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1-2ㄱ.3-8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4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5 나는 말하였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8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11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만군의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시자,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아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가 이미 전한 복음을 상기시킨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라고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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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주님의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뵙고 자신의 부당함을 고백한다. 하느님께서 그를 정화시키시어 그의 입에 당신 말씀을 담아 주시자, 이사야는 그 부르심에 응답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도 자신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으로서 사도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복음 선포의 도구가 되게 하신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제2독서). 시몬 베드로는 고기잡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떠나 주시기를 청한다. 예수님의 권능 앞에서 자신의 죄스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제자로 부르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보잘것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되어 특별한 소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제1독서에서 자신을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묘사한 이사야는 ‘숯’의 정화로 새로워져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룩한 입술을 지니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과거에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의 처지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이제는 당당히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두려운 나머지 그분께 죄 많은 자신을 떠나 주십사 청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선택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사회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던 사람들, 별 볼 일 없던 사람들을 당신의 일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들을 통하여 드러날 놀라운 업적이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오늘 제2독서에서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사실 저에게도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사제가 되기에 한없이 부족한 저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면, 저의 사제 직무를 통하여 이루신 그분의 놀라우신 업적이 마치 제게서 비롯된 것인 양 착각했던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는 모든 구성원에게도 자주 찾아올 수 있는 유혹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늘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의 일을 하고 있으며 그 영광을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가?’(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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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세 명의 제자, 곧 시몬 베드로, 그리고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의 가장 중요한 때에 예수님과 함께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에 초대 교회에서도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 제자들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이면서 교회 공동체의 부르심과 소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군중을 가르치신 다음, 시몬에게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깊은 물은 언제고 위험합니다. 갑자기 풍랑이 일 수도 있고, 사고가 났을 때 멀쩡히 돌아올 수 있는 확률도 높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을 낚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복음을 선포하고자 위험을 무릅쓸 각오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아침나절에는 고기를 잡을 가능성이 없고 밤에 그물질을 해야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내리라 하셨고, 그 결과 배 두 척이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복음 선포를 비롯한 하느님의 일은, 사람이 쌓아 온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실제로 그 일을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은, 분열될 수 없는 교회의 특성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찢어져서 여러 개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본디 하나로서 다양성 안에서 언제나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개별적인 부르심이면서 하나의 공통된 응답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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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얻은 것 같아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첫 출근을 하던 아침을 기억하십니까? 그날 하루는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마음이 얼마만큼 남아 있습니까?
사제 서품 후 첫 미사 때, 새 사제들의 인사말 내용을 살펴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글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족한 저를 불러 주셔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감사 인사입니다. 진솔한 표현이기에 잔잔한 전율도 전해 오지만, 이런 인사를 들을 때마다, 저 마음만 잃지 않으면 충분하리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5년, 10년, 20년이 지났을 때에는, 과연 어떨까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정말로 깨달았습니다. 이사야는 가까이할 수도, 범접할 수도 없이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스러움을 느꼈고, 바오로 사도는 박해자였던 자신의 과오를 명백히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는 자신이 그분과 함께하기에 부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같이 능력 있는 사람이 일을 도와 드리고 있으니 하느님께서 나에게 고마워하셔야 한다거나 내가 도와준 사람들이 나에게 보답해야 한다고는 감히 생각하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자신들이 무엇인가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잘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시거나 가까이하지 않으시고 칠삭둥이라고 자처하는 겸손한 이들을 찾으시는 모양입니다.
오늘날 복음 선포자에게 가장 절실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베드로 사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의탁하는 겸손한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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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지쳐 있었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질’도 없는 낚시는 얼마나 ‘긴 인내’를 요구하는지요? 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멍하니 새벽을 맞이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운명을 바꿀 선택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머뭇거리고 망설였을 것입니다. 밤새 허탕을 쳤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다시’ 그물을 내립니다. 결과는 배 두 척으로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의 고기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선택되었습니다. 지친 어부에서 예수님의 으뜸 제자로 바뀐 것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선택하셨기에’ 베드로는 바뀔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운명은 전적으로 주님께 달렸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계절이 바뀌듯 사람도 바뀝니다. 나무가 성장하듯 사람도 성장합니다. 성숙한 모습으로 바뀌려면 어떤 형태로든 ‘부르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따라야 합니다. 고난과 저항이 있더라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에게는 부질없는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밤새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물을 내렸습니다. 자신의 뜻을 고집했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님의 말씀에 자신의 뜻을 꺾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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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다른 종파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그분의 인품과 덕망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특별히 교회의 쇄신을 위한 성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의 수도 생활을 한 성인의 삶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관과 닮았다는 이유로 좋아합니다.
하루는 성인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성인은 “그 사람은 바로 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자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은 보통 사람들보다도 몇 곱절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 모습을 보십시오. 아직도 인간적인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제가 받은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면 그들은 모두 주님의 훌륭한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큰 은총을 받고도 현재의 이 비천한 모습밖에 보이지 못하는 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권능을 지켜본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더니 많은 물고기가 잡힌 기적의 은총을 체험한 베드로는, 자신이 그분 앞에 설 수 없는 비천한 죄인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진정한 죄인임을 고백한 사람만이 프란치스코 성인과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열심히 책 읽으면 큰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 말 듣고 몇 년 동안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도대체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전에 저 스스로 책을 읽으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내용의 강의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강의를 들었던 분의 하소연입니다. 그래서 “책을 얼마나 읽고 계시는데요?”라고 묻자, “1년에 50권 정도 읽습니다.”라고 답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2021년에 320권 정도의 책을 읽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 50권은 한참 부족한 양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분에게 50권은 너무나 많은 양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예 읽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히 변화가 있었겠지만, 더 큰 변화를 원하셨는지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저 역시 320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 저의 지식은 얼마나 보잘것없어 보이겠습니까? 종종 자신이 최고의 노력을 하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분을 만납니다. 자기 관점에서는 최고의 노력이겠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더 할 수는 없었을까요?
이런 식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외부에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의 주체는 외부가 아닌, 바로 ‘나’입니다.
사람들에게 더 많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기 위해서는 함께 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제자들을 뽑으셔야 했기에,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그 동업자를 부르십니다. 여기서 시몬 베드로는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전문 어부이기에 이미 깊은 데에서 그물을 내리지 않았었을까요? 더군다나 밤새 고기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순명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게 되었지요. 예수님을 통해 자기 자신을 깨닫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제2독서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해서 자격조차 없는 몸이었지만 사도가 되었다고 하면서, 자격 운운하는 것이 아닌 무조건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전합니다. 베드로도 죄 많은 사람임을 알고 있지만,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떠납니다.
자격 운운한다는 것, 능력과 재주가 없다는 것, 주변 상황에 대한 불평불만을 하는 것 등의 말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뜻에 맞게 사는 노력만이 제대로 응답하며 사는 것입니다.
커다란 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작은 것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얼마나 큰 것인지?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둘째 독서인 코린토 1서는 바오로 사도의 성공적인 회심, 개과천선과 인생 역전의 비결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회심 이후 그가 평생토록 잃지 않았던 초심과 항구한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는 틈만 나면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 미성숙과 흑역사를 아무런 가감없이 드러냈습니다. 그는 한두 번도 아니고 틈만 나면 만천하에 자신의 약점을 노출시켰습니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큰 은총과 자비를 잊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근본, 자신의 약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코린토 교회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솔직한 겸손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코린토 1서 15장 9절)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마냥 한때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배신에만 파묻혀 있지 않았습니다.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억눌려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부끄러웠던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생각하며 훌훌 털어버리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마음가짐이 또한 서한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겸손의 덕입니까? 그런 바오로 사도의 겸손의 덕은 그를 더욱 둘도 없는 주님의 제자요 탁월한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나게 만들었습니다.
생각으로는 쉽지만 삶 속에서 실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덕이 겸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겸손의 덕은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겸손의 덕을 지니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얼마나 큰 것인지?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알아야됩니다. 그다음 단계로 그에 비해 나란 존재는 얼마나 작고 미소한 존재인지를 파악해야겠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나는 지극히 상대적인 존재이며, 필연적이신 하느님 앞에 나는 우연적인 존재입니다.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나는 유한한 존재이며, 무죄하신 그분 앞에 나는 죄투성이인 존재입니다.
이 모든 상황들을 종합해보니 결국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최선의 태도는 겸손뿐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무상으로 초대받은 우리는, 크신 그분의 은총에 그저 감지덕지하면서 맨 끝자리라 할지라도 감사하면서 앉아야겠습니다.
주제넘게 자신을 끝도 없이 올려놓고, 하느님께 속하는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겸손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이며,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겸손의 덕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덕이니, 지상에서 부터 겸손의 덕을 갖추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겸손의 덕은 특별한 사람들만 갖춰야 하는 덕이 아니라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입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해도 될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부였던 첫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물고기가 많이 잡히게 만드는 기적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재물은 물론이요, 세속적인 인간관계까지 포함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재물에 대한 욕심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신앙체험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수도자들의 입회가 줄어든 지는 꽤 되었습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수도자가 되려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사제가 되는 성소자는 좀 있었지만 이마저도 급감하고 있습니다. 올해 수원교구의 신입생이 간신히 10명을 넘겼고 서울 대교구를 포함한 다른 교구에서는 없거나 10명 이하입니다. 신학교를 없애는 교구도 있습니다. 운영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제 성소, 수도자 성소가 줄어드는 이유는 단순히 젊은 사람이 부족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매력’을 잃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삶이 더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 저는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결혼한 분 중에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고 사제 중에도 자신이 결혼생활을 포기한 고통이 얼마나 큰 희생인지 알아주는 것 같지 않아서 이런 말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사제와 수도자, 부모들조차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결혼하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어떻게 자녀들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선 ‘행복’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행복은 크게 ‘존재적 행복’과 ‘소유적 행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존재적 행복이란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 품에 안기는 것이고, 소유적 행복이란 엄마가 주는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행복입니다. 둘 다 ‘생존’에 관계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존이 위협받을 때 느끼는 감정을 ‘불안’(不安)이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 불안을 해결하는 데 집중됩니다. 생존을 위해 소유를 늘려 불안을 해소하려 하고, 또 나의 생존을 책임져 줄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 행복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명예를 가졌더라도 자살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근본적으로 존재적 불안을 해소하지 않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먹을 것과 장난감을 충분히 주고 아이를 혼자 집에 둔다면 아이는 소유적 행복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도 어머니의 존재가 옆에서 있을 때 즐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 행복은 어린이처럼 나의 생존을 책임져 줄 자신의 창조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때 옵니다.
그런데 부모가 나의 생존을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있을까요? 부모도 죽습니다. 결국, 죽음은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이때 죽지 않으려고 더 가지려 하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창조자를 찾음이 옳을까요? 창조자를 찾으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더 이상 생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처럼 그 하느님께 양심적으로 나아갈 수 없는 죄를 짓고 산다면 어떨까요? 스스로 죽음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부모를 거부하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부모와 함께하고 싶으면 부모 뜻을 따르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태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할 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셔서 다 책임져주신다는 참 평화를 누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부들을 이 평화로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목숨을 바쳐 선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일수록 주님께 더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더 행복합니다.
문제는 그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소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진 재산도 포기해야 하고 심지어 결혼생활도 포기해야 합니다. 결혼생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더 큰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혼의 삶이 오히려 방해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일을 위해 결혼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괜한 고통을 겪으며 참 행복을 위해 에너지를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록도에 불교를 전하러 갔던 스님이 신도들의 믿음 때문에 오히려 성령을 받아서 개신교 선교사가 된 이민교 선교사가 있습니다. 본래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 상태로 성장하였습니다. 골수 원불교 가정에서 원불교 교무(교역자)가 되기로 예정된 코스를 밟아야 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습니다.
고3 때 죽음에 대해 체험을 하고 싶어서 소록도에서 봉사합니다. 소록도병원의 한 간호사가 성탄 행사에 간다면서 그에게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따라간 곳이 가톨릭 성당이었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중에 갑자기 환자들이 죽 일어서 뭘 하나 받아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도 한센병약이나 되는 줄 알고 얼떨결에 일어서 눈을 질끈 감고 성체를 받아먹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 그는 말합니다.
“그게 예수님의 살을 상징하는 성체였다니…. 저도 모르게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에 처음으로 참여한 셈입니다. 아마 저를 예수님께로 이끄시려는 하느님의 오묘한 물밑작업이 시작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는 한 가톨릭 신자의 초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게 하시기 위해 당신 생명을 우리 안에 넣어주신 체험이었습니다. 스님이 된 이후에도 그는 소록도에도 자주 갔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전교를 당했습니다.
“우리가 문둥이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어. 문둥이가 아니었다면 한평생 멋모르고 살다가 지옥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우리를 문둥이로 만들어주셔서 이제는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으니 살아도 천국에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어. 그러니 우리는 지금 행복해.”
불교 교리에 의하면 ‘전생에 당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 이생에 문둥이라는 과보를 받았다’라고 보는 게 맞는데, 그들이 자신을 더 불쌍히 여기는 것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인과응보가 아닌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문제로 혼란스러워할 때,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1988년 3월 2일 그날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틈만 나면 소록도로 가던 저는 그날도 소록도 법당에 있었습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법당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30분간 좌선을 한 다음 목탁을 치며 염불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염불이 되지 않고, 엉뚱한 말이 입안을 맴돌았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딱딱딱) 며칠 후 며칠 후... (딱딱따) 요단강 건너가…. (딱딱딱)’. 화들짝 놀랐습니다.
처음엔 ‘내가 멸치가 먹고 싶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만하려고 해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것은 장의사 아르바이트할 때 개신교인 장례식에서 들었던 찬송가 가사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염불을 해야 하는 법당에서 아무리 땡중이지만 입에서 찬송가를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그런데 혀가 멈추지를 않아요. 혀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하다가 뜻 모를 소리까지 외쳐댔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방언이 터졌던 것 같습니다. 굉장한 쇼크였습니다.”
그는 개종하여 목사가 되기로 합니다. 이때부터 영적인 시련과 부딪혀야 했습니다. 귀신이 차 뒷자리에 앉았다고 옆자리에 앉아서 큰 사고가 났습니다. 얼마 동안은 잠자는데 오줌을 싸거나 대변이 나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두려움을 끊어내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내도 생기고 어린 자녀도 둘이나 생겼습니다. 아내는 약사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를 우즈베키스탄이란 나라로 부르십니다. 이민교 선교사는 약국을 팔고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을 따라올 것을 아내에게 권고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혼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혼자 떠납니다.
나중에 아내는 마음을 바꾸어 약국을 정리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우즈베키스탄이란 나라로 남편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아내는 갑상선 질환으로, 첫째 아이는 급성 신우신염으로, 둘째 아이는 결핵으로 크게 고생합니다. 그리고 그쪽 동네 청년들은 “저녁 8시까지 옥상에 돈과 담배를 갖다 놓지 않으면 너희 애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농아 축구단 감독을 병행하며 선교를 하고, 많은 것이 정리되었지만 그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일단 하느님을 체험하고 알게 되었으니 너무나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죽음의 불안이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장애가 되는 것은 역시 가족들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려면 부모도, 아내도, 자녀들도 미워해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다음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물고기 잡는 게 행복하겠니, 사람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게 행복하겠니?”
물고기를 잡는 것은 소유의 행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면 존재의 행복을 누립니다. 하지만 그 존재적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결혼도 가족을 구원하고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등 엄청난 선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소유의 행복을 포기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이에 저는 참 행복을 위해서는 사제나 수도자가 되어 영혼 구원에 투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라 말합니다.
기분이 나빠도 어쩔 수 없습니다. 똑같이 행복한 것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길을 가고 있는 사람까지 그러면 누구도 이런 행복을 추구할 꿈도 꾸지 못하는 환경이 될 것입니다. 아주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주님 뜻을 따르는 수월함에 있어서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더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으로 이민 오는 분들은 저마다 이유와 목적이 다릅니다. 유학을 왔다가 미국생활이 좋아서 자리를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행을 왔다가 자리를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미국으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먼저 간 가족의 초청으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재원으로 왔다가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오기도 합니다. 미국에 오게 된 이유는 다양하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에서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분들은 성실하게 일을 합니다. 10년, 20년이 지나면 자리를 잡고 미국에서의 생활을 즐기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성실하지 않다면, 일확천금을 노리고 도박을 한다면, 법을 어긴다면 미국에 온 이유와 상관없이 어려움을 겪기 마련입니다.
성서에 보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늦은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말 주변이 없음에도 하느님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양치는 목동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리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였던 바오로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직업, 나이, 성격, 재능이 다르지만 모두 하느님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가 된 사람들,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된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였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다가와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은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서에 보면 거짓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내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다가오면 도망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거짓 예언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릇의 겉은 닦지만 안은 닦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아무 일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짐을 맡기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등불을 켜놓고 그것을 됫박으로 가리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하느님께 가지 않으면서 남도 하느님께 가지 못하게 막는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쫓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보낸 아들까지도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제가 되려는 신학생들의 이유와 목적도 저마다 다릅니다. 어려서 복사를 서고, 부모님의 권유를 받아서 사제가 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사제가 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나 보좌 신부님의 모습을 보고 사제가 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제가 되고자 하는 이유와 목적은 다양하지만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를 준비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지혜를 쌓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열정적으로 사목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합니다. 지식, 기도, 건강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신학교의 규정을 잘 지키고, 동료들과 인격적인 우정을 쌓아야 합니다. 신학교에 들어왔다고 모두가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사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신앙은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로또 복권 당첨이 아닙니다. 신앙은 원하는 것을 만들어 주는 요술 지팡이가 아닙니다. 신앙은 나의 짐을 남에게 떠넘기는 위선과 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방법으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최선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었든지, 삶의 지뢰밭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유혹의 달콤함은 가리지 않고 모든 신앙인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사야 예언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겸손’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교만함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따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주님을 따라 나섰다. 시간이 제법 지나던 어느날인가? 나의 주인께서 나에게 '깊은데로 가 보라' 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말씀을 들었고 막상 내가 그곳으로 가려고 할 때, 왜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나에게 깊은 곳으로 갈 재주도 능력도 없었지만 마음 한 쪽에서는 반복되는 알상에서 떠나야 한다는 명령이 내 마음이 있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나는 믿음만 가지고 깊은 곳으로 갔고 그곳에 그물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물을 끌어올려 봤다. 엄청난 고기를 끌어 올려졌음을 보았다. 나는 그 일로 값진 보화를 끌어 올릴 수 있었는데 가장 값진 수확은 나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라고 말씀하신 살아계신 하느님의 만남이 있었다.
그 다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부딪히며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예수님으로부터 배웠고 유용한 체험인 기다림과 함께함과 눈높이에 맞추어 산다는 것이 왜 필요한가를 엄청나게 배우며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자기의 능력 안에서 안주하고 싶어하고 무리수를 써서 강제하려 해서 급조하려고 걱정부터 앞세웠다. 그래서 늘상 그렇게 욕심부리며 자기 주장만 하다가 인생도 종국에는 무의미하게 끝을 내고 후회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라고 말씀하셨던 그 장면을 나는 늘 마음에 간직하고 살았던 것 같다. 두렵지만 주남께서 말씀하시니 나는 얕은 곳을 떠나 깊은 곳에서 그물질을 해 보았다. 시몬 베드로가 그물에 담긴 엄청난 고기를 보았던 것처럼 나도 예수님 말씀을 살았던 덕분에 값진 보화를 건져낼 수 있었다. 어제의 감무량 같은 행복을 마음에 간직하고 또 다시 평범한 일상을 넘어 깊은 곳으로 옮겨 나를 살게했고 또 보람을 살려고 노력하고 지낸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5,10-11)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첫 번째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말씀을 선포하시다가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고 말씀하셨고, 시몬은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너무 놀라서 예수님께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말씀드렸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시며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부 일에 있어서 베테랑인 자신이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다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렸고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간다는 것의 의미는 어쩌면 드넓은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자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경우 주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나아갔고, 수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주님과 함께,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가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랬을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듯이 주님 안에서 풍성한 결실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 나섰다고 전합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주님 안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제자들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역시도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온전히 다시 돌려드릴 수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은총을 주시고 나아가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5, 1-11(연중 5 주일)
연중 5주일 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변화,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 공동체 혹은 가정의 변화, 타인들의 변화와 자기 자신의 변화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는 ‘진정한 변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진정한 변화’란 단지 자신의 악습이나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는 자기 교정이나 자기 개선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질적인 변화, 곧 삶의 페러다임, 사고의 틀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가치관 등 인격의 변화를 말합니다.
흔히, 우리는 사람들이 회개하면 변화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변화의 힘은 회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만남에서 오며, 회개는 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체험, 곧 은총과 사랑의 체험의 수락이 변화와 회개를 불러오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가 그렇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그렇고, <복음>에서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을 체험했음을 전해줍니다. 곧 하느님과의 만남 체험이 회개를 불러왔음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을 체험한 후에 고백합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예수님과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1코린 15,9)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이처럼, 하느님 체험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이를 고백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곧 체험이 회개와 변화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니 회개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을 통해, 그 은총을 수락할 때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의 덕입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것입니다.”(1코린 15,10)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먼저 자신의 앎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카 5,5)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하는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 체험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앎을 버리는 바로 이 자리에서, 베드로는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죽음의 수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자신의 앎, 그것도 이미 경험을 통하여 얻은 앎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많은 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단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자신의 앎을 버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어떤 한 분 ‘선생님’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체험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진정한 변화’는 찾아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대상이 될 때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변화’는 자기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회개시키시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이 선물, 이 은총을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하느님과 우리의 합작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무능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동의하지 않을 때에는 무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아니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그 말씀의 성취를 통하여 우리가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주님!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소서.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이사 6,1-2ㄴ.3-8)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말해줍니다.
이사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남쪽 유다에서 예언자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기원전 740년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 2열왕 15장).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부적합함으로 이의를 제기하면, 하느님께서는 기각하시고 표징과 더불어 파견하시면서 말씀을 선포하도록 떠나게 하십니다(탈출 3장; 예레 1장; 에제 2-3장). 이사야 예언자도 이런 형식에 바탕을 둔 자신의 소명체험을 아무런 꾸밈없이 묘사합니다. 이사야는 자기를 예언자로 부르신 하느님을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계신 임금들의 임금으로 표현합니다. 이사야가 목격한 현시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섬기는 천상적 존재들(사랍들: 타오르는 불 같은 존재들)이 성전을 날아다니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환호하고, “거룩하시다!”를 세 번 외쳤다고 합니다. 만군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최고의 존엄과 초월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들은(뵌) 이사야는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하면서 이의제기를 합니다. 죄인이라면서 했던 이의제기가 기각되었다는 표징으로 천사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대고 죄의 용서(정화)를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라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는데, 예언자로서 받은 주님의 파견명령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더 이상 이의제기를 못하고 주님의 소리에 순명하면서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말한 뒤에 말씀을 전하러 떠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선택에 아무도 이의제기를 할 수 없으며, 이의제기를 한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펼치시기 위해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루카 5,1-11)은 시몬과 두 형제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즉시 따라나섭니다.
당신을 메시아로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4,14-30; 4,31-44) 즉시 제자들을 부르러 배가 두 척이 있는 호숫가로 가셨습니다. 군중이 몰려들어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어부들은 두 척의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손질하고: 마르 1,19) 있었습니다. 시몬의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뭍에서 배를 조금 떨어지게 노를 저으라고 하신 뒤 군중을 가르치셨습니다. 물에 반사되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언덕에서 잘 들을 수 있도록 음향학적으로 탁월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호숫가에 있던 두 척의 배들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심으로써 당신 스스로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으러 오신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군중을 그대로 놔두신 예수님께서는 시몬(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부르심)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시몬은 예수님을 “스승님”(διδάσκαλε)이 아니라 세속적인 의미로 “두목”(Ἐπιστάτα)이라고 부르면서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이의제기)고 합니다.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눈빛을 보았는지(이의기각), 이의를 제기했던 시몬은 즉시 “당신의 말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그물을 내리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동료들까지 와서 두 배에 잡은 고기를 가득 채웠다(표징)고 합니다. 이 표징을 본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들어 두 번째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두목”이라 불렀던 시몬은 기적(표징)을 본 뒤에 “주님”(κΰριε)으로 부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셨는데, 이것은 두 번째 이의기각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파견명령입니다. 물고기가 많이 잡힌 표징과 파견명령 때문에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척(유다인과 이방인)의 배에 오르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교회를, 밤새도록 자기들끼리 고기를 잡으려했던 것은 예수님이 없는 공동체를 말해줍니다.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자기들끼리 고기를 잡을 때에는 밤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앞서서인지 낮은 곳에만 그물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지시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이 잡혔다는 것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37; 18,27)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날로 확산되는 공동체를 위해 혼자 그물을 건지지 않고 다른 동료들을 불러 함께 일을 합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건져내면 즉시 죽지만 물(악)에 빠진 사람은 빨리 건져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의미는 바로 이렇게 영원한 생명의 길로, 사랑의 길로 이끌어주라는 것입니다.
제2독서(1코린 15,1-11)는 바오로의 소명체험이지만 조금은 가슴이 아픈 항변입니다.
코린토 공동체는 1년 반 동안 바오로 사도로부터 복음을 잘 전해 들었으면서도 바오로가 코린토를 떠난 뒤에 복음의 내용(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해 의심하면서 바오로가 전해준 복음이 진리이냐고 물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잘 알았지만 복음을 제대로 전해주지도 못하는 이(아폴로: 사도 18,24-28)는 물론 예루살렘 공동체의 어설픈 판단(추천서: 2코린 3장)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받은 은사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들 때문에(1코린 12장) 코린토 공동체가 심각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또한 바오로에게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외모도 못났고, 말주변도 없다면서 무시한 것 때문에 바오로는 마음고생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전해준 복음이 잘못된 것이거나, 헛되이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그리고 열두 사도들이 자기에게 직접 전해준 복음을 코린토 공동체에게 전해준 것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 불러주셨지만(갈라 1,15),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했던(이의제기) 자신에게도 부활하신 분이 나타나셔서(사도 9,1-22; 22,1-21: 이의기각) 직접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다고 합니다. 또한 성령께서,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라고 책임을 맡겨주었기 때문에 코린토에 하느님의 복음을 전해준 것이라고 합니다(1코린 1,17).
바오로는 비록 살아 계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은 아닐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도 나타나셨다고 목격증인으로서 말합니다. 특별히 복음에 나타나지 않는 갈릴래아에 있던 오백 명의 부활의 증인들에 대한 증언도 전해줍니다. 회개하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박해했다는 이유로 열두 제자들과 코린토 공동체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던 바오로는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의 충실한 증인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고,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음에도 성령과 교회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엄청난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가 된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로마 1,5).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고”(1코린 1,17) 복음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뻘겋게 달아오른 숯 덩어리 같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사야의 더러운 입술에 닿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언직을 거부하려는 이의제기가 기각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굴러들어온 패거리의 두목 정도로 알고 있던 시몬 역시 물고기가 많이 잡힌 표징을 본 뒤에는 꼼짝 못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자신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뵙고 박해자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돌아섰습니다. 모두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에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서, 교회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봉사자로서 겸손하고 열정적으로 살라고 부르십니다. 때로는 전혀 느끼지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기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한 이의제기에 대해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시는 표징도 볼 수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성체를 축성하기에 앞서 “거룩하시다”를 세 번씩 노래하는 것은 인간을 불살라버리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뜨거움으로, 강렬함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거룩하심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 외침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에게 운명을 말한다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순간부터 제아무리 도망치려 애쓴다 할지라도,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지 응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도망친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품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파견된 우리도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언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한 주간 동안 생각해봅시다.
<실패한 어부의 배 위에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실패한 어부의 배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네
하느님의 말씀은
일으킴의 말씀이니
쓰러진 터에서 울려 퍼지네
하느님의 말씀은
나아감의 말씀이니
주저앉은 터에서 울려 퍼지네
하느님의 말씀은
돋움의 말씀이니
무기력한 터에서 울려 퍼지네
하느님의 말씀은
이룸의 말씀이니
비워진 터에서 울려 퍼지네
하느님의 말씀은
살림의 말씀이니
죽은 터에서 울려 퍼지네
실패한 어부의 배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네
부르심과 선교사명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주제는 ‘부르심’과 ‘선교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당신 선성, 사랑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며, 부름을 받은 우리가 갖는 선교사명은 하느님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확산시키는 고귀한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 협력자로 부르신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파견 질문에 대해 두려워했던 이사야는 놀랍게도 태도를 바꾸어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찬 대답을 하고 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8절). 이 같은 용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간”(루카 5,11) 사도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복음: 루카 5,1-1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은 처음부터 당신의 “말씀”과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군중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2절) 보았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강둑에서 좀 떨어져서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3절).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4-6절) 하면서 말씀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적은 바로 “말씀”의 힘이다.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믿은 베드로에게서 일어났다. 만일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같이 복음은 선포되고 또한 철저하게 믿어지며 생활화되어야 하며, 또 그것을 듣는 사람에 의해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을 낚는 고기잡이가 풍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철저히 믿고 받아들인 복음이 지금까지의 생활을 변화케 한다. 이 같은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11절). 새로운 생활의 시작은 예수께서 보여주실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신하기 위해 과거에서 떠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베드로의 ‘우위성’이다. 우선 예수께서 군중들을 가르치기 위해 택한 것이 그의 배였다(3절). 그리고 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명한 것도 베드로에게 하셨다(4절).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장본인이 베드로이다(5절). 그리고 기적을 본 다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것도 베드로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에 앞서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것도 베드로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베드로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베드로의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시고 기적의 고기잡이를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베드로 없이는 선교사명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베드로가 교회 일치를 이루는데 장애물이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역할을 알지 못하는 소치이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듯이 다른 또 하나의 배는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의 도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배가 다 ‘가라앉을 정도가’(7절) 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풍성한 고기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베드로의 배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복음을 충실히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전했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했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믿고 받아들인 것을 말하고 있다.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1코린 15,11).
하느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부당한 존재로 느끼지만,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용기를 가지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이제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려는 순명의 자세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그분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것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을 낚으라는 더 어려운 부탁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깊은 데에 그물내려 매우 많은 고기 두 배에 가득차 베드로는 놀랐죠.
베드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도 트신 분 앞에 무릎꿇고 말았고.
그러나 사람을 낚으라는 더 어려운 부탁에 모든 걸 버리고 따랐군요.
고기낚아 생선장수 칭찬 듣고 사람낚아 하느님 칭찬 듣고 영복누리죠.
몸을 먹이기보다 영을 먹이는 하늘양식 영원보물이 훨씬 낫다는 거죠.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양식 먹으라 교회 통해 계속 하십니다.
영혼건강위한 하늘양식보다 육신전반에 몰두해 사는 사람들 투성이죠.
사람 육체는 세상먹이 맞고요 영혼은 하늘사랑 먹어야 영원행복 얻죠.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되는데 베드로 뿐 아니라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동생과 시몬의 동업자인 요한과 야고보 등 총 네 명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들이 묵상해야 할 것은 베드로입니다. 즉 그가 완전한 제자가 되는 과정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먼저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은 대상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종교에서는 이유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분이기에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 개인적인 생각과 판단은 필요 없고 또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군중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을 볼 때 이전부터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을 가르쳤고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다는 것을 듣고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이러한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배 두 척을 보시고 그 중에 시몬에게 다가와 그의 배를 타고 다시 그 배에 앉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시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이러한 말씀에 시몬은 그대로 하지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지요. 이러한 모든 것을 본 시몬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시몬은 오늘 예수님을 처음 본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른 지역에서도 들었으며 그래서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시몬의 본 직업은 아시겠지만 고기 잡는 어부 입니다. 그리고 전날 밤부터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직업이 어부인 그가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으니 기분이 어떠했을지 알 수 있겠지요. 그러한 와중에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니 속상한 마음을 표현할 수 없고 전날 상황을 말하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니 슬픔과 우울에서 기쁨으로 바뀌게 되는 순간을 격에 됩니다. 결과는 완전 대박이 났습니다.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았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맡겼던 것이 초대박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시몬이 전문가로써 예수님의 말씀에 신뢰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대로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신뢰를 하였고 말씀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향한 호칭이 선생님에서 주님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는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세속적인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그의 마음 중 반은 예수님에게 반은 세속에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까지 컨트럴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진정으로 이제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날 밤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도 시몬을 성장시키기 위한 예수님의 계획이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믿음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하니 기쁨을 얻은 것처럼 또한 예수님께 맡기니 우울과 괴로움에서 기쁨으로 바뀌는 체험을 한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말씀대로 산다면 그리고 그 분을 향한 신뢰를 갖고 힘든 우리들의 삶을 그분에게 맡긴다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여러분! 양다리 신앙은 절대 안 됩니다.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루카 복음의 순서를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가르치시고
선포하시며 기적을 베푸시며
먼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의 체험의 장을 여시고
첫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고기잡이를 평생의 업으로 삶았던 시몬도 빈 그물일때가 있었나 봅니다.
예수님은 분명 고기잡이에 있어서는 비 전문가였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일 앞에
그는 자신의 두려움과 더불어 죄를 고백합니다.
이미 소문으로 알고 있던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그 역시 체험합니다.
놀라운 기적 앞에 자신의 모습을 반추해 보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던 시몬의 믿음과 고백에 머물러 봅니다.
당신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 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Do not be afraid
사람 낚는 미끼
이재웅 다미아노 신부님
낚시에 빠져든 것은 피라미를 잡던 어릴 때부터였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던져놓고는 파리채부터 들었어요. 잽싸게 미끼로 쓸 파리를 잡아서 개울로 내달리던 시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요. 그렇게 시작한 낚시, 참 많이도 친구들과 낚시를 했고 낚시를 하면서 친구가 되었어요.
낚시인이자 심리학자인 폴 퀸네트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낚시를 해야 할 때가 온다.’고 했는데 저는 그 말을 이렇게 이해해요.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걸고 하느님 앞에 서는 날이 온다.’
자기를 죽이려고 형 에사우가 달려오는 길목에서 야곱은 하느님을 붙들고 늘어졌어요. 그 밤은 성경만이 아니라 인생에서도 존재해요. 너무나 절박했던 그 날, 도와달라고가 아니라 살려달라고 해야 기도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 이후 제 삶에 개입하시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맺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났고 그분께 사로잡히곤 했어요. 베드로는 뭍에서보다 물에서 오래 지낸 ‘진짜 어부’에요. 하루는 처음 보는 젊은 예언자가 자기 배 위에서 군중을 가르치셨어요. 말씀을 마치신 그분은 대뜸 베드로에게 깊은 데에 그물을 치라고 하셨어요. 하필이면 밤새도록 물고기를 못 잡은 곳인데다가 그분에게서는 물 냄새가 나지 않았어요. 영 못미더웠지만 노를 저어 가 그물을 내렸어요. 하지만 들어 올린 그물은 많은 물고기들로 찢어질 정도였어요. 이 일로 베드로는 예수님께 완전히 낚였는데 물고기가 엄청나게 잡혀서만이 아닐 거예요. 베드로 정도의 어부라면 예수님께서 물 속 상황을 안 것이 아니라 물속 상황을 바꾸셨음을 짐작했을 테니까요. 주님께서는 그렇게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이끄셨어요.
만일 충주호에서 낚시하는 저에게 주님께서 사람을 낚으라고 부르시면 이런 핑계를 대며 긁적일 듯해요. ‘저는 물고기도 잘 못 잡는걸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요즘은 사람이 사람을 낚으면 신고해요.’ 그래도 주님께서 껄껄대며 저를 미끼로라도 쓰고자 하신다면… 뭐, 그때는 어쩔 수 없지 않나 싶어요.
만일 충주호에서 낚시하는 저에게 주님께서 사람을 낚으라고 부르시면 이런 핑계를 대며 긁적일 듯해요. ‘저는 물고기도 잘 못 잡는걸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요즘은 사람이 사람을 낚으면 신고해요.’ 그래도 주님께서 껄껄대며 저를 미끼로라도 쓰고자 하신다면… 뭐, 그때는 어쩔 수 없지 않나 싶어요.
성경의 자구적(字句的)의미와 영성적 의미
이승환 루카 신부님
오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신흥 종교가 생겨나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성경 본문의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아전인수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잘못된 종말론을 퍼뜨리며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요즘도 ‘신천지 교회’라는 신흥 종교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신천지 교회는 그들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런 신흥 종교들은 자기들 주장의 근거로 성경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신흥 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은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성경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왜 이들은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엉뚱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많은 신흥 종교와 신앙의 오류는 ‘잘못된 성경 해석’에서 기인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성경 안에서 자기 맘에 드는 구절만을 골라서 그것을 자구적(字句的)으로만 해석해 교묘한 방법으로 신앙인들에게 접근합니다. 많은 사람이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문자 주의, 근본주의적 성경 해석을 지양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성경 말씀은 자구적 의미와 영성적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5-118항 참조).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간 사건(탈출 14,22)은 단순히 성경 안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해방을 의미하는 물의 의미는 우리가 받는 세례를 상징합니다(1코린 10,2 참조).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레위기 17장 12절에 “너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라는 하느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녹용(사슴피)도 먹고, 선지해장국도 맛있게 먹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절대로 그런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레위기 17장 12절의 자구적 의미는 피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절의 영성적 의미는 ‘생명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피가 상징하는 '생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 말씀의 겉만 보고, 그 말씀 안에 담겨있는 영성적인 의미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성경 본문의 메시지와 정반대의 해석을 할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제시하는 성경 해석의 방향은, 무엇보다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깨닫고, 신자들 스스로 일상에서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은 신앙적 삶을 통해 구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 그 자체인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양식이자 신앙의 최고 규범이기에 자주 읽고 묵상하며 성경 말씀에 담겨져 있는 참된 보화를 발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느님 앞에서의 정직함과 겸손함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영성생활도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낄 때일수록 가장 기본적인 하느님과 나의 관계와 그에 임하는 나의 의식에 대해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과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의식은 매우 중요한 까닭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파견 소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6,5)고 말하며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임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목격하고 정화된 그는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아들입니다.
율법과 전통에 능통하였고 학식에 뛰어났던 바오로 사도는 확고한 믿음을 지녔을 뿐 아니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많은 서간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죄인들 가운데서 첫째가는 죄인’(1티모 1,15), ‘사랑의 빚쟁이’(로마 8,12), ‘칠삭둥이’(1코린 15,8),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15,9)이라 부릅니다. 앞장서서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던 잘못을 인정한 때문입니다.
평범한 어부 출신이요 성격이 급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분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는 부당한 사람임을 솔직히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 죄스런 모습과 상처를 감추고 싶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보잘것없는 사람이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 가운데 가장 작은 종”(2보호자 1)이라 하였지요.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길 바란다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정직함과 겸손을 지녀야 합니다. 엄청난 선교 업적을 이루고도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라고 고백했던 바오로 사도처럼 솔직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나의 장점과 좋은 점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 ‘보잘것없는 나’를 사랑하시고, 그런 나를 도구삼아 당신의 사랑과 선을 전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외없이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보잘것없음을, 죄인임을 고백함으로써 정화되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주시는 주님을 믿고, 위선과 교만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기우 신부님
1. 말씀의 주제와 흐름
오늘 연중 제5주일에 들려오는 말씀의 주제는 선교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부르시어 파견하시고, 파견된 그 선교사의 활동을 신적 권능으로 도와주시며, 새 선교사가 필요할 때마다 발현하신다는 말씀의 흐름이 이어집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 예언서는 이사야가 예언자로서 소명을 받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복음에서는 어부들을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풍어기적으로 당신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신 후 그들을 제자로 삼으신 소명기사를 들었으며, 제2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박해자였던 시절에 예수님께서 발현하시어 선교사로서 소명을 받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 우리 믿음의 바탕
우리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새 역사를 창조하고 계심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살든지 또는 우리가 어디에서 일하든지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새 창조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실상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는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양심과 이를 진리의 빛으로 밝혀주는 신앙으로 세워집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소명입니다.
3.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다
남유다 왕국이 아직 멸망당하기 직전 시대에 유다의 귀족 출신으로 사제였던 이사야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 나라에는 신앙이 흔들려서 불공정과 불의가 넘쳤습니다(이사 1,21). 그러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따라서 자신들의 노력으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로 개혁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집트에 빌붙어서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등 외세에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나 아시리아의 군대보다 더 강하신 ‘만군의 주님’(1,24)이시니, 하느님을 믿고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벗어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주님께서 그를 부르시어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시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4. 선교의 성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과연 어떠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오늘 복음이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부르시려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밤새 허탕을 친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하고 이르시자, 처음에는 망설이던 그들이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배 두 척이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어부 네 사람,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들은 제자로서 삼 년 간의 사도 훈련을 받은 후 초대교회에서 놀라운 선교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유다교와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삼백 년 만에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전 영토에 전파했는가 하면 끝내 국교로 공인받게 했습니다.
5. 박해자도 부르신 예수
바오로는 본시 열성적인 바리사이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니기까지 했는데, 그런 박해자 바오로의 앞길을 예수님께서 가로막으셨습니다. 번개를 내리쳐서 눈을 멀게 하고, 벼락 소리로 그를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4-5). 나중에 사울은 바오로라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바꾸고 그리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이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 영토 안에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위에 언급된 바 풍어기적으로 제자로 부르신 제자들의 역할만이 아니라, 박해자 출신까지 돌려세워 선교사로 삼으신 바오로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6. 하느님의 일, 선교
일찍이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필요한 일꾼을 부르시고, 부르신 일꾼들에게 어떻게 도와주시는지에 대해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이사 55,10).
이 말씀으로, 하느님께서 비와 눈을 내려주시기 때문에 농사도 지을 수 있고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반드시 그 열매를 맺지 않고는 멈추지 않는다는 이치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모른 척 하지 않으시고 매우 관심 있게 지켜보시며, 당신의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일꾼을 부르시고, 그 일꾼이 하는 일을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선교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렇듯 용감하게 응답하며 민족과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사야는 모든 선교사의 모델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교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별 성과가 없이 허탕을 치는 듯한 상황에서 풍성한 성과를 거두게 해 주실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서 필요한 인재가 있다면, 그의 발걸음을 돌려세워서라도 당신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이끄시는 분이 예수님이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 우리의 기도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주듯이, 우리도 이사야나 사도들이나 바오로처럼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인 이상 하느님의 일을 할 때라야 우리의 삶도 풍성해질 수 있고 우리가 하는 일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 미사 말씀의 흐름을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고 행동하며 살아가야 할 방향을 입당송에서 알려주었습니다. 시편 95장입니다.
“어서 와 하느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목청 돋우세
송가를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가세, 노래가락 드높이 주님을 부르세
야훼는 위대하신 하느님이로세, 모든 신들 위에 계신 대왕이시네.
깊고 깊은 땅속도 당신 수중에, 높고 높은 산들도 당신 것이네.
당신이 만드셨으니, 바다도 당신의 것, 마른 땅도 당신이 손수 만드시었네.
어서 와 엎드려서 조배 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세.
당신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우리는 그 목장의 백성이로세.
당신 손이 이끄시는 양떼이로세.
당신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너희 조상이 거기서 나를 시험하고, 내 일을 보고도 시험하려 들었나니.”
“입술이 더러운 백성”
조민아 마리아(조지타운 대학교수)
대통령 선거가 이제 한 달 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가뜩이나 암울한 시기에 희망의 예표를 보여주는 후보가 없으니 참 답답합니다. 재난이 쓸고 지나간 자리마다 불평등이 드러나고 분열과 혐오가 자라나는데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선 이들은 이렇다 할 공약도, 정책도, 지도력도,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한 비전도 아쉬움이 크네요.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유다의 민중들도 불안하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을 듯합니다. 이사야서 6장은 우찌야 왕의 죽음(기원전 738년)으로 시작합니다. 우찌야는 유다를 무려 52년을 통치한 유능한 지도자였습니다. 국제 무역에 뛰어들어 유다의 생활 수준을 높였고, 농토를 확장하였으며, 주변 국가에 영향력을 확장하여 국위 또한 높였지요. 강력한 왕권 아래 정치·경제적 성공에 고무되어 이제는 좀 살만하게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을 유다 민중들에게 왕의 죽음은 큰 상실과 위기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찌야의 뒤를 이을 유능한 지도자가 등장해 유다의 번영을 지속시켜 줄 것을 간절하게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탁월하고 유능한 지도자라 하여 하느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는 메시아가 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이룩한 정치·경제적 번영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지요. 우찌야 시대 물질적인 풍요의 이면에는 권력을 가진 소수의 탐욕과 윤리적 타락이 있었습니다. 거대 지주들의 출현으로 기초적인 사회구조가 부자들의 수탈과 독점을 허용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었지요. 효율성과 풍요라는 명목하에 상호 돌봄을 원칙으로 하는 계약 공동체의 우애가 깨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민중을 괴롭히는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며, 힘없는 이들일수록 더 짓밟고 권리를 박탈하였습니다(10,1-2).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는 예언을 들려주며 돈을 버는 거짓 예언자들도 넘쳐났습니다. 어쩐지 오늘날 우리의 언론과 닮은꼴인 이들은 공동선과 정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물질적 보상을 많이 주는 이들에게는 성공을 약속하고, 그러지 않으면 재앙을 예고하여 계층 간 갈등을 심화하고 신뢰 체계를 망가뜨렸지요. 왕실과 귀족들과 엘리트들의 편에서 그럴듯했던 세상은, 하느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 안으로부터 곪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이 죽던 그해, 수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사야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목도하는 초월 체험 이후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됩니다(6,1-7). 인간의 업적과 정치력에 가려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의 지평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이지요. 그가 남긴 말로 미루어 볼 때 이사야는 수도 예루살렘의 주민으로 상류층의 언어와 생활방식에 익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사야 자신도 시대의 분위기에 젖어 왕의 죽음으로 다가올 혼란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려했던 것은 우찌야의 죽음으로 타격받을 상류층이 아니라, 그들로 인해 진작부터 삶의 터전을 잃고 울부짖고 있던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비로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이사야는 지축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습니다. 당황한 그는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고 한탄하며 자신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며,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6,5). 인간의 잣대로 세상의 안위를 가늠하며, 인간 지도자의 욕망과 능력에 기대어 살아왔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절망한 이사야에게 사랍이 타는 숯을 부집게로 들고 날아와 그의 입술에 대고 말합니다.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용서와 치유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와 동시에 이사야가 들은 소리는 탄식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이사야는 대답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6,8).
이사야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명령은 두렵고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신탁을 전하되,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여 깨닫지 못하도록 해야 한답니다(6,9-10). 하느님이 당신의 신뢰를 거둔 이 백성, 기회를 주어도 진심으로 돌아올 일이 없을 이 백성이 누구일까요? “입술이 더러운 백성”입니다. 인간의 권력에 기대어 하느님을 조롱하고 거부한 이들이지요.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고 괴롭힌 이들, 이 땅 한가운데 자신만 살려 한 자들입니다. 고아와 과부들을 울게 한 자들, 하느님을 울게 한 자들입니다.
이사야의 체험과 신탁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며 대선을 앞둔 가톨릭 시민들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현명한 선택으로 조금 더 자질 있는 후보에게 표를 던져야 함은 물론이지만, 우리의 눈길과 마음이 닿아야 할 곳은 대선의 이전투구가 아닙니다.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 노동자, 청년, 여성, 노인들의 눈물, 즉 하느님의 눈물입니다. 삶의 존엄을 위한 기본 조건이 무너지고 생명이 위협받는 현실은 대통령이 누가 되건 한 사람의 지도력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코로나로 인해 더 극심해지고 있는 부와 노동의 불평등을 직시하고, 실업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살피고,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차별과 혐오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는, 하느님의 시선이 닿는 이 낮은 곳을 우리가 외면한다면, 우리들 또한 “입이 더러운 백성”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희망 없는 세대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내가 난데, 신앙인은 자유를 어디서 찾을까?
방영미 데레사(한국가톨릭 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벌써 2022년 하고도 2월입니다. 할 일은 많고 마음 급한 한국인의 시간이라 그런지 빨라도 너무 빠릅니다. 물론 지구가 공전을 멈추지 않는 한 1년은 365일일 거고, 자전을 멈추지 않는 한 1일은 24시간이겠지만, 자전 따위 무시하고 싶어도 해가 지고 해가 뜹니다. 공전 따위 무시하고 싶어도 육체가 노화되고 부실해집니다. 아무리 내가 나라고 주장해 봤자 시공의 영향을 받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워질 순 없습니다. 이처럼 내 삶이 수동적인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마음껏 먹어서 비만해질 자유? 마음껏 도박이나 게임에 빠질 자유? 마음껏 괴롭거나 우울해질 자유? 내 의지로 선택한 상황이 아닌데, 개선의 의지를 버리는 것도 내 맘이니까 그것도 나의 자유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자유로운가요? 신앙인은 비신앙인보다 금기도 많고 그만큼 자기통제도 더 강합니다. 그래서 더욱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나를 잘 모르면 나는 외적 조건에 순응하게 됩니다. 그래야 내가 덜 다치고 덜 상처받으니까요. 물론 그렇게 해서 내가 평안하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건 내게 맞는 선택이니까요. 그런데 나와 맞지 않는 선택을 했다면 나는 자유롭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감이 치솟고, 타인의 행복에 공감보단 시기심이 앞서고, 남의 불행과 비교해야 비로소 내 삶에 안도감이 든다면, 그런 내가 진짜 ‘나’일 리 없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 그러면 내 안의 무언가가 나에게 하는 말이 들릴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귀 있는 자는 들어라’라는 구절이 7번 반복되는데, 이 말은 공관복음에서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듣는 것,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내 안의 소리를 듣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더더욱 많습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생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린 신앙인입니다. 이 말은 즉 내 안에 성전이 있고, 그 성전 안에 성령이 있으니, 나에게 찬찬히 물어본 뒤 시간을 들여 잘 듣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쉽고도 좋은 방법인가요! 그러니 잘 들어봅시다. 내 안의 영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는지,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알려주는지…. 다만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으니 나의 귀를 내 심장의 주파수에 맞추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지금 괴롭다면, 또는 슬프거나 외롭다면 두려워 말고 넘어진 김에 쉬어 갑시다.
내 안의 성전 문을 활짝 열면, 단지 그러기만 하면 내 영이 나에게 자유의 열쇠를 건네줄 것입니다.
소명召命의 여정, - 만남, 발견, 버림, 따름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성가 연습 시간에 있었던 평범한 ‘더불어’의 따뜻한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난생 처음 저녁성무일도서 안티포날레를 깜박 잊고 지참치 못해 그냥 부르던중 이를 알아 챈 옆에 있던 형제가 말없이 웃으며 슬며시 다가왔습니다. 이어 형제의 성무일도서를 펴들고 함께 성가를 연습했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시절 책이 없을 때 옆에 동무와 함께 정답게 동무의 책을 함께 펴들고 읽던 추억이 생각나 순간 마음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일희일비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늘 한결같이 새롭게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또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이런 일어날 힘을 주는 더불어의 도반들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의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제가 늘 주장하고 살아 온 삶의 원리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소명의 여정’입니다. 부르심과 응답으로 이어진 소명의 여정입니다. 오늘 두 독서에 이어 복음은 소명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독서는 이사야, 2독서는 바오로, 그리고 복음은 시몬 베드로와 두 어부들의 소명에 관한 일화입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우연인 듯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가 전제되어 있음을 봅니다.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예수님은 한 눈에 어부들의 갈망渴望을 알아채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접근하지 않았더라면 어부들은 평생 단조로운 고기잡이 일상의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인생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우리의 경우와도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가르침을 계속하신 후 말씀을 마치시자 시몬에게 이르십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면서도 내심 시몬을 주목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주고 받은 내용이 깊은 의미를 함축한 화두처럼 들립니다. 바야흐로 주님과 어부 시몬 베드로의 만남이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흡사 우리 한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어디가 깊은 데입니까? 평범한 일상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깊은 데를 찾아 어디 밖에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눈만 열리면 여기가 삶의 의미를 건져 올릴 수 있는 깊은 데입니다. 바로 베드로에게 이를 확인시켜준 주님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이 없는 삶의 허무를 말해 줍니다. 평생 열심히, 성실히 살았는데 마음을 여전히 공허할 뿐입니다. 마음의 허기虛氣는 여전하며 삶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강원도 오두막에서 은둔의 삶을 살았던 고故 법정 스님에게 어느 분이 던졌다는 화두 같은 말씀도 생각납니다.
“스님,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삶의 의미입니다. 흡사 의미없는 삶, ‘텅 빈 충만’이 아니라 ‘텅 빈 허무’의 삶 같습니다. 여전히 삶은 무지의 어둠입니다. 다음 시편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주일미사후 낮기도를 대체하여 바치는 시편 126장은 부를 때 마다 새롭습니다. 바로 주님이 삶의 의미임을 밝혀 줍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짧은 시간 잘 자고 나서 이렇게 강론을 쓸 수 있음도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은 시몬과 어부 일행입니다. 새삼 주님이 함께 계신 오늘 지금 여기가 삶의 의미를 풍부히 길어 올릴 수 있는 ‘깊은 데’임을 깨닫습니다. 이를 목격한 시몬 베드로의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반응이 놀랍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남과 동시에 참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동시적으로 발생한 은총의 체험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참 자기를 발견한 구원의 체험입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친 죄인으로서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한 시몬 베드로입니다. 시몬 베드로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과 참나의 발견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소명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살아있는 그날까지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참나를 발견해 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시몬 베드로와 흡사한 이사야의 소명 체험입니다. 사랍들 천사들의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듣고 보는 중 이사야는 주님을 만났고 동시에 참 자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바로 미사중 “거룩하시다” 환호는 여기에 근거합니다.
“큰 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이어지는 사랍들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날아와 이사야 입에 대고 말합니다.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흡사 미사중 성체를 모실 때 해당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성체를 모심으로 우리의 죄는 없어지고 우리의 죄악은 사라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좌우간 이런 강렬한 소명 체험의 기억은 이사야의 평생 삶에서 활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오로의 소명 체험의 고백도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은총에 돌리는 바오로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소명을 체험한 이들의 공통점은 겸손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 자기를 발견했을 때 회개와 더불어 겸손입니다. 도대체 주님의 소명을 체험했다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 허무와 무지, 무의미에 대한 유일한 답은 주님의 소명 체험을 통한 참자기의 발견뿐입니다. 복음 말미의 시몬에게 주신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무지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나를 발견할 때 사라지는 무지의 어둠이요 두려움입니다. 삶은 소명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새로운 복음 선포의 삶이 시작됨을 뜻합니다. 마지막 결론같은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과의 만남과 참나의 발견에 이은 모든 것을 버림, 예수님을 따름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어부의 삶에서 제자의 삶으로 운명이 바뀐 이들입니다. 새삼 소명의 여정은 만남, 발견, 버림, 따름의 일련의 요소로 이뤄짐을 봅니다. 소명의 여정은 바로 끊임없는 만남의 여정, 발견의 여정,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참나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안팎으로 버리고, 끊임없이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소명의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소명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어부는 어부로 농부는 농부로
박민우 신부님
종종 성찰을 하기 위해 눈을 감고 앉으면 저는 주로 저의 단점들을 떠올립니다. 더 잘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들이 떠오르면서 좌절하게 됩니다. 더욱이 제가 못하는 것들을 잘하는 동료들이 떠오르면 질투가 나고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더 노력하면 될 거야’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으로 성찰을 끝내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 ‘사람을 낚는 일’이었을까요? 예수님의 비유에 주로 등장하는 것은 포도나무나 포도 농장, 씨 뿌리는 사람 등입니다. 아무리 봐도 베드로에게 ‘포도를 가꾸듯, 사람을 가꿀 것이다’ 혹은 ‘사람들 마음의 밭에 씨를 뿌릴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굳이 어부로 살아온 베드로에게 농부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제일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어부의 역할에 충실하길 바라십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저에게도 똑같이 제가 잘해왔던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더욱 열심히 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못하는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사람을 부르시겠지요. 결국 나의 부족한 점만 찾는 성찰은 크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나의 장점, 나의 재능으로 무엇을 제일 잘 할 수 있을지를 찾고 거기에 열중하는 것. 또 성실히 노력하는 것. 그것이 올바른 부르심의 삶을 사는 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함승수 신부님
가볍고 편한 것만 찾는 세상입니다. 친구관계도 연인관계도 참 가볍습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집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참아주지 못합니다. 너무 쉽게, 너무 빨리만 얻으려 하기에 그만큼 쉽게 잃어버리고 빨리 싫증내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경향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쉽고 편하게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빨리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신앙이 빨리 성숙하기를 원합니다. 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가 있는 법인데 차분하게 기다리고 인내하지 못합니다. 제 멋대로 제 방식대로 후다닥 해보고는 뜻대로 안되면 ‘하느님이 안계시는 모양’이라고, ‘이 신앙은 소용이 없는 것 같다’고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을 만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찐한’ 신앙체험을 통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깊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허탕을 치고 그물을 손질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깊은 물에는 언제나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호수에 바람이 거세지면 큰 풍랑이 일수도 있고, 배가 난파되어 물에라도 빠지면 살아서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데로 나아가라고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총의 선물들이 우리 삶 깊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빠르고 쉽고 편한 것만 찾으려하지 말고, 천천히 한 걸음씩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많은 영성가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사랑의 일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한 순간에 쉽게 이룬 성취가 아닙니다. 매일을 한결같이, 끊임없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은 결과였지요. 주님과의 만남은 결코 쉽거나 가볍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이 내 마음의 바닥에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해야만,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수고의 땀을 흘려야만 내 마음 깊은 곳에 계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께서 베푸시는 귀한 선물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릅니다. 어부로서의 경험도, ‘또 허탕을 치면 어쩌나’하는 걱정도, ‘이번에는 정말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다 내려놓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맡긴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 속 고집과 집착이 사라지고, 내가 감내해야할 수고로움과 고생도 줄어듭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능력이 나를 통해 발휘되어 큰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허나 주님께서는 그 전에 먼저 우리에게 당신을 향한 참된 믿음과 온전한 투신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맡기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당신 현존과 사랑의 표징들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의 믿음을 굳게 만드십니다.
베드로가 잡게 된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바로 그 ‘믿음의 표징’입니다. 스스로의 계획에 따라,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여 열심히 그물질을 했을 때에는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르자마자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단 한 번도 얻어보지 못한 큰 결실이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베드로는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모든 것은 결국 주님의 뜻대로 되기에 자신의 계획이나 능력에 기대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태도라는 것을. 스스로가 제 삶의 주인이 되겠다고 고집 부리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놀라운 계획과 뜻을 거스르고 방해하는 ‘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고집과 교만의 죄를 참으로 많이 지어왔다는 것을.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며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이 ‘죄인’임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자기 삶의 ‘주님’으로 받아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스승님’에서 ‘주님’으로 바뀐 것에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찐한 예수님체험, 깊은 신앙체험을 통해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따를 수 있다면 참 좋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많은 신자분들이 그러지 못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판공시즌이 되어야 겨우 마지못해 고해성사를 받으시면서, 자신은 주일미사 빠진 거 말고는 죄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 정도면 잘 살고 있는거 아니냐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정도 잘못은 하고 사는거 아니냐고 하십니다. 그분들이 그정도라면, 자주 고해하시는 분들은 고백할 내용이 아예 없어야겠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달이 멀다하고 고해성사를 받으시면서도 고백하시는 내용이 한가득입니다. ‘사는게 죄’라서 주님 앞에서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반성을 통해 자기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나아가 거기서 주님을 만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용서와 사랑, 자비와 은총을 받고 있는지를 깊이 깨달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그 큰 은혜를 생각하면, 지금 자기가 사는 모습이 주님께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러워지는 것이지요. 내가 지은 죄가 속속들이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주님께, 그분께서 비추시는 진리와 사랑의 빛에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빛에 비추인 자기 모습이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벌받을 것이 두렵다고 감추고 부정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주님 앞에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욕심내고 집착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를 용기와 힘이 생깁니다.
새것을 담으려면 그릇을 비워야 한다. <루카 5, 1-11> 2월 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필요한 것을 가지려면 지갑을 비워야 하는 것처럼 귀한 것을 가지려면 어떤 때는 자기 전 재산을 버려야 합니다. 복음에 땅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재산을 다 팔아 땅을 산다고 했고 값진 진주를 만난 사람도 자기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산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주님을 만나 부르심에 응답하려고 직업을 버리고 집도 버리고 주님을 떠나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누구신지 잘 알지 못했지만,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로 알고 끝까지 함께한 사람들은 이분이 하느님이셨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 알고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 함께 하셨습니다.
그 기회는 아주 단순합니다. 밤새껏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부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가 넘치도록 고기를 잡게 되어 놀라고 감동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번 첫 금요일, 토요일 강론을 주도한 수련장 신부님께서 출애굽기 전부를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여주고 각자 성경을 읽으며 출애굽기의 참 의미가 자기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묵상하고 체험했습니다. 저는 해방 후 북쪽 원산에서 아버지 직업, 좋은 집, 환경, 모든 것을 버리고 종교 자유가 있는 남쪽으로 작은 봇짐만 갖고 탈출한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참 잘했다. 아니면, 종교 억압 속에 살다가 벌써 죽었을 것이다.’ 탈출하여 갖은 고통을 겪으며 살았지만 믿음으로 살다가 이 복된 수도원에 들어와 수도사제가 되어 지금껏 사는 것은 참으로 은총이 충만한 삶입니다. 버렸기 때문에 여기에 있지 북쪽에 있는 것을 버리지 못했으면 이렇게 행복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많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버려야 삽니다. 우선 근심 걱정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일에 잡혀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출애굽기의 역사를 되새기고 가나안 복지로 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 살려는 사람은 십자가 없는 주님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고 고통과 시련을 벗어버리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세상의 온갖 욕망의 노예로 살고 있으면 하느님 나라에 살지 못합니다. 권력의 노예, 재물에 노예, 명예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섬김과 나눔과 친교의 삶을 통해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있습니다. “에굽을 떠나자. 노예 생활을 떠나자. 주님이 마련한 시온 산으로 찾아가자.” 가벼운 마음 아니, 가난한 마음의 겸손과 온유는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깨끗한 사람, 진실한 사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헛것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 따르는 사람이며 이 땅에 하느님 뜻을 이루게 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까? 순교자들이 보여주신 대로 목숨 바쳐 따르는 길이 자기를 비우고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출애굽 역사를 기억하며 매일 출애굽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 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우리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두려움과
무력함으로
또 다시
곤두박질치는
은총의
시간이다.
진짜 삶은
먼저
우리자신과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내면의 성장
그 첫걸음이다.
기존의 삶을
바꾸려는
우리의
정직성과
용기가
필요하다.
변화는
또 다른
파괴이다.
과거의 방식을
파괴하는 것이
새로운
창조이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도를
원하신다.
새로운 시도란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음을
우리가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인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방향전환
그 자체이시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다시
내려 고기를
잡게 하시는
새로운 변화의
주님이시다.
깊은 곳이란
먼저 주님을
만나야 할
우리들 마음이다.
우리 마음을
다시 환하게
만드신다.
더 나은 삶을
살고싶은
우리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간결한
부르심을 통해
새로운 삶을
우리들어게
보여주신다.
새로운
방향 전환이
새로운
삶이다.
매순간
우리 삶에
채워야 할
주님의
선물이다.
그 선물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새로운 변화
새로운 삶이
간절히
필요한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새로워지는
삶을 원하신다.
살고싶은 삶이란
깨어나는 삶이다.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해지고
더 가치있는
복음의 삶을
믿는다.
먼저 나의
내면을 향하여
복음의 그물을
힘껏 던지는
은총의 주일이다.
새로워지는
첫걸음은
어제의 것을
버리고
내려놓는
오늘의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어떤 교우 분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천주교 신자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저는 이 사람과 전생에 원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이 사람과는 좋은 관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좋은 관계를 절대로 맺을 수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 예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친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이 급하게 돈 쓸 일이 있다면 돈 좀 빌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워낙 친한 관계였기 때문에 좋은 마음을 가지고서 흔쾌히 빌려주었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한 번 더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이때는 어떨까요? 그래도 친한 관계이기에 약간 미심쩍지만 빌려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또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때부터는 나쁜 관계가 되고 맙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나쁜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주 어려울 때, 뜻밖에 이 사람이 나를 도와줍니다. 고맙기는 하지만 분명히 꿍꿍이속이 있을 것이라면서 의심하고 가까이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멈추지 않고 또 다시 어려움에서 나를 도와줍니다. 그러다가 더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의 일처럼 도와줍니다. 이때 이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나쁜 관계가 아닌 가장 좋은 관계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좋은 관계도 나쁜 관계가 될 수 있고, 나쁜 관계도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원래부터 좋은 관계도 또 반대로 나쁜 관계도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과의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즉, 주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방법은 주님께서 내게 특별한 사랑을 주시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뜻에 따라 살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늘 특별한 사랑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은총을 받은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거부했던 것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늘 사랑으로서 다가오시기 때문에, 이 사랑에 응답만 하면 좋은 관계를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때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큰 행복을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고통스러운 일은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기술을 알고 있으면 그 고통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틱낫한 스님).
즐기십시오.
남미 페루 여행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페루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마지막 여행지로 볼리비아와 국경을 마주하는 티티카카 호수를 가기 위해 ‘푸노’라는 도시에서 1박 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여행 현지 가이드가 이 도시에서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갱단도 있고 때로는 총격전도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저녁식사 후에는 항상 그 도시를 걸으면서 둘러보았는데, 이날만큼은 밤에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위험하다고 가이드가 말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호텔 방 안에만 있었습니다. 혹시 어떻게 될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연히 호텔방의 창문으로 밖을 보니 많은 관광객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가이드의 말 한 마디가 저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 한 마디에 행동의 제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디든 다 위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는 장소를 조사해보았습니다. 어디였을까요? 비행기나 자동차 안이 아닙니다. 가장 많이 죽는 장소는 침대라고 하더군요.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는 곳이니까 이제는 침대를 이용하지 않겠습니까?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로 인해서 즐길 수 있는 것도 즐기지 못한다면 가장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걱정과 불안으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충실하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옹기장이 손에 든 진흙처럼 겸손해져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낚시가 유난히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젠지 아십니까? 기대감이 너무 클 때입니다. 언젠가 명절 전에 낚시를 갔습니다. 큼지막한 대어들을 원없이 잡아, 이집 저집 제삿상 차림에 힘을 보태겠노라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초집중을 했지만, 끝끝내 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형제들에게 싱싱한 활어회를 즉석에서 원없이 먹게 해주겠다고 큰 소리를 뻥뻥치며 포인트로 갔었습니다. 도마랑 회칼, 초장이랑 야채, 소주까지 몇병 챙겨서 갔습니다. 냄비랑, 버너랑, 양파, 무, 마늘, 풋고추, 고춧가루, 소금 등, 매운탕꺼리도 완벽하게 준비해갔습니다.
형제들은 다들 제 낚시대 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끝끝내 꽝이었습니다.아무런 조과도 없이 허탈한 마음으로 되돌아올 때의 기분은 참혹함 그 자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몬과 다른 동료들도 밤 고기 잡이를 나섰습니다. 오랜만에 고기 좀 원없이 잡아서 가족들 앞에 얼굴 한번 세워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결과는? 너무나 기대가 컸던지 완전 꽝이었습니다. 얼마나 맥이 빠졌던지 시몬은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복음 5장 5절)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던지는 한 말씀은 특별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복음 5장 4절)
나름 프로였던 시몬에게 예수님의 지시는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시몬은 어린 시절부터 갈릴래아 호수에서 잔뼈가 굵어온 전문직 어부였습니다. 고기잡이만큼은 인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부와는 전혀 무관한 직종인 목수 출신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리라니, 속으로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온종일 허탕을 쳐서 허탈해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습니다. 담배를 한 대 꼬나물고서는 묻습니다. “많이 잡았어요?” 그러면서 허락도 없이 텅텅 빈 남의 빈 어망을 들쳐봅니다. 그리고는 한심하다는 듯이 씩 웃습니다.
이어서 전문가라도 되는 듯이 미끼를 바꿔 보라는 둥, 저쪽이 더 낫다는 둥,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정말이지 기분이 거시기해지는 순간입니다.
꾼들은 각자 나름대로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습니다. 또한 자기 방식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합니다. 누군가가 훈수를 두면 은근슬쩍 기분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이 분야에는 최고인데, 나처럼 갈릴래아 호수 구석구석, 포인트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텐데...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즉시 마음을 바꾸어 순명합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복음 5장 5절)
꽤나 의아하고 특별한 예수님의 단호한 명령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제 새 하늘 새 땅이 도래했으니, 지금까지 시몬이 고수해왔던 기존의 낡은 인생관이나 가치관, 고리타분한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모두 등 뒤로 던져 버리라는 권고입니다.
새로운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받아 들이기 위해 말끔히 자신을 비워내라는 당부입니다. 주님의 사도로 거듭나기 위해 옹기장이 손에 든 진흙처럼 겸손해지라는 부탁입니다.
어부는 물고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단국대 의대 서민 교수는 외모가 남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열등감을 지니고 살았다고 합니다. 외모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선택했고 그렇게 의대 교수까지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지금은 글을 써서 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글쓰기를 어떻게 잘 하게 되었는지 한 유튜브 채널에 소개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얼굴을 만회하자.’ 이런 생각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시작하면서 제 인생이 조금 더 나아진 것 같아요. 자신과 무언가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과정에서 열등감이 조금 해소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인정을 받은 최초의 일은 ‘글쓰기’를 통해서인 것 같습니다.
제가 2009년에 어떤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뿌듯하고 그랬었는데, 그 인정을 받기까지 글쓰기로 굉장히 많이 실패를 경험했었습니다. 제가 생각해 봤을 때, 저에게 있어 재주가 남들보다 글을 좀 잘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왜냐면 제가 반성문 같은 걸 쓰면서 칭찬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래서 책을 내고 여기저기 글을 쓰면서 무수히 많은 시도를 했는데 그것들이 전부다 실패를 하고 책을 낼 때마다 다 망했습니다.
소설 마테우스라는 거의 쓰레기 같은 제 책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잘 모르고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해서 냈는데 나중에 보니까 정말 한심한 책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책이 별로 안 팔렸고 저랑 어머니랑 다 사서 절판을 시켰습니다. 그 책을 지금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협박전화하고 그래요. 출판사 사장님 같은 경우는 제 책 때문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제 책 두 권 내고 도망가셨어요. 문 닫고. 그런 걸 보면서 미안하고 그랬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 뜨겠다.’ 이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끝까지 글쓰기 연습을 했어요. 제가 ‘하루에 두 개 세 개씩 글을 쓰겠다, 일 년에 백 권씩 책을 읽자’는 결심을 하고 이 두 개를 거의 지키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십년 이상. 십 몇 년 되니까 글을 잘 쓰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모 신문에 칼럼을 쓰게 됐어요. 칼럼을 쓰다가 처절히 실패했죠. 욕도 되게 많이 먹고 결국 잘렸는데,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또 4년 동안 더 열심히 지옥훈련을 하였습니다. 2009년 그때가 글쓰기 시작한지가 14년, 15년 될 때거든요. 그때가 되니까 제게 느낌이 오더라고요. 글을 대충 휙 써도 거의 예술 같은, 남들이 감동하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칼럼을 쓰게 되었고 그렇게 세상에 제 이름을 알렸습니다. 저 자신과 약속을 해서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열등감이 극복된 것 같아요.”
[출처: ‘성장문답: 열등감을 극복하고 싶은 당신이 반드시 들어야 할 대답’, 유튜브]
사람은 훌륭한 사람, 훌륭하지 않은 사람으로 정해져 태어나지 않습니다. 훌륭해지려면 누구에게나 많은 연습이 필요한데 그 연습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눠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실 때에도 이미 훌륭한 사람을 뽑으시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되는데 거쳐야 하는 훈련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선택되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이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평생 어부로 살았기에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는 그에게 명령을 내릴 자가 감히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베드로는 밤새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깊은 곳으로 저어가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혹자는 베드로가 이미 예수님의 정체를 믿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온전한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물고기가 많이 잡히자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잡히고 나서야 그분이 범상치 않으신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베드로의 자존심을 버린 순종이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란 예수님의 응답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젊은 목수의 말을 듣고 창피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런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밤새 실패했기 때문에 한 번 더 실패하는 것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힘을 우리는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어떤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자존감을 낮춥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면 그런 오랜 실패를 견뎌내지 못합니다. 김연아 선수가 자존감이 낮은 선수였다면 수천 번 넘어지고 허리까지 다쳤을 때 “난 여기까지.”라며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거기에서 멈출 사람이 아니라는 자존감이 그 수많은 실패를 견뎌내게 만든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이 자존감만 있다면 무엇을 해도 결국엔 성공하게 됩니다. 아기가 넘어짐 없이 한 번에 걷는 것을 성공하는 경우는 없는 것처럼, 우리도 수천 번 실패하지 않고서는 무언가의 전문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자존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실패해도 나는 가정에서 사랑받는 자녀라는 믿음이 있다면 인간관계를 잘 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부모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에 친구와의 관계가 실패하면 끝장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영원히 친구를 사귀지 못합니다. 친구를 잃으면 다 잃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친구를 부담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더라도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임을 믿는다면 자존감은 하늘로 치솟습니다. 그것을 믿으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믿어야합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실패하더라도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임을 믿으면 모든 것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가져야하는 자존감입니다.
개신교의 고구마 선교왕 김기동 목사의 강의를 유튜브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길거리에서 서성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은 미친 사람 취급을 합니다. 그래도 아무나 그렇게 초대하다보면 일 년에도 수백 명씩 세례를 받겠다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선교의 두려움을 느낄 때 사람들을 ‘고구마’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이 선교하는 대상을 한 번 찔러보고 아니면 더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고구마처럼 생각하면 상대가 자신에게 주는 상처를 잘 참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구마가 익지 않아 내가 찌르는 젓가락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실패를 주저하지 않게 만드는 자존감이 곧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셨습니다. 물고기에게 상처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자존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으면 나는 어부가 되고 내가 구하려는 사람들은 물고기가 됩니다. 이것이 부르심 받은 이들이 갖는 자존감입니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렸다가 기어이 빠져나간다고 해서 어부가 상처받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실패를 통해 더 완벽한 어부로 성장합니다. 이는 내가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 낚는 어부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요, 하느님의 아들딸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믿음에서 오는 자존감만 있다면 실패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상처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았음을 믿는 우리는 이 모든 교육을 견뎌낼 준비가 되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6년도의 기억입니다. 어학연수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지낼 때입니다. 대학교에서 청강도 하였고, 영성 프로그램도 들었고, 조금은 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교학처장 신부님으로부터 메일이 왔습니다. 앞으로 신학교에서 강의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준비를 하라는 메일이었습니다. 청강하고, 프로그램 듣는 것은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의를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료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따로 더 시간을 주지는 않았고, 남은 시간에 준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좋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고, 강의도 귀담아 들었습니다. 갈릴래아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에게 갑자기 주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무 놀라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그런 큰일을 할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는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라는 말을 성경에서 들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말도 있습니다. ‘구하여라. 찾을 때까지 구하여라. 찾았다면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이기면 또 다른 기쁨이 있을 것이다.’ 신앙인에게 어떤 말씀이 더 감명을 줄까요? 여러분은 어떤 말씀이 더 깊이 다가오시는지요?
저의 서품 기념 성구는 시편 126장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았습니다. 비록 지금 힘들고 어렵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손을 잡아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눈물로 씨 뿌리던 어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막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어른들이 계셨습니다. 독일의 탄광에서 탄을 캐던 어른들이 계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는 눈물로 씨 뿌리던 신앙의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박해를 받았고,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고, 가진 것을 빼앗겨야 했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를 피해서 교우촌을 만들었던 신앙의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교우촌에서 신앙은 보존되고,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신앙은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로또 복권 당첨이 아닙니다. 신앙은 원하는 것을 만들어 주는 요술 지팡이가 아닙니다. 신앙은 나의 짐을 남에게 떠넘기는 위선과 가식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유형은 크게 4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첫째는 누군가의 권유에 의해서 오는 분들입니다. 가족, 친지, 이웃의 권유가 있어서 성당엘 찾아오신 분들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평소에 믿음이 가는 친구, 존경하는 친구가 권유를 했기 때문에 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본인의 목적이 있어서 오는 분들입니다. 젊은 남자들이 교리를 받는 경우는 결혼을 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장인, 장모님께서 사위가 되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목적이 달성되면 세례를 받았어도 성당에 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화장실 가기전과 화장실 다녀와서의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본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성당에 온 분들입니다. 커다란 체험은 없었지만, 늘 생각을 하고 있었던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도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에 교리반 출석을 아주 잘합니다. 대부모를 정할 때도 스스로 구역장님께 전화를 해서 대부모님을 정해 달라고 할 정도입니다. 이런 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왔기 때문에 신앙이 성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들은 나약하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신앙인들도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삶의 한가운데에서 유혹과 갈등 앞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분들은 세례를 받은 후에 실망하여 냉담하기도 하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고, 신심단체에서 활동을 하면 점차 신앙이 성숙하고,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굳센 신앙인이 되곤 합니다.
네 번째는 커다란 체험을 한 경우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갑작스럽게 아픈 경우도 있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잘 되던 사업이 실패하기도 하고, 본인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도 하고, 꼭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본인 스스로 성당에 가겠다고 다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큰 체험이 있었던 사람은 세례를 받은 후에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을 봅니다. 이미 그분들은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서말씀을 통해서 만났던 ‘이사야 예언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이런 경우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큰 체험 앞에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체험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겸손하게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습니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분들이 구원의 역사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방법으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최선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었든지, 삶의 지뢰밭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유혹의 달콤함은 가리지 않고 모든 신앙인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사야 예언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겸손’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교만함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는 고백
서강휘 신부님
“학문을 하면 날마다 늘어나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줄어든다.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 무위에 이른다.”(為學日益,為道日損,損之又損,以至於無為) 노자 도덕경 48장의 내용이다. 여기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말한다. 지식의 축적은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이뤄지며 객관적인 기준을 찾아 인생을 설계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할수록 지식이 쌓이는(益) 것과 비례하게 번잡함과 난해함도 함께 증가(益)한다. 반면에 도를 행하는 사람, 즉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그 행위를 반복할수록 고집이나 집착이 점점 사라지고(損) 그에 비례해 수고로움이나 의심도 함께 줄어든다(損).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자신의 계획과 기준을 내려놓는 것이 되므로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무위’, 곧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무위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한다.’(無為而無不為) 즉 그는 하느님의 일과 자기의 일이 하나가 돼 ‘스스로는 하는 일이 없지만(無為)’ 그가 하는 일은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느님의 일이 된다.(無不為) 내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가의 차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이사야와 바오로, 베드로가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을 ‘입술이 더러운 사람’, ‘칠삭둥이’, ‘죄인’ 등으로 표현하며 자신이 무능력하거나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자책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 죄 많은 인간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데 반해 위대한 인물들은 늘 자신의 부족함을 거리낌 없이 고백한다.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어야 했다. 신약성경 안에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비난할 줄은 알았어도 자신과 인생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하거나 그분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지는 못했다. 아니 고백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 모른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식이나 합리적 계산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것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삶의 기적들을 이해할 방도가 없다.
베드로는 오늘 자신의 인생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경험을 했다. 복음을 읽고 있자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구태여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고 더군다나 베드로에게 고기잡이와 관련된 조언을 하신다. 어부였던 베드로도 아직은 낯선 예수님의 지시에 아무 저항 없이 그물을 내린다.
그는 어부였고 예수님은 목수였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그가 낯선 남자의 한마디에 순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동선에 그의 시선이 줄곧 함께했음을 짐작게 한다.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고기가 잡힌 것이다. 이 사건 앞에서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신이 죄인이라 고백한다.
죄인이라는 고백은 쉽사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모든 것들이 잘못됐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계획한 위치에 끊임없이 그물질을 했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 그런데 바로 그 호수에서 예수님의 한마디 지시로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만큼의 고기를 잡은 것이다.
찢어질듯한 그물은 베드로가 상상할 수 있는 희망의 부피다. 그런데 자신의 노력으로는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이 일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지금 눈앞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가 지금까지 해왔던 스스로의 계획과 기준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알려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도록 만들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은 근본적인 삶의 전환을 이루게 해준다. 스스로 주인이 돼 계획하고 실패하고 낙담하는, 그래서 날마다 쓸모없는 것이 자꾸만 늘어나는 과거의 삶에서 불신과 두려움이 날마다 줄어드는 신앙의 삶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 전환점에 죄인이라는 고백이 있다.
혹자는 오늘 베드로의 체험이 내심 부럽다고 여길 것이다. 표징을 요구한 유다인들처럼 신앙의 견고함을 위해 그와 같은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나길 희망한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나 바람은 여전히 외부적 조건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합리적인 위학(爲學)의 태도일 뿐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에 의해 이뤄진 일들은 많지 않다. 나는 왜 태어났으며 나의 부모는 왜 그분들이어야 하는지 또 지금의 나는 왜 여기에 서있으며 왜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됐는지 등에 대한 합리적인 답을 구하려 하는 순간 우리는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우리 인생은 객관적 지식이나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며 초대다. 이것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도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한 베드로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그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했고 그의 응답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했던 일이 그에게 똑같이 재현되도록 했다. 즉 예수님에 의해 ‘낚인’ 그는 예수님의 예견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일이 그의 일이 되는 것, 그것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하는’ 신앙의 삶이다. 베드로와 함께 우리 신앙의 주춧돌을 놓은 바오로 사도의 오늘 고백은 이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9-10)
"스승님의 말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박일 신부님
겐네사렛 호수에 날이 밝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 가에서 하느님의 말을 선포하고 계셨습니다. 많은 군중 이 서로 잘 듣기 위해 가까이하니 예수님을 둘러싸고 치 는 지경에 이르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올라타 뭍에서 조금 나가 달 라고 부탁하십니다. 시몬은 이미 장모님을 고치는 기적을 보았던 터이고, 예수님을 집에 모셨었기 때문에 그분의 말 의 권위와 초자연적인 권능을 보았었습니다. 그리고 인 간적 매력에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었던 차, 시몬은 이 예언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도움을 청하니 뭔가 소속 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깨가 으쓱하는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 있는 말은 사람을 인간적으로 사로잡습 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말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 가 뭍에서 조금 떨어져 나아가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쳤 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을 다 마치시고는 깊은 데 로 나아가 그물을 치라고 하십니다. 당시 그물의 길이는 400~500m로 세 부분이 연결되어 있어 그물을 치려면 가장 깊은 데에 쳐야 했고, 운하려면 적어도 4명의 어부는 달려 들어야 하는 규모습니다. 고기잡이 경험이 많은 어부의 판 단에 의하면, 지금 그물을 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고기잡이에 적합한 밤을 꼬박 새우며 허탕을 쳤는데, 낮에 무엇을 잡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미 지친 몸들입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는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고 말 하시고 인간의 힘으로는 완수할 수 없는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대 답합니다. “스승님의 말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루카 5,5) 스승님의 권위 있는 말에 대한 믿음은 헛되지 않 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먼저 믿음을 요구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부인할 수 없는 당신의 현 존과 사랑의 표지들을 보여주시면서 그 믿음을 지탱시켜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도, 아브라함 선조도 그러셨듯이, “희 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믿고 내어 맡겨야 합니다. 기적적인 고기잡이 작업의 결말을 본 시몬 베드로는 예수 님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분명히 느끼면서 자신이 죄인임 을 크게 자각하게 됩니다. 이런 현존 체험은 그를 베드로로 자리 잡게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도 이제 ‘시몬 베드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시 몬 베드로와 함께 사람 낚는 어부로 불림을 받습니다. 2월 1일 새 신부님들, 2월 2일 봉헌생활을 (다시)시작하 신 수도자님들, 이제껏 그래 오셨듯이 굳건한 믿음과 온전 한 내어 맡김에 항구하시어 기쁨이 가득한 사목 생활, 수도 생활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아라."
김정희 신부님
현대인들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을 통해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 를 맺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더 큰 고독감을 느낍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 겠지만, 우리 시대가 너무 가벼운 것만을 추구해서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 니다. 친구도 가볍게 만나고, 사랑도 가볍게 하고, 쉽게 만나고 헤어집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마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얻었기 때문 에 쉽게, 빨리 잃어버리고 싫증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볍고 빠르고 쉬운 것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행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들은 더 쉽고 빠르게 하느님을 체험하고, 신앙이 깊어지기를 원합니다. 좀 더 노력하고 인내하고 기다 리지를 못합니다. 거기에다 내 방식대로, 내 편한 대로 하느님을 찾고 체험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안 되면, ‘하느님은 안 계시는 모양이다.’, ‘이 신앙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포기해버립니다. 쉽고 가벼운 것 을 추구하는 이 시대는 과거보다 하느님을 만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따라 나서게 되었는지 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은 겐네사렛 호숫가에 있는 마을 카파르나움 출신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곳에 서 예수님은 어부인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 아라.”(루카 5,4) 베드로는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며 자기가 알고 있던 방식을 고집하지 않 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깊은 곳은 더 빨리, 더 쉬운 방법이 아니라 천천 히 인내하며 자신의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주님을 만나라는 뜻입니다. 많은 영성가들이 하느님을 대면하고 그분과 일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묵상과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한순간에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 안으로 파고 들어가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자신을 비우게 되 고 하느님을 찾고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주님은 땀을 흘리지 않고서 가볍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기다리고 인내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만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어떤 보물보다 귀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한지, 쉽고 편하게 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진정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깊은 곳으로 가서 주님께 나를 내맡기면서 기다리고 인내하는지 되돌아보도록 합시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이동주 신부님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일 구어야 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신앙인으로서 부끄럽게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마음이 편안하지도 않고 마음 한구석이 개운하지 않아서 허전함을 느낍니다. 이는 오늘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재주와 능력만을 믿고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허탕을 쳤듯이, 우리도 자기 자신의 재 주와 능력만을 앞세우고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서 오는 것일지 모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똑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나 아가 자신의 죄마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알기에 하느님을 두려워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권위·권능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 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 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조건을 일러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 은 바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특출한 능력과 학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 느님께서 우리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감싸주시며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유능하고 일을 잘하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시고 제자로서 살아가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 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사도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힘을 기울여 온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 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처럼 지금 까지 힘을 기울이고 소중하게 여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야 합니다.
세상이라는 그물
정윤호 신부님
평생을 물가에서 어부로 살아온 이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십니다.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고기는 물 안에서 살고, 사람은 물이 아닌 물 밖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죽음이 기다리고, 사람이 물 안으로 들어가면 역시 죽음이 기다립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향해 ‘낚는다’라는 표현을 하실까?
어부가 고기를 낚는 것은 휴식이 아닌 일을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사람을 낚는 것 역시 이제 일차원적인 작업이 아닌, 또 다른 형식의 일임을 뜻합니다. 그 일은 바로 이제 복음의 선포로 다가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 세상의 이치와 논리 혹은 욕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 선포는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세상의 논리가 아닌 철저히 하느님의 논리로 드러납니다. 욕심, 이기심, 성과주의, 자본주의가 아닌 해방, 용서, 이해, 이타심, 그리고 너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
창세기는 “세상 창조 전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 2)라고 전합니다. 세상 창조 전 물은 어찌 보면 죽음의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물이 아닌 세상 창조 전 심연의 상태에 젖어 있는 우리 모두를 건져 올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새로운 길, 제자들의 복음선포로 인해 이 세상엔 죽음이 아닌 또 다른 자유와 해방이 찾아옵니다. 세상 속 죽음이라는 좁디좁은 그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세상의 그물이 아닌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 나라가 선포됩니다.
오늘 복음의 선포를 통해 이 시대의 ‘나’라는 신앙인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곰곰이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제 세상이라는 그물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서공석 신부님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기록한 문서들이 아닙니다.「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행적도 사실(事實) 그대로만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으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도 그분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고 실천하던 바를 문서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오늘의「복음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군중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고, 그것을 듣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복음에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과 실천을 반영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의 마음가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님’이라는 호칭과 엎드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신앙인이 하느님 앞에 갖는 자세입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본 신앙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호칭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사람들은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겐네사렛 호수에서 있었던 ‘기적적 고기잡이’ 이야기는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바를 담아서 전합니다.
겐네사렛 호수가 있는 갈릴래아를 무대로 예수님이 활동하신 것은 역사적 사실(事實)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은 이 호수에서 일하던 어부(漁夫)들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부 출신 제자들 중에 오늘 거명된 시몬베드로와 제베데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원시(原始) 신앙공동체가 전하는 역사적 사실들입니다. 이 이야기로 그들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 덕분으로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구원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립니다.
오늘의 ‘고기잡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람들의 노력은 헛수고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그물을 쳤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배 한 척으로 옮기지 못하고, 다른 배를 불러야 할 정도로 고기잡이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일하는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거둔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고기를 기적적으로 많이 잡았다는 사실 보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여기서 ‘낚는다.’는 말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말에 ‘낚는다.’는 뜻은 낚시를 미끼 안에 감춰서 그것을 먹이인 줄 알고 삼키는 물고기를 잡는 행위입니다. 물고기는 속아서 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고 말씀하실 때, 그런 뜻은 전혀 없습니다. 물고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뽑은 사실을 말하기 전에 이 ‘고기잡이’ 이야기를 먼저 보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 그분의 제자입니다. 그분의 말씀 따라 실천하면,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많이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은 하느님이 두려워 신앙이라는 대책을 세우는 길이 아닙니다. 선교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 안에 두려움을 불어넣고,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교세(敎勢)확장(擴張)을 꾀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권한으로 행세하며,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기 위해 특수 복장을 하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세(來世)를 위해 전대사((全大赦) 한대사(限大赦)를 챙기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당신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당신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예수님도 그 자비를 실천하고, 하느님이 고치고 살리는 분이라 예수님도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종교기득권층의 눈치를 보거나 권력을 가진 이들과 사귀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그물을 치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삽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풍요롭게 살기 위해 그동안 마련하였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전향(轉向)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가 마련한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재물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죽어서 내세에서도 많은 것을 얻어 누리고 싶은 욕심도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그런 것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소중히 생각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도 베풀며, 살라고 주어진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은 그 자비와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며 삽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따라 실천하는 제자는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수색 예수성심 성당 새사제 박재성 시몬 신부님 강론
1독서 : 이사 6,1-2ㄱ.3-8 / 2독서 : 1코린 15,1-11 / 복음 : 루카 5,1-11
+찬미 예수님
저는 지난 2월 1일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서품을 받은 그 당일부터 오늘까지 정말 많은 축하를 받고 있습니다. 저를 보시는 분마다 ‘축하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십니다. 저는 오히려 그 축하를 수색 신자 분들께 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축하를 받으실 분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부족한 이 사람, 박재성 시몬을 기도로 키우고, 여러분의 삶의 모범으로 키워서 오늘의 한 사제가 수색 성당에서 난 것입니다. 사제를 배출한 수색 공동체 여러분, 수고 많으셨고,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제 서품식이 끝나고 어떤 분께서 물어보셨습니다.
우셨어요? 에~이, 우셨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네 조금 울었습니다. 신부님들께 안수를 받을 때, 눈물이 조금 나더라구요.
또 물어보셨습니다. 그럼 언제 제일 떨리셨어요?
많은 분들이 부복을 할 때, 그러니까 사제가 흰 천 위로 엎드릴 때를 생각하시는데 저는 호명을 할 때, 가장 떨렸습니다. 저희 학장 신부님께서 제 본당과 이름을 부르신 후에, 제가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하면서 주교님 앞으로 나아갔죠. 저는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가 가장 떨렸습니다.
제가 왜 그 때가 가장 떨렸을까 생각해 보니, 우선 카메라가 딱 제 앞에서 저를 찍고 있었습니다. 왠지 목소리도 크게 해야 할 것 같고, 시선처리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제가 떨렸던 이유는 ‘이제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다. 나는 사제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저를 참아주는 신부님, 아버지처럼 넓은 품을 가진 신부님, 저를 기다리고 있던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사제의 삶이 멋지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면서 내가 그 신부님들처럼 살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함께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실제로 겁이 많은 사람이고, 아프고 고통받는 것은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제는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인데, 제가 보기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커 보였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로 제가 짊어지기엔 너무 커 보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저를 이곳으로 이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꿈’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씨앗을 제 안에 심으셨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같이 웃는 것’.
저는 웃고 싶었고, 웃으려 노력했는데 혼자만 웃으니 웃어도 그리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이 웃으니 정말로 기뻤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만 웃는 것이 아니라 같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을 꿈꿔왔고 저는 지금도 그 꿈을 꾸고 있습니다. ‘다 같이 웃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저는 바로 그것이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함께 웃고 싶었지만, 함께 한다는 것은 사실 힘들었습니다. 특히 고통 중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겪으면서 겁 많은 저에게 용기를 주시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제게 그 이유를 가르쳐 주시려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함께 웃는 것이라는 꿈을 통해서 당신과의 관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웃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힘들고 아픔이 있더라고 안고 가야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십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저는 겁 많은 사람이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의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제 삶에 많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기쁜 일도 있겠고, 분명 고통과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는 함께 웃기 위한 준비이며, 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한 길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가 더 이상 고통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입고 있는 제의에 이러한 의미를 담았습니다.
여러분이 주신 사랑으로 다음 본당에서도 사랑하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1)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오르시어 많은 군중을 가르치신 다음 시몬에게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그러자 시몬은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며 그물을 내렸고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사실 고기잡이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던 시몬이었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고, 이미 심신은 피곤할 대로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언가 모를 힘에 이끌려 다시 배를 타고 깊은 곳으로 나아갔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쳤던 것입니다. 곧 베테랑 어부인 그였지만 그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순명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 그는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몬은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대하면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곧 시몬은 너무나도 놀라우신 주님의 능력 앞에 자신이 진정 초라한 죄인임을 느끼며 정말 어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우리도 지난 시간 주님을 만나면서 감히 주님의 제자로서 불림을 받았었습니다. 정말 하느님 앞에 초라한 죄인이었지만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당신을 따르는 사도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초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말씀대로 깊은 곳으로 나아가 그물을 치는 데에 있어서 아직도 수없이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곧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종종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려고 하고, 주님의 뜻에 순명하기 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안달을 할 때가 있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며 그물을 치는 것처럼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주님의 방식을 따르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내 방식이 아닌 주님의 방식을 따르게 될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엄청난 은총이 함께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사도 베드로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며 주님께 떠나달라고 말씀 드렸던 것처럼 위대하신 주님 앞에 자신이 진정 초라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곧 주님 앞에 진정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주님은 그 모습을 바라보시고 당신의 품안에 우리를 안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간 것처럼 우리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심을 내려놓고 그분만을 따라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 모든 것이 되어주실 것이고, 우리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게 될 것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읍시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갈라디아서 주해’에서(Praefatio: PL 35,2105-2107)
바오로 사도가 갈라디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은 그들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을 율법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의 은총이 그들에게 전파될 때 할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받은 은총의 선물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율법의 지배 아래 있기를 원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의를 섬기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죄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부과하신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의로운 법을 주심으로 해서 그 율법이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 주기만 하고 없애 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활동하는 신앙의 은총만이 우리 죄를 없애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교에서 개종한 이들은 은총 지위에 세워져 있던 갈라디아인들을 율법의 지배 아래 두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고 유다교 예배의 외적 예식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복음은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유다교에서 개종한 이들은,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들이 개종할 때 그들에게 유다의 관습을 따르라고 권한 다른 사도들의 지침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그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그런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을 피하려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지 않고서는 그들에게 복음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편지에서 말해 주고 있듯이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더러 이중적인 행동을 그만두라고 말합니다. 로마서에서도 바오로는 이 문제에 대해 말해 주고 있지만 갈라디아서와는 한 가지 차이점을 지닙니다. 로마서에서는 이 문제에 있어 뚜렷한 결정을 내리면서 유다교에서 개종한 신자들과 이방 출신의 신자들 간에 발생한 이 논쟁을 해결해 줍니다.
한편 갈라디아서에서 바오로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이들로부터 율법 준수를 강요받아 그들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고 있던 이들에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인들은 사도 바오로가 자기들을 보고 할례를 받지 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참된 교리가 아니라고 믿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편지 서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하느님을 외면하고 또 다른 복음을 따라가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서두의 말씀은 이 문제점을 간단한 말로 넌지시 비쳐줍니다. 앞에 나오는 인사의 말씀에도 자기가 사도라고 말할 때 “그 사도직은 사람에게서나 사람을 통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와 같은 말은 바오로의 다른 편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바오로 사도는 이 말씀으로써 갈라디아인들 보고 유다 율법의 필요성에 대해 납득시키려 하는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온 이들이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고, 복음적 증거의 권위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다른 사도들 보다 더 낮은 사도로 여김받을 이유가 없으며,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에게서나 사람을 통해서” 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를 통해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리.
최민석 신부님
“도대체가 교회에 희망이 없다.” 교회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한 형제의 고백을 어제 들었다. 그는 현제 교회 출석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지 두 달이 지났다. 현제, 그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제도 교회를 떠나는 이의 어떤 복음을 듣는 것 같다.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것이 새로운 복음(?)인가. 적지 않는 충격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친다.
제도교회를 떠나는 것이 자유와 해방이 될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있겠다. 일단 여러 가지 의문은 뒤로 한 채 그의 자유와 해방을 향해 떠나는 그의 발걸음에 하느님의 축복을 빈다.
그는 현제 교회 출석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교회 출석하지 않은지 두 달이 넘었다. 그는 현제 자유롭고 편안하다. 제도교회를 떠나 참 자유를 얻는다는 신앙고백이다. 나는 그에게서 아브라함의 떠나는 신앙을 본다.
그는 교회 출석으로부터 자유를 선택했다. 교회 출석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정은 쉽지 않았다. 결정하기 까지 많이 망설이고 망설이다 시간이 좀 걸렸다. 그 만큼 교회 교리가 자신을 부자유하게 했다.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 것이란다. 현제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편안하면서도 더욱 절실하게 깨어 기도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길 잘했다 것이 그의 고백이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현 제도 교회에 미련도 관심도 거두어들이기로 한 것이다. 지금의 제도교회는 도대체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 더욱이 세상도 모른다. 세상도 모를 뿐만 아니라 사람도 모른다.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가 도데체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제대로 된 사랑과 관심이 없다.
현 제도교회는 지역사회 시민 사회 단체보다 훨씬 못하다. 현제 지역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도대체가 관심조차 없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 역시 지극히 소수이며 현 제도교회에서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런 교회가 하는 가르침과 행위는 아주 저급하다. 종교라고 하는 삶의 최고의 가치를 살고 가르치기는커녕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저급한 가르침이다. 사실상 아수라장이다.
진정한 복음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사람과 물질을 모으고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며 교회의 집단주의에 빠져가는 현실 교회 앞에 분노를 넘어 절망이다. 이제는 기대를 접기로 했다. 지금의 교회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나는 그의 지적에 대해 어떤 저항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에게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발견한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고향과 친척 그리고 그의 아비를 떠나 가나안 자손들이 살고 있는 땅, 곧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 가나안 땅은, 모세가 이 성경을 기록하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했던 바로 그 땅이다. 세상 한 가운데로 보내신 것이다.
하느님은 이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거기서 나라를 이루도록 계획하고 계셨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는 그 땅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바로 그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나는 제대로 ‘나’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일체의 것으로부터 떠나고 있는가. 새벽기도가 나를 떠나게 하는 기도인가. 아니면 나를 더 강화하는 기도인가. 다시 한 번 나를 떠나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머무는 기도인지 성찰하게 한다.
인디언의 영적 스승 매튜 킹이 “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그 또한 기도”하고 한 말에 동의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느님께 하는 게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에 고요히 귀 기울이는 게 바로 기도다. 그 동안 나는 일방적으로 하고 싶은 말만 많이 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하느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은 수없이 많았다. 때로는 맑은 바람소리로, 거친 천둥소리로, 반짝반짝 빛나는 별빛으로 늘 말씀해 오셨는데도 나만 듣지 못했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도 그걸 기도라고 생각한 게 바로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이다.
하느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먼저 인간의 언어를 접어야 한다. 침묵이 바로 하느님과의 대화를 위한 가장 첫걸음이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우선 하느님을 향해 앉아 있기만 하면 고요한 가운데 어떤 알아차림이 있다. 살아있는 나를 알아차리는 체험이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는 체험이다.
어쩌면 지금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기도란 인간인 내가 하느님을 향해 하는 것이지 하느님이 인간을 향해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왔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다. 신앙은 나를 떠나고 집을 떠나고 집착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신앙이다. 고향과 친척과 아비를 떠나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형제에게서 배운다. 이미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듯이 끊임없이 떠나는 이를 통해 하느님 축복의 통로를 열어 갈 것이다.
<부르시니 따르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9. 02. 10 연중 제5주일
쫓겨나고 버려진 이들 안으시며
함께 짓밟히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제 살고자 가차 없이 쫓아내고 버리던
죄인이기에 떠나시라 말씀드립니다.
너 홀로 너의 힘과 의지가 아니라
너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으로(1코린 15,10 참조)
벗들을 정성껏 품는 또 하나의 나로 만들리니
두려워하지 말라시며 부르십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모든 것 버리고 따라나서렵니다.
거친 세파에 찢긴 처참한 이들 씻으시며
추한 몰골이 되신 주님을 만납니다.
홀로 깨끗함과 거룩함에 취한
죄인이기에 떠나시라 말씀드립니다.
너 홀로 너의 힘과 의지가 아니라
너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벗들의 상처를 닦아주는 또 하나의 나로 만들리니
두려워하지 말라시며 부르십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모든 것 버리고 따라나서렵니다.
무릎을 꿇고 더러운 발을 씻기시며
제자들을 섬기신 주님을 만납니다.
겸손의 가면 뒤에서 위로 오르려는
죄인이기에 떠나시라 말씀드립니다.
너 홀로 너희 힘과 의지가 아니라
너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낮은 이들이 디디고 서는 또 하나의 나로 만들리니
두려워하지 말라시며 부르십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모든 것 버리고 따라나서렵니다.
성체와 성혈로 먹히시며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먹기에 급급하고 먹히기 싫은
죄인이기에 떠나시라 말씀드립니다.
너 홀로 너의 힘과 의지가 아니라
너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명의 밥으로 먹히는 또 하나의 나로 만들리니
두려워하지 말라시며 부르십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모든 것 버리고 따라나서렵니다.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만납니다.
벗들의 억울한 죽음조차 애써 외면한
죄인이기에 떠나시라 말씀드립니다.
너 홀로 너의 힘과 의지가 아니라
너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죽음으로써 살리는 또 하나의 나로 만들리니
두려워하지 말라시며 부르십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모든 것 버리고 따라나서렵니다.
‘SKY 캐슬’은 멈춰야 한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행복인가? 불행인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인가? 남의 강요에 의한 것인가? 목적이 소유인가? 존재인가? 우리가 필요한 학문은 자본학인가? 인문학인가?
모두들 드라마를 보고는 ‘해피엔딩’이라고 말한다. 해피엔딩이 아니라 당연한 귀결이다. ‘SKY캐슬’은 멈춰서야 한다. 사회가 학교가 학부모가 청소년, 제자, 자녀를 공동으로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집, 학교, 사회는 그럴싸한 껍데기로 두껍게 포장하고 알멩이는 텅비고 자신은 없어 한없이 갈등한다.
엘리트 피라밋 꼭대기를 보면서 나는 행복을 보지 못했다. 으스대고 뽑내고 교만하고 거드름피고 그것은 모두 불행의 요소들이다. 나는 학교에 있으면서 학교 밖 학생들과 가정 밖 자녀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그들이 문제라고 보지 않았다. 학교, 가정, 사회가 문제였음을 보았다. 그 제자들이 당시에 불행한 것처럼 보였으나 오늘은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 자기를 멋지게 드러내고 자유인으로 자기를 책임지고 살아가는 멋진 제자들이다.
부모들의 욕심은 더욱 커져가고, ‘SKY캐슬’은 층층이 그 양상만 다를 뿐 계속 고공이다. 무엇을 그 드라마에서 보았는가? 우리가 말하는 ‘해피엔딩’이 정확한 답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한다. 시대는 빠르게 변해가고 행복의 기준도 확연히 변해가는데 가정과 사회의 교육현장은 ‘SKY캐슬’ 3대가 이어가길 고집하며 아이들을 고문하고 돌게하고 죽게한다. 그럴수록 자신의 행복은 공익과 거리가 한없이 멀어져 갈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Vox Dei)과 완성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성소(vocatio)는 하느님의 목소리(vox Dei)이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응답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만군의 주님께서 부르신다. 이사야는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6,8)하고 응답한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중 만군의 주님께서 그를 불러 세우신 사도이다.
사도들 중 바오로는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1코린15,8-11)
오늘 복음말씀(루카5,1-11)은 시몬 베드로의 부르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카5,4-5)
보잘것 없고 비천한 사람을 주님께서 부르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선택하신다. 자신은 이에 응답하고 따라 나선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이사6,1,3)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천사들도 기뻐한다. 만군의 주님을 둘러싼 천사들의 환호소리가 온 누리에 퍼져 나간다. “천주께 감사”라는 노래소리가 성전 가득 울려 퍼진다.
하느님의 목소리(VOX DEI)를 듣고 우리는 주남을 따라 나선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우리의 성소(vocatio)는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야 완성됨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다. 거룩함의 부르심에 내가 응답하고 은총 안에서 예수님께 향한 발걸음이 가속도가 붙을 때면 나의 신앙고백은 더욱 커가고 성소는 성숙되어 간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연중 제5주일에)
신神의 한 수手,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벽 강론을 쓰는 집무실이 프리지아 향기로 가득합니다. 어제 뜻밖에 받은 아름다운 영혼의 선물입니다. 이렇듯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들은 곳곳에 있습니다. 이런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이런 분들 하나하나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새벽 수도원 게시판에 붙은 소식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왜관수도원 소속의 노老 수도선배들의 사진입니다. 참으로 기쁘게, 친절하게, 명랑하게, 평생 순종의 아름다운 삶을 사셨던 형제들이 마지막 얼마 안남은 삶 동안 ‘거룩한 순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저에겐 이 또한 감동입니다.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선종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간절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참 성실히, 충실히 살아갑니다. 저에겐 이런 분들이 모두 성인처럼 생각됩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듯 성인聖人은, 의인義人은 수도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어제 받은 두 편의 가톡 문자메시지에 감동했습니다.
“매일 새벽 아침의 강론 말씀이 이렇게 달디달고 멋질 수가 없어요. 일단 읽어봐야 속이 풀리고 잠을 더 청할 수 있는 보약을 쥐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수고를 주님께서 천국에 가시는 날, 친히 마중 나오실 거예요. 저는 그리 믿고 싶어요.”
삶이 얼마나 절박하고 불안하면 강론 말씀에 이런 반응을 하겠는지요. 새벽부터 강론 말씀을 읽으므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와 말씀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매님이 분명합니다. 또 하나의 문자 메시지입니다.
“오늘은 몸울림이라는 신앙인 아카데미 영화모임에 참석하여 영화보고 토론으로 이어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참 좋은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각자 다 다른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들이 참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어제 신문에서 읽는 한 젊은 이의 인터뷰 대목도 생각납니다.
“수능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생각이 그거 였어요. 나도 이제 인간처럼 살아야 겠다.---불안해요. 지금도 불안해요. 한번도 불안하지 않은 적은 없었던 같아요. 그냥 불안을 데리고 사는 거죠.---삶을 간결하게 만드는 것, 내가 나라고 느끼며 사는 게 제일 바라는 거예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새벽 인터넷 기사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대학생들의 정신 건강을 다룬 내용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의 정신건강이 위험한 수준이다. 2018년 3월 전국 대학생 26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대학생의 불안 정도는 고위험 수준이 40%, 잠재적 위험 수준이 30%로 나타났다. 합치면 70%의 학생이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안한 사회,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아파서 사람이듯, 외로워서 사람이듯, 불안해서 사람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 정서입니다. 특히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답은 단 하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제 미사중 시편 화답송이 답을 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제가 자주 묘비명으로 추천해 드리는 성구입니다. 다음처럼 바꿔 불러도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 두려울 것 없어라.” 어찌보면 불안과 두려움은 주님을 찾으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성 아오스팅의 유명한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내 영혼이 당신 안에 머물러 있기 까지는 불안하나이다.”
주님과의 만남에 앞서 우선적인 것이 주님을 찾는 갈망입니다.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은 주님을 찾으라는 일종의 갈망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의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해야 할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바로 이런 갈망으로 주님을 만나러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매일 수도원 제 강론에 댓글을 다는 한 형제의 글도 생각납니다.
“매일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오늘 하루를 사는 ‘삶의 중심’이 됩니다. 아멘”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영혼도 육신도 삽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말씀을 통해 이뤄집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답은 우리 영혼이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 모습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은 말씀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런 갈망이 있어야 주님을 만납니다. 이런 갈망의 사람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야 말로 성소의 표지입니다. 우리의 근원적 불안과 두려움은 하느님을 찾는 갈망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있는 배 두척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배에 있던 어부들,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내면 깊이의 당신 찾는 갈망까지 보셨기에 시몬의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역시 이사야 예언자와 바오로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주님은 먼저 배에 있는 시몬을 찾아 오셨듯이 하느님 역시 먼저 이사야와 바오로를 찾아 오셨고 주님의 찾아 오심에 앞서 이들의 주님 찾는 갈망이 이미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주님께서 마음속 깊이 심어주신 주님 찾는 갈망임이 분명합니다. 바야흐로 주님과의 만남이 시작된 시몬 베드로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아라.”
바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향한 주님 말씀입니다. 어디가 깊은 데입니까? 멀리갈 것 없습니다. 눈만 열리면 바로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다 내 사랑과 희망의 삶의 그물을 내려 풍성한 삶의 의미를, 기쁨과 평화를,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이웃들을 담아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시몬의 대답 역시 우리의 대답처럼 공감이 갑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써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대로 시몬의 갈망이, 불안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둔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니 그대로 인생 허무의 바다에서 허무만 잔뜩 길어올렸음을 상징합니다. 그 마음 얼마나 허전하고 공허했겠는지요. 인생 말년 이런 심정의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수고했는데 살의 그물에 가득 걸린 것은 허무뿐이라는 것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렛의 고백에 시몬은 내심 깊이 공감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주님은 찾아 오셨고 주님을 만난 시몬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주님뿐입니다. 주님 말씀에 겸손히 순종했을 때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순간 베드로는 우리가 주일 미사후 낮기도를 대신해 바치는 다음 시편 성구에 깊이 공감했을 것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로다.”
주님과 시몬의 만남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물고기의 기적에 눈이 열린 시몬 베드로가 주님을 알아 본 것입니다. ‘스승님’이란 호칭이 ‘주님’으로 바뀝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죄 많은 참 나를 발견한 시몬 베드로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남으로 죄많은 나를 만남이 구원입니다. 우리 영혼의 거울인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나는 나의 참 모습입니다. 회개의 순간이자 참 나를 발견하는 겸손의 시간입니다.
이런 것을 구원의 원체험이라 합니다. 평생 살아있는 생생한 추억이 되어 시몬 베드로를 늘 감사와 기쁨으로 깨어 살게 한 원체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평생 살아도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해 참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완전히 헛 산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 나를 살아 보라고 세상에 온 우리들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주님과의 만남이 끝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주님을 따름으로, 파견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의 삼총사 제자들이 된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참 보물 주님을 만나니 모두가 쓰레기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말그대로 자발적 가난의 선택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이런 철저한 외적 포기가 아니더라도 예전의 그는 아닐 것입니다. 여전히 예전 삶의 그 자리에서 소유속에 살아도 소유물의 주인이 되어 이탈과 초연의 자유를 누리며 살 것입니다. 대부분은 이런 성소로 불림 받은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나를 찾아 구원된 시몬의 심정은 바로 행복기도에 나오는 그대로 였을 것입니다.
“주님/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저의 사랑/저의 기쁨/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주님을 만나 완전히 새로난, 참 나를 찾은 바오로의 겸손한 고백도 감동입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미사에 참석한 우리 역시 바오로처럼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고백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오로에 이어 이사야의 주님과의 만남은 얼마나 극적인지요. 미사중 감사기도후 “거룩하시다”는 바로 여기에서 기원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 하도다.”
그대로 오늘 이사야의 주님과 만남의 장면이 미사의 축소판 같습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참 나를 발견한 이사야의 모습이 시몬 베드로, 바오로보다 더 실감나게 전달됩니다.
-“큰 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이어 주님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이사야의 입에 대고 말합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주님을 만남으로 완전히 정화되고 성화되어 하느님의 참 사람이 된 이사야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런 원체험은 평생 이사야의 선교활동에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말씀에 흔쾌히 파견에 응답하는 참 멋진 이사야입니다. 역시 주님과의 만남은 파견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하여 주님을 만난 우리 모두의 파견에 앞선 고백입니다. 이사야, 시몬 베드로, 바오로가 ‘신의 한 수’ 였듯이, 우리 모두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닌 ‘신의 한 수’같은 필연적 존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난 우리 모두가 당신과 함께 복음 선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눈, 귀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은 다르다. <루카 5, 1-1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무엇을 알려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배워서 지식을 얻고 무엇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박사도 되고 전문가로 불리지만, 아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에서 증명하고 결실을 볼 때 배운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하지만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실 때도 그들은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고 베드로는 버렸던 그물을 다시 찾아서 고기잡이로 바다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는 목숨 바쳐 주님을 증거하려고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하느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처음 신앙에 입문할 때 교리를 배워서 무엇을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형식적으로, 의무적으로 따라서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합니다. 교리 시간에 듣고 배운 것을 실생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체험하고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배운 것이 마음에 가려면 10년, 20년, 70년 걸려야 하지만, 듣고 본 것을 몸으로 실천할 때 즉시 마음으로 들어가 깨우침 속에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씨앗이 보관 창고에 10년, 20년 있어도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씨앗은 적과 물이 흐르는 땅에 심겨야 싹이 트고 자라나 결실을 보게 됩니다.
아는 지식을 머리에만 담아두고 실천하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고갈되어 쓸모없는 지식이 됩니다. 가끔 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신앙을 받아들이실 때 기도하라는 말을 들으셨지만 어떻게 기도합니까?”
주의 기도, 성모송, 묵주기도 등 외워서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참 기도는 “당신을 사랑하는 주님을 스스로 찾아 만나고 사랑에 사랑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의 참뜻은 너와 나의 깊은 관계에서 끊임없이 대화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려고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는 믿음의 삶도 몸이 깊은 체험으로 믿음을 깨닫지 못하면 쉽게 잊어버리고 마음의 삶을 떠나게 됩니다.
아직도 하느님이 두렵고, 신뢰심이 가지 않고, 세상의 모든 일과 무관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성령에게 기도하며 몸으로 깊은 믿음의 체험이 있기를 기도하고, 불과 같이 온유하고 바람처럼 억세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분을 맞이하고, 성령과 함께 살아가도록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아버지와 함께 살아 움직이도록 간구하며 아버지 집으로 다가갑시다. 성령을 충만히 받기 위해 성모님처럼 조용히 기도하는 중에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고 제자들처럼 모여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오신 것같이 개인적 피정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식을 배워 익히는 것보다 성령의 진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소리를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한 것같이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의 신앙 지식이 실천을 통해 증명되고 생활하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
곽승룡 비오 신부님
성경에서 하느님은 큰 인물을 선택하실 때 평범한 일상에서 그가 일을 하던 중 나타 부르신다. 주님의 성소는 이처럼 일상에서 발생한다. 구약을 통해서 보더라도 많은 예언자들도 고통 중에, 노예의 억압 상태에서, 그리고 고요한 시간 기도 때 하느님께서 부르신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그 시간이 비록 실패의 시간 같고, 힘든 때이지만 실망치 않고, 낙담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하느님께서는 나를 부르고 우리를 부르신다.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베드로가 그랬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느라고 애쓰고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런데 베드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호수에 그물을 던졌다. 즉시 그물은 고기로 가득 채워졌다. “기적이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두개의 배가 가라앉을 만큼 고기를 많이 잡았다. 베드로는 즉시 주님의 말씀을 알아차렸다. 진리의 알아차림을 체험 하였다. 그래서 앞으로 그에게 생겨날 모든 것을 뒤로하고,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존재한다는 것을 수락하였다. “만약 나(우리)에게 이 말씀이 (개별적으로) 다가왔다면, 나(우리)도 주님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베드로의 성소, 나의 성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느님은 먼저 대체로 작은 것들에 충실한 (우리의) 순종을 먼저 보신다.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 큰일에도 충실하다“(마태25,23)는 주님 말씀처럼... 하지만 세상일에 잡혀있는 자들은 반대로 살아간다. 큰 계획을 세우지만 떠난다. 일상 계획을 크게 조직화하지만 끝을 맺지 못하고, 마지막에 초라 모습으로 종종 돌아온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작은 씨앗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성장한다. 위대한 성인이나 수도원 창설자는 종종 아름답고 화려하며 어떤 큰 것을 세우려는 지향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저도 우리본당을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폐허가 된 곳에 작은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 작은 행동이 오늘까지 큰 운동으로 탄생됐다. 저도 소박하게 말씀드린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하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말한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나은 방법은 오늘 하느님이 나(우리)에게 묻는 것을 “예”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큰일이 이루어 질 것이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부르심의 특징은 먼저 자기부정이다. 인간의 방법은 이런 일에 적당한지, 경쟁력과 능력이 있는지 살핀다. 그런데 하느님의 방법은 반대다. 먼저 누군가를 부르고, 그에게 확신을 준다. 그리고 함께 있겠다고 믿음(신뢰)를 주고, 결국 그에게 맡긴 일에 필요한 것을 주신다. 사랑하는 형자! 주님이 여러분을 통해 예비신자를 부르신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분명 필요한 것을 주신다. 아름다운 한 주 되시길 주님의 축복을 청한다.
제자의 자격
김정일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불안’한 상태의 제자들을 묘사합니다. 제자들은 밤새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여 ‘불안’해하다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고,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자 또 ‘불안’을 느낍니다. 이래도 불안 저래도 불안, 좌불안석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라며 벌벌 떨지요. 아니, 잡지 못하던 물고기를 그렇게나 많이 얻었는데 베드로는 무엇이 두려워진 걸까요? 베드로는 제자단의 으뜸이라는 ‘지위’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마태 16,19)라는 권한도 부여됐지요. 사회적 신분으로 보자면 꽤나 높은 자리입니다. 베드로는 어쩌면 어렵사리 얻게 된 이 지위를 잃게 될까 두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이자 철학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점하는 ‘지위status’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그 지위를 상실하거나 지위 획득에 대해 불확실할 때 ‘불안’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불안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다보니 자꾸 자신의 죄 많음이 보이기 시작한 거죠. 자격이 문제시될 것만 같았고 권한은 박탈당할 것만 같았습니다. 급기야 예수님께 ‘저에게서 떠나 달라’고 외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위와 신분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께는 오히려 그 죄 많음에 대한 인정이 ‘제자의 자격’이었는데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위 상실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속적 지위가 상실될 때, 주 하느님으로부터 또 다른 지위가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주님께서 시키는대로 하면 대박'(루카 5장 1~11)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시몬베드로와 동료들은 수십년 동안 고기를 잡았기에 나름 전문가였습니다.
밤새 그물을 이리저리 던지며 ~
한마리도 잡지 못해 힘이 빠져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물을 던지라 하셔서 던졌더니 그물이 터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자격증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열심히 해서 많은 자격증을 취득하지만 임상이 없으면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수녀님이 저에게 수녀님도 '나도 이러저런 공부를 했고 자격증이 있다고 ‥' 전문가? 세상이 인정해주고 누군가 인정해주는 간판이 주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주님께서 힘이 되어주시면 영적 전문가가 되는것이 수녀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주님 손길을 느끼지 못하면 끈 떨어진 가방!
밤새 머리 쓰고 요리조리 다 해봐도 안되던 것을 한 방에 이루시는 주님만 믿을래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을 믿자!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설명절은 즐겁게 잘 지내셨나요?
아니면 많은 일에 지쳐서 힘들게 지내셨나요?
가족들 친척들을 만나면 사랑으로 잘 대해야지 결심을 했다가도 일에 지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게 되고 말도 퉁명스럽게 변하게 됩니다. ^^*
그렇지만 가족 친지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힘을 얻기도 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제가 길을 가다가 귀엽고 똘똘해 보이는 초등학생을 만나서 “얘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하면 따라올까요?
그 아이는 저를 따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유괴범이라고 신고할 것입니다.
그 상대가 어른이라면 더욱 저를 따라 오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면 더더욱 따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저에게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명령한다고 해도 제가 그 사람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사람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큰 매력을 지녔거나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를 따라갈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전례의 독서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런 큰 매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는 거룩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복음의 첫 제자들은 엄청난 고기가 잡힌 기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이런 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공통된 반응을 보입니다.
이사야는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하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칠삭둥이 같은 나” 라고 칭하면서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시몬은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부족함은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들을 정화시키시고 능력을 부어주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시면서, 그들이 고백했던 그 부족함을 완전히 충족시켜서 온전한 당신의 일꾼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자기 입술이 더럽다고 했던 이사야의 입을 정화시키시고 예언자로 세우셔서 거룩한 말씀을 선포하고 사회의 더러움을 고발하는 깨끗한 입의 소유자로 세우셨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칠삭둥이 같이 보잘것없는 바오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셔서 가장 널리 복음을 전하고 가장 많은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자신은 죄인이라고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했던 시몬을 으뜸 사도로 삼으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교회의 반석 베드로가 되게 하시고 죄인을 용서하는 용서의 전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불림을 받은 사람의 능력과 관계없이 당신이 그 사람 위에 세우신 모든 계획을 이루십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전례의 독서들에서 부르심을 받은 분들이 보여주었던 겸손의 자세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응답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동안 끊임없이 겸손한 태도로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투신했습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시몬과 동료들은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을까요?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라는 문장은 직역하면 “너는 사람을 낚는 자가 될 것이다.”입니다.
사람을 낚는 자(조그론 :분사형)는 조애(생명)와 아그레오(잡다, 사냥하다/ 이끌다)의 합성어입니다.
그 뜻은 ‘산채로 잡다’, ‘생명에로 이끌다’ 등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의 이차적인 뜻은 “사람들을 생명에로 이끄는 사람이 될 것이다.” 혹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가 됩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는 내가 가지지 않는 것은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먼저 내가 생명을 가져야 생명을 전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은 이미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 곧 하느님만이 누리시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를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무런 의혹 없이 따르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님,
그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사랑의 삶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나는 부족합니다.”하고 도망 갈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느님의 사랑에 나를 맡기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고자 노력합시다. 그 사랑의 생활의 결과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내 모든 것을 걸만한 매력이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그러니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도록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도록 노력합시다!
가정 안에서도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웃으면서 합시다.
그러면 먼저 내가 덜 힘들고, 그런 나를 보는 다른 가족들은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작은 사랑의 실천들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우리를 영원한 삶에로 이끌어줍니다.
사실 사랑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다 소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기 위해서 당신 아드님까지 내어주신 사랑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사랑의 계획을 굳게 믿읍시다.
한계 많은 어부
인영균 끌레멘스 수사 신부님
오늘 복음 구절은 우리에게 호수가에 계시는 예수님을 제시합니다. 주님 둘레에는 하느님 말씀에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찬 군중이 모여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 말씀을 알고자 하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실존의 모든 열쇠를 유일하게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고 있고, 인간 삶에 의미를 가져다 주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이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루카 5,8).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들이 죄인임을 느낍니다. 매일 살면 살수록 ‘나는 참으로 큰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리옹의 성 이레네오는 죄 안에 있는 교육적인 측면을 발견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의 죄스러운 본성을 인식하는 사람은 피조물 자신의 조건을 다시 인식하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이 앎은 우리를 초월하시는 창조주께 대한 증거 앞에 우리가 가게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 아들아 (내 딸아),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루카 5,10).
죄인들인 우리는 오로지 예수님 안에서만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사도적인 일의 열매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도구로서 봉사한 분의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사도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참 어부는 바로 주님 그분이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오직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가정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 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거기에서
모든 것을 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르심의 여정은
부탁을 하듯
겸손된 존중에서
시작됩니다.
겸손과 존중이
부르심의
요체입니다
우리의 생활안으로
부르심이 들어옵니다.
부르심의 방향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받아들이는
믿음없이는 결코
깊은 데로 나갈 수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늘
도와주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듯
거짓된 나를 버려야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부르심은 아름다운
인격으로 성숙되어가는
가장 귀한 여정입니다.
부르심은 실천으로
옮기는 실행에 있습니다.
부르심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더 깊게 사랑하기 위한
떠남이며 봉헌입니다.
부르심의 여정은
서로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