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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2년 4월 10일 (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2.04.10|조회수621 목록 댓글 0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7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해설자 + 예수님 ● 다른 한 사람 ▣ 다른 몇몇 사람 ◎ 군중
○ 루카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22,14―23,56
14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17 ○ 예수님께서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19 ○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0 ○ 예수님께서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
22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23 ○ 사도들은 자기들 가운데 그러한 짓을 저지를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
24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27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28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29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30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32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33 ○ 베드로가 말하였다.
●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34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5 ○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물으셨다.
+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36 ○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그러나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 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말씀이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한다.”
38 ○ 사도들이 말하였다.
▣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것이면 넉넉하다.”
39 ○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40 그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41 ○ 예수님께서는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42 +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43 ○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님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
44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45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시어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4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47 ○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4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49 ○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말하였다.
▣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
50 ○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51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만해 두어라.”
○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종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52 그러고 나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잡으러 온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에게 이르셨다.
+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단 말이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는
너희가 나에게 손을 뻗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
54 ○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대사제의 집으로 데려갔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뒤따라갔다.
55 사람들이 안뜰 한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끼어 앉았다.
56 그런데 어떤 하녀가 불 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 “이이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어요.”
57 ○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 “이 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58 ○ 얼마 뒤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말하였다.
●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 베드로가 말하였다.
●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
59 ○ 한 시간쯤 지났을 때에 또 다른 사람이 주장하였다.
● “이이도 갈릴래아 사람이니까 저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게 틀림없소.”
60 ○ 베드로는 말하였다.
●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61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62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63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분을 매질하며 조롱하였다.
64 또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물었다.
▣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65 ○ 그들은 이 밖에도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많이 퍼부었다.
66 날이 밝자 백성의 원로단, 곧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여
예수님을 최고 의회로 끌고 가서 말하였다.
67 ▣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말하시오.”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내가 그렇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고,
68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69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을’것이다.”
70 ○ 그러자 모두 물었다.
▣ “그렇다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이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내가 그러하다고 너희가 말하고 있다.”
71 ○ 그들이 말하였다.
▣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언이 더 필요합니까?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을 우리가 직접 들었으니 말입니다.”
23,1 ○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2 그리고 예수님을 고소하기 시작하였다.
▣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3 ○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4 ○ 빌라도가 수석 사제들과 군중에게 말하였다.
●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5 ○ 그러나 그들은 완강히 주장하였다.
◎ “이자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유다 곳곳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6 ○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7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8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9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11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12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13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 모아 14 그들에게 말하였다.
● “여러분은 이 사람이 백성을 선동한다고 나에게 끌고 왔는데,
보다시피 내가 여러분 앞에서 신문해 보았지만,
이 사람에게서 여러분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15 헤로데가 이 사람을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을 보면 그도 찾지 못한 것이오.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16 그러니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17)
○ 18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19 ○ 바라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였다.
20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이야기하였지만,
21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은 외쳤다.
◎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22 ○ 빌라도가 세 번째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 그러자 23 그들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그치며 요구하는데,
그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24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25 그리하여 그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풀어 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26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
27 백성의 큰 무리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28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29 보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30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할’것이다.
31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
32 ○ 그들은 다른 두 죄수도 처형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끌고 갔다.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35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빈정거렸다.
▣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36 ○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그분을 모독하였다.
●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40 ○ 그러나 다른 죄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 그러고 나서 그 죄수가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43 ○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44 ○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5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47 ○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48 ○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49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50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회 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이였다.
51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유다인들의 고을 아리마태아 출신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52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53 그리고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셨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무덤이었다.
54 그날은 준비일이었는데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55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56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되셨다고 한다(제2독서). 루카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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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당하지만 주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확신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시자, 하느님께서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다고 찬가를 부른다(제2독서). 루카 복음사가는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는 백인대장의 고백을 전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장엄하게 전한다(복음).

20. 이 미사의 3개 독서는 다 봉독하는 것이 좋지만, 때에 따라서 독서 가운데 하나를 빼거나 둘을 다 빼고 수난기만을 봉독할 수 있다. 그러나 교우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성주간은 전례력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어머니이신 교회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한편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핵심이 되는 구원 사건은 하느님께서 히브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파스카 축제입니다. 노예살이하던 히브리 백성을 구원하실 때 희생된 어린양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그분의 사랑과 구원을 되새기는 축제 기간입니다. 그런데 이 파스카 축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본래 의미를 찾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이집트 해방 사건은 신약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됩니다. 구약의 ‘어린양’을 통한 파스카 사건이 특정 민족을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신약의 ‘어린양’을 통한 파스카 사건은 죄의 노예살이를 하던 모든 인간이 참된 구원과 해방으로 넘어가게 해 줍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우리는 성주간 전례를 통하여 묵상하게 될 파스카 구원의 신비를 미리 맛봅니다. 주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시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고, 그분께 환호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되새겨 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과 죽음 너머 그분께서 맞이하실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에서 장엄하게 선포하듯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그분의 수난과 희생, 십자가 죽음 없이는 이해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파스카 신비가 완성됩니다.(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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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는 정신을 집중하여 주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루카는 주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회상하도록 도와줍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와 달리, 루카는 예수님께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며 손찌검하는 행위, 가시나무로 엮은 관을 씌우는 행위, 거짓 증인들에 대하여 들려주지 않습니다. 또 루카는 예수님을 고통받는 의인,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온갖 고통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이 회개하고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의 본보기로 여기며 찬미하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번민에 싸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올리브산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기도를 마치신 뒤 예수님께서 다시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하고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의 관대함과 자비로움은 당신께서 잡히실 때부터 드러납니다. 제자 한 사람이 칼로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을 때 예수님께서 종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뉘우치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표현들은 예수님의 관대하고 인자하신 마음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거두실 승리의 확신을 보여 줍니다. 수난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위대하게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수난의 상황들은 분명 비극적이지만 사랑으로 극복되고 승리를 거둡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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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기간 동안 우리가 행했던 회개와 보속이 오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아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에 대한 순명이며, 우리 인간과의 유대이고, 그분의 고통이 바로 부활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오늘 수난 복음에 나오는 올리브 가지는 모든 불행을 극복하는 부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왕권은 보잘것없는 십자가입니다. 바로 이 모욕과 고통, 그리고 버려짐 속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처음 만나면 우리의 신앙이 흔들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로우신 분이 처형대에 서시는 것이 바로 불의와 폭력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대변해 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만 십자가의 무능함 안에 계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유로이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으로 가득 찬 온전한 자유로 자신을 바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인간의 지혜가 역전됩니다. 십자가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나 버리고, 악이 승리한 것 같지만,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벌써 온 세상에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성전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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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조롱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다면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데 왜 너무도 무력하게 수난과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을까요? 이를 잘 묵상해 보고자 비유 하나를 들겠습니다.

법정에 선 한 살인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고 직전에 있는 이 사람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검사입니다. 그는 살인자의 잘못한 점만을 바라봅니다. 두 번째는 변호사입니다. 검사와 대조적으로 살인자의 좋은 면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변호사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의 직업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판사입니다. 그는 법의 기준이기는 하지만, 사람 자체를 판단하며 그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청중입니다. 이들의 시선은 제삼자 그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닙니다. 그저 호기심과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인자를 둘러싼 시선 가운데 어떤 시선을 지니고 계실까요? 하느님께서는 검사, 변호사, 판사, 청중과는 다른 시선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마치 살인자의 어머니가 지닌 마음과도 같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잘못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따질 틈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당장 자기 자식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아들이 죽게 된다면, 차라리 자신이 대신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인들의 죽음을 바라시지 않고 오히려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묵묵히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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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길고 엄숙한 수난 복음을 읽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고, 심문받고, 사형수 ‘바라빠’와 비교되는 장면들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이 복음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는지요? 유다인들은 새로운 임금이 출현하면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오늘의 우리 역시 그런 의미로 성지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말합니다. 우리가 환영하는 예수님은 임금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수난하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복음 내용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예수님’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무 저항 없이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를 믿는 이들도 그렇게 ‘삶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자신의 뜻을 꺾지 않으면 십자가는 무거워집니다. 성질대로 하면 점점 귀찮아집니다. 자신을 죽이려 할 때 은총은 ‘그 사람 안에서’힘을 발휘합니다. 전혀 예기치 않던 곳에서 하늘의 힘을 얻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억울함을 체험합니다. 실패를 만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수난 복음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시라면, 우리 역시 당당한 ‘조연’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아픔’을 의미 없는 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일생에도 사순 시기에 해당되는 시련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체험’ 역시 반드시 주어집니다. 오늘은 이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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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군중 안에 파묻혀 있을 때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보다는 집단이나 현재의 상황에 더 초점을 맞추어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군중 심리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줄여 보겠다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의 생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특히 먹이 사슬의 맨 아래에 있는 초식 동물들일수록 거의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데, 이는 자신의 존재를 집단 안에서 희석시킴으로써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수 있는 확률을 최소화하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사람도 동물처럼 군중 안에서 자신의 익명성에 대한 보장을 통하여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줄이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오늘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갑자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성난 군중으로 돌변한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익명성 안에서 희석시키려는 비겁한 인간의 본성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군중의 태도에 분노가 아닌 연민의 감정을 느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직 본능적인 감정에만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연민과 탄식의 표현일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과 책임을 세상에 용기 있게 드러내는 신앙인만이 예수님의 이러한 아픈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된 제자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쓰면 동공이 확장됩니다. 주의력과 집중력이 동공에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만 계산하게 하면 저절로 동공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공은 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동공의 움직임이 생기면 뇌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계산이나 암기할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도 동공이 확장된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대상을 보려고 할 때, 또 부정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인 말을 하려고 할 때 동공이 확장됩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뇌 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이상한 것도 과감하게 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하물며 실천하기 그렇게 어렵지 않은 사랑하기와 긍정적인 자세로 사는 것을 굳이 피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렇게 사는 사람의 눈은 반짝반짝 빛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도 사랑과 긍정적인 자세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약을 챙겨 먹듯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지요. 그리고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복음은 아주 긴 수난 복음을 읽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기를 묵상하면서, 문득 예수님을 향해 적의를 표현했던 사람들의 눈을 떠올려 봅니다. 과연 어떤 눈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철천지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적의 가득한 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과연 그들 자신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을까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거하는 커다란 죄의 무게만을 키웠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마음과 미움의 감정에서 생겨난 행동은 결국 커다란 후회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게 되지요.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2,27)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2,48)

우리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우리의 눈 역시 예수님을 부정하는 적의 가득한 눈이 아닐까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하다면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커다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후회할 행동은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로도 족합니다. 이제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고 칭찬할 사랑의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항상 슬픈 것.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니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리니(푸시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끝까지 자기 비하의 길, 극단적 겸손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전례 지침에 따르면, 긴 수난 복음을 봉독한 후에는 반드시 다음의 권고를 덧붙입니다. “주님의 수난기를 봉독한 다음, 경우에 따라 짧은 강론을 한다. 또한 잠깐 침묵할 수 있다.”

 

주님의 수난기가 길고, 따라서 봉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강론을 짧게 하거나 생략하라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의 수난기 내용 그 자체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기에, 수난기 자체가 가장 좋은 강론이기에, 강론을 생략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겟세마니 동산으로부터 시작되어 골고타 언덕에서 종료된 예수님 수난 여정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배반자 유다, 겁쟁이 헤로데, 애매한 총독 빌라도, 대사제 가야파, 겁쟁이 베드로, 그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 손수건으로 그분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결박된 그분을 채찍질하고 침 뱉고 조롱하던 군사들, 끝까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지킨 성모님과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애제자 사도 요한...

 

하늘이 울고 땅이 우는 성주간 우리는 그 옛날 예수님 수난 여정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깊이 성찰해볼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긴 예수님의 수난기를 들으면서 나는 과연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에 어떤 모습으로 참여했는지 곰곰이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길을 바로 내 삶으로,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나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런 부활의 적극적인 증인입니까? 아니면 그분 수난 여정의 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는 변두리 관찰자입니까?

 

빌라도 총독의 관저로 끌려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모욕과 수치심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총독의 병사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을 갖고 놀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가장무도회라도 벌인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긴 그들은 주황색 망토를 걸치게 했습니다. 주황색 망토는 로마 황제의 신하들이 입던 옷이었습니다. 그분의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워드렸습니다. 오른손에는 갈대를 하나 들려드렸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아주 우스꽝스럽게 만든 후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의 왕 만세!”하고 외쳤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존귀하신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들고 계시던 갈대를 빼앗아 거룩하신 그분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뱃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과 수치심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을 것입니다.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에 가슴이 벌렁거렸을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으로 내 말 한마디면 저따위 한갓 말단 병사들 순식간에 쓸어 엎어버릴 수 있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기적의 능력을 발휘해서 순식간에 결박을 풀어버리고 둘러서 있는 적대자들 한 방에 다 날려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끝내 침묵하셨습니다. 잔혹한 폭력 앞에 결코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경멸과 조롱을 깊은 침묵 속에 묵묵히 견뎌내셨습니다. 일말의 저항도 없이 끝까지 자기 비하의 길, 극단적 겸손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죄인인 인간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조롱 앞에서도 끝까지 침묵하시고 인내하시는 수난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 왕직의 참된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하느님의 왕직은 인간이 저지른 잔혹한 악 앞에서도 침묵으로 견뎌내시는 왕직입니다. 그분의 왕직은 해도 해도 너무한 인간의 조롱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며 봉사로써 인간을 다스리시는 사랑의 왕직입니다.

 

 

 

왜 하느님은 우리를 낮추시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성전으로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 19,38)이라고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임금님으로 임명되어 우리에게 오시는데, 그분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기뻐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루카 19,39)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라고 하시며, 슬픈 마음으로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중략)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2.44)라고 한탄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겉옷을 그분 밑에 까는 것이고 하나는 귀가 찢어질 정도로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짝을 구약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솔로몬 임금의 즉위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1열왕 1장 참조).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을 자기 대를 이을 임금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형인 아도니야가 사람들을 규합하여 왕이 되려 합니다. 현 상황으로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다윗 임금도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나탄 예언자와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가 청원하자 다윗은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곧 자기 나귀에 솔로몬을 태워 샘이 있는 기혼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을 분 다음 “솔로몬 임금 만세!”하고 외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귀를 타고 임금의 왕좌까지 올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모든 백성이 그의 뒤를 따라 피리를 불고 올라가며 큰 기쁨에 넘쳐 환호하였는데, 그 소리에 땅이 갈라질 지경이었다.”(1열왕 1,40)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 찬미 소리를 듣고 아도니야는 겁을 먹고 성전의 뿔을 잡고 나오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도니야는 결국 다윗을 시중들던 여인을 솔로몬에게 청했고 솔로몬은 계속 왕위를 노리는 것 같은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아도니야는 왕권을 강탈하려는 자였고 시민들의 찬미 소리에 질겁하고 결국 솔로몬의 왕국에서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카인의 제물이 왜 하느님 앞에 기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요? 그의 제물이 정성스럽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따르면 십일조를 상징하는 겉옷을 까는 사람들의 찬미 소리가 우렁차게 올려졌습니다. 그래야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예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카인은 제물은 바치되 기쁘게 찬미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쁘게 드리지 못하는 예물은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지, 그분의 것을 기쁘게 돌려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혼 샘은 본래 예루살렘 외곽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름을 부으라는 말은 겸손해져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부터 주님을 찬미해야 모든 예루살렘 시민이 들을 수 있습니다. 겸손과 봉헌은 하나입니다. 

만약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고 “아빠도 하나만 줄래?”라고 할 때, 주는 것을 망설이는 아이에게 아빠는 다음에 또 과자를 사주고 싶을까요? 기쁘게 주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을 것입니다. 아빠를 아빠로 인정한다면 기쁘게 과자를 내어주고 아빠가 좋다고 소리쳐야 합니다. 그러면 아빠에게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참 왕이신 하느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습니다. 계약의 궤를 모셔 오는 것입니다. 그때 그도 옷을 다 벗고 주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왕의 행세를 하지 않고 그분 앞에서 벌거벗은 어린이가 된 것입니다. 이때 그의 아내 미칼은 이렇게 비웃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의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 만하더군요!”(2사무 6,20)

 

미칼은 사울의 딸로서 다윗이 위험할 때 그것을 다윗에게 알려주어 다윗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칼은 여전히 다윗 위에 서 있으려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 그 집안 대신 나를 뽑으시고, 나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바로 그 주님 앞에서 내가 흥겨워한 것이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저 여종들에게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오.”(2사무 6,22)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 뒤 사울의 딸 미칼에게는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2사무 6,23)

이스라엘 여인에게는 자녀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수치입니다. 아도니야와 같이 왕권을 노리다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왕 앞에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낮아져 천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춤추며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사 때 이렇게 합니까?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보다 더 근엄합니다. 찬미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거나 율동까지 한다고 하면 비천한 모습이라고 꺼리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그러면 안 됩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셔서 우리 안에서 자아의 압제를 이기고 당신이 평화의 왕이 되시는 날입니다. 그러니 팔마가지를 마음껏 흔들고 힘껏 찬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 미사가 그래야 합니다. 

 

미사 때 하는 봉헌이 우리 겉옷을 까는 것이고 그것과 함께 기쁜 찬미가 울려 나와야 합니다. 그다음에 나귀를 타고 오시는 그분, 곧 성체를 우리 안에 모셔 우리 왕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찬미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그 사람을 맞아들여도 왕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 자신을 왕으로 삼고 있기에 새로운 왕 앞에서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르나데트는 지금은 큰 성지가 된 루르드 한 지역에서 성모님을 만납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가서 마신 다음에 몸을 씻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베르나데트는 그대로 했고 주변 사람들은 베르나데트가 미친 줄 알았습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그 구덩이를 손으로 파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솟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고 다른 사람들이 치유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많은 기적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왜 성모님은 기적을 주시기 전에 사람을 저렇게 낮추실까요? 정말 온전히 나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아직 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은총 자체가 독이 될 수도 있기에 먼저 낮추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왕으로 영접한다는 말은 자신을 종으로 낮춘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기쁘게 낮춘다는 말입니다. 나로 사는 것보다 그분의 종으로 사는 것이 훨씬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당신께 자신을 봉헌하며 기쁘게 찬미할 줄 안다면 주님은 그 사람을 통해 많은 이를 치유하게 하십니다. 특별히 봉헌 시간에 더 크게 찬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강론 후에 기쁨의 찬미를 바로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필립보 네리가 성녀라고 불리는 수녀님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비가 와서 신발이 지저분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녀님을 불러 신발을 닦으라고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녀는 자신을 뭐로 아느냐며 거부하였습니다. 필립보 네리는 돌아가서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성인이 없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낮추실까요? 더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가 배운 춤을 부모 앞에서 춘다면 부모는 얼마나 기쁩니까? 더 부끄럽게 소리높여 찬양합시다. 이것이 부모에게 더 내어놓는 자세이고 더 받을 자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1년 8월 30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 했습니다. 2001년 10월에 시작된 전쟁이 20년 만에 끝났습니다. 미군은 텔레반과 협상하면서 미군의 철군을 결정했습니다. 당시에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 ‘가니’는 먼저 외국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대통령도 도망갔고, 정부의 관료들도 모두 도망갔습니다. 수도인 카불 공항은 외국으로 도망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기차도 아니고, 비행기에 매달려서 도망가려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미국이 지원해준 무기는 탈레반에게 넘어갔고, 행정조직은 쉽게 무너졌습니다. 미국은 20년간 아프가니스탄의 자치정부가 국가를 통치할 수 있도록 지원했지만 무능과 부정부패에 물든 아프가니스탄 행정부는 탈레반에게 국가를 넘겨주었고, 국민들도 도망간 국가지도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준다고 합니다. 국민을 외면하고 가족들과 해외도 도망간 대통령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요?

 

2022년 2월 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습니다. 군사대국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는 3일이면 수도인 키이우가 함락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1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키이우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러시아는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경제재제로 러시아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명분 없는 전쟁에 자녀들이 사망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러시아 내에서도 반전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이렇게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국제사회의 지원도 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도력이 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끝가지 수도인 키이우에 남아서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미국, 유럽연합, 영국의 의회에 화상으로 연설하면서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협상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한다면 역사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호산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라는 환영을 받으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심각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의 배반이었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스승인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수석사제와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발이 두려워 예수님을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서로 원수였던 헤로데와 빌라도는 친구가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바로 십자가의 길에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성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예수님 곁에는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시는 어머니 성모님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성모님은 예수님 고난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에 넘어지셨던 예수님은 잠시 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드렸던 베로니카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의 슬픔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 예수님의 ‘일어나라’라는 말씀으로 죽었다 살아났던 소녀의 어머니, 예수님께 믿음을 칭찬받았던 이방인이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 예수님께 죄를 용서 받고 새 삶을 찾았던 여인,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렸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던 십자가 위의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성서는 이들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있었는지 돌아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속에 있었는지,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와 함께 있었는지,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처럼 나 역시 예수님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모함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갈 수 있다면,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처럼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의 편에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나의 마지막 길에 함께 하는 사람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올리브 산에서 바라보는 예루살렘의 전경은
참으로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던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쉼 없이 걸어왔던 힘겨운 길이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맞아주고 있다


겉옷을 길에 펴놓고
환성을 지르며 나를 반기는 사람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나의 길을 모른다
자신의 기대와 감정에 이끌려 기뻐할 뿐


나의 길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최후의 만찬을 거행한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제자들
얼마나 사랑했던가
나의 모든 것을 내 주었다
아무런 대가없이


그러나
이들은 나를 버리고
살고자 자신의 길을 간다


배신의 입맞춤 하며
나를 팔아넘긴 가련한 제자 유다


초주검으로 피땀 흘리는 나와 함께
한시도 깨어 있지 못하고
피곤에 지쳐 쓰러진 제자들


힘없이 붙잡힌 나를 두고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완강히 버티다
슬픔에 젖은 나의 믿음 가득한 눈빛 마주하고
가슴 찢으며 슬피 우는 베드로


더 많은 이들이
나의 마지막 길에 함께 한다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려고 달려드는 병사들


두 눈을 부릅뜨고
잡아먹을 듯이 외쳐대는
스스로 의로움에 사로잡힌
대사제들과 원로들


자신을 군중에 묻어버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않으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사람들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흔들거리며
지도자의 권위를 스스로 내팽개치고
제 책임 떠넘기는 추한 빌라도


소문과 흥미에 놀아나는
천박한 정치꾼 헤로데


가진 자들에게 삶을 저당 잡혀
채찍질하고 못 질하는
힘없고 불쌍한 하수인들


영문도 모른 체 끌려나와
십자가 여정의 귀한 벗이 되어준
고마운 키레네 사람 시몬


짓이겨진 나를 지켜보며
아무 것 할 수 없는 자괴감에
피눈물 흐느끼는 여인들


저주와 모독 가득한 절망으로
참회와 속죄에 담긴 희망으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들


처연한 평화 깃든
내 가쁜 생의 마지막 호흡에
함께 한 백인대장과 가슴을 치던 군중들


추악한 음모를 획책하는 의회 의원들 가운데
단 하나 의롭게 빛났던
내 주검을 곱게 감싸 따뜻하게 묻어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처참한 내 주검마저
곱게 보듬어 마음에 새기려는
갈릴래아에서부터 함께 했던
착하고 고운 여인들


나는 혼자이다
그러나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내 삶의 순간순간에 그러했듯
내 삶의 마지막 죽음의 길에도
무수히 많은 이들이 나와 함께 있다


어떤 이는 나를 따르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배척하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죽이기 위해


이제 너를 내 길에 초대한다
과연 너는 왜 이 길에 함께 하려느냐
과연 너는 어떻게 이 길에 함께 하겠느냐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의 신비를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지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였고, 이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기를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결코 성경 속에 나오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먼저,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지만 결국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겼던 빌라도의 모습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만 이웃의 고통에 중립을 지키며 자신만의 안위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또 다른 빌라도입니다.
그리고 호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표징을 요구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다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버렸던 헤로데처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분께 늘 인간적인 욕심만을 바라며 기도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또 다른 헤로데입니다.
그리고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나라를 추구하며 열광하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 시대의 또 다른 군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처럼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인간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끊임없이 계산을 하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분을 팔아넘기는 이 시대의 또 다른 유다입니다.
그리고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처럼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그분이 바로 나의 주님이심을 당당히 고백하지 못하고 숨어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분을 모른다고 말하는 이 시대의 또 다른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정치적이고 율법적인 바리사이들처럼 사랑이 없이 자신의 이기적인 기득권과 아성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분을 빌라도에게 넘기는 이 시대의 바리사이들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과연 이 시대의 누구인지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또 다시 지난 잘못된 선택이 아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수난하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선택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당당히 이 시대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될 때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의 찬미'가 완성되는 성주간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실때, 천사들이 환호하고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다. 천사들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찬양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 
예수님의 탄생은 아주 작게 목동들에게만 나타나 주셨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수료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필요하신 아무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 한 마리를 준비하도록 하신다." 그들은 옷을 벗어 나귀에 걸치고 평화의 임금께서 나귀에 오르신다. 인류구원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나가실 때 겉옷을 길에 깔아 드리고 올리브산에 다다르자 제자들은 환호하고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미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19,38),
공생활 중에 제자들도 많이 성숙했다. 이 찬미는 예수님의 탄생때 들려쥰 천사들의 합창 수준으로 예수님께 대한 구원과 은총의 때가 되었음을 제자들이 지극한 흠숭으로 찬미를 외쳤다. 제자들은 그만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성숙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여기서도 유다인들 속에 못마땅해 하며 제자들을 꾸짖어 달라고 한다. 반대하는 세력 그 누구도 이를 방해해 말문을 닫게 한다면 그들이 외면한 대신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군중 속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의 찬미를 방해하는 것을 꾸짖으신다.
제자들의 믿음이 커져있음을 알리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건설의 든든한 제자들이 있음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의 장엄한 예루살렘 입성이 시작됨을 알린다. 순교로 산앙을 고백할 수준은 거리가 있음을 수난복음'(루카22,14―23,56)에서 보게 된다.
성주간 전례는 복잡하고 심오하다. 불신, 배반, 배신, 인간의 나약함을 본다. 인간들의 잡다한 일들로 저기만 살려고 바둥거린다. 그리고 예수님, 스승님, 살아계신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높이 매달았다. 그 십자가는 인간이 저지른 일들 중에 가장 참혹한 하느님의 죽음이다.
각자 살다가 남에게 당해 마음에 그어진 상처, 그래도 치유하려고 발버둥치고  미워하고, 완벽한 치유라는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완벽한 치유가 있음을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를 통해 보았다. 아파했지만 같이 아파하는 사람 하느님의 아드님, 보고는 내가 일어설 수 있었다.
성주간 살고 예수님 보며는 하느님의 찬미는 극에 달할 것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알렐루야 알렐루야,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 알렐루야, 알렐루야
돌들이 소리지르지 않도록 우리가 마음으로 생생한 찬미가를 불러드리도록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의 의미를 살아내자. 세상에 아파하는 사람이 가득있다. 우리가 세상 사느라 죄짓고 상처입고 아프지만 기대고 살 예수님 계시기에 일어설 수 있어 괜찮지 않니? 예수님과 함께 좋은 한 주간 보내보자.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자연부화 된 병아리 수가 세 마리 밖에 안 되어 장날 다섯마리 인공부화된 병아리를 구입해 어미닭에 넣어 주었다. 어미닭은 세 마리 외에 다른 병아리를 구분하고 품에서 내치고 쪼고 있었다. 이를 어쩐담, 대책을 세웠다.
다섯 마리는 어미닭 없이 낮에 기온이 상승해서 잘 놀다가 밤기온에 적응이 어려워 박스에 넣어 보온 관리를 따로 해 주어야 했다. 어미닭의 보호가 없어 사 온 병아리들은 스트레스성 과식을 했고 이로써 시름시름 졸다 한 마리가 떠났다. 이러다가 모두 떠나고 말텐데, 매일의 인위적 관리가 걱정이 되었다.
점심을 나누며 대책이 무엇인지 지인들과 나누었다. 닭의 습성을 잘 아시는 선생님이 '닭은 밤에 야맹증이라서 잘 못 봐요. 밤에 어미닭 품에 살짝 넣어 주세요. 그러면 아침에 일어나면 어미닭은 자기 병아리들로 알고 그때부터 잘 데리고 놀아요.' 이렇게 대책이 생겨났다.
나는 네 마리 위기의 병아리들을 살려야 한다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20분 운전해 닭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닭장 밖 병아리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가 인기척이 나자 나를 보더니 내가 어미인 줄 알고 삐약거리며 반가운듯 우르르 다가왔다. 인공부화한 병아리들은 어미닭이 없어 자기들을 처음 관리해 주는 사람이 어미인줄 알고 따른다고 했다. 나는 병아리에게 손바닥을 내밀자 손바닥 위로 모두가 올라왔다. '추워요. 외로워요. 죽을 자경이예요. 살려주세요' 병아리들은 아우성치고 있었다.
나는 지인이 점심때 알려준 방법으로 캄캄한 밤을 이용해 병아리들을 한 마리씩 어미닭의 품에 몰래 넣어 주었다. 병아리는 천국을 만난듯 어미품속에 쏙 들어가 안겼고 그렇게 네 마리의 위기는 멈췄다. 어미닭은 날개를 넓게 펴고 별다른 반응없이 품어주었고 아우성치며 삐약거리던 병아리들은 안식처를 찾은듯 했다. 이렇게 하루가 잘 마감되고 있었다. 병아리들이 모처럼 편안한 밤이 되겠구나 생각을 하니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마치 잔뜩 밀린 숙제를 시원하게 풀었을 때처럼 행복감으로 다가왔다.
내일 아침 기상해서 어미닭 품에서 나온 병아리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굼하다. 어미닭이 자연부화한 병아리들에게 물마시고, 먹이를 먹고 하는 것을 모두 통제했지만 인공부화한 병아리는 어미닭이 없이 통제불능상태에서 닭장 밖 병아리 신세가 되어 내 마음을 아리게 했었다. 아침에 어미닭 품속에서 나와 자연부화한 병아리처럼 보호를 받으며 잘 지냈으면 좋겠다.
닭장 밖 병아리를 바라 보다가, 학교 밖 학생들을 떠올렸다. 모두 하나같이 잘 자라나길 바래 본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을 오늘 따라 더 많이 생각나게 한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던 아드님을 보내 주시어 당신 날개 그늘 아래 기댈곳 만들고 조건없이 모두를 품어 주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인고의 성주간이 시작된다. 그리고 성삼일을 지내신다. 엄마 품에 안겨진 어린 아이처럼 하느님의 품속에 우리의 자리를 마련하신다. 어미품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세상 밖에서 거철게 서성인다. 하느님의 품이 있음을 죽을 때 깨달으니 무엇하리오, 예수님 걸어가신 길, 통하여 안에서 함께 걸으며 기쁨의 부활을 맞이해야 한다.


오늘은 충주 가르멜 수도원 06:30 미사주례가 있다. 집에서 시간반 달려야 한다. 또 감사한 하루가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성지주일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축제 기분에 들뜬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고 있다. 이 예수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의 짓누르는 고통을 먼저 거쳐야만 하는 야훼의 종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예언적 전조와도 같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의 셋째 노래를 전하고 있다. 이 종은 하느님의 고통당하는 종이다. 이 종은 주님께 대한 충실성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이사 50,7).

 

복음: 루카 22,14-23,56: 주님의 수난

예수께서는 당신을 휩쓸어버리려는 그 파괴적인 공격을 맞이할 채비를 하신다. 루카 복음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무엇보다도 그 예루살렘에서의 사명과 당신의 마지막 공적 가르침과 이후 직접적으로 계속되는 사건들, 즉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재판, 십자가, 부활과 그 후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일치시키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파스카를 거행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22,15). 이 파스카는 확실히 죽음을 통한 봉헌의 표지로서 식탁에 놓였던 최후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분의 생명을 통한 희생적 봉헌의 예표이며 동시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22,19.20).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당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걱정을 하신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 십자가를 따라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23,28.31). 그러나 애석하게 생각하고 울어야 하는 사람은 패배당한 것같이 보이고 천시당한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죽음에 처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 여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도, 다른 공관복음의 절망적 외침인,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편 21,2)가 아니라, 아버지께 평온히 의탁하는 태도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0,6).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렇게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사를 과장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께서 가지셨던 ‘고뇌’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22,44). 이 표현은 예수께서 ‘수난’을 능히 극복하고 지배하실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의 인간적 한계와 번민에서 그를 제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위대하신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만 절망의 공포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2,42).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처지에 처하게 되는 바로 그때 참으로 신성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신비, 즉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많은 사람이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태도와는 달리 적개심보다는 호기심과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 마음에는 후회의 감정이 있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23,48).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 이는 마르 15,39에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구원’되도록 한다. 오른쪽 강도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못 박힌 다른 강도의 예수에 대한 조롱에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그 죄수가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0-43).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은 그 강도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인간의 모든 비열한 행위와 배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만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모르고 잘못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립 2,9-11). 이렇게 파스카의 빛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온 땅을 뒤덮었던 그 무서운 어두움을 이미 벗겨내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그리고 성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은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였습니다. 특히 우리들이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은 올리브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는 모습과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을 자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특히 주님의 수난기를 들으면서 우리들은 무엇을 묵상해야 할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서 힘든 수난을 받아들였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해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이 짧은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삶이 어떤 삶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신 예수님께서도 한편으로는 꿈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가면서 자신의 것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셨고 십자가 위의 비참한 죽음도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라는 인간적인 나약함도 보여주셨지만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수난주일을 지내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은 세상의 유혹에 빠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것을 먼저 찾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가요. 세상은 사랑이 없습니다. 즉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내편이 아니면 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신앙인들조차도 이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그런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지배자인 로마군인들까지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용서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수난은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을 모으기 위한 수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자녀로써의 삶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렵게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잠을 청했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 것은 모두 아버지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으로 살아갑시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입니다.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어린양, 고통받는 야훼의 종,
섬기는 이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속죄 제물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는
당신의 모습을 묵상하며 성주간을 맞이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Father, forgive them

 

 

 

이근상 시몬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비 2,6-7)
당신 자신을 비우셨다는 건 사순의 내용을 요약한다. 그러니 우리말 비운다(케노오)는 너무 고상하다. 텅빈 공간, 텅빈 그릇의 아취. 동양화의 여백... 사실 우리말 '비운다'는 명료하게 확 다가오는 표현이다. 뭔가 채워진 것을 쏟아낸 뒤의 청량함. 욕심을 비운다랄지, 가득채운 바람과 아픔, 상처, 욕심 뭐든 그런 것들을 좀 다 내려 놓는 행위를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되는 '케노오(비운다)'는 빈 상태가 아니라 가득찬 사태다. 필리비서 말고는 비운다로 번역하지도 않았다. 원래는 가득하였으나 쏟아내버린 사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의미가 없고(로마4,14), 헛되며(1고린토1,17;9,15), 빈말인(2고린토9,3)' 사태. 뭔가 채워질 가능성이 가득한 고상함 대신, 바보같음, 무의미함, 헛됨이 가득하게 채워진 사태.
그러니 성경을 좀 다시 번역하자면 이렇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무의미로 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비 2,6-7)'
비운다(케노오)는 무척 적극적으로 바보가 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십자가의 길, 사람들을 떠나는게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 상영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등장하는 폭력 때문에 답답하고,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처참하리만큼 커다란 고통을 겪으시며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수난이 우리의 마음속으로만 그리는 단순한 고통과 수난이 아니라 실제로 당하신 수난임을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살펴보면서, 한 가지, 그리스도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유다인들의 문화 즉 유다교 신앙 속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처음 알게 된 사건은 이집트 탈출 사건입니다. 지금은 '탈출기'라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될 수는 없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들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느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어려운 노예살이를 굽어보셔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의 과정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부려먹던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인 노예들을 내보내려고 하지 않자,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풀어줄 때까지 한 가지씩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재앙이 아홉 번째에 이르러도 이스라엘을 내놓지 않자, 하느님께서 열 번째 재앙으로 이집트의 맏배인 동물의 첫 번째 새끼와 사람의 맏아들을 치려고 하셨습니다. 그 열 번째 재앙에서 이집트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집안을 구분하기 위해서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두도록 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왔을 때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안은 이스라엘의 식구라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은 죽이지 않고 그냥 지나쳐감으로써 이집트의 맏자식들만을 치셨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천사가 지나쳐가는 것을 '과월절'이라고 했고, 영어로는 '파스카'(pascha) 또는 '패스 오버'(pass over)라는 말을 써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탈출 12장).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다른 민족들과는 다른 특수한 형태의 제사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제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내리신 속죄제사의 규정을 따르자면,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씻으려면, 그 죄를 지은 사람이 동물을 잡아, 자기 죄를 씌워서 그 동물의 피를 속죄판에 뿌리면, 그 사람의 죄가 씻어진다고 합니다. 그것이 레위기 4장과 16장에 나오는 속죄의 제사였고, 이스라엘의 죄를 씻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두 가지 신앙 문화 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것이,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죗값을 속죄하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의미가 아주 쉽게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생전에 이미 이에 대한 언급을 하셨습니다.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면서,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28; 마르 10,45)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27-28; 마르 14,24; 루카 22,20)라고 미리 당신 죽음의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사도 성 요한도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1요한 4,10)라고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씻고, 인류를 죄악에서 구하시기 위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요한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려, 예수님께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29)라고 밝히도록 했고, 또한 19장 31절에서 예수님 죽음의 시간을 과월절 양을 잡는 준비일이라고 기록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이집트 탈출 사건과 연관하여, 예수님을 단순히 죽음으로 그치고 말 인류의 운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전합니다.
그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과거 2000년 전에 죄를 지은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시고 마셨을 뿐, 지금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와 루카 복음사가와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도 코린토 전서 11장에서 '주님의 성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1코린 11,23-25)라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인한 속죄의 제사는 그 한 번의 죽음으로 완성된 것이지만, 그때의 그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는 이들을 통해 계속된다고 전합니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이어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코린 11,26)라고 명합니다.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분이 몸을 여러 번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천지 창조 이후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하셨습니다.”(히브 9,16)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 주셨고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28절) 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유일무이하고 항구한 희생제사로 선포합니다.
결국, 교회는 주님께서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돌아가신 희생을, 오늘도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재현하며, 그 속죄의 신비를 우리는 교회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는 수난을 겪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왜 돌아가셔야만 했는지?' 그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며, 주님께서 오늘 우리 죄로 인해 수난당하시고,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죄의 부당함과 심각성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 죄를 반성하고, 우리 죄로 인한 사회악의 확산과 연대를 끊기 위해, 우리 사랑의 행위로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우리 사랑의 보속은, 주님 십자가의 효과를 이 세상에 확산시키는 데에 공이 될 것이며, 주님 수난의 신비를 열매 맺게 하는 데에 우리를 참여케 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사랑의 보속으로 구원을 위한 주님의 희생제사를 계속하기로 합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방금 우리는 루카가 생생하게 전하는 주님의 수난에 대한 복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고 세상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실 준비를 하시지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그분을 팔아넘깁니다.
그리고 으뜸 제자라 인정받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죽을 준비까지 되어 있다고 했지만,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몇몇 제자들을 데리고 올리브 산에 오르시어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지만, 같이 간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잡히시어 갖은 폭력과 조롱을 당하시고, 동족에게 고발당하여 십자가형을 받으십니다.
오히려 로마인이었던 빌라도가 유다인의 관습을 이용하여 그분을 풀어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동족들은 그분을 풀어줄 바에야 살인을 저지른 죄인을 차라리 풀어주라고 소리지릅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질투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 자리가 위험해질까봐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해서 그들을 모두 용서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 * *
성당에 다니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런 건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윤리적 의무 조항을 되새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단순히 의무를 되새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의 삶과 하신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의무 조항를 채우는 것에서 시작되거나 완성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미학적인 관조"(contemplatio aesthetica)에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가 주님의 수난을 통해 그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바라보도록 초대하기 위해 한 해 가운데 가장 거룩한 시간인 성주간의 시작하며, 이토록 자세하게 예수님의 수난을 전해줍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법정 최고형을 받는 사형수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되셨고, 그 밀알은 썩어서 가지와 잎을 내어 세상을 살리는 열매를 내었습니다.
* * *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려고 하시자, 베드로는 어떻게 스승님께서 발을 씻으시냐고 그분을 만류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저런 신앙과 관련된 의무를 지킴으로서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너무 자주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려야 그분의 몫을 나누어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발을 씻으시도록 해야 우리가 비로소 그분의 몫을 나누어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성주간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실 수 있도록 허락해드립시다. 특별히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것은 그분께 내놓기 부끄러운 우리 발을 씻어주시는 기회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어주시듯,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특별히 우리 삶의 더러운 부분을 닦아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배반한 제자들을 용서하셨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죄에 쉽게 넘어가는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이 사랑을 받고 관조하는 것에서 우리의 사랑이 시작됩니다.  시편 35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생명의 샘이 정녕 당신께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봅니다."
하느님의 빛을 받을 때 우리 영혼에 빛이 돌기 시작하고, 그 빛은 다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우리 밖으로 퍼져나갑니다. 
섬기시는 하느님의 빛, 진리와 사랑의 빛을 가득히 받는 성주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님 사랑의 눈빛(주님 수난 성지 주일)

     키엣 대주교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사업, 파스카의 신비를 완성하시고자 들어서는 길에 열렬히 환영하는 군중들과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 그 모든 걸 알고도 그 길을 한발 한발 내딛는 그 마음까지도 동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성공과 실패
삼십년 동안 나자렛에서 겸손한 삶을 살아오신 에수님께서는 마지막 3년, 유다 전 지역에서 설교를 하시면서 성공과 실패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유다인의 가장 중요한 날인 유월절을 맞이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셨습니다. 12살 때부터 매년 유월절에 이곳에 오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곳에 오신다는 것도, 위험에 처할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실패를 겪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20세기 초 베트남의 유명한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했어도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실패와 성공 중 성공만이 성공한 사람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대하는 태도나 행동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신 분이기에 모든 것을 성공으로 만드실 수 있음에도 인간의 삶에 수 없이 경험하게 되는 실패와 성공, 인간의 삶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코끼리에게 밟혀 죽는 것을 피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조금 더 ‘현명하실 수 없으셨을까요?’ 그 분께서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을 하셨고, 숨기지 않으셨으며, 어떤 어려운 상황도, 어떠한 임무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왜 그런 고난과 수모의 길을 가신것일까요?

당신의 권위로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지 않으셨고, 도전을 받아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모든 경우가 당신에게 참혹한 고난일지라고 당신 스스로 '인간과 똑 같은 조건'을 마지막 순간까지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간으로서, 인간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상황에 따라 인간은 변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하던 군중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예수님께 분노와 적개심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심판하라고 소리지르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스승과 빵을 나누고 잔을 들었던 유다는 스승을 팔기 위해 서둘러 빠져나갔고, 스승 옆에서 삶과 죽음을 이야기 했던 베드로는 이제 스승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포악한 군중들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넘치는 사랑과 자비, 평온을 유지하시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위의 고통과 치욕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인 베드로를 걱정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한 후에야 비로소 스승의 어두운 표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애로운 모습 속에 가슴 에이는 슬픔을 담고 계신 스승의 모습에서 배신한 제자를 비난하는 눈빛이 아니라 나약한 제자를 용서하는 넓은 사랑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의 용서는 베드로를 깊은 참회의 슬픔에 잠기게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마치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정결하고 순수한 봉우리를 피워내는 연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성찬례를 통해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누는 기적, 사랑의 행위는 사람들이 자신을 극복하고, 모든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죽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악은 사랑 앞에서 무력합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봉사, 그것도 숭고한 나눔의 사랑입니다. 


분노와 배반을 초월하는 고귀한 사랑 이것이 바로 주님 크신 사랑이고 주님 사랑의 승리입니다.

겸손하시고 인자하신 주님, 편협한 저희 마음을 고쳐주시어 넓고 자비로운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하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패션과 트랜드를 쫓기에 바쁜 세상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그러한 세상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나는 어디쯤 서 있는 지 생각해봅시다. 2. 그리스도교는 박애와 자비로 믿음을 표현하고 실천합니다. 배신을 당하고 불공평함으로 인해 손해를 보았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돌이켜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숭고한 사랑은 정의를 실천하고 나누는 사랑입니다. 나의 가족, 나의 이웃에게 사랑의 눈길, 사랑의 마음, 나눔의 사랑을 전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랑
    윤성민 그레고리오 신부님
교회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여정에 동참하는 성주간을 보냅니다. 특별히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례는 오랜 전통에 따라 ‘호산나’를 외치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정성스럽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고 재현합니다. 그리고 말씀전례 안에서 예수님의 수난기를 듣게 됩니다. 이 기념 예식과 수난 복음이 전하는 말씀 안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태도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이 환영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가 깔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의 처지, 곧 로마 통치에서 벗어나 옛 다윗 왕조가 누렸던 그 영광을 되찾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메시아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동안 공생활을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그들의 이같은 기대를 충분히 채워주리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기대가 좌절되자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사람들의 태도는 분노와 미움으로 급변합니다. 그들의 이같은 태도의 변화가 당황스러우면서도, 과연 우리는 그들의 태도를 쉽게 비판할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그들의 모습은 우리 신앙의 현실을 비추는 투영으로 다가옵니다. 신앙이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하느님을 대했는지 성찰해 보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으며, 극한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드러나는 여정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등장합니다. 정의가 상실되고 정치적 논리에만 따른 불공정한 재판, 제자들의 어처구니없는 배반과 배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해야 했던 모욕과 수치, 나약한 육체가 받아야 하는 고통 등 사랑에 대해 의심하고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많은 순간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그 길을 묵묵히, 충실히 걸으심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그리고 인간을 향한 사랑은 그 어떤 순간에도 지치지 않고 한결같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계십니다. 앞선 수시로 변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전적으로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이번 성주간은 이 사랑의 여정에 깊이 머물러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우리의 삶도 사랑하고 포기하지 않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올바른 이해
     이승환 루카 신부님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0-44), 물 위를 걸으신 기적(마르 6,45-52), 병자 치유(마르 6,53-56) 등 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일반적으로 기적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초자연적인 신비로운 현상을 말합니다. 즉, 과학이나 이성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들은 다릅니다. 성경에서 전하는 기적은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 안에서 어떤 특별한 행동이나 사건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리거나 실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도움과 구원을 주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크게 드러나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자연법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기적은 언제나 당신의 말과 행동, 전 인격적으로 선포하는 핵심 메시지인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하느님의 다스림이 펼쳐지고 있다는 표징을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기적들을 행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권능을 받고 있음을, 하느님의 권능과 뜻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가령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치유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자연을 다스리는 기적을 통해 당신의 권능을,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써 당신이 생명의 주관자이며, 하느님의 아들임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적의 신비로움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사랑과 존재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해주는 표징이 되지만, 기적 자체가 믿음의 전제 조건은 아닙니다. 참다운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가운데 생겨납니다.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의 사실 자체가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전하고자 고심했던 기적 이야기 속에 담긴 신앙의 진실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실제 사건을 추적하는 자세가 아니라, 나의 삶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다가오는 구원 사건의 진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저는 이 성지주일에 선택된 나귀를 정말 귀하고 사랑스럽게 여깁니다.
제가 사제서품 때 선택한 성구가 ‘주님께서 필요 하시답니다.’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등에 모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했으니까요.

저도 예수님을 세상에서 하늘예루살렘 갈 때에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아마 저와 똑같은 심정일거라고 생각하니 더 기쁩니다.
하늘평화 세상에 알리신 하느님의 말씀 예수님을 모시고 가기로 해요.

세상의 참 평화는 하늘의 평화를 따를 줄 알아야 영생의 맛을 봅니다.
세상투쟁대열에 매였다 해도 내 실체인 정신과 마음은 매이지 맙시다.

 

 

 

어떻게 살 것인가? - 수난기로부터 배우는 가르침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무상無償의 선물들로 가득한 온누리 세상입니다. 대부분의 나무가 꽃나무들이라 죽은 듯 보였던 나무마다 피는 꽃들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무수히 아름다운 꽃들 만발한 수도원을 찾는 이들 역시 꽃처럼 보입니다. 어제 마침 나물 캐던 자매님이 산책하는 저에게 운동하느냐 묻기에 꽃을 보러 나왔다 했고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자매님도 꽃같아요!”

 

나이에 상관없이 아름답게 웃는 얼굴은 꽃같습니다. 그래서 고백성사 말씀 처방전 말씀에 참 많이 찍어 드리는 스탬프가 “웃어요!”입니다. 이걸 읽어 보고 웃을 때는 꽃처럼 예쁜 얼굴들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서로가 꽃’이라는 시도 풀꽃처럼 소박해서 좋았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꽃이고 기도다.

나 없을 때 너 보고 싶었지? 생각 많이 났지?

나 아플 때 너 걱정됐지? 기도하고 싶었지?

그건 나도 그래.

우리는 서로가 꽃이고 기도다.”

 

‘우리는 서로가 꽃이고 기도다’, 참 아름다운 말마디입니다. 서로가 꽃이고 기도로 살 때 잘 살다가 잘 죽는 삶입니다. 어제 가톨릭 평화신문에서 읽은 박노해 시인의 짧은 글도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을 향해 걷고 있다.

언젠가 어느 날인가 죽음 앞에 세워질 때,

나는 무얼하다 죽고 싶었는가.

나는 누구 곁에 죽고 싶었는가.

내가 죽고 싶은 자리가 진정 살고 싶은 자리이니

나 지금 죽고 싶은 그곳에서

살고 싶은 생을 살고 있는가.

이름 없는 수선화 꽃 무덤이 물어온다.”

 

내 좋아하는 곳,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평생 정주의 삶을 사는 수도자인 저에게 그대로 드러맞는 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다 주님 곁에 죽고 싶습니다. 정주의 지금 살고 있는 이 자리가 죽고 싶은 자리입니다. 또 자주 일부 말마디를 바꿔 산책중 자주 부르는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입니다.

 

“나 태어난 수도원에 수도자 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마지막 한 구절은 거듭 되뇌이곤 합니다. 수도자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평생 현역의 영원한 주님의 전사입니다. 이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를 때 마다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합니다.

 

만개한 파스카 봄철의 무수한 봄꽃들, 꽃처럼 피었다 꽃처럼 지라는 가르침을 배웁니다. “잘 살다고 잘 죽고 싶습니다.” 아주 예전 개신교 목사님이 소원이냐 무엇이냐 물었을 때 즉시 대답하고 흡족해 했던 답변이고 지금 물어도 이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산대로 죽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바로 오늘 루가복음 수난기의 주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첫째, 참 좋은 선물로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참 좋은 선물의 삶은 일치를 주지만, 그렇지 않는 삶은 분열을 줍니다. 죽음에 앞서 일치와 평화의 선물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오늘 루카의 수난복음은 “성찬례를 제정하시다”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기신 최고의 멋진 생명의 선물이 바로 성찬례, 우리가 날마다 거행하는 미사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과연 내가 세상에 남길 선물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자주 생각하는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정말 간절한 소원은 하루하루 주님과 이웃에게 선물로 살다가 선물로 떠나는 죽음이면 하는 것입니다. 짐으로 살다가 짐으로 떠나는 죽음이 아니라!

 

둘째, 참 섬김의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이어지는 수난복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친히 평생 섬김의 삶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남기는 주님의 유언입니다.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영성 하나만 있을뿐입니다. 왕처럼 군림과 권세의 왕처럼이 아닌 섬김의 종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 이맘때쯤 낮은 자리 작은 민들레꽃을 보며 위로를 받고 쓴 시가 생각납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

 

이름없는 민들레꽃처럼 낮은 자리에서 활짝 열린 섬김의 삶을 사는 작은 이들을 가득 채우는 하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필리비서 그리스도의 비움 찬가의 다음 대목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섬김의 삶을 참 잘 요약한 읽을 때 마다 감동을 선물하는 비움 찬가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토요일 제1저녁기도 때마다 고백하는 마음으로 이 찬가를 부릅니다.

 

셋째, 참 겸손한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겸손한 삶은 온유한 삶이요 진실한 삶입니다. 겸손한자 주님의 도를 배우게 하시면 온유한 자 주님의 의로움을 살게 합니다. 참 사랑은 겸손한 사랑, 진실한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면 결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이기에 딱히 탓할바는 아닙니다만 우리에겐 반면교사가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인했을 때 예수님의 베드로를 바라보는 눈길을 잊지 못합니다.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오늘 닭이 울기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회개의 눈물이요 회개를 통해 온유와 겸손, 진실을 회복한 베드로입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란 말이 생각납니다. 권세가 있으면 아첨하고, 몰락하면 냉대하는 세상의 인심을 이르는 한자성어입니다. 진실과 겸손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 예루살렘 입성시 “호산나! 호산나!” 열광적으로 환영하던 군중들은, 후에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광분狂奔하니 참 믿을 바 못되는 염량세태의 세상 인심입니다.

 

넷째, 참 기도의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루가복음은 물론 수난기에 특별히 눈에 띄는 모습이 간절하고 항구하고 열렬한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나오는 모습에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봤습니다.

 

“주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기도는 하느님과 사랑과 생명의 소통입니다. 잘 들어야 잘 기도할 수 있고 잘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기도의 비결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기도를 잘하고 싶은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참으로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더욱 날로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기도의 모범입니다. 감동적인 기도 장면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1.“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님의 기운을 북돋아드렸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2.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인 임종어는 그 절정을 이룹니다. 평소 이렇게 사셨기에 이런 기도입니다. 역시 인간의 무지가 얼마나 치명적인 죄이자 병이자 악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시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임종어의 기도도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 참 착한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수난기는 온갖 인간 군상들을 보여줍니다. 선인과 악인이 혼재해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세요. 누가 진짜 이웃인지는 곤궁한 역경에 처했을 때 그대로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시몬,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한 죄수, 예수님의 거룩한 임종장면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던 백인대장,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신 착하고 의로운 요셉 등 이런 착하고 진실하고 의로운 이들이 있어 염량세태에도 불구하고 살 힘을 얻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산대로 죽습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하루하루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도록, 선물로 살다가 선물로 죽을 수 있도록, 착하게 살다가 착하게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살다가 기도하다 죽을 수 있도록, 진실하고 겸손히 살다가 진실하고 겸손히 죽을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아멘.

 

 

 

하느님 백성을 위한 메시아의 수난

     이기우 신부님

1. 오늘은 성주간을 시작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구름처럼 모인 군중으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으시며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로부터는 부활 논쟁으로 그리고 바리사이들로부터는 세금 논쟁으로 마치 사상 검증과도 같은 통과 의례를 거치신 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논쟁에서 말문이 막힐 정도로 궁지에 몰리자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히고는 바리사이들과 연합 전선을 펴는 한편, 바랍바라는 자신들의 동료를 구하려고 가담한 젤로데 당원들과도 야합했으며 이 당원들을 움직여 재판을 방청하던 군중을 선동하였습니다. 군중은 야바위꾼처럼 수작을 부린 이들의 위세에 눌려 동조하기도 하고 지켜보기도 했지만 대세를 거스르거나 그 자리를 떠나지는 않으면서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을 확인하고 석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중 소요가 일어날까봐 겁이 나서 공연히 그분에게 태형을 명령하고 십자가형을 선고하는 바람에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2. 모세의 활약으로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천 년 이상이나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메시아를 환영하는 듯 하다가 돌연 태도를 바꾸어 배신하는 장면이 오늘의 복음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도, 그로 말미암은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도 그분의 부활과 새 하느님 백성의 창조를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두가이와 바리사이와 다수 군중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인해 메시아께서 수난을 당하셨지만, 부활하신 메시아께서 열두 제자를 포함한 소수의 이스라엘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삼으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3. 메시아의 수난과 부활은 하느님 백성을 새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헌장 8항에서 이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교회는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거룩하면서도 항상 정화되어야 하겠기에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을 계속하는 것이다.” 잘못을 범한 유다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던 역사적 선택은 취소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 아니라 참이스라엘로 불리는 것이고, 공의회 역시 교회 역사상 잘못을 저지르는 교회 구성원들의 잘못을 기억하고 통공의 신비 원리에 따라서 인류 앞에 대신 참회를 하면서도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을 구분합니다. 메시아께서 부활하시어 세우신 교회라는 참이스라엘은 여전히 거룩하지만 교회의 지체들은 과거 옛 이스라엘의 사두가이나 바리사이나 젤로데 그리고 다수 군중처럼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이스라엘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지만, 과거 그들의 잘못만큼 가톨릭교회의 지체들도 어리석은 잘못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4. 지난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강생의 신비: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들’」이라는 문헌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지난 이천 년 교회 역사를 뒤돌아보며 과거 잘못을 역사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인류 앞에 참회하고, 교회가 나아갈 미래를 신학적으로 전망한 이 문헌은, 그 유산으로 남아 있는 온갖 형태의 폭력과 증오로부터 개인과 공동체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기억의 정화는 과거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범한 잘못들을 인정하는 용기와 겸손의 행위입니다. 이런 기억 행위는 교회 신비체 안에서 서로를 결합시키는 그 유대 즉 통공의 신비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화해 행위는 지금의 교회 구성원인 우리 모두는 비록 개인적으로는 책임이 없지만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오류와 잘못의 짐을 짊어지고 공동의 몫으로 보속함으로써 부활하신 메시아를 따라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쇄신시킨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함에 있어서는 흠이 없지만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오늘날은 물론 과거에 교황으로부터 일반 신자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구성원들이 범한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 가운데에는 교회를 분열시킨 과오도 있고, 과학적 신념이나 문화적 관습이나 개인적 양심을 인정하지 않은 과오도 있으며, 시대의 징표를 제때에 식별하지 못해서 복음화를 지체시킨 과오도 있습니다. 

 

5. 예를 들어, 11세기에는 로마 공동체의 수위권을 둘러싸고 동서방 교회가 서로 파문하며 갈라졌던 과오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오인 까닭은, 예수님께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서로 첫째가 되고자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서방 교회가 갈라진 후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하고 동방교회 지역을 위협하자 동방교회를 도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당시 우르바노 2세 교황가 시작한 십자군 전쟁은 동방 교회 신자들과 이슬람 신자들에게 막대한 피해와 상처를 주었고, 지금까지도 이슬람 세력권과 동방 교회 영향권 아래에 있는 가톨릭 공동체의 소외를 자초하는 선교적 실패를 야기시켰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과오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해야 할 교회가 평화 대신 전쟁을 일으킨 이 어처구니 없는 과오 탓에 가톨릭교회는 지금까지 두고 두고 보속하고 있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16세기에는 교황청의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둘러싸고 과도한 모금으로 인해 항의하는 개혁가들을 단죄하고 파문시키는 바람에 이들이 소위 프로테스탄트로 떨어져 나가게 만든 과오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오인 까닭은, 예수님께서 당시 복마전 노릇을 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시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는데 성전을 화려하게 짓느라고 신자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으며 스스로 권력자요 부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오들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제자 윤리를 지키지 못한 책임의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6. 이러한 교회 내부 질서를 분열시킨 잘못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이룩된 진보와 성과를 알아보지 못하고 강압적으로 단죄하고 중단시킨 과오도 있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 갈릴레이를 단죄한 일을 비롯해서 이단적 신념을 지닌 이들을 단죄했던 종교재판과, 억울한 이들을 마녀로 몰고 화형과 같은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했던 과오가 있고, 중국과 조선에서 조상을 공경하는 민간 풍습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우상 숭배로 단죄하여 금지시키는 바람에 대규모 박해가 장기간 벌어지게 했던 과오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상 제사 금지령으로 인한 박해에서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배교자로 낙인찍힌 신앙 선조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할 과제도 남겼습니다. 

 

7. 또한 산업혁명의 폐해로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발생했을 때 일어난 노동자 운동과,  인간 존엄성을 주장하는 시민혁명을 무신론으로 단죄했던 과오가 있습니다. 이는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시대의 징표를 제때에 식별하지 못해 복음화를 지체시킨 선교적 책임과 정의를 구현하지 못한 책임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근세에 일어난 이 사태는 역설적이지만 교회 바깥에서도 활동하시는 성령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 두 무신론 사태에 숨어 있던 역사의 징표를 일러주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의 역사적 계시 진리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고양된 존엄성이 자유와 평등, 정의와 연대라는 가치를 공의회 문헌에 담았습니다. 

 

8. 대희년을 맞이하기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새롭고 참신한 눈으로 교회 자신을 돌아보았고 세상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새 복음화’의 여정입니다. 심지어 과거에 단죄하기 일쑤였던 무신론자들과 개신교 그리스도인들과도 대화를 하기 시작했으며, 동방교회와도 상호 파문을 철회했습니다. 교회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한 의미에서, 현대에 나타나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하느님 나라와 부활의 복음의 기준과 현대인들의 눈높이로 조명하고 식별한 새롭고 참신한 메시지가 가톨릭 사회교리입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가 보화로 보전해온 성체신심 및 성모신심과 더불어 복음적으로 쇄신된 가톨릭교회의 담보가 바로 이 가톨릭 사회교리입니다. 

 

9. 역사적 반성과 겸손한 성찰 위에 세상과 교회 자신을 관찰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시대의 징표를 냉정하게 판단한 다음에, 교회 전체가 할 일과 개별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 그리고 작은 공동체들이 사도직으로 행해야 할 일들로 합리적으로 나누어서 지혜롭고도 인내로이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닮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을 보고 세상이 비로소 그분을 알아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쇄신되고 변화된 그 행실에 따라서 교회가 선포하는 부활 메시지를 조금이나마 알아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메시아의 수난은 하느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부활은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나겠다는 다짐과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함승수 신부님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입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상대주의화되면서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신'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들던 절대적 가치들이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린 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하는 말이지요. 그런데 교회의 입장에서 아프게 들릴 수 있는 이 말이, 사실은 지난 이천년동안 교회가 끊임없이 외치고 있으며, 또한 매해 사순시기가 되면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신이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참 사람이시며 참 하느님이시기에, 인간 예수님의 죽음은 곧 하느님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을 기념하고, 그 죽음이 우리 삶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묵상하며, 그 의미를 헛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마음가짐을 되새기는 겁니다.


 오늘 봉독한 루카복음의 수난기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께서 잔혹한 고문을 받으시는 모습이나 치욕을 당하시는 순간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간략하게 압축하여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슬프고 불행한 '비극적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자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필수조건임을 드러내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의도를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1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3-25) '하느님의 아들'이 무력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에게나 행해지던 십자가형으로. 유다인들은 이 사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를 자기 손으로 죽인 그들의 모습을,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무력하게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마는 예수님의 모습을 '어리석다'고 여기며 비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마저 이기는 놀라운 사랑의 힘을 알아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부족하고 약한 인간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그걸로도 모자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분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의 사랑을 머리로 이해하긴 쉬워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긴 어렵습니다. 사랑에서도 증거를 요구하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상반된 모습에서 그분의 사랑을 대하는 우리의 이중성이 드러납니다. 한 죄수는 당신이 메시아라면 나를 구원해보라고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이 고통과 시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보라고 주님의 사랑을 시험하는 우리 모습입니다. 다른 죄수는 자기 잘못을 고백하며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합니다. 스스로가 죄 많은 사람임을 깨닫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갈구하는 우리 모습입니다. 전자의 모습을 지양하고 후자의 모습을 지향하려면 마음 속에 올바른 구원관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원하는 무엇을 이루는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에 증거를 요구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주님께 나를 의탁하고 그분 사랑을 온전히 누릴 때,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마주하면 우리의 신앙이 흔들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로우신 분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이 불의와 폭력이 득세하는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십자가의 무능함 안에 계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른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에서 우러난 온전한 자유로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입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우리도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그분께서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들어높여 주실 것입니다.

 

 

 

성 주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루카 19,28-40. 22,14-23. 49> 4월 1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에 주님의 수난사를 듣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싹이 트고 땅 위의 생명이 자기 모습을 내놓음을 기다리듯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주님의 동반자 되어 그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산티아고의 순례 길을 한 달 이상 오로지 거룩한 생각과 고통을 감내하며 걸어가듯이 각자 순례 길을 떠나야 합니다. 사순절 시작하며 선행과 기도와 절제의 삶을 약속한 것을 각자 아름답게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약속한 대로 잘 이행했는지, 부족하게 살지 않았는지 깊은 반성을 하면서 부족한 점을 채워 가며 거룩한 주간을 지내고 주님의 부활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우선 마음의 정화가 따라와야 합니다. 오늘 성지주일 두 복음을 들으면서 환호와 저주의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지 않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호산나” 주님의 오심을 환영하던 입이, 마음이 군중을 속이는 악마적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 “저 사람은 십자가에 처형하라” 소리 지르지 않았는가 자기 속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나는 절대로 아니야!” 하면서 부정할지 모르지만, 눈앞의 이익만 탐하는 마음이나 임시방편으로 쉬운 일과 편한 자리만 찾는 사람, 수난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에 즐기고 놀이에 빠져 있거나 하느님의 일보다 세상의 일에 빠져 있으면 환호와 저주를 부르짖는 사람들과 같아집니다. 오로지 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해 고난에 동참하고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갑시다.


두 번째, 사람의 일은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좋은 일에 마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제 상담자가 “신부님, 저는 하던 사업을 접어야 하는데 머리가 어지러워 힘이 듭니다.” 하기에 “정하시는데 단순한 마음을 가지세요. 만일 사업을 하시다가 죽음이 눈앞에 있으면 ‘그것을 어찌하나’하고 걱정할 시간이 있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 앞에 의젓하셨듯이 단순한 마음으로 직원에게 더 큰 상처 없이 돈을 주고 나머지는 이익보다 깨끗한 마무리를 하시면서 지금껏 30년 동안 사업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기도 하십시오. 감사기도 하는 마음은 문제 해결과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주님이 언제나 죽음에 대해 하시는 말씀 중에 사시던 것처럼 나에게는 그런 불행이 없기를 바라는 것보다 그런 고통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한동안 코로나가 있어도 나에게는 아무 일 없듯이 살다가 요사이 내 가족, 내 공동체 가까이 확진자가 생기면서 남의 일 아니라, 내 일처럼 생각합니다. 이같이 모든 고통은 내 안에 있으며 함께 사는 것입니다. 고통은 너에게만 아니고 나에게도 언제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구약을 보면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어떤 고난의 길에도 해결책을 주시고 슬픔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부활이 있듯이 참 생명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시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지옥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신다고 합니다. 저는 희망이 넘치게 사는 믿음을 갖고 살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맞이할 것

     이영일 야고보 신부님
서로 다른 두 개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제자들의 무리는 자신들이 직접 보고 체험한 모든 기적 때문에 예수님을 큰 소리로 찬미하며 환호하고 있습니다. 반면 군중 속에 있던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환호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 그들을 꾸짖어달라고 외칩니다. 여러분의 귀에는 어떤 소리가 더 크게 들리시나요? 저는 제자들의 무리가 외친 ‘환호 소리’에 귀를 더 기울여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 위로받았고 누구보다 그분의 연민과 사랑을 체험한,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십자가 길 위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슬퍼하며 동행할 것입니다. 그들은 무섭고 두려운 슬픔 속에서도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침통해하며 자신들의 고향을 향해 돌아갔다가 기쁨과 환호 속에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그 모든 행적 때문에 기뻐할 줄 아는 신앙인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 안에서 진정으로 기뻐하며 큰 소리로 맞이할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정치와 허니문 그리고 초심
     이지혜 체칠리아(CPBC 가톨릭평화방송 작가) 
혹시 신혼여행을 어디로 다녀오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사실 신혼여행, 흔히 말하는 허니문(Honeymoon)은 어딜 가도 상관이 없지요.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질 테니까요. 그런데 지금처럼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지인들 앞에서 결혼식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고 이국적인 장소로 여행을 떠나는 허니문의 개념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생겨났다고 합니다.


당시 산업혁명 이후 교통수단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갓 결혼한 신혼부부들이 기차나 화려한 증기선을 타고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새로운 인생의 시작에 의미를 두게 된 거죠. 그런데 허니문의 유래는 그것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노르웨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당시 신랑이 신부를 납치해 숨겨두는 관습이 있었는데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딸을 찾아 헤매다 결국 찾지 못하고 포기할 때까지 신랑과 신부는 숨어서 기다린다는 거죠. 그리고 숨어있는 동안 신랑과 신부가 매일 꿀로 만든 술을 한 잔씩 마셨는데 이 꿀로 만든 술을 마시는 30일 동안을 ‘허니문 기간’이라고 불렀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납치 감금의 중대 죄목이 되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허니문은 꿀같이 달콤한 달, 밀월(蜜月)로 결혼 직후의 즐겁고 달콤함 시기를 일컫는 용어가 됐습니다. 그런데 정치에도 허니문 기간이 있답니다. 딱 잘라 한 달, 두 달, 이렇게 시한을 정할 순 없지만, 취임 초기 대통령 행보에 대한 비판은 가급적 자제하고 응원하는, 그런 기간을 말하죠. 사실 아무리 인수위를 구성하고 새 정부 구상을 잘한다 하더라도 전 정권의 국정운영을 인수인계 받아 나라 살림을 꾸리다 보면 처음엔 서툴고 미흡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기간이 정치적 허니문 기간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요.
이 기간만큼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던 정치권도 당장 대선 패배에 따른 책임론으로 내분을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고, 언론 역시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대통령 당선인이기에 눈치 없이 비판하고 견제하길 꺼리는, 그런 시기인 셈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허니문을 무조건인 비판 자제 기간으로 보는 건 절반의 이해에 불과하다고 해요. 거기엔 정치적 허니문의 원조격인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취임 직후의 배경을 살펴봐야 하는데요. 1933년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시작된 의회 특별회기 100일 동안 의회와 협력해 경제위기 극복법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통해 경제위기 탈출의 기반을 닦았다고 합니다. 결국, 정치적 허니문은 무조건적인 비판 자제가 아니라 견제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국민을 위하고 국가를 더 발전시키는 그런 기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럼 다시 신혼부부의 허니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새내기 부부들은 각자 꿈꿔왔던 결혼생활이라는 로망을 현실화할 생각에 설렘 반, 기대 반으로 달콤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새로운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두 사람만의 러브하우스 꾸미기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을 때죠. 그리고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이 사랑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새 시간은 흘러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했던 사랑의 지향점과 표현방식이 어긋나기 시작하고, 사소한 일들이 부부간의 문제가 아닌 집안 문제로 비화되는 차가운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면 달콤했던 허니문 기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때부턴 의리로 산다, 동지애로 산다, 다양한 방식으로 허니문의 종료를 표현하지요.


그러고 보면, 대통령 당선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힘겨웠던 선거 과정을 통해 당선이라는 달콤한 승리감을 맛보는 것도 잠시, 인수위를 꾸리고 국민들에게 인정받을 멋진 나라를 구상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5년이라는 시간을 계획하지만, 의외로 정치적 허니문 기간이 석 달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는 걸 곧 알게 됩니다. 한국갤럽이 발표한 ‘역대 대통령 취임 100일 국정 지지율’에 따르면, 16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취임 직후 지지율이 60%였다가 취임 100일 후엔 40%로 떨어졌고, 17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른바 고ㆍ소ㆍ영인사파동으로 취임 직후 52%였던 지지율이 100일 후엔 21%까지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 역시 취임 직후 84%라는 압도적 지지율을 기록했지만 취임 100일 후엔 78%로 미미하긴 하지만 지지율 하락세를 보였고요.


이 정도면 부부의 세계에서도, 대통령의 세계에서도 허니문 기간의 소멸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하지만 부부의 세계에서 유독 허니문을 길게, 오래도록 유지하는 부부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비결은 한결같이 ‘초심’이라고 말하는데요.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은 달라질지언정 사랑했던 그 첫 마음은 오래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대통령 당선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밥 먹을 시간, 잠잘 시간까지 쪼개가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국민들에게 간절히 호소하며 낮은 자세로 지지를 바랐던 그 초심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의 정치적 허니문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거라는 걸 기억해야 할 겁니다.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는 갖되 국민 앞에서 권위적이지 않으려는 마음, 부끄러운 자신의 실수와 치부를 가리고 숨기기에 급급하기보다 국민들 앞에 솔직하게 해명하고 양해를 구하려는 마음, 그런 초심을 마음에 담고 있다면 대통령 당선인에게 임기 5년은 며칠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초심의 중심에 국민을 향한 첫사랑이 늘 자리하길 바랍니다.


“야곱은 라헬을 얻으려고 칠 년 동안 일을 하였다. 이것이 그에게는 며칠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가 그만큼 라헬을 사랑하였던 것이다”(창세 29,20).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2)
     조아름 안젤라(독일 아헨교구 Franziska von Aachen, 종교음악감독)
독일에서의 대학입시시험은 저의 인생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경쟁하는 게 값진 경험이기도 했지만,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기도 합니다. 독일에서 어학 공부와 입시를 위한 비자는 2년뿐이었습니다. 저는 저에게 주어진 2년 동안 스스로 나태해지지 않도록 채찍질하며 피아노 연습을 했고, 독일 전국에 있는 음대란 음대는 다 돌아다니면서 입시 시험을 봤습니다. 그 결과 비자가 만료되기 직전, 어느 한 국립음대 피아노과에 합격했습니다. 드디어 입학허가서를 받았는데 기쁨은 아주 잠시, 또 다른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졸업 후에 내가 피아노라는 악기로 무얼 하며 살 수 있을까?’
걱정에 앞서 우선 2년 동안의 입시 준비로 잃어버렸던 건강을 되찾기 위해 한국에 잠깐 들어가게 됐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하지 못했던 취미생활을 하기 위해 알아보던 중 오르간을 배우게 됐고, 오르간은 뜻하지 않게 또 한 번의 입시 레슨으로 바뀌었습니다. 3개월이라는 말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입시 준비를 끝내고, 다시 독일로 돌아와 두 번째 입시 시험을 봤습니다. 결과는 그저 놀라웠습니다. 몇 군데 지원했던 음대에 모두 합격했고, 그렇게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오르간 전공으로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담당 교수님이 한국의 국가를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평소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기에 저는 망설임 없이 애국가를 불렀고, 노래를 들은 교수님은 저에게 ‘가톨릭 종교음악과’를 추천해주셨습니다. 교수님은 ‘Kantor(칸토어)’*라는 직업이 있는데, 종교음악감독 역할을 하는 것이며, 이 직업을 가지기 위해선 꼭 가톨릭 종교음악을 전공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전공은 피아노, 오르간, 성악, 지휘를 모두 배우고 소화해야 하는 데 너는 이미 가지고 있는 재능이 많으니 이 길로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고, 네가 가지고 있는 재능은 ‘하늘에서 준 선물’이니 귀하게 썼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또 한 번의 입시 시험을 봤고, ‘가톨릭 종교음악과’로 재입학했습니다. 음대의 의대라고 불리는 ‘가톨릭 종교음악과’. 학교를 다니는 4년 내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할까 수십 번, 수천 번도 더 생각했지만, 이 악물고 견디며 마침내 졸업장을 쥐게 됐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신이 선택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저는 저의 재능들을 고스란히 다 바칠 수 있는 칸토린이 되었고, 제가 세례식 때 기도했던 대로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주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 칸토어(여성형 명사 ‘칸토린’)는 독일 성당에 있는 직업으로 미사 때 오르간과 피아노 반주, 오케스트라 지휘, 성가 가창 등 성당에서 이뤄지는 음악과 관련된 모든 일을 담당하는 교회 음악가를 말합니다.

 

 

 

세상의 온갖 죄악들

     조용국 프란치스코 신부님
찬미 예수님 
1.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주일에 예루살렘 입성기와 수난기 복음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환영합니다.. 나뭇가지를 흔들고, 땅에 옷을 깔고 그분을 기쁘게 환영합니다.
2.그러나 이 세상의 죄악들은 그분이 내뿜는 빛과 하느님의 사랑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악들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둠을 감추기 위해 죽느냔 사느냐의 싸움을 계획합니다.. 
3.그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어둠을 폭로하는 예수님을 그냥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고 기뻐하는 군중들을 보면서 그들은 큰 위기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백성의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된다. 그리되면 그들은 설자리를 잃어버릴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4.그 어둠들은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는 그대로 현 세상의 축소판 같기도 하고 심하게 말하면 지옥 같기도 합니다.  
온갖 선과 악이, 빛과 어둠이, 생명과 죽음이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나약함, 죄악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5.예루살렘 입성 시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라고 외치며
열렬히 주님을 환영하던 군중들은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분노의 군중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6.예수님의 신뢰를 받았던 유다는 예수님을 단돈 은전 서른잎에 팔아 넘깁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배신합니다.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뒤늦게 뉘우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을 다시 주어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그는 자살을 하고 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몸의 피곤함을 이유로 그 땀이 피가되어 흐르는 고통의 시간들을 함께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순식간에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가 버립니다. 심지어는 겉옷이 벗겨지면서까지 도망을 갑니다. 
칼을 휘두르던 베드로의 용기는 어디 갔는지,주님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치겠다던 베드로는 너무나 어이없게도 무려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하면서 모른다고 맹세까지 합니다.
7.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자신들의 어둠과 위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하였다는 죄명을 뒤집어 씌웁니다. 
군사들은 밤새 예수님을 때리고, 모욕하며, 조롱합니다. 큰소리로 예수님을 모독하며,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며, 손찌검을 하면서 조롱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판결을 내리고,교묘히 책임을 회피합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하느님의 사랑과 기적과 삶의 새로운 감동을 얻었던 이름모를 군중들까지지도 어둠의 세력에 휩싸여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죽을 죄를 지어 십자가형을 받았던 극악한 죄인들까지도 예수님을 비아냥거립니다.. 
제자들은 겁에 질려 그저 멀찍이 서서 이게 어찌된 일일까? 하며 소심함과 의혹에 휩싸이고 맙니다.. 
8.하늘은 어둡고, 마치 어둠이 세상이 지배하는 듯한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일말의 하느님의 자비도 없는 듯한 그야말로 죄악으로 뒤덮인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들은  이 수난기에는 인간의 온갖 죄가 다 표현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어둠과 그 죄악의 끝을 다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악의 연대는 이렇듯 견고합니다.  
완전히 악의 세력에 포위된 지옥과도 같은 주님의 수난현장입니다. 
9.그러나 악과 어둠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궁창에서 피어나는 연꽃들과 같은 사람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그 한 복판에 성모님이 계시고 
곳곳에 연꽃 같은 아름다운 이들이 있었습니다. 
캄캄한 죄악의 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이들을 
오늘 복음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10.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시몬, 예수님의 피땀쩔은 얼굴을 닦아낸 베로니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고백한 백인대장과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 갈릴래아에서부터 시중들며 따르던 여자들, 그리고 주님을 무덤에 안장한 마태아 출신의  요셉이 있었습니다. 
11.언젠가 들었던 나이 40의 갓난 딸아이의 아빠이기도 했던 가수 신해철의 인터뷰 기사가 기억에 떠 오릅니다. 
“대한민국은 현세지옥이라고 말했는데, 
 왜 떠나지 않고 계속 지옥에서 살고 있나.” 
"이 지옥에서 내 부모님이 사시고, 내 친구가 살고 있다. 
내 딸도 이 지옥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여기를 천당으로 바꿀수는 없지만  여기서 도망 나가는 짓은 하면 안 된다." 
아주 건강한 대답입니다.  
곳곳에 별처럼 빛나는 이들, 연꽃 같이 아름다운 이들이 있어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살지 못하면 어디서도 하늘나라를 살지 못합니다. 
12.오늘 복음의 수난 장면 중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해 있다 생각하십니까? 양상은 달라도 우리 삶의 현장 역시 수난의 현장입니다.  
끊임없이 세상 어둠과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수난의 현장입니다. 
13.어떻게 하면 어두운 밤에 빛나는 별로, 더러운 시궁창의 연꽃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닮는 겁니다. 주님은 그 고통속에서도 누구도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침착하고 차분하며 대체적으로 무저항의 침묵의 분위기입니다. 엄청난 사랑의 힘으로 그 죽음과 같은 고통들을 이겨내십니다. 
14.악과 선이 적나라하게 공존하는 세상임을 오늘 복음에서는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고통과 어둠과 죄악을 경험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이었고, 그 안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인생의 진리가 숨어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 삶의 중심은 하느님이셨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삶의 모든 것이었고, 그 뜻을 위해 사셨습니다.. 
15.우리도 이 어둠의 세상에서 부활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부활해야 참으로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의 어둠에 굴복당하지 말고 하느님의 힘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16.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누군가가 이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 죄의 댓가를 뒤집어 써야만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그 죄가 드러나게 하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7.고통이 깊을수록, 마치 산속에 있는 호수처럼 그 인생의 큰 산들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을 통해 그 크신 마음으로 우리 이 불쌍한 인생길을 품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비로소 당신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부활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셨지만 당신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었습니다.”  아멘,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2, 3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갈채와
환호 뒤에
뒤따라오는
십자가이다.

성지가지
사이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성지가지로
예수님을
환호하는
우리들을 향해

예수님은
십자가로
화답하신다.

모든 것을 거시는
주님의
십자가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기억하는
성주간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수난에서
숨길 수 없는
우리의 거짓과
우리의 교만을
아프게 보게된다.

하느님을
이해하는 방식은
언제나 사랑의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다시 사람을
아름답게 만든다.

우리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였다.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된다.

십자가로
삶의 고통을
통과하시는
주님이시다.

십자가가
다시 삶의
길을 만든다.

가장 위험한 것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느님을
깨닫게 된다.

자아를
깨뜨리는
십자가이다.

죽지 않고서는
다시 살 수 없는
십자가의 진리이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을 다시
살리신다.

인생이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랑의 배움이다.

하늘 아래
하늘나라를
보여주시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지
않고서는
삶을 알 수 없다.

사라지지 않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또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십자가로
닮아가는
삶의 성주간이다.

피고인 또는 피의자는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무죄추정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판결이 나기도 전에 미리 매스컴과 사람들의 뭇매를 맞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유죄로 미리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몇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성직자의 소아 성애 문제가 불거진 것입니다.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난잡한 술자리를 벌였다는 혐의로 10명의 신부가 고발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 중에서 3명의 신부는 이름을 비롯하여 신상이 샅샅이 공개가 된 것입니다. 판결이 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비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구치소에 수감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고발한 청년이 나쁜 생각을 품고서 거짓말 한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신부님들을 향한 판결은 10명 모두 무죄였습니다. 그렇다면 신부님들을 향해서 그동안 악의적인 비난을 했던 사람들은 사과와 용서를 청했을까요?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아직까지도 이들은 판결이 잘못 되었다면서 신부님들을 향한 비난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짜 뉴스라는 것이 큰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있지도 않은 일을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해서 대상자를 아주 못된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사람의 아픔과 상처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함부로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라는 말을 하면서 지레짐작으로 단죄를 내립니다. 물론 각종 의심과 의혹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지례짐작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에 우리들은 수난 복음을 읽게 되지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올리브 가지를 손에 들고 흔들면서 열렬한 환호를 했지만,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며 손찌검을 하면서 모욕적인 말을 합니다. 어떻게 환호가 증오로 바뀌었을까요?

 

예수님을 지레짐작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은 모두 잊어버리고, 십자가를 힘들게 지고 가시는 겉모습만과 소문을 굳게 믿고 큰 죄인으로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비난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다른 이에 대한 모든 비난들이 어쩌면 죄 없으신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는 아주 잘못된 행동입니다.

 

오늘의 명언: 때때로 고통은 우리를 다시 아버지께 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던지 감독).

 

고통을 겪는 7가지 방식

1) 사소한 일로 겪는 고통. 

2) 실패와 개인적 한계로 겪는 고통.

3) 사랑을 상실한 고통. 

4) 병으로 겪는 고통. 

5) 죄와 사악함에 직면해서 겪는 고통.

6) 무의미와 우울함으로 겪는 고통. 

7) 죽음으로 겪는 고통.

우리의 고통은 이 7가지에 모두 포함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어떤 고통이든 영적, 정서적 손상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즉, 마음의 손상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충분히 극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흐르게 하러 오신 예수님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를 시켜 그 종이를 주워오도록 한 다음 “그것은 어떤 종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남아 있는 향기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제자의 말을 들은 부처님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를 걸어가자 이번엔 길가에 새끼줄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부처님은 제자를 시켜 새끼줄을 주워 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전과 같이 “그것은 어떤 새끼줄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생선을 묶었던 줄입니다. 비린내가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이 원래는 깨끗하였지만 살면서 만나는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르는 것이다. 어진 이를 가까이 하면 곧 도덕과 의리가 높아가지만, 어리석은 이를 친구로 하면 곧 재앙과 죄가 찾아 들게 마련이다. 종이는 향을 가까이해서 향기가 나는 것이고, 새끼줄은 생선을 만나 비린내가 나는 것이다. 사람도 이처럼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 의해 물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나요?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향기를 간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로부터 나는 향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또 나에게 오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중간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수준이 곧 나의 수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수준을 높여주러 오셨습니다. 좋은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나귀와 같은 존재입니다. 나귀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만 천상천하의 왕께서 타고 다니시기는 좀 겸손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겸손하신 왕께서 그 위에 타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자신의 발밑에 겉옷을 깔았습니다. 나귀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주님을 맞아들이려는 사람들과의 중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향기를 내게 되니 사람들의 겉옷을 밟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사고가 나서 머리에 피가 고였을 때 그 피를 빼어주지 않으면 상당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피를 흘리는 것이 그 피가 머릿속에서 응고되는 것보다 낫습니다. 피는 흘러야합니다. 그리고 피가 흐르기 위해서는 어떤 곳이 찢어져야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 것을 흘려주지 않으려고 찢어져야 할 곳을 막았습니다. 그래야 더 부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피는 많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흘러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막힌 혈을 뚫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성전은 그 뚫린 곳으로 흐르는 피 때문에 살게 됩니다. 피는 흘러야하고 그 흐르는 심장의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한국전쟁 때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얼어 죽었습니다. 아기는 살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미군에 의해 발견되어 미국에서 자란 이 아이는 청년이 되어 어머니 산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겉옷을 벗어 어머니 산소를 덮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어머니의 옷 벗음이 청년을 옷 벗게 했습니다. 누군가의 피 흘림이 나를 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피 흘릴 수 있을 때 모기에서 예수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모기는 관계를 맺을 수 없지만 예수는 처음 만난 사람과도 가족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줄 줄 알기 때문입니다.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내어줄 줄도 모릅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나게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께서 나귀 위에 타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합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빨리 불쌍한 이웃들을 만나 사랑을 전해야할까요? 아닙니다. 우선 나의 수준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수준을 끌어올리면 그 수준에 맞는 사람들도 나의 향기를 맡고 나에게 오게 되어있습니다. 우선 그분으로 내가 흘러야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팔마가지를 흔들었고 자신의 겉옷을 그분이 오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겉옷은 당시 매우 귀중한 물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흐르게 하신 것입니다. 누군가와 만나려면 반드시 내 것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향을 싼 종이는 향내를 내고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은 생선비린내를 풍깁니다. 이 냄새 때문에 모여드는 사람이 다를 수 있습니다. 향내를 좋아하는 사람이 종이로 모여오고 생선을 좋아하는 고양이는 새끼줄 쪽으로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같은 향을 풍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성령을 흘려보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에제키엘 47장에 보면 성전 오른편에서 물이 흘러내리는데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죽었던 땅이 살아난다는 예언이 나옵니다. 그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분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이 우리 메마른 땅에 들어와 우리를 다시 생명의 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해처럼 꽉 막혀있던 우리도 이젠 갈릴래아 호수처럼 오른쪽 옆구리가 터지며 우리 물을 이웃에게 뿌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웃이 우리가 뿌리는 물로 살아납니다. 그러면 그들도 흐르게 됩니다.

 

내 겉옷을 벗어 그분께서 들어오실 길 위에 깝시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물이 흘러내리는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이들도 뚫리게 되어 성령이 흐르는 성전을 친구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원했던 것은 당장에 자신들을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줄 최고의 힘을 지닌 현실적인 제국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시고, 또 아무런 능력도 보여 주지 못하시자, 결국 그들은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뜻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나라는 투쟁과 쟁탈과 권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적 욕망의 나라가 아니라 진정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이어갈 참된 천국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대사제의 집으로 끌려가시고 난 후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복음에서 보면 베드로가 세 번째로 주님을 모른다고 했을 때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고 주님과 눈이 마주쳤던 베드로는 슬피 울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수없이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곤 합니다. 내가 힘들고, 어렵다는 이유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바라보면서도 외면합니다.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이웃의 어려움을 지나치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지나쳐 버리고 맙니다. 어쩌면 그러한 모습은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모습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이와 같이 많은 순간 당신을 모른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주님께서는 바라보시며 진정 마음 아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주간 우리가 진정 그분과 한 패로서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정말 예수께서 수난을 겪으셔야 하나요?

     곽승룡 비오 신부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최고의 계시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해 신앙인들은 ‘정의’라는 미명하에 의로움만이 ‘맞고 틀리다는 기준’이고, 이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버리려는 위험을 갖지 말아야 한다. 곧 의로움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버리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주장하는 한 가지 기준인 정의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제시하신다. 곧 정의(의로움)와 자비는 분명 두 가지가 모순이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모순으로 보이는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만난다는 사실을 우리 인간들은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죄지은 자들을 향해 부분적으로 의롭고, 부분적으로 자비로운 모습일 수 있다. 우리는 그 죄인을 한 번은 전자의 의로움으로, 다음은 후자의 자비로 대할 것이다. 이 두 개의 행동들 사이에서 이상적인 꿈은 올바른 방법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은 최고의 의로움을 최고의 자비와 하나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움의 정의가 죽음 안에서, 충만한 자비는 부활 안에서 나타나 모든 형벌에서 인간을 결정적으로 해방하셨다. 교부들은 악이란 오직 내면으로부터 이길 수 있다고 알려주신다. 내면에 악의 근원이 도사리고 있단다. 사람은 그 마음에서 죄를 범한다. 거기서 악이 모든 인간의 삶 안으로 침투해 간다. 그리고 그 악은 하느님을 향해 불순명한다.

신인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총체적인 순명과 함께 인간의 마음을 해방한다. 모든 것은 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구원의 원리는 이 원칙에 따라 교부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곧 그리스도께서 떠맡은 모든 것은 구원된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 같이 태어났어야 했다. 인간의 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일하셨고, 인간의 약함 속에서 힘을 주기 위해 예수님은 어린 아기, 도망자, 지치고 오해받으며 미움 받은 설교자로 사셨다. 그리고 오늘 십자가를 지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신다.

 

결국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참혹한 모습으로 인간죽음을 받아들이셨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비우셨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유롭게 행동할 때 나타난다. 다른 자의 뜻을 조건 없이 받아들일 때 그의 존엄성, 정체성이 마치 텅 빈 것처럼 된다.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하여 움직인다. 이는 천상행동으로서 육화하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인간의 삶 안으로 역시 옮겨놓으신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은 역시 최고의 행복을 사는 것이다. 부활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현실이다. 어떤 모양으로 신인 그리스도 안에서도 동시에 지금이었다.

 

고통 속에서 행복은 미학적 뿐만이 아니라 오직 신비와 영적 모양으로 이해하는 그렇게 모순되는 일치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었었다. 오상의 비오 신부의 마지막 사진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을까? 손에 생긴 상처들과 행복한 미소, 흉내 낼 수 없는 모습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경험을 통해 반성하고, 교회와 함께 더 이해하면서 기도할 수 있다.

 

“십자가 안에서 구원이 있고,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구속이 있다.” 만일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안에서 작은 십자가를 만난다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에게 인도하신다. 

 

 

 

<나의 마지막 길에 함께 하는 사람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올리브 산에서 바라보는 예루살렘의 전경은

참으로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던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쉼 없이 걸어왔던 힘겨운 길이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맞아주고 있다

 

겉옷을 길에 펴놓고

환성을 지르며 나를 반기는 사람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나의 길을 모른다

자신의 기대와 감정에 이끌려 기뻐할 뿐

 

나의 길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최후의 만찬을 거행한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제자들

얼마나 사랑했던가

나의 모든 것을 내 주었다

아무런 대가없이

 

그러나

이들은 나를 버리고

살고자 자신의 길을 간다

 

배신의 입맞춤 하며

나를 팔아넘긴 가련한 제자 유다

 

초주검으로 피땀 흘리는 나와 함께

한시도 깨어 있지 못하고

피곤에 지쳐 쓰러진 제자들

 

힘없이 붙잡힌 나를 두고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완강히 버티다

슬픔에 젖은 나의 믿음 가득한 눈빛 마주하고

가슴 찢으며 슬피 우는 베드로

 

더 많은 이들이

나의 마지막 길에 함께 한다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려고 달려드는 병사들

 

두 눈을 부릅뜨고

잡아먹을 듯이 외쳐대는

스스로 의로움에 사로잡힌

대사제들과 원로들

 

자신을 군중에 묻어버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않으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사람들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흔들거리며

지도자의 권위를 스스로 내팽개치고

제 책임 떠넘기는 추한 빌라도

 

소문과 흥미에 놀아나는

천박한 정치꾼 헤로데

 

가진 자들에게 삶을 저당 잡혀

채찍질하고 못 질하는

힘없고 불쌍한 하수인들

 

영문도 모른 체 끌려나와

십자가 여정의 귀한 벗이 되어준

고마운 키레네 사람 시몬

 

짓이겨진 나를 지켜보며

아무 것 할 수 없는 자괴감에

피눈물 흐느끼는 여인들

 

저주와 모독 가득한 절망으로

참회와 속죄에 담긴 희망으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들

 

처연한 평화 깃든

내 가쁜 생의 마지막 호흡에

함께 한 백인대장과 가슴을 치던 군중들

 

추악한 음모를 획책하는 의회 의원들 가운데

단 하나 의롭게 빛났던

내 주검을 곱게 감싸 따뜻하게 묻어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처참한 내 주검마저

곱게 보듬어 마음에 새기려는

갈릴래아에서부터 함께 했던

착하고 고운 여인들

 

나는 혼자이다

그러나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내 삶의 순간순간에 그러했듯

내 삶의 마지막 죽음의 길에도

무수히 많은 이들이 나와 함께 있다

 

어떤 이는 나를 따르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배척하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죽이기 위해

 

이제 너를 내 길에 초대한다

과연 너는 왜 이 길에 함께 하려느냐

과연 너는 어떻게 이 길에 함께 하겠느냐

 

 

 

돌들과 친구해야 되겠습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들과 안 믿는 자들과는 차이 너무 나지요?

루카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바리사이들을 길가 돌만 못하다 전합니다.

돌들이 하느님말씀 구세주로 오셨네! 하늘만세 호산나! 외침 상상했죠.

 

길가 돌들도 자연의 이변 아는데 영물이라며 거부하다니 한심했겠죠.

어린이들 이방인들 제자들 병치유 받은 자들 길가의 돌들과 공감했죠.

저도 우쭐대는 바라사이들 비웃고 길의 돌들과 친구해야 되겠습니다.

 

결국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사사건건 시비 걸어 결국 십자가 처형까지.

처형되셨어도 되살아나신 주님이시니 믿자고 진실 알리며 선교해야죠.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당신의 왕께서 저녁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분과 영원한 계약을 맺을 잊지못할 감격스러운 만찬입니다.

초대에 꼭 응하십시오!

종려 가지(성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당시 상황을 상기시켜 줍니다. 백성들은 구원자이신 그분을 환호하며 가지를 손에 손에 들고 그분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은 모습을 재현하면서 우리들 내면의 성을 향해, 우리들 마음의 중심으로, 그리고 우리들 삶의 구원자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환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서 나귀를 타고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기쁨과 찬미의 환호성으로 그분을 맞아들였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왕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겸손하고 아주 소박한 모습 그대로 우리 곁으로 다가 오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맞이하는데 있어 크고 굉장한 준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상관없이 기쁘게 그분을 맞이하면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을 맞이한다면, 우리들의 왕께서는 다가올 성 목요일 날,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루카 22장 15절)라고 말씀하시며, 아주 특별한 저녁 만찬에 우리들을 초대하실 것입니다. 이 만찬에서 그분은 당신에게,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였고, 지금도 사랑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손으로 너의 발을 씻고, 내 피로 너의 죄를 깨끗이 씻어내며, 너와 새롭고 영원한 사랑의 계약에 내 피의 인장을 찍으며, 빵으로 육화 된 나의 몸이 너희의 양식이 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무한하고 영원한 그분의 사랑을 고백하실 것입니다. 이 만찬으로 당신을 향한 그분의 더없이 섬세하고 고결한 사랑을 몸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크고 위대한 사랑!’말입니다. 이런 모든 경험들은 당신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힘을 실어주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러한 초대를 놓치지 마십시오! 너무나 감격스럽고 놀라워 감히 “입을 다물 수조차 없을” 것이며, 당신의 왕과 함께 영원한 언약을 맺는, 잊지 못 할 벅찬 감동의 만찬이 될 것입니다.

성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이사야 예언자가 묘사한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이사 52장 14절참조) 이 되실 만큼 엄청난 고통을 치루신 날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마땅할 우리 죄를 대속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고백성사를 통해 이러한 죄에 대한 용서를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을 우러러보며, 당신의 구원자이자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분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십시오. 성 금요일은 우리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의 순간 순간들과 동반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그분의 죄 없으신 죽음 앞에 “통회”하고, 또한 그분의 한없는 사랑에 “감사함”과 “감격”의 마음으로 그분의 동행이 되어 드리는 날입니다. 

성 토요일은, 능동적 내면으로부터의 침묵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은 이들과, 살아서 죽은 이들을 깨워서 구해내고 부활시켜, 나의 부활을 믿는 모든 이들이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 새사람’이 되는 “파스카”에 나와 함께 참석하도록 기도하며 기다려라!”

그러므로 이 날은 모든 인류에게 위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날입니다.

요약하면, 성지 주일은,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파스카 신비에 동참하도록 이끄시는 거룩한 초대의 날입니다. “초대에 응하여” 그분을 뒤따르고 그분과 동행한다면, 그분의 파스카가 곧 우리의 파스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주간 동안 이 성삼일 예식에 꼭 참석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분에게 있어 당신은,‘그분의 성탄과 파스카’의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절대 불참하시면 안됩니다! 진실을 말씀드리면, 당신의 생명은 그분에게 달렸기 때문입니다. 아멘.

 

 

 

호랑이 굴 같은 예루살렘으로 입성

     서동신 신부님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호랑이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행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실천하는 사람만이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원하는 것이 있으면 시련이 닥치더라도 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투신해야 합니다. 뜻한 바를 이루려면 그만한 위험과 수고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말의 어원은 ‘평화의 도시(IR=도시, SHALOM=평화)’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평화의 도시'여야 함에도 지금도 '분쟁의 도시' 예루살렘입니다. 오늘날,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대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고향이자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이 예루살렘은 그 의미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서구 강대국의 세계 패권주의의 상징이자 ‘중동의 화약고’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랑이 굴 같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한 때 올리브 동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셨고, 오늘에 입성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파스카 신비의 완성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며 실행에 옮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안에서 울려 퍼지는 아우성 소리, 고통에 울부짖는 부르짖음을 유발케하는 죄의 사슬의 뿌리를 뽑아 버리고 해방시키려 하십니다. 수많는 군중은 메시아 예수님의 발걸음에 발맞추어 환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은 성당 입구 성모동산에서 성지(聖枝) 축복과 성당 마당을 돌며 행렬을 거행했습니다. 성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듯, 우리는 사실 예수 성심의 구원의 여정을 환호 했습니다. 우리는 사실 예수 성심의 구원의 여정을 환호 했습니다. 곧 이어질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의 고통을 알면서도, 우리들은 환호하는 백성들이 하는대로 우리도 그리 환호했습니다.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환호하는 기쁨 대신에 성 금요일의 통곡의 슬픈 십자가 그림자 아래에 우리들은 엎드려 십자가 경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소중한 마음도 본래는 예루살렘의 뜻처럼 평화의 도시여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픔과 고통 슬픈 마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가장 소중한 ‘평화’를 꼭 집어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도 분쟁있는 마음보다는 평화의 마음이 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사랑의 길

     한민택 신부님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함께 우리의 사순시기는 절정에 다다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오른 우리는 이제 그분께서 거쳐야 할 마지막 관문을 함께 걸어갈 준비를 합니다.

 

성주간 동안 예수님의 마지막 날을 함께 지내며,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묵상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당신의 구원 계획에 전혀 없었던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육화로써 실현되고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에서 드러난 인간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의 종결점입니다. 인간의 비천한 삶의 무게를 함께 지고 가시기 위해 인간의 나약한 몸을 당신 것으로 받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버림받고 상처 입은 이들에게 다가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들의 병고를 떠맡고 질병을 짊어지시어(마태 8,17 참조)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인간을 죽음의 그늘에서 구하시기 위해 당신 친히 인간의 죽을 운명을 당신 것으로 하고자 하십니다.

 

성주간 전례는 우리에게 진정어린 마음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우리 내면에서 진정한 사랑을 향한 갈망을 찾도록 하며, 주님에게서 그 대상을 발견하도록 합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며, 힘으로 지배하는 세속적 권력에서가 아닌 나약한 모습으로 상처 입고 돌아가신 십자가의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권능을 알아보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3-25)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실패한 사랑, 철저히 외면당한 사랑이 아닌, 죄와 죽음을 이긴 놀라운 사랑의 힘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인간의 운명을 당신 것으로 하시며, 인간을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의 전부를,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참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에서 우리는 시련과 환난 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내야 하는 이유와 그럴 수 있는 힘을 발견합니다. 지금 괴롭고 힘들 때, 슬프고 외로울 때,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질 때, 예수님께서 이미 그 길을 걸어가셨음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그분께서 이미 겪으셨음을 기억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어떠한 환난도 시련도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난과 시련이 끊임없이 닥치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버텨내기를, 그리하여 인내와 수양을 쌓으며 희망을 찾아가기를 바라십니다.(로마 5,3-5 참조) 내가 지금 이 고통으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고 당당히 일어설 수 있기를, 이 길을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이번 성주간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핏발선 저항도 무력한 순응도 아닌… 

     김혜윤 수녀님

일반적으로 인간은 ‘고통’이라는 현실 앞에서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고 합니다. 생존을 위해 누군가는 아무리 위험하고 불안한 여정을 걸어야 한다 하더라도 투쟁하거나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 투쟁이 결코 희망을 가져다주는 온전한 혁명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안전한 종속의 길을 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주간으로 들어서는 사순의 마지막 주일에 봉독되는 본문들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선택과는 다른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극도의 고통과 비참 속에서 돌아가셨지만 그것은 결코 불의에 대한 저항도, 종교적 심성의 발로인 비폭력 순응도 아닌 매우 독특한 속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체념으로 말미암은 수동성이나, 좌절과 절망에 항복하는 무기력과는 구별되는 당당함이 있었고, 동시에 민중의 분노를 가열시켜 체제 전복을 부추기고 사회를 광폭에 휘둘리게 하는 선동성을 품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항도 순응도 아니었던 예수님의 태도는,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완전한 사랑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발성’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발성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관계에 들어선 이들 사이에는 그 어떤 의무나 규칙의 강요 없이도 저절로 파고드는 극적인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향한 충직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 어떤 힘에도 훼손되거나 파괴되지 않으시고, 오로지 자발적인 헌신과 내어줌, 신뢰와 신념으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십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 사건은 모든 공관복음서가 다루고 있는 내용인데, 저자가 속한 공동체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달리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루카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잔혹한 고문이나 치욕적 순간들에 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자제되어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상 죽음을 결코 비극적 사건이 아닌,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이루는 여정이며 이미 예고된 필수적 사건(루카 24,6.44.46 참조)으로 보려는 저자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특별히 루카복음은 ‘마지막 만찬’ 장면에, 제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한 논쟁을 삽입해 두고 있는데(23,24) 이는 이어지는 내용, 즉 타인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낮아지는 자세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수난을 염두에 둔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실존적 변화는 헌신과 내어줌을 통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고 가장 낮아지는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수난은 그 길이 곧 구원이며 영광이라는 역설을 명확히 알려줍니다. 인간의 실존적 변화는 훌륭한 교육이나 지성, 우아한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헌신이나 내어줌,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체험하고 목격했을 때에만 제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고학력자들이 넘쳐나고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회의 질적 향상과 직결되지 않음은 작금의 우리 사회를 관찰할 때 쉽게 확인됩니다. 성공과 행복을 위해 혹독하게 교육받고 세상이 만들어낸 가치에 적합한 존재로 제조되는 숨 막히는 과정을 무던히도 감수하지만, 그 교육의 결과로 난무하는 것은 상대적 빈곤과 공허한 결핍, 추태와 위선입니다. 그러니 인간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힘은 나를 위한 누군가의 헌신과 내어줌, 항구한 사랑과 희생을 직접 목격하고 배우며 그 경이로움에 온전히 동화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만이 세상을 개혁하고 바꾸는 기본 규칙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몸소 증거하셨는데, 우리를 정치적 능력이나 군사적 힘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시어 세상에 오시고 온전히 내어주심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서는 특별하게,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십자가상의 두 강도의 대화를 통해 대별시킵니다. 두 사람의 상반된 행위는 십자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전반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한 죄수는 그분을 여전히 모독하고 비난하며 하느님과 운명을 저주하지만, 다른 죄수는 그러한 상대방을 꾸짖고 예수님의 무죄함과 의로움을 선언합니다.(39-40절) 그리고 이러한 지고한 사랑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임을 전제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41-42절) 이 강도의 고백은, 수난과 죽음을 선택하셔야 했던 예수님의 의도가 실현되는 중대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겸손과 진리, 인간을 위한 진심 어린 사랑을 목격하면서 우리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고 마침내 구원되기를 간청하는 것, 이 진정어린 관계야말로 생명을 바쳐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구원사업이 목적하고 추구한 결과인 것입니다. 

 

■ 수난받는 주님의 종과 바오로가 증언한 예수님의 고난

제1독서의 이사야서 본문 역시 모든 수난과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힘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임을 알려줍니다.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격려할 줄 알게…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듣게 하신다.”(이사 50,4) 특별히 주님의 종은 모욕하는 자들의 폭력에도 물러서지 않는데(5-6절)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7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일반 영웅들이 남겼던 역사적 서사와는 분명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 이들의 죄를 밝힘으로써 누가 진정한 의인이고 죄인인지를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무죄함을 항변하거나 밝히려고 하지 않으셨으며, 그 수난과 죽음이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인지를 과시하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을 진정한 구원의 길로 인정하시어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십니다.(제2독서, 필리 2,9) 스스로를 낮추신 예수님의 방식은 하느님에 의해 드높여지고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고통을 종교로 승화한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마르크스의 지적대로 ‘종교가 아편’이 되는 순간을 허용하는 말인 듯하여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그분의 고통이 우리의 불행보다 더 처참한 것이었기에 상대적 위안을 주기 위한 것도, 그분처럼 잘 참으면 천당에 가게 된다는 편의적 발상도 아니었습니다. 정해진 제도와 규범 안에 얌전히 구속되어 있을 때 우리의 모든 고통은 천국을 위한 보험처럼 안전성을 보장해준다는 프레임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는 것은 도덕과 금기의 이름으로 감시와 위선만을 더욱 양산시키는 구조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가장 낮고 위험하며 고독한 곳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완성하신 구원의 본질을 축소시키고 왜곡할 여지를 갖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루며 무엇을 소유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충만히 채우고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축복을 온전히 누릴 때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런 구원을 이루는 힘은 누군가의 정직한 내어줌과 사랑에 근거합니다. 메시아의 수난은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계획되고 실현된 위대한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느님 손에 완전히 내어 맡김

     박일 신부님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聖枝) 주일입니다. 이와 함께 시작 되는 성주간 동안 수난받으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예수 님과 긴하게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난복음을 읽 는 것도 그 자체로 이미 삶의 응답이요 신앙의 행위입니다. 시몬에 관하여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 다”(루카 23,26)고 쓰여 있는데, 이는 보통 제자들의 임무를 정의하는 표현입니다. 시몬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 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는 가르침을 따르는 모범이 됩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이 행위는 수난기의 끝에서도 반 복됩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3,48) 심지어 백인대장도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용감한 증거의 행위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개인적 파 국 이상의 것으로서, 바로 하느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무서 운 단죄를 초래할 것이기에,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 23,28)고 말하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대한 단죄는 세상의 모든 악행, 하느님 은총에 대한 거부, 하느님을 적으로 삼는 모든 권력 등에 대한 징벌의 상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모범

 

을 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 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불의와 고통 도 예수님의 사랑을 질식시키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서까지도 당신의 적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십자가 위 의 예수님은 당신 설교의 백미요, 어떻게 그리스도 신자들 이 살아가고, 기도하고, 고통을 참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봉헌하는 이런 맥락에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더해집니다. 뉘우침과 회 개는 하느님께서 늘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있으시다는 믿음 이 필요합니다. 착한 강도는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예수 님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겼고, 그 믿음은 응답을 얻었습니 다. 예수님께선 마지막 순간까지 구세주로 남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선 전 생애에 늘 기도하셨는데, 이제 기도 로써 당신의 삶을 마무리하시며, 아버지께 대한 깊은 신뢰 를 발하십니다. 시편 31편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십니다. “아버지, ‘제 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나긴 가르침의 요약입니다. 올해도 예수님의 수난에 깊이 동참하십시다. 그분의 고 통과 용서, 순명과 완성의 모든 여정을 우리도 그분과 같이 겪고, 같이 나누어 당신의 더욱 충실한 제자가 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 여정에 참여한 인물들로부터도 제자 모습을 찾아 배워나갑시다.

 

 

 

호산나(Hosanna)

     이상락 신부님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건너 가는 파스카 신비가 절정을 이루는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 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오늘 전례를 통해 우리는 두 개의 복음을 듣게 됩니다. 하나는 미사 전 ‘주님의 예루살렘 입 성 기념식’때, 또 하나는 미사 중 ‘수난복음’입니다. 이 두 복음은 분위기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호산 나”를 외치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옷을 벗어 길에 깔 기도 하고 환호하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 오!”라는 저주와 광란의 분위기로 반전되며 십자가 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돌변하는 인간의 처사가 너무나 ‘우매하다’라는 생각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당시 많은 사 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메 시아를 정치적, 현실적으로 해방시켜 줄 분으로 착 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당신 친히 고난의 십자 가를 지고 돌아가심으로써 이를 통해 영원한 삶에 로 인도해 주시고자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신 분이 십니다. 크고 힘센 군마(軍馬)를 타신 것도 아니고 작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으로 ‘참 평화’를 암시해 주시고 또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기억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뜻 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속담처럼, 겉옷과 올 리브 빨마 가지를 길에 깔아놓고 흔들며 “호산나(구 원해 주옵소서)”를 외치며 환호하던 사람들이 그리 쉽게 구세주를 십자가의 죄인으로 몰아가는 인정 없고 폭력적인 무리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수난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 이 십자가의 죽음에 일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과거사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은돈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제자(마태 26,15) ; 밀고, 배신, 청부살인, 인간이 사는 곳에 늘 함께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마태 26,35) ; 신앙 때문에 어떤 손해나 불이익이 생긴다면 언제 나 등 돌릴 수 있는 우리들의 속내를 보는 것은 아 닌지?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2) ; 깊은 철 학, 신앙의 진리, 정의와 양심을 뒤로하고 구호에 따 라 덩달아 춤추는 군중들의 모습은 우리와 무관하 다 할 것인가? 때로는 어떤 이의 참된 모습을 잘 모 르면서도 선입견이나 남의 말에 단죄해 버리기 일쑤 인 우리들의 삶 말입니다. -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마 태 27,24) ; 예수님의 죄 없음을 알고도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너희가 알아서 처리 하여라.”하며 십자가에 매달게 내버려 두는 작태는 과연 오늘날에는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진실 왜곡과 양심부재는 - “내 양심은 내 생애 어 떤 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리라.”(욥 27,6)라고 말할 수 있는지 공정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도 “호산나(구원해 주옵소서)”를 외치고 있으 며, 회개와 나눔을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이 실천과 결실 없는 빈 말에만 그친다면 ‘예수 사건(Christevent)’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며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 빨마 가지를 손에 들고 구세주 를 환영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인류의 죄악을 속죄하시고, 무한하신 사랑으 로 죄를 용서하심을 깨닫도록 합시다. 또한 이 성주 간에 얼룩진 영혼의 허물들을 벗고, 작은 결점들을 고치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랑의 길을 걷게 되기를 바랍시다.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루카 19,34)

     이지철 신부님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교회의 가장 거룩한 주간이 시 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시고, 제자들은 그 뒤를 따릅니다.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진리를 밝히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시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주님 빛 속에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이사 2,5 참조) 누가 주님 빛 속에 걸어가는 사람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 속 나귀 주인은 “주님께서 필요하시 답니다.”라는 말씀에 기꺼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내어 드립니다. 평화의 임금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나가실 때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덧 올리브산 내리막 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 무리가 다 자신들이 본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 을 찬미하기 시작합니다. 이 광경에 히브리 아이들도 올리브 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주님을 맞 으러 나가 외치며 환호합니다. “높은 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 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그러나 이곳에도 주님의 길을 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군중 속에 있던 바리사이들입니다.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어주십시오.” 그러 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영광 찬미 영예 모두 주님께, 그리스도 임금님 구세주! 아이들의 환호 소리, 호산나, 호산나!” 루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수난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묵상하도록 인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들을 때 부정적이고 슬픈 패배의 측면만이 아니라 깊은 내적 기쁨을 우리 마음 안에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참으로 하느님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요, 사랑이신 하느님 의 가장 숭고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합니 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전해주시기 위해 악과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 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 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립 2,6-11 참조) 진리를 찾는 사람은 주님 빛 속에 걸어가는 사람이며 진리와 생명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따르 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던(로마 4,18 참조)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 빛 속에 걸어갑시다.

 

 

 

평화의 임금님이 오신다.

     장성근 신부님

오늘부터 우리 교회는 전례시기 중 가장 거룩한 시기, 성주간을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교회의 전례 안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이 거룩한 주간의 시작은 당신의 죽음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행진과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앞길에 자기들이 입고 있던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흔들면서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즈카르야 예언자의 예언처럼 평화를 가져오는 겸손한 메시아의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를 행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이 행진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찬미와 기쁨,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표현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들려오는 기쁨과 환희에 마음이 흔들려 교만해질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셨고’, ‘낮추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의 영광에 집착하지 않으셨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당신 자신을 오히려 낮추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는 왕이 아닌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로 들어오셨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주간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비우시고’, ‘낮추시는’ 저 모습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우시고, 낮추셨기 때문에 죄인의 신분으로 사람들에게 넘겨져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시면서도 참아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의 죽음에서 아버지의 버려두심을 경험하지만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하시면서 온전히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끝나버린 허무함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비워내시고, 낮추신 그 자리를 부활이라는 선물로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께 의지하면서 당신 자신을 비워내고, 낮추는 그 사람에게는 아버지의 영광, 즉 부활이 채워진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행진에 함께 동참할 것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기심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비우심과 낮추심의 절정인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 자신을 향해 걸어 나아가는 길을 이 성주간의 시간 안에서는 잠깐 멈추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행진하면서 우리 자신을 비워내고, 낮추면서 ‘섬김의 길’, ‘내어줌의 길’,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잊는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서공석 신부님

오늘 우리는「루가복음서」의 수난사를 읽었습니다.  이 수난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대조하여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면서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부인(否認)하고 버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별하는 최후만찬에서 유언(遺言)을 남기십니다.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또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이 잔은 그대들을 위해내 피로써 맺는 새 계약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식탁에서 서로 다툽니다. 그들 중에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다툽니다. 인류가 집단(集團)을 이루어 살면서부터 줄곧 있어온 다툼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우월하여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지배하며 살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고, 눈치를 살피는 그런 강자(强者)가 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달리 생각하십니다.  “나는 그대들 가운데 시중드는 사람처럼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하느님의 생명이 열어주는 질서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곳에는 폭력(暴力)과 좌절(挫折)과 죽음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섬기는 곳에는 사랑과 희망과 생명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지배하지 않고, 섬겨서 그 생명을 행복하게 또 성장하게 합니다. 효도(孝道), 부부애(夫婦愛), 우정(友情) 등이 아름워 보이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섬김의 질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돈 몇 푼을 받기로 하고, 스승을 잡아 줍니다. 그런 처신(處身)은 우리 모두가 쉽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돈 몇 푼이 소중하여. 이웃을 배신(背信)하고 버리기도 합니다. 정치(政治)한다는 사람들은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자신과 자기 패거리의 영달(榮達)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의 이중성(二重星)을 신물 나게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사람을 배신하고, 속이고 버리는 일을 쉽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동족(同族)인 예수님을 그들이 미워하던 이교도(異敎徒) 지배자인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합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식민지에서는 로마총독만이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할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반란(反亂)선동죄로 총독에게 고발합니다.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그런 고발로 빌라도의 법정(法庭)에서 예수님은 정치범(政治犯)이 됩니다. 식민지를 통치하는 로마총독이 철저하게 다스려야 하는 정치적 반동세력의 주모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총독 빌라도 앞에서 로마제국의 충실한 신민(臣民)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미워하는 예수님을 없애 버리기 위해 그들이 평소에 가졌던 민족적 자존심(自尊心)마저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판단하고, 버린 사람들과도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죄인을 미워하고 벌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그들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는 인물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들 자신의 권위와 그들을 높은 지위에 올려 준 유대교의 제도였습니다.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다반사(茶飯事)로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맞서는 자들을 미워하고, 짓밟고 죽입니다. 미움은 남을 먼저 죽이고, 자기 자신도 영원히 죽이는 악(惡)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보낸 사실을 알립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조롱한 다음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이어서「복음서」는 말했습니다. “전에는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 날 서로 친구가 되었다.” 헤로데는 젊었을 때 로마에 유학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 주변 인물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총독인 빌라도에게 그는 불편한 인물이었습니다. 헤로데와 빌라도는 그날 예수님을 결박하여 서로 주고받으면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제삼자(第三者)를 함께 미워하고 짓밟으면서 쉽게 동료의식을 갖습니다. 흔히 제삼자에 대한 우리의 입방아는 우리끼리 동료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유대교지도자들과 군중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바라빠를 택합니다. 바라빠는 폭동과 살인죄로 체포된 인물이었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한 예수님은 폭동과 살인을 범한 자보다 더 나쁜 죄인이 되었습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권좌(權座)에 앉으면,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을 가장 미워합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사람을 미워하고, 벌하며, 죽이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라면, 그들 안에 소용돌이치는, 미워하고 죽이는 힘을 정당화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하느님을 믿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 앞에서도 용서하고 살리는 실천을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느님도 과연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신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웃을 용서하고 살리는 노력이 우리 안에 보이면, 우리도 용서하고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생각하십니다. 우리의 죽음 너머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들인 당신은 아버지의 생명이 하시는 일, 곧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소에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당신을 미워하며 죽이려는 의도를 보면서도, 당신이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일에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섬김과 용서가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가 행하는 성찬, 곧 미사는 이 섬김과 용서를 인류 안에 살아있게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신앙인은 섬김과 용서의 빵을 먹고, 섬김과 용서의 피, 곧 그 생명을 마시면서 섬김과 용서를 실천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인류역사 안에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크레타의 성 안드레아 주교의 강론에서(Oratio 9 in ramos palmarum: PG 97,990-994)

자, 그리스도를 만나러 올리브산으로 올라갑시다. 오늘 베다니아에서 돌아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구원의 신비를 성취하시고자 자원하시어 거룩하고 복된 수난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심연 속에 놓여 있는 우리를 건져 주시고, 당신과 함께 우리를, 성서가 말하는 대로, “모든 권세와 세력과 능력과 현재와 내세의 모든 이름들 위에” 올려 놓으신 그분이 오늘 예루살렘을 향해 기꺼이 발길을 옮기십니다.

 

그분은 영광을 얻고자 하는 사람처럼 화려하거나 의기 양양하게 오시지는 않습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큰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은 자 없습니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게 천한 옷을 입고 가난하게 입성하십니다.

 

자, 와서 당신 수난으로 바싹 다가서시는 그분께 달려가 그때 그분을 맞이한 사람들을 본받읍시다. 그러나 길에다 올리브 가지나 옷자락이나 팔마 가지를 깔지 말고, 우리 자신은 최대한의 겸손된 마음과 올바른 정신으로 그분 앞에 엎디어 다가오시는 말씀을 받아들입시다. 그 무엇으로도 담을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맞아들입시다.

 

겸손 자체이신 그분은 우리에게 겸손하게 나타나시는 것을 즐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의 비천한 상태를 초극하시고 우리들에게까지 오시어, 우리와 함께 사시고 자녀 관계에로 우리를 일으키시고 당신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 분은 전인류 가운데 첫 열매로서 “동쪽 하늘 위에” 즉 당신의 영광과 신성에까지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과 함께 승화시키시기 위해, 그들을 땅 밑바닥에서 더 높은 단계의 영광으로 들어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동안 우리 눈을 즐겁게 하지만 곧 시들어 버릴 생명 없는 나뭇가지나 옷자락을 깔지 말고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발 앞에 깔도록 합시다. 그분의 은총을 옷 입고, 또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아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을 옷 입어 옷처럼 그분 앞에 깔도록 합시다.

 

이전에 죄로 인해 진홍색같이 붉었지만 구원의 세례가 베푼 정화로써 양털처럼 희어진 우리는 이제 종려나무 가지가 아닌 승리의 상을 죽음의 정복자에게 바칩시다. 매일매일 우리도 아이들처럼 영혼의 영적인 가지를 흔들면서 그들과 함께 거룩한 찬미가를 부릅시다. “이스라엘의 왕,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루카 19, 28-40. 수난 복음 22, 14-23.5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의 머리말에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환희와 기쁨과 희망이 넘쳤는데, 바리사이나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선동에 백성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어제 권좌에 오르며 환영하며 받아 주던 사람을 오늘은 땅바닥에 내던지는 형국입니다. 기쁨과 희망으로 시작한 일이 슬픔과 고뇌로 남는 것은 우리의 깊은 관심사여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기쁨이 슬픔이 되고 희망이 절망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고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주님을 사랑 없는 사람들, 은혜를 배신으로 응답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끄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인생도 기쁨이 슬픔이 되고 희망이 절망이 되어 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높이 지은 집을 시간이 되어 무너트리고 새 건물을 짓는 것은 더 좋은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성공이 실패가 되고, 한 인격이 죄로 인해 망가져서 인품을 잃고 살거나, 시기 질투로 인해 잘 준비된 인격이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일은 자업자득일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묵상 중 보편적 믿음의 형태를 보다가 ‘오늘도 주님을 향해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며 깊이 깨우쳤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를 배우고 세례 날 마음 뛰고 기뻐하고 눈물 흘리던 사람들이 삼 년이 안 가서 “나는 믿지 못하겠다. 하느님 어디 계시냐?” 조금 어려운 일만 닥쳐도 극복하지 못해 신앙을 잃고 사는 사람, 잘 믿다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 하느님을 거부하고 믿음을 살지 않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젊은이들이 없어지는 교회의 현상은 “호산나”하고 노래 부르던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저는 나가서 일하는 사명은 없고 이제 수도원 안에서 선교와 주님 구원의 일을 하면서 믿음을 굳게 하고, 길잃은 사람에게 길을 찾아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시간 없이 열심히 일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을 잃고 헤매는 사람 수도원으로 보내시고, 신앙을 잃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 하루만이라도 오셔서, 보고 듣고 느끼면서 잃은 신앙의 영광을 되찾기를 기도합니다. 어디든지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사도는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찾아가세요. 

성 주간을 더 거룩하게 지내며 길잃은 양들을 구합시다.

 

 

 

’호산나’hosanna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아,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아, 주님, 번영을 베푸소서.(시편118,25)

 

유다인들이 과월過越(=유월逾越)절 축제를 거행하러 예루살렘으로 속속 몰려들고 있었다. 건너뜀의 의미가 과월(=유월)이다. 이는 파스카(Pascha)와 같은 뜻이다.

 

과월은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억압에서 해방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건너뜀이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과월절 축제이며 예수님께서 이루신 파스카 축제이며 부활축제를 뜻한다. 인생사에서 한계에 부딪히면 과월(=유월)은 인간의 바람이 되고, 전능하신 하느님께 조건없이 의탁하게 된다. 힘의 장사도 한계에서는 하느님을 향해 두손을 모으게 되어있다. 하느님 구원,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유다인이 외칭 호산나의 절정이며 완성이다.

 

“살려달라!” 죄인의 절규이며, 불의에 대한 회심의 절규이다. 죽음에 대한 살고싶은 마지막 기도이다. 이 외마디는 병 앞에 장사가 없다. 병실 침대에 앉아 아무것도 할 수없는 환자의 간절함이다.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입성에서 외치는 ‘호산나’는 절규처럼 들려온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자 되어 당신을 감추셨다. 권력 앞에 당신은 무색했고, 힘없이 십자가의 길을 걷고 죽어가는 모습에 유다인들은 실망과 환멸로 로맨스의 귀향의 기대는 깨끗이 접었다. 백성들의 여론은 악에 편승하고 예수님의 의를 죽이고 있다. 언제나 이 시점이 우리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이 하이라이트 순간이다. 죽음이냐? 생명이냐의 기로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꼭 반전이 있어야 한다. 반전이 있다. 하느님께서 전능 전지 전선으로 이루시는 일임을 알고 내어 맡긴다.

 

드디어 성주간이다. 침묵 중에 구세주 성탄의 완성인 빠스카(부활)성삼일에 우리의 구세주, 나의 구세주 예수님을 꼭 만나자. 하느님 나라의 혼인잔치는 맛을 내며 산나게 살게 될 것이다.

 

 

 

참 행복한 예닮 삶의 여정. -신뢰, 기도, 비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암투병중인 믿음 깊은 형제와 그 부인을 만났습니다. 목과 머리 뒷부분의 암으로 인해 30회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수도원의 저를 방문하자 부부가 큰 절을 했고 저도 함께 절로 응답했습니다. 목주변은 방사선 치료로 온통 화상을 입은 듯 했습니다.

 

“사순절 동안 내내 방사선 치료를 받았습니다. 참 힘들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순절 동안 수난을 겪는 마음이었습니다. 아내가 시종일관 늘 함께 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아, 부부가 한 몸의 일치가 되는 것도 평생 여정이네요. 결혼했다 하여 부부가 아니라 온갖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등 산전수전,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을 통해 부부 일치도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 이미 믿음의 투병 자체로 연옥 고통을 겪으셨고 보속도 했습니다. 성주간 잘 지내시고 쾌유되어 주님과 함께 부활 축제를 지내시기 바랍니다.”

 

믿음 깊은 부부와 주고 받은 덕담과 더불어 보속의 말씀 처방전으로 이사야서 말씀을 써드렸습니다. 바로 제 여섯째 숙부가 암투병중 선종전 한주간 꼭 지니고 사셨던 생명의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과정입니다. 각자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평생 성장, 성숙되어갈 때 비로소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 참 사람이 되어가는 여정으로 불림 받은 우리들입니다. 이 또한 평생여정, 평생과정입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수님을 닮은 참 행복한 삶에 대한 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신뢰입니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 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서 착안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무신불립입니다. 신뢰가 없으면 서지 못합니다. 신뢰보다 큰 자산이 없습니다. 신뢰로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하면 불안과 두려움에 끝없는 표류요 방황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랑의 신뢰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자주 들으셨을 것입니다. 시편의 다음 말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신뢰의 고백입니다.

 

“하느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고백이 그대로 신뢰의 사람,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온통 주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의 고백입니다. 탓할 것은 주 하느님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 대한 나의 신뢰 부족입니다. 주님께 대한 신뢰 역시 평생 여정입니다. 날로 주님과 신뢰의 관계 깊어가는 여정일 때 비로소 주님을 닮아가며 행복한 삶입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신뢰에 이어 기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신뢰하기에 저절로 기도입니다. 오늘 수난복음에서 착안했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생명의 소통이, 사랑의 대화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이들이 참 불가사의입니다. 얼마나 위태하고 허무한 삶인지요!

 

그러니 헛된 것들의 유혹에 빠지고 무지의 어두움 중에 방황입니다. 하여 무지로 인해 죄도 많고 병도 많습니다. 무지의 병의 치유에 기도보다 더 좋은 처방약은 없습니다.

 

보십시오. 원래 루가복음 사가가 강조하는 예수님의 기도였지만, 오늘 주님 수난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감동적인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늘 읽어도 새로운 감동으로 와닿는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내용을 직접 모두 인용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지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집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바로 무지의 죄, 무지의 병, 무지의 병임을 깨닫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처럼 무지의 죄의 어둠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도 가능합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예수님 삶의 여정입니다. 사랑의 신뢰이듯 사랑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내, 겸손, 온유, 신뢰, 지혜 모두 기도의 샘에서 나왔음을 봅니다. 모두가 기도의 열매, 은총의 열매들입니다.

 

기도의 여정입니다.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기도 또한 깊어질 것이요 기도가 깊어지면서 예수님과 일치의 관계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사랑에 초보자인 우리들이듯 기도에도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이요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비움입니다.

기도에 이어 비움입니다. 기도와 비움은 함께 갑니다. 오늘 제2독서 필리비서의 비움찬가에서 착안했습니다. 삶은 비움의 여정입니다. 순종과 섬김, 겸손을 통한 비움입니다. 끊임없이 비워가는 삶의 여정중에 주님과의 일치도 깊어집니다. 그러니 삶에서 오는 온갖 어려움들 비움의 계기로 삼으십시오. 사랑의 비움입니다. 사랑으로 부단히 나를 비워갈 때 예수님을 닮고 서로간의 평화로운 공존입니다. 섬김을 통한 자기 비움입니다. 마치 다음 말씀이 예수님의 유언처럼 들립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겸손의 사랑은 섬김을 통한 자기 비움으로 드러납니다. 섬김의 배움터에서 섬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움은 필립비서에서 절정을 보여줍니다. 참 아름다운 비움의 사람,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비움의 여정은 순종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랑의 비움, 사랑의 섬김, 사랑의 겸손, 사랑의 비움으로 요약되는 예수님의 감동적인 평생여정을 보여 줍니다. 참 아름다운 분,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 참 사람의 영원한 모델, 우리 삶의 영원한 좌표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우리 삶의 여정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시기에 비로소 살 맛을, 살 희망을 갖게 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참 행복한 성인의 삶은 부단한 신뢰와 기도와 비움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이루어짐을 깨닫습니다. 신뢰의 여정, 기도의 여정,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했던 예수님께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신 예수님의 고양된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참 아름답고 사랑스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런 당신과의 일치를 날로 깊게 해주시니 저절로 흘러나오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지금 내가 뭘하고 있지?'(루카 22장 14~23, 56)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호산나 다윗의 후손이시여 ~

젤 비싸고 좋은 옷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던 사람들이 얼마지나지 않아서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내리는 십자가 형벌에 처하라고 소리칩니다.

변덕스러운 모습 끝까지 참지 못하고 안달하는 모습 덩달아 무리에 끼어 합세하는 모습 태도를 분명히 합시다.

군중 심리에 따라가는 모진 행동은 애매한 사람을 잡게됩니다.

멈춰서서 지금 내가 뭘하고 있지? 

자신이 해놓고 뻔뻔하게 굴지말고 미안하면 미안하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속죄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길에 들어섰다면 죽어도 같이 걷고 넘어지고 또 일어서며 누군가 잡아끌어도 끝까지 갑시다.

철모르는 애같이 굴지 맙시다.

쓰면 뱉는것은 그만!

 

 

 

제병영 신부님

예수님의 수난기이다. 오늘은 게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함께 해본다.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공생활 동안 자신이 인간적으로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욕망과 열망을 대면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하는 고뇌의 모습이다. 수난과 죽음이라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지만 자신의 내면 깊이에서 올라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거역하지 않는 당당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인다. 나 자신의 일상안에서 수없이 많은 이런 갈등을 가지고 살아간다. 인간적인 열망과 욕망을 더 따르려는 강한 힘에 수많은 순간 무릎을 꿇어 버리는 모습에 예수님처럼 내면의 소리를 당당하게 듣고 하느님의 뜻으로 삶을 방향을 잡아 살아가려고 해본다. 그럴 때 예수님의 수난을 삶으로 살아나가는 모습일께다! 

나무에 주는 퇴비는 동물의 배설물이다. 이 배설물이 새로운 생명의 원동력이 되듯이 우리 삶의 고뇌와 고통이 삭혀져 삶의 새로운 생명의 원천이 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갈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루카 19장 38)

     김웅태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

오늘 주님 수난 성지주일부터 성 토요일까지를 성주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구원 사건을 기념하는 가장 거룩한 주간이지요.

오늘 성지주일에서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또 하느님 백성의 주님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예수님은 기간 중 성목요일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며,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성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며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기념하며, 성토요일에는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혀계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서는 루카에 의한 주님 수난기를 낭독합니다. 그리고 성금요일에는 요한이 의한 수난기를 묵상하게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아놓으면서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마른 땅을 밟고 오시도록 했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루카 19, 38)

이렇게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 하느님 백성의 주님으로서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소박하고 겸손하셨습니다. 그분은 무슨 화려한 백마를 타고 멋진 호위병과 군사를 이끌고 오신 것이 아니라, 조금마한 나귀를 타고 또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제자들과 함께 오신 것이죠. 또 환영나온 사람도 억지로 동원된 사람들이 아니라, 자유로이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축하하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우리의 구세주로 맞아 드리면서 환영했던 것입니다. 

•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 자체가 그런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고, 당신 자신을 희생하면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신 구세주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임금님이십니다.

•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고, 다윗의 후손 중에 구세주께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시지요. 참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시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이것은 예수님께서 펼치신 하늘나라의 복음, 평화의 복음이며 인간 구원의 기쁜 소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을 보살피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든지 악마의 세력아래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며, 죄로 인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해서 다시 하느님께로 오도록, 흩어졌던 사람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아들이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 평화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또 하느님과 함께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기에 우리는 그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환영합니다.

• 그런데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구속하기 위해서, 당신은 속죄양으로서 파스칼의 어린 양으로서 희생 되실 운명을 그런 사명을 갖고 계셨습니다.

오늘 영광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머지 않아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진 희생양으로서 사람들은 자기 죄를 그분께 전가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치는 저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대신 희생하셔서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루카에 의한 수난기에서도 예수님을 심문하던 빌라도는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루카 23, 22) 이렇게 자신의 양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더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다그치며 요구했습니다. (루카 23, 23) 그리고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 (루카 23, 31) 고 하였습니다.

•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과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장 33)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당신을 모독한 악당들과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던 군중들, 또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구속의 신비를 묵상하고 기념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하느님 백성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통해 받은 하느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참삶의 길을 따르며,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여정을 가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 나는 나의 왕으로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있습니까?

• 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음을 묵상할 때, 나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이 아침에 나 살아있다.

     최민석 신부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올봄은 부쩍 여기저기서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곤 한다. 천지가 음울한 겨울 빛을 벗지 못하고 있을 때 온통 샛노란 개나리꽃을 가득 피워놓고 계시는 날 아침, 개나리 꽃밭 속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생각이 든다.

 

아! 생명의 놀라운 환희, 회색의 언덕과 길가를 한 순간에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어 놓은 개나리, 진달래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징그러운 벌레의 모습을 지니고 살게 하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한 마리 흰나비로 바꾸어 하늘로 날려 보내는 새로운 탄생, 그 속에 하느님 계시는 게 아닌가.

 

생명의 탄생과 함께 마련해 놓은 고난, 나비 한 마리의 사랑스러운 날개 짓과 나비의 비행을 품어 안고 있는 나비 뒤의 허공, 그리고 그 고난의 끝에 자신과 제 백성을 다 살려내는 십자가의 신비, 그게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증거가 아닐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 16,24)

 

교회 전례력으로 예수 수난 성지주일은 성주간 시작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하늘의 명(天命)’을 받든 예수 수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당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온 몸으로 담아낸 십자가 사건이지만 이제 내가 걸어야 할 십자가 소명사건이다.

 

나의 십자가는 지금 이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말한다. 나는 하느님의 아들로 하늘 꽃으로 지금 여기에 와서 하늘 꽃을 피우고 있다. 나는 하늘의 온갖 은총과 축복을 지닌 존재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나은 나, 지금보다 더 근사한 내가 되려고 애를 쓰며 살아왔다.

 

이런 나에게 스승예수가 오셔서 지금 이대로의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지금 이대로의 나를 받아들임으로써 내 내면과의 싸움을 그만 두는 것이다. 이제 나는 지켜야 할 내가 없다. 구해야 할 나도 없다. 지켜야 할 나도 구해야 할 나도 없기에 싸워야 할 나도 없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지금 이대로의 나를 만나고, 그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내 생명과 생명의 법칙이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가. 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몸’은 어디서 일부러 구해오지 않아도 이미 그 속에 생명의 법칙을 안고 있다. 생명보다 생명의 법칙이 먼저 있어서 그 법칙대로 생명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 법칙을 옛사람들은 ‘하늘의 명(天命)’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은 곧 명이다. 하늘의 명을 좇아 살면 살고, 그것을 거역하면 망한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하늘의 명을 받아 사는 것이다. 명을 받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동양에서는 “법(法) 받는다.”고 말한다. 살아가게끔 되어 있는 그대로, 그 길을 좇아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이라고 믿는다.

 

나는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 살아계신 하느님이 지금 여기 계시기에 나와 세상이 있는 것이고, 나와 세상은 하느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나는 하느님이 생명이심을 믿는다. 생명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신진대사를 계속함으로써 비로소 살아있다.

 

봄 들판의 여린 꽃다지 한 송이에서든, 제 빛깔처럼 은은한 선물을 받은 살구꽃 향기 속에서든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모습, 제 안에서 거듭나며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 부활하는 자연의 몸짓 속에서 이 아침도 하느님의 모습을 본다.

 

 

 

하느님 손에 완전히 내어 맡김

     박일 알렉산델 신부님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聖枝) 주일입니다. 

이와 함께 시작되는 성주간 동안 수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예수님과 긴밀하게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난복음을 읽는 것도 그 자체로 이미 삶의 응답이요, 신앙의 행위입니다.

 

시몬에 관하여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루카 23,26)고 쓰여 있는데, 이는 보통 제자들의 임무를 정의하는 표현입니다. 

시몬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는 가르침을 따르는 모범이 됩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이 행위는 수난기의 끝에서도 반복됩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3,48) 심지어 백인대장도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용감한 증거의 행위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개인적 파국 이상의 것으로서, 바로 하느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무서운 단죄를 초래할 것이기에,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 23,28)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대한 단죄는 세상의 모든 악행, 하느님 은총에 대한 거부, 하느님을 적으로 삼는 모든 권력 등에 대한 징벌의 상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모범을 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불의와 고통도 예수님의 사랑을 질식시키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당신의 적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당신 설교의 백미요, 어떻게 그리스도 신자들이 살아가고, 기도하고, 고통을 참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봉헌하는 이런 맥락에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더해집니다. 뉘우침과 회개는 하느님께서 늘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있으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착한 강도는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예수님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겼고, 그 믿음은 응답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선 마지막 순간까지 구세주로 남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선 전 생애에 늘 기도하셨는데, 이제 기도로써 당신의 삶을 마무리하시며, 아버지께 대한 깊은 신뢰를 발하십니다. 

시편 31편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십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나긴 가르침의 요약입니다.

 

올해도 예수님의 수난에 깊이 동참하십시다. 

그분의 고통과 용서, 순명과 완성의 모든 여정을 우리도 그분과 같이 겪고, 같이 나누어 당신의 더욱 충실한 제자가 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 여정에 참여한 인물들로부터도 제자 모습을 찾아 배워나갑시다.

   

 

 

구원을 향한 동행

     오수진 아가다( KBS 기상캐스터)

2년 전, 회사에서 같은 일을 하는 기상캐스터 후배가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에 함께 나가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좋아하는 후배의 제안이라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마냥 즐거울 것 같았고, 성서 모임이라는 것을 통해 그간 다소 냉담했던 시간들을 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참여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연한 동기로 큰 기대 없이 시작했던 그 모임이 냉담을 풀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제가 참여했던 성서 모임은, ‘탈출기’를 공부하는 모임이었습니다. 

탈출기는 이미 잘 아시겠지만,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을 주님께서 큰 구원으로 이끄신 이야기입니다.

디즈니 영화 ‘이집트 왕자’의 바탕이 된 이 기록은 이야기 자체로도 재미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고난 자체인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이 등장하셔서 그들을 구하려고 하십니다.

노예의 힘든 삶 속에서 나타난 구원의 말씀이며, 선택해야 하는 마땅한 제안이지만, 탈출의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나를 구하시겠다는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였지만, 마주하는 고난과 역경, 긴 광야는 그들을 지치게 합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고통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심지어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차라리 노예의 삶이 낫겠다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더라도 익숙해진 그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 편하겠다고 말입니다.

 

크고 작은 일상의 힘든 시간들을 생각하면 제가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패턴 또한 그때의 이스라엘 민족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삶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그 뜻을 향해 움직여야 하지만, 일상 속에서 그분의 뜻을 의심하게 되기도 하고 익숙해진 냉담의 삶에 가까워지게 되기도 합니다.

 

탈출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신앙적 교훈들 속에서도 제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점은, 그들의 힘든 시간들이 결과적으로는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땅을 찾아 움직이던 그 고난의 시간들이 사실은 더 큰 구원을 위한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점입니다. 

고군분투하는 우리 삶 속의 어려운 시간들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면 더 큰 사랑과 은총을 향한 길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삶 속에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거나, 간절하게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하고 화가 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의 시련 속에 지쳐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거나 그 뜻을 의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각자의 삶에 동행하고 계시며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것을 행하고자 하신다는 점을 믿고 그 굴곡들을 현명하게 이겨내는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루카 22, 5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무나 빨리 변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믿고 사랑한 사람에게서

깊은 배신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앞에서

우리의 모순과 

한계점을 보게됩니다.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주님의 수난입니다.

 

주님께

상처와 고통을

안겨준 장본인은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약하디 약한

가지처럼 약한 것이

우리들 신앙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처절히

만나는 은총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우리들

배신에도 불구하고

삶의 길을 사랑으로

밝혀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오셨기에 모든 것이

다시 열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열림은

수난에서 

시작합니다.

 

우리의 잔인한 욕망을

꺼내어 대면하게 

해주는 주님의 

수난입니다.

 

성주간은 우리자신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주님 수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성주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수난은

다시금 이러한

우리를 껴안는

진정한 사랑과 용서임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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