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라.>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26,16-19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6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17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곧 주님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다.
18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곧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19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주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실천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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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시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며,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복음). 한다.’는 구약의 가르침을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당부하시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관한 율법을 소개하시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이웃 사랑에 대한 율법 조항을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라는 조문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조적으로 강조하고자 더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규정을 준수하여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정당성을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십니다. 사랑받을 대상은 원수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 해석에 따라 레위기 19장 18절의 경계를 넘어서, 차별 없는 사랑이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비교 대상으로 세리와 이방인을 말씀하십니다. 세리들은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이방인들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합니다. 세리들은 정직하지 못하였고, 로마인들과 협력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세리나 이방인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행동 기준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없으며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마태 5,45 참조). 제자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방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세리나 이방인과 같은 이들의 행동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행위 기준을 찾아 행동할 때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살아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5,48 참조).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담긴 ‘이웃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웃의 대상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한정하지 않으시고(레위 19,18 참조), 확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루카 10,30-37 참조). 예수님의 사랑이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이듯이, 우리도 이웃 사랑의 대상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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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규정과 법규를 따르고 실천하면 하느님께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상선벌악의 가르침은, 구약 시대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살겠노라고 결심하고 살아가려면 많은 희생이 요구되지요. 나만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모습에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주님의 계명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보다, 악을 일삼는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이 세상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 나라가 자비가 넘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악인과 선인을 동등하게 대우해 주십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당신의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비를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심판으로 가득하고 하느님의 자비가 없는 곳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선인에게만 해를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모습에 우리는 속상한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그러나 공정과 정의는 우리가 훗날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은 공정과 정의보다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큰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의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은 지금 이곳에서 주님의 계명과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시작됩니다. 그 길이 지금 우리의 눈에는 부당하고, 억울하게 보일지라도 말입니다.(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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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벌악(賞善罰惡). 선한 이는 상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다는 뜻으로 가톨릭의 네 가지 기본 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지니지 않은 이들에게도 당연한 내용이지만 성경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느님의 다른 모습도 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왜 모든 이를 똑같이 대하시냐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악인이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기다림은 악인에게 자비를 체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하지 않는 이들도 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닮으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따라 거룩해지고,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따라 완전해지고자 노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실천의 바탕이자 행동의 기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한편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겁고 힘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깊이 체험한 이들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 사랑과 자비를 손수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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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주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명령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를 지키면 주님께서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고, 그들은 주님 소유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당신 계명을 충실히 지켜 살면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고자 창조된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주님의 참된 규정과 계명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명은 구약 성경에 담겨 있는 문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를 통하여 무엇이 진정한 아버지의 뜻인지 알려 주시는데, 오늘 복음도 그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여야 참으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에게도 해가 떠오르게 하시는 분이시며, 당신을 저버리는 불의한 이들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원수가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원수라 하더라도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선다면, 그를 기꺼이 맞이하라는,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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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어떻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악인마저도 구원되기를 바라시기에, 옳은 이에게나 옳지 않은 이에게나 골고루 햇빛을 비추십니다.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나 모두가 당신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미워하거나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란 어렵기만 합니다. 따라서 먼저 내가 부족한 존재임을 깨우쳐야 합니다. 내가 부족하기에 신앙생활을 통해 더 완전해지려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위해 누군가가 기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나 역시 부족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당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이는 대가를 바라는 행위가 아닙니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은 원수나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에 힘입어 그들의 마음속에 박혀 있는 악의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서서히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께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추구하는 이 사회에서, 오히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랑을 넓혀 나갈 때, 오늘날 확산하고 있는 죽음과 파괴의 문화는 점차 사랑과 생명의 문화로 변화되어 나갈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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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강조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선하거나 악하거나 모든 이를 똑같게 대하시지요. 다들 당신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귀한 존재이지요.
물론 우리 주변에는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누구나 장점도 많이 갖고 있지만, 약점과 아픈 상처마저 있지요. 그런 만큼 상대방의 가능성을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상대방의 선한 점은 키워 주고, 아픔은 치유해 주고, 어둠은 씻어 주도록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오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건 상관없이, 햇빛은 늘 우리를 비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요. 어떤 날은 햇빛이 평소보다 더 강하고, 어떤 날은 약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햇빛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 일상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지 않은 경우, 상대방이 무심코 취한 행동 하나에 걸려 넘어질 때가 많지요. 변함없이 사랑하지만 상대방의 하찮은 표현 한 가지나, 말투 하나로 스스로 상처받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사소한 오해나 선입관에서 탈피하여, 더 근본적인 문제, 곧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문제에 더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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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이 말씀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고 명하시는 셈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저마다 나름대로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을 넘어서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에페소서도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5,1) 하고 권고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 지향해야 할 완전함입니다. 대단히 뛰어난 능력을 닦아서, 어느 기계보다도 출중하게 작업을 완벽하게 잘 처리해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될 때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실현하는 것임을 믿으며, 하느님을 닮아 보려는 큰 포부를 품어 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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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하느님의 유전자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가장 닮는 순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능력이 있다. 인간의 사랑이란 혈육 간이 가장 가깝고 원수 간이 가장 멀지만 하느님의 사랑에는 거리도 경계도 장벽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땅과 하늘, 빛과 공기와 물을 주셨다. 그래서 하늘의 별, 땅의 꽃, 사람의 사랑 …… 이 모두가 아름답지 않던가.
그런데 사람들은 왜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렸을까? ‘자연, 나, 너, 그리고 하느님’으로 엮어진 큰 세계가 하나의 존재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는 모두 하나의 몸이고 ‘공동체’(한가지 共, 한가지 同, 몸 體)이다. 사람은 공동체의 틈새에서 생겨났고 살아간다. 평생 쌀 한 주먹도 생산해 본적이 없지만 굶지 않고 살아온 것이 그 증거다. 이를 ‘공동체 세계관’ 또는 ‘공동체 영성’이라 한다. 공동체 세계에는 완전하신 분과 그분의 사랑이 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하느님의 사랑과 합일되는 것이며, 그를 위해 내 안의 작은 사랑을 확장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수행이다.
공동체의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미움이고 시기다. 그것이 단절이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공동체로 살고자 하는 이유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께 합일되는 길이다.
‘주님, 저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저희에게도 사랑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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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랑’이요, 그것을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낸 가르침이 바로 ‘원수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에게 큰 상처와 피해를 준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데, 어떻게 그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의 상처도 육신의 상처와 비슷합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온전히 치유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육신이 큰 병에 걸려서 완전히 낫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완전히 낫지 못한 채 생각만 해도 계속 쓰라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은 원수에게 받은 상처가 낫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결심하고 하느님께 바쳐야 할 종교적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셨지만 손에는 못자국이, 허리에는 창에 찔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그에 대한 미움이 없어야 가능하다고들 합니다. 또한 원수에게 받은 상처가 완전히 나아야 비로소 그를 사랑할 수 있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랑을 감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감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있고, 의지를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다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의지적인 결단을 내리라는 그분의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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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 거룩함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윤리적 가르침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웃에 대한 의무를 제외한, 하느님에 대한 경건함만을 이르는 거룩함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시된 사랑의 계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온전히 깨달으려면 민족, 혈연, 친분에 사랑을 제한시키는 좁은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이것이 계명의 완성입니다.
이 완성은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에게 속한 사람만이 '이웃'이라는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계명의 한계를 넘어서시며, 오히려 계명을 참되게 완성하십니다. 이러한 완성의 씨앗들은 사실 구약 성경 안에도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떠돌이를 환대하라는 가르침은, 사랑의 계명은 결코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것으로 제한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자신과 다르고, '우리'라 부르기를 꺼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는 자리에서 사랑의 계명은 완성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상계에서 즐겨 쓰는 말로 하자면, '타자'(他者)를 받아들이는 곳에서 사랑의 계명이 온전한 의미를 찾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근본정신에서 폭력적이고 혼돈된 세계를 벗어날 길을 찾는 현대 사상은 다시금 희망의 빛을 찾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현대 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친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입니다. 그는 '타인의 얼굴'을 대면하고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절대적 책임성에서 윤리의 근원을 발견합니다. 그의 이러한 철학에 영감을 준 것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계명이기도 합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의 의무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전입니다. 타인의 얼굴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 보고 책임감 있게 받아 안으려는 노력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자기만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이 온전해지고 완전해지기를 갈망하며 끝끝내 멈추지 않는 발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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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랑이란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자신의 마음이 움직였을 때에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 생각이 정말 맞는다면,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는 원수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사 랑이란 ‘가슴’뿐만 아니라, ‘머리’와 ‘손발’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한창 사춘기인 아이들은 ‘머리’로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가슴’으로도 부모님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그들은 ‘손과 발’이 잘 따르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방황하면서 부모에게 반항하기도 합니다.
그 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 아이들이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대한 성모님의 태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처녀인 성모님께 아기가 생긴다는 말씀은 ‘머리’로는 이해되지도 않고 ‘가슴’으로는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지만, 성모님께서는 ‘손과 발’로 이를 따랐습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머리’, ‘가슴’, ‘손발’이 다 함께 어우러져 온몸으로 하는 것이고,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나머지 부분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그 렇다면 원수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가슴’으로는 할 수 없지만, ‘머리’와 ‘손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비록 얄밉고 이해되지 않더라도 기쁜 표정으로 응해 주는 것 또한 사랑입니다. 아픈 이에 대한 병구완이 가슴으로는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지만, 머리로는 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며 손발로 돌보아 준다면 그것 또한 사랑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도저히 상대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에게 인간적인 예의를 갖추며 대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가슴’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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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은 빵 한 덩이를 훔친 것이 죄가 되어 19년을 감옥에서 보냅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나흘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일러주는 대로 주교관으로 찾아갑니다. 미리엘 주교는 그를 반가이 맞이하며 죄수였던 그에게 ‘무슈’(선생)라고 부릅니다. 미리엘 주교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내 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집이지요. 이 집은 누가 찾아오든,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고통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당신은 고통 받고 있습니다. 환영합니다.” 주교는 장 발장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내 형제입니다.”
이튿날 새벽, 세 명의 경찰이 장 발장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미리엘 주교에게 왔습니다. 주교는 어떤 상황인지 바로 알고는 경찰들을 보지도 않고 장 발장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 오셨군요! 제가 선생께 드린 촛대들도 은 제품인데 왜 그릇만 가져가고 촛대들은 안 가져가셨나요?” 경찰들은 주교의 말을 듣고 장 발장을 풀어 주고 가 버립니다. 주교는 촛대들을 주며 “잊지 마시오. 이것들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사용하겠노라고 내게 약속해 주시오. 그리고 그 약속을 절대 잊지 마시오. 장 발장, 내 형제여.”
이 일은 장 발장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됩니다. 장 발장은 주교의 숭고한 사랑으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죽음을 앞둔 장 발장은 양녀인 코제트와 그녀의 남편에게 마지막 말을 합니다. “언제나 정성을 다해 서로 사랑하여라. 세상에는 별다른 게 없다. 다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있을 뿐 …….”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닮을 수 있는 길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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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미워하라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너무 쉽게 ‘사랑하라’고 합니다. 입으로만 말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남의 잘못을 ‘잊어버리는’ 행동입니다. ‘모른 척해 주는’ 행위입니다. 상대의 실수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랑’의 출발입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어른’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운한 것은 ‘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길에는 ‘사막’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지나면 삭막해집니다. 자신만 손해 보는 듯한 생각에 빠집니다. 사랑하고 받아들이면 ‘좋은 결과’가 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때로는 손해가 오고 오해도 생깁니다. 자신의 처신이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그곳은 사막을 걷는 이만이 갈 수 있습니다. 낙타는 오아시스를 만나면 더없이 겸손해진다고 합니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다고 합니다. 사막에서 죽음을 체험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의 위대함에 숙연해집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요.
사랑의 길을 걷는 이는 ‘사막을 걷는’ 이들입니다. 언제라도 오아시스가 있음을 희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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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에너지는 감동입니다. 감동을 주고받을 때 사랑은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감동을 주는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가능한 일일는지요?
원수는 원한이 맺힌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주는 이들은 많습니다. 삶의 의욕을 앗아 가는 이들입니다. 원인이 나에게 있든 그들에게 있든 그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큰 감동은 ‘용서’입니다. 용서를 담고 있는 언행과 몸짓입니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때로는 용감하게 투자해야 합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붙잡고 있다면 지금 당장 건너뛰어야 합니다. 그것이 감동을 주는 행위입니다. 자신에게 감동을 주고 상대에게도 감동을 줍니다.
장애물 없는 길은 없습니다. 고통 없는 인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장애라고 느껴진다면 넘을 수 있는 힘을 청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감동을 주면 되돌아옵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이 사실을 기억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사랑받는 어린이가 행복하게 자란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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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평범한 삶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삶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자녀들은 무엇인가 달라야 하는데, 바로 자신의 감정과 본능에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만 좋은 감정을 지니는 사람의 특징은 남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금세 좌절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의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 남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그 사람이 사라지면 이내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사랑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 상대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자신에게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사랑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기보다는 사랑은 ‘내가 먼저’라는 점을 깨우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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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가 중학생 때였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적금을 들어야 한다면서 거의 반강제로 적금을 붓게 했습니다. 예금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데 매달 얼마씩 적금을 부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만기일까지 제대로 적금을 부으면 높은 이자와 함께 목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용돈도 부족할 때, 적금을 붓는다는 것은 너무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용돈을 아끼고, 차비도 아껴서 중학교 졸업할 때 적금 만기가 되어 10만 원이 조금 넘었던 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얼마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당시 짜장면이 1,000원을 넘지 않았고, 버스요금이 200원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10만 원은 학생에게 정말로 큰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사실 오랫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끼고 아껴서 모은 것이라 차마 이 돈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쉽게 벌었던 세뱃돈의 경우는 먹고 노는데 금세 써버렸지만, 이 경우는 달랐습니다. 먹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 등 모두 참으면서 아끼고 아껴서 부은 적금을 그냥 한순간의 만족으로 없애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본인이 힘을 쏟을수록 정성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만약 지금 주님 만나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다면 그만큼 주님과의 만남에서 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을 가장 우선시한다면, 늘 주님께 정성을 기울이는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하기 힘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할 수 있겠다 싶지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쉬울까요? 나를 힘들게 하는 박해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키기 힘든 사랑의 계명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을 첫 번째 모신다면 어떨까요? 이 말씀을 지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완벽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시니까요. 그러나 주님이 내게 첫 번째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다면서 불평불만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질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특히 사랑의 계명을 어떻게 지키고 있느냐에 따라 주님께 대한 우리의 정성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남들만큼만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남들만큼 사는 삶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가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벽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열린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열린 마음은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재산이다(마틴 부버).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글을 읽고...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존경하던 채제공의 당호인 매선당에 기문으로 남긴 글인 ‘매선당기’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홉 가지 일을 모두 악한데 한 가지 일이 우연히 착하다 해도 그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또 아홉 가지 일은 모두 착한데 한 가지 일이 우연히 악하다 해도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항아리가 그 전체는 모두 깨지고 주둥이만 온전하다 해도 깨진 항아리라고 하며, 그 전체는 온전한데 오직 하나 구멍 하나만 뚫렸어도 깨진 항아리라고 합니다.
사랑이 매사에 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끝내 착하지 않은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선을 이루기 어려움이 이와 같습니다.”
높은 기준으로 빈틈없이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쯤이면 괜찮아. 나 하나쯤이야.’ 등의 안일한 생각은 이제 내 삶에서 떠나보내야 할 것입니다.
어렵고도 어려운 원수 사랑,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는 가능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운전 중에는 언제나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고정입니다. 반가운 김남조 마리아 막달레나 시인께서 출연하셨습니다. 저도 가뭄에 콩나듯이 출연하는 ‘행복을 여는 아침’ 초대석에 나오셨더군요. 아흔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총기와 시심(詩心)은 여전했습니다.
몇몇 말씀들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다가왔습니다. “인생의 끝자락, 추수 끝 황량한 들판에서 서서 뒤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다 사랑이었습니다.”“주님께 드리는 것, 바치는 것, 봉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통도 드리고, 상처도 드리고, 기쁨도 드리고, 사랑도 드리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애청자들을 위해 직접 최애시(最愛詩)를 낭독해주셨는데, 정말이지 감동이었습니다.
우도(右盜)의 비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양 옆에
두 사형수가 함께 처형되었다.
주님이 오른편 죄수의
신심을 읽으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
내가 나에게 물었다.
주님 곁에서
우도처럼 죽을 수 있겠는가?
나는 불가능을 능히 알았다.
그러나 동트는 새벽녘에
“할수 있다.”고 대답했다.
주님의 고통
그 한 부스러기가
안개와 눈물로
평생 같은 긴밤을
몽롱하게 나를 적시더니
이 대답에 이르렀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 어려운 원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식선에서는, 인간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당부를 하고 계십니다. 하다 하다 안될 때 결국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원수 사랑이라는 것, 김남조 선생님의 말씀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는 가능합니다.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가 수련자 시절, 한 연로한 수녀를 부축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데레사는 노인 수녀를 병실에서 성당으로, 식당으로 조심스럽게 모시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수녀는 성미 고약하고 까탈스럽기로 유명했습니다.
데레사의 모든 것이 못마땅했던 까칠한 수녀는 틈만 나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잘 보란 말이야! 넌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러니 늘 조심하라구!”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도 그 마음과 노고를 몰라주는 까칠한 수녀가 밉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던 데레사는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몹시 힘들게 하는 수녀를 위해 나는 진심을 다해 기도했다.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잘해 주려고 했지만, 뭐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때는 서둘러 밝게 웃어 보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
데레사는 매일 매순간 데레사는 까칠한 수녀가 내뱉는 불평불만을 기꺼이 참아냈습니다. 때로 상대방을 한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들때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지속적으로 깐죽거리는 까칠한 수녀가 “날 두고 또 어딜 가는거야?”라고 따질 때, 인내의 한계에 도달할 때 마다, 데레사는 제의방에 중요한 일이 있어 간다며, 초스피드로 그 자리를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어렵고도 어려운 원수 사랑입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불가능한 원수 사랑입니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도달 불가능해보이는 원수 사랑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는 가능해집니다. 십자가를 뚫어지게 바라볼 때 가능해집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질 때 가능해집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그리스도가 되어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계명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고 하시며 우리 의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그 사람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을까요?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 씨가 자신의 외아들을 납치해 살해한 원수를 용서하러 가서 더 상처를 받고 돌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용서하러 갔는데 범인은 이미 예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의 평화를 찾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범인을 위해 또 용서를 해 줄 수 있을까요? 전도연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힘든 사람이 자신이고 그것을 이길 수 없어 칼로 자해를 합니다.
정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원수까지 나보다 더 행복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복수할 생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가리옷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리옷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얼굴을 넣음으로써 그림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가 경멸의 대상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얼굴이 다빈치와 싸운 사람의 모습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작업에 진전이 없었습니다. 동료에 대한 미움이 예수님 얼굴을 그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빈치는 즉시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선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성당 성가대에서 목소리가 기가 막히게 좋은 남성 성가대원을 발견하곤 환호했습니다. 그는 젊고, 건강하고, 활기찼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청년을 자신의 화실에 초대하였고 그를 모델로 삼아 그렸습니다.
이젠 유다의 얼굴을 다시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찾기 어려웠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그림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그림을 의뢰한 수도회 측에서는 속히 작품을 마무리하라고 압박하였습니다.
다빈치는 거리를 다니며 작품 속 유다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몇 날 며칠을 고생한 후, 레오나르도는 참 슬프고, 외롭고, 술에 취해 있고, 현세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져 사는 듯한 한 젊은이를 찾았습니다. 그를 초대하여 유다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다빈치가 자신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그 젊은이가 작품을 보며 소리쳤습니다.
“앗! 이 그림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는데!”
다빈치는 놀라서 젊은이에게 언제 이 그림을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3년 전에요.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잃기 전에요. 그땐 전 성가대에서 아름다운 성가를 불렀어요. 꿈도 많았었지요. 어느 화가분이 저를 초대해 예수님 얼굴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었어요.”
그렇습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님의 얼굴과 유다의 얼굴, 즉 두 얼굴의 주인공인 것이죠.
위 이야기는 실화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묵상 거리를 던져줍니다. 처음에 다 빈치는 미운 동료를 먼저 그렸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얼굴에 갇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님을 그리니 이젠 유다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의 마음엔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나쁜 사람들은 모조리 ‘상처받은 예수님’의 모습일 뿐입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직 부처만 돼지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돼지는 부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기에 자기 미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해 줄 수 없습니다. 가능하다고 믿어야 기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인간이 되어야 꽃이 예쁜 줄 알고 사람을 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덜 예쁜 사람이 있다면 예뻐지도록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꽃이 되기를 바랄 때 그 사람은 이미 꽃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개나 돼지는 꽃을 볼 수 없기에 자신은 물론이요, 남을 위해서도 아름답게 되도록 바라거나 기도해 줄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원수를 위해 기도해주려면 먼저 유다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당신처럼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유다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십니다. 하지만 유다는 예수님까지도 자신의 모습으로 끌어내리려 합니다. 돼지이고 바리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시선을 가지려면 내가 먼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겸손해질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리스도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는 길은 아버지를 내 안에 모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길밖에는 원수까지 사랑할 방법이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원숭이, 바나나, 판다 곰’을 보여주면서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을 짝지어 보라고 할 때, 동양인과 서양인의 판단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동양인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인은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양인은 ‘원숭이와 판다 곰’을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와 판다 곰은 같은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인은 종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동양인과 서양인은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인과 서양인은 각기 다른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동양인은 순환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계절이 가고 오듯이, 윤회와 업보를 생각하며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서양인은 직선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동양인 중에서도 한국인은 ‘우리’라는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간직하였습니다. 우리라는 문화와 전통은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의병들이 외부의 적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경제위기로 국가의 부도 사태가 있을 때는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대한민국 팀을 응원하였습니다. 저도 광화문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팀이 좋은 경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태안 바다에 유조선의 침몰로 기름 유출이 있을 때는 많은 사람이 유출된 기름을 제거하였습니다. 우리의 바다가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의 팬데믹에서도 ‘거리두기, 손 씻기, 마스크 쓰기’를 잘 지켰습니다. 우리 모두가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세대인 요즘의 젊은이는 ‘우리’라는 관계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여행이 자유롭고, 인터넷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소통하면서 동양인과 서양인 그리고 한국인의 생각도 석물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할 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고,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이 가야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이 가야할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대개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곧 자신이 받은 만큼 또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받은 만큼 주는 것은 사랑의 차원이 아니라 양심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과 양심을 혼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그 양심조차도 없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받은 만큼 주는 거래적인 대가성의 양심의 삶이 아니라 참된 사랑의 삶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받는 것 하나 없이도 계산 없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가진 것이 없어도 아낌없이 영혼마저도 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박해하고 미워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고통 받아도 상대는 구원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주님께서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많은 계단을 올라가시어 우리를 덕의 최정점에 올려놓으셨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처음부터 하나씩 세어 봅시다. 불의로 시작하지 않는 것이 첫 계단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사람이 자기가 당한 대로 되갚지 않는 것이 둘째 계단입니다.
셋째 계단은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자에게 똑같은 식으로 대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당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악행자가 빼앗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그런 이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그런 이에게 선을 베풀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아홉째는 원수를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확실히 아시겠지요? 따라서 그 상 또한 영광스럽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함승수 신부님
'사후세계'를 소재로 다룬 영화 <디스커버리>에서 주인공인 하버 박사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함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다양한 실험들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 '사람이 죽으면 의식의 일부는 육체를 떠나 다른 차원으로 간다'는 가설을 분명하게 정립하는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발견이 생각지 못한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사후세계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 없이, 그저 죽음 이후에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는 주장만 성급하게 발표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왜곡된 희망'을 심은 것입니다. 즉 사후세계를, 이 세상에서 제대로 이루지 못한 일, 제 때 바로잡지 못한 실수나 잘못을 다 '없었던 일'로 하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리셋 버튼'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세상으로 건너가고자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됩니다.
사후세계를 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별개의 세상으로 생각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살면서 저지르는 실수나 잘못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냥 새롭게 시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삶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사후세계에 눈을 돌린 것인데, 오히려 삶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역효과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가 무책임한 리셋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현재의 삶과 새로운 차원의 삶을 관통하는 공통된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제대로 살려면 지금의 세계에서부터 꼭 지켜나가야할 규칙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정통 유다교에서는 그 규칙이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고 여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사후세계에서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만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십니다.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차별없이 공평하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겁니다.
본인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그 말씀이 일종의 '역차별'로 느껴져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런 원칙을 세우신 목적은 구원의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순간의 욱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큰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만나게 되는 하느님이 소위 '법대로' 하시는 분이라면 두려움과 절망이 클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름 최선을 다해왔는데,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는데, 당장 '구원레이스'에서 탈락이라고 하면 앞으로의 삶이 의미없게 느껴져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괜찮다'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다음엔 잘 할 수 있다'고 우리를 다독이시며 이 세상에서부터 실수와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기회를 얻은 사람이라면,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나에게 상처와 피해를 입힌 사람을 '원수'로 낙인 찍어 사랑할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반쪽 짜리 사랑말고, 하느님을 닮아 차별 없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의 자녀다움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하느님 아버지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십니다. 아웅다웅 도토리 키재기를 하며 차별과 갑질을 일삼는 인간의 눈에는 낯설게 보일지 몰라도, 아버지께는 당시의 모든 피조물이 그저 사랑스럽고 귀할 뿐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누구도 가리지 않고 품으시는 아버지는 그래서 완전하십니다. 그분 마음속에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완전함은 아버지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에게도 요구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이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옛 말씀을 뛰어넘는 가르침입니다.
본능대로 사는 이들에게는 참 어려운 요구이지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넘어, 받은 몇 배로 앙갚음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라면 못 들은 체, 귀를 막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자아와 감정을 역행하는 권고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주님의 선언을 들려줍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신명 26,18)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신명 26,19)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소유,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그런데 이 선택과 계약의 수혜자는 철저히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백성의 주인이 되셨다고 해서 그분께 이롭거나 득이 될 일은 없으니까요.
이스라엘은 이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며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낱낱의 문자에 코를 박고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실천이 한 영혼을 차츰 하느님으로 물들어 가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법규와 규정과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방향지워져 있으니까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소유인 거룩한 백성이 사는 방식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박해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바치셨지요. 교회 역사 안에는 인간 본성만으로 어려운 이 무모한 사랑에 수많은 증거자가 몸을 던져 길을 내주었습니다.
살면서 밉고 서운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박해와 공격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마냥 피할 수도 덮어만 둘 수도 없는 아픈 인연들이 인생길 갈피 곳곳에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예수님께서, 잘해 주는 이에게만 잘하지 말고, 또 좋아하는 이만 축복하지 말고 한번 담을 성큼 뛰어 넘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 미움과 분노 안에 갇혀 있던 이를 풀어 주어 가게 하라고, 그러다 보면 결국 우리 자신이 자유와 해방을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원수나 박해자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사랑하기 어렵고 축복해 주기 망설여지는 이들을 마음에 품고 주님 앞에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순 제2주일을 준비하며, 완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녀로서 자아와 감정의 경계를 넘는 역설적 사랑에 몸을 던져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처럼 쉽지 않고 만만치 않은 사랑의 길을 주님만 믿고 따라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평생과제, 예수님의 소원. -하느님을 닮아 성인聖人이 되는 것-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믿는 이들의 평생과제이자 예수님의 소원은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바로 이의 유일무일한 영원한 롤모델이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하느님과 일치의 삶을 사셨던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의 소원이자 평생과제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를 위한 가르침이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이어지는 산상설교의 가르침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소상히 가르쳐 주십니다. 이의 결정적 롤모델이 예수님이십니다. 깨달음처럼 와닿은 이런저런 예화들을 나눕니다.
1.“예수 평전;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예수님의 삶”
어제 선물 받은 김근수 신학자의 책이름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예수님의 삶’이란 말마디는 역설적으로 ‘신적인, 너무도 신적인 예수님의 삶’으로 바꿔도 될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을수록 참 사람이 된다는 것이며 이의 결정적 모범이 예수님입니다.
2.“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共進化,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EARTH+대표 이병한)
새벽 인터넷 글에서 소개된 참 대단한 욕심을 지닌 어느 학자의 고백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 하느님을 닮고 싶다는 원대한 꿈에 대한 고백처럼 들립니다.
3.어제 주고 받은 아름다운 메시지도 소개합니다.
“예수님 발치에 엎디어 기도하다가 바위가 되어버린 사람같아 볼 때 마다 감동이네요!”
사실 은연중 제 소망을 대변하는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님 발치에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의 바위입니다. 이에 대한 화답 메시지가 참 아름답고 고무적이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다가 바위가 된 사진을 볼 때면 우리 신부님이 연상됩니다. 어린 아이의 참 순수와 고운 사랑이 넘치시는 신부님, 맛과 향의 발효인생을 사시기에 꽃에 벌이 날아들 듯 저희들은 신부님의 향기에 젖어서, 취해서 사는 복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샘솟는 청정욕淸淨慾을 느낍니다. 마침 아주 예전 써놓았던 망부석이라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왜 떠올랐는지 모른다
망부석望夫石!
평생 임 그리워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
오늘 따라 마음 저리게 와닿은 망부석”-1997.4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거룩함holiness이자 온전함wholeness이요 영어 발음도 같습니다. 바로 아버지를 닮은 ‘완전함perfection’은 그대로 ‘거룩함holiness’과 ‘온전함wholeness’과 하나로 통함을 봅니다. 지난 밤 정월 보름달처럼 원숙, 원만한 둥근 모습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닮을수록 둥근 마음, 둥근 삶이 됨을 깨닫습니다. 가을철 둥글게 익은 원숙圓熟한 열매들이, 둥근 해, 둥근 달이 이를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참으로 이렇게 너그럽고 지혜로운 노년의 둥근 인생이라면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울런지요!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기도는 테크닉의 기교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할수록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수록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로 말하면 예수님을 능가할 자 없습니다. 늘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되어 사셨던 기도의 사람, 예수님이셨습니다. 가끔 피정 신자들에게 드리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은 둘 중 하나입니다. 기도한 사람인가 기도하지 않은 사람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바꿔 말해 ‘나중에 남는 얼굴은 사랑한 얼굴인가 사랑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입니다’라 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예수님 앞에 갔을 때 심판 잣대는 예수님 얼굴을 얼마나 닮았는가일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이웃을, 자연만물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 배치도 참 절묘하게 잘 어울립니다. 제1독서 신명기의 주인공 모세는 누구보다 하느님을 닮았고,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 역시 그대로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이자 사람이라 우리는 고백합니다. 모세가 강조하는 바 ‘오늘’입니다. 주님은 오늘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명심하여 실천해야 할 평생과제를 부여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원수를 좋아하라 하지 않습니다. 원수와 사랑의 친교를 나누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현실적입니다. 그냥 사랑하고 기도하라 합니다. 서로 주고 받는, 계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밑빠진 독에 물붓듯하는 일방적 무사無私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구에게나 똑같은 공평무사한 존중과 배려, 연민의 사랑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자랑스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진면목이요 이런 모습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이자 교회의 무수한 성인성녀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는win-win 길’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면,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면 악순환의 유혹에 빠지게 되고 먼저 내가 다치고 상합니다. 참으로 원수를 사랑할 때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보존되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우리의 존엄한 품위요, 악마의 유혹인 보복의 안순환에 빠지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악인은, 박해자는 하느님께서 나를 시험하여 단련시키고자 보낸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체 이들에게 감정적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며 단 사랑으로 인격적 응답을 하는 것이요, 때로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사랑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의 끼리끼리 사랑은 누구나 합니다. 참으로 이와 반대로 일방적 아가페 사랑이 참 고귀한 사랑입니다. 또 유념할 사실이 있습니다. 내 눈에 원수요, 박해자들이지 하느님 눈에는 달리 보일 수 있습니다. 원수와 박해자라 해도 그만의 피치 못할 불가항력의 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탓도 아닌 이런 저런 유전적 요인에 환경 요인으로 인한, 죄나 악, 병으로 인한 상처의 아픔이 원인이 되어, 즉 사랑의 결핍으로 원수가, 박해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원인이 있기 마련이며 알고 보면 용서하지 못할, 이해하지 못할 원수는, 박해자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의 해결解決이 아니라 해소解消요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천부인권의 사람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사람이란 자체로 사랑받을 권리가, 사랑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결론은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입니다. 주님께서 부여해주신 평생과제를 하루하루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날로 사랑의 사람, 완전한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1-2). 아멘.
기도하기 좋은 날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 계명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ㄱ)입니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지 말고 자비로운 눈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라’는 당부도 덧붙이셨다는 점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ㄴ)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도할 때 비로소 사랑은 이루어집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인내하지만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기도해야 인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무례하지도 않는다지만 그것도 기도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는다고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만이 성을 내지 않을 수 있고, 기도할 때만이 앙심을 품지 않을 수 있는 법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이 아니라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것일는지 모릅니다. 사랑하기 위한 기도 말입니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날, 오늘은 기도하기에도 딱 좋은 날입니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로운 삶으로
불리움 받은
우리들이다.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불완전한
우리들을
구원하신다.
완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우리들이다.
완전한 사람은
회개로
하느님께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버리고
비우고
이루어나가는
사람들이다.
이와같이
사람에서
출발하는
완전함의
여정이다.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완전한
하느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아주신다.
바르고
진실되고
참된 것이
완전한 것이다.
평범한 것이
완전하고
위대한 것이다.
하느님만을
바란다.
우리 힘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느님의
힘이다.
하느님께
초점을
맞춘다.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속에
살고있는
우리들 삶이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랑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파괴하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한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삶이란
완전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사람의 여정이다.
새로운 삶이란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새로운 삶이다.
새로운 삶은
기본으로
돌아간다.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
완전한 하느님의
은총임을 믿는다.
완전한 사람은
감사의 여정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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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는 목수 일을 하면서 목수가 된다.”라는 라틴어 속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순히 “오늘부터 나는 목수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훌륭한 목수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목수 일을 묵묵히 해나가면서 진짜 목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속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단순히 결혼만 하면 성가정을 이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정의 각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진짜 성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사제도 그렇습니다. 단순히 사제서품을 받는다고 완벽한 사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제 일을 철저히 해나가면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사제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만들어가는 과정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만들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세례를 받음으로 인해서 훌륭한 그리스도인,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아갈 때 진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나눠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 하느님의 뜻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르시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진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냐면서, 이 말씀은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원수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옳은 진리의 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나의 원수에게 육신의 해를 끼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만족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순간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다가선다면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만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만 그럴싸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겉과 안 모두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계속해서 사랑을 실천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사랑했던 시절의 따스한 추억과 뜨거운 그리움은 신비한 사랑의 힘으로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게 한다(발타자르 그라시안).
기적의 체험.
올 초에 3년 동안 함께 사목했던 신부가 본당신부로 발령을 받아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를 채워줄 다른 신부가 오지 않기에, 두 신부가 나눠서 하던 것을 저 혼자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이야 벌써 두 달이나 지나서 익숙해졌지만, 인사이동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걱정이 되더군요.
우연히 중국속담을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특별한 일이 기적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곧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적의 체험은 자신의 삶 안에서 계속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지에서 둘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기적이었고, 이제 혼자서 성지를 꾸려나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모든 것을 기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도 기적의 체험을 하실 것입니다. 설레지 않습니까?
원수에 대한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는 언제나 놀라운 기적과 변화가 뒤따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 ‘원수’는 어떤 존재일까? 생각해봅니다. 평생 지울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기고 이제는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그가 원수일 수도 있겠습니다. 내 가족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준 댓가로 ‘큰집’에 수감되어 있는 그가 원수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좀더 묵상해보니 원수는 뜻밖에도 아주 가까이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 한 사무실 안에 같이 일하는 동료, 매일 몸붙여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가운데 원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듣기 싫은 말만 골라하는 그, 내가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하는 그, 끝끝내 내 마음을 몰라주는 그가 원수인 듯 합니다. 남들 앞에 내 위신 좀 세워주면 좋겠는데, 틈만 나면 사람들 앞에서 내 흉을 보는 그가 원수일 것입니다.
나는 할일이 태산이라서 분단위로 시간을 나누어 뛰어 다니고 있는데, 일어나지도 씻지도 않고 뒹굴거리는 그가 원수로 여겨집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기껏 차려놓은 밥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가버리는 그가 원수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그, 백번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존재 자체로 고통이요 십자가인 그를 기꺼이 견뎌내고 기다려주는 것이 원수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가 이제 절정을 향해 다가서고 있습니다. 바로 원수 사랑이요,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요청의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폭력·무저항 평화주의를 뛰어넘은 꽤나 부담스런 요청입니다.
성격이 원만하고 예의바른 사람은 원수에게도 관용을 베풀고 편안하게 대할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십니다. 즉 한 차원 높은 사랑, 결국 신적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자아’(自我)라는 작고 옹색한 그릇을 벗어날 때 가능합니다. 인간의 협소한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원수 사랑은 우리 인간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과 그분의 정신이 자라날 때, 우리는 옹색함에서 광활함으로,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적 사랑에서 아가페적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 때 불가능하게만 여겨지던 원수 사랑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악에서 선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증오의 힘을 사랑의 힘으로 발전시키셨습니다. 이 세상에 악이 종식되지 않지만 악은 사랑에 의해 선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말이 쉽지 원수 사랑, 참으로 힘겨운 일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그를 위한 목숨 건 기도요, 틈만나면 그를 하느님께 의탁하려는 노력입니다. 그의 인생 안에도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동행하심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는 언제나 놀라운 기적과 변화가 뒤따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외줄타기를 하는 한 서커스 단원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다 강철 줄을 걸어 놓고 거기서 줄타기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손에 땀을 쥐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열심히 이리 건너오고 저리 건너가고 하면서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사람들 앞으로 와서 말했습니다.
“누가 내 어깨 위에 올라타겠습니까? 내가 한 사람을 어깨에 메고 건너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꼬마 소년이 “저요!”하고 손을 들면서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소년을 어깨에 태우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더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겁나지 않든?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지?”
그 소년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분이 제 아버지거든요!”
자녀는 부모를 믿습니다. 그러니 부모님과 함께라면 불가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시키는 것이라면 분명 가능하니까 시키는 것이고 불가능하더라도 도와주실 것이니까 시키는 것임을 압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완전해지는 길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원수가 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분명 나는 그를 원수로 여기기 때문에 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한 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나는 못 해도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 등에 타기만 하면 됩니다. 이를 위해 그분은 성체성혈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분께 맡기지 않으면 내 안에 그분이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한 여행자가 관광 중에 몸의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수영을 전혀 할 줄 몰랐던 그는 물속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팔을 흔들어댔습니다. 그러나 곧 지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이제 난 죽었구나!’ 하며 자포자기했습니다.
그러자 물이 그를 세게 받쳐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몸이 물에 둥둥 떴습니다. 그가 빠진 바다는 사해였던 것입니다. 사해는 다른 물과 달리 염분과 다른 광물들이 많이 섞여 있어 물에 가만히 몸을 맡기고 누워 있기만 하면 둥둥 뜨게 됩니다.
우리 안의 예수님은 마치 사해와 같습니다. 사해에 있으면서도 빠져 죽을 걱정을 한다면 자신이 사해에 있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하여 어쩔 줄 모르는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냥 맡기면 됩니다. 이것이 성체성혈을 먹고 마시는 신자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의 기분을 상상해봅시다. 하느님을 잉태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신 데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못 해도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는 진정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회가 되어서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먼 타향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시는 어르신을 보면서 강론대신 ‘고향의 봄, 봄날은 간다.’를 불러드렸습니다. 어르신들을 보면서 한국의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봄날은 간다.’를 잘 부르셨습니다. 비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시지만, 가시고 싶은 곳을 마음껏 가실 수는 없으시지만 마음은 따뜻한 봄날, 생동감이 넘치는 봄날, 사랑이 싹트는 봄날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흥부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서 품을 팔았고, 매를 대신 맞았습니다. 그러나 흥부의 마음은 봄날이었습니다. 처마 밑에서 날지 못하는 어린 새끼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고쳐주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놀부는 넓은 집에서 살고,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었지만 놀부의 마음은 봄날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의 어려움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흥부는 박을 타서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 흥부는 그것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기에 흥부는 가난했어도, 부자가 되었어도 언제나 봄날이었습니다.
심청이는 어머니가 일찍 죽어서 어머니의 젖을 먹지 못했습니다. 눈이 먼 심봉사가 심청이의 먹을 것을 얻어 왔습니다. 어린 심청이는 아버지 대신 동냥을 했고, 바느질을 배워서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가난했지만 심청의 마음은 봄날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공양미 삼백석에 바다에 몸을 던질 때도 심청의 마음은 봄날이었습니다. 용왕의 도움으로 왕비가 되었어도 심청의 마음은 봄날이었습니다. 전국의 눈먼 이를 위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심청의 효성으로 아버지와 같이 왔던 맹인들이 모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심청은 가난했어도, 왕비가 되었어도 언제나 봄날이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또 다른 ‘봄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실천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듯이, 햇빛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듯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봄날’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차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한 사람은 선하기에
악한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악한 사람은 악하기에
선한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선한 사람은 선하기에
악한 사람이 선하기를 기도하지만
악한 사람은 악하기에
선한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기에
증오하는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기에
증오하는 사람이 사랑하기를 기도하지만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롭기에
불의한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불의한 사람은 불의하기에
정의로운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롭기에
불의한 사람이 정의롭기를 기도하지만
불의한 사람은 불의하기에
정의로운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진실한 사람은 진실하기에
거짓된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거짓된 사람은 거짓되기에
진실한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진실한 사람은 진실하기에
거짓된 사람이 진실하기를 기도하지만
거짓된 사람은 거짓되기에
진실한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살리는 사람은 살리기에
죽이는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죽이는 사람은 죽이기에
살리는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살리는 사람은 살리기에
죽이는 사람이 살리기를 기도하지만
죽이는 사람은 죽이기에
살리는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하느님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 따르기에
하느님 밀쳐낸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하느님 밀쳐낸 사람은 하느님 밀쳐내기에
하느님 따르는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하느님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 따르기에
하느님 밀쳐낸 사람이 하느님 따르기를 기도하지만
하느님 밀쳐낸 사람은 하느님 밀쳐내기에
하느님 따르는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에게 강도 높은 단수를 높여 가신다.
사랑은 신의를 바탕한다. 하다 말다 하는 것이 아니다. 약속이며 서약이다. 그 약속인 인간 서약의 의로움은 그 바탕이 하느님의 의로움에서 출발한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과연 실현 가능할까? 예수님은 행하셨다. 낮춘다는 겸손(humilitas)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땅(humus)을 닮았다. 낮은자, 꼴지가 되라고 하시며 그렇게 사셨다. 죄인들의 채찍질, 수모, 능욕, 침밷음, 조롱, 초와 쓸개를 해면에 묻혀 먹임, 십자가상에서의 저주, 내려와 보라! 인간은 마귀가 되어 해괴망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다. “저들이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저들이 하는 일을 모름이다. 아버지께 저들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원수까지 사랑하셨다. 이로써 원수가 생명이 되어 올라왔다. 완전한 사랑으로의 원수가 드높여진 것이다. 그냥 저절로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중에 어머님만은 하시는 사랑이다.
사랑, 완전한 사랑을 바탕한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그런 사이 생겨나는 사연을 들어보면 저주의 사연이 많다. 인간사가 복잡하다. 일이 풀리다 꼬였다 그것이 인간사가 되었고 이하가 수면으로 올라와 상식이 되어버렸다. 아니 이럴수가? 원수가 원수를 어찌 사랑하는가? 미워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하느님의 사랑, 완전한 사랑, 묵상하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그 사람이 견딜만한 크기의 십자가를 허락한다 하지 않는가? 크리스챤? 기복을 넘어 의로움을 능가하고 완전한 사람에 접근하며 사는 사람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분명 달라야 한다. 하느님 도우심 청하며 힘이 부칠 때라도 완전함을 살려는 시도를 해야하지 않을까? 제자들은 점점 예수님을 닮아 갈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먼저 그 사랑의 대상으로 우선적으로 나를 사랑해주고, 또 내가 사랑하고 싶은 대상을 떠올립니다. 사실 그런 대상은 우리가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어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대상 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는 진정 계산과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계산과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 이루어 가야할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처럼 그렇게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고린토 전서 13장 7절에서 이렇게 전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인간이 가진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의 영과 함께 그렇게 원수와도 같은 이에게도 사랑을 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은사를 이루며 구원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용현 베드로 신부님
사람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있고, 못하고 것이 있다.
잘하는 것을 할 때는 기쁜 마음으로 하다가도 못하는 것을 부탁받게 될 때는 미루거나 피하게 된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이 말씀을 묵상하면 이렇게 다가온다.
“사실 너희가 하고 싶은 것만 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주님께서는 우리가 잘 하는 일이든 잘 못하는 일이든 “예”라는 응답을 통해 성화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하기 싫은 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내가 사랑 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며, 내가 잘해주고 싶은 사람만 잘해줄 때가 종종 있다.
그러기에 성화됨을 바라시는 주님의 요청에 온전히 응답 할 수 없고, 성화되지 못하는 삶을 살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주님의 부탁을 듣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부탁하지 않으시고,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부탁하신다.
주님의 부탁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 부탁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함으로 성화의 은총을 얻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해 본다. 아멘.
미움? 원수?
곽승룡 비오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위해야 한다.’(마태5,43)에서 ‘미워하다’는 지금 우리가 쓰는 말처럼 예수님 당시는 그렇게 강한 뜻이 없단다.
오히려 ‘나두어라, 신경 쓰지 마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보통 우리도 관계없는 사람에게 ‘그 사람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마라.’는 표현을 종종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원수’도 오늘처럼 아군에 반대하는 적, 나쁜 것을 원하는 사람보다 단순히 친구가 아닌 사람, 외국인, 모르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친구와 벗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는 실천에 주목하고 계신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웃, 가까운 자. 아는 자들에게 호감을 갖기 마련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인사하기를 꺼려하고, 무관심하다.
하지만 지금 전 세계는 코로나19로 인해 이웃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는 증거다. 공포심으로, 안타까움으로, 놀라움으로, 경계심으로...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서 사랑의 보편성을 말씀하신다. 곧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다. 그리스도 사랑의 보편성인 이웃사랑은 하느님께 사랑받는 모든 이에게 확장된다. 하지만 한계를 가지고 있음이 현실이다.
교부 위 디오니시오 아레오파지다는 “더 넓은 경계는 더 신적이다. 곧 하느님과 더 가깝다.”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격, 인종, 사회, 국가적 혐오감을 뛰어넘는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 가장 정성을 다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의사 또는 의료 종사자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혐오감을 기능적 훈련을 통해 용기 있게 극복한 숭고한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혐오감 극복을 위한 좋은 예를 보여 주셨다.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 바리사이와 세리들과 식사를 하셨다. 우리도 혐오감, 비호감으로 다가오고, 비위상하게하는 사람에게 갖는 반감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해서 힘을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못한자가 있다면 즉시 그 사람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즉시 눈에는 눈, 코에는 코의 원리로 돌아간다. “네가 내게 한 것 그대로 나도 네게 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 44)
코로나 19의 상황에서 호주가 한국을 Travel Ban(한국을 떠난 시점부터 14일간 호주입국불가)인들의 입국하지 못하는 결정을 내렸다. 호주 시민권자, 영주권자는 다른 항공편으로 돌아온 후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이 모든 결정은 결코 누가 미워서 원수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 듯싶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서로 미워하지 않고, 비록 원수일지라도 사랑하기 위한 것인 듯싶다.
영원한 젊음. -젊음은 나이가 아닌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참으로 사랑이 커갈수록 마음은, 정신은 하느님처럼 영원한 청춘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85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매일의 삶이나 강론을 대하면 전혀 노인이라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을 닮아 영원한 젊음의 청춘같습니다. 바로 사랑이 그 답임을 깨닫습니다. 얼마전 받은 사랑 가득 담긴 메시지에 용기 백배했습니다.
-“온 세상이 코로나 얘기네요. 신부님! 제 눈에는 언제나 젊으신 신부님이시지만 나이가 있으시니 영양섭취도 수면량도 충분하게 하셔야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할 때 무리가 없으세요오.”-
누구나 원하는 바 젊음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 몸은 늙어도 마음은 사랑으로 영원한 젊음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이 젊음의 비결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배움에 대한 사랑도 날로 커집니다. 특히 사랑에 대한 배움입니다. 배워도 배워도 끝없는 평생 공부가 사랑입니다. 하여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언젠가의 사랑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천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삶, 영원한 젊음의 비결입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바로 오늘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의 계명을 지킬 때 비로소 주 우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모두의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된다는 참으로 고무적인 말씀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을 항구히 실천할 때 거룩한 사람이 되고 영원한 젊음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구체적 사랑 실천에 대해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말씀은 그대로 하느님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더 이상 무슨 군더더기 설명이 주석이 필요하겠습니까? 대자대비大慈大悲, 공평무사公平無私하신 하느님을 닮아 사랑을 실천해야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원수나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니 보복의 악순환을 단斷, 끊어버리고 오히려 이들을 사랑하고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엊그제 일간신문에서 읽은 저명한 문학평론가의 글입니다. 바로 오늘 이어지는 복음 말씀에 감격한 비신자의 고백입니다.
-“나같은 필부조차도 숨막히게 되뇌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5,46-47).
그러므로 사상이자 실천으로서의 기독교를 제 삶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포근한 정신적 복지 프로그램의 수혜자가 되는 일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세속적 정신은 가 닿을 수 없는 깊은 곳에서 실존의 의미를 추구追求한다는 것이고, 평범한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이타적인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다. 기복祈福과 반공反共을 부르짖는 기독교란 그 자체가 일종의 모순이다.
자부심 넘치는 합리주의자들은 ‘최악의 기독교’를 과녁 삼아 조롱 섞인 논박을 퍼붓고 그런 자신에게 도취되고는 하지만, 나는 이와같은 ‘최상의 기독교’ 앞에서 내가 신앙을 갖는 데에 실패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한다. 주변의 겸손하고 헌신적인 신앙인들을 경외敬畏하면서 말이다.”-<경향3.4일자, 신형철>
참으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영원한 젊음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거룩한 삶, 완전한 삶, 둥근 삶,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평생 배우고 실천해야할 사랑공부에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역시 어제 일간신문에서 읽은 젊은 작가의 글도 길다 싶지만 인용합니다.
-“사실 나는 바오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울에서 바울이 되는 격정의 삶은 전향자들이 쉽게 과격한 근본주의자가 되는 과정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린도 전서 13장 11-13절까지의 말씀, 특히 12절의 이야기는 매번 가슴을 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뿌옇게 서리가 낀 것처럼 투명하지 않고 확고한 단 하나의 진실을 기대할 수 없는 삶이지만 언젠가는 모든 게 명확하게 드러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내게는 천금과도 같은 약속이었다. 가장 힘들 때마다 저 말은 나를 구했다. 당신이 나처럼 종교가 없든, 혹은 비기독교인이든 관계없이 저 12절의 말씀으로부터 바로 이어지는 문장을 함께 나누면서 이 글을 마치고 싶다.
‘그런즉 믿음, 희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입니다.’”-<한겨레3.5;하지웅>
인생은 말 그대로 사랑의 학교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평생 사랑을 배우고 실천해야할 사랑의 학교에 ‘주님의 학인, 사랑의 학인’인 우리의 신원입니다. 인생은 영적전쟁터이기도 합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 역시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원입니다. 주님은 사랑의 학인이자 사랑의 전사인 우리 모두에게 평생과제를 부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평생 사랑의 학인, 사랑의 전사로서 항구히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1-2).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다른 존재들에게 어떻게 연장되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제1독서인 신명기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이 언급됩니다.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신명 26,17).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였다"(신명 26,18).
서로 마주 선 두 존재가 각각 선언을 통해 이처럼 계약을 체결합니다.
"주님께서 너희 하느님이 되시고"(신명 26,17)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신명 26,18)
이것이 바로 계약의 골자입니다. 이 계약을 통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서로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발생하지요. 그 세부 규정들이 신명기 전반을 채우고 있습니다.
복음 속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따라야 하는 율법 규정의 한계를 넓혀 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고 네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마태 5,43).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분명 율법에 등장합니다(레위 19,18 참조). 하지만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살인 등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복수가 동태복수법의 형태로 공동체 안에 존재함을 묵인 내지 인정하는 정도지요.
그래도 선량하게 살고자 애쓰는 이들은 십분 양보해서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정도의 아량과 선의를 지니려고 노력합니다. 그것만도 큰 희생과 포기가 따르는 자기 비움의 수행일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보복과 복수가 공동체와 자기를 보호하는 미덕인 문화 속에서, 자기애와 일차적 감정에 충실한 우리 인간에게 실로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기 마련이니까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 자기 형제들에게만"
그런데 하느님은 "~에게나" 방식으로 존재를 대하시고, 사람은 "~에게만" 방식으로 존재를 대합니다 아버지와 자녀인 우리 사이에 이처럼 어마어마한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에게나" 방식은 포용적인 반면, "~에게만" 방식은 선택적이고 차별적입니다. "~에게나" 방식의 접근에는 제외되는 대상이 없지만, "~에게만" 방식은 구별부터 하고 봅니다. 주체의 호의와 적대감에 따라 대상의 그룹이 선명히 나뉘지요. "~에게나" 방식은 상대를 고려하는 반면, "~에게만" 방식은 자기 중심이기에 그렇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거룩함"이 이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완전함"을 입습니다. 이 둘은 별개의 특성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의 '아버지다움'입니다.
물론 여기서 완전함은 모든 면에 철두철미한 완벽함과는 다릅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인간 존재에게 완벽함이란 불가능할 뿐더러, 공동체적으로 보면 무용하기까지 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시각으로 모든 불완전함을 관상하고 연민하는, 아버지의 자녀다운 품성이 "완전함"이고 또 "거룩함"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필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완전함입니다. 그리고 이 완전함이야말로 거룩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이 거룩한 완전함의 수혜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 중에 있을 때라도 해가 우리를 비껴가지 않았고 비도 우리를 건너뛴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아버지 사랑에서 제외된 적이 없는 우리가 좁고 편협한 시각 밖으로 감히 누구를 밀어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더 배우고 획득하고 익힌들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의 완전함이 지식이나 능력, 기술, 겉모습에 기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버지 자녀다운 완전함은 가진 바를 나누고 가난을 선택하며, 경계를 허물고 미움을 내려 놓고 차별을 그치는 비움으로만 채울 수 있는 역설적 신비입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영역에서 제외 목록이 적으면 적을수록 완전함에 더 가까이 가는 것 아닐까요? 아버지의 완전함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희가 하느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최재영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참 강론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혹시 원수는 원한을 진 사람만 두고 하신 얘기가 아닐지도 모르죠. 또 그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너무 미워하진 말라는 말씀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간절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묵상해봅니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한 번이라도 내가 미워하고 용서할 수 없는 이를 향해 작은 것이라도 실천해보라는 말씀은 아닐까요? 정말로 제 주변에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이 꽤 계시더군요. 그런 기도야말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보려 애쓰는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해보려 했는데 혹여나 잘 안 되었더라도 너그러운 눈길로 격려해주시지 않을까요?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도 있지요! 정말 어렵게 느껴져도 아주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하루에 한 번 그를 위해 바치는 화살기도라도요.
이우진 요셉 신부님
찬미예수님. 저는 뉴스를 텔레비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서 인터넷으로 확인하고는 합니다. 초록색 창 뜨는 사이트에서 주로 보는데요. 어제도 평소처럼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각 파트에서 난리도 아니네요. 정치는 뭐, 조용한 날이 별로 없었지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사회, 문화 파트는 더 합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와 신천지로 인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인해 아주 떠들썩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간의 힘겨루기와 입국 제한 조치가 늘어났다는 이야기, 또한 일본과의 여러 문제, 한 쪽에서는 전쟁으로 무참히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소식이었습니다.
보면서 제가 그런 뉴스를 보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보듬어준다거나, 힘을 주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 국가, 자기 도시, 자기 단체, 자기 가족, 그리고 자신만이 중요했습니다.
이것이 2020년 지금 지구, 한국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신앙인, 그리스도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들과 똑같이 살면서 주님이 목숨을 내놓아 얻은 구세주,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우리에게 붙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럴 자격이 있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인간이기에 나의 사랑하는 가족, 나라,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이 할 줄 압니다. 그러니 우리는 입에 ‘그리스도’라는 말을 담을 수 있도록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 첫 부분에 나온 것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람이 밉다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 전까지, 그리고 물론 지금도 진행 중에 있을,미투 운동을 생각해봅니다. 미투 운동 안에서 물론 잘못한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할 것입니다. ‘왜 저러냐’, ‘어딘가 이상하다’ 그렇게 박해아닌 박해의 말을 들으면, 된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께 충실하고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완전한 하느님이면서 완전한 사람이었던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주님도 세상 안에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으셨지만, 한 편으론 많은 이들에게 배척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무섭지요.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려면.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나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교우여러분, 우리는 그런 주님의 자녀이고, 주님을 닮으려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안에서 은총 구하며, 조금 더 노력하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멘.
'나는 어떤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것이 무엇이겠느냐?'(마태오 5장 43~48)
완전한 사람이 되기위해 사랑과 용서는 필수입니다.
주님을 따라사는 사람의 모습이 주위 사람과 별반 다를바 없고 그 보다 못한 태도로 산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순수지향으로 움직일때 전율이 일어나고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더 잘 살도록 소리없는 부추김이 됩니다.
적어도 피해주지 않는 삶은 누구나 합니다.
'적어도 신자라면~' 하는 바램이 올라온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살펴봅시다.
'남보다 잘하는것은 빼지말고 하십시오.'
참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민이 사랑을 실천한다. <마태,5/43-4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누구나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의를 벗어난 사람 아니면 세상을 너무나 모르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아니면 “예” 할 것을 “예 ” 하지 않고 “아니요” 할 것을 “아니요” 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정의냐? 사랑이냐 무엇이 우선이냐? 하면 정의라 하겠지만 사랑이 없는 정의는 참 정의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완전한 것을 알지 못하먄 정의를 지킨다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새로운 계명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세싱에 오신 이유는 하느님의 정의를 알려주려 오시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완전하신지를 아려주려 오셨습니다.
율법을 만들어 명하신 하느님은 율법의 완성자로 사랑의 힘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입니다.
원수는 어디서 생깁니까? 세상의 이해타산에서 생깁니다. 요사이 나라의 사랑으로 모두 자기희생 목숨까지 받치려 하지만 막상 거기에 도달하면 아니 나는 더 이익을 보아야한다.
인간의 완성은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랑을 완성하는데 있습니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책상머리에 앉아 십자가와 살모상을 앞에놓고 에페서 3/17-19 “ <저는> 믿음을 통하여 저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마물도록 해 주시기를 빕니다. 사랑에 뿌리를 받고 기초를 두어 저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 그리스도의 신비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고 그리하여 지식을 훨씬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보게 되기를 빕니다. 그것은 저의가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으로 충만 하기 위함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고 다음을 하면서 모든 지식보다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인 것을 하루를 하느님의 사랑에 봉헌합니다.
참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기보다 힘이듭니다. 그러나 나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하느님과 일치로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면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듯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원수를 사랑하여 저를 박해하는 사람 저에게 불의를 범하는 사람 하느님의 사랑의 용광로에 정화시켜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을 완성하신 십자가의 능력으로 저도 하루하루 와성해 나가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한 자되시려거든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다. 빛과 비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내리고 있다고 하신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인데 나는 이 사랑을 조그만 그릇에 담아 저울질하며 살아간다. 내가 편한 사람만을 곁에 두려고 한다. 상처가 받고 긴장하고 아파하고 하는 것이 싫어서 그러나 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는 짓인데 하느님의 사랑을 품기에는 너무나 조그만 존재이다. 메뚜기가 하늘을 나는 새가 보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나 자신의 주관성을 객관화 시킬 수 있는 호연지기를 가지고자 한다.
저 호수가 담고 있는 마음을 그려본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도 계속해서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는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에는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니라, 나아가서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랑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또 오늘, 대체 누가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까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다른 존재들에게 어떻게 연장되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제1독서인 신명기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이 언급됩니다.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신명 26,17).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였다"(신명 26,18).
서로 마주 선 두 존재가 각각 선언을 통해 이처럼 계약을 체결합니다.
"주님께서 너희 하느님이 되시고"(신명 26,17)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신명 26,18)
이것이 바로 계약의 골자입니다. 이 계약을 통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서로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발생하지요. 그 세부 규정들이 신명기 전반을 채우고 있습니다.
복음 속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따라야 하는 율법 규정의 한계를 넓혀 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고 네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마태 5,43).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분명 율법에 등장합니다(레위 19,18 참조). 하지만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살인 등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복수가 동태복수법의 형태로 공동체 안에 존재함을 묵인 내지 인정하는 정도지요.
그래도 선량하게 살고자 애쓰는 이들은 십분 양보해서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정도의 아량과 선의를 지니려고 노력합니다. 그것만도 큰 희생과 포기가 따르는 자기 비움의 수행일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보복과 복수가 공동체와 자기를 보호하는 미덕인 문화 속에서, 자기애와 일차적 감정에 충실한 우리 인간에게 실로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기 마련이니까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 자기 형제들에게만"
그런데 하느님은 "~에게나" 방식으로 존재를 대하시고, 사람은 "~에게만" 방식으로 존재를 대합니다 아버지와 자녀인 우리 사이에 이처럼 어마어마한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에게나" 방식은 포용적인 반면, "~에게만" 방식은 선택적이고 차별적입니다. "~에게나" 방식의 접근에는 제외되는 대상이 없지만, "~에게만" 방식은 구별부터 하고 봅니다. 주체의 호의와 적대감에 따라 대상의 그룹이 선명히 나뉘지요. "~에게나" 방식은 상대를 고려하는 반면, "~에게만" 방식은 자기 중심이기에 그렇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거룩함"이 이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완전함"을 입습니다. 이 둘은 별개의 특성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의 '아버지다움'입니다.
물론 여기서 완전함은 모든 면에 철두철미한 완벽함과는 다릅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인간 존재에게 완벽함이란 불가능할 뿐더러, 공동체적으로 보면 무용하기까지 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시각으로 모든 불완전함을 관상하고 연민하는, 아버지의 자녀다운 품성이 "완전함"이고 또 "거룩함"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필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완전함입니다. 그리고 이 완전함이야말로 거룩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이 거룩한 완전함의 수혜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 중에 있을 때라도 해가 우리를 비껴가지 않았고 비도 우리를 건너뛴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아버지 사랑에서 제외된 적이 없는 우리가 좁고 편협한 시각 밖으로 감히 누구를 밀어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더 배우고 획득하고 익힌들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의 완전함이 지식이나 능력, 기술, 겉모습에 기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버지 자녀다운 완전함은 가진 바를 나누고 가난을 선택하며, 경계를 허물고 미움을 내려 놓고 차별을 그치는 비움으로만 채울 수 있는 역설적 신비입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영역에서 제외 목록이 적으면 적을수록 완전함에 더 가까이 가는 것 아닐까요? 아버지의 완전함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랑은
완전합니다.
완전하신
아버지를 향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아름답게
또 완전케 합니다.
우리가
낮아지면
온전해지고
우리가 모든 걸
맡기면
온전해집니다.
그래서 완전함이란
우리의 가난함과
약함 결핍까지도
아우르는 사랑의
그 완전함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 줍니다.
완전함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사랑의 놀라운
힘은 완전합니다.
아버지께서
사랑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진심어린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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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렸을 때에는 참을성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한 반에 70명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안에서 손해를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래서 별 것 아닌 것으로 친구들과 다투곤 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책상에 금을 그어 놓고서 절대로 넘어오면 알아서 하라고 협박(?)도 하지요.
이렇게 어렸을 때를 떠올리다가 초등학생 때 친구와 크게 싸웠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장난을 하다가 한 친구를 툭 치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왜 때려!”라면서 화를 냈고, 저는 저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그래, 그러면 너도 한 대 때려.”라고 말을 했지요. 나도 한 대 맞으면 공평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한 대 때렸는데 너무 세게 때리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냥 툭 친 정도였는데 말이지요.
이 친구의 행동으로 인해서 오히려 제가 손해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세게 때려?”라고 말하면서 저 역시 세게 때렸고, 결국 서로 치고 박는 큰 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평하다’라는 말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정확함일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확하게 나눈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눈에 보이는 물건의 정확한 나눔 조차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내 마음이 받은 상처의 크기에 따라 누가 더 큰 아픔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자기 아픈 것이 가장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공평함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의 공평함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평함은 자로 재서 정확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조건 사랑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서 세상의 관점으로 공평하게 심판하신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세상 안에서 살아 숨쉬기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공평함은 죄가 많으니까, 또 당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니까 “너는 못되게 살았으니 사랑을 줄 수 없다.”라는 세상의 공평함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똑같이 주시는 사랑이 주님의 공평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는 공평함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나의 사랑을 받았으면 나 역시 딱 하나의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받든 받지 않든 상관없이 무조건 주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매일 이렇게 되뇌었어. “오늘도 나는 마음속에 사랑을 간직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오스카 와일드)
뒷담화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이 특히 믿었던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어떨까요? 아마 이런 두 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혀 사실이 아닌데 어떻게 이런 소문이 난거지?’
‘내가 인생을 헛살았나?’
그런데 이런 생각에만 머물러 있으면 절대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뒷담화를 수집하되 그대로 믿지 마세요. 주관적 의지가 들어 있는 것이니까....
2) 전달자의 의도를 확인해보세요. 당사자를 만나서 직접 해야 합니다.
3) 못들은 척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괜한 가슴앓이를 해봐야 무엇 하나 바뀌지 않습니다. 뒷담화를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잘해주십시오. 큰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원수 사랑이 실천될 때,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초보 수도자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저도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마음만 앞섰지 많이 서툴렀습니다. 그래도 후배들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 만은 대단했습니다. 새싹 같은 후배들이 초고속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에, 무리한 요구도 참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미사를 봉헌하는데, 반주도 없이 그냥 성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천상에서‘음악이 없는 오라토리오’를 보시고 슬퍼하실 돈보스코 생각에, 모두 집결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생각해도 무리였다 싶은 요구를 했습니다.
“앞으로 넉넉잡고 세 달 시간을 드릴테니, 그 안에 최선을 다해 오르간 반주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달 후부터는 그 누구도 예외없이 돌아가면서 미사 성가 반주를 하셔야 합니다. 딱 세 달입니다.”
불쌍하고 착한 우리 형제들, 그날 이후로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빡센 수도원 일과 따라가야지, 틈틈히 생전 처음 만져보는 오르간 연습해야지...한편으로 좋았던 것은, 뭔가 명확한 목표가 정해지니, 다들 얼굴들이 비장하기도 하고, 살아있는 듯 했습니다.
드디어 약속했던 세 달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단 한명도 예외없이, 그럴듯하게 성가 반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상상도 못했던 일을 해낸 것에 대해 깜짝 놀라기도 하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도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악보가 읽혀지지 않던 한 형제는 외워서 치기도 했고, 또 어떤 형제는 늘 입당 성가로, 가톨릭 성가집 중에 가장 짧고 반주하기 쉬운,‘믿음으로’ 1절, 마침성가로 ‘믿음으로’ 2절만 줄기차게 반주하기도 했습니다.
산상설교 중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향한 요구가 참 많으셨습니다. 그만큼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좀 더 크게 성장하기를, 좀 더 넓은 시야를 지니기를, 좀 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기를, 좀 더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꽤나 무리한 요구를 건네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5장 44~45절, 48절)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백번 생각해도 무리한 요구처럼 들립니다. 그러면서 그분께 이런 약속 정도 드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 노력은 해보겠으나, 죄송하지만 약속은 못드리겠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도무지 수용이 안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원수 사랑은 뼈를 깎는 의지적 노력없이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자아’라는 옹색한 그릇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사랑입니다. 협소한 인간적 관점, 제한된 인간적 사고방식을 떨쳐버려야 가능한 사랑입니다.
좁디 좁은 인간의 시선을 버리고 한없이 광활한 하느님의 시선을 지닐 때 원수 사랑은 가능해집니다. 우리 안에서 인간의 옹졸함과 비루함이 빠져나가고, 하느님의 정신과 숨결이 머물때 원수 사랑은 가능해집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실천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가 울려퍼질 때, 우리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오직 하느님의 힘만으로 가능하니, 그저 정답은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또 기도뿐입니다.
화나는 나를 볼 때 이미 화에서 벗어난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화’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내겐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말한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절친했던 클레토스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장성해 장군이 되어 친구인 알렉산더 대왕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클레토스가 만취해 많은 군사들 앞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모욕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화가 치민 알렉산더 대왕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던 군병의 창을 빼앗아 클레토스에게 던졌습니다.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창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가슴을 뚫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절친한 친구를 죽였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운 나머지 알렉산더 대왕은 자살까지 하려 했습니다. 땅은 정복했으나 정작 자신은 정복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입니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친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화가 난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계속 큰 소리로 떠들어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분노를 애써 무시하고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커다란 물통을 들고 거실에 들어오더니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을 쏟아버렸습니다. 순식간에 봉변을 당한 소크라테스는 수건으로 천천히 물을 닦아내며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너무 놀라지 말게. 천둥이 친 후에는 반드시 소나기가 내리는 법이라네.”
소크라테스는 화가 나지 않았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화에 사로잡힐 수 없는 곳에 자신을 옮겨놓은 것뿐입니다. 화를 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화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화가 나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 안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바람 불 때는 배를 바다에 안 띄우면 됩니다. 화와 안 좋은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그것들이 일어나는 곳으로부터 탈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일어나는 일이 내 자신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나로부터 벗어납니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마치 출렁이는 바다에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하고 있다가 헬기에 구조되어 하늘에서 출렁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내 안에서 화가 나고 있는데 이젠 그렇게 화나는 내가 내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기도하면 이렇게 자아와 본래 나의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가 나는 자아를 자기 자신과 구별하지 못할 때 고통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위로위로 더 올라갈수록 이제 자아에서 화가 올라오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자신의 감정을 초월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질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자아는 본성적으로 화를 내고 못된 욕정을 일으킵니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나를 들어 높이면 그런 몹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내 자신을 들어 높이면 제3자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이웃과의 관계도 보입니다. 산 위에 올라가서 밑에 있는 동네를 본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그 밑에서 아웅다웅하던 일들이 조금은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위로 올라가니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차이가 없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모두에게 같은 태양이 떠오르게 하십니다. 태양처럼 높아지면 이제 지역이나 사람들을 분별을 해서 빛을 주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랑이 갑니다. 그 본성이 사랑이라는 말은 이렇게 높이 계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해지려면 하느님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사람과 멀어지는 것은 오히려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남편보다 자신과만 함께 있어주며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편을 더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거든 부모나 아내나 자녀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고서는 참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결혼하셨다면 어떤 남편이 되셨을까?’라는 조금은 불경스런 생각을 해 봅니다. 아마도 성모님에게 고통을 안겨주셨듯이 훌륭한 남편은 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를 사랑하기 위해 가정은 소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가정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까지 불러내어 온전한 가정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베드로 사도가 아내를 덜 사랑했을까요? 육체적으로는 멀어졌을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더욱 충만한 사랑을 했을 것입니다. 더 태양에 가까워져 더 뜨거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뜨거워지려면 더 위로 올라가야합니다. 이것이 아직 밑에서 따듯함을 바라는 이들을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음으로 성모님을 떠나신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해지려면 나를 하늘로 들어 높여 태양까지 가야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불타고 있다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같은 사랑을 뿌려주는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 높이 올라가면 분별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모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사랑은 나를 높이 들어 올릴 때만 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기가 발명되면서 우리는 밤에도 환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집에는 양초가 있었습니다.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밤을 밝히기 위해서 마련하였습니다. 저는 호롱불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전에는 기름에 적신 심지가 밤을 밝혔습니다. 전기가 밤을 밝히는 요즘에도 초가 쓰이는 곳이 있습니다. 예식장, 호텔, 가정에서 향초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당이나 사찰에서 기도할 때 사용합니다. 이번 교육에서 참회 예절이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초를 들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왔습니다. 십자가 주위에 초를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십자가와 초는 마음을 차분하게 하였습니다. 성가를 부르면서 성찰하였고,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환한 전깃불 아래에서는 그렇게 느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교회는 전례에 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성대한 초는 부활성야에 밝히는 ‘부활초’입니다. 사제는 부활초를 축성하면서 그해의 연도를 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작이며 마침임을 표시합니다. 사제는 부활초를 들고 행진을 하며 성당 안에 있는 교우들은 모두 부활초에서 불을 얻어 초를 밝힙니다.
전례에서 초를 사용하는 이유는 초가 가지는 3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희생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서품식에 초를 드는 것도, 종신서원에 초를 드는 것도 바로 이런 희생의 삶을 위한 다짐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조직 때문에 2000년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모든 것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2000년 역사를 이어온 것입니다.
둘째는 나눔입니다. 초는 아낌없이 자신의 불을 다른 초에 전해줍니다. 그래도 초의 빛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부활초에서 전해지는 불은 성당 안을 환하게 하지만 부활초는 그대로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지만, 물고기와 빵은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성체성사는 나눔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세포가 자신의 양분을 나누지 못하면 암세포로 변하게 됩니다. 세포는 자신의 양분을 나눌 때 건강한 몸이 됩니다.
셋째는 빛입니다. 아무리 깊은 어둠도 작은 촛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촛불이 있는 것만으로도 어둠은 사라지지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빛은 생명을 주고, 이 빛은 희망을 주고, 이 빛은 지혜가 되었습니다. 풍랑에 휘말리는 배가 멀리 빛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이웃에게 희망의 빛, 사랑의 빛, 믿음의 빛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참회 예식을 밝혀 주었던 초가 완벽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여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19,8).
산에 생강나무, 산수유, 개나리 모두 노란색이다. 왜 봄 꽃은 대부분 노란색일까? 지금 겨울을 넘어 생명들이 태어나니 사람들이여, 생명의 새싹들을 귀하게 조심스럽게 다루시오! 하는 경고의 색이 아닐까? 요즈음 사람이 생명을 돌 볼만큼 성숙하고, 충만해서 생기를 불어 넣어줄 만큼 목적을 살지 못한다. 노란색의 봄은 엉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경고색이라 여겨진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사순절에 다시 듣는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완전’은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음이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함을 사신다. 우리도 당신의 완전함을 바라보고 살도록 촉구하신다. 이렇게 살 때 모두가 넉넉해질텐데 아쉽게도 많이 흉흉하고 어수선해서 생명이 위태롭다. 완전하게 살도록 힘써보자! 그러면 오늘 듣는 예수님의 사랑의 법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중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Nn. 9-10)
현대 세계는 강하면서도 약하고 최대의 선을 다할 수도 있고 최대의 악을 저지를 수도 있으며, 자유와 예속, 진보와 퇴보, 사랑과 증오의 문이 동시에 열려 있다. 그러나 인간이 발굴한 힘들이 인간을 괴롭힐 수도 있고 인간에게 봉사할 수도 있으므로 이런 힘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인간 자신의 책임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자문하게 된다.
사실 현대 세계가 고민하는 불균형은 인간 마음속에 뿌리박힌 더욱 근본적인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다. 과연 인간 내부에서 여러 가지 요소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여러 가지 한계성을 체험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제 욕망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을 뿐더러 더욱 고차적인 생명에로 불리었음을 느낀다.
인간은 또한 여러 가지 유혹 속에서 언제나 취사 선택을 강요당한다. 더구나 인간은 약하고 또 죄인이므로 원치 않는 일을 행하고 원하는 일을 행치 않는 수도 드물지 않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미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의 많은 불화도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물질주의에 젖은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같이 극적인 상황을 똑똑히 이해하기를 외면하고 또 불행에 짓눌린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겨를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사물의 가지가지 해석 가운데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써만 참되고 완전한 인류 해방을 기대하며 미래에 지상에 건설될 인간 왕국이 자기 마음의 온갖 소망을 채워 줄 수 있으리라고 확신을 가진다. 또 인생의 의의에 대해서 실망한 나머지 인생의 실존 자체는 고유한 의의라곤 도무지 없지만 인간의 재능만으로써 인생에 전가치를 부여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용감성을 찬미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현대 세계의 발전을 직시하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위대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승리는 또 무슨 소용이냐? 인간은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으며 또 사회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지상 생활이 끝나면 무엇이 따를 것인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새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의 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성령을 통하여 사람에게 빛과 힘을 주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으신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음을 교회는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천하에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음을 믿는다. 동시에 교회는 인류 역사 전체의 열쇠와 중심과 목적이 스승이신 주님 안에서 발견됨을 믿는다.
교회는 또한 이 모든 변천 속에도 불변의 것이 많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그 불변의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뿌리 박혀 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존재하실 것을 믿는다.
아버지의 자녀
노우재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43-48)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쁜 사람, 멋진 사람,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야 사랑하는 건데 말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가족이나 친한 사람을 위해서나 기도하는데 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으로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생명을 주시고 돌보아주실까요? 그분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님께 생명을 받아 태어나고 자라나는 것이 그분들의 사랑 때문인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힘만 믿고 살면 자신도 힘들어지고 이웃도 힘들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힘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분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는 분이십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선을 행하는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면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은 그분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내 탓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이 나를
아프게 하여
내가 당신을
받아드리지
못하게 할지라도
당신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탓은
나를 아프게 한
당신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받아드리지
못한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고자만 한다면
당신은 나에게서
아무 것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어느 분이 자기가 아는 어떤 분이 20여 년이 넘게 한 가지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뒤따라 가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사람이 살다 보면, 가끔 싫증이나 불편함을 느꼈을 만도 한데 어떻게 같은 종교를 그렇게 꾸준히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 싶었답니다. 그래서 오라는 말도 없었지만 무심코 따라가게 되었고 성당에 들어와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답니다.
천주교를 믿게 되는 가장 확실한 과정 중의 하나는 초상으로 생겨납니다. 많은 유가족이 자신이 겪게 된 비통한 상황을 함께해주고 자신이 당하게 된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자신이 간직하게 된 슬픔을 위로해주기 때문에, 우리를 따라 우리가 믿는 주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엔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주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인간 누가 곧바로 그리고 그 자체로 성인은 아니지만 나름 살아가는 인생의 한 단면에서 주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입니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가 성당에 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누군가가 성당에 가자고 부르기라도 한다면 따라올 수 있게 되리라고 여깁니다. 내 말 한마디 내 혀의 한 순간으로 다른 사람이 신앙을 선택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주 하느님의 흔적과 모습을 발견한 이들에게는, 아니 우리를 통해 주님께서 부르기로 선택하신 분들에게는 우리의 초대가 주님의 초대로 들릴 것이고 마침내 선교하게 될 것입니다. 내일 6분의 예비신자분들이 세례를 받으시고, 또 다음 예비신자 환영식은 4월 7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5)
우리가 늘 거룩하고 흠없이 살지는 않지만, 우리가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모범을 보이며 살지는 못하지만,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주님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데에 감격하고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초대하셔서 주님 곁으로 부르시는 주 하느님께, 깊은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며, 주님 몸소 내 삶을 이끄시고 주관해주시기를 간구하며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 119[118],1-2)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법치주의 국가 안에서 살아가면서 악에 대해서는 그에 맞는 단죄를 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율법적인 단죄를 넘어서는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완전함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와 같이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 속에서 자라나는 밀과 가라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버지 하느님 이외의 어느 누구도 자신이 밀이라는 것을 자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일일이 가라지를 솎아 내시는 분이 아니시라 그들 모두를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행여 가라지를 솎아내다가 밀마저 뽑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추수 때의 심판은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렇게 우리를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그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처럼 사랑과 자비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완전함’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의 넓고 깊은 사랑 <루카 9, 28ㄴ-3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은 넓고 깊습니다. 넓다는 것은 모든 이, 많은 이를 위한 사랑이고 깊은 사랑은 믿는 이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 되어라”
이 말씀을 듣는 이에게 의무 지워 순종해야 할 말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상 죽음은 만인을 위하여 사랑으로 바치셨지만, 주님을 알고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시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온 인류란 어느 민족을 제외하지 않으시고, 의인이든 죄인이든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각 민족은 제각기 하느님을 부르고 내가 믿는 하느님 아버지가 최고라고 하지만 하느님은 우주의 하늘과 땅을 만드시어 살기 좋게 모든 것 생명이 존속 되는 조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이 아니고 온 인류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슬람의 알라신도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믿고, 불교의 사조, 힌두교의 브라마도 창조신입니다. 온 인류는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찾고 섬기며 후세에 자기들의 이름 지은 나라에 간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원수가 없습니다. 우주의 모든 생명에게 필요한 것을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주시고 골고루 비를 내리시고, 빛을 비추시고, 공기를 주시고, 땅에서 나오는 물과 음식을 주십니다.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따라 살려는 사람은 모든 이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이며 우리도 그 사랑을 본받아 세상 구원의 역사가 바로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각자에게 깊이 새기고 의식되어 하느님 사랑에 보답하고 하느님이 사랑하듯 서로 사랑 합시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죽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곽승룡 비오 신부님
구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과 비슷한 계명이 존재할까? 성경주석가들은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43)에서 ‘미워하다’는 표현은 현대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것 같이 그리 강한 뜻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나두어라, 신경 쓰지 마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보통 우리도 관계없는 사람에게 ‘그 사람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마라.’는 표현을 종종 한다.
한편 원수라는 말도 오늘날 같이 아군에 반대하는 적, 나쁜 것을 원하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친구가 아닌 사람, 외국인, 모르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황에서 공통된 실천을 제시하면 친구와 벗이 아닌 사람에 대한 사랑실천을 주목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대개 이웃, 가까운 자. 아는 자들에게 호감을 갖기 마련이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인사하기를 꺼려하고, 무관심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서 사랑의 보편성을 말씀하신다. 곧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추구하는 보편적인 이웃사랑은 하느님께 사랑받는 모든 이에게 확장된다. 그러나 우리가 구체적으로 사람을 접촉하는 경계 혹은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교부 위 디오니시오 아레오파지다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더 넓은 경계는 더 신적이다. 곧 하느님과 더 가깝다.”
우리는 타인, 이방인 곧 멀리 있는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무감각하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격, 인종, 사회, 국가적 혐오감을 뛰어넘는다. 혐오감들은 가끔 신비하며 내밀하고 또는 어떤 대상에 따라 자극되며, 비위에 거슬리는 자세, 비교육적이며, 천박하고 고집스러울 만큼 사람에게 어려움을 제공한다.
의사 또는 의료 종사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혐오감을 기능적 훈련을 통해 용기 있게 극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혐오감 극복을 위한 좋은 예를 보여 주셨다.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 바리사이와 세리들과 식사를 하셨다. 우리도 혐오감, 비호감으로 다가오고, 비위 상하게 하는 사람에게 갖는 반감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해서 힘을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못한 자가 있다면 즉시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즉시 눈에는 눈, 코에는 코의 원리로 돌아간다.
“네가 내게 한 것 그대로 나도 네게 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요구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 44)
위 마카리오 교부는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 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 45)를 자주 인용하면서, 태양은 어느 곳에 따라 그 빛을 내리지 아니 하며, 어둠 역시 늪을 건조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도 환경에 따라 얼굴의 모습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믿는 이, 믿지 않는 이들과 함께 그리고 성인만이 아니라 죄인과 함께 행동을 잘해야 한다.
원수라 불리는 자는 우리의 영적성장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순수한 사랑은 원수와 함께 드러난다. 그 보답은 세상이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 보상해주신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 -원수를 사랑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미세미세)남양주시 별내동 최고 좋음-공기 상태 최고! 건강하세요!”
새벽 휴대폰을 여는 순간, 떠오른 문자 메시지입니다. 참 오랜만의 반가운 소식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영적 미세먼지를 정화하여 우리 내면 상태를 최고 좋게 합니다. 영육으로 건강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선명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마태복음 5장 6개의 대당명제중 마지막 대당명제입니다. ‘1.성내지 마라, 2.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3.아내를 소박하지 마라, 4.맹세하지 마라, 5.보복하지 마라.’에 이은 ‘6.원수를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너무나 확신에 찬 분명한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때,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비로소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바로 우리 모두에게 차별없이 공평무사한 사랑을 베푸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우리 모두의 아버지를 닮으라는 것이며 이때 비로서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시야를 하느님을 닮아 한없이 넓고 깊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습니까? 유유상종의 끼리끼리 사랑,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우리가 남보다 잘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또한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유유상종의 사랑,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자 한계입니다.
참 이기적 울안에서 벗어나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기적 틀에서 부단히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대자대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의 자녀답게 자비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같은 말씀이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주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이 참 높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로운 삶을 통해 아버지를 닮아갈 때 존엄한 인간 품위의 완성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와 더불어 생각나는 두 말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모두가 결국은 같은 의미입니다. 거룩함이 자비로움이요 완전함입니다. 우리 삶의 ‘거룩함holiness’은 ‘온전함wholeness’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로울수록 거룩한 삶, 온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완전함은 온전함이요 거룩함입니다. 온전함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둥근 원입니다. 둥근 원같은 사랑이 바로 완전한 사랑, 온전한 사랑, 대자대비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갈수록 가을에 익어가는 둥근 열매들처럼 둥근 삶, 둥근 마음, 둥근 사랑이 되어 갈 것입니다.
엊그제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본기도문이 생각납니다. “주님,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기도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우리의 평생공부가 하느님을 알아가고 나를 알아가는 사랑공부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온 목적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무지의 어둠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감이 없이는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공격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떠날 때 악마도 야수도 괴물도 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참 두렵고 무서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지 좋아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좋아할 수는 없어도 측은지심으로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싫어할 수는 있어도 미워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미워하는 것은 죄이지만 싫어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싫고 좋음은 타고난 심리적 경향이자 우리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최대한 자제함으로 눈에 띄는 호오好惡의 표현으로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사실 사람 눈에 원수지 하느님 눈에는 모두가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원수거나 박해하는 자들이거나 그들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할 피치 못할 까닭이 있을 것이니 사랑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들 또한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악의 힘에 사로잡힌 무지의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에서 주님은 모세를 통해 당신 말씀을 실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느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오늘’입니다. 진보없어 보이는 제자리 삶에 실망하지 말고, 바로 오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오늘 복음 말씀을 명심하여 노력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 행복도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있음을 오늘 시편 화답송이 입증합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1-2).
이렇게 말씀을 실천함으로 온전한 길을 걸으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주님은 우리를 높이 세우시어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사람이 되는 길도 없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우리의 모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날로 아버지와 깊어지는 관계인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닮아 날로 우리를 거룩하고 자비로운, 온전한 삶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날로 하느님 자녀답게 살게 하는 ‘미사’은총이자 ‘주님의 기도’ 은총입니다.
다시 한 번 나누고 싶은 하늘과 산의 시입니다. 하늘은 하느님 아버지를, 산은 우리 인간을 상징합니다. 둘이자 하나요 하나이자 둘인 아버지와 우리의 사랑의 일치 관계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하늘 있어/산이 좋고/산 있어/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아멘.
'억울하지 않은가? 버리자'(마태오 5장 43~4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전성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가?
무언가 이루려 잘하려 마음을 쓰지만 사람을 얻으려 마음 쓰는게 안되면 ‥
오늘 예수님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두고 사랑하기에 이른다면 당신처럼 거룩하고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하신다.
마음에 안들어서 헤어지고 미워서 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 거리가 멀고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인데 이를 행하면 완전성에 도달하게 된다니 해보자.
자신을 꺾느라 힘들고 괴롭기도 하겠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제안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지 죽이기 위함이 아니다.
상처준 사람, 미운 사람,
용서가 안되는 사람 그 이름을 종이에 써보고 지우는것부터 시도하고 기도하며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사랑하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웬수때문에 내 마음이 불행한 상태로 산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 버리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 48)
김웅태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복음(마태 5, 43~48)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 4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이상일 뿐이지 과연 우리가 그런 것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일찌감치 그것을 포기하고 살지는 않나 생각합니다. 그저 적당한 선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또 적당히 미워하고 화도 내고 또 나는 그럴 권리도 있다는 식으로 살아 갈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의 목표라고 보겠습니다. 그러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 어디에 있느냐를 보겠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제 1독서 신명기(26, 16~19)에서 또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신명 26, 19)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하느님께서 말씀해 주신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고,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을 명심하고 실천해야 된다." (신명 26, 16)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가정에서 부모가 자기 자녀라면 부모의 말을 자녀가 들어야 된다는 기본적인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녀들이 부모인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자녀로서 좋은 모습이 될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잘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마태 5, 43~48)에서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목표를 더 높여 주셨습니다. 그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바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태 5, 44~45)
보통 친구나 부부, 자녀 그런 관계에서도 서로 좋은 관계,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많은 양보와 이해와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 또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한 차원 뛰어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이며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보겠습니다.
사실 원수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원수이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원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다른 일반 사람일 수 있으며,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그런 사람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 사람을 내가 원수라고 해서 저주하고 안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다른 일반 사람들이 볼 때에 그 모습이 좋아보이진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있어서 원수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일반적인 사람인 그런 경우, 나에게 있어서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내가 용서하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그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좋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내 마음속에서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 오늘 예수님의 말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 하여라"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느낌이 듭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느님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운 창조물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판단하기에 혹여 악인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느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은총을 구한다.
석양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 듯 말이다.
받아들임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완전한 사람, 이것은 하나의 신기루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높은 수준입니다. 싫은 것은 피하고 좋은 것은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완덕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완덕이란 사실 온전히 받아들임입니다.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감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이 해를 뜨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비를 내려주신다는 것에 깊이 감사드려야 합니다. 우리 삶에도 필요한 때에 빛을 비추시고 생명이 자라도록 비를 촉촉히 내려주십니다. 찬찬히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은혜의 여정이었습니다.
‘깊은 감사의 체험’에서 온전히 받아들임이 가능합니다. 아무리 무디고 어렵고 힘들지라도 감사하는 사람만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죽을 것같이 어렵습니다. 차리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럴 때 감사의 사람만이 그 뜻을 찾습니다. 어려움과 고난 중에서도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그 의미, 그 뜻을 찾게 됩니다. 모든 일 안에는 하느님의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감사의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결국 만납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의 사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신명기 저자는 모세가 말했던 것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하시며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신명 16)라는 말씀을 신명기 저자는 전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길을 걸으며 그 분의 규정과 계명을 지키면 그분의 소유의 백성이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이스라엘 백성을 높이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높이 올리게 되고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마태오는 제자들에게 참 제자가 되는 길을 제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제일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에 대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호소하며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겠어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도 인간은 죄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 그늘을 벗어 날 수 있으며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 삶, 그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그 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을 사랑하셨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비로소 하느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보편적인 특성이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 5,45-46)
인간의 사랑은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사랑하고 희생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넘어서면 서로 남이 되고 사랑의 모습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의 사랑만이 조건 없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셨던 그 삶을 통하여 우리가 비로소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완전하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우리가 비로소 자비롭고 완전한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가 전하는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원수가 은인이 될 때까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님 말씀에 제가 토를 달면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 때문에 행복해야 하고, 적어도 원수보다 행복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원수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더더군다나 원수보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여전히 원수이고 그래서 사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원수 때문에 자신은 지금 불행한데 원수는 나를 불행하게 해놓고도 벌 받지 않고 지금 떵떵거리고 산다면 아무리 주님께서 사랑하라하셔도 그 원수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이 밉고 그런 주님께 분노를 터뜨리게 될 겁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보다 행복하거나 원수 때문에 행복해져야 하는데 관건은 어떻게 원수보다 행복하거나 원수 때문에 행복하게 되느냐 그겁니다.
인간적인 오기로 원수보다 더 행복할 수는 있을 것 같고, 실제로 그런 경우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성공함으로써 더 행복해지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공을 하여 실제로 행복해질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설사 행복해졌을지라도 원수사랑에까지 도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행복 때문에 원수를 잊고 지낼 수는 있어도 원수가 은인이 된 것은 아니기에 인간적인 오기로 원수사랑은 불가능하고 원수 때문에 불행했던 내가 원수 때문에 행복해져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원수 때문에 불행했던 내가 원수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 원수가 개과천선하고 나에게 용서를 청할 뿐 아니라 과거 자기 때문에 고통 받고 불행했던 것을 보상해줬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라면 혹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그 행복이 완전하다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역시 사람에 의해서 불행해졌다 사람에 의해 행복해지는 것이니 결국 사람에 의해 내 행불행이 좌우되고 사랑과 미움도 좌우되는 거지요. 그것은 연이 바람을 타듯 사람을 타는 것이기에 위험도 있고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연이 바람을 타고 오르듯 원수를 통해 하느님 사랑에 오르는 것과 하느님 사랑에 의해 원수도 사랑하게 되는 것 두 가지 말입니다.
먼저 우리는 원수를 통해 하느님 사랑에 오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돌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원수 때문에 우리가 증오를 품을 수도 있지만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사랑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 마침내 모든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의 단계에 오르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랑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의지만 가지고 되지 않지요. 우리의 원수 사랑의 의지는 하느님 사랑을 견인하는 마중물일 뿐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원수까지 사랑하려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성령을 은총으로 주셔야만 우리는 그 사랑으로 원수까지 마침내 사랑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원수와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오늘 주님은 또 말씀하시는데 원수사랑의 의지에서 비롯된 이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의 은총이 원수에게 가기 전에 나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청원기도를 할 때 가장 훌륭한 청원기도는 하느님 자신을 주십사고 청하는 것인데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원수가 은인이 될 때까지 우리는 이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판을 넘겨주면서 주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신명 26,18-19) 또 레위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요청하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오늘 예수님도 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네요.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처음 들을 때 이 말씀은 엄청난 축복의 말씀으로 다가오는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엄청난 부담으로 이 말씀이 다시 돌아 들어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도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네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 아닌가요? 우리를 몰라도 너무도 모르시는 말씀 아닌가요?
그럴 리는 없을텐데... 이 말씀이 맞는 말씀이라면, 아마도 거룩함과 완전함의 개념에 대한 우리와 하느님의 인식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일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거룩한 사람(聖人)이라고 보는가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 글쎄요. 하느님은 그저 '자기 동포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시네요. 그렇다면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보고 '완전한 사람'이 되라네요. 우리는 보통 완전한 사람을 완벽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에게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나 다같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네요. 사실 크게보면 다 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니까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잖은 도전이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으로 응하는 건 인지상정이지요. 굳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실천할 수 있는 당연한 도리인데, 거기에 더하여 원수와 박해자까지 사랑의 대상 영역을 확장하라 하시는 겁니다.
왜 이런 요구를 하시는 걸까요? 그렇게 요구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기"(마태 5,45) 때문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기 마련이지요. 원래 인간은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안 그래도 닮은 꼴입니다만, "자녀"라는 표현은 그런 보편성을 넘어서서,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 모상성'의 씨앗이 어떻게 성장해 열매 맺어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독서인 신명기에서는 시나이 계약을 통해 성립된 이스라엘의 신원과 정체성을 명료하게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 되시고..."(신명 26,17) "우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신명 26,18).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에는 서로가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조건들이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소유하심으로써 그들을 높이시고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신명 26,19 참조)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를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신명 26,17 참조)
이 관계는 신약 시대로 오면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라는 더 강한 결속력과 친밀감으로 심화됩니다. 구약 시대에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드러났던 하느님의 부성(모성)이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 즉 부모-자식이라는 관계성이 확정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자식 관계는 어떤 특성이 있을까요? 계약으로 맺어지기보다, 혈연 또는 입양이라는 절차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마르 3,35 참조) 성부의 친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요.
대개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자기 형제에게만"(마태 5,46-47) 좋게 대하려 합니다. 하느님 모상이라는 본성보다 죄의 본성이 더 활성화되어,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무색하게 속 좁고 나약하고 두려움 가득한 모습이지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듣기 전까지는 그래도 되었습니다. v 이에 비해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사람을 대하실 때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마태 5,45) 차별을 두지 않으시고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어느 쪽은 취하고 다른 쪽은 내치시거나, 누구는 포용하고 누구는 제외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모두를 당신 팔 안으로 모아들여 당신 가슴 안에 전부 품으시는 이 모습이 곧 하느님의 완전성입니다.
세속의 군주와 백성의 계약 관계 정도라면 굳이 지배자인 임금을 닮으라고 요구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게 되어 있고 닮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요구라기보다 초대입니다. 부담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완전성에 도달할 충분한 자질과 역량이 자녀인 우리에게 있다고 인정해 주시는 기대의 표현이기도 하고요.
"완전한 사람"은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완전한 사람일까요? 내 사랑과 관심에서 제외되는 이가 더 이상 없을 때, 나는 아버지처럼 완전합니다. 내 마음의 저장공간에 미움과 무관심의 폴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나는 아버지처럼 완전합니다. 혹시 원수가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박해자가 뉘우치고 사과하면 그때부터 어떻게 해보겠다고 생각한다면 순서가 틀렸습니다. 그런 세월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기회를 영영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통회와 회개는 내 조건 없는 기도, 바보같은 사랑의 결실이 될 확률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우리 아버지를 닮은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 우리 동포들, 이웃들을 그저 사랑하면 됩니다. 오늘 우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됩시다. 내 맘에 드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 맘에 안드는 사람도 다 내 형제라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꼭 빼닮은 참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너무 쉽지 않나요.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갈 수 없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신
완전한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게 하시는
구원의 참된 길입니다.
구원은
십자가에서
완전해지는
사람의 참된
여정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기도의 여정이며
회개의 여정입니다.
기도의 여정은 또한
사랑의 여정이 됩니다.
완전해지는
하느님 자녀의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완전하게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순명으로
이끕니다.
받아들이고
내어맡기는 순명은
우리를 완전한
사람이 되게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바치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서
완전하게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이
완전하시기에
사랑의 빚으진
우리또한
완전하여 질 것입니다.
생명과 사랑은
완전하신 하느님과
함께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우리자신을 맡기는
사순의 여정입니다.
온전한 내어맡김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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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와 몸짓, 표정과 신체 습관이 마음가짐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실험을 했습니다. 넓은 공간을 차지하면서 팔다리를 멀리 뻗는 확장적인 자세를 취한 집단과 움츠리거나 오그라든 무기력한 자세의 집단을 나누어서 몸의 호르몬 수치를 검사한 것입니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던 집단은 결단력과 관련 있는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19% 높아지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비되는 코르티솔 수치는 25% 떨어진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완벽한 자세와 몸짓, 표정이나 신체 습관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신체 언어는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있지만 내 자신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자세가 중요하다고 어른들이 한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지요. 따라서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는 완벽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게 해 줄 것입니다.
완벽한 자세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것에도 완벽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힘주어 말씀하셨지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를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내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 또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친절한 것은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남들에게 맞추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주님을 따라야 하는 우리는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완전한 자세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완전한 자세를 갖추지 않는다고 나 역시 남들처럼 불완전한 자세를 계속해 유지한다면 결국 누구에게 손해가 될까요? 내가 본받은 남이 아닌 바로 나에게 큰 손해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맞추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누구에게 이득이 될까요? 바로 내게 큰 이득이 됩니다.
보석 중에 다이아몬드가 비싼 이유는 아무리 높은 열을 가해도 그 성질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소중한 이유 역시 변하지 않는 완전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이 소중한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 역시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에서 변하지 않는 완전함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절대로 고개를 떨구지 말라. 고개를 치켜들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라(헬렌 켈러).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이스라엘의 나자렛에 가면 성모 영보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에 들어가면 다들 감동을 받습니다. 엄청난 규모도 그렇지만 성모님께서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 받은 것을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성당은 원래 4세기 중엽에 건축되었지만 7세기에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몇 차례의 성당이 세워지고 파괴되기를 반복 끝에 1954년 바실리카 양식으로 신축되어 1969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당을 지을 때 반대가 참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성당을 짓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아깝다는 이유였지요. 이 대성당을 지으신 신부님께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사람 죽이는 제트기 1대 값도 안 되는 사람 살리는 성당 짓는 것이 과연 아까운 일입니까? 그리고 쓸데없는 일입니까?”
지금 현재 가장 비싼 제트기는 2,000억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 도입한 스텔스 전투기도 1,400억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2018년 국방예산은 13.5조원입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전 세계에 폭력 없는 평화만 있다면 분명히 아낄 수 있는 비용임에 틀림없습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 그렇게 어마어마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용은 점점 더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화를 간직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의 집이 늘어난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가장 적은 비용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무엇이 더욱 더 중요한 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평생공부, 평생과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구체적 처방의 다섯 대당 명제, ‘1.성내지 마라, 2.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3.아내를 소박하지 마라, 4.맹세하지 마라, 5.보복하지 마라.’에 이어 마지막 여섯째 대당 명제, ‘원수를 사랑하여라.’를 다룹니다. 마지막 여섯번째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대당명제의 결론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이 구절이 마태복음 5장21절부터 47절까지 여섯 대당 명제의 마지막 결론이 되는 구절입니다. 바로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가 이처럼 큽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원대한 평생과제요 평생목표입니다. 이런 목표의식을 지니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무의미하고 허무한 인생이 아닌 아름답고 향기로운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우리의 평생공부이자 평생과제이며 유일한 길은 사랑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랑뿐입니다. 원수를 왜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원수지, 원수 역시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대자대비大慈大悲, 공평무사公平無私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아가페agape 사랑입니다. 육체적 성적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eros의 사랑, 친구간의 상호 사랑 필리아phila 사랑을 넘어서는 무사한, 일방적인 무한한 연민의 사랑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항구한 노력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대자대비한 사랑, 공평무사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결코 끼리끼리 주고 받는 유유상종의 패거리 사랑, 차별적 사랑이 아닙니다.
세례받았다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 역시 선물이자 평생노력의 과제입니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말하는 것을 오늘 복음이 구체화합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여기서는 주로 계명준수의 외적 자세를 말하지만 복음은 우리의 내적자세를 말합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듭 강조되는 단어가 ‘오늘’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뿐이 길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은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은 뭔가 까닭이 있겠고 그 미움으로 이미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우리를 미워하고 위해危害를 가한다 해도 우리 내적자아inner self는 다치지 못합니다.
이들을 미워하고 보복하면 서로의 상처만 깊이할뿐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을 사랑하고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서로의 상처는 치유되고 화해하게 됩니다. 악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무장해제武裝解除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사랑뿐입니다. 모르기에, 무지하기에 미워하고 싫어하고 분노하고 거부하는 것이지 알면 알수록 사랑할 수뿐이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이런저런 내적상처와 아픔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사랑의 빛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 역시 하느님을 닮아 점차 대자대비하신, 공평무사하신 하느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부단히 편협하고 이기적인 나를 넘어서는 자아초월의 사랑입니다. 어제 주간지에서 읽은 어느 부부상담 전문가와의 인터뷰 한 대목에 공감했습니다.
-결혼은 새장과 같다고 한다. 새장 밖의 새들은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새장 안의 새들을 밖으로 나갸려 한다. 결혼에 임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좋은 관계를 만들려면 나를 넘어서야 한다. 나를 넘어서지 않는 관계는 불가능하다. ‘이해한다’, ‘공감한다’라는 말의 뜻은 나를 넘어선다는 거다. 나를 비워야 한다. 자기중심적이 되면 상대방 얘기가 들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만 말하게 된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부단히 나를 넘어서게 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넘어설 때 참으로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 치유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이 가능합니다. 바로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수행이, 특히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이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변모시켜 주면서 사랑의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미사시 영성체 예식중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전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아뢰오니” 라는 권고 말씀이 참 좋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되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을 살게 해주는 주님의 기도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바로 우리의 긍지요 자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해 주십니다. 끝으로 하늘과 산이라는 자작시를 나눕니다. 하늘은 하느님을, 산은 하느님을 배경한 우리로 바꿔읽어도 무방합니다.
-하늘이 있어/산이 좋고
산이 있어/하늘이 좋다
하늘은/산에 신비를/더하고
산은/하늘에 깊이를/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느님을 배경한, 하느님과 둘이자 하나인, 하느님과 우리와의 상호보완관계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이런 자각이 더욱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119.1). 아멘.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5,43-48(사순 1 토)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에 이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단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이라는 것을 없애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또는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나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1코린 4,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대체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나요?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 대체 누구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사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사랑할 때라야, 비로소 의로움을 행하게 되고,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소명을 주십니다. 곧 하느님을 본받으라 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어떻게 하느님을 본받는 일이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까요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묘하게도, 자신을 채울 때 곧 결핍을 메울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비울 때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곧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극복하고 채울 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수락할 때 생겨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완전함’이란 그 어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채로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얼굴을 예로 들어봅니다. 코가 보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알게 될 때 눈을 받아들이듯이, 자기의 결핍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고, 그렇게 눈이 받아들여지고 귀가 받아들여지고 입이 받아들여져 온전한 얼굴이 되듯이 말입니다. 곧 코가 스스로 완전해져서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여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을 부족인 채로 수락하고 다른 타자들, 곧 눈과 귀와 입을 받아들여 온전한 얼굴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결핍된 채로, 그 부족과 한계를 받아들일수록 온전해지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부족과 한계는 우리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물을 끌어들이는 통로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의 불완전함이 완전함이 들어오는 통로인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비추는 해처럼,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내리는 비처럼, 내 이웃과 형제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사랑에는 대상만 있고 적수는 없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해를 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여러분에게 이 말씀은 어떻게 다가옵니까?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은 은총의 사람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여러분에게 이 말씀은 어떻게 다가옵니까? 너무 황송하다는 느낌이 들면 여러분은 겸손의 사람입니다.
겸손하고 그래서 은총지위를 살아가는 여러분은 이 말씀을 누구나 여러분처럼 고맙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실 텐데,
그런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는 죄인이고 사랑을 받기에 자신이 너무도 부족하고 더 나아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주님의 이 사랑이 너무도 고맙고 황송하지 자기는 완전하고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하느님 사랑이 결코 고맙지 않고 오히려 불만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자기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을 주님께서 사랑하시자 그들은 왜 죄인을 사랑하고 식사까지 같이 하냐고 불만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이들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선 자기는 죄 없고 다른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이 잘못이고, 그것도 자기는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하기에 완전하고 죄인이 아니며 자기처럼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다 죄인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죄를 지으면 무조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하느님도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큰 잘못이요 죄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들은 죄 없다거나 율법을 기준으로 자기들은 죄 없다 하고 우월감을 가지는 것은 인간적인 교만이기에 얼마간 그런 교만이 있는 우리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죄를 지으면 무조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하느님이 그런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적인 교만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인간적인 교만은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이 될 뿐이지만 영적 교만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건 다 차단하여 하늘과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늘은 해와 비를 모두에게 내려주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니, 그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리 되는 거지요.
사랑이란 것이 본래 조건을 초월하는 것이고 그래서 은총이고 그 사랑이 완전하면 할수록 더 조건을 초월하고 더 은총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가장 완전하기에 더 무조건적이고 그래서 더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완전하냐 하면 원수까지 사랑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느님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어떤 적수도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완전한 것입니다.
사실 사랑에는 대상만 있지 적수가 없습니다. 사랑하기 쉬운 대상이 있고 좀 어려운 대상만 있을 뿐 적수는 없습니다. 누가 적이나 원수로 생각된다면 그것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 사랑입니다.
우리 주변에 내 사랑의 큰 원수 작은 원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부터 그들을 원수가 아니라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일단은 작은 원수부터 사랑하기 쉬운 대상으로 보고 사랑합시다.
그리고 자동차의 가속기를 1단에서 출발하여 차츰 단을 올리듯 사랑도 이단은 조금 더 큰 원수를 내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사랑을 하고, 차츰 삼단, 사단으로 단계를 높여 원수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사랑합시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라며 하느님 사랑에 대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느님께서 백성들에게 내려주신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해야 한다며 모세가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신명 26,16)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자인 하느님 사랑에서는 “‘마음’, ‘목숨’, ‘힘’을 다하여.”라는 표현에서 규정과 법규에서는 ‘힘’이 빠진 “‘마음’, ‘목숨’을 다하여.‘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단어들을 열거하면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 사랑을 해야한다.’는 의미와 최선을 다해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규정과 법규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의미가 서로 상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소유가 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올리시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선택을 받은 민족이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하느님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에 대한 어렵고도 획기적인 주문을 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이스라엘 백성은 ‘네 이웃’이라는 뉴앙스는 일차적으로 ‘동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맞서는 ‘원수’도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 특히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제국의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직접적으로 그들을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사람들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얼핏 보아서는 이스라엘의 종교를 존중하는 것 같아도 태양신을 바탕으로 하는 ‘황제숭배’를 강요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이방인에 대해서 배타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포를 사랑하고 자신들을 억압하는 이방인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차적으로 로마제국의 사람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는 이들을 대해 민족적인 거부감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로마 사람들, 또는 종교를 달리하는 인접 이방 국가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그들의 종교를 박해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교를 내세워 민족적인 감정도 부추기는 모습이고 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배탁적인 감정에 주님께서는 정면으로 반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미워하는 사람들인 이방인들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좁아터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율법위주의 종교에서 좀 더 개방적인 방향으로 나가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종교인 유대교의 틀과 배타적인 성향에서 비록 종교적으로도 하느님 앞에 평등을 드러내시는 것은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빈부차가 극심하여 양분화 되는 현상에서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이신 것입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5,45)
자신들에게 유익하고 잘 해주는 사람, 도움을 받은 것을 되 돌려 줄 수 있는 능력의 사람에게 잘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갚을 능력이 없는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묵상합시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
반쪽 사랑과 모두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말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명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신명 26,16)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주님의 명에 충실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쪽 사랑의 울타리 안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확신과 자민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민족과 종교가 같은 이들과 선하고 정결한 이들만을 사랑했던 것이지요. 자기 집안사람들만 챙긴 그들은 '반쪽 사랑'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밖의 사람들과 '불편하고 비정한 거리두기'를 한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도 여전히 그런 제한된 반쪽 사랑의 담장 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민족과 종교가 다르고 부정한 이들을 멀리했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지 않았지요. 그들은 모두를 받아들이고 함께 하는 '사랑 광장'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입니다. '반쪽 사랑'은 자신과 친하고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람들에게만 잘 해줍니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만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하십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죄인과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기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마태 5,43-44.48) 예수님께서는 '반쪽 사랑'에 만족하지 말고 '모두 사랑'을 하라 하십니다. 모두 사랑은 시간과 장소, 대상과 처한 상황에 한계를 두지 않는 사랑이지요.
'모두 사랑'은 보편적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려면 열린 마음과 치우침 없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선인과 악인, 그리고 의로운 이들과 불의한 이들을 차별없이 모두 사랑하시는(5,45) 주님의 자비의 바다에 자신을 던질 수 있어야겠지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거룩함과 자비에 젖어들 때, 그런 '모두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별없이 모두를 사랑하려면 자기 기준과 신념과 사고의 틀에 매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의 빗장을 풀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내가 기댔던 것들을 내려놓을 때,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생기겠지요. 차별하지 않고 제한을 두지 않고 모두를 사랑할 때 자유로워지고 참 성화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나는 반쪽사랑과 모두사랑 가운데 어떤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굳어진 사고의 틀, 신념, 종교, 혈연, 외모에 따라 사람을 습관적으로 가르며, 반쪽사랑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마음의 벽을 허물고, 생각의 창을 활짝 열고 모두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모두사랑에 나설 때입니다. 그리하여 악인, 보기 싫고 미운 사람, 불의한 사람과 원수까지도 품어야겠습니다. 이민족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로 먼저 눈길을 돌려야겠지요.
오늘도 나를 박해하고 중상하며, 증오하는 원수들까지 사랑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5,44).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좋고 싫음을 구별하고 선악을 가르며, 관계를 단절하는 좁디좁은 마음의 울타리를 허물고, 그 누구도 내치지 않고 품는 '모두사랑'의 날이길 소망합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지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온 누리 비추는 해처럼
온 땅 적시는 비처럼
모든 생명 품는 공기처럼
모든 땀방울 식히는 바람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신 하느님처럼
네가 있기에 네게 가는 것
네게 다가가 너를 안는 것
너를 안아 네가 너이도록 하는 것
그저 사랑하기 위해
오직 사랑하기 위해
다만 사랑하는 것
원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마태 5, 43-4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용서가 없으면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 죽든지 용서하지 않은 사람이 죽든지 죽음뿐이 됩니다. 개인적이나 국가적이나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쟁이나 큰 싸움이 됩니다. 아파트의 위 아래층에서 소음 때문에 시비가 붙으면 죽음의 경지까지 가는 경우가 있으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은 부당한 차별을 자국민이 받으면서 전쟁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수 관계는 기분이 나쁩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시기, 질투, 복수심에서 나옵니다.
불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원수를 만들지 않으면 된다.”고, 하지만 원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옵니다. 이기심, 욕심, 욕망, 편견, 무지, 무관심, 선과 악을 구별 못 함, 불완전성, 시간과 공간의 제약, 정신력이나 육체의 허약함으로 서로 불편한 관계가 이루어져 원수가 됩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위의 본능적 약점을 극복하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따라 완전하게 되려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약점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며 선 자체이시고 악을 모르는 분입니다. 주님이 복음이시고 우리도 복음이 되려면 완전히 하느님 편에 서 있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참믿음의 삶입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참으로 이런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며 죽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서로 주고받는 생명이 됩니다.
주님처럼
인영균 끌레멘스 수사신부님
우리는 쉽게 편가름합니다. 이쪽과 저쪽, 내것과 네것, 우리와 너희 등 끊임없이 경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는 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편하게 사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경계와 담을 허무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 5,45). 심지어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셨다”(2코린 5,21)고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하느님이 예수님을 죄로 만드셨다는 것, 이는 우리 머리로는 상상조차 못할 정도입니다. 남의 탓을 내 탓을 삼는 것,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측은지심입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이러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냥 죄인뿐입니다. 단죄받을 죄인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당신 사람으로 받아주십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무슨 담보도 없습니다. 우린 빈털털일 뿐입니다. 은행에서는 이런 빈털털이를 신용불량자로 취급합니다. 돈을 갚을 무슨 조건이나 담보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대출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신용 거래를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당신 사람으로 신뢰하기에 그냥 거저 주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스페인 성 베네딕도회 라바날 델 까미노 수도원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오.5,44-45)
김종오 신부님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너무 쉽게 판단하는 우리는 자주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판단까지 합니다. 그릇된 행위에 대한 판단을 넘어 사람 전체를 판단합니다. 사람의 행위는 판단할 수 있지만 사람을 판단하여서는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힘든 것은 우리가 사람들의 그릇된 행위를 넘어 인간에 대한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행위에 대한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있지만, 인간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행위로 이루어진 삶을 보시고 존재에 대한 판단은 언젠가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릇된 행위에 대한 책임은 행위를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책임이 없는 미성년자가 아닌 어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기에 어른입니다.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그릇된 행위를 어른들이 저지르면 악이 득세합니다.
자신이 저지른 그릇된 행위에 대해 우리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지는 일은 성숙한 어른만이 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그릇된 행위를 저지르고 책임 질 줄 모르는 어른들 때문에 사람들은 상처를 입습니다.
잘못된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관대하여야 합니다. 행위에 대해서는 엄하지만 사람들에게 관대해지려면, 행위가 아닌 사람에 대한 판단을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판단을 멈출 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행위는 판단하지만 사람에 대한 판단을 보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는 선하고도 악한 우리 마음에도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얀 눈을
치우면서도
봄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삶의 방향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모두는
완전하신
하느님의
일부분들입니다.
우리모두는
엄청난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직접 빚으신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이기에
사랑의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완전하게 하십니다.
생명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생명은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충만 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완전하신 사랑으로
맺어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처럼
우리 또한
서로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의
사람들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없이는
사랑할 수 없고
사랑없이는
완전할 수 없는
관계의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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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때 너무나 좋아했던 음료가 있습니다. 바로 바나나 우유입니다. 당시는 바나나가 흔하지 않았던 시기로 고급 과일의 대명사였고 더군다나 영양가 많다는 우유와의 조합이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지요. 더군다나 먹기 좋은 달달한 맛과 함께 넉넉한 양은 소풍날과 같이 특별한 날에 먹는 최고의 음료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실제로 이 바나나 우유에는 바나나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바나나 우유’라고 하지 않고, 바나나 향이 첨가되어 있을 뿐이라서 ‘바나나 맛 우유’라고 합니다.
그 과일의 향이 5%만 첨가되어 있을 뿐인데도 그 과일 맛이 나는 것을 보면서, 이것처럼 과대 포장되는 것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질소포장이 되어 있어서 겉으로는 아주 큼지막하지만, 실제로 뜯어보면 몇 개 들어있지 않다고 해서 ‘과대 포장’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것보다 더 과대 포장되어 있는 것이 바로 향기만으로 그 과일 맛을 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우리 인간 역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럴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성당 안에서 그렇게 열심한 사람이 없습니다. 열심히 봉사활동도 하고 있고, 평일 미사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뜨거운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평가도 받습니다. 그런데 성당 안에서만 그렇게 보일 뿐, 성당 밖에서는 전혀 신앙인 같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나나 향만 들어 있어도 바나나 맛을 내는 것처럼, 주님의 향기만 가지고 있어도 진짜 신앙인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을 모시고 있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모습으로는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도 아닙니다. 따라서 과대 포장된 가짜 신앙인이 아니라 진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인인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진짜 신앙인, 즉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완전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바나나 맛 우유에 진짜 바나나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바나나가 주는 영양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향기만 담고 있으면 안 됩니다. 진짜 주님과 함께 하는 삶, 그래서 주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완전한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로베르트 발저).
긍정은 위대하다(‘따뜻한 하루’ 중에서)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된 글입니다.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라 이렇게 나눠봅니다.
어느 마을 다리 밑에는 걸인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다리 입구 쪽에는 기념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리를 세우기 위해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 걸인은 그 기념 비석에 침을 뱉으며 언제나 욕을 해댔습니다.
“에이! 양심도 없는 놈들! 돈 많은 것들이 생색내기는...”
그러나 한 걸인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참 고마운 사람들 아닌가. 우리에게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해주고 많은 사람을 건너가게 해주니 말일세. 나도 언젠가 이 사람들처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그 다리 옆에 새로 큰 다리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기념 비석에 새겨진 이름 중엔 늘 고마운 마음을 가졌던 그 걸인의 이름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넝마주이를 시작으로 열심히 일하여 마침내는 건재상을 경영하는 부자가 되어 기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침을 뱉으며 항상 욕을 했던 다른 걸인은 여전히 그 다리 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왜 먼저 부정적으로 생각할까요?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나의 미래가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더욱 더 부정적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의 습관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나쁜 습관을 벗어 던지고 대신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습관을 간직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긍정적인 생각이 바로 지금의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고, 언제나 감사하며 사는 행복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의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다들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체는 ‘심장’입니다. 심장은 24시간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심장은 혈관을 통해서 각 지체들에게 산소와 영양분을 전달해 줍니다. 심장이 멈추면 생명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기 때문에 생과 사를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저의 심장도 55년을 힘차게 뛰고 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지체입니다.
30일 피정을 함께 했던 신부님이 ‘군종신부’로 가게 되었다고 인사를 왔습니다. 군인들도 여러 병과가 있습니다. ‘보병, 작전, 정보, 행정, 정훈, 포병, 경리, 수송, 의무, 군종, 법무, 군수, 공병, 헌병’등의 병과가 있습니다. 저는 군종병으로 근무했었고, 보직이 변경되어서 행정병으로 제대를 하였습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훈련’입니다.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군인들이 있습니다. ‘공수부대, 해병대, 특전사, 수색대’와 같은 군인들입니다. 유사시에 적진에 들어가서 적을 제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 여러 유형의 신자분들을 만났습니다.
기도에 충실한 신자입니다. 가정방문을 해도 기도하는 장소가 따로 있습니다. 성당에서도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신부님이 바뀌어도 늘 변함없이 신앙에 충실하신 분입니다.
체면유지를 하는 신자입니다. 자신이 드러나는 자리에는 열심히 하지만, 봉사하는 자리에는 오지 않는 분입니다.
강직한 신자입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본당 신부에게도 직언을 합니다. 목소리가 커서 분위기를 압도하지만 뒤끝은 없는 분입니다.
아부를 잘하는 신자입니다. 분위기를 잘 맞추고, 본당 신부의 말을 잘 받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어서 재미가 있지만 뒷담화도 잘 하는 분입니다.
활동적인 신자입니다. 성가대, 제대회, 구역장, 반장, 레지오, 자모회 등 각 단체에서 열심히 봉사합니다. 열심히 활동하는 만큼 내적인 성장을 위해서 기도가 필요한 분입니다.
신앙인들은 부모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전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신선한 공기, 하늘의 별, 떠가는 구름, 흘러가는 물, 아름다운 새, 들판의 꽃들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선물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는 언제나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소중함과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아름다운 세상과 비슷한 세상을 찾으려고 우주여행을 한다면 우리는 몇 백만 년을 여행해도 찾을 수 없을 거라 말을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 사는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따라 걸으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에서의 삶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축복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재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가 그렇게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사랑을 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날숨이 있어야 들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살기 위한 길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저는 아름다운 신앙을 보여주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날, 성당 창문을 닫고, 하수구의 오물을 걷어내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가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명절이 되면 어르신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는 분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피정을 가면 매일 성당에 나오셔서 마당을 치우고, 수녀님을 도와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화가 치밀어 싸움에 이르려는 순간에 본당 신부의 말을 생각하며 용서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답이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이 답입니다. 내일로 미룰 것 없습니다. 오늘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도 못합니다. 바로 오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어제 오늘 제1독서를 읽으면서 ‘오늘’이라는 단어를 무려 4회 만나는 순간 포착된 오늘 강론 제목, ‘오늘이 답이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간의 계약 갱신에 대해 다룹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바로 새 이스라엘 사람들인 우리의 영예로운 신원입니다. 모세는 우리 모두에게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라고 촉구합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신명26,16)
주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한 진리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주님의 응답은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해당되는 축복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신명26,19)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성소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는 모든 이들로부터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느님의 백성이자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원수를 사랑하여라.”
오늘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부여하시는 명령이자 과제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여라.’에서 한층 깊이 들어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기도’의 사명과 실천입니다. 이런 이가 진정 용감한 ‘사랑의 전사戰士’입니다. 아,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영웅적 사랑의 노력과 실천이 있어 하느님 백성,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5ㄱ).
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결론짓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수들 역시 차별없이 공평무사한 사랑으로 대하시기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저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5ㄴ-47).
오늘이 답입니다. 오늘 그대로 실천하라고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고무적이고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이기적 소아小我를 벗어 나 이런 대아大我의 하느님을 닮으라는 초대입니다. 진정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소아小我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의 끼리끼리 사랑에서 벗어나 내적 시야를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넓혀가라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자비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작금의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겪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에 너무 적절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서 본래의 자기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삽니다. 보복의 악순환은 서로 죽이는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면 우선 내가 먼저 상처받고 파괴됩니다. 괴물과 싸우다 보면 나도 괴물이 되어갑니다. 무저항의 비겁한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저항으로 용기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나의 원수들이나 나의 박해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내적으로 깊은 상처가 있는 이들입니다. 광기狂氣, 광신狂信, 광분狂奔, 발광發狂등, 참으로 위험한 현실을 가리키는 용어들입니다. 광신도狂信徒 같이 극단으로 치닫으며 서로 증오하고 미워하는 참으로 치유받아야 할 ‘무지無知의 병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들을 미워하며 싸운다면 결국은 악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요, 서로 파괴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들을 사랑하고 기도할 때 나의 치유는 물론이요 이들 역시 저절로 내적 무장해제武裝解除와 더불어 치유도 일어납니다. 참으로 우리의 행위가 감정적 반응이 아닌 인격적 응답이 될 수 있도록 거리를 두고 차분히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이 답입니다. 주님은 오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실천해야 할 말씀을 다시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5,48).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기대 수준은 이정도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완전성에 상응해야 하며, 이것은 실천적 완전성으로 선인이나 악인이나 다 너그럽게 대해 주시는 대자대비하신 분의 완전성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닮아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있는 그대로’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1-2). 아멘.
사랑을 않는 것과 못하는 것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같다고 생각하거나 별로 그 차이를 생각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사랑치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명히 다른 것이고 사랑치 못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셔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치 못하는 것이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나 사랑이 대상인 누군가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면에서는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치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하려고 하나 사랑을 못하는 것, 곧 사랑의 능력의 결핍이지만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예 사랑을 하려고 하지 않아 안 하는 것, 곧 사랑의 의지의 결핍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치 못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게 100만 원을 주고 싶은데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주지 못하는 사람과 같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돈이 100억이나 있는데도 100만원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에게 단돈 100원도 안 주는 사람과 같습니다.
저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고, 마음이 너무 아플 때가 많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노인이나 불편한 사람이 탔는데 건강한 사람이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당연히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해주었고, 10여 년 전만 해도 잠자는 척이라도 하였는데 지금은 휴대전화로 뭘 하면서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자리를 양보해드리라고 내가 나서야 하나? 어떻게 이렇게 양보라는 작은 사랑조차 없을까? 어떻게 이렇게 사랑 의식이 없고 사랑 의지가 없을까? 무엇이 이 사랑 의식조차 없게 하고 사랑 의지를 없앴을까?
몇몇만의 문제일까, 사회전반적인 현상일까? 무엇 때문일까? 가정교육문제일까, 학교교육문제일까? 우리종교의 문제일까?
제 생각에 어디 한 곳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이고, 모두가 문제라면 이 시대의 문제이고, 우리사회의 문제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의 문제, 그것도 신자유주의의 문제입니다.
사랑을 가르치지 않고 경쟁을 가르치며 희생을 가르치지 않고 이익을 가르치며 져주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이기는 법만 가르치며 공동체의 성취를 가르치지 않고 개인의 성취만 가르치는 자본주의의 체제와 논리와 문화가 우리 사회를 압도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에 종교는 힘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도 힘이 없으며 그러니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오늘 주님의 가르침은 더더욱 미친 소리입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까? 패배주의적으로 있어야만 하고,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너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완전한 자 되고, 완전한 사랑을 하라고 도전하시는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포기할 것입니까?
엄청난 도전을 하시는 오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울타리 없는 넉넉하고 온전한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 하십니다. 앞의 말씀을 보면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온전한 사랑은 울타리 없는 사랑입니다. 보이는 것을 좇기 십상인 우리는 좋음과 싫음, 선과 악, 사랑하는 사람과 원수, 동족과 이민족,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구별하고 그에 따라 달리 사랑합니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사랑의 농도나 표현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분별심의 울타리를 넘지 못한 우물안 개구리식 사랑에 길들여진 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차별과 울타리를 넘어서라 하십니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 뿐 아니라 나를 싫어하거나 내가 미워하고 배척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 인물들이나 살인죄를 저지를 사람들, 각종 경제범죄와 지능범죄, 사이버 범죄를 통해 수많은 피해를 준 범죄자들도 사랑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 해도 자비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무조건 사랑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정의가 실현된 그 열매로 주시는 자비이지요. 죄의 인정 없는 자비와 용서는 없는 법입니다(자비의 얼굴 7항).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두를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는 것은 그들의 죄 인정과 회개에 달려 있으니, 우리는 그들의 회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제1독서에서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신명 26,16)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소유가 되었으니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 자비의 뜻을 실행하고, 생명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의 길입니다.
완전함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과 일치할 때 완전하신 그분께서 우리를 충만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완벽이 아니라 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적당히 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절름발이’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문을 열고, 온전한 사랑을 가로막는 울타리를 과감히 허물고 모두를 받아들이고 차별 없이 사랑하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죄로 인해 증폭된 우리 사회의 부패와 혼란, 불의의 팽배, 미움과 폭력, 거짓 평화를 극복하는 것은, 정의의 바탕 위에서 온 존재를 던져 사랑하는 길밖에 없겠지요. 울타리 없는 넉넉한 사랑으로 온전함을 갈망하는 오늘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순 제1주 토요일
복음: 마태 5,43-48: 하느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게 되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원수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그를 미워하기만 해도, 우리는 그에 대해서보다 우리의 영에 더 큰 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미움이 우리를 더 휘저어 놓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주님의 법은 모든 법을 뛰어넘는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기 때문이다.(루카 18,27 참조) 스테파노가 수난 당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는 알고 있다.(사도7,60 참조)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을 법으로 만들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오로도 그렇게 하였다.(1코린 4,12-13 참조) 이러한 것을 볼 때, 이 일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신다. 이것은 원수에 대한 최고의 정점이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디까지 가야하는 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 말씀은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참조)는 말씀과 같은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분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은 우리는 아드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킬 때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 자녀들은 아드님과 함께 공동 상속자로 불린 것을 표현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아드님을 통해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해와 비는 바로 당신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을 따라 당신의 자녀가 되고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절) 친구를 사랑하는 삶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한다. 이때에 그는 큰 보물을 지닌 사람이 된다. 자기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를 사랑하며 악을 피하고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의로움을 지니라고,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고 하신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써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우리가 아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완전한 사랑이라는 선행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이런 사랑은 믿지 않는 이들과 죄인들 사이에서도 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복음적인 사랑의 법으로 인간적 사랑을 넘어서길 바라신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청하며 살아가자.
가장 예수님다운 말씀
윤경재 요셉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지구상에 숫한 사람이 태어나고 또 떠나갔습니다. 그런 중에 수많은 스승님들과 성인들이 인류에게 등불이 되었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분들 말씀 중에 아무리 살펴보아도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끌어 주신 분은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명령은 많았으나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와 범위가 하느님의 사랑에까지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만 눈이 쏠렸기 때문에 숨이 막히고 다리가 풀리는 듯한 막막함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과연 나 같은 죄인이, 좁쌀만 한 소인배가 대붕의 뜻을 따를 수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는 그 말씀을 실천해 볼 엄두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작정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아닙니다. 저 높은 고지를 향해 돌격하라고 몰아치는 분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모습은 우리 수준에 맞게 앞장서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인내하시며 설득과 아량으로 솔선수범하시는 분이십니다. 물 타기나 타협이 아니라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께 가는 외길을 정확히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오늘 복음은 그 말씀의 순서를 거꾸로 정리해 볼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무엇을 강조하고자 하셨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유다인의 언어 습관은 결과를 앞에 내세우고 목적을 나중에 밝히는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와 조금 다릅니다.
‘완전하신 아버지처럼 되려면 무엇보다 편을 가르지 말아야하며, 그래야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러려면 기도가 필요하고, 기도하게 되면 아버지께서 능력을 주시어 박해자와 원수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 나아가 원수를 사랑할 필요성과 당위성까지 깨닫게 된다. 그런 까닭은 아버지께서 판단하시어 공정한 징벌과 용서를 내려주실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즉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결과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아버지께 나아가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나서서 원수를 미워하거나 사랑하기를 결정한다면 오류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부족하거나 과하기 마련입니다. 합당한 원칙은 이미 아버지께서 정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간여할 성질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잘 따르고 잘 지키는 자녀를 효자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이야말로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가장 잘 따르신 최고의 효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시며 친근함을 강조하셨고, 하느님 아빠를 닮기를 갈망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영성은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늘 예수님처럼 효자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본질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본질을 놓치고 다른 것에 머물다보면 공연히 헛힘만 쓰게 됩니다. 너무 힘에 겨워 목적에 도달하기도 전에 지치고 말 것입니다.
불교 수행법 중에 선(禪)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禪’ 글자를 파자해보면 ‘禪’은 ‘보일 示’와 ‘홑 單’자가 합쳐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그러니 그 뜻은 ‘하나만 본다.’입니다. 본질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어 보고 나머지는 잠시 유보하여 본질로부터 유추한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본질은 자신 안에 불성이 담겼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본질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과 진리와 생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본질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산다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도 있고, 기꺼이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도 있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달콤한 꿀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삶의 고비에서 ‘나는 지금 아버지의 자녀로서 사는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 앞에 어떤 길이 뚜렷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지도자가 되는 조건들 중에서 ‘편애(偏愛)’가 금물입니다.
한 손에도 길고 짧은 손가락이 있듯, 어디에도 마음에 드는 이가 있는가 하면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요. 사람 사는 곳에 사람들이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도 원만한 사람은 마음에 들건 안 들건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살지요. 까탈스런 사람은 마음에 드는 것보다 들지 않은 것도 많은 법이지요.
신명기 저자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신명 26,16)
규정과 법규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이미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에 한 획을 그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이방인들 속에서 기준이 되고 성별되었다는 자만심을 없애고 비록 ‘박해를 하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려 주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에 타민족에게 담을 쌓고 그들에게 적대감을 가졌지만 이제 당신의 사람들은 이제까지의 배타적인 벽을 헐어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마태 5,46-47)
누구든지 자신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또 잘해 주고 싶은 것은 세상의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이론대로라면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를 자세히 보면 ‘편 가르기.’ ‘줄서기의 관행’을 만들며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배타적인 모습을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약자를 두둔하시고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가능했겠어요?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약한 한 인간의 삶을 사셨습니다. 한계가 있고 조건이 따르는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교우들에게 그리스도의 겸손의 삶을 당부했던 편지가 우리에게 새삼스럽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 5-8)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겸손한 삶을 통하여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을 이 세상에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각자가 다 단점도 있고 한계가 있는 존재이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는 그분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몸소 실천하시며 완전하고 거룩한 삶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한계를 딛고 사는 우리를 사랑하고 믿으시며 초대의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만이 한계가 있는 우리를 완전하고 거룩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온전함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느님 사랑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하느님 사랑이
우리 삶속에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충만케합니다.
온전함은
온전함으로
이어집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사순시기가
새로워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완전함의 원천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소멸되지 않는
하느님 사랑이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힘을
다시금 생각하는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으로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끝내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것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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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면 키우는 개 두 마리를 끌고서 성지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개들도 운동 시키고 성지를 두루 살펴보면서 밤사이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다니다보면 종종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종이를 비롯한 쓰레기가 구석진 곳에 버려져 있을 때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 쓰레기를 주우면서 좋은 생각이 날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 아침이었습니다. 이 날 역시 개를 끌고 산책을 하면서 성지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지 구석에서 종이를 한 장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화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밤사이에 내린 비에 흠뻑 젖었지만 짜증도 나지 않습니다. 왜 똑같은 종이인데 화도 또 짜증도 나지 않았을까요?
이번에 주운 종이는 쓰레기통에 버릴 쓰레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종이는 종이지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구입할 때 사용하는 화폐인 ‘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똑같은 종이이고 똑같이 성지 구석에 떨어져 있었지만, 이 종이를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종이의 가치에 따라 대하는 것이 달라진 것이지요.
가치가 있다면 어느 곳에 있다 해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쓰레기통 속에 처박혀 있더라도 돈의 가치는 바뀌지 않습니다. 돈의 가치를 떨어트리겠다고 마구 짓밟아도 그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혹시 쓰레기통에 있어서 다른 쓰레기와 똑같이 취급받고 그냥 버려질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쓰레기통에 있어서 쓰레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내가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또 누군가로부터 짓밟히는 모욕을 당한다 해도 우리 인간의 가치가 쓸모없는 존재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인간 자체의 가치를 무시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소중한 존재인데 말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나약하고 부족함을 내세우면서 완전할 수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래서 쉽게 포기하고 절망에 빠질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특별하게 창조된 소중한 가치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완전성 역시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나 박해를 하는 자라 할지라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완전성을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완전성을 부여 받은 우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제외 없이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 그래서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인간의 생명은 둘도 없이 귀중한 것인데도,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것이 생명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갖고 있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생텍쥐페리)
가장 소중한 것
몇 대째 가게를 운영하던 한 형제님이 병으로 인해 이제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 형제님 곁에는 모든 가족들이 슬픔에 차서 지켜보고 있었지요. 이 형제님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가족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이름을 부르고는 형제님께서 갑자기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여기 다 있으면 가게는 누가 지키고 있는 거야?”
탈무드에 있는 내용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가게를 지키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우리 가족의 가장을 마지막을 지키는 것이 중요할까요? 당연히 후자의 경우겠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자주 잊고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정말로 소중한 가치를 지켜나가는데 최선을 다했으면 합니다.
평생 웬수 앞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원수(怨讐)란 말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요즘은 ‘웬수’, ‘평생 웬수’란 말을 더 자주 사용합니다. 원수란 한 마디로 적(敵)을 의미합니다. 내게 치명적인 손해를 끼쳐 사무치는 원한을 맺히게 한 사람입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생각해보니 이런 사람들도 원수에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 견딜 수 없는 수모를 준 사람, 그래서 대면하기 껄끄러운 사람, 같은 식탁에 앉아 밥 먹기 싫은 사람, 자다가도 얼굴을 떠올리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게 만드는 그 사람, 내 인생에 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틈만 나면 내 인생길을 가로 막는 사람...
결국 원수는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살아가는 존재들이군요. 원수는 어느 다른 하늘 아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내 가정 안에, 내 직장 안에, 내 공동체 안에,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버젓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주님께서 바로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라고 안면몰수하지 말고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꼴 보기 싫은 그 인간도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의 당부말씀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해도 해도 너무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건 뭐 속도 밸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 아닌가요? 그저 바보 멍청이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정말이지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요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한계, 인간의 무력함, 인간의 부족함에 도달해보니 조금 길이 열리는군요. 결국 인간의 끝에서 주님께서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기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주님,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제 힘으로는 안 되겠습니다.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제 힘으로는 저 웬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 인간을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당신께서 활동하실 순간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저 웬수를 사랑합니다. 주님 때문에 저 웬수를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저 웬수에게 먼저 다가가서 인사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당신의 완전성에로 초대하십니다. 더 큰 너그러움과 더 큰 관대함, 더 큰 사랑으로 무장해 유한한 인성을 넘어 무한한 신성으로 건너오라고 초대합니다. 나 홀로는 너무나 나약하고 부족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라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주님 앞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사랑 실천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사순절과 잘 어울립니다. 요즘 계속되는 말씀들의 주제는 회개와 기도였는데 오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오늘 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바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어 ‘오늘’이라는 단어가 두 번 거푸 나오며 주님의 말씀을 오늘 깊이 마음에 새겨 실천할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실천해야 할 계명은 무엇입니까? 두말 할 것 없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구체적으로 사랑의 지침을 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좌절함이 없는 지칠줄 모르는 사랑입니다.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이 아니라 완전히 일방적인 이타적 사랑입니다. 과연 이런 사랑이 어찌 가능할지요. 그러나 이런 사랑을 실천해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이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려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해와 같은 사랑, 비와 같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차별없이 모두를 비추는 해처럼, 모두를 촉촉이 적시는 비처럼, 아버지의 사랑도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평무사한 사랑이요 대자대비의 사랑입니다. 얼마나 자유로운 사랑인지요. 이런 아버지의 사랑을 닮아갈 때 두렴움도 사라져 넓은 마음에 내적 자유의 삶입니다. 하느님다운 사랑은 일방적인 무조건적 아가페적 사랑이요 기대하지 않고 무조건 베푸는 사랑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 속에 살아 온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영원한 빚쟁이인 우리들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깨달아야 비로소 우리도 샘솟는 사랑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 이기적 사랑이요 여전히 목마르고 메마른 사랑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 사람같이 주고 받는 이해관계의 계산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무사한 사랑을 끊임없이 베푸시는 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이어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유류상종의 편협한 사랑에서 벗어나라 촉구하십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대부분 이런 유류상종의 사랑에 머무르는 인간 현실입니다. 이런 편협한 울안을 벗어나 모두를 사랑해야 비로소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래야 비로서 주님 사랑 안에서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 현실은 어떠한지요. 치열한 생존경쟁풍토안에서 사랑은 증발되어 나라도 사회도 가정도 학교도 희망을 찾아 보기 힘든 부정적 현실입니다. 바로 이런 오늘 지금 여기가 사랑을 실천할 자리입니다. 어둠을 탓할게 아니라 한자루의 촛불을 켜는 마음으로 내 사랑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오늘 말씀의 결론인 평생과제를 제시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전하다는 뜻은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끊임없는 사랑의 실천이 우리를 완전하게, 온전하게 합니다. 가을이 되어 열매가 둥글게 익었을 때의 원숙圓熟이란 단어의 뜻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사랑으로 익어갈 때 원숙한 둥근 사랑이 바로 아버지를 닮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아버지의 둥근 사랑을 닮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119.1참조). 아멘.
사랑이 약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홍문택 신부님의 ‘사람을 상대할게 아니랍니다’라는 글입니다.
“누가 당신을 모함합니까? 누가 당신을 두고 빈정거립니까?
누가 당신을 험담하고 다닙니까? 누가 사사건건 당신을 반대합니까?
누가 당신을 미워합니까?
그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십니까? 얼마나 분하십니까?
얼마나 야속하십니까? 얼마나 그가 밉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미워하시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악(惡)의 세력입니다.
그러니
그가 상대가 아닌 만큼 그를 미워하거나
그에 대한 미움과 실망을 부질없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싸움 상대가 악의 세력인 만큼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생각하십시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善)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로지 진실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제된 침묵입니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답니다.
절대,
당신을 비난하고 욕하며 미워하는 사람과 상대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그건 적을 모르고 싸우는 꼴입니다. 싸움을 부추긴 장본인은 멀쩡히 놔두고
엉뚱하게 딴 사람과 아웅다웅하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길을 알려주셨기에 믿고 따르면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4-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만난 억울한 일들을 그저 ‘억울함’으로 안고 살면 그것은 억울한 채로 남아서 슬픈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따라서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돼지는 열 받으면 바비큐’가 된답니다. ‘사람은 열 받으면 쓰러집니다.’ 그리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마음에 화를 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서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참된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요한).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사랑,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한 순간 이용당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움에는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 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참된 정의의 실현을 수반합니다.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정의는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해방되도록 양심을 지니게끔 도와주는 용서를 우리에게 계속해서 선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도 서로 용서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아무도 내치지 않고 품는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명심하여 실천함으로써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된다고 일러줍니다(26,16-19). 그러나 우리는 율법 규정을 지키는 데서 더 나아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26,16) 실천함으로써 온 존재가 그분을 닮음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과 욕구를 좇아가기 쉬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누리려 하면서도, 율법 준수에 머물며 하느님을 닮으려는 노력은 소홀히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우리도 되풀이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고 하십니다. 그분은 동포는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전인적 사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내 기준을 버리고 하느님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거룩해지고 완전해진다는 것은 내가 정한 목표나 기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의 빗장을 풀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내가 기댔던 것들을 내려놓고 그분의 뜻을 마음을 다해 실천할 때 주님을 닮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5,45)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함의 길이요 완전함의 길입니다. 따라서 ‘차별하지 않으며’ ‘한계를 두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다운 삶입니다.
우리는 감정과 사고의 틀과 경험과 좁은 신념, 종교, 혈연, 외모에 따라 습관적으로 가르고 차별합니다. 오해를 받거나 모욕과 무시를 당하면 꼴도 보기 싫어하며 관계를 단절해버리려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적 확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겉모습만으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가족이나 친지, 친밀감이 있는 친구들에게는 잘하고 그들의 말은 무조건 받아들이면서도 나를 싫어하는 이들이나 별 친분이 없는 사람, 사회적 약자나 죄인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무관심한 경우도 많지요.
동족, 가족, 친구나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5,46-47).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랑이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은 바로 자신을 박해하고 중상하며, 증오하는 원수들까지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5,44).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원수를 포함해 아무도 내치지 않고 조건 없이, ‘먼저’ ‘다가가’ 품는 것이 우리의 도리임을 깊이 새겨야겠지요.
오늘도 배타적인 태도로 감정에 따라 좋고 싫음을 구별하고, 선악을 가르며, 관계를 단절하는 좁디좁은 마음의 울타리를 허물고, 그 누구도 내치지 않고 품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키우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
류지인 신부님
먼저 ‘사랑’을 바라보는 우리 이상을 조금 낮추면 어떨지 싶습니다. 사랑 방법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서 달라져야 합니다. 엄마가 자식사랑의 표현으로 아이에게 건네는 뽀뽀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교수가 제자에 대한 사랑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한다거나 가정을 이룬 다 큰 성인 아들에게까지도 그러한 표현을 지속한다면 적지 않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들을 때 한숨부터 나온다면, 혹시 내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내 소중한 사람의 사랑 방법’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마주 보기조차 싫은 원수에게는 ‘안녕하세요’라며 건네는 인사 한마디가 다른 무엇보다도 큰 사랑일 수 있습니다. 길에서 마주친 원수에게 끓어오르는 심한 욕설을 퍼붓지 않고 그저 침묵하며 조용히 지나쳐 갈 수 있다면 그 또한 사랑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상황과 대상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사랑 방법은 사랑은커녕 더 큰 화만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상황과 대상에 따라 서로 다른 사랑 방법이 있기에 조금 더 가볍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해 볼 수 있겠습니다. 동시에 원수라는 단어 사용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완전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실현도 함께 희망해 봅니다.
외나무다리를 안전하게 건너는 방법은 원수를 용서하는 것뿐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세가지 모습을 닮으라고 합니다.
그중에 한 가지로 오늘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닮으라네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어떻게 우리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요?
예수님께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시는 듯 합니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을 우리보고 하라 하시진 않겠지요.
보통 우리는 완전하다는 개념을 완벽하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완전할 수가 없겠지요.
그린데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완전'의 개념은 부분이 아닌 전체를 뜻한답니다.
사랑을 하되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와 가까운 사람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만 사랑한다면 완전한 사랑이 아니지요.
부분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니 그 반대편에 있는 그런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전체가 되는 거죠.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에게 잘 못하는 사람 나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까지도 우리의 사랑을 확장해 나가야 하느님의 자녀답다는 겁니다.
오늘
나의 사랑의 폭은 얼마나 넓은지 한번 돌아봅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와 종교가 다르다고
나와 이념이 다르다고
나와 출신 학교나 지역이 다르다고
나와 민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고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사랑이 반쪽 사랑으로 남아 있지는 않은가요.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그 자녀인 우리도 그리해야 되지 않을까요?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그럽다’는 말은 한편에서 보면 마음이 넓고 선한 뜻이지요. 그러나 또 한편에서 보면 줏대도 없고 자기 소신도 없어 보입니다.
이 너그럽다는 뜻을 좀더 살펴본다면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이 그 뜻을 살피려면 꼭 집어서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아량雅量'이라는 말이 한자에서 온 것인데 '너그럽고 속이 깊다.'라고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문을 살펴보면 '아雅'는 '맑다', '바르다'. '아름답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요 '량量'은 '헤아리다', '추측하다,'라는 뜻으로 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글자대로 한다면 '마음이 맑고, 바르거나, 아름다운 것으로 헤아릴 수 있다.'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너그러운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 오염되지 않는 순수하고 맑은 마음, 바르고 선하고 아름답다 넓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너그러운 마음'이야 말이야말로 인간의 본래의 심성이겠지요?
사람이 본래 착하고 선한데, 살다보면 떼가 끼고 욕심이 들어가고 그리고 '자기'라는 주장이 강하다보니 본래의 아름다운 마음이 손상 입거나 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우리가 나누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그러하듯, 살아가려고 하다보니까 우리가 갖고 있던 본래의 선하고 좋은 마음들이 주위의 환경으로 좁고 이상하게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으로 받은 ‘하느님의 모상’은 기도와 그분을 닮으려는 노력으로 그 모습그대로를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7-28).
좁아터진 세상 사람들은 이웃의 지난 잘못들을 기억하며 용서하지 못하고 처벌을 바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마음으로 기다리시며 악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오늘 전례에서 화답송으로 바치는 시편저자의 청원을 한 없이 부족한 우리도 전심으로 바치게 됩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 130,3)
하느님께서는 인자하시고 너그러우신데 우리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남에게 법의 멍에를 씌우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허세를 비판하시며 사람은 작은 잘못이라도 다스려야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웃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멍청이’이라는 말도 다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옭고 그른 것을 따지고 견주기 좋아하는 그들보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를 거슬러 고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화해를 요청하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일을 하고도 우리는 때로 무심코 지나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일도 하지 말고 나의 작은 과오라도 인정하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주님께서는 남에게 작은 과오를 따지지 말고 먼저 나의 티 같은 잘못도 살피고 악의 시작부터 다스리라고 가르치십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내것을 양보하고 낯추며 상대를 존중해 줄 때,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넉넉함과 너그러움이 자라나고 성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수사랑>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끝까지 원수를 포기하지 말고
원수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때로는
벗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벗과 원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단지 벗은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고,
단지 원수는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일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떠한 존재인가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하였는가를 떠나
바로 내가 그 사람을 사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벗이지만
바로 내가 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원수입니다.
벗과 원수의 차이는
나를 향한 상대방의 태도가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나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나를 괴롭히고
나의 삶의 의욕을 꺾고
나의 인간 존엄성을 짓밟고
나의 사람다운 삶을 방해하는 사람을
비록 이해할 수 없다하더라도
비록 용서할 수 없다하더라도
비록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하더라도
그와의 불편한 관계를 회피하지 않는 것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를 변화시키는 것
그의 악의를 나의 선의로 정화시키는 것
그의 악행을 나의 선행으로 무화시키는 것
그 역시 존엄한 사람임을 믿기에
그가 누군가에게 해코지함으로써
스스로의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것을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며
회개와 참회로써 새 삶을 살도록
그를 위해 꾸준히 간절히 기도하는 것
비록 내가 그의 손에 죽어갈 지라도
그가 다시 참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하는 것
원수에게 관심을 가짐으로써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원수가 되기를 강요하는 이에게
오히려 벗이 되어 주는 것이요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적대자들마저 살리신
예수님을 온전히 따름으로써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완덕의 길.<마태, 5/ 43-4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에게 향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은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차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하느님의 완전함을 본받고 부분적 완성은 가능하나 모든 부분에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들어서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신학생 때 하느님을 완전히 따르려는 마음에서 완덕의 길이란 책을 정독을 하였지만 아직 완덕의 길을 가기에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정화 조명 일치란 순서에 따라 보고 듣고 실천하려고 하지만 매일 정화의 길을 걸어가야 할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사랑에 있어 완전한 사람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심 같이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며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본받고 따라 살아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하느님으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는 높은 자리에 앉아 당신의 완전하심을 자랑만 하시지 않고 직접 사람이 되셨습니다.
오늘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은 사랑은 조건이 없으며 차별도 없고 마치 태양이 모든 사람을 비추듯이 모든 이를 위하여 자신의 자비와 사랑을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베푸십니다.
우리의 완전성은 사랑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사랑하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완덕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불가능하지 않고 사랑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저를 보고 나이가 들었는데 운전을 잘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운전수는 없고 자기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 운전수는 깨어있으며 자신을 생각하고 남을 배려해서 조심성 있게 운전하는 사람입니다. 교통법규를 생명으로 알고 지키는 사람이 완전한 운전수입니다. 모든 율법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여야 완덕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모든 믿는 사람이 하느님 아버지가 완전하심 같이 완전한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아멘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원수를 '왜'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가 '원수' 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도 하느님의 자녀이고, 형제이고, 이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45-48). 사람들을 '이웃'과 '원수'로 편 가르기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른데, 더욱 잘 대해 줄 수도 있고, 타이를 수도 있고, 꾸짖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벌을 줄 수도 있습니다(마태 18,17). (어떤 범죄가 발생했을 때, 사법 기관에 신고해서 법적으로 처리하도록 맡기는 것도 원수를 사랑하는 일에 포함됩니다. 원래 사법제도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교화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목적은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회개시키는 것은 잃은 양을 되찾는 일입니다. (이로써 우상숭배자들을 원수로 규정짓고, 그들을 전멸시켜야 한다는 구약성경의 내용들은 모두 예수님에 의해서 폐지된 셈입니다.)
원수를 '언제'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 실천은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도 '지금' 해야 합니다.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면 그때 사랑을 주겠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심각한 범죄나 박해 때문에 큰 고통을 겪을 때, 사랑을 실천하기는커녕 증오심과 복수심에 사로잡힐 때가 많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증오심과 복수심이 더 큰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또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하느님께 맡기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대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속 편한 말만 하고 있다." 라고 불평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게 살해당하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모진 고난을 겪다가 순교하신 분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속 편한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하느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한때 박해자였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박해했던 신자들이 그에게 사랑을 주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입장에서는 사도들과 신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원수인 자기에게 베풀어 주는 사랑을 받음으로써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라는 그의 말은 사실상 그 자신이 그렇게 굴복했던 일을 고백한 말과 같습니다.)
만일에 당시의 신자들이 스테파노를 대신해서 복수하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박해자 사울을 죽여버렸다면, 위대한 바오로 사도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박해자들을 용서해 달라는 스테파노의 기도도(사도 7,60) 헛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순교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복수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한 증언 때문에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묵시 6,9-10)"
이 질문에 대한 답변과 같은 말이 베드로 2서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고, 동시에 한없이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인간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자비인데, 그게 언제까지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께서 자비를 거두시고, 정의를 집행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 때, '나는'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내가' 실천해야 하는 계명으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저 사람은 원수 같은 나쁜 사람이고, 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해야 할 좋은 사람이고..." (자기가 받은 사랑은 잊어버리고, 자기가 실천한 사랑만 기억하고...) '내가' 누군가의 원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왜 안 하는가?
어쩌면 "나는 누군가의 원수가 된 적이 없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남에게 원한 살 일을 안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용서를 청할 일은 없다." 라는 말은 아무도 못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미사 때마다 바치는 '고백의 기도'와 '자비송'은 모두 거짓말이 되어버립니다. (혹시 "하느님께는 용서를 청할 일이 많아도 이웃에게 청할 일은 없다." 라고 말한다면? 그런 말은 위선자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할 은총을 받고자 한다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오늘 이 말씀은 저에게 양가兩價의 말씀입니다.
악인이나 선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극찬을 드립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그 사랑의 명령에 대해서는 부담을 아주 많이 느낍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달콤하지만 그 하느님의 사랑을 내가 해야 한다면 그것은 괴롭습니다.
제가 옛날에 그랬습니다. 우리의 선배 프란치스칸인 콜베 성인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 굶어죽은,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역시 프란치스칸이야!’ 하는 자부심도 컸지만 제가 군대 가서 꼴베 성인처럼 막상 먹을 것을 나눠 먹으려 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고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것은 사랑이란 자기만족을 초월해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요.
왜냐면 자기만족이란 나 중심적인데 비해 사랑이란 너 중심적이고 너를 위해 나의 만족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는 참으로 저 중심, 자기만족적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다른 사람을 위하거나 배려할 줄 전혀 모르고, 아무도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무던히도 남을 이해하려고 하고 배려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또한 무던히도 남이 내 마음에 들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신이 내 발에 꼭 맞기를 바라듯이 남이 내 마음에 꼭 맞기를 바라는 거지요.
이러한 너, 저러한 너이기를 바라고, 바라는 너일 때는 좋아하고 그래서 사랑하기도 하지만 바라는 너가 아닐 때는 싫어하고 그래서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너라는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너의 이러저러함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과 혼동하고, 사랑한다는 사랑 고백을 ‘나 너 좋아해!’라고 고백하곤 하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실은 정 반대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좋은 것을 자기가 소유하려는 것인데 비해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겁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발전을 했다 해도 좋을 때만 사랑하고 싫어지면 즉시 미움으로 바뀌게 되어 좋아하는 사람, 곧 선인에게는 비와 햇빛을 주지만 싫어하는 사람, 곧 악인에게는 비와 햇빛을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선인, 악인이 내 마음대로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선인이고 내 마음에 안 들면 악인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이 내 마음을 다 알 수 있으며 안다고 한들 어찌 그리고 왜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겁니까?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사랑이 아닐뿐더러 내 마음에 들어야 사랑하려고 할 때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려는, 그런 사랑의 의지와 노력은 있어야 하고, 그래야지 하느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주심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봄이 우리 마음에
고개를 내밀기
시작합니다.
소중한 생명의 봄꽃이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모두는
하느님 앞에 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나약함이라는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 삶의 자세를
다시 한번 성찰하게 되는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예수님을 좀 더
알게되고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부족한 저자신과
이웃들을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사람들 곁에
머무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나
미움을 받는 사람이나
결국 하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는 십자가에서
미움과 비난이 결국
우리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는
새로운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죄인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죄인을 위하여
당신 목숨까지도 바치십니다.
사랑의 시작은
기도의 시작입니다.
신앙의 가장 큰 명령은
언제나 사랑과 기도입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또한
사랑과 기도로 끝을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부족한
우리 모두에게
한결같은 자비를
베풀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의 언어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상처준 사람까지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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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이 지금 천국에 있다면 나는 차라리 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나 그 사람이 싫었으면 ‘천국’을 포기할 정도일까?”
‘영혼의 정원’이라는 책의 저자인 스테니슬라우스 케네디 수녀의 글입니다. 이 수녀님의 말씀처럼 차라리 천국을 포기하겠다는 사람들이 실제로 종종 보게 됩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심지어 그 사람이 있는 곳이 천국이라면 그곳을 거부할 정도로 싫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자기 손해일 뿐입니다. 원수라고 생각되는 그 사람에게 큰 해가 돌아가기보다, 오히려 그 마음을 품고 있는 내 자신이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아름다움을 만들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미움은 가는 곳마다 건전한 생의 아름다움을 더럽히고 있지요. 그러면서 우리의 영에 큰 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원수를 미워하더라도 그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우리 자신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것은 확실합니다.
나를 위해서도 이런 미움의 감정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왜 하필 내가 변해야 합니까? 그 사람 잘못인데!!”라는 감정이 생기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 생각대로 바뀌는 것이 쉬울까요? 내 자신을 바꾸는 것이 쉽겠습니까? 결국 모든 열쇠는 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습니다.
폐렴 걸린 사람은 기침을 하기 마련이지만 기침이 폐렴의 원인이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폐렴 걸린 사람에게 기침을 하지 말라고 해서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병을 고치려면 이 사람의 폐에 침입한 박테리아를 죽여야 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미움, 적의, 원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원수로 생각하는 우리의 병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이 이해됩니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 있는 자라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 때에 비로소 지옥 같은 내 마음을 다시 밝은 빛으로 꺼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선택해서 기쁨의 삶을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어떤 사람은 가능성이 80%가 넘어도 주저하지만, 어떤 사람은 가능성이 1%만 있어도 시도한다.”
어떤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약자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삶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것이다(‘물랑루즈’ 중에서).
분노를 다스리는 15의 법칙(최천호)
화가 날 때는 순간적으로 욱하면서 분노 호르몬이 급상승한다. 분노 호르몬은 15초면 정점을 찍고 분해되기 시작한다. 15분이 지나면 거의 사라진다. 분노 관리에서 15라는 숫자는 중요하다.
한 번 기분 나쁘게 한 것은 열다섯 번 기분 좋게 해야 만회할 수 있다. 좋은 말을 아무리 많이 했더라도 한번 싫은 소리를 하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사람들은 예전에 들었던 좋은 말은 까맣게 잊고 기분 나쁜 말만 기억한다. 이를 최종 정보 효과(recency effect)라 한다.
15번 기분 좋게 해주는 것보다 한번 기분 망치게 할 일을 피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다.
분노를 다스리는 15의 법칙을 기억하면서 사랑으로 행복한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좋은 주말되세요~~~
모든 성경 말씀은 내 안에서 성취되어야하는 예언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희아(1985- )는 두 손을 다 합쳐 손가락이 네 개이고, 무릎 아래로 다리가 없는 선천성 사지 기형의 1급 장애우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열 손가락이 다 있는 사람이 치기도 힘들다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감미롭게 연주하며 국내외 장애·비장애인 모두에게 온몸으로 희망을 전하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연필이라도 쥘 수 있게 하려는 부모의 바람으로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그녀 자신조차도 피아니스트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 잡지 인터뷰에서 그녀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하느님이 원하셨기 때문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딸이 어렸을 때부터 틈나는 대로 성경 비디오를 보여주며 함께 복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또한 피아노를 치기 힘들어도 바로 그 피아노 연주를 자기의 길,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고통을 이겨내길 바랐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그녀는 어딜 가나 항상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걸 믿었고, 굳은 신앙과 피나는 노력으로 믿는 바를 현실로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참조: 무지개 원리, 2. 팔자는 없다]
성모님은 가브리엘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자세도 이래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통해 우리 안에서 성취되어 말씀이 진리임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러저러한 내용이 쓰여 있으니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씀이 나를 통해 실현되어야만 그 말씀이 진리임을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내 안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통해 성취되도록 예언된 모든 내용이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그 말씀을 실현시키려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예언된 내용은 당신은 많은 수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죽음을 거부하는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말씀이 거짓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언된 모든 말씀이 참 진리임을 당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증명해 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이 참 진리임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이런 모든 일들이 우리도 또한 따라서 하도록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발을 씻어주셨다면 우리 또한 이웃의 발을 씻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병아리가 어미닭의 따듯함으로 알에서 깨어나듯, 그리스도께서 당신 따듯한 성령의 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병아리가 이젠 계란을 낳고 또 자신의 온정으로 새로운 병아리가 태어나게 하듯이, 우리 또한 우리가 받은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전해주는 방식은 성경 말씀이 참 진리임을 우리 삶을 통해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삶을 보고 성경을 믿고 교회를 믿고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쓰인 아주 작은 계명 하나까지도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일 점 일획도 어김없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계명들조차도 지키지 않으면서 이웃에게는 하느님을 믿으라고 말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되도록 우리 ‘목숨’을 바쳐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말씀을 실천할 때 그냥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실천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이웃이 성경 말씀이 진실임을 믿게 합시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바라보라, 사랑의 하느님을! -사랑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수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의 삶의 여정은 하느님을 찾는 여정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하느님을 찾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은 내적광야의 특징입니다. 살아갈수록 누구나 직면하는 내적진리입니다.
이는 바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으라는 표지입니다. 하느님을 찾을 때 광야는 낙원이되어 희망과 기쁨도 샘솟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 친히 마련해 주신, 2014.3.25.일부터 시작한 안식년의 순례여정이 2015.2.28.일로 끝나고, 오늘 형제들이 열렬히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집'인 요셉수도원에 귀가(歸家)합니다. 그동안의 여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의 여정'입니다.
20여일 동안의 단식순례여정, 1달 동안의 수녀원 피정지도 순례여정, 3달 동안의 국내성지 순례여정, 50여일 동안의 산티야고 순례여정, 3달동안의 미국 뉴튼수도원 순례여정, 모두 눈부시고 풍요로웠던 하느님을 찾는 순례여정이었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뻣노라."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당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졌던 발걸음도 잊지 못합니다.
기적 같은 놀라운 사실은 순례여정중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를 드렸고 강론을 인터넷을 통해 형제자매들과 나눴다는 사실입니다.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강론과 더불어 참 많이 카톡사진을 통해 하느님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나눴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요셉수도원 도반들인 수도형제들에게, 또 장충동 수도원의 수도형제들에게, 알게 모르게 온갖 사랑과 기도로 도와준 형제자매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저는 모두를 기억하며 하느님께 매일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김명혁 명준 다미아노 형제입니다. 10여년 이상, 제 강론을 '사랑의 향기마을'에 이어 '가톨릭 굿뉴스'에 올리고 있으니 형제님의 항구한 하느님 사랑에 감동할 뿐입니다.
순례여정을 끝내고 다음 순례여정에 오를 때는 흡사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난 아브라함 같은 막막한 심정이었습니다. 안식년 중의 모든 순례여정이 그러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인 요셉수도원에 귀가해도 또 새롭게 시작될 내적순례여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완전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사랑의 길'뿐입니다. 탓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내 사랑 부족, 믿음 부족뿐입니다. 사랑을 통해 완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육신은 노쇠해가도 사랑의 내적성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게 인생의 의미입니다.
신비가, 관상가, 성인은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 한결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성장, 내적성장도 결국은 사랑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보이는 않는 내적광야에서 하느님을 뵈올 때 '텅 빈 허무'는 '텅 빈 충만'의 순수한 마음이 되고 여기서 샘솟는 사랑, 희망, 기쁨,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닮아 완전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한량없는 사랑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미약하고 초라한지요. 이를 깨달을수록 하느님을 더욱 열렬히 사랑하게 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22,37-40).
하느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이며 이웃사랑입니다. 만고불변의 영원한 진리가 위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은 1독서 신명기의 모세를 통해 '오늘' 우리 모두 위 말씀에 충실할 것을 간곡히 촉구하십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무려 '오늘'이란 말이 3회나 거푸 나옵니다. 하느님께는 어제도 내일도 없고 오직 '영원한 오늘'만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의 사랑의 이중계명을 온 마음을 다해 실행하도록 합시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더욱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119,1참조).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느덧 2월의 끝날 입니다. 이제 곧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많은 학생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꿈을 펼치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한 달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덤으로 주실 새로운 한 달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살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인생은 하루만 살아도 흑자입니다.’
지난 2월 16일부터 25일까지 페루에서 선교를 하시는 신부님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비행기를 24시간 타고가야 하는 먼 나라였습니다. 어렵게 말을 배우고, 지금은 현지인들과 함께 사목을 하는 신부님들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우리에게는 멀게 느껴지는 대부분의 남미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가톨릭이 종교이며, 삶이며, 문화입니다. 하지만 남미의 속을 들여다보면 원주민들과 스페인 식민통치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제가 갔었던 페루도 성소자가 적어서 사목하는 사제들의 30%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제들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가신 사제와 수도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신자라고 하지만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5% 정도 된다고 합니다. 지역 공동체의 신자가 50,000명이면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비율은 2,500명 정도라고 합니다. 현지에서 사목을 하는 선교사 신부님들은 ‘신자들의 재 복음화’가 정말 필요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어디에서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선교사들에게 건강과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총과 칼이 아닌 사랑과 헌신으로 굳어버린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일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완벽하신 것처럼 우리들 또한 완벽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니, 우리들 또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사랑을 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날숨이 있어야 들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살기 위한 길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월의 끝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오늘 주님의 도움으로 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화해와 용서의 손을 내밀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언 땅을 뚫고서 새싹이 나오는 봄이 오기 때문입니다. 가녀린 씨앗도 단단한 땅과 화해의 악수를 하기에 새싹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람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불완전한 것이 사람이죠.
하느님 한분만이 완전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보고
하느님처럼 완전한 자가 되라고 하시네요.
불완전자에 머물지 말고
완전자로 나아가라시네요.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하느님의 완전성은
차별없이 공명정대하다는데 있다네요.
따라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두드러지고 사랑하는 사람의 폭이
좁아질수록 불완전한 사람으로 남게 되고
모든 사람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차별없이 한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
완전하게 변해간다는군요.
태어날 때
하느님의 모습과 비슷하게 태어난
여러분은 세상사와 관계에 상처를 입으며
원래의 그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죠.
이제 다시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돌아갑시다.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가 어떤 사람이든간에
하느님의 자녀요
나의 형제자매라고 바라보면 됩니다.
하느님 모습 많이 닮은
여러분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은총으로 받아 은총으로 주는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독서 신명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소유가 되고, 당신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시고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데 거룩한 백성이나 완전한 사람이나 다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존재가 되라고 하시는 뜻은 무엇일까요?
아담과 하와가 교만 때문에 하늘의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오히려 땅에서 나왔으니 땅으로 돌아가 땅이나 일구는 존재가 되었고, 완벽주의 때문에 자기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데 그러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담의 죄나 잘못을 되풀이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지요.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된다 함은 교만 때문에 하느님과 경쟁하고 대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하느님 갈망과 열망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분을 닮고자 갈망하고 사랑하는 분이 원하는 것을 실천코자 열망하잖아요?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고자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사랑을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거룩함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고,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함도 다른 것이 아니라 이 거룩한 하느님만을 바라고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제 우리는 사랑의 소극적인 측면에 대해서 봤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에게 악행을 하지 않는 것, 곧 살인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봤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근근이 남을 해치지 않는 소 극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더 완전하고 적극적인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데 이는 땅에 떨어진 인간의 자존심을 회복하라는 도전이시고,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라는 촉구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완전한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주님께서는 <햇빛 사랑>에 비유하십니다. 차별은 물론 구별도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비추는 것이 햇빛 사랑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빛을 안 주고 부자라고 많이 주거나 반대로 가진 것 없으니까 많이 주고, 많으니까 적게 주지도 않습니다.
똑같이 주지만 집이 추운 가난한 사람은 햇빛이 귀하고 그래서 햇빛을 쬐고 부유한 사람은 굳이 햇빛이 없어도 되니 빛을 쬐지 않는 게 다를 뿐이지요.
하느님 사랑도 그렇고 우리의 사랑도 하느님 사랑을 닮았다면 마찬가집니다. 빈부, 종족, 언어, 피부색을 구별이나 차별하지 않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구별 없음과 차별 없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넘어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고 나에게 잘 해 주는 사람과 잘못하는 사람도 차별 없이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것이 본래 그렇습니다. 은총입니다.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사랑은 거저 주고, 무조건 주는 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도 은총으로 받아 은총으로 주는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내 좁은 사랑의 그릇 너머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불완전성과 한계와 불안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완전하다는 것이 과연 완벽함을 말하는 것일까? 오늘 제1독서에서는 야곱의 열두 부족들과 새롭게 계약을 갱신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신명기의 핵심 주제가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이 당신의 백성이 된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떠나 당신과 일치할 것을 권유하시면서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당신께 충실한 신자들을 끝까지 보살펴주신다. 완전함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과 일치할 때 완전하신 그분이 우리를 충만케 해주시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에서 그 주도권은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하느님과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거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자화자찬하는 바리사이들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신다. 그분은 인간을 배제하거나 우리 처지를 굽어 살피지 않으신 채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더 비참한 상황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과 어둠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받아들여 묻히심으로써,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가야 할 완전함의 길을 보여주셨다.
오늘 복음에는 가슴과 영혼에 하느님 나라를 새기는 경험을 상징하는 내용이 나온다. 신명기에서는 그 상징이 조상이나 계명, 법령 등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복종하는 것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사랑과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마음과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행동을 요구한다. 이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은 그 본질과 궁극적인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 곧, 스스로 재판관이 되기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것, 자신을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 증오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도리라는 말이다(5,44). 사랑하는 사람이나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을 못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5,46-47)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들은 미움 때문에 갈라진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화해하고, 사랑으로 동화되어야 한다. 그 동기는 단 한가지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조건 없이, 오직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용서하고 하나 됨은 자선이 아니라 책무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 속으로 침잠하며 배타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다. 대립, 증오, 미움, 대화단절 등은 성서가 가르치는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들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을 열라고 가르치신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5,45) 그런데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만 찾고 만나는 마음의 좁은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여전히 좋고 싫음,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가르는 옹졸한 판단의 잣대를 내려놓자! 시시비비 가리기 좋아하는 것, 호불호가 분명한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악덕일 수 있음을 명심하자. 나의 사랑의 그릇은 얼마나 넓고 깊은가? 내 안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 일, 마음의 상처는 무엇인가?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버팀목이라 여겨왔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무기들을 내려놓는 ‘영적 무장해제’를 하고 마음껏 하느님 사랑의 바다에 빠져보자!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송영진 모세 신부님
2월 28일의 복음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3-48)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의 '완전함'에 도달하는 일이고, 그것이 사랑의 궁극 목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 말씀은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하느님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가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하느님의 자녀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
자녀로 완성되려면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을 완성시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자비가 바로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인간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마태 5,46), 또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마태 5,47) '불완전한 사랑'인데, 사실은 하느님의 기준으로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그런 일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고,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하는 일이기 때문에(마태 5,46-47), 사실상 사랑이 아닙니다.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려면 이웃도 사랑해야 하고 원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예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완전한 사랑' 안에서는 이웃과 원수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입니다. 사람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사랑의 불완전함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44). 이 말씀은, "박해자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라고 기도하심으로써 박해자들을 위한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인데, 박해자들도 '모든 사람' 속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박해자들도 구원받기를 바라신 기도입니다. (그 박해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숙제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입으로는 그렇게 기도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박해자들이 천벌을 받고 지옥으로 떨어지기를 바란다면?
당연히 거짓 사랑이고 거짓 기도입니다. 그래서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먼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증오심과 복수심을 없애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어떤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억울한 심정, 원한, 증오심, 복수심, 분노 등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경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원수를 사랑하는 행동 자체는 쉬울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평화를 되찾는 일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특별한 비결 같은 것이 있는가? 무슨 비결 같은 것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원수를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일 자체가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비결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노력을 해서 먼저 마음의 평화를 회복한 다음에 원수를 사랑하게 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고, 이것은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행복'을 얻기 위한 노력도 됩니다. 사랑과 평화와 행복이 완성되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만일에 원한과 분노와 증오심과 복수심 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완전한 사랑도, 완전한 평화도, 완전한 행복도 이루어지지 않고, 그런 곳이 하늘나라일 수는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원한과 미움이 하나도 없는 곳,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진 곳, 그래서 증오심이나 복수심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순교자 스테파노와 박해자 바오로가 형제가 되어서 함께 사는 곳입니다. 스테파노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어떤 감정이 남아 있을까?
순교하기 전에 이미 박해자들을 용서했으니(사도 7,60)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는 나중에 스테파노를 만났을 때 많이 미안해했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아직은 불완전한 존재들이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금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너무 자책하거나 열등감에 빠지면 안 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우리도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이스라엘이 선민사상의 근거는 하느님의 거룩함에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특히 하느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라고 독려합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신명 26,16)
이스라엘 사람들은 변함이 없으신 하느님을 '바위'와 '성채'에 비유합니다. 마태오는 인간적인 사랑을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뿌리를 둡니다. 이 세상은 다 변한다고 합니다. 흐르는 강물이 다시 못 올라와서 옛 시간으로 돌아 갈 수 없듯이 우리의 삶도 흐를 줄만 알았지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변함에서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람마다의 고향이지요. 고향은 누구에게나 마음의 피난처입니다. 사람에게 고향처럼 변하지 않는 분이 있으시다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 중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변덕을 부르며 불평과 불만을 터트리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나무라십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변함없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한결 같으시다는 것입니다. 사람관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은 쉽게 변하는 관계입니다. 이유가 어떻든 변하고 등을 돌린다는 사실은 슬프고 괴로운 일이지요. 시나이에서 내려주신 하느님의 법규들에 대해서 성실하게 대답해야 한다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사랑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나를 못살게 하거나 해코지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르게는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라 할까요? 주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에게 똑 같이 햇볕이나 비를 내려 주신다고 일깨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방인처럼 마음에 드는 사람만 좋아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외된 이들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 하느님 외에 사람이 완전할 수 있을까요? 결점이 없는 완전함이 아니라 자비를 통하여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 하는 것입니다.
한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에 함께 했던 봉봉사중창단의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 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아무리 못생긴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꽃이 피네 사랑을 하면은 꽃이 피네
아무리 호박꽃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은 꽃이 피네
하느님의 사랑은 불완전한 사람도 다 완전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랑은 자비와 함께 완전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게 하니까요. 사랑은 완전하신 하느님을 닮게 하니까요. 사랑은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주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한 사람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신비의 힘을 가졌습니다.
양심의 존엄성 <사목 헌장, 16항 >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인간의 양심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 안에 율법이나 실정법 이전에 사람의 마음 안에 심어진 법입니다. 그 법에 순종하면서 인간이 만든 법을 초월해서 절대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코린토 후서 4장 2절 “오히려 진리를 드러내어 하느님 면전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내세웁니다.”
인간은 바른 양심을 통하여 인간이 가야 할 길을 바르게 가고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린토 전서 8장 7절 허약한 양심, 티모테오 전서 4장 2절 거짓 양심이 있습니다.
깨끗한 양심을 보존하려면 히브리 9장 14절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한다.” 공의회 사목 헌장은 마음에 새겨주신 법이며 이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며 이 법에 따라 인간은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또한, 양심은 인간 존재의 중심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와 만남의 자리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소리입니다.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은 높은 교육을 받지 않아도 양심을 통해 자기 생각과 말과 행위가 좋은 것, 선한 것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윤리 기준이 진화하고 윤리 개념이 발전합니다. "성행위가 죄가 된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완성되는 것이며 칼라디아 5장 6절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양심의 완전성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양심의 충실성, 자신이 선이라고 판단하거나 원하는 일에 충실한 것은 인간의 기본 의무입니다.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윤리적 선행과 덕행이 인간 안에 뿌리 깊게 정착합니다. 그래서 다음 판단이나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양심은 불가항력으로 오류를 범할 수 있어 잘못된 양심을 바른 양심으로 변화시키려면 양심의 양성과정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양심 성찰, 공동체적으로는 피정이나 세미나 여러 가지 프로그램으로 양심이 바로 된 것인지 교육을 통해 알아보고 변화시켜야 합니다.
배운 것이 없고 들은 것이 없으면 모르고 잘못 행동하고 선보다 악으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바른 수도자가 되기 위하여 5년에서 6년이란 오랜 양성 기간이 필요하고 바른 신자생활을 하려면 재교육 기간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라, 그러면 깨우치리라.
사랑하라, 그러면 바른길로 나아가리라.
사랑에는 익숙한 삶이 필요합니다.
자유의 우월성 <사목 헌장 17항>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인간의 도덕 행위는 자유로운 것이어야만 한다."가 17항의 주제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써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방종까지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36년 동안 일제에 억압받고 식민자지 살다가 해방되면서 "자유다. 해방이다." 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착각하고 지나가는 사람 발로 차고 “내 발 갖고 너를 차는 것은 내 마음이며 내 자유다.” 라고 말하고 가정에 얽매여 살던 부인이 가정을 뛰쳐나가는 것이 자유라고 하면서 “자유부인”이란 소설이 유명하였습니다.
참 자유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창조주를 찾고 창조주의 뜻을 따라며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것입니다. 최초에 사람이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죄를 지어 자유가 손상되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이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죄를 자유로이 범하였음으로 선과 악의 행위를 따라 심판할 수 있습니다.
요한 8장 32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 선, 미의 근원이신 하느님 만이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십니다. 콘 칼 신부는 “교회는 순수하게 평신도가 되어야 하며 그 자체를 진정으로 흥미 있어야 한다. 사물들에 관한 진리를 더 높은 기준에 존속시키거나 파괴하지 않는다.”사람은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살기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생명 자체이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진, 선, 미를 받아들여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하고 부자유스러워지며 죽음이 따라옵니다.
교통 법규를 지키는 것은 억압이라고 말하고 차를 자기가 몰고 싶은 대로 모는 것이 자유라고 한다면 교통법규 <진리> 따르지 않으면 자유롭지 못해서 죽음이 옵니다. 기차가 레일을 따라 빠르게 달리는 것이 얼마나 자유스럽습니까?
레일을 벗어나면 차는 멈추어 앞으로 신나게 달릴 수 없는 것같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가장 자유스러운 사람입니다.
인도 우화 중 머리 둘 가진 새가 한쪽은 "파니"이고 한쪽은 "우파니샅"이었는데, 저녁내 먹거리를 찾아 헤매다 한쪽 머리 "파니"는 고단해서 잠이 든 사이 한쪽 "우파니샅"이 먹을 것을 발견하여 먹으니 힘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잠을 자던 파니가 깨어나 보니 배가 부르고 힘이 있어 "어떻게 된 것이냐?" 물으니 "파니 네가 잠을 자는 동안 먹이가 있어 먹었다."고 하니 파니는 화가 나서 자기도 "너 자는 동안 먹을거리 있으면 혼자 먹겠다."고 신경질을 부리고 우파니샅이 식곤증으로 잠을 자는 동안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한쪽에 독버섯이 있어 그것을 먹으면서 우파니샅이 "내가 먹은 것은 네가 먹은 것과 같지 않으냐?" 한 말을 기억하여 "내가 먹어도 네가 먹은 것과 같이 함께 아프고 고생하니 너 한번 고통을 당해보라." 하면서 먹으니 독버섯 때문에 머리 둘 달린 새는 그때부터 지구 상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랑은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고, 사랑을 받지 못하면 할 수 없듯이 하느님께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받았음을 자각하고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아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 7-21.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게 되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배우고 익히고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으로 부족하며 실천이 따라와야 합니다. 약방의 처방으로 병을 못 고치고 음식의 요리법을 안다고 배부르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부자유스럽습니다.
나를 부자유스럽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기심 .... 인색, 자기중심, 눈치, 이해타산 <상대의 선만 보고 사는 사람.>
2. 무관심......술에 취한 사람, 마약으로 감정이 마비된 사람, 들어도 듣 지 못 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
3. 무능력......내가 가지지 한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 건강, 재력, 지력 등 을 갖추지 못한 사람.
4. 시기 질투....자기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남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
5. 체면 ........부끄럼, 자기 보존, 명예욕, 자기 보호본능, 공자님 “주 군을 섬기려 하니 사람들이 아첨한다고 한다." 약점을 숨기려고 마음의 문 열지 않고 해야될 일을 하지 않은 사람.
6. 한계성.......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게 된 다.
이같이 자유스러움을 누리고 실천해야하지만 이런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다음은 "새 인간, 그리스도"란 제목으로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믿는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말씀드리며 저에게 맡겨진 글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인생 역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독서를 보면 <그러나>가 두 번 나옵니다.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의인이 계속 의인이었다면 <그러나>란 말은 없었을 것이고 악인이 계속 악인이었어도 <그러나>란 말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의인은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고 악인은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기에 <그러나>란 말이 있는 것이며 회개와 훼절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놓고 우리 인생을 돌아볼 때 초지일관하거나 처음서부터 끝까지 똑같은 사람은 참으로 드물고 대부분의 사람은 전의 것을 버리고 돌아섭니다.
그런데 전의 것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이 어차피 우리 인생이라면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는 회개를 해야지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는 훼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보면 인생역전이 실제로 있습니다. 참으로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었는데 망나니가 되기도 하고 그야말로 개망나니였는데 의젓한 모범생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역전逆轉이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지고 있다가 마지막에 이기면 그 기쁨이 무척 크지만 이기고 있다가, 그것도 크게 이기고 있다가 마지막에 지면 그 슬픔과 허탈함이 클 뿐 아니라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지금에 대해 안심하고 안주하면 실패로 마감을 하고, 계속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심기일전하면 성공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실패한 인생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과거지향적이거나 과거를 지향하기까지는 않지만 나아가지 않고 머뭅니다.
과거지향적인 사람은 옛날이 좋았다거나 옛날에 잘했다는 식으로 옛날에 머물거나 옛날이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잡아서 실패하는데 과거에 머물거나 과거의 발목이 잡히지는 않지만 현재에 머물러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기에 실패합니다.
이는 굴렁쇠나 자전거와 비슷합니다.
조금이라도 계속 굴러가야지, 다시 말해서 나아가야지 멈추면 쓰러집니다. 이것이 굴러가는 것의 이치이고, 인생의 이치입니다.
인생은 굴러간다고 표현하고 굴러가는 인생이라고도 하는데 나아가지 않고 나아지지 않으면 그 상태의 유지가 아니라 실패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고까지 하였고, 생의 말년에 이르러서도 지금까지 아무 것도 한 것 없으니 다시 시작하자고 형제들을 독촉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반대로 심기일전心機一轉을 하면 성공을 합니다.
현재에 안심安心하거나 방심放心하면 안주安住하게 되어 실패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것을 이뤘어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마음을 고쳐먹으면 아니,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심기일전하면 성공합니다.
옛날이 좋았지! 하며 살면 천국을 과거에 가두고 현재는 지옥이 될 것이고, 지금도 괜찮아! 하며 살면 거짓 천국에 안주하여 진짜 천국을 잃게 됩니다.
옛날이 좋으면 어찌 버리겠습니까?
지금이 괜찮으면 왜 버리겠습니까?
그런데 지금부터 영원히 좋기 위하여 지금까지 좋은 것은 잊어야 합니다.
아니, 잊어야 하고 버려야 합니다.
지금, 여기가 천국이고, 천국은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지만 지금, 여기를 버리고 떠나야만 천국은 영원히 계속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삶 속에서 고통을
떼어 낼 수 없듯이
고통은 우리의 관계를
다시 성찰하게 합니다.
절박한 고통과
사랑에 대해
묵상하게 되는
우리의 사순시기입니다.
절박하면할수록
하느님께 집중되는
우리의 고통입니다.
고통과 함께하기에
사랑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선물이 됩니다.
고통없이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길은
갈 수 없는 길이 아니라
주님처럼 가야만 하는
우리의 길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진 생명은
고통을 통해 우리존재를
제대로 알게됩니다.
사랑앞에선 모두
죄인이며 원수인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사랑과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기도는
사랑의 관계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주님의 고통임을 알기에
십자가에서 비로소
용서를 배우며
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의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는
사랑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과 고통은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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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공사현장을 지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공사장 외벽 펜스의 한 부분에 서서는 무엇인가를 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 앞을 가보니 그 외벽 펜스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 위에 누가 장난삼아 쓴 듯 이러한 문구가 적혀 있더군요.
“들여다보지 마시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저 역시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일까요? 더군다나 제 앞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바라보던 이 구멍을 그냥 지나치기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그 구멍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지요. 물론 그 구멍 안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공사 현장 외에는 특별한 장면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선만 실천하고 악을 피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이미 알고 계시기에 그 많은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 뜻에 맞게 살려는 노력과 이해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주님의 생각과 같아질 수 있도록 내 몸으로 체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영이나 자전거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냥 저절로 잘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선 배워야 하고 또 연습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되고 곧 이해를 넘어 내 몸이 체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수영이나 자전거를 타는데 어색함 없이 내게 너무나도 편안하고 쉬운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절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묵상 등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연습해야 어느 순간 주님을 이해하게 되고 체득하게 되어, 주님과 참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시지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실천하기 쉬운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내게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 사랑을 다시 되돌려주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내게 원수 같은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십자가를 통해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보고 배워서 끊임없이 연습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이해를 하게 되고, 이해를 넘어 주님을 내 몸으로 체득할 수 있어 완전하신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배우고 연습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십자가를 다시금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니체).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올해 60세인 형제님께서 등산을 갔다가 어느 연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의 물이 갑자기 출렁거리며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연못 주변인데, 연못의 물이 움직이니 너무나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었지요. 그 순간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루살렘의 ‘벳자타 연못’이 출렁거릴 때, 첫 번째로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모두 뛰어넘어 직접 소원을 들어주셨지요). 그래서 얼른 연못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천사가 나타나서는 “소원을 말하시오.”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생 최대의 기회이니 서둘러 자신의 소원을 생각했지요. 순간 젊은 여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보다 서른 살 적은 여성과 함께 살게 해주세요.”
이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글쎄 60세였던 형제님께서 90세 노인으로 변했다고 하네요.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을 무조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함께 하는 삶, 특히 사랑으로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좋은 길이며 행복의 길입니다.
우리는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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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느님처럼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조차 어불성설입니다.
정신에 문제가 있는 이에게나 있을 법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하셨을까요?
두 가지 방향으로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첫째,
우리가 제대로 살아서 그분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의 완전성에 한 부분으로 흡수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비록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 삶 안에서는 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 하라 하심은, 우리의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며, 철저하게 그분께 의탁하면서,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결국, 두 가지 모두, 살아 있는 동안 옳은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완전해지고자 하는 마음도 교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완전하신 분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따르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완전하심에 의탁해야만 합니다.
"그 사람도 저와 같이 낙원에 있기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이탈리아의 어린 소녀 순교자 마리아 고레띠 이야기입니다.
마리아 고레띠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앙코나 부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가정 일을 도와야했습니다. 네뚜노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을 때 아버지가 과로로 돌아가셨고 마리아는 어머니까지 위로하면서 더 많은 일을 해 내야했습니다.
마리아는 10개월이 넘게 첫영성체 교리를 틈틈이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마리아가 일해 주는 주인집 가족의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지닌 20살 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단순한 욕정으로 마리아를 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는 기회를 노려 마리아가 혼자 남게 되자 그녀를 껴안았고 마리아는 강하게 뿌리쳤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일을 어머니에게 말하면 모두 죽여 버린다고 무섭게 협박하고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며칠이 지난 그녀의 마지막 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은 못하고 어머니께 함께 있어 달라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어머니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결국 마리아를 집에 혼자 남겨놓고 일을 보러 나갔습니다. 알렉산더는 이번에도 자신을 거부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칼을 들고 마리아를 주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마리아는 “안돼, 안돼! 하느님이 원치 않아요, 그렇게 하면 지옥에 가요!” 하고 외쳤고 화가 치민 알렉산더는 거부하며 쳐든 손바닥을 시작으로 마리아의 온 몸에 14번을 찔렀습니다. 마리아는 20시간 동안의 큰 임종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머니를 위로하고 가족을 걱정했습니다. 종부성사를 주시는 신부님은 고레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듯이 너도 살인자를 용서하겠느냐?”
“예, 신부님 그를 용서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그 사람도 저와 같이 낙원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알렉산더는 30년 형을 받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고레띠는 그의 꿈에 나타나 그에게 백합꽃을 전해 주었고 그 환시를 본 후 알렉산더도 회개하고 모범적으로 살다가 풀려나와서는 고레띠의 어머니 아쑨따를 찾아가 무릎을 꿇게 사죄를 청했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아 고레띠가 너를 용서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라고 하며 함께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이후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가 정원사로 나머지 생을 보속하며 살았습니다. 1950년 마리아 고레띠가 바티칸 광장에서 성녀로 시성될 때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를 찔렀던 알렉산더도 눈물을 흘리며 함께 있었습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아주 구체적으로 무엇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그와 함께 낙원에 있고 싶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고 그 사람도 함께 행복해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사랑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가장 큰 원수인 가리옷 유다를 당신 사도로 뽑으시고 함께 있으려고 했고 그를 구원하여 하늘나라로 이끄시려고 하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 고레띠가 알렉산더가 자신을 그렇게 아프게 한 사람임을 명확히 알면서도 그를 용서하였듯이,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가 당신의 원수임을 명확히 아셨습니다. 그래야 그분의 포용력이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해 지기 위해서는 무작정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임을 알면서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함은 죄를 짓지 않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완전함은 사랑에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고정원씨는 이 완전함에 매우 가까이 가신 분입니다. 그는 당신 가족을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인 유영철을 당신 양자로 삼고 그의 두 자녀들까지도 키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범죄자 자녀들을 위해 3천만 원의 장학금도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에게 어떤 죄를 범하든지, 어쩌면 가리옷 유다처럼 당신을 배반하여도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고 당신과 함께 하늘나라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무한한 사랑이 바로 ‘완전함’입니다. 어쩌면 우리 힘만으로는 완전해 질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을 사신 분들이 있으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원합시다. 그러다보면 원수까지도 행복해지기를 원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정인준파트리치오 신부님
때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힘겹게 느껴 질 수 있습니다. 속 시원한 주먹으로 복수하거나 밉게 구는 이웃의 이마에 굴밤이나 한 대 날려주고 싶은데, ‘원수를 사랑하여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람의 좁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힘들겠지만 그 뿌리를 하느님께 두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서로의 대화를 확대 해보면 남을 용서하는 것 보다는 용서하지 못하는 미운 마음, 상처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것을 보면 아직도 우리는 용서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을 칭찬하거나 이해하는 것 보다는 남의 결점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흉보는 것이 더 흔한지 모르겠습니다.
살다보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지만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감정의 결과에 대해선 누구도 예상할 수 없지만 선비정신을 갖고 있는 우리 선조들의 가르침은 오늘 날 우리에게 교훈적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미운 놈 떡하나 더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떡 준다’가 아니라 ‘떡 하나 더 준다.’라는 뉴앙스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더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 비치고 있습니다. 어디 미운 사람에게 잘 해주기가 쉽겠어요? 욕하고 흉보는 것도 시원치 않은데 거기다가 잘 해준다는 것은 웬만한 결심이나 철학없이는 가능하지 않겠지요.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법규를 온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그 하느님의 결심을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신명 26,18-19)
신명기 정신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복수하고 약자를 억누를 추세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까지도 배려하는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도 서로 사랑해야 하며 그 실천을 통해서 또한 거룩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런 신명기의 정신을 주님의 말씀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사실 인간은 부족하고 완전하지 못한데 어떻게 주님께서는 ‘완전’은 주문하실까요? 인간은 부족해서 설익은 모습을 곧잘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점을 구체적으로 들어 말씀하시지요.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기도해주여 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못되게 굴지 말고 잘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46-47절)
오늘 하루를 맞으며 주일을 준비합시다.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변화시키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장차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시키시겠다는 뜻도 담고 계십니다. 우리가 완전하거나 또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것은 형제의 변화된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이웃은 밉고 꼴 보기싫은 원수이지만 내가 주님의 사랑으로 너그럽고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완전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내 형제의 모습에서 내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지요.
내 이웃에게 후하고 너그러운 하루가 됩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족한 나를 감싸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하루가 됩시다. 사순절을 열심히 삽시다.
하느님의 사랑이 사랑하도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오늘 주님은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러기 전에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고, 자녀가 됐다가도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우선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기본으로 전제해야 할 것입니다. 설혹 누가 자기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가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니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다움>, 정체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의식이 있는 사람인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답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인가와 관련된 거지요.
사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없이 살고,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람들도 인구 조사할 때나 자녀임을 생각하고, 조금 나은 신자라도 주일미사에 가서나 하느님의 자녀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설사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얼마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없이 사는 사람이 대다수이고, 자녀답게 살려는 의식이 있더라도 잘못 알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녀답게 사는 것을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정도로 알고 있고, 교무금이나 교회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자녀답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지만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한다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며, 이웃을 사랑하다지만 원수는 사랑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녀로서 해야 할 것은 다 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박해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의 기준이라고. 그러니 아직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못된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입니까? 제 생각에 원수를 사랑치 못하는 것과 원수를 사랑치 않는 것은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요?
원수를 사랑하려고 하는데도 못하는 것은 사랑치 않는 게 아니라 사랑에 발을 담근 것이며 다만 완전한 사랑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 사랑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하지만 아직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했고, 십자가의 주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아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말은 언젠가 우리도 완전한 사랑에 도달해야 하고,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어떻게 이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인 양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위해서 기도를 하다보면 하느님 사랑이 들어올 것입니다. 기도란 사랑의 물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수, 박해자까지 사랑하려는 의지를 가지기만 하면 되고 사랑의 의지를 가지고 기도를 하면 터진 사랑의 물꼬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 하느님 사랑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방법>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를 제시하신 말씀입니다. 신앙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이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뜻을 설명하는 것은 이렇게 간단하지만, '완전'이라는 말 때문에 그 목표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도달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과연 누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루카복음서 저자도 그렇게 느꼈는지 루카복음에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한 채 표현만 바꾼 것이라면, '완전한 사람'이란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비를 완전하게 실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한 사람(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방법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루카복음에서는 원수를 사랑해야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는 일도 어렵게 느껴지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아셨는지 좀 더 쉽게 풀이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
이 말씀의 뜻은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어야 한다."입니다.
아마도 당시의 세리들은 자기들끼리 결속력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냥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범죄 단체의 조직원들의 '의리'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이란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말씀도 어렵다고 느낄 것이라고 염려하셨는지 더 쉽게 풀이하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7)"
이 말씀의 뜻은 "친한 사람들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입니다.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한다." 라는 말씀은, "그런 일은 신앙인의 사랑 실천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 일은 덕을 쌓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나쁘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이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살다보면 친한 사람과 친하지 않은 사람, 자주 만나는 사람과 만나지 않는 사람... 등이 생기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탓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울타리를 허물고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원수도 사랑하여라."입니다.
친하지 않은 사람과 억지로 친해지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랑 실천은 누구에게나 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해야 하고,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해야 하고...
그리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좋아하여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면서 어려운 일이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미사 보편 지향 기도 중에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어떤 특정 국가를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들만의 평화' 를 위해서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또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나쁜 놈들은 제외하고' 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은 제외하고 우리 편을 위해서만'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을 어렵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쉬운 일부터 실천한다면 언젠가는 사랑이 완성될 것이고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완전한 것은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불완전함을 완전케 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완전함을 닮는
유일한 조건또한 사랑뿐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함께 살아가는
참된 행복이 됩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일치시킵니다.
우리의 사랑이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랑은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사명입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늘 목마르지만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은
결코 목마른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은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을
우리 또한 진심으로 사랑할 때
모든 이들은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기도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열 수 있는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십시오.
사순시기는 완전한
하느님 사랑을 닮는
일치의 시간입니다.
불완전함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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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샴푸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해외여행을 가셨다가 너무나 좋은 샴푸여서 사오셨다며 제게 선물로 주셨지요. 처음 보는 샴푸이고 또 좋다는 말에 다음 날 아침 머리를 감을 때 사용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로 좋은 샴푸일까?’라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샴푸와 달리 거품이 잘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보통의 샴푸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사용해도 많은 거품을 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샴푸는 아무리 많이 사용해도 거품이 잘 나지 않다보니 제대로 머리카락을 감은 것인지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로 저는 이 샴푸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이 샴푸를 선물해주신 분으로부터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렸지요.
“저 한 번 쓰고는 다시 사용하지 않고 있어요. 글쎄, 이 샴푸는 도대체 거품이 나지 않아요.”
저는 이때 처음 알았습니다. 샴푸는 무조건 거품이 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거품 자체가 두피를 깨끗이 하고 머리카락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샴푸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거품을 많이 내는 세탁용 세제, 치약 역시 거품이 청결효과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들의 심리가 거품이 나야 깨끗해진다고 생각하기에 화학 물질을 첨가해서 거품을 낸다고 하더군요.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그것이 꼭 진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좀처럼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들이 과연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해주십니다. 완전한 사랑을 받은 우리들 역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나만을 위한 불완전한 사랑만을 하려할 뿐,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이웃을 향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틀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완전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살고 있을까요? 아니 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을까요? 완전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고, 하느님을 더욱 더 닮을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세상에 있는 행복의 반을 얻은 것과 같다. 행복의 나머지 반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면 된다(인드라 초한).
'나'라는 명품
요즘 사람들은 참으로 명품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좋아하는 심리를 이용해서 짝퉁 물건들이 판을 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명품이 좋긴 하겠지요. 하지만 이 명품이 없어도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어쩌면 허영이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명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좋은 물건은 어떻게든 돋보이게 마련입니다. 형편없는 물건들로 가득한 곳에 명품 물건이 있다면 딱 눈에 띠일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 명품이 잘 보이게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자신의 아내에게 “왜 당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명품을 사지 않는 거야?”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는 아주 간단히 답변을 했습니다.
“내가 브랜드니까.”
자기 자신이 명품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다른 명품 때문에 명품인 자기 자신이 가려질 수 있기에 명품을 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각자 각자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신 명품입니다. 그런데 굳이 나를 돋보이지 못하게 하는 다른 명품이 필요할까요? 그러한 명품들로 인해 내가 가려진다면 ‘나’라는 명품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세상의 명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집착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명품인 내 자신을 더욱 더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완전하신 하느님을 닮은 길입니다.
가긴 어딜 가? 그냥 가
김경진 신부님
어느 수도자가 고민의 고민 끝에 결심을 하고 노老사제를 방문해 수도원을 나가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신부님, 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이 제가 가야 할 길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모로 이 길이 맞지 않는 것 같고, 자신의 길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미련 없이 떠나고자 하는 수도자의 말을 듣고 노사제가 입을 열어 딱 한마디 했습니다.
“가긴 어딜 가? 그냥 가. 가다 보면 다 보이게 돼 있어.”
주님께서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그 길을 미리 내다보고 길을 닦는 분이십니다. 험난한 비포장도로는 가기 편하게 밤새 닦아놓으시고, 험한 산길도 올라가기 쉽게 당신 손수 미리 낫질을 해가며 길을 닦아놓으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한결같은 모습은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질 알 수 없는 그 길에 대해서 두려움과 불안을 갖기 쉽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냥 주님 손만 잡고 가다 보면 언젠가는 보이는 게 길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새겨들으며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성화를 이루려고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고배를 마실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진 그 어둔 길을 우리 안에 성령의 불을 밝히고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모습대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안에 참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순 시기는 참된 변화를 위한 도전의 시기이기에 아플 수 있고, 고통스러울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 아픔과 고통 뒤에 숨어 있는 보화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우리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이 은총의 시기를 잘 보내야 하겠습니다.
원수 기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제가 기도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저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러시는 분이 많겠지만 그러나 제가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는 제가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저의 기도는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드릴 때 저의 기분은 묘하고 심정이 복잡다단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오늘 말씀,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진심인지, 아닌지. 억지인지, 아닌지.
그럼에도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되 먼저 저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지금은 그를 미워하는 저이지만 그가 밉지 않은 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미운 그가 예쁜 그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밉게 보는 제가 곱게 보는 저로 바뀌고, 그래서 원수가 은인으로 바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하여 그를 밉게 보던 낮은 사랑이 곱게 보는 높은 사랑으로 성장하여 원수까지 사랑하고,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하는 하느님 사랑의 경지까지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다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밉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그가 밉거나 그의 죄가 미운 것이지 그가 미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기를 저는 바라지 않고, 그가 죽게 되면 안타까워하며 저는 그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저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가 그 죄에서 또는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겁니다.
사실 지금도 제가 한 걸음 물러나 여유를 가지고 보면 미움보다는 연민이 더 크고, 분노보다는 염려가 더 큽니다.
아무튼 저는 이런 기도를 원수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원수 기도를 통해 사랑에 있어서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처럼 완전한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평생을 해도 힘든 계명입니다. 이미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지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씀은 바로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신명기에서까지도 그 내용이 잘 나타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신명 26,1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보편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비단 이스라엘 뿐아니라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에 대해서 일단은 배타적인 감정을 갖어 ‘원수’라는 말도 서슴없이 섰떤 것인데, 그 당시 역사적인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감성을 넘어서서 누구에게나 사랑의 보편계명을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 어려운 계명을 주문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45)
그리고 옹졸하기 쉬운 우리를 일깨워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 다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사실을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명을 받았다는 선민사상의 자부심을 갖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는 사실을 가지고 당신 제자를 구분하시는 것입니다.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사람’의 의미가 살아 나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함으로서 자비의 하느님께서 사람을 완전한 단계로 올려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윤리적인 완벽함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어떠한 죄도 어떠한 무례도 받아들이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하지만 또 때로 지치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최선의 노력과 성실할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기쁘게 생활합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봄을 맞이하기까지
춥고 불편한 추위는
이토록 봄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불편한 추위는
오히려 봄을 탄생시키는
창조가 됩니다.
우리 삶의 원수
또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재탄생되기위한
창조의 새로운 방식입니다.
사랑은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어야합니다.
제대로 살다
하느님의 품에 안기고 싶지만
맞닥뜨리는 우리의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달콤한 욕망을
부풀리게 하는 것은 많아도
욕망을 정화하게 하는
쓰디 쓴 사랑과 인내는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우리 시대입니다.
그래서 점점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만드는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서로를 파괴시키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의 구분이
너무나 분명한 우리시대입니다.
이와 같은 저마다의 구분이 아니라
이 모든 것에 섭리하시는 하느님께
시선을 돌리는 신뢰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신뢰없이는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기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은
무엇보다도 앞서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을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작은 자극에도
쉽게 폭발하고
허물어지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힘으로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는
자기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야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대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삶의 자세는 의미입니다.
원수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의미는
전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해결보다
의미발견이 더 중요합니다.
삶이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삶이 풍성해진다는 것은
생지옥으로 몰아가는 모든 것들을
주님께 봉헌한다는 것입니다.
‘원수봉헌’이라 이름 붙여봅니다.
그래서 봉헌은
함께 살아가는
가장 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풍랑에 요동치는 배처럼
우리의 힘은 미약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더욱 필요한 사순시기입니다.
사순시기의 사랑은
밑바닥같은 원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원수봉헌’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원수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소중한 생명이기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생명을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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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 제가 성소국장으로 있다 보니, 신학생들이 찾아와서 밥 사달라고 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하러 나가며 신학생들에게 “뭐 먹고 싶니?”라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거나요.”
이 말처럼 애매한 대답이 있을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애매한 대답을 안고 삽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느 술집의 메뉴판을 보니까, 그 안에 ‘아무거나’라는 안주도 있더군요. 그리고 주방장이 내키는 대로 ‘아무거나’ 섞여서 나옵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섞여있는 애매한 대답인 ‘아무거나’를 습관처럼 쓰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자신이 내 인생의 주인인데도 우리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의지하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그 누군가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을까요?
사실 다른 그 누군가는 나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어제 만났던 친구가 입었던 옷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또 그 친구가 했던 말이 모두 생각나십니까? 아마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그 친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나만큼 관심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뤄서는 안 됩니다.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떳떳하게 자신의 일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몫을 스스로 행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세상인데도,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해야 함을 명령하시지요.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지요. 심지어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실천하기 쉬운 말씀입니까? 고해소에 있다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신부님, 이 사람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나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이러한 사랑은 실천할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오직 완벽한 사랑을 간직하고 계신 주님만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만의 몫이 아닌, 바로 지금 우리가 행해야 할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을 실천할 때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이미 성공한 사람에 대해 칭찬의 말을 하고, 실패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에 대해 비난의 말만 한다(나폴레온 힐).
최고가 되기 위해서
영국의 국가대표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하며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로빈 커즌즈. 하지만 스케이트 선수를 막 시작할 무렵의 그는 정성과 열의가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국내외 대회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그는 보다 나은 기술을 익히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승리의 기쁨을 제법 맛보았기에 자신감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본 코치는 매우 차갑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실력이 형편없구나. 더군다나 내 눈에는 발전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돌아가거라.”
자존심이 상한 로빈은 발끈해서 그 이유를 물었지요. 코치가 말합니다.
“최고의 스케이트 선수가 되고 싶니?”
“당연하죠!”
“최고의 스케이터가 되겠다는 녀석이 왜 넘어지지 않으려고 하나? 그렇게 몸을 사리면서 어떻게 네가 최고가 될 수 있겠어!”
최고는 되려고 하면서도 몸을 사리고 우리들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네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그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태오 복음 5장-7장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산상설교로 이루어져있는데, 5장에서는 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건네시는 행동지침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니 참으로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오늘 하시는 말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은 너무나 기가 막힌 말씀이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막막할 정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고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원수는 보통 어떤 사람을 두고 원수라고 합니까? 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나 자기 집에 해를 입혀 원한이 맺히게 된 사람.”
결국 원수는 나를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트린 사람, 잘 나가던 내 인생을 끝장나게 만든 사람, 내 가정을 산산조각 나게 만든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라니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의 양보, 너그러운 관용, 신사다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적극적인 천상적 사랑, 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국 바보처럼 살라는 말씀, 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이 세상을 초월하라는 말씀, 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넘어서야 가능합니다. 자아를 완전히 초월해야만 가능합니다. 협소한 인간적 관점,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적당히 한걸음이 아니라 크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넘어 하느님처럼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인성을 극복하고 신성을 획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요원해보이겠지만 언젠가 세월이 좀 더 흐르고, 우리의 시야가 좀 더 광대해지고, 우리 안에서 신성이 점점 성장해가는 어느 순간, 불가능해보이던 예수님의 권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가 인간이지만 우리 인간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힘차게 활동하실 때 우리 인간은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적 성향에서 이타적 성향으로, 인간적 사랑에서 신적 사랑으로 나아가 마침내 기꺼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그날, 우리 삶 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미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
신헌문 신부님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도 힘든 판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까지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그 의미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랑에도 단계가 있는 듯합니다. 기도입니다!
기도의 힘만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수도원에 입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입니다. 저는 대학 졸업 후 입회한 서른 먹은 ‘늦깍이 지원자’였는데 저와 같은 늦깍이가 또 한 명 있었습니다.
서른이 되어 입회를 하였으니 서로 생각도 많이 달랐고, 살아 온 환경도 많이 달라서 서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저 형제의 이러저러한 면을 고쳐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참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형제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바라보는 내 시각이 달라진 겁니다.
그 형제의 존재는 변함이 없는데 그 형제를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벽이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이후로 평온을 되찾았던 기도 체험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저도 자신 있게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기도에 담겨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 이웃, 내 친구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본 적이 있습니까?
한 걸음씩
김태완 신부님
예수님께서 너무 무리한 요구를 우리한테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그렇게 해야 하는 줄은 알겠는데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하고 참아도 저 사람만은 못하겠습니다. 용서도 한 번, 두 번이지 이게 도대체 몇 번째 입니까? 맞고, 또 맞고 가슴에 남은 상처 한없이 깊어 메워질지 모르겠는데, 더는 못하겠습니다.’
‘내 할 만큼 했는데, 좀 봐주시면 안됩니까? 얼마나 더 하란 말씀입니까? 이 정도 노력한 것도 장하다, 훌륭하다, 애썼다, 칭찬해 주시면 안 됩니까? 저도 인간인지라 제 마음이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 어떡합니까?’
이쯤 되면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께 대한 푸념이 됩니다.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몸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못할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고통과 어려움이 지극히 작은 먼지와 같더라도 제삼자의 처지가 아닌 당사자의 처지라면, 먼지가 아니라 내 삶을 가로막는 벽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투정과 푸념이 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을 왜 모르시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이기에 우리한테 한 가지 목표를 정해 주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과 같아지라니…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겪게 될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아시면서도 이러한 목표를 세워주심은 ‘당장이 아니어도 좋다. 기다려 주시겠다.’는 우리를 위한 배려로 느껴집니다. 실패할 수도, 늦어질 수도, 어려울 수도 있으나 조급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어렵사리 발걸음을 떼어봅니다.
흑과 백 너머에
양미강 목사
흑과 백은 분명한 색이다. 서로 섞이기 어렵다. 젊었을 때는 생각이 분명해서 흑과 백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칼’ 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나 세상은 흑백으로 구분될 수 없는 수많은 중간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한일 간 과거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일 과거사 문제해결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은 피해국, 일본은 가해국이라고 분명하게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해와 피해라는 분명한 도식이 성립될 수 없는 회색 지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일본 강점기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일본 관동군 출신이었던 일본인 이케다 고이치 씨와 조선인 BC급 전범인 이학래 씨를 만나면서 내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다. 이 두 사람 모두 80을 훌쩍 넘겨 인생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백발의 노신사들이다. 한 사람은 일본 강점기 전쟁을 수행한 일본군으로 종전이 되자 하루아침에 구 소련군에 의해 하루 10여 시간 이상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전쟁 피해자다. 또 한 사람, 조선 사람인 그는 일본군으로 자원해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포로감시원 업무를 했다는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몰려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조국에서는 죄인, 일본에서는 외국인으로 차별당한 피해자였다.
이 두 사람은 바로 흑과 백 너머에 서 있다. 이제 그들은 적이 아니라 동지다. 한일 과거사를 해결하는 데 국가를 뛰어넘어 함께 활동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전쟁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 원수 되게 하는지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긴 사랑에 빠지는데 필요한 시간은 1초면 된다고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 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도 사랑에 관계되는 것인데요, “사랑했다는 이유로 서로 60년 넘게 살아줘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사랑을 유지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하긴 많은 사람들이 연애할 때는 열정적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많은 다툼과 분쟁이 생기게 되지요. 처음 가졌던 사랑을 유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완전한 사랑을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사랑이 변하지 않는 사랑이 될 수 있도록,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을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섣부른 생각과 판단으로 완전한 사랑보다는 나 위주의 작은 사랑을 만들면서 애인의 관계를 원수로 만들 때도 참 많습니다. 즉, 그 작은 사랑마저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랑이 없어지려는 위기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날 전세 경비행기 한 대가 공중을 날고 있을 때였습니다. 조종사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곧 추락할 것입니다. 이 비행기에는 저를 포함하여 5명이 탑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낙하산은 4개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을 하자마자 그가 먼저 낙하산을 타고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이 앞 다투어 탈출을 했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어떤 청년과 신부님뿐이었지요. 하지만 세 명이 탈출했으니 낙하산은 하나만 남았다고 신부님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청년에게 낙하산을 양보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청년이 이렇게 말해요.
“신부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낙하산은 두 개 남았습니다. 방금 탈출한 사업가는 낙하산 대신에 제 배낭을 메고 뛰었습니다.”
사랑을 버리려는 사람은 낙하산인지도 확인하지 않았던 사업가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보고 조금 더 주의 깊게 생각할 때,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완전한 사랑으로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용서 못해.’, ‘저 사람 다신 안 만나면 되지 뭐.’, ‘저 사람을 다시 보면 내가 성을 간다.’ 식의 섣부른 판단은 이제 하지 말도록 합시다. 이런 말을 하면 할수록 주님과 나의 간격은 더욱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인간의 위대한 교사다. 고통의 숨결 속에서 영혼이 발육된다(바흐).
사람다운 사람
해수욕장에서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던 사람이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축하를 하려고 온 친구가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면서 목숨을 구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지?”
잠시 생각하던 구조원이 대답했습니다.
“음, 단 두 명뿐이네.”
그 친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습니다.
“삼십 년을 넘게 일했는데 그것밖에 안되나? 자네 많이 놀았군 그래.”
그러자 인명구조원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물론 구해낸 사람은 꽤 되네.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찾아온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네. 난 그 두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거든.”
사랑의 신비
고계영 신부님
하느님은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사랑이시며, 이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좋고, 가장 참된 사랑입니다. 흠도 티도 없는 이 사랑은 형언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며 찬란한 신비입니다. 사랑 자체이며 신비 자체이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아름답게 빛나는 당신의 이 지극히 감미로운 사랑을 영원히 관상하십니다. 성자께서는 사랑의 원천이신 성부의 사랑을 관상하시고 성부께서는 성부께 대한 성자의 절대적인 사랑을 관상하십니다. 성부로부터 나와 성자와 완전히 일치하시며, 성자로부터 나와 성부와 완전하게 일치하시는 사랑은 성령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완전한 감미로움이신 이 사랑을 서로 영원히 절대적으로 관상하는 관상의 하느님이십니다.
삼위께서는 당신의 아름다움과 감미로움과 빛을 서로 관상하는 이 영원한 사랑의 신비에 인간이 온전히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이 바라심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완전성입니다. 완전해지지 않으면 완전한 세계에 결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전성의 요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인간이 흠없이 참여하기를 바라시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최고의 배려이시고 완전한 사랑 고백이십니다.
완벽 연기, 완벽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영어 성서중에는 Jerusalem Bibl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오늘 복음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n this way you will be sons of your Father in heaven."
우리 공동 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아무튼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녀가 어떻게 되는지 얘기하는데, “in this way”, 즉 “이런 식(방법)으로”라고 얘기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방법이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선인과 악인, 의인과 불의한 이를 가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구약의 사랑 법을 초월합니다.
하느님 자녀 되려면 구식으로는 안 되고 신식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 방법은 또한 세리나 이방인의 사랑 법도 훨씬 초월합니다.
자만심.
자존심.
자부심.
자긍심.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우리는 이 차이를 잘 압니다.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우리는 자존심 내지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자부심이나 자긍심입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 이상의 사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전에 이미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미국에 있을 때 Salt Lake City를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집을 찾다가 우리 실수로 접촉사고가 냈는데 경찰이 우리의 상대편에게 원만한 해결을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 신자들이 좋게 해결해줘야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외국 사람이 말도 잘 못하고 낯 선 곳에서 쩔쩔 매는 것이 불쌍하기도 했겠지만 유타 주는 대부분이 몰몬교 신자들이기에 신자라면 이런 때 잘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자부심에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이 정도의 자존심은 있어야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과 똑같이 미워하고, 쌍욕을 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쌍욕을 한다면 어찌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흔히 말하듯 진흙탕에서 같이 뒹구는 꼴이고 어른이 애들하고 싸우는 꼴이겠지요.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려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감히 도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김연아 선수가 우승을 했다는데 다른 사람과 똑같이 연기했으면 우승을 할 수 없었지요.
다른 사람과는 다른 무결점, 완벽 연기로 우승을 한 것처럼 우리도 무결점, 완벽 사랑으로 하느님께 도전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을 아는 걸로 하느님께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만은 무결점, 완벽의 사랑으로 하느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사람들은 사형 금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위선자라고 합니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면 사형을 금지시키자는 말은 못 할 것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살해하는 사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의 힘으로는 나를 험담한 사람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을 빌리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 고레띠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앙코나 부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가정 일을 도와야했습니다. 네뚜노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을 때 아버지가 과로로 돌아가셨고 마리아는 어머니까지 위로하면서 더 많은 일을 해 내야했습니다.
마리아는 거짓말을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께 겸손하게 순종하였고 매일 저녁 가족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모신심이 강해지면서 정결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묵주기도를 바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마리아는 10개월이 넘게 첫영성체 교리를 틈틈이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마리아가 일해 주는 집에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지닌 20살 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단순한 욕정으로 마리아를 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는 기회를 노려 마리아가 혼자 남게 되자 그녀를 껴안았고 마리아는 강하게 뿌리쳤습니다. 어머니에게 말하면 모두 죽여 버린다고 무섭게 협박하고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은 못하고 어머니께 함께 있어 달라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어머니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결국 마리아를 집에 혼자 남겨놓습니다. 이미 알렉산더는 이번에도 자신을 거부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칼을 들고 마리아를 주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마리아는 “안돼, 안돼! 하느님이 원치 않아요, 그렇게 하면 지옥에 가요!” 하고 외쳤고 화가 치민 알렉산더는 거부하며 쳐든 손바닥을 시작으로 마리아의 온 몸에 십 수 번을 찔렀습니다. 마리아는 20시간 동안의 큰 임종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머니를 위로하고 가족을 걱정했습니다.
종부성사를 주시는 신부님은 고레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듯이 너도 살인자를 용서하겠느냐?”
“예, 신부님 그를 용서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그 사람도 저와 같이 낙원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 아름다운 부인이 서계신 것이 보여요.”하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는 30년 형을 받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고레띠는 그의 꿈에 나타나 그에게 백합꽃을 전해 주었고 그 환시를 본 후 알렉산더도 회개하고 모범적으로 살다가 풀려나와서는 고레띠의 어머니 아쑨따를 찾아가 무릎을 꿇게 사죄를 청했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아 고레띠가 너를 용서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라고 하며 함께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이후 카푸친 수도원의 정원사로 조용히 나머지 생을 보속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그릇된 길을 가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청합니다. 나처럼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게으름에서 도망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아주 구체적으로 무엇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 사람도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이웃은 우리 자신들의 거울입니다. 상대가 미워지는 이유는 결국 내 자신이 미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모님은 누구도 미워하실 수 없었고 당신들을 박해하는 이들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결국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어야합니다. 결국 용서하는 것이 첫 번째로는 나를 위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김연아 선수의 완벽한 연기를 보고 감동하고 또 자신도 모르게 흘린 그녀의 눈물에 우리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경기가 끝나고 눈물을 흘리는 김연아 선수의 사진을 메인 화면으로 깔았습니다. 다 끝났다는 안도의 눈물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과 겹쳐졌습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수고했어!”라고 하는 눈물일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에게도 저 정도의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똑 같은 눈물을 흘리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금메달을 거저 따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은총을 거저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선수들이 금메달을 위해 저렇게 노력하듯, 우리도 영생의 메달을 위해 조금이나마 더 힘을 낼 결심을 합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세상에 꼭 하나뿐이 너를 위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에 꼭 하나뿐인 너를 위해"(명로진, 사회평론)란 책을 고마운 분으로부터 선물 받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삶에 지치고 몸이 고단해서, 또는 어색해서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우리 시대 아버지들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대신한 저자가 아들에게 하고픈 이야기들을 25통의 감동적인 편지글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약 아빠 엄마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면, 네 주변의 사람들에게 해주어라.
아빠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면 그 돈으로 유니세프에 기증을 해라. 그럼 지구상의 굶주린 수많은 아이들을 위해 쓰일 것이다.
아빠에게 돈을 주고 싶다면, 그 돈으로 홀트아동복지회에 기부를 해라. 그럼 해외로 입양되어 가는 수많은 한국 아이들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아빠를 위해 시간을 내고 싶다면, 병원에 가서 자원봉사를 해라. 너의 건강한 몸이 병들고 힘겨운 사람들을 위해 쓰일 것이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 여유가 있다면, 신문의 국제면을 봐라.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라.
아빠를 위해 기도할 마음이 있다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종교분쟁을 위해 기도해라.
네가 행복하면 아빠는 행복하고, 네가 살아있는 한 아빠는 살아있다."
위 편지글을 읽으면서 저자의 자녀교육관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한 가지 던져주고 계십니다.
신앙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 윤리적인 기준은 이방인들이나 보통사람들과는 달라도 확연히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세상 사람들의 삶의 기준은 상식적인 수준입니다. 자녀들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에게 당연히 효도해야지요. 우리에게 호감을 지니고 도움을 베푼 사람들에게 당연히 호감을 지니고 은혜를 갚습니다. 우리에게 인사를 깍듯이 잘 하는 사람에게 우리 역시 깍듯이 인사를 건넵니다.
착하고 예쁜 아이들,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에게 상을 주고 칭찬하며 귀여워 해줍니다.
그러나 이런 처신을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에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예절교육만 이수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은 "조금 더"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를 요구합니다.
남들이 누구나 다 하는 그런 사랑, 그런 처신, 그런 선행이 아니라 조금 더 진한 사랑, 조금 더 폭넓은 사랑, 조금 더 깊은 사랑, 조금 더 사심 없는 사랑, 조금 더 큰 사랑을 요구합니다.
자녀를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겠습니다. 내가 낳았으니 내 자녀이고 내 소유라는 생각을 넘어 하느님의 자녀, 공동체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서 보다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관대한 인식이 필요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작은 울타리 안에 머물러있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사고방식 역시 나만, 내 가족만, 우리 공동체만 생각하는 지역이기주의를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사랑이 보다 큰 사랑, 보다 깊은 사랑, 보다 순수한 사랑으로 성장해나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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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로 작업을 하는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납니다. 깜짝 놀랐지요.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하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다른 곳도 아닌 컴퓨터 본체 안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였습니다. 저는 컴퓨터를 종료하고서 본체 케이스를 열어서 내부를 보았습니다. 소리가 나는 부분은 컴퓨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CPU(중앙처리장치, central processing unit)의 열을 식혀주는 팬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에 먼지가 많이 끼었고, 팬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기에 시끄러운 소리를 냈던 것입니다. 강력 먼지제거제를 이용해서 먼지를 다 제거하고 나니 지금 현재 너무나도 조용하게 컴퓨터가 작동합니다.
사실 컴퓨터의 외관을 보면 무척이나 깨끗합니다. 먼지하나 묻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컴퓨터 본체의 내부는 먼지투성이 그 자체였지요.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먼지가 나중에 커다란 소리를 내는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하긴 보이는 곳은 열심히 청소하는 우리들입니다. 혹시 몸의 겉에 때를 시커멓게 뭍이고 다니는 분이 계실까요? 아니지요. 남들에게 보이는 부분은 최대한 깨끗하게 보이려고 노력하지요. 그러나 몸 안에 있는 콜레스테롤이나 지방질 등은 어때요? 그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홀히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술, 담배도 많이 하고, 불규칙인 식사 그리고 인스턴트식품 등 몸에 안 좋은 것을 얼마나 많이 즐깁니까?
내 몸 안 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은 어떠한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 마음은 과연 깨끗할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열심히 살고 있었을까요? 혹시 각종 욕심으로, 또한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점점 지저분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더불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지향할 것을 이야기해주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겉만이 아니라 속도 깨끗한 진짜로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목욕탕에서 지저분한 내 몸의 때를 다 밀고 나면 얼마나 개운합니까? 하지만 그것 아세요? 내 마음의 때를 다 밀고 나면 더 개운하다는 것을…….
이 사순시기. 이렇게 내 마음의 때를 완전히 없애는 은혜로운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성공은 능력보다 열정에 의해서 좌우된다. 승리자는 자신의 일에 몸과 영혼을 다 바친 사람이다(찰스 북스톤).
지혜가 담긴 人生의 도움말(‘좋은 글’ 중에서)
내가 남한테 주는 것은 언젠가 내게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내가 남한테 던지는 것은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달릴 준비를 하는 마라톤 선수가 옷을 벗어 던지듯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잡념을 벗어던져야 한다.
남을 좋은 쪽으로 이끄는 사람은 사다리와 같다. 자신의 두 발은 땅에 있지만, 머리는 벌써 높은 곳에 있다.
행복의 모습은 불행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고, 죽음의 모습은 병든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웃음소리가 나는 집엔 행복이 와서 들여다보고, 고함 소리가 나는 집엔 불행이 와서 들여다본다.
받는 기쁨은 짧고 주는 기쁨은 길다. 늘 기쁘게 사는 사람은 주는 기쁨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이는 가난과 싸우고 어떤 이는 재물과 싸운다. 가난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은 많으나 재물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은 적다.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넘어졌다 일어나 다시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느낌 없는 책 읽으나 마나, 깨달음 없는 종교 믿으나 마나. 진실 없는 친구 사귀나 마나, 자기희생 없는 사랑 하나 마나.
마음이 원래부터 없는 이는 바보이고, 가진 마음을 버리는 이는 성인이다.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는 이는 똑똑한 사람이고, 비뚤어진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성인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돈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낮이 즐겁고, 육체로 결혼한 사람은 밤이 즐겁다. 그러나 마음으로 결혼한 사람은 밤낮이 다 즐겁다.
황금의 빛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고, 애욕의 불이 마음에 검은 그을음을 만든다.
두 도둑이 죽어 저승에 갔다. 한 도둑은 남의 재물을 훔쳐 지옥에 갔고, 한 도둑은 남의 슬픔을 훔쳐 천당에 갔다.
먹이가 있는 곳엔 틀림없이 적이 있다. 영광이 있는 곳엔 틀림없이 상처가 있다.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작아진다.
남자는 여자의 생일을 기억하되 나이는 기억하지 말고, 여자는 남자의 용기는 기억하되 실수는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어린 소녀 순교자 마리아 고레띠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원수를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성녀만큼 이 말씀을 잘 실천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고레띠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앙코나 부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가정 일을 도와야했습니다. 네뚜노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을 때 아버지가 과로로 돌아가셨고 마리아는 어머니까지 위로하면서 더 많은 일을 해 내야했습니다.
마리아는 거짓말을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께 겸손하게 순종하였고 매일 저녁 가족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모신심이 강해지면서 정결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묵주기도를 바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마리아는 10개월이 넘게 첫영성체 교리를 틈틈이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마리아가 일해 주는 가정에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지닌 20살 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단순한 욕정으로 마리아를 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는 기회를 노려 마리아가 혼자 남게 되자 그녀를 껴안았고 마리아는 강하게 뿌리쳤습니다. 어머니에게 말하면 모두 죽여 버린다고 무섭게 협박하고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은 못하고 어머니께 함께 있어 달라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어머니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결국 마리아를 집에 혼자 남겨놓습니다. 이미 알렉산더는 이번에도 자신을 거부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칼을 들고 마리아를 주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마리아는 “안돼, 안돼! 하느님이 원치 않아요, 그렇게 하면 지옥에 가요!” 하고 외쳤고 화가 치민 알렉산더는 거부하며 쳐든 손바닥을 시작으로 마리아의 온 몸에 십 수 번을 찔렀습니다. 마리아는 20시간 동안의 큰 임종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머니를 위로하고 가족을 걱정했습니다.
종부성사를 주시는 신부님은 고레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듯이 너도 살인자를 용서하겠느냐?”
“예, 신부님 그를 용서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그 사람도 저와 같이 낙원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 아름다운 부인이 서계신 것이 보여요.”하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는 30년 형을 받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고레띠는 그의 꿈에 나타나 그에게 백합꽃을 전해 주었고 그 환시를 본 후 알렉산더도 회개하고 모범적으로 살다가 풀려나와서는 고레띠의 어머니 아쑨따를 찾아가 무릎을 꿇게 사죄를 청했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아 고레띠가 너를 용서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라고 하며 함께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이후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가 정원사로 나머지 생을 보속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그릇된 길을 가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청합니다. 나처럼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게으름에서 도망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원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원수까지도 성인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어쩌면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에게 작은 잘못을 하는 사람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아주 구체적으로 무엇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 사람도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이웃은 우리 자신들의 거울입니다. 상대가 미워지는 이유는 결국 내 자신이 미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모님은 누구도 미워하실 수 없었고 당신들을 박해하는 이들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결국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어야합니다.
원수 사랑
류충희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대립명제’(마태5,21-48) 중 여섯 번째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본받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끼리끼리 사랑하고 잘해주는 것은 어느 집단에서고 볼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죄인들조차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사랑하고 베풉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원수들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들에게나 불의한 이들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그리스도인들 역시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때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답다는 칭송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이 가르침을 지키기 어렵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으로 나날이 성장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원대한 목표에 도달해야 합니다.
완전한 사랑의 단계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 때 저를 매우 헷갈리고 곤혹스럽게 했던 말씀입니다.
10대, 20대 때는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인 내가 하느님처럼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저는 이 말씀대로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심에 무결점의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나중에야 이 말씀은 결점이 없는 초능력의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 하느님처럼 되라는, 완전한 사랑을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사랑”
수도생활 쇄신과 적응에 관한 교령, “Perfectae Caritatis(완전한 사랑)"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 이것을 수도생활의 목적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이 수도자만의 것이겠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입니까?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나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올해 한 해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인사이동 후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구체적인 사랑의 목표를 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모 형제를 사랑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형제는 저의 기도가 제일 많이 필요한 형제는 아닙니다.
이 형제는 제가 사랑하기 힘들어 하는, 그래서 제가 극복해야 할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면 저는 사랑에 있어서 한 단계 올라가는 것입니다.
건물의 가장 꼭대기까지 가는데 계단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데도 단계가 있습니다.
저의 일을 적극 지지하고 도와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저의 일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저의 일을 그저 흐뭇이 봐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저의 일을 좋게 보진 않지만 반대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저의 일을 반대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저의 일을 훼방놓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저의 일을 완전히 망쳐놓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일이 아니라 저를 망가뜨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단계들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단계를 밟아 올라가 마침내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원수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저는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높은 계단일수록 그만큼 오르기 더 힘든 것처럼 제가 사랑하기 힘든 형제일수록 저를 사랑의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게 할 고마운 형제인 것입니다.
제가 한꺼번에 사랑의 정상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하여 저는 성녀 소화 데레사처럼 사랑에 있어서도 가난하고 겸손하게 작은 사랑부터 차츰 차츰 큰 사랑으로 낮은 사랑부터 차츰 차츰 높은 사랑으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완전한 사람
배미애 수녀님
초대교회사 문헌을 보면, 결혼생활을 법률이나 관습 등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당시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부부애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 가정으로 나타난다. 남편은 혼인에 대한 순수한 신뢰를 지키며 새 생명이 잉태되고 태어나도록 지키고 보호한다. 이교도들은 이를 조롱하고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면서도, 한편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처럼 혼인 생활이 보호받고 남편에게 존경받으며 품위 있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무엇으로 가톨릭 신자임을 보여주며 살아 있는 표징이 될 수 있을까? 대중식당에서 성호를 긋고 식사하는 것인가? 주일미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인가? 초대교회 신자들이 그토록 조롱을 받으며 굳세게 지켰던 신앙은 모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버림받고, 살인자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셨으며, 모든 죄인을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신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들이 믿음을 실천했기에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들로 드러났던 것이다.
오늘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복음 말씀은 계속된다. 어떻게 하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완전해지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고 뛰어넘어야 할 두려움은 무엇인가?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던 그리스도의 초월정신을 닮고자 하는 열망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게, 쓰러져 가는 우리를 완전한 사람으로 일으켜 세우고 있다.
"평생과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직장 잡기도 힘들고 직장 일도 매우 힘들다 합니다.
인원 감축으로 강도 높은 일에다가 생존과 직결된 일터이기에 일에 올인하다 보면 저절로 일중독이 되어버린다 합니다.
일이 삶의 일부가 아닌 삶의 전부가 된다는 사실이, 일의 노예 되어 일 속에 빠져 자기를 잃게 된다는 사실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사순 시기 성무일도 아침 찬미가 1연입니다.
“이윽고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은총에 넘치는 때 빛나는 도다.
절제의 약으로써 병든 세상을
치료해 주시고자 정한 시기네.”
사순 시기는 하느님을 찾고 또 본래의 참 나를 찾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은총의 시간입니다.
나는 나일뿐 그 누구, 무엇도 나를 대치할 수 없습니다.
성무일도 시 유달리 눈에 띤 계약, 계명, 법이라는 단어가 든 시편구절이었습니다.
“내 계약을 네 자손이 지켜나가고, 내 계명을 따르기만 한다면, 그들의 자손들도 영원토록 네 왕좌에 앉으리라 하셨나이다.”(시편132,12).
“당신의 법을 아니 잊었사오니, 이 고생을 보시고 구하여 주옵소서.”(시편119,153).
사람이 되는 길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생각이나 마음만으로 막연히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계약을, 계명을, 규정을, 법을 지켜야 비로소 사람이 됩니다.
오늘날 위기는 법대로가 아닌 욕심대로 산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적게 알아도 몸소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이나 수도규칙의 말씀, 온통 행하라는, 하여 수행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명사(名詞)를 많이 알아도 동사(動詞)가 되지 않으면 그런 명사들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합니다.
제1독서 모세의 서두 말씀의 강조점도 똑같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wholeheartedly)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이래야 그분 소유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뭇 민족들에게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된다 하십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화답송 후렴도 평범한 진리의 재확인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은 행복하여라.”(시편119,1ㄴ).
몰라서 못사는 게 아니라 알아도 명심하여 실행하지 않아 못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모세의 명령을 구체화시켜 우리 모두에게 평생과제를 부여하십니다.
이게 사람으로 태어난 긍지이자 하느님께서 주신 평생책임이자 숙제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매일 미사 때 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참 어려운 그러나 할 수 있는 평생숙제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의인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차별 없고 편애 없는 공평무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끼리끼리 유유상종의 패거리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간곡한 권고 말씀, 역시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하늘의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하느님 수준에 까지 올려보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욕심입니다.
우리 삶의 거룩함은 하느님의 온전함(wholeness)을 보여줘야 합니다.
평생 차별 없고, 편애 없는 공평무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때 우리의 삶은 점차 거룩하고 온전해 질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점차 이런 하느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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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이었습니다. 아침 운동을 가기 위해서 자전거 복장을 갖추어 입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곧바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맞습니다. 비가 오고 있었거든요. 물론 비를 맞으면서도 자전거를 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비까지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순간 괜히 짜증이 나네요.
‘아니, 계속해서 비가 오지 않더니만, 내가 자전거를 타려고 하니까 비가 오네?’
9시. 봉성체가 있습니다. 저는 성체를 모시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비가 아직도 옵니다.
‘열다섯 집이나 방문을 해야 하는데, 구질구질하게 비는 왜 오는 거야?’
봉성체가 끝나고 신학교 입학식에 참여하기 위해 강화로 출발했습니다. 빗줄기가 더욱 더 굵어집니다. 저는 조수석에 앉아서 운전을 하지는 않았지만, 차를 몰고 외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날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러한 마음이 생깁니다.
‘비 좀 이제 그치지…….’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 대한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단 한 순간도 이 비가 좋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요. 짜증이 났고, 비 오는 탓을 했고, 비가 좀 그쳤으면 하는 마음을 간직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마음을 간직했을까요? 아닙니다. 요즘에 날씨가 가물어서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지요. 그 분들이 보기에 어제의 날씨는 어떨까요? 아마도 주님께서 특별히 배려해주신 아주 좋은 날씨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최악의 날씨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최선의 날씨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최악’이라는 마음을 ‘최선’의 마음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나를 낮춘다면, 즉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철저히 살아간다면 어떠한 순간에도 ‘최선’의 삶으로 멋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전지전능한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래서 놀라운 기적을 팍팍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완전한 사람이란 사랑으로 완전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외아들까지도 내어 놓으신 그 완전한 사랑을 본받아서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주님처럼 낮아져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최선의 마음은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신 사랑의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최선’의 마음입니다. 이 ‘최선’의 마음이 항상 나의 마음에 가득하는 사순시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남의 탓을 하지 맙시다.
역발상 동물원('행복한 동행' 중에서)
거대한 초원이 있는 탄자니아는 충분한 햇빛이 쏟아지고 적당히 비가 내려 다양한 열대 동물들이 살아가기에 이상적인 환경이다. 그러나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탄자니아의 동물원은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동물원의 한 직원이 우연히 어느 신문 기사를 보고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얻었다.
당시 탄자니아의 한 시골 마을 주민들은 이리의 잦은 습격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현지 주민들은 보통 집에 문을 달지 않았기 때문에 외출 시 아이들의 안전이 문제였다. 그러던 중 한 여인이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녀는 대장간에서 철창을 만들어 와 어린아이를 그 안에 안전히 두고 외출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온 그녀는 굶주린 이리 한 마리가 철창 주위를 맴돌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곧장 나무 막대기를 들어 그 이리를 쫓아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동물원 직원은 이 기사를 보고 재미있는 아이더어를 떠올렸다. '동물원을 찾는 관광객들과 동물들의 역할을 바꿔 보면 어떨까? 관광객들을 차 안에 가두고 자연 상태로 방목 중인 동물을 구경한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책임자에게 건의한 그의 아이디어는 신속히 수용되어 실행에 옮겨졌다. 그리하여 관광객들은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호랑이, 숲 속에서 우아하게 걸어가는 코끼리, 무리를 지어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탄자니아 동물원은 '역할 전환'이라는 역발상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된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허찬란 신부님
주일학교 1학년 때부터 교리 선생님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귀가 닳도록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제 머릿속에는 원수에 대한 사랑이 마치 가능한 일처럼 자연스럽게 고정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그렇게 잘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완전하신 아버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인간인 우리가 원수마저 사랑할 수 있는 성덕을 갖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전국 성직자, 수도자 성령세미나에 참석하였을 때 지도를 해주셨던 한 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저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제 죄,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저의 한계를 오늘도 당신의 십자가에 맡기오니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사제로서 숱하게 많은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던지며 살아온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원수에 대한 증오와 그 무게를 다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왔을까요?
원수, 또 다른 나
이동훈 신부님
농사를 짓는 데 잡초와 해충은 농작물의 양분을 빼앗아 가며, 성장을 방해하여 소출을 적게 하는 원수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농사는 해충, 잡초와의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류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량의 화학 살상 무기(농약)를 개발하여 광범위하게 사용해 왔다. 인간이 사용한 무기는 놀라운 효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인간이 잡초에게 승리를 거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살포된 농약은 해충과 잡초만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물길을 따라 다른 생명까지도 위협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봄이면 찾아와 노래하던 새들도, 들판을 뛰놀던 짐승들도 사라져 버렸다. 봄이 왔지만 자연이 들려주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생물학자인 레이첼 카슨은 1962년 「침묵의 봄」을 발표하여 만능으로 여기며 사용했던 농약의 해악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농약이 해충과 잡초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파괴해 결국 먹이사슬 정점에 있는 인간에게도 치명적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소출을 조금 덜 내는 대신에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유기농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결국 조상들의 농사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상들의 농사방식은 자연의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생태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나에게 피해를 준다고 해서 원수로 대하고 그것을 멸종시키려 하다가는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조상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수는 처치하여 그 존재를 없앰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현대인을 괴롭히는 암이라는 질병도 결국 자신만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현대인들에게 주어지는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대체의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수술하여 종양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암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암세포가 차지하는 공간을 허락하고, 암세포가 아닌 공간이 더 많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암세포도 결국은 자신의 일부이므로 암세포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암세포는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이다.
최현욱 신부님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먼저 몇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원수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십시오. 원수처럼 생각되는 사람이 없다면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이라도 떠올려 보십시오.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 떠올려지는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은 분명히 여러분에게 어떤 큰 피해를 가져다주었거나 상처를 안겨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라고 한다면 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사실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도 항상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미워하는 사람, 원수로 여기고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해라,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라.”라는 제 말을 듣고 오히려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렇게 하고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제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하고, 또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 “당신은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반문하실 분 있습니까? 아마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원수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 당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주신 것을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저는 죽어도 그 사람만큼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많은 고통을 주고 상처를 가져다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무조건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을 따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어떻게 나만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도저히 질 수 없는 짐을 지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면서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를 참으로 은총의 시기로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김훈일 신부님
원수지간으로 지내는 이들을 보거나 내가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과연 인간에게 진정한 용서가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많은 경우에 그들은 대부분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거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도 멀리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내 삶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멀리서 던지는 비수는 옆구리를 스치지만 가까이에서 던지는 비수는 가슴을 찌른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누구에게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가를 생각해 보면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가 가장 오래 가고 치유하기 힘이 듭니다. 대부분의 원수는 사랑해야 했거나 사랑받아야 했던 사람들에게서 만들어집니다. 즉 사랑의 실패가 원수를 낳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없애는 길은 다시 사랑하는 방법밖에 없어 보입니다. 다시 원수를 사랑하려면 우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계속 개발하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용서의 힘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의 힘도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그다음 원수의 악한 행동 즉 우리에게 상처를 준 행동이 결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사람의 인품은 두 마리가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쌍두마차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죄는 있지만 악인은 없습니다.
본성을 거슬러
강희수 수사님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용서와 마찬가지로 너무 어려운 말씀입니다. 내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당신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이 말씀을 내 문제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분명 저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끊임없이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드러낼 은총을 이미 받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한 이런저런 결심이 벌써부터 무너지고 있습니다. 다 지킬 수 있다고, 다 지키겠노라 큰소리쳤는데 하루하루 지날수록 자신감은 무너져 갑니다. 이런 저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너도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완전함이란 단어에서 쉽게 알 수 있듯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매번 철저하게 용서를 하는 저를 바라시는 것이라면 저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곤 하지만 주님 역시 매번 말씀하십니다. “너는 할 수 있다.”
사순시기는 제가 얼마나 의지가 약한 사람인지 알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약한 의지로 혼자서 해보겠다고 애써 봐야 남는 것은 자신에 대한 실망뿐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내 의지로 뭔가를 할 때 무너지기만 하는 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저를 봅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함께해 주실 때 비로소 제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제가 해보려고 하기보다는 주님께 내어드릴 때 제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당신을 찾습니다. 그것은 제 의지를 꺾고 당신께 의지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사실은 나의 실패, 실망이 아니라 당신이 필요없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임을.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게 하는 원수에 대한 사랑과 기도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제시된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가르친다. 6개의 대당명제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면,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이들 대당명제는 예수님 특유의 '너희는 들었다'는 기본명제(基本命題)와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반명제(反命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반명제로 훈시된 가르침을 따라 행하는 것이 곧 '더 옳게' 사는 방법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나마 '옳게' 산다고 하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더 옳게' 살기를 실천하기는 분명히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사는 방법과 이론은 배웠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보다 더 엄청난 요구가 제시된다. 예수께서 우리더러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48절)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닌가? 걸음마도 채 배우기 전에 달리기를 하라는 것인가? 그렇다고 주저 않지는 말자.
어제 복음과 연결하여 오늘 복음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첫 번째 대당명제를 통하여 행위의 결과보다 행위를 촉발하는 마음속의 의도와 원인이 더 중요함을 깨우쳐 주셨다. '살인하지 못한다.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기 목숨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출애 20,13; 21,12-17)는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옳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더 옳게' 사는 방법은 살인은 물론이며, 형제에게 폭언도 욕도 성도 내지 않는 것이고, 나아가 마음속으로 원한도 품지 않는 것이며, 원한이 있다면 즉각 화해를 청하는 것이었다. 어떤가? 이만큼 하는 것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좀 소극적이지 않는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 소극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더 옳게' 사는 방법이 결국은 소극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는 소극적인 행동을 넘어선 적극적인 행동에 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살펴보자. 기본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것이고, 반명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명제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반부는 구약의 율법조문이지만(레위 19,18), '원수를 미워하라'는 후반부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다. 구약성서에서도 원수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되려 살려주는 대목에서 사울이 "원수를 만나서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야훼께서 너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란다"(1사무 24,20)라고 말한 곳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마태오가 반명제를 만들기 위해서 사해(死海) 근처에 모여 살았던 꿈란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할지니, 그들은 자신의 죄과(罪過)대로 하느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는 대목을 빌어와 가필(加筆)한 것으로 추정한다. 출처야 어찌 되었던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44절)는 반명제를 선포하신다.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지 않는 행위는 분명 소극적인 행동이고, 화해를 청하는 일은 다소 적극적이기 하나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고 타협하는 일종의 중립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어떠한가? 이는 정히 적극적인 행동인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악한 사람의 악행을 보고 그 자리에서 벌(罰)하시고, 착한 사람의 선행을 보고 그 자리에서 상(償)을 내리신다면, 이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추구하는 '옳게' 사는 것에 장단을 맞추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악인(惡人)이나 선인(善人)을 보시고도 당장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계신다면,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더 옳게' 사는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면(45절), 이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행위로서 그분의 '아가페 사랑'에 일치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하느님의 완전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완전(完全)하다는 것은 '온전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다'는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서 '거룩함'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니 너희도 완전하게 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곧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레위 11,44-45; 1베드 1,13-21 참조)는 하느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요구인 것이다. 실로 엄청난 요구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아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은 간단한 표현이나 동정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수에 대한 사랑과 기도를 통하여 완전함과 거룩함에로 나아가는 길은 머리통에 가시가 박히고 두 손과 두 발이 못으로 뚫리는 엄청난 고통을 피해 갈 수 없는 길이다.
공평하신 하느님, 원수 사랑의 가능성
정호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좋고 옳기만 하지만 때론 우리와 너무 달라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는 신과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차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찾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바램은 항상 사람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오늘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사랑의 최고점이라고 불리는 원수사랑. 도대체 그것이 가능한지 사람들은 의심합니다. 그리고 이내 무리한 요구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며 말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런 원수와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단호한 입장을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 역시 변할 리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예수님은 그리 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두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단순한 고집에서 도대체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지 좀 더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다른 말씀 또한 들려주십니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해야 함은 단순히 원수를 대상으로 그들을 사랑해주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를 닮는 것임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후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기준을 설명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이른바 ‘공평하신 하느님’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공평하신 하느님이 원수 사랑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제 하느님에 대한 설명을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 던지시는 질문으로 변화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느님께서 공평하시듯 우리도 공평하게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들은 원수 사랑의 다른 부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싫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관심을 두고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만 간주하지만 예수님이 공평하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것은 원수 사랑이란 원수를 구분 짓는 사랑이 아니라 누구나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별 의미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다, 아님 내 편이다라는 식의 구분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그것은 자신의 욕심이 사람에게 표현된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수 사랑이란 하느님께서 세상에 움직이는 모든 사람의 모습과 내용에 상관 없이 모두 살 권리와 터전을 허락하시듯 우리 역시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런 맘으로 다가서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아니 나에게 원수와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행동이 곧 나의 악함으로 번지지 않도록 그에게도 같은 사랑을 베풀고 기도하기를 하느님은 바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가리지 않은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원수 사랑의 진실이요, 가능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마무리를 다음과 같이 맺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원수 사랑을 해야만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수마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든 이를 향한 사랑이 결국 우리를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는 첫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혹 우리를 힘겹게 하고, 혼동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그분이 바라시는 사랑의 모습은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는 사랑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원수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늘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이유일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이룹시다.
원수를 사랑하라.
강영구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대에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제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적대적(敵對的) 공생관계(共生關係)’에 있으면 원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원수가 있어야 비로소 적개심으로 가득 찬 나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대적 공생관계는 썩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지옥을 만들고 공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원수니 벗이니 하는 구별자체를 없애는 것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 눈에 원수니 벗이니, 악한 사람이니 선한 사람이니, 옳은 사람이니 옳지 않은 사람 따위의 구별이 있을까요?
원수와 벗,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옳은 사람과 옳지 못한 사람 따위의 구별은 옹졸한 인간들이 편 가르기 하려고 만들어 놓은 구별입니다. 편을 갈라야 자신들의 권력욕과 탐욕을 충족시킬 수 있고 이득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의 눈에는 모든 존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랑스러운 자녀일 뿐입니다.
당신 가슴에서 미움과 증오, 적개심을 버리십시오.
사랑과 자비와 용서만 남겨 놓으십시오.
당신의 머리에서 원수니 적이니 하는 말 자체를 지워버리십시오.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운 형제자매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는 일은 죽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오늘이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이기양 신부님
복 음 :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 중에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말씀이지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대표적인 말씀인 이유는 단지 말씀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 말씀의 실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자 비신자나 할 것 없이 기억하고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5,43)하시면서 큰 계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4-45)
신자들은 비신자들과는 삶이 달라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이어서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6-47)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 자기와 친한 사람과는 인사를 하며 지냅니다. 우리가 여기에 머무른다면 신자로서 비신자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여기에 머무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좋아하고 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삶이라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지요. 세리나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대상을 구분하지 말고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는 말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올바른 율법 해석에 힘입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할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롭게 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왔다면 어렵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수정해야 합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주신 말씀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 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 준 후에는 돌에다가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지요. 미움은 모래에 새겨서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고 은혜는 돌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지요. 다치고 힘겨워지는 사람은 미움을 새겨 놓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요. 프란시스 베인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수할 때 인간은 그 원수와 같은 수준이 된다. 그러나 용서할 때 그는 그 원수보다 위에 서 있다."
더 큰 사람은 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며 결국 악순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고 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실천의 삶이 우리 신자들의 삶이어야 하며, 그럴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좀 다른 사람도 기꺼이 인사하고 받아들이며 친교를 맺고 미움은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지요.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유광수 신부님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면, 너희가 남보다 잘 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장차 나는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가?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누구나 다 한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인생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정치인은 대통령이 되는 것일 것이요, 운동 선수는 세계 챔피온이 되는 것이요, 기업인은 세계 일류가 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면서 많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도대체 수도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사제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러나 얼른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해답은 수도생활과 사제 생활을 한참 한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그럼 그 해답이 무엇일까?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내 삶의 목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나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요, 수도생활과 사제 생활의 목표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을"완덕(完德)"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완덕으로 나아가는 길", "완덕의 생활"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의회 이후부터는 "완덕"이라는 말 대신에 "聖德"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왜 그랬는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늘의 아버지를 닮으라는 말이다.
왜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가? 하늘의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아버지란 어떤 분이신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스스로 거룩하게 행동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야 한다."(레위 11,44-4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원형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룩해야 한다.
둘째는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는 법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인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그래서 성 바오로도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데살 전 4, 3. 7)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완덕"이라는 말 대신에 성덕(聖德)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 "성화 되는 길"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목표는 또 모든 신앙인의 목표는 聖人이 되는 것이다. 나라 대통령도 아니요, 재벌가도 아닌 성인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의 목표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따라서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의 성소(聖召)이다. 이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성화 성소의 보편성"이라고 한다. 조금 더 이 부분에 대해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인용하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그것입니다."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교회 안에서 성직계에 속하는 사람이나 성직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다 성화(聖化)의 성소를 받는 것이다. 교회의 이 거룩함은 성령이 신도들 안에서 맺어주시는 은총의 열매로써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며 또 나타나야 할 것이다.
모든 완덕의 천상 스승이시며 모범이신 주 예수께서 친히 거룩한 생활의 원천이시요, 완성자로서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생활의 성화를 요구하시며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완전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마태 5, 48)하시었다....
따라서 신분과 계급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크리스챤들이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을 실현하도록 불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며, 이 성덕은 현세 사회에 있어서도 보다 인간다운 생활 양식의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완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힘을 다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의 모습을 닮아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의 뜻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헌신해야 하겠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의 성덕은 교회사에 있어서 많은 성인 성녀들의 생활이 빛나는 증거를 보여 준 것처럼 풍부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계시 헌장 5장 39.40항 참조)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성인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 또한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신다.(요한1,4,16)"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다. 그러므로 가장 필요한 첫째 은혜는 사랑이며 이 사랑으로써 우리는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영혼 안에서 좋은 씨같이 자라서 결실하기 위해서는 각 신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하느님의 듯을 행동으로 채워 드릴 것이며,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와 거룩한 전례 행위에 자주 참여할 것이며, 기도와 자아 포기와 행동으로서의 형제적 봉사와 모든 덕행 실천에 항구할 것이다.
완덕의 끈이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모든 성화 수단을 지배하고 힘있게 하며 목적을 달성케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으므로, 주님과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있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성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가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도 아버지를 닮아 성인이 되어야 한다. 성인이 되려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랑은 거룩함이다.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가르친다. 오늘의 기본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반명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것이다. 이로써 여섯 가지 대당명제가 모두 선포되었다.
이를 다시금 정리하자면, 예수께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셨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밝혀주신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선포된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하라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기본명제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반부는 구약의 율법조문이지만(레위 19,18), "원수를 미워하라"는 후반부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오히려 원수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 부분은 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되려 살려주는 대목에서 사울이 "원수를 만나서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야훼께서 너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란다"(1사무 24,20)라고 말한 곳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반명제를 위해서 사해(死海) 근처에 모여 살았던 꿈란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할지니, 그들은 자신의 죄과(罪過)대로 하느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는 대목을 마태오가 빌어와 가필(加筆)한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 예수님의 요구는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웃과 원수의 구별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가 내 이웃이며, 누가 내 원수인가?"라는 물음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의(義)를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의 새로운 의로움에 따르면, 우리가 내 이웃이 아닌 사람들을 원수로 규정하고 내 이웃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이웃끼리 인사하고 잘 지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리들과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따라서 거기엔 어떠한 상(償)도 더 나음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내 이웃이나 원수에게 똑같이 대해주시기 때문이다.(45절)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模像)을 따라 빚어졌기 때문이다.(창세 1,26) 어떤 원수라도 그가 사랑을 받는다면 그는 원수가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는 어떤 원수도 없다.
이로써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대당명제의 깊은 의도와 의중이 모두 드러났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는 것 안에 있다. 완전(完全)하다는 것은 "온전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다"는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는 늘 혼란스럽고 갈라지며 그 마음 또한 조석(朝夕)으로 변한다. 굳은 결심으로 시작한 하루가 그 마감시간에는 깨지고 흩어진 마음을 주워 모아야 하는 아픔으로 반복된다. 속으로는 한결같은 마음을 먹지만 마주 대하는 상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을 배우고 익히도록 요구된다.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은 그분이 인간에 대한 어떤 차별도 없이 수행하시는 사랑에서 드러난다. 하느님 사랑의 방법에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곧 완전하게 되는 길이다.
오늘은 적어도 왜 하느님께서 선인(善人)에게 바로 상(償)을 주지 않으시고, 악인(惡人)에게 바로 벌(罰)을 내리지 않으시냐고 말하지 말자. 그래서 하느님은 오늘도 침묵(沈默)만 하고 계신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똑같이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에서 우러나는 창조적이고 거룩한 사랑인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산상수훈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주님께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산상수훈은 주님이 우리가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이 아버지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1.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 “천부”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집중적으로 사용된 성서의 다른 본문은 없습니다. 산상수훈 전체에서 18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5장에서 세 번(16,45,48절) 그리고 6장은 무려 13번(1,4,6,6 8,9,13,14,15,18,18,26,32절) 그리고 7장에는 두 번(26,32절)이 나옵니다.
반면에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5장에서 5번(8,9,34,35,45), 6장에서 3번(8,24,30절)만 나올 뿐입니다. 더욱이 6,8의 하느님은 “너희 아버지”라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 호칭은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나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에 대하여 관계에 따라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을 아무한테나 사용할 수 없으며 아무에게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허용할 사람도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빠”라고 부를 때 그 관계는 사랑과 신뢰이듯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도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은 특히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까? 이것은 큰 복입니다. 이렇게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느님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올바른 자식이 되어 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까? 가출 또는 미아가 되어 아버지 품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자연스레 “아버지”로 불려질 수 있기를..........
2. 누가 아들다운 사람입니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진정 아들다운 삶일까요?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내용을 매우 중요하게 그리고 비중있게 다루셨습니다.
5,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5,43-45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6,14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위 3개의 성귀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전제는 5,9의 평화와 5,43-45의 사랑과 6,14의 용서입니다. 이런 기본전제에서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이 평화와 사랑 그리고 용서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복음에는 세리와 이방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과 대립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자기에게 문안하는 사람에게만 문안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도 즉, 세리와 이방인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원수라고 사랑해야하고 박해하는 자까지도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들이 될 수 있는 속성(품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이런 품성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분명히 우리 삶에 하느님을 닮은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48절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다시말하면 하느님 아버지를 완전히 닮은 아들다운 모습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3. 아들이 받는 특권은 무엇입니까?
첫째, 마태 6,9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에서 보듯이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둘째, 마태 7,7-11입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에서 보듯이 아들과 아버지를 비유로 사용하시면서 우리가 구하는 것이야말로 아들 됨의 특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기도는 자녀 된 사람들의 가장 큰 특권입니다. 자녀이기에 아버지에게 때로는 무리한 요구도 합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구할 특권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기도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시어 말씀을 주시고 계심에 주목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의미는 이 땅의 아버지와의 차별화입니다. 땅의 아버지, 즉 육신의 아버지가 안 계셔 외로운 사람에게도 하늘의 아버지는 계시며 땅의 아버지가 무능력하여 모든 것을 만족하게 못해주더라도 하늘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책임지실 수 있습니다. 군대 보내면 옆에 있을 수 없고 출가시킨 후 아무리 사랑하는 아버지도 옆에 늘 붙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는 그 자녀 되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모든 것에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마태 6,8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또 6,32에서는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는 기도로 하겠습니다.
이 땅에 아버지 된 분들, 아버지 될 분들이여,
우리 자녀들이 아버지를 생각할 때 좋은 느낌이 들게 합시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든든하고 기뿐 좋은 느낌을 심어주므로 우리 자녀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이런 좋은 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삶이 되도록 허락해 주시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며 아버지의 아들된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자 되게 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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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고시에 탈락의 쓴 잔을 마신 고시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번만큼은 반드시 고시에 붙고 말리라는 다짐을 하고는 깊은 산 속에 있는 절로 들어갔습니다. 여덟 달 가까이 고시생은 밥 먹고 자는 것만 빼고 하루 열대여섯 시간을 공부에만 열중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자 그는 올해 시험에서는 무난히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하죠? 글쎄 시험날짜가 며칠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곧바로 산에서 내려와서 공중전화를 이용해서 시험날짜를 확인했지요. 확인해 보니 시험은 이틀 전에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시험날짜를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호칭에 어울리게 참으로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잊어버려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조차도 쉽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사랑의 계명보다도 더 엄격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기초해서,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를 실천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 강한 계명을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세리나 이방인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명하시지요.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려운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좋은 말씀이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성인 성녀가 아니고서야 보통 사람이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봐요. 사람을 미워하고 저주할 때, 우리 마음 안에 평화가 있을까요? 즉,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이 길이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니까요.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있어 더 크고 중요한 것을 쫓아갑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더 크고 중요한 것을 쫓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쾌락이나 일시적인 자기만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행복, 끊임없는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실천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씀을 절대로 잊지 않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계명. 절대로 잊지 마세요.
아들의 장래 희망(잭캔필드 외, ‘엄마와 아들’ 중에서)
일곱 살짜리 딸과 네 살짜리 아들을 매일 아침 탁아소에 맡기면서 어무런 후회를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멋진 일이 있고, 그동안 열심히 일해 인터넷 기업의 영업 부사장 비서까지 오른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20년간의 직장 생활 끝에 전업 주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편으로는 내 정체성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온라인뱅킹 신청서를 작성하다가 직업을 묻는 항목 앞에서 나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무직’란에 체크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결국 나에게 ‘실업자’라는 꼬리표를 붙여 주는 대신 신청서를 내던져 버렸다. 한동안 나는 그런 기분에 시달렸다.
하지만 스쿨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딸아이 학교 행사에 자원해서 참가하고, 아이들을 위해 맛있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몇 달을 보내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아들 코비는 종일 나와 함께 지냈는데, 코비 인생에서 처음으로 엄마를 혼자 다 갖게 된 것이다. 코비와 나는 산책을 하고 장난감도 만들고 축구를 하며 놀았다. 저 혼자 엄마를 독차지한 코비는 나날이 밝고 명랑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그동안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어느 날 공원에서 코비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엄마, 내가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알아요?”
“축구선수?”
“아니에요.” 코비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나는요, 종일 집에 있는 엄마가 될 거예요.”
내 마음은 온통 녹아내리고 말았다. 그 뒤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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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미켈란젤로는 고집이 세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그가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시스틴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되었지요. 고집 세고, 자신의 작품에 자부심이 강했던 그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시스틴 성당에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뒤, 무려 4년 동안이나 성당에 틀어박혀서 그림에만 매달렸다고 하네요.
어느 날이었습니다.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 구석구석에 정성스레 그림을 그리는 미켈란젤로를 보고 있었던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여보게, 그렇게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뭘 그렇게 정성을 들여 그림을 그리고 있나? 그 구석에 있는 그림이 완벽하게 그려졌는지 누가 알기나 한단 말인가?”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무심한 듯 이렇게 한마디를 던졌답니다.
“내가 안다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경을 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대충 대충 넘어가는 마음을 간직할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남의 눈에 잘 띄는 부분, 그럴싸한 부분만 멋지게 포장하여서 자신을 드러내려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그러면서 점점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못하는 우둔한 모습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크고 멋진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작고 별 것 아닌 것에 더 감동을 받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이에요.
제가 성지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것인데요. 성지 경당을 멋지게 꾸며 놓아도 또한 야외 쉼터를 예쁘게 만들어도, 여기에는 커다란 감동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즘처럼 봄으로 막 넘어가는 시기에 보이는 파릇파릇한 풀 한포기를 보면서 감동할 때가 더 많더라는 것입니다.
크고 멋진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어리석은 생각은 아니었을까요? 작은 것에 더 관심을 갖고 그 보이지 않는 곳에 사랑을 쏟아 부을 때, 더 많은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지 않았나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크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에만 신경쓰시는 분일까요? 그렇다면 완전한 분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작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부분까지도 신경을 쓰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에 완전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작고 별 것 아닌 것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처럼 이곳에 최고의 사랑을 쏟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 바로 나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나의 변화를 꿈 꿔 봅니다.
작다고 무시하지 맙시다.
뒷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노은, '여백 가득히 사랑을' 중에서)
누구에게나 뒷모습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감추거나 꾸밀 수 없는 참다운 자신의 모습이다.
그 순간의 삶이 뒷모습에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문득 눈을 들어 바라볼 때 내 앞에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면 내 발걸음도 경쾌해진다.
뒷모습이 쓸쓸한 사람을 바라보노라면 내 마음도 울적해진다.
얼굴이나 표정뿐만이 아니라 뒷모습에도 넉넉한 여유를 간직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면 이 세상은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거울 앞에서도 얼굴만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도 비추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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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의사라는 직업에 돈도 잘 벌었고, 사랑하는 아내가 늘 곁에 있었지요. 하루하루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행복을 가꾸어 가던 그는 어느 날 사고로 아내를 잃고 맙니다. 아내가 죽자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어요.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다시 병원으로 나와 일을 했지만 예전처럼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매사에 의욕이 없어 끼니도 거르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그는 급기야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휠체어 신세가 되어 몸마저 제대로 거동할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기에 이르렀지요.
바로 그 순간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어요. 그래서 그 뒤 그는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간호사에게 들켜서 실패로 돌아가지요. 그는 이 간호사 때문에 괴로운 삶을 계속 이어간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그 간호사가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간호사에게 바람을 쐬고 싶다며 바닷가 낭떠러지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기회를 엿보다가 바닷가로 몸을 던질 작정이었지요. 철썩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며 마지막 삶을 정리하는 생각에 잠겨있던 그에게 갑자기 간호사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글쎄 자신이 떨어져야 할 낭떠러지에 간호사가 그만 미끄러져 떨어진 것이지요.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간호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죽으려고 했지만 간호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자살하겠다는 생각은 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비명소리에 사람들이 바닷가로 모여들었고 잠시 후 남자가 몸이 축 늘어진 간호사를 안고 뭍으로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 본 사람들은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해 전혀 걸을 수 없었던 남자가 똑바로 걸어 나오고 있었으니까요.
이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진심으로 간절하다면 이렇게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그러한 일들을 우리들은 언론매체를 통해서 많이 접하기도 했지요. 특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적과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할 수 있습니까? 실수투성이고, 계속해서 죄를 짓고, 더군다나 하느님처럼 전능한 힘을 발휘할 수도 없는 우리들인데, 어떻게 완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적과 같은 전능한 힘을 닮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을 닮으라는 것이고, 이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앞서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이지요.
나를 완전함으로 이끌어주는 것, 나를 주님과 하나 됨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바로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내가 사랑하지 못했던 그 모든 것을 깊이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나의 가족들에게 사랑 가득한 행동을 하도록 합시다.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닦는 사람의 9가지 모습(공자)
첫째, 밝은 것을 보려 하는 사람
둘째, 남의 말을 새겨듣는 사람
셋째, 항상 온화한 표정은 짓는 사람
넷째, 남을 존경하는 태도를 짓는 사람
다섯째,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람
여섯째, 행동이 신중한 사람
일곱째, 의문점을 풀려 애쓰는 사람
여덟째, 화나는 일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
아홉째, 정의롭게 이득을 얻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