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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1년 2월 2일 (백) 주님 봉헌 축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1.02.02|조회수1,005 목록 댓글 0

제1독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주님의 길을 닦게 하실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에 유혹을 받은 이들을 도와주실 것이다(제2독서).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이 아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반대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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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키 예언자는, 주님께서 홀연히 당신의 성전으로 오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정결례를 거행할 날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치자, 시메온은 아기가 반대받는 표징이 되리라고 예언하고 한나 예언자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복음).

  



오늘의 묵상

마리아와 요셉은 율법의 관례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첫아들로 태어난 그 갓난아기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귀하고 특별한 존재였을까요? 구약의 율법은 맏아들, 가축의 맏배, 햇곡식 등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소중하게 여길 만한 것들을 주님께 바치도록 규정하는데 (탈출 13,2; 레위 23,10 참조), 이는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가장 좋은 것을 내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자신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소중한 아들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봉헌합니다. 성전에 등장하는 나머지 두 인물도 자기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였던 이들입니다. 시메온은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곧 메시아의 도래로 실현될 구원의 때를 간절히 기다리며 의롭고 독실하게 한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나도 마찬가지로 과부로 지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값진 보상을 얻게 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시메온과 한나처럼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서약한 수도자들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 봉헌된 이들의 숭고한 삶에 깊은 존경과 기도를 드리면서, 아울러 우리 각자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봉헌할 수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각자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씩 꺼내어, 주님께서 몸소 마련하신 구원의 선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쁘게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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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는 참으로 놀라운 구세주 강생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신 것으로 모자라, 사람의 도움으로 하느님께 봉헌되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갓난아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봉헌하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길을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되셨던 것입니다.

정결례가 끝난 뒤에 장면이 전환됩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맞이한 시메온은 ‘시메온의 노래’를 부르면서 구세주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보았음에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는 이렇게 두 개의 손길과 마주합니다. 하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신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손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맞이하고 품에 안는 두 팔입니다.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기념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도움과 손길을 요구하고 계심을 기억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두 팔로 따뜻하게 안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님께서는 성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우리의 손길과 도움을 청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두 손과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 드려야 하는 순간입니다.

아울러 오늘은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며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기도 중에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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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지 40일이 되는 날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맞이하여 봉헌의 삶을 사는 수도자들을 기억합니다. 수도자들은 복음적 권고를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며 가난, 정결, 순명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가난은 ‘나의 것’을 봉헌하여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정결은 ‘나의 사람’을 봉헌하여 모든 이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고, 순명은 ‘나의 뜻’을 봉헌함으로써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가난, 정결, 순명은 비단 수도자만이 아니라 신앙인이라면 모두가 자신의 처지 안에서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기에 앞서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아드님을 봉헌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요셉과 마리아를 통하여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천상에서 영원무궁토록 찬미를 받아 마땅하신 당신의 아드님을 지상으로 보내시어, 여느 평범한 이들과 다를 것이 없는 이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 인류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감히 우리의 형제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바치는 봉헌의 의미를 새길 수 있습니다. 봉헌은 하느님께 어떤 대가를 바라고 바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께 무언가를 바치기에 앞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가 봉헌입니다. 그 감사함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봉헌은 시장 경제의 논리에 갇힌 투자나 거래와 다름없을 것입니다.(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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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40일째 되는 날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주님 성탄과 공현을 마무리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본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맏아들, 곧 첫아들은 주님의 몫이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그러하였습니다(탈출 13,2 참조).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될 때, 하느님께서 이집트에 내리신 마지막 재앙이 맏아들과 맏배를 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맏아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피를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 그것을 본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건너뛰게 하여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그 건너감에서 ‘파스카’라는 말이 나왔고, 맏아들의 봉헌은 곧 이집트에서 해방됨을 기억하는 행사였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에 모든 맏아들을 성전에 봉헌해야 한다는 율법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뒤 모든 맏아들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 되고, 부모들은 성전에 제물을 바치고 맏아들을 하느님에게서 받아 오는 것입니다. 

이 율법에 따라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하느님이시기에 당신 자신을 봉헌하실 필요가 없으셨지만, 스스로 봉헌하심으로써 겸손과 순종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시는 성자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모범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봉헌의 모범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메온의 말대로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겪게 되실 성모님께서도 당신 자신과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온전히 하느님께 돌려 드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과연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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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이라는 의롭고 경건한 이를 만납니다.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저마다 꿈을 실현하고자 일생을 바칩니다. 그런데 시메온에게 꿈은 오직 한 가지, 주님께서 구원하러 오시는 것을 보는 것이었지요. 이를 위해 전 생애를 주님께 봉헌하며 끝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처럼 아기 예수님을 통해 주님을 체험하지요. 신앙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봉헌이란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침으로써 내가 근본적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봉헌 중에 가장 뜻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메온처럼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주님께 바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일생을 봉헌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구원은 결국 평생 자신을 주님께 얼마나 봉헌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삶의 마지막 순간에 시메온처럼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시메온처럼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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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시는 요셉과 마리아를 생각해 봅니다. 성령의 계시로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요셉의 마음은 먹먹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낳은 아기 예수님이 정말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될지 확신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첫 아기를 봉헌하는 두 사람이 만난 늙은 예언자 시메온의 고백은 자못 진중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살면서 간절히 원하던 것을 얻으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시메온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 암흑의 역사를 살고 있었지만, 신실하신 하느님께서 죽기 전에 틀림없이 구원의 빛을 보여 주실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시메온의 눈은 어둠 속에서 빛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본 것입니다. 

삶이 너무 괴로우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라고 말하고, 너무 억울하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내가 평생 무엇을 찾으며 살아왔는지 말입니다. 늙은 예언자 한나도 그랬습니다. 평생을 과부로 살아온 그녀에게 남은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짓밟힌 예루살렘의 영화를 되찾는 날, 과부로 살 수밖에 없었던 한 많은 삶에도 하느님을 섬기며 믿어 온 영광의 날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겪을 성모님께서도 당신 고통을 세상을 위한 보속으로 봉헌하시며, 하느님 구원을 미리 맛보는 증인이 되십니다. 봉헌 생활의 날인 오늘, 수도자들의 봉헌된 삶은 바로 종말론적 희망, 곧 ‘지금-여기서’ 미리 맛보는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수도자들이 그런 봉헌의 삶을 기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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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지 40일째 되는 오늘은,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또한 오늘은 수도자들이 봉헌과 축성 생활을 감사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봉헌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봉헌 생활의 해’(2014년 11월 30일-2016년 2월 2일) 성년이 막을 내리는 날이기도 하지요.

하느님의 놀라우신 이적으로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를 무사히 통과하여 이집트를 탈출하기 직전에,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맏배를 치시는 열 번째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이후부터 이스라엘에서 태를 열고 나오는 모든 첫아들은 당신께 봉헌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탈출 13장 참조). 이 계명에 따라 아기 예수님도 성전에서 봉헌되십니다. 우리가 세례 때에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 축성’, 곧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

봉헌 생활과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성작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던 수녀님이 있었습니다. 성작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에, 식사 때에 성작으로 물을 마시면 안 되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속하고 그분의 소유이기에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몫으로 삼아 주셨기에, 하느님께서도 우리 몫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몫이신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차지할 수 없고, 어느 것도 우리의 몫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마실 잔이신 주님”(시편 16,5), 그분이 우리의 주인,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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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의 계절인데 젊은이들의 처진 어깨가 안쓰럽다. 꿈이 없는 청춘의 모습도 안타깝지만 노인들의 모습 또한 그렇다. 노년의 기품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식도 있고 돈도 있지만 가족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때부터 ‘잘살아 보세!’를 따라 농업과 고향을 버리고 도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식들을 다 출가시킨 뒤 이제 할 일은 무엇인가?

인도의 전통에서 남자들은 바로 그때를 출가의 기점으로 삼았다. 한생을 공부하고 일하며 결혼하고 양육하면서 살아오느라 종교 생활에 너무 소홀하였으니, 이제 남은 생은 신께로 귀의하겠다는 것이다. 싯다르타 석가모니불도 그렇게 출가했다. 

노인은 평온히 쉬며 지낼 자격이 있다. 그렇지만 병원 다니면서 매일 한 주먹씩의 조제약을 먹으며 소일한다면 이미 죽은 몸과 같다. 사람은 꿈을 가질 때라야 살아 있는 것이다. 내일 죽더라도 꿈이 있어야 한다. 노인에게 꿈이 있으면 삶의 원숙함과 총명과 영감이 빛나게 된다.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봉헌되실 때 ‘시메온과 한나’라는 두 노인이 등장한다. 그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원대한 꿈과 믿음이 있었으니, ‘죽기 전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것이었다. 

청년의 꿈은 입신출세(立身出世)와 세계 제패라 할진대, 노인의 꿈은 훨씬 더 큰 것이어야 한다. 생의 단 마지막 욕심을 내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다. 욥의 꿈은 ‘나는 나의 하느님을 기어이 뵙고야 말리라.’(욥 19,26-27 참조)였다. 하느님을 만나면 노년의 삶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굳어 있는 얼굴에 평온함이 생길 것이다. 한 번도 그렇게 살아 보지는 못했지? 하루 한 걸음씩 아버지 품을 찾아 걸어가라! 남은 모든 것을 봉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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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가톨릭 성가』 469번 ‘사랑하면 알리라’라는 젠 성가의 가사는 이러합니다. 

“언제나 나는 물었다. 언제나 주께 물었다./ 세상은 사랑 찾는데 왜 고통이 있냐고?/ 오직 한마디 내게 주었네, 마치 물음에 답하듯이./ 사랑하라 알고 싶거든 빛이 솟음을 너 보리라./ 사랑하라 말해 주네. 사랑을 하면 알리라./ 사랑하라, 슬픔 가고 기쁨을 찾으리.”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교회는 ‘봉헌 생활의 날’을 지내며 주님께 봉헌된 삶을 선택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은 위 성가 가사처럼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찾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십자가의 주님께 세상의 모순과 고통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고 강렬하게 물었던 이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논리와 복음의 가르침 사이의 적당한 타협에 만족할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에 대한 추구는 사랑의 선택 안에서만 그 참된 길을 발견하는 것임을 깨닫고 그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들입니다. 

독일에 머물렀던 시절, 오랜 숙고 끝에 봉헌의 삶을 선택한 한 분과 교분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욕심과 바람이 아니라 오직 정직하게 ‘진리와 진실을 찾는 이’가 되기를 바라던 성실한 젊은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공동체와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에 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리가 있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많은 수도자가 자신의 서원을 더욱 새롭게 다지는 이 복된 날, 문득 자신의 응답의 결실에 감사하고 있을 그가 떠올랐습니다. 

다 른 한편으로 이러한 봉헌 생활의 길은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방식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져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살이에서 실천할 사랑의 소명을 주님에게서 부여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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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산모는 아이를 낳고 40일이 지나면 성전에 나아가 정결례를 치러야 했다(레위 12장 참조). 마리아께서도 이 율법을 지키셨다. ‘주님 봉헌 축일’은 성탄 뒤 40일째 되는 날 성모님께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 교회는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복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미사 전례 전에 ‘초 축복’과 ‘봉헌 행렬’을 한다. 

한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주님 봉헌 축일’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전 세계 교회가 이를 기념하도록 하였다. 봉헌 생활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이다. 모든 신자, 특히 젊은이들이 ‘봉헌의 성소’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한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6세기에는 시리아에서 이 축일이 거행되었고, 로마는 7세기 후반에 이를 받아들였다. 8세기 중반에는 ‘성모 취결례(정화) 축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18세기 프랑스 전례에서 ‘주님 봉헌’으로 바뀌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황청 수도회성은 해마다 맞이하는 이 봉헌 생활의 날에 모든 신자가 수도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봉헌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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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으로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삶의 모든 사건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그 여인은 종교적인 정결 예식을 거행해야 했습니다. 정결 예식의 절차는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번제물로는 한 살된 숫양 한 마리를 바쳐야 했고, 속죄 제물로는 어린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바쳐야 했습니다. 만일 집안이 가난하면 양 대신 비둘기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산모는 종교적으로 완전히 깨끗해지고 봉헌된 아이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하느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드릴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봉헌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개인의 욕심과 인간적인 생??버리고 날마다 살아가는 거룩한 삶, 사랑의 삶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참된 봉헌물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은 수도자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며 사는 수도자들과 함께 고 최민순 신부님의 시 ‘받으시옵소서’를 묵상하고 싶습니다.

받으시옵소서 /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아니라도 / 여기 육신이 있습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 본시 없던 나 손수 지어 있게 하시고 / 죽었던 나 몸소 살려 주셨으니 / 받으시옵소서 / 님으로 말미암은 이 목숨 이 사랑 / 오직 당신 것이오니 도로 받으시옵소서 // 갈마드는 세월에 삶이 비록 고달팠고 / 어리석던 탐욕에 마음은 흐렸을망정 / 님이 주신 목숨이야 늙을 줄이 있으리까 / 심어 주신 사랑이야 금갈 줄이 있으리까 / 받으시옵소서 받으시옵소서 / 당신의 것을 도로 받으시옵소서 // 가난한 채 더러운 채 / 이대로 나를 바쳐드리옴은 / 오로지 님을 굳게 믿음이오라 / 전능하신 자비 안에 이 몸이 안겨질 때 / 주홍 같은 나의 죄 눈같이 희어지리이다 / 진흙 같은 이 마음이 수정궁처럼 빛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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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이산가족 가운데 한 분이 꿈에 그리던 가족을 상봉하고 나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꼭 하고 싶던 일을 마침내 이루었을 때 흔히 이런 말을 씁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목적하던 바를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메온이 바로 이런 경우라 하겠습니다. 시메온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이 위로받는 때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정결례를 위해 봉헌하러 오신 마리아와 요셉에게서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시메온은 자신이 평생을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바로 자신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임을 깨닫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사실 이런 기다림의 삶입니다. 어쩌면 평생 동안 내가 믿고 기다리는 주님을 삶 속에서 깊이 깨닫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100년을 넘게 살든, 단 몇 년을 살든, 중요한 것은 주님을 깊이 깨닫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놓고 나면 우리 인생에 무엇이 남을 수 있는지요? 지금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님을 깊이 만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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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시메온의 희망을 이루어 주셨으니,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주님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고, 시메온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품에 안는 기쁨을 누렸던 것처럼, 저희도 주님을 맞이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율법에서는 아이를 낳은 산모를 ‘일정 기간’ 부정한 몸으로 규정해, 남편과 떨어져 있게 했습니다. 몸에 피를 묻혔기 때문입니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33일간이었고, 여자아이를 낳으면 66일간이었습니다. 이 의식이 ‘정결례’의 핵심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내아이는 7일, 여자아이는 14일로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뒤, 사내아이는 성전에 봉헌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셨기에 주님께 드린다는 종교 예절입니다.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굉장한 ‘마음가짐’이지요. 그리고 형편에 따라 새끼 양이나 비둘기를 봉헌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비둘기 한 쌍을 바치십니다.

신앙인 역시 봉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성사로 주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사건을 그분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기쁘고 즐거운 일에는 봉헌이 쉽습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일에는 힘이 듭니다. 억울한 사건을 ‘주님께서 주셨다고’ 여기는 것은 ‘신앙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시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봉헌의 삶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시메온과 한나를 만나십니다. 그분들이 우연히 아기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평생 의롭게 살았기에 구세주를 뵈올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신심 깊은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의 모습입니다.


철학자 츠다 이츠오는 그의 책 ‘침묵의 대화’에서 일상 속 평범한 행동을 ‘신을 모시듯’ 하라고 권합니다.

“비질하거나 목욕하는 것 혹은 요리하는 순간은 신에 대한 존경과 헌신을 표현할 기회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손길이 묻어있는 곳이기에 어디에서든 하느님을 느낄 수 있고 또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헌신을 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이지만, 어디에도 안 계신 하느님인 것처럼 생활합니다. 그래서 정성을 기울이지 못하고,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생활 자체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전혀 바뀌지도 않고 오히려 더 나쁜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구는 “하느님 믿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말합니다. 물론 상대방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또 망신을 주려고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말만 하고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는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구약성경의 정결례 규정(레위 12,1-8)에 따르면 산모가 남자아이를 낳으면 40일간, 여자아이를 낳으면 80일간 정결하지 못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이 기간이 지나면 속죄 제물을 사제에게 바치고, 사제는 이 제물로 산모의 부정을 벗겨줍니다.

또 첫 번째 남자아이는 하느님의 소유라는 탈출기 13장 2절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께 바친 뒤에 되돌려 받아야 했습니다. 이 규정에 따라 성모님과 요셉 성인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고 제물로 속량 예식을 치른 것입니다.

아직 말도 못 하는 갓난아기였던 예수님의 상태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평생 하느님을 잊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봉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주님의 봉헌 축일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봉헌 삶에 대해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입으로만 봉헌된 삶이 아닌, 온몸으로 봉헌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말이지요.


가슴 깊은 신념에서 말하는 ‘아니오’는 그저 다른 이를 기쁘게 하거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말하느 ‘예’보다 더 낫고 위대하다(마하트마 간디).


잘 개발되어야 합니다.

몇 년 전, 영국 의학 전문지 “British Medical Journal”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의학 종사자 대상), 1840년 이후 의학계의 성과 1위는 하수도와 깨끗한 물이었습니다. 항생제, 마취, 백신, DNA 구조 발견 등을 생각할 것 같았지만,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이 볼 때는 하수도와 깨끗한 물이 의학계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와 보편화된 하수도 시설 덕분에 인간은 수인성 전염병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실제 수명이 35년가량 늘어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저소득 국가, 개발 도상국에서 물과 위생 문제로 매년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 하수도와 깨끗한 물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늘 옳은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때로는 인간을 위해 더 깨끗한 자연을 위해 최소한의 개발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개발 금지를 외치는 것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환경을 위해 잘 개발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더 큰 지혜와 바른 판단력이 요구됩니다.




한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케냐 방문 기간 동안 이루어진 성직자·수도자들과 만남 때의 말씀이 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축성생활의 날을 맞이하는 저희 수도자들이 반드시 마음에 새길 말씀입니다.

“우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한 사제, 한 수사, 한 수녀에게서 눈물이 마를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불충실 때문에 우십시오. 세상의 고통 때문에 우십시오. 내쳐지는 사람들 때문에 우십시오. 버려진 노인들, 살해된 아이들을 위해 우십시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우십시오.”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기도를 멈추면 여러분의 영혼은 메말라집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 지루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졸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주님 앞에서 주무십시오. 그것도 기도하는 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주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버리지 마십시오. 축성 생활을 하는 사람이 기도를 버리면, 영혼이 메말라집니다. 바싹 말라 시듭니다. 흉한 모습을 한 마른 나무 가지처럼, 기도하지 않는 사제나 수도자들은 흉한 영혼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생활의 날을 맞아 스스로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수도생활, 과연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의 수도생활에 대해 나는/세상 사람들은/주님께서는 정녕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수도자들의 현존에 대해 정녕 가치와 의미를 찾고 있는가? 수도자들은 존재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우리 수도자들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반대 증거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사는 모습을 보고 ‘저게 뭐야? 수도자가 저래도 되는거야?’라며 충격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4~50년전, 한해 입회자가 4~50명씩 되던, 그래서 침실이 부족하던 수도 성소의 호황기 시절을 그리워며,‘라떼는 말이야!’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끼리만 알콩달콩, 오손도손, 재미있고 편안하게 살면서, 수도원 담 너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잘 짜여진 일과표에 따라 수도 규칙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고통받고 있는 세상과 가난한 이웃을 향한 개방과 환대, 나눔과 헌신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것은 아닌지?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참으로 큰 도전 앞에 서 있는 축성생활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수도생활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 회복시키기 위한 진지한 숙고와 성찰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도자들 한분 한분의 내면에 성령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열정과 활기가 넘치는 수도 공동체 생활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들의 얼굴에서 기쁨과 매력이 철철 흘러넘쳤으면 좋겠습니다. 

고통받는 세상 속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수도자들의 적극적인 봉사와 헌신도 아주 중요합니다. 각 수도회 고유의 카리스마적 현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입니다.


어쩌면 한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수도자 한분의 현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가운데 살아 숨쉬고 계신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봉헌되지 못했을 때 받아야 할 고통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특별히 봉헌의 삶을 사는 수도자들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봉헌 생활을 축성 생활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밀떡과 포도주가 봉헌되면 그것이 성체와 성혈로 축성되는 신비를 인간도 직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밀떡과 포도주도 사제를 통하여 제단에 봉헌되지 않으면 주님의 살과 피로 축성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가장 완전한 사제라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 봉헌은 우리 어머니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키워야 하는지 그 모범이 됩니다. 자녀를 자신의 아이로만 여긴다면 자녀는 축성될 수 없어서 방황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것은 알겠는데, 아직 온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아니라고 느껴 혼란에 빠집니다.

온전히 자녀가 아니라고 느끼면 하게 되는 것은 ‘경쟁’입니다. 자녀들이 경쟁하는 이유는 진짜 자녀가 되려는 이유 때문입니다. 경쟁은 고통스럽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녀들끼리도 경쟁하면 그렇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이 더 자녀답다고 그리스도와 경쟁하였습니다. 하지만 참다운 자녀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6살 여자아이 ‘프리다’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외삼촌과 숙모가 사는 시골집에 맡겨집니다. 삼촌과 숙모는 불쌍한 프리다를 자신의 딸처럼 여기려 노력합니다. 둘 사이에는 ‘아나’라는 어린 딸이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시골 삼촌 댁에 맡겨진 프리다에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무엇보다 삼촌과 숙모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프리다는 사촌 동생 아나에게 자신의 인형들을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이 그만큼 많이 사랑받는 증거라고 그렇습니다. 사실은 아나가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을 질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프리다는 서투른 화장을 하고 담배를 피우는 흉내를 내며 엄마를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엄마 담배를 성모 마리아께 바치며 엄마가 좋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아직 삼촌과 숙모를 참으로 아빠와 엄마로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프리다의 삼촌과 숙모는 프리다에게 잘 대해주지만 프리다는 자신의 외로움을 관심으로 채워보려 노력합니다. 신발끈을 묶을 줄 알면서도 일부러 숙모에게 묶어달라고 하고, 상추를 가져다 달라는데 아나보다 더 먼저 밭으로 뛰어가 양배추를 뜯어갑니다. 그러나 숙모는 프리다의 마음을 압니다. 목욕하며 삼촌의 관심을 끌어보려 하지만 삼촌은 아나의 머리를 먼저 말려줍니다. 냅킨을 식탁 밑으로 숨겨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삼촌과 춤을 추는 아나가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프리다는 아나와 경쟁의식을 느낍니다. 아나가 놀아달라고 하는데 잘 놀아주지 않습니다. 프리다는 그런 아나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나무 사이에 숨어있으라고 하고 집으로 혼자 돌아옵니다. 숙모가 아나를 찾지만 프리다는 숙모에게 미움을 살 거 같아서 아나를 못 보았다고 말하고 아나를 찾으로 숲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하지만 아나는 팔에 깁스하고 숙모의 팔에 안겨 돌아옵니다. 숙모는 모든 것을 다 알지만 프리다에게 혼을 내거나 소리를 치지 않습니다. 숙모에게 미안해서 화단에서 꽃을 꺾어 선물했지만 그 꽃은 숙모가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프리다는 몸이 좋지 않은 숙모 곁에서 숨을 쉬는지 코에 손을 대봅니다. 엄마처럼 숙모를 잃을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아나는 프리다가 수영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뛰어듭니다. 간신히 삼촌이 건져내어 괜찮을 수 있었지만 졸지에 모든 게 프리다의 잘못이 되었습니다.

프리다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며 자신을 사랑해 줄 가족을 찾아 떠나겠다고 가출을 감행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아나는 “난 언니 사랑해.”라고 말합니다. 삼촌 부부는 프리다를 찾습니다. 프리다는 어두워서 멀리 못 가고 다음 날 다시 나가겠다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숙모는 이런 프리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언의 위로를 해 줍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며 프리다는 조금씩 삼촌 부부의 가족이 되어갑니다. 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자 프리다는 엄마가 어떤 분이었는지를 숙모에게 묻습니다. 그런 것을 숙모에게 물으면 안 될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숙모는 엄마가 프리다를 매우 사랑했다고 말해줍니다.

프리다는 이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느낍니다. 삼촌 부부와 아나와 정신없이 재미있게 뛰어놉니다. 아나를 질투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이미 한 가족이 되어버린 자신을 보고는 그동안의 심경과 행복이 겹쳐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이것이 프리다가 원했던 행복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카를라 시몬 피포’ 감독이 어릴 적 자신의 경험을 옮긴 ‘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이라는 영화 줄거리입니다.


잔잔한 이 영화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 주변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프리다의 눈을 통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혼자만 뒤처졌다는 느낌에 잘 보이기 위해 경쟁하고 질투하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해봐야 점점 주위 사랑을 잃고 더 외로워지게 됩니다. 주변인으로 사는 것은 지옥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 부모의 사랑으로 평안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사춘기 전까지입니다. 사춘기가 넘으면 새로운 부모가 필요합니다. 그 이전에 부모는 자녀를 하느님께 바쳐 하느님의 가족이 이미 되었다고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성당에 다녀도 프리다처럼 주변인처럼 살아갑니다. 뒤처졌다고 느끼고 경쟁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런 상태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경쟁상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만 채운다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족의 행복이 모든 행복의 기반을 이룹니다. 사춘기 전에는 인간의 부모가 주는 가족의 행복, 그 이후에는 하느님 부모가 주는 가족의 행복입니다. 우리 부모는 자녀들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그런 마음으로 살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라고 자녀들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를 봉헌하지 않는다면 자녀의 인생은 프리다의 여름처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드님을 하느님께 바로 봉헌하신 성모 마리아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는 지역에 따라서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순창 고추장, 영덕 대게, 영광 굴비, 기장 미역, 흑산도 홍어, 가평 잣, 서산 어리굴젓, 제주 옥돔, 청도 반시, 영덕 사과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대명사처럼 알고 있는 많은 지역 연고 상품들은 천년을 이어온 진상품들이기 때문입니다. 맛있고, 품질이 좋은 음식을 왕이 있는 궁궐에 드리는 것을 진상품이라고 하였습니다. 각국의 정상들이 만나면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가장 한국적인 것을 선물할 것입니다. 청와대에서는 각국의 정상들에게 받은 선물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선물은 우정과 친선을 도모하는 상징입니다. 선물은 가치와 품질이 중요하지만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과 정성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예물도 좋지만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30년 사제생활하면서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손수건에 돈을 넣어서 바늘로 꿰매서 주신 어르신도 있습니다. 어르신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러기와 갈대를 주제로 ‘노안도(蘆雁圖)’를 그려주신 분도 있습니다. 노안도는 노후에 편안한 삶을 기원하는 뜻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일상 속 여인들의 지혜를 담은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따르면 기러기는 네 가지 덕목을 갖춘 새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추우면 북으로부터 남형 양에 그치고 더우면 남으로부터 북안 문에 돌아가니 신(信)이요, 날면 차례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에서 화답하니 예(禮)요, 짝을 잃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節)이요, 밤이 되면 무리를 지어 잠을 자되 한 마리는 경계를 하고, 낮이 되면 입에다 갈대를 머금어서 그물을 피해 가니 지혜(智惠)가 있다.” 사제로서 충실하게 살아 갈 것을 당부하며 주신 선물입니다.


30년 전 사제서품을 받을 때 특별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저의 서품성구를 족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액자는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기에 족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본당을 옮길 때마다 아버님께서 붓으로 써주신 족자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뉴욕으로는 가지고 오지 못하고 집에 놓고 왔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시편 126장을 정성껏 써 주셨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들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는 저의 서품성구였습니다. 아버님이 써 주신 족자에서 아버님의 강직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3년 동안 저를 위해서 사제관에서 밥을 차려주시고, 청소를 해 주셨습니다. 본당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주방에서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저와 함께 해 주셨습니다. 아픈 분들을 찾아서 방문해 주셨고, 함께 기도해 주셨습니다. 교리를 가르쳐 주시고, 대모를 서 주셨습니다. 제가 첫 본당신부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되신 부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겁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축일입니다. 교회는 전통에 따라서 오늘 제단을 밝힐 초를 축성합니다. 초는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초는 빛을 내서 어둠을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을 걷지 않고, 더 이상 고통과 좌절 속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는 스스로 타서 빛을 냅니다. 완전히 다 탈 때까지 초는 계속 불을 밝힙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느님께 순종하셨던 예수님의 희생을 말해 줍니다. 초는 열을 냅니다. 그 열기는 다른 것들에 전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넘치고 넘쳐서 제자들에게 전해 졌습니다. 그 사랑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주님의 봉헌 축일에 교회는 초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초를 축성하면서 우리들 자신도 그렇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사랑과 나눔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느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함께하는 삶, 나누는 삶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기도와 선행의 봉헌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바치는 삶>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내시니


조금씩

하느님께로


마침내

하느님 안에


하느님처럼

지으시니


조금씩

하느님처럼


마침내

하느님처럼


하느님께서

이끄시니


조금씩

하느님 따라


마침내

하느님과 하나




새롭게 시작합시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혼인예식에서 신랑 신부의 입장에 앞서 양가의 어머니가 초에 불을 당긴다. 초가 타들어 가 녹아내리고 빛을 발해주던 어머니의 노고를 읽을 수 있는 혼인예식의 중요한 대목이다. 나는 너를 낳아 기르고 교육시켜 이렇게 오늘의 자리를 마련했단다. 이제 어머니의 촛불점화는 자녀에게 그 바톤 텃치를 알리고 어머니의 희생은 자녀의 몫이 된다는 뜻으로 촛불을 밝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다음 자녀가 입장하며 오늘 혼인예식의 주인공이 되어 혼인서약과 성혼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봉헌의 삶의 시작을 알린다. 입장을 기다리던 신랑은 그런 뜻도 모르고 방 떠있다가 입장 소리에 놀란듯 어떨결에 입장을 한다. 신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신랑 신부는 화촉을 밝히고 살아간다. 가톨릭은 혼인성사를 위해 ‘카나의 혼인강좌’를 하루종일 예비신랑신부에게 실시한다. 혼인을 준비하기 위한 피정의 시간인 셈이다. 여기에서 이들 예비부부에게 봉헌의 삶의 참뜻을 가르친다.

성품성사의 사제가, 봉헌을 서약한 수도자가, 혼인한 성사부부가 축성의 날, 봉헌의 날, 촛불을 들고 제단에 봉헌된 날을 오늘 다시 떠올린다. 성모 마리아님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심을 기념하며 우리도 또한 봉헌의 삶을 되새겨 본다.

봉헌의 삶을 사셨던 성녀 데레사 수녀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번에 단 한 사람만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을 그렇게 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대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내내 대했습니다. 이 삶은 예수님의 봉헌에서 출발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위대한 삶이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삶에서 출발한 삶이며 사람을 한 번에 단 한사람을 껴안는 삶이며 그렇게 대할 때, 수녀님은 위대한 삶을 사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미사에 앞서 초를 축복합니다. 내가 들고 있는 초에 불을 당김니다. 자신을 녹여 빛을 발하는 한 자루의 초가 되라 하십니다. 성모 어머니의 노고, 세상 속 우리들의 어머니, 피땀이 담긴 촛불이 밝혀졌기에 아들 예수님께서 봉헌되시고 우리 또한 봉헌 됩니다. 

혼인예식에서 어머니의 촛불점화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여기에서 성소의 꽃눈이 생겨나고 꽃을 피우는 봉헌의 삶이 생겨납니다. 교회의 일꾼이 생겨나며, 가정을 이루어갈 부부가 봉헌을 이어갑니다. 아름답고 고귀한 축성생활로 봉헌의 삶을 살아가며 성사가 완성되길 기도합니다.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성전에서 봉헌했습니다.


저희 가정의 이야기를 하자면 저희 아버지 어머니가 결혼을 하시고 5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는 함께 100일 기도를 바치시면서 아이가 생기면 하느님께 봉헌하고 싶다고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기도가 끝날 무렵 아이가 들어섰고 결혼 6년 만에 제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선조인 이승훈 베드로 할아버지 이후 7대째 이어져 오는 전통적인 구교 집안이었기에 저 역시도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제가 어릴 적부터 제가 사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가끔씩 하셨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제가 되기를 별로 원하지 않았고 동생이 장애인이었기에 장애인들을 돕는 의사가 되고자 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자 저희 집에 신부님들이 방문을 하시면서 제가 사제가 될 것을 권하셨고, 마침 친구 중에 하나가 예비신학생을 가자고 저를 조르는 바람에 예비신학생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결국 1988년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1997년 사제로 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저희 아버지는 5주기 기일입니다. 아버지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 순간 당신이 달력을 보시면서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에 선종하기를 기도하셨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이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과 비슷하게 당신이 아들 사제를 주님께 봉헌했다는 것이 큰 의미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그 기도는 이루어지고 주님 봉헌 축일에 선종하셨습니다.

봉헌의 의미는 어쩌면 단순히 내가 가진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다시 도로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봉헌을 함에 있어서 하느님 앞에 옹졸하고 인색한 모습으로 생색을 내는 어리석음을 범하곤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생명도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내 삶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내 죽음도 하느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인간이 내가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영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향한 진화길 따라(축성생활의 날)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아기는 사람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아버지께 바쳐지지 않았습니다.

요셉 마리아 시메온의 도움에 의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되셨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님이셔도 세상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힘으로 세상을 갈아엎는 초월행동 안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님 예수님은 사람의 도움으로 사람을 구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조건 준수하시며 사도들과 제자들을 모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제자로 변화 되면서 하느님능력을 행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과 함께 산다면 험난한 세상도 헤쳐갈 수 있습니다.




<봉헌>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 봉헌 축일>(2021. 2. 2. 화)(루카 2,22-40)

예수님의 봉헌은, 태어나신 뒤에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대로 봉헌했을 때에만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봉헌입니다.)

특히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로서 예수님의 봉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봉헌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3-14)”

“......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히브 9,26-28).”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히브 10,19-20.22ㄱ).”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일인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지금 ‘나의 봉헌’은 “내가 살기 위한 일”입니다. (생색낼 것도 없고, 과시하거나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살기 위한 일이니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1-2).”

<여기서 ‘여러분의 몸을’이라는 말은, ‘여러분 자신을’이라는 뜻입니다.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는 말은, 거룩하게 살아서 ‘삶 자체를’ 봉헌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고, 구원을 받는 방법입니다. (만일에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서 제물이나 돈을 바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봉헌도 아니고 예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변화되게 하라는 말은, ‘거룩한 삶’을 설명하는 말인데, 세속에 물들지 말고, 주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선’과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과 ‘완전한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분별하라는 말은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은 성전에서만 (하느님을 향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가정에서도(가족을 향해서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

(이 말은 ‘남편’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가정에서 이웃으로, 즉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말과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내준다는 (바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봉헌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던 ‘가난한 과부’는 봉헌의 모범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돈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또 표현만 보면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에 칭찬하신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그 과부가 ‘온 마음’을 다 바쳤기 때문에 칭찬하셨습니다. ‘온 마음’을 다 바친 것은 사실상 ‘온 삶’을 다 바친 것입니다. 봉헌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에 칭찬하신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음’은 보지 않고 ‘돈’만 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봉헌의 ‘나쁜 예’가 나오는데,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입니다.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사피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는데, 아내의 동의 아래,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사도 5,1-2).”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대들이 땅을 이만큼 받고 팔았소?’ 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예, 그만큼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사도 5,8).”

그 부부는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명예욕과 재물에 대한 소유욕을 모두 채우려다가 ‘하느님을 속이는’ 행동을 했습니다(사도 5,4). 그런 위선자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이 말씀의 ‘자선’을 모두 ‘봉헌’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맞이하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

말라키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당신에 앞서 보내시는 "계약의 사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인류가 고대하며 기다려온 메시아시지요.


"홀연히"

이 말씀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갑작스럽게"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는 인간의 편에서 볼 때 갑작스럽게 닥칠 미지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홀연히"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구원자 주님께 대한 기다림의 끊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그분의 도래는 마음을 다해 바라고 찾고 기다리는 사이 성큼 다가올 순간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루카 2,25)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봉헌하러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섰을 때에, 시메온도 마침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옵니다. 전 생애를 걸쳐 구원자를 고대해 온 시메온 안에 온 인류가 들어 있기에, 그와 구원자와의 만남은 말라키 예언자의 전언 그대로입니다. 부모와 함께 "홀연히" 성전에 들어선 예수님을 성령에 이끌린 시메온이 영접하고 하느님을 찬양한 것이지요.


"제 눈으로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그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성전을 다녀갔을 겁니다. 권력가나 학자, 예언자, 현자 등등... 그중에는 잠시지만 시메온의 가슴을 뛰게 한 이들도 없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가 구원을 만났다고 선포합니다. 한 가난하고 소박한 부부의 아기에게서 구원을 포착한 힘은 오랜 세월 쌓인 기다림이 진액이 되어 흐를 만큼 간절했던 바람과 성령 덕분입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루카 2,37-38)

그날 성전에서 예수님을 뵈온 또 다른 이는 한나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여읜 후 평생을 하느님 앞에 머물렀습니다. 한나처럼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에 영감을 받은 이들은 세상 재물이나 관계에 매임 없이 자유로이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지요. 오늘도 수많은 한나들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릅니다.

주님은 "홀연히" 찾아와 당신을  모조리 내주심으로 시메온, 한나 안에 깃든 인류의 사랑에 응답하십니다. 사실, 주님을 기다리는 그들보다 더 간절히 주님께서 이 만남과 일치를 기다리십니다.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된 거룩한 순간이 시메온과 한나의 증언으로 인류 역사 안에 새겨졌습니다. 육화하신 성자께서 성부께 봉헌되는 순간, 인류는 자신을 찾아오신 주님의 현존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신랑을 맞이한 신부처럼 사랑으로 전율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교회는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축성된 수도자들을 기억하고 성소를 위해 기도합니다. 수도자들이 시메온처럼, 한나처럼 주님을 섬기며 사랑의 삶을 살기를 함께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도 안에서나 제도 밖에서나, 주님 안에 머물러 그분을 섬기며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숨은 기도자들의 봉헌 또한 주님께 참으로 값지고 귀하답니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모시고 섬기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봉헌을 기꺼이 받아 주시고 거룩하게 해 주실 것이니, 여러분은 진정 복되십니다.  축하드립니다.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나타내는 한나

-존자 베다-

신비적 의미로 풀면,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녀의 나이도 교회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지내 온 세월을 가리키지요. 일곱에 열둘을 곱하면 여든넷이 됩니다.

여기서 일곱은 일곱 날로 표현되는 이 세상의 전 과정을 나타내고, 열둘은 사도들 가르침의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삶의 전 과정을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이라면, 보편 교회든 개별 신자든, 여든네 해 동안 꽉 차게 주님을 섬긴 이로 칭찬받을 만합니다.

한나가 남펀과 함께 산 일곱 해는 주님께서 육으로 사신 시간을 나타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간 전체를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주님 위엄의 특별한 속성 때문에, 일곱 해라는 단순한 숫자가 완전함의 표징으로서 그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를 가르치신 때를 나타냅니다. 또한, 한나를 주님의 은총으로 풀이하는 것도 교회의 신비로운 성사들을 확증해 줍니다.

한나는 ‘주님의 얼굴’로 불리는 프누엘의 딸이며 많은 자녀로 축복받은 아세르(신명 33,24 참조) 지파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적 소명

양성일 시메온 신부님

교회에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 성무일도의 끝기도를 통해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시메온의 노래를 기도로 바칩니다. “주여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마치 일생의 삶을 정리하듯 하루를 마치며 이 노래를 바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이 노래를 바치는 시메온에게 아기 예수의 존재는 자신의 죽음마저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와 구원 그 자체입니다. 예언자 한나 역시 같은 때에 사람들에게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는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겠다 하신 하느님 약속이 이루어짐을 과거에도 기다렸고 또 지금도 기다리는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예언자적 소명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도 주님께서 오신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분이 오셨기에, 나의 죽음까지도 평화롭게 하는 그 주님이 오셨기에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예언직은 더욱더 힘이 있을 것이고 그 자리에는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함승수 신부님

'돈 세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탁이라고 하니 돈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지만, 돈 자체가 깨끗해지는게 아닙니다. 횡령, 사기, 갈취 등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한 재물을 어디서 얻었는지 그 '출처'를 불분명하게 감추고 속이는 일일 뿐이지요. 우리가 재물을 참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재물을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그것을 주님의 뜻에 맞게 잘 사용하고 나눔으로써 재물 뿐만 아니라, 그 재물을 관리하는 우리 자신까지 거룩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가 선택한 봉헌의 방식입니다. 사실 그들이 성전에 바친 재물은 아주 미미한 양입니다. '비둘기 두 마리'는 가난한 이들이 정결례를 진행하기 위해 바쳐야 했던 최소한의 양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으로는 절대 값을 매길 수 없는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것을 바쳤습니다. 하나 뿐인 '아들'을 바쳤고, 하느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도록 자신들의 삶 전부를 그분께 바친 것이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 많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자신들이 세운 '계획'을 포기해야 했고, 자신들의 뜻과 의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고난당하며 끝내는 죽임까지 당하는 모습을 보며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극심한 고통과 슬픔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 힘겨운 시간을 참아내야 하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곰곰이 되새겼기에, 그들의 삶은 주님으로부터 은총과 복을 받아 충만해졌고 거룩해졌습니다. 그들이 희생하고 내어놓은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귀한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그 모습을 본받아 각자의 삶을 주님께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은 수도자들에게만 부여된 의무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실천해야 할 덕행이기 때문입니다. '청빈'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가난해지는게 아니라 '나의 것'을 봉헌하여 '주님의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정결'은 단순히 육체적 순결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모든 이를 예수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며 차별 없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순명은 '나의 뜻'을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협력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먼저'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삶의 봉헌'을 더 이상 망설이거나 지체해서는 안됩니다.




봉헌奉獻의 축복 -봉헌 에찬禮讚-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특별히 하느님께 봉헌된 우리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매일매일이 봉헌 축일입니다. 하느님 선물에 대한 응답이 봉헌이요, 봉헌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축복입니다. 아니 봉헌생활 자체가 축복입니다.

봉헌보다 더 깊고 아름다운 말마디도 없을 것입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겸손, 봉헌의 지혜, 봉헌의 죽음등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봉헌의 삶입니다. 이런 봉헌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이들이라면 결코 함부로 막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성전에서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삶은 그대로 봉헌 축복의 표현입니다. 가난, 정결, 순종, 정주 등 모든 수행들 또한 봉헌의 표현입니다. 이런 열정과 순결의 봉헌 수행 생활을 통해 마음의 순수와 더불어 내외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이요 더욱 섬김의 삶에 깊이 투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중심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봉헌은 우리 삶의 의미이자 우리 삶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봉헌임을 깨닫습니다.

어둠을 환히 밝히는 영롱한 봉헌초처럼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밝히는 봉헌생활의 빛입니다. 봉헌초보다 봉헌의 축복과 희생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봉헌이 없는 삶,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하겠는지요! 봉헌의 삶이 참으로 우리 삶을 고귀하고 품위있게 합니다.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의 표현이 봉헌의 삶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봉헌이란 말마디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봉헌이란 말뜻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하느님을 몰라, 하느님을 믿지 못해 봉헌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대로 본능의 욕망따라 허무하게 인생 마치는 사람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하느님 없이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회개, 겸손, 봉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회개, 겸손, 봉헌의 삶에 날로 깊이 투신하게 됩니다. 봉헌의 삶을 통해 점차 또렷해 지는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우리의 신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는 예수님 부모의 평범하고 차분한 모습이 참 경건하고 아름답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참으로 봉헌의 삶에 충실했던 요셉 마리아 부부임을 깨닫게 됩니다.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던 시메온이야 말로 봉헌생활의 모범입니다. 마침내 말라기의 예언은 오늘 복음에서 실현됨을 봅니다.

“보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마침내 봉헌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던 시메온이 성전에서 주님을 만나니 그대로 봉헌의 축복입니다. 시메온에 이어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에서 떠나는 일 없이 단식과 기도로 주님을 섬기며 봉헌생활에 항구하던 한나도 넘치는 축복을 받습니다. 말그대로 봉헌의 축복입니다.

시메온의 아름다운 고백의 찬가는 우리가 끝기도때마다 부르고 잠자리에 드는 찬가입니다. 이 시메온 찬가의 은총이 참 평화로운 단잠을 자게 합니다. 비단 끝기도뿐 아니라 미사때 주님을 만나고 파견될 때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어 시메온은 예수님 부모를 축복합니다. 마리아에 대한 예언이 빛에 그림자가 따르듯 축복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고통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처럼 축복과 더불어 고통도 많이 받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봉헌생활 중에 겪는 이런저런 병으로 인한 고통들 봉헌 축복과 더불어 잘 받아들여야 함을 배웁니다. 말 그대로 고통의 신비입니다. 사실 주변에서 노후에 극심한 병고중 임종을 맞이한 신자분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평소 봉헌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다 보면 주님은 이런 고통도 잘 감당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사실 건강이 자랑이 아니라 고통을 잘 받아들여 견뎌냄이 자랑이요 영광입니다. 욥의 감동적 고백이 생각납니다.

"알몸에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1,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헌의 축복이 고통을 압도합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봉헌의 축복-봉헌 예찬-”으로 정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아기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봉헌 축복이 얼마나 고마운지 잘 보여줍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아기 예수님뿐 아니라 봉헌의 삶에 충실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영육의 건강과 지혜, 주님의 총애를 상징하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하루하루가 주님 봉헌 축일이자 우리 봉헌 축일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크고 작은 다양한 사랑의 봉헌들로 이루어진 삶입니다. 매일 한결같은 일상화된 봉헌의 삶이 마침내 마지막 아름다운 봉헌의 죽음으로 끝을 맺게 할 것입니다.

끝으로 성공적인 봉헌생활을 위해 참 좋은 명약名藥, 말씀 처방전을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 때 말그대로 봉헌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아멘.




나를 어디에 맡겨야 가장 안전할까? <루카 2, 22-40> 2월 2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 금고에만 넣어두는 것은 가진 것을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안전과 이익을 위해 사람들은 찾아 헤맵니다. 오늘 성모님과 요셉은 옛 규정대로 주님을 성전에 가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을 보고 복음 끝에 집으로 돌아가 “지혜와 총애를 받았다.” 하는 내용을 봅니다. 저도 일찍이 하느님 아버지에게 바로 봉헌되어 일생을 지혜롭고 주님의 은총 속에 살게 되었음을 깨닫고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는 참으로 봉헌되어야 할 곳에 봉헌되었으니 일생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고 세례성사로 자신을 봉헌한 삶은 얼마나 다행한 것인가? 아니었으면 세상을 헤매며 앉을 자리나 누울 자리를 찾아 헤맬 것인데, 마음은 둘 곳이 없어 이곳저곳 찾아 헤매다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닐 것인데 아니, 이 늙은 나이에 마음 둘 곳 없어 노숙자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보고 느끼고 안식을 얻을 곳, 마음을 둘 곳이 있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분명 저는 대박을 얻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시간 속에 이루어지는 일을 봉헌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된 것은 누구에게 무엇을 봉헌한 결과일까요? 하느님은 저의 전체였으며 저의 전부를 봉헌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고, 듣고, 체험함으로써 알게 되고 선조들이 그 길을 가셔서 행복의 길을 가셨기에 마음 놓고 자신을 봉헌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끝없이 계속됩니다. 있다가도 없어지고 있는 연속적 희망의 삶입니다. 오늘 시몬은 어린 주님을 보고 그렇게 행복해서 죽어도 좋다고 하셨을까요? 좋은 것을 보고 더 즐기고 행복해야 할 것인데 시몬이 본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을 봉헌하는 것을 보았고, 우리의 봉헌 의미가 더 확실하게 드러남으로 영광스러워서였습니다.

서원 식을 참례하다 보면 거룩함으로 비친 현상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오묘한 뜻을 보면 더욱더 거룩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저는 어머니께 효도를 다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종신서원 식 때 가족은 두 사람밖에 오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회의실이 성당이었는데, 많은 사람 초대하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종신서원 전날 종신서원 식의 의미와 전례를 어머니께 설명해드렸습니다. 이런 때는 이런 의미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되는 것이며, 전체 흐름과 부분의 흐름을 자세히 설명하고 적극적으로 참례하도록 해드렸는데 서원 식 끝에 눈물이 많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어머님이 나를 잘 키워주시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셨으니 저는 어머니께 감사했습니다. 오늘 저는 봉헌 초를 들고 “이 촛불이 타오르면 자기를 태우듯이 나를 주님에게 봉헌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 행복한 봉헌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이 봉헌이 아니고는 전기가 끊어지듯, 수돗물이 끊어지듯 삶이 연결되지 못한 봉헌이 됩니다.

60년 넘게 봉헌의 삶을 살도록 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찬미 드립니다.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봉헌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봉헌의 삶이

있다.


봉헌의

역사는

은총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봉헌으로

은총의 삶이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봉헌이다.


봉헌은

하느님의

기쁨이며


하느님의

선물이다.


남는 것은

봉헌의

삶뿐이다.


봉헌은

성장이며


봉헌은

믿음이며


봉헌은

실천이다.


봉헌 생활로

우리의 삶은

빛과 소금으로

변화된다.


봉헌은

우리의

내면까지

변화시킨다.


생활의

중심에는

언제나

봉헌이 있다.


봉헌을

먹고사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의 현실을

봉헌하는 것이다.


믿음의 삶은

봉헌의 삶이다.


수도공동체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봉헌의 삶이다.


촛불을 켜듯

봉헌은

빛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봉헌의 삶이

소중한 것은

서로를 살리기

때문이다.


봉헌으로

우리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봉헌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삶을 바라보는

중심이다.


생명의 길은

봉헌의 길임을

믿는다.


하느님의

사람은

봉헌의 삶을

살아간다.


이 땅에서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소박한 많은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드린다.


그들의 삶이

이 사회를 밝히는

촛불이고

행복한 소금의

삶임을 믿는다.



지금이야 젊은 사람이 등산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1990년 초반까지만 해도 등산하는 젊은이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이때에는 젊은 청년이었기에 등산을 참으로 많이 했습니다. 방학 때에도 혼자서 등산을 하러 갔고, 친구들과 놀러 가도 주로 산에 갔습니다.

한 번은 친구들과 방학 때에 설악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오색약수로 올라가서 설악동으로 내려오는 코스였습니다. 하지만 전날 산 밑의 민박집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산을 오르는데 다들 너무나 힘들어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어차피 내려갈 건데 그냥 내려가자. 너무 힘들다.”

이 말에 모두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우리 옆으로 한 무리의 등산객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등산객은 모두 젊은 여성들로, 아마도 우리처럼 동아리 MT를 온 것 같았습니다. 여성으로 이루어진 등산객을 보고서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원래 계획대로 설악산을 온전히 등반할 수 있었습니다(참고로 이 여학생들과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힘내어 산을 오르는 여성 등산객들을 보면서 우리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때를 떠올려 보니, 우리 삶 안에서는 포기하려고 했던 적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냥 포기해버리면 어떤 변화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하려고 했을 때 뜻밖의 변화도 얻을 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 열심히 하는 누군가로 우리 모두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을 보고서도 누군가가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심을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율법의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라는 기록을 따라 예수님을 봉헌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굳이 봉헌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자기가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정결례를 통해 깨끗해져야 한다고 율법은 말합니다. 그런데 남자의 씨를 받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은 성모님을 어떻게 부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는 하느님이 아닙니까?

율법 위에 계시는 특별한 권한을 가지셨지만, 우리에게 겸손의 모범을 보이십니다. 이는 우리 역시 그 겸손의 모범을 세상에 실천해야 할 것을 가리킵니다. 그 명령을 기억하면서 겸손의 모범을 세상에 보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에 깨달음을 얻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란걸 선물을 사면서 나는 알았어. 이 행복한 마음, 바로 네가 준 선물임을 그때 나는 알았어(신달자).


싸가지

한양도성을 건립할 때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따라, 동대문은 인(仁)을 일으키는 문이라고 해서 ‘홍인지문’, 서대문은 의(義)를 두텁게 갈고 닦는 문이라고 해서 ‘돈의문’, 남대문은 예(禮)를 숭상하는 문이라고 해서 ‘숭례문’, 북문은 지(智)를 넓히는 문이라고 해서 ‘홍지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가운데를 뜻하는 신(信)을 넣어 보신각을 건립했습니다.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 다섯 가지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에 기초해서 건립한 것입니다.

인(仁)은 측은지심으로 불쌍한 것을 보면 가엾이 여겨 정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의(義)는 수호지심으로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예(禮)는 사양지심으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하여 남을 위해 사양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지(智)는 시비지심으로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입니다.

신(信)은 광명지심으로 중심을 잡고 항상 가운데에 바르게 위치해 밝은 빛을 내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종종 ‘싸가지가 없다’라는 말을 쓰지요. 그런데 이 싸가지가 바로 ‘인의예지’ 4가지를 말한다고 한답니다. 즉, 싸가지가 없는 사람은 ‘인의예지’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싸가지 있게 살아야 합니다.




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유다인들의 정결례법에 따르면, 산모가 아기를 낳고 출혈을 하면 불결해진다고 여겼습니다. 33일간 집 안에 머물러야 했고, 제물로 바쳐질 고기에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정결예식 전까지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요즘 생각하니 참으로 어이없고 웃기는 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은 모든 맏아들과 동물들의 맏배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것을 모두 주님께 바쳐야 한다. 너희 가축이 처음 낳은 것으로 수컷은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러나 나귀의 첫 새끼는 양으로 대속해야 한다. 너희 자식들 가운데 맏아들은 모두 대속해야 한다.”(탈출기 13장 12~13절)


가축의 맏배들은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 했지만, 사람의 맏아들은 대신 속전(贖錢)이 치러져야 했습니다. 그 첫아들은 하느님의 소유로 본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성전에 가서 사제에게 다섯 세켈(Shekel)을 지불하고 아들을 찾아오는 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한 세켈은 통상 일반 노동자의 4일 품삯에 해당되니 약 20만원 정도입니다. 그러니 아들을 찾아오려면 다섯 세켈, 약 100만원 가량의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상황이 그리 넉넉치 않았던 마리아와 요셉은 속량세로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구세주,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분입니다. 당신 자신을 성전에 봉헌하고 속량세를 바치고 찾아올 하등 이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봉헌을 받으셔야 할 주체이자 수용자이신 예수님께서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성전에 봉헌되시고 속량세를 지불하시니,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탄생의 순간부터 시작해서 할례식, 정결예식, 속량예식, 세례식, 공생활 기간, 그리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한없이 깊은 겸손의 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뿐 아니라 카이사르의 칙령에도 복종하여 모든 법 앞에 자신을 굽히셨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맏아들이신 예수님 대신에 속전이 치러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으로 데려와지셨고, 그곳에서 봉헌되셨습니다. 그 봉헌은 하느님께 아들 예수님을 바침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봉헌은 예수님께서 오로지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봉헌 예식이 이루어진 성전에는 두 거룩한 노인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의롭고 독실했으며, 간절히 구세주 탄생을 기다렸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한눈팔지 않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정체를 즉시 알아보는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시메온은 예수님께서 장치 겪으시게 될 수난과 죽음,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가 겪을 고통까지 알아보게 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복음 2장 34~35절)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 초기부터 이미 고통의 어머니(Mater Dolorosa)께서는 극심한 고통에 젖으셨고,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에는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과 함께 어머니의 마음도 찢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람들의 증오보다도 더욱 강한 사랑의 위대한 희생을 치르실 것입니다.


“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입니다. 산비둘기는 순결을 나타내고 집비둘기는 은총을 나타냅니다.”(암브로시우스 교부)




봉헌하지 않는 고통이 봉헌하는 고통보다 항상 더 크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나라에 위대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리라.”

드디어 스승과 제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은 저승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웅장하고 아름답고 호화로운 식탁을 확인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것이 바로 내가 너희들에게 약속한 천국이다!”

그들은 먹고 놀며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날이 지날수록 그들은 따분해 했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인간세계를 보여 달라고 하여, 인간들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그래도 따분한 생각이 들어 다시 안내인에게 부탁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저기 보이는 지옥문을 열어 잠깐 보여줄 수 없소?”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인간들을 보면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옥이야말로 매일 노동에 시달리고, 혹독한 형벌에 고통 받으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로 득실거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안내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 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상상하는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많이 소유할 수 있는 곳일까요, 아니면 내어주어야만 하는 곳일까요?


한 가족이 모두가 돈을 잘 벌어 부족한 것이 없어 자신의 것을 내어줄 필요가 없는 가정이 행복해보이나요, 아니면 가난하더라도 자신이 먹을 것을 자녀에게 주고, 자녀는 부모를 위해 용돈을 아껴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가정이 행복해 보이나요?

서로 부족한 것이 없어 자신을 내어주는 어떤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곳이 지옥입니다.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천국은 십자가 투성이인 곳이어야 합니다. 서로를 위해 내어주고 있어야 ‘사랑’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넉넉해도 내어주는 십자가 사랑이 없으면 행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도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내어줌과 받음의 사랑을 반복하신다는 것을 십자가 죽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내어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으면 행복도 없습니다. 


교회는 내어주어 가난해지기를 가르칩니다. 그래야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재물을 가진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이 가난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신자분이 고민하며 저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넉넉한 편은 아닙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돈이 생겨서 이것을 어디 봉헌해야 할지 찾고 있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어서 가난해지지 못한 것이 꼭 주님께 죄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말하는 가난은 외적인 가난이 아니라 마음의 가난입니다. 부자라도 지금 가진 것을 다 잃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예수님은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구’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욕구들입니다. 따라서 그 욕구를 봉헌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지 굳이 봉헌하는 액수를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욕구가 사라지면 더 많이 봉헌하게는 될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욕구이고 그 욕구에 동의하여 하는 행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까지 말합니다.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악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그 악의 뿌리를 뽑기 위해 자신의 욕구와 싸우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봉헌이고 자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도와주면서도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런 자선이나 봉헌은 의미가 없습니다.

선악과는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필요해서 봉헌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소유욕을 줄이라는 뜻으로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봉헌은 그 욕구를 줄이기 위해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라고 시작합니다. 정결례는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하는 행위인데, 그 정결례를 예수님을 성전에서 바친 것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부모가 정결해지기 위해서는 자녀를 주님께 바쳐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봉헌이 중요하냐면 ‘소유욕’과 싸우고 있음을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르 4,19)고 하십니다. 이 욕구를 끊기 위해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도구가 십일조입니다. 십분의 일은 당신의 소유라고 하시며 바치라고 하시는 이유는 당신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욕에서 자유롭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쁜 욕구를 봉헌한 정결한 신앙인의 모습은 어때야할까요? 성모님은 예수님을 봉헌하셨지만 다시 어머니로서 예수님과 30년을 사십니다. 봉헌하든 안하든 외적인 것은 변화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드님이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 당신을 떠나시려 할 때 성모님은 붙잡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밑에서까지 “주님의 뜻대로!”를 외치십니다.

이 아드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은 이미 오늘 성전에서 예수님을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내어주신 봉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오늘 시작되지만 평생 이어진 것이며 그 봉헌을 잊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드님을 잃는 그 고통을 견뎌내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잃어서 그만큼 고통스러운 이유는 평소에 온전히 주님께 봉헌해드리지 못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봉헌의 연습이 잘 된 사람은 무엇을 잃어도 “주님 뜻대로!”를 외칠 수 있습니다. 


버스가 추락한 곳에서 며칠 뒤 한 남자가 투신자살을 하였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아내가 사망한 곳에서 자신도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래전 여렸을 때 본 뉴스였고, 참으로 마음이 안타까운 소식이어서 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안 좋은 일을 당하면 그것 때문에 부부사이도 멀어지고 가정이 지옥같이 변하는 가정도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에도 대비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봉헌’밖에 없습니다. 미리 내 것이 아니라고 여겨야 잃어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소유욕이 크면 무엇을 잃지 않아도 그것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하며 잃는 고통과 맞먹는 고통을 겪어내야 합니다. 항상 봉헌하지 않는 고통이 봉헌하는 고통보다 더 큽니다. 다 주님 것으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봉헌은 무언가를 바치면서 하는 것이지만 결국 내 안의 소유욕을 끊는 연습인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 광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 원로배우 신구 씨가 한 말입니다. 먹어봐야 그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광고였습니다. 제품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그 말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기도에 맛을 들인 사람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기도합니다. 기도가 지상 최대의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나눔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나누려 합니다. 나눔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를 가는 사람은 기회가 되면 또 가려고 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나누고 싶은 맛은 새벽 묵상입니다. 1995년부터 시작했으니 25년 되었습니다. 성서를 읽고, 기도하고, 글을 쓰는 시간입니다. 25년이 지났어도 질리지 않는 걸 보면 제게는 꿀맛인가 봅니다. 여러분이 이웃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맛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화룡점정(畵龍點睛)’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을 그림에 있어서 다 중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용의 눈입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숙소에 머물게 됩니다. 침대, 옷장, 책상, 냉장고도 다 좋았습니다. 그런데 샤워기가 작동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세면대에 물이 잘 안 내려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조금만 신경 쓰면 되는데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았고, 직접 사용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화려한 건물, 오랜 역사, 교계제도, 율법과 계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필요한 건 성령께서 함께하는 겁니다. 가진 걸 함께 나누는 친교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진실한 회개입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봉헌과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와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헌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봉헌은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이었습니다.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봉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와 바리사이파의 교만한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기도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바리사이파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화룡점정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늘 겸손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제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입니다. 더 멀고 힘든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먹은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많은 본당에서 오늘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은 초가 가지고 있는 3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성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삶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첫째, 초는 밝은 빛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진리의 빛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둘째, 초는 따뜻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이들, 슬퍼하는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셋째, 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십자가의 희생은 가장 숭고한 봉헌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솔직하게 아프다고, 원망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신앙이 있는 곳에, 당신의 몸을 성체의 모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발까지의 긴 여행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봉헌 축일하면 두 가지가 생각난다. 먼저 신학생 때부터 보좌 신부를 할 때까지 본당 수녀님들에게 축하를 드리고 식사도 함께 했던 것이 생각난다. 이번 주님 봉헌 대축일에도 몇몇 아는 수도자분들에게 문자라도 드릴 생각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학교에서 선후배, 동기들에게 들었던 성소 이야기이다. 어려서 자기가 죽을 뻔 해서, 아니면 부모님께서 어렵게 낳은 자식이라, 살려만 주신다면 혹은 아들을 낳을 수만 있다면 신부님을 만들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해서 자기가 신학교에 왔다는 이야기이다.


바오로 사도는 봉헌의 참된 의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성전으로 봉헌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주님의 영께서 거하실 곳으로 자기 자신을 매일 새롭게 축성하는 것이 인간이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값진 봉헌이다.


오늘 복음에서 평생을 기다리던 그리스도를 만난 시메온은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예언한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1독서 말라키 예언서에도 주님께서 당신의 성전에 드시는 날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세례 때에 우리는 물 속에 들어감으로서 세상에서 죽었고 물에서 나오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세례로 모든 죄에서 해방되었다 하더라도 꾸준히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으로 살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유혹을 느끼고, 죄를 짓기도 한다.


하느님의 영이 머무실 거처로 살겠다는 봉헌은 단 한 번의 예식이나 다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 살아야 하는 소명이다. 세례받은 이는 누구나 사는 내내 염색공의 잿물로 정화되는 과정 중에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찾는 사람이 아니다. 고통은 피하는 것도 좋다. 하느님이 당신의 자녀들인 인간의 고통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기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성전으로 산다면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산다면, 자기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산다면) 뒤틀린 세상은 자기들 한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을 견디기 힘들어 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하는 우한시에 사는 교민들을 정부가 전세기로 데려오려 할 때, 우리 교구 천안에서 정치인들과 주민들이 반대하고, 아산과 진천에 사는 주민들도 천안 다음에 왜 하필 우리냐며 반대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보이지 않고 막기도 힘든 질병이 유발하는 두려움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그 공포 가운데에서도 일부 주민들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오는 주민들을 환영한다는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교민들이 자기 동네에 2주간 머무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눈치를 줄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랑과 양심의 명령을 실천하다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고통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런 희생과 고통이 “제련사의 불”이고 “염색공의 잿물”이며 “영혼을 꿰찌르는 칼”이다.


그리고 우리는 유혹을 받더라도 쉽게 지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이다. 오늘 2독서에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정교한 제련사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성령의 불로 우리 안에 사랑이 아닌 것은 모두 태워주시길. 영혼에 매일 이기심, 질투, 교만의 때가 묻더라도 훌륭한 염색공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의 본래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시켜주시길.




주님 봉헌 축일, 축성생활의 날 (루카 2,22-40)

곽승룡 비오 신부님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하는 날이 되자.”(루카 2,22)


오늘은 하느님 어머니께서 정화하신 날을 기억한다. 이날은 예수님 탄생 후 40일이 지난날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산모의 정화 예식은 아기의 탄생 후 40일에 이뤄지곤 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또한 온 세계 수도자들의 ‘축성생활의 날’을 기념하고, 그들의 수도생활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우리 가까이에 계신 수도자들에게 축하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를 권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 봉헌 축일’에 만나는 봉헌의 ‘3가지 영적인 선물’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거룩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 3가지는 봉헌, 제물, 지혜이다.


1. 봉헌이란 무엇일까? 본디 하느님께 속한 것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23)


모든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이 말씀은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살아있는 기억이 있는 사실을 말하는 데, 바로 이집트에서 도망 나온 출애굽 해방 사건이다. 생생하게 기억이 되는 밤에 이방민족들의 모든 첫 아들들은 페스트 병으로 죽어갔지만, 히브리 어린이들은 반대로 구원되었다. 이와 같은 표징은 히브리인들에 아주 선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곧 거기서 하느님께서 맏아들을 구원하였는데, 그들이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께 속하는데, 언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기억할까?

우리의 인생은 누구에게 속해 있을까? 그것은 분명 우리 자신에게는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에게 속하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봉사를 위해 선을 실행하는 목표일 때 그렇다는 것을...


2. 제물, 산비둘기 한 쌍,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는 무엇을 의미하나?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4)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산모의 정화를 위해 양을 희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에게 양은 매우 비싼 가격이었다. 레위기(레위12,2-8)는 이런 경우에 산비둘기 한 쌍 또는 두 마리 집비둘기를 봉헌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혹시 이런 것들은 가격이 비싸지 않았지만 봉헌물로서의 가치는 결코 싸지 않아 보였다. 무슨 뜻일까?


사람의 살림살이에 비교해 두 마리 집비둘기는 과연 비쌀까? 그렇지는 않다. 예수께서 과부의 동전 헌금을 칭찬하셨듯이, 매일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의 작은 제물들은 결코 작지만은 않고, 상징하는 것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곧 우리가 소유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전부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비록 양이 아니라 비둘기 두 마리지만 이는 결코 작지만 않다. 우리 일상에서도 작은 제스처, 작은 행동은 그저 상징적이지만은 아니다. 이를 외적으로 판단하고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작은 것들이 엄청나게 강하게 힘을 드러내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곧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십자가를 긋는 작은 표시, 식사하기 전에 하는 짧은 기도, 사람을 만났을 때 건네는 작은 미소가 그렇다. 작은 희사나 동냥을 주는 것, 매일 짧은 복음구절을 읽기 위해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기. 등... 작은 제스처들이지만 온 종일 거룩한 표징을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호주 산불을 위한 시드니대교구특별헌금을 한 것이 바로 봉헌의 참의미라는 것을 말한다.


3. 지혜란 무엇일까?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루카2,40)

모든 어린이들은 같은 모양으로 자란다. 몇몇은 더욱 강하고. 어떤 이들은 좀 약하고 하지만 모두 자라난다. 만일 어린이가 자라지 않는다면 분명 건강에 중대한 문제가 일어난 것이라고 믿는다. 영적인 생활도 그렇다. 세례는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그래서 하느님을 알고 그 선 안에서 자라나는 첫걸음이다. 멈추는 것은 비극적으로 마치게 될 수 있다. 성 대 그레고리오는 영성생활을 넘치는 강물의 흐름과 비교한다. 수영하기를 그만두는 사람은 물에 빠지거나 파도에 휩쓸린다.


‘지혜로 자란다’는 것은 모두의 이상이다. 하지만 지혜를 위해 모두 같은 것을 추구한다. 1. 고대 백성들에게 지혜는 실천력 곧 무엇보다 어떤 능력이었다. 호메로스는 그렇게 지혜로운 자를 찾았다. 2. 그 후 그리스인들은 보다 높은 개념의 지혜, 정치적인 능력을 지혜자로 ...지도력, 철학 곧 가르침을 지닌 자로 여겼다. 3. 하지만 히브리 유다인들은 적당히 실천적이었다. 곧 친구들과 협력자들을 얻는 능력과 생활에서 성공한 자가 바로 지혜로운 자이다.

구약의 지혜서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인 요소가 그 중심에 있다. 인생의 참 성공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자에 맡겨져 있다.(시편1:110,10) 지혜로 자라는 자는 매일 더욱 내면적이 되는 관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자이다.


지혜는 은총으로 자란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구약의 지혜서가 말하듯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한테서 지혜서가 쓰여 졌는데, 거기에 유명한 그리스학파가 있었다. 그곳에서 히브리인들의 몇 사람들이 살았다. 이것이 이방인의 지혜와 접촉한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히브리 개념은 최상이었다. 왜냐면 지혜는 하느님의 선물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의 은총을 내려주시는 자에게 그의 생각을 비친다.




주님 봉헌 축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초가 초인 것은 누군가 초에 불을 당겨 주었을 때 초입니다. 아무리 좋은 초라도 불이 당겨지지 않을 때, 자리만 차치할 뿐입니다.

초에 불이 당겨졌을 때, 촛불이 되고 자신을 태워 빛을 냅니다. 그리스도의 촛불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촛불은 그리스도의 표상에서 비롯됩니다. 부활초는 빛의 근원입니다.


봉헌의 의미도 내가 자청한 것이 아니라 봉헌하도록 이끄심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봉헌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우리의 봉헌은 그리스도의 표상에서 비롯됩니다. 부활은 봉헌의 완성입니다.

축성의 날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세워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초가 아무리 빛을 내려해도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불을 당겨 주시지 않는다면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초에 불을 당기면 그을음이 심하게 발생합니다. 벌들이 만든 말납의 정제된 초에 불을 당기면 순수한 빛을 발하며 자신을 태웁니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태워 우리의 빛이 되셨습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밀초가 되게 하시고 축성의 불을 당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비로써 순수한 참 빛의 표상을 닮습니다. 그을음을 없이 하여 주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봉헌 축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40일째 되는 날로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산모의 정결례와 더불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을 1년 동안 제대에 봉헌될 초를 축성하는 날로 삼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빛으로서 세상에 오시어 우리를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을 특별히 수도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수도생활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날로 정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말라 3,1-4)는 주님의 날에 벌어질 일을 말합니다.

기원전 5세기경에 활동했던 말라키 예언자는 세상을 심판하러(말라 3,5ㄱ) 오실 주님의 날에 대해 말합니다. 두 인물이 나타나는데, 한 인물에게는 두 가지 이름이 제시됩니다. 한 인물은 파견하는 분이고, 다른 한 인물은 사자(使者: 파견된 사람)와 계약의 사자(使者)라는 이름을 가진 이를 말합니다. 파견하는 분은 주인으로서 ‘당신의 사랑과 동정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셨던’(이사 63,9) 분이십니다. 사자는 자신의 궁궐인 성전으로 오신 하느님(1열왕 21,1)을 뜻합니다. 세 번째로 계약의 사자는 모세와 같이 계약을 맺는 인물로 제시됩니다. 사자는 파견하신 분이 오시도록 길을 준비할 것이며(이사 40,3), 하느님의 백성이 갈 길에서 걸림돌을 들어낼 것이고(이사 57,14), 민족들 위해 깃발을 올릴(전쟁을 선포할: 이사 62,10)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다른 신을 섬기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팔이꾼의 품삯을 떼어먹고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는 자, 이방인을 밀쳐 내는 자,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을 거슬러 이루어지는 심판의 증인이 된다는(말라 3,5ㄴ)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사자가 오시는 날에는 모두 심판을 받고 혹독하게 정화될 것이기 때문에(이사 1,25) 드높아진 민족이 주님께 의로운 제물을 바칠 수 있을 것이고, 처음 주님과 약속했던 날처럼 주님의 마음에 들 것이라고 합니다. 파견하는 분은 하느님을 뜻하고 파견된 이는 구세주를 뜻하는 것입니다. 파견된 분이 머무르시는 곳은 “정의의 도읍, 충실한 도성이라 불릴 것입니다.”(이사 1,26)


오늘 복음(루카 2,22-40)은 새로운 계약(신약)과 옛 계약(구약)의 만남을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구약의 전통에 따라서 세 가지 일을 하십니다. 첫째,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백성임을 확인하기 위해 태어난 지 8일 만에 해야 하는 할례입니다. 둘째, 첫 아들의 봉헌과 더불어 이름을 붙여주는 일인데,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라.”(탈출 13,2)는 계명에 따른 것입니다. 셋째, 산모의 정결례인데, 산모가 아기를 낳은 지 40일 만에 공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은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봉헌했던 구약의 정결례와 구원의 빛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실 어린양이 봉헌되는 신약의 정결례 비교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원래 정결례에는 산모만 성전에 가게 되어 있었지만,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과 함께 성전에 가심으로써 율법에 충실했던 분들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실 분”(루카 2,49)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시기 위해(요한 10,37) 성전으로 가신 것이며, 이때부터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시기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봉헌되실 분이심을 미리 말해줍니다.

구약의 율법(정결례)에 따라 성전에 봉헌되는 어린 아기는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위해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분이고,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간 시메온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로 묘사됩니다.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왔기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노인인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되었다”는데, 옛 계약과 새 계약의 교차를 말합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계시의 빛을 가져다주실 분이며,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을 가져다주실 구세주를 직접 보게 되었음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가 아들 사무엘을 성전으로 데리고 왔던 엘카나와 한나를 축복했듯이(1사무 2,20) 시메온도 요셉과 마리아를 축복했습니다. 한편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은 시메온은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려왔던 구세주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고,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기 위해 제단에 제물로 봉헌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언을 정확하게 반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 독서(히브 2,14-18)는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로 봉헌되신 이유를 말합니다.

구원의 선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 우리의 형제들과 같은 분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이 연대성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악마, 세상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악마를 심판하시기 위해(요한 12,31), 그리고 악마에 의해 조종되는 죽음을 이기시기 위해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어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자비로우신 구세주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해방시키려고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왜 봉헌되셨는지, 어떻게 봉헌되셨는지를 밝히면서, 대사제로서 당신을 바치신 예수님의 봉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될 자유에 대하여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누리게 될 특권을 주셨고, 어린양으로서 봉헌되심으로써 죽음과 악의 권능을 물리쳐주시면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기에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으나 당당하게 물리치시는 모범을 보여주셨으며, 유혹을 받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들은 성부께서 보내셨고,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위해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봉헌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실 분을 알아보는 이는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시메온처럼 예수님을 두 팔에 안으려면 성령께서 기억하게 해주시는 말씀(요한 14,26)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도 세상을 구원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느님께 자신을 돌려드려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음에 삶으로 갚아드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에게서도 잘 드러나듯이 봉헌은 희생으로 표현됩니다. 희생이 있어야 봉헌이 가능합니다. 희생을 통하여 표현되는 봉헌이라는 근본적인 행위를 촉발하고 조절하는 것은 오직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봉헌은 희생이며, 사랑입니다. 사랑(성부), 봉헌(성자), 희생(성령) 이 세 가지는 각기 다른 것이지만 함께 이루어지는 한 가지 행위입니다. 봉헌의 외적인 표현은 희생이지만 봉헌의 본질은 사랑이입니다. 희생이 동반되지 않는 봉헌은 율법주의적이며 형식적이고, 겉만 번지르르 하게 만들어서 전시효과만 누리려는 꼼수입니다. 희생이 동반되지 않는 봉헌이라면 대가를 요구하게 됩니다.

봉헌은 자기 본질인 사랑이 희생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본질은 형상이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은 형상이나 형태에 상관없이 늘 그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자로서 봉헌, 사제로서의 봉헌, 평신도로서의 봉헌이 각각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직분과 처지에 맞게 다양하게 표현되는 사랑이 희생이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같은 봉헌입니다. 직분이 다를지라도 봉헌이란 그 본질인 사랑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른 색깔로, 다른 농도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희생으로 표현되는 봉헌이라면 각자 자신의 직분과 처지에 맞게 사랑을 발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발생하여 희생으로 표현되는 봉헌에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미사와 영성체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의 발생으로 인해 희생과 봉헌의 결정체가 바로 성체, 예수님의 몸과 피 입니다. 미사야말로 가장 숭고하고 거룩한 봉헌입니다. 미사에서 예수님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말씀이 머무를 자리(요한 8,37)를 마련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봉헌되는 사람

강석진 요셉 신부님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는 오늘은 ‘봉헌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1997년부터 지내기 시작한 이 날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지정하셨습니다. 

‘주님 봉헌’과 ‘수도자의 봉헌’! 넓은 의미로 생각할 때, ‘봉헌’에 관한 비슷한 개념이라 ‘주님봉헌’에서 ‘봉헌 생활의 날’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도 중요한 묵상 거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 봉헌’은 주님께서 자신을 봉헌했던 것이 아니라, 부모에 의해 봉헌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봉헌’은 요셉과 마리아가 절차 없이 예수님을 봉헌한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레위기(12,1-8)에 있는 정결례 규정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부모는 아기를 위한 속죄 제물로 ‘산비둘기 한 쌍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습니다. 또한 ‘주님 봉헌’을 위한 여정은 산모였던 마리아와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이 요셉의 인도에 따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부터 150km나 떨어진 먼 길을 걸어간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 봉헌’은 주님이 양부모에 의해 봉헌된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와 함께 수도자들은 주님의 모범에 따라 자신이 잘 봉헌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임을 알아야합니다. 사실, 저는 수도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 ‘나를 주님께 봉헌했다’는 생각에 무척 우쭐거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한 해, 한 해를 넘기면서 점차 목에 힘이 들어가고 삶에도 무게가 잔뜩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수도자로 10년, 20년 살다 보니, 무게감 때문에 힘들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나를 봉헌하기에도 버거운 수도자’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봉헌’이라는 말은 능동형이 아니라 수동형이라는 사실을. 또한 수도자는 자신을 봉헌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봉헌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기 예수님이 부모에 의해 봉헌되듯, 우리 또한 공동생활 안에서 형제들에 의해 봉헌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생활이란 결국 공동체가 형제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나를 잘 봉헌할 수 있도록 내 힘을 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이 나를 주님께 봉헌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무게를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삶의 힘을 빼고, 마음의 무게를 줄였더니,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필요 이상의 긴장감도 줄어들고, 사도직에서 만나는 사람들 또한 편안하게 대할 수 있었습니다. 

‘봉헌 생활’은 결국 ‘나 중심의 무게’를 줄이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봉헌되는 사람답게 잘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보고 비둘기 한 쌍의 속죄 봉헌 물을 하느님께 받쳐 줄 것입니다. 




말씀의 기적

조한철 안토니오(배우)

어린 시절, 저는 악동이었습니다. 외로움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바쁜 부모님께 관심을 받고 싶었던 것일까요?

아무튼 저는 집안에서는 골칫거리, 동네에서는 문제아였습니다. 

늘 싸움을 걸고, 괴롭히고, 부수고, 더럽히고, 악을 쓰는 아이였습니다. 

화가 나면 상대가 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욕지거리를 하며 싸우자고 덤비곤 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당시의 저는 그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였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 손에 이끌려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성당에서도 저의 말썽은 계속되었습니다. 

조용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 할 미사 시간이나 교리 시간에 말썽을 부리는 것이 저는 더 즐거웠습니다. 

그러다가 한 수녀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수녀님은 기적처럼 저를 착한 아이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수녀님의 기적은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수녀님은 저를 ‘우리 착한 안토니오’라고 부르셨습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항상 그렇게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 착한 안토니오 왔구나!” 

“우리 착한 안토니오 밥 먹었니?”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수녀님이 저를 그렇게 부르실 때마다 전 깜짝 놀라고 어리둥절했습니다. 

소문난 말썽꾼이라는 걸 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데 왜 저를 그렇게 부르시는지, 처음엔 꽤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수녀님의 말씀은 저를 빠르게 바꿔놓았습니다. 

아마도 수녀님께 그렇게 불리는 게 내심 좋았던 모양입니다. 

수녀님께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성당에 더 열심히 다녔고,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저는 ‘착한 안토니오’가 되어갔습니다. 

‘착한 안토니오’가 해야 할 일을 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착한 안토니오,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하시면 저는 친구들과 더 이상 싸우지 않았고, “우리 착한 안토니오는 기도 열심히 하지?” 하시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착한 안토니오, 새벽 미사 나올 수 있을까? 

 안토니오가 복사를 했으면 좋겠는데….” 하는 말씀에 저는 매일 새벽 미사에 나가 복사를 섰습니다.


그렇게 저는 달라졌고 꽤 좋은 아이가 되어갔습니다. 

지금 저는 주변에 많은 사람들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나누고 보살피면서 살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때 수녀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조금 폭력적인 어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선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만났던 수녀님 역시 말씀으로 저에게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말, 사람을 예쁘게 하는 말, 스스로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말로 기적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봉헌은 주님 우선이며 나보다 남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장재봉 신부님

오늘 말라키의 예언에 마음이 솔깃합니다. 우리 모두가 애타게 그리며 “찾던 주님”께서 홀연히 오실 것이며 그분께서 손수 “레위 자손들을 깨끗하게” 만들어 마침내 주님 마음에 쏙 들게 해주실 것이라니, 진정 든든해집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더 잘 이루시도록 좁은 마음을 찢어 넓히리라 다짐하게 됩니다. 


지난해 연말 부산교구에서는 네 분의 사제가 나셨습니다. 사제서품은 교구의 가장 큰 경사인 만큼 모든 교구민들이 기도드리며 기뻐했는데요. 우리 본당은 울산에 있는 만큼 부산 주교좌남천성당에서 거행되는 서품식 참례를 위해서 새벽부터 집을 나서야 했음에도 많은 분들이 함께하셨더군요. 하지만 새 사제를 위한 교구의 잔치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새 신부님의 출신본당에서 바쳐지는 첫 미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열성 신자도 많고 각지에서 이어지는 새 신부님들의 미사도 인기폭발, 북새통을 이루니까요. 좋은 일입니다. 기쁘고 감사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아주 속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찌나 속이 거북했던지, 여태 기분이 씁쓸한데요. 오늘, 주님께 몽땅 봉헌하는 마음으로 그 얘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몸이 편찮으신 자매님은 성지에서의 새 사제미사를 꼽아 기다리셨답니다. 그런데 딱 네 분이신 신부님들이 그 많은 신자들에게 안수해주시는 모습이 너무 수고로워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새 사제 안수를 사양하는 마음으로 대신에 새 사제를 위한 묵주기도를 바치고 오셨다더군요. 행복했답니다. 저는 자매님의 배려 깊은 마음이야말로 사제를 위한 참된 봉헌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복된 이야기의 행복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마을버스에서의 일이랍니다. 기사님께서 소리를 치더랍니다. “카드 찍고 타세요.” “카드 찍고 타세요.” 확실히 버스에 올라서는 사람보다 카드 찍히는 소리가 드물더라는데요. 빡빡한 버스에 재빠르게 오르며 카드를 찍지 않는 할머니가 꽤 계시더란 얘기였죠. 기가 막혔습니다. 


새 사제의 정성 어린 미사에 참례해서 과연 무엇을 얻으셨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사제의 강복을 받은 이유가 오직 남보다 더 복을 받겠다는 욕심이었다면 거짓 은총에 매달렸을 뿐이라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은 나보다 남을 섬기는 마음에 주어지는 하늘의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어느 신부님은 “인간이 자신의 것을 주님께 준다고 여기면 그것은 봉헌이 아니다. 주님을 소로 만드는 우상숭배일 뿐이다.”라며 그런 심보는 카인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자신을 잡아 바치지 못한 봉헌은 감사가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봉헌은 어떤 다른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소에게 ‘여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오직 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 겨워 봉헌할 때에만 아벨의 봉헌처럼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것이라 단언하셨습니다. 골백번 공감하여 제 마음에 쏙 담겼던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 모두가 새겨 들어야 할 말씀이라 믿어져 전해 드립니다. 


주님을 향한 봉헌은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에 기초합니다. 세상에서 치사하고 유치한 모습으로 주님을 욕되게 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남보다 더’ 복을 챙기겠다는 마음이 바로 욕심입니다. 아무리 좋은 축복도 먼저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심으로는 얻지 못합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라면 어떤 희생도 주님이 아닌 나를 위한 봉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참된 신앙이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약속이 꼭 이루어질 것을 의심치 않는 것임을 일러줍니다. 성령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렸던 노년의 시메온과 온 삶을 주님을 향한 흠숭과 기다림으로 채워 지냈던 과부 한나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약속에 근거하여 시메온처럼 “그 말씀에 따라 살았으므로 후회가 없다”는 마지막 고백을 바칠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스스로의 봉헌을 꼼꼼히 자세히 상세하고 세밀히 살피며 신앙점검을 하기 바랍니다. 시메온처럼 성령의 약속 가운데 굳건한 삶을 살아가는 참 봉헌의 사람인지를 철저히 따져보기 원합니다. 성모님처럼 고통 중에서도 감사하는 삶만이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 살아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진리는 구질구질하지 않습니다. 뚜렷하고 명료하며 분명하기에 진리의 삶은 먼저 나를 비우는 말끔함에서 비롯됩니다. 하찮은 것에 매이지 않는 넉넉한 자유로 우리는 탐욕과 집착을 털어내는 맑고 향기로운 신앙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이분, 저분, 한 분도 빼놓지 않고 새 사제 네 분의 안수를 몽땅 받으려 분주했던 사람이 아니라, 사제의 수고를 덜어주는 마음으로 안수를 피했던 마음을 훨씬 소중히 봉헌 받으셨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기껏 거룩한 미사에 참례한 후에 혼잡을 틈타 돈 천원을 아꼈던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그 성스럽고 복된 미사의 은총을 다 잃었을 테니, 어서 회개하실 것을 촉구합니다. 


저는 지금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봉헌이 아벨처럼 주님께 기억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특별한 봉헌 축일에 치사하고 졸렬하며 비좁고 누추했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말끔히 씻어 봉헌하시길, 그리하여 예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아가는 진정한 봉헌자로 돋움하시길, 소원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1테살 5,23) 간절히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못난 우리가 모두, 당신처럼 거룩해지리라는 기대를 결코 접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봉헌은 주님처럼

허남호 신부님

“물건을 받들어 바침,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침.” 사전에서 정의하는 ‘봉헌(奉獻)’의 의미입니다. 봉헌 이 봉헌다운 이유는 정성과 공경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주일미사에서의 봉 헌도 정성과 공경이 없다면 봉헌이 아니라 단순한 기부나 참가비 납부가 될 뿐입니다. 우리 봉헌의 기원이 되신 예수님의 봉헌을 보면서 우리의 봉헌은 어떠한지를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전에 바쳐지는 아기 예수님의 봉헌은 십자가의 봉헌으로 그 의미가 이어진다는 것이 시메온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자신의 모든 부분을 전적으로 다 바치며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온 우주를 연결 하는 십자가의 봉헌은 또한 전적인 ‘자기 비움’입니다. 생명까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내어 놓는 자기 비움은 또한 전적인 ‘내어 맡김’입니다. 


우리가 봉헌할 때 자기를 전적으로 비우고, 아버지께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맡김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요? 하느님께 좋은 것만을 봉헌해야 한다고 여긴다면 전적인 자기 봉헌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속에 좋은 것 만을 가지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있는 부정적인 부분들까지도 하느님께 바치게 될 때, 전적인 자기 봉헌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 속에 오랫동안 방치되고 외면되어 있는 상처는 어 쩌면 제일 먼저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 장소, 사건, 심지어 하느님께 대한 거 부감이나 싫어지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 그 장소, 그 사건으로 인한 상처가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것이 지닌 윤리나 도덕적 인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그 자체로 소중한 나 자신입니다. 갓난아기를 다루듯이 자신의 상처를 대하며 하 느님께 바칠 수 있다면 그 빈자리에 하느님께서 자리하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올 한해 ‘치유의 해’를 살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봉헌이 그러하기 때문입 니다. 예수님의 봉헌은 죄와 그 상처에서 우리를 구해내시고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모든 창조물을 올바른 관계, 곧 사랑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를 때에만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온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나"

이지목 신부님

신학교를 입학하기 위해서 치른 논술 시험의 질문이었습니다. ‘복음삼덕’에 맞추어 자신의 사제 상을 서술하시오. 시험장은 도서관의 미디어실입니다. 칸막이 책상에 앉았고, 먼저 복음삼덕이 무엇인지를 떠올렸습니 다. 다행히 그것이 성직자, 수도자들과 같이 봉헌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덕임을 기억해 내었습니 다. 그것은 세 가지 덕목입니다.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입니다.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세 가 지 덕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단어 풀이를 했습니다. 가난한 삶과 순결함,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이 떠올 랐습니다. 불현듯, 인사이동으로 본당을 떠나셨던 수녀님이 떠오릅니다. 새벽 미사를 마치고, 바퀴가 달린 가방 하나를 끌고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저는 버스터미널까지 배웅을 나갔기에, 버스에 오르시는 수녀님을 끝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홀연히 부름을 받고 떠나시는 수녀님의 단아한 미소가 인상적이었 습니다. 짐은 보잘것없이 적었고, 가벼웠습니다. 아쉽고 서운한 저의 마음과 달리 평온하고 나긋한 목소 리에서 갈라지지 않은 초연한 마음을 엿보았습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여쭈어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가시는 곳이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길임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불러주셨고 이끌 어 주신다는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지금은 주문진에 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로 살고 있습니다. 뒤에는 소금강이 있고,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처음의 시험 문제를 다시 읽고, 이제껏 잘 써 내려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깊은 한숨이 나왔습니다. 옆 창문으로 사목 센터를 내려다 봅니다. 선배 신부님을 떠올려 봅니다. 공소에 계신 할아버지 신부님께서 올해도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거실 벽에 걸려있는 주교 님 사진도 봅니다. 옆에 교황님도 봅니다. 죄송합니다. 떠오름 안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이 들립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바쳤으니, 더 가질 것도, 마음이 갈릴 필요도 없을 테지요. 더욱이 내 주 하 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길이니 기쁘게 받아들이셨을 터, 이 세 가지 덕은 결국 한 가지를 봉헌함으로써 주어지는 은총이겠습니다. 봉헌 축일입니다. 우리 각자는 저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여러 단체와 모임뿐 아니라 평일 미사 참례와 아침·저녁 기도를 바침과 같은 노력이 그렇습 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어 매우 값진 사랑으로 받아서 후하게 돌려주실 것입니다. 그 러니 아기를 봉헌하는 부모의 마음을 잘 간직하십시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거룩한 덕행을 이어가십시오




<봉헌>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루카 2,22-23).”


1) 봉헌의 기본정신은 ‘감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모든 은혜와 앞으로 주실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그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를 하면서, 즉 어떤 소원을 빌면서 바치는 ‘청원 예물’도 사실은 ‘감사 예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청하면 반드시 주신다는 것과, 또 우리가 청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아직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믿음만 있다면 이미 소원이 이루어진 것과 같고, 그렇기 때문에 ‘청원 예물’도 사실상 ‘감사 예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없이 그저 예물을 많이 바치기만 하면, 그것에 비례해서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바치는 것은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예물을 바쳐야만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물을 바쳐야만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치기도 전에 이미 당신이 정하신 때에 가장 좋은 은혜와 복을 풍성하게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한 일에도 ‘감사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를 보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겉으로만 보면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봉헌한 일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이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에도 역시 ‘감사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감사.)


2) 봉헌 가운데 최고의 봉헌은 자기 자신을 바치는 봉헌입니다.

(예물 가운데 최고의 예물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은, ‘목숨’을 포함해서 자신의 모든 것, 전 생애, 온 삶을 뜻합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온 삶과 목숨을 모두 봉헌한 분들입니다.)

탈출기 13장 2절을 보면, 첫 아들은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율법이 있는데, 실제로는 아들을 진짜로 바친 것이 아니라,

민수기 18장 15절-16절의 규정에 따라 ‘은 다섯 세켈’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돈을 바쳤다는 말이 없고, 예수님을 주님께 바쳤다는 말만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돈으로 봉헌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직접 바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온 삶’은 처음부터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도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의 전 생애는(‘온 삶’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하느님께 바쳐졌습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은 전부 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하느님께 봉헌되고 축성되어서 거룩해진 사람들, 즉 ‘성도들’이라고 불립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성사이기도 하고,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성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의 삶은 언제나 항상 거룩해야 하고,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주일에만, 또 성당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고,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늘 신앙인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3) 십자가는 예수님의 봉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전체가 봉헌이었지만, 십자가에서 그 봉헌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들도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 봉헌의 절정에, 또는 완성에 더욱 가까이 가게 됩니다. 사람마다 십자가의 내용이 다르고, 크기도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과 시련은 모두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들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끝에 구원과 생명과 참 기쁨과 영원한 행복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4) 봉헌에 대해서 생각할 때,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 ‘나의 것’은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느님의 것입니다. 봉헌은 하느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기신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그러니 생색내지 말아야 하고, 자랑하지도 말아야 하고, 대가를 바라거나 요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이지만, 봉헌은 감사드리는 마음으로만 해야 합니다.

(감사드리는 마음은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봉헌하는 일 자체를 기뻐해야 합니다.)


5) 우리 교회는, 자신의 몸을 태워서 세상을 밝히는 ‘촛불’을 예수님의 봉헌, 희생, 헌신, 사랑의 상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한 해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는 예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빛’으로 오셨음을 믿는다는 뜻이고, 그 빛을 향해서,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잘 받아서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은, 또는 그 구원을 외면하면서 사는 것은, 빛을 등지고 어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어둠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 주는 등불로서 살아야 할 임무를 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 ‘빛 속에서’ 성실하게 사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자신의 등불을 끄는 것과 같고, 자기가 이미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III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우리 모두의 집인 지구 생태환경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제1장 우리가 사는 집인 지구의 환경 오염과 제2장 피조물에 대한 창조의 가르침에 이어, ‘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101-136항) ’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3장에서 교황님께서는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철학과 사회과학과 대화를 나누어 “그 증상과 심층적 원인들을 성찰”(15항)합니다. 이 장은 기술: 창조성과 힘(102-105항), 기술적 패러다임의 세계화(106-114항), 현대 인간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115-121항), 실질적 상대주의(122-123항), 고용 보호의 필요(124-129항), 새로운 생명공학(130-136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

I. 기술: 창조성과 힘 기술(102-105항)

기술이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기술은 “온갖 기술 지식, 특히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경제적 재원을 확보한 이들이 인류 전체와 온 세상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도록” 합니다(104항). 인류는 “올바른 한계를 정하고 바른 자제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105항)을 필요로 합니다.


II. 기술적 패러다임의 세계화(106-114항)

지배적인 기술관료적 사고방식은 현실을 제한 없이 조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는 삶의 모든 측면에 관련되는 환원주의입니다. 과학기술의 산물들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결국 생활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기회들의 형태를 잡아가는 틀을 만들어내기”(107항) 때문입니다. 또한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경제와 정치를 지배합니다. 특히 “경제는 이윤을 목적으로 기술의 모든 발전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시장 자체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109항)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기술만을 믿는 것은 “전 세계의 체제가 안고 있는 가장 뿌리 깊은 진짜 문제들을 숨기는 것”(111항)을 의미합니다. “과학과 기술 발전은 인류와 역사의 발전과 동일시 될 수 없기에”(113항) 그렇습니다. “문화적 혁명”(114항)이 가치들의 회복에 필요합니다.


III. 현대 인간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115-121항)

현실보다 기술의 추론을 중시하는 현대 인간중심주의는 더 이상 자연을 타당한 규범이며 살아있는 피난처로 인식하지 않습니다(과르디니 참조).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인간의 자리와 자연과 맺은 우리의 관계를 이해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배’는 책임 있는 관리의 의미에서 더욱 올바르게 이해되어야만 합니다.”(116항) 잘못 이해된 인간중심주의의 비판은 그와 마찬가지로 불균형적인 “생태중심주의”를 향한 변화가 아니라 “올바른 인간학”을 향한 변화입니다(118항). 이 “올바른 인간학”은 “인간관계의 중요성”(119항)과 모든 인간 생명의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습니다. “자연 보호에 대한 관심과 낙태의 합리화는 양립될 수 없습니다.”(120항)


- 현실적 상대주의(122-123항)

잘못 이해된 인간중심주의는 “어떠한 것이 자신에게 즉각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여기어” 현실적 상대주의를 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다양한 태도들이 서로를 촉진하여, 환경 훼손과 사회 부패를 야기하는”(122항) 논리가 담겨있습니다. “문화 자체가 부패하고 객관적 진리와 보편타당한 원칙들이 더 이상 성립되지 않을 때, 법은 자의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나 피해야 할 장애물로만 여겨질 수 있습니다.”(123항)


- 고용 보호의 필요(124-129항)

온전한 생태학은 “노동의 가치를 고려해야 할 필요”(124항)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일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속하며, 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 성취를 위한 길”(128항)이기 때문입니다. “단기간에 더 큰 금전적 이익을 얻고자 인적 투자를 중단하는 것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업 행위입니다.”(128항)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참다운 혜택을 보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합니다.”(129항)


- 새로운 생명공학(130-136항)

주요 기준은 유전자 변형 식품이며, 이는 “복합적인 환경 문제”(135항)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유전자 변형 식품이 경제적 발전을 가져와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었지만 많은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134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특히 군소 생산자들과 농촌의 일꾼들, 생물다양성, 생태계망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광범위하고 책임 있는 과학적 사회적 토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가능한 정보를 고려하고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독립적인 학제적 연구에서”(135항)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기술의 발전을 격려하시면서도, 어떻게 그 기술을 활용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십니다. 이윤추구를 위한 기술개발보다, 기술을 통한 공동체의 발전과 사회통합을 가져오는 새롭고 올바른 인간학을 역설하십니다.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현실적 상대주의로 인하여 자연 환경의 훼손과 인간 사회의 문화적인 부패를 가져오도록 하지 맙시다. 인간 발전과 개인적인 성취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고용을 증대하며,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과학적 사회적 토론을 신설하여, 인류를 구하기 위한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를 구하신 주님의 가르침과 사랑의 희생을 기초로 한 새로운 생명공학을 펼쳐 나갑시다.




하늘 영원까지 이어 보시려면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시메온이라는 의로운 분이 성령안내로 아기예수 봉헌에 감탄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아기를 성전에 봉헌하며 힘든 예언도 듣습니다.

모든 민족들에겐 빛 이스라엘엔 영광이며 마리아는 고통도 들었지요.


세례 받음과 성직 수도서약이란 하느님께 자기의 생을 봉헌하는 거죠.

신앙인은 자기를 하느님 뜻에 바쳤지 속세욕심 성취위해 안 바치므로,

권력지위 재산명성 모든 걸 하느님 가족으로 하느님 뜻과 함께합니다.


이런 높은 뜻 때문에 신앙인들의 생명이 고귀하고 존엄하다는 겁니다.

인생을 세상부터 하늘 영원까지 이어 보시려면 우선 신앙인이 돼야죠. 




사랑이 주어가 아닌 희생과 봉헌은 말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올해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며 문득 떠오른 말은 '심청이', '희생', '한恨', 이 세 가지였습니다. 

왜 심청이와 희생이 떠올랐냐 하면 요셉과 마리아가 주님을 바친 것처럼 심청이가 자신을 바쳤기 때문인데 그런데 심청이의 봉헌은 자기의 희생이라는 느낌이 컸기 때문에 희생이 자동적으로 떠오른 겁니다. 

그런데 심청의 희생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바친 것임에도 원한까지는 아니어도 뭔가 한스러움이 남아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했나?'라는 의문이 남기도 하고, 너무 애잔하기도 한 희생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늙은 아버지, 어쩌면 얼마 안 있으면 죽을 아버지를 위해 꽃다운 심청이가 피지 못한 꽃봉오리처럼 오히려 죽는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슬픈 거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을 부녀간의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인데 이런 희생이 가치 있고, 숭고하고, 심지어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또 가치 있고, 숭고하고, 거룩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심청이의 봉헌이 한스러움이 남는 희생이냐, 거룩한 희생이냐를 가르는 것은 심청이 자신이고 다른 누구가 아닙니다. 남이 그것을 억울한 희생이다 아니다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심청이가 스스로 그리고 정말로 기꺼이 자신을 바친 것이라면, 그래서 억울함이나 슬픔이 남지 않는다면 거룩한 희생, 행복한 봉헌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희생이 다 사랑이 아니고 그래서 억울하고 불행한 희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희생이 주어가 되어서는 안 되고 사랑이 주어가 되어야 하고, 사랑하기에 희생해야지 희생해야 하기에 희생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얘기를 길게 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희생을 하며 살아가는데 그 희생이 사랑이 주어가 아닌 희생,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는 희생이 많고, 그래서 희생을 하고 난 뒤에 손해봤다는 느낌만 있고 행복은 없는 희생이 많기 때문이고 이것을 요즘 제가 많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요즘 저의 희생을 성찰적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나는 희생을 했고 많이 했는가?

나의 희생은 순수하고 진실했는가?

나의 희생은 행복한 희생이었나?

무엇보다도 나의 희생은 봉헌의 희생이었나? 

희생을 하지 않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희생을 적게 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희생이 진정한 희생이었는지 그러니까 순수하고 진실한 희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수하고 진실한 희생이란 사랑의 희생인데 저의 희생은 불순물이 많은 희생인 것 같습니다.

사랑의 희생이라고 저 스스로 착각하거나 희생으로 위장한 자기 만족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정련에 대해 얘기하고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


그래서 저도 이제 다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봅니다. 희생을 한다고 생각지 말고 그저 사랑해보자. 요즘 계속 사람들 앞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있는 내가 되자고 생각하는데 희생도 남을 위한 희생을 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희생을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봉헌하는 희생을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봉헌된 이들의 전형이 보입니다.


"주님의 율법에 ...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루카 2,23).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4).

"주님의 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루카 2,39).


먼저 예수님의 부모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두 분은 자신들을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에 기꺼이 순종하며 율법에 따라 아기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선한 유다인입니다. 이처럼 봉헌된 이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

특히 마리아는 자신의 영혼을 고통에 내맡깁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 없이 구원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봉헌된 이는 타인의 선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고, 그 모습은 사람들 안에 잠든 선성(善性)을 일깨웁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 기다리는 이"(루카 2,25).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루카 2,25).


시메온은 기다리는 이입니다. 그는 주님의 그리스도가 오시리라 믿었고 그 만남에 전 생애를 걸었지요. 긴 세월을 기다리면서 실망한 순간도 많았을 겁니다. 내노라 하는 학자나 임금들, 정복자들이 성전에 들를 때마다 '혹시 저 사람이 아닐까' 기대했다가 이내 꿈이 거품처럼 스러지는 체험을 수도 없이 했을 터입니다.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의로움과 독실함, 성령의 현존 안에 머무름"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다림이 어느 한 순간에 뚝딱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의 여정 동안 이어지는 믿음의 수행이고 고요한 투쟁이기에 그렇습니다. 봉헌된 이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의 등불을 꺼버리지 않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한나 예언자의 온 생애가 봉헌의 삶을 보여 줍니다. 그녀는 성전에 머무르며 기도와 단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은총을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상 욕망과 재물, 관계에 초연하기 위해 많은 좋은 것들을 내려놓고 가장 좋은 몫을 택한 지혜로운 여인이지요.


"아기에 대해 이야기하였다"(루카 2,38).

한나는 자기가 만난 구원자를 제 안에 가두어두지 않고 나눕니다. 하느님을 홀로 독점하지 않고 구원을 갈망하고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내어줍니다. 봉헌된 이의 체험과 이야기는 증언인 동시에 희망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오늘 봉헌되신 우리 예수님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요?


"깨끗하게 하고 ... 정련하여"(말라 3,3).

제1독서에서 말라키 예언자는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실 주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불순하게 때묻어 뒤섞이고 오염된 우리의 영육을 정화하고 정결히 해주십니다. 이로써 깨끗하게 된 우리가 주님께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도우십니다. 봉헌된 이는 그 존재와 행위를 통해 세상에 순수함을 일깨웁니다.


"자비, 하느님을 섬기는 충실한 대사제, 백성의 죄를 속죄, 고난 겪으심, 유혹 받으심"(히브 2,17-18).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의 사명이 보다 구체적으로 낱낱이 언급됩니다. 그분은 자비를 베풀고 아버지를 섬기는 동시에 백성의 죄를 없애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고난과 유혹을 겪으십니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봉헌의 길을 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을 내어놓는 봉헌은 제 영혼을 거룩히 하는 동시에, 세상의 구원을 위해 미약하나마 기도와 보속, 희생을 그치지 않고 바칩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봉헌된 이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총애를 받은 사람입니다. 진정한 봉헌은 제도나 단체를 대상으로 하기 이전에 하느님께 드리는 전인적인 헌신이기에 그분을 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다 내어드리는 이를 특별히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부족하지만 제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의 그 사랑이 하느님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곧 총애의 열매이고 증거입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제도를 넘어서 영으로 주님께 봉헌하는 삶을 사시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 전하는 사람, 순결과 순수를 일깨우는 사람, 속죄와 희생의 사람, 그리고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가난하고 미소한 채로 봉헌의 의미를 되새기며 영혼 가득 주님을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복한 축제일 되시길 축원합니다.




'축성된 봉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장 22~40)

주님께서 축복으로 허락하신 생명 세상에 보내셨으니 주어진 시간, 머무는 공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움직이는 저의 모든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입으로 사랑을 말하고 손으로 가진것 나누며 가야할 곳으로 향하는 오롯한 마음의 순례자 빛을 비추사 걷게 하시니 축성된 수도자들이 주님으로부터 온 좋은 모든것 돌려드리는 삶 살게 하소서!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도와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축성하신 그 은혜로 지금을 사는 수도자 '




희망을 두는 곳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무엇을 목표로 삼아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삶의 방향성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필요한 도움을 줍니다.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공동체의 일을 도맡아 하며 여러 단체에서 활발하게 봉사하는 사람을 ‘열심한 신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성적인 교우가 하루아침에 냉담자로 바뀌는 사례가 드물지 않습니다.

처음 본당에 부임하여 환영인사를 받으며 착한 목자의 부푼 꿈을 꾸던 날, 교우 한 명이 다급한 모습으로 면담을 청해왔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활동을 모두 멈추고 쉬고 싶다는 심경을 전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가슴 아팠던 것은 면담하러 온 강한 태도와는 달리 생동감을 상실한 그분의 무기력한 눈망울이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 봉사했던 삶의 도착 지점이 낙담과 우울이라면 그것은 분명 신앙의 이유를 확인하며 방향타를 조정해야

할 적절한 시점을 놓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평생을 기다림으로 채운 노인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받아 뻗어 올린 주름진 손에는 알 수 없는 힘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원칙과 기준을 힘써 지켜온 ‘의로움’과 애써 해야 할 일을 세심하게 선택해온 그의 ‘독실함’은 스스로의 만족감을 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끝내 보고야 말겠다는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지루한 기다림이 아니라 성령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향한 확신에 기반한 희망찬 기다림이었습니다.

이로써 평화로이 떠나가게 되었다는 ‘시메온의 노래’는 오늘날 구원 희망을 간직한 이들이 하루일과를 완성하며 바치는

성무일도 끝기도가 되었습니다.

“다 이루어졌다.”라는 십자가상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우리 신앙인에게도 마지막 고백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봉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당신을 사람에게

봉헌하시니


사람은

하느님을 닮음으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네




봉헌의 의미

허 로무알도 신부님

봉헌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신에게 무엇을 바치는 종교적 행위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신의 마음에 들고 신은 그에게 어떤 혜택을 줍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과 신 사이에 일종의 거래가 성립됩니다. 신에게 먼저 무엇을 바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받아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봉헌은 우리가 마치 어떤 힘 있는 사람으로부터 혜택을 받아내기 위해 취하는 행동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적 봉헌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래가 아닌, 감사의 행위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바칠 때, 어떤 이기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참된 봉헌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봉헌은 먼저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하물며 그 대상이 하느님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봉헌하는 내용물이 순수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양이 아니라 질을 따지십니다. 그분은 부자의 금화보다는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을 더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우리 마음과 사랑이 담기지 않은 봉헌물은 하느님 보시기에 별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불가에 삼륜청정(三輪淸淨)한 보시(報施)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누가 보시를 할 경우, 먼저 보시하는 사람 쪽에서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과시나 생색내기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시를 받는 사람 쪽에서도 당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보시는 부처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기에 얽매임 없이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보시하는 물건 역시 흠 없고 깨끗해야 한다고 합니다. 부정하고 불필요한 물건이 아니라, 자기에게도 소중하고 필요한 물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참된 보시가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가의 이런 가르침은 우리 봉헌에 무언가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불순한 동기로 주어지는 선물이나 호의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부정부패를 낳는지 자주 경험합니다. 불순한 동기로 무엇을 주거나 받을 때, 그것은 뒷거래를 낳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봉헌, 깨끗하지 못한 봉헌물, 무엇을 받고 당당하지 못한 태도 등은 모두 참된 봉헌을 가로막는 요소들이라 하겠습니다.


참된 봉헌

여기서 우리는 참된 봉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 동기의 순수성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참된 봉헌은 사랑의 봉헌이어야 합니다. 봉헌은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일뿐입니다. 봉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무언가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도에 따라 우리 봉헌의 가치는 평가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는 봉헌이 사랑의 지고한 표현일 때, 그것은 최상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봉헌은 자기 자신,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봉헌은 가장 완전한 봉헌입니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참된 봉헌은 자발적인 봉헌이어야 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위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내어 놓게 합니다. 타인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서 하는 봉헌은 참된 봉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봉헌은 사랑에 의한 자발적인 봉헌이어야 합니다. 사랑과 자발성 이 두 가지 요소 중 하나가 결핍되었을 때, 참된 봉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봉헌

수도생활을 흔히 봉헌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봉헌생활의 날을 수도자들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수도자들의 경우는 우리의 전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서원은 바로 이 봉헌을 공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서원의 내용들은 우리의 구체적인 봉헌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에 의한 자발적 봉헌, 곧 내어드림입니다. 봉헌생활은 비단 수도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이미 하느님에게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삶 자체가 사랑에 의한 자발적인 봉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을 봉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생명이나 재능, 부,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봉헌은 감사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을 다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어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욥의 다음 고백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기 1,21).


봉헌생활의 의미

형제자매 여러분, 봉헌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둠을 비추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빛의 축일’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일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여 성당과 각 가정에 비치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되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가 세례에서 봉헌되었다는 사실은 세상에 하나의 빛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초는 자신을 태움으로써 어둠을 밝히는 빛을 발산합니다. 예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 자신을 온전히 태우심으로써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여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전례가 주는 교훈이 아닌가 합니다.


봉헌생활의 두 번째 의미는 주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만남의 축일’이라고도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함과 동시에 시므온과 안나가 구세주를 만남도 기념합니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의 구원자, 빛이 되어 오신 분을 만나 기쁨에 넘칩니다. 봉헌생활은 바로 주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시므온과 안나처럼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평생을 주님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야(말라 3,3 참조)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 이 세상에 빛의 역할을 다하며 주님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봉헌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기해 우리 봉헌의 의미를 새롭게 하여 우리 삶이 주님께 합당한 봉헌이 되도록 다함께 노력합시다. 아멘.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고,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신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을 때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참된 봉헌은 하느님께 받은 것을 하느님께 다시 돌려드리고자 하는 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봉헌의 기도’에서도 보면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 저를 사랑으로 내시고, 저에게 영혼 육신을 주시어, 다만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 저는 비록 죄가 많사오나,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주소서.” 그런 의미에서 참된 봉헌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크신 사랑에 대해서 깊이 감사드리면서 그 사랑을 온전히 주님께 다시 올려드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의 본질 자체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곧 봉헌의 삶이 바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주님의 것이 아닌 나만의 것인 것처럼 착각할 때 죄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생겨나는 제일 큰 죄가 ‘자살’입니다. 내 생명 역시 주님께서 주신 것인데 내 맘대로 그것을 죽이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주님께 대한 최고의 반항이자 역행입니다. ‘낙태’ 역시도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렇게 낙태에 대해서 끝까지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메온과 한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봉헌의 삶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곧 그들은 일생동안 성전에서 기도하며 성령과 함께 삶을 이루어 갔기 때문에 결국 살아서 주님을 만나 뵙고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봉헌은 곧 늘 ‘성령과 더불어 함께하는 삶’입니다. 곧 성령께서 내 삶을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실 수 있도록 성령께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며 우리 모두가 진정 주님께서 주신 사랑에 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성령과 더불어 함께하는 봉헌의 삶을 살아가며 참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거룩하고 아름다운 봉헌의 여정 -봉헌과 축복-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수도자는 물론이고 주님의 자녀가 된 믿는 이들 모두가 봉헌의 삶을 새로이 하는 날입니다. 수도서원식 때, 서원자 봉헌 노래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들으면서 모두 자신의 서원식 때를 상기하며 봉헌을 새로이 합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저를 받으소서

그러면 저는 살겠나이다

주님은 저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감동적인 봉헌의 시간입니다. 서원자와 함께 하는 수도형제도 울먹이며 눈물짓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봉헌입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봉헌의 거룩함,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사랑의 봉헌,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입니다. 봉헌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우리 사랑의 봉헌은 그대로 봉헌촛불처럼 주님의 빛이 되어 주변의 어둠을 환히 밝힙니다. 봉헌의 행복을 노래한 다음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봉헌의 하루이옵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루하루 봉헌의 삶을 사는 봉헌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봉헌입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 그리고 무의미에 대한 답도 봉헌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기에 봉헌입니다. 하느님을 몰라 평생 봉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산 인생이라면 얼마나 헛되고 억울하겠는지요.


가난, 정결, 순종의 복음적 권고를 서원하는 수도자의 비상한 봉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평범한 수행 모두가 봉헌입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봉헌입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봉헌의 욕구입니다. 주님께 자발적 사랑으로 바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모두가 아름다운 봉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모, 시메온과 안나, 모두 봉헌생활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수님께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나이가 많은 한나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봉헌 삶의 구체적 모습들입니다. 이처럼 일상의 모두가 주님을 섬기는 봉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대한 자발적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 봉헌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이 이런 봉헌자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무지에 대한 답도 봉헌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받았으니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입니다. 받은 것을 감사하여 봉헌하는 것이니 참으로 봉헌은 마땅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의 봉헌은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평생 여정의 봉헌입니다.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로 우리를 봉헌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봉헌생활에 항구할 때, 우리는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다음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봉헌시간에 우리는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보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이어지는 말씀도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봉헌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정화되고 성화되는 우리들입니다.


“그는 은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바로 파스카의 주님께서 영적 레위의 자손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말라키의 예언은 오늘 복음의 시메온을 통해서 그대로 실현됩니다. 참으로 정주의 봉헌에 항구했던 시메온을 찾아 오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메온입니다. 찬미하는 모습뿐 아니라 찬미가 역시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잠자리에 들기전 매일 끝기도 때마다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바로 이것이 결정적 봉헌의 축복입니다. 주님과 구원의 만남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시메온뿐 아니라 한나도 마침내 주님을 만나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봉헌생활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킨 후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우리들을 풀어 주신 분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우리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기에 가능한 봉헌생활입니다.


봉헌생활의 축복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봉헌생활에 충실하는 것이 구원의 첩경입니다. 바로 복음의 마지막 아기 예수님의 성장과정이 봉헌 축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얼마나 아름다운 봉헌의 축복인지요! 참으로 부모들이 예수님의 부모처럼 봉헌생활에 항구하고 충실하며 날마다 자녀들을 하느님께 봉헌할 때 봉헌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예수 아기뿐 아니라 봉헌생활에 항구하고 충실한 모두에게 주시는 봉헌 축복입니다. 영육의 치유와 건강에 봉헌보다 더 좋은 처방도 없습니다. 우리를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하며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는 봉헌의 축복입니다.


사랑의 봉헌,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입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답도 봉헌뿐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 봉헌하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매일 내 사랑을, 내 생각과 마음과 몸 모두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 안의 모든 긍정적 것들은 물론 부정적인 것들 모두를 주님께 찬미와 감사로 봉헌할 때 주님은 큰 축복으로 보답해 주십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봉헌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마지막 결정적 봉헌이 죽음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봉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거룩하고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선종의 죽음보다 더 큰 축복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축복을 내려 주시며 거룩하고 아름다운 봉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주님의 참 봉헌 <루카 2, 22-4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우리는 모세가 정한 법대로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 어떻게 시메온은 주님을 알아보고, 29절에 시메온의 노래를 듣게 되었는가? 엘리사벳도 성모님 태 안의 주님을 알아보았지만 참으로 알아본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다음 사람들은 “이분이 참 하느님이셨구나” 성령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구나”하고 모든 것을 바쳐 빛내며 증명하고 있습니다.


봉헌은 무엇입니까? 창세기부터 아벨의 정성스로운 봉헌과 카인의 불성실한 봉헌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아벨과 같은 봉헌자인가 아니면 카인과 같은 봉헌자인가를 반성해봅시다.

저의 봉헌의 삶은 19세에 수도원 들어와 왜관에 하숙하면서 수도 생활 시작했습니다. 22살 신학교 입학으로 봉헌 생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입학식 때 교가가 나를 이끌고 갔습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그래서 3소절 끝에 “배우고, 펼치고, 빛내리라 구원의 진리를. 펼치리라 생명의 빛인 사랑. 빛내리라 교회를. 이렇게 시작한 봉헌의 삶을 60여 년을 살면서 이제야 알게 된 것은 티끌 같은 세상과 죽어서 사라질 이 몸. 이제야 떠날 시간이 가까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 세상을 떠나고 이 몸마저 버려야 할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봉헌은 바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본질적으로 봉헌자입니다. 수도자, 성직자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참봉헌자여야 합니다.

믿음 가운데 구원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을 펼치며, 교회를 빛내며 살아야 하며, 끝내 십자가의 참 의미를 알고 부르심에 응해야 합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을 봉헌할 준비를 아벨의 제사처럼, 지혜로운 다섯 동녀가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맞이하듯 해야 합니다. 저는 믿는 모든 이가 승리자로 진리와 사랑과 함께 주님 앞에 자신을 바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사랑만 보신다.

최민석 신부님

내가 살고 있는 자연 생활관 정원 한 구석에는 몇 그루 목련이 심어져 있다. 한 겨울 그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한 채 지금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 놓고 겨울을 기다리고 서 있다. 오늘 아침 잠시 정원에 나갔다가 그 마른 가지 가장자리 부드러운 솜털 봉오리가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싱싱하던 잎사귀를 다 떨쳐 버리고, 뭇 나무들이 겨울잠을 자는 계절을 향해 성장의 빗장을 가로지르는 이 시기에 저토록 여린 망울이 생명의 애절함을 일깨우고 있다. 차디찬 서릿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 생명으로 움터나는 생명의 신비 앞에서 설렘과 더불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심겨진 그 자리에서 한 생명을 마치면서도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여 성장하는 나무는 세상과 우주에 늘 열린 삶을 살고 있다. 봄, 여름, 가을이 가고 겨울의 긴 기다림 속에서 사랑을 담고 있다. 나무는 자신 가운데 사랑을 담고 있다. 끝까지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저 생명의 찬미를 나무에게서 본다.

나무는 끝없이 ‘깨어 있음’을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 ‘깨어 있음’으로만 생명은 생명일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가장자리 가운데 하느님이 계신 것이다. 하느님을 잊지 않는 한 하느님은 나와 떨어져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나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 사랑을 알고 있다.


내가 아는 하느님은 내가 하는 일 속에 담아놓은 사랑만 보신다. 그렇다. 하느님은 사랑만 보신다. 가슴 뛰는 설렘으로 만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참으로 하느님은 사랑으로만 만나 뵈올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가 허상이다. 사랑은 앎이 아니라 삶이다. 사랑은 이해되지 않는다. 사랑은 신비이기 때문이다.

위로 하늘과 땅의 조화에서 아래로 사람들이 하는 짓이 모두 꿈처럼 허망하다. 하느님 없이는, 하느님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일 조차 할 수 없다. 이 말은 사랑 없이는 사랑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일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 내가 만일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내 눈에도 오직 사랑만 보인다.


한 그루 나무가 나에게 말해 주듯이 ‘깨어 있음’이 현존인 것이다. “그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마르 13,33)는 깨어 있는 일상을 일깨워 준다. 살아 숨 쉬는 것이 그러하듯이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것이 현존이며 모든 것이다. 영원한 지금 이 순간에서 만나는 생명의 신비다.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나사렛 예수를 통해 완성될 ‘하느님 나라’ 역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 와 있다. 오직 ‘깨어 있는 삶’, 사랑의 깨달음만이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 이외는 그 아무도 ‘그 때’를 알 수 없지만 ‘깨어 있음’으로 언젠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시된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다. 현존의 눈이 열리면 추운 겨울 앞에서도 꽃망울을 피워 올리는 기쁨과 희망에 찬 기다림을 만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완성이요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너무나도 자명한 사랑의 이치다. 그 누구도 그의 행위를 보아 착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뜻대로 묵묵히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때 악한 사람도 꾸준히 사랑하다보면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선한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이 사랑을 담은 것이 아니라 사랑이 선한 일을 하게 한 것이다.


내가 지금 글을 쓰는 것도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도 없고 하느님도 없다. 있는 것은 다만 그 모두를 있게 한 사랑, 그것뿐이다. 잘 보면 안다. 겉모양에 속지만 않으면 그것들을 있게 하는 사랑의 실체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은 고백한바 그대로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는’ 수행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이끄심대로 살아갈수록 하느님의 섬세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




밝고 영원한 빛을 받아들입시다.

성 소프로니우스 주교의 강론에서(Orat. 3, de Hypapante, 6. 7: PG 87,3,3291-3293)

경건한 신심으로 주님의 신비를 받들고 경축하는 우리 모두는 영접하는 마음을 지닌 채 그분을 맞으러 나갑시다. 이 만남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하고 또 등불을 들고 가기를 거절하는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들고 가는 촛불의 광채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만사를 밝게 해주시고 암흑을 몰아내시며 영원한 빛의 풍요함으로 비춰 주시면서 오시는 분의 신적 광채를 보여 주고,또한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갈 때 영혼에게 광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극히 정결하신 천주의 동정 모친께서 당신 팔에 참 빛을 안고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찾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 빛으로 밝혀져 모든 이들을 비추는 빛을 우리 내부에 들고서 참 빛이신 그분을 맞으러 나갑시다.


빛께서는 “참으로 세상에 오시어” 어둠에 싸여 있는 세상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경축하는 신비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비추어 준 빛을 표시하고 장차 그분에게서 받을 광채를 나타내 주는 등불을 손에 켜 들고 마중 나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함께 모여 하느님을 맞으러 나갑시다. 모든 사람을 비추어 주시는 참 빛께서는 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 그 빛으로 밝혀져, 그 광채로 빛납시다.


우리 중 아무도 이 광채로부터 제외되어서는 안되며 아무도 어둠 속에 남아 있기를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광채를 발하면서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 모두 함께 모여 빛나는 모습으로 연로한 시므온과 더불어 맞으러 나아가 밝고 영원한 그 빛을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모두 시므온의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에게 참 빛을 보내어 어둠을 몰아 내시고 우리 모두를 빛나게 해주신 빛을 낳으신 아버지께 감사의 찬미가를 부릅시다.


우리 역시 그 빛을 통해서 뭇 민족 앞에 마련해 주시고 새 이스라엘인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밝혀 주신 하느님의 그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이 그리스도를 본 후 현세의 사물에서 해방된 것처럼 우리도 그 빛으로 말미암아 어두운 옛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베들레헴에서 우리에게 나아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포옹하셨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십니다. 우리는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을 우리 눈으로 보았고 우리 마음이라는 품안에서 하느님의 가시적 현존을 받아들여 새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축제를 매년 지낼 때마다 이것을 기념함으로써 미래에도 이 신비를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축성 생활의 날 담화문

한국 천주교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

2019년 성탄을 전후해서 경북 상주시 모동면에 있는 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의 이야기가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들어올 수 없다는 의미의 수도원 봉쇄 구역 안에서, 자신들 역시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고 세상과의 거리를 엄격히 유지하며 침묵과 고독 속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모습이 신선하였습니다. 봉쇄 규정이 구속이 아니라 한 영혼을 진정으로 성숙시켜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기도가 진정으로 그들의 일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수도자들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새로운 세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자발적인 포기와 투신의 삶이 화면을 통해 조용히 전달되어 왔으므로 그 수도자들의 절제된 음식과 구멍 난 양말, 단순한 삶은 전혀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고귀하게 느껴졌습니다.


매년 2월 2일 교회는 ‘축성 생활의 날’을 지내며 세상 곳곳에서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분이 사셨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축성(봉헌) 생활자들을 기억합니다. 1997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하여 제정된 이래, 올해로 24회째를 맞이합니다.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2019년 12월 2일 회의에서 기존에 ‘봉헌 생활’로 번역하던 [Vita Consecrata]를 ‘축성 생활’로 옮기도록 결정하고, ‘봉헌 생활의 날’ 역시 ‘축성 생활의 날’로 변경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축성 생활’이라는 용어는 이 삶이 단지 깊은 영적 체험을 갈망하는 신자들이 스스로의 봉헌을 통하여 이러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생활로 불러주시고,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하며, 참된 형제애/자매애를 드러내고, 이러한 친교와 사랑의 바탕 위에 교회와 세상을 위해 봉사할 사명을 부여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개최된 일련의 세계 주교 시노드는 평신도(1987년)와 사제(1990년)와 수도자(1994년)에 대하여 깊이 토론하였으며, “예수님께서 당신 교회를 위하여 바라셨던 삶의 신원들을 특징짓는 특수성들을 다루는 작업을 완성합니다”(‘축성 생활’, 4항 참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 축성된 이들이며, 하느님 백성의 세 가지 신분은 가장 기초가 되고 본질적인 세례성사의 축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이 갖는 신분의 특수성은 세례성사를 통한 이 축성을 더욱 더 풍요롭게 하고, 신앙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은사의 다양성은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선물입니다. 봉쇄된 공간 안에서 기도에 일생을 바치는 하느님의 자녀들과, 세상 안에서 살아가며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이들, 복음적 권고를 따라 살기를 공적으로 약속한 이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에서 펴낸 ‘한국천주교회 2020’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다양한 사목 지표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통계를 통해 신자 수의 증감, 미사 참례율, 영세자 수, 사제 신학생 수도자 수의 증감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남자 수도자 수는 20년 전에 비해 36% 가량 증가하였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는 정체를 보이고 있고, 여자 수도자 수는 20년 전에 비해 18% 가량 증가하였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정체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외로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숫자는 200%가 넘는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성소자와 사도직의 감소에서 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결코 축성 생활의 복음적 생명력에 대한 신뢰의 상실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축성 생활은 언제나 교회 안에 존재하면서 그 활동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축성 생활은 창조자이신 성령의 변함없는 인도 아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갈라놓을 수 없는 일치의 빛나는 증언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축성 생활의 실제적인 붕괴를 막아야 합니다. 성소자의 감소로 평가되는 붕괴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신뢰와 개인 소명과 사명의 흔들림에서 오는 붕괴 말입니다. 축성된 사람들은 축성 생활에 충실함으로써 역사의 주님께 대한 그들의 확고한 신뢰를 세상 사람들 앞에서 힘차게 고백합니다”(‘축성 생활’, 63항 참조).


친애하는 평신도 형제자매 여러분, 존경하는 성직자 여러분, 경애하는 주교님,

축성 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은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이 길을 걸어가며, 복음적 삶을 증거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각 신분 간의 협력은 교회를 더욱 더 풍요롭게 하고, 다양한 은사들이 피어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합니다. 창립자의 은사에 뿌리를 내리고 교회와 세상의 필요에 응답하려는 모든 축성 생활회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며, 순례하는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와 함께 이 길을 걸어가고자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봉헌으로

주님을 만나고

축성으로 유지되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봉헌의 삶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봉헌으로

태어나시고

봉헌으로

자라나십니다.


이와같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봉헌의 삶이

있습니다.


봉헌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봉헌의 삶은

하느님만을

섬기는 사랑의

삶입니다.


봉헌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어둠을 비추는

축성생활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축성생활은

영원한 삶의

아름다운

방식입니다.


불확실한

수도자의 삶을

믿음의 삶으로

바꾸어주는

축성생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간

모든 자리에는

삶을 비추어주는

봉헌 생활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봉헌이며

우리를 향한

축성이 바로

살아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불로장생의 비법을 찾아 헤매다가 세상의 끝에 존재하는 한 동굴에서 신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신선은 그에게 영원히 사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지요. 그곳에는 신비로운 운동기구가 있었습니다. 신선은 그에게 이 운동기구를 계속해서 운동을 하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신선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이 운동기구를 이용해서 운동하시겠습니까? 이 사람은 신선의 말을 듣자마자 너무 기뻐서 운동기구에 올라가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한참동안 운동을 하다 보니 슬슬 지루해졌고, 여기에 몸도 마음도 점점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선에게 언제까지 운동기구를 움직여야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선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고 싶다면, 영원히 운동을 해야 한다.”


다른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영원히 운동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영원히 운동만 하시겠습니까? 아마 그럴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단지 오래 사는 것, 단지 건강한 것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래 사는 것, 건강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행복하지 않으면서 건강하게 오래 살 뿐이라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그냥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냥 마지못해 산다고 말합니다. 어떤 목적의식 없이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맞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 인간을 위해서 희생 제물로 봉헌하신 날입니다. 이 봉헌을 통해서 바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죄로 물들어 있는 우리들을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선택을 하신 것일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 삶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내 자신의 삶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제대로 된 봉헌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그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 사람이 느끼는 감사의 깊이에 달려있다(존 밀러).


주님께 잘 보이고 있습니까?

고등학교 때에 한 친구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옆의 여학교와 미팅을 하기로 했는데 남자 한 명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게 그 빈자를 채워달라는 것이었지요. 솔직히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신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에 이성과의 미팅은 제 관심 밖의 일이었지요. 하지만 친한 친구의 간곡한 부탁에 미팅을 하는 빵집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 복장은 어떠했을까요?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나갔고(당시 본당 신부님께서 늘 고무신을 신고 다니셔서 저도 따라서 고무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옷도 평소에 입는 편한 옷을 입고 나갔습니다. 친구의 부탁으로 자리만 채워주러 나간 것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한껏 멋을 내고 나왔습니다. 제 모습에 대해서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거지같았어.”

다른 친구들은 멋을 잔뜩 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을까요? 친구들은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저는 잘 보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잘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잘 보이려면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해야 하겠지요. 바로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주님께서 잘 보이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완벽한 인간 존재로서의 삶을 지향하고 추구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전혀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우리와 똑같이 마굿간 탄생을 통해 요셉 가문과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 키를 낮추셔서 우리와 시선을 맞추시고,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상류층 명망가들이나 고관대작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과 운명을 공유하셨습니다. 율법의 주인이시기에 율법의 지배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율법 규정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때로 너무 비이성적으로 몰상식할 정도로 세분화된 다양한 규정들을 정확하게 준수하셨습니다.


탄생 8일째 되던 날,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기들과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할례를 받으셨다고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준수는 그분 일생에 있어서 기본 토대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순명하셨습니다. 순명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정신과 의미가 그분 안에 온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 세상에로의 완벽한 적응은 할례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탈출기 13장에는 맏아들과 맏배에 대한 봉헌 세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것을 모두 주님께 바쳐야 한다. 너희 가축이 처음 낳은 것으로 수컷은 모두 주님의 것이다. 너희 자식들 가운데 맏아들은 모두 대속해야 한다.”(탈출기 13장 12~13절)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떄,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친다.”(탈출기 13장 15절)


가축의 맏배들은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 했지만, 사람의 맏아들은 그대신 속전(贖錢)이 치러져야만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정결례 제물 등급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인 산 비둘기 한 쌍을 바쳤는데, 그 중 한 마리는 번제물고, 다른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사와 제물의 주인이요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좌정하셔서, 제물을 받으셔야 마땅한 일인데,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겸손하게도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제사상 앞에 서신 것입니다. 놀라운 겸손이요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순결하신 분이시기, 정결 예식이 전혀 필요 없으신 분께서, 겸손하게도 죄투성이인 인간들이 제정해 놓은 정결예식에 기꺼이 참여하셨습니다.


틈만 나면 죄의 깊은 구렁 속으로 떨어지는 우리들입니다. 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언제나 정결 예식이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럽지만 틈만 나면 정결 예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습니다.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통해서, 그것이 힘들다면, 미사 앞부분의, ‘작은 고백 성사’라고 할 수 있는 참회예절을 통해서, 그 순간도 놓쳤다면, 또 다른 기회인‘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씻고 또 씻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습니다. 지속적으로 거룩한 상태를 유지할 것을 원하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19장 2절)


씻고 또 씻어 정결하게 된 우리 자신을 이제 감사의 정을 담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해야 겠습니다. 매일의 정결 예식, 매일의 봉헌, 그것이야말로 주님 앞에 늘 깨어있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협상의 기술: 요구가 아닌 욕구에 집중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허브 코웬이란 작가는 “인생의 8할은 협상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협상은 회사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전반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와 어느 정도 협상을 하게 됩니다. 이 협상의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매일 싸우느냐, 사이좋게 지내느냐가 결정됩니다.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천재적인 물리학자라 불리는 파인만이 있습니다. 그는 천재였지만 성격이 고약하여 그의 기행만 따로 모아놓은 책이 있을 정도랍니다. 특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1965년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니 상을 받으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타면서 만나야 할 사람들, 일주일 동안 여행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도 끔찍하여 이렇게 응답합니다.

“됐어요. 상 받으려면 북유럽까지 오가느라 비행기를 10시간이나 타야하고 일주일이란 시간을 써야 하는데 ... 귀찮아요. 받지 않겠습니다.”

이에 놀란 노벨상 재단 측에서는 갖은 회유와 협박을 가했습니다.

“이 상은 초등학교 우등상이 아닙니다. 받으시면 국가의 영광이 되는 상입니다. 그리고 교수님, 일주일 씩 있을 필요는 없고요, 상만 받고 바로 가셔도 됩니다. 교수님이 이러시면 앞으로 다른 미국 노벨상 후보자들에게도 지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인만은 “됐습니다. 귀찮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이들은 협상이 아니라 협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협상과 협박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협박은 쌍방이 둘 다 기분 좋게 끝날 수는 없습니다.

이때 파인만의 아내가 나섭니다.

“여보,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그런데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번에 당신이 상을 거부하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발적으로 노벨상을 거부한 첫 인물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누가 관심을 가질까요? 바로 기자들이겠죠. 그냥 며칠 고생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파인만은 아내의 말에 설득당해 노벨상을 수상하러 떠났습니다.

[참조: ‘거절할 수 없는 협상의 신이 되는 법’, 웅이사의 하루 공부, 유튜브] 


이 이야기는 최철규 작가의 ‘협상의 신’이란 책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최철규 작가는 협상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구에 집중하지 말고 욕구에 집중하라.’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파인만이 제시했던 요구는 오랜 시간 여행하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만 듣고 날짜를 줄이려는 노력과 더 나아가 협박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파인만의 아내는 남편의 욕구에 집중하였습니다. 남편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으면 기자들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말하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상대의 욕구에 집중해야 상대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도 즐겁게 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도 통용됩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께서 아드님 예수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한 것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들을 쓰시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참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님 뜻에 맡기는데 주님께서 즐겁지 않으실까요?

아무래도 주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 무언가를 청할 때 돈과 함께 청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통틀어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해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인간에게 감사의 봉헌을 받는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님께 봉헌되어져야 했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기에 모든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에 그 죄가 사해졌습니다. 무엇을 얻어내려면 그 무언가를 주시려는 분의 욕구를 올바로 알고 그 욕구에 합당한 것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주님께는 그것이 ‘봉헌’입니다. 


어떤 아이가 땀을 흘리며 슈퍼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콜라 하나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아저씨는 콜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할까요? 콜라 없다고 가라고 해야 할까요? 그 아이는 콜라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구가 아니라 욕구를 볼 줄 아는 주인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콜라 몸에 안 좋아. 완전 설탕 덩어리야. 물이나 이온음료가 어떻겠니?”

상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성당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내가 원하는 것만 줄기차게 청해봐야 그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먼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그러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봉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Those were The Days’라는 노래를 우연히 들었습니다. 감성적인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가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땐 그랬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젊은 날에 패기도 있었고, 정열도 있었고, 우정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다 지나간 추억이고, 지금 나의 모습은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순수했던, 사랑했던, 젊은 날이 있었습니다.” 추억과 기억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인간은 추억과 기억을 씨실과 날실로 삼아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원체험’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무엘의 체험이 있습니다.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모세의 체험이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ㄹ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체험이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체험이 있습니다. 다마스코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오로 사도의 체험이 있습니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셨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순간순간들이 제게는 원체험이 되었습니다. 길을 잃어서 파출소에서 하루 지내고 있을 때 아버님이 저를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유행성 출혈열로 중환자실에 있을 때 어머님은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고 돌봐 주셨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제게는 원체험입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신앙이 제게는 원체험입니다. 여러분들의 원체험은 무엇인지요?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을 인생길에서도,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도,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팔랑거릴 때도 원체험이 있는 사람은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험난함이 삶의 거름이 되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진지 40일이 되는 날, 성모님과 요셉은 예수님을 성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예물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봉헌에는 크게 3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치’입니다. 국민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국민은 국가에 세금을 냅니다. 이는 국가와 국민이 일치하는 한 방법입니다. 국민과 국가의 일치는 자발적인 것은 아니고 강제적입니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국가는 강제적인 방법으로 징수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은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를 대상으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의 일치는 자발적입니다. 가장 큰 일치는 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봉헌입니다. 우리가 이웃과 하나가 되는 것은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셨습니다. ‘제자들의 배반, 율법학자들의 모함,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고독’ 이런 것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의 결말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무겁기 마련입니다. 십자가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나를 구속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열쇠입니다. 


세 번째는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찬의 전례’의 핵심은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변화되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이 기도를 ‘감사송’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과 피를 봉헌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름다운 성찬기도문은 이렇습니다.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 예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저녁을 잡수시고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다시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악의 유혹은 ‘교만, 욕심, 시기’입니다. 이것을 이겨내는 것은 ‘정결, 가난, 순명’의 복음 삼덕입니다. 이 복음삼덕을 가장 잘 보여 주신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일치, 십자가의 희생, 하느님께 감사’하는 진정한 봉헌을 통해서 악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솔직하게 아프다고, 원망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신앙이 있는 곳에, 당신의 몸을 성체의 모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봉헌축일을 지내면서 참된 '봉헌‘의 의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봉헌은 단순히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일부를 남과 나누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봉헌은 나의 욕심과 잘못을 비워내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입니다. 봉헌은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봉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봉헌은 만남입니다.

화려한 세상에 가리어진

세상을 품은 소박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요란한 소음 한 가운데에서

참된 삶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봉헌은 비움입니다.

삶의 여정 안에서 쌓여가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벗어내는 것입니다.

나의 지식, 나의 재물, 나의 지위, 나의 욕심

그리하여 내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하느님과 마주서는 것입니다.


봉헌은 채움입니다.

나의 자그마한 마음 안에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담는 것입니다.

나의 보잘것없고 흠 많은 삶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열정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봉헌은 드러냄입니다.

하느님의 빛으로 환하게 된 나를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는

자그마한 빛으로 내어놓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품 안에서 따스함 한껏 머금은 나를

세상의 차가움을 녹이는

자그마한 온기로 내어놓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눔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모든 이에게 나누어지길 바라셨던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나의 것인 양 내 안에 품지 않고

기쁘게 아낌없이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빈 손 빈 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새롭게 채워주실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봉헌은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만남, 비움, 채움, 드러냄, 나눔,

그리고 다시 만남.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삶 안에서 단 한 번이 아닌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할

열정 가득한 다짐이며

생기 넘치는 몸짓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이 땅 위에서 아름다운 삶이 끝나고,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언제나 어디서나 이어져야 할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교회는 해마다 2월 2일, 주님 성탄 대축일 40일째 되는 날에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왔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97년에 이 날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이들을 기억하는 ‘봉헌 생활의 날’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수의 수도회에서는 바로 오늘 서원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봉헌 생활을 하시는 모든 성직자 수도자 분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성전에서 봉헌하는 내용이 전해졌습니다.

오늘 미사를 봉헌하면서 저의 돌아가신 아버지 3주기를 함께 기념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호스피스 병동에 계시면서 계속해서 달력을 보시면서 이 날 주님 봉헌 축일 날 돌아가시길 기도하셨고, 돌아가시기 바로 하루 전 날에는 손가락으로 하루 남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결국 이 날 돌아가셨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 날이 바로 성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처럼 당신이 사제의 아버지로서 주님 대전에 당신의 아들을 봉헌했었기 때문에 더욱더 이 날 돌아가시길 간절히 원하셨던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봉헌’이라는 개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면 결국 봉헌은 우리 가톨릭 기도문 봉헌의 기도에서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린다는 말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다시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종종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라는 착각 속에서 때로는 욕심과 집착을 갖으면서 하느님께 대한 봉헌의 삶에 대해서도 매우 인색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바로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곧 시작부터가 주님이 주신 것이고, 결국 마지막에는 주님께 돌아갈 것이며, 그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주님의 봉헌 축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봉헌(consecratio), 봉헌하다(consecrare)=(cum+sacer) 거룩함(sacer)과 함께(cum) 하느님께 바치다. 성별하여 속적인 사용에서 갈라내다. 희생하여 바치다. 불멸의 존재로 만들다. 불멸성 영원성을 부여하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양부 요셉은 율법이 정해진 때가 되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다. 성전지기 시메온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구원의 빛이신 분을 보고 죽으리라는 바람을 갖고 있었고, 그로써 시메온은 성전에 봉헌된 아기 예수님을 팔에 받아 안고 주님을 보게된 은총을 입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께 아기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한다.

예수님께 대한 시메온의 예언은 성장하며 적중한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바쳐진 인류구원을 위한 ‘파스카’ 희생양이 되셨다. 예수님의 봉헌은 스스로 자신을 봉헌함으로 우리의 봉헌의 삶으로 이어졌다. 하느님 아버지기 바쳐진 예수님의 봉헌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 구원의 제사가 되고 우리의 봉헌의 삶도 확장된다.

주님의 봉헌의 의미를 알면 우리의 봉헌은 하느님을 향한 뜻과 이웃사랑의 몫으로 내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몸소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우리 봉헌도 더욱 빛나도록 가르치고 있다. 제대로된 봉헌을 살자!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을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 31)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축복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태어나신지 여드레 만에 유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께 봉헌되셨습니다. 요셉과 성모님께서도 율법을 지키신 것이죠. 율법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 (루카 2, 23 ; 탈출 13, 2.12.15) 그리고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 (루카 2, 24 ; 레위 12, 8)고 명령하신 대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이 예물은 가난한 이들이 바치는 제물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예수님 이 세 분이 이루시는 성가정도 주님의 율법을 준수하고자 소박하게나마 제물을 바치셨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주님께 봉헌하는 일을 우리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헌금과 교무금을 교회에 바치고 있지요. 요셉과 성모님께서도 율법의 규정대로 봉헌 예물을 바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교우들도 교회법으로 정해져 있는 헌금과 교무금을 바친다는 것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교무금을 내는 비율이 50%이하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당에서는 30% 이하로 떨어지는 데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율법을 잘 준수하지 않는 것이지요. 오늘 성모님과 요셉님께서 봉헌 예물을 바치셨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성의껏 자기 형편에 맞는 대로 주님의 법을 준수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예수님의 부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그곳에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라고 하는 나이 많으신 예언자들이 계셨는데, 그중에 시메온은 감격적으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 29~32)

참으로 장엄하고 엄숙한 그런 시간인 것 같습니다. 시메온이 예수님을 본 것을 "하느님의 구원을 보았고, 이제 평화를 눈을 감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기를 고대해 왔는지요? 그리고 그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시메온은 말하기를,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 32)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뿐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하느님 사랑의 계시이고 또 사랑의 빛을 온누리에 비추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진정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을 초월해서 전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구원을 받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성전에 봉헌되는 자그마한 아기에 불과하지만 이 아기가 커서 큰 일을 하신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아기에게 갖는 희망은 참으로 큰 기쁨이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기 예수님께서 성장하셔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진정 온 세계 만민의 구원의 빛이 되셨고 또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광이 되신 분이십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예수님께서 만민의 빛이시며 구원이 되신 것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어떤 느낌이 듭니까?




제병영 신부님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심을 기념하는 날이며 봉헌 생활의 날이기도 한다. 수도자로서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는 것을 기념하는 시간이다. 오늘 지금껏 살아오며 무엇을 봉헌했나 생각해본다. 그러게 무엇을 봉헌했나!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주님 보시기에 봉헌된 모습이기를 희망해본다. 오늘 또한 올해 나 자신의 어떤 구석을 봉헌하려고 하는지 숙고해본다. 나의 가장 힘든 부분을 봉헌해보고자 노력해볼것이라 결심을 하며 하루를 연다.

여명이 시작되기 전 어두움의 순수함으로 오늘을 봉헌한다.




'전적인 봉헌은 일상을 한결같이''(루카 2장 22~40)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오늘은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된 날을 기념하며 예수님따라 봉헌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젊은이들이 이 부르심의 길에 응답할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봉헌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는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며, 하기싫은 것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기까지 순수한 지향, 오롯한 마음, 시체같은 순명의 옷을 매일 새롭게 입는 노력하는 삶입니다.

잘 살고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허락하신 시간, 맡기신 시간을 되돌려드리는 마음으로 사는것 뿐입니다.

'전적인 봉헌은 일상을 한결같이'




숨은 생각 찾기

김정일 신부님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복음 2장 22-40절)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숨은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35절)이라고 합니다. 사실 드러내는 일은 예수님의 사명이기도 하지요. 다만 이번에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숨은 생각’이었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을 숨기려 했던 것일까요? 봉헌된 예수님의 생활 방식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정결, 청빈, 순명으로 요약되는 그분의 생활 방식은 이 땅에서 복음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하는 길’(『축성생활』 18항 참조)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봉헌생활’이라는 삶의 방식은 모두가 선택하기를 꺼려하던 것이었음을 드러내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봉헌’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름’(루카 18,28 참조)을 의미하는데, 그 ‘버리고 따름’은 그때나 지금이나 선택하기 힘든 삶의 방식이라는 거지요.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택하신 생활 방식을 기꺼이 따를 수 있나요? 그렇다고요? 아니라고요? 대답을 망설이거나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주님 봉헌의 삶이 우리의 숨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주실 테니까요.

* 우리는 얼마나 버리고 따르며 응답하고 있습니까?




생명의 존엄성은 주님으로 부터<루카 2/22-4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신약시대 구역과 같이 정결례를 행하지 않지만 하느님을 찾는 그리도스도 신자는 세례성사로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그 존엄과 가치를 들어냅니다.

또한 이 세상은 사람대접을 받고 자라나는 사람과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나는 사람으로 사회적 조건이 구별 지워 집니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부모님 밑에 자라는 아이와 남에 손에 자라는 아이들의 차별은 후에 들어 납니다. 학교나 유아교육기관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부모님 밑에 자랑아이와 부모밖에 자랑아이는 성장 후 다른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닐 시절은 사랑하는 요셉과 마리아의 품안에서 자라서 30이 되어 세상에 나오시어 와성한 활동과 마무리를 잘 지웠습니다. 

정결례나 세례성사나 하느님에게서 받은 선물을 하느님에게 돌려 드리므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됩니다. 사람의 존엄성은 하느님이 아니시면 의미가 없으며 살다 죽는 짐승과 같으면 고귀한 존칭을 받을 수 없습니다. 혹시 어떤 이는 인연이나 정 때문이라고 한다면 살아 있을 때 이지 죽으면 모든 것이 끊어집니다. 사람의 고귀함은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로 판가름 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 자리에서 나오면 처음만 같이 못합니다. 세상의 사회적 조건에서 생겨난 것은 조건에 따라 소명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신 것은 영원한 것이고 하느님과 영결된 것은 변함이 없으며 죽음 뒤에도 지속적입니다. 저는 십자가의 길을 하나다가 성모님이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모자상과 13처 주님의 죽음을 안고 계신 고난의 성모상을 비교하면서 시작과 끝이 어머니 품 그리고 깊은 사랑 우리의 운명도 성모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은총이이라 생각하니 감사와 찬가 저절로 나오며 감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엣 말에 사랑 중에 모성애 만금 큰 사라이 없다고 하였듯이 성보님의 사랑을 품에 가직 하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급하면 어머니! 하고 부르는 것고 어머니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고향 나제렛으로 돌아간 주님은 자라면서 튼튼해 지셨고 지혜가 충만 하고하느님의 총애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건강 , 지혜, 은총 사람을 더 사람 다웁게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 앞에 건강하고 지혜롭고 은총 가득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 아빠스님 내일 축일을 주일이여서 앞당겨 지냅니다. 축하해주세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봉헌이 일상이며

봉헌이 우리

생활이 되어야합니다.


봉헌으로

우리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게됩니다.


함께 하는 

믿음이 진정한

봉헌입니다.


흐트러진 우리 삶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봉헌입니다.


삶의 모든 배경이

되어줍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봉헌으로

더욱 깊어집니다.


봉헌 안에

존엄함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봉헌이 우리를

정화시켜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봉헌으로 당신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봉헌으로 

모인 공동체가 바로

수도 공동체입니다.


구원을 

가능케하는 것은

봉헌입니다.


나약함과 

두려움속에 있는

우리를 봉헌이 

주님께로 데려갑니다.


가야할 길을

아름답게 하는 

봉헌이 있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는 봉헌입니다.


봉헌은 모든

일상임을 믿습니다.



지난주에는 무척 바빴습니다. 이곳저곳에 보내는 원고를 써야만 했고, 또한 방송녹음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쁘다보니 좋아하는 책도 읽을 수가 없었고,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것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지요. 또한 운동도 전혀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문득 이러한 상상을 해봅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36시간이면 좋겠다.’

그런데 반대로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할 때도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주로 어떤 기다림이 있을 때가 그러한 순간입니다. 어렸을 때 소풍 전날 빨리 하룻밤이 지나서 다음날 아침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습니까? 오랫동안 기다렸던 결과를 빨리 보았으면 하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아마 이때는 이러한 상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이면 좋겠다.’

천천히 갔으면 하는 시간도 있고, 또 빨리 갔으면 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대 시간들을 평균내보면 결국 하루 24시간이 가장 적당하고 아름다운 분량이 아닐까요? 이보다 길면 지루하고, 짧으면 무척 바쁘고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적당한 시간 24시간을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만을 봐도 주님께 얼마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욱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향한 최고의 봉헌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는 오랫동안 성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기도와 단식을 하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으면서 주님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는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부귀영화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더 큰 행복의 길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직접 보고 주님을 자신의 품에 앉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께 내 자신을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봉헌이란 나중에 무엇인가를 받기 바라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봉헌했으니, 당신께서도 제게 무엇인가를 주셔야지요.’라는 마음이라면 참된 봉헌이 될 수 없습니다. 봉헌이란 주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맞춰서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최고의 봉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께 어떤 봉헌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의 명언: 사랑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언제나 선악을 초월한다(프레드리히 니체).


쉽게 판단하지 마세요.
나무는 어디가 정면일까요? 특별히 어디가 정면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볼 때마다 또 보는 위치에 따라 정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을 한 번 생각해보지요. 꼭 눈, 코, 입이 있는 부분이 정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의 뒤통수가 원래 하느님께서 만드신 정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고정화시키지요. 모든 곳이 다 정면이 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사람의 한 가지 모습이 그 사람 전체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격도 얼마나 다양합니까? 운전할 때 너무 바빠서 딱 한 번 속도를 내서 추월을 했습니다. 이를 두고서 아주 난폭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평상시에는 3~4시면 일어나지만, 어제 늦게 잠자리에 들어서 5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일어났습니다. 이를 두고서 “빠다킹 신부는 게으른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고 간단히 단정 짓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한 가지 모습이 그 사람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한 가지의 모습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봉헌과 혼인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전에 유투브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한 대형교회 목사님의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조금 들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것저것의 예를 들면서, 그것을 내지 않으면 질병이든, 사고든, 세무조사든,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몫을 꼭 챙겨 가신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몇 배로 갚아 주시니 빚을 내서라도 꼭 정확히 셈해서 십일조를 내라고 설교를 했고 앉아있던 신도들은 계속 아멘이란 말로 응수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렵지 않게 개신교 목사님들이 십일조에 대해 강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봉헌이란 말이 나오면 십일조를 가장 먼저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십일조는 내야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봉헌’이란 단어의 10분의 1의 의미밖에는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 특별히 봉헌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봉헌’이란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우리가 삼위일체 교리에서 배웠듯이 ‘자신을 봉헌함’은 ‘사랑’과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즉, “아버지 - 성령님 - 아들”의 모델에서 아버지가 ‘당신 자신을 비우시는 것’이 바로 아드님께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아들이 아버지께 다시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이 아들의 ‘자기 비움’입니다. 또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드님께 ‘순종’함으로써 당신 자신을 비우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자기 비움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곳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입니다. 또 이 죽음과 부활을 일시에 체험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곧 그리스도의 ‘세례’였습니다.
즉, 세례는 죽고 다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죽이니 성령님을 통한 부활이 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세 분은 한 몸을 이루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비움을 통한 사랑의 일치를 당신의 백성과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인간에게 내어주시는데 그 모습이 “성체”입니다. 
인간 또한 그 성체를 영하기 위해 자신 안에 공간을 마련해 놓아야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성령님을 모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우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듯이 인간도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의미입니다.
이 봉헌은 ‘감사 (Eucaristia)’의 형태로 표출됩니다. 이 ‘감사’는 찬미로 표현되고 그래서 성경에선 ‘찬미의 제사’ (히브 13,15)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어떤 봉헌이든 ‘감사’의 마음이 들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봉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봉헌하시면서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렸음을 명심해야합니다. 감사를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생명 자체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든 미사 중에 자신의 온 마음을 비워 주님께 봉헌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실지라도 그 마음 안에는 자신이 봉헌한 만큼만 은총이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비워야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자신 안에 자신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죄’라고 하고 그 ‘죄’는 ‘원죄’라는 형태로 모든 인간에게 인성을 통해 전달됩니다.
영혼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성모님처럼 자신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싶지만 그 안에 ‘교만과 육욕과 소유욕’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교만의 죄와, 그것을 통해 들어온 육욕의 죄, 또 그것으로 전달되어 카인이 짓게 되는 소유욕의 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육욕과 소유욕도 교만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기에, 교만과 육적인 이기심이 카인의 제사가 하느님께 역겨운 것이 되게 한 이유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아담과 하와 이후로 하느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릴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봉헌을 하지 못하니 동시에 사제직도 잃게 된 것입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봉헌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나는 내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 (갈라 2,19)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일치는 결국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인데 죄라는 것이 들어와서 이기적이 되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의미가, 따라서, 三仇 (교만, 육욕, 소유욕)를 이기는 福音三德 (순명, 정결, 가난)에 있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의 일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엔 순명만이 아닌, 자신의 육신을 이기고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 가난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봉헌’은 추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인 ‘복음삼덕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 봉헌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이 ‘수녀님’들의 봉헌생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여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수녀님들은 ‘여성’으로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교회가 나아가야 할 상징적인 모습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을 어떤 분들은 ‘축성생활’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신학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축성’이란 거룩하게 만드는 것으로써 ‘성체’의 축성에 가장 적당한 말입니다. 수도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몸처럼 온전히 거룩하게 변하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거룩해짐은 서품이나 서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향주삼덕 안에서의 복음삼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봉헌의 모델을 찾으라면 성모님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봉헌이란 자신을 비워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지닌 모든 것, 즉 빵과 포도주를 봉헌함으로써 성자 자신인 성체와 성혈을 받는 것처럼, 자신을 바치지 않으면 어떤 주고받음에서 오는 혼인의 일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처럼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한다는 것은 그 봉헌을 통한 하느님과의 합일의 기적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원죄가 없으십니다. 그 이유는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원죄의 물듦에서 보호해 주셨기 때문이고 그만큼 자아가 비워졌기에 완전한 순종, 즉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며 당신 자신을 아버지 뜻에 봉헌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물론 그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을 나누어 가지시게 됩니다. 봉헌을 통한 온전한 한 몸이 되는 모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헌생활이란 이 한 말씀으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 (마태 16, 24)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버려야합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곧 매일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매일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다운 봉헌은 참다운 하와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참다운 하와가 되어 신랑이신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신 것처럼, 또 성모님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완전한 하와가 되어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하와가 되는 것이 바로 봉헌입니다.
왜냐하면 봉헌이란 말엔 자기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주 강하게 들어있는데 그것이 자신을 버린 완전한 믿음과 순종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청 경당에서 유아세례를 주었습니다. 아이 할아버지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허리의 통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의사들도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병원에서 괴로운 날을 보내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통증이 가라앉고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기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기적이 가능 할 수 있었던 것은 누님들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동생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였던 누님들도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의 유아세례를 미룰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영하 15도가 넘는 추운 날에 아이는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이의 부모도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성전에 아이를 봉헌하였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겠다는 이유로, 나태함으로 유아세례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성가정의 출발은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주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 받은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도 받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의 중심에 있는 공연장입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다면 영광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거장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다면 세종문화회관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과 성요셉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성전을 찾았으니 성전이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시메온은 진실함과 겸손함으로 많은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위해서 기도한 시메온은 이제 주님의 모습을 보았기에 더 할 수 없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시메온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본당에 교무금을 책정합니다. 매주 주일 헌금을 준비하고 감사헌금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봉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진 재능과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샘물은 자꾸만 퍼내야만 새로운 샘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재능, 시간, 마음을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면 주님께서는 더 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봉헌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기도 봉헌입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조금이라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데 시간을 봉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시간을 내서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둘째는 선행의 봉헌입니다. 선행은 아주 작은 것부터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커다란 선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하시면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고, 누군가 청을 하면 기꺼이 가셔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어느 식당의 식탁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이기적 이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상 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기도와 선행의 봉헌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봉헌奉獻이 답이다, -봉헌의 생활화生活化-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봉헌생활의 날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재임중인 1997년 2월2일 첫 번째 봉헌생활의 날을 지냈고 마침내 오늘 제22차 봉헌생활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신자들이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한 축성생활 회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날입니다.


비단 축성생활 회원들만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봉헌자들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축성생활 회원들뿐 아니라 넓은 의미로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봉헌생활을 하는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의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사중 아름다운 본기도 내용이 이를 입증합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비오니,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


아니 오늘뿐 아니라 평생 두고두고 매일 묵상하고 싶은 기도문입니다. 이어지는 예물기도와 영성체후 기도도 은혜롭기가 평생 미사중 마음이 새기고 싶도록 아름답습니다.


“주님, 세상을 구하시려고 흠없는 어린양으로 자신을 봉헌하신, 외아드님의 제사를 받아들이셨으니 교회가 기쁨에 넘쳐 봉헌하는 이 예물도 기꺼이 받아들이소서.”


기쁨에 넘쳐 봉헌하는 예물과 더불어 우리 자신도 봉헌하는 참 은혜로운 미사시간입니다. 영성체후 기도 역시 오늘 복음은 물론 평생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상적 삶을 요약합니다. 


“주님, 시메온의 기다림을 채워 주셨으니, 이 성체를 모신 저희가 주님의 은총을 풍부히 받고, 시메온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품에 안는 기쁨을 누렸듯이, 저희도 기쁘게 주님을 맞이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여기서 저절로 나온 오늘 강론 제목이 “봉헌이 답이다-봉헌의 생활화-”입니다.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평생 매일이 봉헌의 날입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아름다운, 믿는 우리들의 모두를 담고 있는 말마디도 없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겐 무의미한 말마디일 수 있어도 믿는 우리에게는 모두가 되는 말마디입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감동, 봉헌의 지혜,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행복, 봉헌의 치유, 봉헌의 평화, 봉헌의 자유, 봉헌의 아름다움 등 끝이 없습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의미이며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허무에 대한 답도 봉헌뿐임을 깨닫습니다. 봉헌생활 기쁨의 빛이 허무와 무의미,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봉헌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또 의무로 봉헌이 아니라 사랑의 자발적 기쁨의 봉헌입니다. 봉헌 역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들은 자발적 사랑의 기쁨의 봉헌들입니다. 특히 찬미와 감사의 사랑의 공동전례기도 봉헌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섬기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부모, 예루살렘 성전의 시메온과 한나 모두가 봉헌의 모범적 인물들입니다. 분명 예수님의 부모는 기쁨으로 예수님과 예물들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봉헌했을 것입니다. 시메온 역시 기쁨으로 사랑하는 메시아를 기다리며 의롭고 독실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시메온뿐 아니라 한나 역시 기쁨의 봉헌자였음에 분명합니다.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며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한나입니다. 자발적 사랑의 봉헌생활에 여든 네해도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모든 수행들이야말로 기쁨의 봉헌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수행뿐 아니라 우리의 모두를, 즉 병고의 아픔과 이런저런 모든 걱정, 근심들을 자발적 사랑의 기쁨으로 봉헌할 때 저절로 구원의 치유입니다. 말그대로 봉헌의 치유입니다. 봉헌보다 더 좋은 명약名藥도 없습니다. 봉헌과 더불어 최고의 명의名醫이신 하느님 친히 치유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봉헌이 치유와 더불어 우리를 참으로 평화롭고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의 자발적 기쁨의 봉헌에 대한 주님의 응답의 선물이 참 좋은 치유요, 평화와 자유입니다. 하여 우리는 더욱 사랑의 섬김에 전념, 매진할 수 있게 됩니다.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시메온처럼 봉헌자들 위에 성령께서 늘 머물러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매일 강론을 쓸 수 있는 것도 늘 함께 계신 성령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봉헌생활 역시 새삼 성령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봉헌보다 확실한 축복도 없습니다. ‘예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하니, 바로 봉헌 축복의 생생한 증거입니다.


말라기의 예언이 성령의 사람, 시메온을 통해 실현됩니다.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을 때,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실현된 것입니다. 오매불망寤寐不忘 주님을 그리던 봉헌자, 시메온이 감격에 벅차 구원자 예수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 구원을 본 것입니다.”에 이어지는 끝기도 때마다 바치는 시메온의 노래가 우리 모두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죽음 준비의 기도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봉헌의 삶에 올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당신에게 외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시며, 자신을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제 좌우명 자작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중 봉헌생활의 요약과도 같은 마지막 일곱째 연을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나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우리의 봉헌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빕니다. 올 한해도 주님의 축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은“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 되셨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쓰임받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를 위해 모두를 내어주신 그분처럼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초는 자신을 녹여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희생을 통하여, 더 큰 사랑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 구세주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고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였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으며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시메온은 성령께 순명하였기에 성령께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죽어도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백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깊이 알아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바로 구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부가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봉헌은 우리에게도 우리의 봉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봉헌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온 시메온은 성령과 함께 기다림의 삶을 살아왔고 그 안에서 위로와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천상과 연결 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야 합니다.‘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마지막기회일수도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구세주가 찾아오는 자리이며, 그 자리를 가꾸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지금 이 순간을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다시 일어서렵니다.
김대열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2,22)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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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
...
삶을 당신께 바치겠다고 한 그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기도와 사연 많은 눈물,
벗들의 따뜻한 눈빛,
순수했던 나의 가슴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많은 강과 많은 산을 만났습니다.
일어섬과 넘어짐의 시간들.
그 안에는 늘 당신께서 계셨지요.

사랑 하나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당신께 내어드리는 것이
내 삶이어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참 많이도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곁에 계셔주셨지요.

내 안의 너무 많은 것들 때문에
그저 당신을 뿌리치고 싶었던 날들.
그러함에도,
봉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시간들.

어제의 일만이 아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싸워야 할 나와의 다툼입니다.

나 이상의 아픔을 가지고
언제나
내 곁에 계실 당신.

다시 일어서렵니다.
당신 종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참다운 봉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국 축구계에서 홀대받으셨던 박항서 현 베트남 남자 축구 대표 감독님이 지난 1월 한달 동안 베트남 전역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지금 현재 그는 베트남에서 전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박항서 감독님께서는 짧은 기간 안에 선수들을 잘 다듬었고, 베트남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던 ‘아시아 23세 이하 축구 선수 대회’에서 준우승이라는 대단한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준우승도 준우승이지만 그는 이번 대회를 통해 1억명에 가까운 베트남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고, 베트남 국민들의 자긍심을 한껏 드높여주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국제회의 갈때 마다 언제나 베트남 형제들에게 늘 미안했고, 죄인인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회의 때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항서 감독의 일거수일투족,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금 모든 베트남 국민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과의 결승전에서 연장 후반전 단 1분만을 남기고 통한의 결승골을 내주고,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했을때, 박항서 감독님은 라커룸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선수들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넸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왜 고개를 숙이느냐? 당당히 고개를 들어라.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입만 열었다 하면 천박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폭언들을 여과없이 쏱아내시는 분들, 말만 시작하면 국민들 가슴에 대못을 박아대는 분들의 수천, 수만 마디 말보다, 잘 정련되고 진심이 담긴 박항서 감독님의 단 한 마디 말이 백배, 천배 더 영양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베트남 참전’ 문제, 그리고 ‘라이 따이한’(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2세) 문제로 인해 언제나 지고 있는 큰 마음의 빚을 손톱만큼이라도 덜게 해주신 박항서 감독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이지 그분은 존재 자체로 대한민국의 국격을 크게 높인 애국자이십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봉헌생활의 날입니다. 특별히 봉헌생활을 하고 있는 저희 수도자들이 존재 자체로 주님 마음에 드는 선물이자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되는 하루입니다.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 마음에 드는 참다운 봉헌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은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말라키 예언서 3장 3~4절)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우리네 삶입니다. 제련사가 불순물을 걸러내듯 열렬한 기도를 통해 우리 안의 악과 죄를 걸러내야겠습니다. 진지한 성찰 작업을 통해 우리 내면의 불의와 우상숭배를 걸러내야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 앞에 합당히 서기 위해 늘 자신의 가슴을 치고, 하느님과 이웃들 앞에 죄를 고백하며,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주님 마음에 딱 드는 의로운 제물로 변화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평신도, 성직자, 주교님!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보여주는 일, 이것이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이지만 이 자리에 불림을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이 현실의 세계에서 녹록지 않음을 매일 체험하며 살아가면서 여러 도전과 어려움과 관성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 안에서 복음적 권고를 실천할 때 우리와 세상 안에 궁극적인 변화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신앙의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여정이기도 합니다.

우리 축성생활 회원들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이 가난한 이들, 어려움과 절망에 빠진 이들, 고통 받는 이들과 슬퍼하는 이들, 깊은 갈망 중에 있는 이들,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이들 가운데 있게 하시고, 진실한 연대와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 안에, 창조 질서가 보존되는 우리의 '공동의 집'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머물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활동과 지향들을 격려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2018년 축성생활의 날 담화문, 베네딕토 수도회, 한국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




되는 대로 살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인데 이 축일의 의미는 주님의 봉헌을 본받아 우리의 봉헌생활도 다시 정비하고 의미에 맞게 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저의 봉헌생활을 다시 한 번 성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2년 전부터, 특히 작년 하반기부터 저는 저희 삶을 심각하게 되돌아보고, 이전까지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곳 가리봉에 와서 사는 삶입니다.

지금의 삶과 이전의 삶을 구분하면 이전의 삶이 많은 책임을 맡았던 삶이라면 지금의 삶은 책임은 가볍고 비교적 저의 수신에 중심을 두며 살아가면 되는 삶입니다.
여러분으로 치면 일생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이제 그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게 된 것과 비슷한 거지요.

그런데 수신修身이 뭡니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자는 것인데 이것은 수도자가 자기만 알고 자신만을 위해 살자는 이기적인 것 아닐까요?

사실 그런 것도 같아 마음 한 편에 걸리기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기적인 뜻에서라기보다는 제가 그동안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너무 많은 책임을 맡고 잘못 살아왔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이유가 아니라 주제에 맞게 살자는 겸손의 이유입니다.
그러나 제가 살려고 하는 수신의 삶이 겸손의 이유일지라도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이유와는 다르지요.
어떻게 보면 수신의 측면은 불교의 수도생활이 더 뛰어나고 유교에서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라고 하잖습니까?

우리의 수도생활은 근본적으로 수신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이고, 그러므로 수신도 하느님과의 일치를 목적으로 하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소극적으로는 자신을 근신謹身하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 곧 봉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사느냐고 흔히 얘기하는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어서 다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설사 할 수 있어도 갖가지 욕망과 욕심을 스스로 봉헌하는 겁니다.

이것이 근신 또는 소극적인 봉헌이라면 적극적인 봉헌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하느님 원하시는 일에 헌신하는 겁니다.
그런데 소극적 봉헌이니 적극적 봉헌이니 얘기했지만 영적으로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은 축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봉헌에는 봉헌되는 것이 있고 봉헌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봉헌하신 것과 주님이 스스로 봉헌하신 것이고, 이것을 수도 성소와 비교하면 ‘어머니 성소’와 ‘자기 성소’입니다.

수도원에서 보통 ‘어머니 성소’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자기는 원치 않았는데 어머니에게 떠밀려서 들어왔고 그래서 의미도 없이 억지로 살다가 마침내 포기하는 성소입니다.

물론 이런 거라면 봉헌되는 것, 어머니 성소는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니지만 봉헌되는 것이 축성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 축성의 의미를 더 깊이 산다면 영적으로 더 깊은 의미의 성소를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아이가 되고 하느님 나라의 어린이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없고, 자기 뜻도 없으며, 그리고 자기 힘으로 살지도 않습니다.
성자로서 성부의 뜻에 따라 세상에 봉헌되시고, 성모의 아들로서 성모의 손에 의해 성전에 봉헌되시며, 마침내는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 위에서 봉헌되십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제대로 본받아 산다면 되는 대로 사는 것인데 이런 표현이 이상하면 이제부터 저는 되어 가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힘도 없는데 아등바등 제 힘으로 살지 않아도 되니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봉헌을 재현하는 아름다운 봉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마리아와 요셉이 사십 일 전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신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도 생명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무엇을 어떻게 봉헌하며 살아야 할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성가정은 일년 된 어린양 한 마리를 바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비둘기 두 마리를 예물로 바쳤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봉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부요를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이 봉헌은 고향 나자렛을 떠나 낯선 땅 베들레헴에서 온갖 불편을 겪어낸 뒤에 이루어진 기다림과 인내의 봉헌이었습니다. 그렇게 아기 예수님의 봉헌으로 모두가 주님께 봉헌되었습니다. 


한편 시메온은 성전에서 봉헌되시는 예수 아기가 누구인지를 알아봅니다. 이렇듯 주님께 대한 충실한 봉헌으로 구세주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성령 안에 살던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는 계시의 빛이요 구세주이신 분의 부모들을 축복하며, 동시에 고난을 겪을 것임을 알려줍니다(루카 2,35). 이처럼 주님의 봉헌은 희생을 통한 사랑의 봉헌입니다. 


예언자 한나는 혼인하여 칠 년 동안 남편과 살다가 과부가 되어, 여든 네살이 되도록 외롭고 힘든 인생여정을 홀로 살았습니다. 그녀는 성전에서 줄곧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그녀는 텅빈 가족의 자리를 하느님께 대한 봉헌으로 채웠고, 남편을 잃은 상실감을 기도로 메워나갔습니다. 그녀는 전적인 봉헌을 통해 우리를 섬기러오신 주님을 섬기는 영원의 기쁨 안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한나는 인간에게서 잃은 희망을 영원하신 아버지로부터 길어올렸습니다. 그녀는 충실한 믿음과 헌신적 봉사와 항구한 기도로 자신을 주님께 봉헌했습니다. 한나는 이런 봉헌을 통해 구세주 하느님을 찾고 만난 행복한 여인이었습니다. 참 행복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으로 지으시고 사랑으로 섬기러오신 주님을 섬김으로써 찾아듭니다. 


봉헌은 하느님께 항구히 자기 전부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봉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봉헌을 하는 우리를 축성해 주실 것입니다. 봉헌은 주님과 이웃에게 자기 전부를 내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까지 내놓으신 예수님의 구원의 희생에 동참하도록 힘써야겠지요. 깨끗하고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삶의 제물을 바쳐야 할 우리입니다(말라 3,3).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봉헌하며 살아야 할까요? 우리 모두 생명을 주신 주님께 모든 삶을 봉헌하고, 시간을 주신 주님의 일을 하는데 시간을 써야겠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나의 재능과 재물,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쳐드려야 합니다. 사랑을 주신 주님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온갖 좋은 것을 되돌려드려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구원의 희생에 자신을 일치시키며, 모든 것을 기꺼이 되돌려드리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삶 자체가 복음적 가치의 풍성한 표현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세상 한복판에서 삶을 재현함으로써 예언자적인 소명을 다하는 아름다운 봉헌의 날이길 기도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말라키 예언자는 예제키엘 예언자가 예시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던 주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재차 천명하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등진 댓가로 혹독한 유배의 쓴 잔을 마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날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주님의 날인 구원의 날을 맞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말라키 예언자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말라 3,2-3)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솔로몬의 시절처럼 제물을 바치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 아가씨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천사는 마리아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대로 성전에서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지 여드레 날에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면서 천사가 일러준 대로 아기 이름을 ‘예수’라고 짓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성전에서 구약에서 모세가 제시한 율법대로 맏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며(탈출 13,2.12.15)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산모의 정결례를 위해 속죄 예물을 바칩니다(레위 12,8) 

예수님의 부모는 양 한 마리를 바쳐야 하는데 “그러나 양 한 마리를 바칠 힘이 없으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물로,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올려도 된다.”(레위 12,8)라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려 법을 따른 것입니다.
이 예식이 거행되는 동안 시메온이라는 의인이 아기와 부모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루카복음은 시메온이 그 자리에 오게 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본문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루카 2,25-27) 

구약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하느님과 독립적으로 구분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구세사적인 시각으로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29-32절) 

시메온은 이어서 아기의 부모님을 축복하고 나서 어머니 마리아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4-35절)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지만 구약의 법에 따른 모든 예식을 마치고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루카.2,23)
김종오 신부님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너무 힘드셨기에 할머니는 나를 안고서 '성모님, 차라리 종오를 얼른 데리고 가이소.'라며 탄식이 섞인 봉헌 기도를 바치셨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통을 지켜보시던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탄식어린 봉헌 기도를 바치신 할머니의 기도 덕분인지, 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매일 저녁기도 중에 ‘봉헌기도’를 즐겨 바쳤습니다. 봉헌 기도 중 특히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라는 부분에 이르면 왠지 모르게 아직도 마음이 설레고 때로는 감격스럽기도 합니다,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내가 즐겨 바치던 봉헌 기도는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에서 수도자요 성직자로 봉헌 생활을 하면서 성심께 바치는 봉헌 기도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내 삶 안에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주님 봉헌 축일과 봉헌 생활의 날을 맞이하여 오늘은 우리 수도회와 내가 매일 즐겨 바치는 기도 중 하나인 ‘예수 성심 기도문’을 바치면서 나의 봉헌 생활이 사람들과 세상에게 슬픔보다는 기쁨과 설렘을 주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 성심 안에서 성화되는 은총을 청해봅니다.
‘예수 성심이여, 경배하나이다. 찬양하나이다. 찬미하나이다. 당신께 영광을 드리나이다. 감사하나이다. 저희 마음을 드리나이다. 봉헌하나이다. 이 마음을 받아 주소서. 온전히 가지소서. 저희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비추시고 거룩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그 안에 사시어 영원히 다스리소서.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유다의 율법에 따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23; 탈출 13,2.12.15)라고 규정된 대로 예수 아기를 성전에 바친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아울러 이날 자신을 주 하느님께 봉헌한 수도자, 사도 생활단, 봉헌된 평신도들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유아세례 때 아기를 데려온 부모에게 묻습니다. ‘이 아이가 이다음에 커서 무엇을 하는 어떤 아이로 키우고 싶습니까?’ 각각 다른 대답을 하기도 합니다. 그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이에게 주님께서 어떤 소질을 주셨는지, 또 그 소질을 통해 어떤 일을 하여 사회에 선익을 가져오도록 소명을 주셨는지도 생각해 보십시오.’

소화 데레사 성녀는 병중에 있으면서 “나의 어머니인 교회 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라고 자신의 성소를 밝힌바 있습니다. 저는 어제 사제 부제 서품식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나는 기도하는 소명을 받았나 보다. 기도하면서 떠 오른 주님의 말씀을 글로 전하는 소명을 받았나 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소질을 주시고 그 소질을 계발하여 공동체에 기여하도록 하신 주 하느님의 안배를 기리며, 내게 주신 소명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소질을 잘 계발하여 공동체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도 되돌아봅시다. 주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소질과 소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지혜와 깨달음 그리고 힘과 용기를 청합니다.




평화로이 떠나게 하소서.

인영균 끌레멘스 수사 신부님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지붕과 나무에 흰눈이 소복히 쌓였습니다. 하늘의 축복처럼 오늘 봉헌축일에 내렸습니다.

‘시메온의 노래’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가기 전 드리는 끝기도 중 마지막에 노래합니다. 수도자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찬가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받아안고 기쁨에 넘쳐 이 노인은 노래합니다.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더욱 간절했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29-32).

시메온처럼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마지막 때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에서는 이런 기도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평화로이 떠남을 매일 새깁니다.

“주님, 온전히 가져가소서. 내것이라고 생각했던 시간, 사람, 관계, 생각, 감정 모든 것 당신 것이오니 온전히 받으소서. 당신이 주셨으니 모두 당신 것이옵니다. 저의 허물, 죄, 어둠 이것들마저 받으소서. 비록 제가 지은 것들이지만 이것마저 받으소서. 이것이 또 다른 제 모습이기 때문이나이다.”

스페인 성 베네딕도회 라바날 델 까미노 수도원에서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부르심의
떨리는 첫마음을
기억합니다.

제 숨결을
봉헌합니다.

생과 사랑속에
봉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여정이
바로 봉헌의 
여정입니다.

비틀거렸던 시간도
출렁거렸던 시간도
무너져내린 시간도
봉헌이었습니다.

깊어지는 기도는
봉헌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삶은
봉헌으로 다시
피어납니다.

우리가 기어이
가야할 길은
봉헌의 길입니다.

누군가의 봉헌을
먹고사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그 길이 어둠을
환히 밝히는 
빛이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가장 강렬한 
사랑의 이름은
봉헌입니다.

아무도
아무 것도
하느님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봉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구원의 시작은
바로 봉헌이었음을
기억합시다.

주님 이 순간을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제가 주례를 섰던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신부가 된 후 첫 본당에서였습니다. 둘이 연인이라면서 늘 붙어 다니는데 약간의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남자 친구는 훤칠한 키에 연예인처럼 잘 생겼고, 안정적이고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여자 친구는 작은 키에 외모도 별로 뛰어나지 않았고, 직장을 구하고 있는 실업자 신세였지요. 도저히 둘의 조합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눈에 안경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 본당에서 6개월 정도를 생활하면서 이 여자 친구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늘 자신감 넘치게 생활하는 모습, 그리고 남에 대한 배려의 마음도 대단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누구도 못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둘의 만남에 대해 ‘남자가 아깝다’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여자가 아깝다’라는 말을 더 많이 하더군요.

외적으로 못 생긴 사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못나 보이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못나 보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 사람은 못나 보이는 사람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 없이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역시 못나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이렇게 못나 보이는 사람이 실제로도 못 생겼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못나 보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봉헌된 우리라는 것을 기억할 때, 절대 못나 보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로부터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물은 항상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쓸모없는 것, 형편없는 봉헌물을 하느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다면, 내 자신을 어떤 상태로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최고의 봉헌물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잘나 보이는 모습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되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습니다. 물론 수도자들을 위한 날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각자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자신 없이 살아가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하고 세상의 것만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간다면, 즉 못나 보이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주님께 바치는 최고의 봉헌물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라면서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고 복음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적극적으로 사시면서 최고의 봉헌물이 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최고의 봉헌물로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총애를 받습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을 두 손안에 꽉 잡고 있을 때는 그 행복이 작아 보이지만, 그것을 풀어준 후에는 비로소 그 행복이 얼마나 크고 귀중했는지 알 수 있다(막심 고리키).


로댕 이야기(김보은, ‘열정에 기름 붓기’ 중에서)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킨 위대한 조각가 로댕. 그런 그도 어릴 적에는 내성적이고 공부도 못하는, 그야말로 '지진아'였다. 모두가 그를 무시했고, 그 역시 더욱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로댕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것이 있었다. 그림 그리기도, 조각하기도 아닌 그것은 바로 꿈 말하기!

중학교 시절 어느 날, 지루한 수업분위기를 깨기 위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꿈이 뭐니?"

로댕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제 가슴 속은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같은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관심 받지 못하고, 내성적이었던 로댕은 적어도 자신의 '꿈'을 말하는 것에서 만큼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던 것이다. 그리고 로댕은 진짜로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다.

이렇게 자신의 꿈에 대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못나 보이는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잘 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생 수녀님은 진해에서 소임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났고 가능하면 서울 쪽으로 오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수녀님은 이번에는 밀양에 있는 성지에서 소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기쁜 마음으로 순명하면서 떠났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제와 수도자의 생활은 많이 다릅니다. 마치 백조가 우아하게 물위를 지나가지만 물속에서 백조의 다리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사제들의 삶이 성사를 집전하고, 사목활동을 통해서 드러나지만 수도자들의 기도와 헌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입니다. 더 멀고 힘든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먹은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많은 본당에서 오늘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은 초가 가지고 있는 3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성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삶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첫째, 초는 밝은 빛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진리의 빛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둘째, 초는 따뜻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이들, 슬퍼하는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셋째, 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십자가의 희생은 가장 숭고한 봉헌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솔직하게 아프다고, 원망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신앙이 있는 곳에, 당신의 몸을 성체의 모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발까지의 긴 여행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봉헌奉獻이 허무虛無에 대한 답이다. -봉헌의 축복祝福-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봉헌이 허무에 대한 답이다.’ 

말씀 묵상 중 떠오른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봉헌 말고 허무에 대한 다른 답은 없습니다. 빛이 어둠에 대한 답이듯이 봉헌이 허무에 대한 답입니다. 결국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싸워야 할 궁극의 적은 나입니다. 나와의 싸움에 봉헌보다 더 좋은 무기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때 나와의 싸움에서도 승리입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영어로는 ‘Presentation of the Lord’인데 우리의 ‘봉헌’이란 말마디의 느낌을 맛볼 수 없습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거룩함입니다. 봉헌은 믿는 이들의 삶의 의미입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아름다운 말마디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등장 인물들은 모두가 봉헌생활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봉헌합니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 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 기록된 대로 봉헌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부모입니다. 예수의 부모인 요셉, 마리아 역시 아기와 함께 자신을 봉헌하는 경건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시메온 노인 역시 봉헌생활의 모범입니다. 그는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고, 성령께서 늘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합니다. 봉헌생활에 충실하고 항구한 이에게 늘 함께 하는 주님의 성령이요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봉헌의 사람인 시메온은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그대로 말라키 예언대로 성전에서 봉헌되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끝기도를 마치며 바치는 그 유명한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이 찬미가를 마치면 장상의 강복을 받고 하루를 끝내고 시메온처럼 평화로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듭니다. 장상의 강복의 기도 역시 아름답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바로 하루 봉헌생활을 마감하면서 바치는 참 아름다운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날마다 하루를 마치며 바치는 시메온 노래와 장상의 강복 기도의 은총이 분명 언젠가 아름다운 선종善終의 죽음을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시메온은 예수님의 부모를 축복하고,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봉헌되는 아기 예수 아기에 대한 미래 모습을 알려 줍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봉헌의 기쁨만 있는 게 아니라 봉헌의 아픔도 있습니다. 마리아뿐만 아니라 수도자들은 물론 봉헌의 삶을 사는 모든 믿는 이들이 겪는 봉헌의 기쁨이자 봉헌의 아픔입니다. 봉헌의 아픔을 압도하는 봉헌의 기쁨이 삶의 허무를 몰아내 날마다 생명의 빛 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나와의 싸움에 지칠줄 모르는 내적힘을 제공해 줍니다. 봉헌의 기쁨과 아픔의 삶의 리듬중에 날로 깊어져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시메온에 이은 한나라는 예언자 역시 봉헌생활에 항구하고 충실했던 결과 성전에서 봉헌되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립니다.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합니다.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만난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예수 아기의 소식을 전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메온과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두 '정주定住의 대가大家', 봉헌의 노인들이 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새삼 하느님 찬미와 하느님 감사는 봉헌생활의 두 핵심 요소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를 통해 봉헌의 삶을 새롭게 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말라3,3).


말라키 예언자의 말씀처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참 좋은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십니다. 아멘. 




성 프란시스코의 고백

윤경재 요셉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2,22)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에게 마사오 형제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용모가 뛰어나지도 않고 높은 학식도 없으며 귀족 혈통도 아니고, 심지어 사제도 아닌데 모든 사람이 당신을 따르며 뵙기를 바라며 당신에게 듣기를 바라며,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째서 세상 사람들이 당신에게 순종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높이 계시는 분께서 그 일을 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가장 거룩한 눈으로 살펴보고 계시는데, 죄인 중에서도 이보다 더 큰 죄인일 수 없는 사람, 이보다 더 자격 없고 이보다 더 보잘것없는 작은 사람을 찾으실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그분께서 놀라운 일을 성취하시려고 나를 택하였다오.” 

“그분께서는 나보다 더 천한 인간을 찾으실 수 없었기에 나를 택하셨고 또한 이 세상이 자랑하는 고귀한 신분과 위엄, 강함, 멋진 용모 그리고 학식을 깨뜨리기 원하셔서 그렇게도 미천한 나를 택하셨던 거지요.” 

“나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완벽하고 온전하신 분이셨지요. 그럼에도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가난하게 맨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요. 예수님께 비하면 나는 가진 게 너무 많았어요. 지금도 덜어낼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예수께서는 벌거숭이 어린아이로 오셨지만,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분이 되셨던 것은 아버지와 이 세상 모든 것에서 배움을 청하셨기 때문이지요. 말구유에서 가장 연약하게 태어나셨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하신 분이 되신 것은 자신을 이기시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이지요. 가장 가난하게 태어나셨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 가장 부유하셨던 것은 당신의 길을 완벽하게 긍정하시고 자유 자재하셨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나는 부자 부모 슬하에서 박수 받으며 태어났지만, 아직도 이 세상 누구보다 현명하지 못하고, 강하지 못하고, 부유하지 못하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마사오 형제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양 무릎에 파묻고 뜨거운 눈물만 흘렸습니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4~35)

 

만인에게 존경을 받으시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는 평소에 유머 감각이 매우 풍부하셨습니다. 한번은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과 대화를 하시는 장면을 목격한 사제 한 분이 호기심에 몇 나라 말을 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두 나라 말을 잘 하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추기경님 말씀을 듣던 주위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추기경께서는 한국 분이시니 한국말은 물론 잘 하실 것이고, 왜정 때 태어나 일본서 대학 공부하셨으니 일본말도 능통하실 것이며, 독일서 수학하셨으니 독일어는 대화가 가능할 정도일 것이며, 영어와 라틴어도 상당 수준이라는 것쯤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작 두 나라 말을 잘하신다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궁금해 하면서 우리말과 일본말이요? 우리말과 영어요? 영어와 독일어입니까? 라고 추기경께 질문을 하였지만, 빙그레 웃으시며 계속 아니라고 고개만 저으셨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잠시 뒤 추기경께서는 “나는 참말과 거짓말을 능숙하게 잘 하지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모두는 잠시 숙연해졌습니다. 심지어 그때 가슴이 뜨끔해졌다고 어느 묵상글에서 고백하는 사제분도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감싸인 시메온은 입에 발린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성공에 관한 안내서에는 무엇보다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자기에게 돌아오는 혜택이 크다고 합니다. 결국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처신하라는 얄팍한 처세술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진실을 말해 줍니다. 그 진실이 가끔 상대방이 듣기 곤란한 내용일지라도 서슴지 않고 말해줍니다. 그들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길로 또는 온몸에 자신의 진심을 담아 그 뜻을 전해 줍니다.

 

그래서 깨어 있는 사람의 목소리와 말 내용은 언제나 듣는 사람을 움직여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이 잘 되는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더욱 말에 힘이 실립니다. 김수환 추기경처럼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다가갑니다. 그러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시메온이 진실을 보는 눈을 지닌 데는 어떤 인간적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았기에 가능했습니다. 관계를 좋게 맺으려 어떤 전제 조건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눈으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성모님과 성 요셉은 시메온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시메온의 예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때는 깨닫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준비는 단단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축복을 부르는 전인적인 봉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정결례를 치르기 위해 당시의 율법에 따라 태어난 지 40일 만에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합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봉헌되신 이 날 다 함께 봉헌의 의미를 되새기고 살아냄으로써 하느님의 축복의 집으로 들어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라틴어 ‘콘세크라씨오’(consecratio)는 우리말로 봉헌, 축성, 축성된 봉헌 등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핵심적인 말입니다. '봉헌’이란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과 선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응답으로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봉헌은 단순히 좋은 뜻으로 바치거나 건네는 인간적이고 일방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봉헌이지요. 봉헌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분의 뜻대로 되돌리는 거룩한 자기증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봉헌은 철저히 이타적이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행위이며,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거룩한 비움입니다. 


봉헌은 감사와 찬미의 표현으로서 하느님의 눈길을 사로잡아 그분께서 내 안에 머무시도록 하는 자기로부터의 떠남입니다. 봉헌은 하느님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나 자신이 변형되어 그분을 닮는 거룩하고 복된 존재가 되기 위한 회개 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봉헌은 희생 없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어떤 것을 포기하고 참아 받는 그 이상으로, 자기 목숨을 온전히 내어주신 예수님의 구원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놓고 피를 흘림으로써 궁극적인 해방을 가져다주셨듯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자신을 내주는 것이 참 봉헌입니다. 


그런데 봉헌할 것은 세상의 좋은 것, 나의 장점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시며 목숨을 내어주실 만큼 끔찍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서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나의 아픔과 고통, 기쁨과 슬픔, 불안과 두려움, 절망과 뉘우침, 인간적 나약함과 모순 등 내 삶의 모든 것을 봉헌해드려야 합니다. 


나아가 참 봉헌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해야 하고,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임을 깨달을 때,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자발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봉헌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축성’하시어 축복해주시고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축복을 부르고, 그분께서 나와 우리와 이 사회에 대한 축복을 거절하시는 일이 없도록 깨끗하고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친다면(말라 3,3)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도 인류 성화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식하고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기꺼이 희생하고 모든 것을 되돌려드림으로써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고, 구원의 희생에 자신을 일치시켜 나갔으면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축복을 부르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저의 모두를 받아주소서! 




주님 봉헌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고 봉헌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수도자들의 삶은 봉헌생활이 아니라 축성생활이지요.

   

Vita Consecratio를 우리말로 정확히 번역하면 축성생활인데 ‘축성생활’하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기에 봉헌생활이라고 쓰는 거고 더 많이 쓰이는 말은 수도생활이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 용어와 함께 수도자들의 삶을 한 번 음미해봤습니다.

   

축성생활,

봉헌생활,

수도생활.

이 세 가지 중에서 우선 제일 많이 쓰이는 수도생활을 보면 수도생활이란 봉헌생활이 아니고 축성생활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의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신이 없어도 되는 삶이며 신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의 행복과 완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사는 삶이지요.

   

그러니까 하느님께 나를 봉헌하는 삶도 아니고 하느님의 축성으로 살게 되는 삶이 아니며 오로지 자기완성과 성취가 그 목표인 삶입니다.

   

봉헌생활은 이에 비해서 하느님께 나를 바치는 삶입니다.

그렇지만 이 봉헌에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나의 존재와 삶 전부를 바치는 것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나를 바치는 것이며 이를 달리 말하면 마리아의 봉헌과 마르타의 봉헌입니다.


그러기에 봉헌생활은 수도생활에 비해 한결 신앙적이고 하느님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수도생활이 아니라 봉헌생활을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내가 나를 스스로 봉헌하는 봉헌생활을 사는 것도 좋지만 더 좋고 그래서 우리가 더 살아야 할 것은 축성생활입니다.

   

봉헌생활은 내가 나를 바치는 삶이니 자발적이긴 하지만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고 그래서 성소를 살지 못할 위험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살고 싶다고 살 수 있고 우리가 살겠다고 하여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원의와 의지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 사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힘을 주셔야 살 수 있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축성생활이란

하느님께서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뽑아(성별하시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심으로서(축성하심으로서)

봉헌되기에 합당하게 해주셔서 봉헌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요즘 현실상황은 어떻습니까?

축성생활이든 봉헌생활이든 아니면 수도생활이든 이 생활을 잘 하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고 우리나라는 더 그렇습니다.

   

갈수록 하느님의 부르심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뭘 하려고 하고 하느님과 세상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삶보다는 자기실현이나 만족을 위한 삶을 살려고 하는 현대이지요.

   

그러기에 오늘날 축성생활을 선택한 저희들은 더 경각심을 갖고 살고 신자 여러분은 교회성화를 위한 축성생활자들이 늘어나도록 그리고 축성생활자들이 이 삶에 더 맞갖게 살도록 기도해주셔야겠습니다.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을 따르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4,4-5)

   

바로 이날, 죽기를 결의하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노인과 밤낮으로 단식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과부가 구세주를 뵈었습니다. 

바로 이날을 기념하여, 우리는 오늘을 “주님봉헌축일”과 “봉헌생활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봉헌생활”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봉헌생활”이란 <교회법> 573조 제1항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

   

이를 여섯 가지 의미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 봉헌생활의 모범은 그리스도이시며,성령의 감도로 이루어진다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 <봉헌생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봉헌생활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주신 은혜이다”(제1항)

   

따라서 봉헌생활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성취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도록 주어진 성령의 선물에 따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봉헌생활은 복음적 권고인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의 문헌 <봉헌생활>에서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삶”(제22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의 집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건설을,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 구원의 삶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셋째>,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봉헌생활은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전력을 쏟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6세 반포한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인 <완전한 사랑>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복음적 권고의 실천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이신 스승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 기원을 이끌어 온다.”(제1항)

  

따라서, 봉헌생활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내는 삶인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의 완성을 이루었듯이, 봉헌의 삶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삶임을 깨우쳐줍니다.

   

<넷째>,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 봉헌생활의 축성은 세례에 의한 축성에 깊이 근거하며, 이 축성을 더 완전히 표현하는 특별한 축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인 <복음의 증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특수한 축성으로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세례의 축성으로 이루어진 근본적 봉헌을 더욱 완전히 실현시키고 있다”(제4항)

   

그러니, 봉헌생활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인 것입니다.

   

<다섯째>,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봉헌생활은 인간의 궁극적인 생활을 예표 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제44항)과 <봉헌생활>(제26항)에서는 봉헌은 “미래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더 잘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헌생활은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고, 천상적 영광을 예고해줍니다.

   

<여섯째>,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 봉헌생활은 모든 것보다 우선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일시적 충동에 따라 사는 임시적인 삶이 아니라, 공적인 선서로 평생토록 지속되는 고정된 생활 형식인 것입니다. 

이를 <봉헌생활>에서는 “가없는 헌신”(104항)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독수리를 하늘의 제왕이라고 부르는 독수리는 시력이 5.0이라고 합니다. “수도자의 복음”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신비를 바라보는 그러한 눈을 가졌기에 독수리 복음사가라 불리어집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을 보는’ 시메온의 눈이 바로 그러한 눈일 것입니다. 

그런 눈을 지녔기에, 독수리는 날개 짓을 하지 않고도 높은 하늘을 유유자적합니다. 바람을 타고 있는 까닭입니다. 봉헌생활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꿰찔러 바라보며, 바람을 타고 높은 하늘을 나는 삶일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고 유유자적하는 삶 말입니다. 

오늘도 성령의 바람을 타고 흐르는 축복의 삶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오늘은 그리스도 예수를 낳으신 마리아가 모세 율법을 따라 정결예식을 행한 것과 예수님의 성전 봉헌을 기념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날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봉헌한 것을 따라 참회행렬을 했었는데, 이 행렬에 사용된 초를 장엄하게 축복하던 전통이 일 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성하는 것으로 전례 안에 정착되었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이것은 또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맏아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 그 대가로 커다란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 때에 그것이 내가 모든 것을 잘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해서 주위의 칭송이나 칭찬을 바라게 되고,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리지 못하면,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의미마저 잃게 될 것이다. 작은 것이나 큰 기쁨이나,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으로 우리의 유한한 것이라도 그분에게 닿기만 하면 즉시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체를 받아 모시듯이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시고 나서 제단으로 나가신다. 율법을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노인인 시메온과 한나는 깊은 신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맞았다. 그들은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진닌 분임을 알아보았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주님을 기다려 왔고 그분이 오시자마자 신심 깊은 행실이란 두 팔과 꾸밈없는 믿음인 목소리로 그분을 찬미할 준비가 되어있는 모든 남녀 백성들을 나타낸다.

 

의인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구원은 먼 훗날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현재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구원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분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처녀가 어머니라는 사실이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그리스도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마르키온파가 있으며 에비온파는 남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의 영혼을 꿰찌르는 칼은 그의 슬픔을 가리킨다. 마리아는 당신의 일생 동안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예언자 한나가 등장하고 있다. 먼저 시메온이 아기를 뵙고 품에 안아 본 다음에 한나가 나타났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절)고 한다. 복음에 그녀의 조상과 지파를 밝힘으로써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이다.

 

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한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84세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그 할머니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주 접하게 되는 봉헌성가를 부를 때 마다 늘 송구스런 생각이 앞섭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사랑하는 내-주 앞에 모두 드리네.”(가톨릭 성가 214번 주께 드리네)

주님께 바치는 것이 거의 없으면서 큰 목청으로 ‘아낌없이 바치네’를 외치니 가슴이 많이 찔립니다. 일반 신자들은 그나마 적어도 얼마간의 봉헌금이라도 바치니 그 기분이 덜할 것입니다. 수도자랍시고 가만히 앉아 노래만 부르고 있자니 여간 창피스런 일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봉헌 한다’고 하면 주로 먼저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 가운데 일부를 하느님께 드린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봉헌’의 개념이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좀 더 확장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다시 그분께 되돌려드린다’

‘무상의 선물로 주신 것을 본래대로 원위치 시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하느님께서 제게 선물로 주신 것이 어떤 것들인지 곰곰이 헤아려봅니다.  하나하나 챙겨보니 의외로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가장 큰 축복의 선물로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가족’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형제’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하느님께서는 제게 ‘왕창’ 주셨습니다.  저를 위해 ‘대박’을 터트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토록 풍성한 나눔과 베품, 끝도 없는 자기 증여의 역사가 하느님과 저 사이에 계속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한 제 빈손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 과연 무엇을 되돌려드릴까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 개의 거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새해를 맞아 아주 좋은 덕담을 한 마디 잘 들었습니다. 새해에는 세 개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십시오.

동경(銅鏡)과 심경(心鏡)과 사경(史鏡)!

아침마다 구리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십시오.

거울에 비친 나는 단정한가요? 신원과 직분에 걸맞은 얼굴인가요? 틈나는 대로 마음의 거울을 들여다보십시오. 나의 내면과 영혼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가요? 탐욕이나 불평불만?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노? 또한 역사의 거울을 수시로 들여다보십시오. 그저 발밑만 내려다 볼 것이 아니라 시야와 안목을 넓히십시오. 과거를 통해 오늘을 보고, 오늘에 비추어 내일을 진단하십시오.

봉헌생활의 날을 맞아 하루 종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수도자란 누구인가?’ 묵상을 되할수록 참으로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수도자들을 향한 교회 가르침이나 세상 사람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았기에 부담은 더 커졌습니다.

수도자란 세상의 옷을 벗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란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입니다. 수도자란 인간에게가 아니라 하느님께 봉헌된 산 제물입니다. 수도자란 의롭고 거룩한 사람입니다. 수도자란 지상에 몸담고 살아가지만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사는 사람입니다. 수도자란 육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수도자란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복음적 가치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수도자란 쉽고 편한 길, 탄탄대로가 아니라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시는 수도자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갑갑하고 답답한 느낌, 죽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나? 하는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올 것입니다. 불현듯 내가 길을 잘못 선택한 것인가? 하는 걱정도 들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살아보면 별것도 아닙니다. 그리 팍팍하거나 어렵지도 않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성모님께서, 여러 주보성인들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대리자이신 장상들께서, 그리고 선배와 동료 수도자들이 함께 동반해주실 것입니다.

봉헌생활이 주는 은총과 기쁨이 또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꾸려나가는 공동체 생활 안에서 우리는 천국을 미리 앞당겨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진지한 기도생활과 영성생활이 주는 참 기쁨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기쁨입니다. 한쪽을 과감하게 포기한 수도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흘러넘치는 선물을 건네주십니다.

그러나 관건은 우리가 수도자로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저 마지못해서, 누군가에게 강요되어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수도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성소를 주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이요 축복으로 여기고, 하루하루 감사하며 후회 없는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수도생활 성공 여부의 열쇠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수도자 여러분들의 존재 자체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세상 앞에 드러내십시오. 여러분 각자의 기쁘고 충만한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 앞에 보여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만천하에 당당하게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이 심각한 수도성소 위기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불신앙의 시대이자 불확실성의 시대 한 가운데 수도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수도자들을 경제논리나 세속적 잣대로 평가하며 수도자들 존재의 의미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과 회의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수도자들의 존재를 통한 증거가 더욱 필요합니다. 신앙의 빛과 사도적 열정으로 잘 무장한 수도자들이 경제가 다가 아님을, 첨단화된 물질문명이 다가 아님을 온 몸으로 외쳐야겠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각자의 삶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해계시며 이 세상은 희망과 구원의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증거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분명코

봉헌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매순간마다 뜨거운 

봉헌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봉헌으로

닫혀있던

하늘나라의 문을

몸소 열어주셨습니다.


봉헌 생활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봉헌으로

더욱 은총의 사람으로

살아가게됩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봉헌입니다.


생명과 봉헌은

지향점이 같습니다.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은 

봉헌으로 드러나고

봉헌은 하느님을 위한

삶으로 드러납니다.


삶을 완성하는 것은

봉헌입니다.


우리 마음을 

이끌어가시는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봉헌은 우리의

두려움과 죄까지도

봉헌하게합니다.


모든 여정에

함께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사랑을 지켜내게

하는 것은 단연코

봉헌입니다.


날마다 봉헌의

시간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구원의 역사는

봉헌의 역사입니다.


수도생활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봉헌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과 마침에는

봉헌이 있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결혼을 할 때 배우자를 나의 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평생 부려 먹기 위해서 배우자를 선택했고 결혼했다고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이제까지 정말로 많이 혼인 주례를 섰지만 단 한 명도 이런 목적으로 결혼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사랑하는 배우자를 위해 살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선택했으며,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닌 평생 함께 하는 삶을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즉, 상대방을 위한 자신의 헌신적인 봉헌을 다짐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봉헌의 마음이 계속되지는 않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할 것이다.’라는 명언에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부부간의 봉헌이 이렇게 힘들지만, 교회의 봉헌 생활자와 사목자는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세상 속에 살면서 더 큰 유혹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봉헌이 참 어려운 과제로 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이 점을 걱정하시면서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 권고’인 ‘복음의 기쁨’ 78항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오늘날 우리는 봉헌 생활자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목 일꾼이 개인의 자유와 휴식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활동을 자신의 정체성과 무관하다는 듯이 여기며 이를 단순히 삶의 부속물로 간주합니다. 동시에 영성생활도 일부 신심 행사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위안을 줄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 안에 투신하며 복음화를 위하여 열정을 쏟도록 북돋워 주지 못합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며 열의가 식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황님의 지적대로 자기 자신만을 먼저 생각하는 개인주의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첫 마음을 잃어버리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기 때문에 봉헌 생활이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처음 가졌던 모든 열의가 식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이 날을 ‘봉헌 생활의 날’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정했습니다. 봉헌의 삶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점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만연한 세상 안에서 주님께 온전하게 봉헌하면서 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봉헌 생활의 날’인 오늘, 특별히 수도자나 사목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세속에 물들기보다는 주님께 온전히 물들 수 있도록 기도로 함께 해주십시오. 물론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들을 위해 기도할 여력이 어디 있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참된 봉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하느님 나라는 더욱 더 우리 곁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지만 우리의 삶 안에서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을 담당하면서 영적인 풍요로움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나무를 심기에 가장 좋은 때는 20년 전이었다. 그다음으로 좋은 때는 바로 지금이다(아프리카 속담).


기도해 주세요.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생으로 10년을 산 뒤에 사제 서품을 받고, 지금 현재 18년째 사제로 살고 있습니다. 신학생 때의 시간까지 포함하면 28년째 주님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왔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 덕에 편하고 쉽게 살아왔다고 하는 편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분명히 저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취업 문제가 심각한 요즘, 저는 직업을 구해 돈을 벌지 않아도 됩니다. 결혼하지 않으니 부양가족에 대한 부담도 없으며, 특히 자녀에 대한 교육 문제에 대한 신경도 전혀 쓰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만남 안에서 생기는 갈등도 심각하지만 ‘신부’라는 이유로 이해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저의 말을 잘 경청해주십니다. 마지막으로 노년에 대한 두려움도 전혀 없지요.

그러나 저와 반대로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 지요. 그런 사람들과 비교할 때 쉬운 길을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생깁니다. 그런데도 저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성소자 수가 점점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길은 일반적의 세상 사람들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자리이기에 세상 것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이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온전한 봉헌을 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명동 교구청에서 남산 산책로는 10분가량 걸립니다. 10분만 걸어가면 2시간 정도 아름다운 남산의 산책로를 걸을 수 있습니다. 전망대에서 남쪽의 한강을 볼 수도 있고, 북쪽의 산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모처럼 남산을 걸었습니다. 작년에는 3번 정도 남산을 걸었습니다. 많은 날들이 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지 못하였습니다. 올해는 시간이 허락하는 날에는 남산과 친구가 되려 합니다.

 

하면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책을 읽는 것, 기도하는 것, 자주 웃는 것, 가진 것을 나누는 것,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들에 푹 빠져서 우리는 하면 좋은 것들을 굳이 외면하면서 지내는 것 같습니다. 하면 좋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과음하는 것, 늦게 자는 것, 지나친 텔레비전 시청, 미워하는 것, 원망하는 것, 자만하는 것, 교만한 것, 시기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나의 몸과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데도 우리는 마치 불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처럼 그렇게 지내곤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입니다. 더 멀고 힘든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먹은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많은 본당에서 오늘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은 초가 가지고 있는 3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성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삶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첫째, 초는 밝은 빛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진리의 빛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둘째, 초는 따뜻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이들, 슬퍼하는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셋째, 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십자가의 희생은 가장 숭고한 봉헌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솔직하게 아프다고, 원망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신앙이 있는 곳에, 당신의 몸을 성체의 모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의 봉헌축일을 지내면서 제가 좋아하는 한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春蠶到死絲方盡(춘잠도사사방진) 蠟炬成灰淚始乾(납거성회루시간)” 뜻풀이는 이렇습니다.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뽑기를 그치고, 초는 재가 되어서야 눈물이 그친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발까지의 긴 여행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봉헌생활의 축복,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2월2일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지 40일째 되는 날로, 아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참 좋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며칠전 2월이 시작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했는데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의 빛이 2월을 환히 밝히는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 빛으로 봉헌되신 주님의 날이자 봉헌의 삶을 사는 우리 수도자의 날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교황께서 선포하신 봉헌생활의 해(2014.11.30.-2016.2.2.)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니, 올 해 봉헌생활의 날은 참 각별합니다.


세상에 봉헌이란 말보다 아름답고 빛나는 말은 없습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 봉헌의 기도, 봉헌의 사랑,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빛, 봉헌의 믿음 등 끝이 없습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의미이자 존재이유입니다. 봉헌의 빛이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고 주님의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합니다.


한 번의 봉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봉헌의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마침내 마지막 장엄하고 아름다운 봉헌이 죽음의 봉헌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봉헌생활의 축복’입니다. 


첫째, 기쁨의 선물이 바로 봉헌생활의 축복입니다.

세상에 봉헌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을 찬미하는 기쁨, 주님께 감사하는 기쁨,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 등 봉헌의 기쁨은 끝이 없습니다. 바로 주님은 영원한 기쁨의 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기쁨은 주님의 빛입니다. 기쁨의 빛으로 빛나는 주님이십니다. 영성의 진정한 표지 역시 기쁨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누가 저에게 무슨 기쁨으로 사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지체없이 대답합니다.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삽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표현되는 봉헌의 기쁨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학원인 수도원에서 봉헌의 삶을 사는 수도자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대답일 것입니다. 


둘째, 깨어있음의 선물이 봉헌생활의 축복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종교의 궁극 목표도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을 때 진정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기쁘면 저절로 깨어있기 마련입니다. 막연한 깨어있음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깨어있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주님의 얼굴을 뵙기위해,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음 자체가 바로 기도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기쁨 중에 깨어 기도하는 우리들입니다. 


셋째, 더불어 삶의 선물이 봉헌생활의 축복입니다.

나혼자 봉헌의 기쁨이 아니라 더불어의 봉헌이 공동체를 기쁨의 빛으로 가득채웁니다. 요즘 세상에서도 널리 회자되는 말마디가 더불어입니다. 더불어 민주당, 더불어 잘 살자는 경제민주화 등 더불어보다 중요한 말마디도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기쁨의 샘이신 주님을 중심으로 더불어의 수도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우리들입니다. 더불어 나누고 섬기는 봉헌의 삶을 살 수록 배가 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메온만 항구한 봉헌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더불어 안나도 있음을 봅니다. 서로 이심전심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을 나눴음이 분명합니다. 


넷째, 주님과 만남의 선물이 봉헌생활의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항구히 깨어 기다렸던 시메온과 안나입니다. 성전에서 봉헌되시는 주님을 팔에 안고 찬미의 노래를 바치는 시메온입니다. 말라키 예언자의 말씀이 마침내 주님을 기다리는 오늘 봉헌생활의 날에 실현되었습니다.

“보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이 거룩한 주님 봉헌 축일 미사중 봉헌되시는 주님을 팔에 안고 시메온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며, ‘제 눈으로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기쁨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입니다. 봉헌생활의 기쁨, 봉헌생활의 축복입니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봉헌의 삶으로 불림받고 있습니다. 끈임없는 봉헌의 삶이 우리를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여 날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봉헌奉獻의 여정旅程’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주님 봉헌 축일 미사를 통해 은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영적 레위인들인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금과 은처럼 정련하시여, 우리 모두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봉헌하게 하십니다.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루카2,30). 아멘.




기꺼이 모두를 되돌리는 아름다운 봉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성모님과 성 요셉이 40일전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율법에 따라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봉헌은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봉헌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랑의 숨결을 거저 부어주시는 주님께서 봉헌되신 이 거룩한 날 나의 봉헌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봉헌은 예수님의 봉헌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의 손에 의해 봉헌되셨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며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도 세례나 수도축성, 사제 축성을 통하여 삶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한 봉헌된 사람답게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봉헌의 목적과 방향은 내가 아니라 타인이며, 내 이익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선(善)입니다. 봉헌의 유일한 목적은 사랑입니다. 많은 기부를 하고 봉사활동을 하며 자신의 업적인양 자랑하고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봉헌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 하느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서 실행하는 것이 봉헌을 사는 이들다운 삶의 방식입니다.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말라 3,3)는 말씀처럼 늘 대가나 인정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의롭게 봉헌해야 합니다. 필요하고 다급할 때만 주님을 찾고 이용하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 전부를 내놓으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봉헌 또한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기꺼이 되돌려야 하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거저 받았기에 그것을 남김없이 되돌릴 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봉헌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시메온의 고백처럼, 예수님께서는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인데(2,34), 그분과 함께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성모님의 고통은 십자가 밑에 이르러 절정에 이릅니다. 우리의 봉헌은 예수님의 구원의 희생에 전인격적이며 항구하게 동참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맡긴다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끊임없이 사랑과 선을 주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배타적으로 유보하는 것입니다. 봉헌이란 그렇게 내 삶을 생명이요 의미이신 그분께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그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봉헌이란 하느님을 얻기 위한 과정이요 그분과 일치하기 위한 필연적인 길입니다. 


봉헌의 삶을 사는 자세는 충실하고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던”(2,25) 시메온과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2,37) 한나와 같은 자세야말로 봉헌을 사는 이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지극정성으로 봉헌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이 축일에 불의와 고통, 차별과 비참함이 넘치는 세상 한복판에서, 기꺼이 자신 전부를 사랑으로 되돌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재현하는 봉헌의 삶을 더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살아내도록 다짐해야겠습니다. 




기다림의 기쁨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는“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한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기에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고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라고 말합니다. 사실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 되었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 것도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복이 되길 바랍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려고 일어서신다. 주님은 공정의 하느님이시다. 행복하여라,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이사30,18)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숨어 피는 꽃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매년 2월 2일 봉헌생활의 날을 맞이할 때 마다 하느님 앞에 송구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과분한 은총을 소낙비처럼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하느님께 나는 과연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가? 성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드릴 것이 너무 없어 부끄러운 하루를 지내면서 존경스런 선교사 수녀님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지구 반대쪽, 극단의 가난 속에 살아가는 토착민들의 다정한 어머니요 친구, 주치의로 살아가시는 수녀님의 책상 앞에는 이런 좌우명이 붙어있답니다. "한곳에 오래도록 머물러야 뿌리를 내린다." 그러면서 수녀님께서는 웬만해서는 바깥 외출이나 휴가를 떠나지 않으신답니다.


또 다른 훌륭한 선교사 수녀님께서는 오랜만에 한국에 오셨는데 하시는 말씀 "그 동안 선교지에서 일하느라 너무 바빠 기도할 시간이 부족했었는데 이제야말로 마음 편히 기도할 순간이다."며 하루 온 종일을 기도 속에 보내신답니다. 그리고는 원장 수녀님께 이런 부탁도 드렸답니다. "제게도 담당 청소 구역을 주십시오!"


요즘 1960년대 초반 20대의 나이로 소록도로 들어가셔서 40년 이상 한센병 환우들의 천사로 사셨던 마리안나, 마가렛 두 오스트리아 수녀님들의 미담이 다시금 화제입니다. 당시 소록도 병원 책임자의 표현에 따르면 "백로 두 마리가 사뿐히 섬에 내려앉았다."라고 할 정도로 젊고 아리따운 수녀님들이었답니다.


섬에 도착한 두 수녀님의 삶은 그야말로 날개 없는 천사의 삶이었습니다. 당시 소록도에는 수많은 한센병 환우들이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간호사 자격 소유자였던 두 수녀님의 봉사는 가히 초인적이고 영웅적이었답니다. 격리 조치로 인해 당시 소록도 한센병 환자 수는 6천명에 달했는데 의료진은 겨우 5명에 불과할 정도였으니 수녀님들의 하루 일과는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두 수녀님의 삶이 더욱 존경스러운 것은 그토록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봉사활동이 입소문을 타게 되자 여기저기서 인터뷰 제의가 들어왔고 무슨 무슨 상을 수여하겠다고 했지만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습니다. 두 분의 원칙은 한결같았습니다. '숨어 피는 꽃!'


회갑이 되어 주민들과 병원 측에서는 감사의 표현으로 회갑잔치를 준비하자 '기도하러 갈 시간!'이라며 홀연히 사라지셨답니다. 본국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는 단 한 푼도 남김없이 환우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가는 귀향길 그녀들의 뒷모습, 처음 소록도 들어올 때 가져왔던 낡을 대로 낡은 여행용 가방 달랑 하나!


연세가 드신 두 수녀님은 40년 간 동고동락했던 한국인 간호사가 정년퇴직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아쉽지만 큰 결단을 내립니다. 이제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더 있어봤자 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는 판단에 두 수녀님은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이른 새벽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연히 연안여객선에 몸을 싣습니다. 광주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야 간략한 편지 하나를 그토록 사랑했던 소록도 주민들에게 부쳤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부담을 드리기 전에 떠납니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빕니다."


뒤늦게 두 천사가 섬을 떠난 것은 알게 된 소록도 주민들은 갑작스런 생이별의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일시적이고 집단적인 맨붕 상태에 빠졌답니다. 두 수녀님을 가족이나 친구처럼 여겼던 환우들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열흘 이상 성당으로 출근해서 두 수녀님을 위한 기도에 전념했답니다.


소록도 주민들은 한 목소리로 두 수녀님에 대해 이렇게 기억합니다. "저희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 두 수녀님은 진정 살아계신 성모님이셨습니다." 두 천사 수녀님의 사심 없는 봉사를 잊지 못하는 소록도 주민들과 고흥군은 두 분 수녀님을 노벨상 후보로 추천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 중에 있답니다.


이제 한분은 치매로 또 다른 분은 대장암으로 힘겹고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계신데, 그분들의 침실 문에는 아직도 평생토록 가슴에 품고 살았던 좌우명이 한글로 적혀 있답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


여기저기서 현대 수도생활의 다양한 도전들 앞에서 걱정이 많습니다. 수도자들의 신원의식 약화, 소비주의, 극단적 개인주의, 무기력, 열정의 상실, 기쁨의 상실, 공동체 정신의 약화, 건강염려증...


그렇다면 이 시대 봉헌생활자들이 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측면들은 어떤 것일까요? 그래서 봉헌생활이 지상천국, 산위의 마을, 등경 위의 등잔이 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우리 수녀님들이 그 비결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사심 없이 청빈의 도를 지키며 봉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루 이틀 봉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평생에 걸쳐 꾸준히 봉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쁘게 헌신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헌신을 마지못해 한다든지 잔뜩 인상 쓰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 가득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로 복음의 기쁨을 표현하며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모든 헌신과 봉사가 깊은 하느님과의 일치, 다시 말해서 진실한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당부에 따라 이 땅위 모든 수도자들의 얼굴이 보다 활짝 펴졌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부드럽고 너그러워지면 좋겠습니다. 실없어 보이더라도 상처투성이인 세상을 향해 틈만 나면 환한 미소를 날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존재에 감사하며, 우리 얼굴을 보고 기뻐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치유되며, 우리와 함께 다시금 희망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29-30)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복될까요?

할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고 삶에 더이상 미련이 없으니 말입니다.

요즈음 '백세인생'이 대세라지만 더 일찍이어도 이렇게 한줌 미련없이 기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요?

시메온은 주님의 구원을 자기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네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미천한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시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된다면 평화롭게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어요?

오늘 주님 봉헌축일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수도자들을 통해 주님의 구원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모든 수도자들을 기억해 주시고 저를 비롯하여 아는 수도자 한분한분을 위해 주모경 한번 바쳐주세요.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사람<투카, 2/22-4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누가 자신을 어떤 대상에 봉헌 한다는 것은 바로 그 대상과 같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성전에서 봉헌된 주님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사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봉헌으로 우리도 함께 봉헌되어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빛의 날이며 생명의 날입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 우리를 빛으로 살게 하시고 생명으로 오신 주님 우리를 주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십니다.

봉헌축일 우리는 무엇을 하느님에게 드리고 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봉헌 하는 사람은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큰 것을 받고 살게 됩니다.

 

축성생활을 하느님의 축복 받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그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한 삶이되겠습니까? 하느님에게는 되로 주고 말로 받게 됩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하느님의 귀로 듣고 하느님의 입으로 말을 하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는 나를 통하여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빛을 전하고 모든 이의 생명이 되어 주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삶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교회의 공동체 안에 살고 수도서원을 통하여 수도원 공동체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 안에서 봉헌의 삶은 바로 공동체의 속한 사람들과 하나 되어 나누고 받고 공동체가 누리며 아기자기 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에게 봉헌된 사람은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고 사는 만큼 하느님 되어 하느님 같이 살기를 기도합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 되었으니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같이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서 우리를

살게하는 방식은

바로 봉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받아 주십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도

우리는 이 어둠을

받아주실 주님께

믿음으로 봉헌합니다.


봉헌의 영역은

빛과 어둠의 

모든 시간까지도

아우르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봉헌없이 

깨어나는 삶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슴속 깊은 상처까지도

봉헌하니 십자가의 상처가

이제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자녀라는

제자리를

찾게하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봉헌입니다.


우리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살아온

시간들입니다.


봉헌의 삶은

겨울 냉이처럼

얼어있는 땅을 뚫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라나는 기쁨입니다.


봉헌의 정신은

말씀과 기다림입니다.


말씀으로 정화되고

기다림으로

순명을 배웁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할

봉헌의 길입니다.


봉헌 또한 머리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생활로써

봉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길이 

시작된 길에도

봉헌이 있었고

주님의 길이

십자가에서 바쳐질 때도

봉헌은 언제나 함께 했습니다.


모든 시작과 끝은

분명 봉헌입니다.


봉헌의 길을

걸어 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봉헌의 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길 위에 있는

주님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봉헌이며

봉헌은 삶으로

생활로써 우리와 항상 

함께 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살다보면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마음이 칼에 찔리듯 아픔을 겪어보신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노라면 마음이나 영, 정신, 혼이 칼로 후비듯 아플 날이 올 것입니다.

특히 배신, 모욕, 이별, 사별, 자식의 죽음 같은 비통한 일들로 말입니다.

평소에 이런 일을 생각하며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지만 대비는 해야지요.

어쩌면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이런 고통들의 예언을 들었다 해도 맞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주님의 수치의 혹독한 십자가처형으로 너무하셨다 싶네요.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5)"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언젠가 서울 시장이 ‘서울시를 하느님께 봉헌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열심한 신자인 시장이라서 그렇게 말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울시가 자신의 것이 아닌데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맞는 말인지 논란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축일입니다. 교회는 전통에 따라서 오늘 제단을 밝힐 초를 축성합니다. 초는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초는 빛을 내서 어둠을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을 걷지 않고, 더 이상 고통과 좌절 속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는 스스로 타서 빛을 냅니다. 완전히 다 탈 때까지 초는 계속 불을 밝힙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느님께 순종하셨던 예수님의 희생을 말해 줍니다. 초는 열을 냅니다. 그 열기는 다른 것들에 전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넘치고 넘쳐서 제자들에게 전해 졌습니다. 그 사랑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주님의 봉헌 축일에 교회는 초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초를 축성하면서 우리들 자신도 그렇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사랑과 나눔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느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함께하는 삶, 나누는 삶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면서 제물로 비둘기 한 쌍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지는 전승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진실한 믿음을 보시고 이사악 대신에 숫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준비해주신 양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양을 제물로 드리기도 했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둘기를 제물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본당에 교무금을 책정합니다. 매주 주일 헌금을 준비하고 감사헌금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봉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진 재능과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샘물은 자꾸만 퍼내야만 새로운 샘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재능, 시간, 마음을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면 주님께서는 더 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봉헌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기도 봉헌입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조금이라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데 시간을 봉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시간을 내서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둘째는 선행의 봉헌입니다. 선행은 아주 작은 것부터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커다란 선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하시면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고, 누군가 청을 하면 기꺼이 가셔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어느 식당의 식탁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이기적 이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상 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기도와 선행의 봉헌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림의 기쁨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교회는 주님 봉헌축일을 '봉헌생활의 날'로 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의 날로 지냅니다.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많은 젊은이들이 봉헌생활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만났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 한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하고 고백합니다.  이로써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기에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고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 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라고 말합니다. 사실 “태를 열고 나온 사내 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 되었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복이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봉헌의 축복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뉴튼수도원을 떠나기 전 주님 봉헌 축일에 앞서 봉헌하는 마음으로 송바르나바 수사님에게 머리를 깎으니 마음이 나를 듯 상쾌하니 이 또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봉헌'이란 말보다 더 아름답고 좋은 말은 없을 것입니다. 봉헌이란 말 하나에 삶의 중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의미가 환히 계시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허무와 무의미의 삶이 아니라 의미 충만한 삶임을 깨닫게 해 주는 말입니다. 이미 봉헌이란 말 안에 하느님이 우리 삶의 전부임이 드러납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행복,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사랑, 거룩한 봉헌, 끝이 없습니다. 

어제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미국 뉴튼수도원에서 약 3개월의 내적순례여정을 끝내기에 앞서 하느님이 주신 참 좋은 선물의 날이 었으니 봉헌의 삶을 사는 아름다운 두 자매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봉헌 축일 미사 전, 초 축복후 촛불을 들고 행렬할 때의 모습처럼, '주님의 촛불'이 되어 주위를 밝히며 봉헌의 삶을 살았던 두 자매님이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2,22ㄴ). 

짧은 구절이지만 저에겐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 한구절 안에 요셉, 마리아 부모의 신앙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엊그제 1독서 히브리서 중 한 구절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히브11,13ㄱ). 

지극히 평범한 기술이지만 저에겐 앞서의 말씀과 더불어 무한한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봉헌의 삶을 살다가 믿음 속에 죽어감도 큰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봉헌의 삶을 살 때 주님을 만납니다. 복음의 시메온도 한나 예언자도 경건하게 일편단심 주님께 봉헌의 삶을 살다가 성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요셉 마리아 부부도 예수 아기를 봉헌하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시메온의 찬미가를 통해 봉헌하는 예수 아기가 바로 주님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주님을 만나 감격에 벅차 노래하는 시메온의 찬미가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우리 수도자들이 끝기도 시 잠자리에 들기전 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감미로운 찬미가입니다. 


제가 여기 뉴튼수도원에서도 끝기도 때 영어로 바치는 이 찬미가 곡의 아름다움은 내내 잊지 못할 것입니다.

봉헌의 삶을 살 때 주님을 만납니다. 어제 두 분(오은정 레오나르다, 김성주 아나시타시아) 자매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아, 오늘이 자매님들에게, 또 저에겐 봉헌 축일입니다. 자매님들은 저를 통해, 또 저는 자매님들을 통해 주님을 만나 하루를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출국에 앞서 그 먼 LA에서 저를 만나러 불야불야 방문한 오은정 자매 부부였습니다. 그동안 석연치 않게 느꼈던 모든 회의(懷疑)의 구름이 완전히 걷힌 날이었습니다. 

즉시 오은정 자매 부부(나르다. 로마노)를 격려했고 인정했습니다.


"건강한 영성입니다. 그대로 기도생활에 전념하셔도 됩니다. 

1.자매님이 쓰신 책(깨어나는 기도; 온은정, 황인수 글: 성바오로) 내용도 좋고, 

2.든든한 후견인인 황인수이냐시오 신부님이 계시고, 

3.이렇게 좋은 남편의 전폭적 신뢰와 존경이 있기에 자매님의 영성은 아주 건강합니다. 부부동행함으로 부부일치의 바탕이 마련됐으니 이보다 더 좋은 증거는 없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는데 자매님의 적극적 현실적 투신의 삶이 자매님의 영성을 보증합니다.“


그대로 살아있는 아름다운 성경책처럼 느껴지는,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부부의 봉헌의 삶이었습니다. 

광야를 찾아 미국에 왔다는 자매님의 고백도 깊은 울림을 줬고, 한국에선 부부싸움도 잦았는데 미국에 와선 일체의 부부싸움이 없어졌다며 아내에 대한 깊은 신뢰와 우정을 표현하는 형제님의 진솔한 고백도 좋았습니다.


또 이에 앞서 뉴튼수도원을 방문하여 저에게 고백성사를 본 후 픽업하여 뉴악 공항으로 안내한 후, 두 부부를 태우고 이후의 여정에 동행했던 김아나스타시아 자매님의 봉헌의 삶도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전주교대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경기도 광명시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복무했던 분이었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잘 안 보는데 그날은 아들을 픽업하러 맨하탄에 가야 하기에 날씨 확인 차 맨하탄을 클릭했더니 나르다 자매님이 뉴튼수도원의 프란치스코 신부님을 방문한다는 정보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꼭 신부님을 만나야 겠다는 일념으로 지낸 터에 즉시 나르다 자매님과 연결하여 이렇게 만남이 성사됐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웬지 꼭 신부님을 만나고 싶다는 강렬한 끌림이 있었습니다.“


좌우간 두 자매님은 하느님과 현실에 깊이 뿌리내린 건강한 열정과 영성에  지혜롭고도 강한 생활력을 지닌 분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든든했습니다. 두 자매님 모두 봉헌의 삶에 충실하다 저를 통해 주님을 만났고 저 또한 아름다운 영혼의 두 자매님을 통해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거룩한 봉헌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거룩한 만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바로 봉헌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봉헌에 주님은 축복으로 응답하심을 깨닫습니다. 말라키 예언자 역시 봉헌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그는 은 제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진정 주님을 믿는 이들은 모두가 영적 레위의 자손들입니다. 

주님은 봉헌의 삶을 사는 이들을 부단히 깨끗하게 하시어 당신께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십니다. 

어제의 하루를 주님께 의로운 제물로 봉헌함으로 서로의 만남을 통해 주님을 만남으로 깨끗해지고 새롭게 충전된 자매님들과 저의 삶이 되었습니다. 

수도자와 사제는 물론이요 믿는 모든 이들이 봉헌의 삶에로 불림을 받고 있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일상의 모두가 봉헌이요, 주님께 봉헌의 삶을 살 때 거룩한 삶이며, 삶의 의미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봉헌 중의 봉헌이 마지막 죽음의 봉헌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봉헌의 삶에 항구할 때 축복된 봉헌의 죽음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과 함께, 자신을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아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 2,2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주님 봉헌축일입니다.

예수님도 어려서 하느님께 바쳐진 몸이셨군요.

사실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하느님께 봉헌하셨더랬지요.

백일 잔치 때도 돌 잔치 때도 세례 때도...

우린 모두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다만 기억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살아가면서

"아! 정말 내가 하느님께 바쳐진 몸이구나!"

깨달아 알게 되면 그제야 제대로 나를 봉헌하고 싶어지지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맘대로 쓰소서."


이렇게 특별하게 봉헌된 사람들이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내가 아는 수도자들에게 축하드리고 그들을 위해 주모경 한번 바쳐 주십시오.

봉헌된 신분임을 잃지말도록...




봉헌된 축성의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나자렛에 머물던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또한 오늘은 1997년부터 교회가 ‘축성(봉헌)생활의 날’로 정하여 주님께 삶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부모는 당시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였다. 주님께서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봉헌되신 이 날 다 함께 우리의 봉헌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주님께 삶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도록 하자. !


라틴어 ‘콘세크라씨오’(consecratio)는 우리말로 봉헌과 축성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핵심적인 말이다. ‘봉헌’이란 인간 편에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과 선을 주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배타적으로 유보시키고, 감사와 찬미의 응답으로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다. ‘축성’은 인간의 자발적인 사랑과 희생과 헌신에 대해 하느님 편에서 축복해주시고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시켜주는 것이다. 우리네 삶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라면 ‘봉헌된 축성’ 또는 ‘축성된 봉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축일에 듣는 말씀들의 주제는 봉헌이다. 봉헌이란 거룩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만 유보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힘으로 노력으로 거룩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봉헌이 참될 때 그분은 우리를 축성하여 주신다. 희생 없는 봉헌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희생은 자신의 어떤 것을 포기하고 참아 받는 그 이상의 훨씬 더 깊은 뜻이 있다. 시메온의 고백처럼, 예수님께서는‘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인데(2,34), 그분과 함께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성모님의 고통은 십자가 밑에 이르러 극에 도달한다. 신앙인의 희생은, 곧 자신을 온전히 희생한 예수님의 구원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봉헌은 나의 일부를 일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때에만 바치는 희생이 아니라, 전인격적이며 항구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봉헌은 ‘남김없이 건네줌’이며 ‘되돌려드림’의 삶이다. 정결예식은 히브리인들이 에집트에서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될 때 그들의 맏아들들이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맏아들 예수는 생명을 내놓고 피를 흘림으로써 궁극적인 해방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임을 깨달아 머뭇거림 없이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하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깨끗하고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라는 말라키의 말씀처럼 우리의 봉헌은 늘 대가나 인정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리라!


우리의 봉헌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가르침을 재현하는 삶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 증거가 되어야 하며 이는 곧 예언자적인 소명을 일깨워 준다. 축성된 삶이란 그저 자신의 내적 생활만을 추구하거나 순수영성주의에 빠져 안일하게, 그리고 초월적인 신비나 자신의 내적인 만족만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하여 참된 사랑과, 하느님의 진리, 복음적 가치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중대한 사명을 받았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살아있는 복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봉헌생활은 교회생활의 ‘필수 부분’이며,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잠에서 깨어나 주 예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기 위한 철저한 자기 봉헌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적 가치의 풍성한 표현이 되어야 하리라.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고, 구원의 희생에 자신을 일치시키며, 모든 것을 기꺼이 되돌려드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야말로 인류 성화에 대한 더 완전한 표현이 될 것이며, 이 세상에 복음적 가치를 일깨워 주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예언자적인 소명인 것이다. 우리 모두 ‘주님 봉헌 축일’과 ‘축성생활의 날’을 맞아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의 원점을 확인하면서 나날의 삶이 그분께 드리는 더욱 철저한 사랑의 봉헌이 되어 세례의 축성을 꽃피울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모으도록 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리가 주님께 바쳤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통과 기쁨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우리의 삶이란

봉헌의 여정입니다.


봉헌은

주님의 영광에

함께하는 기쁨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봉헌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가야할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기쁨은

봉헌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향기는

봉헌의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며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봉헌한다는 건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우리 내면에

뿌리내리게 하는 건

봉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삶은

사랑의 깨달음으로

공동체와 함께하는

기쁨이 되게 합니다.


봉헌은 주님과

함께 가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새롭게 합니다.


삶을 축복해주는

봉헌이야말로

가장 큰 평화입니다.


생명의 참뜻은

봉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품게되는

봉헌생활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기쁨임을

믿습니다.


봉헌은 가장 큰

평화입니다. 




봉헌된 맏아들

김유겸 신부님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요한 1서가 우리에게 밝혀주듯이 봉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누가 맏아들을 내보였는지, 누가 맏아들을 바쳤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건 분명 하느님이다. 봉헌이란 것은 자신에게 속한 것을 치명적으로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숨겨야 할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남과 나누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는 것, 혹은 그 이상이다.

그래서 상처와 왜곡과 파괴를 동반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이 일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은폐와 소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진정으로 함께해야 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 치명적으로 나눌수록 함께 함의 정도는 커진다. 맏아들을 내어주신 분은 하느님이고 그래서 상처받은 분은 하느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함께하길 원하신다. 요한 1서는 이것을 하느님께서 드러내신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주님 봉헌 축일이 보여주는 신비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봉헌을 하느님 당신만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행위를 인간의 손으로 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주님의 신비스러운 행위에 인간을 동참시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서 신비를 행하게 된다.

주님 봉헌 축일에 교회가 복음 말씀을 통해 열어주는 장면은 마리아 와 요셉이 예수님을 하느님 앞에 봉헌하는 장면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자신의 공간을 열어 개방하고 말씀이 현실이 되도록 출산한 이이며 그의 신심 깊은 배필이자 협조자이다. 이는 곧 교회와 그와 혼인한 배필들이자 협조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현실이 되신 말씀을 성전에 모시고 오자 성전은 그 참된의미를 되찾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맡기신 그일들은 교회를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행위로 인해 성전은 그 의미를 되찾는다.


교회와 그의 신심 깊은 협조자들은 미사성제를 통해 사람이 되신 말씀을 예물로 바친다.

그 순간 인간은 하느님의 행위를 자신들의 손으로 행함으로써 차원을 건너뛰게 된다.

봉헌은 우리에게 내려진 하나의 선물이다.

선물인 이 행위는 시메온의 말처럼 영혼이 칼로 꿰찔리는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행위는 분명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할 것이다.




서공석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부모들이 모세의 법이 명하는 대로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출생 40일 만에, 딸이면 출생 80일 만에 어머니는 정결례 절차를 밟아야 하는 당시 유대교의 법이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시므온의 노래는 루가복음서를 쓴 사람이 채집하여 수록한 초기 교회의 노래입니다. 루가복음서는 마리아의 노래(1,46-55), 즈카리아의 노래(1,68-79), 시므온의 노래, 이렇게 세 개를 채집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하였다는 예언,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공동체가 겪은 갈등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겪어야 했던 아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언 내용은 예수님을 체험한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역할을 해석하면서 발생한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원의대로 살고 싶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와의 이해관계 안에서 보려합니다.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어느 정도의 자기중심적 생각이 감춰져 있습니다. 자기의 직장이나 사회를 보는 우리의 눈은 더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잘 되는 데 필요한 재물이고, 지위이며, 권력이라 생각합니다. 신앙도 그런 것을 얻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말은,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주변을 보지 말고, 하느님 중심으로 주변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 하느님은 심판하고 벌주고 군림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나온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탈출 33,19) 선하신 분입니다. 사람도 하느님을 본받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하도록 유도하는 지침인 율법이었습니다. 하느님에게 봉헌하라는 말은 사물을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보고 처리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봉헌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선한 실천을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맏아들을 봉헌하는 것은 이제부터 태어나는 모든 자녀를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보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실천을 바꾸기 위한 봉헌의례입니다.


일반 종교 현상에서 봉헌은 인간이 신에게 무엇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그 봉헌으로써 신의 마음에 들고 신은 그에게 어떤 혜택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과 신 사이에 거래를 성립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높은 사람 혹은 강한 사람으로부터 혜택을 받아내기 위해 하는 행동과 같습니다. 신에게 먼저 무엇을 바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로부터 비롯된 봉헌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마음을 움직여서 혜택을 받아낼 대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변하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봉헌하는 것은 하느님의 시선이 그 봉헌된 것 위에 내려오게 해서, 그 시선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보고 처리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현세적 사물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시선으로 부모와 주변을 보고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효도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쉽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형제자매가 서로 상대방의 시선으로 보는 것을 우애(友愛)라고 말하고, 부부가 서로 상대방의 시선으로 보는 것을 부부애(夫婦愛)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병 고침과 용서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에게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세례에서 끊어버릴 것과 믿을 것을 약속하면서 하느님에게 봉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 위에 내려오도록 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위에 내려오셨다는 사실도 우리는 믿었습니다. 현세적인 우리 욕심의 시선을 접고, 하느님의 숨결을 존중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봉헌생활이라는 말은 수도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세례에서 봉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숨결로 새롭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자기와 자기 주변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세상의 한 생명체로서 누릴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을 보면서 그분의 숨결이 이 세상에 살아있게 노력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비우고 베풀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세례로써 봉헌된 사람이면, 우리도 그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우리 자신만 보는 시선과 우리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넘어,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그분과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높이기보다는 비우고, 많은 것을 가지기보다는 베풀고, 이웃을 미워하고 무관심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새로운 마음을 찾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교회의 오랜 관례에 따라, 오늘은 앞으로 일 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여 성당과 각 가정에 비치합니다. 하느님에게 봉헌된 우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촛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당 전례 때나, 가정에서 함께 기도할 때 즐겨 촛불을 밝힙니다. 우리가 세례에서 봉헌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빛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비우고, 베풀고, 사랑하는 우리의 노력은 연약하지만, 하느님의 빛으로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촛불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빛입니다.”(마태 5,14).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일이 나타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세상을 버리고 하느님을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세상에 작고 약한 빛 하나를 더 밝히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 청소년 담당 신부님으로부터 지난 1월 27일에 있었던 청소년들의 축제인 바다의 별 축제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문제를 50번까지 모두 맞춘 사람이 마지막에 골든벨을 울릴 수 있는 ‘성경 골든벨’이라는 축제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선 마지막까지 골든벨을 울린 친구는 없었다고 합니다. 단지 한 아이가 아깝게도 마지막 50번 문제를 풀지 못해서 골든벨을 울리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아이에게 마지막 문제를 풀기 전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하네요. 

“마지막 문제까지 다 맞춰서 골든벨을 울리게 되면 상금을 받게 되는데, 받은 상금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요?”

중학교 1학년 학생이랍니다. 어린 학생이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지만 이 학생의 대답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었지요.

“받은 상금은 모두 우리 본당의 성전 건축금으로 봉헌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고 나서야 여유가 있을 때 주님께 봉헌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구를 도와 주냐?’고 말하면서 자신이 항상 우선되는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워 나간다는 것은 한도 끝도 없지요. 욕심이란 마치 깨진 독과 같아서 절대로 나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으면서 감동적인 사람들을 종종 뵙게 됩니다. 시장에서 행상을 하시기에 그리 넉넉하지도 않은 살림을 가지고 있지만, 벌써 몇 차례나 꽤 많은 돈을 신학생을 위해 써 달라고 보내주신 분이 계십니다. 또 교통사고로 받은 합의금을 가지고 오신 어떤 생활보호대상자 할머니도 계십니다. 가난해서 이제까지 봉헌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뜻밖의 돈이 생겼다면서 신학생들을 위해 쓰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이밖에도 너무 많은 분들이 자신도 부족하면서 아낌없는 봉헌을 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봉헌하는 이런 분들을 보고 주님께서는 얼마나 기쁘실까요? 문제는 남은 그렇게 봉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내 자신은 그러한 봉헌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정결례를 마치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그 자체로 온전한 봉헌이지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하신 당신의 큰 봉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큰 봉헌으로 인해 우리 모두의 구원이 보장되는 커다란 선물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주님의 봉헌을 늘 생각하면서, 주님을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늘 가져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관점으로는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가장 기뻐하실 행동이고,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구원의 길이 내 앞에 더욱 더 활짝 열려질 것입니다. 


강하다는 것은, 약함을 아는 것. 약하다는 것은, 겁을 내는 것. 겁을 내는 것은, 소중한 것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소중한 것을 가졌다는 것은 결국 강하다는 것.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봉헌을...

어느 성당에서 미사를 마친 후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꼬마 아이가 제게 와서는 막대 사탕 하나를 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탕이에요.”

많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하나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먹기 싫어서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사를 해 준 신부님이라고 또 자기 마음에 든다고, 하나밖에 없는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막대 사탕을 제게 준 것이었지요. 

문제는 제가 사탕을 전혀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것들을 전혀 입에 대지도 않거든요. 따라서 누군가가 제게 사탕이나 초콜릿을 선물로 주면 그대로 다른 사람 줄 때가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막대 사탕은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막대 사탕을 보면 그 아이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봉헌도 이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님께 봉헌한다고 해서 주님한테 어떤 이득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을 기쁘게 받으실 뿐입니다. 

봉헌은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랑에서 나오는 봉헌이 가장 중요합니다.




봉헌된 삶이란...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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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된 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는 사제나 수도자들의 삶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하지만 넓은 의미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봉헌된 삶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봉헌된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봉헌(奉獻)이라는 말의 의미를 한 번 집고 넘어가보도록 하지요.

봉헌이란 누군가를 위해서,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받 들다’는 의미의 봉(奉)이라는 한자와 ‘바친다’ 혹은 ‘드린다’는 의미의 헌(獻)이라는 한자가 뜻하는 것처럼, 봉헌이란 무엇인가를 누군가 혹은 어떤 사명을 위해,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두 손으로 받들어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봉헌이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봉헌된 삶이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과 죽음으로 드러내신 복음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모아집니다.

주머니 속에서 잡히는 돈 몇 푼을 헌금 바구니에 넣는 것을 봉헌이라 하지 않습니다.

불우한 이웃에게 보이는 어설픈 동정이나 적선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양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의 손에 들려 성부께 봉헌되는 날입니다.

성부의 뜻대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마지막 잔까지 마시게 될 예수님의 거룩한 봉헌을 암시하는 날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거룩한 봉헌의 시작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봉헌된 삶으로 불리어졌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작년 주님의 봉헌 축일에 정리해본 마음을 부끄럽지만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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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

삶을 당신께 바치겠다고 한 그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기도와 사연 많은 눈물,

벗들의 따뜻한 눈빛,

순수했던 나의 가슴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많은 강과 많은 산을 만났습니다.

일어섬과 넘어짐의 시간들.

그 안에는 늘 당신께서 계셨지요.


사랑 하나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당신께 내어드리는 것이

내 삶이어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참 많이도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곁에 있어주셨지요.


내 안의 너무 많은 것들 때문에

그저 당신을 뿌리치고 싶었던 날들.

그러함에도,

봉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시간들.


어제의 일만이 아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싸워야 할 나와의 다툼입니다.


나 이상의 아픔을 가지고

언제나

내 곁에 계실 당신.


다시 일어서렵니다.

당신 종이 여기 있습니다.




봉헌하면 생명, 가지려 하면 독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을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상처’에 관한 내용인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서는 ‘치유’에 관한 영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됩니다. 문방구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존심 때문에 소원이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먼저 학교로 뛰어갔던 같은 반 남자친구, 바쁜 탓에 소원이 머리를 묶어줄 수 없었던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는 못된 아저씨에게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의 착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소원이는 결국 그 악마 같은 사람 때문에 대장까지 파열되어 평생 옆구리에 호스를 차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살아난 것만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한 아이와 가족의 피해는 생각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이밉니다. 그렇게 비싼 일인 실에 입원을 해야만 했고 가족은 마음고생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게 됩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는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친구가 적금을 털어 도와주고 아이들까지 소원이를 위해 모금을 합니다. 혼자 학교로 갔던 같은 반 남자 친구는 자기가 함께 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후회 섞인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치유되기는 소원이의 상처는 너무도 큽니다. 특히 옆구리로 변이 새어나와서 그것을 닦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가 그 무시무시한 범죄자처럼 느껴집니다. 아빠가 병실에 들어오면 부끄러워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둘이 있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조금씩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않고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 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 덕분으로 학교도 갈 수 있었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나쁜 아저씨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누군가가 자기를 아프게 한 만큼 그만큼 큰 사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원이는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자신의 사탕을 나누어주며 아빠에게 농담도 하는 그런 아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던 범죄자는 짧은 쾌락으로 자신의 온 인생을 맞바꾸었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어야지 그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다가는 그것이 내 안에서 독이 되어 나를 죽이게 됩니다.


봉헌은 사랑하면 당연히 주어야 하는 내 자신이고 내 자신의 희생입니다. 소원이 아빠는 소원이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소원이는 그 제물을 받아들였고 다시 인형 속에 들어가 있는 아빠의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봉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향이 자신을 태워 아름다운 향기를 올려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한다면 자신을 소진시키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우리 조상들은 가난해지려 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 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지만 금지된 것까지 가지려 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관계는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당신의 봉헌으로 기워 갚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당신 것이라 여기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 봉헌해 드립니다. 그분이 당신의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봉헌은 우리 죄와도 직결됩니다. 죄란 마땅히 봉헌해야 할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푼젤’이란 디즈니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불로초와 같은 꽃이 한 송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로초는 수백 년을 산 마녀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불로초를 감추어놓고 자신만 사용하여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신을 한 왕비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왕비와 아기까지 생명이 위험해지자 온 나라 사람들은 그 생명의 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마녀가 감추어둔 꽃을 뿌리째 뽑아서 왕비를 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쁜 공주가 태어났는데 그 공주의 머리카락은 공주가 노래 부를 때마다 금색으로 변하며 그것을 만지는 사람은 누구나 치유되고 젊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마녀는 그 공주를 몰래 훔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깊은 산 속 높은 탑 위에 가두어 두고 자신만이 또다시 그 생명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탑 위에 한 도둑이 숨어들면서부터입니다. 그 도둑은 왕궁에서 왕관을 훔쳐 달아나다가 그 탑까지 숨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주는 몰래 그 훔친 물건을 감추고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 주면 나중에 그 왕관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엄마라고 속여 왔던 마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주가 그 왕관을 돌려주면 그 남자는 바로 떠나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도둑은 자신이 훔친 왕관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라푼젤을 참 부모님에게 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마녀는 더 이상 공주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다 그렇듯이 왕과 왕비는 자신의 딸을 찾아준 그 도둑과 자신들의 딸을 혼인시킴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됩니다. 


라푼젤이라는 공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긴 했지만 결국 우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봉헌할 줄 알면 그것이 비로소 우리 것이 되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이 생명나무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봉헌하시기에 그분을 되돌려 받습니다. 우리 또한 그 분을 영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면서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는 못된 소작인들 때문이 주인의 외아들인 당신이 돌아가셔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봉헌하지 않고 내 것으로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면 그 생명나무는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어버립니다. 마녀가 라푼젤을 자기 혼자의 것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왕국과의 관계단절을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취하려고 했던 어린이 성추행범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봉헌축일은 우리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고 오롯이 다시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면 그것은 내 안에서 독으로 변하여 나를 죽이게 됩니다.


경주 최씨가 오랫동안 만석꾼 집안으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집 가보가 ‘돈을 똥처럼 여겨라!’라는 집안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오래 있으면 그것이 대변이 되어서 그것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으면 똥독이 옮아 나를 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생명은 나에게 생명을 주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봉헌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복음의 핵심은 봉헌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봉헌입니다.


봉헌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친히

당신 자신을 봉헌하십니다.


봉헌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은 봉헌을 통해

더욱 깊어집니다.


봉헌은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는 참기쁨입니다.


봉헌은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변화시켜줍니다.


봉헌은 회심과 정화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봉헌은 모든 것이

선물이 되게 합니다.


봉헌은 십자가 또한

생명의 기쁨이 되게합니다.


봉헌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주님의 길입니다.


주님의 방법은

봉헌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심이며 행동입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가장 강한 하느님의 힘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봉헌입니다.


봉헌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실 분은

봉헌의 주님이십니다.


어리석은 자아속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봉헌하십시오!"

봉헌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신비의 길입니다.


부르심은 봉헌을 통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신앙을 여물게 하는 것은

봉헌입니다. 



수녀님께서 전화를 받으신 뒤, 제게 “신부님, 전화왔는데요. 혹시 ** 은행 *** 팀장 아세요? 신부님을 무척 잘 아시는 분인가 봐요.”라면서 전화를 돌려주셨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 은행과 제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혹시 강의 부탁 때문에 그런가 하면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에 다른 은행에서 강의를 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네, 전화 바꿨습니다. 조명연 신부입니다.”

그분께서는 저를 무척이나 잘 아는 것처럼 친근한 말투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저는 ** 은행 *** 팀장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저의 직원들과 함께 찾아뵐까 합니다. 이번에 좋은 저축 상품이 나와서요. 신부님 계시는 성소국 직원들에게 선물도 좀 드리고, 저축 상품 안내 좀 해드릴까 합니다. 괜찮죠?”

조금 어이가 없었습니다. 무척 친한 사이인 것 같다는 수녀님의 말씀과는 달리 자신의 은행 상품 홍보 차 방문하겠다는 것이니까요. 저는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오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성소국에는 저와 수녀님 빼고는 직원 한 명입니다. 이 한 명에게 저축 상품 안내하려고 오시려고요?”

이 말에 무척이나 당황하시더군요. 아마 교회 주소록을 보셨나 봅니다. 그리고 ‘성소국’이라고 하니까 직원이 많은 상당히 큰 부서 정도 생각했나보지요.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저한테 다가왔던 것이고 그 결과는 “죄송합니다.”만 외치고 얼른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알아야 장사도 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 역시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엉뚱한 신앙심을 가지고 이상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만을 전할 뿐입니다. 이를 우리는 많은 사이비 종교의 피해 사례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낳으신 뒤, 40일째 되는 날,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고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지금까지의 많은 사건들을 통해 분명히 깨달았던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시지요. 그런데도 보통의 사람들이나 따라야 하는 율법을 따르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율법을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임을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율법을 무시하시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철저히 따랐던 것이지요. 


율법을 몰랐다면 이런 행동을 하시지 않았겠지요. 오히려 커다란 교만에 빠져서 하느님 위에 올라서려는 큰 잘못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큰 정신을 잘 아셨기 때문에 자신을 낮춰서 진정한 봉헌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봉헌의 삶을 사셨던 성모님과 요셉 성인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께서 원하시는 봉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많이 알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면서 더욱 더 겸손의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해의 눈은 작은 틈을 통해서도 위대한 원리를 볼 수 있다(프랜시스 베이컨).


선택

지난 2007년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이탈리아 테너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성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파바로티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스스로 진로를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즉, 두 가지의 갈림길. 수학 선생님과 성악가 모두 욕심이 났던 것이지요. 선생님이 되는 것은 실패할 걱정이 없는 안전한 길이지만, 성악가가 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수학을 잘했기 때문에 수학 교사가 되고 싶었고, 성악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

이때 파비로티의 아버지께서 두 개의 의자를 가지고 와서 서로 멀리 떼어 놓은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얘야, 너는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의자에 동시에 앉을 수 있겠니? 앉기는커녕, 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이야.”

하나의 의자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파바로티는 부모에게 30세가 되어도 성악가가 되지 못하면 다른 길을 모색하겠다고 약속한 뒤 음악의 길로 뛰어들었고, 결국 세계 3대 테너 중의 하나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선택의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때 어떻게 하십니까? 혹시 모든 것을 다 선택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욕심보다는 꿈과 희망을 채울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봉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뵙게 됩니다.

봉헌의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은

지향점입니다. 


같은 지향을 가지고

수도공동체는 기꺼이 같은 길에 투신합니다.

이렇듯 봉헌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투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투신이야말로

가장 높이 평가되어야 할 봉헌입니다. 


그래서 봉헌은

복음을 더 신뢰하게 만들며

그리스도께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개방하게 합니다. 


살다보면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봉헌은

흔들리는 우리 삶의 모든 한계점을

겸손하게 인정하게 만들며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주님께

주저앉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세워

걸어가게합니다. 


봉헌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듯이

봉헌은 이렇듯 지극한 사랑의

구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까지도

기쁘게 봉헌하게 됩니다. 


봉헌은 순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한 부활로써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주님 봉헌을 통해

우리는 새생명, 새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봉헌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주님을 통해 우리의 약함까지도

나약한 본성까지도

주님을 드러내고 주님을 들어 높이는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삶은

단지 인간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봉헌을 통해

그리스도적인 차원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빵과 포도주의 봉헌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성변화인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봉헌처럼

우리 또한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을 아낌없이 주님과 이웃을 위해

봉헌하는 주님봉헌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복된 봉헌의 삶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봉헌밖에 없습니다. 


참다운 봉헌은

언제나 자신의 십자가와 결합되는

봉헌입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변화되는 봉헌의 시간,

봉헌의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미국 어느 대학의 수학과 2학년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이 어느 날 시계를 잘못 보아서 수업 시간에 늦게 들어갔습니다. 수업 중간에 몰래 들어간 이 학생은 교수님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고 단지 칠판에 적혀 있는 두 문제를 보고는 노트에 적었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교수님께서 과제를 칠판에 적으시곤 했기 때문이었지요. 따라서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과제는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노트에 정성껏 적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이 두 문제를 열심히 풀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다음 수업 전까지 필사적으로 문제를 풀려고 했지만, 너무 어려워 한 문제밖에 풀 수밖에 없었지요.

다음 수업 시간에 그는 교수님을 찾아가 과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 한 문제밖에 못 풀었다면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제를 본 교수님은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네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다. 그런데 네가 이걸 풀었다니, 정말 놀랍구나.”

사실 당시 강의 시간에 교수님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이것은 잘 풀리지 않는다.’라고 공개한 문제를 학생들에게 소개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학생은 몇 십 년 동안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를 과제인 줄 알고 풀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학생의 논문은 논문 랭킹 1위의 학술지에 실리게 되었고, 그는 후에 아주 유명한 수학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 학생이 처음부터 강의를 들었다면 이 문제를 과연 풀었을까 라는 가정을 해봅니다. 아마 세계적인 석학들도 풀지 못했다는 말에 그 역시 쉽게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단순히 과제라고 생각했고 이 과제를 풀기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모두가 포기했던 문제를 풀려고 했고 또 풀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또 내 자신을 별 것 아닌 존재로 격하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까지도 쉽게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결국 내가 못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 안에서 스스로 막고 있었기에 못하는 것이지요.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만을 기억하는 주님 봉헌 축일이지만, 우리는 이보다 한 단계 이상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우리 역시 하느님께 봉헌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하느님께 봉헌할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다면서 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것보다는 하느님께 받아야 할 것만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조차 하지 못하면서, 대신 마음속에 온갖 불평불만을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 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도 내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히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주님을 닮는 것이며, 주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둔한 사람의 마음은 입밖에 있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입은 그의 마음속에 있다.(벤자민 프랭클린)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것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주인공 앤디가 모든 교도소의 수감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를 틉니다. 그 결과 그는 일주일 동안 독방에 갇히게 되지요. 독방에 갇혔다 나온 주인공 앤디에게 동료들이 “독방은 어땠어?”라고 질문을 던지자, 모차르트를 계속 들어서 견딜 만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에 “녹음기를 갖고 들어갔느냐?”고 묻자,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며 “여기에 있지.”라고 말하지요. 머리와 가슴 속에 있는 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머리와 가슴 속에 있는 ‘꿈’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바로 나만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내게 꿈이 없다며 주님께서 주신 나의 삶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지요. 나만의 꿈, 나만의 희망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커질수록 세상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도 커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학교 때 아주 친했던 세 친구가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다른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신부, 또 한 사람은 목사,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나자 마자 신부와 교수는 “우리 한 잔 해야지?” 하면서 술을 주문합니다. 이 둘은 담배까지 피우면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지요. 이렇게 담배까지 피면서 술을 마시는 두 사람이 못마땅했던 목사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핀다네. 그런데 참 불공평한 것 같아. 목사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 당장 난리가 나는데, 신부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건 왜 괜찮은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렇게 불평스러운 목사 친구의 말에 교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아니, 그걸 여태 몰랐단 말이야? 신부들은 가장 중요한 ‘동정’을 하느님께 바치고 결혼을 안 했으니 무슨 재미로 사나? 따라서 술, 담배 정도의 재미는 인정해 줘야지. 그런데 목사들은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재미 볼 것은 다 보면서 거기다가 술 담배 재미까지 허락해 달라고? 그게 더 불공평한 것 아니야?”


이 교수 친구의 말이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봉헌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봉헌에 대한 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돈의 액수에 따라 열심한 신자로 구분을 짓기도 하며, 또한 그 사람의 봉헌하는 모습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형편없는 사람, 부족한 사람으로 판단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봉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바치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십일조를 꼭 봉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는 자신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의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그 십분의 일인 2시간 30분 정도는 주님을 위해서 봉헌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당에 앉아서 기도만 2시간 30분 동안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기쁘게 할 만한 행동 역시 하나의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이 생활들을 봉헌한다면 주님께서는 더욱 더 기쁘게 받아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하루를 생활한다면 내가 쓰고 남은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기쁘게 봉헌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고 있는 것은 혹시 찌그러지고, 병들고, 내게 이차적인 것들은 아닌지요.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노령에 얻은 귀한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 명하실 때, 과연 납득이 갔을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좇아 이사악을 제물로 드리지요.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과연 지금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지요?


오늘 하루의 십분의 일을 주님께 봉헌합시다. 방법은 알아서~~~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b단조 작품23('좋은 글' 중에서)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b단조 작품23은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가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사랑 받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작곡한 차이코프스키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며 모스크바음악원의 학장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이곡을 헌정할 생각으로 악보표지에 <루빈스타인님께>라는 문구를 쓰고는 음악원 교수들과 루빈스타인 학장을 초청해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차이코프스키는 루빈스타인의 표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루빈스타인은 이 작곡에 대해 혹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너무나도 형편없네. 도저히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니야. 물론 몇 군데는 괜찮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다시 손봐야 하네, 제대로 다 고친다면 다음 번 나의 음악회에서 연주해 주겠네."

이 말을 들은 차이코프스키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빈스타인에게 반박했습니다.

"죽을지언정 단 한음도 고치지 않을 것이요. 나는 이대로 출판할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 동안 너무나도 믿었던 루빈스타인에게서 그런 모욕적인 발언을 듣고는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악보표지에 써놓았던 <루빈스타인님께 >라는 문구를 지우고는 그 대신해서 <한스 폰 뷜로님께 >라고 고쳐 썼습니다. 한스 폰 뷜로는 당시에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이었습니다. 뷜로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이 음악을 받고 는 흥분하여 말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작품을 작곡가께서 제가 직접 받다니요! 이 기쁨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한스 폰 뷜로는 1875년 이 곡을 보스턴에서 세계 최초로 연주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세계적인 음악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처음 루빈스타인에게 받았던 그 치욕과 모멸감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878년 루빈스타인에는 파리박람회에서 러시아의 대표로 초청받아 이 음악을 연주하여 엄청난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 후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잘못을 차이코프스키에게 사과했고 차이코프스키 역시 이 음악의 부족한 독주부분을 수정하여 일단락되었다 합니다.

차이코프스키의 곡이 엉터리라 몰아붙였던 그가 그 곡을 연주하여 열렬한 찬사를 받으면서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루빈스타인과 같은 세계 최대의 음악가도 자기 분야에서 실수를 하는 것으로 보아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남에게 모욕을 주어도 좋을 만큼 뛰어난 사람은 없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어떤 은행의 금고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먼저 백지 수표가 입을 열었지요.

“이봐! 아랫것들, 내 이마빡에 뭐가 쓰여 지겠나?”

“그야 액수가 써지겠지요 뭐.”

“잘 맞추었어. 그러니까 나는 내 이마빡에 써지는 액수만큼이나 팔자가 급변한다는 말씀이야.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하고 아예 같이 누워있기 조차 창피하다 창피해! 그래 너희들은 어디 어디 다녀봤냐?”

그러자 만 원짜리 지폐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 그래도 나는 화폐 단위로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지요. 일류 레스토랑은 물론이고, 고급스런 곳은 다 다녀봤지요. 다시 말해서 상류사회는 주욱 살펴보다가 조금 쉬러 들어 왔다고나 할까?”

그러자 오천 원짜리가 쭈뼛거리며 입을 떼었습니다.

“저는 만 원짜리 형님처럼은 못돼도 그래도 저 나름대로 꽤 인정은 받고 지냈어요. 초일류는 아니래도 중산층 이상으로 대접 받으며 중, 상류층 이곳저곳은 다 돌아다녀 봤다고요.”

그러자 수표가 천 원짜리 보고 말했지요.

“야, 꼬마야, 너는 어디를 다녀봤냐? 어디 말해봐.”

그러자 천 원짜리가 기가 팍 죽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저는 아무데도 자랑할 만 한데는 없고요, 다만 온 성당 봉헌 바구니에는 다 들어가 봤어요.”


물론 봉헌을 하는데 액수의 차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성의 없는 봉헌이 아닐까요? 정성스럽게 봉헌을 하는 모습이 아니라, 성의 없이 마치 쓰레기통에 휴지 버리듯이 봉헌 바구니에 집어넣는 모습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의 없는 봉헌을 하시는 분들은 물질적인 봉헌뿐만 아니라 마음의 봉헌들 역시 성의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성의 있는 기도를 하고 있는지요? 또한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나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주님께 대한 봉헌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은 아닌가요? 결국 내가 주님께 바치고 있는 것은 찌그러지고, 병들고, 이차적인 것들만 바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늘그막하게 얻은 아들 이사악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당신께 제물로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십니다. 만약 여러분들은 어떠하실 것 같습니까? 하느님의 이 명령이 납득이 가십니까? 이것만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거부하실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좇아서 이사악을 제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과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희생하여 봉헌하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지금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내가 주님께 바칠 봉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생각의 차이('좋은 글' 중에서)

공자가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는 조카 공멸에게 물었다.

"네가 일하면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은 것이 무엇이냐?"

공멸이 대답했다.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를 잃었습니다. 첫째는 일이 많아 공부를 못 했고, 둘째는 보수가 적어 친척 대접을 못 했으며, 셋째는 공무가 다급해서 친구와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그후 공자는 공멸과 같은 벼슬을 살고 있던 제자 자천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자천이 대답했다.

"저는 잃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를 얻었습니다. 첫째는 배운 것을 실행해보게 되어 배운 내용이 더욱 확실해졌고, 둘째는 보수를 아껴 친척을 접대하니 더욱 친숙해졌고, 셋째는 공무의 여가에 친구들과 교제하니 우정이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어제는 인간적으로 너무나 추웠습니다. 아마 작년 11월부터 지금까지의 날 중에서 가장 춥지 않나 싶습니다. 글쎄 방송국을 가기 위해서 밖으로 나서는 순간 다시 방으로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옷을 너무 얇게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그래도 방송국 간다고 아저씨 복장을 벗고서 약간 세련된 옷을 입었는데, 이렇게 추운 날씨에 이렇게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미친놈’ 소리 들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아저씨 복장을 하고서 방송국으로 갔습니다.

아무튼 오전에는 평화방송과 KBS방송을 들러서 방송녹음을 하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도가 얼어서 물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드라이기와 토치로 얼은 수도를 녹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보일러에 점검 등이 들어옵니다. 보일러 쪽은 제가 잘 모르기에 보일러 기사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보일러에 들어가는 수도관이 얼었다고 합니다. 또다시 열심히 드라이기로 녹였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보일러 수도관을 녹이면서 이런 생각들이 많이 나더군요.

‘이게 뭔 짓이야.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특히 보일러실은 무척 춥거든요. 바람도 세차게 불어오고... 그러한 상황에서 1시간 가까이를 있다 보니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아무튼 그렇게 1시간의 노력 끝에 보일러 수도관을 녹였고, 보일러가 잘 돌아가더군요.

그런데 오늘 새벽 1시. 생각보다 춥다는 생각에 잠에서 깼습니다. 글쎄 보일러에 또다시 점검 등이 들어온 것입니다. 또다시 얼었나 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보일러실에는 등이 없어서 날이 밝아야 작업을 할 수 있거든요. 따라서 아침이 올 때까지 저는 냉방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장작난로에 나무를 집어넣었는데 제대로 타지 않습니다. 아마도 젖은 나무를 넣었나 봅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드는 생각들.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지겹다. 지겨워…….’

그러면서 오늘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쓰기 위해서 매일 미사 책을 펴는 순간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었습니다. 즉, 주님께서 성전에 봉헌된 것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 날을 교회에서는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을 하고, 우리들의 생활이 주님의 삶과 행동으로 될 수 있도록 주님께 봉헌하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날, 저는 이른 새벽부터 지금의 제 처지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던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집도 없어서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한 끼의 식사를 걱정하시는 분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더군다나 저는 교회를 위해서 제 한 몸을 바치겠다고 봉헌한 몸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약간의 불편을 가지고 불평을 던지고 있었으니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지금의 삶을 불평의 삶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의 주인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불평 하나가 바로 주님께 드리는 불평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성전에 봉헌될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왜 성전에 봉헌되어야 합니까? 따라서 당신의 능력으로 성전에 봉헌되지 않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순순히 세상의 규칙을 따랐던 것은 우리들 역시 불평하지 않고 당신께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지금의 삶은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은총의 날로 만드세요.


날이 춥다고 꼼짝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움직이세요. 특히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경우에는 더욱 더 많이 움직이세요.


행복한 주인공이 되세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나중에' 라고 미루며 시간을 놓치는 사람은 불행의 하수인이 됩니다.

힘들 때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의 당선자이고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 낙선자입니다.

사랑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사람은 이미 행복하고,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만 섭섭한 사람은 이미 불행합니다.

미운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반비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정비례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연합군 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불행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누구는 저렇게 사는데 나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수시로 닦고 조이고 가르치는 사람은 행복기술자가 되겠지만 게으른 사람은 불행의 조수가 됩니다.

아침에 '잘잤다' 하고 눈을 뜨는 사람은 행복의 출발선에서 시작하고, '죽겠네' 하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불행의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도움말을 들려주는 친구를 만나면 보물을 얻은 것과 같고, 듣기 좋은 말과 잡담만 늘어놓는 친구와 만나면 보물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웃는 얼굴에는 축복이 따르고, 화내는 얼굴에는 불운이 괴물처럼 따릅니다

미래를 위해 저축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의 주주가 되고, 당장 쓰기에 바쁜 사람은 불행의 주주가 됩니다.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불행 다음에 행복이 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표를 예약한 사람이고, 불행은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의 번호표를 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행복 합격자가 되겠지만, 포기하는 사람은 불행한 낙제생이 됩니다. 남의 잘됨을 기뻐하는 사람은 자신도 잘되는 기쁨을 맛보지만, 두고두고 배아파 하는 사람은 고통의 맛만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취미를 가지면 삶이 즐겁지만, 나쁜 취미를 가지면 늘 불행의 불씨를 안고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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