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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1년 10월 10일 (녹) 연중 제28주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1.10.10|조회수822 목록 댓글 0

제1독서

<나는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7,7-11
7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8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9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0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11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2-13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30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진흙처럼 여겨진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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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는 현인 솔로몬의 입을 빌려,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한다. 다른 무엇에 앞서 지혜를 구할 때, 지혜는 많은 좋은 것을 가져다준다(제1독서). 하느님의 말씀이 쌍날칼보다 날카로우며, 하느님 앞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신다(제2독서). 어려서부터 열심히 계명을 지켜 온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 한다. 그러나 그는 가진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그것에 집착하기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복음).

 

 

 

오늘의 묵상

아주 오래전에 본당에서 주일 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의 일이 생각납니다. 초등부 고학년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들어오라고 하시는 분이시라고 자주 이야기하였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도 받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이들에게 하늘 나라를 그려 보라고 하였더니 꽤 많은 아이가 열린 문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마치 제가 교리 교육에 성공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마르 10,23)라고 하십니다. 자주 눈에 띄는 말씀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 예수님의 선포에 들어 있는 한 측면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열려 있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시지만, 모든 이가 그 초대에 응답하지는 못합니다. 문이 열려 있어도, 응답해서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넘어야 할 장벽이 있습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을 하느님 나라보다 더 앞세워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왕홀과 왕좌나 재산보다 낫게 여겼듯이,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려면 다른 모든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포기하여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우리의 집착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문 앞에서 멈추게 하고, 슬퍼하며 떠나가게 합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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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는 부유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켜 왔으며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의 질문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라는 결의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그는 자신의 약점을 되었고 부족함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지닌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까지도 꿰뚫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한 생명일까요? 구원일까요? 물론 우리는 그것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인가요? 우리의 내면에는 하느님 나라라는 지고한 가치를 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세에서도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하며,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오직 현세의 안락함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눈은 하느님 나라뿐 아니라 세상의 나라까지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친 모습이 아니라 온전하게 모든 것을 내던지고 당신을 따르는 모습을 원하십니다. 어쩌면 이 말씀을 들은 지금 우리 얼굴이 복음의 부유한 사람처럼 울상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슬픈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해 봅니다.(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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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솔로몬은 주님께 칭찬받는 임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완공하여 봉헌하고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한 힘은 그가 받은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에게, 재물보다 더 귀한 제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재물에 집착한 부자 청년은 결국 예수님의 곁을 떠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셈법과 인간의 셈법이 다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판단은 인간의 욕심과 속임수를 드러내고 이 세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보여 줍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하느님을 기만할 힘과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유한한 재물과 명예를 움켜쥔 인간의 시야는 너무나 좁고 어두워서 큰 빛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지혜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나 지고한 빛에 조명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남을 돕고 자선을 베푸는 행위는 사람의 시야를 넓혀 줍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월하는 세계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영원한 가치에 마음을 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존귀함은 하느님 대전에서 비천하고 비참함으로 바뀝니다. 영혼의 눈멂을 일깨우는 천상의 빛이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얻은 영혼은 다른 어떠한 피조물도 그분을 대체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왕홀과 재물은 허공에 사라져 없어지는 연기임을 깨닫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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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성사로 하느님께 축성된 모든 신자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보편적 부르심을 받았다는 현대의 교회 문헌들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성직자, 특히 수도자의 봉헌 생활의 고유한 특징은 과연 무엇인지 자문해 봅니다.

이에 관한 이론이나 학설을 논하기보다는 수도자로 살아가는 제가 그저 이해하는 바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삶 안에는 이런저런 많은 요소가 함께 있는데, 그 안에 하느님께 속해 있는 봉헌 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몸과 마음과 가진 것 전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 소유가 되어야 하는 삶, 곧 ‘하느님께 축성됨’이 저의 삶 전체를 차지하는 것이어야 수도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지혜에 비하면 재산도 건강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솔로몬이, 무엇보다 앞서 지혜를 추구하였듯이, 부르심에 응답하려고 다른 모든 것을 가차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몸집이 커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낙타처럼 이것저것을 동시에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마음 안에 오로지 하느님께서 자리하시고 다스리시도록 그분의 섭리에 내어 맡겨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라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고백을 하며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화답송 시편처럼 우리의 날수를 헤아리면서 저마다 고유한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자세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께 어떤 자리를 내어드리고 있는지,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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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말씀은 재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삶의 목적’이 되고 생명보다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는 재물입니다. 그런 재물을 많이 소유한 청년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시지만, 그는 머뭇거리다 포기합니다. 무엇이 그를 돌아서게 했겠습니까?

스승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오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아까워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애초부터 제자가 될 생각을 안 했을 것입니다. 청년을 머뭇거리게 한 것은 재물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재물의 위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힘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그런 재물’을 없앤 뒤에 오라고 하십니다. 그는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재물의 든든함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재물의 힘을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재물의 힘에 굴복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이들은 재산이 넘쳐나도 부족함을 떨치지 못합니다. 물질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만족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돈이 최고다.”, “재물이 최고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그렇게 말하더라도, 우리는 그 위에 스승님의 힘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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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자녀들에게 ‘지혜’가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가르칩니다. 요즘엔 지혜가 ‘지적 재산’으로 계산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눈부시게 성장한 데에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교육열이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참지혜란 하느님의 말씀에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느 시인의 글입니다. “많은 재산과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였답니다. 천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저승으로 떠납니다. 

갖고 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부자는 말했습니다. ‘돈을 가져가겠습니다.’ 천사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러자 부자는 권력을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천사가 그것도 안 된다고 하자, 아름다운 여자를 데려가겠다고 했습니다. 그것 역시 안 된다고 하자, 화가 나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사가 대답하였습니다. ‘세상에 있을 때 남에게 베푼 것은 모두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그의 재산 모두를 가져갈 수 있도록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소유나 소득이 내가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게 되면, 또 내가 원하는 지위나 상태에 오르게 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순간의 만족에 불과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90년대 중반,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 컴퓨터의 중요성이 알려지면서 이쪽 분야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어졌습니다. 286, 386, 486, 586 펜티엄으로 이어지는 발전에 저 역시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최고 사양으로 업그레이드를 해도 부팅하는데 2~3초 빨라질 뿐이고, 다른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는데 조금 빨라진다는 것 외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몇 초 때문에 비싼 돈을 들여 업그레이드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업그레이드를 하고 난 뒤의 기쁨은 얼마나 갈까요?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잠시뿐인 기쁨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최선 스마트폰을 사면 그 순간은 너무 기분이 좋지만, 그 기분이 며칠 가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늘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를 외치면서, 자신은 욕심이 없다는 식의 합리화를 시킬 뿐입니다.
물질적 만족은 분명히 외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도 외적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행복은 내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얻겠다는 마음이라면, 내적 만족을 이룰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그래도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지켜왔습니다. 이런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를 주님께서는 발견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렇게 주님 말씀은 이 부자 청년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냈습니다(히브 4,12). 그렇다면 부자 청년은 어떻게 했을까요? 주님 말씀을 듣고서 마음의 생각을 바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복음은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말해줍니다. 즉, 그는 외적인 만족을 추구했었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행복은 이런 외적인 만족이 아닌데도, 내적인 만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재물이라는 외적인 만족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만족을 추구하고 있을까요? 입으로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외적인 만족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행복은 내적인 만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바람도 필요합니다.

수십 년 전 과학자들이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 ‘바이오스피어 2’라는 인공생태계를 건설하고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유리와 쇠로 된 거대한 돔 내부에 정화된 공기와 깨끗한 물, 영양가가 풍부한 토양, 다량의 자연 채광을 공급했습니다. 이렇게 내부의 동식물 군에 이상적인 생존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이곳의 식물은 최적의 조건에 걸맞게 최고의 가치를 간직하면서 성장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곳의 나무는 일정 높이가 되면 자꾸 쓰러졌습니다.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이 제공되었는데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나무가 건강하기 위한 필수 조건 하나가 빠졌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람’이었습니다. 자연환경에서 나무는 바람에 의해 흔들거립니다. 이를 통해 줄기가 더 튼튼해지고 뿌리가 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 안정적이고 훌륭한 존재로 성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상징하는 ‘바람’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또 육적으로 결코 튼튼해질 수 없습니다.

 

 

 

적극적이고 관대한 나눔을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부자들을 향한 주님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에는 일억 원만 있어도 부자라고 어깨 피고 다녔는데, 요즘은 어디 가서 명함도 제대로 못 내밉니다.
최근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얼마가 있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라는 설문조사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40억이랍니다.
그러나 40억은 꿈같은 희망사항일 뿐이고, 대한민국 부자의 기준(재난지원금 계급표)에 따르면, 나름 부자라고 할 수 있는, 상위 12퍼센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연봉 5,000만 원정도가 되어야 한답니다.


그런데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부자에도 여러 유형의 부자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까무러칠 정도의 막대한 은행 잔고를 보유한 부자가 있는가 하면, 그리 넉넉하지 않아도 언제나 마음이 풍요롭고 여유로운 영혼의 부자, 마음의 부자가 있습니다.


재물이라는 것, 참으로 묘한 것 같습니다. 우선 재물이란 것,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력을 지니고 있어야 가족들 앞에 얼굴도 서고, 적극적인 이웃 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품위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도구가 재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지나친 바가 없지 않습니다. 눈만 뜨면 돈돈! 입니다. 입만 열면 돈돈!입니다. 돈 외에도 더 크고 의미 있는 가치들이 부지기수인데, 완전 무시합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엄청난 재물을 탑을 쌓아올립니다.
그렇게 발버둥 치던 어느 순간, 그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는 곧 떠나가게 되는데, 그토록 애써 쌓아올린 저 재물들은 어떡하지? 재물이라는 것,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별것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목숨 걸었을까? 왜 좀 더 나누지 못했을까?”


평생 돈이 최고라고 외치고 다녔기에, 자녀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돈을 최우선 가치로 여길 것입니다. 다들 유산 가운데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몫을 챙길까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떠나가는 자신은 거들떠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쇠락해가며 흐려져만 가는 자신을 내팽개쳐놓고 다들 떠나갈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오늘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 말씀을 건네십니다.

“애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코 복음 10장 24~25절)


부자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부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나눌 줄 모르는 부자들입니다. 재물 좀 있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뻐기지만, 어려운 사람들과 단 한 푼 나눌 줄 모르는 수전노 같은 부자들을 향해 오늘 예수님께서 옐로우 카드를 내미신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서 축척한 부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유분에 대한 적극적이고 관대한 나눔을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부자들을 향한 주님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참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노년기 기도생활
형제들과 둘러앉아 조만간 다가올 노년기를 어떻게 준비하고, 또 노인이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몇 가지 큰 가닥을 잡고, 같이 노력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첫째, ‘아직 나는 젊으니, 좀 더 나이 들면 준비하지.’가 아니라, ‘오늘부터’ 노년기를 준비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편안하고 잘 웃는 노인이 참 보기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전혀 웃지 않고 울적한 얼굴인데, 나이 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지겠지요. 내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오늘부터 좀 더 너그러워지고, 좀 더 편안한 얼굴로 살아가야겠습니다.
둘째, 나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기도하는 존재로 탈바꿈해 나가기로 다짐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들수록 우리는 점점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히고, 소외감은 커져만 가겠지요? 그때 분노하고 좌절하기보다는, 좀 더 자주 성체 앞에 앉고, 좀 더 자주 주님과 소통하는 시간을 늘려가는 영적인 존재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에게보다 주님께 투자하는 시간을 점점 늘려가야겠습니다. 
셋째, 나이 들어갈수록 유머 감각을 좀 더 키워나가야겠습니다. ‘난 체질상 유머와는 무관한 사람이야.’라고 포기하지 말고, 오늘부터라도 ‘깔깔 유머 백과’ 한 권씩 사서 들고 다니면서, 이웃들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마술사로 변신해야겠습니다. 단 너무 지나쳐서는 안되겠습니다. 괜히 이곳저곳 참견하다가 웃기는 상황 연출하지 말고,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짐)를 잘 하는 노년이 되어야겠습니다.
기도하는 노인 하니 즉시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한나라는 여성 예언자입니다. 루카 복음사가 표현에 따르면 그녀의 생애는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나 예언자는 13세에 혼인해서 7년간 결혼생활을 했으니, 20살에 남편과 사별한 것입니다. 그리고 84세가 되기까지 64년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충실한 신앙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이런 한나 예언자의 깊은 신앙과 충실성에 하느님께서도 크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녀에게 당시로서는 놀랄 정도의 장수(長壽)를 허락했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 구세주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는 은총,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다들 꿈꾸실 것입니다. 영적이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노년기! 그렇다면 한나 예언자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충만한 기도생활을 추구했고, 그 맛에 깊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살아생전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평생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말씀을 실천할 것인가, 말씀과 동행할 것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예수님께 찾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계명은 다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버림과 가난을 전제합니다. 내가 가난해지려 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계명은 이웃사랑을 지향하는데 이웃이 굶고 있는데 본인만 부자로 산다면 그것은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예수님을 ‘스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스승은 ‘말’로 가르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 스승은 ‘동행’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만약 하와가 하느님과 동행했다면 어땠을까요? 결코, 뱀의 말을 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뱀의 ‘설득’에 지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뱀이 함께 눈에 보인다면 하느님 대신 뱀의 말을 듣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입니다. 기도에서는 묵상과 관상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듣는 것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의 음성만 들었다면 물 위를 걸을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영화 ‘나의 산티아고’(2015)는 이런 줄거리가 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 인기 코미디언 하페가 과로로 쓰러집니다. 의사는 최소 3개월을 쉬어야만 한다고 경고합니다. 하페는 잠시 일에서 떠나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기로 합니다.
하지만 순례길은 만만치 않습니다. 첫날부터 폭우와 허름한 숙소, 불면의 밤까지. 하페는 일단 걷는 것보다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긴 여정을 빨리 끝마치고 싶어 합니다. 잠은 고급 호텔에서 잡니다. 도장만 받는 게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힘이 듭니다. 호텔이 없는 곳에서 벌레에게 물려가며 잠을 한 번 자고는 포기하고 돌아가려 합니다.
이때 스텔라를 만납니다. 그녀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딸을 잃었습니다. 딸은 암이었고 순례를 하다 죽고 싶다고 해서 엄마와 함께 순례하다 중간에 죽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을 잃은 아픔을 딸과 함께 마지막으로 걸었던 순례길을 되밟으며 달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페는 뭔지 모르는 목표의식이 발동합니다. 어머니를 잃고 돈과 성공에만 집중하며 달려왔던 길. 그리고 지금 서 있는 길은 고통과 외로움과 시간을 허비하는 듯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받아들입니다. 그분께서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걸어주셨음을 믿고 정말 오랜만에 그분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가 순례하는 동안 쓴 일기를 살짝 들여다볼까요?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 신앙이 확고한 적이 있었다면 다시 찾고 싶다…. 내 발이 길을 밟는 걸까, 아니면 길이 나의 발을 미는 걸까?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감정 표출도 감동도 없다. 자비로운 상태. 재미없지만 아픔도 없다.
가장 놀라운 건 이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이 길의 힘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대한 존재와 이 세상에 미치는 그의 놀라운 영향력을 철석같이 믿는다.신을 만나려면 먼저 그를 영접한다고 말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 신을 올 수 없으니까.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누구든 신과 나름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자만이 지속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나와 너……. 나와 당신.”

그는 모든 것 안에서 신을 발견합니다. 눈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비로소 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를 만났다. 나머지는 오직 그와 나의 문제다.”
이제 그는 친구들을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무례한 여자의 손을 잡아주고 딸을 잃은 스텔라의 손도 잡아줍니다. 그리고 산티아고 대성당에 입성하여 향을 받습니다.

“난 물론 혼자 간다. 이제 알았다. 사실 지금 집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왜 그래야지? 순례의 길을 걸으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는 매일 신을 만났다는 거다.”
할머니는 하페에게 “묻지 말고 신께 의지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페는 신께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신께 의지할 때 외로움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신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어릴 적 신앙에 관한 말씀은 하페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800킬로를 가는 여정 중에 하페는 하느님을 만났고 하느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말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구약으로 충분했습니다. 존재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자 비로소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욕심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음은 존재에 대한 믿음만이 변화시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이가 어떻게 줄곧 게임만 할 수 있겠습니까? 존재가 곧 법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가 눈에 보인다면 행동과 생각만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여서 본성까지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그리스도와 동행함을 믿고 그리스도를 보는 듯이 행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전례’만 하는 것과 ‘성찬의 전례’까지 하는 것이 이 차이입니다. 말씀과 동행하는 것과 그분의 실존과 동행하는 것의 차이인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걷는 것, 이것이 관상입니다. 묵상에 머무는 사람은 배 위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이 세상 삶에서부터 관상이 시작되면 언젠가 그분은 진짜 당신 모습을 보여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그분처럼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쓴 호메로스에 대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평가는 달랐다고 합니다.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었던 플라톤은 호메로스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위협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분노, 방황, 전쟁, 열정, 혁명, 권위에 대한 도전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불온한 사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도덕적이어야 했고, 순수해야 했습니다. 법과 질서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권위에 도전하고, 반항하고, 분노하는 이야기는 아이들을 사상적으로 오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이 세상은 순수한 이상의 그림자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순수, 사랑, 나눔, 희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를 그리스 사람들이 꼭 배워야 할 시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작품 속에 있는 영웅들은 트로이와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할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쳐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장 강대한 국가였던 페르시아를 상대로 그리스는 제2의 트로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그리스인들은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를 침공하려는 페르시아를 물리쳐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지도자들에게 페르시아를 상대로 싸우자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그리스 사람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페르시아의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그리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리스를 통합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물리쳤고, 당시에 가장 넓은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문득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나라입니다. 기쁜 소식은 억눌린 이들이 자유를 얻고, 묶인 이들이 해방되고, 가난한 이들이 부유해지고, 아픈 이가 치유 되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고, 미천한 이들을 높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눈 먼 사람이 보게 되었습니다. 귀가 먼 사람은 듣게 되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었던 헤로데는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마귀의 뜻을 따른다고 선동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고 선동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 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 기득권을 가진 사람, 폭력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 두려움에 빠진 사람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을까요? 예수님께서 전하신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을까요?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였던 성모님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입니다. 성모님은 시메온의 예언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였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변하였습니다. 거리로 나가서 당당하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 회개한 사람,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습니다. 

플라톤은 지혜는 궁극적인 진리와 원리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그러한 진리가 비쳐지는 허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는 상황을 극복하는 의견이라고 하였습니다. 상황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상황에 맞는 의견을 내는 것이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또 다른 지혜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기도를 통해서 자라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실천을 통해서 열매 맺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 10, 17-30(연중 28 주일)

오늘은 연중 2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참된 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나는 진정 지혜를 찾고 있는가?’, 아니면, 돈이나 능력이나 타인의 인정을 추구하고 있는가? 혹 지혜를 추구하고 있다면, 참된 지혜를 추구하는가? 아니면, 나에게 필요하고 도움 될 만한 지혜를 찾고 있는가? 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고백합니다.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졌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지혜 7,7)

 여기에서, “주어졌고”와 “나에게 왔다”라는 동사에서 알 수 있듯이, 지혜는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그분의 영께서 오신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을 경외할 줄 아는 이 지혜를 보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이사 33,6;지혜 7,7-14). 그리고 이 보물은 이미 우리에게 선사되었습니다.

<제2독서>는 주어진 선물인 이 지혜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다름 아닌 “하느님의 능력”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의 들음’에서 옴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작가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이는 ‘말씀’이 참됨을 가려내는 지혜의 힘이요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히브 4,13)

오늘 <복음>에서는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부자청년과 우리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직 재물을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못한 부자인 어떤 사람과, 이미 재물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면서도 온전히 자신을 버리지도,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벌거숭이”로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한 말씀’, 곧 부자 청년에게 하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라는 말씀과 제자들에게 하신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29 참조)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을 가리고 있던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버리고, 그들의 마음 속 생각과 속셈을 들통내버립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따를 것인가?’라는 결단의 문제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양편의 질문 사이에는 애시 당초 차이가 있습니다.

곧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라는 부자청년의 질문과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마르 10,26)라는 제자들의 질문 사이에는 그 배경이 다릅니다.

곧 부자청년의 질문은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지만, 제자들의 질문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자신의 영생을 위해 죄짓지 않고 율법을 지켜왔고, 베드로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집과 형제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같이 아직 영생과 구원을 얻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인 어떤 사람에게 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베드로에게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29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부자청년은 비록 율법을 지켰다 하나, 그것은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기 지킴이 아니라, 자기 버림과 자기 나눔을 통해서 타인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곧 가진 것을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곧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곧 말씀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형제를 사랑하되, 당신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비록 그가 집을 떠나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하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것일 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 곧 복음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29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 힘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비워 드려 그 지혜가 내 살 속으로 파고들도록, 말씀의 영의 권능에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지혜가 이미 우리 안에 선사되었으니, 말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

 

주님!

재물이 없어도 고집과 완고함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도 제 주장과 의견을 앞세워 물러서지 않는 저는

제 뜻으로 가득 차 있는 부자입니다.

저를 가늘게 부수고 부수어 당신 바늘귀로 꿰소서아멘.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그리스도인에게 십계명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세례를 준비하는 이에게 전해지는 규율입니다. 이 규율에 어긋나는 것을 우리는 ‘죄’라 부르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에 있어서 이 계명은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묻는 젊은이는 이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이 말씀에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순간, 우리는 이 대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테고 또 그가 모르는 잘못을 이야기하며,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있는가?’하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증언은 맞았고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론은 우리가 생각하는데로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한말씀이 그의 꿈을 좌절시켜 버립니다. 그 말씀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십계명을 다 지키고도 부족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그로인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야말로 당시에도 또 지금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죄’가 없다는 의로움이 하느님 보시기에 부족함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것은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였습니다. 그것으로 그가 바라는 것을 얻게 되리라고 예수님은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압니다. 곧 실천하는 사랑을 요구하신 주님입니다. 그는 부유했고, 세상은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 곧 나누어 함께 살아야 하는 이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죄를 짓지 않았지만 사랑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지키는 것을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 그에게 사랑이 부족한지도 또 그것이 필요한지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부유한 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설명했을테니 말입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하나의 착각을 가지게 됩니다. 아직까지 지속되는 착각입니다. 하늘나라를 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하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뒷모습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을 낙타와 바늘귀로 연결시키는 이유는 이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주인공은 ‘부자’였습니다. 사람들은 부자도 들어가지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부자의 부유함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각했고 표현했으며 그 때문에 세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 때의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우리는 멀리 떨어져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원래 하느님이 결정하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서 계신 자리에 사람들은 모두 부자를 부러워하는 아니 그들의 부유함을 이루어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중이었습니다. 곧 영원한 생명을 묻는 이에게 주님은 당신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묻는 그에게 선하신 분은 하느님이라고 알려주셨고, 그에게 원하신 것도 선한 일이었던 셈입니다.

선하게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선하게 살기 위해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들이 바로 십계명이라는 것을 알아챈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선하게 살고 사랑을 실천하면 십계명에서 우리가 아주 멀리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법이 그러하듯 십계명도 우리에겐 최소한의 경계일 뿐입니다. 믿기 어렵다면 그만큼 천국은 여전히 멀어 보이실 겁니다.

 

 

 

<너 없이 나 없으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 없이
나 없으니


너를 보아야
나를 볼 수 있고


너를 보지 않으면
나마저 볼 수 없지


너 없이
나 없으니


너 없이 나 홀로
있어도 없고


너와 더불어 나
없어도 있지


너 없이
나 없으니


너 없는 나를
움켜쥠은 죽임이고


너 있도록 나를
내어줌은 살림이지


너 없이
나 없으니


내게서 너를 없애면
나는 스르르 죽고


너에게 나를 나누면
나는 비로소 살지

 

 

 

영원한 생명은 발견이자 선택, - 주님, 지혜, 말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가 한글날이었고 새삼 한글이 얼마나 고맙고 좋은 글인지 세종대왕에게 거듭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언뜻 책상 앞에 놓여 있는 32년전 사제서품식 때 사진을 보니 갑자기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세분 형님들이 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갈수록 더욱 그리워지고 보고 싶어집니다.

 

‘보고 싶다’. ‘그립다’는 순수한 우리말을 아무리 다른 외국어로 번역해도 이런 ‘말맛’은 못느낄 것입니다. 손, 발, 목, 몸, 불, 물, 길, 돈, 빛, 등 끝이없는 한 음절로 된 우리말입니다. 한 음절로 된 중요한 우리 말은 끝이 없습니다. 역시 다른 외국어로 번역해도 이런 말맛을 못 느낄 것입니다.

 

서로 잡으라 있는 손이요,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라 있는 손이요, 악수하라 있는 손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활짝 편 손이 아니라 주먹쥔 손으로 서로 맞대는 모습이 참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며칠 전 손잡았을 때의 참 편안하고 따뜻했 느낌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녁식사전 방문을 여니 도미니코 수사가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천국 입장은 이렇게!”

“하, 그렇군요.”

 

좁은 복도를 도미니코 수사와 잠시 웃으며 손을 잡고 식당까지 걸었습니다. 순간 따뜻한 손의 감촉과 더불어 참 편안한 느낌이었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손잡고 걸었던 선명한 추억들입니다. 반가운 좋은 이를 만나면 저절로 손잡게 되듯이 좋아하는 이들을 보면 마냥 손잡고 함께 걷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가장 행복한 시간은 좋아하는 분과 함께 손잡고 걷는 시간일 것입니다. 임종시도 사랑하는 이를 가장 잘 떠내는 방법은 조용히 따뜻한 손잡아 주는 일이라 합니다. 이런 손잡아 주는 사랑 역시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제 미사중 갑작스런 깨달음에 원고에 없던 내용을 강론 전에 장황하게 길게 나눴던 다음 내용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처럼 생각됩니다. 가정을, 부모를, 형제를, 성향을, 재능을, 건강을, 외모를, 탄생을, 죽음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타고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자유로운 듯 하나 자유롭지 못한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래서 원망이나 절망이 실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외적 환경들은 우리의 선택의 영역이 아닙니다. 하느님도 이런 것들을 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약함과 부족함과 한계에 아파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한한 연민을 지니라는, 자비로우라는 것입니다. 참 좋은 것들을 타고난 이들은 감사하며 주님을 대하듯 부족한 이들을 돕고 섬기며 함께 나눠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살 줄 아는 이들은 절대로 이런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각자 이런 타고난, 유리한 것들을 보지 않습니다. 참으로 각자 잘 선택하여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보람있게 사는 것을 봅니다.”

 

이런 요지의 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합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지킴도 선택입니다. 기쁨도, 행복도, 감사도, 웃음도, 사랑도, 선행도 선택입니다. 그러고 보니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합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칠죄종을 말합니다.

 

칠죄종중 교만이 아닌 겸손을, 인색이 아닌 자선을, 질투가 아닌 친절을, 분노가 아닌 인내를, 음욕이 아닌 순결을, 식탐이 아닌 절제를, 나태가 아닌 근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불신이 아닌 믿음을, 절망이 아니 희망을, 무관심이나 미움이 아닌 사랑을, 즉 신망애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영적전쟁중 자기와의 싸움의 요체는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부단히 좋은 덕목을 사랑하여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택하여 실천하여 습관이, 제2천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요 성령의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선택의 여정입니다. 죽을 때까지 끝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 날마다 영원한 생명의 행복을 발견, 선택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다음 셋의 발견과 선택입니다.

 

첫째 주님의 사랑, 주님의 발견과 선택입니다.

우선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발견이요 주님의 선택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떤 부자는 주님을 발견, 선택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구도자들의 한결같은 궁극의 질문으로 누구나의 영원한 소망일 것입니다. 십계명을 다 지켰는데도 영혼의 갈증은 계속됐던 부자에게 주님을 결정적 처방을 제시합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재물이 아닌 주님을 선택하여 따르라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발견, 선택했다면 무조건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재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집착하는 욕심이 문제입니다. 부자도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여 주님을 선택할 때 재물의 소유에 관계없이 이탈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부자는 주님을 선택하여 따르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으니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자체가 영원한 생명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자나 깨나 주님을 발견, 선택하여 주님을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의 행복입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시편의 고백을 기억할 것입니다.

 

둘째, 지혜의 사랑, 지혜의 발견과 선택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듯 지혜를 사랑하여 갈망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간절히 지혜를 할 때 지혜의 발견이요 지혜의 선택입니다. 때가 되면 주님은 지혜를, 혜안慧眼을 선물하십니다. 이미 지혜를 사랑하여 선택한 자체가 지혜로운 삶입니다. 착해도 무능하면 착함도 무용지물입니다. 착함보다 먼저 선택하여 찾아야 할 지혜입니다. 지혜로워야 착함도 빛납니다. ‘착하라!’ 보다는 ‘지혜로우라!’ 강력히 권고합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 전체가 살아있는 보석처럼 빛납니다. 참으로 항구히 기도하며 간청할 때 주어지는 지혜의 선물입니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한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재산이 들려 있다.

 

지혜에 비기면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흡사 지혜 예찬처럼 들립니다. 바로 이런 지혜를 사랑하여 지혜를 발견, 선택할 때 참 행복에 영원한 생명입니다. 바로 이런 지혜의 결정체가 하느님의 지혜인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셋째, 말씀의 사랑, 말씀의 발견과 선택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선택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발견이요 말씀의 선택입니다. 참 행복도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선사됩니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우리 영혼에 말씀은 식이자 약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영이요 빛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이요, 삶에 의미를 주는 말씀입니다. 제2독서 히브리서 고백 그대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 생각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여 선택할수록 하느님 앞에서 날로 진실하고 순수한, 투명한 삶입니다. 말씀 사랑이 우리 영혼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행복을 원하십니까?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하느님 나라의 구원의 문입니다. 환경탓할 수 없습니다. 순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행복을, 영원한 생명을 하루하루 날마다 발견,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발견, 선택하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의 연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혜를 사랑하여 지혜를 발견, 선택하는 것입니다.

평생 지혜의 연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사랑하여 말씀을 발견, 선택하는 것입니다.

평생 말씀의 연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로 압축됩니다. 주님의 연인!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연인, 지혜의 연인, 말씀의 연인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누구나에 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입니다.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시편90,12.14)

 

 

 

문화와 문명의 힘, 선교와 순교의 역사적 위력

      이기우 신부님

1. 영원한 생명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 하는 부자 청년에게 십계명을 잘 지키고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자 청년에게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것이어서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지만, 사실 이 요구는 예수님 자신의 삶을 반영한 조건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하느님의 크디 큰 선물을 받자면 절대로 손에 쥘 수 없는 자기 몫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당연한 조건이었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나라의 삶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그런 삶입니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 사랑의 최고봉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서로가 발을 씻어주라고 분부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이 삶은 서로가 서로의 필요와 기대에 열려 있는 삶과도 통합니다. 이 사랑의 진리가 영원한 생명의 문화를 일굴 수 있게 하고 하느님 나라의 문명도 가능하게 합니다.

그만큼 사랑의 진리는 왕의 권세보다 귀하고 온 세상의 금보다도 값진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담은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 나라의 말씀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살아있으며 힘이 있습니다. 이를 사회교리에서는 사랑의 문화, 사랑의 문명이라고 말합니다. 

 

2. 문화의 힘

10월이 우리 교회에게는 전교성월이요 로사리오 성월인데, 사회에서는 문화의 달로 지냅니다. 아마 오랜 옛적부터 우리 조상들이 이 시월에 하늘 제사를 바치면서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잔치를 통해 노래와 춤을 즐기면서 한민족 공동체임을 확인해 왔기 때문인 듯합니다.

요즘 한류가 한창입니다. 이 한류가 문화 개방을 선언하고나서 처음에는 가까운 중국과 일본부터 퍼져나가더니 중앙 아시아와 동남 아시아와 중동 아시아를 거쳐 동유럽과 서유럽, 아프리카와 남미, 미국에서도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 흐름의 내용도 처음에는 K-Pop이나 드라마와 영화 같은 대중 문화로 시작되더니 한식과 한복, 첨단 기술이 적용되는 전기자동차나 밧테리 같은 각종 상품, 아주 작은 반도체나 아주 거대한 배를 만드는 산업을 거쳐 각종 대형건설 공사, 심지어 가뭄이 심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식량 종자를 개량해 주는 농업이나 사막화 현상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고비 사막에서 15년째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는 조림 같은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치더니 코로나로 인한 보건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이즈음에는 의료와 방역장비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거의 모든 나라들이 보건위기로 인해 경제가 침체되어 있는데 비해서 한류로 인해 좋아진 한국의 이미지 덕분에 유독 한국의 수출 실적만 더 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아마도 단군 이래 한민족의 위상이 요즘처럼 높아진 때는 없는 듯합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국운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화의 힘입니다. 

 

3. 한류 문화, 선한 소프트파워

한류(Korean wave)라고 부르는 이 새로운 바람 내지 흐름에는 그 전과 다르고 다른 나라와도 다른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삶의 질곡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가능해진 민주화의 영향이 첫 번째입니다. 빈부격차를 다룬 영화 ‘기생충’이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무기력해지고 왜소해진 개인의 절망감과 상실감을 다룬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이 한국을 미화한 작품이 아니지요. 그보다는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을 만큼 보편적인 주제를 가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견해가 첨단 전자제품과 기술을 통해서 전 세계에 퍼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IT 산업화의 영향이 두 번째입니다. 창의성을 바탕으로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의 기술력 덕분에 세계인들은 한국과 손을 잡으려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무엇보다도 한류 속에는 그것이 노래건, 드라마나 영화건, 상품을 팔거나 공사를 시공하건 간에, 그리고 다양한 국제 협력을 함에 이르기까지 상대방의 처지를 배려하는 선한 영향력이 담겨 있습니다. 과거 다른 강대국들의 영향력은 군사력과 경제력에 기반한 압력이었으므로 억압과 착취 그리고 수탈과 종속 등을 수반하는 패권적 표현이었던 데 반해서, 한류에는 패권적 요소는 전혀 없고 닮고 싶어 하게 만드는 매력만 물씬 풍깁니다. 이러한 매력은 그동안 알려지 못했던 한민족의 예술성과 창의성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선함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류 문화는 패권적 하드파워가 아니라 선한 소프트파워입니다. 

 

4. 한류의 뿌리, 홍익인간

이런 선함은 정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요 누가 시킨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한국인들의 정신적 유전자 속에 자리잡고 있을 만큼 깊은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저는 이 뿌리가 단군왕검 이래 건국이념으로 내려온 ‘홍익인간’ 정신이라고 봅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부와 영토와 패권을 추구하기 마련인 건국신화에서, 유독 한민족은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선한 영향력을 추구하였습니다. 이것이 문화의 기본이요 매력입니다. 

 

예로부터 하느님을 믿어온 히브리인들의 지혜를 담은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시며 자비하신 주여, 당신 말씀으로 온 누리는 만들어졌고 당신 지혜로써 사람을 지으셨나이다. 당신 손수 만드신 창생을 거느리시며 그들이 거룩함과 의로써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고 정직한 마음으로 통치하게 하소서”(지혜 9,1-3). 이처럼 한겨레도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시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이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 즉 거룩함과 의로움으로써 세상을 다스리자는 진리를 민족의 목표로 제시한 채 반만년의 역사를 흘러 왔던 것입니다. 

 

이 중에서 특히 의로움의 가치는 두드러집니다. 국난이 닥칠 때마다 지배층의 대응방식이 형편없었어도, 민초들은 스스로 ‘의병’이라고 자처하면서 개미처럼 일어나 민족의 위기를 극복해 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일제강점기에도 의병이 일어났었습니다만, 외국에서는 보기 어렵고 오직 한국에서만 볼 수 있었던 사례로서 최근의 대표적인 두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1998년 외환위기가 닥쳐서 나라 살림이 거덜나게 생겼을 때 너도 나도 장롱 속에 묻어두었던 금붙이를 들고 나온 금모으기 운동이 그렇습니다. 이때 351만 명이 참여하여 227톤의 금을 모았는데, 이 희한한 애국 행렬을 본 외국 투자가들이 감동하는 바람에 나라빚을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겨 다 갚았습니다. 또한 2007년 태안 앞바다를 지나던 유조선이 충돌하여 기름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서해 바다가 검게 뒤덮였을 때 너나 할 것없이 무려 123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들어 그 추운 날씨에도 손으로 일일이 기름띠를 닦아내서 깨끗한 바다로 되돌려놓은 기적도 그렇습니다. 

 

5. 한류의 꽃, 순교 정신

홍익인간 정신이 한류의 뿌리라면, 한류의 꽃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무려 백 년의 박해 동안 보여준 순교 현상과 이를 계승하려는 순교 정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엄청난 사회적 모순이 백성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옆 나라 중국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저술한 책들이 방아쇠가 되어 강고한 성리학 체제를 무너뜨릴 기세로 천주교가 맹렬하게 번져나갔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혹독한 박해를 받아야 했고, 그것도 백 년 동안이나 받았습니다.

한민족 역사 반만년 동안에 지배층과 일부 피지배층이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닌 적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만, 천주교처럼 피지배층이 독자적인 체계를 지닌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백 년 동안 저항한 사례는 전무후무합니다. 옳지 못한 사회적 모순에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만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이들이 겨레 안에 뿌려 놓은 선한 유전자는 매우 진한 향기를 풍겼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남녀는 동등하다”, “사회적 차별은 폐지되어야 하며, 개인들의 양심과 사상은 자유로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인격은 존중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천주교 신자들이 단군의 후손으로서 같은 후손인 한겨레에게 던진 메시지였습니다. 

 

6. 의로움을 넘어서는 거룩한 실천, 순교

특히 지난 2014년에 복자품에 오른 순교자들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한 본보기입니다. 사랑의 이중 계명이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합니다. 이 순교자들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예수님 말씀대로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쳤습니다. 

 

124위 순교자들은 당시 불합리한 사회 구조와 성리학적 가치 체계 안에서 천주교의 참된 가치를 발견했고, 이를 삶으로 드러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천주교 신자가 된 후 박해가 닥치자 배교하기보다는 차라리 산 속으로 찾아들어가 세운 교우촌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하였고, 순교는 이러한 신망애덕의 실천에서 나온 결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순교자들은 박해 중에도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희망하면서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7. 하느님 믿음, 이웃 사랑

이 관심은 생각이나 마음만으로 지닌 것이 아니었고, 순교자들에게 신앙은 실천이었으므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이들은 사랑의 삶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간직했고, 자신들의 삶은 천주교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삶은 결코 그릇되지 않다는 사실을 실천적 행동으로 세상과 사회에 웅변해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순교자들의 내면세계는 완덕의 추구라는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만큼 내면의 가치는 외양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들이 드러낸 외양의 특성은 가진 재화를 나누고 공동체적 신앙생활 그리고 개인적 순결에 대한 지향 등을 통해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불합리한 유교적 신분질서나 남녀 차별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존엄함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였습니다. 이러한 외양으로 나타난 실천의 내면세계는 천주교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교우촌(敎友村)이 함께 사는 주거 공동체였다면, 이들에게는 명도회(明道會)라는 교리 학습 공동체가 붙어 다녔습니다. 그리하여 주교요지와 천주가사를 비롯한 여러 서책을 공부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종교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복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8. 새로운 사회, 새로운 인간관계

또한 당시의 교회에서는 남녀 간의 순결을 강조했습니다. 이 순결은 비단 미혼 여성의 순결이나 과부의 정절만을 의미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가치가 되었습니다. 박해 시대 강조되던 순결은 이제 개인윤리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전망하는 윤리로 발전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 교회의 순교자들은 향주삼덕의 실천을 통해서 내면적 완성을 추구했고, 이로 인해 외양적으로도 신자로서의 새로운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는 순교 인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들의 순교 인식에 대한 바탕에는 계명을 철저하게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이들 순교자는 순교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르는 행위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순교자들은 체포된 이후 신앙과 배교의 양자택일을 강요받을 때에 순교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의로움을 넘어 거룩하게 살아가려는 의지였습니다. 

 

9. 죽기 전에 부활을 살다

순교자들이 추구한 완덕의 삶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삶이었으며, 결국은 순교를 향한 열망으로 드러났습니다. 순교자들이 가진 순교 열망의 근원은 첫째, 하느님께 관한 인식이 분명했기 때문이며, 둘째 순교 자체를 하느님의 부르심이자 명령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셋째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순교를 각오하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만큼 일상생활 속에서도 순교의 은혜를 청원했고, 순교의 그날을 기다리면서도 일상생활을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이처럼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순교 인식은 그 안에 향주삼덕이 응축되어 있고, 순교를 일상생활 안에서 완덕을 구현하는 행위로 이해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은 완덕의 지향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합일과 자기완성을 바랐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순교자들은 내세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갈망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신앙을 지킴으로써 현세에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이미 부활한 삶을 살아갔던 이들이야말로 선교사들의 모범입니다. 순교 정신과 선교 사명을 이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한류의 열매는 순교자들이 모범을 보여준 사랑의 문화로 세상 속에서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는 일입니다. 순교 정신으로 임한다면 그 어떠한 열악한 선교 환경에서라도 능히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께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오늘날 5백 만 한국 가톨릭 신자들의 존재가 입증합니다. 이만하면 순교 정신이 한류의 꽃이라 할만 하지 않습니까?  

 

10. 알바트로스 이야기

날개짓을 하지 않으면서 오직 바람의 힘으로 창공을 나는 알바트로스라는 새가 있습니다. 스스로 날개짓을 하지 않아도 불어오는 바람의 힘으로 지구를 몇 바퀴나 힘들이지 않고 날 수 있는 유일한 새입니다. 다만 날개가 크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날고자 하면 뒤뚱거리다가 주저앉습니다. 그 몸짓이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 바보새 알바트로스가 제 역할을 하는 때는 큰 바람이 불어올 때입니다. 이 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커다란 문화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바로 한류입니다. 저는 한국 가톨릭의 선교가 한류를 타고 날아오르는 꿈을 꿉니다. 빠르면 한 세대 안에, 늦어도 한 세기 안에 K-Catholic의 알바트로스가 날아올라 지구촌에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는 밀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얻는 지혜

      키엣 대주교님

평생 모아 온 재산을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젊은이는 슬펐습니다. 그를 보는 예수님도 슬펐습니다. 모든 계명을 지키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말하는 그가 당신보다 재물에 더 얽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그 믿음을 지킬 수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그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걸림돌이 되는 순간, 주님의 손을 놓고 세속의 가치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주님께 돌아가리라 다짐하지만 믿음보다 더 큰 즐거움에 현혹된 다음 권력과 명예, 유혹을 외면하는 것은 주님을 버리는 것 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명예, 권력을 가진 사람도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빈 손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더 많이 가지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갑니다. 어느 곳간에 쌓이는 재물이 나의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세에 쌓여가고 있는 재물은 볼 수 없기에 믿을 수도 없습니다. 더 많은 재물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을 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참 행복을 얻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은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 때문에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고 주님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참 행복을 구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주님을 택하고,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기에 주님과 나 사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주님께 다가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버릴 수 있다면 주님을 얻는 영광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행복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영원한 가치를 위해 눈 앞의 이익을 버릴 줄 압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지혜를 얻는 열쇠입니다.
주님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 세상 어떤 것보다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영원한 가치를 선택하는 것임을 알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늘나라 나의 곳간에는 얼마나 많은 재물이 있습니까?
2.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혜는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3.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내가 가진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마르 10,17).”

 

여기서 ‘어떤 사람’은 부자이고(마르 10,22), ‘권력가’이고(루카 18,18), ‘젊은 사람’이고(마태 19,22), 십계명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경건한 신앙인입니다(마르 10,20-21).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그의 질문은, 그가 십계명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생각하면, ‘쉽고 빠른 길’을 찾은 것은 아니고, 일상적인 신앙생활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일’(특별한 극기 고행 같은 것)을 물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신앙생활의 목표이고, 신앙인의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물은 것은, 그 목표를 잊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고,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스승님’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선생님’입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학자나 교사로 존경하기는 하는데, 메시아이신 분으로, 또는 주님이신 분으로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고, ‘주님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고, 우리가 순종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냥 떠났습니다(22절).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십계명을 잘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19절).

이 말씀은, ‘특별한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 할 계명들을 제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고 자비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느님께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런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일’이 아니고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잘 받으려면 ‘삶’ 전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십계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마태 19,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0-22).”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신 것은, 그가 십계명을 다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라는 말씀은, 십계명에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십계명 실천’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부족한 점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십계명을 다 잘 지키려고 노력하긴 하는데, 마음의 일부가 항상 재물 쪽에 가 있어서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라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마음의 일부가 재물 쪽에 가 있으면,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합니다.(사랑은 온 마음을 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착심 자체가 무슨 ‘큰 죄’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크게 방해하는(사실상 가로막는) ‘걸림돌’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그리고 그 걸림돌을 치우기를 거부한다면 그때부터는 죄가 됩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방법을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대로 실천한다면, 부족한 점을 채워서 신앙생활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1)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을, 사도들을 부르실 때 하셨던 말씀과 같은 말씀으로 생각하면,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버리고 나의 제자가 되어라.”로 해석됩니다.(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라는 말과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도들과 같은 급의 제자로 삼고 싶어 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나를 믿어라.”로 생각하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평생 실천해야 할 과제가 됩니다.

3)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하고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신앙인이 수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으로 갈 때에는, 지금 애지중지하며 아끼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빈 손’으로 가야 합니다. 그 부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특별한 일’(실천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자기 힘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는데, 그래도 나중에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했다면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퍼하기만 하고, 끝까지 자신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면, 재물이라는 걸림돌에 막혀서 영원한 생명의 반대쪽으로 갔을 것입니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지혜 7,7-11)는 하느님과 물질을 비교하면서 지혜로운 선택을 권고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왕좌와 왕권보다 지혜를 더 좋아했던 솔로몬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었고, 좋은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1열왕 3,5-15). 그래서 지혜서의 저자는 솔로몬이 기도의 답변으로 얻은 지혜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마치 솔로몬이 회고하는 형식으로 말합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주님께 직접 청하지는 않았지만, “지혜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그 왼손에는 부와 영광이 들려 있고, 지혜의 길은 감미로운 길이고, 그 모든 앞길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다.”(잠언 3,16-17)고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가르침과 자기 아버지 다윗의 규정을 따라 잘 살았던 솔로몬의 꿈(1열왕 3,1-15)과 지혜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이 지혜가 곧 하느님의 말씀이며, 하느님 자신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여정을 환하게 비춰주는 빛과 같은 지혜는 세상의 그 어떤 왕권, 그 어떤 보석, 그 어떤 인간적인 것들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고 말합니다(욥 28,12-15). 지혜가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은 욕심 없으니 아낌없이 나눠주고 지혜를 많이 지닌 사람은 재산을 감추지 않는다고 합니다(지혜 7,13).

복음(마르 10,17-27)은 영원한 생명을 원했던 어떤 부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수난과 죽음의 길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 앞에 젊고(마태 19,22), 권력을 가진(루카 18,18) 어떤 부자가 달려와 대단한 존경심으로(“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부릅니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선하다”는 말은 오직 하느님께만 적용되는 표현이었습니다. 젊은 부자는 다짜고짜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하느님을 앎은 온전한 정의이고 하느님의 권능을 깨달음은 불사의 뿌리”(지혜 15,3)라고 했듯이,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면서 기본적인 신앙생활의 요청(십계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며, 실천했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이 사람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젊은 부자에게 특별히 “횡령해서는 안 된다.”(신명 24,14; 집회 4,1)는 계명을 첨부하십니다. 아마도 권력가였던 부자는 자기만 살려고(이사 5,8) 가난한 이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을 쌓아두는 것(이사 3,14; 미카 4,1-4)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과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 하느님을 무척 사랑했고 잘 섬겨왔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곧 이어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는데, 하늘에 있는 보물을 차지하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다음에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부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는데,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한 것입니다. 어쩌면 젊은 부자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란 부자로서 예수님께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었으며, 그에게 재물이란 곧 선하신 하느님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 이런 사람이야!” 하면서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한 것입니다.
젊은 부자가 떠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고 하십니다. 오만한 부자로 살면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1티모 6,17)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며 떠나간 부자가 어떤 사람인지 제자들은 몰랐는지 예수님께서 혹독한 표현을 하신 것에 놀랐다고 합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마음속에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서 하느님의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하늘의 보물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4,19).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하느님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욥 42,2)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오로지 하느님께서 원하실 때, 원하시는 대로 주시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히브 4,12-13)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하기 때문에 자기는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기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라고 합니다(4,1).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 기쁨이 아니라 날카로운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게 마음에 와서 꽂힌다면 그것은 아직도 그가 완고한 마음을 갖고 있으며 불순종의 본을 따르기 때문입니다(4,7.10). 히브리서 저자는 복음과 율법을 비교함으로써 복음의 우월성을 밝히려고 위협적인 말을 쓴 것입니다. “날카로운 칼”의 입을 지니신(이사 49,2)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그 구원의 말씀이 우리를 심판하는 소리로 들리는 것은 예수님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요한 12,48). “날카로운 쌍날칼인”(묵시 1,16)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한 번 듣고 지나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 살아있고, 효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이들에게는 평화의 선물입니다(마태 10,34). 복음의 젊은 부자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믿음으로 눈여겨 바라보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어낸다면 우리 마음을 찌르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셈을 해드려야 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찾아온 이는 재물을 쌓아두는 것과 나누는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아들여 회개하지 않는다면,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재물로 인한 풍요로움 때문에 우리를 구원에서 제외하지 않으십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조건이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한 일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9,24) 자신의 풍요로움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지혜가 전혀 없는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혜가 없어서 이웃과 나눌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늘 슬픔을 가져다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날카로운 쌍날칼과 같아서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권력가였던 젊은 부자가 재물을 쌓아놓는 일이 아니라 지혜롭게 나누는 일에 더 관심을 가졌었더라면, 부당하게 횡령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에게 쌍날칼처럼 날카롭지 않았을 것이고, 슬퍼하면서 예수님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에는 애당초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혜롭지 못했고, 율법주의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부와 업적을 자랑하는 것에만 온통 관심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이 부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쌓아놓은 재물을 바라보는 흐뭇함이 하늘의 보물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떠나간 것입니다.

부유함은 하느님의 축복이고, 그것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더욱 풍요로워진 것이지만,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더 많은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살려는 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하면서 회개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느님의 말씀보다 재물을, 이웃보다 자기 업적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완고한 이들에게는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이 파고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구원이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기적과 같을 것입니다. 복음의 젊은 부자가 실천했다는 계명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도 잘 지킵니다. 아니 그들이 더 잘 지킬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한 주간동안 노력해봅시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 분 앞에 무릎을 끓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라고 질문합니다. 마태오는 그 사람을 ‘젊은 이’(마태 19,22)로 루카는 ‘어떤 권력자’(루카 18,18)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은 구약의 계명 실천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십계명 일부를 예로 듭니다.

질문을 한 그 사람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마르 10,20)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그런데 그 사람은 울상이 되어 슬피 떠납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떠나자 주님께서 주이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주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운 반응을 보입니다. 왜 그렇게 놀랬을까요? 구약의 사고에는 욥 이야기에서 나오는 한 예처럼(욥 1,1-3; 4,42,12),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재물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는 스승의 말씀에 제자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것입니다.

 

이번에 다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25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더욱 놀랍니다. 낙타와 바늘귀는 크기 자체에서도 ‘큰 것의 극’과 ‘작은 것의 극’이기 때문에 불가능으로 이어져 제자들의 반응은 더욱 놀랍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이라며 서로 말합니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낙타’라는 것과 ‘굵은 밧줄’의 해석을 놓고 설명합니다.

히브리어 ‘낙타’인 가말(גָּמָל)을 희랍어로 번역할 때 ‘카멜로스 Kamelos κάμηλος’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람어를 쓰셨다면 ‘가말’대신 ‘캄라 gamla גמלא’(밧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같은 단어의 발음 ‘카멜 gamela גמלא (낙타)로 잘못 옯겨 쓴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밧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번역할 때 ‘낙타’로 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밧줄로 바늘귀에 궤는 것이 더 쉽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낙타’나 ‘밧줄’로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일부학자들은 이 바늘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합니다.

‘바늘귀’는 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한 도시에 달려 있는 일종의 문을 말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야파문은 전형적인 ‘바늘귀’로 불릴 정도로 좁아서 가축들이 드나드는 것도 쉽지가 않다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낙타가 짐을 잔뜩 지고 그 문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가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 시대에는 ‘바늘귀’라고 하면 예루살렘을 통과하는 좁은 문을 칭했는데 세월이 가면서 그 바늘귀라는 말은 남아 있고 그 뜻을 해석해주는 배경은 없어진 것이기에 본문에는 그대로 ‘바늘귀’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의 설명을 풀어보자면 ‘낙타가 예루살렘의 한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이지요.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낙타’나 ‘바늘귀’가 나오는 본문을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시도했지만 초기의 번역문에 일부에서만 이 시도가 있었고 대부분의 번역은 지금의 ‘낙타’와 ‘바늘귀’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해석에는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낙타와 바늘귀의 단어가 어떤 의미를 지녔든 주님께서 하시고자하는 말씀의 골자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마감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여기 마르코 복음에서 ‘부자’라는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라는 이야기와 연결시켜 보면 그 의미가 살아 날 수 있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내용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자는 가난한 라자로의 배고품과 고통을 자신의 재물에 가려 몰랐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자신의 행복에 취해서 정작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재물을 당연히 자신을 소유로 여기고 나누는 것에는 인색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재물이 많은 구약의 축복받는 의미보다는 자기 재산을 나눌 줄 모르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 여기저기에 있을 수 있고 그들은 이웃과 담을 쌓고 자기의 세계에서 벗어날 줄을 모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은 아무리 재물이 있는 부유한 사람이라도 세상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떨어질 수 있어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이 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어 당신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세상의 어떤 재물과 권력에도 좌우되지 않고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버릴 줄 알고 떠날 줄 아는 지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가장 대표적인 깨달음의 종교가 불교라고 합니다. 왜냐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 또는 붓다가 바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고, 석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깨닫게 되면 부처가 된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궁극적으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고, 이 깨달음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거지요.

그리고 진리란 도리라는 말이 있듯이 행복에의 길입니다. 그러니 지혜란 진리를 통해 행복에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고, 그러니 행복의 길을 모르고 불행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며, 그러니 행복의 길을 모르는 무지가 어리석음이고, 불행의 길을 행복의 길로 잘못 아는 것도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 지혜서 말씀처럼 지혜가 무엇보다 소중함을 또한 알고 있기에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고,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비교할 때 한 줌의 모래처럼 여깁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부자 청년이 아니라 어리석은 청년입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에 지혜의 눈 곧 혜안慧眼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은 혜안이 있다고도 하고, 반대로 돈에 눈이 멀고 욕심에 눈이 멀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욕심에 눈이 멀어 돈이 이웃보다 가치있음을 보지 못하고, 돈에 집착하여 사랑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이 세상에 안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천상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이 세상 행복에 안주한 그였는데 이 세상에서 행복할 때 그 행복과 그 안정을 깨고 싶지 않고, 또 그 행복과 안정이 영원히 갈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너무 고통스러운 사람이 이 세상 삶을 빨리 끝내고 싶고, 이 세상에서 너무 불행한 사람이 천국 행복을 더 바라지요.

그러나 이 청년의 어리석음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이고,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몰랐기에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임을 몰랐고, 그래서 참행복의 길과 영원한 생명의 길이신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오늘 그가 예수님께 온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지요. 복음은 그 첫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열성을 보입니다. 느릿느릿 걸어온 것이 아니라 달려왔고, 길 떠나시는 주님을 붙잡아 세웠으며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열망과 얻고자 하는 열성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참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몰랐던 것이고, 또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았으며 그래서 다 버리고 떠나고 싶지도 주님을 따르고 싶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지혜는 얻기 위해 버릴 줄 아는 것이요. 따라 가기 위해 떠날 줄 아는 것입니다.

더 풀이하자면 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덜 소중한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며, 주님을 따라 가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날 줄 아는 것임을 깨닫는 오늘입니다.

 

 

 

소유하되 사로잡히지 않는 삶
      이상권 미카엘 신부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을 묻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잘 지켜왔던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볼 정도로 바른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말씀하시며,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며 영원한 생명으로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제가 선교중인 남수단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불립니다. 유엔의 식량 원조 없이는 소위 ‘보릿고개’ 같은 시기를 넘기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이웃이 힘들 때 서로 살피고 돕습니다. 그들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살고 있는 저에게도 달걀도 가져오고 강에서 잡은 생선도 가져다줍니다. 공소를 방문하면 닭도 잡고 염소도 봉헌합니다.

쉐벳 본당에 아브라함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시장에서 일하면서 자기가 받은 월급의 10퍼센트를 매달 교무금이라며 가져옵니다. 이들에게는 매우 큰돈입니다. 이만큼을 본인을 위해 쓴다면 다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이웃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배웁니다. 

더 갖고 싶어 더 누리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을 더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앞에서 가진 것을 내려놓으면 하느님은 더 크게 갚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는 바른 사람이었지만 많은 재물을 버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어떤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성경에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배의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따라라.’ 하고 부를 때 내가 그것을 버릴 수 있으면 됩니다. 쉐벳 본당의 아브라함이 어려운 와중에 교무금을 봉헌하고 이웃 사람들과 나누고 사랑을 베풀었을 때, 그들은 ‘버리고 따랐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유하되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버리고 따를 수 있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불교 용어 중에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뜻으로,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재물, 명예, 성공, 관계에 대한 욕심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져버리라는 의미입니다. 당나라의 선승 '조주스님'이 깨달음을 얻고자 자신을 찾아온 중생들에게 이 '방하착'을 강조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이 더 이상 내려놓을게 없이 탈탈 털어버리고 나면 그제서야 '착득거(着得去)'하라고 했다 합니다. 이는 '지고 가라'는 뜻으로, 모든 욕심과 집착을 온전히 내려놓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얻게 된 그 깨달음과 편안함을 마음에 지니고 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행복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항상 무엇인가를 더 득(得)하려고 애쓰지만, 참된 행복은 오히려 그 득하려는 마음 자체를 내려놓아야만(放) 누릴 수 있는 상태라는 가르침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평생 무엇인가를 '얻을 생각'만 하며 살아온 그가, 그래서 많은 재산을 모으는데 성공한 그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많고 복잡한 율법 조항들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기본이고, 마음에도 없는 달콤한 칭찬으로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컸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의 그런 순수한 갈망을 어여삐 보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제자'라는 자들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데에만, 더 풍족하고 부유한 삶을 누리는데에만 정신이 팔려 스승님이 하시는 말씀을 귓등으로도 안듣는 상황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싶다는 간절함으로 당신을 찾아왔으니, 그런 그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보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의 순수한 갈망은 어여삐 보실지라도, 그 갈망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은 올바르게 이끌어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하나, 단지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죄를 저지르지 않는 수준에 머물렀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즉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라는 소명에 충실히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 밖의 것들을 하는데에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봐야 '하느님 나라'에는 가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그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아낌없는 나눔과 자선으로 그가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울 절호의 기회를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주신 그 소중한 기회를 제발로 걷어차 버립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마음보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 손에 지니고 있는 그 쓸데없는 것들을 내려놓아야만, 그보다 더 귀한 선물들을 받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것들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그가 지금 흘리는 아쉬움의 눈물은 세상 종말의 순간 절망과 탄식의 피눈물로 바뀔 것입니다. 그 때 가서 뒤늦게 후회해봐야 한 번 지나쳐간 기회는 되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단지 재산을 많이 가져서가 아닙니다. 세상 것들에 욕심내고 집착하여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비대해진 상태로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지금 내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냥 내려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백배로' 받을 상급을 생각하며 더 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지금 가진 것을 잠시 내려놓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즉 나의 말과 행동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 기꺼이 내려놓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의 삶을 모자람 없이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아홉을 가지면 열을 채워야 충만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족한 인간의 사고방식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당신을 위해 그 아홉을 전부 내려놓는 이를 백 배, 천 배 더 큰 은총으로 채우십니다.

 

 

 

함께 살아야 하는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살기 좋아진 때부터이다.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커 갔다. 그 전에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려 가진 것 나누며 공동체를 생각했다. 모두 가난하면서도 마음의 부자로 살았었다.
어느날부터 물질이 부자 되더니 마음이 황폐해져 갔다. 사랑을 잃어갔고 자기만 아는 세상, 자기만 뽑내는 세상, 돈이 하느님이 된 세상이 되었다. 가진자는 더 가지려 하고 돈에 중독되어 욕심이 욕심을 낳고 스스로 무덤을 판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 불로소득이 커지면 커질수록 흥청망청 인간이 되길 포기해 갔다.
성체를 모심은 우리가 일상에서 남을 위해 빼기를 하고 나누기를 하라고 했는데, 욕심만 키우는 기도도 아닌 기도를 했다. 계속 자기만을 위해 더하기 기도를 했고, 거기다 곱하기를 해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며 비리를 저질렀다. 불로소득으로 50억 거액을 챙겼다고 좋아라 세속 산수를 하더니 가족 전체가 오염되어 인생이 썩어 버렸다.
예수님께서 ‘뭐 먹을 것이 없는가?’물으셨을 때, ‘물고기와 빵 몇개가 있다’ 답했고 나누어 주어라 했을 때, 그 말씀의 뜻을 제자들은 몰랐었다. 이 많은 배고품의 사람에게 이 보잘 것없는 양식으로 대책이 서질 않으니 각자 위치로 돌려보내 해결토록 하자고 한 제안이 제자들이 예수님께 들려준 최선의 답이었다. ‘이를 주고나면 우리는 먹을 것이 없는데 우리가 가진 것까지 주라고 하시니 원망스럽고 ‘굶어 죽을 것 같아 결코 못합니다’ 이것이 이기주의요, 개인주의로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남이야 죽건 말건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세속 생각이었다.
부자 청년이 있다. 부자 청년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마르10,17-30) 이것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답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하나 뿐인 당신 생명을 매일 미사성제를 통해 우리에게 양식으로 내어 주신다. 더하기 셈법이 아니라 빼기 셈법을 사시고, 자신을 물질적으로 부자가 되는 곱하기 셈법을 사시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모두를 살리기 위한 내어주는 나누기 셈법을 실천하라고 날마다 미사성제로 성체를 내어 주시고 계시다.  그토록 영원한 생명 위해 미사를 통해 삶의 지혜를 살라 하시는데 여전히 우리는 신앙인이 아닌 세속인이 되어 부정축재나 저지르고 미소 짓는다. 이래가지고서야 행복하겠는가? 불행과 파멸이 기다릴 뿐이다.
우리 신앙의 길은 신비에 쌓여 알아듣는 다는 것이 어렵기만 하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 삶을 깊이 있게 바라다 보고 당신을 따른다고 나선 부자청년처럼 나에게도 가진 것 다 팔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나 또한 울상을 짖고 있지 않은가? 성체성사의 신비를 마음으로 깊이있게 깨닫는 은혜의 주일이었으면 한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자 청년을 만나시고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먼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기본적인 계명을 잘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그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대답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청년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화를 하나 들려드리자면, 어느 날 사탄이 한 청년을 찾아와서 게임을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사탄은 청년에게 열 개의 병을 보여주면서 아홉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 있고 한 개의 병에는 독약이 들어있는데, 꿀이 들어있는 병을 찾아 마시면 엄청난 액수의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청년은 아무리 자신의 형편이 가난하다고 해도 생명을 건 게임을 할 수 없다고 하며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계속해서 청년을 유혹하였고 마침내 병 하나를 골라 마셨습니다. 청년은 다행히 죽지 않았고 엄청난 돈을 받고 부유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돈 맛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청년이 가진 돈이 바닥날 무렵 사탄은 또 다시 찾아와 같은 게임을 제안하였습니다. 사탄은 이번에는 아홉 병중에 한 병을 제안하면서 판돈을 두 배로 올렸습니다. 청년은 운 좋게 이번에도 꿀물이 든 병을 골라 마셨고, 사탄으로부터 엄청난 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그렇게 돈을 쉽게 얻으면서 점점 방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알코올과 마약과 도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돈이 떨어질 때마다 사탄을 찾아서 게임을 스스로 제안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간 청년은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되었고, 마지막에는 사탄과 두 병 중에 한 병을 고르는 절체절명의 게임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게임에도 운이 좋게 꿀물을 마신 노인은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남아 있는 독약이 든 마지막 한 병을 스스로 마시면서 그 노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처음부터 독약이 든 병은 없었고 열 병 모두 다 꿀물이 들어있었지, 하지만 너는 이미 돈이라는 독약에 죽어가고 있었던 거야. 너는 그렇게 돈의 노예로 살다가 정말 인생의 소중한 가치, 영원한 것을 결국 잃어버리게 된 거야. 이제까지 네가 받은 돈의 대가를 내가 있는 지옥에서 고통과 함께 지불해야 할 것이야.” 


오늘 복음에서 보면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자 하느님의 제안입니다. 그 제안의 요점은 우리가 가난한 이를 위한 나눔, 곧 사랑의 나눔을 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커다란 은총을 채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제안이 아닌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인생의 모든 소중한 가치, 그리고 영원한 생명까지도 잃어버릴 수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각자의 부유함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여쭙니다. 기본 계명을 성실히 준수하며 살아온 이스라엘의 모범적 일원으로서 더욱 완전한 삶을 살고 싶는 듯 보이지요. 예수님도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거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라고 권유하십니다. 그를 매우 기특하게 보셨기 때문에 알려 주신 숨은 비책이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2)
그런데 이 말씀이 부유한 그에게는 좌절로 가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슬퍼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지요. 무엇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재물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는 재물이 자기 재산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일 수 있고, 능력이나 가족, 타이틀, 우월감, 인맥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번듯이 구축해 놓은 자기 이미지가 반드시 지키고픈 재산일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포기하기 정말 어려운 자신만의 무엇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일화는 자기 삶에서 어떤 것도 내려놓지 않은 채, 구원까지 덤으로 얹어 보려는 안일한 욕망에 도전장을 던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은 액세서리나 스페어 부품이 아니라 전 존재를 거는 결단이고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 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03)
자신을 나름 빛나게 해주는 각자의 재물을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내려 놓을 때,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버림과 따름의 동기가 반드시 예수님과 그분 말씀 때문이어야 하지요.

제1독서는 다른 무엇보다 지혜를 추구한 이의 고백을 들려줍니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지혜 7,11)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 권력, 명예, 성공, 겉꾸밈을 추구하며 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선택합니다. 그분을 청하면 다른 모든 것도 곁들여 받는다고 지혜를 얻은 이가 말하지요.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을 소유한 이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 말씀이 어떤 분이신지 들려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말씀의 본성에 대한 히브리서 저자의 표현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어쩌면 우리가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 같지만, 실은 말씀께서 다가오셔서 우리를 듣고 빚어가고 계시는 게 아닐까 합니다. 오늘 슬퍼하며  떠난 복음 속 어떤 사람에게서처럼, 말씀 앞에서는 신앙 고백의 옥석이 가려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각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또 그것으로 가난한 이들을 섬길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예수님 시선 앞에 더 진실되게 더 뜨겁게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나의 선택을 의식하기
      이윤정 요안나(비폭력대화 국제공인 트레이너)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한다.’라는 의무감으로 억지로 하는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학교나 직장에 다니는 것, 식사준비나 빨래, 청소와 같은 집안일, 결혼이나 출산, 육아, 제사나 명절, 집안 행사 참여, 결혼식이나 생일파티, 장례식에 가는 것, 종교의례, 누군가와 대화, 회의하기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 일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시나요?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 즐겁게 하려고 마음먹어보기도 하고, 사회적인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한다며 세상을 원망하다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한다는 생각에 억울해서 신세 한탄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충족되는 욕구에 초점을 맞추며 일부러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든지, 충족되지 않는 욕구에 초점을 맞추어 비관적인 표현을 하거나 자신을 불행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조금 깊게 생각해 보면, 억지로 한다고 불편해하는 일도 무언가 충족되는 욕구가 있어서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매 순간 충족되는 욕구와 충족되지 않는 욕구는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집안 행사에 참석 여부를 선택하는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집안 행사에 참석하게 되면 어떤 욕구가 충족될까요? 친밀감을 나누고 경험을 공유하는 것, 소식을 나누고 관심을 표현하는 것, 축하와 돌봄 등 충족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충족되지 않는 욕구 때문에 짜증이 납니다. 쉬지 못하고 움직여야 하니 휴식이 모자라고, 때로는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갈등이 생기거나 편치 않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방식으로 충족되는 것과 충족되지 않는 것을 살펴보고 선택하면 삶의 주도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안 가기로 선택한다면 휴식, 재미, 편안함은 충족할 수 있지만 친밀감, 공유, 나눔, 관심, 축하와 돌봄을 위해서 무엇(축의금이나 선물을 보낸다든가 통화 등)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를 권합니다. 반대로 참석하기로 선택한다면 휴식, 재미, 편안함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아이디어 (참석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돌아와서 쉴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등의 자기 돌봄)를 떠올려 봅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나의 선택임을 의식하면서 그 순간에 충족되는 것을 축하하고, 충족되지 않는 것을 돌볼 수 있다면 보다 행복해질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도록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율법 근본정신 하느님사랑과 법률위주 생활을 구분하십니다.
법치주의의 삶과 하느님의 사랑중심 삶을 재물사용으로 표현하십니다.
법대로 잘 살았다는 이에게 재산을 불우한 이웃들과 나누라 하셨어요.

세상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도록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하늘사랑나라에 들기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세상 법만 따르는 사람보다 하늘사랑대로 사는 사람을 좋아해야 되죠.

세상돌아가는 게 다 재물 때문이라 한심한데도 그렇게들 살고 있네요.
하늘에다 보물을 쌓기 위해 세상서부터 준비하는 사람 참 훌륭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지난 한가위에 유 신부님과 동생 수녀와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어머님 아비님들은 왜 우리 자식들의 요청을 들어 주셔야만 했을까?’ 
  ’안 들어 주셔도 그만이었을 텐데!’ 
  ‘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의 부모님들께 요구했어야만 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손으로 땀흘려 마련했어야 할 일이 아니었던가?’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해줘도, 들어주고 또 들어주어도, 자식들에게서 좋은 소리 한번 못들을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왜 들어 주시려고 그토록 애쓰셨을까? 그런데도 ‘왜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사주고,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먹이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셨을까?’ 그 마음에는 무엇이 들어있어서 그렇게 하셨을까? 지금에서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갖고 싶은 것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달라고 조르고 갖은 심술을 다 부렸던, 우리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마음 안에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사랑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치 않고서야 왜, 그리고 어떻게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위해 그런 수고와 희생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에게 그럴싸한 말을 하며 혼란스럽게 하여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 앞에 겸손하라.’고 이르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18절) 그러시고는 유다인들이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이라고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십계명에 관하여 일러주십니다.”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19절) 
  그러자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20절) 라고 자랑스럽게 그렇지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2절)


  어쩌면 부자 청년은 자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가지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누리고 있었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에 둘러 쌓여 더 이상 필요한 것도 새삼 얻어야 할 것조차 없이 편하게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지루하고, 단조롭고, 그야말로 재미없었는지 모릅니다.
  다른 부모들이 그 청년이 가지고 있는 재물과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자기 자식에게 주기위해서 안달복달을 하면서 갖은 수고를 다 하고 있었을 텐데, 정작 그 부자청년은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었는 데서 그만두지 않고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고 즐거워하지 못하고 무료하다고 여기고 있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찾아와 새로운 뭔가를 도전하듯이 청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그런데 더 좋은 그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 그 청년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포기해야 한다고 하니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여겨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에는 최고의 기대치요 바람이었건만 정작 그걸 누리고 있는 부자청년에게는 그것이 별 것 아닌 것이었고, 더 이상의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누리고 있던 것을 버리고, 그가 괜찮다고 여기는 것을 향해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이 고개를 푹 숙이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시고는,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빌게이츠처럼 억만장자는 아니어도 나름 자신들이 먹고 살 정도의 재산은 가지고 있는 제자들이 놀라서 예수님을 원망스럽게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런 제자들의 시선을 아시는지 모르는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25절)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하면서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서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시기에, 제자들을 바라보며 이르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현세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까지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주눅까지 들어있는 듯한 우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셨는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괜찮다!’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만 보시고도 기뻐하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고,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능히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주님 말씀을 이루면서 살 수 있도록 해주신다!’고.
  어쩌면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찾아 얻어도 부자청년처럼 행복할 수도 없는 꿈을 꾸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그런 것을 얻고자 엉뚱하게 예수님께 기도마저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원한 생명을 향한 우리의 첫 걸음에 예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차마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예수님 사랑의 십자가 길을 걷겠다고 꿈꾼다는 것 자체가 호사요 사치라고 여겨 엄두조차 못내고 망설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해 주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에 힘입어 영원한 생명을 향해 기꺼이 나아갑시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나라에서도 양반은 뛰지 않는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비에 젖어도 그냥 걷는 것이 품위 있는 것이라는 교육을 받았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게 달려가는 것은 위협적인 행동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실제로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 달려온 사람은 딱 둘 뿐입니다. 한 사람은 5장에 등장하는 마귀들린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병행 구절에서 이 사람은 "젊은이"라고 표현되고, 루카 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권력가"라고 표현됩니다.  
이 사람은 아직 젊었고 권력도 가지고 있었지만, 인생에 채워지지 않는 어떤 목마름을 느꼈기에 절박한 마음으로 무례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예수님께 달려가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생명의 길을 물었던 것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사람의 과거와 목마름을 모두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먼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행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십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던 십계명의 제 4계명부터 제 8계명까지 인간과 관련된 계명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이로서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완전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름난 예언자로 소문이 돌고 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누구나 알고 있는 가르침을 주시니, 그 젊은이는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그 젊은이를 더 높은 길로 초대하십니다. "계명" 준수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의 길로 초대하셨던 것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 말을 듣고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뛰어오기까지 했던 그 젊은이는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그 이유를 복음서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요!
우리는 매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바치며 우리는 온 인류를 하느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형제와 자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이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내가 가난한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이 기도는 나의 기도이기도 하면서, 세상 곳곳에 있는 가난한 우리 형제 자매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이 기도의 실현을 위해 자기의 것을 나누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일치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성직자의 꿈을 꾸었던 소년, 신경외과 의사로 45년을 살다(2)
      고영초 가시미로(건국대학교병원 신경외과 자문교수)
저는 서울 문리대 의예과에 다니면서 청량리 성당에서 중등부 교리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가대에 가입하여 베이스 파트로 활동하면서 성가를 4부로 합창도 하였고, 부활과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특송을 할 때엔 솔리스트 역할도 했습니다. 1973년 본과에 진입 후엔 본격적인 의학 과목인 해부, 생리 등을 원서로 공부했습니다. 신학교에서 익힌 라틴어 덕에 의학 용어들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를 의사의 길로 이끄신 그분께 대한 감사의 마음에 가톨릭학생회(CaSA, 카사)에 가입하여 열심히 의료봉사를 쫓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첫 주말 의료봉사의 대상은 청계천 복개작업으로 성남시 변두리로 내쫓긴 철거민들이었습니다. 주일 아침 일찍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걸려 성남시에 도착하였습니다. 진료소는 버스 정류장에서 상당히 멀었는데, 무거운 진료 박스를 동료와 함께 들고 삼십 분 이상 걸으면 손이 아프고 마비되는 듯했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월요일 수업은 졸면서 듣기 일쑤였습니다. 1973년 여름방학에 양평으로 장기 진료를 떠났는데, 지도교수님들과 선배 의사들, 간호사를 포함한 카사 회원 30여 명이 닷 새 동안 약 1,500여 명을 진료하였습니다. 참으로 재밌고 보람되었습니다. 
저는 2학년 여름방학 때 강원도 평창에서 장기 진료 봉사 후 카사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주말 진료 활성화를 위해 저는 토요일 오후에 진료할 곳을 물색하였고, 난곡동에서 사회사업을 하고 있던 사라님을 소개받아 그 집에서 매 주말 진료를 했습니다. 난곡 주말 진료는 제가 졸업할 때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되었고, 평창에서의 장기 진료도 대화, 봉평, 진부면을 돌아가며 하였습니다. 
졸업반이 되어 전공과를 결정해야 했는데, 청진기 하나로 진단을 척척 해내던 내과 교수님들이 부러워 내과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1976년 3월 17일 신경외과 실습을 돌고 있을 때, 아버님이 뺑소니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어 밤 9시 경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습니다. 약 두 시간에 걸친 뇌혈관조영술이란 복잡한 검사를 통해 급성뇌경막하혈종이 진단되었습니다. 후일 저의 박사논문 지도교수님이 된 신경외과 과장님께서 밤중에 나오셔서 응급 뇌수술을 하셨지만, 아버님께선 식물인간 상태로 9개월 가까이 투병하시다 결국 12월 초 운명하셨습니다. 
처음엔 내과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아버님을 곁에서 간호하면서 신경외과의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가 의사가 된 1977년 여름에 우리나라에 CT가 도입되었고, 이어서 MRI 등 뇌질환 진단장치와 미세뇌수술, 뇌항법수술 등 치료도 괄목할 만하게 발전하였습니다. 지난 45년 신경외과의 발전 한가운데에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행복한 신경외과의사로 살아온 저는 그분이 저를 신경외과 의사의 길로 이끄셨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2040년에도 지구가 존재하려면
      이원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LAB2050 대표)
신문 1면에 오랜만에 기쁜 소식이 실려 있었습니다. 수원교구가 2040년까지 탄소중립을 실천하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전세계가 미국인처럼 살면 지구 4~5개가 필요하다는 분석 결과가 화제에 올랐던 일이 있습니다. 이미 십수 년 전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전세계에서 가장 소비를 많이 하는 경제 대국이었습니다. 그러니 전세계 모든 사람이 가장 소비를 많이 하는 미국인처럼 자원을 사용하고 탄소를 배출한다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나라도 많이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소비하는 만큼 전세계가 소비하려고 해도 지구 3.5개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뿐일까요? 그동안 중국도 인도도 많은 아프리카대륙의 개발도상국들도 힘을 내어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소득도 소비도 많이 늘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좋은 일입니다. 전세계를 보면 가난한 사람의 숫자는 아직 많지만, 그래도 절대빈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소득과 소비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세계인 모두가 미국인처럼 사는 세상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지구 4~5개가 있어야 지탱할 수 있는 상황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기후위기는 이미 눈앞에 닥쳤습니다. 지금 지구 온도는 산업혁명 이전보다 1도 정도 오른 상태인데, 이게 1.5도를 넘으면 대형 재난이 올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방식을 그대로 이어가면, 다음 세대에게 지구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비극을 피하려면 우리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에 급격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탄소배출이 많은 기업의 수출에 매기는 탄소국경세 같은 정책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큰 전환에는 아픔이 따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연료를 많이 사용하는 산업 중심의 성장 경로를 걸어왔습니다. 이런 산업이 가진 자산의 상당부분은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친환경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제조업의 30~40%가 좌초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이미 부자가 된 국가들과 기업들이 손해를 감수하며 스스로 변화하는 것은, 오늘 복음 말씀처럼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기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를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모두가 두려워서 멈칫거릴 때, 누군가는 먼저 행동해야 많은 사람들이 따를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의 용기있는 탄소중립 선언이 반가웠던 이유입니다.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젊은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가가서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계명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모두 지켜왔던 그를 보시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부자청년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고 싶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것을 온전히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는 입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얻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의 비유에서의 이야기는 부자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요? 누군가를 현실적으로 도와주는 데에 있어서는 부자이든 가난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복음에서는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을 하였을 뿐 만약에 가난한 사람이 와서 같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물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같은 대답을 하였을 것입니다.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부자와 가난한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복음의 내용에 충실히 본다면 재물이 중요한 주제는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서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에 관해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자인든 가난한자이든 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려고만 하는 모든 사람들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무료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남보다 가진 것은 없지만 또 보잘 것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충분히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눌 때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실은 부자와 가난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서 중요한 것은 부자와 가난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것을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내어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것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즉, 나의 것이지만 언제든 내어줄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마르코 10/17-30>10월1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보존하려면 먹고 마시고 숨 쉬고 더위를 피하고 추위를 피하는 집이나 옷이 있어야 합니다. 이모든 것을 얻으려면 돈이나 재산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굶어 죽고 목마라라 죽고 숨을 못 쉬어 죽고 얼어서 죽고 더위를 못 이겨 죽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오늘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가진 바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 하십니다. 이는 성경의 한 사건으로 보고 있지만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나만 내 가족만 내 나라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는 삶이여야 합니다.
오늘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신 말씀은 인색한 부자 욕시만 부리는 부자 성경의 부자와 나자로 이야기처럼 자기는 호이호식을 하면서 상 밑에 있는 나자로는 거들도 보지 않은 사람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재원은 나누어 쓰라고 만드셨으며 혼자 독식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 이념은 평등한 세상입니다. 나라가 관리하며 제산을 골고로 나누어 사용하도록 하는 것인데 생산의 기술 자본을 생각하지 않고 나누는 것에만 신경을 쓰면 나눌 것이 없어지면 모두가 죽고 창고지기만 배불리 먹고 다른 사람은 죽게 됩니다. 북쪽의 현상과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개인 소유를 인정하여 자기 곡간에 쌓아 두지만 나눔의 정신이 없으면 가난한 사람은 헐벗고 굶주리고 길거리에서 얼어 죽거나 더위에 쓸어져 죽게 됩니다.
그래서 부자에게 영원한 생명에 집으로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 사람에게 불가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시며 부자도 나눔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수도원의 삶의 형태가 거이 공산주위 이념을 따라 모인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 상하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평등성이 없어지고 1960년대와 2020년대는 다른 양식의 삶의 형태가 있습니다.
저만의 체험이지만 신학생 때 원장님 방에는 스위스시계가 설합속에 가득차 있어 어떤 사람은 시계를 받고 가지고 있는 데 저도 시계가 필요해서 하나 달라고 하니 너 줄 것까지는 없다고 하여 마음 의 상처를 받고 고만 하니 수련장님이 눈치를 체시고 왜 우울하냐 해서 시계이야기를 하니 원장신부에게 말하여 오라고 하여 들어가니 투겅 알고 닫는 괴정시계를 주기에 불편하지만 고장 자주낳지만 신부될 때 까지 사용하다가 신품성사 때 사람들이 무엇 해줄까 해서 만나는 사람에게 시계가 필요하다고 하니 신품 받고 10개나 받아 핑요한 사람에게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더 많은 이애기가 있지만 이만하고 가진 사람은 정의롭게 나누지 않으면 세상에서 벌을 받게 됩니다. 공산주위나 자본주의나 정의롭고 자비로운 나눔이 없으면 멸망하게 됩니다. 사람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을 먼저 생각하며 처신하고 관리하는 삶을 살아야 물질적 축복을 받게 됩니다. 모두가 정의와 자비를 따라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르심과 응답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가 소개됩니다. 부자 청년은 어릴 적부터 율법과 계명을 모두 열심히 지켜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청년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계명을 지키거나 단체 봉사와 같은 외적인 활동에 열정적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일상생활, 즉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심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 각자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습니다. 누군가는 혼인 성소로, 누군가는 독신 성소로, 누군가는 수도 성소로, 또 누군가는 사제 성소로 말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응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애당초 부르심의 과정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심과 응답의 과정은 나와 하느님이 함께 하얀색 도화지에 그려나가는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맺음인 신앙생활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부르심과 응답에 관하여 진지하고 냉철하게 식별하는 작업, 그리고 기도와 노력으로 식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떤 목표 안에서 사제직을 선택하고, 수도자의 길을 선택한다면 그 끝은 항상 ‘해피 엔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르심과 응답에 있어 선택의 기준이자 목적은 항상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청년
       조용국 프란치스코 신부님
찬미예수님 
1.아름다운 가을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가을비에게 라는 시입니다. 
”여름을 다 보내고 차갑게 천천히 오시는군요.
사람과 삶에 대해 대책없이 뜨거운 마음 
조금씩 식히라고 하셨지요?
이제는 눈을 맑게 뜨고 서늘해질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시는군요.“
2.오늘 복음에서 부자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그 사람은 청년이었고, 재산이 많았습니다. 아마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청년으로서 부자였지만 그 동네에서 욕을 먹는 사람,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묻습니다“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
3.예수님께서는 일단 개념정리부터 확실히 하십니다. “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시고, 그 일들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오로지 하느님중심적이십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기에는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께 이끄는 것, 그들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만이 예수님의 유일한 목표이고, 관심사인 것입니다. 모든 관심과 영광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중심을 확고히 잡고 계십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절대 착각이나 오류를 범하시지 않으십니다. 교만에 빠지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진리의 차원에서 보고 계십니다. 
4.우리는 많은 경우에 교만에 빠집니다. 정말 자기자신이 잘난것처럼 착각을 하고, 자신에게 교묘하게 영광을 돌립니다. 겸손한 듯이 말하지만 가만히 그 속내를 보면 자기 잘난 척인 경우가 많습니다. 속에서부터 겸허한 것이 아니라 겉만 겸허한 척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교만을 겸손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5.이 청년은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을 하는걸로 봐서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속에 꽂혔고, 내내 그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유다교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가르침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이야기하십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들입니다. 
당시 모세의 율법은 유대사회를 지키는 근간이었고, 질서였고, 법이었고, 신앙이었습니다. 아무리 로마법이 있어도 유대인들은 이 모세의 법에 따라, 전통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7.그 청년은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부자청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에 탐욕스럽지 않았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재산이 많으면서도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처한 한계를 넘어서서 보다 더 큰 세계,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차원을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아마도 그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9.내가 가진 것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에서 존재감을 느끼고, 뿌뜻함과 자신감을 얻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임과 동시에 경제적인 동물이기도 합니다. 그 사회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분명 가진 것이 있어야 합니다. 가진 것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불안감을 없애주며,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도움을 줄수 있으며, 또 때로는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은 명예를 동반하고, 가진것과 명예는 힘을 줍니다. 
10.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과 가진 것을 동일시 합니다. 가진 것은 단지 소유물일뿐인데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명품만을 추구합니다. 명품을 걸치면, 명품과 같은 차를 소유하면, 명품의 음식을 먹으면 마치 자신이 명품인간이 된 듯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1.분명 가진 것과 그 주인인 사람은 다른 것인데 동일시 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번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고, 명예와 힘을  가진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갖고 있는 돈이, 명예가, 권력이 나를 훌륭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명예가, 권력이 있다고 결코 훌륭한 사람은 아닙니다. 훌륭하다는 것은 그 소유물과는 다른 것입니다. 다들 그 사람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소유물에 대해서 머릴 숙이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에게 머릴 숙인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오늘날에는 물질이 신입니다. 모든 삶의 질은 물질로 결정됩니다. 가진 자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그들 앞에서 법은 무용지물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이들이 외쳐보아도 결국 승리는 가진자들의 전유물입니다. 똑같은 상황일지라도 돈이 있으면 무죄이고, 없으면 유죄인 사회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13.겉으로는 마치 훌륭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으로 포장되었지만 속으로는 횡포한 광풍이 부는 사람들이 자리와 권력을 차지하니 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자연법도 지켜지지 않는 마치 정글과 같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진자들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오늘도 못가진자들의 가진 것마저 빼앗으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14.그러나 그 와중에도 삶의 고통들을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증을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5.”너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실로 충격적인 말씀이십니다. 아니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어떻게 얻은 명예이고, 권력인데 이걸 다 포기하라니 말도 안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청년처럼 침울해가며 떠나는 사람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적당히 타협을 하며 살아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속에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의문을 겪으며 여전히 허전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6.여태까지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너 자신안에 있는 잘못된 욕구를 인식하고, 그 잘못된 욕구가 의욕을 넘어 욕심이 되고, 탐욕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탐욕에 의해 마련된 재산은 그의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는 통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락한 삶을 위해, 안정된 삶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이라고 미화하거나 합리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이들의 눈물이요, 고통이요, 애환이요, 절망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나의 편안함을 위해서 갈취된, 인간 탐욕의 결과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17.그리한다면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기꺼이 용서해주실 것이고, 그에게 하느님안에서 사는 새로운 인생을, 비로소 행복한 인생을, 영원한 생명을 얻는 축복받은 인생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보화를 얻는 참된 인생의 길인 것입니다. 
18.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원소유주에게 돌려 드림을 뜻합니다. 자기를 버림은 하느님께 자기를 바치는 것이며, 자신의 것을 버림은 그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9.그렇게 자신과 자신의 것을 돌려드리지 않으면 그 자신과 그자신의 것들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삶을 인정사정없이 찌를 것입니다. 그의 내면에 있는 탐욕은 절제되지 않을 것이며, 그는 인간의 고귀한 하느님의 모상을 잃어버릴 것이고, 그가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빼앗겨 버릴 수 있게 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나도 하느님의 것이고, 내가 가진 것도 역시 나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 원래의 주인에게 그 모든 것을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나자신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나의 것들도 하느님의 뜻안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멘.

 

 


내 이름이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쳤도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의 ‘하깨서 주해’에서 (Cap. 14: PG 71,1047-1050)
우리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옛 성전보다 비할 수없이 더 영광스럽고 더 찬란하며 더 위대한 하느님의 성전이 나타났습니다. 옛 율법의 예배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복음적 예배가 다르고 또 상징과 실재가 다른 것인 만큼 옛 성전과 새 성전은 서로 다르다 하겠습니다.


위에 말한 것에다 또 한 가지를 덧붙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적에 성전을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에만 있었고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만 제사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 주 하느님이신 외아드님께서 우리와 같은 분이 되시고” 우리를 비추어 주신 다음, 온 세상엔 성전이 늘어나 우주의 하느님을 희생물과 영적인 향기로 경배하는 무수한 경배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언자 말라기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봅니다. “나의 이름은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쳐,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내 이름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새 성전의 영광이 더 크게 떨쳤으리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구세주께서 “나는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이 성전을 건설하는 데 일하는 영혼은 누구나 평화를 얻으리라.” 하고 말씀하실 때 이 성전을 건설하는 데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우리 평화이신 그리스도 즉 하늘로부터의 은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른 데에서 “나는 내 평화를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평화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을 인도해 주는지를 바오로 사도가 다음의 말씀으로 설명해 줍니다. “사람으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슬기로운 예언자 이사야도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이여, 당신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하는 일을 모두 이루어 주십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차지한 다음에는 영혼을 구원하기가 쉽고 또 마음을 덕행의 추구에로 이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성전을 건설하는 데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예배를 지도하는 사람이건 거룩한 신비들을 해석하는 사람이건 간에, 하느님의 집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교회를 건설하는 데에 일하는 사람이나 영적인 산 돌이 되고 거룩하고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도록, 자기 영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평화의 상급을 받을 것이며 아무 어려움 없이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연민과 존중의
마음에서
사람은
사람다워진다.

사람을
귀하게 하며
아름답게
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다.

사랑은
구체적인
실천이다.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하느님께서
매순간 주시는
행복이다.

참된 행복은
자유로
우리를
이끈다.

하느님의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가장
자유로울 때이다.

자유는
나눔을
전제로 한다.

나눔이
사랑이다.

참된 사랑이
있는 곳에
참된 나눔이
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묶인 것도
많다.

하느님께서는
대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난이 있고
나눔이 있다.

복음은
나눔을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욕심으로
사랑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의 길은
나눔의 길이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으로
오셨다.

건강한 삶은
하느님에게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나누시고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신다.

생명은
나눔으로
공동체가 된다.

구원의 공동체는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공동체이다.

행복은 나눔이고
나눔은 진정한
자유이다.

무엇을
나눌 것인가!

모든 삶을
가난하신
하느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나눔의 날이며
새로운
열림의 날이다.

나누는 것이
자아가 열리는
해방이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국어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나는 준다.’의 미래형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구동성으로 “나는 줄 것이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선생님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준다.’의 미래형은 ‘나는 받는다.’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무엇인가를 받고 싶으면 먼저 줘야 합니다. 그런데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만 집중을 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바로 우리들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풍요로운 사랑의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원인은 커다란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울리고 있는 작은 외침 때문입니다. 내 것을 더 가져야 한다고, 내 것을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 등등으로 인해서 우리는 사랑의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 안에 있는 이 작은 외침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배가 고픈지, 그래서 계속 갖고 싶어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지요. 사랑이 어려워지고, 행복해지기도 힘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이 주님께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이에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말씀하시지요. 부자 청년이 정말로 열심히 살았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냥 허언이 아니었는지, 주님께서도 이를 인정하시듯이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에게서 부족한 면을 발견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그렇게 올바른 청년이었지만 자신의 재산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주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온전하게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지혜서의 저자 역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지혜 7,8-9)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지혜야 말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은 물론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까지도 얻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두 마리의 토끼 모두를 잡고 싶은 것이지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주님께서는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는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시는 주님이십니다(히브 4,12 참조). 그렇기 때문에 이제 세상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는데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더하기를 할수록 삶은 자꾸 빼기를 하고, 욕심이 더하기를 할수록 행복은 자꾸 빼기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다시 바꿔서 쓰면 욕심을 빼면 뺄수록 행복은 자꾸 더하기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을 빼면 뺄수록 분명히 주님을 따르면서 계속 더해 나가는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울상이 되어서 주님 곁을 떠나는 부자청년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기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은 미로다. 길이 없을수록 더 많은 길이 열린다(양광모). 

 

77 풍수원 성당

1888년 6월 한국에서 네 번째로 그리고 강원도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된 풍수원 성당은 1910년에 봉헌식을 가졌으며, 한국인 신부(정규하 아우구스티노)가 지은 한국 최초의 성당으로 신자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나무를 해 오는 등 건축 자재를 스스로 조달하여 세웠습니다. 

풍수원 일대는 오래된 교우촌으로 그 시작은 신유박해(1801)가 일어났던 때,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횡성군의 풍수원 산간지역으로 숨어들어 형성되었습니다. 신태보 베드로는 신자 40여명을 이끌고 천진암에서 이곳으로 들어섰고, 이들이 바로 풍수원 교우촌을 이룬 당사자들입니다. 이후 박해가 거듭될수록 많은 교우들이 모여 큰 촌락을 이루어 신앙생활을 이어 왔으며,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80여 년간 목자 없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믿음을 지켜온 곳입니다. 

특히 풍수원 성체 현양 대회는 1920년부터 한국 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거행되고 있으며, 신자들에게 성체와 성혈의 신심을 깊이 뿌리내리게 하고 있습니다.

풍수원 성당은 신앙의 요람으로 선조들의 얼이 담겨 있는 역사의 현장이며, 30명 이상 한국인 사제가 탄생한 성소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미사는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 오전 11시에 봉헌되고 있습니다. 주소는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 유현1길 30이고, 전화는 033-342-0035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운명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오늘은 참으로 중요한 주제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선물로 주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때로 봉헌생활자로서 재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재물과 하느님 나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부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가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가난의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몇 가지 측면들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청빈생활과 관련해서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부를 죄악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된 부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이자 선물로 여기셨고, 그 축척된 부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가난을 비참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게 가난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내가 가난을 먼저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가난은 자랑꺼리였습니다. 찬미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난하다보니 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습니다. 

 

예수님의 가난은 스스로 선택한 가난, 자발적인 가난이었습니다. 가난을 모토로 삶았던 수많은 성인성녀들 역시 예수님의 이런 선택적 가난, 자발적 가난을 추종한 것입니다. 

 

사실 가난은 뭔가 결핍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비참함으로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가난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수도자들에게 주어진 과제 가난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을 결핍과 궁핍함으로,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수도자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수도자들은 부자들을 멀리해서도 안됩니다. 부자들에게 주어진 재물이 자신들의 것이 아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들을 잘 영적으로 인도하고 설득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도록 안내해야 합니다. 

부자는 크게 두 가지 부자로 나눠집니다. 안하무인의 부자들과 착한 부자들로 나눠집니다. 절대로 모든 부자들을 싸잡아 경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평생 땀흘리고 정직하게 모아서 일어선 부자들, 박수받아야 하고 축복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부자로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명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관대한 나눔을 통한 구원의 길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한 신부님께서 얼마 전에 아주 공감가는 한 마디 표현을 해주셨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운명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희 수도자들이 가난을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추종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다보니 그의 운명까지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추구했던 생활 방식이 극단적 청빈이어서 그분의 생활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청빈하게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까지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공유하는데서 오는 가난, 그리고 그 자발적 가난의 실천의 결과인 재물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 수도자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 기간 중 수도자들과의 만남 시간 때 청빈과 관련된 말씀이 아직도 강한 울림으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 길로 이끌기에 ‘어머니’입니다.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수도자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교황님 말씀처럼 우리의 넘치는 생활, 반복음적 생활, 부유한 생활이 그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늘 돌아봐야겠습니다. 

 

청빈에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과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아끼고 절약하며 사는 것,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은 조금은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다양한 가능성과 장점, 강점이 무엇인지를 찾고, 최대한 개발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 정말 근사한 청빈생활입니다. 

 

내게 주어진 24시간이란 보물을 효과 있게 구성해서 보다 충만하고 기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래서 힘겨워하는 이웃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청빈생활이겠습니까? 

 

한평생 게으르게 살지 않는 것, 꾸준히 맡은 일에 충실한 것, 하루하루 보람되게 살아가는 것, 결국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선물이 되어주는 일,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건강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일, 참으로 의미 있는 청빈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이언 맨’은 전 세계가 좋아하는 슈퍼 영웅입니다. 아이언 맨은 돈 많은 과학자가 하늘을 나는 기계 슈트를 만들어 어려운 사람도 돕고 지구도 지킨다는 좀 황당하지만 누구나 꿈꾸는 삶을 대변해주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언 맨’의 실제 모델이 있습니다. ‘테슬라’라고 하는 전기자동차회사를 만든 사람인데 ‘일론 머스크’라고 합니다. 그는 실제로 아이언 맨 영화에도 깜짝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전기자동차의 에너지를 태양광으로 충전시킬 생각을 해서 태양광 회사(솔라시티)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성에 인류를 살게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스페이스 엑스라는 로케트 회사도 만들어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처음 로케트 세 대의 발사가 모두 실패하여 엄청난 손해를 보았을 때 포기할 마음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혀요. 저는 포기를 모릅니다. 제가 죽거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병원에 누워있지 않다면 말이죠.” 

그는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본래부터 실패의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본래 돈이 없었습니다. 당장 가진 돈 가지고는 그런 일을 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투자는 항상 무일푼이 되거나 빚쟁이가 되어야하는 위험부담이 있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투자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1달러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돈이 있었는데도 그랬던 것이 아니고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그의 동생과 첫 인터넷 사업을 하며 창업을 할 때 하루에 1달러만 쓰고 한 달을 버틸 수 있는지를 시험한 것입니다. 그는 마트에 가서 30달러를 주고 한 달 동안 먹을 냉동 핫도그와 오렌지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만 한 달을 살아보았습니다. 생각보다 견딜 만 했습니다. 컴퓨터 한 대와 30달러로 일을 하면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안 돼도 한 달에 30달러는 벌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모든 사람이 말리는 일에 투자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공시킨 사업이 결국 우주 산업까지 뛰어들 수 있게 자금을 만들어준 최초의 인터넷 금융결제 시스템인 페이팔입니다. 

지금은 땅굴을 파서 차들이 막힐 때 지하도로로 들어가 자동주행을 통해 목적지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만드는 회사(땅 파는 회사)를 ‘정말’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땅굴을 파는 기계를 만들어 땅을 파고 있습니다. 그는 땅 속으로 그리고 우주 밖으로 나아가는 좀 비현실적인 회사를 만들며 지금까지도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대부분은 돈이 없더라도 굶어죽지는 않을 시스템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업이 실패하지는 않을까, 직장에서 해고당하지는 않을까, 자녀가 이혼하지는 않을까 등의 고민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만약 일론 모스크도 그랬다면 지금의 혁신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모든 재산을 자신의 꿈에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믿음이 바탕이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두려움에 직면하여 보고 얻은 결과물입니다. 거지와 다름없이 가난하게 살아봤지만 크게 나쁠 거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예수님께 달려와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가 율법은 다 잘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가 열심히 살아온 것을 아시자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고 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시며, 그 일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화성으로 가고 싶어서 모든 것을 투자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누리는 하늘나라를 가기 위해 무엇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가진 것을 다 바칠 만큼 간절히 원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투자에는 위험부담이 따름입니다. 하늘나라를 위한 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위험부담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부담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도 마치 밭에 묻힌 보물과 같아서 가진 것을 다 팔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투자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 별로 투자하지 않습니다. 이는 5만원만 투자하고 화성보다 더 살기 좋은 곳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사람과 같습니다. 화성까지 가는데도 완전히 미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영원히 살 곳을 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투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1달러 프로젝트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도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투자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들어가기 전에 좋아졌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군대에 들어가서 편지를 기다리는데 한 통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7개월 만에 휴가를 나올 때까지 온갖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별의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다른 사람과 사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나를 떠나가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 때문에 혼자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는 그 사람이 없으면 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져 그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갖은 방법을 씁니다. 이것이 두려움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막상 그 사람이 떠나가도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 자유롭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크게 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뜨거운 사우나를 한 번 하고 마음을 접었습니다. 두려움은 항상 자신 안에서 현실보다 부풀려져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전쟁 때문에 죽는 사람의 숫자보다 그 두려움 때문에 스트레스로 죽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두려움의 실재는 별거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현실보다 훨씬 크게 두려워합니다. 우리 자아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일론 머스크처럼 그 최악의 상황을 한 번 살아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신학교 들어가서도 ‘쫓겨나서 신부 못 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쫓겨나면 프란치스코처럼 거지로 살면서 복음을 전하면 되지 뭐.’라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오히려 사제가 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던 어떤 신학생들은 그 두려움을 스스로 사제가 되지 않으며 극복하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자살로 극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다보면 그 두려운 일이 일어나고야맙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잃는 두려움을 넘어서야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이 존재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울증을 겪을 때 우주로 나가고 싶다는 젊었을 때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가난해지는 두려움을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별거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인생에 과감하게 투자하며 꿈을 펼쳐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밭에 묻힌 보물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과연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주님께서 알려주신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십일조’인데도 그것조차도 내지 못하면 진정 그 뒤에 따라오는 삶을 맛볼 수 없습니다. 정녕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돈인지 천국인지 결정해야합니다. 돈을 잃는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바늘귀 앞에서 망설이는 낙타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면 가진 것을 모두 잃는 두려움을 넘어서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통령께서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교황님의 방북을 요청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교황님의 방북이 이루어진다면 여러 가지로 기쁜 일입니다.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새롭게 시작될 수 있고, 교황님의 방북을 계기로 남한의 성직자들이 북한에 파견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성소국에 있을 때 북한 선교를 희망하는 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교황님의 방북이 이루어진다면 국제사회도 북한에 대해서 좀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문을 처음에 열기가 어렵습니다. 한번 문이 열리면 그 문을 통해서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주와 사랑이 들어갈 것입니다. 이는 총과 칼로는 이룰 수 없는 민족의 일치와 화합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교황님의 방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평화가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어둠에 빛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을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긴장과 갈등의 상징이었던 군사 분계선이 생태계의 보고로 국제적인 문화유산으로 변하면 좋겠습니다. 꿈은 혼자 꾸면 꿈으로 남지만 여럿이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북한이 개혁 개방의 길로 들어서고, 핵무기를 폐기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남한에서 국회의 비준이 이루어지고, 북한에 경제 협력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남한의 경제력과 북한의 자원이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남한의 기술과 북한의 노동력이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꼭 경제적인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5000년을 함께 살았던 우리 민족이 함께 잘사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남쪽이 어려운 북쪽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눈다면 남쪽에도, 북쪽에도 많은 결실이 맺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많은 것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충분히 머물 수 있는 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입을 수 있는 옷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내 가족, 내 이웃, 내 나라라는 ‘틀’에서 벗어난다면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지금 헐벗고, 지금 아픈 사람들이 나의 이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이 땅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후배 신부님의 ‘꿈’을 들었습니다. 가톨릭 음악인 협회를 만들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노래하는 사람, 작곡하는 사람, 지휘하는 사람, 연주하는 사람들이 등록을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당에서는 필요한 사람들을 신청하고, 협회에서는 본당에 회원들을 파견하는 것입니다. 기금을 마련해서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 소정의 사례금을 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작은 본당에서도 전례 음악이 활성화 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톨릭 음악인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기꺼이 나눌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 음악인들이 함께 연주를 할 수도 있고, 가톨릭 음악인들이 정보를 나눌 수 있고, 교구의 교회 음악이 더욱 풍요로워 질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여유 있는 본당이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교구에서 관심을 가진다면 후배 신부님의 꿈도 현실이 될 것 같았습니다. 이 또한 우리가 나눈다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돈으로 커다란 집을 살수는 있어도 그 집안의 화목과 행복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커다란 자동차를 살수는 있어도 그 차를 운전하는 넉넉한 마음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비싼 신발을 살수는 있어도 소외당하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는 예쁜 마음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푹신푹신한 침대를 살수는 있어도 피곤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잠을 살수는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돈의 힘과 능력을 이야기 합니다. 또한 돈의 부작용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돈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분별력과 지혜입니다. 우리는 가난을 약속한 수도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려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궁핍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남을 도울 정도로 여유가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돈이 있어서 교무금과 헌금도 기쁘게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죽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지혜입니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집니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재산이 들여 있습니다. 그 지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상과 영생 사이에서!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한 주간 동안 행복하게 잘 지내셨습니까?

감기는 걸리지 않으셨죠?

한반도에서 봄과 가을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느낌입니다.

가을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겨울이 닥쳐올 기세입니다.

일교차가 심한 날들이니까 감기 걸리지 않게 건강관리도 잘 하세요! ^^*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다.”

 

형제 자매님,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지혜가 얼마나 좋고 고귀한 것인지를 이렇게 실감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것들 즉 권력, 재산, 금, 은, 보석, 건강, 미모 같은 것들을 지혜와 비교하면서 그것들은 지혜의 가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우상으로 섬기고 있고, 우리도 쉽게 우상으로 섬길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던 제자들이 깜짝 놀랐듯이 우리 역시 깜짝 놀랄 말씀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부자들은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단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도 처음에 그 부자 청년을 대견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청년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기를 원했고, 그가 이웃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시고는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재산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데 발목을 잡을 수가 있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을 땐 그 청년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의 속을 꿰뚫어보신 것입니다.  

그 청년은 계명들을 다 잘 지켰다고 대답했지만 정말 성심을 다해서 그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재산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딜 마음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 부자청년에게는 이미 재산이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재산이 그 청년에게는 우상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자는 금전이나 부동산 등 재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자는 자신의 마음과 행복을 재산이나 금 은 보석, 혹은 권력이나 쾌락, 아름다움, 육체적 건강 등과 같은 세상의 가치에 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본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부자들은 하느님께서 의인으로 봐주셔서 현세적인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은 구원에 가깝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놀란 것이다.

  

형제 자매님,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 세상에 애착을 가지고 물질적인 부에 노예가 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신자들도 기도하면서 현세적인 복을 비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주일 강론 때도 말씀드렸듯이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지불하고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선물을 나에게 주시리라는 믿음을 지닌 사람은 기쁨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며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 옛날 사도들의 작은 공동체가 그것을 보여주었듯이, 오늘날에도 참된 가치 곧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삶이 이 말씀을 증명할 것입니다.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금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살펴봅시다.  

영원한 생명이 맞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잘 생활하기 위해서는 영원한 생명에 참된 희망을 두고 내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려고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꾸미거나 속일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까지 속일 수는 없습니다. 

 

형제 자매님,

제 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듯이 나중에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면 “하느님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서 셈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속임수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이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내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들어 올립시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부터 참된 행복을 누리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형제 자매님,

이번 한 주간도 하느님 사랑 안에서, 가족들과 이웃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사랑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합니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때 우리는 천금보다 더 귀한 지혜를 얻게 될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보장받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다.” 

한 주간 동안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면 참된 행복에 한걸음 가까워 질 것입니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선량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

나무랄 데 없는 사람입니다.

본인의 눈에 그렇듯

예수님의 눈에도 그런 사람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가진 것이 많아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여전히 홀로만을 추구하기에

함께 살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떠난 부자

이 사이에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홀로와 함께

이 사이에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홀로 거룩할 수 없습니다.

오랜 시간 고독과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내적 친교를 맺으며

말씀과 성체로 양육된다 하더라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는 벗들이 있다면

거룩한 삶을 방해하는 악이 있다면.

그러기에 세상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우리 작은 힘을 보태야만 합니다.

우리는 홀로 맑고 깨끗할 수 없습니다.

양심을 돌보고 선한 웃음 지으며

품위 있는 말과 예의바른 행동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산다하여도

진흙탕 같은 세상 더듬는 벗이 있다면

인간 존엄성 짓밟는 차별이 있다면.

그러기에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홀로 부유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이

올바른 피땀으로 얻은

정당한 몫이라 하더라도

애써 일해도 여전히 가난한 벗들이 있다면

신성한 노동의 권리를 박탈당한 벗들이 있다면.

그러기에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눔으로써

모두가 부유한 세상을 일구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홀로 정의로울 수 없습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남의 것 빼앗지 않고

정당하게 우리 삶을 보듬는다 하더라도

노동의 결실을 빼앗기는 벗이 있다면

부당한 권력에 희생되는 벗이 있다면.

그러기에 약한 이와 억울한 이가

더 이상 피눈물 흘리지 않는 세상을 위해

함께 어깨동무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홀로가 아니라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함께 살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연중 제28주일(나해) 마르 10,17-30; ’18/10/14

2018년 전교의 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장 담화 

전교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전합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을 하든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일하는 복음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나 구원을 선포하셨을 때에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데에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전교는 하느님을 세상에 내어 주어 그분을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전교 활동은 자기 마음속에 간직되어 넘쳐 나는 ‘복음의 기쁨’을 세상에 드러내는 거룩한 작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전교에 앞서 우리의 삶이 그분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성령의 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불이 먼저 우리 개인 안에서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타오르기를 바라십니다.

성령의 불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안의 사랑과 일치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하는 일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결코 튼실한 전교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가슴 아프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강권에 못 이겨 마지못해 한두 번 성당에 따라와 교리반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나서는 결국 냉담하고 돌아서는 많은 이들을 통해서 이를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 내지 못한 결과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전교에 대한 생각을 확고히 해야겠습니다. 전교는 예수님처럼 하루를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교의 바탕은 다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2티모 4,2)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께서는 “사도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착한 이들의 소심증, 더 정확히 표현해서 비겁한 태도에 있다.”(‘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 39장, 31항)고 하시면서 선교의 사명을 지닌 평신도들이 사도직의 직분에 소홀한 모습을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쉬넨스 추기경도 “우리는 흔히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 38장)라고 지적하면서, 선교 활동을 주저하는 우리의 허약한 속내를 상기시켰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도직을 통해서 부여받은 선교 사명을 실천하는 데에는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전교의 목적은 결코 ‘교회의 세 불리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력으로 죽어 가는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전교는 하느님을 향한 역사적 여정에 있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는 은혜로운 작업입니다. 아직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이웃을 최고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닐 것입니다.”(묵시 21,24)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거룩하고 소중한 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하는 전교가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내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는 은총을 청합시다. 내가 누리는 삶의 기쁨과 행복이 하늘 나라를 확장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임을 명심합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 내 생각과 말과 행위가 이웃에게 복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2018년 10월 21일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장 손삼석 요셉 주교

 

 

 

참된 부를 가지려면 어떻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28주일: 나해: 참된 부를 가지려면 어떻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는 참된 부를 가지려면 주님께서 우리를 신앙의 선물을 통하여 부르시는 그 영광 속에서 추구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것을 희생하여야할 필요가 있다.

부자 청년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 때,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근심하며 떠나갔다”(22절). 즉 예수께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어떤 인간적 보장이나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의 지혜’가 이루어진다(시편 90,12-17 참조).

제1독서: 지혜 7,7-11: 지혜에 비교하면 재산은 아무 것도 아니다

1독서에서 솔로몬은 이 지혜를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도 낫게 여기고 주님께 그것을 청한다. 그 내용은 솔로몬이 왕국을 시작하면서 바치는 기도에 관한 것으로 생각된다(참조: 1열왕 3,6-13). 그러나 이 기도는 지혜서의 저자 자신이 기원전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권력과 재산과 아름다움과 육체적 건강, 생활의 즐거움 등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던 그리스 사람들의 거짓된 지혜에 현혹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었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8.10-11절).

그러므로 참된 부는 이 세상의 재화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위험스러운 요소들을 알게 해주는 지혜를 소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전도가 오늘 복음에서 추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오직 신앙의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이 지혜는 바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7절).

복음: 마르 10,17-30: 가진 것을 다 팔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오늘 복음에서도 참된 부는 이 세상의 재물을 포기할 줄 알고 또 끊어버릴 마음을 갖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을 보면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그 주제는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끊어버림”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이다.

첫째 부분에서는 부자청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청년은 처음과 마지막 태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20절) 하는데 예수께서도 감탄하시고 대견해 하셨다(21절)고 한다. 그런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하였을 때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22절).

아마 제자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청년과 같이 이미 열심히 살아왔으면서 그 여정에 매력을 느끼고 원의를 가진 사람도 그 여정이 제시하는 요구를 철저히 따를 능력이 없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이 극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은 재산 때문에 비롯되는 치명적 위험이다. 그 청년은 용기 있게 결심하고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22절). 물질에 대한 애착이 참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처음에 당신을 선하다고 하는 것(18절)을 거절하시면서 ‘하느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상기시키신다. 그래서 유일한 선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선(善)들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들은 제1계명에 의해 생기를 얻고 조명되지 않으면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그의 모든 재산을 실질적으로 버리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을 첫 자리에 놓음으로써 나오는 결과이지 다른 요구가 아니다. 그 청년에게는 하느님보다는 자기의 재산에 대한 집착이 컸으므로 하느님이신 주님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장면은 예수께서 비탄스럽게 재물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모든 시대의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에 하시는 권고의 말씀이다(23-27절 참조). 여기서 예수께서는 두 번씩이나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24절)고 하신다.

두 번째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상징적인 표현을 덧붙이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이 표현은 너무 강해서 좀 부드럽게 해석을 하려고 하지만, “눈 속에 들보”(마태 7,3)라는 표현을 생각한다면, 청년처럼 재산에 마음을 두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26절)하고 수군거린다. 구약에서는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는데, 장애물로 말씀하셨고, 또 그 청년이 구원에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낙담한 사람처럼 떠나갔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렇게 수군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원이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이 표현은 구약에서 사라가 아들을 얻는 장면에서(창세 18,14), 마리아가 잉태하게 되는 것을 알리는 천사를 통해서 반복되고 있다(루가 1,37). 중요한 것은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간이 그 은총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부자청년과 정 반대되는 태도를 취한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여기서 베드로는 마태오 복음에서와 같이(19,27) 어떤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보상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의 결실이며 그 은총이 확장되는 것이라고 알려주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29-30절).

여기서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끊어버리는 행위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끊어버리는 행위가 그 행위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29절) 끊어버리는 행위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와 복음이라는 가치를 소유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자신을 보다 충만한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즉 그 보상은 사도행전과 같은(참조: 사도 2,44-45; 4,32) 보편적 사랑과 형제애를 체험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세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은(30절)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의 풍요함으로 자신이 부유해짐을 느낄 때 그것을 완성시켜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박해’도 받게 된다고 하신다.

그 박해까지도 믿는 이에게는 영광과 행복을 더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그 박해까지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며 우리 믿음에 대한 보상의 한 형태라고 한다.

제2독서: 히브 4,12-13: 하느님의 말씀은 속셈을 드러낸다

이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실현되리라고 확신하는 모습을 2독서에서 보여주고 있다. 히브리서는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유하게 들으라고 권고한다(12절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요구하는 과제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 생활의 모호한 점, 거짓, 주저함과 두려워하는 것을 심판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또 복음을 위해 사물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있는지 볼 수 있게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13절) 그 말씀에 의해 철저히 자신이 드러나도록 내 맡기는 것이 진정한 마음의 “지혜”이다.

가난함이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만이 그 나라를 차지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우리 마음에 하느님과 재물이나 세상의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독서의 말씀에 따라, 참된 부, 참된 지혜를 차지할 수 있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 더욱 풍요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 더 일치되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삶을 청하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며칠 전에도 역시 바지락을 선택한 분들이 계셨는데요.

‘미사로부터 멀어지는 그분들의 뒷모습이 복음에 나오는 어떤 사람과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원한 생명에 가까이 이르렀지만, 또 많은 계명을 실천해 왔지만, 결국 갈림길에서 예수님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재산을 선택합니다. 

그 갈림길에서의 선택이 진짜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아지가 한 길로 갈 때에는 멋대로 해도 되지만 갈림길에서는 누군가 자기 목줄을 당깁니다.

‘그쪽이 아니야 이리 따라와..’

그런데 그 당기는 주인이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나 재산일 때가 많이 있는 거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 의지하고 돈으로 대비하고 돈을 갖고 있어야 안전하고 든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돈도 의지할게 못 된다..’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이 있습니다.

 

“1948년부터 2001년 사이에 미국 경제는 열 차례나 곤두박질쳤습니다.

한 번 불황을 겪을 때마다 평균 10개월을 끌었고, 수조원의 재정손실을 불러왔습니다.

 

따져보면 미국 경제는 대략 5년마다 한 번씩 주역들을 말끔히 쓸어버리고 새 출발해온 셈입니다.

 

어떤 남자가 5년에 한 번씩 여자를 갈아치운다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50년 동안 아홉 번이나 아내를 갈아치운 남편을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할까요?

그걸 알면서도 그런 남자와 결혼한 열 번째 아내는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바보 멍청이’ 쯤이 어울리지 않을까요?

돈을 신뢰하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깜박 속아서 불행의 구덩이로 굴러 떨어질 준비를 갖춘 겁니다.”

 

지금 나의 생각으로는 내 손에 움켜쥐고 있는 그것을 놓으면 굶어 죽을 것만 같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거 같고, 길거리에 나앉을 것만 같을지 모릅니다.

구약에 나오는 사렙타의 과부가 그랬을 겁니다.

밀가루와 기름이 조금 남아 있었는데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것으로 음식을 해 오라고 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겠죠.

‘이거 놓으면 죽는데...’ 그런데 그녀는 엘리야의 말대로 음식을 해오고, 그 이후에 음식이 끊이질 않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내 손 안에 움켜쥐고 있는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큰 풍요를 체험하는 길임을 깨달은 겁니다.

 

구약에 나오는 나아만도 그렇고, 여호수아도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여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되는데요.

저도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 안에 풍요로움과 행복, 그리고 놀라운 일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 같습니다.

없던 행동과 말들이 생겼고, 그 안에서 목적지로 가는 든든한 한 걸음 한 걸음을 걷고 있는 듯합니다. 

때로 그분이 말씀하시는 풍요로움, 생명, 잔치상, 하늘 나라가 막연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가 개미와 말이 통하는 놀라운 일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 보다 크고 놀라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비유로 밖에 설명하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예수님도 전혀 다른 세상, 우리가 전에는 보지 못했던 세상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에서는 이런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봄에 새벽 미사를 마치고 어떤 자매님이 바지락 캐는 거에 대해서 홍보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바다가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 고 하시면서 바지락 캐러 가는 일에 장점을 막 이야기하셨었습니다.

‘바다에 나가면 바지락 캐서 먹을 수 있지.. 그거 팔면 돈 벌 수 있지..

몸도 건강해지지.. 사람들과 수다 떨 수 있지.. 너무 좋아..’

그래서 기회가 되면 주위 분들에게 같이 가자고 하시는 거 같은데요.

저도 그 얘기를 듣고, ‘그럼 나도 한 번 나가 볼까...’ 해서 나갔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머리도 맑아지는 거 같고, 무엇보다도 냉장고에 가득 찬 바지락이 당분간 끊여먹을 된장찌개를 맛있게 해 줄 거라는 생각이..

저를 참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던 거 같습니다.

 

자매님은 바다에서 바지락 캐는 작업이 너무 좋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느낌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셨던 거 같은데요.

예수님도 그러한 모습이 있으셨 던 거 같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부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또 하늘나라의 잔칫상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또 천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그 길로 걸어 나가, 그러한 행복과 영광을 받아 누리기를 바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길을 따라 성실히 걷는다면, 언젠가 그 길의 끝에서 그분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누리고 체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차를 타고 성당에 가는데 그 중간 길에 성당 초등학교 여자 아이들이 놀고 있어서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인사를 하고서는 신자가 아닌 친구에게 달려가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친구야~ 저게 신부님이야~” ^^;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 10, 17-30(연중 28 주일) 

오늘은 연중 2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참된 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나는 진정 지혜를 찾고 있는가?’, ‘그것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찾고 있는 지혜, 그것은 참된 지혜인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고백합니다.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졌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지혜 7, 7)

 

이는 “주어졌고”와 “나에게 왔다”라는 동사에서 알 수 있듯이, 지혜는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그분의 영께서 “오신”으로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를 통하여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는 주어진 선물인 이 지혜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능력”이심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의 들음’에서 옴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작가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 12)

 

이는 말씀이 참됨을 가려내는 지혜의 힘이요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히브 4, 13)

오늘 <복음>에서는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부자청년과 우리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이 하느님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직 재물을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못한 부자인 어떤 사람과, 이미 재물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면서도 온전히 자신을 버리지도,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를 “벌거숭이”로 만들어버립니다. 곧 당신의 한 말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 21)라는 말씀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 29 참조)는 말씀이 그들을 가리고 있던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그들의 마음 속 생각과 속셈이 들통 나게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따를 것인가?’라는 결단의 문제와 마주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 17)라는 부자인 어떤 사람의 질문과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마르 10, 26)라는 베드로의 질문 사이에는 애시 당초부터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곧 부자인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질문을 하지만,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위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자신의 영생을 위해 죄짓지 않고 율법을 지켜왔고, 베드로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집과 형제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같이 아직 영생과 구원을 얻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인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 21)

 

이는 그가 비록 율법을 지켰다 하나, 그것은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기 지킴이 아니라, 자기 버림과 자기 나눔을 통해서 타인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단지 가진 것을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곧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지난 주 월요일 <복음>에서,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오늘 <복음>의 부자인 어떤 사람과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루카 10, 25), 예수님의 반문에 그가 <신명기> 6장 5절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 19장 18절의 이웃 사랑으로 답변을 하자,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마르 10, 28)라고 하신 것처럼, ‘말씀을 실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 29 참조)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사랑하되, “당신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비록 그가 집을 떠나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하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것일 뿐, 복음 때문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을 원해서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 힘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비워 드려 그 지혜가 내 살 속으로 파고들도록, 듣는 마음과 말씀에 승복하고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지혜이신 하느님을 믿고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버리면서 얻는 지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지혜를 얘기합니다.

먼저 독서는 지혜의 효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

사랑은 모든 덕의 종합이요 완성입니다.

모든 덕이 모아졌을 때 비로소 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참고 기다리고’를 시작으로 사랑의 모든 요소를 나열한 것도 바로 사랑의 이러한 면 때문이지요.

사랑이 이러한 것임에도 다시 말해서 모든 덕의 종합이요 완성임에도지혜가 없으면 사랑은 어리석은 사랑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뭐든지 사주는 것이 진정 아이에게 좋은 건지 부모가 생각지도 않고 사준다거나 아이가 단 것을 좋아하면 이빨이 썩는데도 사탕을 준다거나 고생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갖게 해주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지혜를 여왕이라고 합니다.

“여왕이신 지혜여, 인사드립니다.” 

 

지혜가 우리를 단순하게 하고,

지혜가 우리를 가난하게 하며,

지혜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지혜가 우리를 사랑하게 한다는 뜻이 있는 거지요. 

 

예를 들어 백발의 늙은이를 지혜롭다고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아주 단순하고 가난한데 이렇게 되기까지 과정이 있습니다.

그도 젊었을 때는 온갖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 다 소유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가족을 잃고 건강까지 잃었으며 그래서 나이 먹어 ‘건강이 최고’라고 하며 건강 이외의 것들은 다 포기함으로써 단순하게 살고 가난하게 사는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은 것인데 실은 지혜를 얻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지혜는 잃기 전에 버리는 지혜이고 그런 다음 얻는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는 얻는 지혜라는 것을 우리는 아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건강을 얻기 위해 우리는 근심걱정을 버리는 것이고, 근심걱정을 않기 위해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진정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건강입니까?

나이든 사람에게 물으면 백이면 백 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데 우리 신앙인도 똑같고, 신앙인이 이 정도에 그쳐도 되겠습니까? 

 

우리 신앙인이 신앙 없는 사람보다 나아야 한다면 건강을 얻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을 얻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어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부자가 건강이나 다른 것을 얻으려 하지 않고 영원을 생명을 얻으려했던 것은 분명 지혜로운 거였지만 그 얻는 방식의 선택은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버리면서 얻는 그 방식을 거부했고, 이 세상 것을 버리면서 하느님 나라를 얻는 것을 거부했으며,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 세상 재물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고 한 욕심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한 것도 결국 욕심이었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진시왕처럼 이 세상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 하나도 잃지 않고 천년만년 살겠다는 거였습니다.

하여 버리는 지혜 없이 얻는 지혜도 없음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우선순위”

      원종훈 요셉다미안 신부님

본당에 있을 때 가끔 강론을 통해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하곤 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많이 가질수록 좋은 욕심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너를 위한 욕심이라고…”

나를 위한 욕심이 아닌 너를 위한 욕심! 

그 욕심이 바로 사랑이 되고 사랑하게 되면 너의 웃음과 너의 만족이 나의 웃음과 만족이 되어 내 삶이 따뜻해지고 행복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내 삶의 우선순위는 이제 내가 아니라 너와 우리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나는 좋은 글을 소개해 봅니다.

“나는 아무래도 눈이나 비가 올 것 같다고 하고 그이는 눈도 비도 안 온다고 하신다. 

내 경험으로는 저런 하늘에서 틀림없이 눈 아니면 비가 내리던데 그이는 눈도 비도 안 온다고 하신다. 

아아, 나는 오늘 종일토록 눈도 비도 안 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내 경험보다 그이가 훨씬 소중하니까!”(이현주 - ‘내 경험보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는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제자들이 그러했듯 현실 안에서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쉽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어렵다고 포기하기보다는 다른 시선에서 우리의 관점을 다시 디자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 ‘우선순위’입니다. 

나의 노력과 어려움을 생각하기 이전에 하느님의 이끄심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처럼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가 아닙니다. 가장 큰 것을 위해 내가 지켜야 할 것! 

가장 큰 것을 위해 넘어야 할 나의 고통과 어려움! 그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이끄심이 먼저입니다. 

그 이끄심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믿음을 두며 그 이끄심을 내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저 우리의 결심으로만 머문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결심을 넘어서 단호한 결단! 

내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것을 선택하는 결단을 통해 이것이 말이 아닌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확신하건대 오늘 복음의 말무리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였듯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시다. 

“나는 진정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있는가?” 

“나의 고통과 어려움보다 하느님의 이끄심을 믿고 온전히 나를 맡겨 드릴 수 있는가?” 

 

이번 한 주간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지금의 나의 진짜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고 다시 한 번 신앙인으로서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길 위에서의 만남

      김호정 엘리사벳(영화배우)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다 보면 비슷한 시기에 걷는 사람들과 마주치곤 합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니고 육체적으로 고된 여행이어서 그런지, 짧은 만남 속에서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특별한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이 열흘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모녀사이로 보이는 스페인 아주머니 한 분과 옆에서 그 아주머니를 부추기며 걷는 딸의 모습이 제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분들과 눈인사 정도만 나누고 며칠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걷게 되었습니다. 화살표를 따라서 목적지를 향해 걷다 보면 들판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숲속을 걷기도 하고 땡볕의 도로 옆 갓길을 하루 종일 걷기도 합니다. 

또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뀌는 날씨를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한 번은 산 중턱을 걷는데 예상치 못한 소낙비 때문에 삽시간에 도랑물이 넘쳐 길이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숲길을 헤매다 밤늦게 서야 가까스로 숙소에 도착한 적이 있습니다. 

홀딱 젖은 옷과 퉁퉁 부은 발 때문에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 숙소를 발견하자 왠지 알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복받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누군가가 저를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지르며 한 걸음에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하며 봤더니 저랑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길을 걸었던 그 스페인 아주머니이셨습니다. 

그분은 제 두 손을 덥석 잡으시며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시더니 다시 저를 안아주시고 등을 쓸어주시며 제가 늦게까지 안 와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또 제 발은 괜찮은 건지 물어봐 주셨습니다.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시는 그분에게 저는 마음을 활짝 열고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마음이 통해서일까요.

 

그분은 마치 제게 수호천사와도 같았습니다. 

홀로 걷는 순례길 여행이라 두려움이 가득 찰 때도, 때로는 걷잡을 수없이 외로움이 몰려올 때도, 또 지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그 길 위에서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주고 걱정해준다고 생각하니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짧았지만 그분과의 따뜻했던 만남은 여행을 떠날 당시 일에 대한 회의감으로 지치고 절망적이었던 제게 한 줄기 빛이 되어 제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고, 마음이 따뜻해지니 내 안에 가득 담고 있었던 복잡했던 문제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며 모든 것이 긍정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몇 시간 동안을 타인을 걱정하며 기다려주셨을 그 아주머니의 마음을 떠올려 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감동이 밀려와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저는 그날 그분을 통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아주머니를 만난 후 저는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주고 지쳐 보이는 사람들에게 괜찮은지 물어봐 주고 격려해 주면서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한 걸음씩 걸었습니다. 

마음을 나눌 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 스페인 아주머니를 통해 배웠기 때문입니다.

 

   

 

참 행복의 비결, -지혜 사랑, 말씀 사랑, 예수님 사랑이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방금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듯이 화답송 후렴을 노래했습니다. 오늘 자주 짧은 기도로 삼아 끊임없이 노래하시기 바랍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생활화보다 영성생활에 실제적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주-여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복음 환호송 역시 흥겹고 우리 마음을 환히 밝혔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마음이 가난한 겸손한 사람들 바로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마음의 가난이요 참 행복입니다. 요즘 참 많이 ‘---이 답이다’라는 제목의 강론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은 모두가 ‘사랑이 답이다’란 제목으로 수렴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제 졸저,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책이 품절된지 이미 오래인데 수도원을 찾는 피정자들이 끊임없이 찾는 것을 보면 새삼 사랑이 답임을 깨닫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사랑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울리는 징과 같네

하느님 말씀 전한다 해도/그 무슨 소용 있나

사랑없이는 소용이 없고/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성가 애창곡 46장 사랑의 송가 1절입니다. 가사 내용 그대로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 학생들인 우리들입니다.

여전히 공부해도 여전히 초보자처럼 느껴지는 사랑 공부입니다. 다 사라져도 영원히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인생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없어 외롭고 쓸쓸한 것입니다. 참 행복도 사랑에 있습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참 행복의 비결–지혜 사랑, 말씀 사랑, 에수님 사랑이 답이다-’로 정했습니다.

언젠가 참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참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지금 여기 있습니다. 사랑할 때 참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하느님의 유일한 소원도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 인류의 영원한 화두 같은 물음입니다. 바로 참 행복을 누리려면 무엇을 해야하는 물음과 대동소이합니다.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지켰는가 물었을 때, 부자는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 대답합니다. 계명들을 다 지켰는데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에 목마르다는, 참으로 행복하지 못하다는 고백입니다. 어떻게 참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지혜를 사랑하십시오.

지혜 사랑(필로소피아)이 철학아닙니까? 누구나 지혜를 사랑하면 철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면 무엇이든 즐겁고 자발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분도 성인도 금식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순결을 사랑하라 했습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수도생활도, 결혼생활도, 순종도, 겸손도, 성독도, 공부도, 침묵도, 고독도, 기도도, 가난도,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면 전부 보물이 되어 풍요로운 영성생활도 가능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저절로 자발적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순수한 아가페 사랑이 정결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지혜 사랑도 바로 그렇습니다. 정말 지혜를 사랑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참 행복에 지혜라는 보물보다 더 좋은 보물도 없습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도 지혜뿐입니다. 주님은 바로 제1독서에서 참 행복을 위한 지혜의 처방을 주십니다. 지혜를 사랑하여 기도하는 자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하는 자에게 지혜의 영이 옵니다. 현자의 고백을 들어 보세요.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

구구절절 너무 아까워 모두 인용했습니다. 참으로 지혜가 참 보물입니다. 참 행복도 지혜에 있습니다. 집착에서 초연하여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참 보물 지혜를 지녔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참으로 진짜 참 부자가, 참 자유인이 이런 지혜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런 지혜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런 지혜를 사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이런 지혜를 선물받고 싶지 않습니까?

둘째, 하느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아, 깨닫습니다. 앞에서 말한 지혜란 참보물은 하느님의 말씀임을!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말씀은 빛이요 생명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참으로 말씀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마음의 순수입니다. 위로와 치유도 받고 기쁨과 평화도 선물로 받습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해 집니다.

그러니 지혜의 참보물은 하느님의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평생공부가 말씀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말씀공부를 통해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더불어 나를 깨달아 알아 갈수록 지혜와 겸손, 온유와 인내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참 행복을 위해 말씀공부보다 더 중요한 평생공부는 없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님을 사랑하십시오.

지혜 사랑, 말씀 사랑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님 사랑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님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야 말로 하느님의 지혜이시며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십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님을 통해 하느님께 갈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 비로소 참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선언하셨습니다. 복음의 부자가 결정적으로 놓쳤던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참지혜, 참보물, 참행복이었습니다. 아무리 외적 계명들의 준수에도 예수 그리스도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공허할 뿐입니다. 영혼의 허기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자에 대한 결정적 처방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모두에게 이런 처방이 아니라 오직 부자에게 이런 극단적인 처방입니다. 그가 얼마나 소유욕에 깊은 병이 들었는지 간파하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합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는 훌륭한 신자였는데 삶의 중심에는 주님이 아닌 재물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봅니다. 하여 재물을 포기하고 당신을 따라 당신 중심의 삶으로 살라는 초대를 받았는데 많은 재물로 말미암아 좌절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주고 받는 대화가 영원한 화두입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부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가난하다 하여 무조건 구원도 아닐 것입니다. 바로 소유의 유무에 관계 없이 참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님을 사랑함으로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께 구원을 받습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님을 사랑하여 그분을 따를 때 자연스런 버림과 비움의 이탈의 삶에, 하느님과 이웃사랑은 저절로 뒤따를 것이며 무욕의 텅빈 충만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버림으로 얻고, 비움으로 채워지는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의 선물입니다. 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경우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지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늘 깨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꼴지가 되지 않고 늘 첫째의 삶을 살라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참지혜, 참보물, 참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모심으로 참부자, 참자유인이 되어 참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시편90,14). 아멘.

 

 

 

땅 위에 가득 찬 것은 주님의 것이다. <마르코 10, 17-3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 부자 청년에게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이런 말씀을 하실 권한이 주님께 있음을 증명해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 그 말씀에 “버린 것을 도로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하심으로써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증명해주십니다.

시편 23편에도 “손이 깨끗하고, 허튼 데 정신을 아니 쓰는 이, 이웃에 거짓 맹서 않은 이에게 주님은 큰 복을 내리리라” 하십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은 모든 이에게 자비를 공평하고 정의롭게 나누어주시는 분입니다. 누가 지상에 꽉 찬 공기를 내 것이라 하겠으며, 누가 저 높은 곳 태양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빛과 힘을 내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자기 힘으로 생산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이런 참 진리를 알지 못하고 모두가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그는 주님의 산에 오르지 못하고 주님의 것을 받지 못하고 빈곤하고 허무하게 살게 됩니다. 특별히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갑질을 하거나 자기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면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또한, 자기 주머니 것을 자기 주머니 안에 넣고 살면 필요한 사람이 필요할 때 사용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은 죽거나 영양실조로 병들게 됩니다.

깨끗한 손이란 움켜쥔 손이 아니라 펴진 손이며, 편 손은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의 손입니다. 가진 것은 내 것이 하나도 없이 주님의 것입니다. 나누고 내주어야 더욱 풍요롭게 됩니다. 상담하다가 후원회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이 어린이, 장애우 단체, 아프리카 등 후원회에 가입하여, 한 달에 몇만 원씩 후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가진 것을 나누고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은 주님의 것이어서 우리에게 명합니다. “네 것은 다 내 것이니 내가 원하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모든 이에게 명하십니다. 주의 기도 중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그 기도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올바른 믿음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것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가난한 마음이 생명의 길이다.

      김창선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이 땅에서 삶의 기쁨을 누리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연중 제28주일의 말씀을 통해 지상의 것과 천상의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소중한 지혜를 주십니다. 또한 나눔과 비움이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밝히십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지혜 7,7-11)에 솔로몬이 한밤중에 주님께 기도하니 지혜의 은총이 내립니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 열왕 3,5)고 물으셨을 때, 그는 자신의 건강과 재물이 아닌 ‘듣는 마음’과 ‘선과 악의 분별’을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시고 부와 명예는 덤으로 주십니다. 지혜의 빛을 입은 솔로몬은 지혜에 비기면 권좌, 재산, 보석, 건강, 미모 등은 하찮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알고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지혜는 바르게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에게 청하면 베풀어주십니다. 덧없는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영원하신 주님의 자애와 지혜를 입으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기쁨은 물론이요 후손들에게까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시편 90, 화답송)

 

제2독서(히브 4,12-13)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땅을 지배함을 밝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 내면의 생각과 속셈까지도 가려내시기에 모든 피조물은 그분 눈앞에 벌거숭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소중한 지혜가 담겨져 있기에 이에 대한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 주님께 보답해 드리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와 부자 이야기’는 공관복음(마르 10,17-27, 마태 19,16-26, 루카 18,18-27)에 모두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가며 ‘선하신 스승님’이라 경의를 표한 그가 악의를 품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공개적으로 남을 칭찬하는 인사말은 상대방의 명예에 손상을 입히고 자신은 일어서려는 저의가 숨어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잘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고 하시며 겸손하게 대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로 가려면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 횡령을 해서는 안 되며 부모를 공경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스럽게’ 보셨습니다.(마르 10,21) 마르코 복음사가만이 이 표현을 쓰고 있는데, 유다사회에서 사랑은 말보다 실천을 중시합니다. 부자는 어려서부터 도덕적인 생활을 해왔기에 예수님의 관심을 얻어 제자가 되려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시며,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라며 권고하십니다. ‘가진 것을 판다’는 것은 오늘날 서구사회처럼 주식을 팔고 은행구좌를 비우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 곧 가족, 주택, 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사도들처럼 혈연의 유대도 끊어야 하는 철저한 자기 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에서 가족과 혈연관계는 삶 자체에서 뗄 수 없는 필수조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현세에서 박해를 받는 사회적 자살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고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게 영예로운 일이며, 당장 보상을 받아야 만족하기에 주님을 따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을 위해 많은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 되고 말았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화들짝 놀란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고 수군댑니다. 탐욕적인 부를 누리는 사람은 낙타처럼 몸집이 크기에 바늘구멍 같은 ‘좁은 문’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 비움의 은총을 입으면 가능합니다.

 

유다인은 자녀들에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지혜가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재물의 소유와 사용에 대해서도 큰 가르침을 줍니다. 부자에게 문제는 부의 소유가 아니라 탐욕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알고 보면 주님께서 물질적인 축복으로 주신 재화에 인간은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삶의 목적은 재물을 모으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알고 사랑과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 뒤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더욱 가난해지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이 가난한 모습을 본받아 복음적 가난의 삶을 산 모범적인 분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실리오 성인은 부는 샘에서 솟는 물과 같아 자주 길을수록 더욱 깨끗해지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썩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마음의 가난을 깨달은 사람은 주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습니다. 누구나 벌거숭이로 세상에 왔다가 먼지로 돌아갑니다. 삶은 내적 태도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홍성만 신부님

오늘 복음은 길을 막 떠나시려는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선하신 스승 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 서는 안 된다. …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이에 예수 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 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 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 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 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 나갑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 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저는 이 구절을 대할 때마다 주춤해지곤 합니다. 그러면 서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는 그 의 뒷모습이 한없이 쓸쓸해 보입니다. 한편 그를 사랑스럽 게 바라보신 주님의 눈길에 마음이 자꾸 갑니다. 이어서 드 는 생각은, ‘재물이 많은 성실한 젊은이가 이후 어떻게 하 느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을까?’입니다. 특히 삶의 굴곡 속에서 몸과 마음을 정리해야만 했을 때 말입니다. 그는 그 

 

어느 땐가 마음이 움직이면서 재산 일부를 희사하였겠고, 그러다 보니 자유로워지고 평화가 그를 감싸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차츰 자선과 희사는 그 액수를 더해 갔을 것입니 다. 마침내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의 재산이 결코 자신의 것 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정하면 서, 존재론적인 자유와 평화 속에서 믿음의 생활을 영위하 였으리라 묵상합니다. 그리고 끝내, 그렇게 바라던 영원한 생명이 내가 무엇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서 허락하시는 선물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묵상하면서 스스로 자문합니다. 지금 내가 소유 하거나 누리고 있는 것 중에 절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 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재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데 분명 장애가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앞으로 영원한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받아들이 는 소중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 을 나의 삶의 한가운데로 모시려고 애쓰는 나를 결코 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재산이 많기 때문에, 사랑스럽게 바 라보시던 예수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젊은이가 마침내 그를 향한 사랑의 시선을 깨닫습니다. 깨닫는 순간 자유와 평화 그리고 기쁨이 엄습합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느 님이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오늘의 복음환호송입니다. “알 렐루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알렐루야.”

 

 

 

먼저 손에서 놓으면

      연상모 신부님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키며 살아온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살인을 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으며, 도둑질도, 거짓 증언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을 공경하며 살았습니다. 이렇게 계명을 지키며 살아온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영원한 생 명을 얻는 방법을 묻습니다.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전혀 몰랐기 때문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에게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 반, 그리고 예수님께 잘하고 있다고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 반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이 청년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계명을 다 지키고 살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를 주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서도 재산이 꽤 많았던 것으로 봐서는 부모님이 부자이거나 스스로가 성실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무엇인가 부족한 것 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부족함을 모르는 풍족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풍족함을 포기하라는 예 수님의 말씀은 익숙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라는,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하라는 말씀으로 들렸 기에 쉽게 따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가진 것을 손에서 놓으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따르기만 했다면 그 다음 단 계로 넘어갈 수 있는 초대였습니다. 그렇게 가진 것을 손에서 놓을 수 있었다면 그 다음으로 마음에서도 놓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비워진 마음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진리를 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참진리를 알게 되었다면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지켜온 계명이 단 순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금지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라는 초대임을 깨 달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 하고 슬퍼하며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우리가 당장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저 슬퍼하며 그분을 떠나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있는 삶 의 자리에서 조금씩 손에서 놓는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꼭 쥐 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손에서 놓게 되면, 마음에서도 놓을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마음에서 놓게 되면 그렇게 비워진 곳에 예수님을 더 채 울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찮은 물건 하나를 버리지 못하는 미련

      임현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쉽다”고 말씀 하십니다. 재물의 탐욕에 빠져 살면 그 사람은 하 느님을 잃고 영혼까지도 잃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애용하던 하찮은 물건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매이는 경우가 허다합니 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입니다. 가진 것이 더 값진 것들이면 더 애착이 가기 마련인데, 그런 것들을 더 많이 가 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버리지 못하는 옷가지 하나에 비교할 수 있 을까요? 아마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것입니다. 물욕에 빠지면 이렇게 헤어나지 못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 는 것이 더 쉽다’하신 그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맙니다. 있는 사람이 더 구두쇠가 된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가진 만큼 거기에 그만큼 애착을 갖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그토록 목숨을 걸고 움켜 쥐었던 것들도 주님이 부르시면 한 순간에 놓 아야 합니다. 모든 시간은 주님이 오라고 부르시는 그 길을 향해 빈틈없이 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르 8,36) 하십니다. 재물은 주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유익하게 사용되 어야 할 도구이지 목숨을 걸어야 할 목적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가르침 입 니다. 재물에 방향을 맞추어 살면 오히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가로 막는 큰 장 애가 되고 맙니다.

재물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시는 또 다른 말씀도 기억해 보시면 좋겠 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하느님 자녀답게 사는 길은 재물이 우선이 아니라 늘상 생명과 재물을 주시는 하느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받은 재물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물질이든 영적인 재능이든 주님께 받은 것들임을 항상 기억하며 주님의 뜻에 합당한 도구로 쓰여졌을 때에 비로소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내가 나눌 것은?

      김형렬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있다고 자신했던 것 같습니다. 그 자신감은 선조들에게 내려 주신 하느님의 계명을 어김없이 다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부족한 것 한 가지, 소유하고 있는 많은 재물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고 했을 때 실망하며 돌아갑니다. 이 실망감과 원인이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않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조언을 실천하지 못할 자신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본인만이 알 것입니다.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님 발현 성지를 갔을 때, 성전 밖에서부터 무릎을 꿇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행렬을 봤습니다. 저는 차마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리고 올바른 행위인지 알 수 없으나 정성을 다해 자신을 낮추고 기도하는 모습에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그 감동은 저의 기도 생활을 성찰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바쳐온 기도가 얼마나 형식적이었는지를 깨달았고, 그러면서도 자만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져 반성했습니다. 하지만, 평신도보다 부족한 사제라는 반성이 저를 분발하게 하는 기회를 준 것 같아 값진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부족한 모습의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겸손해야 하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더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가진 재물과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엔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만 기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많이 성장한 모습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 수련을 통하여 세 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하게끔 합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 드린 일’이 무엇이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 드리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연히 ‘해 드려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은 하느님과 교회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기만 바라는 신앙인들에게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 겁니다.

 

오늘 두 독서에서는 지혜이신 하느님만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많은 것을 가진 솔로몬 왕은 지혜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이 세상의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번 한 주간 내가 가진 재물과 재능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기억하고, 다른 이들과 나누는 지혜로운 신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더 큰 선물을 하느님께 받는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서공석 신부님

복음서들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억하던 것과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고 실천하던 바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 그분에 대해 회상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들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이 기억하던 것, 그들이 믿던 것과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실천하던 것들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것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서를 읽는 것은 그 안에서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고, 실천하던 바를 알아듣고, 우리도 우리의 문화적 여건에서 올바로 믿고 실천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문화적 여건은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것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과 실천의 모습도 달라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는다.”(마르 2,22)는 말씀과 같이, 시대가 다르면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모습도 달라야 합니다. 신앙과 관련된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 청년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를 먼저 소개합니다. 예수님에게 접근한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 청년은 유대인으로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켜왔다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려면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장래가 촉망되던 유대교바리사이파 율사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신앙으로 전향한 후,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고귀한 인식 때문에...나는 모든 것을 잃었으며 쓰레기로 여겼습니다.”(3,8).

 

오늘 복음은 그 청년이 부자였다는 사실을 들어서 재물이 신앙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오늘 복음에 도입하기 위한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복음서들 안에 재물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여러 번 나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재물의 유혹과...욕심이 밀고 들어오면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한다.”(4,19)고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6,24)고 말합니다. 재물에 대한 우리의 애착은 하느님도 이웃도 보지 못하는 경지로 우리를 쉽게 몰고 갑니다. 진지한 모든 종교는 어느 수준의 무소유(無所有)를 권장합니다. 재물이 발산하는 현란한 빛은 인간을 쉽게 무분별하게 만듭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사람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것으로 혹은 값비싼 명품으로 스스로를 치장하면,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훼손되기도 합니다. 자기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모든 이에게 가진 것 모두를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수준 이상의 부자는 ‘바늘귀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와 같이 구원 받을 수 없고, 어느 수준 이하의 재물을 가진 사람은 구원 받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재물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고 복음은 권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마음이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필립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궁핍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어떤 일,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을 통해 나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4,11-13).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집착하는 재물이 나에게 힘을 주는지, 혹은 바울로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이 힘을 주시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택한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신앙인은 때때로 하느님 앞에 눈감고 앉아서 반성해 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도록 삶의 궤도를 수정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오늘의 청년은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고칩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당신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의식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선하십니다. 우리 안에도 선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있다면,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이고,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자들이 서로 묻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고, 당신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말하는 길거리 선교사들이 알리는 하느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은 선한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에 대한 말도 선하지 않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재물과 명예를 얻기 위해 살기보다는, 많은 것을 버리고 잃는 아픔을 겪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그분이 보여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이를 찾아보는 선한 실천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시오.”(마태 5,16).라는 예수님의 분부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선한 실천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서는

나눌 수 있는

오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줄 수 있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나눔의 삶으로

우리의 삶은

살맛나는 

삶이 됩니다.

 

나누게 될 때

알게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실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기쁨을

알려주십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나눔입니다.

 

나눔의 삶이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삶입니다

 

다시금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삶은 나눔이며

나눔은 기쁨이며

기쁨은 가난한 이들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행복으로 나아가는

나눔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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