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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1년 5월 12일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1.05.12|조회수642 목록 댓글 0

제1독서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7,15.22─18,1
그 무렵 15 바오로를 안내하던 이들은 그를 아테네까지 인도하고 나서,
자기에게 되도록 빨리 오라고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전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다.
22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24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29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31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32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
33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다.
34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18,1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2-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아레오파고스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하여 증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제자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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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 서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그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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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아레오파고스에서, 아테네 시민들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대상을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그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고대 그리스 문화의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아테네. 그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아크로폴리스 정상에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정수라고 손꼽히는 파르테논 신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건물로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지만, 그 거대한 규모와 높이 솟아오른 수많은 돌기둥은 여전히 보는 이를 압도하며 과거의 영광과 위용을 그대로 자랑하고 있는 듯합니다. 
여행길에 그 아크로폴리스 정상을 향하여 가다가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작은 푯말 하나를 보았습니다. “아레오파고스, 바오로가 이곳에서 설교하다.” 바오로는 그렇게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인 아테네에서, 그리스의 다신론 사상이 절정을 이루고 있던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며,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선포합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함과 웅장함과 그 화려함 앞에서 담대하고도 용기 있게 외칩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요? 신전 중에 신전이요, 인간이 지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졌던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어떻게 이런 말로 설교할 수 있었을까요? 바오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이 다 담아낼 수 없는 하느님, 사람의 손으로 드리는 섬김과 예배에 결코 종속되실 수 없는 그 하느님께서 바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오늘은 그렇게 온 세상조차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계심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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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는 분이시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요한 8,28)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곧 성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성자의 것이며,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성자에게 받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성부에게서 성자로, 성자에게서 성령으로 이어지는 이 심오한 일치의 신비는 세 위격이지만 하나이신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도 당신 안에 사랑으로 일치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 삼위께서 사랑 안에 온전히 일치하여 하나가 되시듯,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이는 사랑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하나가 되리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며 일치하려고 애쓴다면 이는 바로 충만한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밝아질까요?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자녀들이 많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평화롭고 사랑 가득할까요? 숨을 쉬어 보십시오. 들숨과 날숨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아가게 하시는 하느님을 날마다 의식하며 산다면 이 세상은 그런 나 때문에 더 밝게 빛나고, 아름다우며, 평화롭고 사랑 가득한 기쁨의 땅으로 변할 것입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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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안에 머무는 것은 타인에 대하여, 나아가 하느님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각자의 생각을 고쳐 하나의 사실과 정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고 다듬는 것이 진리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진리는 다름의 자리에서 서로를 향한 열린 눈과 귀를 간직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진리의 영께서 일깨워 주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믿음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길잡이시며 버팀목이셨습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신앙의 정답을 제시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아버지 하느님께 들으신 것을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여러 가르침은 획일화되고 화석이 되어 무조건 그대로 수행해야 하는 정언 명령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로 채색된 화려한 그림과 같습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리의 영께서 이어받으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들은 이야기를 진리의 영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과 같이, 신앙인들은 서로의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교환한 자리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누리는 개방적이고 초월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다듬고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와 우리 각자의 생각을 나누기 위하여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은 저 혼자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친교를 되새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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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처음에 어머니와 오랜 시간을 지내기에, 아버지가 자신을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모릅니다. 이때 어머니는 중간에서 자녀에게 아버지를 알려 줌으로써 자녀가 아버지를 존경하게 합니다. 이렇게 아내는 자녀 앞에서 남편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고 하십니다.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받아 교회에 주십니다. 교회는 또한 그 받은 모든 것을 자녀들인 신자들에게 베풉니다. 이 ‘받은 것을 자녀들에게 내어 줌’이 신부로서 신랑을 영광스럽게 하는 가장 완전한 방법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새로 태어나는 교회는 아직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피 흘리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당신께서 보내실 성령께서 오시면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자녀 앞에서 아내가 하는 역할을 교회 앞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역할을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 교회의 가르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배운 지식과 받은 은총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교회를 드러내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이도 교회의 사랑을 받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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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 연설합니다. 당시 아테네는 교육 도시로서 명성이 매우 높았으며, 시민들은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갈망과 함께 종교심도 깊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우상 숭배에 물들어 있었기에 온갖 것에 이름을 붙여 신격화하여 제단을 만들어 섬겼던 것입니다. 더욱이 아테네 시민들은 아직 자신들이 모르는 신이 분명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머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긴 것입니다. 

오늘 주목할 점은 바오로 사도의 태도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아테네 사람들을 대하는 바오로 사도의 지혜와 포용력이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세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언급하면서, 바로 그 알지 못하는 신이 ‘하느님’이심을 자연스럽게 말한 것이지요. 이 방법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그들의 무지와 우상 숭배를 무조건 탓하기보다, 그들 안에 심어진 복음의 씨앗을 발견하여, 그 싹을 키워 주는 이런 방법도 바람직한 선교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복음을 전하면서,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의 환경과 입장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참되고 변하지 않는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입과 손이 되어 말씀을 널리 전하도록 성령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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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의 아레오파고스 연설은, 그리스도인이 낯선 문화와 환경 속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갖추어야 하는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만, 그 신이 인간의 형태로 살면서 활동한다고 믿는 그리스인들의 범신론적 사고방식을 그리스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신을 향한 ‘대단한 종교심’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오로 사도의 태도는, 다른 종교인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중요한 자세로 꼽힙니다. 

흔히 그리스도교를 ‘보편적인 종교’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인간 영혼에 심겨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신에 대한 사랑’은 대화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 사람들이 지닌 신에 대한 사랑을 무시하지 않은 대신에, 구약에서부터 전해 오는 인격적인 하느님의 신앙으로 그들을 인도합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 연설은 오늘날 이웃 종교인들이 간직한 보편적 종교심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그리스도 신앙을 증언하는 교회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을 약속해 주시고, 그 진리 안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을 온전히 깨닫기에는 우리 인간의 이성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한민족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는 ‘한(恨)’의 종교심을 일으켜 주시어, 예수님의 십자가와 만나게 하시고, 성령의 치유와 화해의 장으로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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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의 아레오파고스 연설은 ‘자연 종교’와 ‘계시 종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잘 알려 줍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서 만물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진리는 ‘자연 종교’에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구세주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계시 진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제자들에게만 받아들여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 사상을 대변하는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리스도교 진리를 설파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인들의 종교심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을 하느님의 계시 진리와 부활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어떤 이들은 비웃고, 다음에 듣겠다는 이도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몇몇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계시 진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른 사상과 종교와 열린 대화의 장을 가지면서도 복음의 진리를 용감히 선포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진리이지만, 세상은 이를 진리로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진리의 영을 모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살아갑니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놓으면 우리의 삶은 단순하고 소박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고 이기심과 욕심이 사라져 새로운 질서를 포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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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설명을 통하여 바로 알 수 있는 것과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공부하는 과학이나 역사 등의 내용은 설명으로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제주에서 서울로 갈 수 있는 교통편과 소요 시간, 비용 등에 관한 정보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낳을 때의 부모 심정, 군인이었을 때의 심정, 아플 때의 고통 등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당사자의 처지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 렇다면 과연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이 역시 교리적인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처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7.13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숨결이 되실 때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숨결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가 세속적인 삶이 아닌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그 신비를 살아가도록 성령을 청합시다.

바쁘고 힘들면 여유가 없어집니다. 특히 사랑을 실천하기 힘들어집니다.
강의가 있어서 서울로 운전해서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워낙 복잡한 서울 길로 알고 있기에 강의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성지에서 출발했습니다. 일찍 도착한 뒤에 카페에 가서 강의 마무리를 하면 되니까요. 시간이 임박해서 초조한 기분을 갖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강의할 곳까지 1시간이면 충분했지만 3시간 전에 출발했습니다. 너무 여유 있게 출발해서일까요? 제 차 앞으로 들어오겠다고 방향지시등을 켜면 착하게 받아주었습니다. 저는 전혀 급한 일이 없으니까요.
강의가 끝나고 다시 성지에 돌아오는 시간은 엄청나게 차가 막히는 퇴근 시간이었습니다. 서울에 정말로 차가 많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 피곤했는데 여기에 운전하는 시간도 길어지면서 짜증까지 밀려듭니다. 이렇게 여유가 없어지니 착한 일을 전혀 하지 않게 됩니다. 제 앞에 들어오겠다는 차에게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유가 있어야 사랑도 실천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 바꿔야 할 것은 제 생각입니다. 제 생각을 바꿔야 여유도 만들고 또 사랑의 실천도 이루어집니다. 여유는 바깥 환경이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내가 만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선물에 대해 말씀을 해 주십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며, 앞으로 올 일들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성령의 선물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고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령의 선물을 받을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성령의 선물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세례 성사를 통해 분명히 성령을 받았지만, 성령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나 자신이 성령의 선물에 걸맞은 모습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삶은 정말로 바쁩니다. 이는 어린아이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바빠서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자신을 스스로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이 여유가 성령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될 것이며,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좋은 친구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함께 어우러진다(임지호).

 

기억

지난 사순시기에 어느 본당으로 사순 특강을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성당에서 선배 신부님을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잠시 공부를 하면서 이 본당에 기거하고 있는데, 저 온다는 말을 듣고서 사제관에서 내려왔다고 하십니다. 거의 30년 만에 만난 것입니다.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선배 신부님께서 이런 질문을 제게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예림반이었지? 그림도 잘 그리고 시도 잘 썼던 것 같아.”
예림반은 신학교에 있는 서영화반 동아리 이름입니다. 그런데 선배 신부님의 잘못된 기억이었습니다. 저는 그림을 못 그려서 그림 그리는 동아리 근처에는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글도 그때에는 잘 못 써서 ‘시’를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아니라고 했더니, “아닌데…. 분명히 맞는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사자인 저는 아니라고 하고, 제3자가 맞다고 하는 것이지요. 누가 맞을까요?
남의 기억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남의 시선에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을 성실히 그리고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제대로 기억해 주시니까요.

 

 

 

바오로 사도를 보십시오. 실패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워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오로 사도의 제2차 전도 여행 때의 일이었습니다. AD 51년경 바오로 사도는 당시 로마 지배를 받고 있던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합니다. 실라스와 함께 애제자 티모테오를 기다리고 있던 중, 아테네 이곳 저곳을 돌아보게 되는데, 도시 전역에 걸쳐 만연되어있던 우상 숭배에 크게 격분합니다.

 

한번은 바오로 사도가 당시 나름 잘 나간다던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과 논쟁이 붙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바오로 사도의 발언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자신들의 논점과는 전혀 다른 바오로 사도의 설교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던 철학자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습니다. “이 떠벌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들은 바오로 사도를 아레오파고스로 데리고 가서 다른 철학자들 앞에서 연설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는 아레스의 언덕이란 의미입니다. 115미터 정도 되는 나즈막한 언덕 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대 아테네 귀족 정치의 중심지이자 법정이 위치하고 있던 장소였습니다.

아레오파고스는 시대의 변화 앞에 부침을 거듭했지만, 나름 막강한 권한과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의도적 살인에 대해 재판하는 법적 권한도 지녔습니다.

너무 어마무시한 자리였던지 바오로 사도의 연설은 청중들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연설 서두에 아테네 시민들에 대한 예우랄까 배려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7장 22절)

 

사실 연설 내용도 신선하고 감동적이며 멋진 것이었습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사도행전 17장 24절)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행전 17장 27~2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을 귀가 없었던 청중들, 새로운 포도주요, 새로운 가치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믿음과 관심도 없었던 청중들이었기에,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바오로 사도 설교의 주제가 부활에로 넘어가자 마침내 청중들은 대놓고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저히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바오로 사도의 설교는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흐지부지 끝나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가득찼던 명 설교가 바오로 사도의 연설도 때때로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복음 선포라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마음이 굳게 닫혀있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를 보십시오. 실패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워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가슴치며, 좀 더 많이 기도하고, 좀 더 잘 준비할 것을 다짐하면서, 또 다시 다른 지방으로 복음을 선포하러 길을 떠났습니다.

 

 

 

완벽주의는 비난받아야 할 문제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보내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하십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시켜주시는 선생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님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대로만 이야기하고, 성령님은 예수님에게서 들은 대로만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시고 완벽하시다면 왜 당신의 완벽함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시키는 대로만 하시고 들은 대로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완벽해지려는 마음을 포기해야만 완전해지는 것일까요?

현시대에 ‘완벽주의’란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인정을 받기 위하여 일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고생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물론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완벽주의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보고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내가 완벽해지고 완전해져서 영광을 받는 대상이 누구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영광이 나에게 오면 진정 그 완벽주의는 병적인것이고, 내가 완벽해져서 나를 완벽하게 한 분이 영광을 받으면 그런 완벽주의는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완벽주의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어난 것으로도 이미 완전한 것이니 그냥 놀면서 설렁설렁 살아도 된다는 식의 위로를 하는 것이 더 나쁩니다. 만약 여러분이 작품을 만든다면 설렁설렁하게 작품을 만드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면서 우리가 완전해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나의 자녀가 “아빠, 나 개랑 똑같지?”라고 하면 겸손하다고 칭찬해 줄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처럼 완전해져야 하는 것은 자녀의 도리입니다. 다만 자신이 아닌 키워준 부모의 영광을 위해 완전해져야 합니다.

‘완벽주의’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봉준호 감독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소위 ‘봉테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이 계획한 시나리오의 모습대로 완벽한 디테일의 연기나 장면이 나오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봉 감독도 자신은 심각한 불안, 강박적 완벽주의자라는 진단을 받았고 신경정신과 약도 먹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영화 구상에만도 엄청난 시간을 쏟는데, 예를 들면 ‘설국열차’는 무려 9년을 계획하였고, 기생충은 기본 골격과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에만 5년을 소비했습니다. 자신이 촬영대본을 그린대로 장면이 나오지 않으면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영화 ‘마더’를 촬영할 때 김혜자씨에게 같은 장면을 30번이나 반복해서 찍은 것은 큰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젊은 배우도 아니고 원로급 배우에게 한 장면을 30번이나 반복하게 한 것은 가히 고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그 강박적 완벽주의를 극복하고 아카데미상에서 ‘기생충’으로 6관왕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바로 자신과, 일하는 사람들과, 관객들의 행복을 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김혜자 씨에게 같은 장면을 30번 반복하게 하면서도 결코 화를 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결국 김혜자 씨에게도 좋은 일임을 일깨워줍니다. 완벽주의는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타인의 영광을 위할 때 그 완벽주의는 좋은 것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그의 완벽주의를 극복하게 만드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단짝 송강호 씨입니다. 송강호 씨가 오디션에서 매번 퇴짜 맞던 시절 봉감독은 그를 위로하는 문자를 보냈고, 나중에 송강호 씨가 인기가 높아졌을 때는 오히려 봉준호 감독을 도와주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송강호 씨가 자신의 완벽주위에서 오는 불안을 해결해 주는 알약과 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의사들은 항상 약을 권하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는 더듬이와 촉수가 예민해야 하기에 약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제게 송강호 선배님은 인간 알약입니다. 형님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됩니다. 저 형님과 함께하면 뭐든 찍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나를 지지해 줄 것 같습니다. 이런 느낌은 ‘살인의 추억’을 함께 하며 알게되었습니다.”
[참조: ‘어떻게 봉준호는 강박증+완벽주의+예민한 성격을 이겨내고 ...’, 유튜브 채널, ‘김대리의 만물사전’]

나에게 고마운 누군가가 생기면 그 사람을 영광스럽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저절로 나 자신을 위하는 불안한 마음이 해소됩니다. 완벽주의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완벽해지게 만드는 것에 고마운 분들이 많아야만 합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을 위해 살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말하는 것에서 이런 것들이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다 누군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타자를 영광스럽게 하는 말이 아니면 다 자기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조차도 당신 자신을 위해 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분의 영광을 위해 말합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말하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생각하면 근심이 커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완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 완전함을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만드심으로써 가지게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완전해지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성령님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완전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분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을 하려면 영감을 주시는 성령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보답으로 영광스럽게 하려는 말과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고마움에 보답하는 방법은 말과 행동이 그분으로부터 받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기에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완전함을 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완벽주의를 추구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사일런스(Silence)'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1784년에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100여 년간 박해를 받았습니다. 1549년에 시작된 일본 천주교회는 300년간 박해를 받았습니다. 한국의 박해도 길고 심했지만 일본의 박해는 더 길었고, 혹독했습니다. 300년 박해를 받는 가운데 사제도 없어졌고, 교회도 없어졌고, 조직도 없어졌습니다. 일본의 박해 중에 ’후미에’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년 한 번 예수님의 그림이나 그 형상을 내놓고 그것을 밟으면 살려주고, 그것을 밟지 않으면 기독교인이라고 인정해서 처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제도로 인해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 처형방법이 기독교가 해금이 될 때까지 약 300년간이나 지속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이런 박해 중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신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교리도 모르고, 신앙생활도 모르지만 뜻도 모르는 라틴어 기도문을 외우는 신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4월 11일자 기사에 ‘팬데믹과 한국천주교회 통계’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영세자 수는 전년 대비 62.6% 감소했습니다. 견진성사 61.4%, 병사성사 43.5%, 첫 영성체 53.9%, 고해성사 54.8%가 감소했습니다. 주일미사 참여율은 9.8%였습니다. 100명 중에 90명은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였습니다. 영성체 횟수도 57% 감소했습니다. 다만 가톨릭평화방송을 통한 주일미사 시청률은 전년도 대비 623%가 증가했고, 유튜브를 통한 미사참례도 555% 증가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 미사 참례가 늘어났습니다. 통계에서 우려되는 부분은 한국교회도 한국사회와 마찬가지로 급속하게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65세 이상의 신자비율은 모두 늘었지만 25세 미만의 신자비율은 계속 줄어서 10% 미만이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건강을 돌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울러 이웃의 건강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후미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이런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아름답게 꽃 필 수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가난 때문에, 국가의 역량 때문에 코로나 백신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많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국가를 위한 백신 나눔을 호소하였고, 많은 지역교회에서 교황님의 뜻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검사와 백신 접종을 위해서 기꺼이 성당의 문을 여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어찌 보면 귀찮고, 위험할 수 있지만 매달 코로나 검사를 위해서 성당을 개방하였습니다. 최근에는 백신 접종을 위해서 신청을 받았습니다. 아침부터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까지 신청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뉴욕 대교구는(교구장 티모시 돌란 추기경)는 가난한 사람과 노숙자들을 위한 아파트를 지어서 분양하였습니다. 지자체, 전문가, 후원자들이 협력하여 버려진 땅, 쓸모없는 땅을 이용하여 아파트를 건설하였습니다. 교구는 향후 활용도가 떨어지는 교구 소유 부지도 저소득 가정을 위한 아파트 부지로 활용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뉴욕대교구는 협력단체, 신자, 비신자들과 합심해 아파트 마련으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존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바위틈에도 꽃이 피는 걸 봅니다. 팬데믹 상황이지만 길을 찾으면 신앙은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몇몇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만나면, 우리는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환한 미소는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기다리면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이 함께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가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에게 차선을 양보하면 그 사람은 지금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느린 걸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난 한걸음

잊지 않고

 

앞으로 한걸음

예단하지 않고

 

지난날의 고마움과

앞날의 설렘으로

 

그 사이 지금여기

고스란히 품으며

 

더디더라도 한걸음

지치지 않고 한걸음

 

물러서지 않고 한걸음

꾸준하게 한걸음

 

느린 걸음

 

 

 

진리의 성령이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3절)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참다운 진리가 무엇인지,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우쳐 주시리라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즉, 사랑 안에서 더 충만한 지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 안에서 살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모든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13절) 성령께서는 스스로 오시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 계신다는 것과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들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영감도 주고 말도 한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들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뜻이다. 아들도 성령께서도 스스로 말하지 않으신다.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3절) 그분의 가르침은 아들의 가르침이며, 성령께서는 아들이 가르친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그 말씀들은 아들의 말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 미리 앞당겨 살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사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기쁨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 하느님 안에 살 때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4절)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실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와 가르침은 주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았듯이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15절)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이것들을 아들에게서 받지만,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일치하신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은, 아들이 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성령께서는 우리를 평범한 인간적 삶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 즉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영원한 파스카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지만 이미 천국으로 건너간 삶을 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겨드리고 따를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해야 할 것이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성령에 관한 강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지만, 성령께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고, 성령께서 앞으로 이끌어주시도록 내어 맡기지 않는 그리스도인 삶은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은 이방인의 삶에 불과합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삶의 주인공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동행하시고, 우리를 변화시켜주시며, 우리와 함께 (한계와 죽음을) 이기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그 모든 힘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주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바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영이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지혜를 통해 바른 길로 이끌어 가시는 영이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힘을 통해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영이십니다. 오늘 미사 중에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시고 이끌어 주시길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16,13).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깨닫자 죽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생을 마감할 때야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내 힘으로 세상을 살 때는 전혀 진리는 현실감이 없다. 그러다 사람이 숨을 몰아 쉬기 시작할 때면 그제서야 진리와 마주한다. 성성한 속권의 극치인 빌라도가 자기 앞에 선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께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18,38). 그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자신만 뽑내며 진리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이 시간이 아주 중요한 시간인데 빌라도는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진리가 빌라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세상의 아우성 치는 사람들 보는 눈 때문에 진리를 자기 앞에 세우고도 모른 채 외면하고 쓰레기처럼 버렸다. 빌라도에게 이 순간이 구원을 잡을 수 있는 순간인데, 빌라도는 진리를 버림으로 자유를 잃었고 그의 길게 살아온 인생은 찰라로 끝나 버렸다. 그의 인생은 진리에 귀의하지 못하고 셔터를 내렸다.

빌라도에게 인생 막장이다. 인생 헛 산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에러가 또 있겠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벌써 사흘이 지나고 있었다. 슬픔과 좌절이 뒤범벅 되어 엠마오로 낙향하던 두 제자가 생각난다. 길동무가 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걸어 가신다. 그러면서 함께 지냈던 때의 들려주신 말씀을 생생히 기억하게 해 주신다. 제자들은 잠재된 말씀이 생생히 기억에서 살아나며 뜨거운 감동을 받게 된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진리를 만났다’(루카24,13-35참조).

진리의 영이 그들 제자에게 오시고 두 제자들을 모든 진리 안에 끌어 드리신다. 눈이 떠지고 마음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본다. 진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들어 주신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 나타난다.

‘너에게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려면?’ 기억해 낼 예수님의 말씀을 주야장천 들어야 한다. 그럴 때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뭐든지 고집스럽게 행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이 주어지는 법이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 제6주간 수요일>(2021. 5. 12. 수)(요한 16,12-15)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이라는 말씀은, “너희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보충 설명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으로 해석됩니다.(뭔가 새로운 계시 진리가 더 있는 것은 아니고,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계시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싶지만, 제자들 쪽에서 아직도 그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계시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파스카의 신비’ 라고 부르는 일에 관한 가르침들, 즉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관한 가르침들, 그리고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에 관한 예고 말씀들이었을 것입니다.(당시에는 그들은 ‘예수님의 신원’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런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설명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은 제자들의 믿음이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성령)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체험한 뒤에 성령을 받아서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들이 깨달은 진리와 믿음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체험과 믿음과 성령의 도움이 합해졌습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진리를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뜻입니다.(우리가 알아야 할 계시 진리는 예수님께서 모두 말씀하셨고, 더 이상 새로운 계시 진리는 없습니다.)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미래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힘과 용기를 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 없는 ‘미래의 일’을 성령께서 미리 알려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세상 마지막 날에 관해서도, 즉 종말과 재림과 심판에 관해서도 충분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계시 진리를 깨닫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인간의 능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은총을 받아서 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 은총을 잘 받으려면 우선 먼저 믿어야 합니다. 성경과 신학을 긴 세월 연구하고 공부해서 많은 지식을 쌓는다고 해도 믿음이 없다면, 또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구원받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성령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은총을 받아서 알게 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34).”

 

요한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사람들에게 증언한 일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 알게 된 지식을 말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알려 주신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다시 사람들에게 전해 준 일입니다.(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과정에서도 성령의 도움이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령의 활동은,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이라는 특정 시점에서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라, ‘한처음’부터 이루어졌던 일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크게 실망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서(루카 24,25-27) 완전히 새로운 ‘깨달음’과 ‘믿음’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그 두 제자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말을(루카 24,31ㄱ), ‘깨달음’과 ‘확신’을 갖게 되었음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는데 (루카 24,31ㄴ), 그 일에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8).” 라는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일을 ‘성령의 작용’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일 수도 있고, 성령께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일 수도 있고...)

두 제자가 성경 말씀을 이해하게 된 것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게 된 것은 공부나 연구를 통해서 된 일이 아닙니다.

(도를 닦거나 수행을 해서 된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또는 성령께서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모두 이해했고, 믿었고,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했습니다(루카 24,35).

 

그 일에서 중요한 점은 그들이 ‘믿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두 제자는 이해할 수 없어서 실망은 했지만 포기는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해하고 믿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그들의 믿음과 노력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실망해서 믿음을 완전히 버렸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설명을 알아듣지도 못했을 것이고, 끝까지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깨달음’의 첫 번째 조건은 ‘믿음’입니다.

믿는 사람만이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의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우리를 더욱 깊은 믿음으로 (확신으로) 인도해 줍니다.

우리는 깨달음과 믿음을 통해서지식에 도달하게 됩니다(1코린 13,12ㄴ).

 

 

 

우리(복수)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삼위일체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주시려 하셨습니다만,
개미들이 어찌 인간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알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개미도 창조 못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거든요.

하느님은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도 하느님과 유유상종 관계 느껴집니다.
방대한 우주를 볼 때 하느님의 기운이 감도는 신비한 느낌 그렇습니다.

세상 관리자 인간들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는 무관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어야만 우주관리 자격 적격자라 인정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16, 12-15(부활 6주 수)

우리는 이제 고별담화의 마지막 말씀에 도달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다음 구절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다음 구절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 곧 강생 때, 세례 때, 부활과 승천하실 때인데, 성령에 대한 약속을 고별사에서만도 다섯 번이나 거듭 된다. 곧 ‘아버지께서는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4,16-17). ‘보호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해 주실 것이다.’(14,26). ‘보호자,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15,26-27). “보호자가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16,7-11). 그리고 오늘 <복음>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13a)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b)

이는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그 계시 역시 서로의 일치 속에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6,14)고 하십니다. 곧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계시하고 예수님의 구원행위를 계속함으로써,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요한 13,31-31;17,1-2 참조). 곧 아들에게서 들은 것을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이기에 아들의 것은 동시에 아버지의 것이며(요한 16,15), 성령께서는 이를 받아 알려줍니다.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의 관계를 드러내줍니다.

오늘 우리는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한 말을 기억해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소서.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아멘.

 

 

 

드러날 성령의 신성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우리 구원자께서는, 할 말이 아직 많지만 당신 제자들이(이미 많은 것을 배우고도) 그때는 아직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 그것들을 감추어진 채로 두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게 되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요한 14,26참조). 나중에 우리 구원자께서 부활하신 뒤 사람들이 그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그 지식이 알려지기에 적당한 때가 되었을 때 분명하게 드러난 지식들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신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사실,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영께서 가르치신 지식 기운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예비자 교리를 하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이제까지 모르던 새로운 세계, 신앙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하는 과제라 하겠습니다.

신앙의 삶은 논리적인 설명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앙은 지성에 의해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도되기 때문에 예비자들에게 그 사실을 설명하기란 참 힘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제자들도 주님께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지만 주님께서 승천 후에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에 의해서 그 모든 것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를 말씀하시며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을 성령께 맡기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5)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그들에게 전해지는 많은 우상들을 반대하며 하느님께 대한 참다운 믿음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과 신전을 통하여 여려 신을 숭배했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하느님의 신원에 대한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었기에 이해하며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살리신 분을 통하여 구원이 성취되는 사실에 대해서 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반응이 좋지는 않았음을 알게됩니다.

어떤 이들은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비웃고 어떤 이들은 꺼려하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사도 바오로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곳을 떠나 코린토로 향하고 그들에게 전했던 편지의 내용이 새삼스럽습니다.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1코린 9,16.17)

 

이 처럼 복음선포에 대한 열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냉담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도께서는 순교하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의 반응과 결과에 대해 인간적으로 연연한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인간의 지성이나 혀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적인 사업이나 결과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청하게 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왜 하나이고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야기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5)예수님은 당신의 뜻대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만 말씀하신다고 제자들에게 밝히신 바 있습니다.(요한 14,24 참조)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이 모두 아버지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또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이 모두 아드님께 전해져 예수님의 것이 됨을 뜻합니다.

그리고 곧 오실 보호자, 진리의 성령께서 이제는 예수님에게서 받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결국 성령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실 모든 것은 원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고 또 예수님의 뜻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분 하느님이시니, 다른 뜻과 다른 생각, 다른 의견이 있을 리 없으시지요.

성부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 과정은 계급이나 중요도가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일치를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 곁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들)의 뜻을 전하실 뿐입니다. 그 하나의 뜻, 하나의 생각이 곧 진리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진리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그 하나됨의 깊고 그윽한 품이 우리를 받아 안고 품으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로 이어지지요. 진리를 받아들이고 또 진리 안에 받아들여진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하나로 결속하고 또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된 이들에게 두려움이나 미움, 경쟁이나 착취가 있을 리 없으니까요. 진리 안에서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인 까닭입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신화의 도시인 아테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도 17,25)바오로는 아테네 시민들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이 곧 하느님이시라고 자신있게 선포합니다. 그 하느님께서 유다인, 그리스인 할 것 없이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고 주인이심을 밝히지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우리가 어느 민족, 어느 신분이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진리이신 하느님 안에서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언어와 문화, 체험 안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실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몫은 그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이끄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는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복음 환호송)아버지와 아들의 바람으로 우리에게 오실 성령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더 이상 주님의 부재를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성령과 함께 할 "영원"의 시간은 이 지상 삶을 하느님 나라의 영원성과 이어줄 것이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에게 오신 주님께서 한 분이시고, 그분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입니다. 진리 외에 우리가 안길 품은 없습니다. 진리이신 한 분 주님 안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이어진 우리 모두는 복됩니다. 

 

 

 

일리와 모든 진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난주 동포 미사 때도 물었지만 저는 가끔 저를 얼마나 아는지 사람들에게 미사 강론이나 강의 때 묻습니다. 그런데 저를 안다고 대답하지만 의외로 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저의 이름이나 신분 정도 알고 있거나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조금 아는 정도여서 그것은 안다기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거였습니다.

사실, 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지요. 한 번은 어떤 분이 '좋은 분으로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길래 그것을 어떻게 아시냐고 되물었더니 '좋은 분일 거라고 믿는다.'고 바꿔 대답하시는 거였는데 그러니 그분이 저에 대해서 아는 것은 뭘 많이 알고 잘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아는 거였습니다.

 

본래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거의 다 이렇습니다.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믿는 것이며, 알면 굳이 믿을 것까지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것까지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저를 좋은 사람일 거라고 믿는 것은 경험을 통해 저의 좋은 면을 조금 알고는 저라는 존재 전체를 좋게 믿는 겁니다.

 

제게 대해 이러하니 하느님께 대해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저에 대해 아는 것보다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훨씬 적고, 저에 대해서 보다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으며, 그러니 더더욱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믿는 것이겠지요.

사실 하느님을 모르니 믿을 수 없다고 뻗대서도 안 되겠지만 하느님을 잘 모르는 것을 창피해 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니 잘 모른다고 함이 오히려 겸손이며, 안다고 하거나 더 나아가 잘 안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거나 착각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모르는 신을 숭배하는 것에 대해 아테네 사람들을 칭찬하는 듯이 말합니다.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 모름을 겸손히 인정한다면, 다시 말해서 모름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에서 나온 것이라면, 모르는 채로 있을 것이 아니라 알려는 열망과 알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은 이렇게 더듬거리는 것이고, 이렇게 더듬거려서 찾은 하느님은 하느님의 전부가 아니라 봉사가 코끼리를 더듬거려 아는 것과 같이 일부입니다

다리를 만진 봉사가 코끼리는 기둥 같다고 하여도 잘못 안 것이 아니고 배를 만진 봉사가 담벼락 같다고 하여도 잘못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부를 안 것이 아니라 일부를 안 것이고, 그러니 자기가 안 것이 코끼리의 전부라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다 일부 진리, 곧 일리一理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성령만이 모든 진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라고 하시듯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 진리에 눈먼 나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깨달음을 얻기까지

     한재호 루카 신부님

『현대의 사제양성』이라는 교회문헌이 있습니다. 신학생 시절, 이 문헌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그때는 그 내용이 참 지루하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제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고 신학교에서 양성 소임을 맡고 있는 지금 다시 읽어 보니 그 느낌이 다릅니다. 사제로서 살아간다는 의미, 오늘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신학생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깊이 있으면서도 명쾌하게 전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는데 막상 어른이 되면 그 충고가 참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건강할 때에는 건강이 최고라 크게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막상 아프면 그 소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아직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말씀의 뜻을 깨우치게 될 날이 옵니다. 그리고 그런 깨우침을 주시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성령이십니다.

 

 

 

‘여강여산如江如山', 무공해의 삶, - 무지에 대한 답은 성령과 회개뿐이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림자처럼 인생은 지나가고, 부질없이 소란만 피우는 것,

모으고 쌓아도, 그 차지할 자 누구인지 모르나이다.”

“나는 주님의 집에서 푸르른 올리브같이, 언제 까지나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리라.”

“생명과 죽음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명부에 내려 보내고 올라오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로다.”

“빈궁과 부요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주님은 낮추시고 또 높이 올리시는도다.”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 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샘솟나이다.”

 

새벽 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주옥같은 생명의 시편들입니다. 어제 언뜻 스치듯 본 ‘영성생활 제61호’ 잡지의 산을 배경한 강과 함께 ‘여강여산如江如山’이란 글자가 있었던 수묵화水墨畵 그림이 생각납니다. 더불어 떠오른 ‘강과 산’이라는 짧은 자작 좌우명 애송시입니다.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1998.1.27

 

강과 산뿐이라면 무지와 허무의 무의미한 삶이겠지만 궁극의 희망이신 하느님이 계시기에 강과 산도 비로소 존재 의미를 지닙니다. 강이 상징하는 바 시간이라면 산이 상징하는 바 공간입니다. 산과 강,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 살고 있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여강여산如江如山, 성령에 따른 삶을 상징합니다. 무지의 대한 궁극의 답도 진리의 성령뿐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관한 깨우침을 주는 글입니다.

 

“삶의 근원적 토대는 공간보다 시간이다. 우리가 매달리는 공간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공간과 달리 우리가 마음대로 장악할 수 없는 시간은 낯설다. 우리는 시간의 낯섦을 피해 공간의 익숙함으로 도피한다. 공간에서 익숙한 생산과 소비의 쳇바퀴를 분주히 돌린다.

우리는 삶의 근원적 토대인 시간에 다가가 대면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삶이 불안해질수록 공간으로 파고든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안식은 우리에게 공간의 분주함을 ‘멈추고’ 시간 속으로 들어와 머물러 한다. 시간 속에, 주님 안에 머물 때, 우리의 관심은 소유가 아닌 존재 자체로 향한다. 공간은 소유의 영역이고 시간은 존재의 영역이다. 안식으로 우리는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옮아간다.”(녹색평론178호;115쪽)

 

안으로는 임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강처럼 살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으로 살아야 비로소 존재의 삶, 성령에 따른 삶입니다. 공간에 포획되어 소유의 삶을 살 때 날로 무거워지는 소유의 짐에 자기를 잃어 버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유에 소유, 중독되어 자유를 잃고 소유의 노예로 살아가는 지요. 무지의 탐욕으로 공간의 소유에 집착하여 안주의 삶을 살다보면 부패로 무너지기 십중팔구입니다. 시간과 공간, 존재와 소유의 경계선에서 경계인으로, 성령에 따라 살아 갈 때 비로소 자유인입니다. 바로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 받아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당시 제자들과의 약속은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 덕분에 실현되어 우리는 진리의 성령에 따라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진리의 성령에 따라 살 때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소유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시간과 공간, 존재와 소유의 경계에서 자유로운 경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의 은총으로 깨달음의 여정, 개안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이의 전형적 모범이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성령의 사도, 대자유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밖으로는 산같은, 안으로는 강같은 바오로 사도의 제2차 전도여정중 고대 문명의 중심지 아테네에에서 있었던 일화를 보여줍니다. 공간의 화려하고 웅장한 우상들 속에 하느님을 잊고 사는 무지의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으로 와닿는 바오로의 아테네 시민을 대상으로한 명강론입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서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성령에 따라 강처럼, 산처럼 자유롭게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강론의 결론은 파스카의 주님입니다.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받아들여 성령의 삶, 회개의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성령에 따른 회개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에 따른 끊임없는 회개의 삶이 시간과 공간을 정화하고 존재와 소유의 경계에서 경계인으로, 자유인으로 살게 합니다.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흐르는 강으로, 밖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기다리는 산으로 살게 합니다.

 

이래야 무지의 어둠에서 허무의 늪에서 벗어납니다. 화려하고 장엄한 우상의 조형물에 현혹되지 않고 하느님 만드신 자연 그대로의 현실에 만족합니다. 기후재난, 코로나도 하느님을 잊고 끝없는 탐욕으로 공간의 소유와 즐거움에 집착하고 탐닉耽溺하여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지구를 함부로 다룬 자업자득, 무지의 결과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하느님 사랑만으로, 진리의 성령만으로 채울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진리의 성령 따라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여강여산如江如山, 무공해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고 증명하는 성령 <요한 16, 12-15> 5월 12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나서 죽기까지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권력도 있고, 돈도 있고, 박사이며 명예가 높다 해도 지금 배우지 않으면 많은 것을 잃고 불편하게 살고,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지금이란 시간은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사람의 죽음도 언제인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어제도 아니요, 내일도 아니고 “지금이란 시간이 죽음의 시간입니다.” 낳고 죽는 것은 지금이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나는 지금 깨어있어 무엇이든지 깨우치고 세상에 있는 모든 현상을 알기 위해서 진리를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왜, 어떻게 되는지 모르고 일어나는 일에 무지하면 내가 탄 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배를 탄 사람과 같고, 가야 할 목적지를 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예를 들면,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은 인류가 근대에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해를 향하여 스스로 돌면서 그 자리에 있는 해를 만나게 됩니다. 지구가 해를 향하여 돌고 돌아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해를 만나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선생이 있어야 합니다. 가르쳐주어도 깊은 명상과 침묵 속에 진리에 접근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난 이유를 선생님이 알려주지 않으면 알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으나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제자들은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 보이는 것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저는 산소, 수소, 탄산가스, 전기, 핵, 병균, 전자파, 전자의 힘은 볼 수 없으나 존재하는 물질입니다. 하느님의 영도 보이지 않지만, 내 안에서 작용하심을 믿고 그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신앙의 진리에 가까이 가게 됩니다. 진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과는 언젠가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고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사람은 각 사람의 깊은 생각이나 마음 씀씀이를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어느 날 그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바로 그것이었구나.” 합니다. 한국의 폐쇄적 상태에서 다른 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부분의 서민은 글자도 모르고 내가 하는 말의 의미도 모르고 살 때 그리스도교의 전파는 무식에서 유식한 사람으로 만들고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어젯밤 지난 영화 중 상록수를 보다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한국을 변화시킨 원동력은 교회의 힘이었습니다. 잠자는 사람을 깨우고, 깨어 일하도록 이끌고, 세계 열 번째 국민 수준을 만들고, 경제 부흥을 시킨 것은 교회의 힘이었습니다. 지금도 성령에 인도된 교회가 이 땅에 살아있어야 하는 것을 다시 깨우쳐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왜관만 해도 천주교가 순심고등학교를 세워 지역민에게 지식의 전달뿐 아니라, 영적 진리의 산실로 만들었습니다. 김천도 성의 중고등학교가 지역 사회 발전에 힘이 되었습니다. 계몽, 계획, 변화는 배우지 않고는 불가능하고 이런 교육의 현실이 중요합니다. 양심 교육, 거짓이 없고, 깨끗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가진 선생이 필요합니다. 그런 선생이 되지 않으시렵니까?

성령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진 선생님들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역사에 입각한 교육, 거짓 없고 진실과 사랑이 넘치는 교육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진리의 성령이신 하느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예전에 가난한 집안의 아이가 부잣집 음식을 먹으면, 고생한다고 합니다. 기름진 음식을 자주 먹어보지 않아서 소화를 잘 못 시킨다고 합니다. 먹는 것만큼이나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도 비슷한가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지도 않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온전히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만큼만 알뿐입니다. 그나마 우리가 이해되는 한도 내에서 이해하고 믿고 따릅니다. 그나마 어렴풋이 이해한다고 해도 우리가 다 따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만큼만 알려주시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 예수님 생전에 우리에게 다 가르쳐주실 수 없어서 그러셨는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3절ㄱ)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다 확인해 주실 것이며, 그 이상의 신비도 일러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13절ㄴ)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말을 확인해 주시고 증명해 주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참되시다는 사실을 드러내심으로써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며, 예수님과 일치하여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신비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4절) 이 신비는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비이며, 그 신비를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15절)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수준에 맞춰 일러주시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실현함으로써 한 단계 한 걸음씩 주님께 다가서도록 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함승수 신부님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이 하는 주장에 공감이 되고, '듣고보니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을 때,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라고 합니다. '일리'(一理)라는 말은 '한 가지의 이유', 혹은 '한 가지의 이치'라는 뜻이지요. 상대방이 주장하는 바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된 모든 이유를 다 포괄하는 모범답안은 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수많은 이유들 중 하나는 되겠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이 세상 만물의 이치를 다 담아내는 완전무결한 진리 그 자체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어느 한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기엔 이치에 맞을 수 있겠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 나도 한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고, 너도 한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으니, 무조건 자기 뜻과 고집대로 하겠다고 우겨서는 안됩니다. 어떤 분야에 대해 나도 한 가지 이치를 알고 있고, 너도 한 가지 이치를 알고 있으니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다보면 전체를 아우르는 참된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내가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은 내 일을 방해하며 나에게 피해를 입히는 '적'으로 간주하여 헐뜯고 비난합니다. 내가 이길 수만 있다면, 상대방의 주장을 묵살하고 내 주장을 '유일한 진리'로 관철시킬 수만 있다면 가짜 뉴스를 퍼뜨려 사람들을 선동해서라도 상대방을 제거하려고 듭니다. 이런 사회분위기가 심회되다보니 이젠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받아들이고 따라야 할 참된 진실, 진짜 진리가 무엇인지가 불분명해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짙은 무지와 오해의 안개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잃고 헤매는 아비규환의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고통을 겪고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제자들이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난해하고 복잡해 이해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강력한 힘과 권능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셔야 할 예수님이 나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고통을 겪으셔야 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완고하고 고집이 세서, 구원의 진리를 감당하려고 하질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리의 영'을 받아들이면, 그 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 비로소 나의 완고한 고집을 꺾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 내가 견뎌내야 할 고통과 시련, 인내와 기다림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구원의 진리 안으로 이끄시어, 나를 위해 준비하신 당신의 특별한 계획을, 나를 향한 당신의 크고 깊은 사랑을 보여주시겠지요.

진리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삶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이성과 논리로 판단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일 때, 내가 받아들인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어려움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랑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가 나를 모든 걱정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 것입니다.

 

 

 

이근상 시몬 신부님

유언. 똑부러지게 유언이라 남기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경우를 보니 유언이라 제목을 붙일 수 없는 말씀들이 유언으로 남겨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돌아가실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때의 말씀들이 유언처럼 마음에 남아 있으니.

오늘 복음은 예수님 유언의 일부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대목이고, 그러하니 나는 이 말씀이 시간의 순서상 생의 마지막 어느 순간이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유언은 그게 유언으로 마음에 남겨진 자들에게 달린 것이니.

유언으로 예수님의 인간되심은 더 곡진해졌다. 주님은 모든 것이 가능한 하느님이 아니라 결국 유언을 남겨야 하는 존재, 모든 것을 미완인채로 남겨놓아야 하는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나도 결국 유언으로 남겨질 것이라는 사실. 아무 것도 이루고 갈 수 없는 존재란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린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님

+찬미예수님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안에 살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진리 안에 살아갑니다.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한 진리로 이끄시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의 거룩한 생명에 온전히 참여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거룩한 생명, 거룩한 삶은 우리를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만들어, 새로운 때에 새로운 정신을 갖고 살아가게 합니다.

진리의 성령께 온 마음과 귀를 기울이면 그분께서 말씀하시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모든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안에 머무시며 그분의 ‘목소리’를 듣도록 해주시는 성령께서는 용서하고, 봉사하고, 내어주고, 사랑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나쁜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매달 복음이 우리 안에 심어주는 생활말씀을 기억시켜주고 이를 살도록 해주십니다.”(가브리엘라 팔라카라)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를 이끄시어 진리 안에 바르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한 말을 기억합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의 아버지, 은총의 주님, 오시어 마음에 빛을 주소서.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아멘.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명은
진리를 향하고
진리는 생명의
길이 된다.

모든 진리는
서로를
속이지 않는다.

사랑의 빛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소중한 것을
간직하고
지키는 것이
진리를 되찾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 마음안에는
진리를 모실
공간이 없다.

진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진리의 영은
우리를
올바른
믿음으로
인도한다.

올바른
믿음이란
진리이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믿음이다.

진리는
따르고
추구할 때
진리는 참된
삶이 된다.

진리의 영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언제나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신다.

생명을 주고
영혼을 살린다.

진리의 영을
보내신 분을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의
첫시작이다.

신앙의 여정은
진리를 향해
나가는
진리의 여정이다.

진리는
아는 것에서
사는 것으로
옮겨져야 한다.

삶을
일깨워주시고
삶을 사랑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 우리를
이끄신다.

모든
진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음을
가르쳐주신다.

사랑은
십자가이며
부활의 진리임을
깨닫게된다.

샌디에고 주립대 심리학 교수인 진 트웬지 박사는 요즘 젊은 학생들의 우울증과 자살에 관해 연구하던 중에 상관관계가 있는 두 가지 활동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등의 전자기기 사용이고, 두 번째는 텔레비전 시청이었습니다.

Screen 대 Non Screen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스크린 이용 시간이 하루에 2시간을 초과하면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점점 커졌고, 2시간 이하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젊은 학생들은 스크린을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뉴런 설계는 타인과의 친근하고 대체로 지속적인 대면 접촉 속에서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대면 접촉이 아닌 스크린 접촉을 통해 소속감을 느끼려고 하다 보니 시스템에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스크린을 통한 접촉은 쉽습니다. 그래서 사회성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회성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피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스크린에 의한 접촉에 쉽게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쉽고 편한 것은 결국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 우리는 나의 성장과 더불어 진정한 사회관계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쉽고 편한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역시 쉽고 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셨고,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삶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쉽고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나약한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어렵고 힘든 것을 피하려고만 하고, 도저히 희망이 없다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내적인 귀와 눈을 밝히는 영적 빛과 말씀으로 인간의 마음을 가르치십니다. 제자들도 그러했지요. 성령이 주어지기 전에는 여전히 율법의 그림자에 매여 있는 노예와 같았지만, 성령께서 내려오신 뒤에는 성령의 가르침과 단련으로 모든 진리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더는 쉽고 편한 길만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성장을 가져다주는 어렵고 힘든 길을 향해 걸어갈 힘을 주시는 성령을 굳게 믿으면서, 지금의 삶을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비겁한 자는 평생에 여러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오직 한 번 죽는다(김만술 대위).

 

주님을 만나는 시간의 중요함.

세계보건기구가 21세기 최대의 위험으로 지목한 병이 무엇일까요? 암이나 에이즈가 아닙니다. 바로 직업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로, 번아웃 신드롬 혹인 탈진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증상입니다. 이 증상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일에 탕진한 나머지 정작 자기 삶을 위해 쓸 수 있는 기운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기분은 점점 나빠지고, 믿을 수 없이 공허해지면서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부정적 감정까지 사라지면서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며 생기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오는 것은 신체가 나를 향해 보내는 구조 신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조금 더 열심히 하자’라며 노력을 더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것은 더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잠깐 뒤로 물러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야말로 내 삶의 의미를 찾는 엄청나게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기도할 시간도 없다고 말합니다. 21세기 최대의 위험 질병에 스스로를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은 온유와 겸손을 타고 흐른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는 군대의 모습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말년 병장 유태정은 선임과 후임들에게 신망이 높은 군인입니다. 그런데 이승영이란 명문대 출신 신병이 들어옵니다. 그는 이등병임에도 군대의 부조리한 면을 뜯어고치겠다고 선배에게 대들고 사고를 칩니다. 태정은 자신이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끝까지 친구를 감쌉니다. 그런데도 승영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친구가 걱정되면서도 태정은 제대합니다.

승영이 어느 정도 선임이 되자 부조리하다고 여겼던 군 생활에 아주 잘 적응합니다. 선임에게는 아첨을 떨면서 후임도 최대한 잘 대해주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윤종빈이란 신병이 자신의 부사수로 들어옵니다. 그도 어리바리하고 사고뭉치입니다. 승영이 그를 잘 대해주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사고는 늘어만 갑니다. 종빈 때문에 선임들에게 계속 욕을 먹어가며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릅니다.

그런데 종빈이 여자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게 된 후로 병영에서 걸어가며 담배를 피웁니다. 군대에서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승영은 자신이 후임 때문에 더는 피해를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마음먹고 그를 야단칩니다. 믿을 사람이 유일하게 사수뿐이었던 그는 자살을 선택합니다.

죄책감을 느낀 승영이 자신의 사수였던 친구 태정을 찾아갑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님을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태정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계속 “내 탓이 아니다.”,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승영의 태도에 태정도 짜증을 냅니다. 태정이 미안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승영도 자살하고 난 뒤였습니다. 

 

오랜 시간 사귀었어도 여전히 남남 같은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잠깐 만나고도 친근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친교는 사랑이 흘러야 합니다. 사랑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흐르지 않는 친교는 친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서만 참다운 친교와 인간관계가 맺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성령을 어떻게 흐르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군대 문화’에서는 사랑이 흐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선임 후임이 즐겁게 다시 만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때 함께 지내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이 손해를 입는 상황이 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화를 내고 심지어는 구타까지 하는 일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화를 내고 갈구며 때리기까지 한 사람과 이후에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령을 교회에 흘려보내 주시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선 당신과 사도들 사이에 성령의 중개가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친교를 맺게 해 주시는 주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본성은 ‘겸손’입니다. 같은 하느님 가운데서 가장 겸손하신 분을 찾으라면 성령님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물론 하느님은 세 분 다 완전하신 분이시지만).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자는 아버지께 순종하시지만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드님께 순종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겸손하신 분이 교만한 사람을 통해 흐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당신 마음을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군대 문화 안에서는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통해 흐릅니다. 

 

이탈리아 ‘폼페이’라고 하는 곳은 2,000년 전에 매우 번성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여 화산재로 오랜 기간 덮여 있다가 최근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입니다. 그 오래전에 이 도시엔 이미 수도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도관을 잇는 곳은 납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 납중독을 모르던 때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도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40살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께서 세상 끝까지 흐르십니다. 성령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따라 흐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가리옷 유다처럼 자신이 흘려보내야 하는 성령을 통해 이웃을 납중독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또한, 전혀 변하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이웃들 앞에서 온유함과 겸손함을 잃어갈 때 그런 납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만약 그렇게 끝나버린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도 외로울 것이고 영원히 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산 넘어’라는 영화가 지난 4월 30일 부처님 오신 날에 개봉하였습니다. 영화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화작가 정채봉 프란치스코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을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어린 날의 추억을 담담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듯이, 어린 시절은 우리 모두의 고향과 같습니다. 몇몇 뜻있는 사람이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을 영화로 만들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영화는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흥행성이 있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영화에 대해 선뜻 투자를 하는 사람이 나서지 않았습니다. 

 

몇 년째 표류하던 영화는 뜻밖의 투자자를 만났습니다. 투자자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지만 김수환 추기경님을 존경하였고,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을 영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는 달랐지만 한경직 목사님,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님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분들은 시대의 어른이었고, 그분들이 있어서 위로를 받았고, 희망을 보았다고 합니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의 색깔이 있습니다. 색이 다르지만 하나의 무지개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습니다. 종교는 어쩌면 하나의 무지개를 이루는 것은 아닐까요? 서로 조화를 이루고, 보듬어 주기에 무지개입니다. 무지개는 다투고, 갈등하고, 분열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에 희망과 진리가 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입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상황에서 많은 나라가 한국식 모델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단키트와 방호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건강에는 국경도, 종교도, 이념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체면도, 선진국이라는 자부심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미국의 대통령도 전화를 하였고, 각국의 정상들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한국 정부도 기꺼이 정보를 공유하고 있으며, 가능한 범위에서 진단키트와 방호복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 또한 더 좋은 모델이 있으면 기꺼이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국민의 건강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국가의 존립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전쟁과 정쟁을 중단하고 코로나19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을 함께 돕자고 호소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우선적으로 도와주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한국을 외면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국민의 건강보다 정치적인 계산을 먼저 하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일본은 일방적으로 반도체 등 일부품목의 한국수출을 금지하였습니다. 한국을 화이트 국가(우방국가) 명단에서 제외시켰습니다. 한국은 부품을 국산화하는 노력을 하였고, 한국인은 일본 제품의 불매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것 같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 백제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문화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백제와 동맹관계였습니다. 역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일제 강점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나라이기에 생길 수 있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국민의 건강 앞에서는 정치적인 계산도 넘어서야 합니다. 역사적인 애증의 관계도 넘어서야 합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존립하기 때문입니다. 확진자가 늘어나고, 사망자가 늘어나는 일본의 현실을 보면서 일본 정부의 현명한 판단과 대처를 기대합니다. 생명은 모두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생태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눔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까닭>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분께서

시나브로

내게 스미는

까닭은

나는

그분을

오롯하게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진리의 영, 곧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내 안에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시고 살아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제관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습니다. 그 연못은 제가 정릉에 부임해서 정원을 관리하면서 벽돌을 쌓고 그 안에 물이 새지 않도록 방수포를 깔아 놓은 뒤에 물을 받아서 만든 연못입니다. 그 연못에는 3년 전 잉어 치어들을 풀어 키웠었는데 지금은 제법 커서 제일 큰 잉어가 20센티가 넘어갑니다. 

사실 연못을 만들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관리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래도 고여 있는 물이기 때문에 여과가 잘 되는가 계속 살펴보아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물을 환수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물이 얼기 때문에 물고기들을 따로 옮겨서 얼어 죽지 않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적으로 볼 때도 마치 연못과도 같이 내 안에 성령께서 임하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못의 물을 환수하듯이 끊임없이 정화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늘 함께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정성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그분께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고, 그분을 만나 그분 안에 새로운 정화의 시간을 갖는 것이며, 그분과의 그 사랑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눈길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습니다>(창세 1,31 참조)

     백종연 신부님

“창세기에 나오는 상징적이고 서사적인 고유한 언어로 표현된 창조 이야기는 …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세 가지 관계, 곧 하느님과의 관계, 우리 이웃과의 관계, 지구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세 가지 핵심적인 관계는 이 세상과 우리 안에서 깨어졌습니다. 이러한 불화가 죄입니다”(「찬미받으소서」, 66항).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지상에 계셨던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이 세상과 맺으신 실재적인 사랑의 관계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 이 세상의 피조물은 더 이상 자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이 모든 피조물을 신비롭게 간직하시며 그들의 목적인 충만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감탄하셨던 들판의 바로 그 꽃들과 새들은 이제 그분의 빛나는 현존으로 충만하게 됩니다”(「찬미받으소서」, 100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하실 일을 알려 주십니다. 제자들은 진리 안으로 이끌려 들어갈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분의 말씀은 참되고, 그분을 믿는 이는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 제자들이 깨닫게 하셨고, 그렇게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고 알게 된 제자들은, 교회를 통해 주님이 누구이신지 계속해서 선포해 왔습니다.

생태계의 위기, 기후 위기라는 비상 상황을 맞은 이 시대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교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리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계명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그 길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 귀 기울인다면 진정한 회심과 삶의 전환을 통해 이 지구에 닥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목적은 하느님

진리의 영께서는 교회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피조물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선포하게 하십니다. “다른 피조물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은 우리와 더불어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공동의 도착점, 곧 하느님을 향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품어 주시고 빛나게 해 주시는 초월적 충만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성과 사랑이 부여된 인간은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이끌려 모든 피조물을 그들의 창조주께 인도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찬미받으소서」, 83항). 참으로, 다른 모든 피조물도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

모든 피조물은 우리 인간과 함께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십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창세 1,31). 모든 것을 당신의 선하심을 드러내고 나누기 위해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어여삐 여기시고 보살피십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어떤 피조물도 소홀히 대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아버지로서 맺으신 관계를 깨달으라고 권유하시며,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들 모두 중요하다는 사실을 감동적인 온유함으로 상기시켜 주셨습니다”(「찬미받으소서」, 96항).

하느님을 반영하는 피조물,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피조물

오늘의 독서인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며, 그분을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주님”,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시는” 분으로 선포합니다. 그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신다고 「찬미받으소서」는 가르칩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각자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어찌 인간이 피조물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선의 빛을 반영하고(「찬미받으소서」, 69항), 하느님의 사랑, 무한한 자애를 나타내며(「찬미받으소서」, 84항), 또, 하느님께서 피조물들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십니다(「찬미받으소서」, 85항).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피조물과 함께 주님을 흠숭하려는 마음을 품게”(「찬미받으소서」, 87항) 될 것입니다.

회칙은 피조물이 하느님 현존의 자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찬미받으소서」, 80항). “모든 피조물 안에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살아 계시며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십니다”(「찬미받으소서」, 88항).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시어 당신의 보편적 주권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도 보여 줍니다”(「찬미받으소서」, 100항). “우리를 매우 사랑하시는 생명의 주님께서는 늘 이 세상 중심에 현존하십니다”(「찬미받으소서」, 245항).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 주어진 임무

이처럼 「찬미받으소서」는 하느님께서는 피조물 안에 현존하시며, 말씀이신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된 이 세상은 하느님을 향하여 존재한다는 진리를 강조합니다. 물론, 회칙은 인간이 그 어떤 다른 피조물보다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음을 잊지 않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인간에게 맡겨진 역할을 대신할 수 없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닮아 피조물을 돌보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회칙이 다른 피조물들도 하느님을 드러내고, 하느님께서 그 안에 현존하실 정도로 중요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임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강생하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고, 그분께서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신다면, 그리고 그 피조물들이 하느님을 다양한 방법으로 드러낸다면, 그 피조물들을 돌보고 가꾸지는 못할망정, 우리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 피조물을 파괴하고 착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곧 삼위일체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고, 다른 피조물과 인간에게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찬미받으소서」, 8항 참조).

참으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 물질세계에 몸소 오시고 이제 부활하시어 모든 존재의 내면에 현존하시며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당신 빛으로 밝혀 주신다는 확신”(「찬미받으소서」, 221항)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우리가 다른 피조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합니다. 곧, 우리의 신앙이 생태계를 보호하라고, 공동의 집인 지구를 보호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생태계를 보호하는 것, 지구가 겪는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피조물을 돌보는 일을 넘어서 동시에 우리 인간을 위해 필수적인 일입니다. 이를 기억하게 하려고, 「찬미받으소서」는 인간이 이 세상의 일부이며 구성원이라는 것, 우리가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육신을 통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긴밀하게 결합”하였습니다(「찬미받으소서」, 89항).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에 속하므로, 자연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합니다”(「찬미받으소서」, 139항).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진리이지만, 이 진리를 우리 인간이 너무나 무시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현재 지구가 고통 받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지구에서 살아가는 가난하고 작은이들이 점점 더 고통 받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모든 속박에서 해방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라고 호소하시며,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흔들어 깨우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신 하느님과 인간, 피조물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필요한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피조물과 함께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멘.

 

 

 

<진리의 영>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 제6주간 수요일>(2020. 5. 20. 수)(요한 16,12-15)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여기서 ‘진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뜻하기도 하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또 믿음을 통해서 얻는 구원으로 사람들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또는 새로운 것을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앞으로 올 일들을” 알려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즉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재판을 받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이 말씀의 뜻은,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왔다.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일 것이다.(나를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것과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것은 모두 구원의 진리를 거부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 라는 반응을 보였는데(요한 18,38), 그의 말은, “진리 따위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는 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관심 갖지 않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길을 그들 자신들이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 말씀에서 ‘자유’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사람의 행복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원’은 ‘참되고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살면 너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자유를 얻는 것의 반대 상태를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요한 8,34). ‘진리’의 반대쪽에는 ‘죄’가 있고, ‘참되고 영원한 자유’의 반대쪽에는 ‘죄의 종’이 되어서 사는 상태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서 진리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도움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죄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살기를 희망하고, 또 그 희망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죄 속에서 살면서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복음을 ‘진리’로 표현하신 것은, 당신의 복음이 아닌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가르치신 것이기도 합니다. 거짓 복음을 믿고 그것을 따라가면 구원이 아니라 멸망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짓 복음’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갈라 1,7-9).”

 

사도들이 전해 준 예수님의 복음만이 진리입니다. 자기가 어떤 계시를 받았다고, 또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복음인 것처럼 가르치는 자들은 모두 이단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사탄의 수법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복음과 다른 것을, 또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4-6).” 

구원의 진리는 하나입니다. 만일에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와가 뱀의 말에 속아 넘어간 것은 뱀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았다는 것도 한 이유입니다. 이미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신자들이 이단 종파와 사이비 종교의 주장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또 자기가 이미 받아들인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리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온 누리를 가득 채우고 계신 하느님의 충만함을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요한 16,1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을 제자들에게 전달해 주실 겁니다. 이러한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곧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요한 8,28)고 하셨습니다. 또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요한 5,19)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 ...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요한 16,15)

성령께서 예수님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은 실상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성부에게서 성자로, 성자에게서 성령으로 이어지는 이 관계는 삼위 하느님의 완전한 일치를 가리킵니다. 획일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들이 하나이심을 드러내지요. 온전히 일치하고 온전히 사랑하는 분들에게 다른 생각, 다른 뜻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들은 바를 영혼 없이 되풀이하는 기계적 재연과는 다릅니다.

아버지에게서 예수님께로, 예수님에게서 성령께로, 성령에게서 제자들(우리들)에게로 앎이 이어집니다. 이 앎이 곧 진리이고 사랑입니다. 피조물이고 죄인에 불과한 우리에게까지 이신비적 지식과 영의 기운이 흘러듭니다. 사실 아버지는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길 갈망하십니다. 이 뜻은 아드님도,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아테네 설교 대목입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도 17,25).

인간 편에서는 성전 건축이나 의례, 제물 봉헌 등을 통해 마치 사람이 신에게 무엇이나 대단하게 하는 것인 양 착각을 합니다만, 실은 인간 편에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고 있지요.

하느님은 무언가를 더 받아 누리고자 인간 주위를 서성이는 채권자가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인간을 만드신 이래 인간을 돌보시느라 잠시도 쉬지 못하고 눈조차 붙이지 못하는 아버지시지요. 그분이 바라는 것는 당신이 가지신 모든 것을 우리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사도 17,28).

의식하건 의식 못하건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온 세상을 만드시고 누리를 가득 채우고 계신 하느님을 인류는 자기들 문화와 신심과 체험 안에서 고유의 이름을 지어 불러드리고 섬기고 경배하지만, 결국 한 분이신 하느님이 계실 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온갖 신화와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 아테네에서 이를 알리고자 애를 쓰지요.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화답송).

우리는 주님의 영광, 주님의 위엄, 주님의 사랑이 가득 찬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영의 눈을 크게 뜨면 이 세상이 주님으로 충만하다는 것이 보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이 기운이 오늘도 우리를 숨 쉬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사랑하게 합니다. 성삼위 하느님의 일치 속에 머무르는 우리에게 다른 생각, 다른 뜻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강요나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 그렇게 만들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어 흘러나온 사랑이면 좋겠습니다. 또 누군가에게 전해져 사랑으로 열매를 맺으면 더 바랄 것 없겠지요. 우리는 하느님으로, 그분 사랑으로 꽉 찬 세상 안에서 그분과 호흡을 같이 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알게 된 하느님을 바오로처럼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는 기쁨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어수선한 세상 살기힘들지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진리의 영은 하느님의 보증이며 예수님의 영광이며 하늘 안내자입니다.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알기 쉽게 설명하신 사도요한님께 참 감사합니다.

사랑의 신비로 꽉 차 계신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속성표현 참 높습니다.

 

하느님 안에 말씀예수님 책임성령님이 진리와 사랑으로 한 분이시라니!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건 모래알 같은 우리로선 힘겹겠지요.

감히 하느님을 닮은 존엄한 인간이라면 지금 우리 삶 바로 고쳐야지요.

 

오류거짓 기만조작 악용이라는 단어들이 어수선한 세상 살기힘들지요?

영원한 행복 향해 하늘 진리의 사랑길 가시려면 가톨릭 신앙 가꿉시다.

 

 

 

“진리가 무엇이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의 신전이 있는 아레오빠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임을 선포합니다. 진리는 사람이 인식(이론과 실제)통하여 알게 된 초월적 가치이며, 이로써 삶의 목적이 되신 초월적 대상을 뜻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힘입고 새롭게 태어난 사도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리스도 예수님이 진정으로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하느님이시고, 확실한 믿음의 대상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직접 박해했던 예수님이었지만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신’을 말하고 있음이 아니고 예수님을 확실히 하느님으로 선포합니다. 진리는 초월적 존재이며 목적임을 무지의 아테네 시민에게 설파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행17,22-25)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18,38)

빌라도는 인식체계가 잘못 되어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존재, 생의 목적으로의 믿음의 대상임을 한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진리를 앞에 두고 신문하면서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묻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한계였다.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라고 쓰여진 제단에 제물을 놓고 숭배하는 그 대상이 누구인가를 아테네 시민은 모르고 있다. 미신일 뿐이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그들을 향해 ‘진리가 무엇이오’에 대한 답을 담대하게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그 이유가 여기 이 말씀에 담겨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16,13-15)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 시민 여러분을 무지에서 깨우쳐 진리 안으로 끌어드리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뿐인가? 성령에 힘입은 사람은 이와 꼭 같다. 진리의 영이 내안에 오시고록 항구하게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해야 한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서 진리의 영에게로!

     이기우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삼년 동안이나 직접 가르침을 듣고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이 오시면 깨닫게 되리라고 말씀하시고는 더 이상 가르침을 아끼셨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제2차 선교여행의 길에서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예배하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진리를 설파하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결국 바오로의 아테네 선교 시도는 디오니시오라는 지식인과 몇몇의 시민들에게서 동조를 받았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으나, 세월이 흐른 뒤에는 고대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였던 이 아테네에서 로마로, 그리고 다시 로마에서 전 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결과를 낳았고, 결과적으로는 서양 문명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신앙의 세례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바오로의 아테네 선교 이후 무려 천6백여 년이 흐른 후에, 이제는 인류 문명의 또 다른 중심축이었던 중국 땅에 들어가서 하느님을 모르던 중국인들에게 바오로처럼 맨땅에 헤딩하듯이 선교를 시도한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4백여 년 전 이태리 출신의 선교사 마태오 리치는 중국에 파견되어 20년 이상이나 유학과 한문을 습득한 다음에, 원시 유학이 담긴 고전 문헌에서 ‘상제’(上帝)라는 인격신의 개념을 발견하고는 이 개념을 유학과 그리스도교의 연결고리로 전제한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저작을 저술하였습니다. 

바오로의 아테네 선교가 그 당시로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테오 리치의 이러한 시도 역시도 당대 중국 선비들에게는 반짝 주목을 받기만 했을 뿐이었지만, 이 책이 조선의 선비들에게 전해지면서는 선교의 불모지였던 조선에 복음이 자생적으로 뿌리내리는 놀라운 선교적 섭리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 복음 진리를 담아온 이 서적이 선교사의 직접적 선교 노력이 없이도 자생적 교회가 세워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배경에는, 바오로가 상정했던 ‘알지 못하는 신’처럼, 마테오 리치가 찾아낸 인격적 천(天)의 개념에 목말라 하던 조선 선비들의 구도전통이 있음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서적을 통해서 당시 서양 종교로 여겨지던 천주교를 본격적인 종교요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여서 목숨을 걸기까지 했던 선비들은 당시 조선 사회의 모순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남인파 선비들이었는데, 이들은 당시 성리적 유학을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결과 사회의 공동선을 도탄에 빠뜨리고 만 부패한 권력에 실망하여 과거에 응시하기를 포기하고 실학  서적 독서에 개인적으로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녹암 권철신 문하의 선비들이 실학 공부를 공동으로 연구하기를 원하여 강학회를 열기까지 했는데, 이 녹암계 선비들의 실학 강학회 노력에 천주학과 천주교로의 불을 붙인 인물은 광암 이벽이었습니다. 특히 강학회의 막내였던 정약용은 강학회 중도에 합류한 이벽의 해박한 천주교 교리 지식을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한 동력으로 삼고자 받아들였으면서도, 다른 남인파 녹암계 선비들과는 달리 과거에 응시하여 조정에 출사하였습니다. 

그러자 정약용을 시기한 다른 선비들이 마침내 그를 천주교인이라 하여 고발하는 사태가 촉발되자 단연 돋보였던 그의 재주와 인품을 유난히 아끼던 정조는 전라도 강진 땅으로 장기 유배를 보내어 보호를 해 주었습니다. 강진은 그의 처가였던 해남이 산 하나 너머에 있던 땅이었고, 그 덕분에 정약용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반대자들의 모함을 받지 않고 처가의 장서들을 활용하여 천진암 강학회에서 습득한 천주교 교리를 바탕으로 하되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저술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치, 경제, 법률 등 여러 분야에서 독보적인 저작을 내놓았는데, 공허한 관념론에 빠졌던 주자학풍 전통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었던, 천주교 교리의 세례를 받은 학풍에서라야 가능한 저작들이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정약용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고 알려진 최제우의 동조자들은 동학당을 조직하여 동학혁명을 일으킬 때 경세유표(經世遺表)를 혁명의 경전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편찬 이래 조선에 일어난 섭리적 역사의 흐름을 간추리면 이러합니다. 공리공론을 일삼던 주자학에서 실사구시의 실학으로, 사물의 이치만을 궁리하던 실학에서 그 전제가 되는 신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한 천주학으로, 알기만 하던 천주학에서 믿는 천주교로, 믿기만 하려던 천주교 교리에서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다산 정약용의 저술로, 이 저술로부터 동학의 혁명적 시도로, 그리고 이 동학혁명으로부터 오늘날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동양과 한국의 문명은 진리의 영에 의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선교 내지 사도직이란 신에 대한 올바른 관념으로 시작해서 복음의 해방적 성격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파스카적 좌표의 움직임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파스카 신비로 귀결되는 흐름이 진리의 영을 따르는 사도직 활동일진대, 성모찬송에는 메시아 신앙의 파스카 신비가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인자하심은 세세 대대로 당신을 두리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성무일도와 레지오 마리애 까떼나에도 찬미가로 들어와 있는 이 성모찬송을 매일 바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진리의 영께서 이끄시어, 그 안에 담겨 있는 성모성심의 파스카 신비라는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 그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시인이 쓴 "지금 알고 있는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입니다. 철 없던 시절에는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누가 가르쳐주면, 자신이 그것을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거나, 그런 일은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나중으로 미루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나면 그렇게 미루거나 그냥 넘어간 것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때 이렇게 할걸'하고 후회해보아도 때는 이미 늦지요.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보다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일찍 깨달을 수 있다면, 그만큼 나중에 후회하는 일도 적을 것이고, 쓸데 없는 일들에 시간을 허비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류시화 시인의 이 시는 이러한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이 자주 나타납니다. 그들이 아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가치들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마음 속이 '나 자신'으로 가득하여 성령을 받아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을 모시고 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참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인지, 어떤 일들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그러했지요.

 

다행히도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사도들과 초기 교회 공동체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을 살펴 보았고,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충분히 배웠습니다. 또한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성령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니 각자가 배워 알고 있는 것들을 충실히 실천하기만 한다면,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대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지금 알고 있는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하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러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역사 안에서 성령의 가장 큰 업적? <요한 16, 12-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 나의 것이다.” 구약과 신약 성경을 보면서 감탄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되고 깨닫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말들이 하나의 길을 찾아 일치로 가는 것인지 “오신 주님은 2000년 전에 태어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입니다. 이를 알게 해준 말은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모두가 참 진리의 길을 이끌어 주십니다. 성경 공부를 할 때 제 마음과 머릿속에 남아있는 교수님의 말씀은 “구약이나 신약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점 하나도 성령의 감도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하신 말씀입니다. 설마 했는데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더 감동을 주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려 봅니다. “구약 성경, 신약 성경을 기록으로 남아 저에게까지 전달된 것은 성령의 가장 큰 업적이다.”라고 정의를 하고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원산 덕원분도 수도원 인쇄소에서 발간한 소년 성서, 구약에서 신약까지 중요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전해주는 수녀님들의 말을 통해 통달하여 전체적 내용이 제 안에 자리 잡고 있어 성경을 공부할 때도 중심을 잃지 않고 보게 됩니다. 또한, 시편 공부를 하다 보면 내용이 모두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하루에 4번 기도 시간에 드리며 감동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하느님 말씀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어떤 것보다도 저를 가치 있게 합니다. 성령이 기도와 묵상 중에 오늘은 무엇을 깊이 묵상하라고 지시합니다. 모르는 문자는 성경 신학 사전을 참고하여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역사적 현상과 오늘의 현실 안에 조화를 이룸을 깨닫고 글을 쓰게 하는 것도 성령의 감도로 가능해집니다.

 

오늘 주님 진리의 영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일치를 보며 알려주는 것은 성령을 보지 않고, 내용을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고 제 글을 보시면서 성경을 모르면 알아듣지 못하고 흘러가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시편을 보며

1) 시편이 써진 환경, 역사성 관찰을 사실에 따라 보고

2) 그리스도에 관련되는 부분을 보면서 연관 짓고

3) 교회와 관계되는 것을 관찰하고 해석해야 하고

4) 현재 나의 입장과 인간의 조건을 기억 관찰하여 각자의 삶에 적응해야 합니다. 시편 1장을 보면 지혜의 편으로 인간의 두 가지 길은 선과 악의 길입니다. 각자에게 심어진 양심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명령입니다.

 

선인의 모델은 예수그리스도이며 의인의 실현은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부활 전례 안에도 “나는 존재하는 것이며 죄인의 길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법을 낙으로 삼는다.” 합니다. 이렇게 성령은 구약의 아담 나무와 메시아의 나무가 심어진 십자 나무를 비교해보게 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 살려면 성경을 보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믿음을 더 빛나게 살려면 성령으로 만들어진 성경을 몸과 마음에 새기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긴 시간 속에 여무는 신앙

     한민택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다고 하시며, 진리의 영께서 오셔서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밝은 태양을 직접 바라볼 수 없듯이, 아드님을 통해 알려주신 하느님의 진리는 우리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타고난 나약함과 한계를 지닌 인간이 주님의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지만 아이는 바람이 이루어질 때까지 긴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듯, 영적으로 여물기 위한 시간도 필요합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교에 들어가 긴 시간을 지내야 합니다. 두 남녀가 만나 완숙한 사랑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시련의 시간이며 정화의 시간이고, 숙고의 시간이며 성장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신앙이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인격적 관계는 함께 지내는 시간 속에서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에 대한 신비 안으로 들어가며 성장합니다. 지금의 삶이 바로 그러한 관계가 무르익기 위한 시간, 진리를 깨달아가는 시간이며,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와 더불어 하느님 자녀로서의 인간 존재의 신비를 깨달을 것입니다.

 

 

 

자아초월自我超越의 여정旅程, -진리의 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에서의 바오로 사도의 설교입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대단한 종교심을 지닌 그러나 하느님을 모르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소개하는 바오로입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아직 하느님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오늘날의 모든 철학자, 예술가, 종교인들은 물론 모든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같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뿐입니다. 하여 절박한 것이 회개의 은총입니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만나 믿음과 희망,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불가사의한 인간입니다. 그처럼 자명한 하느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을 종종 망각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명백하게 거부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태도들은 매우 다양한 근원에서 비롯될 수 있다. 곧 세상의 불행에 대한 반발, 종교적인 무지나 무관심, 현세와 재물에 대한 근심, 신앙인들의 좋지 못한 표양. 종교에 대한 적대적 사조, 그리고 끝으로, 하느님이 두려워 몸을 숨기며, 그분의 부르심을 듣고 달아나는 죄인인 인간의 태도등이다”(교리서29항).

 

그러나 사람은 하느님을 잊거나 거부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 당신을 찾아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끊임없이 부르십니다. 끊임없이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시며, 우리 역시 마음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니, 하느님은 사람의 운명이자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하느님을 만납니까? 회개의 은총을 통해서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보호자 진리의 영, 성령이십니다. 참 좋은 선물, 보호자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회개에로 이끄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오늘 복음 환호송 말씀처럼 파스카의 예수님 덕분에 진리의 영을 선물받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거듭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분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이미 진리의 영께서 오셨고 오늘 지금 여기서, 아니 앞으로도 모든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참으로 진리의 영, 성령의 은총으로 부단한 회개와 더불어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됨으로 비로소 무지로부터 벗어나 주님을 닮은 참나의 자유인이 됨을 깨닫습니다. 모든 진리는 파스카의 예수님 안에 다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진리의 영의 은총으로 부단히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예수님을 깨달아 알아가는 일뿐이겠습니다.

 

참 행복은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분이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진리 자체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게 하십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 요즘 계속 강조되고 있는 분이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신 진리의 영,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살아 있는 ‘기억’이시며, 사랑의 멘토가 되십니다(교리서1099항). 영적 스승이 없다고 탄식할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겸손히 마음을 여는 누구에게나 최상, 최고의 영적 스승이자 멘토가 되시는 진리의 영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사람은 진리의 사람이요, 이래야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요 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영혼의 영혼입니다. 진리의 영, 성령의 은총이 부단한 회개와 더불어 날마다 자아초월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삶은 성령의 은총에 의한 자아초월의 여정입니다. 마침 어제 써놓고 자유로워 했고 행복해 했던, 또 간절한 소망이 담긴 고백시를 나눕니다. 이 또한 성령의 선물입니다.

 

-“삶은/첩첩산중疊疊山中

자아초월自我超越의 여정旅程

날마다/힘겹게 정상頂上에 오르니/만나는

 

오, 확트인 광활廣闊한

신록新綠의 평원平原이신 주님

걸림이 없어라/자유自由로워라

 

오, 넘치는 행복幸福

요즘이 아니 날마다 그러하다

계속 그러하기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의 사람, 진리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시어 성공적 자아초월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 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모든 진리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리의 길을

일깨워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세상의 진리가

아닌 주님의

진리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불안한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진리를 실천하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을 믿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진리안으로

이끌어가시는

진리의 영입니다.

 

삶안에서

꽃과 열매를

맺게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두 가지의 세상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세상은 여러분 1년 수입이 5,000만원이고, 다른 사람들의 수입은 그 절반인 2,500만원입니다. 두 번째 세상은 여러분 1년 수입이 1억이고, 다른 사람들의 수입은 그 두 배인 2억입니다. 이 두 세상의 물가는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세상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조사는 1998년 하버드대학을 포함해서 학계의 연구 결과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50% 이상이 첫 번째 세상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는 두 번째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게 되는 첫 번째 세상을 선택하더라는 것입니다. 물가가 같다면 비록 다른 사람보다는 수입이 적어도 더 많은 수입을 얻는 것을 선택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소비를 할 수 있는 비용이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서열의 위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과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남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이 더 높은 서열에 있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행복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경쟁에 동참하면서 결국 불행에 가까워집니다.

 

경쟁과 비교의 삶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욕심을 자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경쟁자로 바라보지 않게 되고, 나를 이해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고대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 아니라 원하는 게 적은 사람이 부자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좀 더 쉽게 진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즉, 잘못된 생각과 판단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 세상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살게 하면서 주님을 영광스럽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해서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이끄심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나의 동반자이며 협조자라고 이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쟁자이고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 정도로 이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령을 받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바로 내 자리가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곳이 됩니다.

 

오늘의 명언: 어쩌면 ‘사랑’에 가장 가까운 말은 ‘가만히’가 아닐까. 거기 가만히 있어도 삶의 이유가 되는 그런 사랑...(서영식)

 

내 편.

모든 사람이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나’를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완벽하게 이해해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내 편’들이 있습니다. 가족이 될 수도 있고, 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밖에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편이 되어 줍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완벽한 이해를 해주는 내 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내편에 서지 않고 반대편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남’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조금의 이해라도 해주려고 노력하는 ‘내 편’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들이 바로 내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는 정말로 고마운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고마운 내 편이 계시네요. 늘 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 주님입니다.

 

 

 

‘죽어야만 산다’는 역설(逆說)의 진리 앞에 오늘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자(弟子)란 말 마디 그대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스승께서 하시는 말씀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보여주신 구체적인 삶의 모범, 사상, 가치관, 일거수일투족을 따르고 실천하는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더불어 그분의 운명을 내 운명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분처럼 살고 그분처럼 죽겠다고 따라나선 사람들이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스승님께서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꽤나 부담스럽고 걱정되는 가르침을 내려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복음 12장 24~26절)

 

진정으로 살고 싶다면, 죽으라고 하십니다. 영원히 살고 싶다면, 덧없이 짧은 이 세상은 포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정녕 중요하고 큰 것을 얻으려면, 스쳐지나가는 작은 것은 아쉽지만 떠나보내라고 당부하십니다.

 

‘죽어야만 산다’는 이 역설(逆說)의 진리 앞에 오늘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앞에 서게 되면, 심한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게 됩니다.

 

스승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 역설의 진리를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관건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이웃을 향한 적개심과 분노, 복수심과 미워하는 마음에서 죽어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얼굴을 내미는 교만함과 우월감으로부터 죽어야겠습니다. 주님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나를 돋보이게 하고 빛나게 하려는 교만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일 겪게 되는 우울감이나 무기력함,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의 찬란한 별이 되신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한분 한분 순교자들의 순교 과정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들은 어느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채, 순식간에 순교의 영광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준비 과정이 철저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순교하기 오래 전부터 매일 순교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셨습니다. 마음 속으로 언젠가 다가올 영광의 순간을 그리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불꽃처럼 살아가셨으며, 마침내 영광의 순간이 다가오자, 추호의 미련도 없이 순교의 형장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영예로운 한국 순교자들의 후예인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떻게 순교 영성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고민과 성찰은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몫입니다.

 

여기저기 극심한 병고로, 노환으로 고생하고 계시는 형제자매들을 생각합니다. 그분들 매일 매 순간 겪고 계시는 깊은 슬픔과 고통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과연 내 병이 나을 것인가? 이러다 영영 회복 못하고 세상 뜨는 것은 아닌가? 내가 떠나고 나면면 남겨진 저들이 겪을 고통은 또 어떡할 것인가? 또 다시 해가 뜨고, 세월이 흘러가는데, 세상 사람들은 다들 저리도 활기차게 걸어다니고, 깔깔대고 웃고 다니고, 마음껏 삶을 만끽하고 있는데, 나만 이 우울한 병실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세상과 가족들에게 기여나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여러측면의 부담만 주고 있는 이 죄책감은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병고가 지속되면서 가중되는 이 극심한 고통과 심연의 고독, 점점 증폭되는 두려움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데, 언제까지 견뎌내야 할 것인가?’

 

이런 면에서 순교 영성은 우리 환우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성인 듯 합니다. 고통과 외로움이 다가올 때 마다 순교자적인 마음으로 견뎌내는 것입니다. 순교하는 마음으로 병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환자로서 수행할 병실 사도직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투병생활로 힘겨우시겠지만, 기회 닿을 때 마다 병실에서 성경을 펼쳐드시는 것입니다. 좋은 양서들, 영성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더 아픈 환우, 거동이 불편한 환우가 있다면 작은 도움의 손길이라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매일 나를 위해 고생하는 의료진들과 간병인들, 가족들, 문병객들 환한 얼굴로 환영하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힘들다, 죽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덕담을 건네고,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건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병실에서 환우들이 실천할 순교 영성입니다.

 

병고가 극심해서 기도 조차 힘겨울 때는, 묵주를 꼭 쥐고 있는 것만도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기도가 됩니다.

 

 

 

누군가를 영광스럽게 하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고속도로에서 수녀님들을 태우고 운전을 하고 가고 있었습니다. 대화를 한참 하던 터라 뒤에서 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차선을 바꾸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백미러에는 차가 없었는데 갑자기 “빵 ~~~” 그러며 한 차가 제가 빠졌던 차선으로 차를 붙이며 창문을 내렸습니다. 본래 추월하려면 2차선에서 1차선으로 추월해야 하는데 저는 1차선에서 2차선으로 빠지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차는 아마 2차선으로 추월하려다가 제 차가 갑자기 2차선으로 들어서니 급브레이크를 밟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창문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쪽에서 운전자 아주머니가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저도 “추월하려면 1차선으로 해야지, 비켜주는 나한테 왜 그래요?”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싸움을 하면 수녀님들이 불편해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속은 부글부글 끊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차를 보내버렸습니다. 그 사람도 제 차 안의 수녀님들의 복장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누군가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원하는 말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 나와 하느님 사이에서 일어난다면 이것이 예언자직입니다. 나 자신이 할 말을 하지 않고 타인이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 타인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께서 세상에 보내시는 성령께서 그것을 받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13-14)

 

예수님도 스스로 한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고, 성령께서도 스스로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들을 파견하신 분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해주실 뿐이십니다. 

 

이렇듯 예언자직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나의 말을 참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예언자직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아내는 것이 예언자직입니다. 예수님도 이 예언자직을 수행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셔야 했습니다. 성령을 받는 이들은 모두 예언자들이 되는데 그 이유는 자기 뜻대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길이 됩니다. 

 

한번은 또 고속도로에서 차에 소리가 나서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찾다가 앞 트럭을 살짝 박은 적이 있습니다. 그 차가 1톤 트럭이어서 제 차는 그 차 밑으로 들어가 보닛이 다 휘어질 정도로 피해가 컸지만 그 차는 멀쩡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이는 두 남자가 목을 잡고 내렸습니다. 아들은 인상을 쓰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피해가 없는데 무언가 받아내려는 속샘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기도를 하면서 가는 중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빨리 내려서 “괜찮으십니까? 정말 죄송합니다.”를 고개를 깊이 숙이며 연발했습니다. 조금 화가 난 표정이었던 젊은 사람이 갑자고 조금 당황해하더니 얼굴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러더니 “어이구, 아저씨 차 많이 망가졌네요. 잘 고치세요.”라고 하며 다시 차에 타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해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직은 나를 죽이는 행위이지만 또한 나를 살리는 행위입니다. 내가 하는 말들이 사실은 나를 죽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나를 살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매순간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들어보아야 합니다.

저도 살면서 제 마음대로 말하다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실수를 하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후회가 되어 항상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는 후회가 없습니다.

 

예언자직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고 싶어 하는 말을 하여 나를 죽이고 다시 부활하는 직무입니다. 이것이 나도 살리고 이웃도 살립니다. 하느님께서도 서로서로를 위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도 하지 않고 상대의 말만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서로 순종하시는데 우리야 얼마나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겠습니까?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조앤 치티스터 수녀님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수녀님은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실패는 또 다른 길로 가는 입구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실패를 통해서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성공에 대한 갈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실패가 곧 자존감의 상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성공, 1등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꽃밭의 꽃들은 서로 자기가 1등이라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꽃밭에서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장애인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활 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서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모든 인간은 흔들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신앙은 1등만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실패와 허물을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는 실패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패란 나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실패로 인해서 자존감이 무너지고 근심, 불안, 원망이 자라면 이는 실패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젊은 인도인 변호사였던 마하트마 간디가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기차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작가 엘리 위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죄의 용서가 아닌 것이 무엇이었나. 하느님이 아담에게 준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권리였다.” 유학자인 구양덕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시는 물과 흐르는 물은 그 성질이 다르지 않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모두 하늘에 기인한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하는 것이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선교사가 없이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100년 동안 50년은 사제 없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신유, 기해, 병오, 병인박해가 있었습니다.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박해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순교자도 있었지만, 배교자도 있었고, 밀고자도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뜨거운 피와 숭고한 신앙이 열매 맺었고, 오늘 한국 천주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저의 삶에도 바람이 있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후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서 20일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IMF의 거센 파도가 저에게도 밀려와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다리가 골절돼서 15일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혈압도 높고, 치아도 좋지 않은 편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이 세상 모든 꽃은 흔들리며, 비에 젖으며 피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흔들리며,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 시험을 통과하면 생명의 화관을 받으리라.

 

 

 

<성령 같은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벗들에게

 

가시는 길

가운데 내가

 

벗들이

하느님께

 

가는 길

가운데 내가

 

하느님과 벗을

벗과 하느님을

 

곱디곱게 잇는

성령 같은 사람이 되는

 

맑고 착한

욕심 가져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곽승룡 비오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자기 목숨(psyche)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12,25)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7)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래서일까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추방과 죽음을 겪는 공동체 안에 틀림없이 존재한다.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밀알 하나의 씨가 “땅에 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먼저 그렇게 땅에 떨어지셨다. 그리고 하늘로 "들어 올려 지셨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 "떨어짐"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를 바라는 이들은, 예수님처럼, 자기를 선물로 내어놓으면 된다고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다. 곧 자기들의 목숨을 내놓도록 준비되어야만 한다고...

그래서인지 지금 이 곳에서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고, 목숨을 미워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 의해 지워진 절대적인 것들을 "포기함"을 사랑함으로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열매를 맺고 종이 아버지에 의해 영예롭게 된다는 희망을 말한다. 종인 예수님의 추종자가 예수님의 아버지에 의해 영예롭게 될 것이다.

 

오늘날 본당,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진정으로 땅에 떨어져 섞는 밀알 하나, 녹는 소금이 되도록 초대된 자들이다. 나는 녹는 소금일까, 섞는 밀알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오히려 썩게 하는 밀알, 녹지 않고 짜기만 하는 소금일까.... 주님과 자신은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감당하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감당하다’ 는 뜻은 일 따위를 맡아서 능히 해내고 견디어 낸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능력으로 앞으로 닥칠 고통을 이겨내며 영광을 능히 이루어 낼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제자들 수준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그만큼 가르치고 보여주셨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때가 이르게 되면 그 어떤 험한 일과 그에 따를 고통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16,12-13).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할 말이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나는 제자들에게 무리수를 쓰지 않겠다고 말씀 하신다. “‘진리의 영’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 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대스승님은 예수님 말고 그 어떤 세상에도 계시지 않는다. 일반적인 스승은 자기 욕심이 있고, 급조하고, 생색내기를 한다. 그러기에 이들은 제자들이 감당하기도 전에 아예 질려버린다. 이것이 우리의 교육현실이다.

 

제자들은 대스승님이신 예수님께로부터 영광에 이르는 법을 배워고 난 다음 제자들의 제자들에게 제대로 가르칠 것이다.

 

 

 

신앙인은 성경 중요성 알지만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이야기는 신기하고 황당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죽음과 현세를 이미 오가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보다 더 신기했겠죠.

어린이들에게 신기한 동화 들려주면 진지해하고 어른들은 웃어넘기죠.

 

그러니 예수님도 순진한 어린이를 좋아하셨죠. 잘 통했으니까 말이죠.

제자들도 예수님 말씀을 성령의 도움으로 겨우 깨닫고 성경 남겼지요.

신앙인은 성경중요성 알지만 일반인들은 성경을 시답잖게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 갖고 계신 것이 다 나의 것이라는 예수님말씀이 그렇지요.

이에 신앙인들은 감탄하지만 거부하는 사람들껜 어쨌든 알려야겠지요?

 

 

 

천주교 종교는 사교가 아닙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시복 자료집 제1집) 23-25, 31-33면 참조)

나(윤지충)는 음력 10월 26일(양력 1791년 11월 21일) 저녁에 진산 관아에 도착했고, 저녁을 먹은 후 군수 앞에 소환되었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너 그 무슨 지경이냐. 그래 무슨 연유로 그렇게 되었느냐?” 나는 대답했다. “제게 묻는 바를 잘 모르겠습니다.” 군수의 질문과 나의 답변은 계속되었다. “(들리는) 소문이 매우 심각한데, 근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사교가 아니냐?”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복희(伏羲) 이후 송(宋)조의 성현들에 이르기까지 실천했던 모든 것이 거짓이구나.” “우리 종교에는 계명들 가운데 (남을) 헐뜯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저로서는 단지 천주의 종교를 따를 뿐, 아무도 비판하거나 비교할 마음은 없습니다.” “시랑(豺狼, 승냥이와 이리)이라는 동물도 제 부모를 향해 감사의 표시를 하고, 어떤 새들은 부모를 위해 제물을 바칠 줄 안다. 하물며 인간이야 마땅히 그처럼 처신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공자(孔子)의 서적도 읽지 않았느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부모가 살아 계신 동안 모든 규정에 따라 그들을 섬기고, 그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모든 규정에 따라 장례를 치를 것이며, 끝으로 관습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 비로소 효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느니라.’ 하셨다.” “이 모든 것이 천주교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30일 새벽에 우리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고, 날이 밝았을 때 우리는 감영으로 인도되었으며, 감사는 오후에 우리를 그 앞에 소환하여 말했다. “윤이라는 자가 누구이며 권은 누구냐?” 우리는 저마다 대답하였다. 감사의 계속되는 질문에 나는 대답하였다. “너희가 일상 하는 일이 무엇이냐?” “어려서는 과거 시험 공부에 전념하였고, 얼마 전부터는 마음과 행실을 다스리는 공부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경서를 공부하였느냐?” “예. 그것들을 공부했습니다.” “네 마음과 행실을 다스리기 원한다면 우리 경서가 충분하지 않느냐?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천주의 종교가 사교가 아니더냐?”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 교리의 간단한 요약을 내게 해 보아라.” “이 곳은 규범을 논하는 장소이지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것은 십계명(十誡命)과 칠극(七克)으로 요약됩니다.” “너는 누구에게서 이 책들을 받았느냐?” “그를 지목할 수는 있겠지만, 내게 이 책들을 빌려 준 때는 임금님의 금령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니 그 사람은 죄가 없었습니다. 엄중한 금령이 있는 오늘에 제가 만약 그 사람을 지목하면, 그 사람은 그 자신의 무고함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형벌에 처해지게 될 것인데, 제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웃을 해치지 말라.’고 하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니, 저는 그를 고발할 수가 없습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23-26: 그리스도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3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그러했듯이, 너희 영혼이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너희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순교라는 행위는 자기를 온전히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이다.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특히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며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결과로 순교의 월계관을 쓸 수 있는 것이다.신앙은 끝까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라고 하였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내가 지고 가야하는 십자가는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나를 이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신앙은 나를 이기고 나를 버리고 나를 끊고 나를 죽이는 일만 요구한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또한 내가 죽을 수 있어야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전한다고 하는데 바로 그 부활은 내가 부활하여야 하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그 부활을 전할 수 있다. 나 자신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24-25절)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한다 하여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악한 이들에게는 보화가 독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세상 풍조는 지나가기 마련이다. 순전히 이기적인 삶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을 망칠 수 있다. 쾌락은 뜬 구름처럼 사라지고 재물은 그 손에서 빠져나가고 만다. 그러나 의로움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낸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26절)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은 마땅한 보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수고를 견디며 신앙을 지킨 이들에게는 큰 축복이 내릴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많은 순교자들을, 신앙의 선조들을 시복을 하고 시성을 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그분들을 시복 시성하는 것은 그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시복시성의 목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 성인들이 되기 위한 것이다. 그분들은 우리가 시복 시성이 없어도 그분들은 이미 성인들이다. 시복 시성이 되신 분들은 기록상으로 객관적인 증명이 된 분들이라는 것이고 그런 것이 없어도 순교하신 분들은 모두 하느님 안에서는 모두가 성인들이시기 때문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순교정신을 필요로 한다.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이겨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대부분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그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실천하는 순교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순교정신으로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 성인들이 되도록 노력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복음묵상(요한12,24-26)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오늘은 우리나라 124위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124위는2014년 8월 16일 이 땅의 서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입니다. 오늘 기념 미사를 봉헌하며 우리도 역시 순교 복자들의 신앙을 본받아 이 시대에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어제 저는 본당의 제일 연세 많으신 형제님들의 모임인 니콜라오회 성지순례를 천안 성거산 성지로 다녀왔습니다.미사를 봉헌하고 잠시 성지를 돌아보며,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던 박해시기에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 죽기까지 신앙을 이어갔던 피와 땀의 증거들을 성지 곳곳에서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요즘은 너무나도 자유로운 시대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입니다.우리는 이에 대해서 정말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하고, 이 시대의 또 다른 순교의 모습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그것은 곧 언제 어디서든지 하느님의 함께하심을 참된 사랑의 삶을 통해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참된 행복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 24)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복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순교복자 124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124위 복자들이 탄생한 것은 2014년 8월 16일이었습니다. 그 때 프란치스코 교황 님께서 교황이 되신지 2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우리나라에 몸소 방문하셔서 우리나라의 순교자들 124위를 복자품에 올리셨습니다. 

참으로 우리 생애에 감격스러운 순간을 맛본 것이지요. 그날 천주교 신자들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한국의 순교자들 124분이 복자품에 오르는 영광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이분들이 복자품에 오르는 영광을 받은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그 믿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믿음을 위해서 바친다는 것은 대단히 숭고하고 고귀한 일이며, 그것은 세상에 무엇인가 주는 어떤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존재 자체도 중요한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진정 계시고,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 이러한 믿음이 생명보다 더 귀중한 진리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에게는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는 그 믿음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에게 이 믿음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며, 확고한 신앙과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밖에 없는 생명까지도 하느님을 위해 바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증거이며 초인간적인 믿음의 증거를 몸소 보여주신 순교자들의 삶에 대하여 머리 숙여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떨어져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 24)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은 한 알의 밀알처럼 신앙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순교로 인한 그 증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하게 해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초대교회의 교부 테르툴리아노도 말하기를,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밑거름이다."라고 하셨지요. 이제 순교자들은 그분들이 믿어온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실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요한 12, 2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 하느님 아버지가 계시며, 이 세상에서는 선과 악을 구분하도록 가르쳐 주셨고, 즉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이들에게는 벌을 주신다고 하는 상선벌악의 진리와 또 죽음 이후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어서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우리 초대 교회 신자들은 천주교 주요 4대교리 즉 천주존재, 강생구속, 상선벌악, 천당지옥 교리를 믿음으로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밀알처럼 바쳤던 것입니다. 그 분들의 믿음의 후예인 우리들도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의 순교 복자 기념일을 맞이하여 그분들의 믿음의 증거에 감사드리며, 우리들도 이 시대에 그런 믿음을 굳게 가지고 증거할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합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습니까?

•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 나는 착한 이들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이들에게는 벌을 주신다고 하는 하느님의 정의를 믿습니까?

• 나는 죽음 이후에 천당과 지옥이 있어서 주님을 믿고 산 사람들에게는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더 좋은것 주시려는 사랑'(요한 16장 5~11)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

주님은 가시지만 ~ 

협조자 성령을 보내어 우리 가까이에서 돌보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지난 2월 함께 살던 수녀님이 다쳐서 입원을 하다보니 수녀님을 기다리며 빈자리를 채우는데 더 일찍 일어나야 하고 더 많은 일을 해내야하는 부담이 점점 커져서 언제까지 버티고 견뎌야 하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하든 최선으로 협조해주던 수녀님이 고맙고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함께하고 싶었는데 ㅠ..

수녀님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방을 빼지도 않고 사랑으로 기다렸는데 수녀닝은 우리가 고생하는걸 안다고 자신이 가야만 다른 협조자를 보낼것이니 청하셔서 짐을 보내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보내야 한다니 눈물이 나고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서 안가면 안되냐고 떼도 써 보고 나도 가겠다고 어리광도 해보았지요.

사랑하기에 놓아야 하고 사랑하기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좋은것 주시려는 사랑이 가고 그 빈자리에 함께 할 사랑을 보내실 것이니 묵묵히 기다립니다.

 

 

 

사람을 땅에 묻으면 요한 12장24-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밀알이 땅에 들어가 묻으면 새 싹이 나와 많은 결실을 맺는데 사람을 땅에 묻으면 어떻게 되는가? 분명 주님은 땅에 묻처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 하시였지만 어제 땅에 묻친 에바리스도 신부는 어찌 될까,? 나는 알고있다 하느님 앞에 다시 살아 이것이 애써 믿음을 살아 주님 말씀듣고 따르고 살아온 결과 였구나 하고 열매를 주님과 함께 따서 이세상 보내고 계신것입니다. 오늘 유지충 복자의 축일바로 복자의 믿의 열매를 전달 받고 기도중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것 같이 세상 남아있는 우리도 에바리스도 신부님의 삶을 본받고 더 아름다운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수 있어야 그분의 살이 빛나고 하신일이 빛날것입니다 우리도 땅에 무처 허무하게 되지 않으려면 적어도 에바신부처럼 깨끗하고 순수하게 어린이같이 살아 살있는 사람들에게 힘이되고 희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원한 오늘이다.

     최민석 신부님

나는 천지 사방 모든 것에 자신을 열어 두고 싶다. 아침은 매우 기분 좋다. 오늘은 시작되고 출발은 이제부터다. 세수를 하고 나면 내 할 일을 시작하고 나는 책을 더듬는다. 오늘은 좋은 하늘에서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중요한 것은 다만 오늘 여기 내 앞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한 때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꿈꾸었던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그 어떤 것도 바랄 것도 구할 것도 없다. 더욱이 지킬 나도 없다. 하늘도 푸르고 산과 들도 맑고 푸르다. 하느님은 푸른 청록색을 좋아하시는가 보다. 이미 지금 이대로가 참 좋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내가 사랑이 되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는다고 했다. 사랑은 친절하다고 했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고 했다. ‘모든 것’이라는 말은 실로 엄청난 말이다.

 

그것을 덮어 주고 견뎌 내는 나까지도 그 모든 것 안에 들어간다. 사랑은 결국, 나로 하여금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향해 성을 내지 않고 덮어주고 바라고 믿고 견디게 한다. 그러기에 모든 사랑은, 나에게 주는 나의 사랑인 것이다.

 

고요함 속에 텅 비어 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돌아가 쉴 곳이 생겼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좋다. 그냥 느낄 수만 있어도 행복하다. 어떠한 고통이나 절망이 가슴을 어지럽혀도 언제나 따뜻이 불 밝혀주는 가슴속 사랑이 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 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나는 말하였다.”(요한16,13-15)

 

진리의 영이 오시어 나에게 자유를 주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일 분의 앞의 과거와 일 분 뒤의 미래에 얽매이지 않게 하신다. 과거를 돌아보되 거기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되 거기에 묶이지 않는다. ‘순간’이라는 이름의 ‘영원한 오늘’을 살아간다.

 

암을 진단 받았을 때, 그것은 오히려 내 앞에 나타난 새로운 문이요 희망이었다. 막다른 곳에 닿아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그 문을 열고 걸어갔다. 죽음이 내 안으로 들어와 평안하고 다정한 삶이 되었다. 두려움은 나도 모르는 새에 사라졌다. ‘순간’이라는 ‘영원한 오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선 내게 가장 기본적인 원칙하나가 생겼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은 어떤 것이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거기에 판단을 덧붙이지 말자는 것이다. 그 원칙은 아주 유효한 것이어서, 통증이 왔을 때에는 오직 그 순간에 머물기로 했다. 그 순간의 통증만 느끼면 되었고, 그것이 내 마음의 밑바닥까지 흔들어 놓지는 못했다.

 

오직 순간만 존재했다. 통증을 느끼는 순간에도 그것이 곧 지나갈 거라는 생각이 햇살처럼 틈을 비집고 들어와 비춰주곤 했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것은 지나갔다. 그러고 나면 폭풍우 지난 후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기쁨이 찾아왔다.

 

몸에 자주 통증이 찾아올 때가 바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은혜로운 순간이었다. 더욱이 똑같은 두려움을 안고 있던 환우들도 나와 비슷한 체험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만나고 서로를 격려하다보니 어느덧 마음은 기쁨으로 환해졌다. 벗들은 의연했다. 너무도 의적하게 잘 준비하고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 벗들은 한 사람씩 차례로 내 마음에 들어와 하나가 되었다.

 

모두가 예기치 않게 찾아온 상황이었다. 난 어떤 것도 계획하거나 맘대로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나는 내 자신이 가장 낮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교우들의 친절과 기도와 헌신이 낮은 데로 흘러와서 나를 이루는 생명이 되었다. 매순간 그것을 경험하고 목격했다. 모든 것이 와서 내가 되었기에 나는 모든 것이 되었다.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주어진 모든 상황이 내가 살아야 할 삶의 현실이다. 사람은 한 번에 숨을 한 번밖에 쉴 수 없다. 어제 쉰 숨은 기억이고 내일 쉬 숨은 추론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생애는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전부다. 나의 삶는 순간순간만 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성령을 통한 회개의 은총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침 성무일도시 마음에 새롭게 와닿은 성구입니다.

“생명과 죽을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명부에 내려 보내고 올라오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도다.”

“빈궁과 부요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주님은 낮추시고 또 높이 올리시는도다.”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 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

 

바로 이런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진리의 영, 성령의 은총 덕분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진리이신 주님을 깨달아 알아감으로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점차 자유로워지는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하여 우리 삶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하여 복자의 반열에 오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주님을 위해, 진리를 위해 몸바친 124위 순교 복자들을 위한 기념 미사를 봉헌합니다.

 

요한복음 중 진리를 위해 몸바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주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예수님 역시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중 다음 빌라도와의 대화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 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진리가 무엇이오?”-

 

진리이신 주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 무지의 사람, 빌라도입니다. 참으로 진리를 알 수 있는 길은 성령의 은총뿐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도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는 데 진리의 영, 보호자 성령께 마음을 여는 겸손의 개방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진리의 사람’, 바오로의 아테네에서의 선교가 인상적입니다. 바오로의 설교중 이교도들에게 한 가장 전형적인 설교입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 아는 것이 병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바로 안다 하면서 실상 참 진리를 모르는 아테네 식자들을 지칭합니다. 이들을 향한 바오로의 설교중 일부를 인용입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도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 역시 성령의 은총입니다. 회개를 통해 무지에서 벗어나 참 진리이신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의 영을 통해 파스카의 주님을 만날 때 겸손과 지혜의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바오로의 아테네 선교는 별 성과없이 끝난 듯 보입니다.

 

바오로가 다시 아테네를 방문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참으로 안다하는 사람들, 세상의 학문과 철학으로 무장되어 있는 이들, 실상은 무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습니다. 아무리 세상 학문에 정통하다 해도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른다면 헛공부이고 결국은 무지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아테네 시민들 대부분이 그러합니다.

 

회개의 은총이 참으로 필요한 아테네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진짜 공부는 채우고 채워 교만해지는 공부가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날로 비우고 비워 겸손해지는 공부가 참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평생공부에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절대적입니다. 아테네 선교 후 코린토로 선교 현장을 옮긴 바오로요, 다음 코린토 1서 말씀에서 바오로의 아테네 체험이 반영되고 있음을 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참 표징이자 참 지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그리스도 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의 원천인 파스카의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바로 진리의 영,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뿐이요, 진리의 영이 우리를 끊임없는 회개에로 이끌어 주고 주님을 닮은 겸손과 온유, 지혜와 자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줍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날로 당신을 닮은 진리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5/29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시카고에서 공부할 때 이라크에서 박해를 받다가 온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신부님의 박해 현장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디다. ‘저분이 공부를 마치고 다시 그 박해의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으실까?’ 그 누구도 그 신부님께 박해의 현장으로 돌아가시라고 요구할 수 없고, 또 안 가신다고 해도 누가 뭐랄 수도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을 전파하는 데에서 오는 박해와 난관을 이야기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오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를 기리는 날입니다. 냉담자 수가 나날이 늘어나고 주일미사 참례자가 교적대비 15% 수준으로 떨어져가면서, 마치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은 우리 교회를 성령의 불길로 훨훨 타오르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요한복음 대목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성삼위 하느님께서 드러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성령과 당신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시지요.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요한 16,13). 말씀을 공유한다는 건 당신과 성령께서 마음과 뜻으로 일치하신다는 것이지요. 의지와 생각과 지향이 온전히 하나로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씀같지 않나요?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9-50) 예수님께서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 이미 비슷한 표현을 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의지와 생각과 지향을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전하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듯이, 성령 또한 예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심으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성삼위 하느님은 이렇듯 한 뜻을 지니시고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의 아테네 선교를 다룹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부정하기 보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사도 17,23) 유일신이신 하느님이라고 소개하는데, 그가 전하는 분이 곧 성삼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도 17,25) 그는 성부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라고 밝힙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를 주시고, 살아 움직이도록 숨도 불어넣어 주시고, 또 생명을 지탱하고 관계를 꾸려가는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을 받아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얻었고, 성령의 도움으로 나날이 새롭게 거듭납니다. 숨 쉬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성삼위 하느님 안에 있으며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사도 17,27)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육화를 통해, 그리고 성령의 현존을 통해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우리 밖에 우리 곁에 온통 우리를 감싸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분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그분의 현존을 벗어나는 곳이란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 분명 "영원히"라고 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묶여 사는 우리에게 "영원"을 보장하시고 보증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신비를 믿는 우리에겐 두려움이나 의혹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은 그렇게 온 세상에 가득한 성령을, 그 기운을, 그 사랑을 호흡하며 성삼위 하느님 품에 잠겨듭시다. 그분께서는 나의 온 세포 구석구석을 채우고 계시고, 누추한 마음에도 충만히 머물러 계시고, 숨 한 모금에도 깃들어 계십니다. 그분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계시고, 또 나를 온통 둘러싸고 계시니 그분이 곧 나이고, 내가 또한 그분입니다. 나는 그분과, 성삼위 하느님과 하나입니다. 이런 축복이 또 어디 있을까요? 

 

 

 

모르기에 믿는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는 협동조합을 돕겠다는 단체가 있어서 명동성당에 갔는데 가는 길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불신지옥 예수천국’을 외치는 사람들인데 듣는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고 나는 나의 선교나 해야겠다는 자들이지요.

전에 언젠가 길을 가는데 웬 할머니가 얼마나 힘이 좋은지 ‘불신지옥 예수천국‘을 지치지도 않고 소리 지르며 가니 지나가던 어떤 남자가 시끄럽다고 하였는데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그 남자에게 ‘너도 지옥’ 이러고 계속 외치며 가는 거였습니다.

이것이 선교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선교를 했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입니까?

 

어제 더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그런 사람이 여럿이었다는 점입니다. 옆에 누가 이미 있으면 다른 데 가서 할 것이지 근처에서 똑같은 짓을 하니 좋은 것도 과잉은 안 좋은데 꼴불견의 과잉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드디어 아테네까지 갔고, 돌아다니며 그들의 예배소를 살펴봤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아테네 시내를 죽 둘러봤나봅니다.

아테네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바오로 사도가 어디로 가는 것은 막고, 어디로 가게 해서 거기서 말씀을 선포했다는 그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기에 바오로 사도가 계획이나 준비나 생각 없이 성령이 시키는 대로 다시 말해서 거의 즉흥적으로 성령에 이끌려 선포하는 것 같은데 오늘 얘기를 보면 어떻게 해야 아테네 사람들에게 선포가 먹힐까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종교심이 있다는 것을 칭찬하며 선포를 시작하는데 이 칭찬은 그저 환심을 사기 위해 마음에도 없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믿음이 있음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칭찬꺼리가 됩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신비영역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배움과 올바른 학생은 모르는 부분이 있음을,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모르는 것이 더 많음을 인정할 줄 압니다.

안다고, 다 안다고 하면 더 알려고, 배우려고 하지 않고 주장을 할 것이고, 그래서 그 배움에 확장성이 없고, 일부 아는 걸 가지고 전부라 주장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할 때 그것이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자신을 알라는 것이고 그러니 자신과 모르는 것을 더 알려고 노력하라는 뜻인데 광신적 믿음이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자신을 모르고 잘못 알거나 일부 아는 것을 주장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테네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있음을 인정하기에 신비에 열려있고 그래서 종교심이 있고 그 믿음에 확장성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사도 바오로는 중요한 말을 다음과 같이 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기에 알지 못하는 채 만나고 더듬더듬 체험적으로 알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겸손한 할머니들이 똑똑한 신학자보다 하느님을 더 체험적으로 알고, 광신자들처럼 주장하지 않는 믿음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에게 한 수 배우는 우리라면 우리도 조금 아는 하느님을 주장하지 말 것이고, 모르는 것을 배울 것이며, 조금 안다고 자기주장 하지 말고 모르기에 믿는 하느님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기에 믿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순교자들을 통해

진정 살아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묻게됩니다.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순교의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의 소중한

열매들로

밀알의 죽음을 

깨닫게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밀알의 죽음으로

사랑해야 할 

우리 주님을 

깨닫게됩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알게됩니다.

 

밀알이 죽어야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듯

 

우리자신이 죽어야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쓴 잔을 마셔야

사랑의 참맛에 

진심으로 

감사하게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함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게하여 주십니다.

 

이 땅에서 보여주신

선배님들의 순교는

어리석은 우리를

치유하여주십니다.

 

일상의 사랑이

쌓여 순교가 됨을

믿습니다.

 

살아있는 삶이란

죽음까지 뛰어넘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연구하는 심리학자 조안 다빌라는 이성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내가 나를 알고 나를 좋아한다. 둘째, 내가 상대방을 알고 상대방을 좋아한다. 셋째, 상대방도 나를 알고 나를 좋아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참으로 실천하기 힘든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먼저 자신을 좋아해야 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없어지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싫은 내 모습을 상대방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상대방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좋아하는 감정을 갖기 힘듭니다. 좋아하는 친구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친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좋아하는 감정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상대방도 나를 알고 나를 좋아하게 됩니다.

이러한 대인관계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주님을 좋아할 수 있을까요? 주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주님을 좋아하면서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따라서 내 자신을 먼저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패배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불평과 불만 속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삶이 아닌, 감사와 기쁨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주님도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 안에서 살고 있는 내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 기도, 성경이나 영적독서 등을 통해 주님을 알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보다 더 앞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을 간직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또한 사랑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랑의 힘을 바로 성령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누구도 자신이 받은 것으로 인해 존경받지 않는다. 존경은 자신이 베푼 것에 대한 보답이다(캘빈 쿨리지).

 

낯익은 얼굴

어느 엄격한 교수님께서 학기 마지막 수업에서 자신에게 서명을 받은 학생만 학점을 주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직접 한 명씩 얼굴을 보면서 수업에 충실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것이었지요. 수업에 한 번도 출석한 적이 없는 학생을 본 교수님께서는 “자네는 내가 강의시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라고 말씀하시면서 서명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서명을 받지 못한 이 학생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줄의 맨 뒤에 섰습니다. 그리고 다시 차례가 되었을 때 교수님께서는 “음, 낯익은 얼굴이군. 좋아.”라고 말씀하신 뒤에 서명을 해주셨습니다.

만약에 이 학생이 서명을 받지 못했다고 그냥 돌아갔으면 학점을 받을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다시 줄을 섰기에 교수님의 착각(?)을 일으켜서 학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물건이 가장 많이 팔릴 때는 같은 손님에게 4번 권할 때라고 합니다. 그만큼 안 된다고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 된다고 물러나면 그대로 끝이 나고 말지만, 다시 한 번 힘을 쓰게 되면 가능성과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됩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시 한 번 용기와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와 주님께서도 함께 하십니다.

 

 

 

음식과 음료

      전삼용 요셉 신부님

결혼 20년 만에 30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 부부가 있었습니다. 

워낙 여러 번 이삿짐을 싸 본 경험이 있어서 그 부부는 이번에도 이삿짐센터를 부르지 않고 자신들이 손수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이 갑자기 “내가 도와줄게요. 걱정 말아요. 공짜에요, 공짜.” 라고 하시며 대꾸할 기회도 주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부부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 노인이 자신들을 도와주도록 하였습니다. 

짐을 싸는 도중에 노인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어유, 짐이 많네. ... 뭐 ... 버릴 건 없나요?”

리모컨도 없는 구형 텔레비전, 낡은 선풍기, 그런데도 부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워낙 정이 든 물건들이라 버리기가 아까워서요.”

노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지만, 노인은 끝까지 이삿짐 싸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도 한 푼도 안 받지 않고 웃으며 인사한 뒤 돌아가셨습니다. 

그로부터 보름 뒤 이 부부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복지시설에서 초대장이 날아왔습니다. 

“두 분의 도움으로 저희 복지시설이 온전하게 터를 옮겼습니다. 부디 오셔서...”

그런 곳을 후원한 곳은 없었지만, 또한 앞으로는 좋은 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 초대에 응하기로 하였습니다. 

부부를 맞이해 준 사람은 보름 전 공짜로 이삿짐을 날라준 그 노인이었습니다. 

노인은 부부를 맨 앞자리로 안내한 뒤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분들이 우리 집을 유지하게 해준 진짜 후원자십니다. 그동안 저는 이삿짐을 무료로 운반해 주며 버리는 옷장, 선풍기, 전기밥솥 따위를 모아서 복지관 살림을 꾸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만이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이사를 했습니다.”

객석에서 한 여자가 질문했습니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면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요?”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이 복지시설을 운영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작은 집으로 옮기고 몇몇의 장애인 가족들을 다른 곳으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헌데 이 부부의 이삿짐을 옮길 때, 그리고 돌아오면서 저도 오랜 시간 정이 든 가족들을 버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노인의 이 설명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부부는 그날로 복지관의 진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1, 진정한 후원자]

 

제가 성경을 공부할 때, 어떤 분이 이렇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성경 잘못 공부하면, 신앙을 잃는다.”

성경을 공부하면 신앙이 증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실제로 성경을 공부해가면서 신앙이 줄어들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그저 공부를 위한 공부가 될 때 그렇게 말씀은 나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고 메말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른 음식만 먹고 사람이 살 수 있을까요?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음료도 마셔야합니다. 그래야 음료가 음식을 소화시키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가끔은 음료를 마실 시간은 안 주면서 음식만 먹고 좋은 결과가 나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공동체 때 하는 복음나누기 7단계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복음말씀에서 자신에게 와 닿는 구절을 찾아내고 3분 정도 묵상한 다음 삶과 연결시켜 나누기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나눔이 진정 가슴을 뜨겁게 하는 나눔이 되려면 적어도 성체 앞에서 1시간은 깊이 묵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어느 정도 선지식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가능하면 일주일 전 것을 미리 읽고 일주일 동안 묵상하며 산 다음에 나누기를 하기를 권합니다. 

어떻게 3분 안에 그 말씀이 내 안에 녹아들어 내 삶을 비추어줄 등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위의 이야기에서 노인의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이들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면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그들과는 달랐습니다. 

부부가 물건을 버리지 않는 모습에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겨있는 뜻을 해석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음식입니다. 

그러나 그 음식이 소화되기 위해서는 물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합니다.

물은 성령님입니다. 

성령의 빛이 없이는 어떤 말씀도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빛으로 소화되고 나의 살과 피가 될 시간도 충분히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음식을 먹을 때도 물과 소화가 될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하는데, 어떻게 말씀을 소화시켜 나의 것으로 만드는 데는 3분밖에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게 되면 깊은 나눔이 아닌 반복되는 일상의 이야기만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감동이 없고 변화와 기쁨이 없기 때문에 소공동체 모임에서 말씀나누기를 통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런 나눔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에 잘 안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음식이 소화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함께 오셔야만 말씀이 참으로 소화되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매일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저도 3분 묵상해서는 잡념에서만 헤매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도 다만 성경 한 구절이라도 나의 것으로 삼고 내 살과 피가 되기를 원한다면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실 수 있도록 먼저 내 자신을 정화하고,

또 그분이 내 안에서 활동하실 시간과 그 말씀이 나의 것으로 소화될 시간을 충분히 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예전에 제가 용문 청소년 수련장 원장으로 있을 때 수련장에 찾아오는 아이들이 더 많이 자연과 공감하고 살아있는 동, 식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꽃과 나무들도 많이 심었지만 동물장과 제법 큰 수족관을 수련장 내에 설치를 하였습니다. 그 중에 테라쿠아라고 이름이 되어있는 수족관 방에는 어항들이 종류별로 있어서 용문의 민물고기와 열대어 등등 각종 물고기를 전시를 하고 아이들이 물고기의 생태를 배울 수 있도록 만들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관리를 하면서 가만히 보니까 물고기 마다 저마다 살아가는 환경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고기는 알카리성 물에서 잘 성장하고 또 어떤 물고기는 산성물에서 잘 성장합니다. 그리고 어떤 물고기는 수초가 많은 곳에서 잘 살고 어떤 물고기는 돌들이 많은 곳에서 잘 삽니다. 결국 그것들이 저마다 노는 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곧 물의 성질을 잘 알아야 물고기들을 잘 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고기가 노는 물이 달라야 하듯이 언제나 주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영, 곧 성령 안에서 성장해 나갈 수 있어야 우리는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으로 오염된 물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점점 우리의 영혼은 힘을 잃어버리고 어둠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진리 중의 진리, 불변의 진리, 궁극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끔씩 우리는 거짓 보도, 허위 사실, 헛소문을 접합니다 때로 유명인사들의 거취에 대한 허위사실들이 sns를 타고 순식간에 유포되어 입장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저도 언젠가 한 신자로부터 어떤 신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럴리가 없는 데’하며, 즉시 전화를 걸어 직접 확인까지 해본적이 있습니다. 

 

껄껄 웃으시며 '이미 부활해서 삼시새끼 밥 잘 드시고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큰 혼란으로 몰고가는 거짓, 허위, 헛소문들들이 날개를 달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때로 이런 그릇된 정보가 부당한 공권력을 등에 업고, 진실인양 공공연하게 유포되기도 합니다. 분명 거짓인데 그럴싸하게 포장되고 편집되어 일반화된 것을, 비판력을 상실한 관용 매체를 타고 진실인양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구체적인 사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보도들이었습니다. 신군부와 관변 언론들은 이를‘광주소요사태’, ‘광주사태’, ‘폭동’ 등으로 왜곡 보도했습니다. 국민들이 믿고 구독하던 국내 유수 일간지들조차 선량한 시민들을 폭도로 내몰았습니다. 

 

무고한 시민 학살의 당사자는 아직도 그 잘난 회고록에서 ‘본인은 죄가 없다.’ ‘게엄군 헬기 사격은 거짓이다.’라며 선량한 국민들과 광주시민들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는 세상만사, 다양한 사건사고 들 앞에서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파악할수 있는 정확한 식별력과 정보력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보면 분명 거짓이요 악인데, 사탄의 우두머리인데, 그럴싸하게 스스로를 포장해서 진리처럼, 예언자처럼 행세합니다. 아직도 두꺼운 가면을 쓰고 다니며 선량한 사람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그릇된 지도자들과 사이비 교주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근원적, 태생적으로 나약한 우리 인간들입니다. 거짓과 헛소문 앞에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존재가 한분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13절)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진리, 진리 중의 진리, 궁극의 진리, 불변의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자체이시며,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애 전체이며, 그분께서 선포하신 복음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그릇된 오류에 빠지지 않길 기도합니다. 그들이 불변의 진리이자 영원한 진리인 정통 가톨릭 신앙에 맛을 들여, 사이비들이 미끼처럼 건네는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도록 신앙의 깊이를 더해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또 다시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선물로 주신 은혜로운 이 아침, 다 함께 다시 한번 진리이신 예수님을 향한 멀고도 먼 신앙의 길, 구도의 길, 생명의 길을 힘차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른들에게 ‘밀가루 신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교회는 구호품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구호품을 받기 위해서 교회를 찾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된 분들을 밀가루 신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밀가루 신자는 아니지만 교회는 사회복지 시설을 많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사회복지 시설의 운영을 교회에 위탁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당을 다니고 싶어서 교리를 물어보면 친절하게 알려주는 분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자매님은 복음화 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전화를 해서 수강 신청을 하였습니다. 복음화 학교를 다니면서 자매님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매일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면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10명을 신앙으로 인도했고, 냉담하는 분들이 다시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소극적이었던 자매님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준 것은 복음화 학교의 가르침이었다고 합니다.

 

명동 거리에 늘 어김없이 함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예수를 믿으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때로 그분들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지만 그 방법은 조금 아닌 것 같습니다. 핸드폰은 삼성, 엘지, 애플에서 만든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핸드폰의 장점을 이야기하면 족하지, 다른 회사의 핸드폰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소비자들에게 좋은 느낌을 줄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회사의 핸드폰을 선택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면 그것은 공갈과 협박의 수준입니다.

 

시골의 공소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저와 함께 간 신자분들과 공소의 신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미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전주 교구의 신부님과 수녀님들께서도 오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알지 못하지만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금세 가족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참 넓고도 좁은 것이, 전주 교구의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또 제가 아는 분들과도 친분이 있으셨습니다. 세상은 5사람만 통하면 모든 사람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실감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몇몇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만나면, 우리는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환한 미소는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기다리면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이 함께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가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에게 차선을 양보하면 그 사람은 지금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진리의 영, -성령이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에서의 선교후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고 언급합니다. 바로 아테네에서의 선교의 실패를 반영합니다. 아테네인들은 바오로의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하고 말합니다. 하여 바오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고 바오로의 마음은 한없이 썰렁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반응이 코린토 1서에서 잘 드러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1,22-23).

 

바로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어리석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바오로의 아테네에서는 그대로 인간의 종교심에 호소한 내용들로 가톨릭 교리서에서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가톨릭 교리서 제1장의 주제는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인간’입니다. 이어지는 27항에서 29항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인간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그들의 신앙과 종교적 행위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찾는 길을 표현해 왔다. 비록 모호한 점들을 내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매우 보편적인 것들이므로 인간을 종교적인 존재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을 종종 망각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명백하게 거부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태도들은 매우 다양한 근원에서 비롯될 수 있다.’

 

바로 사도행전의 아테네 사람들은 물론 하느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종교인인 사람들이지만 얼마나 하느님을 찾기가 힘든 ‘죄인들인 인간들’인지 짐작이 갑니다. 하여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 설교중 ‘회개’를 강조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지혜롭다는 아테네 시민들이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막연한 하느님이 답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답입니다. 코린토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심정을 다시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우리의 모두임을 말해 줍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 답입니다.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바로 진리의 영, 성령이 우리를 모든 진리의 원천인 파스카의 예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보호자 성령은 예수님에게 받아 모두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복음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도 고맙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성령이 답입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살아있는 기억이시며 우리의 ‘사랑스런 멘토loving mentor’이시며 우리 모두 파스카의 예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성령을 선사하시어 성령과 함께 성령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5. 09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은

그 자체로 슬픔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가면서

할 말을 다하지 못함은

또 하나의 슬픔입니다.

떠나는 이가 할 말을 다하지 못함이

남은 이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면

남은 이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떠나시려고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면서

제자들을 떠나시려고 합니다.

남아야 하는 제자들의 슬픔과

떠나야 하는 예수님의 슬픔이

너무나도 서럽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면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당신 떠난 후 빈자리를

든든하게 메워주실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떠나신 당신을 생생하게 드러내실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당신의 진리를 밝혀주실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떠나셔야만 하시는 예수님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아야만 하는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과 떨어져 가슴 졸이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뵙고자 갈망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살려는 이들에게

성령께서는 가장 든든한 동반자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예수님과 하나이신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성령의 강렬한 이끄심에 힘입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오늘도 힘차게 따라 나섭니다.

 

 

 

성령을 기다리는 사람 <요한 16, 12-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무엇이든 필요한 사람은 기차역에서나 병원에서나 기다리며 이름난 식당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차례가 옵니다. 주님은 무엇을 다 가르치려고 오시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할 일이 많으셔서 할 말을 다 못하시고 오시는 성령께 진리를 알고 실천하도록 알려주셨으며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깊이 넓게 포괄적으로 알려면 아버지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아버지의 것을 알고 계시는 성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잘 몰라서 승천하신 후에도 두려워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골방에 숨어 있었지만 바람과 불 혀 모양으로 강림하신 성령을 받고서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고 밖으로 나가 자신들이 보고 들은 바를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 세미나에 가면 처음부터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기도와 말씀에 대한 묵상과 봉사자들의 지도로 어느 시간 “나 성령 받았네” 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성령과의 일치를 표현합니다.

성령은 말씀을 전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을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큰 사랑이 없다.” 하신 말씀을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실천하도록 주님의 길로, 주님의 선하심으로 주님의 아름다움을 이끌어주십니다. 하느님을 대면하는 삶을 살면서 40년 동안 사목 일선에서 교회의 전통을 익히고, 알려주고, 따르게 하였지만, 감동이 있는 신앙생활을 바로 전달 못 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바른 기도의 삶을 또한 하느님을 앞에 모시고 어린아이가 부모님 앞에 춤추고 노래하며 기쁨과 평화를 감추지 못한 것과 같은 생활로 이끌어 줍니다.

믿는 모든 사람이 성령에 도취하여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일치와 사랑을 받고 전하며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16,12-15(부활 6주 수)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강생 때인데,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표현됩니다.

<둘째 시기>는 세례 때인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마르, 1,10). “그 뒤에 바로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마르 10,12)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셋째 시기>는 부활과 승천하실 때인데,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겠다.”(루카 24,49)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 다음 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활동하실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요한 16,13)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안내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의 이끄심이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도, 진리를 행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라고 하심은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우리 역시 성령의 일치 안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1요한 2,20).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7)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는 우선적으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귀고 아빠스는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성령을 청하라. 그러면 빛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성령의 도유, 곧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독서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성령으로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에 대해서, 성 보나벤뚜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유 없는 독서는 쓸데없다. ~성령의 도유야말로 구원을 촉진시키는 모든 것을 가르친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의 해석자이시고 동반자이심을 말해줍니다. 말씀의 뜻이 진리의 영으로 하여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곧 성령의 도움으로 말씀을 깨달아, 말씀이신 분과 친교를 이루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한 말을 기억해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멘.

 

 

 

남녀탐구생활과 신앙의 권태기

     전삼용 요셉 신부님

TvN의 ‘롤러코스트 2 - 남녀탐구생활’에선 권태기를 느꼈을 때 남자가 보이는 7가지 행동을 재연하였습니다.

만약 우리도 전에는 신앙에 열심히 하였다가 지금은 어떤지 이것과 비교하여 자가 테스트를 한 번 해 보심이 어떨까요?

 

첫째,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예전에는 잘 보이려고 어울리지도 않게 무스를 바르고 키높이 깔창을 넣는 등 무한 신경을 쓰던 남친이 눈곱 낀 얼굴에 무릎이 튀어나온 추리닝을 입고 나온다면 권태기의 징조다.

혹시 우리는 성당에 나올 때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나옵니까?

아니면 영적으로 죄가 있어 영혼이 더러워져 있음에도 고해성사도 없이 그냥 성체를 영하거나 앉아 있다가 그냥 돌아가지는 않습니까?

 

둘째, 스킨십이 줄어든다.

길에서 손을 잡으면 사람들이 본다고 빼고 팔짱을 끼면 땀난다고 피하거나 또 그렇게나 집착하던 뽀뽀마저 무관심해졌다면 이 역시 의심할 필요가 있다.

전에는 평일미사도 나와 성체를 영하다가 지금은 주일만 간신히 지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에는 십자가를 보며 “예수님, 사랑해요!”라는 말을 자주 했지만

혹시 근래에 그런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지는 않습니까?

 

셋째, 싸워도 먼저 사과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내가 실수를 했을 때도 “오빠가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소홀해서 일어난 일이다”

라며 무조건 사과를 하던 남친이 이제는 자기가 술 먹고 전화를 꺼놓고도 “의심 하냐?, 간섭 하냐?”라고 적반하장으로 군다면 여자가 귀찮다졌다는 증거다.

전에는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했고 죄가 있으면 바로 고해를 했지만, 지금은 개인 사정이 약간만 어려워지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는 식으로 하느님께 화가 나 있었던 적은 없습니까?

아니면 죄를 짓고도 ‘판공 때 보면 되지’ 하며 하느님과의 화해를 미루지는 않습니까?

 

넷째, 데이트 비용을 아낀다.

매일 꽃다발에 고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가고 갖고 싶은 선물도 척척 사주며 지갑을 아낌없이 열던 남친이 이제 무엇이든 ‘제일 싼’ 것으로 통일한다면 권태기가 찾아왔다.

십일조는커녕 교무금 책정도 안 하고 있고, 봉헌도 아까워하며 최소한만 하려고 한다면 권태기가 확실합니다.

 

다섯째, 3분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전화하고 충전기를 꽂은 채 밤새 통화하던 남친이 용건 없다고 전화 안하고 여자가 먼저 전화해도 할 말 없다는 듯 한숨만 내쉰다면 여자에게 지루함을 느끼고 있다.

전엔 안 그랬지만, 지금은 성당에 미사 시작한 이후에 들어오고

신부님 퇴장하자마자 나가려고 맨 뒷자리에 앉는다면 100% 권태기입니다.

성당에서 미사 하는 시간 외에 그 분과의 대화시간을 갖지 않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섯째, 친구들 모임에 데려가지 않는다.

예전에는 친구들 만나는 자리에 꾸역꾸역 데리고 가고 내 친구들도 못 만나서 환장하던 남친이 이제는 “남자들만의 모임이다. 넌 모르는 친구다”라고 핑계를 댄다면 지금 여자가 불안해하는 그것이 맞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 하느님이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맞습니다.

 

마지막, 주말에 약속이 생긴다.

남친의 주말계획에 내가 빠져있다면 피할 수도 숨길 수도 없는 권태기가 확실하다.

주일미사까지 나오지 못할 정도로 바빠진다면 자신이 신앙의 권태기라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 이전에 열심히 했던 신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도 못했다면 단 한 번도 뜨거웠던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내주시면 그 분께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에게 다 알려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을 일으키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뜨거움을 스스로 거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 16,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닫힌 문을 열고

진리 안으로

이끌어가시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처럼

성령께서는 진리로

뜨겁게 존재하십니다.

 

우리의 삶이란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성령의

삶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소중한 진리는 언제나

함께하는 기쁨입니다.

 

모든 진리가

되시는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모든 진리로 우리를

이끌어가십니다.

 

모든 진리가

우리들 안에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뛰어난 진리는

없습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시고

알려 주십니다.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럴듯한 가짜

진리에 속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거룩한 진리로

나아가는 진리의

새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진리의 영 안에서

우리자신을 더는

속이지 않길

기도드립니다.

 

흙으로 빚어진

우리가 소중한 것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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