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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1년 3월 14일 (자) 사순 제4주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1.03.14|조회수218 목록 댓글 0

제1독서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와 해방으로 주님의 분노와 자비가 드러난다.>
▥ 역대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36,14-16.19-23
그 무렵 14 모든 지도 사제와 백성이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크게 배신하고,
주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에서 성별하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15 주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당신의 처소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16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19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었으며,
궁들을 모두 불에 태우고 값진 기물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20 그리고 칼데아 임금은 칼을 피하여 살아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켜,
그와 그 자손들의 종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1 그리하여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 땅은 밀린 안식년을 다 갚을 때까지
줄곧 황폐해진 채 안식년을 지내며 일흔 해를 채울 것이다.”
2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3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여러분은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4-10
형제 여러분, 4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6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10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4-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온 나라에 명을 내리고 칙서를 반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이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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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으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마침내 그들은 주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칼데아 임금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성전과 궁궐을 불태우고 살아남은 자들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유배시킨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리셨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선물로 구원된 우리는 선행으로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제2독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며, 그분을 믿는 것이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사순 제4주일에 강조되는 주제는 ‘기쁨’입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입당송). 예수님의 수난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 도대체 교회는 무엇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순간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하물며 내가 ‘하느님 사랑의 대상’임을 확인한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요? 
제1독서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외면에도 변함없이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유배하던 유다인들을 해방하여 준 페르시아 임금의 칙령이 사실은 하느님의 조처였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한결같고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복음에도 잘 드러납니다. 
광야에서 생활하며 되풀이하던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시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려고 구리 뱀을 들어 올리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여기에서 관심을 끄는 내용은 “-해야 한다”라는 표현입니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배상하거나 속죄하는 것은 사랑할 때 나오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니까 그를 대신해서라도 배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셔야 한다’라는 표현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난 주님의 희생을 의미하고, 그렇게 십자가는 사랑이 완성되는 자리가 됩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분을 ‘올려다보며’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렇게 날마다 ‘위’로부터 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참다운 삶의 ‘기쁨’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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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둠으로 덮여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인가 빛이 나타나고 조그마한 빛줄기가 새어 들어옵니다.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빛이 이제 세상으로 퍼져 나갑니다. 한 사람에게서 바로 옆 사람에게, 또 그 사람은 자신의 옆 사람에게 그 빛을 전합니다. 어둠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곳이 이제 모든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조그마한 빛으로 환히 밝혀집니다. 얼마 뒤에 있을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에 거행할 ‘빛의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위의 작은 이에게 관심을 가지기보다 이기적인 무관심으로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자신이 더 얻고 많이 가지고자 누군가를 짓밟고 뭉개며, 이 과정에서 써먹은 거짓과 술수는 미덕이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분열과 분쟁은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립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약하지만 한 줄기의 빛으로 어둠을 이겨 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한 분만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나누어 받고 그 빛대로 살아갈 때, 그리고 그 빛을 한 사람씩 나누어 가질 때에야 비로소 세상은 점차 밝아집니다. 나 혼자만 밝아진다고 좋아하기보다는 그 빛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환히 밝아질 것입니다.
어둠을 이겨 내는 방법은 오직 그 방법뿐입니다. 누군가는 그리스도의 빛을 손안에 받았지만, 어둠이 좋다며 그 빛을 꺼리고 외면합니다. 어떤 이는 빛을 받았지만, 빛을 어떻게 전할지 몰라 함지 속에 넣어 둡니다. 또 다른 이는 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시다며 갓을 씌워 빛을 가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러 빛으로 오셨지만, 우리는 스스로 그 빛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해 버립니다. 이것이 곧 심판입니다. 심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갈라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지금 심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들여다 봅시다.(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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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사순 제4주일의 의미를 밝혀 줍니다. 교회는 희생과 단식을 하며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미리 알려 주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주일에는 사제도 보라색 제의 대신 기쁨을 나타내는 분홍색 제의를 입을 수 있습니다.

바빌론강 기슭에서 시온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사람들,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키루스왕의 칙령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사랑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유배의 고통 중에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화와 치욕 속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치욕적인 죽음을 맞으실 때에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죽음과 생명, 낮춤과 올림의 역학이 함께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류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셔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하늘 높이 올라가시어 닫혔던 하늘 나라의 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의 신비를 통하여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발견하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풍성한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사순 시기의 재계는 십자가의 비움을 향해 걸어가는 행위인 동시에 영광의 행진입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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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병행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깊이 깨닫지 못하면 하느님도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구차한 변명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들의 입을 막기에 급급했습니다. 자신들이 인정하기 싫은 아픈 진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남에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과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려면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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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들어 올려진다’는 표현은 요한 복음의 특징적인 용어입니다. 요한 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때를 예수님께서 현양되시는 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이 드러나는 때라고 표현합니다. 요한 복음서 전반부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내용이 소개되는데, 심지어 그분께서 기적들을 행하시는 시기마저도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시기, 표징을 보여 주시는 시기로 이해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야말로 비로소 현양의 때, 영광의 때라고 강조합니다.

십 자가에 달리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극악무도한 흉악범이 비참하게 처형되는 순간에 불과하고, 좀 더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무죄한 의인이 이 세상의 권력에 불의하게 희생되는 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당신 외아드님이 가장 무력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기에 하느님의 아드님, 창조 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말씀, 신성을 지니신 그분께서 불의한 힘에 의하여 이렇게까지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을까요?

그 러나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힘의 행사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세상에 구원을 주십니다. 세상을 위하여 이렇게 생명을 바치시는 그 사랑이, 이 세상의 권세보다 강한 예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죽을 수는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구원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전능, 예수님의 현양은 그 전능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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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들어 올린 ‘광야의 뱀’은 민수기에 나옵니다. 이집트를 벗어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갑니다. 모세의 인도로 희망에 부풀어 떠납니다.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했기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은 사기를 꺾습니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밤낮으로 걷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조금씩 이집트의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불평합니다. ‘우리를 광야에서 죽일 셈이냐?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게 해 다오.’ 불평은 끝내 하느님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생존 자체가 기적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개입이 시작되었습니다. ‘뱀’이 나타난 것입니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그제야 백성은 뉘우치며 도움을 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계시가 모세에게 내립니다. ‘구리로 만든 뱀’을 장대에 달아 놓고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뉘우치는 마음으로 보는 이는 병이 나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을 ‘본다는 것’은, 그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 안에서 문제 해결을 ‘시도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 사순 시기의 넷째 주일의 교훈은 여기에 있습니다. 시련 앞에서도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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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라는 책을 보면, 그 첫 번째가 ‘사랑에 송두리째 걸어 보기’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이야말로 인간 사랑에 송두리째 거신 분이십니다.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하여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기꺼이 내놓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는 것을 막으시고, 당신의 소중한 외아들을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성공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능지수(IQ)가 높으면 될까요? 그런데 이 지능지수는 20%의 영향만을 준다고 합니다. 나머지 80%는 역경지수(AQ)와 감성지수(EQ)라고 합니다. 감성지수는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조절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마음의 지능지수입니다. 그리고 역경지수(AQ)는 역경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해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지수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일 중요한 지수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지능지수인 것처럼 생각해서 “너 IQ가 어떻게 돼?”라고 묻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경지수라고 합니다. 이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이 확실한 성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적개심을 가지고 복수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으로는 역경지수가 높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감정지수가 떨어져서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다시는 이런 불행이 반복되면 안 된다”라는 마음으로 지금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 자체에 사로잡혀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쉽게 포기하면서 어렵고 힘들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장 중요한 역경지수를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감정지수도 올라가면서 더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에 대해서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하시지요. 즉, 죄라는 독사에게 물린 사람은 누구나 주님만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보여줍니다. 위대한 의사이신 주님께서는 죄로 인해서 곪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몸을 굽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세상에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당연히 실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유혹은 참으로 많습니다.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힘을 직접 체험했지만, 광야에서 하느님을 배신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섰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죄의 유혹에서 주님의 일을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줍니다. 계속 주님의 일을 포기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주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구원의 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역경지수를 높여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관심은 미래에 있다. 그것은 내 삶의 나머지 부분을 미래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찰스 F.케터링).

 

사랑에 빠지십시오.
어떤 시인이 이렇게 글을 쓴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뼈를 깎는 아픔과 피를 말리는 고통이 따른다.”
맞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창작은 어려운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고통을 안고서 과연 아름다운 시,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주는 시를 쓸 수 있을까요? 본인 스스로가 이렇게 힘든데 말이지요.
의무감에 가득 차서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글 쓰는 것 자체가 즐겁다면 어떨까요? 물론 좋아하는 글만을 쓸 수도 없겠지요. 때로는 비판과 한이 담긴 글을 써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순간에도 한 가지가 있어야 행복하게 글을 쓸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사랑에 빠져라.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러면 사랑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머무는 사랑의 사람이 되면 어떨까요? 스스로도 행복할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야 하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불뱀에 물렸던 사람들이 구리뱀을 보고 치유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이 구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다 심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다 불뱀에 물려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하지만 죄에 물든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느님 외아들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얻어집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구리뱀을 보고 치유를 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먼저 모세의 말을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구리뱀의 이름이 곧 모세인 것입니다.

국어사전에서 ‘이름’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어떤 사물이나 단체를 다른 것과 구별하여 부르는 일정한 칭호”라고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이름은 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을 일컫는 칭호입니다. 누가 내 이름을 종이에 써서 태워버렸다고 해서 내가 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분은 나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이 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는 실존 인물 ‘제리 콘론’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아일랜드 인 제리 콘론이 망나니처럼 살기는 하였지만 큰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 폭탄 테러범으로 무기징역을 살게 됩니다. 이때 영국은 무고한 그의 아버지까지 감옥에 가둡니다. 아버지는 14년간 기도로 잘 참아냈지만 결국 감옥에서 숨집니다. 만약 제리 콘론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영원히 죄인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싸워 무죄를 입증하고 자신과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싸운 결과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 자체는 아니지만 그 사람의 존재를 품고 있는 그릇과 같고 그 사람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영광을 받으면 그 이름의 주체도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리뱀을 보고 구원을 받았던 이들은 결국 구리뱀의 이름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구리뱀을 계시한 인물이 누구인지 압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아버지를 품고 계시고 아버지를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품고 있으면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은 그리스도의 계시일 수밖에 없습니다.곧, ‘교회’입니다. 교회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우리는 매 주일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보편 된 교회를 믿으며”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이기 때문에 교회를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려면 먼저 가톨릭교회를 믿어야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겨울왕국 2’에서 안나가 동굴에 갇혀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눈사람 올라프의 희생 덕분으로 한 줄기 빛을 봅니다. 올라프는 마치 언니 엘사의 분신과 같습니다. 엘사의 목숨이 끊어지면 올라프도 죽습니다. 엘사가 올라프를 안나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가 동굴에 갇혀 죽지 않도록. 올라프는 무한 긍정 에너지로 엘사에게 빛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움직일 힘도 없었던 안나는 엘사와 올라프의 희생 덕분으로 힘을 얻어 그 동굴을 빠져나옵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은 그 동굴 속과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올라프와 같고 엘사와 동굴 속으로 비치는 빛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구원이 없습니다. 다른 구원의 중개자도 없습니다. 올라프를 거쳐야 엘사에게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 자체가 빛이라 믿는 사람들, 혹은 빛으로 나아갈 길이 여러 개라 말하는 사람들, 혹은 교회 없이 빛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면 자신도 빛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외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것 외에는 구원이 없고, 그 믿음은 당신께로 이끌도록 파견하신 교회에 대한 믿음에 근거합니다. 교회가 구원자이신 분께로 이끄는 유일한 길임을 믿어야, 교회 울타리 안으로 사람들을 이끌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선교의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흐리멍덩한 교리에 휩쓸리지 맙시다. 교회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CCC, 846)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9년 안식년을 지내면서 동창신부님과 이탈리아에 있는 ‘돌로미테’로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10일 동안 산장에서 자면서 산행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출발하면 다음 산장까지 오후 4시쯤 도착하였습니다. 점심은 산행 중에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친구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산을 오르는 것은 고단하고, 힘든 일입니다. 산행의 피곤함을 덜어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들에 핀 꽃을 보면서,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일행과 담소를 나누면서 피곤함을 잊습니다. 산행을 이끄는 대장은 적당한 시간에 모두가 지쳐갈 무렵에 쉬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20분 정도 쉬면서 물도 마시고, 짐도 다시 정리하고, 신발 끈도 다시 묶었습니다. 쉬는 시간이 없다면 산행은 고행(苦行)으로 끝날 것입니다. 잠시 쉬는 시간이 있기에 산행은 지난 날의 삶을 돌아보는 수행(修行)이 됩니다. 

군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기 위해서 매년 유격훈련을 받습니다. 유격훈련에는 계급이 필요 없습니다. 모두가 훈련병입니다. 줄을 타고 오르기도 하고, 기구에 매달려 계곡을 건너기도 하고, 줄에 의지해서 절벽에서 내려오기도 합니다. 훈련을 받기 전에는 체조를 합니다. 조교는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서 체조에 구령을 붙이도록 하였습니다. 마지막 번호에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소리가 나면 체조의 숫자는 배로 늘어났습니다. 고된 훈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의 진한 전우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훈련 중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호랑이 같은 조교도 그때는 담배를 나눠 피우는 전우가 됩니다. 장기자랑을 하기도 합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고된 훈련의 피곤함을 달랩니다. 유격훈련에 흘리는 땀방울은 전쟁에서 흘릴 피와 같다고 합니다.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인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은 사순시기를 지내는 교구민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난해 사순 시기에 우리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하는 미사의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코로나19라는 갑작스러운 상황이 우리 모두의 삶을 혼돈으로 내몰았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하고 힘든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회개의 시간인 이 사순 시기를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고통을 동반하지만 그 고통 역시 무의미하지 않고 때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고난과 고통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먼 훗날 코로나19는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인류에게 잠시 뒤를 보게 하였던 성찰의 시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오늘 사순 제4 주일의 말씀은 고된 산행 중에 잠시 쉬는 시간처럼, 유격훈련 중에 잠시 쉬는 시간처럼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폭풍우를 이겨낸 사람이 더 깊고,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인생은 폭풍우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폭풍우를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이제 곧 유배의 시간이 지나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고난이 끝날 것이라고 희망을 전해 줍니다. 

오늘 복음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과 같습니다. 해가 뜨면 곧 말라버리는 이슬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빛과 어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은 봄이다
어둠은 안 봄이다


보니 빛이다
안 보니 어둠이다 


빛은 모두 봄이다
어둠은 가려 봄이다


나와 너를
모두 보니 빛이다


나는 보되
너를 안 보면 어둠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에페2,10)
하느님의 작품인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만들어져 선행을 꺼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신앙공동체의 지형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신앙공공체가 고령화 초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19로 유,청소년,청년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저출산의 영향은 모든 공동체가 곳곳마다 위기의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본래 모든 피조물,특히 사람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신앙교육받고 진행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피상적에서 구체적인 사람으로 발전하며 하느님의 작품이 되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인간 구실을 제대로 드러내는 창조물로 말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3,21)
바리사이 중에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진정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는 하느님의 작품으로 발전되어 갈 것이다. 그는 진리를 실천하게 될 것이고 캄캄한 밤을 지나 영안을 자니고 빛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니코데모’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새롭게 창조되고 있음이다.
신앙공동체는 여러 요인으로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유.청소년, 청년들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새로이 창조된 하느님의 작품을 만들어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많은 유, 청소년, 청년들과 만나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아 대안없이 신앙교육이 정체되고 단절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 세대만 잘 살고 떠나면 되겠는가? 오늘을 사는 주인들이 후대를 위해 심각하게 걱정하고 대안을 찾아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특별히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며 하느님의 작품이다. 하느님의 작품이 되려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 선행을 사는 것도, 캄캄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도 신앙 안에 진행되고 성숙해 가야한다.

 

 

 

인생의 주체인 영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육신 건강한 사람들과 약하거나 환자들이 많듯 영혼도 참 다양하겠죠.
몸의 외형이 백인백색 다르듯 그 주체인 마음정신도 꽤나 다르겠지요.
믿음과 불신이 상반되듯 그 인생의 주체인 영혼도 다른 양상일겁니다. 

택배로 포장이나 박스에 뭐가 도착하면 뜯으면서 얼핏 생각해 봅니다.
세상권력 재물 지위로 포장되어 하늘로 택배 되는 인간들을 말입니다.
포장재들은 흙에서 처리되겠고 내용물인 영혼만 고차원이 받아보겠죠.

포장 뜯어 내용물만 받고 포장재 버리듯 육신포장은 버리고 말테지요.
육신 물질로 포장된 인생들이 떠들썩한 세상 내용물 생각하며 삽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전에 제가 수련장에서 있을 때 중고등부 아이들 캠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조금은 위험하고 아찔한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행여 작은 사고라도 나게 되면 얼마든지 문책을 받을 수도 있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한 열 명 정도의 한 그룹원이 지도교사와 함께 그룹작업을 하는데, 그 방법은 한 아이가 의자 위에 올라가서 눈을 감고, 뒤로 쓰러지듯 몸을 던지게 되고 다른 아홉 명의 친구들이 그 쓰러지는 친구를 받아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아이들 중에는 위험하다는 생각으로 시도조차 하지 않는 친구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게 돌아가면서 의자 위에 올라라 눈을 감고 뒤로 넘어졌고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를 안전하게 받아내면서 그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마쳤던 것입니다. 
사실 의자위에 올라가서 눈을 감고 뒤로 쓰러진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몸을 던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믿음입니다. 또한 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뒤로 쓰러지는 친구가 다치지 않게 하려고 잡아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다른 친구들을 믿는 마음과 믿어주는 그 친구를 꼭 잡아주려는 사랑의 마음이 함께하면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믿음과 사랑이 함께할 때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랑지극하시고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그분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6장28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이 만날 때 생명이 이루어지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순 제4주일>(2021. 3. 14.)(요한 3,14-21)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4-17).”


1)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또 베드로 사도는 최고의회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는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다른 생명도 없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2)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기력한 패배로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승리라고,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일은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은,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기 때문에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일과 비슷합니다.>


3)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목적’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모두 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그러나 그냥 ‘믿음’은 아니고,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사람의 아들 안에서’ 라는 말은,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밖’에서는(예수님이 아니면)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4)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을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마태 22,37).
그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 일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에도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회개와 구원만을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그것을 바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32).”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되찾은 양의 비유’를 보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늘에서 기뻐한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15,7). 우리의 회개와 구원은 우리 자신에게도, 하느님께도 ‘큰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느님께서 크게 슬퍼하신다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8-21).”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시고(마태 12,20),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십니다(마태 18,12).
그래서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격이 많이 부족하고, 노력도 많이 부족하더라도, 정말로 구제불능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버림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기를 희망하지 않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만이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스스로 심판을 선택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끝까지 구원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회개하려고 애를 쓰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김기남 세례자 요한 신부님
특별히 잘하는 운동은 없어도, 언제나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걷기’를 좋아합니다. 주로 어떤 목적지를 향해 걷거나 일정 시간을 걷습니다.
때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발걸음이 닿는 데로 길을 나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간에 쫓겨 서둘러 걸을 때와는 달리, 여유롭게 걸음을 내디딜 땐 계절에 따라 혹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아침 안개 사이에 어렴풋이 보이는 그곳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기도 하고, 해지는 노을을 향해 나아가기도 합니다. 길 한쪽에 소담히 핀 작은 꽃이 건네는 미소에 방긋이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마주치는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에 아쉬움을 남기며 발걸음을 떼기도 합니다.

교회도 사순 제4주일을 맞이하며 파스카 축제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순시기 동안 걷고 있는 이 길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계신가요?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어 들어 올린 구리 뱀(민수 21,4-9 참조)처럼, 훗날 십자가에 들어 올려질 당신의 모습을 이야기하십니다.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불평했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벌로 불 뱀들을 보내셨고, 뱀에 물린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주님께 간청했고, 모세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자 뱀에 물린 사람이 이를 바라보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저 구리로 만들어진 뱀일 뿐이지만, 죽을 위기에 빠진 이를 살렸던 광야의 구리 뱀처럼, 믿지 않는 이들이 보기엔 그저 나무로 만든 형틀에 죽은 이의 모습이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드님마저 내주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습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자신 있게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어디를 향하는지, 어떻게 가는지 몰라 헤매고 불평하며, 지쳐 쓰러진 저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감싸 안아주시고, 당신을 ‘바라보도록’ 부르십니다. 그러니 눈을 들어 그분의 크신 사랑을 바라보고 나아가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켜주시니, 빛으로 나아갑시다.



하느님의 선물
     임선혜 아녜스(성악가)
성악 창법 중에 콜로라투라(Coloratura)라는 것이 있습니다. 목소리로 곡예를 하듯 음계를 높게 또는 낮게, 빠르고 자유롭게 오가며 고난도의 기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밤의 여왕’ 아리아에서 그 진수를 들어볼 수 있는데요. 듣는 이들은 큰 희열과 스릴을 느껴 이에 열광하며 감탄하게 되지요.

유럽에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콜로라투라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한 메조소프라노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정말 재봉틀로 멋진 수를 놓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고 수려하게 해내더라고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어려움을 모르는지 표정마저 여유로우니, 놀라움은 배로 커졌지요. 단둘이 이동할 기회가 생겼을 때, “너의 콜로라투라는 정말 엄청나서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분명 그녀도 제 칭찬에 기뻐할 것으로 생각했죠.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너의 칭찬은 고마워. 하지만 나는 내 뛰어난 콜로라투라 테크닉을 자랑하거나 칭찬받을 자격은 없어.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잘 되는,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주어진 재능이거든.”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타고난 것이니 내가 으쓱하고 자랑할 일이 못 된다?’ 들어보지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대답이었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절대적인 기술임을 저도 물론 알고 있었지만 그걸 자기 입으로 겸손하게 고백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겸손을 위장하거나 가식인 듯한 얼굴빛도 아니었는데,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보아 칭찬을 들을 때마다 이같이 말했나 봅니다. 
그 뛰어난 기교로 무대 위 조명을 한 몸에 받는 가수가 자기 자랑과 칭찬을 사양하다니요.

그런데 오늘 제2독서에서 아래 구절을 우연히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그 동료의 말이 오래 남아 곱씹곤 했는데요. 생각해보니 우리는 예쁘고 잘생긴 외모, 훤칠한 키, 타고난 몸매, 명석한 두뇌, 뛰어난 학습능력 등, 사실 노력해서 얻은 것보다 타고난 것을 더 뽐내기 좋아하고, 또 부러워하고 있더라고요. 과연 그 동료는 그때 이미 저 성경 구절을 알고 있었던 걸까요?

그 동료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함께 떠올리며, ‘하느님의 선물’을 내 자랑삼아 어리석게 우쭐대지 않기로 다짐해봅니다. 
자랑하려면 하느님을 자랑해야겠다고…. 우리가 그 선물로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신 그분’의 작품답게 살아 야겠다고요.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죽음을 통해 믿는 모든 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죽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죽음은 그리스도교적 메시지에 있어서 핵심적 주제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메시지는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바로 죽음이 있는 곳에서 드러납니다.
플라톤은 죽음 앞에서도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보다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물어야 하고 이러한 질문은 대답해야 하는 자신의 행위에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죽음은 하나의 행위로서 그 행위는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었는지 혹은 나쁜 사람이었는지 보여줄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인간을 구성하는 영혼과 육신의 분리로 이해하는 사상이 일찌기 오르페우스와 그의 종교로부터 시작하여 플라톤, 플로티누스, 영지주의를 통하여 면면히 계승되었고 그리스도교 죽음 이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초대 교부들은 죽음을 나그네살이의 종착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교부들의 견해를 이어받아 베네딕도 12세의 회칙에서도 죽음을 나그네살이의 마지막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문헌에서는 의화된 인간은 죽은 후 즉시 하느님의 지복직관에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칼 라너는 죽음은 영혼의 시작이며 인간이 자유로이 자신의 현존재를 전체적으로 완성하는 최고의 행위로 이해합니다. 죽음은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바로 역사적 시간성에서 영원이라는 초월을 넘어가는 순간으로서 최종결단의 최고의 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이렇게 희망적이고 초월적인 얘기를 하여도 인간은 결국 육신을 지닌 존재이기에 죽음자체는 두렵게 다가옵니다. 특히 말할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수반하는 죽음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앙인들이 위로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속에서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 나그네살이의 종착점에 겪어야 할 고통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을 미래의 삶을 위해 우리의 영혼을 준비시켜 주는 영적 정화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상 순례 여정의 끝에 기쁨을 주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입니다.
성 보나벤뚜라의 ‘하느님께 나아가는 정신의 여정’은 죽음을 넘어선 영원을 바라보게 합니다. 
“기도하면 우리는 하느님께 상승하는 단계를 배울 빛을 얻습니다. 그분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물질적, 일시적, 외부적 흔적들을 먼저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길로 인도됨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영원하고 영적이며 내면적인 우리 자신의 영혼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걸어감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제일원리 하느님을 우러러 봄으로써 우리 위에 있는 영원한 상태, 온전히 영적인 상태로 넘어가야 합니다.”

 

 

 

니꼬데모와의 대화 
     조용국 프란치스코 신부님
찬미 예수님 
1.이젠 완연한 봄의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이 어려운 시기에도 진정 따뜻하고, 포근한 봄바람이 감돌길 기도해봅니다.. 
2.어느 시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남이라는 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겨울이 떠나야 봄이 오려나  봄이 돌아와야 겨울이 떠날건가
그게 아니지 봄이랑 겨울이 서로 만나 둘이서 예쁘게 풀꽃 피워서 
겨울에게 꽃신을 드리고, 봄에게 봄바람 드리고
그처럼 예쁘게 꽃신을 봄바람을 주고 받으며 떠나고 머무는거지“
3.겨울이 끝나가는 이 시점, 봄을 맞이하는 시점에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겨울과 봄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선물이며, 감사라는 것입니다.. 겨울이라는 인고의 세월은 봄의 새생명을 위한 준비이며, 봄이라는 찬란한 세월은 겨울에 대한 진정한 감사라는 것입니다.. 이쁜 풀꽃을 피워내는 봄은 혼자서 그리 하는 것이 아니라 겨울이 있었기에, 겨울과 함께 피어내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겨울에게는 감사의 마음으로 꽃신을 신겨주고, 봄에게는 따뜻한 봄바람을 선물로 준다는 것입니다.. 
4.서로 다른 계절이지만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시련의 시기도 잘 넘길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시련들을 통해 새로운 창조라는 변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5.어려움이 많은 코로나 시기이지만 이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이 어려움의 시간들은 여태까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지만 분명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대로는 안된다. 뭔가 새로운 변화를 인간에게 요구하고 있는 듯 합니다. 
6.인간의 근본적인 본질은 바로 사랑입니다. 미움의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봄이라 해도 겨울과 같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날카로운 얼음과 같은 미움이 자신의 마음을 찢고, 또 함께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찢어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해도 사랑의 마음, 용서의 마음이 있으면 그 추위마저도 추억과 낭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7.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좋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쁘다고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공의 기쁨속에는 언제나 실패와 좌절의 기운이 자라고 있는 것이며, 시련의 아픔속에는 언제나 새로운 기쁨과 희망의 새싹이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속에서도 항상 조심조심해야 하고, 진정으로 감사해야 하는 것이며, 실패와 좌절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잃지 말고, 마음이 어둠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8.신앙이란 새로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성공속에서 겸손의 마음을 키워야 하는 것이며, 시련속에서 희망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속에서 죽음을 바라보아야 하고, 죽음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9.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꼬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구원받게 하시기 위해서임을 말씀해주십니다... 
10.즉 예수님은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하여, 나의 행복과 기쁨을 위하여, 나의 삶에 새로운 비젼과 희망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바로 나의 마음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세상에서 당연히 행복하고, 기쁘게, 희망을 갖고, 즐겁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또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게, 또 고통스럽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나는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된 것이고, 하느님께서 또 그리 섭리하신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나에게 뭐라하든 상관없이 나는 하느님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중한 사람인 것이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힘과 능력을 다하여, 당신의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나를 허락해주시는 하느님의 귀하디 귀한 명품이고, 걸작인 것입니다... 
11.하느님께서는 나를 귀하게 여겨주시고, 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해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십니다.. 우주전체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나를 창조하기 위해서 이 우주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것이고, 나의 삶을 통해 나에게 당신이 주실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12.나는 너무나 귀중한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불행하게도 이 엄청난 진리를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는데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나를 가장 귀하게 보시는데 내가 나를 천하게 봅니다.. 하느님은 나를 위해 못해 주실 게 없는데 내가 나에게 해주는 게 별로 없습니다... 
13.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말로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바쳐 최선을 다하십니다... 그야말로 죽기까지 가르쳐주십니다... 
14.때로는 나의 삶에 받아들이기 힘든 십자가와 삶의 실패와 좌절과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하느님께서 나를 벌하시기 위해서인 것은 아닙니다..좀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 좀더 미래에서 지금의 나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나를 괴롭히는 인생의 온갖 고뇌조차도 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당신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는 고통을 참으시면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유익한 것을 허락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5.나를 사랑합시다.. 나를 귀하게 봅시다.. 나는 온 우주보다도 귀한 존재임을 깨달읍시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데, 나를 가장 귀하게 보시는데, 나를 위해서 아까울게 없으신 분이신데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천하게 본다면, 내가 나를 값싸게 본다면 그것은 절대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16.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그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어내시고, 그 칠흑과 같은 죽음을 겪어내시고, 그 찬란한 부활의 영광을 마련하셨으니 우리가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께서 나의 가장 깊은 친구가 되어주시고, 나의 편이 되어주시는데, 또 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변호해주시고, 보호해주시는데 우리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께서 나를 구원해주시겠다고 마음먹으셨는데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분은 우리의 조그만 실수나 허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그 엄청난 사랑에만 유일한 관심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17.그분께서 그러하시니 나도 나의 조그만 부족함이나 허물이나 죄에서 과감히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나의 어둠에 사로잡히지 말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하느님의 사랑과 그 빛살에 나를 맡겨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나를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아멘

 

 


그리스도는 빛과 진리와 생명에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요한 복음 주해’에서 (Tract. 34,8-9; CCL 36,315-316)
주님은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주님의 이 몇 마디 말씀은 부분적으로 명령이고 또 부분적으로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주십사고 우리가 요청할 때 하느님이 우리를 염치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시지 않도록 먼저 주님이 명하시는 것을 따르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 날에 주님이 이렇게 꾸짖으시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약속한 것을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너는 내가 명한 것을 행했느냐?” 주 하느님이여, 당신은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명했노라.” 여러분은 하느님에게서 삶에 대한 권고를 찾았습니다. 이 삶의 권고는 “생명의 샘이 당신께 있나이다.”라고 성서에서 말하는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시작합시다. 그분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사슬들을 부숴 버리도록 합시다. “당신이 제 결박을 푸셨나이다.”라는 말씀에 따라 그 결박을 풀어 주시는 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누가 그 쇠사슬을 부술 수 있겠습니까? 시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님은 사로잡힌 이를 풀어 주시고 억눌린 이를 일으켜 주시도다.”
그리고 풀려지고 일으켜진 이 사람들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나오는 그 빛 외에 또 무엇을 따르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주님은 눈먼 자에게 빛을 주십니다. 형제들이여, 지금 우리 눈은 믿음의 약을 발라 회복되어 빛을 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쳐 주실 때 먼저 당신의 침과 흙을 섞으시어 그 사람의 눈에 발라 주셨습니다. 우리도 아담 때문에 눈먼 자로 태어났으므로 주님에게서 시력을 되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도 침과 흙을 섞으셨습니다. 즉 “말씀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오리라.” 하는 예언에 따라 그분은 침과 흙을 섞으셨습니다. 그분은 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얼굴을 서로 맞대고 바라볼 때 그 진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지 않으신 것을 누가 감히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불완전하게 알뿐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의 서간에서 또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놀라운 약속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을 따르십시오. 여러분은 이렇게 물어 볼지 모릅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떤 길로 그를 따라야 합니까?” 여러분의 주 하느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진리를 갈망하며 생명을 열렬히 원하는 여러분은 틀림없이 진리와 생명으로 가는 길을 다음과 같은 말로 구했을 것입니다. “진리는 얼마나 위대하며 얼마나 귀중한가! 내 영혼이 거기에 도달할 길만 있다면!”
정말 어떤 길을 통해서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십시오. “나는 길이다.” 여러분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다.”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진리와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주님은 먼저 걸어야 하는 길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 목적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다. 또 나는 진리이고 생명이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기에 주님은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실 때 길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보시고 “너희가 진리와 생명으로 가기 위해 먼저 길을 찾도록 노력하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이여! 일어나시오. 길 자체께서 여러분에게 오시어 여러분을 잠에서 깨우셨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잠 깨었다면 일어나 걸으십시오.
여러분은 아마 걸으려고 하지만 발이 아프기에 걸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왜 발이 아픕니까? 발이 탐욕으로 충동되어 거칠은 길을 달려왔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절름발이까지 고쳐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보라, 나는 튼튼한 발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길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은 맹인에게 시력을 되찾아 주기까지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알려 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요한 3,14)
이 말씀은 민수기에 언급된 광야 사건을 가리킵니다(민수 21,4-9 참조). 물이 없다고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는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백성을 물어 죽이자, 모세의 간청으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해결책이 구리 뱀이었지요.
방금 전의 불신앙을 거두고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본 사람은 불 뱀에 물렸더라도 목숨을 건집니다. 그래서 이 일화는 불신에서 믿음으로 돌아선 이들에게 내린 자비와 구원의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모세처럼 민족에게 해방을 선사한 또 다른 메시아가 등장합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일으키셨다."(2역대 36,22)
주님의 말씀이 이방인 임금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민족 출신이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라 불리는 키루스를 통해 이루어진 이 해방 사건은 정통 유다인들은 물론 우리까지도 놀라게 만들며 고정관념의 허를 찌릅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
간결한 이 명령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을 선사했을지요! 키루스는 이방신인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주 하늘의 하느님"으로 칭하며, 그분에게서 받은 임무를 기꺼이 수행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누구를 통해서 올지 모르는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믿고, 순종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모세의 구리 뱀처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당신의 외아들이십니다. 이를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이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
믿는 것만으로 심판받지 않는다니 하느님의 관대한배포가 얼마나 놀라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고 진정한 주님의 종, 메시아라 믿고 고백하는 이는 주님께서도 무한히 믿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를 천상 잔치에 들이기 위한 절차나 거름망이 불필요하다는 뜻도 되겠지요.

제2독서에서는 그 믿음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에페 2,8)
우리 구원은 먼저, 은총을 통해 옵니다. 우리 편에서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 달렸다는 의미지요. 구원은 또 믿음을 통해서 옵니다. 자신이 구원받았음은 믿음을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유한 재물의 수량이나 건강 지수, 권력이나 명예 등을 구원이라고 하지 않지요. 이것들은 믿음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측량이 가능한 것들이니까요.
믿음 또한 구원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자신을 좀 더 알아갈수록 별볼일 없는 죄인의 실존과 맞닥뜨리기 마련이지만,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허락하시는 분이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희망할 수 있습니다.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입당송)
믿음과 은총을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오늘 미사는 그래서 이렇게 기쁨의 독려로 열린 것입니다. 교회가 전례 안에서 기나긴 사순 시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잠시 쉼표를 찍고 기뻐하라며 숨 돌릴 틈을 주시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자신의 나약하고 죄스러운 모습으로 슬프고 우울하다면 오늘의 말씀에 더 깊이 머물러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실패자처럼 보이는 자신의 실존이 새로운 눈으로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은총이 충만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에페 2,10)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복된 오늘 하루를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당신을 주님이라 믿고 고백하는 우리로 인해 그분도 기쁘실 겁니다. 아멘.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군대를 제대하고 한 동안 안 보다가 로마 생활을 하면서 보기 시작한 한국 TV 프로그램들을 보다보면, 가장 자주 듣는 표현 중에 하나가 “힐링”입니다. 
학생은 학생대로, 주부는 주부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자기에게 가진 것의 120퍼센트 이상을 뽑아내며 살아야 하는 전투 같은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나라 사람들이 “힐링”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말이면 산과 바다, 아름다운 카페가 있는 근교로 가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도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힐링을 찾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복음이 우리의 모든 갈망을 채워줄 최종적인 힐링의 길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가장 크게 힐링을 받을 때는 관심과 격려의 따뜻한 말 한 마디, 애정 가득한 배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을 받을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뱀”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뱀은 온갖 불행을 가져온 원흉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 민수기에서 하느님은 당신과 당신의 종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뱀을 보내시어 그들을 벌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세에게 와서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하느님은 모세에게 “불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으라고 명하시며,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뱀이 사람들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그 불 뱀을 보면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도 그 뱀처럼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 못 박혀 들어올려졌고, 그 후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집집 마다 걸어놓으며 그 십자가를 보며 구원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묻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성취를 이루었는지, 또 이루어야 하는지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가장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표현을 발견합니다.
뱀을 통해 죄가 들어왔지만, 들어 올려진 뱀을 보며 사람들이 생명을 되찾았듯, 
에덴동산의 나무를 통해 죄가 들어왔지만, 십자가 나무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갑니다.
하느님의 기묘한 섭리 안에서 저주의 대상이었던 것이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니코네모라는 명망 높은 바라시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러자 당황한 니코네모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도 사람은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참다운 “힐링”을 가져다줍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나라는 인격의 가치를 뒤흔들 수 없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나의 고귀함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창출하는 효용을 넘어서서 지고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귀한 사람이다. 하느님의 아들인 내가 너를 구하기 위해 내 목숨을 건다. 너는 나에게 참말로 귀한 사람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김효석 요셉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구원’은 단지 미래에 가게 될 천국의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지도 못하는 내세의 삶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 일 중에 가장 소중한 방법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복음 말씀처럼, 우리는 빛보다 어둠을 더 가까이 할 때가 있습니다. 어둠은 우리를 투명하고 맑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어둠은 우리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몰고 가서 혼자 숨도록 만듭니다. 깊은 구렁 속에 빠진 사람처럼 앞을 분간할 수 없어서 갈 곳을 찾지 못합니다. 이런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이것이 바로 구원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어둠 속에 두지 않으시려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졌던 불 뱀의 독을 없애기 위해 하느님께서 구리 뱀을 만들어주셨듯이 예수님은 어둠에 싸여 있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며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짊어지고 걸으셨으며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을 단죄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빛이며 진리입니다. 빛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빛의 자녀가 되지만,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갑니다. 그런 사람이 이미 죄인으로 판결받았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 하십니다. 빛은 비추임을 본성으로 합니다. 내 가족을 비추고, 내 이웃을 비추고 이 사회를 비춥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이란 서남부의 데자그 마을에 사는 '하지' 씨는 ‘청결이 병을 불러온다’는 생각에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씻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 그의 얼굴과 몸은 땅과 거의 색깔이 흡사합니다. 그런데 그는 씻는 것만 싫어하는게 아니라, 신선한 야채와 깨끗한 물에 대한 혐오감도 큽니다. 그가 큰 병에 걸릴 것을 염려한 마을 사람들이 신선한 음식과 물을 가져다 주면, 그는 그런 것을 어떻게 먹냐며 심하게 역정을 내고 그것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칠 정도입니다. 대신 그는 썩은 고슴도치 고기를 즐겨 먹고, 녹슨 기름통으로 더러운 물을 떠마시며,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지어준 집을 마다하고 자신이 직접 판 구덩이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씨가 깨끗한 물과 신선한 음식, 아늑한 집을 거부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그런것들로부터 멀어져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주변에서 그에게 좋은 것들을 아무리 추천해도, 스스로가 불편하고 싫은 선택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지씨처럼, 자기가 불편하고 싫다는 이유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구원의 선물들을 마다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함인데도, 이미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져 죄악의 '어둠' 속에 사는데에 익숙해져버린 우리가 그 '좋은 길'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어둠 속에서 불행하게 사는 쪽을 선택한다는 것이지요. '심판'과 '지옥'을 두려워하면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 못해 스스로 그 상태에 머무르려고 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예로 드신 것이 「민수기」(21,4-9)에 나오는 '구리뱀 이야기'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믿지 못하고 그분께 불평 불만을 늘어놓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셨고 그 뱀에 물린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러자 모세가 주님의 뜻에 따라 구리로 뱀을 만들어 높은 장대 위에 매달았고, 믿음으로 그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치유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불신'으로 소중한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함으로써 생명과 구원을 누리도록 섭리하신 하느님의 큰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상기시키시면서, 당신께서 못 박혀 매달릴 '십자가'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구원의 징표'가 될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복된 소식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관계의 기본이자 핵심입니다. 부부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믿음이 깨지면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부부는 그저 헤어지지 못해 껍데기만 함께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순간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성경말씀 안에서 드러나는 주님의 뜻이 나와 상관있는 이야기가 되고, 그래야 비로소 하느님과 '기도'를 통해 대화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내 삶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비쳐주시는 진리의 빛을 외면하고, 악한 일을 저지르며, 어둠 속에 숨느라 멸망을 자초(自招)할 뿐입니다. 인간은 어둠 속에 있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심에 매몰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 분 말씀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진리를 발견하며 실천하는 사람은 구원의 빛에 인도되어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갑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이 아닙니다. 무조건 참고 믿어서 얻어내는 보상(報償)도 아니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데 대한 포상(褒賞)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빛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더 넓게, 더 밝게, 더 제대로 보고, 그 안에서 더 큰 기쁨과 자유를 누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가 바로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나의 삶 속에서, 나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 희망도 없어진다.< 요한3/14-21>3/1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완전한 것인지 깨닫게 해주십니다. “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주시어.” 주셨다는 말씀은 함께 노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 까지 내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복음 외에도 요한세례자 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의 소리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시고 주님 형성용 때 3명의 제자들에게 “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이 말을 들으라.” 하시였습니다. 우리는 이 깊은 말씀 뒤에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신 것같이 하느님 자신을 내어주시겠다는 말씀이 였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죽음 앞에도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하느님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시려 목숨을 하느님께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 끝에 “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하시였습니다. 이는 천주교 믿음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독일의 신학자이며 목사인 본헤브는 독재자와 맞아 싸우다가 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죽음 앞에 행복해 하며 나는 죽어도 하느님이 받아주시니 죽어도 좋다고 하였답니다.  믿음은 즉 진선미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은 “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심으로 사랑으로 하느님 앞에 가는 사람은 기쁨이 넘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삶의 방향입니다. 서쪽으로 가면 빛을 등지고 동쪽으로 가야지 빛을 만날 수있습니다. 방향이 분명해야 가야할 길을 갈수 있고 하느님에게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방향은 내가 사랑하면서 사는가 아닌가에 다려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가? 이웃을 사랑하는가? 내가 속한 공동체를 사랑하는가? < 나라와 가정 > 그리고 나를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하니 이렇게 살고 있지만 미루는 사랑 겨으른 사랑 무관심한 사랑 이기적 사랑은 방향을 잃은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경전 탈뭇에 어느 나그네가 길을 가다 다리에 힘이 빠져 지나가는 마차를 필려 타고 가다가 “예루살렘이 여기서 얼마 걸리나.” 하니 “30분 걸립니다.” 나그네는 잠시 피근하여 조금자다가 일어나 “이재 얼마나 남았나 ” 하니 한시간 거리라고 하여 아니 나는 엘루살렘으로 가야하는데 이 마차는 엘루살렘 반대편으로 가는 마차입니다. 이 이야기의 뜻은 방향을 잃으면 목적지에 갈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가야할 목적지에 방향을 두고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반대 하느님을 등지고 살고 있습니까? 저는 한순간도 내가 가는 방향이 잘못 될가? 늘 마음쓰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죽음 속에 살고 있다는 증거는 저녁에 잠을 자기전 방문을 잠그지 않고 잠이 듭니다. 오래전에 죽음을 묵상하며 “주님 웃으며 죽을 수 있도록 은총 주세요.“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각자의 죽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행복하게 맞이하도록 기도합니다.

 

 

 

참 기쁨과 행복의 삶 -바라보라, 감사하라, 나아가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일명 장미주일이라 일컫는 사순 제4주일입니다. 입당송 시편 “즐거워하여라(Laetare)”로 시작되기에 ‘래타레 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하여 기쁨을 상징하는 분홍색 제의가 참 곱고 입당송 시편도 참 흥겹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교회요 성전입니다. 참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기뻐 즐거워하라!’는 주님의 권고입니다. 어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교황직에 착좌하신후 만8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8년을 요약한 기사 제목이 “전 세계를 위한 복음의 기쁨”이었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전하고 사시기 위해 노심초사, 전력투구한 교황님의 8년간 행적이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순시기 어둡고 무겁게 지내는 시기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옥중에 있으면서 신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했던 기쁨의 사도였습니다. 어제 본기도 역시 ‘파스카 신비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십사’ 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역시 사부 성 베네딕도의 권고에 따라 사순시기 기쁘게 지냈고 남은 동안도 기쁘게 지낼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규칙서중 즐거움이란 말마디가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제49장에서 단 2회 나온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요즘 산책중 즐겨부르는 봄이 오면 마지막 구절도 봄꽃처럼 활짝 핀 얼굴로 살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나는야 봄이 오면 그대 그리워 진달래꽃 되어서 웃어본다오,”
기쁨으로 활짝 핀 봄꽃들처럼 파스카 신비의 기쁨을 앞당겨 밝고 경쾌하게 꽃처럼 살아야 할 남은 사순시기입니다. 영성의 참 표지도 파스카의 기쁨과 유머입니다. 어떻게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바라보라!”입니다.
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샘솟는 기쁨, 회개의 기쁨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십자가입니다. 늘 바라보라고 성전 앞면 중앙에 걸려 있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은연중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것은 권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말 그대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징이자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100% 드러난 사랑의 표징입니다. 바로 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파스카의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삶의 의미로, 삶의 목표로, 삶의 방향으로 삼을 때 내적 안정과 평화요 샘솟는 기쁨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무엇보다 회개의 표징입니다. 참으로 부단한 회개가 축복의 보증이 됩니다. 우상숭배로 주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심판으로 바빌론에 유배되어 고통을 받았지만 이들이 회개했을 때 주님은 페르샤의 키루스 임금을 움직여 이들을 해방시킵니다. 바로 바빌론 유배 중 회개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오늘 화답송 시편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한 주님 그리움이 사무치게 잘 드러나는 애절한 시편이 감동적입니다.


“바빌론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그리며 눈물짓노라.---예루살렘아,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굳어 버리리라. 내가 만일 예루살렘,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이런 회개의 응답에 하느님은 페르샤의 임금 키루스를 움직여 당신 백성을 바빌론의 압제에서 해방시켰음을 봅니다. 참으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파스카의 기쁨과 구원을 앞당겨 살게 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기쁨의 삶을 위해 늘 바라봐야 할 대상은 영원한 구원의 주님의 십자가뿐이요, 이런 우리들에게 선사되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둘째, “감사하라!”입니다.
회개의 기쁨과 더불어 저절로 샘솟는 감사입니다. 기쁨과 감사로 빛나는 삶이 참 영성의 표지입니다. 기쁨과 감사로 빛나는 얼굴은,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지요! 이런 이들이 진정 행복한 부자요 이웃에겐 참 좋은 선물이 됩니다. 자주 산책중 노래하는 시편 구절이 생각납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고운 치매 걸린 할머니가 연신 웃으며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는 일화도 미소짓게 합니다. 오늘 제2독서 바오로의 에페소서를 보십시오. 제가 볼 때 온통 하느님 은총에 대한 감사의 고백, 감사의 찬가처럼 보입니다. 기쁨의 사도이자 감사의 사도인 바오로입니다. 숨쉴틈 없이 쏟아지는 감사의 폭포수같습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렀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미 생사를 넘어 부활의 기쁨, 부활의 감사를,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사는 우리들인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말씀 역시 얼마나 고무적인지 참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의 작품이란 말마디들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합니까! 한 두 번의 창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는 우리들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감사기도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줄 몰라 불행이요 살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런 감사에서 샘솟는 기쁨과 행복의 삶입니다.


셋째, “나아가라!”입니다.
계속 전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목표가, 방향이 있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제대로의 방향입니다. 주님을 향해 전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구원의 행복은 은총이자 동시에 선택입니다. 주님은 생명이자 빛이자 희망이자 진리입니다. 그러니 죽음이 아닌 생명의 주님을, 어둠이 아닌 빛의 주님을, 절망이 아닌 희망의 주님을, 거짓이 아닌 진리의 주님을 선택하여 전진하는 것입니다. 
하여 주님을 향해 나아가면서 주님을 닮아 우리 또한 생명과 빛이, 희망과 진리가 될 것입니다. 생명의 빛, 희망의 빛, 진리의 빛으로 충만한 삶, 바로 기쁨과 행복의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세속에 병든 무지에 눈먼 영혼들이 빛이 아닌 어둠을, 생명이 아닌 죽음을, 희망이 아닌 절망을. 진리가 아닌 거짓을 선택하여 지옥을 삽니다. 하느님이 내리시는 심판이 아니라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생명에로, 희망으로 나아갑니다. 하여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뤄졌음을 드러냅니다.
기쁨과 행복의 삶은, 믿음과 구원의 삶은 은총이자 동시에 선택의 결단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과 진리의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쁨과 행복의 삶을, 믿음과 구원의 삶을 살고 싶습니까!


1.늘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파스카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2.늘 감사하십시오!
3.늘 나아가십시오! 전진하십시오! 생명이자 빛이시고 희망이자 진리이신 주님을 향해서 말입니다.
기쁨과 행복의 비결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십자가 주님을 바라보며 나의 죄를 보십시오.
     키엣 대주교님
기둥 위에 매달린 모세의 구리뱀을 보라고 하신 것처럼 새 생명을 얻으려면 십자가를 보아야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나의 죄를 바라 보는 것입니다.
그 옛날 먼 길을 가느라 지친 백성들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사람들을 죽게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하시며 뱀에 물린 자가 그것을 보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리뱀을 보듯이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합니다.
죄는 영혼을 파괴하고 왜곡되고 추악하게 만들고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주님을 올려다 볼수 조차없는 죄를 지은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영광을 위해 당신은 치욕을 당하셨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당신은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어둠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려 주시기위해 당신은 높은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나의 죄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치욕과 고통,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나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죄의 깨달음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당신 사랑을 증거하시기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까? 수도 없이 많은 죄를 겹겹이 쌓아 어둠속에 숨겨둔 나약한 인간일뿐인 우리를 위해 왜 당신께서는 그런 무모한 사랑을 하셨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 볼수록 점점 쌓여가는 나의 죄를 깨달습니다. 나의 죄를 깨달을 때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지 깨달게 됩니다.
사막에서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게되는 순간 자신들을 구원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것을 깨달게 됩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 주님께 구원받기 위해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주님의 은총없이 죄의 어둠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없이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우리는 나약한 인간입니다. 진실된 참회만이 주님의 은총을 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끝에는 어둠과 희망의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을 따라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가는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저희를 주님 곁으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께 받은 사랑이 무엇인지 되새겨 보십시오
2. 주님의 구원이 필요한 나약한 사람입니까?
3.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순 4주일로, “기쁨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입당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루살렘아 즐거워하여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으로 기뻐 뛰며 흡족해 하리라.”  

그리고 <제1독서>에서 역대기 저자는 주님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잃고 성전은 파괴되고 이방인의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 유배를 끝내주시는 기쁨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실현한 구원과 그리스도께서 실현한 부활을 함께 노래하며, 우리를 기쁨에로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말해줍니다.
흔히 말하는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 혹은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이 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왜 오셨고, 무엇을 하셨는지를 한 마디로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 한 마디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여기에는 바로 하느님의 외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그 사명의 기원과 본질이 “하느님의 사랑”임을 천명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이나,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줍니다(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사랑한 나머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친다).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려고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세상과 모든 사람들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축복의 자리요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혹 우리는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속정신”과 ‘어둠’입니다.
그것은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같은 것들 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사는 이타적인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곧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그렇습니다. 세상에 빛은 이미 왔고,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구원의 삶과 사랑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빛이 비추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이 감겨있어 빛을 보고 못한 따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피앗’의 응답이 구원을 불러옵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그러니 <시편>(36,11)의 말씀처럼, 빛으로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빛이 오면 어둠은 물려갈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어둠을 볼 수 있음은 이미 빛이 비추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둠인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둠을 바라보기보다 어둠을 비추어주는 빛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사실, 어둠은 어둠을 보며 어둠으로 이끌지만, 빛은 빛을 보며 빛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이미 세상에 왔고,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며, 기뻐합니다. 오늘도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운 하루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양손을 못에 내어주고 가슴을 열어 창을 받아들이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봄이
왔다.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셨다.

우리와 함께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호흡하신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 세상에
오셨다.

사람의 아들은
세상의 아픔을
피하지 않으셨다.

사랑으로
우리 곁에
계시며

아픔속에서도
삶의 맛을
함께 하셨다.

우리의 죄까지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셨다.

우리의 약함까지
사랑하게 하시는
참된 구원이다.

구원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가르쳐준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괴로움을
치유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게하신다.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의
절망까지
이겨내게
하신다.

구원이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사랑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귀한
자녀임을
깨닫게 하신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을
완성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인간은 배신하고
하느님은 끝까지
사랑하신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되었다.

구원은
실천이다.

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사랑을 주셨다.

구원은 이제
하느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저마다의
삶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이 사순시기가
십자가의 상처를
바라보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드린다.

하느님께서
오심으로
구원이
시작되었다.

십자가
사건은
구원의
절정이다.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다.

새로운 삶을
주시는
분이시다.

제가 있는 갑곶순교성지에는 꽃나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봄이라 말하는 3~4월에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을 볼 수 있습니다. 매화를 시작으로 목련,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영산홍, 벚나무, 그 밖에도 많은 야생화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제가 제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꽃이 있습니다. 바로 벚꽃입니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은 아닙니다. 바로 제가 처음 성지에 와서 처음으로 땀 흘려서 심은 것이 바로 벚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심고 키운 나무 중에서 제대로 자라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제 손만 타면 시들면서 죽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이 벚나무만큼은 갑곶에 와서 처음 심는 것이었기에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더 정성을 쏟고 관심을 가졌던 이유였지요. 그런데 저의 염려와 달리 무럭무럭 잘 자랐고, 4월이 되자 드디어 꽃을 피웠습니다. 다른 꽃들이 보이지 않더군요. 그리고 벚꽃이 질 때에는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제가 직접 심고 키운 것이기에, 더군다나 특별한 정성과 사랑이 들어갔기 때문에 특별한 정이 생긴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떠하실까요? 당신이 직접 만들고 키우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보실 것 같습니까? 왜 그렇게 큰 사랑을 주시는지, 그래서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우리들을 특별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작품입니다.(에페 2,10)

 

이렇게 귀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가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독사에게 물렸을 때 모세가 들어 올린 구리뱀을 봐야 살아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가 용서되는 치유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빛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가져다주는 죄를 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요한 3,19 참조) 

 

이렇게 당신 곁을 떠나는 사람들을 얼마나 안타깝게 지켜보고 계실까요?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 모습에 “제발 나를 좀 봐 다오”라고 안타까운 탄성을 지르시는 것만 같습니다. 

 

제1독서를 보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칙령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장면을 봅니다. 유배의 고통에서 해방되던 날,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습니다. 이 해방의 기쁨을 지금 우리들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죄로부터의 해방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큰 표징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이제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악행이 아닌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입니다.(에페 2,10 참조)

 

‘바라봄’에는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똑같은 것을 바라보아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자신이 있는 곳이 어두운 감옥 철창 같이 캄캄한 곳이라도 희망의 빛은 반드시 있고 또 이 빛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로 빛이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시기도 벌써 4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남은 사순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여전히 빛이 아닌 어둠만을 바라보고 또 이 어둠을 향해 의미 없이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슬픈 눈이 떠올려집니다.

 

꿋꿋이 내 길을 계속 나아갔을 때, 나는 내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파울로 코엘료).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여섯 가지입니다.

1. 내가 진실로 원하고 또 하고 싶은 것인가?

2.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가?

3. 결과 및 평가를 직면할 용기가 있는가?

4. 그 결과에 대해 슬퍼할 수 있는가?

5. 배움으로써 성장시킬 지혜가 있는가?

6. 포기할 것들에 대해 열려 있는가?

어떻습니까? 그래도 결정을 해야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아닐까요? 무조건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짖어대는 개가 생각납니다. 겉으로는 시끄럽게 짖어대면서 강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 꼬리를 내리고 도망갑니다.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위의 여섯 가지를 따져보십시오. 분명히 바른 결정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품고 있는가

     김혜숙 선교사

오늘 묵상은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의 후반부입니다. 후반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11절에서입니다. 11절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이렇게 ‘너’라는 단수로 시작하지만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고 복수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니코데모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다시 바라보고 그 핵심에 들어오라는 초대입니다. 이 초대에 우리도 함께 갈까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니코데모는 적어도 외적으론 훌륭한 종교인이고, 산헤드린 의회 의원으로서 명예가 있었으며, 지도자였고 부자였습니다.(3,1.10;7,50; 19,39) 그는 계시를 개념으로 파악하고 그것에 묶여버린 외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대변합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보면 세상의 것을 다 갖고 있었지만 편안하거나 행복하지는 않았던가 봅니다.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에서는 대홍수 이후 하느님께서 노아와 계약을 맺으실 때의 무지개(창세 9장), 광야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구리 뱀(민수 21,4-9), 그리고 지금은 사람의 아들이 지셨던 십자가 구원의 메시지로 연결됩니다. 무지개, 구리 뱀, 십자가는 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바라볼 수 있지만 모두가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듣고도 쳐다보지 않는 사람,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 듣고 바라보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다르게 행동하게 할까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지만 다 구원되지는 않습니다. 구원이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말씀이 생명이 되어 그 사람 안에 들어갔을 때, 그 힘에 의해 바라보는 자만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뱀이 들어 올려짐을 사람의 아들로, 구리 뱀을 달아맨 기둥을 십자가로, 뱀을 바라보는 이들이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는 믿는 이들로 대비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는 자신의 저 깊숙한 내면을 바라볼 때 알게 됩니다. 앎을 통하여 자신을 열 때, 처음부터 선재하셨던 생명을 발견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15절을 봅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믿음은 힘, 능력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합니다. ‘영원함’(αίώυιον)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것입니다. “생명”으로 번역된 조에(ζωή)는 새롭고 결정적(최종 완성을 향한) 삶이 있습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의 질서를 따르는 이들에게 가능한 삶이지요. 즉 믿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명의 근원이며, 죽음을 초월하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살게 됩니다.(5,24절 참조) 이미 지금, 그래서 이 땅에서 믿음을 받아들이고 고백한다는 것은 자연적인 것 안에 초자연적인 삶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2독서가 그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사랑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안다’라고 말할 때는 체험이고 상대와 온전히 결합하는 것이며, 게다가 현재형으로 쓰인 걸 보니 지금 현재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복 강조되고 있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들어있음을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 안에서 존재와 유한성을 뛰어넘는 인간의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약하고 잘못도 많지만 무한과 영원을 갈망하는 ‘우리’입니다. 나약함이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약함을 인간의 약점을 이긴 그리스도 안에 둘 때, 그곳을 향해 무릎 꿇을 때, 우리는 변화,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16절은 마음에 품어야 할 말씀입니다. ‘너무나’로 번역된 이 단어는 사랑의 정도를 강조할 때 쓰이고, 사랑의 방식을 강조할 때는 ‘이런 식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처음 나와 요한복음 전체에 점진적으로 심화되는 이 사랑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하고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통하여 나에게 선물로 오셨고, 아들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아버지의 생명입니다.(17-21절) 그 생명을 찾고 살고 나누어야겠습니다.

‘너’를 나의 대상이나 나의 목적을 위해 대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도 얻지 못합니다. 한평생 부부가 함께 살고도 그 배우자를 모를 수 있고, 한평생 신앙생활을 하고도 하느님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럼 자신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 머무르지 않는다면 결코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둠에 갇힌 것입니다.

아들을 받아들였다면 이미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구원의 주도권에 대한 한 자락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구원과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판결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에 누가 있는지 드러나는 일입니다. 말씀이 생명으로, 그 생명이 빛으로, 나의 내면에서 밖으로 발산된다면 그는 이미 구원을 완성하는 여정에 있습니다.(1,5.9-11) 어둠은 빛과 근원적으로 대립되는 관계로서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간 상태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결정하는 것은 또 어둠일 뿐입니다. 이는 파멸의 운명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행위들이 나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업적이 나쁜 것은 빛의 영향에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니코데모가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밤 일수도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상징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가 어두움 중에 있었지만 빛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을 “했느냐” “하지 못했느냐”라는 외적인 것에 묶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녕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갈망하느냐?’(열망했느냐?)에 따라 하루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회개란 참 자아를 찾기 위해 아버지의 방향으로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만든 이가 내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빛이 그곳을 비추고 생명의 힘이 우리를 재촉합니다. 오늘 말씀의 화답송을 기억하며 아버지께 되돌아 갈 수 있는 용기를 냅시다.

 

“내가 만일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즐거워하여라.

     김현일 신부님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참조)

  오늘은 사순 제4주일‘즐거워하여라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 미사에서는 자색 대신 분홍색 제의를 입기도 합니다. 전에는 장미 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주일’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회개와 참회의 시기를 보내는 사순 시기에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보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합니다.“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이 선포된 것입니다. 나라 잃은 설움, 그리고 하느님의 집을 가지지 못한 설움, 이스라엘 백성은 가슴이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바로 축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순 시기가 곧 지나고 파스카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참회와 회개로 자신의 죄를 씻고 골고타의 십자가를 향하여 달음질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파스카 축제를 시작하십니다. 우리에게 손짓하십니다. 십자가를 향해 달려오라고. 오기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노라고. 십자가는 무겁지 않다고, 고통스럽지 않다고. 십자가는 자유이고 사랑이라고 외치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부활절이 곧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부활로 이끄십니다. 오늘 복음은‘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로 달음질쳐 기쁘고 즐거운 부활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왜 하필 믿음일까?”

     여인석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의 핵심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지 불신으로 인한 멸망이 아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믿음’일까? 희망, 사랑, 정의, 용서와 같은 다른 덕목들도 많은데 말이다. 그것은 모든 관계의 기본이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는 사랑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한다. 만약 부부 사이에 믿음 없이 산다면 그건 헤어지지 못해 껍데기만 부부로 사는 것뿐이다. 신앙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본당 신부가 본당 신자들을 믿지 못하고 본당 신자들이 본당 신부를 믿지 못한다면 그 성당은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콩가루 공동체가 된다. 믿음 없이는 희망과 사랑도 없고 믿음 없이는 기쁨도 결실도 없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시작되는 시점은 믿음을 가지는 순간이다. 최소한의 믿음이 있어야 성경의 내용들이,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오늘 복음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와 닿기 시작한다. 이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기도가 시작되고 생활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 믿음은 인간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은사로 생기는 것이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고린 전 12,3). 따라서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은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 믿음의 싹이 움트기 위해서는 성령께 믿음을 청하는 겸허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니코데모와 대화하면서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인물이며, 유대 최고회의 의원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저명(著名) 인사였습니다.「요한복음서」는 그가 유대아의 지도급 인사로서는 드물게 예수님에 대해 호감을 가졌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대화합니다.「복음서」가 전하는 그 대화의 내용은 속기록(速記錄)이나 녹취록(錄取錄)을 옮겨 적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수십 년이 흐른 다음,「요한복음서」를 집필한 신앙공동체가 제자들로부터 전해들은 바를 상기(想起)하면서,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그들 방식으로 기록하여 남긴 것입니다. 따라서「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역사적 사실인 양 알리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이 믿던 내용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이 말씀으로 시작하였습니다.「요한복음서」공동체는 십자가를 모세의 ‘구리 뱀’에 비유하였습니다. ‘구리 뱀’의 이야기는「구약성서」의「민수기」(21,4-9)가 전해주는 고사(故事)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매고 있을 때, 불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었고, 물린 사람들은 죽어갔습니다.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 높이 달았더니, 그 뱀을 쳐다본 사람은 모두 치유되었습니다.「복음서」는 그 고사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날 광야의 ‘구리 뱀’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징표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의미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결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獻身)의 결과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우리도 같은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헌신할 때, 구원에 이른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느님은 심판하시지 않지만, 사람이 하느님의 빛을 외면하고, 악한 일을 저지르며 어둠 안에 머물면, 심판을 자초(自招)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그분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진리를 읽어내어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빛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구원이십니다.「요한복음서」는 이미 그 서론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빛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건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4-5). 같은 말이 오늘의 복음에도 반복됩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분이 보여준 하느님의 생명을 자기 삶의 빛으로 받아들이고, 그 빛 안에서 자기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실천하며 가르친, 하느님의 사랑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어둠 안에 있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빛 안에서 삽니다. 구원은 우리의 자유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어떤 혜택, 즉 요사이 말로 ‘대박’이 아닙니다. 구원은 무조건 믿어서 얻어내는 보상(報償)도 아니고, 인간의 신심(信心)행위에 대한 포상(褒賞)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신앙은 하느님의 빛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큰 자유를 누리며 사는 길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고, 그 빛이 보여주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비굴한 순종(順從)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일신(一身)의 영달을 위해 하느님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빌붙어, 재물이나 지위(地位) 하나를 얻어, 뽐내며 살기 위한 처세술(處世術)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인도 주변 사람들을 사랑합니다.「복음서」는 그 사랑이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正體性)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사랑은 하느님 자녀의 당당한 몸짓입니다. 

 

흔히 신앙은 우리의 사고(思考)를 초월하는 교리(敎理)를 믿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모순된 말을 믿고,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지킬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금육(禁肉)과 금식(禁食)을 비롯해서 주일 미사참례 의무와 고해성사 의무 등. 교회가 만든 모든 법규(法規)들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은총을 얻는 방법을 강구하고. 전대사(全大赦)와 한대사(限大赦)를 얻기 위한 행사에 참여하며,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열심히 살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자세들은 자칫하면, 신앙인을 신앙의 참 빛을 잃고, 지엽적인 것에 얽매이게 합니다. 신앙은 합리적 사고를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합리적인 교리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지켜야 할 것을 강요하는 유대교 율사들을 비난하셨습니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루가 11,52). 신앙은 은총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를 위한 삶의 빛으로 살아계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섬겨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르시오.”(요한 12,26). 예수님은 우리가 경배(敬拜)해야 하는 대상도 아니고, 우리가 배워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으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높아지는 곳에 하느님은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어둠’ 안에 사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교회의 제도(制度)와 법규(法規)들도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것들이 과연 예수님을 배우게 하는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대중(大衆)이 베운 것 없고, 몽매(蒙昧)하던 유럽 중세(中世)사회에서 만들어져, 교회 안에 자리 잡은 제도와 관행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요구하는 복장(服裝)과 존칭(尊稱)들이 있습니다. 유럽 중세적 어둠의 산물입니다. 오늘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둠입니다. 하느님의 빛을 감춰버리는 어둠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어둠 안에는 인간의 허세(虛勢)와 비굴(卑屈)함은 보여도, 사랑이신 하느님의 빛과 예수님이 실천하신 진리는 보이지 않습니다.「요한의 첫 번째 편지」는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4,8)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01년에 개봉했던 ‘진주만’이란 영화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만이 아닌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의 전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테네시주에 사는 두 젊은이 레이프와 대니는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자란 죽마고우입니다. 이들은 둘 다 미공군 비행사가 되었고 레이프는 미해군 간호사 에벌린과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 레이프는 유럽으로 배치 받고 대니와 애벌린은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으로 배치 받게 됩니다. 레이프는 독일군과 교전 중에 바다에 추락하여 사망처리 됩니다. 레이프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애벌린은 대니에게 의지하게 되고 대니 또한 애벌린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레이프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오게 되고 이 셋은 애매한 삼각관계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애벌린은 이미 대니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레이프는 그 둘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이 둘이 일본을 다시 공격하러 갈 때 대니의 대사는 이렇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나보다 그를 더 좋아하게 되는 거야.”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지게 되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대니는 결국 전쟁에서 사망하게 되고 다시 레이프가 애벌린과 대니의 딸과 함께 가정을 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판에 박힌 삼각관계 이야기입니다. 삼각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 여자는 한 남자만을 선택해야 하는 운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할 수도 없고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동시에 차지하며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주인이 한 집에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집의 주인이 되시려고 하지만 그 경쟁자가 있습니다. 두 경쟁자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사라질 수도 없는 일이고,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니 뱀이 죽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넣어준 뱀을 당신 스스로 제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뱀은 발과 연관이 있습니다. 기어 다니면서 사람의 발을 물어 목숨을 빼앗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를 건널 때 모래 속에 숨어있는 뱀들에 의해서 많이도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뱀에게 물려죽을 때 그들이 그렇게 죽어가는 이유를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뱀은 나의 자아라고 하는데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게 시스템 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했지만 개의치 않고 따먹게 만듭니다. 이렇게 된 이상 그 집엔 뱀이 살게 되고 하느님이 나가시게 됩니다. 뱀이 사는 집은 영원한 죽음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 외에 에덴동산에 있었던 중요한 나무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뱀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나무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이 주었던 다른 맛을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렇게 불평합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가졌던 마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지만 광야에는 ‘생명의 빵’이 있을 뿐입니다. 생명의 빵인 그리스도의 성체는 이제 신물이 나고 돈이나 명예나 쾌락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불뱀을 내려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들을 죽이는 것은 결국 너희 안에 있는 너희 자신인 자아, 즉 뱀이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후회하고 “우리가 야훼와 당신께 대든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뱀이 물러가게 야훼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지만 하느님은 뱀을 없애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뱀이 없다는 것은 자유가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스스로 매달아 죽이지 않으면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높이 매달리심으로써 우리가 그 모범을 보고 따라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 또한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자아, 뱀, 당신 뜻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같은 방법으로 믿고 따라하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렇기에 구원을 주는 믿음이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주인을 하느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하느님 나라에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을 베인 사람들의 영혼”이 등장합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말씀에 순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을 내어놓은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명령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뱀은 마치 성모님께서 발로 밟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해야만 하지만 뱀이 머리가 돼서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뱀 때문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칼로 우리 목을 쳐서 잘라내야만 합니다. 누구든 자신의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머리로 오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때문에 우리 목이 잘려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한 살인범이 어떤 한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범의 형이 되는 사람은 공직에 있는 동안에 아주 많은 공로를 세워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은 주지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생을 사면해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주지사는 동생을 위하여 탄원하는 형의 잊혀질 수 없는 공로를 참작하여 그 동생의 죄를 사면해주었습니다. 양복 안주머니에 주지사의 사면장을 받아 넣은 형은 곧바로 감방 안에 갇혀 있는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동생을 만나본 형은 물어보았습니다.

“만약 네가 사면을 받고 살아 나간다면 너는 무엇을 하겠니?”

그러자 동생은 안면을 찡그리더니 즉시 대답을 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살아서 감방을 나간다면, 첫째로, 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를 찾아 그 놈을 죽이는 일이고, 그 다음에는 내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던 놈을 찾아서 그 놈을 쏘아 죽이는 일이야!”

형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습니다. 그래서 형무소 문을 나서는 형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주지사로부터 받은 사면장이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뱀이 회개하여 주님과 함께 사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면 미운 마음이 솟구칠 것입니다. 그런데 뱀은 매번 내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물어 살해합니다. 그런데도 자아를 원수처럼 여기지 않고 타협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뱀에게 아담과 하와에게처럼 “너는 어찌하여 그런 일을 하였느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뱀은 본성상 하느님을 거역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회개되어질 수 없다면 십자가에 매달거나 감옥에 가두어 놓거나 목을 잘라버리거나 성모님처럼 발로 밟고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사순특강을 다니고 있습니다. 부족한 제게 강의를 부탁하시는 본당신부님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도 주어진 일이기에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교우 분들께서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고, 신부님들께서도 저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몸은 조금 힘이 들지만 제가 필요한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웃이 나에게 잘못을 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루가복음 15장에서는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이야기하십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우리가 겪는 고통보다 작지 않았습니다. 채찍을 맞으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가시관을 쓰셨고, 제자들에게 배반을 당하셨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했고, 창에 찔리고, 못에 박혀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 우리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목마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회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쁨이 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성직자들이 거룩함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대화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아픈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네 번째는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봄누에는 죽기까지 실뽑기를 멈추지 않고, 초는 재가 되어야만 비로소 눈물이 마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작심삼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에 하지 머’라고 미루던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정들었던 땅을 떠나야했고,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다섯 번째는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요셉 성인께서도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했던 마음을 바꾸었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여섯 번째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입니다. 십자가 위에 있던 죄인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의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기만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지난날의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유다는 똑 같이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유다는 절망하였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주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일곱 번째는 “어머니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 분이 당신의 어머니입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에게 제자들을 부탁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모님을 부탁하였습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도 발현하셔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모님께 공경과 사랑을 드리는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하느님처럼 사랑하며, 하느님처럼 정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나약함과 우리들의 잘못으로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은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만큼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께서도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과 베로니카 성녀입니다. 시몬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갔습니다. 주변을 보면 자신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이웃의 십자가를 말없이 지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로니카 성녀가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렸듯이 주변을 보면 이웃의 고통에 함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봄이 오면 예쁜 꽃들이 피듯이 주변을 보면 사랑의 꽃을, 희망의 꽃을 피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주님께서도 외롭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의 기쁨 -구원은 선물이자 과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쁨은 믿는 이들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기쁨으로 빛나는 모습보다 아름다운 선물도 없습니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이 기쁨입니다. 오늘은 사순 제4주일 일명 ‘래타레Laetare 주일’,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바로 입당송이 이 기쁨을 알립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뛰리라.”

 

구원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제가 가장 많이 써드리는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 말씀도 다음 두 구절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메모지에 성구를 쓴후 ‘웃어요’ 라는 스탬프를 찍어 드리면 활짝 웃는 얼굴이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일정 기간 동안 마음에 새기고 지낼 것을 당부드립니다.

 

구원의 기쁨입니다. 구원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선물은 기쁨의 원천입니다. 제1독서 역대가 하권에서 보다시피 때가 되자 주님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를 마음을 움직여 바빌론 유배중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에 귀환의 기쁨을 선물하셨습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세상 모두가 하느님 수중에 있습니다.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 인류역사 역시 하느님 구원섭리의 무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알게 모르게 구원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구원섭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핵심 구절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구원은 선물이자 동시에 선택의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그러니 구원도 심판도 믿음의 유무에 따라 스스로 자초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진리의 실천으로 입증되는 믿음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믿음으로 선택한 이들은 끊임없이 진리를 실천함으로 빛으로 나아갑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선물이자 선택이요 노력입니다. 환히 빛나는 태양같은 하느님을 향해 있는 걸어가는 자에게는 천국의 구원이지만, 태양을 등지고 어둠속에 머물러 있는 자에게는 지옥의 심판입니다. 이 또한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습니다. 믿음의 선택으로 구원을 살면 됩니다. 언젠가의 구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하는 구원입니다. 며칠전 읽은 사막 영성에 대한 글도 생각납니다.

 

-너희는 사막 넘어 어디로 가겠는가? 시리아의 주상수도승들이 앉았던 30피트 기둥에 올라갔을 때 너희는 어디로 가겠는가? 안토니오처럼 이집트의 외적 사막에서 내적사막으로 이동했을 때 너희는 어디로 가겠는가? 너희는 바로 앉아있어라. 바로 머물러라. 바로 기다려라. 다음 너희가 개인적 원천의 끝에 도착했을 때, 무한하고 영원한 원천이 열린다. 그런 신적은총은 앞에 부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알아보지 못할뿐이다.-

 

‘어디로 가겠는가?’ 갈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가 구원의 기쁨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제자리에서 구원의 기쁨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구원의 기쁨에 저절로 따라오는 하느님 선물에 대한 감사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구원은 선물이자 선택이요 과제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런면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미완의 작품입니다. 끊임없는 선행을 통해, 진리를 실천함으로 완성되는 하느님의 작품인 우리들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구원의 표지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끊임없이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망각忘却의 병’ 역시 영성생활의 큰 장애입니다. 영성생활은 기억의 투쟁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구원의 기억을 끊임없이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권고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의 양면같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에 활짝 열린 하늘문입니다. 그러니 구체적 영적습관으로 마음의 중심이 흔들릴 때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삶의 중심을 바로 잡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상기하시시 바랍니다.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면 안됩니다. 구원의 완성은 우리에게 과제로 부여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이어 진리의 실천에, 말씀의 수행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선사하시고 선행과 진리의 실천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애송시 중 마지막 연을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차라리 도와주고 끝내자!

     전삼용 요셉 신부님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 강원국 작가는 세바시에 출현해 ‘글쓰기의 두려움을 이기는 법’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글쓰기에만 전념한 이런 분도 여전히 글쓰기가 두렵다고 말합니다. 강원국 작가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시절 대통령의 연설문을 쓰는 일을 하였습니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대통령의 마음에 들게 쓰는 것은 매우 큰 어려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2~3일에 한 번은 써내야 하며 어떤 때는 단어가, 어떤 때는 문장이, 어떤 때는 문단이, 어떤 때는 페이지 전체에 엑스표가 되어 다시 내려옵니다. 그렇게 자신의 글에 칼질을 해 대는 인물이 대통령일 때는 그 스트레스가 엄청날 수밖에 없습니다.

강원국 작가는 그때 매우 간절하고 절실할 때 글이 잘 써졌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일곱 시까지 대통령에게 보내야 하는 연설문을 새벽까지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을 때가 많았는데, 다음날 아침까지 한 자도 쓰지 못하고 대통령을 만나는 상상을 하면 겁이 나 안 나오던 글이 빠르게 써질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시험 직전 초치기 공부가 엄청난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글도 간절하고 절실할수록 잘 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며 글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강 작가는 더 좋은 방법을 소개합니다. 은퇴하여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을 내겠다고 아내에게 말하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이십일이 넘도록 한 자도 써지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고 또 일정 시간 동안은 꼭 책상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이십 며칠이 지났는데 갑자기 글이 봇물 터지듯이 써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것이 ‘습관의 힘’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뇌는 인간이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저항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정 시간 계속 그 습관을 들이면 뇌도 저항하는 것을 힘들어하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이렇게까지 저항했는데도 끝까지 하려고 하니 차라리 도와주고 끝내자”는 식으로 일에 협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아의 저항을 이기는 데 습관의 힘처럼 큰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구원은 결국 습관의 힘을 키우는 것과 매우 큰 관련이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구원의 신비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먼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구원이 모세의 뱀처럼 당신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각자가 다 자신의 불 뱀들에게 물려 죽어가는 이들에게 모세는 자신의 뱀을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아야만 뱀에서 치유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닮아간다는 말과 같고 결국 자신의 뱀도 그렇게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뱀은 자아(에고)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들어오면 자아는 저항합니다. 모세는 자아의 저항을 이긴 사람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뱀을 장대에 매달아 이스라엘 백성의 모범이 된 그리스도의 전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뜻을 십자가에 매달아 그 피를 땅에 흘렸습니다. 십자가에 매단 당신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세상이 그분의 뜻을 받아들여 자신 안에 있는 자아와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피인 성령을 받아들여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의 싸움을 시작하셨던 예수님의 경우와 같습니다. 사십(40)은 땅, 혹은 인간을 나타내는 숫자 ‘4(동서남북)’와 계명(법, 토라)을 나타내는 숫자 ‘10’이 곱하여져 하나가 된 숫자입니다. 즉 땅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자신 안에 있는 뱀을 죽여 대신 하느님의 뜻이 자신 안에 이루어지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40일, 혹은 40년은 세례 받을 때의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죽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시기인 것입니다.

 

난자는 일생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황체, 백체가 되어 몸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난자도 새로 태어나면 굉장히 오래 살게 됩니다. 바로 난자가 정자를 받아들여 완전히 변하여 인간이 될 때입니다. 난자가 정자를 받아들여 이렇게 새로 태어나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법이자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새로 태어나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흘린 피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아드님을 보내주셔서 그를 받아들이는 이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하느님은 아드님을 통해 이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바로 변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새로 태어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자아를 죽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둠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스스로 자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야합니다. 강원국 작가가 꾸준히 습관을 들였더니 자아까지도 그 저항을 포기하게 된 것처럼 규칙적으로 선한 일을 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둠보다는 빛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처음에는 자아의 저항에 부딪히겠지만 어둠보다는 빛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로봇다리 수영선수 김세진 군은 두 다리가 없고 한 손도 온전하지 않은 장애인이지만 장애인 수영선수로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희망의 전도사입니다. 그를 수차례의 뼈를 깎아내는 수술을 받게 하여 로봇다리로 걷게 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장애인 수영선수로 키운 것은 그의 어머니 양정숙 씨입니다. 양정숙 씨는 딸 아이 하나만 낳아 극도의 가난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막노동판에서, 밤에는 졸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어가며 청소와 대리운전을 하며 생계를 유지할 때였습니다. 겨우겨우 주일 하루를 쉴 수 있게 되었을 때 양정숙 씨는 고아원에 딸과 함께 봉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세진이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양정숙 씨 딸은 여덟 살이었는데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더란 것입니다.

“엄마 나는 팔 년 동안 엄마에게 사랑을 받았잖아. 그러니까 엄마 팔 년 동안 이 아이를 사랑해주면 안 돼? 이 아이는 우리가 아니면 데려갈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이 아이 입양하자 엄마. 내가 도와줄게. 내 동생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 두 모녀는 두 다리와 온전하지 못한 팔을 가진 세진이를 극진히 사랑하고 강하게 교육하여 스스로 세상의 희망이 되겠다는 훌륭한 아이로 성장시켰습니다. 세진이 또한 자신이 타는 상금은 이웃에게 기부하는 천사와 같은 청년이 되었고 세계 곳곳에서 장애인들의 희망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양정숙 씨를 키워준 아버지의 교육이 중요했습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은 일주일에 하루는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힘든 상황에서도 봉사하러 간 것이고 딸도 아들도 훌륭한 인성으로 교육시킬 수 있습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습니다. 습관이 되면 힘이 덜 듭니다. 힘이 덜 들어야 남는 힘으로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힘이 덜 들게 하기 위해 습관의 힘은 가장 좋은 무기가 됩니다. 습관적으로 자아를 이기는 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부의 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강성태 씨는 처음에 학생들에게 공부의 좋은 방법들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하더랍니다. 그래서 동기부여 프로그램을 만들어 닦달하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하고 비전을 주며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뿐이더랍니다. 하지만 런던 대학교에서 같은 일을 66일 정도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는 결과를 바탕으로 습관 달력을 만들었고 그 칸을 다 채우도록 하였습니다. 결과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이겨가는 그 달력은 결국 자아가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자아가 저항하지 않고 도와주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로 보자면 습관을 들이는 66일은 40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죄와 싸워 이기실 수 있다면 3년도 버틸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3년을 버틸 수 있다면 영원히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음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아의 저항을 40일 동안 끊어보도록 권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자신의 육체를 이기기 위해 장미 밭에서 수없이 굴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구르는 시간은 훨씬 적어졌을 것입니다. 항상 처음이 힘들지 습관이 되면 자아를 이기는 것이 덜 힘듭니다.

자아의 저항은 삼구, 즉 세속-육신-마귀이기 때문에 자선-단식-기도로 자아를 길들일 수 있습니다. 사순절 때 자선, 단식, 기도에 더 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사십 일만 할 수 있으면 삼 년도 문제없기 때문입니다. TV와 인터넷을 40일 간 달력에 체크하며 끊어봅시다. 술과 담배를 그렇게 해 봅시다. 아침기도 한 시간을 40일 동안 해 봅시다. 매일 미사를 40일 동안 해 봅시다. 그렇게 되면 그것에 대해서는 자아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아가 “그냥 도와주고 끝내자!”라는 항복의 말을 할 때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을 이기기 전까지 가나안 땅에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바라보며 빛을 밝히는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의 지도 사제와 백성들은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그들을 향하여 타올라 그들은 처참한 꼴을 당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그들을 유배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자비로 그들을 다시 품어주시어, 또다시 사랑의 길을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에페 2,4) 

 

예수님의 십자가는 광야의 구리뱀처럼(민수 21,4-9) 구원의 징표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과 헌신의 결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 3,16) 목숨바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나무 위에 들어 올려진 것은, 상처를 입고 타락의 밑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과 생명의 표지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사랑을 회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살려나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사랑과 정의 때문에 죽어가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물러 사랑을 실천하는 이는 빛 가운데 머뭅니다. 그런데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자기가 한 일을 감추려고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고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빛이신 하느님을 외면하고, 악을 저지르며 어둠 안에 머무는 사람은 심판을 자초할 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교회의 목자들과 봉사직무를 맡은 이들의 위선과 삐뚤어진 권위행사, 고귀한 성을 상품화하고 유희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폭력과 파렴치함, 기업인들의 끝없는 탐욕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런 것들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절정을 이룬 사랑을 갈망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삶의 중심에 허망한 우상과 인간을 피폐케 하는 독버섯을 키우는데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짓을 덮으려고 더 큰 어둠의 동굴을 파고 또 파는 어리석음과 죄악을 되풀이하는 까닭입니다. 민족의 평화와 국민들이 더 인간답게 살 길을 고민하기보다 유치한 어깃장 놀음에 팔린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스스로 어둠의 터널을 파며 악취나는 시체가 되어갑니다. 

 

우리 모두 어둠보다 빛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생명을 빛으로 받아들이며, 그 빛 안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이 사순절은 예수님을 따라, 그분의 사랑의 진리를 배워 실천함으로써,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진리를 감춰버리는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와, 사랑과 정의의 실천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빛을 내 안에 환히 밝히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높이 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순 제4주일은 기쁨의 장미주일로 표현되고 있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어렵고 힘든 결실을 촉구하는 엄숙함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테마는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빛으로써 세상에 보내 주셨다. 이 빛을 피해 숨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는 즉 죽음의 판결을 받는 것이다. 

 

제1독서: 2역대 36,14-16.19-23: 주님의 분노와 자비

1독서에서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이유를 백성들이 예언자들의 권고를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 하느님의 비탄에 찬 간절한 호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약속의 하느님께서는 고레스의 해방칙령을 통해 한 가닥 희망을 보여주신다. 이것으로 바빌론 유배가 끝난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3절). 오늘의 전례가 “기쁨”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1독서의 이 마지막 고레스의 행위인 해방칙령 때문일 것이다. 

 

복음: 요한 3,14-21: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

복음에서는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심판의 주제를 엄숙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 심판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심’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삶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의 삶의 척도로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미 구원의 영역에서 사는 것이며, 그 반대로 그 사랑의 선물에 대해 문을 닫을 때는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먼 사람이 되는 것이고 구원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 되고 만다. 

 

어째서 주위의 모든 것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을 때 어둠 속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가?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곳으로 멸망에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높이 들리심’이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높이 들리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높이 들릴’ 수 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새로 남’이란 오로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며, 예수님의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도 고양될 수 있다. 예수께서 수난이 가까웠을 때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라고 하신 것은 당신 사랑의 매혹적인 힘을 확인시켜 줄 뿐 아니라, 당신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 앞에서 ‘높이 들리신’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우리 각자의 근본적인 선택이 있다. 즉 우리 각자의 운명은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을 믿거나 아니면 거절하는 데 있다.”(D. Mollat, Dodici meditazioni sul Vangelo di Giovanni, Brescia 1966, p. 42.).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6-18). 어떤 면에서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느님의 사랑이 심판을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이고,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죽음을 담보로 우리 인간의 구원을 택하셨다. 

 

즉 인간에 대한 심판은 바로 이 사랑의 위대함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빛을 거절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생명까지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 심판의 선포는 바로 인간 자신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빛을 외면할 때에는 자기 자신이 장님의 상태가 된 것에 대해 그 빛을 탓할 수는 없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19-20절). 우리의 행실이 드러날까 봐 빛을 멀리하는 것, 즉 심판을 피하기 위해 빛을 멀리하는 것 그 자체가 더 무서운 심판의 대상이 된다. 

 

빛을 멀리 한다는 것은 어둠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단죄 받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1요한 4,16 참조)을 믿지 않을뿐더러, 그의 아집과 오만불손한 자만으로부터 그를 구원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2독서: 에페 2,4-10: 여러분은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2독서에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보다는 해방의 행복한 결과에 주안점을 두고 ‘기쁨’에로 초대한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4-6절). 이와 같이 부활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은 사순절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하느님의 빛을 더욱 가까이하는 삶이 되어 ‘높이 들리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과 더불어 변화될 수 있는 삶을 바치기로 하고 이 미사 중에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시간이 되도록 열심히 기도하자.

 

 

 

예수님 안에서 제 지신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김진학 안드레아님

저는 묵상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제 영혼은 금세 무한히 크신 하느님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서 곧장 깊은 묵상에 잠겨들거던요. 그 때 제 영혼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졌으니만큼 제 영혼이 머물러야할 최후의 본향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더욱 잘 깨닫게 됩니다.

이런 순간에는 영혼이 육신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하느님 대전으로 날아가는 듯하고, 예수님 앞에 이르러 그분 안에서 제 자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느낍니다.

-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하는 성녀 젬마 p86. 장면 역,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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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향기마을 가족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묵상글로 뵙는 것 같습니다.

엊그제 사순시기가 시작된 것 같은데 벌써 성주간이 다가왔습니다.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내시고 계시지요?

동계올림픽 열기가 가라앉자 한편엔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한 편엔 me too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몰랐고, 숨겨졌고, 어두웠던 갑(甲)들의 삐뚤어지고 잘못된 문화가 당연시 됐던 사회가 수면 위로 오른 것입니다.

미투 운동은 예전엔 꿈도 꿀 수 없었던 을(乙)들의 양심선언이자 반격입니다. 다른 것도 아닌 인간의 성(性)과 관련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것들에 대한 저항은 부당함과 억울함을 바로잡는 좋은 운동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가톨릭의 사제 한 분이 미투에 연루되어 버렸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렇다고 사제를 욕하거나 탄핵할 권한이 우리는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사제라고 죄를 짓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게 어떤 죄이던 우리가 사제를 탄핵할 수는 없습니다.

신품성사는 우리가 아닌 하느님이 주셨고 심판도 하느님이 하실 것입니다.

죄가 있다고 신품성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제들을 욕하기 전에 사제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제의 삶은 일생동안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해가는 사람들이지 예수님이 아닙니다.

 

사랑의 향기마을 가족여러분

한국의 초대교회에서는 사제 한분을 모시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리며 순교하셨습니다. 공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저는 일 년에 몇 번 밖에 오시지 않는 신부님의 미사집전과 성사를 보기위해 길게 줄서던 어른들의 행렬을 기억합니다. 

 

“사제가 그럴 수가....” 라는 욕보다 “내가 사제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지?”를 생각합니다.

그 신부님은 지금 세상을 살고 싶지 않은 십자가를 지고 계실 겁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용서를 배웠습니다. 날마다 외우는 ‘주님의 기도’를 다시 한 번 외워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자신의 신분까지 완전히 노출되어 더 이상은 살아가실 수 없으실 만큼 그 신부님은 고통스러우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부님을 위해 함께 주모경이라도 외워주실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은 배워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가톨릭은 예수님이 주인이신 용서와 화해의 교회입니다.

 

 

 

“왜 하필 믿음일까?”

     여인석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의 핵심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지 불신으로 인한 멸망이 아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믿음’일까? 

희망, 사랑, 정의, 용서와 같은 다른 덕목들도 많은데 말이다. 

그것은 모든 관계의 기본이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는 사랑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한다. 

만약 부부 사이에 믿음 없이 산다면 그건 헤어지지 못해 껍데기만 부부로 사는 것뿐이다. 

신앙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본당 신부가 본당 신자들을 믿지 못하고 본당 신자들이 본당 신부를 믿지 못한다면 그 성당은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콩가루 공동체가 된다. 

믿음 없이는 희망과 사랑도 없고 믿음 없이는 기쁨도 결실도 없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시작되는 시점은 믿음을 가지는 순간이다. 

최소한의 믿음이 있어야 성경의 내용들이,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오늘 복음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와 닿기 시작한다. 

이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기도가 시작되고 생활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 믿음은 인간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은사로 생기는 것이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고린 전 12,3). 

따라서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은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 믿음의 싹이 움트기 위해서는 성령께 믿음을 청하는 겸허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즐거워하여라.

     김현일 예로니모 신부님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오늘은 사순 제4주일 ‘즐거워하여라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 미사에서는 자색 대신 분홍색 제의를 입기도 합니다. 

전에는 장미주일이라고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주일’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회개와 참회의 시기를 보내는 사순시기에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보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합니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이 선포된 것입니다. 

나라 잃은 설움, 그리고 하느님의 집을 가지지 못한 설움, 이스라엘 백성은 가슴이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바로 축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순 시기가 곧 지나고 파스카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참회와 회개로 자신의 죄를 씻고 골고타의 십자가를 향하여 달음질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다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파스카 축제를 시작하십니다. 우리에게 손짓하십니다. 

십자가를 향해 달려오라고, 오기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노라고, 십자가는 무겁지 않다고, 고통스럽지 않다고, 십자가는 자유이고 사랑이라고 외치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부활절이 곧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부활로 이끄십니다. 

오늘 복음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로 달음질쳐 기쁘고 즐거운 부활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형제 사랑이 하느님 사랑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 목요일엔 겨울에도 볼 수 없었던 함박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습기를 많이 머금은 눈이라서 교정의 소나무들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몇 그루가 쓰러졌습니다. ^^*

그래도 극심한 가뭄을 해소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겠죠?

 

형제 자매님,

오늘은 사순제4주일인데 전에는 장미 주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날 전례 때는 사제가 분홍빛 제의를 입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내고 있는 사순절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해줍니다.  

교회가 사순시기를 정하고 희생과 절제를 하며 자선을 베푸는 것은 부활을 더 잘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의 전례 독서들도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대신들과 사제들과 백성들은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배신하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던 예언자들을 배척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민족 바빌론제국에게 패망하여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유배지에서 힘든 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자 그들을 유배생활에서 해방시켜 다시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유배생활은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고, 하느님을 더욱 열심히 믿고 섬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다시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리고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백성들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오늘 복음이 증언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맏형이 되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배려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신의 몸을 온전히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삶, 곧 하느님과 같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은 우리가 영원한 삶, 곧 부활의 삶에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한없이 커다란 하느님의 선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맞아들여 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지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해 드릴 때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실 수가 있고 우리를 당신처럼 영원한 삶을 누리는 존재로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해 드릴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서로 사랑하여라.”는 새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예수님을 직접 사랑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그러므로 형제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도록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잘 사랑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는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내 할 일은 다 했다.”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할 때까지’ 

곧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 응답할 때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함께 계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고자 노력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일치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듣고 간직한다면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실 것이고 그 사람은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그 말씀은 그 사람을 변화시켜 줄 것이며 그를 예수님과 일치시켜줍니다.  

그때 그 사람은 무한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야 말로 생명이 충만하신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형제 자매님,  

이것이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심판 때 받게 될 영원한 벌이 무서워서 죄악으로부터 도피하는 소극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분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자신의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늘 생명이 충만한 삶, 기쁨이 넘치는 삶,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런 기쁨과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살펴보고, 우리가 형제들을 더 잘 사랑함으로써 이런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오늘의 미사를 봉헌합시다.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명은

아픈 것입니다.

 

사랑도

아픈 것입니다.

 

아프니 예수님을

찾게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프다 

말씀하십니다.

 

모든 존재는

아픔을 통해

십자가를 

알게됩니다.

 

피할 수 없는

십자가가 

우리의 어둠까지

밝힙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들어 올려지는

여정까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구원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려했던

어리석음을 이제야

십자가를 통해

내려놓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아픔을 겪는 것도

사랑이며 

은총입니다.

 

십자가로

사랑의 영역이

확장됩니다.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하느님의 

구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우리 삶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어주는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고통으로

어둠은 비로소 

빛이 되고

사람은 비로소

영원한 생명이

될 것입니다.

 

구원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하느님의 氣대로 살아야 구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여당은 야당을 심판하려고, 대통령을 심판하려고 의원된 분도 있네요. 남편이 부인을 심판하려고, 부인도 남편을, 자녀가 부모님을 이게 뭡니까. 이렇게 사니 식은 땀 나네요. 만물들은 서로 어울리지 심판들 안하거든요? 

 

남녀노소, 전라도와 경상도가, 대 중 소 기업들, 모두가 자연처럼만 삽시다. 하느님의 기(氣)님이신 예수님을 믿어 모두가 자연스레 어우러져 삽시다. 예수님은 자연의 힘(하느님의 氣)대로 살아서 모두가 구원되라 하셨잖아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단절을 통한 새로운 시작'

     박재식 신부님

오늘 시편(화답송)을 보니 카리브해 출신 흑인 혼성 그룹 ‘보니 엠’(Boney M)이 생각납니다. 1978년 발표한 ‘바빌론의 강’(Rivers of Babylon)은 레게음악, 흑인 특유의 리듬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흥겹게 했습니다. 하지만 노래의 가사는 흥겨운 리듬과는 다르게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득 배어있습니다.

‘바빌론의 강’의 내용과 비슷한 처지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 합창 ‘가라, 내 생각이여, 금빛날개를 타고’를 들으면서 한 주간을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려 합니다. 주변 상황이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더라도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 자비를 기억하면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복음은 정말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에 몰래 찾아온, 당대 유명한 바리사이 니코데모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하신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말씀과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위로부터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고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영으로 태어나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경의 여러 말씀과 신학적 설명을 통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라는 말씀에 대한 묵상과 해설을 통해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합니다.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뱀인지 나와 있지 않지만 민수기 21장 4-9절에 죽음의 원인과 새로운 생명이 설명돼있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뱀같이 슬기롭고”(마태 10,16)라는 구절 외에는 뱀은 간사하고 사람에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동물로 묘사됩니다. 하느님 본질과는 대립적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뱀은 당시 사회에서 지혜의 상징이자 치료의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뱀은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생명’과 관련이 있는 사상이자 학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세는 주님 말씀을 따라 ‘구리 뱀’을 만듭니다(민수 21,9). 구리는 이집트가 히타이트 국가와의 전쟁으로 철기문명을 접한 후 이집트인들의 자존심이 됐습니다. 전쟁에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신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도구이자 버려야 하는 폐물이 되었습니다. 즉 구시대의 가치와 우상을 높이 매달아 단절시키는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생명을 살게 된 것입니다. 

구리 뱀 사건으로 아담 이후 단절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모세와 그의 동료들은 노예로 살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폐습을 높이 매달았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십 자가에 들어올린다’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들어올려짐’은 단절과 외면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죄수를 높이 매달고 온갖 욕설과 폭행을 하는 인류의 문화에서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또 다른 측면은 희생과 봉사를 통한 영광과 명예의 의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극히 존경하는 경우 어깨 위에 들어올립니다. 또 군중 앞에 올려서 환호와 갈채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십자가에 지니고 있는 욕심과 편협한 사고방식을 매달고 철저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한편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한없는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매일 매일 예수님을 따라가며 살아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고통받던 이집트 시대에 하느님과의 소중한 만남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그릇된 즐거움에 철저히 순응하는 삶으로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처절한 치욕과 아픔을 체험하는 순간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됐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우리에게도 또 다른 십자가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모두 구시대 유산과의 단절을 통해 위에서부터 새로이 태어납시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안형준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도록 한 이유가 인류에 대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 16) 

하느님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고, 바로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구원을 결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 하셨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빛(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빛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고, 빛의 비추임 안에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곧 옳은 것을 행하고, 옳지 않은 것을 멀리하는 삶, 잘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열심히 하려는 사람을 본받으려는 삶.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하는 삶. 그 삶이 바로 빛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반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의 요구에 따라 사는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곧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스스럼없이 남을 짓밟고 갑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의 삶은 그야말로 죄의식도, 죄책감도,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 숨어 살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 어두움을 털어 버리고 다시 시작하길 바라십니다. 빛이신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내 삶이 그 어떠한 흠도 티도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부족하여 매번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족한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일이 세상에 전해질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관심과 무관심한 태도

     채동호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주 하느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것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던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 처참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전해줍니다. 그 무관심한 태도의 결과는 왕국의 멸망과 죽음, 그리고 타국에서의 유배생활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인간들은 주님의 말씀과 경고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늘 취합니다.

그러나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의 증언대로 한없이 자비스러우신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 인간들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욱 크고 깊은 관심을 보이시며 인간들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외 없이 주님께는 소중하고 귀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무관심을 오히려 지극한 관심으로 되갚으시는 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의 신비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각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있으나 마나 한 무관심의 관계가 아니라 더욱 긴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우리와 맺기 바라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동안 일상 안에서 주님을 잊고 주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게 살아왔다면, 이제 우리도 주님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맺기 위하여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고쳐야 하겠습니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최우선적인 관심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분께 우리의 참된 평화가있고 참된 생명과 구원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일상 안에서 늘 주님을 잊고 살면서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와 고통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계속 고집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전혀 알 길 없고 주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인으로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증언입니다. 참된 믿음으로 우리가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우리는 죄인으로 판결받은 것입니다. 그런 죄인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이 은혜로운 사순 시기에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꿀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불행을 이용하여 행복을 배우는 사람

     박영식 신부님

어느 날 나는 버스 안에서 한 소녀를 보았다. 그는 무척 쾌활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가 부러웠다. 그때 이 소녀는 버스에서 내리려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는 것이었다. 소녀는 내 옆을 지나가며 살며시 웃음을 입가에 띠며 “고마워요.” 하며 지나가게 자리를 만들어준 것에 감사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이러게 기도했다. “오, 하느님, 제가 투덜거리거나 불평하면 용서해 주세요. 제게는 다리가 두개나 있어요.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답니다. 저 아름다운 소녀처럼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이웃에게 고마워할 줄 알게 해주소서.” 나도 버스에서 내렸다. 껌을 파는 소년을 보았다. 껌을 하나 살려고 다가갔다. 그는 미남에다 매력적이었다. 껌을 사려하자 소년이 무척 기뻐했다. 내가 껌을 받아들고 돌아가려는데 소년이 “고마워요. 친절하게 제 말을 들어주셔서.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볼 수가 없답니다.” 그때 나는 다시 기도했다. “오, 하느님, 제가 투덜거리거든 용서하세요. 제게는 눈이 두개나 있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잖아요. 저 앞을 못 보는 소년처럼 늘 고마워할 줄 알게 해주소서.” 또 나는 길을 계속 가다가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 가까이 아이 하나가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아이에게 물었다. “애야, 너도 가서 아이들과 놀지 그래.”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이는 앞만 뚫어지데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아예 듣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 아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줄을 짐작했다. 자기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내가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알고 얼른 자리를 비키는 것이 아닌가? 또 나는 기도했다. “오, 하느님, 제가 불평하면 용서하세요. 제게는 귀가 두개나 있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잖아요. 저 앞을 못 보는 소년처럼 남을 배려할 줄 알게 해주소서.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다리가 있고,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니, 하느님, 제가 불평하거든 용서하세요.”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이르셨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물은 니코데모에게 이 재생이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가져다주는 열매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힘으로 모든 죄의 뿌리인 이기심을 버리고 거룩한 마음으로 세례성사를 받고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했다. 천주교 신자,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던 것이다. 우리가 신자가 된 목적은 불행을 모면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행과 온갖 고난을 겪음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함이다. 특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겪는 고통은 예수님의 운명에 참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어차피 받는 불행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한다.

 

“불행을 모면할 길은 없다. 불행은 예고 없이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행을 밟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할 힘이 있다. 불행은 때때로 유일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불행을 이용할 수 있다. 불행 앞에 우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불행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오노레 더 발자크)

 

사람은 불행에 빠져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이고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행복은 훌륭한 선생이다. 그러나 역경은 그보다 더 훌륭한 선생이다. 불우한 사람들, 병자들, 정박아들, 불구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음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그래서 불만이 많은 자들을 자기 삶을 하느님의 선물로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불우시설로 데려가 현장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고마워하는 사람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어김없이 이웃에게 사랑을 베푼다. 행복한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면 자기의 행복은 갑절로 커진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모든 불행과 고통과 죽음은 인류가 죄를 짓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를 대신하여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불행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은 인류가 받아야 하는 고난을 대신해서 당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고통 덕분에 자기가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고마워하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은 없다. 남들이 나를 비추어 주기 때문에 나에게서 빛이 나온다.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 때문에 행복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행한 사람의 침묵이 없었던들 행복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안톤 체호프)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는 그 소녀, 앞을 못 보는 그 껌팔이 소년, 들을 수 없어 친구들과 함께 놀지 못 하는 그 소년은 고통 속에 매여 있지 않고 고통을 이겨냈다. 그래서 미소를 잊지 않고 고마워할 줄 알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가르친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성령에 힘입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시험만 합격한다면, 취업만 된다면, 로또 복권에 당첨만 되면.... 등등의 조건을 들어 지금의 고통과 시련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해서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될까요? 정말로 장밋빛 인생이 자기 앞에 펼쳐질까요? 아닙니다. 아마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서 ‘이것만 해결된다면’이라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근본적인 것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힘든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을 간직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얼마 전에 보았던 동영상 하나가 생각납니다. 

눈이 너무 많이 온 어느 날이었습니다. 출근을 위해 집밖에 나오니 자신의 차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운전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차에 쌓인 눈을 치우기 시작합니다. 미끄러져서 뒤로 벌러덩 자빠지면서까지 말이지요. 아무튼 한참을 치워서 어느 정도 운전할 정도가 되었다 싶었을 때, 그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차문을 열기 위해 자동차 리모컨 버튼을 누릅니다. 그런데 글쎄 앞 차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을 해도 역시 마찬가지로 앞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차라고 생각했던 차는 남의 차였고, 엉뚱한 차의 눈을 신나게 치웠던 것이지요. 이처럼 목표를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힘만 들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목표로,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세의 구리 뱀은 십자가의 예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해서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지요. 하지만 뱀에 물린 사람이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 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구리 뱀을 통해 살아날 수 있던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살 수 있습니다. 즉, 죄라는 독사에 물린 사람은 누구나 주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죄가 용서되는 치유가 있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멸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죄로 기울어져 있을 때, 오로지 매달릴 분은 주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접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더욱 더 신앙생활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지극함을 기억하는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살 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이상한 인종들, 나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에밀리 헨리 고브로)

 

좋은 쪽으로 닮기.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다가 영국 리버풀 대학에서의 한 실험의 흥미로운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남녀 각 11명에게 부부 160쌍의 사진을 뒤섞은 뒤 인상이 닮은 남녀들을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닮았다고 지목된 남녀를 보니 대부분이 실제 부부더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오래 살다보면 외모까지도 서로 닮아간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 미세한 얼굴 표정이나 감정 표현, 대화상의 어투 같은 것을 자기도 모르게 서로 배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살아가면서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가치관을 맞추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닮는 것이 외모만이 아니라 가치관이나 성격까지도 닮게 됩니다. 

이렇게 닮아가는 것은 좋지만 문제는 어떤 쪽으로 닮아 가느냐는 것이지요. 좋은 쪽으로 닮아 가야 하는데, 나쁜 쪽으로도 닮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흥부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놀부와 놀부 마누라의 심보를 보십시오. 나쁜 쪽에서 똑같습니다. 처음부터 과연 그랬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누가 먼저 나빴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쪽이 나쁜 쪽을 닮아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야기일 뿐이라고 간단하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그런 부부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반대로 결혼 전에는 봉사나 나눔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결혼 후 부부가 함께 사회봉사를 하고 기부를 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닮아가는 것을 매스컴을 통해서 종종 보게 됩니다. 이는 좋은 쪽으로 닮아 가는 모습입니다. 

닮아가는 것은 부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쁜 쪽을 닮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좋은 쪽을 닮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 나쁜 점을 크게 만들지 말고, 대신 좋은 점을 크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점을 가지고 있는 이웃을 스승으로 삼고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래야 서로 좋은 쪽으로 닮아갈 수가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세상 같습니다. 즉, 먹고 산다는 이유를 들어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를 없애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에 많은 악들이 판을 치고, 점점 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쪽으로 닮아가는 우리가 될 때 이 세상을 더욱 더 살기 좋고 사랑 가득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이 바로 ‘나’한테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믿음은 순명을 낳는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3,16)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아들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아들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제의색은 장미색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희생과 보속, 극기의 삶을 잘 살아오셨습니다. 지칠 만하지요. 그렇지만 한 고비를 넘겼으니 좀 더 노력 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의지가 약해 실천하지 못하였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은혜의 때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미 새와 아기 새가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아기 새가 귀여워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아기 새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도 어미 새는 계속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미 새는 늙었습니다. 늙은 어미 새는 이제 더 이상 아기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지 않자 어른이 된 아기 새는 어미 새의 머리를 콕콕 쪼았습니다. 배고프다고 화를 내면서 콕콕 머리를 쪼았습니다.”

 

큰 사랑을 받았으면 큰 사랑을 할 줄 알아야 하는 데, 받는 데만 익숙해 졌지 사랑을 할 줄 몰랐습니다.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다고 했거늘 그 사랑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아니 깨우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누리고저 한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방법은 생각지 않고 주어진 고기에 묶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을 잘 읽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호흡,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말하지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손이요, 발이라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기보다 내 이익을 더 챙깁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은총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면서도 제 실속을 위해 정신없이 삽니다. 하느님을 간절히 부르면서도 그저 부를 뿐 그분의 뜻을 찾고 행하기보다 내 뜻을 들어달라고 하소연하고는 내 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내 원의대로 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댑니다. 정말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가? 영락없이 어미 새의 머리를 쪼는 아기 새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구리 뱀을 만들어 광야의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리면 그 구리 뱀을 바라보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습니다(민수21,6-9).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보라면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순명이라고 합니다. 순명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고, 그러나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한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신 그 사랑을 살게 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봐서 산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숨겨있는 그분의 사랑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 콘라도는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 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겸손과 양순함을 배웁니다. 또한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면 즉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도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십자가는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를! 자동차에 십자가를 매달고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고 위로 받지 말고 그것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십시오.

 

기도해야 한다는 것,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 미사참례를 하고 그분의 손발이 되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 차원을 넘어 그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이는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몸소 씨를 뿌리십시오.

 

나중에 죽으면 신부는 입만 천당 간다고 하잖아요. 말만하고 행함이 없으니까, 수녀님들은 귀만 간대요.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거든요, 여러분은 발만 간대요. 열심히 성당에 오셨으니까요. 다 알아요. 알면 뭐합니까? 알면 바뀌어야죠. 내 삶을 바꾸어야지요. 어둠을 빛으로 바꾸지 않는 한 안다고 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 삶을 빛의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실 매일 매순간 거듭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어느 한 부분의 구원이 아닙니다. ‘아무개’ 한 인간의 구원이지요. 그러므로 균형 잡힌 신앙생활로 우리 모두가 구원 받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확실히 믿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꼭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믿음에 따르는 행동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심판을 원하지 않 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3,18).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보지 않은 사람이 죽었고, 소돔이 멸망할 때 구원에 부름 받은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 했는데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19,26). 결국 높이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혜택을 주어도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곧 심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하고 말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만나면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만날 때마다 부활의 생기를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가장 위대한 선물이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 사랑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최양업 토마스 신부).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예비자 교리에 열심히 참석하셨습니다.
신부님은 할아버지께 세례식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돌아 가셨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허, 그런 질문하지 마세요,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 마누라의 짓인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언젠가 우연히 내 마누라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자기 죄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래도 내 마누라인데 잘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죠?
남의 죄 때문인가요? 아, 내 죄 때문이라고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이래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녁을 먹고 가끔씩 명동거리 산책을 하곤 합니다. 명동성당에서 롯데백화점 앞까지의 200미터 정도의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한국 사람보다는 외국 분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길거리의 먹거리를 사먹기도 하고, 가게에서 물건을 사기도 합니다. 길거리 노점에서 물건을 파시는 분들도 중국어, 일본어, 영어는 기본적으로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대한민국 수도의 명동 거리는 이렇게 늘 분주함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명동거리에서 중앙우체국 쪽으로 조금 걸으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됩니다. 높은 전광판 위에 사람이 올라가 있습니다. 아직은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데 전광판 위에서 사람은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저녁에 ‘거리의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님들과 교우들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명동의 밝은 빛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공존의 그늘에서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해고될 위험에 있는 사람, 같은 일을 하고도 적은 급여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 그곳에 사람들이 있는데 신문과 방송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양심을 속였으며, 자신들의 욕심대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삶의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벌을 주십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시련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당신의 처소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뉘우치기만 하면, 우리가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감싸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바로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들 구원을 위해 보내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돈과 명예, 권력처럼 외부로부터 채워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작품으로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 주셨듯이, 우리들도 우리들의 맘과 정성을 다해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때 우리는 참된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내부에서 채워지는 것이기에 사라지지도 않은 행복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하느님처럼 사랑하며, 하느님처럼 정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나약함과 우리들의 잘못으로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이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만큼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순시기의 기쁨 -참 좋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순시기 이렇게 기쁘게 지내기는 처음입니다.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도 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생시인가 꿈인가 할 정도로 안식년을 끝내고 귀원한 후로의 나날이 행복합니다. 한 때는 '설렘'에, 또 한 때는 '아픔'에 새벽 잠을 깼지만, 지금은 '기쁨'에 새벽 잠을 깹니다. 하여 요즘 사순시기 면담고백성사중 가장 많이 쓴 보속 처방전 말씀은 다음 바오로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5,16-18).

 

아마 이보다 더 좋은 처방의 말씀도 드물 것입니다. 며칠전 수도형제들 앞에서 미사 강론 중 언급한 말이 떠오릅니다.

"안식년 중 내 강론 스타일이 변했습니다. 큰 특징이 하나 생겼습니다. 미담인 경우 대담하게 실명을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주저했지만 지금은 거침없이 아름다운 일화와 더불어 그 주인공들의 실명을 언급합니다. 이제 제 강론은 '가톨릭신문'처럼 되었습니다. 사순시기는 우울하고 어둡게 지내는 시기가 아니라, 주님 부활을 앞당겨 기쁘고 밝게 지내는 시기입니다. 분도성인 역시 성령의 기쁨으로,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부활 축일을 기다리라 합니다. 규칙서에 기쁨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모두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장에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꼭 저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안식년을 통해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에페2,4-6).

큰 위로와 구원의 말씀입니다. 

 

'우리'대신 '나'를,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대신 '안식년을 통해'를 넣어 그대로 내 고백으로 바꿔봤습니다. 비록 지상에 머물지만 행복하기가 주님이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아 사는 느낌입니다. 

요즘 며칠도 기쁨에 넘쳤던 하루하루였습니다.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게 사십시오.“

시들어 가는 꽃들이지만 꽃병에서 한 송이를 뽑아 말씀 처방전과 함께 면담고백성사를 본 형제자매들에게사랑의 보속 선물로 드리니 '기쁨의 고백성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현 세라피나 자매는 음성이 좋아 성가 한곡 부를 것을 보속으로 하나 덧붙였습니다.

"아, 자매님은 성악을 전공하셨어도 좋을 뻔 했습니다.“

진정이었습니다. 보속으로 눈물지으며 정성을 다해 부르는 '마니피캇' 노래가 심금을 울렸습니다. 하느님은 거룩한 성가를 통해 자매는 물론 나를 치유하셨음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3월 첫주 금요일(3.6일), 월피정중인 서울 베네딕도회 수녀님들에게 3시간에 걸쳐 고백성사를 줄 때 대부분 보속도 일치되었고 내심 흡족했습니다.

"보속은 오늘 피정 하루 오로지 하느님만 생각하고 사랑하며 거룩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보속을 선물했습니다. 제 동생 영희 엘리사벳이 보낸 카톡 편지도 나를 기쁘게 했습니다.

"요즘 강론은 전 같지가 않아요. 단맛이 나는 것 같아요. 물흐르듯 이어지는 체험의 숨소리가, 사랑이 배어있어 읽으면서 느껴져요. 새로 마련된 집무실이 있어 마음 든든하네요. 최 빠코미오 새 원장님께서 사랑으로 해주셔서 감사해요. 매사 감사의 마음으로 사시니 기쁨이 넘쳐나는 것 같아요. 강론을 보는 이들도 신부님이 안식년 전후가 다르다고 해요.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해요. 김진봉 말가리다 수녀님은 근래 보기 드문 성인사제라고 극찬을 하셨어요.“

 

마음의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마침 새벽에 일어나 집무실로 나오려니 가지런히 놓여있는 두 켤레의 신발이 보기 좋아 즉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후배이자 원장인 빠코미오 수사의 신발과 내 신발입니다. 왼쪽은 내 슬리퍼이고 오른쪽 신발 콧머리에 태극기 스티커가 붙어있는 귀엽고 앙증스런 털신은 빠코미오 원장의 것입니다. 이런 사랑스런 장면 역시 사랑의 선물입니다.

 

어제의 행운목 선물도 소개합니다. 

15년 이상 가족 미사를 드려준 가족 12명이 생전 처음 저를 찾았습니다. 가족을 대표하여 최경원 엘리사벳 자매가 미사를 신청했고 어제는 전 가족을 대동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를 찾았고, 행운목도 선물했으며 참으로 회기애애한 분위기 중에 대화도 나눴고 다섯 가족에게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재 책도 선물했습니다. 떠날 때는 형제자매들에게 강복도 듬뿍 드렸습니다.

도대체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함께 사는 수도형제들 하나하나 모두가 소중한 하느님 사랑의 선물들입니다. 하느님이 그 마음을 움직여 유배중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시켜 자유인들이 되게 해준 1독서의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역시 하느님의 좋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은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예나 이제나 세상 모든 나라 지도자들이, 모든 시간과 사건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은 '구원의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구원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아, 구원의 선물, 하느님의 선물을 깨달아 알 때 저절로 샘솟는 겸손과 기쁨, 감사의 삶입니다. 구원의 선물을 실감할 수 있는 참 좋은 선물 중 하나가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다음 요한복음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거행되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속속들이 체험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아드님과 그 아드님 대사제 예수님 친히 집전하시는 미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이자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바오로의 다음 고백 말씀이 고무적입니다. 믿는 이들의 긍지요 끊임없이 분발케하는 자극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자랑이 되고 하느님은 우리의 자랑이 됩니다. 새삼 우리 인생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우리의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미완성의 하느님의 작품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선행의 노력이 함께 하는 가운데 완성되어가는 하느님의 작품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래타레',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제의도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기쁨이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주님 부활을 기다리는 기쁨이 사순시기 우리 기쁨의 원천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의 작품인 우리를 점차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완성시켜 가십니다.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66,10-11참조). 아멘.

 

 

 

까꿍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

사순 제4주일 오늘은 전통적으로 ‘래따레 주일’(Laetare)이라고 합니다. 그레고리오 성가 입당송이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Laetare Jerusalem)라는 말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사순절 중간에 자리하기에 교회는 사순절 고된 나날을 보내는 신자들에게 기쁨을 상기시킵니다. 기쁨은 삶의 원천입니다. 기쁨은 우리를 살맛나게 합니다. 기쁨이 없다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기쁨이 있으면 깊이 살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우리 삶의 참 기쁨을 찾도록 합니다. 기쁨이 솟아나오는 원천을 찾아가는 시기입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데서 기쁨의 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재물에서, 오락에서, 건강에서, 인간에게서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런 데서 오는 기쁨은 스쳐지나가는 것임을, 영원하지 못한 것임을 잘 압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즐겁게 하다가도 어느 순간 우리를 깊은 슬픔과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우리 기쁨의 원천은 단 하나, 십자가에서 높이 들어 올려지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이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징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 바로 외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에게서 기쁨이 터져나옵니다. 기쁨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넘어져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웃을 수 있습니다.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삶에 부드러워질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이렇게 살 때 우리는 기쁨의 전파자, 기쁨의 증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까꿍’하고 웃읍시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에페 2,8-9)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순 제4주일은 전통적으로 '기쁨의 주일'로 지냅니다.

사순절에 왠 기쁨이냐구요?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공로를 통해 구원의 선물을 받게된 것을 미리 경축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바로 이 구원의 선물에 대한 넘치는 기쁨을 성대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잘 살아서 우리가 많은 은총을 받고 또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선물을 아무런 댓가없이 무상으로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 살든 못 살든 공로가 많든 적든 죄가 많든 적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공짜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리고 죽을 때와 죽고 나서조차도 모두 공짜 인생입니다.

그러니 그저 감사할 일뿐입니다.

공짜로 살아가는 인생인데 감사할 것 외에 또 뭐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구원의 기쁨을 누립니다.

오늘 한껏 감사드리는 날

되소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눈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봄의 기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상쾌한 공기, 대지로부터 생명이 꿈틀거리며 꽃망울을 터뜨리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는 이 즈음은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게 해준다. 교회는 사순 제4주일을 ‘기쁨의 주일’(Dominica laetare)로 정하고 수난을 향한 여정이 고통과 시련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을 향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래서 오늘의 입당송은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의 위로가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참조) 하고 우리 모두를 초대하면서,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남은 여정을 더욱 기쁘게 갈 수 있도록 재다짐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 세상에 빛 자체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째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은 결코 우울하고, 슬프고 지겹고 짐스럽기 만한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 삶이 인간적으로 고달프고, 힘겹다 해도, 세례 때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상으로 맞춰 주신 신앙의 안경, 사랑의 안경으로 모든 사건과 모든 사람을 바라보고 그분이 비춰주시는 빛으로 삶을 바라볼 때 뚜렷한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여정은 하느님을 알아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기 위하여 곧 영으로 볼 수 있는 안경을 찾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고 ‘영혼의 통로’이며, 믿음의 표현이다. 실제 사람이 밖에서 받아들이는 80% 이상의 정보가 눈을 거쳐 들어온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소리 이외의 거의 모든 정보가 눈을 통해 들어오고 눈으로 전달된다. 그렇다보니 무엇을 보며 어떤 마음과 지향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삶의 질을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척도가 된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마음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 달라지고, 어디에 눈길이 가 있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오늘날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는 시선이 사람을 구해 준다는 것이다.”라는 시몬느 베이유의 말처럼 우리의 구원은 ‘눈길’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만인의 형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도 ‘눈길’은 매우 중요했다. 눈길에는 무관심한 눈길, 반대만을 바라보는 대상화의 눈길, 적대자만을 바라보는 심문적인 눈길, 위험만을 바라보는 겁에 질린 눈길, 물건만을 바라보는 소유적인 눈길이 있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는 다른 존재들에 열려진 포용성 있는 눈길,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하는 친교의 눈길, 그리고 다른 이와 전적으로 합치하는 애정 어린 눈길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주시하였으며 특별히 각 개인을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경치와 자연, 세계에 눈길을 돌렸다. 그는 형제나 다른 존재들을 한 번도 비웃지 않았고, 부끄러움을 주지 않았으며, 조롱하거나 빈정대지 않았고, 분노하거나 면박을 주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열렬한 사랑과 친절에 넘치는 열정으로 다른 존재들을 깊이 있게 바라볼 줄을 알았다. 그의 이러한 눈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수난의 사랑’에 대한 회상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나무 위에 들어 올려진 것은 상처를 입고 타락의 밑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다. 수없이 많은 볼거리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십자나무 위의 예수님에게서 눈길을 떼지 말아야 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바로 그 순간 예수님과의 관계 단절이 시작된다. 관계단절은 의미 없는 삶,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 사업을 벌이는 셈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요 무의미이며 스스로에 대한 단죄이다.

 

세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탐욕에 빠지기 마련이지만, 순수한 눈길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면 영원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이웃을 나의 애정어린 눈길 안에 둠으로써 ‘은총으로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된다.’(에페 2,4) 따라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먼저’, ‘자주’ 바라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신 사랑이신 그분을 바라보지 않는 ‘주소 없는 눈길’은 죽음을 부를 뿐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어떤 눈길을 지니고 있으며, 나의 눈길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나의 눈길은 과연 믿음의 표현이 되고 있으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 되고 있는가? 이 사순절에는 이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나의 눈길을 가다듬었으면 한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믿음 안에서 포용하는 눈길과 친교의 눈길, 애정어린 눈길을 지니도록....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리는 봄처럼

겨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라.'는

진리의 기쁨을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내면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의 실천에 있음을 

다시 깨닫는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진리이신 주님께서는

좁힐 수 없는 

우리와 거리를

십자가의 빛으로

다시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십니다.

 

모든 어둠과 모순의

시작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교만에서 출발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십자가의 빛에

순명합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진리의 무게이며

십자가의 기도로

하느님의 뜻이

가장 분명해지는

빛이 되게하십니다.

 

모든 것의 배경이 되는

십자가가 역설적이게도

가장 빛나는 빛임을

어둠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어둠과 빛을

아우를 수 있는 건

십자가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빛은

피 흘리는 십자가를 통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저마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고유한 우리의 길을

걸어가고 느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진리의 빛을 향한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저마다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실천으로

우리의 삶을 성숙시킵니다.

 

사랑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자신과 이웃을

제대로 볼 것입니다.

 

빛은 모든 것을

제대로 사랑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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