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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1년 1월 23일 (녹)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1.01.23|조회수1,330 목록 댓글 0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9,2-3.11-14

형제 여러분, 

2 첫째 성막이 세워져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제사 빵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3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하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0-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Jesus came with his disciples into the house.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다고 한다(제1독서).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는데,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해 붙잡으러 나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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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제는 지성소에 들어가 사람들이 마련해 놓은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새로운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성소에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피를 봉헌하시는 분이시다(제1독서). 새로운 대사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느라 식사도 못하실 지경이었다.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에 몰두하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유다인들에게는 물론 친척들에게까지도 이해받지 못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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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다가 전사한다. 다윗은 그들의 비참한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단식까지 하였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부른다. 이렇게 하여 사울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의 일행이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군중과 예수님의 친척들을 비교합니다. 집으로 돌아간 예수님과 제자들은 몰려드는 군중 때문에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맥락을 보면 군중은 예수님을 보려고, 그분의 자비를 구하고 그분의 업적을 보려고 모여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며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은 시작 부분부터 이러한 업적을 다양하게 보여 줍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친척들은 군중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미치셨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잡으러 옵니다. 같은 한 분이시지만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의 업적을 보고 그분을 믿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판단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먼 곳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희망을 예수님께 두는 이들과는 다르게 친척들은 그분께서 미치셨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리며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갈등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한편으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지만 믿음의 모습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삶의 기준과도 같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복음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판단과 해석의 기준은 다양할 것입니다. 그 기준이 어떤 이들에게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재물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일 수 있지만, 신앙인에게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입니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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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오늘 복음 환호송은 우리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들을 수 없으며,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없고,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가짜 뉴스’인 소문에만 집중하여 편협하게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려 나서는 태도를 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8년 홍보 주일 담화에서 가짜 뉴스는 거짓되고 매혹적인 주장을 앞세워 유쾌하고 위험한 유혹으로 인간의 마음을 파고들어 불안, 멸시, 분노, 좌절과 같은 즉각적 감정을 자극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직해 보이는 가짜 뉴스로 조작된 허위 정보가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퍼져 나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 알고 있습니다. 올바른 식별력과 판단력으로 진리를 가려내려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단단히 새겨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가짜는 참된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가짜가 주는 열망은 불신을 낳고, 고립과 분열을 가져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믿으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때 우리는 진리를 체험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생각이 옳다는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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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을 때, 생각지 못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러 나선 것입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을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낫게 하고 마귀를 쫓아낸다는 소문을 듣고 정말 의아하게 생각하며 혹시 나쁜 영의 힘을 빌려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했습니다. 

사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보았습니다(마르 3,22 참조). 드디어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나쁜 소문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것입니다. 안식일 법을 어기고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지어낸 것입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계약을 준비하는 예수님의 구원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영적 눈이 멀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노력하다 보니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권력과 명예와 재물에 탐닉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도 현실에 안주하거나 물질적인 것에 심취할 때 예수님을 외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업을 방해하려는 친척들의 행동은 바로 우리의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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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남이고 올해로 아흔이 되신 어머니가 계신다. 가끔 서울에 일 보러 나가면 하룻밤이라도 어머니 곁에 자려고 늦은 밤이라도 찾아간다. 머지않아 돌아가실 터이다. 그러면 나는 이 시간에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동창 신부의 사제관으로 갈까? 아니면 야간열차를 타고서라도 우리 마을로 가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어머니의 존재감이 한없이 클 것만 같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자는 아들에게 밥을 차려 주시는 것을 무척 기뻐하신다. 생선도 발라 주시면 나는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저수지 갈대 끝의 잠자리 허물처럼 껍데기만 남은 몸인데도 아들에게 마지막 밥을 지어 먹이시려는 듯하다. 집을 나서면 잠시 뒤 어김없이 베란다 창을 여시고 아들의 뒷모습을 내다보시며 ‘잘 가라.’ 손짓하시면, 나는 ‘어서 들어가시라.’며 손을 흔들며 답한다. 이런 순간도 이제 몇 번이나 있을지 생각하며 나는 정류장을 향한다. 

나는 사제가 된 뒤로 어머니와 형제들과 친척들에게 혈연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신자들의 혼인 미사 주례는 멀리라도 가서 해 주면서 친척 결혼식에는 참석도 하지 못했다. 바빠서가 아니다. 어머니는 ‘성당 일에만 열심인 것이 신부의 도리’라면서 친척들의 장례조차 알려 주시지 않았다. 아들을 온전히 봉헌하고 싶었던 마음임을 이해한다.

혈육이란 무엇일까? 부모 형제 친척은 출가 뒤라도 어쩔 수 없는 인연이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는 소문에 그분을 찾아 나섰다는 것도 공감하고 좋은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출가와 혈연 사이의 최소한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이해해 주는 것도 나이 든 나의 태도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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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안고 이 땅에 들어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른바 3D 업종에서 힘들게 일을 합니다. 그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 환경, 일부 악덕 기업주들의 임금 체불과 비인간적 대우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아픈 병입니다.

1996년 고 김수환 추기경님은 국내에 들어와 있던 두 명의 파키스탄인 사형수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게 됩니다. 그들은 죄도 없이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몇 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추기경님은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그들이 누명을 벗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써 주셨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서울대 병원 가톨릭 의사들을 중심으로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병원이 생기게 됩니다. 그 이름을 라파엘 천사의 이름을 따서 ‘라파엘 클리닉’이라고 했는데 올해로 15년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주일이면 수많은 외국인이 서울 혜화동에 모여드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몸은 아픈데 돈이 없어서 라파엘 클리닉을 찾는 이주 노동자들도 많습니다. 그들을 자원해서 돕고 있는 봉사자들은 세상 속에 살되 세상을 거꾸로 사는 이 시대의 작은 천사들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일행에게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음식조차 드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군중이 왜 예수님의 일행에게 모여들었을까요? 그들에게는 세상과는 다른 신선함과 매력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 공동체에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매력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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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을 위험하게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일을 그렇게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옵니다. 하시는 일을 말릴 작정입니다. 아마도 나자렛에서 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의 본모습을 모릅니다. 기적의 소문을 수없이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색안경을 끼고 바라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생각坍 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편견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짧은 표현 속에는 예수님의 또 다른 고뇌가 숨겨져 있습니다.

진주의 순교자 ‘정찬문’은 『치명일기』에 등장합니다. 그는 고려 말 ‘대사헌’을 지낸 ‘정온’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런 가문에서 천주교를 믿었기에 집안사람들이 먼저 박해를 가했습니다. 신앙 때문에 ‘멍석말이’를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는 눈물로 거절합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문중에서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맥을 동원해 배교시키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는 끝내 신앙을 지켰고 감옥에서 숨졌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르면 ‘무슨 말’이라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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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소문을 냈는지요? 예수님을 만난 세리나 창녀, 병자 등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이런 소문을 내고 다녔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행한다고 떠들고 다니던 사람들, 안식일 법을 어기고 사람들을 치유한다고 예수님을 없앨 것을 궁리하던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며 어울린다고 불평을 터뜨리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악성 소문을 내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당시 유다 사회의 지도자라는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바리사이들일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가진 온갖 기득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 권력과 명예, 재물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정상으로 보는 사회라면, 분명 예수님이 미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회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면, 그 반대편을 사는 자신들이 미친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먼 옛날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질적 탐욕으로 끊임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론자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온갖 수단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짐을 지우는 사람들, 정의를 가장해서 또 다른 권력을 누리는 사이비 지도자들 ……. 이런 세상이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시대라면, 여전히 예수님을 닮은 ‘미친’ 사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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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는 부모가 주는 애정을 듬뿍 받습니다. 부모가 웃으면 아기도 웃습니다. 부모가 신경질을 내면 아기도 찡그립니다. 차츰 아기의 뇌는 부모의 ‘감성적 신호’에 반응하도록 발달됩니다. 느낌이 눈을 뜨는 것이지요.

이렇게 아기들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바탕으로 감정을 읽는 ‘기본 틀’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이 기본 틀에 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군요. 부모를 닮은 사람을 쉽게 사랑하게 되는 이유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기본 틀이 있습니다. 처음 믿음을 접했을 때의 느낌일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준비할 때의 생활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신앙의 길로 이끌어 준 분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의 ‘기본 감정’ 위에 ‘믿음의 체험’을 쌓아 갑니다. 

그 ‘체험들’을 언젠가는 예수님 안에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의 관점에서만 그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닮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빠지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을 섬기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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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앞뒤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통하여 당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이때 수많은 군중이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몰려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군중을 피해 강가에 배를 마련해 놓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이 못마땅하여 예수님께 악령이 들렸다며 악선전을 합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려고 몰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기적이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미를 불러일으키는 은총의 사건이 되었으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시기와 질투, 중상과 모략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은 그분의 기적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했지만, 예수님을 가까이서 잘 알고 있는 친척들은 오히려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책을 읽다가 인격장애의 종류가 정말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편집성, 분열성, 분열형 인격장애는 A군이고, B군은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를 말합니다. A군이 외톨이형(자기만의 성을 쌓기 때문)이라 하면, B군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보기에 자존감이 낮고 외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마지막으로 C군 인격장애도 있는데, 강박성, 회피성, 의존성 인격장애로 불안해서 집착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이라고 합니다.

인격장애의 종류가 하나씩 살펴보다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저 역시 약간씩의 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고 정신적으로는 아주 건강하다고 자부했지만 저에게도 약간의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보면서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느님 외에 그 누구도 완벽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많은 이가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관대합니다. 자신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완벽한 사람은 없지요. 따라서 자신의 문제를 알아가면서 좀 더 조심해서 살면서 조금씩이라도 완벽한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결국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정하고 피하기보다는 알고 배우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앎은 ‘나’라는 틀에서 바라보는 앎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때에는 잘못된 판단으로 더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희망 가득한 말씀, 깜짝 놀랄만한 표징들로 인해 사람들은 늘 예수님 주변에 모였습니다. 문제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표징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예수님 망신 주기에 더 큰 노력을 쏟습니다. 그래서 미쳤다는 소문을 흘렸습니다.

이 소문을 예수님의 친척들이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잡아서 더는 미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소문만 듣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친척이라면 예수님을 어렸을 때부터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가까이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단지 남의 말만 듣고 “미쳤다”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이 역시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어떤 판단을 해야 할 때,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먼저 따져보았으면 합니다. 알고 배우고 고쳐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재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도해 본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매튜스).


원칙과 단호함.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합니다. 양심이나 죄책감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꽤 있지요. 공감 능력이 없고, 공감할 의지도 없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참 많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이 피해를 입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뿐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이들에게 “네가 맞다. 네 마음대로 하도록 해.”라고 한다 해도, 그들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타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이런 성향의 사람과 잘 지낼 방법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최대한 엮이는 것을 피하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직장 상사를 비롯해서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원칙과 단호함.

스스로 원칙을 세워 단호하게 끊을 수 있을 때, 상대방에게 휘둘리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병적인 이 사람을 고치겠다고 해서는 더 큰 상처만 입게 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나의 원칙과 단호함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사목활동에 깊이 매진하셨다는 반증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846년 돈보스코(1815~1888)가 32세의 혈기왕성한 젊은 사제 시절 때 일이었습니다. 당시 돈보스코가 시작한 오라토리오는 큰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 400여명 가까이 되었지만, 오라토리오는 계속 떠돌고 있었습니다. 묘지에서 방앗간으로, 작은 헛간에서 풀밭으로...

앞날이 창창하고 유능한 돈보스코가 본당이나 병원 등 안정된 사목을 뒤로 하고, 갈곳 없는 아이들 수백명과 토리노 뒷골목을 전전하며 깔깔거리는 모습을 본 토리노 교구 동료 사제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1846년 연초에 개최된 토리노 교구 사제 모임 때 몇몇 사제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혹시 돈보스코가 정치적 야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것은 아닐까? 

교구에서는 돈보스코의 정신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돈보스코와 절친했던 빈첸조 폰자티 신부와 나시 신부를 진상 조사 위원으로 선정해 파견했습니다. 교구는 정확한 진단과 정밀검사를 통한 치료 계획까지 세워놓았던 것입니다.

토리노 시당국의 눈초리도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안그래도 비상시국인데, 수백명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던 경찰국장이 돈보스코를 호출해 호통을 쳤습니다. 

“대체 이 부랑아들이 신부님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들을 자기 집에 내버려 두시오.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에게 화가 미칠 것이오!” 

돈보스코가 물러서지 않자 경찰국장은 바로 그날부터 경찰관들을 파견하여 오라토리오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후에 돈보스코의 후계자이자 2대 총장이 된 미켈레 루아 신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미사 복사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오는 제게 본당 주임 신부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 어디 가니?” “돈보스코 오라토리오에 가요.” “너 아직 모르고 있었니? 돈보스코는 심각한 정신질환에 걸렸단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주임 신부님의 말씀은 가시처럼 제 마음 속으로 깊고 아프게 파고 들었으며, 형언할 수 없는 큰 슬픔으로 밀려왔습니다. 저는 오라토리오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돈보스코는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돈보스코가 미쳤긴 미쳤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에 미친 것입니다. 그분은 미칠 정도로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가 앓고 계시다는 병은 바로 가난한 청소년들을 향한 사랑병이었습니다.>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가난한 청소년들을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돈보스코의 모습을 묵상하다보니, 너무나 안일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제 모습이 교차되어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예수님 역시 돈보스코와 똑같은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해주신 기간을 지극히 제한적이지, 당신 손길이 필요한 백성들은 끝도없이 구름처럼 몰려오지, 아무리 외쳐도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지...

당신 양떼를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활활 불타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침식마저 잊고 사목에 헌신했습니다. 하루를 백년, 천년처럼 그렇게 강도높게 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 앞에 감사하고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잔뜩 꼬인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친척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코 복음 3장 21절)


예수님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그분께서 사목활동에 깊이 매진하셨다는 반증입니다. 마치 오늘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셨고, 순간순간 지니고 계셨던 에너지를 남김없이 활활 불타오르게 하셨다는 표시가 미쳤다는 소문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그런 열정이 솟아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꼭 필요한 일,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 이웃과 하느님을 위한 일을 향한 강한 열정이 샘솟았으면 좋겠습니다.




훌륭한 리더는 비전과 열정으로 불타고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도 역시 리더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교회의 리더셨던 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제자들도 그렇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고, 마찬가지로 그분의 제자들도 너무 바빠서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 리더의 역할은 이렇게 자신도 미치고 자신의 조력꾼들도 미치게 만들 수 있는 ‘동기 부여자’여야 합니다.

교회의 리더는 그 동기 부여의 힘을 ‘성령’으로부터 받습니다. 리더가 먼저 성령을 받고 미쳐야 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팀원들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악령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악령에 사로잡힌 리더와 성령에 사로잡힌 리더를 구분하기 어려울까요? 악령에 사로잡힌 리더는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의 욕심과 육체적인 욕심, 그리고 권력과 명예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화 ‘데블스 에드버킷’(1997)은 잘 나가는 한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그 변호사는 승리에 취해있습니다. 지금은 한 성추행범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변호하는 자가 성추행범인 것을 너무 잘 압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믿고 엄청난 설득력으로 재판을 승리로 이끕니다.

그리고는 가장 큰 법률사무소에 취직하게 됩니다. 그 사장은 그를 엄청나게 좋아해 줍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자신에게 관심을 잃어가는 남편을 참을 수 없었고, 결국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 회사 사장은 사탄이었고 자신이 그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주인공은 사탄의 말에 응하는 척하다가 자유의지를 발동합니다.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쏴서 자살합니다. 그때 번쩍 다시 눈이 떠집니다. 처음 영화가 시작할 때의 바로 그 재판장입니다. 그가 성추행범을 변호한다면 미래가 어떻게 될지 깨달았던 주인공은 변호를 포기하고 재판에서 지는 것을 선택합니다.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세상 누가 봐도 악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소유욕, 육욕, 권력욕을 채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그런 악령에 들렸다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그런 욕구에서 벗어나기 싫어하는 악령에 이미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의 길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령으로 인도받는 이들은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미치고 죽게 만듭니다. 아이돌 지망생들을 경연시키는 어떤 프로그램에서 정신적으로 무장이 안 된 그들을 비(정지훈) 씨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가르쳐준 지 며칠이나 됐니? 내가 늘 좋은 얘기만 하니깐 좋아 보여? 아니야. 너희들은 그냥 씻고 잘 준비가 돼 있니? 집에 일찍 가고 싶어? 그럼 연예인을 하지 마. 가수를 하지 마. 무대에 백 번, 천 번 섰던 나도 잠이 안 와서 오늘 들어가서 혼자 또 연습한다니까? 내가 나를 만족하지 말라니까? 거울로 봐봐. 나를 만족하지 마! 예뻐야지. 멋이 있어야지. 그래야 대중들이 본다니깐 너희를. ”

정지훈 씨는 진통제 살 돈이 없어 고통 받으며 죽어간 어머니를 생각하며 죽을 듯이 연습해서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런 꾸지람을 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슈퍼 주니어 출신 예성이 아이돌 연습생들에게 하는 말도 들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습한 지 얼마나 됐어요? 일주일 내내 했어요? 노래 연습도? 근데 1년 이상 해야 할 거 같은데? 여기 계신 분들은 원래 퍼포먼스에서 춤을 좋아했던 친구들이죠? 근데 가수가 되고 싶은 거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노래는 할 줄 알아야 해요. 무대를 하는 사람이라면 연습실에서 누가 본다고 했을 때 절대 장난치면 안 돼요. 가사지를 들고 와서도 안 되고. 내 파트가 나오면 자신감이 없어도 자신 있게 불러야 하고, 틀려도 실실 웃으면 안 되고. 민폐라고요.

여기 데뷔하는 사람 몇 명이에요? 거기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제가 처음 회사(SM)에 들어갔을 때 80명 가까운 연습생이 있었어요. 불안했죠, 내가 언제 잘릴지 몰랐으니까. 우리가 데뷔할 때 12명이었는데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제 모든 걸 다 버리고, 웃고 떠들 수가 없었어요. 난 아슬아슬했으니까. 진짜 간절한 사람이 데뷔할 수 있었어요, 여러분.

제가 봤을 때 여러분들은 그리 간절해 보이지 않아요. ‘나 합격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쉬운 바닥이 아니에요. 좋은 기회가 왔잖아요? 정말 목숨을 걸어요. 진짜 모든 걸 걸었을 때 합격할 수 있어요, 진짜로.” 


성령은 나를 죽이게 합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는 이들도 죽입니다. 이것이 악령에 사로잡힌 리더와의 확연한 차이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151경기’(2014)란 영화가 있습니다. 한 고등학교 미국 풋볼팀은 지는 법이 없습니다. 11년 151경기 동안 한 번도 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끌던 코치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1년 동안 코치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1년 만에 팀은 첫 패배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경기도 집니다. 모든 승리의 근저에는 ‘밥’이라고 하는 리더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1년 만에 다시 복귀한 코치 밥은 그들을 버스에 태워 군인 재활 시설에 데리고 갑니다. 당장 잘린 손이 있다면, 당장 잘린 발이 있다면 전우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죽어라 재활하는 군인들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그런 절실함이 없었던 것이고 거기에서 자극을 받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 연승행진은 이어집니다.


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죽도록 무언가에 한 팀이 되어 매진할 수 있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받은 리더는 자신과 또한 그를 따르는 이들도 그렇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도록 노력하는 데서 참 기쁨이 옴을 가르칩니다. 게으르게 만드는 리더를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은 밥 먹을 시간도 없게 만드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년 전의 일입니다. 수녀님들과 대림특강의 강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서울교구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었습니다. 거리가 멀었고, 신자의 수가 적었습니다. 누구를 강사로 모실지 고민하고 있을 때입니다. 수녀님이 제안을 하나 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모실까요?’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바쁘신 추기경님께서 작은 성당에 오실 수 있을까? 오신다고 하면 어떻게 대접을 할까? 혹시 모르니 편지를 보내자고 결론을 냈습니다. 수녀님이 정성어린 편지를 추기경님께 보냈습니다. 6월에 보냈는데 9월이 되어도 아무런 답장이 없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못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강사를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0월에 연락이 왔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로마에 다녀오셨는데 편지를 보셨고, 대림특강을 해 주시기로 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많이 모일지, 준비는 차질 없이 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동네 입구에 추기경님의 방문을 알리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장단의 콩으로 두부를 만들었습니다. 임진강의 꽃게로 탕을 만들었습니다. 면장님도 오고, 군인들도 올 수 있도록 부대에 연락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대림특강도 해 주시고, 미사까지 봉헌해 주셨습니다. 미사 후에 사진도 찍어 주시고, 식사도 함께 하셨습니다. 바쁘신 추기경님께서 온전히 하루를 내어 주셨습니다. 서울교구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었기에 특별히 시간을 내 주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해마다 성탄절이면 작은 곳에서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비록 작고 허름한 곳이지만 추기경님께서 방문하시고 미사를 봉헌하시면서 결코 작고 허름한 곳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인가 피정 중에 추기경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이 어디일까요? 그것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여행입니다.” 아는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의 제사는 다시 번제물이 필요하지만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더 이상 번제물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방문이 저와 성당에는 큰 기쁨이요, 영광이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더할 수 없는 영광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길만 따라가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처럼 고난이 찾아오면 다른 곳을 찾으려합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 쉽게 넘어지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눈에는 하늘을 나는 나비가 위험에 보일 겁니다. 날개의 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욕망에 눈이 먼 사람의 눈에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모습이 미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미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는데 십리를 가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 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세와 성공 그리고 부와 명예를 쫓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미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영적인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수준에서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나비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여 주셨고,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참된 성소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마르 3,20)

열두 사도를 뽑으신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십니다. 군중도 뒤를 따르고 소문을 들은 이들도 모여듭니다. 이제는 유형의 성전이 아니라, 주님이 계시는 곳이 곧 성전이고 지성소가 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그런데 예수님께서 계신 집에는 제자들과 군중만이 아니라, 그분을 붙잡으러 온 친척들까지 모여듭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에 놀라 달려왔을 겁니다. 이 대목 바로 뒤에 베엘제불 논쟁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마귀 두목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속단해 퍼뜨린 듯하지요.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만큼 적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친척인 예수님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앞섰겠지요. 혹 가문에 수치가 될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예수님을 위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이들의 의도와 지향을 관상합니다. 제자들 중에는 메시아와 함께 출세와 영광을 바라는 이가 없지 않았을 것이고, 군중은 치유건 구마건 위로건 무언가 얻어내고자 왔습니다. 친척들도 인간적인 걱정이 앞섰던 것이고요. 이 모든 동태를 살피러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마르 3,22)의 의도야 너무 뻔한 것이겠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찬미와 영광을 바치며 마음을 다해 섬기는 이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형의 성전 안에 존재하는 성소, 지성소와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참된 성막을 비교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히브 9,11)

인간 대사제는 지파에 따라 성소와 지성소에 접근할 지위가 주어집니다. 그는 율법이 정한 짐승의 피를 뿌려 사람들을 정화하지요.


예수님은 당신 피로써 온 인류를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사람이 만든 성소가 아니라, 모상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성소의 원형, 곧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거처에 들어가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공동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을 짓고 집회와 친교의 장소로 삼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도와 지향을 가지고 성전에 모여 각자의 바람을 아뢰고 청원을 올립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염원부터 세상 모든 피조물을 위한 기도와 헌신, 그리고 순수히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까지 주님이 계신 곳에 모여드는 이들의 모습은 참 다양합니다.


당시 종교제도 밖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아버지께 올리신 제사가 온 인류를 위한 완전한 희생제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장소도 이스라엘 백성이 자랑스러워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성문 밖 해골터라 불리는 골고타 언덕이었지요.


우리가 겪고 있는 인류재앙적 감염병 사태가 "진리와 영 안에서 예배하는"(요한 4,23참조) 때를 앞당겨 준 듯합니다. 눈에 보이는 유형의 성전에 갈 수 없어도,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우리 각자가 성전이고, 우리가 머무르는 공간이 주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지성소임을 절절히 체험하고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과 거룩하고 아름다운 지성소 안에 들어가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 품에 기대어 사랑을 속삭이고,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며, 세상의 긴급한 필요를 위해 그분께 아룁시다. 우리 지향의 시작이 무엇이었든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차츰 정화되고 성화되어, 우리도 예수님처럼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영혼이 되어갈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함승수 신부님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분을 ‘미쳤다’고 생각해서 ‘붙잡으러’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하고 입바른 소리를 하여 사람들, 특히 권력층에게 미움을 샀다는 말을 듣자, 괜히 자기들에게까지 그 ‘불똥’이 튈까 두려워 그분을 제지하러 나선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붙잡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크라테오’ (krateo)는 원래 ‘손에 쥐다’, ‘제지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친척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는 한편, 그분이 자기들에게 피해가 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손에 쥐고 제멋대로 흔들려고 했다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던’ 그들은 베드로가 범했던 잘못을 똑같이 저지르는 셈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오늘 복음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 두 단어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을 묵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붙잡힌’ 사람, 그분의 뜻과 가르침에 ‘사로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주님을 손에 쥐고 제멋대로 흔들려는 교만함을 버리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나를 손에 쥐시고 당신 뜻을 이루시도록 그분께 나 자신을 내어드리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성령에 붙들린 사람,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미친’ 사람이어야 합니다. 무엇엔가 깊이 열중하여 남들이 보기에 평범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 때 우리는 그를 두고 ‘미쳤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돈에 미치고, 권력에 미치고, 쾌락에 미치면 우리의 영혼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멸망의 나락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기왕 무엇엔가 미쳐서 열중할거라면 세상이 주는 즐거움보다는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참된 진리에 미치고,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주님의 공정에 미치며, 우리 모두를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이끄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미쳐야겠지요.

 이처럼 주님께 미친 삶을 살다보면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신다는 단순하고도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내가 바라는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을 통해 얻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미쳤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학생들이 말 끝마다 ‘진짜요?’하고 되 묻는다. 이 의문사는 전자동이 된 표현이다. “아버지, 진짜요?, 엄마 진짜요?, 신부님 진짜요?” 모든 말에 대해 한 번은 꼭 의심하고 확인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진짜 맞다.” 해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예수님이 미쳤다.” “진짜요?” “그래 맞다” 미치셨다. 오늘 복음(마르3,20-21)에 장면은 예수님께서 오랜만에 군중을 피해 제자들과 집에 오셨다. 그동안 예수님과 바리사이 사이에 생겨난 행적에 대한 소문도 일파만파 무성했을 것이다. 친척들 귀에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렸고, 정말 그랬는지 친척들이 확인차 찾아 온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 보기에 보통사람들과 말과 행동이 사뭇 달랐고, 그들 보기에 상식적이지 않았던 것은 틀림없다. 우리들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지만 예수님께서 온전히 하느님께 집중 되었고 인간 사랑이 극진했다. 이는 믿기 어려울 상식선을 벗어나 곱게 미친 것이다. 친척들이 듣던 소문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에 대해 더욱 온전히 미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배고픔도 모르고 식사 때도 놓쳤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마르3,20). 예수님의 인간 사랑과 인간구원은 하느님의 사랑과 맞닿으며 함께 증폭되며 친척들이 들었던 소문대로 인간에게 미친 행동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커져갈 것이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3,21).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친척들이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전합니다.


예전에 수련장 시절에 겨울이 되면 시즌 생활성가 공동체 더 프레젠트와 함께 내내 복사학교 및 음악피정을 30차례 가까이 진행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국적으로도 음악피정 요청이 들어오는 곳에 수차례 출장을 다녀왔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 하루는 늦게 새벽1시쯤 수련장에 도착해서 공연장비를 다시 풀고 있었는데 함께 사셨던 원장수녀님이 주무시다 나와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유~다들 미쳤어~~미쳤어~~” 수녀님의 생각에 쉬는 날도 없이 그렇게 다들 애쓰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쓰러우셨기에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공동체가 그렇게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어떤 인간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가슴 벅차게 기뻐서 다들 그렇게 뛰어 다녔던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은 코로나 여파로 인해서 지난 한 해 1월 성탄대공연과 성음악 찬양미사를 마지막으로 한번도 공연과 피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엔 비대면의 시간 속에서도 계속해서 성가 작,편곡과 레코딩을 하면서 SNS를 통한 복음선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미쳤다는 말을 듣는 것이 때로는 행복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선입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5) 아마도 요한 복음의 이 말씀이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가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 커서 직장도 구하지 않고, 집을 나가버리고, 어부들과 패거리를 만들어 그들의 스승이라고 말하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모습을 봤을 때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에게 다가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면, 또 사람들의 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귀 기울였다면, 그분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결론은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사이가 그 누구보다도 가장 멀리 있는 사이일 수 있습니다. 잘 안다는 선입견이 그 사람 안에 담겨져 있는 진심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진짜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또 소중한 관계일수록 잘 안다는 선입견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누군가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그를 가장 모르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잘 들어주고 잘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식을 넘는 해위는 미친 행위인까? < 마르코 3/20-21.>1/2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상식적 행위와 비상식적 행위의 차이를 왔다 갔다 하며 살고있습니다. 

대부분 보수적 사람은 잔보적 사람을 이해 하지 못하고 정싱 나간 해위로 보거나 오랜 습광에 매여 사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수용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기는 악은 서로 일치가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나타나 복음을 전하실 때 중위의 사럼들은 미친사람의 행위로 보아 잘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인간적으로 아끼는 진착들에게더구나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첫 첫 번째 본당에서 사목을하려할 때 많은 해설df 하었지만 끝내 제 말과 행위에 반발하어 성당을 멀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해를 받은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성당 안에 닭장 퇴지 우리 염소우리를 만들어 축산을 하려 하니 교요한 성당을 soat 나게하고 더럽게 한다고 나를미첬다고 하는사람, 또한 신용협동조함을 만드니 어디 성당에서 돈을 주고 받고 하느냐? 하며 비난을받고 농촌 생활 개선 개발을 하여야 한나고 하니 개발 개의 발과 같은 소리냐 하고 미쳤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농촌의 기초를 만들어 놓고 가난한 사람도웁고 농촌 잘살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70년대는 선풍기 에아콘이나와서 성당안이 더워 선풍기라도 넣고 미사를들이고 참례싴려하여 선풍기 모금을 하니 어떤 부자집 마님이 와서 나보고 돌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자기집은 에아콘도있어 집에서 시원하게 지내는데 성당에 와서 땀을 흘리며 고심극기 하려는데 내가 가로막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당의 환경과 5섯대의 미사지내는 저는 어떻게 하라고 하니 “그야 신부는 그렇게 살려고 선택한길이니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은냐?” 합니다. 나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 본당을 떠났습니다. 사제생활 중 가장 힘든 시절이였습니다. 나중에 주님이 십자가의 의미를 피정을 통해 깨닫고 이렇게 아직도 수도사제로 살고 있습니다.

주님도 미친 사람 대마귀가 들은 사람  마침내 하느님의 믿음을 혼란하게하고 믿음의 방해라고 생각하어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애 뒤에 참 희망이 있었음을 부활로  복귀 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되는데 모든 노인 신부는 노년을 즐기고 사는데 왜 신부님은 맷날 여행할 때도 묵상글을 쓰십니까? 그만 하시지요 하는사람도 있지만 1000명중 한명이라도 신부님 글보고 평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는 글을 받으면 아니 한 사람도 없어도 어느 날 이 글이 후대 사람들에게 힘이되고 믿음의 도움이 되면 아니 제가 주님을 ᄎᆞᆽ아 함께 하는데 힘이 되니 행하고 있습니다. 지나처도 상식을 벗어나도 나는 수도자이며 선교사로 사제가 되었으니 숨이 끊어지는 시간 까지 복음을 묵상 하고 힘이 있는한 글로 쓰고 전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십지가가 많은이의 걸림돌이 되었어도 지금은 우리믿음의 본질이 되어 매일 미사성제를 통해 전달되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길이 되었으니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주님의 영원한 자비와 구원은 여기서 빛으로 나오고 어둠을 빛입니다. 

상식을 넘는 행위 속에 하느님의 뜻이 있으니 그 뜻을 따라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중심中心의 삶.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 잘못 미치면 폐인廢人-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오늘 한 번 잘 살아보라고 하느님 주시는 특별 선물입니다.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오늘 하루 어떻게 사시나 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루를 보람있게 마치고 홀가분하게 잠자리에 드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과연 하루중 몇%를 살까요?

마찬가지 한생애를 보람있게 마치고 홀가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과연 평생 몇%의 삶을 살고 갈까요? 아마 하루를, 한평생을 보람있게 홀가분하게 마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를, 평생을 살고 나도 남는 것은 늘 아쉬움 뿐일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의 중요성입니다. 하루하루 오늘의 삶에, 얼마전 강조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는 얼마나 중요한지요!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 방황이요 표류요 서서히 무질서한 삶으로 안팎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늘 날마다 새롭게 확인해야 할 것은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입니다.

문득 어제 읽은 기사가 생각납니다. 14년째 파킨스병을 앓으면서도 건재한 68세 서울대 명예교수의 고백입니다. “사유를 통해 인간은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지요.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힘은 의학이 아니라 올바른 사유에서 나옵니다.” 좋은 말씀이지만 이런 삶의 엘리트들, 사유의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올바른 사유와 더불어 올바른 믿음, 희망, 사랑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좋은 글은 늘 읽어도 새롭고 영감과 감동, 힘을 줍니다.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을 새롭게 확인케 합니다. 언젠가 들었을 세 편의 글을 다시 나눕니다. 제일 먼저 나눌 시는 구상 선생의 널리 회자되고 있는 ‘오늘’ 이란 시입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어지는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는 22년전 씌어진 제 자작시는 16년전 2004년, 로마에서 ‘베네딕도회—시토회-트라피스트회 세계 양성장 모임 교육’시 제가 한글로 읽고 함께 참석했던 대구 분도회 수녀님이 영역英譯하여 읽었던 시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세 번째 인용되는 시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 애송시 마지막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오늘 복음은 단 두절, 참 짧아서 좋습니다. 강론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 중심의 삶-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금언입니다. 미쳐야 어느 경지에 미친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 삶의 방향, 삶의 의미를 잃어 세상의 무엇에 중독되어 미치면 괴물이 될 수 있고, 폐인이 될 수 있으며 주변에서 무수히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술맛, 밥맛, 일맛 등 자칫하면 중독이 될 수 있습니다. 일중독, 알콜중독, 성중독, 도박중독, 인터넷 중독, TV중독, 휴대폰 중독, 쇼핑중독 정말 끝없는 중독이요 세상에 참 많은 것이 중독환자일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움과 불안의 사람들이요 미치기 쉬운 사람들이요 무엇엔가 미쳐야 사는 사람들입니다. 미칠 광狂자가 들어가는 말마디가 미치기 쉬운 인간의 경향을 말해 줍니다. 이데오르기나 잘못된 신념에 중독된 광인, 광신, 광분, 광란, 광기, 광증 등, 지식유무에 상관없이 광신狂信에는 약이, 답이 없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허무하고 덧없는 광야 인생 살아낼 수 없어 제대로 미쳐 성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살아낼 수 없어 잘못 미쳐, 삶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자들도 속출하는 현실입니다. 그야말로 영적전투 치열한 현실입니다.

그러니 주님 중심의 삶을 시스템화한, 삶의 중독을 막아주는 기도와 공부와 일이 균형잡힌 수도원 일과표의 평생 영적훈련이 얼마나 결정적인 영적 안전망이 되어 주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이런 일과표의 영적 안전망이 없으면 삶은 무질서해져 곧장 깊이없는 무기력, 무의미, 무감각, 무의욕이란 ‘삶의 늪’에 빠져들어 갖가지 중독으로 괴물이, 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정말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그러자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가르치고 먹이시고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주시고 섬김의 활동에 여념이 없으신 예수님은 사랑에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사도들, 성인들, 우리 수도자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미친 사람들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제대로 미친 것이지요. 세상 곳곳에도 제대로 미친 무명의 성인들 참 많을 것입니다. 이런 제대로 미친 주님의 사람들 덕분에 유지되는 세상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주님 중심의 재대로 미친 삶보다 영육으로 건강한 삶도 없을 것입니다.

하여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간혹 묻기도 합니다. 언제나 화두같이 삶을 되돌아 보게 하는 물음입니다. “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재미로, 기쁨으로 살아갑니까?” 저는 지체없이 “찬미의 맛, 주님의 맛”으로 살아간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니 주님 맛 아니면 무슨 맛으로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는 시편 말씀이 진리입니다.

참으로 주님 맛이 영원하며 늘 새롭고 무궁무진합니다. 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대로 우리가 매일 새계약의 제사인 미사를 통해 모시는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일치가, 평생 우정이 참으로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친히 새계약의 제사인 미사를 봉헌하시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 중심의 제대로 미친 경천애인의 삶을, 성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이근상 시몬 신부님

밥 먹을 틈도 없을만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면 오늘날로치면 대박인데 친척들은 뭐가 두려웠을까? 옛날, 불과 한 두어세기 전만해도 사람의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종놈들 모여봐야 그건 소란일 뿐.

예수님 곁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오늘 복음보다 더 적나라한 보도가 없다. 한마디로 힘없고 빽없는 이들의 것이었다.

내 곁을 둘러봐야하는 날이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사람들이 계속 모여 들어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과 이를 믿고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친척들의 모습에 머문다. 미쳤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을 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긍정과 부정이 다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미쳤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관조한다. 나 역시 하느님의 뜻에 미쳐 살 수 있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희망한다.

어제 오후 오미자 청을 다시 저었다. 설탕이 거의 다 녹아 더 숙성하고 있는 모습이다. 숙성은 어떤 면에서 미쳐가는 것이 아닐까? 더 그윽한 맛을 내기 위해서!




<예수는 미쳤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래

예수는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사랑할 수 있으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다 줄 수 있으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당당할 수 있으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무모할 수 있으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죽을 수 있으랴


그래

예수는 미쳤다




교회의 순수한 제물 봉헌

성 이레네오 주교의 ‘이단자를 거슬러’에서 (Lib.4, 18,1-2. 4. 5: SCh 100,596-598. 606. 610-612)

주님이 온 세상을 통하여 바치라고 명하신 교회의 제물 봉헌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순수하고 마음에 드시는 제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제물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제물을 받아들이실 때 그것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영광이 됩니다. 왕에게 무슨 예물을 바치면 그것은 우리가 그에 대해 지니는 공경심과 사랑의 표시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순수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모세가 “아무도 너희 주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아라.”고 말했듯이, 사람은 피조물의 맏배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거저 받은 것을 다시 그분께 되돌려 드릴 때 하느님께 대한 공경심을 표시하여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영예를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부하신 제사는 없습니다. 제사는 항상 있어 왔습니다. 옛적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유다인들 가운데에서도 있었고 교회 안에서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제사를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렇다고 두 가지 제사가 똑같은 제사라는 말은 아닙니다. 옛적의 제사는 죄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바친 제사이고 지금의 제사는 자유인들이 바치는 제사입니다. 두 가지 제사를 받아들이시는 분은 동일한 주님이시지만 종이 바치는 제사와 자유인이 바치는 제사는 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유인은 바치는 그 제사의 성격을 통하여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의 표시를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 앞에서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옛 유다인들은 자기 소출의 십분의 일만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한편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바칩니다. 하느님께서 백 갑절로 갚아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쁘고도 자유스런 마음으로 바칩니다. 그들은 마치 복음서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가 자기 생계비 모두를 성전의 헌금 궤에 넣은 것처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쳐야 하고, 만사에서 순수한 말과 위선 없는 신앙과 경건한 희망과 열렬한 사랑으로 그분의 것인 피조물의 맏배들을 바침으로써 창조주께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만이 이런 순결한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며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피조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제사를 바칠 때 그분께 속하는 것을 바치는 것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 우리 간의 친교와 일치를 전하고 영과 육의 부활을 고백합니다. 물질적인 빵이 하느님의 축성을 받게 될 때 이제 그것은 보통의 빵이 아니고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두 가지 요소를 지닌 성체가 되는 것처럼, 성체를 받은 우리 육신도 이제 부패될 육신이 아니고 부활의 희망을 지닌 육신이 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 여섯째 날 기도 주제는 ‘다른 이를 환대하기’이고, 주제 성구는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ㄴ)입니다.

묵상

그리스도께서 변화시켜 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 안에 그분의 사랑이 자라나 열매 맺게 됩니다. 다른 이를 환대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지상 삶 내내 당신께서 만난 이들을 환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말에 귀 기울이셨고, 그들이 고통에 대한 두려움 없이 당신께 손을 대게 해 주셨습니다.

빵을 많게 한 복음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은 양분을 섭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당신께서만이 굶주린 이를 빵으로, 목마른 이를 생명으로 진정 채워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 제자들 없이, 그들이 당신께 드릴 수 있는 작은 것, 곧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없이는 그리 하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조건 없는 사랑에 협력하도록 이끄십니다. 때로는 친절한 눈길이나 열린 귀, 또는 함께 있어 줌과 같은 작은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누군가 자신이 환영받고 있다고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보잘것없는 능력을 예수님께 봉헌할 때, 예수님께서는 이를 놀라운 방식으로 활용하십니다.

그때 우리도 아브라함이 체험한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환영할 때 우리는 더 풍성한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손님으로 맞이한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 「프랑스어와 영어 떼제 규칙서」(2012년), 103면

“우리가 날마다 환영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빛나는 남녀의 얼굴을 우리 안에서 발견할까요?”                                                    - 「떼제 자료집」, 60면

기도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는 저희 곁에 있는 형제자매를 온전히 환영하고자 합니다.

당신께서는 저희가 얼마나 자주 그들의 고통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지 아시고,

언제나 저희보다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시어

늘 연민으로 그들을 받아들여 주시나이다.

저희의 말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저희의 행동으로 그들을 뒷받침해 주시며,

저희 모두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협의회, 세계 교회 협의회 신앙 직제 위원회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를

더 가치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도

우리자신들이다.


목숨을 바치러

오신 예수님이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것이다.


세상에

빨간색만

있다면

그야말로

돌아버릴 것이다.


삶의 묘미는

다양함이다.


다양함을

미쳤다고

생각하기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지나친 과장과

지나친 왜곡은

언제나

우리 삶을

아프게 한다.


정상과 이상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좀 부족해도

괜찮다.


저마다

남모를

고통이 있기

마련이다.


그 고통을

헤아려주지는

못할망정

판단과 낙인으로

소중한 인격을

무너뜨린다.


무례한 통제와

도를 넘는

간섭과 무리한

요구를 이제는

멈추자.


우리자신밖에

모르는 삶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자.


저마다의

보폭과

저마다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자신과

이웃 형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 지를

반성하게 된다.


가치있는

존재로

바뀌는

그 시작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들에게

건강한 삶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미치지 않으셨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우리들

삶의 관계이다.


판단이 아니라

사랑속에서

성장하는

우리들 삶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누구십니까?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함께 했던 가족이 많이 생각납니다.


집에서 짐을 싸들고 신학교 기숙사로 들어갈 때, 부모님께 큰 절을 올리고 군대에 갈 때를 떠올리면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족을 떠나서 혼자서 생활할 때 어려운 일들이 가끔 찾아옵니다. 병으로 혼자서 끙끙 아파하고 있을 때, 개인적인 고민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등의 어려움을 겪게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가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를 느끼게 되던 지요.


그런데 종종 사랑하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가슴 아픈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 회사 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니 “네가 배불렀구나. 누구는 취직도 못해서 그렇게 안달인데, 너는 직장생활하면서 뭐가 어렵다고 그래?”라고 혼을 내면 어떨까요? 성당 안에서 교우들과의 갈등 때문에 힘들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성당 당장 나가지 마.”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힘듦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가 아닐까요? 위로받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힘듦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 힘듦을 아예 피해버리라고 명령을 내려버릴 때 과연 위로가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커다란 실망과 함께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인가?’라는 의구심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쁜 일상의 연속 그리고 여기에 당시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으로 인한 고민들이 쌓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누가 생각나셨을까요? 당연히 첫 번째로 하느님을 떠올리셨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바쁜 일정 가운데에서도 홀로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셨던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는 누가 떠올려졌을까요? 바로 가족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고 친척들이겠지요. 이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위로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붙잡으러 온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요?


내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주로 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힘이 되는 위로의 말이었을까요? 아니면 힘을 빼게 만드는 절망의 말이었을까요? 그리고 사랑한다는 예수님께는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을 기쁘게 하는 말일까요? 주님을 힘들게 하는 말이었을까요?


오늘의 명언: 친절한 행동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절대 헛되지 않다(이솝).


행복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식당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부가 함께 식당을 하니 참 좋겠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 종일 함께 계시는 것이잖아요.”라고 말을 했죠. 그러자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종일 같이 있다 보면 뭐 좋은 점이 보이겠어요. 나쁜 것만 보이고, 못마땅한 점만 보이고. 화낼 상대가 둘밖에 없어서 종종 싸움만 일어나요. 오히려 남편이 아침 일찍 직장에 갔다가 밤이 되어서 볼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평생 함께 하겠다고 부부가 되었을 텐데 막상 하루 종일 함께 하니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배우자에게 위로와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구속하고 간섭한다는 생각 때문에 같이 있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상대라도 위로와 사랑을 주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함께 하는 제1법칙이 되지 않을까요?
어느 금술 좋은 연세 많으신 부부에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물음에 그 부부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사는 게 뭐 별건가? 서로 정을 주며 사는 거지.”

정을 주며 사는 것, 내가 받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것에 집중하며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원칙인데도 참으로 지키기 힘들지요?


 

 

그가 미쳤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돈 보스코의 오라토리오가 정착되기까지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돈 보스코는 혈기왕성한 수많은 아이들을 이끌고 성당에서 공동묘지로, 공동묘지에서 헛간으로, 헛간에서 벌판으로...쫓겨나고 또 쫓겨났습니다.

대기근을 피해 시골에서 올라온 수많은 아이들은 본당은 물론이고 본당신부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저 돈 보스코의 무조건적인 환대와 따뜻함이 좋아 정처 없이 떠도는 보잘 것 없는 오라토리오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당국자는 돈 보스코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신부님의 오라토리오는 아이들을 소속 본당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왜 그 아이들을 각자의 본당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필립보 씨의 풀밭에서 아이들과 열심히 뛰놀고 있던 어느 날 마침내 돈 보스코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급속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돈 보스코가 미쳤다!”

사실 돈 보스코가 미치기는 미쳤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미쳤습니다. 오로지 아이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미쳤습니다. 그 어디도 환대하지 않은 아이들, 고삐 풀린 조랑말처럼 천방지축이던 아이들, 그냥 두면 100% 소년원이요 교도소가 분명할 아이들을 극진히 돌보고 보살피던 돈 보스코를 향해 사람들은 “미쳤다!”고 외쳤습니다.

당시의 외로움과 괴로움이 얼마나 컸으면 돈 보스코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모두가 나를 멀리 했다. 나를 도와주던 사람들마저도 400명이나 되는 아이들 가운데 나를 홀로 내버려두고 떠나갔다. 당시 나는 정신없이 뛰놀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도 혼자였고 건강마저 악화된 상태였다. 아이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홀로 들판을 거니는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부르짖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역시 예수님 친척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실 예수님 친척들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도 했습니다. 삼십년 오랜 세월 동안 나자렛에서 조용히 지내던 조카요 사촌동생, 사돈의 팔촌이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여타 유다 청년 중 한명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부모에게 순종하고 율법을 준수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지내온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특히 공생활 초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적은 역사상 그 어떤 예언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치유면 치유, 구마면 구마, 말씀이면 말씀, 메시아로서의 위대한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순식간에 유다 전역의 최대 이슈요 관심의 초점이 되셨습니다. 나자렛의 한 조용한 청년에서 시대의 중심이요 시대의 대세 인물로 떠오른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변모 앞에 친척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고, 도무지 수용할 수가 없었는데, 그 놀라움의 표현이 “미쳤다!”인 것입니다. 그만큼 공생활 출범 이후 예수님의 삶의 전환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극적인 대반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일생일대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파악과 인식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누구이십니까? 그 옛날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우리도 그분의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변모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역시 그분의 행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쳤다!”고 외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얼마나 충실했으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돈 보스코를 보고 “미쳤다!”고 외쳤습니다. 우리 내면에도 복음 선포와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한 그런 열정, 그런 에너지, 그런 헌신이 다시금 살아나길 바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모해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말도 있습니다.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삶을 사셨던 것 같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예언자들도 역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아녜스 성녀도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조건이 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우유부단했었습니다. 모세는 너무 소심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토마 사도는 자신의 눈으로 봐야만 믿겠다고 우겼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를 죽이고, 여인을 취했습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도망을 갔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분들을 사랑하셨고, 가능성을 보시고 구원의 역사에 함께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가정은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 만난 것처럼 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갈등이 커지면 다투게 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깊은 상처를 남기고 깨지기도 합니다. 사제들도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부부처럼 한 집안에서 살지는 않지만 더러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제가 신자들과 어울려 식사를 자주하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고, 늘 성당에 있으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일을 신자들과 상의해서 하면 추진력이 없다고 하고, 혼자서 결정을 하면 독단적이라고 합니다. 강론이 길면 지루하다고 하고, 강론을 짧게 하면 준비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면 정치적이라고 하고, 신앙 이야기를 하면 현실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사제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기껏 준비한 강론을 하는데 주보를 보거나,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피정을 준비했는데 오셔야 될 분들은 오지 않습니다. 성당의 시설물들을 사용하면 제자리에 갖다 놓지 않습니다. 미사 전에 미리 와서 기도를 하면 좋겠는데 미사 시간이 돼서야 성당에 오고, 늦게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당의 재정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사제와 신자들도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해서 오해를 하고,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미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는데 십리를 가주기 때문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 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세와 성공 그리고 부와 명예를 쫓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미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영적인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수준에서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나비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여 주셨고,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미쳐야(狂) 미친다(及).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 잘못 미치면 폐인(廢人)-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마 오늘 복음은 가장 짧은 복음에 속할 것입니다. 단 두절입니다. 오늘의 강론 역시 짧습니다. 이 복음을 묵상할 때 마다 늘 한눈에 와닿는 대목은 마지막 절,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입니다. ‘미쳐야 미친다.’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합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 아주 예전에 인용했던 구절도 생각이 납니다. 옛 초등학교 교사 시절 선배 교사들의 충고와 답변도 생각납니다.

“이 선생, 쉽게 살아. 왜 그렇게 힘들게 사나?”

“저에겐 이렇게 사는 것이 쉽습니다.”


철저히 원칙대로 살려는 열정을 빗댄 충고에 솔직한 제 답변입니다. 미쳐야 미칩니다. 바로 성인들이나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이의 가장 좋은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반응이 예수님의 친척들은 물론이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어 댑니다(마르3,22). 정상인들의 시각에는 정말 예수님의 행태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찌 예수님뿐이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과 그 후예들인 수도자들 역시 정상인들의 시각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친 행위처럼 보일 것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고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하여 세상에는 성인들도 많고 폐인들도 많습니다. 끊임없는 열정과 회개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제대로 미친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미친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순수와 열정이요 이들을 통해 우리는 신선한 자극을 받습니다. 하여 제대로 미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끊임없이 조금씩 진보한다 믿습니다. 하느님께 희망과 기쁨을 둔 제대로 미친 사람들, 이들의 고독과 외로움, 내외적 고통과 시련은 얼마나 크겠는지요?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총이 우리를 제대로 미친 거룩한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나태와 타성에서 벗어나 초발심의 자세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의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9,14).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새계약의 중개자이시며 대사제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끗한 양심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며 제대로 미친 성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성녀 아녜스 기념일의 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 노래 후렴과 저녁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참 아름답습니다. 주님께 제대로 미친 성녀 아녜스의 두가지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보라, 나는 내가 갈망하는 것을 보았고, 희망하는 것을 얻었으며, 지상에서 온 마음으로 사랑한 분을 만났도다.”

“성녀 아녜스는 두 팔을 벌리고 기도하였도다. 내가 사랑하고 찾으며 갈망하던 아버지 당신께 가나이다.” 아멘.

 

 

 

우리도 제대로 한 번 미쳐야 되는 것 아닐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붙잡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더 이상 지금 하고 있는 그 이상한 짓들을 못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친척들에게 이상한 짓들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선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고, 다음은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며, 사람들이 피하는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교회가 금하는 것을 거침없이 하는 것입니다.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이런 짓들은 결코 하지 않을 텐데 지금 정신이 정상이 아니어서 이런 짓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표현들이 있습니다.

지금 제 정신이 아니다. 지금 정신이 정상이 아니다. 지금 정신 이상이다.

다 정신과 관련된 표현들이고 그러므로 미쳤다는 것은 정신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얘기하는 거지만 우리의 건강에는 네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육신과 관련한 건강,

마음과 관련한 건강,

정신과 관련한 건강,

영혼과 관련한 건강.


육신건강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마음의 건강도 우울, 불안, 두려움 등과 관련된 거라고 잘 알고 있지만 정신이나 영혼과 관련한 건강이란 잘 모르고 그래서 그저 미쳤다고 하지요.

그런데 한 마디로 미쳤다고 하지만 미친 것에는 여러 양상이 있습니다.

정신질환에 의해 미친 것이 있고, 정신질환 때문이 아니라 정신이 특별한 뭣에 사로잡혀서 미친 것이 있으며 우리의 정신이나 영혼이 영적인 것에 사로잡혀서 미친 것도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뭣에 사로잡혀서 미친 것이란 우리가 흔히 ‘그림에 미쳐서’, ‘운동에 미쳐서’, ‘화투에 미쳐서’의 경우처럼 어떤 하나에 열광하여 다른 것은 다 팽개치고 그래서 다른 면에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 열광주의 중에 종교적인 열광주의도 있습니다.

흔히 종교에 미쳐서 가족도 돌보지 않고 생활도 엉망인 경우지요. 제 생각에 친척들은 예수님이 이런 면에서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이어지는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마귀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에 사로잡혀서 율법을 함부로 어기고 교회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며 이들의 힘에 의해 악령이나 더러운 영을 쫓아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복음은 공생활 초기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셨으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성령에 의한 것이고, 예수님은 성령의 힘으로 악령과 더러운 영들을 쫓아낸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프란치스코도 처음에 미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미쳤다는 얘기, 정상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어쩌면 아무 것에도 미치지 않는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얘기 듣는 것을 오히려 더 두려워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하느님께 못 미친 사람이라면 말이 안 되겠지요. 하느님께 미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제대로 한 번 미쳐야 되는 것 아닐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 하였던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절로 되어 있는 짧은 본문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사도로 세우시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마르 3,20)
 
이는 제자들이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되기 전에, 먼저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양성을 받는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함께 지낸다.’는 말이 ‘물들어가는 것이요 섞이는 것’이라는 사실임을 보았듯이, 제자들은 복음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복음으로 물들어가고 섞여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배추벌레가 배추를 먹으면서 배추색깔로 변해가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마르 3,21)
   
여기에서, “붙잡다”(krateo)라는 말은 ‘손에 쥐다, 제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러 나섰다’는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자기 손에 쥐고 조정하고 흔들려고 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수난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로막고 붙잡으며 반박한 것(마르 8,32)도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신 일을 제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자기 손에 붙잡고 조정하며 흔들려고 한 까닭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르 8,33)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려고 붙잡는 이는 그가 비록 제자라 하더라도, 혹은 친척이라 하더라도, 결국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의 행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신 것이지, ‘나를 붙잡으라.’고 부르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뿐 붙잡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자기의 뜻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서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요한 20,17)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들일 뿐인 것입니다. 앙드레 루프는 말합니다. 
“수도승은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제지하도록 승복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지는 우리의 굴복이 아니라,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유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는 예수님을 붙잡으려 찾아다니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께 사로잡혀 따라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선 이유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붙잡혀버린 까닭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치신 분’이라고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 사로잡히신 분이요, 아버지께 미치신 분이라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은 나에게 미치신 분입니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배신할 때나 무관심할 때나, 언제나 나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진정,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는, 예수님께 사로잡히고 말씀에 사로잡힌 미친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흔들림 없는 삶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셨습니다(마르3,20).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기를 고집하며 새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급기야 소문을 듣게 된 친척들조차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이나 죄인이나를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아우르고 품으셨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조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견제심리에서 모함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헛소문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일을 하면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침묵하심으로써 항시 행할 바를 일깨우셨습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법입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겉포장에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줏대란 노와 같아요.
배를 타는데 꼭 있어야 할 노와 같아요.
줏대 없는 돌이 아빠는
노 없는 배를 탄 것처럼
남의 말에 흔들려요.
줏대 있는 순이 아빠는
노를 저어 가는 배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갈 길을 가요”-이규경-  
 
우리도 일상 안에서 이런 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 그야말로 ‘줏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오해 받으시고 모함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는 일이야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선을 선으로 보고 기뻐하는 이도 있고, 그 선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다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의 일을 한다면 흔들림 없이 기쁨으로 하십시오! 소문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헛된 소문 때문에 그 진실을 알게 되니 은총이기도 한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하는 의도, 속셈을 알게 됩니다.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 안에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덕행으로 가슴을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척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20-21: 예수님의 친척들의 몰이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알고, 또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가족들이다. 그것 때문에 어떤 때는 아무런 부담 없이 농담을 하고, 또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가족들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해해 주리라 믿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는 많이 체험한다.

 

예수께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업적을 통하여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고, 이것을 본 군중들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그 행적들을 비하시키며 악령의 힘으로 기적을 행한다는 등 비방을 하였다(22절).

 

여기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몰려온 것이다(21절). 아마도 예수께서 고향, 친척, 직업을 모두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으셨을 것이다.

 

사실 그 형제들과(요한 7,5) 고향 사람들은(마르 6,1-6)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이 친척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친척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알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업적을 보고 경탄하기보다는 악의에 찬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없는가? 한 사람이 완전하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인간은 서로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채워가며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가 나름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완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이러한 중상이나 비방은 훨씬 줄어들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그것은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을 볼 때에 그에게서 무엇인가 좋은 점, 장점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면 좀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우리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제2의 그리스도인 우리는 이웃의 명예훼손이나 중상모략보다는 어렵고 곤란한 이들에게는 위로와 도움을,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진정으로 축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조금 힘들더라도 옳고 그른 진실과 허위를 가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 이것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다섯 부류

윤경재 요셉

마르코복음서 3장 7절부터 22절까지 내용은 예수님 주위에 있으면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다섯 부류의 모습을 그립니다. 1.‘피상적인 기적에만 열광하는 군중’ 2.‘교묘한 간교를 숨기고 다가오는 악령들’ 3.‘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복음 선포와 악령과 싸우는 제자들’ 4.‘소문에 휘둘린 친척들’ 5.‘기득권을 지키려 선과 악을 멋대로 재단하는 종교지도자들’ 등 다섯 부류가 나옵니다.

 

이 다섯 부류는 똑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출현은 그저 쉽게 넘어갈 평범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고 표명해야 할 급박한 사건이었습니다. 누구도 무관심하게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더러 우리가 갈 길을 확실하게 정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인간이 타인을 판단하는 데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친척들은 얼마 전까지 예수와 함께 살던 친지와 이웃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을 나간 예수가 한동안 나타나지 않아 무척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이 괴상했습니다. 악령을 물리치고 병자를 치료하며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른다고도 했습니다. 평소에 알던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모습만 보았던 그들은 도저히 이렇게 변한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몇 년 전에 가혹한 세금에 항거하며 많은 사람과 폭동을 일으켜 죽임을 당한 갈릴래아 출신 유다가 떠올랐습니다. 또 자신이 메시아입네 하며 떠들고 다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광신도들도 몇이나 있었습니다. 친척들은 예수도 그렇게 될까봐 걱정되었고, 혹시라도 자신들이 피해를 당하게 될까봐 염려가 되었습니다. 마침 예수가 베드로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말께나 한다는 몇몇 친지들이 나섰습니다. 예수를 붙잡아다 집에 가두어 버릴 작정이었습니다. 예수가 미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익히 안다고 여기고 이러저러한 소문을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변한 모습을 알아보려하지 않았으며 진실을 묻기보다 소문에 더 귀 기울였던 것입니다.

 

요즘도 이와 같은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는지요. 카더라 통신에 휩쓸려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요즘처럼 극심할 때도 없습니다. 그 피해는 소문에 휩싸인 당사자는 물론 결국 사회가 떠안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마음 약한 연예인들은 악플과 소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또 익명의 소문 덕분에 사회가 지불한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감추려 들고  솔직히 고백하지 못하는 풍조가 이렇게 만들었고 또 소문이 무서워 감추는 악순환이 벌어진 것입니다.

 

소문에는 정직이 최선의 대책입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선거 유세도중 인터뷰에서 마리화나를 피운 경험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솔직히 그런 적이 있었고 심지어 코카인까지 손 댄 적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릴 적에 흑인청소년들이 흔히 겪는 반항기를 자신도 겪었으나 회개하고 거기에서 벗어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게 대학까지 마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미국국민은 돌을 던지기는커녕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주었습니다. 우리 국민과 정부와 정치인들도 이런 자세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마르 3,25)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4`35)

 

이 대목과 병행구문격인 루카복음서 11,27-28절을 보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답하십니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이 말뜻은 아무리 잘 아는 처지의 상대라도 눈을 씻고 다시 살펴보라는 경구입니다. 성장하는 상대를 알아보고 자신도 성장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성장하는 데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계속 변화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특히 영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어떤 부류에 속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누구도 이 선택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과연 나는 이 다섯 부류 중 어느 부류에 속해야 할까요? 안타깝게도 한번 선택했다고 변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그만큼 부족하고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자기 자신의 이해타산과 관계없이 괄목상대하는 심정으로 자신과 이웃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하찮은 판단의 잣대를 버리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으로 여겨지는(1,29; 2,1) 곳으로 가십니다.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3,20). 그분의 새로운 가르침과 능력을 듣고 본 이들이 비참함에서 벗어나고자 몰려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섭니다(3,21). 


예수님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이 왜 예수님을 ‘미쳤다’고 판단하였을까요? 어떤 이는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군중들의 열광적인 반응과 존경을 보이자 정신이 나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마음이 삐뚤어져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았기에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라 합니다. 


또한 친척들이 마귀의 영감을 받아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보아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막고자 예수님을 붙잡아 가려 했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도록 호도하는 예언자나 환몽가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신명 13,6; 18,20). 로마 치하에 있던 당시 사형을 당하지 않더라도 고발되면 가족들이 수치를 당하게 될 것으로 보고 그리 했을 거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판단은 신학적인 동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친척들은 가족과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한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평범한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방식과는 전혀 달리 행하는 그분의 구원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어 자신들의 고정관념에 비추어 미친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친척들은 소문뿐 아니라 자신들이 목격한 것들을 토대로 그런 판단을 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부들, 죄인과 세리, 혁명당원 등으로 제자공동체를 구성하는 것부터가 그랬지요. 더 놀라운 것은 율법과 전통에 맞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고, 접촉해서는 안 되는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며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등 완전히 새로운 가르침과 행동방식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인간의 소리나 경험, 혈연관계나 인간적인 친분에 비추어 하느님의 손길, 그분의 뜻을 알아차리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靈)이시기에 영이 아니고서는 그분을 알아 뵐 수 없습니다. 인간의 시각이나 세속적인 가치판단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는 없지요. 


따라서 자주 멈추어 하느님 앞에 자신을 두고,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가져야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가 아니면 자신을 알아볼 수 없고 하느님을 향해 잘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고, 기도 안에서 자라나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나 계획을 알아보는 영적인 감각이나 지혜를 지니기 위한 기도가 중요한 까닭입니다. 


나아가 하찮은 판단의 잣대를 버려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판단을 넘어서 먼지에 지나지 않은 지식으로 하느님을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지요. 내가 원하시는 하느님, 내 판단기준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예수님을 바란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겠지요. 그 순간 예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 바로 미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주님,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잃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하찮은 판단의 잣대와 굳어진 사고의 틀과 묵은 습관에서 벗어나 당신을 구세주로 알아뵙게 해주소서! “임의 모습 찾고자 늘 몸달게 하소서!”(아우구스티누스) 




<무엇이 과연 미친 짓인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온전히 나를 내어놓음으로써

조건 없는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니면

내게 무엇인가 줄 수 있는

이들과의 계산적인 만남을 통해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 맺음이 미친 짓인가

 

더불어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벗들의 든든한 디딤돌로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니면

우러러보는 이 하나 없는

권력과 지위를 얻기 위해

보듬어야 할 이들 내팽개치며

앞으로 나가는 것이 미친 짓인가

 

서로를 죽이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 되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니면

자신과 맞지 않는 이들을

서슴없이 적이라 몰아세우며

부질없는 힘겨루기 속에

모두 죽여 가는 것이 미친 짓인가

 

억울하게 짓밟히고 빼앗긴

벗들을 곱게 품에 안고

함께 울고 함께 외치며

함께 살고자 저항하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니면

안하무인의 무도한 권력자에게

빌붙어 간 쓸개 다 내어놓고

잘 보이려 약한 이들을 손수 짓밟으며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미친 짓인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며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니면

양심과 영혼은 더럽힐지언정

한줌 흙으로 돌아갈 육신을 지키고자

빛을 어둠이라 어둠을 빛이라 강변하며

거짓을 호흡하는 것이 미친 짓인가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불신과 불의와 분열의 세상을

사랑과 믿음으로 하나 되게 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니면

삶의 참 의미를 잃어버리고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을 버리고

목적 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더러운 시류를 따르는 것이 미친 짓인가




<미쳤다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1월 21일의 복음말씀에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라는 구절은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21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의 친척들은 그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입니다. (원문에는 '생각했다.' 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친척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란 뒤의 31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소문을 듣고 걱정은 하셨겠지만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분류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미워하거나 안 믿는 사람,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요한복음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마귀가 들렸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당신은 마귀가 들렸군.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요한 7,20)"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인이고 마귀 들린 자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요한 8,48)"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요한 8,52)."


'마귀 들렸다.' 라는 말은 '미쳤다.' 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바오로, 당신 미쳤구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치고 말았군(사도 26,24)."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웃고 미워하고 놀리고 미쳤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8-19)."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 사람들의 욕망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들과 같은 편이 아닌 다른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다른 편'이 아니라 죽여 없애야 할 해로운 존재로 생각합니다. 추구하는 것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그곳 사람들의 마지막 범죄는 롯을 해치려고 했던 일입니다(창세 19,9).

온통 다 타락했던 그 도시에서 유일하게 의인이었기 때문에, 자기들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그래서 롯을 싫어하고 미워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재판을 받을 때 이런 말로 고소당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흑사병 같은 자로서,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 사이에 소요를 부추기는 자며 나자렛 분파의 괴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사도 24,5)."

'흑사병 같은 자' 라는 말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박해를 받은 이유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라 너무나도 해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것이고, 교회를 박해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박해도 사실 그런 이유였습니다.

서학 때문에 조선이 무슨 피해를 입어서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너무 낯설고 새로웠기 때문에, 그리고 가치관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조선 사회에 해로운 존재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박해를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로부터 무슨 피해를 입은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무슨 잘못을 알고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예수' 라는 자가 싫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 싫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과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옳지 않다고 하시니까, 지금 자기는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시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은 너무 힘들고 싫고 피곤하니까 자기에게 해롭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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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흑사병 같은 자’ 취급을 당하는 것을 각오하는 생활입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모두 다 한통속이 되어서 양심을 거스르는 어떤 일을 할 때, 집단 따돌림 당할 각오를 하고 양심선언을 하면서 내부 고발자로서 고난의 길을 걸을 것인가, 함께 한통속이 되고 공범이 되어서 편하게 살 것인가?

다른 길을 선택해서 고생할 것인가, 같은 길을 선택해서 편하게 살 것인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좁고 험해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적고,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고 편해서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마태 7,13-14).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동정 순교로

우리 마음을 울리는

성녀 아녜스 

축일입니다.


가장 연약한 소녀가

가장 강력한 

신앙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녜스 성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미쳤다는 오해까지

불러일으키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이 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삶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묻게됩니다.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의미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성녀 아녜스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됩니다.


삶도 죽음도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생생한 삶으로

생생한 봉헌을

일구어냅니다.


봉헌의 목적지에는

하느님과의 일치가

있습니다.


가장 뜨거운

봉헌의 피는

하느님 사랑이라는

피입니다.


하느님 사랑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아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순간순간이

하느님 사랑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향하는 봉헌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지요. 



전라도 광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랍니다. 아주 유명한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특히 ‘날’이라면 청산유수라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 집에 서울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똑 소리 나는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시어머니가 될 할머니를 잘 알기에 며느리가 엄청나게 시집살이를 할 것으로 예상했지요. 하지만 그런 일은 없고 오히려 며느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며느리가 들어올 때 시어머니는 벼르고 별렀습니다. 처음에 꽉 잡지 않으면 큰 일 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부터 생트집을 잡고 모욕도 주면서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그런 시집살이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의연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친정에서 그런 것도 안 배워 왔느냐?”고 생트집을 잡으면, “저는 친정에서 배워 온다고 했어도 시집와서 어머니께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모르는 것은 자꾸 나무라시고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대학 나왔다고 하느냐?”며 모욕을 주면, “요즘 대학 나왔다고 해봐야 옛날 초등학교 나온 것만도 못해요, 어머니!”라고 답변을 합니다.

매사에 이런 식이니 어떻게 갈등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자신을 한 없이 낮춘 며느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권위나 힘을 세상의 모든 것을 누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어쩌면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자신을 낮춘다는 것일 쉽겠습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마음의 상처도 보통 큰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된 낮춤을 통해서 진정한 승리인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척 바쁘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글쎄 음식을 들 시간조차 없었지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정신없이 사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주님의 뜨거운 사랑은 보지 않고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친척들조차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반대하려고 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낼 만도 합니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이런 사랑을 보여준 줄 아느냐? 너희 마음대로 살아봐!”라고 외치면서 벌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의 사랑 실천을 멈추시지도 않습니다. 자존심을 내세우고,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내세우고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는 그래서 삶 안에서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신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신은 우리 가슴에 머물 것이다(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운전 면허를 따지 못한 이유?

한 드라마에서 어떤 사람이 자동차 사고가 나 차 안에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는 운전면허를 따지 않을 것이고 자동차 운전도 안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의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돌아가셨니?"

"병원 침대에서"

"너의 할머니는?"

"침대에서"

"너의 아버지는?"

"침대에서..."

"가족들이 모두 침대에서 돌아가셨구나. 내가 너라면 그렇게 위험한 침대에는 근처에도 안 가겠다.“

교통사고의 사망률이 적지는 않지만, 침대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이 더 많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침대에 눕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지는 않습니다. 미리 걱정할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변화시키려면 미안하게 만들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여자는 남자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인다고 합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저희를 위해 열심히 하시는 모습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삽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쏟아내는 그 땀과 피가 없으면 금방 지쳐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 자랑하는 프로인 JTBC ‘99 만남’에 한 여성이 이렇게 남편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같은 회사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후 3개월 만에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편하게 자라서 고생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3~4개의 일을 한꺼번에 하면서 저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저의 꿈은 학원을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왔는데 남편이 일하다 허리를 다쳐 파스 하나 붙이고 누워있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을 가자니까 안 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자신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나의 꿈을 이루어주려고 저렇게 밤낮으로 고생하는데 나는 나의 꿈만을 이루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왜 이렇게 나를 미안하게 해. 당신도 꿈을 찾아. 당신은 꿈 없어?’ 그때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꿈을 이뤘어. 내 꿈은 당신이야. 당신만 행복하면 돼!’ 저는 이 말이 평생 잊히지가 않아요. 부러우시죠, 모두?”

정말 모범이 되는 남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남편의 희생이 삶의 힘이 되기도 하지만 나를 바로잡아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는 남편이 고생하는 모습에 비추어 자신의 꿈만 찾는 모습이 너무나 이기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미안해졌고 남편의 꿈이 무엇인지도 물어볼 수 있는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 양심을 바로잡아주고 깨끗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의 속죄제사는 신약의 예형이었습니다. 대사제가 짐승의 피로 가장 거룩한 장소로 들어가 죄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신약은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 우리 지성소인 양심 안으로 들어가 우리 죄가 바로 당신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깨닫고 미안해하며 죄를 몰아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카인이 아벨의 피를 땅에 뿌려 그 피가 울부짖는 땅에는 살지 못하게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 죄송하다면 더 이상 죄는 우리 안에 머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아이들을 깨끗하게 했던 그 방식을 다시 소개합니다.

박 목사와 살던 아이들은 배가 고파지면 견디지 못하고 다시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고 합니다. 아무리 타이르고 야단쳐도 고쳐지지 않고 주기적으로 도둑질은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박 목사는 아이들이 도둑질을 하고 돌아왔을 때 아이들보고 쇠파이프로 자신을 있는 힘을 다하여 10대씩 때리라고 시켰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박 목사를 때렸고 박 목사는 허리를 다쳐 40일 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박 목사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아이들은 누워있는 박 목사 주위에 둘러앉아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박 목사가 다 낫고도 그들은 그 시간만 되면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아이들은 절대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지 사람의 마음을 씻을 수 있는 것은 ‘피’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 가족 중 누구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죄를 지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매번 죄를 범하며 그리스도를 피 흘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도 둘러앉아 나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신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고 미안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행실을 돌아보아야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피는 나를 위해서는 헛되게 흘리신 피가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다른 누가 아닌 내가 그분을 그렇게 아프게 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 3,21)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미친 듯이 일해 본 적이 있나요?

미친 듯이 사랑해 본 적은요?


예수님도 미친 듯이

일하셨군요.

병자들을 고쳐주느라

식사도 못하였다네요.

하루이틀도 아니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

자신의 몸은 아랑곳 않고

미친 듯이 저렇게 일하니

친척들의 눈에

그냥 내버려 두면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여긴 것 같군요.


젊은 시절

그렇게 열정적으로

몸사리지 않고

살았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제 몸으로는 그렇게 못하여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만큼은

사그라들지 말아야 할텐데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 마음만큼은

잊지 말아야 할텐데요.


벌써 열정이 식어버리고

사랑이 식어버렸다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다시한번 우리 힘내봐요.

하느님 나라를 품에 안고

오늘도 힘차게 시작합시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코3,21)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친척들에게 들어갑니다.

보통 사람살이 그렇듯 소문을 들은 일가 친척 중 누군가는 마치 예수님과 그 가족을 위하는 냥, 호들갑을 떨면서 그의 부모들에게 살을 붙이기도 하고 떼어내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고요.

그리고 그 결론이 예수가 미쳤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그들이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근본도 모르는 어부들을 끌고 다니면서,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로 선동을 하고, 상종을 해서는 안 되는 죄인들과 어울리고, 심지어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겁 없이 도발하고 있다는 소문이 돕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고 다닌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옵니다.

그 소문이 이러한데 어느 친척들이 고운 시선으로 예수님에 대해 생각했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어야 했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옳은 것을 보고 미쳤다고 하면, 미쳤다고 하는 사람이 진짜 미쳤을 확률이 높습니다.

옳지 못한 것을 보고 옳다고 한다면, 세상이 미쳤던지 그 사람이 미친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혼돈을 느낍니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참으로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똑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먼저 식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옳은 것이라 철저하게 믿을 수 있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모두가 미쳤다고 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당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분의 옳으심을 믿는 것은 하나의 신앙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예수님께서도 당대의 사람들에게 미치광이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요즈음 방송매체들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다양한 분야의 사건들, 그 사건들에 대하여 우리는 혀를 차며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며 분노를 폭발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철저하게 미쳐가고 있는 세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그러한 사회를 만든 동조자이거나 방관자였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옳은 것을 옳다 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한 우리의 이기심이 생산해낸 세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의 주어질 시간들, 그 시간들은 더욱 옳은 것을 위해 살았으면 합니다.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복음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옳은 것을 따르는 우리여야만 합니다.

복음적 실천 때문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복음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 삶은 분명 아름다운 삶일 것입니다.




미쳐야(狂) 미친다(及). -제대로 미치야 성인(聖人)-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마음이 밝아지고 기분이 좋습니다. 딱 두절로 짧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복음중 오늘 복음보다 짧은 복음은 없을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일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역시 12년 전 여기 뉴튼수도원에 머물 때 일입니다.

"원장신부님, 강론이 아주 좋습니다.“

당시 원장신부님의 영어미사중 영어강론에 대한 어느 수도형제의 찬사였습니다.

"예, 어느 면이 좋았어요?“

반색하며 묻자, 

"아주 짧아서 좋았습니다.“란 대답에, 언뜻 스치던 신부님의 실망스런 안색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좌우간 말이든 글이든 기도든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라면 짧고 순수한 것이 좋습니다. 사실 마음이 간절하고 절실하면 저절로 짧아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 중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는 대목이 강렬합니다. '미쳤다'는 말마디가 좋은 묵상감입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습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입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누구나 무엇엔가 미치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허무한 세상, 재미없는 세상, 사막같은 세상,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 이게 인간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 달인(達人), 장인(匠人), 도인(道人)이지만 잘 못 미치면 폐인(廢人)이란 옛 강론 내용도 생각납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주교 학자나 복음의 예수님 및 모든 성인(聖人)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분명 미친 사람들입니다. 

제 정신이 아닌 거지요. 매일 새벽 3시마다 일어나 묵상하여 강론을 쓰는 저 역시 미쳤을 지도 모릅니다. 

직장 생활 8년만에 교직을 접고 제 나이 34세에 수도원에 들어올 때 찬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 반대했습니다. 무모(無謀)하기는 맨땅에 헤딩하는 모습이었고 모두가 걱정했습니다. 이 또한 세상 눈에는 미쳤음이 분명합니다.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 역시 당대 세인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미친 예수님께는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이자 집이었습니다.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정처없는 삶이셨지만 역설적으로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이요 집이었음을 뜻합니다. 오늘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라는 대목의 집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활동은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당시 엘리트 종교인들인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과의 빈번한 충돌, 상종 못 할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림 등 예수님이 가족 들 눈에는 미쳤다고 볼 수 뿐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교사들도 마귀 두목에 사로잡혀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몰아 붙였을까요. 

다만 예수님의 충실한 추종자들만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존경했고 무한한 신뢰를 보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제대로 미친 성자(聖子), 하느님의 아드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쳐야 미칩니다.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합니다. 

곳곳에서 제대로 미친 성인같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는 기쁨에 살 맛나는 인생입니다. 제대로 미쳤기에 마침내 하늘의 하느님에 까지 닿아 하느님을 감동시겨 부활하신 후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가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가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니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대사제 예수님께서 집전하시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제대로 미쳐(狂) 하늘까지 이르신(及)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미사 선물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제대로 미친 성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사도16,14참조). 아멘.




죽음의 문화를 바꾸는 긍정의 언어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중풍병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고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심으로써 자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드러내셨다. 사람들은 치유와 해방을 불러오는 예수님의 행적을 보며 놀라워 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그분을 배척하며 예수님을 붙잡아 없애려 하였다(3,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으로 여겨지는(1,29; 2,1)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3,20). 그만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은 대단하였고 하느님의 선은 넘치도록 풍요로웠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에 관해 악의적으로 중상 모략하여 퍼뜨린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3,21). 같은 지방에서 그분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왔기에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이 왜 예수님을 ‘미쳤다고 판단하여’ 그분을 붙잡으려고 나섰을까?


예수님의 친척들의 태도를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해보자. 무엇보다도 그분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던 동기는 바로 ‘소문’에 있었다. 그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잘 알았을 뿐이었고 하느님의 섭리나 계획을 알아보는 영적인 감각이나 지혜를 지니지 못했다. 그런 그들은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소문에 따라 피상적인 눈길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소문은 악의적이고 부정적인 소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들도 얼마나 자주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함께하며 깊이 헤아려보지도 않고 그저 들리는 험담과 중상모략, 악의적이고 부정적인 소문에 휘둘리는가! 그런 부정의 언어들이 생명의 하느님을 죽음으로 내몰아 죽음의 문화를 조장하게 됨을 의식하고 있는가?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한 또 다른 이유는 자신들의 경험과 기대에 예수님을 묶어두려고 한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틀 때문이었다. 친척들은 예수께서 고향과 친척, 직업을 저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셨기에 정신이상자 취급을 했다. 예수님의 형제들(요한 7,5)과 고향사람들마저도 그분을 믿지 않았다( 6,1-6).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경험과 혈연의 울타리 안에서 바라보았고, 나자렛 고을의 소박한 가정 출신의 동향인이라는 이미지 안에 그분을 가두어두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기대를 벗어나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유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의 눈길이 없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선과 자유와 그분의 영이 꿈틀거림을 잘 알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야 할 것이다. 또한 중상, 모략, 험담, 배척과 같은 부정의 언어를 멈추고, 서로를 살리는 칭찬과 격려와 지지와 관대한 배려와 속깊은 헤아림이 담긴 긍정의 언어를 통해 하느님의 혼이 숨 쉬는 살아있는 성전인 동료 인간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눈에 참으로 하잘것없어 보이는 이들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경이로운 능력을 알아보아야 하리라.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인간적인 차원에 묶여 소문에 휘둘리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그런 이들까지도 관대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될까! 바로 그 지점이 하느님 나라가 아니겠는가! 그분의 친척들처럼 눈이가려져 다른 이들을 미쳤다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에 떨어지지는 말았으면 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문만 무성하고

소문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은 안중에 없습니다.


둘러보면

다 우리의 자식들이요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문에 일조하는

우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기도에

일조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사랑받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랑 자체가

빈약하기에

관계 자체도

위태로운 것입니다.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보다는

한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까지 너무 쉽게

부정하려드는 우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사랑의 이중성을 보게 됩니다.


보이는 폭력보다

더 무서운 건

안 보이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성입니다.


조화를 이루며

산다는 건

인식의 격차를

줄이며 산다는 것입니다.


모든 걸 너무나

빠르게 판단하고

서둘러 단정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삶은

판단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지는

사랑의 참된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저마다의 삶에서

소중한 선물을

내쫓기 위한

구실과 핑계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한 봉헌의

시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삶 자체가

빈약한 것은

봉헌 자체가

빈약한 것입니다.


모든 관계의 시작과 끝이

봉헌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어렸을 때 저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공부에 취미가 그다지 많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가까이 하는 것보다는 밖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이 더욱 더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리고 이렇게 사제로 살면서 책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또한 책으로부터 얻는 지식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래서 시간이 나면 책을 읽으려 하고 있고, 또 남들보다 많은 책을 읽고 있다고 자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책 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새벽에 일어나서는 책 보는 것이 더욱 더 어렵습니다. 소위 ‘노안’이라는 것이 저에게 일찍 왔기 때문에, 책을 읽으려면 돋보기안경을 꼭 착용해야만 합니다. 돋보기 쓰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오랫동안 쓰고 있으면 약간의 두통이 생기지요.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이 점점 책을 멀리 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책을 예전처럼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에 대해 ‘괜찮아. 노안인데 어떻게?’하면서 스스로에게 위안의 말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부모님 집에 갔다가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글쎄 아버지께서 커다란 돋보기를 책에 얹어놓고 힘들게 책을 읽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전에도 그런 모습을 봤었지만, 그때에는 제가 눈이 좋았을 때라 그 어려움을 몰랐었지요. 그러나 여든이 훨씬 넘으신 노령에 돋보기를 가지고 책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에 더욱 더 제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게 됩니다. 


복자이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남기셨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성공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노력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아무런 노력 없이 각종 이유를 들어 쉽게 판단하고 또 쉽게 포기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중요한 것은 성공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노력이라는 과정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일행이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가장 많이 이해해야 하는 친척들이 오히려 잘못된 판단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쉽게 예수님을 판단했고 또 쉽게 예수님을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스스로의 판단을 내세워 주님께 불평불만을 계속해서 던지고, 또한 주님 곁을 떠나겠다는 협박을 과감하게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내 삶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주님의 활동을 이해하도록 노력해보십시오.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기보다는 주님의 판단으로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이러한 이해의 노력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몸을 맞추려 하지 말고, 그 기준 위에 걸터앉아 휘파람도 불고 하늘도 보라(헨리 프레데리크 아미엘).


복테스트

“다음 중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어느 책에서 보게 된 질문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합니다.

- 돈을 더 버는 것

- 영혼의 반쪽을 찾는 것

- 체중 5kg 감량

- 새 집으로 이사

- 승진, 성공

- 더 좋은 유전자


여러분은 어떠한 것이 여러분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까? 이 책은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어떤 목표로만 생각합니다. 궁극의 결과에서만 얻는 것이 행복인 것처럼, 그래서 항상 힘들고 어렵다는 말을 입에서 놓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행복은 어떤 결과나 목적에 달려 있기보다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입니다. 그 선택 자체가 행복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매 순간을 이 행복과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박대남 신부님

사람의 말은 끝이 없이 퍼져 나갑니다. 퍼져 나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영원히 남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말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누가 그랬다더라”라는 말을 시작으로 참으로 많은 말들이 공동체 안에서 떠돌아 다닙니다.

어느 선배 신부님이 사석에서 이런 가르침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 특히 신앙인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 ‘어느 누가 다쳤다더라’라는 한마디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 사람 내일 장례미사 한다더라, 라고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앙인들이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경우가 더 많고, 사제의 입은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주님의 사제들이 말을 잘못하면 사람을 죽이게 된다. 인간 사제의 말보다는 주님의 사제로서 주님의 말을 하라.”

우리는 주님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우리의 근본을 흔들어 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 많은 말들로 사람을 살렸습니까? 아니면 사람을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드셨습니까? 아니면 미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존재감

박공식

지난 가을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던 박지성 선수에 대한 보도가 생각난다. 한 시즌 38경기 중에 3분의 1 정도의 경기를 소화한 가운데 3위를 달리고 있던 박 선수 팀은 중요한 경기를 맞게 된다. 하위팀과의 경기지만 선두권에 달라붙느냐 아니면 중위권으로 밀려나느냐의 기로에 서 있고, 이 경기를 마치면 강팀들과의 대결이 남아 있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그날 경기에 나서는 스타급 주전들이 부상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대거 결장하고 박지성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대부분 신예들이었다. 박 선수 팀은 상대팀에게 시종일관 밀리며 졸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박지성 선수만은 달랐다. 그는 전반 종료 직전에 골을 성공시켰고, 후반에도 일대일 무승부 상황에서 경기가 끝나기 직전 드라마 같은 골을 성공시켜 팀을 승리로 이끌고 선두권 진입에 교두보를 마련한다. 이러한 박지성 선수를 두고 언론에서 미친 ‘존재감’ 이라는 표현으로 극찬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미쳤다는 소문이 나고 그 소문을 들은 성모님과 친척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오신다. 당신 아들이 남다른 데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미쳐 있었다. 사람들도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미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귀 들려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하느님께 미쳐 있었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미쳐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유다인들의 스승이라고 자처했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그냥 평범한 존재감을 지닌 사람들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봤을 때 예수님은 그야말로 하느님 아버지께, 하느님 나라를 위한 ‘미친 존재감’ 을 지닌 분이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살면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가족을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내놓을 만큼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야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 사람은 미쳤다.’ 는 ‘미친 존재감’ 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은 다음 산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염소와 황소의 피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게 피와 관련한 추억은 별로 없지만 오늘 히브리서에서 정화의 피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고등학교 때 얘깁니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삶에 대한 고민이 크고 저 자신에 대한 불만이 머리 꼭대기까지 꽉 차 있을 때였는데,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친구와 함께 산에 올랐습니다. 정상에서 한참을 머물다 나무를 꺾어 그것을 짚으며 내려오는데 마침 완전히 술에 취한 군인이 마주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린 저희에게 시비를 걸다가 제 친구의 몽둥이를 뺏어 제 친구를 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제가 먼저 그 군인에게 몽둥이를 휘둘러 그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시뻘건 피가 막 흘러내리는데 놀라거나 죄책감이 들기는커녕 뭔가 제 안에 있던 나쁜 것들이 싹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평온이 제 안에 깃드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그의 피가 내 안의 나쁜 것들을 제거하고 평온케 하였을까?

그의 흐르는 피가 내 안에서 끓어오르던 피를 식히고 저에게 평온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피는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것입니다.

피가 있으면 살고 피가 빠지면 죽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수혈을 하면 살아납니다.

그러니 피를 본다는 것은 삶의 다른 모든 주제들을 잠재우는 삶과 죽음이라는 두 극단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불평불만이 불 뱀에 의해 쏙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랜 기간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은 그 불편한 상황과 거친 음식 등 모든 것이 불만이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최고조에 달하자 불평을 한꺼번에 쏟아놓았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불 뱀을 보내 불평을 한 사람을 물어 죽게 하자 불평은 싹 사라지고 살려만 달라고 합니다. 죽게 되자 삶이 보이고 그렇게 큰 문제였던 것들은 하찮은 것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살기 위한 처방이 바로 자기들을 죽게 한 그 불 뱀을 보는 것, 그것도 불 뱀을 높이 매달아 놓고 모두 올려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우러러봐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욕정을 잠재우고 피는 모든 욕구들을 정화한다. 그렇게 피는 죽음으로 살린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고 죽기 전에 죽어야 죽은 뒤에 산다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그 참사랑의 피는 우리의 피를 대신하여

우리의 욕구들을 정화하고

욕정에 죽게 함으로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을 섬기게 합니다.


 


"미쳐야(狂) 미친다(及)"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미침(狂)’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미치다’라는 뜻이 재미있습니다.

‘1(일정한 곳에)가 닿거나 이르다.

2(언행이)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다.

  어떤 일에 지나칠 정도로 푹 빠지다.’였습니다.

어떤 경지에 미치기 위해서는 그 일에 몰두하여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여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정상인과 미친 사람은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치고 싶은 갈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치지 않고 맨 정신으로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무엇에, 어떻게 미치는가가 문제입니다. 제대로 하느님 사랑에 미치면 성인이고, 시에 미치면 시성, 그림에 미치면 화성, 음악에 미치면 악성이요, 제 분야에 제대로 미치면 장인이나 명인입니다. 반면 이상하게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술에 미쳐 술중독이요, 돈에 미쳐 돈 중독, 성에 미쳐 성 중독, 일에 미쳐 일중독, 도박에 미쳐 도박 중독 등 끝이 없고 결과는 폐인입니다. 누구나의 미치고 싶은 열정을 어떻게 발산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사랑으로 제대로 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정상인의 시각으로 볼 때 집과 친척, 직업을 버리고 무리들과 떠돌아 다니며 생활을 하는 예수님은 미쳤음에 분명합니다. 하늘나라의 비전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미친 예수님이셨습니다. 제대로 미친 사람들이 역사를 이루어 갔고 하늘의 별들처럼 세상의 어둠을 밝혔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인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지 상상해보십시오. 미친 사람들 없는 세상 참 재미없을 것입니다.


미치기로 하면 예수님의 후예들인 우리 수도승들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사랑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머리 깎고 검정 수도복에 수도원 안에서 죄수(?) 같은 생활은 미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제대로 미치기 위해 하느님 안에 정주하면서 하느님 찾는 열정을 기도와 일에 쏟으며 균형 잡힌 삶을 사는 여기 수도승들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잘 못 미친 게 아니라 하느님 사람에 제대로 미쳐 매력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미친 사람들에게 괴력이 나오듯 하느님 사랑에 제대로 미친 예수님이나 성인들, 수도승들에게 나오는 내적 힘의 괴력입니다. 


얼마 전에 저도 제대로 미친 아름다운 부부를 만나 감동했습니다.

연상의 불구의 여자와 연하의 카이스트 박사 출신의 부부 간의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정상인의 상식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남자 쪽 부모의 집요한 반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막을 수 없어 결혼하게 되었고 몇 년 만에 뜻밖에 만난 두 분의 밝고 행복한 모습에 안심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 안에서 제대로 미친 두 분을 기적처럼 부부로 맺어 주신 것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이상하게 미치면 폐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사랑에 미치는 것입니다. 로 매일 거행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이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새 계약의 제사는 바로 미사성제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우리 역시 완전한 성막의 미사 안에서 대사제 그리스도의 은총에 참여함으로 영원한 해방을 얻어 하느님을 향해 제대로 미치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은총)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충실히 섬길 수 있게 합니다. 이 모두 새 계약의 제사인 미사 은총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여 당신 사랑 안에서 제대로 미친 성인의 삶을 살게 해 줍니다. 아멘.




두려움이 환상을 만든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TV 특강이란 프로에서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이정원 교수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탄생한 고전소설 콩쥐팥쥐전을 재해석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같은 이름의 서로 다른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지만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가재공실록]이란 책에 기록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철산 지방에 살던 배좌수에겐 장화와 홍련이라는 어여쁜 딸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일찍 죽고 홀아비 배좌수는 새 장가를 들었습니다. 후처 허씨는 매우 사악한 여자였습니다. 남편이 전처의 딸들만 사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쥐의 껍질을 벗긴 다음 그것을 증거로 자신의 아기를 장화가 낙태했다는 누명을 씌웁니다. 누명을 쓴 장화는 연못에 빠져 죽습니다. 그리고 이를 알게 된 홍련도 따라 죽습니다.

그러나 이 고을에 새로 부임한 원님마다 부임 첫 날 밤에 비명횡사합니다. 그러자 조정에서 용감한 무관 전동흘을 파견합니다. 전동흘에게도 첫 날 밤에 원귀 장화 홍련이 찾아와 억울한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전동흘은 사연을 듣고 계모 허씨를 심문하였는데 계모 허씨는 이번에도 껍질을 벗긴 쥐를 증거물로 가져옵니다. 그러자 장화 홍련이 다시 나타나 그것의 배를 갈라보게 하여 결국 계모 허씨를 처단하게 됩니다.

이정원 교수는 이 소설에서 처음부터 ‘계모는 나쁜 사람이어야 한다.’는 편견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소설에 표현된 계모의 허씨의 외모를 들고 있습니다.

계모 허씨의 용모는 “두 뺨은 한 자가 넘고 눈은 통방울 같고 코는 질병 같고 입은 메기 아가리요 머리털은 돼지털 같고 키는 장승같고 소리는 승냥이 소리요 허리는 두 아름은 되는데 그 중에 곰배팔이며 수중다리에 쌍언청이를 겸하였고 그 주둥이를 썰면 열 사발이나 되고 집에 두기가 한때라도 어려웠으나...”라고 표현됩니다.

배좌수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생긴 부인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소설에서는 허씨가 죽게 되자 새 장가를 드는데 그 때는 18살 여자와 혼인하게 됩니다. 왜 진작 그런 여자와 혼인하지 않았을까요? 

 

정말 계모는 처음부터 외모가 저렇게 그려질 정도로 나쁜 사람이었을까요? 물론 전 처의 자녀보다 자신이 낳은 자녀를 더 사랑하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도 계모로 살아온 자매를 만나보았는데 그 분은 전 처의 자녀들이 편애한다고 느낄까봐 오히려 전 처의 자녀들에게 자신의 자녀들보다 더 잘해주려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자녀들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계모도 계모 나름입니다. 그러나 왜 이런 소설이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요? 누가 이 소설을 가장 좋아했을까요? 바로 당시의 아내들입니다. 그 때는 여자들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경우도 많았고 그래서 계모가 전 처의 자녀를 키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 때 당시의 아내들은 이런 현실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남편에게도 경종을 울려주고 앞으로 자신을 대신해 계모가 될 사람에게도 경종을 울려주는 내용이기에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아내들은 앞으로 누군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자신의 자녀를 키우게 될지도 모르는 바로 그 계모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미움 안에는 이 ‘두려움’이란 것이 숨어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모든 계모들을 추하고 못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환상 속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잡으러 옵니다.

당시엔 지금과 달라 가문의 집결력은 매우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라의 지도층들에 대항하고 모세의 율법을 고쳐가며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한다는 말을 듣고 가문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은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복음에 보면 가문만이 아니라 당신의 동네인 나자렛에서 배척당하고 심지어 재판 받으실 때는 그렇게 믿고 따르던 백성들까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이들은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예수님은 어떤 두려움 때문에 미움을 받고 돌아가셔야 했을까요? 사람들은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것을 쓰레기로 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잃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이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고 급기야 미운 사람으로 만들어 십자가에 못 박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이 예수님을 보면서 그 위에 밉고 추한 환상을 겹쳐지게 만든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세상적인 계산 때문에 성당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지는 않았는지요. 혹시 누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옳은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 사람을 판단하며 그 말을 따르려고 하지 않지는 않았는지요.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잃게 될 두려움을 극복해야합니다. 밭에 묻힌 보물은 모든 재산을 팔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계속 환상을 자아내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주님의 집에 찾아가면

이명옥 수녀님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엄마 품에 포~옥 안겨 간식을 받아먹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엄마는 고구마를 작게 잘라 아기 입속에 쏙 넣어주고 곧 우유 빨대를 입에 대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불혹의 나이가 지난 지금도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면 부러운 마음이 불쑥 고개를 내밉니다. 몸이 아프셨던 어머니 품에 별로 안겨본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픈 어머니를 위해 첫영성체 하던 날 저는 ‘제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걸 알아요. 우리 엄마를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선 친척들과 예수님의 집에 모여든 군중이 대조됩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시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었다는 걸 보면 군중은 치유자라고 명성이 나있던 예수님을 만나려고 그분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주님의 집 앞에서 기다리는 이들은 그분의 손길이 시급하고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겠지요. 반면에 예수님의 친척들은 단순히 소문을 듣고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섭니다. 하느님의 손으로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분에게 미쳤다니 가당치 않은 말입니다. 친척들은 그분이 구원자이심을 아직 모르는 모양입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처럼 예수님의 손길이 시급하고 꼭 필요한 이들은 주님의 집에 갑니다. 제 어릴 적 어머니의 병고는 주님의 집에 찾아가 은총을 청하도록 저를 안내한 인도자였습니다. 당신 집으로 찾아가 애원하는 절박한 이들의 외침을 흘려듣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당신 곁에 모여든 이들의 간청을 들어주시고, 품에 안고 더욱더 사랑해 주십니다.




주님의 집인 우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오늘 좀 이상한 표현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합니다. 마르코복음에만 있는 표현인데, 이에 비해 마태오와 루카복음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마르코복음에서도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니 가족들이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러 오기까지 하지요.


주님은 떠나오신 분입니다. 하늘 집을 떠나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고, 고향 집을 떠나 이 고을, 저 고을을 떠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집으로 가셨다 할 때 그 “집”은 당신 집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성찰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 집을 버리시고 우리 집을 당신 집 삼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이 집은 건물(house)이 아니라 가정(home)이라는 것을. 가족이 울타리 되어주고 사랑이 감싸주는 생명의 아기집이란 걸. 호화롭고 겉치레뿐인 가구나 장식은 하나도 없고  사랑이라는 소박하고 편안한 안락의자와 침대뿐인 집이란 걸. 이 집은 주님도 편히 쉬어가시고, 주님 뿐 아니라 주님의 떨거지들도 편히 쉬어갑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레오나르도의 집으로 가셨다.” 

“그 다음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데레사의 집으로 가셨다.”


 


우리 자신을 망치는 가장 큰 유혹

강인봉

'내가 미쳤어~ 미쳤어~' 얼마 전에 유행한 노래의 한마디입니다. 뭔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게 움직일 때에 미쳤다는 표현을 씁니다. 저 같은 경우도 한참 댄스음악이 유행하던 시기에, 10대 가수들이 가요계의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통기타 음악으로, 30대에 가수 활동을 다시 시작하자 많은 동료 선후배들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너, 미쳤니?'였으니까요. 


하지만 오늘 말씀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군중에게 인정받고 계신 예수님을 가까운 친척들이 미쳤다고 붙잡으러 오다니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군중의 호응을 받으시는 만큼 친척들의 위상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일 텐데요.


친구가 어려울 때 같이 아파해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친구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친구의 기쁨을 진정으로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누가 잘 되었다고 하면 일단 부러워하고 배 아파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요? 특히 그 사람이 내가 잘 알고 있는, 이른바 별 볼일 없던 사람이라면 하느님은 왜 이리 불공평한 것일까라는 푸념을 늘어놓기가 쉽습니다. 

누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면 뭔가 부정을 저질렀을 거라고 의심하고 시험을 잘 봤다고 하면 그간의 노력을 인정하기보다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폄하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질투와 교만, 우리 자신을 망치는 가장 큰 유혹인지도 모릅니다.

 


 

신명나는 예수님의 모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다보면 참으로 썰렁하고 난감하며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어린 상주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텅 빈 영안실, 하객석의 반에 반도 채워지지 않은 결혼식장, 관중이라곤 손꼽을 정도인 그라운드에서 맥없이 달리고 있는 2부 리그 선수들... 

저희도 언젠가 수도원 큰 행사를 끝내고 다들 낭패감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잔치 준비를 잘 했습니다. 이런 저런 볼거리도 준비하고, 잔치 음식도 넉넉히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저희가 잡은 날짜가 다른 단체의 행사날짜와 겹치고 말았습니다. 거의 파리만 날렸습니다. 준비했던 많은 음식물 처리 차 계속 같은 음식 먹느라 한 3일 다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장례식이든 결혼식이든, 축제든 행사든, 일단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좋더군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음식이 동이 나고, 다들 뒷바라지하느라 파김치가 되어도 썰렁한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단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명나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데, 너무나 많은 인파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기진맥진했습니다. 식사 때조차 놓칠 정도였습니다.  

너무나 시장했던 나머지 예수님께서는 잠시 휴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머물고 계시던 집으로 가셨습니다. 우선 주린 배라도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식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밥 한술 뜨는 둥 마는 둥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밖으로 나와야했습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고 좋은 일에 몰두 할 때,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해 선행을 베풀 때, 정말 중요한 일을 할 때는 먹는 것 그 까짓 것 생략해도 좋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정말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저도 가끔씩 그런 체험을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일 때, 교회와 수도회를 위해 정말 필요한 일일 때, 누군가에게 정말 필요한 일을 할 때는 식사뿐만 아니라 잠까지 포기해가며 일을 할 수가 있더군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환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등 백성들의 절박한 요구에 응답해나가면서 그들은 정녕 신바람이 났습니다. 밥 같은 것 먹지 않아도 정말 행복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봉사자들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은 이웃들을 위한 봉사에,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헌신에, 세상의 평화와 인류의 공존, 공동선이란 큰 가치에 정신없이 빠져 들다보니 식사뿐만 아니라 자신이란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기까지 하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 되면 좋겠습니다.





어제는 본당에 4분의 새 신부님께서 오셔서 첫 미사를 봉헌해주셨습니다. 강론을 해 주신 신부님께서는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그만두려고 짐을 몇 번이나 쌓다 풀었다 했는지 모른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만큼 신부가 되기까지 쉽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특히 이 사제의 길이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기 때문에, 신부가 되어서도 쉽지 않은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기도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저께 인천 교구에는 아주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만 31살밖에 되지 않으신 젊은 신부님께서 선종하신 것입니다. 처음으로 나간 본당에서 열심히 사목을 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며칠 동안 물과 음식을 드실 수 없는 상태에서도 항상 본당의 일이 먼저였다고 합니다.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는 날에도 유아세례 등 본당의 일을 다 처리하고, 본당 부제에게 본당의 일들을 하나하나 지시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아쉽게도 주님 곁으로 떠나셨지요. 


이 신부님 역시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먼저 생각했었습니다. 


사실 어떠한 신부도 자기를 위해서 신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즉, 돈 많이 벌기 위해서 그리고 높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신부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의 비판은 얼마나 많은지요. 물론 인간의 몸을 취하고 있는 이상 부족한 부분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비판을 위한 비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모습 역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또 다른 모습임을 기억하면서 기도해드리고 사랑하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드실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정말로 바쁘게 사목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은 이렇게 열심히 사목생활을 하시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쳤다면서 붙잡으러 나섰다고 오늘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지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반대하고 나섰을 때의 예수님 기분은 과연 어떠하셨을까요? 하느님의 일들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기억할 때, 몸과 마음을 다해 성원해주고 기도해줘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힘을 빼앗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힘을 빼앗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하느님의 일이지만 내 몸이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다면, 2천 년 전 예수님의 힘을 뺏는 그 모습을 따르며 사는 것이 됩니다. 


이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힘이 되어 주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힘이 되어 주는 것 역시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일이 이 땅에 완성될 수 있도록 하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라는 공을 던졌을 때 그것을 모두 다 받지 말고 거절해라. 모든 행복과 고통은 그때 뿐,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피에로의 행복

어떤 젊은 사진사가 매주 토요일만 되면 피에로 복장을 하고 병원을 찾아가 어린이 환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아이들은 토요일만 되면 그 사진사가 나타나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사진사는 그런 아이들의 바람을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어째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익살이 많았던가 봅니다. 제가 익살를 부리면 사람들은 몹시 즐거워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몹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자 함부로 남을 즐겁게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더불어 저의 행복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피에로 복장을 하고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었지요. 이 일을 하면서 저는 잃어버렸던 행복도 다시 찾게 되었답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는 남에게 기쁨이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기회를 무수히 놓치곤 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타인의 행복과 나의 행복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신중한 판단

조명연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좋으신 분, 사랑 가득하신 분? 

혹시 예수님에 대해 미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도 예수님을 가장 잘 안다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요? 그때에는 ‘혹시 그럴지도 모르겠는데?’하면서 의심을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미친 사람처럼 취급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적혀 있지요. 당시에 미친 사람은 마귀 들린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린 사람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이 더는 활동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친척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100% 틀렸습니다. 그 판단이 틀렸음은 후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지요. 

순간의 감정으로 판단을 내려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랫동안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우리는 바르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순간의 판단이 얼마나 옳을 수 있을까요? 순간의 판단으로 예수님을 미쳤다고도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오랫동안 주님 안에 머무르며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합니다.



 

미쳐야 미친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아주 짧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이상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으로 가셨다.”는 표현과 “미쳤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고 하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집이 있었던가요?

아마 여기서의 집은 계속 머무시던 고향집이라기보다는 가시는 곳마다 잠시 머무시던 집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예수님은 定處없이 계속 떠돌던 분, 그러므로 고단하고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나그네, 순례자이셨습니다. 집이 없고, 定處가 없다는 것은 一定한 것이 없고 不安定입니다. 一定한 處所가 없을 때 不安定하고, 一定한 시간표가 없을 때 不安定합니다. 이렇게 一定한 시간과 공간이 없는 불안정한 삶을 사는 예수님이 친척들에게는 비정상적으로 보이고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어디에 미치면 나머지 삶은 불안정하게 됩니다.

그림에 미치면 그림을 그리느라 일정한 시간표가 없고 수석에 미치면 돌을 떠돌아 일정한 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쳐야 비로소 거기에 도달한 것입니다.

“미치다”라는 뜻에는 두 가지 뜻이 있지요. 정신이 나갔다는 뜻의 “미치다”도 있지만 어디에 到達하다는 뜻의 “미치다”도 있습니다. 이때의 “미치다”는 완성과 완전의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손이 못 미치다, 생각이 못 미치다는 말에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 미치지 않은 사람은 아직 하느님께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반대로 하느님께 나아가 하느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완전히 미쳐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친척들이 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미치신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늘 생각이 하느님께 미치고 집에서나 길에서나 늘 하느님 생각뿐이며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미치긴 미치셨는데 精神이 나간 것이 아니라 精神이 一到하신 것이고 바로 하느님께 一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우리도 제대로 한 번 미쳐보실까요?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두 자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언니는 그래도 부모를 무서워해서 야단치면 듣기라도 하는데 동생은 워낙 당돌해서 부모가 아무리 겁을 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번은 아빠가 두 아이를 야단치고 있는데 언니는 울먹울먹하며 반성의 기미가 보였지만 막내는 여전히 눈만 말똥말똥 뜨고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빠는 이번에야말로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강하게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이제부턴 너 내 딸 아니니까 어서 고아원 가게 엄마한테 입을 옷 달라고 그래.” 하며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딸은 겁도 안 먹고 엄마에게 가서 옷을 달라하고 챙겨 입는 것입니다.

아빠와 엄마는 여기서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차로 아이를 태웠습니다. 아이는 겁도 없이 부모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떨어진 놀이터에 아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이제부턴 네가 알아서 살아!”

그래도 아이는 겁을 먹지 않고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질세라 차를 타고 떠나는 시늉을 했습니다. 몇 미터쯤 가니까 아이가 차로 막 뛰어오는 것입니다. 아빠는 이제 됐다 싶었지만 창문을 내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아빠 아니라고 하는데 왜 따라와?”

아이는 아빠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아저씨, 고아원까지만 태워주시겠어요?” 

부모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이를 태워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는 사연입니다.

 

‘뭐 저런 아이가 있을까?’ 싶지만 실명까지 거론하는 것을 들으니 사실이긴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 나를 온전히 다 이해해주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습니까? 남편은 나를 100% 이해해 줍니까? 그래서 내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로부터 이해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면 마치 혼자만 화성에서 온 사람처럼 외로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먼저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나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누구에게 가장 많은 잔소리를 듣겠습니까? 아내가 그가 하는 행동이 못마땅해서 잔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사람은 왜 저래? 참 이해가 안 가!’ 하면서도 가끔은 내가 그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상이 아니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다 안 좋은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시고 그 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잡으러 옵니다.

당시엔 지금과 달라 가문의 집결력은 매우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라의 지도층들에 대항하고 모세의 율법을 고쳐가며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한다는 말을 듣고 가문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입니다. 가장 믿고 힘을 주어야 할 친척들로부터 예수님은 배척을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복음에 보면 가문만이 아니라 당신의 동네인 나자렛에서 배척당하고 심지어 재판 받으실 때는 그렇게 믿고 따르던 백성들까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함께 해 왔던 제자들도 한 명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예수님을 홀로 남겨놓고 모두 도망쳐버립니다.

 

세상에 예수님만큼 큰 사랑을 주신 분도 없고 또 예수님만큼 이해받지 못한 분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독특해서 이해받지는 못하더라도 그 길이 올바른 길임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힘은 사람들보다는 하느님께 기대하게 하여 실망하는 일이 없게 합니다.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아 다시 사랑이나 정을 주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자들에게 상처받은 신부님들은 다시 본당 나가기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께서 원하는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하면 사람들의 이런 판단은 나에게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지 말고 영원히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는 하느님께 먼저 모든 희망을 겁시다. 주님께 거는 이 믿음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혹은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게 만드는 힘을 줄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바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번은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에 갑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파트 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서, 관리원이 출입하는 차량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부 차량이 들어올 때면 “어디 가세요?”라고 항상 묻습니다. 그러면 아파트 동과 호수를 불러주어야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아파트 입구에서 “어디 가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글쎄 부모님 사시는 아파트의 동과 호수가 어떻게 되는지 도대체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백 몇 동인데……. 그리고 호수는 어떻게 되지? 13층 맨 왼쪽이니까 1301호인가?’

결국 ‘잠깐만요.’ 라고 말한 뒤에 수첩을 보고서야 제대로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부모님 집이라고 해서 저절로 아파트의 동과 호수를 기억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부모님 집이라도 자주 가지 않으면 아파트 동과 호수를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잘 아는 사이라는 이유, 나와 가깝다는 이유 등을 내세워서 “나는 그 사람을 너무나 잘 알아. 그 사람은 이러저러한 사람이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자주 만나고 가까이 산다고 할지라도 내가 아닌 남이기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행동하면서 섣부르게 판단합니다. 그 결과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아픔과 상처를 전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친척이라는 가까운 관계이기에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고, 지금의 행동으로 보아 분명히 미쳤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서는데, 이는 아마도 가문의 명예를 염려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판단만을 내세우다보니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었고 심지어 하느님 아들의 행동을 미친 행동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과 가깝다면 가까울 수 있는 친척이라는 점에서 우리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반대자가 되어 예수님의 행동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예수님 믿은 지 오래되었다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요. 죄를 지으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아.”하면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그러면 안 되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하면서 엄격한 잣대를 내세웁니다.

혹시 지금 내 자신이 예수님의 반대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뜻에 먹칠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어렵게 배운 것 가운데 하나는 용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계속 바쁘게 움직이며 낙관적인 삶의 태도를 가질 때 자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다.(루실 볼)


19세입니다(‘행복한 동행’ 중에서)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여배우 사르 베르나르의 일화다.

연극 ‘잔다르크’의 주연을 맡은 그녀가 연습을 끝내고 관객 앞에 선 첫날이었다. 2막의 법정 장면. 잔다르크로 분한 사르 베르나르가 피고석에 섰고 재판관이 심문을 시작했다.

“피고는 몇 살인가?”

흔들림 없는 눈빛의 잔다르크가 나직히 대답했다.

“19세입니다.”

그때였다. 그녀가 이 대사를 내뱉자, 객석에서 일제히 박수가 쏟아졌다. 극본상 크게 의미 있는 장면이나 대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자 베르나르는 객석을 돌아보며 살며시 머리를 숙여 화답했다.

이 난데없는 박수와 여배우의 몸짓은 사르 베르나르의 당시 나이를 알면 이해가 된다. 여전사의 모습으로 무대에 선 그녀의 나이는 68세였다. 관객들은 칠순을 앞둔 노배우가 여전히 무대를 떠나지 않고 열연하는 것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19세의 젊은 여인 역을 맡을 수 있었던 그녀의 자신감에도 열렬한 지지를 보내 주었다. 꺼지지 않는 열정을 간직한 베르나르에게 용기와 도전의 상징인 잔다르크 역은 적격이었다.

무엇이든 자신감으로 설득하라. 열의에 가득 찬 모습을 보여 주는 것보다 더 좋은 설득은 없다. 자신을 불태우는 열의는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돼 동조와 지지를 끌어내는 힘이 있다.


 


정말 미쳤어!

김연희 수녀님

가톨릭 신자가 겨우 한 명밖에 없었던 우리 동네의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던 그 신자는 동네에서 자신의 종교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신앙의 불모지에서 어찌된 일인지 그 아랫집에 사는 어린 남매가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라서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수녀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모두 영세하여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변화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동네 사람들은 그 집안은 이제 망했다, 그들은 정신 나갔다고 손가락질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반응을 들으면서 ‘그들이 미쳤다’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우리의 신앙상식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겠지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해서 그분을 붙잡으러 몰려오는 친척들을 만납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이 표현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는지 생략하고 있습니다. 자기실현을 위해서만 투자하고 그것을 최선의 가치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적인 가치에서 벗어난 이들을 보며 ‘제 정신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어쩌면 참 신앙인은 제 정신이 아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뜻,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의 삶을 매순간 살아갈수록 “정말 (주님께) 미쳤어!”라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믿는 구석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두 자매인데 언니는 그래도 부모를 무서워해서 야단치면 그것이 먹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생은 워낙 당돌해서 부모가 아무리 겁을 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한 번은 아빠가 두 아이를 야단치고 있는데 언니는 울먹울먹하며 반성의 기미가 보였지만 막내는 여전히 눈만 말똥말똥 뜨고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겁니다.

아빠는 이번에야말로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강하게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이제부턴 너 내 딸 아니니까 어서 고아원가게 엄마한테 입을 옷 달라고 그래.” 하며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딸은 겁도 안 먹고 엄마에게 가서 옷을 달라고 챙겨 입는 것입니다.

아빠와 엄마는 여기서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차로 아이를 데려갔습니다. 아이는 겁도 없이 부모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차에 태워 조금 떨어진 놀이터에 아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이제부턴 네가 알아서 살아!”

그래도 아이는 겁을 먹지 않고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차를 타고 떠나는 시늉을 했습니다. 몇 미터쯤 가니까 아이가 차로 막 뛰어오는 것입니다. 아빠는 이제 됐다 싶었지만 창문을 내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아빠 아니라고 하는데 왜 따라와?”

아이는 아빠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아저씨, 고아원까지만 태워주시겠어요?” 

부모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이를 태워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는 사연입니다.


저는 이 사연을 들으며 많이 웃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해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요? 사실은 저도 조금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왔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나가라고 한다고 그냥 나간다고 어머니가 더 열이 받으셨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부모님이 나를 버리실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두 아이 중 부모를 끝까지 신뢰한 아이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막내가 아니었을까요? 막내가 아주 부모가 싫어 정말 고아원에 가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면, 실제로 막내는 부모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 겁이 없었던 것입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없다면 그런 당당함이 나올 수 없었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시고 그 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잡으러 옵니다.

당시엔 지금과 달라 가문의 집결력은 매우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라의 지도층들에 대항하고 모세의 율법을 고쳐가며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한다는 말을 듣고 가문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입니다. 가장 믿고 힘을 주어야 할 친척들로부터 예수님은 배척을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복음에 보면 가문만이 아니라 당신의 동네인 나자렛에서 배척당하고 심지어 재판 받으실 때는 그렇게 믿고 따르던 백성들까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함께 해 왔던 제자들도 한 명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예수님을 홀로 남겨놓고 모두 도망쳐버립니다.

세상에 예수님만큼 큰 사랑을 주신 분도 없고 또 예수님만큼 사랑 때문에 실망하셨어야 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은 하시되 실망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와 성모님은 당신을 실망시키시지 않을 것을 굳게 믿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힘은 두려움과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일들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아 다시 사랑이나 정을 주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신자들에게 상처받은 신부님들은 다시 본당 나가기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지 말고 영원히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는 하느님께 먼저 모든 희망을 겁시다. 주님께 거는 이 믿음이 나를 실망시키는 사람까지도 사랑하게 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성소 밖에도 계시는 성소의 하느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스라엘의 성전에는 ‘성소’가 있었고,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구별된 지역입니다. 이방인은 들어갈 수 없는 聖所가 있었고 정해진 사제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至聖所가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인도에 가서 빛의 축제 때 힌두 사원에 들어갔습니다. 힌두 신자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들어간 것입니다. 저는 외국인이기에 괜찮았지만 그 바람에 저를 안내하던 인도 신부님이 무차별 구타를 당했습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區別心을 경계하는 그들이 구별 정도가 아니라 차별을 하니 말입니다.


실제 있었던 얘기인지, 지어낸 얘기인지 모르지만 어느 관광객이 인도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바닥을 닦던 더러운 걸레로 식탁을 닦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더러운 걸레로 식탁을 닦느냐고 따졌더니 당신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구별하느냐고 반문하더랍니다. 실제로 제가 강가(갠지스) 강에 갔을 때 시체가 떠다니는 더러운 물에서 목욕을 하고 이빨을 닦고 성수라 하여 집에 가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걸레와 물은 더럽고 깨끗하고를 구분하지 않지만 강가 강은 다른 강과 달리 성스러운 강으로 구분하고 사람은 카스트 제도에 따라 철저히 구별하고  더 나아가 차별까지 합니다.


우리의 성당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는데 굳이 성당이라는 곳을 따로 정해 놓고 하느님을 거기에 가둬야 할까요?

물론 하느님은 성당이라는 장소에 갇혀계실 분은 아니시지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 이 산이냐 예루살렘이냐 하고 장소를 따지지 않아도 될 때가 온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히브리서가 얘기하듯 “그리스도께서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실” 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두 가지로 편재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기에 성당 안에서도 만나고 성당 밖에서도 만납니다.

성당 안에 성체로서 현존하시는 하느님도 만나고 성당 밖에 모든 것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도 만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성당 안에서만 하느님을 만나고 성당만 벗어나면 하느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당은 또한 우리 신자들의 독점적 장소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 장소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누구나 이곳에 들어올 수 있도록 개방되어야 합니다.

일본에 갔을 때  신자들이 아닌데도 성당에서 결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일본 교회가 허용한 것이고 많은 일본인들이 성당에서 결혼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후 저도 정동 수도원에서 두 차례 비신자 결혼을 주례하였습니다. 친구 결혼식 때 저희 수도원 혼배 미사에 참석했다가 자기도 친구와 똑같이 결혼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입니다. 저는 말씀의 전례 형식으로 결혼을 주례하였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어디에나 계시고 누구에게나 당신을 주시고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눈도 있지만 눈꺼풀도 있지 않느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 사람이란 존재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와 알고 지내고, 오랜 날들 그와 한솥밥을 먹었고, 숱한 희로애락을 그와 같이 해서 이제는 충분히 그에 대해 알겠노라고 자신하지만, 그래도 장담해서는 안 될 존재가 사람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 안다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라고 합니다. 나란 존재 안에는 4측면이 공존한다고 합니다.

① 나만 보는 부분이 있습니다. ② 나는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는 부분이 있습니다. ③ 나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도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④ 오직 하느님만 보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나간다는 것, 인간이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무한한 가능성, 끝도 없는 성장의 가능성을 지닌 대단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물론 “그냥 둬! 제발.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 하시는 분에게는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을 알면 아는 만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좀 더 파악한다면 그만큼 더 하느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은 역시 아무도 못 보는 부분입니다. 사각지대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바깥은 쳐다보기 전에 먼저 바라봐야 할 곳은 내 안입니다. 이웃의 흠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쳐다봐야 할 곳이 내 발끝입니다.


한 공동체에 큰 과오를 범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정도를 넘어선 큰 실수였기에 다들 뭔가 큰 벌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도 스승께서는 잘못을 범한 제자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과오에 대한 아무런 질책이나 벌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흘이 지나도 스승님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의아하게 생각한 다른 제자들이 달려가서 따졌습니다. 

“스승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분명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저희에게는 눈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그 말끝에 한참을 껄껄 웃으시던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눈도 있지만, 눈꺼풀도 있지 않느냐?”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으로 인한 작은 소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이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활발히 사목활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기적도 일으키시고, 치유도 행하시며, 엄청난 메시지가 담긴 강론도 서슴없이 해나가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매료되어 그분의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 앞에 예수님의 친척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미쳤다는 자체 진단을 내리고 예수님을 광에 가두려고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 충만한 영성생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의치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우리 신앙의 대상인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우리 신앙생활의 깊이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더 그분을 사랑하게 되고, 그때 우리는 신앙생활의 참맛을 조금 더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나가는 것,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점점 바뀐 모습이 자연스럽고

이창걸

1999년 3월 미국연수에서 돌아오자 과에서 큰일이 벌어져 있었다. 전임 과장님이 장비관련 뇌물수수라는 이름으로 억울하게 구속된 것이다. 과거부터 고가의 장비가 도입되면 장비회사는 과의 발전기금으로 얼마씩을 기부해 왔는데 그 돈은 대부분 학술활동에 사용되고 사적인 용도로 사용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병원에서 개인 용도로 사용된 사례가 드러나면서 이런 기금을 받은 것 자체가 불법이라며 구속되었다. 

나는 당시 새 과장님과 상의해서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할 것을 제안했고 그때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기도모임이 열렸다. 직원들은 처음에는 전임 과장님이 구속되었기 때문에 모두 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와 성경을 읽고 나눔을 했다. 차츰 일이 해결되면서 기도모임이 끝나는 줄로 생각했는데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교회를 나가지 않는 직원들도 돌아가며 기도하게 되었다. 


모두들 내가 이상하다고 했고 미국에 다녀와서 180도 달라졌으니 한 번 더 다녀와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기도회 중에 기사장인 박 선생님이 나를 원망과 약간은 분노에 찬 모습으로 바라보던 것이 생각난다. 토요일 아침에 교회도 다니지 않는 자신이 왜 이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직원들은 서로를 위하는 기도, 환자를 위하는 기도로 발전했고 과의 분위기가 과거와는 달리 서로가 이해해 주고 환자들에게 친절한 과로 변하게 되었다. 


영동세브란스병원으로 파견되어 오면서도 직원들이 당연히 기도모임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세상 것을 추구하던 나는 어느 순간 변화되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변했다(미쳤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다. 그러나 내 삶의 방향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뀐 것은 사실이다. 삶의 방향이 바뀌고 처음에는 새옷을 입은 듯 어색했지만 점점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변화됨을 느낀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저와 반대 방향의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할머니! 손을 놓으세요. 제발 손을 놓으세요.”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면서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를 보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할머니가 “사람 살려”를 외치면서 소리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할머니의 손을 어떻게든 떼어놓으려고 안달입니다.


상황은 아주 간단합니다. 할머니는 난생 처음 에스컬레이터를 타셨나 봅니다. 당연히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겠지요. 그 두려움에 에스컬레이터의 옆 부분에 고정되어 있는 난간을 꼭 잡고 올라타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발은 에스컬레이터 위에 올라져 있으니 올라가고, 손은 고정되어 있는 난간을 꽉 잡고 있으니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손을 놓으시라고 제발 좀 손을 놓으라고 이야기하면서 손을 떼이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신속한 조치로 할머니께서는 다치시지 않고 지상으로 나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주님께 온전히 모든 것을 맡겨야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어떤 스승이 자신의 제자와 함께 숲으로 산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에 달라붙더니만,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깜짝 놀랐지요. 그래서 얼른 나무에 매달린 스승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나무에 매달린 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무가 스승을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도리어 나무를 꼭 잡고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스승님, 스승님께서 손을 놓으시면 나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맞다. 물질과 명예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물질과 명예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괴롭다고 그리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이란다.”


지금 나의 모습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에 찬 시선으로 미쳤다고 생각하는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꼭 잡고서 힘들다고 울부짖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손을 놓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이 새벽에 뜨거운 마음으로 묵상을 하게 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보세요. 새로운 것을 많이 볼 수 있답니다.


행복의 비밀 한 가지('좋은 글' 중에서)

행복해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십시오.

얼굴에 웃음을 자주 띠십시오.

팔을 높게 올리고 손뼉을 힘껏 치십시오.

힘차게 걷고 몸을 자주 흔드십시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자연과 자주 접촉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주 떠올리고,

사랑할 사람들을 찾아보십시오.

좋은 한마디,

힘이되는 글 하나

깊이 간직하십시오.


좋은 공기 속에서 살거나

좋은 물을 계속 마시면

몸이 회복되고 건강해지듯이


좋은 생각,

행복한 느낌을 자주 접하다 보면

어느새 행복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습니다.

"자기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객기와 투신     

이중섭 신부님

마르코 복음 1장 9-11절부터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숨가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고 했겠는가 말입니다(마르 3,20). 그런데 여기 3장 21절에 와서 이야기는 갑자기 제동이 걸립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소문은 그렇지만, 예수님은 몸 바쳐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바쳐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투신(投身)이라 합니다. 투신의 반대는 객기(客氣)이지요. 객(客)이라는 말이 가리키듯 밖에서 들어와 일시적으로 덧씌워진 기(氣)의 발로입니다. 객기에 대비되는 말은 투신입니다. 평소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일상의 삶이 쌓이고 쌓여 그쪽으로 분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 투신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에 투신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마음만 앞서서 늘 객기만 부리며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객기와 투신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이 신명(神明)입니다.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는 것보다는 신명이 나서 기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명이 나서 일을 하다보면 투신할 날이 올 것입니다.

 



바람에 꽃잎 지듯

문화순 수녀님

바람에 꽃잎 지듯 가볍게 눈이 내린다. 눈송이가 얼마나 큰지 몇 송이만 받아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다. 알래스카의 나뭇가지는 겨울이 긴 탓에 실핏줄같이 가늘다. 굵으면 눈에 가지가 부러지겠지. 가지마다 눈꽃이 아름답다. 하느님께서는 꽃도 없는 긴 겨울을 백색의 눈꽃으로 꾸며주셨다. 참 놀랍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상이 온통 얼음 궁전으로 변해 있다. 얼음 요정들이 나올 것 같은 숲속이 궁금해 자꾸 숲으로 눈길을 둔다. 하얀 도화지로 변한 성당 마당에 가끔 사람 이름을 적는다.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을 그냥 밟기엔 너무 죄송스러워 하느님께서 보시고 기억해 주셔야 할 분들의 이름을 적어보는 것이다. 

우리 수녀원 옆집에 혼자 사는 남자분이 이사를 왔다. 아직 인사는 나누지 않았지만 마음이 자꾸 쓰인다. 좋은 이웃들이 있다고 우리가 먼저 찾아가야 할까? 그러나 남자 혼자 있는 곳에 수녀들이 찾아가기엔 뭣하고. 가만히 보니 참 부지런도 하다. 새벽같이 커튼을 젖히고 눈이 내리자 즉시 눈사람 두 개를 만들어 집 쪽으로 거리 쪽으로 세워두었다. 그분의 마음이 우리한테도 전해지는 것 같다, 따뜻하고 포근한 마음씨 좋은 이웃으로. 

예수께서도 참 부지런히 다니시며 일을 하셨다. 예수님이 동네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여와 병을 치유받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좋은 일을 못마땅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대편과 대화를 하다 보면 ‘저 말은 시기심에서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분명히 좋은 일을 가지고 부정적인 말로 매도하거나 옳은 일을 한 사람을 그릇되게 판단하는 일들이다. 위선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그를 매장하려 한다. 남의 말은 방수처리가 잘된 옷처럼 스며들지 않게 하면서 남에게 독설을 퍼붓는 사람들이다. 대개 착한 사람들은 그 위선자들의 영악한 머리를 따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착한 사람이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 잘못되게 보인다. 그래서 세상?죄는 더 크다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는 것을 보고 마귀가 들었다고 하는가 하면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저렇게 한다고 떠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사람의 심성이 똑같은지. 시편에 보면 ‘마음이 올바라야 찬미가 어울리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먼저 마음을 고쳐야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를 시기하거나 미워하거나 그리고 나와 다른 그 누구를 비난하는 일은 없는지 마음을 살펴보아야겠다.

 



예수님이 미치셨다?

김홍태 신부님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분주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분의 일행이 가는 곳마다 군중들이 몰려들어 음식을 들 겨를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군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그분을 찾아다니는데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다니!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못 받는가 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이들이 예수님이 베엘제불, 곧 마귀 두목에게 사로잡혔다고 떠들어댔기 때문일 것입니다(마르 3,22).

그러나 오로지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찾아 그들에게 위로와 용서를 전하며 진리를 선포한 예수님이 어째서 미쳤다는 말입니까? 미치고 마귀 들린 건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선을 베풀 때에도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 스스로 나팔을 분다(마태 6,2).

그들은 기도할 때에도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6,5).

그들은 단식할 때에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침통한 얼굴을 하고 다닌다(6,16).

그들은 부모에게 해드릴 것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말만하면 부모를 봉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15,5-6).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23,4).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23,5).

그리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란다(23,6-7),

그들은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성전보다 황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23,16-17).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23,23).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율법학자들이요 바리새이들입니다. 도대체 누가 미쳤고 마귀 들렸다는 겁니까?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는 인도 마발 지방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 지방에서는 악마의 상을 희게 칠한다고 합니다. 악마는 흔히 정결과 정직의 탈을 쓰고 인간에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이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리를 선포하고 실천하신 예수님을 오히려 마귀 들렸고 미쳤다고 말합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오늘날 현대 사회도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을 미쳤다고 말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거꾸로 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그러나 우리 크리스챤들은 아무리 세상이 뒤집혀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며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 잘못 미치면 폐인(廢人)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갈 곳은 많은 것 같은 데 막상 가려하면 갈 곳이 없고, 만날 사람은 많은 것 같은 데 막상 만나려하면 만날 사람이 없는 우리의 역설적 현실입니다. 

그래서 매일 주님을 만나기 위해 미사에 오는 우리들입니다. 또 여기 수도원을 찾는 많은 이들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고, 여기 아니곤 마음 털어 놓고 이야기 할 곳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많은 장소들에, 사람들인데 갈 곳이 없고, 만날 이가 없다는 사실이 참 신기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통하는 장소나 사람이 생기면 한없이 빠져들게 됩니다.

이래서 삶이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것입니다. 외로움, 쓸쓸함, 고독함, 인간의 본질적 현실 같기도 합니다. 

하여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탈선하여 방황하기도 하고 미치기도 합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 되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 됩니다. 제대로 미쳐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온전하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이요 세상입니다.

하여 돈에 미쳐 돈 중독이, 마약에 미쳐 마약 중독이, 도박에 미쳐 도박 중독이, 술에 미쳐 술 중독 등 갖가지 중독으로 폐인이 되기도 하고, 반면 자기 전문 분야에 제대로 미쳐 예인(藝人)도 되고, 철인(哲人)도 되고, 장인(匠人)도 되고, 도인(道人)도 됩니다.

그러니 제대로 미쳐 나름대로 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성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사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의성(醫聖)이라,

시인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시성(詩聖)이라,

음악으로 일가를 이룬 이를 악성(樂聖)이라,

바둑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기성(棋聖)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결국 하느님께 제대로 미쳐 성인으로 사는 게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별난 성인이 아니라 하느님에 미쳐 하느님 중심으로 참 나를 살아가는 이가 성인입니다. 

이래야 욕심의 구름 걷혀 맑고 튼튼한 영혼으로 세상 것들에 중독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도 깊이 있고 거룩하게 살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제대로 미친 분입니다. 예수님을 이해 못하는 친지들 예수님이 미쳤다 하여 붙잡으려 왔다 합니다. 

가정을, 고향을, 친척을 버리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예수님,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미친 행색이었을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이 단조로운 반복의 일상, 미치지 않고는 살아내기 힘들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로 하느님께 미쳐야 풍요롭고도 새로운 정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매일 새 하늘과 새 땅을 살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 제대로 미쳐 사는 데 기도와 일의 규칙적 삶의 리듬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하느님 아닌 세상 것들에 미치면 중독되어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사실 미치기로 하면 가정, 고향, 직장, 재물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온 우리 수도자들도 예수님과 똑같이 미친 사람들입니다. 

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는 말이 있습니다.


제대로 미쳐야 제정신의 성인으로, 참 사람으로 제자리에서 살 수 있습니다. 

매일 미사 은총으로 세상 중독을 해독시켜 주시고 하느님께 제대로 미쳐 맑고 튼튼한 영혼으로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히브리서 말씀대로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더욱 잘 섬기게 하십니다.

 

한량없는 미사성제의 은총입니다. 아멘.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영양가 만점의 의미 있는 하루>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위해서, 형제들을 위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런 날, 저녁은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합니다. 잠자리에 들면 마음이 얼마나 뿌듯해지는지 모릅니다. 비록 ‘뒷골이 땡기고’, 삭신이 쑤시지만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는 마음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듭니다.


반면 하루 온종일 허송세월할 때가 있습니다. 축 쳐진 몸으로 하루 온 종일을 TV 앞에서 보낸다든지, 쓸 데 없는 대화나 근심걱정으로 ‘영양가 전혀 없는’ 하루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 저녁은 얼마나 마음이 공허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 성인께서 후배들에게 이런 강조를 자주 하셨던가봅니다.


“형제들이여, 일, 일, 일을 하십시오. 휴식은 천국에 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끊임없이 몰려드는 군중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던 예수님과 제자들 삶의 한 단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즘 보면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바쁘다고 합니다. 연세 지긋한 할머님들께서도 한번 모이자고 하면 바쁘다고 하십니다. 스케줄 확인해봐야 한다며, 서로 시간 맞춰야 한다며, 한번 모이는 것이 여의치 않습니다.


저 역시 바쁩니다. 때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 때문에 바쁜지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조용히 제 일상을 관찰해보니 어떤 때 노느라고 바쁩니다. 쓸 데 없는 일, 무가치한 일, 교회나 세상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일에 뛰어들어 헤매느라 바쁩니다. 전혀 아닌 길로 접어들어 다시 빠져나오느라 바쁩니다.


이제는 보다 의미 있는 일 때문에 바쁘면 좋겠습니다. 보다 사목적인 일로 인해 바쁘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좀 더 밝게 하는 일, 이웃들의 삶을 드높이는 일로 바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목적 열정으로 인해 바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얼마나 바빴던지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끼니마저 거르며 예수님과 제자들은 복음 선포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으면, 얼마나 깊이 투신하셨으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오해까지 했습니다. 자기 몸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식사마저 건너뛰며,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 치유활동에 전념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미쳤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주님처럼 미쳤다는 소리까지는 아닐지라도 몸과 마음을 바쳐 복음 선포에 한번 투신해보면 좋겠습니다.


의미 없는 하루, 영양가 없는 하루, 그저 그런 하루, 그래서 허전하고 슬픈 하루가 아니라 우리의 에너지를 완전히 한번 쏟아 붓는 하루,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나는 미치고 싶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으로 당당하게 '하느님께 미친 놈, 복음에 미친 놈,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남들은 욕이라고 뱉어내는 미친 놈이라는 소리가 제 귀에는 어떤 말보다 더 귀한 칭찬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다들 '하느님께 미친 놈, 복음에 미친 놈,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소리 듣기를 싫어한다기 보다, 하느님께, 복음에,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미치기를 꺼려하는지도 모릅니다.

 

혼신을 다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앞뒤 가리지 않는 광신적인 무엇으로 비춰지고,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교묘히 줄타기를 하면서 적당히 타협하는 삶이 지혜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여지는 풍토 안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제로서 살아가면서 함께 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도대체 어떤 말과 행동으로 주님의 길에 헌신하자고 격려하고 이끌 수 있을 지 망설여지는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예전에 물불 가리지 않고 교회 청년 활동을 할 때 함께 했던 동료 후배들에게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주님의 일에, 지금 하고 있는 교회 청년 운동에 미친 놈들이 필요하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말을 하기가 솔직히 겁이 납니다.

 

세상을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원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은 있지만 몸이 따르지 않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책망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시간 내가 먼저, 아니 나 혼자만이라도 거침없이 주님의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아직도 내 뜨거운 가슴 속에는 지금까지 나를 키워주고 지탱해준 포기할 수 없는 꿈, 바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용솟음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기쁘게 '현실은 모르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주님에 미친 놈, 복음에 미친 놈,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외로운 진보의 길

박상대 신부님

일년 중 가장 짧은 복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막상 오늘 이런 대목이 ’복음’으로 봉독될만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늘복음도 복음(福音)이다. 문맥상의 뜻을 살피기는 좀 어렵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산에서 선발하여 뽑아 세운 12제자를 데리고 예수께서 다시 산을 내려오시어 집으로 가셨다. 여기서 집은 가파르나움에 있는 시몬의 집을 말한다.(1,29; 2,1) 그런데 예수께서 집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또 다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모여든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필요한 청을 들어주셨을 것이며, 제자들은 스승 곁에서 시중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이 미쳤다는 소문과 함께 가파르나움에서 45Km 정도 떨어진 예수의 고향 나자렛의 친척들에게 전해졌을 것이고, 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예수를 붙들어 데려가려 했을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12제자의 선발은 마치 주교서품식이나 사제서품식과도 같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자가 사제서품을 받았던 날(1988년 2월 6일)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혼미하다. 다음날 첫미사를 마치고도 한참 지나서 축하식장에 참석해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사실 그 때는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몰랐다. 서품식과 첫미사를 마치자마자 첫강복(benedictio prima)을 받을 신자들의 줄은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졌었고, 정성껏 강복을 베풀던 필자는 결국 중간에 붙잡혀갔다. 그러나 그 때 ’미친’ 일을 하다가 붙잡혀 간 것은 아니다. 아무튼 지금도 서품식과 첫미사의 날은 생애 최고의 기쁨과 은혜의 날로 기억된다. 어찌 나의 날들을 예수님의 날들과 비교할 수 있으랴.

 

  우리가 식음을 전폐하고 어떤 일에 몰두하면 ’정신이 나갔다’거나 미쳤다’는 말을 듣게된다. 또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종종 ’미쳤다’는 말을 듣게된다. 주지하다시피 예수님의 도래는 새로움의 시작이요, 그분의 활동은 새로움의 연속이다. 예수께서 몰두하시는 일은 기존의 관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와 관계를 세우는 것이다.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문도 바로 이런 맥락으로 이해된다. 예수를 미쳤다고 보는 생각은 결국 당시 예수를 반대하거나 외면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예수의 인척과 친척들도 예수를 오해하고 불신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예수의 반대자들이 백성의 지도층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이는 곧 가문의 명예와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진보(進步)와 보수(保守)는 공존(共存)하기 힘들다. 예수님의 진보적 행보(行步)에 모두가 동감하고 동참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분명히 과욕이다. 진보는 늘 외로운 길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길을 묵묵히, 그러나 자신 있게 가실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또한 외롭고 쓸쓸한 길이 될 수도 있다

 




오랫동안 냉담을 하고 있는 딸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딸에게 간절하게 부탁합니다.
“제발 부탁이다. 딱 한 번만 나와 함께 성당에 가자.”
딸은 오랫동안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머니의 바람을 한 번 채워드릴 생각으로 허락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믿지도 않는데 성당에 가면 뭐해.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는데 시간만 아깝지.’라고 생각하면서 이번을 마지막이라고 다짐했습니다.
미사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기도하신다고 성당에 들어가셨고, 자신은 미사 시간에 맞춰서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성당 휴게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흉보는 소리가 들리고, 또 다른 자리에서는 어떤 분이 자기 자식 자랑을 실컷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휴게실 밖으로 나오자 이번에는 어떤 자매 두 사람이 큰 목소리를 지르며 다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 화가 난 그녀는 성당에 들어가 집에 가겠다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흉보고, 자기 자랑 하고, 여기에 다투기까지 하는데, 이런데서 무슨 미사가 의미 있느냐면서 말이지요. 그 순간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평생 성당에 다니면서 주님만 봤는데, 너는 딱 하루 성당에 와서는 참 많은 것도 봤구나.”

그 순간 딸은 크게 반성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보는 수준과 어머니가 보는 수준은 크게 다르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자기 수준만큼 보인다고 하지요. 주님과 가까운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주님이 보이는 것이고, 세상에 가까운 사람은 어떤 상황이 찾아와도 세상만 보일 뿐입니다. 가까운 것이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까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잘 모르겠다면 지금 내게 보이는 것들을 따져보시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거짓된 행동이 많이 보이면, 내가 거짓과 가까이 하는 것이지요. 미워하는 사람이 많이 보이면, 미움 등의 부정적인 것들과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행동이 많이 보이면, 그만큼 내가 사랑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보이면, 나 역시 기도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반대자였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는 소문을 내지요.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 소문은 정말로 강력한 힘이 있었나 봅니다. 글쎄 예수님의 지지자가 되어 주어야 하는 친척들조차 이 소문을 듣고 주님을 붙잡으러 나설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도 있고, 또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귀 들렸다는 소문에 붙잡으러 왔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의 말과 행동을 가까이 하기에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어떤 것들이 보이십니까? 주님만이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많이 보고 적게 말하고 더욱 적게 행동한(J.헤이우드).
 
내 이웃을 새롭게 바라보세요. 
우리는 나의 이웃을 늘 새롭게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이웃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다면, 또한 평가하거나 비난하는 눈길로 본다면, 그리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생각으로 바라본다면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시선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마르 10,21)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성경에서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를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죄나 허물을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의 마음으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나의 이웃들을 향해 그런 시선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새롭게 바라보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한 사건을 바라보면서 현재도 그럴 것이라고 단정 짓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 이웃을 새롭게 바라보면 어떨까요? 특별히 그 이웃 너머에 주님이 계신다는 생각으로 우러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을 느낄 수도 또한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과 믿음. -최고의 예방제이자 치유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림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보다 영육의 아픔에 더 좋은 예방제나 치유제도 없습니다. 정상인과 광인狂人은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극심한 충격으로 누구나 미칠 수 있습니다. 하여 많은 이들이 심한 심신의 질환을 앓거나 자살 하기도 합니다. 
몸은 기억합니다. 트라우마는 뇌와 오장육부에 새겨집니다.
“몸에는 비극적인 경험의 흔적이 남는다. 트라우마의 기억이 내장 감각기관으로, 가슴을 찢고 속을 뒤틀리게 하는 감정으로, 자가 면역 질환과 골격, 근육계 이상으로 암호화 되어 남는다. 마음, 뇌, 내장기관의 커뮤니케이션이 감정 조절에 성공하는 지름길이라면 환자를 치료하는 방식에도 전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어제 읽은 구절도 생각이 납니다. 하여 예수님의 치유에는 늘 ‘연민의 마음’과 ‘능력의 말씀’, ‘몸의 텃치’가 함께 했음을 봅니다. 주님은 누구보다 영육의 치유에 사랑의 텃치인 스킨십의 중요성을 잘 아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이런저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죄인이요 병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독서의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다음 모습은 당대 정상인들의 눈에는 비정상으로 보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합니다. 미쳐야狂 미칩니다及. 예수님은 분명 사랑에 미쳤습니다. 이처럼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이지만 잘못 미쳐 중독되면 폐인廢人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몰이해로 인해 내외적으로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갑니다. 혼자서는 못삽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 중심이 믿음이 뿌리 깊었고 추종자들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일치의 기도가 이런 스트레스와 상처에 대한 최고의 예방제이자 치유제였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사울과 요나단 부자의 장렬한 전사에 대해 다윗의 아픔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알게 모르게 미운정 고운정 깊이 든 사울과의 관계요, 요나탄과 우정의 사랑 관계 역시 한없이 깊었던 다윗입니다. 특히 아버지 사울에겐 충신忠臣이자 효자孝子였고 사울의 적대자인 다윗에겐 충실한 친구親舊였던 요나단의 온전한 인품은 영원한 감동입니다. 
‘사울이 애가를 지어 불렀다.’
슬픔의 아픔에 대한 치유에 애가哀歌 노래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사울의 진정성 넘치는 애가가 감동입니다. 이렇게 슬픔은 애가로 노래해야 영육의 상처도 속히 치유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다윗이 이런 충격적 슬픔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 중심의 깊은 믿음과 사랑 덕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요나탄과의 우정의 사랑 추억도 다윗의 아픔의 치유에 결정적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사랑의 치유입니다. 이런 사랑의 추억이 아픔을 치유합니다. 이런 애가뿐 아니라 우리 수도자들이 평생, 매일,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노래로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기도도 영육의 건강과 치유에 최고의 예방제이자 치유제입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육이 치유받기위해, 살기위해,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노래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텃치하심으로 치유해 주시고 당신 사랑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ㄴ).  아멘.



다름과 틀림
김동원 신부님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 버스를 타고 대여섯 시간만에 도착한 자그만 시골마을. 그곳 사람들과 농사를 지으며 함께 사시는 여든을 넘긴 선교사제와 며칠 지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가 이슬람이고 마을 한구석 힌두교
사람들도 두세 가구가 있었습니다. 동네에는 갓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처자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마을을 휘젓고 다니지만 밥때가 되면 누구든 그 처자를 불러 밥 먹고 가라고 합니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대충 옷을 걸친 모습, 누구라도 정상이 아니라고 알 수 있는 그는 무엇을 제지당하거나, 손가락질 당하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마을사람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를 붙잡아 가두기라도 할 듯한 친척들의 태도는 모든 차이를 대항해야 할 세력으로 바라보는
오늘 한국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좌우, 남북, 남녀, 노소 등등의 다양성을 획일화시켜 가는 사회의 무료함을 보여 줍니다. 이미 언어 습관 안에 자리잡은 혼란이 그걸 잘 드러냅니다. ‘다르다’ ‘틀리다’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수는 다름을 배척하려는 우리의 인식을 보여줍니다. 거울을 봐도 얼굴의 좌우가 같지 않습니다. 함께하지 못하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아버지 앞에 당신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신 것을 우리가 자꾸만 흩어 놓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나는 무엇을 모으고 무엇을 흩으며 사는지요?
 


풍문에 휘둘리지 않는 신앙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고, 갖가지 질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며,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리는 등 여러 방법으로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에 대해 놀라워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여겨지는(1,29; 2,1) 집에 가셨을 때,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섭니다(3,21). 혈연관계에 있는데다가 같은 지방에서 그분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왔기에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의 반응이 매우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의 태도에 비추어 우리 삶을 돌아봤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분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려고 했던 동기는 바로 ‘소문’이었습니다. 소문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이 아니고 그 진위를 알 수도 없는 그야말로 ‘세상에 떠도는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귀로 들은 풍문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믿거나 그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사소한 일, 미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영적인 지혜와 감각으로 헤아리는 속 깊은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지요. 

우리도 매일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살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나를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맡기고 단순하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사고의 틀에 그분을 가두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 좀 더 속 깊은 영성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말을 통해 소통하는 우리이지만 ‘떠도는 풍문’이 아니라 주님께 중심을 두고 그분의 눈으로 헤아리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해 못할 행동이나 사건들을 접할 때, 다른 이들의 말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성생활은 호기심을 발동시켜 들리는 소리를 좇는 삶이 아니라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헤아리는 ‘말씀이신 분의 마음’을 키워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좀 겪어봤다며 그 사람에 대해 잘 아는 듯이 얘기합니다. 그러나 수십 년을 같이 살아도 모르는 부분이 훨씬 많은 게 인간입니다. 

진위도 확인하지 않고, 관련 당사자인 양쪽의 얘기도 듣지 않고 판단하고 입에 올려 전하는 것이야말로 경솔함이며 일종의 폭력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아가 제한된 경험과 추측에 따라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어내고 전하며, 험담과 중상모략을 즐기는 참으로 유치한 ‘죽음의 언어’를 발설하는 것을 멈춰야겠습니다. 

오늘도 순수하고 단순하게 예수님을 받아들여 풍문에 휘둘리지 않고, 그분과 확고한 일치를 이루어 영의 눈길로 만사만인을 바라보고 소중하게 대하는 속 깊은 하루가 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모신 우리 생각은   
박윤식
어느 신부님의 고백의 일부이다. 나는 장남이고 올해로 아흔이 되신 어머니가 계신다. 가끔 서울에 일 보러 나가면 하룻밤이라도 어머니 곁에 자려고 늦은 밤이라도 찾는다. 머지않아 돌아가실 터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어머님 곁에 가기 전에 나름으로 고민을 한다. 동창 신부의 사제관으로 갈까? 아니면 야간열차를 타고서라도 교회로 돌아갈까? 생각할수록 얼마 남지 않은 그 시간, 어머니의 애정이 한없이 크다.
 
어머니는 곁에서 함께 자는 아들에게 밥 차리시는 것을 무척 기뻐하신다. 생선도 골라 주신다. 저수지 갈대 끝의 잠자리 허물처럼 껍데기만 남은 몸이지만 아들에게는 마지막 밥인 양 짓는다. 집을 나서면 잠시 뒤 어김없이 베란다 창을 여시고 아들의 뒷모습을 내다보시며 ‘잘 가라.’ 손짓하시면, 나는 ‘어서 들어가시라.’며 손 흔들며 답한다. 이런 순간도 ‘이제 몇 번이나 있을지’ 생각하며 나는 정류장을 향한다.
 
나는 사제가 된 뒤로 어머니와 형제, 친척들께 혈연의 의무를 다 못했다. 신자들의 혼인 미사 주례는 멀리라도 가서 해 주면서도 친척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바빠서가 아니다. 어머니는 ‘성당 일에만 열심인 것이 신부의 도리’라면서 친척들의 길흉사조차 알려 주시지 않았다. 아들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한 그 마음을 이해한다.
 
혈육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부모 형제 친척은 출가 뒤라도 어쩔 수 없는 인연이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분께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는 소문에 그분을 찾아 나섰다는 것도 공감하고 좋은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출가와 혈연 사이의 최소한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이해해 주는 것도 나이 든 ‘나의 태도에 맞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 일행에게 모여서 그들은 음식조차 드실 수 없을 정도였다나. 세상과는 다른 신선함과 매력이 있기에 예수님의 일행에게 모여들었을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지금 우리네 교회 공동체에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매력’은 과연 무엇인지? 도대체 누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소문을 냈었는지? 예수님을 만난 세리나 창녀, 병자 등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이런 소문들을 내고 다녔을 리는 아예 만무하다.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한다고 떠들고 다니던 이들, 안식일 법을 어기고 사람들을 치유한다고 예수님을 없앨 것을 궁리하던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며 어울린다고 불평을 터뜨리던 이들, 이런 이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악성 소문’을 내고 다녔을 것일 게다. 바로 당시 ‘사회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이리라.
 
사실 자신이 가진 온갖 기득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된 이들, 권력과 명예, 재물에 미쳐 있는 이들이 자신을 정상으로 보는 사회라면, 분명 예수님은 미친 사람이어야 할 게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회에서 미친 이 취급을 받지 못한다면, 그 반대편을 설쳐대는 이들이 미친 이가 되고 말기에. 이 이야기는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네 사회 모습이기도 하리라. 물질적 탐욕으로 끊임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꾼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온갖 수단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짐을 지우는 이들, 정의를 가장해서 또 다른 권력을 누리는 사이비 지도자들, 이런 세상이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시대라면, 마치 예수님을 닮은 ‘미친 이’가 꼭 필요할 게다.
 
이러한 기득권층의 뜬소문에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려고 몰려왔단다.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 기적이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미를 불러일으키는 은총이었으나, 어떤 이들에게는 시기와 질투, 중상과 모략의 대상으로 전락했으리라. 예수님을 모르는 많은 이는 그분의 기적에 하느님을 찬양했지만, 예수님을 가까이서 잘 알고 있는 친척들은 오히려 그분이 미쳤다고 여겼다. 지금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는’ 정녕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는지를 겸허히 묵상해 보자.




저는 지금 방학 중에 갑곶성지로 실습 나온 네 명의 신학생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제는 그 신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등산 다녀온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지리산에 다녀온 이야기였습니다. 너무나 힘들었고 그래서 이제 산에 간다고 하면 다들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요. 하지만 너무나 재미있는 것은 그때 그렇게 힘들었고 다시는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산에 대해서 안 좋은 추억이 있다고 하면서도, 이 지리산 등반한 이야기를 가지고 자그마치 30분 이상을 쉬지 않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네 명의 신학생이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서 말이지요.
분명히 기억하기도 싫은 추억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때 지리산 등산을 하게끔 했던 분에 대한 안 좋은 기억까지 갖게 되었다고 했는데... 5년이 지난 지금, 신학생들에게 그 힘들고 기억하기 싫은 추억들은 하나의 중요한 시간이 되어서 이렇게 서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그땐 그랬지’를 외치고 있지만, 그 당시에야 너무나 힘들어서 모든 것이 다 싫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다짐을 한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요?
“내가 다시 산을 가면 성을 간다.”
하지만 지금은 정작 웃으면서 그 이야기만을 가지고서도 오랫동안 말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그 어려운 일들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고 멋진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순간에는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좋았음을 느끼는 경우는 우리 삶에서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지금 그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합니다. 그래서 그 감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나요? 조금만 더 지켜본다면 오히려 내게 좋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참지 못해서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그래서 서로 단죄하는 죄를 범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적혀 있지요. 당시에 미친 사람은 마귀 들린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린 사람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이 더 이상의 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친척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100% 틀렸습니다. 그 판단이 틀렸음은 후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지요.
순간의 감정에 의지하는 판단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랫동안 생각을 했다하더라도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순간의 판단이 얼마나 제대로 될 수 있을까요?
순간의 판단으로 예수님을 미쳤다고도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오랫동안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하는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맙시다.

삶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없다('좋은 글' 중에서)
삶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삶에서의 그 어떤 결정이라도
심지어 참으로 잘한 결정이거나,
너무 잘못한 결정일지라도,
정답이 될 수 있고, 오답도 될 수 있는 거지요.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답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고 다니는 것이 습(習)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모두가 정답이 될 수도 있고
모두가 어느 정도 오답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지나온 삶을 돌이켜 후회를 한다는 것은
지난 삶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정답이 아니었다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정확히 내 자리가 맞습니다.

결혼을 누구와 할까에 무슨 정답이 있을 것이며
대학을 어디를 갈까에 무슨 정답이 있겠고,
어느 직장에 취직할까에 무슨 정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그때 그 대학에 입학했더라면
그때 또 그때...
한없이 삶의 오답을 찾아내려 하지 마세요

정답, 오답 하고 나누는 것이
그 분별이 괴로움을 몰고 오는 것이지
우리 삶에는 그런 구분이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어떤 가난한 사람이 마법의 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이 마법의 돌은 다른 금속들을 순수한 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조그만 돌멩이로, 기록에 의하면 이 조그만 돌이 흑해의 어느 해변에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돌은 아주 비슷하게 보이는 수많은 자갈 중에 있기 때문에 다른 돌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전혀 구별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돌은 보통의 돌보다 온도가 높기 때문에 만지면 따스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가난하기 때문에 팔 것도 별로 없었지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몇 가지 짐을 꾸려 무작정 흑해로 떠났답니다. 그리고 흑해의 바닷가에 이르러 텐트를 치고 자갈들을 하나하나 조사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갈을 집어 들어서 그것이 차가우면 던져버리기로 하고, 차례차례 집어서 바다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온종일 수많은 자갈을 집어 던지는데 시간을 보냈지만 그가 집어든 자갈 중에 마법의 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한 달, 일 년, 그리고 삼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마법의 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마법의 돌을 수중에 넣기만 하면 큰 부자가 되리라는 상상을 하면서 그 일을 멈추지 않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드디어 그는 하나의 따뜻한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 온기는 분명 햇빛 때문에 생긴 온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돌을 집어 들고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에 습관적인 그의 행동이 또 다시 나왔습니다. 즉, 평소와 마찬가지로 돌을 집어서 바다에 던지는 습관이 나왔던 것이지요.
그가 그토록 원했던 돌을 순에 얻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습관으로 인해서 얻었던 것을 다시 바다에 던지게 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 어리석음이 어쩌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습관과도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습관 중에서 가장 버리기 힘든 습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남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를 만나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못된 습관은 아닐런지요?

요즘 연예계가 아주 시끄럽습니다. 물론 평소에 관심도 없어서 연예인 이름도 잘 모르는 저이지만, 연예계의 X파일이 떠돈다는 말에 그 신문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게 되었지요. 이것 역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습관에서 나온 것이더군요.
“내가 재미있는 것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 볼래?” 하면서 건넨 것이 인터넷을 통해서 세상에 공개되었고, 그럼으로써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소문들이 더욱 더 무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그런 소문들의 한 가운데에 설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글쎄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께서는 미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남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그 습관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은총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보다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못된 습관으로 받은 은총을 버리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에 대해서는 무조건 좋은 말만 합시다.

인생의 지름길은 없다(<씨 뿌리는 사람의 씨앗 주머니> 중에서)
1880년대의 일이다. 엠마누엘 닝거는 매주 들르는 식료품점에서 물건 값으로 20달러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상점 직원에게 잔돈을 거슬러 받은 닝거는 가게를 떠났다. 그런데 직원은 손에 잉크가 까맣게 번진 자국이 묻었음을 알아차렸다. 닝거가 지불한 20달러짜리 지폐를 집었더니 거기에도 번진 자국이 있었다.
결국 닝거가 낸 지폐가 위조 지폐임이 밝혀졌다. 경찰에서는 그 위조 지폐가 걸작 수준이라고 말했다.
닝거는 노심초사하면서 20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씩 손으로 그렸던 것이다. 모두 진짜와 구분이 힘들 정도로 완벽한 복사본이었다.
그런데 가택 수색을 해보니 다락의 작업실에서 닝거가 예전에 그렸다가 내던져둔 초상화 석 점이 발견되었다. 이 그림들은 나중에 경매에서 점당 5,000달러에 팔렸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는 엠마누엘 닝거가 20달러짜리 위조 지폐 한 장을 그리는 데 걸린 시간과 5,000달러짜리 초상화 한 장을 그리는 데 걸린 시간이 거의 같았다는 데 있다.
인생을 살면서 지름길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면 닝거처럼 결국 자신에게서 도둑질을 하는 결과를 얻고 만다.
당신은 자신의 능력을, 잠재력을 활짝 꽃피우는 데 쓰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에게서 재능을 훔쳐내는 데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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