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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1년 10월 11일 (녹)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1.10.11|조회수479 목록 댓글 0

제1독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시작입니다. 1,1-7
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2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3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7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서간을 보내며, 은총과 평화를 기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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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다며,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며, 요나 예언자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지난주 금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이야기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루카 11,15-16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가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앞의 내용과 연결해서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표징을 읽어 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표징은 무엇일까요? 표징은 단순히 기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표징은 하느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하느님 구원 약속의 성취를 읽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 그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그저 일종의 구마 행위로 바라보았음을 알려 줍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이 한마디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저 요나 예언자의 이 한마디면 충분하였습니다. 요나 예언자가 선포한 뒤에,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큰 성읍 니네베의 모든 사람이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 한마디의 선포로 회개합니다.

이방 민족인 니네베 사람들도 요나의 한마디를 통하여 회개하는데, 자칭 하느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다인들은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들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을 직접 모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오고, 말씀 자체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빵이 되어 오십니다. 이 만남 안에서 우리 또한 유다인들처럼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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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로 규정하시면서, 그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나 예언자는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네베로 가라는 소명을 받았으나, 순명하지 않고 도망을 가다가,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낮과 밤을 지냈고, 결국 니네베로 가서 하느님 명령대로 회개를 선포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생명을 되찾은 사람으로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위한 표징이 되었던 것입니다.사람의 아들인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세대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십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뿐만이 아니라 예수님 인격 자체가 사람들에게 표징이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요나 예언자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보낸 것을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셔서 사흘 동안 머무신 것을 미리 보여 준 예표로 여겼습니다.이 표징 이야기의 핵심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남방의 여왕이나 니네베 시민들은 다 같이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들은 현자였던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 예언자의 선포를 경청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그들보다 더 탁월한 현자요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지혜와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상대로 엄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메시지는 예수님 당시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주님의 요구이며 요청입니다. 회개하여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는 그 자체로 이미 은총입니다. 회개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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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징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보고 확신할 수 있도록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이나 평화, 정의 등과 같이 우리의 삶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치 그것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만, 표징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차릴 뿐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눈빛이나 말투, 몸짓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그 바탕에 신뢰의 마음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평화는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서로 간에 진정한 사랑과 양보의 마음이 있어야 진짜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정의도 단순히 나의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 줄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 대해 한탄하십니다. 표징은 이미 그들에게 주어졌지만, 그들이 그 표징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 인류에게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신 표징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볼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니 그것을 알아볼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표징도 의미가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신뢰하는 오늘날, 신앙인에게는 표징의 깊은 뜻을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이 더욱 절실합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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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던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한 학기에 시험은 두 번 보았습니다. 중간고사를 기말고사보다 잘 보았으면 두 시험 점수의 평균이 그 학생의 성적이었지만, 만일 기말고사를 중간고사보다 잘 보았다면 실력이 향상된 것으로 인정하여 중간고사 점수는 넣지 않고 기말고사 점수만으로 성적을 주셨습니다.

회개한 죄인에 관한 문제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악하게 살다가 회심하여 하느님께 돌아왔다면, 그들의 삶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군중들에게, 불의와 폭력을 저질렀으나 요나의 설교에 회개하여 깨끗이 손을 씻은 니네베 사람들이 평생을 미지근하게 살아온 군중이나 신자들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공공연한 죄인이었다가 예수님께 용서를 받고 돌아와 그분을 깊이 사랑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봅니까? 예수님께서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어떤 사람은, 커다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신앙은 어떤 표징이나 기적을 눈으로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과 체험을 통하여 이르게 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최대의 표징이요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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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동료 사제들과 테니스를 치는 중에 허리 통증이 왔습니다. 몸풀기가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하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계속 운동하였는데, 급기야 앉았다가 일어서기조차 힘들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한 주 넘게 물리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생하고 난 뒤 불현듯 제 자신이 제 몸을 소홀히 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온 통증은 심각한 병이 되기 전에 자신을 돌보라는 하나의 신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동안 수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음에도 아무런 표징도 보지 못했다고 우기는 군중을 꾸짖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시고, 눈먼 이를 보게 하시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표징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많은 표징을 보고서도 변화되기는커녕 더 큰 표징을 요구할 따름이었습니다.

제 몸이 제게 올바른 몸 관리를 호소하며 신호를 보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가 변화되기를 바라시며 일상의 크고 작은 일을 통하여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십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통하여 그 신호를 알아듣고 변화되었으며, 남방 여왕은 그 신호를 알아듣고자 솔로몬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여러 가지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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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 존경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사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칭찬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명예로워지려는 욕망으로부터 / 찬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선택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조언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인기를 끌려는 욕망으로부터 / 모멸받는 두려움으로부터 / 경멸받는 두려움으로부터 / 질책당하는 고통의 두려움으로부터 / 비방당하는 두려움으로부터 / 잊히는 두려움으로부터 / 오류를 범하는 두려움으로부터 / 우스꽝스러워지는 두려움으로부터 / 의심받는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

마더 데레사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살아 계실 때부터 이미 성인처럼 알려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셨지요. 그래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과, 한편으로 자신의 삶이 무너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이런 기도가 누구보다 더 절실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분은 늘 이런 기도를 하며, 매순간 뉘우치고 새롭게 시작하기를 반복하며 살았으리라 짐작됩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첫 말씀이었고, 복음의 대부분의 내용은 회개와 관련이 있을 정도로 우리 구원을 위한 핵심 과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큰 죄를 짓고 살지 않는 한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내적인 힘이 어디에 있는지 세세히 살펴보면 자신이 얼마나 회개하고 살아야 할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며 살고 있어도 그 마음은 온갖 욕망에 사로잡혀 있거나 옹졸한 자기 생각에 빠져 있어서 정작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안 계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남들에게서 비방당하고 질책당할까 하는 두려움, 복음적 가치로 위장한 권력욕 등, 하느님이 아닌 위장된 거짓이 우리 삶을 지배하여 성실한 신앙인처럼 자신과 남을 속이고 있는 경우입니다.

회개는 우리 안에 있는 거짓을 식별하고 이를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거짓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아직 우리 삶에 평화가 없다면 무엇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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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불만을 가집니다. 그리하여 예언자가 되기 싫어 도망을 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끄심에 결국은 승복하고 ‘니네베’로 갑니다. 당시 니네베는 이방인의 큰 도시였습니다. 그가 할 일은 도시의 멸망을 예언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회개합니다. 요나 역시 긴가민가하고 예언했는데, 니네베 사람들은 즉각 뉘우침의 단식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듯 이방인들도 요나의 외침에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언자가 ‘되기 싫어했던’ 사람의 설교를 감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조건을 답니다. 스승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함을 꾸짖으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음 없이’ 기적을 바라는 것을 ‘악한 행동’으로 규정하고 계십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기적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매일매일을 ‘기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상의 기적’을 모르는 사람이 특별한 기적에 감동할 수는 없습니다. 신기해할 수는 있어도 감동을 받지는 않습니다. 감동 역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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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다는 것은 치유를 요구하는 생체의 반응이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위험 상태도 감지할 수 없다. 가정이나 공동체 생활에서 심기가 불편한 것은 삶의 성찰이 필요한 때라는 신호다. 시대의 이상 징후는 사회적 건강성을 성찰케 한다. 

우리 삶의 주변에는 사라지거나 새롭게 나타나는 것이 적지 않다. 점심 도시락, 목욕탕에서 서로 등을 밀어 주는 풍경, 대가족제, 어머니와 대한민국 아주머니의 힘 등이 사라졌고, 가족은 있어도 가정이 없다. 노동과 상부상조, 예의염치, 의협심, 마을, 가내 수공업도 사라져 버렸다. 공동체가 해체되었다는 징표들이다. 그러나 쓸모없고 나쁜 것들은 날이 갈수록 기승이다. 늘어나는 암 진단과 중환자실, 자격증, 명품 브랜드, 전자 기기, 외식, 퇴폐업소, 게임, 복권, 중독증, 이혼, 우울증, 핵 발전소 ……. 과학 기술과 금융 자본주의가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들이다. 

종말론적 구원의 성사인 교회는 무엇을 보여 줄 수 있는가? 타락한 니네베의 도시에서 회개를 외친 요나 예언자가 구원의 징표가 되었듯이, 인간성과 영성이 한없이 추락하는 흉측한 소비문화의 도시에서 교회는 다가오는 종말의 날과 새날의 빛, 죽음과 생명 가운데 하나의 길을 선택하라고 외치는 하느님 나라의 성사가 되어야 한다.

기술 문명과 소비문화의 혜택에서 스스로 물러나 바위가 있는 겟세마니 언덕으로 가야 한다. 불편한 생활, 고행과 극기의 삶이 우리 시대를 치유하는 유일한 성사다. ‘우리가 보여 줄 것은 성체성사의 기적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하시고는 다음 날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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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여러 표징을 받았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요구를 들으실 때마다 시대의 징조를 모르는 그들을 보시고 한탄하셨습니다. 신앙의 눈을 크게 뜨고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이루신 기적을 듣고 보았더라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신 표징이심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손길을 보았으면서도 일부러 외면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악의에 차 있다고 나무라셨습니다.

어느 일간 신문에서 백혈병으로 숨진 어린이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린이는 열세 살 소년으로 초등학교 6학년이었습니다. 작가가 꿈이었던 어린이가 2년가량 백혈병으로 고통을 겪으며 그 아픔을 일기로 썼습니다.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에게 백혈병이 왔다. 너무 억울하고 슬프다. 내게는 맞는 골수가 없다고 한다. 누군가 나를 살려 줬으면 좋겠다. 바다에 가 보고 싶다. 파란 하늘을 보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이런 것을 느끼기만 해도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았다. 살아 숨 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

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공기,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푸른 하늘, 이 모든 것이 시한부 인생을 사는 그 어린이에게는 행복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고 기적일 수 있습니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 봄맞이하며 재잘대는 계곡의 물소리, 해맑게 웃는 어린아이의 얼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이웃의 친절 ……. 이런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의 선물이며, 우리가 사람들을 통해 날마다 누리는 축복입니다. 삶은 자세히 바라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매우 짧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발걸음을 늦추고 우리 주변에 있는 놀라운 보화들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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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사회의 지식층이요 주류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끊임없이 도전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와 놀라운 언변으로 그들은 오히려 궁지에 몰렸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럴 때마다 늘 하늘의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숱한 표징에도 결코 마음이 열리지 않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제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이란, 요나가 주님의 사명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도망을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내던져졌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가두셨다가 육지에 뱉어 내게 하시어 결국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던 이야기로,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회개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고 돌아가셔서 사흘 동안 묻히셨다가 부활하시리라는 구약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란 이런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는 말씀에는, 당신께서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서 돌아오셔야만 이 세대가 ‘마음의 문을 열고 회개를 할 것인가’ 하는 한탄이 배어 있습니다. 마치 부모들이 “내가 죽어야 저 아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라고 말하며 한숨짓는 것과 같습니다. ‘악한 세대’란 철저하게 ‘잘난’ 사람들의 계층을 말합니다. 자신이 가진 알량한 지식, 사회적, 종교적 신분이 오히려 철저하게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살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모든 것을 가졌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빈 쭉정이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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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믿겠다고 합니다. 흥정입니다. 그런 모습은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적이 있다는 곳’에 사람들은 모여듭니다. 기적을 확인하면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를 걸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가 연출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기적적인 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회개가 먼저입니다. 새 마음으로 기도와 성사 생활을 하면 기적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호기심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기적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현대판 솔로몬’을 찾고 있습니다. 물질을 앞세워,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솔로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욕심에서 조금만 물러서면 솔로몬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을 만날 수 있는데, 그걸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외치고 있습니다.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기적은 정성의 결과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심혈을 기울이면 ‘기적적인 일들’은 일어납니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정성을 망각하기에 욕심에 빠집니다.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는 마음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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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예언자는 특이한 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합니다. 예언자가 싫다며 먼 곳으로 달아나려 합니다. 당시 예언자는 신분을 보장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카리스마’가 인정되면 먹고사는 데도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언자의 신분을 거절하려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얽매이는 것이 싫었거나 아니면 남다른 취미 활동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돌릴 수 없었습니다. 말로써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기에 그는 죽음을 체험합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나자 태풍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더구나 자기 때문에 무모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요나 1,12). 요나는 마음을 비웠던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 역시 죽음의 위협을 느꼈기에 회개했습니다. 요나의 목소리에는 죽음의 힘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힘을 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뻔했던 사건들’은 모두가 은총입니다.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살아 있음’은 분명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청중들에게 요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신 안에서 ‘하늘의 표징’을 찾아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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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상권 10장 1절에서 13절을 보면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끝, 지금의 예멘 부근에 있었던 ‘스바’라는 나라의 여왕이 솔로몬 임금의 명성을 듣고 그의 지혜를 시험하려고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스바는 문명국이었고, 솔로몬 임금이 다스리던 이스라엘 또한 그 위세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지혜가 얼마나 출중한지를 시험하고자 많은 것을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모든 것에 답변을 하였을 뿐 아니라 그 인격이 훌륭하였기에 결국 두 사람은 사랑을 하여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이 에티오피아를 건설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한편,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의 기적이란 요나의 설교를 듣고 죄악에 빠져 있던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곧, 요나는 하느님 앞에서 악행을 일삼던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거나 불을 내리거나 하는 방식으로 회개하라고 설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그대로, 그들의 성읍이 무너질 것이라고 한 예언을 사람들이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가지 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니네베 사람들도 스바 여왕도 모두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에 대한 열망을 가지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기는 이방인의 모습은, 마음이 돌같이 굳어 버린 유다인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유다인들을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이 실현될 것임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봄을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만물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꽃이 피고 새순이 돋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봄에 피는 꽃은 겨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포가 우리나라의 개나리를 너무 좋아해서 고국 방문 때 개나리 몇 토막을 잘라다가 시드니 자기 집 정원에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나리는 위로 자라기만 하지 몇 해를 두고서도 꽃을 피우지 않는 것입니다.
개나리꽃이 예쁜 것이지, 개나리의 줄기는 별 볼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는 식물학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시드니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춥고 황량한 겨울을 이겨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게 보입니다. 암을 극복하신 분이 더 열심히 사시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자기 삶이 다져져서 삶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지금을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 후에야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

요나 예언자의 말 한마디로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했던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며 표징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나 예언자는 이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민족을 지배하던 니네베 사람들이기에 이들의 멸망은 곧 자기 민족의 구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망까지 갔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대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몽땅 다 회개합니다.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말이지요.
바로 가장 큰 기적과 표징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을 때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 모습이 때로는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를 인정하고 굳은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했을 때, 가장 큰 기적과 표징이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적과 표징을 찾아보세요. 고통과 시련 속에서 그 기적과 표징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노동은 인생을 감미롭게 해주는 것이지 결코 힘겨운 짐이 아니다.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노동을 싫어한다(빌헬름 브르만).

 

어떤 영향을 세상에 전달하겠습니까?

스탠퍼드 대학에서 104명을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우선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제1그룹에는 지루함을 느꼈던 때를 주제로 짧은 에세이를 쓰게 했습니다. 제2그룹에는 인생이 불공평하거나 ‘타인에서 부당한 대우나 무시당했다’라고 느꼈을 때의 상황을 쓰도록 했습니다.
이 작업을 마친 사람들에게 혹시 연구진을 도와줄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부정적인 글을 쓰도록 했던 제2그룹이 제1그룹보다 26% 낮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2그룹은 계속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보였고, 실험 후 그들의 자리에는 쓰레기가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실험용 펜까지 가지고 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삶 자체를 바꿔놓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전달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으로 다른 이에게 좋은 영향이나 나쁜 영향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향을 세상을 전달하겠습니까?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 표징은 일상생활 그 한가운데에서 숨어있기에, 매일 눈을 부릅뜨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기저기 황금빛 들판이 장관입니다. 점점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는 벼이삭을 바라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도 저렇게 성숙되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더해가면서 점점 균형 잡히고 성숙한 신앙인, 영적이고 겸손한 신앙인으로 성장해나가면 좋겠습니다. 크신 주님 앞에 나란 존재가 얼마나 미소한 것인지를 잊지 않는 신앙인, 주님 떠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사는 신앙인으로 익어가면 좋겠습니다.
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게 되는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상승과 추락, 병고와 죽음, 그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기꺼이 수용하며 살아가는 넉넉한 신앙인, 지나가는 작은 것들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은 관대하고 너그러운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정반대의 길을 걷은 신앙인들이 수두룩합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죄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나 모릅니다. 자신이 얼마나 정도를 벗어나 엉뚱한 길을 걷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주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신앙은 너무나 미성숙하고 유아기적인 것이어서 또 놀랍니다. 눈만 뜨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현실성 떨어지는 끝도 없는 기적이요 치유요 표징입니다.


예수님 시대도 상황은 비슷했나 봅니다. 얼마나 한심스럽고 안타까웠으면, 예수님께서 장탄식을 터트리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복음 11장 29절)


그런 분들이 즐겨 찾아가는 곳이 있습니다. 조금 밋밋하게 느껴지는 본당 공동체나 신앙 공동체는 뒷전입니다. 지극히 어색하고 볼썽 사나운 곳을 찾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거기 가면 그런 분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맞춤형 행사가 이어집니다.
입만 열면 성공이요 합격입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불치병의 치유나 기적이 설교의 거의 전부를 차지합니다. 신앙을 빙자한 사기꾼들입니다. 거기에 현혹되어 교회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분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늘 이 시대 표징은 우리들의 일상생활 그 한가운데에서 숨어있기에 매일 눈을 부릅뜨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성체성사야말로 표징 중의 표징입니다. 매 미사 전 고백소 안에서는 수시로 기적이 거듭됩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 안에서 용서와 사랑, 헌신과 배려를 통한 기적과 표징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듣는 마음’은 자신 안의 뱀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지금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악한 이유를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들이 표징을 보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듣지 않으면서 보기 원하면 악한 것입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악한 세대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증거를 대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불신을 깰만한 화끈한 무엇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를 보여주면 의견을 바꿀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그런 것으론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고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기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속에서 사흘을 있다가 밖으로 나온 사건입니다. 예수님도 사흘 동안 땅속에 머물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울 수 없는 표징에도 악한 세대는 꼼짝하지 않습니다. 이미 귀를 막고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부터 본인들은 마음이 굳게 닫혀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남방 여왕이 긴 여행을 했다는 것과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기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는 것은 듣는 것 다음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 마음에 이미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합당한 증거를 보여주어도 그 사람은 바뀌지 않습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뀌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최강의 영향력』이란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증거가 우리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가?’
이 책에서 여러 실험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사형제가 범죄율을 낮춘다는 증거와 또 범죄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객관적 증거를 준비하였습니다. 물론 객관적 정보이기는 하지만 둘 다 편향되게 만든 그럴싸한 허위 정보들입니다.
두 그룹에 각자 하나씩의 정보를 주었더니 사형을 반대하던 학생들은 사형이 범죄율 감소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증거에 대해서 잘못되고 조작된 정보라고 반기를 들었고, 사형을 찬성하던 학생들은 범죄율을 낮춘다는 증거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가 아니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실험은 온실가스에 관련된 실험입니다. 처음 환경학자가 2100년까지 지구 온도가 3.4도 오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의견에 수긍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과학자들이 정보를 재평가한 후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절반에게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했고 다른 절반에게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바뀐 정보를 수용했을까요?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3.4도 맞을 텐데?”
[참조: ‘팩트를 제시해도 신념을 바꾸지 않는 진짜 이유’, 유튜브, ‘더 나은 삶 TV’]

이것은 지금 대선 주자들에 대한 인지도 평가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잘못된 일들을 아무리 쏟아내도 일단 한 번 지지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좀처럼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한국일보, 2021년 10월 5일’ 자 신문에 ‘대선이 이상하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선주자 빅2’로 불리는 두 사람에겐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고발 사주 의혹 같은 대형 악재를 맞아도, 실언·실책으로 자질 시비가 일어도 콘크리트 지지율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사와 윤 전 총장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겠지만, 이 같은 기현상엔 그늘도 있다.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똘똘 뭉쳐 격돌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뜻인 동시에, 대선에서 정책·인물 경쟁이 변별력을 발휘할 공간이 지극히 좁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 선거를 할 때 나라를 위한 대통령을 뽑으려는 것보다는 내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증명하려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증거를 제시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나를 부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열린 마음’을 갖고 올바로 판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확증편향은 의견이 곧 자신이라 여기는 오류에서 시작함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부정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서울 아파트 시세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32평 아파트를 보여주고 “10억 원이 넘을까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은 10억 원 아래다, 더 나간다는 두 쪽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자신과 의견이 같은 사람들이 몇 명씩인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이 많으면 자신감이 생겨 자신이 배팅한 가격보다 더 내리거나 더 올렸습니다. 하지만 처음 정한 의견은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남더라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더 자신의 의견을 견고하게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은 견뎌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듯 ‘자기가 부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견이 틀릴 수 있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믿고 있었던 자신의 의견이 뱀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와는 뱀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뱀을 철저히 믿은 것입니다. 뱀의 의견이 바뀌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아가 뱀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에 귀를 막아버립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자아를 뱀이 아니라 천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버린 것만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지도 않을 것이면서 끊임없이 증거를 보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명확한 증거를 눈으로 보더라도 자기 식대로 합리화해버립니다. 따라서 듣지 않고 보여달라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어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가 뱀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오류만 있음을 알기에 진리를 외부에서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듣는 마음’을 청했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지혜는 듣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뱀이요, 오류요, 어둠이요, 악임을 인정할 때야만 듣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뱀임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외부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책을 찾아서 읽고, 강의를 찾아서 듣고, 묵상하며 하느님 음성을 들으려 합니다. 고집불통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뱀임을 아는 것뿐입니다. 내가 뱀임을 알았다면 외부에서 진리를 습득하기 위해 남방 여왕처럼 진리를 찾는 노력을 반드시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두 가지 주제를 전해 줍니다. 하나는 가벼움입니다. 감각적인 삶, 육체의 만족, 하고 싶은 일을 사랑하려는 삶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거움입니다. 이성적인 삶, 영적인 만족, 해야 할 일을 사랑하려는 삶입니다. 이 두 가지 주제를 연결해 주는 단어가 있습니다. ‘키치’입니다. 키치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밤 길 운전에 오두막을 봅니다. 오두막에 한 가족이 식사를 합니다. 그 가족이 참 행복하다고 보는 것은 나의 생각입니다. 실제로 그 가족이 행복한지는 모릅니다. 독재정권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은 민주화된 나라의 생활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민주화된 사회에도 ‘희로애락’은 있기 마련입니다. 풍족하고, 만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모험과 열정을 동경합니다. 투쟁의 현장으로 가보지만 모험과 열정 뒤에는 위험과 죽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은 육적으로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님입니다.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은 영적으로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육적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보는 것입니다. 많은 표징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권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감각적인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고통으로 죽으셨지만 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는 이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바오로 사도가 전한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율법과 계명의 잣대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느님 아들의 죄명이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혁명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아넘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을 사람들은 직업과 가문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집안의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놀라운 표징을 보일 리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빌라도는 권력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하였지만 권력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서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많은 보물을 남겨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발견합니다. 어떤 이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어떤 이들은 감성, 이성, 오성을 통해서 참된 진리의 길을 찾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물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면 잘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물은 잠시 멈추어서 바라모면 보일 것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는 것도 큰 표징입니다. 우리는 밤에 잠을 자면서 죽음을 체험합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깊은 어둠을 체험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어쩌면 늘 새로운 부활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바라볼 때, 내가 만나는 이웃, 내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의 눈으로 바라볼 때, 교만함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서로를 이용하려하고, 모두가 경쟁의 상대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지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 만약 지금도 주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신다면 우리의 바람 역시 이런 모습에서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데, 주님은 이런 우리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그 때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것을 내 놓으실 것 같습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의 표징을 경험한 사람들은 바로 니네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방탕한 생활로 하느님의 걱정을 만들었지만 결국 멸망해야 마땅했던 그들은 요나의 이야기를 듣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반성과 회개가 하느님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엉망이 되고 사람들이 죽음의 문화에 짓눌려 살고 있는 상황에 우리는 뭐 하나 신기한 일이 일어나 우리를 구해주는 징표가 되기를 바라고 기적을 청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자신들에게 회개하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 마음을 돌린 이들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놀라운 기적이 아닌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고 삶을 바로 잡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요나는 니네베의 회개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처벌을 바라며 하느님 앞에서 숨으려 했습니다. 그에게 니네베는 구제불능의 세상이었으며 없어지면 좋을 세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그들을 구하십니다.

최고의 지혜를 찾아 나선 남방 여왕이었지만 정작 그 좋은 세상에 있었던 솔로몬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하느님을 잊은 이들에게 하느님은 기적이 아닌 당신의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주님은 기적을 팔아 구원을 보이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사람들의 올바른 깨달음 없는 기적의 청을 들어주실 생각이 없으신 주님은 당신이 요나의 목소리가 되실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기적으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간절히 사람과 세상의 회개를 원하시고 계시기에 그들 앞에 기적이 아닌 죽음을 각오하는 사랑으로 서실 것을 미리 이야기하십니다. 곧 “요나보다 더 큰 이”의 목소리가 아닌 생명을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아, 왜 그러는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아
왜 그러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아


보여주어도
보지 않으며
왜 보여 달라는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아


들려주어도
듣지 않으며
왜 들려 달라는가


알고 싶은 것만
아는 사람아


알려주어도
알지 않으며
왜 알려 달라는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사람아


하라하여도
하지 않으며
왜 할 바를 알려 달라는가


가고 싶은 데만
가는 사람아


가라하여도
가지 않으며
왜 갈 데를 알려 달라는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아


살라하여도
살지 않으며
왜 살 길을 알려 달라는가


사람아
왜 그러는가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가 11, 29-32(연중 28주 월)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마태오복음>에 비추어 보면,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앞 장면에서 그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1,16 참조).

사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달려왔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지역에서는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지혜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요나의 표징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외치는 회개의 때가 왔음의 표징이며, 동시에 그가 바다에 빠져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의 표징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표징을 볼 줄 아는 눈, 곧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일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활동이요 현존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루카 11,29)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먼저 베푸신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아멘.

 

 

 

선택받은 우리들의 복된 삶, - 환대歡待와 경청敬聽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문득 이름에 관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이런 이름은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신순이’라는 60년전 초등학교 시절 여학생 이름입니다. 이름을 거꾸로 하면 ‘이순신’ 장군이라며 놀리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런 놀림은 기분 좋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 중 압권은 전임 의정부 교구장이었던 ‘이한택’ 주교일 것입니다. 거꾸로 하면 ‘택한이’라 바로 하느님이 선택한 이라 웃으며 자신의 성소를 자랑했다는 어느 자매로부터 들은 주교님 일화도 생각납니다.

 

또 어제는 지인과 통화하던중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 생각나 나눴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귀한 살아있는 성경聖經같은 존재인지 실감케 하는 많이 회자되는 명시입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이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의 마지막 말마디중 ‘환대’란 말에 즉시 21년전 썼던 제 자작 애송시 ‘환대’가 연상되어 다시 나눴습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찌프린 적 있더냐

하루 이틀 몇 날이든

언제나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주차장 옆 코스모스 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 마다 환히 밝아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우리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성경책 같은 귀한 존재입니다. 하여 저는 세 성경의 성독, 렉시오 디비나를 강조합니다. ‘1.신구약성경, 2.자연성경, 3.각자 삶의 성경’ 셋입니다. 어제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주님의 선택, 지혜의 선택, 말씀의 선택이 행복의 첩경이라는 요지의 강론이었습니다.

 

오늘 강론을 묵상하면서 기막힌 진리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런 선택에 앞서 이미 주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사랑의 주님께 대한 환대歡待와 말씀의 경청敬聽의 응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또 만나는 하나하나의 사람들이 주님께 선택받은 형제자매들이라면 이들에 대한 환대와 경청 역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상담의 기본 자세인 환대와 경청의 자세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도 없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신원은 물론 로마의 모든 신자들을 통해 우리의 신원을 명쾌하게 밝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로마 신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신자들 모두가 ‘부르심을 받아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신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자 성도聖徒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 하느님께 사랑받는 하느님의 사람들이자 더불어 교회의 사람들입니다.

 

이 복된 신원에 맞갖는 삶이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이자 참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더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총과 평화를 선사하시니 우리는 늘 성소에 충실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콜로3,12)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라는 오색五色 덕德의 옷을 입은 모습이 바로 우리 선택된 사람의 모습이자 신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선택해 주신 주님을 닮아갈수록 오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우리의 영적 삶일 것입니다. 바로 복음은 이런 자신의 신원을 망각한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자신의 신원에 맞갖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지난 토요일 참행복에 곧장 뒤를 잇는 복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참 행복한 삶을 살았더라면 이렇게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어리석은 일은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회개의 표징인 요나를 보고 회개한 이방의 니네베 사람들을, 또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왔던 이방의 남방 여왕을 반면교사로 삼아, 당대 세대들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이십니다. 무엇보다 이들보다 더 큰 당신 자신을 보고 회개하여 본래의 부름받은 존재로서의 복된 신원을 되찾으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크신, 언제나 우리를 부르시는 영원한 회개의 표징인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선택된 신원에 맞갖는 환대와 경청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을 고백하며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합시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기쁨,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표징 이야기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루카 11,29)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일갈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더 확실하고 더 많은 표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으려 하기보다, 표징을 일으켜 자기들이 믿게 해 보라고 예수님을 재촉하지요. 하지만 감각적인 표징에 집착하는 이들은 대개 사람이나 사건 안에서 의미를 캐내는데 게으릅니다. 표징은 저 심저에 있는데 말이지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보내진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징이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굳이 예언자를 보내실 것도 없이 그냥 죄악이 만연한 도시 니네베를 단번에 싹 쓸어버리시면 그만이었을 겁니다.
요나가 니네베의 타락과 하느님의 진노에 대해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이 곧 회개했고 하느님도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요나는 아무리 죄인이라도 끝까지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 죄인이 돌아서면 당신도 당장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는 하느님 자비의 표징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하느님은 인류와 화해하시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께서는 기꺼이 순명하시고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로 오셨고 제단 위에 당신을 스스로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이시고 하느님 자비의 표징이시니까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로마 1,6)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가 로마의 모든 신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자체가 참 위험한 시대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사랑하기에 죽기까지 따를 결단을 내린 이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지요.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분과 동반했던 사도들에게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로 확장됩니다. 이들은 각자 또는 공동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삶의 길에 숨겨진 표징들을 따라가면서 영적 여정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그들 자신이 사도가 됩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로마 1,5)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이들은 자기가 있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표징이 됩니다. 그의 존재가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표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사도들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표징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과 말과 사건에서 그 안에 심겨진 표징을 알아보고,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향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바로 그 표징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따라가다보면 언젠가 표징이 가리키는 분, 주님을 만나게 되지요.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고 이기적으로 돌아간다 해도,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징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고 사람들 안에는 여전히 선한 힘이 흐르지요. 게다가 더 멋진 사실은 우리 자신이 바로 선하고 자애로우신 주님의 표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각자 자신의 역사에서, 지금 머무르는 삶의 자리에서 주님 사랑의 표징을 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 사랑의 표징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신앙으로 죽음 후를 확신하며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니네베사람들이 요나의 설교 듣고 회개 보속하여 재앙을 피했단 거죠. 
솔로몬의 지헤를 들으려 시바의 여왕이 멀리 찾아 왔다고 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이나 요나보다 더 큰 바로 내가 여기 있다고 알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하늘표징 요구하는 것에 한탄하십니다.
이에 예수님은 요나예언자의 표징밖에는 보여주지 못하겠다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죽음과 부활 즉 십자가처형과 삼일 후 부활이 그것입니다.

죽음과 삶 넘나드실 수 있으신 예수님이 인간처럼 사시기란 힘드셨죠.
우리도 예수님 같진 못해도 죽음 후를 확신하며 믿음으로 이겨봅시다.

 

 

 

예수님의 궤적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람’ 으로 살아가려고 훌륭한 사람의 궤적을 살핀다. 사람들은 그 훌륭한 품성의 궤적을 보고 하느님을 향해 움직인다. 결정적으로 회심을 하고 ‘하느님의 사람’이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궤적을 본다. 그분의 생애 전체를 보며 어떤 분인가를 알아챈다. 그리고 회심하고 그분을 따른다. 요나 예언자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요나 예언서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다. 요나는 예언자적 소명을 버리고 도망가다 막다른 곳까지 가고 하느님께 잡힌다. 결국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의 회심을 위하여 하느님 사람으로는 몫을 다 한다. 이로써 하느님은 의노를 푸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우리는 지금 요나의 궤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궤적을 보고 있다. 예수님의 궤적은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명백한 표징이다. 그 표징을 읽지 못하고 제멋대로 사는 오늘의 우리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훌륭한 궤적을 보여준다 해도 소용이 없다.


‘늙은 어린이’가 많다. 늙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인생 상승 정점에서 하향하고 있는데 자기의 궤적을 성숙의 목표로 삼지 못하는 늙은이가 많다. 어린이의 수준의 늙은이일 뿐이다.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궤적을 보고 회심을 하고 하느님 사람으로의 재창조를한다. 그들은 위기탈출하여 순간에서 영원을 달린다. 우리는 직접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생생한 궤적을 보고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이다.  눈뜬 장남이다. 그들에게 보여줄 표징은 ‘요나의 궤적 밖에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 하신다. 사람 바탕 자체가 예수님의 궤적을 살피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이미 접었기 때문이다. 눈뜬 장님을 어떻게 하겠는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예전에 어떤 신부님으로부터 들은 예화인데, 어느 본당에 신부님이 새로 부임을 하시면서 첫 미사 때부터 강론을 너무나도 잘하셔서 신자들이 그 말씀에 매료되어 사람들마다 신부님에 대한 칭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부님이 매 미사 집전을 하시면서 맨날 똑같은 말씀의 강론을 반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본당 사목회장님이 신자들을 대표해서 교구장님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 하고 본당신부를 바꾸어 달라고 청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자세한 사정을 들으신 후 교구장님께서 그 사목회장님께 이렇게 말씀하시랍니다.

“사정이 정말 딱하군요. 그런데, 혹시 신자 분들이 그 신부님의 말씀대로 사시던가요?”

그 질문을 받은 사목회장님은 그 질문을 받고 대답을 못하고 당황하시다가 교구장님께 황급히 인사를 드리시고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는 가끔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을 머릿속에 입력하기는 하지만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출력하지는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온갖 좋은 말씀이 머릿속에 있어서 웬만한 좋은 말씀도 시답지 않게 느끼면서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실 때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주님의 모습처럼 삶 속에서 그 말씀을 이루어갈 수 있는 사도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늘의 표징

      김성래 하상 바오로 신부님
이 세대는 걱정스런 세대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과 생태계 위기뿐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생명의 위기까지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주식 시장의 주가, 집값, 그리고 갖고 싶은 물건들을 매일 찾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한 삶의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니네베 사람들, 남방 여왕이 몇 천 년 전에 그랬던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니네베 사람들과 남방 여왕은 하느님의 사람인 요나와 솔로몬을 만나고는 회개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돈이나 물건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들 삶의 중심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이신 말씀과 만나고 있습니까? 표징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성찬례에서 사제는 예수님의 몸을 높이 들고 외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예수님께서 보라고 소리치시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참 생명을 주는 것을 바라보아야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표징은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는 그 표징을 똑바로 바라보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군중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메시아로 구세주로 하느님의 아들로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많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많은 기적을 일으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찾아온 남방여왕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그 사람들이 이 세대의 사람들을 단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를 들었던 니네베라는 나라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요나는 어떠한 표징도 보여주지 않았고 다만 다음과 같은 말을 외쳤을 뿐입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하느님을 믿지 않던 니네베가 이름도 들어보지도 못했던 어느 한 사람이 40일이 지나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소리를 듣고 단식을 선포하고 왕까지 회개를 하고 하느님을 믿었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마도 니네베의 왕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요나의 말 한마디에 단식을 하고 회개를 하였을 것입니다.


복음으로 돌아와서 예수님께 몰려든 많은 군중들은 많은 기적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들었음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자 했던 표징을 보았어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은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표징과 기적을 보며 믿는 것은 금방 식어버립니다. 그저 믿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돌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표징을 보지 않아도 믿는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네베를 예로 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직접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음에도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바램을 청하고 은총을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들의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하느님을 향한 변치 않는 믿음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믿든 안 믿는 항상 돌봐주고 계십니다. 특히 2021년 10월10일 이글을 쓰고 있는 순간 저는 살아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보살핌입니까. 또한 여러분들도 살아 숨 쉬고 계시기에 이 부족한 글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큰 보살핌과 표징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것으로 그분을 하느님으로 그리고 아버지로 믿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아멘.

 

 

 

툿찡 포교 베네딕토 수녀회 대구 수녀원
​예수님은 모여드는 군중들을 향해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복음사가는 요나 예언자와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표징에 대한 설명을 한다.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내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죽어 땅에 묻히겠지만 사흘 후에 다시 부활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표징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심판 때에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 예수님과 함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고 하신다. 니네베 사람들은 이방인인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받았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얻으려고 먼 남방에서 유대 지방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더 큰 이", 위대한 지혜 자체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고기 배 속에 들어 앉아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스바의 여왕처럼 지혜를 찾아 나서지도 않는다.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새로운 시작을 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고 어둠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있지 말고, 나오라고 하신다. 이제 당신을 찾아나설 때가 되었다고 촉구하신다. 우리 가까이 바로 여기계신 당신을 찾아나서라고 축구하신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어떤 분들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랑으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람들은 주 예수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새로 날 수 있다고 믿고 새로 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군중에게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라고 대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군중들에게 이어서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32절) 라고 덧붙이십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경험처럼, 본능을 따라 살다 보면 우리는 희망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을 어기고 도망가다가 큰 고기에게 잡혀서 먹혀 큰 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다가 회개하여 하느님의 명을 따르겠다고 변화된 것처럼. 그리고 또 요나의 설교를 듣고 하느님의 뜻대로 성실하고 사랑하며 살겠다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처럼, 우리도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응답하여 회개의 새 삶을 살아가기로 합시다.

 

 

 

주님은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입니다.<루카11/29-32>10월 1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영원과 시간은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과 세상은 비교할 수 없는 차입니다. 하느님 앞에는 천년이 하루 같다 라고 시편은 말하고 있으며 만들어진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 말씀으로 창조 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지혜 면에서 솔로몬보다 더 큰이라 하고 말솜씨에 요나보다 더 큰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그 말씀아니라도 아부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은 구약의 말씀 통해 듣고 알고 있습니다. 힘과 능력에 있어 다윗보다 더 힘있는 분이고 노예로 살던 에짚트에서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 내신 분으로 모세의 힘의 원천이고 모든 예언자의 말보다 더 완전한 예어자십니다. 이런 주님을 알고 믿는 것은 행운이며 은혜로움입니다.
하늘과 땅이 없이는 우리의 생명은 어는 때나 어느 장소에나 머무를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니시면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잊거나 잃어버리면 가난아기가 부모를 잃은 것 보다 더 가련하고 비참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를 찾는 이유는 저의 존재의 근본이고 시작이며 마침이기에 찾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 찾아 만나야 하고 만날 수 있을까?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하느님을 찾지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순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의로운 사람, 하느님 편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찾아 만나 찬미하고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의 은총 안에 살아야 합니다.
저는 수도자로 일생을 살면서 규칙을 지키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찬미 찬송하려고 살았습니다. 
종신 서원 하려고 할 때 생각해보니 불편한게 하나 둘이 아니라 장상에게 퇴원해서 교구신부로 살기를 허락 받으려 이틀을 대화 하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을 하니 끝말에 참으로 하나도 없느냐? 하시기에 딱 하나 기도하는 시간만은 행복하다고 하니 그려면 성소가 있다고 하여 하느님 뜻에 맏기고 형제들에게 물어 허락하면 그대로 하겠다고 하여 신학교 올라가니 소식이 종신 서원 하라고 해서 하느님 뜻을 따라 서원하고 지금것 60년 이상 살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도 4시에 일어나 기도준비하고 5ㅣ에 성당에 들어가니  독사기도 첫 말에 내 입술을 열고 주님을 찬미하는 기도문 시작이 “ 어서 와 하느님께 노래 부르세, 노래 가락 드높이 주님을 부르세.” 이 기도에 매료되어 큰 소리로 찬미노래 부르며 아침기도를 마치고 이렇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찬미 찬송하고 살도록 시간 주시고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이끌어 주심에 감사 하면서 지고지존 하신 주님을 알고 믿으며 온갖 희망 속에 살게 하시고 사랑하도록 모든 것을 마려해 준 수도자의 삶이 얼마나 주님 앞에 소증한 것인지 알고 살면 바로 그것이 행복입니다. 우리는 성부의 자녀이고 성자의 벗이고 상령의 동반자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찾아 만나고 함께 산다는 것 외 큰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가 하느님 찾아 만나 해복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 3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중한 인격을
탄생시키시는
공감의
주님이시다.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신다.

삶의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할
주님이시다.

회개를 일깨우고
삶을 일깨우는
스승이시다.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에게
활짝 열어
보여주신다.

삶의 시작부터
삶의 끝까지
희망 자체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깊이만큼
깊어가는
우리들
믿음이다.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지를
다시 묻게된다.

하늘을 향하듯
가을 햇빛을
간절히 바라듯
주님을 향하는
우리들이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을 통하여
하느님 자녀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께서
누구이시며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하는
이것이 참된
은총이다.

신앙은
마음 깊이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
이곳에 가장
필요한 것은

먼저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삶의 길
관계의 길을
알려주시는
분이시다.

2001년에 썼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벌써 만 18년 전에 쓴 묵상 글입니다. 유치하기도 하고, 이런 내용을 묵상 글이라고 썼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렇게 부족한 내용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 올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오늘 쓰고 있는 글 역시 지금까지 보내온 시간이 지난 뒤에 바라보면 유치하고 부끄럽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는 성장합니다. 유치함과 부끄러움을 극복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의 감정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이라고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 역시 극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서 주님의 놀라운 손길을 깨닫습니다. 주님 안에서 유치함과 부끄러움이 점점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착각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나의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지금의 상태로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착각입니다. 바로 전지전능하신 주님을 생각하지 않기에 갖게 되는 착각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쓸모없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점점 나아질 수 있도록 만드셨고, 이를 통해 당신의 영광이 이 세상 안에 환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 하는 ‘나’를 통해서도 주님의 놀라운 표징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표징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요? 혹시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 안에서만 표징이 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말을 듣고서 모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요나보다 더 큰 분이 이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꾸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눈에 보이는 표징만을 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 뜻에 따라서 움직이는 마술사 예수님만을 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기적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지금을 사는 우리 안에서 그대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나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삶 안이 아닌 일상의 삶에서도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을 깨닫는 것보다 큰 기적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다고 꿈꾸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시작하라. 시작할 용기 안에 천재성과 능력, 기적이 숨어 있다(괴테).

 

아이디어를 찾는 시간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신부님, 책을 쓰는데 보통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이제까지 9권의 책을 출판했기에, 한 권의 책이 나오는 시간이 궁금했나 봅니다. 사실 저의 책들은 이제까지 썼던 ‘새벽 묵상 글’ 중에서 책으로 내고 싶은 내용을 뽑아 다시 구성해서 출판합니다. 아주 새롭게 쓰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작가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30초 걸렸습니다.”

말도 안 된다고 하고 싶지요? 이 작가는 말합니다.

“30초는 아이디어를 찾는 시간입니다.”

 

아이디어를 찾으면 책을 거의 다 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생각이 중요합니다. 특히 새로운 생각들, 이러한 생각들의 확장이 주님의 일에 있어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굳게 믿으면 의화(義化)되고 구원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부터 우리는 열흘 넘게 첫번 째 독서로 로마서를 봉독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쓰신 마지막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서는 여러 바오로 서간들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이는 로마서가 바오로 서간들 가운데 차지하는 가치와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세 번에 걸친 고된 동방 전도 여행을 마친 바오로 사도의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치셨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휴식 겸 피정도 하면서, 전도 여행을 정리하기 위해, 코린토 시내 가이오스의 집에 석달간 머물렀습니다. AD 56~58년 경으로 추정되는 이 시기에 로마서는 씌여졌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구술(口述)하셨고, 테르티우스가 받아 적었습니다. 완성된 편지는 켕크레애 교회의 성모회장 격인 포이베에 의해 로마 교회로 전달되었습니다.

 

로마서 안에 포이베라는 인물을 비롯해 프리스카, 마리아, 트리포사, 페르시스, 루포스의 어머니, 올림파스 등 여성들의 등장을 통해, 우리는 바오로 사도께서 당신의 복음 선포 사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여성들을 포함시켰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통해 바오로 사도가 여성들을 얼마나 존중하고 배려했는지를 잘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의 협력자인 프리스카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주님 안에서 애를 많이 쓴, 사랑하는 페르시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로마서 16장 3절, 12절)

 

로마서의 집필 목적은 서간 안에 명확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지역에는 더 이상 내가 일할 곳도 없고,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고 싶은 소망을 품어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에스파냐로 갈 때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보고, 먼저 얼마 동안 여러분과 기쁨을 나누고 나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로마서 15장 23~24절)

 

3차에 걸친 험난한 선교 여행을 통해, 동방에서의 전교를 마무리지었다고 판단한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전도 여행 중에 겪은 갖은 고초로 인해 온몸은 만신창이가 된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나이도 나이였지만, 너무나 힘겨운 여정을 걸어온 그였기에, 이제는 좀 쉴만도 한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열정은 그칠줄 모릅니다. 상처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스페인 포르투갈 쪽 서방 전도를 준비합니다.

 

이렇게 동방 전교를 끝내신 바오로 사도가 서방 전교를 시작하기 전, 코린토 교회에 잠시 휴식하면서, 로마 교회 신자들을 격려하고 고무하기 위해 쓰신 편지가 로마서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로마서를 쓰실 당시 교회는 꽤나 큰 위기 상황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유다교 전통을 중시하고 고수하려는 보수파 유다교 그리스도인들과 새로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가입한 이민족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비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깊어만 가는 골을 어떻게 하면 메꿔볼까 고민하고 또 노력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두 부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일치시키고 화해시킬까, 고민하면서 로마서를 쓰신 것입니다.

 

사실 로마 교회 그리스도 신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직접 선교하여 신앙의 길로 이끈 직계 자녀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 최고 목자로서 로마 교회 신자들 역시 각별히 신경쓰고 도와줘야 할 영적 자녀들로 여겼습니다. 로마 교회 신자들 신앙의 성장과 쇄신을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자상한 마음이 로마서 안에는 듬뿍 담겨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로마서 1장 16~17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화(義化)와 구원은 이제 더 이상 나라나 민족, 인종이나 신분, 지위고하나 경제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굳게 믿으면 의화되고 구원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장차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면 의화되고 구원받는다는 것! 그것이 로마서 전체의 간추림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표징도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큰 빚을 지고서도 게으름만 피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채권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돈을 갚을 생각이 있긴 한 거요?”

“있고말고요. 당신의 돈을 갚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세 가지가 다 쉽지 않아서 답답해하고 있던 참입니다.”

채권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대체 그 세 가지가 뭐요?”

“저... 하나는 당신이 갑자기 죽어서 돈을 받을 수 없게 되면 좋겠고, 둘째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차용증서가 분실되든가 불에 타든가 했으면 하는 것이고, 셋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많은 돈을 주웠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이 없는지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군요.”

이 빚쟁이는 좋은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돈을 갚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못 갚더라도 돈을 갚을 방안을 생각하고 노력을 하고 있다면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선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빚쟁이라도 선한 사람이라면 일자리라도 알아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하십니다. 악해서 악한 것이 아니라 변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악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핑계를 댑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그들의 핑계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키워준 것에 대해 보답하기를 원치 않아 자신의 부모가 맞는지 증거를 대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에게 자신의 부모가 맞는다는 증거를 대보라는 것만큼 불효는 없습니다. 하느님께 어떤 기적이나 표징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으려고만 한다면 부모가 준 사랑의 기억을 통해 부모임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으려고만 한다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보면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믿으면 내가 변해야 하니까 그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표징을 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변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것입니다. 변할 마음만 있으면 표징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페루의 모체 시에서 CCTV 보안 카메라에 한 남자 아이가 가로등 불빛으로 공부하는 모습이 인터넷 여기저기 공유되었습니다.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집이 가난해서 학교에도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레인에 사는 야쿱이라고 하는 한 백만장자가 우연히 이 동영상을 접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그 소년을 찾았고 그 아이가 12살 빅터 앙굴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야쿱이 직접 본 앙굴로의 집은 생각보다 비참하였습니다. 처음엔 앙굴로를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생각이었지만, 허물어져가는 집을 다시 지어주고 앙굴로의 학교에는 컴퓨터를 보급해주었습니다. 앙굴로의 어머니에게 일자리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 앙굴로가 평소에 하던 대로 최선을 다해서 훌륭한 학생이자 모두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없기에 표징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굳어버린 유태인들과 비교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러 멀리 남방에서 온 여왕과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을 예로 드십니다. 변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무언가 시작할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선할 수 없는 핑계를 반드시 만듭니다. 핑계를 대는 사람에게 하늘의 표징은 절대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어져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먼저 지성부터 합시다. 감천이 따라올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진주조개가 있습니다. 조개는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참으면서 진주를 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찾는 건 조개껍데기가 아닙니다. 조개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입니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잘 모릅니다. 다만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조개는 아픔을 참아내야 할 겁니다. 매주 가톨릭 평화신문이 발행됩니다. 신문이 조개껍데기라면 신문을 채우는 글과 기사는 진주와 같습니다. 좋은 기사와 사진을 보내주시는 분이 있기에 신문이라는 껍데기는 진주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오랜 경험과 지혜를 나누어 주시는 분이 있기에 신문이라는 껍데기는 매주 은은한 빛을 내는 진주가 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좋은 글을 주시는 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상담을 통해서 치유되는 사연을 전해주는 교수님이 있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서평과 함께 영적인 도움을 주는 책을 소개해주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이민 생활의 애환을 묵상을 통해서 전해주시는 어르신도 있습니다. 멀리 있는 분은 직접 만나지는 못하지만, 전화로 인사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애정과 관심이 있기에 가톨릭 평화신문은 매주 작은 진주를 보여 드리게 됩니다.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고된 훈련과 선임병의 얼차려와 초소 근무의 어려움을 잊게 해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연예인들의 위문 공연도 있습니다. 중대장님이 허락한 회식도 있습니다. 옆 내무반과의 족구도 있습니다. 제게 커다란 위로를 주었던 게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친구와 지인들이 보내주었던 편지였습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보내주었고, 아직 입대하지 않았던 친구가 보내주었고, 농촌 봉사활동 가서 알게 된 학생이 보내주었습니다. 성탄 때면 추기경님께서도 카드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때 편지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기억하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농촌 봉사활동 가서 알게 된 학생이 보내준 인사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이라는 인사말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제가 받았던 편지는 고된 군 생활에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로마의 신앙 공동체와 다른 교회의 신앙 공동체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받았을 때 기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헌신과 희생과 사랑에 감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엄한 질책과 충고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배웠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음을 믿었습니다. 환난도, 박해도, 칼도, 두려움도, 권세도, 천신도, 세상의 그 무엇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맺어진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음을 믿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참된 행복, 참된 기쁨을 전해주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유대인들이 원하는 표징은 놀라운 업적, 전쟁에서의 승리, 엄청난 재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이면 족하다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3번씩이나 말씀하십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생각을 바꾼 사람은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의 얼굴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얼굴이 분노와 짜증, 원망과 불평의 모습이라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드리면 감사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반대로 원망을 하면 원망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회개한 사람은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참으면 그것이 마음에 쌓이게 되고, 언젠가는 분노로 폭발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주님께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주님께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잠시만이라도 모든 것을 털어내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길이 보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진리가 환난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시련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신비가 사라진 천박한 앎을 반성하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독서 로마서의 시작을 읽을 때 제게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기 전에 밤새도록 한 고백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내 사랑하는 하느님이여,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가장 미천한 작은 벌레이며 쓸모 없는 작은 종인 저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이 고백이 생각났을까 생각해보니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를 시작하며 하는 말이 예수는 누구이고 자신은 누구인지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즉시 반성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과 나의 차이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반성입니다.

 

이 두 성인은 인생의 막바지까지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과 뚜렷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성찰과 인식이지요.

 

헌데 언제부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 질문과 성찰이 제게는 사라졌습니다.

왜 사라졌을까요?

 

10대, 20대 때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는 어떤 분이시며 나는 어떤 존재인지 몰랐고 또 그래서 알고 싶었으며 그래서 질문을 참으로 많이도 던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고, 그 답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도 기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다면 그때 이후 그리고 지금은 '답을 알았으니 됐다!' 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직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탐구가 끝나지 않고 계속 되고, 저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어느 정도 됐다는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었고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 치열하지 않은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는 기쁩니다.

두 성인처럼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이 사실을 다시 또 까먹을지라도.

 

사실 나라는 존재를 잘 알고 있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잘 알면서도 잘 모르는 것이 나이고, 하느님은 더더욱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느님이 신비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신비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건 나에 대해서건 신비가 사라진 천박한 앎에의 안주를 뉘우치는 오늘이고, 그래서 새삼스럽게 입으로 읊조려 봅니다.

 

"내 사랑하는 하느님이여,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가장 미천한 작은 벌레이며 쓸모 없는 작은 종인 저는 무엇입니까?"

 

 

 

곽승룡 비오 신부님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루카 11, 16)에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가시적으로 오는 묵시록적으로 기대되는 특별한 징표를 거부하신다.

오히려 예수님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을 말씀하신다. 요나의 설교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구원의 도구, 징표였다. 그리고 남쪽나라 세바의 여왕(1열왕10,1)도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러 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솔로몬과 요나 보다 더 큰 사람으로서 징표, 기적 자체이다. 사람의 아들이 이 세대 사람들에게 기적의 표징인 것이다.

곧 십자가 상위에서 돌아가시고 성령 안에서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삶 전체가 기적이다.

혹시 우리가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라 불꽃놀이 같은 또는 달무리나 해무리 같은 기적을 원하고 있지는 않는지...

 

 

 

겉 똑똑이는 머리만 크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말씀은 전해집니다. 행동하는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요나에게 하느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 그는 명령에 역주행했습니다. 멀리 피하고 달아났습니다. 엄청난 명령에 질려버렸을 겁니다. 그는 명령에 멀어졌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불러 세웁니다. 거역할 수 없는 숙명임을 압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힘입은 요나는 니느웨로 갑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에게 전한 말씀은 하느님의 권능을 힘입고 강력하게 전해집니다. 생명으로 넘쳐납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자신만 있을 뿐 하느님의 권능을 알지 못합니다. 체험은 하느님의 권능을 압니다. 체험한 사람은 자기생각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권능으로 가득차 살아 움직입니다. 말씀을 큰 힘을 드러내며 전해지고 사람을 살립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말씀은 폭발적으로 전해집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 뭉치가 계십시다. 자기생각이 없고 온전히 하느님의 권능 자체이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삽니다. 그럼에도 말씀과 무관한 사람이 있습니다. 온전히 자기 생각으로 가득찬 사람입니다. 머리만 커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예수님깨 대들며 자기가 믿도록 해달라며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권능이 낫낫히 드러나고 있음에도 하느님의 표징만 요구합니다. 눈 앞에 두고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궤변만 하고 자기 기세만 등등합니다. 정말 악한 사람들이고 악한세대일 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진리를 외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 빠져죽을 우물을 팠습니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울법학자,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이렇게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표징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태극기를 보게 되면 그것이 우리나라는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또 예를 들어 결혼반지는 부부가 사랑 안에 하나로 맺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곧 반지는 부부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군중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표징을 요구했다고 전합니다. 곧 군중은 예수님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 보여줄 것을 계속적으로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표징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 표징은 그저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국의 성조기를 보면서 그것이 미국 국가를 상징하는구나하고 이해는 가지만 그것을 내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그것은 나와는 별 상관이 없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도록 드러내시는 아주 결정적인 표징과도 같은 분이십니다. 문제는 그 예수님을 내가 진정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계속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말씀과 기적들을 통해 여러 가지 표징들을 보여 주셨지만 군중은 그것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치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신기한 것을 보듯이 계속적으로 예수님께 또 다른 표징을 보여주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하느님 사랑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혹시나 아직도 우리는 그 표징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또 다른 표징만을 보여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보다 더 큰 뉴스 인류사에 없거늘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고래 뱃속에서 3일 만에 살아나온 요나와 하느님의 지혜 받은 솔로몬.

죄와 사치로 물든 사람들을 깨우치려 한 구약 인물들의 사건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님이신 예수님은 이런 주역들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요나의 기적은 예수님의 죽음부활 예시며 솔로몬은 하느님 지혜십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느님아버지 들었을 텐데도 거부합니다.

이보다 더 큰 뉴스 인류사에 없거늘 무시하다니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육신 죽어도 영원히 살 길 있다는데 굳이 망해 죽어 끝나겠다는 심보?

하느님아버지와 인류를 예수님이 가족관계로 승격했건만 안 믿겠다니! 

 

 

 

회개의 여정인 인생

      이종훈 신부님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을 건네 오신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통해서 그리고 나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서 깨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잠잘 때까지도 나에게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는 이들은 처음부터 그분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 대신 그분의 살아 계시다는 증거 즉 기적과 표징만을 찾는다. 처음부터 믿을 마음이 없었으니 어떤 기적과 표징이 주어져도 그보다 더 신기한 기적과 더 큰 표징만을 요구할 것이다. 

 

반면 믿음의 은총을 입은 이들은 아무런 기적과 표징이 주어지지 않아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믿음의 순수성 해치는 걸림돌이 된다. 사형수로 생을 마감하신 예수님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2천 년 넘게 그분의 제자들이 세상 곳곳에서 아직도 활발하게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전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분의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메시지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회개하여 복음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구원의 시작은 회개이다. 회개는 삶을 바꿈이고 행복을 찾는 방식을 바꿈이다. 그런데 회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수십 년 동안 익숙했고 뼈 속 깊숙이 박혀 있는 삶의 방식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것도 몇 줄의 글을 읽고 바꿀 수 있겠나?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회개의 여행을 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나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게 예수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약속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하느님처럼 영원히 산다. 

 

요나는 하느님의 분부대로 실행하지 하지 않고 도망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다.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자신의 신분과 하느님을 피해 달아나는 중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요나는 그 죄 때문에 죽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랬지만 하느님은 그를 다시 살려내셔서 처음에 분부한 그대로 하게 하셨다. 하느님을 피해 달아날 곳은 이 세상뿐만 저 세상에도 없다. 그분의 사랑과 인류구원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그분에게 등을 돌리지만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의 불성실과 죄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생의 마지막 1초까지. 나의 인생은 긴 회개의 여정, 하느님께로 가는 긴 여행이다. 그러니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7-8).’ 

 

예수님, 주님은 제가 죽음을 쳐 이기고 주님처럼 영원히 사는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계신데, 주님을 떠나 다른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주님의 길에서 자꾸 넘어지고 실패해도 제가 그런 줄 저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을 더욱 굳건히 믿고 제 십자가를 단단히 짊어지고 주님 뒤를 따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 모두를 초대하시는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잊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이제 평일 미사 독서에서 울려퍼지던 구약 예언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사도 바오로의 서간이 봉독됩니다. 그동안 구약의 독서들이 복음 내용의 근거를 제시했다면, 신약의 서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복음을 해석하고 신앙 고백의 근간으로 삼을 것입니다.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루카 11,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기는 하는데 진짜배기 신앙인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듯합니다. 그들의 몸은 예수님 곁에 와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재고 따지는 중입니다. 요즘 말로 간을 보고 있다고 할까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진짜 메시아일지, 믿어도 괜찮을지, 마음을 열어도 좋을지, 가르침을 따라야 할지 말지... 그래서 그들은 자꾸만 더 큰 기적, 더 확실한 표징을 요구합니다. 지금 입밖으로는 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이런 질문을 던지겠지요.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

 

예수님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고 육지로 뱉어진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들어 그밖에 다른 표징은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이야말로 수난과 죽음을 거쳐 사흘만에 부활하신 당신의 파스카를 미리 보여준 것이지만, 그 연관성을 깨닫지 못한 군중으로선 실망스럽기 짝이 없겠지요.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찾아온 남방 여왕을 들어 군중의 무지와 게으름, 안일함을 흔들어 보시지만 여전히 군중은 그저 눈에 보이는 기적만 게걸스레 군침 흘리며 기다릴 뿐입니다. 지혜도 회개도 그들의 관심 밖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32).

"여기에 있다!" 이 얼마나 엄청난 계시인지요! 먼 옛날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 당신을 드러내셨을 때 "나는 있는 나다"(탈출 4,14)라고 하셨지요.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즉 "있는 나"이십니다.

 

예수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것도 "여기에!"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땅 위 "여기에",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있는(계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인 "있는 나"에 더해진 "여기"라는 현장성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그분은 여기에, 우리 곁에,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있습니다(계십니다).

 

지혜 자체이시며 백성의 마음을 아버지께 돌려 구원을 이루실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 두 차례나 반복하시는 안타까운 음성이 들립니다. 그 안에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탄식하셨던 하느님의 목소리가 담겼습니다.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문의를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만나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겨레에게 나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반항하는 백성에게 날마다 팔을 벌리고 있었다"(이사 65,1-2).

 

사실 이제는 지혜를 들으러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현자를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이신 분이 "여기" 계시니까요. 또 회개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들으러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 살아난 예언자를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모든 지혜와 표징의 주인이 "여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시작 부분으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명징하게 설명합니다.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로마 1,2).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구약 성경에 미리 준비하셨다는 뜻이지요. 곧 구약은 신약의 준비이며, 또한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 안에서 지혜의 상징인 솔로몬도, 물고기에 먹혀 죽은 줄 알았던 요나가 사흘만에 다시 나타난 기적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안내문일 뿐입니다. 그런데 군중은 그토록 절절히 고대해온 실체 앞에서 여전히 안내문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으니 예수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하실까요...

 

사도 바오로는 눈도 귀도 마음도 닫힌 우매한 군중 무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아듣고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로마 1,6)이 된 성도들에게 중요한 사명을 일깨워 줍니다. 바로"사도직의 은총"(로마 1,5)입니다. 사도직의 은총은 다름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로마 1,5)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입니다.

 

이렇게 부르심 받은 우리는 나이와 성별과 소속과 신분에 관계 없이, 또 지식의 많고 적음에 관계 없이 성령에 힘입어 말씀을 듣고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헌신하는 그분의 종, 그분의 사람입니다.

 

말씀과 함께 살아가면서 들은 바를 나누고, 나눈 바를 행하고, 행한 바를 봉헌할 때, 우리에게서 "사도직의 은총"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매는 이웃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만들, 놀랍고 은혜로운 표징이 될 것입니다.

 

 

 

'어디에 묶여'(루카 19장 29~32)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이 세대가 악하구나.'

오늘 예수님께서 너나 할것없이 세대를 묶어서 악하다고 하십니다.

개개인을 보지 않고 한데 묶어 뭐라하시는 이유는 악의 수위가 선이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높다는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 될때, 바위가 승리한듯 보이지만, 아무리 무딘 마음에라도 계란의 힘없는 몸짓을 받아들여 회개한다면 니네베 사람들처럼 인정하십니다.

어디에, 누구에게 묶여 완고함을 지니고 삽니까?

그것을 놔버리고 부드러움을 지니고 움직이십시오.

'남 말고 나를 보고 바꾸는 움직임'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루카 11, 30)

(For just as Jonah was a sign to the Ninevites, so also will the Son of man be to this generation.)

      김웅태 신부님

+ 찬미예수님!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 복음(루카 11, 29~32)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루카 11, 30)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듣고 많은 표징을 보았던 사람들이 회개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면서 더 많은 표징들을 요구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을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이지요. 그것은 이제 구원의 때가 왔다는 것이며, 하느님의 아들께서 몸소 이 땅에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람들을 구 원하시고자 하시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용서하신다고 하는 이 기쁜 소식을 보여주기 위해 때때로 표징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표징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이끌어주고 믿음을 강화시켜 주기 위한 것이기에 결국은 믿음을 굳세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모두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소박한 사람들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의 요술이나 베푸는 그런 정도의 사람으로만 보고, 표징을 보면서도 믿지는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표징들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라고 하는 앗시리아의 큰 도시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회개의 설교 첫날, 임금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며, 하느님께서는 그 도시를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을 사람들에게 외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수많은 표징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나보다도 더 크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몸소 선포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세대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니네베 사람들이 일어나 그 믿지 않은 세대를 심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과 자비의 말씀이며 우리를 올바른 삶으로 이끌어주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표징이 없어도 그 자체가 우리를 참되게 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나라에 초대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희생케 하셨으니,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깨끗한 마음으로 하늘나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예수님의 회개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 나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회개의 표징, -표징들의 표징인 파스카의 예수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주님을 닮아가는 깨끗한 영혼의 눈에는 모두가 주님의 현존이자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도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무지한 이들이 표징을 요구합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인데 무지로 인해 표징들을 보고도 못보니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무지한 군중들의 표징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이들을 악한 세대로 규정합니다. 예나 이제나 무지한 인간의 본질은 변함없어 보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의 청중은 그분께 경탄할 만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에 일어난, 또는 엘리야가 일으킨 비상한 표징들을 요구하는데 예수님은 이들을 단연코 거부하며 요나의 표징으로 눈길을 돌리게 합니다. 요나의 회개의 표징을 통해 바로 표징 자체이신 당신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과 더불어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땅끝에서 온 남방 여왕의 예를 들면서 거듭 동시대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들과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이 세대가 상징하는 바 회개를 필요로 하는 모든 시대의 모든 세대입니다. 우리 또한 이 세대에 해당됩니다. 그러니 그 멀리서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왔던 남방 여왕처럼, 또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던 니네베 사람들처럼 즉각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입니다. 바로 당신 자신이 회개의 유일한 표징임을 천명하십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지혜롭다는 솔로몬 보다 더 크신 분, 예언자 요나 더 크신 분, 참으로 지혜롭고 큰 예언자이신 영원한 회개의 표징은 예수님 당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이 영원히 빛나는 회개의 표징들인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대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때 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바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영원한 회개의 표징은 파스카의 예수님께 눈길을 모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매일 미사 역시 우리에게는 빛나는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은 모든 이들 역시 회개의 표징들이 됩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은 이들을 통해 현존하시시기 때문입니다. 하여 파스카의 예수님을 투명히 드러내는 교회의 성인들 역시 빛나는 회개의 표징들이자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이들 성인중 바로 대표적 인물이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오늘 바오로는 자신의 신원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로 정의합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을 투명히 드러내는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에겐 영원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의 신원을 명쾌하게 밝혀 줍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로 이런 예수님을 닮아 거룩해질수록 우리 또한 모든 이들에게 회개의 표징이 될 것이고 바로 주님께 불림받은 우리의 존재이유일 것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 말씀이 우리의 신원을 확고히 합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대로 우리도 모두의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자 교회의 사람이자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인 우리들입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얼마나 복된 우리들의 신원인지요. 우리가 윤리 도덕적으로 거룩해서 불림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은총으로 불림 받아 거룩해 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겸손과 감사요 사랑의 수행생활에 항구히 정진하게 합니다. 저에게는 오늘 본기도와 영성체후 기도도 우리 모두 회개의 표징이 되어 살게 해달라는 청원처럼 들립니다.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 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때, 또 성체성혈의 은총으로 주님의 신성에 깊이 참여하면 할수록 우리는 주님을 투명히 드러내는 회개의 표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표징중의 표징, 회개의 원표징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이며 이 예수님을 닮기 위해 끊임없는 말씀공부와 기도와 회개의 실천이 전제되어야 함을 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의 답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주님의 거룩한 회개의 표징이 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누룩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요나, 예수님, 그리고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요나 1,2)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났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살기 위해 도망쳤던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 동안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요나를 살리셨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주님 말씀의 선포를 거부했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헛된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립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9-10)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요나는 두려움 없이 외쳤습니다.

니네베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로부터 구원이 오니까요.

 

쾌락과 탐욕에 제 몸 던지고

우상 숭배를 탐닉하던 니네베 사람들은

준엄함 심판을 선포한 요나를 죽이는 대신

악한 길과 폭행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힘껏 부르짖었습니다.

(요나 3,6-7 참조)

 

예수님께서

분열, 불평등, 억압, 배척, 탐욕에 물든

악한 세대에게 회개하라 외치셨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악한 세대가 살길이니까요.

 

비록 이 외침이

당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광기어린 음모를 자극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외치고 외치고 외치셨습니다.

 

악한 세대는

참회의 피눈물 흘리며 가슴을 찢지 않고

자신들을 살리려던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모질게 때리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서.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스스로를 죽였습니다.

 

요나 예언자와 예수님의 자리에

감히 주제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저를 놓아봅니다.

 

요나와 예수님의 외침을 가슴 깊이 새기며

감히 주제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제가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제가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스스로 들어봅니다.

 

큰 물고기의 밥이 되기 전

제 살길 찾아 하느님으로부터 달아나던

요나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두려움 없이 외침으로써

니네베 사람을 살린 회개한 요나를 닮은

제2의 요나 예언자가 되어야 하는데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온갖 질시와 비난 속에서

십자가 수난 여정을 당당히 걸어가신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때때로 약하고 비겁하며

아직은 때때로 두렵고 흔들립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다시 시작해야죠.

제게 들려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네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느냐?

네가 나의 참 사제가 되고자 하느냐?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마음 깊이 간직하여라.

내 십자가의 표징을 뼛속 깊이 간직하여라.

 

요나가 그러하듯

내가 그러하듯

네가 시대의 표징이 되어라.

 

오직 네가 표징이 될 때에

오직 네가 표징이 됨으로써만

비로소 너는 그리스도인이고

비로소 너는 나의 사제이리니.’

 

 

 

주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 <루카 11, 29-3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태초에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로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온갖 생명을 살게 하셨듯이 지금도 주님의 말씀 하나에 생명이 살고 죽습니다. 구약에서 니네베 사람이 죄로 인하여 죽게 된 것을 요나가 전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구원을 받았듯이 그보다 더 큰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것은 생명의 은총이며 구원의 길입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는 진, 선, 미가 들어있을 뿐 아니라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빛과 생수가 흘러나옵니다.

 

어둠에는 빛이 있어야 하고 메마른 땅에는 생명의 물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은 빛과 생수의 은총을 받습니다.

빛이 없으면 가야 할 곳을 가지 못하고 물이 없으면 생명이 살지 못합니다. 인생의 가야 할 길이 없으면 망각하여 헤매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면 희망을 잃고 주저앉게 됩니다. 물이 없어 목마르면 힘을 쓰지 못하고 맥이 빠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맛이 있습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냅니다.

하느님 말씀은 보약과 같아 병든 이의 몸을 보호해주고 생기를 돋아줍니다.

 

하느님 말씀은 갈라져서 분쟁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일치의 힘을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슬픈 이에게 위로의 힘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불행한 사람에게 행복을 주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말씀에 살고 죽는 삶을 알고, 하루도 죽지 않으려고 말씀에 몰두하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우쳐 전하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 빛과 샘물이 용솟음 치고 말씀 속에 살아 숨 쉬게 합니다. 말씀 속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게 하고 듣고 깨우쳐 숨 쉬고 생명을 유지하게 합니다.

 

저녁에 내일 듣게 되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의 본질을 알기 위해 합당한 단어를 찾아 기록하고, 그 단어의 뜻을 묵상하고 기도한 다음 잠을 잡니다. 아침 4시에 일어나자마자 그 단어를 다시 보고, 기도하고, 그다음 일을 보고, 커피 한잔 마시고, 성당에 가서 성체 앞에 묵상을 시작하며 묻고 응답을 구하고 독서기도, 아침 찬미기도를 공동체와 함께 하고 방으로 가서 미사 전까지 글을 끄고, 식사 후 마무리하고 페이스북 수도원 홈페이지에 올리고, 카톡에 올릴 준비를 하고, 마무리를 짓고, 하루 종일 묵상하며 생활하고, 오후에 카톡 친구에게 보냅니다.

 

하느님 말씀은 저의 전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전해주는 말씀에 자신의 온 생명이 있음을 깨닫고 말씀에 가까이 가도록 기도합니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며 소금이다.” 하신 말씀처럼 빛과 소금의 역할은 전하고 알려주는 복음 선포의 시작입니다. 열매는 봉사, 나눔, 친교입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갑시다.

 

 

 

정인숙 안나 장례미사 강론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한 번 어떤 의사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셨는데도, “신부님, 치매는 하느님께서 노년의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 같습니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너는 지상 생애 동안 수고와 고생을 많이 했으니, 그 정도 했으면 되었다. 하늘에 올라가기 전에 이제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다 잊고 편히 쉬고 오너라!’라고 하신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치매에 걸려서 벽에 칠하지 않고 남부끄러운 일 하지 않고 갈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마치 치매환자가 벌이라도 받은 듯이 숨기려 하고, 어딘지 모르게 꺼리게 되고, 귀찮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하여 그 의사 선생님의 말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던져 줍니다. 그리고 고통과 괴로움에 대한 새로운 의식도 던져주는 듯합니다. 그리고 치매 환자 곁에서 먹고 마시고 씻겨 드리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우리 처지를 생각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송구스러워하는 우리의 마음에 위로를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장례미사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주님의 약속을 듣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요한 6,37-39)

 

오늘 우리는 인간에게 가자 좋은 생명의 순간을 허락하시는 주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가 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효도보다도 더 베풀어주실 수 있는 주 하느님께 우리 안나 자매님을 기꺼이 맡겨드립니다. 세상에서는 마치 포기한 듯한 영혼도 주께서는 인자로이 받아주시고, 세상에서는 어찌해드려야 할지조차 모르는 영혼을 주님께서는 평안케 해주시니,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청합니다.

주님, 정인숙 안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생전에 그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 품 안에서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주소서. 아멘.

 

주님, 정 안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웃음 하나로 온 세상을 품는다.

      최민석 신부님

나이를 먹을수록 말은 사라지고 사랑의 눈길만 그윽해진 나이 드신 예수님의 삶을 그려본다. 나이 드신 예수님은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서 얼굴도 어린아이처럼 깨끗하여 웃음 하나로 온 세상을 품어 주는 말없는 노인, 그런 분으로 예수님을 한 번 그려본다.

 

나도 죽지 않으면 나이를 먹을 터인즉 이미 나이 들어 예수의 하느님 현존을 사는 이런저런 모습은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나의 몫이다. 예수님은 늙으면 글도 쓰지 않고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현존으로 맑은 샘물처럼 한 줄기 ‘말없는 가르침’이 되고 세상 흙탕물을 조금씩 맑고 밝은 변화로 이끄시는 분이실 터이다.

 

말이 사라지고 사랑의 눈길 그윽한 하느님의 현존이 되는 것은 ‘내일’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나의 문제다. 지금 내가 노트북에 ‘무엇’을 쓰느냐의 문제보다 무엇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마찬가지 이유로 장차 무엇이 되느냐보다 지금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에 전하는 말이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가 11,29-30)

 

예수님이 전하는 회개는 하느님 나라 표징이다. 그 회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새 계명의 징표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를 배신한 대표적인 분이 유다와 베드로이다. 배신한 후 두 사람은 똑같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크게 통곡하지만 그 후 두 사람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유다는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너무나 후회하고 자책하며 가슴 아파 하다가 그만 자살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 이후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선지자가 된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정’이다. 유다는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기에 하느님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말았다면 베드로는 자신의 행위와 잘못을 진정으로 시인하며 하느님 사랑을 인정하였기에 오히려 자유와 평화 그리고 그리스도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인정과 받아들임은 우리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때로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며 산다. 하지만 그 실수와 허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이후의 모든 순간을 또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에 영원토록 자유와 평화 그리고 기쁨을 살 수 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이 하느님의 뿌리로 돌라가는 것이다. 흙에서 온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듯, 온갖 사물이 무성하지만 마침내 제 뿌리로 돌아가고 만다. 만물이 돌아가 묻히는 근원, 거기에 있는 것은 고요함이다. 그래서 뿌리로 돌아감을 일러 고요함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현존에 있으면 마음의 평안을 느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과거를 등지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면서 동시에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는 것이 날마다 늘어나 쌓이는 것이면서 아울러 날마다 덜고 또 덜어 내어 마침내 아무 하는 바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천국의 주인공인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늙어 가는 노인을 보기 힘들다. 유식한 늙은이는 많은데 스스로 무식한 늙은이는 드물다. 고집불통 늙은이는 쌨는데 젖먹이 아기처럼 자기를 비워 모든 것에 화(和)해 주는 늙은이는 드물다. 몸이 늙으면 마음도 늙을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언제 어린아이 같은 사람으로 될 것인가.

 

멈출 때가 되면 멈출 줄 알고 사라질 때가 되면 사라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다. 평소에 순간순간 현존을 살아야, 이윽고 죽음이 찾아올 때 허둥대지 않고 맞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늙지만 속으로 날마다 새롭다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은 매일 매 순간 현존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진실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현존의 삶을 살게 되면 비로소 본래 부족하지 않은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진정한 만족이란 채워서 오는 게 아니라 채워서 만족하려는 바로 그 마음이 사라질 때 오기 때문이다. 몸은 늙어 가는데 고집과 욕심은 오히려 갈수록 왕성한 늙은이만큼 보기 흉한 물건도 세상에 없지 싶다.

 

 

 

마음을 움직이는 조건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 이야기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이해의 선물’이라는 잔잔한 여운을 건넵니다. 고가의 관상어 값으로 동전 몇 푼을 소중하게 건네는 어린 남매에게 수족관 주인은 오히려 거스름돈까지 쥐어 보내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형형색색 사탕을 한아름 고르고 버찌 씨앗 여섯 개를 귀하게 내밀던 어린 시절, 거스름돈까지 얹어 포장해주던 사탕가게 위그든 할아버지의 너털웃음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강력한 힘이나 위대한 업적이 아닌 이해와 사랑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랜 역사 안에서 강한 힘을 지닌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권위가 믿을 만한 신적 권능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검증 수단으로 뚜렷한 표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프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연민은 자신들이 의도했던 표징의 범주를 벗어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고 다른 이를 심판하리라 믿었던 강력한 메시아가 아니라 그분은 스스로 전부를 희생하는 무력한 모습으로 참된 표징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해와 사랑으로 똘똘 뭉친 그 연민의 표징이 오늘 우리 마음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표징>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루카 11,14),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루카 11,15),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루카 11,16).

마귀는 ‘사람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신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쫓아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정말로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라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요구는 ‘믿고 싶어서’ 한 요구가 아니라, ‘믿기 싫어서’ 한 요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마귀 우두머리가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자기 힘을 빌려 주는 것은 그 자신이 자멸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하시고(루카 11,17-18),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은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라고 가르치십니다(루카 11,20).

그리고 그들을 ‘악한 세대’ 라고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의 힘’이 작용한 일이라는 것이 명백한데도 믿지 않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악한 일’, 즉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표징을 보여 주기를 거절하시는 말씀이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 그들에게 표징이 될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당신을 안 믿어도 당신의 부활 후에는 믿게 될 것이라는 예고인데,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는 말씀은,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회개부터 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또는 표징을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믿기 싫어서, 또는 예수님을 인정하기 싫어서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한 대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셨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표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속임수’ 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속임수, 사기’ 라고 생각했습니다(마태 27,64).

(오늘날에도 ‘기적’을 ‘우연의 일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믿지 않고, 착각이나 환각일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직접 기적을 체험해도 그렇습니다.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을 믿게 만드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이 있지만 더욱 확신을 갖고 싶어서 표징을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는 ‘표징이 없어도 흔들림 없이 믿는 사람들’보다는 믿음이 약하고 부족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즈카르야인데, 그는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을 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18).

여기서 ‘어떻게’ 라는 말은, 표징을 요구하는 말입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였고,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고(루카 1,6).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은 ‘믿기 싫어서’ 표징을 요구한 말이 아니라 ‘더욱 확실하게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구한 말입니다.

(그는 자기와 아내의 나이가 많다는 점 때문에 천사의 말을 못 믿었습니다. 훌륭한 신앙인이었지만 ‘인간의 상식’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그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믿지 못한 것에 대해서 ‘벌’을 받은 일이라기보다는 그가 요구한 ‘표징’을 얻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 마리아도 즈카르야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여기서 ‘어떻게’ 라는 말은 표징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표현은 비슷한데, 뜻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때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에 네가 따로 무엇을 해야 할 일은 없다.” 라는 뜻의 말을 했고(루카 1,35), 또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전해 주면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는 말도 했습니다(루카 1,37).

믿음이 있지만 부족했던 즈카르야에게는 표징을 줄 필요가 있었지만, 믿음에 부족함이 없었던 마리아에게는 따로 표징을 줄 필요가 없었고,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전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이 말은, 예수님을 안 믿고 있었던 제자들이 혼인 잔치의 기적을 본 다음에야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된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본 다음에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르코복음의 맨 끝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이런 말들은, “표징은 믿음의 보조 수단”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있으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보조 수단.)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이 우리를 성화시킵니다.

      루스페의 성 풀젠시우스 주교의 ‘파비아노를 거슬러’에서(Cap. 28,16-19: CCL 91A,813-814)

제사를 바칠 때 바오로 사도가 입증해 주는 바와 같이 우리 구세주 친히 명하신 바가 완수됩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사를 바치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신 그분에 대한 기념으로 하는 것입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그분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제사에서 그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을 행할 때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 안에 사랑을 부어 넣어 주시기를 청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사랑으로, 우리도 성령의 은총을 받아, 세상이 못박힌 것으로 보고 우리가 세상에 대해 못박히게 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죄에 대해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새 생명을 얻어” 주님의 죽음을 본받아 사랑의 은총을 얻고 죄에 대해 죽으며 하느님을 위해 살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빵을 먹고 그분의 잔을 마실 때 그분의 몸과 피에 참여한다는 그 사실 자체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죽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야 하며 우리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못박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신자들은 육체적 순교의 잔을 마시지 않아도 주님의 사랑의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취해 자신들의 외적 지체를 억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으며 육신의 정욕에다 마음을 두지 않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다 더 마음을 둡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사랑을 간직하면서 그분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사랑 없이는 자기 몸까지 불에 던지는 일도 쓸모 없는 일이 됩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하여 제사에서 신비 속에 거행하는 것을 실제로 이루게 됩니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참 메시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져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나라는 표징 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요나의 표징이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요나의 표징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으로 갔겠지만, 요나의 예언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 멸망하기도 한다. 이 표징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남방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도 주님께 왔고, 남방 여왕이 이 세대를 단죄하듯 교회도 그럴 것이다. 지나가고 마는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왔던 남방 여왕이 그 세대를 단죄한다면, 지혜자체이신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어떻겠는가? 

 

바로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 요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는데도, 즉 다른 어느 세대, 어느 백성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전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자기 고집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지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와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소화시켜 전해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 성서 등 우리는 하고자만 한다면 더더욱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욱 의욕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때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특전이 내린 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잘 안된다면 우리도 성경 말씀대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태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듯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의 이익만을 찾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는지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기적도 나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 변화될 때에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루카 11,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목마르고 혼돈스러운

이 세대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회개가 필요한

이 세대의

아픔입니다.

 

회개는 우리모두를

살리기위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를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안에는

머뭇거림이란

없습니다.

 

회개라는 은총과

은총이라는 신비와

신비라는 경이로움이

있을 뿐입니다.

 

회개만이

새로 태어나는

이 세대의 가장

뚜렷한 표징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우리자신의 회개를

간절히 청합니다.

 

우리자신의

회개만이

반목과 대립을

없애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표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날카로운 이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기쁜 회개의 길을

걸어가는

감동의 세대이길

기도드립니다.

 

이 세대가

진정한 회개로

영원한 생명의

문을 활짝 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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