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4,18-20
그 무렵 18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20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은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1,23-26
형제 여러분, 23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1ㄴ-17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11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빵을 먹고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시어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신다(복음).
☆☆☆☆☆☆☆☆☆☆☆☆☆☆☆☆☆☆☆☆☆☆☆☆☆☆☆☆☆☆☆☆☆☆☆☆
하느님의 사제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람을 축복하고, 아브람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준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만찬 때에 빵과 잔을 나누어 주시며,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킨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시어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1독서의 멜키체덱은 성경에서 언급된 최초의 제사장입니다.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던 그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멜키체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여겨지며,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시편 110[109],4)라는 메시아적 신탁은 마침내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실현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당신의 몸과 피를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대사제이시며, 새 계약의 중개자가 되십니다.
제2독서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성찬 제정문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몸소 성체성사를 세우신 내용을 전합니다. 여기에서 ‘기억’(ἀνάμνησιζς, 아남네시스)이라는 말은 이천 년 전의 사건을 그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사제를 통하여 봉헌되는 미사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거행된 완전하고도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성체 거양 다음에 “신앙의 신비여!”라는 사제의 선창과 함께 바치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현재, 예수님의 죽음을 전하는 과거,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미래, 곧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이 지금 이 순간에 공존하며 천상 잔치의 영원한 기쁨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앞서 헤로데는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하며 예수님에 관해서 질문하였는데, 우리는 오늘 복음을 읽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참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복음의 내용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동작들, 다시 말해서 빵을 ‘들고’, ‘축복하시며’, ‘떼어’, ‘나누어 주셨다’라는 네 동사가 예수님의 성찬 제정문과 엠마오 발현 이야기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쓰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동작의 연속성’을 통해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성찬례를 제정하시고, 부활하신 다음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식탁에 앉아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분께서 바로 같은 예수님이심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사제를 통해서 거행되는 미사 안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주님’(요한 6,51 참조)께서 우리 안에 찾아오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이 놀라운 신비로 우리를 당신 생명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또한 주님과 더욱 깊이 일치하며 우리도 누군가에게 생명의 주님을 나누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빵’이 되도록 합시다.(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묵상하는 날로 지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전례 안에서 기념해 왔던 육화의 신비 전체와 삼위일체의 신비까지도 바로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의미 안에 함축되어 있고, 오늘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이야말로 하느님 사랑과 구원 의지의 가장 탁월한 표현이요 그 구체적인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제시하시면서, 당신의 살을 우리의 양식으로, 당신의 피를 우리의 음료로 내어 주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분이 스스로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신 겸손과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신 수난과 고통, 부활을 통하여 이룩하신 승리까지도 모조리 우리에게 내어 놓으실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당신 안에 갖고 계신 삼위일체의 신비까지도 우리와 함께 나누고자 하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성체와 성혈을 모심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며, 온전한 일치 속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정말 기쁘고 감사한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온전히 채워지는 신비를 경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우리의 가장 소중한 능력 가운데 하나임을 되새기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진 우리는 이제 그 사랑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고, 우리의 이웃들과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
성체성사는 생명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저녁에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새로운 생명의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빵의 기적은 육적인 양식을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기적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에 대한 예표입니다(요한 6,54 참조).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고 계십니다. 매일 미사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하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의 현존과 생명을 느낍니다. 그 생명은 우리 삶 안에서 살아 숨 쉬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고 다시 얻으셨습니다(요한 10,17 참조).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요한 15,12 참조).
우리는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그분의 크나큰 사랑을 받아 모십니다. 이로써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게 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성사는 우리를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것을 사랑으로 대하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믿음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 믿음을 두지 않은 유다인들은 생명의 양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믿음 없이는 성체성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인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기념하며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모든 교우 믿는 교리, 빵이 변해 성체 되고, 술이 변해 성혈 된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육적인 양식을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양식보다도 더 중요한 영적인 양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육적인 양식은 짧은 시간만을 배부르게 하지만, 영적인 양식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상에 바치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시어 이를 항상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산삼을 먹을 때에는 사전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먹기 전에 몸속을 깨끗하게 유지하고자 짜거나 매운 음식, 술을 삼가야 합니다. 또한 산삼을 먹을 때에도 수돗물이 아니라 생수로 씻어야 하고, 먹은 뒤에도 여러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합니다. 이러한 정성이 있어야 산삼의 효과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몸에 최고라는 산삼을 먹을 때 사람들은 온갖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렇다면 이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삶에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양식인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참으로 깨끗하게 하고 있는지, 성체 안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는지, 그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지 곰곰이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려고 사람으로 오시어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그 거룩하신 몸과 하나가 되고, 주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체성사는 생명의 성사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온몸을 내어놓으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내시어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하시고,우리는 새롭게 주님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내어놓으신 바로 그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매일의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 삶 안에서 언제나 그분의 현존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그분께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이며 생명입니다. 성체성사가 사랑이며 생명이라면, 그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도 사랑과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것을 사랑으로 대하고, 그 생명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곧 나눔과 섬김의 신비입니다.
☆☆☆☆☆☆☆☆☆☆☆☆☆☆☆☆☆☆☆☆☆☆☆☆☆☆☆☆☆☆☆☆☆☆☆☆
오늘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은 성체성사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힘을 얻으려고 성체를 모십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라왔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풍요로웠지만 육신은 배고팠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라고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뿐이었습니다. 어른 한두 사람이 먹어도 모자라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군중이 배불리 먹도록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요즈음은 각종 세균 때문에 먹을거리에 무척 민감해졌습니다. 그러나 내적 음식에는 무관심합니다. 영혼에게도 음식이 필요하건만 그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삶이 우울하고 이유 없이 불안한 것은 영혼이 굶주렸다는 신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라고 하십니다. 영혼에 양식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의 힘을 얻고 마음이 밝아집니다. 삶의 기쁨을 얻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힘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스스로 다짐해 봅시다.
미국 코넬 대학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인간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연구했습니다. 즉,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가는지를 본 것입니다. 결론은 길어봐야 30개월 정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꼭 두근거리는 감정을 가져야만 사랑이 있는 것일까요?
어느 영화에서 “나를 보면 아직도 심장이 뛰어?”라고 묻는 부인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연애 4년에 결혼 3년이야. 아직도 심장이 뛰면 그건 심장병 같은데?”
사랑은 처음에 분명히 떨리고 설렙니다. 그 단계를 거치면 공기처럼 소중하고 없으면 못 살지만, 늘 숨 쉬고 있어서 익숙해지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주님과의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처음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마냥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과의 사랑 관계가 익숙해집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 합니다. 예전의 기쁨을 또 설렘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주님과의 사랑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만약 설렘이 없어졌다면 지금 익숙해지는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공기처럼 소중하고 없으면 못 살 주님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던 주님이십니다. 그 일회적 사건으로 당신 사랑을 끝내지 않고, 성체와 성혈을 주심으로 인해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즉,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계속되는 사랑입니다.
미사 때마다 이루어지는 그 사랑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처음 주님을 모실 때 느꼈던 설렘과 기쁨도 사라진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공기와 같이 잘 느끼지는 못하지만, 꼭 필요한 우리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습니다. 그리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됩니다. 영적 양식은 이렇게 차고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은 계속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역시 주님께서 주셨던 사랑을 나의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받기만 하는 사랑을 넘어서 주는 사랑이 되어야,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잘 따르는 것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걸 보진 못한다(공자).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크게 강조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선교 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001년 축성 생활의 날을 맞아, 모든 사제, 수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개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과 사도적 활동의 원천이자 정점으로서 우리가 매일 기념하고 경배하는 성찬례 안에서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그분을 만나고 관상하십시오.”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님께서는 성체성사와 선교, 그리고 일상 안에서의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연결시키셨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 식탁에 나아가면 선교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적 노력은 그리스도인 삶의 성찬적 모습의 한 부분입니다.”
살레시오회 전 총장 파스칼 차베스 신부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기쁨, 창의성, 열정으로 거행하십시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성체성사가 시작되기 전 천사들은 우리를 위한 청원 기도를 하려고 기다립니다. 바로 이때가 천상의 은총을 얻기에 가장 좋고 유리한 시간임을 천사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의 가경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성체성사를 기쁨과 연결시킵니다. “만일 그대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체성사를 봉헌하십시오. 성체성사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선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요셉 과드리오 신부는 성체성사에 있어서 파견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그대가 매일 미사 경본을 덮을 때마다 그대의 미사는 다시 한번 그대의 생활 안에서 새롭게 시작됨을 기억하십시오.”
양식은 공동체를 만들고 음식은 외로움을 만든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이 살과 피는 탈출기의 만나와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로 상징됩니다. 그래서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모세처럼 광야에서 헤매는 백성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십니다. 이 빵을 먹고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체성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밝혀집니다. 먹는 것은 이것과 직결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102회에 9년째 구토하는 금쪽이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금쪽이는 14세 외동아들입니다. 머리가 좋은 아이였지만 구토증세를 달고 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울렁거리고 메스껍고 복통이 나며 이내 구역질을 합니다. 응급실에 가서 링겔을 맞아도 계속 구토가 나옵니다. 이 증상이 9년째 지속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금쪽이는 건강문제로 등교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쪽이는 초등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중학교 복학은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건강과 학업이 동시에 걱정됩니다. 금쪽이는 제발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사는 게 지옥 같다고 합니다.
금쪽이의 증상은 6살 때부터 장염을 앓은 후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병원을 전전하며 괜찮아지는가 싶었는데 11살쯤 다시 증상이 심해져 시골 학교로 전학을 하였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고 8번이나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금쪽이는 대인관계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말을 할 때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상대가 말하는 단어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가 구토를 하는 이유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빠가 글씨 연습을 하자며 앉히자 숨이 거칠어지고 트림이 나왔고 구토 전조 증상까지 보였습니다. 금쪽이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부모의 강요에 학교가 싫어졌습니다. 남들과 비교되는 게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공부 멈춤 선언’을 하라고 부모에게 말합니다. 일단 아이가 살아야 하니 그렇습니다. 부모가 주는 ‘밥’ 안에는 부모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부모는 밥을 주며 자기 뜻을 아이에게 강요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뜻이 버거울 때는 부모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뜻이 부담스러워 뜻을 거부하니 몸이 음식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은 몸과 직결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은 어떤 뜻이 들어있을까요? 공부를 잘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라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그 뜻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말합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루카 9,12)
황량한 곳은 말 그대로 하면 사막처럼 텅 빈 곳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텅 빈 곳을 당신 성체와 성혈로 가득 찬 곳으로 변하게 하십니다. 어떻게 하셨을까요?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 9,14-17)
사막도 배불리 먹을 것이 있고 그 음식을 함께 먹을 공동체가 있다면 더는 황량한 곳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바뀝니다. 이를 위해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모의 양식을 먹는 자녀들은 서로 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향으로 양식을 내어줍니다. 한 부모의 양식을 나누어 먹는 것 때문에 형제들은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뜻이 잘못되었을 경우는 위 금쪽이처럼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사회성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씨 가족의 지웅이는 동생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동생을 잘 보살핍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그러기를 바라는 음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모의 음식을 거부한다면 동생과의 사이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부모가 주는 양식 안에는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분명 부모가 주는 음식은 사회성과 직결됩니다. 어쩌면 그 사회성이 양식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24회에도 식음을 전폐한 아이가 나옵니다. 음식을 먹으려고는 하지만 삼킬 수가 없습니다. 머리카락이 목에 꽉 찬 것 같다고 하며 음식을 넘기지 못합니다. 이 금쪽이도 수액으로 연명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아보면 됩니다. 언제부터 그랬나 살펴보니 엄마가 직장을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엄마가 직장을 나간다고 다 아이들이 식음을 전폐할까요? 엄마가 일을 나가는 것이 아이에게 그만큼 커다란 충격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자 금쪽이는 사실 남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아이가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로부터 양식을 충분히 먹지 못하면 결국엔 동생과의 관계도 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고, 또 동생과도 원만해지려면 아이는 음식이 아닌 양식을 더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토하며 양식을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식은 부모의 사랑이고 부모의 사랑은 곧 형제간의 사랑을 지향합니다.
이것으로 볼 때 성체를 영하며 성당에서 형제들과의 친교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부모가 주는 음식을 먹으며 형제간의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절로 한 부모의 양식을 먹으면 형제간의 친교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미사 할 때 형제간의 친교로 이어지지 않는 성체는 진정한 양식이 아니고 음식일 뿐입니다. 음식을 먹기 때문에 친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미사만 하고 집에 돌아가고 친교 공동체, 봉사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성체성사를 대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서로 사랑하는 친교의 무리가 형성되지 않는 성체성사는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냉담의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냉담은 성체를 영하지 않음이 아니라 그 성체를 영하면서도 효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공동체를 이뤘습니다. 이 정도는 되지 않더라도 하느님 자녀들끼리 서로 친교를 맺는 형제 공동체는 만들어져야 합니다. 양식은 곧 친교 공동체를 지향함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 의미도 잘 모르지만 따라 부르던 성가가 있습니다. “하늘에 별수가 얼마인지 아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강변에 모래알 헤아릴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바다에 물방울 누가 셀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논밭에 이삭 수 누가 알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나무에 잎사귀 헤아릴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영원과 무궁을 깨달을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매일 축성되는 성체의 수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31년 동안 제가 미사를 통하여 축성한 성체의 수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은 성체가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인호 선생은 투병 중에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부님, 저 지금 성체가 몹시 고픕니다. 성체를 주십시오.’ 본당 신부님은 기꺼이 봉성체를 해 드렸다고 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있습니다. 성체는 사제가 미사 중에 제병을 축성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몸을 내어주신 주님의 성체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혈은 사제가 미사 중에 물이 섞인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주님의 성혈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미사에 참례하여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감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신 우리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광야에서 지치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배부르게 하는 ‘만나’보다는 영혼을 살리는 ‘성체와 성혈’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면 우리는 영적으로 충만해집니다. 어릴 때, 물을 퍼 올리던 펌프가 생각납니다. 펌프에는 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부어주고 펌프질을 하면 수백 수천 배의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어린 저에게는 참으로 큰 체험이었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이지만 기꺼이 내어주니, 모든 사람이 마시고도 남는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낌없이 마중물이 되어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꽃동네,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선교회, 이태석 신부님은 모두 한 바가지의 마중물 정신을 사신 분들입니다.
성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마중물’이 되시어 수많은 신자의 가슴에 용기와 생기를 주고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축복을 받았으면 나누시기 바랍니다. 엄청난 은총이 되돌아올 것입니다. 바다의 물이 마른 적이 없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모두 아낌없이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으니
이곳은
황량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어도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는 한
이곳은
기름진 곳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9,13)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나는 생명의 빵이다" 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의 성화를 위해 부활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대축일'을 지내는 의미,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근거가 아닐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9,13)하고 말씀하신다. 황량한 벌판에 수많은 사람들을 앉게 한다음 제자들에게 명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빠르게 숫자 계산을 하고 있었다. '들판의 사람들은 장정만도 오천명에 이르는데' 하며 '먹을 것을 주라니?' 그들은 이미 불가능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이때 예수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셨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다. '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쉰 명 단위로 나누어 앉게하라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 손에 빵을 맡기며 직접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결과는 놀라웠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9,17)
나는 가톨릭 학교에 있으면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를 학생들과 함께 봉헌하며 성체잔치를 벌였다. 각 홈마다 매주 한 홈씩 순회하며 홈 미사를 봉헌했다. 책임 홈은 다른 홈 학생들을 미사에 초대했고, 생활성가와 특송을 준비했다. 간식은 홈 선생님과 학생들이 준비했었다. 미사는 횟수를 더하며 생생하고 훈훈한 미사가 되어갔다. 홈을 가득 메우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하나로 만들었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흡족하도록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학교에서의 매주 목요일 홈 미사는 모두들 기다리게 했다. 미사는 단순함, 깔끔함, 간단함으로 이어갔다. 미사 내내 모두 주님 안에 하나 되었고 자기들 안에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여라' 홈 미사는 말 그대로 축제였고 잔치였다. 미사가 끝날 때면 모두가 '마음의 배가 불러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9,17)
이 말씀이 미사가 있을 때마다 공동체는 마음이 부유해져 갔으며 그 언에서 실감이 커져간 것이다. '사랑으로 마음을 드높히자' 는 학교의 교훈이 성사가 되는 아름다운 미사시간이 되어갔다. 나는 학교에서의 이 미사가 늘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배불리 먹였다는 빵의 기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는 주일학교가 해체되고 청소년이 없다고 말한다. 이제 문제인식이 되었다면 제대로 된 현실해법을 찾아야 한다. 현실해법은 아동을 포함한 청소년 미사가 격식의 율법적 미사가 아니라 작은 다락방 미사로 봉헌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단순하고, 깔끔하고 짧은 강론, 그리고 청소년들이 스스로 준비한 생생한 작은 공동체 미사로 봉헌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예수님 부활 승천하신 후 성모님과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 드린 작은 공동체 미사를 떠 올려 본다. 얼마나 생기있고 아름다운 미사였을까? 이런 미사라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함께 하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생명의 빵'으로 오신 다락방 미사를 드렸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신 되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9,13) 모두들 서로가 가진 것을 사랑으로 나누고, 이로써 서로가 배불리 먹고, 공동체는 신나서 하느님을 찬양드리지 않았겠나? 다락방의 거룩한 미사가 학교 공동체를 살렸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기념하고 그 신비를 함께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을 함께 묵상하자면 오늘 복음에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오늘 성체 성혈 대축일 복음에 이 말씀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바로 당신의 살과 피, 곧 당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주시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구원의 삶의 예표가 되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지만 제자들은 또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처럼 대개는 종종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 조건적인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먼저 내가 나눌 수 있는 상황이 되는지를 따져봅니다. 그리고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이 충분한지를 따집니다. 곧 나의 상황이 우선적으로 먼저 고려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나눌 수 있는 상황과 여건이 된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판단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나의 상황과 여건, 그리고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따져본 다음 최종적으로 실행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조건을 따지지 않으시고 그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인간적으로 볼 때 그러한 예수님의 결정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판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결정은 합리적, 이성적인 결정이 아니라 사랑의 결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때부터 기적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진정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루어갈 때 기적은 우리의 자리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러한 모습이 믿지 않는 이들이 바라볼 때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랑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순간 기적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고, 그것을 통해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위대함도 거기에서 드러납니다. 곧 제자들은 그 예수님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따르며 주님과 함께 기적을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전례와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역시 당신과 함께 기적을 이루어가는 사도들이 되길 바라며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음식에 신경쓰신 예수님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물을 술로 변하게 하신 가나안잔치 때와 빵다섯 물고기두마리의 기적.
한국에서는 밥과 국이라 보겠지만 음식에 신경 쓰신 예수님 맞습니다.
먹는 것은 생명과 직결된 소재로서 예수님은 적절히 잘 이용하셨네요.
자식들 먹여 키우는 부모님심정으로 예수님도 인생들을 키우신답니다.
미사에서는 먹음의 의식을 중심으로 이루며 하느님자녀로 키우십니다.
현재에도 가톨릭 신자들은 미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모신 답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하늘의 사랑잔치로 가족맥락을 풍성해지게 합니다.
가톨릭 신앙인들은 세상서 이뤄지는 하늘잔치 참여로 행복해진답니다.
성체와 성혈의 신심
이기우 신부님
1. 전례적 의미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 전례적 취지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룩하기 위한 실천적 지혜가 바로 자신과 세상의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성사적 변화를 거행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임을 일깨우고자 함입니다.
2. 카파르나움 평원에서의 엇갈린 반응, 열광하거나 의심하거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 평원에서 오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 앞에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이때 배고팠던 군중은 많아진 빵에 열광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광하는 군중을 떠나 근처의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좀 더 차분하게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빵을 구하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빵을 구하라.”(요한 6,27)고 그분이 말씀하시자 말귀를 못 알아들은 군중이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였고, 그분이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35.41.51).
빵에만 열광하던 군중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거나,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하며 떠나갔습니다.
빵을 배불리 먹을 때에는 열광하던 군중이 이렇게 의심하거나 반문하며 떠나버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결단을 재촉하셨습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요한 6,67). 믿든지 떠나든지 하라는 매우 단호한 어조였습니다. 그러자 망설이며 눈치만 보면서 선뜻 대답하지 못하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나서서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한 6,68).
그 다음, 생명의 물에 관해서는 예루살렘에서 초막절 축제 마지막 날에,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요한 7,37-38)이라고 군중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도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예언자나 메시아로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분이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2.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2003년에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는 제목의 회칙을 반포하여 성체성사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확정하였습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성체성사에 관해 공식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기점은 트리엔트 공의회입니다.
이 회칙에 따르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 안에 ‘참되고, 실재적이며, 실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어 성체와 성혈로 거룩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표명했는데, 이는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성체성사에 관한 계시적 언급을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해석해 놓은 성전(聖傳) 즉 거룩한 전통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거룩한 변화를 중세 유럽의 철학적 사유로 엄정하게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변화에 대한 이 세 가지 형용부사, 즉 ‘참되고, 실재적이며, 실체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라는 트리엔트식 표명은 중세에 특유한 형이상학적 용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상하게 설명한다 해도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성서적 형용부사 이상으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체성사의 질료인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개입 없이도, 즉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전제하지 않고도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세와 근세에 성체성사를 둘러싼 해프닝이 두 가지 일어났는데, 트리엔트식 성체 교리 설명의 한계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3. 성체성사를 둘러싼 현실 하나 : 루터는 뛰쳐나가고…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베드로 대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던 교황청 관료들의 부패와 과도한 모금 행위에 항의하는 95개조 반박문을 1517년에 독일 비텐부르크 성당 문에 내걸었습니다. 이 항의에 대해 레오 10세는 파문으로 응수했고 결국 이 파문장을 찢어버린 루터는 성체성사를 비롯한 성사의 효력 모두를 폐기한 채로 가톨릭교회를 뛰쳐나갔습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직무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제정된 것인데, 과도한 모금 행위와 이로 말미암은 부패한 사제상은 파스카의 역사적 정신에 대한 섬김과 함께 상호 섬김과 그것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섬김으로 뒷받침 되어야 할 성체성사의 거룩한 변화를 인효적(人效的)으로 – 사효적(事效的)으로가 아니라 -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루터의 항의는 정당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이를 종교적 관용으로 수용하고 부패상과 과도한 모금 행위를 중단했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문으로 응수하고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서방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성체성사의 필요조건인 사제직의 섬김 윤리가 관철되지 못하는 바람에 생겨난 역사상의 해프닝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를 뛰쳐나간 루터와 그에 동조한 개혁가들이 세운 공동체들 역시 성사적 효력 자체를 부인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성사 없는 공동체로 남아 있습니다. 성사 없이는 교회성도 담보할 수 없기에, 가톨릭교회 공식 문헌에서는, ‘개신교 공동체들’이라고만 쓰지 ‘개신교 교회’라고 부르지 않으며 교회 일치 운동에 있어서도 그들 개신교 공동체가 성체성사에로 돌아오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당시까지 이단으로 단죄했던 개신교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일치 교령’을 반포함으로써 재일치를 향한 담대한 도정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만 재일치로 향한 여정에서 가장 큰 관건은 이 갈라진 형제들이 성체성사에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4. 성체성사를 둘러싼 현실 둘 : 브루노는 화형당하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설명은 이미 그전부터 행해져 오던 성체성사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반발한 인물이 있습니다. 당시 교회가 이 거룩한 변화를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차원에서 실체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식으로까지 과도하고 무지하게 성체성사의 거룩함을 가르쳤던 관행에 반발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제 브루노(1548-1600)는 자연과학의 이론을 인용하여 모든 물질에 하느님의 영이 작용하고 있으며, 성체성사 중에 빵과 포도주가 물질적이고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가 아니라 마법사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학술적으로 반박하였습니다.
브루노의 이 같은 주장은 빵과 포도주의 실체적 변화를 과도하게 주장했던 당시 교회 교도권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 그 은총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성체성사의 신학적 본질에 비추어 보면 역시 초점이 빗나간 반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책임은 애초에 성체성사 교리의 프레임을 잘못 짜 놓은 교회 당국에 돌아가는 것이지, 문제를 제기한 브루노에게 돌아갈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는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고, 교권 당국은 끔찍하게도 그를 화형시켜 버렸습니다(1600년). 이는 성체성사의 충분조건인 성령의 개입과 그리스도의 현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데서 생겨난 역사적 해프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분위기의 일단을 잘 말해줍니다.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브루노를 화형시킨 사건에 대한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에 브루노에 대한 사형 선고가 부당하다는 재심 판결을 내렸고 2000년에는 브루노 처형 400주년을 맞아 폭력적인 사형 선고와 집행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였습니다.
5. 성체와 성혈 신심의 실천을 향하여
오늘 전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가 성체와 성혈의 성사에 참여하여 삶과 세상 일에서 거룩한 변화를 이룩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아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를 세우셨는데, 교회는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성찬례를 성체성사로만 좁혀서 기념하는 관행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가 우리 영혼을 양육하는 생명의 빵이라면, 그리스도의 피인 성혈은 우리가 사랑의 희생을 각오하고 다짐하는 생명의 물인데, 성체와 성혈의 신심은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하느님 나라로 이끌기 위하여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기운도 얻어야 하지만 우리가 바칠 희생도 각오해야 하는데, 희생을 아끼려는 오래된 관행은 성혈 신심을 망각한 데에서 기인한 듯합니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 대축일인 오늘, 생각해 볼 주제는 균형의 회복입니다. 첫째, 성령의 개입 및 그리스도 현존에 대한 믿음이라는 성찬례의 충분조건과 섬김으로 나타나야 할 사제직의 윤리라는 필요조건 사이의 균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둘째, 이를 위해 우리가 거룩한 기운을 얻기 위한 성체 신심과 우리의 희생을 다짐하는 성혈 신심도 균형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성찬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나타나야 할 인격의 거룩한 변화와 세상의 거룩한 변화 사이의 균형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이는 믿지 못하면 떠나야 할 만큼 너무도 중요한 계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함승수 신부님
사람이 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고사로 갑자기 목숨을 잃는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가 죽는 것은 제대로 먹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암 같은 불치병에 걸리더라도 제대로 먹고 소화시킬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절망 속에서 먹기를 중단하면 금새 기력이 약해지고 점점 초췌해져가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지요. 인간은 이렇듯 먹어야만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물질적인 음식을 먹는게 아닙니다. 그 음식이 나에게 오기까지 거친 수많은 이들의 정성, 노력,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이들은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어조로 '사랑이 밥 먹여주느냐'고 따져묻지만, 우리를 먹여살리고 삶의 의미를 찾게 만드는 것이 사랑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인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에게 그런 사랑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들을 단지 육신의 음식으로 배불리는 수준을 넘어서서, 사랑이 가득 담긴 영혼의 양식으로 배부르게 하시어 삶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하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명령에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런 예수님의 마음에 공감하여 '사랑의 나눔'에 동참하기를 바라시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돌려받을 것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이런저런 조건들을 달아가며 스스로에게 제한을 두지 말고, 손해보는 것을 아까워하며 망설이거나 미루지 말고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 나눔을 통해 제자들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돈을 지불하고 사는 가치들이 아니라, 햇볕 공기 물처럼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저 베풀어주신 것들임을, 그런 하느님 사랑을 생각한다면 내가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야 함을. 사람을 참으로 사람답게 살게 하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요소가 바로 그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하며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데 오히려 재물에, 사람이 주는 도움에 기대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의 '섭리'보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먼저 보입니다. 자기들에게는 수천명 분의 빵을 살만큼 큰 돈이 없습니다. 그럴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 내일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빠듯한 처지에서, 왜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저들의 끼니까지 챙겨줘야 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내 한 몸 챙기기에도 버겁고, 하루하루 고된 삶을 지탱하기도 힘든데 대체 그럴 '여유'가 어딨냐고, 지금 자기들이 가진 거라고는 제 입에 풀칠 하기에도 모자란 보잘 것 없는 양식이 전부인데 그것마저 내어주기는 싫다고, 우리도 좀 먹고 살아야겠다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군중들을 쉰명씩 무리지어 앉게 하시고는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른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분을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는 자세입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고 따지기 전에 먼저 '감사'해야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이 감사가 바로 '성체성사'의 핵심입니다. 내가 받고 누리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작은 것들에도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을 때 그것들을 기꺼이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손 안에 내어드린 것들을 축복하시어 그것들이 단순한 물질에만 머무르다 썩어 없어지지 않고, 우리를 충만히 채워주시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의 표징으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바로 그 표징이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재현하고 기념하는 '성체성사'인 것입니다.
주님 당신 손으로 변화시키셨으니 그대로 나누어주시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굳이 제자들의 손을 빌려 '사랑의 성사'가 된 그 양식들을 나누어 주십니다. '돈을 주고 양식을 사오자'는 경제의 논리로 접근할 때에는 불가능한 일이 빵을 떼어 나누는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행위를 통해서는 가능함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돈에 기울어져 사람을 외면하는 '황량한' 마음이 아니라, 사랑에 기울어져 자신을 내어주는 충만하고 따스한 '정'(情)임을 느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내가 갖고 누리는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이니 그 선물을 받은 내가 할 일은 그것이 내 안에 고여 욕심으로 썩게 만드는게 아니라, 나를 통해 흐르게 하여 모두를 살리는 일임을, 우리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서로를 내어줌으로써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 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열 둘은 그 어떤 모자람도 없는 충만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모두의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사랑의 기적은 나누고 베풀려는 작은 진심에서 시작됨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빵을 많게 만드는 마법같은 일이 기적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소유욕에서 나눔의 의지로 바꾼게 기적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는 분명 작은 숫자이지만 다섯과 둘을 합치면 '일곱'이라는, 성경에서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가 됩니다. 나혼자만 빵을 먹으려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다른 이에게 빵이 되어주는 이타심으로 나아갈 때, 우리 모두를 사랑의 참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워주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황량한 그곳에서 당신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케 하였고
축복의 기도는 생명의 양식을 모실 수 있게 하였습니다.
매 미사의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와 생명의 빵의 의미를
새기고 기억하며 당신과 일치하는 한 주간이 되게 하소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직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셨다는 것, 즉 바로 이 뜨거운 사랑을 기념하는 날이 오늘인 것이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이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미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빵의 형태로 우리에게 오시는데 우리들은 이 빵이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성체가 주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체는 희생입니다. 동시에 사랑이지요. 사랑하지만 희생 없는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바로 이런 사랑이 우리들을 악으로부터 어둠으로부터 구원하였으며 지금 현재도 우리들을 구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하루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서 예수님의 구원을 이 지상에서 확장 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눠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이들은 함께 무엇이든 함께 합니다. 또 함께 있기를 바라지요.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끝이 난 것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사업에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초대하십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앞서 언급한 대로 희생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임을 잊지 맙시다. 또한 우리들은 미사를 통해서 빵의 형태로 우리들에게 오신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매일 죄의 삶에서 용서를 받고 또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이를 기억함으로서 또 믿음으로써 우리들은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이며 바로 이 사랑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이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하는 큰 의미인 것입니다. 아멘!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 -성찬례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이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 셋입니다. 성서, 예수님, 그리고 미사입니다. 이 셋만 있으면 어디서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듯 성경을, 예수님을, 미사를 사랑합니다. 6월은 예수성심성월은 참 좋은 달입니다. 어느달보다도 대축일이 많습니다.
오늘은 예수성심사랑이 활짝 드러난, 절정의 날인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모든 축일이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드러내지만 오늘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선물중 하나인 성체성사를 경축하는 날입니다.
이날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얼마전 타계한 김지하 시인의 ‘밥은 하늘이다’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읽을 때 마다 새롭게 감동을 선사하는 시입니다. 예전 한국의 세계적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가 성체성사의 핵심을 정말 잘 드러냈다고 극찬했던 시입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그래서 지체없이 강론 제목을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성찬례의 삶-”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살기 위하여’,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모시기 위하여 이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혈 대축일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 배고픔을,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 바로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생명의 빵,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하느님을 모셔야 비로소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되며, 우리를 날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러니 도대체 세상에 이 성체성사 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많이많이 사랑하면 얼굴에 손대지 않아도 됩니다. 저절로 예뻐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교회는 복음화하고 복음화됩니다. 전례는 또한 복음화 활동을 경축하는 것이며 자신을 내어 주는 새로운 힘의 원천이 됩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는 물론 오늘 아침성무일도 전례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요!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감동으로 와닿는 많은 내용들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멜키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께서 빵과 포도주를 올리셨도다.”
엊저녀 부른 저녁기도중 첫 후렴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 나오는 신비의 사제 멜키체덱은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의 예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지는 후렴들 모두가 은혜롭습니다.
“구원의 잔을 받들고서 찬미의 제사를 올리리이다.”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잔을 받들고서 찬미와 감사의 제사를 올리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하늘의 빵을 그들에게 주셨도다. 사람들이 천사들의 빵을 먹게 되었도다. 그 맛이 더할 나위 없었나이다.”
“오 거룩한 잔치여, 예수의 몸은 음식이 되었도다. 수난의 기념, 은총의 충만, 장차 영광의 보증이로다. 알렐루야”
이어 아침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도, 즈카르야 후렴도 은혜로웠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 그리스도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로다. 이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리라.”
하느님 자랑하는 마음에 많이 인용했습니다. 예전 있었던 추억이 새롭게 생각납니다. 초등학교때 친구가 와서 두시간 동안 자랑을 늘어놓고 갔고 저는 듣기만했습니다. 간다음 요약하니 자식자랑, 돈자랑 둘이었습니다. 내 자랑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다 떠오른 것이 바로 하느님 자랑, 예수님 자랑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참으로 좋으신 하느님 자랑하는 재미로, 하느님 찬미하는 재미로, 예수님 사랑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또한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너는 멜키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이니라.”
‘너’가 가리키는 바 예수님은 물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는,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들입니다. 또 제2독서후 부른 하느님 사랑의 깊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성체송가’는 얼마나 풍요로웠는지요! 성체성사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 무려 24절까지 계속됩니다. 마지막 23,24절을 또 하느님 자랑하는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23.참된음식 착한목자 주예수님 저희에게 크신자비 베푸소서.
저희먹여 기르시고 생명의땅 이끄시어 영생행복 보이소서.
24.전지전능 주예수님 이세상에 죽을인생 저세상에 들이시어,
하늘시민 되게하고 주님밥상 함께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
정말 깊고 아름다운 전례에 잘 참여하면 강론시 미진했던 것을 완전히 보완해 줌을 깨닫습니다. 성찬례는 단지 전례로 끝나면 반쪽입니다. 우리 하루 전 삶으로 확산되어 성찬례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되어 살아있는 성체로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정말 성체를 공경하는 이들은 살아있는 성체인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래야 비로소 성체신심의 완성입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2003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반포한 회칙 그대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몇가지 성찬례의 고마움을 나눕니다. 너무나 끝없이 깊어 나누는 내용은 그 일부일뿐입니다. 마치 바다 같은 넓이와 깊이에서 퍼올리는 몇컵의 생명수같은 내용입니다.
첫째. 회개와 배움의 성찬례입니다.
이 거룩한 성찬례 시간은 회개와 배움의 시간입니다. 내 죄를 회개하고 주님 사랑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이런 자세는 하루 전삶으로 파급됩니다. 성찬례를 통한 끊임없는 회개와 배움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날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회개하는 삶, 공부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새 하늘과 새 땅의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합니다.
둘째, 기억과 감사의 성찬례입니다.
성찬례는 과거 구원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화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오늘 성찬례를 통해 현실화고 오늘은 영원이 됩니다. 그리하여 기억과 감사로 바치는 성찬례의 은총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의 두려움을 없애니 그대로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미 2천년전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서 말씀안에 성찬례 말씀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얼마나 뿌리 깊은 전통의 가톨릭 교회인지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미사은총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천년전과 똑같은 파스카 예수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 현존하셔서 당신 사제를 통해 친히 성찬례를 집전하십니다.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영원한 현재의 구원을 살게 하는 성찬례 은총입니다.
셋째, 섬김과 나눔의 성찬례입니다.
성찬례의 영성은 섬김과 나눔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파스카 예수님께서 미사를 집전하는 장면을 상징합니다. 황량한 광야인생중에 지친 이들이 흡사 생명의 샘터이자 오아시스인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형국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모습은 그대로 섬기는 모습으로 계시됩니다. 온전히 우리를 섬기러 오신 참 겸손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주신후 본격적으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대로 미사로 하면 전반부 말씀전례같습니다. 말씀을 경청하면서 이미 시작된 영육의 치유가 성체를 모심으로 완결될 것입니다. 복음 후반부 나눔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마치 인류의 영원한 꿈인 대동사회大同社會, 하늘 나라의 실현같습니다. 궁극적으로 이런 세상을 지향 성찬례입니다. 아, 이런 파스카 잔치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바로 하느님이 꿈꾼 세상이요 예수님을 통해 현실화된 하늘나라의 꿈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과제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 하늘의 빵인 성체도 함께 나눠야 합니다. 정말 큰 죄는 혼자서 먹고, 갖고, 누리는 독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어려울 것도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나부터 섬김과 나눔의 삶에 충실하면 바로 그것이 성찬례의 삶이요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혼자 꾸면 꿈이지만 함께 꾸면 현실이 되니 바로 이 거룩한 공동미사전례은총입니다.
넷째, 일치와 평화의 성찬례입니다.
성찬례의 빛나는 은총의 선물이 바로 공동체의 일치와 평화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일치와 평화라면 사람이 하는 일은 분열과 불화와 갈등입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데 작금도 계속되는 현실입니다. 나라든 가정이든 내적분열로 망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무리 작고 약해도 내적으로 일치와 평화의 상태에 있으면 누구도 다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짜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고 분열을 조장하는 이들입니다. 참으로 내적일치와 평화를 증진시키는 성찬례의 은총입니다.
사상누각, 모래위의 집이 아니라, 주님 바위 위에 일치의 공동체라는 집을 짓게 하는 성찬례의 은총입니다. 성찬례 미사가 아닌 도대체 세상 그 무엇이 이렇게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일치시킬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서로간 형제들로 만들 수 있겠는지요! 놀랍지 않습니까? 2017년 이날 대축일 미사때 프란치스코 감동적인 강론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성체성사는 추상적인 기억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해 살아 있는 기억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DNA’안에 새겨져 있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일치의 성사, 평화의 성사입니다. 이 일치의 빵(성체)이 다른 이를 지배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자기 자신만을 위해 독점하려는 탐욕으로부터, 불화를 조장하고 비난을 퍼뜨리려는 마음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해 주시길, 또한 우리가 경쟁의식을 버리고,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않으면서 서로 사랑하는 기쁨을 주시길 빕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더욱 깊이 마음에 와닿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활짝 계시된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이 거룩한 성찬례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찬례의 삶을 살게 하며 날로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끝으로 2007년 써놓고 애송했던 “온 세상 제대로 삼아” 자작시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신다.
산山 가슴
활짝 열고
온세상 제대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고
미사를 드리신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리신
둥글고 커다란
찬란한 태양 성체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
태양 성체 모시고
태양 성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아멘.
'주춤 주춤' 루카 9장 11ㄴ~17
예수성심 김연희마리아 수녀님
'물고기 다섯개 빵 두개가 있습니다'
성지순례나 여행은 걷는 경우가 많기에
가방에 무엇이든 먹을것을 넣고 다닙니다
내가 목 마를때, 배고플때 먹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준비성이 없는 사람도
자신이 필요한 것은 챙기는게 본능입니다
'목이 마른데 혹시 물 있나요?'
'배가 고픈데 먹을것을 줄 수 있나요?'
내 주머니에 들어 있지만 갈등이 됩니다
원하는것을 주고 나면, 나는 이 시간 이후로
목마름과 배고픔을 견뎌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수많은 군중들과
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보며
사랑의 나눔이 가능한지 물으십니다
주춤 주춤하다 나눔의 기회를 놓치죠
그 가운데 용기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이거요' 하며 내놓습니다
기적은 나눔에서 일어납니다
내게 담아주신 것을 기꺼이 내어놓을때
나를 통해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당신의 가방을 열어 주는것입니다
'다 비우면 화수분처럼 채워주십니다'
화수분? 재물이 끝없이 나오는 것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를 마무리하며
진효준 요셉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오늘날 각종 도전과 위기에 직면한 가정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그 해결책을 함께 모색하고자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첫 번째 주제로 ‘가정’을 선택하는 놀라운 행보를 보여주십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복음화의 첫 단계이며 핵심 열쇠가 바로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의 가정 기본이 되는 ‘작은 교회’인 가정이 성화되지 못한다면, 교회도 자연스럽게 존재 자체의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과 교회는 각자도생이 아닌 동심 협력을 지향하는 관계입니다. 즉 가정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여 복음 선포의 주춧돌 역할을 수행하도록 이끌어 주는 ‘작은 교회’이며 ‘교회의 길’입니다.
2016년 4월 8일 발표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사랑의 기쁨』은 2014년과 2015년에 ‘복음화의 맥락에서 본 가정에 관한 사목적 도전들’이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결과를 골자로 교황님이 가정 사목의 과제와 방향을 제시한 후속 문헌입니다. 교회가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주제로 온전히 가정과 관련된 문제를 성찰하고 방향을 모색하려 했다는 것은 가정에 대한 교회의 사목적 관심이 높다는 사실의 방증으로 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20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삼종기도 자리에서 『사랑의 기쁨』 반포 5주년을 맞아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를 선포했습니다.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는 가정의 사랑에 관한 교황 권고 반포 5주년인 2021년 3월 19일부터 제10차 로마 세계가정대회가 열리는 2022년 6월 26일까지 특별히 이 권고를 깊이 성찰하고 숙고할 기회를 열어 권고가 지닌 풍요로움을 확실히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가족 사랑을 성찰하고 이를 기회로 가정을 성화하자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느덧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의 마무리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가정에 관한 복음은 혼인과 가정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친교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은총을 그리스도께서 선사한다는 소식입니다. 이처럼 가정에 관한 복음은 가정의 여정이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소상히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의 가정을 성화시키는 결정적 동인입니다.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를 갈무리하며 우리가 꼭 상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사랑과 자비의 절정인 하느님이 우리의 삶의 여정 안에서 언제나 동반하여 한없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성경이 전해주는 삼위일체와 사랑의 친교
이승환 루카 신부님
‘삼위일체’란 하느님 안에 세 위격(位格)이 있다는 표현입니다. 위(位)는 자리를 뜻하는 한자입니다. 굳이 이렇게 표현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의 기록 때문입니다. 성경 안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따로 등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을 위해 삼위일체 용어를 만든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이론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존재 모습’을 표현한 용어일 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도 삼위일체라는 말은 직접 언급되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강조되는데, 하느님께 구별되는 위격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그 계시를 준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분이신 하느님을 복수 대명사로 표현한 경우(창세 1,26)와 ‘말씀’, ‘영’, ‘지혜’라는 말로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삼위일체 신비가 예수님의 탄생 예고 때(루카 1,35 참조)잘 표현되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는(루카 3,22 참조)삼위께서 동시에 현존하시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실 때(마태 28,19 참조)세 위격을 분명히 언급하셨고, 특히 예수님께서 수난이 임박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요한 14,15-31; 16,5-15 참조)과 제자들을 위하여 바치신 기도(요한 17장 참조)에서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무도 잘 알려진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 묵상하며 백사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어린아이가 모래성을 쌓고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열심히 퍼 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아이와, 삼위일체 하느님을 머리로 이해하겠다는 나 자신 중 누가 멍청한 자인가?” 하고 자문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삼위일체 하느님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아들의 사랑 또한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따르셨고, 생명까지도 바치실 수 있었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두 분 사이를 오가는 완전한 사랑의 움직임은 성령이십니다. 이처럼 삼위의 세 위격은 가장 완전한 친교와 상호 증여로 살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하시며 우리를 삼위께서 이루시는 완전한 사랑의 일치에 늘 초대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삼위일체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하느님의 백성”(『교회 헌장』 4항)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서로 일치하며 산다면, 삼위일체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친교가 부족한 교회는 그 심장에 사랑이 식어 있다는 표지입니다.
복음화와 습
오지섭 요한사도 (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고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복음화입니다. 너무 흔하게 사용하다 보니 본래의 의미를 잊어버린 채 그저 구호(?)처럼 습관적으로 되뇌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느 회사에서 직원들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자동적으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교육받는다고 하는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복음화라는 말도 그런 느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됩니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에 반복하여 강조할 필요는 있지만, 자칫 내면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형식화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가 신학자는 아니지만, 종교의 기본적인 의미 안에서 복음화의 진정한 뜻을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저의 성찰 내용이 본격적인 교리신학에서의 해설과 다른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은 내면 차원의 의미로서는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 의미를 지니는 복음화 개념이 형식화로 퇴색되지 않고 본래 생명성을 더 잘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복음화’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복음(福音)’과 ‘화(化)’의 두 단어 결합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진리, 하느님의 가르침을 뜻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화’는 변화의 의미입니다. 둘을 결합하여 복음화는 ‘하느님의 진리에 의한 변화’ 또는 ‘하느님의 진리로(하느님의 진리에 맞게)변화’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주어는 하느님의 진리, 동사는 변화라는 점은 드러났는데 변화의 대상인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체 문맥을 고려하면 목적어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과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진리에 의해 인간 내면과 세상이 변화하는 것, 또는 인간 내면과 세상이 하느님의 진리로(하느님의 진리에 맞게)변화되는 것이 복음화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복음화의 기본 의미는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보편적 의미와 일치합니다. 여러 종교의 내용을 비교 연구하는 종교학에서는 인간에게 종교가 지니는 핵심적인 의미를 ‘초월 추구’로 설명합니다. 초월적 진리에 따르는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현세적 가치 혹은 질서와는 전혀 다른(그 너머)의 초월적 진리를 제시해주고, 초월적 진리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 의미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데 초월적 진리에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이전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 현세적 가치와 질서를 좇는 삶을 살았다면 초월적 진리를 만난 이후에는 전혀 다른 삶,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았던 것,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충실한 사도 바오로로 변화된 것을 떠올려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결국 복음화는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 하느님의 진리에 부합하는 인간 존재로 전환을 뜻합니다. 이렇게 종교의 기본적 의미와 연결할 때 복음화의 의미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복음화의 기본 의미를 충분히 성찰했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가 있습니다. 관건은 어떻게 복음화를 실현하느냐입니다. 복음화가 삶의 전환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짐에 따라 복음화는 단지 아는 데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가 실천적인 삶의 전환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안 이상 이제 복음화는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구호에 그칠 수 없습니다. 너무 쉽게 말해왔던 복음화에서 엄청난 무게의 압박감을 느끼게 됩니다.
압박감과 곤혹스러움은 삶의 전환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오랜 기간 굳어져 온 나의 삶이 전혀 다른 방향의 삶으로 전환되는 것은 어려운 문제 정도가 아니라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삶의 전환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돈오(頓悟), 즉 단박에 깨달음이 이루어짐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오의 의미가 단순히 시간적 의미에서 한순간에 갑자기 깨달음이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돈오에서 강조하는 것은 깨달음의 완전성 혹은 철저함입니다. 깨달음은 한순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화시키는 완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이 갑자기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삶의 전환, 즉 복음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 그리고 점차적인 변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의미를 유교에서 강조하는 습(習)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 습은 ‘지속적인 익힘’의 의미로 강조됩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불역열호(不亦說乎)’ 구절에서 익숙한 개념입니다. 유교에서는 궁극적 완성의 경지, 즉 군자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인간과 세상에 관한 여러 진리를 공부하도록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공부하는 진리를 매일 일상의 삶 속에서 반복하고 지속해서 익히는 일입니다. 익힘(習)의 노력이 없으면 공부한 진리는 단지 머리에 머무는 형식적 지식일 뿐 내 삶을 변화시켜주지 못합니다. 일상 안에서 지속해서 익힘으로써 진리가 온전히 나의 것으로 내면화될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온전히 초월적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결국 복음화에서 핵심은 ‘습(習)’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머리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일상의 삶 속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익혀가는 것이 복음화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지속해서 익히다 보면 하느님의 진리가 점차 나의 것으로 내면화되고, 어느 순간 온전히 하느님을 닮은 인간 존재로 변화될 것입니다. 복음의 생활화라는 것 역시 이러한 지속적 닦음의 의미이지 않을까요?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기다리기
김상균 라우렌시오(백석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
저는 15년 동안 한 본당에서 청년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강요도, 어떠한 의무감도 없이 자발적으로 제가 좋아서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분에 넘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아직도 청년들과의 첫 만남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숫기가 없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의 간절한 눈을 보았을 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 좀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세요. 오래오래 함께 해 주세요’ 이렇게 시작해서 처음에는 사목자의 마음으로, 저의 음악적인 능력을 총동원해서 성가 연습을 준비했고, 성가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도 준비했습니다. 또 좋은 성가 공연에도 초대하고, 성가 경연대회도 준비시키면서 좋은 것을 주려고 애를 썼고, 가끔 있었던 뒤풀이도 참여해 청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좋은 결과와 보람도 있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겉으로만 아름답게 보이는 청년 공동체의 모습에 만족하고, 여기까지가 나의 소임이고 몫이라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그런데 점점 해가 가고 아이들과 더 깊게 소통 하면서, 청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경험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정 생활, 학창 생활, 취업 준비, 직장 생활, 연애,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청년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의 다양한 경험담을 들으면서 제가 그동안 감지하지 못했던 어두운 이면이 많이 있었고, 교회가 과연 이들의 삶에 어떻게 관여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의 일주일이 심히 궁금해졌고 이렇게 묻고 싶어졌습니다. ‘잘 지냈는지, 얼마나 바빴는지, 힘든 일은 없었는지, 지금은 괜찮은지…’ 성당에서 쉬고 위로받아서 일주일 동안 살아갈 힘을 내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기도가 필요한 청년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기도 하고, 냉담 중인 청년에게 살가운 문자도 날리고, 생일과 축일도 기억해주고, 오랜만에 성당을 찾은 청년에게는 들어올 때부터 반색하는 눈빛을 날리고, 그 청년이 좋아하는 성가로 선곡도 했습니다. 청년 성가대에 있다가 결혼한 청년, 취업 문제로 다른 곳으로 본당을 옮긴 청년들에게도 가끔 문자나 전화를 합니다. 그냥 보고 싶고 놀러 왔으면 하고, 궁금해서 그럽니다. 한참 전화로 이런 수다를 떨다가 제가 아무런 압박을 주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냉담 풀고 성당 갈게요.” 함께 열심히 준비한 성가를 봉헌하고 감동했던 추억, 함께 울고 웃었던 추억, 순간순간 찾아온 소중한 신앙체험들. 이 모든 것들이 청년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살아 움직이고, 나이가 들어 새로운 신앙공동체에서도 이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아이들에게 15년 동안 무수히 많은 롤링페이퍼를 받았습니다. 가장 많이 본 내용은 이렇습니다. ‘선생님! 오랫동안 우리 곁에 계셔주세요’ 그래서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청년 사목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기다리기···’
연쇄반응
남창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어느 날 사제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늘 막히는 도로였습니다. 그런데 한 대의 승용차가 갑자기 버스 앞으로 끼어들었습니다. 버스기사는 속도를 내서 다시 승용차를 추월하더니 그 차를 가로막고서는 버스를 세웠습니다. 휘청거리는 버스 안에서 승객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하더니 다들 불안해하며 내릴까 말까를 고민했습니다. 기사님은 버스에서 내려 승용차 운전자에게 고성을 지르고는 씩씩거리며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그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버스에 탄 수십 명은 불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불과 몇 분 전만해도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 누군가 때문에 기사님은 화에 사로잡혔고 승객들은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펜데믹의 터널을 빠져 나오면서 우리들은 우리가 얼마나 서로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인지 뼈저리게 체감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어 살고 있는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는지도 말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서로에게 주는 영향들을, 좋은 영향은 하얀 색으로 부정적인 영향은 검정색으로 표시해서 볼 수 있다면 우리들 삶 전체의 색깔은 어떠할까요.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기적이 제자들의 손과 군중들의 손으로 모두에게 전달되어 성취되었듯, 성체 안에서 샘솟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들이 접촉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로 전달되길 소망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시복시성 기원미사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 9,16-17)라는 기사를 전합니다.
이 기사에 이어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3-26)라고 전해 주십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체와 성혈의 제사를 봉헌하도록 하시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희생제사를 기억하고 우리의 생애를 통해 성체성사의 예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온몸으로 성체성사의 예를 행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기억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순교하신 이후에, 이 땅에 방인 사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뿐이셨습니다. 그분은 한국천주교회 역사 안에서 ‘땀의 순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부님은 한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주님의 생애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박해를 피해 남들이 지나가지 않는 산길을 통해 하루 종일 숨어서 교우촌을 찾아가, 밤새 고해성사를 주고 성체성사를 거행하시고는, 동트기 전 새벽녘에 다음 교우촌으로 향하기를 반복하시다가 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6월 15일이 신부님께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1777년 주어사의 천진암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던 조선 학자들은 당시 ‘서학’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다가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고, 그 중에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 중국 북경의 천주교회를 찾아가 세례를 받으면서 한국천주교회는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새로운 문화나 종교를 이단으로 여겨 배척하였으므로, 한국 천주교회는 창설하자마자 1791년부터 박해를 받았고, 이 박해의 칼날을 피해 교인들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남몰래 교우촌을 이루어 신앙생활을 계속하며, 선교사제의 입국과 종교의 자유를 꿈꾸었습니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마침내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1821년 3월 1일, 충남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1835년 말, 박해 중에도 한국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모방 베드로 신부님이 입국하여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다가, 최경환의 집에서 15세의 소년 최양업 토마스를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합니다. 이어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김대건 안드레아가 선발됩니다.
이들은 1836년 12월 3일 순명을 서약하고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여 신학 공부를 하다가, 1837년 11월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로 필리핀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다가 돌아옵니다. 1842년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한국 천주교회와의 연락을 기대하고 최양업과 김대건을 통역자로 프랑스 함대에 승선시키지만, 계획이 바뀌어, 만주의 소팔가자로 가서 조선 대목구의 페레올(Ferreol) 요한 부주교님에게 수업을 받았고, 1843년 최양업 신부님은 리브와 신부님을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성모성심회에 가입합니다. 그러던 중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고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님께 이런 서한을 보냅니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1844년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은 후, 김대건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님,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님과 함께 한국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님과 함께 귀국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1846년 동료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소식을 알립니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며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 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서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최양업 부제는 귀국을 포기하고,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하여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합니다.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한국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합니다.
상해로 옮긴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장가루(금가항) 성당에서 마레스카(Maresca) 주교님에게 사제로 서품됩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바로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님 아래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1월 매스트르 신부님을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하여, 12월 3일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페레올 주교님과와 다블뤼 신부님을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합니다.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천여 리를 걸어다니며 신자 3,815명을 방문합니다. 진천 배티를 중심삼아 11년 6개월여 동안 사목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합니다.
최 신부님은 전국의 신자들을 순방하며,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도록 얻어맞기도 합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님은 몇몇 신자들과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님이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긴 채, 르그레즈와 신부님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한국 천주교회를 부탁합니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으신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신부님은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마친 후, 베르뇌 주교님께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걸려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40세의 일기로 주님께 돌아가십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님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님에게 최양업 신부님의 신심과 열심, 평소에 보여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는 서한을 보냅니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 신부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후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님이 이 소식을 듣고서는 즉시 최 신부님에게로 달려갔지만,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고 합니다. 최 신부님이 선종한지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님은 성대한 장례미사를 올렸고, 그 시신을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해 기도하며, 성인 기적 심사 통과를 위해, 최양업 신부님의 이름을 부르며 전구기도를 청하며 쾌유하시는 분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의 두 번째 사제이며, 땀의 순교자이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하루 빨리 시복의 영광을 누리시기를 간구하면서, 우리도 우리 생의 순간에,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성체성사를 기억하고 우리 삶으로 재현하며,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갑시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에서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마음이 초조해진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따르던 수천명의 군중들을 돌려 보내서 저마다 자기가 주변 마을에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해달라고 간청드린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과 제자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제자들의 간청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자들도 당연히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달리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주 의외의 대답을 해주신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답을 듣고 황당해 했을 것이다. 자기들의 주머니 사정을 빤히 알고 계시는 분께서 저런 대답을 하시니,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상 물정도 모르시는 분은 아닐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한다. "저희에게는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서 축복하시고, 도로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 자리에 있던 수천명의 사람들이 제자들의 손에서 받은 빵과 물고기로 모두 배불리 먹었고, 이후 남은 빵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애초에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제자들이 충분한 양의 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다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작은 것을 봉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봉헌을 예수님께서 축복해주시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 올 해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였고, 또 이 전쟁의 여파로 앞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일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있다.
그 밖에도 각종 매체를 통해 듣는 기후 위기에 대한 소식이나 세계 곳곳에 사는 가난한 이들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소식들은 우리의 마음을 괴롭힌다.
이 모든 현실 앞에서 "한 명의 소시민일뿐인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무기력한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라는 제자들의 호소는 세상의 비극을 보며 슬퍼하는 우리 각자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포함하여 자기들 13명도 먹기에 모자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꺼이 내어놓는다.
머리로 계산하고 내어놓은 것이 아니라, 그 작은 가진 것이라도 나누어 먹으려고 마음으로 내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마음에서 기적이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크기나 수량을 보고 당신의 업적을 이루지 않으신다. 그분이 당신의 신비를 이루시는 제물은 작지만 구체적인 봉헌이다.
마치 성체성사를 이루는 빵과 포도주처럼.
가브리엘 천사 앞에 선 나자렛 시골 소녀 마리아처럼.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나자렛 시골 사람 예수님처럼.
우리의 작지만 구체적인 봉헌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기적의 시작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내어 줄 수록 우리는 더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이 위대한 역설이 그리스도교의 영원한 진리이다.
겨자씨가 되자.
누룩이 되자.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는 과부가 되자.
땅에 떨어져 썩고 사라져서 생명을 틔우는 한 알의 밀알이 되자.
가난한 제자들의 손에 들린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되자.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리라.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 9,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삶의
모든
희노애락과
함께하는 삶의
미사성제이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대축일이다.
사람과
성사(聖事)는
일상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사랑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변화는
참된
실천이다.
빵과 포도주의
변화는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난다.
실천과 투신
구원은
생명의 진정한
가치이다.
생명으로 오신
하느님께서
생명을 살리신다.
보이지 않던
하느님께서
성체와 성혈로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의 삶이란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사랑의 자리이다.
사랑의 빵
사랑의 포도주를
먹어야 사는
우리들이다.
하느님을
통하여
모든 것은
사랑이 된다.
빵과 포도주의
소명이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소명이다.
모두를
배불리 먹이시는
하느님께서는
행동하시는
변화이시다.
참으로 소중한
하느님 생명을
먹고 사는
우리들이다.
그러기에
성체와 성혈은
감사이며
실천이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매일매일
빵과 포도주가
되어 오시는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다.
모두를 살리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생명으로
생명을
구원하신다.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항상 자기 몸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에 다녔던 성당에 대한 기억은 엄청나게 컸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신부가 되어 가보니 너무나도 작은 성당이었습니다. 전교생 숫자가 5,000명이 넘었던 초등학교의 운동장은 어마아마하게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가 본 초등학교 운동장은 너무나도 좁았고 이런 곳에서 5,000명 넘는 학생들이 함께 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너무나도 넓다고 생각했던 도로는 지금 너무 좁아서 늘 길이 막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때는 어리고 작은 아이의 몸이었고, 지금은 훌쩍 커버린 어른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이의 몸에서 커버린 어른의 몸이 되자 전혀 다른 새로움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관점이 변하면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펴보게 됩니다. 관점의 변화가 자세히 보게 하고 이로써 새로움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지루하고 당연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또한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형편없다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나의 관점을 바꿀 때입니다. 어쩔 수 없다면서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면서 새로운 삶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힘을 가져다 줄 것 같은 돈과 명예만을 쫓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를 통해서 얻으려는 쾌락에만 집중하려 하고, 이 쾌락에서 새로움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오히려 더 큰 쾌락을 추구하면서 금세 실망하고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러한 순간의 만족에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행복을 따를 수 있도록, 그래서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요구하십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직접 내어주면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십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세상에 집중하기보다 주님께 집중하는 관점의 전환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런 점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요. 배고파하는 그들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지금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세상만을 바라보던 관점에서 주님만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큰 위로를 느끼면서 기쁨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아이리스 머독).
다른 관점으로 산다는 것.
산수 문제 하나 내 보겠습니다.
‘28 X 7’을 종이에 적어서 계산하지 마시고, 암산을 해보십시오.
물론 곧바로 암산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구구단을 넘어가는 숫자가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저절로 눈을 위로 치켜뜨며 생각하게 됩니다. 눈 위로 문제의 답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우리 몸 자체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몸도 이렇게 다른 관점으로 보라고 계속해서 가리키는데,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해 다른 관점을 갖지 못하는 내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 볼 때입니다.
그 다른 관점이 주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며, 세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환하게 펼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준비하며, 우리 교회는 성체성사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도 중요하겠습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크게 강조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선교 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
존경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001년 봉헌생활의 날을 맞아, 모든 사제, 수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개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과 사도적 활동의 원천이자 정점으로서 우리가 매일 기념하고 경배하는 성찬례 안에서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그분을 만나고 관상하십시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성체성사와 선교, 그리고 일상 안에서의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연결시키셨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 식탁에 나아가면 선교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적 노력은 그리스도인 삶의 성찬적 모습의 한 부분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25차 세계 총회 문헌에서는 매일의 무미건조하고 밋밋한 성체성사를 탈피하라고 강조합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기쁨, 창의성, 열정으로 거행하십시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참여하다보니, 어느 정도 습관화되고, 타성에 빠지게 되는 성체성사야말로 정녕 은혜로운 성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성이 영원한 신성에 참여하는 길이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이 하느님성, 그리스도성, 신성, 영원성에 완전히 참여하고 일치할 수 있는 성사, 그래서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맛보는 성사, 우리를 영원히 살게하는 축복의 성사가 바로 성체성사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체성사는 우리 인간 각자의 영혼 성장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건네시는 종합선물세트입니다. 왜 종합선물세트인가 한번 짚어볼까요?
성체성사 시작 부분의 참회 예절은 우리의 발걸음을 한없이 자비하시고 따뜻하신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의 전례에서는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오시며, 세파에 지친 우리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건네심으로 충만한 위로와 격려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의 파스카 신비가 재현되는 성찬의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한 부분 한 부분 그 무엇 하나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소중한 성체성사이기에, 우리가 조금만 더 잘 준비한다면, 조금만 더 정성을 기울인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 역사상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강론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체성사가 시작되기 전 천사들은 우리를 위한 청원기도를 하려고 기다립니다. 바로 이때가 천상의 은총을 얻기에 가장 좋고 유리한 시간임을 천사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의 성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성체성사를 기쁨과 연결시킵니다.
“만일 그대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체성사를 봉헌하십시오. 성체성사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선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요셉 과드리오 신부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그대가 매일 미사 경본을 덮을 때마다 그대의 미사는 다시 한 번 그대의 생활 안에서 새롭게 시작됨을 기억하십시오.”
성체성사가 단순히 전례행위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겠지요. 성체성사의 정신, 영성, 교훈이 하루 온 종일 우리 삶 가운데 자주 기억되고 반복되도록 노력하라는 부탁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했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성체성사의 핵심정신인 희생과 자기증여로, 선교에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가난한 이웃들에게로 버림받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로 우리를 파견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성체성사를 거행했다면 우리는 편안하게 지낼 수가 없습니다. 성체성사의 중요한 요소인 화해와 용서에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포기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촉구합니다. 결국 우리를 바보처럼 살게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영성체를 했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지연이나 학연, 빈부격차, 인종이나 국가 등등의 모든 장벽을 허물어뜨리게 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세상 끝으로, 분쟁지역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합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의 의미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알렉산더 대왕이 친한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매우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였습니다. 세상에 몇 안 되는 놈들이라고 했습니다. 한가할 때면 사냥을 즐겼던 대왕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은 그 사냥개들을 데리고 의기양양 첫 토끼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개들은 사냥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습니다. 달아나는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만 있었습니다. 대왕은 화가 나서 사냥개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대왕은 씩씩거리며 돌아와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를 불러 호통을 쳤습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쓸모없는 개들을 내게 왜 선물했는가! 그 밥만 축내는 개들은 내가 모두 죽여 버렸네.”
친구는 대왕의 말에 크게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대왕이시여, 그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기 위해 훈련된 개들이 아닙니다.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오랜 시간 훈련받은 무척 귀한 개들입니다.”
친구의 말을 듣던 알렉산더 대왕의 얼굴은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굳어져버렸습니다.
선물은 유용성이 있어야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선물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것으로 사람의 영혼을 잡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 알렉산더 대왕처럼 선물을 가치를 몰라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대부분은 우리가 호랑이와 사자를 잡는 선물이 되어야 하는 데도 토끼밖에 잡을 수 없는 선물밖에 드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성당에 봉사자들이 많이 있지만 어떤 봉사자들은 수천 명의 신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하는가하면 어떤 봉사자들은 자리만 지키고 있는 듯한 봉사만 합니다. 그 차이는 물론 그분들을 옳게 사용하지 못하는 성직자들의 부족함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을 봉헌할 때 어떤 사람은 온전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부족한 모습으로 봉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나옵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인간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온전한 봉헌을 가지고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숫자 다섯은 성경에서 그리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습니다. 다만 물고기 숫자 둘이 합쳐지면 그것이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됩니다. 이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우리 자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잡은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나 되기 때문입니다. 열둘은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교회입니다.
다섯은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 자신을 뜻합니다. 창세기 다섯 째 날 하느님은 하늘과 물속의 온갖 동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과 물고기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길들여질 수 없는 자아의 본성, 육체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섯을 오감, 즉 육체적 본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본성에 사로잡힌 제물일 때 그것들로는 새 백성을 창조할 도구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 다섯 임금이 동맹을 맺고 시띰 골짜기 곧 ‘소금 바다’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소돔에 살고 있던 롯을 잡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삼백십팔 명을 불러 모아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함께 부녀자들과 다른 사람들까지 도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마중 나오는 살렘 임금 멜키체덱에게 십분의 일을 봉헌합니다. 육체적 욕망을 이겼을 때 온전한 봉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육체적 욕망을 이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성자와 성령입니다. 하느님은 소돔 땅에 있는 롯을 구해오라고 두 천사로 상징되는 성부와 성자를 보내십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성령을 받고 153마리나 되는 인간을 잡는 어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에 말씀과 진리가 함께 봉헌되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카인과 아벨은 그들이 바치는 제물에서 차이를 보였습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바쳤고 아벨은 가축을 바쳤습니다. 땅의 소출은 그저 숫자 다섯(5)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소출은 양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까지 더해 바쳤습니다. 두 가지 조건이 더 충족된 것입니다. 맏배는 신약으로 따지자면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 있고, 굳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 두 가지가 더해져 함께 바쳐질 때 하느님께서는 그 제물을 즐겨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님께 드리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의 제물이 되었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물고기 두 마리가 나에게서 하시는 드러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한 중년의 남자가 미용실에서 드라이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부인 테레사는 몇 년 전 뇌졸중에 걸려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테레사는 얼마 전, 한 미용실에서 머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녀의 머리가 미용실에서 봤을 때처럼 예뻐 보이지 않았습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테레사는 직접 머리를 할 수 없었고, 자신의 몸에 실망했습니다. 앤드류는 테레사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부인을 위해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합니다. 바로 부인의 머리를 예쁘게 하려고 드라이하는 법을 익히기로 한 것입니다.
부인이 머리를 했던 미용실로 다시 찾아가 스탭에게 드라이 하는 법을 직접 배웁니다. 결혼생활 45년 만에 앤드류는 처음으로 부인에게 처음으로 머리를 해 줍니다.
“제 부인 테레사는 뇌졸중에 걸렸습니다. 제가 일하러 밖에 있을 때 테레사는 우리 가족을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했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죠. 연인 관계를 위해서는 두 사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출처: ‘할아버지가 왜 여자 머리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걸까?’,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뭐가 필요한지 아셨습니다. 이것은 관심입니다. 그 관심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한 기술을 익힙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말씀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좋은 제물이라면 먼저 신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필 것이고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있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카나의 혼인잔치 때 혼인잔치에 참석한 이들이 필요한 것을 먼저 눈치 채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로 달려가셨습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성령과 말씀을 포함한 주님께 드리는 가장 완전한 제물이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성모님을 통해 지상 교회에 포도주라는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그렇게 열두 광주리인 교회가 충만한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우리 안에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우리는 교회에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성령은 관심이고 예수님은 그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성령과 예수님은 이웃을 향해 나에게서 솟아나 이웃에 대한 관심과 이웃을 채워주기 위한 노력이 솟아나게 만듭니다.
빵 다섯 개는 나 자신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나에게 오신 성령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을 봉헌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섯 만이 아니라 일곱을 봉헌해야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봉헌된 우리들을 즐겨 받으시고 세상을 배불리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열두지파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았고, 부족한 제가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28년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니 만 번 이상의 미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모든 미사가 거룩하고, 소중하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미사가 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았던 시나이산에서 드렸던 미사가 기억납니다. 새벽 2시에 시나이산을 올랐고, 붉게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면서 함께 갔던 순례자들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십계명이 삶의 지침이었다면, 그날 받아 모셨던 주님의 성체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임종을 앞둔 형제님을 위해서 드렸던 미사가 기억납니다. 형제님은 성체를 모시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수녀님께 부탁해서 형제님을 위한 미사를 봉헌했고, 성혈을 영해 드렸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 받아 모신 성혈은 형제님에게는 큰 은총이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그날의 은총을 생각하며 지상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수도원 미사를 봉헌하면서 제의 방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의 사제여! 처음 드리는 미사처럼, 마지막으로 드리는 미사처럼, 유일한 미사처럼 미사를 봉헌하십시오. (Priest of Jesus Christ! Say every Mass, as if it were your first Mass, as if it were your last Mass, as if it were your only Mass! )”
성전에서, 성지에서, 가정에서 미사를 봉헌하였지만, 또 다른 곳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거리의 미사입니다. 용산 참사의 현장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거리의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강정 마을의 평화를 위한 미사가 거리에서 봉헌되었습니다. 세월호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거리의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격식과 전례의 분위기는 다를지라도,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지친 이들의 위로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절망 중인 이들에게 희망이 되셨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교인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교회가 없어서 대학교의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인들이 늘어나서 대학교의 강당에서는 더는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는 교회를 신축하기 위해서 200억을 모금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기 위해서 200억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늘어난 신자들은 4곳의 교회로 나누었고, 다른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기 위해서 마련한 200억 원을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탈북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베트남, 러시아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공장을 세웠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의 공동체는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알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그대로 이웃들의 발을 씻겨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광야에서 지치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배부르게 하는 ‘만나’보다는 영혼을 살리는 ‘성체와 성혈’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면 우리는 영적으로 충만해집니다.
어릴 때, 물을 퍼 올리던 펌프가 생각납니다. 펌프에는 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부어주고 펌프질을 하면 수백 수천 배의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어린 저에게는 참으로 큰 체험이었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이지만 기꺼이 내어주니, 모든 사람이 마시고도 남는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성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마중물’이 되시어 수많은 신자의 가슴에 용기와 생기를 주고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축복을 받았으면 나누시기 바랍니다. 엄청난 은총이 되돌아올 것입니다. 바다의 물이 마른 적이 없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모두 아낌없이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대축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어제 시민들 속에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도시숲을 지켜야 한다는 시민들의 열망에 함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국수를 마련했고, 삶은 달걀을 준비하고, 음료수, 우유 등을 준비했습니다. 앉을 깔개도, 무대장치도, 음향시설도, 문화제 행사도 시민들이 준비했습니다. 저녁식사를 놓치고 달려온 시민들의 배고품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이들도 자리에 함께하며 배불리 음식을 먹고는 도시숲을 지켜야 한다고 발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뿌듯한 행사였습니다.
시민들 속에서 누군가 제자리 옆에 와 앉았습니다. 한 어머니가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아들이 고등학교 담임교사인데 학생이 자해를 하고 있어 해결 방법을 저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학생이 자해를 하는 것은 자기의 상태가 비참하고 황량함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행위라고 말하며 주변의 모두가 나서서 관심과 배려, 사랑을 베풀어 준다면 그 자해학생은 곧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며, 그 자해학생을 함부로 말해 비난하거나 따돌림해서 소외시킨다면 그 학생의 황량함은 극에 달해 더 비참해질 거라는 조언도 했습니다. 한 어머니는 아들에게 도움이 될거라며 저에게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오늘 복음(루카9,11ㄴ-17)은 오천명의 장정을 배불리 먹인 빵의 기적이야기 입니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습니다. 여자와 노인들을 포함시킨다면 군중의 수는 배가 될 것입니다. 군중들은 구원을 바라는 익명의 사람들입니다. 방금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을 본 이유로 군중들이 고침을 받으러 따라 나섰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하루종일 움직입니다. 마을과 촌락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이고 황량한 곳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배고푼 황량한 처지를 살피십니다. 구원이 필요함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지금 당장 직면한 배고품의 문제를 우선 해결해 주실 책임을 통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관심한 황량한 마음도 읽으십니다. 예수님은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당신이 뽑은 제자들의 배고품을 해결할 책임을 통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제자들은 방근 전에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도 관심이 없고, 군중의 처지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제자로 뽑혔다는 이유로 군중 속에 파묻혀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우쭐대며 서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기들 배고품에 연연하며 제발 좀 식사나 하고 또 보자는 속셈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군중이 제자들에게는 귀찮은 존재 정도로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황량한 마음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청합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9,1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들이 배가 고파하니 좀 관심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해결해볼 방도를 찾아 보라고 주문하십니다. 제자들은 방금 전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권능을 떠올리며 “자기들은 한계이니 주님께서 해결해 주세요” 라고 청을 다시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저 마움의 황량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제자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9,16-1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쉰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단합된 마음, 사랑을 나누고 싶은 형제애, 서로를 하랑하고 싶은 맘을 갖게 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의 군중과 뿌듯해진 제자들의 마음도 보게 됩니다. 그 작은 양식은 배불리 먹고 열두광주리에 모으게 됩니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의 기적을 우리 안에서 보게 됩니다.
가슴이 뛴다.
‘놀체인 양업 사회적기업협동조합’ 인가신청을 하게 되었다. 지난 봄에 뜻을 같이한 분들과 함께 인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빠졌다. 로고, 홈페이지, 앱 등도 만들고 홍보 준비를 하기로 했다. 인가기관은 교육부장관이고 인가까지 두달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 사회적기업협동조합은 ‘놀이체험인성학교’의 뜻을 담은 ‘놀체인’과 교육의 변화와 혁신을 위한 적극적인 방법으로의 좋은 일(양업)을 합한 브랜드이다.
‘체험이 훌륭한 교육이다.’ 이 시대는 ‘노는만큼 성공한다.’ 고등학교 시절 한 제자가 열심히 전국을 돌며 한옥을 보러 다니더니 졸업 후 한옥의 대목이 되겠다고 길을 나섰다. 나는 그 제자가 행복해 보였다. 자기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니 말이다. 공항 면세점을 돌아본 제자가 언어감각이 뛰어난 근무자들을 보며 나도 여러나라 말을 익혀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단다. 그 제자는 면세점에서 아이쇼핑을 한 것이 아니라 언어감각이 뛰어난 근무자들을 보고 언어공부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알게 되어 그 때부터 열심히 언어를 익혔단다. 그것도 세계봉사단체에서 봉사를 하며 생활언어를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요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문화제 거리축제, 시민연대 모임에 어린이들이 함께한다. 무대체질을 익혀간다. 당당한 어린이가 되어간다. 선생님은 길을 걷는 제자에게 ‘안목’을 갖게하는 안내자야야 한다. 지식전달자 시대는 지나고 있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오늘 제1독서(창세 14,18-20)에 아브람이 나오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 거행하던 예배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아브람의 조카 롯이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싸우러가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소돔 임금이 아브람을 마중 나왔던 것처럼(창세 14,17),
살렘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던 멜키체덱 역시 아브람을 맞이했습니다. “나의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라는 뜻을 지닌 멜키체덱이 제사 때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를 대접했다는 것은 피로에 지친 아브람과 그의 부하들에게 축하와 더불어 안전을 보장한다는 뜻입니다.
멜키체덱은 아브람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즉시 적들을 아브람의 손에 넘겨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는데, 이것은 멜키체덱을 사제로 인정하고, 그가 예배를 드리는 곳을 거룩한 장소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들에게 제물의 십분의 일을 주던 관습이 아브람 시대부터 내려오던 것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제2 독서(1코린 11,23-26)는 예수님께로부터 전승되는 성찬의 전례를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찬의 전례를 잘 가르쳐주었건만, 무질서하게 거행하던 코린토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면서(1코린 11,1-22) 바로잡아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찬의 전례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강조하면서 잘못된 성찬의 전례를 거행한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준다는 것은 모든 가정에서 가장이 실천하는 일입니다.
성찬의 전례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신 것은 성사적으로 빵을 당신의 몸으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빵은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갈라 2,20)와 똑같은 것입니다. 빵의 축성과 같은 모양으로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축복의 잔을 주시면서 예수님의 피로 맺는 계약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옛 계약을 어긴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한 어린양의 희생제사임을 강조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 빵과 포도주를 함께 마시는 이들이 예수님과는 물론 이웃들과 친교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현재화, 그리고 성령의 역사(役事)인 성사적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공동체 한 가운데 계시니 올바른 지향으로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라는 권고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면서 공동체의 일치와 친교가 잘 이루어져야 함에도 분열과 교만, 추태를 부리는 코린토 공동체를 질책하면서 바오로 사도는 성찬의 전례에 대한 근본적인 정신과 올바른 전승을 전해줍니다.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뒤에 우리가 외치는 것처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26절) 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재림을 기다리는 성찬의 전례에 합당하게 참여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며, 그분의 재림을 잊어버리는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가 9,11-17)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치유 뒤에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은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시편 23,5)라는 찬미가가 들리는 듯하고, “모든 육신에게 빵을 주시는 분이신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 136,25) 하는 찬미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모든 눈이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때에 주십니다.” (시편 145,15)라는 경탄의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속뜻은 말씀과 성찬의 전례, 그리고 장차 제자들이 해야 할 사명(자선: 13절)이 들어있습니다.
복음의 기적은 벳사이다라는 “황량한 곳”(12절),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한 곳인 광야에서 날이 저물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선교활동을 하고 돌아온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피정을 가셨는데, 그곳까지 군중이 따라왔습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 제자들은 예수님께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그들 스스로 먹고 잘 곳을 마련하게 하라고 약간은 철없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고 합니다.
무척 많은 수의 사람들(오천 명)을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신 뒤,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제목은 “빵의 기적”이라기보다 “빵을 나눔”, 혹은 미사라는 말이 더 적합합니다. 복음사가는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빵인지 물고기인지 아무튼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는데, 이는 늘 사랑으로 넘쳐서 충만해야 하는 교회의 풍요로운 모습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이 12광주리였다는 것이 기적이냐 아니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참여해야 할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통하여 풍요로움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하루 종일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빵을 떼어주시는 모습에서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듯이 (루카 24,13-35) 군중과 제자들은 하루 종일 하느님 나라에 대해 들었고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을 보았건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 먹을 것을 축복해주신 뒤 나누어주었으나 역시 당연하고 평범한 일처럼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치 매주일 미사에 참여해도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마치 모세처럼(탈출 16장), 엘리야(1열왕 17,14)나 엘리사(2열왕 4,42-45)와 같은 예언자처럼, 그리고 지친 이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었던 영원한 사제인 멜키체덱처럼 묘사합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의 식탁과 빵을 나눔이라는 성찬의 식탁이 강하게 표현됩니다. 한편 예수님 없이 제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오직 예수님과 함께 할 때 교회는 나눠주고 남은 게 12광주리가 된다는 풍요로움을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식탁에서 풍요로움을 체험하려면, 제자들처럼 할 것이 아니라, 말씀의 전례에서 예수님의 뜻을 잘 헤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찬의 전례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기 위해 힘을 얻는 잔치이며, 잔치에 참여한 모든 이가 기쁨으로 주님을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또한 주님을 알아보았다는 기쁨과 충만함 때문에 서로에게 축복(평화의 인사)을 빌어주는 뜨거움이 넘실거리는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코린토 교회가 보여준 무질서한 행동과 준비소홀(1코린 11장)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성체만 받아 모시는 성찬의 전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구원의 잔치인 미사의 참된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에 젖어들어야 합니다. 미사 때 읽혀지는 말씀들을 이해하고 자기 삶으로 증거하려는 다짐이 없이는 성찬의 전례의 참된 의미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기쁨의 잔치이며,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좋은 잔치에 참여한 사람은 함께 하지 못한 사람에게 그 잔치 분위기와 음식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사에 다녀와서 이웃에게 미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기적을 체험했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기적을 보았다는 표현은 고사하고 미사의 분위기, 강론, 그리고 성체와 성혈의 의미를 이야기해주지 (증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미사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도 미사에 참여한 사람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겠다는 다짐과 더불어 본당의 모든 이가 잔치 집처럼 흥겹게 들끓는 미사,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미리 읽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미사가 되도록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며, 교회를 살게 하는 거룩한 음식입니다.
<그저 함께 있음만으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고통 받는 벗들이 있습니다
신음조차 버거운 벗들이 있습니다
홀로 다시 설 힘없는 벗들이 있습니다
제 탓 없이 사람대접 못 받는 벗들이 있습니다
벗들을 사랑으로 안고 싶지만
그저 옆에서 바라보는 것도 힘듭니다
이들의 고통 한숨 소외감 억울함
한 마음으로 보듬고 싶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무너집니다
척박한 세상에 내던져진 벗들에게
금수 같은 사람들에게 짓찢긴 벗들에게
갖은 모함과 욕설로 망신창이 된 벗들에게
자그마한 힘과 따스한 위로가 되고 싶지만
이들의 아픔에 함께 함이 너무 고통스러워
이들의 울분에 함께 함이 너무 치밀어
이들의 눈물에 함께 함이 너무 서러워
차라리 이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싶습니다
차라리 이들을 마음에서 지우고 싶습니다
차라리 잊을 수 없는 이들을 잊기 위해
나를 혹사시키고 싶습니다
보잘것없는 작은 이 한 몸으로는
벗들을 짓이기는 악한 세상에
사랑과 정의 넘쳐나게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이들의 피눈물 짜내는 사람들을
참회와 속죄로 참사람으로 다시 나게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저 함께 있음만으로
벗들이 소중한 사람임을
거룩하고 장엄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저 함께 있음만으로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벗들이
이 세상 모든 것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그저 함께 있음만으로
다시 사람 사는 세상 만드는
다시 살 맛 나는 세상 일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기념하고 그 신비를 함께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을 함께 묵상하자면 오늘 복음에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오늘 성체 성혈 대축일 복음에 이 말씀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바로 당신의 살과 피, 곧 당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주시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구원의 삶의 예표가 되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기 시작할 때 바로 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시작되게 됩니다. 날이 저물어 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지만 제자들은 또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처럼 대개는 종종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 조건적인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먼저 내가 나눌 수 있는 상황이 되는지를 따져봅니다. 그리고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이 충분한지를 따집니다. 곧 나의 상황이 우선적으로 먼저 고려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나눌 수 있는 상황과 여건이 된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판단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나의 상황과 여건, 그리고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따져본 다음 최종적으로 실행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조건을 따지지 않으시고 그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인간적으로 볼 때 그러한 예수님의 결정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판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결정은 합리적, 이성적인 결정이 아니라 사랑의 결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때부터 기적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진정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루어갈 때 기적은 우리의 자리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러한 모습이 믿지 않는 이들이 바라볼 때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랑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순간 기적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고, 그것을 통해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위대함도 거기에서 드러납니다. 곧 제자들은 그 예수님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뜻을 함께 이루어가며 엄청난 조연 역할을 하면서 주님과 함께 기적의 동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전례와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역시 당신과 함께 기적을 이루어가는 동반자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9,13)
곽승룡 비오 신부님
오늘날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사회학적인 설명과 함께 해석하게 된다.만일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다면, 우리도 베고픔으로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더욱 많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고, 배고픈 자들은 그렇지 않다.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종종 돌아보아야 한다. 발전된 나라의 사람들은 배고픔과 좋지 않은 양육환경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앞에서 진실과 연민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이 세상에서 그런 인간애를 우리가 바로 회복하는 해결책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를 위해 우리가 최소한은 무감각해지지 말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큰 선물은 사실 다른 가난한 자들이다. 그리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돕고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이다.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다.”(루카9,16)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빵과 물고기는 베고픔을 이겨낼 정도의 단순하고 작고 보잘 것 없는 음식이다.
성 바실리오는 윤리적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생계를 위해서는 적게 먹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것들을 계속 원한다. 사실 현실적으로 삶의 필수품들은 소박하고 적당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달하는데도 용이하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할 때, 필요하지 않는 비싼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청한다.일용할 양식 조금으로 만족 하기를 배운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예수님과 함께 침묵 안에서 기도하며, 무익한 염려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런 기도시간을 많이 가질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말한다. 나도 기꺼이 그렇게 기도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성찰을 위해 잠시 머무르면,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더욱 준비를 할 수 있고, 놀랍게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함께 하는 일들은 잃어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을 더욱 많이 주신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단순히 군중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물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에 머무르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과 삶과 사건은 그 것의 내면과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표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사건을 통해 바라보고 추리하며 통교하시기를 원하시는 영적 선물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빵의 기적이란 배불리 먹은 풍요로운 사건의 그 속에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 그리고 연민이라는 영적 선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다. 즉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생명을 주는 빵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계신다.”(S.Th., III, q. 65, a.1 ad 1) 즉 성체성사는 “선교활동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종합’일 뿐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의 근원적인 힘이요, 또한 표현 양식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제2독서: 1코린 11,23-26: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너희를 위하여’ 즉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는 의미의 표현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체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현존’의 신비를 이루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의 신비,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쏟으시는 순간에 ‘봉헌’하신 생명의 신비를 재현시키는 것이다. ‘피’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두 번씩이나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24.25절)는 예수님의 명령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순간 행하신 것을 그분이 부여하시는 의미와 더불어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이 반복해서 행해야 한다는 그분의 원의를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행위를 반복해서 되풀이 하는 일이 단순히 ‘회상하는 행위’정도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기념(anamnesis)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성체성사적 행위를 그분이 부여하셨던 충만한 의미와 더불어 현재에 재생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 식탁을 주관하고 말씀을 반복하시는 분은 여전히 그리스도시라는 점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제사를 거행하는 사제는 다만 그분의 투영에 불과하다 하겠다.
파스카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십자가의 봉헌과 부활로 이루어진 시기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그 먼 과거가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26절) 여기서 ‘전하다’는 말의 시제가 현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체성사의 거행은 충만한 사랑으로 역사 전체를 뒤덮는 죽음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사는 사랑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죽기까지 온전히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한다. 성체성사가 이렇게 거행되지 못하고 우리에게서 먼 이야기로 되고 만다면 그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에 불과하고, 새롭고 신선한 분위기를 창조해주는 ‘기념’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고, ‘기억’인 동시에 ‘예언’이다. 즉 성체성사는 사랑의 마지막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랑의 마지막 표현은 오로지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차 충만함 속에서 다시 임하게 될 ‘하느님의 나라에서 새 포도주’(마르 14,2 참조)를 마시게 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복음: 루카 9,11-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은 성체성사에 대한 직접적인 의미는 없다. 그러나 복음사가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행하실 바로 그 행동들을 그분께 돌려드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16절)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통해 마련하신 음식을 사도들로 하여금 군중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오늘날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람들, 사제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이다. 우리 가운데서 성체성사를 재현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말씀’ 뿐이다. 여기서 사도들의 행위는 외적행위 뿐 아니라, 자신도 성체가 되어야 하는 의미가 있다.
만일 성체성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대한 ‘기념’이라고 한다면 그 성체성사의 거행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연 어느 정도로 주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베풀어 주신 무상적이고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생활한 것이 못되는 ‘기념’은 과거에 대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성체성사가 오직 우리의 존재 그대로의 봉사와 참여와 형제애가 ‘봉헌’될 때에만 참되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렇게 할 때만이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왕국의 결정적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그분의 죽음에 대한 참된 ‘기념’과 ‘선포’가 될 것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이렇게 지내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바치신 그 사랑의 행위가 지금의 나를 통하여 계속 선포되고 전해질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사랑과 나눔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이다.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칠 수 있을 때에 우리 자신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나를 봉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를 구체적으로 살아가며 그 신비를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질병과 굶주림 또는 외로움으로 고통 받으십니까?
해결 가능합니다...그러나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의 사회 현상은 오늘 복음 말씀의 내용과 아주 유사합니다. 육체적, 정서적 그리고 영적 치유가 절실함은 물론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갈급함을 채워줄 양식이 필요하며, 사막처럼 메마른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우리와 함께 해 줄 친밀하고 폭 넓은 이해력을 갖춘 목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군중의 건강을 되찾아 주셨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군중을 돌려 보내시어 그들 스스로 음식과 잠자리를 구하도록 제안했습니다. 왜냐하면 황량한 벌판에 군중이 오천 명 가량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십 명씩 무리를 지어 앉도록 요구하신 후,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기쁨에 찬 증인들이 되었고 훗날, 이와 같이 기적을행하는 주인공들이 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 기적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요?
제자들이 봉헌할 수 있었던, 적지만 가진 모든 것을 드렸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시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시고 축성하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빠짐없이 나누어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이 기적에서,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행하신 비슷한 행적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성체이신 빵으로 조각 조각 쪼개어지고 나누어져서 제자들을 통해 모든 인류역사를 아우르는, 모든 인간을 먹이고 치유하시는 위대한 기적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쪼개어진 예수님을 모실 때,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본 받고 당신처럼 변화되도록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주님의 손에 맡겨진 빵이 되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며 축성을 통해 우리를 당신 몸의 일부로 변모시켜 주실 것이며 또한 우리를 다시 쪼개시어 또다른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몸을 먹는” 모든 이들이 바로 그 예수님을 모시게 되어 우리를 매개체로 예수님의 치유를 받고 영적 성장을 거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현시대에도 주님은 당신의 기적을 위한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필요로 하십니다. 다시 말해, 타인에게 관대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담대히 주님의 손길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군중의 크나큰 요구를 충족하기엔 너무 적은 수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치유와 양식을 “공급”하는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성인이 말씀하신 것들이 우리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들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테살 2장 8절 참조)
오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속한 사회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같은 빵의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비록 소수의 인원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능력과 자비 안에서 무한히 신뢰하며, 절대적 관대함과 담력으로 “자신을 쪼개어 나누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시고 또 찾으십니다. 또한 우리 형제들을 먹이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고통의 순간에도 함께하시는 기적의 주님을 전달하는 중개자의 신념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 축일을 맞아,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두 눈을 지극히 바라보시며 당신에게 물으십니다. “너 또한 바로 그 ‘빵’이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나는 모든 인류를 위해 기적을 행하겠다! 나 역시 네가 필요하다!!!” 아멘.
이 성찬은 얼마나 보배롭고 놀라운가!
아퀴노의 성 토마스 사제의 저서에서(Opusculum 57, in festo Corporis Christi, lect. 1-4)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신이 되도록 우리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또 당신이 취하신 우리 인성의 전체를 우리 구원을 위해 되돌려 바치셨습니다. 즉 우리를 화해시키시기 위해 십자가의 제단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당신 몸을 제물로 바치시고 우리를 구속하시고 씻으시고자 당신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비참과 노예 상태에서 구속하시고 온갖 죄에서 정결케 하셨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가운데 이 사랑의 위대한 업적을 기념하고 기억하도록 당신의 몸을 음식으로 당신의 피를 음료로 남기시어 신자들이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받아 모시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고 온갖 감미로움으로 가득 찬 이 성찬은 얼마나 보배롭고 놀랍습니까! 구약에서처럼 소나 양의 살이 아니라 참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영하도록 우리에게 베푸시는 이 성찬보다 더 보배로운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성사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죄를 씻어 주고 덕행을 자라나게 하며 풍부한 온갖 정신적 카리스마로 우리 마음을 살찌게 하는 이 성사보다 우리 구원에 더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성사는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제정된 성사이기 때문에 교회는 모든 이에게 유익이 되도록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해 이를 거행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수난 당하실 때 보여 주신 그 뛰어난 사랑을 기념하여 거행하는 이 성사가 주는 기쁨과 그 샘에서 맛보는 영적 감미는 아무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무한한 사랑을 신자들 마음에다 더 깊이 새겨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르자 당신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를 지내시던 최후 만찬 석상에서 이 성사를 세우셨고, 당신 수난의 영원한 기념으로서, 구약에 예시된 상징의 구현으로서, 당신께서 행하신 기적 중 가장 큰 기적으로서, 그리고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에게 주시는 독특한 위로로서 이 성사를 남겨 주셨습니다.
사회 안에서의 고독
서동신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대축일은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때 제정하신 성체성사 즉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변화를 이루는 교환의 신비를 기념하는 거룩한 잔칫날입니다. 사람이 식음료를 먹고 마셔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듯이, 성체성혈로 영적 고독과 번잡한 사회 안에서 건강한 긴장으로 기우뚱한 균형을 이뤄 평화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영성의 대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71-1327)는 고독과 사회의 관계를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상보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독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독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평화를 찾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런지 설명하겠습니다. 잘 살아가고 있다면 언제든지 당신은 평화로울 것입니다. 내면의 평화를 얻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시어 조용한 곳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시장 통에 있을 때라도 함께 계실 것입니다.」
장 바니에 신부의 『공동체와 성장』이라는 책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의 영적 고독을 통한 내적 성장은 서로를 연결하는 고리이자 거울인 것입니다. 사회라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인 개인은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밀접한 상호 보완 차원에서 접근할 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 고독안에서 치유되어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개인의 고독과 사회 공동체가 분리되지 않고 밀접한 상호 연결 고리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할 때 건강한 긴장이 오히려 공동체의 성장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의 이야기 묵상집 『개구리의 기도』에 예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성덕이 높은 어느 수사가 밤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구리 한 마리가 "개굴개굴!" 울어 대는 소리에 분심이 들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해라! 기도중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성덕이 높은 그의 명령은 즉각 실행되었습니다. 기도하기에 좋은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내심의 목소리가 그를 방해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시편 노래하는 것을 기뻐하시듯이 저 개구리가 "개굴개굴!" 우는 소리를 기뻐하실지도 모르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명령했습니다. "노래해라!“ 그러자 박자에 맞춰 "개굴개굴!" 우는 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메웠습니다. 근처에 있던 모든 개구리들도 우스꽝스러운 반주에 맞추어 노래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분심에 들지 않았고 그의 기도와 개구리의 노래는 하나가 되어 이제는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습니다.」
여러분, 하루 종일 마음에 품어 기도해 볼까요? “저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게 도와주십시오.”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하느님께 마음을 두지 못한 그 순간을 다시 사십시오. 분심 속에서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분심이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평화 안에 머무르십시오.
“주님, 저의 모든 행위가 어떤 사건, 어떤 상황, 어떤 분심에서까지도 당신을 드러내는 것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제 마음이 당신만을 자랑하고 제 말이 당신만을 선언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내 마음광주리 속의 주님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는 당시에 한 가족 한 끼 도시락 같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아무리 꺼내도 줄지 않는 그 광주리를 찾고 싶습니다.
혹 광주리가 요술광주리는 아닐 가 싶어 박물관 찾았지만 없더라고요.
이스라엘 성지 순례 때 요술광주리를 찾아봐도 기념품도 못 봤습니다.
타볼산에서 점심도중 갑자기 그 광주리는 바로 내 마음인걸 느꼈어요.
내 마음광주리 속의 주님을 계속 나눠도 마음은 기쁨으로 더해지니까.
아~! 미사 때 빵을 들고 이는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하다니 놀랍네요.
오병이어! 바로 예수님을 나눠먹는 오늘의 하늘잔치 이 복음 전합시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다해) 루카 9,11ㄴ-17; ’19/06/23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미사의 영성 3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미사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참회예절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참회예절은 주님을 만나러 달려온 사람에게 다시 만나기 위한 준비를 시키는 듯할 정도로 중복되고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모시고자 한 사람들은 이미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보았을 것이며, 최소한 주님을 만나려고 미사에 참석하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참회예절을 또 시키는 것은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 그야말로 밤에 끝기도까지 하고 잠밖에 잔 것뿐인데 아침에 일어나 새벽미사에 참여하자마자 또 반성하라니?
우리는 미사경본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부분을 신약성경에서 루카 복음 18장 35절에서 43절에 나오는 ‘예리고의 소경’의 외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 또한 마태오 복음 15장의 ‘가나안 여자의 믿음’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태 15,21-22) 인용된 이 두 성경구절에서 드러나는 자비를 청하는 기도는 일견 반성의 의미로서의 참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간절한 바람의 성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나오는 예리고의 소경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면 그에게 한 번 자신이 “볼 수 있게 해”(루카 18,41)달라고 청하겠다고 작정하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37-38절) 그는 단순히 밑져야 본전이겠지 하는 마음에서 한 번 청하는 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소경은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39절)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간절했는지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40절)실 정도였습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 자기를 고쳐 달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그가 자기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만난 것이 아니라 그는 작정을 하고 그 자리에 와서 나자렛 예수님을 기다렸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 간절하고도 확신에 찬 소경의 청원을 우리는 가나안 여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계속 졸라대는 데도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마태 15,23ㄱ)고 게다가 제자들이 다가와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23ㄴ절) 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24절)는 데도, 그 여자는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25절)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또 다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절) 라고 거절하셨는데도, 그 여자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하며 청합니다. 이 여자는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할 정도로 자신의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아예 본능적으로 매달립니다. 이 여인의 청원은 예수께서 자기 딸을 고쳐 주실 수 있는 주님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두 번씩이나 거부하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강아지에게 비유하기까지 할 정도로 간절하면서도 당당하게 청합니다. 그래서 전혀 비굴하기보다는 자식이 부모에게 청하는 것처럼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렇게 주께 자비를 청하는 예리고의 소경이나 가나안 여자에게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28) 하고 칭찬하십니다. 주님은 그 둘에게 ‘내게 비는 너의 청은 참으로 내게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라는 인정 아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향하는 근본자세입니다. 곧 하느님을 알고 믿기에 그분 앞에 주저함 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 앞에 대령이라도 하듯이.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이 그를 주님 앞에 달려가 서게 만듭니다.
그런데 왜 주님 앞에 서서,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하는 우리의 모습을 참회로 규정지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예리고의 소경이나 가나안 여인이 주님을 뵈옵고 바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루카 18,38)라든가 또는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렀습니다.”(마태 15,22ㄷ) 라고 말하지 않고, 먼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39ㄴ; 마태 15,22ㄴ)라고 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경과 여인의 표현을 주목해 보자. 이 표현은 주님께 잘 보이기 위해 겸손과 가련함을 내세우는 모습일까? 아니면, 당시에 랍비나 예언자들, 혹은 사제들이라는 선인들에게 하는 일상적이고도 습관적인 표현일까?
그러한 접근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입장을 루카 복음 5장 1절부터 11절까지에 나오는 ‘첫번째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부들이 밤새 그물을 쳤으나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탕을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하신 대로했더니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6-7절) 되자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이 장면을 루카는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9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너무 많은 고기가 잡힌 사건 앞에, 즉 자신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이 자기들 앞에서 이루어져 펼쳐진 기적 앞에 인간은 겁을 집어먹고, 또 두려움에 빠져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서고 주님을 만났을 때 초라한 자신과 주님 앞에 가소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비를 청하게 된다. 이 모습은 또한 루카 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성전에 들어왔지만 성전의 하느님 앞에 서지 못하고 자기의 업적 앞에 서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업적을 선포합니다(루카 18,10-12절 참조).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가르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루카 18,9)이라고 규정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앞에 서는 의로운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4절)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3절) 하고 기도합니다.
그럼 이제 우리의 문제가 정리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서는 사람,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을 보게 됨으로써 주 앞에 송구스러운 자세로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은 바로 이 자비를 청하고, 또 그 청을 들어 주는 주님의 자비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회는 단순히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이거나 그 반성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인위적인 예절로서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참회는 인간이 주님 앞에 서고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인간이 구조적으로 가지게 되는 감정이요, 본능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참회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바로 참회자의 믿음이요, 그 믿음은 바로 주님께 대한 확실한 선체험(先體驗)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이미 체험하지 못했다면,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전해들음으로써 주님을 믿고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미사 때에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전번 은총사건의 체험이거나 또는 주님께서 선조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사건, 특별히 그리스도교 신자 일반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사건의 체험에서부터 미사는 시작합니다. 이렇게 참회는 주님을 맞이하는 과정의 첫걸음입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
거저 베푸시는 사랑
한민택 신부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느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늘 가슴에 품고 사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 물음에 인간은 ‘하느님의 무상한 은총’으로 산다고 답합니다. 여기서 ‘무상한’이라는 말이 ‘값없는’ ‘거저 주는’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도 있지만, 공짜만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장정만도 5000명가량이나 되는 군중을 배부르게 먹이시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모든 일이 배고픈 군중의 처지를 헤아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음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이 그 빵을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에서 비롯됐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행위에는 세상의 눈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경제나 시장의 논리로는 그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기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아주 작은 인간적 행위를 통해 가능케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삶의 다른 차원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이며, 그 관계 안에서 무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만이 서로를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사랑의 행위는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지만, 그것이 지닌 놀라운 힘과 의미를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선물을 주고받을 때 우리는 경험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무상으로 내어주는 사랑과 나눔의 행위라는 것을 말입니다. 거저 주는 것이 경제와 시장의 논리에 맞지 않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러한 일을 종종 행합니다. 그리고 경험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가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그 점을 잘 드러냅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새 생명을 바라고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생명이 태어났을 때 놀라운 선물을 받아 안고 기뻐합니다.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아이는 부모님의 무상한 사랑으로 살며 성장합니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약해지면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힘없고 지능이 약해진다고 하더라도 나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나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사랑하시고 희망을 두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고 희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바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아버지 하느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온 삶으로, 특별히 몸과 피를 내어주는 성체성사로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체 성혈에서 우리를 바라시고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아버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빵과 포도주로 하나 된 기쁨
김창선 선교사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념하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합니다. 생명의 양식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의 현존에 감사를 드리고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립니다.
가톨릭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미사가 봉헌됩니다. 미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찬미하는 말씀의 전례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며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모시는 성찬의 전례로 구성됩니다. 제대의 예물인 빵과 포도주는 성찬례의 핵심입니다.
오늘 제1독서(창세 14,18-20)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전승을 기리고자, 고대 살렘(예루살렘, 시편 76,3) 임금이고 대사제인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져와 창조주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에 멜키체덱이 바친 거룩하고 흠 없는 예물은 양떼의 맏배를 바친 아벨의 제물(창세 4,4)과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사악의 봉헌(창세 22,2)과 함께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신 세 가지 제물(감사기도 제1양식)입니다. 멜키체덱은 하느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사제의 예표(시편 110,4; 마태 22,44; 마르 12,36; 루카 20,42)입니다.
제2독서(1코린 11,23-26)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목요일 ‘주님의 만찬’에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관해 가장 먼저 기록된 내용입니다. 성체성사는 유카리스트(Eucharist)라 불리는데 그리스어의 ‘감사하다’(eucharistein)가 그 어원입니다. 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십니다. 같은 모양으로 포도주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시고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성체성사를 거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초기부터 교회는 성찬례를 위한 예물인 빵과 포도주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가지고 모였습니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인 디다케(Didache)에는 성찬례를 위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고 성부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가 끝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빵의 형상은 그대로이지만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성체)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포도주 역시 그리스도 피(성혈)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는 미사에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말씀의 힘으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성체와 성혈로 성(聖)변화를 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명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누룩 안든 빵을 쓰셨습니다.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외적 형태는 그대로이면서 그 실체는 성체와 성혈입니다. 종교혁명의 지도자인 마르틴 루터도 이 실체의 변화를 인정했습니다. 이 ‘성(聖)변화’는 하느님의 무한한 힘으로 이루어진 기적입니다. 나뉜 성체 조각마다 주님께서 온전하게 현존하십니다.
오늘 복음말씀이 전하는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사건은 성체성사의 예표로, 네 복음(마태 14,13이하; 마르 6,30이하; 루카 9,10이하; 요한 6,1이하) 모두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선교활동에서 돌아온 예수님과 제자들이 외딴곳인 ‘벳사이다’로 피정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이를 알고 몰려듭니다.
날이 저물어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황량한 곳이기에 그들을 돌려보내 잠자리와 음식을 스스로 해결하게 하자고 예수님께 건의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로 가엾게 보여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십니다. 제자들이 가서 양식을 사오지 않는 한,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인데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르신 대로 군중들을 대충 쉰 명씩 그룹을 지어 자리를 잡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린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됩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봅니다. 주님의 감사기도가 마음의 문을 열어 파스카 음식을 나누는 축복으로 돌아왔나 봅니다.
“이는 내 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요한 6,35)으로 오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안에서 머문다”(요한 6,56)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기쁨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만 이 행복을 누릴 수 없기에,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삶으로 복음화에 나섭니다. 주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마음에 새기고, 성사생활로 사랑의 힘을 기릅니다.
‘생명의 빵’인 성체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성사생활은 우리 안에 사랑의 샘물이 강물 되어 흘러내리게 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내면의 나를 비우고 성체를 모십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찾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기릅니다. 생명과 성덕의 샘이신 예수 성심,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살이 공동체
김동훈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 을 내어주고 쏟아주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실 수 있음에 흠숭과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통해 우리에게 내려주신 당신의 크신 사랑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지난 달 교구 사제 피 정 때의 주제인 “공동체 영성의 사목”으로써 ‘예수살이 공동체’를 나누고 자 합니다.
강사 신부님은 강의 중, 문익환 목사께서 감옥에 있을 때 밥을 미음이 될 때까지 씹어서 넘겼다는 일화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어느 날 문 득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고 곧 자신의 입 안으로 들어올 밥이 되기까지 수고한 분들의 노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체와 성혈을 모 시는 우리들도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강사 신부님은 예수님의 삶을 닮아 가는 것이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신 사람들의 나아갈 목표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아 산다고 하면서 무조건 희생과 봉사만 강요당하다보면 행복을 잃어버리고 결국 공동체에서 벗어나 그 삶을 포기하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 있 다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살아가는 ‘예수살이’는 품성과 덕목을 바탕으로 신앙과 믿 음을 두지 않으면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본당 사목을 하다보면, 교우분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들에 대하여 열심히 봉사하다가도 소임을 벗어나게 되면, 더 이상 뵙기가 어려울 때가 많기도 합니다. 아마도 ‘예수살이’를 실천 할 때 의무감과 강요에 이끌려 억지로 봉사하다보면 어느덧 지쳐있고 더 이상 함께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의 봉사로만 남아 있었기 때 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살이’를 하면서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을 뵙게 되면, 그분 들의 표정과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품성과 덕목 (가치관)이 바탕이 되어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소임들을 묵묵히 수행해나가는 신앙인임을 느끼 게 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인 오늘 온전히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시고자 원하시는 예수님을 내 안에 합당 히 모심으로써 행복한 삶을 잃지 않도록 기도드리고, ‘예수살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 자 신을 주님과 일치하도록 노력합시다.
성체는 하느님의 사랑과 나눔
김두신 신부님
교회는 거룩한 성체성사를 세우신 예수님을 기념하며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라는 말씀을 통해 인간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를 완성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들고 나와 아브람을 축복하였고 아브람은 가진 것의 십분의 일을 멜키체덱에게 바칩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늘의 별처럼 번창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체성사의 핵심에 대하여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라고 전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라고 하시며 믿는 모든 이들에게 나눔의 기적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체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신 최고의 사랑과 구원 그리고 나눔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처음 나눔의 명령에 걱정을 합니다. 가진 것도 특별한 재주도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사실 많은 걱정 가운데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믿음의 부족과 몰이해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사업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은 성체성사 세우심과 나눔의 기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22-32 참조)라고 하십니다.
믿음과 성체성사의 기적도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성령 강림전의 모습이 아니라, 성령 강림 후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으로 사제직과 평신도 사도직에 참여해야 합니다.
인류구원을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고 제관이 되신 예수님의 성체성사를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들의 도리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인격적인 나눔과 동참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증거합시다
받아먹었으니 내어줍시다.
김태호 신부님
‘성체성사를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가, 우리를 위해 성체성사가 존재하는가’ 제가 신학생 때 ‘성사론’ 이라는 과목의 시험문제였습니다.
정답은 무엇일까요? 받아먹었으니 내어줍시다 정답은 ‘둘 다’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체성사가 내 안에서 끝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에게 나 자신을 쪼개고 내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의 본질은 나를 비롯한 이웃, 우리 모두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계속해서 다른 이에게 퍼져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체성사를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으면서도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것은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 생명의 빵을 받아먹으면서도 계속해서 땅에서 일구어 낸 빵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내 곳간에 빵이 차는 것만 생각하고, 심지어는 다른 이에게 돌아가야 할 몫의 빵까지 가져와 내 욕심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더 많은 빵을 양산해 내어 독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다가왔던 유혹자는 지금 우리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우리가 땅에서 일군 빵으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고, 그것을 위해 다른 사람이 피를 흘리게끔 우리를 유혹합니다.
욕심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이것까지만” 하는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내 이웃은 피와 눈물을 흘리며 굶어갑니다.
우리의 영혼은 내어줄 때 채워집니다. 나를 쪼개고 내어주어 생긴 빈 공간에 예수님께서 머무르십니다.
예수님의 몸은 빵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채워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생명의 물이 되어 우리의 욕심을 씻어주고 탐욕의 갈증을 없애줍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땅에서 일구어 낸 빵이 많다고 과시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빵을 받아먹고 세상을 향해 나 자신을 내어줍시다.
내 욕심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생명의 물이 샘솟게 합시다. 내 안에서 샘솟은 그 물이 이웃과 온 세상을 상대로 흘러넘치게(즈카 14,8) 합시다.
서로를 살리는, 썩어 없어지지 않는 생명의 빵(요한 6,27)을 쪼개어 나눕시다.
김귀중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우리공동체를 지극히 사랑하시므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오시는 참으로 당신 전체를 내어놓는 지극하고 거룩하신 그리스도 성체 성혈 대축일 입니다.
이제 계절은 무더운 여름이나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생각할 때 계절은 오히려 그리스도와 우리에게 알맞는 계절인 것 같습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사랑은 작은 사랑이 아니라 살과 피 전체를 내어놓는 통큰 사랑입니다. 우리는 제 2독서후에 부속가인 성체송가를 합송하는데 부속가 중에서 몇개만 골라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성다해 찬양하라 찬송하고 찬양해도 우리능력 부족하다.
생명주는 천상양식 모두함께 기념하며 오늘특히 찬송하라.
거룩하온 만찬때에 열두제자 받아모신 그빵임이 틀림없다.
새것와서 옛것쫓고 예표가고 진리오니 어둠대신 빛이로다.
물질세계 넘어서니 감각으로 알수없고 믿음으로 확신한다.
천사의빵 길손음식 자녀들의 참된양식 게에게는 주지마라.
전지전능 주예수님 이세상에 죽을인생 저세상에 들이시어 하늘시민 되게하고 주님밥상 함께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
부속가 성체송가를 합송하다보면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모셔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영성체를 할 준비도 없이 성체를 모시는 행위 개에게는 주지마라 하는 대목에서는 참으로 죄송하고 부끄럽다.
이제 우리는 죽으면 그분께 가야한다는 절박하고 간절한 희망에서 주님밥상 함께앉는 상속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요한 6.51)
예닮의 여정.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명의 빵이신 주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아름다운 새벽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으로 우리 수도자들은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을 활짝 열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사랑의 주님은 우리 모두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미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모든 축일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주님 부활대축일, 주님승천대축일, 성령강림대축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대축일, 그리고 오늘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자 극치인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환히 계시된 날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참 고맙고 좋은 선물들이 이런 축일입니다. 이런 축일 선물들의 은총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변모시킵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참 좋은 응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질문에 앞서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기도든 삶이든 간절하고 절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간절하고 절실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저의 간절하고 절실한 소망은 예수님을 닮는 것, 이것 하나뿐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믿는 여러분 모두의 궁극의 소망도 예수님을 닮는 것 하나뿐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신기하게도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본래의 내 모습, 내 얼굴이 드러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응답입니다.
어제의 체험이 새삼스러워 나눕니다. 수도원의 참 좋은 쉼터인 회심정이란 정자를 아실 것입니다. 회심정 앞을 지나면서 그윽한 향기에 뒤를, 위를 쳐다 봤습니다. 바로 연분홍 흰색깔의 은은한 자귀나무꽃 향기였습니다. 늘 이맘때쯤 되면 늘 여기 이 자리에 피어나는, 향기맡고 찾아내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자귀나무꽃 그윽한 향기입니다. 하여 작은 꽃술을 따서 만난 몇 분과도 향기를 나눴습니다.
꽃에는 꽃향이, 소나무에는 솔향이, 글에는 문향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향이 있습니다. 간혹 향기 맡고 알아 보는, 떠난 후에도 향기로 남아있는 좋은 분을 만나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믿는 이들의 향기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갈수록 그윽하고 은은한 그리스도의 향기, 내 고유의 존재의 향기, 겸손의 향기입니다. 하여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우리는 비로소 무지의 어둠,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에서 벗어나 지혜롭고 자비로운 사람,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성공적 예닮의 여정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선 소개해 드리는 행복기도, 일명 예닮기도를 자주, 아니 평생 매일 바치시기 바랍니다. 참 많은 이들과 나누고 추천한 예닮기도를 다시 읽어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이 기도만으론 부족합니다. 기도와 더불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삶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늘에 보물을 쌓습니까? 구체적 사랑의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절대 비범하거나 비상한 수행이 아닙니다. 깨어 평범한 일상의 내 삶의 자리에서 다음 사랑의 수행에 항구하고 충실하면 됩니다.
첫째, “찬미하라”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예닮의 여정중 평생 매일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의 기도와 삶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착안했습니다.
창세기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 멜키체덱은 참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바로 눈밝은 신앙의 선배들은 멜키체덱이 대사제 예수님의 예표임을 알아봤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 모습이 흡사 빵과 포도주를 앞에 두고 미사를 봉헌하시는 대사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하여 오늘 화답송 시편이 탄생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대사제 예수님의 신원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거룩한 빛, 새벽품에서, 나는 너를 낳았노라.”,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모두 우리의 거룩하고 사랑하는 대사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우리를 축복하시는 일입니다. 바로 창세기 멜키체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여러분은 복을 받으리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하느님의 축복의 사랑에 대한 자연스런 응답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 찬미와 감사의 사람입니다. 세상에 찬미와 감사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는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기쁨과 사랑의 찬미에서 샘솟는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의 삼감의 삶입니다.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그래서’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위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찬미하라, 감사하라 주어진 인생입니다. 찬미와 감사는 하느님 창공을 자유로이 날개하는 영혼의 양날개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에 응답하여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둘째, “행하여라.”입니다.
예수님을 기억하여 미사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에서 착안했습니다. 예닮의 여정중 평생, 주일은 물론이고 할 수 있는 한 자주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선물이 파스카 신비의 절정인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예수님 친히 성체성사에 충실히 참여할 것을 권하십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거푸 반복되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입니다. 주님을 기억하여 행하는 성체성사가 바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이 지극히 거룩한 성체와 성혈의 성체성사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미사를 사랑합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사랑으로 미사에 참여하면서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하여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성체성사의 깊이와 은총은 그대로 하느님의 깊이와 은총을 반영합니다. 바로 방금 부른 ‘성체송가’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니 자주 미사에 참여하는 일,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성찬례는,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의 미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파스카 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그 안에 계십니다. 한마디로, 성체성사 미사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자 우리 신앙의 요약이고 집약입니다. 우리의 궁극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일거에 해결해 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반쪽 인생이 주님을 만나 일치해야 비로소 온전한 인생입니다.
성 이네네오는 이단반박이란 글에서, ‘우리의 사고방식은 성체성사와 일치하며, 성체성사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확인해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것도,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음도 미사은총입니다.
셋째, “나누어라.”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착안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나눔의 봉헌이 있었기에 복음의 기적이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그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조각만도 열두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바로 성체성사의 무한한 무상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아침 성무일도때 흥겹게 노래했던 가사도 생각납니다.
“당신 백성을 천사들의 음식으로 배불리셨고, 하늘의 빵을 그들에게 주셨도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리라.”
사랑의 나눔, 나눔의 기적입니다. 서로 일상에서 사랑의 나눔이 생활화될 때 비로소 성체성사의 완성입니다. 예전 김지하 시인의 ‘밥이 하늘입니다’란 시가 생각납니다. 민중신학자 고 안병무 박사님이 성체성사의 핵심을 요약했다 극찬했던 시입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그러니 가진 것을, 무엇보다 밥을, 바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참 큰 죄가 독점의 죄입니다. 함께 나누며 살라 주신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예닮의 여정중 평생, 매일 끊임없이 사랑을 나누며, 선행과 자선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요즘 ‘기생충’ 영화가 화제입니다. 저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대강의 뜻은 파악했습니다. 영화가 목표하는 바는 상생과 공생의 사랑입니다. 외관상 기생이지 깊이 잘 들여다 보면 공생이요 상생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하나뿐인 지구에, 또 너에 기생하는 나이기도 하지만 하느님도 살고 우리도 살고, 교회공동체도 살고 우리도 살고, 지구도 살고 우리도 살고,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사랑이, 공생의 사랑이 맞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중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주춤 주춤'(루카 9장 11ㄴ~17)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물고기 다섯개 빵 두개가 있습니다.'
성지순례나 여행은 걷는 경우가 많기에 가방에 무엇이든 먹을것을 넣고 다닙니다.
내가 목 마를때, 배고플때 먹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준비성이 없는 사람도 자신이 필요한 것은 챙기는게 본능입니다.
'목이 마른데 혹시 물 있나요?'
'배가 고픈데 먹을것을 줄 수 있나요?'
내 주머니에 들어 있지만 갈등이 됩니다.
원하는것을 주고 나면, 나는 이 시간 이후로 목마름과 배고픔을 견뎌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수많은 군중들과 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보며 사랑의 나눔이 가능한지 물으십니다.
주춤 주춤하다 나눔의 기회를 놓치죠 그 가운데 용기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이거요' 하며 내놓습니다.
기적은 나눔에서 일어납니다.
내게 담아주신 것을 기꺼이 내어놓을때 나를 통해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당신의 가방을 열어 주는것입니다.
'다 비우면 화수분처럼 채워주십니다.'
화수분? 재물이 끝없이 나오는 것
모든 것이 고마운 신비다.
최민석 신부님
어느 하루 잠시 잊었던 친구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접한다. 잠시 할 말을 잊는다. 말이 뚝 끊어지고 자연스럽게 관상상태에 접한다.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깨어나길 간절히 바랄 뿐 아무 생각이 없다.
이 소식으로 인해 홀연히 내게 다가오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물위를 걷거나 하늘을 나는 것을 기적이라 하지만 진짜 기적은 숨 쉬고 말하고 땅위를 걷는 것이로구나. 유월의 푸른 하늘 아래나 이렇게 살아 언젠가 뚝 멈출 나의 심장일지라도 아직은 팔짝팔짝 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기적을 살고 있구나. 매일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나다.
이 모든 것이 기적이다. 고마운 신비(神秘)다. 한밤의 꿈결을 지나 날마다 맞이하는 새로운 아침, 나의 두 눈 가득 풍성히 들어오는 초록빛 잎 새들, 나의 귓가에 맴도는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나의 코끝을 파고드는 라일락 향기, 이 가슴 가위 누르는 슬픔과 괴로움의 저편에서 손짓하는 한 줌의 기쁨과 환희, 가끔은 내 여린 생명 맥없이 무너질 듯하다가도 다시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숲은 아무 말 않고 잎사귀를 보여준다. 저 부신 햇살에 속창까지 길러 낸 푸르른 투명함 바람 한 자락에도 온 세상 환하게 반짝이며 일렁이는 잎 새 앞에서 내 생 맑게 씻어내고 걸러낼 것은 무엇인가. 숲은 아무 말 않고 새소리를 들려준다. 숲은 그러자 이윽고 꽃을 흔들어 준다.
어제는 산 나리꽃 오늘은 달맞이꽃 깊은 골 백도라지조차 흔들어 주니 내 생 또 얼마나 순해져야 맑은 꽃 한 송이 우주 속 깊이 밀어 올릴 수 있을까. 문득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 때마침 오솔길의 다람쥐 눈빛에 취해 면경처럼 환한 마음일 때라야 들려오는 낭랑한 청청한 소리여 이 고요 지경을 여는 소리여 그러면 숲의 침묵이 이룬 외로운 봉우리 하나 이젠 말쑥하게 닦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의 평화는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마음의 평화는 기쁨의 미소로 화답한다. 실상은 주님이 주시는 평화의 선물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가 9,16-17)
아름다운 기적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일으킬 수 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주부는 가정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며 나누는 현장에서 얼마든지 아름다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 사람을 사랑하는 귀한 마음, 기쁨, 감사, 용서, 지혜, 인내, 만족, 용기, 희망..... 아름다운 가슴으로 품은 풍성한 생각들이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낸다.
기적을 만드는 사람은 말을 아껴 그만큼 밖으로 빼앗기는 말의 기운을 돌이켜 내면의 기도로 바꾼다. 관상기도만으로도 우린 내면 관찰의 힘을 한껏 높일 수 있다. 관상기도는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과 번뇌, 망상, 분별들을 쉬는 기도다. 생각을 과거로 미래로 오락가락하지 않고, 이리저리 복잡한 생각으로 어지럽히지 않으며, 오직 ‘지금 여기’라는 순간순간에 존재하는 관상상태 유지가 중요하다.
또한 관상기도란 말 뿐 아니라, 몸과 뜻까지도 침묵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의 관상은 무조건 침묵을 지키는 데에만 있지 않다. 공허한 말, 삿된 말, 거친 말 등을 줄일 것이지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까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허언을 놓으라는 말이지 진언 까지도 놓아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지금도 여전히 그러할 거라는 생각을 한참을 살고 난 뒤에야 겨우 하게 된다.
매년 여름에 피었던 산나리 꽃이 올해도 또 피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초록 잎들과 아이들의 호기심에 찬 반짝이는 검은 눈, 이 모든 것이 바로 기적이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친구를 기억하며 나와 함께 깨어나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친구야, 일어나라.’ 지금 여기 일상의 기적을 생각하며 다시 그 기적을 살 기회를 달라고 기도한다.
영과 육의 음식 <루카 9, 11ㄴ-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체 성혈 대축일은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으로, 피로 변화됨을 경축하는 날인가? 영적 생명을 위한 날이라고 생각하거나 사랑의 성사를 기억하는 날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부족합니다.
오늘 최후 만찬 전례의 의미를 드러내지 않고 광야에서 남자만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려고 빵의 기적을 듣게 하는 이유는 하느님은 영육의 음식을 주시는 분이시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는 기도의 내용을 의미 있게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고,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굶어 죽는 일이 없도록 영과 육의 양식을 얻어먹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음식은 맛있고 멋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상담자와 함께 하느님은 생명의 창조주이시고 생명을 보존하여 주시는데 영적이냐 아니면 육체적인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우리의 기도를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로만 생각하고 세상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세상일에 무관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삶이란? 세상을 떠날수록 영적이라고 하지만 저는 영과 육이 조화를 이루는 곳에 참 영적 삶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30에 사제가 되어 보좌 생활을 거쳐 34세에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가 1965년도였습니다. 우리 수도원 관목 대리구 시절 관할 구역이 농촌 지역이었습니다. 가난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으며 청년들이 할 일 없이 놀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성당에서 놀이터처럼 놀고, 면 전체에 텔레비전도 없고, 없는 것뿐이었습니다. 제가 텔레비전을 2호로 샀습니다.
제가 한 일은 환등기, 영사기<빌린 것>, 텔레비전 구매해서 시청각적 사목을 시작했습니다. 저녁이면 성당 마당이 이삼백 명의 사람이 모여 관람하고, 미사를 드렸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먼저라서 성당 뒷마당에 닭장 짓고, 창고에 부화장 만들고, 젖 짜는 염소를 길렀습니다. 농촌 영양센터, 군으로부터 부탁받고 양송이 단지 조성하여 구미에 공장을 유치하고, 협업 단지 만들어 2만 평에 특용작물과 하우스 농작물 생산했습니다. 야간 학교 개설하고, 마침내 신용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여 지방 조합으로 1호 구미 신협을 만들어 지금껏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의 참뜻은 맛있고 멋스러운 먹거리를 만들어 잘살아보자는 의도였습니다. 그 후 1971년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 “잘살아보세” 노래를 들으며 농촌을 떠나 부산 명상의 집으로 이동되어 저의 농촌 일은 끝이 났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을 보존하려고 생명에 필요한 공기, 땅에서 먹거리, 태양의 에너지로 시간과 공간 안에 현존하십니다.
미사 때 이루어지는 성체 성혈의 의미는 우리 영과 육의 생명을 위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미사의 은총인 자비, 일치, 생명의 나눔과 복음적 실천이 미사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교회의 현주소는 가난과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온 군중들에게 "말씀"도 주시고 "치유"도 해주시며 돌보시다가 어느덧 날이 저뭅니다. 이제 군중에게 육신의 양식도 절실해질 만한 시간이 된 것입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루카 9,12)
놀랍게도 제자들이 군중의 필요를 알아채네요. 그리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그 말투가 정보 전달이나 청원의 성격보다 어째 명령에 가깝게 들립니다. 흔히 사람은 은총을 통해 영의 세계를 접촉하고 맛보기 전까지는 직관이나 영감, 믿음보다 데이터와 논리, 합리성에 더 의존하기 마련이고, 타인에게도 그걸 당당히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경험한 세계까지는 그것이 우위를 차지하니 그게 전부라 여기는 겁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예수님의 말씀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담백합니다. 제자들의 형편과 현실적 사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던지시는 이 말씀은,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저희에게는 ...밖에 없습니다."(루카 9,13)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인정해 주시고 발휘하도록 틈을 내어주시는데 반해, 제자들은 이성적으로 자기들의 한계를 파악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묶어둡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인간의 "최대치"를 바라보시는 반면, 인간의 시선은 자기들의 "최소치"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루카 9,16) 제자들이 "...밖에"라고 지칭한 보잘것없는 소량의 음식을 가지고 예수님은 그것들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풍부한 봉헌물이라도 되는 듯 정성을 다해 하느님께 바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지요.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국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게 된 것입니다.
빵과 물고기의 양이 늘어난 이 기적이 예수님의 기도 중에 일어났는지, 제자들이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 9,17)는 말씀으로 그들과 함께 영육의 풍요와 기쁨, 기대감과 희망을 누릴 뿐입니다.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경계를 넘어서면 숫자든 수치든 타이밍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제1독서는 살렘의 임금 멜키체덱이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빵과 포도주로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창세 14,18)가 마련한 빵과 포도주는 세상을 구원하신, 영원한 사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미리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때 아브람이 멜키체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은 십일조 전통의 시초가 됩니다. 이는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레위 27,30)라는 계명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러면 너희 성안에서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는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14,29)라는 규정에 잘 나타나 있듯 "나눔"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신 마지막 만찬의 장면이 사도 바오로의 입으로 전해집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1코린 11,24)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1코린 11,25)
예수님이 당신 몸을 베어내고 헐어내고 쪼개어 내주시는 살과 피는 오로지 "너희를 위한", 즉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사랑, 사랑, 흔히 말들은 많이 하지만 이처럼 어마어마한 사랑을 흉내낼 수 있는 은총은 (아쉽게도, 다행스럽게도) 아무에게나 주어지진 않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나눔의 보람과 기쁨이 넘실대니 더 이상 이 현장은 제자들이 말했듯 "황량한 곳"(루카 9,12)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주시기보다 제자들의 손을 통해 나누어 주신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무언가를 나눌 수 있도록, 줄 수 있도록 마련하시는 분이 주님이시고, 인간에게는 순명하는 분배자의 역할이 맡겨졌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손에 쥐어 주시는 모든 것에는 이처럼 당신의 뜻에 따라 나누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물리적으로 살과 피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와 내 가족이 독식하여 우리의 살과 피가 될 것을 나누어 그것이 필요한 이웃의 살과 피가 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실상 나눔은 죽음의 경험입니다. 물리적으로 나와 내 식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려는 욕구의 중단이고 내 생명에 더해질 양분의 포기이기에 일차적으로 볼 때 죽음의 체험이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의 인연에서 죽음을 고한 그 양식과 재화가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나누어지고 베풀어질 때 그에게 새로운 생명이 됩니다. 나의 죽음이 타인에게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대부분의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명을 내놓으라는 요구 앞에 서지는 않지만, 예수님처럼 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손에 쥐어주신 모든 것을 나와 내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 이웃을 위해 나눌 때, 그 유대와 연대의 연결 고리를 통해 생명이 이어집니다. 실제로 목숨을 바쳐 생명을 주신 예수님보다, 열 달을 품어 생명을 주는 여느 엄마들보다, 훨씬 쉽고 덜 고통스러우면서도 보람과 기쁨은 그에 못지 않은 생명의 나눔이 오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를 재촉합니다.
아무리 작은 나눔이라도 그 안에는 죽음과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나누고 축복하는 우리는 모두 멜키체덱과 같은, 예수님과 같은 사제입니다. 이 사제직에 참여하는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고사가 아닌 한 모든 죽음은 결국 먹지 못해 죽는 거라고 합니다. 암 때문에 죽는 것 맞지만 암이 있어도 먹을 수 있는 한 죽지 않고, 암으로 인해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 죽는 거랍니다.
인간은 먹어야 삽니다. 그런데 음식을 먹는 것과 사랑을 먹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우리 삶에 더 필요하고 중요합니까?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말하는 사람이 꽤 있는데 그렇게 말해도 됩니까? 그것은 정말 무식한 사람의 입에서나 나오는 막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앞에서 정말로 사랑은 사치입니다. 일단 살아있어야 사랑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주 묘하게도 자살의 경우는 반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배가 아무리 불러도 살 의지가 없어집니다. 배고프다고 자살하는 사람은 없지만 사랑이 고픈 사람은 자살을 합니다. 배고프면 생명의지가 오히려 강렬해지는데 반해 사랑이 고프면 삶의 의미를 잃게 되면서 생명의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먹는 것이 훨씬 풍요로운 지금과 비교하여 옛날 그렇게 먹을 것이 없어도 지금보다 자살하는 사람이 없었고 풀뿌리를 캐 먹고서라도 살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그때 저의 친척 중에 연애결혼을 하려고 했지만 부모가 허락지 않자 같이 자살을 한 일이 있었는데 배고파도 사는데 사랑 때문에 죽다니 저로서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사랑으로 사는 것이며 주님 말씀대로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의 빵이시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주님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 바로 이것이고 오늘 성체와 성혈의 축일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 많다거나 우리를 사랑을 하신다는 그런 뜻 이상으로 사랑 자체시라는 말씀이지요.
하느님만이 나는 사랑이라고 하실 수 있고 우리 인간은 내가 곧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랑을 조금 가지고 있어 그 사랑을 조금 줄 수도 못 줄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존재가 사랑이기에 사랑에 결핍이 없고 전부를 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 전부를 주신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체와 성혈이 바로 당신 전부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체와 성혈은 당신 자신 전부를 사랑으로 주시는 표시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속이요 재현이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영원히 현재한다는 표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부모가 돌아가셔도 부모가 남긴 것 곧 유품을 가지고 부모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기억과 추억만으로도 힘이 들 때 살아갈 힘을 얻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품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성사적으로 주시어 우리가 성사 안에서 그 사랑을 기억하고 재현하게 하셨지요.
그런데 부모가 유품을 남겨도 사랑만큼 유품이 각 사람에게 사랑이 되지요. 부모의 정이 없는 자식은 돌아가시는 즉시 유품을 다 태울 것이고, 부모를 더 사랑하는 자식이 유품도 잘 간직하고 부모의 사랑이 재생되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랑을 살과 피의 성사로 우리에게 남기셨어도 그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그 사랑이 성사가 되고 기억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양식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양식, 마음의 양식, 영혼의 양식.
그리고 육신의 양식을 얻으려고 애써 일하고 마음의 양식을 얻으려고 독서를 한다든지 애를 쓰며 영혼의 양식을 얻기 위해 명상을 하느니 정신수양을 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이런 노력을 하는데 우리 신앙인들에게 양식은, 그것도 지금은 물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성체와 성혈이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며 다시 한 번 명심해야겠습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해다오!
김훈 안토니오 신부님
예수님이 체포되시기 전 마지막 밤에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 직접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라고 주시며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1코린 11,24-25 참조)고 하셨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여 행하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무방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왜 우리에게 이것을 꼭 하라고 하셨을까?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22,15)고 말씀하시고 또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요한 13,1)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 도대체 어떤 마음이셨을까? 당신을 기억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7-9)라고 묻는 부분과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18-21 참조)라는 베드로의 고백사이에 끼어 있는 이야기이다.
그 옛날 광야에서도 당신 백성을 굶기지 않으셨던 그분(시편 105,40-41 참조)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병자도 능히 치유해주시는 ‘구원 자’(루카 9,11 참조)로서 당신을 따라온 사람들을 그냥 보지 못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이 내놓은 빵과 물고기를 들고 먼저 ‘하늘을 우러러’ 축복(감사) 하시고 그것을 나누어 먹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사랑과 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루카 9,16 참조)
그렇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다른 이들과 기쁘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뜬금없는 듯 보이지만, 바벨탑 이야기를 잠시 떠올려 보자.
그 옛날 사람들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고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4 참조)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여 열심히 일해서 위대한 업적을 세워보자는 것이 뭐가 나쁘고 서로 모여 잘해보자고 의기투합하는 것이 어찌 잘못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며 “참 좋았다”(창세 1,31)고 하신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에게 “복을 내리시며 번식하고 번성하며 땅을 가득 채우라”(창세 1,22.28 참조)고 하셨다. 하느님은 당신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서로 나누고 그로써 모두가 풍요로워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바벨탑을 세우고자 한 자들은 ‘우리가 흩어지지 않게 하자’고 하며 그들이 받은 것과 누리고 있는 것을 움켜쥐고 그들끼리, 그들만의 왕국을 세워 그것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누군가의 말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뼈와 가죽까지’ 곧 당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주신 것이니 그날 밤 주신 빵과 포도주는 당신 자신이었던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거저 얻어먹고 마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그분처럼 서로 내어주며 살아야 하는 천명을 받은 것이리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대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누구에게나 ‘황량한 곳’(루카 9,12)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넥타이 매고 점잔빼던 사람도 비오는 날이면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라는 노래를 부르며 술 한 잔에 삶의 시름을 덜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황량한 세상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그것을 먹고 산다는 우리는 무엇 하는 사람들일까?
강론 서두에 색깔로 표시된 몇 가지 엉뚱한 질문의 답을 우리 모두 함께 찾아보자.
말과 행동
임두빈 안드레아(생활성가 가수)
저는 주로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일을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자들이다 보니, 좁은 울타리 안에 지인의 지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과 업무적 대화를 하다 보면, 간혹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대화가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차후에 생각하지도 못한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사건, 사고도 일어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말로 인해서 일어나는 일들이지요.
‘말’, 참으로 달콤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16세기 계몽주의 사상을 이끈 볼테르의 명언 중 “사람은 할 말이 없으면 남의 욕을 한다.”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이처럼 저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때로는 가해자가 때로는 피해자가 되어, 쉽사리 남을 도마 위에 올리고 헐뜯기도 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악플러의 약70%는 나의 주변 사람이라는 언론의 통계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예상 못 한 주변인의 말들은 저에게 비수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상대해야 하나?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사람이 싫어지고, 말수가 적어지는 마음의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이유 없이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도 하고, 숨쉬기가 힘들고 갑자기 울다가 화가 나기도 하는 제 모습이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저를 이해하고 믿어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방탕하지 말자! 취해 있지 말자!
이렇게 마음에 꼭 쥐고 있던 미움 하나, 분노 하나, 자책 하나, 이렇게 하나둘씩 내려놓으니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말로 인해서 낭비된 시간과 감정들보다 더 내려놓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저 자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낮은 자보다는 높은 자, 겸손보다는 자존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이가 들수록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지만 입으로만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행동은 제가 만든 모습과 제가 만든 계획대로만 가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쉽사리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을 통해서 극복할 수 없는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시련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완전한 극복도 완전한 치유도 없지만, 그저 주님이 마련하신 여정의 길을 멈추지 않고 갈 뿐입니다.
작은 말에 흔들리지 않고 조금 더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나약한 저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결정은 야훼께서.(공동번역성서 잠언 16,33)”
계획은 인간이 세우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 9,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삶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삶을 향합니다.
무조건적이며
무차별적인
사랑을 언제나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사랑은 공허한
말잔치가 아니라
살과 피 전부를
내어주는 놀라운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는
내어주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생명의 기쁨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일치와 감사로
드러납니다.
일치와 감사를 통해
우리존재의 소중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삶을 변화시키시는
성체와 성혈 안에
삶의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봉헌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듯
우리를 사랑의
존재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빛이 되고
하느님의
사랑이 살과 피가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임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우리의
일상안에서 행합시다.
행하는
생명의 잔치가
가장 아름다운
변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