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2.16-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17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어, 물가에 심긴 나무 같아 가문 해에도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덧없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다고 하시며, 부유한 사람들은 이미 위로를 받았으니 불행하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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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물질에 의존하는 사람은 사막의 덤불과 같다. 뿌리를 내리지 못해 언제나 삭막함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 뿌리는 풍부한 수분을 흡수하여 가뭄이 닥쳐도 푸른 잎이 변하지 않고, 그의 삶은 알찬 열매를 맺는다(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에 모든 이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그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믿음은 덧없고 부질없는 행위가 된다. 우리는 이렇듯 영원하신 분을 믿고 있다. 우리의 희망은 이 세상을 뛰어넘어 저세상에 닿아 있다(제2독서). 행복한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 있든 그분께서 행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은 주님을 떠나 있는 사람이다. 그는 행복의 주인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이른바 평지 설교의 시작입니다. 이 본문에서 대조되는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은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습니다. 전반부의 행복 선언은 마태오 복음서 5장의 참행복 선언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을 향하여 직접 이인칭으로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불행 선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불행 선언에 근거하여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유함과 즐거움은 바랄 것이 못 되고 오직 내세에만 희망을 두라는 식의 해석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난과 슬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불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됩니다. ‘사목 헌장’은 “사회 질서와 그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여야 한다.”(26항)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선포하는 구원은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전인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아우릅니다. 행복과 불행의 궁극적인 기준은 바로 하느님 나라, 사람의 아들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오직 영원한 행복이신 하느님께만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합니다. 지금 배부르고 부유하고 웃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지 않기에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도 자기들이 가진 것을 나누면서 하느님을 찾는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현세에서 끝나는 가치들을 하느님 자리에 둘 때 참행복은 없습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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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동경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돈’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유함이 행복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코로나 상황으로 가뜩이나 힘들어진 요즘 같은 시기에 솔직히 돈만 있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돈이라는 것은 도통 만족을 모르는 듯합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 있어야 만족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은 대개 지금 자신이 보유한 자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앞으로 자산이 더 많아지면 그때 가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으로 행복해지는 때가 정말 오기는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행복도 아이러니하게 돈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흐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가난하고 굶주리면 행복하지만, 부유하고 배부르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가난은 불행, 부유함은 행복’이라는 공식을 뒤집는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하여 추구해야 할 대상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지 그 방향을 재설정해 줍니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나는 무엇을 더 신뢰하고 무엇에 더 의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신뢰하십니까? 돈의 힘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힘입니까? 도무지 만족을 주지 못하는 돈보다, 존재만으로 충만하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진정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우리는 이미 신앙생활에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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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여덟 가지 행복 선언이 산 위에서 선포되는데,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에서는 네 가지 행복 선언과 네 가지 불행 선언이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어 평지에서 하신 말씀으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받고 누명을 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시고,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칭찬받는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바라고 행복을 추구합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려면 가난보다는 재물이, 슬픔보다는 기쁨이, 굶주림보다는 풍요로움이 당연히 필요해 보이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으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가난이나 슬픔, 굶주림 자체가 좋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가난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말씀도, 가난을 행복으로 알고 참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께만 도움을 바랄 수 있으며, 그래서 더 쉽게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열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재물을 믿고 재물에 의지하며, 부족한 것이 없기에 하느님께 쉽게 기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신 대로,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나눔으로써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함께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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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행복에 대해서 조금씩은 알고 있습니다. 표현은 하지 않아도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확신’을 갖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행복하다고 외치면’ 행복이 도망갈까 두려워합니다. ‘행복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근본이 은총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복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의 가난이라도 그분께서 함께하시면 행복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님 ‘때문에’ 받아들이는 가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가난의 대칭은 부자입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재물은 다른 재물을 ‘끌어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들이 소유에 집착하는 이유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사람이 재물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을 소유해 버립니다. ‘주님 때문에’ 받아들이는 가난은 이 ‘끝없는 욕망’ 앞에서의 ‘절제’를 말합니다. 소유욕 앞에서 멈출 줄 아는 자세입니다.
그러니 부와 가난의 구별을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부자는 소유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든지 주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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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고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고 칭찬받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유물론자들은 주님의 이러한 말씀이 약자들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약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내세에 대한 희망으로 미화시켜 현실을 회피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까지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가르침은 가난하고 굶주리며 슬픔과 박해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현실적 처지를 스스로 위로하라는 말씀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가 느끼는 가난을 통하여 인간의 한계와 세상의 부조리를 깨닫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아니시면 세상 어디에서도 늘 만족하며 살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기회를 얻기에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굶주릴 때 배부름에 대한 고마움을 깨달으며 형제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울고 있을 때 이웃의 슬픔을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며, 또한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우리는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당하는 수많은 약자들의 마음을 이해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현실에서 불행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 세상을 세상의 법칙이 아닌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할 수 있습니다. 참행복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내세를 향한 현실 도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현실을 참되이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무척 엄격하고 무서운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격이 참 더럽다’라는 말을 직장 동료들이 뒤에서 많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 이 형제님이 드디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은 아주 잘하지만, 화를 많이 내는 직장 상사의 은퇴 소식에 모두 좋아했습니다.
이 형제님은 은퇴 후 가죽공예를 배웠고 후에 공방까지 열었습니다. 그런데 공방에 다니는 사람들의 이 형제님에 대한 평가가 이상합니다. 화를 전혀 내지 않고 언제나 다정다감한 유쾌한 ‘천사’ 선생님이라고 말합니다.
전 직장 동료들은 이 형제님에게 왜 이렇게 성격이 변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형제님은 “내 성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서 그래.”라고 웃으며 답하시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이유는 주로 하기 싫은 일,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 마음에 드는 일을 하게 되면, 화를 낼 수 있는 조건에서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어떤 조건도 좋기 때문입니다.
만약 화가 많은 자신이라면 그 이유를 찾아봐야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어떻게 마음에 드는 일로 바꿀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의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물질적인 만족으로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길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일인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8가지의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루카 복음은 4가지 행복론에 짝지어 4가지 불행론이 뒤따릅니다. 루카 복음의 행복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가난을 받아들이고, 굶주릴 수 있고, 울 수 있고, 박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이라고 불평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좋은 일, 마음에 드는 일로 받아들이기에 행복합니다.
제1 독서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행복은 어디에서든 얻을 수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불행하지 않으며, 굶주리고 있다고 불행하지 않으며, 운다고 불행하지 않으며, 박해받고 있다고 해서 불행하지 않습니다. 특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라면 무조건 행복합니다. 하늘에서 받게 될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산다(이해인 수녀).
소멸의 아름다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소멸의 아름다움(필립 시먼스 저, 도서출판 나무심는 사람들 출간)이란 책을 밑줄까지 그어가면서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저자는 한때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뜨기 시작하던', 문단의 샛별이었습니다. 그러나 힘차게 비상(飛上)을 시작하던 그에게 루게릭병이란 희귀병이 찾아옵니다.
장밋빛 꿈을 접기도 전에 죽음의 그림자는 소리없이 그의 옆에 자리잡기 시작했지요. '살아가는 기술'을 배워야 할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는 한 순간에 '죽어가는 기술'(Art of dying)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서서히 다가오던 죽음의 공포, 그로 인한 좌절감이나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초췌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몰골, 그럼에도 세상은 아무런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것을 보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자신은 극심한 고통 속에 번민하고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즐기고 떠들어대고…. 그 모든 것들이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난데없이 다가온 극심한 고통', 그 앞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저자에게 어느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막다른 길에서 만난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깨달음이었습니다.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삶의 일부이며, 결국 성장을 위한 신비'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진실로 용서하고 진실로 마음을 열면 이 세상은 문제 덩어리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라는 깨달음이 그에게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왔습니다.
저자는 행복한 삶을 위한 첫째 원리로 '낙법(落法) 배우기'(Learning to fall)를 제시합니다. 머지않아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사라지므로 미리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落法)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꿈의 좌절, 체력 저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 병고나 죽음 등 언제 닥칠지 모르는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미리미리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 다시 말해서 '인생의 낙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복팔단'(眞福八端)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영원하고 참된 행복은 이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진복판단을 인간 영혼이 완덕에 도달하기 위해 밟아야 할 여덟 계단으로 보았습니다. 이 진복팔단은 순례 길을 걸어가는 교회공동체가 올바른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결정적 방향타 역할을 수행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참된 행복'의 조건 한 가지 한 가지를 묵상하면서 제 삶을 돌아보니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여기면서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와서야 솔직히 인정하는 바이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제 자신의 한계나 무력감을 철저하게 느끼는 순간,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음을 알게 된 사면초가 순간, 막다른 골목 그 끝에 서서 괴로워하던 순간들이 오히려 은총의 순간이었음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의 순간만큼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실하게 하느님께 손을 내밀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가장 하느님과 제 자신에 대해서 솔직했던 순간, 겸손해진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현실적 불행, 그 안에는 묘하게도 진정한 행복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이 납득하기 힘든 진리를 하루라도 더 빨리 깨닫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닥으로 내려가야 올라가며, 죽어야 산다는 그 역설의 진리를 깨치는 순간,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 순간은 우리 신앙이 한 단계 비약적으로 도약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나 인간이 주는 기쁨들은 모두 순간적인 것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지며, 얻었다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일시적인 것들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행복,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죽고 우리 자신이 없어져야만 우리 존재 전체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우리가 없어지는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우리 존재 전체를 당신 영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말끔히 비워진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살아 숨쉬심으로 인해 행복한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행복은 사랑해서 하는 고생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루카 복음의 행복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세속-육신-마귀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속을 못 박는 것은 ‘가난’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 하십니다. 육신을 못 박는 방법은 절제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입니다. 또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은 세상에서 멸시받고 조롱받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으며 웃지 맙시다. 울게 될 날이 있습니다.
오늘 행복선언을 한마디로 말하면 “행복은 사랑 때문에 고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100세를 넘기신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가 내린 행복론의 결론입니다. 인생을 깨우친 이들은 누구나 같은 행복론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 행복하려고 열심히 사는데 행복하지 못합니다. 고생은 하는데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린 왕자’를 한 번쯤은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어린 왕자는 B612라는 작은 별에 삽니다. 어린 왕자의 별에 꽃이 한 송이 피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그 한 송이 꽃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의 행동방식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꽃은 아무리 노력해도 끊임없이 요구하는 까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결국,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자기 별에 뿌리내린 꽃을 떠난 것입니다.
첫 번째 도착한 별에는 위대한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왕은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려 하기에 외로워짐을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두 번째 별에는 허풍쟁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손뼉 쳐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손뼉을 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역시 박수받을 사람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세 번째 별에는 술꾼이 살고 있습니다. 술꾼은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왜 마시냐고 물었더니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그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신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또 부끄러운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별에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린 왕자가 와도 쳐다보지도 않고 계산기만 두드리고 장부 정리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중대한 일을 하는 가치 있고 정확하고 착실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자신이 소유한 별들을 잘 관리해서 그것으로 다른 새로운 별들을 사는 것뿐, 그 별들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로운 일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별은 매우 작았는데 가로등 하나와 가로등 켜는 사람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의 명령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계속 가로등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별이 1분에 한 바퀴씩 돌기 때문에 1분에 밤낮이 반복되어서 쉴 시간이 없습니다. 좀 쉬면서 하라는 어린 왕자의 말에 “내 평생에 하고 싶은 것은 자는 거야”라고 말하며 계속 불을 켰다 끄기를 반복합니다.
여섯 번째 별은 넓은 별인데 나이 든 지리학자가 책을 쓰고 있습니다. 이 별에 살고 싶은 어린 왕자는 그 별에 강과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지리학자는 자신의 별을 단 한 번도 탐험해 보지 않아 모른다고 합니다. 자신은 지리학자지 탐험가가 아니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별이 지구입니다. 지구란 그동안 만났던 왕과 지리학자, 사업가와 주정뱅이, 허풍쟁이와 가로등 켜는 단순노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씩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이 설정은 지구에 사는 대부분 사람이 열심히 고생하며 사는데 행복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돈을 벌다가 이젠 왜 버는지도 모르고 그냥 출근하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고생은 하는데 덜 행복합니다. 가족을 위해 살다가 이젠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는데 일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렇게 항상 고생하고 남는 건 없고 항상 공허하고 피곤하기만 합니다.
행복은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빠지면 아무리 고생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귀한 친구 둘은 여우와 비행기 조종사입니다. 여우는 길들이는 법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항상 4시쯤 오는 노력을 하면 여우는 3시부터 행복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자신을 위해 꾸준히 십자가를 져 달라는 뜻입니다. 어린 왕자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함을 알게 되면서 자기 별에 홀로 남은 장미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부족했기에 십자가가 힘들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비행기 조종사는 어린 왕자가 요구하는 까탈스러운 그림을 그려줍니다. 바로 양입니다. 조종사는 사막에서 빠져나가기도 어려운데 어린 왕자가 귀찮았지만, 그와 친해지며 사막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어린 왕자를 위해 그림을 그려준 고생이 행복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외톨이로 살던 그도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고생을 합니다. 그래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부모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듯이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고생이 헛것이 됩니다.
또 사랑만 외치는 이도 있습니다. 처음의 어린 왕자처럼 사랑은 없는데 자신만 고생한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그러니 고생하는 게 너무 싫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관계의 단절과 외로움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아이들로 키워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맞아야 하는 엄청난 가르침을 말했다가는 아이들이 다 도망가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작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위해 작은 십자가를 져야 함은 알려줄 수 있습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부터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린아이에게 햄스터를 한 마리 선물해 줍니다. 그 햄스터는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정성을 다해 먹이를 주고 아프지 않도록 보살펴주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햄스터의 평균수명은 2~3년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이때 아이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는 “또 햄스터 키울 거니?”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절대 안 키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2년 지나면 또 키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아이가 햄스터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돌봐 주어도 햄스터가 곧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햄스터가 행복하게 살게 해 줍니다.
햄스터를 처음 키울 때 햄스터를 참으로 사랑한 것일까요, 아니면 햄스터의 죽음, 곧 진정한 십자가를 받아들였을 때 햄스터를 사랑한 것일까요. 햄스터가 내 곁을 떠날 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이 사랑스러워 십자가를 져 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햄스터를 사랑하는 것이고 행복한 것입니다. 상대 때문에 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입니다. 자녀가 내 곁을 떠나고 자녀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죽음을 받아들이며 자녀를 위해 나의 십자가를 질 때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가 죽지 않을 것처럼, 그래서 나중에 자녀를 통해 어떤 덕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결말로 끝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십자가를 버렸기 때문이고, 십자가를 졌지만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사랑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가톨릭다이제스트에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흑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의 이야기입니다. 외모 때문에 따돌림을 많이 당했습니다. 변변한 직장도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운명처럼 한 여인을 만나고 겨우 자리를 잡았습니다. 둘 사이에 하느님의 선물로 예쁜 아이가 생겼습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가정에 큰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감전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한쪽 눈과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아내는 간난아이를 업고 남편의 병수발을 들었습니다. 아내는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아픈 남편의 고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남편은 열심히 하는 아내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부부가 어머니처럼 따르는 수녀님이 병실에 자주 찾아왔고, 부부는 다시 힘을 냈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파도처럼 다시금 형제에게 찾아왔습니다. 남은 한 쪽 눈도 점차 시력을 잃어갔습니다. 다행히 수술을 하면서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수녀님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서 의족을 얻게 되었습니다.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장애인들을 위한 상담을 하면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낸다고 합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가 제게는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원하는 것들이 채워지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 성공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수영장이 딸린 넓은 집이 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 있고, 어딜 가나 존경받는 명예가 있고, 명품으로 치장하고 여행도 다닐 수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것 같지만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 많은 시간 힘들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얻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기도 합니다. 반대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아마존의 원주민, 아프리카 내전의 주민, 고향을 떠나 방황하는 난민, 가난한 나라에서 사는 주민들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그분들은 채울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배우고 싶어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꽃은 피고, 사랑은 열매 맺고, 희망이 함께 하는 것을 봅니다. 어린 시절입니다. 지금보다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했고, 잠자리도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해질녘까지 뛰어놀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둥근 밥상에 모여 기도하던 가족이 있었습니다. 꽃과 구름과 들판이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말씀에서 우리는 행복의 또 다른 기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고통과 슬픔은 먹구름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이 하늘의 태양을 없애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가진 사람은 고통과 슬픔 뒤에 밝게 드러나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 고통,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십니다. 가난할지라도, 슬픔 속에 있을지라도,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 고통,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할지라도, 성공했을지라도,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것은 재물, 권력, 명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은 사랑, 헌신,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게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어쩌면 지금 삶의 먼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삶이라는 배가 험한 파도에 몹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폭풍우를 피하고, 그 폭풍우를 벗어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폭풍우를 이겨내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주님의 힘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가야할 곳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나는 늘 행복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행복하니까요
행복에
매달리는
사람은
불행하니까요
행복을
품는
사람은
행복하니까요
행복을
쫓는
사람은
불행하니까요
행복이
나인
사람은
행복하니까요
행복이
남인
사람은
불행하니까요
내가
행복인
사람은
행복하니까요
남이
행복인
사람은
불행하니까요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행복선언(루카6,20-23)은 우리가 주님께서 이루신 부활을 믿고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살 때 가능하다. 주님께서 말씀 하신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루카6,23)
장례 조문을 하며 그 사람의 영정을 드려다 본다. 행복과 불행을 어느정도 살았는가 구분이 된다. 나는 영정 사진을 보며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의 정도를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 분명해 진다.
주께서 말씀하셨도다. “지금 우는 너희는 행복하도다. 후에 웃게 되리니.”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찬미예수님! 이번 2월8일 서울대교구 사제인사발령으로 이 곳 청량리 성당 주임으로 부임한 이용현 알베르또 신부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뜻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53년전 유아세례를 받았던 바로 이 곳 청량리 성당으로 저를 보내 주셨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처음으로 돌아가서 더욱더 하느님의 사제로서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어느 누가 말하길, ‘행복은 우리 안에도 없고, 우리 밖에도 없으며, 우리가 하느님과 늘 함께할 때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들, 곧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사실 인간적으로 바라볼 때 분명히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을 때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는 파스카의 신비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나누며 살다 가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리니 나누며 살다 가자 내 마음이 예수님, 부처님 마음이면 상대도 예수, 부처로 보이는 것을, 누구를 미워도, 누구를 원망도 하지 말자.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것도 적게 가졌다고 불행한 것도 아닌 세상살이, 재물 부자이면 걱정이 한 짐이요 마음 부자이면 행복이 한 짐인 것을,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 닦는 것과 복 지은 것 뿐이라오.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누군가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가슴 아파하며 살지 말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 가자.” 그렇습니다. 행복은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때 시작되는 것이고, 그 행복을 나누게 될 때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 참된 구원의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시편 1장의 말씀을 함께 노래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우리 모든 교우분들이 시편 1장의 말씀처럼 늘 언제나 하느님 안에 함께하시면서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들처럼 삶 속에서 많은 열매를 맺으며, 하는 일마다 다 잘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행복하여라!"
함승수 신부님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이 있고 나중에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지 먹는 순서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엇을 먼저 먹는가의 문제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은 지금 당장의 즐거움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보통 성격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심리적 정신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인내와 기다림 속에서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기 위해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는 힘이 상대적으로 강합니다. 더 나은 삶, 더 좋은 가치에 대한 희망이 현재의 어려움을 견뎌낼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맛있는 것만 골라 먹는 이기적인 식사가 아닙니다. 나의 건강을 위해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 자매를 위해서 상대적으로 맛없는 것들까지 다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맛있는 것을 먹으리라는 희망을 급하게 소모해버리기보다, 그 희망을 마음 속에 품고 삶을 살아갈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행복은 바로 이런 희망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 희망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구분하시는 기준은 단순히 재물을 많이 가졌는가 적게 가졌는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유한 사람'은 자기 삶의 기반을 자신이 소유한 재물에서 찾으려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느님이,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안일한 마음으로 현재의 상태에 안주한 '고인물'이 되어 욕심으로 썩어가기에 불행한겁니다. 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얻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기에 그들은 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갑니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구원을 향해 흐르기에 늘 생명과 활력이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겁니다.
그런 '진리'를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게 사실입니다. 당장의 이익과 세속의 가치들을 쫓는 이들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 모습을 보면 억울하고 속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이미 위로를 받았다'고 하십니다. 이는 세속적인 이익과 즐거움이 주는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 삶의 참된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된 슬픈 상태를 의미합니다. '불닭볶음면'이 주는 매콤하고 강렬한 맛에 길들여진 요즘 아이들은 '봄동 배추전'이 지닌 자연 본연의 달큰하고 고소한 그 깊은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 참된 맛을 모르기에 찾지 않게 되고 점점 더 강하고 자극적인 맛들만 찾다가 위도 장도 다 버리게 되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이 주는 자극적인 위로를 지금 당장 받겠다고 조바심을 내기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위로의 맛을 제대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행복의 핵심은, 우리가 그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비결은 행복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욕망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지금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바라보지 않고 '더 더 더'에 집착합니다. 지금 충분히 행복하고 또 행복할 수 있는데도 자신은 아직 덜 행복하다고, 그러니 더 큰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속적인 가치들로 남들보다 '비교우위'에 서서 자신이 '더 행복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행복을 욕망하고 집착하느라 그 행복을 지금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행 속에서 살게 될 뿐입니다. 반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금 자신이 충분히 행복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줄 알기에,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해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기에 완전한 행복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갑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극과 극이 통하는 인생살이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행복과 불행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 이라고 감탄합니다.
하늘에서 배부르고 웃고 행복해 상 받아 기뻐 뛰게 될 조건들인 거죠.
옛 예언자 돌아가신 훌륭한 분들 성인순교자들이 지금 그렇다는 거죠.
그러나 세상서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 받으면 반대된다는 거죠.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 들으며 막대자석 N극과 S극이 늘 생각납니다.
여기서 느낌은 세상과 하늘의 차이란 한 인생이지만 양극이란 겁니다.
하늘정신 살기와 세속정신으로 살기가 바로 극과극인 한 인생이란 것.
인생 자유라지만 세속정신과 하늘정신 둘 중 어느 쪽을 택해 살 거죠?
행복해 지려거든 가난한자 되어라.<루카 6/17,20-26>2월 13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많은 사람이 더 높은 권력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명예심으로 가지려고 행복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높은 산을 오른 사람 더 높은 산을 오르려 하고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은 더 믾은 아름다운 것을 찾아 나서고 지금의 자기 현상을 만족하지 못하여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돈 많은 사람의 손에 1억은 돈없는 사람의 만원만도 못하여 불만족하게 살아갑니다.
배부르게 먹는 사람은 김치한쪽에 된장국 한 수저의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진수성찬을 차려주어도 맛도 모르고 배가 부름도 모르고 그저 그런 것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감탄과 감격을 느끼는 것에 부지는 그런 느낌 없이 살아갑니다. “ 매사에 감사하고 살아가십시오.” 란 말을 듣지 못하고 매사에 불만만 가지고 더 많은 것에 마음을 빼앗겨 행복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멸시는 당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시고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좋은말만 듣는 사람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보상이 따르고 역보상으로 말씀하시자만 세상의 삶에도 가난한 사람이 행복할일이 더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신부님 외로워서 어떻게 사십니까? 가진 것도 없는데 이제 죽음이 더 가까이 있는 데 슬프지 않습니까? 합니다. 아니요 이 나이가 들어 참으로 행복합니다. 더 권력을 가지려 자리를 탐하지 않고 더 많이 가지려 하지도 않고 더 많은 지식으로 명예를 탐하지 않고 지금 있는 그대로가 저에게 매사 감사입니다.
24시간 말한 마디 않 하고 지내도 침묵 속에 그 많은 말이 내 안에 움직이고 말에 의미를 되 색이며 기쁨을 느끼며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해아릴 길이 없습니다. 과거에 있던 자리를 알고 있어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더 좋은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느끼고 확신을 가지고 살고 있기에 그래서 저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상담이 가능 합니다. 주님을 알고 믿고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행목하다고 하시며 하느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란 말을 무수히 미사 때 마다 반복해서 외치면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하고 세상의 권력 세상의 부와 자기명성을 찾으면 헛소리에 지니지 않습니다.
주님은 힘있는 자를 내치시고 부자는 가난하게 하시고 교만한자는 흩으신다고 하십니다. 잃어버린 양한미리가 주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돌아온 탕자가 잔치 상을 받고 새로운 자녀로 받아드리려 지는 비유도 없는 자 가난한 자입니다. 저는 죄인이여서 주님과 함께 있으려면 주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저는 안다는 지식은 보잘 것 없어 진실한 주님의 지식을 듣고 깨닫기 위하여 영원한 말씀이신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어 본래의 모습을 가지려면 주님이 주시는 주님을 모시는 영성체로 주님과 같아지고 주님이 내인에 살게 됨을 느끼게 되어야 합니다. 죄를 벗어나고 진리를 실천 하고 주님을 살며 복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미사 때 우리는 행복의문을 드나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로 죄의 용서 말씀이 전례로 진리를 듣고 깨닫고 영성체로 저희가 주님 안에 살게 됩니다. 자 이제 이 기쁜 소식을 전합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기도>
2022.02.13. 연중 6주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참 행복이 무엇일까?
어떻게 그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은
바로 이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가는 길인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줄곧 이것을 찾도록
강요 당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내가 공부에로 내몰린 것도
공부를 잘 해야만 그 파랑새를 잡을 수 있다는
어른들의 희망사항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대학이 좋은 직장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곧 파랑새를 만나는 것이라 믿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고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지위로 올라가면
그 파랑새를 취하게 된다는
감언이설에 유혹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어느 곳에도 행복의 파랑새는 없었습니다.
행복은 내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하고
맑고 깨끗하여
오롯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헷갈림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될 때
파랑새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웃을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함께하고
하느님께서 도반으로 주신
벗들과 함께할 때
파랑새는 나에게 손짓하였습니다.
오 나의 주님!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당신을 알게 되어서 행복합니다.
가톨릭신자여서 행복합니다.
프란치스칸이어서 행복합니다.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우리의 행복은 선택입니다. - 하느님 중심의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구나의 보편적 소망이 행복입니다. 그러니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이웃도 행복해야 합니다. 더불어의 행복이요 더불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행복을 선택해서 살아야 합니다. 한 번뿐이 없는 유일회적 인생,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권리요 의무요 책임입니다.
과연 행복하십니까? 과연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소원도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갔을 때, 하느님은 단 하나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행복하게 살았는가?”
바로 하느님이 참 행복임을 말해 줍니다. 궁극의 행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연초에 써놓은 “평생 소원”이란 기도문 역시 참행복에 대한 갈망의 표현입니다.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모세처럼
하느님과 마주하여 대화 나누고 싶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감히 참행복의 하느님이 되게 해달라는 소원의 기도입니다. 이 또한 참행복하고 싶은 영혼의 갈망을 표현한 겁니다. 다음 시편의 고백과 동정녀 축일 때 낮기도 후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주님, 당신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곳 나의 희망 주 하느님이시니이다.”(동정녀 축일 낮기도 후렴)
바로 행복은 선택임을 입증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참행복의 원천인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선택함과 동시에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생명을, 빛을 선택하는 것이니 저절로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됩니다. 진짜 이런 주님 보물을 모신 이가 내적 부자요, 행복한 사람이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세상 행복이 채워줄 수 없는 영혼의 갈망인 행복이요, 바로 영원하신 하느님 만이, 하느님의 사랑만이 비로소 영혼의 행복에 대한 갈망을 해갈解渴시킬 수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참행복의 원천인 주님을 모시고자 이 은혜로운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실 주님의 성체는 그대로 주님의 평화, 주님의 사랑, 주님의 행복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의 주님의 평지 설교중 참행복 선언도 궁극의 행복은 하느님께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선택할 때 이런 행복의 선물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참으로 역설적인 행복입니다. 세상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바로 참행복의 하느님을 모시기에, 이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런 하느님께 궁극의 신뢰와 희망을 두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 누구도 탐내지 않은, 앗아갈 수 없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행복 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처럼 이런 행복한 사람은 ‘그 뿌리를 하늘에 두고 땅을 향해 거꾸로 자라는 나무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화답처럼 들리는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참 통쾌하고 명쾌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여러분의 영혼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세상입니까 혹은 하느님입니까? 새삼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은 참행복의 원천인 하느님 중심 자리에 깊이 깊이 뿌리를 내리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여기 수도자들은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깊이 영혼의 뿌리를 내리는 영성훈련에 전념합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누구나 하느님께 영혼의 뿌리를 깊이 내릴수록 참행복한 삶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한마디가 참 행복을 요약합니다.
반면 참행복과 첨예한 대조를 이루는 불행선언입니다. 새삼 우리의 행복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점검해 보게 합니다. 안개처럼 사라질 덧없는 피상적, 물질적, 일시적, 거짓 행복을 참행복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생각없이, 영혼없이, 참으로 천박하게 하느님이 아닌 세상에, 사람들에게 신뢰의 뿌리를 내릴 때 자초한 불행입니다. 이 불행선언은 저주도 아니고 형벌의 선고도 아닌 탄식이며 경고입니다. 하느님은 누구도 불행하길 원하지 않으시고 모두가 구원받아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이런 불행선언은 그대로 회개의 촉구입니다. 부족한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가난하고 힘든 이들과 사랑의 연대를 이뤄 살라는 실천적 회개의 촉구입니다. 네가지 행복선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네가지 불행선언입니다. 이들 불행한 이들에 대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주석이 참 적절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에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세상 광야에서 하느님을 잊고 이런 황량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황폐한 영혼으로 살아갈 때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도, 폐인도 되는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은 이런 불행한 이를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은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이 모두가 스스로 자초한 자업자득의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런 불행이 아닌 참행복의 하느님을 선택하여 하느님께 하루하루 날마다 깊이 정주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또 하나 참 행복에 결정적 요소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입니다. 바오로의 열화熱火와 같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신에 넘치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도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요! 파스카의 주님은 끊임없이 성령을 통해 우리의 믿음, 희망, 사랑을 북돋아 주어 당신과 함께 참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며 더욱 하느님께 신망애信望愛의 뿌리를 내리게 합니다. 얼마전 교황님의 “부활의 믿음만이 두려움 없이 죽음을 직면하도록 우리를 도와준다.”란 말씀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죽음이 아닌 부활이 마지막 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참행복은 선택이자 은총의 선물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참으로 일편단심 참행복의 원천인 주님을 선택하여 오롯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 참행복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제 자작 행복기도중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이옵니다.” 아멘.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예레 17,5-8)는 행복과 멸망은 어디에 희망을 두는지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와 시편 1장(화답송)의 저자들은 하느님과 지혜가 아니라 사람에게 의지하고, 하느님의 힘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죄에 머물게 되고,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날 것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하느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산다면 사막의 덤불이나 인적 없는 소금 땅과 같이 쓸모없어 버려진 땅에 살려는 것이므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희망을 둔다면, 마치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잘 자라서 줄곧 열매를 잘 맺는 것처럼, 약속된 축복의 땅(예루살렘)을 잘 간직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행복(하느님과 이웃사랑)과 멸망(악을 추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겉으로만 좋게 보이는 것에 믿음과 희망을 가지게 된다면 물이 고이지 않는 저수 동굴을 파는 것(2,13)과 같아 절망이 닥칠 것이고, 비록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신 주님께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루카 6,17.20-26)은 행복과 불행을 선언하는 종말론적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뒤에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열두 사도와 군중을 이룬 많은 제자들과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이 이룬 큰 무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기 위해 약속된 땅에서 예수님과 군중의 만남이 이루어졌음(루카의 공동체)을 말합니다(탈출 19장).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14,23)라고 하실 말씀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복과 불행의 복음적 기준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굶주린 이들을 인도해야 할 제자들에게(집회 25,9)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6,39)라는 말씀을 위한 전제입니다.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신 것(4,19)에 대한 확인이며, 동시에 굶주리고, 울고, 당신 때문에 미움을 받는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루카가 전하는 행복과 불행선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와 약간의 시간이 경과되었고, 교회가 시작되면서 겪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마태오의 행복선언(5,3-12)이 영적인 것에 치중했다면 루카는 당시 공동체 안에서(“지금”) 드러나는 사회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회적 악 때문에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박해 때문에 울 수밖에 없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루카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다.”(1,52-53)는 마리아의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모두 함께 지내면서 공동으로 소유하였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었다고 합니다(사도 2,44-45; 4,34-35).
부유한 이들의 횡포 앞에서 자신을 방어하거나 저항할 힘도 없고, 생존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하는 가난한 이들은(16,19-31) 불의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가난한 이들에게는 주님의 해(희년)가 실현된다는 선포가, 하느님 나라가 오면 의로움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선포가 사치스럽게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한편 가난이란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마음이고, 부유함이란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 살 수 있다는 교만함(신명 8,14)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제 막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이들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위로의 선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위로를 찾을 줄 알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울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것은 재물이 나빠서가 아니라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것은 물론 인색함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기(18,23-26) 때문입니다.
배부름이란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후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탈출 16,3-8) 전제합니다.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을 벗어났음에 감사드려야 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배불리 먹을 것만 찾았지 구원에 대한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하면서 노력하면 된다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배를 채울 것만 찾는 이들, 당장 즐거움을 주는 것만 찾는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기 때문에 불행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은 많았지만 정작 구원을 기다리는 제자들은 매우 적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먼저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만 행복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웃고 우는 이들은 바빌론 유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시며(이사 25,8), 바빌론에서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을 위로의 품에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이사 66,10-11). 그래서 비록 지금은 울지만 하느님께 의지하는 이들은 크게 기뻐 웃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반대로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고 제멋대로 세상을 즐기기만 하는 이들은 지금은 크게 웃으면서 살 수 있겠지만 머지않아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주실”(1.25)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받는 것과 좋은 말을 듣는 것도 우리의 신앙생활과 밀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1,71)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21,17)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 된 것을 잘못이라 말하지 않고, 다른 이들로부터 좋은 말만 들으려고 애쓰는 이들은 지금은 좋을지라도 불행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총애보다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고 가식적인 행동을 하면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1코린 15,12.16-20)는 부활을 부정하는 코린토인들에 대한 반박입니다.
바오로는 자기가 전한 복음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이기에 다른 복음을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15,11).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죽지 않는 분으로, 죽음이 더 이상 그분에게 힘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세상에 들어났기(로마 6,9)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린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지만 죽은 이들의 부활을 부인하기 때문에 바오로가 반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불가분의 관계인데, 하나는 인정하고 하나는 반대한다면 말로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우리들도 부활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며, 영원한 행복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바오로 사도의 선포는 거짓 증언이고, 또 그런 믿음은 바탕도 목적도 없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희망은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거나,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에 불행할 것입니다.
비록 고통이 따를 테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이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약속해주시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머지않아 당신 때문에 많은 박해를 겪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박해가 고통스럽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가 선포된다는 반증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으며, 현세적인 것에 집착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저버리고 불행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모든 것에 대한 권한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다가 불행을 끌어들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이웃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자기 배만 채우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주 듣고 있습니다. 자기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자기도 되받을 것입니다(루카 6,38ㄷ).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드러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겪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1베드 4,16)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바라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기에 하느님께로부터 영원한 행복을 보장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것이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울게 될지라도, 엉뚱한 모함으로 미움을 받기 때문에 슬퍼하게 될지라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극복하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런 희망으로 사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이기우 신부님
1. 새 하늘을 열어젖히신 예수님께서 새 땅을 펼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루카 6,23)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의 참된 행복을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열두 사도와 함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도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모두 이 길을 보았습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이 배부르도록 먹을 것을 나누면 천국이 땅에 펼쳐집니다. 지금 우는 사람들이 웃을 수 있도록 위로해주면 천국이 땅에 펼쳐집니다. 나누고 위로해주는 선행을 하다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때에도 천국은 땅에 펼쳐집니다.
2. 일찍이 예레미야 예언자도 이렇게 내다보았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시편의 시인도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 1,1-2).
3. 이렇게 예수님께서 새 하늘을 여시고 새 땅을 펼치셨기 때문에,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아들로서 부활하신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1코린 15,11-12). 이 말은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여신 새 하늘과 펼치신 새 땅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부활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4. 그러나 우리가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거부하고, 부활 신앙을 불신하며, “현세만을 위하여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장 가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1코린 15,19). 예레미야도 이런 가련한 사람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사람은,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예레 17,5-6). 이런 자들에 대해서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시편 1,6).
5. 악인들은 부유해도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기 때문에 천국의 행복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악인들은 배불러도 굶주린 이들을 외면하기 때문에 지옥의 불행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죄악이 저질러져도 못 본 척하기 때문에 그 악을 키우는 자들입니다. 지옥이 여기에 있습니다.
6.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세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옥을 키우는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부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눈앞에 보이는 현세에만 희망을 거는 자들도 있습니다. “늘 깨어 있어라.”(마태 24,42) 하시는 예수님 말씀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7.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세상에서 부활한 삶을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기초로 청사진을 그렸으니, 그것이 사랑의 문명을 위한 파스카 과업입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파생된 네 가지 최고선의 가치와 세 가지 공동선의 가치가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씨줄이 되어야 할 최고선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가치입니다. 날줄이 되어야 할 공동선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모든 이에게 공동선의 혜택이 고르게 주어지는 공정함의 가치와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이 혜택을 주어지도록 하는 배려의 가치가 있습니다.
8.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고발하는 인간형은 하느님께 의탁하기보다 사람에게 의지하고,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겼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상숭배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등장합니다. 반만 년 전 이 땅에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 민족은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천손의식(天孫意識)으로 하느님을 섬겨 왔었습니다. 그리하여 받들던 하늘의 뜻이 바로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런데 지배층과 지식층이 불교와 유학을 들여온 이래 무려 2천 년 가까이 하느님 신앙은 잊혀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민간으로 숨어 들어간 하느님 신앙은 지배층과 지식층으로부터는 무속으로 취급당했지만, 민족의 심성 깊숙이 자리잡고서 마치 거대한 지하수맥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민간 신앙을 흡수하여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가르치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칠성단을 세웠는가 하면 유학에서도 민간의 효 관념을 따라서 조상 공경을 하느님 제사 대신에 했던 것인데, 고약한 것은 조상제사를 양반 계층만의 특권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8. 조선시대 후기에 이 땅에 들어온 천주교는 지하에 흐르던 신앙의 거대한 수맥을 터뜨려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도 교리로 제천의식을 일깨워 가족들이 모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바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기도는 제물 없는 제사입니다. 제사의 요체가 바로 하느님과 인간이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등 교리로 천손의식을 일깨워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하느님을 믿는 벗, 즉 교우로 지냈습니다. 당연히 노비로 데리고 있던 천민들은 모두 해방시켜 주었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열심한 천주교 신자요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제사금지령 때문에 양반 신자들이 대거 떨어져 나간 후에도 천민 출신 신자들의 입교 행렬은 계속 이어졌으며 그 수효는 더욱 늘어났습니다. 치명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이 이 천민 출신 신자들입니다. 실제로 천민 출신으로 백정을 직업으로 지니고 있다가 입교한 황일광 시몬은 “나에게는 천당이 둘이 있소. 하나는 죽어서 갈 천당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서 양반 교우님네들이 나를 인간으로 대접해 주는 교우촌이요.”라고 고백하며 죽어갔습니다. 이렇듯, 천주교는 기도와 평등에 관한 교리로 우리 민족이 하느님과 소통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 소통이 우상을 숭배하던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제천과 천손으로 대표되는 민족 정체성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9. 하느님과 소통하며 믿을 수 있는 자유는 인간이 누려야 할 모든 자유의 기본입니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오늘날에도 평등의 가치는 더욱 요긴합니다. 정치적 평등은 이루었다고 하겠으나, 경제적 평등은 아직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이 주로 종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차별받는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10.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며 평등을 실천하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저항하며 기도로써 하느님과 소통했다면, 유신 독재가 극성을 부리던 1970년대에 등장한 사제들은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일제 식민 통치가 되살아난 듯이 정치적 자유가 압살당하던 암흑 속에서 정의의 횃불을 들었는데, 이 당시 자유가 탄압받아 희생자가 날 때마다 사제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나서는 그 메시지를 알리려고 시민들을 향해 시가행진을 할 때마다 부르던 성가가, “장하다, 복자여!” 라는 제목의 순교자 찬가였습니다. 그야말로 순교정신을 이어받아서 정의를 외쳤던 것입니다.
11. 우리 사회에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화해를 실현하자는 담론을 촉구한 계기는 1989년에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 성체대회였습니다. 그 전에도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운동은 물밑에서 계속되어 왔었지만 당국의 탄압 때문에 여론화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두 번째로 방한하여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 성체대회를 요한 바오로 2세가 주관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우리 나라에도 평화의 가치를 여론화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 냈습니다.
12. 교우 여러분!
이제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재확인하면서, 또한 우리는 인간 존엄성을 중심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선의 혜택을 공정하게 누리는 사회를 만들 후보가 누구인지, 사회적 약자를 따뜻하게 배려할 후보는 누구인지를 가려야 합니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가치는 물론 공동선의 가치를 후퇴시키지 않고 오히려 증진시킬 후보와 정당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선택에 있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비롯한 독서의 말씀들이 매우 선명하고 정확한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 줄 사람, 지금 우는 사람들을 위로해 줄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설사 이러한 선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오해를 받는다 해도 우리는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투표를 복음과 공동선의 기준에 따라 행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복음선포 행동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마태오 복음(5,1-12)에서는 산상설교로, 루카 복음에서는 평지설교로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신앙인들은 구원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올라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신다.’ 즉, 우리가 당신을 향해 올라갈 수 있도록 당신을 낮추어 내려오신다는 의미이다.
복음: 루카 6,17.20-26: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루카 복음에서는 4개의 축복이 나온 다음 4개의 저주가 나오는데 이렇게 축복과 저주가 쌍을 이루게 한 것은 ‘축복’의 의미와 효과를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데 복음 내용을 잘 조명해주고 있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5-8절).
성서에서 ‘축복’이란 미래에 얻게 될 기쁨을 선포하거나(이사 30,18; 32,20; 다니12,12), 현재의 기쁨에 감사를 드리거나(시편 32,1-2; 33,12; 85,5-6.13) 보상에 대한 약속을 표현하는데(잠언 3,13; 8,32.34; 시편 1,1; 2,12) 사용된다. 따라서 축복은 항상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주실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어떤 희망 사항이나 원의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상황을 뒤집고 그 나라를 실현하실 것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오늘 복음의 축복이 현재 상황이 뒤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가난한 이들이 부유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그런 상황으로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축복은 불행한 사람들과 행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처지만 바뀔 뿐 여전히 세상에 불의는 존속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 그 때문에 다시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일어난다. 즉 정신적 내면 상태의 변화와 또한 마음의 회개로 말미암은 외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이 사회에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고통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여기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면이 충분치 못할 뿐이다. 그들이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밝은 생활을 할 때는 부유하다. 이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활이 감추어진 차원 즉 세상이 간단히 알아챌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상의 부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은 단순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 마음의 개방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청하는 사람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와 참된 재화와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형태로 모든 이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축복’이나 ‘저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의 도움이 필요한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다 함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육체적 정신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채워야 하는 그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영적, 물질적인 악에 대해 회개하는 용기를 가짐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나 자신의 마음의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23절).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알아듣기 힘든 역설적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보증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고통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가난하게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끊고 살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송잔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말씀은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한 사람들을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 그리고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으로 불행한 사람들을 부유한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 그리고 웃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에 대해서 묵상해봅시다.
복음의 내용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가난은 눈에 보이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믿는 이들, 그리고 하느님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은 배부르게 될 것이고 우는 사람들은 웃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적으로 굶주리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 행복해질 수 없음을 알 때 비로써 하느님을 찾게 되는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는 이들도 같은 맥락인데 세상으로부터 희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울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불행한 사람들에 대해서 묵상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부유한 사람들은 대체 어떤 이들일까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모두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졌다고 생각하는 이들,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지 않는 이들이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는 실제로 부자들과 실제로 가난한 이들도 다 해당 될 수 있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배부른 사람들과 웃는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배부른 사람들은 오직 자기의 배부른 상태에 만족하여 다른 이들을 돌보지 않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또한 웃는 이들에 대해서 불행하다고 말하시는데 여기에서의 웃음은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웃음이 아닙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사는 이들, 그래서 다른 이들을 비웃는 이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행복선언에 나오는 내용들은 하느님을 향한 것이고 불행선언에 나오는 내용들은 다른 이들과 관계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먼저 하느님을 찾고 우리들의 시선을 그분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오직 행복은 하느님을 찾고 오직 그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이들이 이웃에 눈길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녀로써 우리들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이들이 아니라는 것은 귀에 따갑게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세상이 주는 것에 좌지우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앞으로 가야할지 옆으로 가야할지를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직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만 생각하시면서 세상의 생활을 한다면 우리들은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아주 예전에 어떤 분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으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올바른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에 노신부님께서는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반대의 삶을 살면 바로 올바른 신앙인이 됩니다.” 아멘!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하는
행복이다.
행복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이 시간을
견딜 수 있다.
모든 행복의
시작은 행복의
주님이시다.
행복한 사람
예수님께서
진짜 행복을
가르쳐주신다.
행복이란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진실한
울음이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참된
행복도 없다.
행복과 슬픔이
교차하는
우리들 삶에서
행복을 다시
일깨워 주신다.
행복은
삶처럼
멈추어
있지 않다.
멈추어 있지
않기에 서로를
향한다.
행복도
철이 들어야
한다.
생활의 자리가
바로 행복의
자리이다.
조금씩 조금씩
삶을 사랑하게
되는 행복이다.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삶의
자세인 행복이다.
우리가 사람임을
아는 행복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의
하루이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행복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계신다.
행복은 생활의
반성에서 더욱
풍요로워진다.
행복의 방향이
주님께로 향한다.
행복은
주님과 함께
울다가
주님과 함께
웃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시간은
울음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안다.
끝내 자녀들이
행복하길
바라시는
하느님이시다.
행복과 창조
사람과 행복은
하나이다.
행복하다.
행복은
사랑의
마음이다.
이 사랑의 마음을
나누고 드리는
행복한 주일이다.
2015년 90만명의 인스타그램의 팔로워를 가지고 있는 호주의 모델 에세나 오닐은 “소셜 미디어는 진짜 삶이 아니다(Social Media Is Not Real Life).”라는 말을 하고서 모든 계정을 삭제하고 소셜 미디어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녀는 가짜 삶을 위해서 한주 50시간씩 사진을 찍었고, 팔로워가 늘어날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했습니다. 매일 자신이 얼마나 근사한지를 증명해야 하는 강박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비참했다고, 왜냐하면 인터넷 안에서 자신은 가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멋있게 보이는 사진을 한 장을 위해 똑같은 포즈로 100장이 넘는 사진을 찍어야했고, 조금이라도 날씬해 보이기 위해 음식을 거의 먹지도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감추고 진한 화장으로 가린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다른 이들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을 가꾸어 나가게 되지요. 진짜 내 모습은 그렇지 않은데, 가짜의 내 모습을 통해서라도 행복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세나 오닐의 고백처럼 가짜의 내 모습 안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기준으로는 불행하게 보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고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을 생각해봅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좋게 말하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 같은데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요. 그에 반해 부족함이 많은 사람은 주님이 필요하고 이런 사람들과 기꺼이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세상 안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나중에 하늘에서 받을 상에 집중하는 하늘 나라에서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주님의 행복은 결코 죽음 이후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병자들을 고쳐주실 필요도 없고, 마귀를 쫓아내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세상의 기준으로는 불행의 상황이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지금의 나를 꾸밀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신다는 것 자체에서 행복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때 그랬더라면’ 이라는 말을 그만두고 ‘이번이야말로’라는 말로 바꾸라(스마일리 브랜튼).
자긍자시(自矜自恃, 투에고)
설령 세상 모두가 차가운 바닷 속으로 당신을 밀어내도 절대 자신을 버려선 안 된다.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나를 믿어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죽고 못 살던 사이도 혈연으로 맺어진 친척이나 가족도 어떠한 계기로 인해 한순간에 남남으로 돌아서기도 하니까
나날이 무정해져만 가는 세상에서 자신마저 믿을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슬픈 일이 아닌가?
맞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간직해야 합니다. 내 자신만이 내 안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또 주님 앞에 나아가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 것은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나가는 현세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고 멀리 내다봐야 한다.’, ‘두발은 비록 땅에 딛고 서 있을지라도 고개는 늘 하늘을 향해야 한다.’, ‘큰 마음 먹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현실과 마주치면 언제나 코 앞의 일에만 몰두하고 목숨을 거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 말씀들은 참으로 뜨끔하면서도 은혜롭게 다가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미야서 17장 5절, 7절)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코린토 1서 15장 19절)
우리 모두 지금까지 이 한 세상 살아오면서 얼마나 자주 체험했습니까?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변한다는 것을. 그리 든든하던 성채 같던 ‘그’도 언젠가 무기력하게 허물어진다는 것을. 그 뜨거웠던 한때의 사랑도 언젠가 참담하게 식어버린다는 것을. 결국 이 세상 것은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그러니 인간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렇다고 인간에게 모든 것을 걸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현세를 충실히 살아가지만, 또 다른 세상을 언제나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의지하고 돌아갈 곳은 영원불변하신 주님이요, 세세대대로 허물어지지 않는 불멸의 도성, 하느님 나라 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운전 중에 ‘지나간다’는 멋진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귀담아 들어보니 가삿말이 참으로 복음적이었습니다.
“감기가 언젠간 낫듯이 열이나면 언젠가 식듯이 감기처럼 춥고 열이 나는 내가 언젠간 날거라 믿는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듯 장맛비가 항상 끝이 있듯 내 가슴에 부는 추운 비바람도 언젠간 끝날 걸 믿는다. 지나간다. 이 고통은 분명히 끝이 난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이렇게 갑자기 끝났듯이 영원할 것 같은 이 짙은 어둠도 언젠가 그렇게 끝난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혹독한 고통과 시련, 결핍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선과 전망은 언제나 더 먼곳을 향해야겠습니다. 이 세상 것이 너무 연연해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소홀히 해서도 안되겠지만, 너무 연연해 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이 세상 것에 눈길이나 발목을 사로잡히지 말고 주님 나라를 향해 시선을 돌림을 통해 보다 자유로워져야겠습니다.
경솔한 부자들은 마치 여기 이 세상에 언제까지나 머물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행동하고 안주합니다. 또 다른 세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합니다.
그런 부자들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주님 나라는 필연적으로 다가옵니다. 주님 나라가 더디 오기를 바라는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간절히 주님 나라를 기대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복음 6장 20절)
아프도록 사랑하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소녀가 산길을 걷다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든 소녀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비를 구해 주었지만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긁혀 피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순식간에 천사로 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와 자기를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소녀는 망설임 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 살게 해주세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는 알았다며 소녀의 귀에 무슨 말인가 소곤거리고 사라졌습니다.
그 후 소녀에겐 일평생 늘 행복이 떠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할머니가 죽기 전에, 그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나비 천사를 구해 준 적이 있지. 그 대가로 나비천사가 나를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었어. 그때 천사가 내게 다가와 내 귀에 대고 ‘나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지금 나를 구해 준 것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꼭 도와주세요. 그럴 때마다 행복 에너지를 많이 보내드릴게요.’ 라고 속삭이고 떠나갔습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결국 깨달은 것은 더 많이 줄수록 더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주기 위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꽃은 꽃을 피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꽃은 아름다움을 풍기고 꿀을 주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사람 또한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줄 때 태어난 소명을 다 하게 되는 것이고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움을 풍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가난해지셨겠습니까?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굶주린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왜 굶주리셨겠습니까?
배고픈 자녀들을 보시며 당신만 배불리 어찌 드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또 왜 우셨겠습니까?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당신 자녀들을 보며 어찌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왜 미움을 당하셨습니까? 아버지의 뜻만을 따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프도록 사랑하면 아픔은 없고 더 큰 사랑만 있다.”(마더 데레사)
그렇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기에 나에게 남는 것은 가난과 배고픔과 슬픔과 멸시뿐일 수 있습니다.
성모님도 당신이 가지신 전부인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해 속죄 제물로 봉헌하셨습니다.
그 때 예언자 시메온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당신의 전부를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고통스러울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은 아낌없이 봉헌하십니다.
스펀지는 그 안에 스며든 물을 최대한 많이 짜낼수록 더 많은 새로운 물을 흡수합니다.
우리의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이 남을 행복하게 할수록 더 새로운 행복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영광스러운 승천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비워내지 않으면 어떻게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아프도록 사랑하면 아픔은 없고 더 큰 사랑만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의정부 어머니 집에는 어머니가 돌보는 화초들이 있었습니다. 30년이 넘은 것도 있었습니다. 화초들은 어머니와 함께 3번 이사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화초들과 대화를 하셨고, 화초들의 잎도 자주 닦아 주셨고, 화초들의 입맛에 따라서 물을 주셨습니다. 어머니를 만난 화초들은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30년 이상을 화초들과 함께하신 어머니도 행복하셨을 것 같습니다.
주변을 보면 저와 함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13년 동안 큰 탈 없이 제가 원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저를 데려다주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타이어도 한번 바꾸었고, 엔진오일도 몇 번 바꾸었고, 배터리도 한번 바꾸었고, 와이퍼도 몇 번 바꾸었지만 제게는 든든한 친구와 같습니다. 저의 생각을 적을 수 있는 만년필도 고마운 친구입니다. 5년 넘게 저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노트북과 스마트 폰은 저를 또 다른 세상과 만나게 해주는 소중한 친구입니다. 부족한 저의 생각과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책들도 고마운 친구입니다. 어머니처럼 사랑과 정성으로 대하지는 못하지만 함께 있기에 행복한 친구들입니다.
예전에 ‘행복’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행복은 채우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작은 것일지라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울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비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집니다. 그러기에 채우고 소유하는 것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누가 저에게 행복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한다면 저는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또 질문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행복이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길과도 같아서 처음에는 없는 듯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 내린 마당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이 작은 길을 냈고, 신자들이 길을 내면서 성당까지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진리를 향해서 길을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진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돈으로 따진다면 저는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명예로 따진다면 저는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권력으로 따진다면 저는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건강으로 따져도 그렇습니다. 외모로 따져도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감히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분께로 조금씩 서툴지만, 발길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부족하지만, 느린 걸음이지만 포근한 마음으로 인내하시며 저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주변에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분들을 만날 수 있고 그런 만남 속에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행복은 돈이나, 명예, 권력이나 힘으로 맛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언제든지 느낄 수 있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게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어쩌면 지금 삶의 먼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삶이라는 배가 험한 파도에 몹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폭풍우를 피하고, 그 폭풍우를 벗어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폭풍우를 이겨내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주님의 힘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의 길는 어디에?
서동신 신부님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꿉니다. 행복이 꿈으로만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을까! 그러나 불행이 꿈틀대며 더욱 커져만 가는 것이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행복 추구는 인생 목적이며 인류가 나아갈 방향이것은 확실합니다. 이상과 현실 혹은 현실과 이상에 억매이지 않을 때 참 행복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이상에만 매어있어서도, 아주 현실에만 매여 있어서도 참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참 행복은 믿음에서 토대를 얻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믿음은 희망을 낳고 그 희망은 믿음에 의해 사랑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1고린토15,17)라고 설교합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저주와 축복(예레미아 17,5-8)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먼저 저주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이는 아집에 사로잡혀 탐욕의 그 끝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받는 사람은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예레미야 17,7)라고 말하면서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가 복음사가는 행복과 불행(루가 6,20-26)을 이야기 합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로서 하늘나라가 그들의 소유가 될 것을 말합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멸시와 천대를 받고 쫓겨나는 사람들 등이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들은 탐욕으로 가득차서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임을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래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며 평화를 사랑하여 서로 나누며 사는 신원을 가진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욕심이 커져서 불행의 길을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내 가정이 행복해하고 본당공동체가 화기애애하며, 지역사회가 상생하는 것을 가서 온 나라가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아멘.
<행복한 사람 그리고 불행한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9. 02. 17 연중 제6주일
누군가를 믿고
누군가를 바라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와 함께 하고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홀로 있을 수 없기에
곁에 누군가를 두고
누군가의 곁에 서는
홀로는 아무것도 아닌
함께하기에 모든 것인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도 바라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와 함께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내어주지 않는
홀로 있을 수 있는 듯
곁에 아무도 두지 않고
어느 누구의 곁에도 서지 않는
함께하면 빼앗기는 듯
홀로 모든 것을 움켜쥐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제가 컴퓨터 문서 작업을 하면서 종종 하게 되는 실수 중에 하나가 한글자판과 영문자판을 바꿔주는 변환키를 누르지 않아서 한글 작업을 했는데 화면에는 영문이 적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문서작업 중에 같은 실수를 하면서 조금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한글로 ‘행복’이라는 글자를 치게 되었는데 행복의 첫 글자 ‘행’이라는 글자를 치니까 모니터 화면에 영문으로 ‘GOD’ 하느님이라는 글자가 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드는 것이 역시 행복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느님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행복은 우리 안에도 없고, 우리 밖에도 없으며, 우리가 하느님과 늘 함께할 때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들, 곧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사실 인간적으로 바라볼 때 분명히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을 때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는 파스카의 신비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2019년 2월 16일, 오늘이 바로 존경하올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돌아가신 지 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생전에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나누며 살다 가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리니 나누며 살다 가자 내 마음이 예수님, 부처님 마음이면 상대도 예수, 부처로 보인 것을, 누구를 미워도, 누구를 원망도 하지 말자.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것도 적게 가졌다고 불행한 것도 아닌 세상살이 재물 부자이면 걱정이 한 짐이요 마음 부자이면 행복이 한 짐인 것을,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 닦는 것과 복 지은 것 뿐이라오.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누군가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가슴 아파하며 살지 말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 가자.”
그렇습니다. 행복은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때 시작되는 것이고, 그 행복을 나누게 될 때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 참된 구원의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한 모든 이들, 가난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 우는 이들, 박해를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바로 행복을 키워가는 삶이자 구원의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연중 제6주일 제27차 세계 병자의 날 교황 담화 요약(다해) 루카 6,17.20-26; ’19/02/17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이 말씀은, 거저 주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자랄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제27차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교회는 자신의 모든 자녀, 특별히 병자들의 어머니로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보여 준 것과 같은 너그러운 행위가 가장 믿음직한 복음화의 수단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병자들을 돌보는 데는 소명감, 온정, 그리고 상대방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손길처럼 기꺼이 베푸는 소박하면서도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묻습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코린 4,7) 바로 인간 생명은 선물이기 때문에 개인의 소유물이나 재산으로 평가 절하될 수 없습니다. 특히 “생명나무”(창세 3,24)를 조작하도록 인간을 유혹하는 의학과 생명 공학의 발전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날 버리는 문화와 무관심의 문화에서, ‘내어 줌’은 개인주의와 사회 분열에 대항하는 가장 적절한 패러다임이 됩니다. 또한 이 ‘내어 줌’은 민족들과 문화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와 다양한 형태의 인간적 협력을 촉진합니다. 대화는 내어 줌의 전제 조건입니다. ‘내어 줌’은 단순히 선물을 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산이나 물건의 이전이 아니라 자기 증여를 의미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러한 상호 인정이 사회관계의 기초가 됩니다. ‘내어 줌’은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강림으로 정점에 이른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우리 각자는 가난하고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삶의 모든 단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이의 도움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타인이나 어떤 상황 앞에서 ‘피조물’로서 우리가 지닌 한계를 언제나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을 솔직히 인정할 때, 우리는 겸손해지고 삶의 중요한 미덕인 연대를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은 우리가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선을 증진하도록 이끕니다. 동떨어진 세계가 아닌 다른 이들과 맺는 ‘형제적’ 관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공동선을 목적으로 사회 연대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그리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우리 한계들을 극복할 수 없기에,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다른 이에게 의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기쁨과 존경의 마음으로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성녀를 떠올리고자 합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와 병자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사랑의 모범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너그럽게 전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인간 생명, 특히 태어나지 못한 아기와 버려져 외면당한 이들을 환대하고 보호하면서 모든 이를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 그분은 길가에 버려진 채 죽어가는 쇠약한 이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그들의 존엄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들이 초래한 빈곤이라는 범죄에 대하여 그들의 책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더 데레사에게 자비는 자신의 모든 일에 맛을 내는 ‘소금’이었습니다. 또한 자비는 빈곤과 고통으로 눈물조차 말라버린 많은 이들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도시의 변방과 삶의 변방에서 펼쳐진 성녀의 사명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 곁에 계시다는 것을 알려 준 훌륭한 증언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는 우리 행동의 유일한 기준이 언어, 문화, 인종, 종교와 무관하게 모든 이를 향하여 거저 주는 사랑임을 일깨워 줍니다. 성녀의 모범은 끊임없이 우리를 이끌어, 우리가 이해와 온정의 손길이 필요한 모든 이, 특히 고통받는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지평을 열게 해 줍니다.
거저 주는 무상성은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에 누룩이 됩니다. 자원봉사자들은 사회보건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착한 사마리아인의 영성을 호소력 있게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세속화된 세상에서 여러분이 계속해서 교회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자원봉사자는 귀여겨들어 줌으로써 아픈 이들이 수동적인 치료 대상에서 벗어나 관계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이러한 관계는 아픈 이가 희망을 되찾고 더욱 수용적인 태도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자원봉사 활동은 내어 주고자 하는 깊은 바람에서 나온 가치와 행동과 생활양식을 전달합니다. 또한 이는 더욱 인간다운 의료를 실현하는 방법이 됩니다.
가톨릭 의료 기관은 영리보다는 인격적 보살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건강에는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이 꼭 필요하며, 이러한 건강은 신뢰와 우애와 연대도 요구하는 관계적인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는 함께 나누는 것일 때만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보화입니다. 거저 줌의 기쁨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을 드러내는 척도입니다.
병자의 치유이신 성모 마리아께 여러분 모두를 맡겨 드립니다. 대화와 환대의 정신으로 우리가 받은 선물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는 형제자매로 살아가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주고, 이타적인 봉사의 기쁨을 알 수 있도록, 성모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한민택 신부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사람이 그분께 모여들었습니다. 모두 그분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입니다.(루카 6,17-19)
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차분하게 눈을 들어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을 건네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 군중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분의 힘을 통한 즉각적인 치유보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은 보통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군중이 좇아가는 길의 정반대 편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합니다. 가난, 굶주림, 슬픔, 미움과 추방, 모욕과 중상… 그보다 더한 불행 중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행복을 찾기 위해 바로 그곳으로, 곧 사람들이 가장 행복과 멀리 있다고 여기는 곳으로 우리의 눈길을 돌리라고 합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길을 찾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은 조개가 긴 시간에 걸쳐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단 한 번에 진주로 변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신앙은 마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서기를, 스스로 길을 걷기를, 시련을 헤쳐가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술과 같이 주어지는 환상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변화와 성장, 인격의 완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과 자유를 찾는 과정에서 더 개방된 존재로 성장하기를, 시련을 통해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시련이 없는 탄탄대로를 걷기보다 시련 속에서 견디고 버티며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로써 그분과의 우정이 돈독해지기를, 신뢰가 더욱 굳어지기를, 우리의 인격이 그분을 닮아 겸손해지고 온유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시간 안에서 우리의 변화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원이 아닌 마술이나 눈속임일 것입니다. 동전을 넣기만 하면 음료를 제공하는 자판기처럼, 사람들은 즉각적인 답을 바랍니다. 바로 주어지는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나 마술처럼 주어지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말해줍니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사람의 말로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장할 시간, 변화할 시간, 자신을 깎고 뛰어넘을 시간 말입니다.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은 책임 없는 말장난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사실은 삶의 근본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시련 속에서만 성장한다는 것, 바로 그곳을 관통해야만 자기를 깨뜨릴 수 있으며,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진리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만나 맛좋고 향 좋은 포도주로 익어가는 과정이라면, 삶에서 겪는 시련은 우리가 잘 ‘익어가도록’ 하는 ‘효소’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찾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행복은 가장 행복이 없을 것만 같은 우리 삶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은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지금 어디서 행복을 찾고 있느냐고.
행복과 불행의 완벽한 반전
김혜윤 수녀님
‘행복’은 불행이 시작되는 지점일 수 있고, ‘불행’은 행복을 찾아가는 출발일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불행을 생각하지 않지만 불행 중에 있는 사람은 늘 행복을 갈망하고 궁금해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집착’이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삶은 불행해지고, 참혹한 불행 속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진실과 양심을 의연하게 지키는 이라면 이미 그는 행복의 빛 안에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맨얼굴은 이렇게 우리의 일반적 통념을 완벽하게 반전시키며 발생합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무엇이 진정한 행복이며 불행인지, 그 본질적 개념을 명쾌한 반전 속에 가르쳐줍니다.
■ 복음의 맥락
‘행복선언’으로 잘 알려진 본문은, 모두 8개의 선언으로 되어있는 마태오복음 5장입니다. 반면 오늘 복음 루카 6,17-26은 4개의 행복선언과 4개의 불행선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행복과 불행을 정확히 4개씩 병치해둠으로써 보다 분명한 대조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특별히 선언의 대상을 ‘3인칭’(그들)으로 설정한 마태오복음과 달리 루카는 ‘2인칭’(너희)으로 지정하고 있어서 수신인에 대한 보다 신랄하고 집중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현재 굶주리고 고통과 모함 속에 울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 가난이 주는 행복
행복과 불행에 대한 루카 6장의 내용은 당시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 역발상적 파격을 담고 있습니다. ‘가난하고-굶주리며-슬픔에 울고 있고-박해받는 이’(6,20-22 참조)가 오히려 축복받은 이로써 행복한 사람이고, ‘부유하고-배부르며-기쁨 속에-존경받는 이’(6,24-26 참조)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 ‘가난’에 해당하는 ‘프토코스’는 경제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비참과 소외 속에 뒤처지고 내버려진 상태 전반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프토코이)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자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칭합니다. 곧 그들은 어느 것도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않고, 또 될 수도 없기에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부여잡은 이들이며, 하느님과 그런 긴밀한 유착 속에 있기에 그분이 직접 곁에 계시어 보호하시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주시는 이들입니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공존 관계로 인해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 나라를 누리게 되는데,(20절) 하느님의 현존이 그들 곁에서 항시적으로 시작되고 발생하며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24절)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자기 보호 장치를 갖고 있어서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은 이들이고,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도, 그것이 주는 충만한 평화와 위로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인생의 모든 반전이 발생합니다. 굶주리는 사람은 배부르게 될 것이고(21절ㄱ) 배부른 이들은 굶주리게 될 것이며(25절ㄱ) 지금 우는 사람들은 웃게 될 것이고(21절ㄴ) 지금 웃는 사람은 울게 될 것입니다.(25절ㄴ) 그리고 이 모든 반전의 핵심은 행복선언의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행복과 불행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사람의 아들”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2절 참조) 즉, 모든 행복과 불행의 관건은 우리 삶의 중심에 ‘사람의 아들’을 모시고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 사막의 덤불과 물가의 나무
복음에서 제시된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모습은 제1독서에서 마치 그림을 그리듯 소묘되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을 대조적 이미지(“물가에 심긴 나무”와 “사막의 덤불”)를 통해 생생히 보여주는데, 이 이미지들은 인간의 힘에 의지하는 이와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를 대별시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7-8절)
창세기에 나와 있듯이 사람은 진흙으로 만들어졌고, 하느님이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비로소 생명을 갖게 됩니다.(창세 2,7) 하느님 없이 인간은 그저 부서지기 쉬운 존재(진흙덩어리)일 뿐이고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의 숨에 의해 지탱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을 강하게 하는 진정한 힘은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둘 때 발생합니다. 하느님을 의지하는 자는 물 옆에 튼튼히 심겨진 나무 같은 존재이며, 시냇가에 심겨져 있기에 폭염이나 가뭄으로부터도 안전하고 또한 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의지하고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이는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으므로 메마른 사막처럼 황폐해지고 죽음의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 죽음과 부활
굶주리고 고통과 박해 속에 울고 있는 이들을 행복하다고 선포한 복음과 제1독서의 내용은 제2독서에서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연결됩니다. 행복은 죽음과 부활의 역설적 진리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삶과 생명은 죽음에서부터 시작됨을 증명하셨지만 이를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17절)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지혜의 결과이고 지혜는 감수성의 결과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가난함과 빈곤이 주는 감수성’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간은 불행해질 때 본능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정말 위험하다고 인식했을 때 내 삶의 주체가 누구이며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저’(looser)가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루저의 감수성’을 갖게 되는 것은 행복이요 은총입니다. 진정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이제, 행복에 대한 부질없는 담론과 무분별한 추종을 접어두고, 가난과 환멸, 극심한 불행 중에서 찬란히 피어나는 감수성을 부여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행복에 대한 헛된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할 기대 속에 현재를 불안과 긴장으로 장악하고, 결국 오늘 하루가 주는 사소한 행복과 알찬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부와 명예가 곧 성공이며 행복이라는 불온한 왜곡은 인간이 꽃피울 수 있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질식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벗어난 다른 행복이란 없으며, 그렇게 날조된 행복은 그저 사회가 생산해낸 또 다른 가면이고 잔혹한 선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부조리와 역풍 속에서도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정직하게 매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주인공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허규 신부님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故 김정훈 부제를 기리는 유고집의 제목입니다. 산을 유난히 사랑했던 김정훈 부제의 안타까운 죽음 이전에 산장에 남긴 본인의 이기도 합니 다. 산은 성경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하느님의 영광 이 드러나는 장소로 표현됩니다. 그렇기에 산은 기도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평지보다 높은 곳이기에, 하늘에 가까운 곳이기에 이런 생각이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신 이유 역시 기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루카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 는 것을 많이 언급합니다. 특별히 중요한 순간들에 앞서 예 수님은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후에 당신의 공생활을 앞두고 기도하셨고(루카 3,21 참조)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루카 6,12 참조) 그리고 광스러운 변모 사건에서도 기도하셨다고 전합니다.(루카 9,28 참조) 잘 알려진 겟세마 니에서의 기도 역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루카 22,41-42 참조) 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또 말하십니다. “불행하 여라!” 흔히 행복과 불행선언이라고 부르는 루카복음의 말 은 사실 똑같은 내용의 반복입니다. 내용을 짝지어 보면 이렇습니다. 가난과 부유함, 굶주림과 배부름, 우는 것과 웃는 것 그리고 박해와 칭찬입니다. 가난하고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으며, 지금 굶주리고, 지금 슬퍼하는 이들은 행복 합니다. 반면에 부유하고 칭찬을 들으며,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는 이들은 불행합니다. 행복과 불행. 예수님의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내용입니다. 불행하다고 표현되는 이 들은 실상 지금 행복한 이들입니다. 그들에겐 부족한 것이 별 로 없습니다. 모든 것이 채워지고 다른 이들에게 칭송을 받 으며 지금 세상에서의 삶 역시 만족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 만 행복한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불행한 이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재물도 칭찬도 음식도 부족합니 다. 심지어 그들은 웃음으로 표현되는 기쁨 역시 부족합니다. 행복과 불행선언은 비움과 채움에 관한 말처럼 들립 니다. 행복한 이들은 지금 부족한, 그래서 하느님께서 채워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불행한 이들은 지금 풍족 하고 만족한 삶을 사는, 하느님께서 채워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너무나도 역설적이지만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은 이들이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하느님께서 채워주시기를 고대하는 사람들, 세상의 것보다 하느님을 바라는 사람들, 지금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하느 님의 나라가 완성될 그날을 희망하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용기 있게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 그들은 행복합니다. 세 상의 행복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입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참된 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루카 6,20)
이지훈 신부님
미국의 방송가인 오프라 윈프리는 “당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면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한다면 영원히 만족스럽 게 가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쉽게 잊고 살아가 는 내용입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또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며, 가지 지 못한 것에 집중하고 살고 있다면 주어진 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행 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는 욕심이 가지고 있는 것,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행복을 빼앗아 버립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 우는 사람들, 모욕당하고 중상당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관점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쏟고 있기에, 주 님께 자리를 내어드리지 못하고 있기에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가난하고 울고 주 님 때문에 모욕당하고 중상당하는 사람들은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께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많은 선물을 주셨고 그것들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욕심을 부리 기보다 주님의 말씀에 더욱 집중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만족할 때 우리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고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복된 시간들이 되 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너희 바보들!
신호철 신부님
누군가가 말합니다. “나는 가난해서 정말 행복해.” 그러면 다들 이렇게 반 응할 것입니다. “바보 아냐?” 그런데 가난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 누 군가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라면…,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결코 농담이 아니 라면…,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처럼 보지 않으시는 하느님’(1사무 16,7)께서는 세상의 논리와 인간의 판단을 여지없이 뒤집어 놓으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어, 만왕의 왕이며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가장 미약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인 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평화를 주셨고’(요한 14,27),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당신의 친구로 부르셨습니다’(마태 9,13).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마태 5,39)던 그분은 급기야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35). 그러므로 이 모든 말씀을 세상의 기준에 따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렇습니다. “너희는 모두 바보가 되어라.”
오늘 복음은 이런 가르침의 연속선 상에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쫓겨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말씀은, 행복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관념을 뒤집었을 때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현실의 그 무엇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과 일치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 입니다. 즉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행복에 대한 주님의 ‘바보 선언’을 묵상하면서, 우리 시대의 참된 바보,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합니다. 어제로써 세상을 떠나신 지 만 10년이 되셨는데,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질 만도 한데, 그런데 아직도 그분의 모습이 선명하고 그 따스한 미소가 몹시도 그리 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일생을 시대의 아픔과 고통에 정면으로 맞섰고,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들과 더 가까이 있지 못함에 괴로워했던 분,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눈마저 내어주고 가신 그분께서는 자신을 일컬어 ‘바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누구도 그분을 바보 라 여기지 않지만,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바보라고 인식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의 ‘바보 선언’ 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되돌아보면 그분은 정녕 진정한 바보였습니다. 인간적인 기준과 세상의 논 리 안에서 그분은 정말 바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으로 행복했습니다.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똑똑해지고 잘나 보이려 기를 쓰는 세태 속에서, 우리 시대의 위대하고 거 룩한 영혼, 바보 추기경의 마지막 말씀을 상기합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이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 그리고 복음이 불행하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에 나열한 처지에 반대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불행선언은 앞의 행복 선언을 뒤집어서 한 번 더 강조하기 위해 초기신앙인들이 첨가하여 남긴 것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이었습니다. 행복선언은 하느님이 축복하신다는 선언입니다. 그 선언의 대상인,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 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는 모두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현재 불행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고 축복하신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이 선언하신 내용입니다.
오늘 불행선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입니다. 부유한 이, 배불리 먹고 지내는 이, 웃고 지내는 이, 또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이, 이런 이들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대상입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되고자 노력합니다. 흔히 보람 있는 삶이라고 일컬어지는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최대 보람을 그런 것 안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길가에 잠시 피었다 시들고 없어지는 꽃 한 송이의 환상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난하게, 배고프게, 울면서, 또 남의 비난을 받으면서 불행하게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부유한 것, 웃고 행복한 것, 잘 되는 것을 곱게 보아주지 못하여 하는 말도 물론 아닙니다. 복음은 현재 자기가 소유하고 누리는 것으로 말미암은 집착과 환상에서 벗어나라고 권합니다. 그런 집착과 환상은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 안에 멈추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어 행복한 것도 자기 자신을 넘어설 줄 알 때 가능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 먹는 것, 사람들의 칭찬 등에 심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도, 친구가 되어 살지도 못합니다. 자기의 일에 골몰한 나머지 이웃을 사랑하지도, 이웃과 함께 있지도 못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사람을 불행하다고 선언합니다.「 구약성서」에 모세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함께 계심을 실천하며 살라고, 십계명(十誡命)이라는 지침(指針)을 주었습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장애(障碍)를 벗어나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살라는 지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은 그런 삶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깨닫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자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살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배려와 사랑이 우리를 감싸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배려와 사랑 안에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셩장하면서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힘들여 공부도 하였고, 일도 하였습니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이웃으로부터 부당하게 견제(牽制)를 당하기도 하였고, 외면(外面)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러는 와중에 우리는 터득하였습니다. 현명하게 사는 길은 남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고, 재물을 소유하고 남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없는 말이지만, 남을 제압하는 입장에 있지 못하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감내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념 없이 우리 자신을 계발하는 데에 열중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시선은 우리 자신만을 확대해서 보도록 조절되었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좁은 시야(視野)를 벗어나 하느님의 넓은 시야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입니다. 새로운 시야 안에서 산다는 것은 새로운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고린 5,17). 바울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새것이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신앙인은 새로운 시야에서 새로운 실천을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시야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 부요하고 배불러서, 자기 한 사람 즐거워서, 자기 한 사람 칭찬 들어서 행복하다는 수준을 벗어난 시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시야 안에 요구되는 실천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새로운 실천은 가난과 굶주림과 슬픔을 당하여도, 그것을 최대의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넓은 시야에서 자기가 할 바를 찾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가난하고 굶주렸다고, 재물을 얻기 위해 혹은 배부르기 위해 아무 짓이나 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많이 갖고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남을 속이지도 않고, 강자 앞에 비굴하게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곡학아세(曲學阿世)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배운 바를 왜곡하고 사람들에게 아부하여 잘 살아 보겠다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산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자기 한 사람 즐기기 위해, 또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 아무 짓이나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하느님의 행동 방식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대제관이나 로마 총독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강자(强者)로 군림하며 사람들의 찬사(讚辭)를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셨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읽어내어 그것을 실천하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시야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시야 안에서 살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자기 한 사람 부유하고, 배부르고,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듣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부유하지 말고, 배부르지 말며, 사람들로부터 늘 비난만 받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물론 아닙니다. 자기 한 사람 부유하고, 배부르고, 즐거울 것만 찾아 헤매다가 끝나는 허망한 인생을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런 인생은 타버린 재와 같이 한때의 환상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예레미야서」는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뿌리 내리는 강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이고, 우리의 실천은 그분의 축복과 은혜로우심을 개울 같이 흐르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치지 않는 생명의 샘이다.
성 에프렘 부제의 ‘디아테사론 주해’에서(1,18-19: SCh 121,52-53)
주여, 당신의 단 한 말씀이라도 그것이 지닌 부요를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샘에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사람처럼 당신 말씀에서 마시는 분량보다 거기다 남겨 두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주여, 당신의 말씀은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많은 견해에 따라 많은 가닥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여러 색깔로 채색하시어 그 말씀을 고찰하는 사람마다 그 안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거기서 풍성하게 찾을 수 있도록 주님은 그 안에 많은 보화를 숨기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가지에서 복된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의 나무입니다. 그것은 사방에서 영신의 물을 샘솟게 한 사막의 갈라진 바위와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 조상들은 그 나무에서 영적 양식을 먹었고 그 샘에서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누가 말씀의 보화의 한 부분을 접하게 될 때 자기가 찾아낸 것이 그 말씀에 담겨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여러 보화 중에 한 가지만 찾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그 하나만 찾아냈다고 해서 그 말씀은 쓸모없고 빈약한 말이라고 하면서 경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자기가 모두 찾아낼 수 없었던 그 말씀의 부요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진 것을 기뻐해야 하며 그 말씀이 나를 이겼다는 데에 슬퍼하면 안됩니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마실 때 그것을 흐뭇하게 마셨다고 해서 기뻐하지만 그 샘을 다 마셔 버려 바닥낼 수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갈증이 그 샘의 물을 다 마셔 없애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샘이 그 갈증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샘물이 바닥나지 않고 갈증이 해소된다면 당신은 목마를 때마다 다시 그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증이 해소되고 샘도 역시 다 말라 버린다면 당신의 승리는 손해가 됩니다.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뒤에 남겨 둔 풍요에 대해 투덜대지 마십시오. 이미 받은 것과 도달한 것이 당신께 돌아온 몫이며 남아 있는 것은 당신이 앞으로 받을 유산입니다. 당신의 나약성 때문에 한때 받을 수 없는 것은 인내만 한다면 다른 때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입에 마실 수 없는 것을 한입에 마시려고 하는 욕심을 부리지 말고 차차 조금씩 마실 수 있는 것을 게으름 때문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미움 받을 용기?
곽승룡 비오 신부님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루카6, 21)
옛 문헌, 영웅전, 문학전집에는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슬퍼하는 자, 우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나온다. 오히려 영웅, 왕, 부자, 힘 있는 자의 이야기들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빈자, 가난한 자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가난한 자들과 그런 상황을 칭찬 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사실 빈곤과 배고픔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빈곤과 부유함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늘 삐걱거리고 있다.
성경을 보면 창조주 하느님께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도록 축복을 주셨다. 그런데 고통과 가난이 어떻게 생겼고, 그것은 대체 무엇이고 어디서 왔을까. 궁금하다.
고통과 가난은 하느님 앞에서 풍요와 부유함의 권리를 이웃한테 빼앗은 자의 죄다. 구약의 모세율법이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은 빈자를 보호하고 돕는다.(마태15,1-15) 그럼에도불구하고 인간의 선행과 자선으로만 세상의 가난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 지금 현실이다. 그래서일까 하느님께서 개입을 해야 한다.
구약의 하느님께서는 종종 가난한 자들을 위해 특별보호를 약속하신다. 이 때문에 빈자들은 행복할 것이다. 가난 한 사람들이 비록 땅에서 재화를 소유하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루카6,21)
가난하게 살 때 사람들은 슬프고, 눈물이 난다. 눈물을 많이 흘린다. 슬픔이 이렇게 지상생활에서 느끼는 행복과 인생의 맛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신앙과 신심도 부정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슬픔은 이처럼 악습의 옛 목록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또한 높이 올라가고 부유함에 도달해 있는 사람과 늘 비교되었다.
누군가 다리를 다쳐 슬프다. 왜 그럴까. 단지 고통 때문에 그럴까. 실은 마음의 아픔이 있다. 멀리 가지 못하고, 가고 싶은 곳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인 듯싶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오직 슬픈 때만 울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는 경우들을 살펴보자.
전쟁에서 집으로 돌아온 군인이 눈물을 흘린다. 위험에서 생존한 감동 때문이다. 부부들과 애인들이 말다툼을 한 후 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후 화해할 때 운다.
교부들은 우는 자들이 느끼는 이러한 행복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말하고 있는 것, 우는 자가 더욱 행복하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한 사람이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후 다시 가족을 만났을 때 행복하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만난 자는 행복하다. 모든 걸 잃고 돌아온 방탕한 아들, 다시 힘들게 그를 되찾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은 행복하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6,22)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무슨 뜻일까. 화해가 거절 될 수 있다는 의미인 듯싶다. 결백하지만 이유 없이 오해 받으며, 저주받고 박해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행복하다는데, 도대체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라 일까.
그렇다. 증오하는 자는 이 땅에서 내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자. 원수다. 복음은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오해 받고 미움 받고 박해 받을 때 행복하다고...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보상해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오해와 갈등, 증오는 나에게 무겁다. 하지만 복음은 다른 이들의 미움과 생각 그리고 오해와 별개로, 용기 있게 다시 일어나도록 가르친다.
이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나에게 기쁨을 선물한다는 것을 믿으면 행복하다는 것, 주님께서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듯싶다. 아무리 나를 미워하는 자가 있어도, “용기내고 포기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행복을 만나”라는 초대를 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말씀(루카6,17.20-26)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행복과 불행선언이다.
중국의 한자는 상형문자로 시작된 뜻 글자이기에 그 뜻이 심오하다. 신(辛)라면은 어느나라에서건 그 맛이 뛰어난가 보다. 해외에서도 진열대 중심에 그 신라면이 보이니 말이다. 포장지에 신(辛)이라는 한자가 눈에 뜨여 뜻을 헤아려 본다.
인생살이가 고추보다 맵다는 노랫말도 있듯이 좌절하게 될 때면 곧잘 매운 맛을 봤다고 한다. 그런데 매울 신(辛)에 한 일(一) 을 더하면 바로 행복을 뜻하는 행(幸)이라는 글자가 된다. 그것은 삶의 매운 순간에도 무언가 하나를 더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 하나가 인생의 매운 맛을 하나 더 더하면 행복으로 바뀐다는 열쇠임에는 분명하다. 인생살이가 맵지만 행복이 생겨나고 행복 속에 희망이 있다는 것과 매운 맛을 본 사람들은 한걸음 더 행복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하기 위해 매운 맛을 하나 더 가하여 견뎌내면 될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이미 행복하기 위한 정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그 답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음이다. 주님이 들려주신 행복선언을 살면 되는 것이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루카6,20-23).(연중제6주일에)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춘성 스테파노 신부님
마더 데레사 수녀의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은 물질적 및 정신적으로 궁핍해 있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배가 고프고 목 말라하고 있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입을 옷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집이 없고 피난처가 없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병들어 있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리한 사람이다 (… 중략 …)
가난한 사람은 슬픔에 잠긴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부정을 참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버릇없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기분이 나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죄인이고 비웃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나에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바람직스럽지 않은 사람,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들 자신이다」
예수님께서는 선교를 시작하시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몹시 어려움에 처하고 죄로 상처를 입고 이 세상의 부정이나 악, 병고, 결핍, 재해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을 받고 허덕이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 6,20)」라고….
가난은 악입니다. 빈곤 자체가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리가 없습니다.
빈곤이 인간다움을 빼앗고 비참한 상황을 낳습니다.
우리들은 가난을 극복하여 모든 사람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란,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궁핍한 사람들의 외침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꼭 자신의 은총의 힘을 드러내 주시며, 그들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계시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 자신을 구원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통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 즉《기쁜 소식》을 받아들일 기초가 있습니다.
들을 귀가 있습니다. 구원을 영혼의 밑바닥으로부터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비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비해서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은 자기 안에 이미 기대할 곳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17,5)라고 ….
가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 만들며, 그분의 호소에 응답하게 합니다. 그곳에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걱정
최재원 요셉(배우)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걱정입니다.
살기는 편해졌는데 살아가기가 어려워진 요즘 세상이라는 말이 참 와 닿습니다.
모두 힘들고 경쟁적인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다보니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하고 받는 돈의 대가가 스트레스에 대한 비용이라는 말도 공감이 갑니다.
우리가 아무리 걱정을 하더라도 걱정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린 걱정에, 거기다 상상의 걱정까지도 하게 되지요.
실제로 우리가 걱정하는 그 상황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실제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훗날 생각해보면 벌써 추억이 되어 버렸거나 ‘그땐 왜 그렇게 불안하고 걱정했는지 몰라….’ 하는 생각을 하곤 하죠.
지금 생각해보면 참 별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작년에 한 드라마에서 난생처음 검사 역할을 맡았습니다.
근데 역할이 부장검사에서 중앙지검장으로
나중엔 살인까지 저지르는 악역이라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한 산문집에서 읽은 이 글은 제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이큐라는 스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 승려들을 모아놓고 편지 한 통을 내놓으며 이렇게 얘기했답니다.
‘걱정거리가 있을 때 이 편지를 열어보아라. 대신 작은 걱정거리로는 절대 열어봐서는 안 된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큰 걱정거리가 생겼을 때 그때 열어보아라.’
세월이 흐른 뒤 사찰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두 머리를 맞대고 조아렸으나 그 걱정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이큐 스님의 편지를 열어볼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모두 모여 편지를 열어보았습니다. 편지에 단 한마디가 적혀있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든 된다.”(「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티베트 속담에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이 안 될 문제라면 걱정해도 소용없다”라는 말이 있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만 잘 붙들고 있다면 꼭 피할 길을 주실 겁니다.
피할 길이 없을 때도 있다고요?
그렇다면 그 길은 당신에게 꼭 필요한 길일 겁니다.
그 또한 주님의 뜻일 거고요.
혹시 이 순간 ‘그럼 내가 그동안 너무 걱정을 많이 하고 살았나?’ 하고 또 걱정하실 분들도 계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바로 당신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참으로 행복하고 싶습니까?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으로 행복하고 싶습니까?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참으로 행복하다 생각하는 분들은 얼마나 될까요? 평생을 살아도 참으로 행복했다 생각되는 날들은 얼마나 될까요? 어제나 내일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행복할까요? 가난하다 해서 다 불행할까요? 부자들중에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고, 빈자들중에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어쩌면 빈자들중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살 줄 아는 ‘무욕無慾의 지혜’의 사람이라면 분명 가난한 중에도 행복하게 내적 자유와 내적 부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중에도 이렇게 사는 사람이 진짜 아름다운 사람, 멋진 사람, 매력적인 사람, 향기로운 사람, 살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바로 청빈낙도淸貧樂道(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즐김), 안빈낙도安貧樂道(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의 삶을 살았던 옛 선비들의 삶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옛 선비들이나 군자들뿐 바로 오늘의 우리 하느님의 자녀들이 살아야 할 이런 가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행복을 살지 못하면 내일도 못삽니다. 오늘이 미래입니다. 오늘 행복하게 사는 이가 내일도 행복하게 삽니다.
행복은 누가 주지 않습니다. 내가 행복을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라고 목숨받아 태어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단 하나의 소원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의 물음은 단 하나 “너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느냐?”일 것입니다.
어제 읽은 “품위를 지키는 가난이 교회의 사랑실천이다”라는 인터뷰 기사를 보았습니다. 교회 대신 우리를 넣아 “품위를 지키는 가난이 우리의 사랑실천이다” 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에도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자신도 가난해져야 할 뿐 아니라, 가난하게 사는 삶이 결코 불행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가 보여 주는 것이다. 가난하게 살아도 찡그리지 않고 살 수 있구나, 가난하게 살아도 누군가를 해치거나 탐욕스런 눈으로 다른 이들의 물건을 보지 않는구나. 이랬을 때 가난은 좋은 모범이 되고 좋은 모범은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품위있는 가난을 즐겨 택해 살자는 것입니다. 가난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사랑합니다. 최소한도의 소유로 만족합니다. 많이 소유해서 부자가 아니라 탐욕이 적을수록 부자입니다. 하여 가난하면서도 행복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이렇게 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16,2)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진정 행복하고 부유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난을 사랑합니다. 이런 행복을 노래한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방에 있는/TV, 그림, 사진---/대부분이 군더더기/쓸데 없는 짐
이보다 더 좋은/임 만드신/창문밖 하늘 풍경
살아 있는 그림/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방 하나만 있어도/부러울 것 없겠네”-
하느님 사랑의 무욕의 행복을 노래한 시입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난중에도, 굶주린 중에도, 우는 중에도 인간 품위를 잃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이 바로 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참행복선언은 이들을 향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를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른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도대체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친히 지금 이들의 배경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레미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이들을 지칭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바로 이것이 가난한 부자의 내면의 모습입니다. 참 행복선언에 이은 예수님의 불행선언입니다. 행복하다 여겨지는 사람들이 실은 불행하다는 참 역설적이나 참 진리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요 하느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외화내빈의 삶입니다. 부유한 듯 하나 내면은 가난하고 황폐한 진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생각없고, 의식없고, 영혼없고, 뿌리없고, 삶의 깊이도 없는 천박한, 얕고 가벼운 사람들입니다. 세상 것들로 가득차 있어 하느님께서 머무실 내적 공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하느님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 빠진 삶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이것들은 저주도 아니고 형벌의 선고도 아니라 탄식이며 경고입니다. 이것들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이들과 사랑으로 연대하여 살라는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바로 예레미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이들을 지칭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그대로 불행한 부자들, 현세적인 것들로 만족한 이들의 황폐한 내면을 반영합니다.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난 자업자득의 업보입니다. 하느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 세상 중심, 현세 중심, 재물 중심의 삶을 산 결과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노욕老慾, 노추老醜의 삶이 되지 않고 품위있는 노년의 삶을 위한 세 조건이 생각납니다.
1.하느님 믿음, 2.건강, 3, 돈입니다. 절대로 우선 순위가 바뀌면 안됩니다. 하느님 믿음이 빠져도 안됩니다. 하느님이 빠지면 그 중심 자리에 건강이, 돈이 우상처러 자리잡습니다. 자연히 품위를 잃고 비루한, 추한 삶이 뒤따릅니다. 하여 나이 들면 입은 다물고 귀와 지갑은 열라는 적절한 충고도 생각납니다.
그러니 영원토록 우리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희망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가 영원한 희망이 될 때 온갖 불행중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 향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향한 희망을 지닐 때 행복한 부자로, 자유롭고 아름답게 하느님 자녀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라는 간곡한 당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부활하시어 우리와 늘 함께 계신 주 그리스도님이 우리의 영원한 행복의 원천이자 도반이요 반려자요 수호자이십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구절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온갖 좋은 것, 온갖 필요한 것을 주시어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게 하십니다. 주님 사랑의 은총으로 행복하고 부유하고 자유롭고 아름답게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제 자작 행복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누구나 끊임없이 바칠 때 행복해지는 기도, 성인이 되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을 감동시켜 온갖 필요한 선물을 받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빛, 저의 사랑, 저의 진리,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행복한 삶과 만족한 삶 <루카 6, 17. 20-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행복은 자기 자신 안에서 얻을 수 있지만, 만족은 자기 밖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가난해도 행복하지만, 그 행복이 무엇으로든지 채워지기를 기대한 결과는 만족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만족하게 하여 행복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굶주림이 행복도 아니고, 우는 것도 행복이 아닙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 그 자체도 행복이 아닙니다. 죽음 뒤에 새로운 생명으로 채워져서 행복한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 속에 믿음과 희망이 없으면 사랑은 빈 깡통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삶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에게 “하느님을 믿어 무엇이 좋습니까?” 하면 “그저 믿으니 의지가 되고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한다면 신뢰가 없어지고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이고 하느님이 아니시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 의미가 없어집니다.
제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나를 존재하게 하시고, 존재를 지속시키고 존재를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가변적이고 없어질 것 안에 생명을 누리고 있지만 불변하고 영원히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믿어 의심치 않아 믿는 것이 행복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재의 수요일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람아 너는 하느님께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라”
믿음의 삶은 비록 흙으로 빚어 만들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일생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모습으로 완성되려고 노력하며 사는 길이 참믿음의 길입니다. 그 완성은 죽어서 흙에 묻힌 다음에야 증명됩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고 만족하게 됩니다.
모든 믿는 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하고 은총이 넘쳐흐르며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하는 인사말을 하도록 기도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쓰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도다." (예레 17, 5. 7)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십시오.
오늘은 연중 제 6 주일입니다. 오늘 제 1독서 예레미야서에서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쓰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도다." (예레 17, 5. 7)
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이 말씀은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에게는 진실한 말씀으로 다가오지요. 그러나 젊은 사람에게는 아직 자기 자신의 젊음과 힘을 믿으며 이런 말씀이 인식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젊은이가 자기의 젊음과 근력과 재산 그리고 지위와 인간관계 안에서 항상 즐거움에 차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항상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도움이 필요없고 또 희망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자신이 가졌던 지위도 내려놓고 또 항상 붙어 다녔던 재산도 흩어지고, 인간관계도 소원해졌을 때, 그때는 주님을 찾게 되겠지요.
우리는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젊을 때, 잘 나갈 때에도 주님 안에서 지혜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젊은 패기와 인간관계 그리고 재산과 좋은 기회가 있을 때도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그 신뢰를 두는 사람은 복되다" 하는 이 말씀을 듣고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길을 간다면, 그는 매사에 조심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그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있느냐, 주님에게서 떠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지금의 모든 행복이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자세,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길이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재산과 지위와 좋은 인간관계가 있을 때, 그것을 감사히 여기면서 그런 것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주님께 희망을 드리며 주님의 뜻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오늘 예레미야서의 말씀처럼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 것" (예레 17, 8)과 같다고 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쓰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예레 17, 5)고 했는데, 그것은 제 힘을 믿고 주님에게서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할 것이며, 또한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사는 것처럼 메말라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레 17, 9)
우리는 또한 오늘 복음 말씀 루카복음에서처럼, 주님께 희망을 두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리고 지금 굶주리고 있어도 주님께 희망을 두며, 지금 우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웃게 해 주실 것이며, 사람의 아들 때문에 모욕당하고 중상을 받을지라도,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생각하면서, 인내하고 주님께 희망을 둔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 받는다 해서 그 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지 않으며 주님에게서 마음이 떠났다면 그는 불행해지고 말 것입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지금 주님을 믿으며 행복합니까?
• 나는 무엇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해줘서 행복합니다'(루카 6장 17, 20~26)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행복하여라 ~
지금 우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은 그날 춤을 추어라 ~ 받을 상이 크다' 라고 ‥
이 말씀을 고통스러울때 떠올린다면 화장실 가서 미소짓게 됩니다!
내게 상처주고 모욕을 준 사람을 계속 미워하다보면 마이너스 통장이 되고 상처 받고 모욕 받았지만 그 속에서 겪은 깨달음을 디딤돌로 삼으면 플러스 통장이 됩니다.
눈물나게 해줘서, 결핍을 알게 해줘서,
아까운 걸 알게 해줘서, 넘어지게 해줘서,
밤을 지새게 해줘서, 손해보게 해줘서,
불안에 떨게 해줘서, 속상하게 해줘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춤을 춥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이 생명 이 시간의 나로!
평화와 행복
오경섭 신부님
행복은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행복에 대해서만큼은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고 싶은 사람에게 왜 행복하려 하냐고 묻는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삶이 행복해진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음을 잘 아시고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해주십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 받는 일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경험입니다. 이런 일을 겪는 이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선 왜 내가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 원인을 찾지 못해서일 수 있고, 두 번째로는 이 일이 끝내 좋지 않게 끝나지 않을까 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 불안함을 어루만져주십니다.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이 어려움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십니다. 그래서 지금 이 어려움 때문에 주저앉지 말고 주어진 삶을 인내로이 살아보자고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이들은 삶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들에 좌절하지 않고, 평정심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 있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텅비어 있는
가난한 마음에
하느님을 담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존재자체만으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지극히 관계적인
행복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행복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인지를 우리들에게
잘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 안에서
받아들임이 참된
행복입니다.
자신이 만든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가난함도 굶주림도
울음도 미움받음도
추방도 모욕도 중상도
예수님께서 겪으신
행복의 여정이었습니다.
행복은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의미를 찾고
하느님 안에서
사는 모든 이들은
행복합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진정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진정한 하나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