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오늘복음♥묵상글

2021년 10월 19일 (녹)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1.10.19|조회수293 목록 댓글 0

제1독서

<한 사람의 범죄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2.15ㄴ.17-19.20ㄴ-21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5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17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며,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과 그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이 주인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종이 이렇듯 당연한 일을 하였을 뿐인데, 주인이 그 당연한 일을 한 종들을 위하여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듭니다.
종과 주인의 역할이 바뀐 듯합니다. 세상에 어떤 주인이 이러한 변화를 자처할까요? 어떤 주인이 자신의 종을 위하여 시중을 들까요?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 비유는,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께서 주인이시지만 기꺼이 종이 되어 주신다는 복음의 핵심을 전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깨어서 성실히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다만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깨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종이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늦더라도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면, 종은 주인이 들어올 문을 바라보지 않고, 등불을 끄고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실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종이 되기를 바라지, 불행한 종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행복한 종이 되고자 깨어 노력하는 사람과 행복한 종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깊은 잠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주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종입니다. 행복한 종이 되시렵니까? 아니면 불행한 종이 되시렵니까? 선택은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박형순 바오로 신부)

☆☆☆☆☆☆☆☆☆☆☆☆☆☆☆☆☆☆☆☆☆☆☆☆☆☆☆☆☆☆☆☆☆☆☆☆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의 모습을 통하여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깨어 기다리다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상급을 받으리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불충한 종은 벌을 받으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지만 종말의 근본적인 내용은 만남입니다.지금은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모든 것이 분명하리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그때는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가장 바라고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종말은 고통과 혼란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의 완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런 기쁨을 기다리며 그 희망으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은 겁이 나거나 불안해서가 아닙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자신을 축복해 주리라는 기쁨에 차서 취하는 자세입니다. 주인이 종의 식사 시중을 들어 줄 것이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머리로 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하느님의 커다란 신비와 축복이 드러납니다. 이제 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벗이 된 것입니다.이런 맥락에서 내일 복음에서 듣게 될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는 주님의 권고는, 어떤 위협이나 협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무한한 행복에 마음을 활짝 열고 희망 속에 살기를 바라시는 정감 가득한 말씀이며,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 주시고자 하는 사랑 가득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

우리의 인생은 늘 무언가를 준비하는 삶입니다. 유아기 때는 앞으로 커서 학교에 잘 다닐 수 있도록 부모님께서 우리를 키워 주시고, 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 스스로 어른이 되어서 훌륭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혼인을 하면서는 앞으로 가정을 잘 꾸미고 자녀를 낳아 잘 기를 수 있도록, 또 그 시기가 지나면 노년의 삶이 평안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고 하느님과 만나게 될 영원한 행복을 준비합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늘 내일을 함께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 있는 삶의 마지막은 하느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허무의 대상인 죽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내일의 희망이며, 또한 그날을 준비하여 오늘을 충실히 살아갈 가장 위대하고도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극적입니다.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밤새도록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을 기다린 종에게 주인이 내리는 상급입니다. 

종 대신 오히려 띠를 매고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드는 주인의 모습이 어색해 보이기는 하지만, 평생 동안 내일을 준비하며 날마다 열심히 살아왔고, 주님과 만날 날을 고대하며 열심히 달려온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대신학교 1학년 신학원론 시간에 쪽지 시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험 범위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한 부분이었고, 여러 문항 가운데 “원죄 교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라고 말할 수 있다.”였습니다. 여러분도 맞혀 보세요! 정답은 ‘이면(裏面)’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깨닫지 못하였지만, 원죄론과 로마서를 배우고 나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오늘 독서의 첫 구절을 출발점으로 하는 원죄 교리는, 인간 본성의 악함을 주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누구에게나 구원이 필요하고 예수님께서 그 구원을 넘치도록 주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점이 바로 바오로 사도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가 열렬한 바리사이였을 때에는 스스로 율법을 흠 없이 지키는 의인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자기를 구원해 주실 분을 찾지도 찾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오로는 자신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잘 압니다(로마 7장, 금요일 독서 참조). 이 깨달음이 그와 하느님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나의 의로움을 당연히 갚아 주셔야 하는 분이 아니라, 거저 베푸시는 당신의 은총으로 나를 받아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천상을 향하여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80년이라는 인간의 수명은 당신께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지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실 그분을 철저하게 신뢰하면서, 그분께서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받아 주시기를 간청합시다.

☆☆☆☆☆☆☆☆☆☆☆☆☆☆☆☆☆☆☆☆☆☆☆☆☆☆☆☆☆☆☆☆☆☆☆☆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에는 노예 제도가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부유층이 적고 소작농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왕궁에서만 많은 노예를 거느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인이라고 하면 말 그대로 그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명망이 있으며 권력을 지닌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주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뜻밖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행복한 이유를 그다음에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정말 기막힌 반전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종을 시중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양반이 가장 낮은 종에게 시중을 듭니다. 가장 높은 이가 가장 낮은 이가 되고, 가장 낮은 이가 가장 높은 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부모님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믿는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위하여 시중하실 것을 믿고 희망하며 늘 깨어 기다리도록 합시다. 

☆☆☆☆☆☆☆☆☆☆☆☆☆☆☆☆☆☆☆☆☆☆☆☆☆☆☆☆☆☆☆☆☆☆☆☆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복음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감동한 주인이 종을 챙겨 준다는 내용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어떤 삶이 그것일는지요? 

주인은 주님이시고, 종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부터 ‘깨어 있음’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인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삶’의 핵심입니다. 내 뜻과 다를 경우, 내가 놓여 있는 ‘현실’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소나무는 비탈에서도 잘 삽니다. 뿌리가 강한 탓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도 ‘소나무 같은’ 이들이 많습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바르게’ 살려는 이들입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 삶’입니다. 사람보다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건강한 뿌리가 만들어집니다. 어떤 시련에서도 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삶은 언제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세상 역시 변덕이 심합니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위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소나무처럼 언제라도 ‘푸른 꿈’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

온종일 잠자지 않는다고 깨어 있는 삶이 아닙니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게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언젠가 하리라 마음먹고 있다면 ‘지금’ 해야 합니다. 언젠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다면 ‘지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와 어울리는 삶입니다. 

시간뿐 아니라 장소에도 어울리게 살아야 합니다. 몸은 성당에 있는데 마음은 집에 가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곳에서는 기도해야 하고, 일하는 곳에서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핸들을 잡고서 정신은 엉뚱한 데 가 있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난 일을 후회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앞날을 걱정하느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룹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장차 다가올 일도 미리 만날 수는 없습니다. 어제는 그랬더라도 오늘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유가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이 말씀은 현재에 충실하려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 실천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개그맨이 ‘나는 항상 구쁘다’라는 글을 자신의 SNS 계정에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 글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구쁘다’라는 단어가 어떤 뜻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약자인지, 아니면 속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줄임말도 속어도 아닌 순우리말이라는 것입니다. 한국말을 50년 넘게 사용해왔음에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 말의 뜻은 ‘배 속이 허전하여 자꾸 먹고 싶다’, ‘먹고 싶어 입맛이 당기다’라고 합니다.

한국인이 한국말도 잘 모른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마 많은 분이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요.

주님에 대해 우리는 완벽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주님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조금만 알고 있으면서도 전부를 알고 있는 듯 사는 우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불평불만을 늘 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완전히 모르기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아는 사람은 불평불만보다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지금을 살게 됩니다. 미움과 판단보다는 사랑의 삶에 머물게 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종은 바로 주인의 뜻을 듣고 기억해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도착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만 하는 사람이 제대로 기다릴 수가 있을까요? 오시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 과연 주인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오지 않는다면서 미움의 감정을 품는 사람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사람은 결코 이런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이 자리를 지키고 기다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기다리며 주인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지금을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우리도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특히 사랑으로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하려면 남을 행복하게 만들라. 행복을 준 만큼 행복해진다(아브라함 링컨).

 

걱정의 점수

걱정의 점수를 1에서 10점까지 매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집의 가보라 할 수 있는 도자기를 도둑맞았다.’
보물인 ‘가보’이기에 걱정의 점수가 꽤 높을 것입니다. 지금 최고의 고민거리라면 어쩌면 10점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면 이에 대한 걱정의 점수는 어떻게 될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상실감에 큰 슬픔과 아픔을 경험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걱정의 점수는 최고 점수인 10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 보물을 잃어버린 일의 걱정 점수는 어떻게 될까요? 10점이 될 수 없습니다. 7점 이하, 어쩌면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지금 어렵고 힘들다면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별것 아닌 것으로 힘들어하냐며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가장 어려운 삶을 사는 중입니다. 이 점수를 낮추는 것은 남이 해주지 못합니다. 바로 나만이 최고의 걱정을 가져다주는 고통과 시련을 온전히 바라보면 점수를 매기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상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힘을 얻습니다.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종이요 죄인인 우리 각자를 위해 시중을 드시겠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피정센터에 와서 형제들과 함께 주로 하게 되는 일이 시중드는 일입니다. 픽업해 드리는 일, 잠자리를 준비하는 일, 식탁을 준비하는 일, 서빙에다 뒷정리...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최고참 어르신 신부님께서도 예외 없이 바비큐 담당으로서 기쁘게 장작을 패시고, 화부 역할에 최선을 다하십니다.


오랜 세월동안 어디가나 늘 대접받고 살다가 시중드는 일을 해보니, 시중드는 일에 종사하는 분들의 고달픔이나 애환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저야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한 일이 될 때, 견뎌내야 할 몫이 얼마나 큰 것이겠는가, 하는 생각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시중드는 일아 만만치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때로 이 일을 통해 느끼는 보람과 기쁨도 의외로 큽니다. 존중받고 환대받는 느낌을 받은 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그 감동을 주변 사람들에게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것도 작지만 사목의 한 부분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개인적으로 화들짝 놀랐습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복음 12장 37절)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일입니까? 창조주시면서 삼라만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죄인인 우리 한명 한명을 위해 식탁에서 시중을 드시겠답니다. 우리를 위해 직접 식탁보를 펼치시고, 손수 수저를 놓으시고, 서빙을 하신답니다.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시는 하느님의 모습 앞에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며, 어이없어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땅에 육화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성목요일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지친 제자들을 위해 아침상을 차려놓고 그들을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가장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식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겸손한 섬김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식탁의 특징 역시 겸손한 섬김이어야 마땅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시겠다는데, 아무에게나 시중을 드시지는 않습니다. 시중의 대상은 오직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는 평생토록 허리끈을 단단히 매고 환하게 등불을 밝히며 살아온 우리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앞에 풍성한 선물과 영적 잔칫상을 차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수고한 만큼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행복의 길: 열정의 띠를 매고 사랑의 등불을 들어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종들!”

주인이 왔을 때 깨어있는 종이란 '언제나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종’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원하는 일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주인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돌아오면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야 하고 ‘등불’을 켜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띠’가 무엇을 의미하고 ‘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깨어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그렇습니다. ‘띠’는 ‘봉사할 자세’를 의미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받은 대로 해 주신다면 분명 우리가 한 대로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이란 ‘사랑과 봉사’를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당신이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 뜻은 인간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등불’을 들고 허리에 ‘띠’, 곧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십자가를 메시고 우리에게 봉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매 순간 사랑실천을 위해 성령으로 나 자신을 포기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불행에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줄 힘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 등불을 들고 ‘실천’이라는 띠를 매고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영화 ‘네이든’(2017)은 영국 수학 천재 소년 네이든의 유년기 실화를 담았습니다.
네이든은 자폐아입니다. 감정을 표출할 줄 모르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사회성이 뒤처집니다. 이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아버지는 네이든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해주고 아버지는 특별히 네이든이 수학에 눈을 뜨게 해 줍니다.
그런데 불행이 닥쳤습니다. 네이든과 함께 차를 몰고 가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네이든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주려 하지만 네이든은 마음의 문을 닫아겁니다. 어머니는 수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무엇을 사 오라고 할 때 항상 소수(1과 자신을 제외하고는 나눌 수 없는 수: 2, 3, 5, 7, 11, 13, 17, 19)로 사오기를 원합니다. 엄마는 새우튀김을 사갈 때도 9개 준다는 것을 7개만 달라고 합니다. 그래도 항상 네이든에게 무식하단 취급을 받습니다.
어쩌면 네이든은 아버지가 죽은 원망을 어머니에게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네이든은 수학에만 더 몰두하였습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폐증 환자에게 능력까지 없다는 것은 그냥 모자란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네이든은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 영국 대표 16명 예비 명단에 올라갑니다. 이 중에서 6명의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기 위해 대만에서 진행되는 2주간의 합숙 훈련에 참여하게 되어 네이든은 처음으로 집을 떠나게 됩니다.
16명의 영국 아이들은 대만 아이들과 짝을 이루는데 네이든은 장메이라고 하는 여자애와 짝이 됩니다. 그러나 악수도 못 하고 어찌 대해야 할 줄 모릅니다.
장메이는 그냥 사랑 가득한 아이입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활달하고 아무 표현도 못 하는 네이든과 잘 놀아줍니다. 새우튀김이 8개라고 주저할 때 그냥 하나를 집어먹어 7개를 만들어줍니다. 자신의 가장 어려운 고민을 간단하게 해결해주는 장메이에게 네이든은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낍니다. 다행히 둘은 각 나라 6등으로 나란히 올림피아드에 나갑니다.
시차 적응을 위해 하루 쉬는 날이 있었는데 장메이는 긴장을 했는지 네이든의 방에 찾아옵니다. 네이든은 좀 쉬다 가라고 합니다. 둘은 가벼운 뽀뽀를 하고 그냥 잠이 듭니다. 그러나 대만 지도자가 아침에 갑자기 들어왔고 장메이는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네이든은 시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랑의 공식만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시험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갑니다.
응원하러 왔던 엄마는 깜짝 놀랍니다. 네이든은 엄마에게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야 했느냐며 웁니다. 그런 네이든을 엄마는 안아줍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는 장메이를 만나러 역에 가자고 데려다줍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띠를 매고 등불을 들어주기만을 기다린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먼저 띠를 매고 등불을 들고 있습니다. 네이든은 교통사고 이후 처음으로 앞 좌석에 탑니다. 그렇게 네이든과 장메이는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다니엘 라이트윙’은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네이든에 의해 7등으로 아쉽게 떨어진 한 아이가 화장실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너도 자폐증 진단받았지? 난 특별한 재능이 있으니까 이상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근데 특별하지 않다면 그냥 이상한 거야!”
이것이 깨어있지 못함입니다. 빛이 없는 것입니다. 특별함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 곧 수학이나 돈, 재능, 명예 등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지 못함입니다. 비록 그것을 위해 자신을 바칠 용기가 있어도 그것이 등불이 아니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종교를 통해서도 특별해지려 했습니다. 종교가 아닌 사랑으로 특별해지려 해야 합니다. 그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네이든의 아빠처럼 자녀들에게 특별해질 수 있다는 띠를 매어주고 네이든의 엄마처럼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사랑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불을 손에 들려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는 지혜를 줍시다. 이것이 자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모기 뒤에 숨은 코끼리’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모기는 아주 작지만 매우 귀찮습니다. 소리 없이 다가와 물기 때문입니다. 밤에 잠자리에서 모기에 물리면 짜증이 나고, 결국 불을 켜고 모기를 잡기 마련입니다. 책은 사소한 일 때문에 ‘화’를 참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기와 같은 사소한 일 뒤에 커다란 코끼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꽉 끼는 신발을 신으면 발의 뒤꿈치가 까질 수 있습니다. 불편한 신발을 신고 지하철을 탔을 때 누군가 실수로 발을 밟으면 평소와는 달리 더 화가 나기 마련입니다. 신발 속에 감추어진 뒤꿈치의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감추어진 상처는 보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무시당한다는 생각, 간섭받는다는 생각, 나의 허물을 들추어낸다는 생각, 실패한 일들에 대한 생각들은 나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작은 일을 통해서 주체하기 어려운 ‘화’가 되기도 합니다. 

아버님의 기일을 지내면서 어머니, 형수, 조카들과 추모관엘 다녀올 때입니다. 연도를 하고, 기분 좋게 돌아오면서 중국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마침 어린이 날이라서 중국집에는 손님이 많았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렸습니다. 40분 정도 기다렸는데 우리보다 더 늦게 온 손님에게 음식을 갖다 주었습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곧 우리가 주문한 음식도 나왔지만 밖으로 나왔습니다. 가족들은 주문한 음식을 먹고 나왔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직원이 실수로 그렇게 한 것을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참지 못하고 화를 낸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주문한 음식을 먹고 나왔으면 좋았는데 화를 참지 못하고 나왔기에 집에 오는 길에 배가 고파서 또 화가 났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는 부당한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계급이 있었고, 하급 병은 그런 것쯤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화를 낸 이면에는 ‘코끼리’가 있었습니다. 사제생활을 하면서 익숙해진 편리함이 있었습니다. 식사할 때면 으레 음식이 먼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줄을 서서 기다릴지라도 먼저 앞자리로 가라는 권유를 받곤 했습니다. 순례를 가는 버스에서도 맨 앞자리에 앉곤 했습니다. 조별로 자리를 바꾸었지만 저는 자리를 바꾼 적이 없었습니다. 민박집에 가서도 독방을 마련해 주곤 했습니다. 다른 분들이 불편하게 같은 방을 사용하는 것을 알면서도 같이 자자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무라시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모습이 제게 있었습니다. 사제복 안에 겸손, 희생, 나눔, 봉사, 인내가 있어야 했는데 권위, 자존심, 가식, 허영,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화’를 낸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의 무례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났지만 사제라는 이유 때문에 참아 주셨습니다. 화가 난다면 그 현상 뒤에 숨어있는 코끼리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는 죄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결과는 의로움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담의 불순종 뒤에 있던 코끼리는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비열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 뒤에 있던 코끼리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이 되신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을 들고 깨어 있는 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렇게 깨어서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은 어떤 등불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가식, 교만, 게으름, 허영, 분노의 등불을 들고 있으면 그 등불은 본인과 이웃에게 큰 상처를 주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희생, 나눔, 겸손, 온유의 등불을 들고 있으면 그 등불은 희망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 환하게 피어나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깨어 있어라. - 희망의 빛, 희망의 약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하루의 기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엔 사연이 있습니다. 집무실에 들어온 큰 지네를 살려 보냈기 때문입니다.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입니다. 정확히 지난 9월27일 끝기도후 집무실에 들어 와 불은 켜는 순간 큰 지네가 발가락을 물고 쏜살같이 필사적으로 달아나 숨었고 도저히 잡을 수 없었습니다.

 

따끔하는 아픔과 더불어 정신이 번쩍 들었고 순간 ‘깨어 살라’는 깨우침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니까 20여일 만에 완전히 사라진줄 알았던 검붉은 빛을 띤 큰 지네가 엊그제 10월17일 저녁 끝기도후 집무실에 들어 왔더니 나와서 쉬고 있었습니다. 만 20일만에 나타난 것입니다. 즉시 놀라서 입은 스카풀라 수도복으로 힘껏 때렸습니다만 놓쳤습니다. 수십분 동안 수색했지만 종적이 묘연했습니다.

 

후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수도형제들이 웃었습니다. 책같은 것으로 두드려 잡아야지 옷으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본능적으로 살생殺生을 피하고 싶었던 탓이었던 듯 싶습니다. 그래서 사다 놓은 에프킬러를 집무실 속속들이 뿌리고 갔더니 다음 10월18일 새벽 나와 불을 켜보니 집무실 그 자리에 죽은 듯이 큰 지네가 누워 있었습니다. 건드려 보니 움직였고 종이에 담아 집무실 밖에 던진후 잠시 문열고 보니 사라진 것입니다. 살아 도망간 것이지요.

 

이렇게 지네를 살려 보낸 것이 정말 잘했다 싶어 온종일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필사적必死的으로 살려고 달아나는 불쌍한 미물微物 지네를 살려 보냈으면 그저 평범히 잊으면 될 것을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사람인 내가 무용담武勇談을 자랑하듯 호들갑스럽게 형제들에게 이야기 했던 자신의 경박輕薄함이 내심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좌우간 새벽부터 살생하지 않고 살려 보냈다는 사실이 기뻤고 새삼 깨어 살아야 겠다는 자각도 새로이 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도 우리 모두 ‘깨어 있어라’입니다. 과연 하루중 깨어 있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깨어 있을 때 참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영성생활이나 끊임없는 기도의 궁극 목표 역시 깨어 있음에 있습니다. 많은 사고나 일, 유혹도 깨어 있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수도원 성전 뒷면 양쪽에는 올빼미 눈의 사진이 있고, 제의방과 제 집무실에도 제 조카가 선물한 핀란드 영롱한 눈의 흰 올빼미 도자기가 있습니다. 바로 영롱한 눈의 흰 올빼미는 “깨어 있어라”, 무언의 가르침을 줍니다. 깨어 있음을, 살아 있음을 상징하는 영롱하게 반짝이는 깨어 있는 눈입니다.

 

참으로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10월 초인가 했더니 벌써 10월 종반에 접어듭니다. 엊그제와 어제는 섭씨 2도의 추운 겨울날씨를 연상케 했습니다. 처음으로 겨울 외투를 입고 새벽 산책을 했습니다. 지금 내리는 늦가을 비가 내리면 다시 추워질듯합니다. 얼마 지나면 11월 위령성월이 될 것입니다.

 

이런 흐르는 세월에 대한 절실한 자각이 저절로 하루하루 깨어 오늘 지금 여기를 살게 합니다. 항상 오늘 지금 여기에 초점을 두게 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자작시를 매일 읽어보며 삶을 새롭게 추스르게 됩니다.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내 삶의 여정을 압축해, 내 현 지점을 확인하다보면 저절로 깨어 살게 됩니다. 주변에서 갑작스런 사고나 뜻밖의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 역시 깨어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과 더불어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라틴어 격언도 우리 모두 깨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참으로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둘 때 삶의 환상이나 거품은 사라지고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투명한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을 때 참 맑은 기쁨에 행복한 삶입니다. 깨어 있을 때 저절로 내적 침묵에 텅빈 충만의 행복한 관상적 삶입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비움기도, 명상기도, 향심기도 역시 주님 중심의 삶을 살기 위한 일종의 깨어 있음의 훈련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에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주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십시오. 또 궁극의 희망을, 꿈을 주님께 두십시오. 희망의 빛, 희망의 약입니다. 이런 주님 향한 사랑이, 희망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인내하며 기다리게 합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한 병고病苦 중인 자매에게 드린 말입니다. 사실 희망보다 영혼에 더 좋은 명약名藥도 없습니다. 또 주님 주신 희망의 빛이 무지의 어둠, 허무의 어둠을 몰아 냅니다. 궁극의 희망과 꿈은 주님입니다. 이런 희망과 꿈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은 삶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 향한 사랑이, 희망이 우리를 깨어 아름답게 빛나는 내적평화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말씀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 인간 존재를 상징합니다. 빛과 어둠, 은총과 죄, 선과 악, 희망과 절망, 생명과 죽음, 영적 삶과 육적 삶이 하나로 어울러진 인간 실존實存을 상징합니다. 새삼 우리의 전관심사를 그리스도께 뒤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선택하여 날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그리스도와 사랑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할수록 깨어 살게 되고, 은총의 빛에 죄의 어둠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희망, 저희 기쁨, 저희 평화,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 함께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 모두 기쁨으로 인내로이 당신을 기다리며 깨어 살게 합니다. 주님의 평생 전사, 주님의 평생 학인의 빛나는 덕이 바로 깨어 있음입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께 궁극의 신뢰와 사랑과 희망을 둘 때 저절로 하루하루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기쁘게 오늘 지금 여기를 살 수 있습니다. 복음의 주인은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행복하여라, 주님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님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런 깨어 있는 주님의 종으로 살 때 참 기쁨에, 참 행복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깨어 살면 내일은 걱정안해도 됩니다. 바로 내일은 내일이 저절로 잘 해결해 줄 것입니다. 우울이나 치매도 들어 올 수 없습니다. 복된 선종의 죽음도 은총의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행복한 삶을 살게 합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게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깨어있는 '한 사람'을 통한 은총

      이기우 신부님

평온한 상황보다 엄중한 상황에서 신앙은 더 빛을 발합니다. 본능적인 반응보다 더, 이성적인 판단보다 더한, 그래서 가장 근본적인 안목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공생활 내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견지해 온 자세와 영성을 한 자락 열어서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혼인 잔치에 참석했던 주인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지만 언제라도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는 종처럼, 예수님께서는 언제 도움을 청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요청에 늘 대기 상태로 살아가셨고, 더 중요하게는, 언제 회개하고 믿음을 갖출지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늘 노심초사하며 기다리셨습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갈수록 엄중해져만 가는 로마의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들으며,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있는 의식으로 이 엄중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아담과 예수님을 극명하게 대비시켜가며 설득하였습니다. 로마의 권세가들과 재력가들이 저지르는 죄가 많아진 것은 상황을 엄중하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믿는 이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깨어있으면서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을 깨어있게 만들고자 먼저 깨어있다면, 은총도 충만히 내릴 것이라는 논리로 설득한 것입니다. 

 

이 은총의 가시적 효과는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안목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기운을 받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날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그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그 엄중한 상황을 복된 상황으로 만드는, 다시 말하면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요 그 과정에서 당사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부활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은 그저 자기 자신을 태우는 희생의 고통이 너무도 커서 온 신경이 그 고통을 감내하는 데에로 모일 뿐, 자기 자신이 태워 비치는 빛이 과연 얼마마한 면적으로 밝게 하는지 또는 그래서 얼마마한 어둠이 사라졌는지는 알 수도 없고 계산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의 우리 자신들의 믿음과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의 은총은 우리보다 먼저 살아가신 이들의 십자가 희생 덕분에 누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밀알의 비유가 말해주듯이, 우리가 썪으면 싹이 트고 꽃도 피며 열매도 맺을 것입니다. 단,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러할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의 은총인 동시에 신비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12, 35-38(연중 29주 화)

오늘 <복음>은 종말의 준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여기에서, 깨어있음의 표시는 두 가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과 ‘등불을 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에 대해 하신 말씀, 곧 “그것을 먹을 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라”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허리에 띠를 매듯이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경계하고 있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아우구스티누스)을 말해줍니다. 곧 임을 맞아들여 시중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루카 12,39) 모르듯,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루카 12,40)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는 것은 마음과 지성에 등불을 밝히고 기운차게 깨어 있으라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선의 행실로 등불을 밝힘(아우구스티누스)을 의미합니다. 곧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빛 속에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에서 “말씀은 발의 등불”(시 119,105)이라 말하고 있듯,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여기서 ‘깨어있음’은 단지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것,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것,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정리해 보면, 깨어있음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주인이 오기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기다리는 이 안에서 임이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는 이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요,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이미 품고 있는 임으로 말미암아 것, 곧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편> 말씀처럼 “당신 빛으로 당신을 봅니다.”(시 36,10).

그런데 이 비유의 주인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 당연하거늘, 오히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님은 그러신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바로 이 미사의 성찬을 차려주시니, 그저 주님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기도 -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주님!

깨어있게 하소서!

단지 잠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임을 기다리게 하소서!

기다림이 이미 축복임을 알게 하소서.

그리워하는 임을 이미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열망을 품고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임이 나를 이미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이 날 그리워하는 희망 안에 깨어있게 하소서아멘.

 

 

 

<오는 이와 맞는 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는 이의
마음 안에
맞는 이가


맞는 이의
마음 안에
오는 이가


오는 이와
맞는 이가
갈림 없이


오는 이와
맞는 이가
하나 되어


오는 이와
맞는 이가
서로 섬김


오는 이와
맞는 이가
서로 기쁨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내용으로 들어가 본다면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바로 열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며 이렇게 한 종들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인이 띠를 매고 종들의 시중을 들 것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시중을 든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믿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겸손하신 분이신지 그리고 우리들을 정말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겸손하시고 또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복음에서 중요한 내용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원래 겸손하시고 비천한 우리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놀랄 일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중요한 것은 종들을 극진히 사랑해주시는 주인이 아니라 바로 그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의 자세인 것입니다.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할까요. 물론 육체적으로 잠을 자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마음 안에 하느님을 첫 번째로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느님을 첫 번째로 두고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적당히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또한 미사참석 및 성당활동에는 거리를 두면서 자신에 대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를 합니다. 그리고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들에 대한 세속적인 교육에는 열정적으로 시키면서 하느님에 대한 교육에는 소홀히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잠을 자는 신앙인들이며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는 선택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참 종교는 가톨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우리 가톨릭만이 하느님께서 직접 만드신 종교이며 바로 그 분이 유일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적당히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은 매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청년레지오를 했었는데 선배 한분이 잔업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레지오를 하는 날에는 동료들은 잔업을 하는데 정시 퇴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장이 한 소리를 하니 그 선배는 사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수요일에는 내가 성당에 가서 레지오를 하는 날입니다. 참석을 해야 하는데 못가게 하신다면 전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 30년전, 제 나이 20살에 참 신앙인을 보았던 것이며 지금 생각하니 그분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깨어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후 일담을 들어보니 그런 말을 한 후 사장이 먼저 퇴근 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인이 언제 올지 우리들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 오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오실 주인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깨어 있으라고 독려하십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6)
예수님께서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는 종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주인이 기척을 하면 그때가 언제이든 용수철처럼 반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영육의 촉수가 주인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 주인은 띠를 메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이것이 그 결과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주인이 종이 되어 섬기고, 종이 주인처럼 섬김을 받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일까요? 그 답을 제1독서에서 찾습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
먼저 죄가 왔고 그 다음에 구원이 왔습니다. 첫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새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은총이 도래하였어도 알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죄의 짐을 지고 율법의 지배 아래 자신을 묶은 채 구원의 해법을 율법에서 찾으려 골몰하는 동안, 새로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익숙하고 안전한 옛것에 취해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죄로 얼룩져 죽음을 향해 달리는 인간의 비참이 하느님의 자비를 움직였습니다. 죄와 죽음에 신음하는 인류에게 창조 때의 온전함, 첫 범죄 이전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리셨지요. 당신 백성을 만나시기 위해 혼인 잔치에서 숨가쁘게 달려오신 주인이 바로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화답송)
새 아담이신 예수님은 당신을 알아보는 이들, 구원을 갈망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열렬히 기다리던 이들과 더불어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보통의 주인들과 다르게, 당신을 고대하다 맞이하게 된 이들을 되려 섬기시면서 자신을 낮추셨지요. 복음 속에 언급된 '주인답지 않은 주인'의 모습으로요.

그 결정적인 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많은 이들이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미래를 걱정하며 경쟁하고 모으고 쌓으면서 삽니다. 그런데 물질과 육체에 명민하게 깨어 있다 보면 영적 사정에는 무뎌지기 마련이니,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 왜 기다리는지조차 잊고 영혼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를 각성시켜 주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복음 환호송)라고요.

언제라도 주인이신 분을 기쁘게 맞이하려 깨어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아 우리도 행복하고, 기다리는 우리를 보시는 주님 또한 더욱 행복하실 겁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함승수 신부님
물에 열을 가하면 ‘수증기’가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 변화는 '한순간에' 일어나는 듯 합니다. 섭씨 0도에서 99도에 이르기까지는 아무리 열을 가해도 물은 그냥 물일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99도에서 1도가 올라 100도가 되는 순간 액체였던 물은 순식간에 질적 변화를 일으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인 ‘기체’가 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온도인 섭씨 100도를 ‘기화점’이라고 부르지요.


우리의 삶에도 ‘기화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내는 ‘인고의 시간’은 때로 너무나 힘들고 답답하게만 느껴집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힘든 것도 참아가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데도, 겉으로 보기에 나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떄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나만 손해보고 사는 것 같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뿌린대로 갚아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뜻 안에서 깨어보내는 인고의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헛된 시간이 결코 아닙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가 무르익었을 때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하느님 나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구원은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날을 기다리며 철저히 깨어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종말의 순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하려면, 뜨뜻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을 마지못해 기다리고, 죄를 짓지 않고 겨우 버티는 수준으로 하루 하루를 견디듯 살아가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일은 손해보는 것으로 여겨 어떻게든 '최소한'으로만 하려는 모습,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는데에는 '더 더 더'를 외치면서 주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데에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안일하고 나태한 모습, 그런 모습으로 살면 우리의 영혼은 차갑게 식어버려 종말의 순간 '구원의 기화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뜨겁게 데워져있어야 합니다.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나가겠다는 열정과 적극성으로,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맞이하는 종말의 순간 기쁨으로 끓어올라 하느님 사랑 안에서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복된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Servus servorum 즉 ‘종들의 종’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종들의 종인 집주인이라는 세상에 없는 처음 듣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저도 거기 있었다면 예수님이 말씀 실수 하셨나보다 생각했을 겁니다.
교황님의 라틴어 공식 칭호는 Servus servorum 즉 ‘종들의 종’입니다.

밤늦게 남편이 귀가하면 집에서는 어때요? 생각 해 볼 여지없는지요?
학생들이 아침 첫 시간에 선생님께 안녕인사하면 선생님 교만해져요?
좋은 선생님은 흡족하면서 사랑하는 학생들께 잘 봉사해야지 하겠죠!

아이들께 부모님이 젊은이들께 어른들이 어른들께 노인들이 그래야죠.
국민위해 일하시는 분들이면 권력보다 당연히 봉사정신 앞서야겠지요.

 

 

 

천상의 혼인잔치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잔치 중에 가장 큰 축제는 혼인잔치이다. 
카나에서 혼인잔치의 축복은 주님께서 이루신 첫번째 기적이다. 오늘 복음(루카12,35-38)에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혼인잔치의 적극적 참여이고 완성이다.
결정적 혼인잔치는 ‘천상의 혼인잔치’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 ‘고령화 사회, 초고령화 사회라고 말하면 늙음이 초라해진다. ‘수명이 길어진 사회’라고 말한다면 늙음도 할 일이 많아질 것 같은 희망이 있다.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건강하라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대부분 건강은 육신을 말한다. 늙음 앞에 육신은 한계가 있다. 신앙인이 말하는 건강은 내면의 건강이다. 날마다 건강을 물으려면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암에 걸렸어도 건강하게 지낸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속담처럼 나도 매일의 행복한 일정이 있어 암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하루의 일과가 암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역시 덕분에 건강히 살아간다. 그리고 주님께로 깨어있는 종처럼 ‘천상 혼인잔치’를 떠올린다. 이제 나는 인생 전체를 떠올릴 나이이다. 살아온 날들, 살아야할 오늘, 그리고 수명이 길어진 덕분에 살아야할 내일, 늙은이의 건강은 육신의 건강 보다 주님께로 향한 영혼의 건강을 더 많이 챙기고 늙음답게 살아야 한다. 생의 시작과 끝 사이에 삶이 더 소중하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12,38)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사실 인간이 진정 깨어 있기 위해서는 충분한 잠과 휴식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힘이 장사인 사람일지라도 내려오는 눈꺼풀을 올릴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이 잠과 휴식을 갖지 못할 때 깨어 있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신앙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서도 충분한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는 그 하느님으로부터 힘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되는 휴식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이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도 좋은 태도와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늘 휴식과도 같이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 안에 충분히 머물며 영적인 에너지를 얻는 태도와 습관은 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생에는 늘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가 그러한 하느님 안에 참된 휴식을 이루지 못한다면 졸음과도 같은 악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후회 없는 삶은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하면 지나친 사건과 시간의 아픔 속에 잠기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몫을 다 하며, 지나치거나 주저하거나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응하고 채우며 내게 다가오는 생의 한 문제 한 문제를 풀고, 내게 요청하는 책무들을 다하며 후회 없는 생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5-36) 예수님께서는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이들은 주님 사랑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7-38절)
  우리는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오실 때 깨어 맞이하기 위해 24시간 보초 서듯 긴장한 상태로 기다린다는 것은 더군다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분이 언제 오시던지 내가 내 할 일을 꾸준하고도 성실하게 수행하며 사는 일일 것입니다. 매일 정한 시간에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들을 읽고 묵상하며, 욕심부리지 않고 그렇다고 겁먹지도 말고 주저하지 않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말씀 적용으로 자신과 가정 그리고 자신이 머무는 그곳에서 복음화의 길을 걷는 길이 깨어 기도하는 길일 것입니다.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옛날 어른들은 '한 치의 앞도 못 보는 것이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하는 것을 듣곤 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과거의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어떤 사람이 살았는지도 모르면서 마치 이 세상, 이 현실은 나를 위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현실이 아닌 내일의 일로 미루면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매스매디아, 요즈음은 대부분이 인터넷을 통해 세상 소식을 접하지만, 또 신문지상이나 TV를 통해서 연말 연시, 명절을 보내면서 연례행사처럼 부쩍 많은 사고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또 듣습니다.

사고를 당한 분들의 소식에서 개인적인 사항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멀지 않거나 아니면 같은 도시에 산다면, 우리는 더 관심을 갖고 내의 일처럼 소개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깝습니다.

그들도 사고를 당하기 전에,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 지금 우리가 그 소식을 듣듯이 그들도 사고소식을 안타까워하면 언제까지라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온 들과 산을 덮었던 녹음과 늘 푸르기만 하던 나무들이 어느새 단풍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을이 오고 겨울이 시작되는 문턱에 서면 '이별의 계절'을 생각합니다.

꽃 피고 새 싹이 돋으면 시작되었던 계절이 이제 우리에게서 떠나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지는 낙엽을 바라보면 마치 우리의 운명을 보듯, 서글픈 마음과 함께 ‘참 세월이 빨리도 흐르네.’라는 말을 하는 우리가 됩니다.

문득 동창들의 모습이 있는 졸업앨범을 볼라치며, ‘이 사람도 세상을 따났지.’하며 그 옛날 함께 공부했던 학창시절을 회상해봅니다.

얼마 전까지 만나 대화를 나누던 이웃도 이제는 곁에 없습니다. 그의 정다운 가족, 친구, 이웃들의 모습을 회상하며 그 이면에는 ‘이제 나도 언젠가는 떠나겠지.’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훌쩍 떠나는 삶인데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며 떠나는 세상에서 나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속상해서 믿을 수 없는 미래의 일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면서도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던 성인성녀들의 자서전을 읽어 보면 그날그날을 한 삶의 마지막으로 여기며 침대에 오를 때 벗어 놓은 슬리퍼를 내일은 신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성인성녀들께서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어느 정에도 매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살려고 애쓴 분들입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것을 듣고 깨달아서 세상을 다 알고 우리의 삶을 다 아는 것 같아도, 변하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살고 싶어도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있을 것처럼, 이웃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미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없을 날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일을 손에서 놓지를 못합니다. 또 현실을 일을 해야하고 이웃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성모님만 모시고 한 삶을 욕심 없이 또 미워하지 않고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면 얼마나 행복하고 축복받은 것일까요?

그래도 우리의 이런 처지를 잘 아고 계시는 주님이시지만 그래도 우리가 깨어살아야 한다는 과제를 일깨워 주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5-36)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 대해 한 사람의 범죄로 세상에 죽음이 왔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흐름으로 살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께서 가셨던 그 길을 우리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의 날처럼 이 세상을 마감하는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정확히 그 날이 언제인지를 모르고 오늘을 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며 기도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선행도 하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봉사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악의 그늘이 있어 결심하고도 이행하지 못하는 선행도, 교회의 가르침도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회개하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오늘 ‘깨어 있는 삶’을 살으려고 노력하고 있 습니다.

 

 

 

<깨어 있어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원래 이 말씀은, 당신을 본받아서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인데, “예수님은 지상에서도 사람들을 섬기시고, 하느님 나라에서도 사람들을 섬기시는 분” 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예수님의 시중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받게 될 최고의 상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중을 들어 주시는 것과 같은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ㄱ.13).”

그때 제자들은 아마도 하느님 나라의 행복과 평화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깨어 있는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에 받게 될 ‘벌’이 아니라, 그날 받게 될 ‘상’과 ‘복’을 더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심판 때에 벌을 안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하느님께서 주실 ‘상’과 ‘복’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만일에 벌을 안 받는 것만을 바라면서(지옥에 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죄를 안 짓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런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억지로 하는 강제노동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과 평화와 행복을 얻어 누리는 것을 희망하는 신앙생활은 기쁨이 가득한 생활이 됩니다.

그 신앙생활은 의무감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투덜거리는 생활이 아닌,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기뻐하는 생활이고, 누가 시켜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좋아서) 하는 생활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체험하는 생활입니다.(그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심판을 의식하면서 ‘깨어 있는 생활’을 하는 것도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으로 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는 말씀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말은, 일을 할 때의 복장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맬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띠를 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고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은, 주인이 도착한 다음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불을 켤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를, “‘어둠 속에’ 있지 말고, ‘빛 속에’ 있어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죄 속에서 살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하고,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그 때’가 닥친 다음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온다는 말은 특별한 의미가 없고,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주인이 일찍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늦게 올 것이라고 마음대로 예상하고서 방심하면 안 되고, 지금 곧 온다고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말은, 각 개인의 수명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은 “복을(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인데, 지금은 불행한 상태에 있지만 나중에는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희망과 기쁨과 사랑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상태도 복 받은 상태, 또는 행복한 상태입니다.

(만일에 벌을 주려고 오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종이라면, 그 종은 두려움 때문에 기다림 자체를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상을 주려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생활이기 때문에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행복하고 기쁜 생활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주인과 종의 위치가 바뀐다는 뜻이 아니라, 주인이 종에게 ‘큰 행복’을 주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주었고,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였습니다(루카 15,20-24).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을 옆자리에 앉히고 이것저것 음식을 집어 주면서 마치 시중을 드는 것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고, 사랑하는 그 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 5,8-10).”

(예수님은 우리가 이쪽 세상에서나 저쪽 세상에서나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시중을 들어 주시는 것은 당신이 원하셔서 하시는 일이고,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깨어 있어라.

      김성래 하상 바오로 신부님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지나가게 되어 있다.’ 스스로 종종 되뇌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아무리 나쁜 것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너무 기뻐하거나 너무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어떤 것에 너무 매몰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것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집착하게 되면 나쁜 것에도 집착하게 되고 지나가야 할 때에 지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쓸모없는 종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제가 제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사는 인생이 저다운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철이 좀 들었는지 제 인생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저는 종으로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기 위해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주인은 언젠가 오실 것입니다. 아니면 종인 제가 그분을 뵈러 나가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종으로서 저의 자세, 마음,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래도 오실 주인은 종인 저를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까지 드실 분이기에 저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분을 기다립니다. 어서 뵙고 싶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마리문모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토 수녀회 대구 수녀원)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아빠가 회사 마치고 집에 돌아오기를 서서 기다리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문 앞에서 서서, 어느 곳도 쳐다보지 않고 문만 계속 바라보며 아빠의 벨 소리 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들리는 벨 소리
'띵동~'
아이는 너무나 기뻐하며 맨발로 현관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빠를 향해
"아빠~~!!!"
부르며 폴짝폴짝 뜁니다.
아빠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환히 웃으며 아이를 꼭 안아줍니다.
그 영상을 보며 아.. 사랑이라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
서로를 기다리고 서로를 향해 웃고 서로를 향해 기뻐하는 것..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가 이런 것인것 같습니다.
서로를 간절히 기다리고,
서로를 향해 웃고,
서로를 향해 기뻐하는 것.​

오늘도 그 모습을 생각하며 흐뭇이 미소를 짓습니다.

 

 

주님의 현존은 밤과 낮이 없다.<루카 12/35-38>10월 19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갈망과 충족은 하느님의 사랑이 담긴 큰 은총입니다. 기다림과 만남은 큰 기쁨이며 즐거움입니다. 전에 어머니가 시장에 물건을 팔고 도라오심을 기다리는 시간 후 만남은 기쁨이 됩니다. 물건 파시고 남은 돈으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시어 저녁을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도 잔치 집에서 먹을 것을 가지고 오시는 주인을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현존은 어디나 어느 때나 깨어있는 사람은 만나서 의인이 받는 상을 받게 됩니다.
어제 휴가를 갔다 돌아오니 어느 형제가 손을 벌리며 선물을 달라고 하기에 없다고 하면서 무엇 든지 구해서 나누어 먹을 것을 가져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었습니다. 전에 본당에 있을 때 출장이나 다른 곳에 갔다 오면서 중국집에서 만두를 사거나 그곳의 귀한 것을 사가자고 오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즐겁게 먹던 생각이 납니다.
수도자는 늘 주님의 현존 안에 살고 있지만 혹시 잠을 자는 사람은 주님이 찾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이 만찬 상에서 주는 주님의 자비와 일치와 사랑을 배 푸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미사는 주님의 생명을 받고 춤추며 노래하며 온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은총입니다. 아침에 일찍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제가 본당사목을 할 때 강론을 하면서 이 고귀한 미사에 참례하고 은총을 지워버리는 사람에 대하여 말을 하였습니다. 
시어미는 성당에 와서 기쁜 은총을 받고 집으로 가니 며느리는 아기를 엎고 빕을 짖고 있는 데 방은 아직 청소도 정리도 되어있지 않아 신경질을 부리며 집안에 아직도 방도 치우지 않고 요강단지는 그대로 있다고 며느리를 야단치는 사람은 미사를 올바르게 참례 못한 사람입니다. 야단치기 전 방을 정돈하고 할 일을 하면서 도와야 합니다. 하니 한 할머니가 저에게 외서 며느리 편든다고 원망하는 말도 들었지만 저는 거룩한 미사에 자비와 일치와 사랑의 은초을 받은 사람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이렇게 은총을 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때 우리는 침묵이 최상의 영성생활의 본질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침묵은 좋은 말을 위하여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글 쓰기전 저는 전말 저녁부터 침묵합니다. 글을 쓰기 전 까지 생각하고 기도하며 묵상 하며 준비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려면 준비 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기다림입니다. 독서기도 전 우리는 입술에 십자가를 놓으면서 “주님 저의 입을 열어주소서 주를 찬미하나이다. ” 그러나 입만 여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열어야  하느님을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며 시편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어디나 현존하는 주님을 언제나 만나 기쁘고 행복한 날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만나는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하루가 되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미워도 다시한번 돌아보시고 싫어도 다시한번 찾아보는 마음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됩니다.
아씨시 성 방지거 성인이 하루는 말타고 길을 가다가 나환우를 만나 냄새도 나고 복도 싫어 막 지나가다가 거분이 예수님이면 어떻게 하지  생각하고 뒤돌아가 포웅 하었더니 바로 그분이 주님이셨다고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을
아는가?

깨어있음이
행복이다.

행복의
출발점은
언제나
깨어있음에
있다.

삶이란
깨어있음으로

삶을 채우는
여정이다.

깨어있음을
주님께
내어드린다.

깨어있음의 길이
즐겁고
행복한
신앙의 길이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듯

깨어있는 몸에
깨어있는 정신이
있다.

찌그러진
마음을
펴게하는
깨어있음의
정신이다.

나를 돌보고
너를 돌보는
깨어있음의
우리 마음이다.

내려놓는
결단과
진실한 소명이
깨어있음의
길이다.

사랑은
깨어있음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복음은
깨어있음의
기쁜소식이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다.

사랑을 지켜내는
깨어있음이
우리 곁에 있다.

사랑은
깨어있음으로
행복하고

행복은
깨어있음으로
기적같은
사랑이 된다.

신앙공동체를
살리는
깨어있음은
회개이며
반성이다.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깨어있는
오늘 그날이다.

첫마음을
잃지 않는
깨어있음으로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절망을 치유하는
깨어있음

그 희망과
구원또한
깨어있음에
있음을 믿는다.

구절초를
적시는
가을비가
마음을 깨운다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아내를 향해 남편이 큰 소리로 말합니다.

“여보, 우리 어떻게? 글쎄 태양이 머지않아 크게 폭발해서 적색거성이 된다네. 그렇게 되면 지구는 전부 불타고 이후에 얼음으로 뒤덮이게 된데.”

아내는 깜짝 놀라면서, 정말로 큰 일이라며 언제 그런 일이 생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말합니다.

“응…. 50억 년 후에!”

이 대답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또 장난치면 태양보다 당신이 먼저 사라진다.”

 

우리 중에 혹시 50억 년 후를 걱정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100년도 못 사는데 50억 년 후를 걱정하고 있다면 쓸데없는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걱정은 멈추지 않으면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 쓸데없는 걱정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특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서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했었지요. 그러나 걱정의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가 쓸모없는 걱정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순간에 얼마나 충실하게 사느냐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걱정을 줄여나가고 미래를 잘 준비하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지요. 즉, 언젠가 닥쳐올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나의 죽음이 언제 어디서 이루어질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이 그 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연중무휴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살 준비도 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육체노동을 하거나 힘든 일을 하는 이들은 허리에 띠를 단단하게 맵니다(역도선수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래야 자신의 온 힘을 쏟아부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등불은 깨어 있음을 의미하지요. 즉, 마음과 육체가 기운차게 깨어 있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언제나 깨어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먼 훗날 힘이 떨어져서 이 세상 힘이 떨어질 때 할 것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이라고 하시지요. 우리가 젊든 늙었든, 누구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준비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붓고, 사랑을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등불을 켜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과 경쟁합니다. 내 목표는 마지막 공연의 성과를 능가하는 것입니다(셀린 디옹).

 

어느 온천에서...

어느 온천에 갔던 기억 하나가 생각납니다. 그곳의 온천수는 너무나도 유명했습니다. 철분과 무기질이 다량함유되어 있고 물이 나오고서 10분 정도 지나면 붉은색으로 변하는 신비한 물이 나오는 곳입니다. 특히 피부에 무척 좋아서 옛날부터 피부병 치료에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워낙 유명해서 신기한 마음에 방문했습니다. 소문대로 욕조에 받아 놓여 있는 물은 붉은색이었고, 많은 사람이 이 욕조 안에서 몸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어떤 분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보고는 모두 욕조 밖으로 성급히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분의 피부가 너무나도 이상했기 때문이었지요. 피부병 환자로 보이는 사람이 욕조에 들어가니 다른 사람은 모두 인상을 쓰면서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피부병 환자는 입욕할 수 없다고 매정하게 말합니다. 아마 누군가가 직원에게 항의했겠지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부병 치료에 좋은 곳이니 피부병 환자가 들어가는 것이 당연할텐데, 정상인인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난리입니다. 피부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피부병에 좋은 곳을 이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의 불편함에 대해서는 조금도 참지 못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러지 않으셨습니다. 늘 그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셨다는 것을 떠올려 봅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행을 떠나면서 불현듯 떠오른 생각입니다! '그래 우리네 인생도 여행이로구나!'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걷다보면,때로 조금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때로 결코 길지 않은 여행, 마치도 벗꽃 만개한 어느 봄날, 아스라한 하루밤 꿈과도 같은 짧은 여행 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은총과 자비로 이 땅에 온 우리는,다들 각자 나름의 여행길을 걷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여행길이 아무리 길어보이고 고단하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것입니다.무한 반복되지 않고 이 한번의 여행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 여행길의 종착점에는 그토록 우리가 그리워했던,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두 팔 크게 활짝 벌리고 미리 마중나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힘겹고, 때로 포기하고 싶어도,두발에 힘을 주고 기꺼이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왕 걷는 여행길 억지로,갖은 인상 다 쓰며 걷지말고,세상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순간순간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이 여행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강한 폭풍우를 만나거나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걸어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반드시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자비의 하느님께서 마냥 우리를 험난한 비탈길로만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걷다보면 황홀한 일출 광경도 만날 것입니다. 절경 사이로 펼쳐진 평탄한 능선길도 걷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정원같은 꽃길도 만나게 될것입니다.

 

더욱 은혜로운 일 한 가지! 우리의 인생길은 결코 우리 혼자 걷지 않는다는 것! 때로 자주 잊어먹지만 우리의 여행길에는 인도자 성령께서,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의 수호천사들께서 우리와 함께 걷는다는것은 우리가 굳게 믿어야할 신앙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나혼자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외롭다고 울부짖지도 말아야겠습니다.

 

초목 우거진 멋진 수목원 산책하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걸어가야겠습니다.

 

내일은 또 어떤 길로 나를 안내하실까...흥미진진한 얼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남아있는 우리의 인생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왕 걷는 길,잘 꽃단장하고 걸으라고 초대하십니다. 우중충하고 심란한 모습이 아니라 허리에는 띠를 매고 등불을 켜서 손에 들라고 하십니다.

 

단 한번 뿐인 소중한 우리네 인생길 적당히 흥청망청 낭비하며 보내지말고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더할나위없이 충만한 모습으로 엮어가라고 초대하십니다.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일 때 잠자고 있는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제가 좋아했던 여자와 결혼을 해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하는데 정말 정성스럽게 아침밥을 해 주는 아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다느니, 양말 좀 뒤집어 벗지 말라느니 갖은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일하러 가는 것도 힘든데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신혼 때부터 이렇게 잔소리를 하면 갈수록 더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앞이 막막했습니다. 평생 아내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 같아, 괜히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이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보좌신부일 때 꾼 꿈입니다. 눈을 떴을 때 주위를 둘러보고 사제관인 것을 알았습니다. 눈뜨자마자 감사기도를 그렇게 절실히 드려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주님, 제가 사제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종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이 힘들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혼은 나의 선택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누군가의 종이 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가기 싫은 직장도 억지로 가야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었을 때는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임을 다시 알게 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제생활을 하다 보니 제가 꾸었던 꿈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꿈이었지만 많은 분들에겐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살지만 실제로는 사람에 휘둘리고 현실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삶은 깨어있지만 잠을 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살지 말고 당신을 주인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잠에서 깨는 유일한 길입니다. 나는 내 생명을 만든 적도 없고 내 존재가 생겨나게 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 생명을 부모님이 만들어준 것도 아닙니다. 부모님은 나의 눈 하나도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나를 만드신 분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도 내가 주인인 것처럼 살면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참 나의 창조자를 만나 창조자의 의도대로 살아갈 때 비로소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일반 대학교 다닐 때 이런 꿈도 꾸었습니다. 제가 사막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푹푹 빠지는 모래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래 언덕을 오르고 있었는데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그때 옆에서 저를 부축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너무 편안한 마음이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더니 아는 여자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이것은 분명 하느님의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사귀고 결혼하였습니다. 허망한 꿈이었던 것입니다. 

 

인생이 허망한 꿈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살면 안 됩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면서 혼자 판단하고 혼자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오류에 빠져 고생만 하며 살다가 하나도 남지 않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나의 주인이 주님임을 믿게 될 때 참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자신이 주님의 종으로 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그 삶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이런 깨어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살 자격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인으로 여기며 산 이들에게 이런 축복을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당신을 참 아버지요 주님으로 인정한 이들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을 받게 됩니다. 자신을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며 살지 맙시다. 나는 나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주님을 나의 주인님으로 여기고 오늘 하루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결심합시다.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입니다. 전광판이 있고, 기다리는 버스가 몇 분 후에 올지 알려줍니다. 집에서도 인터넷에 접속하면 원하는 교통수단의 출발시각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용한 프로그램은 열정을 가진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의 안내 서비스는 고등학생의 신선한 생각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많은 사람에게는 생활의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맥가이버’처럼 도움을 주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서랍도 고쳐주고, 형광등의 안전기도 갈아주고, 고장 난 스위치도 바꿔주고, 막힌 배수구도 뚫어주고, 청소 도구함도 만들어 줍니다. 같은 손인데 형제님의 손은 만능입니다. 저와 신문사의 직원에게 형제님은 언제가 감사한 손님입니다. 땀을 흘리면서도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봉사하시는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주셨고, 태양을 만들어 주셨고, 들에는 많은 먹을 것들을 주셨습니다. 물과 공기가 있어서 우리는 마시고,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셨는데, 때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서로 싸우며 분열을 일으킬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우리에게 한결같이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이제 그릇된 길에서 돌아와 바르고 참된 길을 가도록 요청하였습니다.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많은 축복이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회개란 무엇일까요?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살인하지 말며,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부자 청년은 그런 것들은 이미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미 그런 계명들은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 그러자 부자 청년은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눈은 뜨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켜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은 친절, 인내, 나눔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 희망, 믿음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걸 배우고 도전하는 사람도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도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열정과 노력으로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사람도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따르며 생각과 의식이 깨어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곽승룡 비오 신부님

허리에 띠 두르고 등불을 켜고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은 정말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 주인이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종들을 위해 시중을 든 단다.

 

꼴찌가 첫 찌가 되는 거란 느낌이 든다. 주인을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면 종이 주인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복음인데 우리 사회에서도 그럴까?

 

주인이 종을 섬기는 사회, 목자가 양들을 보살피는 교회, 정치인들이 국민을 섬기는 나라... 대통령이 백성을 위하는 나라... 그런 나라가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하였다.

 

 

 

현명한 사람이려면 신앙 가집시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무서운 죽음을 혼인잔치서 귀가주인 기다림으로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주인 기다리는 종보다 하늘잔치에 데려가실 아버지 기다리는 걸로요.

세상점수 따려고 기다리는 종들보다 아버지의 하늘잔치초대 기다려요.

 

예수님은 알기쉽게 영원실화를 세상예화로 돌려 설명하신 멋쟁이예요.

죽음은 하늘로 불려가는 날로 아버지께 하늘잔치초대 받는 날 돼야죠.

허리에 진리 띠 매고 마음에 불 밝히고 살다 하늘가족 찾아 가야해요.

 

몸이 좋아하는 것만 찾는 와중에 믿음으로 보이는 하늘을 찾아갑시다.

하늘 좋아하는 그만큼 큰 사람이며 현명한 사람이려면 신앙 가집시다.

 

 

 

이기심과 욕망의 지옥

      이종훈 신부님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첫 사람의 죄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다는 원죄교리를 현대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연좌제도 없어진 세상에 죄를 물려받았다는 교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뭔가에 홀린 듯 가짜를 진짜라고, 악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를 두고 한 신학자는 ‘원죄적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그 공동체의 분위기가 각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나의 정의와 선도 이미 내가 속한 공동체의 분위기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사이비종교집단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인 행위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그것이 의로운 결정이고 구원의 길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공동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구성원이 바뀌면 공동체의 분위기도 바뀐다. 모두가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거기는 천국이고,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지옥이 될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거기를 지옥으로 만든다. 공동체가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만 개인의 마음 생각 행동이 공동체의 색을 바꾸기도 한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다. 하느님을 닮아 영적이고 사랑할 줄 안다. 세상이 이것을 잊어버리게 우리를 폭력적으로 만들어가려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기억한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를 벗어나야하는 이유라고 내세웠던 것은 하느님 예배였다. 모세는 수차례 파라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탈출 7,26).’”하고 말했다. 인간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버려 공동체를 지옥으로 만든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따라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이기심과 욕망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한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주님, 제가 당신을 주님이라고 불렀으니 당신의 말씀을 따릅니다. 주님의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기심과 욕망의 올가미가 저를 옭아매고 있어서 주님을 잘 따르지 못합니다. 이기심과 욕망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음을 기억하고 생명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인을 기다리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혼인잔치에 갔던 주인이 느닷없이, 예고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라도, 당장 아무 무리없이 맞이하여 여독을 풀 수 있게 섬길 수 있는 준비 자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허리의 띠"는 치렁치렁한 복장이 노동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허리에 붙들어 매는 끈입니다. '당신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는 마음을 옷 매무새로 표현한 셈이지요.

 

"등불"을 켜 놓은 상태는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 등불과 함께 제 영혼도 밝히고 있습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입니다. 깜깜한 밤, 저 멀리서 집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집 어딘가에 불이 켜져 있으면 마음이 설레고 위안이 되지요. 거창한 해후가 아닌 일상의 소소한 만남이어도, 모든 만남은 기다림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켜 놓은 등불은 그 기다림과 기대감을 더 밝고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되겠지요.

 

"그 주인은 띠를 매고 ...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종이 자신을 깨어 기다려 준 것이 주인을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보십시오! 주인은 이를 종의 당연한 의무라 치부하지 않습니다. 긴 잔치와 여독으로 지쳤을 법도 한데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스스로 허리에 띠를 맵니다. 그리고 종들을 앉힌 뒤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오늘의 복음 대목에서는 두 차례나 종의 행복을 외칩니다(루카 12,37.38 참조). 그런데 그 행간에는 주인의 행복이 들어 있지요. 얼마나 행복하면 주인이 자청해 종처럼 되어, 종의 종이 되어 종을 섬기겠습니까! 이 역할의 전복, 신분의 전복은 누가 억지로 시켜서 될 일이 아닙니다. 주인 스스로 기쁘고 행복에 겨워 자기 자리, 자기 신분을 잊고(초월하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유명한 죄와 은총의 역설을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로마 5,12).

성경은 원조의 불순종으로 인류의 죄가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죄로 '생명의 나무로 이르는 길은 불 칼로 차단되고'(창세 3,24 참조) 인간은 죽음을 운명으로 떠안게 되었지요. 하지만 인류의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로마 5,18).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죄 없는 어린양의 순결한 피는 원조가 초래한 슬픈 결말을 뒤집습니다. 하느님께서 종이 되고 사형수가 되셔서 이루신 봉헌으로 인류는 구원의 보증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천 년 전에 이루어진 고귀한 희생 제사의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일상 안에,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 선과 진리를 가장하고 교묘히 스며들어와 있는 죄와 악과 어둠의 실체에게 우리는 번번이 무너집니다. 그리고는 실망하고 좌절하고 용기를 잃어버리지요.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이 구원의 보증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비록 영육의 충돌과 모순이 우리를 끌어내릴지라도 예수님의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는 이 모두를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완성될 하느님 나라, 흠도 티도 주름도 없이 완성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로 거듭나기까지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을 쏟아주십니다. 그분은 단죄와 심판이 아니라, 억압과 박탈이 아니라 은총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분이십니다. "당신 구원을 열망"(화답송)한다면 그분은 결코 얼굴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행복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종이 로봇이 아닌 이상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겠지요. 평소 주인이 종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인이 잔치에서 돌아온 이 순간, 주인은 종이 자신을 깨어 기다려 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감동 받고 감격해서 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내려갑니다. 최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저는 거기에 감히 한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인은 더 행복하다"라고요.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믿고, 날마다 회개하면서, 그 생명과 행복과 기쁨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제는 강론을 할 때마다 지옥과 연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강조하면서, 그 무서운 곳에 안 가려면 회개하라고, 마치 협박을 하듯이 강론을 합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는가?

벌을 받는 것이 무서워서 회개하면, 그 회개는 과연 진정한 회개일까?

그런 경우에는 고해성사를 보아도 기쁨이 없고, 귀찮은 숙제를 마쳤다는 정도의 안도감을 느끼는 것으로 그칠 것입니다.

또 그런 경우에는 기쁨 없이, 의무감으로만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일마다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낀다면, 그래서 주일을 지키는 일에서 아무런 기쁨과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주일은 괴로운 날로 변질될 것이고, 그러면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주신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날이 되어야 하고,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누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일미사 때마다 무시무시한 심판과 지옥 벌로 협박하는 것 같은 강론을 들어야 한다면, 주일미사도, 주일을 지키는 일도 모두 고통스러운 강제노동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만일에 ‘복음’에서 ‘기쁨’을 빼버리면, 복음은 들으나마나 한 소식, 즉 들을 가치가 없는 소식이 됩니다.

어떤 성직자도, 어떤 수도자도, ‘기쁜 소식’에서 ‘기쁨’을 빼고 ‘무서운 소식’으로 바꿀 권한은 없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 경우에, 성당에서 항상 혼나기만 하고, 그래서 성당에 가는 것을 싫어하면 집에서 부모가 혼내고...

가도 혼나고, 안 가도 혼나고... 그 어린이 입장에서는 성당은 무서운 곳이 되고, 예수님은 무서운 분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영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이 ‘기쁨의 생활’이 아니라 ‘괴로운 생활’이 된다면, 그것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일차 책임이 있습니다.(어떻든 죄를 안 짓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신앙생활은 아주 많이 부족한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기뻐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왜 하는지, 그 목적부터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옥과 연옥에 가는 것을 피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이 말씀은 당신의 ‘재림의 날’은 결코 ‘무서운 날’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날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는 것은 즉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항상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시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신앙인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지금 우리 곁에 안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림’은 떠나셨던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현존해 계셨던 주님께서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차원의 존재로 변화되어서 주님과 함께 지내게 되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과 “그 종들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원래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또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인데, 글자 그대로 ‘지금’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은 기다리는 동안에도 행복하고, 만나면 더욱 행복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행복한 생활입니다.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다음에야 비로소 행복하게 된다고 믿고, 희망하기만 하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행복한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고, 행복하니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을 보는 ‘주님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는 ‘신앙인들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기쁨’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 기쁨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 누리고 있는 기쁨이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종말, 재림, 최후의 심판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모르니까 무서워합니다.

각 개인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잘 모르니까 무서워하고, 그 뒤의 일도 모르니까 무서워합니다.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이 ‘무서움’을 ‘믿음’과 ‘사랑’으로 극복해야 하고,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혹시라도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회개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억지로 기뻐할 수 있는가?”

자신에게 부족한 믿음과 회개와 사랑이 완전해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이 찾아옵니다.

 

 

 

'준비된 사람'(루카 12장 35~3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어린시절 ~ 집에 혼자 있게 되었을때 나 혼자 있다는것이 좋아서 탄성을 지르며 기분 좋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언제 오나 문 밖을 내다 보고 또 내다 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시간을 보내는것이 아까워 무엇을 할까? 하다가 엄마가 돌아왔을때 집안이 깨끗하면 기쁘실거라는 생각으로 청소를 했지요.

집에 오신다는 확신이 있기에 그때가 언제든 나는 내 할 것을 하며 기다림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때를 맞추는 것은 마치 도박과 같아서 요행을 바라다 큰 코 다칠 수 있고 나 몰라라 방치하다 후회할 수도 있죠.

엉망으로 지내다가 예수님 오실때를 놓칠 수 있으니 일상을 잘 관리하고 정돈하며 살다보면 굳이 때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한번에 힘쓰거나 당황할 필요없이 '오셨어요?' 하고 맞아들이면 됩니다.

'준비된 사람은 태연합니다'

 

 

 

<기다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이 내게 줄 기쁨 때문에

부질없는 희망에 애태우며

굳어버린 몸과 마음으로

당신을 기다리진 않겠습니다

 

힘겨웠던 값진 여정 끝에

나를 다시 찾은 당신에게

따스한 쉼과 작은 기쁨 되고자

설렘으로 당신을 맞겠습니다

 

오랜 기다림 후에

당신과의 가슴 아린 만남이

나의 기쁨이기보다

당신의 기쁨일 수 있다면

그만큼 나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행복이다.<루카, 12/35-3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시간이 가야 기다리는 일이 닥아 온다. 출산을 기다린다. 졸업날을 기다린다. 결혼날을 기다린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이 나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기다림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오늘 복음에 주인이 오기를 깨어 기다리는 종은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아 기다리는 삶이란 바로 희망의 삶입니다. 주인과 종의 비유로 종속의 의미 보다 기다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깊이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빛 속에 눈을 뜨고 사는 삶입니다. 무엇을 의식하며 깨닫고 사는 사람 그 깨달음에서 행복이 옵니다.

모르든 것을 알기위해 밤낮으로 연구하거나 배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깊이 있고 진실 되게 믿음을 가져도 믿음의 깊이와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여야 행복한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겨으름없이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준비해야 할 것을 준비하고

필요 할 때 필요가 되어주고 준비란? 힘 능력 즉 무엇인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태한 삶은 그자체가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에도 순응하고 적응하고 성숙해 질 수있다면 행복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희망에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련이 닥쳐도 십자가의 고통을 극복하시고 새로운 삶을 보여주신 것 같이 죽음 뒤에 참 생명이 있듯이 어떤 절망 중에도 넘어지지 않고 서 있으려면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기도의 영적지도 신부님이 나이도 많고 신학생 때부터 몸이 약하신 분이였는데 90이 가깝도록 살아계시며 “저는 희망기도를 하는한 죽음이 없습니다.” 하시며 병중에도 모임에 참석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같이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떤 분이 카톡에 빙계점이란? 글을 보내주시어 어제 상담자와 이야기 중 큰 도음을 받아 잘 이용하였는데 100도에 끊은 물은 99에 1도더 모자라라면 물이 끊지 않은 것 처럼 우리는 보통 상식에서 초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만 고집하고 상식을 뛰어 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알지 못합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은 상식이지만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는 것은 상식을 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 얻어 행복하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식을 넘어 물질적 가치를 넘어 영적가치를 따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희망 하고 사랑하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눈앞에 일만 보지 말고 저 멀이 피안의 세계를 볼수 있는 눈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 들입니다. 모두 깨어 기다리며 행복 하세요.

 

 

 

한 사람이 중요하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를 통해서 볼 때 한 사람이 무척 중요합니다.

나 한 사람쯤이야! 라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사람과 그런 사람들로 인해 세상에 죄가 퍼지고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 나 하나라도 똑바로 살겠다는 사람과 그런 사람들로 인해 죄의 파급이 멈추게 됩니다.

 

오늘 독서는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얘기로 시작됩니다.

아담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그렇다면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리고 카인도 죄를 짓지 않았다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그 둘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자손 중에 그 누가 죄를 지어 세상에 죄는 들어왔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오늘 독서에서 얘기하는 그 한 사람이란 꼭 아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너나 나이고 너와 나의 죄는 한 사람의 죄로 그치지 않고 세상에 퍼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현상이 있습니다.

건널목에 신호등이 있고 빨간불이 켜져 있습니다.

모두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사람이 그냥 건너버리자 마치 둑이 터진 듯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법규를 위반하고 길을 건넙니다.

 

우리 안에 법을 어기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다들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이런 자유를 주신 겁니까?

자유를 자기 마음 대로 하는 것에 쓰는 것이 인간인데 왜?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욕심과 비교할 때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유를 주는 것이고 사랑이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자유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있기에 사랑하면서도 욕심만큼 내 욕심대로 되거나 해 주기를 상대에게 바라고 애착을 하고 얽어매려고 하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전혀 없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자유를 주시면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완전한 자유로 우리가 당신을 선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유의지로 당신을 배반하고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그 자유의지로 당신을 선택하고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죄를 선택할 수도 있는, 이 위험한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자유를 수성守城해야 합니다.

자기를 포기한 사람은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고 인생을 막 살아버리는데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자유를 소중히 여겨 한찮은 것에 개떡같이 쓰지 말고 소중히 써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은 거잖아요?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다시 말해서 이웃 사랑 때문에도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가장이 무너지면 한 가정이 무너지듯 내가 무너지면 나를 밑돌 삼아 서 있던 사람들까지 허물어질 것이고, 내가 버티고 있으면 나를 바탕 삼고 디딤돌 삼아 사랑의 탑/건물이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듭 얘기하지만 나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고 생각지 말 것이고, 나 하나로 뭘 할 수 있겠어? 라고도 생각지 말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11,21-12,22: CSEL 44,63-64)

기도할 때 말이 필요한 것은 그 말로써 우리 자신을 자극시키고 우리가 청하는 것의 내용을 인식하기 위함이지 주님에게 무엇을 알려 드리거나 주님을 우리 의지에 굴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할 때, 하느님의 이름은 항상 거룩하지만, 사람들도 그러한 것으로 여길 것을 즉 멸시치 말기를 욕구하도록 우리 자신을 자극시키는데, 이것은 하느님께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임하소서.” 할 때 그 나라가 우리에게와 우리가 거기에서 다스릴 수 있기를 청하면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곧 다가올 그 나라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할 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도 그 뜻을 이루게 하는 참된 순종을 그분께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할 때, “오늘”이라는 말로 이 현세를 뜻하고 “양식”이라는 말로 사람이 살아 나가는 데 있어 근본적인 것만을 표현하지만, 삶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청할 뿐만 아니라 현세의 행복이 아닌 영원의 행복을 얻기 위하여 믿는 이들이 현세에서 필요한 성사를 청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할 때, 우리가 청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할 때,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어 속아서 유혹에 응해 버리거나 고통을 받아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라고 우리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입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할 때, 우리가 아직도 온갖 악을 배제하는 그 완전한 선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우리 자신에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이 마지막 청원은 매우 광범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자는 자기가 당하는 어떤 고통에서도 다른 기도의 형식을 찾을 필요 없이 그 청원만으로 자신의 애통을 드러내고 눈물을 쏟으며 그것으로 기도를 시작해야 하고 그것으로 계속해야 하며 그것으로 기도를 끝마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기도문에 나오는 말들로써 그들이 뜻하는 실재 자체들을 우리 기억에다 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기도할 때 마음의 열정에서 나오는 다른 말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들은 열정에서 흘러나올 때 그 열정을 명료화하고, 열정을 뒤따를 때 그것을 증대시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를 정상적으로 또한 뜻을 파악하여 바친다면 그 열정에서 나오는 말들 가운데는 주님의 기도에 이미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누가 만일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과 무관한 것을 청한다면 그것은 비합법적인 기도라 할 수는 없다 해도 육적인 기도라 하겠습니다. 사실 비합법적인 기도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은 항상 영에 따라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어릴 때 숙제를 못 했다고 해서 죽을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과제라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지 못했을 때는 괜실히 마치 양심의 가책이라도 되는 듯이 우리 가슴을 졸이게 하고 부끄럽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7-38)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혹시 할 일이 생기면 그 즉시 처리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무리 한다고 해도 모든 것이 저 혼자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들이 아니어서 어떤 것은 마음 한구석에 짐처럼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늘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깨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제 미진한 부분을 은총으로 채워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세례성사로 혼인잔치는 시작 되고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은 우리의 혼인 잔치 주인공이시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있다. 혼인잔치는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 마련 된 것임을 말이다. 그런데 축복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혼인잔치의 본뜻을 모르거나, 알고 있어도 이를 망각한다. 현대 사회의 혼인잔치로 하느님의 본뜻을 헤아릴 겨를도 없이 살아가며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축복 받기를 바라고 있다.

 

“혼인잔치를 벌려주신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른다. 깨어 있어라.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 ‘깨어 있어라!’ 주인께서 오실 때 깨어 있는 종은 행복하다. 그들은 주인이 오셨을 때 곧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시중 들 것이다.”

 

혼인잔치에 깨어 있음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 앞에서의 서약을 발했던 것처럼 살아가며 그 서약에 충실한 것이다. 그 서약에 충실했는지? 첫번째로 드러나는 일이 혼인에서 드러난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혼인을 준비해야 하는데, 오르지 인간계획에 의해 준비된 혼인이 너무나 많다. 여기서 축복의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는 일이 벌어진다. 그 일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된 첫 자리가 된다.

 

서약에 충실했는지 두번째 알아보는 기회가 찾아 온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이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하느님 계획에 따른 삶이 무엇인가를 직접 부딪치고는 어찌해야할지 우왕좌왕 한다. 부끄럽기도 하고 잘못낀 단추를 다시 풀어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보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자식이 부모가 펼친 혼인잔치의 결말도 그렇게 쓸쓸히 보내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후회를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세례성사에서 하느님께 발한 서약으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혼인잔치에 초대받고 있다. 살아가며 단계적으로 성사가 진행되며 혼인잔치는 펼쳐진다. 평소에도 끊임없이 서약에 깨어 있어야, 일생을 깨어 있는 것이 되고, 결정적일 때 하느님을 떳떳이 맞이할 수 있다. 진정한 혼인잔치의 완성은 끊임없이 여러 기회로 나에게 찾아 온다. 언제나 허느님의 충실한 종으로 살며 결정적으로 행복했으면 한다. 승자는 언제나 행복한 것이다.

 

 

 

내 몸이 나의 스승이다.

      최민석 신부님

시민들의 촛불 혁명으로 시작된 정부여서 그런지 왠지 촛불이 친근하다. 촛불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옮겨 수많은 촛불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되면 가슴이 뛴다. 작은 촛불들이 모이고 모여 어둠의 세상을 밝히는 기쁨이다. 깨어있는 시민의 촛불이 어둠의 세력들의 정체를 하나 둘 밝혀내는 환희가 아닌가 싶다.

 

벌들이 꽃에 앉아 꿀을 따간다고 그 꽃이 시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의 미소를 너의 입술에 옮겨준다고 나의 기쁨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빛은 나누어줄수록 더 밝아지고 꽃은 꿀을 내줄수록 결실을 맺어가고 미소는 번질수록 더 아름답다.

 

생명의 빛과 미소가 하늘 꽃이 되어 온다. 하늘이 따뜻하게 사랑의 기운 불어넣으면 나무에서 꽃이 피고 알에서 새들 깨어나듯 엄마 아빠를 닮은 귀여운 아가들이 태어나고 자란다. 나무는 굵어지고 숲은 넓어져 가지마다 새들 깃들여 온갖 소리로 노래하고 아가들은 예쁘고 슬기롭게 자라나 과학자가 되고 음악가가 되고 시인이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고요한 시간 생명의 숨결을 듣는다. 들숨 날숨 코 끝 바람 소리에 마음을 모은다. 다시 가슴 심장 소리 잘 들리지 않지만 귀를 기울여 본다. 어찌나 숨어서 소리 없이 일하는지 귀 기울이지 않으면 느껴지지도 않지만 그래도 애써 가만 들어 보면 두근두근 둥 둥 둥 소리가 난다.

 

내가 살아서 심장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심장이 살아서 내가 산다. 내가 죽어서 심장이 죽는 게 아니라 내 심장이 죽어야 내가 죽는다. 그러니 내게 있어 심장이 몸 보다 먼저다. 내 몸이 내 심장의 부분인가 보다. 심장의 소리를 내가 듣는다.

 

이렇게 은밀히 숨어서 만물이 잠든 고요한 밤에도 쉼 없이 처음 받은 한 가지 명령만 외곬으로 따르는 심장이 내 몸 속에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저렇게 숨어서 소리도 없이 빛도 없이 이름도 명예도 없이 일편단심 저 맡은 일만한다. 참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내 심장은 내 몸의 부분이면서 전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가 12, 35-38)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라면 내 몸은 죄를 모른다. 내 몸은 시종일관 완벽하게 하느님의 명령 또는 법을 지키고 있다. 내 심장을 비롯한 몸이 하느님의 법도를 따르는 그만큼만이라도 하늘의 뜻에 순명하며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충실한 신앙생활이 없을 것이다.

 

몸이야말로 우리에게 하느님을 믿고 그 법도를 좇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나의 위대한 스승이다. 나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내 몸의 한 지체가 다른 지체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의 현존은 살아 있는 신비 자체요 경이로움과 놀람이다. 눈에 보이는 몸 소화기 내장에는 없는 게 여럿 있다. 지난 일 년 전 위암과 대장암 절제수술로 위도 없고 대장도 없다. 거기다가 콩팥도 하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들을 대신하여 소장뿐만 아니라 온 몸이 협력하여 지금 이렇게 살게 한다는 것이 기적 아닌가.

 

그 동안 소장이 말없이 소리 없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위장과 대장의 짐을 대신 져 준 것이다. 불편함이 없지 않지만 현존의 충만함으로 감사한다. 진심으로 소장과 다른 내장 그리고 온몸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이렇게 말이나 관념 따위가 아니라 몸으로 하느님의 길을 좇아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스승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내 몸은 내가 아니다. 그러나 내 몸 바깥 어디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보다 먼저 있는 나, 내 부모보다 먼저 있는 나, 나보다 나중에 있는 나, 내 자손보다 나중에 있는 나, 마침내 마음의 등불을 켜 놓고 깨어 현존하는 나를 만나 하나 되지 못한다면 시방 이렇게 먹고 입고 쓰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이 모두가 무슨 허깨비 놀음이란 말인가.

 

 

 

그리스도께 문들을 여십시오.

      윤정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1978년 10월 22일,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직을 시작하면서 오래도록 기억될 말을 온 세상에 전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께 문들을 여십시오.” 2005년 4월 2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인은 아래 노래의 찬가를 온몸으로 사셨습니다. “그리스도께 문들을 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에 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후렴) 구원을 바라는 이들을 위한 희망의 증언, 세상의 길 위에 사랑의 순례자/ 세상을 위해 파견된 젊은이들의 아버지, 아침을 여는 길, 희망의 생생한 표징/ 삶으로 선포한 믿음의 증언, 시련 속에서 굳건하고 강하게 형제들을 일으키신 분/ 모든 이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가정을 사랑의 표징이라 가르치신 분/ 평화의 운반자 정의의 전령傳令, 사람들 사이 자비의 전달자/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의 힘을 드러내시고, 언제나 형제들을 사랑의 길로 이끄신 분/ 주님 어머니의 전구를 통한 은총의 힘으로써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신 분/ 자비의 아버지, 우리 구원자 아드님, 사랑의 성령님, 삼위께 영원히 영광을. 아멘.”(‘요한 바오로 2세 찬가-그리스도께 문들을 여십시오’ 가사 전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 전구를 청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시길 바랍니다.

 

 

 

행복한 삶

      김기현 신부님

말기암 환자가 올린 영상을 몇 가지 보았습니다. 제가 병에 걸려서 관련 정보를 얻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분의 이야기여서 그런지 귀 기울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보면서 느껴지는 것 중의 하나가 암환자가 되면 스스로에게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여행도 가고, 평소 해 보고 싶었던 작은 일들도 시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의식 없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반성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쁜 일들이 있다면 아마 그런 생각은 일 뒤로 밀려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종종 그런 생각들이 밀려오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몇 가지 적어 보았는데 이런 겁니다. ‘글을 쓰고 나서 조금 말이 된다고 생각할 때, 혼자 조용한 숲길을 걸을 때, 플롯으로 쉽지만 아는 노래를 불고 있을 때, 심고 거두며 흙을 만지고 일할 때, 책을 읽고 무언가를 알아가는 느낌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읽을 때, 운동하면서 작은 근육들이 생기는 것을 볼 때, 낯선 곳에 갔을 때, 기도 안에서 위로를 받을 때...’ 등등이 생각났었습니다.

 

그리고 ‘잘 하고 있나...’ 라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어느 순간에는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해야 된다는 느낌의 것에 나도 모르게 사로 잡혀서 힘을 쓰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그래서 매일 해 오던 것들을 조정하고 다시 살아가곤 하는데요.

 

오늘 복음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복음은 저에게 ‘종’임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삶의 주인이 아니라 섬겨야 할 주인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 그 주인을 기다리는 마음과 삶의 모습도 잊지 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두 달 전에 조금 길게 피정을 했었습니다. 피정을 하면서 다시 마음이 주님을 향하고 나에게 진정한 안식과 쉼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고 평안함을 회복했던 적이 있는데요. 살다보면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때로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것처럼, 주인을 맞이하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내 일을 이루고 싶어하는 교만한 모습으로, 그리고 영원을 위한 선택과 삶이 아니라 사라질 것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조금 헤매였다면, 그리고 중요한 것을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면 다시 기본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애착을 버리고, 영혼구원을 위해 내 인생에서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을 찾고 일하는 것.’ 이 아마 그 기본을 생각하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행복은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중국 신부님, 수녀님, 식복사 분이랑

사제관에서 식사를 했다.

중국 신부님이 유머를 했는데 못 알아들었다.

중국 신부님이 “알아 들었어?”라고 해서

“못 알아 들었어요.” 했다.

그랬더니 신부님이 나보고 웃으시면서,

“예전 신부도 불리하면 못 알아 들었다고 했어~”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하신 말씀과 비슷하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이는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 사도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라고 하였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의와 연관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허리에 띠를 동이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들 영에 좋은 것을 함께 찾아야 한다. 가야 할 길을 끝까지 다 가지 않으면 “한평생 믿음으로 산 것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기”(바르나바의 편지 4,9) 때문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주님께서 어느 때 오시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치 않을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을 청하도록 하자.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과

우리의 사랑은

깨어 있음으로

풍요롭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깨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가지마다 가득

깨어 있는 빛깔로

불타는 단풍입니다.

 

우리 마음까지

물들입니다.

 

주님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이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시기에

모든 순간은 특별한

순간이 됩니다.

 

기다리는 주님 계셔

바라볼 주님이 계셔

우리는 행복합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는 삶이 실상

가장 큰 행복입니다.

 

주님의 힘으로

살아 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주님이 오시기에

견딜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거리는 깨어 있음의

거리입니다.

 

깨어 있음은

행복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법

믿는 법은

깨어 있음에서

비롯됩니다.

 

깨어 있음으로

주님의 것임을

알게됩니다.

 

단풍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깨어 있음의

오늘 되십시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