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36-41
오순절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1-18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이들 가운데 삼천 명가량이 세례를 받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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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가 오순절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를 용서받으라고 하자 삼천 명가량이나 되는 이들이 세례를 받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은 하느님께 올라간다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과 독서에는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울다’(‘클라이오’)라는 동사를 네 번이나 쓰는데, 좌절하고 분노하였지만 끝내 항의조차 하지 못하여 상처 입은 감정을 묘사합니다. 한편 독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로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는 유다인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가책을 느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데 그 답은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울고 있던 마리아는 무덤에서 “뒤로 돌아서”고 “마리아야!”라는 부르심에 또 “돌아섭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무덤에서 돌아서고 부르시는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스 말 동사 ‘스트레포’는 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동작을 의미하지만, 심경과 인식의 ‘변화’를 뜻하기도 합니다.
‘돌아서다’라는 행위로서 그는 ‘모름’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에서 ‘앎’(“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으로 건너갑니다. 진정한 파스카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시신이 없어졌다.’고만 생각한 탓이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깨닫자, 본능적으로 그분을 붙잡습니다. 더 이상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즉각적이고 단순한 반응이었을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여야 할 일은 당신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은, 이 이야기 바로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썼던 그리스 말 동사 ‘호라오’(부재를 통하여 현존을 믿게 되는 의미의 ‘보다’)를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도 적용합니다. 이제 그가 주님의 부활을 보고 믿게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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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복음(20,1-9 참조) 다음 대목으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계속 등장하고 장소의 변화도 없다는 점에서 두 복음의 연속성이 확증됩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집으로 돌아갔고, 마리아는 무덤에 남아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떠나 보낸 상실감에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20,8 참조), 마리아는 아직 빈 무덤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데 모든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불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극복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라뿌니”, 곧 “스승님”이라고 응답하며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마리아의 ‘뒤늦은 인식’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불신의 어둠 가운데 머물러 있던 마리아에게 믿음의 빛을 선물하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 신앙을 증언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믿음의 여정을 보여 줍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천사들의 말을 이해하지도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였지만, 이야기의 끝에서 마리아는 부활 사건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응답하여 제자들에게 달려간 마리아의 ‘움직임’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부활 신앙의 실천입니다.(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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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다가, 무덤 안쪽 하얀 옷의 두 천사를 발견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을 떠나보낸 슬픔에 잠겨, 눈앞에 계신 그분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곧이어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그제야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슬픔의 눈물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주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그분을 알아봅니다. 마리아에게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눈물이 환희로 승화되는 순간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더 이상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성자께서 성부께 건너가심으로써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부활하신 성자께서는 성부를 ‘내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내 하느님’, ‘너희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으로 하느님과 맺는 일정한 관계성의 차이를 전제하시고, 동시에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공생활 중이신 예수님과 맺었던 관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는 ‘새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로 나아갑니다.(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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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막달레나가 울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분의 죽음 앞에서 너무나 황망하여 어찌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지극히 사랑하는 분의 곁을 지키고자 아직도 어두운 새벽에 무덤으로 향합니다. 마리아는 당황스러워하며 더 큰 상실감에 빠집니다. 무덤이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너무 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무덤 안의 두 천사를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천사가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마리아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대답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어둠을 직면하여 슬픔과 고통이 우리 마음을 온통 차지할 때 ‘왜 우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그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였듯이 우리도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께 횡설수설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할 때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대답하고 나서 뒤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발견하지만, 아직도 그 슬픔이, 그 집착이 커 여전히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뵙고도 정원지기로 착각합니다. 그렇게 그분을 찾으려 애썼으면서도 정작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눈앞에 나타나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슬픔에 짓눌려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십니다. “마리아야!” 이제 마리아는 돌아서서 “라뿌니! 스승님!” 하고 예수님을 알아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슬픔과 아픔을 다 쏟아 낼 때, 그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때 우리 마음 안에는 그분을 향한 사랑, 기쁨이 피어오릅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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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하느님의 애인’이라 불리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네 복음사가는 모두 주님 부활 이야기의 첫 장면과 그 중심에 등장시킵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모 성인은 이처럼 부활의 첫 증인인 그를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그대 선택된 여인이여, 사랑 가득한 선택자여!”
무덤 밖에 선 채로 마리아는 울고 있습니다. 적막한 이른 아침에, 비록 돌아가셨을지라도 곁에 있고 싶어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으셨던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도 슬픈데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그 실망과 허탈감이 끝내 울음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 뒤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잇달아 큰일이 닥치면 넋을 잃고 하염없이 울다가 끝내 실신까지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마리아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한처음에 빛과 어둠, 하늘과 땅을 만들어 이름을 주셨고, 사람에게 온갖 생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것은 관계를 맺는 시작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스승과 제자, 바로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눈물이 주님 부활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께 눈물 대신 응답해야 합니다. “라뿌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이에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부활의 신비는 사랑의 관계로 거듭 완성됩니다.(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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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군중의 반응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마음의 고통을 느끼면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자, 베드로 사도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와 세례에 대하여 말해 줍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리아는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 때문에 그녀의 눈물은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기쁨으로 변합니다. 그녀가 정원지기로 생각했던 분이 실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자마자 곧 주님을 알아봅니다. 사랑에 힘입어 눈물을 통하여 너무나 사랑했던 주님을 알아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은 그녀의 눈과 삶을 밝혀 주셨습니다.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사랑은 하느님을 보고 믿으며 스승을 깨닫게 해 주는 지름길입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리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였습니다. 사랑에 눈뜬 믿음을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을까요? 형제들 안에서, 곧 둘이나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 그리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면 어디서 주님을 만날까요?(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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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이른 아침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을 찾아갑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그녀가 당혹감에 빠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텅 빈 무덤에 놓인 아마포를 바라보며, 죽임을 당하신 것도 모자라 시신마저 빼앗긴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 서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어쩌면 이 좌절의 순간에 가장 큰 반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눈은 어두워졌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고는 잊고, 오직 눈으로 볼 수만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자기 집착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까요? 심지어 그분을 정원지기로 여기고 예수님의 시신을 찾게 해 달라고 애원까지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를 때, 비로소 그녀는 알아챕니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보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라뿌니!’ 곧, ‘스승님!’이란 호칭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신 구원자 예수님을 향한 신앙 고백과도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와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모여 있던 곳에서 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회개와 죄의 용서를 선포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모든 사람을 초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막달레나가 붙잡을 수 없는 ‘불멸의 몸’이자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찬 몸’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죽음과 죄의 굴레에 갇히지 않는 불멸의 몸이 될 수 있음을 믿읍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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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막달레나의 눈물은 사랑과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인류의 죄악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때, 막지 못한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러한 눈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도록 그녀의 영혼을 준비시켰습니다.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만들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그분의 영광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였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영광과 은총을 놓치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달레나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주님을 뵈었다.’고 외치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사랑으로 가득 차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듯이 우리의 마음도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삶의 무게를 견디게 하는 사랑이 우리의 영혼 안에 넘칠 때,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우리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칠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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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립니다. 존재 깊은 곳의 내면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는 죽음 너머의 생명이 보이고 삶 너머의 부활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러 온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감각적인 만남 안에서는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따뜻하게 부르시며 그녀를 당신의 사랑 안으로 초대하실 때 마리아는 그분의 존재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고 할 때 당신 존재의 충만한 의미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올라가셔야 하고, 우리는 형제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깊이 사랑했던 그녀는 이제 다른 형제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고 그들의 마음에도 주님에 대한 사랑이 타오를 수 있도록 커다란 불씨가 될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난 것을 소개하면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하심을 알려 줍니다. 따라서 그분을 만나려면 우리도 새로운 방식으로 그분께 다가가야 하고,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것도 그분이 아버지와 함께하시는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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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신학교 교정을 산책하며 동창과 나눈 대화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부제품을 받기 전에 가졌던 '30일 영신 수련 피정'을 마친 겨울날의 저녁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는지에 대해 동창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녀야말로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다. 사도들은 아마도 예수님을 죽을 만큼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한 나머지 그리움에 사무쳐 무덤가를 떠나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신 것이다.'
오 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을 헤아려 봅니다. 복음의 장면을 머리에 그려 보니, 문득 노래가 들립니다. 바로 사랑에 대한 노래가 귀에 쟁쟁합니다.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마리아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 이렇게 머물러 있다고 그녀가 노래 부르는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이제 '나는 어떻게 그분을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노래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사랑이 어떻게 자라고 강해지는지를 알려 주시니까요. 이제 그녀는 죽음마저 이긴 그 사랑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 수님께서는 다정하게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녀를 당신의 사랑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녀가 예수님을 붙잡는 사랑에서 당신의 부활을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전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을 가장 깊이 사랑했던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타오르게 하면서 부활의 기쁨이 가득하게 하는 불씨가 됩니다. 그러니 지금 '죽도록'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는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그 사랑을 이웃에게 어서 전해 줍시다.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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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체험한 분입니다. 그녀 안에 ‘숨어 있던’ 하느님의 모습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새벽까지 고뇌하다 무덤으로 갑니다. 놀랍게도 무덤은 비어 있었고, 천사들만 있었습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애정과 갈망이 담긴 독백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보자 그냥 돌아갔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머리로만 이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막달레나는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사랑’이 예수님의 시신을 다시 찾게 했던 것입니다. 막달레나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순수의 눈물입니다.
그 모습을 스승님께서는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참으셨던 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 순간 막달레나는 알게 됩니다. 부활하신 스승님께서 바로 곁에 계심을 온몸으로 느낀 것입니다. 이렇듯 부활은 은총입니다. 모든 이론과 학설을 뛰어넘는 ‘순간의 깨달음’입니다.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주님을 뵈었다’고 외칩니다. 스승님의 부활을 깨달았다는 고백입니다. 부활의 ‘증언’이란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막달레나는 그런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몸짓에 우리 역시 동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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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름을 부르시자 곧바로 알아봅니다.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부르시는 목소리를 듣자 즉시 살아 계심을 알아챈 것입니다. 온몸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의 적(敵)은 의심입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목소리가 갈라집니다. 본인은 구슬 같은 목소리로 얘기해도 듣는 이에게는 갈라진 목소리로 들립니다. 그러한 목소리로는 아무리 불러도 돌아선 마음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온몸으로 사랑하는 첫길은 의심의 그림자를 지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의 발현을 부활의 증거로만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그분의 발현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믿었던 이들에게 드러내신 애정의 보답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온몸으로 사랑했던 이들은 그만큼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심을 풀면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랑의 길을 보여 준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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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가 잘 아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입니다. 오늘 복음은 아름다운 ‘시’ 한 편이 그려지는 장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따뜻하게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 주시니 마리아는 ‘꽃’이 되고 ‘의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 주시기 전에는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 헤매는 외롭고 허무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마리아는 주님께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고유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린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군중 속에 파묻혀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말을 잘 못하는 장애인 아들의 이야기를 어머니는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는 죽음 너머의 생명이 보이고 삶 너머의 부활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따뜻한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꽃’이 되고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한 학부모가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철수가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놀지 않고 책만 봐요. 계속 저러면 나중에 왕따 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 아이에게 잘 말해서 친구들과 놀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2) 왜 혼자 책을 읽냐면서 아이를 나무랍니다.
3) 이런 전화를 왜 하냐면서 선생님께 화를 냅니다.
아마 1번을 선택하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번은 분명히 정답이 아닙니다. 왕따 당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왕따 시키는 것이 잘못일까요? 친구와 놀지 않고 책만 보면 왕따 당할 수 있다면서 마치 아이의 책 읽음이 잘못된 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왕따 시키는 아이의 잘못이 아닌, 왕따 당하는 아이의 평소 행동 때문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1번으로 늘 유도합니다.
사실 피해자 중심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면서 그 원인을 제공했을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약자인 피해자 중심에 서야 분명히 문제 해결의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는 피해자 중심이 아닌 가해자 중심의 세계였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른 사람이어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것이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인 병자와 창녀 그리고 과부 등의 사람은 죄가 많아서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당시에 죄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 편에 서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커다란 사랑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사랑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주님 말씀을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까지 받습니다.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편에 서는 사람만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칠 때, 우리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꽃에 향기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품격이 있다. 그러나, 신선하지 못한 향기가 있듯 사람도 마음이 밝지 못하면 자신의 품격을 지키기 어렵다. 썩은 백합꽃은 잡초보다 그 냄새가 고약한 법이다(윌리엄 셰익스피어)
그녀에게 예수님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전부였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른 새벽,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여인,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모습이요, 결코 통상적이지 않은 모습임이 분명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면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한둘도 아니고 일곱이나 되는 마귀에 들려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은총을 입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에 크게 감동받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남은 생을 오로지 예수님께 바치고자 결심합니다. 자신이 지닌 재물이며, 시간이며, 삶 전체를 남김없이 그분께 봉헌합니다. 눈을 떠도 예수님, 눈을 감아도 예수님, 그녀의 생애에서 예수님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였습니다.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예수님의 죽음, 그분의 부재, 그리고 그분 시신의, 부재가 너무나 큰 충격이요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스승님께서 그리도 끔찍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한 것만 해도 억장 무너지는 일이었는데, 미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안타까웠던 그분의 시신마저 사라져버리니, 그녀의 상실감과 허탈함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도통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천사 앞에서도,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 앞에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꺼이꺼이 울면서 외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복음 20장 13절)
보십시오. 그냥 주님, 우리 주님이 아닙니다. 저의 주님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열렬한 것인지를 잘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와는 동떨어져 계신 분, 멀리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분,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분, 감히 범접하지 못할 분은 아닙니까?
마리아 막달레나를 보십시오. 그녀에게 예수님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전부였습니다. 계셔도 그만 아니 계셔도 그만인 분이 아니라 잠시라도 아니 계시면 절대 안 되는 내 삶의 전부요 최종적인 의미였습니다.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의 큰 사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크게 응답하십니다. 세상 다정한 음성으로 두려움과 슬픔에 잠겨있는 그녀의 이름을 친히 불러주십니다. “마리아야!” 그녀를 당신 부활의 최초 목격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녀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 당당한 여사도로 임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려는 이에게만 나타나시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도 예수님께서 부활할 것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타락의 소굴에서 건져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다 보면 믿어집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믿으면 사랑하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알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사랑을 떠받치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원하고 믿는 일은 사랑을 높이기 위한 목적입니다. 물론 믿어지면 더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랑하려는 자에게 믿음을 가장 먼저 주십니다.
영화 ‘라이언’은 어린 시절 기차에서 잠들어버린 다섯 살 인도 소년 꼬마 라이언이 호주에 입양되었다가 다시 어머니를 찾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다섯 살 꼬마 라이언은 형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석탄을 훔쳐 엄마에게 우유를 사다 드리는 것이 유일한 놀이이자 즐거움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형이 나갈 때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졸랐지만, 잠이 너무 쏟아져 형은 동생을 업고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차역에서 잠깐 자라고 하고 절대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라이언은 잠을 자다 일어났고 형을 찾아 어떤 기차에 올랐는데 거기서 또 잠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며칠을 그렇게 간 끝에 더는 집을 찾을 수 없는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고아원에 있다가 그는 사랑이 많은 한 호주 가정에 입양됩니다.
그의 양부모는 다른 형도 한 명 입양하였는데 그 형은 좀 망나니였습니다. 엄마도 사랑했지만, 엄마를 사랑할수록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친엄마가 자신을 잃고 슬퍼할 것 같은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괜히 데리고 나와 잃어버린 죄책감에 고통스럽게 살아갈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애인과의 관계도 제대로 되지 않고 모든 삶이 엉망이 됩니다.
25년이 지난 뒤 라이언은 엄마를 다시 찾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구글 지도가 인터넷에 올라왔고 그는 구글 지도를 통해 자신이 발견된 곳으로부터 주위를 뒤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자신의 기억에 있는 동네와 똑같은 곳을 발견합니다.
25년 만에 엄마를 만나 처음으로 한 말은 죄송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젠가 아들이 돌아올 것을 믿고, 다른 동네로 가지 않고 그 동네에서만 살았습니다. 불행히도 형은 25년 전 그날 동생을 찾다가 기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라이언은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를 친어머니에게 소개해줍니다. 이제 진짜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키워준 부모님이나 그 부모님이 입양한 망나니 형까지.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낳아주시고 존재하게 하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을 만나기를 필요로 합니까? 어쩌면 마리아 막달레나만큼 예수님을 만나기를 희망한 사람은 없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시궁창에서 구원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유튜브에서 보면 새끼 때 자기를 구조한 사람을 엄마로 믿는 새나 동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동물들은 어미를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이 아니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몰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조금만 사랑을 준 대상이라도 부모로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반면 많은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사랑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를 창조자로 여기고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한 유일한 분을 사랑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돈을 벌면 되지’, ‘성공하면 되지’, ‘자녀를 잘 키우면 되지’ 등으로 각자가 삶의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합니다. 그 공허함 속에 고통스러워하지만 끝까지 창조자가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를 보여주신 유일한 분을 사랑하기를 거부합니다.
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나를 사랑해주신 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자신을 시궁창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채워지지 않은 채 그녀는 무엇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를 찾으면 결국엔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데 그 형제를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존재하게 하고 그 형제도 존재하게 하신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왜 당신을 사랑할 마음이 없는 이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실까요?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싶지 않고 세속-육신-마귀를 좇는 이는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없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일은 하느님 뜻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 그리고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믿게 하시고 부활의 기쁨을 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처음으로 혼배 주례를 부탁받았습니다. 저는 이번 혼배 주례를 부탁받으면서 우연이 필연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작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였습니다.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되면서 형제님은 시카고를 경유해서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를 탑승하게 되었습니다. 옆 좌석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이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시카고에서 내려 뉴욕으로 갈 때 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옆의 책 읽던 여성이 친절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짐을 다시 찾아서 부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성과 5분 정도 짧은 대화를 했지만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 메일을 주고받고 가끔 연락을 했는데 그 여성도 친절하게 답을 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한다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음악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된 아들과 여성은 음악회를 같이 갔고,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약혼식을 하고, 뉴욕에서 혼배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선택이 필연이 아닌 우연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책을 가까이 하고, 낯선 이웃에게 친절함을 보여준 여성의 따뜻함입니다. 그 여성의 따뜻함을 알아보았던 아버지의 안목입니다.
그럼 저와는 어떻게 연결이 되었을까요? 저는 지난 사순시기에 오타와, 토론토, 뉴욕, 뉴저지에서 사순특강을 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 오타와는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여정이었습니다. 사순특강을 듣기 위해서 저를 기다리는 오타와의 교우들의 눈망울이 선합니다. 규모가 크지 않아서 사순특강을 들을 기회가 적었다고 합니다. 30여명이 사순특강을 들었고, 고맙게도 신문 구독도 해 주었습니다. 과묵하지만 속이 깊은 토론토 신부님은 사제관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서재에 있는 책을 선뜻 빌려주었습니다. 뉴욕의 퀸즈성당은 특강 전에 십자가의 길, 성체강복이 있었습니다. 특강은 미사 중에 하였습니다. 덕분에 매주 금요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뉴저지에서 사순특강을 하였습니다. 강의를 듣던 형제님은 제게 아들의 혼배미사 주례를 부탁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혼배 주례를 하면 아이들에게 더 큰 축복이 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신랑과 신부를 위해 혼배 주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사순특강을 들었던 형제님은 처를 처음 보았는데도 아들과 며느리를 위한 혼배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인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5월 6일 하느님 앞에서 부부가 되려는 요한과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설교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고, 신자가 삼천 명 가량 늘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물위를 걷다가 빠졌던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꾸지람을 듣던 베드로입니다. 절망 중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베드로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갈릴래아에서 낚시를 하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무엇이 베드로의 마음을 바꾸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를 품어주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따듯한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시카고를 경유하는 뉴욕 행 비행기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보통은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타고 내리는 것이 비행기입니다. 그런데 따뜻한 마음과 마음이 만나니 우연은 필연이 되어서 젊은이들이 부부가 되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비록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 중에 있다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교만과 욕망 중에 있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해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시카고 경유 비행기가 아닌 빈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의 간절함이 있다면,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자캐오의 간절함이 있다면 봄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는 꽃을 보듯이, 우리는 주님 부활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주님과 우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앞서도
앞서지 않고
뒤서도
뒤서지 않으며
높아도
높지 않고
낮아도
낮지 않으며
오롯이 나란히
늘 나란히
곁에서
더불어함께
다시 살아나신
주님과 우리는
형제자매요
벗이라네
앞선 주님 따라
뒤선 우리는 서로
형제자매요
벗이라네
여인아! 왜 우느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새벽 이른 아침 한 여인이 무덤을 향해 달립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무덤에 있습니다. 저도 또한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른 새벽 동틀 무렵 가족들이 무덤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님이 세상을 떠났고, 그가 왜 울고 있는가를 무덤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울고있는 그를 침묵 중에 아무 말없이 바라보고 함께 곁에 있어주고, 그의 손을 굳게 잡아 주었습니다.
그는 위로를 받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느님을 제 자신에게 맞추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접니까? 원망과 절망의 한숨만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내 중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저를 맞추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닫힌 마음이 열렸고 부활을 살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너는 너만을 처지를 그만 보고 주변의 많은 아픔의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과 머무르고 그들의 손을 잡아 보아라. 그때 너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슬픔을 딛고 일어나 슬픔을 넘어 다시 기쁨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께 맞추어 살면 아픔을 씻은듯 낫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결실입니다. 믿음은 모든 나의 고통과 상처를 아물게 합니다. 믿음의 사람아! 슬픔으로 닫혀있지 말고 하느님께 의탁하고 일어나 달려다구!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부활은 믿는 이들, 신앙인들이 믿음을 통해 겪게 되는 신비이자 증거이며,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믿는 이들은 지난 시간 모든 일들이 바로 주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현재의 시간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이루어가고, 앞으로의 시간도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곧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무덤에 계신 분이 아니시라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왜 울고 있느냐고 하시면서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살아가면서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련이 닥친다 해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언제나 함께하심을 기억하며 주님과 함께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참된 사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사도로서의 증거의 삶이자 부활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부활하신 초자연 몸이신 예수님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시신을 돌봐드리려고 여자분들이 더 신경 쓰셨던 것 같아요.
일요일 이른 새벽에 시신만이라도 우선 제대로 염해 드리려 했겠지요.
예수님의 발에 기름바르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었죠.
마리아야 하시는 음성에 놀라 스승님하며 순간 붙들려는 자세 취했죠.
부활하신 초자연 몸이신 예수님은 하느님께 올라가야한다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급히 달려가 주님을 뵈었다며 전하라 하셨네요.
예수님은 하느님께 올라가시고 세상에 오시고 문하나 열 듯 하셨네요.
자연적 차원에서 초자연적 몸이신 걸 보이셨다니 이해가 잘 안되었죠.
가톨릭알림 말: 초자연적 예수님의 몸을 자연차원에서 믿으니 신앙이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20,11-15).”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했습니다(요한 20,2).
마리아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퍼뜨린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마태 28,12-15).”
경비병들이 퍼뜨린 거짓 소문은 아주 빠르게, 널리 퍼졌을 것이고, 사도들과 신자들도 그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사도들과 신자들은 당연히 그 소문을 안 믿었겠지만, 그래도 “혹시 경비병들 자신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서 거짓 소문을 퍼뜨린 것은 아닐까?” 라고 의심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게 의심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울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죽인 적대자들이 예수님의 시신마저 훔쳐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그것은 예수님을 두 번 죽인 일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슬픔’을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을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즉 ‘예수님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과 절망과 슬픔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라고 묻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그 상실감과 절망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어떤 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그분은 되살아나셨다.” 라고 증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해서 대화의 일부가 생략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왜 우느냐?”고 천사가 묻자, 마리아는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간 것 같다고 대답하고, 그 다음에 뒤로 돌아섰는데(요한 20,14), 뒤로 돌아선 것은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말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말은 아마도 “울지 마라. 그분은 되살아나셨고, 지금, 여기에,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부활 전의 예수님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마리아에게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려면, 또는 만나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6-18).”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신 것은, 마리아에게 ‘믿음의 은총’을 주신 일로 해석합니다.
믿음도 은총입니다.
그 은총에 응답하는 일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그래서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아직 부활 신앙은 없었지만, 믿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의 은총’과 마리아 자신의 ‘믿으려는 노력’이 합해져서, 마리아는 곧바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은, “나를 붙들지 말고 지금 바로 사도들에게 가서 나의 부활과 승천을 알려라.” 라는 뜻입니다.(“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곧 올라갈 것이다. 그러니 너는 지금 곧바로 사도들에게 가서 내가 부활했다는 소식과 승천한다는 소식을 전하여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먼저 만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를 먼저 만나신 것에 대해서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사랑받는다.”라고 해석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사도들보다 더 사랑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인데, 그 사랑을 받는 사람 쪽의 사랑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시신이 없다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그 사실을 곧바로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에게 알렸습니다(요한 20,2).
그런데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는 무덤에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한 뒤에 그냥 되돌아갔고(요한 20,10), 마리아는 무덤에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울면서도 예수님을 찾으려고 계속 노력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로 그 차이입니다.
사도들도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가 사도들보다 더 많이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두 사도가 되돌아가지 않고 마리아와 함께 남아 있었다면,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부활의 증인'(요한 20장 11~1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마리아야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늘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이의 음성은 그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금새 알아들을 수 있고 잊지않고 기다렸기에, 찾고 있었기에 눈 앞에 나타나심은 감동자체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받았으나 예수님의 자비로 모든것을 용서받은 여인입니다.
무엇을 찾고 있느냐?
왜 우느냐?
이 목소리는 간절히 찾고 있고 보고파서 울어본 사람에게 들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 어느 죄인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날이요 선물이니 우리도 서로의 장벽을 허물고 용기내어 사랑을 전할 때입니다.
우는 사람 눈물 닦아주고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 실천적 움직임을 한다면 당신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며 부활의 기쁨을 사는 것입니다.
말을 건네시는 예수님
김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슬픔에 젖어 있는 여인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그에게 다가가 말씀을 건네시며 위로하셨고, 당신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관심이 많으신 예수님은 자꾸 세상 속으로 들어오시고 사람들에게 다가서십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이며 이 세상 안에 있는 교회는 예수님처럼 세상에 말을 건네며 살아야 합니다. 이전에 교회는 세상을 ‘속되고 잠시 지나갈 곳’으로 여기며 세상 일들에 담을 쌓은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강자들의 횡포가 도를 넘어 약자들이 내는 고통에 찬 절규가 커져가는데도, 이런 세상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약자들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교회의 일이 아닌 양 처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에 찬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선포하시며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상 교회에 속한 이들입니다. 그러니 지상 교회에 속해 있는 동안에 세상의 어둠과 아픔, 절망과 차별에 말을 건네며 세상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곳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 20, 18)
김웅태 신부님
+찬미예수님!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요한 20, 11~18)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뵙고 엉겁결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며,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내용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없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사람들과 그 증언은 여럿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 복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주셨기 때문에, 그 이후로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게 되었지요. 그래서 모든 관심이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때도 십자가 아래 성모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땅에 묻히셨고 그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이 가장 궁금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가보니, 꽉 막아 놓았던 무덤의 입구는 열려 있고 그 무덤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하고 묻자, 마리아는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요한 20, 23)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보니까, 마리아는 동산지기 같은 사람이 있어서 울면서 그에게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으니 어디에 모셨는지 알려달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물으시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뵙고 "라뿌니"(선생님) 하며, 엉겹결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요한 20, 13~1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요한 20, 17)는 사명을 받고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던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보았고, 또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처음으로 본 사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구원 사건의 모든 중요한 일들을 마리아 막달레나는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그 일을 증언했던 것입니다. (요한 20, 18)
마리아의 이러한 증언은 소박하게 성경에 기술되어 있지만, 대단히 엄청난 전대미문의 예수님 부활사건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희망의 기쁜 소식이 될 예수님 부활의 증언이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 라고 하는 한 여인에게서 시작됐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입은 주님의 은혜는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 증거할 수 있는 첫 증거자로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 은혜를 받았다는 것, 이것은 그녀가 예수님께 대해 모든 관심을 집중했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였고, 예수님의 삶이 자신의 삶의 전부가 될 정도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입장이 되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러 가는 그 설레는 마음에 공감하고, 또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듣고 놀란 제자들을 느껴봅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예수님의 놀라운 부활을 목격하고 증언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입장이 되어 봅시다.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세상을 떠나신 예수님에 대한 깊은 슬픔에
지속적인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당신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만남의 장면입니까!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더 이상 나를 손대지 마라, 나를 붙잡지 마라
예수님은 아직 하셔야 할 아버지 하느님의 일이 있고
막달레나 역시 사도들의 사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이 전해지는 놀라운 순간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한 여인을 통하여 전하여 졌고
사도들은 여인을 통해 부활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믿는 이들을 통하여 전하여 질 수 있음을
부활의 기쁜 소식 앞에 다시금 새겨 봅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
Go to my brothers and tell them
김성 요한 신부님
찬미 예수님!
나이 지긋한 노신부님이 주일 오후에 예비자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의 성경 주제는 "동정녀 마리아" 교리였습니다.
신부님이 열정을 다하여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교리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젊은 신자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농담하지 마세요. 어떻게 처녀가 아기를 낳아요?
다른 교리를 가르쳐 주시지요."
그러자 노신부님께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더 자세히 설명하려 했지만 그 형제는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계속 의문을 제기하자 화가 난 신부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형제! 마리아의 신랑 요셉도 믿었는데 네가 뭔데 안 믿어?"
오늘 주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 후 처음으로 발현하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깊은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마리아는 주님을 정원지기로 오해하고 자신이 모시고 싶다고 울면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애틋하셨겠습니까? “마리아야” 다정하게 부르시는 그 음성에 마리아는 이제야 그분을 알아봅니다. “라뿌니!” 스승님하고 부르는 마리아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겁니다.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것입니다.
이번 부활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계속 묵상의 주제가 되네요. 그녀의 깊은 신심과 사랑. 그래서 다시 뵙게 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도 이리 고백하면 참 좋겠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염철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여인 중 하나였던 그녀가 예수님을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다소 의아합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좀 더 깊이 읽어보면 그녀가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눈이 멀어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으로 새로운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허망함과 고독감에 사로잡혀 텅 빈 무덤만을 쳐다본 채 예수님 말씀, 곧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그분 말씀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눈앞에 펼쳐진 기적을 제대로 알아볼 수도, 깨달을 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완전히 변화된 몸이기에 인간의 눈으로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물쇠로 잠긴 방 안으로 들어오시기도 하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시는 등 이 땅에서 보아온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몸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마리아의 눈을 뜨게 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자신을 향해 “마리아야!”(요한 20,16)라고 부르시자 그분 음성을 곧바로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봅니다.
이런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붙들지 말라 하시며,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사랑하는 이와 머무는 것이 가져다주는 안녕과 평화에 사로잡혀 영적 평화만을 누리려 하지 말고, 나가서 다른 이들에게 부활을 선포하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예수께 받은 임무였습니다.
● 말씀 따라 걷기
*무덤 앞에서 서성이며 눈물 흘리는 마리아의 간절함을 내 것으로 느껴보자.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부활 8일 축제 화요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흔히 “사는 것이 죄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자애로운 죄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피에 공로로 얻어진 예수님 부활의 은총입니다.
그렇다면 1년 전 오늘 있었던 고통과 시련을 기억하십니까?
1년 전에도 어렵고 힘든 시간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렵고 힘든 시간이 언제인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때는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고통과 시련 역시 금방 지나가고 잊히는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다 지나가겠지요. 잊히겠죠. 그리고 잘 살아지겠지요. 그러니 예수님 부활의 은총으로 견디셔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희의 이름으로 불러주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자리를 찾아가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마리아는 그분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리고 너무나 아팠고 너무나 서러웠기 때문에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갔다고 하염없이 울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사랑해서 무덤까지 찾아간 마리아인데, 자기의 슬픔과 눈물 때문에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물으신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는 말씀을 다시 묵상해보겠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라는 말씀에는 ‘눈물을 멈추라’라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지금까지 울고 있는 것을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이제 눈물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또한 “누구를 찾느냐?”라는 말씀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생명의 주 예수님을 찾으며 울라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저희의 눈물을 멈추게 해 주시라.”는 뜻입니다.
요한 묵시록 21장 4절 말씀입니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께서 제일 먼저 해 주시는 일은 바로 고운님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라는 말을 들은 뒤에야 마리아는 “라뿌니!”라고 예수님을 부르며, 예수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부활 준비로 좀 바쁜 시간을 보내고, 지금 성체 앞에서 ‘멍’ 하니 있으니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아서 참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곳에 있으면 저곳이 그립고, 이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이 그립고, 그래서 있을 때 잘해야 하고, 계실 때에 잘해야 하고, 내 손에 있는 것이 보물인 줄 모르고 없어 봐야 후회하고 가슴을 치면 소용없는 것이지요.
이제 고운님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리고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답답하고 가슴을 칠 일이 있어도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고운님들이 가장 아파하는 곳에서, 힘든 시간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저희를 찾아오셔서 큰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실 것입니다.
“고운님들아!” 내가 너희를 늘 지켜보고 있단다.”
이제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자애로운 은총과 죄의 용서에 고운님들이 해야 할 일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아멘. 알렐루야!’라고 응답하시면 충분합니다. 아멘.
저 두레박 사제도 제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에 ‘아멘. 알렐루야!’ 응답하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아픈 이들을 돌보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저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저희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저희의 죄를 갚아주시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권능으로 고운님들은 오늘도 기쁘게‘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하면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함승수 신부님
주님께서 묻혀 계셨던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한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그분의 무덤 앞을 떠나지 못한 채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몰래 꺼내간 사람이 시신을 훼손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그녀의 온 마음을 사로잡아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 그녀 앞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이미 천사들이 그녀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음에도,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으니 더 이상 그분의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알려주었음에도, ‘주님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완전히 사로잡혀 참된 의미도, 분명한 목적도 없이 그저 눈물만 흘리던 그녀에게 우리가 참으로 울어야 할 ‘진짜 슬픔’이 무엇인지, 우리가 간절하게 찾아야 할 주님이 어떤 모습인지를 제대로 알려주고자 하신 겁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여전히 ‘동문서답’입니다. 눈 앞에 그토록 그리던 예수님이 서 계시는데도, 그분이 그 무덤이 있는 동산 전체를 관리하는 ‘동산지기’라고 제 멋대로 오해하고는, 주님의 시신이 어디있는지만 알려달라고, 그러면 자신이 그분을 모셔가겠다고 답합니다.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뻣뻣하게 굳어진 장정의 시신을 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몰약과 침향을 섞어 만든 향료가루를 잔뜩 바르고 아마포 수의로 감싸 무게가 거의 100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무거운 시신을 자기 혼자 운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는 무모하게 보였겠지만, 그녀는 진심이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기에 그분을 되찾아 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예수님께서 사랑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시자, 마리아는 자기 앞에 서 있는 그분이 예수님임을 즉시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자 슬픔과 비탄, 절망에 빠져 죽어가던 그녀의 마음에 순식간에 기쁨과 환희, 희망이 가득차게 되지요. 즉 그녀는 그 자리에서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고는 아람어로 “라뿌니!”라고 외칩니다. 유다인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스승을 부를 때 쓰는 일반적 호칭인 “라삐”와는 어감이나 의미가 다른 특별한 호칭입니다. 제자가 자기 스승에게 특별한 애정과 친밀감, 존경의 마음을 가득 담아 부를 때 쓰는 사랑의 호칭입니다. 학생들이 친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을 “쌤~”하고 부르듯, 예수님을 보고 “사랑하는 나의 선생님!”이라고 외친 겁니다. 그렇게 너무나 사랑하는 예수님과 기쁨의 해후를 나눈 마리아는 다른 제자들에게 자기가 느낀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증인이자 사도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여 도움과 동반이 필요한 평범한 이웃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렇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다면 내 주위에 있는 수많은 ‘낯선 이’들을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공감과 도움, 자선을 청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저하거나 미루지 말고 즉시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눈이 열리고 귀가 틔어서 그들 안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큰 기쁨 속에서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나의 예수님!”
Sing again!
송영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다가서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당신의 죽음은 사흘 전 일이고, 무덤 안에 시신이 없다는 것은 당신 약속대로 부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왜 아직도 울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는 부활하여 지금 ‘무덤 밖’에 있는데, 너는 왜 아직도 ‘무덤 안’만 바라보고 있느냐는 뜻이겠지요. 이처럼 예수님 부활 사건은 우리의 시선을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겐 ‘그다음’이 있음을, 허무하게 끝나지 않고 ‘다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과거의 일에 집착하거나 지난 일에 연연해한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불필요한 과거의 감정들은 비워버리고, 다시 지금 내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 그때 부활의 기쁨은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혹시 아직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나요? 아직도 과거의 일에 계속 머물러 있나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Sing again!’ 다시 노래하자고,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초대에 우리도 힘차게 응답해봅시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여러분, 부활절 잘 지내고 계십니까?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느끼십니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접하십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잃고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여쭈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요한 20,13) 마리아가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라고 답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더 이상 볼 수 없고,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절망감과 슬픔에 잠겨 허망해합니다.
그런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마리아야!”(16절) 마리아는 생전에 자신을 부르던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기뻐서 대답합니다. “라뿌니!”([스승님!] 16절) 그동안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그 모습으로 부활하지 않으셨기에 미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마리아가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신 예수님을 향해 기뻐서 달려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만류하시며 이르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17절)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는 첫 선교사가 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여러분, 주님께서 복음의 일꾼으로 나를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내 생애의 어느 순간이 추억의 고리가 되어, 나를 부활하신 주님께로 연결해 줍니까?
오늘 어떤 느낌으로 어떤 방법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십니까?
나를 향해 다가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느끼고 깨우침으로써 주님 부활의 큰 기쁨을 누리시게 되기를 빕니다.
주님 부활의 증인들 <요한 20, 11-18> 4월 1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믿음은 말이나 환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의 증인들 증언과 목숨 내놓고 증명한 것으로 굳은 마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믿음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도 증명이 있으며 필요합니다.
부활의 시작은 빈 무덤이지만 보고 느끼고 체험하고 증언하며 몸으로 증명하여 굳은 믿음을 2000년 동안 지속합니다.
이를 증명하려고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모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300년 동안 순교가 지속되고 가는 곳마다 믿음을 증거하거나 목숨 바쳐 증명하셨습니다. 이는 성경의 말씀과 일치된 믿음입니다.
진실을 사랑으로 증명하신 증거입니다. 믿음을 드러내고 증거할 사명을 지니고 살아야 참믿음으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희생 없이 증명되지 않고 증거하려면 자신을 내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위해 사랑으로 보답해야 참믿음이고 믿음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살아야 하는데 무엇으로 증거합니까? 거저 윗대로부터의 믿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보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몸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을 우리도 따라 살아야 올바른 증거자가 됩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들은 자녀대로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믿음 없이 불가능하지만, 사랑 없는 믿음은 증명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주님을 스승처럼 대하고 사랑하던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부르는 소리 듣고 “라뿌니”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찾다가 알아보고 “스승님”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목소리도 쉽게 알아듣고 친교를 가집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주님이 참으로 우리 안에 부활하심을 증거하며 살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가장 바쁜 날입니다. 8시 30분 상담, 9시 40분 이발, 10시 30분 대구 요셉회 노인 신부님들 점심, 오후 2시 카톡 발송, 4시 상담자 면담, 그 외 수도원 일정에 맞춰 기도, 그러나 그런 시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하루를 지내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시간을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힌싱우 바오로 신부님
제일 먼저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중한 이름을
빼앗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이름을 만남으로
되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운 이름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저마다의 소중한
이름입니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소중한 이름을
사랑으로
불러주십니다.
이름에는
심장이 있고
함께 한
시간이
흐릅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가장 연약한
이름이
가장 사랑하는
이름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이렇듯 부활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름에
부활의 글을
쓰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이
부활의 길입니다.
부활의 길은
끊임없이 새로운
현재의 길입니다.
같은 시각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더 깊어지게 하는
부활의 이름은
반가움이라는
이름입니다.
사람이 반가운
소중한 부활의
새 아침입니다.
반가운 소식
반가운
이름입니다.
소중한 이름을
소중하게 부르는
너무나 반가운
부활 축제입니다.
로고테라피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모든 절망의 기초가 되는 것은 결국 우상화밖에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절망하는 것은 우상화한 것이 깨졌거나 환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어머니라는 것에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는 것을 우상화했지요. 그래서 자녀에 대한 집착이 심했고, 자녀와의 커다란 다툼이 생겼을 때 크게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우상화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절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돈 많이 버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등을 우상화하면 절망에 빠질 확률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우상이라는 환상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절망하게 됩니다.
우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즉, 우상에 기대어 사는 삶이 아닌 자기 본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참 하느님이신 주님이 중요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의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주님만 잃지 않는다면 절망에서 벗어나 늘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왔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비어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처음 소식을 알렸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여전히 무덤을 지키며 울고 있었습니다. 누가 주님의 시신을 꺼내 가서 훼손할 것을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요. 하긴 직접 부활 예고를 들었던 제자들도 깨닫지 못하는데, 마리아 막달레나가 어떻게 부활을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됩니다. 그만큼 주님께 대한 사랑이 컸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울면서 빈 무덤을 지키고 있었으며, 얼마나 여기에 집중하고 있었으면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을까요? 주님께서도 그 사랑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에게 사명을 내리십니다.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먼저 키워야 합니다. 그 사랑이 주님의 따뜻한 말과 함께 주님으로부터 커다란 사명을 받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희망을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을 알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알프레드 아들러).
라뿌니! 나의 사랑하는 선생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별것 아닌 내용인데 장황하고 어렵게 풀어나가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난해하고 어려운 주제라 할지라도, 잘 갈고 다듬어 쉽고 친숙하게 우리를 안내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존경하는 송봉모 토마스 신부님께서 최근 출간하신 ‘요한복음 산책 7, 평화가 너희와 함께’(바오로 딸)를 눈여겨볼 만합니다.
신부님께서는 7권이나 되는 요한복음 산책 시리즈를 통해, 그 어렵고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요한 복음서를 성경 초심자들도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하고 계십니다. 흥미로운 예화들과 생생한 체험들이 성경 본문과 어우러져 우리를 요한복음의 생생한 현장 속으로 안내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내신 책은 요한복음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21장~22장,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부활을 맞이한 우리 모두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예수님 부활 사건의 최초 목격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송봉모 신부님의 해설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다시 뿜어져 나오는 대목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가 모셔가겠다고 한다. 장정의 시신을 나르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몰약과 침향을 섞어 만든 34킬로그램의 향료 가루와 아마포 수의로 감싸 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운반하다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러한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야!: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자 주님께서는 “마리암!” 하고 부르신다. 아람어로 마리암은 그리스식으로 마리아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말로 쓰였기에 마리암을 마리아로 번역한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자 즉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마리암!”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자신을 불러주시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라뿌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시자 즉시 예수님임을 알아본다. 그리고 슬픔과 비탄, 절망으로 죽어있던 그녀의 마음이 순식간에 기쁨과 환희와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부활을 체험한 것이다. 그러고는 아람어로 “라뿌니!” 하고 외친다. 라뿌니는 ‘나의 사랑하는 선생님’이란 뜻이다. 안셀무스 성인에 따르면 그녀가 “라뿌니!” 하고 외칠 때 이미 그녀의 눈에서는 조금 전까지 흐르던 눈물과는 완전히 다른 눈물, 환희와 기쁨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스승이라는 뜻인 “라삐”라고 불렀다. 라뿌니는 제자가 스승에 대해 특별한 애정과 친밀함과 존경을 가득 담아 부를 때의 호칭이다. 학자들은 이 외침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최고의 신앙고백이 들어간 외침이라고 한다.
나와 동행하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엔 이 순간이 무덤이 아닌 ‘정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지기’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원은 단순한 정원이 아닙니다. 바로 에덴동산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은 생존에 대한 문제, 심지어 죽음에 대한 문제도 해결된 곳입니다. 계속 설명해 왔지만, 사람이 악해지는 것은 생존에 대한 문제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죽음까지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에덴동산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동산지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동산지기는 아담이었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창세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한 여인을 “마리아야!”라는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모님조차 마리아란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참아온 것입니다.
아담은 동물처럼 살고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며 새로운 존재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그 아버지는 곧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에게서 나온 예수님도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도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소명을 마리아에게 넘겨줍니다. 새로 태어난 이는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처러 누군가에게 에덴동산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그래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신 분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분이 모든 것을 책임지지 못하실 분처럼 두려워하며 세상 것에 다시 집착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우리가 믿게 하려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줄 알기를 기다리십니다.
유기성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함을 믿으려면 내가 죽었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생명이시기에 내가 죽었다고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을 때 그분의 부활이 더 명확히 믿어진다고 합니다.
그는 군종 목사가 되기 위해 훈련받던 도중 발이 부러집니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훈련을 받아서 발을 거의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의사는 발을 절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유 목사는 수원에서 목사로 있던 아버지만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와 통화가 될 수 없었고, 수술 대기실에서 혼자 마지막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유 목사는 울부짖었습니다. 하느님은 찾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를 먼저 찾았던 목사로서의 부족한 신앙이 죄책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부족한 자신에 비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느껴지자 이젠 주님께 자기 발을 바치고 싶어졌습니다. 영원한 생명까지 주실 능력이 있으신 분께 의탁하지 못한 자신이 후회되었고 이젠 제발 자신이 절름발이 목사로 살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세 번 수술하고 나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죽음까지 이기신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다음 시련은 목사가 된 이후 찾아왔습니다. 한 장로님이 불쌍해서 더 많은 기도를 해 주었는데, 신도들 사이에 유 목사가 그 장로에게 돈을 꿔가서 갚지 않아 그렇게 잘해 주는 것이란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신도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더는 유 목사와 함께 할 수 없다며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때 느낀 배신감과 허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는 목사로서 일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복음을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스스로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나는 죽었습니다. 당신 마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했고,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없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마냥 기쁘고 행복하신 것이 아니라 찢어지게 아픈 마음으로 이런 모습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시련은 계속 왔습니다. 대학원을 나와야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이 당연한 시절 주님은 공부를 좋아하는 마음을 없애고자 논문을 포기하라는 강력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이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 했지만, 마음 안에서 울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고민을 너무 한 탓에 열이 끓어올랐고 몸이 아주 아팠습니다. 이불을 쥐어뜯으며 울었습니다. 석사가 되는 게 뭐라고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또다시 “나는 죽었습니다. 주님께 의탁합니다”라고 몇 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한없는 평화가 오고 열이 갑자기 내렸습니다. 유 목사는 석사가 되지 않고도 담임 목사가 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여서 다행히 석사가 없는 거의 유일한 학사 담임 목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정말 우리 옆에 동행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죽음까지 이기신 분임을 우리가 믿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 믿음은 나의 모든 것, 결국엔 생명까지도 요구하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까지도 기꺼이 그분께 봉헌할 수 있을 때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분께서 죽음까지 이기신 분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작은 것을 잃는 것도 얼마나 두려워합니까? 한 번은 다른 곳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로 방금 암 판정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의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빨리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계획하신 것이고 이것이 지금 자신처럼 마음 아픈 사람들이 와서 앉아 있는데 그들에게 큰 위로의 복음이 될 것이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까지도 주님께 바친다는 강의를 했고, 결과적으로 강의도 잘 되고 아내도 수술이 잘 되어 건강해졌습니다. 아내도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고 집에 오는 길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많은 이들에게 선교하며 돌아왔다고 합니다.
유기성 목사가 강조하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결국 나를 죽이는 삶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죽음까지 이기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인정하는 방법은 내가 모든 것을 잃어도 감사하다는 믿음뿐입니다. 우리는 진정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가요, 아니면 아직 부활하기 전에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그 예수님과 동행하나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면 그분이 말하지 않아도 맡기기만 하면 다 해 주실 분임을 압니다. 그래서 무엇을 잃을 걱정도 없고 또 무엇을 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웃에게 전해야 하는 “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라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동행으로 나와 만들어집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표현한 것이 이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할 때 그분 손바닥에서 나 때문에 뚫리신 구멍을 확인합시다. 그 구멍이 있는 것을 본다면 나는 에덴동산에서 사는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입니다. 하지만 아직 구멍이 없다면 나는 아직은 완전한 부활을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그분 손의 못 자국을 항상 확인하십시오. 죽음을 이기셨다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나도 죽음을 이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보 길에 자주 보는 것들이 있습니다.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새입니다. 새는 날개가 있기에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날개가 있는 새는 걸어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새가 걸어 다닌다면 날개에 이상이 있거나, 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걸어 다니는 새는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다람쥐도 볼 수 있습니다. 다람쥐는 새들처럼 날지는 못하지만 나무를 아주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곡예사처럼 높은 전선 위를 이동할 수 있습니다. 다람쥐에게는 단단하게 움켜잡을 수 있는 발톱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새들에게는 날개를, 다람쥐에게는 발톱을 주셨습니다. 새들처럼 날개는 없지만, 다람쥐처럼 발톱은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는 ‘신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면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고, 나무를 오르는 다람쥐를 보면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모든 것이 기쁨입니다.
예전에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커피를 마시면 컵에 경품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는 자매님과 커피를 마시면서 평소처럼 제 것이 당첨이 되면 가지시라고 말을 했습니다. 될 리도 없고 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분이 제가 마신 컵을 가지고 열어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동차 나와도 저 주는 거예요?” 저는 “그럼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컵 말린 부분을 여는데 그분 표정이 변하는 겁니다. 보통은 ‘Please try again.'이라고 나오는데 처음 글자가 ’W'인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더 이상해졌습니다. 정말 자동차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신부가 되가지고 반씩 나누자고 할 수도 없고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결국 ‘Win coffe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커피의 경품은 나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정말 나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 정도로 흔들어 놓는지 생각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기쁨과 영광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꼭 해야 할 어떤 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성삼일을 지내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묵상하며 그 의미를 내 삶에 받아들이기 보다는 아! 올해도 주님의 부활이 지나갔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그렇게 나에게 의미 있고, 그렇게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큰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날개가 있음에도 날지 못하는 새와 같았습니다. 날개를 믿지 못하고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새와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복음을 선포하고, 어떤 고통과 두려움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제 그들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도, 재산도, 명예도, 욕심도 다 버렸을 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느끼고, 만날 수 있었습니다. 10개월 동안 엄마의 몸속에 있는 아이에게 탄생은 어쩌면 죽음과 같은 두려움과 고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탯줄에 연결되어 매일 아무 수고 없이 양식을 받아먹고, 엄마의 몸 안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는 아이에게 세상은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한 곳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의 몸에서 나와야 하고, 나오지 못하면 결국 아이도 엄마도 위험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먹여주고 지켜주던 탯줄을 끊어야만, 엄마의 몸에서 나와야만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는 죽음과 같은 체험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탄생’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마리아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슬픔을 다 떨쳐버리고,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편안한 하루 되십시오.
<왜 우느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왜 우느냐?
사랑하는 이를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웁니다
왜 우느냐?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지 못하기에
웁니다
왜 우느냐?
사랑하는 이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웁니다
왜 우느냐?
사랑하는 이를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웁니다
왜 우느냐?
사랑하는 이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웁니다
왜 우느냐?
사랑하는 이에게
눈물밖에 드릴게 없어
웁니다
왜 우느냐?
사랑하는 이 때문에
그저 사랑하는 이 때문에
웁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본 증인은 '13인의 사도'라고 부르는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렸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갈릴레아 지역의 막달레나 사람 마리아였다. 그는 예수님과 마지막 장면까지 지켜본 믿음의 사람으로 성모님 다음으로 주님께 충실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복음의 선포자로 추앙받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과 생을 함께 했다. 그리고 기도하며 말씀을 들었고 들은 것을 선포했다. 그는 열두 사도처럼 제자로 불림을 받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부르심을 받고 기도했고 주님을 따르며 매 순간마다 함께 했다. 무덤을 찿던 날도 간절함으로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바랐다. 그를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고 기뻐했다. 그를 사도로 부르기에 충분했다.
십자가의 길에서 수난에 동참했고 예수님 죽으심을 바라 보아야 했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보았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목격 증인이었다. 그는 믿음 안에서 복음의 선포자라는 칭호를 받을만큼 훌륭했다. '나는 주님을 제가 뵈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준 선물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온 것이다.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을 없으리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 맛달레나 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인이 또 있겠는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당신께서는 하느님께 올라간다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셨고,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미쳤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막달레나가 당당하게 주님의 부활소식을 전했다는 것이 바로 성녀의 위대함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신앙을 증거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늘 언제나 함께하며 그 믿음을 증거해 나갈 때 세상은 주님 안에 희망을 발견해 나갈 것이고 우리가 바라는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그러한 사명을 지닌 사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적인 곳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 중 2명 즉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인 것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 후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슬피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명의 제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던 두 명의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요. 이는 의도적인 하느님의 역사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두 명의 천사,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알아보지 못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향해서 “마리아야” 라고 다정하게 부르지요. 그 다정함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게 되고 붙들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더 이상 육적으로 자신을 찾지 말고 붙들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승천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시는데 바로 이 승천을 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이 완성됨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육체적인 삶을 끝냈으며 이제 영적인 삶으로 즉 하느님으로써의 자리로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에게 큰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성부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의 하느님이심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큰 기쁨의 선물임을 우리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특히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그녀에게만 한정 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이고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름을 통해서 주님을 알아 볼 수 있다는 큰 은총을 받고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의지에 의해서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항상 우리들을 보시고 우리들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현재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매일의 삶이 기쁨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혼자가 아닌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들 개인의 이름을 부르시고 있다는 것을 믿고 힘든 하루를 그분의 이름으로 이겨냅시다. 아멘!
계속되는 부르심
김정일 아느드레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며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고기잡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부르신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이 부르심 이후 제자들은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받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는 많은 이들이 이렇게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제자들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게 되는 걸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무덤에서 우는 여인에게서 우리는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슬픔에 빠져 있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시자 마리아는 “라뿌니” 곧 ‘스승님’이라고 응답합니다. 이로써 마리아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할 사명을 띤, 스승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부활의 증인들의 외침, 즉 ‘신앙고백’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와 신경을 통해 하는 신앙고백도 계속되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르심에 응답하는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내적혁명. -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저희를 치유해 주셨으니,
천상 선물도 풍성히 내리시어,
지금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 자유를, 하늘에서 온전히 누리게 하소서.”
오늘 본기도가 참 은혜롭습니다. 4월의 엊그제 주님 부활 대축일과 대축일에 이은 이번주 계속되는 부활 팔일 축제가, 이어지는 파스카 부활 시기의 전례가 참 고맙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겐 매일이 부활 축일이요 매일이 내적혁명의 날입니다. 진정한 혁명은 내적혁명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회개가 바로 내적혁명의 요체입니다.
그러니 4월은 내적혁명의 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무수히 폈다지는 청초한 파스카의 봄꽃들, 이어 연초록 파스카의 기쁨으로 빛나는 초목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내적혁명의 삶을 살아 가는 이들의 아름다운 영혼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합니다. 한국의 현대사를 봐도 그러합니다. 4.3 제주도 사건, 4.16 세월호 사건, 이어 오늘 62주년을 맞는 4.19 혁명이 이를 입증합니다. 62년전 바로 오늘, 자유당 부정 선거로 인해 촉발된 4.19 혁명의 날, 하루 동안의 시위로 서울에서만 1백여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했고 6026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4.19 시인’이라는 신동엽 시인의 감동적인 시를 나눕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永遠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4.19 혁명을 통해 잠시 하늘을 본 시인의 감격에 넘친 고백입니다. 과연 몇이나 진짜 하늘을 보았겠는지요?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게도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루하루 날마다 눈이 열려 참 하늘을 봅니다. 구원의 하늘이신 파스카 예수님을 만납니다.
저에겐 그대로 종교시로 읽히는 시입니다. 우리 한국 가톨릭인의 정서에도 맞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 구름 한 자락 없는 맑은 하늘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와의 만남이 진정한 내적혁명의 회개요, 우리 모두 날마다 영원의 하늘, 구원의 하늘이신 파스카의 주님과 하나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우리는 하늘이신 파스카의 주님을 만난 두 빛나는 내적혁명의 모범이자 주인공을 만납니다.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와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입니다. 내적혁명에 전제되는 바 이분들의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열렬한 사랑입니다. 바로 사랑이 내적혁명 회개의 동인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죽은 예수님을 찾던 마리아는 살아 계신 파스카 예수님을 만납니다. 마리아의 사랑에 감격하신 새에덴동산의 동산지기 파스카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를 부르셨고 부르심에 응답하여 회개로 돌아서는 순간 전광석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마리아는 눈이 열려 영원의 하늘, 구원의 하늘이신 주님이 한눈으로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내적혁명이 일어나는 참된 회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이어 마리아에게 주어지는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더불어 내적혁명의 회개요 복음 선포의 실천입니다. 마침내 마리아는 주님의 형제들인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이젠 예전의 마리아가 아닙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 ‘참으로 살게 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한 번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매일 새롭게 만나야 하는 파스카의 주님입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 역시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파스카의 주님을 만남으로 참된 회개를 통해 내적혁명을 성취한 분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만난 이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들이 감동적입니다.
“회개하십시오.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진리 말씀입니다. 세례를 통해 시작된 우리의 내적혁명이요 완성은 날마다 주님과 만남을 통한 끊임없는 회개로 이뤄집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진짜 참으로 사는 길’은 이런 주님과 만남을 통한 내적혁명의 삶, 회개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의 본질적 삶을 살게 하며, 내적혁명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베드로와 마리아 막달레나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도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아 맑고 푸른 영혼의 하늘로 살게 합니다.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대표적 시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우리의 내적혁명의 삶에 박차拍車를 가하는, 참으로 우리의 민족성을 일깨우며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의 삶을 살도록 분발奮發케 하는 시입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으든 쇠붙이는 가라.”
세월 흘러도 오늘도 여전히 현실성을 띠는 감동적 시입니다. 아멘.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이기우 신부님
2016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령 「사도들을 위한 사도(Apostolorum Apostola)」, 2016.6.3.)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막달라의 마리아를 ‘사도를 위한 사도’로 부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으셨듯이, 막달라의 마리아는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강생의 신비에서 성령의 동정 잉태 전갈에 순명하신 성모 마리아의 역할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 섭리 역사에서 탁월했다면, 부활의 신비에서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 역시 교회의 탄생과 성장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마리아는 혼자가 아니었고, 요안나, 수산나 등 공생활 시절에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던 여인들(루카 8,2-3)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들 모두에게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명예가 주어져야 마땅합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부터 이 여인들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모여(사도 1,14) 사도들이 주축이 된 초대교회의 공동생활과 복음선포활동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드러나지 않게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숨은 주역들이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역할을 수행한 여인들은 열두 제자 출신 사도들에게서만이 아니라 별도로 사도로 부르심 받아 돋보이는 선교활동을 수행한 바오로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했습니다(로마 16장). 사도 바오로 역시 20여 년 가까이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 등 로마 제국의 드넓은 영토에 복음을 전하러 세 차례나 선교여행을 하고 곳곳에 신앙 공동체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활의 증인역을 자처한 여인들의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오로에게 20여년 동안 내내 한결같이 돈독한 도움을 준 여인은 필리피에서 만난 리디아였을 것입니다(사도 16,14-15; 필리 1,5; 4,15).
오늘 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삼천 명 가량 되는 유다인 군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 부활을 증언하고 나서 세례를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초대교회를 활성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드러나지 않게 예수 부활의 증인이자 사도를 위한 사도의 역할을 수행한 이 여인들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놀라운 변화의 단초가 되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뵈온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전한 한 마디 증언이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보편교회의 역사 2천 년을 돌이켜 보아도, “주님을 뵈온” 여성들의 역할은 지대하였습니다. 성경에서도 성전에서도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그러하고, 특히 한국교회의 지난 2백여 년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그러합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가부장의 역할이 기록상 두드러지게 보이지만 가모장의 역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가정이 존속할 수도 없듯이, 교회에서도 그러합니다. 박해시대 교우촌에서도 “주님을 뵈온” 여성들의 역할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앞장서서 치명한 경우도 있었지만, 가장이나 아들들이 치명한 경우에 남은 자기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심지어 부모가 모두 치명한 경우에 그들의 자녀들까지 거두고 돌보는 역할은 죄다 “주님을 뵈온” 여성들의 몫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의 대표로서 우리는 강완숙 골롬바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강 골롬바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히기도 했고, 1794년 말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주 신부를 물심양면으로 정성껏 보필하였습니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함부로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을 이용하여, 주 신부를 자신의 집 안에 숨겨 두고 6년 동안 교우들을 모아 성사생활을 하게 하면서 자신은 여회장으로 여성 교우들을 이끌었습니다. 천진암 강학회 선비들이 시작한 한국교회는 이벽과 동료 선비들의 활약으로 1794년까지 4천 명까지 늘어났는데, 주 야고보 신부와 강 골롬바의 이러한 활약으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1만여 명에 달하는 신자들로 교세가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강 골롬바 외에도, 동정녀 공동체 회장을 맡아 수많은 동정녀들을 지도하며 가르쳤던 윤점혜 아가다, 맏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사제가 되도록 봉헌하고 교우촌 회장을 맡았던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함께 교우들을 돕다가 세 아들을 남기고 치명한 이성례 마리아, 철저한 애긍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송 루치아와 유 마리아 등 “주님을 뵈온” 여인들은 희생과 순교와 애덕의 영성으로 박해시대 교우촌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밖에, 황사영 알렉산델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관비로 신분이 격하되어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갔지만, 치명을 하거나 전교활동을 할 수는 없었어도 뛰어난 애덕을 증거한 덕분에 지금까지도 제주에서 공경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뵈온” 수많은 마리아들이 교회를 뒷받침하고 돌보며 지켜왔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마리아들의 사도직은 그러할 것입니다.
누구를 찾고 있느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마리아가 혼자 무덤에 남아 울고 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도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리아가 이미 들여다본 무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것은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있는 천사들을 만난다.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고 묻는다.(13절)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고 답하였다.
그리고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 하였다. 마리아의 눈은 닫혀 있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리아야!”(16절) 이름을 부르신다. 처음에는 여인이라고 부르시고, 다음에는 이름을 부르셨다. ‘너를 알아보는 이를 알아보아라.’라는 말씀이다. 마리아는 “라뿌니!”(16절) 즉 ‘스승님’으로 알아본다. 그분은 마리아가 지금까지 찾고 있던 분인 동시에 마리아가 당신을 찾도록 내적으로 인도하신 분이다. 마리아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17절) 말씀하신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17절) 이 말씀은 우리와 같이 모든 지체로 만들어지신 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분, 죽음 이후에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그 건너가심의 첫 열매를 당신 안에 지니고 계신 인간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가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결국 그분이 계시는 곳에 그분의 삶들도 있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 주시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 그리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였다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으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부활절의 삶이 이러한 삶이 되어 참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새신부 때 본당 관할 구역 내에 은퇴 신부님이 사셨습니다. 하루는 제게 “신부는 너무 욕을 안 먹어서 탈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그 신부님은 사제가 복음과 교회의 정신을 실현하려고 애쓰고 사는지. 아니면 혹여 신자들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춰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를 표명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37)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받고는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38-39절)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유다인을 타이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40절)
사도행전의 자자는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고 전합니다.
가끔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비결이 혹시 예수님의 말씀이나 교회의 정신을 따르기보다 일반인들의 문화 전통과 자본주의 경제 사회 질서에 맞춰진 사회의 처세를 따른 결과인지. 아니면, 인격적으로 원만하면서도,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정신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다른 이에게 폐해를 끼치지 않고, 내 희생과 양보로 다른 이에게 기여함으로써, 형제자매들이 나를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을 찬미하게 되어가고 있는지 되새겨 봅니다.
내가 있는 곳에 현존하시는 주님.<요한20/11-18> 4/19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진실과 사랑의 주님은 외로움 슬픔 고통이 있는 곳에 현존하시며 외로움을 달려 주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고통을 가볍게 해주시려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찾기만 하면 우리 옆, 앞, 뒤, 위에 함께 계십니다.
오늘 무덤을 찾아 주님을 마나지 못한 마리아가 동산을 해매며 슬퍼 할 때 나타나시어 “ 마리아야 ” 부르시는 소리에 “라뿌니!” 스승님 하고 돌아보며 주님을 붙으려고 하니 잡지 말라고 하시었습니다. 아름다운 장면은 주님의 부활의 기쁨을 영적뿐 아니라 현실 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로움 슬픔 고통을 해결하시러 부활하시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죽음의 고통 까지도 영원한 생명으로 확신을 주시는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믿고 힘이들면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러나 기도가 무엇이지 잘 모르면 하다가 중하거나 절망을 느낍니다.
평화 방송에서 아나운서와 교황님의 대담 중에 “ 교황님 기도를 무엇이라 말하면 제일 적합한 말입니까?” 하니 아주 간단히 말씀하시면서 누구나 쉽게 기도에 적응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아빠 엄마를 부릅니다. 믿음과 신뢰심을 가지고 그리고 먹을 것 마실 것 자기가 필요한 것 청하며 해결합니다. 아빠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알고 있습니다. 이같이 서로 믿음을 가진 소통입니다.
어제 어떤 분이 자기 시어머니가 먼데서 돌아 가섰는데 주음을 보지 못해서 안타가워 하는 말을 전하기에 저는이런 글을 써 주었습니다. “ 돌아가신 분은 죽지 않고 당신 안에 살아계십니다. 사랑하세요. 하고 기도한다.” 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에 어는 가정의 장례미사 때 이런 강론을 해드렸습니다. “ 전 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아가야 만났지만 지금은 당신이 있는 곳에 살아 계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거기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 우리는 주님이 어디계신가?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데 하고 주님을 찾아 해매지만 두손 합창하고 ‘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고 부르면 하느님 아버지는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며 닥아 오십니다. 왜 나를 찾았느냐? 하시며 거룩함을 주시고 당신의 나라에 살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주의 기도를 진심과 사랑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주의 기도 안에 청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십니다.
급한 사고가 일어나면 119를 부르듯이 우리는 어둠속에 갈길을 모르고 길을 잃거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멍청하게 살지 말고 주님 부르세요. 자비로운 아버지를 부르세요. 응답해주십니다.
하느님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이미 세상에오시어 하느님 모습 보여주시고 각자에게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보네 주셨지 않습니까? 찾아 만나고 이야기 하세요 저는 불편 한일이 있으며 주님 보고만 있지 말고 손잡아 주세요. 소리 내어 기도하면 응답이 옵니다. 믿음은 바로 당신이 있는 곳에 언제나 살아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나서 모든 어려움이 살아지도록 기도합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함승수 신부님
1965년 미국 아이오와주의 '매디슨 카운티'라는 작은 마을, 교사 출신인 프란체스카는 평범한 농부의 아내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써 무료하고 권태로운 전업주부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두 아이가 소 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해 4일간 여행을 떠나고, 프란체스카는 홀로 집에 남겨집니다. 그 때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기자 로버트가 그 마을에 있는 다리를 촬영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우연히 프란체스카를 만나게 되고 그들은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서로의 온 마음을 다 하여 진실한 사랑을 나눕니다. 그렇게 꿈 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고 가족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자 어떤 선택을 해야할 지 몰라 고민하고 불안해하던 프란체스카에게 로버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세상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번만 오는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거요."
자신과 함께 떠나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하며 살자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프란체스카는 괴롭고도 긴 고민 끝에 가족들 곁에 남기로 결정하고 이런 말로 로버트에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당신은 낡은 배낭이고, 해리라는 이름의 트럭이고, 아시아까지 날아가는 제트 여객기예요.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구요. 당신 말처럼, 당신의 진화 가지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면, 나는 당신이 빠른 속도로 그 골목을 치고 나가길 바라요."
프란체스카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뜨거운 열정을 냉철한 이성의 차가움으로 진정시켰습니다. 만약 자신이 인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가족을 버리고 로버트를 붙잡는다면, 그와 사랑의 도피를 하는 길을 선택한다면 자신만 비난받지는 않을 것임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로버트 역시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랑 때문에 한 가정을 파국으로 몰고갔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은 유명한 사진작가라는 그의 커리어에도 분명히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사랑에 머물고 싶은 인간적인 욕망을 붙잡는 대신, 각자가 가족이라는 이름의, 꿈이라는 이름의 더 고귀한 가치를 찾아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상대방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길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리고 두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가슴 절절한 그 사랑을 마음 속 깊이 묻어두고 간직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는 너무나 반갑고 놀라운 마음에, 다시는 예수님을 잃고 싶지 않은 간절함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분을 붙잡으려는 행동을 취합니다. 그만큼 예수님께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기적적으로 다시 만난 그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붙잡으려했던 그녀의 행동은 예수님을 독점하고픈, 그분 곁에 머물며 안주하고픈 인간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는 말씀으로 그녀를 진정시키십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마저 끝내셔야 할 사명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인간적인 욕심으로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무사히 마치실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 그분을 도와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주 예수님을 붙잡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나만의 주님"으로 구속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소원만 들어주시는 '자판기'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할 중대한 사명을 띄고 계신 분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을 잘 수행하실 수 있도록 그분을 자유롭게 놓아드려야 합니다. 내 기도만 들어주시라고 그분을 구속하려 들지 말고, "당신 뜻을 이루시라고" 그분을 응원하고 최선을 다해 그분을 도와드려야 합니다. 그 구원 사명이 완수되어야만 나에게도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길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신다.
"마리아야!"
부르시며
우리를
돌아서게 하신다.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난다.
모두 다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다.
참된 사랑이
바꾸어 놓은
새롭고 새로운
부활의 모습이다.
서로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되는
빛나는
부활의 모습이다.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
깨닫게하는
참된 사랑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다시금
서로의
사랑임을
부활로
보여주신다.
우리의 울음과
눈물 또한
사랑을
향해있다
더 깊이
사랑하였기에
더더욱
간절한 것이다.
이 슬픔을
걷어내는
부활의
참기쁨이다.
같은 분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신다.
부활은
단정과 규정을
뛰어넘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부활은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어지는
것이 된다.
신앙은
보고 믿는
뜨거운
체험이다.
우리 뒤에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다시 새롭게
보는 봄(春)
연두와 초록의
순수한
부활이다.
시각과 관점을
바꾸면 이미
와 있는
새로운
부활이다.
새롭게
새롭게
만나는
부활의 기쁜
소식조차
붙들지 않는다.
우리의
하느님을 향해
올라가는
사랑의 새로운
소식이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 18)
새롭게
만나고
새롭게
보는 사랑이
부활이다.
우연히 어렸을 때 봤던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고등학교 때에 시험 끝나고 학교에서 단체로 극장에 가서 봤던 영화였습니다. 당시에 너무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어서 열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타임머신을 타고서 미래의 시간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래의 ‘나’를 만나게 되지요.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크게 실망합니다. 나이 많은 미래의 나는 젊은 현재의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여정 안에 수많은 ‘나’가 있습니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서 과거나 미래에 간다면 그 시간의 저 역시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황혼의 시간을 사는 미래의 ‘나’는 지금 중년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아주 어린 과거의 ‘나’ 역시 아저씨인 ‘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모두 같은 ‘나’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과거와 미래의 ‘나’ 모두가 지금의 ‘나’와 연관되어있지만, 너무 큰 차이로 자신조차도 인정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나’의 모습을 모두 인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는 모습은 전혀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으면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무덤까지도 찾아갔겠습니까? 그 사랑 때문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문제는 그렇게 사랑한다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부활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모두 같은 ‘나’이지만, 과거와 미래의 ‘나’와는 너무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직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는 육화된 예수님만 기억하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냥 그곳에서 일하는 정원지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라뿌니!”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다른 모습도 알아보게 됩니다.
우리 삶 안에서 주님께서는 여러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어떤 모습이든 다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아이리스 머독).
판단보다는 이해를...
2년 전일까요? 강의 때문에 부산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KTX 고속열차를 타고서 부산역에 도착한 뒤에, 전철을 타고 강의할 성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중년의 형제님이 전철 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습니다. 전화 통화를 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인상을 쓸 정도로 큰 목소리로 하는 것입니다. 또 자리에 앉아 있을 때에도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옆의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였고, 큰 목소리를 가지고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지 않을까 싶어서 이분 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한 임산부가 전철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아이가 임산부의 손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을 생각했지요.
‘저 아저씨는 절대로 자리 양보를 하지 않을 거야.’
저의 예상은 틀렸습니다. 이 중년의 형제님은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놀아주면서 임산부인 엄마가 잠시 동안이라도 쉴 수 있게 해줬습니다.
이때 이 형제님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여전히 예의 없는 못된 사람으로 보였을까요?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사랑 많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도 한 가지 모습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남을 섣부르게 판단하기보다는 남에 대한 이해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 결국 각자의 복음을 매일 새롭게 써내려가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여사도이자 애제자였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보여준 행동의 몇가지 측면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초의 반응은 몰이해요 착각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부활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마음 속은 그저 사별한 스승님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만으로 가득했습니다.
부활하신 스승님께서 바로 앞에 등장하셔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질문을 던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승님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스승님을 묘지 관리인으로 착각하고, 혹시 그분의 시신을 다른 무덤으로 모셨는지 물었습니다.
“마리아야!” 마침내 스승님께서 세상 다정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자 마침내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분을 알아뵐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야!” 이 얼마나 은혜롭고 황홀한 부르심입니까? 되살아나신 주님께서 살아생전 당신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친히 내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말입니다.
마리아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의 정으로 목이 메었을 것입니다. 나를 일곱마귀의 횡포와 죽음으로부터 되살려주신 주님, 내 삶의 의미요 전부이신 주님, 그분과 영영 작별한 줄 알았었는데, 그분께서 기적처럼 되살아나셔서, 내 앞에 나타나시고, 내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을 것입니다.
십자가 형을 통해 주님과의 끔찍한 사별을 맛보았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순간 자동으로 주님 발치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 다시는 스승님을 놓치지 않으리라.’는 마음에서 그분의 두 발을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안쓰러우면서도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한 가지 사명을 건네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복음 20장 17절)
부활하신 주님께서 매일 우리네 구체적인 일상사 안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으니 오늘 우리 개별 그리스도인 한명 한명 역시 예수님 부활 사건의 목격 증인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생활로써 이토록 은혜로운 소식,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 결국 각자의 복음을 매일 매일 새롭게 써내려갈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시기 전례 안에서 특징적인 측면이 한 가지 있다면 부활초를 켜는 것입니다. 부활 시기 동안 모든 본당 대성전에는 독서대와 제대 사이에 놓여있는 큰 초가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야 미사 때 사제들은 부활초에 분향하며 예를 표하는데, 이는 부활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시기 동안 우리 역시 매일 매일 우리 영혼의 심지에도 불을 붙여야겠습니다. 주님 섭리의 손길에 힘입어 지천으로 활짝 피어나고 있는 꽃들처럼 우리의 얼굴도 화사하게 피어나야겠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 역시 부활하신 주님처럼 성령의 불꽃으로 활활 타올라야겠습니다.
나는 언제 주님을 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수준이 되어야 주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주 오래전 어떤 남자 둘이 원인 모를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갑자기 깨어났는데, 두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도저히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그냥 하루 일해서 하루 벌며 술과 여자로 방탕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술에 취해 더러운 늪에 빠져 오물이 목까지 차올라왔습니다.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그 사람을 구해주었습니다.
어리둥절해서 하고 있을 때 많은 하인이 와서 자신을 구해준 이를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혀 줍니다. 그런데 왕과 같은 옷차림이었습니다. 매우 귀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그 사람이 죽다 살아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동생아!”라고 합니다. 이름을 어떻게 알았고, 왜 자신을 형제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신하들도 다 그렇다고 말해주는 눈치입니다. 그 사람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며 그저 자신을 구해준 분을 붙잡고 감사의 말을 전하려 할 때, 그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냐, 지금 나를 붙잡지는 말아줘. 동생을 찾았다는 소식을 빨리 아버지에게 전해야겠다. 금방 다시 돌아올게. 내 아버지이며, 너의 아버지가 저기 계시는데 동생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는지 알아? 나 빨리 가서 아버지 먼저 만나고 올게. 그리고 다른 동생도 함께 있지? 그 동생에게 내 아버지이며 너희 아버지께 내가 먼저 갔다고 알려줘, 알았지?”라고 말해줍니다. 왕이 향하는 곳을 보니 그분이 만나러 가는 아버지는 누가 봐도 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사람의 정체는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누가 봐도 이 사람도 왕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지금처럼 방탕하게 살 필요는 없는 존재임이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을 형제라고 부르고 아버지가 같다고 말하는 왕자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자신을 구해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임금을 아버지로 믿게 된다면 이전의 죄의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요? 혹은 그 죄에서 벗어나게 해준 맏형을 만났음을 형제에게 전해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가 이런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죄 속에 있었다면 ‘우리가 이런 죄 속에서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이전의 죄 속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느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 유튜브 채널에 서울 교구 어떤 여자 신자분이 남긴 댓글 내용입니다.
이 자매는 억압되고 불화가 잦은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공부만 해야 하는 억압된 환경에서 소아 때부터 만성 불안증,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자살 기도까지 했었습니다. 겉으로는 성당을 다니면서도 속은 어둠과 절망이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20대 때 청년 꾸르실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꾸르실료에서 부모님이 자신을 많이 사랑해주신다는 것과 또 주위 청년들의 사랑, 더군다나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는 하늘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어둠뿐이던 삶에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프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무속인들이 걸리는 신병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아프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려움으로 고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물이나 성모님 이콘이 무서워졌고 알 수 없는 예지력 같은 것도 생겼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안에 있던 어둠의 세력이 청년 꾸르실료를 통해 받은 사랑과 은총 때문에 더는 숨어있지 못하고 자신이 문 것을 놓지 않으려고 발악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당시 은퇴 구마 신부님에 의해 구마 예식을 하였습니다. 마치 검은 사제들에 나오는 것과 같이 엄청난 증오심과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구마 예식은 3시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그 자매가 기억하는 것은 이 싸움을 할 때 사제가 “십자가를 바라보세요!”라고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귀는 “이 여자를 죽여야 이 집안이 망한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결국 “꽥!”하는 소리와 함께 나갔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그 어둠의 시절에 주일학교 피정을 하러 가서 “주님을 알게 될 때까지 절대 죽지만 말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것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미사, 성체조배, 기도 안에 머물며 한 가정의 아내요 어머니로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와 위 서울 교구 자매는 예수님을 만난 것에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참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나의 삶의 기준이 결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느님이면 하느님 자녀의 품위에 맞지 않는 삶은 어색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을 수 있는 믿음은 사랑과 희생에 의해서만 생깁니다. 예수님은 7마귀를 지녔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참 아버지를 믿게 해주시며 죄에서 해방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해방된 여인은 다른 형제들에게도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전에 인간으로서 짓는 죄들을 아직도 짓고 있고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면 아직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지금의 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체취가 묻어있는 무덤에 머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일 수 있고, 성경, 혹은 위 자매처럼 피정이나, 책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에 머물다 보면 천사를 만나게 되고 예수님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전에 사로잡혀 있던 죄에서 해방되어 점점 하느님 자녀의 품위를 갖춘 삶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모두 죄에 묶여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만 그 죄의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형제들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 선물로 자전거를 받았습니다. 자전거를 처음 탄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입니다. 자전거를 빌려서 타곤 했습니다. 그 뒤로 자전거를 탈 기회가 적었는데 1999년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도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논두렁도, 강가의 길도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고,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보았습니다. 본당을 떠나 사목국으로 오면서 자전거를 탈 기회가 없었습니다. 20년 만에 다시 자전거를 타게 되었습니다. 함께 지내는 신부님들 대부분이 자전거가 있고, 자전거로 뉴욕을 쉽게 다니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선물 받은 기념으로 신부님들과 부르클린 브리지까지 다녀왔습니다. 25킬로미터입니다. 자전거로는 먼 길은 아니었지만 제게는 길게 느껴진 여정이었습니다. 사실 본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앞에 가는 신부님의 뒷모습만 보고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자주 다니다 보면 예전에 본 것처럼 하늘의 새도 보고, 바람을 느끼고, 자유의 여신상도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전에 베드로 사도는 나약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물위를 걷다가 두려움을 느꼈고,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면서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하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베드는 두려움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절망에 빠지고, 어둠 속으로 빠졌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전에 세상의 것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 사도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당당했고, 두려움도 없었고,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밤에만 신자가 삼천 명 가량 늘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는 많은 순교자가 있습니다. 배움이 부족했던 백정도 주님을 증거하며 순교하였습니다. 아직 어린 소년도 기꺼이 목숨을 바쳐서 순교하였습니다. 기력이 약한 노인도 순교하였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는 지식도, 나이도, 건강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성령을 받으면 주님께서는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께서 ‘마리아’라고 부르셨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신앙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즐겨했던 오락, 취미, 만남이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선교 그리고 나눔의 삶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제 내 삶의 우선순위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도록 결심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을 끊어 버릴 수 있다면, 주님 부활의 의미를, 주님 부활의 기쁨을 보다 진실 되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과 주님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누구를 찾고 있느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마리아가 혼자 무덤에 남아 울고 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도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리아가 이미 들여다본 무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것은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있는 천사들을 만난다.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고 묻는다.(13절)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고 답하였다.
그리고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 하였다. 마리아의 눈은 닫혀 있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리아야!”(16절) 이름을 부르신다. 처음에는 여인이라고 부르시고, 다음에는 이름을 부르셨다. ‘너를 알아보는 이를 알아보아라.’라는 말씀이다. 마리아는 “라뿌니!”(16절) 즉 ‘스승님’으로 알아본다. 그분은 마리아가 지금까지 찾고 있던 분인 동시에 마리아가 당신을 찾도록 내적으로 인도하신 분이다. 마리아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17절) 말씀하신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17절) 이 말씀은 우리와 같이 모든 지체로 만들어지신 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분, 죽음 이후에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그 건너가심의 첫 열매를 당신 안에 지니고 계신 인간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가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결국 그분이 계시는 곳에 그분의 삶들도 있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 주시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 그리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였다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으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부활절의 삶이 이러한 삶이 되어 참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2021. 4. 6. 화)(요한 20,11-18)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1-13)”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 지켜보면서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는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지는 바람에 더 큰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혔습니다. 마리아가 천사들을 보면서 놀라지도 않았던 것은 그 충격과 슬픔이 너무 커서 그랬을 것입니다.
여기서 “여인아, 왜 우느냐?” 라는 천사의 말에는 “울지 마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천사는 “울지 마라.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으니.”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마르 16,6).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천사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묵시록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마리아는 큰 슬픔 속에서 울면서도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하느님 나라를 간절하게 희망했을 것입니다. 그 희망은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희망을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 주신 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은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요한 20,14-15).”
여기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을, “마리아야, 왜 나를 찾으면서 울고 있느냐? 내가 여기에 있는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이 말씀에도 “울지 마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음성도 알아듣지 못했을까?
그것은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시신만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찾는 예수님은 ‘살아 계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돌아가신 예수님’ 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눈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의 음성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 슬프게 울고 있는 동안에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 너머에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있다.” 같은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별’의 슬픔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이니, 믿음이 부족하다고 탓할 수는 없습니다.(슬픈 건 슬픈 거고, 아픈 건 아픈 겁니다.)
그럴 때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은 함께 슬퍼해 주는 일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죽음에 대해서 묵상하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더욱 키우고 희망하는 일은, 시간이 좀 지나서 안정을 되찾은 다음에 하면 됩니다.
(너무 슬퍼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믿음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고 꾸짖는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않고, 상처만 주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정말로 ‘사랑 없는’ 행동입니다. 사랑은 함께 울어주는 일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마리아를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6-18).”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은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눈과 귀를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선택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 사도들이 아니고 마리아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과 같은 말씀이 요한복음 14장에 있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또 더 깊이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편애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 쪽에서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시키신 일은, 당신이 부활하셨다는 소식과 곧 승천 하신다는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뜻에 따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나를 붙들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곧 올라갈 것이라고 내 형제들(사도들)에게 가서 전하여라.”>
마리아는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꼭 붙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임무를 주시자마자 마리아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곧바로 예수님을 떠나서 사도들에게로 갔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입니다.(겉으로만 보면 ‘일’ 때문에 예수님을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떠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마리아를 무덤에 남아 있게 한 것은 사랑이다.
-대 그레고리우스-
그 고을에서 죄인으로 살던(루카 7,37 참조) 마리아 막달레나는 진리이신 분을 사랑했고 그래서 자기 눈물로 사악함의 얼룩을 닦아 냈습니다. 죄인일 때 그녀는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그뒤로는 견딜 수 없는 사랑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우리는 큰 사링의 힘으로 불타오르던 이 여인의 마음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입니다 그녀는 제지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도 그곳을 뜨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발견하지 못한 그분을 사방으로 찾있습니다 ... 사랑하는 시람이라면 한 번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시랑의 힘은 더욱 열심히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만듭니다. 마리아는 처음에 그분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발견한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더욱 커지면서 그 갈망은 자기가 발견한 분을 붙잡았습니다. ...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거룩한 욕망은 바라는 일이 미루어질수록 더욱 커집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갈망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이미 들여다 본 무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것은 이런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배가된 그 갈망의 결과 이 여인이 무엇을 얻었습니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마리아는 무덤을 찾았다가 주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당혹감과 제자 중에 베드로와 요한에게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라고 말합니다.
두 제자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황급히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은 그곳에 도착해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대로 무덤에는 주님의 시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들은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주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대해 슬퍼하며 웁니다.
그녀가 울면서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 보니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자리 머리 맡에 그리고 발치에 각각 천사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왜 우은지에 대해서 물어 봅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대답하지요.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
그리고 뒤에 마리아는 눈을 돌려 자신의 뒤에 서 계시는 분을 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지만 마리아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분도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라고 물어보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알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는 그제야 그녀는 주님을 알아보며 ‘스승님’이라는 뜻인 “라뿌니!”라고 부르지요.
존경하는 분들에게 인사하는 당시의 인사법은 상대 앞에 엎드려 발을 잡고 절을 하는 관습을 마태오는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28,9)
요한 복음 본문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어떻게 인사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 17)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마태오가 전한 인사 관습법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에 마리아도 그리고 제자들도 할 말을 잃고 서성였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서 비록 울기는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성이던 마리아가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구약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아버지이고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하여 구약의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다정하신 하느님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 있던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18절)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러나 제자들은 후에 몇 차례 주님을 뵙고 나서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활 후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도 주님과 친해져야 참으로 주님부활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정신없이 달려갔을 마리아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마리아는 무덤돌문 열려있고 안에 예수님 안계시니 황당해 울었겠지요.
이런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며 접근하셨겠고요.
예수님께 예수님 시신 모셔가겠다고 하자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지요.
재빨리 알아차린 마리아 예수님께 스승님하고 부르며 부활확인 하였고.
이때에 예수님은 나와 너희 아버지 나와 너희 하느님께 간다고 하셨죠.
아마 들었던 나르드향유 던지고 제자들에게 정신없이 달려갔을 겁니다.
마리아의 심경급변은! 동산지기->예수님, 죽음->부활, 제자알림이었죠.
성경의 부활사건 읽었을 때 우린 어떤 심경변화였었는지 기억해봅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야기하십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 20, 15)빈 무덤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지만 마리아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녀가 경험한 바로는, 예수님이 사흘 전에 처참히 죽임을 당하셨고, 바로 이 곳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니 시신은 반드시 여기에 남아 있어야 했지요.
"모셔 가겠습니다."때로는 사랑이 사람을 대책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가냘픈 여인이 성인 남성의 시신을 모셔가겠다니요. 적당한 무덤자리라도 봐 두었단 말일까요? 게다가 예수님은 사형수의 신분이니 로마의 행정 절차로 보나 종교 기득권층의 적대감으로 보나 그리 쉬운 일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어처구니 없는 마리아의 말에서 참으로 진한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 시신마저 잃은 공허함이 얼마나 애틋하고 절절하면 저리 말할까 싶지요. 성토요일까지의 우리 마음도 그랬으니까요.
"마리아야!"(요한 20,16)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살아 생전에 그녀를 부르시던 그 톤과 온도였을 테지요. 아마도, 아니 분명히,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실 때는 듣는 이에게 저마다의 울림이 있었을 겁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요한 10,3) 동행하니까요.
"마리아야!"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시는 순간, 마리아 안에서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육을 지니신 인간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 인격을 흠모하던 마리아가 지금 그분 육신의 흔적을 찾는 건 너무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에게 새로운 영혼의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익숙했던 이름을 새로이 불러 주심으로써!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마리아의 사랑은 육에서 영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지금 그분을 붙잡는 건, 반가움과 기쁨, 안도감 등 사랑의 다른 표현이 되겠지만 영의 사랑은 그 차원을 뛰어 넘어야 하니까요.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8)마리아는 실제로, 결과적으로, 진실한 바람대로 예수님을 "모셔 갔습니다!" 시신을 모셔 가겠다고 결심한 그녀가 예수님의 현존과 뜻을 모셔 간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메시지를 생생하게 제자들에게 전한 것이니 그렇습니다.
"마리아야"예수님께서 부르신 순간 마리아는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건너갑니다. 육의 공허와 아쉬움, 슬픔과 절망에서 영의 충만함과 기쁨, 희망에로 들어갔지요. 그녀는 더 이상 스승의 핏기 없는 육신을 붙들고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으로 예수님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모셔가 전하는 진정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가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믿는 성경에 근거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고 선포합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메시아를 자기들 손으로 처단한 사실에 당황하고 마음 아파하며 어찌 해야 할지 묻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회개와 세례, 죄의 용서로써 하느님 백성은 성령을 받을 준비를 갖춥니다. 성자 예수님은 떠나가셨지만 이제 성령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시며 성부의 사랑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깨워 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이렇게 인류는 영의 존재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족보와 율법에 의거한 육의 삶에서 회개와 세례를 통한 영의 삶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빈 무덤가에서 찾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지요. 육의 프레임 안에 그분을 가두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분이 부르실 때 흔쾌히 응답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야!" "요셉아!" "바오로야!" 혹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벗님의 이름을 부르며 느닷없이 나타나시더라도 그분을 영의 사랑으로 알아볼 수 있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도 주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형제가 형제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처럼
살 수 없습니다
난 그저 사람이기에
당신처럼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난 그저 사람이기에
당신처럼
부활할 수 없습니다
난 그저 사람이기에
아니란다
그렇지 않단다
결코 그렇지 않단다
너는 할 수 있단다
너는 해야 한단다
너는 나의 형제이기에
“형제여! 왜 울고 있느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얼마 전 지인이 유명을 달리했다. 뇌출혈이 있었고 세상을 떠났다. 활짝 웃음지어 주시던 건강한 분이, 믿음으로 사랑을 사셨던 선하신 분이 말이다. 모두들 그분이 있었던 그 자리에 지금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삭히고 있다. 내가 빵가게에 들르면 그분은 카운터에서 나를 반가이 맞이해 주셨으니 나 또한 죽음이 아닐꺼야, 잘못된 소식일꺼야 하며 빵 집을 서성인 것은 나만이 아니다.
죽음은 냉혹한 현실임에 틀림없다. 그분은 우리 곁을 떠났고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우리가 슬픈데 가족들과 남편 분은 얼마나 슬프고 당혹스러울까? 자녀들은 어머니를 잃고,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오늘도 당혹감에 마음 추스리시기 쉽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떠난 분을 이방, 저방, 늘 있던 일터에서 찾고 부르기라도 하면 금방 앞에 나타나 “왜요? 나 여기 있어요” 그렇게 있어야할 분이었다. 집 안에 없으면 성당과 빵집에서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분이 정말로 안 보인다. 죽음이다.
자녀가 남편이 절규한다. “누가 제 엄마를, 누가 제 아내를 데려 갔습니다. 그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떠난 님에 대한 애절함이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곳곳에 찾아 나서는 유가족의 한없는 슬픔을 기쁨으로 꽉 채워줄 수는 없나? 나는 그 슬픔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본다.
오늘 복음(요한20,11-18)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 누가 그분을, 나의 라뿌니(스승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나? 미친듯 찾았는데 그분께서 묻힌 무덤에 시신까지 계시지 않았음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마리아의 예수님께 대한 상실감은 폭등했을 것이다. 그때의 마리아 마음은 또 한 번 좌절이고 절망이 아닐 수 없다. 묘지 정원지기인 줄만 알았던 그가 마리아에게 물어 본다. “여인아, 왜 우느냐?”(요한20,13) 마리아는 그에게 묻는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20,15).
상심이 큰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고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다. ‘라뿌니’ 스승님 하고 부르며 마리아의 좌절과 절망은 기쁨으로 바뀐다.
다시 지인에게로 이야기를 옮겨 본다. 어떻게 하면 이 형제를 절망에서 구출할 수 있을까? 부활 이야기를 만들 생각을 하다가 나는 남편 되시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얼마나 슬프신가요? 마음을 어떻게 추스리고 계신가요?” “우리 만나서 이야기 해요!”
나는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사이였다. 다만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그의 아내가 빵집에서 일하고 있을 때 그분도 빵집에 있었고 아내의 소개로 그분은 나에게 다가오며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이야기 꺼리를 꺼낼 수 있는 공통분모도 없으면서 나는 단지 형제요 자매라는 이유 하나로 부활 이야기를 만들어 가려고 만나자고 한 것이다. 믿음 안에 한 형제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이야기가 잘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저 , 00신부입니다.” 그분은 내 전화를 받고 나를 즉시 알아채고 ‘신부님’하고 불렀다. 첫 만남이지만 이야기 나눌 공통분모가 컷었나 보다. 문제의 해결 답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서로에게서 생겨났다. ‘신부님, 우리 만나요’ ‘네 그렇게 하지요’
죽음에서 우리는 또 생명을 보아야 한다.
믿는이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내재되어 있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가기 때문이다. 만남은 협력으로 소통하게 만들고 그래서 만남은 상생으로 부활의 꽃으로 피어 나리라. 만남의 약속 시간을 서로가 마련했으니 삶에 생기가 돈다. 부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서로가 좋은 선물로 주고 받을 수 있으리라. 천주께 감사합니다.
내가 알던 그분
김준한 빈첸시오 신부님
오랜 시간 변치 않는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고백록』입니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오래고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 풀어내기엔 하룻밤이 모자란 사연의 실타래를 만들어왔지만 그 모든 것이 이미 생애 첫 자리에 자리하고 있던 하느님의 자비 앞에서는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결국 회한의 눈물을 흘립니다. 깨달음의 순간은 말이 아니라 마음에서 울리는 메아리로 하느님 신비를 보게 합니다.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오직 한 마디, “마리아야!”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더 이상 말이 아닙니다. 소리로 마리아의 귀에 가닿았지만 그것은 소리 이전에 예수님 자신입니다. 지난날 마리아가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 회심의 길로 이끌었던 그분의 놀라운 현존 그 자체였습니다. 참으로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더이상 말이 필요 없는 사람, 그저 얼굴에 퍼지는 미소가 모든 것을 대신해주는 사람, 그저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힘이 되는 사람. 그렇게 우리는 주님을 이미 뵈었습니다.
개안開眼의 여정 -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에 대한 답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개안의 여정-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참 많이 사용했던 강론 제목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마음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주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됩니다.
하여 우리 삶의 여정은 눈이 열려가면서 주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개안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도대체 이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지 않고는 주님은 물론 나를 알 길이 없습니다. 무지의 어둠, 무지의 눈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주 인용했던 행복기도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바로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야 할 주님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고 나를 압니다. 개안의 기쁨은 그대로 파스카의 기쁨이요 이런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흡사 활짝 만개한 온갖 다양한 파스카의 봄꽃들이 주님을 만나 활짝 열린 눈들을 상징하는 듯 참 찬란하고 황홀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사도들의 사도’라 칭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이고 제1독서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주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요, 이 두분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늘 읽을 때 마다 새로운 감동입니다. 만남에 당연히 전제되는 바 마리아의 사랑입니다. 당신을 찾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에 감동하신 주님께서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누구를 찾느냐?”
주님의 물음에 마리아는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문득 연상되는 바 에덴동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에덴동산의 정원지기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 에덴동산에 정원지기로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에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는 마리아입니다. 아마 이런 주님과의 만남의 추억은 마리아의 삶에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당부입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하여라.”
이제 믿는 이들 우리 모두는 부활하신 주님의 형제들이 되었음을 뜻하며 부활하신 주님은 하느님 곁에 계신 초월자超越者시며 동시에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신 내재자內在者이심을 깨닫습니다. 사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 중심에 자리잡고 계시는 초월자超越者이자 내재자內在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제자들에게 보고하는 마리아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린 마리아는 무지의 어둠, 무지의 눈멈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과의 만남으로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무지에서 벗어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주님을 만나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눈이 열린 이들은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화두와 같은 물음에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 정답을 주십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된 삼천 명은 그대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무지에서 해방된 이들입니다. 이미 세례 받은 우리들이지만 여전히 회개를 통해 용서와 성령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개안의 여정에 성령 충만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사촌형의 장례식장에 문상갔을 때 영정사진 주변의 남은 유가족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아, 형이 떠나기전 주님을 믿어 가족들을 주님께 맡기고 떠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흡사 남은 가족들이 고아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평생 바르고 착하게 살다가 주님 부활 대축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주님은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과 함께 형도 부활시켜 주셨으리란 믿음도 듭니다.
사실 시골 초중고初中高의 동문인 사촌형은 사촌형제들 모임이 있을 때 마다 독신 수도사제인 저를 안타까워해 병원비에 보태 쓰라 40-50만원의 용돈을 슬며시 주머니에 넣어 주기도 한 인정 많은 분이었습니다.
주님과 만날 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주님을 알고 참 나를 알 수 있습니다. 한 두 번만 아니라 평생, 날마다, 주님을 만나 개안의 여정,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이니, 바로 우리의 삶은 날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함승수 신부님
집착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집착하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도,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애인을 사랑하는 것도 집착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집착이 무서운 이유는 항상 좋은 것들을 내세워 자신을 포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헌신과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나타나서는 상대방에게 그 대가를 요구하기에 무서운 것입니다.
자녀들을 구속하고 옭죄면서도 그게 다 사랑해서 그런거니 부모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 속에 자녀의 자유나 의견은 없습니다. 그저 부모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따라야 하는 ‘순종’이 대가로 요구될 뿐입니다. 자기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만 생각한다고,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거라고 주장하지만, 그런 사랑에서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은 중요치 않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이 잘못하는 것이고, 최선을 다해 사랑해준 나를 배신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대화를 할 때도 무조건 ‘내 생각’만이 옳습니다. 내 의견에 반대되는 상대방의 의견은 잘못된 것이고, 좋은 일을 하는데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이런 집착의 상태에서는 하느님의 뜻과 말씀도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가 하는 내 생각과 입장만 중요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나를 위해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더라도, 먼저 내 생각과 맞아야 하고 내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의미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말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하지만, 결국 내 맘대로, 내 뜻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자기 중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눈 앞에 두고도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한 것은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그녀가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당신을 온전히 바라보도록 이끄시기 위해 사랑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반가운 마음에 당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마리아가 귀찮거나 부담스러워서 밀어내신게 아닙니다. 당신을 ‘집착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초대입니다. 육신의 손으로 당신을 붙들어 구속하려고 하지 말고, 신앙의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따르라는 권고입니다. ‘내가 아는 예수님’, ‘내가 원하는 예수님’, ‘돌아가신 예수님’에 얽매여 있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부활신앙’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함승수 신부님
오순절에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두려움 없이 외칩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 말을 들은 군중은 베드로의 이 말을 듣고 괴로워하며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냐?’라는 질문을 베드로에게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38절)라고 말합니다.
그날 삼천 여명이 베드로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공관복음에서 그동안 주님의 말씀이 세 번이나 ‘ 수난과 죽음 그리고 사흘 후의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십니다.1)
그러나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제자들이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겠지만 막상 이 일이 일어나니까 그들은 흩어지고, 여인들이 주님의 빈 무덤에서 서성거립니다.2)
공관복음에서 여인들의 출현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을 출신의 마리아가3) 무덤에서 서성 거립니다.
그녀는 스승이신 주님의 시신을 안식일 때문에 서둘러 무덤에 장사지내고 유다인의 장례 절차를 밟을새도 없이 그냥 무덤에 주님의 시신을 모신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안식일 이튿날 동틀 무렵 향유를 준비해서 서둘러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돌은 굴려져 있고 주님의 시체도 없습니다. 그녀는 상심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요한과 베드로에게 알립니다.
두 제자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지만 그녀의 말대로 주님의 시신은 없고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사건은 그녀에게나 두 제자에게 실망만을 안겨주고 성경본문은 그 정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20,9-10)
여기서 그들이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실망의 상태로 주님의 부활이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요한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하여 다시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무덤에 다시 온 것입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실망으로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주님께서 직접 그녀에게 왜 울고 있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시체가 없어진 것이 속상해서 그녀는 미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을 정원지기로 잘못 알아봅니다.
그녀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주님에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 20,15)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마리아야!‘하고 부르십니다. 그녀는 즉시 주님을 알아 뵙고 히브리 말로 ’라뿌니‘하고 대답합니다.
“기쁨과 반가움에 있는 마리아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그녀는 단숨에 제자들에게 달려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면서 주님께서 자기에게 하셨던 말씀을 전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만 머물러 있어서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다는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을 뵙고도 처음에는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자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비록 그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지만 주님을 따르며 사랑하던 여인들, 사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까지 당신 제자들과 함께 지상에서 지내시면서 부활의 의미를 확실하게 새겨 주십니다.
사도들은 의혹과 두려움을 떨치고 사람들 앞에 확신을 갖고 스승의 부활을 알립니다.
주님께서는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삶으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우리 삶에서 주님 부활이 이미 시작되고 있는데도 우리는 아직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향하는 과정에 있기에 아지고 우리는 주님 무덤 주위를 서성거리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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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수난 예고, 첫 번째(마태 16,21-23; 마르8,31-33; 루카 9,22), 두 번째(마태 17,22-23; 마르 9,30; 루카 9,43-45),
세 번째(마태 20,17-19; 마르 10,32-34; 루카 19,31-34)
2)제자나 여인들 중에 직접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목격한 자들은 없다. 마태오는 주님의 부활과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천사가 중개자로 주님의 부활을 전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마태 28,5-6) 마르코는 흰 옷을 입은 한 젊은이가 무덤 오른 쪽에 앉아 있다가 여인들에게 마태오와 같은 내용의 말을 전한다.
(마르 16,6). 루카는 두 눈부시게 차려 있은 두 남자가 여인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린다. ‘어찌하여 살아 겠닌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야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무어쇼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보아라.’(루카 24,5-6) 요한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을 찾았을 때에는 무덤을 막았던 돌은 치워져 있고 시신이 없었던 사실을 두 제자에게 알린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나중에 막달레나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신다.
3) 마리아 막달레나는 스승이신 주님을 존경하고 사랑한 여인으로 등장한다. ‘마리아’라는 이름이 흔하던 이름이었는데,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이 마리아 막달레나(루카 7,2)인지, 또 베타니아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씻은 여인(마태 26,7; 마르 14,3), 또는 베타니아의 마르타와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요한 12,3)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이 어렵다. 그렇지만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죽음, 그리고 부활의 순간에 가까이에 있었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부활을 준비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하는 고민과 아쉬움 속에 잠겨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주교님들이 춘계정기총회를 하면서, 지금 우리가 지내고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과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시복시성 준비 일환으로 교황님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백신 나눔 운동’에 동참하기로 하셨다고 전해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예수님 무덤을 찾아왔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여인아, 왜 우느냐?”(요한 20,13ㄱ) 하고 물으십니다. 마리아는 얼마나 놀라고 안타까웠을까! 자신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만도 황당하고 억울한데, 그 시체마저 없어졌으니 얼마나 한탄스럽고 허망했을까 싶습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ㄴ) 그 황망항에 자기 뒤에 예수님이 서 계신 줄도 모릅니다(14절 참조). 예수님께서 다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ㄱ) 라고 물으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정원지기인 줄로만 알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ㄴ)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향해 이르십니다. “마리아야!”(16절ㄱ) 그제서야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가 너무나 반가워서 소리칩니다. “라뿌니!”(“스승님!“[16절ㄴ])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17절)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더 이상 인간적인 감성에 휘둘리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소명을 주십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며, 승천하실 것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지상 소명을 다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부활을 알립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18절)
부활하신 주 에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부활의 신비에 동참하는 길은 가난한 이들과 이 시대를 고단하게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하는 일일 것입니다. 주교님들의 ‘백신 나눔 운동’ 소식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희생하심으로써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생명을 빚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우리도 내 생명을 빚진 마음을 갚기 위해 백신 나눔 운동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고, 부활의 기쁨을 나누시겠지만, 특별한 다른 방법이 없으신 분들은 이번 백신 나눔 운동으로 생명나눔을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미얀마 국민을 위한 9일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세상에 힘겹게 살아가고 생명을 위협당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면서 주님 부활의 영광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그 신비에 동참하기로 합시다.
참고로, 백신 비용은 1인 두 번 맞는데 6만 원이라고 합니다. 물질적인 나눔에 동참하실 분은 본당 사무실로 내시거나, ‘우리 1005-383-100417 (재) 천주교서울대교구유지재단’으로 직접 송금하셔도 좋겠습니다.
살아계신 분을 죽음 안에서 찾지 말자. <요한 20, 11-18> 4월 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분명히 주님은 다시 살아나신다고 했는데 여인들은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옆에 있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여 헤맨 이 사정은 오늘 우리의 현실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믿으면서 찾아 모시지 않고 주위의 사람들과 장애가 생기면 현존하시는 주님을 잊고 어둠 속에 헤맵니다. 역사 안에 잘 믿어오던 하느님은 자기 철학적 견해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죽었다고 합니다. 다만, 여기에 단서는 병들어 죽지 않고, 늙어서 죽지 않고, 그리스도 신자들이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잘 믿어오던 주님을 마음속에서 버리고 주님을 주님이 아닌 것에서 찾으려고 하다가 스스로 절망에 빠져 죽음에서 살아나신 주님을 찾지 못하여 방황합니다.
모든 고통 뒤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통만 보니 주님을 못 알아보게 됩니다. 이는 죽음만 보고 살아계신 주님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또한, 니체가 말한 대로 나의 삶이 세상의 어둠 속에 있으니 주님을 못 알아보게 됩니다. 건망증이 심한 노인이 담뱃대를 들고 “내 담뱃대”하고 찾는 것처럼 우리의 건망증이 있던 것을 없다고 하고, 없던 것을 있다고 합니다. 주님은 존재 자체이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이 지옥에 계셔도 나는 주님 계신 곳 지옥이라도 따라가겠다.” 하셨습니다. 각자는 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님과 다정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주님의 뜻이 지금 여기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모르고 살고 있을까요? 죽은 자 안에서 주님을 찾으면 이미 무덤을 비우고 여기저기에 주님은 현존하십니다.
어제 엠마오를 떠난 사람과 함께 지리산 형제봉, 섬진강, 마지막 신동 고개까지 돌고 수도원 정문에 들어오면서 모두 같이 “이 좋은 수도원을 뒤로하고 어디로 헤맸나? 주님은 갈릴레아에 계셨네.” 주님은 바로 수도원에 그래서 “주님은 지금 여기에 계셨네요.” 하며 각자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엠마오 갔다 오고 주님 우리 안에 계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 안의 주님 현존을 모르고 살면 너를 보는 나는 어둠 속에 있으며, 주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울면서 무덤 속의 천사를 보고, 동산에 동산 지기는 보면서 그분이 주님이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마리아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돌아서서 “라뿌니” 스승님이라 부르고 주님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동산 지기인 줄 알았는데. “우리는 거저 지나가는 나그네인 줄 알았는데 주님이시네.” 엘리고로 가는 나그네로 알았는데 빵을 떼어주실 때 알아보았다고 하네요. 어떤 사도는 주님이 방에 계시는데 꼭 상처를 만져보고 확인하려고 하였다고 하네요. 고기잡이하다가 “당신이 누구십니까?” 묻지 않고 침묵으로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니 형제가 돈으로 보이고 형제로 보이지 않아서 재산 두고 싸우고 서로 욕심부리다가 부모님을 잊어버리고 원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을 두 번 죽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형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주님을 지금 여기서 만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자신을 부르셨을 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고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할 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 수 있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릴 수 있습니다. 사실 저의 집안의 동생의 경우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정신지체 장애인입니다. 말을 하더라도 문장이 되질 않고 짧은 단어만 되뇝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은 그런 동생이 말을 완벽하게 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서만이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사랑을 통해서만이 생명이 이루어집니다. 사랑을 통해서만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야!"
저마다의
시작과
끝에는 소중한
이름이 있었다.
멈춰 선
곳에서
주님을 다시
만난다.
뒤돌아보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름이 있다.
마음과 마음을
따뜻하게
이어주는
이름이 있다.
저마다의
이름에는
소중한 역사가
있고 소중한
이야기가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신다.
이름은
삶이 되고
이름은
사랑이 된다.
주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
부활의 참된
순간이다.
우리의 이름을
끝까지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시고
불러주신다.
참된 사랑은
서로를
성장시킨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늘 그대로이신
주님의 사랑이다.
주님 사랑이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랑을 통해
되살아나는
부활의 기쁜
소식이 된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모르고 살 때가
너무 많다.
"마리아야!"
매 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부활이 있다.
"라뿌니!"(스승님!)
삶이란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여정이다.
부활은 서로를
향한 마음이다.
마음안에
머무르는
시간이다.
이름은
마음을
만나는
가장 따뜻한
사랑이다.
사랑과
사랑 사이에
마음이 있고
이름이 있다.
이름이
있는 곳에
따뜻한 부활이
있다.
"마리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