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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2년 6월 24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작성자peater|작성시간22.06.24|조회수302 목록 댓글 0

제1독서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4,11-16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12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13 그들을 민족들에게서 데려 내오고 여러 나라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의 산과 시냇가에서,
그리고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14 좋은 풀밭에서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은 그곳 좋은 목장에서 누워 쉬고,
이스라엘 산악 지방의 기름진 풀밭에서 뜯어 먹을 것이다.
15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6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5ㄴ-11
형제 여러분,
5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3-7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3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몸소 당신 양 떼를 먹이시고 그들을 누워 쉬게 하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구원받게 되리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늘에서는 더 기뻐한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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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양 떼를 구해 내시어 이스라엘로 데려와 몸소 먹이실 것이라고 전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사람처럼,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한다고 가르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세리나 죄인과 같이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들이시고 가까이 하시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루카 복음 15장은 세 가지 비유, 곧 되찾은 양(3-7절 참조), 되찾은 은전(8-10절 참조), 되찾은 아들(11-32절 참조)에 대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의 이야기로,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잃었던 당신 자녀를 다시 찾았을 때 느끼시는 하느님의 큰 기쁨을 전하십니다. 백 마리의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자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밤낮으로 길을 헤매며 애쓰는 목자,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고서는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그 마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성심 안에 머물며 본받고자 다짐합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착한 목자,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심장마저 꿰찔리시어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예수 성심은 오늘도 우리를 당신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 예수님께서는 또한 성체로 우리 안에 찾아오시어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를 당신 생명으로 가득 채우시고 다시 살게 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오늘 하루, 예수 성심과 하나 되어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며, 우리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따뜻한 마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 세상의 모든 사제가 예수님의 성심을 닮아 주님의 착한 목자로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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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로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성화를 보면 흔히 가시관에 둘러싸인 심장으로 표현되는 예수 성심은, 예수님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면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사람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이미 숨을 거두셨기에, 그분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자, 그곳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입니다.

심장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돌아가셨음을 보여 주는 표지이지만, 그 상징적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 복음의 상징 체계 안에서 물은 세례성사와 관련되어 성령을 가리키며, 피는 이미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사상 안에서 생명을 뜻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심장에서 피와 물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에 당신의 영과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사형 도구였던 십자가가, 세상에 성령과 생명을 수여하는 귀중한 도구로 변신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심장을 여시어 모든 것을 내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그분의 열린 심장을 바라보는 것이며, 가장 소중한 것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시는 그 마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불타오르는 사랑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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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슬픔은 인간 삶의 양면입니다. 내가 기쁘다는 것은 언젠가 같은 이유로 슬펐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내가 슬프다는 것은 같은 이유로 기뻤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언제나 슬픔을 잊는 행복이고, 슬픔은 언제나 기쁨을 갈망하는 아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이 두 마음의 본질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잃었던 것을 되찾는 기쁨’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잃은 양을 되찾은 주인의 기쁨은 남은 양들의 숫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들의 얄팍한 계산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가치입니다.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 본 사람은 가진 사람들보다 더 인생의 깊이를 들여다볼 줄 압니다. 건강을 잃은 뒤에 건강의 소중함을, 욕심으로 재산을 날린 사람은 마음의 절제와 소박함의 가치를, 교만과 위선으로 사회적 지위를 잃은 사람은 겸손과 진솔함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만납니다. 모든 것을 내 소유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로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마음입니다.

신앙인은 죄인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성령으로부터 받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마음의 눈을 뜨고, 세상의 욕망으로 가려진 우리들의 마음을 열 준비만 하면, 하느님 사랑이 지닌 위대한 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쁨은 바로 그런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행복임을 오늘 예수님의 성심으로부터 배웁니다. 특별히 오늘은 사제들이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닮도록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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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양 떼들을 마을 공동의 소유로 키우며 서너 명의 목자들이 관리했기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러 떠날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유다 지방에서 양이 길을 잃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곳의 목초지는 마치 사람의 등뼈 모습처럼 좁고 길게 뻗친 고원 지대인데, 건기에는 이런 곳에서 양들이 풀을 뜯어 먹습니다. 그러니 양들이 이곳을 돌아다니다가 벼랑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 짧은 복음 안에는 ‘기뻐한다.’는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기쁨이라는 말을 반복하시며 쓰고 계실까요? 물론 죽어 있을지도 모르는 양을 다시 구하였으니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쁨’이라는 표현의 다른 면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죄인들의 회개에 하느님께서 이토록 기뻐하시는 모습 뒤에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느끼시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할 때 흘리는 뜨거운 기쁨의 눈물 뒤에는 그동안 서로 만날 수 없었던 이별의 슬픔이 담겨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의 회개를 두고 기뻐하시는 반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함께 떠올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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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길 잃은 양을 결코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분의 양 떼이고 백성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너른 가슴에 파묻혀 그분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약한 인생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분의 음성을 듣고도 자꾸만 멀리 도망치려는 못된 마음을 가진, 길을 잃고 헤매는 죄인임을 잘 압니다. 아니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잘 안다고 말하면서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어리석고 교만하고 형편없는 인생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쩌면, 주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주님 위에 군림하려 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위해 모욕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분께서 우리 죄 때문에 그토록 황당한 일까지 당하셨습니다. 억울함으로 말하자면 그분보다 더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두둔해 주십니다. 주님의 마음은 바로 그러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아 세상 사람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증언하는 삶을 살 것을 결심합시다. 그분의 거룩하신 마음을 기억하며, 나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주님을 따르기를 맹세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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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교우들을 위하여 순직한 성직자들이 많습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최양업 신부님도 그랬습니다. 조선의 세 번째 사제 그룹이었던 강도영·정규하·강성삼 신부님 역시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1896년 4월 26일 서울 중림동 약현 성당에서 거행된 이 세 분 신부님들의 서품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가진 성품성사였습니다. 특히 세 분 가운데 막내였던 강성삼 신부님은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 입학하여 14년 만에 사제품을 받았는데, 그분의 짧은 일생은 참으로 험난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와중에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강성삼 신부님은 16살 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국 땅 페낭 신학교에서 영양실조와 풍토병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신부님의 첫 사목지는 경남 밀양(명례)이었으나, 본당 사목 6년 만에 선종하였습니다. 38세의 아까운 나이였습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인 오늘은 또한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성화는 예수 성심을 닮는 일입니다. 기도 없이, 은총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사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신앙인이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더욱 노력합시다.

인간은 부정적 경험을 많이 기억할까요? 아니면 긍정적 경험을 더 많이 기억할까요?

듀크 대학의 브라이언 섹스톤 교수는 이를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부정적 경험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한 상태이면 긍정적이고 평범한 일을 인식하는 감각이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피곤할 때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잠을 자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스트레스와 피곤을 잊게 됩니다. 열정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Three Good Things’라는 프로그램이 나왔습니다. 일종의 행복 기록으로 그날의 멋진 경험과 그때의 감정을 적는 것입니다. 매일 세 가지씩을 기록하면 평소 무심코 지나쳤을 작은 기쁨과 소소한 기쁨을 인식하게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스트레스와 피곤을 잘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좋은 일 3가지. 적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좋은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성찰을 힘들어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습관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크고 대단한 곳에서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 주님을 찾지 못한다면,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의 우리도 아닌 광야에 놓아두었다는 것은 그냥 방치해놓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잃어버린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서 방황하고 있을 때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만을 찾으면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늘 함께합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기억보다는 긍정적인 기억을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와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제로 지내는 예수 성심 대축일은 주님의 사랑 가득한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사랑받음을 강력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은 자기 역시 다른 이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실천하는 우리의 사랑을 통해, 주님 안에서 함께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장애물이란 목표지점에서 눈을 돌릴 때 나타나는 것이다. 목표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면 장애물은 보이지 않는다(헨리 포드).

 

 

 

부단히 넘어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서는 사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 교우들은 무척 바쁜 날입니다. 사제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저희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주시는 날인 동시에, 우리 인간의 죄악과 방황 때문에 상처입은 예수님의 성심(聖心)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행해진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성장을 위해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조사 결과는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위해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사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대답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사제들의 지속적인 회심과 쇄신, 성화 없이 교회의 쇄신과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는 답이 되풀이되어왔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착한 목자로 살아가시는 사제들도 부지기수인데, 그런 사제들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사제도 어쩔 수 없이 근본적인 한계와 결핍을 지닌 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틈만 나면 대대적인 삶의 변화를 꿈꾸지만, 마음과는 달리 행동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멋진 모습의 착한 목자로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지만, 희망 사항과는 다른 초라한 스스로의 모습에 좌절도 많이 합니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따로인 모순된 삶을 살아가며 가슴을 치고 후회합니다. 한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나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신기루 같은 하느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예수성심대축일을 사제성화의 날로 지정하고 사제들을 위한 특별한 기도를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이 인간적 부족함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넘어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서서 하느님께로 또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내공을 지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최우선적 선택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느님만으로 행복하고, 하느님께만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은 또 다른 한 가지 지향을 두고 기도를 해주셔야 합니다. 통상 우리가 바치는 대부분의 기도는 우리 인간 측에서 하느님께 청하며,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하기보다 하느님께 위로를 드리는 기도를 바쳐야 마땅합니다. 우리 인간의 부족함, 우리 인간의 죄악, 우리 인간의 배신으로 크게 상처입은 예수님의 성심께 송구한 마음으로 그분의 부서진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상호 통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흘러가야 하고, 다시 또 되돌아가야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이겠지요.

 

한쪽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에 불이 붙고, 밤잠도 제대로 잘 못 이루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조금도 그 사랑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짝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그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우리가 아무리 그분께 대들고 반역해도, 우리가 그렇게 배신을 때려도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의 불꽃을 태우고 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 성심은 우리의 반역과 배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구세주의 상처 입은 성심에서 우리 교회가 탄생되었고,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습니다. 그 부서진 예수 성심에서 7가지 성사가 흘러나왔으며, 그 성사는 큰 강이 되어 메마른 사막을 비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간절한 바람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 성심께로 기꺼이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퍼마시는 것.’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사제는 예수님의 성심을 본받으면 성화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더 자세히 보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방치합니다. 도대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맹수가 우글거리는 광야에 방치하는 것이 왜 사랑일까요? 

 

우리는 가끔 버릇없는 아이를 감싸는 어머니를 볼 때가 있습니다. 왜 남의 애 기죽이냐고 되레 화를 냅니다. 그것이 사랑일까요?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자신을 무는 개까지도 감싸는 어머니를 나무랍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그 개가 다른 사람을 물게 될 것을 용인하는 범법자나 다름없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정말 누가 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물리면서까지도 잘해주는 주인일까요, 아니면 강 훈련사일까요? 강 훈련사는 개를 물속으로 끌고 갑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일단 살아야 하는 게 우선이 되어서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개에게 입마개도 하고 조금씩 주인에게 의지하고 순종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광야로 끌고 나온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아의 압제에서 구해주고 싶으셨습니다. 당신께, 혹은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하는 백성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강 훈련사가 물속으로 개를 끌고 들어간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의 척박한 곳으로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어깨 위에 그대로 있으려 하지 않고 본인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방치하신 것도 이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어깨에서 무슨 일에나 자신을 죽이고 순종할 수 있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성심입니다. 사랑의 목적입니다. 사제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나라 카리스마 대표 배우인 최민수 씨를 길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살다 최민수 씨와 혼인한 강주은 씨입니다. 강주은 씨는 빚이 지금 시세로 30~40억 있는 최민수 씨와 결혼하여 힘겨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했던 최민수 씨에게 최대한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계속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지만 참았습니다. 한국말도 잘하지 못할 때라 만화를 그려가면서 소통해야 했습니다. 사고를 칠 때도 참아내며 그의 편을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결국 강주은 씨는 지금 연매출 600억 상당의 홈쇼핑 사업을 하고 있어 재정적으로 안정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반면 최민수 씨는 월 40만 원의 용돈을 타서 씁니다. 기름값 하면 남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강주은 씨는 최민수 씨가 돈 개념이 없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광야를 선사합니다. 그래도 최민수 씨는 강주은 씨에게 어쩔 수 없이 순종합니다. 

 

사람의 이기심을 없애려면 환경의 결핍을 주어서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자각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해주어서 기를 살려주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습니다. 구원을 보장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선물하십니다. 당신의 결핍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궁핍과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물에 빠진 개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장 자기가 사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못된 아이를 감싸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가 나에게 앙심을 품더라도 순종을 가르치는 게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어깨에서 꼼짝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존재로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주시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기 전에 주님께 의지합시다. 그냥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아멘!” 하겠다고 고백합시다. 그래야 결핍 훈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종만이 살길입니다.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순종해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성령강림 대축일 때입니다. 평화방송에서 성령의 은사를 뽑는 ‘어플’을 만들었습니다. 이름과 세례명을 입력하면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나오는 프로그램입니다. 저의 성령의 은사는 ‘지혜’였고, 성령의 열매는 ‘절제’였습니다. 사제인 저에게 꼭 필요한 은사와 열매였습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건강과 장수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청을 좋게 보셨습니다. 지혜를 주시고 덤으로 건강과 장수를 주셨습니다. 신학생 때 신부님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와 지식도 필요하지만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은 ‘판단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판단을 위해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급한 성격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많습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적도 많습니다. ‘절제’ 또한 제게 필요한 열매였습니다.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이고,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성화되어야 합니다. ‘사제 성화의 날’이면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2002년 ‘사제 성화의 날’이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이 저에게 ‘사목 체험’을 나눠보라고 하였습니다. 사제들 앞에서 체험을 나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배 사제들은 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료 사제들은 저의 허물까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 사제들에게 모범을 보일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구장 신부님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본당에서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의 사목 체험은 교구 사목국에도 전해졌고, 사목국장 신부님이 함께 일해 보자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교구 사목국의 ‘교육담당 사제’로 3년을 일하였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구역장/ 반장을 위한 월례연수를 기획하는 것이었습니다. 미리 강사 신부님들을 섭외하면 되었습니다. 다행히 큰 무리 없이 3년간 월례연수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보람 있었던 3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한 성가가 있습니다. ‘예수마음’입니다.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마음 겸손하신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잡아당기사 네 성심에 네 성심에 결합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차지하시와 네 성심에 네 성심에 보존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변화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바꿔 주소서.” 예수님의 마음은 아낌없이 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분에서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목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권한과 능력에서 겸손하셨습니다. 자연을 다스리고,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지만 그래서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으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심에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배반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침을 뱉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뺨을 때리며 모욕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셨고, 하느님께도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하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으로, 끝까지 믿어주시는 사랑으로, 고통과 수난까지 감수하시는 사랑으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결합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호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겸손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사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제는
하늘빛을 땅에 드리우도록
땅기운을 하늘에 들어 높이도록
그리하여 하늘과 땅을 곱게 잇도록
부르심 받음 사람입니다


사제는
여린 마음과 작은 몸으로
하느님께서 정성껏 빚으신
온 누리 보듬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한 몸 추스르기 버거워도
하느님 사랑 가득 담은
함께 사는 세상 가꾸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저 홀로 머물 울타리 허물어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 가득한
여리고 찢긴 거친 세상 담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홀로 거룩함의 꿈에서 깨어나
더러운 것 깨끗하게 하고자
온 삶 아낌없이 던지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하느님 손길 닿은 세상 모시되
세상에 짓눌리고 세상이 버린
하느님의 작은 이 품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살기 위해 벗을 희생시키지 않으며
벗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으라고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약하고 추하고 부족한 사람이기에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부끄럼 없이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몸과 마음에
핏빛 사랑의 상처 가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순간부터 끝 모를 마지막까지
앞서 가시고 함께 하시기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용기 내어 또 한 걸음 내딛는 이
바로 주님의 사제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대축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하늘 창공을 날다가 거미줄에 걸려든 나비 한마리, 한 없이 자유롭고 싶지만 나비의 생명은 위기이다. 그 때 그 모습을 지켜 본 어린 소녀가 가시덤불과 맞서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구해준다. 나비는 다시 하늘을 날아간다. 자유로운 나비가 고맙다며 인사를 하는 듯 하다. 이런 모습에서 따듯한 구원의 의미를 떠올린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즉 그리스도이시다. 거미줄에 걸려 자유를 잃어버린 고장난 인간이다. 인간은 신음한다. 그 때 우리에게 다가 오시어 본래의 성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시는 만왕의 임금,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죄 지은 자, 어둠에 갇힌 자, 병자, 일어나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다가 가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이 되어주시기 위해 흠없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당신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다. 어디 그 뿐인가? 당신의 전존재를 날마다 우리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 주시는 지고한 하느님이 사랑이시다. 생명이신 당신께서 결정적으로 오시어 성심으로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신다.

어린 소녀가 거미줄에 걸려든 나비를 위험에서 꺼내주려 가시밭길을 마다하고 다가가 나비에게 생명이 되게 한다. 나비를 구해주는 어린 소녀의 마음이 거룩하다. 그 어린 소녀는 예수성심을 닮았다. 그 소녀는 어른이 되며 예수성심은 더욱 아름답게 행복하게 커갈 것이다.

예수성심대축일에 예수님의 성심은 인류구원에 촛점을 맞췄다. 예수님의 전생애가 슬펐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를 버려두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을 다시 부뢀시켜 우리의 구세주가 되게 하셨고 더 큰 상급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이 되게 하셨다. 그분의 전생애가 행복이셨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일까?

날마다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받아 모신다 함은 성체에 담아 놓은 예수님의 성심을 어린 소녀처럼 알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사는 것이다. 그런 성심을 닮은 삶을 응용해서 살 수 있다면 우리가 지내는 예수성심대축일의 의미는 더욱 내 안에서 커 갈 것이다. 오늘은 사제성화의 날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어린 소녀처럼 생명에 대한 구원을 향해 예수님의 성심을 살 때 그 의미가 다시 초심으로 재건 되는 날일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6-30)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되찾은 양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셨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곧 타인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 때문에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말인데,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조각한 아름다운 여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자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의 사랑에 감동해 그 여인상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나누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인간을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사랑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그 지극하신 사랑을 ‘예수 성심’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를 통해 당신께서 바로 착한 목자와도 같으심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주님의 모습을 닮아 잃어버린 양들, 우리로부터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 사랑을 전하고 생명을 나누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살아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동시에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사제는 어떤 모습입니까. 각 개인에 따라서 훌륭한 사제의 상이 있을 것이겠지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 올바르고 훌륭한 사제의 상이 있습니다. 이 사제의 모습은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지금부터 함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자로서의 사제의 모습을 함께 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사제의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양은 약한 동물입니다. 다른 동물이 공격을 하면 도망도 제대로 못가고 그대로 먹히는 아주 약한 동물이지요. 그런데 양 백 마리중에 한 마리가 잃어버렸다면 그 양은 주인이 찾으러 가지 않는다면 어느 육식돌물에게 먹히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양을 “찾을 때 까지” 주인은 찾으러 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찾을 때 까지”입니다. 메시아이자 하느님이시며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예수님의 성심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에서 나오는 100이라는 숫자는 당시에 완전 혹은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양 백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완성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완성을 위해서 잃어버린 한 마리를 예수님께서는 찾을 때까지 찾는다는 것입니다. 또 알아야 하는 것은 “잃으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목자의 잘못이 아닌 양의 의지로 다른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목자는 위험에 처해 있을 양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목자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며 오늘을 살고 있는 사제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사제는 기도를 해야 하며 목자로서 하느님의 모든 양들을 같은 마음으로 보듬고 악으로부터 지켜야 하며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야 하는 이들입니다. 사제들은 자신의 성향과 가치관을 가져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들은 하느님의 나라로 잘 가고 있는 이들 뿐 아니라 특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이들에게 더 관심을 보이고 사랑해야 하며 그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복음에서처럼 찾을 때까지 찾아야 하겠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위의 비유를 한 이유는 그들이 사제로서의 삶을 살지 안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사제들에게 위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이겠지요. 사제의 성화의 날을 맞이해서 그들이 예수님처럼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보듬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하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사제가 멋질때'
     예수성심 김연희마리아 수녀님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루카 15장 3~7)
잃은것을 알게 되면 찾아야합니다
잃은것이 귀한 존재라면
더욱더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대리자인 사제는 너무나 귀한 존재!
어떻게 하면 신자들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줄지 시간, 능력, 열정을 쏟으며
푸근한 아버지가 되어갈때 가장 멋집니다
착한 목자인 사제는 예수님 마음 닮아
누가 아픈지, 무슨일이 있는지,
어떻게 사랑하고 위로하고 감싸줄지,
좋은 일이 있으면 더 없이 기뻐해주고
용서와 화목을 위해 마음을 다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며
사제들이 거룩함의 옷을 더럽히지 않고
성체를 만지는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신자 천명보다 사제 한명 파멸시키려는
악마의 집요함에 넘어가지 않도록 보호하소서
세상에 물들어 신자들이 참아주기 어려운 사제,
혼탁한 마음으로 대충 살며 겉멋만 부리는 사제,
고통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겸손한 사제,
다정하면서도 권위있고 삶으로 빛이 되는 사제,
예수성심이시여!
저희 모두가 잃어가는 거룩함을 되찾아
서로를 받아들이며 기뻐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더불어 ~예수성심시녀회 수녀들이 주보이신 예수성심을 본받아 겸손한 시녀의 자세로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근상 시몬 신부님

죄인(하마르톨로스)은 '하마르타노'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라고 하는데, '과녁을 빗맞추는 행위; 해야할 바를 하지 않거나, 목표에 다다르지 못하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감각과 조금 다른 것이, 우리는 어떤 죄목을 저지른 행위자를 죄인이라 칭하는데 반해서 복음 속 죄인들이란 해야할 바를 하지 못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죄인이란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한 이들을 뜻하는데, 복음 속 죄인이란 해야할 바를 하지 않는 이들을 뜻한다. 그 때에는 물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이들- 많은 경우 신분(세리)이나 처지(병듦) 자체에서 율법을 어기는 상태가 된 이들을 뜻하지만, 그보다는 더 넓게 하느님의 명령,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하느님만을 섬기는 행위에 다다르지 못한 이들을 뜻하는 말씀이다.
우리들 감각에서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자는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닌, 그저 조용하게 자기 삶이나 살아가는 이일 터인데... 주님께서 회개를 촉구하고, 건져내시고 하는 죄인(하마르톨로스)는 바로 이들, 아무 '죄'도 짓지 않으나 굳이 '선한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닌 평범한 이들을 뜻한다.
우리가 돌아서야 한다는 말씀이며, 그게 당신이 찾는 기쁨이란 말씀이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 복음을 처음 접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선한 아흔 아홉 마리의 양 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만을
더 귀중히 여기시는 것 같아서 괜시리 서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잃어버린 양을 다시금 되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더 머물러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변화하고 돌아온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에
변화되고 돌아온 사람을 맞이하는 기쁨이
어느것 보다 큰 기쁨이자 행복임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다시금 돌아감!
새 시작과 새 출발!!
예수님의 거룩한 성심에 의지하고 의탁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Rejoice with me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십시오. -머무름, 찾음, 기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예수성심을 공경하고 예수성심의 신비를 묵상하는 6월 예수성심성월의 절정을 이루는 오늘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예수님과 요셉 수도원을 충심으로 한결같이 사랑하는 17년 역사를 지닌 ‘예수성심자매회’ 축일이기도 합니다. 회장 자매를 비롯한 예수성심의 딸들에게 축복을 비는 마음 가득합니다.

 

예수성심은 그대로 하느님 성심입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난 하느님 사랑입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성심과 하나될 때 만사형통萬事亨通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예수성심신심입니다. 자주 부르는 예수마음이란 성가 199장을 조용히 불러 봅니다.

 

“예수마음 겸손하신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수도원 십자로 중앙 ‘늘 거기 그 자리’에 서있는 예수성심상이 한결같은 예수님 사랑, 하느님 사랑을 보여줍니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환대하며 하시는 말씀이 바위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성심의 사랑만이 우리의 근원적 두려움을, 불안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의 빛만이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의 역사가 자못 깊습니다. 예수성심공경은 성경에 근거하고,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교회의 전통적 신심입니다. 

 

초세기의 여러 교부들은 창에 찔린 예수님 심장에서 구원의 물과 피가 흘러내렸다고 해서 예수성심을 성령과 함께 초자연 은총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물은 세례를, 피는 성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믿었으며 이 둘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의 샘, 성사의 원천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1673년 12월27일부터 1675년 6월까지, 성녀 말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47-1690) 수녀에게 70회 발현하시며 메시지를 주셨고, 그후 교황들은 이를 받아들여 공적 공경을 허락하였으며 마침내 교황 비오 9세는 교회 축일로 선포합니다. 

 

예수성심은 성체성사의 원천이고, 성체성사는 예수성심의 가장 완벽하고 탁월한 표현입니다. 성체성사는 제대상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이고, 당신 자녀들을 영원히 살리고자 하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발현하신 예수님께서 말가리타 수녀에게 주신 특기할만한 메시지입니다.

 

“내 거룩한 마음은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너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내 성심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홍수를 퍼부어 성덕과 구원의 은총으로 그들을 부요하게 하고, 마침내 멸망의 구렁에서 건져내려 한다. 

보라, 사람들은 이렇듯 사랑했고, 그들에게 이렇듯 많은 은혜를 베풀었건만, 이 무한한 사랑에 대해 오직 배은망덕만 당하는 이 성심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성심에 관한 역대 교황님들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희망을 둘 곳은 예수성심뿐이다. 우리의 모든 불행을 낫게 하실 이(비오9세), 위험중에 있는 인류의 유일한 피난처(비오10세), 모든 신심의 종합이요, 더욱 완전한 생활규범(비오11세)이 예수성심이다.”

 

이어 ‘성심의 교황’으로 불리는 비오 12세는 “예수성심 신심이야 말로 매우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탁월한 방편이요, 현대 사회에 가장 긴요하고 적합한 신심으로서,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험있는 학교”라 불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그 방법을 알려 줍니다.

 

첫째, 예수성심의 사랑안에 머무르십시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영적 쉼터인 예수성심 안에 머물러 예수성심의 사랑을 관상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성심의 모범이자 대가입니다. 오늘 제2독서 로마서 말씀은 바오로의 예수성심의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아드님의 죽음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그러니 예수성심의 사랑안에 머물러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는, 예수성심과 하나되는 성체조배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둘째, 예수성심의 사랑을 찾으십시오.

참으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찾는 사람은 성체성사를 찾으며, 방황하는 형제들을 찾아 나섭니다. 이 미사중 아름다운 감사송이 예수성심의 정체를, 예수성심을 찾는 영혼의 모습을,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의 모습을 생동감있게 묘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흡사 어머니 교회에서 평생 영적 젖을 빠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참으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찾아 해갈된 영혼들은 길잃어 방황하는 형제들을 찾아 나섭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의 착한목자 하느님은 예수성심의 예표입니다.

 

“내가 몸소 내 양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붇돋아 주겠다.”

 

새삼 이런 사명을 위해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착한목자 하느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바로 아흔아홉마리 양들을 광야에 놓아둔채 잃은 양 한마를 찾아 나서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잃은 양은 물론이요 우리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셋째, 예수성심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잃은 양 한 마리리를 찾고 기뻐 환호하는 예수 성심의 기쁨은 바로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환성歡聲이자 하느님의 환성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을 절정을 보여주는 다음 복음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참 기쁨은 예수성심의 사랑과 하나되어 길잃어 방황하는 형제들을 주님의 교회 공동체에 합류시킴에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십시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예수성심의 사랑을, 성체를 모심으로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1.머무르십시오. 

영원한 안식처인 예수성심의 사랑안에 머무르는 관상이 우선입니다.

 

2.찾으십시오.

자주 미사를 찾아 예수성심과 하나되는 것이요,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길잃어 방황하는 영적 난민難民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길잃은 ‘양 하나’가 아니라 대부분 방황하는 ‘양떼들’ 같은 현대인들입니다.

 

3,기뻐하십시오.

만남의 기쁨, 찾음의 기쁨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이 바로 은총의 샘, 기쁨의 샘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이, 기쁨의 사도가 되어 파견될 때 필시 찾음의 기쁨도 뒤따를 것입니다. 헤매는 많은 이들이 우리의 기쁨과 평화를 찾아 올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습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우리가 찾지 않은 양

    유상혁 세례자 요한 신부님
제가 좋아하는 것, 제가 행복해하는 것, 제가 기뻐하는 것에 대한 애착을 가집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잃어 버렸을 때, 상실감도 큽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다시 찾으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양을 찾아 기뻐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동이 사랑하는 양들 안에 외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무리의 양들은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오직 양의 주인만이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의 노력과 정성은 마음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양의 주인은 자신의 신체 가장 높은 곳에 양을 놓아 두고, 친구들과 이웃들을 부릅니다. 그 모습은 다른 양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동료에게 무관심한 다른 양들에게 나무라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다른 양들은 배가 아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공동체에 있는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에 대한 무관심은 질타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금 너희와 함께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찾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나서서 그들을 위로하고 돌볼 수 있는 시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함승수 신부님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헨델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헨델이 길을 가다가 가발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당시에 가발은 귀족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지요. 게다가 그 당시 가발은 사람의 진짜 머리카락으로만 만들 수 있었기에 무척 귀하고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 소중한 가발을 잃어버려 난처한 표정으로 이곳 저곳을 헤매고 있는데,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의 가발을 찾아주었습니다. 그는 근처 이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였습니다.
 헨델은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그 이발관을 자주 찾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녀와 가까워져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헨델은 자신이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오라토리오곡 '메시아'의 친필 악보를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메시아'라는 곡은 오랫동안 침체기에 빠져있던 헨델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 준 명곡으로, 그 곡의 친필 악보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소장하고 싶어할 매우 가치있는 것이었지요. 그런 소중한 악보를 선물했다는 것은 헨델이 그만큼이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헨델은 그녀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헨델은 그녀에게 청혼하기 위해 그 이발관에 들렀습니다. 그 아가씨는 헨델이 온줄도 모르고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한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옆에 있던 다른 이발사에게 말했습니다. "저 이 손님 머리 좀 말게 거기 있는 악보 몇 장만 집어주세요." 알고보니 그 악보는 헨델이 그녀에게 선물해준 '메시아' 악보였고 그 사실을 확인한 헨델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는 그녀를 만나러 가지 않았습니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 아가씨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준 선물의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그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이 갖는 가치와 소중함마저 '싸구려' 폐지로 만들어 버렸고, 그렇게 그녀의 인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줄 수도 있었던 소중한 사랑이 끝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나에게 있어서 갖는 가치와 소중함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다 받는다고 해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또 특별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셨기에, 우리들 중 어느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실 정도로 아끼셨기에, 당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잘못된 길로 들어선 이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면, 그 무겁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언제라도 다시 짊어지실 각오가 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숫자'로 파악하지 않으시고, 각자의 상황과 개성과 재능을 헤아리며 그에 걸맞는 소중한 은총의 선물을 내려주시는 분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자, 그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사랑을 받는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은총의 선물을 받는 우리는 그 사랑과 은총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앞서 들려드린 이야기의 이발관 아가씨처럼 그분께서 주신 사랑과 은총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무시하고 외면함으로써 그 가치와 소중함을 훼손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나 스스로 예수님 앞에서 나 자신의 가치와 소중함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분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총의 선물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잘 간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과 그분의 뜻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우리도 그분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두 갈래 인생길에서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아흔아홉 양들은 회개할줄 모르거나 원래 선한마음 지닌 이들이겠죠.
잃은 양 한 마리는 욕심이나 교만에 사로잡혔다 뉘우친 사람일 테죠.
하늘이 기뻐할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이라며 인생길 잃은 사람이었죠.

하늘에서 알려 준 좁지만 험한 인생길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 많아요.
세상과 하늘나라의 두 가지 인생길이 언제나 우리에게 열려있습니다.
영혼의 만족인 행복의 길 잃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 무섭더군요.

하느님을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나라 영복에 관심 둡시다.
예수님사랑으로 영복바라는 마음 지닌 사람들이 많아지면 참 좋은데.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여덟 번째 주제는, ‘평화의 일꾼들을 위하여’입니다.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십시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습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하여, 선인이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주 하느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하여, 죄를 거듭 지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주 하느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해서, 죄인에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악에 휘둘려 더욱 혼탁스러워진 세상을 우리의 선으로 정화합시다. 세상 사람들이 죄악을 저질러 혼탁해진 세상을 우리의 희생으로 기워 갚기로 합시다.

 

 

 

생각은 한계가 있으나 마음은 한계가 없다< 루카15/3-7>6/2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랑 한다는 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야 하지만 이는 모두 한계가 있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나는 너를 생각으로 사랑해 하면 아는 것만 사랑 한다는 말이지만 마음으로 사랑해 하면 전체적이며 완저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주님의 한 없는 사랑을 비유로 들려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며 잃은양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 하시는 말씀 한마디가 심근을 울려줍니다.

주님의 마음은 바다 같고 태양 같이 느껴집니다. 또한 진실과 사랑이 담긴 마음입니다. 기도시간 시상이 떠올라 기억해 두었다가 올려보았습니다.

예수마음 소금 같아라.

맛과 멋이 빛나

생명이 살아 나내

살 맛 나게 하시네

주님 마음이 아니시면

어디서 생명 얻으리까?

예수마음 빛이라

어둠 구석구석 빛이니

어둠 물러나고

밝은 세상 되었네

주님 마음 아니시면

인생길 찾아 얻으리까?

예수마음 물이라

생명의 참 삶 주네

목마른 자에게 갈증 풀고

생생한 삶을 살게 하네

주님 마음 아니시면

어찌 생명 살아갈까?

오늘 우리를 위하여 주님 심장 창으로 열고 피와 물을 이 땅에 속아 내시니 매 마른 땅 적시우고 온갖 생명 춤을 추며 반깁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따라 소금 빛 물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소금 음식의 맛을 내고, 섞음을 방지하고, 물건을 단단하게 하고, 소금에서 태아가 성장 합니다.

빛은 어둠을 없이하고, 사물을 반간하게 하고, 활동하도고 히을 주고 모든 것을 바르게 길로 가게 합니다.

물은 겸손으로 내려만 가고 어디나 침투하는 부드러움이 있으며 생명을 살게하는 원동력입니다. 그 외는 더 많은 작용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 15, 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음의 주소를
찾는 시간이다.

예수 성심께
마음의 길을
다시 묻는다.

우리 삶의
중심에는
우리를
살게하시는
예수 성심이
계신다.

예수 성심은
끊임없이
사랑과 용서를
우리들에게
건네시며
베푸신다.

지극한 사랑은
지극한 정성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이시다.

마음은 열어야
마음이다.

우리가 잃어
버린 것은
서로를 헤아리는
진실된 마음이다.

깨어있는 마음은
잃어버린 양을
몸소 찾아 떠나고
위하는 열린
마음이다.

열려있기에
낮아지고
낮아지기에
서로를
아낄 수 있다.

예수 성심을
닮아가는 것이
참된 우리들
신앙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

우리의 본모습은
우리들
참된 마음에 있다.

우리들 마음을
기다리시는
예수 성심이시다.

예수 성심께
지쳐있는
우리 마음을
봉헌한다.

진실한 기도
참된 실천
이 모든 것은
예수 성심의
간절하신
마음이다.

간절하신 마음은
회개로

지극하신 마음은
독단과 편견
합리화를 겸손된
열림으로

거룩하신 마음은
새마음으로
바꾸어주신다.

끊어진 마음의 길
서로의 관계를
이어주시는
예수 성심이
우리를 아름답게
정화시켜 주신다.

예수 성심에서
길을 찾고
마음의 원천이신
예수 성심에서
마음을 회복한다.

날마다
열리고
나누는
마음의
여정이다.

물건 구입할 일이 있어서 어느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이 물건의 종류가 많아서 어떤 것을 구입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직원이 다가와서 말합니다.

 

“사장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제게 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장’이 아니라 ‘신부’니까요. 그런데 다시 한 번 “사장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닙니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뒤에 저를 향한 물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반 복장이 아닌 클러지셔츠를 입고 있는 저를 보고서는 직원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장님! 신부님이신가 봐요.”

 

그런데 신부임을 알면서도 물건을 계속 설명하는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나라 취업 인구 중에서 26%가 자영업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습니다. 그만큼 사장님이 많아서 남자가 오면 무조건 ‘사장님’이라고 말하라고 교육을 받았나 봅니다. 습관이 되었는지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이야기 중간에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다음에 올게요.”라고 말하고는 그 가게에서 나왔습니다. 신부인 제게 계속해서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손님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냥 습관처럼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습관처럼 대하는 마음, 형식적으로 대하는 마음에서는 진정성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모습에 대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고 있을까요? 그냥 습관처럼 “하느님!”만을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사랑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는 날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같이 주님께서는 당신 품을 떠난 죄인들을 보살피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진정성 넘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우리 역시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사랑을 말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향해서 또한 주님을 향해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에 주님께서는 더욱 더 기뻐하십니다.

 

특별히 오늘은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제들이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열심히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명언: 영혼이 머무르고 싶게 만들려면 육체를 잘 보살펴야 한다(베르나르 베르베르).

 

사람과 사랑

작가 김상현의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라는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발음하면 입술이 닫힌다. ‘사랑’을 발음하면 입술이 열린다. 사람은 사랑으로 여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고 계속해서 사람과 사랑을 소리 내어 발음해 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사람은 입술이 닫히고, 사랑은 입술이 열리더군요. 그러면서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를 떠올려 봅니다. 이웃과의 갈등으로 인해, 세상 삶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닫혀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열 수가 있을까요? 작가가 말하고 있듯이 사랑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해와 지지를 통해, 존중과 칭찬이 동반하는 사랑을 통해서만 마음을 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함께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사랑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리고 당신 자신을 죽음으로 몰면서까지 사랑을 보여주셨을까요? 당신의 진정성 넘치는 사랑으로만이 우리들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사랑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연민의 정이 북받쳐오르는 예수 성심(聖心)!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서 안에서 가끔씩 예수님께서 거짓 예언자들과 사제들, 지도자들을 향해 던지시는 초강력 경고 메시지를 봉독하고 묵상할 때 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너희는 거짓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마태오 복음 7장 15절)

 

지난 사목생활을 돌아보며, 저짓 예언자, 게걸든 이리떼 같은 존재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주님 앞에, 양떼들 앞에 그저 송구스럽기만 한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성화의 날입니다. 얼마나 걱정되었으면 따로 ‘사제 성화의 날’까지 제정했을까? 하는 마음에 크게 부끄럽기도 합니다.

 

오늘 한국 가톨릭 교회의 현실을 진단할 때, 지금 수많은 도전과 기로 앞에 서 있는 우리 교회가 쇄신되고 성장하는가? 아니면 퇴보와 쇠락의 길을 걷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70퍼센트의 답은 사제들에게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 사제들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언제나 자신의 양떼를 위해 기도하고 일하며, 노심초사하고 결국 목숨까지 바치는 노력을 통해, 우리 교회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드라마틱한 나날이 매일 펼쳐지는 세상 안에서 고생하며 살아가시는 평신도들, 그리고 나와 너무나 다른 그, 그리고 공동체와 더불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수도자들의 삶도 힘겹지만, 사제들의 삶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강론대 위에서의 모습과 강론대 밑 내 모습 사이의 큰 괴리감에 늘 괴로워합니다. 사제들 역시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인지라, 때로 작은 파도 앞에서도 무기력하게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는 언제나 주님과 교우들로부터 사랑받는 멋진 사제로 살고 싶은 마음 가득하지만, 막상 구체적인 현실 앞에 서면 예의바르고 균형잡힌 사제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본인도 이해하기 힘든 부끄러운 모습으로 전락합니다.

 

언제나 내 안에는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그 나를 통제하고 다스려가며 살아가기가 얼마나 버거운지 모릅니다. 사제 역시 교회 안에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한 가엾는 죄인이요 상처투성이의 어린이지만, 그 상처를 꼭 부여안고, 오늘도 상처입은 치유자이자 부족한 사목자로서, 가슴을 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성심께서 당신의 한없이 너그럽고 뜨거운 사랑으로 매일 사제들을 따뜻히 품어 안아주시고,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에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예수 성심(聖心)은 어떤 마음인가요?

 

우리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연민의 정이 북받쳐오르는 마음이 곧 예수 성심입니다. 우리가 배신과 타락의 길을 걸어간다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시고 다시 한번 새출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마음이 곧 예수 성심입니다.

 

“자녀들아, 너희들을 향한 내 이 불타는 사랑을 보거라. 헛되고 헛된 길에서 얼굴을 돌리고 이제는 내게로 돌아오너라. 너희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 애끓는 사랑으로 이글거리는 내 성심(聖心)에게로 달려오너라. 내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은총과 사랑의 강물을 마음껏 마셔 허기와 갈증을 해소시키거라.”

 

 

 

예수님의 마음을 얻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목자를 잘 따르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목자의 품으로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목자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그 마음이 편하지 않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목자가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된다면 이렇게 됩니다. 쉬는 시간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해 반납해야합니다. 

 

마음은 삶의 자세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어떤 삶의 자세로 사느냐를 결정합니다. 같은 사제로 살더라도 어떤 사람은 잃어버린 양을 신경 안 쓰고, 어떤 사제는 신경이 쓰여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이 사제성화의 날인 이유는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그런 열정이 식습니다. 조금 더 쉬고 싶습니다. 사제로 사는 것만으로도 많이 해 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다그칩니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1-12) 

 

예수님의 마음은 성령의 불로 타는 마음입니다. 이 불은 기도하지 않으면 꺼집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만큼 예수님의 마음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면 더 고생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당당하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5)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3)라고 권합니다. 우리도 이웃을 위해 죽으라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76세의 나이로 보디빌딩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한 임종소 할머니가 있습니다. 허리 협착증으로 오른발이 불편해 치료차원에서 보디빌딩을 시작하여 보디빌더가 되어 상을 탔습니다. 30세 선수들과 경쟁하여 2등을 한 것입니다.

80세가 가까우면 허리가 굽어지고 걷기가 힘들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 할머니는 그런 생각을 버렸습니다. 하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연세에 하이힐을 신고 비키니를 입고 보디빌더 대회에 나가 젊은 사람들과 경쟁하여 상을 탔습니다.

이분을 보면서 잠깐 닮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람이니까 그랬다고, 나는 사정이 다르다고 마음을 접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기를 원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생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그냥 조금씩 약해지는 몸을 치료하다가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이 더 행복한지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을 선택하느냐가 삶의 질을 좌우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을 원하는 이에게만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마음을 우리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기를 원할까요? 예수님은 원하는 이에게 당신 마음을 선물하십니다. 성령을 받아 마음의 할례를 받으면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 대신 세상에서는 멸시받고 박해받는 가난한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마음의 차이에 있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다 공간 안에 갇혀 공동생활과 노동을 하며 지냅니다. 하지만 감옥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처럼 느끼고,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은 천국처럼 느낍니다. 이것이 지금 같은 하늘 아래 사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그 마음으로 살면 고통스러울 것 같은 착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으로 사는 것이 감옥입니다. 같은 감옥이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면 행복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원합시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저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임을 믿읍시다. 믿으면 당신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 마음 안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들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 즉시 몸은 좀 힘들어지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혼배 미사 주례를 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날입니다. 미사에는 신랑과 신부의 혼인을 축하하는 가족과 친지가 함께 하기 마련입니다. 미사이기에 당연히 성체를 영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다음과 같은 안내를 듣게 됩니다.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분들은 자리에 계시기 바랍니다.” 신자가 아닌 배우자나 친구가 성체를 영하려고 하면 이렇게 말을 하곤 합니다. “나가는 거 아니야!” 성체의 의미와 성체를 영하는 의미를 설명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행사하는 권리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은 4대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근로의 의무, 교육의 의무입니다. 이에 더불어 환경보존의 의무, 재산권 행사의 공공복리 적합 의무도 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연설했던 것처럼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요청하기도 하지만 국민은 국가의 요청에 응답할 책임이 있습니다. 국민이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국가는 당연히 국민을 위해서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은 특권일까요? 성체를 모시는 것은 의무일까요?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 성체를 모시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모시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성체를 모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지 않는 신앙인 역시 성체를 모시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예수님의 성체를 모시는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체를 모시는 것이 특권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한국 교회는 오늘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지만, 특히 매일 성체성사를 봉헌하는 사제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가 성화 되는 것 역시 특권이 아니라, 사제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성가 199번은 ‘예수 마음’입니다.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잡아당기사 네 성심에 네 성심에 결합하소서.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차지하시어 네 성심에 네 성심에 보존하소서.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변화케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바꿔 주소서.” 

 

예수님의 마음은 아낌없이 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분에서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목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권한과 능력에서 겸손하셨습니다. 자연을 다스리고,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지만 그래서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으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심에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배반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침을 뱉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뺨을 때리며 모욕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셨고, 하느님께도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하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으로, 끝까지 믿어주시는 사랑으로, 고통과 수난까지 감수하시는 사랑으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결합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호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겸손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한 마리를 잃으면”(루카 15,4)

     곽승룡 비오 신부님

구약에서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는 유목민의 환경에서 영향을 받은지라, 양들과 목자의 관계로 나타난다. 이스라엘백성은 긴 시간동안 목동들의 백성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양들은 목자를 잘 만나야 한다.그래서인지 목자의 권위가 양들에게서 드러나야 하는데 그 권위란, 양들을 위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양들이 원하는 곳에서 양 떼를 먹이고, 누워 쉬게 하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양에게는 원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또한 양들이 예쁘지만 그 양을 잃을 때는 목자는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유일한 백성의 인도자로 히브리인들에게 길을 잃지 않게 될 것을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양과 목자의 관계를 심화하였다.

 

비록 잃어버린 양일지라도 새로운 당신 백성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곧 양들은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의 세상에서도 이 복음이 가르치는 메시지는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목자인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더라도 결코 그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목자의 마음이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에 대한 비유 말씀을 들려주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사실 수치적으로 계산해 보자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보다는 우리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잘 챙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착한 목자에게 있어서 양들은 단순히 재산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그 양 한 마리 한 마리가 자신과도 같은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삯꾼의 경우는 양 한 마리쯤이야 계산적으로 얼마든지 포기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는 사랑 지극한 착한 목자이심을 믿습니다. 오늘 특별히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의 모든 사제들이 주님의 그 지극하신 성심을 닮은 사제들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묵상하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냈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낸 다음 금요일에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오늘을‘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여 지내고 있다. 사제들은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선포의 직무를 더욱 충실히 수행하며 성덕을 쌓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사제들을 위해서도 많은 기도를 부탁드린다.

 

제1독서: 에제 34,11-16: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겠다.

구약에서는 이미 하느님께서 자기 양들에 대한 배려로 가득한 목자에 비유되셨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16절)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그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으며, 당신의 사랑을 인간적 현존을 통해, 인간적 마음을 통하여,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까지 열정적으로 사랑하신 착한 목자를 통해 보여주셨다.

 

복음: 루카 15,3-7: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은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다. 이성적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랑이다. 이성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하고 비판한다. 이성적으로는 옳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과 우정관계, 형제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과 그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들의 불의를 인정하고 공범자가 됨을 말한다.

 

이러한 이성적인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즉 양 백 마리를 가진 목자가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광야에 놓아둔 채 자기를 따르지 않고 무리를 이탈해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간다는 이야기이다. 이 목자의 행동은 이성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양에 대한 큰 사랑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논리적으로는 이러한 행동이 비판의 여지가 있고, 또한 하느님께도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양을 잃어버린 목자처럼 행동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7절) 하느님은 자비로운 사랑으로, 즉 이성적으로는 따질 수 없는 사랑으로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도 구원하러 가시는 분이시다.

 

예수님 자신이 사랑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이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마음 역시 계사하시지도 따지지도 않으신다. 이성적인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 팔을 벌리실 뿐이다. 우리의 이성도 그 사랑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제2독서: 로마 5,5-11: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바오로 사도께서도 그리스도의 비이성적인 사랑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6절) 아무 죄 없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가장 치욕스런 죽음에 내맡기는 것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보통 “죄인들은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지 그들을 너그럽게 보아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바오로 사도는 주장한다. 이성적으로 볼 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그가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어느 누구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는다. 사람은 죽음이 불가피할 때 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가 없으니까 죽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성적인 관점이 아닌, 지나치게 넘쳐흐르는 사랑, 자격이 jqt는 죄인들에 대한 자애의 관점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8절) 예수님은 성체성사에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주신다.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죽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장 정신 나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축일은 바로 그 사랑을 충만한 믿음과 감사의 정으로 받아들이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바오로 사도는 이 믿음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10절)

 

그 지나친 사랑 때문에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성심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도 이성적이 아닌 열정적이고 어리석은 충만한 사랑으로 우리도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사랑을 살려는 결심을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이성적이 아닌, 정신 나간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셨다면 우리의 사랑도 그분의 사랑을 닮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은총을 청하며 기도할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랑의 마음

     남상근 라파엘 신부님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15장 3-7)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예수님의 심장, 혹은 요한 복음 표현으로는 옆구리에서 구원이 흘러나왔음을 보존하면서 예수 성심 신심을 키워왔습니다. 예수님의 심장, 바로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믿었습니다. 

성경과 교부가 이야기하는 예수 성심의 핵심은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어제도 사랑하셨고, 오늘도 사랑하시고, 내일도 사랑하실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지상생활의 모든 순간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거부만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다. 이것이 인간 마음을 밝히고 불태우기 위해 계시된 예수 성심의 진리이다.’ (샤를르 드 푸코) 예수 성심은 사랑과 헌신의 완전함을 알게 합니다. 

그분의 상처는 우리를 낫게 하기 위한 상처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스스로를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도록 크신 사랑을 베푸셨음이 예수 성심의 신비입니다. 실로 모든 사랑은 상처를 동반합니다. 상처받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가장 큰 상처는 가장 큰 사랑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받은 심장, 그 성심은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는가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 교회는 이 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냅니다. 모든 사제들이 예수 성심의 상처 속으로,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사제성화의 날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사제서품, 그리고 첫미사, 바삐 살아온 날들 함께 웃다가 울다가 때로는 교회가 추상명사였다가 고독했고, 보통명사가 되어 나타난 교회공동체에서 하느님과 함께 신도 분들과 함께 걸어온 사제의 길,

 

잘 살다가도 자책하며 의기소침해지고 잘 나가다가 능력의 한계에 부딪힐 때 주님께서 지켜주신 사제의 길, 거룩함을 살다가 세상 속에 있다가 때묻기도 하고 위기의식 지닐 때면 “주님 살려주세요!” 외칠 때, 주님께서 황급히 물위를 걸어오셔서 “나다, 안심하여라. 용기를 내어라” 하신 당신은 두려워 울고 있는 아이를 돌보려 황급히 달려오신 ‘우리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성모님의 품이셨습니다.

 

오늘 사제성회의 날에 사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제’라는 45분 분량의 다큐를 보았습니다. 갓 태어난 새사제의 첫미사, 중년을 살며 주님께 기대는 중견사제, 원로가 된 사제들이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행복한 사제의 삶을 봅니다. 그래서 닮고 싶고 용기를 내어 힘차게 사제의 길을 갑니다.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대축일’에 사제성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교황님의 말씀에서 사제들을 향해 권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산상수훈’의 맨 마지막 부분 “기뻐하고 줄거워 하여라! 하늘에서 마련한 큰 상이 있다”(마태5,12).

 

용서로 세례를 받다.

‘용서’는 자신에게 더 유익하다. 군사정부시절 용공세력으로 몰려 죄인 아닌 죄인으로 30년을 살았다. 그는 잘못된 권력을 증오하며 30여년을 살아온 한 분이 찾아와 세례받기를 청했다. 그 이유는 자기를 죄인으로 만든 상대를 용서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의 나이는 70이 되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미워하다 증오하다 제 자신이 황폐해졌습니다. 저는 그 모습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생명을 무수히 죽였던 상대를 증오하다가 무수히 죽은 무고한 사람이 그냥 죽어있습니다. 미움과 중오만이 남아 있어 적대 적이 되어있을 뿐이다. 너도 살고 나도 살려면 ‘용서’해야 한다. 특히 내가 살려면 원수까지도 용서해야 한다. 무지는 사람을 무수히 죽였지만 용서는 부활을 이끌어 낸다. 그는 용서라는 하느님의 뜻 살아나 세례를 받았다.

 

 

 

그 잔치 참여할 우리도 바빠지죠.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의인보다 회개하는 죄인을 하늘은 기뻐서 잔치 열어 환영한다 합니다.

탕자의 비유도 그러신 하느님의 설명이며 환영잔치 열었다 하잖습니까.

여기서 그렇게 회개하도록 도와준 벗이나 이웃도 잔치 참여 당연하죠.

 

회개할 필요 없는 우리 신자들 모두 그의 환영잔치에 동참해야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아버님이 그러시니 교회도 신앙인도 그래야지요.

그래서 하늘잔치 스케쥴이 바빠지고 그 잔치 참여할 우리도 바빠지죠.

 

오늘내일 매일 세상 떠나도 영원히 하늘잔치가 이어지도록 협조합시다.

하늘과 연결 끊긴 이들이 아버님께 돌아와 재 발동 걸도록 도와줍시다.

 

 

 

당신께 생명의 샘이 있나이다.

     성 보나벤투라 주교의 저서에서(Opusculum 3, Lignum vitae, 29-30. 47)

구원된 사람아. 너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분이 누구이시고 얼마나 위대하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여 보라. 그분의 죽음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분의 돌아가심에 하늘과 땅은 애곡하며 굳은 바위도 산산히 부서지나니.

 

십자가 위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교회가 생겨나고,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느님의 성의는 한 병사가 창으로 그 거룩한 늑방을 헤쳐 열어 우리 구원의 대가인 피와 물이 흘러 나오도록 했도다. 그분 성심의 은밀한 샘에서 흘러 나온 이 피와 물은 교회의 성사에 은총의 생명을 베풀 힘을 주었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샘물처럼 솟아 올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수가 되었도다.

 

그리스도의 벗이여, 일어나 “동굴 입구의 벼랑에 둥지를 둔 비둘기처럼 되어라.” “자기 집에 들어 있는 참새처럼” 그 안에 끊임없이 깨어 있고, 정결한 사랑의 비둘기처럼 새끼들을 거기에 숨기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거기에 네 입술을 대어라.” “에덴 한가운데서 흘러 나와 네 줄기로 갈라져” 사랑으로 타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흘러 퍼져 온 땅을 적시고 열매 맺게 하는 강물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아, 네가 누구이든 간에 열렬한 갈망으로 생명과 빛의 이 샘으로 달려가 마음의 깊은 데서 나오는 힘으로 그분께 외쳐라. “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여! 오, 영원한 빛의 순수한 광채여! 당신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생명이시고, 온갖 빛을 비추어 주시고 동녘이 처음으로 밝아 오기 시작하던 때부터 당신 신성의 옥좌 앞에서 빛나는 무수한 별들을 꺼지지 않는 광휘 속에 보존하는 빛이십니다!

 

모든 인간의 시야에서 감추인 샘에서 흘러 나오는 영원하고 다다를 수 없으며, 맑고, 달콤함 물이여!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그 높이는 잴 수 없으며 그 폭은 광대하고 그 해맑음은 때 묻음을 모릅니다.”

 

그 샘에서 “하느님의 도성을 즐겁게 하는” 강물이 흘러 나와 “환희와 찬미 소리 드높던 그 가운데서” 우리가 찬미의 노래를 당신께 부르고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당신 빛으로 빛을 보게 됨을” 체험으로 확증하게 되는도다.

 

 

 

예수성심의 열매와 향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을 항구히 충실히 따르는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예수 성심의 열매와 향기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이 답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믿는 이들의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요즘 국내외 산적한 난제들을 보면서 정말 ‘지극한 인내와 지혜의 사랑’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새벽마다 강론 쓰기전 일별해 보는 인터넷 뉴스를 통해 깨닫는 사실입니다. 특히 세계의 모든 난제들이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는 듯, 참으로 예수성심의 인내와 지혜의 사랑의 은총이 절실한 한반도 남북의 지도자들이며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참 고맙고 반가운 예수성심대축일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축일에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도 아름다웠습니다.

-자비의 원천이신 우리 주 예수/당신은 온갖 기쁨 희망이시고

감미와 새생명의 은총 샘이며/참되신 우리 맘의 기쁨이시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완전히 환히 드러난 날입니다. 예수님 부활 대축일-승천대축일-성령강림대축일-삼위일체 대축일-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세례자 요한 대축일-예수성심대축일 흡사 일곱의 대축일이 하늘에 걸린 일곱 색깔의 무지개처럼, 하느님 사랑의 장엄한 파노라마처럼 느껴집니다. 내일은 또 성 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이처럼 예수성심성월에 집중적으로 온누리에 쏟아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며칠 전 6월25일 ‘예수성심자매회’ 월례 모임을 하며 나눈 덕담도 생각납니다.

“예수성심성월은 여러분의 달입니다. 올해로 예수성심자매회 설립 14주년입니다. 이번 주는 참 대축일이 많은 주간입니다. 마치 오늘은 예수성심자매회 대축일처럼 느껴집니다. 끊임없이 예수성심의 사랑을 닮아가는 여러분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얼마전 예수성심자매회 두 자매님과 카톡으로 나눈 재미난 덕덤德談도 나누고 싶습니다. 태산목꽃이 우아하고 향기로워 고마운 마음에 카톡 사진을 선물했고, 다른 자매에겐 대추꽃을 선물했습니다.

-“태산목꽃이 정말 예쁩니다. 이따가 뵙겠습니다.”

“레지나 자매님 영혼이 더 예뻐요!”

“ㅎㅎ. 신부님,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추꽃도 처음 봐요. 노오란 게 은은한 향기를! 예뻐요. 신부님!”

“요안나 자매님 영혼은 더 예뻐요!”

“늘 고운 말씀으로 위로와 힘을 주셔서 감사드려요. 오늘도 활기차게 생활하겠습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대중가요도 생각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예뻐지는, 아름다워지는 영혼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미사전례가 참으로 아름다운 것도 하느님 사랑이 그대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말하마디 천량 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사실 세상 그 무엇이 아름답다해도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인간 영혼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영혼을 잘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을 잘 돌보는 일이 우선입니다. 몸 건강 관리, 돈 관리에 우선하는 것이 영혼 관리입니다. 영혼을 잘 돌보고 관리하는 일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사랑을 다해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보다 영혼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하는 수행은 없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의 사랑을 통해 생명 충만한 아름다운 영혼이 됩니다.

또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 사랑을 받고 있는지 깨달아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듯 이웃과 나 그리고 주변의 모두의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그러니 이제 사랑을 찾아 밖에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샘솟는 사랑의 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어 주님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셨고, 또 끊임없이 부어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여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을 잘 요약한 다음 감사송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예수성심 영성의 대가 바오로의 다음 고백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보다 예수성심의 사랑을 잘 요약한 고백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끝까지 집요히 당신 백성을 찾아 나서시는, 잃은 양 하나를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나하나가 하느님께는 유일무이한 참 소중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착한 목자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바로 이런 착한 목자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믿는 이들 우리 안에 부어진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요 보답하는 길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랑의 책임과 의무에 일체의 변명과 핑계를 할 수 없습니다. 

착한 목자 하느님의 사랑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 성심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마침내 백마리 양중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내시고 기뻐하는 착한 목자 예수님 성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잃은 양을 찾고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 마음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기쁨에 동참해달라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는 예수님이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구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우리는 화답송 후렴처럼 착한 목자 주님이 우리의 구원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예수성심의 사랑을 가득 부어 주시어 더욱 당신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 아멘.

 

 

 

잃은 것을 찾는 길< 루카, 15/3-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한번 잃은 것을 다시 찾는 것은 새것을 얻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새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비교적 쉽게 믿음을 가지게 하지만 잃어버린 믿음을 찾아주는 것은 10배 더 노력이 필요합니다. 소위 냉담 자 회두는 시간 노력이 들어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 저는 신앙을 잃었습니다.” “왜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냉담한지 몇 년 만에 성당에 다시 나왔습니까? “ 20년 만에 나왔습니다.” 그러면 저는 주의기도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며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로 시작 기도는 대화인데 대화자는 바로 아버지십니다. 이야기 속에 아버지는 하늘과 땅으로 만들어 가장 귀하게 창조한 피조물은 바로 당신입니다. 세상에서 아버지의 은덕을 잊지 말아야 함 같이 하느님을 잊거나 잃은 사람은 마음심 자가 붙어 다니는 것처럼 마음이 망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어떤 오래 냉담하던 사람이 냉담의 이유를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다가 사람 탓 환경 팃 하다가 결구 내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하고 마음을 잘못 관리한 탓이라 고백하는 것을 듣고 오늘 예수 성심 축일 저는 마음을 찾아 주님과 하나 되는 길을 설명하면서 잃었던 신앙을 찾아주기도 하였습니다.

마음은 한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외모가 출중하여도 속마음이 나쁜 것으로 가득하면 마음은 쓰레기통 역할만 합니다.

마음이 불평불망 미움 저주, 거짓 사기, 분노 탐욕, 돌처럼 딱딱하면 마음을 비우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꾸어 나갈 때 평화 기쁨 행복이 찾아옵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어디까지도 찾아 만나면 품에 안고 어개에 앉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십니다. 서양 사람들 익수와 포웅을 자연스럽게 하듯이 우리는 피하지 말고 돌아온 아들을 품어주고 받아 들이 듯이 마음으로 품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길을 가야 합니다. 

나는 조용히 예수마음 내 마음 되게 하시고 특별이 사제의 성화의 날 모든 사제가 거룩함이 각자의 마음속에 잡고 목자를 떠르는 양들을 사랑으로 이끌고 가기를 기도합니다. 주여 온순하고 겸손한 마음만이 제 마음 되게 하소서 아멘.

 

 

 

자연은 스스로 살고자 하지 않는다.

     최민석 신부님 

날이 덥다. 물 냄새 비가 오려나 보다.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자욱하다. 살아있음이 좋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뭇잎들이 시든다. 천지는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초여름 실록이 푸른 제복 입은 계엄군처럼 몰려오는 듯하다. 신록이 우거진 계곡마다 새소리 요란하고 전신주 피뢰침은 천둥번개 받아들일 준비로 여념이 없다. 하늘은 먹장구름처럼 찌푸린 채 빗방울 후드득 떨어질 듯 분주하다. 구슬땀이 또르르 구르고 속옷이 흥건히 젖는다. 가만가만 불어오는 명주바람 앞세우고 싱그러운 초록 잎사귀 사이로 은빛 햇살 쏟아진다.

 

설레이는 초여름이다. 개구리 울음소리 자욱한 밤 윤전기(輪轉機)에서 거듭 찍혀 나오는 신문기사마다 개골개골개골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개구리 울음소리에 초여름 밤은 더욱 소란스레 깊어간다. 여린 갈잎이 미풍에 하늘거리고 이름 모를 잡초들 짙은 향을 풍기는 초여름 숲에 누우면 몸은 구름 위로 뜨고 마음은 무아(無我)의 원(原)인간으로 돌아간다.

 

이 새로운 여름날의 아침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가. 오늘 하루 또 무슨 일이 내 앞에 펼쳐질까 눈뜰 때부터 감동하며 설레는 기대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에 세수하다 말고 문득 대야에 담긴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 이 물! 이 빛깔과 이 차가움과 이 질감! 이런 것이 여기 이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어제와 같은 오늘이지만 마치 처음인 듯 눈부시기까지 하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당당하고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만 보인다. 이 얼마나 살맛이 나는가. 스스로 복받쳐 오르는 감동에 젖기도 한다. 지금 여기 살아있음의 모든 기쁨과 환희가 펼쳐 보인다.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온갖 생명력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가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가 15,6-7)

 

진정으로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니 잃은 양이 깨달은 양인 것을 알겠다. 그는 잃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항상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체험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내 안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긍정됨으로써 비롯되는 엄청난 환희와 평화의 세계가 여린 것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이사야 65,17-18)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나아가 꿈속에서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과 느낌들이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오는가. 그런데 그 하나하나가 분별하지 않고 간택하지 않는 마음으로 보면 사랑 아닌 것이 없고 은총과 은혜 아닌 것이 없다. 그렇다. 한 마음 내려놓고 살아가게 된 이 ‘나’와 ‘삶’은 얼마나 충만한 생명력으로 가득한지 알게 된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이 너무나 평범한 일상들이 얼마나 새롭고 눈부신지! 살아 있음이 얼마나 신비롭고 오묘한지! 배고프면 밥 먹고, 자고 싶으면 잠을 자는 이 낱낱의 움직임이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지! 때로는 짜증내고 때로는 미워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살포시 미소 짓기도 하다가 때로 불같이 회를 내기도 하는 아뜩할 만큼 변화무쌍한 온갖 감정들로 가득한 이 ‘나’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새삼 느낀다.

 

하느님(神)은 인간을 사랑으로 빚었으리라. 보드란 흙에 풀잎 향을 섞어 지어내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지었으리라. 자연 숲에만 오면 순한 양이 되고 어머니 품보다 더 편안하다. 숲은 언젠가 영원히 돌아갈 영원한 생명의 품이다. 저 신비하고 아름다운 여름 하늘, 때때로 처마 밑으로 날아와 집을 짓다가 무슨 급한 일이 생각난 듯 후두둑 날아가 버리는 저 이쁘디 이쁜 제비. 저 산, 저 강, 저 바람아 내가 돌아가야 할 집이다.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생각하고 우리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생각해 보면서 감사하는 날입니다.

이날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거룩해지고 착한 목자로서의 삶을 걸어가실 수 있도록 기도 드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15, 3~7)에서 예수님께서는 양 100마리를 가진 사람이 그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99 마리를 그대로 둔 채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 할 것이다." (루가 15, 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이 100마리나 목자를 따라 다니다 보면, 그중에는 한눈 팔다가 길을 잃어 버리는 양들도 나타나겠지요. 그럴 때 목자는 자기 양들을 헤아려 봅니다. 그래서 그 중에 한 마리가 없다고 한다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두고 잃어버린 한마리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목자는 한 마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아흔이홉마리가 있는 그곳으로 돌아올 때, 다른 양들도 한 마리를 찾은 것에 기뻐하고, 또 그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주시는 목자에게 감사하고 더 마음 든든함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과 우리 신도들의 관계도 양과 목자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착한 목자이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순한 양들이라고 보겠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인도에 따라서 풀이 많은 곳에서 잘 먹고 또 푸르른 시냇가에서 물도 마시고 이렇게 편안한 삶을 살지만, 그러나 때때로 길을 잃을 때에도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 오신다는 것, 우리도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 새로운 계명을 따라서 우리도 잘 가고 있지만 그러나 계명의 길에서 벗어나서 잘못된 길을 갈 때, 목자는 그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생각하면서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한 마리라도 관심을 두지 않거나 버려두는 일은 없다는 것, 이처럼 예수님도 우리 모두가 구원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로서 양들을 이렇게 이끌어 주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마음 든든함을 느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착한 양들이 돼야 하겠고 혹시 길을 잃는다 해도 우리를 찾아 오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더 큰 기쁨 속에서 교회공동체의 든든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습니까? 혹시 내가 길잃은 그 양이지는 아닌지요?

•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 헤매시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사제가 멋질때'(루카 15장 3~7)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잃은것을 알게 되면 찾아야합니다.

잃은것이 귀한 존재라면 더욱더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대리자인 사제는 너무나 귀한 존재!

어떻게 하면 신자들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줄지 시간, 능력, 열정을 쏟으며 푸근한 아버지가 되어갈때 가장 멋집니다.

착한 목자인 사제는 예수님 마음 닮아 누가 아픈지, 무슨일이 있는지, 어떻게 사랑하고 위로하고 감싸줄지, 좋은 일이 있으면 더 없이 기뻐해주고 용서와 화목을 위해 마음을 다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며 사제들이 거룩함의 옷을 더럽히지 않고 성체를 만지는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신자 천명보다 사제 한명 파멸시키려는 악마의 집요함에 넘어가지 않도록 보호하소서.

세상에 물들어 신자들이 참아주기 어려운 사제,

혼탁한 마음으로 대충 살며 겉멋만 부리는 사제,

고통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겸손한 사제, 

다정하면서도 권위있고 삶으로 빛이 되는 사제,

예수성심이시여! 

저희 모두가 잃어가는 거룩함을 되찾아 서로를 받아들이며 기뻐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더불어 ~예수성심시녀회 수녀들이 주보이신  예수성심을 본받아 겸손한 시녀의 자세로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잃은 양과 썩은 사과 중에 나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아주 당연한 듯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당연한 듯이 말씀하시는 이 얘기가 실제 우리 삶과 공동체 안에서는 꼭 그렇지 않습니다.

 

양으로 먹고 사는 목자는 양을 하나라도 잃으면 자기의 손해기에 아흔아홉을 놔두고라도 찾아 나서겠지만 우리 인간관계나 공동체 안에서는 말썽꾸러기 하나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고 공동체가 파괴된다 생각하기에 찾아 나서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공동체에서 빼버립니다.

 

한 집안으로 치면 문제아를 호적에서 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너 계속 그러면 호적에서 빼버릴 거야!'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실 사과의 한 부분이 썩으면 빨리 도려내고 썩은 사과는 솎아내야 다른 부분까지 썩고 다른 사과까지 썩는 것을 막을 수 있기에 이럴 경우 썩은 부분을 아까워하지 말고 빨리 도려내야하고 마음이 아파도 과감히 솎아내야 한다고 오히려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 공동체를 보면 어떤 사람이 솎아내야 할 썩은 사과이고 어떤 사람이 찾아야 할 잃은 양인지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썩은 사과도 잃은 양도 죄인이기는 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차이는 이렇습니다.

잃은 양은 이미 공동체 밖에 있고 썩은 사과는 아직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ㅍ

잃은 양이란 죄로 인해 공동체를 떠났거나 공동체를 떠난 죄인인데 반해 썩은 사과란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죄의 생활을 그만 두려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려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회개의 여부이고 더 정확이 얘기하면 회개의 의지 여부입니다.

 

하느님의 공동체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집단인데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제 멋대로 공동체를 이탈하였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돌아섰거나 돌아오고 싶어 하면 잃은 양입니다.

 

이에 비해 하느님을 사랑치도 않고 하느님 말씀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그것이 죄라는 의식도 없고 그래서 돌아설 의지도 없으면서 계속 공동체 안에서 세속적으로 살면 솎아내야 할 썩은 사과입니다.

 

그런데 잃은 양이건 썩은 사과이건 그것이 문제임을 깨닫고 돌아서면 다시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시겠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본받자는 것이 오늘 축일의 뜻입니다.

 

썩은 사과도 썩은 부분만 도려내면 성한 사과가 되는 것이고, 잃은 양도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처럼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시고, 그렇게 되면 반기시는데 우리는 맏아들처럼 용서치 못한다면 사실은 우리가 썩은 사과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곁을 떠났지만 그것이 잘못임을 알고 돌아온 잃은 양이고, 맏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붙어 있긴 하지만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은총인지 모르고 종처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동생처럼 마음대로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으니 썩은 사과입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 교회부터 교회란 죄인들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고 회개하는 죄인과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있을 뿐이며, 회개하는 죄인은 그런 자신을 하느님이 반기실 거라는 것을 믿는 죄인이고, 길 잃은 양, 흩어진 양, 병든 양들을 모으고 고쳐주기 위해 오셨다는 주님께 감사하며 기쁘게 돌아가는 죄인일 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먼저 돌아서는 죄인이 되어야 하고, 죄를 짓고 떠날 때는 아파하고 돌아올 때는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 이웃의 죄를 동병상련으로 아파하고 돌아올 땐 환영해야겠습니다. 오늘부터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은 우리에게 당신 심장을 열어 주신 예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 마음을 만나는 복된 날입니다. 우리는 미사의 말씀들을 통해 목자의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주님을 더 친근하고 친밀히 체험합니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에제 34,11)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당신 양 떼인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살피실지 매우 구체적으로 전합니다. "보살피겠다, 구해 내겠다, 모아다가 데려가겠다, 먹이고,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누워 쉬게 하겠다, 찾아내고, 도로 데려오며, 싸매 주고, 북돋아 주겠다." 목자의 존재는 유목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봄"의 대표적 표상이기에, 그들에게 목자의 이러한 행동거지는 참으로 익숙합니다.

 

"그 가운데 한 마리를 잃으면 ...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쫒아 가지 않느냐?"(루카 15,4)

 

 

목자의 집념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옵니다.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반드시 찾아내서 생명의 울 안으로 다시 넣어 주겠다는 사랑의 의지입니다. 한 마리쯤은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포기와 타협의 기미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모든 걸 다 거는 목자의 모습에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양떼를 위해 죽음까지 불사한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를 이야기합니다.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로마 5,9)는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로마 5,10) 되었고, 또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로마 5,10) 되었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는 자기의 사랑이 희생과 직결된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한 마리라도, 단 한 마리라도 그에겐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이 곧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사실 인간이 진정 위안과 안식을 얻을 곳은 그 마음 밖에 달리 없습니다. 그 마음을 향한 허기와 갈증이 인간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찾게 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 진원지를 제대로 인식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지요. 그런데 세상 안에서 계속 여기저기 헛다리만 짚고 있다면 아무리 파고 들어도 공허감은 더 커질 뿐입니다. 돈도 명예도 성공도 인기도 취미나 사교도 인간에게 진정한 본향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모든 인간의 본향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화답송)

욕구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되면 이 세상은 온통 아쉬운 것 투성이지만,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을 소유하고 그 마음 안에서 살아가면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 우리를 품고 계신 그분 마음이 "보살피고 먹이고 싸매 주고 북돋아 주고 쉬게 하길" 원하시니 참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에 머무르는 영혼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십니다. 사랑이 흐르는 곳으로 달리십니다. 그 마음의 셈법은 세상 것과 천지차이로 다릅니다. 단 한 마리의 양, 단 한 사람의 죄인 때문에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어리석은 사랑이 그분 마음에 들어 있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 15,6)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목자의 이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예수님은 어쩌면 이 기쁨 가득한 환호를 십자가상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외치고 싶으셨을 것 같습니다. 바로 벗님을 위하여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로마 5,5) 이제 어질고 겸손한 그 마음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그러니 벗님, 우리 마음이 그 사랑에 절여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미 마음과 마음이 닿았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스며들고 있으니까요. 

 

"사랑의 불가마이신 예수 성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온유하고 겸손하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 벗님의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길 축원합니다. 또한 사제성화의 날을 맞아 모든 사제들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양떼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사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제는

하늘빛을 땅에 드리우도록

땅기운을 하늘에 들어 높이도록

그리하여 하늘과 땅을 곱게 잇도록

부르심 받음 사람입니다

 

사제는

여린 마음과 작은 몸으로

하느님께서 정성껏 빚으신

온 누리 보듬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한 몸 추스르기 버거워도

하느님 사랑 가득 담은

함께 사는 세상 가꾸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저 홀로 머물 울타리 허물어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 가득한

여리고 찢긴 거친 세상 담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홀로 거룩함의 꿈에서 깨어나

더러운 것 깨끗하게 하고자

온 삶 아낌없이 던지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하느님 손길 닿은 세상 모시되

세상에 짓눌리고 세상이 버린

하느님의 작은 이 품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살기 위해 벗을 희생시키지 않으며

벗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으라고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약하고 추하고 부족한 사람이기에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부끄럼 없이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몸과 마음에

핏빛 사랑의 상처 가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순간부터 끝 모를 마지막까지

앞서 가시고 함께 하시기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용기 내어 또 한 걸음 내딛는 이

바로 주님의 사제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6/28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주 하느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하여, 선인이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주 하느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하여, 죄를 거듭 지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주 하느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해서, 죄인에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악에 휘둘려 더욱 혼탁스러워진 세상을 우리의 선으로 정화합시다. 세상 사람들이 죄악을 저질러 혼탁해진 세상을 우리의 희생으로 기워 갚읍시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 15, 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계속되는 사랑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예수 성심을

되찾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예수 성심은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를 깨우십니다.

 

모든 것을

쏟아부으시는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이 닿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모두를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심장처럼

사라지지 않을

관계입니다.

 

사랑하기에

아픈 것입니다.

 

상처 난 성심이

사제들을

성화시킵니다.

 

심장의 시간만큼

소중한 삶의

시간입니다.

 

예수 성심이

사제들의 첫마음을

되찾게합니다.

 

사랑과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를 기억하시는

예수 성심이 잃었던

우리를 되찾았습니다.

 

예수 성심이시여

아직도 못 깨달은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예수 성심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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