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18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2,9-16ㄴ
형제 여러분, 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10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11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13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16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게, 주님께서 한가운데에 계시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다(제1독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인사하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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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며 이스라엘의 주님께서 한가운데에 계시다고 한다(제1독서). 마리아가 찾아가 인사를 하자 엘리사벳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시다고 외친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마리아는 시골 나자렛 목수의, 엘리사벳은 유다 산골 사제의 아내였습니다. 창조부터 이어진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완성하시는 예수님과 요한을 태중에 모신 이 여인들이 그토록 작고 가난한 이들이었다는 사실에서 하느님의 영광은 더욱 빛이 납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36-37). 아이를 낳지 못하는 늙은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는 소식은 마리아에게 커다란 확신과 기쁨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잉태한 서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 열망으로 100-150킬로미터나 떨어진(걸어서 닷새나 걸리는) 엘리사벳의 집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이러한 태도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전적인 믿음과 즉각적인 응답을 잘 보여 줍니다.
마리아와 태 안에 계신 주님의 방문으로 모든 이가 성령을 가득히 받고 기쁨에 넘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마리아와 주님을 찬미하고, 천사의 예언대로(1,15 참조) 요한도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해집니다. 그리고 주님을 태 안에 모신 마리아는 하느님을 한껏 찬송하고 용약하며 ‘성모의 노래’(마니피캇)를 바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 하느님을 한가운데에 모신 시온의 환성과 기쁨을, 그리고 바로 그 시온 때문에 기뻐하며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예언하면서, 우리를 하느님 안에서 기쁨 가득하고, 또 그분께 기쁨이 되어 드리는 축복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성모님처럼 내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뜻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도 바라볼 줄 아는 혜안을 청합시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 안에도 머무르고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함께 기뻐하고 격려하는 이 시대의 ‘마리아’로 살아갑시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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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이 둘의 만남은 참으로 기구하면서도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던 처녀였지만 성령에 힘입어 아이를 갖게 된 마리아가,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하느님의 손길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하느님을 체험하였지만, 자신들의 남은 인생 전부를 그분의 구원 역사를 위하여 내놓습니다. 그러고는 서로 만나 자신들에게 섭리하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따뜻한 인사를 받으며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하여 더 큰 확신과 위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마리아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의 섭리에 끝까지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서로에게 진정한 위로와 힘이 되어 줍니다.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마리아이며 엘리사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안에서 끊임없이 머무르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만남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고 있는지요? 한 신앙인으로서 다른 신앙인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 주는 만남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억하며, 우리의 만남이 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 힘과 용기가 되어 주기를 희망해 봅니다.(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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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전통에서 ‘시온의 딸’은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뒤에 선포한 신탁으로 다시 세워진 하느님의 백성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유배에서 돌아온 ‘남은 자’들이며, 종말에 메시아를 맞이한 예루살렘(즈카 9,9 참조)을 의미합니다. 구원 역사 안에서 성모님께서는 메시아 예수님에 관한 구절들에서 새로운 하와로서 불순종이 아닌 순종의 신앙인으로 나옵니다. 메시아를 잉태하시고 이스라엘을 재건하시는 성모님께서는 시온의 딸의 전형이며, 세상의 어느 것보다 하느님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모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시는’(루카 1,35), 마치 구약 성경의 커룹들이 감싸고 있는 ‘계약의 궤’(탈출 25,20 참조)처럼 표현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라고 노래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말하였듯이 “은총이 가득한” 행복한 여인이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마리아보다 엘리사벳이 더 행복한 여인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문화 안에서 엘리사벳은 늙도록 아이를 가지지 못한 여인이었기에, 창피함과 부끄러움 가운데 일생을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늦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었고, 당당하게 한 여인으로 서게 하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의 잉태는 축복이라기보다는 염려스럽고 걱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그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일이며, 걱정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과 그의 태 안의 세례자 요한은 기쁨 속에서 성령으로 가득 차 마리아를 칭송합니다. 이에 성모님께서는 겸손하고 온화하게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라고 노래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자신의 삶에서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더라도 우리가 체험하는 많은 만남을 통하여 주님의 은총을 발견하는 것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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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자라면서 ‘혹시 나 입양되어 온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어떨까요? 아이에게 믿고 살아갈 든든한 부모가 없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이는 스스로 약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니 부모에게 의지해야만 마음이 편합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어 아는 것이 많아지고 몸집도 커지게 되면 부모보다 자신을 더 믿게 됩니다. 그러면 어릴 적에 느꼈던 부모와 함께하는 편안함의 의미는 잃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 없이 혼자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고통스러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보다는 자신을 더 믿게 된 때가 있었습니다. 뱀의 말을 믿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단절되고 행복이 충만한 상태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인간은 어른이 되면서 행복을 잃습니다.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믿어 행복을 잃었다면, 이제 다시 하느님을 믿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다시 인간이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외친 것은, 성모 마리아께서 어린이처럼 믿으셨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신이 행복하신 이유가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시며, 어린이처럼 믿는 그 겸손한 믿음만이 곧 행복의 시작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행복하려면 아버지 앞에서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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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두 여인 간의 만남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의 만남이지요. 태어날 아기들의 운명이 어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여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쓰렸겠습니까? 그런데도 서로 격려하면서 주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처럼 주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만 앞날에 대한 희망이 나옵니다. 지금은 나의 처지가 비천하지만, 언젠가 귀한 존재가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비록 내가 슬픔에 젖어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쁨으로 넘치리라는 희망이지요.
마리아는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비천한 사람은 낮은 신분, 또는 매우 겸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없기에 하느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또는 재산이나 명예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주님 앞에서 자신은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비천한 자신을 택하신 주님을 찬미하며, 주님께서는 하실 수 없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기쁨이 넘치려면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껴야 합니다. 나의 생활을 늘 되돌아보면서,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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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께서 잉태 예고를 받으시고 가장 먼저 달려가신 곳은 사촌언니 엘리사벳의 집입니다. 늙은 나이에도 자신보다 6개월 먼저 아이를 갖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서로에게 이루어 주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벅찬 감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찬양과 성모님의 노래는, 그리스도인이 찾아야 할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일깨워 줍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의 찬양을 받으신 이유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배 속의 세례자 요한도 구세주의 오심을 태중에서부터 기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비천한 종으로 겸손하게 낮추시고, 당신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이 세상에 펼쳐질 것에 대한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찹니다. 성모님께서는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루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성모님의 노래 속에는 우리의 희망과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불의와 불공평,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이, 정의와 평화, 진리와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비천한 종 성모님과 엘리사벳을 통해 이루신 것처럼, 우리의 작고 보잘것없는 손과 발을 세상을 바꾸는 도구로 쓰고자 하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나의 봉헌이나 희생이라도 하느님께서 기꺼이 쓰실 수 있도록 내어 드린다면, 스바니야 예언자의 외침처럼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선포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울려 퍼질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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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모님은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을 찾아가셨을까요? 성모님은 혼자 담고 계시기에는 너무나 벅찬 감동과 기쁨을 나누셔야 했습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가지게 된 친척 엘리사벳이 자신의 기쁨을 나눌 상대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서둘러 그녀를 찾아가셨고, 구원의 환희와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구세주의 어머니라는 중압감을 해소시킵니다. 나자렛의 한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생긴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은 ‘감사와 찬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한 표현이 성령의 감도를 받은 엘리사벳의 입술에서도 나오게 됩니다. ‘성모의 노래’는 세세 대대로 믿음의 자녀들이 부르는 찬미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를 ‘소통과 친교의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두 여인의 만남은 ‘믿음’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임신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았으며, ‘여인들 가운데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라고 마리아를 찬양합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은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서로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종임을 고백하셨습니다.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우리도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 때 마리아에게서 일어났던 ‘구원의 감동과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갈수록 더 ‘능력 있는 어머니’를 찾게 만듭니다. 자녀들은 ‘믿음 깊은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아름다운 만남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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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성모님께서는 걸음을 서둘러 가셔야만 했을까?’
어떤 이들은 처녀인 성모님께서 아이를 가지시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엘리사벳에게 서둘러 가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하고 외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미치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시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뛰니 …….” 하고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로 응답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걸음을 서둘러 엘리사벳에게 가신 것은 이러한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지금 겪고 계시는 상황에 놀라움과 오묘함을 느끼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천사의 말마따나 아이가 생겼습니다. 더구나 이 아이는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생겨났으니 그 놀라운 체험이란 얼마나 컸겠습니까?
성모님께서 혼자 담고 계시기에는 너무나 벅찬 감동과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지게 된 친척 엘리사벳이 이를 공감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를 서둘러 찾아가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이 묵주 기도에서 ‘걱정의 신비’가 아니라, ‘환희의 신비’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쁨이 넘치는 방문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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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아기를 못 낳던 여인에서 ‘기적의 잉태’를 체험한 여인으로 바뀐 분입니다. 천사를 만났던 두 분이었으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겠습니까?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에는 두려움이 자리하지 않습니다. 두 분은 ‘희망과 사랑’의 주님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없었는지요? ‘이것은 분명 기적이다.’ 이렇게 느꼈던 ‘사건과 만남’은 없었는지요? 주님께서는 모든 이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깊이 들어와 계십니다. 대림 시기 네 번째 주일은 이러한 고백을 하는 날입니다. 그리하여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날입니다.
성탄의 아기 예수님께서는 구유에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의 마음에 ‘먼저’ 오십니다. 내 마음에 ‘오신 주님’을 깨닫지 못하면, ‘구유의 예수님’은 주님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쳐다봐도 ‘거룩한 장식’으로 보일 뿐입니다.
희망과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희망하며 사는 이에게는 더 엄청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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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여,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잠자는 이여,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죽음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빛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나는 다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죽은 채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결코 죄의 육신에서 해방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불행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친히 당해야 할 죽음을 맞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생명을 다시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을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패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밝아 온 하느님의 이 은총보다 더 큰 은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당신 편에서 어떤 공로나 권리나 선행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은총으로만 주어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지난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겨울을 보내고 날씨가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서 겨울옷들을 정리했습니다. 세탁소에 맡길 옷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이때 제가 했던 행동이 있습니다. 혹시 주머니에 물건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주머니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빈 주머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옷에서 손에 잡히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돈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5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이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공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돈을 어떻게 써야 더 행복할까요?
많은 이가 자신을 위해 쓸 때 더 행복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을 위해 쓸 때 행복감이 더 오래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을 위한 마음이 그 사람과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 인간은 도저히 혼자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누군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행복하게 됩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다른 이와의 연결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이와 단절되는 혼자만의 삶보다 다른 사람과의 연결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그런데 문득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왜 방문했을까?’라는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그냥 막연하게 친척 언니를 찾아가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교회에서는 이날을 특별히 기념할까요?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협력하고 연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협력으로써 상대방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라는 것이지요.
앞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모님도 엘리사벳 성녀와의 연결을 통해 큰 행복을 느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모의 노래’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 어떤 말을 하는 사람에게 ‘상관하지 마!’라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를 죄짓게 하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함께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서로 연결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처럼, 지금 우리가 연결해야 할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 연결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과정보다 큰 성취를 원하지. 하지만 변화는 작은 일의 성취가 모여서 이루어지는거야(영화 ‘비포선셋’ 중에서).
구원의 성채인 가톨릭교회 안으로 들어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피정 센터에 와서 낯선 사람들에 대한 환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온몸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족처럼, 절친처럼 여기며, 기쁘게 환대하다보니, 참으로 은혜로운 체험을 많이 하고 삽니다.
첫 만남 때 인사부터 잘해야겠지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누추하고 불편하시더라도 머무시는 동안 주님 은총 안에 편안한 시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빈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 만남, 첫인사가 잘 되면 그 뒤로는 매사가 술술 일사천리입니다.
그 간단한 환영의 인사에 세파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눈녹듯이 녹아내린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아름다운 환대의 영성을 좀 더 생활화한다면, 이 심각한 위기 상황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들이 우리 가톨릭교회를 찾아올 때, 기존의 구성원들은 어떤 자세를 보이는지요? 진심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환영하고 환대하고 있는지요? 그들이 우리 성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가요?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의 마음속은 그야말로 복잡하고 심란했을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미래에 대한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큰 그림을 그려주셨지만, 마리아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는 순간 즉시 다가오는 도전들과 근심 걱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서른 마흔도 아니고 10대 초반의 소녀 나자렛의 마리아는 마치 안갯속 길을 걷는 듯한 막막함으로 인해 힘겨웠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을 한 아름 안고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아인카림을 찾아갑니다. 마리아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복잡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혼전 잉태 사건을 엘리사벳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마음에 걱정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 마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모든 걱정은 한낱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버선발로 튀어나온 엘리사벳을 그야말로 온몸과 마음으로 마리아를 환대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사촌 언니 엘리사벳의 극진한 환대에 불안·초조했던 마리아의 마음은 태평양 바다보다 더 편안해졌습니다. 이 엄청난 하느님의 초대 앞에서 대체 누구한테 가서 자문과 조언을 구해야 하나 전전긍긍하고 있던 마리아였는데, 엘리사벳은 그 초대가 진정으로 참되다는 것을 진정성 있는 환대로 확증해준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 삶의 다양한 순간 우리를 극진히 환대해주십니다. 내 품 안으로 잘 들어왔다고. 내 성찬의 전례 안으로 잘 들어왔다고. 영원한 안식처요 구원의 성채인 가톨릭교회 안으로 잘 들어왔다고.
오늘 하루 우리 역시 주변 동료 인간들을 진심으로, 그리고 극진히 환영하는 환대의 영성을 생활화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환대란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친절, 작은 서비스, 작은 환영과 격려의 말이 환대의 영성의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복은 알아보면 오고 알아보는 이에게 간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당신이 가야 할 곳을 택하실 때 성모님은 당신을 바로 알아볼 엘리사벳을 택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분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당시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알아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지구상에 엘리사벳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바로 엘리사벳에게 달려가셨습니다. 심지어 의인 요셉도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알아볼 눈이 없었습니다. 성모님은 요셉 성인보다 엘리사벳을 택하셨습니다.
저는 이 법칙을 “볼 줄 알면 온다”라는 법칙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왜 하느님은 아드님을 성모님 태중에 주셨을까요? 볼 줄 아는 유일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았을까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보지만 실제로 그 안의 하느님을 봅니다. 그러니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명예, 돈에까지 해당하는 법칙이라 믿습니다.
어쩌면 성모님이 사람을 가려서 만나는 것 아니냐고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품은 이들은 사람을 가려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를 보물로 만들어주신 분을 위함입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간다는 말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성체’를 두고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품은 우리 각자도 거룩한 성체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우리 안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2006년 필리핀에서 한 어부가 낚시를 하다 왠지 묵직한 대왕조개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열어보니 씹다 만 껌 같은 허여멀겋게 보이는 무언가가 들어있었습니다. 어부는 거참 희한한 게 다 있다며 그것을 침대 밑에 넣어두고 10년 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우연히 그것의 가치를 알게 된 어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제일 큰 진주로 최소 ‘1,000억’원을 호가하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조개가 그만한 진주를 만들려면 몇 년을 살아야 하는지조차 측정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어부는 1,000억 원을 침대 밑에 두고 10년을 살았던 것입니다.
어부라면 진주를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값이 많이 나가는 진주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와도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을 선물하는 것은 진주에 대한 모독입니다. 주님은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 어떤 것을 선물하지는 않으십니다.
사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그냥 ‘열혈사제’에 나오는 정도일 것입니다. 드라마 열혈사제를 보고 신앙을 갖겠다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있어도 이상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사제는 그냥 한 종교의 옷을 입은 평범한 사람이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에게는 사제가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생명의 빵을 주고 죄를 용서해 주는 존재입니다.
사제는 한정된 시간에 신자들과 함께 머무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가야 할까요? 당연히 사제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제를 사제로 세워준 것에 대한 예의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방문함으로써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 하느님을 알아볼 이들에게 우선 다가가야 함을 알려주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야 하는 수준의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자신 안의 하느님을 믿게 할 성덕에 오른 사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이슬람 왕인 술탄을 찾아가 선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탄은 십자군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적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행동은 무모한 행동이었을까요? 술탄은 성 프란치스코에게만 이슬람 땅에서 선교를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성지들에 가톨릭 성당이 세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때 그곳에 자기 형제들을 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219년 프란치스코는 선교하기 위해 일루미나토 형제와 함께 5차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까지 가게 됩니다. 이 당시 십자군은 다미에타의 나일강이 범람하며 홍수가 나고 역병이 돌면서 그리고 양쪽 지휘자의 능력 부족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서른일곱의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교황 대리 펠라조의 특사로 서른아홉의 이슬람 술탄 알 카밀을 만나 평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술탄과 그 백성들이 개종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말과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불을 피워 이슬람의 제사장과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불에 타 죽으면 자신의 죄로 벌어지는 일이고 자신이 살아있으면 모든 이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힘이니 개종의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슬람의 제사장들은 두려운 얼굴을 하며 불을 등진 채 도망을 쳐버렸고 술탄 알 가밀은 손을 뻗어 프란치스코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죽든 살든 자기에게 유리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술탄 알 카밀은 프란치스코의 용기에 보물을 주려 하였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갈망하고 청빈 서약을 한 프란치스코는 먼지인 양 재물을 무시하였고, 그것을 본 알 카밀은 프란치스코에게 더 큰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비록 알 카밀이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프란치스코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프란치스칸은 지금도 예루살렘 성지를 지키며 하느님의 평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인의 경지에 오르면 누구도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이에게 프란치스코를 보내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군이 프란치스코를 몰라봤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능력을 알았기에 사마리아로 들어가면 당신의 파견이 허사가 될 것임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그것을 알아보는 이에게만 보내십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누구라도 주님을 믿게 할 자신이 없다면 그나마 자신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믿어주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파견하신 것이고, 아드님은 교회를 파견하셨고, 교회는 바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알려질 때 분명 호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면 됩니다.
우선 ‘성호경’으로 시험해 봅시다. 저희 동기 신부 아버님께서는 가스 폭발 사고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룻밤 사이에 몸이 깨끗해지는 기적을 겪었습니다. 그 이후로 항상 성호경을 긋고 다니십니다.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아버님은 성호경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도 회개시키셨다고 합니다. 그중에 목사님도 네 분이나 있다고 합니다.
성호경은 내 안에 주님이 계심을 내가 먼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호경에 반응하는 사람에게 다가갑시다. 이것은 가려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주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에게 주는 것뿐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세기의 만남’을 찾아보았습니다. 냉전의 시기에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만남이 주로 있었습니다. 1961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후르시초프의 서기장의 비공식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쿠바의 핵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중국의 마오쩌뚱 주석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만남 이후로 중국은 개혁과 개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985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동유럽은 민주화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2018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만남으로 한반도의 핵전쟁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세기의 만남은 분쟁과 갈등이 화해와 평화로 가는 만남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절망이 희망으로 변할 수 있다면, 두려움이 담대함으로 변할 수 있다면, 폭력이 평화로 변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세기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위해서 미리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구세주의 어머니께서 방문하신 것입니다. 좋은 기운이 함께 만나니,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옵니다. 엘리사벳의 고백은 우리가 늘 바치는 ‘성모송’의 기원이 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태중에 아들 또한 기뻐 뛰노나이다.’ 엘리사벳의 환영을 받은 성모님은 참된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분,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고, 가난한 이를 배불리시는 분께서 나를 복되다 하시나이다.’ 내가 만나는 이웃의 장점을 찾아 낼 수 있다면, 내가 만나는 이웃의 좋은 점을 칭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축복이 될 것입니다. 만남을 통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면, 깨달은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희망의 불씨가 될 것입니다.
행복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드러나고, 내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신가요? 그럼 욕망의 불꽃에서 멀어지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축복의 인사를 드렸고,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 것처럼 우리들의 만남이 이렇게 축복과 은총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5월 마지막 날입니다. 나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충실하게 지내면 좋겠습니다. 나를 통해서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절망 중인 이웃들이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다만 사랑이게 하소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당신을
바라보는 까닭이
다만 사랑이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느끼는 까닭이
다만 사랑이게 하소서
내가
당신에게
가는 까닭이
다만 사랑이게 하소서
내가
당신에게
머무는 까닭이
다만 사랑이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품는 까닭이
다만 사랑이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떠나는 까닭이
다만 사랑이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이
다만 사랑이게 하소서
성모성월 5월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성모님, 하늘을 향한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예수님 향한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성령과 함께하신 어머니, 제자들의 어머니, 또한 우리들의 어머니,
성모님, 하늘의 인삿말 들으신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인삿말이 무슨 뜻일까 마음에 담고 사신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비천한 종이오니 도구로 써 주소소, 응답하신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아기를 낳으실 방 하나도 찾지 못하고 가축 똥냄새나는 마굿간 구유를 찾으신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바람이 부족할 때, 기도로 아들 예수님을 움직이신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성모님,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픔을 겪으신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십자가의 아들을 품에 안으신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성령강림날,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중심의 어머니,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신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천상의 화관을 쓰신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늘 예수님 곁에서 겸손을 사시는 어머니, 최고의 존경을 받으신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성모님의 달 오월을 감사드리며 장미다발로 오월을 수놓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인사를 받은 엘리사벳은 자신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고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사실 오늘의 만남은 성모님과 성녀 엘리사벳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태중의 아기이신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님과 성녀 엘리사벳의 만남은 정말 인간적으로 볼 때 기구한 운명을 가진 두 분의 만남이었지만. 결코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더 기뻐하며 서로에게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그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실 구원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만남들이 있겠지만, 우리의 만남은 오늘 성모님과 성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구원의 역사를 위한 거룩한 만남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만남 속에 늘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당신 안에 하나가 되게 해주시며, 언제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 함께 해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마리아께서는 가브리엘로부터 위대한 소식을 듣고 급히 “서둘러” 엘리사벳을 찾아가지요. 왜 찾아갔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동질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느님에 의한 임신과 또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위해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보기 위해 또 마지막으로 같은 길을 걸어갈 엘리사벳을 보기 위해 갔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마리아의 방문을 통해 엘리사벳의 인사에서 우리들이 묵상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지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세상의 행복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 바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이들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지요.
다음으로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의 인사에 마니피캇으로 불리는 답사를 하지요. 이 마리아의 인사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그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상에서 자신의 구원사업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이들 특히 통치자들을 그들의 자리에서 끌어내십니다. 그 대신 자신의 구원사업을 받아들이고 이루어지리라 믿는 모든 이들을 들어 올리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들로 대표 되는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로 대표 되는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시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찬양하였습니다. 또한 엘리사벳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또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모든 이들이 행복할 것이라 말합니다. 마리아께서 어떤 이유로 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갔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위에서 언급한데로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사업이 이루어져야 함을 알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진 그 현장에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둘러”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과 석 달가량 함께 지냈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석 달 동안에 무엇을 하였을까요. 성경에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두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함께 기도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들은 기억하고 함께 묵상해야겠지요. 바로 하느님의 구원사업, 그리고 전능하신 분 또한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그 분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서 신앙인으로써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최돵희 마태오 신부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을 향해 달려가는 마리아의 마음
폭풍우와 같은 혼란과 복잡한 마음은
상호간의 만남과 성령의 위안으로
이내 평온과 평화, 기쁨의 순간으로 변화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당신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행복
그 삶이 기쁨이고 행복이며 축복의 길임을
두 여인의 믿음과 신앙의 자세를 마음에 새깁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My soul proclaims the greatness of the Lord
하느님 중심의 행복한 삶. -우정, 환대, 찬미-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계속되는 가뭄이 안타깝지만 게속되는 파스카 축제의 부활시기와 더불어 5월의 성모성월은 참 아름답고 싱그러웠습니다. 꽃들도 새들도 많았던 수도원이요, 우리 나라 어디나 하느님 계신 천국처럼 느껴지는 계절이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할 수 있는 참 좋고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오늘 5월 성모성월聖母聖月 마지막날 5월 31일은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고 내일부터는 6월 예수 성심성월聖心聖月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5월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 참 좋아하는 성가 244장이 생각납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 모아 성전꾸미오며, 기쁜 노래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1절만 아니라 4절까지 모두가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아름다운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오늘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 참 아름답습니다. 어제 수도원 성전 봉헌 축일 미사에 갑작스럽게 케익을 들고 축하차 방문한 분을 반갑게 환대하여 “아, 오늘은 자매님의 방문 축일이기도 하네요.” 드린 덕담도 생각납니다. 반가운 분을 환대할 때면 꼭 그분의 방문 축일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의 두 도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우정과 환대가 참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가난하고 겸손한 찬미의 삶에서 가능했던 우정이요 환대임을 깨닫습니다.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처럼 힘들 때 언제나 찾을 수 있는 도반은 있으신지요?
예수님 탄생 예고를 듣고 순종한 마리아 였지만 심중은 참 착잡했을 것입니다. 서둘러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은 마리아의 모습이 이를 입증합니다.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참 좋은 도반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 중심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두 분이 줍니다.
첫째, 우정友情의 삶입니다.
행복한 삶의 여정을 위해 도반과의 우정은 필수입니다.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의 여정에 더불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도반이야말로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에게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두분 도반과 같은 관계의 도반이 있으신지요? 부부관계도 이런 영적우정의 영적도반의 관계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이런 참 좋은 선물의 도반입니다. 서로간의 우정에 전제되는 바,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신 영원한 도반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자매 도반들과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우정관계요 형제 도반과의 우정관계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둘째, 환대歡待의 삶입니다.
마리아의 영적도반이자 영적우정의 사람, 엘리사벳의 마리아 환대가 참 고맙고 놀랍습니다. 이미 태중의 예수님과 요한 세례자의 우정도 함께 시작됨을 봅니다. 하느님의 섭리 은총이 참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환대하는 엘리사벳의 모습이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 지리라고 믿으신 분!”
참 아름다운 환대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말한마디 천량빛을 갚는다 했습니다. 엘리사벳의 환대는 마리아에게는 그대로 눈물 겹도록 고마운 위로의 구원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의 우정과 환대일 때 진짜 도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분 도반 사이의 신뢰와 사랑도 참 깊어졌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니 엘리사벳의 환대가 참 극진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과연 환대에 충실한 우리의 삶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셋째, 찬미讚美의 삶입니다.
엘리사벳의 우정의 환대에 감격한 마리아의 즉각적 응답이 저 유명한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성모님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저녁 성무일도 끝무렵에 바치는 찬미의 노래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이야 말로 찬미의 모범입니다. 아니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생래적 특징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하느님 창공을 자유롭게 날게하는 영혼의 양날개가 찬미와 감사입니다.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이 찬미와 감사의 사람입니다. 하느님 찬미와 더불어 영원한 도반 주님과의 우정은 물론 형제 도반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집니다. 오늘 마리아의 노래 전반부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의 개인적인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고, 후반부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집단적인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대표적 노래가 바로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이 바치는 찬미 감사가로 이런 찬미와 감사의 고백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순수한 마음과 더불어 가난과 겸손의 영성을 깊이해 줍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온전히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둔 가난한 아나뷤의 전형적 모범이 바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오늘 제1독서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은 마리아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찾는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 모두에 대한 위로와 격려이기도 합니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들 하나하나가 딸 시온이요 이스라엘이요 예루살렘입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 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하느님 중심의 찬미의 삶에 쏟아지는 축복이 참 놀랍습니다.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하느님 찬미의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영혼이 육신에 끌려가지 않고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갑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제목이기도 합니다. 또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은 성서에 얼마나 많이 반복하여 나오는지요!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행복한 삶과 더불어 우정과 환대, 찬미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의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우리 모두 우정의 삶, 환대의 삶, 찬미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보라, 내 구원의 하느님, 나는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해 주셨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12,2-3). 아멘.
만남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을 묵상하면서 이 두 여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헤아려봅니다. 엘리사벳은 느지막이 아이를 잉태하게 된 것에 기쁘고 감사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많은 나이에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두려움과 무엇보다 갑자기 벙어리가 된 남편 즈카르야를 보며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린 마리아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겠지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고백은 했지만, 갑작스러운 일에 당혹감을 느낀 것은 물론 처녀의 몸으로 임신하여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만남은 당황하는 두 여인의 만남, 위로와 연대가 필요한 두 사람의 만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서로의 성소를 확인하고 비전을 나누고 축복하는 시간을 통해서 둘은 자신들을 향한 하느님의 뜻에 확신을 갖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여정 중에 서로 격려하고 확신을 나누는 만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처음부터 끝까지 확신에 차서 지치지 않고 이 여정을 걸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격려와 힘이 되는 형제자매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뜻이 우리 각자 안에서 충만하게 완성되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가브리엘 대천사의 예고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당시 임신중이던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임신 초기, 가장 예민하고 위험하기에 그만큼 각별히 조심하며 제 몸을 잘 챙겨야 할 그 중요한 시기에, 거의 10킬로미터나 되는 험한 산길을 걸어가면서까지 엘리사벳을 방문하고자 했던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사실 성경 말씀 안에 분명한 답이 드러나 있습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지 여섯 달이 되었다."(루카 1,36)
여기서 '보아라'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영어로 'behold'라고 번역됩니다. 우리 말로 '보다'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존재하다, 있다'라는 뜻의 동사 'be'와 '잡다, 붙들다'라는 뜻의 동사 'hold'가 합쳐진 합성어이지요. 어떤 대상을 보긴 보는데 멀찍이 떨어져서 무관심하게 대충보는게 아니라,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함께 '있으면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을 뜻합니다. 제 한 몸 챙기기에도 버거운 노령의 임산부가 임신 7개월차에 접어들어 여러가지로 고생하고 있으니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가서 돌봐주라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마리아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받아들인 그 뜻을 '이웃 사랑'이라는 행동으로 실천했기 때문임을 기억하고 본받자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과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분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이자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분께서 바라시는 뜻인 사랑과 자비를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실천함으로써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게 해 주고, 더 나아가 내 안에 계시는 그분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자신을 돌봐주기 위해 찾아온 마리아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큰 사랑을 느낌으로써, 마리아 안에 계신 주님의 모습을 알아보고 기뻐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마리아의 사랑은 일회성으로, 잠깐의 이벤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이 출산하고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를 때까지 삼개월이 넘는 시간을 그녀 곁에 머무르며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자신을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지켜봐주시고, 놀라운 능력과 섭리로 보살펴주고 계심을 자기 삶으로, 행동으로 드러낸 셈입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당신의 뜻을, 사랑의 계명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들과 함께 계시면서 힘을 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떠한 조건이나 변수에도 휘둘리지 않는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해마다 5월 31일에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루카 1,39-56 참조)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5월 31일을 축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천사의 메시지를 따라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러한 이웃사랑은 위대한 두 인물이 만나는 자리가 됩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성령으로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하자, 자신이 처녀인데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느냐고 하자, 천사가 엘리사벳이 아기를 못 갖는 여인이라고 하지만 아기를 가진지 벌써 석 달이나 되었다는 답변을 확인하고자, 하느님의 영광이 진정 어떻게 드러나는지 함께 느끼기 위해 엘리사벳을 찾아옵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확신하게 되고, 엘리사벳에게 환대를 받게 되자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드립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 1,46-50)라고 외치며,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시는지, 자신에게 얼마나 분에 넘치는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지 되새기며 감탄하여, 자신을 통해 놀라운 일을 시작하시려는 주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는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1-53절)라고 외치며, 자신 한 개인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은총을 모든 이에게 대한 축복과 나눔으로 확산시킵니다. 그리고 어쩌면 마리아는 자기 민족이 그 당대에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아픔을 넘어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새로 오실 주 예수님께 봉헌합니다.
마리아는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 신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54-55절)라고 외치며, 주 하느님께서 자기 민족을 구하시러 오시어 마침내 주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영광을 들어 높이고자 합니다.
오늘 성모님 엘리사벳 방문 축일에,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아쉬움과 허전함,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교회공동체가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공동체원 하나하나를 아무도 제쳐놓지 않으시고 모두 다 사랑해주시고 축복해 주시며 마침내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늘과 땅의 만남은 큰 축복입니다. <루카 1, 39-56> 5월 3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늘의 아들과 땅의 아들이 각각 어머니 태 안에서 만나 기뻐 뛰놀았다.” 합니다. 만남으로 모든 일이 성사되고 초대에 응답함으로써 인연이 이어집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인연이 끊어집니다. 서로 인연을 이어주려면 연락을 자주 하고 접촉해야 합니다. 일 년 지나도 그 흔한 전화 한 통 하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멀어져 만나도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오시자마자 어머니 태 안에서 만나야 할 인연을 찾아 만나면서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오늘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신 첫 번째 사람 엘리사벳의 찬미 소리를 듣게 됩니다. 태중에서 하늘이신 주님과 땅이신 주님의 길 안내자이신 요한의 만남은 신비스럽고 의미가 있습니다. “자매님은 언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하고 물으면 “저는 태중 교우입니다.” 하고 나기 전부터 하느님 자녀라고 자랑합니다.
참으로 나기 전부터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은 큰 행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 성령의 인사말처럼 성령이 충만한 어머니들의 충만한 은총으로 키워진 사람과 은총 없이 자란 사람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부모님의 은총 가득한 삶을 함께 한 사람들, 기도하며 자란 사람과 기도 없이 자란 사람은 차이가 납니다.
태중 교우라도 신앙 없이 태 안에 있는 아이와 믿음의 대화 없이 그저 생겨난 아이에 대한 기쁨만 있으면 아무런 믿음의 영향 없이 자라고 강한 믿음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태중 교우는 아니지만 가난할 때 어머니께서 빈 밥상을 놓고 기도하시며 성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신앙의 박해를 받을 때, 아버지가 외인이어서 아버지 있을 때 기도도 못하고 벽에 십자가도 달지 못했습니다. 기도하다가 아버지가 밖에서 들어오시면 화투 놀이를 하는 것처럼 꾸미기도 했지만, 자녀들을 믿음으로 자라게 했으며 사제, 수녀가 나오도록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늘날 각 가정의 냉담 아이들을 보면 세상 탓이 아니라, 부모 탓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성모님의 성령이 넘치는 노래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넘어 겸손과 온유함과 희생적 봉헌의 삶을 통해 우리 안에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찬미 찬송합니다. 억눌린 이, 가난한 이를 돌보고 죄와 악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을 찬송 찬미합니다.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 살면서 인간적 마음은 더욱 메마르고, 돌같이 굳고, 거칠고, 양보심 없고, 자기만 생각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이기심, 야망, 욕망으로 옆을 보지 않고 자기만 보는 세상에서 인정머리가 없고, 비난과 욕설로 찾아보고, 인정을 나누지 못하고, 믿음은 점점 식어가고, 하느님 떠나 사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 성령 강림 날 성령을 충만히 받고 오늘 복음에 아름다운 만남과 기도의 삶이 있도록 기도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엇이
신앙의
기쁨인지를
다시 묻게 된다.
우리들에겐
이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낼
형제자매가
있다.
쓰러지지 않게
하는 기도가 있고
쓰러졌어도
다시 일으켜주는
나눔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모임이 되고
모임은 찬미가
되고 찬미는
살아있는
말씀을 향한다.
번져가고
넓어져 가는
복음의
기쁨이다.
사람을
살게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사랑이며
믿음이다.
길을 내는
신앙이며
현실을
끌어안는
신앙이다.
실천으로
문이 열리고
이기심으로
문이 닫힌다.
참된 만남에
함께 하시는
머무름의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역사를
믿는다.
우리의 믿음은
만남과 방문을
통해 익어간다.
나눔 없는 신앙
만남 없는 말씀은
아픈 관계이다.
방문(訪問)을
잊어버린
우리들에게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신다.
서로를 반기고
함께 나누는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방문이 된다.
신앙의 기쁨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함께 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찬미하는
기쁨이다.
오월의 계절에
함께 한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어떤 사람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작품을 보니 미켈란젤로 당신은 정말로 조각의 천재입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매일 20시간씩 14년간 계속 일했는데도 제가 천재로 보이십니까?”
어떤 선천적인 천재도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도 노력을 통해 다른 이의 눈에는 천재 이상의 인물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능력과 재능을 주지 않으신 하느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노력하지 않고 있는 자신의 탓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계속되는 노력을 통해서만이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 벌써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리고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나 자신은 세상 안에서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왔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한 노력이 과연 충만했을까요? 마치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교만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서 살았던 것이 아닐까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성녀를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당시 이 두 분에게는 큰 걱정이 있었지요. 엘리사벳 성녀는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된 것에 대한 걱정, 성모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한 것에 대한 걱정입니다. 이러한 걱정이 있을 때,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 성녀를 방문하셨고 이 둘은 서로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의 이 만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한 시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휴대전화가 있어서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만남을 위해 성모님께서는 힘든 방문을 하셨습니다.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자기 자리만 지켜서는 안 됩니다. 그때일수록 주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노력을 하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길 바란다고 기도하시는 분을 봅니다(사실 자기 뜻을 이뤄달라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어떤 노력도 없으면서 말이지요. 과연 하느님께서는 어떠실까요? 노력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적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자기 스스로의 지적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탈무드).
자기와의 싸움.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잘 사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잘 사는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아닐까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세상도 이길 수가 있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세상과의 싸움도 이길 수가 없게 됩니다. 실제로 세상을 이긴 사람의 말을 들으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말합니다. 1953년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한 에드먼드 힐러리도 기자가 묻는 소감을 “제가 정복한 것은 산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라는 멋진 명언을 남겼지요.
남과의 싸움에만 신경을 쓰면 힘든 싸움을 할 수밖에 없지만, 자기와의 싸움만을 신경 쓰면 손쉬운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것은 나밖에 없으니까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세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바로 그것 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세계 총회 때의 일입니다. 청소년 사목을 주로 하는 저희 살레시오회이기에, 당사자인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10명의 청소년들을 초대했습니다. 청소년들은 전 세계 각국에서 온 대의원 살레시오 회원들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떠나는 날, 자신들이 쓴 편지를 총회 석상에서 공개했습니다. 대표 청소년이 낭독한 편지글을 들으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살레시안들은 집단적 성찰과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솔직히 저희는 지금 두렵고 혼란스럽습니다. 저희들의 삶은 하루 하루 힘겨운 투쟁의 연속입니다. 저희에게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손을 잡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저희에게 다가오는 것을 제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그 누구도 풀지 못할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풀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희와 함께 있어 달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외로워 울고 있는 저희 옆에 그저 현존만 해주셔도 충분합니다.”
“친애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저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편안하고 쾌적한 사무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저희가 지금 서 있는 이 거리, 이 운동장으로 나와주십시오.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바로 그것 뿐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맞아 청소년이었던 마리아를 따뜻하게 환영하고 위로했으며, 격려하고 동반했던 엘리사벳의 지혜로운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으로 며칠이나 걸리는 여행길이었는데, 서둘러 걸어온 나자렛의 마리아를 엘리사벳을 극진히 환영하고 환대합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삿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마리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환대를 받고 있는 마리아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참 기쁨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세 요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기쁘고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함으로써 참 기쁨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잉태하신 어마어마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온 인류에게 이 행복을 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기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늙은 사촌 누이와 그 태중의 아기를 기쁘게 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십니다.
이를 볼 때 참 기쁨을 위해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EBS 다큐프라임, ‘가족쇼크’에서 김용준(21세) 씨는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엄마의 전화를 계속 받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들과 단둘이 살았는데, 아들이 호스피스 병동에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으니 혼자 고통을 견뎌야 할 뿐입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도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방에 놓습니다. 그러며 전화를 안 받는 아들을 원망합니다. 아들은 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어머니의 전화까지 외면하는 것일까요? 김용준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락을 안 하면 싫어할 수 있겠다.’ 생각은 하지만, 전화해서 목소리 들을 때마다 진짜 현실이 눈앞에 딱, 있다는 느낌? 엄마가 저보고 살았고 저도 엄마만 보고 살았으니까. 엄청 소중하죠. 아직은 함께 할 게 많았는데! 제일 하고 싶은 건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 먹는 거.”
김용준 씨는 아직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한 상태입니다. 더 받아야 하는 상태인데 이제 엄마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결국, 엄마 임종 직전에야 엄마를 볼 용기를 내어 찾아갑니다. 그러나 울기만 합니다. 엄마는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아들을 위해 머리맡에 숨겨 두었던 5만 원 지폐를 쥐여줍니다.
엄마는 주고 싶은데 줄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고, 아들은 받아야 하는 나이인데 주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무언가 주어야 하는데 아직 가진 것이 없어서 사랑하면서도 죽어가는 엄마를 볼 힘이 없는 것입니다.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두 번째는 내가 주는 것을 기쁘게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참 기쁨의 삶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에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후 당신의 능력으로 누구를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지 아셨습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에게 가시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은총이 있더라도 그 은총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레오파드 증후군이라는 병 때문에 태어나면서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로 자란 이예지 양. 검은 상자 속에 갇혀 사는 예지 씨는 부모의 존재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으면 좋고 배고프면 화를 내는 동물과 같은 상태입니다.
부모는 그녀와 소통을 할 수 없어서 예지가 짜증을 내며 손으로 자기 머리를 때리고 자해를 해도 무엇을 원하는지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주고 싶어도 받을 능력이 없는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은 미어질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딸이 자신보다 먼저 죽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누구도 그녀에게 자신들처럼 대해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에게는 당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해 줄 능력을 지닌 엘리사벳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달려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사랑하면 누구나 줄 것이 있고 그 줄 것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겸손’이 없다면 그렇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순절 동안 특강을 같은 내용으로 17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의를 많이 하는 것이 사순절 때 주님께 바치는 희생으로 여기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17번째 강의를 마치고 많은 감사와 박수를 받으며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커다란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이게 다인가?’
저는 저도 모르게 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남을 기쁘게 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려면 겸손해져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를 기쁘게 할 능력이 없는데 내가 기뻐지라고 주님께서 나에게 그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기쁘게 했다면 그것만으로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김용준 씨는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어도 아직 힘이 없었습니다. 그 한 명을 기쁘게 할 힘도 받아야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전에 ‘가장 작은 학교’라고 하는 제목으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한 시골 학교인데 선생님이 한 명이고 학생도 한 명입니다. 선생님은 그 한 명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아이도 선생님에게 참으로 고마워합니다. 그 한 명이 없으면 자신은 선생님일 수 없고 아이는 학생일 수 없습니다.
교실에 선생님 한 분, 학생 한 명이 수업하는 사진을 보며 ‘하느님께서 세상에 말씀을 주실 때도 이와 같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은 ‘말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뿐입니다.
하느님은 얼마나 다행이셨을까요? 들어줄 성모 마리아가 없으셨다면 말씀은 아버지 입에서 나오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받아줄 성모 마리아 한 분을 보며 기뻐하셨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 한 분을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더 바란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저도 유튜브를 하면서 가장 기쁜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있고 그 가진 것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조회수에 신경이 쓰입니다. 교만의 병이 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내가 할 말이 있고 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도 기쁠 수 있는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으려 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기쁘고 행복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 그 다음은 내가 줄 것을 받을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니 줄 것이 있고 받아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기쁘게 감사해야 할 겸손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창 신부님이 한국에서 전화하였습니다. 요즘은 카톡으로 전화를 하니 전화비에 대한 부담은 없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받으니 ‘잘 지내는지 물었습니다.’ 며칠 전에 꿈속에서 저를 보았다고 합니다. 아시안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소식도 있었고, 걱정도 되어서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꿈에서 봤다고 전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의 소식을 듣고 전화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대하였습니다. 동창 회장이었을 때입니다. 축일을 맞이하는 친구가 있으면 꼭 찾아가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친구의 성격과 분위기에 맞는 화분을 준비해서 방문했습니다. 준비해온 화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축일을 챙겨주는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저도 동창 회장을 했었습니다. 축일 선물은 한꺼번에 같은 것을 사서 동창 모임에서 주었습니다. 형식은 갖추었지만 세심한 배려는 부족했습니다.
코로나19로 요즘은 거의 없지만 코로나19 이전에는 제가 있는 신문사로 신부님들이 자주 오셨습니다. 2019년 10월부터 2020년 2월까지 4달가량 신부님들이 방문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대부분 안식년이었습니다. 저도 뉴욕에서 도착한지 2달가량 되었을 때입니다. 불편한 잠자리지만 신부님들은 모두 즐겁게 지냈습니다. 뮤지컬도 보았고, 센트럴파크에도 다녀왔습니다. 근교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백신이 널리 보급되고 상황이 좋아지면 좋겠습니다. 강남 갔던 제비들이 봄이 되면 다시 찾아오듯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신부님들이 뉴욕을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고 하루 지내면서 식사를 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신부님들이 오면 식사도 같이하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학창시절로 돌아가서 함께했던 시대의 고민과 아픔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경험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뉴욕에 있으면서 보스턴, 코네티컷, 필라델피아의 한인 성당을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모두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보스턴에 가면 미사 전에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함께 하였고,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보스턴 시내를 구경하였습니다. 보스턴의 신부님은 소탈한 웃음으로 배웅하며 다음에도 오라고 하였습니다. 코네티컷 신부님은 인터넷에서 요리하는 법을 배워서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었습니다. 텃밭도 가꾸고, 직접 술도 담았습니다. 더덕주, 과일주, 막걸리를 만들었습니다. 생각이 깊고, 성실한 신부님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신부님은 신자분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신문을 홍보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신자분들은 후원금도 주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는 신부님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같은 곳을 향해서 가는 동반자인 신부님들이 있어서 위로가 되고, 힘이 납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여 주었고, 마리아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가를 부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축복의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축복에 기도로서 화답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즐겨 부르셨다는 ‘만남’이란 노래를 함께 나누면서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 또한 각자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신앙의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적 도반, 영적 우정, - 존중, 배려, 공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난 주일 성령강림대축일 이후 선물같은 참 감사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순전히 자비하신 하느님 섭리의 배려입니다. 우연偶然은 없고 지난 일들 잘 헤아려 보면 모두가 자비하신 하느님 섭리攝理의 배려임을 확연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감사와 찬미입니다.
얼마전의 개인사에 관한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저는 2011년에 수도서원25주년 은경축을 했고, 그해에 마치 은경축 기념 선물처럼 졸저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책이 출간되었습니다. 2012년에는 수도원 설립 25주년 기념 감사 음악회가 수도원 정원에서 성황리에 열렸고, 이때 제 대표적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가 처음으로 발표 소개되었고 가슴 뭉클한 전율戰慄같은 감동을 선사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마 이날처럼 수도원을 사랑하는 영적도반들이 많이 참석한 때도 없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2012년은 오틸리엔 연합회 총회에서 요셉수도원이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이 결정된 해이기도 합니다. 이어 2013년에는 왜관수도원 분도계간지가 그동안 25주년 수도원 삶을 회고한 ‘불암산 정주기’란 제 글을 4차례에 걸처 연재함으로 제 소임은 일단 마감되었음을 은연중 예감했습니다. 이어 2014년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새 원장이 선출되었고 1992년부터 2014년 까지 무려 22년 동안의 제 원장 소임은 아름답게 끝맺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던지요!
얼마전의 주마등走馬燈처럼 떠오른 새삼스런 회고回顧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어 2014년에는 원장직에서 떠나 안식년 여정중, 800km 2000리 산티아고 길을 영적도반과 함께 순례했고 이해(2014.7.11.) 수도공동체는 사제서품 25주년 기념행사도 마련해주어 많은 분들로부터 넘치는 감사 축하 인사도 받았습니다. 2015년 귀원후로는 지금까지 한결같이 하루하루 봉헌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특히 지난 주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있었던 선물과도 같았던 44년전 초등학교 여러명 제자들의 방문도 잊지 못합니다. 이제는 스승과 제자 관계를 넘어 영적도반과도 같은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후에 제자들이 집무실에서 기타 연주와 함께 조졸히 마련해준 음악회는 얼마나 흥겨웠던지요. 코로나 사태로 조심하면서 제자들은 ‘스승의 은혜’, ‘어린이날 노래’, ‘과수원길’을 가열加熱차게 열창熱唱해 줬고 동영상도 만들어 전송해 줬기에 참 많은 영적도반들과 기쁨을 나눴습니다.
진짜 영적 부자는 영적우정을 나누는 영적도반을 지닌 사람일 것입니다. 광야인생여정중 참 영적도반은 사막의 오아시스 샘과도 같습니다. 이런면에서 저는 참 영적부자입니다. 영원한 영적도반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참 많은 영적도반들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매일 제 강론을 나누는 무수한 분들도 ‘더불어(together) 인생 순례 여정’중의 제 영적도반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반가운 영적도반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영적 도반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고 좋은데 대부분 정성이 담긴 이러저런 선물을 갖고 옵니다. 오늘은 5월 성모성월 마지막날 참 아름다운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입니다. 오늘 미사주례는 제 차례이지만 어제 잠시 2박3일차 수도원에 영적 주유注油와 충전充電을 위해 휴가차 온 영적도반 임마누엘 사제가 집전하니 말 그대로 ‘임마누엘 사제 방문 축일’처럼 느껴져 참 즐겁고 기쁩니다. 마침 임마누엘 사제는 어제 고백성사후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콘도 선물해 잠시 십자가 예수님 아래서 함께 기념 축하 사진도 찍어 나눴습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에 만나는 영적도반 관계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영적우정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지요! 참 상징성이 깊은 복음입니다. 뜻밖에 예수 아기를 잉태하게 된 마리아와 늦은 나이에 이미 세례자 요한을 몸가진 엘리사벳은 동병상련의 처지였기에 참 반갑고 서로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 영적도반들인 두 자매의 서로간의 존중과 배려, 공감 능력은 얼마나 뛰어난지요! 참으로 영원한 도반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배웠기에 이렇게 서로 환대하며 영적 우정 나눔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말한마디 천량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성령의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친 엘리사벳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존중과 배려, 사랑과 공감이 가득한 말마디에 마리아의 어둡고 무거웠던 마음도 활짝 개어 푸른 창공의 마음이 되었을 것이며 두분간의 영적우정도 참 깊어졌을 것입니다. 이어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로 가득한 마리아의 화답 찬가는 얼마나 아름다운 감동인지요!
이천년 가톨릭 교회와 함께 하는 마리아의 마니파캇 찬미가요, 영적 아나뷤인 우리 수도자들이 날마다 저녁기도를 마치면서 성모님과 함께 부르는 찬가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양날개를 달고 하느님 창공을 나는 새처럼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은총과 더불어 치유되는 우리 영혼들입니다. 마리아의 찬가와 더불어 마리아는 물론 엘리사벳의 내적 상처와 아픔도 말끔히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니 이 두분의 영적우정과 더불어 태중의 예수아기와 세례자 요한 아기의 영적우정도 참 깊어졌을 것입니다. 흡사 제1독서 스바니야 예언서에 나오는 딸 예루살렘과 딸 시온이 상징하는 바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물론 주님을 영원한 영적도반으로 삶의 중심에 모신 우리들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딸 예루살렘아, 마음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딸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 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해주시리라!”
얼마나 아름답고 고무적인 위로와 격려가 되는 주님 말씀인지요! 그대로 이 미사 축제 분위기를 연상케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영적도반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으로 당신과의 영적우정은 물론 우리 영적도반들 사이의 영적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1, 39-56(마리아 방문 축일)
오월, 성모성월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의 ‘아름다운 만남 이야기’ 입니다.
<첫째 만남>은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한 이들입니다.
한 여인은 동정인 채 아기를 가진 처녀이고, 다른 한 여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돌계집으로 나이가 많아서 아기를 가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이 여인들에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만남에서,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생긴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이 기쁨과 찬송이 되어 터져 나옵니다.
먼저, 그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치는” 엘리사벳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한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을 찬송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오늘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면 우리 안에서도 놀라운 탄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낳으신 분을 내가 다시 낳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종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작고 낮은 자 안에 벌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찬송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찬양을 받은 이유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비천한 이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권능과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은 마리아의 믿음입니다.
<둘째 만남>은 더욱 더 의미심장한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사실, 요한이 6개월 형이지만, 아우 예수님께 먼저 태중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듯이, 요한도 태중에서 하느님인 예수님의 방문에 대해 몸 둘 바를 몰라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벌어진 아기 예수님의 이 신비로운 방문은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세상을 방문하신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만남이요 친교요 소통입니다.
곧 그들의 만남과 친교와 소통은 '믿음'이라는 공감대 안에서 벌어집니다.
엘리사벳은 믿음 안에서 마리아의 임신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았으며, 여인들 가운데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라고 마리아를 찬양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믿음으로 서로 소통하고 서로 친교를 나눕니다.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신비로운 소통과 친교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 두 여인은 무명의 시골 아낙이었습니다.
궁중의 여인도, 부잣집 마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분과 지위에서 보통 여인이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위대한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어머니가 된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교제하는 깊은 친교가 필요합니다. 또 서로 믿음 안에서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능력 있는 부모, 더 이익을 주는 동료, 더 똑똑하고 재주 많은 후배가 아니라, ‘더 믿어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두 여인들이 하늘나라 이야기로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엘리사벳은 요한을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두 분이 만났습니다.
두 분은 사촌관계며 엘리사벳은 60대 고령, 마리아는 16살 이었습니다.
두 분은 가족 얘기나 먼 길 달려온 이야기는 않고 하늘 일만 얘기했죠.
태아들의 반응이 어머니들 입을 통해 하늘나라의 이야기로 펼쳐집니다.
여자들은 만나면 상대방의 외모를 스캔하고 나서 대화를 시작합니다만.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곰곰이 엘리사벳도 하늘안내를 표현했던 겁니다.
두 여인들이 하늘나라 이야기로 시작하여 예언자들의 말로 마무리했죠.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이라고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인사를 받은 엘리사벳은 자신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고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오늘 복음의 성모님과 성녀 엘리사벳의 만남은 인간적으로 볼 때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인들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모님과 성녀 엘리사벳은 서로에게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평생을 구원의 역사를 위해 함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의 만남은 단순히 인간적인 거래나 친교로 끝나버리는 만남이 되어서는 안되고, 성모님과 성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서로가 서로의 축복을 빌어줄 수 있는 거룩한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곧 하느님 안에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구원의 만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만남을 이루어 가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만남 속에 함께하시며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길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모님 성월 5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눈감고 꿈꾸면 어제가 보이고 눈뜨고 꿈꾸면 내일이 보인다. (크리에이터 강우현이 만든 탐나라공화국에 새겨놓은 글 중에서)
성모 마리아 님은 언제고 눈 뜨고 꿈을 꾸신 분, 내일이 보이셨다. 역발상은 언제나 역발동이셨다. 하늘의 뜻 헤아릴 수 없지만 하느님께 맡기고 뜻을 곰곰이 헤아리셨다. 그리고 응답을 드렸고 지혜이신 말씀을 잉태하셨고 세상에 그리스도 낳아 주셨다.
믿음의 사람에게 삶의 방법을 알려 주시려 첫 번째로 사촌 언니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하셨다. 달려라, 달려라, 그 먼 길을 달려 오셨다. 눈을 뜨고 하늘 향해 꿈꾸신 어머니는 구원의 내일을 보셨고 그 내일은 오늘이 되셨다. 성모님의 방문을 받은 늙은 나이의 사촌언니 엘리사벳은 부끄러움이 기쁨이 되었고, 엘리사벳의 배 속의 요한도 마리아의 잉태된 예수님 보고 기뻐 뛰논다. 얼마나 큰 기쁨이던가. 구약과 신약의 만남은 둘 사이를 삼개월 동안 묶어 두셨다. 아무리 반가운 손님도 삼일이면 지루하다던 데,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영적인 만남은 그정도 오래 머무는가 보다.
‘가끔은 죽었다치고 시작하면 새로운 도전에 두려움이 사라진다.’ 성모님께서 그러셨다. 성당을 찾으면 언제고 문 앞에서 서 계시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가 되라고 성전으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 눈감고 꿈꾸면 어제가 나타나지만 눈뜨고 꿈꾸면 구원의 내일이 보인다. 사실 그러하다.
가장 좋은 시절, 5월이 행복한 것은 빛고을 5,18 민주화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는 아픔과 슬픔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늘 눈 뜨고 꿈꾸었기에 내일이 있었고 위대한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미얀마의 내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주님의 어머니, 믿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님, 혹시 우리가 오늘이 두려워 눈감고 꿈꿀 때라도 믿음의 사람인 우리가 눈뜨고 꿈꾸게 하소서. 그래서 행복한 내일을 살게 하소서. 성모님! 오월 감사드립니다.
<사랑>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사랑에
깃든다
사랑이
사랑을
품는다
사랑이기에
사랑에
깃든다
사랑이기에
사랑을
품는다
사랑만이
사랑에
깃든다
사랑만이
사랑을
품는다
사랑에
깃드니
사랑이다
사랑을
품으니
사랑이다
깃드는 사랑과
품는 사랑이
하나 되어
온 누리
모든 이에게
사랑을 이룬다
<내 주님의 어머니>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2021. 5. 31. 월)(루카 1,39-56)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1) 우리 교회는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 일을 기념하는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이 왜, 무엇이 중요한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이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진 일이라는 점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믿은 엘리사벳의 증언 때문에, 그 일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를 찾아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고, 또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신 일은, 본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성모 마리아 혼자만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라고 증언했고, 바로 그것을 증언한 첫 증인으로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복음서에 표현되어 있는 대로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 마리아께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씀하시기도 전에 그 일을 알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실 때 인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직접 말씀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려 준 첫 선교사가 되는 셈입니다. 어떻든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예수님 탄생을 예고한 존재가 하느님의 천사라는 것과 천사가 한 말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성모 마리아 태중의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증언한 첫 증인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증언은 메시아께서 이미 세상에 오셨음을 확인하고 선포한 첫 증언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2)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려 주기 위해서, 또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만 만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옆에 즈카르야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성모 마리아께서 다른 사람들 모르게 엘리사벳만 몰래 만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는 상태였고, 아마도 듣는 일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루카 1,62). 그래서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어머니의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엘리사벳의 임신을 알게 되면서, 천사가 전해 준 말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성모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뒤에는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3) <성령으로 가득 차>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했다는 것은, 자유의지 없는 로봇처럼 되어서 말했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는 말은, 엘리사벳의 믿음과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물론 천사는 세례자 요한이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예고했었습니다(루카 1,15).
그래서 아기가 뛰놀았다는 말은, 세례자 요한 자신의 기쁨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4)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이유는,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되셨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셨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루카 1,28).
태중의 아기가 복되신 이유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복을 충만히 받으셨다는 점에서 복되신 분이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복을 주실 분이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5)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여기서 ‘내 주님의 어머니’ 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인데, 뜻은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의 어머니”입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첫 번째 인물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라는 말은, 기쁨, 감사, 겸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한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언제, 어떻게 오실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메시아 강생은 ‘뜻밖에 주어진 큰 은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6)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여기서 ‘주님’은 ‘하느님’이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에 관해서 천사가 한 말들을 가리킵니다. ‘행복하십니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복되십니다.’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모 마리아의 믿음에 대해서 찬양하는 말은, 사실은 성모 마리아의 순종과 응답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순종과 응답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에 관해서 천사가 전해 준 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관한 말이지만, 성모 마리아께서는 그 일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믿으셨고, 믿으셨기 때문에 응답하셨습니다.)
7) 엘리사벳의 찬양에 대해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마리아의 노래’로 화답하십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메시아를 보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찬미가이고, 그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이고,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요한, 엘리사벳, 마리아에게 충만하신 성령
-오리게네스-
그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그는 아들 덕분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 어머니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들이 성화된 다음에,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졌지요. 여러분이 우리 구원자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했음을 알면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몇몇 문헌에 따르면, 복되신 마리아께서도 예언을 하셨다고 하며, 엘리사벳이 예언으로 이 말을 했다고 기록한 복음서 사본들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마리아 또한 구원자를 잉태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습니다. 그분께서 주님의 몸을 지으신 성령을 받이들이자 곧바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그분 태 안에 거하기 시작하셨고, 그리하여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던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강생하신 창조주와 인간의 만남을 기쁨에 찬 어조로 전합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예수님 탄생 예고 때 노령의 사촌인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 마리아는 "서둘러" 그녀를 방문합니다. 당시 교통 여건이나 사회적 안전망은 소녀가 홀로 여행을 하기에 썩 적합하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참 적극적이고 용감해 보입니다.
혹자는 이 방문에 대해 출산을 앞둔 노령의 사촌에게 봉사하려는 마리아의 착한 심성을 주목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천사의 전언을 확인하려는 발걸음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 순간을, 강생하신 창조주를 인간의 무리가 환대하는 첫 만남의 자리라 보고 싶습니다. 사실 인간적 의도가 무엇이었든 모든 지향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어놀았습니다."(루카 1,44)
마리아의 인사말이 들리자 엘리사벳 태 안에서 아기가 기뻐 뜁니다. 훗날 예수님의 오실 길을 마련할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요르단 강가 광야에서도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할 "신랑의 친구"입니다.(요한 3,29 참조)
마리아가 남모르게 성령으로 잉태한 뒤 이토록 기쁨 충만한 축하와 격려를 받은 순간이 있었을까요! 또 마리아의 순결한 태 안에 자리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이토록 열렬히 환대를 받으신 적이 있었던가요! 지금 이 자리가 바로 그 때이고 그 순간입니다.
엄마 엘리사벳은 뱃속 아기의 움직임에서 창조주를 맞이하는 영광에 찬 기쁨을 감지하고, 있는 그대로 마리아에게 전합니다. 이를 듣는 마리아의 마음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찬미의 기도로 터져 나오지요. 그 기도가 바로 우리가 사랑하고 즐겨 부르는 '마니피캇'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태아 요한의 기쁨에 찬 환영을 받으신 마리아 태중의 아기는 당신의 마음을 어머니에게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마니피캇 안에는 고통과 슬픔에 찬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이 생생히 녹아있는 겁니다.
하느님은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이, 불의한 통치로 제 잇속이나 채우는 권력자, 자기만 누리는 부유함에 도취된 이들을 내치시는 혁명가 같은 분이시지요. 동시에 그분은 비천하고 굶주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 올리시는 보호자이십니다. 마리아의 입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신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도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오시는 주님과 그분을 맞이하는 백성의 기쁨을 노래하며 복음의 장면을 준비시킵니다.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 3,14)
이제 이스라엘은 한껏 기뻐하고 즐거워해도 됩니다. 승리의 용사이신 주님이 원수들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하시고 영영 불행을 치워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느닷없이 닥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역경을 염려할 것 없이 이제로부터 영원히 이어질 주님 현존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라는 위로입니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스바 3,17)
우리와 주님이 서로를 향해 환성으로 올리는 이 장면을 관상합니다.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신 주님의 기쁨이 그런 주님으로 인해 느끼는 우리의 기쁨을 압도합니다. 하느님이 비천하고 가난한 우리로 인해 이토록 행복하시다니요! 이토록 열락에 차 어쩔 줄을 모르시다니요!
스바니야 예언서의 이 행복이 마리아와 엘리사벳, 태아 예수님과 태아 요한에게로 이어졌지요. 이 복되고 신비롭고 유쾌한 만남이 이루어진 유다 산골은 이 순간 이스라엘 전체, 온 세상 전체를 품고 있는 작은 우주일 것이고, 이 축제는 영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위로의 어머니 마리아는 버겁고 힘겹고 슬프고 아픈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그분은 홀로가 아니라 항상 예수님과 함께시지요. 예수님을 빼고는 마리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마리아는 태중에 모신 하느님의 마음을 투영해 우리를 격려하고 어루만져 주시며 힘을 북돋우시는 어머니이십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여러 기쁨과 슬픔의 궤적을 지나온 오월을 마무리하며, 우리에게 하느님을 선물하신 마리아를 깊은 감사와 사랑으로 환대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는 복됩니다. 이 행복을 잘 간직한 채, 뜨거운 예수님의 성심으로 더욱 깊이 파고드는 6월을 향해 나아갑시다. 지난 한 달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와 세상을 위해 오신 주님
신동원 요셉 신부님
본당에서 매달 병자 영성체를 위해 가정을 방문하다 보면 대부분의 환자들, 특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은 주님을 모시는 기쁨에 때론 눈물까지 흘리십니다. 그들에게 병자 영성체는 주님께서 몸소 그들의 집을 방문하신 순간이며 환희의 잔치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한 몸으로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라며 감격합니다. 마리아와 뱃속 아기의 방문은 엘리사벳에게는 영광이요 환희 그리고 구원 그 자체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방문의 의미가 엘리사벳 개인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 1,50)라고 노래한 대목에서 알 수 있듯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온 인류를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방문은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스바니야 예언자의 예언처럼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스바 3,15) 즉 우리 인류에게 구원의 보증을 알려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일치를 위한 비밀 번호< 루카 1/38-56> 5/3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이 세 어른이 하나로 영원으로 존재하고 일치를 유지 하시는지를 우리는 따라 배워야 합니다. 저는 이 비밀번호를 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찾아 묵상한 것을 전해주고자 합니다.
에페서 4/5 “ 주님도 한분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입니다. 모든 이의 아버지도 한분이시니 그분은 모든 이위에 모든 이를 통하여 모든 이 안에 계십니다.” 하나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신 하느님은 일치된 한 몸이시라는 것이며 우리도 그 안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일치의 길을 가지 않으면 분열 분쟁 미움 저주 죽음과 같은 싸움이 일어납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파괘됩니다. 자유 평화 기쁨이 없어지면 인간이 바라는 행복은 여기 없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일치를 본받아 하느님이 사시는 나라에서 함께 사는 삶을 시작합니다.
성삼위는 일치를 위하여 서로 돌보고, 서로 나누며, 서로 복종하고, 똑같은 방향으로 헌신합니다. 이는 하나하나 성경 안에 하느님의 말씀에서 나온 말이며 방법입니다.
1,성삼은 서로 돌보십니다. 요한 17/24 “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요한 14/ 31 “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 그 사랑은 선행적 사랑을 타두어 한다. 전면적 전 인격적 사랑. 살존적 존재론적 존재의 이유를 알려줍니다. 무상적 서로 보수를 기대하지않은다.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2, 성삼은 서로 나눕니다. 요한 17/1 “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셔서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들어내게 해주십니다.
17/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다.” 하느님의 주고 받는 것은 잠시 가 아니고 영원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성삼은 서로 복종한다. 요한 15/10 나는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언제나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요한 11/ 42 “ 아버지께서 내 청을 들어 주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4. 성삼은 서로 짐을 진다. 요한, 10/17-18.“ 아버지께서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목숨을 다시 얻게 될것입니다.” 십지기를 지신 아들 예수는 아버지가 하신 창조사업을 완수 하시려 십자가를 지셨지만 아버지는 죽음의 짐을 생명의 짐으로 바꾸어 주시며 함께 짐을 지셨습니다. 사실 십자가위에는 아들 예수님만 계시지 않고 하느님이 계셨으니 아버지도 십자가위에 현존하시였습니다. 우리 각자의 죽음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며 죽음과 영원한 삶을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수도원의 의미는 공동체의 일치를 위하여 봉한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일치를 본받아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순명은 하느님이 서로 복종하듯 공동체에 봉사하고, 청빈은 공동체 안에 서로 공편하게 나누기 위하여 내 것은 없고 모두가 우리의 것입니다. 정결은 사랑은 영원한 것이여야 합니다. 사랑이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온전히 너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정결 서원으로 나는 없어지고 사랑의 대상만 남아 있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오드라도 아버지를 위하여 목숨 바처 사랑한 것같이 사랑이 모든 비밀 번호의 열쇄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키를 가지고 있으면 누구와도 일치가 가능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본받아 서로 하나 되어 하느님 나라에 살기를 기도합니다. 수도자의 삼대 서원은 가정 공동체에도 아니 나라에도 일치를 이하여 필요한 도구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해마다 5월 31일에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루카 1,39-56 참조)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5월 31일을 축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천사의 메시지를 따라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러한 이웃 사랑은 위대한 두 인물이 만나는 자리가 됩니다.
천사는 일찍이 성모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리라는 예언을 쉽사리 수긍하지 못하자, 엘리사벳의 예를 들어준 바 있습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6-37)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얼떨결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라고 대답을 하고서는 즈카르야의 집을 찾아 엘리사벳에게 인사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장면을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41절) 라고 전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2-45절)
마리아는 그동안 자신 혼자 고민하고 시름에 안겨있다가 엘리사벳의 인정과 칭찬을 들으면서 자신의 혼란과 망설임을 내려놓고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46-48절ㄱ) 마리아는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불안과 수치의 대명사가 아니라 기쁨과 존경의 대상이 되리라고 예언합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48ㄴ-49절ㄱ) 거룩하신 주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흠숭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49ㄴ-50절) 주 하느님께서는 높은 자리에 있다고 보통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내리치시고, 낮은 사람을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51-52절) 주 하느님께서는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게 사랑과 은총으로 채워 주시고, 가진 것이 많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가르쳐주십니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3절) 주 하느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주님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54-55절)
오늘 함께 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고, 우리의 처지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를 되새기면서, 나를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합시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스바니야 예언자는1) 유배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불행’과 ‘모욕’을 위로하며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스바 3,15)라고 외칩니다.
이스라엘은 죄 값을 치루기 위해 기나신 세월을 남의 나라에 보내져 유배의 생활을 했지만 때가 되어 하느님께서 백성들 가운에 계시며 예루살렘 귀환의 희망을 전합니다.
나자렛에서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게 됩니다.
마리아가 언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마을, 유다산골을 방문했는지, 또 얼마나의 여행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다만 루카는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고을로 갔다.’(루카 1,39)라고 그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차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1)
그리고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는 놀라운 사실을 말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3-45)2)
이어서 마리아는 이스라엘 여인들이 부르던 하느님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마리아도 하느님의 은혜를 입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받아들이며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49) 마리아는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1.53)라고 하느님의 구원을 찬미합니다.
루카는 그녀가 하느님 구원을 찬미찬송을 마치자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56)라고 마무리의 말을 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예고와(1,12-13) 예수님 탄생의 예고가((1,30-31)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루카는 이어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루카 1,58-66)과 예수님 탄생(2,1-7)을 전합니다. 즈카르야는 자신과 부인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아서 임신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1,18)과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이기에 어떻게 임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1,34)을 가브리엘 천사에게 합니다.
인간의 한계와 하느님의 전능하심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지만 성령과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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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바니야는 열두 소예언서 중에 한 예언서로 요시아 왕(기원전 640-609)이 다스리던 시절에 예언자로 활동한 것으로 추측한다. 이방신들을 섬기고 혼탁한 사회 풍조, 토속신앙(1,4 · 5), 밀려드는 이방인 문화 (1,8), 거짓 예언자들의 만행(3,4), 폭력과 사회불의(1,11; 3,1-3)등으로 예언자 주위를 어지럽힌다. 스바니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며 ‘시온의 딸아 기뻐 소리쳐라’(3,14)라는 외친다. 스바니야의 이 외침이 이스라엘 정서에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루가 1,28)라는 신약성서의 말씀과 연결될 수 있다.
2) 마리아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일어지리라 ‘믿으신 분(헤 피스테우사사 ἡ πιστεύσασα)’은 복되십니다.!”라는 엘리사벳의 말은 성모님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그 믿음을 바탕으로 구약으로부터 예언된 예언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의 왕 아하즈에게 장차 이루어질 표징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한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성사적인 만남>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조금 유치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엇갈리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봉쇄 수녀처럼 집밖을 나오지 않고 살아가는 클라라에 대한 얘기를 듣고 프란치스코가 먼저 클라라를 찾아가 만났다는 증언이 있는데 향기는 상자에 담아도 그 향기가 퍼지는 것처럼 클라라의 성덕이 그렇게 프란치스코에까지 전달돼 프란치스코가 찾아와 만났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클라라가 와 주기를 프란치스코에게 청하여 만나게 되었다는 증언인데 클라라의 사촌 오빠인 루피노가 그 다리 역할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이 있음을 의식한 때문인지 성녀 클라라의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두 사람의 만남은 성령께서 두 사람의 움직인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축일에 이 얘기를 길게 한 것은 당연히 두 분의 만남도 성령에 의한 만남이라는 것을 얘기하기 위함이고 우리의 만남들도 이런 만남이 되어야 함을 얘기하기 위함이지요.
어제 삼위일체 축일 강론에서도 성령의 인도를 받음에 대해 얘기했지만 우리의 많은 만남이 성령에 이끌려야지 그 만남들이 성사가 됩니다.
우리의 많은 만남이 성사가 되지 못하고, 그저 좋아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계모임이나 친목회가 되거나 또는 좋아하는 것이 같은 사람끼리 동호회가 되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을 같이 험담하는 모임이 되는 것은 비록 악령에 이끌리지 않더라도 성령에 이끌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성사란 무엇입니까?
성사적인 만남이란 어떤 것입니까?
성사란 하느님이 그 일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이 발생하는 것이니 성사적 만남도 그런 거지요.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난 것은 하느님이 자기들 안에서 이루신 일들 곧 은총을 같이 확인하고 같이 기뻐하며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함이었지요.
이런 뜻에서 우리의 만남들을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만남 중에 이런 성사적인 만남들은 얼마나 되고 그저 그런 만남은 어떤 만남들인지.
또 어떤 만남은 은총이 발생하는 성사적인 만남이고, 어떤 만남은 죄악이 발생하는 만남인지.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따뜻한 사람
따뜻한
방문(訪問)이
있다.
믿음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진정한 애정이다.
믿음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믿음은
혼자서는
갈 수 없던
이 길을 걸어
갈 용기를 준다.
믿음의 여정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서로에게서
배우는
여정이다.
삶은
신비이다.
하느님의
이끄심과
은총은
우리가 계획한
것보다 훨씬 크고
더 따뜻하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믿음이 있다.
믿음이 있는
인생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삶이다.
삶은 믿음을
일깨우고
믿음은 삶의
관계를 풍요롭게
한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방문하고
있으며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믿음은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게한다.
더 좋은 사람은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것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하느님의 방문은
믿음과 설레임의
방문으로 이어진다.
하느님과
사람이
만들어가는
믿음의 역사이다.

요즘에 아오스딩 성인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성인의 책은 과연 가톨릭의 보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읽어나가면서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성지순례를 통해서 많은 성인 성녀들의 삶을 돋고 또 보게 됩니다. 이때 역시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이 보여주신 주님을 향한 강한 믿음, 또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 등에 대한 존경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이렇게 특별하고 대단한 성인 성녀들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들을 평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은 어떤 사람인 것 같습니까? 성인 성녀들처럼 특별하고 대단합니까? 아니면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특별하고 대단한 성인성녀와 우리들의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외적인 환경이 다를까요? 순교성인들을 보십시오. 우리들은 죽음의 위험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죽을 수도 있는 환경에서도 신앙을 꿋꿋하게 지켰습니다. 외적인 환경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러면 개인의 능력 차이일까요? 이 역시도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역시 성인성녀들처럼 충분히 특별하고 대단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평범함’에 자신을 가둬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나는 평범하니까 그렇게 살아갈 수 없어.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 과연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등등의 생각에 말입니다.
자신의 사소한 일에서도 소홀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소한 일이라 생각하는 곳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활동에 동참하는 특별한 일이 되면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나’만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웃 역시 같이 창조하셨습니다.
오늘은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문득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왜 방문했을까 라는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그냥 막연하게 친척 언니를 찾아가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교회에서는 이 날을 특별히 기념할까요?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협력으로써 상대방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특별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를 특별한 사람이라면서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함께 하면서 대단한 하느님의 일을 하는 특별한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정함이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거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발터 벤야민).
힘을 보태도록 합시다.
홈리스 자립잡지 ‘빅이슈’를 판매하면서 자신의 글과 그림을 잡지 안에 끼워서 넣었던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내용이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빅이슈’입니다. 이 책에는 작가의 많은 체험이 들어 있었는데 그중 한 가지의 체험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감기 몸살로 힘든 어느 날, 너무 힘들어 하는데 청년 둘이 도와주겠다면서 거들어주었고, 2~3권만 팔아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어느 분이 자신이 오늘 생일이라며 친구들에게 이 잡지를 선물로 주겠다면서 28권을 사갔다고 합니다. 이를 ‘기적’이라고 작가는 표현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준 사람, 많은 책을 사준 사람이 자신에게 기적을 안겨 주었듯이, 자신도 누군가에게 기적 같은 하루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랍니다. 그런데 정작 기적을 주는 사람이 되려고는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적을 누리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기적을 주는 사람은 사양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주님께서도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그 몫을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야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존재 전체, 삶 전체를 다 바쳐 마니피캇을 노래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자렛의 마리아와 아인카림의 엘리사벳이 서로 상봉하는 장면은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동시에 감동적입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참으로 기구하고 비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길을 걸어 찾아온 여인은 10대 미혼모입니다. 맞이한 여인은 놀랍게도 노산(老産) 중의 노산을 앞둔 호호백발 할머니입니다.
그러나 두 여인은 서로 상봉하자마자 기쁨 충만한 찬가를 주고받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두 여인의 뱃속에 든 아기들도 서로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더 이상 불행할 수 없는 만남인 듯 한데,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입니다. 비결은 활기차고 충만한 성령의 현존 때문입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가 위대한 예언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엘리사벳은 이스라엘의 옛 백성 전체를 대변한다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새 백성 전체를 대변합니다. 이로서 인류의 두 위대한 어머니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가득찬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대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의 서막을 찬양하는 동시에, 마리아의 놀라운 믿음을 칭송하고 축복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엘리사벳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마리아가 어떤 분이신지 명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 ‘주님의 어머니.’ ‘믿으신 분.’
여기서 우리가 꼭 눈여겨 볼 점 한 가지! 마리아는 믿는 모든 이들의 전형으로 등장합니다. 복음사가들이 마리아에게 최상의 칭호를 부여한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노래에 이어 마리아께서도 응답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신약 성서 내 여러 찬가 중에 가장 아름답고 의미있는 찬가로 손꼽히는 마리아의 노래는 라틴어로 ‘찬미하다.’(Magnificare)라는 동사의 3인칭 Magnificat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마니피캇이라고 부릅니다.
마니피캇은 하느님을 향한 마리아의 찬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놀라운 위업(偉業)을 노래하는 동시에, 인류의 구원을 위한 역사(役事)하심, 그분이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보증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니피캇은 종말론적 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개인적 차원의 감사의 찬미가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부족한 자신을 선택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찬가입니다. 후반부는 공동체적 차원의 감사의 찬미가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살펴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이루어진 데 대한 감사의 찬가입니다.
마니피캇에서 마리아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이제 막 체험하게 될 종말론적 대사건의 해설가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니피캇은 마리아의 노래이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 각자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홀로 감사의 찬가를 부르기보다는, 우리 모두 함께 찬미가를 부를 것을 기대하십니다.
매일 저녁 기도 때 마다 마니피캇을 노래하는 모든 수도자와 사제,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업적을 큰 목소리로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새로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해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크게 감사하며, 이 노래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냥 적당히 마니피캇을 노래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 삶 전체, 몸과 마음, 정신 전체를 다 바쳐 노래했습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구원자 하느님, 이스라엘을 대표한 마리아 자신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사랑의 하느님께 큰 감사를 드리며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결정적인 도구로 마리아를 선택하신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권세 있는 자, 부유한 자, 교만한 자, 능력있는 자가 아니라, 비천한 자, 단순한 자, 스스로 보잘 것 없는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잊지 않는 겸손한 자여서 선택하셨습니다.
성령 부자 되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밭에서 일을 하시며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시키셨습니다. 저는 막걸리를 받아오며 홀짝홀짝 마시고 그러다 취해 넘어져 주전자에 막걸리를 조금밖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화내실 것 같아서 매우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오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화를 내셨는지, 아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걱정으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만 했던 그 기억은 생생합니다. 누군가가 기뻐할 것을 가지지 못했다면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나에게 기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오늘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당신이 모신 성령님을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가 성령으로 기뻐하는 것을 보자 당신도 기쁨에 넘쳐 찬미를 드립니다. 사람은 남을 기쁘게 해 줄 때 가장 기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사랑의 본성이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가져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니 돈을 가져가면 좋겠지만,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돈과 성령님과는 공동점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돈을 모으는 것처럼 성령님을 고이 간직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이웃도 기쁘게 하고 나도 기쁠 수 있습니다.
스노우폭스 김승호 회장은 빈손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 중에 가장 성공한 한국인 사업가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그의 매장은 국내 10곳, 전 세계 1400여개로 연간 4,000억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한 강연에서 돈의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말했습니다. 이 돈의 속성을 잘 이해하면 성령의 은혜를 잘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돈은 인격체입니다. 돈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돈을 소중히 여기고 합당하게 대우해주면 돈도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또 옳은 곳에 쓰면 다른 친구들을 데려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을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은 돈도 그 사랑에 지쳐 도망가게 됩니다. 또 돈을 너무 무시하는 사람은 돈도 그 사람을 무시해 가지 않습니다. 아낄 때는 아끼고 보낼 때는 흔쾌히 보내주는 사람이라면 돈도 그 사람에게 다시 오고 싶어 합니다.
성령님도 인격체이십니다. 성령의 은혜는 자신만 가지고 있으려고 해도 말라버리고, 아무에게나 무의미하게 전해주려 하다가는 무시 받는 것이 싫으셔서 그 사람을 떠납니다.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그에게 전해주려 긴 여행을 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꼭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성령님을 전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 자신도 성령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2. 돈은 중력과 같습니다. 중력은 무게가 무거울수록 더 강하게 끌어당깁니다. 무게감이 크면 클수록 다른 돈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에는 중력의 힘이 작용하기에 1,2,3,4,5,6,7,8의 순서대로 늘어나는 게 아니라 1,2,4,8 ...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불어나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이 모신 성령을 통하여 당신 관계를 확장시키셨습니다. 요셉에게만 있지 않고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미래의 세례자 요한에게까지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큰 가족이 형성됩니다. 예수님도 사도들과 제자들을 바탕으로 커다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혼자 성령으로 충만한 것보다 성령으로 여럿이 뭉칠 때 성령의 힘은 더 강력해집니다. 성령은 우리를 개인적인 기도생활에만 머물지 않고 친교 공동체를 통해 더 확산됩니다. 성령 강림 때 성령께서 120명이 모인 가운데 내려오셨습니다. 함께 모인 곳이 더 뜨겁고 더 뜨거운 곳에 성령께서 더 많이 내리십니다.
3. 일정하게 들어오는 작은 돈은 일시적으로 들어오는 큰 돈보다 더 힘이 셉니다. 예컨대 매달 100만원씩 버는 사람은 어쩌다 한 번에 1000만원씩 버는 사람보다 힘이 세다는 것입니다. 일정하게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를 관리하고 모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 피정과 같은 것을 즐기면서 일상에서는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기 어렵습니다. 성령을 쉽게 잃게 됩니다. 돈도 그렇듯이 성령도 매일 꾸준한 기도를 통해 모시는 사람에게 더 큰 은총을 주십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으셨던 이유가 한 번에 성령을 모신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기도를 꾸준히 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4. 고생해서 번 돈은 공짜 돈보다 힘이 셉니다. 현재 보여 지는 가치가 동일한 돈일지라도 돈이 벌어지는 과정에 따라서 그 돈의 무게가 전혀 달라집니다. 갑자기 복권당첨이나 땅값이 올라 큰 부자가 되더라도 꾸준히 모은 적금하고는 전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생하지 않고 번 돈은 가볍게 날아가 버리고 그냥 흩어져버립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하느님의 피를 얻기 위해 인간도 합당한 고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것이 곧 기도와 같습니다. 그렇게 밤새 고생해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TV를 끄고 집보다는 성당에서 기도한다면 같은 시간 기도하더라도 더 충만한 성령님을 모시게 될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모신 사람은 남과 머무르며 남을 기쁘게 할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을 기쁘게 하는 방법으로 당신이 모신 성령님을 전해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기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부자가 될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동시에 기쁨의 부자가 될 것입니다. 성령의 부자가 되는 능력을 키웁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일 새벽 미사에 복사를 서는 아이들에게 집이 어디인지 물었습니다. 뜻밖에도 한 아이는 집이 동탄이라고 합니다. 집이 이사하여서 평일에는 복사하러 올 수 없고, 주말에는 할머니 집에 와서 자고 복사를 한다고 합니다. 왜 동탄에서 서울로 오는지 물었습니다. 아이의 대답이 제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동탄으로 가면 성당이 낯설고, 복사를 서지 않으면 신앙이 식을 것 같아서 힘이 들지만, 주말에 서울로 온다고 합니다.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대견했습니다. 신앙은 많이 아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임치백 요셉 성인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에게 옥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리를 받을 시간이 많지 않아서 십계명도 잘 몰랐습니다. 신문하는 관원이 십계명을 외워보라고 했지만 외울 수 없었습니다. 관원은 십계명도 모르면 신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임치백 요셉 성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배워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라면 법을 몰라도 부모에게 당연히 효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교리를 잘 몰라서 십계명을 모르지만, 하느님께 효도하는 것은 신자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하느님께 효도하려고 합니다.” 관원은 임치백 요셉 성인의 말을 듣고 더 심하게 고문하였고, 임치백 요셉 성인은 순교하였습니다. 신앙은 율법을 많이 아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위해서 미리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구세주의 어머니께서 방문하신 것입니다. 좋은 기운이 함께 만나니,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옵니다. 엘리사벳의 고백은 우리가 늘 바치는 ‘성모송’의 기원이 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태중에 아들 또한 기뻐 뛰노나이다.’ 엘리사벳의 환영을 받은 성모님은 참된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분,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고, 가난한 이의 배를 불리시는 분께서 나를 복되다 하시나이다.’
행복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드러나고, 내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신가요? 그럼 욕망의 불꽃에서 멀어지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축복의 인사를 드렸고,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 것처럼 우리들의 만남이 이렇게 축복과 은총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5월 마지막 날입니다. 나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충실하게 지내면 좋겠습니다. 나를 통해서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절망 중인 이웃들이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루카1,46)
곽승룡 비오 신부님
마리아의 노래 곧 성모찬송 안에 시편과 구약성경의 기도가 울리는 공명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또한 성모찬송은 하느님에 의해 인간들을 위해 시작된 모든 약속들이 하느님의 어머니와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에게 기도의 방법과 훈련을 최고로 잘 보여주고 주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시편기도이다.
모든 시편과 기도들이 성령의 감도로 쓰여 졌기 때문이다.히브리인들은 역사와 기억 속에서 시편을 배우곤 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 역시 시편을 배우는 것이 중요했는데, 바로 세례 준비와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신자들이 시편을 찬송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순간 기도할 때, 우리의 맑은 마음과 바른 정신 그리고 올바른 상태가 회복되도록 주님과 성령께서 도와 주신다.
그래서인지 마리아 처럼 우리도 기도를 통해 기억 속에 차곡차곡 성모님의 영혼을 담아, 주님을 알아가고, 배우고 것이 정말 유용하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시편은 우리의 참 마음이 형성되는 감각을 선물한다.
왜냐하면 성경과 우리의 영혼 사이에 관계가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더욱이 시편 찬송은 고대의 시기부터 나쁘고 부정한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고, 그 악의 영향에 반대하여 아프게 하는 영혼을 낳게 하고, 정신의 모든 면을 보호하도록 인도하였다.
수도자 안에서 성모님을 본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한 수도자를 만났다. 매번 광화문 광장미사에 함께하는 수도자이다. 늘 현장에서 현실을 보며 아픔으로 함께 울고 있는 수도자를 본다. 교회는 곧잘 신부로 표현한다. 신랑인 예수님과 신부인 교회를 혼인에 비유한다. 신부로 표현되는 교회에서 현실참여를 하고 현실을 품어 안고 예수님을 세상에 낳아주는 적극적 수도자를 본다. 나는 수도자 안에서 ‘성모님’을 본다.
성모성월 5월의 맨 끝 날, 오늘은 성모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이다. 성당 마당에 서 계시는 성모님을 보았다. 합장하고 얼굴을 비스듬히 숙이시고 다소곳이 미소를 지으시는 성모님을 보았다.
한 여신자분이 나의 멍청한 생각을 잠에서 깨웠다. “신부님, 제가 성모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폼잡고 장승마냥 서 계시지 말고 적극적으로 기도좀 해주세요! 제가 성모님께 이렇게 하소연했어요. 죄송해요!”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나도 참 오래도록 성당에서 장승처럼 서 계시는 소극적인 성모님만을 바라보고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적극적인 성모님을 만나지 못했던가 하는 생각 말이다.
교회 안에서 남녀 신자 분들을 본다. 공동체의 구성원 중 많은 부분이 여신도분들이다. 그분들은 진정 살아있는 신부이며 교회이다. 그분들은 믿음의 사람들이며 신앙의 모범이며 예수님을 통하여 주님이시며 구세주 이심을 증거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사시는 분들이다. 여신도 분들은 마리아의 모습을 닮았다. 그분들은 마라아의 노래(루가1,39-56)를 적극적을 부르시는 분들이다. 그분들은 믿음으로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는 분들이고 세상에 인류의 빛, 예수님을 낳아 주시는 분이시고 성전에 드리시고 찾아 만나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단단히 하시는 분들이다.
수도자는 이어서 말했다. “여러 본당의 기념미사에 참여하지만 그 기념미사에서 강론을 들어보면 과거 교회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우리가 오늘의 교회가 어떻게 현실 문제에 적극적 이야기는 전무하거나 턱없이 부족하다” 며 사제들의 강론이 현실감을 잃고 살아있지 않다고 꼬집는다. 신부인 교회가 신랑인 예수님과 함께 하며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하자는 강론을 한다면 훨씬 더 살아있지 않을가 합니다.” 수도자의 조언이 내 마음을 흔들어 깨운다.
우리의 성당 마당에 서 계시는 성모님은 장승처럼 서 계시는 성모님이 아니라 적극적 믿음으로 사시며 신앙인의 모범으로 ‘마리아의 노래’를 이루신 주님의 어머님으로 만나야 한다. 또한 교회의 주역인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를 칭송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리라.
<당신에게 갑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이 있기에
당신에게 갑니다
당신을 있게 하러
당신에게 갑니다
당신과 있으러
당신에게 갑니다.
‘통공’을 믿으며 살자는 가톨릭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세상에 태어난 두 분과 태중에 있는 두 분 모두 4분이 대화했습니다.
60대 중반(?)과 10대 후반과 6개월 태아와 며칠정도의 태아였습니다.
태아 상태와 세상 상태가 있으면 육신 벗은 영혼 상태도 있어야겠죠.
이 성경구절의 주체들은 가상주체 아닌 실제주체라는 점에 놀랍니다.
육신 있는 영혼과 육신 없는 가브리엘 대천사까지 모두 다 있거든요.
태중아기 그리고 먼저 육신 벗은 가족 이웃들 모두 통하며 살아야죠.
지금 우리는 대화주체가 현세인물들 위주로만 늘 살다보니 아주 좁죠.
가톨릭은 넓고도 높게 영혼들과의 ‘통공’을 믿으며 살자는 교회랍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인사를 받은 엘리사벳은 자신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고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사실 오늘의 만남은 성모님과 성녀 엘리사벳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태중의 아기이신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님과 성녀 엘리사벳의 만남은 정말 인간적으로 볼 때 기구한 운명을 가진 두 분의 만남이었지만. 결코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더 기뻐하며 서로에게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그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실 구원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만남들이 있겠지만, 우리의 만남은 오늘 성모님과 성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구원의 역사를 위한 거룩한 만남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만남 속에 늘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당신 안에 하나가 되게 해주시며, 언제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 함께 해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마리아는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송하십니다.
성 베다 사제의 강론에서(Lib. 1,4: CCL 122,25-26. 30)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마리아는 이 말씀을 하실 때 우선 자신이 특별히 받은 은총의 선물 에 대해 감사 드리고, 다음으로 하느님께서 인류를 도우시려고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일반적 은혜들을 열거하십니다. “주님을 찬송하는 영혼은” 자신의 모든 내적 애정과 힘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는데 바치고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 위엄의 권능을 항상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람의 영혼입니다. “우리를 구하신 하느님께 마음 기뻐 뛰노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창조주를 생각하는 데 기쁨을 두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완덕에 도달한 사람들이 모두 합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복되신 모친께서는 특히 그러했습니다. 마리아는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 태중에 기꺼이 모실 수 있었던 아드님에 대한 영적 사랑으로 불타 올랐습니다. 다른 성인들보다도 성모님은 예수님 곧 당신의 구세주께 대한 더욱 큰 기쁨으로 용약할 이유를 지니셨습니다. 마리아는 구원의 영원한 근원이신 분으로 알고 있던 바로 그분을 때가 이르면 자기 몸에서 낳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인 같은 위격 안에서 참으로 자신의 아들이시고 또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한 분’이시로다.” 여기서 성모님은 아무것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권능과 위대함 자체이시고 당신의 빈약하고 연약한 종들을 강하고 위대한 인물들로 만드시고자 작정하신 분께로 자신의 온갖 위대함을 돌리십니다.
마리아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마리아는 자기 말을 듣게 될 모든 이들에게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또 그 이름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들 역시 “그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예언의 말씀대로 참되고 영원한 구원의 참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위에서 말한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는 데에서 말하는 그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저녁기도 때 우리 모두 이 성모의 노래를 매일 부르는 것은 훌륭하고도 유익한 관습입니다. 이렇게 하여 신자들이 더 자주 주님의 육화를 상기하고 신심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덕행을 견고하게 합니다. 교회는 또 이것을 저녁기도 때 바치기를 원했습니다. 하루가 끝나 피곤하고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갈라져 있는 영혼은 휴식을 맞는 시간에 흩어진 생각들을 이렇게 한데 모으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사랑의 찬미와 감사의 삶, -환대와 우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5월 성모성월 마지막날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참 아름다운 축일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환대와 우정이 참 아름답습니다. 참 아름다운 영적 도반입니다. 어렵거나 힘들 때 언제든 찾아 가 만날 수 있는 도반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평소 얼마나 돈독한 우정의 관계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니 두 어머니의 만남은 태중의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까지 함축하고 있습니다. 두 어머니는 그대로 태교胎敎의 모범입니다. 태중의 아기 예수님을 환대하는 태중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기쁘게 마리아를 환대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환대와 친교요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한마디 한마디가 다 귀한 성령의 말씀입니다. 환대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는 그대로 위로와 치유, 격려의 구원의 환대였을 것입니다. 참 좋은 영적 도반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 참 자기의 복된 신원을 확인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내적 갈등과 회의의 어둠은 말끔히 걷혔고 곧장 이어지는 마리아의 기쁨에 넘친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이 참 단순하고 명쾌하고 깊습니다. 지난 화요일 강론의 요지는, ‘1,크리스찬은 슬퍼해선 안 된다, 2.매일 성령과의 대화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3.죄는 영혼을 늙게 하고 성령은 영혼을 젊게 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성령은 기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영혼을 젊게 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물론 모든 성인들이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에 충만할 때 찬미와 감사입니다. 찬미와 감사는 영혼의 양날개입니다. 하느님 창공을 자유로이 날게 하는 찬미와 감사의 영혼의 양날개입니다. 우리 교회가 저녁기도때 마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주님을 환대하며 부르는 성모 마리아의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환대의 하느님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통해 환대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찬미와 감사는 기쁨과 활력의 샘입니다. 찬미와 감사는 파스카 영성의 핵심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가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바꿉니다. 비관적 부정적 인생관에서 낙관적 긍정적 인생관으로 바꿔줍니다.
환대의 하느님께 대한 참 좋은 최고의 응답이 찬미와 감사요, 찬미와 감사의 여정중에 날로 깊어가는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바로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어머니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형제 상호간의 우정이 항구할 수 있는 것도 주님과의 우정이 함께 갈 때 가능합니다.
주님은 스바니야 예언자를 통해 마리아는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기뻐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딸 시온이, 딸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마리아요 믿는 우리 모두입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참 아름다운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가운데에, 우리 삶의 중심에 늘 현존하시어 우리를 환대하시고 위로하시며 치유하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런 환대의 주님이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며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줍니다. 사랑의 찬미, 사랑의 감사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삽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새롭게 하시고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십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로 주님과의 환대와 우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참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일 것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준비없는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감동적인 두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제 피정차 수도원에 온 자매님의 일화입니다. 자손들이 다 모인 중에 장부인 남편의 임종어였다 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를 예수님 품 안에 꼭 안아 주십시오.”
일곱 마디의 임종어였다 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유산의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환대에 감사로 응답하여 선종함으로 자손들에게 기쁨과 평화라는 참 좋은 선물과 추억을 남기고 떠난 형제입니다. 얼마전 수도형제가 페이스 북에 올린 고 에바리스트 신부님에 대한 추모글도 감동이었습니다.
“10년전 간암 말기 3개월 시한부를 선고 받고도, 하느님의 은총에만 의지하며 교장 정년을 채우시고, 은퇴후 산티아고 순례를 꿈꾸셨던 분, 초지일관 착하셨던 분, 지독하게 착하셨던 분, 누구에게나 존대하고 누구에게나 미소짓던 분, 착하디 착한 에바 신부님이 오늘 우리 곁을 떠나신다.”
모두가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과 평생 사랑의 환대와 우정에 항구하고 충실하셨던 분들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으로 하느님을 환대하고 이웃을 환대할 때 깊어가는 주님과의 우정, 형제들과의 우정이요 행복한 선종의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찬미와 감사로 당신을 환대하는 우리를 환대하시며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아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 45)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5월 31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이것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 방문을 받으시고 장차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신 것이라고는 전갈을 받았을 때, 그 알림에 순명하면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셨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실 수가 있었고, 또 성모님의 잉태를 통해서 온 인류에게 구세주 예수님을 탄생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믿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던 것이죠.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목적은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의해서, 성모님의 사촌인 엘리사벳이 나이도 많은데도 불구하고 아기를 가진 지 벌써 6개월이나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방문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아주 먼 유대 산길을 기쁜 마음으로 찾아뵙고, 엘리사벳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또 아기를 가진 것에 대해서 축하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가득 쳐서 마리아께 이런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루카 1, 42~44)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성모님이기 때문에 그런 인사를 한 것이고, 엘리사벳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하는 것은 장차 예수님의 선구자로 오실 요한이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즐거워 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하신 바로 이 말씀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 45)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듣고,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실 일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셨습니다. 바로 이 믿음을 통해서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하여, 이후 태어날 아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선물로 주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믿음은 이렇게 하느님의 결실을 가져다 줍니다. 믿음은 또한 그것을 베풀고자 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그의 뜻을 이루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믿음은 그것을 베풀고자 하는 분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이런 믿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죽음 이후에 주어질 하늘 나라를 선물로 받는 것이 우리 믿음의 선물이라고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이 있기에 어떤 위협과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으며, 바로 순교자들은 그 믿음을 보여주신 것이며, 그 분들의 믿음의 응답은 오늘날 복자로서, 성인으로서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결실이 이루어지도록 인내와 순명과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도록 합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믿음을 통하여 그 믿음을 제시하는 분으로부터 어떤 선물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 그 선물을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기도와 사랑의 끈'(루카 1장 39~56)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예수님을 잉태한 어머니 마리아가 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니 서로 기쁨에 넘쳐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찾아가는 기쁨, 사랑하는 이가 찾아오는 기쁨은 아무리 길이 멀고 험해도 만남에 대한 설레임이 더 커서 힘들지 않습니다.
기뻐하는 사람과 기뻐하고 궁핍한 이를 사랑으로 돌보며 악을 혐오하고 선을 추구합시다.
오만함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그들을 예수님 사랑에 물들게 합니다.
아들 예수의 행보에 끝까지 함께한 어머니 마리아처럼 늘 기도와 사랑의 끈으로 주님과 세상을 이어주는 사람
'주님이 기뻐하실 일에 마음 쓰는'
<우리도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오늘의 축일은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찾아가 만나는 아름다운 만남을 소개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많은 만남들이 이런 만남이기를 바라는 교회의 뜻을 전례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겁니다.
실로 살면서 참으로 많은 만남이 있고 또 있어야 합니다. 만남이 많지 않다면 만남이 불행이어서 인간을 기피하는, 심하게 얘기하면 잘못 살거나 실패한 인생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긴 하지만 모든 만남이 좋은 것이 아니고, 특히 우리 신앙인에게는 피해야 할 만남이 있고 가져야 할 만남이 있는데 오늘 두 분의 만남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만남의 모법입니다.
두 분의 만남은 우선 거룩한 만남, 곧 성사적인 만남입니다. 무릇 거룩하다고 하고 성사적이라고 함은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는 것인데 두 분의 만남은 성령에 인도를 받은 만남이고 그 만남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두 분이 왜 만났겠습니까?
두 분이 아기를 밴 상태이고 그것도 둘 다 비정상적으로 임신한 상태였는데 처한 상황이 같고 관심사가 같아서 그런 것들을 같이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기 위한 그런 인간적인 동병상련의 만남이었겠습니까?
인간적으로도 무엇을 함께 하고 함께 나누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흔히 얘기하듯 나누면 기쁨은 배가 되고 슬픔은 반이 되며, 혼자서 못하는 것을 같이 하면 어떤 어려운 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두 분의 만남은 스스로의 계획이 아니고 성령의 주선입니다. 오늘도 보면 엘리사벳이 성령에 가득 차 외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마리아도 성령에 이끌려 엘리사벳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찾아간 것인데 바로 하느님께서 서로에게 하신 구원 업적을 같이 확인하고 찬미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만남도 서로 사랑과 친교를 나누거나 아픔과 슬픔을 나눌 수 있지만 성령에 의해 하느님 안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보는 그런 만남이어야 하는데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본다는 것은 자기들이 받은 구원을 보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을 보는 것이고 그분의 역사를 보는 거지요.v 우리는 종종 구원의 결과인 행복은 보면서 구원을 주신 하느님을 놓치거나 만나 행복은 서로 나누면서 정작 행복을 주신 하느님은 놓치기 쉬운데 우리는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어야겠지요. 그래야지 한 번 소유한 행복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거룩하고 성사적인 만남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만남입니다. 자신의 행복이나 노닥거리는 만남이 아니라 건설적인 만남이어야 합니다.
이는 내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구원업적이 자기 안에 갇히지 않도록 나를 하느님 나라 건설의 도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신 하느님은 내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를 원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은 내가 당신 구원사업의 도구되기를 바라십니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행복이나 기쁨이나 구원도 내 안에 갇히면 썩어버리고, 혼자 타는 불은 이내 꺼지나 같이 타는 불은 다른 것에 불을 붙이며 계속 살아나고 번지는 법이지요.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에 불쏘시개가 되고 나의 구원이 세상 구원을 이루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구원이 되도록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우리 구원을 봉헌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병영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성모님의 삶에서 하느님께서 큰일을 이룩하셨다. 나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께서 큰일을 하시리라 믿지만, 마음은 어디간 다른 곳에 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께서 하시고자하는 큰일이 과연 무엇일까? 성모님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에는 온전히 자신을 비우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자신을 온전히 비우지 못하고 큰일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분께 삶속에서 나를 만들어 가시고 큰일은 아니지만 당신의 뜻을 이룩하시고자 하신다는 위안을 가져본다. 지금이 순간에 내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기대를 다시 생각하고자 한다. 그 기대를 버리고 당신께 온전히 마음을 열수 있는 은총을 매일 구한다.
그러면 언젠가 나 자신의 삶에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리라!
모든 순간이 다 아름답다.
최민석 신부님
나 이십 대에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세상은 여전히 찬란하고 눈부시고 난 슬프게도 멀쩡하다.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있는 그대로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최고의 절정이다.
모든 순간이 다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이 순간 내가 하늘의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 이 그 얼마나 화려한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베토벤의 운명을 듣는다는 것. 이 얼마나 찬란한가. 나 지금 이 순간 내가 여기 보고 듣고 숨 쉬고 말하고 움직이며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다 기적이다. 그렇다. 삶 즉 기적이요, 기쁨이요, 감동인 것이다.
교회는 해마다 5월 31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로 지낸다. 이 날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이 날이다. 오늘 복된 날이다. 복되신 마리아 방문 축일이기도 하지만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이 나를 찾아오겠다고 한 날이다. 기쁘고 기다려진다.
아들은 올 나이 스물 한 살이다. 갓난 아이 때부터 시설에서 살다가 지난 해에 독립했다. 믿고 살아갈 든든한 부모가 없다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들은 사춘기가 되어 아는 것이 많아지고 몸집도 커 독립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고 싶어 한다.
별 도움이 되지 않은 나를 아버지 신부라며 부르며 잘 따른다. 부모 없이 혼자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고통스러운 인생을 잘 견디며 사는 것이 대견스럽다. 나를 아버지라 부르며 의지하는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와 힘이 되면 좋겠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박해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 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로마 12, 12-16)
나 역시 나를 아버지 신부라 불러주는 너에게서 배운다. 너는 나로 하여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무엇이며 누구인지 깨닫게 해주고 진정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해 준다. 나는 너로 인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와 그 가치에 대한 감사를 배우게 된다.
인생은 모를 일이 참 많다. 온 세상이 알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살면 살수록 세상은 신비하고 찬란하다. 나는 나의 꽃으로 너는 너의 꽃으로 세상의 어느 모퉁이 한 점 빛이 되기로 하자. 이 짧은 목숨 마감하는 그 날까지 꽃잎처럼 순하게 살기로 하자. 내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 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아들아, 우리 무엇보다도 건강관리 잘하며 살자. 건강해야 일도 잘 할 수 있다. 건강해지려면 마음이 강하고 긍정적이어야 한다. 마음이 약해지면 몸도 따라 약해진다. 주어진 너의 현재를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일이 마음이 강해질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다. 아들아, 비록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긍정하는 마음만은 바위같이 단단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다가 넘어지면 바로 그곳에 내가 찾는 보물이 있다’고 한다. 만일 넘어졌다면 넘어진 곳에서 기진맥진하지 말고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자. 그러면 반드시 바로 그곳에서 내가 찾고자 하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야. 온통 세상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어. 정말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세상이야. 생명 가득한 세상이 선물로 주어졌어.
요즘은 나무마다 신록의 이파리들이 눈부시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순간들이 찬란하고 아름답다. 나를 아버지 신부라 부르는 아들이 오는 날, 저 푸른 잎 새들 사이로 언뜻언뜻 아들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너를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지난 번 네가 나를 찾아온 순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가 1,46-50)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해. 슬픔도 기쁨도 모두 신비하고 찬란하잖아. 크고 넓은 세상 한 점 먼지로 왔다가 한 점 먼지로 스러지는 가난한 목숨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세상 살아간다는 건 가없는 축복이다. 거저 누리는 은총이야.
이제 바람 같은 세월의 그림자 길게 드리워져 한 뼘쯤 남았을 나의 삶 더욱 알뜰히 더욱 애틋이 살아가리. 지금 이대로 사랑이고 자유이고 행복이며 지혜이며, 또한 무한의 질서요 평화인 것이다. 아, 우리 이미 이대로 완전하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지내는 방문 축일의 말씀들 안에는 기쁨이 일렁이고 즐거움의 환호성이 터져나옵니다. 복음에서는 두 여인의 입으로, 독서에서는 예언자의 입으로 구원의 기쁨을 미리 노래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삿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루카 1,41) 표면적으로는 두 여인이 만났지만 그녀들의 몸 안의 생명들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특히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은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4) 훗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이렇듯 태아 적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성자의 육화가 마리아와 요셉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지되는 순간입니다. 피조물로서 하느님을 영접한 이때, 이 엄청난 은총에 대해 기쁨 말고 달리 무엇을 더 표출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칭송합니다. 아이 못낳는 여자로 인생의 고초를 눈물로 삭히며 살아왔을 엘리사벳의 입에서 나온 '믿었으니 행복하다'는 말의 무게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당장 드러나지도 보이지도 않는 약속을 믿고, 또 그 믿음 때문에 명예와 목숨을 건 여정이 행간에 숨어 있다는 걸 두 여인은 압니다. 그리고 우리들 중 비슷한 체험 안에서 믿음을 견지한 투쟁을 치열히 견뎌온 이들도 또한 압니다. 그러니 이 행복 선언은 풍랑 중에 믿음의 강을 건너온 우리 모두를 격려하고 칭송하는 말씀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 마리아는 기쁨의 이유를 이렇게 외칩니다. 비천함!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존엄합니다. 그런데 존엄한 동시에 비천합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는데 우리의 선택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지요.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에서 오는 자기 파괴적인 비하 말고,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비천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영혼은 강인합니다. 그는 꾸임 없이 담백하고 겸허하게 진실을 직시하면서 믿음이라는 한 조각 나룻배로 폭풍이 몰아치는 해협을 능히 건널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순간을 그리면서 복음이 피조물인 인간 편에서 터져나오는 기쁨을 드러냈다면, 독서는 하느님의 기쁨을 부각시킵니다. 과연 조물주와 피조물의 만남에서 누가 더 기쁠까요?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스바3,17)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해 보셨습니까? 우리 때문에 하느님께서 이토록 기뻐 뛰십니다. 우리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환성까지 지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살고자, 하나가 되고자 저 하늘 끝에서 달려오신 분이십니다. 때 묻고 탁해지고 무뎌진 우리가 스스로의 자격 없음을 떠올리며 엉거주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 더 따뜻한 포옹과 더 깊은 입맞춤으로, "당신 사랑으로" 다시 "새롭게 해"(스바 3,17) 주시고 온전히 품어주시는 분.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의 축일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충실한 두 여인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과 피조물의 기쁨을 관상하며 함께 기뻐하는 날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한 가운데 계시고 이로써 구원이 선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함께 기뻐합시다. 우리 앞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때문에 이토록 기뻐 뛰시니 우리도 그분과 함께 기뻐 뜁시다. 구원은 지금 이 순간, 이 기쁨 가운데 있습니다.
파티마에서 벗님들을 기억합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디에서
행복이 오는지를
알게됩니다.
온갖 행복은
주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오늘의 의미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함께 나누어야 할
말씀의 사랑입니다.
말씀 위에
믿음을 세우십니다.
말씀을 만나
희망으로
가득찬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행복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하느님 사랑을
나눌 때입니다.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임을
깨닫게됩니다.
말씀안에서는
지나갈 모든 길이
행복이 됩니다.
우리의 삶이란
말씀으로
다시 시작되는
여행과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깨우는 행복한
만남처럼
행복한 나눔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합니다.

흑인 노숙자였던 카디자 윌리엄스는 어머니와 함께 쓰레기더미에서 성장했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사람들은 “노숙자가 무슨 대학이냐?”며 비난을 했지만, 카디자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버드 대학교를 비롯해서 20여개의 미국 명문대학교에 동시에 합격하게 되었지요. 그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장학생으로 수석졸업의 영광도 얻었습니다.
그녀가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노숙자 주제에’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떠했을까요? 아마 상처가 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들으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의 말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습니다. 타인이 멋대로 찍은 낙인에 자신의 인생을 내주지 않고 멋진 인생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부정적인 환경이었지만 의지를 세워 긍정적인 환경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요즘에 집을 장만해 놓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아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말은 남의 말입니다.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의지를 내세워서 스스로의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성모님을 묵상해봅니다. 성모님께서는 인간적으로 볼 때 이겨내기 힘든 일을 경험하십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고, 실제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태중에 모시게 되었지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어린 처녀이기에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는 남녀차별이 아주 심했었고, 그래서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을 했다고 해서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세워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성모님이니까, 특별한 하느님의 부르심의 받으신 분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머니께서도 혼자서는 이 모든 것을 견디기에는 참으로 어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시지요. 그리고 이제 확신에 차서 마니피캇이라는 성모찬송을 외치십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라는 의지를 세우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라는 의지를 세워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내 안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하느님이 인간을 빈손으로 내려보낸 이유는, 누구나 사랑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이외수).
확신(‘좋은 생각’ 중에서)
영업 사원의 성과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사교적인 성격, 호감 가는 외모, 거래처 방문 횟수 등을 떠올렸다. 하지만 실험 결과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확신’이었다. 자신의 제품과 서비스가 추천할 만하다고 믿는 사람이 좋은 성과를 냈다.
맞습니다. 확신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역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확신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가장 좋은 상과를 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의 친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바닷가를 바라보는 한 구조대원의 뒷모습과 그 옆의 약간 일으켜져있는 이동침대를 찍은 한 장의 사진이 미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동침대에 실려 앰뷸런스에 태워진 한 여성은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앰뷸런스를 돌아서게 하는 ‘한 마디’를 합니다. 환자는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통 완화 치료소로 이송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꺼냅니다.
“마지막으로 바다가 보고 싶어요.”
이 얘기를 듣고 있던 구급대원은 조용히 차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해변으로 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구급대원들은 그녀를 들것에 옮겨 구급차 밖으로 꺼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눈에 바다를 볼 수 있는 해변으로 그녀를 데려다주었습니다. 환자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구급대원은 물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평화 속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행복합니다.”
구급 대원 중 한 명이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고 이들의 연민은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출처: ‘죽어가는 여성 한 마디에, 병원 ‘정반대’로 달린 구급차’, 포크포크, 유튜브]
주는 것이 더 행복할까요, 받는 것이 더 행복할까요? 받는 것이 더 좋은가요? 받기만 하는 노숙인이 더 행복해보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받지 못하는 것보다야 받는 것이 더 낫기야 하겠지만,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받는 쪽보다는 주는 쪽에 있는 편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더 좋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호스피스 병동에 있을 때 아버지와 비슷한 연령대의 분들이 오셔서 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를 목욕시켜주는 봉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만약 제가 아버지였다면 받는 쪽보다는 주는 쪽을 선택하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봉사 받는 쪽보다는 봉사 해 주는 쪽이 더 행복합니다. 봉사가 힘들다면 그것은 봉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된 봉사는 나를 매우 흡족하게 합니다. 우리의 행복은 타인의 행복에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행복하게 해 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당시 엘리사벳은 매우 늦은 나이에 아기를 가졌기 때문에 얼굴을 들고 세상에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기를 가져 기쁘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까봐 동시에 우울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시는 성모님께서는 사촌 엘리사벳의 잉태 사실을 알자 당신이 어디에 머물러야하는지 명확히 아셨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곳에 당신이 계셔야한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돈 1,000원은 큰 액수는 아니지만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한 아이 앞에서는 며칠을 더 살 수 있게 만드는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내가 1,000원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어느 자리에서 가장 행복할까요? 50,000원짜리 다발 속에 끼어있을 때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가장 귀하게 사용될 수 있는 곳일까요? 답은 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항상 더 불편한 자리를 찾습니다. 부자들이나, 권력 있는 사람, 혹은 인기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에게 크게 필요하지 않은 잔돈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괜히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말고 내가 쓰일 수 있는 비천한 사람들 사이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셨고 심지어 세리와 창녀들처럼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이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명성에 큰 먹칠을 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이용할 뿐입니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가난한 이의 친구’라고 하면 예수님이나 성모님이 떠오르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불리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4월 27일입니다.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났습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그 만남을 지켜보았습니다. 긴장, 갈등, 전쟁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은 평화, 번영, 화합의 상징으로 변하였습니다. 두 정상이 손을 잡고 남과 북의 분단 선을 넘어가고 넘어오는 모습은 가슴이 찡하였습니다. 저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선인데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 기다려야 했습니다. 새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두 정상은 나무다리에서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두 정상이 함께 발표한 판문점 선언은 희망의 선언이었습니다. 신뢰의 선언이었습니다. 평화의 선언이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발표로 만남이 취소되었지만, 미국과 북한의 정상이 함께 만나는 날이 올 것 같습니다. 비가 온 뒤에는 땅이 더 굳어진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앙금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대통령과 북한의 지도자가 함께 만나서 핵은 버리고, 평화를 나누는 선언이 발표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예전의 기억입니다. 교리를 가르치던 학생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첫 월급을 타는 날 제게 저녁을 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약속을 하였지만, 깜빡 잊어버리고 산엘 갔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약속 시각을 기억했습니다. 연락할 방법도 없었고, 저는 한참 늦은 시간에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학생은 다방 한쪽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제가 올 줄 알았다고 하면서 밝은 웃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를 믿고 기다려준 학생과 고마운 만남이었고, 미안한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에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글을 통해서 저의 내면과 만납니다. 그 만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 만남이 제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성찰과 묵상이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만남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를 이웃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욕심과 교만이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만남을 통해서 위로를 받기 어렵습니다. 만남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마음을 열면 길가의 꽃에서도, 하늘의 구름에서도,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닫으면 아무리 좋은 글을 읽어도, 좋은 사람을 만나도 배울 것을 찾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여 주었고, 마리아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가를 부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축복의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축복에 기도로서 화답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즐겨 부르셨다는 ‘만남’이란 노래를 함께 나누면서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 또한 각자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신앙의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내 도반道伴은 누구인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많이도 걸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이후 이렇게 많이 걷기는 처음입니다. 그동안의 계속된 무릎 치료로 인해 이렇게 많이 걸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엊그제 2만보 계족산 도보에 이어 어제는 공주 계룡산의 갑사, 청양 칠갑산 천장호의 출렁다리 등 대략 1만5천보를 걸었습니다. 또 걷는 동안 묵주기도도 참 많이 했습니다. 길을 걷는 여정중에 끊임없이 바칠 수 있는 참 좋은 기도가 묵주기도임을 새삼 잘 깨달았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인디언 속담도 있듯이 비숫한 연령대의 사촌 형들과 아우들과 대화하며 동행했기에 불편한 중에도 이렇게 많이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혼자라면 재미도 없고 도저히 그 무의미해 보이는 길을 멀리 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새삼 여정중의 도반이, 길벗이, 길동무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길을 걷는 여정에 건강한 두 다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1박2일의 휴가! 거의가 걷는 일로 서로간의 우정을 두터이 한 참 건전하고 건강한 휴가였으니 그대로 인생순례여정의 압축이라 할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얼마나 이상적인 좋은 도반인지 한 눈에 들어옵니다. 과연 마리아처럼 언제든 일이 있을 때 찾아나설 도반이 있는지요? 눈감으면 떠오르는 그리운 도반은 있는지요? 필요할 때 언제든 전화할 수 있는 도반은 있는지요? 살아갈수록 인생순례여정중 필수적 요소가 도반임을 절감합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고을의 즈카르야의 집에 있는 도반 엘리사벳을 찾아 나섭니다. 두 도반의 만남이 참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성령으로 가득 차 환대하는 엘리사벳의 말은 마리아에겐 그대로 위로와 격려, 치유와 구원의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참 도반의 모범이 엘리사벳입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이십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참 좋은 도반관계에 전제되는 바 영원한 도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따뜻한 환대를 통해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의 하느님 찬미감사가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두분 모두 영원한 도반 주님과 깊은 우정이 전제되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과 함께 깊어가는 보이는 도반, 형제와의 우정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서두로 시작되는 성모님의 마니피캇 하느님 찬미감사 노래는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엘리사벳의 환대를 통해 주님을 만난 마리아의 영혼 깊이에서 샘솟듯 솟아오르는 하느님 찬미감사가입니다. 영혼의 양날개같은 찬미와 감사가 튼튼한 영혼으로 만들어 줍니다.
영적성장과 영육의 건강에 참 좋은 하느님 찬미감사가입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에 형제들과의 우정도 깊어집니다. 하여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함께 바치는 하느님 찬미감사의 미사와 시편성무일도가 그리도 고마운 수행인 것입니다.
마리아의 하느님 찬미감사가는 우리 가톨릭 수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신자들이 저녁성무일도를 끝내며 마리아 어머니와 함께 바치는 마니피캇 기도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더불어 형제 도반들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하느님 찬미감사가입니다.
언젠가 사라질 형제도반들입니다.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신 영원한 도반은 주님뿐입니다. 하여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을 깊이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기에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을 깊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한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신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은 기쁨의 샘입니다. 스바니야가 말하는 시온과 이스라엘, 예루살렘은 주님을 도반으로 둔 우리 모두를 지칭합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언제나 우리 한가운데 계신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이 바로 기쁨과 힘의 원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영원한 도반이신 당신과의 우정은 물론 형제들과의 우정도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12,2ㄴ-3). 아멘.
전능하신 분께서 큰 일을 하셨습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믿음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오늘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바람이 주님께 전구되고 가슴에 담았던 아픔과 시련의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이 어머니의 청을 통하여 이루어졌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어머니의 전구를 통하여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여러분의 모든 바람을 성취시켜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구원능력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맡겨 드려 풍성한 열매를 반드시 얻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늘 곰곰이 생각하고(루카1,29), 마음속에 간직하며(2,19.51) 사셨던 성모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누군가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나서 끝까지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실컷 도와주고서는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구지 스스로 해 놓고는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화로 가득 채우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둘은 뱃속에 든 세례자 요한과 함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임신을 하였고, 더욱이 마리아의 방문에 성령을 받아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며 찬미의 노래를 합니다.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신 하느님, 돌계집의 부끄러움을 없애주신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으로부터 찬미를 받으시고 또한 두 여인은 참으로 서로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석 달가량이나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통하지 않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달프고 미운사람은 봐서 가슴이 아프답니다. 해외 교포사회에서는 ‘손님이 오실 때 반가운 손님, 떠나실 때 더 반가운 손님’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할 때 풍요로워집니다. 함께 나눌 수 있음이 기쁨입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루카복음 11장 27절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러이러 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무엇이 저러저러해질 때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참 행복은 주 하느님을 믿고 믿음에 따르는 실천을 하는 것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써 복되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곧 행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과 환경이 마련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 안에 있다는 자체가 행복의 순간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리아를 통하여 큰일을 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부족함도 굽어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가장 큰 일은 가장 작은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야 그 잉ㄹ이 큰 일이라는 것이 역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가장 겸손하고 가장 작은 마음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시선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모님의 영성입니다”(함께야).
이 시간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성모님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 우리도 오직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비천함을 굽어보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리아 방문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월, 성모성월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의 ‘아름다운 만남 이야기’ 입니다. 하나는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만남이요, 다른 하나는 태중의 두 아들, 곧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첫째 만남>은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한 이들입니다. 한 여인은 동정인 채 아기를 가진 처녀이고, 다른 한 여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돌계집으로 나이가 많아서 아기를 가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이 여인들에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후, “서둘러”(루카 1,39) 달려간 곳은 6개월 먼저 아이를 갖은 사촌언니 엘리사벳의 집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혼자 담고 있기에는 너무나 벅찬 감동과 기쁨을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 예수님이 태중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보채어, 자신의 길을 닦으러 세상에 태어나게 될 요한에게 가기를 다그쳤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만남에서,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생긴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이 기쁨과 찬송이 되어 터져 나옵니다. 먼저, 그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치는” 엘리사벳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한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을 찬송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오늘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면 우리 안에서도 놀라운 탄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낳으신 분을 내가 다시 낳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신 하느님의 활동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비천한 여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마리아의 노래”는 세세 대대로 믿음의 자녀들이 부르는 ‘하느님 자비의 찬미노래’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종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작고 낮은 자 안에 벌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찬송합니다. 사실, 이 두 여인은 무명의 시골 아낙이었습니다. 궁중의 여인도, 부잣집 마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분과 지위에서 보통 여인이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위대한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어머니가 된 여인들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찬양을 받은 이유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비천한 이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권능과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은 마리아의 믿음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가난과 겸손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과 그분의 자비에 희망을 두고 살게 되면, 마리아에게서 일어났던 그 구원의 감동과 기쁨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위대하심을 알리고 노래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만남>은 더욱 더 의미심장한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사실, 요한이 6개월 형이지만 아우 예수님께 먼저 태중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듯이, 요한도 태중에서 하느님인 예수님의 방문에 대해 몸 둘 바를 몰라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이는 태아의 인사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태중의 아기의 인사를 마리아를 통해 태중의 예수아기에게 전달합니다. 그리하여 신비로운 방식으로 태중의 요한의 원죄가 사해지고, 그는 원죄 없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원죄 없이 태어난 세 분, 곧 예수님과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의 탄생일을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마리아와 함께 벌어진 아기 예수님의 이 신비로운 방문은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세상을 방문하신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만남이요 친교요 소통입니다. 곧 그들의 만남과 친교와 소통은 '믿음'이라는 공감대 안에서 벌어집니다. 엘리사벳은 믿음 안에서 마리아의 임신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았으며, 여인들 가운데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라고 마리아를 찬양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믿음으로 서로 소통하고 서로 친교를 나눕니다. 아기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신비로운 소통과 친교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교제하는 깊은 친교가 필요합니다. 또 서로 믿음 안에서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능력 있는 부모, 더 이익을 주는 동료, 더 똑똑하고 재주 많은 후배가 아니라, 더 믿어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이토록 아름다운 만남, 믿음 안에서 소통과 친교를 이루는 만남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애기 아빠 들어오세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수도원에 상처입은 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시고, 거기다 아주 재미있게 동반해주시는 수사님이 한분 계십니다. 한번은 수사님이 담당하고 있던 고2 짜리 여자 아이가 감기가 심해 병원에 갔다가, 깜짝 놀랄 일을 발견했습니다.
뭐겠습니까? 그 소녀가 임신을 한겁니다. 범인이 누구냐고 아무리 캐물어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고민고민 끝에 아이를 잘 설득해서, 수녀님들께서 운영하시는 미혼모의 집에 가서 아이 낳고, 입양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수사님은 소녀를 미혼모 집으로 보내기 전날, 태아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산부인과를 데리고 갔습니다.
소녀가 진료실에 들어가고 나서, 수사님이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진료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 선생님이 고개를 조금 내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기 아빠 들어오세요!”
그럴 때 저 같았으면, ‘저 애기 아빠 아닌데요, 전 천주교 수사인데요.’ 했을텐데, 이 수사님이 얼마나 웃기는 사람인지...
그냥 “예!” 하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떨결에 수사님은 어린 소녀에게 나쁜 짓한 애기 아빠가 된 것입니다. 들어갔더니 임산부는 배를 드러내놓고 누워있고,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 기계를 임신부 배위 얹고 여기 저기 돌리고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수사님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심상찮았습니다. “보아하니 나이도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해도 해도 너무하네.”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 왈,“애기 아빠도 보셔야 되. 저기 아이 움직이는 거 보이죠?”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태아의 영양상태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니 산모를 잘 먹이세요!”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컴퓨터에서 태아 사진을 하나 프린트해서 수사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얼떨결에 어린 소녀를 건드린 사람으로 오해를 받은 수사님은 태아 사진을 받아 성무일도 안에 끼워놓고, 오래오래 산모와 아기를 위해 기도했답니다. 기도 덕분이었는지 미혼모는 건강한 아이를 순산했고, 좋은 가문으로 입양시켰습니다.(‘오마이 파더 오마이 시스터’ 생활성서사 참조)
곰곰히 생각해보니 수사님은 어린 나이에 덜컥 아이를 갖고, 당혹스러워했던 고2짜리 소녀를 참 잘 동반하셨습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벌어진 일, 어찌 할 것인가?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서로를 위해 가장 좋은 길을 찾은 것입니다.
실수한 아이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고, 호통치지도 않고, 무엇이 그 소녀를 위한 최선의 길인가? 고민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동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아기 예수님을 막 잉태하셨던 나자렛의 마리아 역시,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고2짜리 소녀와 거의 흡사한 미혼모였습니다. 나이도 비슷했습니다.
혼전 잉태 사실에 대해서 약혼자 요셉은 물론 부모님에게도 똑부러지게 설명할 길 없었던 나자렛의 마리아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과 당혹스러움은 정말이지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는 떠나가기 직전, 곤혹스러워하고 있던 마리아에게 힌트 하나를 줬습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나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복음 1장 36~37절)
마리아는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라는 말씀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그녀는 만사 제쳐놓고 서둘러 엘리사벳이 거처하고 있던 아인카림으로 길을 떠납니다. 지도상으로 확인해보면 나자렛에서 아인카림까지의 거리는 직선 거리로 약 120킬로 정도입니다. 요르단 계곡을 따라서 좀 돌아가면 160킬로나 되는 거리인데, 마리아는 그 먼길을 황급히 서둘러 걸어가셨습니다.
힘든 여행 끝에 아인카림에 도착한 마리아가 드디어 엘리사벳의 집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성령으로 가득 차있던 엘리사벳은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러웠던 나머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복음 1장 42절)
엘리사벳의 극진한 환대, 확증을 주는 메시지, 따뜻한 동반과 격려에 마리아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의혹과 불신, 두려움과 걱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잔잔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마리아는 하느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의 찬가를 부릅니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 주님의 뜻이 자신 안에 이루어지길 굳게 믿으며, 그 유명한 마니피캇, 마리아 찬가를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복음 1장 46~48절)
<공감(共感)>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5. 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루카 1,39-56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마리아의 노래)
공감은 겸손한 자기 비움입니다.
벗을 만나기 위해,
나의 나이, 지위, 능력, 재물,
아니 나의 모든 것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의 내’가
벗에 대한 아무런 바람 없이
살포시 ‘있는 그대로의 벗’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공감은 순결한 바라봄입니다.
나보다 더 아름다운 벗을
질투하지 않고,
나보다 더 잘난 벗을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벗이 지닌 모든 것을
곱게 받아들이며,
그 너머에 있는 벗에게
따스한 눈길 전하는 것입니다.
공감은 티 없는 마음의 나눔입니다.
벗의 기쁨에 함께 웃고,
벗의 슬픔에 함께 눈물 흘리는 것입니다.
벗의 삶 안에 일어난
놀라운 일에 함께 감탄하고,
벗의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에
가슴을 찢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두 마음이
두 사람의 한 마음으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감은 아름다운 힘입니다.
벗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벗 안에 내가
머물게 하는 힘입니다.
내 안에 벗을
담는 힘입니다.
벗을 위하여 나를
내던지게 하는 힘입니다.
그럼으로써 벗과 내가
하나 되게 하는 힘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9-56: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오늘 축일은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주님의 잉태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예루살렘 남쪽 유다 지방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노년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나이에도 아이를 가진지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말씀을 천사에게서 듣고 “길을 떠나, 서둘러”(39절) 엘리사벳의 집으로 바삐 가시는 모습이다.
당신이 장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분이었지만, 당신은 언제나 ‘주님의 종’으로 겸손하게 행동하시는 모습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요즈음 매스컴에 회자되는 그러한 여인들의 모습이 아니다.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39절) 가는 모습을 우리는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서 비롯되었다고 많은 영성가들은 말하고 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잉태소식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거기에 그냥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그 사실이, 그것도 걸음을 서둘러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이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모범을 주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또 그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는 이렇게 신앙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마리아를 통하여 배워야 하며,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즉 신앙을 갖고 사는 우리는 이제 마리아와 같이 즉시 이웃에게로 ‘걸음을 서둘러’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이웃에게 낳아주는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시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낳아 주셨다. 그 아들의 탄생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신”(요한 1,13) 분이시라고 복음은 전하고 있다. 이것이 동정잉태의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가 1,37).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것도 이와 같다. 우리도 바로 하느님에게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완숙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성장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어야 한다. 즉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자신의 태도가 사랑(1요한 4,7), 즉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참조: 3,1) 특징지어져야 하며, 자신의 인격을 걸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를 변화시키는 삶은 바로 실천적인 신앙생활을 통하여 사랑으로 귀결되는 새로운 정의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이 삶을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써 그리스도를 낳아주셨고, 이제 우리도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나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전해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계속 하느님의 자녀들이 태어나게 하는 중간 역할을 우리가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복되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 모두 지금 이 자리에서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해보자. 우리 역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언제나 감사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하자.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56절) 마리아의 봉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의 봉사였다. 엘리사벳의 산후 조리까지 도와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사랑을 많이 가진 자일 것이다. 참으로 높은 사람은 자신을 작게 보고 모든 귀한 영예를 허무와 같은 것으로 보는 자일 것이다. 마리아의 방문이 이 같은 느낌을 갖게 해 준다. 만왕의 왕이신 분을 가지신 분이 엘리사벳을 찾아가 봉사하다니! 놀라운 겸손과 사랑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오늘 5월의 마지막 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내면서 성모님께 우리의 사랑을 드리는 이 시간에는 우리 모두가 성모님을 본받아 이웃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정으로 진정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려는 덕을 배우고 또 그렇게 하도록 결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다. 우선 우리가 마리아와 같이 되는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성모님께 도와주시기를 청하자.
성모님 엘리사벳 방문 축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산 길을 간다. 사람들이 지나간 곳에 길이 열린다. 들풀이 무성하게 자랄 것도 같은데 주변의 풀마져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다. 여타의 피조물이 인간에 대한 예의인가 보다.
집이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윤기가 났다. 거미줄이 없다. 사람이 사는 동안 거미가 베푼 예의인가 보다. 집을 비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기가 빠져나가고 거미줄을 쳤다. 벽에 금이가고 흉가가 된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도 사람이 살면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의 기운이 있어 집이 베푼 예의인가 보다.
사람이 있어 사물은 빛난다. 사람이 없는 사물은 빛을 잃는다. 그만큼 사람은 사물을 빛나게 하나보다. 사람이 있어 자연을 빛나게 한다 . 그런 사람에게 기를 주고 빛을 나게 하시는 분이 계시다.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계신 사람은 비천한 신세를 돌보아 주시고 빛나게 한다. 생기가 생겨나며 빛나는 사람이 된다.
“사람이 하느님이 계시지 않을 때, 하느님을 잃어버릴 때, 사람은 빛을 잃는다. 두려움이 생겨나고 힘없이 손을 늘어트린다. 그런데 승리의 용사께서 내 안 한가운데에 계시는 날, 두려움 없어지고 함없이 늘어트린 손이 생기를 얻는다. 사람은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비천한 여인의 신세를 돌보신 분께서 함께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사람을 새롭게 하신다. 사람은 환성을 울리고 기뻐한다. 당신께서 비천한 신세를 돌보시고 불행을 치워버리셨기 때문이다.그리고 자신이 격게될 모욕까지도 짊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 사람 속에 계신 하느님, 당신께서 우리를 노래 부르게 하신다”(스바3,14-18 참조)
마리아의 노래, 즈카리아의 노래, 시메온의 노래는 하느남께서 비천한 신세를 돌보아 주시고 인간구원을 이루어 주셨기에 생기를 찾고 하느님께 찬양드리는 노래이다. 우리의 불행과 모욕을 대신 짊어 주셨기에 우리는 이 노래들을 아침 저녁, 끝기도에서 부를 때 마다 십자가의 신비가 너무나 고마워 떠올리며 십자성호를 긋고 노래하지요.
성모성월 오월을 끝내며 두 여인의 만남 안에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받아들임의 기쁨
김기한 프란치스코 수사님
T.평화를 빕니다.
작년 가을 요양원에서 감나무에서 감을 딴적이 있었습니다. 나무위에 올라가 감을 하나하나 따기 시작했는데 감하나가 제 얼굴에 떨어지면서 오른쪽 눈밑에 상처가 났습니다. 하지만 전 이 모든일이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삶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허락하시지 않으신다면 감을 딸수도 없었고 감이 제 얼굴에 떨어져 상처날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라보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얼굴이 감에 맞아서 상처가 났었어도 전 기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으신 분이시며 기쁨 또한 좋은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참된 기쁨"이 되십니다. 마리아께서는 가브리엘천사를 통해 잉태소식을 전해들으시고 온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처녀가 임신을 한것이 드러나기라도하면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사형에 처해진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께서는 온전이 받아들이심을 통하여 "참된 기쁨"이신 하느님을 잉태하시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인간적인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받아들인 마리아의 믿음은 "참된 기쁨"이신 하느님을 잉태하시고 또한 낳게 되었습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영성,정신,생활양식등 이 모든것들의 중심은 성 프란치스코의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실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될때 우리는 정배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 뜻을" 실천할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게된 어려운 상황이 기쁨으로 변화될 때, 성령의 열매중의 하나인 기쁨과 하나 되기에 우리는 "참된 기쁨" 이 되시는 예수님의 정배가 되고, 그 "참된 기쁨"을 통하여 기쁨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참된 기쁨"이신 예수님과 똑같이 우리는 그분의 형제 자매들이 되며, 내 안에서 "참된 기쁨"을 간직하게 될 때, 우리는 "참된 기쁨"이신 하느님을 품은 어머니가 되고, 기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 할 때, 우리는 "참된 기쁨"이신 예수님을 낳게 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 말은 비범한 사람들만이 알수가 있고 실천 할 수가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누구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도 실천 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이 또한 나에게 주어지지 않기에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누구나 "참된 기쁨"이신 하느님의 아들이요.형제 자매이며, 정배요,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도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참된 기쁨"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안에 자리잡고 계시는한 우리는 다시는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기쁨"은 인간의 불행스런 삶에서 오는 어떠한 걱정도 욕망도 몰아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삶을 이끄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께 내어맡기며 그분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믿음과 신앙안에서 받아들이며 하루하루 순간마다 "참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자비의 전달자와 받는 자 <루카 1, 39-5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시고 권능은 하늘을 찌르지만 전달하는 사람이 없거나 받을 만한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받아드려 전달자 되시고 세상에는 자비가 필요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받을만한 사람만이 받게 됩니다. 오늘 엘리사벳은 주님의 자비를 받을만하여 마리아가 방문하셨습니다. 미사 때마다 자비송을 외우며 자비를 구하지만, 자비를 받는 사람도 있고,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모님의 노래 속에 그 모든 것을 다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자비가 필요한 사람은 죄를 짓고 죄의 고통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도 자비를 받는 사람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자비를 구하는 사람이고 자기 죄를 의식하지 못하고 뉘우치지 않은 사람은 자비를 받지 못합니다.
성모 노래는 마음이 교만한 사람, 무자비한 통치자, 인색한 부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하고 벌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자비를 받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굶주리고 헐벗고 휴식을 못 하는 사람, 가진 것 없고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받게 됩니다.
자비의 전달자는 힘 있는 사람, 많은 것을 가진 사람, 이름이 드러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믿음, 희망, 사랑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전달됩니다. 마리아가 자비의 전달자 되심은 하느님의 말씀에 종처럼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은 사람은 자비의 분명한 전달자 됩니다.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알고 아는 바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비를 받은 사람은 자비를 전달해야 합니다.
자비를 전달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 세상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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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더없이 아름다운 마음을 믿는 것이고, 하느님의 더없이 옳고 좋은 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적어도 막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막연한 것에 대해 제대로 된 신앙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분의 마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삶의 고난과 슬픔 중에서도
삶의 순탄함과 기쁨 속에서도
그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
올바른 희망이 도출되고
교만한 마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믿어야만 하는 것과 믿고 싶은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믿어야만 하는 것과 믿고 싶은 것이 일치하는 삶은 행복한 삶입니다.
먼저, 우리가 믿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살펴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삶이 그분의 마음에 응답하는 삶이 아니라 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입니다.
엘리사벳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은 처녀 마리아는 행복하다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려는 지 모릅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려 하는 것이 나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서 협조해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이기를 희망합니다. (201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믿음은
역동적입니다.
믿음은 주저앉지
않습니다.
낯설고 먼 길을
방문할 용기를 줍니다.
믿음으로 펼쳐지는
가장 맑은 믿음은
모두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서
절정을 이룹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가슴에 새겨야 할
믿음의 이야기가
우리 마음에 가득
울려퍼집니다.
믿음을 잃은 사람은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야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을
더욱 따뜻하고
아름답게 하는 건
한 사람의 믿음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또 다른 믿음과 어울려
아름다운 합창이 됩니다.
평생 소중히
간직해야 할
믿음의 약속이
두 여인의 삶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는 곳에
더 따뜻한 방문이
있습니다.
함께 믿음을
키워나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믿음은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