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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3년 4월 28일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3.04.28|조회수80 목록 댓글 0

제1독서

<그는 민족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9,1-20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2-59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사울은 다마스쿠스에 이르러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니아스에게 안수를 받은 뒤,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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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던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눈이 머는데,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을 뜨고 세례를 받고는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고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소개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유다인들은 그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직까지 가시적 세계 속에서 물질적 이익을 좇는 유다인들의 오해와 몰이해를 없애시고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을 가르치시고 설득하시려고 사용하신 방법은 대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 표현에 이어 긍정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에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그분의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달하시려는 요점을 부정과 긍정의 대조로 강조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유다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 오직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로써 가능하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살과 피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과 함께 주님 곁에 머물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불신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나를 이어 주는 고리입니다.(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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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 동안 우리는 ‘생명의 빵’에 대한 복음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8-58). 그런데 누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셨으며 또 그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 나눈 제자들이었을까요?
실제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몸소 당신의 몸과 피라고 말씀하신 빵과 포도주를 직접 먹고 마신 제자들이야말로 분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례를 미사에서 재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십니다. 
그러나 미사에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흔히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생명의 빵’에 대하여 우리에게 전하는 요한 복음의 또 다른 부분은 영원한 생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요한의 첫째 서간도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게 ‘하느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1요한 2,24-25 참조).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이 끝나는 오늘, 예수님의 살과 피로 얻게 될 그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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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님의 이 말씀에 유다인들은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말다툼을 벌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과 대화하는 이들을 군중에서 유다인으로 바꿈으로써, 이들이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심을 거부하고 적대시할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한발 더 나아가시어 ‘살을 먹고’ ‘피를 마시기’까지 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구절부터 성체성사의 선물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언급합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하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 또한 성체성사를 암시합니다.
특히 “내 살을 먹고”에서 동사 ‘먹고’는 ‘씹어 먹고’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단순히 먹는다는 일반적인 동사가 쓰이다가, 여기서부터 소리를 내어 씹어 먹는 행위를 강조하는 동사로 바뀝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씹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자들이 성체성사 안에서 실제적인 방법으로 생명을 주는 몸을 먹는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실재성을 말하고,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참생명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희생에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성제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살인 성체를 모시고 예수님의 피인 성혈을 마실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예수님 ‘안에 머무르며’,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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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 만남 등의 단어들은 요한 복음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아냅니다. 생명을 얻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지고지순한 바람이겠지요. 문제는 그 방법이 무엇이냐인데,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쉽게 그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해 줍니다.

초대 교회는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다는 믿음을 다듬어 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 믿음을 미사성제를 통하여 이어 나가고 있지요. 성찬례는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매우 단순한 전례입니다. 그저 먹고 마시는 일이 중심이 된, 너무나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거창하거나 세련된 예식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손쉬운 몸짓들이 성찬례에 녹아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줄곧 예수님의 정체성,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먹고 마시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입니다. 먹을 것을 주면 먹으면 되고, 마실 것을 주면 마시면 될 일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때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느님을 만나고자 신앙생활을 하지만, 무엇을 추구하기에 앞서 우리는 무엇을 배고파하는지, 무엇을 목말라하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찾아 헤매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굳이 필요 없는 것조차 끝까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더욱더 많이 채우려 덤비는 오늘의 세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배고픔을 묵상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배고플 때 모든 음식이 맛있어 보이듯, 우리가 무엇에 정말 배고픈 것인지 살펴보는 일이 그리스도인이 맛볼 참된 양식을 찾는 일입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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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양식은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으며 부모가 그 양식을 준비하려고 한 고생도 함께 먹습니다. 그렇게 자란 자녀는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닙니다. 부모에게 감사하니 최대한 부모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말을 잘 따르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성장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손에 놓인 성체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살과 피를 봅니다. 신앙인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생기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말다툼을 벌이고, 마침내 많은 이가 예수님을 떠나갑니다(요한 6,66 참조). 그들이 떠나는 것은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믿을 수 없어서입니다. 진정으로 믿지 못하면 상대방이 주는 어떤 사랑과 관심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관심을 받아들인다면 미움과 원망이 사라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감사는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만듭니다.

인간은 사랑이 없으면 온전해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믿지 못해도 사랑은 믿어야 합니다. 자신은 사랑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음식을 안 먹고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자녀가 부모가 주는 양식 없이 살 수 없듯이,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성사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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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의 회심 이야기에는 한 인간의 역설적 삶이 보입니다. 열정적인 바리사이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의 눈은, 하늘에서 내린 빛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이후 사흘 동안 감겨집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파스카 성삼일처럼 사울에게도 이 암흑의 시간은 참된 진리를 깨우쳐 바오로 사도가 되는 정화의 시간이 됩니다. 

사울의 나쁜 평판을 듣던 하나니아스는 주님의 환시 속에 바오로가 사도로 선택된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오로를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라고 하시고, 바오로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고 하십니다. 

사울의 회심은 그가 가진 바리사이의 열정을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열정으로 바꾸어 주신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실제로 바오로 사도는 세 차례의 전도 여행에서, 수많은 박해와 죽음의 위협에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예수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고 부활을 희망하는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의 잔을 함께 마시고, 십자가를 짊어지며 육신의 고행을 기쁘게 감내하는 사람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지혜를 얻는 사람임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 주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시간의 속박에 얽매이지 않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자유로운 영혼이 될 때 얻게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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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누군가에게 내어 줄 때, 흔히 “내 살과 내 피 같은”이란 표현을 씁니다. 나 자신을 뜻하는 ‘살과 피’를 준다는 말은, 내 전체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을 섞는다.”, “피를 나눈다.”는 표현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실 때 상징적인 의미로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실제로 제단에 봉헌된 어린양처럼 십자가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하느님께서 받으실 제물로 봉헌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찢겨진 살과 흘리신 피를 통하여 영원한 형벌과도 같았던 죄와 고통, 죽음의 쇠사슬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이야기 속에는 한 인간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엿보입니다. 율법에 대한 열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던 바오로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기묘한 방식으로 사도로 선택하시고, 그가 내뿜는 살기를 복음 선포와 순교의 열정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걸으신 수난의 길에 바오로 사도가 동참하도록 부르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열정은 결국 피땀으로 채워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여정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복음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필요합니다. 어린이들이 부모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성장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과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받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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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나머지 좌절감에 빠진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기득권층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을 다 없애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재화를 나누지 않고 어느 특권층만 독점한다면, 그 결과는 어떠하겠습니까? 바로 이 점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살과 피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우리는 나 하나만 편하면 다른 이들이 겪는 불편은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나 하나 잘되는 길만을 찾곤 하지요. 이제 이런 길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목적에 대해,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 나 혼자 복 받으려고 예수님의 생명을 받는다면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가 사라질 것입니다. 반대로 이웃에게 나를 아낌없이 나눠 주려고 성체를 모신다면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떤 인간관계를 지녀야 하는지, 오늘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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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활 제3주간 평일 내내 '생명의 빵'에 관한 요한 복음 6장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부분은 길기도 하거니와 그 뜻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용의 전체적인 흐름과 구조를 되짚어 보는 것이 더욱 깊은 묵상을 하는 데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처럼 이 6장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은 예수님의 긴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시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당신의 살과 피에 관한 '성체성사적' 말씀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빵과 물고기로 배불리신 기적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도 모두 나오지만, 요한 복음은 우리가 이 기적에서 표징을 보도록 이끕니다. 배불리 먹은 군중이 그 표징을 육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있음을 요한 복음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표징은 시선이 영적인 차원으로 향할 때 비로소 그 뜻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빵과 물고기의 기적이 가리키는 표징에 대해 점점 깊이 이해하도록 이끄십니다. 지상의 양식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한되고 사라져 버릴 갈망을 채우는 양식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기도록 촉구하십니다. 마침내는 그 생명의 살이 '당신의 살과 피'라고 선언하십니다. 

요한 복음은 이 성체성사적 표징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이 기적의 참뜻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우리의 육신의 만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라는 표징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복음은 이제 그 표징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선택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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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초대 교회는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철저한 일치’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것’으로 가르쳤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성체성사를 염두에 두신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그러기에 성체를 통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모신다고 부담 없이 말합니다.

살을 부딪친다는 말은 ‘내밀한 관계’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습니다. 피를 섞는다는 표현도 가족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이라도 성체를 모시면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가 됩니다. 몰라서 그렇지, 주님과 ‘살을 섞은’ 사이입니다. 지나친 두려움이나 무서움을 조장하는 발언은 성경의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살과 피를 준다는 표현으로 당신의 애정을 드러내셨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인간을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받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점쟁이에게 가거나 이상한 곳에서 ‘엉뚱한 신앙 행위’를 할 신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야 할 장소는 언제나 감실 앞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성체를 모셨습니다. 하느님의 힘을 느낀 적이 없다면 오늘은 ‘실존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소박한 깨달음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마음을 맑게 하면 주님의 음성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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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이가 성지 순례 도중 유명한 수도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젊은이 역시 평소 그분의 작품을 읽은 터라 내심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거실에 있는 것이라고는 책상 하나에 나무 걸상 서너 개, 책 몇 권이 전부였습니다.

젊은이는 깜짝 놀라 묻습니다. “수사님, 짐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수도자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나도 같은 질문을 하겠소. 당신의 짐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짐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순례 중이거든요.”

수도자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답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순례 중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매달릴수록 ‘천상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세상 것이 전부라고 여기면 그때부터는 ‘전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어떤 영적인 말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 갇히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신다’는 말씀인데도 못 알아듣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이 말만 되풀이합니다. ‘세상 시각’으로만 바라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식으로는 누구라도 성체성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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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은 ‘목으로 쉬는 숨’을 뜻합니다. 숨을 멈추면 죽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숨을 쉰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만큼 호흡은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맑은 공기를 바랍니다. ‘공기 청정기’를 비치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얼마만큼 공기를 맑게 할지는 몰라도 비싸게 팔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기운을 호흡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는 말씀은 그러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시?막?세상을 보고 사람을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기운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막?세상과 부딪치며 살고 있는지요?

분노의 눈길은 아닌지요? 돈과 물질이라는 겉모습만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면 맑은 눈빛이 될 수 없습니다. 겉이 아니라 내면을 볼 수 있어야 주님을 호흡하는 눈빛이 됩니다. ‘나도 그러한 사람 안에 머무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성체를 모셔 오고 있지만 아직도 주님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였다면, 바꾸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암시입니다. 천국을 바라기에 앞서 현실을 제대로 보는 건강한 갖도록 해야 합니다. 바르면 믿음은 자연스레 깊어집니다. 올바른 운명까지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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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뒤에 공익 광고 하나가 나왔습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친 할머니, 30년 동안 모아 온 돈을 나라를 위하여 기부한 군인, 줄 것이 없다며 자신의 몸을 기증하기로 한 할머니 등이 등장할 때마다 추기경의 말씀이 나옵니다. “밥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추기경의 육성이 들립니다. “사랑은 내어 주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밥이 되어 주십시오.”

“밥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이 짧은 문구는 김 추기경이 1989년 서울 세계 성체 대회 때 밝힌 말씀이라고 합니다. ‘밥’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영양분을 주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힘을 주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네 밥이냐?”라는 말처럼, 남에게 눌려 지내거나 이용만 당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도 ‘밥’이라는 낱말이 사용됩니다. 그러니 ‘밥이 되고 싶다.’는 것은 자기희생과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김 추기경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한 그렇게 살았던 것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밥’이 되신 분이십니다. 당신 자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뒤에도 역시 성체 곧 ‘밥’이 되어 오십니다. 김 추기경 말고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본받아 ‘밥’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라는 ‘밥’을 먹으며,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밥’이 되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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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스승이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각자 새장에서 새 한 마리를 꺼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죽인 다음 내 앞에 다시 가져오너라.” 그러자 제자들은 새를 한 마리씩 꺼내 들고 흩어져 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각자 죽인 새를 들고 스승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어느새 죽은 새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평소 바보 취급을 당하던 제자 하나만 해가 지도록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들 바보 하나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며 불평을 했습니다. 이윽고 그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새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안고 와서 말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을 찾았지만 그런 곳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나무와 풀이 보고 있고, 하늘이 보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던 제자들은 새를 죽이는 것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스승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이는 놀림만 받던 바보뿐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한 유다인들은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눈에 보이는 썩어 없어질 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같은 빵을 두고도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밀가루로 만든 빵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먹어서 죽지 않는 빵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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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계속 이어지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곧 ‘생명의 빵’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또 하시지만 사람들은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생명의 양식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무슨 말씀인지 오리무중에 빠집니다.

이탈리아 란치아노 성당을 순례하면 성체에 대한 기적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8세기 중엽 성 바실리오회 소속 수사 신부가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현존하시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미사를 집전하면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순간 실제로 살과 피로 변화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그때 이루어진 성체 기적은 빵과 포도주가 사람 심장의 ‘살과 피’로 실제로 변화되었다는 과학적 진술과 함께, 순례자들이 이를 볼 수 있도록 지금도 그 성당에 현시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처럼 하느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니까, 하느님께서 이런 기적을 교회 역사 안에서 보여 주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미사 때마다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감히 성체를 모시지 못할 것입니다. 빵이 실제 사람 살로 바뀐다면 어쩌면 미사는 혐오스러운 사건이 될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지 몰라도 성체가 주는 구원의 신비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상한 현상을 좇아서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이런 기적이 우리 신앙을 깊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뭔가 눈으로 보아야 더 잘 믿을 것 같은데, 사실 신앙은 깨달아서 깊어지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눈으로 보았지만, 깨닫지를 못했기에 결국 예수님을 떠나고 맙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에서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많은 사건 사고를 보게 됩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에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아프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뉴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안 좋은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픕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 무게가 분명히 더 무겁지 않은데, 사랑하는 사람의 일에 대한 것이 훨씬 더 자기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마음 아픈 거, 정상이야. 마음이 아프다는 건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최선을 다한 사랑의 대상 앞에서는 아픔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무게가 가벼워도 최선을 다한 사랑이기에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마음 아파했습니까? 부활을 알고 있기에 그냥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슬퍼해야 할 주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내 마음의 아픔이 작았던 것입니다.

먼 훗날, 주님 앞에서 섰을 때, 우리 마음의 아픔 정도를 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얼마나 사랑을 많이 했느냐고 물으실 것 같습니다. 무관심을 통해 아픔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아픈 것이 싫다면서 불평불만만 늘어놓았음을 지적하실 것 같습니다. 사랑의 삶에서 멀어지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아파서 더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어떻게든 용서하며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마음의 아픔을 만들지 말라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얼마나 큰 마음의 아픔을 간직하셨습니까?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식인종들의 말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저 사람’은 ‘이 천민 출신’이라는 경멸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경멸과 모욕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사랑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온몸을 내던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삶을 통해서 모범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몸을 내던지신 사랑의 모범을 보고, 우리 역시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마음의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음의 아픔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랑의 치료 약은 없다(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작은 죽음 체험을 통한 거듭남의 역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가 봉독한 사도행전은 혈기왕성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거칠 것 없이 탄탄대로를 걷던 한 유다 청년, 사울의 추락 과정과 주님 안에 거듭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정통 유다인이자, 바리사이 가운데 바리사이였으며, 유다교 수호에 목숨을 건 돌격대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제대로 율법을 공부한 사람으로, 오직 율법만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으며, 율법의 실천과 연구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런 사울이었기에 율법을 사사건건 비판하고, 자신이 목숨처럼 여기던 각종 세칙들을 모조리 어기고 깨트려버리신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또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몰래 집회를 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인육제를 벌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통 유다교 수호의 첨병임을 자랑하고 있던 사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흉악한 행위를 서슴없이 일삼는 그리스도교의 척결에 앞장서기로 결심합니다.


사울은 그리스도교 섬멸이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사제에게 갑니다. 그리고 특별 서한을 발부해줄 것을 청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는 일종의 체포권, 체포영장을 신청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참으로 오묘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교 박해에 가장 앞장섰던 적대자 중의 적대자 사울을 수제자 베드로 못지않은 중요한 사도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체포하기 위해 살기를 내뿜으며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드디어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엄청난 밝기의 빛과 함께 사울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이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갑니다. 갑작스런 하느님의 음성, 그로 인한 실명으로 인해 사울이 받았던 충격이 얼마나 컸었던지 그는 사흘 내내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간 앞길이 창창했던 사울, 병원 한번 안 가볼 정도로 건강했던 사울, 오직 장밋빛 미래만을 꿈꿔왔던 사울, 지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단 한 번도 내리막을 걸어보지 못했던 사울이었기에 당시 받은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자존심도 완전히 바닥나 버렸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너무나 건강했던 사울이었기에 남의 손에 이끌려 걸어간다는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 사건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 체험은 사울 인생 전체의 분기점이 될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사흘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사울의 내면에서는 대대적인 작업 한 가지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죽음 체험을 통한 거듭남의 역사’가 신속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암흑 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이끌려가던 사울은 그 치욕적인 체험을 통해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총체적인 재평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재구성과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방향 설정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마스쿠스 사건을 통해 완전히 추락한 사울이었지만, 제대로 미끄러진 사울이었지만, 그는 사흘이란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체험하셨던 십자가 죽음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처참하게 부서졌던 예수님의 사흘을 사울 역시 온몸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가끔씩 사울에게 행하셨던 방식으로 접근해오십니다. 때로 기고만장한 우리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내려치시고 심연의 밑바닥으로 내려 보내십니다. 우리의 완고함, 우리의 똥고집을 완전히 꺾어놓으십니다. 일종의 충격요법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길 안에 가끔씩 겪게 되는 추락, 실패, 바닥체험, 미끄러짐...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이런 충격적인 사건들은 우리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로 인해 새 인생을 출발하라는 하느님 측의 메시지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아니면 구원이 없는지 설명하시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 사이에서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논쟁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우리도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씀에 ‘조금 지나치고 억지 아니신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무조건 지옥이라고 하신다면 그 말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나요?

 

가톨릭에서는 많은 경우 영양제나 치료제처럼 성체를 설명합니다. 상처나 병이 생겼을 때 성체 성혈을 영하면 힘이 생기고 상처가 치유된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예수님의 성체 성혈에 대한 커다란 모욕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음식이 단순히 건강만 유지하게 만드는 데 사용될까요? 하느님 자녀가 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인식 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관련되어서 말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이 구절을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을 통해 배우고 이해함을 통해 하느님 자녀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과 피, 곧 성체 성혈은 단순한 성경 말씀과 구별됩니다. 부모가 살과 피를 주지 않고 가르침만으로 자신처럼 아이를 성장 시킬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루마니아의 차우슈에스쿠 정권(Nicolae Ceaușescu)은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를 다스린 공산주의 정권이었습니다. 차우슈에스쿠 정권은 높은 출산율을 통해 인구 증가를 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대부분 가정이 무거운 세금을 물지 않으려면 다자녀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적 문제로 인해 가정에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동이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이렇게 버려지는 아이들을 위해 차우슈에스쿠 정권이 설립한 아동 보호 시설은 상당히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기초 시설과 인프라가 부족하였고, 사람들이 아동에게 필요한 보살핌과 사랑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시설 내에서 아동들은 영양 부족, 체계적인 교육과 의료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곳에서 자란 아동들은 발육 부진, 정서적 및 인지 문제 등 다양한 건강 문제를 겪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고아원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 고아원은 1941년 독일군 침공으로 인해 발생한 굶주림과 대규모 사망으로 인해 수많은 고아가 생겼습니다. 루마니아 시설과 마찬가지로 이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발육 부진과 인지, 학습 문제의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은 단 한 번도 엄마와 같은 포옹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생존하려는 방법으로 이 아이들은 몸을 앞뒤로 흔드는 일을 합니다. 동공이 풀려있고 머리를 처박는 등의 자해를 하기도 합니다. 음식은 먹었지만 사랑은 먹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분이 하느님임을 믿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마치 엄마 젖을 먹는 아이가 자신도 엄마와 같은 존재임을 믿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탄생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시는 분이 하느님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분의 말씀이 나에게 의미가 있게 됩니다. 같은 말이라도 엄마의 말이 힘을 발휘합니다. 엄마는 나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젖은 엄마의 살과 피입니다. 아기가 젖을 먹을 때 엄마의 살과 피가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곧 엄마의 죽음인 것입니다. 엄마는 그 죽음으로 아기를 살리고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 다시 생명을 되찾습니다. 이것이 죽음과 부활의 과정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성경에서 이 신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알아보려면 예상해야 합니다.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체 안에서 하느님을 볼 줄 모르는 이유가 바로, 이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에게 먹을 것을 받아먹은 옥사나 말라야는 자신이 개라고 믿기에 인간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옥사나 말라야를 인간으로 만들려면 한 인간의 살과 피가 필요합니다. 그를 부모라 믿고 그 부모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절대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저는 이 교리 교육이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기에 냉담자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왜 성체 성혈과 연결이 되는지를 깨닫고 그분의 살과 피가 아니면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깊이 깨닫고 가르쳐야 합니다. 지금은 성체 신심이 매우 약해졌습니다. 이 신학이 확립되지 않으면 코로나와 같은 것이 오거나 어려운 일들이 생길 때 또 쉽게 성체를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엄마의 젖 없이 아기가 아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살과 피 없이 누구도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함명춘 시인의 “종(鐘) 이야기”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마음에 울림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의 몸은 종루였고/ 마음은 종루에 걸린 종이었다./ 종은 날마다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흘린 땀방울과 눈물이 종소리였기 때문이다./ 임종 직전까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땀방울과 눈물을 흘렸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주일에 한 번씩 그가 행했던 일을 따랐다./ 날이 갈수록 종소리는/ 점점 더 크게 더 멀리 울려 퍼져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귀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의 종소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종소리가 매일 들리지만 귀가 닫힌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욕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교만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합니다. 시기와 질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열등감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합니다.

부활시기에 우리는 독서에서 ‘사도행전’을 듣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전하는 사랑의 종소리입니다. 사도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때입니다. 성령이 불혀의 모습으로 사도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사도들의 마음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금도 없고, 은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신자가 된 사람도 수천 명이 넘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도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내어 놓았습니다. 부족함이 없이 서로 나누었습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공동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매 주일 공동체는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그것이 ‘미사’입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는 영이 열려서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성서에 예언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순교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교는 사랑의 종소리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울은 사랑의 종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귀가 닫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명예와 능력을 보이고 싶어 귀가 닫혔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할 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공명심에 불타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사울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교회 공동체를 박해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굳게 닫혀 있던 사울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사울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이제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랑이 종소리’가 됩니다. 사울은 이제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된 시몬과 바오로가 된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큰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내는 사랑의 종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사랑의 종소리가 되어서 지친 이에게 위로를 주었고, 절망 중에 있는 이에게 희망을 주었고, 원망과 분노는 이해와 평화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의 빵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의 빵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살과 피를 우리가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살과 피를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 세상에 퍼지는 ‘사랑의 종소리’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당신과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먹음으로써


당신께
먹힙니다


그리하여
갈림 없이
당신과 하나입니다 


당신 안에
머무름으로써


당신을
품습니다


그리하여
갈림 없이
당신과 하나입니다

 

 

 

히말라야 ABC 등반 동료들과 오랜만에 만나 느긋한 여유로움의 하루를 함께 지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오늘 만난 동료 중 마라토너가 있다. 58세부터 뛰기 시작해 70이 훌쩍 넘었는데도42.195Km를 완주하고 지낸다. 그는 신앙인이며 그의 삶의 양식을 들으며 함께 먹고 마셨다.


갈매못 순교성지에 들러 1866년 병인 박해시 순교자들을 만났다. 봄빛 풍요한 경당에서 성체께 조배하고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했다.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취한 순교자들의 숭고한 삶을 먹고 마셨다.


보령해저터널를 통해 안면도 꽃지 튜립밭 꽃 길을 걸었다. 아름다운 꽃향기를 흠뻑 먹고 마셨다. 입장료가 비쌌지만 꽃밭을 조성한 수고로움을 떠올리며 감사를 드렸다. 돌아오는 길에 ‘서산의 간월도’에 위치한 간월암을 찾았다. 석양의 빛 받아 고즈넉한 암자에서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수행하는 스님의 삶을 먹고 마셨다. 하루가 행복했다. 오늘 일정이 모두들 무계획이었지만 계획이 된 것처럼 양질의 삶을 배불리 먹고 마시니 하루가 즐겁고 기뻤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세례성사 후 미사를 봉헌하며 걸어온 안생길, 예수님의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마셨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있는 음식’은 오늘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날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식인종은 인육을 취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 천상양식을 모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을 쫓아 행복을 산다. 천주님께 감사!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오늘 복음을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너무나도 크신 사랑에 우리는 감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곧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 곧 당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살과 피를 나누어 준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살리신 분이십니다.
물고기 중에 가시고기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그 가시고기의 특징 중의 하나가 수컷 가시고기가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서 매일같이 다른 물고기들과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그렇게 수일이 지나게 되면 결국 녹초가 되어 죽게 되고 그 가시고기의 새끼들은 죽은 아비의 살을 뜯어 먹으면서 자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미사를 통해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매 미사 안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그 숭고한 죽음을 이루시고 우리는 그 주님의 살과 피로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감사드리는 것이며, 사도 바오로가 갈라티아서 2장20절에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언제나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면서 그분께서 당신의 일을 해 나가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피와 살을 먹고 마시지 않는다면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시며 이렇게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시지요. 이는 살아 있으면서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으로도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이는 죽은 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며 죽음이 없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매일 미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이 자체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현재 살고 있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매일 기쁨의 하루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매일 매일 자신 안에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또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짐승 사탄으로부터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제발 내 안에 머물러라. 제발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그저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만 하면 됩니다. 아멘!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밥이 되어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의 연속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6,54.56)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도 인정하지도 않은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있었고,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썩어 없어질 빵에 시선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뱃속에 들어갈 빵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그들의 눈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이 보일리 없었겠지요.

 

영원한 생명을 위해, 우리가 먹고 마셔야 할 ‘예수님의 살과 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강생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예수님의 희생의 삶입니다. 목숨 바쳐 희생하심으로써 구원의 신비를 알려주신 예수님의 인격과 삶 전부를 말합니다. 그분의 십자가 길입니다.

 

따라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예수님의 모범대로 연민과 희생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생명 안에 머물고, 예수님께서도 내 안에 머물게 됩니다. 곧, 죽음에 이르는 희생을 통해, 예수님과의 영원히 변치 않을 친밀한 일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생명’이십니다. 파견되신 까닭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 우리의 밥이 되어 먹히심으로써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살라고 파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난과 죽음을 철저히 받아들임으로써, 그분과의 깊은 친교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친교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비움과 낮춤을 의식의 중심에 두는 것을 말하지요. 예수님과 친교를 이루지 않고는 내 살과 피를, 곧 내 존재와 소유 전부를 내어줄 수 없을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입하거나 상한 밥이 아니라,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품은 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 거짓과 불의, 차별과 불평등, 교만과 시기 질투를 품고 있는 나를 다른 이에게 밥으로 내어준다면, 상대방은 식중독에 걸리거나 죽고 말 것입니다. 다른 이와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밥이 되려면 끊임없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모셔야겠지요.

 

나아가 ‘생명의 빵’으로 나 홀로 방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먹힐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과 죽음의 그늘 밑에 있는 사람이나 죽음의 문화로 병들어가는 사회에, 아낌없이 먹혀, 그 안에서 함께함으로써,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6,55)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기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기도는 두 말 할 것 없이 미사다.

왜 미사가 그토록 강력하고 아름다운 기도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매일 변함없이 저질러지는 인간의 죄를 보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시어 봉헌되는 성체성사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준비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가끔 피정 지도를 가는 곳이면 미사 강론으로 하는 질문이 있다.

“여러분 중, 성체를 모실 자격이 있으신 분은 손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물론 성체를 모실 외적인 자격은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내 질문의 의도는 영성적인 차원에서 그 답을 찾게 하려는 데 있다.

 

꼭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이 세상에 성체를 모실 자격이 있어 모시는 이는 아무도 없다.

성체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께서 거저 주신 선물임을 깨닫는 데 있다

 

선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두 가지만 허락된다.

하나는 “죄송합니다. 애를 썼지만 또 죄 속에서 당신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는 마음과,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오신 주님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이다.

 

물론 기억에 있는 상처나 죄가 있다면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모시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니 말 할 필요도 없다.

너무 생각 없이, 너무 뻔뻔하게 성체를 모시는 이들이 많다.

떨리는 마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성체를 모셔야만 한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가 필요합니다
당신을 먹고 마심이
영적 생명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당신께서 내게 오시어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당신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고
우리는 당신과 일치를 이룹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거저 내어주시는 당신 앞에
그저 당신을 모실 수 있는 신실한 준비가 필요할 뿐입니다
주님 제 안에 당신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라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This is the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사도 9,17)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을 당신께로 이끄시기 위해 누군가를 보내 주십니다.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 주시고 당신을 박해하는 사울에게 하나니아스를 보내 주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오늘 나를 위한 천사나 사람을 보내주실 겁니다.중요한 것은 

그 천사와 하나니아스를 알아보는 눈이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에게 밝혀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사울처럼.

 

다른 한편,

하느님께서는 오늘 나를 가브리엘 천사로, 하나니아스로 다른 누군가에게 메신저로 파견하실른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이 내 맘에 들지 않을수도 있답니다.

그러나 나는 대상이 누구이든간에 하느님의 메신저가 되기만하면 됩니다.

그를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

나의 가브리엘 천사,

나의 하나니아스를 만나 봅시다.

나도 누군가에게 천사가 되고 하나니아스가 되는 기쁨과 희망의 메신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참된 봉헌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제서품을 받던 날, 차를 빼다 뒤에 있던 고급 승용차를 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사제가 되었다는 기쁨과 하필이면 그날 사고를 쳤을까 하는 씁쓸한 마음으로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불현듯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 다 바쳐드려야 하는 겁니다!” 영적지도 신부님이셨던 서봉세 질베르토 신부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좋은 일뿐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까지도 하느님께 모두 봉헌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 “다 바쳐드리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제로서의 첫 미사를 기쁘게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 말씀은 바오로가 주님을 만난 뒤 사도가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회개한 바오로가 예루살렘에 와서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려고 할 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사도 9,26 참조). 또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우리는 그가 주님을 만난 후에도 여전히 우리처럼 유혹을 받는 인간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 모든 외적, 내적 고난의 순간들을 “하느님께 다 바쳐드리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함승수 신부님
음식에는 사랑과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편의점에서 파는 간편식이나,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집밥이나 그 재료나 구성성분 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밥은 매일같이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편의점 밥은 몇 끼만 연속으로 먹어도 속이 부대끼고 몸에 탈이 나지요. 그렇게 아픈 배를 붙들고 있으면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면서 집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 집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집밥에는 자녀를 생각하는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담겨 있지만, 효율성과 경제성이라는 원리에 따라 생산되는 편의점 밥에는 그것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과 정성이 있고 없음’이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드는 것이지요.


음식은 그저 영양소가 담겨있는 재료들의 혼합물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소통의 장입니다. 어머니는 정성과 노력이 가득 담긴 맛있는 음식으로 자녀들에게 당신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음으로써 거기 담긴 당신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그 음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음으로써 어머니의 사랑을 자기 마음 안에 담게 되지요. 즉 음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어머니는 당신 자신을 자녀들에게 내어주고, 자녀들은 어머니를 자기 안에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참된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것도 그와 비슷한 방식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와 동일시하실 정도로,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마련하신 그 참된 양식을 받아먹음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내 안에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그저 심리적인 위로나 영적인 위안을 주시는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십니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먹여 살리는 참된 양식을, 그것만 먹고 마시면 더 이상 배고프거나 목 마를 일이 없는 생명의 양식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이 주는 음식들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기에 기꺼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주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먹고 마시는 행위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먹다”(τρωγω)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씹어서 부수다’라는 뜻으로 인간이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동사가 아니라, 초식동물이 질긴 풀을 뜯어서 먹는 모습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합니다. 즉 초식동물이 풀을 씹을 때는 입만 살짝 움직이는 게 아니라, 온몸의 근육을 동원하고 움직여 최선을 다해 씹듯이, 내가 받아들인 주님의 말씀을 소화시켜 내 삶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온 몸과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한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은 그저 신체 일부가 아니라 그 몸을 지닌 이와 맺는 ‘인간관계’ 곧 ‘사랑의 친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피’는 그저 몸 안에 흐르는 액체가 아니라 그 피가 유지하는 ‘생명’ 그 자체를 또한 하나의 ‘핏줄’로 연결된 이들이 이루는 굳은 ‘일치와 유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분과 참된 사랑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그분께서 누리시는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함께 누리는 ‘운명공동체’가 된다는 뜻이지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는 이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총과 사랑의 ‘힘으로’, 그분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희생의 피 ‘덕분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그분과 하나되어’, 주님께서 누리시는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그분과 함께 누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새로워지는 데는 영적으로 삼일 정도 걸리는가 봅니다. 뭔가를 새롭게 깨닫거나 몸과 마음이 전적으로 변화되는데, 요나가 큰 고기 뱃속에 갇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시는데, 오늘 첫 번째 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데 사흘이라는 기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 52) 하며 반발하고 불평을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54-56절) 


어느 날 문득 말과 행동으로 성큼 커 버린 자식을 바라보며 놀라고 대견해 하듯이, 매일 맞대고 사는 남편과 아내도, 부모와 자녀도 서로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사는지 등의 내면을 바라보고, 서로의 진면목을 발견하여 서로 존중하며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매일 읽는 성경이지만, 매일 바라보는 세상이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새로운 빛으로 새로운 깨달음과 의미를 되새기며 주님께 나아가기로 합시다.

 

 

 

주님의 살, 빵 안에는 믿음, 희망, 사랑 있다. <요한 6, 52-58> 4월 28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음식을 먹어야 살지만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영양분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먹고 마셔도 되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믿을 사람인가? 희망을 품은 사람인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인지를 알아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오래전 부인이 남편과 산에 등산 가서 바위에서 남편을 죽게 했는데 무기징역을 사는 부인이 8억이란 남편의 보험료를 청구했다는 소리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믿고 산에 올라간 사랑해야 할 남편을 돈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다니! 믿음이 없어서 함께해도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임까지 당하면서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증명하시고 다시 살아서 우리 가운데 사시며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내 살을 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미사에 참례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 안에 믿음, 희망, 사랑이 있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기도의 본질은 감사입니다. 부족한 것을 원망하며 구하거나 다른 이와 비교하면서 시기 질투하며 구하는 기도는 올바른 기도 행위가 아닙니다. 받은 것을 감사하는 기도란?  더 강한 믿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이미 받은 것을 갚아드리는 마음이 있어야 올바른 기도입니다.
미사를 드리며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없으면 빵은 아무런 의미가 없이 지나가는 바람같이 됩니다. 만일 믿음, 희망, 사랑을 가지고 미사를 드리는 사람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님 내 안에 사시고 나 주님 안에 살게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바오로 사도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신 것같이 생명의 빵인 주님을 영하는 사람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함께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고 살면서 서로 감사 찬미 찬송하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지니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 5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갈증이 있기에
기도가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구원이 있고
거짓이 있기에
참됨이 있습니다.

갈증이 있기에
음료가 있고
허기가 있기에
양식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삶의 맛을 배우고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삶을
닮아갑니다.

삶에서
만나게 되는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인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만납니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을
십자가로
안고 가십니다.

십자가 뒤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그 자체가 이미
영원한 생명임을
믿습니다.

욕망이 죽어야
참된 양식
참된 음료가
될 수 있음을
또한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셨던
그 길이
공동체를 살리는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십자가로
아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참사랑이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입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마음과 마음을
이어줍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삶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양식과 음료가
되어 살리는 삶
살게하는 삶을
우리가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되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비껴갈 수 없는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님께서

오늘도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되시어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십니다.

인격은 사랑을
필요로 하고
인격은 참된
양식으로
영원한 사랑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랑을 마시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는
생명의
이 순간입니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언젠가 죽기 마련입니다. 당연한 진리인데도 이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태어날 때 아기는 마구 웁니다. 그러나 이 아기를 바라보는 주위의 사람들은 세상의 행복을 차지한 것인 양 활짝 웃습니다. 그렇다면 죽을 때는 어떻습니까? 우선 주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크게 슬퍼합니다. 죽는 사람은 어떤가요? 여기서 이 세상을 잘 살았던 사람은 웃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에 태어날 때 아기는 참 걱정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 뱃속의 편안함을 벗어난 낯선 환경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힘차게 울었겠지요. 하지만 곧바로 안정을 취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기운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태어난 아기를 보호해 줄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세상을 떠나는 우리를 보호해 줄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갓난아기가 세상 안에서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우리는 미사 때마다 느낄 수 있습니다. 성찬례 때, 사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당신 자신을 몽땅 내어주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식인종의 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 사람’이라는 표현은 ‘이 천민 출신’이라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전혀 보려고 하지 않고, 미개한 식인종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면 절대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일치를 이루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과도 하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셨던 주님의 사랑에 무조건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행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칸트).

 

 

 

우리는 성체로 ‘말미암아’ 살아가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은 계속 ‘생명의 빵’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들만 영원히 살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고 그 살과 피를 먹은 이 덕분으로 살아간다는 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영화 ‘아이, 로봇’(2004)은 공상과학 영화이지만 인간과 로봇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며 ‘인간도 로봇과 같지 않을까?’, 혹은 ‘로봇도 인간과 같지 않을까?’란 섬뜩한 메시지를 전달해줍니다. 로봇이 자유의지를 가져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결론은 이것입니다. 

‘로봇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생존에 대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2035년, 로봇의 원칙은 1.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2. 인간의 명령에 따른다. 3. 이 두 법칙에 위배되지 않으면 스스로 보호한다. 이렇게 3가지입니다. 

인간의 생활 전반에 인공지능이 발달된 로봇과 생활을 합니다. NS-4가 단종되고 NS-5 모델이 출시되려는 시기에 이 모델의 개발자 래닝 박사가 자살을 합니다. 시카고 경찰인 델은 AI 로봇을 적대시하는데 과거 애인과 사고를 당했을 때 로봇이 명령을 어기고 자신만 구해 애인이 죽었던 사건 때문입니다. 

그는 래닝이 살해당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래닝이 개발한 모델 NS-5는 인간의 명령과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모델이라 로봇의 3대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수도 있어 불안해 합니다.

 

NS-5 써니도 인간처럼 꿈을 꾸고 감정을 느낍니다. 델은 수잔과 써니의 심리 검사를 하는데 나쁜 AI는 아니라고 나와도 델은 써니가 래닝을 죽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수사를 하던 델은 습격을 받고 래닝 사건은 자살로 수사가 종결됩니다. 써니는 델을 피해서 NS-5 공장에 숨습니다.

 

써니는 왜 래닝 박사가 자기를 만들었나 궁금해합니다. 써니는 자기가 꾼 꿈 얘기도 하며 대화를 나누다 써니를 신뢰하게 된 델은 써니가 알려준 곳으로 가는데 컨테이너 박스에 NS-4들이 숨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NS-5 모델에 의해 제거되고 있었습니다.

 

델은 사건을 파헤칠수록 의문의 로봇들에게 공격을 받고 로봇의 반란을 예상해서 써니를 없애려던 사장과 얘기해보려고 찾아갑니다. 로봇들의 반란의 배후가 궁금했지만 이미 사장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봇의 반란은 메인 컴퓨터 비키가 조종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이를 막으려고 델은 수잔과 바이러스를 심으려다 비키의 반격으로 죽을 위기에서 겨우 비키를 제거한 델과 수잔은 반란을 막았지만, 사람들이 AI 로봇을 폐기하려 합니다. 

써니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델은 마음대로 해보라면서 자유를 줍니다. 써니는 버려진 로봇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인간들의 명령에서 벗어나 이 로봇들은 써니의 지도 아래 자유롭게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게 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6-57)

여기서 사용하는 누구를 “말미암다”라는 단어는 ‘디아’(dia)라는 전치사는 “~을 통하여”, 혹은 “~ 덕분으로”란 뜻의 전치사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살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통로가 막히면 들락거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존재입니다. 그 조종 당하는 방법은 나를 만든 이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살은 행동 강령이고 피는 에너지라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에너지를 지니고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는 ‘신’(神)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과 피로 알려주지 않으면 인간은 살 의미를 잃습니다. 

 

여기 인간의 못된 야심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한 불쌍한 인간이 있습니다. 아니, 두 사람입니다. 한 하체에 두 상체가 달린 샴쌍둥이입니다. 마샤와 다샤 자매는 1950년 러시아 모스크바 산부인과에서 샴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이들의 비극은 어머니 품에서 아이를 떼 자신의 실험 도구로 사용한 한 과학자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소련의 생물학자인 표트르 박사였습니다. 표트르 박사는 어머니에게는 아이가 사산했다고 말하고는 아이를 감금하고 한 아이를 찌르면 다른 아이도 아픈지, 한 아이에게만 음식을 주면 다른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등을 실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언니 마샤는 긍정적인 편이었고 동생 다샤는 자주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40년 만에 실험실 쥐처럼 사는 삶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어찌 살아야 할 이유를 몰랐습니다. 자유는 오히려 이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2003년 동생 다샤는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언니 마샤는 몸을 분리하는 수술을 하면 살 수 있었지만 동생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동생과 한 몸으로 살며 동생을 돌보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더는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겐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없습니다. 인간의 폄하하고 존엄성을 깎아 먹는 발언이 될 수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입니다. 지금 대부분 우리는 부모와 학교에서 자라면서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었고 그들 덕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뜻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는 그 뜻을 실현해주며 사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뜻이 옳았음을 증명하며 사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존재할 때부터 삶의 의미나 뜻,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사람도 결국엔 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을 증명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자신으로 산다는 말은 그저 태어날 때의 생존본능(물론 이것도 창조자가 넣어준 것이기는 하지만)으로 모기나 기생충처럼 산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스스로 생존의 의미와 방법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사회생활이 가능한 모든 동물은 결국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그들의 삶을 대신 살아주며 무리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 자녀들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살과 피를 먹고 그분을 살게 해 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그분 나라에 살 수 있는 모습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인간은 창조자가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자의 의지 없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게 뭐가 좋습니까? 모기가 될 뿐입니다. 

창조자로 삽시다. 창조자로 사는 방법은 창조자를 아버지로 여겨 그 본성이 나를 통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세상의 일을 접고, 노년의 삶을 준비해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였습니다. 고향 땅에서 여생을 편히 지내도 좋은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 땅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늙은 나이에 정든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땅을 축복해 주셨고,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의 나이는 80세였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집트는 모세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던 곳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늙은 모세를 통하여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는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셨을 때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은 베드로와 안드레아에게는 삶을 지탱해 주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삶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삶을 지탱해주는 도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는 결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셨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삶을 이끌었던 신념을 버려야 했습니다. 바오로는 정통 바리사이파로 가졌던 모든 권위와 권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박해하는 자에서 박해받는 자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신념과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라고 응답하는 결단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바오로는 벼락 맞는 것처럼 삶의 여정에 극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성서는 그런 극적인 순간을 하느님의 부르심, 예수님의 부르심이라고 전해 줍니다. 그러나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서에서 전해주는 극적인 ‘부르심’의 순간은 기억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몇몇 분에게 물어보았지만 벼락 맞는 것 같은 극적인 ‘순간’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극적인 순간은 없을지 모르지만 세례를 받는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고향 땅을 떠나지 않을지라도, 모세처럼 위험한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을지라도, 첫 번째 제자들처럼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버리지 않을지라도,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을지라도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오히려 극적인 순간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2018년 12월 20일입니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 부르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길이 막혀 지하철을 타고 교구청으로 갔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을 맡아서 일하면 어떤지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늙은 나이에 고향 땅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고, 모세처럼 위험한 땅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제 삶의 신념을 바꾸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벼락 맞는 것 같은 극적인 순간은 아니었지만 제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신문을 배달한 적은 있지만 신문을 만들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신문사가 주관하는 성지순례를 기획했지만 코로나로 취소되었습니다. 의욕적으로 신문홍보 일정을 잡았지만 역시 코로나로 취소되었습니다. 코로나는 위기와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코로나는 더 높이 날 수 있는 충전과 기회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회심의 여정. -회심과 성체성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사람들아!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 알렐루야”(시편117)

 

신록과 꽃들로 아름다운 계절의 여왕, 성모성월 5월의 한국은 어디나 황홀찬란한 천국같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참 아름다운 신록의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참 축복받은 한국입니다. 어제는 어린이날이라 많은 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수도원을 찾았고 어른들 역시 어린이들이 된 듯 밝게 빛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요즘은 어린이날이 필요없습니다.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날 제정시는 어린이들에 대한 처우가 매우 열악하여 어린이날 취지에 공감이 갑니다만, 요즘은 하나 둘뿐이 없는 아이들이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자식들인지 매일이 어린이날입니다.”

 

한 형제의 언급에 공감이 가면서 영적으로도 정말 딱 드러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무릎을 쳤습니다. 참으로 영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하루하루 날마다 정신은 늘 푸른 동심으로 빛나는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영혼들이겠기 때문입니다. 사실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회심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이라면 매일이 새 하늘이자 새 땅의 천국의 영적 어린이들입니다.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참 아름다운 날입니다. 이처럼 아름답게 살라고 좋은 날과 자연을 선물하신 하느님을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 보답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감사하면서 참 아름답고 희망찬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정말 우울이나 절망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며 수도원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마침 오후 피정을 마치고 고백성사후 떠나는, 여기 수도원에 처음으로 피정왔던 자매에게 보속으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어제 고백성사를 본 여덟분들에게는 모두 한결같이 보속으로 다음 처방전 말씀과 더불어 “웃어요”라는 초록색 스탬프를 찍어 드렸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 성체성사”(6,22-59)에 대한 마지막 대목(6,52-59)입니다. 참 길고 영적으로도 깊고 풍요로운 '생명의 빵' 성체성사에 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마침 사도행전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 사건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에 신선한 충격입니다. 여기서 연상되어 착안한 강론 제목이 바로 “회심의 여정-회심과 성체성사”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누구나 예외없이 회심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회심의 여정에 충실할 때 날로 정화되고 성화되어 예수님을 닮아 참나의 실현이 이뤄질 것입니다. 이런 회심의 여정에 날마다의 성체성사 미사가 결정적 도움이 됨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회심으로 순수해진 영혼은 성체성사의 진가를 깨달아 더욱 이를 찾게 되고 성체성사의 은총은 우리를 더욱 회심의 삶으로 이끌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바오로의 회심 과정이 참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청천벽력같은 주님의 음성이자 벼락치는 듯한 회심의 결정적 순간입니다. 박해받는 제자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화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동료들에 대한 우리의 유형무형의 못된 짓의 박해 행위들은 바로 주 예수님께 대한 박해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고,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이 갑니다. 

 

하느님은 한없는 인내의 기다림 끝에 때가 되자 결정적 순간에 개입하셔서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바오로를 회심으로 이끈 것입니다. 흡사 사흘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기까지 날들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마침내 사흘후 바오로는 주님의 제자, 하나니아스를 통해 결정적 구원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회심으로 이끄십니다. 제가 날마다 매일 강론을 쓸 수 있음도 순전히 이런 파스카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은총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고,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니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부활한 사울,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우리의 회심은 이런 비상한 회심이기 보다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의 사건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회심으로 순수해진 영혼들은 다음 오늘의 요한복음의 성체성사 진리에 대한 말씀에 그대로 공감할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얼마나 풍요로운 성체성사 미사의 은총인지요!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와 더불어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힘으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파스카의 예수님을 모심으로 영원히 살게 된, 또 회심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된 복된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우리를 속량하셨네. 알렐루야.”(영성체송). 아멘.

 

 

 

<당신을 먹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먹습니다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당신을 먹습니다


당신을 먹습니다


내가 먹고 싶은
당신의 무엇만이 아니라
당신을 먹습니다


당신을 먹습니다


내가 먹고 싶지 않은
당신의 무엇마저 깃들인
당신을 먹습니다


당신을 먹습니다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하신 말씀을 가지고 유다인들이 이를 가지고 열띤 토록을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그들은 이해를 할 수 없었지요. 더군다나 오늘의 복음에서는 살만이 아닌 피까지 먹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시대에서의 율법에 따르면 피를 마시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피 뿐 아니라 살까지 먹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유다인들은 납득하기 어려웠고 율법을 어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지요. 이러한 그들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셔야 한다는 이 말씀은 십자가의 위에서 희생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자신을 믿으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마지막에 살린다는 것이고 믿는 이들은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 역시 믿는 이들 안에 머무른다는 뜻이지요. 또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것,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예수님을 통하여 산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어제와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또한 오늘 자신의 피를 마시는 이들을 축복하시고 먹고 마시지 않는 이들은 생명을 얻지 못함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현실 세계의 삶을,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신 이들이 얻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현실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생명이 되는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유다인들을 향한 말씀이지요. 또한 믿지만 제대로 믿지 않는 현재의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생명이십니다. 이 생명을 통해서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진리를 믿지 않고 자신이 주도권이 된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을 향한 가르침이시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현실에서 어떤 방법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리고 이 예수님을 통하여서 이루어짐을 믿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6 55)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6,52) 말다툼이 벌어진 것은 당연했다. 
'내 살은 참된 양식,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철학에서 이 명제가 사실과 정확이 들어 맞을 때, 참되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객관적으로 참으로 받아들이는가?  이 말씀을 두고 유다인 사이의 시작된 말다툼은 오늘도 우리 사이에  논리나 이성으로 계속 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참은 철학적 논리를 넘어 믿음 안에서 내가 하늘을 향해 삶으로 상승할 때 보게되는 참이다.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 '살아계신 하느님', 우리의 구세주로  만나기 시작할 때부터 이 명제가 우리에게 참이 된다.
헌혈을 하는 제자가 있다. 50회를 훌쩍 넘었다고 했다. 그 날도 헌혈을 하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피가 많아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피를 나눠줘도 됩니다.' 나는 생각했다. '아, 천주교 집안에서 제대로 된 예수님 나셨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예수님 말씀은 그 제자에게는 참임을 사는 증표가 아닐까? 구체적으로 이 말씀을 사랑으로 행하며 살 때 오늘의 말씀에 대한 말다툼이 멎게 되는 명제가 아닐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6 55)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그 빵이 바로 당신의 살이라고 말씀하시자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말다툼이 벌어졌다고 복음이 전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 초대교회 박해시대 때도 사람들이 교인들이 거행하는 성찬례를 엿듣고 교인들이 식인종들이 아닌가하는 오해를 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과 피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내어주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살을 내어준다는 것의 의미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곧 주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뭐든지 다 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함께 있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어줄 수 있고,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또한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고, 당신의 영을 전해주시며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렇게 우리에게 당신의 목숨마저도 내어주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며 깊은 감사와 찬미를 함께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더불어
당신안에 머무를 수 있는 핵심의 방법을 다시금 알려주십니다.
"생명의 양식"
당신의 살과 피에 그 핵심이 있음을
당신 안에서,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This is the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다인들은 불쾌하게 여기고 멀리하려 한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당신이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을 알아듣지 못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53절)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함께 모여, 일치된 마음으로 한 덩이의 빵을 나눈다. 이 빵은 불사의 약이다. 이 빵은 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예수님께서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0,26) 하신 빵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거룩한 살을 먹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분의 살은 생명인 ‘말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주님의 몸과 피를 받는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다. 참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분의 빵이 주어졌다. 이 빵은 땅에서 생산되는 빵이지만 축성되면 평범한 빵이 아니다. 이는 지상의 것인 동시에 천상의 것인 성체이다. 성체를 영하는 우리의 몸도 썩는 몸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원으로 가게 되는 희망을 지닌 몸이 된다.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55절) 참된 양식은 우리를 구원하신 당신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어야 함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다. 말씀이 살이 되시고, 살이 된 말씀을 우리가 받는다면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당연히 머무르신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56절) 하신다. 성체는 참된 살이요 참된 피다. 그것을 먹고 마시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57절) 아드님은 살아 계신 분의 살아 있는 모습이시다. 아드님은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다. 이렇게 파견되신 그분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다. 이처럼 우리는 그분의 살로 말미암아 산다. 이분을 우리가 먹으면 생명을 먹는 것이다. 그분이 먹힌다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사십 년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 더 위대한 목적을 위해 오신 그분은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다. 구약에서는 장수를 약속하지만, 그분은 끝없는 생명을 약속하신다.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카파르나움에서 가르치실 때, 회당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이 생명의 빵을 열심히 영해야 한다. 성체를 통해 하나가 되고 생명을 얻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다.

     이기우 신부님

  오늘 독서는 박해자였던 사울이 선교사로 인생의 방향을 180도로 바꾸게 된 극적인 사건을 전해줍니다. 그때 그는 스테파노의 치명 이후 유다교의 박해를 피해 북쪽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박해자 사울의 살기 어린 발길을 세우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비추신 번개 빛이었습니다. 뒤이어 벼락치는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 이 소리에 놀란 사울이 누구시냐고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 하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그가 거짓 예언자로 생각했던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그의 귀에 들려온 것은 분명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뜻이었기에, 그는 정신적 충격을 받고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기도를 하기도 했고(갈라 1,17), 타르수스에 있는 자기 집에서 이제껏 그가 알고 있던 성경 지식을 샅샅이 훓어보기도 했으며(사도 11,25), 자신에게 세례를 주고 신자 공동체에 받아들여준 하나니아스를 통해(사도 9,17-18)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들과 그분을 만난 증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분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보여주신 행적을 낱낱이 취재하였습니다. 이 기간이 무려 14년(갈라 2,1)이었는데, 결론은 그가 남긴 편지 곳곳에서, 특히 서두마다 인사말로 고백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결론이 나자 그는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봉사하던 바르나바가 자신을 찾아와서 권하자(사도 11,25), 그의 신원 보증으로 사도단에도(사도 12,25) 또 안티오키아 공동체에도 들어가서(사도 13,2-3), 본격적인 사도요 선교사의 길로 나섰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선교여행이 20여 년 동안(1차:45~49년, 2차:50~52년; 3차:53~58년) 세 차례나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공동체들을 세웠는데 대체로 소아시아에서는 에페소 공동체를 중심으로 여러 공동체를 돌보았고, 그리스에서는 코린토 공동체를 중심으로 여러 공동체를 돌보았습니다. 이런 경위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이 로마제국 영토 곳곳에 퍼져 나갔습니다. 

 

  특히 로마제국이 소아시아의 속주로 삼은 에페소에는 사도 바오로가 3년이나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했는데(사도 20,31), 예루살렘이 로마군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다음에는 초대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티모테오, 사도 요한, 폴리카르포 등이 에페소를 중심으로 로마제국 전체에 그리스도 신앙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이 퍼져나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은 역설적이게도 로마제국의 박해였습니다. 로마제국은 황제를 신격화하며 경배하도록 강요했는데, 이를 거부한 신자들을 검투사의 대결 상대로 내몰아 죽이거나 굶주린 맹수들의 먹이로 내주어 물려죽게 하는 등 로마 시민들의 재미있는 볼 거리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너무도 경건하게 자신들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고, 이 광경을 본 로마인들 사이에서 자원하여 점차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마침내 박해가 종식되고 나중에는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서유럽 세계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서유럽권이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되는 데에는 예수님께서 박해자 사울을 돌려세워 당신의 사도 겸 선교사로 삼으신 일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가 말년에 고백한 자신의 일생은, 밀레토스에서 에페소 공동체의 원로들 앞에서 털어놓은 대로입니다: “나는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고 우리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사도 20,21).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하늘과 땅은 새로운 역사를 뜻하는 성경의 상징어입니다. 그 새로운 역사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시작되었고, 이 신앙의 신비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말씀이 강생하시어 이루십니다. 말씀이신 그분의 섭리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신앙 진리를 관철하십니다. 우선 말씀이신 주님께서는 전례에서 일하시는데,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지금 여기에서도 성찬례마다 현존하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부르셔서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박해자 사울이 부활하신 그분의 빛에 눈이 멀었다가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진리와 현실을 제대로 보게 되는 그런 일이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전례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신비가 전제하고 있는 차원입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눈에도 ‘비늘’이 가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청하여 비늘이 떨어지도록 청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처럼 벼락을 맞고서야 제 정신을 차리는 것보다는 평온한 일상 속에서 스스로 그분께 도움을 청하시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야 진리를 제대로 보는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이근상 시몬 신부님

사울은 예수를 박해한 적이 없다. 박해하다(디오코)는 사전에 따르면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듯 누군가를 잡으러 쫓는 행위를 뜻하는데, 사울이 쫓은 사람들은 예수의 추종자들이지 예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내 벗들, 내 형제들을 박해하느냐 추궁하지 않는다. 다름아닌 바로 예수 자신이 사울의 박해를 받았노라 선언한다. 사울로서는 난감할텐데... 자신이 미워하고 쫓고 있는자가 일단 복수여서 당혹스러울 것이고, 그 추종자들의 우두머리는 이미 죽고 사라진 것으로 확신하였는데 나타났으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 예수라는 길을 따르는 자들의 정체성은 예수의 선언에 따르면 '예수' 자신이다. 박해를 받건, 빛나는 성취를 이루건, 골방에 처박히건, 어디에 있든 우리의 예수가 우리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참으로 믿는 자는 이 사실 앞에 두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두려움과 함께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담대함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죽음이 두려우랴!

 

 

 

영적인 생명을 주는 성체

     김준형 요한사도 신부님
우리는 성체가 단순한 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체를 통해 일어난 여러 기적과 성체를 모시며 변화되기 시작한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성체를 갈망해왔고 죽을 때까지 성체 모시기를 희망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한시적인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는 영혼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세상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그 생명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생명을 얻고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분명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생명 그 자체를 내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코에 숨을 불어넣어 우리를 생명체가 되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사그라지지 않는 생명으로 그렇게 살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1825년 ‘사바랭’이 <미식예찬>에서 쓴 유명한 문장입니다. 이것이 독일어로, 그리고 다시 영어로 번역되면서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eat)라는 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930년에 이르러 ‘빅터 린드라’라는 영양학자가 ‘건강은 어떤 음식을 섭취하는가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고, 그 이후로 많은 대중들 사이로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런 믿음 때문이었는지, 예전에 우리 어머니들은 임신하면 닭고기도, 뱀고기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랬다가는 태어날 아기의 피부가 ‘닭살’ 혹은 ‘뱀살’처럼 될 것이라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까지 일어나지는 않지만, 내가 먹는 음식이 나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여 조심하고 기왕이면 몸에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는 태도는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본받으면 좋을 겁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는 ‘먹고 마시는’ 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구원받으리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십니다. 그것도 비유나 은유로 에둘러 표현하시는게 아니라, 입을 벌려 음식물을 밀어넣고 소리가 날 정도로 야무지게 씹어서 목구멍 안으로 넘기는 과정까지를 구체적, 직접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여 설명하십니다. 음식은 그저 바라만보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씹고 먹고 소화시키는 과정을 제대로 거쳐야만 비로소 ‘양분’이 되어 내 피가 되고 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먹으라고 하시는 그 대상이 일반적인 ‘음식’이 아니기에 사람들 사이에 논란이 생깁니다. 우리가 무슨 식인종도 아니고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시니,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반감이 드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수정되는 순간부터 잉태와 출산을 거쳐, 독립하기 전까지 양육되는 동안 우리는 부모의 살과 피로, 우리를 위한 그분들의 사랑과 희생에 힘 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얼굴을 찡그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과 희생에 힘 입어 살아가며, 그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 안에 머무르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이 당신 안에 ‘머무른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성찬의 전례 중에 주님의 몸과 피를 몸으로 직접 받아 먹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를 위한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기념하고 기억하여 마음으로도 그분을 내 안에 모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는 존재 안에 깊숙이 스며든 그분의 살과 피 덕분에 그분의 일부가 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머무르는 참된 일치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야 비로소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곧 ‘주님 때문에’ 산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힘이자 의미가 되도록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모든 영예와 영광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게 되고,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과정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중국집에 식사를 하러 가서 요리가 나올 때, 살찌면 안 된다고 조금씩 먹다가, 마지막에 짜장면을 시켜서는 면발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끝까지 먹는 제 모습을 성찰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비싸고 좋은 것은 오히려 골라 먹고, 비싸지도 않은 짜장면은 그렇게 끝까지 악착같이 다 먹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어리석기 때문일까? 탄수화물 중독 때문일까? 아니면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 때문일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4-56) 그러시고는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십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7-58절)

가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시는 말씀, 또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해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더 깊이 감화되어, 그 말씀을 실현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되갚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괜실히 우리를 위해 희생까지 하신 예수님을 놔두고, 다른 어느 곳에서 나름 좋다고 여기고, 어리석게도 도움이 된다고 여겨, 다른 것들에 귀 기울이고 휩쓸리는 우리의 안타까운 방황을 더이상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으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의 길로 나아갑시다.

 

 

 

주님이 주시는 음식은 주님으로 살도록 한다. <요한 6, 52-59> 5월 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든 생명은 먹고 마심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고 활동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고 살도록 창조되어 주님이 주시는 음식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른다.” 하십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과 음식인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살아갑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것이 아무거나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체질에 맞게 먹고 마셔야 합니다. 요사이 한방에서 음식을 사람마다 가려서 먹으라고 체질 검사를 받고 그대로 하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건강 상담하는 사람이 이것 먹으면 안 되고 저것 먹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또한, 음식에는 참 양식과 참 음료가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음식은 체질에 따라 맞고 안 맞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음식이지만 체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이 준비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따라 효과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 효과도 없이 맹물 같지만, 어떤 사람은 진국을 먹고 마신 것처럼 강렬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는 주시는 막걸리가 무엇인지 알고, 깨닫고, 의식하고 음식에 접하는 사람과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의식 없이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먹고 마시는 사람은 유다가 최후 만찬 때 주님이 주신 빵과 포도주,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도 주님을 팔아넘긴 것같이 독이 되기도 합니다.

보약을 먹고 마시면 몸에 힘이 생기고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같이 주님이 주신 참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은 주님이 모든 이를 사랑하여 자비를 베푸신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베푸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자기 안에 사시도록 하는 것은 성자이신 주님이 아버지 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듯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인 것같이, 매일 성호경의 몸에 놓는 의미같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치는 너 안에 내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듯이 참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음식을 받아먹고 마신 사람은 성체성사의 은총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어제 뉴스 시간에 고상형 이란 12살 학생이 뇌사 상태에서 살 가망이 없어 세 사람을 죽음에서 살리려고 장기기증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말을 듣고 감동했습니다. 또한, 그런 기관이 있어 장기 기증으로 죽음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말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도 죽으며 어떤 장기를 기증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판단은 의사들이 할 일이지만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산다는 참 의미는 주님이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함을 모두 깨닫고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 5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참된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온 몸을
살리려고
온 몸이
되신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에게서
생명은
시작한다.

제멋대로
산 우리들에게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로
우리 삶을
보게 하신다.

살아갈수록
감사를 배우게
된다.

움켜쥐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나누는
삶이 된다.

참된 것은
닫혀있지 않고
복음처럼
열려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떠날 수 없는
우리들
생명이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먹고 사는
특별한
자녀들이다.

존재의 본질을
바꾸어 놓으신다.

공존(共存)을
넘어 하나가
되는 신비이다.

내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하느님의 것이다.

욕심이라는
자아 속에
빠져 있는
우리가

매일 주시는
살과 피를
통해
가장 좋은
사랑을
알게 되었다.

참된 사랑에서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시작이다.

참된 시작은
가장 구체적인
살과 피에서
시작되는
감사이다.

어떤 형제님이 교통사고로 다리에 큰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주님께 “일어나 걸을 수만 있게 해주십시오. 더 큰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백내장이라고 해서 수술을 한 어떤 자매님이 계십니다.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는데, 글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점점 시력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매일 기도했습니다. “볼 수만 있게 해주세요. 더 큰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분 역시 “주님, 살게만 해주세요. 더 큰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많은 분이 이런 식으로 기도합니다. 이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필요한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우리였습니다. 누군가가 간절하게 바라는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까요? 높은 지위를 얻어야 만족할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의 삶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하고 만족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도 이렇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그래서 감사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혹시 이런 말을 쓰지 않습니까? 어떤 위험한 일을 겪으면 “휴~~ 죽을 뻔했네.”라고 말하고, 힘든 일을 겪으면 “아이고~~ 죽겠네.”라고 말을 합니다. 그만큼 죽음에 대해서 힘들어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당신의 살과 피였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없이는 도저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총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박해라는 고통 속에서도 주님만을 믿고 따를 수 있었으며, 주님의 살을 모시는 것이 커다란 기쁨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살을 모시면서 주님의 본성과 결합되게 되고, 이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증거를 당신의 부활로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부활을 통해서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분명한 희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감사할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슬프도다! 부모는 나를 낳았기 때문에 평생 고생만 했다(시경).

 

부모님 덕분입니다.

지금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많은 책을 읽고 또 많은 글을 쓰고 있는 저의 모습은 순전히 제 부모님 덕분입니다.
부모님은 한 번도 제게 “~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늦게 일어난다고 뭐라 하신 적도 없고, 공부 안 한다고 혼내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늘 새벽 3~4시에 홀로 일어나 기도하셨고, 아버지는 늘 서재에 앉아서 책을 읽고, 무엇인가를 계속 쓰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저 역시 새벽 일찍 일어나게 되었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생활을 자연스럽게 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생전에 “왜 제게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알아서 잘할 것으로 믿으니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무조건 믿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강요한 적은 없지만, 저를 믿고 부모님 스스로 보여주신 모습이 지금의 제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이제 저 역시 다른 이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하겠지요.
보이는 삶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역시 남들이 보고 있으므로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 안에 행하신 놀라운 기적에 감사하고 찬미드려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스테파노, 필리포스에 이어 오늘은 사울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그 유명한 사울의 회개 스토리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신비하고 오묘하신 분이신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인생 여정을 통해 이루신 놀라운 업적을 돌아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서 11장 33절)

회개 이전 사울이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악명이 높았으면, 환시 중에 주님으로부터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고 세례를 베풀라는 명을 받은 하나니아스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사도행전 9장 13~14절)

사울은 그리스도교라면 치를 떨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바오로 사도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밝힙니다.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갈라티아서 1장 14절)

사울은 유다인 중에 유다인이자 골수 바리사이였습니다. 율법학교도 수료했고, 유다이즘에 대한 특별한 사명 의식에 활활 불타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유다교에 대한 배반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유다교에 대한 강력한 충성심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를 완전 박멸시키는 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소명이라고 여겼습니다. 회개 이전 사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릇된 확신, 외골수로 빠지는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에 대해서 나중에 바오로 사도는 여러 차례 공개석상에서 표현하곤 했습니다.

“나는 수석 사제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성도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를 감옥에 가두고, 그들은 처형할 때에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또 자주 회당마다 다니며 그들에게 형벌을 주어 예수님을 모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너무나 격분하여 나라 밖 여러 고을까지 그들을 쫓아갔습니다.”(사도행전 26장 10~11절)

이토록 열렬한 그리스도교 박해자를 굽어보시고, 큰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의 사도로 선택하시는 주님의 선택이 참으로 놀랍고도 은혜롭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과 주님께서 행하시는 신비 사이의 깊은 골이 우리를 크게 갈등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묘한 업적들 앞에서 그저 감탄하고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유다교인들 사이에서 촉망받는 차세대 지도라로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사흘간의 바닥 체험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유다 전역을 달려다니던 사울이었는데, 순식간에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토록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한 발자국도 내딪지 못하게 됩니다.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사흘내내 밥 한숟가락 뜨지 못했습니다.

하나니아스로부터 안수와 세례를 받는 사울은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시력만 되찾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비춤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볼 수 있는 통찰력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이제 사울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람에서 박해당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유다 최고의회 전권 대사로서 활약하던 사람에서 최고의회 의원들 앞에 심문을 당하는 죄수로 서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 안에 펼쳐진 주님의 놀라운 업적을 바라보며 평생 감탄하고 찬미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펼쳐지는 주님의 엄청난 업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 안에 행하신 놀라운 기적에 감사하고 찬미드려야겠습니다.

 

 

 

내가 속한 세상은 내가 먹는 ‘살과 피’(뜻)가 내리는 세상>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서로 논쟁하고 다툽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생명체는 창조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 없이는 생존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아기가 어머니 태중에서 어머니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살 듯, 모든 피조물은 자신을 창조해 준 창조자의 태중에서 창조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생존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하늘의 법칙입니다.
 

자동차가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그 만든 사람이 주는 연료와 돌봄을 통해 생존하고, 스마트폰도 창조자가 잘 관리해주고 충전을 시켜주어야 제 역할을 다 합니다. 그런데 자동차에 들어가는 연료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전기는 주인의 살과 피입니다. 그만큼 고생해서 번 돈으로 그것들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참 창조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살과 피를 양식으로 먹고 마시지 않으면 마치 버려진 자동차 안에 짐승들이 집을 짓는 것처럼, 혹은 버려진 스마트폰을 원숭이가 무언가를 깨는 데 사용하는 것처럼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창조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피조물은 창조자의 의도가 아닌 헛된 삶을 삶으로써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뱀을 구워 먹은 적이 있습니다. 동네 형들이 쥐를 먹고 소화가 되지 않자 땅 구멍으로 들어가지 못 한 뱀을 잡았습니다. 형들이 저에게 소금을 가져오라 하고는 뱀의 껍질을 벗겼습니다. 제가 집에 달려가 소금을 가져왔더니 형들이 이미 뱀을 불에 구워놓았습니다. 저는 먹기 싫었지만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먹어야만 했습니다.
 

얼마 뒤 시장에서 약을 파는 사람을 어머니와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쭉 앉아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더니 저를 나와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약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리고 20분 정도 지났을 때 바지를 내려보라고 했습니다. 초등학생이라 창피한 것을 알았기에 많은 사람 앞에서 내리기를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팬티까지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길고 흰 회충 몇 마리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사람이 회충을 발로 밟자 그 안에 또 회충 새끼들이 가득했습니다. 정말 끔찍한 장면이었습니다.
 

아마도 뱀을 먹었을 때 그 회충이 제 몸속에 살게 된 것 같습니다. 뱀을 먹었던 것은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공동체에 머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는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이 사실을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반대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먹는 양식이 있는 곳에 나도 머무릅니다. 우리가 부모의 양식을 먹고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이렇듯 뱀의 뜻을 따르게 되고 뱀에 의해 나 자신이 잠식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자아가 죽고 부모의 뜻이 나를 살립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부모의 뜻을 따를 수 없을 때는 자기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기생충 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려면 그 자아를 죽여줄 양식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그 양식이 주어지는 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 안의 자아를 죽여 그것이 만드는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합니다. 이것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로 나오는 과정과 같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누구의 뜻을 따르겠습니까? 뱀의 뜻을 따릅니다. 모세가 들고 내려온 십계명 판은 곧 하느님의 뜻을 의미하고 만나를 의미하며 하느님의 살과 피를 의미합니다. 또한, 생명 나무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먹기를 거부한다면 내가 하느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뜻을 따라야 하므로 우상 숭배자가 됩니다.
 

광야는 하느님의 자궁입니다. 하느님의 자궁에서는 하느님의 양식이 탯줄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 탯줄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양식을 먹는 이는 이집트에 머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양식은 광야에서만 내리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하느님의 살이고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이집트에서 영원히 파라오의 노예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곳입니다. 그러니 모기나 기생충 같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는 광야에서만 창조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요? 부모의 살과 피로 삽니다. 태아에서부터 그렇고 세상으로 나와서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자궁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양을 공급받고 안 받고는 우리 자유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 안에 나를 이기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나에 사로잡히면 마치 떨어져 나간 포도나무 가지처럼 말라서 버려집니다.
 

사람은 창조자의 살과 피로 삽니다. 내가 지금 먹고 마시는 양식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분명 그 힘으로 살고 있을 것이고 그 힘이 흘러나오는 세상에 머물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6년 전입니다. 아는 자매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데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사제로 사는지 14년이 되어 가는데 어떻게 지낼 만 한지요?” 저는 그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지낼 만한 것인지, 아니면 마지못해서 지내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제 생활이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시장에서 물건 바꾸듯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게 이런 이야길 하였습니다. 둘째 애가 성당에서 복사를 하는데 사제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참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제가 대답도 하기 전에 한 자매님께서 이렇게 답변을 하였습니다. “처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맡은 신자들을 열심히 돌보며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친절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어때요 정확한 답변인가요? 수도자나 사제들의 독신을 단순히 효과적인 사목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효과주의나 경제마인드로 접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목활동만 잘 한다면 독신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포기하지 못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을 버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回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지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보고나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됩니다. 무엇이 바오로 사도의 삶을 바꾸었을까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체험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지금 죽는 것도 좋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될 수 있었다면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성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를 받아 모시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단순한 기억이 아닙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최후의 만찬’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온전한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면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회심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매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유대인들은 토라의 테두리에서 구원의 역사를 보려고 하지요. 물론 그동안 우리가 들어왔던 이사야 예언서에서 ‘주님의 종의 노래’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 들인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메시아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구약의 한정된 신관(神觀)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요한을 통해 전해지는 ‘살과 피의 가르침’도 거부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세계를 배우면서 ‘자신을 비우라’라는 말과 함께 자신을 묶어두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면서도 정작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교회공동체에서 ‘식탁의 봉사자’로 일하던 스테파노를 죽이는 이들의 옷을 맡아주던 청년 사울(사도 7,58)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사고에만 젖어서 당신과 공동체를 박해하는 사울을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가두었던 유대인의 한정된 사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쓰시기 위해서 과거로부터 그를 가두었던 그 자신의 세계를 비우게 하십니다. 사울은 회심을 통해서 유다 인이 갖는 한정된 율법 세계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참 모습을 뵐 수 있었고 회심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로 들어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유대교의 열렬한 신봉자로 그리스도교 인들을 잡아서 예루살렘까지 끌고 갈 정도로 혈기가 왕성했었습니다.

 

하나니아스가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보아도 그리스도 공동체에 그가 얼마나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사도 9,13)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니야에게 말씀하시지요.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 9.15)

 

사울은 예수님을 체험하고 나서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극과 극의 삶으로 나선 것입니다. 사울이 그토록 헌신적이었던 유대교를 반대하며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편에 섰으니 유다인들에게는 그가 적이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삶을 묵상하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참으로 심오하고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겸손해야 하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6)라고 말씀하신대로 사울에게 펼쳐지는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통의 연속이었고 마침내 순교로 마감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며 따르는 사람들을 당신의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듯 초대교회에서 이미 성체성사가 거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믿음의 공동체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아직도 구약에서 자유롭지 못해서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살과 피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사울은 두 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고 그리스도 공동체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미더워하지 않거나 멀리하려는 눈치입니다. 이런 와중에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사울은 그의 고향인 타르수스로 가서 대기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 머뭄은 그에게 시련이었고 그리스도와 복음 선포를 위한 준비와 성숙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교와 대조를 이루는 그리스도 공동체는 이중의 어려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시달려야 했고 안으로는 개종한 유대인들의 거부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공동체의 유다인들에게는 세례와 성체성사와 그리고 성체성사의 ‘살과 피’는 큰 장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 인들은 빵과 포도주를 통한 살과 피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논란이 있었던 것입니다.1)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6,52)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분명히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사실을 강조하십니다.2)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4-55)

 

예수님께서 이어서 율법에 젖은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진리를 가르치시며 구원을 주는 ‘생명의 빵’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7-58)

 

우리에게 까지 전해지는 성체는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박해와 이단, 인간이 갖는 한계를 극복한 소중하고 놀라운 주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아울러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을 사도 바오로로 선택하신 주님의 놀라우신 구원 계획과 너그러우심을 묵상합시다. 아울러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6,56) 하시는 주님 말씀을 우리의 삶에 더욱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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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대인들에게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새롭고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구약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살을 먹는 것도 생소 하겠지만 동물의 피를 마시는 것도 금지하는 율법(레위 7.41)에서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예수님께서 일전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마태 9,17; 마르 2,22; 루카 5,37-38)라고 말씀하신대로 구원의 새 결단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데,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라고 말한다.”(루카 5.39)라는 여분의 말씀도 남기신다.

 

 

 

 

주님을 놓치면 구원을 놓친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제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며 그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생명의 빵이시니 그 빵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함은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지만 지당한 말씀이라고 치부만 하고 지나치면 안 되기에 오늘은 이 말씀을 곱씹어보려고 합니다.

주님의 생명은 우리 인간의 생명과 달리 지음이나 낳음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 생명으로부터 모든 생명이 나오고 시작되는, 그래서 우리의 생명도 있게 하신 근원적인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있기 전에 우리 생명이 있지 않았고, 이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생명이 있게 되었기에 나의 생명을 주십사고 요청할 나도 없었고 그래서 나의 동의 없이 나를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까?

이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하나요?

 

제가 음악 방송을 듣다 보면 방송을 통해 사랑과 감사를 전하는 청취자들의 편지를 듣게 되는데 나의 딸이 되어주어서 고맙다거나 나의 엄마가 되어주셔서 고맙다는 내용을 듣곤 합니다. 그리고 이때 저는 흐뭇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찌 이런 자식이 나에게서 나왔냐고 하거나 왜 나를 낳았냐고 부모자식 간에 서로 원망하는 것에 비하면 이 얼마나 흐뭇한 관계입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것을 싫어하실 리 없다는 지혜서 말씀처럼 당신에게서 나온 우리를 싫어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데 혹 우리는 감사는커녕 왜 나를 있게 하셨냐고 하느님께 원망하지 않는지요.

 

하느님의 생명은 근원적 생명일 뿐 아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라는 주님 말씀처럼 마지막 날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적인 생명이십니다.

나를 있게 하고 구원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애를 낳아놓고 내팽개친 자격 없는 부모처럼 자격이 없는 하느님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고맙게도 하느님은 끝까지 사랑하시고 마지막에 살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감사는커녕 투덜거릴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언제 구해달라고 했느냐는 투이지요.

이는 마치 깡패 집단에 속해 방탕하게 살아가는 자식을 큰 대가를 치르고 빼어냈더니 이렇게 살게 내버려 두지 왜 거기서 빼냈느냐고 오히려 성을 내는 것과 같겠지요.

 

실로 미래도 구원도 생각지 않고 이 세상을 사는 포기한 인생들이 있습니다.

구원을 포기한 인생이야말로 대학을 포기한 인생보다, 취업이나 결혼을 포기한 인생보다 포기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포기한 인생은 아니지만, 정신없이 사는 인생은 많고 어떤 때 우리도 그렇게 허방지방 인생을 삽니다.

이는 목표를 지향하지 않고 정신없이 노를 젓는 것과 같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를 젓긴 했는데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포기한 인생은 아니지만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길잡이신 주님을 놓치면 구원을 놓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의 일치하고픈 주님의 마음이 읽혀집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백성에게 내어줄 빵이 곧 당신 살이라는 말씀에 유다인들은 충격을 받아 서로 논쟁을 벌입니다. 육의 귀와 육의 마음으로는 예수님 말씀에 담긴 참 뜻을 좀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머무름"먹는 것이 그 사람을 이룹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이 우리의 뼈와 살을 이룰 뿐만 아니라 정서와 인성에까지 영향을 미치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먹는 행위를 머무름으로 연결하십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는 존재 안에 스며든 그 살과 피로 인해 그분의 일부가 되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그와 하나가 되어 주십니다. 머무름이 일치라는 궁극의 차원으로 심화됩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당신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표현은 내 존재와 삶의 의미가 곧 당신이라는 진심의 고백이지요. '말미암음'은 참으로 강한 결속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근원이시고 원동력이시듯,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모시는 이는 철저히 예수님으로 인해 존재하고 사랑하며 움직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존재와 행위의 이유가 되시는 겁니다.

"머무름과 말미암음"으로 우리는 온전히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르심으로 우리 또한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지요. 천상 예루살렘의 혼인 잔치에 이르기까지 불완전하나마 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일치의 은총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수님은 사울에게 이 일치의 관계로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 선 사울이 그 일을 자청해 수행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충격으로 땅에 엎어져 누구신지를 묻는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시지요.     

예수님은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 안에 당신이 계시고, 또 당신 심장 안에 그들을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 일치한 두 존재는 그 무엇으로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위협도, 박해도, 죽음도 이 일치를 무너뜨리기는 커녕 더 견고히 만들어 줄 뿐이지요.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 9,15)다마스쿠스에 사는 주님의 제자 하나니아스에게 주님께서 이르십니다. 사울의 악명을 들은 터라 그에게 가기를 주저하는 하나이아스에게 예수님은, 사울 역시 예수님과의 머무름, 말미암음의 관계로 초대받은 사람임을 밝히십니다.

선교는 교인의 수를 늘이는 활동이기 이전에, 누군가를 주님과 머무름, 말미암음 관계를 맺는 은총으로 초대하는 선행이 아닐까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는 이는 다른 이에게도 그 행복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될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울고 또 웃는 것처럼 주님 또한 우리로 인해 울고 웃으십니다. 그분을 모시는 우리가 그분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며 살아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그 사랑 안에 깊이깊이 잠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성체성사적 삶과 회심, - 주님과의 일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후위기일 것입니다. 벌써부터 더위가 시작된 조짐이 보입니다. 2015-2020년까지 가장 더운 6년이었으며,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가 ‘나락의 경계’에 와 있음을 경고합니다.

 

“우리는 나락의 경계에 서있다. 원인은 분명하다. 인간의 활동과 결정, 어리석음으로 인한 기후파괴이다. 2021년은 행동의 해가 돼야 한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등 국제사회는 온실가스 배출량에서 세계 8-9위 수준인 한국을 콕 찍어 온실가스 감축 목표 상향을 압박해 왔지만, 한국의 연내 상향 약속은 이번 회의에 참여한 다른 나라들-미국, 영국, 일본등-과 비교할 때 초라한 수준이라 합니다.

 

어제 4월22일은 ‘지구의 날(Earth Day)’이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회칙이 그 유명한 ‘찬미받으소서(Laudato sí)’입니다. ‘찬미받으소서’ 생태회칙은 우리에게 새로운 통합적 생태적 삶과 회심을 촉구합니다.어제 교황님의 ‘행동해야 할 시간이다(It is time to act!)!’ 란 호소도 참 강렬했습니다. 위 모두는 인터넷 1면 톱기사의 내용들이었고, 참으로 생태적 회심의 삶과 더불어 성체성사적 삶이 절실한 때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마침 어제 산책중 꽃잎 덮인 땅이 신비스런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어 써놓은 “꽃잎이, 꽃별이’란 글입니다.

 

“꽃잎이

꽃눈이

꽃비가

꽃별이

내렸어요

땅이 하늘이 되었어요

위로와 기쁨

땅이 구원받았어요.”

 

꽃이 상징하는 바, 천상은총이요 땅이 상징하는 바 지상의 인간들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참된 회심을 통해서 마음을 활짝 열때 만이 천상은총도 효력을 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땅이 하늘이 되는, 땅의 사람이 하늘의 사람이 되는 은총의 시간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시간입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오늘 금요일까지 계속된 요한복음(6,22-59)의 주제는 ‘생명의 빵’, 성체성사였고 오늘로서 끝납니다. 또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그 유명한 바오로의 회심 사건입니다. 헛된 삶, 가짜 삶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완전히 부활하여 진짜 삶을 살게 된 바오로입니다.

 

이 회심은 보통 중요한 사건이 아닙니다. 한번뿐이 없는 유일무이한 소중한 선물같은 삶을 참된 회심이 없어 참나를 살아보지 못하고, 참나를 알지도 못하고, 무지와 허무, 무의미와 절망 중에 허망하게 가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어제 기도를 청하려 방문했던 어느 희귀병 환자 자매의 간곡한 당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자꾸 절망하게 됩니다. 버텨내기가 참 힘들어요!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낼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집무실 게시판에 한눈에 보이도록 붙여놓고 매일미사중 기억하며 기도드릴 것을 약속했습니다. 질병의 경우, 의사가 알 수 있는 부분은 20%라 하고 80% 영역은 모른다 합니다. 흡사 농사에 있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80%라 하면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20%라하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새삼 최고의 의사이자 농부이신 하느님과 더불어 우리의 백절불굴의 믿음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도대체 누가 극성스런 열혈의 사람, 사울이 회개하리라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지요! 그러나 전능하신 하느님은 결정적 때를 기다리고 계시다가 마침내 때가 되자 사울을 회심으로 이끄십니다. 말 그대로 회심의 은총입니다. 사울을 결정적 회심으로 이끈 다음 부활하신 주님과 사울의 실감나는 만남은 늘 읽어도 새롭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당신 제자들과, 이미 교회의 지체들과 하나된 부활하신 예수님이요, 그러니 형제자매들에 대한 박해는 그대로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박해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회심의 은총을 통해 주님과 완전 일치를 이뤄 새롭게 태어난 사울입니다.

 

사울은 사흘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합니다. 흡사 죽으셨다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연상케 합니다. 주님의 일꾼, 하나니아스의 결정적 구원의 선언과 이어지는 감동스런 내용입니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주님과 함께 완전히 부활의 파스카의 참 삶을 살게 된 사울입니다. 파스카 은총이 나쁜 열정을 좋은 열정으로, 부정적 본성이나 본질을 참 좋은 주님의 본성과 본질로 바꿔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죄에 물든 본성을 파스카의 영약으로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사울의 비상한 결정적 회심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평범한 일상에서의 끊임없는 회심이 더 중요하고 실제적입니다. 말 그대로 평생 ‘회심의 여정’중에 파스카의 은총으로 날로 주님을 닮아 참내가 되어 참 삶을, 진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이요, 이에 대한 최고의 처방이자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주님과의 결정적 일치에 성체성사의 선물 은총보다 더 좋은 선물 은총은 없습니다. 성체성사의 진수를 보여주는 다음 주님 말씀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내 살은 참되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을 영원히 살 것이다.”

 

그대로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체성사의 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지상 예수님의 육체적인 살과 피가 아니라 천상적 사람의 아들의 영으로 가득한 성체와 성혈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참된 회심으로 이끌고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며 이런 항구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완성되는 성체성사임을 깨닫습니다. 삶과 분리된 성체성사가 아니라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삶, 성체성사적 삶이 진짜 참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파스카 미사은총으로 회심한 우리 모두와의 일치를 굳건히 하십니다.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 아멘.

 

 

 

<당신과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내가 먹음으로써

당신에게 나는 먹힙니다

 

당신을 내가 품음으로써

당신에게 나는 안깁니다

 

당신께 내가 머무름으로써

당신은 내게 머무르십니다

 

당신으로 내가 죽음으로써

당신은 나로 살아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함승수 신부님

1956년 명문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간 뒤 실종되었습니다. 아우카족은 그 당시까지 접촉해서 살아남은 백인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사나운 부족이었지만, 엘리엇과 친구들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선교를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을로 들어간 뒤 실종되었고 가족들은 이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으나, 엘리엇과 친구들 모두가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언론은 이 사건을 ‘이 무슨 낭비인가!’(What a waste!)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 했습니다. 전도유망한 청년들이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을 당했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된 아내들이 남편들의 뒤를 따라 아우카족에게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녀들은 정글에서의 생존법과 아우카족과 친해지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또한 짐 엘리엇의 부인인 엘리자벳은 2년 동안 간호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뒤 그들은 남편을 죽인 아우카족 마을로 들어가 정성껏 부족원들을 섬겼습니다. 추장을 비롯한 부족 구성원들은 그녀들의 헌신에 감동하여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본국으로 떠나던 날, 추장이 그녀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그러자 엘리자벳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남편들이 그렇게도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어했던 말을 들려주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그 후 아우카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짐 엘리엇 일행을 창으로 찔러 죽였던 다섯명의 부족원 중 4명은 목사가 한 명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엇 일행이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려다 희생당한 것은 세속적인 시각으로 보기에 실패한 미션이었고 허망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뜻을 이어받은 아내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이 있었기에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를 아오카 부족원들이 감사와 믿음으로 받아들여 부족원들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 깨달음은 곧 그분의 가르침과 뜻을 ‘유지’(遺志)로 받들어 희생과 봉사,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품 안에,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마음과 영 안에 머무르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의 사랑 덕분에, 그분께서 주시는 위로와 힘 덕분에 기쁘게 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체성사를 통해 얻는 은총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 제3주간 금요일>(2021. 4. 23. 금)(요한 6,52-59)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6,52).”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알아들은 척 하는 사람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씀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한 6,42)” 라고 하면서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말다툼을 벌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신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 6,66).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이천 여 년이 흐른 지금도 성체성사 교리는 여전히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교리입니다. 그리고 ‘살’과 ‘피’ 라는 표현도, 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표현도 여전히 듣기가 너무 거북한 표현입니다. 성체성사 교리는 듣기가 너무 거북해도, 또 이해되지 않아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교리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교리입니다.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온전히 깨닫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1코린 13,12).>

 

예수님께서는 듣기가 거북하다고 말하면서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지 않으셨고, 그들을 위해서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바꾸지도 않으셨고, 남아 있는 사도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라고 물으셨습니다(요한 6,67).

(이 질문은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질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지만 믿는다는 대답입니다. 바로 이 태도가 ‘말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그 한계를 뛰어넘는 일입니다.(알아들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해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3-58).”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우리는 하느님의 ‘젖먹이’이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어미’로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우리는 살고 죽는 일을 분간하지 못하는 철부지 병아리들이고, 예수님은 그런 병아리들을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애를 쓰는 암탉 같은 분이십니다.)

이 말씀들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나를 먹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을 연결하면,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연상됩니다.

어머니가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은 곧 ‘자기를 먹이는 것’입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몸 안에 있을 때에는 분명히 그렇게 되지만, 태어난 후에 젖을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태중의 아기가 어머니의 생명력을 받아먹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너희가 나의 생명력을 받아먹지 않으면 너희는 살 수 없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생명력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 즉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먹이시는 일을 ‘상징’하는 성사이면서, 동시에 실제로 예수님의 생명력이 전달되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사는 원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일입니다.)

‘살’과 ‘피’는 예수님의 생명력을 뜻합니다.

‘먹는다.’는 표현은, 믿는 것 이상의 강한 ‘일치’를 뜻합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는 성사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룬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성사“ 라고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참된 양식’, ‘참된 음료’ 라는 말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예수님과의 ‘일치’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영원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참되다.’의 반대말은 ‘거짓되다.’이지만, 몸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음식이 거짓된 음식인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참된 양식’은 ‘영원한 양식’으로 해석되고, 몸을 위한 음식은 ‘허무한(썩어 없어질) 양식’으로 해석됩니다(요한 6,27). 물론 ‘허무한(썩어 없어질) 양식’도 우리가 지상에서 살아가려면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몸을 위한 양식’과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을 모두 가리킵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 라고 물으면?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참된 양식’이 더 중요하다.” 라고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처음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시기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들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몸을 먹고, 사람의 피를 마신 데.”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을 이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이렇게 해석합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53절) 여기저기서 “이렇게 하면 산다. 저렇게 하면 산다.” 하면서 우리를 유혹하는 광고들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해서 광고에서 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선택한 것을 가지고 이제 노력해야 하는 또 하나의 숙제를 떠안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온전히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54절) 우리를 진정 배부르게 하고 목마르지 않게 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성체성사를 통해 영합니다. 성체성사를 영하면, 풍요로움을 느낍니다. 배가 불러오는 것은 아니지만, 영이 채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다른 무엇을 먹고, 얻는 것과는 달리, 성체성사를 영하면 우리 영이 제 자리를 잡은 것 같고, 푸근하며, 평안합니다. 영과 정신과 마음이 만족합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55절)

성체성사를 영하면, 내 안에 주 예수님께서 오셨음을 알게 되고, 내 영이 주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을 느낍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56절) 성체성사를 영하면, 주 예수님과 하나되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평안함이 나를 휘감으며, 세상살이에서 겪어온 어려움과 갈등을 잠시 잊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과 갈등으로 입은 상처와 아픔을 위로해 주고 씻어주며, 점차로 그 어려움과 갈등에 맞서 주 에수님의 말씀을 실현하며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57절)

예수님의 몸은 이 땅에서 천국을 느끼게 해 줍니다. 에수님의 몸을 모시면, 하늘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느낍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

사람답게 사는 것, 사람으로 사는 것,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 긴장과 갈등 없이 평안하게 사는 것, 이것이 성체성사를 영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영함으로써 이 세상에 같은 평화와 안녕을 전해주는 사도가 되는 성사적 삶입니다. 성체성사를 영하며 주 예수님과 함께 생생히 살아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갑시다.

 

 

 

주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 <요한 6, 52-59> 4월 23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빵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줍니다.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면 하루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이의 평등 원칙을 세워 전례 개혁을 했습니다. 옛날에는 성체 난간이 있어서 제대 위에 미사를 집행하는 사제나 복사 외에는 오르지 못하고, 영성체 때 난간에 무릎 꿇고 성체를 영했습니다. 지금은 격차도 없고 하늘 향하여 사제가 미사를 봉헌하지 않고 신자 석을 향해 둥근 원을 그리며 전례가 진행됩니다. 피라미드식 교회 구조가 원을 그리며 하느님은 저 멀리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고 한 원과 같이 모두 함께 현존하십니다.

성체를 축성하는 사제나 영하는 신자나 다 같은 원의 선에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중심에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사제가 되려고 들어갔을 때 만일 입학 시켜 주지 않으면 사제가 되려는 열망으로 신학교 앞에서 죽겠다고 했습니다. 입학하고 라틴어를 배우며 성체 축성하는 문구를 가슴에 품고 살만큼 열정을 갖고 사는데 위기가 왔습니다. 내 탓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인한 것인데 쫓겨날 지경에 이르러 성당에 가서 주님에게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살려 주시라고 청하니 한참 후 “무엇을 걱정하느냐?” 하시기에 사제직의 임무 중, 성체 성사 축성의 열정을 이야기하니 성체를 축성하는 것이나 축성된 성체를 모시는 것 다르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밥하는 사람과 밥상에 함께 앉은 사람 차별이 없듯이 평등하다고 하시며, 그러니 어찌 될지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셔서 마음에 평화를 얻고 기다리던 중 아무 일 없이 지나갔습니다. 이 체험으로 사제가 되어도 이런 이상한 말을 하는 사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떤 본당 신부가 이런 강론을 했습니다.

“신자 여러분! 신자 천명, 만 명 있어도 빵을 주님의 몸으로, 포도주를 주님의 피로 변화하지 못하지만, 사제 한 사람이 가능합니다.” 맞는 말씀이지만 다음 “그러니 여러분은 본당 신부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는 같은 제단 밥상 위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주님의 몸을 함께 먹고 마십니다. 음식 앞에 평등한 것같이 주님 앞에 모두가 평등합니다. 세상을 하늘에 비하면 마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모두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모두가 손잡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에페서 1, 18-19. 주님의 몸을 영하는 은총에 불린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희망에 차 있는지,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부요한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두든 성도는 희망과 영광에 참례합니다. 하느님 앞에는 특별한 자리가 없습니다. 태양의 빛이 온 천지를 골고루 비추듯이 하느님의 은총도 평등하게 내립니다. 함께 갑시다. 아버지의 집에 영원한 생명의 초대에 함께 갑니다.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혼의 성숙은 하늘음식인 하느님 말씀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빵과 포도주를 살과 피로 강조하시며 우리와 하나 되려 하신 예수님!
고차원하늘나라 이야기를 납득시키기 위해 아예 직격탄 쏘신 예수님!
이 말씀을 100% 이해하시려면 죽어야 하니까 그냥 믿기로만 합시다.

빵과 포도주는 그 시대 기본식사 형식이고 우리에겐 밥과 국이겠지요.
인간주체인 정신(精神) 혼의 성숙은 하늘음식인 하느님 말씀뿐 입니다.
인간 존엄성 근원은 예수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을 통해 내려오는 예수님 정통교육은 믿음형식 아니미즘입니다.
사회나 학교에서는 마음의 교육보다 데이터들의 알고리즘 형식입니다.

 

 

 

‘구호물자 신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저 안셀모입니다’ 악수를 하며 ‘네, 반갑습니다. 교우이시군요,’ ‘저 윤 00신부입니다’ 그러자 그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들려준 말은 ‘우리 어렸을 때, 신부님은 모두 외국 신부님 이셨어요.’

안셀모, 4,21 축일이 막 지나고 있었다. ‘축일을 지났지만 축하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몇마디 대화에서 그 형제는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음을 즉시 알아챘다. 그는 겸연쩍었던지 스스로를 ‘구호물자 신자’ 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6,25한국전쟁 직후 무척 가난했던 시절 서양 신부님이 나누어 주는 구호물자가 있었는데 하나 더 얻으려고 성당을 다녔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그때 신자를 자칭 ‘구호물자 신자’라고 말했다. 신부, 서양신부, 그리고 그후로 그에게 방인신부는 기억에 없기에 신부인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의 신앙은 멈춰섰고 그의 세례명 하나 아련히 기억하고 오늘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6,53-55)

이 말씀은 그에게 지식도 아니고 결코 이해될 수도 없으며 삶의 실천으로 응용될 수도 없는 생명력을 잃은 말씀일 뿐이다. 그에게는 아련히 기억나는 세례명과 ‘구호물자 신자’로만 남아 있다.

‘생명의 빵’이 되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또 하나도 잃지 않게 하시려 오신다. 하느님께서 이 뜻을 이루어 주시며 우리에게 풍요의 생명을 만들어 주신다.

그는 전원주택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가꿔놓은 삶의 장소에서 그와 다르게 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다 함께하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그의 주변으로 그를 걱정하는 신자가 하나 둘 늘어나고 있음이다. 마음이 놓인다. 헤어지며 나는 그에게 강복을 주었다. 그는 나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지난 코로나 19사태가 시작되면서 한 동안 우리는 미사를 하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두 달 동안이나 미사를 못하고 있다가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가 재개 되었을 때 많은 분들이 정말 감동을 하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의 식구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구가 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 한 가족으로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가족이 되는 것 자체가 바로 구원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예수님과 일치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내 삶을 이끌어 가실 때 우리는 구원의 길을 가게 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제 아는 것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과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질 만큼 아리송한 말씀입니다. 분명히 문법적으로 부족함 없는 문장이지만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기에 이해를 했다고도 못 했다고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에 빠져버립니다. 논리적인 도식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면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아 다시 살아날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게 되는 동시에 당신께서 머무시는 거처가 되는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율법에서 피를 마시는 행위를 부정한 것으로 가르친다는 점입니다. 금하는 것에 대한 실천적 요구처럼 보이는 말씀인 탓에 예수님의 권위마저

부정당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구원 역사를 진리로 고백하는 오늘날 신앙인 입장에서는 이 같은 유다인들의 고민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즉 성자 하느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구세사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할 일은 분명해집니다. 당신 생명을 바쳐 우리에게 생명을 얻어주신 그분의 사랑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굶주림을 달래는 빵과 포도주라는 음식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믿음이 확인하게 하라.

    -예루살렘의 키릴루스-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구원자께서 사람을 먹는 풍습을 부추긴디 생각하며 불쾌하게 여기고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옛 계약에 제대 빵이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옛 계약에 속한 것이기에 종말을 맞았습니다. 새 계약에는 육체와 영혼을 성화하는 하늘의 빵과 구원의 잔이 있습니다. 빵은 육체와 짝을 이루고 말씀은 영혼과 찍을 이룹니다.

그러니 이를 단순한 빵과 포도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선언하신 대로, 이는 살과 피입니다. 우리의 감각이 그와 달리 느낀다면, 믿음이 그대에게 확인시켜 주도록 하십시오. 맛으로 이 문제를 판단하지 말고, 그대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도록 허락되었디는 사실을 믿음의 토대위에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십시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 5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는
십자가의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양식과 음료처럼
피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목마름이
있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다.

참된 사랑에
목마른
우리들 삶이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음료가 되시고
빵이 되신다.

그 어떤 것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깨닫게된다.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사람들이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삶의
배고픔과
삶의 갈증을
아시는
주님이시다.

삶의 중심에는
우리를 살게하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있다.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음료는
일시적이거나
찰라적이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우리를 위해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되신다.

우리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은 서로를
살린다.

하느님의 뜻은
살과 피를 통해
우리 삶속에서
이루어지길
원하신다.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참된 음료와
참된 양식으로
오시는 주님은
참된 삶을
일깨워주신다.

참된 삶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참된 사랑의
주님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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