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내 마음이 미어진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1,1.3-4.8ㅁ-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3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8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9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3,8-12.14-19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8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은총을 주시어,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다른 민족들에게 전하고,
9 과거의 모든 시대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이제는 하늘에 있는 권세와 권력들에게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1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12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14 이 때문에,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31-37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르시어, 타오르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으신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빈다(제2독서). 군사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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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예언자는 죄의 늪에 빠진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아기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철없는 이스라엘을 돌보고 가르치며 길러 주시지만 이스라엘은 그 하느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범하지만, 그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에 이스라엘을 늘 용서하신다(제1독서). 에페소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신비로운 계획을 기린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이해를 훌쩍 뛰어넘는다(제2독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신다. 창에 찔려 피와 물을 흘리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지탱해 주던 마지막 피와 물마저 내어 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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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성장을 도와주셨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지파마다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셨다. 그분은 결코 모른 체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연민과 동정으로 계속 다가가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를 선택하신 분은 주님이시다. 복음의 일꾼으로 삼으시고자 택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셨다. 이제 모든 이는 주님의 이끄심으로 굳건한 신앙인이 될 것이다. 바오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군사들은 확인하러 왔다. 하지만 이미 숨지신 것을 알았기에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에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 그러자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것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무서운 하느님을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그들에게 수시로 벌을 내리시고 심판하십니다. 금송아지를 보고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느님이시다.’라고 외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시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도 하십니다(탈출 32,25-29 참조). 또한 그분께서는 광야에서 불평을 늘어놓는 백성에게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게도 만드십니다(민수 21,4-9 참조).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시지만 질투하시는 하느님이기도 하셨습니다(탈출 20,5; 34,14 참조). 그리고 하느님 분노의 절정은 왕국의 멸망으로 구체화됩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분,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구약의 역사 안에서 자비와 분노의 감정을 모두 표현하셨습니다.
그럼 어떤 하느님의 모습이 진짜일까요? 하느님의 진짜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드님을 보내시고, 그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강력한 구원 의지로 당신의 외아드님을 인간의 손에 맡기십니다. 아울러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그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면, 신약에서 분노와 심판은 사랑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절정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그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을 바치시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와 물을 쏟으십니다. 그분의 크신 사랑이, 우리의 언어로 담기에는 너무나도 크신 사랑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전해지는 따뜻한 축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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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사랑, 헤아릴 수 없는 그 사랑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심장’은 인간의 감정과 마음의 변화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쏟으신 예수님의 심장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무한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요한 15,13 참조).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를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교회는 오늘 미사 감사송에서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하고 찬미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은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은총을 말합니다. 그 피는 무한한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에게 주는 생명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적이면서도 무한한 가치와 능력을 지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측은지심을 복음의 여러 대목에서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한 11,35 참조). 온몸이 피땀에 젖으실 정도로 겟세마니에서 근심에 짓눌리셨습니다(루카 22,44 참조).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보시며 우셨습니다(루카 19,41 참조).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사랑, 심연을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을 발견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줄로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예수 성심께 나아가 속죄의 선물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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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인을 만나거든, 내가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 제발 그이에게 말해 주어요”(아가 5,8).
호세아서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아기에게 음식을 떠먹여 주고 아기가 아프면 온통 아기 생각으로 옆에서 애가 타들어 가는 엄마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마음을 전혀 몰라줍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생략되었지만 호세아서에서 우리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구절은 11장 2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모습은 늘 그랬습니다. 아담과 하와부터, 인간은 늘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려 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늘 품어 안으려 하셨고, 사실 매번 안아 주셨습니다. 부모가 자녀와 관계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듯이 하느님도 이 못난 인간들을 결코 버리실 수 없으셔서 그대로 끌어안으시느라고 매번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왜 이렇게 나약해야만 할까요? 왜 거부를 당하고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사랑이어야 할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곧 ‘신비’입니다. 그저, 사랑 때문에 앓고 계신 하느님께는 당신의 그 상처보다 우리에 대한 사랑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쏟으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인간이 입혀 드린 그 어떤 상처보다 큰 하느님의 사랑을 봅니다. 예수 성심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드러냅니다. 오, 거룩한 마음이여!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심오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마태 11,25 참조). 또한 오늘 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3,18-19) 하고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축일의 의미는 주님의 거룩한 마음, 곧 그분께서 몸소 보여 주신 한결같은 사랑과 그 사랑에 바탕을 둔 정의를 실천하며 인간답게 살아가라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믿음을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성심의 사랑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 그 성심의 빛 속에 살아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그분의 성심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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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부모의 고통을 알게 될 때 성숙해집니다. 부모의 아픔을 보고 자란 자식은 쉽게 벗나가지 않습니다. ‘가족애’는 미움과 사랑 때문에 울어 볼 때 싹을 틔웁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모두 어른인 것은 아니지요. 고통의 옷을 입어야 어른이 됩니다. 남을 위해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이라야 어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몸은 어른인데 생각은 ‘어린애’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어려움’을 피해 다녔기 때문입니다. 고뇌가 없으면 성숙도 없고 발전도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어린이의 신앙’으로 남게 됩니다. 작은 고통에도 휘청거리고 기도와 성사 생활에서는 불평을 내세웁니다. 힘들다고 보채고, 주지 않는다고 투정 부리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해야 변화를 만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성심 성월’을 제정했습니다.
주님이신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모욕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무죄하신 분께서 그토록 황당한 일을 당하셨습니다. 억울함의 극치입니다. 그런데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참아 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불평하고 외면하려 들면 더욱 모르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분을 기억하며 ‘나의 십자가’를 끌어안는 날입니다.
강론 원고를 프린트하려는데 인쇄가 되지 않습니다. 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켜보기도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유를 찾다가 너무 간단한 이유를 찾았습니다. 잉크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 간단한 이유부터 점검했어야 했는데, 이 점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프린터나 컴퓨터 본체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원인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알았음에도 인쇄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여분의 잉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필요한 부품도 시간이 지나면 갈아줘야 합니다. 프린터만이 아닙니다. 자동차도 그렇고 그 밖의 많은 가전제품이 그렇습니다. 아~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각자도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단순히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종합검진도 중요합니다). 영적인 점검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면이 황폐해졌는지도 모르고 계속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황폐해질수록 주님과 함께 할 힘이 없어집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즉,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더욱 공경하며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 거룩한 마음은 바로 겸손과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겸손과 사랑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빠짐없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주님의 나라에 초대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주님의 초대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제때 점검하지 못해서 황폐해진 내면으로 주님께 나아갈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이제 버리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 주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 될 때,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인 오늘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사제 성화의 날’을 지냅니다. 사제 생활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을 정한 것입니다.
사제들의 인간적인 부족함을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보셨으면 합니다. 이 사랑을 보게 될 때, 사제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또 사제들도 교우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함께 하는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힘찬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최고의 스승은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 스스로 믿게 하는 자이다(노만 크지슨).
보편성보다는 다양성을….
미 항공우주국에서 우주선에 탈 우주인을 위한 최고의 비행용 시트를 설치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 수천 명의 체형을 연구해서 표준 시트를 만들었습니다. 수천 명의 체형을 연구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우주인에게 최고의 만족도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이 표준 항공 시트에 맞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이라는 말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연만 봐도 다양함이 얼마나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매년 같은 꽃이 피어나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모습으로 피어나는 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습니까?
모두 다 그렇다는 보편성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살아가는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상처입은 치유자이자 부족한 사목자로서, 가슴을 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한없이 부족하고 부끄러운 사제로 살아오면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을 돌아봅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깊은 연민과 측은지심이 들게 하던 꽃잎같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유난히 혹독한 십자가와 깊은 상처로 힘겹게 살아가던 형제자매들의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좀 더 따뜻하고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것, 좀 더 격려하고 좀 더 위로해주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인생 자체가 고역이요 슬픔인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견뎌내는 그들을 바라보면, 한없이 부족한 저지만, 제 마음 역시 깊은 슬픔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합니다. 그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되는 ‘상황전이’ 현상으로 제 마음도 괴롭습니다.
한낱 인간의 마음도 이럴진데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랜 세월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하느님의 마음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요? 그분의 마음은 한 인간 존재의 고통과 슬픔을 못견뎌 하는 마음입니다. 그분의 마음은 그저 우리가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의 죄와 방황과 타락 앞에 탄식하고 눈물 흘리시는 마음입니다.
이런 측은지심과 연민의 하느님,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끔찍이 여기시는 하느님, 우리를 향한 불타는 사랑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랑의 하느님께 깊이 감사하는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그 큰 사랑에 작은 보답이라도 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 앞에, 그리고 양떼들 앞에 그저 송구스럽기만 한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성화의 날입니다. 얼마나 걱정되었으면 따로 ‘사제 성화의 날’까지 제정했을까? 하는 마음에 크게 부끄럽기도 합니다.
오늘 한국 가톨릭 교회의 현실을 진단할 때, 지금 수많은 도전과 기로 앞에 서 있는 우리 교회가 쇄신되고 성장하는가? 아니면 퇴보와 쇠락의 길을 걷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70퍼센트의 답은 사제들에게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 사제들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언제나 자신의 양떼를 위해 기도하고 일하며, 노심초사하고 결국 목숨까지 바치는 노력을 통해, 우리 교회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드라마틱한 나날이 매일 펼쳐지는 세상 안에서 고생하며 살아가시는 평신도들, 그리고 나와 너무나 다른 그, 그리고 공동체와 더불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수도자들의 삶도 힘겹지만, 사제들의 삶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강론대 위에서의 모습과 강론대 밑 내 모습 사이의 큰 괴리감에 늘 괴로워합니다. 사제들 역시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인지라, 때로 작은 파도 앞에서도 무기력하게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는 언제나 주님과 교우들로부터 사랑받는 멋진 사제로 살고 싶은 마음 가득하지만, 막상 구체적인 현실 앞에 서면 예의 바르고 균형잡힌 사제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본인도 이해하기 힘든 부끄러운 모습으로 전락합니다.
언제나 내 안에는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그 나를 통제하고 다스려가며 살아가기가 얼마나 버거운지 모릅니다. 사제 역시 교회 안에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한 가엾는 죄인이요 상처투성이의 어린이지만, 그 상처를 꼭 부여안고, 오늘도 상처입은 치유자이자 부족한 사목자로서, 가슴을 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성심께서 당신의 한없이 너그럽고 뜨거운 사랑으로 매일 사제들을 따뜻히 품어 안아주시고,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예수님 마음 : 다 주고도 미안한 마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기도 하고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왔다는 내용입니다. 피와 물은 성사를 상징합니다. 아담의 갈비뼈와도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듯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피와 물로 자녀인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나온 피와 물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부모님의 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튜브 동영상 ‘하늘 같은 든든함, 아버지’를 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아버지들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어린 자녀들을 둔 아버지들에게 자녀에 대해 질문하는 설문지를 작성하게 합니다.
자녀의 사진은 얼마나 가지고 있고 자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몇 번이나 하고, 자는 모습을 지켜본 적은 있느냐는 등의 질문입니다.
아버지들은 입에 미소를 머금고 설문지에 답합니다. 그러다 질문이 이젠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는 것으로 바뀝니다. 같은 질문인데 자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너무 무심했다는 미안함에 사로잡힙니다.
이때 미리 녹화해 놓았던 그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아버지들은 하나같이 말씀하십니다.
“항상 미안하죠. 항상 미안해요. 잘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그게 부모 마음 아닐까요?”
“너에게 해 준 게 얼만데!”라는 마음은 분명 참사랑에서 나온 내어줌이 아닌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입니다.
미안해하는 부모님에게 관심을 두지 못했던 것에 대한 또 미안함을 느끼는 자녀.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과 교회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다 주면서도 미안해할까요? 그 이유는 그들도 당신들의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받지 못한다면 내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도 많이 받은 것에 대해 덜 내어준 것 같아서 미안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님 마음, 예수님 마음은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께 감사할 수 있을 때 예수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거저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예수님 마음을 닮은 사제,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OBS TV’의 ‘멜로다큐 가족’, ‘미안하다, 보고 싶구나’에서 한 아버지가 나옵니다.
딸 둘과 늦둥이 쌍둥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만 한 아들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는 조그마한 카센터를 운영하는데 출근 전 새벽 4시에 일어나 평택에서 매일 새벽 충주에 있는 아들의 산소에 음식을 싸서 옵니다. 음식을 차려놓고 “그때 잘 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라며 웁니다. 그러며 그는 말합니다.
“아들 묘가 없었다면 못 살았을 겁니다.”
남은 한 명의 아들은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숨었다고 합니다. 워낙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무서웠던 아버지가 사실은 다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런 사랑 가득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왜 그리 아들에게 다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할까요? 아마 잘은 모르지만, 본인도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그의 부모로부터 받았던 것에 비해 자신은 덜 주고 있다는 죄송함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사제로서 예수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도 너희를 굶긴 적은 없었다.”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다면 이 말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김치도 없이 맨밥을 물 말아 먹은 적도 있고 며칠 동안 계속 라면만 먹어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우리 앞에서 하실 수 있는 유일하게 마음이 편한 말씀이신 것이고 평생 이것을 위해 살아오셨음을 느끼게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언제나 미안해하시기도 합니다.
만약 제가 매일 강론을 쓰며 신자들에게 양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저는 자녀를 잃어 더는 무언가 줄 수 없는 위 아버지처럼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플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그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매일 강론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적어도 어머니께서 하신 이 말은 하고 싶습니다. 그런 말도 할 수 없다면 매우 후회될 것입니다.
전에 ‘판타스틱 듀오 2’에서 가수 ‘바다’ 씨는 인순이 씨와 함께 아버지에 관한 노래를 부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두 가톨릭 신자입니다.
특별히 바다 씨는 S.E.S.로 데뷔해서도 1년은 추워도 찬물로만 샤워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힘들게 키운 부모님께 대한 죄송함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해야 했던 아버지, 학비가 없어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던 어머니가 아직도 찬물로 샤워하는데 자신만 따듯한 물로 샤워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 따듯한 물이 나오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리고서야 자신도 따듯한 물로 샤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받은 것만큼 다 주지 않으면 편안할 수 없는 마음, 사랑을 받은 사람의 마음은 이런 것 같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만큼 내가 내어주지 못하면 후회막급일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으로부터 아드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들이야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을 이웃에게 내어주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도 그래도 받은 것에 비해 너무 조금 내어놓은 것에 대한 미안함. 이것이 예수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날입니다. 교구에서는 ‘사제성화의 날’이면 사제들이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피정 중에 강의를 듣고, 함께 기도하고,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교구장님과 함께 미사로 피정을 마쳤습니다. 20년 전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저에게 ‘사목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발표하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본당신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선배 신부님의 권유를 받아들였고, 제가 생각하는 사목에 대해서 발표하였습니다. 오늘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면서 20년 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사목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산보를 하고 있지만 20년 전에도 산보는 제게 유일한 운동이었습니다. 산보 중에 있었던 기억입니다. 점심을 먹고 산보를 가려고 사제관을 나서는데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잔뜩 흐렸습니다.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서는데 초등학교 2학년인 진성이가 성당으로 왔습니다. 진성이는 성당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어린이인데 달리기를 아주 잘합니다. "진성아! 산보갈래!"하니까 진성이는 가방을 교육관에 벗어놓고 곧 저를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큰 찻길을 건너, 비가 온 뒤에 물이 많아진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을 지나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장날이 아니라서 시장은 한산했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는 진성이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다시 큰길을 건너 진성이가 다니는 학교엘 갔습니다. 진성이가 우산을 교실에 놓고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개울을 건너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놀다가, 성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평소보다 길게 산보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진성이가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산보는 어디에 있어요?" 저는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다시 산보를 가자는 말인가! 진성이는 "산보"라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 줄 알았나 봅니다. 문득, 하느님 앞에 저 자신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진성이처럼 하느님은 어디계시냐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고,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고,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목이라는 것도, 어쩌면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미 사제가 되었으면 어떤 사목자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 어떻게 살아야 참된 사목자가 될 수 있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꼭 많은 이야길 해야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꼭 먼가를 가르쳐야만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실천하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둘째, 사목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들어서 죄인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규정을 따져서 죄를 범한 여인을 돌로 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라고 하셨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잘못을 비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도록,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과 심판은 하느님의 몫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가라지의 삶이었을지라도 밀이 되는 것입니다.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은 밀의 삶을 살았을지라도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은 밀과 가라지의 경계가 없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옳고 그름을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목이란 용서와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셋째, 사목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분들과 인사도 나누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는데 건회와 진성이가 성당 문으로 뛰어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왜 뛰어올까 생각하면서 물어 보았습니다. 두 친구는 집에서 성당까지 뛰어왔답니다. 두 아이의 집은 장현리이고, 장현리는 차로도 15분은 가야되는 거리입니다. 아이들은 성당 버스를 놓쳤고, 그래서 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3시간 30분을 뛰어서 성당에 도착한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찡해집니다. 뛰다 넘어지고, 그리고 또 뛰고 그렇게 성당엘 온 아이들을 생각하니, 조금만 불편해도 짜증을 내는 저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졌습니다. 건회는 현지라는 동생이 있고, 진성이는 민정이라는 누나가 있습니다. 현지와 민정이는 뛸 수가 없어서 장현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건회와 진성이와 성당차로 장현리 건회의 집으로 갔습니다. 두 아이들을 이 저를 보고 너무 반가워합니다. 우리는 함께 성당으로 왔고, 아이들은 2시 30분 군종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에, 두 아이가 그렇게 저에게 감동을 줍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에, 두 아이가 성지 주일의 참 의미를 알려줍니다.
어느덧 주님께 모욕을 주고, 어느덧 주님을 모른 체하고, 어느덧,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목이란 한 번에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사목이란 논에 모를 심는 것과 같이 모를 심었다고 농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 그리고 반성을 통해서 결실을 맺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의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우리도 또한 본받고자 기도하는 날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성심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길 바라며 함께 기도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옆구리가 창에 찔리면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대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예수님의 지극하신 사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숨을 거두신 마지막 순간까지도 지극하신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또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영화에서 본 장면 중에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병사에게 예수님의 피와 물이 쏟아졌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피와 물이 그 병사에게 쏟아지면서 그 병사는 어쩌면 제일 먼저 주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게 당신을 죽인 죄인들까지도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구원으로 이끌어주시는 지극하신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사랑을 생각할 때 서로 좋아하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눔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나를 좋아하고, 나에게 잘해주고, 또 내가 좋아하는 대상과의 나눔과 거래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을 하느님 안에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예수 성심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성심대축일, 우리가 진정 주님의 거룩한 사랑을 배우고 함께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또한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 저를 비롯한 우리의 모든 사제들이 예수님의 성심을 따르며 참된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마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있어
마음도 있지만
마음이 있는 대로
나는 있지요
내 안에
마음이 있지만
마음이
나를 이루지요
나를 통해야
마음은 보이지만
마음을 헤아려야
나는 참으로 살지요
예수성심대축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 마음 하느님 마음
하느님 마음은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내 안에서
깊이가 생겨나면 나는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이웃의 아픔을 본다.
인간 예수님은 하느님 마음 바라보고
그 마음으로 인간을 본다.
아픔의 인간 위해 대신하여 죽으시고 죽은 인간을 생명되게 하신다.
예수님의 전 생애에서 자비를 보았다.
내 마음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은 내 마음
예수님과 깊이가 생겨나면 하느님 보고 나는 이웃의 아픔을 본다.
오늘도 많은 이들의 아픈 마음을 본다.
5층 건물 철거하다 지나는 버스를 덮쳤다는 뉴스가 있다. 인재로 참사는 계속된다. 사람이 속된 마음으로 무자비하게 살아가는 단적인 모습이다.
우리들 마음은 속된 마음이 되었다.
아픔의 사람들이 말했다. ‘살려 주세요’, ‘기도해 주세요’ 그들 아픔은 내 아픔이 되지 못하고 붕 떠다닌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예수님 마음 하느님 마음
하느님 마음은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이 깊이가 생겨나면 나도 이웃의 아픔을 본다. 무릎꿇고 기도를 한다.
하느님 마음,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은 내 마음
자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야 한다.
가톨릭 평화신문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사제의 모습’이 사진으로 실렸다.
‘사제성화의 날’에 무릎에 뚝살이 생겨나도록 아픈 사람을 기억하고 자비를 살아야 한다는 글이 마음에 찔린다.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호세아 예언자는 이집트에서부터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시작부터 여러 세대의 임금들이 치세하는 동안 한 예언자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드라마적인 모습으로 이행합니다.
“유다 임금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그리고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호세 1,1)
하느님께서 불충한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기 위해 예언자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가서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 이 나라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마구 창녀 짓을 하기 때문이다.”(2절)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고메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이즈르엘이라는 아들과 로 루하마 라는 딸과 다시 로 암미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성실에서 돌아서고 변절한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미어지는 심정을 예언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호세 11,1.3)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에프라임을 잊지 못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서간을 통하여 주님 공동체의 교우들이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 되기를 빕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각을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를 사도는 또한 비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에페 3,1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이 금요일이었는데, 그날 해가 떨어지면서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까봐 마음이 급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시신을 치우게 해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습니다. 죽음을 확인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에 처형된 두 죄수에게 와서 그들의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그런데 병사가 예수님께 와서 보니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알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그러자 그분의 상처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성서 저자는 그 광경을 전하며 문득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경(탈출 12,46; 민수 9,12) 구절을 떠올립니다.
파스카 제물의 고기도 먹을 때 ‘뼈를 부러뜨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빠스카 제물의 동물은 이스라엘 백성이 맏배를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에 식구들이 먹을 만한 규모의 짐승, 염소나 양을 파스카 제물로 잡는데, 우슬초 한 묶음을 가져다가 대야에 받아 놓은 피에 담갔다가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라고 모세는 이릅니다. 주님께서 이집트 인들을 치러가시다가 문설주와 상인방에 피가 묻혀 있으면 이스라엘의 그 집은 지나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죄 없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그 상처에서 피와 물을 나온 것입니다. 그 피로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고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을 향해 비웃고 침을 뱉는 사람, 못을 박는 사람을 위해서 아버지께 청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십자가 위해서 고통의 순간들을 넘기며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46절)라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십니다.
누가 이집트에서 자신의 피를 내어 문설주, 문인방에 발라 이스라엘을 구한 그 빠스카의 양이 몇 천년 후에 십자가 위해서 흘리신 피로 세상의 죄인들을 구할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실지 알았을까요?
유대인들도 깨닫지 못한 이 진리를 주님의 제자들과 후계자들로 이어오는 교회에서 이 신비를 깨닫고 주님의 무한하신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찬미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미사성제 때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만지는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서 오늘 전세계 교회가 기도하며 미사를 봉헌하는 날입니다.
세상이 혼탁하고 때로 어지럽더라도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들이 매일 주님의 몸과 피를 봉헌하며 교우들을 위해 희생 봉사할 수 있도록 모든 사제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제들이 하느님의 명에 따라 순명하며 말씀을 선포한 호세아 예언자처럼,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에페 3,17) 내리도록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취하며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난과 그분의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고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열정의 사제들이 되기를 빌며 오늘 거룩한 예수성심축일을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지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때 병사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을 쏟으셨습니다.
고통이 극심하면 몸에서 피와 물이 섞여서 나옵니다. 극도의 고통을 겪어보신분은 그것을 아실것입니다. 넘 아플때 제 몸에서 피와 물이 섞여나오던때가 기억납니다.
예수님은 극도의 고통속에서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몸과 피로 살리셨습니다.
펠리칸새가 자신의 심장을 쪼아서 자식의 생명을 살리고 죽는것처럼 ...
교회의 사제들이 성화되기를 바라는 날!
특별히 마음 모아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세속의 부패에 물들지 않고 목자로서 양떼를 사랑으로 돌보며 거룩한 생활로 예수성심 닮은 사제되기를 기도합시다!
~^-^ 또한, 오늘 주보축일인 예수성심시녀회 수녀들이 성심의 정배로서 봉헌의 생활을 통해 이 세상에 예수성심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사랑과 헌신을 다하도록 기도해주시길~♡
분노와 연민에 대하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오늘 호세아서는 분노와 연민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 호세아 말씀을 독서로 뽑은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이 호세아서가 얘기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오늘 저는 분노와 연민에 대해 성찰코자 하는데 우리는 보통 언제 분노를 하게 되는지 먼저 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분노라고 하지만 분노는 의노와 분노로 나뉘지요. 주님의 성전 정화의 경우처럼 의노가 불의에 대한 분노라면 분노는 정의에 어긋나기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에 어긋나기에 분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내게 상처를 주거나 내 맘에 들지 않거나 할 때 생기는 자기중심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죄지은 사람에 대한 분노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종종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의 죄를 보고 분노하지 않습니까?
나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죄를 짓건 말건 무관심할 수도 있는 것인데 분노한다는 것은 그래도 관심 있는 표시이니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죄를 보고 분노한다는 것은 실제로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 인류 사랑의 발로, 곧 같은 인간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보편적 인류 사랑의 발로일 겁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죄에 대한 분노는 사랑일 뿐 아니라 인류의 공통적인 적인 죄에 대한 의노일 것입니다. 인류 공동체를 깨는, 특히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를 깨는 죄에 대해 공분하게 되는데 그런 공분과 의노 말입니다.
그러니 이 죄에 대한 공분과 의노에는 내가 빠지지 않습니다. 나도 같은 죄를 지을 수 있고, 짓고 있다는 겸손의 분노여야 하고 그래야 공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는데 너는 왜 그러냐는 식이라면 바리사이처럼 교만하고 위선적인 분노일 뿐이고 공분이 아니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11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죄 외에는 아무것도 못마땅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죄를 짓든 하느님의 종이 이 때문에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한다면, 스스로 과오를 쌓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 말미암아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이 진정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 줍니다."
죄에 대해서는 공분해야 하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연민해야 한다고 하고, 특히 나에 대해 죄를 지었을 때 가슴 아파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지요.
나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나에 대해 겸손하고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너에 대해 관대하다면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이 사랑에서 연민은 나오는 것이며, 사랑이 크면 클수록 연민을 넘어서 가슴이 아플 거이고, 이 사랑보다 더 커지면 예수 성심처럼 가슴이 상처를 입을 것이고 십자가 주님의 가슴에서 피와 물이 나오듯이 피눈물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2021. 6. 11. 금)(요한 19,31-37)
1) ‘예수님의 마음’은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2-13).”
우리는 ‘되찾은 양의 비유’에 나오는 ‘잃은 양’을 ‘그들’이나 ‘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잃은 양’은 ‘그들’이나 ‘그’가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내가 딴 생각을 하거나 한눈을 팔면서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있으면,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보다 세속의 일에 더 정신을 쏟고 있으면, 나는 ‘잃은 양’입니다. 그러다가 회개하고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하면 ‘되찾은 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슬퍼하실 때도 많을 것이고, 나 때문에 기뻐하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지금’ 나는 예수님께 슬픔만 드리고 있는가?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혹시라도 “나는 ‘잃은 양’이었던 적이 없다.” 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을까?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로마 7,18-20).”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ㄱ).”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가 “나는 비참한 인간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큰소리치는 자만심은 아주 위험합니다.
2) ‘예수님의 마음’ 은 자녀들을 끝까지 보호하려고 애쓰고, 자녀들이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져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마태 23,37-39).”
이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오늘날의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에 관한 말씀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언제나 항상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전쟁, 전염병, 대재난 등을 겪어도 회개하지 않고 변화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오늘날의 인간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면서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마음은 곧 어머니의 마음과 같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곧 사랑입니다. 바이러스 사태를 겪으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조금 상황이 호전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거나, 또는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모습들을 자주 봅니다.
그 ‘일상의 소중함’이라는 말에서 예수님의 다음 경고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여기서 예수님께서 묘사하신 사람들의 모습은 죄를 짓는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의 모습입니다.
노아 때의 사람들과 롯 때의 소돔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일상생활에만 몰두하다가 모두 멸망했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일상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지만, 신앙인들은 ‘회개로써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의 마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하는 바로 그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여기서 “그가(작은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라는 말은, 아버지가 날마다 ‘먼 곳’만 바라보면서 작은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작은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말은, 굶주리고 헐벗은 작은 아들의 모습을 가엾게 여겼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죄를 짓고서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린 아들을 불쌍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일이고, 회개하는 것은 그 생명력을 다시 얻어서 되살아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곧 ‘재생’입니다.)
작은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벌인 잔치는(루카 15,24) 굶주리다가 돌아온 작은아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한 잔치이면서 동시에 아버지 자신의 기쁨을 나타내는 잔치입니다.(작은아들이 떠나 있는 동안에, 아마도 아버지는 몹시 슬퍼하면서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큰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데(루카 15,28), 아버지는 “함께 기뻐하자.”고 큰아들을 타이릅니다(루카 15,32).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요한 13,34).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우리가 모두 함께 회개해서, 함께 기뻐하기를 (함께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곡한 호소입니다.
하늘의 힘님을 무시하는 건 그때나 지금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사도요한은 예수님사형직후 상황 보면서 구약예언대로구나 했습니다.
정치인들의 수작에 어이없는 처형을 목격했으니 기가 막혔을 겁니다.
마침 오늘의 성경을 읽게 되는 이 날을 사제성화의 날로 정했습니다.
사도요한은 모두가 읽도록 글로 남겼으며 오늘도 하늘서 함께합니다.
목마르다니 신 포도주를, 숨 거두셨는데도 창으로 심장을 찌르다니요.
세상의 힘이 이렇게 하늘의 힘님을 무시하는 건 그때나 지금 같네요.
하늘 힘이 세상 힘에 가리어 하늘 힘 못 보는 사람들로 득실 거려요.
하늘 힘을 믿는 분들만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 살다 천국영복 갑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는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의 심장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영성체송)
그분이 곧 생명의 물이십니다.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며 사랑과 정의와 진리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우리 인간의 실존을 예수님 친히 겪으셨고 또 친히 살아내셨지요. 우리의 갈증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외치십니다.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복음은 우리를 예수님 죽음의 슬픈 장면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미 숨을 거두신 그분께서 한 번 더 날카로운 창으로 헤집어지는 처참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상처로 벌어진 그분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복음사가가 증언합니다. 세상을 향해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는 주님의 또 다른 입술입니다. 예수님의 실제 입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발설되었다면, 이제 옆구리의 열린 입(상처)에서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발설됩니다. 피와 물은 교회를 지탱하는 성령과 교회의 지향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애끓는 뜨거운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호세 11,4)
사랑의 예언서인 호세아서의 이 대목은 아버지요 신랑이신 주님의 모습을 모성적인 사랑의 행위들로 표현합니다. 창조 때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입맞춤하셨던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에게 마치 어머니가 아기에게 애정을 퍼붓듯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내내 인간을 향해온 그분의 입맞춤은 연민의 사랑이 응축된 그분 심장에서 흘러나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신도들이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깨닫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에페 3,18-19)
세상의 눈에 예수님은 실패자에 불과합니다. 설교와 기적으로 반짝하고 사라진 이상주의자나 망상가로 보일 수도 있지요. 당신 상처로(입으로) 피와 물을 다 쏟아내시어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한 사랑을 깨닫는 은총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예수님의 중심인 심장, 사랑으로 펄펄 끓는 그분 심장을 열렬히 갈망하며 지치지 않고 달아드는 이에게 그분은 당신 상처(입)을 활짝 열어젖히십니다. 그리고 피와 물의 근원인 심장을 드러내 주시지요. 그분 심장에 가닿으려면 그 아프고 슬픈 상처를 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화답송)
그럼에도 우리는 기뻐하며 주님의 심장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은 우리의 의혹과 불안과 두려움의 갈증을 씻어줄 구원의 샘입니다. 예수님 심장인 구원의 샘에는 하느님의 신비의 계획이 감추어져 있습니다.(에페 3,9 참조) 우리는 거기서 그 사랑의 신비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을 기초로 삼아 살아가라고 불리웠습니다.(에페 3,17 참조)
사랑하는 벗님! 십자가에서 당신 존재를 활짝 열어 불결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신 예수님께 다가가 사랑으로 친구합시다. 그분 심장에 머물러 그분께 위로를 드리고, 우리를 향해 펄떡이며 끓어 오르는 열렬하고 애틋한 사랑을 들여마시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시다. 아울러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저를 포함해 모든 사제들이 거룩함의 여정에 지치지 않고 충실하기를 함께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랑의 불가마이신 예수 성심,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생명의 샘
김용태 안드레아 신부님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전, 그날 할 일들을 정리하곤 합니다. 기쁘게 기다려지는 하루가 있는 반면 한숨이 먼저 나오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 날이면 ‘휴~’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무거운 어깨와 찡그린 얼굴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문득 바라본 거울 속 내 얼굴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지금 무슨 마음으로 살고 있는 걸까?’ 자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셨을까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다는 기쁨이었을까요 아니면 소외되고 아픈 이들을 바라보는 슬픔이었까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또 어떠하셨을까요?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리면 슬프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모습이 한없이 따스하게 다가옵니다. 늘 기쁘게 늘 행복하게 지낼 수는 없겠죠.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자 한다면 그 안에서 새로운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상처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물과 피가 흘렀던 예수님의 마음처럼요. 생명이 흘러나오는 마음, 그 마음이 우리 마음이 되길 소망합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호세아는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호세 11,1)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로 안아주실 뿐 아니라 병까지 고쳐주고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내비치십니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호세 11,9)
사도 바오로는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은총을 주시어 하느님 안에 감추어졌던 그 신비의 계획을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에페 3,16-17)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매달리신 이후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돌아가셨으니 유다 인들은 안식에 십자가에 시신이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시신을 치우게 해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군인들이 와서 죽음을 확인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두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와서 보니 이미 숨지신 모습이어서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그러자 피와 물이 흘러나옵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언의 글을 씁니다.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한 19,35)
그리고 요한은 이어서 구약성경에서 “그의 뼈가 부러지지”라는 말씀과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음과 연결하는 것입니다.2)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왔다는 증언과 함께 요한은 그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은 기술을 합니다.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1요한 5,6)
미사 전례 중에 제병을 봉헌하고 성작에 포도주를 붓고 물을 조금 따르면서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하고 속으로 기도하고 두 손으로 성작을 제대 위에 조금 높이 받쳐 듭니다.
예수님 성심 대축일을 지내는 날입니다. 특히 사제들의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여호수아에서 하느님께서 레위지파에게는 가나안 땅의 지분을 주지 않고 하느님의 삶의 전부로 배당하시듯 사제들에게는 어떤 재물도 어떤 가치도 아닌 오로지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로 새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봉헌하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도록 기도합니다. 교회의 사제는 그 옛날 갈릴리 호숫가에서 불림을 받았던 제자들처럼 그 모두를 내려놓고 오로지 주님만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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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전 8세기에 호세아(Hosea, הוֹשֵׁע)는 북부 이스라엘, 예로보암 2세 때에 예언활동을 했다. 아시리아 제국의 위협 앞에 위태로운 이스라엘 왕국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며 하느님과의 화해를 외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북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기원 전 722년에 멸망하고 유다 왕국만 남게 된다.
2) “의인의 불행이 많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그를 구하시리라. 그의 뼈들을 모두 지켜 주시니 그 가운데 하나도 부러지지 않으리라.”(시편 34,20-21) “나는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들 위에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영을 부어 주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고 곡하듯이 그를 위하여 곡하고, 맏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그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다.”(즈카 12,10)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양’의 뼈를 부러뜨리지 않게 했다.(민수 9,12) 바오로는 ‘파스카 양’을 십자가에 희생되신 그리스도로 선포한다.(1코린 5,7) 묵시록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묵시 1,7)
분노와 연민에 대하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오늘 호세아서는 분노와 연민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 호세아 말씀을 독서로 뽑은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이 호세아서가 얘기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오늘 저는 분노와 연민에 대해 성찰코자 하는데 우리는 보통 언제 분노를 하게 되는지 먼저 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분노라고 하지만 분노는 의노와 분노로 나뉘지요. 주님의 성전 정화의 경우처럼 의노가 불의에 대한 분노라면 분노는 정의에 어긋나기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에 어긋나기에 분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내게 상처를 주거나 내 맘에 들지 않거나 할 때 생기는 자기중심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죄지은 사람에 대한 분노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종종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의 죄를 보고 분노하지 않습니까?
나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죄를 짓건 말건 무관심할 수도 있는 것인데 분노한다는 것은 그래도 관심 있는 표시이니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죄를 보고 분노한다는 것은 실제로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 인류 사랑의 발로, 곧 같은 인간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보편적 인류 사랑의 발로일 겁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죄에 대한 분노는 사랑일 뿐 아니라 인류의 공통적인 적인 죄에 대한 의노일 것입니다. 인류 공동체를 깨는, 특히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를 깨는 죄에 대해 공분하게 되는데 그런 공분과 의노 말입니다.
그러니 이 죄에 대한 공분과 의노에는 내가 빠지지 않습니다. 나도 같은 죄를 지을 수 있고, 짓고 있다는 겸손의 분노여야 하고 그래야 공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는데 너는 왜 그러냐는 식이라면 바리사이처럼 교만하고 위선적인 분노일 뿐이고 공분이 아니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11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죄 외에는 아무것도 못마땅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죄를 짓든 하느님의 종이 이 때문에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한다면, 스스로 과오를 쌓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 말미암아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이 진정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 줍니다."
죄에 대해서는 공분해야 하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연민해야 한다고 하고, 특히 나에 대해 죄를 지었을 때 가슴 아파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지요.
나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나에 대해 겸손하고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너에 대해 관대하다면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이 사랑에서 연민은 나오는 것이며, 사랑이 크면 클수록 연민을 넘어서 가슴이 아플 거이고, 이 사랑보다 더 커지면 예수 성심처럼 가슴이 상처를 입을 것이고 십자가 주님의 가슴에서 피와 물이 나오듯이 피눈물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 성심聖心의 사랑, - 하느님 사랑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연은 없습니다. 저에겐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 은총처럼 믿어집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에 앞서 어제 받은 유형 무형의 사랑의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예수 성심 사랑의 선물이라 믿습니다. 수녀원 미사 때 강론 서두의 언급에 수녀님들 모두가 웃었습니다. 저에겐 잊지 못할 웃음의 선물입니다. 두가지 예를 소개했습니다.
-“얼마전 어느 자매님으로부터 ‘어떻게 매일 그렇게 강론을 쓸 수 있겠느냐?’ 묻기에 ‘매일 목숨을 걸고 씁니다’ 답변했습니다.”
“‘절박한 쪽이 이긴다. 삶은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해야 한다’란 글이 생각납니다. 저에겐 매일 강론이 참 절박합니다. 제가 꿈이 거의 없습니다만 가장 많이 꾸는 꿈이 강론 쓰는 꿈입니다. 강론을 다 썼다 기뻐하며 잠을 깨니 꿈이었을 때 얼마나 허망하던지요.”-
이 두 예화에 수녀님들 모두 웃었고 저에게 참 고마운 예수 성심의 선물이었습니다. 어제 오전 수녀원 미사후 귀원하던중 아름다운 장면도 즉시 사진에 담았으니 이 또한 저에겐 예수 성심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 마르코 수사와 박응표 세례자 형제간의 사랑의 우정이, 형제애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다정한 형제같습니다.” 말했더니 박 응표 세례자 요한 형제는 “우리는 형제인걸요.”웃으며 화답했습니다. 두 분은 농민대학에서 만났고 두분 다 농민대학에서의 가장 큰 보람이자 선물은 두분간의 만남이라 주저없이 고백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우정의 선물입니다. 박응표 세례자 요한의 수도원을 위한 사심없는 사랑의 봉사와 선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이런 아가페 사랑의 우정일 것입니다. 예닮의 여정중에 예수성심과의 아름다운 우리의 우정도 날로 깊어지리라 믿습니다. 또 어느 자매로부터 예쁘고 소박한 캘리그래피 선물을 받았고, 다른 자매로부터는 수도원 형제들을 위한 이중날 면도기 100개도 선물받았으니 저에겐 이 모두가 예수성심 사랑의 선물처럼 믿어졌습니다. 이렇듯 예수성심의 사랑은 곳곳에서 아름다운 우정의 꽃과 열매로 드러남을 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한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더불어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제들이 성화은총으로 예수성심을 닮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동안 지냈던 모든 대축일이 요약되는 예수성심대축일입니다. 특히 지난 주일의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혈 대축일과는 분리할 수 없는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오늘 예수성심대축일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활짝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마침 수도원을 아끼고 사랑하는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들도 생각나며 축복을 비는 마음 가득합니다. 수도원이 곤경중에 있던 시기인 2004년 중반에 시작됐으니 무려 17년 역사가 되었고,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예수성심형제’회도 생각나며 역시 축복을 비는 마음 가득합니다. 코로나로 모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지가 2년째 되니 안타까운 마음입니다만 곧 백신이 완료되면 모임도 재개되리라는 희망을 지닙니다.
참 아름답고 소중한 에수성심신심입니다. 수도원 십자로에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환대하는 분도 예수성심상이며, 가톨릭 성가집에도 12편의 예수성심 성가가 나옵니다. 참으로 신심 깊은 신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예수성심 신심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 사랑의 절정은 교회의 성사입니다. 바로 예수성심은 사랑의 샘, 생명의 샘입니다. 여기서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의 성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표징인 되는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라는 성구에서 예전 교회의 교부들은 예외없이 교회의 성사임을 알아 챘습니다. 피는 성체성사를 물은 세례성사를 뜻함을 알아챘던 것입니다. 여기에 근거한 미사경문중 다음 아름다운 감사송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감사송인지요!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의 바오로 사도의 고백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예수성심 영성의 대가인 바오로 사도의 가슴 벅찬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깊고 은혜롭습니까! 그대로 미사은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바로 예수 성심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의 중심안에 정주의 뿌리가 날로 깊어지면서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된 우리 교회공동체의 모든 형제자매들입니다. 무지와 허무라는 마음의 병의 근원적 처방의 치료도 예수성심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한결같이 충실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서 주제는 ‘배신당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죄짓은 일이라면 하느님 하시는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배신하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 밑빠진 독에 물붓듯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다음 호세아를 통한 하느님의 고백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얼마나 감동적인 지극한 인내의 사랑, 한결같은 사랑, 하느님의 사랑, 예수성심의 사랑인지요!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결코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예수성심의 사랑이자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예수 성심 성월에 끊임없이 피어나는 수도원 경내의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자연이 그대로 우리 위한 예수성심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예수 성심의 사랑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요한7,37-38).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부터 시작하여 점차 퍼지면서 보편화되었습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 성심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우리 본당에서는 교황청에서 2019년부터 하는 것과 같이 예수 성심 대축일 경축 이동을 다음 주일에 다시 한 번 성대하게 봉헌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한 날은 안식일 준비일이었고, 그 이튿날이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숨지셨으므로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심장에서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사도 성 요한은 이 복음서를 읽는 분들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기록대로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라고 전합니다. 추가로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고도 전합니다(요한 19,31-37 참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참사람이셨음을 알려 주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거룩하신 피가 세상의 물과 합쳐졌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는 성체성사를 축성하기 전에, 성작에 포도주를 붓고 이어 물을 섞는 상징적인 예식과도 합치됩니다. 사제는 포도주에 물을 부으며, 속으로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곧 우리를 사랑하셔서 세상을 구하시러 오신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우리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은 우리가 또 하나의 성체가 되어 세상에 나아가 성체성사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게 됩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받아 모셔 거룩해진 우리가 주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따라 실제로 세상에 봉사하면서 더욱 거룩해지고, 또한 우리의 희생과 봉사로 세상도 한층 더 하느님 나라로 변화되어 거룩해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사랑으로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의 약< 요한 19/31-37> 6/1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온 인류의 상처받은 병을 치유하시려 심장에 창에 찔리시어 상처받은 우리 마음을 고처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속담에 “ 열기를 굶어보지 않은 사람과 말하지 말라” 이는 고통을 체험한 사람만이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알아듣는 다는 말입니다. 한미디로 자기가 처한 감사스러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적은 고통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편 불만으로 시간을 낭비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의 깊은 상처는 상처받은 사랑으로 치유합니다. 분명십자가의 싱처는 인류의 모든 병을 치유하는 도구이며 십자가 아니고는 치유가 불가능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성심축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마음이 상처받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함을 깊이 느끼면서 감사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깊은 사랑은 보이는 것인 몸과 피를 다 내어 주시고 마음까지 내어 주심으로 완전한 사랑을 증명하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 함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 하어라. 하십니다.
오늘 사제 성화의 날 많은 이가 기도하시면서 교회 안에 사랑이 태양의 빛과 같이 빛이고 마르지 않은 샘물같이 흐르며 모든 생명이 활기차게 살아가기를 바라며 하루를 지내야 합니다.
사랑과 마음의 상징인 심장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몸 구석구석 발끝 소끝 머리끝 까지 생명의 피를 공급해주고 정화시키며 몸 전체가 살아가도록 역할을 하듯이 우리의 삶도 서로 마음과 마음의 일치 속에 활기찬 생명을 누립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몸소리 치게 되며 정신 까지 전율이 흐르게 됩니다. 어떤 때는 심장을 멈추게도 합니다. 그래서 상처받은 사람 가슴을 탁탁 치며 울부짖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지비로운 아버지 같이 그 많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 사람이 되시어 송곳 보다 날카로운 창으로 찔리고 대포보다 강한 말로 비난 저주 막말 무자비한 말 “ 발랍바 말고 저자를 십자가에 처형하시오 ” “ 십자가에 처형 하시요 ” 그 군중의 소리 비웃은 바리사이 율법학자 로마 병사 죄도의 죄수의 자기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주님을 시험하는 소리 모든 것 감내하시며 피투성이가 된 눈은 죄인이 우리를 바라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지금까지 미사 때 자비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하시는 상처받은 사랑의 마음은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 하십니다.
마침 글을 쓰다가 성가 하나를 선택하어 노래 부르니 “ 예수마음은 겸손하시고 그 마음 묵상하는 저는 열절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과 같게 하소서 하는 성가 199는 내 마음을 깊은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오늘 우리의 참 감사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도록 바라는 마음은 성처 받은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 주님이 사랑으로 마음을 쓰신 것같이 마음 쓰려면 주님의 성심을 각자 마음속 깊이 심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이란, 말 그대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왜 그분의 마음을 두고 '거룩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까지도 거룩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의 마음을 두고 '거룩하다'고 하는지는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2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교회 공동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라고 권고하면서 예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셨는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7)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그래서 하느님과 동등한 신적 권능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누리시는 모든 것은 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라는 점을 항상 잊지 않으셨기에, 하느님을 위해 당신이 받으신 모든 것을, 심지어 당신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드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겸손한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해서 으스대거나 대접받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당신이 사랑하시는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때로는 그들보다 더 낮은 자의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면서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뜻을 따를수만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슬픈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고통의 잔'까지도 기꺼이 드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마음가짐으로 사실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그분의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병사들의 창에 찔려 피와 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슴 속에 얼마나 큰 아픔을 품고 살아오셨는지가 잘 나타납니다. 오늘 예수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내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겸손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당신께 생명의 샘이 있나이다.
성 보나벤투라 주교의 저서에서 (Opusculum 3, Lignum vitae, 29-30. 47)
구원된 사람아. 너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분이 누구이시고 얼마나 위대하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여 보라. 그분의 죽음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분의 돌아가심에 하늘과 땅은 애곡하며 굳은 바위도 산산히 부서지나니.
십자가 위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교회가 생겨나고,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느님의 성의는 한 병사가 창으로 그 거룩한 늑방을 헤쳐 열어 우리 구원의 대가인 피와 물이 흘러 나오도록 했도다. 그분 성심의 은밀한 샘에서 흘러 나온 이 피와 물은 교회의 성사에 은총의 생명을 베풀 힘을 주었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샘물처럼 솟아 올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수가 되었도다.
그리스도의 벗이여, 일어나 “동굴 입구의 벼랑에 둥지를 둔 비둘기처럼 되어라.” “자기 집에 들어 있는 참새처럼” 그 안에 끊임없이 깨어 있고, 정결한 사랑의 비둘기처럼 새끼들을 거기에 숨기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거기에 네 입술을 대어라.” “에덴 한가운데서 흘러 나와 네 줄기로 갈라져” 사랑으로 타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흘러 퍼져 온 땅을 적시고 열매 맺게 하는 강물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아, 네가 누구이든 간에 열렬한 갈망으로 생명과 빛의 이 샘으로 달려가 마음의 깊은 데서 나오는 힘으로 그분께 외쳐라. “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여! 오, 영원한 빛의 순수한 광채여! 당신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생명이시고, 온갖 빛을 비추어 주시고 동녘이 처음으로 밝아 오기 시작하던 때부터 당신 신성의 옥좌 앞에서 빛나는 무수한 별들을 꺼지지 않는 광휘 속에 보존하는 빛이십니다!
모든 인간의 시야에서 감추인 샘에서 흘러 나오는 영원하고 다다를 수 없으며, 맑고, 달콤함 물이여!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그 높이는 잴 수 없으며 그 폭은 광대하고 그 해맑음은 때 묻음을 모릅니다.”
그 샘에서 “하느님의 도성을 즐겁게 하는” 강물이 흘러 나와 “환희와 찬미 소리 드높던 그 가운데서” 우리가 찬미의 노래를 당신께 부르고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당신 빛으로 빛을 보게 됨을” 체험으로 확증하게 되는도다.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아프면
예수님께서도
아프시다.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예수 성심이시다.
예수 성심께
마음을 연다.
따르고
닮아야 할
마음이 있다.
예수 성심은
십자가의
마음이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는
십자가의
마음이다.
사라지지 않는
거룩한
마음이시다.
예수 성심은
우리 몸과
마음의
의지처가
되신다.
정신적
공허함을
당신 마음으로
채워주신다.
서로의 마음이
한마음이 된다.
말씀과 마음은
이렇듯 하나이다.
마음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예수 성심은
우리의 일상을
비추어주신다.
마음이 어두우면
모든 것이 어둡다.
마음이
빛이다.
마음이
고요하면
모든 것이
고요하다.
마음은
십자가를
먹고산다.
마음을
성장시키는
십자가이다.
기다려주시는
예수 성심은
사제들을
성화시킨다.
마음을
살리시는
예수
성심이시여
한마음이
되게하여
주소서.
주고받아
한마음이 되는
성심(聖心)이시다.
성심의 바탕은
십자가이시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꽤 쌀쌀했던 날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 손을 잡고서 학교에 가는 것은 너무나도 설레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항상 형 누나들이 학교 가는 것을 부러워했었는데, 드디어 저 역시 학교에 간다는 사실은 큰 기쁨일 수밖에 없었지요. 가슴에 가제손수건을 달고서 어머니 손을 잡고 학교에 간 뒤에 선생님께서는 신장순으로 줄을 세워서 자리를 배정해주셨습니다. 바로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저를 보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수연이 동생이지? 똑같이 생겼다. 너도 공부 아주 잘 하겠는데?”
사실 제 위의 형이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형을 모르는 선생님이 없는 것입니다. 공부도 잘 하고 모든 점에 있어서 뛰어났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면서 선생님들이 자주 형과 저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부담이 점점 커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형만큼 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더 힘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형은 안 그런데, 너는 왜 그러니?’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고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공부도 운동도, 수업시간에는 발표도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형만 한 아우 없다.’라고 말하지만, 형만 한 동생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지요. 어쩌면 지금의 제 모습도 형을 따라하려고 했던 노력들이 더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의 아들, 아무개의 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부모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면 더욱 더 이를 악물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큰 압박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통해서 내 안에 숨겨진 또 다른 나의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주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즉, 주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중에 무엇을 물려받을까? 어떤 혜택 받을 것만을 생각하시겠습니까? 진정으로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받을 것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부모를 어떻게 기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더욱더 노력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자녀인 우리는 주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완벽한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사랑을 닮기 위한 노력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봉헌하신 주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닮기 위한 나의 노력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이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은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봉헌할 수 있도록 그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오늘의 명언: 오랜 시간 동안 꿈을 꾸는 사람은 결국 그 꿈과 닮아가게 되리라(니체).
누구 탓?
어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문이 닫히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정원초과로 문이 닫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맨 마지막에 탄 사람을 향해 따가운 시선을 던집니다. 그래서인지 맨 마지막에 탔던 사람이 내리더군요.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은 여전히 닫히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 같다면서 웅성거립니다. 어떤 분은 “또 고장이야?”라면서 불평불만의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바로 그때 어떤 형제님께서 옆의 친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야, 네 가방으로 열림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잖아.”
정원초과도 아니었고 고장 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생겼던 해프닝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류가 전혀 없으신 완벽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문제가 있는 것처럼 불평불만의 말을 했던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내 안에서 문제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티끌 같은 나를 향한 예수 성심은 얼마나 강렬하고 뜨거운 것인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염화미소(拈花微笑)라는 아름다운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아무런 말 없이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 못지 않게 부처님께서도 제자 교육에 큰 비중을 두시고 열과 성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제자들을 위해 다양한 비유를 총동원하셨고, 그래도 긴가민가하는 제자들을 향해 ‘세족례’같은 극단적 방법까지 사용하셨습니다.
제자 교육에 있어서 부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는 부처님이 제자들을 영취산(靈鷲山) 모아 놓고 설법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날 따라 다른 말씀 일체 하지 않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때 마침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꽃 한 송이를 손에 집어들어(拈華) 제자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스승님의 모습에 대부분의 제자들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습니다. 그러나 가섭이라는 제자만이 스승님께서 의도하시는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습니다.(微笑)
이에 부처님께서도 빙그레 웃으시며 가섭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언어나 경전에 따르지 않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하는 오묘한 진리가 있다. 그것을 너에게 주마.”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지상 순례 여정 중에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입니다. 한 가지를 깨달았다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값진 보물을 얻는 것 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깨달음이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체험한 한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정말 행복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불붙는 생지옥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큰 마음 먹고 한번 죽어 보십시오. 재물에 죽고, 자리에 죽고, 탐욕에 죽고, 집착에서 죽고, 거짓에 죽고 위선에 죽고...그렇게 부단히 한번 죽어보십시오. 우리가 진정 죽는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천국문이 열리고, 새하늘 새땅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聖心)을 기억하는 6월입니다.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그분의 애틋한 마음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명명백백히 잘 드러났습니다.
먼지요 티끌이었던 우리를 생명에로 불러주신 분, 핏덩이같은 우리를 애지중지 당신 팔에 안고 키워주신 분, 젖먹이였던 우리를 어미처럼 돌보아주셨던 분, 당신 눈동자보다 더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분, 우리가 배신과 타락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시는 분, 우리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연민의 정이 북받쳐오르는 분, 바로 예수 성심(聖心)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 그 애틋하고 각별한 마음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기뻐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행복해 펄쩍펄쩍 뛸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이뤄내야할 수많은 깨우침 가운데, 가장 큰 깨우침이요, 중요한 깨우침은 바로 이것입니다.
‘먼지 같은 나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오묘한 것인가? 티끌 같은 나를 향한 예수 성심은 얼마나 강렬하고 뜨거운 것인가?’
사제는 역주행하는 이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매일 낫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한 농부. 사람들을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20년 후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목숨을 빚지게 됩니다. 1960년 인도네시아, Gendol 숲, 누군가의 실수로 마을에 들불이 번졌고 모든 것이 타버렸습니다. 이 재앙으로 건기에는 가뭄이, 우기에는 홍수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혹독한 빈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농부 사디만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정향 씨앗을 팔고 더 비싼 반얀 씨앗을 구매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매년 수천 그루의 반얀 나무를 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생산물이 없어 돈을 벌 수 없는 나무입니다. 사람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가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디만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정향은 돈에 팔릴 수 있지만 반얀 나무는 마을에 물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반얀은 지하에 물을 저장시켜 수분을 적재적소에 공급하는 나무였습니다. 사디만은 20년 동안 이 나무들을 혼자서 심고 보살폈습니다. 그가 심은 나무는 20,000그루를 넘어 100만 평의 숲을 이루었습니다. 가뭄이 든 땅에는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샘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50년 만에 Dali 마을에 가뭄과 홍수가 끊겼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가난에서 벗어났습니다. 묵묵히 나무를 심던 농부 한 명이 최소 800명의 인생을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Dali의 생태계를 소생시켰습니다.
“제가 바라는 전부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죽을 때까지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Sadiman)
[출처: ‘쓸데없는 짓 한다고 욕만 먹던 농부. 20년 뒤 마을을 뒤집어놓다’, 포크포크, 유튜브]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삼기를 청해야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또한 사제의 맘과 같기에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사제가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면 진짜 사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좋아함입니다. 원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을 좋아하면서도 계속 아버지께로 향합니다. 결국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제물로 드리고 부활하셔서는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셨습니다. 세상은 돈과 권력을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겸손과 가난을 좋아하셨습니다. 결국 가장 비참하고 모욕적인 죽음을 선택하심으로써 명예와 성공을 좋아하는 세상의 흐름과 맞서셨습니다.
예수님 마음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의 흐름에 쓸려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구하려면 당신은 세상을 거스르고 계셔야합니다. 그 세상의 흐름에서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사제들도 세상을 거스르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서는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사제는 봉헌하는 사람인데 세상 것을 좋아한다면 자신의 호주머니에 그런 것들을 챙기느라고 결국 세상에 휩쓸리고 말 것입니다. 사제는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자신과 하나 된 사람까지 봉헌되게 합니다. 만약 사디만이라고 하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듯 돈을 좋아하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듯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면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디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어떻게 닮아가야 하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한 사람이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을 지나칩니다. 그는 오토바이를 돌려 역주행을 하여 다시 그 사람 있는 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달리는 차들을 멈추게 합니다. 뛰어내려도 차에 치이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당신을 이해한다, 다리에서 내려오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 사람은 간섭하지 말라고 하다가 정신이 들었는지 다시 도로 안으로 들어갑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황급히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대화를 나눕니다. 그 사람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늦었다는 등의 말들을 횡설수설하듯 합니다. 오토바이를 탄 사람은 당신과 이야기를 왜 해야 하느냐고 하는 그 사람과 경찰과 앰뷸런스가 올 때까지 대화를 나누어줍니다.
[출처: ‘한 바이커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남자 구하기 위해 역주행하는데’, 포크포크, 유튜브]
누군가 그 차선에서 역주행하여 다시 오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도로 위로 뛰어내렸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다시 역주행하며 당신이 오신 곳으로 사람들을 이끄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과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사람은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화해시켜 주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제는 마치 낚싯바늘처럼 자신을 문 이들을 물의 방향을 거슬러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사제는 세상의 흐름과 반드시 역방향으로 가고 있어야 합니다.
<사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6. 08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는
하늘빛을 땅에 드리우도록
땅기운을 하늘에 들어 높이도록
그리하여 하늘과 땅을 곱게 잇도록
부르심 받음 사람입니다
사제는
여린 마음과 작은 몸으로
하느님께서 정성껏 빚으신
온 누리 보듬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한 몸 추스르기 버거워도
하느님 사랑 가득 담은
함께 사는 세상 가꾸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저 홀로 머물 울타리 허물어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 가득한
여리고 찢긴 거친 세상 담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홀로 거룩함의 꿈에서 깨어나
더러운 것 깨끗하게 하고자
온 삶 아낌없이 던지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하느님 손길 닿은 세상 모시되
세상에 짓눌리고 세상이 버린
하느님의 작은 이 품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살기 위해 벗을 희생시키지 않으며
벗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으라고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약하고 추하고 부족한 사람이기에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부끄럼 없이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몸과 마음에
핏빛 사랑의 상처 가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순간부터 끝 모를 마지막까지
앞서 가시고 함께 하시기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용기 내어 또 한 걸음 내딛는 이
바로 주님의 사제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39년 만에 만났습니다. 모두 중년의 멋스러움이 있었습니다. 토목을 하는 친구, 연구소에 있는 친구, 금융권에 있는 친구들입니다.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닐 때는 알 수 없던 미래였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사제가 되었고, 명동 교구청에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39년 전 저의 모습에서 사제가 되리라는 생각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홀로되신 어머니와 함께 가족여행을 간다는 친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안식년을 지내면서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친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실에서 게임을 자주 하던 친구는 금융권에서 회사의 채권을 다룬다고 합니다. 담임 선생님 이야기, 학교 주변의 탁구장 이야기, 교련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4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하였습니다. 한 친구가 40년 전에 저와 다투었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유는 생각나지 않지만, 저도 그 친구와 다투었던 것은 기억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학창시절의 그리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가 199번은 ‘예수 마음’입니다.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잡아당기사 네 성심에 네 성심에 결합하소서.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차지하시어 네 성심에 네 성심에 보존하소서.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변화케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바꿔 주소서.”
예수님의 마음은 아낌없이 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분에서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목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권한과 능력에서 겸손하셨습니다. 자연을 다스리고,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지만 그래서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으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심에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배반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침을 뱉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뺨을 때리며 모욕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셨고, 하느님께도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하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으로, 끝까지 믿어주시는 사랑으로, 고통과 수난까지 감수하시는 사랑으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결합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호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겸손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지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강론을 충실하게 준비하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세상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할 수 있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무엇보다 가난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말씀에 목이 마른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예수성심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부터 시작하여 점자 확산되면서 보편화 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다. 이 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모든 신자들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2015년 6월 매일미사에서)
복음: 요한 19,31-37: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초기 교회에서부터 예수성심에 대해 언급되었었는데 이는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루는 한 구성요소로서였다. 예수성심은 예수의 심장만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생의 신비와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 설정 등을 통하여 보여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참조: 마태 11,29).
특히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을 사랑과 은총의 샘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상에서 군인의 창에 찔리어 예수의 늑방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요한 19,34) 천상 보화의 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에 비유하였다. 즉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은 영혼을 깨끗이 씻고 초자연적 생명을 부여하는 성세성사를 상징하며, 피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는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마치 하와가 아담의 늑방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수의 늑방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13세기 이래로 독일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아 성심 공경이 성하였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회칙에서 “구세주의 상한 성심에서 구원의 성혈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탄생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원의와 인식, 사랑과 정서, 감정의 중추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근원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동시에 인간의 사랑의 응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원의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한 것은 이 축일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13세기 이래로 예수성심의 공경이 성하였지만, 1673년 12월 27일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성심공경과 성심축일의 제정을 요청하시게 되어,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공적으로 세상에 전파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에서 돌아가신 후에 그 죽음을 확인하려고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것을 전하고 있다. 그 군인의 행위는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사도 요한은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장면을 통하여 요한은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교회의 탄생을 읽고 있다. 피는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성체성사와 당신의 죽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물은 성령의 상징으로써 세례의 표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으로 교회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잠들었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셨듯이, 십자가에 잠드신 새로운 아담의 옆구리에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가 탄생되었다고 교부들은 말하고 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분의 성심을 위로해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 -예수 성심의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로 시작된 하느님 사랑의 축일이 마침내 예수 성심 대축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느낌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마침내 예수 성심 대축일로 절정에 달한 느낌입니다.
참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거룩한 대축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이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 하며 마음을 순수하게 정화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삶의 아름다움으로,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마침내 예수 성심의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로 표현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잠시 예수 성심을 닮은 자매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2004년 중반부터 수도원이 큰 어려움을 겪을 때 태동하여 모임을 갖기 시작해 만 14년 역사를 지닌 제가 지어준 명칭의 ‘예수성심자매회’입니다. 약 25명의 회원들이 매월 1회 모임을 갖는,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요셉수도원을 아끼고 사랑하는 예수성심을 꼭 닮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예수성심의 자매들입니다.
수도원에 살면서도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앵두를 이렇게 많이 제 두손으로 따보기는 처음입니다. 빨갛게 무르익어가는 앵두 열매를 보며, ‘아, 열매는 사랑의 열매이구나!’ 깨달음처럼 와 닿았고 시간내어 꼭 따려 했는데 엊그제 오후 우연의 일치처럼 원장수사가 앵두를 따고 있었습니다.
하여 엊그제와 어제 오후 하루 몇 시간씩 각자 앵두를 땄습니다. 어제는 마침 원장수사가 제가 빨갛게 무르익은 앵두를 가득담고 있는 바구니를 들고 있는 사진도 찍었는데 흡사 예수 성심의 빨간 사랑을 가득 담고 있는 듯 생각되었습니다. 예수 성심의 사랑을 색깔로 친다면 이런 빨간 색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빨간 앵두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어제 인용했던 아주 짧은 자작시입니다.
-흰 눈물같은/슬픔의 꽃자리마다
기쁨의 열매로/익어가는 빨간 사랑의 앵두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라는 시편을 연상케도 하고, 흡사 ‘슬픔에서 기쁨으로’, 파스카 신비를 상징하는 듯한 시입니다. 빨간 색 하니 더불어 문득 생각나는 시가 있습니다. 꼭 20년전 1998.12,25일 예수님 성탄 대축일날 수녀님으로부터 빨간 칸나를 선물 받고 즉흥적으로 썼던 시입니다. 처음으로 공개하면 샬트르바오로 수녀회 김카타리나 수녀님입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날의 시입니다. 그대로 오늘 예수 성심께 바치는 시가 되겠습니다.
-당신이/꽃을 좋아하면/당신의 꽃이
당신이/별을 좋아하며/당신의 별이
당신이/하늘을 좋아하며/당신의 하늘이/되고 싶다
늘/당신의 무엇이/모두가/되고 싶다-
예수 성심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심정이 아마 이럴 것입니다. 참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거룩한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한데 어찌 사제뿐이겠는지요? 예수 성심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가 성화되는 날입니다. 오늘 미사중 감사송은 얼마나 은혜롭고 아름다운지요! 그대로 오늘 복음에 근거한 감사송입니다. 잠시 인용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화답송 후렴,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시편 구절처럼 예수 성심의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러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 성심의 사랑을 통해 탄생된 교회입니다.
교회의 교부들은 예수님 심장에서 쏟아진 물에서 세례성사를, 피에서 성체성사를 감지感知했습니다. 세례성사와 끊임없는 회개로 순수해지는 우리 마음이요 끊임없이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 열정의 사랑으로 붙타오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끊임없이 부어지는 예수성심의 사랑이 우리를 순수純粹와 열정熱情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예수 성심의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로 제1독서 호세아가 하느님 사랑을 잘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 사랑을 예수 성심의 사랑을 통해 체험합니다. 배신당한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버렸지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바로 이런 한량없는 연민의 사랑은, 모성적 특성을 지닌 아버지의 표상은 그대로 예수 성심의 사랑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그러니 예수 성심의 사랑을 추구해야 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 성심이야 말로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 정주처, 피난처입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당신 성심의 안식처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예수성심의 안식처 안에, 배움터 안에 머물러 예수성심의 사랑을, 바로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워 예수님과 일치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성심의 사랑 안에 늘 머물러 살았기에 탄생된 제1독서 에페소서의 기도입니다. 신약성서의 가장 아름다운 기도문 가운데 하나인 바오로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에페3,16-19). 아멘.
거룩하신 그분을 응시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늘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을 특별히 생각하는 날입니다. 또한 ‘사제 성화의 날’로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그 삶을 충직하게 사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으로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적인 마음이 지배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도 안에서도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니 언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뀔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소망은 있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과 정성은 여전히 소홀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그 사실을 확인하느라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피는 심장에서 나온 것이고, 물은 늑막에 있던 림프샘의 액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흘러넘치도록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이며, 그래서 세례성사를, 그리고 흘러나온 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먹고 마셔야 하는 성체성사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두를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의 샘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성체성사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실은 이미 예언된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이냐시오에 의하면 사랑의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은 말보다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둘째, 사랑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당신 목숨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받은 것 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의 모두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 앞서 그분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냐가 소중합니다. 우리는 분명“주님 앞에”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5. 8).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한 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 진실로 주님을 닮고자 원한다면 모든 것의 모범인 거룩하신 그분을 응시하십시오.”
알퐁소 성인은 “예수님의 성심은 당신의 사랑을 애원하는 사람들에게 청하는 바 무엇이든 틀림없이 채워주신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말가리다 성녀도 “예수님의 성심을 열심히 공경하고 의탁하는 영혼은 구원의 항구로 안전하게 도착할 것”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성심 안에 모든 바람을 이루시고 또한 구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오! 저는 그분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분이 저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제가 그분 마음에 들고 그분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비르지니수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성심 대축일(요한 19,31-37)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입니다. 곧 사랑의 대축일입니다.
이는 마치 물줄기를 찾아 올라가, 산꼭대기의 높은 곳에 있는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맑은 샘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곧 우리가 마시고 있는 사랑의 강줄기의 발원지인 그 원천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화답송>입니다. <화답송>에서 이사야는 바로 이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
그렇다면, 그 사랑의 발원지인 구원의 샘은 무엇일까? 그 발원지가 곧 예수님의 심장, 곧 예수님 마음입니다. 결국, <말씀전례>의 열쇠는 “심장”(마음), 곧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응석받이 아기에 비유하여, 간장을 태우는 어머니의 절실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전해줍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호세 11,9) 라고 하시면서 당신 사랑이 무한하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백성들은 이 사랑을 알아듣지 못하고, 끊임없이 배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밝혀지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주게 하셨습니다.”(에페 3,9)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러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오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을 드러내 보이시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상의 증거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님의 늑방과 심장에서 흐르는 물과 피!
이는 ‘가나안의 혼인잔치’(요한 2,1-12 참조)를 반향해 줍니다. 곧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던, 정결례에 쓰던 여섯 개의 항아리는 마침내 예수님의 몸인 일곱 번째 항아리에서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하여, 바로 이 갈바리아의 혼인잔치에서 신부인 교회와, 죄를 씻어내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가 탄생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늑방과 심장에서 흐르는 물과 피’는 여인이 깨트린 옥함(요한 12,1-8 참조)을 반향해 줍니다. 값진 옥함을 부수고 남김없이 쏟아 부은 향료가 온 집안으로 번지듯, 감춰진 하느님의 사랑을 담은 그리스도의 부서진 몸에서 흘러나온 사랑이 온 세상을 기름칠하고 번져가게 됩니다. 온 세상은 축성하고 새롭게 탄생하게 됩니다.
이는 성소의 휘장을 찢고(루카 23,45 참조),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를 담은 성전을 부수고(요한 2,19 참조), 온 세상에 아버지의 사랑을 내어주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이 찔리는 것, 이는 아버지의 고결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는 바로 아버지의 심장이었고, 마음이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부어주신 피와 물로 우리를 씻으십니다. 그 사랑으로 저희를 감싸주십니다.
여기에는,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이 바로 끊임없이 부어지는 사랑의 샘이요, 생명의 샘입니다. 결코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하느님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축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 거룩한 마음,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기념합니다. 오늘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인, “예수 마음”이 우리에게 선사되는 은혜로운 날입니다. 아멘.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주님!
당신께서는
휘장을 찢고
가로막힌 모든 것을 치우셨습니다.
남김없이 쏟아 부은
물과 피로
우리의 영혼을 씻으셨습니다.
온 누리를 새로 지어시고
아버지의 향기를 가득 채우셨습니다.
사랑의 옥함인 당신 몸을 부수어
사랑의 향유로
온 세상을 기름칠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멘.
열린 마음 <요한 19, 31-3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은 하늘의 문을 열고 온 인류를 초대하셨습니다. 그 문은 주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열린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 나를 찾아 들어올 수 없으며 다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열린 마음이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며 모든 욕망에서 자유스러운 사람입니다. 또한 미움도 원망도 두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돌아가신 주님의 심장을 창으로 찔러 피와 물이 나오게 한 것은 사람이 되신 주님께서 이 땅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셨음을 증명해주셨습니다.
오늘은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거룩한 사제, 깨끗한 사제, 아름다운 사제가 되려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이 거룩하여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만 사셨던 것처럼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되려고 준비하고 희망을 품는 삶이 아니라, 사제의 고귀한 직분을 마음속 깊이 인식하고 마치 하이에나에게 뜯어 먹히듯이 믿는 사람들을 위해 먹이가 되어주고 나를 위한 삶아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사는 것입니다.
늦은 밤에 병자성사를 청하면 급히 일어나 응답해야 하고, 고백성사를 청하면 시간을 정해놓고 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한 영혼의 평화를 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수도원에 고백성사를 청해서 고백 소에 앉으니 “미안합니다. 바쁜 시간에....” 하시기에 “아니요, 저는 이를 위해 사제가 되었습니다.” 말하고 고백성사를 행복하게 마쳤습니다. 한번은 한밤중에 병자성사를 청하는 사람을 따라 성사를 주고 나오는데 곡소리가 나기에 ‘지금 오지 않았으면....’하고 깊은숨을 쉬었습니다.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 놓고 “이 시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돼”가 아니라 자기 시간은 없고 필요한 사람을 위한 시간만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나를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의 말도 들어주는 사목이어야 합니다. 목자는 목자가 원하는 대로 양을 따르라 하지 말고 양들이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사제의 마음은 예수의 마음”이란 노래를 하며 기도합니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서울에서 보좌 신부를 하다가 경기도 지역으로 처음 본당 신부를 나갔을 때였습니다. 식복사도 관리인도 없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하고 성당 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본당 관할 구역 내에, 신자들의 가정을 주님 사랑 안에서 평안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하루 일과를 다 마친 후에 밤에 끝기도를 바친 후 성당 문을 잠근 후에야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 가정들의 평화를 빌긴 하지만, 일일이 다 쫓아다닐 수도 없고, 쫓아다닌다고 해도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고, 참 힘에 벅찼습니다. 그 때는 정말 아무런 능력이 없는 저 혼자의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고, 주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주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우리 인간이 보고 들으며 느낄 수 있는 똑같은 인간으로 세상에 나셔서, 인간의 구강조건을 통해 말씀하시고 인간의 육과 정신과 심리조건을 통해 기적을 발휘하시며,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우쳐 주시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면서 대신 죽기까지 희생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신 예수성심을 바라봅니다.
우리 모두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지금 이 생을 살아갈 자격이 있다고 자랑하거나 마땅히 살만하다고 주장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세상에 나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라고 하셔서 살아갈 뿐입니다. 본당 신부, 수녀, 사목협의회원, 구역반장, 단체장, 봉사자, 아버지, 어머니, 자녀 중 어느 누구도 자신 있고 자격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훌륭한 사람도, 온전히 존경받을 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주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임명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고 활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주님께서 현세에서 활동하시기 위해 누군가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통해서도 주님께서 나타내 보이시고 몸소 활동하시기를 기꺼이 봉헌하며,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을 구하시는 도구로 써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을
또 다시
불러봅니다.
예수 성심 안에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 성심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말 없이 우리를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예수 성심이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와 함께
기도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기댈 곳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당신의 피와 물의
희생으로 우리 죄를
씻으시고 우리 마음을
껴안아주십니다.
어둡고 아픈
마음을 봉헌합니다.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을 봉헌합니다.
예수 성심을 통해
사제들과 신자들
모두 건강해지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 성심의 것이며
예수 성심은
사제의 것입니다.
작은 아들처럼
예수 성심께로
돌아갑니다.
예수 성심은
우리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상처받기 쉬운
우리 마음은
예수 성심과
늘 함께 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