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한 번에 다 이루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7,25―8,6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25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8,1 지금 하는 말의 요점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대사제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2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3 모든 대사제는 예물과 제물을 바치도록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사제도 무엇인가 바칠 것이 있어야 합니다.
4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5 모세가 성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지시를 받은 대로,
그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
하느님께서 “자,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6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1,26-31)와 복음(마태 13,44-46)을 봉독할 수 있다.>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지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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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대사제가 계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밀려드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른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주된 활동 무대는 갈릴래아입니다. 갈릴래아는 호수의 이름이자 호수가 속한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지역으로 보면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유다 지역이 자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 지역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중심 도시가 속한 유다 지역, 이스라엘의 최남단인 이두매아,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은 동쪽의 경계를 나타냅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티로와 시돈은 갈릴래아보다 더 북쪽에 있는, 당시에는 페니키아에, 지금은 레바논에 속하는 도시입니다. 도시와 지역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갈릴래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전 지역에, 더 나아가 다른 나라들에도 퍼져 나갔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결과를 통하여 마르코 복음은 이미 예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악령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외칩니다. 악령의 외침은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지만 그분께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악령의 외침은 진정한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가르침과 업적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드러나는 신비를 통하여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믿음은 단순히 아는 것 이상입니다. 믿음은 알고 고백하며 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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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칠리아, 아가타, 루치아 성녀와 함께 초세기 4대 동정 순교자 가운데 한사람인 아녜스 성녀는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온전히 그리스도께 용감히 나아가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과 악에 얼마나 잘 대항합니까? 세상의 악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우리의 믿음과 형제애를 실천하여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나누어야 함을 알려 주는 요한 1서 저자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1요한 5,5)라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합니다. 세상의 악과 마주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있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의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이 계명은 힘겹지 않고,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모두가 세상을 이긴다.’라고 전합니다. 아녜스 성녀는 자신을 위협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박해자들을 세상의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지만, 용기 있는 신앙으로 세상을 이겼습니다.
오늘날 신앙의 증거로 목숨을 요구하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피 흘림 없이 신앙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작은 불편이나 불이익을 참고 견디며, 세상의 악에 순응하지 않고,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용기를 내어 살아야 합니다.
오늘 미사의 화답송은 우리가 이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이 외침은 우리가 바치는 희생과 봉사와 애덕의 실천으로 세상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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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온 나라의 슈퍼스타가 되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배를 한 척 마련하시고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보통은 사랑하면 더 가까워지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너무 가까워지다 보면 오히려 서로가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들어오라고 허락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느 선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제대로 보지 못하고 폭력을 당해 주는 것이 사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히려 자신의 자리에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나와 함께 설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쓰러지는 사람과 함께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일으켜 주려고 혼자라도 그 옆에서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있으신 다음 곧바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고쳐 주셨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분 앞에 엎드리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만약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다 받아들이셨다면, 좋은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마귀들도 받아들일 뻔하였습니다.
사랑은 마치 영원히 만나지 않는 기찻길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느 선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공간을 가지고 계셨듯이, 우리 모두도 ‘하느님 외에는’ 내어 주어서는 안 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사랑은 그 공간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부터 시작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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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팔레스티나 지방 전역에서 예수님을 향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내쫓는다는 소문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땅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토록 온 땅에 퍼져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다른 사람들은 척박한 이 세상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으려고 그분을 찾습니다.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장의 어려움과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찾는 동기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능 해결사로 이용하려 듭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부르면서도 진정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이기심과 아집에 머물러 순수한 영을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고도 호기심에 머물거나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어 무너져 버리는 구경꾼에 불과하며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가 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희생되시고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만난 사람들은 믿음의 기쁨과 구원을 얻습니다. 신앙생활 중에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되더라도 그들의 믿음은 반석과 같아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더 완전한 신앙인이 되어갑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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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노동에 거침없는 태도를 가진 우리 마을의 가족을 대하면 힘이 느껴지고 행복하다. 이들처럼 무슨 일이건 자신에게 맡겨진 일과 해야 할 일이라면 따지거나 조건 없이 해 내는 이들이 있다. 어머니가 대표적이다. 가족의 먹거리와 빨래는 물론이고, 자식들의 병치레와 용돈, 학교 일까지 챙긴다. 심지어 남편 사업이 잘못되고 빚더미에 앉게 되면 그 뒤치다꺼리에 정신없고, 그것도 안 되겠다 싶으면 파출부로 뛰어서라도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친척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어머니 몫이다.
가부장적 전통에서 세상은 남성이 주무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어머니의 힘이 우리 삶과 역사를 떠받쳐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구역장과 반장, 레지오 마리애 단장 등 소공동체의 책임자들이 본당 챙기는 일에 거침없음으로써 본당 사목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슨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쉴 새 없이 요구되는 궂은일을 묵묵히 감당한다.
이런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 ‘모성’이라 생각한다. 모성은 지식이나 사상이 아니라 인정이며 사람의 도리고 영성이다. 그러나 불행하다. 모성이 사라져 가는 시대! 이는 금융 자본의 경제 구도와 거의 쓸모없는 교육열과 정신노동, 경제 문제로 판단하는 결혼과 자녀 출산 등에서 온 것이다. 재앙이다.
모성은 삶을 창조해 내는 사랑이며 하느님의 마음이다. 예수님께서는 병고에 시달리거나 마귀 들린 이들을 무상으로 고쳐 주셨다. 치료받을 길 없는 가난한 무리가 먼 고장에서까지 연일 몰려들어도, 예수님의 연민의 눈길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인 모성은 당신 몸을 돌보지 않으시고 거침없이 받아 주셨다. 어머니와 하느님의 일에는 걸리거나 막힘이 없다. ‘대한민국 어머님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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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까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러 갈릴래아 호숫가에 모입니다. 당시에는 자동차도 없었으니,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과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오늘날의 사업가와 같으셨다면, 그 정도의 정성을 들인 이들에게 “나에 대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라.” 하시며 널리 알리기를 종용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반대로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왜 그러신 것일까요?
마태오 복음 7장 24절부터 27절까지를 보면, 두 개의 집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모래 위의 집과 반석 위의 집입니다. 둘 다 평상시에는 멀쩡하겠지만,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치게 되면, 모래 위의 집은 무너지고, 반석 위의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비유를 오늘 복음에 대조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당장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께 몰려든 이 많은 군중의 믿음은 마치 모래 위의 집과도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호소하고 그 어려움이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겪게 될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다면 썰물처럼 사라질 사람들인 것입니다(요한 6장 참조).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고 싶었던 것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어려움까지도 감수할 수 있는 반석 위의 집과 같은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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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데레사 수녀님(콜카타의 데레사 복자)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 집 없음에서 오는 고통, 모든 질병에서 오는 고통, 그러나 이런 고통들은 물리적인 것입니다. 가장 큰 고통은 외로운 것, 사랑받지 못하는 것, 옆에 아무도 없다는 소외감일 것입니다.” 수녀님의 말씀처럼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몹쓸 병은 ‘아무도 나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저 멀리 그리스인들이 사는 곳까지 퍼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이 계신 곳에 몰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사람에게서 악령을 몰아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외롭고 슬프게 사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몹쓸 병에서 사람들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도,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는 소외감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몹쓸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들의 병을 고쳐 주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하루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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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인이 ‘술 빚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쌀 ‘한 말’과 누룩 ‘한 냥’에 물 ‘두 말’을 붓고 7일 동안 숙성시키면 됩니다.” 술집 주인은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노인은 돌아와, 물 ‘두 말’에 누룩 ‘한 냥’을 섞어 아랫목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7일 후에 맛을 봤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물이었습니다. 노인은 술집으로 가서 진짜 방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주인이 물었습니다. “알려 드린 대로 하셨습니까?” “가르쳐 준 대로 물 ‘두 말’에 누룩 ‘한 냥’을 섞었다네.” 주인이 또 물었습니다. “쌀은 넣으셨습니까?” 노인이 생각하니, 쌀을 넣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 쌀 넣는 것을 잊은 것 같네.”
술의 근본은 쌀인데, 그것을 빠뜨린 것입니다. 그러고도 잘못 가르쳐 주었다고 원망했습니다. 쌀이 없으면 아무리 누룩과 물을 섞어도 술이 되지 않습니다. 근본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도 근본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믿음의 기쁨’은 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보았기에 복음의 군중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호숫가의 군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깨닫는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며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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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거룻배 한 척을 제자들에게 주문하십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려고 서로 밀치며 나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예수님께서는 배 위로 옮겨 가시어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병이 낫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이 멀쩡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 몸에 손을 대면 무언가 강렬한 힘이 전해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앞 다투어 몰려들고 있기에 그분께서는 호숫가의 배 위로 옮겨 가신 겁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기적이 있었던 곳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기적이 있었다고 ‘소문만 나도’ 사람들은 찾아갑니다. 호기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믿음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간접 체험이라도 좋으니 ‘기적의 순간’에 동참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모습입니다. 한 번이라도 뜨거운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면 결국은 ‘그분의 뜨거움’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의 ‘순간’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과 성경 속의 예수님은 같은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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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형제님께서 “저도 운동을 좀 해야 할 텐데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운동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수록 운동 없이는 지금을 잘 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첫 번째는 ‘운동 좀 해야 하는데’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책 좀 읽어야 하는데’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필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운동해야 한다고 하셨던 형제님을 향해서 곧바로 “운동하세요.”라고 했습니다. 필요성만을 기억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의 기억보다는 몸으로 하는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지만 가능성이 현실로 변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할 수 없는 이유만을 늘어놓고 있어서 소망만 가지고 있을 뿐 실제로는 하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는 대단하다는 것만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매일 2시간씩 해야지만 만족할 수 있을까요? 책은 하루에 한 권씩 읽어야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주 적은 시간이나 양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습관으로 내 안에 자리 잡아서 매일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단 한 번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는 그 뒤로는 주님을 잊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매 순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씩이라도 실천할 수 있을 때, 주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은 모두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지 손으로만 예수님을 만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해서 단지 손으로만은 만질 수 없게 하셨던 것입니다.
악마의 세력마저 예수님을 뵈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왜냐하면 악마의 세력이 외치는 말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과 사랑 없이 예수님을 만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믿음과 사랑 없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도 소용없음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을 간직하면서 조금이라도 변하려고 노력한다면 분명히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으며,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 역시 얻게 될 것입니다.
가난하며 원망하지 않기 어렵고, 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기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논어 헌문편).
나만의 시간, 나만의 삶
미국 주간지 ‘타임’ 칼럼니스트 마이클 시몬스는 에디슨, 아인슈타인, 벤저민 프랭클린 등 저명인사의 공통 습관을 찾았습니다. 대단한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공통점은 어쩌면 너무 작고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낮잠, 일기, 산책 등....”
일에서 비켜나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취의 원동력이었다고 마이클 시몬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면 자기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시간을 산다면 자기만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래서 더 의미 있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부정적인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만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나만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그저 당신 눈앞에 고통받고 있는 한 인간 존재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께서 풍기셨던 매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분께서 가시는 곳 마다 수많은 군중이 큰 무리를 이루며 따라다녔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 때 모인 군중의 수는 장정만도 5천명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많은 숫자의 여성들, 그리고 어린이들 합치면 적어도 만명, 이만명이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에 잠시 계셨는데, 소식을 전해들은 군중이 밀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하더니, 예수님 주변을 뺑 둘러싸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더 불어나 제자들의 힘만으로 질서 유지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밀려드는 군중으로 인해 자칫 잘못하면 대형 참사가 벌어질 수 있겠다는 걱정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상 조치로 거룻배 한척을 마련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배 위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후, 안전한 상태에서 가르침과 치유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엄청난 군중의 수효를 확인한 제자들은 신명이 났을 것입니다. 더 큰 욕심도 생겼을 것입니다. 지난 번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 때는 장정만 5천명이었는데, 다음 신앙대회 때에는 만명을 돌파해야 할텐데,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승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좋을텐데, 스승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각자 마을로 돌아가서 입소문을 많이 내면 좋을텐데...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유난히 자주 사용되고 있는 이른바 ‘메시아 함구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세상 사람들의 인기와 박수갈채에 연연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이나 권위가 만천하에 알려지는 것을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당신 눈앞에 고통받고 있는 한 인간 존재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그의 깊은 슬픔에 마음 아파하시며, 그에게 치유의 은총을 주시고 자유로워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사람은 치유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뵙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하느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 왔습니다.
교통 수단이라고는 특별히 없었던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무척이나 지쳤을 것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예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새 세상을 열어주실 메시아의 말씀을 듣겠다는 목적으로 그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들처럼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처럼 설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축제에라도 가듯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가듯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로 오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운 겨울,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쳐도 교회를 찾습니다. 문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운 날씨에도, 꼭두 새벽부터 집을 나서 성당으로 발길을 향하는 형제자매님들 앞에서 참 구도자의 얼굴을 만납니다.
발걸음 옮기기조차 힘겨운 분들, 100미터 걷기 위해 10분 이상 걸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성당 한번 왔다 가면 진이 다 빠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찾아오십니다.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제들과 수도자들, 봉사자들은 그 옛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백성들이 원 없이 생명의 물을 마시도록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마음껏 마셔 평생의 갈증을 채울 수 있도록 동반해주면 좋겠습니다.
그 옛날 예수님으로부터 말끔히 치유 받고 춤을 추며 떠나가던 사람들처럼,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영혼 역시 깨끗이 치유되어 기쁜 얼굴로 교회를 나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에게 잘할 수 없으면 아무에게도 잘해주지 마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도 공동체 리더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이어가겠습니다. 예수님은 리더이십니다.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밀쳐댈 수 있기에 예수님은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시어 그들과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중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도 그분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곤 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한 공동체의 리더십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리더는 ‘편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더 잘 안다는 말은 더 많이 사랑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편애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누군가는 그 가정에서 소외되고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공동체 분열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귀 들린 이들이 당신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함구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리더를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끔 공동체 분열의 주범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마귀의 입을 막으십니다. 또 뭍에 계시면 당신에게 가까운 사람들만 이익을 보기 때문에 배를 타고 조금 떨어지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당신을 만질 수 없고, 모두가 당신을 알 수 없다면 모두가 당신을 만질 수 없게 하고 모두가 당신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참 리더의 모델입니다.
‘KBS 안녕하세요’ 프로에 「아홉 살인데 몰래 우는 아들」 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9살, 4살 두 아들이 있는데 지나치게 차별하는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밥 먹으면 두려움과 스트레스로 밥을 토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왜 토하냐고 화를 내고 그 아이와 밥을 먹으면 밥맛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진행자들이 큰아들에게 “아빠가 너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고 물으니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만약 작은아들에게도 그렇게 물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빤 절 사랑해요. 경상도 사람이라 좀 무뚝뚝해서 그래요.”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경상도 사람이고 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아빠가 말하지만 작은 아이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핑계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교하기 좋아합니다. 자녀는 부모 사랑의 절대적인 양보다 상대적인 양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니 부모가 사랑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차별해서 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이 그렇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편애는 사랑이 아닙니다. 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은 리더가 다른 이에게 하는 사랑의 최대치가 자신에게도 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고 지금도 쉽지 않습니다. 본당에서 청년들이 서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집 센 누군가가 물을 흐리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 제가 본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청년들이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다른 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청년회가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을 따르는 청년들은 소수였지만 결국 끝까지 둘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항상 본받고 싶은 분이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이 정말 대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잘 해 주어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세금도 많이 걷고 다른 의무도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불만이 없었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못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 잘해줄 수 없다면 똑같이 못 해주라는 것이 세종대왕의 리더십입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한 나라의 리더가 편애해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의 의견에 휘둘린 것입니다. 최순실 씨의 의견이 다 옳았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편애하는 리더일 뿐입니다. 그녀의 파일엔 국가안보 자료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대통령을 다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두를 골고루 사랑하고 모두에게 골고루 자신을 알게 하지 않을 바에야 누구에게도 편파적으로 사랑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조선의 어떤 양반은 하인 둘이 서로 싸우고 왔을 때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 “자네가 옳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말하자 “자네가 옳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다른 하인이 “주인님, 다 옳다고 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둘이 싸운 것인데요.”라고 했더니 “너의 말도 옳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분열은 옳지 않고 일치는 옳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면 다른 이들은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지 않은 것입니다. 공동체가 분열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애정에 휘둘린다면 좋은 리더는 될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서 조금 떨어져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배를 보며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명만의 지도자가 됩니다. 지도자는 오직 하느님께만 흔들려야 합니다. 몇몇 사람에게 휘둘리는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어머니는 양발이 구멍 나면 기워 주셨습니다. 내복도 무릎이나 팔목이 헤어지면 천을 대고 기워주셨습니다. 가난한 시절이었고, 다들 그렇게 살았습니다. 형들이 쓰던 가방, 책, 옷을 물려받았습니다. 예전보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지금은 옷을 수선하거나, 헌옷을 물려 입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자녀가 적기도 하고, 유행 따라 옷을 입기 때문입니다. 예전처럼 살지는 않지만 아끼고, 나누는 검소함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금이 간 도자기, 흠집이 있는 도자기에 금칠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서 작품으로 만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도자기는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너무 낮은 온도에서 꺼내거나, 너무 높은 온도에서 꺼내면 금이 가거나, 흠이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런 도자기에 마음이 갔고, 작품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고 합니다. 어릴 때 나환자들을 자주 보았다고 합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분, 손가락이 없는 분, 발가락이 없는 분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모두 밝게 사셨다고 합니다. 비록 외모는 흉터와 상처가 있지만 마음은 천사와 같았다고 합니다. 건강한 몸으로 노래를 불렀던 자신이 오히려 영적으로 더 큰 상처와 흉터가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나환자들과의 만남을 기억했고,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는 일을 그만두고 흠이 있는, 금이 간 도자기를 작품으로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상처를 탓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허물과 상처가 있음에도, 어쩌면 그런 상처와 허물이 있기에 우리를 더욱 사랑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앞으로 오실 구원자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목은 ‘지나간 다음’입니다.
“어느 날 나에게
큰 고난이 왔습니다.
나는 너무나 슬프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며
한탄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고난이 지나간 다음
그때 비로소 나는 알았습니다.
나의 고난은
인생을 깨닫고
더욱 성숙하라는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예, 권력, 자존심, 욕심’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
숲길을 거르며 나무를 보지 못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갈릴레아, 유다, 예루살렘, 이두메아. 요르단 건너편, 티로와 시돈으로부터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왔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들로 갈릴레아 호숫가가 넘쳐났다’(마르3,7-12) 치유 받은 사람들의 말문을 엄히하라 예수님께서 이르셨지만 그럴수록 복음은 멀리 멀리 전해졌고, 큰 무리를 이루며 예수님께 모여왔다.
오늘도 예수님을 찾아 움직이는 무리의 세상 모습을 본다. 모두들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나 속을 드려다 보면 예수님을 찾아나선 무리들로 넘쳐난다. 예수님께서 아픔을 보시며 홀로 하루 일과가 벅차다. 무리 속에 사람들은 고쳐 달라는 아우성 치며, 아픔을 보고 있으려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아픔의 군중 속에 있지만 서로의 아픔을 보지 못하는 군중들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신다. 열둘을 사도로 뽑으셨다.
뽑힌 제자들은 그동안 아픔을 보고도 아픔을 보지 못하고 무심히 살았던 고통의 사람들이었다. 마치 숲을 거닐며 나무들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무를 보지않고 땅만 보고 숨을 몰아셨던 제자들이었다. 제자로의 부르심이 있고부터 삶의 의미가 생겨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뽑으셨다. 뽑힌 제자들은 드디어 아픈 사람들 속에 아픈 사람을 보기 시작했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새로운 미션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미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궁극적 삶의 목적이다. 미션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에게 복음선포이며 치유의 인간구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신다. 그리고 파견한다. 엊그제 태어난 새 사제의 파견처럼 말이다.
파견 받은 제자들은 드디어 새로운 눈으로 군중의 아픔을 본다. 제자들을 뽑기 전에 당신 홀로 군중들의 아픔을 바라보셨지만 이제부터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되어 군중의 아픔을 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은 것은 그들도 받은 권한을 통해 군중의 아픔을 보고 그들을 양냄새나는 목자로 책임지기 위함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아픔의 사람을 고쳐야 한다. 권한과 의무, 권위와 책임을 통감한다.
거리두기가 사고방지책이었군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이방인지역 사람들이 무리지어 예수님께 몰려와 사고미연방지책 썼네요.
치유 바라는 병자들과 군중이 몰려드니 거리두기가 사고방지책이었군요.
코로나19 처럼 오늘도 욕심바이러스 감염도 심각하니 서로 거리 둬야죠.
예수님의 치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만큼 사느냐가 치유문제겠죠.
‘나’라는 인간이 최고라고만 하며 욕심껏 살았지 잘한 게 있냐 말입니다.
만물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에게 세상 관리하라고 자유까지 주셨습니다.
재물욕심 권력욕망에 자신의 자유만이 최고라고 착각 감염된 분 많지요.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분을 찾았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고 전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으로 육화하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다른 차원의 분으로 만들었던 입니다. 결국 이렇게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타이틀이 나중에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마귀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을 그렇게 우리와는 함께하시지 않는 먼 곳에 계신 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 바로 여기 우리 안에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늘 우리 곁에 계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코로나가 계속되면서 어떤 분이 ‘하느님도 무심하시지’하고 원망 섞인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코로나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코로나는 우리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면서 균형이 흐트러져 스스로 불러 들린 위기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가장 바쁘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가장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에게 이겨낼 힘을 주시기 위해 애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강만연
오늘 복음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첫째, 예수님의 인기를 실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텍스트의 의미만을 놓고 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병자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실 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또 그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풍문으로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익히 들었기 때문에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꼭 한 번 만나뵈려고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들의 병고로 고통을 많이 받았는지 그 사람의 수가 엄청났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상황을 적절하게 유용하게 이용하시려고 어느 정도 사람들과 거리를 두시기 위해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분부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량면에서만 본다면 육적인 이야기를 복음사가는 많이 이야기하다가 한두 줄 정도의 영적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둘 다 의미가 뭔가를 알아본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의 기적을 알아봤으니 몰려들었을 겁니다. 근데 이와는 달리 갑자기 더러운 영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러운 영일지라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 앞에서 엎드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만약 일반 군중들이 몸이 성한 사람들이였다면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지 않았을 겁니다.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육신의 병만을 낫기를 바라는 데에만 정신이 온통 팔렸던 것입니다. 근데 복음에서는 난데없이 갑자기 더러운 영에 대해서 언급을 하며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사람의 병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한번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병도 육적인 병이 있고 영적인 병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어도 어둠 때문에 세상은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일반 병자는 예수님을 단순히 그들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하나의 마술사 아니면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정도로만 인식을 하는 것이었지만 더러운 영은 비록 더러운 영을 가졌어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아봤다는 것에 대해 좀 더 한 번 더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순리적으로 보면 깨끗한 영을 가진 사람이 어쩌면 더 예수님을 더 잘 알아봐야 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이 세상에 하느님의 아들이 구세주로 오셨어도 알아보지를 못한다면 구세주가 이 세상에 오신들 무용지물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저는 역으로 더러운 영은 죄인을 상징하리고 봅니다. 즉, 죄인은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에게서 빛이 나니 어둠을 상징하는 죄인이 자신의 존재가 빛 앞에서는 설 수가 없기 때문에 바로 예수님 앞에서 승복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교황님께서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수요 알현에서 한번은 여기서 죄인 아닌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봐라고 하셨는데 한 사람도 들지 않는 것을 봤습니다. 선한 영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선한 영을 가졌어도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된 죄인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늘 복음을 개인적으로 묵상한 내용의 초점은 이렇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우리 모두는 죄인임에도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스스로 아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아볼 수가 있다는 것과 또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아볼 수가 있어야 그분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는 게 아닐까 묵상해봅니다. 마치 오늘 군중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든 게 예수님이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 주위에 몰려든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저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 수 있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잘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오늘 복음이 한 번 더 상기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만지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는 만지지 않고 손으로만 만지는 것보다, 손으로는 만지지 않아도 믿음으로 만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손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습니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오, 가톨릭교회여, 그대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지십시오. 제발 믿음으로 만지십시오. 그대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그대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같으신 주님이시라고 믿는다면, 그대는 그분께서 아버지께 올라가시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진 셈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이해하게 될 때, 그분은 우리와 함께 올라가십니다.
그는 고통받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으나 승리를 얻을 만큼 이미 성숙되어 있었습니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동정녀들’에서 (Lib. 1, cap. 2.5.7-9; PL 16 [edit. 1845], 189-191)
오늘은 동정녀가 천상 생명으로 태어난 날입니다. 우리 모두 그의 정결을 본받읍시다. 오늘은 순교자의 탄일입니다. 우리 모두 희생 제물을 바칩시다. 오늘은 성녀 아녜스의 탄일입니다. 그는 12살 때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이 어린 소녀마저 불쌍히 여겨 주지 않는 그 잔인성은 정말 가증스럽습니다. 이렇게 유약한 나이의 소녀에게 증거를 보인 신앙의 힘은 진정코 위대합니다.
그의 어린 몸에 상처를 입을 자리가 있었겠습니까? 칼을 받을 자리마저 없었던 아녜스는 그 칼을 이겨낼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나이의 소녀들은 부모님의 성난 얼굴마저 견디지 못하고, 또 모르고서 바늘로 한 번 찔리기만 해도 중한 상처를 입기나 한 듯 보통 울고 맙니다.
그러나 성녀 아녜스는 사형 집행인의 피 묻은 손 아래서도 두려움을 몰랐고 쨍그렁거리는 육중한 쇠사슬로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온몸을 난폭한 병사의 칼에 내 맡기고, 비록 아직 죽음을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그 죽음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강제로 신전의 제단에 끌려 나아가 불 가운데 놓여졌을 때 그리스도께로 손을 펼쳐 그 불경한 제단 위에서 주님이 거두신 승리의 표시를 나타냈습니다. 아녜스는 자기 손과 목을 쇠 차꼬에 집어 넣을 자세가 되어 있었지만 그의 작은 지체를 조여 맬 쇠사슬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순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는 고통받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으나 승리를 얻을 만큼 이미 성숙되어 있었습니다. 전투는 힘들었지만 월계관을 받기는 쉬웠습니다. 아직 나이 어렸으나 덕행의 교훈을 주었습니다. 결혼하는 신부라 할지라도 이 동정녀가 즐거운 표정을 지니고서 형장으로 급히 달려갔던 그만큼 급히 신방에로 달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동정녀는 댕기머리 대신에 그리스도로, 화관 대신에 자신의 덕행으로 머리를 단장했습니다.
모든 이가 울고 있었지만 그만은 울지 않았습니다. 그가 맛보기 시작하지도 못한 자기 생활을 흡사 모두 맛본 것처럼 이제 아낌없이 내맡기는 것을 볼 때 사람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직 법 앞에서 책임질 나이도 되지 못한 그가 하느님의 증인으로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볼 때 모두 놀랐습니다. 그가 인간을 위해 증거를 내세웠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못했을 것이지만 하느님을 위해 내세웠기 때문에 그 증거를 믿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자연을 초월하는 것은 자연을 지으신 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형 집행인이 어떤 위협으로 그를 겁먹게 만들고 어떤 달콤한 말로 꾀려 하고 또 얼마나 숱한 약속을 하면서 결혼을 간청했겠는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녜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유혹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남편에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나를 먼저 택한 사람이 나를 소유할 것입니다. 사형 집행인이여! 왜 지체합니까? 내가 원치 않는 눈들이 사랑할 수 있는 이 내 몸을 속히 멸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아녜스는 일어서서 기도드린 후 머리를 숙였습니다.
여러분은 사형 집행인이 흡사 자기 자신이 단죄를 받은 듯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어린이는 자기가 당할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 어린이가 당할 위험을 앞에 두고 그의 오른손은 떨리고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하나의 희생 안에 여러분은 두 가지의 증거, 즉 정결과 신앙의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아녜스는 동정도 간직하고 순교의 팔마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리 두기’>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주간 목요일>(2021. 1. 21. 목)(마르 3,7-12),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7-10).”
예수님께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것은, 밀려드는 군중과 당신 사이에 ‘거리 두기’를 실행하신 일입니다. (사람들을 밀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뒤로 물러나셨습니다.)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거리 두기’를 실행하신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먼저 손을 대려고 서로 밀치고 다투었는데,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그리고 ‘말씀의 은총’을 주는 일을 먼저 하시려고 뒤로 물러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뒤로 물러나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모습에서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밀쳐 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빵’을 주시는데도 그 ‘빵’을 받지는 않고 ‘돌’을 달라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몸의 병’을 고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또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받지 않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만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먼저 만지려고 서로 다투고 밀쳐 대는 모습은 그들의 ‘이기심’을 나타냅니다. 그 모습은 자기만 생각하고 남 생각은 하지 않는, 양보할 줄도 모르고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사랑 없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거리 두기’는 바로 그 이기심에 대한 ‘거리 두기’이기도 합니다.>
복음서 저자는 사람들이 그렇게 밀쳐 댄 것은,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병자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가엾게 여기셔서 고쳐 주신 적도 있습니다(요한 5,5-9).
그래서 예수님께서 뒤로 물러나시면서 ‘거리 두기’를 실행하신 것은, 병을 고쳐 주기를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 고쳐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라는 뜻입니다. (“우선 먼저 나의 설교를 들어라. 그 다음에 모두 고쳐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밀쳐 대는 모습과 관련해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로 가시는데 군중이 그분을 밀어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고쳐 주지 못하였다. 그가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즉시 하혈이 멎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모두 자기는 아니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스승님, 군중이 스승님을 에워싸 밀쳐 대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다. 나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나는 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부인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음을 알고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기가 무슨 까닭으로 예수님께 손을 대었으며, 또 어떻게 즉시 병이 나았는지 온 백성 앞에서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8,43-48)”
표현만 보면, 그 여자가 예수님 모르게 예수님의 ‘기적의 힘’을 훔쳤고, 예수님께서는 나중에야 그것을 알아차리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여자의 간절함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 여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예수님을 밀어 댄 군중 가운데에는 그 여자처럼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을 만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많았던 상황인데, 치유의 은총은 그 여자에게만 내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병이 낫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는 믿음도 없이 예수님을 만지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옷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십니다. (당신의 ‘자비’로, 또 당신의 ‘권한’으로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예수님의 옷만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에게 손을 대는 경우에도,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생각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청해야 할 진짜 큰 은총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역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을 ‘만병통치약’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 가운데에도 어디서 무슨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자기도 기적 체험을 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충실한 신앙생활’은 하지도 않고, 자신의 영혼 상태는 반성하지도 않고, 이웃 사랑 실천도 하지 않고, 그저 기적 체험만 많이 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신앙생활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콜로 3,1-3).”
(신앙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몸의 건강’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입니다.)>
거룩한 걸레?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은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이해하던 주님과 전혀 다른 또는 정반대인 주님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면 주님을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라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죄인들과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늘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신 분이시고,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분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와 같이 계시고, 똑같은 인간이 되신 분이잖아요?
그래서 히브리서도 앞에서는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고 얘기하지요.
그러니까 진흙의 수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고, 땅에서 우리와 함께 진흙탕을 뒹구시던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것이지 애초부터 우리와 거리를 두신 주님이 결코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순수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계시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제대로 이해해야겠습니다.
우선 죄인들과 떨어져계시다는 것이 죄인들을 멀리하거나 죄인들에게 가지 않으셔서 떨어져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같이 계셔도 죄를 타거나 죄에 물들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옛날 우리 시조에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에 가지 말라는 시가 있는데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 죄인들과 어울려다니셨어도 죄 짓지 않으셨고 이젠 하늘로 오르셔서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이 되어주셨다는 뜻이며 그래서 히브리서는 오늘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간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통로라는 뜻이 되지요.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주님은 그저 우리 죄인들과 어울려주시는 주님이 아니라 죄를 씻어줄 주님이고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이신데 죄를 씻고 구원하시는 방식이 바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방식입니다.
다른 사제들은 제물을 바쳐 사람들의 죄를 씻는 데 반해 대사제인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씻으시는 것이지요.
여기까지 얘기하면서 제게 계속 아른거리는 것이 바로 걸레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곳에 뒹글다보니 걸레가 된 걸레가 아니라 더러운 것을 닦기 위해 자원해서 걸레가 된 걸레입니다.
사실 걸레라는 것이 애초부터 걸레인 것은 아니지요. 더러운 것을 계속 닦아주다보니 걸레가 된 것인데 이때 스스로 걸레가 된 걸레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거룩함과 순수함도 사랑이 아닌 다른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거룩하고, 주님의 사랑이 순수하고 순결하다는 뜻이며 이것은 우리의 사랑이 어느 정도 불순물이 있는 사랑인 것에 비해 자기애나 욕심이나 보상과 같은 불순물이 전혀 없는 사랑이라는 뜻이며, 그래서 오로지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사랑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마십시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부각됩니다.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히브 8,4)
율법은 레위 가문에 사제 직무를 맡깁니다. 하느님이 그들의 유산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거룩함에 봉직하는 아론의 후예 사제들을 포함한 모든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는 따로 상속 재산이 주어지지 않았지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유다 가문, 다윗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그러나 인간 대사제들이 바치는 제사와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한 제사를 바치신 대사제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우십니다.
인간 대사제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히브 8,5). 반면 예수님은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히브 8,2)이십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 8,6)라고 증언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로 군중이 몰려드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
"큰 무리가 따라왔다. ...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 들었다. ... 그분을 보기만 하면 ...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역동적인 광경이 펼져지고 있습니다. 이제 신앙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변방으로 이동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이 곧 중심이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여전히 사제들이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위해 예물과 제물을 바치며 예식을 거행합니다. 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레위인들은 성전을 관리하지요.
예수님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 치유와 구마가 절실한 이들, 중심 기득권층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이들이 모입니다. 주로 온도와 핏기 없이 형식과 제도로 이어가는 예식 안에서는 도무지 위로와 안식을 얻기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배운 것도 적고 가진 것도 없는 투박하고 단순한 이들이지만 구체적인 삶의 자리 깊숙이까지 생생하게 침투하는 실질적인 구원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곧 예식 안에서만이 아니라 삶이 곧 제사인 구원자 사제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보았고 체험한 것이지요.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성막의 모상이고 그림자"라면, 예수님께서 계신 이곳이 곧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요 참성막"입니다. 진정한 희생제사와 예배, 찬미와 찬양이 이루어지는 영의 도가니가 기쁨과 희망과 찬양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마르 3,9)
군중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몰려드는 통에 예수님께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게 하십니다. 지금 당장은 마구잡이로 몰려드는 군중과 예수님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 질서를 찾고 또 말씀으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한 장치가 됩니다만, "배"는 곧 교회의 표상입니다.
교회는 심연을 헤치고 파도를 넘어 지상 순례길을 항해하는 배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에 대한 희망"은 이 배를 단단히 고정해 항구인 "저 휘장 안"(히브 6,19)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영혼의 닻이지요. 그리고 이 배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성전에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중심이 이동되고 있음을 봅니다. 신앙의 주인은 저 멀리 하늘에서 온갖 권리를 행사하며 섬김만 받으시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받고 슬퍼하는 이들 곁으로 내려와 보살피고 회복시키는, 종래에는 그 고통을, 죽음까지도 떠안는 분이심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지금 어디쯤 존재하고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신약시대를 지나 성령의 시대를 살면서도 두려우신 하느님은 그저 멀리 계셔야 편하다며 적당선에서 신자 신분만 유지하고 구약 율법에 안주하며 살지는 않은지요? 오늘 예수님께 몰려들어 그분을 만지고 싶어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열정이 일어나며 가슴이 뛰는지요? 그분 곁에 머물고 싶어 간절히 종종걸음을 치는지요?
예수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은 어디에서나 드러나고 발휘되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 신자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예수님을 닮으려 애쓰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녜스 성녀께도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위해 빌어주십사 청합니다.
성녀 아녜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악의 존재 방식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왜 더러운 영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까요?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모든 모습을 드러내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모두 지켜보고 난 뒤에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는 백인대장의 고백은 마르코 복음에서 사람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부른 장면이기도 합니다.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당신의 모든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드러내는 분이십니다. 더러운 영들은 바로 이 점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 없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악은 이렇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고백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 곧 십자가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절대로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악의 존재 방식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지만 마음 안에서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계획과 뜻을 거부하고 있다면 악은 이미 우리의 마음과 생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함승수 신부님
달은 지구로부터 38만 5천 킬로미터만큼 떨어져서 그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만약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가 이보다 더 가까웠다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충돌을 일으켜 부서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 반대로 둘 사이의 거리가 더 멀었다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남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지구에 있는 육지는 대부분 바다에 잠겨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었겠지요.
상대방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욕심과 집착으로 서로를 옭아매어 모두가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반대로 거리가 너무 멀면 ‘관계’ 자체가 끊어져 버리기에, 서로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온기를 나누지 못하고 무섭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 고립된 채 외롭게 살게 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군중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신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한 군중들은 욕심으로 ‘눈이 뒤집힌’ 상태였습니다.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놀라운 능력을 이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데에만 혈안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믿음이 아닌 집착이고, 사랑이 아닌 폭력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예수님과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한들 신앙의 궁극적 목표인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그들이 당신과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신앙의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게 만드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누구나 주님께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나 사이의 ‘욕망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그분께 대한 믿음이 집착과 광기로 바뀝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며 따르려 하지 않고, 그분의 능력을 이용해 내 욕심을 채우는데에만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는 ‘욕망의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그분께 바람을 갖되, 욕망에 눈이 어두워 그분을 내 맘대로 휘두르려 해서는 안됩니다. 나에게는 ‘나의 뜻’이 있듯 주님께는 ‘주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내가 그분께 바라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주님의 뜻을, 그분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섭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뜻과 섭리는 단편적, 일시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여러가지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나무가 아닌 숲을 보려는’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악마의 유혹은 세 가지 방법으로 한다. <마르코 3, 7-12> 1월 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을 유혹한 내용을 보면
1) 참으로 이 사람이 주님인가? 시험 방법
2) 주님이신 것을 알면 아부함으로 교만하게 추켜세우는 것
3) 어려운 짐을 지우고 고통과 시련을 주면서 유혹한다.
첫 번째 유혹은 악마가 주님이 40일간 광야에서 엄제하시는 것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고 인간이 쉽게 빠지는 재물로 유혹하여,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으나 거절당하고, 명예의 유혹으로 성전 높은 곳으로 끌고 가 뛰어내리라 하지만 거절당하고, 세상을 다 보여주고 자기를 섬기면 세상을 다 주겠다 하였으나 주님은 멋있게 사탄을 물리치심으로 첫 번째 유혹에 승리하셨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오늘 복음에 있는 말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당신이 누구신지 알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주님을 드러내고 아부하지만, 그 말에 따라가면 본질이 노출되어 행동하기가 더 어렵게 됩니다. 여기서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사라지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유혹은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기 전 악마가 “그리하지 않아도 되는데”하고 들리는 소리, 그래서 “할 수 있으면 나를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기도하심으로써 마지막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악마의 이런 유혹에 견뎌내야 합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힘없이 다가옵니다. “다스리고 싶다. 모든 사람을 내 밑에 두고 싶다.” 그러다가 부정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무지막지한 권력을 사용합니다. 권력의 유혹을 극복하려면 모든 이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풀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권력자는 많은 사람을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유혹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지만, 돌을 황금이라 속이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면 달라집니다. 나눔의 정신이 재물욕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명예에 대한 욕망의 유혹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를 언제나 밑자리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안다고 자기 자랑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자기 행위를 자랑하고 남의 일은 경멸하는 것입니다. 함께 즐기고 기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보화를 이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가 유명 인사들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여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엄마 덕이나 아버지 덕으로 살려는 사람은 남의 덕에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고통의 시련을 극복하는 힘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신 것같이 고통은 더 좋은 것을 얻는 기회라는 믿음을 가지고 고생 끝에 낙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과 같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듯이, 대한이 지나면 춘분이 옵니다. 희망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아녜스 순교 축일, 순교자의 믿음은 죽음 뒤에 참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고통을 극복합니다.
우리는 간사한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 살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아멘."
예수님 방향方向, 예수님 중심中心의 삶. -일치와 평화, 치유와 구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방향을, 삶의 중심을 잃어 극심한 방황이요 혼란이요 분열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나 사정은 똑같습니다. 정말 삶의 방향을, 삶의 중심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나 불행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방향은, 삶의 중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무엇’이 아니라 ‘누구’이겠습니까?
두 말할 것 없이 예수님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방향이자 중심입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풍성한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오늘은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4세기 초 14살 어린나이에 순교한 동정녀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성녀가 보여준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고,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합니다. 아녜스는 그리스어로 ‘순결’ 또는 ‘양’을 뜻하며, 성녀는 자주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성녀는 어려서부터 한결같이 주님 방향이, 주님 중심이 확고한 사랑과 믿음의 삶을 살았기에 가능한 순교임을 깨닫습니다.
2.요즘 교황님의 세계 영적 지도자로서의 활약이 참 눈부십니다. 한결같은 열정과 사랑의 관심이 놀랍습니다. ‘일치는 언제나 갈등보다 위대하다’, ‘일치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등 말씀하시며 요즘은 부쩍 ‘일치’에 대해 많이 강조하십니다. 대통령 선거후 1860년대 남북전쟁이래 최대 분열의 위기에 직면한 미국에 대해 크게 우려하시는 교황님은 ‘지금은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라며 인내하며 일치를 위해 힘쓸 것을 권고합니다. 이런 모든 불행의 원인은 미국민이 삶의 궁극의 ‘방향’, ‘중심’을 잃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3.어제는 저에게 참 잊지 못할 역사적 날이 될 것입니다. 현재 요셉 수도원의 부원장이자 주방장인 75세 최고령자 김 스테파노 수사님이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25세 청년 나이에 첫 서원을 한 후 75세 되기까지 만 50년을 한결같이 주님 방향으로, 주님 중심으로 살아온 참 성공적 행복한 인생을 사신 수사님이니 생각할수록 감동이요 감격입니다. 50년 서원 금경축을 통해 환히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또 한분은 20년 이상(1998-2021) 제 강론집과 시집을 교정 제본해주며, 한결같이 주님 방향으로, 주님 중심으로 살아온 한 깊은 믿음의 자매님이 나이 60에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직장 생활 중에는 매달 거액을 수도원에 봉헌금으로 바쳤던 수도원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명예 퇴직전 몇 년 전부터 공부를 시작하였고 가정과 직장 생활의 바쁜 일과중에도 대학에서 강의하고 교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한결같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노력한 결과 거의 10년만에 박사학위로 결실을 맺었으니 참 놀랍고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매님의 한결같은 주님 방향, 주님 중심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환히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4.오늘 말씀중 문득 떠오른 성가 445장입니다. 지금부터 32년전 1989년 7월11일, 제 사제서품식 미사때 입당성가입니다. 입당성가를 들으며 서품 받기위해 성전에 입장할 때 주르르 흘렸던 눈물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그분만을 따릅니다.(1절)
이 땅위에서 산다하여도/이 땅위에서 산다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그분만을 따릅니다.”(3절)
삶의 방향이자 중심이신 주님 만을 따르겠다는 다짐의 성가입니다. 참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주님 방향의, 주님 중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방향을, 주님 중심을 잃어버릴 때 방황과 혼란, 분열과 표류, 무질서로 인해 안팎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아무도 도와 줄 수 없으니 백약이 무효입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참으로 한결같이 주님 방향의, 주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일치와 평화요 치유와 구원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지도층 인사들 소수일뿐, 좌우사방에서 무수한 병자들이 죄인들이 구름떼처럼 예수님 방향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몰려 들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무지와 허무의 어둠 속에서 방향없이, 중심없이 표류하며 무질서하게, 무의미하게 살다가 갖가지 영육의 질병으로 무너져 내리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 방향을, 주님 중심을 항해 밀물처럼 몰려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병고에 시달리던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고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그분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며 도주하니 만나는 사람마다 영육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참으로 빛이나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주님 방향을, 주님 중심을 회복했을 때 온전한 영육의 치유와 구원이요 일치와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에서처럼 공생애로 끝난 예수님의 활동이 아닙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느님 곁에 초월자超越者로 계시며 어디에나 편재遍在하신 내재자內在者로 계시는 파스카의 대사제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끊임없이 끝까지 일치와 평화, 치유와 구원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의 고마운 증언입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우리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1.거룩하시고 2.순수하시고 3.순결하시고 4.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5.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마우며 든든하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까! 바로 이 대사제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 삶의 방향이, 우리 삶의 중심이, 우리 삶의 의미가 되어 주시니 온전한 영육의 치유와 구원을, 일치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 가게 된 우리들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대사제 예수님이 계십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 은혜로운 미사가 거행되는 거룩한 성전이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에게 일치와 평화, 치유와 구원의 열매를 선사하시며 우리 모두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이 당신 방향, 당신 중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벗들을 위한 한걸음>
상지종 베르나르도
곁에
벗들이
가득하니
마냥 좋지만
허나
벗들을
하나하나
알기 힘들어
왠지
벗들께
미안하기
그지없으니
하여
벗들을
하나하나
품고 싶어서
잠시
내 곁의
벗들에서
한걸음 뒤로
다만
하나씩
마음 깊이
벗들 새기면
이제
한걸음
따뜻하게
다시 벗들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 넷째 날 기도 주제는 ‘함께 기도하기’이고, 주제 성구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입니다.
묵상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기를 갈망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아담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하고 찾으셨듯이,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안에서 당신 아버지와 긴밀한 일치를 이루시면서도 당신 제자들과 또 당신께서 만나시는 모든 사람과 친교를 맺으시며 살아가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곧 당신 아버지이시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이루는 사랑의 관계로 이끄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풍요로운 유다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시편을 함께 노래하였습니다. 그 밖의 때에 예수님께서는 따로 물러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와 함께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는 놀라움, 탄식, 간구, 감사, 또는 단순한 침묵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따금 기도하고픈 마음이 있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픈 마음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단체 안에서 함께 있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성가, 말씀, 침묵을 통하여 친교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할 때, 우리는 모든 분열을 초월하시는 그 한 분에게서 비롯되는 친교의 유대로 하나 됨을 느끼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지만, 우리를 하나 되게 해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공동 기도를 바칠 때마다, 우리도 모르는 새에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샘솟습니다. 공동 기도를 바친다고 우리가 개인 기도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 기도와 개인 기도는 서로를 지탱해 줍니다. 날마다 시간을 내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친밀함을 새롭게 다져 나갑시다.”
- 「프랑스어와 영어 떼제 규칙서」(The Rule of Taizé in French and English)
그리스도교 지식 촉진회(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영국, 19.21면
기도
주 예수님,
예수님의 지상 삶 전체가 아버지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기도였으니,
성령을 통하여 당신 사랑의 뜻에 따라 기도하는 법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어.
전 세계 믿는 이들이 기도와 찬미 안에서 하나 될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아멘.
-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형의회, 세계 교회 협의회 신앙 직제 위원회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을 고백하는 순간은 깨끗한 영에서가 아니라 더러운 영들에서 일어나고 있다. 더러운 영들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이 누구이신지 고백하는 순간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하느님 앞에 서다! 겸허하게 나는 당신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순간말이다. 그런 순간을 위해 오늘도 여정을 시작한다!
아침의 풍경이 깨끗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모든 것이 뚜렷이 보이는 아침이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볼 수 있는 영혼의 눈을 기다리다.
이근상 시몬 신부님
'물러가셨다(아나코레오)'는 단어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우리말 '피정(외딴 곳으로 떠나 기도하는 일)'의 어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말뜻을 풀이하면 피정의 본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아나(뒤로)와 코레오(공간을 만들다; 무엇인가가 깃들이도록 빈자리를 내주다)라는 두 단어의 합성이다. 희랍어사전을 보면 코레오는 시급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을 품어주는 걸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 물러남, 곧 피정이란 '거듭해서 보다 중요한 것을 품어주도록 품을 넉넉하게 열어주는 행위'를 뜻한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품이 열린 뒤에 주님께 벌어진 현상이다. 그저 물러나 빈공간이 생기고 만 것이 아니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팔레스틴의 중심부, 갈릴래아, 티로와 시돈은 북부, 요르단 건너편은 동부, 그리고 이두매아는 남부를 뜻한다. 사방팔방에서 온갖가지 사람들이 다 몰려와 당신의 빈자리, 그 품을 채웠다는 말씀이다.
세속의 피정이 아니라 주님의 피정이란 결국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었다. 그건 낮은 곳에 생긴 큰 웅덩이처럼 온갖 물을 다 품는다. 피정을 사람들을 쏟아버리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와 채워지는 시간이란 말씀이다. 물러나 수행하는 우리의 기도란 쓰레기를 치워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물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꾸정물이든, 맑은 물이든... 낮은 자리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모든 생명을 환대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다.'(마르 3, 1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세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골짜기가
꽤나 깊다.
영원한 것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부서진다.
부서지는 것이
맑아지는 것이다.
맑아지는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이다.
은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부서짐도
아픈
은총이었다.
순교란
부서져서
한 줄기 맑은
빛이 되는 것이다.
믿음의 잔치는
부서짐의
잔치다.
동정 순교자
성녀 아녜스
축일이다.
하느님밖에
모르는
삶이 있었다.
아름다운 삶이
있기에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의 무게만큼
아픔도 향기가
된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또한
내 것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믿음은
부서짐의
봉헌이었다.
가장 아팠던
곳에서
그리스도는
승리하신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사랑을
가릴 순 없다.
하느님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는
오늘이다.
인생의 의미는
믿음의
의미이며
믿음은
영원한 것을
향한 부서짐의
사랑이다.
자아가
부서지는 것이
영적인 삶의
참기쁨임을
믿는다.
성녀 아녜스여,
기쁨이 없는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느님 사랑에
다시 집중하는
신앙의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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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신학교에 들어가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공부를 못하면 신부가 될 수 없는데, 그렇다고 밤늦게까지 공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제가 새벽형 인간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올빼미형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무조건 밤 11시에 잠을 자야한다는 것이 크게 불합리해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시험 때에도 이 규칙을 어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시험 때에는 교칙을 어기고 일탈(?)을 하는 신학생들이 생깁니다. 물론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합법적으로 불을 켤 수 있는 화장실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머리에 쓰는 등산용 헤드 랜턴을 구입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한 친구는 옷장 안에 쪼그려 앉아서 공부하다가 옷장 문이 안에서 열리지 않아서 아침에서야 친구의 도움으로 탈출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디에서 몰래 공부했을까요? 등잔 밑이 어둡지 않을까 싶어서 함께 모여 공부하는 연학실에서 새벽에 일어나 공부했습니다. 저 말고도 몇몇 친구들이 더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연학실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꼼짝마~~”라는 큰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담임신부님이셨습니다. 신부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어떠했을까요? 신부님이 반가웠을까요? 아니면 두려웠을까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이렇게 두려움을 가지고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는 고개조차 들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신부님은 가까운 분이 아니라 아득하게 먼 분이 됩니다. 하지만 기쁨을 가지고 신부님을 만나게 될 때는 어떨까요? 계속해서 신부님 얼굴만 보고 싶습니다. 너무나도 가까운 분이고 그 순간이 행복합니다. 이때를 떠올리면, 주님을 만나는 것도 두려움으로 만나고 있는지, 기쁨으로 만나고 있는 지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두려움으로 만날 때에는 내 자신이 잘못이나 죄를 지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만날 때에는 내 자신이 칭찬받을 일을 했거나,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을 때였습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정답을 말했다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엄하게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당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은 잘 하는 것이 아닐까요?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 앞에 두려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으로는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죄로부터 멀어진 삶,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 앞에 기쁘게 나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분명히 칭찬하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기쁨입니까? 두려움입니까?
오늘의 명언: 백 퍼센트 행복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 낸 기쁨은 분명히 존재한다(크레이그 데이브드슨).
하느님 나라는 ‘할부’로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구입하는 방법은 일시불과 할부를 통해서 구입하는 것이 있습니다(리스나 렌탈 등은 제외하겠습니다). 물론 일시불로 현금을 내고서 구입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그렇게 큰 현금이 없을 때에는 할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매달 할부 금액을 충분히 낼 수 있겠다 싶으면 할부 구입을 선택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시불로 새차를 구입하는 것처럼 순교를 하거나 성인처럼 살아서 곧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의 삶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거룩한 삶이라는 높고 큰 가치를 특별한 사람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가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쉽게 포기할 것입니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작은 사랑의 실천까지 모두 받아주십니다. 자동차 할부금을 내듯이, 일상의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도 충분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불후의 명작’ ‘불세출의 걸작’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바라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깊은 감동과 전율, 기쁨을 선사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인(聖人)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땅위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다들 너나할 것 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존재려니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우리들 사이에 명품(名品), 곧 성인이 존재합니다.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그는 솔직하고 자연스러우며 유머감각도 풍부합니다.
우리 시대 성덕은 왕좌 밑에 감춰져 있을 수도 있고 노숙인의 외투 안에 숨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인간 존재가 자신의 영역에 있어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겸손할 때, 반대로 한 인간이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이를 기꺼이 수용할 때 성덕은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신학자가 성인일수 있지만 과학자도 성인일수 있습니다. 수도회 창설자가 성인일수도 있지만 한 가정의 가장도 성인일수 있습니다. 반드시 대단한 업적을 남겨야만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인이 이룩한 업적 안에서 성덕이 발견될 뿐입니다. 성덕은 한 나라를 통치함에서 드러날 수도 있지만 작은 노점상 안에서도 발견된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특별한 성인(聖人)이 한 분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입니다. 그는 어렵게만 여겨졌던 성화의 길이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만천하에 공포하신 분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 사람들은 성화의 길이 아주 어려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성화는 성직자나 수도자의 전유물로 생각했기에 평신도들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이냐?”며 크게 반박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인의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는 당시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성성(聖性)의 보편성을 강조했습니다. 성직자·수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과 직업 안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완덕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살아생전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의 매력과 명성은 대단했습니다. 준수한 외모와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 감동적인 설교가였던 그를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고 존경했습니다.
특히 당대 여성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할 때는 여인들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듯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그 중에 한명이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성녀였습니다. 당시의 만남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행동은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갔습니다. 나는 그분 곁에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제 처지가 허락된다면 그분의 몸종이라도 되고 싶었습니다.”
이토록 온유하고 사랑넘치는 성인, 품격있고 매력적인 성인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이었지만, 그의 전기를 읽다보면 오늘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역시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역시 한때 성격이 성급했으며, 신앙 역시 흔들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같이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성덕의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넘어지고 또 넘어짐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어떤 유혹과 고통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성인, 세상 모든 사람들을 따뜻히 품어안을 수 있는 대성인으로 거듭났습니다. 그의 신앙 여정 안에서 매일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점진성(漸進性)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민감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매우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전기가 중학교 2학년 때 들어왔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누리는 것들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창피하지는 않았습니다. 촛불로 공부를 해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기가 들어오면서 조금씩 부끄러움을 알아갔습니다. 중학교 때 도시락 반찬이 항상 김치여서 창피했습니다. 어머니는 좀 업그레이드해서 어묵만 싸 주셨습니다. 전 조금 자랑스러웠지만 누군가 “너희 집 어묵 공장이니?”라고 했을 때 창피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수원으로 다녔습니다. 잠바가 없어서 겨우내 한 번도 빨지 않아 시커멓게 된 어머니가 누군가로부터 얻은 여성잠바만 계속 입고 다녔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말은 안 해도 여자 잠바 하나로 겨울을 나는 저를 불쌍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대학에 가서 수백 명이 모인 강의실에서 출석을 부를 때 다른 과 여자아이들이 제 이름을 듣고 깔깔대며 웃을 때 창피했습니다.
내가 창피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나를 창피하게 만드는 사람들과는 친해지지 못합니다. 나를 창피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작업은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나의 감정에 상처를 입지 않는 연습입니다. 내가 상처 입는다는 것은 곧 나를 상처 입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온전히 보호하지 못한 나의 탓에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시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가지 않으시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밤이나 새벽에 혼자 기도하시고 배 한 척에 타시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셨습니다. 아마 이것에 기분이 나빠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까지 다 감수하시며 예수님께서 꼭 지키시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당신의 ‘감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당연한 찬양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런 영을 지닌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찬양에 기분이 좋아지셨다면 악령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감정이 외부의 영향에 의해 휘둘리면 사랑하기 매우 어렵게 됩니다. 만약 돈 때문에 기쁘고 돈 때문에 슬프다면 그 사람은 돈에 지배받는 것입니다. 가진 돈이 다 사라지면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살 힘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미워하게 됩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지배받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에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면 그 사람에게 어떠한 좋은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되어버립니다. 그의 종이 되어 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거든 그 대상으로부터 감정을 독립시켜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당신의 감정을 지키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마련하도록 하신 ‘배’가 바로 그 상징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배 안에서 타인들이 만지는 손에서 멀리 떨어져있을 수 있어야합니다.
한 저명한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평소에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나를 죽이는 사람이다”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가 하루는 의학협회에 나가서 논문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참 발표하는 도중 한 의사가 일어나서 그의 논문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논문을 발표하던 그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나머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를 비난한 사람을 큰 소리로 공격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나를 죽이는 것은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타인의 말에 화가 나도록 내 자신을 방치해 둔 자신이 스스로를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도록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합니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역시 ‘기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감정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에 지배를 받게 되면 십자가를 감당해 내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감정을 이기시고 당당하게 그들의 손에 잡히십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을 때리고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도 예수님의 감정은 평정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온유함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십니다. 이 온유의 힘은 기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이 평정심입니다. 이렇게 감정을 지킬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감정이 감사와 사랑으로 채워진 온유한 마음인지 항상 민감하게 살펴야합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나의 감정이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멀어져서 더 수련하고 다시 다가가는 편이 낫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어를 배우면서 ‘Landmark’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장소나 건물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만리장성, 프랑스의 에펠탑,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한국의 경우는 경복궁, 남산, 명동을 이야기 합니다. 댈러스의 Landmark는 무엇일까요? 대부분이 평지인 댈러스에서 사람들의 눈에 뛰는 ‘유니언 타워’일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말씀과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중에 어떤 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일까요?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과 병자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가식을 비판하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은 ‘십자가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죄를 지어 방황하는 나를 위한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죽음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며 죽어야 하는 나의 죽음을 대신하는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인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는 표징이 되었고, 그분은 죽었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드러내는 것들이 있습니다. 24년 전에 담배를 끊은 것이 저는 좋습니다. 다른 일들이 많지만 지금 생각해도 금연은 현명한 판단이고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묵상하는 것도 저는 좋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말씀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의 도움이 컸습니다. 매일 걷는 것입니다. 별일이 없으면 3시간은 걷고 있습니다. 걸으면 건강에도 좋고, 생각을 정리하기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저를 드러내는 것이 있다면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성체와 성혈을 축성하고, 공동체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대사제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희생의 제사, 친교의 제사를 봉헌하는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갈등하고, 번민하고, 나약하지만 모든 사제의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제사입니다. 미사는 사제의 인격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 드러나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그런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고, 병자들은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습니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병자를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그려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온 아픈 이들을 사랑과 정성을 다해 치유해 주셨으리라 봅니다.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는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많은 시간 환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셨었습니다. 사십대 후반에 간염을 앓아 고생하셨던 아버지는 병이 호전되신 것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남은 여생을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찾아서 기도해 주시며 하느님 사랑을 증거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버지가 그렇게 환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기도를 하셨다고 해서 기적처럼 병이 완치되고 죽어가던 이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도를 받으셨던 분들과 그 가족들은 그 아버지의 사랑과 정성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기도해 준 아버지께는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은사는 기적처럼 병이 낫게 해 주는 초능력이 아니라 아픈 이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을 위해 사랑과 정성을 다해 기도해주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정성을 다해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하심 안에서 어떠한 모습이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하느님 안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믿습니다.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신심 생활은 모든 소명과 직업에 가하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신심 생활 입문’에서(Pars, 1, cap. 3)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을 초목에게 명하셨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또한 그 교회의 생활한 초목인 신자들에게 그 처지와 각자 맡은 직분에 따라 각각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설명하신다. 귀족과 직공, 왕족과 노복, 과부와 주부, 소녀들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신심은 각각 달라야 한다. 또 한층 이것을 개인의 능력, 일, 직무에 맞추어야 한다. 필로테아여, 주교가 샤르트르 수도회의 수사처럼 관상적 독수자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가정을 가진 자들이 카푸친회 수사들처럼 금전을 소홀히 여기거나, 또는 직공이 수도자처럼 종일 성당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든지, 또는 수사가 주교처럼 언제나 타인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닌다면, 이런 신심은 참으로 우습고 질서를 뒤집으며 또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착오는 극히 많다. 따라서 세속은 참된 신심과 그릇된 신심을 구별치 않고 또는 구별하려고도 않으며 신심을 배척하고 이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과 배척은 위에 말한 그릇된 신심에 한해서만 말해야 할 것이다.
아니, 필로테아여, 진정한 신심은 아무것도 손상치 않고 오히려 만사를 완성시킨다. 자기의 정당한 직무를 거스르는 자의 신심은 확실히 그릇된 신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꿀벌은 꿀을 마실 때 조금도 꽃을 상하지 않게 하며 꽃은 이전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고 한다. 참된 신심은 이보다 더 어떠한 직무나 처지도 손상치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이를 아름답게 꾸민다. 보석을 꿀에 담그면 그 성질에 따라 광채를 더한다고 한다. 그와 같이 어떤 사람도 그의 경우를 신심과 합치시키면 그의 경우는 일층 더 아름다워진다. 가정의 평화는 커지고 부부간의 애정은 깊어지며, 임금께 대한 충성은 두터워지고 각자가 맡은 일은 유쾌하고 즐거워진다.
신심 생활의 군인들의 병영, 직공들의 공장, 제왕의 궁정, 결혼한 자들의 가정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유설이며 이단의 교설이다. 필로테아여, 관상적인 신심이나 수도원식 또는 수도자적 신심이 이런 이에게 전연 맞지 않을 것은 말할 여지도 없지만, 위에 말한 세 가지 신심 외에 세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완덕으로 인도하는 신심의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완덕의 생활을 구할 수 있고 이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추위와 침낭 속 필요한 것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밤 영하 14도, 낮에 복사열은 눈을 녹였다. 해가 떨어지면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솔라 전기는 오래가질 못해 그 기능을 잃는다. 밤이 되면 죽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화장실이 너무 캄캄해 큰 문제였다.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 반짝이고 수많은 별이 어두운 밤을 밝힐 뿐이다. 별을 바라보다 화장을 고치고 이내 온기 있는 침낭 속으로 얼른 몸을 피했다. 4,130고지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아야기이다.
침낭 속에는 1리터들이 온수가 담긴 보온 물통 한개, ‘화롯불’이라는 ‘핫팩’이 생명 에너지를 보탰다. 위대한 인간이 초라하게 이를 붙들고 간신히 추위를 녹이며 그 속에서 간신히 잠을 청했었다. 탕자의 비유(루카15,11-32)에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 같은 품을 그리워 했다. 아, 아버지의 따뜻한 온기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온기가 나에게 소중해졌다. 산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늑한 방에서 잠을 청하며 일주일 내내 감당한 침낭 속 겨울잠을 다시 꺼냈다.
엄동의 추위에 몸을 보호해주던 온기라는 에너지, 침낭 속 보온 물병, 핫팩을 떠올렸다. 그렇게 그것이 소중하게 여겨진 적이 없었다. 생명보호 에너지였다. 너무 흔하게 넘처난 에너지 덕분에 내가 이렇게 편안하게 살아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이곳에서 온기의 소중함을 알아챈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건강을 잃고, 마음과 육신의 병을 앓고 있는 최악의 사람들을 떠 올린다.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 어둠 속에 밝음을 찾는 죄인들은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건강과 깨끗한 영혼으로 되돌려달라고 애원하는 아버지의 품, ‘구세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하늘에 구름을 이루듯 군중들이 무리지어 예수님께로 향해 모여든다. 엄동처럼 매서운 추위에 직면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부르고 있다. 최소한의 생명이 되어주었던 침낭이, 핫팩이, 한통의 보온 물병이 소중하듯 그들에게는 오직 ‘하느님의 아드님’만이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엄청나게 무리지어 ‘구세주’를 따라 나선다. 왜 그들이 구세주를 향해 무리지어 따르고 있는지? 편안하고 즐겁기만 한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른다. 무리진 군중들의 심정을 알아챌리 없다. 제자들이 그랬다. 건강하고 의인인 제자들은 무리진 군중의 예수님 따름을 읽지 못했다. 제자들이 군중에게 구세주가 되어 준다면 새상은 훨씬 더 아름다워 질 것이다.
산행이 끝나고 침낭과 물통과 핫팩이 다시 무용지물로 구석에 처박혔다. 산행 중 원시에서 문명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널부러진 에너지의 편안함에 그 소중함을 즉시 잃었다. 나에게 온기가 되어준 물품들의 구세주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된 것이다. 역시 ‘구세주’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필요할 뿐이다. 건강할 때, 의인일 때 어려운 군중둘 떠올려주며 그들을 더욱 잘 챙겨야할 침낭 속 물건이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극한 상황에 지녔던 고마움, 소중함, 감사함으로 구세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떠뜻한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수많은 음표사이의 쉼표'(마르코 3장 7~12)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병에 시달리던 이들이 낫고 싶은 마음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여기저기서 몰려와 큰무리를 이룹니다.
희망이 되어주고 눈물 닦아주실 분이 오셨다는 소식이 병자들에겐 희소식이며 예수님을 만나러 몰려든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쏠려 넘어질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죠.
무명세월을 보내는 가수나 연예인들이 한번 뜨기를 바라며 많은 세월을 보내고 스타가 되었다가도 어느새 사라지지만 예수님은 유행을 타지않는 믿을표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루종일 강행군을 하시면서도 따로 한적한 시간을 내어 쉼을 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떠들며 소란피우는 더러운 영을 가려내시고 잠재우십니다.
선한 영은 시끄럽지 않고 깊이가 있으며 사랑하되 침해하지 않고 지켜주며 예수님처럼 멈춰야할때와 시작할때를 압니다.
'수많은 음표사이의 쉼표처럼 '
<물러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9. 01. 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마르코 3,7-12 (군중이 호숫가로 모여들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내게서 한걸음만
물러서 주세요
그곳에서
당신이 찾는 나를
바라보세요
그곳에서
나를 찾는 당신을
바라보세요
그곳에서
내가 나로 보이거든
당신이 당신으로 보이거든
그곳에서
당신이 찾으려는 내가 보이거든
나를 찾으려는 당신이 보이거든
그때에 비로소
나에게 가까이 오세요
나 역시 한걸음에 나아갈게요
당신이 당신이고
내가 나일 때에
당신은 내가 되고
나는 당신이 될 수 있으니까요.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어제 아침 미사를 드리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욕실에서 미끄러져서 넘어졌습니다. 전에는 가볍게 넘어졌는데 이번에는 아예 머리를 땅에 부딪힐 정도로 넘어져서 왼쪽 눈두덩이가 퍼렇게 멍이 들고 아직도 얼얼합니다. 남들이 욕실에서 넘어졌다는 소리를 들을 때는 안쓰럽기만 했는데 막상 제가 겪고 나니 어이가 없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언젠가 한 번 주 하느님께서 내게 치유의 은사를 주셔서 어렵고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치유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기도하면서 생각해보니, 그러다가는 제가 제명에 죽기는 힘들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10) 라고 적혀있습니다.
복음의 장면을 연상하면서, 예수님 성격에 끝도 없이 한도 없이 밀려오는 그 많은 환우를 일일이 다 고쳐주셨으니,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겹고 난처하셨을까 하는 마음에 송구스럽고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한 번 눈 감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 상상으로 그려보세요.
한 사람 한 사람을 밀어내지 않고 다 받아주시는 주님.
멍들고 한 맺힌 사람들을 어루만져주시고, 그들의 염원을 다 들어주시고 풀어주시는 주님.
주님의 손이 갈수록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바라보십시오.
여러분도 원하시면 주님께 청해보세요. 저를 고쳐주십사 하고요.
주님 품 안에 안겨 있는 느낌을 가져보세요.
편안하시면 잠시 그 속에 머물러 계세요.
주님, 저희의 염원을 들어주시고, 저희를 잡아놓고 있는 병마와 온갖 악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아멘.
긍정의 이중성 <마르코 3, 7-1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긍정의 긍정이 있다면 긍정이 부정을 나타내는 말이 있습니다. “너 잘한다.” 말은 긍정이지만 억양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진실한 긍정과 거짓 긍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악마는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소리 지름은 주님의 입장을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자기편인듯하지만 반대편에 서서 입장을 더 어렵게 합니다. 시기 질투에서 나오는 긍정, 아부성 긍정, 악의를 가진 긍정, 비웃음의 긍정, 마음속은 부정적이나 겉으로만 긍정하는 사람들이 있어 잠시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들 속에 살면 불편하게 됩니다.
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제 앞에서는 “신부님 하시는 일 잘하시는 일입니다.” 하고는 뒤로 가서는 온갖 비난의 소리를 다 하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젊어서 경험 없는 제 잘못도 있었겠지만, 그다음이 힘들어졌습니다. 주님도 잘하시는 일이 다른 이에게 눈에 거슬리고, 인기가 상승하니 시기 질투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더 미움의 대상이 되어 결국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 긍정을 잘 살펴야 합니다. 옛날 임금님이 하시는 일이 잘못인데도 “지당하옵소이다.” 하였듯이 진실에 입각한 충언이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장상이나 어떤 일에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잘못하면 바로 비판의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뒷소리하는 사람에게 “바로 말씀드리지요” 하면 “아니요. 손해 보는 일은 왜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이 자주 겹치면 망하는 꼴이 됩니다. 칭찬하는 사람보다 나를 부정하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의 인간 공동체는 말썽 없이 잘되어가기만 하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어느 날 제가 글 중에 사람 이름 잘못 사용했다고 지적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껴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나라나 교회나 가장이나 모두가 잘 되어 간다는 자부심보다 잘못이 있으면 수정하고 민심이 천심이라고 하듯이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구성원의 말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다만 절망적 부정이 아니라 희망적 부정은 병든 공동체의 보약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잘못된 것을 수정하고 바로 세우시는 분입니다. 지구의 움직임 따라 삭막한 겨울이 지나 따스한 봄날이 오듯이, 밤이 지나 낮이 오듯이 준비하여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 때 악이 선이 될 수 있으며 죽음이 참 생명이 되기도 합니다.
모두가 악마의 소리가 아니라 천사의 소리를 듣고 일어나 오늘 하루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마르 3, 9)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된 날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마르 3, 7~12)에서는 예수님께서 군중이 몰려 오니까 군중과 약간 거리를 두기 위해서 갈릴래아 호수에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도록 하시고 그 배에 오르셔서 군중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하시기 시작하셨을 때,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몰려왔고, 온갖 종류의 병으로 시달리던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치유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갈망하고 찾아와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에도 군중들의 지도자들이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권위있는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서 예수님께 몰려왔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몰려오는 군중들을 피해 약간의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취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가엾이 여기 시면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로 하셨지요. 그동안 너무나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서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면, 예수님도 아무리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큰 지장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들 모두를 가까이 두고 싶고 그들을 위로해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더 많은 봉사, 더 큰 봉사, 그리고 더 오랫동안의 봉사를 위해서, 모든 열정을 한 번에 다 소진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조절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사목적인 지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삶의 여유를 둔다는 것 그리고 삶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 시간적인 간격을 둔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할 수는 없지요. 한 번에 다하고 있을 때, 사람은 지치고 그 일에 짜증과 실증도 날 수도 있고, 힘이 빠져서 더 이상 봉사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그것은 더 이상의 봉사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몰려드는 군중과 떨어지기 위해 갈릴래아 호수의 한 거룻배에 오르셨을 때, 군중들은 자신들과 어느 정도 떨어져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느꼈을 것입니다. 약간 군중들과 일정 거리가 떨어진 그런 삶 속에서 예수님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혼란과 복잡함을 떠나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해서 그들을 잘 고쳐 줄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만남과 떨어짐, 이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떨어져 있을 때, 기운을 충전하고, 만났을 때 열정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일, 그리하면 이것이 오랫동안 갈 수가 있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계속 오랫동안 시간을 같이 한다면 그 좋은 감정이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정한 만남과 헤어짐의 시간을 적절히 갖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좋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지만, 때때로 그들을 피해 달아나시기도 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때때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때, 또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 하느님께 기도하고 새로운 열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봉사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면서, 다시 만나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더욱더 좋은 만남으로, 더 좋은 봉사로 이루어 가는 삶의 지혜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하느님이 주신 나의 소명을 수행할 때, 일정한 시간 쉬면서 그리고 일정한 공간에서, 내가 섬겨야 할 분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는지요?
• 또 나만의 그러한 공간과 여유를 가지면서 봉사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지요?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 정도 인기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할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치유하면 그들이 재산을 희사해서 많은 재산이 모일 것이다. 이 정도 되면 호의무사들이 예수님을 경호해야 하고 전용 자동차, 운전수, 비서 등등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 줄만하다. 그런데 치유하는 능력은 하느님의 것이지 자신 예수님 것이 아니기에 에수님은 그냥 자신이 있는 그 모습대로 그들에게 다가가셨다. 하느님의 능력을 발휘하신 것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런 겉치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해방이 필요한 사람에게 해방을 주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냥 순수하게 나누는 삶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우리는 삶보다 말로써 정의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 하며 살아간다.
하느님의 도구로 삶을 표현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투명교회
김귀웅 신부님
지난여름 세상을 떠난 노회찬 국회의원의 연설 중 한 대목입니다. “6411번 버스가 있습니다. 새벽 4시에 구로에서 첫 출발하는데, 출발 15분이면 만석이 됩니다. 이분들은 새벽 5시 30분까지 강남의 빌딩에 출근하여 청소하는 분들입니다. 다시 그 버스를 타고 강남의 수많은 빌딩으로 출근하는 젊은 직장인들은 이런 버스가 있는 줄도 모릅니다. 그분들은 그냥 청소하는 아주머니로 불립니다. 한 달 85만원 받는,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투명인간들입니다. 그분들은 9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고단한 삶을 사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제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이는 그 투명인간들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정당이 되겠습니다.” 큰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전합니다. 군중에게 밟힐 지경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에 올라타시고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큰 무리의 군중은 아픈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아쉬움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명의 정치인조차 그들 곁에 있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합니다. 예수님에게 몰려들던 그들이 갖가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금 우리 교회를 찾아오고 있을까요? 그들에게 우리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는 투명교회는 아닐까요?
영적 혁명의 삶. -열린 삶, 멀리, 그리고 함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지인이 4차 혁명에 대해 물었습니다. 농업혁명, 산업혁명, 디지털혁명, 그리고 4차혁명입니다. 이에 대한 저의 단호한 답변입니다.
“인간이, 자연이 살아야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농업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지구가 살아야 합니다. 하나뿐인 지구가, 사람이, 자연이 훼손되는 눈먼 4차혁명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인 데 도대체 기계가 일자리 다 차지하면 사람은 무슨 일을 합니까? 인간도 자연입니다. 땅에서, 자연에서 멀어지면 사람은 비인간화됩니다. 병도 많아집니다. 인간도 자연입니다. 지구의 종말, 인류의 종말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정작 필요한 것은 4차혁명이 아닌 영적혁명입니다.”
어느 문명사가의 글도 생각납니다.
“우리 동시대인이 이 미증유의 파괴력을 통제할 능력이 있는가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문명은 어느 순간 길을 잘못든 것일까. 그 뿌리는 너무나 깊어서 치유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온 것이 아닐까?---인간을 넘어 동식물계 혹은 자연계로 시야를 돌리면 인간이라는 종은 차라리 생기지 말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야금야금 죽여왔지만, 지금처럼 온난화가 가속화되면 무수한 종들이 떼죽음을 당할 것이다. 과연 이런 흐름을 돌릴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
그러니 정작 필요한 것은 화급한 것은 영적혁명입니다. 영적 혁명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제는 예수님 중심의 ‘열린 삶’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반대가 닫힌 삶입니다. 날로 닫힌 공간, 닫힌 시간, 닫힌 관계, 닫힌 세계, 닫힌 공동체로 향하는 외로운 존재의 사람들 같습니다. ‘살아 있는 만남’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만남을 통한 열린 삶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할 때 비로소 열린 삶입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빨리가 아니라 제대로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빨리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 열걸음 가기보다는 열이 한걸음 가는 것이 진정한 진보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린 예수님의 삶입니다. 주님은 모두와 멀리, 함께 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중심으로 할 때 비로소 치유의 구원이요 영적 혁명입니다. 열린 공간, 열린 시간, 열린 관계, 열린 공동체, 열린 미래로 바뀝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온통 모든 이들의 중심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기에 병고에 시달리던 사람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고, 더러운 영들은 주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십니다.
늘 일정한 거리를 두시고 일체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치유의 구원이요, 주변에 활짝 열린 삶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은 우리의 대사제도 되십니다. 바로 미사중에 만나는 오늘 히브리서가 고백하는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파스카의 예수님을, 대사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실 때, 만날 때 비로소 영적혁명입니다. 죽는 날까지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이뤄지는 영적혁명입니다. 얼마전 써놓은 ‘파스카의 꽃’이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날마다/언제나/새롭게
어둠에서 빛으로/피어나는/‘빛의 꽃’같은
죽음에서 생명으로/피어나는/‘생명의 꽃’같은
절망에서 희망으로/피어나는/‘희망의 꽃’같은
주님/‘파스카의 꽃’같은/삶이었으면/강론이었으면 좋겠다-
바로 이것이 영적혁명의 요체입니다. 매일 새롭게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피어나는 삶입니다. 바로 영적혁명의 전범典範은 파스카의 예수님이시고 모든 성인들 역시 영적혁명의 삶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을 아십니까?
1.휴식이 없었습니다.
2.늘 고통이 따랐습니다.
3.주변에 활짝 열린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4.검소한 자연친화적 삶이었습니다.
5.늘 내적 기쁨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여기에 부탄 사람들의 4S의 행복한 삶의 요소를 추가할수 있겠습니다. 단순한simple, 작은small, 느린slow, 미소smile의 삶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만55세로 생을 마감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님의 임종어도 참 감동적입니다. 주교님의 성공적 영적혁명의 삶을 요약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나의 모두여!
(God’s will be done! Jesus, my God and my all!)”
그대로 화답송 후렴의 주님의 시편고백과 일치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중심의 활짝 열린 영적혁명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 1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밀려드는 우리의
모습은 가장 절실한
고백의 우리
모습입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힘든 이들이
참으로 많이
살고 있습니다.
조금만
도와 주어도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힘든 고비마다
주님을 찾게됩니다.
치유는 주님처럼
가까이 있습니다.
서성이고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 치유의
본질입니다.
간절함의 깊이가
치유의 깊이입니다.
간절함의 끝에
새로운 삶의
의미가 펼쳐집니다.
간절함의 길 위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간절함이
예수님을 향하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간절함을 통해
우리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됩니다.
간절함이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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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의 제 담임 선생님께서는 산수(요즘에는 초등학교에서도 수학이라고 하지만, 제 때는 산수였습니다)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중학교 올라가서 제일 힘든 과목이 수학이기 때문에 지금 6학년 때에 산수를 열심히 하면 중학교에 가서 쉽게 공부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쪽지 시험을 자주 보셨고, 한 문제 틀릴 때마다 한 대씩 때렸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를 포함해서 제 친구들은 다른 공부는 하지 않아도 필사적으로 산수 공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맞는 것이 싫었으니까요.
때리는 선생님이 무서웠고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점점 더 산수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숫자만 보면 괜히 움찔하게 되고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팠습니다. 이제 중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답이 틀렸다고 매 맞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쎄 제 담임 선생님이 수학 담당인 것입니다. 실망이 컸고 괜히 짜증도 났습니다.
선생님은 초등학교 때의 선생님 모습과 달랐습니다. 때리거나 윽박지르지 않으셨고 대신 쉽게 가르쳐 주시면서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무서웠던 선생님이 아니라 저의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선생님이신 것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수학이 되었습니다.
공포 분위기로 성적을 올리는 것과 스스로 좋아하게끔 만들어서 성적이 올라가는 것,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 당연히 후자의 것이겠지요. 공포 분위기 안에서는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싫어도 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공포 분위기에서 우리가 행동하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게끔 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사실 주님으로부터 어떤 공포심을 느꼈던 사람들이 있기는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더러운 영이 든 사람이었습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을 듣고서 기뻐하시거나 어떤 반응을 보이시지 않습니다. 바로 사랑이 없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은 공포 속에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뿐 사랑으로 응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자그마한 잘못에도 나에게 벌을 주시는 분, 그래서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 무서운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공포 속에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주님께서는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 울려 퍼지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주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
공포가 아니라 사랑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름 자체가 큰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이란 일상적인 것 너머로 나를 데려다 주는 것. 이름조차 없었을 순간들을 빛나게 해 주는 것(무무).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설득’이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에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로고스’입니다. 이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와 증거를 이야기합니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으니 우산을 준비하라고 하면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실적이 올랐으니 상여금을 준다고 해도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로고스만으로는 설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깁니다.
설득에는 두 번째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파토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에게는 논리적인 설명은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담아서 보듬어 주는 것이 더욱 큰 위로가 됩니다. 지금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이 우리 몸에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시원한 물을 한 잔 주는 것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논리적인 설명보다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설득에는 더 유용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설득의 3번째 요소는 ‘에토스’입니다. 예전에 미국제품이라면 튼튼하고 좋다는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힘과 권위를 믿기 때문입니다. 삼성제품이라면 좋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삼성이라는 기업이 가진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곧 정치의 계절이 올 것 같습니다. 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하는 지도자가 있을 것입니다.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지도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저 사람이면 이 나라를 맡길 수 있겠다.’라는 신뢰를 줄 수 있는 지도자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우리는 ‘히브리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베들레헴에서는 위대한 예언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대사제’라고 설명을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바오로 사도의 논리적인 설명,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마음에 이끌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지녔던 진정성, 바오로 사도가 보여 주었던 율법에 대한 열정, 바오로 사도가 지녔던 인품을 보았을 것입니다.
신자분들이 원하는 사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사목을 하는 신부님들도 필요할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신자들을 위로해 주시는 신부님들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제는 신뢰와 사랑을 드릴 수 있는 덕과 인품이 있는 사제라고 생각합니다.
교구의 사제가 곧 1,000명이 됩니다. 모두가 맡겨진 직무에 충실하면 좋겠지만 어떤 분들은 건강 문제로, 어떤 분들은 성격 문제로, 어떤 분들은 과도한 음주 문제로, 어떤 분들은 정신적인 문제로 ‘휴양’을 하게 됩니다. 본인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들은 ‘휴양’을 통해서 아픈 것들을 치유하고 사목의 현장에서 다시 신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아픈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것을 설득하는 것도 힘들고, 휴양을 했어도 다시금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근본적인 치유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은 신자 공동체와 함께 지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러기에 신자들에게는 건강한 사제가 필요합니다. 아프고 지친 사제들을 위한 ‘치유센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덕망이 있는 원로 사제가 함께 지내면서 전문적인 심리치료사, 상담가들이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부끄러워하거나, 감추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예, 권력, 자존심, 욕심’ 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참 중요한 일. -삶의 중심中心을 찾는 것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일치일란(一治一亂), 한번의 평화와 한번의 혼란, 즉 치세治世와 난세亂世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맹자의 말씀이 작금의 국내외 현실을 보면 수긍이 갑니다. 참으로 난세와 같은 혼란의 시대입니다. 도저히 앞날의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미국도 혼란스럽고 유럽도, 동북아 현세도 혼란스럽습니다. 국내의 상황도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사람은 살아온 모습대로 죽어 간다.’
새벽에 읽은 글귀도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사는 일’이 최고의 죽음을 맞이하는 길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일출만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일몰도 아름다웠습니다. 새삼스런 깨달음에 짧은 자작시와 더불어 카톡사진과 더불어 친지들에게 전송했습니다.
“황홀한 일몰日沒/일몰의 축복祝福 노년老年도/노년에 맞는 죽음도/이랬으면 좋겠다-
‘우리 황혼인생도 이토록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답신의 글도 생각납니다. 살아온 모습대로 죽습니다. 축복의 일출같은 삶에 축복의 일몰같은 선종일 것입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삽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습니다. 일치일란 상황중에도 역사는 서서히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니다. 혼란의 내외적 상황중에도 곧장 삶의 중심을 찾아야 합니다. 중심을 잃어 혼란이요 방황입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바로 주님이 답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전 삶을 압축한듯한 장면입니다. 참으로 혼란한 시대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제자들과 호숫가로 물러가십니다만 무수한 이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라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구름떼 같이 모여드는 사람들입니다. 완전히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신 주님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고,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분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고백하며 자신을 폭로합니다. 참으로 신바람 나는 장면입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실 때 일어나는 일상의 크고 작은 축복의 기적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반복되는 삶의 역사입니다. 예수님 당대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죄악이 만연된 세상에 병고에 시달리는 병자들 천지의 세상이며, 수없이 다양한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삶의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화답송 후렴의 고백처럼 우리 삶의 중심에 구원자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세상의 중심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고백하는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이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형제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살아 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합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시어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이십니다. 바로 이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으시어 우리의 영육을 치유해 주시고 우리 모두 온전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아멘.
촛불은 어둠 가운데 있어도 밝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대사제인 예수님은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고 “만일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신다.” 뭐 이런 식으로 오늘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받고 오늘 복음을 봐도 물러나셨는데도 하도 많은 사람들은 몰려들어 배를 타고 사람들과 떨어져 말씀을 선포하실 정도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고 사람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어도 떨어져 계시고 죄인들을 피하지 않고 죄인들 가운데 있어도 죄와는 떨어져 계시며 세상 한 가운데 있어도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히브리서를 묵상하며 이런 주장을 합니다.
아니 이렇게 크게 외치고 싶습니다.
촛불은 어둠 가운데 있어도 밝다.
촛불은 어둠 가운데 있어도 밝을 뿐 아니라 어둠을 밝힌다.
그런데 촛불은 자신을 태우면서 밝고 어둠을 밝힙니다.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시어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죄인들과 함께 계시지만 죄 물듦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추종해야 할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시자(3,7ㄱ) 갈릴래아와 유다인들이 사는 모든 지방에서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듭니다(3,7-8).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만 모여들었던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온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그분을 따라온 것입니다(3,10).
여기서 예수님 곁에 있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분을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신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깊이 체험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온전히 인식한 것은 수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뒤였습니다.
군중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질병과 가난과 고통을 겪는 비참한 상황에 있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고 자석에 끌리듯 그분을 찾아온 것이었지요(3,10).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그들을 끌어내시어 자신을 다시 보도록 하십니다(3,9).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지릅니다(3,11).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은 그분을 거부하는 몸짓이지요. 그들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긴 하지만 믿음에 이르지 못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립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미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계시되고(1,11), 하느님의 아드님(3,11)으로 고백되며,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셨지만 그 뜻은 수난을 겪으시고 목숨바쳐 죽는 그때에야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참모습은 구마나 치유처럼 사람들 눈에 영광스럽게 보이는 행위에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하느님의 뜻과 일을 이루는 데서 드러나는 까닭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제자들처럼 그저 부르심에 따르거나, 군중들처럼 하느님과 무관하게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알아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더러운 영'처럼 정확하고 심오한 인식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적 인식만으로는 믿음에 이를 수 없고, 그분과의 일치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그분의 수난의 여정에 동참하고, 그 수난의 사랑으로 목숨 바쳐 이웃을 사랑할 때에만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온 존재로 받아들이고 살아낼 때만이, 그리고 살아내는 만큼만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삶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한 함구하고, 아는 체 하지 않는 정직함이 우리다운 겸손한 모습이 아닐까요? 세상의 힘이 아니라 철저히 다른 이들을 섬김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우리이길 소망합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왜 일까?
또한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엄하게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왜 일까?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당신은 치유 받은 이들에게도,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셨습니다. 왜 일까?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 대체 왜 일까?
이상하게도 야훼 하느님께서는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고, 이사야에게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고 하십니다. 대체 왜 일까?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눈이 열리지 않아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 곧 참된 모습을 볼 수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때’ 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때, 십자가에 매달릴 때가 아니면,“하느님의 아들”의 참된 모습이 올바르게 밝혀질 수가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고백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릴 때라야,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야 비로소 당신의 진면목, 곧 참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난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부수고서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상의 자기 자신을 허물어지고, 찢어지고서야, 비로소 하느님의 아드님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여기 수도원에 혹은 성당에 몰려와 있다하더라도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군중들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지를 못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외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십자가에서 매달려 찢어져 피 흘리지 않는다면, 악령들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참되게 믿지 않고 외치기만 할 뿐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십자가의 제사가 이루어지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할 일입니다. 아멘.
지금은 염불을 할 때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매력이 넘쳤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스스로 당신을 소문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렸습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심지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야말로 향이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법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기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믿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기에 편승하면 그것은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사실 인기가 결코 성공은 아닙니다. 따라서 한 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기가 최고인줄 압니다. 곧 허상 안에서 쓴맛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의 열매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군중을 모으는 것, 신자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채워져서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거기에 향기가 있고 향기가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벙어리 동상
윤경재 요셉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1~12)
<벙어리 동상>
- 윤경재-
하나이신 주님
우리도 하나만 남기고
모두 비우게 하소서
우리가 걸친 모든 게
거저 주신 선물이더라도
하늘에선 소용없을 것
쥐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가장 소중한 평화인
이웃과 하나 되는 달란트만 지니게
허락하소서
아버지 앞에서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벌거숭이 되게 하소서
제 말은 할 줄 모르고
사랑만 향해 쳐다보는
벙어리 동상이 되게 하소서
오직 주님 뵌 기쁨에
눈물 한 방울쯤
흐르게 허락 하소서
세계 여자 골프계에서 한국 여자 선수들이 두각을 내어 국가가 어려운 시기를 맞을 때마다 국민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외환위기 때에는 박세리 선수가 해저드 근처에 떨어진 공을 맨발로 들어가 쳐내어 US 골프선수권을 우승하여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작년 올림픽에선 박인비 선수가 손가락 부상 탓에 참가도 불투명했던 고비를 넘기고 정신력으로 우승하여 우리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였습니다. 다른 나라 선수들과 우리나라 선수들을 비교해 보면 체격에서는 작은 편이나 정신력과 우아한 스윙 폼에서 우세하다고 합니다.
골프 교습가들은 초보자를 교습할 때 아예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결과가 더 좋고 배우기도 쉽다고 말합니다. 어설프게 골프 이론에 대해 주워들은 게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게 제일 힘들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몇 년 정도 연습을 하고 와서 자기 나름의 폼이 고착된 사람은 잘못된 폼을 교정하는 게 여간 힘들지 않다고 말합니다. 가르치기도 힘들고 배우기는 더욱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골프 입문자가 빨리 공을 치고 싶어서 제대로 된 폼이 형성되기도 전에 교습을 그만 두거나 선생님을 바꾸어 죽도 밥도 아닌 상태로 망가진다고 합니다.
더 좋지 않은 건 하루라도 먼저 배운 사람들이 선배랍시고 참견하고 코치하려고 들어 오히려 폼을 망가뜨리는 경우입니다. 특히 이런 분일수록 정확한 스윙 이론에 따른 폼 교정이 아니라 자기의 느낌을 전달하는데 주안점을 둡니다. 내가 쳐 보니 이런 느낌일 때 잘 맞더라고 말합니다. 사실 느낌이라는 것은 주관적이라 사람마다 그 느낌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릅니다. 또 인간의 언어 표현은 불완전해서 그 사실을 정확하게 그대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색깔 표현 만해도 실제로 수만 가지나 되는 색상을 몇 십 개정도의 단어로 묘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아예 국제 표준 색상은 숫자로 정해 놓았습니다.
사람마다 체격도 다르고 쓰는 힘도 차이가 납니다. 운동신경 반응 속도도 다르니 스윙 중에 느끼는 감각 부위도 다른데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느껴보라고 권하는 자체가 오류를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안다는 듯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침묵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의 외침이 하느님의 계획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이 그저 기적이나 펼치시고 권능을 드러내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아빠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쳐주시고 그 사랑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자체가 하늘나라가 이미 들어와 있는 기쁜 소식이며, 평화를 완성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의 협조가 절실하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습니다.
인간이 지닌 지혜와 재능이 아무리 훌륭하고 크더라도 방향이 잘못되면 하느님과 이웃에게 누가 되고 해롭기만 하다는 걸 인간은 알아채기 어려운 법입니다.
악령의 꼬임은 아무리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 방향을 비트는 데 있습니다. 악령은 하느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고 인간의 약점을 파고듭니다. 무엇이든지 인간 스스로 판단하려는 속성을 이용합니다. 뭐든지 다 알 수 있다는 자만심이 인간의 취약점입니다.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권력과 재산, 명예를 쥐었어도 이웃과 국민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제 이익과 제 편의 욕심만 따르는 사람들이 저지른 폐해가 얼마나 큰지 우리는 또 한 번 경험합니다. 숫제 그들이 아무 능력도 없었다면 그렇게 나대지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역사에서 수 없이 반복되었는데 그때마다 올바른 방향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보다 그럴듯한 악령의 소리에 귀를 더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영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 대목 해설에서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 둘째 ‘아무것도 알려하지 않음’ 셋째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입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은 모든 일에서 자신의 의지를 단념하고 하느님의 뜻을 구하라 하는데 이제는 그 단계도 넘어서는 것이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의지마저도 떠나라는 요청입니다. 피조물과 상대인 하느님마저 여의고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초월적 하나의 상태로 환원하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알려하지 않음’은 하느님을 알되 이 앎에서마저도 자유로운 경지로서 자신이 무엇을 안다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지식이 도그마가 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고착된 이미지, 상념, 관념에 의지하여 관계를 맺으면 아무런 생명력도 발생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은 나의 소유를 전부 없애야 하느님과 하나 될 것이며, 도리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얻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악령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서 우리를 빠트릴 커다란 오류의 함정을 파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간계를 꿰뚫어 보시고 침묵하기를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가르침을 따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때 호황기를 누렸던 서구교회의 몰락이 끔찍할 정도입니다. 신자수의 격감으로 교회들은 무용지물이 되어 텅 빈 교회 건물의 매매가 활발합니다. 매각된 교회는 휘트니스 센터나 스케이트보드 연습장, 상가나 술집 등의 용도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515곳의 본당이 문을 닫은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스위스 내 전체 본당 수는 1700개인데, 그중 650곳에는 담당 사제가 없습니다. 네덜란드 가톨릭교회는 향후 최근 10년 간 전체 1600개 가톨릭 본당 가운데 3분의 2가 문을 닫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한 대수도원에는 한때 380명의 수도자가 몸담고 있었지만 지금은 39명으로 줄어들었으며, 현재 이 수도원에서 가장 젊은 수도자의 나이는 70세이랍니다. 이 수도원의 사용되지 않는 공간은 호텔로 바꾸기 위해 리모델링하고 있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현 실태를 바라보면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본당에서 중고생들이나 청년들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교회 공동체와는 너무나 비교·대조되어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발길 닿는 곳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큰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를 계속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 머물고 계실 무렵, 너무나 많은 군중들이 몰려와 인명피해가 우려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비상 대책 안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밀려드는 군중들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기 위해 거룻배 한척을 구해 그 위에 오르신 것입니다. 배 위에서 안전하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의 ‘평생소원’을 이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오랜 갈증을 원 없이 채웠습니다. 그 누구도 차별대우 받지 않았고 그 어떤 사람에게도 특별대우란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치유면 치유, 구마면 구마, 설교면 설교...그토록 고대하던 하느님 나라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생명력 넘치는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와 너무나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를 바라봅니다. 점점 활력과 회복탄력성을 잃어가는 우리 교회를 바라봅니다. 더 이상 수직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기 위한 묘안이 무엇인가 고민해봅니다.
프랑스 교회의 충격적인 몰락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떼제 공동체 언덕은 전 세계로부터 몰려온 수많은 청년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루르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세속화된 세상 한 가운데 가장 거룩한 성모님 성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성모님의 현존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가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종교라면 고개를 가로 짓는 프랑스인들이지만 엠마우스 공동체 창설자이자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의 아버지요 벗으로 살았던 아베 피에르 신부님을 가장 존경하는 첫 번째 인물로 손꼽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려 하시지만 그러실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는데 그분의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이제는 갈릴래아에서만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 티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 모여들고 있다(8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절)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만지려 했고 또 만졌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는 믿음으로 만질 수 있다. 믿음이 없이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손으로는 만지지 않아도 믿음으로 만지는 것이 더 낫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이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이시라고 여기면 그분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절)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똑같은 고백이지만, 똑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악마와는 다른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다.(참조: 갈라 5,6) 악마들도 “믿고 무서워 떱니다.”(야고 2,19)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가?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4)라거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마르 5,7; 루카 8,28)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고백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조용히 쉬실 시간이 없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휴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계시다. 또한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면 그분을 언제나 잘 알아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둔한 영적 감각과 교만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 존중을 위한 거리 두기
이해윤 루도비코 신부님
우리는 너무도 ‘나만을 위한’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을 믿기보다는 하느님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반대로 하느님보다 나 자신의 인기나 사람들의 환호에 취해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거짓 신자 혹은 거짓 예언자가 되기 쉬운 세상의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오늘 거리를 두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맛보고자 예수님께 군중이 달려듭니다.
심지어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발설하지 말도록 하시고 더 나아가 거룻배를 타심으로써 사람들과 일종의 ‘거리’를 두십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 아버지 그분을 찾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의 능력에 집중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을 사람들이 알아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거리를 존중하십시오.
하느님도, 사람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름다운 물러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이름을 외치는 열광적인 군중의 함성 가운데에도, 당신으로 말미암아 새 삶을 찾은 이들의 칭송 가운데에도, 당신 때문에 욕망이 좌절된 어리석은 이들의 한탄 가운데에도, 당신은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들이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하는 그 곳, 모든 이들이 앉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자리, 당신은 그 자리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이를 죽여야 하는 모순 한 가운데에 생명이신 당신은 자리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 옳다 외쳐대는 거짓투성이 한 가운데에 진리이신 당신은 자리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 이기기 위해 서로를 짓밟는 아수라장 한 가운데에 십자가 넘어 부활의 월계관을 쓰신 당신은 자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소박한 작은 자리,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는 보이지 않는 자리, 하느님 모상인 사람이 온전히 새로이 태어나는 자리, 당신이 원하신 곳이었습니다.
당신을 연호하는 군중들의 함성 뒤로, 당신을 권좌로 초대하려는 군중들의 움직임 뒤로, 당신은 물러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당신의 자리에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이들이 당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얻으려합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욕망을 채우려합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하느님과 사람을 갈라 세웁니다.
가슴 시리게 당신의 아름다운 물러섬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듯 헛된 것을 추구했던 어리석음을 깨닫고 당신 따라 아름답게 물러설 수 있기를 다짐하는 오늘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여전히 같은
고백을 하면서도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제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의미 없는
고백 뒤에 이제는
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통해
우리의 삶이
치유되고 변화되길
간청해봅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은
삶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내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이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에서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진짜 안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통해
우리가 기쁘게
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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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떤 강의에서 흰 옷 입은 여성과 검은 옷을 입은 여성들이 나와 패스하는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이 중 흰 옷을 입은 여자들은 몇 번 공을 패스하는지를 맞춰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집중해서 흰옷 입은 여성들이 몇 번 패스하는지를 세었습니다. 패스가 모두 끝나고 강사는 몇 번 패스를 했는지 물었지요. 저는 자신 있게 16번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16번이 실제의 정답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사는 이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혹시 고릴라를 보셨습니까?”
뜬금없이 웬 ‘고릴라’를 이야기하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상한 점이 없었는지도 묻더군요. 저는 이상한 점을 전혀 찾지 못했었고, 또한 패스를 하는데 무슨 고릴라가 나왔나 싶었습니다. 강사는 이 동영상을 처음부터 다시 보여줍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중간에 고릴라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나와서 한 가운데에 서서 가슴을 치는 것이 아닙니까? 또한 패스를 하던 검은 옷을 입은 여성 한 명이 중간에 밖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뒷면 벽을 가리고 있었던 커튼 색깔 역시 바뀌는 것입니다.
다른 동영상을 틀은 것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분명히 처음에는 이상한 점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동영상이 아니라 똑같은 동영상이 분명했습니다. 문제는 제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즉, 흰 옷 입은 여성이 패스하는 것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을 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동영상이었습니다. 즉, 어떤 것에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느끼고 깨닫는 것도 달라지는 것이지요. 하긴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곳에 가고 싶은데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으면 당연히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바라봐야 합니다.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주님을 느끼고 체험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아닌 다른 것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주님을 만나기가 힘든 것입니다.
이 천 년 전,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이 보려는 것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불치의 병도 나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바라보고, 또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영처럼 무서워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알아 뵙고 기쁨에 넘쳐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쾌한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일을 제쳐놓고 타인의 문제에 전력을 쏟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다(데일 카네기).
미래를 대비하라(김진배, ‘내인생을 바꾸는 유머 한 마디’ 중에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남자편)
1. 건강해야 한다.
2. 돈이 있어야 한다.
3. 딸이 있어야 한다.
4. 친구가 있어야 한다.
5. 마누라가 있어야 한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여자편)
1. 건강해야 한다.
2. 돈이 있어야 한다.
3. 딸이 있어야 한다.
4. 친구가 있어야 한다.
5. 남편이 없어야 한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같습니까? 단순히 유머가 아니라고도 말하지만, 어쩌면 여기에 나오는 것보다 더 필요한 분이 계십니다. 주님을 만나고 함께 하지 못한다면, 위에 꼭 필요하다는 것 역시 쓸데없는 것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안전대책 중 최고는 죽음 후 영생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안전 불감증으로 사고가 잦은 걸 보면 국민성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빨리 빨리’를 찾고 공짜나 작은 수고로 큰 효과를 탐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안전사고가 잦을 수밖에 없고 인생과 영혼의 안전까지도 생기지요.
목숨안전은 육체의 건강일 테고 인생안전은 노후대책이 아닐까 합니다.
목숨과 인생의 안전 때문에 보험회사들이 그렇게 야단들 아닙니까.
그러나 안전대책 중 최고는 죽음 후 영원히 살 내 영혼안전 같은데요?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마르코 3,9)”
축복의 통로, 옆구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제의 역할은 신자들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고 또 하느님의 축복을 신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축복의 통로 역할을 하는 사제가 제물을 바치고 또 축복을 전해주고 하는 것이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옆구리를 통해서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꼴찌를 하다가 아버지의 사랑으로 경북대 총장까지 역임한 박찬석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 前 경북대 총장 박찬석 -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을 주는 방식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 1호를 잡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멜키체덱의 대를 잇는 대사제로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는 방식 또한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대사제로서 속죄제물인 당신의 피를 들고 주님의 성소인 하느님 앞에서 우리 죗값으로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피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뽑아내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하와에게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뽑아낸 갈비뼈가 축복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뽑아낸 피와 물로 태어났습니다. 피와 물은 성사를 의미하는데 우리 모두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로 태어난 그리스도의 하와들인 것입니다. 옆구리를 찢어 갈비뼈를 빼 내든 피와 물을 빼 내든 그 모든 행위는 바로 참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 그 통로로 우리를 당신 안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노아의 방주에 문을 옆으로 내어서 그 밖으로 성령으로 상징되는 비둘기를 날려 보내 그 비둘기를 받아들이는 땅이 축복을 받게 했던 상징적인 행위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통로는 바로 교회로 상징되는 짐승들이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축복과 구원의 통로였습니다. 누군가에게 축복을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옆구리를 뚫어 하느님의 축복이 인간에게, 또 인간이 그 통로를 통하여 그분 심장에 계시는 하느님께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멜키체덱처럼 빵과 포도주만을 봉헌하신 것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당신 생명을 봉헌하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 인터넷에서 건강한 사람들의 생활 습관을 본적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다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 책을 많이 읽는 사람, 운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 남을 돕는 사람,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목표가 뚜렷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저는 음주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점수가 깎이지만 대체로 건강한 사람들의 습관을 따라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습관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교회도 건강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유럽교회는 사제, 수도자 성소의 급격한 감소, 신자들의 냉담, 신자들의 고령화와 그로인한 성당의 폐쇄’등으로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황님의 방한, 신자들의 증가, 성당의 신축, 지속적인 성소의 증가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교회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고 있습니다. ‘사제와 수도자 성소가 감소하고 있고, 청년과 주일학교 학생들을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냉담자들이 늘고 있고, 급속하게 고령화 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바오로 6세 교황의 사도적 권고인 ‘현대의 복음 선교’ 반포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40년 전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었고, 대안을 제시하였던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인 현대의 복음 선교는 어쩌면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가 다시금 파란불로 바뀔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백령도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동창 신부가 백령도 본당 신부였고, 동생 수녀가 백령도 본당에서 수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령도로 가는 뱃길이 멀고 험했습니다. 가는 날 파도가 심해서 많은 사람들이 뱃멀미를 하였습니다. 저도 속이 좋지 않아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도, 군인들도 힘들어 했습니다. 백령도에 사는 주민들을 보니, 모두들 자리를 펴고 눕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파도가 심하면 자연스럽게 바닥에 눕는 법을 배웠던 모양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예, 권력, 자존심, 욕심’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도다.”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뜻이 아니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염불을 할 때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감곡매괴성모성당에서 4년 5개월의 소임을 마치고 새 임지로 가게 됩니다. 교구 모태성당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있었다는 것은 큰 은총이었고 감사와 기쁨을 안고 갑니다. 많은 부족함에도 이렇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함을 다듬어 주시는 주님의 안배였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소임지에서 오래있지 못한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업무를 파악하고 무엇인가 멋있게 하려고 하는데 “떠나라”는 명령은 미련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복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 속을 다 보여주면 실망할 사람이 많을 터인데 부족한 허물들을 숨겨둔 채 훌쩍 떠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안주할 틈도 없이 떠나는 것도 분명 은총이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은총을 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쳇말로 인기가 대단하셨습니다.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하시려고’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기란 결코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되는 물건입니다. 거기에 편승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이현주). 인기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거룻배가 꼭 필요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분명 사람의 눈에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악령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원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열매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덩어리 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인기가 치솟을수록 한발 물러서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열매까지 맛보려 한다면 분명 욕심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히브 7,25)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죄도 짓고 남을 미워도 하고 기도도 많이 못하고 남을 많이 돕지도 못하는 내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염려되기도 하지요?
히브리서 저자는 그런 걱정은 붙들어매라고 하네요.
예수님은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사람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그런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신다네요.
그러니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고 늘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보잘것없는 저를 기억해 주십사 아뢰기만 하십시오.
이미 구원의 길로 들어 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코3,11)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복음서 곳곳에서 비슷한 내용의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것은 악한 영들이 예수님의 신원을 먼저 알아봤다는 대목입니다.
참 묘한 생각이 듭니다. 악한 영도 영적인 존재니 그럴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왜 사람들은 그리도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을까요?
항상 그분 곁에서 그분의 모습과 말씀을 듣고 지내던 제자들조차 반신반의 하면서 많은 갈등 속에 있었다는 것을 성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령 강림 이후에야 비로서 순교를 마다 않는 확신에 이르게 되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천사나 악마처럼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늘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감을 벗어난 것에 대한 판단은 주저하게 되어있고, 판단을 하더라도 확신에 이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만큼이나 믿음에 대해 그리도 많이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때,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심을 한다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선과 악의 식별에 자주 실패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악한 영도 선한 영도 악이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선을 없애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도구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 떻게 해서든지 인간의 약함을 이용해서 악을 흥하게 하고 선을 없애려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려 하는 것이 악마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한 영은 우리가 악의 유혹을 이기고 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고자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매 순간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리해보지요. 우리 모두는 분명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는 쉽지 않은 조건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식별해야만 합니다.
악한 영이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악을 선으로 믿게 하거나, 아예 우리의 마음을 무디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던 철저하게 교묘하고 악한 방법입니다.
선도 최선을 다해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길을 걷도록 도와줍니다.
어떤 방법이던 철저하게 선한 방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결정은 우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에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도록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혹에 이길 수 있는 힘을 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기도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동체. -오래된 미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침 영어미사중 입당송의 느낌이 각별했습니다.
"Take up your cross and follow me, mine is the way to life"(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내 생명의 길이다.)
나름대로 주어진 공동체의 십자가란 짐을 충실히 지고 주님을 따라 책임적 존재로 사는 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자 구원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 장면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공동체가 떠오릅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모두를 포함한 자연친화적 공동체입니다. '오래된 미래'의 공동체요 교회공동체의 원형처럼 생각됩니다.
외딴 곳의 산에서 기도하시고 갈릴리아 호수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갈릴래아 호수 주변 언덕에 앉은 많은 이들을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습니다.
요셉수도원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아쉬웠던 것 하나는 호수였는데 여기 뉴튼수도원엔 호수가 있어 수도원을 참 풍요롭게 합니다.
얼굴 하나야/손바닥 둘로/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호수만 하니/눈 감을 수 밖에
호수곁을 지나며 바라볼 때 떠오르는 정지용의 호수라는 시입니다.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신기합니다. 지난 1.17일(토;미국시간) '호수위에서 기적!'이라는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뻔했습니다. 그 날은 몹시 추운 맑은 날씨에 호수는 약 20cm두께의 얼음으로 덮여있었고 마침 호수 한 복판에서 얼음을 깨고 낚시 하던 맘씨 좋은 미국 형제가 하나 있었기에 핸드폰 사진 촬영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은 확 풀린 영상의 날씨에 온종일 장마처럼 비가 내렸고, 이후의 계속 풀려가는 날씨로 호수를 걷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참 좋은 추억을 선물하셨습니다. 한국에 가도 뉴튼수도원의 묘지와 호수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 같아요.-
"듣고 보니 갈릴리 호수 같네요!“
주고 받은 카톡 대화 내용도 생각납니다. 크기는 갈릴래아 호수보다 훨씬 작지만 평화로운 정경(情景)은 갈릴래아 호수를 꼭 닮았습니다.
예수님의 활동무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민초(民草)들의 삶의 터전, 갈릴래아 호수는 그대로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마음 역시 모두를 받아 들이고 살리는 넓은 연민(compassion)의 호수와 같았을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흡사 예수님의 공동체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니 제 카톡 역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현대문명이 선물한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나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제 카톡의 공동체는 결코 엘리트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바로 예수님의 공동체이자 제 카톡의 공동체입니다.
어제의 아주 평범한 체험도 저에겐 깊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어, 안경 나사가 어디있지?“
돋보기는 책 보거나 기도서를 보는데 필수인데 돋보기를 들으니 안경다리가 뚝 떨어졌습니다.
참 암담했습니다. 그 미세한 안경다리 나사를 찾을 길이 막막했으니 말입니다. 한참만에 눈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나사를 방바닥에서 찾아 조립하니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하던지요. 아무리 좋은 제품도 시시해 보이는 작은 부품 하나만 빠져도 쓸모없어 집니다. 바로 공동체가 그러합니다. 모두가 모여 더불어 함께 살도록 되어있는 공동체입니다.
소수정예를 부르짖는 공동체주의자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비인간적인지 깨닫습니다. 예전 풋열심으로 철없을 때는 소수정예를 말했지만 이젠 완전히 철회했습니다. 힘들어도 모두를 품에 안은 연민의 공동체가 바로 예수님의 공동체입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엔 대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중입니다. 일하는 미국 노동자들의 공동체도 참 보기 좋습니다. 대부분 구김살이 없고 밝고 활달합니다.
이색적인 것은 20대 처녀 여럿도 함께 일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혼자 일등으로 오는 이가 있다면 주님은 분명 말씀하실 것입니다.
"얘야, 네 동료들은 어디 있느냐? 좀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와라.“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가 어디있는지 담박 드러납니다. 상호치열한 경쟁 속에 상호보완과 협력의 공동체 형성을 어렵게 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입니다. 이럴수록 공감과 연대의 실천공동체 형성이 절실합니다.
뉴튼수도원 게시판에 붙은 왜관본원의 인사명령지를 보면서도 연민의 공동체를 발견합니다. 모든 수도형제를 살게하는, 살리는 배려 가득한 인사명령처럼 느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바 능율과 효율의 엘리트 소수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이런저런 모든 이들이 함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연민의 공동체입니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오늘의 복음 장면은 그대로 예수님의 연민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있는 이나 없는 이나, 의인이나 죄인이나, 강한 이나 약한 이나, 건강한 이나 병든 이나 모두 함께 더불어 사는 연민의 공동체입니다.
예나 이제나 당신의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신 대사제이신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더러운 영들은 스스로 고백하며 뛰쳐나와 저절로 치유가 이뤄지니 예수님의 내공의 깊이가 놀랍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대 사제 예수님은 오늘 역시 당신 연민의 공동체의 중심에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히브리서의 아름다운 묘사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 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대사제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며 우리 모두 당신의 연민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편40,8.9참조). 아멘.
하느님을 알아보는 거룩한 여백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 수님의 활약상을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께 적대감을 가졌던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작당하여 예수님을 처치하기로 결의했다(3,6). 그래서 예수께서는 피신하시려고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신다(3,7ㄱ). 그럼에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갈릴래아를 비롯해 유다인들이 사는 '모든 지방에서'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들었다(3,7-8).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3,10) 이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말해준다.
먼저 예수님께 몰려든 군중들에게 시선을 모아보자. 그토록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든 상황은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한 인간적 소망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희망하는 이들, 고통과 시련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한숨소리가 예수님을 갈망하고 있다. 아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고, 교회의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 예수님의 마음과 손짓으로 기쁠 때 함께 기뻐해주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해주는 우리가 되어야 하리라. 하느님께 매달릴 힘도 여유도 없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이제 예수님께로 눈길을 돌려보자.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자신에게 몰려든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척을 준비하라고 명하셨다(3,9). 군중들은 그분의 놀라운 능력에 끌려 너나 할 것 없이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려고 밀려들었다(3,10).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이 기대하던 현세적 권능과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 사이에 불편한 마찰을 피하시려고 거룻배를 띄우신다. 그분께서는 거룻배를 이용하여 군중들과 거리를 두시고 그들을 한적한 곳으로 끌어내시어 당신께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보도록 해주셨다.
나에게 하느님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와 하느님의 능력을 알아차릴 순수함이 있는가?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11)라고 외치는 더러운 영의 거짓 고백과 유혹에 휘말려 세상적인 힘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집착과 소유와 고착된 습성의 자리,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떠나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경이로운 능력을 받아들이라고 초대하신다. 멈추어 진정 나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며 진정 내 영(靈)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인지 성찰해보았으면 한다.
이제 하느님 앞에 멈추어 내가 해오던 것들, 내 뜻대로 살아오던 삶의 방식들을 다시 보도록 하자. 나의 사소한 몸짓과 일상의 시간들 안에서 삶의 중심이요 혼인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온 몸으로 느껴보도록 하자! 그분의 사랑이 내 안에서 샘솟도록 주님과 나 사이에 빈자리를 마련해드리도록 하자! 하루에 한번쯤은 하느님의 마음과 능력을 회상하며 자신을 다시 보도록 하자!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이름은
필요에 따라 불렸다가
필요 없을 때엔
버려지는 이름이
결코 아닙니다.
어둠속에서도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희망을 보게하는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가장한 어둠은
사람들안에 있는 어둠과
더욱 밀착될 뿐입니다.
분산된 마음이
또 사람들을 향할 때는
미궁과 미로 속을
반복하며 헤매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르며 함께 해야 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집중해야 할
구원의 여정입니다.
사랑의 본질인
일치는 기도로
시작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에
집중되는 것입니다.
경계심과 두려움 없는
고백이 되게 하는 건
먼저 하느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삶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서로를 살게 하는 건
기도 속에서 빚어지는
고요와 침묵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올려지는
참된 신앙고백이기를
기도드립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기도를 통한 침묵은
우리의 어둠을 깨끗한
신앙으로 변화시킴을
믿습니다.
새로이 시작되는 순간은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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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책을 읽는데 너무 재미없는 것입니다. 한 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지루한 내용이고, 왠지 시간 낭비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한 줄이라도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거의 한 시간 넘게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의 바람과는 달리 한 줄도 마음에 와 닿지 않더군요. 결국 저는 다른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책을 통해 보상을 받기 위해서이지요.
이러한 보상 심리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더 많습니다. 즉,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 해줘야 한다는 생각들이 관계 안에서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까? 보상 심리를 생각하다보니 문득 군대에 있을 때가 생각납니다. 졸병일 때에는 고참들 등쌀에 참 힘들고 어려웠지요. 그런데 고참이 되고 나서는 졸병일 때가 생각나면서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것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보상심리이지요. 문제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 보상심리를 전혀 적용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즉,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끊임없이 받아야 하는 것으로만 착각합니다. 돈도, 명예도, 그리고 각종 세상의 물질적인 혜택을 남도 아닌 바로 ‘나’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떤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지요.
사실 어려움에 처할 때에는 공수포를 남발하는 우리입니다. 이것만 해결해주시면 열심히 하겠다는 말 들로 말이지요. 그러나 정작 해결되면 곧바로 잊어버리는 우리이기도 합니다. 보상심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대신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면서 조금이라도 나 역시 보답하겠다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감사한 일 100가지 적어보기’라는 구절을 보고서 실제로 적어봤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감사한 것이 없는 것 같았는데, 생각하다보니 너무나 많았습니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두 눈이 있다는 것, 양 손이 있다는 것,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등등... 감사한 일들은 생각보다 너무 많았습니다. 그만큼 주님께 감사를 표시하고 보답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무조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이듯이, 당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다 고쳐주시고 위로해주십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치지요.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공연한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리시는 것이지요. 이처럼 더러운 영은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마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받기만을 원하고 다른 이들이 받는 것에 방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 안에도 그러한 더러운 영이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철저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고, 주님께 감사를 표시하며 살아야 할 때입니다.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던가!(파울로 코엘료)
홀가분해지기(‘좋은 생각’ 중에서)
정신과 전문의 페넬로프 러시아노프는 행복 지수를 낮추는 습관을 살폈다. 우선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 ‘우주 중심 증후군’은 “왜 나에게만!”이라고 불평하게 만들뿐더라 상대의 입장에 서 보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전화해 테니스를 치자고 했을 때, 그가 우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이때 ‘우주 중심 증후군’에 빠졌다면 친구가 자신을 싫어하거나 테니스 칠 만한 상대가 못 된다고 여긴다.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 거절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오로지 자신을 중심에 두고 타인과의 관계를 해석하니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볼 여유는 갖지 못한다.
둘째로 결점 탐지기를 갖고 다니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칭찬 같은데 진짜 속셈은 뭘까?” “사과가 먹음직스럽네요. 그래도 자세히 보면 벌레 먹은 곳이 있을 거예요.” 하는 식이다. 결점 탐지기는 빈틈없이 돌아간다. 이 탐지기는 특별히 불행에만 더 많은 점수를 준다. 하루에 열 가지 일이 잘되면 각각 1점씩 더하지만,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되면 10점을 빼는 것이다.
셋째로 답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왜’ 또는 ‘만약에’처럼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면 부정적인 감정에 쉽게 빠진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왜 태어난 걸까?‘처럼 답 없는 질문에 머리를 싸매기 전에 내일을 바꿀 수 있는 오늘에 집중하는 게 더 낫다.
무엇보다 이런 부정적인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경직 지수’를 낮추라고 러시아노프는 조언한다. “변화할 수 없다.”가 아니라 “변화를 선택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관점 역시 “나는 그녀에게 차였다.”가 아닌 “그녀는 나를 선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라고 상대에게 주도권을 맡김으로써 홀가분해지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매달 보고 있는 잡지의 내용입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이렇게 나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홀가분해질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치유되어야 할 것이
무언지를 우리부터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무지한 우리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방향을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일깨워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삶의 방향을
잡아주기에 진실된 치유입니다.
공허한 말이 아니라
진실된 기도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속이는 많은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기도가 필요한
우리의 영혼입니다.
이렇듯 기도는 성찰이며
치유입니다.
진실된 기도는
기도로 견딜 힘을 얻습니다.
성찰없는 기도는
결코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요란한 소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도는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참아내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침묵의 시간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치유는 치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이켜보는
사랑의 관계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남김없이 쏟아내는
많은 말이 아니라
마음을 만나고
마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침묵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위로와 사랑이 더욱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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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동안(童顔)이란 말이 최고의 유행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조금이라도 더 어려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으며, 심지어 방송에서도 동안대회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번은 우연히 동안대회를 보게 되었는데, 아들을 스튜디오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20세인 아들이 40대의 엄마보다 더 늙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 엄마에게 대단하다고 하면서 피부 관리의 비법 등을 묻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자기 나이대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분이 어려 보이는 얼굴과 피부 관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을지 또 그에 따른 스트레스는 얼마나 많았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동안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인 ‘늙음’에 대한 자기 방어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늙음은 곧 죽음으로 연결될 수 있는데, 이 세상 안에서 간직하고 있었던 모든 자랑거리가 죽음 앞에서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26세부터 늙어가며, 또 여자는 24세부터 늙어가기 시작한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넉넉하게 잡아 100년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 내 인생의 4분의 3이 바로 죽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죽음을 두려워하며, 또 늙음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따라서 겉으로 젊어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젊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모습이 더욱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잊지 않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병자를 고쳐주시고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지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전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받은 주님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겉으로 보이는 인기만을 추구하셨다면 굳이 함구령을 내리실 필요가 없지요. 어쩌면 더욱 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널리 알리라고 선전해야 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적인 부분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 줄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주님의 뜻에 맞게 스스로 행동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피부 관리를 잘하는 것보다는, 내 마음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보다는, 사랑을 많이 실천해서 주님의 곁으로 올라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보이지는 않지만 따뜻한 위로를 전할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채우려는 욕심보다, 주님의 사랑이 늘 부족한 내 마음이 참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길 기도합니다.
내 마음에서 희망이 사라질 때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낙심시키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낙심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이해인).
작게 시작하라
어느 잡지에서 인상 깊은 글을 하나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실어 봅니다.
한 할머니가 칠십 대에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했다. 젊은이도 하기 힘든 일을 해낸 할머니를 취재하기 위해 세계 각자에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할머니에게 물었다.
“어떻게 대륙을 가로지를 생각을 했습니까?”
“오래전부터 그런 꿈을 품었습니까?”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적도 있었죠?”
할머니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처음부터 대륙을 횡단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성한 듯해요.”
“무슨 뜻입니까?” 하고 되묻자 할머니는 말했다.
“손자가 코 묻은 돈을 모아 제게 운동화를 선물했습니다. 친구에게 운동화를 자랑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기쁜 맘으로 새 운동화를 신고 다른 주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친구에게 손자 자랑을 한 뒤 생각했지요. ‘이번에는 저쪽 주에 사는 친구에게 가 보자. 걷다가 무릎이 아프면 택시 타고 돌아오면 되지.’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대륙을 횡단했더군요. 대륙을 가로지르겠다는 남다른 각오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작은 시작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과연 어떨까요?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이 큰일에도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작은 시작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시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거창하고 화려한 것만을 추구하기보다, 작은 것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 모습을 통해 또 하나의 역사가 완성될 것입니다.
세상에 휩쓸리지 마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세기를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21세기 현대인의 삶은 컴퓨터와 정보통신, 교통수단의 발달로 어느 때보다도 훨씬 여유 있고 풍요하리라는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방향도 없는 달리기와 이유도 모르는 초조함과 긴장 속에서 여유는 사라지고 바쁘기만 합니다. 성능 좋은 자동차가 많고 편리한 핸드폰이 있기에 우리의 생활과 마음에 여유가 있을 만도 한데 우리의 현실은 여백도 없이 빡빡하게 써놓은 연습장처럼 숨 막힐 듯 여유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모든 것이 빨라지고 정확해 졌기 때문에 시간을 더 쪼개서 더 바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단점 중의 하나도 시간 약속을 잘 못 지키는 것입니다. 빠른 자동차가 있으니, 우선 어디를 가려고 하면 스마트폰으로 그곳까지 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체크합니다. 그리고 사제관에서 나가서 주차장까지 가는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서 출발하면 보통은 조금 일찍 도착합니다. 그러나 도로 공사를 한다거나 차가 막힌다면 반드시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차를 더 빠르고 험하게 몰게 됩니다. 마음속으로 ‘조금만 더 일찍 나올걸.’이라고 후회를 하지만, 다음번에도 똑같이 조급해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10분만 더 일찍 나오면 과속을 하지 않아도 되고 조급한 마음을 가질 필요도 없는데, 그 10분을 나에게 주지 못해서 매번 마음을 졸이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성체조배를 할 때 스마트폰으로 문자나 전화가 오면 매번 예수님께 죄송하게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제 모습도 보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어도 세상은 끊임없이 저를 자신들 쪽으로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고, 저도 자주 그 힘에 휩쓸리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한 탄광에서 붕괴사고가 발생, 10명의 광부가 갱 안에 갇혀 외부와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광부들은 시간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중 유일하게 시계를 찬 광부가 있었는데, 그는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며 불안과 초조에 시달렸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구조대원들이 광부들을 구출했을 때 단 한 사람만 사망한 채로 발견됐습니다. 희생자는 시계를 찬 그 광부였습니다.
시간을 알 필요도 없는 상황에서 시간만 들여다보고 있다 보니 자신이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지배를 받아 결국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다 목숨까지 단축되게 된 것입니다. 시간은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나의 것이니 나의 뜻대로 쓸 수 있는 것인데, 오히려 자신이 주인이 돼서 사람을 조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본 군중이 예수님께 밀려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밀쳐대지 않게 하고, 또 마구 당신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려고 배를 한 척 구해서 배에 타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이는 당신이 세상에 영향을 주러 오셨지, 세상의 영향 때문에 당신이 휩쓸리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세상에 휩쓸리면, 세상이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지 내가 세상에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합니다. 빛이 어떻게 어둠의 영향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빛은 항상 어둠을 이깁니다. 그러나 세상의 힘에 짓눌려 내가 휘둘린다면 더 이상 세상의 빛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악처로 유명했습니다.
한번은 아내가 소크라테스에게 잔소리를 퍼부은 뒤 그래도 성이 안 찼는지 물통에 담긴 물을 머리에 부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빙긋이 웃으며 “천둥이 친 다음에는 소나기가 오게 마련이지.” 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대철학자가 저런 부인과 사는가?”
주위에서 물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나운 말을 타고 연습을 하면 어떤 말도 다룰 수 있지. 아내를 다룰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인들 다루지 못하겠나?”
저런 상황에서 화를 낸다면 아내와 똑같은 수준의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고, 그렇다면 더 이상 위대한 스승으로 불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도 인간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영향을 받아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향을 받았다고 당신이 휩쓸리지는 않습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마음을 아파해 하실지언정 당신이 흔들려 당신이 만들어놓으신 지옥을 없애지는 않으십니다.
어떤 무언가가 나의 근본적인 면까지 흔들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만든다면 잠깐 뒤로 물러서십시오. 바다에서 파도에 휩쓸리면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다시 육지로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용병으로 참가했다가 전쟁 포로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힌 다른 동료들은 모두 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또 그는 포로 생활이 글을 쓸 수 있는 ‘여가’를 보장해주었다고 생각하고 감옥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동료들에게 읽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소설이 바로 유명한 『돈키호테』이며, 그 포로는 다름 아닌 세르반테스였습니다.
마음의 동요가 내가 원치 않는데도 발생하고 있다면, 잠깐 배를 한 대 구해서 조금 세상과 떨어져 보십시오. 아마 이것이 조용한 기도와 피정의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여유가 세상의 힘을 이기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외로운 축복
노희연 수녀님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간다. 무리 속에 함께 있으면 왠지 안심이 된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많은 학생이 “외로워요.”라고 외치고 있다. 혹 다른 사람한테서 인정받고, 친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면 외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러한 물음이 내면의 세계에서 늘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외로움은 대학생뿐 아니라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대를 망라하고 인간의 내면세계 깊이 새겨져 있다.
현대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서 인간 사이의 소통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면서 인간 내면의 가치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으니 우리 학생들이 외롭다고 외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나 진정한 외로움은 축복의 빈자리다. 인간한테는 친구도, 연인도, 남편도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근원적 외로움이 있다.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군중도 아니요 무리도 아니다. 오히려 혼자이기에 풍요로움이 될 수 있는 외로움인 것이다. 쇼핑을 하고 놀러 가고 누군가를 만나 수다를 떠는 등 어떤 활동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빈자리가 있다. 하느님은 그 빈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오늘은 무리를 떠나 축복의 외로움을 만들어 보자.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갖게 하소서.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시는 꼼꼼하신 예수님을 본받고 싶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인 일들을 늘 겪으면서 여태 살았습니다.
실수 연발하는 인생, 나는 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속세와 타협 않는 졸장부라 놀려대도 진실과 결백함을 디딤돌로 알고,
내가 실수로 재물을 다 잃어도 하느님 사랑의 십자가를 재산으로 알고,
세속의 유혹이 매일 나를 괴롭혀도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마르코 3,9)”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구약의 대사제와 그리스도와 비교를 합니다. 구약의 대사제는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매번 제사를 바치는 것이 대사제의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제물로 단 한 차례 바치는 것이지만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사제로 하느님께로 사람들을 나아가게 할 수 있게 하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 서간 저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히브 7, 27)
주님께서는 호숫가에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큰 무리가 몰려들어 서로 밀쳐대며 예수님께 다가왔는데 그들은 병고에 시달리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로 주님께 다가가 손을 대려했습니다. 그래서 거룻배를 마련하여 땅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군중을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들은 주님을 보기만 하면 엎드려 예수님의 신원을 폭로하며 소리를 질러 댑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며 침묵을 지카라고 하십니다.
이 더러운 영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악의 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악의 세력을 쫒아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악의 세력을 아예 없애시면 좋으시련만...
주님께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시는 모습입니다. 악령은 광야에서 주님을 유혹하고 악의 세력은 주님께 대한 반대와 배타적인 태도로 주님을 죽음까지 몰고 가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무력으로나 강제성을 갖고 대항하지 않으십니다. 놀라운 것은 더러운 악령은 주님을 알아보지만 결국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훈을 얻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를 알고 있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더러운 악의 세력은 우리가 숭상하는 재물과 권력일 수 있고, 오늘날 오도되고 있는 성문화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극단으로 흐르는 이기주의 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은 악의 세력에 위협받고 유혹을 받더라도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신 대사제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마르 3,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삶을 살다보면
분명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실망하고 절망한다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안에서 진심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길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나의 자존심과 나의 뜻을
조금만 더 낮추면
작은 거룻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넘쳐나는 군중을 배려하기위해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마련하십니다.
거룻배란 돛이 없는 작은 배입니다.
이 작은 배 안에서
소외와 단절의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들을 향해
생명의 말씀을 다시금 힘차게 선포하십니다.
삶의 변화를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고집스러운 우리의 자아입니다.
절망의 다른 한 곳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거룻배가 있습니다.
작은 거룻배도 호수에 바로 서서
자기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오늘 이 소중한 하루는
우유부단해서 아무 것도 실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하루가 아니라
작지만 거룻배같은 기도와 사랑으로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성숙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삶의 해답은 거룻배를 타는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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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비결에 대해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저는 이에 대한 답변을 어느 책에서 보았던 내용을 토대로 말씀드리지요.
“행복이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필요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것도 필요한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한 것 같지요. 그러나 그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해도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아서, 기존에 있던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하는 욕심을 부립니다.
저는 아침마다 운동을 합니다. 특별히 근력운동을 위해 아령을 가지고 운동을 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안에서 값싼 아령을 발견했습니다. 그것도 “1+1” 행사입니다. 문득 욕심이 생기더군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조금 무겁다는 생각과 함께 조금 가벼운 무게를 가지고 있는 이 아령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 현재 예전의 가지고 있었던 아령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롭게 구비한 아령을 가지고 편하게 운동을 합니다. 하지만 너무 가벼워서 그런지 운동이 되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새로운 것을 얻었지만, 처음보다 더 낫지 않습니다. 약간의 편함만 있을 뿐, 운동의 효과도 그렇게 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후회를 하게 되네요. “괜히 샀다.”고…….
행복은 이렇습니다. 불필요한 것들에서 자유로워질 때,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필요한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했지요.
“하나가 필요할 때에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마귀는 또 한 가지를 얻어야 한다는 유혹을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고,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 즉 마귀는 쫓겨나며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거짓말인가요?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이며, 정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정답을 말하는 마귀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왜 그럴까요? 마귀의 의도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것 자체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이것보다 하나 더 진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어 더 큰 욕심을 갖게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더 큰 욕심을 갖고 예수님을 쫓아다닐 것입니다. 즉, 더 큰 기적을 보려 하고, 그 체험의 당사자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주님께서 행동하시는 본 뜻을 사람들이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 더’라는 욕심이 생길 때,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혹시 마귀가 내 안에서 유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지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이 안에서는 어떤 욕심도 나올 수 없습니다.
증오심이 커지는 것은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보다 더 하찮은 사람으로 전락되는 것이다.(라 로슈푸코)
인생의 길이와 가치(토드 홉킨스 · 레이 힐버트, ‘청소부 밥’ 중에서)
의미 있는 내용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사람은 몇 년을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일세.”
“하지만 인간이면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하잖아요.”
로저가 말했다.
“그건 그렇지. 우린 인생의 길이가 그 가치와 비례한다고 배워왔거든. 하지만 길든 짧던 인간은 자신에게 정해진 시간을 사는 거야.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자기 자신에게 달렸지. 로저, 묘지에 가면 뭐가 있나?”(중략)
“한번 들어보게. 지금 우리가 제임스 씨의 묘비를 보고 있다고만 생각해봐. 1939나 1987이라는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숫자보다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리고 1987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삶이 이 세상에 남긴 것은 무엇인지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2천 년을 살든 20년을 살든 중요한 건 그 기간이 아니라네.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기간에만 매여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간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병의 치유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은, 이스라엘 전역과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어느 정도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어떻든 예수님의 초기 활동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군중이 몰려들자 배를 타고 군중에게서 떨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9-10)."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는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도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을 만지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았습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예수님의 옷이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고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에게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1월 19일의 복음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당신을 만지려고 몰려드는 것을 피해서 뒤로 물러나시고,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병'만 고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병은 설교를 마친 뒤에 고쳐 주겠다. 우선 내 말을 들어라."
그러나 사람들은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기적'만 원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활동 성공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고, 궁극적인 구원이 아니라 당장에 필요한 것만 얻어 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시는 많은 은혜 가운데 한두 가지 은혜만 받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열 명의 환자를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열 명 모두 병이 나았지만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명뿐이었고, 그 한 명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루카 17,19).
열두 해 동안 하혈증으로 고생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몰래 손을 대고 병이 낫게 되는데, 예수님은 그 여자를 불러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마르 5,34).
병의 치유는 구원의 일부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전인적인 구원'을 주시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몸의 치유만을 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서 병을 고친 병자는 수도 없이 많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전인적인 구원을 받기 위한 생활이지 당장 필요한 것 한두 가지를 얻기 위한 생활은 아닙니다.
물론 지금 어떤 고통 속에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또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됩니다.
눈앞의 일만 생각하는 것은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중간 경유지에서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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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탄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면서 유혹했었는데, 이제 사탄의 졸개들이(악령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악령들의 태도에는 존경의 뜻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악령들의 말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해 줄 테니까 우리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마라. 우리를 해치지 마라.' 정도의 뜻입니다.
악령들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들보다는 예수님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한이나 자기들의 운명을 정확하게 알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악령들의 태도를 보면 예수님과의 싸움을 '한 번 해볼 만한' 싸움으로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계속 쫓겨나긴 했지만.)
예수님과 사탄의 싸움은 십자가 수난 때에 절정에 이르렀고, 예수님은 부활로써 최종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우리들)과 사탄의 싸움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루카 22,31)."
예수님을 공격하는 일에 실패한 사탄은 지금은 예수님의 제자들(신앙인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아니면(예수님의 힘에 의지하지 않으면)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카 22,40)."
주일 지내기
김수환 신부님
박 과장은 주말이면 늘 친구들과 모여 늦게까지 술을 마십니다. 그래서 새벽에 집에 들어가 주일 아침 내내 자다가 일어나 정신을 차리면 오후입니다. 이런 까닭에 박 과장은 언제나 주일 저녁미사에 참여합니다. 김 씨 부부는 낚시에 취미를 붙이면서 밤낚시를 다니게 되었는데 토요일 특전미사에 참여하고 낚시를 떠나면 다음 날 주일 오후까지 느긋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어 요즘 특전미사에만 나옵니다. 이 씨 아저씨는 아침 7시 미사에만 옵니다. 아침 첫 미사에는 신자들이 적고 성가대가 따로 없어서 미사가 보통 사십 분이면 끝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도 위와 비슷한 이유로 미사를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당 공동체란 한 가족이기에 주일에 신자 모두가 함께 같은 미사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신자 수, 성당 좌석 수, 신자들의 서로 다른 직업과 생활양식을 고려하여 여러 대의 주일미사가 있습니다. 토요 특전미사 역시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을 지내기 어려운 신자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많은 신자들이 편리에 따라 미사시간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오그라든 손을 펴 주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주일을 지내며 우리의 상처받은 영혼과 육신을 치유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 미사로 의무를 다했다고 여긴다면, 안식일에 보여 주신 예수님의 치유 행위 조차 율법 위반이라며 예수님을 해칠 모의를 시작한 바리사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신비
한상갑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볼 요량으로 밀려듭니다. 치유의 기적은 예나 지금이나 매력이 있고 상품가치가 큽니다. 사도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치유기적에 매혹되어 신자가 된 마술사 시몬은 성령을 받게 하는 권능을 돈으로 사자고 덤빕니다.(사도 8장)
아흔네 살이신 제 어머니, 지금은 ‘철모르는 딸’이십니다. 언제나 자리에 누워 계시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잠에 빠지십니다. 그러다 보니 밥 먹자고 말씀드리면 늘 아침이냐고 물으십니다. 이처럼 때를 모르시니 ‘철’ 모르는 딸이 되신 겁니다.
주방이나 화장실 출입도 자유롭지 못하십니다. 하루에 한 번쯤은 침실에서 식사하십니다. 머리맡에 좌변기가 놓여 있지만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 보니 곧잘 넘어지십니다. 그래서 옆구리 통증으로 고생하십니다. 빨리 가고 싶다 하십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다섯 살배기 증손녀한테는 일 분에도 서너 차례씩 몇 살이냐고 물으시다가 핀잔을 듣기도 하십니다. 그러다가도 제가 외출한다고 인사드리면 땅이 고르지 못할 테니 단장(短杖, 지팡이)을 짚고 나가라고 이르십니다. 이런 걸 지켜보는 일이 제게는 속이 상하고 힘이 듭니다.
철을 가늠하지 못하시는 제 어머님은 다행스럽게도(?) 투덜거리고 짜증내는 저의 불효를 금방 잊으시고는 제 걱정을 하십니다. 그래서 힘들기는 하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지냅니다. 이게 바로 고통의 신비인가요?
지치지 않고 일을 하는 법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연말연시, 저희 형제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피정을 합니다.
한 해를 같이 돌아보고, 한 해를 같이 시작하는 것인데 이때 매년 말씀 사탕 뽑기를 합니다.
새 해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어떤 말씀을 내리시는지 보는 겁니다.
저는 여기에 같이 할 수 없기에 저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제 어머니께서 대신 뽑으시는데 올해는 이런 말씀이 제게 내렸습니다.
“그분께서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어 지칠 줄 모른다.”(이사 40,29)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에겐 새 힘이 솟습니다. 날개 치솟아 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습니다.”(이사 40,31)
세 번 뽑기 중 두 번이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었을 때 저는 움찔했습니다.
작년 저는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고 너무 힘들고 지쳐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지칩니까?
너무 많은 힘을 쏟았을 때이고 새로운 힘은 얻지 못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힘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 힘을 전혀 소모하지 않을 수 있다면 모르지만 무엇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곧 지치게 될 겁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지만 건강한 사람이라면 힘을 얻는 법을 알고 그리고 열심히 무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힘을 얻는 몇 가지 법이 있습니다.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억지로 하지 않고 즐겁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시키는 건 하지 않고 늘 자기 하고픈 건만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미숙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은 시킨 걸 자기가 다시 선택합니다.
적어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자세로 무얼 합니다.
다음으로는 보람되게 일을 하는 겁니다.
죽도록 일을 했는데 아무 보람이 없으면 힘이 쑥 빠지죠.
이에 비해 보람감은 우리 안에서 힘을 재생산합니다.
그러니 보람되게 일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늘 일의 보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고 실패로 끝날 수 있고, 칭찬이 아닌 비판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가 두려워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비판이 염려되는 것은 피하고 최소한의 것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건 미숙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 보람의 구조를 가집니다.
일을 하게 된 그 좋은 의도로 이미 만족하고 결과는 집착치 않으며 누구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이미 충만한 사랑으로 하는 겁니다.
이렇게 결과와 평가에 가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이고, 그것도 샘이 마르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물줄기를 마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의 샘에 대는 사람은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몰려와도, 그래서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지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하기에 다 보람됩니다.
이것이 자기 보람의 구조입니다.
사랑의 거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는 흔히 사랑하면 가까워지고 사랑이 식으면 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더 사랑하는 것일까요? 오늘 예수님은 사랑의 거리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려의 칠현(七賢)으로 손꼽히는 이인로의 ‘파한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주락적에 군수로 와 있던 사나이가 임기가 끝나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기생과 이별하게 됩니다. 그 기생이 군수를 너무 사랑했던 터라 오로지 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군수에게 촛불을 주며 자신의 온 몸에 화상을 입히도록 합니다. 또 그 군수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누구도 그녀를 유혹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립니다.
미국에서 한 때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제목의 책이 40주간 이상 베스트셀러로 올라있었습니다.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너무 사랑 (too much loving) 증후군’을 다루었던 책입니다. ‘너무 사랑 증후군’이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너무 불안해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대상을 잡아두기를 원하는 증세입니다.
알코올 중독증이나 마약 중독증 환자 수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웬만한 도시에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임’이 없는 도시가 없을 정도라 합니다.
저도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손과 발을 잘라 못 움직이게 하고 집에 가두어놓는 끔찍한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이런 사랑 병은 결손가정과 혹은 부모가 있더라도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주정이 심하고 노름으로 지새우는 등의 불목한 가정에서 가족애 없이 자란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그 사랑이 모자랐던 사람은 커서 만끽하는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따라서 사랑하면서도 지독한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집착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사랑과 집착은 거리에서 차이가 납니다. 집착은 두 사람이 꼭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것이고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권위 있는 말씀도 선포하심으로써 사람들이 그 분의 주위로 모여듭니다. 또 옷에 손만 대면 모든 병이 고쳐지는 것을 알고 누구나 예수님을 건들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그들이 당신께 덮쳐들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예수님도 당신의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그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랑을 하지만 사람들 속에 섞이기를 원치 않으시고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시는 것이 위에서 말한 사랑 병, 혹은 집착과의 차이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마치 부활한 후 마리아 막달레나가 당신을 만지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사람들이 당신에게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삼위일체는 있어도 이위일체는 없습니다. 즉,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둘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를 연결해 주시는 성령님이 존재하는 이유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영원히 메워지지 못할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거리를 성령님께서 다리로 연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군중 사이에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떠나가지 않게 잡아놓고 둘을 하나로 엮어줍니다.
저는 사랑을 생각할 때 항상 기찻길을 생각합니다. 기찻길은 서로 같은 목적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 만나지는 않습니다. 서로 조금씩 좁아지거나 벌어진다면 그 길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 기찻길 위에 서서 목적지를 바라보면 사실 둘은 만나지 않지만 멀리 볼수록 둘은 하나가 됩니다.
어떠한 관계든 같은 하느님을 지향하고 또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가 되려하지 않고 단 둘만이 서로 하나가 되려한다면 그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병이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거든 둘만 서로 바라보지 말고 눈을 돌려 함께 가야할 목적지를 바라봅시다. 약간의 거리를 두어서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자리를 만들어드립시다. 둘은 하느님을 통해서만이 삼위로 한 몸을 이루고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의 거리는 손을 댈 수는 없지만 상대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떴다 신부님
양승국스테파노 신부님
신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절정인 연세 지긋하신 신부님 몇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신부님들이 "떴다" 하면 일대 소동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신부님들이 미사 집전이나 서품식, 서원식 같은 때 등장하면 그분들을 아는 신자들의 표정에는 즉시 설레임과 행복함이 묻어납니다. 예식이 끝나기가 바쁘게 신부님들은 인파에 둘러싸입니다. 인사를 드리기 위해, 안부를 여쭙기 위해, 얼굴 한번 뵙기 위해, 손 한번 잡아보기 위해, 안수 한번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파묻힙니다.
그런 신부님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저희 같은 신참들, 찬밥들, 개털(너무 심한 표현인가요?)들은 "도대체 비결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비결이 있었습니다.
1. 신부님들에게서는 온화한 성품, 따뜻한 마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품에 안는 부드러운 가슴, 기도와 수행, 연륜과 세월이 선물로 준 삶의 향기, 고향과도 같은 넉넉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 신부님들은 언제나 먼전 다가서셨습니다. 기다리지 않고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이름을 부르고, 먼저 안부를 묻는 예수님의 겸손함이 몸에 배어있었습니다.
3. 신부님들의 사랑은 저희와는 달리 사심 없는 사랑, 공평한 사랑, 부담 없는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폭넓은 사랑,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점점 세상에 알려지면서(특히 치유와 구마와 기적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명성) 예수님은 일약 당대의 유명인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너무도 많은 인파가 순식간에 몰려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파로 인한 대형사고의 위험을 감지하십니다. 그래서 일단 피하시기 위해 나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실 정도였습니다.
공생활 이후 예수님의 삶은 하루하루가 무척 팍팍했던 삶으로 추정됩니다. 매일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 끊임없는 만남과 활동, 제자 교육,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피곤한 하루하루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과 사람들과의 만남은 분위기 좋은데서 향기 좋은 커피한잔 시켜놓고 만나는 기분 좋은 만남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뭔가 한가지씩 골치 아픈 "민원"을 손에 들고 해결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다가오는 영업상의 만남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해결사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며 사람들은 몰려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들을 내치지 않으십니다.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아픈 사연들을 귀여겨들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가슴아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가 귀족이든 천민이든 상관없습니다. 후원금을 많이 낼 수 있는 부자인가 아닌가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내 고향 사람인가 이방인인가도 묻지 않습니다. 오직 한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연민의 마음,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만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은 스타 중에 스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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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전철을 타고 어디를 가고 있는데 제 바로 앞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앳된 모습을 띄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하면서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들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마디에 끊임없이 욕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 말들이 마치 평상시의 말인 것처럼 그들은 주변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많은 욕을 섞어 말을 했습니다.
이 학생들이 쓰는 욕은 겉으로 보이는 앳된 모습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앳된 모습에서는 깨끗한 말, 사랑 가득한 말이 나와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 저의 예상과는 달리 입에 담기에 더러운 말, 싸움을 지금 당장 해야만 할 것 같은 말이 나와서 정말 보기가 싫더군요.
하긴 저 역시 욕을 입에 달고 살았던 학창 시절이 잠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는 왠지 욕을 해야지만 멋있어 보이고, 친구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지요. 그렇게 말을 하면 할수록 내 자신이 추해 지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추한 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던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존재인 우리 인간들의 입에서 추한 말만 계속 나온다면 그때에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 즉 아름답고 깨끗하고 사랑 가득한 말을 해야 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 앞에 패배를 인정하는 소리이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비밀을 폭로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틀린 말일까요? 아닙니다. 확실한 예수님의 신원이었고 우리 모두도 해야 할 고백입니다. 문제는 하느님 백성인 우리 인간들이 말하고 있지 않고, 더러운 영을 가진 이들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들을 고쳐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은 바로 우리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더러운 영을 통해서 나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가진 이들의 말을 막아버리고 대신 우리 인간들의 올바른 고백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주님을 찬미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 하나 되어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남을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아리스토텔레스)
웃으며 출근하세요(‘좋은생각’ 중에서)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한 아침 출근길의 파리 지하철, 어두운 터널을 달리던 지하철이 갑자기 멈췄다. 당황한 시민들 머리 위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까뜨린느의 날이에요. 프랑스에서는 오늘 전통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다 아시죠? 스물다섯 살 이상의 미혼 여성은 얼른 손을 드세요. 창피해하지 마시고요. 자, 이제 멋진 미혼 남성분들은 손을 들고 계신 여자 분 옆으로 가서 연락처를 물어본 뒤 약속을 받아내세요. 모두 하셨습니까? 그럼 이제 사랑의 열차는 다시 출발합니다.”
갑작스런 정차로 짜증나고 답답했던 지하철 안이 예상치 못한 안내 방송에 웃음바다가 됐다. 매일 아침, 무료한 지하철 안을 즐거운 안내 방송으로 유쾌하게 만드는 주인공은 바로 파리 지하철 기관사 방센. 21년째 기관사로 일하는 그가 아침마다 마이크를 잡게 된 것은 지하철을 탈 때마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듯 답답해하는 아내 때문이었다.
그는 날마다 그날그날의 기념일을 확인한다. 기념일에 맞추어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그의 재치 있는 입담은 곧 파리 시민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이미 프랑스에서 유명 인사가 된 그는 동료 기관사들과 ‘지하철 2호선의 웃음’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난치병 어린이를 돕기도 한다.
그는 오늘도 활기차게 말한다. “성 니꼴라의 날이 밝았군요. 제 이름은 방센이지만 오늘 하루는 니꼴라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리실 때 저한테 오시면 사탕을 나눠 드립니다. 받으러 오실 거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신명나는 교회공동체 건설을 위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큰 행사를 치룰 때의 일이었습니다. 3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와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대성당 제대 위에 서서 성당 안을 내려다보니 대단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안내하고, 행사를 치루면서 다들 얼마나 정신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대단한 인파에 주최측 입장에서 얼마나 흐뭇했던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보니,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상상이 갔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 뒤를 따라 ‘큰 무리’가 따라다녔다고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무리’는 어느 정도의 군중이었을까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이 일어났을 때, 장정만도 오천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때로 만 명, 때로 2만 명 이상의 군중들이 따라다녔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분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한번 잡아보기 위해 몰려드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때로 너무나 많은 군중들, 집요하게 달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나는 것을 아닐까’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군중들을 바라보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피곤에 지치고, 때로 잠시라도 쉬고 싶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말 신명이 났을 것입니다.
엄청나게 몰려드는 수많은 ‘고객’들로 인해 하루 온종일 격무에 시달리는 예수님과 제자단의 모습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열정을 지니고, 얼마나 간절한 마음과 함께 우리 교회로 달려오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너무나 ‘썰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와 있는 사람들마저도 그저 의무감에, 마지못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얼마나 그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얼마나 큰 호감을 주고 있습니까? 상처 입은 사람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와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 교회가 너무 좋아, 우리 교회 사목자들과 봉사자들의 모습에 크게 매료되어 자발적으로, 기쁘게 우리 교회를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우리와 한번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오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마음 한 몸이 되어 행복한 표정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사목적 서비스를 제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월요일에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오전 10시쯤에 신자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출발하려고 했는데, 제가 가는 본당의 총무님께서 ‘바다가 얼어서 배가 안 뜬다... 1시나 되야 배가 뜰지 안 뜰지 알 수 있다..’ 는 말을 하셨습니다.
‘바다가 언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바다가 어는 일은 외국에나 있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사이동 하는 곳의 바다는 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 지역이 강이랑 만나는 지점이라 염분이 낮아서 어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도 잘 얼지 않는데 요번 한파 때문에 몇 십 년 만에 바다가 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꽁꽁 언 건 아니구요. 배가 다니기 어렵게 얼음이 둥둥 떠다닙니다.
그래서 1시정도까지 성당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인사 이동하는 본당의 총무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착장에서 5분 전에 갑자기 방송을 하고 배를 한 번 운행했답니다. 배를 운행하고 하지 않은 건 선장 마음인가 봅니다. 그러고는 운행을 마감해서, 배를 못 타고 본당에 하루 더 있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새로 부임해 온 신부님과 몇몇 청년들과 잘 놀았지만, 짐을 실어주고 날라줄 신자 분들에게는 조금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는데, 그날도 배가 뜰지 안 뜰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쪽 신자 분들의 말에 의하면 오후가 되 봐야 운행을 할지 안 할지 알 수 있는데, 적어도 한 번은 배를 운행할 거라고 해서 일단 선착장에 가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도착해서 보니 상황은 어제보다 더 나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 3~4시간 정도 대기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2시쯤 배를 운행한다는 방송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전 본당 신자 분들과 인사를 하고 제가 갈 섬 본당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 본당이 바로 영종도 옆에 있는 신도 본당입니다. 섬이긴 하지만, 도시와도 가깝고 배도 많이 다니는 육지 같은 곳입니다. 이틀 동안 지내면서 ‘정말 조용하다. 공기 좋다. 전망 좋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요. 조금 걱정되는 것도 있습니다. 아예 나갈 생각을 안 하면 괜찮겠지만 치과 치료나 피정이나 다른 모임 때문에 나가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가려면 배 시간이나 기상 상태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저녁 6시가 넘거나 안개가 끼거나 얼음이 얼면 육지가 코앞인데도 나가지 못합니다. 섬에 사는 이상 배에 의존하고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겠죠.
우리 사람이 사는 조건도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제한과 제약, 그리고 한계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부족함이나 공허함, 그리고 외로움을 느끼게 될 텐데요. 그러면 자연히 나의 부족함이나 공허함, 그리고 필요를 채워 줄 무언가를 찾게 됩니다. 그 무언가가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이고 하느님 나라겠죠.
그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고 통하고 연결되기 위한 ‘배’ 가 되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 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섬에서 사는 사람들이 ‘배’에 의존하여 도시와 연결된 생활을 할 수 있듯이, 우리도 하느님 나라와 연결된 삶을 살고 언제가 그 나라로 이동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 부족하다. 용서가 필요하다. 부족함이 없는 평안함을 원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고 싶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 의지하고 예수님을 통해 건너갈 수 있어야겠죠.
오늘 하루, 예수님을 통해서 기도하고 예수님께 의지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레지오 회합 후에 신자분들과 커피를 마시는데, 작년에 세례를 받으시고 어부이신 할아버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
“예수님은 어부인 베드로에게 이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일러주셨잖아요. 그래서 베드로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예수님처럼 제가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도록 많은 지시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마음에 눌어붙은 이기심
황세현
오늘 복음에 치유를 바라며 밀려드는 사람들과 이를 피하시려고 거룻배를 마련하시는 예수님이 대조를 이룹니다. 지난해 어느 성지에 갔을 때 신부님께서 참기도를 하지 않고 구복신앙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며 하신 강론이 떠오릅니다. 좋은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수험생 부모님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성당 안을 꽉 메워 밖에서까지 미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 치유를 바라는 사람들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정은 저에게도 다를 바 없습니다. 치유를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처럼 저의 이익을 위해서만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살고 있는 저와 그로 인해 제 마음에 이기심이 철석 눌어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종종 사회봉사를 한다고는 하지만 남의 이목을 생각하고 할 때도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득 송유미 님의 시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가 생각납니다. ‘물만 마시고도 컵은 씻어두는데 내 마음은 씻지도 않고 사용해 온 탓에 더럽혀지고 때 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 없다. 그릇은 한 번만 써도 뼛 속까지 씻으려 들면서 마음은 비우지 못하고 닦아내지 못하고 있다.’ 는 취지의 글귀가 귓전에 맴돕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양적으로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지만, 내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우리 모두와 교회는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예수님 정신에 따른 참된 길을 가야겠습니다.
비럭질하시는 우리의 대사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저는 히브리서에서 얘기하는 대사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감동을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의 사제직 수행에 대해서는 부끄럼을 느낍니다.
특히 오늘의 히브리서가 저에게 감동을 주는데 구원자이자 중재자이신 대사제를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자이신 분이 중재자 되심에 대해 우리는 자주 아무 감동 없이 지나칠 수 있는데 잘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감동적인 낮춤이요 사랑입니까?
이는 프란치스코가 그토록 감동했던 그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신 것, 인간을 만드신 분이 인간의 젖꼭지에 매달린 것의 그 감동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를 풀어서 얘기하면 우리의 대사제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완전한 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당신을 통하여”가 맞지만 개신교 성서는 “당신을 통하여” 대신에 “당신을 힘입어”로 번역합니다.
이는 우리의 대사제께서는 구원하실 수 있는 엄청난 힘의 소유자이고, 그러기에 그 힘센 손가락을 까닥만 하셔도 우릴 구원하실 수 있으시고 우릴 구하시기 위해 수고스럽게 이 땅에까지 내려오실 필요조차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사제는 끌어올릴 힘이 없으셔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모셔가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고마우십니까?
끌려가도 그만인 비천한 우리를 귀인처럼 모셔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셔가기 위해 우리의 대사제는 내려오시고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시고 구원자이신 분이 중재자가 되시며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이 되십니다.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
잘못을 빌고
살려 달라고 빌고
도와 달라고 빕니다.
우리는 욕처럼 “빌어먹을 놈!”이라고 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빌어먹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사제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럭질하는 존재가 되신 것이고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하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대사제께 “우릴 위해 비천해지소서!”하고 기도하는 셈입니다.
"샘솟는 기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중심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중심이신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중심이신 하느님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삶입니다. 중심이신 하느님 안에 자리 잡은 정주의 삶일 때 샘솟는 기쁨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극명히 드러내는 표지가 바로 지금 거룩한 이 성전에서 거행되고 있는 미사입니다. 사제의 존재이유는 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미사 은총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퍼뜩 떠오른 주제가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중심이신 주님을 찾는 복음의 장면입니다. 예나 이제나 하느님을 찾는 인간입니다. 바로 이게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느님 찾는 기쁨을, 행복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세상 그 어디도 없습니다. 이 복음의 장면에서 예수님이 빠져버린다면 온통 혼돈과 허무의 어둠일 것입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잊고 우상과 환상에 빠져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모두 인양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새삼 주님은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중심이신 주님을 찾아 만날 때 죽음은 생명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바뀝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바로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으며, 늘 살아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히브리서가 묘사하다시피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우셨습니다. 하여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 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십니다. 바로 이 성전미사를 통해 그대로 깨닫는 진리입니다. 바로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보이는 사제를 통해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시는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지요. 바로 중심에서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을 만날 때 치유와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그대로 미사 장면을 압축한 듯합니다. 주님을 만나 치유 받은 병자들이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 중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을 만나 영육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빛이신 주님 앞에 숨어있을 수 없자 뛰쳐나와 엎드려 주님을 고백하는 더러운 영들입니다. 새삼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치유할 분은 주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떠나 방황할 때 파생되는 온갖 질병들이요, 더러운 영들에 포로 된 삶입니다. 오늘도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은 당신의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치유, 구원하시어 건강한 영육으로 살게 하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제들을 위한 옛 기도문 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강론을 마칩니다. 사제는 물론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문으로 삼아도 은혜롭습니다.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 주의 성심 속에 (사제)우리들의 안식처를 마련하시어 아무도 감히 (그들)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하소서, 날마다 주의 성체를 (만지는 사제들)모시는 우리들의 손을 깨끗하게 보존하시며, 주의 성혈을 마시는 (그들)우리의 입술을 항상 거룩하게 지켜주소서. 주의 영광스러운 (사제직의 표를 받은 그들의)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들의 마음을 언제나 순결하고 결백하게 보존 하소서.”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을 닮아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 겸손해 질 때 충만한 주님의 현존에 샘솟는 기쁨입니다.
아멘.
예수님의 마음으로 환자를 돌본다면
이창걸
나는 암을 치료하는 의사인데 명성이 높아서 많은 환자가 몰려오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암환자를 치료할 때 암 자체만 바라본다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환자들은 암을 진단받는 순간부터 충격의 연속이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불안·우울·두려움 때로는 분노에 아파한다.
이런 환자들과 관계를 잘 맺으려면 환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환자가 어디에 사는지(치료를 매일 한 달 넘게 다녀야 하므로 가까운지 확인), 자녀는 몇인지, 누구와 살고 있는지, 그리고 직업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술이나 담배를 많이 했는지, 살면서 스트레스는 많지 않았는지, 그리고 종교는 무엇인지 물어본다. 이 정도면 환자의 주변 환경에 대해 대략 알 수 있다.
이 사적인 정보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필수적이어서 어떻게 접근할지 또 치료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집이 멀거나 지방이면 병원에서 입원하거나 가까운 협력병원에 입원하도록 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경우라면 가능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사회사업실을 연결하기도 한다.
암으로 인한 불안이나 우울증이 있으면 정신과 도움을 받도록 하고, 영적으로 지쳐 있다면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성직자와 연결하거나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래서 초진 환자는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방사선 치료만 하면 되지 무슨 호구조사를 꼼꼼히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다음부터는 환자와 아주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물론 방사선 치료에 대한 설명과 검사한 사진을 일일이 보여주며 설명하다 보니 환자들의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느덧 초진 환자 뒤에 기다리는 환자들이 힘들어지기 시작하고 진료실 밖 복도에 환자들이 밀려 장사진을 이룬다. 그러나 생각보다 큰 소리도 없고 환자들은 진료 후 나갈 때는 행복해한다. 많이 기다렸지만 자신도 충분히 설명을 듣고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진료는 9시 이전에 시작해 오후 1시가 넘어 끝났다. 많은 환자를 본 것 같지만 실은 25명 정도밖에 보지 못했다. 2008년 1월 한 신문사에서 전국의 암환자 동호회 회원을 대상으로 친절한 암전문의를 선정한 바 있는데 전국 방사선 종양학과에서 내가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했다. 무슨 상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환자들이 나를 평가했다는 데서 무엇보다 큰 상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유명세
김연희 수녀님
제가 담당하고 있는 ‘우리성서모임’의 연간 계획에 외부강사의 특강을 넣습니다. 3년의 교육기간 동안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공부하면서 정해진 말씀봉사자의 강의에서 벗어나 좀 더 폭넓게 성경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또한 수강생들뿐만이 아니라 교구 신자들에게도 문을 열어놓고 특강의 기회를 공유하게 합니다. 강사가 국내에서 잘 알려진 이라면 각 본당의 여러 행사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참석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게 바로 유명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리가 꽉 찹니다. 인터넷이나 광고가 없던 그 시대에, 입과 입으로 전해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파다했습니다. 그 유명세로 큰 무리가 사방에서 그분께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이 점점 늘어나서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치유를 체험하면서도 예수님에 관한 참된 이해에 이르지 못한 군중을 봅니다.
오직 더러운 영들만이 두려움에서 터져나오는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에게 침묵을 명하시는 예수님의 엄하신 명령을 귀담아들으면서 주님께서 가시는 십자가 길과 벗을 위한 죽음에 동참하지 않으면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거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고려의 칠현(七賢)으로 손꼽히는 이인로의 ‘파한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주락적에 군수로 와 있던 사나이가 임기가 끝나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기생과 이별하게 됩니다. 그 기생이 군수를 너무 사랑했던 터라 오로지 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군수에게 촛불을 주며 자신의 온 몸에 화상을 입히도록 합니다. 또 그 군수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누구도 그녀를 유혹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립니다.
미국에서 한 때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제목의 책이 40주간 이상 베스트셀러로 올라있었습니다.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너무 사랑 (too much loving) 증후군’을 다루었던 책입니다. ‘너무 사랑 증후군’이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너무 불안해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대상을 잡아두기를 원하는 증세입니다.
알코올 중독증이나 마약 중독증 환자 수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웬만한 도시에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임’이 없는 도시가 없을 정도라 합니다.
저도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손과 발을 잘라 못 움직이게 하고 집에 가두어놓는 끔찍한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이런 사랑병은 결손가정과 혹은 부모가 있더라도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주정이 심하고 노름으로 지새우는 등의 불목한 가정에서 가족애 없이 자란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그 사랑이 모자랐던 사람은 커서 만끽하는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따라서 사랑하면서도 지독한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집착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사랑과 집착은 거리에서 차이가 납니다. 집착은 두 사람이 꼭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것이고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권위 있는 말씀도 선포하심으로써 사람들이 그 분의 주위로 모여듭니다. 또 옷에 손만 대면 모든 병이 고쳐지는 것을 알고 누구나 예수님을 건들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그들이 당신께 덮쳐들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예수님도 당신의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그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랑을 하지만 사람들 속에 섞이기를 원치 않으시고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시는 것이 위에서 말한 사랑병, 혹은 집착과의 차이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있어도 이위일체는 없습니다. 즉,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둘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남녀 두 사람이 춤을 춘다고 합시다. 그들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춤을 출 수 있을 때는 음악이 있을 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둘은 각자의 춤을 추다가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그러다가 서로 떨어져나가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군중 사이에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떠나가지 않게 잡아놓고 둘을 하나로 엮어줍니다.
저는 사랑을 생각할 때 항상 기찻길을 생각합니다. 기찻길은 서로 같은 목적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 만나지 않고 평행을 이룹니다. 서로 조금씩 좁아지거나 벌어진다면 그 길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 기찻길 위에 서서 목적지를 바라보면 사실 둘은 만나지 않지만 멀리 볼수록 둘은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기차가 그 위로 지나가면서 기차를 통하여 둘은 정말 한 몸이 됩니다.
어떠한 관계든 같은 하느님을 지향하고 또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가 되려하지 않고 단 둘만이 서로 하나가 되려한다면 그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병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거든 둘만 서로 바라보지 말고 눈을 돌려 함께 가야할 목적지를 바라봅시다. 약간의 거리를 두어서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자리를 만들어드립시다. 둘은 하느님을 통해서만이 삼위로 한 몸을 이루고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직장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혼자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커다란 호숫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드문드문 자리 잡고 앉아있던 ‘꾼’들이 그날따라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 서둘러 낚싯대를 두 대 드리웠습니다. 수시로 떡밥을 갈아주며 ‘대어’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때마침 호수 건너편으로 붉은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로 새떼들이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훈훈한 봄바람에는 그윽한 야생화 향기가 묻어있었습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홀로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그림 같은’ 오후였습니다.
호수, 생각만 해도 마음이 잔잔해집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강이나 바다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호수 특유의 맛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갈릴래아 호수 역시 그랬습니다. 언젠가 직접 제 눈으로 확인했던 갈릴래아 호수,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랜 여독이 눈 녹듯이 풀릴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시나 광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푸른 초원이며,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 같은 호수며, 여러 종류의 야생화며, 대추야자 나무...마음속이 다 환해졌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태와도 같은 장소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첫 제자단을 부르신 장소도 갈릴래아 호숫가였습니다. 십자가 죽음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재회했던 만남의 장소도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래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의 주요 교통수단은 당연히 거룻배였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갈릴래아 이 지방 저 지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호숫가에 묶여있던 배에 올라 밀물처럼 밀려드는 군중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때로 너무나 많은 인파에 피곤해지셨던 예수님은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피해가셨습니다.
언젠가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 위를 걷는 시범도 보여주셨습니다.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골란 고원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과 헤르몬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찬 바람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만나면 심한 기류의 이동으로 금방이라도 잡아 삼킬 듯한 큰 파도가 생성되기도 하는데, 그로 인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큰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을 위해 풍랑을 잠재우는 기적을 행하셨지요.
오늘 마음으로나마 예수님과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로 여행을 떠나보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지금 갈릴래아 호숫가, 푸른 풀밭 위에 앉아있습니다. 화창한 봄날 오전입니다. 내 주변에는 키 작은 꽃들이 지천입니다. 때마침 호수로부터 미풍이 불어옵니다. 멀리 배 위에는 예수님께서 서계십니다. 산들 바람을 따라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사랑한다. 내 아들아. 사랑한다. 내 딸들아.”
“너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사랑, 내 귀염둥이들이란다.”
“안심하거라. 평안하거라. 너희는 구원 받았단다”
“이제 그만 내려놓거라. 이제 그만 떠나보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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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판결을 내리려고 최선을 다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란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왕은 못된 불한당을 석방해버리면 어쩌나, 무고한 사람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면 또 어쩌나 싶어 밤낮으로 걱정했습니다.
어느 날 왕이 집무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와 한탄했지요.
“아,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바로 그 순간 악마가 나타나서 이러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나로 말씀드리자면 당신한테 그런 특권을 주기는 식은 죽 먹기지.”
“딴 데 가서 알아보시구려. 악마의 속셈이라면 나도 잘 알아요. 악마는 교환 조건 없이는 아무것도 거저 내주지 않는 법이죠.”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댁한테는 정말로 특별히 예외로 해줄게.”
“왜 나한테 그런 선심을 쓴단 말이오?”
“그냥 재미삼아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난 어디까지나 악마인 만큼 순전히 심술이라고나 할 까? 그렇지만 안심하라고. 교환 조건으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테니. 원한다면 서약서를 써줄 수도 있어.”
왕은 이튿날 나랏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신하의 재판을 앞두고 있었지요. 유죄인지 무죄인지, 그 신하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마에게 서약서를 받고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알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의 그 신하가 유죄인 것은 물론이고 들키지는 않았다뿐이지 죄 지은 신하들이 수두룩했으며, 자기가 아끼고 믿었던 측근들조차 질투와 증오와 원한이 가득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면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왕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능력이 과연 왕을 행복하게 해주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 지릅니다. 이 말이 틀린 말일까요?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내가 누구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누구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베드로에게는 칭찬의 말을 하실까요?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아직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는 놀라운 능력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말들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가 행복의 길로 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숨기기도 하시고, 우리가 원하는 능력을 주시지 않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몫은 주님께서 행하시는 방법이 최선이며 바로 나를 위한 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 뒤에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진정한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남의 능력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내 능력만으로도 행복하기에 충분합니다.
아내가 집을 비운 5일(임소천, ‘좋은생각’ 중에서)
지난 7월에 자식들이 회갑 기념으로 제주도에 다녀오라며 여행비를 봉투에 넣어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딸이 시집가고 나면 모녀가 오붓하게 여행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아내와 딸을 여행 보내기로 했다. 나는 5일 동안 아내의 잔소리로부터 해방된다며 “자유다!”하고 외쳤다.
그런데 아내가 떠난 날 밤, 골목에 들어서 우리 집을 보니 주변이 깜깜했다. 평상시 같으면 아내가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며 마당에 불을 밝혀 놨을 텐데……. 부엌에 들어가 아내가 만들어 놓고 간 삼계탕을 먹으려니 제 맛이 안 났다. 아마도 이것 먹어라, 저것 먹어라 하는 아내의 잔소리가 빠져서 그런 듯했다. 잠자리에 들려고 안방에 들어서니 방이 텅 빈 듯 했다. 아내가 집에 있다면 잠자리를 보아 놓고 자리끼까지 떠다 놓았을 텐데…….
4일 뒤 날마다 벗어 놓은 옷들이 방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어 그 많은 빨래를 다 하고 나니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었다. 그날 잠자리에 누워 깨달았다. 그간 내가 집에서 해 온 일라고는 먹고 자는 일밖에 없었다. 내가 편하게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내의 손길이 집안 구석구석은 물론 내 온몸을 다독거렸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밖에 나가 돈 벌어 온다고 목에 힘주고 큰소리만 쳤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내를 안 본 지 며칠 안 됐는데, 긴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아내가 돌아오는 날 저녁, 전철에서 내려 집을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참으로 아내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거듭 드는 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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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성지에서 지금 있는 간석4동 성당으로 옮긴 지 벌써 한 달이 훨씬 넘었습니다. 한 달 넘는 시간, 본당에 적응하느라 정말로 정신없이 보낸 것 같습니다. 그 좋아하는 자전거도 동네에서만 잠깐 탈 뿐, 먼 거리를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어제 오후에는 여유가 좀 생기더군요. 그래서 우리 성당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습니다. 소강당, 교리실, 주방, 그리고 화장실…….
화장실을 보는 순간, 너무나 조그맣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 화장실은 소변기 두 개와 대변기 하나, 여자 화장실은 대변기 두 개. 신자 수 오천 명이 넘는 곳의 화장실이 이렇게 작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누구도 화장실이 적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제가 전에 있었던 갑곶성지의 남자 화장실은 소변기 한 개와 대변기 하나, 여자 화장실은 대변기 세 개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갑곶성지에는 소속되어 있는 신자도 없습니다. 단지 성지순례 오는 순례객들뿐입니다. 그렇다고 많이 오지도 않습니다. 하루에 많이 와봐야 500명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제게 항상 건의합니다.
“화장실이 너무 적어요.”
그래서 나중에 여자 화장실 세 개와 남자 화장실 하나를 더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불만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더군요. 그때 제가 가졌던 생각은 화장실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봐야 이 불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욕구는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지금 제가 있는 성당은 화장실을 만들 공간 자체가 없습니다. 250평밖에 되지 않는 공간 중에서 어디에 화장실을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사실을 아시는 교우들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만족하면서 살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욕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적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항상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과 말씀으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많이 늘었지요. 이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까지 합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높은 명예와 온갖 재물을 준다고 하는데도 이를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거저 공짜로 준다는데 말이지요. 저 같으면 마지못한 척 하면서 받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오히려 피하십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자리 잡으면, 또 다른 욕심을 불러온다는 것을 잘 아셨고, 그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시지요.
욕심은 우리에게 완벽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이것만 채워지면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고 주님께서 매순간 주시는 행복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한 모습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주님을 본받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만큼은 돈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맙시다.
용서는 사랑의 완성입니다('좋은 글' 중에서)
용서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라 합니다.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큼
참 된 사랑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용서는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복은 보복을 낳는 법입니다.
확실히 상대방을 보복하는 방법은
그를 용서하는 겁니다.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처지가 되어 살아 보아야 하고
그 사람의 마음 속 아니 꿈속에까지
들어 가봐야 할겁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설령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상대방의 실수를 용서해주세요.
나도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요.
맛과 서비스
구경국 신부님
음식집이 늘어서 있는 곳에서 다른 집들은 파리를 날리는데 유독 어느 한 집만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입소문을 탄 덕분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입소문을 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의 교통이나 통신 상황을 감안한다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뵙기 위해 몰려듭니다.
하지만 아무리 입소문이 났다 해도 일시적인 문전성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것에 걸맞은 음식 맛과 서비스가 뒤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인기도 도무지 식을 줄을 모르니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하기야 가르침이라는 음식이 맛깔스럽고, 병자들까지 척척 고쳐주시는 서비스가 확실히 뒤따르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한때는 입소문을 타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모여드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이 줄어든 것을 보니 음식 맛과 서비스 중 하나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음식이 예수님의 시대와는 달리 요즈음의 세태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세워봅니다만 아무래도 서비스의 부족, 다시 말해서 교회의 모든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삶이 그다지 복음적이지 않다는 데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아서 스스로 부끄러워집니다.
악령에 대한 나의 생각
김현숙 수녀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악령이 소리 질렀다. 악령의 속셈은 무엇일까?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고 복종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병자를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은 당연하다고, 그분을 기능화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부모니까 당연히 자식을 사랑하고 희생해야 하고, 선생이니까 당연히 학생을 사랑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삶이 그렇게 당연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일까? 철든 사람이라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을 것이다.
때로는 미사를 소홀히 하거나 준비하지 못한 강론으로 신자들을 야단치려는 사제도 있고, 수업 준비는 제대로 하지 않고 학생들의 잘못만 들추며 적당히 수업 시간을 넘기려는 교사도 있다.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 자녀의 성질만 나쁘게 버려놓는 부모도 있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는 돈벌이 의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 역할을 순간순간 성실하게 잘해 내는 것만큼 큰 성인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아닐까!
철들면서 부모님이 힘겨운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주신 것이 감사하고, 나의 자매들이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서도 수도생활의 완덕을 지향하며 도반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고맙고, 새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 공간에서 매일매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동료 교사들이 고맙다. 다양한 문화 속에서 신앙의 절대적 가치와 권위를 지켜나가며 세속의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신영성의 도전 앞에서 서로 고뇌하면서 일치하려는 사제들이 있어 고맙고 감사하다. 그리고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하는 세상을 거슬러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상을 실천하는 신앙인들이 있어 감사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마다하지 않았듯이 수많은 악령의 잡다한 외침에 흔들림 없이 묵묵히 예수님만을 바라볼 줄 아는 하느님의 아들딸이 있음에 감사드린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돈보스코의 이상향, 프란치스코 드 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아가면서도 저희 수도회의 주보성인이신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일명: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던 제 자신을 깊이 반성하며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앙리 코위아니에 저, 안응렬 역, 돈보스코미디어, 2001)를 서고에서 꺼내들었습니다.
책을 펴드는 순간,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의 분량에 기가 많이 꺾였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돈보스코 성인께서 왜 그리도 이 성인을 존경했었고, 또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의 주보성인으로까지 모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을 읽던 저는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의 생애 각 단계마다 널려있었던 숱한 걸림돌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더 저를 놀라게 한 것은 그런 좌절과 낙담의 순간에도 꾸준히 희망했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그의 낙천성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낙천성은 돈보스코에 이르러 예방교육의 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의 온유와 겸손, 성공적인 사도직, 그 이면에는 무엇보다도 그의 낙천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비록 고통스럽고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하느님의 도움으로 잘 되어 나가리라고 믿는 그의 낙천성은 후에 돈보스코의 생애 안에 철저히 재현됩니다.
1593년, 26세 되던 해 프란치스코 드 살은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네시의 사제로 서품됩니다. 안네시의 수석사제로 열심히 활동하던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이 들어오는데, 샤블레 지방의 선교책임자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샤블레 지방은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칼빈 교도들의 땅이 된 곳이었습니다.
샤블레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드 살 앞에 펼쳐진 상황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오래 전 이 지역은 칼빈 교도들에 의해 접수되었고, 전체 인구 3만여 명 가운데 가톨릭 신자 수는 백 명도 채 못 되었습니다.
일부 개신교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 사이에 나타난 그를 우상숭배자나 거짓 예언자로 몰아세우곤 했습니다.
이 지역에서의 첫 번째 강론은 어느 예배당에서 개신교 목사가 일차로 설교를 마치고 나간 뒤에 시작되었는데, 잔뜩 겁을 집어먹어 힐끔 힐끔 뒤를 돌아보던 몇 명의 천주교 신자들뿐이었고, 그 뒤로 호기심에 찬 몇 명의 칼빈교도들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모두 합해서 10명도 채 못 되었습니다.
한겨울에도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선교를 위해 눈이 내린 시골길을 끝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동상에 걸린 그의 발은 자주 부어터지곤 했었는데, 그로 인한 통증이 너무 심해 어떤 날은 두 손과 무릎으로 기어서 귀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서 돈보스코 낙천주의의 뿌리를 읽습니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피로감과 사람들의 노골적인 냉대와 급진적인 개신교도들의 위협으로 가득 찬 그 험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그는 희망을 않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샤블레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불가능은 없다고 여기며, 언젠가 자신의 노력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알찬 결실을 맺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 있어 낙관주의는 곤란한 상황 앞에서 ‘더 이상 어쩔 수 없지’하고 포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윽고 8년 후에는 샤블레 지역 주민 거의 모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인간적인 노력을 다한 뒤, 그 이후의 일에 대해 하느님의 손길에 맡기는 것, 그것이 프란치스코 드 살의 낙관주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저하게도 낙천적인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막중한 삶의 십자가 앞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그 이면에 긷든 하느님의 손길을 읽고자 노력합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처럼.
인간이기에 매일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시련이나 좌절, 실패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고 꾸준히 나아갑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처럼.
이동진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이 몰려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는 등 당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중풍병자, 나병환자, 마귀 들린 자 등은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이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찾아다니고 또 고쳐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과 어울려 다니시고 먹고 마시는 등의 당시 사회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헐벗고 굶주린 자를 보살피시고, 아프고 고통 받는 이들을 치료해 주시고, 힘없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또 자주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갈 것을 약속하고 다짐하였습니다. 모두를 사랑으로 보살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이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만을 보살피고 살아갑니다. 또한 어디에서건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는 삶을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힘들 때 치유자이시며 위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의탁합시다.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예수께 믿음으로 의탁합시다. 주님은 언제나 지치고 쓰러진 우리를 위로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그분을 향해 눈을 돌려 바라봅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김상조 신부님
오늘복음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요르단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 왔다고 합니다. 요르단강 건너편 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을 넘어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나를 넘어 서야 하고, 내가 정해놓은 경계를 허물어야 하고 나의 원칙을 허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경계를 허물지 않고서는 경계선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요르단강 건너편 사람들까지도 예수님께 몰려드는 상황은 좋은 징조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불안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라도 한듯이 예수님은 그렇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셨다”그리고 악령들까지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은 모두 잘못된 혹은 왜곡된 추종의 모습들입니다. 병이 고쳐지지 않으면 언제라도 예수님을 욕하면서 떠날 사람들이고, 악령들도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해 줌으로써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런 높은 신분과 그에 걸맞는 능력을 이용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라는 유혹을 건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저런 사정 때문에 예수님은 군중들로부터 당신 자신을 보호하시고 일정한 거리를 두시면서, 악령들린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아주 엄중하게 타이르십니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몰려오는 군중들을 피하는 모습은 아주 이례적이고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고, 그래서 어떤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그분처럼 사는 것이 비록 힘들지라도 참된 가치가 있고 그것만이 바른 삶이라고 믿기 때문입니까?
그분처럼 산다는 것은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 처럼 대중적인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보다 가치있고 바른 삶을 사는 것일 것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병을 고치고 또 배고픔을 해결하고, 그래서 복음서 어딘가에서는 그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분명하게 거절하시고 고통받는 야훼의 종의 모습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울 때,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응답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하느님의 응답이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잘못된 혹은 지나친 과욕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까?
어떤 청이든지 하느님이 못들어 줄 청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비록 기도하고 청하는 나에게는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려면 덩달아서 변해야 할 다른 사람이나 상황이 하느님도 전혀 손쓸 여지가 없는 경우일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의 악령들처럼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실제 그 속마음은 그러니 당신의 그 능력을 가지고 나를 위해 봉사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잘못된 추종, 거짓된 진실, 그래서 수고의 삶을 거부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런 예수님의 반듯한 제자, 반듯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우리도 그분처럼 인간적인 인기나 인간적인 위로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예수님의 자상한 마음
이철구 신부님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으시고, 하시는 일마다 신비롭게 보였기 때문에 많은 군중은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고 그래서 예수님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몰려드는 군중을 일일이 다 만나주시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한마디 말씀이라도 전해주기 위해 제자들을 시켜 배 한 척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육지에서 조금 떨어져 찾아 온 군중을 만나시려는 예수님의 따스하고 자상한 마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나의 사목생활은 예수님처럼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찾아오는 신자들을 피하기도 했고, 교우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준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진정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자상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유 루시아 수녀님
예수님의 명성이 알려져서 군중이 많이 모여듭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기적의 사목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지려고, 또 그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옵니다. 명성이 절정에 달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계속 당신의 일을 하셨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보시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던 장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은총을 계속 받습니다.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나는 스무 살이 넘어 세례와 견진을 받았고 은총을 계속 받으며 늘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최의정 신부님
여러분도 ‘물부족국가’란 말을 들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국제연합 국제인구행동연구소(PAI)에서는, 전세계 국가를 조사해 물이 부족한 나라를 분류했습니다.
이 연구소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물부족 국가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 나라는 연간 강수량이 세계 평균 강수량보다 조금 많은 편이긴 하지만, 국토의 70%가 급경사로 된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게다가 강수량의 대부분이 여름철에 집중되어 있어서 한철에 집중적으로 내린 비가 그대로 바다로 흘러가는 한편, 높은 인구밀도로 인해 1인당 강수량은 세계 평균의 12%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물부족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덧 우리는 물이 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돈을 물쓰듯 쓴다’는 말도 이제는 옛날 말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돈을 주고 물을 사서 마신다는 말이 옛날에는 우스개 소리같았지만, 지금은 현실이 되었듯이, 돈을 주고 공기를 사서 마신다는 말도, 지금은 우스개 소리같겠지만, 현실이 될 날도 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사람은 물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 몸의 70%를 구성할 만큼, 물은 중요한 존재이고, 사람이 출생할 때에도, 어머니 태 속의 양수에 들어 있다가 출생합니다.
또한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를 살펴보면, 모두 물이 풍부한 강을 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물은 건강과 생명, 풍요로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말씀에도 물은 생명과 풍요로움의 표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에제키엘서 47장에는 성전에서 샘솟는 물이 강(江)이 되어 흘러내리면,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치고, 짠 사해(死海)의 물마저 단물이 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에제 47, 8-9)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서 그 장면을 상상해본다면, 예수님께로 몰려든 군중이 여러지방에서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를 기점으로 해서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는 남쪽 지방입니다.
요르단 강 건너편은 동쪽 지방입니다. 그리고 띠로와 시돈은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군중은 그야말로 사방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갈릴래아에서도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또한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死海)의 차이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살아있는 호수이고, 주변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반면, 사해(死海)는 문자 그대로 죽은 호수이고,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사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생명의 호수 갈릴래아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로 가시어 거룻배 한 척을 띄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병고에 시달리다 못해 사방에서 몰려와서, 생명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주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입니다.
생명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간절히 찾던 군중들처럼, 한때, 우리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세례성사로써 새 생명을 주셨고,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러한 생명을 나눠야겠습니다.
성전에서 샘솟는 물이 흘러 흘러 강을 이루고 사해의 물마저 단물로 바꾸듯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흘러들어가야 할 생명수가 되는 일. 바로 세례성사로서 새롭게 태어난 우리의 몫이요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는 교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꽤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바리사이들과의 쓸 데 없는 논쟁에 예수님께서는 신물이 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시를 떠나십니다. 회당을 떠나 한적한 갈릴래아 호숫가로 물러나십니다.
제자들 생각에 ‘이제 좀 쉴 수 가 있겠구나, 여유가 생기는 구나’ 했었는데, 웬걸, 도시에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호숫가로 밀려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호숫가 주변은 거의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유다 지방 사람들뿐만 아니라(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옛 유다왕국), 예루살렘 도시 사람들, 이두매아 사람들, 요르단 강 건너편 사람들, 북서쪽에 위치한 티로와 시돈 지방 사람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군중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습니다. 군중의 특징이 무질서하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차례가 올 것인데, 조금이라도 빨리 치유의 은혜를 입고자 새치기를 하고, 뒤에서 밀고 난리였습니다. 그러다보면 ‘상주 참사’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자 일행은 무척 당황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전장치 겸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십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척을 구해보라고 이르십니다. 거룻배에 타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밀어 육지에서 약간 떨어트려놓으십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좀 가라앉힌 상태에서 차분하게 치유활동을 재개하십니다.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와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하느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통수단이라고는 특별히 없었던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무척이나 지쳤을 것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예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새 세상을 열어주실 메시아의 말씀을 듣겠다는 목적으로 그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교회를 찾는 우리의 발걸음이 그들처럼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 차 성당을 찾는 우리들의 마음이 그들처럼 설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축제에라도 가듯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가듯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로 오길 바랍니다.
오늘도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영하 20도 가까이 되는 추운 겨울,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쳐 문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운 날씨에도, 그 신 새벽에 집을 나서 성당으로 발길을 향하는 형제자매님들 앞에서 참 구도자의 얼굴을 만납니다.
발걸음 옮기기조차 힘겨운 분들, 100미터 걷기 위해 10분 이상 걸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성당 한번 왔다 가면 진이 다 빠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찾아오십니다.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제들과 수도자들, 봉사자들은 그 옛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사람들이 원 없이 생명의 물을 마시도록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마음껏 마셔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길 바랍니다. 그 옛날 예수님으로부터 말끔히 치유 받고 춤을 추며 떠나가던 사람들처럼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영혼 역시 깨끗이 치유되어 기쁜 얼굴로 교회를 나서기를 바랍니다.
박종주 신부님
혹 여러분들은 어렸을 때 고향에 가셔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인사하신 기억이 있으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 명절이면 기차를 타고 부모님의 고향에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린 적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사를 드리면서 저는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를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은 제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누구누구 아들입니다’라고 말을 하면 그제야 사람들은 저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러면 ‘아이구 고놈 속 빼닮았네’라는 정감어린 시골말투와 함께 제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던, 어쩌면 오늘날은 잊어져가는 아름다운 과거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처음에는 저를 모르셨지만 저의 부모님의 이름을 통하여 제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누구라는 것이 부모님의 이름을 통하여 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 오늘 복음을 보면 악령들이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소개 됩니다. 마치 우리가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듯이, 오늘 예수께서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불림을 통하여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아들이라는 단어는 직계관계만을 뜻하지 않고 어떤 집단에 예속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아들’, ‘바빌로니아의 아들(에제 23,17)’, ‘시온의 아들(시편 149,2)’, ‘예언자들의 아들(2열왕 2,5)’, ‘사람의 아들(에제 2,1)’ 등과 같은 표현을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아들이라는 단어는 한편으로 어떤 특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평화의 아들(루까 10,6)’, ‘빛의 아들(루까 16,8)’ 등과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있지요. 이처럼 오늘 복음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특성과 그분께 속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 칭호는 예수님에게만 붙여진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왕들도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하였고, 로마의 아우구스티노 황제 이후에는 모든 황제들의 비문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붙여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이들이 사용한 칭호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즉 오늘 예수님께 붙여진 칭호는 당신의 제자가 아니라 당신이 물리쳐야 할 적으로부터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적대 세력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본질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적대세력을 통하여 인정 받으셨기에 우리고 그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드러냅니다. 일상 속에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잊지 말며 우리도 주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의 모습을 본받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 합시다. 아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 !!!
이찬홍 신부님
복음에 “유다와 예루살렘과 에돔과 요르단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이며 띠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많이 몰려왔다”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가르침과 여러 가지 놀라운 행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연중 1. 2주간을 살펴보아도,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시고, 가나안 여인을 낫게 하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참된 회개를 불러일으키시고, 나자렛 회당에서는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이외에도, 베싸이다의 소경, 성전에서의 앉은뱅이, 회당에서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는가 하면, “에파타”라는 말로 귀머거리를 치유해 주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치유의 기적들과 가르침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로 몰려왔습니다.
때문에,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과 이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을 종합적으로 요약하고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활동의 전체적인 삶을...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에게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일은 많고, 실제로 그 안에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인 마르 3, 7-12의 말씀이 실현되는 곳, 이 복음 말씀을 연상케 하는 사건은 오늘날 여러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루르드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발현 이후 오늘날 년 간 400만 명이 방문합니다.
루르드라는 그 촌구석에 세계 곳곳에서 비행기타고 오고, 또 다시 기차타고 오는 것입니다.
또한 이곳에서는 1882년부터 1905년까지 총 2,000여 건의 기적적인 치유가 발생했으며 그 이후로도 현재까지 기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의,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의 놀라운 손길과 그에 따른 변화를 목격하기 위해서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의 핵심은 후반부 곧, 함구령을 내리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고 거기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면서도 그것을 당신의 홍보 수단으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드러내는 광고 효과는 엄청날 텐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러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슴 속에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그러하였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칫 소문만 무성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신의 변화, 치유에만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모든 효과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만남에서 오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얻어 누리는 결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행렬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는 매 시간 마다 이곳저곳에서 미사가 이어집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매 순간, 미사가 있고, 그 미사에서 이루어지는 말씀과 성체를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그 말씀과 성체라는 두 양식으로 우리는 양육되고 하느님께 나아가기에 기적과 치유가 바로 이곳,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놀라운 신비에... 말로 다 표현 못할 은총과 사랑의 나눔에 함께 하고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진정한 사랑이라면
강인봉
사랑하는 사람 곁에 가까이 가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마음입니다. 좀 더 많은 시간을 그 사람과 함께 보내고 싶고 그 사람의 손 한번 잡아보는 것이 무한한 행복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 온갖 나쁜 병을 고쳐주고 어쩌면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 곁으로 가까이 가려 애를 쓰게 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보다 앞서 있는 사람을 밀쳐내기도 하고 소중히 모셔야 할 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연예인을 보면 무척 피곤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바쁜 일정 중에 휴식도 취해야 하고 다음 일정을 위한 준비 시간이 필요한데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대중을 무시할 수도 없고 또 그들이 있기에 자신의 위치가 지속됨을 잘 알기에 때로는 내키지 않아도 팬들을 위해 웃음을 짓곤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보다 상대방이 편하고 행복해지도록 배려하는 일일 겁니다. 수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하셔서 그들이 자신을 밀쳐내지 않도록, 어느 한 사람에게 편중되지 않은 공평한 가르침을 주시려 애쓰십니다. 받기보다 주는 사랑을 몸소 보여주고 계신 것이 아닐지요?
얼마 전에 참석한 결혼식 주례사가 떠오릅니다. "서로 덕 보려 하지 말고 도와주려고 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뒤에 숨겨진 이기심은 없는지 잘 헤아려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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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형 할인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별로 없고 아주 한산하더군요. 저는 필요한 물건을 들고서 계산대에 섰습니다. 그런데 계산대 직원의 표정이 너무나 어두워 보였습니다. 아마 늦은 시간까지 일하느라 많이 힘든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늦은 시간까지 일을 참 열심히 하시네요. 정말 보기 좋아요.”
그러자 그 직원의 얼굴이 금세 화색이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웃으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 직원은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계산만 하고 그곳을 지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분명히 기분이 별로 안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 한 마디 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것을 얻게 되었지요. 물론 시간이 낭비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감사의 응답을 들었던 것은 물론, 나의 한 마디로 직원의 표정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큰 기쁨도 얻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에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데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다툼과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잘 한 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잣대로 평가합니다. 그러다보니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한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우리들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이 사회에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우리들의 창조 목적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기 보다는 힘을 빼앗는 존재가 될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여기서 힘이 되어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힘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분명히 힘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전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꿋꿋하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면서 함구령을 어기지요.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이 주님을 만날 수 없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끄는 우리, 그래서 참된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작은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로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올바른 것을 찾기 전에 한참을 기다려야 할지라도 설사 몇 번의 시도를 해야 할지라도 용기만은 잃지 말라. 실망을 맞아들일 준비는 하되 원하는 것을 포기하진 말라.(알버트 슈바이처)
승리자의 말, 실패자의 말
1. 승리자의 말
‘하면 되는 거야.’
‘나는 내 능력을 알고 있어. 무엇을 해야 되는지도 알아.’
‘내가 정말 자랑스러워.’
‘오늘은 정말 잘되었어. 내일은 좀더 잘될 거야.’
‘나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나는 결심했어.’
2. 실패자의 말
‘어떻게 되겠지, 뭐.’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야. 애써 보았자 헛일이라구.’
‘아나, 내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나는 잘될 턱이 없어. 언제나 마찬가지야.’
‘배워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어. 나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니까.’
‘난 아무 계획이 없어.’
욕심
지금 현재 운영하고 있는 저의 홈페이지에는 하루 평균 천 명에서 천오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원 수는 현재 8천 명을 넘어 9천 명을 향하고 있지요. 사실 처음 홈페이지를 만들고 운영했을 때는 정말로 인원이 조촐했습니다. 방문하는 이들이 몇 명 되지 않았지요. 그런데 문득 그 당시가 더 재미있었고 따뜻함을 많이 느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회원 수가 많아질수록 말도 많아지고 충돌도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외적인 번창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대신 비록 숫자는 적더라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홈페이지,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우리들이 되길 원하셨던 것은 아닐까 싶네요. 놀라운 행적과 말씀으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명예와 재물을 갖다 바치겠다고 하는데 사실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피하십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자리 잡으면 또 다른 욕심을 불러온다는 것을 잘 아셨고, 그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우리 역시 그 욕심들을 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욕심은 주님을 만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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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처음 나온 사람이 신부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예전에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보려고 구름같이 몰려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지금은 계속하지 않으시나요? 그 기적들이 지금도 계속된다면 이 성당에 발 들여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요.”
이 사람을 바라보면서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님, 사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매일같이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그것들을 바라볼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주님께서 그들의 길 위에 심어놓은 꽃 한 송이, 그들에게 뿌려주는 비 한 방울조차 눈치 채지 못하더군요. 그것이 바로 기적인데 말이지요.”
우리 주변에는 기적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거창한 기적만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기적이며 행복인데도 우리들은 대단한 기적만을 찾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동안 보여주었던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서 쫓아왔던 것이지요. 예수님만 따른다면 병에 걸릴 염려도 없고, 더 이상 배고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을 가진 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정답을 말하는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들에게 왜 함구령을 내리실까요? 바로 사람들이 당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나 행하는 분, 배고프지 않고 아프지 않도록 하는 분, 그래서 편안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분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정답을 말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더러운 영이 말하는 정답에 속아서 주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계속해서 보이는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느끼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더러운 영의 말에 속지 않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영광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생각하고, 그러한 친구들이 있어서 영광이었다고 말하노라.(W.B.예이츠)
세 가지의 눈(‘좋은 글’ 중에서)
우리에게는 세 가지 눈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자기를 보는 눈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남을 보는 눈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를 알고,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나갈 때 건강한 인간관계가 형성됩니다.
세 번째는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나는 이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는 눈입니다.
개인이 속해 있는 사회 전체가 성장하지 않는 한 개인의 성장은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나를 보고, 그 다음 다른 사람들을 보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속한 사회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기를 수 있으며 이상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몸이 움직여야 마음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2시도 안 되어 잠이 깼습니다.
어제 하루 종일 회의를 하여 몸이 피곤한 때문인지 바로 일어나지지 않아 얼마간 잠자리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천장에서 내려다보듯 제가 보이고 제가 가엾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그럴까?
어제 머리를 많이 쓰는 회의를 한 뒤의 건조함과 공허감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 자기 전에 읽고 잔 오늘 복음 때문일까?
내 마음이 더 따듯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이 더 생동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느낌을 갖고 일어나 오늘 복음을 마주 하니 예수님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 나서고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수도원에 매일같이 미사 드리러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번 강추위에도 빠지지 않고 그 새벽에 미사 드리러 오셨습니다.
저는 우리 집에서 미사를 드리니 찾아 갈 필요가 없었지요.
찾아 가는 것, 몸이 가지만 몸이 가기 전 마음이 찾습니다.
그러니 찾아 감에는 몸과 마음의 어떤 관계가 있습니다.
몸이 찾아 갈 필요가 없으니 마음의 찾음이 그리 열렬하지 않습니다.
몸이 편안하니 마음이 그리 뜨겁게 찾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아 어디 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하느님을 찾아 어디 간 적이 없습니다.
유명한 강사를 찾아 가시는 신자들을 보고 좋은 강의를 들으러 가는 우리 형제들을 봐도 나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고 와서 그 느낌을 얘기하고 우리 카페에 그 영화 감상이 올라와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 영화 괜찮은 영화일 거라 생각이 들어도 굳이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작년 “워낭 소리”처럼 누가 표까지 사 와서 같이 가자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가고, 또 가서 보면 감동을 받겠지만 아직까지 갈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작년 “워낭 소리”를 보고 감동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聖事的인 영화라고 생각하고 “위대한 침묵”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갈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튼 수도원 성당에 성체가 모셔져 있고,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니 무엇을 찾아 어디 갈 생각이 없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의 축복인 것 틀림없지만 微動도 않으니 感動도 없는 것은 아닌가,
몸으로 찾지 않으니 주님을 찾는 마음도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하게 되는 새벽입니다.
기적, 상처받은 마음의 반응
이중섭 신부님
공생활 동안 예수님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많은 기적을 행하여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야 했던 상황은 인간적인 가능성이 고갈된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신앙을 고백할 때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처럼 기적 이야기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상대방에게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은 비로소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곧바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나? 이 사람이 기적의 은혜를 입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내가 만일 이 사람을 고쳐주면 이 사람이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당신의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그냥 놔둘 수 없는 그분의 상처받은 마음의 즉각적 반응이었고, 아울러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건의 표징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인기를 끌기 위한 것도 아니요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하느님의 나라가 이제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행복` 없인 못살아요.
문화순 수녀님
오늘날 현대인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디인가? 어디 재계발 지역은 없는지, 몸짱을 만드는 곳은 없는지, 넘쳐나는 찜질방과 온천장·헬스 클럽·게임방 등이 현대인들이 모여드는 실상을 잘 말해준다.
작은 본당에서 잠시 도와주던 때다. 매일 성체조배 오시는 한 자매님이 하루는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그 자매님은 글자를 깨칠 수 없는 장애인이라고 했다. 친정에서는 불편 없이 지냈지만 시집가서 얼마 후 글자를 모르는 것이 들통나 남편의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중에 첫아이를 낳았는데 뇌성마비 장애아였다. 그러자 시집 식구들도 대놓고 구박하기 시작했다. 자매님은 갈 곳이 없어 성당을 찾았고 세례를 받았는데 성당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데 둘째, 셋째, 넷째까지도 뇌성마비 아이를 낳았고 냉대는 더욱 심해져 결국 집에서 쫓겨나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수녀님, 저는 첫아이 때문에 구원의 열매를 얻었고, 둘째아이 때문에 사랑의 열매를 얻었고, 셋째아이 때문에 겸손의 열매를 얻었고, 넷째아이 때문에 인내의 열매를 얻어 너무 기뻐요”라고 했다.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장애 아이 넷을 파출부하면서 키웠는데 아이들이 일고여덟 살이 되면 그냥 천당으로 갔단다. “수녀님, 제가 키울 능력이 없으니 하느님께서 데려가시더군요” 하면서 그뒤로 딸 셋을 더 두었는데 착한 딸들이라고 얼굴이 환해진다. 막내를 가졌을 때 사람들이 모두 낙태시키라고 했지만 숨어숨어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낳았다면서 “지금 그 아이 없으면 저는 못살아요” 한다. 재롱을 얼마나 떠는지 ‘행복’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자매님은 “수녀님, 저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아 너무 좋아요” 한다. 만약 하느님이 보였다면 돈 있고 힘있고 잘난 사람들이 먼저 성당을 다 메워서 자기같이 글자도 모르는 보잘것없는 사람은 성당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란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으니 늘 성당이 비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가 가고 싶은 때 성당에 들어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었다.
어느 곳이나 성당이 텅텅 비어 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비었는데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어디인가? 그 옛날 예수님 주위에도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그들도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병을 고치고 빵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사람만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했을 때 군중들은 “우리가 식인종인가?” 하며 모두 떠나갔다. 오늘 우리는 어디로 몰려가고 있는가? 진정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살아 계신 그분 곁으로 가는가, 아니면 이익이 생기는 곳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생명과 거리가 먼 곳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
1. 오늘의 루가 복음은 불쌍한 병자와 마귀들린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다고 전해 줍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로우신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엘리트층들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이들은 죄인, 창녀, 과부, 병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쿰란 공동체 수도자들의 회칙도 보면 그 당시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대했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자, 미친 자, 무지한 자, 마음이 헷갈리는 자, 눈먼 자, 절름발이, 앉은뱅이, 귀머거리, 철부지 등 이러한 자들은 그 누구도 공동체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당시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인간들, 곧 죄인, 창녀, 세리, 과부, 병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고,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이들이 당신께로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으심으로써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이를 위한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정신은 예수님이 당신이 자라난 나자렛 마을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다음의 대목을 펴서 읽으신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2. 특히 예수님은 죄인들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것을 원하십니다.
예1)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신도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저지른 과거의 오점은 영구히 지울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과거를 지워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잃었던 한 마리 양을 다시 찾아 기뻐하며 돌아오는 목자의 마음(루가 15,4-7), 잃었던 은전 한 닢을 되찾은 주인의 마음(루가 15,8-10),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마음(루가 15,11-32)은 주님께서 우리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3. 이러한 예수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 죄인들을 위한 용서의 복음을 전해들은 군중들은 앞 다투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의 복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복음을 전해도 어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뭘까요?
예2) 윌리엄 바클레이(영국의 성서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신앙에 대한 이론, 곧 교리에 설복되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교회는 떠나게 되는 이유는 성경 내용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인들의 불친절과 누추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여러분 중에 이미 영세를 받은 교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사랑의 표양을 보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또 교우가 아닌 여러분도 비록 이미 영세 받은 교우들에게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더라도 어차피 예수님이 세우신 공동체는 처음부터 죄인들의 공동체였음을 이해하시어 주님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이회진 신부님
하느님의 일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가만 두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온갖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칭찬을 받아 자신을 망각하는 경우도 있죠.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상황은 후자에 속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자 사람들은 예수님 곁으로 몰려듭니다.
그래서 그분을 서로 밀쳐댈려고 하죠.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서로 예수님께 은총과 축복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밀쳐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이 편리한 대로 이용하고자 하는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명성에 이용하려고도, 어떤 이는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도, 어떤 이는 육체적, 물질적 이득을 취하는데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이리저리 이용하며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발견됩니다.
성당에서 신자라는 이름으로, 수도자라는 이름으로 혹은 사제라는 이름으로 신앙인의 삶을 흔들어 놓고,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서 떨어져 서 계십니다.
그들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당신을 흔드는 것에 편승하지 않기 위해 그들로부터 떨어져 당신의 삶이 오직 하느님의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군중 속의 고독이 아버지 하느님 앞에 겸손하신 그분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흔들어 대고 올려주고 추겨주면 자신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잊고 자신의 능력에 도취되어 착각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주님은 당신의 말없는 겸손으로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 것이고, 나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것이며, 나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이 되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주님, 당신 이름이 아니라면 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저의 부끄러운 교만을 살피시고 용서하소서. 아멘”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이기양 신부님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문에 갈릴래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고,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 강 건너편 사람들이며, 티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옵니다. 더러운 악령들까지도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1)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피하시고, 악령들에게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3,12)고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알리지 말라는 명령은 여기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후 병자들에게 자기 일을 입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마르1,34)
또 마르코 1장 40절 이하에서는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보이도록 하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1,44)
왜 예수님께서는 몰려드는 군중들을 피하려 하시고 또 악령들에게는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 온 나라에 소문이 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알리지 말 것을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그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하느님의 권능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이 낫고 싶은 병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만지려고 들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많은 군중들이 찾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6-27)
또 수없는 기적을 목격한 바리사이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8,12)하시고는 그들을 떠나버리십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백성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인 빵에만 매달릴 것이 염려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이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여러 기적을 목격했지만 기적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기대로 시작한 접근은 끝까지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요. 구름같이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인간적인 기대가 충족되지 않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릅니다. 결국 예수님은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망하여 흩어져 버립니다. 이러한 한계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극복되고, 성령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성당을 처음 찾을 때는 하느님을 알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호기심과 막연한 기대심으로 출발해서 차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적인 호기심과 기대는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소한 것에 실망하거나 게을러져서 냉담을 하게 되지요.
때로 믿음보다 인간적인 것만을 좇아 바리사이들이나 예수님 시대의 군중들보다도 더 무섭게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서려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인간적인 것보다는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바리사이들이나 어리석은 유다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의 함구령은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기대나 호기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분은 본당 신부도, 수녀도, 사목위원도 아니고 또 직책이나 재력, 신분도 아닌 오로지 하느님 한 분뿐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강영구 신부님 (2003-01-23)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을 때에 갈릴래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다. 유다와 예루살렘과 에돔과 요르단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이며 띠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몰려왔다. ..더러운 악령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소리질렀다.(마르 3,7-8.11)
온 세상을 두루 밝히는 큰 빛이 떠올랐다. 그 빛이 갈릴래아, 유다, 예루살렘, 에돔과 요르단강 건너편, 띠로와 시돈까지 방방곡곡에 두루 비치고 있다.
생명의 빛, 자비의 빛, 희망의 빛, 진리의 빛이 온 누리를 비추자 수많은 사람들이 빛을 향해 나왔다. 그리고 그 따뜻함과 밝음으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은 치유를 받아 건강을 되찾게 되었고, 생명의 불이 꺼져가던 사람들은 새 생명의 씨앗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좌절과 절망 속에서 살던 사람들도 희망을 불꽃을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예수로 인해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빛의 근원이 어디일까? 예수 자신에게서 그 빛이 나오는 것일까? 아니다. 예수의 빛은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철저히 하느님께 귀의한 사람 예수, 그의 존재의 근거는 하느님에게 있다. 하느님이 아니면 예수는 없다.
온전히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으로 충만한 예수,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버리고 하늘의 뜻을 찾고 따르는 예수는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다.
태양이 있어서 밤 하늘에 밝게 떠오르는 달처럼, 하느님의 빛으로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닮고자 하는 사람이다. 스승 예수와 같이 자신을 비워 하느님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그래서 예수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一明)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 왔다>(마르3,7-12)
유광수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띠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7-8절)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는데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서 몰려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 모여든 지방을 보면 모두 7개지방이다.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는 남쪽 지방이고 요르단 건너편은 동쪽 지방이며 띠로와 시돈 근처는 북쪽이며 갈리래아 지방은 남쪽 지방이다. 7개 지역은 완전한 숫자이며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은 모든 지역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몰려 온 사람들은 어느 한 지방에서만 온 것이 아니라 사방 팔방에서 온 사람들이며 이들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이 왜 몰려왔을까? 그냥 몰려 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많이 몰려왔다.”고 하였다. 무엇을 보았는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것을 보고 들었다.
예수님의 존재는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활동에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런 예수님의 활기찬 활동을 보고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새로운 비젼을 보았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존재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시다. 예수님의 활동은 희망을 주고 생명력을 불러 일으키고 당신께로 몰려 오게 하는 동기를 유발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만이 모든 이에게 똑같은 희망과 느낌을 주고 삶에 자극을 준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 오는 것이다.
왜 모든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 오는가? 인간은 누구나 병자들이거나 더러운 영이 들린 존재익 때문이다. 자신이 병자가 아니고 더러운 영이 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니 그것은 감각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중풍병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누구나 병자이고 더러운 영이 들렸기 때문에 그것을 치유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하신 예수님께 몰려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길이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주 작은 공동체이다. 마치 겨자씨와 같은 작은 존재이다. 그 공동체에 비해 그분께 몰려 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이 작은 공동체는 병든 이들을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하고 필요한 공동체이다. 그 어디에서도 고쳐줄 수 없는 병을 고쳐주어야 한다.
이 작은 공동의 한 중앙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앞으로 건설될 하느님의 나라의 모퉁이 돌이시다. 그 위에 작은 공동체가 건설될 것이며 그렇게 형성된 공동체는 예수님 이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시켜주어야 할 공동체이고 그것이 그들의 일이고 사명이다.
오늘날 이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병든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어야 하고 또 그 사람들을 고쳐주는 곳이어야 한다. 과연 오늘 우리 교회는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몰려오게 하는 능력 있고 매력적인 교회인가? 병든 이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이 교회에 와서 치유 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가 하느님을 찬미하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병들고 더러운 영이 들린 이 세상 한 가운데에 존재하지만 아무러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병든 이들이 치유 받기 위해 왔다가 아무런 치유의 능력이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돌아가고 왔던 사람들마저 발길을 돌린다.
오늘 날 얼마나 교회에 나오는가? 보통 3분의 1정도이다. 그러니까 1000명 신자라면 300명 정도 나온다. 그것도 수도권이니까 그렇지 시골 본당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도 나이 드신 분들이고 젊은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가 이런 사정인데도 뚜렷한 대책이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고 특별한 대책도 없다.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병든 이들은 다른 곳을 찾아가고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로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기본적인 인간의 모습을 상실한 병든 이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에 대한 책임은 교회에도 있다.
과연 오늘 날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가?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가? 과연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몰려올 만큼 매력적인 힘을 갖고 있는가? 오늘 사람들의 하느님은 교회가 전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아파트나 증권 또는 부동산에 만들어내는 하느님이 그들의 하느님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리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가기 때문이다.
나의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나는 어디로 몰려가야 하는가?
교회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커다란 비젼은 가지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그 하느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또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양떼를 인도해야할 사제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할 교회의 생명이라고 하는 수도자들조차도 자신의 사명을 다 하고 있지 못하고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자들은 복음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해야하는데 복음을 읽지 않는다.
오늘 우리 교회는 너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지도 못하고 보여주지 못하고 인도해주지도 못하는 교회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순절 특강이다 대림절 특강이다 하고 장을 마련해놓으면 신자들이 얼마나 올까 하는 것부터 걱정해야할 처지이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배부른지 모른다. 관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말하는 이나 말을 듣는 이가 힘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 우리가 가야할 곳은 다시 예수님께로 몰려 가야 한다.
그분에게서 치유받고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고 희망을 발견해야한다. 즉 복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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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 운영하고 있는 저의 홈페이지는 2002년 7월부터 시작한 두 번째 형태의 홈페이지입니다. 첫 번째 홈페이지는 저의 없는 디자인 감각으로 아주 이상한 형태로 만들었는데요, 그래도 참 재미있는 시간들을 홈페이지에서 보낼 수 있었지요. 물론 회원 숫자도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던 중에 지금의 홈페이지를 제공해주는 업체를 알게 되었고, 2002년 7월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형태로 쭉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늘어난 회원수가 4천명을 넘어 이제 5천명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네요.
그런데 이렇게 회원 수가 많아질수록 저는 부담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처음에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원했던 사랑이 가득한 홈페이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홈페이지라는 지향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서운했던 것은 제가 처음에 홈페이지를 만들고 그곳에서 만났던 분들을 이제는 만나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분들의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 홈페이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러한 따뜻함도 줄었기 때문에 한분씩 떠났던 것은 아니었는가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홈페이지를 통해서 Daum 카페로의 이전을 공고했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카페에 이런 식의 글을 남기시네요.
“신부님, 더욱 더 번성해서, Daum 카페 중에서 제1의 카페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말도 많아지고 싸움도 많아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그렇게 외적인 번창은 욕심도 가져오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적인 성장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비록 숫자는 적더라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공동체,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를 원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도 그러한 우리들이 되길 원했던 것은 아닐까 싶네요.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과 말씀으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명예와 재물을 갖다 바치겠다고 하는데 사실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피하십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자리 잡으면 또 다른 욕심을 불러온다는 것을 잘 아셨고, 그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우리 역시 그 욕심들을 버리도록 하기 위함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욕심이 있어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어느 정도의 욕심이 있으면 그 욕심만큼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것은 다 누려도 되지만 딱 하나만은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 딱 하나까지도 취하려는 욕심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딱 하나만하지 말아라.”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들의 원조인 아담과 하와처럼 그 하나마저도 취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저 역시 이제 홈페이지에 대한 욕심, 제1의 홈페이지가 되겠다는 욕심을 접습니다. 대신 작지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홈페이지를 지향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해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지지 말아야 할 “딱 하나”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찾아보시고, 그것을 갖지 말도록 합시다.
여유를 만드는 방법(‘빙점’, 미우라아야꼬 여사의 젊은 시절 이야기)
어떤 가정주부가 남편의 수입이 적어서 동네에 구멍가게를 냈습니다. 이 아주머니가 정직하고 친절하게 물건을 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점점 많아졌고, 물건이 달리게 되어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놓으며 하루 종일 정신없이 팔아야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퇴근하여 바쁘게 장사를 하고 있는 부인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동네 다른 가게들은 이제 손님이 거의 없대. 저 건너의 가게는 아예 곧 문을 닫아야 할 것 같다더군.”
이 말을 듣고 그 부인은 물건을 트럭으로 주문하지 않았고, 파는 물건의 종류도 줄여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물건은 건너편 가게 가시면 살 수 있습니다.”
그 후로 장사로부터 벗어나 시간이 많아진 부인은 좋아하던 독서에 빠질 수 있었고, 틈틈이 글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욕심을 부리면 여유로워 질 수 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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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업에서 신입 사원을 뽑는 시험을 치렀습니다.
면접이 있는 날, 면접관들은 다른 회사에서 보통 묻는 질문을 한 뒤 그들에게 상자를 하나씩 주었지요. 그 상자는 단단한 끈을 사용해 수십 개의 매듭으로 묶여있었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상자를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은 이 회사에 입사할 수 없습니다.”
지원자들은 열심히 매듭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지요. 워낙 단단히 묶어 있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주일 뒤 두 명의 합격자가 발표되었고, 합격한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어떻게 매듭을 풀었는지를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대답했어요.
“저는 도저히 시간 안에 풀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상자를 부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상자 안에 ‘당신은 합격입니다’라고 쓰인 카드가 있더군요.”
나머지 한 사람도 말했습니다.
“끝까지 노력했지만 시간 안에 매듭을 풀지 못했어요. 그래서 면접은 떨어져도 좋으니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만 가르쳐 달라고 했지요. 그러자 상자를 가져가라고 주더군요. 집에 돌아와서 열어보니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다가가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끈기와 인내를 갖춘 두 사람만이 이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 안에서 개인의 재능과 운만을 바라볼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더불어 운이 남들보다 좋아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우리 사회 안에서의 일반적인 목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요?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앞선 회사에서 요구하는 사람처럼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끈기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것을 쫓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당신의 능력이라면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쉽게 높은 자리에 올라 군림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아셨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는 그들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낮은 자리로 갈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대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을 믿고 당신을 따른다면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성인성녀들이 그분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따랐던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가요? 이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특히 주님까지도 깜짝 놀랄만한 끈기와 인내로 그분께 다가설 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메시지를 보내시지 않을까요?
“축하합니다. 당신은 하늘나라에 합격하셨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맙시다.
유도창시자 지고로 가노의 평생학습 자세('태도를 바꾸면 성공이 보인다' 중에서)
가노는 배우고자 하는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82년 그는 그때까지 거의 소멸해 버린 유술이라는 무도를 찾아내어 좋은 것만 택하고 위험한 것은 배제시켰습니다. 그는 여기에다 새로운 기술을 첨가함으로써 정신 수양과 육체 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오늘날의 유도를 완성했습니다.
유도는 오늘날 일본 경찰의 기본 무술이 되었으며 동양 무술로는 첫 국제 올림픽 대회의 정식 종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학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학생들이 스승의 유언을 듣기위해 모여들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묻을 때 내 몸에 검은 띠를 매지 마라. 반드시 하얀 띠를 매어 묻어야 한다."
무도에서 하얀 띠는 초보자, 곧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은 견습생의 상징입니다. 가노는 이처럼 계속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자세로 그의 생을 일관한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