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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3년 5월 6일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3.05.06|조회수57 목록 댓글 0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44-52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7-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는 유다인들에게, 이제 자신들은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서겠다고 선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당신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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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했는데 배척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선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에게, 당신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시며, 당신 이름으로 청하면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고, 관계가 지속되려면 당연히 서로 만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제시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립보의 청원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느님을 뵙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도 여전히 이를 요구하는 황망함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된 아버지와 아드님의 일치가 또 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여 주어도’ 그 안에 있는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독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유다인들을 고발하며, 이제 그들을 떠나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라고 담대히 선언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전하여 줍니다. 결국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을 ‘보게 된’ 이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 세상 땅끝’에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화답송 참조).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한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에게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우아함’과 ‘하느님을 박해하는 우둔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경종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설명이나 훌륭한 해석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장에 현존하여 계시는 하느님은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상황은 우리 주변에 복병처럼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여 나가는 것은 종교적 허상일 뿐이고 그만큼 쉽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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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유다인들의 믿음은(탈출 33,20 참조)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한계성에 관하여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예언자들과 성경을 통하여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때가 차자 외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온전히 계시하셨습니다. 필립보는 “나를 알게 된 이는 아버지를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아버지를 뵐 수 있게 하여 달라고 청합니다. 
지금껏 주님께서 아버지와 이루시는 일치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이 참으로 무색해집니다. 주님께서 오천 명을 먹일 빵을 ‘어디서’(주님에게서) 구할 수 있는지 물으셨을 때도 필립보는 ‘얼마’(이백 데나리온)가 필요하다며 동문서답합니다(요한 6,5-7 참조). 필립보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과, 주님께 모여든 이들을 모두 배불리고 싶은 열정을 지닌 훌륭한 제자지만, 여전히 자기 생각과 기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충분하다’(동사 ‘아르케오’)는 표현은 두 번만 나오는데(6,7; 14,8 참조), 모두 필립보가 한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뵙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이백 데나리온은 되어야 ‘충분하겠다’는 그의 기준은 매번 주님의 뜻과 달랐습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만족하는 방법으로만 주님을 찾는 자는 진리를 유연하게 받아들여 참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제1독서는 자기 생각에 갇혀 진리를 고집스럽게 밀어낸 유다인들과,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기쁘게 살며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한 이방인들의 서로 어긋난 모습을 전합니다. 요즘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산란한 마음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바람은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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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를 가르치거나 강론을 할 때 ‘우리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믿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쉽게 가르치고자 찾은 예화나 방법은 때로는 혼란을 불러 오고, 잘못된 것을 가르치거나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의 교리, 그 사람의 하느님만을 전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립보의 간청은 오늘날 우리가 잘못 드리고는 하는 기도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제가 생각하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버지, 당신은 저에게 어떤 분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내 안에 가두어 버리고,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거나, 때로는 교회의 가르침이 나에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 때, 하느님과 교회를 원망하거나 외면해 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묵상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주님 뜻에 맞는다면, 우리가 하는 봉사가 그분의 일이라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유다인들의 박해와 내쫓음에도 기쁨으로 가득 찼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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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바로 곁에 두고도 하느님을 모르는 일이 가능할까요? 오늘 복음의 필립보는 예수님을 두고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께서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오늘 복음의 필립보를 통하여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 일이나 취미 때문에 또는 우연히 알게 된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수많은 지인들, 그들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요한 복음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는 ‘육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대상화된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이 부족하고 못난 인간의 한계가 곧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자리라는 놀라운 발견입니다.

날마다 자신의 부족을 탓하면서 내일만을 향하여 있는 우리의 시선은 그리 복음적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 부족하다는 우리의 모습 안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우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더 나은 내일의 자신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이런 모습은 자기 부정이자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부정일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을 우상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자신이 꿈꾸는 내일에 우상 하나를 세워 놓고 그것이 하느님이라 고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생각나는 사람, 지금 기도를 해 주고 싶은 사람, 지금 마음이 불편한 사람, 그 속에서 당신을 제대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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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열심히 벌어다 주는 남편에게 아내가 “이젠 돈 말고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세요.”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남편들은 황당해 할 것입니다. 그들은 피땀이 서린 돈이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편이 벌어 온 돈이 사랑을 모두 표현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사랑이 담긴 선물’로 표현됩니다. 선물을 보면서 그 안에 담긴 사랑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도 이와 같은 질문을 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물이십니다. 아버지의 피땀이 서린 사랑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면 아버지를 뵌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면 아버지의 사랑을 본 것입니다. 선물을 믿어야 선물을 주신 분을 믿게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보여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필립보와 같은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신 선물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선물은 바로 당신께서 피 흘리심으로 탄생시키시고 세상에 세우신 ‘교회’입니다. 교회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내시는 당신 사랑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보면서도 예수님을 보여 달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보면서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유다인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배척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다른 민족들에게 가겠다고 합니다.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선물을 주시는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선물을 먼저 믿어야 그것을 주시는 분을 받아들이고 주시는 분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교회를 받아들여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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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은 볼 수 없는 분이시니,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때로는 허상이거나 자기기만 또는 자신의 바람을 투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필립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예수님을 통해서라도 하느님을 뵐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모양입니다. 그런 필립보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교의 신비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의 세상에서 보고 듣고 만져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실로 체험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얼굴이시고,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시며,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십니다. 

강생의 신비인 하느님 말씀의 육화는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입니다. 모든 종교는 저마다 한계를 지닌 인성과 대조되는 초월적 신성에 대하여 다양하게 가르치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들과는 달리 초월적 신성의 하느님께서 한계를 지닌 인성 안에 머무르시며 인간을 영원한 신적 생명에 초대해 주고 계시며,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절대적 기준이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한 인격과의 만남에 있다고 확신하며 가르칩니다. 

한 인간의 완성이 고통과 죄,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그 희망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믿는 이에게 더 이상 세상의 한계들은 영원한 희망을 가두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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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또는 내가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다면 그분께 원하는 것을 다 달라고 청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믿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표현은 직접 하지 않지만,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감춘 채 하느님을 내 마음속에 우상으로 만들어, 자동판매기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는 필립보의 말 속에는 이런 우리의 마음도 숨어 있습니다. “당신이 해 주시기만 하면 …….”이란 조건을 걸고 하느님과 거래를 하는 우리 속마음을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우리 믿음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내가 원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손길과 하느님의 말씀을 예수님 안에서 보는 사람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유다인들 앞에서 그랬듯이, 사람들의 모함과 박해에도 담대히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살아갑니다. 

정작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들과 반대되는 것을 찾으면 답이 보일 것입니다. 멈추고 내려놓는 일, 용서하는 일, 기다려 주는 일, 사랑하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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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매우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당신의 신원과 사명에 대해 그토록 말씀하셨음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까지 내다보셨지요. 이제 시간도 없습니다. 

그런 마당에 오늘 필립보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지요.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인에게는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변화되지요. 가치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자기 자신이 가치 기준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알게 된 다음에는 모든 것을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듣고, 판단하니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늘 고백합니다. 그런 만큼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 다음, ‘나의 삶이 정말 변화되었는지? 나에게 예수님의 평화와 생명이 넘치고 있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고 있는지? 그분의 뜻을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따르고 있는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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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날의 이른 아침에 동네의 야트막한 산이나 공원을 느긋하게 산책하면서 느끼는 행복감은 각별합니다. 제가 사는 곳에는 근사한 인공 호수도 있어서 그 호숫가의 가로수 사이로 천천히 거닐면 몸과 마음이 다 편안해집니다. 이 부활 시기에는 이러한 '아침의 기분'이 더욱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아침의 기분'이란 무엇일까요? 근심 걱정을 잠시 접어 둔 채 잠을 청해서 다행히 잘 자고 일어났을 때, 상황은 변하지 않았으되 무언가 잘 되어 갈 듯한 예감이 들어 마음이 가벼운 느낌이 아닐까요? 지난 2월 하순에 소치 동계 올림픽의 김연아 선수를 보면서 감동하고 감탄했던 기억을 아직도 많은 이가 생생히 떠올릴 것입니다. 그날 그녀가 보여 준 피겨 스케이팅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완벽해 감탄을 넘어 고마운 마음까지 느끼게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에게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판정에 대한 김연아 선수의 의연하고 성숙한 처신입니다. 마지막 경기를 메달에 연연하지 않는 가운데 최선을 다했고 잘 끝나서 기쁘다는 진심 어린 고백이었습니다. 경기 뒤 이어진 그녀의 여러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음이 홀가분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새로 시작할 인생 향로에 대한 잔잔한 기대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체험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여러 여건과 환경, 사건이 우리의 인생살이를 버겁게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아침의 기분'을 잃지 않고 가볍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시는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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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늘 바치는 ‘기도’이자 ‘성가’라고 할 수 있는 시편에는 곳곳에 하느님 얼굴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신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신화적 표현은 있지만 그분의 얼굴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목소리나 천둥과 구름 같은 표징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초월적인 하느님께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먹기도 하시고 마시기도 하시며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뜬금없이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에게서 유다의 남자, 비범한 나자렛 사람의 얼굴은 보았지만, 그분 삶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의 얼굴’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나자렛 사람으로 그려진 초상이 아니라 그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안에 심어 있는 ‘하느님의 모상’, 그 참된 ‘사랑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나’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내는 ‘사랑하는 나’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함께 계셔도 주님의 얼굴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주님에 대한 그리움의 목적지는 우리 자신 안에 있습니다. 오로지 사랑을 해야만 그분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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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겠다.” 예수님께서 무심코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진정으로 사람들의 청을 들어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 간청했던 병자들은 예외 없이 치유를 체험했습니다. 나을 수 없다고 체념했던 사람도 예수님 앞에 나아갔기에 기적을 안고 돌아갔습니다. 복음서 안에서 자주 만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머뭇거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되는데도 미적거립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절실하게 다가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름에는 힘이 있습니다. 간절하게 부르면 ‘영혼’이 듣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목소리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애절함이 없기에 머뭇거리게 됩니다. 

애절함은 인연에서 생깁니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연을 만나는지요? 맺고 싶다고 맺어지는 것이 아니고, 끊고 싶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 때문에 괴로워하고, 인연에서 늘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기에 애절함이 생기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왔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기도를 시작하고 끝냈습니다. 오늘만큼은 인연을 위해 정성과 간절함을 더해야 합니다. 좋은 인연을 악연으로 만들지 않도록 늘 애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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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왔습니까? 얼마나 많이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며 지내 왔습니까? 그럼에도 별다른 느낌이 없다면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기도 끝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수도 없이 이렇게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호를 그을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며 삼위일체의 주님을 찾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예수님을 부르며 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늘 답을 주십니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사건과 만남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몰랐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기도를 새로이 시작해야 합니다.

좋은 일에는 감사를 드리고, 시련에는 그 의미를 묻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사건과 만남을 통하여 ‘그분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깨달음은 그냥 지나가고 맙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 갑곶성지 개발을 위해 강화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성지 안에는 그래도 잘 정리된 잔디밭이 있어서 성당이 없는 관계로 이 잔디밭에서 매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래서 잔디밭 관리를 잘해야만 했습니다. 유일하게 미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관리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잔디만 있어야 멋진데, 봄부터 잡초가 잔디 사이에서 삐죽삐죽 나오는 것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잔디를 뽑았습니다. 넓은 잔디밭 안의 잡초를 이제 다 뽑았다 싶었는데, 처음에 뽑았던 그 자리에 또다시 잡초가 잔디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것입니다. 할 일도 많은데, 매일 쪼그려 앉아서 잡초를 뽑아야 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어느 날, 잡초를 뽑고 있는 제게 어떤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잡초는 뿌리까지 뽑아야지 그렇게 위만 잘라내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맞습니다. 조심조심 땅을 해쳐서 잡초를 뿌리째 뽑지 않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급하게 힘으로만 잡아당기다 보니 윗부분만 잘려 나간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뿌리까지 뽑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시간과 힘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잡초의 뿌리까지 뽑아내야 한다는 어느 자매님의 말씀이 문득 생각납니다. 우리 죄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도 뿌리째 뽑아버려야 다시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뿌리보다 순간을 모면하는 데 급급합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보지 못하면서, 반복된 죄의 무게에 힘들어할 뿐입니다.

죄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어느 편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느 편을 믿느냐에 따라서 나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단체 스포츠 경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편을 믿지 못하면 결코 경기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어느 편에 속해 있어야 할까요?

주님을 굳게 믿고, 주님과 같은 편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가장 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당신의 말씀과 많은 표징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약속해주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뿌리까지 뽑는 방법은 주님을 굳게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주님의 힘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너의 약점을 단련하라, 너의 강점이 될 때까지(크누트 로크니).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널린 일들이 산더미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저는 주로 허름한 작업복 차림입니다. 그러다 보니 피정 센터를 찾아오시는 분들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작업을 하면서까지 사제복을 입고 할 수는 없고...


한번은 이불 한 보따리를 들고 세탁실로 가고 있는데, 한 무리의 형제자매님들이 저를 불러세우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기요! 형제님, 양신부님 뵈러 왔는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양신부를 두고, 양신부 어디 있냐고 묻는 분들 보며,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저는 예수님의 심정을 아주 조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도 높은 정신 교육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자들은 스승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틈만 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복음 14장 8절)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요, 분신, 그분 자체이신 예수님을 오랫동안 뵈었으면서도,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니,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지 않으시고, 다그치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해주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자상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는 백성을 위해 ‘자! 이게 내 얼굴이다.’며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는데,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명확히 드러난 것입니다.

 

 

 

진리 안에 사는 법을 알려주신 성모 마리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은 세상에 왜 오셨을까요?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그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하지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라는 짤막한 질문으로 대화를 급하게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진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리에 속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현실 세계가 참 세상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두 알약이 제시됩니다. 하나는 진실을 알게 하는 약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지금의 현실이 진리라고 믿고 살아가게 하는 약입니다. 주인공은 진실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은 기계 안에 갇혀 있고 지금 보이는 현실은 가상현실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며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사는 이 세상이 가짜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도 사람의 숫자만큼 이 세상이 창조 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각자는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상한 종교에 빠진 사람입니다. 결혼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귀여운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세상을 무한히 반복되는 하나의 게임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번 생엔 에너지가 다 되어서 다음 생에 더욱 완전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유서를 썼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웅다웅하며 사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진리를 알고 다른 이들은 모른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예 외에도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같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음을 자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이 하나의 세상을 보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서로 다른 세상을 만들어 놓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극도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천국의 평안함으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는데도 두려움에 거짓말하고 사람을 공격하고 숨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각기 다른 행위들은 자기 나름대로 이 현실을 해석하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의 현실을 해석하여 각자의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에 맞게 자신을 세팅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 맞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모기를 닮았건, 예수님을 닮았건.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올바른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와 같은 모습의 우리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사람이 각자 다른 세상을 만들고는 있지만, 이 세상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도 하나입니다. 그 하나인 진리를 해석하려 들면 안 됩니다. 우리 자아는 그것을 해석하여 진화하였느니, 윤회하느니 등의 말을 붙입니다. 하지만 원숭이가 자동차의 원리를 알까요? 이 세상의 원리는 이 세상을 만든 분만이 압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만든 이에게 ‘순종’하는 길만이 참 진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어린이가 부모에게 순종 하면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듯이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임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그분을 해석하려 들지 말고 순종 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이렇게 진리를 받아들이십니다. 자신에게 인사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이 세상을 만든 이로부터 온 것임이 믿어지기 전까지 그분은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세상과 자신을 만든 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자신보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기까지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 안에 진리가 없고 자신이 해석한 세상이 진리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생만 하게 됩니다.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는 자신이 창조자가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외롭고 힘든 투쟁에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외로움과 공허와 두려움과 고통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창조자의 세상에서 산다면 안식을 얻습니다. 이는 아이가 부모를 믿고 안 믿고의 차이와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어떤 믿음의 길이 참 진리 안에 머무는 길임을 아셨습니다. 바로 “창조자에게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진실을 알게 하는 빨간 약과 그냥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살게 되는 파란 약을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우리입니다. 진실을 알고 싶으면 빨간 약을 먹으면 됩니다. 이것이 창조자가 있고 그의 법에 순종 하려는 결단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만든 각자의 세상에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됩니다. “주님의 종이오니!”는 이러한 어린이와 같은 지혜를 담은 말입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의 뜻대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이러한 삶이 참 행복임을 느끼셨고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진리를 벗어난 삶은 노예 생활일 뿐이고 고통일 뿐입니다. 참 행복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따릅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평화신문 4월 16일 지면에서 두 분의 사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분은 유의배(루이스 마리아 우리베) 신부님이고, 다른 한분은 지정환(세스테벤스 디디에) 신부님입니다. 한국 이름이지만 두 분 모두 외국에서 오셨습니다. 유의배 신부님은 1980년에 왔으니 43년째 한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산청의 성심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성심원은 ‘한센인’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신부님은 한센인들의 겉모습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43년이 넘도록 그분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한센인들이 사망하면 염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지정환 신부님을 ‘임실 치즈의 아버지’로 기억합니다. 더 소중한 그분의 삶의 향기는 사람에 대한 애덕과 장애인 가족에 대한 사랑입니다.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무지개 가족(1984)’, 학업에 대한 열정이 있는 장애인 대학생들과 가족을 위한 ‘무지개 장학재단(2007)’ 설립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신 사제로서의 사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한국에 오셔서 60여 년을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형제적인 사랑을 나누신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렀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로 공동체는 신자가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교로 이스라엘을 넘어서 교회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복음을 선포하였지만 사도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교회는 이스라엘을 넘어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유의배 신부님과 지정환 신부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공생활 하셨지만 유의배 신부님은 43년이 넘게 한센인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지정환 신부님은 60 동안 사랑을 베풀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신부님들은 멀리 한국까지 와서 사목하였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말의 힘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시기와 질투에 가득차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 비난의 말을 하였습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말입니다. 인격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악의 세력으로부터 나오는 말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한 말로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민족들에게 퍼져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입니다. 기쁨을 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들을 시기하고 배척하였던 것처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물질주의이고, 자본주의이고, 이기주의입니다. 모든 것을 경쟁과 이윤으로 판단하려는 신자유주의입니다. 바벨탑이 무너졌던 것처럼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신앙인들도, 성직자들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참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곤 합니다. 몸은 세례를 받아서 신앙인이 되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권위와 힘이 있는 말입니다. 오늘 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은 어떤 말인지 생각합니다. 욕망을 채우려는 말이었는지, 시기와 질투를 나타내는 말이었는지, 비난과 험담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말이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 생명을 살리고, 신뢰를 주고, 평화를 주고, 참된 진리를 알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예수님을 뛰어넘는 말과 행동이 되면 좋겠습니다.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늘. 잠깐이라도. 그 순간만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지만


잠깐이라도
내가 하느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그 순간만큼
나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만


잠깐이라도
내가 하느님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순간만큼
나는 하느님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지만


잠깐이라도
내가 하느님을 통해
일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만큼
나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9)


오랜 세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살았다. 함께 지낸 세월 덕분에 예수님을 알았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뵈었다. 말씀이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 되어 주셨고 따르며 실천하며 살았다.


그리고 장벽이 생겨날 때 마다 예수님께 물었다. ‘어떻게 하지요?’ 벽에 부딪힐 때마다 파스카를 이루어 주셨다. 나는 믿었다. 답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기다렸고, 항상 너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에 의탁하며 예수님과 함께했다. 그리고 납작 엎드리신 예수님 보며 나는 납작 엎드려 살았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 아낌없이 다 이루어 주셨다.


살아계신 하느님, 하느님을 볼 수 있었다. 내 안에 예수님의 신성이 힘차게 작용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예전에 부모와 함께하는 첫영성체 어린이 피정이 있었습니다. 피정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보니까 아이들은 정말 엄마와 아빠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기도할 때 같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렸고, 엄마 아빠가 노래를 부를 때 함께 입을 모아 노래를 불렀으며, 엄마 아빠가 춤을 출 때에 같이 신이 나서 몸을 흔들며 춤을 추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육체적인 유전자에 의한 것일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엄마 아빠의 사랑이 그대로 전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시며 그분의 영과 일치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우리도 역시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의 영과 일치된 삶을 이루어 가며 그분을 꼭 빼어 닮은 그분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늘 간직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계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먼저 보아야 하는 것

     강희재 신부님
제 어머니는 황반변성이라는 병을 앓으신 후 앞이 잘 안 보이십니다. 그럼에도 드라마도 보시고, 밭일도 나가시고, 심지어 김치와 장도 잘 담그십니다. 하지만 식탁의 반찬을 더듬거리며 집으시는 것을 보면 시력이 안 좋은 게 분명합니다. 가끔 고향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머니는 ‘누구여?’ 하십니다. ‘저예요’ 대답하면 ‘응~ 신부님이여?!’ 이내 반가운 표정을 지으시며 안색이 안 좋다느니, 배가 홀쭉해졌다느니 갖은 걱정을 하십니다.


사제인 아들의 존재를 먼저 보시고 나머지 것을 보시는 어머니. 그런데 필립보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표징, 유창한 말씀, 치솟은 인기에 눈이 가려져,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이는 요한 복음사가의 집필 의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고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형제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앞에 있는 이가 주님 안에서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그 속을 헤아려 본 뒤에 나머지를 보아도 늦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 안에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셨고,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진 한 사람의 존재 그 속을 가장 먼저, 소중히 보셨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시선의 초점이겠지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요한 14,9)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신부님들의 강론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하느님을 뵙고 쉽고 성모님도 예수님도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지요?
그런데 어쩌지요. 신부님에게서 그리고 같은 신자들에게서 하느님을 뵙고 성모님과 예수님을 만나 뵈어야 한다네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도 예수님과 더불어 살면서도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니 예수님은 참으로 답답해 하십니다.


"아직도 모르겠니? 내가 곧 하느님의 아들이야! 너희가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거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면 하느님을 만나도 그분을 못 알아보실꺼야!"


여러분은 하느님을 자주 만나시지요?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을 담고 있답니다.


오늘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이 어떻게 숨어있는지 한번 찾아봅시다.
그러면 다른 이들도 내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부활4-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연수회를 마치고 사제관으로 돌아와서 보니 너무나 좋습니다..그리고 잠자리도 너무도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집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있는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식들, 특히 원하는대로 되지 않고,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아프겠지만 그 자식들을 집에서 내 보내는 것도 중요한 일인것 같습니다.


어느 수도원의 원장님이 많은 제자 가운데 특별히 한 제자만 사랑했습니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머리도 가장 나빴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원장님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편애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불만, 불편이 점점 불거질 무렵...원장님은 제자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새를 한 마리씩 나눠 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이 새를 죽여 다시 이 자리로 모여라.”고 했습니다.
모두 모였을 때 다른 제자들은 모두 새를 죽여 가지고 왔지만 사랑받는 그 제자만은 새를 산 채로 안고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말귀도 알아듣지 못한다면서 그 제자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원장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왜 새를 죽이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제자는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도 하느님은 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차마 새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원장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 제자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 하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내 자신의 믿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혹시 이 세상의 것들을 더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그러면서도 나는 행복하지 못하고 늘 투덜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이런 모습이 얼마나 아쉬웠으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까지 강조하여 말씀하실까요?


사랑하는 고운님들!
그동안 “내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새겨보시길 바랍니다.
예) 밥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밥을 먹을 사람들을 축복하시기를...
청소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마음을 회심하고 회개하시고...
누군가를 미워할 때에도 내가 하지말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워하게 되면...저절로 “용서”라는 자비가 베풀어지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매 순간 나날이...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간직하며... 은총 가득한 행복한 날이 되시기를...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필립보의 마음에 머물러 봅니다.
예수님과의 머뭄
당신께 가서, 보고, 듣고 함께 함이
그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었고
성경의 새로운 의미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직접 뵐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그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의 깨달음이 아직 다다르지 못한 것이었지요.
아버지와 아드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당신을 보고 만나고 머무르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을 보고 만나고 머무르는 것이었음을
그의 신앙의 여정 역시
새롭게 깨닫고 알게 될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이 당신을 알고
깨닫는 하루가 되기를 청해봅니다.
당신안에 굳게 머무르는 용기와 힘을 청해 봅니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That will be enough for us.

 

 

 

주님을 알게 되고 뵘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고별을 앞두고,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해주시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14,7)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14,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14,11)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4,13)

 

예수님께서는 ‘유일한 길’이신 당신을 알게 되고 보게 되면 참 행복에 이르는 것이니, 흔들림 없이 믿을 것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가 됨을 뜻합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주님을 알려면 사랑이신 주님의 사랑을 소유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이 보이기 시작하고 알게 됩니다. 물론 알아가면서 사랑이 생기기도 하지요. 사랑하려면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주님께 마음과 눈과 생각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침 없는 말씀의 경청과 사랑의 실천이 이어질 때, 초점이 맞아 주님을 알아뵙게 될 것입니다. 지혜이신 주님께 대한 앎에 이를 때, 탐욕과 세상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행복이 시작됩니다.

 

또한 주님을 알려면 주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그분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해 아는 것은 창해일속(滄海一粟), 곧 큰 바다에 던져진 한 알의 좁쌀처럼 미미한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늘 그렇게 내가 서 있는 바로 그 지점이, 사랑이요 행복의 원천이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의 출발점임을 기억해야겠지요.

 

한편 영원한 생명에 이르려면 예수님을 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14,9) 우리는 사랑이요 생명이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바라지요.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어떻게 뵐 수 있을까요? 하느님 친히 그 불가능한 한계를 넘어, 살을 취하시어 우리 곁에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감당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여정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 희망을 불러일으키시고, 죄인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사랑하시고, 병자와 마귀들린 이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주시려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바로 하느님의 손길이요, 하느님의 얼굴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주님을 뵌 것입니다.

 

누구든지 행복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지금, 여기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과 예수님의 거룩한 십자가 희생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세상일에 몰두하여, 이미 내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망각이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병입니다. 무감각이 병이요, 스스로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근심걱정과 탐욕이 병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말씀을 경청하여 영혼의 세포에 새기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알아보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차별 없는 사랑과 연민, 십자가 희생을 ‘기억하여’, ‘눈앞에 둠으로써’, 주님을 뵙는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알고, 주님을 뵙게 되는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확고한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 뵙고 그분의 이름으로 청할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14,13). 우리 모두 편견과 차별없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힘씀으로써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어나갔으면 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어떤 사람이 신발을 사러 가기 전에 모양과 크기가 자기 발과 똑같은 ‘본’을 하나 떠 두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일이 신었다 벗었다 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자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막상 시장에 갈 때 그 본 뜬 것을 깜빡 잊고 집에다 두고 갔습니다. 신발 가게 앞에 도착해서야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본 뜬 것을 가지고 다시 시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져서 시장에 있던 상인들이 모두 철수하고 난 뒤였지요. 나중에 이 사연을 전해들은 친구가 그를 답답하게 여기며 말했습니다.
"아니 신발가게 앞까지 갔는데 본 뜬 것을 가지러 다시 집에 다녀올 필요가 뭐가 있나? 자네가 직접 신발을 하나 하나 신어보고 발에 맞는 것을 찾으면 될 게 아닌가?"
그러자 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에이,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내 발 치수가 본 뜬 것만큼 정확하겠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발이 더 중요할까요? 아니면 그 발을 본 뜬 것이 더 중요할까요? 물론 발모양을 본 떠 놓은 것이 있으면 자기 발 사이즈에 맞는 신발을 고르기가 한결 수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발에 관련된 치수가 같다고 해서 그것이 내 발에 꼭 맞는 신발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요. 그 신발을 직접 신고 서보고, 걸어보고, 뛰어보기도 하며 어떤 점이 편하고 어떤 점이 불편한지를 직접 겪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상황에 맞게 신발끈의 길이와 조임 정도를 조절해준다거나, 밑창의 두께를 맞춰준다거나 하는 세세한 작업도 필요하지요. 그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나의 발에 꼭 맞는 진짜 내 신발을 찾을 수 있는 겁니다.


진짜 자기 발보다 그것을 본뜬 모형을 더 신뢰했던 어리석은 모습,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 사도가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고, 당신을 보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필립보는, 자기 두 눈으로 직접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하지요. 아마도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과 뜻을 간접적으로 전해듣는 것보다, 하느님을 직접 보고 그분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 하느님의 참된 모습과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에 보다 효율적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아버지를 눈으로 보고 그분 목소리를 귀로 듣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봐야겠다며 신비로운 영적 체험과 놀라운 기적들만 쫓아다닌다면 그건 신발을 자기가 직접 신어보지 않고 자기 발을 본뜬 모형에 대 보려고만 어리석은 모습이지요.


부족하고 불완전한 우리의 이성과 감각기관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참된 모습과 뜻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어 당신의 모습과 행동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그분의 뜻을 알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어떤 왜곡 없이 하느님 아버지의 참모습을 바라보도록, 우리가 그 어떤 오해 없이 그분의 뜻을 알아듣도록 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여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런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순명하며 최선을 다해 실천한다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고 나도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일치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것들을 그분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모든 기도가 이루어진 세상

     노동준 안토니오 신부님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브루스는 어느 날 전지전능한 능력을 얻게 됩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의 기도를 듣고 그 기도에 응답하는 능력도 있었는데, 끝없이 쏟아지는 사람들의 기도에 하나씩 답변하던 브루스는 귀찮은 마음에 모든 기도에 “YES,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답변을 하고 맙니다. 그 순간 사람들의 모든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세상은 그리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복권 당첨자가 너무 많아져 당첨금은 만 원 정도에 불과했고, 온갖 해괴한 일들이 거리에서 벌어졌습니다. 영화에서처럼, 우리의 모든 기도가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봅니다. 과연 그런 세상을 천국이라 할 수 있을까요? 병이 낫는 사람이 많을까요 아니면 새롭게 병을 얻는 사람이 많을까요? 뒤를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던진 기도들이 전부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게 될까요.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기도를 이루어주지 않으신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자신도 무엇을 바라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오늘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하고 말씀하시는데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마음도 담을 수 있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살다가 주변을 둘러보면 다른 사람들은 다 좋은 것과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왠지 왜소해 보이고 부족해 보이고 어딘지 모르게 쳐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또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어딘지 모르게 힘겹고 지쳤을 때, 불평과 불만이 슬금슬금 솟아나면서 ‘하느님이 내게 해 준 것이 뭐냐?’는 투정이 볼멘소리처럼 목을 넘어오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2-14) 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앉아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해주셨는지를 하나씩 곱씹어 보면, 그야말로 숨 쉬는 것에서부터 살아있는 오늘의 이 순간까지 모든 것이 감사로울 뿐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감사할 것을 되새기느라 보면, 자부심과 함께 행복해지기까지 합니다.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하다가 못 얻으면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며, 탐욕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이 나 스스로도 지나친 욕심으로 힘겹지만,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을 되새기고 감사드리기 시작하면 오히려 스스로도 행복하고 자연스레 감사와 찬미가 울려 나옵니다.
주님,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청하오니, 저를 통해 주님의 거룩한 일을 하심으로써 주께 영광드리게 해주소서. 아멘.

 

 

 

하느님 모습을 시간과 공간 안에 보여주셨다. <요한 14, 7-14> 5월 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구약을 보면 하느님 당신의 모습을 여러 형태로 보여주시고 증명해 주셨지만, 신약에 와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을 오신 주님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셔서 하느님 모습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현대에 와서 나도 봐야지 믿겠다고 하면 주님은 보여주십니다.
지금도 하느님 본모습을 보려면 가진바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 인간적 눈을 벗어나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다가 이상한 모습이 거울에 비쳐서 “너는 누구냐?” 하니 “내가 하느님이다.” 하기에 “어찌하여 하느님이냐? 내 모습이지” 하니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보라고 하여 다시 창세기를 보니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너를 창조할 때 내 모습대로 만들었다.“ 하시는 대목에서 멈추어 내 모습 안에 하느님 모습이 있다는 확신을 두고 나와 너 안의 하느님 모습을 찾게 되어 우리 안에 하느님 살아계심을 알고 믿으며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은 내 안에, 너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일찍 잃었지만, 그 아들을 보고 잃은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 안의 하느님 모습이 아니라, 모든 현상 안에서 찾기만 하면 하느님 모습을 찾아 만나게 됩니다.
어느 사막에 큰 궁궐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집에 형제가 살고 있는데 동생은 매일 저녁 늦게 술 마시고 들어와서 버릇을 고치려고 늦게 돌아온 동생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사막은 밤이면 찬 바람 불어서 추워집니다. “형님, 문 열어주세요.” “누구냐?” 하니 접니다. 동생입니다.“ ”나, 당신을 모릅니다.“ 동생이 아무리 사정해도, 날은 추운데 떨면서 울고 사정해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동생은 ‘만일 형이 이런  입장이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마지막으로 ”지금 문밖에서 떨고 있는 사람은 형님 자신입니다.“ 하니 문을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형님은 동생과 같은 처지애서 당하는 입장을 생각하게 되었듯이 우리는 너 안에서 나를 보고 내 안에서  너를 보며 모두가 하느님의 모습을 너에게서 찾고 내 안에서 찾아 만나는 것으로 현실 안에서 하느님 모습을 찾아 만나야 주님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살아계신 주님 만나서 주님과 함께 엠마오 길을 걷도록 기도합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기에
보고싶은 것만
보며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가슴을 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쓰러진 것을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서로를 의심하고
물어뜯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연결된
우리의
생활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의 결핍이
바로 의심이며
분열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일은
주님의 일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의심으로
모든 불행은
시작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새아침을
여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사라질 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날마다
하느님의 일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장이
뜨거운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믿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믿음의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글 쓸 일이 있으면, 특히 많은 양의 글을 써야 할 때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따로 외딴곳을 찾습니다. 그곳은 피정의 집이 될 때도 있고, 호텔이나 펜션일 때도 있습니다.
두 달 전이었을 것입니다. 이때도 3일 동안 글만 쓸 생각으로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글이 잘 써져서 이틀 만에 원하는 글을 모두 쓸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자유의 시간을 누리면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낮잠도 자고, 그동안 못 보았던 책도 읽으면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지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없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이것저것 궁금해지고 걱정이 됩니다. 오랜만에 누리는 자유의 시간이었지만, 이 자유를 누리기가 힘들었습니다.
결국 자유를 포기하고 성지로 돌아갔습니다.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자유가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소속감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누릴 시간인데도 그 자유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성지로 돌아간 것이지요.

우리는 보통 자유는 좋고, 구속은 나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어느 정도의 자유와 구속이 균형을 이루며 함께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앙 생활하는 것을 자신의 자유를 구속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벗어나 자유롭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주님께 구속된 편안함 속에서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를 향해 당신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할 것을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하느님 아버지 안에 있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두 분은 진정한 하나를 이루십니다. 이를 구속이라 생각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를 이루면서 더 큰 자유를 그리고 더 큰 일을 우리를 위해서 해 나가십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이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 주신 것을 자유가 없다고 거부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를 더 누릴 수 있도록, 이 세상 안에서 더 자유롭게 잘 살 수 있게 하려고 당신 안에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불확실한 삶에서, 외로운 삶에서, 기다리는 삶에서 느낀다(가스통 바슐라르).

 

호텔 이용하기

여행을 가서 숙소는 그냥 잠만 자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늘 최저가를 검색했고, 그 숙소에서 잠만 자고 새벽 일찍 나오곤 했습니다. 머리만 대면 곧바로 잠을 자는 ‘나’이기에 시끄러워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냥 값만 싸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호텔의 새로움을 어느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호텔에 가서 글을 쓴다고 말합니다. 정리·정돈할 필요도 없고 식사 걱정도 하지 않고(룸서비스를 이용) 오로지 글에만 집중한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익숙한 환경이 아닌 낯선 장소에서의 글쓰기는 새로운 생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때 호캉스라고 해서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사람이 많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글을 쓰기 위해 그리고 호캉스를 누려보겠다고 호텔 예약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이용했던 숙박비보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가격이었지만, ‘이런 체험도 필요해’라면서 스스로 합리화하며 이용해보았습니다.
그 뒤, 호텔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글을 몰아서 써야 할 때는 하루 이틀 동안 호텔에 투숙하면서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익숙한 사제관을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기에 정말로 많은 도움을 얻게 됩니다.
종종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새로운 나를 만들고 싶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아버지께 가는 길이요,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요, 그리고 아버지의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신 내용에 바로 이어지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성전으로서 아버지를 당신 안에 품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심으로써 아버지 안에 머무십니다.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시이기에 예수님을 보고 나서 또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말은 계시 자체이신 예수님을 무시하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시고,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라고 하시며, 당신의 말과 이루신 업적이 당신 안에 아버지께서 계심을 증명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계시해야 하는 우리에게도 이런 말씀을 해 주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셔서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내실 수 있으시니, 그리스도를 품은 우리의 말과 행동도 인간의 능력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시가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하려고 하면 못 할 것이 없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왓칭’의 저자인 김상운 기자의 지인이 어느 날 딸의 일기장에서 “죽고 싶다.”라는 내용의 글을 발견했습니다. 딸이 어렸을 땐 책 읽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소위 날라리 아이들과 어울리며 가수가 되겠다고 노래만 듣는다고 합니다.
아마도 모범생인 오빠에게 부모의 모든 관심이 쏠리는 것에 대한 반항인 것 같았습니다.
“수진아, 너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러니? 이젠 제발 정신 좀 차려!”
엄마는 혼내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수진이는 점점 더 멀어져갔고 대화도 완전히 끊겨버렸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그녀는 한 학부모 교육 프로그램에 등록하였습니다. 교육을 받으며 분명히 깨달은 것은 ‘문제가 수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수진이에게 학원에 다니기 싫으면 안 다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수진이는 다니던 학원을 모조리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것을 ‘딸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라디오 음악프로도 함께 듣고, 가사도 함께 외우고, 노래도 함께 따라 불렀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가수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스크랩도 해주었습니다. 친구들을 데려오면 진심으로 따듯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딸이 이해가 되었고 왜 음악에 빠져들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등교하러 집을 나서던 수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 내가 공부 못해도 나 사랑하지?”
“물론이지. 넌 언제나 내 딸이니까.”
어느 날 그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소리도 없이 들어온 수진이가 뒤에서 슬며시 그녀의 한 손을 잡았습니다.
“엄마, 나 이번 중간고사에서 100등도 넘게 올랐어. 반에선 5등!”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엄마, 감사합니다. 기다려줘서.”
수진이를 꽉 껴안은 엄마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출처: 『왓칭 2』, 김상운, 정신세계사]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있을까요? 100% 다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자존감에서 옵니다. 『왓칭』에는 이런 사례도 나옵니다.


미국의 어느 한 고등학교에서 악기를 배우는 특별반을 관찰했습니다.
처음엔 그들의 실력이 비슷했지만 몇 달이 지나자 편차가 4배로 커졌습니다. 같은 시간동안 배우고 같은 시간을 연습해도 그 실력 차이가 4배가 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아이들의 음악적 소질에 있을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그 차이는 아이들의 음악을 대하는 자세였습니다. 가장 실력이 늘지 않는 아이들은 악기 배우는 것을 정말 특별활동으로 생각했던 학생들이었고, 가장 뛰어나게 발전했던 아이들은 음악을 전공으로 평생을 하고 싶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음악을 평생 하려고 했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음악에 소질이 있다고 믿는 아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음악에 소질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음악을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실력을 향상시킨 것입니다.

위 사례에서 수진이가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엄마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믿게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자신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으면 결국은 원하는 것을 이뤄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을 받은 이들이 가진 자신감입니다. 이 자신감이 모자라면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현실에서 회피하게 되는데, 게임에 빠지거나 불가능한 목표 속에 자신을 가두는 일 등입니다.

어떤 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것이 잘못인가요?”라고 묻습니다. 그것이 왜 잘못일까요? 가난해야 한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집착을 버리라는 뜻일 뿐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다 돈과 인기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다만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믿음이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왔다면 성공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성공으로 그리스도를 계시하게 됩니다.

2016년 10월 8일 대만 제51회 금종상 시상식에서 ‘이천주’라는 남자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탔는데,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히 밝히고 수상소감 때 주님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예전에 금종상을 받아본 한 사람이자 40년 전부터 배우였던 저에게 있어서 저는 더 많은 젊은 후배들이 이 무대 위에서 이 상을 받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들에게 이 상을 내어주고 싶습니다. 사실 저들은 정말 훌륭합니다. 모두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특히 저를 선택하셔서 이 자리를 통해 얘기하라고 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할 분이 많지만 저는 이 자리를 통해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저와 하나님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그분은 우리 공동체 모두를 여기에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밖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나의 하나님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자녀들을 이렇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면 빨리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게 해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품은 자녀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다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유태인들이 이런 믿음으로 사는 민족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모는 빨리 자녀를 주님께 봉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입에서 “나는 안 돼.”라는 소리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믿음을 지녀야 진정 그리스도를 모신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믿는 바를 성취해가며 자신 안의 그리스도를 계시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계시하며 사신 그리스도의 삶을 닮는 방법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쿠버 다이빙 강사와 상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강사에게 상어가 다가왔습니다. 상어의 입을 보니 낚시 바늘이 박혀 있었습니다. 강사는 상어의 입속에 있는 바늘을 뽑아 주었습니다. 잠시 뒤에 다른 상어가 왔는데 역시 바늘이 박혀있었습니다. 강사는 그렇게 100여 마리의 상어를 도왔습니다. 스쿠버 다이빙 강사와 상어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상어는 자칫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쿠버 다이빙 강사가 상어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 통했기 때문입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세상이기도 합니다. 사자가 어린이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어린 양이 늑대와 춤을 추는 세상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행복할 것 같았던 부부가 살면서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고, 대화를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면서 갈등과 오해가 쌓이곤 합니다. 말은 하지만 상대방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상대방이 쫓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남편은 집에 오면 청소도 하고, 정원도 가꾸고, 쓰레기도 치워주고, 요리도 해줍니다. 남편은 자기가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여깁니다. 아내는 남편이 일을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서로 마주보면서 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도 하고, 같이 차를 마시면서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남편은 사랑해서 사다리를 올랐지만 엉뚱한 곳에 사다리를 놓고 올랐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일을 하는 대신에 아내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집안 청소를 하였고, 남편의 옷도 수선해 주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일을 해주니 가정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을 모함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율법과 계명의 ‘틀’에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복음의 기쁨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지만 복음의 기쁨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지만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성공, 권력, 명예를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한 자리씩 차지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베드로는 닮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권위와 힘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말씀의 힘으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말씀의 힘으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말씀이 진리였으며, 말씀은 빛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행동과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7절) 아들은 당신의 모습을 통해서 아버지에 관한 지식을 드러내 주신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을 본 사람은 당신을 낳으신 분을 안다고 하신 것이다.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7절) 그러나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는 인간이 되신 아들을 보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아버지를 뵌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직 그의 눈이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9절) 필립보는 예수님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지만, 아직 아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통하여 계속 아버지를 보여 주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상이시다. 이것은 아들이 진리와 하느님의 권능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절) 하신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10절)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시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 일치한다는 것은 관계로서 하나이며 일치이다. 이 관계는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이라는 관계로 사랑 안에서 하나이시다.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며, 이 사랑이 바로 성령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 하나이시며,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다. 그것을 믿지 않느냐고 사도들을 꾸짖으신다. 당신이 하시는 말도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12절)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살며,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일하시고, 더 큰 일도 해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우리는 더욱더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는 가운데 주님을 모시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때 이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서 우리를 위해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3절)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것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13절) 하신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드리도록 하는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도 하느님께 참된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원성사 안에 계신 하느님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나는 예수님을 통하여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보고 알아서 믿고 따른다.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이끄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유산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그 하나는 부족함의 하나가 아니라 완전한 하나이다’

아드님의 세상에 오심은 아버지의 뜻으로 착한 목자가 되시어 양들인 우리를 파란 풀밭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엄청난 십자가가 있다. 그 십자가는 죽음에서 생명을 이루는 댓가이며 이로써 부활을 이루셨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본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을 본다.

 

예수님의 인생여정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함이다. 믿는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게 하심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나는 예수님의 인성을 통하여 신성을 만난다. 그 신성 안에 하느님을 똑똑히 본다. 살아계신 하느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본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14,8-10)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대로 당신의 모든 삶을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된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분이 보여주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너무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다가오시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덜어주시며,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부활을 통해 늘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며, 성령을 통해 늘 우리의 힘이 되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당신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 14, 7-14(부활 4주 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요한 13,33)라는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세 번째 반응이 이어집니다. 곧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는 베드로의 반응과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는 토마스의 반응에 이어,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요한 14,8) 하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

               내가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도 믿어라.”(요한 14,9-1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관계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뜻은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를 안 사람은 하느님을 본 것이며, 하느님을 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한 것은 ‘과시해 보여 달다’는 의미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과시’가 아니라 ‘보는’ 것이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하나 됨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의 무지를 꾸짖으신 후, 참을성 있게 이전의 가르침을 되풀이 하십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며, 당신이 하신 말씀은 모두 아버지의 말씀(참조:3,34;8,18.28.38.47;12,49)이시고, 당신이 하신 일은 모두 아버지께서 하신 일(참조:5,19.36;9,3-4;10,25.32.37-38)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이를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가 여전히 믿음의 부족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러니,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더라도 당신이 하신 일, 곧 구원하는 일과 하느님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 일은 궁극적으로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는 일 안에서 당신의 권능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3.14)

 

당신을 믿고 당신께 의탁하면, 당신의 권능으로 다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아멘.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안식일에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주님에 대해서 증언하며 그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사도 13,46-47)

 

사도 바오로의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희망찬 포부가 전개되는 반면 크고 작은 방해의 일들이 또한 펼쳐집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을 떠나서라도 세상 일이 뜻하는 것에서 벗어나 어긋나거나 고통스러운 일들이 따르기도 하지요.

그리고 대다수의 대중은 색깔이 없다고 하지요?

바람이 이렇게 불면 이쪽으로 바람이 저쪽으로 불면 저쪽으로 쏠리듯 대중은 한 마디의 선동의 말이나 순간적 자극적인 말에도 바람처럼 쉽게 쏠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사도행전은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도들을 시기하는 유다인들이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거짓으로 선동합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잘 받아들이던 그들이었지만 유다인들의 모함으로 그곳 주민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서 또 다른 이코니온 지방으로 갑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히려 복음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성령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흔들림이나 의심을 하지 않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 어렵습니다.

때로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사도들처럼 확고한 신앙을 갖지 않고 형식적이고 외적인 신앙의 모습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외관상으로는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하기야 예수님을 직접 뵙고 따르던 많은 이들이 주님의 말씀 몇 마디 때문에 주님을 더 이상 따르지 않은 성경의 기록을 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과 함께 생활하며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기적을 목격했던 제자들도 처음부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의심하기도 했겠지만 참다운 신앙인은 이런저런 경우들을 거치며 더욱 깊은 신앙을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주님 사랑으로 채워져 있어서 비록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추방되는 수모를 겪었어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제자들을 흔들어 놓을 수 없었듯이 주님의 삶을 살며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한 목자’를 따라 평화의 길을 걷은 것입니다.

 

 

 

들어서 아는 하느님을 눈으로 뵈올 때까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오늘 필립보의 말은 하느님을 뵙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그러니까 더 바랄 것이 없을 거라는 뜻인데 그것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하느님을 뵙기만 하면 정말 그럴 거라고 저는 믿고 또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한눈을 파는 것은 하느님으로 충분하지 않아서가, 더 바라는 무엇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기보다는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그래서 충만하지 못하니 그 대신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는 거지요.

소위 대리만족이라는 것이 이것이고, 우상 숭배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으로 충만한 사람 그러니까 충분히 만족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만족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터인데 뵙지 못하니 불충분하지만 다른 것에서라도 대신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고, 그러기에 대리만족을 이것저것에서 찾지만 늘 불만이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느님 말고도 대리만족할 것이 있기에,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으로 만족하려고 하지 않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만족하려다 만족치 못하고 다른 것으로 옮아가고, 그것으로 만족하려다 만족치 못하고 또 다른 것으로 옮아갈지언정 다른 것으로 대리만족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그 대표지요.

이 여인은 남자가 다섯이나 되었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만족을 충분히 얻지 못했고 그래서 늘 목말랐는데 그러다가 자기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만나 그 갈증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만 운이 좋았던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는가요?

물론 그녀가 운이 좋았던 것인데 실은 그녀만 운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다가오는 기회가 많이 있었고 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처럼 계속 목말라하지 않고 적당히 이 사람으로 또는 이것으로 만족하자고 하며 더 이상 참 만족을 찾아 하느님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적당히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욕심부리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그것이 또 영성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아예 모른다면 모를까, 우리처럼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들어서 아는 사람은 그 하느님을 뵈올 때까지 오늘 필립보처럼 뵙게 해달라고 해야 합니다.

들어서 아는 하느님을 눈으로 뵈올 때까지 예수님께서 너는 이미 보았다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나는 아직 못 봤으니 뵙게 해달라고 졸라야 합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다음 말씀을 자주 마음에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 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공동체에서 만나는 주님. - 꽃 같은 인생이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이러저런 체험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저에게는 피하고 싶은 못마땅해 하는 부정적 세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포만감’입니다. 배불리 먹었을 때의 포만감, 참 부끄럽고 후회스럽기에 과식이나 탐식은 절대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하나는 ‘해방감’입니다. 예전 사제 생활 초창기에 수도사제 둘일 경우는 격주로 강론했기에 한 주간 주례와 강론이 끝났을 때의 해방감, 그러나 십여년 이상, 혼자 1년 365일 매일 미사에 강론을 하다 보니 이제는 매일 강론이 생활화되었습니다. 사실 사제 둘이 격주로 하다 끝났을 때의 해방감 역시 완전히 긴장의 끈을 놓는 느낌이라 못마땅해 합니다. 이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주례하든 않든 매일 강론을 쓰기 시작한지도 꽤 오래 되었습니다.

 

하나는 ‘비애감’입니다. 몇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약봉지를 한 아름 받았을 때 느끼는 좌절감 비슷한 비애감 역시 단연코 곧장 떨쳐버리는 감정입니다. 약먹고 절대 죄를 짓지 말아야 겠다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서 늘 깨어 있는 겸손한 삶이라면, 또 겸손의 수련, 비움의 수련에 충실한 삶이라면, 이런 포만감, 해방감, 비애감은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어제 4월의 끝은 오늘 5월의 시작입니다. 신록과 온갖 꽃들이 만발한 계속되는 부활축제 시기에 오늘부터는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에 성모성월입니다. 성모성월이 되면 떠오르는 참 좋아하는 성가 244장입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모아 성전꾸미오며/기쁜노래 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코로나로 인해 입에 마스크를 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지 못한지도 일년이 훨씬 넘었으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한 재앙의 연속입니다.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쓰고 복면같은 마스크를 하면 외계인처럼 얼굴을 볼 수도 없고 누구인지 알수도 없으니 이 또한 재앙스런 현실입니다. 회개할 죄가 참 많은 현대인들 같습니다. 죄가 많기에 병도 많습니다.

 

얼마전 60대 중반에 손주를 둔 소녀같은 할머니 자매의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외손주에게 신혼 때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충격을 받았다!” 얘기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린 아이가 충격이라는 어휘를 썼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공감했습니다. 저 역시 32년전 40대 초반 사제서품때 사진을 보면서 나도 이런 젊은 때가 있었나 충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젊어서 성인이지 나이 들어 갈수록 성인이 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넉넉하고 편안한, 너그럽고 자비로운 노년이 아니라 까칠하고 신경질적이고 쉽게 삐지는 노년이 될 위험도 다분하고 주변에서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가끔 할아버지같다. 아버지같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게 됩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좋듯이 인생사계人生四季도 그래야 좋고 이상적일 것입니다. 가을이나 겨울 인생이 봄 인생이나 여름 인생을 선망하여 모방하는 것도 꼴불견일 것입니다. 그 인생 계절에 맞는 고귀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일출日出의 찬란함도 좋지만 일몰日沒의 고요와 평화도 좋고, 꽃의 봄향기도 좋지만 수수하고 편안한 단풍의 가을 향기도 좋습니다. 때로는 꽃보다 아름다운, 초연한 아름다움의 가을 단풍이듯 인생도 그러합니다.

 

어제 수녀원 미사차 들렸을 때 정원은 온갖 꽃들의 향연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떠나면서 노수녀님께 “꽃처럼 사세요!” 덕담을 드렸을 때, 새롭게 떠오른 꽃과 사람에 대한 묵상이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활짝 웃을 때는 그대로 꽃같은 얼굴이 웃지 않고 심각하거나 화났을 때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 보속 처방전에 참 많이도 찍어 드리는 스탬프가 “웃어요!”입니다. 꽃에 대한 자작시 셋을 나눕니다.

 

-“사람은 꽃이다

늘 피는 꽃이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언젠가 꽃을 가져온 분께 써드린 시입니다.

 

-“꽃/존재 자체가 시이자 꿈이요

희망이자 사랑/기쁨이자 평화/위로이자 구원이네요

제각기/고유의 모습/크기/색깔/향기를 지닌

꽃같은 사람이네요/사람이 꽃이네요“-

얼마전 글입니다.

 

-“꽃은 필때도 아름답지만 질 때도 아름답구나.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주 예전에 썼던 짧은 글도 생각납니다.

 

이런 모든 묵상들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이 줍니다. 정말 주님을 몰라서, 체험하지 못해서 외로움, 그리움이지 주님을 만나면 충만한 기쁨과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혼자서의 주님 체험은 착각이나 환상이기 십중팔구입니다. ‘함께 죄지으며 살 바에야 이혼하여 죄짓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란 물음에 단호히 거부했던 일화가 생생합니다.

 

수도자들 고백성사 ‘하나마나’란 말도 있지만 대부분 많은 신자들 고백성사 역시 하나마나한 경우도 꽤 많습니다. 함께 살며 죄짓는 것도 은총입니다. 함께 살기에 죄를 지으며 자신을 성찰하지만, 혼자 살면 죄 안 짓는다 해도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영적 진보도 없습니다. 천국입장은 혼자가 아니라 단체입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부는 혼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간다. 둘의 사랑점수를 합해 둘로 나눈후 평균 60점을 넘어야 함께 천국입장이다. 혼자는 아무리 점수 높아도 천국에 못들어 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겠다 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함께의 공동체를 찾아 오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공동체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공동체 덕분에 주님을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지금 여기 형제 공동체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서도 못만납니다.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있는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공동체가 주님을 닮아갈수록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입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공동체는 얼마나 이상적이고 아름답겠는지요! 바로 매일 미사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축복에 감사해야 합니다. 광야인생 혼자 살다 보면 괴물이, 악마가, 야수가, 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함께 살 때 상처도 받지만 받는 위로는 더 큽니다. 참으로 함께 할 때 주님도 만나고 외로움도 그리움도 사라져 주님과 함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주님의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 온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필리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건강하고 온전한 신비주의입니다. ‘너’와 함께의 단수가 아니라 ‘너희 공동체’와 함께의 복수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주님의 몸이자 거처가 됩니다. 참으로 세례받고 수십년이 지나고도, 또 주님의 집 수도원에 수십년을 살고도 늘 함께 계신 주님을, 주님을 통해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면 정말 헛 산 겁입니다. 정말 깊은 영성가라면 형제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아버지의 얼굴을 희미하게라도 발견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대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환상의 콤비 사도들을 통해서만 아니라 오늘은 교회공동체를 통해서도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셔서 우리를 통해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하시게 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 맹활약을 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정말 공동체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이처럼 신바람 나는 말씀 선포입니다. 박해를 받고 도시에서 쫓겨날 때 제자들의 모습에 대한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라는 묘사가 참 신선한 충격입니다.

 

꽃같은 사람들입니다. 꽃같은 얼굴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꽃입니다. 꽃처럼 살라고,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라고 끊임없이 피고지는 꽃들입니다. 우울하고 심각한 성인은 모순이요 그런 성인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체험케 하시며 또 함께의 생활중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꽃처럼 살게 하십니다. 저절로 화답송 시편을 노래하게 됩니다. 빨리 마스크를 벗고 맘껏 찬미 노래 할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을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노래 불러라.”(시편98,3ㄷㄹ-4).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명확히 선포하신 후 하시는 말씀들은 이 내용의 부연처럼 들리지요. 마치 그 관계성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시려는 듯합니다.

사람의 인성을 취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가시적 존재이십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행적이 사랑이고 자비이신 아버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계시지요. 예수님은 율법 조항으로 삭막하게 규격화시켜 버린 절대자의 틀을 깨고 사랑 때문에 앓으시는 진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아버지와 아드님의 관계를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은 믿음입니다. 서로의 존재 안에 머무름은 신비이기 때문에 육의 논리로 풀어낼 수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로서, 사랑의 유대로 아버지와 긴밀히 이어지시고, 아버지와 하나시라는 신비는 이를 믿는 이들을 그 사랑의 유대로 초대합니다. 믿으면서 그 사랑 안에 포함되도록 부름받는 은총의 신비입니다.

제1독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이루어진 선교의 결말 부분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사도 13,48-50)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한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일부 백성의 호의를 얻지만 이를 시기한 유다인들에 의해 결국 박해받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찼다고 하지요.

아무리 시기와 모독, 박해와 축출, 배척과 거부라는 험하고 불쾌한 일을 겪어도 마음에 주님을 모신 이는 흔들리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걸 제자들이 보여줍니다. 그들이 그저 참아내고 견디는 수준을 넘어서 기쁠 수 있는 것은 스승이 가신 길을 따름으로써 그분을 닮아가다 종래에는 그분과 하나가 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믿음으로 제자들은 더 이상 육과 감정의 원리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담대히 예수님께서 하셨고 또 그들에게 하라고 당부하신 일들을 할 것이고, 성령에 힘입어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하시며 보호자요 변호인인 성령을 보내시어 제자들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어떠한 환난과 박해에도 무너지지 않는 힘을 주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장애가 되는 걸림돌을 치워주시며, 믿는 이들의 간청을 단 한 마디도 흘려 듣지 않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성삼위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도 주님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성삼위의 사랑 안에 함께 스며들어갑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며, 우리는 주님께서 해 주시는 모든 것이 그 응답임을 믿고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그리고 나.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아름답고 복되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눈으로 그분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 이름으로 청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성부 하느님께서 맡기신 인류의 구원 사명을 그들을 통해 계속 이어나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일을 이 지상에서 이어가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각각 그분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 지체인 우리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이웃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행에 옮기십시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일함, 그 거룩함이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일하는 사람은

오롯한 몸과 마음으로

일함으로써

 

몸소 일하심으로써

일하라 부르시는

하느님을

참으로 찬미한다

 

일하는 사람이

일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존중받는 그만큼

 

몸소 일하심으로써

일하라 부르시는

하느님께서

참으로 흠숭을 받으신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보는’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필립보를 비롯한 제자들이 취하는 ‘수동적’ 태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달라’(Show us)고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루 24시간 내내 함께 있으면서도, 그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섭리를 알아보려는 적극적 노력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편안하게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는 그대로만 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들 딴에는 누구도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증거를 직접 보고나면, 자신들의 믿음이 ‘충분히’ 깊어질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요구를 한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시면서, 직접 ‘보라고’(See) 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머무르시면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을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살펴‘보고’, 느껴‘보고’, 경험해‘보고’, 생각해‘보고’, 고민해‘보고’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고 무엇이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인지 스스로 잘 식별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분명히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실천해야 사람들 앞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겠는지를 고민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별과 고민의 시간을 거쳐야만 비로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내가 마음에 품고 살아내야할 ‘나의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쪽집게 선생님이 머리 속에 주입식으로 넣어준 지식은 금방 잊혀지고 사라지지만, 내가 직접 생각하고 고민하고 노력하여 알게 된 ‘살아있는 지식’은 오랜 시간 동안 잊혀지지 않고 내 머리 속에, 내 마음 속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앎’이 오래도록 남아 영향을 미치는 살아있는 ‘앎’이 되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표징’보다는 ‘기적’을 찾습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기적과 관련된 유명한 장소나 사람을 찾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마음에 담으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나주 율리아’나 ‘신천지’ 같은 이단, 사이비 종파가 왜곡하여 보여주는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여 신앙의 길을 잃고 헤매게 되지요.

신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실행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이 힘들고 어려워도 내 힘으로 직접 해내야만, 그 열매인 구원도 내 것이 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 5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요셉의
시간이
새롭게
다가온다.

어떠한
하루를
어떠한 삶을
살것인가를
성 요셉에게서
다시 뜨겁게
배우게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삶이다.

삶은 건강한
노동을 통해
바뀌게된다.

생명과
노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노동은
삶의 가장
적극적인
실천이다.

노동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뿌리를
내리고있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성 요셉또한
노동을 통해
그의 소중한
소명또한
더욱 깊어진다.

삶이란
노동하는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선물이다.

노동은
버겁지만
살아있음의
은총이다.

성 요셉의
노동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한
삶이었다.

성실한 목수
성 요셉의
노동으로
더 중요한 것을
만나게된다.

그것은
삶이다.

삶은
목공처럼
조금씩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느리드라도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노동을
응원하신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안에
노동이 있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는 집필했을 때부터 완결에 이르기까지 26년이 걸렸습니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을 4년 동안 준비하고 6년의 집필 기간을 걸쳐서 완성했습니다. 황석영 작가는 ‘장길산’을 11년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을 하나의 작품에만 집중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준비하고 집필했기에 이러한 대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늘 서두르며 삽니다. 어쩌면 조바심을 늘 내면서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두르다 보면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결과의 질을 떨어뜨리고 개인의 역량을 저하합니다. 그런데도 불안감에 한군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나무꾼이 나무를 하는데 가지고 있는 톱이 무디어져 있습니다. 빨리 나무를 베어서 장에 팔아야 한다는 이유로 무딘 톱으로 계속해서 힘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힘을 쓰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톱날을 날카롭게 가는 것이 옳을까요?

주님께 기도하면서 머무는 것이 이렇게 톱날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시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이 세상을 잘 살 힘을 얻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 조바심과 불안감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알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이 세상을 더욱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으로 당신 모습으로 보여주심으로써,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들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주님을 아버지로 알지는 못하지요. 그래서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사 청했던 것입니다. 아직 믿음의 눈이 떠지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살아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그리스도는 당신을 낳으신 분의 모습을 당신 안에서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완전한 표상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신성을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신 것은 두 분의 본질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하느님을 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 안에 머무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일에만 몰두하게 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뒤돌아볼 때 비로소 이해되지만 우리는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키르케고르).  

 

무기력한 학습.

무기력이 학습된다는 심리학자 마크 셀리그만의 실험이 있습니다.

그는 개 24마리를 8마리씩 세 집단으로 나누고 탈출할 수 없도록 철창을 두른 방에 가두었습니다. 이후 바닥을 통해 전기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첫 번째 집단은 방 한쪽에 차단 장치를 설치해서, 이 차단 장치를 건드리면 전기충격이 멈추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전기충격에 힘들어했지만, 우연히 차단 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반복적인 학습이 일어나니 전기충격이 오자마자 차단 장치를 눌렀습니다. 두 번째 집단은 아무런 차단 장치 없이 철창에 가두었습니다. 전기충격이 가해지면 속수무책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집단은 충격을 가하지 않은 채 철창에 가두었습니다.

24시간이 지난 후, 이제 실험조건을 바꿨습니다. 이번에는 높은 울타리를 제거하고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낮은 울타리 안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전기충격을 가하자 첫째, 셋째 집단의 개들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안전한 곳으로 피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집단의 개들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학습된 무기력의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 지레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단정 짓는 무기력의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학습이 되지 않도록 늘 긍정적인 상황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희망 그 자체이십니다. 절망 안에서 희망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주님 안에서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현존 없이는 교회의 창립과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도행전은 극단적으로 비교대조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그룹은 시기심으로 가득 찬 유다인들입니다. 반대쪽 그룹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찬 사도들입니다.

유다인들이 시기심으로 가득 차게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거칠 것 없는 담대한 말씀 선포에 매료되고 감동받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말씀의 말씀 전문가라고 자처하던 자신들의 설교 때는 고작 100명, 200명이었는데,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다인들의 노골적인 적대감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사도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어놓는 가르침, 유다인들이 그리도 목숨걸고 지켜왔던 모세 율법을 폐기시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도들의 가르침은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고리타분하고 관념적인 유다 지도자들의 설교와는 달리 사도들의 설교는 힘과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흥미진진했고 박진감이 철철 흘러넘쳤습니다. 듣고 있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어갔어갔습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듣는 중에 낡은 삶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열정이 저절로 샘솟았습니다. 사도들이 설교하는 그 자리에서 수백 수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만국 공용인가 봅니다. 사도들의 거칠 것 없는 성공적인 전도에 배가 아팠던 유다 지도자들은 계략을 꾸밉니다.

유다인들 가운데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선동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자기네 지방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저같았으면, 분노로 가득차 그들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고 한 소리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 두렵지 않느냐? 인생 금방 지나간다!’고 경고도 날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발의 먼지를 탈탈 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도시 이코니온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떠나가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저같았으면, 추방에 대한 충격에 의기소침했을 것입니다. 그간 정성들인 지역에서의 복음 선포가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해 크게 상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얼굴을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발걸음은 힘찼습니다. 또 다른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한 여행길이었습니다.

그토록 놀라운 사도들의 모습, 그 배경은 바로 성령의 현존이었습니다. 성령의 현존 없이는 교회의 창립과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교회와 교회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모든 순간 성령께 의탁하고 의존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시대 가장 큰 슬픔은 교회 안에 살아 숨쉬고 계시는 성령의 능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봉성체를 다니면 정말 예수님을 맞으시는 분들의 얼굴이 천차만별입니다. 대부분은 천사와 같은 얼굴로 사제를 맞이합니다. 참으로 기억에 남는 한 할머니가 계셨는데 얼굴이 말 그대로 천사였습니다. 봉성체가 끝나면 이불 밑에서 몇만원이 돈 봉투를 꺼내서 꼭 저에게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 연세에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고우신지 저도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그렇게 평했습니다.

그런데 한 요양병원에서 어떤 분에게 성체를 영해 주려고 한 적이 있는데 그분은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얼굴이 마치 마귀와 같았습니다. 심지어 치아도 육식동물처럼 뾰족해져 있었고 눈은 흰자가 많이 보였으며 입에서는 끊임없이 욕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몸은 사람들에 의해 침대에 묶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온전한 의식이 없다고 판단하여 성체를 영해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의식도 있는 사람이고 봉성체를 기다렸다고 하기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예식을 진행하고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성체를 뱉어버렸고 침이 묻어 녹아내리는 성체를 제가 영해야 했습니다. 그런 저를 향해서 계속 끊임없이 욕설을 해 댔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과는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외모까지도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유튜브에 지금 올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삼위일체는 한 분 안으로 다른 분이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하나가 되는 친교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오신 분이 그 받아들인 이의 주인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받아들인 이는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신 안의 보이지 않는 주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과 행동이 바뀝니다. 결국, 외모까지도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 계신 분의 능력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인간들에게 삼위일체를 계시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아버지를 당신 안에 모시고 그 이후부터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제 당신 뜻대로 살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셔서 아버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자동차 운전자의 성격을 알려면 그 차가 어떻게 달리는지 밖에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을 보면 그분 안에 계신 아버지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당신도 한 몸을 이루는 삼위일체이니 우리가 당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사시면 우리는 이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표징입니다. 물론 표징이나 이적도 일으키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고 결국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이라 할 수 있게 됩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을 잘 아실 것입니다. 어니스트는 그 마을의 매우 온화한 인간의 얼굴 모습을 닮은 큰 바위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얼굴을 닮은 사람이 그 마을에 나타날 것이란 예언도 믿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그런 얼굴을 닮은 사람을 찾았습니다. 자신이 그 얼굴로 변해가고 있음을 잊은 채로. 한 시인이 늙고 주름졌지만 온화하고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한 죽음이 임박한 어니스트를 보며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 씨야말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어니스트를 쳐다보았고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가면서 분명히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지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큰 바위 얼굴은 어니스트의 주인이 되었고 그렇게 그를 변화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나 자신은 절대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였다고 믿을 때 누군가로부터 그분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가면 안에 숨겨진 참 우리 자신이 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모든 신앙인은 “나를 본 것이 곧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 친교의 목적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인식의 전환을 일으킨 성찰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진화론’입니다. 고고학과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학자들은 진화의 고리를 찾아냈습니다. ‘창조론’을 가르쳤고, 주장했던 학자들은 진화론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진화론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신앙 안에서도 진화론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 박테리아, 세균은 아직도 수많은 시간을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만 동물과 식물은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스스로 진화하는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지동설’입니다. 르네상스는 인문학과 과학 발전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천동설’을 가르쳤고, 주장했던 학자들은 지동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지동설을 알고 있으면서 우리는 여전히 해가 뜨고 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지구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우리는 지동설을 이야기하지만 삶 속에서, 신앙 안에서는 여전히 천동설을 이야기합니다. 우주의 차원에서는 천동설도 지동설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은하계는 우주의 중심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바로 여기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시기하였고, 박해하였습니다. 자신들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만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또한 모든 곳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성전에만 계시는 하느님을 생각하였고, 자신들만 보살피시는 하느님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제 여러분과 나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문명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 너무도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운 문화, 역사, 경제, 예술이 너무도 쉽게 멈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근대 문명을 주도했던 유럽과 미국도 코로나19 앞에는 나약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멈춘 사이에 대기는 정화되고 있었습니다. 생물은 더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뉴욕의 맨해튼도 더 깨끗하게 보였습니다. 인도에서는 200킬로 밖에서도 히말라야 산맥을 볼 수 있었습니다. 혜민 스님이 이야기 했듯이 멈추니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었습니다. 물질과 자본이라는 바벨탑을 쌓기보다는 이웃을 돌아보고, 생명을 존중하는 믿음과 사랑의 탑을 쌓아야 합니다.

 

“하느님, 파스카의 천상 영약으로 세상을 치유하시니 저희가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살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분과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은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나는 그분과 함께 하는지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은 나를 보시는데

나는 그분을 보는지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은 내 안에 계시는데

나는 그분 안에 있는지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은 나를 믿으시는데

나는 그분을 믿는지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은 나에게 맡기시는데

나는 그분께 맡기는지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은 나에게 들으시는데

나는 그분께 듣는지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은 내게서 이루시는데

나는 그분에게서 이루는지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은 나를 있게 하시는데

나는 그분을 계시게 하는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예전에 더 프레젠트 피정 중에 부모와 함께하는 첫영성체 어린이 피정이 있었습니다. 피정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보니까 아이들은 정말 엄마와 아빠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기도할 때 같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렸고, 엄마 아빠가 노래를 부를 때 함께 입을 모아 노래를 불렀으며, 엄마 아빠가 춤을 출 때에 같이 신이 나서 몸을 흔들며 춤을 추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육체적인 유전자에 의한 것일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엄마 아빠의 사랑이 그대로 전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시며 그분의 영과 일치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우리도 역시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의 영과 일치된 삶을 이루어 가며 그분을 꼭 빼어 닮은 그분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늘 간직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생명수 내리는 소리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어제 밭이랑을 만들었다. 여러 손들이 함께해 금방 일이 끝났다. 버려진 땅처럼 그랬는데 문전처럼 밭은 다워졌고 친근해졌다. 엊그제 함께하며 심어놓은 토마토와 당귀가 예쁘게 자리를 잡았다. 비가 온다는 소식이지만 생명수를 주었다. 생명은 더욱 푸르렀다.

 

뒷동산 산책에서 가뭄에 먼지가 풀풀날고, 소나무 숲은 노란 송아가루 날렸다. 공해였다. 건조주의보가 긴장케 했다. 아직도 강원도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고성군 산불이 또 나면 어떠나 걱정이 되었다. 비가 내리길 청했다. 아루어 주셨다.

 

비가 온다. 빗소리에 자다가 눈을 떳다. 기뻐서이다. 청했기에 들어 주셨다. 오월 찔레꽃 필때 극심한 가뭄인데 단비가 온다. 이런 반가운 손님이 창문을 두드린다. 손님이 말했다. “문열고 빗소리 들어 봐요!” 반가운 손님이다. 오늘은 한밤이지만 곤한잠 보다는 빗소리가 좋다. 어제 만든 이랑이 촉촉히 화장을 하겠지, 밭이랑이 더 예뻐 보이겠지, 생명을 가꿔 보아야 빗소리도 즐거울 것이다. 모내기 철이오면 두꺼비, 맹꽁이, 개구리 울음소리가 우렁찰 것이다. 빗소리 들으며 잠을 청해야 겠다. 클레식 실내악을 생으로 들으며 또 깊은 잠 청해야겠다.

 

 

 

나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이기우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세족례의 가르침에 이어서 매우 중요한 깨우침을 주고 계십니다. 바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성을 뜻하는 이 말씀은,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전권(全權)을 지니고 계시다는 주장이 됩니다.

 

이 전권주장은 당신이 성부 하느님과 일치하여 존재하신다는 신성(神性)의 진리와 함께, 당신 제자들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신적 권능을 행사하시겠다는 현존(現存)의 진리를 아울러 천명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현존의 진리는 전권주장이 뜻하는 신성의 진리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들리는 다음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즉,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의 능력이 갑자기 위대해져서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이 성령으로서 제자들 안에 현존하시며 일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현존의 진리는 성부 하느님과 일치하여 계시는 존재로서 당신의 이름으로 제자들이 청하는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도록 중재하여 주시겠다는 중재(仲裁)의 진리를 포함합니다. 실로 엄청난 약속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공식 기도는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라는 결문으로 마칩니다.

 

성소주일이었던 지난 부활 제4주일에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 떼에게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해 주시겠다는 중재의 복음 말씀도 들은 바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사회와 교회의 최근 변화에 나타난 시대의 징표를 주의깊게 살펴보면서 여러 성소를 받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기운을 얻어 누릴 수 있는 사도직에 대한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협동조합이라고 부르는 공동체의 사도직이었습니다. 비록 그 이름이 우리에게는 아직 낯설고 생소해서 사도직으로 응답하기에는 세속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성령의 깨우침도 있었듯이, 중세의 커다란 변화 속에서 더욱 어려워져만 가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선구적 그리스도인들이 창안한 협동조합은 온전한 믿음을 구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던 새로운 사회사도직 형태입니다.

 

서로가 함께 지내며 가진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어 놓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함으로써 사기지은으로 나타나는 부활의 은총을 구현하는 공동체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한 발현 사건이었습니다. 탐욕이라는 세상의 죄에 물들지 않고 나눔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상하지 못함의 은총을 받았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 일으킬 정도의 매력을 발산함으로써 빛남의 은총을 받았으며, 자신들도 가난했던 코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이 대기근을 만나 궁핍해진 예루살렘 공동체의 교우들을 위해 헌금하여 나눌 정도로 빠름의 은총을 받았고, 이런 전통이 로마 제국권 내에 널리 퍼져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무려 수백 년 동안이나 통공과 연대의 흐름으로 거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마저도 이겨낼 수 있었기에 사무침의 은총을 받은 발현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근세 이후 유럽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였던 소수의 선구자들은 협동조합이라는 공동체와 사도직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헌신적 창안 덕분에 오늘날 유럽에서 전체 경제물동량의 10%를 넘는 규모를 차지하게 된 협동조합 공동체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되었음을 수치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자본주의 기업들이 부침을 거둡하는 가운데에서도 유럽의 협동조합 공동체들은 조합원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신뢰가 작동하기 때문에 매우 안정된 운영을 해 왔습니다. 또한 협동조합 공동체들은 자본주의 기업과 달리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하지 않고 사회적 공동선에 기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룩한 수익과 수입의 일부를 모아 비영리 목적으로 활동하는 공익 단체에 기부하는 전통을 수립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신뢰를 받고 있는 이 협동조합원들이 앞장서면 일반 시민들도 따라하기 때문에 사회적 반향이 큽니다. 사회적 공신력과 호소력에 있어서 유럽 가톨릭 주교단이 움직이는 힘보다 더 크게 보일 정도입니다. 세계적인 환경운동 단체인 그린피스라든지,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은 국제 NGO들의 활동이 그 대표적인 결과입니다. 그들의 공익 활동으로 인해 지구촌의 공동선이 보호되고 증진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양 떼의 반응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유럽이 종교적으로는 쇠락해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본산임을 말해주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1990년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협동조합 방식으로 공동선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가난한 이들이 자립하고자 하는 크고 작은 시도들이 우수죽순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국제연합이 정한 ‘세계 협동조합의 해’였던 2012년에는 협동조합 기본법도 제정되어서 이런 움직임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협동조합에 참여하는 이들이 신앙인이 아닌 경우도 많아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또 신자들이 포함된 경우라 하더라도 사회적 공동선에 대한 신용이 없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십중팔구입니다.

 

사도직 활동이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협동조합 방식을 통한 사도직을 포함해서, 성령으로 현존하시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을 인간관계에서나 사회적으로 온전하게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 덕분에 그분보다 더 큰 일도 해 낼 수 있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하신 예수님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점 의혹도 없이 확고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직 깨치지 못해 무지한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하시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유다인들에게도 그야말로 폭탄과 같은 발언이 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라는 진리를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발설하십니다. 바야흐로 "때"가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요한 14,10)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니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동시에 당신 말씀이 지닌 능력을 오로지 아버지의 공으로 돌리시는 예수님의 겸손이 느껴집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전기가 마련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사도 13,46).

선택된 민족임을 자부하며 새로운 길, 복음을 배척하는 유다인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육화하여 현존하시는 말씀을 율법에 기대어 밀어냅니다. 말씀께 죽음을 안김으로써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려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사도 13,48).

이 말씀은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비록 혈연으로는 선택된 민족 안에 처음부터 속하지 않았더라도 진리와 구원에 목말라하는 이들이라면 하느님 구원 계획 안에 진즉에 들어 있었을 테니까요.

진리와 구원을 목말라 찾던 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이의 조건이나 외양 너머로, 그가 전하는 말씀에서 진리를 듣게 됩니다. 또 그에게서 파견하신 분을 보게 되지요. 이는 그의 능력이라기보다 말씀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52).

모함과 박해로 쫓겨나면서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합니다. 비록 유다인들에게는 거부당했지만 주님의 말씀이 온 지방에 두루 퍼졌으니까요. 인간적 성취나 실패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제자들이 자신들이 선포하는 예수님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머무르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나약한 인간인 우리는 그저 부족한 죄인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담아 사심없이 신중하게 전하는 말이 곧 그분의 뜻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벗님! 세상의 평범하고 특출날 것 없는 이웃에게서 예수님을, 하느님을 보는 눈이 뜨이기를 바라며 벗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서로의 존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함으로써 이 세상은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기쁨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아멘.

 

 

 

아름답고 행복한 우리들, -주님과의 일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름다운 시편 성무일도로 사랑의 새날을 시작한 행복한 수도자들입니다.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임이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에는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

주님, 하신 일들이 얼마나 크옵시며, 생각하심 얼마나 깊으시니이까”(시편92.2-3.5-6).

 

참 사랑은, 참 행복은 아름답습니다. 바로 주님과 하나된, 하나 되기를 지향하는 분들이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닮아 참 사랑의, 참 행복의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참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에 참 아름다운 분들을 보며 떠오른 생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지난 목요일 말씀에서 새삼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술가들에 대해 축복을 청하고 싶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다. 아름다움 없이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모든 피조물들을 내리 누르는, 무엇보다 모든 남녀의 마음 속에서 표현되는 침묵의 신음을-왜냐하면 ‘사람은 하느님 앞에 거지’이기에-종종 해석해 내는 이들이 예술가들이다.”

 

깊이 들여다 보면 누구나 ‘사람은 하느님 앞에 가난한 거지(man is a beggar before God)’입니다. 이걸 깨달아야 참 겸손에 참 아름다움, 참 사랑에 참 행복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참으로 자기실현을 한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평소 복음성서를 읽을 때 마다 늘 복음의 아름다움에 ‘경탄(驚歎,敬歎)’하는데 제 평소 생각과도 일치하는 교황님의 견해가 고맙습니다.

 

어제 어버이날은 어버이날 중 제 생애 첨으로 참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몇분의 자매들로부터 꽃을 선물받았고, 24년동안 매해 어버이날이면 꽃을 가져오는 자매도 또 만났기 때문입니다. 35세때 자매가 지금은 59세가 되었으니 꼭 24년입니다.

 

마음이 주님을 닮아 꽃보다 아름다운 분인데 꽃을 가져오다니, 가져온 꽃이 자매에 비해 참 초라해 보인 순간적인 깨달음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꽃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은 꽃이다, 죽어야 지는, 늘 피는 꽃이다’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어 적어 놓은 ‘꽃과 산’이라는 시입니다.

 

-“꽃이/꽃을 가져 오시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꽃보다 더 예뻐요

 

산이/산에 갈 수 있나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산보다 더 좋은/더 깊은 산이예요”-

 

참으로 주님을 닮아 하나될 때 꽃보다 더 예쁜, 산보다 더 좋고 깊은 산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아름답기로 하면 꽃중의 꽃이요 좋고 깊기로 하면 산중의 산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운 시詩’같은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믿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과 동시에 하느님을 반영합니다. 복음의 주님의 제자들 역시 주님을 반영하지만 깊이 깨닫지 못한 듯 합니다.

 

바로 필립보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다음 주님 말씀이 크게 깨우침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평생 주님과 함께 산다는 우리 수도자들에게 주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 모두를 부끄럽게 하고 분발奮發케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필립보 덕분에 이런 깊은 깨우침의 진리를 알게 되니 필립보가 고맙습니다. 역시 솔직하고 아름답고 고맙기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고백한 토마스와 흡사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더욱 주님을 닮아 아름다운 제자들이 되어감을 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얼마나 아름답고 고무적인지요. 역시 아름다움 없이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있음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하느님과 상호내주의 일치를 사시는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며 바로 복음서 전부가 이런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무엇이든 다 이루어 주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주님을 사랑하여 믿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하나된 복음의 예수님처럼, 예수님과 하나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주님과 하나됨으로 100% 자기실현에 이른 참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그 고난의 역경중에도 두려움 없이 참으로 담대하고 성령따라 사는 모습이 바람같이 자유롭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두 제자를 통해 일하고 계심을 봅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민족들의 빛이 된 제자들입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했고, 제자들을 내쫓김을 당하였지만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기쁨과 찬양, 성령 충만의 참 밝고 역동적 분위기입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와 하나 되고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오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갈망하듯 주님 또한 우리를 갈망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반영하며 참 아름답고 행복한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시편8,5-6). 아멘.

 

 

 

모든 일의 힘의 원천은 믿음이다<요한,14/7-1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누구나 위데한 일을 성취하려면 신념이나 믿음이 뒷받침 해야 합니다. “ 나는 믿는 사람은 내가 한 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지 때문이다.” 이 말씀은 교회 역사 안에 이룩한 역사적 업적을 살펴 보아도 중명되고 남습니다.주님을 믿는 믿는 읻들의 마음속에 목숨을 내어놓고 믿음을 굳게 쌓았고 그 믿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버자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고난의 길을 가고 스 많은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일이 있는 곳에 몸을 아끼지않고 가고 해결하는 사람들의 수고는 가이 영웅적이라 할 수있습니다.

 

교황 청는 경제 정치적 중심지는 아리도 사람들의 관심 집중적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교황청의 말 한마디는 세계사를 움직이며 약간의 부조리는 인간적 실수는 있었어도 시작이 반이다 라는 읨로 인류는 진 선 미로 향하여 발전하고 봉사하고 나눈고 친교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마는 시기질투로 방해 하는 일이 있지만 교회는 계속 성장합니다.

우리는 보편적 의미를 가진 교회로 전파 되었고 믿음을 지키려 목숨까지 내어준 사람의 수는 다 알아볼 수 없습니다. 만일 한 사람 한 사람 십자가를 이따에 세운다면 지구상에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두하고 바른 갈로 나간 사람들의 수를 알아보면 모두 알기에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는 믿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줄었다 늘었다 하는 굴곡이 있습니다. 정치적 발전에 기어하지 않은 다 하지만 가장 민주적이고 가장 자율적이고 가장 진보적입니다. 세계적으로 시간대에 미사가 끊어지지 않고 어디서나 미사가 지속적으로 진행됩니다. 이런 이애기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모르시는 것 첫째 수도회가 얼마나 많은지 수를 몰르신다. 둘째 예수회 총자의 머리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신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같이 주님이 하신 일보다 큰 일이 세상에 일어납니다.

이모든 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일이지만 힘의 원천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모두가 허사입니다. 그런데 저는 요사히 걱정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믿음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교회를 망한다고 합니다. 이것만은 변하지 않은 말씀 “ 지옥문이 쳐 이기지 못 하리라.” 튼튼한 믿음속에 후대에 세상 끝 날 가지 교회를 전해주고 많은이가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가도록 내 믿음 네 믿음은 견겨히 하도록 기도합니다. 저는 미사 때 마다 “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부족한 제자들을 통하여

     이종경 비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유다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돌아가신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신성모독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불렀고, 급기야 당신께서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지니신 분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는 유일신 신앙을 가진 유다인들에겐 두고 볼 수 없는 중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공격을 모면하기 위해 당신의 신성을 에둘러 표현하거나 왜곡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에 알려야 하는 참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진리를 제자들에게 더 자주 알려주셨습니다. 앞으로 그들은 주님의 구원을 널리 알릴 사명을 수행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공생활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그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알려주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심지어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부활 이후 제자들이 주님 말씀을 모두 깨닫고 사도로서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끝까지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저는 OO으로 충분합니다"라는 말은 보통 상대방이 제안한 것보다 '급'이나 '가치'가 한 단계 낮은 것을 선택하면서 겸손하게 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웃어른께서 밥을 사주실 때, "뭐 먹을래? 오늘 고생 많았는데 간만에 소고기나 한 번 사줄까?"라고 물으시면, "제가 뭐 한 일이 있다구요. 전 국밥 한 그릇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그런 경우이지요. 병에 걸린 자기 종을 고쳐달라며 찾아온 백인대장이 '집까지 함께 가자'는 예수님의 제안에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답하는 것도 같은 경우입니다. 만약 상대방이 제안한 것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이 정도는 되야 만족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가 한 말은 '겸손한 만족'보다 '교만한 불만족'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깊은 일치를 이루고 계시기에 예수님의 뜻을 아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본 것은 결국 하느님 아버지를 본 것과 진배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정도로는 만족 못하겠다'고 합니다. 자기는 하느님을 직접 보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어야 성에 차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스승인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답답한 '불통'의 상황이 생기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보다'-'알다'-'믿다' 사이의 상관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아는 것'이 제일 먼저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처럼 먼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서 그분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만, 비로소 하느님께서 어떤 식으로 세상을 섭리하시는지,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여 피조물들을 구원으로 이끄는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세계관 안에서 어떤 대상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 대상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을 전제로 합니다. 상대방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에 내 뜻을 그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먼저 '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힘든 길을 가려고 하기보다, 그냥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거룩하고 좋은 것들을 수동적으로 '보며' 좋은 것들을 누리고자 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뜻이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심을 믿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필립보의 모습은 '삶 속에서 만나는 주님'과 '성전에서 만나는 주님'을 분리하려는 태도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깨달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데에는 소극적인 모습. 장엄한 전례가 주는 거룩한 느낌이, 좋은 묵상글을 읽고 난 후 마음에 이는 이성적 감동이 '진짜 하느님 체험'이라고 여기며 그 안에 안주하려는 모습. 성직자나 수도자가 삶의 부조리와 세상의 불의를 지적하고 바꾸자고 하면 '빨갱이'라는 낙인, '정치사제'라는 낙인을 찍어가며 종교는 사회에 관여하지 말라고 부르짖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필립보의 진심인 것입니다. 그런 필립보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신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다고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도 남들처럼 하느님 체험을 '찐하게' 제대로 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고 푸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수십 년 동안이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매 주일이면 열심히 미사에 참여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몸을 받아모시면서 왜 주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할까요? '삶 속의 주님'과 '성전에 계신 주님'을 분리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살면서 겪는 사건과 상황 속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하지 않고, 내 주변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나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잘 알면서 주님의 목소리가 직접 들려야 바꾸겠다고, 내가 잘못한게 맞다면 주님께서 벌을 내리시지 않겠느냐고 고집 부리며 버티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고나서도 주님에 대해 모르는 채 죽고 싶지 않다면 더 늦기 전에 내 고집을 꺾고 주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 알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 1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도의 길을

벗어나 있습니다.

 

기도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기도로 단련되고

고통으로

겸손해지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삶을 드러내는

기도가 필요한

우리들

시간입니다.

 

기도와 함께가는

우리들 삶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처럼

기도가

우리 삶을

비추어 줍니다.

 

기도로 마음을

다듬고 기도로

마음을 다스립니다.

 

알 수 없는

시간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기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 잡게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2011년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사회심리학과 교수 로이마이스터는 ‘나쁜 것이 좋은 것보다 강하다’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인간의 뇌는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 그런데 주머니에 구멍이 나서 잃어버렸던 1,000원이 아까워서 속상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렇다면 칭찬 받은 경험과 비난 받은 경험은 어떨까요? 이 역시 비난이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분명히 칭찬 받은 일도 많았을 텐데, 혼났던 기억이 더욱 더 생생하게 남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가 오래 기억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연하니 어쩔 수 없다면서 계속 기억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특히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계속 기억하면서 미움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할까요?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쌓이게 되면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책에서는 좋은 기억을 위해 이렇게 계속해서 생각하라고 하더군요. ‘당신의 삶은 당신의 기억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

 

부정적인 기억을 더 많이 하는 내 뇌의 경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의식의 초점을 불행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맞춰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행복의 길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한 것이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단순히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주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갖춰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주님을 믿고 있었습니까? 이 믿음은 팽개쳐두고 혹시 ‘어쩔 수 없다.’면서 스스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과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스스로 이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고 투덜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내 자신의 기억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주님께 대한 사랑에 의지하십시오. 분명 행복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의 열쇠 중 하나는 어두운 과거를 잊어버리는 나쁜 기억력이다(리타 메이 브라운).

 

주님과의 대화

먼 나라에 사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여행을 가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가 했는데, 요즘에 잠이 잘 오지 않으면서 감성적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화를 걸어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답니다.

문제는 그 시간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면 자야 할 시간이기 때문에 큰 실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 나라에 사는 친구가 있다면, 즉 시차가 8시간 이상 나는 곳에 친구가 있다면, 이곳이 한밤중이지만 그곳은 아침이 될테니 얼마든지 전화를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지요.

저는 “하느님께 기도해보시죠. 그분께서는 늘 깨어계십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께서는 “대화도 서로 이야기를 나눠야지요. 나 혼자 이야기하면 문제가 해결되겠어요?”라는 것입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 나눠야 내 마음의 문제들이 해결될까요? 언젠가 상담하면서 아무런 이야기를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분의 사연이 너무나 기가 막혔기에 오히려 제 말이 이분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의 1시간을 꼬박 듣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과 대화하면서 많이 풀렸어요.”

저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지요.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분께서는 주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에 대화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시대의 깊은 아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송구함으로 가득한 5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월만 돌아오면 언제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감정은, 시대의 깊은 아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큰 부끄러움이요 송구함입니다.

 

전남대학교 정문 근처에 저희 수도 공동체가 자리잡고 있었기에, 아직도 5월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불행한 정치 군인과 일당들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다들 숨죽이고 있을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얻어 맞고, 투옥당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맑은 얼굴로 또 다시 스크럼을 짜고, 거대한 악이요 불의 앞에 온 몸으로 저항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소나기처럼 쏟아붓던 최루탄 자욱한 거리 풍경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 중에 ‘지랄탄’이라고, 탁구공 만한 작은 최루탄이 여기저기 동시다발로 발사되면, 그 녀석들은 이리저리 지랄같이 굴러다니면서 엄청난 가스를 내뿜었습니다, 그로 인해 학생들과 시민들이 받았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큼지막한 사과탄이 빠른 속도로 날아올 때 받게 되는 두려움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5월을 맞아 많은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 그때 학살의 주범들을 사면해줬는가?’하는 분노요 안타까움입니다. ‘기대할 사람에게 기대했어야지’ 하는 회한입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국민 앞에 사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학살 범죄 행위를 자위권 발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처는 그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적 퇴행은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라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크게 공감합니다.

 

우리 모두 지난 역사를 통해서 온 몸으로 느끼는 바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언제나 또 다른 악순환을 반복한다는 진리입니다. 그토록 큰 관대함으로 눈물을 머금고 사면을 해줬다면, 하루에도 수백번씩 감사하면서, 남은 생애는 언제나 가슴치면서, 쥐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비온 뒤 여기 저기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독버섯과도 같습니다. 불사조(不死鳥) 같다고나 할까요? 진정성있는 반성이나 참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올해는 기적처럼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성찰과 사죄가 있으려나 기대해보지만, 웬걸 안그래도 쓰라린 유족들과 희생자들의 가슴에 굵은 소금을 왕창 뿌려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가르침도 사실은 상식적인 것이고 일반적인 토대 위해 성립됩니다. 상대방의 인생에 평생 씻지 못할 치명적 과오와 상처를 입혔다면, 그에 합당한 방식과 절차에 따른 진정성 있는 사죄와 다시는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노라는 결심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절차가 이루어진 다음에 용서나 화해라는 단어가 사용 가능한 것입니다.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수호해야할 군인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오로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사람, 채 피어나지도 않은 무수한 꽃봉오리를 무참하게 꺾어버린 대학살의 주범, 역시 결코 용서와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마땅합니다.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은 역사의 오점들은 두고 두고 그 누군가에게 큰 상처로 남습니다.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희생자들, 부상자들, 그 가족들이 가장 힘겨워하시는 바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든든한 기둥 같았던 남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생떼 같은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낸 후 겪어야 했던 슬픔과 상처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이 남기고 간 빈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슬픔이 있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당당히 일어선 분들이었습니다. 놀라운 용기와 희생정신을 지닌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위대한 행동에 찬사를 드려도 부족한데, ‘폭도’란 말로 오물을 덮어씌웠습니다. 가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죄인처럼 숨죽여 지내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참혹한 대 학살의 주범인 당사자와 그 가족, 일당들은 아직도 고개 뻣뻣히 쳐들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습니다. 국민 세금으로 특급 경호를 받고 있으며, 자신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며 그 잘난 ‘자서전’까지 세트로 발행해서 팔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희극적인 일이 아직도 가능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이신 주님께서 518민주화운동의 영령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한없이 따뜻한 위로를 베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직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불행한 역사가 조속히 청산되길 또한 기도합니다.

 

 

 

사랑은 내 안의 예수님을 꺼내주는 것.

     전삼용 요셉 신부님

MBC 베테랑 기자였던 김상운씨가 ‘왓칭’이란 책에서 한 방송작가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TV 프로가 폐지되자 1년 동안 백수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은 집을 떠나 연락을 끊었습니다.

유치원 다니는 딸아이를 키우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마침 TV 단막극 공모가 있어서 죽기 살기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석 달 동안 그 짓만 하였고 어느 덧 마감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도 원고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안 되는 건가봐.’

한겨울의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춥고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딸아이를 보아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째 감지 않아 기름이 조르르 흐르는 머리, 핏기 하나 없는 피부, 앙상해진 얼굴, 퀭한 눈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울 속에서 익숙한 따스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세상살이 참 힘들지? 네 힘으로 안 되면 하늘의 힘을 빌어보렴.”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녀는 털썩 주자앉아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제발 완벽한 원고를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떴는데 뭔가에 홀린 듯 아이디어가 샘솟았습니다. 그것을 정신없이 메모해나갔습니다.

“그건 분명히 내 머리에서 나온 건 아니었어요. 완벽한 원고가 고스란히 보였으니까요. 제목까지도.”

그녀는 응모에 당선하였고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특별한 것 같지만 미술이던, 음악이던 간에 창조활동을 하는 수많은 작가들이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믿지 않고 하늘의 도움을 청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게 만듭니다. 

 

해피포터 시리즈로 단숨에 세계적인 거부가 된 영국의 작가 롤링(J.K. Rowling)은 기자들이 어디서 그런 영감을 얻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누군가가 내 머리에 아이디어를 확 집어넣는 것 같았어요. 그 아이디어가 전개되는 걸 선명하게 볼 수 있었죠. 나는 보았던 걸 적어놓은 것뿐이에요.”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도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에 비길 바가 못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야기를 들려주실 공간을 열어드려 그 들려주시는 것을 받아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은 창조의 능력이고 오직 창조자만이 사랑의 주인이십니다. 피조물이 사랑을 하려면 그 창조자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창조자께서 피조물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실 때 그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비워야합니다. 나를 비우는 방법은 나를 하느님께 제물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미사 때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다는 상징입니다. 봉헌이란 하느님을 위해 나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느님 것이 됩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라고 하시며, 당신이 아버지를 당신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 당신 자신을 아버지 손에 맡겼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은 당신이 받아들이신 하느님을 그대로 꺼내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하시며 당신이 하시는 모든 말과 행동이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웃을 위해 단돈 천원이라도 내어준다면 그 돈은 분명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받지 않고 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그분께서 당신을 내어주게 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방법입니다.

나는 줄 것이 없지만 하느님은 줄 것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드러내 보이며 예수님께 많은 청을 드려 그분께서 그 청하는 사람을 통하여 세상에 많은 축복을 내리게 합니다. 사랑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꺼내 주는 행위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년 초에 있었던 일입니다. 사립 유치원과 정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정부는 정부가 마련한 회계 시스템을 사용하도록 하였고, 사립 유치원 연합회는 몇 가지 이유로 반대하였습니다. 다행히 정부의 안을 받아들여서 유치원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였기 때문에 해결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도 아이들이 먼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주 52시간 근무가 시행되면서 전국의 버스업계와 정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버스 노조에서는 몇 가지 이유로 반대하였습니다. 다행히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국민을 먼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협상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 정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한 버스 노조에 박수를 보냅니다. 

 

국회의원들도 산적한 문제들을 협상을 통해서 해결하면 좋겠습니다. 당리당략을 따지기 전에 국민을 먼저 생각한다면 풀릴 문제들이 많을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유대인들은 사도들과 격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보지 않았고, 정의를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전통과 가치를 지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보기보다는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았다면 유대인들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되고, 사람들이 다투고, 분노와 미움이 자라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말을 조심하도록 ‘치아’라는 창살을 만들어 놓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입술로 덮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무시하는 말을 합니다. 자녀에게 말을 거칠게 하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말의 힘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시기와 질투에 가득 차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 비난의 말을 하였습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말입니다. 인격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악의 세력에게서 나오는 말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한 말로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민족에게 퍼져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입니다. 기쁨을 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권위와 힘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였고, 말씀의 힘으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말씀의 힘으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말씀이 진리였으며, 말씀은 빛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라일락의 향기는 비가와도 젖지 않는다고 어느 시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말과 사랑이 담긴 우리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이웃들에게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오늘 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은 어떤 말인지 생각합니다. 욕망을 채우려는 말이었는지, 시기와 질투를 나타내는 말이었는지, 비난과 험담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말이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 생명을 살리고, 신뢰를 주고, 평화를 주고, 참된 진리를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믿어라! 믿는 사람은 ...”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이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분의 말씀과 행한 일을 보고서라도 믿어라”(요한14,7-14참조).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겁이 없는 사람을 본다. 왜 겁이 없겠는가? 믿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을 하고저 할 때, 잘 이루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은 자기 능력이 아닌 믿는 분께 그 일을 잘 이루어 달라고 청하고 그 일을 믿는 분께 맡겨 드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무리수처럼 보이는 일도 가능하다.

 

잠을 잘 자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잠들 때, 걱정에 대한 분심잡념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가며 무리수의 일이 생겨날 때라도 주님을 믿고 주님께 청하고 주님께 맡겨드리고 잠을 청하기 때문이다. 나는 잠을 잘 잔다. 그 이유는 내 안에서 무리수일거라는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잘 이루어 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예수님은 아버지께, 아버지는 예수님께 믿음 안에 서로 말씀하시고 일을 행하신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하시는 일이 된다. 우리가 볼 때, 행하시는 일이 무리수처럼 보이나 언제나 일의 결과는 유리수가 되어 세상에 들어난다. 믿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믿어라! 우리가 생각했던 그 이상의 큰 아름다움으로 드러난다.

 

“믿어라” 믿는 사람은 일을 이루어 달라고 청하고 맡길 수 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다 이루어 주신다.

 

사진은 ‘쪽’이다. ‘쪽’은 하찮은 풀 같지만 ‘쪽빛’이 된다. ‘쪽’에서 염료를 추출해 모시를 염색하면 그 색갈이 하늘을 닮은 푸르른 남빛을 낸다. 이 색을 ‘쪽빛’이라 한다. 놀라운 변신이다. 우리도 이런 변신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믿어라’ 믿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 있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

 

 

 

<당신의 빈자리에 서게 하소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아버지께 가신 후

당신의 빈자리에 서 있습니다

 

진리를 팽개치고

거짓의 노예가 된 세상

 

길을 잃고 끝없이 표류하는

의미 없이 휘청거리는 세상

 

생명이 움트지 못하고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

 

당신께서 아버지께 가신 후

당신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절망적입니다

 

다시 당신의 빈자리에 섭니다

 

아니 당신의 빈자리에

당신께서 저를 세우십니다

 

거짓을 파헤쳐 진리를 세우고

어두움을 걷어내 길을 밝히며

죽음의 사슬을 끊고 생명을 꽃피우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참담한 무기력함과

분노의 응어리를 부수며

 

뜨거운 열정으로 빛나는 희망 머금고

당신의 빈자리에 서게 하소서

 

당신 떠난 뒷자락을 향한

초점 없는 눈빛 거두고

 

보잘것없는 이 한 몸

당신의 빈자리에 기꺼이 서게 하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께서

아버지를 보여 주셨듯이

당신의 뒤를 따라

생명을 꽃피우는 진리의 길이 되어

아버지를 드러내게 하소서.

 

 

 

아버지의 이미지

     곽승룡 비오 신부님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 9)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을 금지하였나?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금하신 그 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신명 4, 23)

 

교부들의 대답은 성화상ikon으로 설명하였다. 성화 안에 그려지고 설치된 돌, 나무, 또는 색깔이 공경된다면 그것은 우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미지 그 모습 안에 있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자신 안에서 아버지를 보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는 천주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 안에서 역시 볼 수 있다. 맑고 아름다운 모든 것이 투명하게 되고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을 직관하도록 한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요한 14, 10)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투명한 창문유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에 당신을 계시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생명의 원천이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일과 업적을 홀로 단독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이미지 곧 투명한 창문유리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도 똑같은 관상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성경의 참 저자는 성령이시다. 영은 살아있는 펜으로서 저자들을 통하여 기록하고 봉사한다. 성경의 저자들 모세, 예레미아, 마태오, 바오로.... 안에 영이 계시고, 그들은 성령과 함께 있다.

 

마치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머물러 계시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루고 실천하는 모든 것도 그분과 우리사이의 협력(synergy)으로 일치된 업적이다, 우리의 신앙여정은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계신 맑은 성화, 투명한 창문유리이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나의 어머니 광주는 아직도 아프다.

     최민석 신부님

80년 오월 광주 내 나이 20살. 오월 18일 그날은 주일. 주일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전남대학교 정문을 지나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전남대학교 정문 낮 12시 경 바로 그 장소에서 유혈사태를 목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때 그 장소 그 시각이 바로 5.18의 최초의 유혈사태였고, 나는 그 역사적 사건의 목격자다.

 

그 때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농대 뒷마을에 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 학생들을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이 학교 정문을 막아섰다. 학교 정문에서의 유혈사태를 목격하였지만 나는 그 심각성을 알지 못했기에 다른 길로 학교에 진입했다. 집으로 가던 도중에 학교 내에 주둔하고 있던 4명의 군인들을 문리대 캠퍼스 등나무 앞에서 만났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이 새끼들이 데모를 하니까..............”하면서 다짜고짜 발길질에 커다란 곤봉 세례를 퍼부었다. 4명의 군인들의 의한 무자비한 구타였다. 잠시 후 “일어나, 너희들 여기서 5초 내에 사라지지 않으면 죽인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직 그 소리만 기억한다.

 

그 명령자는 아마도 그 중에 소대장 쯤 되어 보이는 이의 말이었다. 나는 그 길로 마을로 향해 내리 달렸고 마을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그 곳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때 내 온 몸은 피멍이 들었고 옷은 다 찢어져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업혀 집으로 들어와 응급치료를 받은 후 2박 3일 꼼짝 없이 집에 누워있었다.

 

몸을 추수리고 일어나면서 도청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전두환 일당의 사살명령으로 저질러진 그 날 현장을 확인하고 말았다. 당시 도청 앞 상무관에는 피해자 시신으로 가득했다. 그 중에 내 시선을 끈 것은 “아들아 장하다.”는 쓰여 있는 관이다. 그렇게 많은 시신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처음이다. 아 얼마나 처참한 날이었던가.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나는 보았다. 그 날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그 날 금남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그 날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를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그 얼마나 끔찍한 밤이었던가. 광주는 그러나 달도 둥그러이 밝았다. 아 이제 보니 기획된 시나리오에 따른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의 조직적인 학살의 날이었던 것이다. 광주의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광주의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다.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80년 광주는 전두환 악당들의 시나리오에 따른 계획된 학살이라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라. 집집마다 거리마다 침략자와 같은 몽유병자들이 피에 굶주려 날뛸 때 그해 5월 광주는 바다 한 가운데 섬이었다.​

 

아 80년 광주는 섬이었다. 대한민국의 바다에 떠 있는 섬이었다. 광주의 섬사람들은 울부짖었다. 39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섬의 이야기는 다 알려지지 못했다. 그 5.18진상 조사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학살을 계획하고 사살 명령을 지시한 살인마 전두환 후예들이 가로 막고 있다. 그 악당들과 후예들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아직도 광주 5,18 망언을 계속하고 있다.

 

그해 5월 광주는 고독한 십자가였다. 학살자들이 황구(黃狗)를 그슬리며 시뻘겋게 웃을 때 신 그해 5월 광주는 부러진 십자가였다. 신부와 스님들도 군부대에 잡혀가던 골고다 언덕이었다. 발가벗겨 내팽개쳐진 부처의 알몸이었다.

 

아아, 그해 5월 광주는 달도 밝았다. 총칼뿐인 악마들이 사방팔방 미친 듯이 들쑤셔도 온 시가지가 보리밭으로 출렁이고 사람들은 서로를 아껴주고 이 땅의 갈 길을 향하여 살과 뼈의 깃발을 흔들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분노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5월 광주는 오히려 흥분을 자제하며 수습해 나갔다. 함께 쓰러져 죽으면서도 함께 일어나 살고야 마는 하늘같은 펄럭임이 있었다, 그 오월은 내게 푸르름이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노을빛이었다. 오월은 내게 살아있음을 노래하고 푸르게 흔들릴 줄 아는 바람으로 왔다가 바람으로 떨어져버린 망월동의 꽃잎이었다.

 

해마다 오월은 다시 찾아오는 그 슬픔과 분노의 오월로 왔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소리 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흰빛 꽃잎이 되어 내 가슴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매년 광주의 오월은 그저 따사로운 한줄기 햇살 햇살로 왔다가 최루 가스와 함께 피어나던 민들레의 시절을 거쳤다.

 

오월의 슬픈 함성은 나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순결한 꽃이다. 눈부신 흰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게 하는 오월이다. 그 오월의 꽃이 다시 피어나고 있다. 그 80년 오월 광주가 나를 39년 동안 나를 키우고 성숙한 삶이 되게 한 어머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 온 세상은 구원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의 ‘로마서 주해’에서(Cap. 15,7: PG 74,854-85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의 유대로 결합시키셨으므로 성서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비록 여럿이지만 한 몸이며 서로가 서로의 지체입니다. “주님은 율법의 조문과 규정을 폐지하시고 원수 되었던 분리의 벽을 헐어 버리심으로써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서로 같은 마음을 갖고,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들이 같이 괴로움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예를 입으면 모든 제체들이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을 너그러이 맞이하셨듯이 여러분도 서로를 너그러이 맞으십시오.”라고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서로서로의 짐을 지고 “평화의 유대 안에서 마음의 일치를 유지한다면” 서로서로를 맞아들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너그러이 맞아들이셨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주셨다.”고 성 요한이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의 생명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시어 우리 모두를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넘어가게 하시고 죄와 죽음에서 속량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할례 받은 사람들의 종이 되셨다고 사도가 말했을 때, 그 말씀은 하느님의 계획이 지닌 목적을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그들의 후손들을 축복하시어 그 민족을 하늘에 있는 별처럼 불어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그것들에게 천상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인성을 취하여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의 말씀대로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고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고자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다만 이스라엘 집안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 왔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셨고 또한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그들 역시 우주의 창조주요 구세주이시며 구속자이신 분께 영광을 드리도록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유다인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상에서 오는 자비가 일단 모든 이를 곧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의 신비가 그 자비의 목적을 성취했습니다. 타락한 사람들 대신에 온 세상이 하느님의 자비로써 구원받았습니다.

 

 

 

5,18의 아침 단상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아침에 일어나 창문 밖을 내다 보았다. 비가 제법 내리고 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하느님께 감사 드렸다. 찔레꽃 필무렵이면 언제나 긴 가뭄이 이어졌다. 이 날 아침의 비는 땅을 적시기에 충분한 비였다.

 

오늘 군부 독재에 항거하며 싸웠던 1980. 5,18광주민주화항쟁이 있던 날이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죽어간 숭고한 영령들을 기억하게 한다. 그 때의 한없이 흘렸던 눈물이 오늘도 비가 되어 내린다. “영령들이시여! 고이 잠드소소” 우리가 촛불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있소.

 

 

 

성모의 밤 요한 19,25-27; ’19/05/18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저는 어머니가 아니지만, 제가 본 어머니의 모습은 부끄럽게도 이러합니다.

 

어머니의 눈에는 자기 자식이 제일 먼저 보입니다. 아무리 많은 아이들이 있어도 자신의 자식은 유별나게 돋보입니다. 아니 다른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자신의 자식만 보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어머니의 마음 속에는 늘 자식이 들어 있습니다. 어디 가서 음식을 먹다가도, 자식에게 먹여주고 싶은 마음에 주위 눈치 안 보고 싸서 가져 가려고 합니다. 자신은 안 먹어도 자식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고, 자신은 펑퍼짐한 옷을 입어도 자식은 사시사철 때맞춰 새 옷을 맞춰주려고 합니다.

 

좋은 것은 하나라도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마련해주지 못해 안달복달합니다.

 

비가 오기라도 하면, 맨 먼저 혹시 자식이 비를 맞지나 않을까 걱정이 돼서, 학교 앞까지 우산을 가지고 달려가서 자기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자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자식이 혹시 아프기라도 하면, 그 아이를 얼싸안고 쩔쩔매며 차라리 자신이 그 병고를 대신 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가 어서 빨리 일어나기를 바라며 이 병원 저 병원 쫓아 다니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대신 앓게 해 달라고 기도마저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머니의 몸이 망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체, 자식을 위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하려고 합니다.

 

누가 혹시 어머니의 자식을 흉보기라도 하면, 자식에게 눈이 먼 어머니는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누가 혹시 자녀의 부정적인 단점을 조금이라도 지적하면, ‘아니에요! 잘 못 본 거에요!’라고 싸고 돕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해이고 곡해하고 있는 것이라며 강변합니다. 열 달 어미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어머니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못해 무결점 옥동자일뿐입니다. 아마도 그런 어머니가 계시기에 어머니의 자녀들인 우리가 오늘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우리를 애지중지 키워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살아있습니다.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어머니의 인생을 다 희생해주셨기에, 저희가 그나마 사람구실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 어머니이신 여러분, 제가 드린 어머니에 대한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라겠지요.

 

여러분, 여러분이 어머님께 대한 이 보잘것없는 설명을 가득 채워주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으로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 사랑하고 애써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어머니로서 살아오신 인생의 궤적들을 채워주십시오.

 

아마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이러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이신 마리아도 그러기에 예수님을 애틋하게 사랑하셨고, 자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 자식을 위해서 어머니의 모든 것을 바치셨으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 3장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는 자식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친척들을 데리고 허겁지겁 자식에게 달려갑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왜냐하면,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22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멀쩡한 자식 예수님은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건재함을 어머니께 보여줍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저는 아무일 없어요.’ 라고 외치기라도 하듯이 말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4-35절)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속단과 오해와 불신에 대해 아들의 원망을 듣기라도 한 것 같아 당혹해 합니다. 그렇지만 자식이 멀쩡하다는 상황 앞에서 안심하고 기뻐하며,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으시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십니다. 아니, 오히려 이 순간 이후 어머니 마리아는 늘 아들 예수를 따라다니십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사람들 앞에 결코 나서지 않으시지만, 제자들 중의 수제자인 베드로보다 먼저, 아니 누구보다도 먼저 아들 예수님의 뜻을 정확히 알아듣고, 준비하고 이해하며 따르시는 확고한 지지자와 추종자가 되십니다.

 

어쩌면 주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에,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어머니에게 심어주셨나 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머니들에게 아버지 하느님의 온정을 대신하여 어머니들의 자식인 우리들을 키우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 속 깊이 담고서 우리들을 키우십니다.

 

이러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주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맡겨 주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주시며 그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그 사명을 다하시고 지상 생애를 마치시는 순간마저 어머니를 그냥 그렇게 남겨두고 가실 수가 없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못내 가슴 속에 빚처럼 남아있는 어머니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면서 어머니 마리아께,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성모님의 아들이 되어 어머니로 모시도록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도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27절) 라고 맡기십니다. 우리는 이 성경구절을 통해 어머니 마리아를 주님의 제자단인 우리 교회의 어머니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우리 육신의 어머니는 아쉽게도 우리가 철이 들어 어머니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는지를 채 깨닫기도 전에 가십니다. 미처 효도를 다 바치지도 못했는데, 우리가 어머니의 은공을 기억하려는 순간, 아쉽게도 앞서 가십니다. ‘언제 내가 네 효도를 바라기라도 했다는 말이냐?’고 물으시듯이, 우리 곁을 떠나 하늘로 가십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 소명을 다 한 것에 기뻐하시고, 어머니의 마지막을 기꺼이 맞이하시는가 봅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런 어머니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우리 어머니들에게 그 보답으로 주님 품 안에서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천상 행복을 누리게 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신 우리들의 차례입니다. 우리의 효도를 요구하지 않으시는 어머니들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것 자체로 이 지상 생애에서 기뻐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보답하는 길은 우리도 주 하느님의 뜻대로 주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안고, 우리 주위에 어머니가 필요한 이들에게 어머니가 되어 주는 길입니다. 여성성이거나 남성성이거나 관계없이, 피로 엮어진 관계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오늘 우리 곁에 어머니가 필요한 이들에게 어머니성의 사랑을 나눕시다. 무엇이 사랑이고,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지, 어머니들께서는 자신의 몸을 불태우시면서 우리들에게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 어머니들에게 심어주셔서, 우리 육신의 어머니들이 우리에게 나줘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도 형제자매들을 사랑합시다.

 

비단 우리 본당의 어린이들을 우리 모두의 자녀로 삼고 함께 돌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에 어머니가 없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이들, 어머니가 없어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이들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신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교회가 어머니가 됩시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누군가에게 이유없이 지지받고 사랑받고 싶은 이들에게, 우리 교회 공동체가 어머니가 됩시다. 

우리 천주교회는 스스로를 자모이신 성교회라고 부릅니다. 자비로우신 어머니의 마음과 가슴으로 자녀들을 품어 안도록 합시다. 자녀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거룩한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신 어머니 마리아의 품처럼 우리 교회의 자녀들을, 부모 없는 자녀들을, 누군가가 필요한 이들의 어머니가 됩시다. 그렇게 품어 안음으로써 우리 교회의 선교 사명을 실현합시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예화를 하나 들려 드리자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목소리 좀 들려주세요.” 종달새가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하느님 목소리 좀 들려주시라구요!” 하늘에서 천둥이 쳤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하느님, 모습을 좀 보여주세요.” 밤하늘에 별이 반짝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다시 외쳤습니다. “하느님 기적을 보여주세요!”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절규했습니다. “절 만져주세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자 하느님이 내려와서 그를 어루만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깨에 앉은 나비를 귀찮아 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 안에서 갖가지 모습으로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감사드리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감사드리는 자의 몫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참 행복 -주님과의 만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주 예전에 써놨던 ‘정주’란 시가 생각납니다. 정주의 행복을 노래한 시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의 산이나 나무가 상징하는 바 정주입니다. 죽을 때까지 수도원 안에 정주 서원을 한 우리 분도 수도자들에게 산과 나무는 정주의 모범입니다.

 

-“산처럼/머물러 살면

푸른 하늘/흰 구름/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배경이 되어 주신다.”-

 

늘 하늘에 닿아있는 산 능선들을 바라볼 때 마다 떠오르는 또 하나의 자작시를 소개합니다.

 

-“늘/하늘에 닿아 있는/고요한/산 능선들

내 영혼/늘/하느님께 닿아 있는/고요한/산 능선이고 싶다.”-

 

하느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언젠가 거기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한결같이 내 삶의 자리에 항구히 정주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날 때 치유와 위로, 기쁨과 평화입니다.

 

늘 강조합니다만 모든 것 다 지녔어도 마음안에, 그 공동체 안에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그 지닌 것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선사되는 기쁨과 평화보다 좋은 치유제도 없을 것입니다.

 

어제 안내실 소임 형제가 미사 봉투 둘을 전해 주었습니다. 한 눈에 들어온 생미사 사연이었습니다. 하나는 폐암2기의 형제였고, 하나는 유방암 수술을 앞둔 자매님이었습니다. 그 불안과 두려움이 얼마나 크겠는지요. 치유자이자 명의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친히 위로와 치유를 주시고, 기쁨과 평화, 희망을 선물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시편 말씀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뵈올 때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의 선물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나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사막교부들 역시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십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당신을 만나는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여기서 저절로 솟아나는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필립보 제자의 청에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아버지께 이르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신 당신과 늘 지낸 제자들이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말했으니 예수님도 참 당황하셨을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바로 이 말씀 직후에 나온 필립보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청원합니다. 바로 무지에 눈이 가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아버지를 못 본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곧장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필립보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는 참 좋은 깨우침의 말씀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세례받고 수십년 동안, 또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과 함께 수십년 동안 살아왔는데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겠는지요. 매일 미사때 마다 만나는 주님인데 말입니다. 이어 제자들은 물론 우리의 믿음을 촉구하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파스카 주님이십니다. 하느님 곁에 초월해 계시는 동시에 우리와 함께 오늘 지금 여기 내재해 계시는 파스카 주님의 은총이 참으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여 참으로 진실히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다 이루어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참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아버지와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가 얼마나 견고한지 깨닫습니다, 거푸 두 번이나 강조되는 예수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다 이루어 주겠다는 확신에 넘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절실히 청할 때 주님은 다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주님을 만날 때, 뵈올 때 넘치는 활력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사도행전의 제자들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사도행전에서 당신을 만난 제자들을 통해 대활약을 펼치십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담대함은 바로 파스카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박해후 쫓겨나면서도 기쁨과 성령이 가득했던 제자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주목되는 단어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무려 4회 반복하여 나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요 빛입니다. 말씀은 파스카 주님의 살아있는 현존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전해야 했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들불처럼 번지는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말씀 선포의 사명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들불하니 소개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5.18민주화 운동 3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광주 항쟁 참여 일곱 들불 야학 관련자를 기리는 상이 바로 들불상이고 제14회 들불상 수상자로 고 김용균씨의 모친 김미숙 씨가 선정됐다는 소식입니다.

 

들불상으로 하면 주님의 말씀을 들불처럼 타오르게 한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일 것입니다. 믿음의 눈만, 사랑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리운’ 주님의 얼굴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뵈옵는, 만나는 그리운 얼굴, 주님의 얼굴입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행복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당신은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요한 14, 7)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 복음(요한 14, )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 자신은 하나이며, 당신 자신을 본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를 본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는 얼마나 일치되어 계신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또 예수님께서 얼마나 확신에 가득차지 않고서는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활동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활동이 곧 하느님의 활동이고, 또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늘의 아버지를 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를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혹은 직접적인 당신의 활동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또 모든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시는 분은 하느님 아버지이시라는 것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진복팔단에 나오는 그런 마음들을 형성해야 된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께서 밝혀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오랫동안 생활에 왔던 제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보는 하느님 아버지를 한 번만이라도 뵙게만 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그렇게 오랫동안 생활했으면서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말을 하느냐 하시면서 섭섭하다는 말씀을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본 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느님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를 뵈온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 14, 10)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얼마나 일치되어 계시면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수용하시는 분이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닮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 사람을 보면 곧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다는 표현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또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는 이런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보여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시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될 수 있도록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 안에 일치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뜻과 행동이 담겨있어야 할 것입니다.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제 앞에 나타나지 마셔요'(요한 14장 7~14)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주님을 볼 수 있다면 족합니다.'

예수님과 오랜 시간을 지낸 필립보가 예수님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늘 함께 있었는데 뭐를 더 ??? 

먹으면서 먹고 싶은걸 이야기하고 같이 있는데 있어 달라고 하며 보고 있으면서 보여 달라고 하는 우리를 보고 예수님이 뭐를 더 ??? 

동생 수녀님이 저 보고 묻습니다.

'수녀님은 예수님 보고 싶어요?' 

'아니, 난 안 보여도 괜찮아'

보이지 않기에 더 애틋하고 혼자말로 건네면 대답하지 않지만 느껴지는 그 온기가 순간마다 함께 계심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존재감 ~ 영향력 ~ 

보이지 않으나 계시며 굳이 나와 너를 통해서 드러내시려는 분,

이 세상 끝날까지 기쁜소식이 되고 구원의 손길이 지속되길 바라시는 분

예수님! ~^--^

제 앞에 나타나지 마셔요.

제 눈에 띄지 마셔요.

안 보여도 느끼는데 보이시기까지 한다면 그 감당을 어찌해야 할까 ~ 

보이지 않기에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하며 마음으로 느끼는 사랑이여, 저는 흡족하오니 저를 통하여 제 생명을 당신 뜻 이루는데 써 주소서!

 

 

 

     노중호 신부님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장 7-14)

새해를 시작하며 ‘이렇게 살아야지’ 계획을 세웠던 것 같은데, 어느덧 한 해의 중간 지점에 와 있습니다. 얼마 전 한 교우에게 받은 편지가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것 같아 소개합니다. 

“암환자들에게 주로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인 모르핀, 이 모르핀보다 약 50배 강한 엔돌핀은 웃음 호르몬입니다. 행복할 때, 기쁠 때, 때로는 어이가 없을 때도 하하하 크게 웃으면 그때 나오는 엔돌핀은 모르핀보다 더 강한 힘으로 고통을 없애줍니다. 그런데 엔돌핀보다도 100배 강한 호르몬이 ‘다이놀핀’, 이 호르몬은 감동 호르몬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거나, 뜻밖의 선물을 받았을 때, 위로를 받았을 때, 가슴이 뭉클뭉클 할 때 나오는 호르몬입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을 살며 가장 큰 감동을 느끼는 순간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사랑을 느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큰 사랑에 가슴 먹먹해지며 나오는 다이놀핀은 우리의 고통을 잠재워줍니다. 어쩌면 이 두 호르몬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끼며 그분 뜻대로 기쁘게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도 늘 예수님의 삶을 되새기며 감동하고, 그 감동을 사랑으로 실천하며 주위 이웃들과 엔돌핀과 다이놀핀을 주고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거울처럼 비출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태양의 빛을 받아 환한 빛을 내는 달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비추고 있습니까?

 

 

 

시작을 마치는 사람들 <요한 14, 7-1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새날 새 아침에 일어나 계획한 모든 일을 실천하고자 있는 능력을 다하지만, 저녁이면 실망하게 됩니다. 오늘 주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루 일정에 계획된 일을 다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일생을 주님의 일을 시작하고 참으로 큰일을 해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큰일이 무엇인지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1963년 사제로 시작하여 2019년이 되기까지 주님의 일을 얼마나 따라 하고 큰일을 하고 여기까지 왔는가?’ 생각하니 부끄럼만 앞서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있는 한 주님이 원하시는 큰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며 오늘 시작합니다.

 

아침에 깊이 깨닫게 된 것은 그 큰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아버지에게 깊은 신뢰심으로 기도하지 않고 내 생각이나 뜻대로 하려고 하니 졸작이 나오고 실패작이 나옵니다. 

성모님처럼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해야 합니다. 또한, 아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세상에 오시고 아버지의 일을 하신 것같이 우리의 기도 안에 아버지의 뜻을 시간마다 찾고, 현존하는 자리마다 찾아 실천해야 합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모두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는 큰 것이고, 내가 하는 일이 수도 공동체 안에서 미미하지만 모두의 일이 모이면 태산도 옮기고, 허허벌판에 크고 아름다운 안식처가 생기고, 하느님의 일이 크게 성장하고, 많은 새의 안식처가 됩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자기 혼자 무엇을 한다고 나서면 성장에 반하는 것입니다. 모두 함께 기도하며, 기도하고 일을 하면 겨자씨가 자라나듯 큰 나무 되어 찾아드는 많은 새의 안식처 되고 자유와 평화와 기쁨의 삶이 됩니다.

 

시작은 나 하나의 믿음에서 나오며 많은 믿는 사람들의 믿음으로 주님께서 시작한 일을 성장하고 완성하며 많은 이가 그 안에 분명한 구원이 성취되도록 기도합니다. 슬픔이 기쁨이 되는 것이 행복인 것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 내가 사는 이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 1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뜨거운 기도로

우리의 오월은

더욱 향기롭고

눈부십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우리는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기도의 

새날입니다.

 

머무름의 기쁨을

기도로 깨닫게됩니다.

 

믿음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남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며

믿음의 일들입니다.

 

믿음 안에

기도가 있고

기도 안에

믿음이 있습니다.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찾던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우리가 청하는

예수님의 이름은

 

열림이며

부활이며

하느님이며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모든 

순간들입니다.

 

우리를 

우리이게 하시며

우리의 삶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합니다.

 

생명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시듯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소서.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대부분 돈을 많이 벌었거나, 어떤 특별한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었을 때, 아니면 사람들이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을 가지고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준에 맞춰서 저를 비교해봅니다.

 

제 통장에는 그리 많은 돈이 없습니다. 매스컴을 통해서 억대의 말이 나오면 정말로 다른 나라 말처럼 들립니다. 돈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저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일인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최고의 신부라고 말할 수 없는 저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그렇게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닙니다. 이 기준에서도 저는 실패자입니다. 사람들이 오를 수 없는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제게 과분한 사랑을 주시지만 이 역시 세상 속의 큰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제로 살고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 분야에서도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자입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기준으로 삼는 행복은 세상 안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묵상을 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글과 강의를 하는 것 등등 모두가 부족하기만 하지만 그대로 이 안에서 만족을 하고 있으며, 매일 아침 어떤 좋은 사람과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행복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 말에 큰 공감을 합니다. 솔직히 많은 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행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나 그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존감이 떨어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필립보가 예수님께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청을 드립니다. 이 부탁이 이루어진다면 정말로 행복할 것이라는 의미로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뵐 수 있도록 하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하십니다. 행복은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할 때 생긴다는 말씀처럼, 행복은 하느님을 뵙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기쁨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요?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실천하는 가운데에서 행복이 있습니다. 이 행복을 찾는 오늘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커다란 기대와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라파데르).  

 

혼자 있을 때의 행복을 찾으세요.

어렸을 때, 혼자 있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집이 답답하기만 했고 그래서 어떻게든 집을 떠나서 친구들과 놀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간다고 해서 특별히 놀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쓸데없는 일을 한 것만 같고, 그래서 집에 들어올 때에는 ‘또 쓸데없는 일을 했구나.’라는 후회를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신부가 되어 성지에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거나 또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할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고 있는 일들이 재미있고 또한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밖에 나가서도 집에서 하고 있는 것들의 연장선에서 쓸데없는 일보다는 가치 있는 일을 찾게 됩니다. 지금 현재 혼자 있어도 또 여럿이서 함께 있어도 행복합니다. 어디서든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은 함께 있을 때에도 행복하다.”

혼자 있을 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청에서는 매주 금요일 회의를 합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가톨릭교회의 통계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문제는 없는지 고민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추구한 길에 문제가 있다면 대책을 연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건강검진을 하면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본인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을 하면 의사의 처방을 받아들일 수 있고, 생활 습관을 바꾸는 노력을 함께 한다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고, 생활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건강검진을 받아도 건강을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가톨릭교회의 통계라는 건강검진은 교회의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사생활이 줄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신앙생활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체성사에 대한 참여가 줄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들이 줄어든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영양실조를 겪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세를 받는 사람들의 수가 감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 모두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명입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복음화의 열차에 기름이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는 아이들과 학생들 그리고 청년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정에서 신앙이 전수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성당에 오기 전에 다른 곳을 다니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에 가지 않아도, 기도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기 때문입니다. 학원에 다니고, 성적이 올라서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삶의 토대가 되는 신앙, 인문학, 예술적 감각은 아이들에게서 점차 멀어지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한국사회의 흐름처럼 교회도 급속하게 고령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많은 예산을 들여서 출산장려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지속되었던 가족계획 정책과 아이를 키우기 어려워진 여건 때문에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한국사회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성소자들의 감소입니다. 사제와 수도자가 되려는 젊은이들이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서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 할 사제와 수도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뿌리가 메말라가는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는 점차 생기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신앙심이 깊고, 분별력이 있으며, 지적으로 준비된 젊은이들이 성소의 길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추기경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연구소에서는 다양한 대책을 마련할 것입니다. 신심서적을 소개하고, 복음화를 위한 다양한 교육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성장하고 문명을 일으켜 온 것은 부단한 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의 쇄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목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교구를 넘어선 다양한 연대와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통합 할 수 있는 것은 통합하고, 나눌 수 있는 것은 나누어야 합니다. 다양한 사목의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사목의 지평을 열어야 합니다. 말씀을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으로 찾아가는 사목도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교님들과 사제들이 교회의 현재 모습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그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권위와 힘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말씀의 힘으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말씀의 힘으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말씀이 진리였으며, 말씀은 빛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행동과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길동무, -예수님과의 우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 이상 전쟁은 없다.”

어제 남북정상의 판문점 선언입니다. 4월 1일, 주님 부활 대축일로 시작된 부활시기 4월27일,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은 성공적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해주신 느낌입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걷우오리다.’ 시편 말씀이 이뤄진 느낌입니다.

 

어제는 한반도에 참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남북의 화해분위기가 꿈만 같습니다. 기적같은 일입니다. 당사자들의 노력과 더불어보이지 않는 많은 분들의 기도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마치 남북이 하나가 된 축제분위기와 같았던 하루였습니다. 같은 뉴우스를 자주 반복해 봐도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문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반도의 남북에 주신 참 좋은 선물의 하루에 감사했습니다. 한민족의 위대함을 세계만방사람들에게 깊이 널리 각인시킨 쾌거快擧의 하루였습니다. 평화의 집, 남북정상만찬석상에서 문대통령이 김위원장에게 했다는 다음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문대통령은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라는 북한 속담을 인용하며, “김위원장과 나는 이제 세상에서 둘도 없는 좋은 길동무가 됐다”고 말했다 합니다. 길동무는 길벗처럼 도반에 대한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1953년생 문대통령과 1984년생 김위원장은 31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대통령은 김위원장을 길동무로 언급했습니다. 나이를 초월하는 길동무와의 우정관계이듯 시공을 초월한 예수님과의 우정도 그러합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우리의 영원한 길동무-예수님과의 우정’으로 정했습니다.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 참 좋은 속담입니다. 더불어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가야 한다’는 인디언 속담도 생각납니다. 멀리 인생순례여정중인 우리에게 영원한 길동무 예수님과의 우정은 필수입니다.

 

어제 강론쓴 후 내내 흡족치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이 좋은 복음 말씀을 충분히 표현해내지 못한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고무적인 가슴 설레게 하는 복음 말씀인지요. 거의 32년전 대구가톨릭신학대학 부제반 때 지금은 고인이 된 문세화 교수 신부님께 드렸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하느님 역시 우리가 예수님처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살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수준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목표라 생각합니다.”

 

물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지만, 문교수신부님도 제 의견에 전폭적으로 공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예수님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때 비로소 구원의 완성이란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필립보의 대화가 참 재미있습니다.

 

-예수님;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예수님;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그대로 세례받고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말씀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깊어가는 우정이었다면 이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주님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세례받았어도 주님과 남남의 관계도 있겠고, 끊임없이 깊어가는 길동무로서 주님과 우정관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남는 것은 영원한 길동무인 주님과 우정관계뿐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가면서 점차 비슷해져 가다 죽을 때는 모두가 똑같아 집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부많이 한 자나 적게 한 자나 똑같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마지막으로 영원히 남는 것은 주님과 우정관계뿐이요 인생 성패의 기준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다 같아도 같을 수 없는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의 깊이입니다. 주님과 깊은 우정에서 샘솟는 기쁨과 평화가 행복한 노년과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주님과 우정이 깊어가면서 주님을 통해 아버지를 뵙기에 필립보처럼 새삼스럽게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한 길동무 예수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보이는 길동무 형제들과의 우정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마침 아프리카에서 오틸리엔 연합회 주관하에 양성장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수도형제가 보내 준 사진이 영원한 길동무 예수님 안에서 이뤄진 형제 길동무들 모습이 담긴 사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인종, 국가, 언어, 나이를 초월한 수도형제들간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길동무의 모범입니다. 영원한 길동무인 예수님과의 우정이 전제되었기에 이런 보이는 길동무 형제간의 우정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합니다. 이런 담대함은 전적으로 예수님과 우정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 섭니다.”

 

최선을 다하고 집착없이 이렇게 두 사도가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영원한 길동무이신 예수님과의 깊은 우정때문임을 깨닫습니다. 두 사도는 박해에 지체없이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떠났고, 두 사도의 선교로 생겨난 안티오키아 신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찼다하니 이 또한 두 사도를 통한 영원한 길동무,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길동무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어제 한반도에 내리신 하느님의 축복에 저절로 오늘 화답송 시편으로 그 감사를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시편98,3ㄴ-4). 아멘.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청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내 바람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여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기심을 채울 수도 남에게 해가 되는 무엇인가를 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구원을 청했듯이 우리도 이웃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을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바람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말합니다.“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침묵해야 합니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침묵하는 사람입니다.”깊은 침묵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눈과 입은 닫고 가슴과 귀를 열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책에서 하느님을 탐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발견하는 것은 기도 안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들어야 하겠습니다. 

 

피아노를 치면서 피아노를 배우듯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잘 하려거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따라서 많이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혹 구해도 얻지 못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했는지 짚어보십시오. 분명 주님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며 희망이길 바랍니다. ‘인간 아무개의 이름으로 청하면’인간적인 것을 얻을 것이고,‘예수님의 이름으로’청하면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모든 것을 얻게 될 껏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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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로 양육되는 사람은 주님의 생각을 닮는 것”이다. 그분께서 다른 이를 위해 쪼개진 빵이 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곧 다른 이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프란치스코 교황).

 

 

 

"나를 본 사람은 곷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14,7-14(부활 4주 토)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토마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뒷부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이에, 필립보가 간청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요한 1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보여 달라’는 제자들에게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관계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에서 쓰인 ‘보다’라는 동사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갔을 때, 요한이 베드로를 뒤따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입니다. 이는 구경꾼처럼 단순히 바라본다거나 관찰하여 파헤쳐본다는 것이 아니라, ‘보고 알았다’, 곧 보고서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라는 뜻의 ‘보다’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보다’라는 뜻은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를 안 사람은 하느님을 본 것이며, 하느님을 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한 것은 ‘과시해 보여 달다’는 의미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과시’가 아니라 ‘보는’ 것이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이는 아들 안에 아버지의 본질이 있고 아버지 안에 아들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아들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아버지의 말씀이며, 아들이 하는 행동은 모두 아버지의 행동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호내재가 꽃피우는 것이 바로 두 분이 함께 하신 “일들”이며, 그것은 곧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 ‘일들’, 곧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더라도 당신이 하신 일, 곧 구원하는 일과 하느님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는 일 안에서 당신의 권능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두 번씩 반복 강조하여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3.14.)

 

 먼저 당신께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기도하는 것이요,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권능으로 다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결국,당신이 일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그들에게 당신의 모범에 따라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가르치십니다.(요한 13,1-15) 그러고 나서 곧바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16절)라고 하시며,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파견한 이, 곧 주인이신 분께서 직접 보여주신 모범을 우리도 삶으로 실천할 때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인에게 한 행동을 종들에게, 파견한 이에게 한 박해를 파견된 이들에게 할 것입니다.(15,18-25) 그럼에도 제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켜 서로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 벗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는다면, 종은 예수님의 친구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14절)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지만, 친구는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들어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은 우리를 종 취급하면서 무조건 당신을 따르라고 권고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아버지를 알게 됨으로써 당신의 벗이 되라고, 당신의 명령을 잘 실천하여 생명을 향한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 당신의 벗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18절에서 예수님은 이 말을 하는 것이 모든 이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시편 41편 10절을 인용하면서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십니다. 시편 41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제가 믿어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저를 일으키소서. 제가 그들에게 앙갚음하오리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유다의 배신으로 죽음을 겪게 되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을 다시 일으키시리라는 것을 직접 예고하심으로써, 훗날 제자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이 그분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벗으로서 당신의 모범을 따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파견된 제자들을 박해하는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이가 될 것이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가 될 것입니다.(20절)

 

● 말씀 따라 걷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불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당신의 빈자리에 서게 하소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진리를 팽개치고

거짓의 노예가 된 세상

 

길을 잃고 끝없이 표류하는

의미 없이 휘청거리는 세상

 

생명이 움트지 못하고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

 

당신께서 아버지께 가신 후

당신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절망적입니다.

 

다시 당신의 빈자리에 섭니다.

 

아니 당신의 빈자리에

당신께서 저를 세우십니다.

 

거짓을 파헤쳐 진리를 세우고

어두움을 걷어내 길을 밝히며

죽음의 사슬을 끊고 생명을 꽃피우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참담한 무기력함과

분노의 응어리를 부수며

 

뜨거운 열정으로 빛나는 희망 머금고

당신의 빈자리에 서게 하소서.

 

당신 떠난 뒷자락을 향한

초점 없는 눈빛 거두고

 

보잘것없는 이 한 몸

당신의 빈자리에 기꺼이 서게 하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께서

아버지를 보여 주셨듯이

당신의 뒤를 따라

생명을 꽃피우는 진리의 길이 되어

아버지를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께서 아버지께 가신 후

당신의 빈자리에 서 있습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Ad Iesum per Mariam)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도회 입회 전 청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할 때, 언제나 들고 다니던 두툼한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자주 등장하던 성인이 한 분 계셨는데, 프랑스 북서쪽 몽포르 지방 출신 성 루도비코 신부님(1673~1716) 이셨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레지오 마리애 교본은 이 분의 말씀과 영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분은 레지오 마리애 창설의 주인공이자 주보성인 격이었습니다.

비상한 통찰력과 탁월한 예언 능력의 소유자였던 루도비코 신부님은 당신의 저서를 통해 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마리애 출현에 대해 정확히 예언하였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가장 위태로운 시대에 마귀와 세속과 부패와 싸울 막강한 군단, 즉 예수님과 성모님의 용감무쌍한 남녀 병사들로 이루어진 대군단이 나타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가톨릭 교회 안에서 루도비코 신부님은 성모님에 대한 탁월한 신심과 열정으로 유명합니다.

성모님과 묵주기도는 그의 영성생활에 있어 기반이 되는 두 중심축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극진한 성모님 사랑에 대해 우려스런 눈길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예수님을 소홀히 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의 열렬한 성모신심은 곧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평생에 걸친 그의 모토는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Ad Iesum per Mariam)’였습니다.

1700년에 사제가 된 루도비코 신부님은 도미니코 재속3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흠모했던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기 위해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묵주 기도의 비밀’ 등의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한편 그는 성모님의 깃발과 보호 아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착한 목자들의 모임을 만들기 위해 열렬히 기도했고,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동료 사제 몇명과 힘을 모아 ‘마리아 선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루도비코 신부님의 감동적이고 열정적인 설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너무 과하다,  이상하다.’는 피드백도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너무나 강했던 루도비코 신부님이었기에 오해도 많이 받고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때로 큰 좌절도 맛보았으며, 그로 인해 건강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성모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열정을 식지 않았으며, 그 누가 뭐래도 자신의 길을 꿋꿋히 걸었습니다.

 

전국을 순회하며 설교 활동을 계속해나갔습니다.

루도비코 신부님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성모님께서 하시는 역할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완덕은 예수 그리스도께 동화되고 결합되며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완전한 형태의 신심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 동화되고 결합되어 우리를 그분께 더욱 완전하게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으신 분이므로, 모든 신심 가운데에서 그분의 어머니 성모님께 대한 신심은 우리 영혼을 우리 주님께 바쳐 주님과 동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 영혼을 봉헌하면 할수록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께 영혼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 있으며, 성모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로부터도 멀어져 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에게, 당신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지난 시간 갈라진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수없이 해왔었는데 어제는 정말 하느님께로부터 그 기도의 응답을 들은 것과 같은 하루였습니다. 아무쪼록 화해의 하느님이시며 일치의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더 많은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하루 빨리 참된 평화의 날들을 이루어 주시기를 재차 기도드립니다. 

 

요한 복음 6장28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복음말씀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피조물인 미약한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힘은 없다고 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그 힘은 바로 하느님에게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 하느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고 이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곧 그분만이 나의 구세주이시며 그분만이 나의 주님이심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그분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 역시도 그분 안에 참된 영광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요한 14, 7-1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 아버지를 보고 만나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함은 믿는 사람들, 하느님을 아버지로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에 영광스럽게 드러나고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보고 체험하게 됩니다. 필립보가 그렇게 보고 싶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주시러 오신 아들이신 주님을 뵙고 우리도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따라 살아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됩니다.

어제 우리는 뉴스를 통해 평화 모드를 보고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바로 눈앞에 민족의 통일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끼게 하여 감동과 기쁨을 만난 날입니다. 그러나 생각이나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두 정상의 선언문을 들으며 6.15와 10.4 선언문을 상기했습니다. 실현되지 않은 지금까지의 현실을 생각하며 ‘말로써 끝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우리의 현실에서 평화통일을 보려면 10년이든, 11년이든 침묵의 시간은 상호 간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새롭게 시작하려면 묵은 때를 벗어내고 깨끗한 마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새날 새 아침을 맞이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어제의 모든 것을 깊은 반성을 통해 뉘우치고 고백하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를 진실한 마음으로 인정할 때 새로운 시작이 가능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것은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실천이 우선되는 것입니다. 참 평화는 거룩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민족의 통일은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고 배격하는 문제가 아니고, 힘의 논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서로의 짐을 지고 주님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야 함을 깨닫고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가도록 기도합니다. 그때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 1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일 먼저

찾아야 할 이름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이름입니다.

 

우리 힘만으로

살아온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인생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생과

함께 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만들어가는

이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면

매순간 가장 

좋은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청할 수 있는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전하는 것이며

 

기도는 날마다

돌보아주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됩니다.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게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다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뜨거운 믿음으로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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