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싸움을 견디어 냈으니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32-39
형제 여러분, 32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33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34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5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
36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Seed grows of itself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는 겨자씨와 같다며, 군중에게 많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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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저자는, 많은 싸움을 견디어 냈으니 확신을 버리지 말라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땅에 뿌릴 때에는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커져 새들이 깃들이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던 가르침의 한 방식입니다. 오늘 첫째 비유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로 불립니다. 땅에 뿌린 씨는 저절로 자랍니다. 농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릅니다. 씨가 자라 수확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어들일 뿐입니다. 자연의 변화는 위대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하여 아무런 수고도 들이지 않지만, 봄이 되면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을 보여 주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놀랍거나 화려하지 않아 그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늘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당연하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 변화를 일상에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없던 싹이 나고 잎이 나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만 관심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싹이 자라는 과정을 하느님 나라에 비기십니다.
놀라운 변화이고 생명의 성장이지만, 우리는 농부처럼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의 매 순간에 현존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그렇게 우리 안에서 “저절로”, 곧 하느님의 섭리로 충만해집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 여느 때보다 우리를 포함한 창조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공동의 집’인 우리 삶의 터전이 오염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돌려 주위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고민하며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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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서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자체를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인간의 욕심과 욕망, 이기적인 삶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 여겨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고, 겨자씨가 뿌려져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듯 모든 민족들에게 퍼져 갑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우리 모두 그 완성을 기다리듯이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씨앗이 다 자란 뒤에는 그 어떤 나무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 나라의 끝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통하여 활동하는 하느님 나라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씨앗인 하느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 안에 뿌려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뿌려져 자라납니다. 이 씨앗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곧 모든 민족들이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하는지, 우리는 모르는 신비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믿고 희망하며, 애덕을 실천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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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저절로 싹이 터서 자라는 씨와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이 두 비유는 모두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앗이지만, 싹이 터서 자라면 어떤 푸성귀보다 커집니다. 가장 작은 씨앗에서 가장 큰 관목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이 비유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의 호응을 크게 얻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뿌려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서, 마치 하늘의 새들이 겨자 나무 그늘에 깃들이듯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측면을 설명해 줍니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고, 돌보기는 하지만, 어떻게 싹이 트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지 모릅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 뿌리신 하느님 나라의 씨앗도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것인데, 그 모든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고, 또 그 완성을 위하여 협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 완성을 인위적으로 앞당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힘과 능력으로 성장하고 있고, 결국에는 그 위대한 완성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농부가 자신이 키우는 작물에 애정을 쏟고 돌보듯이, 하느님 나라를 굳게 믿고 희망하며 그 완성을 위하여 신자로서 본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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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우리에게 미소하게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께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받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영양분으로 그 씨앗을 키우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자라고 커지게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므로 우리는 그 성장의 과정을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씨앗이 자라고 열매 맺고 추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은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맺게 계획되어 있으므로 그분께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싶고 좋은 일을 하고 싶을 때, 우리 안에 말씀의 씨앗이 자라는 것이고 하느님의 나라가 좀 더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과 실천들이 일상 속에 쌓여서 점점 커지면 신앙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잘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날마다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의 믿음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걱정거리와 가정에 주어지는 십자가들이 더 크게 보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씨앗이 큰 나무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때 수확의 시기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사랑하는 시간들을 보낼 때 은총과 생명의 상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간들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으로 변할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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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그리스의 철학가들은 만물이 생겨나고 자라며 소멸되는 원리가 무엇일지 무척 궁금해하였고, 거기서 ‘자연 철학’도 생겼다. 그 궁금증을 고대 중국인들이 시원하게 설명했는데, ‘자연(自然)이니 스스로(自) 그러하다(然).’는 것이다. 스스로 한 치도 어김없이 창조의 이법을 이어 간다. 자연의 틈새에 사는 인간은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혀 고통과 번뇌를 만든다. 자연은 남은 것을 덜어 부족한 생명을 살리는데,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자연의 송가’이다.
생물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늘, 공기, 햇빛, 물, 땅이다. 이 중요한 요소를 하느님께서는 창조 때에 거저 마련해 주셨다. 공기와 햇빛과 물과 땅을 돈으로 구해야 한다면 큰일 날 것이다. 한처음 자연이 있었고, 그 위에 사람이 태어났다. 과학 기술로는 단 한 평의 땅도 만들거나 늘릴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땅에 국경도 소유의 금도 긋지 않으셨다. 주인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땅에 주인이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대체 누가 그런 생각을 하였고 땅문서를 만들었을까? 국가라는 합법적 폭력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정말 이상한 나라다. 잡곡과 채소의 종자에 특허를 주고서 농부가 대대로 가꾸어 온 종자들을 불법이라고 법정에 기소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 곡식과 채소와 나무와 꽃은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노아의 방주에 보관되어 무상으로 전해졌는데, 미국의 회사들은 어떻게 자기들의 특허라고 보호받는 걸까? 악의 축이 하는 짓이다. 우리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해서도 계속 질문해야 하느님 나라의 권리를 되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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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하느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 마치 씨앗이 자라나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씀입니다. 씨앗 하나가 자라나 열매까지 맺는 과정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씨앗을 심은 바로 그다음 날에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마치 아기를 가지면 그 순간 바로 출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 달 가까이 임부의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본디 생명력을 가진 것들은 제빵기에서 빵이 툭툭 나오듯이, 인쇄기에서 인쇄물이 연이어 찍혀 나오듯이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바로바로 생산되는 것은 물건이지 생명체가 아닙니다. 생명력이 있는 것은 반드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이 한층 완전하고 깊어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믿음, 용서, 사랑과 같은 생명력 있는 것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씨앗처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용서가 잘 안 된다고,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기 어렵다고 좌절하지 맙시다.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그 모든 것이 자라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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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하고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홀시어머니와 외아들 사이에서 시집살이를 하며, 병 수발까지 해야 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 13,4)라는 구절을 마치 씨앗처럼 가슴에 심고 묵상하며 어려움을 견디어 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인내하며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순간들이 제가 하느님 앞에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을 보낸 때였습니다.”
한 자매의 신앙 고백입니다. 말씀을 씨앗처럼 품고 자신의 삶을 통해 물 주고 가꾸어, 지금은 가족 안에 평화와 기쁨의 열매를 맺었다는 나눔입니다. 신앙이 없고 말씀이 없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한 그루의 나무를 가꾸는 심정으로 살아 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주십니다. 다 자란 큰 나무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마다 하느님 나라를 열어 줄 믿음과 희망, 사랑의 씨앗을 주십니다. 우리가 비록 돌밭 같은 마음을 가졌을지라도, 우리 안에 심긴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물 주고 가꾸면, 어느덧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우리 자신이 큰 나무가 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믿음, 주님을 향한 희망 그리고 이웃을 품어 주는 사랑의 마음이 자라면 우리가 큰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이 나의 넉넉한 그늘 아래 쉴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바로 그렇게 자란 우리 큰 마음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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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저절로 자라는 듯이 보입니다. 때가 되면 잎이 나고, 시간이 흐르면 큰 나무가 되는 듯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저절로 자라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보이는 나무 뒤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습니다. 나무의 성장은 뿌리가 좌우합니다.
뿌리는 땅속에 있습니다. 지하에 흐르는 물과 영양을 빨아들여 줄기로 보냅니다. 그러니 뿌리의 활동이 멈추면 나무는 절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면 이미 뿌리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무에도 뿌리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시간’입니다. 그 부분이 튼튼하면 줄기는 자동적으로 건강해지고 꽃은 당당하게 피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기도 생활입니다. 드러나지 않게 성사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남모르게 베푸는 선행이 ‘신앙이란 나무’의 살아 있는 뿌리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믿음도 정성으로 다가가면 큰 믿음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정성 역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잘할 때 빛을 발합니다. 강한 겨자 나무도 뿌리가 시원찮으면 자라날 수 없습니다. 언제라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는 부분’을 좌우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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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생활을 하는 일부 생명체를 제외하고, 동물 대다수는 본능적으로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뇌가 본능적으로 원한다고 하네요. 특히 사람의 체취와 체온은 정서적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장기적으로 심혈관 질환과 면역 기능에 변화를 줘서 수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Harry Harlow)는 ‘가짜 원숭이 실험’을 했습니다. 새끼 원숭이의 우리 안에 먹이를 주는 ‘철사 엄마’와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헝겊 엄마’를 넣었습니다. 즉, 생존을 위한 먹이에 집착하는지 아니면 부드러운 감촉에 집착하는지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허기질 때만 철사 엄마에게 가서 우유를 먹을 뿐, 그 외의 시간은 헝겊 엄마에게 붙어 있었습니다. 본능적 욕구보다는 포근하고 따뜻한 품에 애착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더 하다고 합니다. 관계를 맺지 못하면 세상 안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거리두기를 하면서 힘들어합니다. 코로나 블루 라는 신종 우울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거리두기, 자가격리 등이 서로의 건강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관계 맺기가 필요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이 관계를 맺지 않으면, 세상 삶이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고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데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매 순간 관계를 맺으십니다. 평범하고 아무런 특징이 없는 일상 같지만, 그 안에서도 당신의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을 바라봅니다. 세상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있는 것만 바라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긍정적인 관계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뿌린 씨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가 채 느끼기도 전에 하느님 나라가 다가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아주 작고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아주 작고 사소한 우리의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날이 올 때까지 막연하게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면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야 합니다. ‘나중에’라는 뒤로 미루는 말을 통해서는 커다란 후회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독히 화가 날 때에는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생각해보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죽음에 대한 묵상
그리스 신화에는 비극적인 간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중 한 명이 생각납니다. 바로 트로이의 왕자 티토누스입니다.
그를 사랑한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티토누스에게 영생을 달라고 다른 신들에게 간청했고, 신들은 에오스 여신의 청을 기꺼이 들어줍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데, 왜 비극의 주인공일까요?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먹고, 자고, 또 운동도 하고, 아프면 병원을 찾아갑니다. 어르신에게 “오래 사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을 보면, 오래 장수를 누리는 것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그런데도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말합니다.
에오스는 깜빡하고 영원한 젊음도 함께 달라는 청을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점점 늙고 쇠약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하지만, 영원히 사는 것, 이것이 티토누스에게 주어진 비극적인 삶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자비로운 위안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죽음, 이 죽음을 위해 이 세상 삶을 잘 마치기 위한 노력이 왜 필요한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위로가 한도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이 아닐까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년 봄 수도원 성당 옆, 손바닥만한 텃밭에다가 몇 가지 채소 씨앗을 뿌릴 때였습니다. 어떤 씨앗은 너무나 작아서 손에 제대로 쥘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씨앗은 너무나 가벼워서 후 불면 날아가 찾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솔직히 씨앗들을 땅에 파묻으면서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씨앗들인데, 여기서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웬걸, 일주일이 가고, 이주일이 가고, 봄비가 한번 오고, 밭에 나가보니 기적 같은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저기서 무수한 새싹들이 고개를 쳐들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작고 하찮아보였던 씨앗 하나가 점점 자라나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을 만듭니다. 솎아먹고, 옮겨 심고, 따먹고 또 따먹고, 그래도 또 나오고... 바로 이 맛에 농부들께서는 농사를 계속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씨앗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코 복음 4장 30~31절)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대체 어떤 곳일까? 과연 나란 존재도 거기 갈수 있을까?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까? 거기서는 하루 온종일 뭘할까?
은혜롭게도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장막에 가려져 있던 신비스런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예수님 존재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열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어쩌면 예수님 그분과 함께 하는 이 세상, 그분의 손길이 닿은 이 세상이 곧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하느님 자비의 풍성함, 하느님 사랑의 풍성함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위로가 한도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이 아닐까요?
따뜻한 봄볕이 꽁꽁 얼어붙어있던 대지를 소리 없이 녹이듯이 그 숱한 우리의 죄악과 부족함, 실수와 과오들이 크신 하느님 자비 앞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참혹하리만치 견디기 힘들었던 우리들의 고통이나 좌절, 분노, 끝도 없는 방황... 이 모든 괴로움들이 크신 그분의 위로 앞에 자취 없이 사라지는, 그래서 부드러운 그분의 손길만이 우리 영혼을 어루만지는 사랑으로 충만한 곳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러한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조금씩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능하다면 이승에서부터 최대한 만끽해야 되지 않을까요? 언젠가 또 다른 세상에서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려야만 하는 하느님 나라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가 풍요로운 하느님의 자비 안에 살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와 닿는 현실이 아무리 팍팍하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꼭 성장해야만 하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등불’이 있는 공동체의 필요성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공동체마다 진리를 품은 정도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공동체에 어느 만큼의 진리가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장에도 차이가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진리와 은총이 충만한 공동체에 머물면 저절로 성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도 오직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따로 풀이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머물면 그 충만한 진리로 사람이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왜 굳이 그런 공동체에 속해서 내가 자라나야 하는가? 그냥 살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반박합니다. 성장과 성숙이 의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하지 않으면 자신과 이웃에게 해를 끼칩니다.
지하철은 우리 일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지하철에서 한 할머니가 한 아이의 머리를 만졌다고 아이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욕을 하며 폭행을 가한 적이 있습니다. 또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20대 청년이 80대 할아버지가 불편하다고 말을 하자, 할아버지에게 폭언을 퍼붓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중학생 아이들이 한 할머니에게 욕을 하며 목을 조르는 등의 폭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나이가 어려 처벌이 어렵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의를 일으키는 당사자들은 ‘내 맘대로 사는데 뭔 간섭?’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은 둘째 치고 본인들은 행복할까요? 이들은 성장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이고 그 피해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의 몫이 됩니다.
영국의 한 TV 채널에서 ‘5일간의 격리’란 실험을 했습니다. 스마트폰 없이 독방에서 5일간 견뎌내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실험입니다. 실험에 5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들이 들고 들어갈 수 있는 물건은 3개로 제한되었는데 전자제품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독방은 감옥 같지는 않고 웬만한 원룸 오피스텔 방보다 좋습니다. 제 때에 식사도 푸짐하게 제공되었습니다.
참 쉬워 보이는 도전인데 실상 다섯 명 중 끝까지 견뎌낸 사람은 단 세 명에 불과했습니다. 참가자 중 한 명인 28세의 샤르마인은 겨우 4시간 만에 독방 생활을 포기했습니다. 또 다른 참가자였던 TV 진행자 조지는 정확히 24시간 만에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고독과 권태감, 그리고 불안감을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특히 고립된 상태에서 시간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매우 괴로웠다고 털어놨습니다.
실험의 최종단계에 진출한 사람은 로이드, 루시, 사라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사라는 72시간이 지난 시점부터 환각을 보고 혼잣말을 시작했습니다. 로이드는 카메라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군가가 아니면 적어도 어떤 것과도 소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루시는 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녀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혼잣말하거나 환각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어렵지 않게 5일을 잘 견뎠고 방은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출처: ‘인터넷 없이 독방에 5일 동안 갇힌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 유튜브 채널 ‘모든 사람’]
독방도 사실 우리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인생이 지하철처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각자 자신의 독방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면 삶은 지루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루가 왜 이리 기냐고 투정하면서 그 따분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자극적인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그 자극은 점점 더 강해지지 않으면 소득이 없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렇게 자신과 사회를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5일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간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육체적 본능과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장은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과정입니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탈출하여 자신에게 햇빛과 물을 주는 하늘로 향하는 과정이 성장입니다. 하지만 세속-육신-마귀의 본성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은 이들은 여전히 그것들을 주는 스마트폰에 머리를 들이박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각자의 독방에서 힘든 고독에 지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간신히 5일을 견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타인과의 관계 단절을 힘들어했습니다. 관계가 중요하긴 하지만 홀로 설 수 없는 사람은 관계를 통해 자신 인생의 따분함을 채워나갑니다. 자신의 심심함을 채우려고 타인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시는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창조’하는 데 썼습니다. 그림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창작물입니다. 창작은 창조이고 창조는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본성이 지배하는 공동체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서 그녀는 성장하였고 성숙하였고 자신과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삶의 시간을 소중히 사용하고 자신과 이웃을 만족하게 하는 삶을 삽니다.
공동체 안에는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등불이 있습니다. 이 등불은 진리이고 뜻입니다. 그 뜻이 자기 자신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공동체에 머무는 사람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자기 손해이고 세상의 피해입니다.
우리나라는 조상 대대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이란 건국이념으로 살아왔습니다. 이 이념이 한 공동체의 빛이 되면 그 공동체에서 그 이념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견뎌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이념을 따르지 않는다고 크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여 사람에게 이롭지 않은 일을 했다면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머물면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장하지 못하면 스스로 공동체에서 퇴출당해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가 등불을 켜 놓고 간 집에 살고 있었던 청년은 그 등불 때문에 삶이 변했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의 등불이 있습니다. 그 등불 때문에 우리는 성장해야 하고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왜 꼭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행복’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면 할 말은 없지만,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를 성장시켜 줄 진리의 빛, 좋은 뜻이 지배하는 공동체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뜻은 ‘사랑’입니다. 인간 육체적 본성과 반대이기 때문에 올바른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등불인 공동체에 머물면 자신도 저절로 성장하게 되고 행복도 함께 증가하고 주위 사람들도 함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가장 완전한 공동체가 가톨릭교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매튜 켈리의 ‘가톨릭신앙의 재발견(Rediscover Catholicism)’을 읽고 있습니다. 번역하신 분께서 보내 주셨습니다. 현대사회는 풍요 속의 빈곤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질과 자본은 우리의 삶을 편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과 정신은 ‘개인주의, 쾌락주의’에 의해서 점점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물의 온도가 뜨거우면 개구리는 빨리 물 밖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물의 온도가 조금씩 높아지면 개구리는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물속에서 죽는다고 합니다. 화려한 불빛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은 불에 타서 죽게 됩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는 개인주의,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쾌락주의는 현대인들의 생각과 정신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방송, 언론, 기업, 교회에도 이런 개인주의와 쾌락주의가 들어와 있습니다.
교황님은 2021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돌봄의 문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가 살 수 있도록 돌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입니까?’라는 카인의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율법학자에게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았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가진 것을 나누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백신과 치료제를 얻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도 백신과 치료제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난민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신앙은 영적으로 메마른 현대인에게 다시금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가치와 질서를 벗어나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회개’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했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회개했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공,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복음이란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기에 좀 더 인내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희망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어째서 박해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에도 인내하며 참을 수 있는 것일까요? 출세, 성공, 권력, 명예, 욕망이라는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 희생하고, 양보하며, 나눌 수 있는 것일까요? 희망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분은 겨자씨에 감추어진 희망을 보았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면 큰 나무가 되고, 거기에서 많은 새들이 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고통과 절망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희망을 보았고, 부활은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것들에서 희망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희망 때문에 감옥에서도 감사드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 희망 때문에 고통과 시련을 이겨 낼 수 있다고 위로합니다. 그 희망 때문에 율법과 계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희망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신앙 안에서 희망은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의 삶과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사건들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뿌리는 사람이 거두지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땅에 씨를
뿌리는 사람이
낟알을 거둔다지요
땅이 씨를
곱게 품어
어떻게 낟알을
영글게 할까
굳이 몰라도
탐스런 낟알을
거두려거든
정성스럽게
씨를 뿌려야지요
어찌
씨만 그러겠어요
사랑도
믿음도
희망도
생명도
정의도
평화도
베풂도
품음도
함께도
모두
마찬가지지요
거두려거든
뿌려야지요
여전히 민둥산이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어린시절 발가벗은 민둥산, 그 민둥산이 원시림이 되어 있다. 좀더 관심을 갖고 잘 가꾸었다면 더 아름다운 산이 되어 있을 것이다.
전남 장성의 축령산의 편백 숲, 한 사람이 생애동안 가꾼 숲으로 관광객을 불러 모으기로 유명하다.
거제도의 ‘외도’, 한 사람이 천연의 섬을 생애동안 아름답게 가꾸었다. ‘외도’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이런 명소가 있음이 자랑스러웠다. ‘외도’를 가꾼 분들이 고맙다.
네델란드의 ‘퀴켄호프’ 튤립 정원을 기억한다. 백조가 호수 위에 여유롭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5월의 신록을 뽑낸다. 누가 이런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을까? 고마웠다.
캐나다 벤쿠버 이일랜드에 위치한 ‘부차드 가든’ 버려진 석회암 광산을 한 가문이 대를 이어가며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었다. 누가 이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했을까? 고마움이 계속 이어지며 미래를 향한 좋은 생각으로 피어났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셔 이루어 낸 나라이다. 나는 유아세례를 받던 날부터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셨다. 내 안에 조성된 하느님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내가 예수님과 함께 조성한 하느님 나라, 겨자씨가 자라나 공중의 새들이 깃들만큼 나도 사람들의 안식처 구실을 하고 있는가? 자문해 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비유가 아닌 눈 앞에서의 직접 체험으로 알려주셨다. 제자들의 마음이 시나브로 예수님으로 자라나 하느님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성장이 또 있을까? 지내다 보면 훌적 지나버린 시간을 보며 과연 나의 하느님 나라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나를 들여다 본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4,31-32)
민둥산이 세월을 지나며 온통 원시림이 되어 있다. 그런데 왜 나는 하느님 나라가 아직도 민둥산일까? 비유의 하느님 나라 설명이 복잡했나, 귀가 있으면 즉시 알아들을 수 있는데 오르지 예수님께 기복적으로 구걸했고, 맹목적 신앙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 따로 나 따로, 연결된 신앙 없이 살아온 빈 껍데기 신앙인 나를 본다. ‘하느님 나라’는 아직도 내 안에서 여전히 민둥산이다. 내 마음 안에 예수님 닮은 아름다운 정원 하나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어서 겨자씨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농부가 씨를 뿌려서 수확을 얻는 데까지는 사실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인간의 노력만으로 결실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갑자기 자연재해가 휩쓸고 간다고 하더라도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망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그 결실을 위해 우리 인간의 힘이 닿지 않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도와주실 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영성지도 신부님과 면담을 하면서 신부님이 저에게 요즘 말씀 묵상이 잘 되고 있는지를 물어보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서 그렇게 물으시기에 별 생각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갑자기 표정이 굳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니?” 사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저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열심히 노력해 보겠다는 데 그게 잘못된 일인가?’ 그러나 그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부님의 말씀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곧 구원의 삶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와 같이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그분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에 언제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일입니다.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게 다르단 겁니다.
겨자씨와 겨자나무는 크기에서 비교 불가며 엄청난 차이란 거겠지요.
인간들이 이뤄놓은 세상서 천국을 알아듣기란 불가 하다는 거겠지요.
예수님도 설명하시기가 참 어려워하신 것이 하느님나라 비유였습니다.
우리도 3차원과 고차원 유한과 무한 뭐 그 정도 뿐 더는 영 어렵지요.
우리생활 에서도 시간 빼고 장소 빼고 말한다면 뭐 통할 수 있겠어요?
3차원에서 살면서 말이나 생각은 고차원 경지를 건드릴 때 많거든요?
내안에서 보이지 않는 나 즉 영 또는 혼이 실은 내 실재 주체니까요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을 일러 줍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6-27)
사람은 씨를 뿌리고 조상 때부터 축적된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밭을 가꿉니다. 그는 자고 일어나고 먹고 마시는 일상을 유지하면서 어느새 쑥쑥 커가는 생명에 놀라고 감탄하며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조력자일 뿐이기에, 그의 앎은 거기까지입니다.
"저절로"(마르 4,28)
이 말씀은 사람 입장에서 보는 현상이고, 실상은 일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가리킵니다. 겸손하신 하느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의 뒤에서 묵묵히 숨어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생명의 기적을 우연이라 치부하거나, 그 공로를 제 것인 양 가로채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의 근원에는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그저 주어진 씨를 뿌리고 생명을 돌보며 하느님 나라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커가는 것을 놀라고 감탄하고 감사하며 하느님께 협력하는 것으로 제 몫을 다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혼자 다 하실 수 있는 일임에도 이처럼 사람을 참여시키십니다. 홀로 전능하시고 완전하시면서도 사람 없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어느 씨앗보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고 나면 새들이 깃들 그늘을 드리울 만큼 커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 형태로 안겨주지 않으시지요. 그 시작은 열매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미소하고 가난하며, 허약하고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는 이들이 희망을 저버리지 않도록 독려합니다.
"여러분의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히브 10,35)
이 서간을 읽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이들입니다. 무수한 박해와 핍박, 모욕과 환난, 재산 몰수까지 겪으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내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지요.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브 10,34)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초와, 잃은 것들보다 더 고귀하고 값진 것을 바라기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동시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히브 10,39)
아직 작디작은 겨자씨밖에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미소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밖에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난을 망연히 바라보자면, 결실 없어 보이는 노력에서 어서 발을 빼어 좀 더 확실해 보이는 길을 찾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까지 비죽비죽 올라올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형체가 없는 듯하고, 그분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아직 땅 아래서 움을 틔우느라 몸살을 하는 중이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우리에게는 믿음과 인내가 절실합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이 요구하는 가치관과 그다지 화합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욕심에 맞서 주님의 길을 따르기가 때로는 버겁기도 하지요. 아마 이천 년 전 제자들도 그러했을 겁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마르 4,34)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직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꿋꿋이 인내하고 살아가도록 당신의 말씀을 "따로 풀이해" 주심으로써 각별히 돌보십니다. 겨자씨 앞에서 초조하고 실망하는 마음이 원대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잃지 않도록 다정하고 섬세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매일 말씀을 읽고 듣고 머물고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또는 누군가를 통해 그 말씀을 풀이해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해 당신을 알아듣도록 방향을 잡아주십니다. 작은 씨앗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는 마음의 눈을 키우시는 동시에, 작은 씨앗에 불과한 우리가 하느님 나라가 되도록 일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기여하고 협력하면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 나라로 성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가난하고 미소하고 허약해도, 무수한 영혼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는 하느님 나라로 성장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분께서 지치지 않고 우리를 돌보시니, 희망을 놓지 말고 끝내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시길 축원합니다. 반드시 그리되리라 믿습니다. 아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3주간 금요일>(2021. 1. 29. 금)(마르 4,26-34)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여기서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라는 말씀은,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씨를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오순절 날의 성령 강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를 했는데, 그들은 그 설교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사도 2,41).”
사도들이 설교를 아주 잘해서 그런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은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도들은 사람들 마음속에 ‘말씀의 씨’를 뿌렸습니다. 하느님(성령) 께서는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만일에 그 성과에 대해서 사도들이 “우리가 설교를 잘해서 이런 결과를 얻었다.” 라고 교만해졌다면, 그 일은 그것으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오순절 날 이후의 교회의 성장도 좋은 예가 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게 되어,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사도 4,4).”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는 일도 열심히 했지만, ‘말씀 안에서의 삶’도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그 ‘삶’ 자체도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적인 삶’을 통해서 사람들 마음속에 ‘복음의 씨’를 뿌린 것은 사도들과 신자들이 한 일이고, 그 ‘삶’에 감화된 사람들이 자기 발로 찾아와서 신자가 된 것은 하느님(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현실이 되는 것을 체험하면서 큰 기쁨과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힘은,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어도 굴하지 않는 용기와 인내의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하느님께 맡기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물을 주고, 가꾸고 보살피는 일 등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그 씨에서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느님께 맡기면 됩니다. (농사짓기에 좋은 날씨도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고 ......
그런 일들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고,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천재지변을 미리 예측하고 막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때가 많은데, 그런 일을 당할 때 피해자들을 돕고,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즉 아무것도 안 하면서 하늘만 쳐다본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교만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0-32).”
‘겨자씨의 비유’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라는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같은 비유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처음과 마지막의 모습을 대조한 비유이고,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우리는 ‘겨자씨의 비유’를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내가 지금 심는 씨가 겨자씨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
2) 무슨 씨인지 모르는 경우.
우리는 겨자씨를 심으면 겨자나무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심는 씨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그 씨가 겨자씨이니까 겨자나무가 되는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습니다. 놀라기는커녕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경우는 예수님께서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 무슨 씨인지도 모르고,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려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씨를 심는 경우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될지 예상하지도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위대한 결과를 얻었을 때,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라고 말합니다.
믿음이란, 모르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결과를 알고 있고, 알고 있는 그대로 되는 일이라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사람의 힘으로는 그 결과를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도 없을 때, 바로 그런 때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망설이지 말고 바로 실행해야 합니다. (내가 바치는 짧은 기도가, 내가 실천하는 작은 사랑이 큰 결과를 만들어낼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지,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알 수 없지만, ‘믿음의 기준’으로는 결코 헛일이 아니라고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은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실천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곡식인 우리
-대 그레고리우스-
좋은 열망을 품을 때 우리는 땅에 씨를 뿌리는 셈입니다. 올바르게 행동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줄기가 되고, 선행으로 무럭무럭 자라날 때 이삭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완전한 삶을 위하여 힘쓸 때 바야흐로 이삭에 가득 팬 낱알을 내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주일학교 친구들!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일까요? 영원히 묵주 기도 하는 곳이에요. 영원히 미사 드리는 곳, 영원히 성경 말씀 듣는 곳, 영원히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에요. 하느님 나라 꼭 가고 싶은 친구들 손 들어보세요!”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럼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영원히 묵주 기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영원히 미사 드리지 않아도 되는 곳, 영원히 성경 말씀을 듣지 않아도 되는 곳, 영원히 이웃 사랑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에요. 나는 지옥이 더 좋고 편할 것 같은 친구들 손들어보세요!” 저와 함께 교리공부를 한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람은 기쁨을 얻는 곳에서는 영원히 살 수 있지만, 기쁨을 얻지 못하는 곳에서는 절대로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 그리고 기도와 이웃 사랑 안에서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기쁜 곳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2)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자라나서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들 스스로가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건들이지 않고 내버려 두기, 바라보고 지켜보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로 둘 다 하느님의 나라 비유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초미의 관심사이자 화두는 하느님의 나라였고 하느님의 나라를 사신 삶 자체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걸어다니는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주님이 하느님의 나라이듯 참으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깨어 가만히 관상의 침묵중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절로 순리대로 전개되는 하느님의 나라 현실을 건들이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뿐입니다. 가만히 바라보고 지켜보며 때가 될 때까지 한없이 마냥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이건 무관심이나 방치가 아니라 지극한 사랑과 겸손, 배려와 존중의 표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웃사랑이며 자녀교육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참으로 내적힘의 내공이 대단한 이들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섬세하고 민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묵묵히 하시는 일에 잘 협조해야하고 결코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도 대동소이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참으로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증이 큰병입니다. 기다리지 못해 참지 못해 손질과 잔소리의 입질로, 인내력의 결핍으로 일을 그르쳐 버리는 일을 얼마나 많은지요. 편리하고 빠르고 쉬운 것을 많이들 선호하니 불편하고 느리고 힘든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참 얕고 가벼운 천박淺薄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은 다 그 때가 있는 법입니다.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는 비약이나 도약은, 첩경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청사진대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청사진대로 진행되는 역사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카이로스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그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겸손이며 그 때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전에 산을 보며 써놨던 글이 생각납니다.
“산은 다투지 않는다
서로 등을 기대거나 바라보면서
늘 거기 그 자리에 평화롭고 고요히 머물러 있다.”-1997.10.4.
결코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이렇게 서로의 자리를, 공간을, 영역을 지켜주고 서로의 거리를 견뎌내는 공존의 평화가 평범한 듯 하지만 진짜 비범한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관계의 현실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도 이런 한결같은 평화로운 공존의 삶을 지향합니다.
하여 분도성인은 그의 규칙에서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합니다. 진짜 정주의 수도승들이라면 기다림의 대가, 인내의 대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제 경우도 형제가 7을 잘하고 3을 잘못한다면 3을 절대 지적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둡니다. 녹을 지우려다 그릇을 깰 수 있듯이 3을 교정하려다가 좋은 것 7까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기다리면 결국 누구든 제자리를 찾기 마련입니다. 때가 되어 스스로 깨달아 해야지 시켜서 강요에 의한 행위는 전혀 오래가지 못합니다. 안으로부터 변해야지 마치 페인트칠처럼 겉만 번지르르해보여도 페인트칠이 벗겨지면 본래 모습 그대로인 경우와 흡사합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29.
산처럼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쉽게 본능적으로 이해관계에 좌우됩니다. 인터넷, 휴대폰의 신속한 소통이 점점 기다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가만히 멈추어 사색思索하기 보다는 인터넷 검색檢索하기에 바쁩니다. 이러다 보니 날로 다양한 중독 환자들이 늘어납니다. 관상적 기도와 침묵, 휴식이 참 절실한 때입니다. 어느 분의 비판에도 공감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마치 인간들이 다 증발해 버리고 아파트 당첨을 기다리는 사람들만 사는 것 같은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전 국토에 이렇게 많이 짓고 때려 부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깨어 관상의 침묵중에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으로, 건들이지 않고 내버려 두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때가 될 때까지 한없이 인내하며 기다리며 무리하지 않고 순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내공의 사람들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히브리서가 묘사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때의 필요와 요구에 적절히 사랑으로 음답하는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결같이 평화로이 함께하는 사랑, 함께하는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랑, 인내하는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이들의 결정적 특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한결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시편37,5-6). 아멘,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
성 요한 피셔 주교 순교자의 ‘시편 주해’에서 (Ps 101: Opera omnia, ed. 1597, pp.1588-1589)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실 때 기묘하고도 놀라운 여러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발을 적시지 않고 홍해를 지나가게 하시고 광야에서는 천상 양식으로서 만나와 메추리로 그들을 먹이시며 그들의 갈증을 풀어 주시고자 단단한 바위에서 그치지 않는 샘물이 솟아 나오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그들에게 저항하는 모든 원수들을 눌러 승리를 가져다 주시고 요르단 강물이 본래의 흐름을 바꾸어 거슬러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의 지파와 가족의 수효에 따라 나누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인자롭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대해 주셨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그들은 이 모든 은혜를 완전히 잊어버려 하느님께 대한 참된 예배를 거부하고 여러 번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에 빠져 버렸습니다.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원래 야생 올리브 나뭇가지였을 때 “이방인으로서 헛된 우상에게 매여 우상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녔던 우리를” 그 올리브 나무에서 잘라 내시어 유다 민족의 참 올리브 나무에 접목시키시고, 우리가 원래 지닌 가지를 잘라 내시어 열매를 맺는 당신 은총의 뿌리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이를 위하여 내어 주시어 그를 향기로운 제물처럼 당신께 바치게 하시고,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깨끗이 하고 속량하시어 당신 마음에 드는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과 우리에 대한 당신의 자비의 순수한 징표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는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 모든 배은 망덕을 지나쳐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지도 않고 그분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위대함을 깨닫지도 못하며 오히려 그분을 거부하고 우리를 지어내시고 그렇게도 위대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그분을 거의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 계속하여 보여 주시는 이 놀라운 자비를 보면서도 우리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법에 따라 우리의 생활과 행습을 고칠 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은 후손들이 영원히 생각하도록 기록에 남길만한 사실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를 알아 그분을 항구히 찬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겨자씨와 하늘나라 비유.
강만연 베드로
오늘 복음의 내용은 씨 뿌리는 사람이 씨는 뿌려놓았는데 그 씨에서 싹이 어떻게 터서 자라는지는 모른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 씨가 땅으로 인해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수확을 할 때가 되어서는 수확을 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여러 가지로 그당시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도 복음을 전하면 어려움이 많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정신적인 수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하니 믿음의 눈으로 이해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지금 시대도 그런데 2000년 전 그당시 사람들의 지적 수준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과는 감히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지 않겠습니까? 문맹인 사람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일반 수준으로 하늘나라를 알려준다면 쇠귀에 경읽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워낙 수준이 낮으니 농부에게는 씨 뿌리는 비유로 어부에겐 그물과 고기를 잡는 것처럼 그들의 생활 수준에 맞는 눈높이로 설명을 하셔야만이 겨우 그것도 이해를 할 수가 있었을 정도의 수준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귀 있는 사람은 들을 거라고 하셨으니 귀가 있어 들어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반증이 될 겁니다. 아무리 무식해도 씨를 뿌리고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잘 가꾸고 하면 열매를 맺는다는 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먼저 이런 걸 예로 드시면서 여기에 그들의 시야를 좀 더 확장을 해서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 내용은 당시 당대 지금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향해 하실 때 그 군중들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다른 복음도 복음이지만 이 복음의 비유는 특히나 그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세상 종말까지 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비단 겨자씨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씨를 뿌린 후에 뿌린 사람이 자는 사이에도 저절로 자란다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도 모른다고 나옵니다. 실제 복음은 아주 간결하게 표현을 했지만 액면 그대로 해석한다면 조금은 무리가 있을 듯합니다.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밭에 나는 잡초도 뽑고 여러 가지 관리를 해야 될 것입니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아무리 씨를 뿌리고 관리를 한다고 해도 햇빛과 비가 없으면 천하에 비옥한 토양이라고 해도 자랄 수가 없을 겁니다. 복음 속에 나타난 행간의 숨은 의미를 보게 되면 절대 저절로 자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겁니다.
해와 비를 배제하고 생각하면 저절로라는 말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저절로라는 말로 표현을 했을까? 그건 무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 가치의 중요성을 배제했다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마치 우리는 산소가 없으면 살 수가 없지만 산소를 무상으로 얼마든지 공급이 되니 그 고마움을 모르는 것과 흡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사전에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그냥 저절로 되는 게 없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게 다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먼저 이 복음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전제가 됐을 때 겨자씨 비유가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를 하시면서 아주 작은 미비한 존재가 하늘의 새들도 깃들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자랄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단순히 크기만 놓고 판단을 하면 좀 어색할 것 같습니다. 이것도 처음에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그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 나오는 땅을 우리가 말하는 땅도 해당하지만 좀 다르게 묵상을 해보면 이 세상을 상징하는 걸로 묵상했습니다. 그렇다면 땅에 뿌린다는 것은 말씀이 이 세상에 왔다는 것 즉, 하느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의미로 이해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정말 창조주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 것을 오늘 복음에서 언급된 표현과도 아주 흡사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오셔서 실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건 고작 3년이라는 짧은 세월의 공생애 기간밖에 없었습니다. 한 인물이 인간 육신의 모습을 지니신 채 이 땅에 오셔서 숱한 고난과 가난 속에서 사시다가 이 땅에서 활동하신 그 시간이 하나의 밀알이 되어 오늘날 200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이렇게 복음이 전세계적으로 전해질 거라고 만약 당시의 사람들이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마 이처럼 우리의 지금 모습도 그럴 겁니다. 당시의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 현실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 우리가 가게 될 하늘나라의 모습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모습이 될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묵상하면 이 작은 겨자씨가 우리의 믿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중엔 그렇게 자라 새들도 깃들 수가 있다고 해도 크기가 작다고는 하나 일단 심겨져야 싹이 자라든 말든 할 것입니다. 같은 씨가 같은 땅에 뿌려져도 잘 자라는 것도 있고 잘 자라지 않는 것도 있듯이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을 생각하는 말씀의 씨앗도 우리가 가진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잘 자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향방에 대해선 누구도 판단을 할 수가 없을 거라고 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씨앗이 자란 크기가 어쩌면 믿음의 크기와도 같은 의미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른 건 몰라도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는 더더욱 우리의 눈으로 판단을 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저절로 그냥은 자라지 않는 것처럼 비나 해가 있어야 하듯이 하느님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그런 하느님의 도움이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남의 믿음을 판단하는 건 금물이어야 한다는 걸 오늘 복음을 통해 다시 한 번 더 제 자신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함승수 신부님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인 노자(老子)가 주창한 삶의 방식 중에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무위'(無爲)란 일체의 '인위'(人爲)를 가하지 않는 것, 즉 '인간중심'적인 의도와 목적에 따라 대상의 모습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요. 한편 '자연'(自然)이란 풀이 우거지고 동식물이 자라는 환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러한 상태' 즉 어떤 것이 타고 태어난 본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무위자연'이란 어떤 것을 인간 위주로, 인간 중심으로 억지로 바꾸려 들지 않고, 본래 타고 태어난 본성 그대로 물 흐르듯 흐르게 두는 일일 겁니다. 이것을 천주교의 신앙 용어로 바꾼다면 인간적인 욕심이나 집착에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대로, 그분께서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는 순명과 따름의 삶으로 표현해 볼 수 있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어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씨앗'이 싹이 터서 자라는 모습에 비유해서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떤 '원리'로 그렇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은 모른다'고,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고만 언급하실 뿐입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저절로'라는 말을 "내버려두어도 으레 그렇게 되는 작용에 따라"라고 정의합니다. 그렇기에 하느님 나라가 '저절로' 싹이 터서 자란다고 하면, 우리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방치해도 구원이 알아서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저절로'라는 말은 우리의 노력이 아무 쓸모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을 이해하는데에 앞서 언급했던 '무위'라는 개념이 도움이 됩니다.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방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본위로 억지로 방향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자연의 순리대로 잘 흘러가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계획, 내 뜻, 내 고집, 내 이익을 앞세우며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으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내 뜻이 하느님의 뜻이 되어, 나의 힘을 빼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힘을 채워 그분 뜻에 맞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그분 뜻에 충실하게 살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저절로' 구원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와 있을 것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아침 미사 후에 하 아우구스티나 수녀님께서 이임하십니다. 그동안 뉴타운 재개발로 불안정한 상황에 오셔서 코로나19로 감염되셔서 고생도 하시고 여러모로 수고만 많이 하시다가, 오늘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헌신적으로 수고하신 수녀님께 주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빌며, 새로 부임하시는 임지에서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0-32)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고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26-29절) 지금 와서 되돌아 보면, 우리는 주 대전에 그야말로 부당하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도 주님의 거룩한 일을 하십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27절)는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같이 나약하고 부족하기 이를데 없어 부당한 인간에게 한 층 위로가 됩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28절) 라는 말 속에서, 우리를 둘러싼 세상 전체를 주님 사랑과 은총이 꽉 채워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우치게 해주십니다.
우리를 구하시는 거룩하신 주 하느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다. <마르코 4, 26-34> 1월 29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지지만, 그 사실을 누리는 것뿐이지 사람이 어떻게 시간이나 궤도를 바꿀 수 없는 일입니다. 사계절을 알고 “봄이다. 여름이다. 가을이다. 겨울이다.” 할 수 있지만 봄에 여름을 앞당길 수 없습니다. 한 생명이 어머니 배 안에서 형성되도록 정자가 난자를 만나게 하지만 10개월 어떻게 자라는지 아무도 모르고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고 말하지만,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히 나에게 작용하고 있어서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초월하는 일에 하느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사화복도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 안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소서” 기도합니다.
반대로 하느님이 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의 협력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은 자비를 베풀어도 받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비는 바로 우리의 협력을 기다려 무엇이든지 함께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중에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면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인사를 받으며 모든 일은 주님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의 협력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일하게 하시려고 합니다. 학교 공부에 일등하려면 기도만 하고 “주님, 일등 하도록 해주십시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래 전 산에 복숭아나무를 심어 몇 년 후 과일을 따먹을 수 있었는데 과수원을 비우고 몇 년 지나서 가보니 복숭아 나무가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나무를 심었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이 필요합니다.
출산율이 적은 것은 청년들이 결혼을 미루고 안 하는 이유입니다. 아담에게 낳아서 번성하라고 하셨지만, 요사이 경제적 이유와 사회적 이유 때문에 출산율이 3년 전보다 반이나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모든 공동체가 걱정하는 일입니다. 또한, 자기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있어 주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하시고 “너희는 나의 협력 없이 아무리 좋은 이상이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신 것같이 하느님의 협력 없이 할 수 없기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주님의 사랑받는 협력자가 됩시다.
주님은 늘 나의 문 앞에서 노크하시며 문 열기를 기다리십니다. 지금 이 시간. 당신을 만나서 눈 앞에 일어나는 일을 함께하자고 하십니다. 천지창조 그림에 하느님의 손과 아담의 손이 마주쳐 손끝이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은 “함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힘과 우리의 작은 힘이 합쳐 이루어지는 일에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저는 기도의 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뜻을 찾아 얻어서 행복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서로 정성들인 협력 없이는 이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
하느님 나라는 거룩함과 은총, 진리와 생명, 정의와 평화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씨앗을 주님은 우리 각자 마음 속에 심어주셨습니다.
그 씨앗이 우리 안에서 싹이 트고 또 지금 힘차게 자라고 있습니다. 그 생명의 박동을 오늘 느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귀를 기울여 감지하도록 합시다. 여기서 살아갈 희망과 힘이 생깁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우리는 오늘 하루를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히브 10,35).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난다."(마르 4,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김없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랑의
일이시다.
사랑은
새롭다.
이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잊고산다.
기쁨은
서두르지
않는다.
의미있는
삶이란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는 은총의
삶이다.
은총의 물살에
우리 삶을
내맡긴다.
맡기는 삶이
자연스러운
삶이다.
자연스러움은
언제나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자연스러우시고
자유로우시다.
저절로
자라나는
자연스러운
관계처럼
하느님과의
우리와의 관계도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우리들
삶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라나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새싹이
자란다.
시련을 딛고
성장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하느님을
믿는다.
그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믿음은
단순하고
믿음의 힘은
강렬하다.
새싹도
열매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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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살고 있는 중년의 부부가 15명의 청소년과 한 줄로 서서 웃는 사진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에 대한 설명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지요. 글쎄 부부가 청소년들의 무리와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 아니라, 가족사진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인 로사 피크는 1989년에 남편 호세 포스티고와 결혼해서 18남매를 낳았습니다. 가족 전체가 한 달 동안 먹는 비스킷이 1,300개, 화장지가 95개 필요하다고 합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육아에만 전념하지 못하고 맞벌이를 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웠습니다. 아이들 모두가 건강하게 잘 성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18남매 중에서 셋은 심장병으로 하느님 곁으로 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도저히 힘들어서 못 살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도 기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매일 아침 미사에 갑니다. 미사 후 30분 동안 묵상을 해요. 그날 할 일을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죠. 그게 저의 가장 큰 힘입니다. 저만의 마약인 셈이죠. 하루 30분의 기적입니다. 종교가 달라도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바쁘면 바쁠수록 멈춰 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미사와 묵상을 통해 자신의 삶 안에 작지만 가장 커다란 힘이 되었다는 로사 피크의 말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만 그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함께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그리고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땅에 뿌린 씨에 비유하십니다. 씨를 땅에 뿌리는 것은 사람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땅에 뿌려진 뒤로는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가 없지요. 어느 순간에 줄기가 나오고, 또 이삭이 나오고, 또 낟알이 영글고 곡식이 익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느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도 어느 순간에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아주 작은 씨앗에서 가장 큰 관목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 역시 처음에는 작고 볼 품 없어 보이지만, 모든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겨자나무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 안에서만 가장 큰 힘과 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일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 자체가 처음에는 보잘 것 없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상 것들로는 느낄 수 없는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게 합니다. 이 주님의 일을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일이 바쁘다고 주님의 일을 계속해서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변화를 또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비교해서 기뻐하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비교해서 슬퍼하면 자신을 잃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교 자체를 피해야 한다.
커피 반잔
제2차 세계대전 때,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추운 겨울 오후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수용되어 있는 유다인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질 좋은 커피는 아니었지만 워낙 춥고 배고팠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얼른 이 따뜻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몇몇 극소수는 커피 반잔은 마시고 나머지 반잔으로는 자신의 얼굴과 손을 씻는 것입니다.
강제수용소 안에는 샤워는 물론 세수도 할 수 없었고, 대소변을 해결할 화장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포로들을 냄새나고 더러운 몰골로 만들어 학살할 때 죄책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반잔의 커피로 손과 얼굴을 씻는다는 것이 쉬웠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인간으로 존재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즉, 커피 한잔을 다 마신 사람은 모두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커피 반잔으로 인간성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절망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나의 자존감을 키워주고 지켜줄 커피 반잔을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커피 반잔은 무엇입니까?
기도와 묵상, 미사 영성체, 봉사, 희생, 나눔, 가족, 사랑을 실천하는 일...
제 모든 것, 생명까지도 여러분을 위해 바칠 것을 약속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가끔 듣는 말 중에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란 말이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 혹은 삶을 새롭게 시작한 중요한 계기를 일컬어 ‘터닝 포인트’라고 말합니다.
역경을 딛고 당당하게 일어선 유명 인사들이 힘겨웠던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이렇게 단골 멘트를 날립니다. “제 인생의 가장 암흑기, 제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치던 그 순간이 사실은 내 삶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체험을 하는가봅니다 저 역시 돌아보니 제 수도생활 안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역시나 대단한 성취를 이룬 순간이나 높이 올라간 순간이 아니라 제 인생사 안에서 가장 암울했던 순간이자 가장 밑바닥에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하느님께서는 참 묘하신분이십니다. 별것도 없이 우쭐거리던 저를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 보내시면서 제 교만과 이기심의 산을 인정사정없이 깎아내시더군요. 그리고 거기 가장 밑바닥에서 다시 한 번 저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봉헌생활에 대한 제 그릇된 기대와 사사로운 욕심을 산산조각내신 후 거기서 다시 한 번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돌아보니 제대로 된 바닥 체험을 했던 그 시점이야말로 하느님의 뜨거운 자비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은총의 꼭지점이었습니다.
돈 보스코의 한평생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제요 교육자, 수도회 창립자로서 그의 삶은 셀 수 없는 역경과 고통, 수많은 터닝 포인트와 넘어야할 높은 산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사제성소를 꿈꾸는 그에게 의붓형 안토니오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그의 앞길을 가로 막았습니다.
너무나 가난했기에 신학교 입학을 위해 동네 사람들로부터 적선을 구해야 했습니다. 사제서품 이후 그의 시련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주민들로부터의 오해, 그들과의 마찰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동료사제들 역시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질환자 취급을 했습니다. 오라토리오 청소년들의 숫자는 이백 명 삼백 명, 점점 늘어가는 데 그나마 도와주던 협력사제들과 후원자들마저 등을 돌리고 떠나갔습니다. 그에게는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던 수많은 청소년들뿐, 철저하게도 그는 혼자였습니다.
1846년 7월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돈 보스코의 나이는 이제 32세, 사제가 된지도 5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찜통 같은 더위 속에 고된 하루를 보낸 그는 침실로 돌아가다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검진을 끝낸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사제가 와서 병자성사를 집전했습니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그날 저녁 고된 노동을 끝낸 수많은 아이들이 그의 침실을 찾아왔습니다. 땀에 전 작업복, 횟가루를 뒤집어 쓴 옷, 시커먼 굴뚝 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옷 그대로 저녁도 먹지 않은 채 단숨에 달려온 것입니다.
그들은 울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발 신부님이 죽지 않게 해주세요!” 의사는 면회를 금지했고, 간호사는 사람들이 돈 보스코의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통제했습니다. 아이들은 사정하며 매달렸습니다. “잠깐만이라도 신부님의 모습을 보게 해주세요! 제가 여기 왔다는 것을 신부님께서 아시면 꼭 들어오게 하실 거예요!” “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 신부님께 할 말이 있다니까요!”
아이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 돈 보스코는 8일 동안이나 사경을 헤맸습니다. 그동안 치유의 은총을 얻기 위해 어떤 아이들은 뙤약볕 아래 일하면서도 물 한 모금 먹지 않았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일과가 끝난 후 대성당으로 가서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성모상 앞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이런 아이들의 기도덕분이었는지, 기적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7월 말 어느 주일 오후, 돈 보스코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오라토리오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놀이에 열중하던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돈 보스코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아이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큰 아이들은 손으로 의자를 만들어 돈 보스코를 그 위에 태웠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와 함께 성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눈에서도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오랜 감사기도 끝에 돌아서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살아난 것은 바로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저는 앞으로 제 모든 것, 생명까지도 여러분을 위해 바칠 것을 약속합니다.” 그 후 돈 보스코는 죽는 순간까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청소년들 가운데 머물렀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장기적 관점으로 오늘 하루의 ‘따로’를 마련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마 전 동남아시아를 여행할 일이 있었습니다. 가이드 한 분을 만났는데 40대 초반이었고 미혼인 남성이었습니다. 거의 20년을 동남아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가이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월세를 사는 것을 보니 집을 살 돈이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오래 외국에서 살 줄 알았으면 왜 진작 집을 마련하지 않았을까.’를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20년 동안 월세 낸 것만 모아도 동남아에서 집 몇 채는 사고도 남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후회하면서도 시내 중심가의 서른 평 넘는 아파트에서 월세로 혼자 살며 차도 굴리고 골프도 치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는 10년이 지나도 집을 사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에서의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앞만 보느냐, 멀리 보느냐’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자신이 20년 동안 그렇게 외국에서 살 줄 알았다면, 그리고 차근차근 돈을 모으고 집을 마련하고 사업을 확장했다면 지금과 같았을까요? 분명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오래 외국생활을 할 줄 몰랐고 그렇게 몇 년을 외국에서 살다보니 한국에도 들어와 적응할 수 없게 되어 또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문화에서 고쳐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빨리빨리’ 문화입니다. 이 문화가 어쩌면 멀리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개발도상국 정도 되면 이 문화가 참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열심히 일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어느 정도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그렇다면 삶의 시스템도 바꾸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문화에 젖어 단기적인 성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우리나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영어를 가르치고 좋은 대학 보내기 위해 학원을 보냅니다. 한 나라 말을 완전하게 잘 할 줄 알아야 두 번째 언어를 배워도 완성도 있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학원은 아이들의 자기 스스로 방법을 만들어가며 공부하는 습관을 없애버려 완전히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결국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창의력도 없고 남들이 시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학생 때 좀 덜 좋은 대학에 들어가더라도 스스로 공부하는 방식을 터득하고 노력하게 하면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삶의 큰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삶이 대학이 끝이고 취직이 끝이고 결혼이 끝인 것처럼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어떤 대학을 나왔는가와 행복은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연구결과들이 많습니다.
10년 , 20년 , 30년 후, 그리고 내가 죽을 때, 그리고 우리 후손이 살아갈 세상을 예측해야합니다. 성공한 사람치고 복권을 사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단기적인 이익을 보려고 하는 사람치고 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경마장에서 도박하는 사람에게 투자하고 싶겠습니까? 투자의 귀재인 워렌 버핏은 10년 이상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주식은 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앙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마치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씨앗이 뿌려졌다고 곧바로 열매 맺는 일은 없습니다. 밭에 뿌려진 씨앗을 열매 맺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열매는 거의 맺히지 않습니다.
이 뒤에 나오는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씨앗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씨앗으로 뿌려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비유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하는데서 맺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만 따로 설명해주시는 것이 몇 년 후에는 비유말씀만 들은 이들과의 차이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열매 맺게 하는 방법입니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따로 예수님과 머무는 시간을 가졌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생각해 내어 세상을 바꾼 스티브 잡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에 한 시간은 명상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더 노력하는 사람에게 따로 더 많은 무언가를 안겨주려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다 소진시키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따로’ 다만 10분이라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10년 후의 우리 영성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요즘에 서점에 가보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조언이 담긴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들의 많은 경우는 마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많은 것을 극복하고 이겨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남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인 마르셀 파뇰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와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낙관적인 사람에게 삶은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다. 삶 자체가 이미 해결책이다.” 곧 우리의 삶은 해결해야하는 문젯거리가 아니라 삶이 흘러가면 그것이 곧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조금은 어려운 말일 수 있지만 우리가 신앙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그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하느님 안에서 내 모든 삶이 흘러가도록 놔두는 것이 바로 구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 나라가 보이느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2월이 시작된다. 첫 절기인 입춘이 기다린다. 설명절이 있고 정월 대보름도 자리를 함께한다. 금방 2월도 무르익겠다. 복을 받는 좋은 한달이 되길 축원해 본다.
비유 말씀은 비유 속에 말하고자 하는 알맹이가 들어 있어서 귀를 열고 잘 들어야 한다. 잘 듣지 못하면 그 비유는 무용지물이 된다.
겨자씨는 육안으로 파악되지만 아주 미미한 씨임에 분명하다. 그 씨가 땅에 뿌려지면 싹이나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드러내며 그 겨자식물의 본 모습을 표현해 낸다. 사람이 그 자라남을 감지하지 못하지만 하루 하루 지나며 성장 되어감을 보게 된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의 씨앗이 사람의 귀를 통해 마음의 밭에 접하게 된다. 그 말씀은 가능성만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지만 아직은 시작이라서 현실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은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심겨져 자라나고 놀라운 성장과 성숙을 거듭한다. 하느님 나라의 실체는 겨자씨가 자라나 큰나무가 되듯 말씀으로 시작되어 세상을 움직이는 생생한 동력이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철이 들기 시작하면 철학적 사고가 생겨나고 더 나아가 신학적 사고로 옮겨가면 그 사람 안에 엄청나게 큰 하느님 나라를 품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비유에서의 알맹이가 밝혀지는 것 뿐 아니라 한 인격이 다른 안격과 연결되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결과를 가져 온다. 이쯤되면 한 인격은 한 인격에 고정되지 않고 생명이 생명되어 더 큰 생명이 되고 하느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보게 된다.
하느님 나라는 피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눈이 보이지 않는 가능성으로 시작되나 매우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생명의 나라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느님 나라를 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한 인격이 인내를 갖고 하느남과 살 때 그 사람에게 선물이 주어지는데 이 나라가 하느님 나라이다.
귀를 열고 말씀을 듣고 되새김하며 마음에 깊이 새길 때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 되고 하느님 나라가 힘차게 자라난다.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그렇게 되기를 빌어본다.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
성 요한 피셔 주교 순교자의 ‘시편 주해’에서(Ps 101: Opera omnia, ed. 1597, pp.1588-1589)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실 때 기묘하고도 놀라운 여러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발을 적시지 않고 홍해를 지나가게 하시고 광야에서는 천상 양식으로서 만나와 메추리로 그들을 먹이시며 그들의 갈증을 풀어 주시고자 단단한 바위에서 그치지 않는 샘물이 솟아 나오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그들에게 저항하는 모든 원수들을 눌러 승리를 가져다 주시고 요르단 강물이 본래의 흐름을 바꾸어 거슬러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의 지파와 가족의 수효에 따라 나누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인자롭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대해 주셨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그들은 이 모든 은혜를 완전히 잊어버려 하느님께 대한 참된 예배를 거부하고 여러 번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에 빠져 버렸습니다.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원래 야생 올리브 나뭇가지였을 때 “이방인으로서 헛된 우상에게 매여 우상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녔던 우리를” 그 올리브 나무에서 잘라 내시어 유다 민족의 참 올리브 나무에 접목시키시고, 우리가 원래 지닌 가지를 잘라 내시어 열매를 맺는 당신 은총의 뿌리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이를 위하여 내어 주시어 그를 향기로운 제물처럼 당신께 바치게 하시고,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깨끗이 하고 속량하시어 당신 마음에 드는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과 우리에 대한 당신의 자비의 순수한 징표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는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 모든 배은 망덕을 지나쳐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지도 않고 그분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위대함을 깨닫지도 못하며 오히려 그분을 거부하고 우리를 지어내시고 그렇게도 위대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그분을 거의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 계속하여 보여 주시는 이 놀라운 자비를 보면서도 우리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법에 따라 우리의 생활과 행습을 고칠 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은 후손들이 영원히 생각하도록 기록에 남길만한 사실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를 알아 그분을 항구히 찬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르 4, 31)
김웅태 신부님
+ 찬미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된 하루 되십시오!
오늘은 서울대교구 사제•부제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서품되는 모든 분들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 축복된 성직자의 길을 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복음(마르 4, 26~34)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르 4, 31)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씨앗에 속합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져서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지고 큰 가지도 생기면서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마르 4, 32)
예수님께서는 왜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 말씀의 씨앗도 처음에는 작은 것이지만,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잘 받아들여서 키우면 크게 성장하듯이, 하느님 말씀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사실 하느님 말씀의 시작은 예수님의 복음전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그 중의 한 비유가 바로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뿌리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의 씨앗은 사람들 마음에 들어가서 평화를 주고 기쁨을 주고, 그래서 그 말씀이 좋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할 마음을 갖게 해 줍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처음 시작된 하느님 말씀은 점점 사람들 마음에 영향을 주고 커져서 믿음 공동체가 생기고 오늘날 큰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에 귀기울이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살아갑니까? 하느님 나라는 점점 확장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평화로워지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평화롭게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처음에 우리 마음에서도 작은 것이었지만 그것은 점점 더 커져서 큰 믿음으로 성장해서 큰 믿음을 가진 사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 말씀의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신비롭습니다. 우리도 그 말씀의 씨앗을 받았다면 이런 것을 곰곰히 생각하고 묵상하고 그래서 그 말씀이 주는 의미를 깨달아서 큰 믿음으로 성장하도록 합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에게 전해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내 안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일단 한걸음 내딛는 거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9. 02. 01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마르코 4,26-34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다)
그래 일단
한걸음 내딛는 거야
얼마나
더 갈 수 있을지
비록 자신할 수 없어도
마침내
이르러야 할 곳조차
뚜렷하게 알 수 없는데
그곳까지
몇 걸음인지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러니 일단
한걸음 내딛는 거야
설사
가다 멈출 지라도
더 이상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쓰러진 그곳에서
아쉬운 눈물 쏟을지라도
지금여기가
머물 자리가 아니기에
가야만 할 곳이 있기에
끝없는
생각의 꼬리를
과감하게 잘라내고
무모하다 싶을지라도
일단 한걸음 내딛는 거야
첫 걸음 내딛기가 힘들 뿐
한 걸음 뒤에 한 걸음
그 뒤에 또 한 걸음 이어지리니
그리하여 비록
최종목적지는 아닐지라도
지금여기보다는
그곳에 더욱 가까울
어딘가에 설 수 있다면
그래 일단
한 걸음 내딛는 거야.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사람들이 “자기 혼자 잘나서 저 자리에 올라간 줄 알아요!” 하며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위에서 끌어주고, 누군가 대신 희생해 주고, 누군가 대신 밀어주면서 자리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 자리에 오른 다음에는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고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불평과 불만의 소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비슷한가 봅니다. 주 하느님께서 먹고 마시고 숨쉬고 잠잘 것 다 마련해 주셨는데 그것을 모르고 자기가 다 노력해서 얻은 줄로만 알고 기고만장하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안배해주시고 섭리로 이끌어오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드리며 주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리면 좋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은혜와 그에 따른 열매를 주 하느님께 보답하는 의미로 사회에 나름 기여하고 형제들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과 진리의 하느님 나라. -존중, 신뢰, 무욕, 인내, 자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 둘은 모두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여기서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비유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깨달아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저는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는 두 원리를 깨닫습니다.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예전 피정하시던 주교님의 고백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기 수도원에서 피정하니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두어 좋아!”
저절로 자라는 씨앗처럼, 자연스럽게 자라는 겨자씨처럼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두면 그대로 평화로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마음을, 욕심을 비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문제는 욕심 때문에 집착하여 참지 못하고 자꾸 입질하고 손대는 것이 문제입니다.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진리에 새삼 공감합니다.
이것은 방관이나 방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깨어 배려하고 보살피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두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께서 잘 일하시도록 깨어 사랑으로 가꾸고 돌보는 것입니다. 존중하는 사랑, 신뢰하는 사랑, 욕심없는 사랑, 기다리며 인내하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이, 사랑이 많이 욕심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환경이 햇빛, 공기, 물, 흙입니다. 무엇하나 없어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흙도 오염되었고 물도 오염되어 정수기가 있고 공기도 오염되어 요즘은 공기청정기가 필수 제품이 되었다 합니다. 미세먼지로 마스크도 자주 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더불어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도,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알게 모르게 얼마나 오염되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은 정수기로 공기는 공기청정기로 정화하는 데 오염된 영혼은, 마음은, 사랑은 무엇으로 정화하겠는지요.
며칠전 방문한 자매가 휴대폰에 미세먼지 정도를 알아 볼 수 있는 앺을 설치해 줬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여기 불암동의 공기 상태가 요즘 대부분 “상당히 나쁨-탁한 공기, 마스크 챙기세요”란 문자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공기상태는 측정가능하지만 현대인들의 영혼이나 사랑을 측정한다면 그 오염상태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육신 건강은 그렇게 챙기면서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는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입니다. 영혼이, 마음이, 사랑이, 병이 깊으니 육신의 병도 많고 깊어진다는 생각입니다.
바로 영혼의, 사랑의 정화와 치유에 우리가 끊임없이 함께 바치는 공동전례기도가 그대로 참 좋은 영혼의 정화기임을 깨닫습니다. 영혼을, 마음을, 사랑을 정화하고 치유하기위한 필수적인 처방이 끊임없는 공동전례 기도요 말씀 공부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을 통한 영혼의 정화와 치유가 우선입니다.
정화되고 치유될 때 비로소 욕심없는 순수한 사랑, 끝까지 기다리며 인내하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도 가능할 것입니다. 하여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두어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문득 생각나는 두 일화가 있습니다.
어제 인터넷에서 읽은 법정 스님의 대원각을 인수해 창건한 길상사의 유래입니다. 대원각의 여주인인 ‘자야(김영한1916-1999)’는 법정(法頂, 1932~ 2010) 스님의 무소유란 책을 읽고 감명받아 요정인 대원각을 시주할 테니 절을 만들어 달라했다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은 여주인의 강권에 대원각을 길상사(吉祥寺)란 절로 만들고 시주한 여주인 자야에게는 염주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선물했다 합니다.
바로 여주인 ‘자야’는 그 유명한 천재 시인 ‘백석(백기행1912-1996)’의 영원한 연인입니다. 문제는 1000억에 해당하는 재산을 시주한 자야의 마음입니다. 낙성 법요식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천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시주하셨는데 아깝지 않으십니까?" 길상화는 "그까짓 천억 원, 그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 거야"”
길상화 불자의 무욕의 순수한 마음이 감동적이었습니다. 1000억원이 영원한 연인 백석의 시 한줄만 못하다니요! 이런 무욕의 순수한 사랑일 때 세상은 온통 하느님 나라의 실현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장애인 시설에 관한 내용입니다. 장애인들의 탈시설화가 요즘 활발한 추세입니다. 장애인 시설에서 자립생활자가 된 한 형제의 고백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시설에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27년 시설 생활을 끝냈을 때 나를 찾았다.“
제가 여기서 연상한 것은 시설같은 감시와 규칙, 획일화를 강조하는 가정공동체, 학교 공동체, 수도 공동체였습니다. 시설같은 공동체이기에 문제도 많고 병도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유롭고 행복한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을런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그 답을 줍니다.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최대한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최대한 자유와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지요. 이건 방치나 방관이 아니 하느님 나라의 순리에 맡기는 참으로 섬세한 사랑, 끝까지 기다리며 인내하는 사랑, 욕심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 가능한 사랑입니다. 히브리서가 권고하는 사랑도 이런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끝까지 희망하며 기다리는 인내의 사랑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마음의 쉼터
최민석 신부님
며칠 전 마을에 사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이곳 마을에 학당을 열기로 했다. 내가 이 마을에 살게 된 것은 햇수로는 이년, 달수로는 아홉 번째 달이다. 여기 휴양하면서 살고 있는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게 뭐 없을까 생각이 현실이 되었다.
그 생각이 어찌어찌 전달되어 공부하는 모임이 생긴 것이다. 마음에 품은 생각이 언젠가 현실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기묘하고 신비하다. 한 생각이 시작되고 말이 되고 그 말이 구르고 굴러다니다가 현실이 되어 학당을 이룬 것이다.
이번 주 화요일 내가 사는 나눔 방에서 ‘마음학당’은 어르신들의 자발적인 제안으로 모인 학당이다. 어르신 8분 중에 72세에서 80세 사이의 어르신들이시다. 이장님도 참여할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반갑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함께 결정해 나가기로 했다. 학당이름도 <일선마음학당>이라고 지었다.
무엇이든 마음의 눈으로 보면 온 세상이 아름답다. 말로써 진실을 표현하려고 애써 봐야 소용없다. 눈빛으로 나누는 대화가 입으로 하는 말보다 훨씬 더 진실한 마음을 담아낸다. 그러나 정작 자신도 들여다보지 못한 마음이다. 지나간 것들은 대체로 아름다운 게 사실이지만, 추억의 뒷면에는 금계랍처럼 쓰고, 석류처럼 신맛을 가진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
어르신들의 마음을 나누는 일선마음학당은 어르신들의 새로운 가족을 꿈꾼다. 아름다운 것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가까이 있다. 아름다움은 크기가 아주 큰 것도 아니다. 지극 정성을 다하는 마음 그 마음을 나눌 것이다. 결코 사라지지도 않는 그 마음을 나눌 것이다.
빛나는 추억의 훈장을 나눌 것이다. 걸판진 잔치의 기억보다 상처의 흔적이 더욱 사람을 감동시킨다. 기쁨은 가볍고, 아픔은 무거운 것이다. 관심을 가지게 되면 제일 먼저 이름부터 알게 된다. 서로의 이름을 안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추억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무시한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들은 추억을 촌스럽게 여기고, 낡은 집을 허물어 거기에다 한시바삐 고층 아파트를 세우고 싶어 한다. 추억에다 겹겹이 페인트칠을 하려고 한다. 추억에 대한 경멸이 결국은 존재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을 모른다.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여 선한 마음을 밝힐 것이다. 그 그것이 아름다움의 힘이다. 그것이 아름다움이 아름다울 수 있는 까닭이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 오래도록 머무는 아름다움 그것이 선이다. 어르신들의 그 값진 삶을 나누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삶을 나눌 것이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란 날렵한 고속철도의 속도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아주 작고 느린 움직임들이 모여서 아름다움을 이루어낸다는 것을 깨달아야 안다. 작고 느림이 세상의 중심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늙고 오래되고 느리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지혜가 쌓여있다. 안락하고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시대는 낭만이 거세된 시대이다.
나는 어르신들의 외로움이 가장 큰 병이라지만 또 한 편 어르신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어르신들의 외로움이라는 특혜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것이다. 외로움 때문에 몸을 떠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외로움을 느껴 볼 시간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외로울 때 사랑을 꿈꿀 수 있다. 그러니 사랑하고 싶거든 외로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마음학당을 시작하는 날 이러저러한 걱정을 하다가 학당 어르신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겠다고 마음먹으니 어느새 편안해 졌다. 마음이 참 묘하다.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어르신들 마음 가는대로 돕기로 한 것이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 판에 마음학당을 열었다.
“한 처음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다.”(요한 1,1) 이 말씀과 하느님은 역시 둘이면서 하나다. 일선마음학당이 있게끔 하고, 또 그 학당에 담겨 있는 뜻을 이루실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말씀은 그래서 참말이다. 하느님이 이루어 가실 것이므로 일선마음학당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이 학당은 한 시절의 행복을 나누는 새로운 가족으로 태어날 것이다.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며 위로하는 공동체를 기대한다. 멀리 있는 자식보다 함께 사는 이웃의 소중함을 배우는 지혜가 날로 커가는 학당을 기대해 본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이 갈수록 많아 질 것을 안다. 산다는 건 정말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은 동행이다.
인류의 위대함은 땅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마르코 4, 25-3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고대 역사를 보면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로 크게 구분합니다. 서식의 발달은 땅에서 나오는 자연적 추출물을 거두어들여 저장했다가 먹었으나, 신석기시대는 땅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추수하는 것으로 안정된 자리에서 문화나 문명이 싹트기 시작하여 한곳에 정착해서 도시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잘 알고 있는 자연의 이치를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는 데 이용하십니다.
그때부터 땅의 소유주가 생기고 개인적 생활이 시작되어 땅따먹기 전쟁도 했다고 합니다. 그 시대는 15,000년~10,00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지혜를 사용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있는 대로 먹고, 짐승을 잡아먹으며 살다가 농경지 시대에 시작하며 인류의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현대에는 땅에서 나온 추수한 먹거리를 그대로 먹지 않고 가공해서 4차 사업으로 육성하여 더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곡식은 물에 넣어 불로 익혀서 밥이나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지금은 마른 먹거리, 튀김 먹거리, 양배추, 죽 등 간단히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어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되려면 생산이 문제가 아니라 공평한 나눔입니다. 어제 몸이 감기몸살로 점심도 못 먹고 골방에 누워있으며 ‘무엇으로 입 다실까?’ 하다가 양배추 죽을 물 끓여서 타 먹으며 ‘이것도 없는 사람은 배를 굶고 있겠구나’ 했습니다. 좀 살펴서 못 먹는 사람을 챙겨줘야지 하다가 이제 춘궁기에 든 이북의 동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먹는 것으로 시작하여 원시인이었을 때는 먹거리를 장만하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몇천 년을 고생하였지만, 지금은 먹고사는 문제는 인류가 해결해나가는데 영양실조와 아사 상태에 빠진 오늘의 문명국가가 부끄러워집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 마련한 먹거리를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어서 지구상 어디서나 먹거리 걱정 없는 국제사회가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땅에서 나오는 모든 먹거리는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의 뜻대로 분배되어 모두가 행복한 생활을 하도록 국제연합이나 사회적 양심이 개혁적 사고로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이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장과 변화는 인류 전체의 기쁨이며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이웃에 나눔을 실천하여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합시다. 인류가 위대한 것은 나눔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작년 농번기 때가 생각난다. 모종을 만들어 밭에 심어 놓으면 낮과 밤이 지나며 자라 올라오는 곡물을 보며 정말 밤과 낮 동안 하루 종일 우주 전체가 움직이며 자라게 하는구나!를 실감했다. 우리 역시 태어나 이러한 보살핌으로 오늘 내가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살아가고 한다면 하느님께써 추수할 때 무엇인가 잘 영걸은 열매에 기뻐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우리이기에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우주에 한부분이기에 하루를 살 수 있음에 경탄하며 하루를 열어 본다.
오늘의 여명이 또 색다른 것처럼 오늘의 삶의 색갈도 다르게 살아가자. 그믐달과 금성 목성이 태양을 맞이하는 여명이다.
천국의 씨앗
곽승룡 비오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 땅에 뿌려 놓으면 자라는 씨앗과 같다."(마르4,26)
신앙은 이념이 아니라 생명이다. 처음에 생명은 종종 조금 분명하다. 잘 하지 못하는 자녀 혹은 학생은 모든 선의 근원 곧 하느님이 심어놓으신 믿음의 씨앗이 이제서야 발아하려고 기다리는 중일 것이다. 씨앗은 자라기 마련이다. 환경의 도움이 절실한 듯싶다. 그 씨앗이 자라는 우리의 밭은 마음이다. 그 마음 안에 하느님의 살아있는 목소리 곧 그 소리를 듣고 씨앗은 싻을 티우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우리 영혼의 성장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영혼 곧 양심의 성장은 시험 곧 양심셩찰을 통해 조정된다. 윤리도덕의 발전도 그렇게 잘 조절되는 방법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영성생활의 중심은 성령께 맡기는 의탁에 있다. 곧 하느님 앞에서 참 가치를 판단할 수 없고 불완전한 방법같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신비에 머무는 것이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4,29)
성무일도 시작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거든 너희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8)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서울대교구의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서품 받는 새 사제들이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히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성소국장으로 5년 동안 있었기 때문에 ‘서품식’은 저의 주된 업무였습니다. 준비하는 과정이 긴장되고 힘은 들었지만 가장 보람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1년 농사를 마치고 수확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멀리 미국의 댈러스에 있지만 새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서품식 준비를 위해서 수고하는 성소국 직원들과 봉사자들에게도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미국 교회는 사제성소가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유럽의 교회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사제가 없는 교회는 미사가 없고, 미사가 없는 교회는 성체성사가 없는 교회가 되고, 성체성사가 없는 교회는 영적으로 메말라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어째서 사제성소가 감소하고 있을까요? 사제성소의 밭인 가정에서 기도와 찬미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문을 열면서 교회의 소중한 전통과 가르침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자본이라는 달콤한 독배를 마시면서 말씀과 영성이라는 진리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친교와 축제라는 열매는 좋아하지만 희생과 봉사라는 뿌리가 되기를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하였습니다. 사제성소와 수도자성소가 증가하였고, 성전 신축이 매년 이루어졌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비롯한 한국 교회의 사목자들은 인권과 정의를 이야기하였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비자들은 스스로 교회를 찾았습니다. 교우촌을 중심으로 순교자 영성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재물과 집 심지어 목숨까지도 기꺼이 포기하는 영성입니다. 일치는 분열보다 강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분제도의 사회였던 조선은 양반, 상놈, 양민, 천민의 구분이 철저하였습니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였던 이들은 신앙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상에서 이미 천국을 살고 있었습니다. 전체가 부분보다 강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일차원을 달리는 기차는 2차원을 달리는 자동차를 능가하기 어렵습니다. 2차원을 달리는 자동차는 3차원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나, 이웃, 국가, 지구, 태양계, 은하계를 넘어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실재는 관념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은 그를 치료해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교회의 교우촌은 실재가 관념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준 공동체입니다. 함께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순교자 영성’을 망각하고 세상의 것들을 따라간다면, 영적인 풍요로움을 외면하고 물질의 풍요에 빠져든다면, 가정에서 기도와 대화가 사라지고 텔레비전과 스마트 폰에 시간을 내어준다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듣지 않고 가진 것을 내어 주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성소도 감소할 것입니다. 교회는 생동감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물질과 자본은 하느님나라의 겨자씨가 될 수 없습니다. 성공과 명예와 권력은 하느님나라의 겨자씨가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하느님나라의 겨자씨가 될 수 있을까요? 무엇이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쉼터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의 제1독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오늘 서품 받는 새 사제들이 하느님나라를 알리는 겨자씨가 되면 좋겠습니다. 새 사제들의 미사와 복음 선포가 영적으로 메마른 이들에게 깊은 위로와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되기보다는 끝까지 인내하여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마르 4,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절로
열매 맺게 하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또한
언제나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속에서
우리모두는
살아갑니다.
떠나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우리모습입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이와같이 자연스레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입니다.
순리라는 흐름안에
하느님의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들 삶또한
저절로 자라게하는
하느님 방식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또한
자연스럽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고
자연스레 영글게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오신
자연스러운 순리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땅과 줄기
이삭과 낟알
이 모두는 자연스러운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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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에 종종 얼굴을 비추기 때문에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특히 성지에 있다 보면 “신부님, 평화방송에서 봤어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반갑게 인사하시지요.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연예인도 아닌데....’라는 생각에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꽤 익숙해졌습니다.
며칠 전, 미사를 끝내고 성당 밖에서 인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분께서 저를 향해서 사진을 찍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평소의 습관대로 그분을 행해서 손가락으로 ‘브이’를 표시하고 웃으면서 포즈를 취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사진을 찍으신 뒤에 제게 다가와 “신부님, 사진이 잘 나왔어요.”라면서 스마트폰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진 속에는 제가 없었습니다. 제가 아니라 제 옆으로 보이는 성당의 정면을 찍은 것이었습니다.
순간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저를 찍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냥 짐작일 따름이었고,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먼저 “저 찍으시는 거예요?”라고만 말했어도, 혼자만의 지레짐작으로 민망한 포즈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혼자만의 짐작과 혼자만의 착각입니다.
이처럼 타인의 생각을 자신의 입장으로만 짐작하여 판단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과정 안에서 많은 오해와 함께 아픔과 상처도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내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삶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삶이 필요합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입장을 전혀 바라보지 않으면서 내 입장만으로 주님을 판단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솔직히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씨이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라서 수확 때에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또한 겨자씨 역시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큰 가지를 뻗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된다고 하시지요. 그 순간만을 바라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내 자신의 생각만을 가지고 지레짐작한다면 하느님의 뜻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씨의 비유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같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자라나고, 조용히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섣부르게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깨닫지도 또 체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떠올려보십시오.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섣부른 짐작과 판단을 내려놓는다면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길에서 넘어져 본 일이 있는가? 우리 발을 거는 것은 커다란 바위가 아니다. 오히려 작은 돌부리이다. 넘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작은 돌부리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심의용)
새로운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
예전에 저는 남들 앞에서 전혀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울렁증이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가슴은 두근두근, 다리는 후들후들... 그러다보니 입은 부들부들 떨려서 제대로 말이 나올 수가 없었지요. 이러한 제 자신을 스스로 걱정하고 있는데 어느 날 책에서 이런 내용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성을 보고 두근두근, 시험을 볼 때 두근두근,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두근두근. 이 세상 모든 두근거림은 기회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이 말에 큰 힘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두근거림이 생겼을 때에는 제게 어떤 기회가 다가오는 순간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뒤로 두근거림의 순간이 오면, ‘내가 좋은 기회가 온 거야. 이 기회를 나는 즐길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되뇌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울렁증이 없어진 지금의 저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울렁증이 있는 사람만이 두근거림을 체험할까요? 아닙니다. 뜻밖의 일을 경험할 때,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등 역시 두근거림을 갖게 됩니다. 그 순간에 피하려는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라, 좋은 기회가 왔음에 감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모습을 갖춘다면 어떨까요? 그 안에서 새로운 나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도 오늘은 의정부에 계신 어머니에게 가려고 합니다. 가족들이 모이면 정겨운 이야기꽃을 피우게 됩니다. 어르신들은 장성한 자녀들을 보면서 흐뭇해하십니다. 저도 이제 직장을 잡고 열심히 사는 조카를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어르신들은 자녀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씨앗이 땅에 떨어지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듯이, 아이들에게 숨어있던 재능과 가능성들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보기에 기쁘실 것입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는 누군가 돌보아 주지 않으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생명들은 태어나면서 스스로 걷고, 움직이고, 먹을 것을 찾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오랫동안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하고, 배워야합니다. 참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다른 생명과 달리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더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고, 더 완벽하게 적응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겨자 씨’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작은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아주 작은 씨앗이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것들이 담겨 있다고 하셨습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커다란 나무가 나오고, 새들이 쉬어가는 둥지를 틀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하였습니다.
일주일 후면 사제 서품식이 있습니다. 새 사제들은 어쩌면 씨앗과 같습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격려가 함께하면 영성이 자라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물론 사제들도 가능성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한 선배이지만 새 사제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아프고, 외로운 이들을 위한 봉성체를 정성껏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본당에 장례가 나면 먼저 빈소를 방문하고 고인을 위한 연도를 해 드리면 좋겠습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잘 듣기만 해도 치유가 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꽃은 아름답기 때문에 벌과 나비가 날아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꽃에는 향기가 있기 때문에 벌과 나비가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인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내는 쓰지만 그 결과는 달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성장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식과 율법을 뛰어넘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충실함이 없는 자유로움은 악의 유혹 앞에 쉽게 넘어가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자유가 없는 엄격함은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도 비난하고, 심판하려고 하기 쉽습니다. 영적인 자유로움이 가득한 엄격함이면 좋겠습니다. 내적으로 신앙에 충실한 자유로움이면 좋겠습니다. 설 연휴입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향 가는 길입니다. 주님의 사랑 듬뿍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신비가. -인내와 믿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매주 월요일 3시경때 독서 말씀은 늘 들어도 새롭습니다. 경각심을 줍니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또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마십시오.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야고1,19ㄴ-20).
화를 내면 반드시 후회합니다. 아무리 잘했어도 집니다. 끝까지 참는 자가, 인내하는 자가, 기다리는 자가 이깁니다. 인내의 믿음, 기다림의 믿음입니다. 인내의 믿음과 함께 가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칠전팔기七顚八起, 백절불굴百折不屈, 모두 인내와 믿음을 상징하는 말마디입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가 심오합니다. 깊은 깨달음을 줍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입니다.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말 그대로 사랑의 신비가입니다. 두 씨앗의 비유가 말씀에도, 사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멀리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자연스럽게, 은밀하게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손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고 끝까지 기다리며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알아도 모르는 체, 봐도 못 본체 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희망이, 믿음이,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기다림의 인내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인 희망이, 믿음이,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기다림의 인내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처럼, 하느님 말씀의 성장도 사람의 성장도 매사의 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무리하지 말고 순리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손대고 입질하여 그르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이 절대적입니다.
그러니 매사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하느님의 뜻대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전개될 수 있도록 존중하고 배려하며 끝까지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비의 사랑입니다. 인내와 하느님 믿음이 얼마나 우리 삶에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우리 분도수도자의 정주서원 역시 인내와 믿음의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죽을 때 까지 정주하는 분도수도자들은 ‘인내의 대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의 주제 역시 인내입니다. 인내에 관한 내용이 끝나면 11장은 온통 믿음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인내와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합니다.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세례 받은 이후 겪어 온 무수한 고난의 인내를 상기시킨후 인내의 결정적 비결을 말합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 줍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더 좋고도 길이 남는 재산인 하느님을 믿었기에 항구한 인내요 초연한 삶입니다. 하느님을 잡고 있을 때는 모든 것을 놔버릴수 있지만, 하느님을 놔버리면 모두를 잡아야 하니 너무 힘듭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한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제 불가의 잡지 ‘해인海印’지에서 읽은 방장님의 병신년 동안거 반결제 법어 중 한 대목을 잊지 못합니다. 이 또한 수도승의 믿음을 환기시킵니다.
“혜암 스님께서도 ‘공부하다 죽어라.’고 하셨습니다. 공부하다 죽으면 수지맞는 일입니다. 공부하다가 죽는 그것이야 말로 참으로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기도하다 죽어라.’ ‘일하다 죽어라.’ ‘믿다 죽어라.’ ‘희망하다 죽어라.’ ‘사랑하다 죽어라.’ 추가하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을 찾다 죽어라' 입니다. '주님을 따르다 죽어라'입니다. '놀다가' '자다가' '먹다가' '앓다가' '취하다' 죽어라가 아니라, '깨어 살다가' 죽어라입니다. 인내의 믿음으로 사는 이에게 주님은 이런 선종의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 믿음의 전쟁입니다. 믿음으로 싸우다 전사戰死해야, ‘믿음의 전사戰士', '믿음의 승리'임을 깨닫습니다.
제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제목의 말마디 역시 인내와 믿음을 상징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참고 기다리는 믿음이 있을 때 구원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궁극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인내의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저절로 된다구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
주님께서는 오늘 하느님 나라를 씨 뿌리는 것에 비유하시고, 씨 중에서도 겨자씨를 뿌리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이런 돌발적인 묵상을 했습니다. 나는 어떤 씨를 뿌려왔고 지금 어떤 씨를 뿌리고 있나? 나는 과연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고 있는 건가?
오늘 주님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면 씨를 뿌리는 것도 중요하고, 뿌린 씨를 싹트게 하는 것도 중요하며,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씨를 뿌리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오늘 주님은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씨를 뿌리기만 하면 저절로 싹트고 자라 열매 맺는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믿기 힘들어합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씨 뿌린 다음에 그것이 싹트고 자라고 열매 맺기까지 자기가 얼마나 애 써야 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쌀농사가 아니라 자식농사만 해도 애를 나 놓기만 하면 얘가 저절로 크고 저절로 사람 노릇하는 것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절로>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씨는 저절로 싹트고, 자라고, 열매 맺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씨가 세상의 씨라면 <저절로>가 절대로 불가능하겠지만 하느님 나라의 씨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노자도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하였지요. 여기서 무위無爲란 인위人爲가 없는 것이고, 자연自然이란 우리가 요즘 뜻하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손을 타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것을 말하는 거겠지요.
그러므로 무위자연이란 인간이 인위적으로 뭣을 하지 않으면 무엇이 스스로 그러하거나 그렇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우리 신앙적인 말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정말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고 자라고 열매 맺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하고, 할 것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무위의 뜻,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의 뜻을 다시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무위란 자포자기적이거나 무책임하고 게으르게 아무 것 하지 않음인가?
무위란 자기본위 또는 자기중심으로 무엇을 하지 않음입니다. 무엇을 하되 자기가 없음입니다.
자기 이익,
자기 계획,
자기 뜻,
자기 고집,
자기 힘. 이런 것이 없이 하느님이 내가 되고 내가 하느님이 되어, 하느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내 뜻이 하느님의 뜻이 되어, 나의 힘은 빼고 하느님의 힘이 나의 힘이 되어 무엇을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회심축일에 저는 하느님께 여쭙고 나는 뭘 하는지 자문했는데 여쭙고 뭘 하기도 해야겠지만 아예 내가 뭘 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하라 하시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 차라리 낫겠습니다.
그렇겠지요?
이것을 이렇게 하려는데 이 것이 당신 뜻에 맞는지 여쭙는 것보다 당신 원하시는 것 하려 하는데 당신 뜻이 뭔지 여쭙는 게 차라리 낫겠지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과학 문명은 삶 전반에 걸쳐 엄청난 편리함과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과 정보기술(IT)과 생명공학이 융합하여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저절로 이룰 수 있는 영역들이 급속도로 늘어가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지요. 문제는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인간이 설자리를 잃고, 기계의 힘을 믿고 만사가 절로 이루어진다는 의식을 갖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4,26-32)를 통하여 자신과 함께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사정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대단한 위력을 지니며, 수확 때가 돌아오듯이 어김없이 오고야 만다 하십니다(4,29).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기에 우리가 참여하지 않고 협력하지 않는다 해도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하느님 나라는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저지르는 불의와 죄악에도 인간의 구원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무관하게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나가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세속화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개입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당신의 자비와 의로움과 선을 당신 뜻대로 실현해나가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이지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시고 인간의 생각에 따라 바뀌지 않으며,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도 실현되어 갈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어김없이 다가오는 수확의 때를 아는 농부처럼 성장 과정에서 오는 고통을 감수하고 인내하며 기다리실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 미약한 나를 씨앗 삼아 하느님 나라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자 하시는 하느님께 나 자신을 기꺼이 내놓을 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대단한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려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동참해야겠지요.
또 세상만사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생사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를 벗어나 그분의 은총 없이 이루어지지 않지요. 제 아무리 큰 공적도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하며”(1코린 3,7) 내가 이룬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품은 사람들의 도움 없이 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아 감사하며 교만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아울러 나 자신을 포함하여 미소한 이들과 사소한 일상사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나아가 아픔과 고통, 절망의 깊은 늪에서조차도 그 안에서 함께 하시며 놀라운 성장을 이루시는 주님을 믿고 견뎌나갔으면 합니다. 오늘도 '기계화된 자동화'의 잠에서 깨어나 겸손한 마음으로, 땀흘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적극 동참하는 거룩한 노동의 날이었으면 합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차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4)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나라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는 매 한가지 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안으로부터 오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건설되는 걸까?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바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 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씨앗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뿌려진 씨가(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씨앗은 자신 안에 이미 스스로 싹을 틔우고 잎으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잘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움과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을 잘 가꾸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응답하고 협조할 때라야 비로소 건설되는 나라인 까닭입니다.곧 씨앗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만 성장하고 자라나고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씨가 우리 안에 뿌려지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어떻게 성장시키는지,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에서 줄기가 나오고, 이삭이 나오고, 낟알이 맺히고, 하는 것은 말씀 권능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는 분은 말씀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작은이의 모습으로 오셨을까?
왜 그러실까요? 그것은 사랑에 빠져본 이는 이를 알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이 앞에서, 늘 가장 작은 자로 머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놓고 작은 자로 그를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 이유는 그토록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신 까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작은 자인가(의 모습인가)?
만약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결코 ‘크고 웅장한 나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작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십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겨자씨’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작은 ‘겨자씨’로 존재해야 할 일입니다. 비록 작은‘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썩기만 하면,바로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썩기만 하면, 바로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이 씨앗을 정성껏 가꿀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소서.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가난하고 소외받고 외로운 이들이 찾아와 쉴 수 있는 큰 나무로 저희를 축복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형제들 앞에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지금 여기서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원장님은 그제서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 입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 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씨앗은 풍성하게 되기 위해서 순응하고 씨앗으로서의 그 존재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다른 것이 됩니다. 아주 커다란 다른 것이 됩니다. 변화됩니다. 이렇게 하느님나라는 과정 중에 있으며 희망과 완성을 향한 과정 중에 있습니다...하느님 나라는 매일 이루어지고 성령께 대한 순응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겨자씨가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씨의 크기는 0.95-1.6밀리미터=보니까 아주 먼지 같아요!)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듯이(마르 4,32) 우리의 정성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 끝은 장대하리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무리는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포함하는 교회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 안에 자유로워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있듯이 우리의 사랑과 희생도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참으로“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요한3,27).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로마11,35-36).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 됨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 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거짓은 100년이 지나도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미룰 수 없는,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모른다.(마르 4,26-34)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우리가 우리 마음에 좋은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라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 즉 자기 안에 심어져 자라나고 있는 덕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직 헤아릴 길이 없다. 땅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인간도 그렇게 스스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땅이 처음에는 싹을 트게 하고 줄기를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가득 달린 낟알을 낸다. 아직 약한 싹이지만 좋은 시작이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덕이 선행으로 발전할 때, 줄기에서 이삭이 패는 것이다. 덕에서 훌륭하고 완전한 행동이 나올 정도로 진보하면 마침내 이삭에 낟알이 가득 달리는 것이다. 그 낟알들이 영글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31절) 겨자씨는 아주 평범하고 하찮은 씨앗이다. 빻으면 그 힘을 드러낸다. 믿음도 처음에는 단순하지만, 역경으로 으깨어지면 그 힘을 발휘하여, 믿음에 관해 읽거나 듣는 사람들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운다. 하느님의 말씀은 분노의 쓸개즙을 가라앉히고, 교만의 불꽃을 억누른다. 말씀의 씨앗에서는 커다란 나무와 같이 자라났다. 이 나무는 바로 세상 곳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에 하늘이 새들, 곧 하느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
주님은 겨자씨였다. 그분께서 상처 입지 않은 겨자씨였을 때, 백성들은 그분을 겨자씨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분을 아직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려고 잘게 부서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겨자씨처럼 동정녀의 태라는 정원에 뿌려지신 그분은 십자가 나무로 자라셨고, 그 가지들은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갔다.
수난의 절구에 빻아진 그분의 열매는 그분과 관계를 맺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이 맛을 지니고 보존될 수 있도록 넉넉한 양념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빻아짐으로써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 정원 즉 교회에 씨를 뿌리셨다. 교회는 온 세상으로 퍼져가는 정원이다. 복음의 쟁기로 갈고, 가르침과 규율의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고, 사도들의 노고로 온갖 해로운 잡초를 제거한 정원이다.
이 정원에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영원한 꽃들인 동정녀들의 백합과 순교자들의 장미꽃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든 이의 푸른 풀밭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부드러운 초목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정원에 뿌리신 겨자씨이다. 그분은 성조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고, 예언자들은 싹을 틔웠고, 사도들은 크게 자라게 하였다. 그 씨앗은 교회 안에서는 큰 나무가 되어, 선물 즉 은총을 실은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우리에게 있는 씨는?
하느님의 선한 뜻에 맡기면
윤경재 요셉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르4,26~34)
어느 마을에서 농부들이 모여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 년만 날씨를 변화시켜 주세요.’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좋다. 일 년 동안 너희 원하는 대로 날씨를 변화시켜 주마.’
그래서 농부들은 자기들의 경험에 따라 때맞춰 하느님께 요구했습니다.
‘하느님, 지금은 비를 주세요.’
‘하느님, 지금은 햇빛을 주세요.’
‘하느님, 지금은 바람을 주세요.’
가을이 되어 들판이 누렇게 변하고 추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농부들은 대풍을 기대하며 신이 나서 추수하고 탈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막상 탈곡기에 넣어 탈곡을 해보니 알곡이 없었습니다. ‘아니, 하느님, 왜 알곡이 하나도 없습니까?’ 크게 실망한 농부들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 비를 원할 때는 비를, 햇빛을 원할 때는 햇빛을, 바람을 원할 때는 바람을 주었다. 그런데 너희가 언제 나에게 알곡을 달라고 하였느냐? 너희는 알곡을 달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농부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의해서 하느님께 이리저리 주문하는 것보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의 선하신 뜻대로 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오지로 나가 친지들이 보내주는 적은 도움만으로 생활했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할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조력자와 선교비가 더 많이 필요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점점 줄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은 마음과 실제로 벌어지는 환경의 차이에 선교사는 정신적 부담으로 밤잠을 설쳤고 마침내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외로움에 지친 그가 할 일이라고는 성경에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15장을 읽다가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순간 밝은 태양이 비추는 것처럼 갑자기 어두웠던 마음이 환하게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는 나무이므로 가지인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제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모두 맡기니 책임져주시옵소서.’ 선교사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시인하고 회개하며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화가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점차 건강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밝고 희망찬 모습으로 살아가니 오히려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고 선교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 나라를 가리켜 보이고자 무던히 애쓰셨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게 온갖 비유와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리켜 보이셨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내어놓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못했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귀를 닫아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씨앗이 자랄 때 알맞게 자라도록 때맞추어 에너지를 부어주십니다. 한꺼번에 부어주어 질식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만물을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귀를 여는 수준에 맞춰 알맞게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하느님의 판단아래 모든 것이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우리가 귀를 열었다고 우겨도 결국은 연 만큼만 들립니다.
비유를 제자들에게만 따로 설명해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 몸을 개방하고 스승에게 다가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넘치는 신비를 오롯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들 몸 안에 마르지 않는 샘을 터트려주시어 신선한 생명수를 넘치도록 받은 것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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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분이 큰 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또 위로도 해드리기 위해서 찾아갔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환자 분을 통해서 오히려 제가 더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 특히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내게 이렇게 감사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행복지수가 너무나 높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행복지수가 늘 세상의 관점에 맞춰 있다 보니 점점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 않아 ‘행복하지 않다’는 착각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커다란 농장을 경영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농장을 경영하는 것이 너무나도 지겨웠습니다. 도시에 나가서 생활하는 자신의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고 그에 비해 시골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자신은 실패자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농장을 팔겠다는 광고를 냈지요. 그러면서 이 후진 농장을 누가 사겠냐면서 회의적인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농장을 사겠다는 사람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농장이 신통치 않아서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던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 볼 수 있었지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지금 현재 주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눈에 잘 보이면서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농장을 팔려고 했던 청년 역시 자신을 불행하게 생각하다가 농장을 사겠다고 찾아온 엄청난 사람들을 보면서 비로소 자신의 행복했었음을 찾은 것처럼, 우리 역시 지금 현재에는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내 곁에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스스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전해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면 싹이 터서 자라는데, 정작 씨를 뿌린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저절로 자라서 열매를 맺는 순간까지 씨 뿌리는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주님의 사랑이 계속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사랑은 공기와 똑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공기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공기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공기야~ 고마워. 주님, 공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기 힘들지요?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공기가 없다면 어떨까요? 우리들은 이 세상을 10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딱 10분만 공기를 끊어버린 채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들 모두 이 세상과 ‘Bye-Bye’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자신의 삶 곳곳에서 행복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련스러운 노력 말고 무엇이 우리 인생에 빛을 줄 수 있겠는가(조정래).
행복한 하루
일본 저널리스트 ‘후쿠오카 켄세이’는 ‘삶의 의미’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자살한 사람들의 유서들을 많이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사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무능력, 병, 노화를 겪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문제인데 말이다.. 나를 지켜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은 일도, 돈도 아니며, 세상의 평가도 아니다. 당신 자신의 존재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부족한 돈, 낮은 명예, 아픈 자신의 삶, 늙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의 자신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는 ‘나’입니다. 그래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며, 누릴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이 더 큰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행복이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어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가장 행복한 하루가 될 것입니다.
소통의 비결
신명희 수녀님
누구나 그렇듯 제게도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정확히 전달하고 소통하는 일은 수월치 않은 일입니다. 소통하고자 하는 바가 논리의 틀을 따르지 않거나 상대와 경험의 공통분모가 적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로의 말과 생각이 엇박자로 빗나가 결국 엉뚱한 궤도를 타고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도 그랬습니다. 관계 안에서 일어난 저의 두려움과 애잔함, 속상함을 꺼내놓았습니다. 한데 스스로의 감상에 젖어 제식으로 덤벙대며 표현한 탓인지 제가 느낀 두려움은 약함으로, 애잔함은 불쌍함으로, 속상함은 성마른 화냄으로 해석되어 받아들여짐을 보며 답답하고 난감해 말을 닫았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며 틈새 없이 본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미끄러지지 않고 그들에게 제대로 가 꽂힐 수 있도록 듣는 사람의 자리에서, 듣는 사람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십니다. 그러고도 모자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십니다. 소통의 달인이신 예수님조차도 한 번에 사람들을 깨닫게 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셨나 봅니다. 한 가지 가르침을 위해 이런저런 비유를 들어가며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하십니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결국 소통의 비결은 상대의 선을 바라는 간절한 바람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성임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생각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 거의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최근에 읽은 책의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인데요. 그 중간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종종 이를 앓곤 했는데, 그때 마다 어머니께 가면 통증을 없애는 약을 주실테고 그러면 잘 잘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통증이 아주 심해지기 전까지는 어머니께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틀림없이 제게 아스피린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 다른 조치도 취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치과에 데려가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것만 얻고 원치 않는 것은 피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저는 당장 아픈 것만 면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완전히 고칠 각오를 하지 않고는 아픔을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치과의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의사들은 아직 아프지 않은 이들까지 모조리 찾아내 손볼 것입니다. 제 생각에 그들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사람들로서, 하나를 주면 열을 달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우리 주님은 바로 이런 치과 의사 같은 분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하나를 드리면 열을 달라 하실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부끄러운 죄나 매일의 삶을 망치는 죄를 고치려고 그를 찾습니다. 물론 그는 그것들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기까지만 고쳐 주시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분을 끌어들인 이상, 완전하게 치료받지 않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먼저 “대가를 계산하라.” 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는말씀하십니다.
“잘 듣거라. 일단 너희가 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너희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겠다. 너희 자신을 내 손에 맡기는 순간, 내 목적은 오직 너희를 완전하게 만드는 그것뿐이다. 그 밖의 것도 안 되고 그 이하도 안 된다.
너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니 원한다면 나를 밀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를 밀어내지 않겠다면, 내가 이 일을 끝까지 해내리라는 점을 명심 하거라. 너희가 세상에서 어떤 고통을 대가로 치러야 하든지, 죽은 후에 어떤 알 수 없는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든지, 또 내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든지 간에, 너희가 말 그대로 완전해지기까지.. 나는 결코 쉬지 않을 것이며 너희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있고, 이렇게 할 것이다. 그 이하의 것에는 결코 만족하지 않겠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면에서 루이스의 어린 시절 마음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당장의 아픔만 면했으면.. 한 두 가지의 잘못을 고쳤으니, 이 정도면 됬어... 하고 뒷걸음 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보통 사람이 된 것에 만족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완전하게 건강해진 치아, 잡초의 줄기만 짧게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잡초를 뿌리 채 뽑아 버리는 것, 지금 살고 있는 낡은 집을 부숴버리고 더 큰 궁궐을 지어주시는 것.. 이 하느님의 생각이십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막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나의 자유 의지입니다. 만약 게으름과 비겁함으로 뒤로 물러난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그분께서 나를 완전히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그분이 하시는 대로 맡기고 순종해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큰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그분이 하시는 좋은 계획과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맡기고 순종해 봅시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2월 1일의 복음 말씀은 마르코복음 4장 26절-34절,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다.'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생명력의 원천에 관한 가르침이고, '겨자씨의 비유'는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게 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생명력의 원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두 비유는 사실상 같은 뜻의 비유입니다.
생명력의 원천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하시고, 겨자씨를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라게 하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비유의 뜻과 비유에 들어 있는 가르침이 다릅니다.)
그런데 두 비유 모두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신다.' 라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도 된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지만 씨를 뿌리는 일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씨앗이든 아니면 제법 큰 씨앗이든 간에 그 씨를 뿌리고 가꾸고 보살피는 일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인간이 할 일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구경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인간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하고,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도 있습니다. 천지창조는 인간이 없는 상태에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관리하고 보살피는 일을 맡기셨고, 동물의 이름을 짓는 일까지도 맡기셨습니다(창세 2,15-20).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구해 주셨지만, 백성들이 고향땅까지 스스로 걸어가게 하셨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지만 그 '만나'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은 사람들이 스스로 하게 하셨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내렸을 때,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는 성령에 사로잡혀서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행한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성령의 힘으로 설교를 하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사도들 자신들의 의지와 생각으로 자기들의 믿음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였습니다.
그 이후 사도들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서 선교활동을 할 때, 성령의 힘이 계속 작용했지만, 사도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까지 성령께서 대신해서 전부 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박해를 예고하시면서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르 13,13)." 라고 약속하셨는데, '끝까지 견디어 내라.' 라는 말씀은 '어딘가에 숨어서 꼼짝도 하지 말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려라.' 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박해를 받고 고난을 겪더라도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을 증언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지시였습니다(마르 13,9-11).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겨자씨를 큰 나무로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의 생명력을 보고 감탄하면서 구경만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씨를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가꾸고 보살피면서 하느님의 일을 도와드릴 것인가?
인간들이 구경만 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겠지만, 그러면 그 일은 인간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 나라는 인간들이 들어갈 일이 없는 나라가 되고,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닌 분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그 나라의 건설과 발전 과정에 동참해야 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자녀로서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려야 합니다. 남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일은 사실상 자녀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사실상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문을 두드리는 일은 예수님의 일이고, 그 문을 열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일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속세가 하느님 나라를 이해? 어렵지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지구촌이라는 말이 앞당겨지며 국제사회 관계도 더 긴밀해졌습니다.
20~30년 전만해도 인공위성 문제는 한국으로선 어림없던 일이었지요.
40년 전엔 오늘 같은 한국사회를 상상도 못했고 꿈도 꾸질 못했습니다.
다이알 전화기 시절에 스마트 폰을 어찌 상상이나 꿈을 꿨겠습니까.
지상이 천상을, 세상이 천당을, 속세가 하느님 나라를 이해? 어렵지요.
상상도 못하고 꿈도 꿀 수 없는 정도로 다르다는 말만이 맞을 겁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코 4,32)”
가장 작은 그 이름은 겨자씨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세상에 좋은 일은 거저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 좋은 일은 그냥 있어도 저절로 되는 것이 많지요. 좋은 것에는 수고스러움과 고통이나 번거로움이 따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예 시도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그만 두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겨나가는 것이 신앙의 정석으로 볼 수 있고 사도들의 서간에서 보면 교우들에게 당부하는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고 솔직히 어려운 길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 예로 사도 바오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빛을 받은 교우들이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내던 때를 회상시키며 어려움을 끝까지 극복 하도록 격려합니다.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히브 10, 33-34)
그러나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확신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그는 아울러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시는데, 씨를 뿌려 놓고 자고 일어나면 저절로 싹이 나오고 자라나는 이치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곡식이 영글면 농부가 낫을 대어 추수를 하듯, 사람도 한 평생 했던 선행과 하느님 말씀의 실천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서 주님께서 설명하십니다.
또한 씨와 연관시켜서 이번에는 사람의 신앙에 대해도 설명을 하십니다. 겨자씨가 아무리 작아도 땅에 심어 싹이되어 자라나기 시작하면 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나무가 된다는 사실을 두고 설명하십니다.
이런 비유로 비록 우리의 신앙이 눈에 보이지 않고 때로는 미비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신앙이 겨자씨처럼 자라나 큰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비록 자신의 신앙을 사람의 오감이나 계산에 의해서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바로 주님의 기적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겨자씨처럼 작게 여겨지는 신앙이라도 주님 안에서는 놀라운 힘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손바닥에 놓고 보아도 보기가 너무 작은 겨자씨지만 하늘을 향하는 큰 나무와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을 바라 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를 주님께 청합시다.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흐르는 물줄기도 자라나는 화초도
자연적으로 흐르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모든 건강한 방식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들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합니다.
모든 것들은 자연스럽게 자라며 열매 맺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 나라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그분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분명히 계심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매일 매일 조금씩 우리를 자라게하는
살아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성장이 됩니다.
모두를 성장시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인간의 사랑처럼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사랑은 또한 서로를 성숙시키는
성숙을 지향합니다.
성숙이란
하느님 사랑을 믿고
겸손하게 의지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존재하고
사랑이 있기에 자라납니다.
사랑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서로를 존중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합니다.
있는 그대로 그를 존중하기위해서는
아주 많은 시간의 인내심과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까지도
생명의 나라로 받아들이신
그분의 사랑을 이제는 믿고
따를수 있어야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성장입니다.
성장과 성숙으로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믿고 삶의 바깥에서만
성숙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성장과 성숙을
만나는 신앙의 하루되십시오.
복음묵상이 늦었습니다.
점점 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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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곤충의 세계를 보면 어떤 질서가 있다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들을 보십시오. 기러기들은 먼 거리를 여행할 때 V자로 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만약 서로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만약 맨 앞에 있는 대장 기러기가 길 안내를 엉뚱하게 한다면? 또 뒤에 날아가는 기러기는 대장 기러기를 따르지 않는다면? 분명히 V자의 행렬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먼 거리를 여행하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꿀벌 역시 그렇다고 하지요. 육각형 모양의 꿀벌 집에는 한 마리의 여왕벌과 약간의 수벌, 그리고 약 3~5만 마리의 일벌이 함께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 공동체 안에서 가지는 힘과 하는 일은 각각 다르지만, 서로 도우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수의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의 세상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과연 이 사회가 제대로 움직여질 수 있을까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에, 내 자신이 모든 것을 다할 수 없어도 이 세상 안에서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을 저는 책임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만약 ‘될 대로 되라’라는 생각만 가지고 자기 하고 싶은 것만을 하고 살면 이 세상이 제대로 움직여질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책임감을 가지고 때로는 하기 싫은 것도 행하면서 살아가도록 우리들과 이 세상을 주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편한 것만을 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만을 받으면서 섬김을 받는 생활만 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오히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생활하셨으며,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왜 이렇게 비참한 모습을 스스로 선택하셨을까요? 바로 책임감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당신께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인간들을 위한 책임감 때문에 이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쉽게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쉽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특별한 배려인 것이지요. 또한 당신께서 받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책임감에서 나온 말씀이십니다.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미루면서 포기하는 책임감 없는 모습에서 벗어나, 내 자신부터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적극적인 책임감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는 우리가 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과 사람들에 대해 배우려고 할 때, 필요한 것 이외에는 절대로 추측하지 마라. 대신 직접 질문하고 관찰하라.(윌리엄 오브 오컴)
무의미한 행동은 이제 그만.
제2차 세계대전 때, 어떤 부대원 모두가 첫 번째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척이나 긴장했지요. 특히 밤중에 적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부대원 모두는 참호 안에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전투한 이 부대원들은 모두 벌벌 떨 수밖에 없었지요.
밤중에 예상대로 적이 공격해 왔나봅니다. 총성이 울려서 그들 모두 미친 듯이 총을 발사하며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싸움은 밤새 격렬하게 이어졌고 소리가 잦아들면서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적의 총격을 받아 사망한 동료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마침내 아침이 밝아왔고, 그들은 산을 수색하며 죽은 적군의 수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명의 시체가 없더랍니다. 그들은 적이 없는 상태에서 모두 밤새 착각 속에서 총을 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던 것이지요. 무의미한 싸움을 격렬하게 벌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 안에서 많은 착각 속에서 무의미한 행동을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리고 그런 행동을 통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요? 이제는 좀 더 신중하게, 그리고 좀 더 의미 있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우리 자신을 꿈꿔 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오늘 나로부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작다는 것을 강조할 때 어떤 표현을 합니까? 그 표현이 상황 상황에 따라 참으로 다양합니다. 봉급이 작을 때 ‘쥐꼬리만한 봉급’, 방이 작을 때 ‘콧구멍만한 방’, 가게가 작을 때 ‘구멍가게’, 눈이 작을 때 ‘단추 구멍만한 눈’ 밭이 작을 때 ‘손바닥만한 밭뙈기’
유다인들은 작은 것을 말할 때 겨자씨 만하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만큼 겨자씨는 크기가 작습니다. 씨앗의 직경은 대개 0.2mm정도랍니다.
11월경에 씨앗을 뿌리는데, 씨앗에서 싹이 나오면 채소처럼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키가 커가면서 한 가운데 줄기가 점점 굵게 자리 잡으면서 마치 나무처럼 커지기 시작합니다. 겨자나무는 이스라엘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자라지만, 특히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갈릴래아 지방에서 많이 서식합니다. 유채꽃 빛깔의 길쭉하고 재미있는 꽃도 피는데, 2-3월경 갈릴래아 호숫가를 산책하다보면 온 산과 들이 겨자 꽃으로 인해 노랗게 물듭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 한 가지는 그 작은 씨앗이 특별한 투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성장을 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 자라면 2-3미터는 물론이고, 기후가 좋은 요르단 강 기슭이나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는 3-4미터 높이까지 자라나 무성해진 가지 사이로 새떼들이 날아와 앉기까지 한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인 교회,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폭발적인 확장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장의 속도나 위세가 대단한 겨자씨를 비유로 드신 것입니다.
결국 언젠가 도래하게 될 최종적이고 궁극적 구원, 결정적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 완료될 때 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 말씀의 성장, 교회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해야 할 예수님의 협력자들인 것입니다.
엄청난 하느님 나라이지만, 그 시작은 바로 ‘오늘 날의 겨자씨 한 알’인 우리 각자로부터 시작됩니다. 나란 존재, 때로 죄투성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언제 인간될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 각자 안에는 은총의 겨자씨 한 알이 뿌려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의 씨앗을 싹 틔어야겠습니다. 멋진 나무로 성장시켜야겠습니다.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매달고 그늘도 만들어 세파에 지친 어린 새들이 날아와 쉬도록 만들어야겠습니다.
오늘 나의 작은 회심, 오늘 나의 새 출발, 오늘 나의 결심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참으로 의미 있는 몸짓입니다. 나의 작은 시작에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의 손길이 보태지면 엄청난 에너지가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씨앗과 그 열매의 하느님 나라
박대남 신부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에는 손이 많이 필요합니다. 계절에 따라 씨앗에 쏟는 정성이 다릅니다. 물을 줄 때, 거름을 줄 때, 그 시기와 처방이 각각 다릅니다. 씨앗을 뿌릴 때는 많은 열매를 맺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열매를 거둘 때는 보람의 기쁨을 누립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말씀처럼 인간은 씨앗이 그 스스로 이뤄 내는 것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단지 관리하고, 키울 뿐, 씨앗 자체가 이뤄내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단지 씨앗이 틔워 내도록 돕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씨앗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곧, 복음을 접하게 되는 모든 이가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관리해야 하는가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나 복음에 대한 이야기와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복음의 열매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각기 다릅니다. 그 다른 모습대로 이뤄지는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오늘 그 씨앗을 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모습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각자에게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관리하고, 그 씨앗으로 열매를 맺어 서로 주님의 기쁨을
나누는 삶,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숨쉬고 있습니다. 우리 곁에서….
씨앗
박공식
사회사목을 하다 보면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오묘하신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결코 그대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필요에 의해 간절히 청하지만 결코 그것을 그대로 주시지 않고 ‘씨앗’ 을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청하는 모든 일을 한순간에 성취시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훌륭하게 성취할 씨앗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 교구 첫 이주민 전담 신부로 발령받아 이주민들을 위해 일하면서 필요한 게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마는 가장 먼저 주님께 청한 것이 바로 이주민을 위한 쾌적한 공간이었다. 주님은 그 청을 한순간에 들어주시지도 내가 생각한 대로 들어주시지도 않았으며, 늘 기쁘고 행복한 일의 연속으로 들어주시지도 또 단 몇 사람의 노력의 결과로 들어주신 것도 아니었다.
희망의 씨앗은 말씀이었다. 우연히 마태오복음의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당신의 귀한 자녀인 이주민들이 머물 공간 하나 주시지 않겠는가 ?’ 하는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었다. 그것을 땅에 심고 가꾸고 돌보고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하며 추수하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씨앗을 뿌려 거두는 농부의 걱정과 수고로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추수를 거두는 것처럼 지금의 아름다운 이주민회관을 주님께 봉헌하고 이주민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환대해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씨앗에 비유하신다. 씨앗은 그 안에 이미 모든 성취된 것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주어진다. 씨앗을 받아 든 우리가 농부의 마음으로 심고 가꾸고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삶 안에서 이미 씨앗으로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 갈 것이다. 나 자신과 가족과 직장과 공동체 안에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심고 가꾸고 꽃피우고 열매 맺어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자.
빛과 더불어 환난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은 어떤 뜻일까요?
빛을 받은 뒤에 오히려 고난을 겪었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빛이신 주님을 믿으니 오히려 고통이 더 많다는 뜻일까요?
사실, 세례를 받고 오히려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사고도 많은 것은 무슨 뜻인지 묻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아무런 환난이 없게 하셔야지 왜 오히려 더 환난을 주시는지 따지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이렇게 따지면 대답하기 곤란하여 그저 듣기만 하지만 가끔, 하느님께서 환난을 주셨다면 그것은 좋은 뜻이 있으시기 때문일 거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시련을 통해 믿음의 단련을 하시고 믿음의 단련을 통해 하느님의 좋으심과 사랑을 더욱 굳게 믿어 좋으시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주시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고통일지라도, 좋은 것임을 믿게 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은 이런 뜻도 있지만 이어지는 말씀,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한다는 말씀을 보면 빛을 받는 위치에 있기에 드러나게 환난을 당한다는 뜻일 겁니다.
어제까지 저희는 연례총회라고 할 수 있는 참사회의를 하였는데,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을 하듯 관구장의 말 한 마디에 저희 형제들이 주목을 합니다.
저도 전에 어린나이에 관구장을 했을 때 저의 말 한 마디에 형제들이 일희일비하고, 말 한 번 조금 잘못해도 비난이 거세기에 힘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반면에 빛을 받으며, 공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빛을 받는다는 것은 아마 spotlight를 받는다는 뜻일 겁니다.
각광을 받거나, 집중조명을 받는다는 뜻이겠고, 각광이든 집중조명이든 빛을 받아 환히 드러난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집니다.
빛을 받고 빛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나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내가 빛의 자녀답게 잘 살면 빛을 증거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안팎으로 비난을 받고 모욕도 당할 수 있습니다.
안팎의 비난이라고 하였는데 다른 사람의 비난 이전에 나 자신이 나를 용납할 수 없어 심하게 자책하고 심지어 자학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더불어 이런 환난과 모욕을 받으며 빛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고, 이런 환난을 통해 믿음은 더욱 굳건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관상(觀想)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우리의 숨통입니다. 하느님 숨통이 있어야 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의 관상의 삶입니다.
겨울의 깊은 침묵과 고독 중에 봄을 기다리는 인고의 겨울 나목들은 진정 관상가의 모범입니다. 기다림의 인내 없이는 봄도 없습니다. 인고의 침묵과 고독 중에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겨울 나목들입니다.
인내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서두르거나 무리하지 않습니다. 침묵 중에 서서히 순리에 따라 당신의 일을 하시며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자꾸 손대거나 건드리지 않고 그냥 놔둡니다. 자연 리듬에서 하느님의 리듬을 배웁니다. 교육 원리도 사람을 대하는 원리도 하느님께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나 겨자씨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하늘나라의 실현은 바로 이렇습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이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매사 가만히 바라보고 지켜보면서 ‘하느님의 때’를 깨닫는 관상의 지혜가 참으로 긴요합니다.
세상에 인내의 기다림 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내의 힘이라 하여 인내력이라 하는데 날로 약해져 가는 현대인들의 인내의 힘입니다. 빠르고 쉽고 편리만 추구하는 인스턴트 시대, 이런 삶의 양식에 중독되어 상실되어가는 인내의 힘입니다. 점점 속물적이, 즉물적이 되어가면서 삶의 깊이도 무게도 잃어 천박해지는 하여 참 행복을 잃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참 역설적인 게 삶이 빠르고 편리할수록 삶은 더욱 바빠지고 여유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본원에 갈 때 일부러 무궁화열차를 탔습니다. 느리고 불편함 속에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함 이었습니다. 간이역에서 쉴 때마다 간이역의 소박한 모습을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바쁘고 빠르게 살다보니 우리 일상에서 놓쳐버리고 사는 소중한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
바로 정주영성의 핵심을 잡아낸 오늘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종신불퇴(終身不退), 몸이 다할 때 까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는 인내의 믿음 있어야 성공적인 정주의 삶이요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인고의 겨울을 견뎌내고 버텨내어 찬란한 봄을 맞이한 겨울나무들처럼 말입니다.
기다림의 인내와 믿음 없이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뒤로 물러나지 않고 제자리에 항구한 종신불퇴의 사람들,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고요히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보며 믿음을 견고히 하는 관상의 시간입니다.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아멘.
인간의 ‘영’이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학생 때 본당의 한 자매님이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시면서 저희 신학생들에게 식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대화 도중에 그 자매님은 이런 어려움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저는 특별히 걱정할 것도 없고 돈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있고 남편 자녀들도 신앙에 열심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눈물이 나요. 자다가 일어나서 혼자 앉아서 그냥 눈물을 흘릴 때가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저는 나름대로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그 영혼의 빈 공간을 하느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세상 어떤 것도 영혼의 그리움을 만족시켜 줄 수 없어요. 남편도 자녀도 돈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존재적인 외로움을 채워줄 수는 없어요. 오직 주님으로 채우지 않는 이상 그런 공허감은 계속 느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렇게 잘 알면서도 저도 그런 공허감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유학 나와서, 아니 그 전부터도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조여오고 답답하고 불안해졌습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가슴의 초조함은 점점 커져만 갔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머리로 아무리 주님과 함께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가슴을 달래도 가슴은 들은 척 만 척 했습니다. 성체조배를 아무리 해도 한 두 시간 마음이 편안해 질뿐이지 조금 지나면 다시 마음의 초조함이 급습해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위의 자매님에게 말한 대로 내 마음을 주님으로 채우기 위해서 성체조배하고 성경 읽고 영성서적을 읽고 묵상하며 닥치는 대로 마음을 성령으로 채우려 했습니다.
처음엔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그 마음의 공허함이 다시 급습해 왔지만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그 초조함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한 삼,사 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저의 믿음을 한 단계 높여주시기 위해 그런 마음의 초조함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밭에 뿌려놓은 씨앗과 같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그것이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지만 밤낮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저절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어느새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 영 안에서 마치 씨앗과 같이 서서히 자라납니다. 마치 콩나물을 키울 때 매일 물을 주어도 물이 밑으로 다 빠져나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매일 매일의 수분으로 조금씩 자라나는 것처럼 하느님나라도 우리 마음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조금씩 자라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누가 저와 같은 증세를 호소하면, 즉 원인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고 초조하다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있는 영이 당신 자신에게 대화를 거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의 전부인, 영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까지 흠 없이 지켜주시기를 빕니다.’하신 것처럼 인간은 영과 영혼과 육체로 되어있습니다. 영(마음)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고 하늘나라의 씨앗이 자라는 곳입니다. 영은 이성(영혼)을 뛰어넘기 때문에 이성으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성으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이성으로 아무리 컨트롤하려고 해도 그것보다 높고 깊이 위치해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우리 마음과 양심이 있는 곳입니다. 그 영은 주님의 성령으로 가득 차서 주님의 나라, 즉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육체와 이성이 협조해주지 않기 때문에 목마르다고 자신에게 외치는 소리입니다. 마치 연료 없는 자동차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움직일 수 없어 괴로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콩나물에 물 주듯이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언젠가는 그 목마름이 해소되고 꽃과 곡식이 피어나는 생명의 땅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마치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하지만 조금씩 커져서 당신 마음에 자리 잡으면 새들이 나무에 깃들이듯이 다른 사람들이 당신께 와서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얻어진 행복은 세상 어떤 어려움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줄어들지 않고 계속 자라기만 하는 그 영원한 행복, 그것을 위해서는 절대적 믿음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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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아마 발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네 다리 수는 보통 15~20쌍이지만, 어떤 것은 170쌍까지 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발이 많은데도 서로 꼬이지 않고 절도 있게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하루는 개미가 그 모습을 보고서 지네에게 물었답니다.
“나는 발이 여섯 개밖에 되지 않지만 발이 교대로 척척 나가는 것이 신기할 때가 있네. 그런데 자네는 발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헷갈리지 않고 차례대로 내디딜 수 있나?”
개미의 질문에 지네가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발이 왜 꼬이지 않은지, 이제까지 어떻게 걸어 다녔는지가 의문이었지요. 그래서 걸을 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발이 나갈 때 다른 발은 어떻게 하더라? 또 다음 발은 어떻게 하지?’ 그러다보니 지네의 스텝이 꼬이면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모르고 다닐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만, 알려고 하니까 더 이상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 사는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요? 모든 것을 다 알아야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 몰라도 불편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십니까? 내 머리로 어떤 명령을 내리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고, 또 피는 어떻게 흐르는지 알아야 제대로 움직일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것 몰라도 내 몸은 잔 고장 별로 없이 24시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알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미래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요.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걱정으로 가득할 대도 많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다고 해서, 미래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절망하고 도저히 못살겠다고 인생을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미래를 모른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지 않습니다. 또 미래를 모른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스스로 자라는 씨에 비유해서 설명하십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농부는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씨에서 싹으로 움트게 하는 힘이 무엇이고,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농부는 모릅니다. 또 하루에 얼마큼씩 자라는지, 그 장면을 지켜볼 수도 없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밤낮으로 자고 깨다보면 어느새 자라있고 결국 추수할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도 천천히 다가온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는 것 같고 그 때문에 답답하지만, 씨가 자라는 것을 알 수 없는 농부의 비유처럼,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습은 미래에 대한 걱정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대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아주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를 이루듯, 커다란 하느님 나라를 나도 모르는 순간에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일이다.(존 스튜어트 밀)
북극곰(‘좋은 글’ 중에서)
창조주가 눈 덮인 북극곰의 모양을 만들어 놓고 마지막으로 곰의 털을 무슨 색깔로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흰털을 입힐까 생각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추운 곳이니 아무래도 햇볕을 잘 빨아들이는 검은 털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검은 털의 곰이라면 다른 동물의 눈에 잘 띄어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조주는 북극곰을 아주 힘이 센 놈으로 만들어 북극에서는 아무도 북극곰을 잡아먹을 동물이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창조주는 만족스러웠습니다. 북극곰은 검은 털을 가지고 있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면서도 힘이 장사라서 다른 동물에게 잡혀먹을 염려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북극곰은 늘 배가 고팠습니다. 먹잇감이 눈에 띄어 사냥을 하려면 다른 동물들이 먼저 검은 곰을 알아보고 멀찌감치 달아나버렸으니까요.
창조주는 결국 북극곰의 털을 다시 하얗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흑곰이 되어 따뜻하게 살 것인가? 백곰이 되어 배부르게 살 것인가?
주님, 감사합니다.
이창걸
2년 전 비인두암으로 진단받고 방사선 치료를 위해 부모와 함께 내원한 여학생이 있었다. 암 선고를 받고 진료실을 들어서는 가족의 어두운 모습, 약간은 반항적인 얼굴의 여학생을 통해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성격이 민감한 여고생 시절에 큰 병으로 투병하는 학생이 안타까워 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많은 배려와 함께 정성껏 치료했다.
치료종료 한 달째 CT검사에서 암은 완전히 치유되었고 부작용도 심하지 않아 성공적인 치료가 되었음을 학생과 가족에게 설명했다. 그때 내가 학생에게 처음 내원 당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병을 이야기해 주지 않느냐고 했던 일이 생각나느냐고 물었더니 학생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부모는 크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딸과 함께 진찰실을 나갔다.
그런데 왠지 마음 한구석이 서운했다. 그동안 내가 그 여학생을 위해 얼마나 신경 쓰고 배려하고 기도하면서 치료했는데 그리고 완치를 시켰는데 “선생님, 잘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 한마디해 주길 기대했는데 그냥 나간 것이다.
나는 앞에 있던 간호사에게 그 여학생이 너무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푸념을 했다. 귀갓길에도 계속 그 학생에 대한 서운한 생각을 하던 중에 갑자기 내 마음에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렇게 정성껏 치료해 주고 완치시켜준 학생이 한마디 안 하니 서운하지? 나도 너에게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구나.”
그렇다. 나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주님께 나는 언제나 푸념이나 힘들다는 말만 했지 감사의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 학생은 내가 주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보내주셨음을 깨달았다.
이 일은 오히려 내가 그 학생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이렇듯 주님께서 뿌리신 신앙의 씨앗은 알게 모르게 자라 나의 일상 속에서 과거에는 학생의 버릇없음을 탓하고 말았을 일을 이제는 그 속에서 주님의 메시지를 민감하게 느끼는 정도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분께 의지하고 따르면 우리의 믿음은 알게 모르게 자란다. 주님, 감사합니다.
박철현 신부님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6-27)는 말처럼 어떤 자연현상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렇게 되는 과정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밥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밥이 어떻게 영양분이 되어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활동할 수 있는 힘이 되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일하다 지치면 기운이 떨어지고, 기운이 떨어졌을 때 밥을 먹으면 다시 기운이 솟는 것을 경험하여, 기운이 떨어졌을 때는 먹으려고 할뿐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와 같은 경험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성체성사의 경험입니다. 밥 한 끼를 먹지 않았다고 지금 당장 굶어죽지 않는 것처럼, 성체성사에 매일 참여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 냉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끼니를 거르면 힘이 없고 심지어는 영양결핍으로 병치레를 하게 되거나 영양실조로 육체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체성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 역시 약해집니다. 우리의 신앙이 약해지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보다 세상살이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세상살이를 더 좋아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행동 여하에 따라 빚어지는 결과가 있는가 하면, 우리의 행동 여하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어져 열매를 맺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저절로’ 자라나는 주님의 말씀을 제 때 수확하는 지혜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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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서 본 들인데요. 마귀가 유혹할 때 다음의 네 마디 말을 쓴다고 합니다.
첫째, “이 정도는 괜찮지 뭐…….”
둘째, “딱 한 번인데 뭐…….”
셋째, “내일 해도 돼.”
마지막 넷째,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데 뭐…….”
놀랍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들이 평소에 자주 쓰고 있는 말이며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우리들이 마귀의 유혹을 평소에 자주 당하고 있으며, 또한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마귀의 유혹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화가 헤리 리버맨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1905년 29세 때 단돈 6달러를 가지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평생 장사로 돈을 모았지요. 그리고 77세에 은퇴하여 여유 있고 조용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노인 클럽에 나가 한가로이 체스 상대를 기다리고 있을 때, 한 봉사원이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체스 상대가 오시지 않는 것 같군요. 거기 그냥 앉아 계시지 마시고 화실에 가셔서 그림을 한번 그려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리버맨이 당황하며 말했지요.
“내 나이가 올해 77세요. 그런데 어떻게 그림을 그린단 말이오? 난 지금껏 살아오면서 붓 한번 잡아본 일이 없다오.”
“뭐, 어떻습니까? 무료하실 텐데 한번 가보시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그 후 그는 10주간 그림지도를 받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나이 팔십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오늘날 여러 미술관의 벽에 걸려있을 뿐 아니라, 그림 수집가들이 계속해서 그의 그림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미술평론가들은 리버맨을 가리켜 ‘원시적 눈을 가진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하고 있지요.
만약 리버맨이 현실의 편안함에 그냥 안주했다면 그러한 극찬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아니 자기 자신에게 숨어 있는 재능을 발견할 수는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비유를 들어 말씀해주십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같다고, 그리고 아주 작은 겨자씨이지만 땅에 뿌려지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서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한다고 하십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커진다는 의미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씨앗이 자랄 수 있을까요? 또한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가꾸는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고 끊임없이 삶을 발전시키려는 노력과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이 하느님 나라를 더욱 더 커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하느님 나라를 크게 만들고 있을까요? 아니면 또 다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느님 나라를 허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지 마세요. 그래야 밝은 미래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2위입니다(‘행복한 동행’중에서)
미국 렌트카 회사인 에이비스는 만년 2위 업체였다. 게다가 1위로의 도약은커녕 늘 적자에 허덕였다. 그러니 1위 업체인 허츠와는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도 우울함을 더했다. 종업원의 의식, 서비스, 차량의 성능이나 청소 상태 등 어느 하나 허츠보다 나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확실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에이비스가 선택한 방법은 이른바 ‘NO.2 캠페인’을 벌여 2등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캠페인을 전개했다.
“We're No.2 in a rent cars. So why go with us?”(우리는 렌트카 회사에서 2위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이용할까요?“
다음 광고에서는 이 슬로건을 사용했다.
“We are No.2. Therefore, we work harder.”(우리는 2등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합니다.)
에이비스의 전략은 적중했다. 그전까지는 1등만이 광고에서 등위를 얘기할 수 있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2위임을 내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2등이기에 더 열심히 일한다고 외치는 에이비스의 캠페인은 사람들의 큰 공감을 얻었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 결과 에이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들이 급격히 증가했고 에이비스는 오랜 적자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복음의 씨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군종신부로 있을 때이니 오래된 기억이지만 아직까지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활 대축일에 대대장 부부가 세례를 받았는데, 그 당시 최전방에 부대가 있었던 관계로 충분히 예비기간을 갖지 못하고 속성으로 세례를 받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그 대대에서 총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생겨 부대 전체가 비상이 걸렸고 군 병력이 총동원되어서 총을 찾았지만 시간만 갔지 별다른 해결점도 찾지 못하고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 부대장이 책임을 져야 할 때라는 이야기가 나돌 무렵 그 부대를 방문해서 위로라도 하고 싶었지만 가슴만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대장 입에서 신앙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으로 감탄했습니다. 그 대대장의 말은 너무 쉽게 세례를 받았다고 주님께서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주님의 뜻을 잘 따르도록 기도해주십시오”라는 말로 오히려 저를 위로했습니다.
그날 저녁인가 그 이튿날 다행스럽게 총을 찾아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대장은 후에 장군까지 승진을 했고 군을 떠날 때까지 군 선교를 위해서 많은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은 복음의 씨를 심고 하느님께서는 자라나게 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잊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
김은주 수녀님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같다고 한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면 싹이 트고 자라서 줄기가 나오고, 이삭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다. 씨를 뿌리는 일은 우리 눈에 보이는데,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은 마치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그 나머지는 하느님이 하신다. 인간과 하느님의 공동 작업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공을 들이고 정성을 쏟으며 진행된다. 하느님은 그렇게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으며 생명을 움직이신다. 그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하신다.
나는 ‘피정의 집’에서 소임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피정하는 분들을 위해 식탁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식사 준비를 자매들이 돌아가면서 하다 보니 저절로 솜씨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보통 두 명이 함께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데, 어느 날 음식 솜씨에 자신이 없는 자매들이 짝을 이루게 되었다. 음식 솜씨가 있어서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자매들과 달리 서로 맛을 보며 이런저런 조언을 하면서 음식 만드는 데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식사 준비가 끝나자 피정자들한테 음식을 권하며 맛은 없지만 정성을 다했으니 맛있게 드시라고 겸연쩍게 웃었다. 하느님과 만나고 있던 피정자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식사를 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보이지 않게 ‘저절로’ 일하신다. 우리 가운데 웃음이 피어나게 하시고, 서로를 자랑스러워하게 하시며 평화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 바라볼수록 안타깝습니다. 한창 꽃피어나야 할 그들이건만, 엄청난 무게의 짐을 하나씩 등에 지고 지척지척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갈팡질팡하는 교육정책, 교육철학의 상실, 설설 기는 공교육, 하늘높이 치솟는 사교육, 교육의 총체적 위기 상황, 그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우리 청소년들입니다.
그러나 한숨만 쉬고 있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습니다. 이토록 열악한 교육풍토 속에서도 우리 청소년들을 위해 묵묵히 자신을 불사르고 있는 ‘참스승’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인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시작하는 ‘참스승’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선생님을 뵙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아이들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스승입니다.
아이들보다 1시간 먼저 학교에 도착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리는 스승입니다. 마음이 쓸쓸하고 허전한 아이들을 날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스승입니다. 울고 있는 아이들의 눈물을 매일 닦아주는 스승입니다.
아이들의 담임교사이자 국어교사, 상담교사이면서도 부모로서의 다중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한 스승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방학이 오면 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한 보다 유익한 교육 자료 수집을 위해 길고도 긴 여행을 떠납니다. 다양하고 풍부한 볼거리로 가득 찬 수업에 아이들은 무척이나 행복해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참으로 감명 깊었습니다.
“인간은 홀로 고립된 섬이 아님을 아이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날은 애인을 만나러가는 여인처럼 아침부터 마음이 달뜹니다. 아이들의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제겐 가장 좋은 보약입니다.”
오늘 복음은 청소년들과 매일 삶을 나누는 부모나 교육자들에게 참으로 의미 있고 유익한 내용의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교육이 강제로, 억지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순리에 따라,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적절한 분위기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아이는 전혀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부모나 교사만 욕심에 가득차서, 이것 저 것, 수많은 잡다한 것을 주입할 때, 아이의 머리는 당연히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차근차근, 아이의 상황을 살펴가면서, 섭취된 것에 대한 소화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안색을 봐가면서, 한 단계 한 단계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오늘도 아이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신 부모님들, 교육자들, 다른 무엇에 앞서 인내의 덕을 쌓아나가시길 바랍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영역도 마련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오늘 우리 아이들이 모자라고 형편없어보일지라도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풍성한 결실 맺을 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키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자라는데...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옛적 수련장을 처음 맡았을 때 수련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겠노라는 야심(?)에 많은 책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선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형제들을 '잘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키우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이 생각은 너무도 잘못되었음을 깨달아가게 되었다.
형제들은 저절로 크는 것이지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형제들은 서로 배우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키우는 것이지 수련장이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점차로 <교육무용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무리 훌륭한 교육자라 하더라도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 - 15%밖에 되지 않는다는 교육학적 진리(?)를 체험적으로 깨달은 결과였다.
그때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책임감에서 형제들을 양성시키기보다는 실질적인 양성가는 성령이심을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식 키우기가 참으로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애들은 누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실 스스로 크는 것이다.
스스로 자라고 나이먹고 배워나간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무언가를 키운다고 생각하기에 그 결과에 연연해 하는 것은 아닐까?
수련자가 훌륭하면 마치 '내가 교육을 잘 시켰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내 탓이오' 라고 생각하고 그 결과에 따라 웃고, 울고 한다는 이야기다.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난다.
아니, 하느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것이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님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키울 수 있고 내가 이룰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고 하느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어주시는 선이나 결실이 있다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자.
혹 우리를 통해 좋은 결실이 없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아직 하느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아니, 어쩜 아직 싹이 트고있고 거름을 주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자.
이렇게 그 어떤 결실에 대해서도 집착과 판단을 버릴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기뻐 용약하게 되리라.
하느님의 섭리
박혁 신부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얼마 전 제가 본당에서 경험했던 사소하면서도 놀라운 일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매일 미사 때,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해주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성체가 가장자리가 부스러져서 있었습니다. 연일 날씨가 춥다보니 성체가 얼고 건조해져서 가장자리가 부딪히면서 이빨이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가루는 가루대로 쌓이고 신자들에게는 못남이 성체를 영해 주어야 하니까, 감실에 있는 성체를 다 영해주고 포장을 새로 따서 부스러지지 않은 좋은 것으로 축성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한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저녁 미사였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좀 많아 보인다 속으로 생각하고 영성체를 영해주기 시작하였는데, 성체는 줄어가고 교우들의 행렬은 계속 이어지고 마지막 여섯 사람에게 성체를 쪼개어 나누어 주고 나니 성합에 성체가 딱 하나, 딱 하나가 남았습니다.
이런 세상에나! 주님께서는 이런 작은 바람도 들으시는구나, 이런 하찮은 기대도 들어주시는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도 들어서 처리해 주시니 주님 앞에 서는 아무 것도 감출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참 경이로운 체험이었습니다. 도대체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섭리하시고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농부가 땅에 씨앗을 뿌려 놓으면 해가 뜨고 지고 하는 사이에 싹이 터서 자라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지만, 이삭이 패고 낱알이 영글면 수확 때가 된 줄 알고 낫을 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고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만 들으면 ‘아니,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비유로 말씀하고 계신가?’ 하고서는 도통 알아듣기 어려워합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명확하게 다가오고 있으며 또한 가까이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씨앗를 뿌려 놓으면 씨앗이 언제 자라는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열매를 맺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힘을 통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조용히 저절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고 다가오며,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맞이하는 신앙인의 자세에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씨앗이 저절로 자라고,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씨앗이 뿌려지면 반드시 추수가 있듯이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면 신앙인 공동체는 반드시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신앙의 씨앗을 간직하고, 그 씨앗이 성장해서 열매를 맺기까지 묵묵히 추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 처해있는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넉넉한 형편 속에서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하루하루 궁핍한 생활 속에서 삶에 지친 채로 불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누가 더 신앙생활을 더 잘하느냐, 어느 쪽이 낫겠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떤 형태로 신앙생활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마지막 추수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엮어온 삶을 보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가서 ‘제 삶이 이러쿵저러쿵 해서 신앙생활을 이것밖에 못했습니다’ 라고 변명을 늘어놓아 보아야 농부는 알곡은 알곡대로 쭉정이는 쭉정이대로 낫을 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일이라는 시간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일 뿐이며, 어제는 지나간 시간의 기억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시간뿐입니다. 따라서 수확할 때는 먼 미래에 다가올 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지금, 현재 이 시간이 바로 구원의 시간이요 은총의 때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결단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이 은총을 때를 외면하고 허비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주님의 발자국
이기양 신부님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해변을 산책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때 하늘 저편에는 그 사람이 이제까지 걸어온 삶이 영화처럼 비추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각 장면이 지날 때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의 발자국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발자국이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하느님은 그 사람 옆에서 항상 함께 걸어오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때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니 그 때는 정말 살아가기가 힘들고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이 힘들거나 어려울 때마다 발자국은 한 줄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따지듯이 여쭈어 보았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항상 저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작 제가 힘들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왜 주님의 발자국은 보이지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그대가 어려울 때마다 그대를 업고 갔다네. 한 줄뿐인 발자국은 그대 것이 아니고 나의 발자국이라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깨닫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 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삶의 어려운 시기에 더욱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으며 사는 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 혼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금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고 하루하루 지나면 씨앗에서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낟알이 맺히게 됩니다. 하지만 씨를 뿌린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합니다.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농사를 짓는 농부는 늘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기도합니다.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한 후에는 반드시 조상들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더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삶은 은총으로 충만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혼자 걷는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으시며 우리 삶의 여정 어디에나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의 삶이 버거울 때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과 기쁨과 희망을 나누었습니다.
당신이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당신은 삶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수히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당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가정이, 사회가, 교회가 있습니다.
당신이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당신은 세상을 가꾸는 아름다운 일꾼이었습니다.
앞길이 캄캄할 때 당신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당신 안에서 이루신 주님의 업적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은 작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이제와 같이 항상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당신 안에서 주님은 점점 커지실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작은 씨앗 하나
손봉철 신부님
어떤 임금이 맛있는 과일이 잘 열리는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과수원에다 앉은뱅이와 장님을 두었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장님에게 말하기를 “나는 맛있는 과일이 열려 있는 것을 보니 따먹고 싶은데 나를 나무까지 데려다 주지 않겠느냐? 그러면 과일을 따서 둘이서 실컷 맛있게 먹자!” 장님은 그 말을 듣고 좋다고 하면서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 나무까지 가서 과일을 따주는 대로 실컷 먹었다.
몇 주일이 지난 후에 임금님이 와서 과수원에 과일이 많이 없어진 것을 보고 장님과 앉은뱅이에게 물으니 앉은뱅이는 말하기를 “나는 그곳까지, 그 높은 데까지 올라갈 수 없으니 내 잘못이 아닙니다” 하였고, 장님은 핑계대기를 “나는 그런 과일이 어느 나무에 어떻게 달려 있는지 볼 수도 없으니 내 잘못이 아닙니다” 하였단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두 사람에게 임금님은 어떻게 했을까? 둘 다 함께 벌을 주었다고 한다.
비유의 말씀을 경솔하게 들어 넘기면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말씀이다. 씨를 뿌리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씨앗은 곧 말씀이며 받은 사람의 마음을 뜻한다. 좋은 밭으로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사실 내가 할 것은 하나도 없다. 하느님이 작은 씨앗을 자라게 하시고 이삭을 맺게 해주신다. 우리 마음에 넣어주신 신앙이란 씨앗을 하느님은 키워주실 것이다. 내가 할 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것이다. 무엇인가 애써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많은 것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하늘 나라의 풍성함
이철구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랑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과 그런 하느님 곁에서 자유롭게 정감어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그 안에서 햇볕을 피해 쉬고 있는 새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도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과 자유로움, 또 사랑 가득한 그곳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농부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마련하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에 우리의 노력이 더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개미의 성실함이 요구됩니다.
신앙의 성실함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최재곤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궁금한 것이 하늘나라일지도 모릅니다. 하늘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천당과 지옥은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는 어떻게 사는지 등 수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하늘나라에 대한 신비가 밝혀져서 모든 것이 알려진다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삶을 살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요즈음 학생들이 대학에 가기 위해서 입시전쟁을 치르듯이 하늘나라에 가기 위한 조건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기고, 고액과외도 생길 것이며 수많은 입시 부조리가 있듯이 하늘나라에 가기 위한 부조리가 생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나라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알아듣기 어려운 비유로만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만약 하늘나라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우리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시면 우리는 다른 일은 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만 살던가, 아니면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니까 아예 그런 요건을 갖출 수 있도록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제발 하늘나라의 신비는 영원히 신비로 남게 해주십시오.”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 !!!
이찬홍 신부님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많은 말과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나라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다 평등한 나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면 어떤 푸성귀보다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되지만 충만하고 완전한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마지막은 충만하다.”는 성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미약하게 시작되지만, 그 시작이 너무 미소하여 가치 없게 보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또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서 나날이 성장해 가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겨자씨와 같은 하느님 나라를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묵상해 봅니다.
떼제 공동체가 그러합니다.
로제 수사님으로 시작된 떼제 공동체는 처음에는 조그마한 모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커다란 나무로 성장했습니다.
연간 수십만 명이 일주일 간격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만나는 공동체! 곧 눈에 보이는 하느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같이 우리에게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를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은 한국 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란 종교가 조선에 알려지기 전, 유학자들은 천진암에 모여 천주교에 대한 교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교리서에서 제시하는 기도를 규칙적으로 드렸고,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물론,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은 이승훈 베드로 성인의 세례부터 입니다.
그러나, 그 싹은 이미 천진암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두세 명이 모여 교회의 삶을 실천하려는 노력 속에서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 미소한 시작이 오늘이라는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듯이, 하느님 나라 역시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그마한 것에서 시작되어 조금씩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나날이 조금씩 완성을 향해 성장하는 나라이기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나라로... 완전한 나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입니다.
어제 유행하던 패션이... 노래가... 전자제품이, 오늘이면 구식이 되는 그런 세상입니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찾고 맛보는 삶은 참 어렵습니다.
현재의 우리 삶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보다 적어도 어제보다는 어렵습니다.
왜 오늘날은 하느님 나라를 찾고 체험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단순히 감각적인 즐거움과 쾌락에 만족하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 안에서 우리 역시 빠른 삶, 결과에 익숙하다 보니... 겨자씨처럼 조그맣게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 삶 안에서 겨자씨를 찾아 잘 키워나가려 하기 보다는 푸성귀만을... 열매만을 얻으려 하다보니,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기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나에게 있어... 나의 삶에 있어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지...
무조건 하느님께서만, 교회에서만 주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각자에게 주어진 씨앗에 심과 물과 퇴비를 주며 결실을 맺도록 키워나가는 나라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다.
강인봉
살면서 고민이나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는 누구나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오늘 간식은 뭘 먹을까 하는 게 가장 심각한 문제일 수 있고 학생들은 진학이나 취직 문제 등 나이가 들면서 그 내용이 바뀔 뿐 고민의 강도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학식이 높아지고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더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가까이 하려 할수록,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할수록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하느님 뜻이고 나라인지도 모릅니다. 어린아이가 무조건 엄마?·?아빠를 믿고 따르듯 주님을 믿고 따르기가 어려워집니다. 뭔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해답을 찾아야 하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압도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을 주님 품으로 이끌 수 있도록 무장하고 토론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쉽게 알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어느 성인의 말처럼 신앙은 논리와 과학만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라는 말처럼 불합리한 말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평생 한 권의 책만을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합니다. 그 책만이 진리이고 그 외에는 어떠한 이야기도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과신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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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사장이 집을 나오면서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회사에 나온 사장은 상무를 불러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집에서 못한 화풀이를 하면서 사장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당하고 있을 상무가 아니겠지요. 자기 방으로 돌아온 상무는 부장을 불러들여 별 것도 아닌 것을 사장에게 당한 식으로 분풀이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부장이 과장한테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과장은 대리에게 화를 냈습니다. 대리는 맨 끝자리에 앉은 직원을 향해 왜 오늘 청소가 이 모양이냐고 삿대질을 합니다.
말단 직원이라고 해서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렇다고 화를 풀 대상도 없고, 결국 퇴근해서 아내에게 트집을 잡습니다. 집 안에 있으면서 청소도 제대로 못하고 무엇을 했느냐고 대리에게 당한 그대로 앙갚음을 했습니다. 아내 역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기르고 있던 고양이를 발로 차버렸습니다. 집을 나온 고양이는 담과 담을 넘어가며 처량하게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때 잠자리에 든 사장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고양이의 소리에 신경질이 났습니다.
‘웬 고양이가 저렇게 쳐 울어!'
그렇다면 사장의 잠을 못 재우게 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아랫사람에 쏟아내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써 대해주었다면 아마 편안한 잠을 잘 수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결국 돌아서 자기에게 더 큰 피해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 있는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모두 다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할 것이 없으며, 나에게 있어서 모두 의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것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이 겨자씨를 지난 성지순례에 가서 실제로 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자그마한 씨더군요. 코딱지보다도 조그마한 씨가 커다란 나무로 성장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믿기지 않는 일들이 이 세상 안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씨가 커다란 나무를 일구듯이, 아주 조그마한 것도 소중히 여기면서 최선을 다해 생활할 때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에서 커다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인 하느님 나라는 바로 우리의 곁에서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작은 것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는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을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으니까요.
사소한 잘못을 용서할 수 없다면 우정은 결코 깊어질 수 없다.(파스칼)
만족은 마음으로(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중에서)
‘하우스 오브 덴마크’는 미국에서 꽤 인기를 끄는 가구점이다. 우리는 이 가게에서 조립식 소파를 주문했는데, 바로 귀국하는 바람에 소파는 이삿짐이 되고 말았다.
한국에 들어오고 두 달 뒤에야 도착한 이삿짐을 푸는 날, 우리 가족은 몹시 실망했다. 짝이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부품이 잔뜩 들어 있는 데다, 조립에 필요한 철재 부품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쌓인 전폭적인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하지만 한국으로 부품을 보내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다. 딸아이가 부품을 확인하고 인수증에 서명까지 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품 사진과 함께 가게 매장 지배인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그로부터 1년 뒤 미국에 간 나는, 그동안 미국에 있던 아들 앞으로 온 편지를 점검하다가 가볍게 놀랐다. ‘무성의와 불성실’을 정중하게 사과하는 매장 지배인의 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편지를 들고 문제의 가구점을 찾아갔다. 지배인이 그날 했던 말을 옮겨 보면 이렇다.
“... 당신 편지를 받은 직후, 우리는 정중하게 사과하고 소파를 완벽하게 조립할 수 있는 부품을 한국으로 보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당신 아들에게 두 차례나 한국 주소를 묻는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작년 11월 당신 편지를 받고 재주문한 부품을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 인수증에 따님이 한 서명을 빌미로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 서명은 손으로 하는 것이지만 만족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당신이 만족하는 순간에야 우리 책임이 끝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
우리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상대방의 기를 살리기도, 또 반대로 죽이기도 합니다. 만약 내가 오늘 아침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긍정적인 말, 칭찬의 말, 사랑의 말 등을 들으면 어떨까요? 모든 것이 기쁘고 세상 살맛을 느끼게 되면서 하루를 신나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부정적인 말, 미움의 말, 악담 등을 듣는다면, 머리에서 그 말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서 하루 종일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기쁨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기를 뺏는 나라가 아니라 기를 살리는 나라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 하면 보통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죽어서 갈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체험하는 나라입니다. 달리 이야기한다면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내 이웃을 위해서 기를 살리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바로 그 순간 하느님 나라가 내 곁에 자리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라는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듯, 우리의 작은 칭찬이 다른 곳에서 더 큰 수확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기쁨을 주는 말 한마디,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키워가는 좋은 거름이 됩니다
내가 위대한 이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씨앗을 뿌릴 때 마다 참으로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생명의 신비, 작은 것 안에 깃든 무한한 가능성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지요.
씨앗들의 크기도 천차만별입니다. 시금치나 근대, 옥수수 씨앗은 큼지막합니다. 그러나 열무, 쑥갓, 상추 씨앗은 정말 작습니다. 입으로 훅 불면 날아가 버립니다. 다룰 때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런 씨앗은 흙을 덮어줄 때도 너무 많이 덮으면 발아가 더디기에, 빗자루로 조심조심 쓸어가며 흙을 살짝 덮어줍니다.
그렇게 일주일, 이주일, 한달이 지나가면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황량했던 텃밭이 온통 푸른빛으로 변해갑니다. 밭 전체가 풍성한 식탁으로 변화됩니다. 아무리 솎아먹어도 또 나오고 또 나오기를 반복합니다.
하느님이 부여하시는 생명의 신비를 눈 앞에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지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만날 때 너무나 왜소해 보이고, 덜 떨어져 보여 안타깝습니다. 저게 도대체 인간구실이나 하려나, 의문이 가기도 합니다.
더딘 성장과 성숙에 답답할 때도 많습니다. 도대체 언제쯤 철이 들려나, 언제쯤 인간되려나, 걱정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웬걸, 2-3년만 지나면 그런 걱정은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몇 년 전 철부지 모습은 어느새 없어지고 의젓한 청년이 되어있습니다. 생각하는 것, 마음 쓰는 것, 행동하는 것도 전과는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기분 나쁘게’ 나보다 더 키가 커졌습니다. 바라만 봐도 마음이 다 든든해집니다.
한 생명체 안에, 한 인간 안에 깃든 무한한 가능성과 하느님께서 뿌려놓은 작은 씨앗의 성장 앞에 감탄할 뿐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고, 때로 한심해보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위대한 존재입니다. 위대한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성장 가능성’ ‘변화 가능성’ ‘회개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란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내 삶이 비록 초라해 보이고, 때로 비루해보일지라도, 내게 내일이 있으니 나는 오늘 위대합니다. 오늘 내 인생이 비록 실패로 얼룩져 있을지라도 새 출발의 가능성, 변화의 가능성을 지니는 한 오늘 나는 위대합니다.
오늘 비록 내가 부족하지만 내 안에 뿌려진 하느님의 씨앗으로 인해 오늘 나는 위대합니다.
저를 키우소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면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 커진다.”
지난 참사회의에서 발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패배주의를 경계해야한다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저의 이 말을 보완하여 한 형제가 승리주의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패배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얘기할 때 제가 승리주의를 얘기하고자 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 형제의 현명한 지적처럼 승리주의도 우리는 경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승리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신앙을 빙자하여 승리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제 강론 끝에 저는 우리의 작은 것을 가지고 하느님께서는 거기에 보태어 크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했는데, 내가 또는 나의 작은 것이 커지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가 커지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느님 나라가 커지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의 나라가 커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크게 하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나의 나라가 커지기를 바라서도 안 되지만 하느님 나라를 내가 키울 수 있다는 교만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씨, 그것도 지극히 작은 겨자씨를 뿌리지만 어떻게 그 씨앗에서 줄기와 이삭이 나오고 이삭이 영그는지를 그 사람은 모르고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땅은 대지의 하느님이시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겨자씨 같은 우리, 겨자씨 같은 우리 능력과 정성과 노력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를 크게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작음을 없이 여기지 않으십니다.
작아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니 있는 것을 없이 여기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꽤 괜찮은 사람도 깎아내려 쓸모없다고 무시하는데, 하느님은 어찌하여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시고 크게 만드십니까?
물론 작은 것일지라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만 하느님은 작은 것도 크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에 작은 것도 작다고 탓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사랑도 크시고 능력도 크시기에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십니다.
지혜서의 말씀대로입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11, 23-26)
그래서 오늘 이 아침 기도합니다.
“주님 저에게 당신의 큰 사랑과 능력을 주소서!
내가 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이 커지도록, 그래서 당신의 나라가 커지도록 저의 사랑과 능력이 당신의 사랑과 능력만큼 되도록 겨자씨 같은 저의 작은 사랑과 능력을 먼저 키우소서!”
겨자씨와 하느님 나라
강영구 신부님(2004-01-30)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마르4,30-32)
스승 예수님, 하느님 나라(天國)에 대한 당신의 비유 말씀은 너무나 아리송해서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니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하느님 나라를 가야 할 곳, 이승에서의 삶을 끝 낸 후 저승에서 누릴 수 있는 어떤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場所) 혹은 사후死後의 어떤 세상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께서 大慈大悲하신 왕권王權을 행사하시는 현실現實입니다.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심이 드러나는 현실現實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엄청나고 화려하고 대단한 것을 통해서 大慈大悲하심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大慈大悲하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심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옳은 사람과 옳지 못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비와 햇빛을 내려(마태5,45) 생명을 이어가게 하고, 아버지를 배반하고 집 떠났던 아들도 용서하고 품어주어 새 생명을 누리게 하고(루가15,11), 길 잃은 한 마리 양 같은 세리와 창녀와 병자들을 용서하고 품어주고 치유하여 새 삶을 누리게 합니다.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신 손길로 새 생명이 태어나고,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밤낮과 계절이 바뀝니다. 여기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死後 세상도 아니요 어떤 場所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의 現實입니다.
겨자씨는 너무나 작아서 땅에 떨어지면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이 겨자씨는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있는 것’을 ‘없다’할 수 없습니다. 겨자씨 안에는 ‘생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겨자씨 속에는 뿌리가 있고 잎이 있고 가지가 있고 꽃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겨자씨 속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심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처럼 감추어진 신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歸依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심을 누리면서 삽니다. 예수님, 오늘 하루도 하늘나라를 누리는 하루가 되도록 축복하소서.(一明)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김용한 신부님
이 말씀은 요한 보스코 성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랑받기에 충분한 젊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아마도 ‘성장해 나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계속해서 자라서 더 커지지만...
젊지 않은 사람들은 다 자라서 더 이상 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젊다’라는 것이 결코 생물학적 것에 한정되지 않음을 꼭 짚어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젊은 사람입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는 분명 젊은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왜? 무슨 근거로?’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지만...
매일 매일... 그리고 오늘도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는
어찌되었든 그 복음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어제의 모습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늘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씨앗으로 받아들여 키워내고 노력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모두 젊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씨앗이 우리 안에서 지금 자라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그냥 자라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자라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작은 씨앗이 싹이 트고 줄기와 잎을 내고 열매를 맺기까지 참으로 많은 양분이 필요합니다.
물과 햇빛과 거름이 적절하게 제공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도 그러합니다.
우리 안에서 싹이 트고 줄기와 잎을 내고 구원의 열매를 맺기 위해...
물과 햇빛과 거름이 필요합니다.
그럼 복음의 씨앗을 키워낼 물과 햇빛과 거름을 우리는 어디서 마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씨앗을 우리 안에 뿌려주신 하느님께로부터 라는 것을 말입니다.
씨앗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그 누구보다도 씨앗이 잘 자랄 방법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굳건히 믿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온전히 사랑하십시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 사랑받기 충분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바꾸어 말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복음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는 사랑받기 충분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분 안에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을 잘 키워내도록 하십시오. 아멘.
스스로 씨앗이 되어야 함을...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나머지 두 개의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절)와 ’겨자씨의 비유’(30-32절)를 한꺼번에 들려준다. 각 비유의 시작(26절, 30절)에서 직접 언급되었듯이 비유의 주제는 하느님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낟알을 맺는 이삭으로 성장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어느 씨앗보다도 작은 것이지만 땅에 심겨지면 새들이 둥지를 틀고 그 그늘에 쉴 수 있을 만큼 큰 푸성귀(나무; 마태 13,32)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비유의 특징은 시작과 끝의 대조, 작고 하찮은 것에서 시작하여 놀랍고 엄청난 결과로 끝맺는 대조(對照)에 있다.
오늘 두 가지 비유를 첫 번째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이해는 더 빨라진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아주 열악한 환경, 즉 길바닥이나, 흙이 많지 않은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을 제외하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그 토양의 조건에 따라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따라서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경우에 한하여 세 가지 비유를 모두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세 가지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씨앗(seed)’과 ’성장(growth)’과 ’열매(fruit)’이다. 이 셋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요소들로서 씨앗은 시작을, 성장은 과정을, 열매는 마지막 결과를 뜻한다. 시작은 어떤 경우에든 작고 미약하다. 마지막 결과인 열매는 놀랍고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 해당되는 성장은 사람의 머리로는 잘 파악할 수 없는 신비에 덮여있다. 이렇게 하느님나라는 작고 미약한 복음의 씨앗을 시작으로 누구도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성장과정을 거쳐 진정한 하느님나라로 완성된다. 이 완성은 곧 ’낫이 사용되는 추수의 때’로서 종말을 의미한다. 하느님나라의 완성은 조그만 씨앗이 놀라운 열매를 내듯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아무도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없다. 농부라면 씨앗에서 열매까지의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농부에게조차도 성장의 신비는 놀라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놀라운 성장의 신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하려는 자는 스스로 씨앗이 되어 땅에 묻혀야 한다.
오늘 두 가지 비유의 청중은 누구인가? 앞서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청중은 호숫가에 모여든 모든 군중이었고, ’등불의 비유’와 종말보상률에 관한 훈시는 12제자와 다른 특별한 제자들에게 한정된 말씀이었다. 비유설교의 마지막 부분(33-34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 복음의 두 가지 비유는 다시금 전체 군중을 향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여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있는 사람에게는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고 한다. 웬 차별인가? 예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9절, 23절)고 하시면서 왜 군중과 제자들을 차별하시는 것일까? 제자들이 두 귀 말고도 다른 ’들을 귀’를 달고라도 있는 것일까? 군중과 제자들을 따로 차별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권한에 속한다. 즉 예수님 마음이다. 그러나 군중에게도 여전히 ’들을 귀’를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있다. 반면 제자들에게도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들을 귀’를 단계적으로 시험받아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따라서 누구에나 하느님나라의 복음은 열려있고, 복음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복음은 처음에는 씨앗과 같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씨앗이시듯이 제자들도 씨앗이 되어야함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스스로 씨앗이 되는 자만이 하느님나라의 성장신비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마르 4,26-34)
유광수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속이 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오늘은 하느님 나라의 세 번째 네 번째 속성에 관한 설명이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뿌린 씨와 같기 때문에 이 씨를 잘 가꾸어야 하고, 두 번째, 하느님의 나라는 등경 위에 놓은 등불과 같다. 그래서 등불인 하느님의 말씀에서 빛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오늘 셋째, 하느님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과 넷째, 겨자씨에 대한 비유로 설명하신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 자라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신 말씀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신앙이 또는 나의 영적인 성장이 잘 되려면 그 비결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신앙은 나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다른 하나는 나의 노력이다. 하느님의 은총 없이 나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항상 내 안에서 무엇을 시작하시고 그것을 완성시키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나는 다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잘 따르기만 하면 된다. 즉 하느님께 순명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하느님의 역할과 나의 역할의 차이점이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은 매우 능동적이시고 나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수동적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즉 하느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며 나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내가 그 은혜를 받아 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 따라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도 중요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내가 앞장서서 무엇을 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하나도 빠뜨리지 아니하고 모두 받아들이려는 노력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인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겨자씨에 대한 비유"는 하느님의 능력 즉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설명이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서 강조하는 것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나와 아무 관련 없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뿌려진 씨가 자라는 것은 씨를 뿌린 어떤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속이 찬 낟알이 맺힌다." 싹이 터서 낟알이 맺히기까지 질서 정연하게 순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이"저절로" 이루워 지고 있다는 것이다. 천지 창조 때에도 하느님은 항상 질서있게 하나 하나 창조하셨고 그 질서를 유지하셨다. 혼돈에서 질서를 잡아주셨고 그것들이 각자의 개성대로 잘 자라도록 축복해 주셨다.
어떤 사람은 다만 "곡식이 익으면 곧 낫을 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아기들이 자고 일어나면 키가 자란다. 어떻게 자라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저절로 키가 크고 자란다.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들의 머리도 그렇다. 언제 어떻게 머리카락이 자라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 달이 되면 또 이발을 해야 하고 미장원에 가야 한다. 참으로 신간한 일이다. 이렇듯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넷째, 하느님 나라의 속성은 "겨자씨와 같다"는 것이다. 겨자씨란 가장 작은 것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최초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신 분이시다. 아니 이 세상에 세워진 하느님의 나라이시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시키셨는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부는 특히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새로운 삶의 방법을 배우고 그렇게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는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이 하느님의 나라는 열두 제자들만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파되기 시작했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예수님이 최초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신 겨자씨와 같이 작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당신의 뒤를 이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해 파견된 열두 제자들의 존재도 겨자씨와 같이 작고 나약한 공동체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이 작은 공동체가 어떻게 크게 자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열두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겨자씨가 자라는 것을 매순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겨자씨는 자라고 있다. 우리의 영성생활이 얼마나 자라는지 금방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내 안에 뿌려진 겨자씨와 같은 말씀을 정성껏 가꾸며 살아갈 때 나도 모르게 영성적으로 성숙되어 간다. 그 속도는 내가 정성들여 가꾼 만큼 자랄 것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꽃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 주고 벌레를 잡아 주어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심고 가꾸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이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둔다. 우리는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거나 심지 않았는데 수확만을 기대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요즈음 우리 국민의 사고방식과 인생관, 가치관은 저마다 인생을 쉽게 살려고 한다. 노력없이 성공할려고 한다. 노력의 땀을 흘리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허망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벼락 성공, 벼락 출세, 벼락부자, 벼락감투는 벼락맞을 생각이다.인생은 결코 쉽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쉽게 살아지는 인생은 행복할 수도 없고 또 행복하다고 해도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톨스토이는 "손에 굳은살이 박힌 사람이 식탁의 제일 상좌에 앉아서 따뜻한 밥을 먼저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꾸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없다.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 신앙생활, 땀흘려 가꾸며 성장시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쉽게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세는 버려야 한다.
이제 이 겨자씨는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겨자씨가 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는 작은 겨자씨로 존재해야 한다. 작은 겨자씨이지만 썩어서 바로 그곳에서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와서 깃들일 수 있도록 크게 자라나야 한다. 우리가 자라지 않으면 그 누구에게도 우리 주위에 모여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 줄 수 없다.
우리가 자란다는 것은 우리의 신체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성숙을 말한다.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우리의 영적 세계를 성숙시켜 줄 말씀이 우리 안에 뿌려져서 자라야 한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이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씀을 잘 가꾸면 점점 우리 안에서 우리를 성장시켜 줄 것이다. 우리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이루워지기를 바라는 조급함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모여 쉴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로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말씀이 내 안에 뿌려져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을 수 있을 만큼 자라려면 하루 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어느 한 말씀이라도 내 안에 뿌려져서 자라도록 정성껏 가꾸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성인들이 복음 전체를 실천하며 사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한 말씀을 온몸으로 사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예수님"을 사셨다. 마더 데레사는 "보잘것 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의 씨앗을 정성껏 가꾸며 키웠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라는 겨자씨와 같은 작은 말씀으로 시작된 꽃동네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그늘에 와서 깃들이고 있는가?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말씀은 늘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의 나라가 "크고 웅장한 나무와 같다."고 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레 겁부터 먹을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작은 것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설날이 다가왔습니다. 제대로 성숙하지도 못했는데도 하느님은 성숙해졌다고 또 나이 한 살을 더 얹어 주십니다. 그만큼 어른이 되었음을 인정해 주시는 것이겠지요. 우리 모두 한 살 먹은 만큼 성숙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합시다.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은혜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또 하시는 모든 일들이 번영하기를 바랍니다.
허물어지는 것은 한 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때로 죄나 악의 세력들이 지닌 힘이 얼마나 강렬한지...나약한 우리가 홀로 막아내고 저항하기가 이만저만 힘겨운 게 아닙니다. 인간을 악의 골짜기로 인도하는 어둠의 세력이 지닌 확장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나는 아무 걱정하지 마. 그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 라고 큰소리치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깊고 깊은 악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자신의 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지속적인 겸손이며, 유혹 앞에서의 즉각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죄란 것이 그렇더군요. 한번 짓기 시작하면 어느새 몸에 익숙해집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딱 이번 한번만이라고 다짐하지만 어느새 죄는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습관화됩니다.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사슬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되고 맙니다.
죄란 것이 그렇더군요. 한 가지 죄를 지으면 또 다른 죄가 고개를 내밀며 유혹합니다. 죄들은 서로를 부추기면서 점점 한 인간 자체를 죄의 소굴로 만들어버립니다.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칠죄종(七罪宗) 다시 말해서 일곱 가지 대죄(大罪)는 교만, 인색, 음욕, 탐욕, 분노. 질투, 나태인데, 이들 각자는 서로 단합해서 한 인간을 점점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결국 한 존재를 폐허처럼 만들어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멀쩡하다 할지라도 절대 방심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허물어지는 것은 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 왕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성왕으로 점지된 다윗이었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덕으로 백성들을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나약한 한 인간이었습니다. 잠시 하느님에게서 눈을 떼고 살짝 방심한 사이 그는 어느새 깊은 죄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 죄는 또 다른 죄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는 충신 중의 충신 우리야를 사지로 몰아넣고 죽게 했습니다. 또 다른 충직한 신하 역시 공범으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또 다른 죄를 불러왔습니다. 다윗의 실수는 죄와 악의 세력이 지닌 확장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 죄와 악의 확장성에 놀라워하고 가슴을 쳐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나라가 지니는 놀랍고 신비한 확장성을 체험하며 기뻐해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확장성’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풍요로움’이 아닐까요? 한없는 관대함과 자비로움이 아닐까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겨자씨 하나가 자라고 자라서 날아가는 새들까지 깃들일 큰 나무로 성장하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아주 작은 선행 하나, 이웃을 향한 아주 미세한 희생 하나,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실천한 티끌만한 사랑의 봉사 하나가 백배, 천배 확장되어 하느님으로부터의 아낌없는 칭찬과 보상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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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월 1일,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 선언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이로써 미국의 모든 노예들은 자유를 찾아서 어디든 갈 수가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서 떠났을까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많은 노예들은 예전처럼 주인을 모시면서 자유 없는 노예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의 자리에 계속 머물렀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 상태가 주는 편안함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변화에 따르는 고통을 감수하는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의 자리가 너무 괴롭고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새로운 변화는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좋은 의지보다는 부정적인 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현재의 고통과 시련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면서 그 자리에 안주하고 맙니다. 이러한 의지를 가지고서는 새로운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항상 입에 어렵고 힘들다는 말만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저는 올해 초에 강화도에 있는 갑곶순교성지를 담당하는 신부로 발령받았습니다. 이곳의 초대신부로 있다가 10년 만에 다시 갑곶순교성지에 오게 된 것이지요. 인사이동 전에 솔직히 겁이 좀 많이 났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커진 규모, 더불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에 제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제가 발령받았던 곳을 하나하나 따져보니 어려움이 없었던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임기를 마쳤을 때의 제 모습을 보니 항상 조금 더 성장했었음을 깨닫습니다.
피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또 하나의 은총을 받는 은혜로운 자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긍정적인 생각과 함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생기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에 좋은 의지를 심을 때 그것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좋은 의지가 어떤 결과를 낼 지는 주님만이 아실뿐,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땅을 성실하게 잘 가꾸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곡식이 자라나 익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어 풍성한 수확을 얻는 것처럼, 좋은 의지를 심을 때 분명히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좋은 결과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좋은 의지를 내 마음에 심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명언: 인내는 한 번 뛰는 장거리 경주가 아니다. 숱한 단거리 경주의 연속이다(월터 엘리어트).
나를 위해 우시는 주님
어느 신부님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자매님께서는 고해성사를 보면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어렵고 힘든 상황을 사제에게 울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해사제가 훈화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우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우시겠구나.”
내가 아파하고 힘들어 할 때 아무런 감정 없이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길로 가길 간절히 원하시면서 울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답니다.
말로 위로를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위로는 입으로 내 뱉은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공감하고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튼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내 자신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함께 했었는지를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사람들과 만났을 때 너무 이성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을 때가 많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우리를 위해 울어주시는 내 안의 하느님 모습을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세상은 살기 힘든 곳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가장 살기 좋은 곳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의 거룩한 여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의 벗이 되어주시며 자유와 해방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에 군중들은 놀라고 열광했지만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데 길들여져 나자렛 시골 출신이요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 그리고 그분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믿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4,26-29)와 겨자씨의 비유(4,30-32)를 통하여 미소한 것도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지니며, 그 나라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초에는 보이지 않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반드시 오며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 씨앗은 농부에 의해 뿌려지지만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합니다.”(4,28) 이 점이 바로 인간의 세상과 하느님 나라의 근원적인 차이입니다.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가시적인 성과나 변화에 끌려다니느라 보이지 않는 기묘한 방법으로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확장되어가며 어김없이 수확 때가 돌아오듯이 반드시 도래합니다(4,29).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많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들과 변화하는 현상들에 끌려 숨 가쁘게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농부처럼 땀을 쏟고 고통을 감수한 다음, 어김없이 다가오는 수확의 때를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기보다는 조급해 합니다. 계획은 인간이 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낙담하거나 의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태도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지 않는 교만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녀답게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되돌리되 완성시켜주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인정하며 기다리는 ‘거룩한 여유’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언제든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치열하게 살면서 반드시 오게 될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에 합당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고 무가치해 보이는 아주 작은 씨앗을 통해서도 생명과 희망의 선물을 주시고 창조를 이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커가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는 ‘거룩한 여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여유는 그저 일이 없는 시간적 여백이나 신체적 자유를 말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거짓 자아와 집착과 탐욕, 육의 욕망에서 온전히 벗어날 때 찾아드는 영(靈)의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하루도 눈에 보이는 현상과 육의 욕망을 좇는 조급한 발걸음을 멈추고 거룩한 여유를 되찾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그리는 여유로움으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과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시며 행복을 가져다주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
김동원 신부님(서울대교구 대만선교)
맹자가 말한 어리석은 농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싹이 잘 자라도록 모종을 손으로 살짝 뽑았다는 농부는 결국 농사를 다 망치고 말았습니다. 조장助長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지요. 씨앗 한 톨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라나는 신비에 농부는 좋은 결과를 위해 돕는 역할을 ‘적당히’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렇게 커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커가는지 모르기에 신비롭습니다. 내가 인위적으로 무엇을 보태고 조작한다 한들 그 신비로운 생명의 힘이 없으면 무엇도 아닙니다. 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생명의 힘이 모든 것의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듯, 하느님의 나라도 곳곳에서 모든 피조물의 행복을 위해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작은 씨앗처럼 보이는 하느님 사랑의 힘이 모진 내 마음을 움직여 하는, 작은 새싹 같은 행동을 통해서 밖으로 밖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라난 가지에 다른 생명이 깃들어 삽니다. 예수님은 씨앗의 비유를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인지하지도 못 할 정도지만, 어김없이 열매를 맺는 생명의 힘이 하느님 나라이며, 하느님의 말씀이며,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게다가 생명처럼 보이지도 않는 극히 작은 것에서 그 모든 것이 시작 됩니다.
내 삶의 가지에 타인이 깃들일 공간이 있나요?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나무
서광석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 28)하고 말씀하시고, 그 하느님 나라를 '작은 겨자씨'에 비유하신다. 씨앗에 싹이 터서 순간순간의 세월과 함께 큰 나무로 자라듯, 하느님 나라 또한 이와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비유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므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는 맞고 문헌적으로는 틀리다. 듣는 이에게 알아들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작은 겨자씨 비유의 본질은 우리 마음에 뿌려진 사랑의 씨앗이다. 그러나 인간 지성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씨앗의 생물학적 변화 정도일 뿐이다. 피조물 하나하나의 속성과 그 개개에 관한 창조주의 사랑과 목적은 파악할 수 없다.
이러한 비유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행한 작은 사랑의 행위로 공동체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며 하느님 나라를 유추해 낼 수 있다.
하느님 나라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거울이자 시대의 표징이다. 인간 안에 내재하는 하늘의 씨앗은 하느님 은총과 더불어 그 사람 일생이라는 나무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생활 전체에 걸친 행복한 삶의 지수는 인간 속성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성찰 없이 제도나 윤리로 속박하는 것은 이론의 교의로 빠져들 위험이 크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편협함은 경계해야 한다. 개개 나무의 특성을 유념하는 '구체적 사랑'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하느님 사랑은 천재의 영역이 아니라 성숙한 사람의 영역이다. 천재는 기발한 발상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경험으로 사랑의 지혜를 넓혀나가는 법이다.
하느님 사랑 안에 성숙한 자는 동물 중에 최상의 동물이다. 그러나 이 사랑을 벗어나면 동물 가운데 가장 저급한 동물로 전락한다. 위선과 불의로 무장된 인간은 자신과 타인에게 가장 해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어떻게 완전히 불행해질 수 있는가?'하는 제목의 글을 찾았다.
"자기만 생각하십시오. 자기에 관한 말만 하십시오. 할 수 있는 한 '나'라는 말을 많이 쓰십시오.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십시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하는 말에 신경을 쓰십시오. 질투하고 욕심을 부리십시오. 사소한 것도 지나치지 마십시오. 비판을 절대로 용서하지 마십시오.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자기에게 좋은 시간만 고집하십시오.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자기를 최고로 사랑하십시오. 이기적으로 사십시오.(…) 이렇게만 하면 당신은 확실히 완전하게 불행해질 것입니다. 자기, 자기, 자기 그리고 나, 나, 나. 당신이 자기만을 위하여 살면, 자기 생각과 자기 관심만 반복하다가 지겨워서 죽을 것입니다."
사회는 점점 타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께서 역사하심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사랑과 정의가 실현돼야 함이 마땅한 것으로 점점 더 인식돼 가고, 인간과 더 나아가 창조된 자연까지도 존중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작은 겨자씨가 싹이 터서 자라 큰 나무가 되고, 숲을 이뤄 다른 피조물의 쉼터가 되듯, 신앙인 각자는 우리 안에 뿌려진 사랑의 씨앗을 키워서 다른 이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 뜻에 맞는 한 그루의 성숙한 사랑의 나무가 될 것이다.
“작은 것이 크다.”
고찬근 신부님
‘세쿼이아(Sequoia)’라는 나무가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은 이천 년을 넘게 살며, 높이는 80미터, 둘레는 30미터, 무게는 1,300톤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씨앗은 무척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다지요. 매년 봄이 되면 거무튀튀한 나무에서 형형색색의 꽃과 어린 연두색의 새순이 터져 나오고 가을이 되면 달콤한 열매가 맺힙니다. 자연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겨자씨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 비유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작지만 큰 생명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삶 속에서 미소, 작은 선행, 작은 관심, 작은 용서 같은것들은 점점 자라나 하느님 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작은 겨자씨같이 시작되는 것처럼, 작은 무관심, 작은 거짓말, 미움, 시기, 질투 같은 것들도 점점 자라나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수천억 개 은하의 엄청난 우주가 존재하고, 작은 씨앗이 거대한 나무로 변하고, 봄이면 팝콘처럼 벚꽃이 터져 나오고, 옹알이를 하던 아기가 건장한 청년이 되고,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회색빛 노인의 뺨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모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세상만사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 보고 갑자기 큰 나무가 되라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한 사람의 슈퍼맨이 갑자기 세우는 것도, 제도와 법으로 인간을 통제함으로써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꽃이 피는 과정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국은 활짝 피듯이 하느님 나라도 천천히 자연스럽게 변화되어 이룩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러 사람들의 작은 마음, 작은 선행, 고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를 세워야 하는 우리는, 조급증을 버리고, 어떤 경우라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며, 작은 것, 작은일, 작은 마음들도 소중히 여기는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사랑이란 것은 전염성이 있어서 누군가 사랑을 시작하면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우리들의 작은 사랑들도 모이고 모이면 세상을 바꾸는 큰 사랑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돈이나 재물의 힘은 철석같이 믿으면서 하느님이 뒤에 계신 사랑의 힘은 별로 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진정한 힘은 그 사랑의 힘인데 말입니다. 돈오점수(頓悟點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욕심마저 버리고 성실히 수행할 때 문득 깨달음이 오듯이, 우리 안에 하느님이 심어주신 작은 겨자씨에 대한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느 날 하느님 나라를 받치는 커다란 사랑나무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반명순 수녀님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지혜를 저에게 허락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마르 4,26)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30ㄴ절)라는 전제를 두며,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해줍니다.
‘땅에 뿌려놓은 씨’(26ㄷ절)와 ‘땅에 뿌릴 때의 겨자씨’(31ㄴ절)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 곧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하느님 나라는 그 자체로서 역량과 위력을 지니고(27-28절. 31절) 확장하며 완성의 때를 이루어 갑니다.(29절.32절) 물론 씨앗을 땅에 뿌리는 사람은 풍성한 열매를 위해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26ㄷ절) 그는 씨앗을 뿌린 후에 밭에도 나가보고, 김도 매어주고, 거름도 주며, 가뭄이 계속될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물을 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뿌려놓은 씨앗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 것처럼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릅니다.”(27절) 농부의 지고한 수고가 있었다 해도 씨앗의 내밀한 성장 과정은 농부의 수고가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도 그 자체의 역동성에 의해 확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앗을 뿌린 사람의 몫은 충실하게 모든 것을 행하고 인내롭게 때를 기다리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이 오래 기다린 끝에 “곡식이 익으면 곧 낫을 댑니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29절. 참조: 야고 5,7-8; 마태 25,13)
뿌려진 씨앗은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마르 4,28) 본시 ‘땅’이란 하느님께서 혼돈에서 질서를 세우시고 세상을 창조하시어 사람이 살게 하신 곳으로써 땅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창세 1장; 8,22 참조) 주인이신 그분께서 친히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품과 언행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완성으로 나아갑니다. 농부가 이해를 하든지 못 하든지 관계없이 땅에 뿌려진 씨앗들이 저절로 자라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부여받은 제자들이 그것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는 위력을 떨치며 강력히 작용하여 마침내 종말에는 엄청난 결과를 이룰 것입니다.(마르 4,11.13 참조)
그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일단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됩니다.”(32절. 참조: 에제 17,22-23) 겨자씨는 가장 작은 것의 상징이 됩니다.(마태 17,20; 루카 17,6 참조) 그런데 그 작은 씨앗이 자라서 큰 가지를 뻗고 새가 깃들이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확대 발전해 가는 하느님 나라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빈약하고 왜소하게 시작된다 해도 그 자체의 역량을 가지고 확장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이며, 또한 하느님의 통치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큰 가지와 넓은 그늘’은 그 누구나 찾아가 안식을 얻고 쉴 수 있는 자리, 초대된 자리입니다.(마태 11,28-30 참조)
마르코복음에만 나오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4,26-29)는 파종에서 수확으로 그려지는 하느님 나라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 여정의 신비와 비밀스러운 힘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추수와 함께 심판을 표상하는 ‘낫’은 우리한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요?(요엘 4,13; 묵시 14,15 참조) 제2독서의 말씀처럼, ‘낫’과 함께 우리가 경계해야 할 묵은 누룩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전前문맥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20)를 본문에 앞서 전하며 제자들한테 따로 풀이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34절)
묵상(Meditatio)
제 마음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나라가 있는가 하면, 저의 뜻만을 성취하려는 나의 나라도 있습니다. 제 의지를 넘어 두 나라는 그 자체의 역동성을 가지고 확장해 나가는데 ‘하느님 나라’는 큰 가지를 뻗어 누군가의 자리를 마련하는 한편, ‘나의 나라’는 저 자신만을 위한 영역을 넓혀가려 합니다. 시작은 함께 이루어지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하느님의 나라와 육의 행실을 따르는 나의 나라는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다를 것입니다.(갈라 5,16-26 참조) 오늘 제 안에 말씀의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어떤 수확을 위한 것인지 면밀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기도(Oratio)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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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어떤 신부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은 그 당시에 상당히 힘든 상태였지요. 왜냐하면 소문이 그렇게 좋지가 않았거든요. 각종 소문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힘들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얼굴도 많이 수척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그분은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 신부님을 만난 뒤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지금 돌고 있는 소문이 정말입니까?”
신부님께서는 깜짝 놀라서 말씀하세요.
“제가 정말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말했지요.
“아니, 그렇다면 진실을 밝혀야지요. 왜 그냥 가만히 계세요?”
“물론 그렇게 하고 싶지요. 하지만 그렇게 밝힌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더군다나 저는 이렇게 부족한 제가 신부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정도의 비난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요.”
결국 그 신부님에 대한 소문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그냥 사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없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부님께서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싸울 때에도 그렇지요. 시비를 걸더라도 상대가 전혀 반응이 없다면 싸움이 될까요? 아주 싱거운 싸움이 아니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침묵을 통해서 상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참으로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렇게 무조건 당한다는 것. 자신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분명하게 대응을 하고, 진리를 밝히는 것이 옳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신부님께서는 달랐습니다. 왜 신부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처럼 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신부’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가장 큰 행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시련과 고통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그 하느님 나라를 자신도 모르게 자라는 씨앗과 같으며, 작은 겨자씨가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크게 자라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결코 대단한 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체험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 나라를 만나게 하는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감사할 수 있는 것이며, 그 과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고통과 시련도 기쁜 마음으로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를 둔 아빠의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아빠가 어느 날, 아들이 사회 시험 문제를 푸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답니다. 문제는 “개를 잃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지요. 과연 이 아이가 뭐라고 썼을까요? 이 아이의 답은 이러했답니다.
“하느님께 기도한다.”
이 아이는 문제가 생겼을 때 하느님이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었지요. 이처럼 우리의 삶 안에서 특히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분이 하느님이고, 그분 안에서 언제나 행복을 체험한다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에 대한 비난을 하지 맙시다.
당신은 혹시....(호머 엘리어트)
사람들이 진짜 열매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완벽하게 인공적인 열매들을 만든 어느 여자에 관한 옛날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일부 평론가들은 끝까지 그녀가 만든 열매의 모양, 색깔, 그리고 다른 것들에 관해서 잘못을 지적했다.
어느날 평론가들은 그녀가 테이블 위에 진열해 둔 여러 개의 열매 앞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특히 하나의 사과를 비난했다. 그들이 비난을 끝냈을 때, 그녀는 그 사과를 집어내어 그것을 절반으로 쪼갰다.
그 다음 한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짜 사과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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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에 의하면 침팬지와 인간의 게놈(유전체 : Genome)은 98.77%가 같고, 단지 1.23%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침팬지가 인간과 가장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비록 인간보다는 낮은 수준이지만 글자와 도형을 배우고, 숫자를 다루며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수화와 몸짓으로 사람과 의사를 교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음성과 표정을 흉내 낼 수도 있고, 사람과 컴퓨터 게임을 즐길 수 있고, 게임에서 이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침팬지를 통해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침팬지와 인간의 생물학적 차이는 단 1%밖에 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1%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고 침팬지를 형제요 자매라고 말할까요? 즉, 침팬지를 우리 인간과 똑같이 취급을 할까요? 아닙니다. 단 1%의 차이는 숫자상으로 아주 작은 차이이며 실제로 인간과 가장 유사한 모습과 행동을 보이고 있지만, 그 1%의 차이는 실제로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1%가 인간이냐, 동물이냐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1%라는 숫자는 엄청난 숫자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즉, 이렇게 작은 것이 나를 인간이냐 동물이냐를 결정하게 한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그 1%가 너무나 작아서일까요? 이렇게 동물보다 못한 사람의 위치로 돌아가려는 많은 사람들을 뉴스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아기를 유괴하고 아기 엄마를 살해하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결식아동들에게 형편없는 도시락을 제공하는 사람, 전처의 자식이라고 때려서 죽인 계모, 돈 있고 빽 있는 아이의 시험지를 대신 작성해주는 선생님, 외국인 노동자에게 함부로 대하고 있는 업주들…….
올해 들어서 있었던 사건들 중에서 몇 가지만을 적어보았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 그래서인지 이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 그렇게 놀라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이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만의 고유한 1%를 포기하고 어쩌면 동물보다 못한 모습을 간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의 소중함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인간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바로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했습니다. 즉, 처음에는 너무나 작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점점 자라 엄청나게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엄청난 힘과 능력이 넘치는 곳임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1%도 비록 작아 보이지만 엄청난 힘과 능력이 담겨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인간만의 고유한 그 1%를 키우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하느님 나라를 성장시키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답게 삽시다.
마음을 바꾸면 행복이 온답니다.
생활이 궁핍하다 해도 여유 있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에게 섭섭하게 해도
그 동안 나에게 그가 베풀어 주었던
고마움을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밥을 먹다가 돌이 씹혀도
돌보다는 밥이 많다며 껄껄껄
웃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밥이 타거나 질어 아내가 미안해 할때
누룽지도 먹고 죽도 먹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대범하게
말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가를 미리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남이 잘 사는 것을 배아파
하지 않고 사촌이 땅을 사도 축하할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직위가 낮아도 인격까지
낮은 것은 아니므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처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비가 오면 만물이 자라나서 좋고
날이 개면 쾌청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루 세끼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비가 세도 바람을 막을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느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좋았던 추억을 되살리고
앞날을 희망차게 바라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받을 것은 잊어버리고 줄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돈으로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 한 번만 바꿔 먹으면
그 순간부터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