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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1년 2월 15일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1.02.15|조회수955 목록 댓글 0

제1독서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4,1-15.25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demand for a sign


말씀의 초대

카인은 죄악을 다스리지 못하고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을 보고 깊이 탄식하시며, 그들은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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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은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을 보고 깊이 탄식하시며, 그들은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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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카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하느님께 제물을 드리다가, 농부인 형 카인은 화가 나서 양치기인 아우 아벨을 죽인다(제1독서). 바리사이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시며,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는 두 형제가 주님께 각자의 소출을 바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카인의 곡식과 달리 아벨의 봉헌물에 눈을 두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궁금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차별을 말합니다. 카인이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듯이 보이는 하느님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가장 잦은 시도는 히브리서의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아벨이 카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바쳤다는 것입니다(히브 11,4 참조). 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짚으며 하느님의 행위에 반영하였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축업을, 가나안 민족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우월을 강조하고자 카인(농업)보다 아벨(목축)의 봉헌을 하느님께서 선호하셨을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봉헌물이 카인의 것보다 낫지 않았는데도 받으셨다면 주님은 불의한 분이 되시는 것은 아닐까요? 하와는 첫 아기를 낳고 “내가 주님과 함께 한 사람을 얻었다.”(창세 4,1의 직역)라며 카인이라고 부르며 무척 소중히 여긴 듯합니다. 반면에 아벨에 대하여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은 듯합니다. 아벨은 부모의 아들로 제시되기보다는 카인의 동생으로 덧붙여진 사람으로 소개됩니다(창세 4,2 참조). 

이렇게 우리 앞에 대조되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열망이 반영된, 하느님과 함께 얻은 카인과 그와 비교할 바 못되는 아벨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와의 두 가지 불의를 봅니다. 카인에게 쏟은 과도한 애정과 아벨에게 보인 무관심 또는 무정입니다. 어머니에게 지대한 관심과 소유의 열망을 받고 있는 카인과 달리 아무런 관심도 애정도 받지 못하는 아벨의 선물을 하느님께서 받아 주심은, 어쩌면 차별당한 불의한 아들 아벨에게 하느님 편에서 베푸실 수 있는 보상이 아닐까요? 아벨이 여전히 하느님 앞에 또 사람들 앞에 존재함을 인정하시는 하느님의 행위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아벨의 선물을 받으시자 이제껏 연기처럼 존재하던 아벨이 드러나게 되고 카인은 그의 옆에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의 첫 형제는 형제애를 이루는 데 실패합니다. 사실 성경은 단 한 번도 카인을 아벨의 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아벨의 경우는 카인의 동생이라고 일곱 번이나 말합니다(4,2.8.9.10.11 참조). 우리는 주님 앞에서 형제애를 이루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소유와 질투의 욕망으로 형제를 잃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살핍시다.(정용진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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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인류 첫 번째 형제인 카인과 아벨의 깊은 우애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질투와 시기로 시작된 감정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끔찍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형제 간의 갈등 원인은 하느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시고, 반대로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인이십니다. 카인의 제물이 아벨의 제물보다 정성이 없었습니까? 성경 본문 어디에서도 그런 내용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냥 그것은 하느님 마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번만큼은 하느님께서 잘못하셨고, 원인을 제공하신 것이라고.

그런데 창세기 저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과 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는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눈은,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리면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카인에게 관심을 표현하시는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벨보다 카인을 더 돌보아 주시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하느님의 말씀과 설득에도 한마디 대꾸도 없이, 들로 나가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행동과 판단과 계획이 우리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고, 더 나아가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카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을 걱정하며 설득하십니다.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느님께서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으로 가득한 우리를 오늘도 계속하여 설득하고 계십니다. 죄악을 다스릴지 아니면 죄악에 맡길지, 그 선택은 하느님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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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는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시며 깊이 탄식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위대한 업적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의심하였고, 그래서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사명을 주실 때, 표징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표징을 거부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표징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자기 입맛에 맞는 표징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행위를 불신앙의 표시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라 살아야 하지, 하느님을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는데도, 그것을 표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불신앙에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2,000년 전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다면 우리 신앙이 더욱 굳건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사 안에서 빵과 술의 형상으로 당신을 내어 주시는 주님을 믿을 수 없다면, 실제로 그분을 본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성체로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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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실증적인 증명을 통해 합리적으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체험을 통하여 얻은 실천적 지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전자는 논리적 방식의 실험을 통해 얻은 자연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문명사회를 낳았고, 후자는 논리보다는 추론과 경험을 통한 인격적 친교로 얻은 신뢰에 기초한 다양한 형태의 인류 공동체를 만들어 냈습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증명되고 확인되어야 진실이라고 믿지만, 정작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수많은 형태의 믿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정말 하느님에게서 온 분이라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가치들, 곧 그들이 신뢰하는 방식으로만 진실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는, 눈에 보이는 가치들만 좇아 정작 우리 삶을 둘러싼 기적들을 보지 못하는 세대들에 대한 탄식이 들립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하느님의 표징을 잘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이 바친 제물을 다르게 받으셨을 뿐, 아벨을 카인보다 더 사랑하고, 카인을 미워했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이는 카인이 범죄한 뒤 두려워 떨 때 그에게 표를 찍어 주시어 목숨을 지켜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카인의 죄는 눈에 보이는 표징만 쫓고,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살인의 죄를 짓고도,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천연덕스럽게 양심을 거스른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은 우리 삶의 작은 기적들입니다. 내가 숨쉬고, 살아가는 순간이 기적이고, 내 마음 하나 추스르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며, 미움의 나락에서 용기 있게 손을 내미는 순간 얻는 평화야말로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참된 표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표징을 보이며 살라고 부르시지 않으실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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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주의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하느님의 기적을 보지 못한다. 영상 기술과 감각 산업들은 신화와 전설과 고전을 제거해 버렸고, 신앙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기적의 구호를 줄기차게 외친다. ‘경제 성장의 신화, 기적의 3D 기술, 공격용 신무기 개발 …….’ 세상은 신기술에 열광하지만 진정한 기적을 보지 못해 고독하다. 

한 농부 시인이자 문화 평론가는 ‘삶이 기적’이라고 했다. 생명은 신기술로도 만들 수 없는 기적이다. 죽음을 앞둔 병자를 살려 내면 기적이라 하면서 왜 병원에도 가지 않고 건강한 것에 대해서는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가? 하느님의 확실한 기적을 보면서도 어떤 징표를 보고 싶어 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과학은 인간성과 사회의 공동선을 발전시키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한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면서도 왜 인간은 변종되고 시대는 퇴행하는가? 왜 설 땅은 점점 좁아지고 물과 공기와 음식이 독극물에 오염되며, 햇빛은 줄어드는가? 인문 과학과 사회 과학은 발달하는데 왜 빈부의 양극화는 갈수록 극심해지고, 제국은 포악해지는가? 하느님 없는 과학의 모습이다.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삶에 감사하는 순간 하느님께서는 내 의식으로 현존하시며 축복하신다. 살아 있는 모든 이에게는 매 순간 기적을 체험하며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마을은 일하러 가기 전에 일과 기도를 바친다. “오늘도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일거리를 주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오늘 우리의 기도와 노동이 서로에게 평화와 기쁨의 선물이 되게 하시며, 수고와 정성마다 풍성한 결실을 주옵소서. 성체성사의 제물로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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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과 물고기 기적 후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손을 씻는 정결 예식 문제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두 번째 빵과 물고기의 기적 후에도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시비를 겁니다. 사실 그들은 여러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기적이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능력으로 땅에서 이루어진 것일 따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그들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믿고 싶지 않은 마음과 의도적인 악의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며 예언서에도 정통하다고 으스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병자들이 치유되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며 죄인들이 회개하는 모습 등을 인정하기 싫어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표징들을 외면하는 그들에게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주는 것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깊이 한탄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완고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는 앞을 볼 수 있으나 햇빛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야행성 부엉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장과 만족을 위한 일에서는 꽤 똑똑해 보이지만, 진리의 빛 앞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눈 뜬 장님입니다. 소중한 것은 열린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보입니다. 예수님께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을 때, 우리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올바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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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기적을 보여 주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합니다. 조건을 다는 것이지요. “돈을 벌게 해 주면 성당에 다니겠습니다.” “사업이 성공하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찬가지 이야기입니다. 적극적인 요구는 아니더라도 이와 비슷한 마음으로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십니다. 신앙은 조건을 단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고 맡기면 어느 날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그러니 늘 청해야 할 것은 ‘인내와 절제’입니다. 참지 못하고 객기 부리는 마음을 ‘조절하게’ 해 주십사는 것이지요. 아직도 투정 부리는 신앙이라면 어린이의 신앙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1코린 13,11). 그러니 우리 역시 어른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조건’을 달지 않는 일입니다. 

은총은 반드시 옵니다. 일상에 충실하면 ‘삶의 기쁨’은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나의 신앙’으로 내가 끌고 가야 합니다. 억지로 ‘끌려가는’ 신앙이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 때문에 신앙이 힘들다.’ ‘누구 때문에 인생이 괴롭다.’ 이런 것은 모두 조건을 다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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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이 왜 이렇게 자꾸만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지요?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수없이 치유되고, 여러 표징들을 목격하거나 들었을 텐데, 무엇이 모자라서 예수님께 논쟁을 벌이며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지요? 설령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청대로 어떤 표징을 다시 보여 주신다 해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나 있을런지요?

마음이 닫힌 사람은 그 무엇을 해도 믿지 못합니다. 우리 속담에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는다.”는 말처럼, 마음이 닫힌 바리사이들은 설령 예수님께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신다 해도 또 다른 트집을 잡고서 믿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믿음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받으셨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루카 4,3) 하는 유혹을 하는 셈입니다.

눈을 들면 우리는 늘 기적 같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아침 태양, 푸르른 하늘과 구름, 저녁노을, 밤하늘의 별과 달, 오늘 우리가 만난 사람 …… 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경이롭습니다. 이런 눈이 없으면 주님께서 우리 삶에 주시는 특별한 은총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특별한 기적을 체험한다고 해서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어떤 기적만을 주님께 기대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 같은 모습이 되고 맙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께 충분히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저 주님을 믿고 따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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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늘의 기적을 보여 주면 승복하겠다고 합니다. 조건을 다는 것이지요. 믿음에 조건을 다는 것은 성숙한 자세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 줘야만’ 믿겠다는 것은 어린이의 신앙입니다. 답답한 것은 우리 인간이지 주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들 앞에서 답답한 것이 없으셨습니다. 

‘하도 그러니까 참석하겠다.’ ‘하도 저렇게 말하니까 들어 주겠다.’ 이것은 끌려가는 신앙생활입니다. 주일 미사를 ‘참석해 준다.’는 자세로 임한다면 어떻게 은총이 함께할는지요? 강론 말씀을 ‘들어 준다.’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어떻게 깨달음이 찾아올는지요? 

‘자꾸만 읽으라니까’ 읽는 성경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읽다 보면 그저 평범한 말이 어느 날 ‘칼날’이 되고, ‘따듯함’이 됩니다. 은총은 늘 그렇게 갑자기 다가옵니다. 그러니 앞에서 끌고 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뒤에서 밀고 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들은 가끔씩 ‘이러이러한’ 신부님 때문에 성당에 못 다니겠다고 합니다. 신부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저러한’ 교우님들 때문에 사제 생활을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모두가 조건을 다는 일이 아닐는지요? 믿음의 길 역시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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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바로 앞 내용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허기진 군중 사천 명가량을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배불리 먹이신 뒤 그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였다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기적이 일어난 뒤 오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기적에 대한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요청에 탄식하며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참된 의도는 감탄을 자아내는 신비한 표징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외적인 기적 사건 속에 감추어진 내적 신비를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기적의 표징만을 요구하는 이들에게는 그 기적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인간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참된 의미를 간과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신비한 기적만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참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일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가 했던 모든 작품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자 한 기자가 찰리 채플린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 작품이 모두 히트를 했는데 그중 최고로 꼽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저 역시 그가 했던 영화를 거의 봤기 때문에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최고의 작품은 기계화되는 인간을 보여준 ‘모던타임즈’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답은 이러했습니다.

“다음 작품입니다.”(Next One.)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오직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과거에 얼마나 많이 연연하는 우리일까요? 미래에 그리고 현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떠올릴 필요가 없는 과거인데, 또 떠올린다고 해서 바뀌지도 않는 과거인데, 많은 이가 이 과거에 연연하면서 현재를 만족스럽게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표징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고쳐 주셨고,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또 빵의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그밖에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얼마나 많이 보여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요구했던 표징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가져다줄 정치적 메시아를 원했다는 것을 기억할 때, 그들은 사람을 고치고 배 불리 먹고 또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 그들이 보고 싶은 표징은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보여주었던 하느님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표징은 전혀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표징은 그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불완전한 인간의 눈으로 알아볼 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많은 표징을 보고서도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도 없으면서 계속 표징만 보여달라는 억지만 부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은 과거에 연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래를 바라보게 하면서 현재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이미 우리 곁에 왔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바라보면서 현재를 살고 계십니까?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바로 당신에게 달렸다. 그리고 가치란 당신이 선택하는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장 폴 샤르트르)


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 전에 광고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먼저 아웃도어 광고입니다.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장소를 여행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광고를 보면서 세상에는 모험과 구경거리가 가득한 곳임을 깨닫습니다. 뒤이어 화장품 광고가 나왔습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모델을 보면서 세상에는 미남, 미녀들이 정말로 많구나 싶었습니다. 다음은 텔레비전 광고였습니다. 최신 과학기술이 접목된 텔레비전을 알리는 광고를 보면서, 최신기술에 발맞춰서 살아야 할 것만 같습니다.

광고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광고의 목적은 소비입니다. 그래서 광고를 보면서 ‘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를 목적으로 촬영을 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광고를 보면서 위축되기도 합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장소를 여행하기에는 시간이 없고, 화장품 광고에 나오는 모델와 달리 외모가 형편없고, 최신기술에 발맞춰 살기에는 머리가 따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소외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소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광고를 보지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와 다른 것들과 비교하는 것에 매이게 되면 자유로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 짓고 살아가는 것, 대단한 표징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만 그런줄 알았는데, 예수님 시대에도 특별한 표징만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있었던가 봅니다. 몰지각한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장탄식이 제 귓전까지 들려오는 듯 합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코 복음 8장 12절)


해도해도 너무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명확하고도 뚜렷한 표징이었습니다. 죽어가는 불치병 환자들을 말씀 한 마디로 치유시켜주셨습니다. 이미 죽은지 사흘된 사람마저 되살려주셨습니다.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먹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노골적으로 또 다른 표징, 더 큰 표징, 더 신비스럽고 강력한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과 몰염치함에 크게 실망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뒤로 하고 호수 건너편으로 넘어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분명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어디 가나 특별한 현상을 찾습니다. 대규모 신앙 행사에 참석하면, 오늘은 뭐 없나? 하고 하늘만 올려다 봅니다. 촛불을 켜고 기도할 때도, 촛농이 조금만 이상하게 녹아내려도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지역 교구장님의 정식 교령에 의해 미사, 전례, 성사 집전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순명하며 선량한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교회 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나주 추종자들 역시 그렇습니다.


2011년 3월 30일자 공식 서한을 통해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나주 문제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단을 내린 바 있습니다.

“율리아의 추종자들이 기적의 사례들이라고 보내온 것들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심과는 거의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또한 신앙교리성은 나주의 기적이라고 알려진 사건들에 대해 교황청의 입장이 광주대교구 교구장의 입장과 동일하다는 것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주 추종자들은 교황청이 조만간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승인할 것이라는 허위사실을 계속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거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판단 유보’니 ‘순례 허용’이라고 강조합니다. 더 새빨간 거짓말이니 절대로 속아넘어가시면 안됩니다.

그들이 단골로 써먹는 미끼가 있습니다. 유치찬란함의 끝판왕입니다. 피눈물, 참젖, 황금향유, 율신액(창시자의 소변)...그런 어이없는 대상들이 치유와 은총, 축복과 구원의 아주 중요한 도구랍니다. 

이토록 어색하고 불편한 신심을 아직도 추종하고 따라다니는 분들의 조속한 회심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가 지니고 있는 가장 1차적인 모습은 공번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모습,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거나 부담스럽다면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편안하다면 방향성이 괜찮은 것입니다.

특별하고 신비스런 표징이나 기적에 너무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에 펼쳐졌던 표징이나 기적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이제 공은 우리 손에 넘어왔습니다. 표징과 기적은 이제 우리 손으로 행할 때가 온 것입니다. 보잘것 없는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주신 것, 하루 하루 하느님 은총 속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표징이요 기적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 짓고 살아가는 것, 대단한 표징입니다. 나도 힘겹지만 나보다 더 힘겨운 이웃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 엄청난 기적입니다. 




하느님의 표징은 영광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시고,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셨는데도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었던 라자로가 살아나는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우리를 먹여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은총과 진리’가 있는데도 그것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겐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으로 자녀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가르침을 주는데도 여전히 그분이 아버지임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믿을 마음만 있다면 어머니를 보고 아버지 사랑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태국 광고에서 어머니 없이 자신을 키우는 아버지에 대한 딸의 마음을 닮은 편지 내용이 있습니다.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아빠다. 아빠는 가장 멋있다. 가장 똑똑하고 가장 영리하고 친절하고. 아빠는 나의 슈퍼맨이다. 아빠는 내가 학교에서 잘하기를 원한다. 아빠는 대단하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을 한다. 직업을 가지는 것에 대해. 그는 거짓말을 한다. 돈을 버는 것에 대해. 그는 거짓말을 한다. 피곤하지 않다고. 그는 거짓말을 한다. 배고프지 않다고. 그는 거짓말을 한다. 왜냐하면, 나 때문에.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아빠 사랑해요.” 


아빠는 왜 거짓말을 할까요? 사랑은 생색내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런 모습을 아이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런 아버지를 보며 차리라 학교에 가지 않는 편이 아버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빠의 사랑은 자녀에게 점차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곧바로 느낀다면 그 사랑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높은 경지에 도달한 성인들도 예수님의 아주 작은 당신의 계시에 까무러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수난당하시는 예수님상을 보고 엎어져서는 한없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는 미살 때 성체를 바라보며 한 시간이 넘도록 눈물만 흘리셨다고 합니다. 비안네 신부는 사제가 성체의 참 의미를 알게 된다면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이끌어준 교회가 있기에 다행입니다.

따라서 먼저 교회가 베푸는 은총을 감당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아버지는 이를 위해 처음엔 자신을 조금 숨깁니다. 사랑은 생색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생색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면 잘 자랄 수 없습니다. 사랑의 본성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내어주는 순수함에 있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알게 된 아이가 제대로 자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어머니가 존재하듯, 이를 위해 교회가 존재합니다. 먼저 어머니를 믿지 못하면 아버지께 갈 수 없고, 교회를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께 갈 수 없습니다.


김창옥 강사의 아버지는 술과 폭력과 도박, 그리고 폭군에다 호랑이였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아버지가 가정을 파괴하는 주범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고 술도 마시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으려 했습니다. 김창옥 강사가 지금도 딸에겐 매우 자상하지만, 쌍둥이 아들에게는 대하는 게 매우 어색한 이유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자녀에게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가 임플란트하며 아들에게 돈을 내줄 수 없느냐고 전화를 했습니다. 아들은 당연히 내주겠다고 말했는데, 귀가 들리지 않는 아버지는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둥이냐? 아버지다……. 미안하다….”

아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미안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을 생전 처음으로 들었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자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입니다. 다 컸는데도 그렇습니다.

그 이전까지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린 적이 없었던 김창옥 강사는 공항에서 아버지에게 용돈을 처음으로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돈을 세며 뒤돌아 걸어가셨습니다. 그 어깨가 축 처지고 한 다리를 저는 뒷모습을 보았을 때 아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울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아주 조금 사랑했어도 자녀는 그 사랑을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기둥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렸을 때는 다 아버지처럼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무너진 작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모든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압니다. 아버지가 커야 자식도 기가 죽지 않았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자신을 무너뜨리고 갈아 넣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이 두 상반되는 모습에서 처음엔 자신의 사랑을 숨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역할을 어머니에게 맡깁니다. 아버지는 무너지면서도 굳건한 기둥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선 하느님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자녀를 위해 파견받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리스도께 파견받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사랑의 표징이고, 교회는 그리스도 사랑의 표징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보면서도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을 보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직접 보여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자녀에게는 하느님과 십자가에 달린 두 모습을 동시에 보여줄 수 없는 딜레마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보면서도 그리스도를 보여달라는 그런 사람에게 더는 표징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가장 완전한 표징이 어머니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가장 완전한 표징은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 십자가의 참 의미를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 태어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월 20일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은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습니다. 선거의 결과가 나오면 승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패자에게는 위로의 인사를 전하는 것입니다. 현직 대통령이 선거에서 지는 경우에는 새로운 당선자를 백악관에 초대해서 차를 마시고, 직접 백악관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평화로운 권력인계를 위해서 협조하는 것입니다. 정권은 교체되지만 국가의 안보와 경제는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대통령의 취임식에 전직 대통령이 함께하면서 축하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245년 동안 이어진 아름다운 전통이며, 자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민주주의의 ‘꽃’이 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은 경제력과 군사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식 민주주의와 합리적인 삶의 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46대 대통령 취임식은 예전의 아름다운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선거의 결과에 불복하였고,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당선인에게 축하의 인사를 하지 않았고, 백악관에 초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지지자들에게 행동하라고 선동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급기야 1월 6일에는 미국 국회의사당에 폭도들이 난입하였고,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경제력과 군사력은 세계 최고일지 모르지만 정치와 민주주의에서는 실망을 넘어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번이나 의회에서 탄핵되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방역도 실패하였으며 가장 많은 확진자와 사망자가 나오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국민에게 선택받지 못한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아름답게 퇴장했으면 박수를 받았을 것입니다.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비슷한 경우를 보았습니다. 카인과 아벨이 하느님께 제물을 드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아벨이 하느님께 선택받았습니다. 카인은 아벨에게 축하의 인사를 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제물이 선택받지 못한 이유를 생각하고, 반성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정성이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제물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동생에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하느님께서 받아주신 제물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겸손하지 않았던 카인은 동생을 시기하였습니다. 동생만 없으면 하느님께서 제물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국민에게 선택받지 못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지낼 수 없듯이, 하느님께 선택받지 못했고, 동생을 죽였던 카인은 고향에서 쫓겨났습니다.


성서는 인류의 첫 형제가 서로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사랑하며,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역사는 담담하게 이야기 합니다. 조선의 개국 당시에 ‘왕자의 난’이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권력 때문에 사랑해야 할 형제들이 서로 싸우고, 죽였습니다. 1950년에 있었던 ‘한국전쟁’은 사상과 이념 때문에 사랑하는 동포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던 비극의 역사입니다. 끊임없이 분쟁이 벌어지는 중동의 전쟁은 역시 형제들의 다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인데 지구촌에는 가난, 굶주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류의 사망 원인은 자연재해와 질병 그리고 다른 동물의 공격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형제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국어책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형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은 이제 막 장가를 간 동생을 위해서 자신의 논에서 소출한 벼를 동생의 논으로 가져다줍니다. 동생은 자녀들이 많은 형을 위해서 자신의 논에서 소출한 벼를 형의 논으로 가져다줍니다. 달빛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에 형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1997년 우리나라는 IMF라는 높은 파도를 스나미처럼 맞이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형님은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님을 제가 모시게 되었습니다.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으면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가족들이 서로 아껴주며 살아가는 형님과 형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벌써 24년이 지난 일입니다. 돌아보면 그런 일도도 다 감사할 뿐입니다. 덕분에 제가 효도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고, 존중하며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영적 여정에서 유혹이 다가올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창세 4,3-5)

편애처럼 느껴지는 주님의 반응에 대해서 성경 저자는 "땅의 소출"과 "맏배들과 그 굳기름"이라는 말을 통해 함축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벨의 제물인 "양 떼 가운데의 맏배와 굳기름"은 가장 소중한 제물을 가리키지요. 모든 맏배는 주님의 것이고, 특히 짐승의 굳기름은 '피와 비슷하게 일종의 생명의 자리로 여겨질'만큼 중요했다고 하지요.

이에 비해 카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맏물"이나 상태를 가늠하는 표현 없이 그저 "땅의 소출"이라고만 적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이들은 두 제물의 차이를 통해 봉헌의 마음가짐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요.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7)

카인이 아벨을 질투하자 주님께서 카인에게 이르십니다. "옳게 행동"하지 않은 구체적인 사례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이미 하느님 눈앞에는 드러났을 터이지요. 화답송에서 시편저자는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라고 주님의 마음을 노래합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분께서 무엇이 필요해서 제사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이와의 충실하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성을 기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유혹은 우리의 빈틈을 노립니다. 우리의 옳지 못한 탐욕과 욕망의 실마리를 붙잡고 영혼의 문턱까지 들어선 죄악이 그 앞에서 덮칠 틈을 노리며 도사리고 있습니다. 기회를 노리는 유혹에 문을 열어줌으로써 죄악으로 기우느냐, 마음을 바로 세워 오히려 그 죄악을 다스리느냐는 영적 여정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갈림길입니다.


오늘 복음은 당신을 시험하려는 바리사이들에게 단호히 대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마르 8,11-12)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이나 치유, 구마 기적으로는 그분의 신원을 인정할 수 없었던 걸까요? 그래서 자신들이 납득할 때까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한 걸까요? 하지만 어떤 표징도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겁니다. 제도권 밖에 머무르며 율법의 문자보다 정신을 중요시하는 예수님은 기존 종교 기득권자들에게 오히려 위협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미 답을 가지고 출발한 이 논쟁은 진리에 대항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몇 가지 그럴듯한 기적들을 보여주시면 당신 신원에 대한 그들의 동조를 끌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는 당장의 우쭐한 명예와 인정받음, 소속의 안정감이 중요하지 않으시지요. 바리사이들의 불신 앞에서 솟아나는 그분 마음의 깊은 탄식은, 겉은 멀쩡하나 속은 단단히 병든 가련한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나옵니다.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3)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목자의 사랑에 익숙한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모습은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이 서슬 퍼런 단호함! 이 결단!

예수님은 그렇게 악을 내버려두고 떠나십니다. 지금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때가 아님을 아시니까요. 유혹이 우리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미끼를 던질 때, 호기심에 몇 마디 주고받으며 기회를 주다가 말려들어가기 일쑤인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단호한 결단은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이야말로 주님이 카인에게 말씀하신 "죄악을 다스리는" 방법일 겁니다. 온전히 죄악과 분리되어 살아갈 수 없는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인 우리에게도 그 죄악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악에게 기회를 주지 말고 얼른 그곳을 떠나 주님께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은총의 사순 시기를 기다리며, 주님의 단호함에서 배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모든 걸 아시는 주님 앞에서는 '대충 좋은 게 좋은 거'가 아니라, '아닌 건 아닌 것"입니다. 자기애와 분별 없고 무질서한 애착을 단호히 박차고 떠나,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 진정한 사랑을 바치는 단계로 넘어가는 영적 여정을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새해 축제의 여운을 뒤로하고 이제 지척에 다가온 사순 시기를 하루하루 잘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소명>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에서

오지 않은 것이

무엇이랴


땅에서

솟지 않은 것이

무엇이랴


모든 것에

하늘과 땅이

담겨있으니


하늘을

우러르고

싶거든


땅을

아우르고

싶거든


지금여기

곁을 두루

보듬어야지




땅에 살며 하늘을 향해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사람은 땅을 밟고 하늘을 꿈꾸며 산다. 땅을 밟지 않고 하늘을 향해살면 신선은 될수 있으되 사람은 될 수 없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홀로 떨어져 살 수 없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 문제가 생겨나면 홀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함께 풀어가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문제해결의 능력, 힘이 부족하면 서로 힘을 모아 메꿀 줄도 알아야 하고 인간 한계에 직면할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한다.


처절한 배고품이 있었다. 군중은 예수님 곁에 있느라 외딴 터에 하루 종일 먹지 못하고 저녁을 맞이했고, 한 번은 예수님 곁에 있느라 사흘을 굶었다. 한 끼만 굶어도 배고푼데 사흘을 굶었으니 군중이 집결된 현장은 배고품으로 가득찼다. 예수님만이 땅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두 번씩이나 제자들과 함께 찾아낸 작은 음식을 모아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제자들에게 직접 빵을 나누어 주라 하셨고 오천 명, 사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 남은 빵만도 넘쳐났다. 

제자들이 현장에서 빵을 나누어 주는 즐거움은 있었는지 모르나, 빵의 분배는 생각없는 노동 수준이었다. 배고품의 땅, 현장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였는지 그들 머리 속 생각은 모자랐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문제해결의 방법을 알지도 못했다. 제자들은 나누어 주고 있음에도 뜻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현장과 무관한 자기들 생각에 머물러 신선을 사는 뜬구름이 되어 있다.

또 바리사이들은 어떠한가? 한 술 더 떴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보여 달라는 그들을 보고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셨다.(마르8,12)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땅을 밟고 살면서 배고품의 현실을 외면하고 예수님께 하늘의 표징을 보여달라는 그들에게 어떠한 표징도 보여주시지 않고 그들을 버려두고 떠나 가셨다. 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늘을 향해 꿈꾸는 이상주의 경건주의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현실과 동떨어진 신선들이다. 제자들 또한 바리사이파 수준에 머물고 있다. 나눔과 베품이 있었음에도 단순노동은 삶의 동력을 꺼내지 못했다.


결코 바리사이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다. 땅을 외면하고 자기 좋을대로 하늘만을 향해 사는 자, 그들의 이름은 위선자일 뿐이다. 경건주의자들이 하는 일이란 사람을 굶겨 죽이고 모함하여 쳐 죽이는 일을 할 뿐이다. 




<믿음과 표징>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월요일>(2021. 2. 15. 월)(마르 8,11-13)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1-13).”


1) 이 이야기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로 사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르 8,1-10).

두 이야기가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면, 바리사이들은 ‘빵의 기적’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고서, “그 정도의 기적으로는 당신을 믿을 수 없으니,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그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을 보이시오.” 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일으키실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과 ‘표징’을 요구했다는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예수님께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하신 것은, 그들이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표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으려고 하지도 않고 회개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래서 ‘구원’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셨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시비를 걸면서 다른 표징을 또다시 요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떠나신 것은,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 것인데,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표징을 보여 주지는 않겠다는 뜻이고,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의 이야기는 믿음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삶을 보고,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35-39). (어떤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했고,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요한 1,41-42).

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가서,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라고 증언했고, 예수님을 만나보라고 권고했습니다(요한 1,43-46).

필립보와 나타나엘의 이야기에도 표징에 관한 말은 전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는 ‘증언’에서 ‘증언’으로 이어진 교회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선배 신앙인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교활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믿음을 증언’합니다.)


3) 마르코복음서 끝부분에, 예수님께서 표징들을 통해서 제자들을 도와주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라는 말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주셨다는 뜻입니다.(제자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일으키는 기적은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항상 ‘말씀’이 먼저이고, ‘표징’은 그 ‘말씀’을 도와주는 보조수단입니다.(‘말씀’을 믿는 일이 먼저이고, ‘표징’은 그 믿음을 더욱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수단입니다.) 따라서 ‘표징’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믿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은총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마르 13,22-23).”

이 말씀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으키는 ‘표징과 이적들’은 표징과 기적을 흉내 내는 속임수일 수도 있고, 속임수가 아닌 실제로 놀라운 어떤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놀라운 어떤 일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면 모두 거짓 표징이고, 거짓 기적입니다.(마귀들도 표징과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고을에는 전부터 시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술을 부려 사마리아의 백성을 놀라게 하면서 자기가 큰 인물이라고 떠들어 댔다. 그리하여 아이에서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힘‵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사도 8,9-10).”

사람들은 마술에 현혹되어서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보는 사이비 종교의 모습입니다.


5) 이미 예수님을 믿고 신앙인이 되어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말씀’을 듣지는 않고, 또 ‘말씀’대로 살지는 않고, 기적만 바라면서 신기한 일과 놀라운 일만 찾아다닌다면, 시몬이라는 마술사에게 현혹되어서 거짓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처럼 되거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표징만 요구했던 바리사이들처럼 될 것입니다.(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의 길을 떠나서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됩니다.)

‘기적’은 내가 바란다고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나의 힘으로 내가 내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기적은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판단하실 때에 예외적으로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표징이 없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말씀’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예수님 믿는 이들 위대하고 큰 인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황당하다 어이없다 기막히다 어처구니없다는 말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상대할 필요 없을 땐 웃어넘기거나 아예 말대꾸도 하지 않는 게 상책.

하느님능력 말씀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를 지켜주셨지요.


그 즉시 안 보이는 하늘 망치 내려와 머리 때려 죽여도 할 말 없지요.

역시 하느님사랑 예수님의 관용은 정말 대단하셔서 감탄 절로 납니다.

예수님 믿는 이들 이래서 위대하고 큰 인물이라 해야 당연하다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며 하느님 가족이지요.

예수님을 의심하면 우리 내버리고 떠나버려 우리는 우주 고아 됩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와서 논쟁하며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이 시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사와 관해서 이야기 할 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표징’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나신 분이시며 원성사이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수련장에 있을 때 복사들에게 성사와 관한 강의를 할 때 원성사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모두가 세상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라고 했었습니다. 곧 복사들은 단순히 신부님을 도와 제단에서 봉사하는 사람을 넘어서도 삶 속에서도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이 세상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곧 다른 이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복음화의 모습이고 전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지혜의 눈. -우리가 카인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제1독서 창세기의 내용이 참 흥미롭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실감있게 마음에 와닿는 보편성을 띄는 내용들입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아담의 죄로 인해 줄줄이 죄의 세계가 열려가는 모습입니다. 오늘은 창세기는 카인이 아벨을 무자비하게 살해함으로 비극의 시작입니다. 살인 사건의 단초가 된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그 죄악을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상황에서 카인을 비난할자 누구이겠는지요? 카인 역시 질투와 분노의 보편적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하여 ‘카인의 후예’라는 소설도 있습니다. 저도 이런 유사한 추억이 있습니다. 초중등학교 시절 1.2등을 다퉜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때로 저 여자 애가 없었으면 내가 늘 1등을 했을 터인데 하는 생각도 언뜻 들 때도 있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카인이지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이름 석자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의 장군, 주유가 이른 나이에 병사하면서 평생 숙적인 제갈량을 두고 남긴 말도 생각납니다. “하늘은 이미 주유를 낳았는데, 어찌하여 또 제갈량을 낳았단 말인가(기생유 하생량;旣生瑜, 何生亮)!” 최대의 라이벌 제갈량을 낳은 하늘을 원망하는 주유 장군에게서 카인의 모습을 봅니다.


바로 이런 질투와 분노에 눈멀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카인입니다. 카인이 좀 더 냉정했다면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자신을 들어봤어야 했을 것입니다. 정말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와 겸손입니다. 참으로 카인이 주님의 알 수 없는 편애에 분노할 것이 아니라 이런 결정적 시험과 시련을 지극한 인내로 슬기롭게 견뎌냈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마음 깊이 담아두고 곰곰이 되새기며 끝까지 인내하며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견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조건반사적 감정적 ‘반응reaction’이 아니라 깊은 생각에서의 인격적 ‘응답respondence’이 필요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랬다면 주님께서도 카인이 한없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질투와 분노에 눈이 멀어 돌이킬 수 없는 살인의 범죄로 아우를 죽였습니다. 죽은 목숨은 다시 살릴 수 없으니 아무리 후회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평생을 살아도 그 죄의 아픈 상처는 안고 살아야 하니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전 민주화 운동중 자식들을 잃고 투사로 변한 어머니들의 ‘내 죽은 아들을 살려내라!’는 피맺힌 절규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주님과 주고 받는 대화도 의미심장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흡사 주님의 아담에 대한 ‘너 어디 있느냐?’의 물음을 연상케 합니다. 이때라도 카인은 죄를 고백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카인의 주님께 대한 분노와 불만이 가득 담긴 너무 안면몰수의 뻔뻔한 항의성 답변입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창세기 저자의 심리 묘사가 인간 본질을 깊이 뚫어 볼 정도로 참 심오합니다. 이어 아담처럼 카인도 삶의 터전에서 쫗겨나 유랑의 처지가 되었지만 주님의 보호는 계속될 거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자비는 계속됩니다. 비극의 역사지만 계속되는 삶의 역사입니다. 결국 아담-하와 부부는 카인과 아벨 두 아들을 잃고 말았으니 그 아픔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날에도 갖가지 불의로 인한 자녀들의 억울한 죽음으로 이런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어머니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비극의 역사지만 산 사람들은 슬픔을 이기고 살아내야 합니다. 주님은 다른 아들 셋을 선물하셨고 이어지는 하와 어머니의 고백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주셨구나.” 하면서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합니다. 

질투와 분노 역시 무지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탐욕, 질투, 분노, 어리석음으로 드러나는 무지의 병이 얼마나 인간의 고질병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니 평생 영적 전쟁이 무지와의 전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을 봅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아니라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으로 무지의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착각과 오해는 얼마나 많은지요!  어제 교황님의 “편견을 극복하고 타인의 삶을 품에 안으라.” 삼종기도후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당대 최고의 강론가 교황님의 강론 특징은 군더더기나 사적인 것이 전혀 없는 그러나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공적이며 보편적이며 본질적이라는 것이며 깊고 쉽고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은 그동안 예수님이 일으킨 무수한 표징을 보고도 하늘에서 내려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참으로 눈밝은 지혜의 눈, 혜안을 지니신 예수님은 이들의 유혹을 떨처 버리고 바람처럼 지체없이 떠나시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통쾌합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진퇴進退가 뚜렷한, 떠날 때 잘 떠나는 사람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세대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지혜의 여정은 떠남의 여정과 직결됩니다. 평생 무지와의 영적전쟁중인 우리들입니다. 영적 전사의 최고의 롤모델은 예수님 한분 뿐이십니다.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무지에서의 해방이요 지혜로운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와의 영적전쟁에 필요한 온갖 지혜와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부모님의 마음은 정말 하해와 같다는 말이 맞는가 봅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키우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다 들어 떠난 자식마저도 돌봐주시고, 심지어는 죄를 짓고 돌아온 아들도 나무라기보다 감싸 안아주시는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고 감사드릴 뿐입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카인은 동생 아벨을 질투하여 죽여버립니다. 그런데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 주 하느님께서는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0-12) 라고 벌을 내리십니다. 주 하느님께서 생명을 부어 넣어서 지어낸 사람에게서 생명을 빼앗아 간 죄인에게 똑같이 생명을 거둬들이는 벌을 내리시기보다, 단순히 추방형식의 벌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카인이 엄살을 핍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13-14절)

  그랬더니 주 하느님께서는 ‘너는 맞아 죽어도 싸다’라고 내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15절) 라고 전합니다. 그러시고는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25절) 라고 합니다.


  주 하느님의 이런 말씀을 듣노라면,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서 인간공동체에서 벌을 받을 수는 있어도, 주 하느님께서 생명을 불어넣어 지어내신 사람에게서 생명을 다시 거둬들이는 일은 주 하느님만의 권한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어도 언제나 재생의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돌아갈 수 있고, 언제나 되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인간 세상에서 ‘개과천선’이라는 말과 ‘회개’ 그리고 ‘용서’라는 말이 실제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 하느님의 이 자비로운 사랑에 경탄하고 감사드립니다. 

  사도 성 바오로의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오늘 나를 용서해주신 주님의 하해와 같은 사랑에 감사드리며, 나는 가급적 주님 사랑 안에서 사랑만을 하고, 나 스스로 악을 품음으로써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 하느님께 맡겨 드립니다.




표징의 필요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어떤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까? 그분께서 해를 멈추시거나, 달에 고삐를 채우시거나, 번개를 내리시거나, 풍향을 바꾸시거나, 그 밖의 다른 일을 일으키셔야 했다는 말입니까? …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러한 표징들이 일어났습니다(탈출 3장-15장 참조). 그러나 친구들 가운데 오신 분은 이러한 표징들을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주어야 받는다.

안향 아만도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카인과 아벨은 땀 흘려 얻은 결실을 주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벨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의 제물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카인과 아벨의 제물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지만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히브 11,4) 아벨은 자신이 키우던 양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쳤지만 카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벨은 자신이 가진 것은 모두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거라는 믿음과 그것을 다시 주님께 돌려드린다 해도 궁핍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더 좋은 것을 많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친 만큼 자기 재산이 줄어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 바치면 더 좋은 것을 많이 주시리라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먼저 많은 것을 주시면 받은 만큼 바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아담이 아내 사이에 카인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벨을 낳습니다.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농부가 됩니다. 세월이 후른 후 카인은 땅의 소출을 하느님께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으나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카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을 떨어뜨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6-7)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라고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제 아우를 죽입니다. 동생에 대한 질투1)를 느낀 카인은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결국 질투가 카인이 동생을 죽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 물어 보십니다.

카인은 진실을 외면하며 퉁명스럽게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라고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죄를 물어 응징의 뜻을 말씀하시지요.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1-12) 


카인은 하느님께 그 형벌이 자신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크고 세상 떠돌며 헤매는 신세에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죽이지 못하게 표를 찍어 주셔서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응징과 자비가 교차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다시 셋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정상적인 심리는 ‘부러움’ ‘선망’이 되지만 이것이 욕심이라는 부정적 면으로 흐르다보면 본인도 다스리기 힘든 ‘질투’의 영향권으로 기울게 됩니다. 


마르코는 시리즈처럼 이방인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과 기적 (마르 7,24-30),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고치신 기적 (마르 7,31-37)에 이어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마르 8,1-10)을 이어서 전합니다. 이 기적들이 다 표징들인데도 바리사이들은 주님을 시험하려고 자신들 앞에서 다시 하늘에서 오는 표징2)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 8,12)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어떠한 표징도 받을 수 있는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주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건너편으로 가십니다. 


마르코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단순한데 마태오는 이 보다 좀 더 길게 이 논쟁을 전하고 있습니다.3) 마태오는 주님께서 자연의 질서인 “‘저녁때가 되면 하늘이 붉으니 날씨가 좋겠구나.’(마태 16,2)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리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16,2)하며 ‘하늘의 징조를 읽을 줄 알면서도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십니다(16.3). 그러고 나서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6,4)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그들을 떠나십니다. 루카는 마태오보다는 좀 더 간략하게 전합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서 볼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관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12,54-56) 


마태오, 마르코, 루카가 다 표현에는 차이가 있지만 내용에서는 다 공통적인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질서정연한 자연의 변화와는 다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은 이 세상 자연 질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자연의 질서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어떤 인간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질서를 거역하지는 못합니다. 자연 질서 중에 동물이건 사람이건 병이 들면 그 나름대로의 질서를 따라 종래는 죽음에 이르게 하지요. 불치의 병은 고칠 수가 없는 것이 자연의 대답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 아닌 하늘에서 이미 하느님께서 자연 속에 심어 놓으신 법칙인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능력만이 자연의 순리인 병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더러운 영에 걸려 있는 사람을 고쳐주시고, 나병환자와 중풍병자, 풍랑을 가라앉히신 기적, 이방인의 지역에서 수없는 돼지 떼에 마귀를 집어넣으신 기적, 빵을 많게 하는 기적도 다 소문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는 데에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도록 요구하는데 그 의도는 순수하지 않고 시험해 보려는 심산인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되고 굳어 버린 마음을 아시고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십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어떤 기적을 일으켜도 트집을 잡고 딴 소리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도 스승을 온전히 그리스도로 믿은 것은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시고 실망과 갈등의 기간을 겪고 성령을 받은 후였습니다.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것은 주로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은 마태오에 의하면 사두가이도 포함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기 전까지는 우리 표현으로 그야말로 ‘독불장군(獨不將軍)’으로 다른 이들이 견줄 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없었던 사두가이들은 성전세를 받고 그 재력으로 대사제와 사제들의 힘과 권위는 대단했다고 봅니다. 그들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서민이 아니라 로마의 통치자들과의 교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많은 서민들의 관심을 받고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니까 그들은 질투와 함께 어떻게든 깎아 내려서 군중으로부터 지지를 되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 최초의 카인에서부터 보이는 질투는 보이지 않지만 악의 세력과 결탁하여 결국 폭력을 불러옵니다. 카인이 하느님께서 동생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신의 것은 물리치신데 대해 깊은 질투심을 갖게 되고 그것이 폭력으로 이어져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맙니다. 카인이 하느님과 연결시켜 동생을 죽이듯 예수님 시대에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을 시샘하여 폭력을 불러 일으켰고 강한 질투심 끝에 증오심으로 그들 스스로 메시아를 죽이고 맙니다.


질투는 욕심을 먹고 성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가르침대로 가난한 마음으로 욕심을 비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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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질투 嫉妬 jealousy’는 서로의 관계에서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에 뿌리를 둔 비교하는 심리적 현상을 말합니다. 질투 자체는 인간의 본성이라 하겠지만, 이것이 부정적으로 번져나가면 정상적인 사고의 능력이 떨어지고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된다. 보통 ‘질투하다.’라는 또 다른 말은 ‘샘을 낸다.’ ‘시샘한다.’ ‘시기한다.’라고 표현하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샘쟁이'이라는 말도 있다. 희랍 신화에서 기인하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심리학 용어 ‘외디푸스 콤플렉스 (독일어: 'Ödipuskomplex' 영어: Oedipus complex)’라는 말이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에서 이미 유아기(幼兒期)에부터 본능적으로 질투가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 신화의 얘기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빼앗긴다는 본능에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끔찍한 이야기가 있다. 또한 동생이 태어나면서 형은 어머니의 사랑에서 동생을 질투하거나 제거하고 싶어 하는 질투의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리학계 많은 학자들의 호응도 얻지만 또 다르게는 비판도 받는다. 


 2) ‘하늘에서 내려온 표징(세메이온 아포 우라누 σημεῖον ἀπὸ τοῦ οὐρανοῦ)’: 여기에서‘표징表徵 (세메이온 σημεῖον/복수;σημεῖα/단수)은 ’영어로 상징(symbol), 사인(sign) 기적(miracle)으로 번역할 수 있다. ‘표징’보다는 우리에게는 ‘상징’, 또는 ‘기적’이 더 익숙한데, 공관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은 이 말에 신학적 의미가 깊다. 이 표징은 보이는 것은 인간적인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인데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인간적인 예수님도 볼 수 있고 그분께서 참 그리스도이심을 또한 믿는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마음이 닫혀 있어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징/기적을 보고도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라야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는데, 그들은 표징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의 요구대로 주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기적(표징)을 일으키신 데도 그들은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의 굳을 대로 굳은 그들을 보시고 한탄하시는 것이다.


 3) 는 마르코와 달리 ‘하늘의 징조(프로소폰 투 우라누 πρόσωπον τοῦ οὐρανοῦ)’와 ‘시대의 표징(세메이아 톤 카이론)’ σημεῖα τῶν καιρῶν)’을 대비하시는 말씀을 전하고(16.3) 루카는 “‘하늘의 징조’는 알면서 ‘시대를 풀이할 줄 모르다.’”라고 풀어서 하시는 주님 말씀을 전한다. ‘요나의 표징(토 세메이온 τὸ σημεῖον Ἰωνᾶ)’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16,4)을 전한다. 다시 말해서 유다인들이 알고 있는 구약의 요나 예언자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마태오와 루카도 표징은 이미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유다인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에서 멈추고 만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굳은 마음을 어찌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죄악의 비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금까지 인간이 하느님께 죄를 지은 얘기를 한 창세기는 오늘 드디어 인간이 인간에게 죄를 짓는 얘기, 그것도 친동생을 살인하는 죄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참으로 석연치 않고 찜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편애하시어 카인이 죄짓게 하시고는 카인이 죄악을 잘 다스리지 않아 죄를 지은 것으로 뒤집어씌우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이런 것이 아니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편애를 하신 것이 아니라 카인이 잘못해서 나무라신 것이고 그 나무람을 카인이 오해하여 죄를 지은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종종 오해합니다. 누가 잘하여 윗사람의 칭찬을 받고 내가 잘못하여 꾸중을 들을 때 윗사람이 그를 편애하고 나는 미워한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내 잘못을 고치면 간단히 끝날 것이 시기 질투의 죄로 비화되고 오늘 창세기에서 보듯 살인죄로까지 비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창세기의 말씀처럼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죄악을 잘 다스린다는 것이 바로 이 <죄악의 비화>를 막는 것입니다. 


불을 잘 다스리면 불이 좋게 쓰이고 모든 것을 삼키는 큰불이 되지 않게 하는 것처럼 죄악을 잘 다스리면 <죄악의 비화>를 막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죄로 인해 오히려 영적인 유익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죄악의 비화를 막아야 하는데 비화라는 말을 잘 이해하면 죄악의 비화를 막을 수 있습니다.

비화란 <날을 비飛>, <불 화火>가 합쳐진 말로서 불이 날리는 것이고 우리말로 하면 불똥이 튀는 것입니다.

카인의 최초의 죄가 뭔지 지금의 우리는 잘 알 수 없지만 네가 옳게 했다면 얼굴을 들 수 있는데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았기에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린 거라는 말씀을 놓고 볼 때 뭔가 옳게 행동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래서 카인은 화를 내고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요즘 죄를 짓고도 얼굴을 꼿꼿이 세우고 기자회견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카인이 죄를 짓고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자기 주제를 아는 거고 그래서 그것은 좋게 이해할 수 있는데 문제는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카인은 누구한테 왜 화를 내는 것입니까?

우선 동생보다 못한 제물을 바친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일 겁니다. 열등감으로 인해 화가 나고 열등한 자신에게 화가 난 것 말입니다.

다음으로 자기 제물을 어여삐 받아주지 않으신 하느님께 화를 낸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어여삐 받아주지 않은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표시라고 생각하여 화를 낸 것입니다.

그런데 불똥이 튀지 않게 하여 물리적인 불이 비화되는 것을 막듯이 이 마음의 화/분노를 잘 다스려야 죄악의 비화도 막을 수 있는데 제 생각에 겸손이 마음의 화를 다스리고 죄악의 비화도 막아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꾸짖음을 들을 때 겸손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나의 잘못이나 부족에 대해 꾸짖음을 들을 때 그것이 나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기회로 삼음으로 화를 밖으로 내지 않고 그 불로 내적인 정화를 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겸손으로 죄악의 비화를 막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익한 기회로 만드는 우리가 되도록 카인에게서 교훈을 받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

자체가

표징이며

기적이며

선물이다.


표징이

가야할 길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복음의 길이다.


마음이 없으면

표징도 보이지

않는다.


생명보다

더 큰 표징은

있을 수 없다.


표징을 결코

나의 틀에

가두어

둘 수 없다.


표징을

가둘 때

표징의

요구는

폭력이 된다.


표징은

순리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복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자신이다.


일상의 자리가

표징의 자리이며

복음의 자리이다.


표징은 우리

내부에 있다.


표징은

아픔을

껴안는다.


표징은

마음을

알아차린다.


표징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거쳐 온

수많은

표징들을

떠올려본다.


모두가

은총의

표징이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표징을 요구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이다.


우리가

집착하는

표징을 깨야

예수님

그 자체를

만난다.


그래서 우리

일상이 표징이

되고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소통이 표징이

되는 것이다.


살리는

관계의

표징으로

나가야한다.


마음 없는

표징은

가짜이다.


사람이

표징이다.



도루묵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한 어부가 바친 ‘묵’이라는 물고기를 먹은 뒤에 이렇게 맛있는 생선은 처음이라면서 ‘은어’라는 새 이름을 하사했지요. 전쟁이 끝난 뒤에 궁으로 돌아온 선조 임금은 그때의 맛을 못 잊어서 식사에 올리라고 했고, 이 생선을 먹는데 너무 맛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이, 도로 묵이라고 불러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피난지에서는 기가 막혔던 맛이 궁궐에서는 사라졌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 역시 비슷한 기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군대에서 가서 어느 날 헌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헌혈이 끝난 뒤에 과자 한 박스를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기만 했던 훈련병 때였는데, 이 과자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바닥에 흘린 과자 부스러기까지 먹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줘도 잘 먹지 않습니다. 원래 과자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어렵고 힘들 때는 모든 것이 감사하게 여기면서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따라서 어렵고 힘든 상황도 내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순간이 바로 삶의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큰 뜻을 보여주기 위해 외적으로 보이는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 큰 뜻을 보고서 지금의 삶 안에서 변화를 갖는 것이 주님 기적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그저 깜짝 놀랄 외적인 모습만 보고 있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시지요.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하긴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떠올려보십시오. 마귀를 쫓아내면 베엘제불의 도움으로 쫓아내는 것이라 하고, 병자나 세리와 같이 힘없고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죄인’과 함께 하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기적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기적을 쫓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나의 변화를 이끌 주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변화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기적을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데 있다(마르쉘 프루스트).


가장 끔찍한 폭군

“우리 각자 안에는 권력과 그에 따른 위신을 원하는, 지배하고 군림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는 작은 폭군이 존재한다. 그 폭군 덕택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실을 추구한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를 자신의 방패막이로 이용하는 폭군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가장 끔찍한 폭군이라 할 수 있다.”

장 바니에의 ‘공동체와 성장’이라는 책의 한 부분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대로 이러한 폭군이 되어서 주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아가고, 또한 때로는 주님을 거부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스스로는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욕심과 이기심으로 만들어내는 폭군의 모습에서 주님과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폭군의 모습이 아니라, 모두를 감싸 안을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초연히 떠나가는 수도자들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제나 수도자들의 소임 이동 시기가 되니, 초보 사제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한 아동 보육 시설에서 그야말로 신명나게 사목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하루 해가 짧을 정도로 해야 할 일이 많았고, 혈기왕성했기에 의욕이 넘쳐 뭐든 다했습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지상천국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회 장상께서 갑자기 저를 부르시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 “하던 일 즉시 정리하고, 비자 수속 마무리되는데로, 즉시 유학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마치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 했습니다.

즉시 ‘나만 바라보고 있는 저 아이들은 어떡하지?’ ‘내가 지금 빠지면 잘 운영되고 있던 이 시설, 순식간에 쫄딱 망할텐테’ 하는 걱정도 앞섰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안된다. 한 일년만 더 있게 해달라.’고 졸랐지만, 씨알도 안먹혔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한 몇 년 떠나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 시설을 방문했습니다. 속으로 ‘내가 없는 시설, 쫄딱 망했겠지?’ 아니면 ‘문닫기 직전이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도착해 보니 웬걸! 그 시설은 제가 운영할 때 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원활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


이제 또 다시 또 다른 임지로 정처없이 떠나셔야 하는 분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내가 떠남으로 인해 한동안 여파도 있을 것이고, 어려움도 겪겠지요. 그러나 일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 사랑과 능력으로 모자람을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발길 닿는 곳 마다 놀라운 기적과 업적을 드러내시자, 군중들은 집요하게 그분을 따라다니며 그분을 붙잡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 다음에는 즉시 물러나셨습니다. 또 다른 곳을 향해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나가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코 복음 8장 13절)


떠나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아무런 미련도 집착도 없이, 훌훌 털고 초연히 떠나가는 수도자들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떠나야 할 순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미적미적 대는 모습은 또 얼마나 서글픈지 모릅니다. 지난 삶의 모든 것은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고, 또 다시 펼쳐주실 미래를 흥미진진하게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가야겠습니다.


오늘도 바리사이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해도 해도 너무한 무례한 요구에 깊이 탄식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코 복음 8장 12절)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황당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순식간에 불벼락을 내리는 것, 다양한 하늘의 이상징후를 보이는 것, 예수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ㅕ 그들의 불신앙을 신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에 큰 슬픔을 느끼시며, 그들을 뒤로 하고 떠나가십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특별한 징표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얼토당토 않은 엉뚱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털끝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은채 손을 놓고 있으면서, 하느님 편의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정한 기적은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 안에 다 있습니다. 참된 기적은 우리가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고백소 안에서 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참된 기적은 우리가 얼마나 먼저 변화하고 쇄신되고자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용산에 있는 국립 중앙박물관엘 다녀왔습니다. 규모와 전시된 유물의 양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 박물관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규모가 크고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문화재일지라도 그것이 약탈과 침략의 결과물이라면 의미는 퇴색될 것입니다. 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가진 문화재가 아니었습니다. 박물관 한 층을 가득 채웠던 기증 문화재였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했던 기증자들은 더 많은 사람이 문화재를 볼 수 있도록 아무런 조건 없이 평생을 걸쳐서 수집한 소중한 문화재를 기증하였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국립 중앙박물관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소중한 문화재를 보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문화재를 사랑하였고, 문화재를 후손들을 위해서 기증한 따뜻한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북한군의 개입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주장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검증이 된 일입니다. 과잉진압이 있었고, 그에 따른 항의가 있었고, 발포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언론과 방송은 검열을 받았고, 제대로 보도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북한군의 개입이 있었다면 당연히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언론과 방송을 장악해서라도 보도를 금지해야 했던 일은 북한군의 개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같은 국민을 향해서 발포해야 했던, 발포를 명령해야 했던 힘과 권력의 개입이었을 것입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죽인 것처럼 북한군의 개입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 희생당한 사람을 다시 한번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희생자들을 가슴에 묻고 사는 유족들에게 다시금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주는 행위입니다. 왜 40년이 지난 일을 다시 들추어내는 것일까요? 국민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제사를 받아 줄까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권력을 줄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셨습니다. 기존의 질서와 전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권위와 가르침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음을 조금만 열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은 넘치고 넘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열지 않고 새로운 표징만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2월 27일과 28일에는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납니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돌이킬 수 없고, 검증 가능하며 완벽한 표징을 요구할 것입니다. 북한은 상호 신뢰와 행동대 행동의 조치를 원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종전과 평화협정을 원할 것입니다. 일방적인 포기와 굴복을 요구하는 것은 협상과 대화가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협상과 대화는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부디 이번 회담을 통해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으면 좋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회담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알렐루야와 영성체송은 우리에게 새로운 표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들을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다가와서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중에 유명한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말 중요한 것들을 쉽게 지나쳐 버리곤 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의지적으로 보려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수많은 시간 동안 사랑 안에서 기도하였지만 자식은 무심히도 그 부모의 사랑의 기도를 보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가 자신에게 못해준 기억만을 가지고 섭섭해 합니다. 나중에 자식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 유품을 정리하면서 자식을 위해서 수없이 기도했던 낡은 묵주를 바라보면서 통곡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삶 속에는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예화 속의 수많은 사랑의 기도가 서려있는 부모님의 낡은 묵주처럼 하느님이 나를 위해서 마련해 주신 사랑의 표징이 너무나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신앙인들은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을 하나하나 발견해 나가며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지혜의 추구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Sermo de diversis 15: PL 183,577-579)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고 우리 구원을 위해 일합시다. 매일의 품삯을 받을 수 있도록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합시다. “내 뜻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는 지혜의 빛으로 일합시다. 진리 자체이신 분께서 “세상은 밭”이라고 말씀하시니 그 밭을 파서 감추어져 있는 보화를 캐냅시다. 이 밭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지혜입니다. 우리 모두 지혜를 갈망하고 또 지혜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말합니다. “찾고 싶거든 되돌아와서 찾아 보아라.” 당신은 어디에서 되돌아와야 하느냐고 묻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당신 욕망과 의지에서 되돌아오라.” 그러나 당신은 또 질문합니다. “내 욕망과 의지에서 지혜를 찾을 수 없다면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내 영혼은 그것을 열렬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찾아낸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을’ 때까지는 다만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지혜를 찾아내는 사람은 행복하고 슬기를 얻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그를 찾을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있을 때 청하십시오.


그 지혜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그는 바로 당신 곁에 있고 당신 입에 있고 당신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마음으로 찾을 때만 그러합니다. 당신의 마음 안에 지혜를 찾아내면 입술은 지혜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것을 밖으로 자아내어 잃어버리지 않도록 내부로 흘러 들어가게 하십시오.


지혜를 찾아냈다면 참으로 꿀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어 부대끼어 토하지 않도록 지나치게 먹지 말고 언제나 배고플 수 있게 취하십시오. 지혜는 말합니다. “나를 먹는 사람은 더 먹고 싶어지고 나를 마시는 사람은 더 마시고 싶어진다.” 당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벌써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토하지 않도록 탐식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탐구하는 일을 너무 빨리 포기함으로써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지혜가 가까이 있고 그것을 찾을 수 있을 때 탐구해야 합니다. 청하는 것을 중단하면 안됩니다. 솔로몬의 말에 의하면 “꿀도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은” 것처럼 “엄위를 너무 찾는 사람은 그 영광에 눌리고 맙니다.”


“지혜를 찾아내는 사람은 복된 사람”인 것처럼 지혜를 잃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은 더욱더 “복된” 사람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지혜를 많이 얻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음 세 가지 경우에 당신 입에서 확실히 지혜나 슬기가 흘러 나옵니다. 즉, 죄를 고백할 때,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를 때, 그리고 격려의 말이 흘러 나올 때입니다. 참으로 “마음으로 믿어서 의화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또 성서 말씀에 의하면 “의로운 사람은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먼저 자신을 나무랍니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에 하느님을 찬미하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그 입에서 지혜가 흘러 나온다면 세 번째로 자기 이웃을 격려합니다.




보이지않은 표징

김기환 수사님

T. 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시고 바리사이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는 그 어떠한 표징도 드러내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전부터 갖가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죽은이들을 살리셨으며 수천명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고 갖가지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바리사이들도 역시 예수님의 기적들을 이미 소문으로 들었었고 보기도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기적들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적들과 표징들을 기적과 표징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표징들로 인해서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으며 바리사이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의 기적과 표징은 그들에게 "위협"인 동시에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시험하려고 올가미를 씌워 모함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논쟁을 펼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 이전에도 그 순간에도 그 후에도 갖가지 기적들과 표징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이말씀을 하신 이유는 표징들을 받지 못할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기적들과 표징들을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이 세대는기적과 표징으로 알아보지 못할것이다라는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과 그분의 기적과 표징들은 그들의 지위에 도전하는 하나의 위협이며 도전이기 때문인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형인 카인이 동생인 아벨에 대한 질투심때문에 동생을 살해하게 됩니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동생을 동생으로 보이지 않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동생이 어디있느냐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카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듣지 않고 피해야 하고 회피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카인의 질투심이라고 하는 죄가 말씀을 말씀으로 듣지 못하게 하는 귀머거리가 되게 했고 동생을 동생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맹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갖가지 하느님의 기적들과 표징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과 표징들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것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안에서 기쁨을 찾고 참다운 행복을 찾기 보다는 내가 즐겨보는 드라마와 통장안에 두둑하게들어있는 돈 그리고 직장에서의 높은 지위와 명예 갖가지 물질적인 것들로 인해서 취할수 있는 재미와 기쁨 이것들로 인해서 우리는 기적과 표징들을 보고서도 보지못하고 들어도 듣지못하게 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세대와 지금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도 하느님의 기적들과 표징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표징과 기적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8,11)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란 무엇일까. 소위 유명세를 띤 종교인들이 말하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 같은 기적일까. 성경에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은 딱 한 가지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육화, 성경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나타난 부활(1코린15,4.5)”사건 곧 파스카인데, 그리스도교만이 가지는 특징이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8,12)


어찌하여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할까. 간단하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의 가치에 이끌리고 싶은 사람들의 순수한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믿는 이들이 기성종교에서 이끌릴 바른 표징이 없을 때, 그들은 무속인을 찾아서라도 그들의 말에 이끌리기를 바란다. 

그들의 말은 구체적이기에 끌린다. "3월에 누가 찾아온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8,12)


이 세대가 눈에 보이는 기적만을 바란다면, 그런 기적은 이제 찾기 어려울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표징으로 위장한 가짜 기적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기적으로 가득 찬 세상이라면, 바리사이들이 원했던 하늘에서 온 표징은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이 바로 기적이고, 표징이기 때문이다. 

오늘 선종 10주기를 맞도록 우리가 그리워 하는 김수환 추기경님! 왜 그럴까. 그분의 말씀과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삶과 말씀이 여전히 살아있는 이 세대의 표징이자 기적이다.


주님! 우리 교회에 김추기경님의 삶과 말씀이 이뤄지는 기적과 표징을 살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하늘 땅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9. 02. 18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마르코 8,11-13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다)

하늘은 땅을

곱게 품었기에

하늘입니다


땅은 하늘을

살포시 머금었기에

땅입니다


하늘과 땅이

갈림 없이 맞닿았기에

사람입니다


하늘의 보살핌과

땅의 돌봄이

사람 안에서 하나입니다


사람을 보듬는 이가

하늘이요 땅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내, 회개, 지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제1독서 창세기 말씀이 현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대로 반복되는 오늘날의 어둔 인간 현실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저절로 자문하게 됩니다. 지난 번 제1독서 창세기가 ‘인간의 죄와 벌’에 대해 다뤘다면 오늘은 아담의 아들, 카인과 아벨이 중심인물로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자손에게 유전되는 느낌입니다. 문득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라는 소설 이름도 생각납니다.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같습니다. 카인과 아벨, 의좋은 형제로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지요.


문제의 발단은 하느님께 바친 제물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바친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 지고 카인 자신의 제물은 거부되었을 때 카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지요? 마침내 카인은 불타오르는 질투심에 아벨을 죽였고 아벨은 영문도 모르는 채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카인도 아벨도 모두 우리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죄로 물든 적나라한 인간 현실을 보여줍니다. 카인같은 살인자들도 아벨같은 억울한 피해자들도 인류 역사를 통해 아니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안의 카인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투로 분노로 탐욕으로 살인을 저지른 이들도 있고 마음 속으로 살인한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카인이기도 합니다. 과연 내가 카인의 위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자문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선 참았어야 했습니다. 인내가 답입니다. 질투심은 우리를 눈멀게 합니다. 카인은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신뢰하면서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대하든 하느님의 뜻은 알 수 없으니 끝까지 인내하며 자신의 본분만 다했으면 됐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창세기는 카인을 반면교사로 삼아 어떤 처지에서든 끝가지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인내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어제 화답송 후렴이었는데, 카인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였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했다면 질투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자신의 품위를 지켰을 것입니다. 카인의 질투로 인한 순간적 살인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는 지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처럼, 카인도 저주 받아 정주의 자리에서 추방되어 정처없이 세상을 떠도는 자가 되지 않습니까? 이제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음 같은 ‘살아있는 지옥’의 삶입니다. 오늘날도 범죄로 인해 아벨같은 억울한 죽음들도 또 카인처럼 살아있는 지옥을 사는 이들도 얼마나 많을 것입니까? 살인자 카인에게도 하느님의 자비하신 보호는 약속됩니다만 남은 떠돌이 인생은 그대로 지옥같은 삶이었겠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심정은 또 어떻겠습니까? 아벨은 죽었고, 카인은 쫓겨 났으니 졸지에 두 아들을 잃었으니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평생 안고 살아갈 상처는 얼마나 컸겠는지요. 마지막 구절이 감동적입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참 힘든 아픔과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아담의 하느님 믿음이, 또 살아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희망을 선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감동입니다. 세상의 축소판과도 같은 오늘 창세기의 생생한 내용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살아있는 모두에게 영원히 미칩니다. 살인자 카인같은 이들도 이제부터는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최선을 다해 끝까지 인내하며 살아야 하고, 아담부부같은 이들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인내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아담-하와 부부에게 새 희망으로 세 번째 아들 셋을 선물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입니다. 부질없는 가정법이지만 카인이 질투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자신의 품위를 지키며 아벨과 의좋은 형제로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바로 우리는 카인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 점을 필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창세기와 똑같은 폭력과 죽임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말로나 행동이나 생각으로라도 폭력자가 되지 않도록 온갖 인내의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수도공동체 생활 중에도 참으로 필요한 덕이 그 무엇보다도 인내의 덕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인내, 희망의 인내, 사랑의 인내입니다.


창세기에서 인내를 배운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지혜를 배웁니다. ‘지혜의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 말로 예수님의 대표적 표징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알아 본 이런 예수님의 표징을 바리사이 지도자들만 눈이 멀어 알아보지 못하고 하늘로부터 표징을 요구합니다. 분명 무지로 인한 교만과 편견, 질투가 이들을 눈멀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제가 보기에 바리사이들은 불순한 생각을 잠시 제쳐놓고 끝까지 인내하며 예수님의 표징을 깨닫도록해야 옳았습니다. 이런 완고함에 눈먼이들에게는 회개를 제외한 약이 없습니다. 이들의 완고함에 깊이 탄식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회개란 화두를 던지고 그들을 버려두신 채 홀연히, 미련없이, 집착함이 없이 떠나는 참으로 지혜로운 예수님의 처신이십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눈만 열리면 어디나 하느님 사랑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 사랑의 표징들을 알아보게 하시고 참 좋은 인내심도 선사하십니다. 아멘.




하느님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마르코 8, 11-1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의 존재를 다 알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느님으로 오셨지만, 하느님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알려줄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른들의 일을 다 알려줄 수 없습니다. 개방된 사회에 너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겠다고 까발리고, 뒷소문 내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여 전해질 때 사회적 오류가 발생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호 간에 갈등도 생깁니다.

“나는 하느님처럼 모든 진리를 알지 못하면 주님을 따를 수 없다.”고 한다면 지나친 욕심이 아닙니까? 학교에서 드러내고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배운 것과 아는 것이 자기 안에서 상충하여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어떤 이가 자기 아는 것을 한 시간 안에 모두 다 가르치려고 하면 지식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이 뒤죽박죽되어 본질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대로 다 해주고 나면 신비는 사라지고 기대치가 없어집니다. 친구를 사귀면서 처음부터 잘 알고 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알기 시작한 지 80년이 되었지만, 존재하시는 그분을 다 알아듣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죽음 앞에 서 있으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참 의미가 무엇인가? 세상이 끝이 아니라 더 다른 세상이 있는가? 아니면 이 모양으로 끝나서 마치 하루살이처럼 하루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어느 나라의 비참한 현상은 인류 역사 안에 무엇을 뜻하는가? 그저 있어야 할 일인가? 아니면 없어야 할 것이 인간의 착각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그러나 저에게 가장 확실한 표징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이 다시 살아나 이 세상에 계시고, 살아있는 분으로 우리 앞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무리 큰 고통 중에도 위로받고, 힘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주님의 뜻을 찾아 실천하고자 합니다.


표징은 믿는 이들에게 더 나타나고, 보이고, 증명됩니다. 가진 자에게 더 주어 더 풍요롭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표징을 주시어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가끔은 뚝 떨어져 보는 것도'(마르코 8장 11~13)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께서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보고 깊이 탄식하시며 버려둔채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속 시끄러울 때가 있지요.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를 계속 할 때 거리를 두고 떼어 놓는것도 좋습니다.

한 아버지가 부인없이 딸을 키워 시집을 보내게 되었는데, 사랑한다면 혼수를 많이 해서 보내겠지 하며 계속 은근히 바래서 끙끙 앓는 아버지를 보면서 끊임없이 요구하는 속내가 답답해서 귀 막고 놔두라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면서 자꾸 확인하고 척도를 재려하고 믿는다면서 증표를 보여 달라고 쿡쿡 찌른다면 휘둘리지 말고 거리를 두는게 필요합니다.

자기 불안과 자기 중심에 빠져있는 사람이 밤이 되면 자연히 보게되는 별을 낮 시간에 보여달라 아니면 별이 없는것이라고 억지쓰는것과 같습니다.

가끔은 뚝 떨어져 보는것도 괜찮아요.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어찌하여 이 시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오늘 복음의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짜증스러운 모습이다. 많은 표징을 이미 보여 주었는데 알아 듣지 못하는 그들에게 답답한 마음을 표한다. 혹여 우리는 예수님께 마찬가지로 어떤 극적인 표징을 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나의 삶의 전체가 변하기를 말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대면하지 못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진정한 나를 보는 순간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을 통해서 하느님의 시각으로 삶과 세상을 쳐다보면 이미 나의 삶 자체가 그분의 표징임을 알아 차리게 된다. 

오늘 한 주일을 다시 시작하며 나의 삶이 표징임을 알아 듣는 시간을 마련해 보자. 36년이 지난 북한산 자락은 내 눈에 똑같이 보이지만 그 세월의 흐름속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내가 모를 뿐이다. 나의 삶 역시 내가 보지 못하는 표징이 나를 이끌어 왔음을 알아 차리지 못하는지 모른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내가 너하고 무슨 관계냐?’ ‘그냥 나 혼자 잘 살면 되는데, 내가 왜 너 때문에 고민하고 불편해하고 아파해야 하느냐?’고 자문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보는 나의 동반자들도 같이 느끼는 질문이겠지요. 그 답은 두말할 나위 없이 주 하느님께서 같이 살라고 보내주셨기 때문이고, 나에게 온 너와의 관계를 풀면 내가 하느님 나라로 편하게 가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 길로 똑같이 고달프리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카인이 아벨을 질투하여 아벨을 죽인 후에, 주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카인이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9절)


우리가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있든 아니든, 고의든 아니든, 알고 있었던 몰랐던, 가깝든 멀든 인류와 피조물 모두는 동시대를 살아가라고 주 하느님께서 맺어 준 한 식구들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서로가 어떤 식으로 함께하던, 우리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결코 눈 감아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관계와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한 일에 관해 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마르 8,12) 계속되는 그들의 억지 요구에 예수님은 마음이 지치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는 일을 보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논리에 딱 들어맞는 표징만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와 있는데도 형식에 맞는지, 규정에 맞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이미 하느님이며 진리인 분이 세상 우리 가운데 오셔서 구원의 지평이 열리고 있는데, 바리사이들은 줄곧 전달 방식이나 매개체에 불과한 표징만을 보고 싶다고 생떼를 쓰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깊은 탄식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표징은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것이지 보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을 조정하려는 나쁜 생각인 거죠.


어쩌면 예수님을 직접 접하고 구원을 체험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죄인인 이들은 더 이상 표징을 찾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소위 배웠다는 이들, 한자리 하는 이들,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 행세하는 이들, 율법 제도가 합당하다고 인정해 주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구미에 맞는 매개체가 필요한가 봅니다. 제도와 규율의 보호 속에 아직 구원이 절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자기들이 규정한 잣대를 고수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급기야 그들을 두고 떠나십니다. "그들을 버려두신 채 ... 가셨다."(마르 8,13) 진심은 커녕 말도 통하지 않으니 떠나실 수밖에요. 떠나실 때 예수님 마음이 어떠셨을지 머물러 봅니다. 아마 우리같이 속 좁은 인간이라면 실망이나 무시, 분노, 앙심, 저주를 품을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구원에서 제외시키지 않기 위해, 그들도 하느님 나라를 위한 새 계약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완전한 희생제사를 준비하십니다.(마르 8,31 참조)


독서에서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 그것도 친족 살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슬픈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놀랍게 다가온 사실은, 죄를 범해 하느님에게서 내쳐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여전히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출산 후 "하느님의 도우심"(창세 4,1)을 칭송하고, 자녀들은 노동의 열매를 주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에덴에서의 추방이 관계의 단절을 낳지 않고 여전히 주님과 끈끈히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당신이 만드시고 숨을 불어넣어 주신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지순한 사랑, 변치 않는 자애를 봅니다.


하느님과 카인과의 대화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마음은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깊은 탄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취조나 추궁, 단죄가 아니라 고통이 배어나는 신음에 가까운 슬픔의 물음이고 안쓰러움 가득한 위로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처럼 아우를 죽인 피로 더럽혀진 땅에서도 쫓겨나야 하는 신세가 되지만, 여전히 가죽옷, 카인의 표, 그리고 셋의 탄생은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연민과 자애로 돌보시는 하느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완고한 바리사이들을 잠시 내버려두고 떠나실망정, 결코 그들의 구원에서 관심을 거두지 않으실 겁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그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봉헌이 될 것이니까요.


요즈음도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신이 어디 있어? 종교는 다 가짜야!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이용해서 신을 팔아먹는 장사꾼에 불과해! 정말 신이 있다면 표징을 보여줘 봐! 그라믄 한번 믿어볼까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 온통 하느님의 표징들인데... 뭘 보여달라구?" 내가 살아 숨쉬는 것조차 기적이요, 내가 사랑하며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만나 여기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닌가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제가 벗들과 이곳에서 만나 같이 살게 될 줄 꿈엔들 알았겠어요?


일상에 깔려있는 이런 수많은 기적들과 표징들을 못 본다면 그 어떤 거창한 표징이 내려도 절대 믿지 못할 테니까 그런 사람은 어떤 표징도 못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오늘 또 어떤 구원의 표징을 보게 될까요? 또 어떤 하느님의 선물들을 보고 감사드리게 될까요? 오늘 하루를 살면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의 미소를 만나시길 축원합니다.


과연 기적이란 뭘까요? 기적은 이상한 현상이나 표징이 아니지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기인열전 같은 게 아니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특별하고도 별난 표징(Sign)을 좇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 숨쉬고 살아가는 생로병사의 인생자체가 기적임을 깨달아야만 참신앙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은 기적덩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과 보살핌이 늘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아시나요? 그걸 알아야 내 인생이 소중해집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성령의 궁전>임을 깨닫게 될 테니까요. 기적덩어리인 벗님의 인생을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멀리서 특별한 이적이나 표징을 찾으려 하지말고, 여러분 가까이에서 이미 그분께서 마련해 두신 그 고귀한 표징들을 찾아 보십시오. 그때 벗님은 하느님이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알게 될 것이고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살아 숨쉬고 있는

이 순간이 감사의

참된 표징의 

순간들입니다.


아직도

활짝 열리지 않는

차가운 우리의 

믿음입니다.


가장 반가운 표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서 계심에도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모순된

우리들 모습입니다.


아직도 헤메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를 좁히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실천이 빠져버린

표징 요구는

건강한 표징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현실을 똑바로

보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끄십니다.


절제를 모르는

우리 세대의

아픈 욕망입니다.


피폐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바라보십니다.


가장 확실한 표징은

이미 우리 양심에서

메아리칩니다.


자기를 정화하는 것이

표징의 시작입니다.


자기를 정화하는 것이

표징의 본질입니다.


가꾸어야 하고

키워나가야 할

표징의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순리가

참된 우리의 표징입니다.


가장 중요한 믿음인

올바른 실천이

필요할 뿐입니다.


표징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실천임을

믿습니다.



제가 있는 성지에는 ‘기도틀’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신의 기도를 적어서 이 기도틀에 꽂아 놓습니다. 그러면 제가 새벽에 일어나 하나하나 빼어 읽으면서 기도를 하지요. 이분들의 기도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많은 분들의 기도가 참으로 절절합니다. 지금의 어렵고 힘든 상황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있는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의 기도는 다짜고짜 돈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가정이 안정되면서 살 수 있다고, 정말로 사랑의 주님이라면 자신에게 돈을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재물이 채워지면 그때 교회에 봉헌도 많이 하고 또 봉사도 열심히 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돈을 주시지 않아서 교회에 봉사하지도 못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렵고 힘든 자신을 외면하시는 주님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도 하시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먼저 나의 일을 해라. 그러면 네가 필요한 것도 주겠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 믿겠다는 신앙은 옳지 않습니다. 신앙은 주님의 일이 먼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나의 일이 먼저가 되고서야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주님께 협박, 공갈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기적이고 주님의 놀라운 표징이라고 떠들면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말합니다.

나의 일이 이루어질 때의 기쁨보다 주님의 일을 이루어질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큽니다. 그리고 덤으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은총의 선물도 함께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 표징이 있어야 당신을 믿겠다고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먼저 집중을 했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만 원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수많은 불평거리를 간직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절망하고 불신하는 이유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기 전에 내가 하지 못한 주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을 나누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미치 앨봄).


정승이 된 아이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된 글입니다.

조선시대에 몰락한 한 양반 가문의 어린 자제가 너무 배가 고파서 울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모는 양반이 배고프다고 울면 어떻게 하냐면서 회초리로 때렸습니다. 너무 어린 이 아이는 회초리가 무서워서 잠시 울음을 참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파서 울었지요.

어느 날, 이 집 앞을 지나가던 스님께서 아이가 매를 맞는 광경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양반 체면 때문에 아무것도 모를 어린 아이에게 매를 든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지요. 바로 그 순간, 스님은 아이에게 큰 절을 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깜짝 놀랐습니다. 울기만 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아이를 향해서 큰 절을 하니까요.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아이는 나중에 정승이 될 아이입니다. 그래서 제가 미리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이때부터 아이의 부모는 어떻게 했을까요? 정승이 될 아이니까 더욱 더 신경을 써서 키웠습니다. 자신들은 굶어도 아이는 어떻게든 먹이려고 했고, 공부도 열심히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커서 진짜로 정승이 된 것입니다.

정승이 된 후, 아이의 부모는 이 스님을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한 후에 어떻게 그런 먼 훗날의 일을 미리 내다볼 수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한 번 해 본 말이었는데요?”

미래는 누가 만들어나가는 것일까요? 위의 이야기를 보면, 지금을 살고 있는 내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너무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 시대 표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도성소의 총체적 상황 속에서 은혜롭게도 4명의 형제가 저희 수도회 문을 두드려 오늘 입회식을 거행했습니다. 새싹처럼 파릇파릇한 형제들을 바라보며 참으로 고맙고 기특하고 대견스러웠습니다. 기쁨에 넘친 나머지 이런 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포켓몬 게임하다가 추락사고로 세상 떠난다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겠습니까? 새로 나온 게임 연구차 2박3일 식음 전폐하고 피시방에 죽치고 있다가 과로사 했다면 가족친지들이 얼마나 부끄러워하겠습니까?
반대로 민주화를 위해 독재 정권에 맞서다 장렬히 산화했다면 후손들이 두고두고 박수를 칠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구하려다 대신 죽었다면 세상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추모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향해 자주 질문 한 가지를 던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이 소중한 생명, 단 하나 뿐인 이 삶을 무엇을 위해 헌신하고 무엇을 위해 바칠 것인가?’ 이왕이면 더 큰 가치, 더 큰 선, 더 의미 있는 대상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되지 않을까요?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청춘과 열정과 삶 전체를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우리 형제들은 참으로 좋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자신만을 위한 길을 선택하는데, 더 큰 선이자 가치이신 하느님을 선택하겠다니 참으로 은혜롭고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왕 나선 길입니다. 더 이상 뒤돌아보지 말고, 더 이상 후회도 하지 말고 우리 함께, 이 아름다운 길을 묵묵히, 그리고 끝까지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런 후배들의 모습을 보며 한 가지 진리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사심 없이, 그리고 갈라지지 않는 마음으로 자신의 젊음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위해 바치겠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적과 표징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진리 말입니다.
그 옛날 바리사이들은 집요하게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사사건건 따지고 대들면서 기회를 노렸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들의 사악함에 예수님께서는 진절머리까지 나셨습니다.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이런 말씀까지 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코복음 8장 12절)
이 시대 표징, 기적이 무엇인가 묵상해봅니다. 표징은 이제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며 찾을 일이 아닌 듯합니다. 기적은 이제 우리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 숱한 우리 인간들의 배신과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당신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우리를 참아주시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인내의 하느님, 그리고 그분의 일상적 현존, 이것보다 더 큰 표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모진 고통, 그 깊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않고 또 다시 힘을 내서 일어서는 분들, 그 큰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역사를 계속 써나가는 의인들의 얼굴,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학생 때, 민중가요를 부르곤 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광야에서,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아침이슬, 상록수, 작은 연못’과 같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사가 가지고 있는 상징과 서정적인 멜로디는 가슴을 뜨겁게 달구곤 했습니다. 오늘은 ‘작은 연못’이란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대립과 갈등으로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드러나는 현상을 없애는 것은 참된 치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상이 생기는 원인을 알아야 참된 치유는 시작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에 드러나는 많은 현상들이 있습니다. ‘청년실업, 비정규직, 고령화, 저 출산, 금 수저’의 논란이 있습니다. ‘계층, 지역, 세대, 빈부, 이념’의 갈등이 있습니다. 드러나는 현상들을 없애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의 마음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모습을 회복해야 될 것입니다.

 

생각의 전환, 인식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땅에 있지만 우리는 우주적인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공간에 살고 있지만 영원한 시간을 향해 나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은 병원과 의사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생각, 적당한 운동, 규칙적인 식사,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건강을 유지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없다면 병원과 의사의 처방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카인은 동생이 없으면 하느님께서 제사를 잘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현상만을 보고, 원인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인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트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원인은 동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카인 자신의 행동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카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파트의 평수를 가지고 비교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대학입학을 가지고 비교하기도 합니다. 본당 신자들의 숫자를 가지고, 본당의 헌금액수를 가지고 비교하기도 합니다. 남편의 수입을 가지고 비교하기도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내가 얼마나 충실한가입니다.

 

집채만 한 고래도 아주 작은 꼴뚜기도 저마다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원하는 바리사이파들을 만났습니다. 바리사이파들은 예수님을 비교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보다, 엘리야 보다, 다윗보다 더 뛰어난 분인지 알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비교하는 마음으로는, 상대평가를 하는 눈으로는 사랑으로 오시는 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입니다.

비교하고 평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보다는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눈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창세기의 카인과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그대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경우 다 믿음의 눈 먼 모습입니다. 누구나 카인의 경우라 해도 하느님에 대한 서운함과 동생 아벨에 대한 질투에 참으로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둘 다 똑같이 정성을 다해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는데 아벨 동생의 제물은 받아들이고 자기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카인은 얼마나 실망스럽고 화가 났겠는지요.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고, 이어 하느님의 추궁이 뒤따릅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테, 너는 그 죄악을 다스려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라도 카인은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냉정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하느님의 입장을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눈이 없었던 탓입니다. 
‘왜,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부질없는 물음입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은 나올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니곤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유에 속한 신비로운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불가사의한 경우,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족할 줄 아는 게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어 유혹에 빠진 카인입니다. 믿음의 눈이 있었다면 하느님의 결정을 존중하고 자신의 품위를 지키며 의연하게 처신했을 것입니다. 사실 최선을 다해 제물을 봉헌했고 하느님의 결정을 관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여 제 본분에 충실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일입니다. 
오히려 하느님도 내심 고마워하며 미안해 했을 지도 모르고 다음 번에는 카인의 제물을 꼭 받아들이리라 다짐했을 지도 모릅니다. 정말 믿음이 있고 지혜로운 카인이었다면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렸을 것이고 끝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순간 질투와 분노의 유혹에 눈이 멀어 자기의 품위를 떨어뜨린 어리석고 안타까운 경거망동의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보면 아무 것도 아닌 문제가 카인이 이성을 잃고 분노함으로 큰 문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평소 자존감이 약하고 열등감이 컸던 카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생각해 보면 별 것도 아닌 것 갖고 분노하고 격하게 행동함으로 후회한 적도 많을 것입니다. 한 번 무너진 카인은 겉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어 아우 아벨을 살해하고 마침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방랑길에 오릅니다. 그대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버지 아담의 재판을 보는 듯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흡사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이 아담에게 묻던 물음을 연상케 합니다. 한 번 무너진 카인의 뻔뻔한 모습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답변입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카인의 반응에 상관치 않고 하느님은 끝까지 그를 보살피지만 진정한 회개가 없어 계속 망가지고 무너져 내리는 카인의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졸지에 두 아들을 잃은 아담과 하와 부모의 아픔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새삼 자신들의 원죄의 결과에 전율했을 것이며 하여 하느님을 더욱 찾았을 것입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묘사에서 인간의 죄악에 좌절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간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와 배려를 배웁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일으키는 문제를 수습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십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주셨구나.”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이렇게 용감하게 슬픔을 딛고 일어나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요 보속이고 용서받는 일입니다. 
힘든 세상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입니다. 참으로 질긴 목숨이요 강인한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 역시 믿음의 눈이 먼 사람들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자체가 불순하며 완전히 편견에 닫혀 있는 모습들입니다. 예수님의 대응이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이들의 완고함에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 세대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 가득한 세상인데, 예수님 자체가 최고의 표징인데, 이를 알아 보지 못하는 눈먼 이들에게 더 이상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믿음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어 하늘에서 오는 최고의 표징인 당신을 알아 보고 믿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31,20). 아멘. 



삶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 안에는 수난 받은 성모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매괴성모님상은 루르드에서 제작하여 1930년 대성전 건립당시 제대뒤편 중앙에 안치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성당은 인민군의 사령부로 사용되었고 인민군이 성모상을 없애려 총을 쏘았는데 7발을 맞았는데도 부서지지 않았고, 그래서 성모상을 없애 버리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끌어내리려 하였으나 성모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며 힐책하는 모습으로 바라보셔서 인민군들은 성모상을 더 이상 건드릴 수 없었고 그때부터 성당에서 철수 하였다고 합니다. 6,25가 지난 후부터는 이 성모상을 ‘칠고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상 앞에서 기도하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치유의 성모님'이라고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모님 앞에서 기도하게 되는데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총을 겨누는 것은 하나의 미움이요, 증오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7발의 총탄에도 부서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모두 가슴에 품었다 할 수 있습니다. 원수의 총을 맞고도 하늘을 우러러 보시는 모습으로 여전히 두 손을 모으고 계신 모습인데 마음이 천상을 향하고 계셨기에 모두를 품으실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 자비와 사랑을 권고하며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천상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표징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 덩어리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사람들은 하늘의 기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사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많이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며 영원한 삶을 살아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뭘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인간을 죄짓게 하시는 하느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드디어 살인죄 얘기가 나옵니다.
최초의 살인죄 얘기입니다.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라는 소설도 있듯이 그래서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죄를 지은데 이어 그의 아들인 카인이 인간을 죽이는 죄를 지은 것인데 그런데 창세기는 이것을 인간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죄를 지은 거라고 얘기하고 있고, 더 나아가 하느님으로 인해 죄를 지은 거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요?
하느님께 죄를 지은 거라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하느님으로 인해 죄를 짓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분명히 하느님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편애 때문에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게 아니라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을 더 어여삐 보셨기에 죄를 지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편애를 하신 것일까?
그리고 하느님을 정말로 변호하고 싶습니다.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고 편애하신 것이 아니라고.
신약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시라고 얘기하시는데 구약은 인간을 투사하여 편애하시는 분으로 잘못 이해한 거라고.
그런데 저는 신약의 입장에서 이렇게 이해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굳이 하느님을 변호하지 않으렵니다.
하느님도 죄를 지으십니다.
인간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지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 때문에 얼마나 많이 죄를 짓습니까?
인간이 하느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여 얼마나 많이 죄를 짓습니까?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여 죄를 짓게 하시고, 하느님이 나는 사랑해주지 않고 나만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것처럼 오해케 하시어 죄짓게 하시잖아요?
그래래서 저는 이것을 묵상하며 교리적인 오류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런 기도문을 지어봤습니다.

“주님, 하느님, 당신은 본질적으로 죄인이시나이다. 
당신의 그 다 알 수 없음이 저희를 근본적으로 죄 짓게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당신의 그 다 알 수 없는 사랑이 저희를 죄짓게 하나이다.
너무도 크고, 넓고, 높고, 깊은 사랑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오해를 하게 하심으로 당신은 저희를 본질적으로 죄짓게 하시나이다.
이것을 알아가고 깨달아가기까지 죄를 짓고 또 지었으며 아직도 그리고 영원히 다 깨달을 수 없기에 죄를 또 짓게 될 것이니 이런 저희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아니, 이런 저희임을 당신은 다 아시기에 이해하시리라 믿나이다. 이런 저희어도 당신은 저희를 사랑하고 차등 없이 사랑하심을 믿나이다.
당신은 카인과 아벨의 제물이 달라도 달리 받아주시고, 카인과 아벨의 정성이 차이가 나도 달리 받아주시지만 당신의 사랑만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나이다.
아니, 믿음이 부족하면 믿게 하소서. 아멘.”




내가 바라보고 찾아야 할 진정한 표징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8,11). 이제껏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치유 등을 보아온 터였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불러일으키고, 저 존재의 심연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절대의 힘을 지니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능력과 권위를 지녔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보고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현상과 물질과 외적 변화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뜻에 맞는 결과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던 것이지요. 그들의 삶은 이렇듯 영원한 생명과는 무관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카인도 마찬가지였지요. 농부인 카인은 주님께서 양치기인 동생 아벨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자신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시자 몹시 화를 내며 머리를 떨어뜨립니다(창세 4,3-4). 그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주님께서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시자 화를 낸 것입니다. 


카인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눈길을 두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성취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욕구를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 뜻을 앞세우며 살았던 것이지요. 그 결과 동생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져 머리를 떨어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마음과 불신에 대해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마르 8,12) 그들이 요구한 표징을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왜냐하면 찾아야 할 진정한 표징은 기적이나 이기적인 욕구 충족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야말로 갈망해야 할 진정한 표징입니다. 


오늘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무엇을 찾고 있는지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 기도하면서도 실은 내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 자신을 바라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를 맡겨야 하는데 내 안위와 성공과 세상적인 만족만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한 하느님께서 자비로 베푸시는 표징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나만의 표징만을 바랄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 버리실 것입니다.”(8,13) 하여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핵심적이며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갈망합시다! 


세상의 귀한 물건들과 권력과 명예,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럴싸한 결과물들, 시선을 끌고 마음을 사로잡는 세상의 현상들에 속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찾는 표징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고통을 품고 견뎌냄으로써 모두를 사랑하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이신 예수님이 우리가 찾는 참 표징입니다. 


영성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황홀한 신비체험,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 눈물 흘리는 성모상, 예수님 얼굴이 나타난 강론대, 오상 체험, 방언, 초월적인 치유와 같은 특이한 현상이나 표지들을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참 신앙은 현상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바리사이들의 예수님께 대한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예수님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메시아임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을 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마치 그들은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이나, 사무엘 시대의 우뢰사건(1사무 7,10)이나, 엘리야의 카르멜산의 승리사건(1열왕 18,30-40)과 같은 초자연적인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 깊은 저의는 이러한 표징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이 넘어지게 하려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인지 스스로 증명해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표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하고도 온전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8,12)
   
이는 마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죽은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들에게 경고하게 해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말을 떠올려줍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그래서 마태오의 병행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마태 16,3)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곧 바로 앞 장면에서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불충하고 악한 까닭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표징을 구하는 마음 안에 자리 잡은 불신과 절개 없음을 말입니다. 왜곡된 우리의 마음이 진실과 진리를 왜곡하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아멘.



내가 변화하는 기적을 청하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1-13: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빵의 기적이 있은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즉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참된 메시아로서 그것을 말씀과 행적으로 드러내셨다. 바리사이들은 그것의 사실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고 거절하셨다.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요구한 메시아적 징표란, 참으로 깜짝 놀랄만한 일로서, 요르단 강물을 갈라놓고 그곳을 지나다니는 길을 낸다든지, 말 한마디로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린다든지 하는 무력적이고 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왕국을 만들어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에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어떤 곳을 꼭 찾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 꼭 배워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배운다면, 아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귀의 수준은 높아질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으로 변화되는 기적을 항상 청하고 열심히 노력하자. 주님께 이러한 은혜를 청하며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하자.




참된 표징은 내안에 있다.
 윤경재 요셉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8,12)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이 확실히 믿게 만들어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요구는 미리 일정한 기준선을 그어놓고 대상을 저울질하는 자세였습니다. 적어도 이 선은 넘어야 표징으로 인정하겠으니 기준을 넘는 일들을 보여 달라는 요구입니다. 자기네 입맛에 맞는 것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 가슴에 단 훈장을 더욱 빛나게 할 어떤 표징을 원했습니다. 표징을 보여주면 그 표징마저도 새 훈장으로 만들어 자기들 이마에 달 판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 구절을 적어 넣은 성구갑을 이마와 옷자락에 매달고 다녔습니다.
 
요한복음서 묵상을 지은 마르띠니 추기경은 요한복음서의 특징 중 하나를 ‘믿다’라는 동사를 무려 98회나 사용했는데 단 한 번도 믿음이라는 명사형은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꼽습니다. 그 의미는 믿음은 동사적 행위이지 정지된 상태나 사물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20,31)
 
요한저자는 신앙행위의 대상과 목적을 예수님의 신원을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 일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마르띠니 추기경은 우리가 이런 신앙행위를 하는데 장애요소로 다가오는 원인을 세 가지로 분석합니다. 첫째가 표지를 이루는 그 사물에만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가 ‘메시아 강박관념’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메시아를 모시려는 강박증을 말합니다. 셋째는 종교적 자기만족으로 스스로 신앙에 대해 잘 안다는 착각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 내용에서 나오는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행동에 바로 이런 세 가지 장애요소가 모두 담겼습니다. 집착과 강박과 착각이 종합 세트처럼 한 데 담겼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레너드 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걸 뜻한다.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말이다. 그건 아주 ‘관계적’인 의미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그걸 믿어야 하는 신앙의 원리로 바꾸어 버렸다. 사람들은 기독교 교리만 믿으면서 ‘믿는 사람(信者)’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는다의 뜻은 그런 게 아니다.”
 
예수께서 원하신 것은 교리를 믿는 우리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14,20)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15,4)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7)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2,19)
 
다른 신약성경 저자들과 비교하면 요한 저자는 믿음의 행위를 주님을 아는 것에 두었고, 하느님의 빛을 향하는 데 두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집착과 강박과 착각을 내려놓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행위이지 훈장처럼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의 신자, 레지오 단원, 전례부 단원, 꾸르실리스타, 사목위원이라는 이름이 신앙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물을 보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는 필연적으로 착각이 따릅니다. 다른 하나는 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 여기엔 착각의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에 성냥개비와 성냥갑이 있습니다. 둘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불이 붙지 않습니다. 성냥갑 안에 담아 두어도 불꽃이 일지 않습니다. 성냥개비와 성냥갑에는 불의 속성이 내재되어 있지만, 둘이 만나서 마찰을 일으키기 전에는 그 속성이 발현되지 못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안에서 문고리를 열고 나와 하느님과 마주쳐 주기를. 우리가 성냥개비처럼 몸을 부딪쳐 스스로 불붙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처럼 표징은 어떤 외부적 사물과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내가 공유한 속성을 만남과 마찰을 통해 꺼내는 행위에 있습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카인과 아벨!’ 

성서 밖의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과 둘 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농부인 형 카인과 양치기 동생 아벨 두 형제는 잘 지내다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칠 때에 문제가 생깁니다. 카인은 하느님께 자신의 농산물을 아벨도 양을 바칩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광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창세 4,3-5)

 

그러한 카인에게 하느님께서 나무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6-7절) 

그런데 결과는 도리 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듭니다. 형은 아우를 꼬드겨 들로 나가자고 하고 그곳에서 그 아우를 죽여 버립니다. 하느님께서 땅바닥에서 아벨의 피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카인에게 문책을 하시지요.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양의 제사는 받아들이시고 카인의 땅의 소출은 받지 않으신 것인가?’

화가 난 카인에게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있으니 잘 다스려야 한다.’하신 하느님이 당부의 말씀을 듣고도 ‘왜 카인은 동생을 죽였는가?’ 등등의 질문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문제의 주제가 있습니다.

 

‘편애(偏愛)는 자식들 간에 질투를 불러 올 수 있다.’는 것과 ‘질투 늪에 빠지면 그곳에서 나오기가 힘들다.’

 

일부학자들은 ‘하느님께서는 목동을 농부보다 더 사랑하신다.’ 또는 ‘하느님께서 형보다 아우를 사랑하신다.’라는 테두리에서 카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 그렇게 설득력 있는 설명은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의 벌로 그 땅에서 추방되어 소출이 없는 황무지로 나갈 것이며 그곳에서도 떠돌이 신세가 되리라고 카인에게 예고하십니다.

 

카인은 하느님의 선고를 듣고 하느님께 호소하지요.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13-14절)

 

그러자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금방 마음이 약해지셔서 카인을 사람들이 죽이지 못하게 표를 찍어 주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죽은 아벨 대신 아들을 또 가져 낳으니 그의 이름을 셋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주님께서 와서 논쟁을 벌이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주님께서 마음속으로 탄식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표징(表徵)은 겉으로 드러나서 감각으로 확일 할 수 있는 실재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 단어와 연결해서 상징((象徵, symbol)이라는 말도 씁니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께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왔다는 표지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그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기적이라도 일으키라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도는 주님을 시험하고 또 배타적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보를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래도 저래도 되지 않기에 주님께서 그들을 두고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존경의 자리에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리고 그가 죽자 예수님에게 군중이 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일종의 질투와 같은 경쟁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군중 앞에서 기회가 닿으면 어떤 때는 만들어서까지 주님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스승의 위치를 일축시키는 일을 꾸밉니다. 

오늘도 주님께 시험하기 위해서 그들은 작심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의도가 악의로 담겨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과 논쟁을 벌이지 않으시고 떠나십니다. 

때로 우리는 경쟁의식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때로 모욕으로 때로는 군중심리를 배경으로 소외감의 극단으로도 몰고 가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때에는 그들에게서 침묵을 지키거나 떠나는 것이지요. 경쟁을 위한 경쟁이 이 사회에 그리고 국제간의 문제로 번지고 있는 현대의 모양새는 이미 주님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카인의 질투가 악과 연결되었듯이 세상은 경쟁을 부추기며 거기에서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오늘도 작은 질투나 그 사슬에 머물지 않도록, 그래서 자유를 잃지 않기를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승화된 기쁨

이순아
눈은 내려 수북이 쌓여 있고, 밖은 영하 9도의 날씨였습니다. 허리 수술 후 엄마의 건강에 촉각을 세우며 이런 날씨에는 외출을 삼가라는 딸의 당부가 귓전을 울렸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미사참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했습니다. 나설까 말까를 고민하다 결국 주저 않고 말았습니다. 만약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그 원망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건강이 회복되면 2017년에는 교회활동도 열심히 하고, 여행도 자주 해야겠다는 결심을 깨고 새해 첫 번째로 들려주신 그분 음성은 침묵과 절제였습니다. 더 깊은 당신과의 만남을 원하시는 것이라고 바로 짐작은 했지만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이승에서의 나의 삶은 과연 무엇일까?
 
평생 남과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해본 나를 세상에 내돌리면 안 될 것 같으셔서인지, 조금만 나가 설칠라치면 금방 뭇매를 때리시곤 합니다. 심지어 감정 조절 하지 못한 글을 여과 없이 게시판에 올리면 금방 삭제를 권유 하시는 것 같아 고민하다 실행에 옮기곤 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내가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말고, 방에 꼭 박혀 기도나 하라고 종주 묵을 대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럴 때마다 반항할 힘도 없고, 분수를 지키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순명을 밥 먹듯 하다 보니 늦게 주신 은혜도 참 많습니다.
 
영적으로 풀이하자면 그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면면히 보살펴 주신다는 것을 늘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영육간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며 늘 덧부치시는 말씀은 나눔 생활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니 이런 영적 감각을 가진 사람들은 새벽부터 감사를 입에 달고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재빠르게 그분 뜻을 헤아리다 보면, 세상살이 모두가 그분의 섭리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감사에 감사를 거듭하다보면 여러가지 더 감사 할 일이 생긴다는 것을 체험해 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새벽부터 눈을 뜨면 기도의 끈을 놓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쳐진 눈을 위로 치켜뜨고 세상을 넓게 바라보라고 권고 하십니다. 그리고 응답도 확인 할 수 없는 기도제목을 수 없이 날라다 주십니다. 부정하고 싶어도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세상은 영적 선물을 양산해 내는 세트장이라 하십니다. 그 무대 위에서 당신이 관람하실 노래와 춤, 때로는 모노드라마를 연출하는 연출가가 되라고 하십니다. 기도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이 소명에 충실하다보면 체험을 통해 기도는 아주 멋진 종합예술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더 나열할 필요 없이 이날 주신 은혜는 영적으로 나를 한 단계 끌어 올린 승화 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어떤 기쁨을 이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억지 부리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드려 혼자 교중미사시간에 교회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던 중, 성모님께서 신령성체의 은혜를 더욱 깊게 체험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병고에 시달리던 프란체스코 성인도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 내가 미사에 참례할 수 없다면 나는 마치 미사에 참례하듯이 묵상하면서 또 영혼의 눈을 갖고서 그리스도의 몸을 흠숭합니다.” (완덕의 거울 175)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다
 
땅을 하늘로 만드시려
땅 사람을 하늘 사람으로 만드시려
 
하늘의 하느님이
땅의 하느님이 되신다
 
하늘이 땅이 되니
땅은 하늘이 되어야 하고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니
사람은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
 
하늘이 된 땅만이
땅이 된 하늘과 하나이듯
 
하느님이 된 사람만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과 하나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대의 
진정한 표징입니다.

표징과 기적
이 모두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이기적인
우리 자신을
바로 아는 것에서
참된 표징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표징은
내적인 표징으로
옮겨가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늘 타이밍을
놓치고 삽니다.

알고있는 표징을 
더 요구하기보단
표징이 되지 못한
우리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표징의 출발점이
우리자신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맡기는
십자가의 표징이
있습니다.

지울 수 없는
영원한 표징을
내면화하는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명품을 좋아하십니까? 이 명품이라는 것이 가격이 엄청나지요. 보통 사람은 절대로 구입하기 힘들 정도 비싼 가격을 형성합니다. 그런데도 이 명품을 좋아하고 구입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과의 차별성일 것입니다. 명품을 들고 다니면 마치 자기 자신이 명품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과연 이렇게 귀하게 여기는 명품을 아무데나 들고 다닐까요? 목욕하러 가면서, 장보러 가면서 명품 백이나 명품 보석을 가지고 가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집중하지 못해서 소중한 명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날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야하는 상황에서 명품을 들고 외출하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비라도 맞아서 명품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일상 삶 안에서는 들고 다닐 수 없다면 그 명품이란 것의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요?


책을 읽다가 미국처럼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에 사는 부자들은 외출 시에 값비싼 장신구를 함부로 몸에 지니지 않는다는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치장이 필요할 때는 진짜와 똑같이 생긴 이미테이션을 대신 사용한다는 것이지요. 이 글을 보면서 ‘그렇다면 진짜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는 과연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위 명품이라는 것 역시 이 세상에서 언젠가는 사라져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목숨을 걸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언젠가 사라질 것을 쫓는 것이 아니라, 대신 영원히 변하지 않을 참으로 소중한 것을 쫓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표징만을 요구했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을 척척 고쳐주고, 배고플 때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빵을 나눠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때로는 물 위를 걷기도 하는 등의 놀라운 기적만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들은 영원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만을 만족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영원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참된 표징을 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곧 사라질 순간의 기적만을 요구한다면 예수님 말씀처럼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사라질 표징만을 쫓는 우리가 아니라, 영원한 변하지 않을 참된 표징을 쫓아야 합니다. 그 표징은 사실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통해서 그리고 그 실천을 통해 표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찾는 표징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영원함을 가져다주는 참된 표징을 찾을 수 있는 지혜로운 나를 청해 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최고의 재산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부모는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았다’고 느끼는 것이다.(가나모리 우라코)


한 걸음, 한 걸음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본 구절입니다.


1959년 티베트에서 중국의 침략을 피해 80이 넘은 노스님이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에 왔다. 그때 기자들이 놀라서 노스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토록 험준한 히말라야를 아무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까?”

그 노스님의 대답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아주 간단한 답입니다. 그런데 이 답이 정답이네요. 어떤 결과도 한 걸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특별한 무엇인가를 통해서만 얻는 결과가 아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우리의 작은 발걸음을 통해서 주님의 놀라운 표징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늘 특별한 것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내 욕심과 이기심은 더욱 더 커졌나 봅니다.

이제 그러한 욕심과 이기심을 대신할 ‘사랑’이라는 작은 한 걸음을 힘차게 내딛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실로 우리에게 필요한 영원한 생명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언제나 표징은

회개와 쇄신이 필요한

우리의 생활을 성찰케합니다. 


화해와 용서를

일깨워주는 표징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넘치는 은총의 삶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보다

더 큰 표징은 있을 수 없습니다.


화해와 용서를 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세대의 가장 큰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표징은 감히 우리가

다른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받아들여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기꺼이 기도하고

기꺼이 봉사하는

우리 자신이 이 시대의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의지와 결단, 사랑의 실천과

진정한 회심으로 표징을

더욱 구체화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큰 표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큰 구원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표징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합니다.


희망의 표징은

우리가 깨어있는

삶을 살 때 더욱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십자가의 표징은

십자가를 지고가는 이들을 통해

열렬한 사랑의 표징이 될 것입니다.


표징은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할 우리의 의무입니다.





어떤 자매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한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가 그리 좋지 않은 내용이었지요. 그 신부님의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 신부님과 그리 친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야기한 것 같은데, 이 분의 생각과 달리 저와 신학생 때부터 신부가 되어서까지 너무나도 친한 신부님이었습니다. 20년 넘게 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그분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몇 번 보지 않았으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더 믿을까요? 

그 신부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를 이 자매님께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제가 신부이기 때문에 신부 편을 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분이 아닌지에 대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자신은 도저히 제가 변호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요. 

오랜 친분 관계를 맺어오고 있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상황이 다가와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모습이 보여도 그럴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이해하려 합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친분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믿을 수 없다면 작은 틈만 생겨도 공격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라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했던 그 모든 표징들을 왜 이들은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일들, 그리고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기쁜 소식 등등, 계속된 표징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합니다. 아마 마술사와 같은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낮게 판단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마른하늘에 갑자기 벼락이 떨어지고, 해를 멈추고 시간을 멈추는 등의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표징을 보여주어도 사람들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 없음에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어떤 친분을 맺고 있을까요? 잠시 동안의 기도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불공평한 행동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면서 쉽게 말을 뱉어 버리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표징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편안하게 잠잘 수 있음에 감사하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도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과연 주님께서 계속해서 주시는 표징을 받고 있나요?  

사랑은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캐서린 앤 포터).

수상 거부
군축이나 평화 증진에 현저히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아주 권위 있는 상이 있습니다. 바로 노벨 평화상입니다. 많은 분야의 노벨상 중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 노벨 평화상입니다. 그런데 이 노벨 평화상을 거부한 사람이 한 분 계십니다. 바로 베트남 전쟁 종결 당시 총리였던 레둑토입니다. 그는 “조국 베트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면서 상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지향했던 평화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국 베트남을 위한 것이었기에 수상 거부를 한 것이지요(혹시 다른 이유 때문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보이니 저의 생각을 적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어쩌면 진정으로 상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한 마음, 이기적인 마음이 아닌 사랑이 가득한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존경할까요? 자기를 위한 마음보다는 남을 위한 마음을 갖춘 사람을 존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도 이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마음, 즉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하느님 나라는 더욱 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상대는 편하고 나는 행복해질 일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사람은 신기하면 더 보고 또 다른 신기한 것을 더 찾는 욕심이 있습니다. 가지면 더 가지려 하고 보았는데도 더 보려고들 덤비는 한 없는 세상이지요. 그래서 물질이건 사건이건 더 더를 찾는 이런 게 바로 과욕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욕이 자기 중심이면 상대를 힘들고 괴롭히기까지 하지요. 이런 과욕으로 자기 이기심을 더 키우며 감사하는 마음은 잃고 맙니다. 과욕을 버리고 신뢰하면 상대는 편하고 나는 행복해질 텐데도 말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코 8,11~12)” 



카인 죽이기
전삼용 요셉 신부님
메릴 스트립,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주연의 ‘다우트(Doubt: 의심)’란 영화는 ‘의심을 왜 하게 되는가’, 또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의심한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등의 질문에 답을 제시하려 합니다.

한 학교의 엄한 원장 수녀님이 그 학교에 파견된 신부님이 흑인 아이를 사제관에 불러 들였다는 사실 하나로 끊임없이 의심하여 그 아이와 신부님을 결국 쫓아내게 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줄거리를 신부님은 강론 하나로 다 설명해 냅니다.
“배가 난파되었습니다. 다행히 한 사람만 살아남았습니다. 구조보트에 탄 그 사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별자리를 보고 노를 열심히 저어서 집에 들어와 편안히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노를 젓다가 ‘이 방향이 맞나?’라는 의심이 든다면 그는 그 혼란 속에서 바다를 헤매다 죽고 말 것입니다. 이것을 ‘의심’이라 부르는데, 여러분 가운데 이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수녀님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겠지만 수녀님은 신부님의 강론보다는 졸거나 떠드는 아이들을 혼내려 다니는 것에 온 정신을 쏟습니다.
물론 수녀님이 의심하는 것에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부님을 만난 아이는 유일하게 흑인이기 때문에 신부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었고, 신부님의 방에 다녀온 후로 학교에서 조금 이상할 정도의 행동을 보였고, 평상시에 신부님은 만년필 대신 볼펜을 쓰는 개혁적인 사람이어서 아이들에게 ‘꼬마 눈사람’과 같은 교회 밖의 노래를 부르게 했고,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설탕을 세 스푼씩이나 커피에 넣는 이상한 행동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녀님의 의심을 꺾지 못했고 그래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수녀님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교님조차도 그럴 신부님이 아니라며 더 큰 성당으로 발령을 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원장 수녀님은 자신의 의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근거를 거짓으로 꾸며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는 그 정도 빗나가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녀님의 마지막 대사는 매우 고통스런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는 이런 고백이었습니다.
“내 안에 의심이 있어요. 내안에 엄청난 의심이 있어요.”   

의심은 바로 자신 안에 있는 뱀이 주는 것입니다. 뱀은 자아입니다. 뱀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게 합니다. 이 ‘뱀’이 오늘 독서에서는 ‘카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오늘 독서를 통해 뱀을 어떻게 내쫓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뱀을 내쫓은 유일한 방법은 그 뱀이 얼마나 나쁜지를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뱀이 죽인 누군가의 피가 우리 마음에 떨어져야만 합니다. 뱀이 죽인 희생자를 보아야만 뱀의 정체를 비로소 깨닫게 되고 나쁜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카인이 죽인 것은 아벨이었습니다. 아벨의 피는 그 땅 위에서 부르짖습니다. 하느님은 카인을 내어 쫓습니다. 그러나 죽이지는 않습니다. 카인은 죽을 수 없습니다. 카인이 죽으면 인간에게 자유가 없어진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인이 쫓겨나면 그 자신 안에는 아벨에 대한 사랑만이 남습니다.   

위 영화에서 의심으로 사제를 쫓아낸 수녀님은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자신의 의심이 너무 강해서 죄도 없는 신부님을 모함하여 쫓아냈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수녀님이 자신의 의심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신부님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피를 흘리게 되었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낀다면 앞으로는 더 겸손해 질 것입니다. 의심을 쫓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아니면 끊임없이 의심으로 죄 없는 이들을 죽일 것입니다.
바로 내가 죄 없는 그리스도를, 또 죄 없는 다른 이들을 죽였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내 안의 카인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내 안의 땅이 하느님께 제발 카인을 내쫓아 달라고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이미 우리 땅에는 그리스도의 피와 내가 상처 입힌 많은 이들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그 피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었음을 마음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겸손한 땅이 되게 됩니다. 다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을 에덴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마음 헤아리기. -아담의 일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꿈깨니 현실입니다. 아, 강론을 잘 완성하고 흐뭇해 했는데 잠깨니 꿈이었습니다. 다시 강론을 써야 하는 현실입니다. '꿈이냐 생시냐?'하며 살을 꼬집어 확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꿈과 현실의 차이가 애매합니다. 한생을 일장춘몽(一場春夢)에 비유하기도 하고 한생을 뒤돌아보면 꿈같은 인생같다고도 합니다. 도대체 꿈과 현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꿈처럼 살기에는 너무 아까운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꿈을 살 때 진정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하느님만이 진정 꿈과 현실을 분별하는 잣대입니다. 하느님 빠진 인생,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환상(幻想)을 삶인양 착각합니다. 진정 살아있음의 표지는 하느님 의식, 하느님 믿음뿐입니다. 성서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느님 꿈의 사람들이자 현실적 인간이었습니다. 환상을, 헛된 꿈을 살지 않고 하느님 현실을 살았습니다. 고통과 아픔, 슬픔의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성경을 3번 통독했습니다.“
자신있게 말하는 제자에게,
"그래, 그러면 성경은 너를 몇 번 읽었느냐?“

스승의 물음에 답을 못했다는 제자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하느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하느님이 내 마음을 읽도록 하는 것이 바로 렉시오디비나의 요체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진정 살아있는 현실적 삶입니다. 내 중심의 삶은 환상이요 진정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창세기에는 하느님의 마음이 환히 드러납니다. 참 무능(無能)한 하느님입니다. 자비하기에 무능인 것입니다. 악의 신비 앞에 속수무책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왜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면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없었나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 묻던 힘없는 하느님은 또 카인에게 동생 아벨의 소재를 묻습니다. 분명 하느님은 울먹이며 물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픔이 감지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뻔뻔한 카인의 모습, 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무죄한 이들의 죽음에 대해 오늘도 끊임없이 이들의 소재를 우리에게 묻습니다. 아,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이것저것 달라고 축복만 청하지 말고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 도와드리는 것이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실 성서의 모든 예언자들이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음을 참으로 헤아렸던,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던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한량없습니다. 살인자 카인에게 살길을 열어주는 하느님입니다. 왜 사형제도가 잘못된 것인지 잘 드러납니다. 살아서 보속하도록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살해될 위험성을 호소하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신 하느님의 자상한 배려가 놀랍습니다. 오, 하느님의 마음은, 인내의 사랑은 얼마나 깊고 깊은지요.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아픔을, 인내를 헤아리는 일이, 하여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것이 우리 영적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아담의 일생이 참으로 위대합니다. 이심전심, 자신의 아픔을 통해 하느님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헤아렸을 아담입니다. 자기 운명에 끝까지 충실했던 아담입니다. 자식들의 칼부림으로 인해 아벨이 큰 아들 카인에게 살해 되었을 때 아버지 아담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겠는지요. 이 모두를 묵묵히 참고 받아들여 끝까지 살아낸 아담의 일생이 참으로 위대합니다. 가끔 힘들어 하는 부부들에게 한 조언도 생각납니다.

"잘 살고 못 살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렵고 험한 인생, 그저 부부가 이혼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냈다는 자체가 위대한 일이요 구원입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묻거나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아담을 보십시오. 하느님을 믿었기에 이렇게 현실적 사람입니다. 진정 영적일 수록 현실적입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합니다. 하느님을 믿었기에 이 엄청난 아픔의 슬픔을 겪어낼 수 있었던 아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아픔의 상처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비극의 아픔을 감당하고 꾿꾿히 살아 낸 아담의 위대함이 감동입니다.

'셋을 낳은 다음, 아담은 팔백년을 살면서 아들딸들을 낳았다. 아담은 모두 구백삼십년을 살았다.'(창세5,4).
하느님을 참으로 믿었기에, 하느님 꿈이 늘 생생했기에 모든 아픔과 슬픔을 이기고 이렇게 현실적 인간으로 항구히 천수를 누린 아담임을 깨닫습니다. 진정 위대한 신앙의 사람, 현실적 인간 아담입니다. 이런 아담의 대를 잇는 영적 계보가 내일 등장할 주인공, '노아'입니다.

사람과 보조를 함께 하는 하느님 인내의 사랑이, 기다림이 놀랍습니다. 사람이 철이 나 하느님의 마음을 깨닫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마침내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예수님이 등장합니다만 철부지 사람들의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인데 눈이 멀어 보지 못하니 별난 표징을 요구합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표징을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에게 깊이 탄식하시며, 그들을 버려둔 채 홀연히 떠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느님 마음을 헤아려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이요 기적인데 하느님 마음에 깜깜하니 아무 것도 보일리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 하느님의 꿈을 현실화하며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31,20참조).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성서는 인류의 첫 형제가 서로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사랑하며,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역사는 담담하게 이야기 합니다. 조선의 개국 당시에 ‘왕자의 난’이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권력 때문에 사랑해야 할 형제들이 서로 싸우고, 죽였습니다. 1950년에 있었던 ‘한국전쟁’은 사상과 이념 때문에 사랑하는 동포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던 비극의 역사입니다. 끊임없이 분쟁이 벌어지는 중동의 전쟁은 역시 형제들의 다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인데 지구촌에는 가난, 굶주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류의 사망 원인은 자연재해와 질병 그리고 다른 동물의 공격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형제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국어책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형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은 이제 막 장가를 간 동생을 위해서 자신의 논에서 소출한 벼를 동생의 논으로 가져다줍니다. 동생은 자녀들이 많은 형을 위해서 자신의 논에서 소출한 벼를 형의 논으로 가져다줍니다. 달빛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에 형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는 진한 우정을 이야기 합니다. 

1997년 우리나라는 IMF라는 높은 파도를 스나미처럼 맞이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형님은 음식점을 크게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했습니다. 장사는 잘 되지 않고, 이자는 높아졌고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형님에 대한 원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부모님을 제가 모시게 되었습니다. 의정부에 전세를 얻었고, 10년 전에는 작은 빌라를 매입하였습니다. 지금은 대출금도 모두 갚았고, 홀로 되신 어머님께 매달 용돈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으면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가족들이 서로 아껴주며 살아가는 형님과 형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벌써 15년이 지난 일입니다. 돌아보면 그런 일도 다 감사할 뿐입니다. 덕분에 제가 효도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고, 존중하며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표징을 요구하지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님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은총도 그 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그렇지만 자주 접하게 되면 둔감해지기 마련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만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 맞는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 진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당신의 권능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이 지니셨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순결한 마음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바리사이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주님을 시험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보입니다. 그들 마음에 어둠의 영이 가득 찼습니다. 의인으로 차처한 이들이 어둠의 하수인이 되는 것은 정말 한 순간인 듯합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 땅에 구현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위한다는 그들의 의도가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적 힘의 논리가 앞서자 어둠의 영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을 자신들의 틀 안에 넣어버리고자 하는 교만이 넘실거립니다. 

주님은 늘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내어드릴 것은 마음의 순결함, 마음의 깨끗함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마음이 깨끗해야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신기한 표징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삶에서 하느님을 만나뵈올 수 있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볼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참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상을 끊임없이 초월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만납니다. 깨끗한 마음의 눈을 통해 우리는 평범함 안에서 비범함을, 찰나 안에서 영원함을, 일상 안에서 기적을 깊이 봅니다. 

비가 내리는 이 아침 지인이 짧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참 고마운 빗님이지요.
감사로 시작하는 오늘이 선물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 8,1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신이 어디 있어?
종교는 다 가짜야!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이용해서 신을 팔아먹는 장사꾼에 불과해!
정말 신이 있다면 표징을 보여줘 봐!
그라믄 한번 믿어볼까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 온통 하느님의 표징들인데...
내가 살아 숨쉬는 것조차 기적이요, 내가 사랑하며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요.
이런 수많은 기적들과 표징들을 못 본다면 그 어떤 거창한 표징이 내려도 절대 믿지 못할 테니까 그런 사람은 어떤 표징도 못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오늘 또 어떤 구원의 표징을 보게 될까요?
또 어떤 하느님의 선물들을 보고 감사드리게 될까요?
오늘 하루를 살면서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의 미소를 만나시길 축원합니다.



하느님도 편애를 하실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제 아담에게 “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고, 그제 하느님께 지은 죄에 대해서 얘기하는 창세기는 오늘 인간에게 지은 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기회에 여러 번 얘기한 것이지만 사실 원죄는 인간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지은 겁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원죄의 탓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근원적으로 하느님께 있습니다.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죄를 지었지만 그런데 그 이유가 하느님의 편애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제임스 딘 주연의 에덴의 동쪽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저도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바로 카인과 아벨의 얘기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이며 에덴의 동쪽이란 제목은 아담이 죄를 짓고 동산 동쪽으로 쫓겨나고 카인도 아벨을 죽이고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게 된 데서 따온 것이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형만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자 비뚤어진 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아버지가 좋아할 일을 하지만 끝내 사랑을 얻지 못하게 되자 자기 형을 파멸시킴으로써 가족이 결과적으로 다 잘못되게 됩니다. 인간이란 영원히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고, 사람에 따라 그리고 성장 과정에 따라 연인, 친구, 스승 등 받고 싶은 사랑이 달라지긴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부모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주제입니다. 그러니 부모가 편애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저의 경우도 저희 할머니가 저보다 형을 더 사랑하는 것 때문에 할머니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꼈고 나도 같은 사랑을 받고 싶어 했으며 형에 대해서는 형이니까 더 사랑 받아야 한다 생각하고 존경하면서도 나이 차이가 나는 형인데도 사랑을 놓고 경쟁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이 편애하듯 편애하고 차별하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음에도 하느님께서 차별치 않고 편애치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합니다. 인간 사랑에 대한 의심이 하느님 사랑에 대해 의심케 하는 것이고, 인간의 편애와 차별을 하느님께 투사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왜 인간은 느끼지 못하고 인간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걸까요? 인간은 사랑이 성숙하지 못할 때, 그리고 성숙하지 못할수록 나만 사랑하기를 바라고 나를 더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만 사랑할 때 사랑한다고 느끼고 나를 더 사랑해야만 사랑한다고 느끼며, 그러니 모두를 사랑하면 사랑을 못 느끼고 똑같이 사랑해도 사랑을 못 느낍니다. 나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나의 햇빛이고 나의 감나무에 걸린 달이 나의 달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공동소유는 안 되고 뭐든 내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고 하느님의 사랑도 나만의 사랑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나무인 동산의 선악과나무를 나의 나무로 따먹으려한 인간은 하느님 사랑도 보편적인 사랑으론 만족 못하고 내 사랑이길 바랍니다. 이 소유적 사랑을 넘어서야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고 하느님 사랑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발견하는 일상의 기적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바라고 특별하고 획기적인 사건들에 관심을 쏟곤 한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예언자다운 모습을 보자 그분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다(8,11). 그들이 이런 요청을 한 까닭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능력과 권위를 지녔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권위는 외형적인 것, 인간의 기준에 의한 것, 자신들에게 유익한 것, 자신을 높여주는 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그 자체로 생명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깊은 곳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절대의 힘이요 사랑이다. 그 권위는 볼 수 없으나 사랑을 지닌 사람들을 통하여 드러난다. 신앙인들의 권위도 인간의 뜻이나 힘, 소유와 애착, 재물이 아닌 하느님께 뿌리를 두어야 한다. 참 권위는 순수한 사랑과 믿음에서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8,12) 그들이 요구한 표징을 단호히 거부하셨다. ‘깊이 탄식하셨다’는 표현은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마음과 불신에 대한 일종의 분노와 비탄을 드러내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뜻대로 강요되실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놀랄만한 표징이 주어지더라도 그 표징을 보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나 입맛에 따라 기적적인 성공과 놀라운 결과를 바라곤 한다. 그리고 바리사이처럼 그것을 얻기 위하여 자기 방식대로 움직이며 기도마저도 이기적인 지향으로 바치곤 한다. 이 얼마나 앞뒤를 못 가리는 어리석은 짓인가! 우리가 탐욕과 자기중심적인 삶의 자세,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것을 끌고 가려고 하는 한, 하느님께서는 자비로 베푸시는 기적과 표징마저도 감추어버리실 것이다. 각자가 깨끗한 ‘마음의 거울’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만나거나 알아볼 수는 없다.

오늘 복음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 하나만으로 그분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표징만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신다.”(8,13) 그들의 태도가 예수님과의 단절 곧 일종의 심판을 부른 셈이다. 그렇다! 불순한 마음, 눈앞의 자기 이익과 안락함, 쾌락,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만을 고집하며 다른 이들도 하느님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원한 죽음뿐이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카인의 처지가 그렇다. 카인은 자신의 예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자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영원히 죄의 굴레를 쓰게 되어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창세 4,12)가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는 달리 자신의 어둠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그 어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오,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 제 마음의 어두움을 비추어 주소서. 주님, 당신의 거룩하고 참된 명(命)을 실천할 수 있도록 올바른 믿음과 확실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감각과 깨달음을 주소서.”(십자가 앞에서 드린 기도) 그는 평생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복음을 실행한 끝에, 1224년 라 베르나 산에서 주님의 거룩한 오상(五傷)을 받았다. 그 오상은 단순한 기적적 표징이 아니라 평생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았던 그의 삶에 대한 하느님 편에서의 ‘사랑의 인증’이었던 것이다.

나의 삶을 겸허히 되돌아보자! 나의 완고함과 불신 때문에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얼굴을 떠올려보자! 나는 눈앞의 것에 사로잡혀서 내 안에서 숨 쉬고 계시는 예수님을 느끼지도 만나지도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과연 ‘어떤 표징’을 원하는가? 나는 진정 믿음과 회개를 통해 내적인 변화를 이루는 “일상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가? 아니면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줄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처럼 현세적 만족만을 바라는가? 고통과 희생, 자기 봉헌은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재물과 현세적 기쁨을 찾아 헤매고 있지는 않는지. 세속적인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바람으로써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오늘 나의 눈길과 마음이 엉뚱한 허상을 좇는다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버려두신 채 내 인생의 바다 저편으로 떠나버리시리라!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주보고 있어도
표징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자신이 지고있는
십자가에서 
표징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에서도 
결코 표징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표징을 뚜렷하게 하는 건
언제나 우리의 기도입니다.

기도야말로 회개와
용서의 표징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는
삶의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교만과 욕심의 표징은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갔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진실된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표징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이 세대의 아름다운
표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표징의 씨앗은
이미 우리자신에게
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표징이 아니라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가지 않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향기로운 표징이 되는
화해의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산다는 건
목숨처럼
십자가의 시간을
영글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표징을 읽을 때
우리는 생명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어제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피정 강의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강의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두 달 만에 하는 강의라서 그런지 약간의 긴장을 하게 되더군요. 아무튼 긴장감을 가지고 피정자가 있는 강화도의 어느 피정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인천에서 강화 가는 길은 워낙 공사하는 구간이 많아서 도착 시간을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략 1시간 정도 걸리지만 보통 넉넉하게 1시간 30분을 예상하고 출발을 하지요. 어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글쎄 신호 하나 막히지 않는 것은 물론 도로에 차도 없는 것입니다. 강화에 살았었고 또 그렇게 강화를 많이 다녔었지만, 낮 시간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결국 1시간 정도 걸리는 길을 4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지요. 

한참을 기다려 피정 강의를 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오랜만에 하는 강의이고, 또한 그렇게 긴 강의가 아니라서 시간이 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서두른 경향이 있었고, 약간 버벅거리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나도 좋은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제 강의에 대한 시를 그 자리에서 직접 써서 선물로 주셨답니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내 삶에는 깜짝 놀랄만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도 깜짝 놀랄만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이 땅에 산소를 10분만 끊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과연 우리가 살아 숨 쉴 수 있을까요? 내 존재 자체도 깜짝 놀랄만한 일이고,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 역시 놀라운 하느님의 배려와 섭리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하느님께 부탁만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나만의 욕심을 채우는 부탁을 청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고 그 부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하고, 하느님께 갖은 불평과 불만을 던질 때도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더 많은 것을 주고 계신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나 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역시도 사람들은 하느님께 깜짝 놀랄만한 표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 표징은 조금만 잘 살펴보면 우리의 일상 안에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특별한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내 곁에 있는 깜짝 놀랄만한 표징들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어떠한 순간에서도 하느님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과거의 일로서만 처리해 버리면 미래까지도 포기해 버리는 것이 된다.(윈스턴 처칠)

쉼(조진형)
"내가 너무 빨리 걸어서 내 영혼이 나를 미처 못 따라오고 있어요. 이쯤에서 쉬면서 영혼을 기다려야 해요."
남미의 원주민 셀퍼들은 탐험대가 아무리 독촉을 해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쉴 만큼 쉬지 않고는 산을 오르지 않습니다. 고산에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걷게 되면 정말로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쉼표를 모두 없애도 여전히 훌륭한 음악일 될 수 있을까요? 음악에서 쉼표는 연주하지 않으므로 의미가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음표가 음악을 만들어 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듯이 쉼표 역시 하나 하나가 음악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휴식 없는 등산이나 쉼표 없는 음악처럼 사는 인생은 마침표를 일찍 찍게 됩니다. 휴식은 세상살이에 바빠서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2010년을 정리할 날이 3일도 채 안 남았습니다. 새해를 함께 시작하려면 영혼을 기다리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지 않으세요?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하루하루가 표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정말 변화되지 않는 바리사이들 앞에 깊이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탄식’은 어떤 때 나오는 것입니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때, 정말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 때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종착지가 바로 코앞인데, 구원이 바로 눈앞인데, 영원한 생명이 이렇게 자기들 가까이 있고, 금방 손에 넣을 수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발로 차버리는 바리사이들 앞에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터져 나온 탄식이었습니다.

  그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준 기적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간 예수님의 손으로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빠져나간 악령들, 죽음에서 되살아난 사람들...그 모든 하늘의 표징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확인했던 바리사이들이었건만,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메시아의 능력을 자신들의 눈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승복하여 예수님께 돌아서기 위해서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저 호기심에, 그저 장난삼아, 애초부터 신앙의 눈이 아니라 적개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눈으로 예수님에게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의 모습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감과 실망감을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극에 달한 바리사이들의 불신과 적대감, 꽉 막힘 앞에서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는 가슴 아프셨겠지만 그들에게서 기대와 희망을 접습니다.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십니다. 영혼의 눈이 먼 그들이었기에, 바로 자기들 눈앞에 다가온 구원을 놓치는 일생일대의 과오를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주변을 곰곰이 살펴보면 일상의 모든 흐름들이 표징입니다.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눈을 부릅뜨고 기적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회심하면, 우리가 제대로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주변의 모든 것이 다 경이로움의 대상이요, 매 순간 순간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랜 투병생활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한 형제의 간절한 바람이 아직도 제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그 간절한 바람이란 것이 평범한 우리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그렇게 간절했나 봅니다.

“시원한 물 한 컵만 벌컥벌컥 들이 마셔봤으면...”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한 것 같은 우리의 작고 소소한 일상들은 기적과 표징의 연속이 분명합니다.



봉사자의 길
신효원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가꾸고 이루어 나갈 일꾼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좋은 봉사자의 모습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봉사자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하느님의 힘을 얻기 위해서 봉사 중에는 하느님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일을 마친 뒤에는 내 안의 저수지를 다시 그분의 사랑으로 채우는 시간을 가져야겠지요. 그러면 오랫동안 봉사를 하고 힘든 일을 하더라도 내 힘으로 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충실한 종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봉사자는 시간을 잘 지켜야 합니다. 교구 단체에서 십 년째 함께 봉사하는 형제가 있는데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 형제를 생각하면 언제나 든든합니다. 
작은 것이 큰 믿음을 준 것이지요.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은 일의 우선순위를 분별하여 시간을 소중히 쓰게 됩니다. 봉사자는 기쁘게 봉사해야 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낫고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즐기며 하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봉사자의 기쁜 모습에 다른 이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칭찬과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그는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왜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느냐 ?
이창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늘의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아마도 기적을 보여 달라는 거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믿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이들한테 기적은 아무 의미 없는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거부하고 참된 신앙 위에 당신 교회를 짓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생애와 부활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하느님의 모든 계시를 알려주신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시대의 표징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2005년 한 해 34만 여건의 낙태가 시술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2009년 합계 출산율 (가임 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 수)은 1.15명으로 세계 최하위이며, 자살률은 하루 평균 38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 교통사고 사망률은 OECD 국가 평균의 2배 이상인 곳. 정부 지원으로 인공임신시술이 가능하며, 비윤리적인 난자 매매와 인간생명을 파괴하는 배아연구를 허용하고, 사형제도를 국민 다수가 찬성하며 법률로 유지하는 나라. 최근에는 소극적 안락사인 ‘존엄사’ 를 법률로 허용하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낙태 관련 법률을 개정해 95퍼센트 불법낙태를 아예 합법화하자는 나라 ….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어느 신부님은 이런 우리나라의 현상을 보고, 현대 세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생명경시현상이 백화점처럼 드러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수많은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믿을 마음이 없으면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왜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느냐 ?’ 예수님의 깊은 탄식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내 이웃은 어디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너 어디에 있냐고 물으시는 하느님은 이제 네 아우, 네 이웃은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물으십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죄 중에 있을 때, 나는 하느님 밖에 있고 내 이웃은 내 밖에 있습니다.
죄란 사랑이신 하느님 거부이고, 그러니 사랑의 거부이고 관계의 거부이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중심인 내가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 모두를 거부하고, 오직 내 안에 틀어박혀 있기에 모두 관계 밖에 있는 것입니다.

요즘 최 고은이라는 분의 서러운 죽음 때문에 많은 분들이 마음 아파합니다.
먹는 것이 지천이서서 마구 버리는 이때에 굶어 죽다니. 그가 그렇게 배고프고 굶주려 죽을 때 나는 무엇을 했나?
이런 자성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무언가 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아름답고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름답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 편 씁쓰레합니다.
왜 씁쓰레합니까?
서러운 죽음이 어디 최 고은이라는 분, 그 한 분뿐이겠습니까?
서울 역 노숙자들, 결손 가정의 아이들, 자식 없는 노인들, 북한의 우리 형제들과 멀리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아이들.
그들이 외로이 죽어갈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가 배가 불러 죽겠다고 할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가 배를 두드리며 너무 배가 불러 죽겠다고 할 때 굶는 사람이 있다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얘기를 해주면 오늘 카인처럼 
“나는 그를 모릅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저는 우리라고 했습니다.
저를 빼놓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분명 몰랐습니다.
신문에서 보기 전에는 최 고은이라는 분을 전혀 몰랐습니다.
어떻게 제가 모든 사람의 처지를 다 알고 헤아립니까?
그러므로 제가 카인처럼 모른다고 하는 것은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들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은 모름이고,
내 기억에서 밀어낸 모름이고,
내 관심에서 밀어낸 모름이고,
내 사랑에서 밀어낸 모름입니다.

내 안으로 밀고 들어와 성가시게 굴려는 그를,
나에게서 부모의 유산을 빼앗아가려는 그를,
부모의 사랑을 놓고 나와 경쟁하는 그를,
나는 알고 싶지 않고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그를 지키는 사람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저는 오늘도 카인처럼 이렇게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이재학 신부님

오래전에 상영된 영화 <기적>이 있다. 그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난 수녀를 대신해 수녀원의 성모상이 그 수녀로 변해 돌아올 때까지 대신 수도 생활을 한다는 내용이다. 수녀가 돌아오자 성모상이 있던 자리로 스윽 올라가는 성모님의 그림자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중학교 때 그 영화를 처음 보았던 것 같은데, 그때는 성모상이 수녀로 변신해서 오랜 시간을 그 수녀로 살았던 일이 기적이고, 영화 제목도 그래서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영화를 보고, 생각해 보니 그런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기적이 아니라 주인공 데레사 수녀가 방황 속에서 다시 하느님의 사랑을 찾고,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깨달아 본래 자리로 돌아와 무릎 꿇는 것, 그녀 스스로 하느님의 사람으로 먼 길을 돌아온 것이 진정한 기적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은 기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자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한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을 보아야 믿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태도가 영 잘못되었다고 질책하신다. 기적의 본모습을 알아봐야지 그림자만 쳐다보려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 끝만 보아서는 안 된다. 


어디서 성모상이 눈물을 흘린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신기해 쫓아다니는 것은 그림자를 부여잡으려는 바보짓과 같다. 신기한 일만 붙잡을 것이 아니라 그 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사랑과 일치를 주시는 분이시다. 사랑과 일치에 어긋난다면 그 신기한 일은 기적도, 참된 것도 아니다. 표징만을 쫓는 바리사이는 되지 말아야 한다.




박영진 신부님 

오늘 마르코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표징 혹은 징표라는 말마디는 ‘어떤 생각을 전달하거나 사물에 대한 견해를 밝힐 때 기호나 상징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사상전달의 수단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성서적 의미로 표징이라고 할 때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나아가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구약시대의 표징이 대체로 기적과 연결된 계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비해, 신약시대의 표징은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인간들이 행해야 할 바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참조;‘징표’ 가톨릭대사전)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구약의 의미의 표징을 요구하는데 비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표징은 신약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그 시대에 맞는 표징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이 드러내는 시대의 표징을 파악하고, 그것에 포함된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함을 의미’(참조;‘징표’ 가톨릭대사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독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카인과 아벨’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창조주께서 농부인 카인의 제물보다 목동인 아벨의 제물을 굽어보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큰 죄를 지은 카인에게 벌(11-12절)도 내리셨지만, 두려워하는 그를 끝까지 보호 하신다(15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 또 나를 미워하는 사람 역시 있습니다. 특별히 후자의 경우, 우리 대부분은 어떠한 태도를 취합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참조;마태5,44)구요. 그리고 덧붙이십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5)라구요. 이 시대 주님의 표징은, 그리고 우리가 살아야하는 표징은 바로 용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용서에 대하여 묵상하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아멘.





한 소년이 할아버지와 함께 나귀를 끌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왜 바보같이 나귀를 타고 가지 않느냐고 비웃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귀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걸어가자 또 어떤 이가 어린 것을 걷게 하는 무정한 할아버지라는 비난을 합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손자를 나귀에 태웠습니다. 또 어느 정도 길을 가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손자를 가리키며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아이라고 욕을 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나귀를 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말 못하는 짐승에게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고, 정말 해도 너무하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퍼붓는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이 할아버지와 손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이러한 경우를 우리들은 종종 체험을 하게 됩니다. 정말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했지만, 그 의도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때에는 힘이 빠지지요. 그래서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다른 방향으로 바꾸면, 또 그렇게 바꾸었다고 이러 저래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더욱 더 힘이 빠지곤 합니다. 


어떤 사람이 치과에 가서 이 하나를 빼는 데 얼마냐고 물었답니다. 의사가 10만원이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 말했지요.

“아니? 이 하나 뽑는데 1분도 안 걸리잖아요. 왜 그렇게 비싼 거죠?”

그러자 심각한 표정으로 의사가 말했답니다.

“물론 환자분이 원하시면 아주 천천히 천천히 뽑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 하나 빼는데 정말로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환자에 대해 일침을 놓는 의사의 말이 정말로 압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 예수님께서도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일침을 놓는 말씀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의 인간 사랑의 그 깊은 뜻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외적으로 보이는 기적을 행하셨던 예수님이시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기적 자체만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어떤 신기한 일을 행할까?’ 하고 예수님을 보고만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예수님께 대한 부정적인 말도 합니다. 마귀를 쫓아내면 베엘제불의 도움으로 쫓아내는 것이라는 말을 하며, 또한 힘없고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 부정한 사람과 어울리기 때문에 역시 부정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해버립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표징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혹시 우리들도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여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직접 보여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내게 주어질 은총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행복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日常 속을 통과해 간다('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중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지름길도 없으며,

일상의 현실을 슬쩍 비켜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행복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을 통과해 간다.


게다가 우리는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대단한 비용을

들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다만 이 순간-지금 그리고

여기에서-우리 주변의 작은 일들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면 되는 것이다.


새들이 앉아 있는 나무, 먼 바다,

폭풍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된다.

삼라만상이 아름다움을 인지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것은 일종의 선물이다.




표징     

이정호 신부님

신학생이던 시절에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인가를 고민하면서 하느님께 분명하게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 끝에 ‘성직자의 길이 제가 가야 할 길이라면 알기 쉽게 표징을 보여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어떤 표징을 주신다면 신학교에 남고 그렇지 않으면 짐을 싸겠습니다’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구한 표징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저는 하느님께서는 내가 성직의 길을 걷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나보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요구한 우연한 표징 하나에 제 인생을 건다는 것이 참으로 미련스럽게 여겨져 죄송한 마음에 다시 한 번 기도하고 마음을 다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표징을 보고 싶어하지만 표징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표징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한 표징도 있겠지만 하느님의 일을 믿고 신뢰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표징이요 그러기에 또 다른 표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표징도 없습니다.

 



기대나 조건 없이

김홍일 신부님

얼마 전 감기가 심하게 찾아왔습니다. 아침기도도 못 나가고 방에 누워 성경을 읽는데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신 부분에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라는 구절이 가슴에 와 꽂혔습니다. 여러 번 읽은 구절이었지만 그날 그렇게 마음에 다가왔던 것은 감기를 털고 일어서고 싶은 깊은 내 바람에 조응하는 구절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래 구절은 더 이상 읽지도 않고 바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일으켜 달라고. 그런데 기도 중에 마음 한구석에서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치유를 통해 보여 달라는 기도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내 건강을 담보로 하느님을 시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습니다.

요사이 병원 방문을 하며 더 이상 의학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이웃을 자주 만납니다. 감기에 걸린 내가 이 정도인데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환우들이나 가족들은 오죽하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순간까지도 따뜻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성숙한 믿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표징 없이는 자신의 신앙을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에도 자신의 믿음을 아름답게 익혀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하느님께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우리가 해결하고 싶어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새삼 배우고 있습니다.

감기는 이튿날 나았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담보로 하느님을 시험했던 내 기도에 대한 부끄러움과 후회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기대나 조건 충족과 상관없이 하느님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과 신뢰라는 사실을 새삼 생각합니다. 더욱이 절실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일은 믿음을 찾고 구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을 흥정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새삼 생각했습니다. 믿음은 바깥에서 시험하고 관찰하는 일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과 처지에서도 이미 우리에게 와 계신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며 살아가는 일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징표는?

박성태 신부님

독일의 한 남작이 자신의 거대한 집에 있는 양쪽 굴뚝에 여러 갈래의 철사줄을 연결하면서 어떤 철사줄은 강하게, 어떤 철사줄은 약하게 연결시켜 그 줄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일컬어 거대한 바람 하프라고 불렀습니다.

이 거대한 바람 하프는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는데, 어떤 소리는 솔솔부는 봄바람소리요, 어떤 소리는 시원한 여름 바람소리요, 또 어떤 소리는 한겨울의 강풍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바람 하프가 내는 소리 중에서 가장 우렁차고 아름다운 것은 남작의 집 골짜기를 가득 메우는 한 겨울의 강풍소리였습니다.

한겨울의 강풍이 휘몰아칠 때 여러 갈래의 철사줄은 참으로 우렁차고 힘있게 소리를 냈습니다.

남작은 이 소리를 들으며 ‘인생에 있어서도 강풍이 휘몰아칠 때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베에토벤은 귀머거리가 되었을 때 불후의 명곡을 남겼고, 에디슨은 모든 시험에서 낙방하여 둔재 소리를 들었지만 가장 위대한 발명을 하였고, 헬렌 켈리도 맹인이요 귀머거리였지만 불후의 명작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다가오는데 마음들이 깨끗하지 않는, 예수님을 시험하고픈 마음으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면서 그들에게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그들의 교만한 콧대를 확 꺽었으면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올바른 모습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접근한 그들에게 어떤 기적이 있어도 그들은 쉽게 수긍을 하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기적의 뜻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그들에게는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기적은 어떤 것일까요? 혹 우리는 마치 마슬사가 마술을 부려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만들듯이 그런 유형들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것들을 쫓아 계속 헤메는 것은 아닌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 기적은 사람과 동떨어진 어떤 것을 찾아서는 안 되리라 여깁니다. 거기에는 환상만 있을 따름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고쳐 주시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소외된 이들을 가까이 불러 주시는 이런 모습이 오늘날 신앙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세라 여깁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아무 어려움 없이 아니 어려움을 피해가면서 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표징이 아니고, 삶에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수록 그것을 이겨나가고자 애쓰는 모습이 이 시대에 진정한 표징이라 생각합니다.


사목생활을 하다보면 가정형편상 여러 모습으로 어려움들이 있는데, 그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잘 이겨나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그분들이 바로 이 시대에 참다운 신앙적인 표징을 보여주고 있기에 마음이 기쁩니다.

반면에 가진것이 남보다 있으면서 많은 불만과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오늘 복음의 바라사이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나를 생각해 봅니다. 또한 기도해 봅니다. 나 또한 바라사이 모습은 없는지? 아니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는 이 시대 신앙의 표징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사목자가 되길 은혜를 청해 봅니다. 또한 모든 분들이 오늘 하루도 은혜로운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죄악의 사슬을, 윤회의 사슬을 끊는 길"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수녀님들이나 저는 하느님의 기적이며 축복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끊임없는 내우외환으로 얼마나 무고한 아벨들이 죽었으며, 한 맺힌 삶들은 얼마나 많았는지요?

또 낙태로 인해 죽은 생명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래서 연미사, 생미사들을 많이 봉헌하는 가 봅니다.

어느 분들은 조상들의 죄를 용서 받고 후손들이 구원 받고자 하는 애절한 마음에 생각나는 조상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가계 치유 미사를 청하기도 합니다.

어느 자매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시집을 와보니 남편의 생활이 문란했고, 거슬러 올라가니 시아버지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저 역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 죄의 사슬을 내 대에서 끊고 자식 대까지 가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에 세례를 받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덕분에 자식들은 반듯하게 자라나 영세 받고 신앙생활에 충실하며 제 몫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와 흡사한 장한 믿음의 어머니들의 고백을 들을 때마다, 죄의 악순환의 사슬을 끊는 길은 회개와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의 수도자로 인해 전 가족이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죄의 사슬은 완전히 끊어진 것입니다.

죄악의 악순환,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이래서 죄의 유전에 대해, 불가에서의 업보에 따른 윤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아담의 원죄도 이런 죄의 유전성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죄는 큰 자식 카인에게 유전되어 살인의 대죄를 짓지 않습니까?

졸지에 카인과 아벨, 두 자식을 잃어버린 아담, 하와 부부입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부전자전이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 이어, 아벨 동생을 죽인 카인도 땅에서 쫓겨나 정처 없는 유랑 길에 오릅니다.

우리의 방랑벽, 아마 여기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릅니다.

고맙게도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복원된 에덴동산, 교회공동체에 우리를 모아 주셨습니다.

죄인들에 대한 놀랍고도 고마운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주신 하느님은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 내심의 아픔과 고통, 실망은 얼마나 컸겠는 지요!

무한한 인내와 연민의 하느님임을 깨닫습니다.

죄보다 강한 하느님 자비의 은총입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보면 절망이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보면 희망이 샘솟습니다.

사실 우리가 죄 없어, 잘 살아서 구원 받는 게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은총으로 구원 받습니다.

죄의 악순환의 고리 사슬을, 윤회의 고리 사슬을,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 사슬을 끊는 길은, 벗어나는 길은, 하느님의 은총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회심과 깨달음뿐입니다.

이래서 매일 수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믿음의 눈, 깨달음의 눈에는 모두가 기적이요,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지금 여기에 살아있음이 기적이요 구원이요 축복이요 행복입니다.

죄의 사슬에 매여 눈먼 이들은 절대로 이런 축복의 현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믿음의 눈 없으면 아무리 표징 보여줘도 보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논쟁의 악순환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논쟁하는 바리사이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바리사이들을 상대하지 않고 버려둔 채 미련 없이 떠나시는 주님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세대뿐 아니라, 합리적 사고에 눈먼 오늘 날의 불신의 세대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바리사이들에게 화급한 것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 아니라, 회심과 믿음입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회심을, 깨달음을 심화하면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표징보다는 믿음을

김미자 수녀님

독선과 우월감으로 가득 찬 바리사이들은 빵의 기적을 비롯해 예수님께서 베푸신 많은 기적을 보고도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가장 똑똑하고 완벽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껏 당신을 믿기에 충분한 징표를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은 더 확실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있고, 눈이 가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설립자 무아 방유룡 신부님은 ‘교만하고, 욕심 많고 나만 박학하다고 하는 사람한테는 검은 막을 내려 신비의 빛을 못 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바로 교만하고, 욕심 많고, 자신들이 가장 박학하다고 하는 사람들이어서 하느님의 신비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 더 확실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며 다가오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 현존하며 우리를 만나고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전례와 성사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하여 예수님께 탓을 돌리며, 주님께서 현존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주시면 믿겠다고 요구합니다. 표징을 요구하기보다는 믿음을 견고히 해주시기를 청하는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자신이 이 동네에서 제일 넓은 땅을 가졌다고 열심히 자랑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 땅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고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 근처에서 제일 큰 부자임을 드러내었지요. 잠자코 이 사람의 말을 듣던 농부가 어디선가 무엇인가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전국 지도였습니다. 그는 지도를 펼친 뒤에 이렇게 말했지요. 

“자네가 가진 땅을 이 지도에 표시해 보게.”

이 사람은 당황해하며 말했지요. 

“전국 지도에 내 땅을 어떻게 표시할 수가 있겠나? 내 땅은 이 지도에 표시할 만큼 그렇게 크지는 않아.”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도에서 찾지도 못할 땅을 뭐 그렇게 크다고 자랑하는가?”


우리가 자랑하는 것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것이 과연 하느님 앞에서도 자랑할 만한 것일까요? 티끌보다도 작은 것들을 대단하다고 자랑하고 다녔던 내 자신을 다시금 부끄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크신 하느님 앞에서 너무나도 미약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기 모습에 대해 자랑할 것도 없으며, 더불어 하느님의 이끄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불평불만을 던져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긴 과거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감히 하느님 보다 위에 서려고 했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계속해서 요구합니다. 이미 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고, 하느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 왔음을 선포하셨음에도 그들은 믿기 보다는 또 다른 표징은 무엇이냐는 어리석은 모습만을 간직했습니다. 


사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특별한 표징이 내게만 내려졌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바로 일상 안에서 계속해서 주어지는 주님의 표징을 발견하는 비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훈련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기는 뒤집기를 반복하고, 약한 손으로 엉금엉금 기다가 어정쩡하게 일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걷기 훈련을 합니다. 말하기도 마찬가지로 반복된 훈련의 연속입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사랑해’라는 단어를 말하려면 수 천 번이나 듣고 어설프게 발음을 하면서 점차로 말하게 된다고 합니다. 


현재의 나는 이런 다양한 훈련을 받으며 성장해왔습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와 묵상 등 계속된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또한 하느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성장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훈련을 통해 더 나은 나로 변화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단 하나, 지혜롭고 성숙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레이첼 나오미 레멘).


지금 말하세요(권소연, ‘사랑은 한 줄의 고백으로 온다’ 중에서)

2001년 9월 11일,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이 끝나 가는 순간에 예외 없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사랑해.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아. 그런데 나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아기들 잘 부탁해(세계무역센터에 출근한 지 한 달 만에 변을 당한 사람이 아내에게 남긴 메시지).”

“여보! 내가 탄 비행기가 피랍됐어. 그런데 상황이 아주 안 좋아. 내가 당신 사랑하는 거 알지?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어. 만약 못 보더라도... 여보, 즐겁게 살아. 최선을 다해서...(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비행기 승객이 남긴 메시지).”

“난 아무래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아. 넌 정말 좋은 친구였어(한 남성이 죽음에 임박해 친구에게 보낸 메일).”

“엄마! 이 건물이 불에 휩싸였어. 연기가 들어오고 있어.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어. 엄마, 사랑해. 안녕...(세계무역센터에 갇힌 사람이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내용).”

“여보! 당신을 사랑해. 우리 딸 에이미도 정말 사랑해. 당신이 남은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꼭 행복해야 돼(한 승객이 추락 직전 아내와 통화한 내용).”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생의 마지막에 사랑을 전하려고 안간힘을 쓴 3,000여 명의 사람이 있었다. 이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다투고 아직 사과하지 않았다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당장 전화기를 들어라. 그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아무도 장담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표현해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강화에서 자전거를 탔습니다. 그동안 추워서 자전거를 많이 타지 못하기도 했지만, 바빠서 강화까지 나오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거든요. 아무튼 오랜만에 강화에서 자전거를 타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논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하늘로 날아가는 청둥오리 떼를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멋진 광경이었지요. 그리고 문득 하늘로 날아가는 청둥오리 떼를 제 사진기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진기를 얼른 꺼내들었지만, 이미 하늘 높이 올라가서 늦어버렸지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앞으로 가려고 했는데, 하늘로 올라간 청둥오리 떼들이 저쪽 논에 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하늘로 날아가는 청둥오리 떼를 사진에 담기 위해서 청둥오리들이 내려앉은 저쪽 논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혹시 사진을 찍기 전에 다시 날아 갈까봐 아주 조용히 이동했지요. 그리고 사진기를 꺼내는 순간 다시 하늘로 청둥오리들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그 순간을 찍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던 지요. 특히 원하는 그 순간을 찍기 위해서는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긴 사진가들은 셔터를 눌러야 하는 순간을 놓치면 아무리 멋있는 장면이라도 다시 찍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항상 긴장된 상태를 준비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 안에서도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삶의 멋진 장면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긴장감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힘들거든요. 또한 긴장감 없이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기도 하거든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음 속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 끊임없이 표징만을 요구했거든요. 즉, 예수님이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라면 자기들을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행해보라고 사람들은 요구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기적을 행해도 더 큰 기적만을 요구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었습니다. 그토록 기다린 메시아는 믿음으로만 만날 수가 있는데, 사람들은 편하게 메시아를 만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야구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정확한 타이밍을 맞춰야 제대로 타격을 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그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 얼마나 긴장되겠습니까? 하지만 긴장된다고 눈을 질끈 잡아버리면 투수의 공을 칠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칠 수가 없습니다. 즉, 긴장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긴장을 이겨낼 때, 정확한 타이밍을 맞출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편하게만 주님을 만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긴장을 이겨내면서 믿음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들이 그토록 원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다면 자화자찬하지 마라.(패이런드로스)


네 종류의 친구(‘좋은 글’ 중에서)

첫째 꽃과 같은 친구.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꽃이 지고 나면 돌아보는 이 하나 없듯

자기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는

바로 꽃과 같은 친구입니다.


둘째 저울과 같은 친구.

저울은 무게에 따라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기웁니다.

그와 같이 나에게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가

바로 저울과 같은 친구입니다.


셋째 산과 같은 친구.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이며

멀리 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늘 그 자리에서 반겨줍니다.

그처럼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 든든한 친구가

바로 산과 같은 친구입니다.


넷째 땅과 같은 친구

땅은 뭇 생명의 싹을 틔워주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없이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친구가

바로 땅과 같은 친구입니다.




좁은 문

김성웅 신부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표징을 요구받는 것은 그분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을 상기시킵니다(루카 4,1-13 참조). 

“악마가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고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3)는 것은 바리사이들의 표징 요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치신 것은 우리의 신앙 여정이 기적이나 표징을 보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좁은 문을 통과하는 사랑의 십자가 여정임을 전해줍니다.

바리사이들의 표징 요구는 사람들의 유아기적인 영적 갈망을 대변합니다. 

기적이나 표징을 찾는 마음에는 어느 모로 좁은 문을 통과하는 십자가의 길을 외면한 채 손쉽고 편안함이 보장된 신앙의 ‘고속도로’를 찾으려는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 자체가 사랑과 추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추종이 표징을 낳는 다는 것을 전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 길이야말로 우리가 보고 따라야 할 가장 결정적인 표징임을 믿고 그 길을 기꺼이 받아들여 우리 가운데서도 그 사랑의 표징이 드러나면 좋겠습니다.

 

 


일단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들을 버려두신 채 가셨다.”

오늘 복음의 이 마지막 말씀을 더 자극적으로 바꿔보면 “그들을 내버리고 가 버리셨다.”


주님은 아무도 버리시지 않는 줄 알았는데 주님도 누구를 버리시는가?

주님도 버리신다면 주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주님이 버리신다면 그래도 우리가 버리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싫어서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싫어해서 버리시겠습니까?

지혜서 11장이 얘기하듯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것을 싫어하고 미워할 리 없으시고 싫어하고 미워할 것으로 만드실 리 없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싫어하신다면 선이신 당신의 본질에 위배되고 우리를 미워하신다면 사랑이신 당신의 본질에 위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버리고 가신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일단은 포기이고 일단은 버리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기에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단(一段)은’입니다.

일단은 二段, 三段의 처음 단계입니다.

노력을 해도 안 되고 좋은 것을 주려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이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버림은 움켜잡음의 반대입니다.

움켜잡지 않음이지 싫어서 완전히 버려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흙구덩이에 같이 빠져들지 않음이요 엉킨 실타래에 얽히지 않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사람은 무엇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든지 나쁜 것으로 바꿔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부정의 매카니즘이 그를 지배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나쁜 것으로 만들고 부정의 매카니즘에 빠져들게 하는 교만의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부정의 매카니즘을 깨려하지는 않고 기적을 보여 그것을 깨라고 주님께 생떼를 부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버림을 받습니다.

누구나 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도 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버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버림을 받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남을 못 받아들이는 자신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적과 믿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태리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의 하나는 세계의 기적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기적이 일어난 각 지역에 가서 그 사건들을 면밀히 검사하여 보여줍니다.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로마에서 가까운 나폴리였습니다.

나폴리의 가장 유명한 기적은 뭐니 뭐니 해도 성 제나로의 피의 기적입니다. 성 제나로는 초대 교회 베네벤또 지방의 주교였는데 AD 305년경 박해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참수형 당했던 돌에서 피가 흘러나온 것을 하녀가 받아두었다고 합니다.

중세를 지나면서 유리병 속에 응고되어있는 피는 기이하게 일 년에 한두 번 다시 액체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사람의 피가 한 번 응고되면 다시 액체로 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축일이 되면 나폴리의 대주교님이 사람들 앞에서 그 병을 흔들어 보이고 그 병에 응고되어있는 피가 점점 액체로 되어 흔들리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한 과학자가 이 현상을 재연하였습니다. 무엇을 섞었는지는 모르나 화학적으로 피를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 굳어졌다가 다시 흔드니 액체로 변하였습니다. 마치 케첩이 응고되었다가도 흔들면 다시 액체가 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충분히 현대 과학으로 그런 기적은 하나의 속임수일수도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는지 제가 만나본 이태리 시골 사람들도 나주의 기적을 많이들 알고 있었습니다. 나주가 교회로부터 거짓이라고 단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텔레비전으로 교황님 앞에서 율리아 혀 위에 있던 성체가 피로 변하였다가 다시 성체로 변하는 장면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 PD수첩에 방영된 것을 보면 나주 율리아가 손에 쥐고 있던 제병을 남들이 안 보는 사이에 위로 뿌리면서 하늘에서 성체가 떨어졌다고 속이는 장면과 심지어는 그녀의 소변을 나누어 마시는 장면까지 나왔습니다. 또 성체가 피가 되게 하는 것은 이미 입속에 있는 상처를 다시 내어서 그렇게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기적이 있다고 하여 몰려가는 사람들 중 누구는 나폴리로 누구는 나주로 향합니다. 결국 나폴리로 간 사람들은 아직까지 교회에서 인정하는 기적을 보는 사람들이고 나주로 향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매우 창피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폴리처럼 교회에서 인정하는 기적을 찾아간 사람들이 나주를 찾아간 사람들보다 더 잘 했다는 말일까요? 저는 그들도 한국에 있었다면 나주로 향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어디나 기적을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텔레비전을 보고는 그 기적이 사실이 아닐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 결국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얼마 전에 오상의 비오신부님의 시신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분의 손과 발에는 오상의 자국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기 10일 전부터 오상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분이 계속 스스로 자해를 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내고 그 분을 치료했던 의사도 그것이 기적이 아니었음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이미 교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된 분입니다. 결국 어떤 기적들도 우리를 확신시키기엔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아무리 큰 기적이 일어나도 현대 과학으로 다 재현 가능할 것이고 믿지 않을 사람들은 안 믿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믿을만한 확실한 기적이 있다면 그들도 신앙을 갖겠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에서 인정하는 표징을 따르라고 하시지 않고 ‘표징을 요구하는 것 자체를 나무라십니다.’

이는 마치 한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이 친 자식인지 그 ‘증거를 대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DNA 검사를 해보자고 한다면 부모는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자녀는 부모가 평상시에 자신에게 하는 사랑을 보며 그 분이 자신의 부모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증명서가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증명서도 꾸며낸 것이 아니냐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당신이 메시아이심이 확실한데도 끊임없이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하느님께 무례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우리 일상사 안에서도 혹은 조금만 묵상해보면 하느님이 계심을 또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기 싫기 때문에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표징이 있어도 다른 핑계를 댈 것입니다.


어떤 패륜아는 부모의 재산을 빨리 물려받고 싶어서 부모를 살해하고 방화로 위장했다가 발각되었습니다. 또 어떤 패륜아는 보험금을 위해 친구를 시켜 어머니를 차로 치이게 하였습니다. 결국 패륜아가 되는 것은 부모가 사랑을 덜 보여주어서가 아니라 그 사랑에 올바로 응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당신의 사랑을 온갖 방법을 통하여 보여주시는데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은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부모 탓만 하는 패륜아와 같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표징도 믿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겐 믿음을 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믿으려고 한다면 아주 작은 표징으로도 믿음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또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사랑의 표징을 안 보여주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믿음이 약하다면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나타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마귀도 예수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시도이지 믿음을 성숙시키지는 못합니다. 결국 믿음은 육체적 표징이 아닌 이성과 마음으로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시적 표징이 아닌 묵상과 깨달음으로 의심할 수 없는 믿음을 쌓아갑시다.




<기적같이 환한 미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환자 한분이 영성체하기를 간곡히 바라고 있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여기는 원목실도 없을뿐더러, 저희는 지방에서 올라왔습니다. 바쁘시겠지만 꼭 좀 와주세요." 

부랴부랴 달려갔더니 환자분의 안색은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병세가 위중해보였습니다. 침대에서 제대로 일어날 기력도 없어보였기에, 그냥 누워계시라 해도 겨우겨우 일어나 앉아 깍듯이 예의를 갖추셨습니다.  

간단한 기도를 바친 후에 모시고 간 성체를 영해드렸습니다. 그 형제님의 성체를 영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제 신앙이 참으로 부끄러워졌습니다.  

마치도 보물이라도 건네받듯이 조심스럽고 경건한 태도로 성체를 받아모시던 형제님의 얼굴에는 너무도 황공해하고 감사하는 느낌이 씌여있었습니다.  

시간도 늦었고 피곤하니 봉성체 끝내고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저는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성체를 받아모신 그분은 얼마나 오랬동안 감사의 기도를 드리던지요. 간병중이던 따님의 말에 따르면 며칠 내내 신부님 오기만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윽고 기도를 끝낸 그분은 마치 기적과도 같이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제게 의자를 권했습니다. 그리고 따님을 시켜 제게 음료수를 건냈습니다 또 늦은 시간에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를 하셨습니다. 

주변에 같이 서있던 가족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오후내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셨던 분인데, 식사를 제대로 못하셔서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던 분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하며 다들 놀랐습니다.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힘으로, 성체의 힘으로 그 고통을 이겨내려는 형제분의 신앙이 참으로 눈물겨워보였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고통을 해결해나가려는 형제분의 신앙이 놀라워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 표시로 한번 기적을 보여달라"고 시비를 겁니다.  

기적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마음 한편에는 씁쓸함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발길을 내딪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다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몰려든 군중들은 대부분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을 안고 몰려들었지요.   

기적을 베푸신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 권능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결국 기적을 통해서 백성들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몰지각한 사람들은 그저 흥미거리로, 때로 심심풀이로, 너무도 이기적인 바램을 안고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려러니 하셨겠지만 너무도 실망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기적도 하지 않으시고 군중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피하십니다. 

우리 역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은 아닌지요? 호기심에서 또는 심심풀이로 그게 아니면 우리의 이 극단적 이기심의 성취를 위해서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은 아닌지요?  

이 시대 기적은 고통과 실패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순간에도 하느님을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꿋꿋이 견뎌내는 삶이 곧 기적입니다.




기적과 믿음

강영구 신부님

스승 예수님,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인정할 작정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믿음 없는 사람들은 늘 깜짝 놀랄 기적을 보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분께 귀의하기만 하면 지천至賤으로 널려있는 기적을 볼 수 있을 텐데,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탓하지 않고 기적奇蹟 보기만을 원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마태6,26.28.30) 

그렇습니다. 예수님!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기적입니다. 하늘에 나는 새들이 큰 기적입니다. 길섶의 들꽃들이 큰 기적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또 지닌 재산이 많아도 어떻게 하늘의 새들을 먹이겠으며, 들꽃들을 아름답게 입히겠습니까?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의 손으로 작은 들꽃을 저토록 아름답게 입힐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신 손길을 감지합니다. 길섶의 들꽃으로 大慈大悲하신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기적 중의 기적은 예수님 바로 당신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당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겠습니까? 당신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3,16) 

당신 자신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 그 자체입니다. 저희들이 믿음의 눈으로 늘 기적을 보며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一明)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가장 큰 기적이자, 가장 확실한 표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많은 치유와 구마활동,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백성들 앞에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구원의 길이 자신들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때가 한 치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신과 의심, 그릇된 옛 습관을 버리지 않는 가련한 영혼들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선교사 예수님의 장탄식입니다. 죽음을 향해가는 동족들을 향한 슬픔과 괴로움의 탄식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생활 안에서 참된 기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있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란 또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 크신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이토록 작고 연약한 한 인간을 찾아주심,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토록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가 하늘을 찌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의 현존, 그것이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정녕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지만, 신앙 안에서 조금씩 성장해서 언젠가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 그것은 정녕 크나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는 것, 그분께서 내 안에 머무시는 것, 그분의 이끄심대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영성의 대가 아빌라 데레사 성녀께서는 어느 날, 자기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 ‘기적 중의 기적’을 체험한 이후 이렇게 고백하셨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안심시키는 한 단어를 말씀하시는 바로 그 때, 나는 보통 때처럼 두려움 없이 고요와 위로로 충만했다. 예수께서 항상 내 편에 계신 듯이 여겨졌다. 나는 예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매우 분명하게 예수님은 항상 내 오른편에 계셨고 내가 행한 것과 행하지 않고 있는 것의 증인이심을 알았다. 내가 지나치게 산만하지만 않으면, 마음을 집중하고 정신을 가다듬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내 옆에 계신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늘 내 오른편에 자리하시고, 언제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고 계시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자, 가장 확실한 하늘에서 오는 표징입니다.

 



시험과 요구에 응답은 없다.

박상대 신부님

이방인의 땅에서 4,000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행하신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고 했다.(8,10) 달마누타(Dalmanutha)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갈릴래아 호수 서쪽 포구 막달라일 가능성이 높다. 똑같은 대목에서 마태오복음은 예수께서 마가단(Magadan)으로 배를 타고 가셨다(15,39)고 했는데 이 또한 막달라와 같은 지명이다. 막달라는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이기도 하다.(루가 8,2; 마태 17,56; 요한 19,25)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타(막달라)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께 청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그 이상의 차원인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표가 될만한 기적’이였다. 이는 곧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말하는 것으로서 예수를 메시아로 증명해 줄 것을 의미한다. 당시 유다인들은 종말에 올 메시아가 하느님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를 증명할만한 놀라운 표징들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구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출애 16,1-36), 해와 달을 멈추게 한 기적(여호 10,12-14),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 예언자의 대결에서 제단 위에 내린 야훼의 불길(1열왕 18,30-40) 등과 같은 하늘에서의 표징으로 예수 자신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하늘로부터의 표징을 ’우주적 이변들’로 표현한다.(묵시 12,1.3; 15,1)

 

지금까지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이 어디 한 두 개인가? 제자들은 물론이고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예수의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하였다. 그들이 이제 와서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표징을 청하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데 기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제자들도 아직까지 스승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니 바리사이들의 불신과 표징을 청하는 무리한 요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이 예수께서 하늘의 표징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동시에 그들이 ’믿음을 위해서’ 표징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시험하는 것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야훼께서 직접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고 하셨고, 모세도 백성들에게 "야훼를 시험하지 말라"(출애 17,2)고 했다.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임’을 걸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악마의 유혹을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마태 4,7)는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태도에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특히 "나는 분명히 말한다"(12절)는 공관복음 모두가 아주 즐겨 사용하는 예수님의 독창적인 어법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 다음에는 통상 앞에 서술된 내용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 ’확신과 진실성’, ’현저한 대조’, 또는 ’더 높은 단계로의 진행’ 등의 말씀이 따른다. 시험과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없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그들을 버려 둔 채 즉시 다른 곳으로 떠나셨다. 표징이란 요구나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사(善射)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은 자기가 믿는다는 하느님께 조건을 걸고 선물을 요구한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해 주신다면, 나도 저렇게 하겠다"는 식의 조건부 다짐이다. 이것은 신앙을 놓고 거래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과도 같다. 하느님께서 다짐을 보고 조건을 승낙할 수도 있지만,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오늘복음에서와 같이 하느님께서 영영 나를 떠나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떤 자매님께서 저를 찾아오시더니만 부탁을 하십니다.

“신부님, 제가 급해서 그런데요. 이 내용 좀 팩스로 넣어 주시겠어요?”

저는 팩스를 이용해서 그 내용을 넣어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만 그 자매님께서는 “신부님, 팩스를 이용해서가 아니라 컴퓨터를 이용해서 팩스를 넣어 주셔야 하는데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저는 한 번도 컴퓨터로는 팩스를 넣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매님, 컴퓨터를 이용해서 팩스를 넣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제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러자 자매님께서는 실망의 눈초리를 보내시면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신부님께서는 컴퓨터 공부도 하셨다면서 그것도 모르세요?”

사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또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지요. 제게 문서 작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저는 신학생 때 이후로는 복잡한 문서를 작성할 일이 없어서 잘 못한다고 말하면 그분들은 꼭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컴퓨터 잘하신다고 하더니만 잘 못하시네요.”


저는 문서 작성이나 팩스 보내는 것을 공부하지는 않았지요. 제가 공부한 분야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었고, 컴퓨터에 관심이 있다 보니 컴퓨터 A/S 부분만 잘할 뿐인데 사람들은 컴퓨터 잘한다고 하면 모든 점에 있어서 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르세요? 잘 못하시네요.”라는 말을 던짐으로써 괜히 저의 자존심을 건드리십니다.

만약 그분들이 제가 무엇을 공부했는지, 그리고 어느 부분을 잘 하는지 아셨다면 이런 말씀도 하시지 않았을테지요. 즉, 저를 잘 몰랐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도 저와 비슷한 입장이 아닌가 싶어요.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아마 그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서 그것도 못해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더니만 별 것도 아니네.”

그들이 그렇게 표징만을 요구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들은 절대로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겠지요. 대신 “저희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청을 드렸을 것입니다.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듯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야 내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있나요? 아니 알려는 시도는 하고 있나요?

그냥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표징을 계속해서 원하는 모습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대신 예수님을 알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전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생각합시다.


고쳐나가야 할 머릿속 지도(리빙스턴)

사람이 평생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것들을 깨지고 아파하며 후회하는 시행 착오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부모들의 가르침이나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삶의 모든 우여곡절을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시험에 떨어진 뒤에야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했는지 알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에야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 어울리는지 알게 되고,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난 뒤에야 자신의 생활습관에 문제가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니다.

그러니 살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너무 원망하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실수를 통해 깨달은 바를 하나씩 차곡차곡 머릿속 지도에 담아가다보면 차츰 인생이라는 항해가 조금씩 순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기적>(마르코 8,11-13)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인간은 하느님이 입력해 놓은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닙니다.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행을 할 자유도 있고, 악행을 할 자유도 있습니다.

선택은 각자 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있고,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행을 했다면 그 공로는 선행을 한 사람 자신에게 돌아가고, 악행을 했다면 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합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당연히 하느님에게도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보통 하느님에게는 자유의지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고, 주권이나 권능이나 전능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어떻든 인간이 남에 의해서 강요당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당연히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하고, 이 원리는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도는 강요나 요구가 아니라 부탁과 간청입니다.

그 부탁과 간청을 들어주실지 말지는 하느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하느님의 부탁을 잘 들어드리지도 않는 인간들이 하느님을 향해서는 자기 기도를 안 들어준다고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왜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냐고 불평하기도 하고,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들은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손가락질 하면서 말합니다.

당신이 만들어주신 저 여자가 따주어서 먹었을 뿐입니다, 라고.

이 말은 당신이 여자를 만들어 주시지 않았으면 내가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책임을 떠넘기는 말입니다.

여자를 만들어 주니까 그렇게 좋아했던 아담이 나중에는 여자를 만들어 준 하느님을 탓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불가항력이라는 것이 있긴 있지만, 많은 일들이 대부분 천재가 아니라 인재입니다.

2월 14일의 복음 말씀의 주제는 표징(기적)이 아니라 바로 그 자유의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실 필요가 있을 때엔 언제든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로 가야 하는데 타고 갈 배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가셨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적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기적입니다.

수천 명의 굶주리는 사람을 먹여야 하는데 빵이 없다...

그래서 빵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아무도 청하지 않았는데도 지나가다가 그냥 딱해서 병자를 고쳐 주신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이 표징(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에 대해서는 딱 잘라서 거절하셨습니다.

그건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여주어도 믿지 않을 사람에게 기적을 보여줄 수는 없었던 것이고, 당신의 전권을 침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먼저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원칙은 하나입니다.

먼저 믿어라. 믿으면 기적이 일어난다,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믿음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순전히 자비심으로 기적을 행한 경우가 있긴 있습니다.

그 결과는 참 안 좋았습니다.

벳자타 못 가에 있던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인데, 그 사람은 병이 낫고 나서 예수님을 밀고합니다.

그 사람의 밀고를 접수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요한 5,1-18).

완전히 배은망덕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믿음 없는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나서 믿게 된 경우보다 잠깐 놀라기만 하고 안 믿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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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바란다면 믿어라.' 라는 말은 사실 위험합니다.

정말로 믿는다면, '기적을 바란다면'이라는 전제 조건 자체를 없애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진짜 믿음입니다.

기적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글자 그대로 '선물'... 주는 쪽에서 호의로 베푸는 것입니다.

강요해서 얻어낸다면 그건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겸손하게 간청하고, 끈기 있게 기다릴 뿐입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기적이다, 라는 말은 저도 자주 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그 말은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고, 그 말도 위험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기적만 즐기는 모습이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도 기적이다... 라는 말이 맞긴 한데, 인간이 지구를 망치고 온난화가 더욱 심해지면, 그래서 빙하기가 와버리면 봄이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는 것도 기적이다... 라는 말이 맞긴 한데, 대기가 너무 심하게 오염되면(인간들이 너무 심하게 대기를 오염시키면) 해가 떠도 뜬 줄 모르는 시대가 올 수도 있습니다.

기적이 기적으로 유지되려면 인간도 노력해야 합니다.

불치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나았다고 좋아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건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암을 고쳐 주니까 알콜 중독에 걸리더라, 라는 식이라면 곤란합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기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 몰려온 바리사이들은 집요하게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 마다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의 원하는 것은 보다 스케일이 큰 표징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기적들이겠지요.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모세는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어 힘겨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습니다(출애굽기 16장 12절 참조).

 

그런가 하면 엘리야는 나라 전체에 3년간의 가뭄이 들게 한 뒤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 대대적이고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열왕기 상권 18장 44절 참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도 만나의 기적이라든지 3년 가뭄 사건 같은 눈에 확 띄는 기적,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제대로 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한번 보십시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치유와 구마활동, 죽은 이들에 대한 소생사건,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뜨거운 사랑, 한없이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을 통해 그분의 신성, 그분의 메시아성은 충분히,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또 다시 ‘이거다’하는 표징, 제대로 된 확실한 표징을 또 요구하는 것일까요?

 

바리사이들은 애초부터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 열정적이고 호의적인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서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전개해나가시는 인류구원사업을 흥미어린 눈으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예수님을 떠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오만방자하고 한심한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정말 크게 실망하십니다. 깊이 탄식하십니다. 여기서 보여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탄식은 예수님의 고통스런 마음의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가련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탄식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셨던지 아주 슬픈 어조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도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사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통해 크신 하느님 자비와 우리 인간의 비참이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남부러울 것 없는 삶, 탄탄대로가 잘 보장된 삶을 뒤로 하고 세상 사람들 눈에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 봉헌 생활에 투신하는 젊은이들의 삶,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그들과 함께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증거를 대봐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태리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의 하나는 세계의 기적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기적이 일어난 각 지역에 가서 그 사건들을 면밀히 검사하여 보여줍니다.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로마에서 가까운 나폴리였습니다.

나폴리의 가장 유명한 기적은 뭐니 뭐니 해도 성 제나로의 피의 기적입니다. 성 제나로는 초대 교회 베네벤또 지방의 주교였는데 AD 305년경 박해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참수형 당했던 돌에서 피가 흘러나온 것을 하녀가 받아두었다고 합니다.

중세를 지나면서 유리병 속에 응고되어있는 피는 기이하게 일 년에 한두 번 다시 액체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사람의 피가 한 번 응고되면 다시 액체로 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축일이 되면 나폴리의 대주교님이 사람들 앞에서 그 병을 흔들어 보이고 그 병에 응고되어있는 피가 점점 액체로 되어 흔들리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한 과학자가 이 현상을 재연하였습니다. 무엇을 섞었는지는 모르나 화학적으로 피를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 굳어졌다가 다시 흔드니 액체로 변하였습니다. 마치 케첩이 응고되었다가도 흔들면 다시 액체가 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충분히 현대 과학으로 그런 기적은 하나의 속임수일수도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 옛날에 그런 것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 낸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바탕 안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기적들이 과학으로도 충분히 재현될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요즘 과학으로 못해 낼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은 모든 기적들을 믿지 않으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큰 기적이 일어나도 현대 과학으로 다 재현이 가능할 것이고 믿지 않을 사람들은 안 믿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믿을만한 확실한 기적이 있다면 그들도 신앙을 갖겠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에서 인정하는 표징을 따르라고 하시지 않고 ‘표징을 요구하는 것 자체’를 나무라십니다.

이는 마치 한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이 친 자식인지 그 ‘증거를 대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DNA 검사를 해보자고 한다면 부모는 얼마나 황당하겠습니다. 자녀는 부모가 평상시에 자신에게 하는 사랑을 보며 그 분이 자신의 부모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DNA 검사를 해보자는 말은 ‘당신이 내 부모가 맞는지 증거를 대보라.’는 뜻입니다. 이미 부모에게 대한 마음이 떠나있을 때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적을 보여 달라는 말도 하느님께 대한 마음이 떠나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사랑으로 자신이 부모라는 것을 증거하고 사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증거들을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런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또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믿을 마음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무엇도 믿게 할 수 없습니다. DNA 검사를 하고 그 증명서가 있다고 완전히 믿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증명서도 꾸며낸 것이 아니냐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믿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기적으로도 믿음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데 있습니다.

 

반면 믿으려는 마음만 있다면 나타나엘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작은 표징에서도 믿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은 조금만 노력하면 생길 믿음을 두고 믿지 못하겠으니 표징을 보여 달라고 청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의심이 드십니까? 그건 믿으려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우리 자신의 탓입니다.




그는 당신과 달라요.

김효준 신부님

초등학생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나보다 훨씬 공부를 잘했고, 나보다 훨씬 운동도 잘했으며, 나보다 훨씬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모든 것을 나보다 훨씬 잘했습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어느 날 문득 그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초라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 마음에 싹트기 시작한 시기와 질투라는 사실을 나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무성히 자라난 시기와 질투는 그 친구를 공격하는 칼이 되었고 화살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우정에 금이 갔습니다. 공격받은 친구는 상처를 입었고 그를 공격한 나에게도 깊은 상처가 남았습니다. 내 안의 시기와 질투는 타인을 공격하고 또한 동시에 나를 공격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그랬던 것이라고 성경은 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특별함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아무나 보여 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아무’ 중 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특별함을 보지 못할 때 내 안에서 싹트는 시기와 질투 역시 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라나 결국 양쪽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입힐 것입니다.

 



내가 요구하고 있는 표징은 ?

이민순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티로 지역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셨으며, 사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푸신 후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는데 거기서 바리사이한테 시험을 받으십니다. 


바리사이는 마치 40일 동안 광야에서 유혹하던 사탄처럼 예수님께서 진실한 사랑의 기도로 행하신 하느님의 표징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완고함에 사로잡혀 구약 예언자의 능력을 상징하는 모세의 만나 ( 탈출 16,12 ), 엘리야의 비 ( 1열왕 18,44 )와 같이 하늘에서 오는 영광스러운 표징을 드러내 보이라고 합니다. 이 요구는 지극히 유아적이고 악마적입니다. 감히 하느님을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의도는 여러 강대국의 속국으로 억압을 받은 유다인답게 강력한 정치적 메시아를 대망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협박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더 강력한 말로 이들의 악한 의도를 꾸짖으십니다.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우리의 기도내용은 무엇입니까 ? 혹 유다의 메시아 대망 사상처럼 하느님께서 나한테 어려움을 가져온 원수를 대신 처리해 주시기를 바라는 일종의 청부와 같은 기도는 아닌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이러한 기도에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시며 아무것도 하시지 않고 떠나버리실 것입니다. 오히려 억울하다고 울부짖고, 배고프다고 부르짖으며 주님의 자비를 구하다 보면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우리로 하여금 체험하게 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시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늘 두 독서에 모두 “시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야고보서는 우리 인간이 시험을 받는 것에 대한 말씀이고 복음은 우리 인간이 주님을 시험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시험은 선생님이 학생에게 시험문제를 내고 시험 보게 하듯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하느님께서 인간을 시험을 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우리 인간이 받는 시험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 우리 인간을 시험하신다는 얘기지요.

이 시련의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우리의 인내심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하느님께서는 시험하신다는 얘깁니다.

사실 이 시련의 시험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인내심이 얼마나 강한지 또는 약한지 알 수 없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지 또는 강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통해 우리의 실력을 정확히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이 시험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정확히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련을 통해 시험하시는 더 큰 목적은 그저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지 알고는 좌절하라고 시험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나를 정확하게 앎으로써, 다시 말해서 나약함을 정확히 앎으로써 인내력을 더욱 든든히 키우고 믿음을 더욱 단련하라는 뜻입니다.

그저 시련으로 우리를 괴롭히시는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시험은 이렇듯 사랑이니 더 많은 시련을 주시는 것이 사랑이고 좋은 것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시험은 교만이고 불신일 뿐입니다.


우선 대단한 교만입니다.

어찌 감히 하느님을 우리가 시험한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교만은 우리가 그럴 수 없는 것을 감히 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하느님 대신 모든 것의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 하려고 하기는 하나 의심하는 시험도 있습니다.

진정 하느님이신가?

하느님은 정말 능력의 주님이신가?

하느님은 정말 좋으시고 나를 사랑하시는가?

믿지 못하기에 이렇게 의문을 가지고 의문을 풀기 위해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심도 교만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아주 부정하는 교만은 아닐지라도 자기 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으려는 교만이요, 그래서 여간해서는 믿지 못하는 교만입니다.


시련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런 교만을 꺾을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어떤 때는 크나큰 고통을 주시고, 어떤 때는 오늘 복음처럼 버려두시는 극약처방도 내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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