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주님께서 한나를 기억해 주셨기에 한나는 사무엘을 낳았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9-20
그 무렵 9 실로에서 음식을 먹고 마신 뒤에 한나가 일어섰다.
그때 엘리 사제는 주님의 성전 문설주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11 그는 서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
12 한나가 주님 앞에서 오래도록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엘리는 그의 입을 지켜보고 있었다.
13 한나는 속으로 빌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는 그를 술 취한 여자로 생각하고
14 그를 나무라며,
“언제까지 이렇게 술에 취해 있을 참이오?
술 좀 깨시오!”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자 한나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리!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16 그러니 당신 여종을 좋지 않은 여자로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17 그러자 엘리가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8 한나는 “나리께서 당신 여종을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그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의 얼굴이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
19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라마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20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cure of a demoniac
말씀의 초대
엘리 사제는 한나의 진실한 마음을 보고 안심하고 돌아가라며 위로한다(제1독서). 사람들은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란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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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을 만난 마귀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의 이 말은 악마가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마귀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고 있듯, 악마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아 가는 데 방해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마귀의 이 말 한마디에 담겨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악마는 우리가 하느님과 아무 상관 없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받으려면 미사와 고해성사를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도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하느님과 그 어떤 것도 함께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무엇인가 함께하여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는 마귀의 말처럼, 아주 부담스럽고 괴롭게 느껴집니다. 신앙이 짐처럼 귀찮게 느껴집니다. 오히려 하느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살아가는 것이 매우 편하고 기쁩니다. 악마는 이렇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권위’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 또는 ‘누군가의 행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힘’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악의 지배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힘입니다. 이 힘이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 말씀 한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하던 악마를 떠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그분의 말씀에는 우리를 빛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 탁월한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억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김재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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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과 더러운 영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읽고 해석하는 공간, 그리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깨닫는 공간인 회당에 더러운 영에 짓눌린 이가 들어올 수는 없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저자는 현실의 당위를 깨뜨리고 있습니다.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해서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에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다 보면, 낯선 이들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감은 이유 없이 커져 갑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그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더럽다고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이유 없는 적대감에 희생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분리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서로를 향한 시선이 서로를 멸망시킬 듯 날카롭다면 우리는 더러운 영에 취하여 사람다움을 잃어 가게 됩니다.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사람다움의 회복이었고, 사람다움은 이 세상에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무한한 자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얽힌 실타래마냥 꼬인 이념의 논쟁들, 사상의 다툼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제 목소리 하나 내지도 못한 채 사람 꼴을 잃어 가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제 목소리를 내기 전에,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만의 ‘코드’에 합당한 이들만 모인 공간(회당)을, 낯선 ‘코드’도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넓디넓은 공간으로 만들 줄 아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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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란 상대에게 존중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내면의 힘과도 같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권위를 갖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때 성장합니다. 권위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힘으로 누르려는 권력과는 달리 겸손과 사랑으로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관계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율법 학자들처럼 성경 지식과 전통에 대한 해석의 권위와 같은 지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병들고 악령에 갇힌 이들을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영적인 권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굶주린 사회적 약자들 편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하시며, 당신 스스로 가난하게 사신 삶의 권위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지식과 재산으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권위라고 착각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된 권위는 하느님을 향한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 백성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한나가 사무엘을 얻게 된 것은, 그녀가 철저하게 자신을 가련한 여종으로 낮추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도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낮추시어, 그 비천함을 주님께서 굽어보시고 자비를 베푸셨다고 믿으셨기에, 은총을 가득히 받은 여인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속되고 속물로 가득 차도 하느님의 거룩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인들의 삶이나, 우리 주변에 거룩한 순명의 삶을 살아가는 숨은 성인들의 겸손과 사랑이 있는 한, 세상의 권력과 권위가 하느님의 영의 권위를 이길 수 없음을 기억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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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힘을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투나 외모는 영락없는 시골 사람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뭔가 다른 특별함이 있음을 느끼고 알아차렸습니다.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었으며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실천이 사람들 가슴속에 깊이 새겨진 것입니다.
우리가 한생을 살면서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음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우리 시대에 김수환 추기경님을 뵐 수 있었던 것도 좋은 인연이며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때 교구청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김수환 추기경님을 가까이 뵐 수 있는 행운도 얻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 깊이 새겨 있는 추기경님의 모습 가운데 하나는 경당에서 늘 밤늦게까지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고단한 일과가 끝나고 좀 쉬셔도 좋으련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김 추기경님은 당신 어깨 위에 지워진 교회와 사회의 무거운 짐을 이렇게 기도의 힘으로 지고 가셨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저도 기도하는 흉내를 내러 가끔 경당에 올라갔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무심코 신발을 벗어 놓고 경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나와 신발을 신으려 할 때면 언제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추기경님이 경당을 나가시면서 허리를 굽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으신 것입니다.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게 하는 말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어르신이 젊은 사람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는 것은 몸에 겸손이 배어 있지 않으면 힘든 일입니다. ‘몸으로 가르치니 따르고, 말로 가르치니 반항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바로 허리 굽혀 몸으로 가르치는 겸손에서 우러나온다고 봅니다. 예수님을 닮은 우리의 겸손한 모습이 주변을 흐뭇하게 만들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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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풀어 주십니다. 옛 표현을 빌리면, ‘마귀 들린 사람’을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역사 이래 무수히 많았습니다. 대부분 원인을 몰랐습니다. 기이한 말과 행동을 했고, 어떤 경우에는 앞날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라 독특한 방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한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꾸짖疸시며 그에게서 나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권능’이 드러났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기에 ‘사람의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어떤 ‘마귀’도 예수님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점을 보러 ‘사탄의 힘’ 앞에 앉습니다.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앞날을 묻고 있습니다. 호기심으로 간다 해도 ‘악의 세력’ 앞에 조아리는 결과가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선한 기운’을 움츠리게 하는 행위입니다.
믿음의 중심은 언제라도 성체성사입니다. 그리고 성체 안에는 역사 안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풀어 주셨던 그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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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풀어 주십니다. 옛 표현을 빌리면, ‘마귀 들린 사람’을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역사 이래 무수히 많았습니다. 대부분 원인을 몰랐습니다. 기이한 말과 행동을 했고, 어떤 경우에는 앞날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라 독특한 방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한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꾸짖疸시며 그에게서 나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권능’이 드러났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기에 ‘사람의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어떤 ‘마귀’도 예수님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점을 보러 ‘사탄의 힘’ 앞에 앉습니다.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앞날을 묻고 있습니다. 호기심으로 간다 해도 ‘악의 세력’ 앞에 조아리는 결과가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선한 기운’을 움츠리게 하는 행위입니다.
믿음의 중심은 언제라도 성체성사입니다. 그리고 성체 안에는 역사 안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풀어 주셨던 그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우연히 옛날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입학할 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35년 전의 사진입니다. 우선 지금과 달리 너무 젊었습니다. 그리고 나름 멋을 내려고 했는지 머리카락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상당히 말랐습니다. 하긴 당시에는 60kg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가졌었던 생각도 떠올려졌습니다. 좋은 신부가 되겠다는 다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겠다는 마음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걱정도 많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학교 공부에 힘들어했고, 열심히 공부해도 향상되지 않는 제 모습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많이 느꼈던 시간이었고, 그래서 과연 신부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신학생 때, 실패의 경험이 가장 많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제가 암기 중심의 철학과 신학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나름으로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계속되는 좌절에 저의 미래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실패의 내용이 사진 한 장에서 쫙 펼쳐졌습니다. 그렇다면 실패를 경험했던 그 시간이 잘못된 시간일까요? 만약 그 실패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주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것인지를 깨닫는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 또 주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했던 저도 바꿔 쓰시는 그분의 힘에 감탄하게 됩니다.
과거의 제 모습을 보며, 현재의 모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포기, 좌절의 단어를 담아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노력에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사랑이 합해져서 과거보다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그 큰 힘에 대해 오늘 복음은 증언합니다.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지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25)라고 꾸짖으십니다. 더러운 영의 말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그분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자체에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더러운 영들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주님의 권능과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사랑을 전혀 보지 못해서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쉽게 판단하고 스스로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정호승).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례가 나서 ‘연도’엘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들이 무척 많이 왔습니다. 71년생이니 조금 일찍 하느님의 품으로 간 것도 있지만, 고인이 생전에 많은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고인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고인이 생전에 꾸르실료 봉사를 열심히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도에 갔습니다. 연도 중에 ‘자녀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대학생인 딸은 눈물 때문에 엄마를 위해 기도를 다하지 못했고, 대녀가 대신 ‘자녀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연도를 마친 후에 딸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습니다. “엄마가 가장 행복했을 때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을 때와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리고 예쁜 딸을 낳았을 때라고 했다고 합니다. 엄마는 늘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였고, 엄마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가 그렇게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보여주었으니 이제 내 삶의 의미도 ‘이웃을 위한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구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하늘을 보면 구름이 된 엄마를 만날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엄마는 구름이 되어 나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엄마 이제 아프지 않은 곳에서 편안히 계세요.”
우리가 고인을 위해서 ‘연도’를 하는 것은 신앙 안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도 중에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며 고인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청합니다. 성인 호칭기도를 바치면서 성인들의 전구를 청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주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의 남은 삶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고인은 해야 할 일을 깨달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랬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인을 위해 연도를 하였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마귀는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고인은 자선과 봉사로 마귀를 쫓아냈습니다. 그랬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인을 위해 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한나는 성전에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에게 아이를 주셨습니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인의 손에는 오래된 묵주가 있었습니다. 고인은 늘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본기도에서 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주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요안나와 죽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소서.”
참 권위의 원천인 하느님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일간신문 1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스마트폰이 아이 뇌 잠식...‘도파민 인류’출현이란 제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알파(Alpha)세대. 인류통계학자들은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이후인 2010년 이후 태어난 세대를 알파 세대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뇌가 일찌감치 유투브 등 짧은 영상 ‘쇼트폼’(Short-form)에 노출되면서, 글을 읽고 이해하는 정적인 활동에 흥미를 잃게 됐다고 지적한다. ‘짧은 유투브 동영상은 서사가 없어요. 그저 게임처럼 자극적으로 들어오는 거죠. 가만히 책 읽는 행위는 아이들에게 흥미를 유발하지 못해요.’ 스마트폰에 흥미를 뺏긴 아이들은 글을 낯설어하고 있다.”(한겨레2024.1.8.)
아이뿐 아니라 모든 세대에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위시의 시대, 알파시대입니다. 현대판 악마가 되고 있는 문명의 이기 스마트폰입니다. 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동영상의 유혹이나 중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참으로 분별력과 자제력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저만해도 2000년까지는 손으로 온통 강론을 쓰다가 지금은 노트북을 사용하니 손으로 글 쓰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사실 요즘 손으로 쓴 친필 편지를 받아보기는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그래서 얼마전 부터는 만년필을 구입해 손 글씨를 쓰기 시작했고, 보속시 말씀 처방전은 반드시 만년필로 씁니다.
보고 배웁니다. 듣고 배웁니다. 읽고 배웁니다. 가상의 세계가 아닌, 직접적인 살아 있는 만남의 관계가 사람됨에 결정적입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기도도 겸손도 순종도 성실도 진실도 침묵도...보고 듣고 읽고 배울 것은 끝이 없습니다. 말그대로 배움의 여정입니다. 수도자의 기본 요소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이라 했습니다. 영적지도의 두 목표는 하느님을 알게 해주는 것, 그리고 자기를 알게 해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권위 역시 보고 배웁니다. 권위주의는 배격해야하겠지만 권위는 필수입니다. 권위를 잃어버리면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신뢰와 비전을 지닌 권위의 사람은 모두가 배움의 대상,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보고 배우는 공동체 지도자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권위 상실보다 큰 불행은 없습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가정이 무너집니다. 권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에 맞는 참권위의 형성이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답게’ 사는 분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로 말하면 존엄한 품위와 권위의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42년전, 1982년 늦깎이로 34세에 수도원에 입회하여 대학에 편입하여 희랍어를 배울 때 배운 '권위'라는 단어 뜻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권위(ex-ousia)’, 즉 ‘존재로부터’ ‘안으로부터’ 나온 권위의 어원입니다. 밖에서 덧붙여진 권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로부터 자연스럽게 저절로 흘러나온 권위입니다. 옷 잘 입었다고, 지위가 높다고, 재물이 많다고, 배운 것이 많다고, 학식이 많다고, 예쁘다고, 권력을 많이 지녔다고 권위가 아니라,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참되고 고결한, 깊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품이, 인격이, 품격이, 저절로 권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런 권위는 직감적으로 감지되며 이런 참 권위 앞에는 저절로 승복하게 됩니다.
어떻게 참 권위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답을 줍니다.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참 권위의 원천은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에 항구하여 날로 하느님을 닮아 겸손하고 온유한, 진실하고 성실한 참나가 되어갈 때 저절로 참 권위입니다. 하느님과 날로 깊어가는 신망애와 삶과 더불어 하느님을 닮아갈 때 참 권위입니다.
그러니 어린 자녀들이나 젊은이들은 어른이나 부모의 이런 권위를 보고 배웁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이런 어른에게서는 꼰대가 아닌 참 어른으로서의 신선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으니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권위의 위력입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권위를 고백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권위 있는 꾸짖음에 더러운 영은 큰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고 사람들은 모두 놀라 고백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움직이는 중심의 산같은 권위의 예수님입니다. 이런 참 권위 앞에 사람들은 저절로 존경과 사랑을 드리기 마련입니다. 저절로 공동체의 안정과 평화, 질서가 이뤄집니다. 24년전 불암산을 닮고 싶은 마음에 ‘큰 바위 얼굴’ 일화를 생각하며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묵묵히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또 18년전, 그리고 14년 전 써놨던 두 편의 시도 생각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산이다”-2006.4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2010.12
참 권위의 큰 어른을 상징하는 불암산을 닮고 싶은 마음에 흠모하며 쓴 시들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권위가 아닙니다. 날로 주님과의 깊어지는 신망애의 관계가 참 권위의 사람, 참 권위의 어머니로 만듭니다.
1독서 사무엘기 상권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서 저는 어머니의 참 권위의 비결을 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의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제 경우도 이에 해당됩니다. 제1독서 마지막 부분에서 기도의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 한나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살아감으로 주님을 닮은 존엄한 품위를 지닌 참 권위의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거룩한 소명이자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참 권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멘.
누가 죄인인가?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은 말과 행동이 하나이다. 신성을 지니신 인성이기에 그러하다. 삶의 목적이 뚜렷하고 그 목적에 흐트러짐이 없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우리의 인성 안에 신성을 지니고 의를 위해 살기 위함이다.
‘누가 죄인인가?’ 아무런 죄도 없는 자에게 죄를 뒤집어 쒸우는 자이다. 속과 겉이 서로 다르며 순수한척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이 있다. 주님을 올곧게 닮으려는 삶 말이다.
나이들어 나이 값을 못하는 이유가 적당히 삶을 자기 방식으로 얼버무리며 신앙인척 살아가기 때문이다. 권위는 내 삶이 상대방에게 빛으로 드러남이다. 온유하고 진실되고 의로운 삶으로의 드러남이다.
누가 죄인인가? 울사와 바리사이들이다. 더러운 영으로 주님을 함부로 말하며 진리를 왜곡하며 마르고 닳도록 편하게 삐뚫어진 삶을 살려는 사람이다. 우리는 외쳐야 한다. ‘누가 죄인인가? 권위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이다.
안중근의 마지막 1년을 영화로 만든 ‘영웅’ 그를 사랑했던 민중은 외친다. ‘누가 죄인인가?’ 그리고 민중은 살아난다. 신앙과 삶이 하나로 ‘권위’를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이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무척 놀랐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사실 진정한 권위는 그렇게 모든 이의 종이 될 수 있는 사랑의 모습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어느 부모가 별다른 능력과 가진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섬기는 이유는 바로 헌신적인 사랑으로 자신들을 키워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드러나는 권위는 사랑의 권위였습니다. 결국 그 사랑의 권위에 마귀들 마저도 다음과 같이 말하며 복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율법 학자와 달리 권위가 있다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리고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으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복음에서 나오는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이가 들어왔습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오늘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매일 회당에 들어왔지요. 오늘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당은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장소인데 더러운 영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말씀이 선포되니 더러운 영이 경련을 일으키고 나가게 되지요. 회당에는 율법 학자들이 있었지만 같은 말씀임에도 그들이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의 힘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았다면 더러운 영이 감히 회당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 안에 말씀이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입으로 하느님을 찾았고 본질적인 그들의 삶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삶을 사는 이들, 즉 하느님께서는 순종하는 이들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죄지은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셨는데 용서받은 우리가 용서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셨는데 우리가 자신만 생각하며 희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또 순종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확신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나 자신을 용서해주셨다는 확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확신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더러운 영이 우리를 차지하게 될 것임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들입니다.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회당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라워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던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놀라움과 호기심이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고나 믿음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당신을 더러운 영이 알아본다는 사실은
당연하다고 생각 되면서도 아이러니 하게 다가옵니다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과 말씀 앞에서도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알려주었지만
이를 알아듣고 알아보는 이는 너무나 적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까지 기다리고 참아주며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알아보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루하루 꾸준히 일상을 살아갔던 이들이
일상의 성화를 이루었음을 새겨봅니다
놀라움과 호기심이 그 시작이었음을
오늘의 기도에 그 지향을 담아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A new teaching with authority.
말에 힘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권위란 ‘영적인 권위’임을 말하기 위해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틀러 같은 경우도 말에 권위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령의 도움이었습니다. 말의 권위는 그 말이 미치는 영향력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죄를 없애시는 말씀입니다. 더러운 영을 이기는 권위가 아니면 말에서 좋은 권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말엔 힘이 있었을까요? 말에 표징이 얹혔기 때문입니다. 말에 힘을 주는 성령님은 또한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힘이시기도 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말에만 표징을 주시는 일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입니다. 기적을 일으키지 못해도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내가 일으키는 외적인 표징들로 나의 말을 더 확신하게 됩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모델이 된 인물이 있습니다. 템플 그랜딘입니다. 그녀는 동물 과학 분야의 연구뿐만 아니라 자폐증 옹호자로서도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입니다.
템플 그랜딘은 어린 나이에 자폐증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이 아이가 말도 못 할 것이고 공부도 못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녀를 일반 학교에 보냅니다. 그녀의 어머니 믿음대로 템플은 말도 하고 대학도 들어갑니다.
그녀는 소가 압착 슈트에 안겨 있는 방식에서 영감을 받아 자폐인의 과민성을 진정시키기 위해 설계된 장치인 압착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의 움직임을 파악해 지금 북미에서 많이 사용하는 소 사육장을 설계하였습니다. 여러 책과 강연으로 그녀는 한 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위 안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꼭 기적을 행해야만 표징이 아닙니다. 표징이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일인데 세상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줍니다. 이 놀라움을 주지 않으면서 말씀에 권위를 지닌 인물은 없습니다.
헬렌 켈러의 선생님인 설리번 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 또한 지독한 어둠 속에서 실명까지 하고 독방에 오래 갇혀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어둠에서 나온 경험이 있기에 그 어둠에 있는 헬렌 켈러에게 말로써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의 유튜브 중 성체조배에 관한 것만 매우 조회수가 높습니다.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동영상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체조배를 통해 저 자신과 이웃이 변화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말에 능력이 있음을 스스로 믿지 못하면 말에서 확신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 대한 표징을 나 자신이 보았을 때는 그 주제에 대해서는 말에 힘이 실립니다. 자신도 모르게 실리는 그 힘을 듣는 사람은 느끼고 반응하게 됩니다.
표징과 함께하지 않는 말의 권위는 없습니다. 공부가 부모 자신들은 변화시키지 못했으면서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그 말을 잘 들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그 말이 나를 변화시키고 이웃의 삶을 변화시키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보면 내 말에도 힘이 실릴 것이고 권위도 실릴 것입니다. 표징과 함께 하지 않는 말에는 어떤 권위나 도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권위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에 두 번에 걸쳐 나오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봅시다. 첫째, 예수님의 권위는 돈이나, 지위,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순종하십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나는 순간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때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권위가 있었지만,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러니 너희는 나에게 순종해야 한다.”라는 말씀으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숨기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더러운 영에게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무 말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내가 누구다.’라고 내세우지 않고 그저 묵묵히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심으로써 참된 권위를 보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함승수 신부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 나오는 ‘존 키팅’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과 다른 ‘괴짜’였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숫자’로 표현되는 세상의 기준에 따라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한,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한 것들을 가르쳤지만, 키팅 선생님은 아이들이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스스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었지요.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바로 책상 위에 올라가는 장면입니다. 수업 중 갑자기 책상 위에 올라간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왜 이 위에 섰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
“크다는 기분을 알려고요.”
“아니야, 이 위에 선 이유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거야. 이 위에서 보면 세상이 무척 다르게 보이지.”
학생들은 경쟁을 강조하는 어른들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힘으로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쾌감을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키팅 선생님은 힘의 논리로만, 숫자라는 틀로만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함을, 그래야만 그 대상이 지닌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학생들에게 수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키팅 선생님이 성적을 중시하는 학교 측의 압력으로 강단을 떠나게 되자, 학생들은 일제히 자기 책상 위로 올라가 그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자신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가르쳐 자기 삶의 방향성을 정립하도록 도와준 참된 스승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겁니다. 키팅 선생님이 참된 교사로서 지닌 ‘권위’가 드러나는 결정적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자신들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참된 권위’가 있다고 느낍니다. 말만 앞세우고 실행하지는 않는, 자기들 어깨 위에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만 잔뜩 지울 뿐 그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려주지도 보여주지도 않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시는 바를 실행에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사랑을 강조하시는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시고, 때로는 병자를 치유하시기 위해 안식일 규정을 거슬러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위험까지 감수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 신음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팔짱 낀 채 멀리서 구경하는게 아니라, 깊이 공감하시고 함께 마음아파 하시며 함께 울어주시는 진정성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귀기울여 듣고 싶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따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던 것이지요.
주님께 사랑이 없었다면, 그분이 하시는 말씀도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하는 말처럼 ‘잔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구속하는 ‘족쇄’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 자신의 모습을 깊이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 내 입장과 원칙만 내세우면서 무섭고 차가운 심판과 단죄의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내가 하는 말들이 그들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 울림 없는 ‘빈 소리’가 되어 한 쪽 귀에서 반대쪽 귀로 흘러나가 버리지는 않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의 슬픔과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그들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럽게 내뱉어야겠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하는 말에서 사랑의 권위를 느끼도록...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깨끗한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악한 영을 쫓아내고
선한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어둔 영을 쫓아내고
밝은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내모는 영을 쫓아내고
보듬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부수는 영을 쫓아내고
이루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가르는 영을 쫓아내고
모으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움켜쥐는 영을 쫓아내고
베푸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짓밟는 영을 쫓아내고
세우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할퀴는 영을 쫓아내고
어르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죽이는 영을 쫓아내고
살리는 영을 품으리라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사람들이 어느 한 사람을 잘 안다는 심리적인 배경으로 그 어느 사람의 흉을 본다고 합니다. 그만큼 가깝고 살갑다는 마음의 표현이 배어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아울러, 그 사람의 참모습과 진실한 면을 깎아내리고, 그의 인격이나 행동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비아냥으로 비칠 때가 있어 조금 아쉬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 카파르나움의 회당에 들어서시어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더러운 영이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24) 더러운 영은 자신에게 닥칠 추방의 위기를 방어하고자 하는 시도로, 예수님께서 마지막 희생제사로 사명을 마치실 때까지 숨겨져야만 하는 예수님 신원의 비밀을 드러내며, 예수님의 사명 수행을 막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더러운 영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25절) 하고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갑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는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27절) 하며 서로 물어봅니다. 그러고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예수님께 대한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마음속 깊이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하고, 그 사랑의 실천을 수행해야 할 순간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자기가 처한 현실과 자신의 나약함을 핑계로, 자기 합리화와 변명을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예수님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야!’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야!’
우리 스스로 믿고 자랑스럽게 증언하는 예수님을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일상에서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그리고 외면하고 싶은 그 순간에 주님께 청합시다.
‘주님, 제게 오시어, 몸소 주님의 일을 이루소서! 아멘!’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까지 권위가 있다. <마르코 1, 21ㄴ-28> 1월 9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의 말이나 행위가 권위가 있으려면 진실과 최선과 사랑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치고 자신 있게 말해도 진실과 선과 사랑이 없이는 권위가 드러나지 못합니다.
성경 안에 들려주는 주님의 말씀은 잘못 옮겨진 말이거나 전달된 말이 아니고는 그 말씀 안에 진, 선, 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주님 당대의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이나 행위에서 지금껏 보고 듣지 못한 권위를 보고 놀라며 그분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30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60년을 말씀 안에 살고 말씀을 전하며 살면서 스스로 진실과 사랑을 말씀 안에서 찾고 즐기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하루 24시간 지속하는 것은 주님이 마지막으로 “세상 끝 날까지 실행하라.” 하시는 말씀 따라 미사가 계속되고, 미사 안에서 하느님 생명에 참례하고, 복음 속에서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현대에 와서 오랜 전통을 변화, 발전시키는 공의회가 1960년도에 시작하여 1965년도에 마침으로써 교회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변화와 성장을 갖게 했습니다. 전례 헌장의 첫 번째 변화는 제대의 변화이며 신학적 변화입니다. 하느님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우리 가운데 계시며, 멀리 따라가서 만나는 주님이 아니고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을 찾아서 만나며, 참례가 아니라 미사를 드리는 사람으로 주님의 모든 것을 받아 전하고 실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전례 헌장에 분명히 미사의 은혜가 자비, 일치, 생명으로 선포되었지만, 60년 지나도 알려지지 않고 신자들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힘 있고 은총으로 가득한 미사를 모르고 형식적으로 드리는 것은 귀한 것을 귀한 줄 모르고 사용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어도 뭔지 모르니 흙탕을 밟고 지나치는 것과 같습니다.
미사를 통해 그 많은 죄의 용서를 받고 멀리 있는 하느님과 말씀 가운데 일치를 이루고 영성체로써 하느님 생명에 참례하여 하느님 사시는 것처럼 살게 됩니다. 복음은 말씀 안에 있지 않고 행동 안에 있습니다. 진실과 사랑의 실천으로 복음이 이루어집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권위 있는 행동은 우리의 본질적 삶과 구원에 직결됩니다. 내가 주님 따라서 진, 선, 미의 삶을 살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산다는 의미는 없어집니다.
주님 따라서 진, 선, 미의 삶을 말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 2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더러운 영이
아니라
하느님 생명을
먹고사는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하느님을 선택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올바른 선택에는
나쁜 거래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마귀의 고백이
올바른 선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더러운
영의 추방은
새로운 삶을
열어주시는
각별하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열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조용하지
않고서는
뜨거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간절하신 마음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의 어둠을
믿고 내어주어야
빛이 들어옵니다.
하느님을 닮은
올바른 인격으로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빛은 고요하고
하느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부정할 수 없는
어두움과
부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빛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며
더러움을
치유하는
말씀입니다.
고독과 침묵으로
더 깊어지고
더 가까워지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을 선택하는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인격은
말씀과 사랑으로
침묵과 고요로
더 아름다워지고
더 깊어져 갈
뿐입니다.
지난번에 직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위해 중화요리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늘 하던 대로 이번에도 고민이었습니다. 어떤 고민이었을까요? 맞습니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라는 고민이었습니다. 이 고민 해결을 위해 주변 테이블을 바라봅니다. 많이 드시는 음식이 맛있을 확률이 높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짜장면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직원이 고른 짬뽕을 보니 ‘짬뽕이 더 맛있겠다. 짬뽕시킬 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곧바로 나옵니다.
언제나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다른 경우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후회를 안고 사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특히 늘 후회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과거로 되돌아간다면 정말로 후회하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될까요?
자신의 선택에 어떤 커다란 원칙을 가지고 있다면 후회가 적다고 합니다(없지는 않습니다). 예를 드리어, 음식을 선택할 때는 ‘오늘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고른다.’라는 원칙이 있다면 후회를 줄일 수 있습니다.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라는 원칙이 있어도 후회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떤 선택을 하실 때, 늘 원칙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인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있는지를 눈여겨보고 있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치유의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 원칙을 누가 깨고 싶을까요? 바로 마귀는 사랑의 선택을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러했지요.
예수님 앞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말합니다. 어떤 정신질환이 아닌, 더러운 영이 들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시 랍비가 쓰던 구마 방법이 아니고 단 한마디의 말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마귀의 유무를 떠나서 병마로 힘들어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셨고, 가장 빠른 방법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더러운 영을 지닌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훼방하려고 소리소리 고함을 쳤습니다. 특히 신앙고백의 가면을 쓰고 예수님의 정체를 일찌감치 드러내어서 예수님의 선택을 방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일도 하기 전에 반대자들에게 방해받도록 하려는 잔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훼방이 예수님께서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에게서 썩 나가라는 한 마디로 내쫓으십니다.
사랑의 원칙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원칙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마귀를 쫓아낼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면 외모만 보게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보면 인간적 품성이 드러납니다(신영복).
겸손과 사랑
아는 지인들과 술자리를 함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는 무척 유쾌했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취한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커지면서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삶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이든 “그건 아니죠.”라면서 시비조로 말을 받습니다.
술 취해서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인들도 그랬는지 그만 먹자는 말에 서로 동의하고 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형제님은 “한 잔 더” 만을 계속 외치고 있습니다.
서로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헤어졌습니다. 다음 날 그 문제의 형제님은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다시는 그 형제님과는 안 마실 것 같습니다. 평상시의 모습은 너무나 훌륭한데 술만 마시면 이렇게 된다면 함께 마실 수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이 형제님을 통해,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맞는다며 상대를 지배하려는 사람,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돌아가게 하려는 사람은 주변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겸손과 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모두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한 번은 하느님처럼 되어야 악령에 대한 권한을 가지게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초기에 어떠한 권위로 가르침을 이어가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악령 들린 사람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자기를 들어 높이는 행위이고 그리스도를 자신과 한편이라고 말하며 그분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하시며 악령을 당신 권위로 누르십니다. 사람들을 이것을 보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악령에 대한 권위가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악령을 장난감 다루듯이 하십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발생할까요? 당연히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성령의 힘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악령도 하나의 영이기에 영은 영에만 반응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은 원죄로 성령을 거부하였기에 쉽사리 악령의 노예가 됩니다. 악령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전능한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먼저 전능해지지 않으면 교만으로 유혹하는 악령 앞에서 언제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의 저자 ‘이시이 마레히사’에게 웹 디자이너 ‘도츠’라는 남성이 상담하러 찾아왔습니다. 동거 중인 여자친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쿠라이’라고 부르는 그 친구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인데 도츠는 그녀가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먼저 집에 있으며 그녀를 맞이해야 한다고 합니다. 도츠는 집을 사무실로 사용하기에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일이 있어 자신이 들어왔을 때 남자친구가 없으면 사쿠라이는 견딜 수 없어 하고 끊임없이 전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도츠를 범죄자 취급하며 심하게 몰아세웁니다. 도츠는 사쿠라이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몇 시간이나 사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도츠가 회사에서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울렸고 그래서 받지 않았습니다. 계속 전화가 울려서 전화기를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회의실 사무직 여직원이 회의실에 들어오더니 “저기…. 혹시 도츠씨 계신가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츠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가보니 여자친구가 사무실로 몇 번이나 전화해서 바꿔 달라고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츠는 어쩔 수 없이 전화해야 했고 흥분하여 막무가내인 그녀 때문에 회의를 중단한 채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로 도츠는 회사에서도 조금씩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습니다.
도츠의 노력으로 사쿠라이가 변할 수 있을까요? 사쿠라이는 왜 도츠를 ‘지배’하려 드는 것일까요? 도츠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쿠라이의 도츠를 통제하려는 마음은 바뀔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쿠라이의 문제는 도츠가 아닌 자신의 어릴 적 상처 때문입니다.
사쿠라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을 관찰하는 여름방학 숙제를 위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와 동물원에 가기로 된 날입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사쿠라이에게 아버지는 미소 띤 얼굴로 “잠깐만 기다려. 꼭 끝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라고 말하고 집을 나가고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쿠라이는 집을 나간 아버지가 계속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쿠라이는 이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습니다.
“내가 숙제를 함께 하자고 하도 부탁해서 아버지가 그게 싫어서 집을 나가신 거야!”
몇 년 동안 후회와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었고 그날 그 여자와 도망치기 위해 떠났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듣고는 이젠 자책이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제일 의지했던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기에 아버지도 싫고 그렇게 버려지는 존재인 자신은 더 싫었습니다. 그래서 남자친구도 자신을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그렇게 병처럼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악령은 이렇게 사랑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쉽게 스며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육체와 정신과 심지어 마음마저 점령해버립니다. 그러면 결국엔 마귀 들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령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쿠라이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넘어서야 합니다. 아버지보다 전능해져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이 결국 도달하게 되는 곳은 어디입니까? ‘부모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공부도, 힘도, 키도, 사랑하는 마음도 부모를 넘어서면 그 아이는 비로소 ‘겸손’의 길로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부모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관계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넘어서서 전능한 존재가 되어보지 못하면 그 아이는 성장해서도 끊임없이 일단은 부모를 넘어서려 합니다. 한 번은 전능해져야 합니다. 그러다 혼자 힘으로 안 되면 결국 악령의 힘까지 빌리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는 먼저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교만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하느님처럼 전능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악령에 휘둘리는 약한 존재로 머물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CCC, 460 참조). 아담과 하와가 먼저 하느님처럼 되었다면 ‘하느님처럼’ 만들어주겠다던 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령이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마치 자신이 그렇게 고백해 주어서 예수님이 이득을 보는 것처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덕이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알기에 더는 악령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악령을 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넘어섰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하느님이 되려고 합니다. 자아의 욕심은 완전히 하느님처럼 되지 않으면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전능해지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전능해지지 않으면 전능해지라는 사탄의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처럼 되었다고 믿지 못할 때, 사탄은 돈과 쾌락과 명예로 하느님처럼 만들어주겠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어 이미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는 이에게는 그 유혹이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만이 악령을 이기는 가르침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는 이는 그 모든 것이 주님 덕분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오로주 주님께 영광을 올리기 위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 가르침으로 사탄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르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처럼 성령으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얻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를 영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5년 신학생 때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천마산으로 답사를 갔습니다. 답사의 목적은 교사들의 단합을 위한 것이었고, 시설을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조립식 건물이 있었고, 부족한 잠자리는 텐트를 치기로 했습니다. 체력 단련장, 화장실, 세면장을 둘러보았습니다. 답사 첫날이었습니다. 늦은 밤에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비가 그칠 것 같으니 그냥 머물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짐을 옮기는 것이 귀찮기도 했습니다. 비가 더 올 것 같으니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뒤에 모두 저를 보았습니다. 제가 신학생이니 결정을 내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물이 가까이 있고, 머물기 좋지만 비가 더 내리면 위험할 수도 있는 지금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힘은 들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자리를 옮겨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산행의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저에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제가 ‘신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힘이 들지만 안전을 위해서 자리를 옮기자고 했고, 모두들 저의 의견을 따라 주었습니다.
1991년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제가 결정을 내려야 할 일들이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이유는 ‘사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처럼 지혜가 충만하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힘든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나온 ‘한나’처럼 기도를 열심히 하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힘든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목의 경험과 연륜이 쌓인 사제였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젊은 열정만 있었습니다. 31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큰 허물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사제의 결정 때문에 갈등과 아픔이 생기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어렵게 일구어 놓은 것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바꿔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당 공동체가 힘을 모아 마련한 작품을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옮겨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작가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모조품을 갖다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제직이 권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직이 교만을 만나면, 사제직이 시기를 만나면, 사제직이 위선을 만나면 그 권위는 권위주의가 되고 맙니다. 그런 권위주의가 예수님을 재판에 넘겼고, 그런 권위주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주교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이럴 때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 주교님 선택의 기준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사제직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따름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 대한 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제직이 순명을 만나면, 사제직이 십자가를 만나면, 사제직이 겸손을 만나면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권위가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참 권위, -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예수님, 축복인사 받으시고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제가 요즘 가장 자주 많이 형제자매들에게 보내 드리는 인사말과 더불어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있는 예수님 부활상 사진입니다. 예수님 부활상 밑 바위판에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성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에 참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을 모실 때 참 건강에 참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드문 세상입니다. 노인은 많아도 어른은 드문 세상입니다. 지식인은 많아도 지성인은 드문 세상입니다. 권위의 부재가 그 원인입니다. 참 권위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권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참 권위 앞에 순종하고 싶음은 인지상정입니다. 권위주의는 배격해야 하지만 참 권위는 삶의 필수 요소입니다. 권위 상실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사실 실추된 권위의 회복은 요원합니다.
삶의 중심에 참권위를 모실 때 안정과 평화의 삶입니다. 삶의 중심에 참권위를 모시지 않을 때 불안과 두려움, 갈등과 분열의 삶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에 참 권위를 모시고 참 권위와 일치된 삶을 살 때 비로소 영육의 건강에 행복한 삶입니다. 요즘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이 모두의 궁극의 원인은 삶의 중심에 살아 있는 참 권위를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중심에 살아있는 참 권위를 모시지 못할 때 온갖 내적 분열에 정신 질환이요, 이를 일컬어 더러운 영이 들렸다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약하고 위태한 인간입니다. 삶의 중심에 참 권위를 모시지 못했을 때 언제든 악령에 휘말릴 수 있고 우상들에게 휘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40여년전 희랍어 시간에 배운 ‘권위(ex-ousia)’란 말마디의 설명에 공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권위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인 내부의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외적 지위가, 화려한 의복이나 외관이, 많이 지닌 재물이 권위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위에 걸맞지 않는 천박한 언행을 대할 때, 이들의 인품이나 인격의 민낯에 실망과 더불어 이들의 권위를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됨의 필수 요소가 참권위입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의 권위를, 부모님은 부모님으로서의 권위를 지녀야 하고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맞는 참권위를 지녀야 거룩한 삶이요 참 건강에 참 행복의 온전한 삶이겠습니다. 바로 참 권위의 주님을 모실 때 강인한 영혼에 정신력입니다. 바로 참권위의 예수님을 모시는 삶입니다.
참 권위의 원천인 하느님과 일치된 삶에서 유래하는 예수님의 참 권위입니다. 더러운 영, 악령들린 사람의 치유에 답은 참 권위를 지니신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악령들린 사람이 상징하는 바 내적 분열의 사람입니다. 삶의 중심이 없을 때, 즉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지 못할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바로 악령들린 사람의 고백입니다. 제 정신이 아닙니다. 극도의 내적분열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더러운 영의 격렬한 반응입니다. 거룩함을 못견디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빛이자 영이자 사랑이신 참 권위의 주님 앞에 악령은 더 이상 숨을 수 없어 뛰쳐 나와 주님을 고백합니다. 참권위의 주님의 즉각적인 명령이 참 통쾌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니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서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달아납니다. 이어지는 사람들의 반응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겐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그렇습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참 권위의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구마 행위에서처럼 참 권위는 ‘섬김의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섬김의 권위요 섬김은 바로 참 권위의 판단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참 권위의 파스카의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섬김의 사랑 실천에 항구할 때 참 건강, 참 행복, 참 거룩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백 낫습니다. 애당초 내적분열의 정신질환에 앞서 미리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이 하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호흡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끊임없이 호흡에 맞춰 기도할 것을 권합니다.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일도 훈련입니다. 치매 예방에도 참 좋은 처방이 이런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훈련과 더불어 영육으로 건강하고 온전한 삶입니다. 바로 이런 모범이 제1독서 전형적 아나뷤인 한나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강인한 영혼의 한나인지 다음 간절한 기도가 이를 입증합니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한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시어 아이를 갖게 되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마지막 대목이 묘사가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불렀다.’
새삼 아이들 하나하나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산모産母들에게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화답송 기도(1사무2,1-10)는 ‘마리아의 노래’를 연상케하는 아나뷤의 한나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참으로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선물로 얻는 자식들임을 생각한다면 하느님 중심의 삶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늙고 병들어 아프기 전, 젊고 건강할 때 기도 훈련에,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 훈련에, 참으로 힘쓰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영육의 건강에, 내적일치의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에,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수행보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악령들을 모두 몰아내 주시고, 하느님 중심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1사무2,1ㄱ). 아멘.
<다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나날이
그분의 힘으로
그분과 함께
자유요
해방이니
탐욕의 영에서
벗어나
더불어함께
무관심의 영에서
벗어나
사랑과 자비로
죽임의 영에서
벗어나
돌보고 살리는
그분을 닮는
그분의 사람으로
새로 나리라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의 내용은 제자들을 부르신 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회당에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복음에서는 그 회당이 카파르나움에 위치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곳에서 말씀을 들은 이들은 모두 놀랐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회당이라는 곳은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장소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선포된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에서 회당에 귀신들린 이가 나옵니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기 전까지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 된 거룩한 장소에 귀신들린 이가 들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은 회당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곳은 예수님 뿐 아니라 다른 율법학자들에 의해서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귀신들린 이가 들어와도 그 어느 누구도 귀신을 내쫒지 못하였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 자체는 살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선포 한 이들은 살아있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구체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데 귀신들린 이가 들어와 갑자기 다음의 말을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귀신들린 이는 예수님을 향해서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말하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라고 하였을까요. 귀신들린 이는 예수님을 향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예수님을 부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진실로 예수님을 향해 고백을 했다면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아닌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라고 불렀어야 맞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 것이지요.
다음으로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귀신이 나갔습니다. 여기가 중요한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치는 장소인 회당에서 귀신들린 이가 왜 치유 받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율법학자들은 위에서 말한 대로 죽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표현은 비유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그 자체이지만 그것을 선포 혹은 가르치는 이들이 하느님과 합일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권위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귀신들린 이를 치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반에 예수님께서는 물론 성자 하느님이시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예수님의 삶에 제 일 원칙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성경 말씀이라도 그 말씀에 권위가 생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귀신들린 이에 대한 스토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권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위에 적은대로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분이시며 하느님의 의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어떤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의만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인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들이 권위 있는 말씀이라고 한 것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할 때 우리들의 말 혹은 모습에서 하느님의 권위가 드러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아멘!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도들이 호수를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의 악습을 버렸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복음에서는 그들이 “카파르나움”(21절)로 갔다고 한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 혹은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란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여기서 보면 구세주의 현존은 악마에게는 고문이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오심을 예상하였다. 그러니 저렇게 소리를 쳤다.
마귀들도 아드님을 뵙고 이렇게 외친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주님을 뵌 악마는 그분을 유혹하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이라고 말한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 뵈었지만 믿음이 없었다. 성경 말씀을 증거로 들이대어도 믿지 않고 예수 아기를 죽이려 했던 헤로데는 마귀의 손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악마가 진리를 말할지라도 믿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우리를 속임수에 빠뜨리기 위해서 진리를 미끼로 사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칭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하느님의 아드님”(마태 8,29)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고, 악마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루카 22,33)라고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라고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나는?
이근상 시몬 신부님
더러운(아카타르토스) 영과 거룩하신(하기오스) 분이 대비된다. 아카타르토스는 뭔가가 섞여있다는 뜻이다. 완전히 까만게 아니라 회색같은 것. 검은 것과 하얀 것이 섞인 것. 복음처럼 그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알아채며 동시에 그와 다른 자신의 길을 알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감잡으며 동시에 딴 짓도 하는 이의 두 마음이 더러운 영에 들린 마음이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주님의 외침이 지금 우리의 광장을 정화해 주시기를 간청한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예수
이기우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 시작하신 공생활에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을 부르신 일과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고쳐주신 일이었습니다. 마르코가 연이어서 보도한 이 부르심과 구마와 치유 행위(마르 1,16-34)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는 과정의 표준이며,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에게도 치유와 구마가 뗄 수 없는 한 묶음으로 수행해야 할 활동임을 보여줍니다. 더러운 영은 한처음에서부터 하느님을 대적하려던 창조의 적수였고,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로 행세하던 주요 세력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죄악에 광범위하게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쫓아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복음선포였습니다. 오늘은 구마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구마 행위에는 먼저 영을 식별하는 일과 그 다음 식별된 악령을 쫓아내는 일, 이 두 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구마 행위는 우리 힘으로 하기 어렵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해 주셔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서 해 주시리라는 믿음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실질적으로 영을 식별하는 일이 더 절박한 과제입니다.
개별 인간에게나, 사회 구조에도 더러운 영은 맹렬히 활약하고 있습니다. 개인들의 가치관과 사람들의 집단풍조는 물론이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 즉, 사회의 여론을 전해주어야 할 언론이나 학문으로 표현되는 사상에도 더러운 영은 암약합니다. 오늘 복음의 본문에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다고만 나오지, 어떤 특징으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식별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신앙 진리에 입각하여 풀이한 교리와 이에 준하는 교도권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흔히 교리는 재미없다느니, 교황청 문헌은 읽기가 어렵다고들 말하는데, 이러한 평판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교리나 교도권 가르침은 재미나 편이성으로 평가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들이 성령의 이끄심인지 악령의 준동인지를 식별하기 위한 진리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대체로는 오늘 복음의 상황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이름이나 그분의 가치들이 드러나는 현장에서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정체를 폭로하고 마는 존재가 악령입니다. 무신론적인 학문과 사상, 언론 동향이나 사람들의 풍조들이 다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예전 영화중에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배우 최민식 씨가 주인공을 맡았던 영화인데,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같은 집안사람 중에 조폭두목과 연합을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서 경찰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느그 서장 어딨어? 니 내 누군지 아나? 에? 내가 마 니 서장이랑 임마 어저께도 같이 밥묵고 사우나도 같이 가고 다 했어 마.” 여기서 보면 자신의 존재가 별 볼일 없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끌어 올리려면 연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규정할 때 선의 결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곧 선이 부족할 때 드러나는 것이 악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마귀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보면 분명히 주님을 안다고 이야기 하면서도 주님께서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면서 자신들의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의 세계 안에서도 보면 오히려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들은 법의 세계를 그만큼 알기에 빠져나갈 구멍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경우 주님을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늘 관계를 이루고 모든 것을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과 악마의 싸움 읽으면서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과 악마의 싸움 읽으면서 남의 이야기로 넘겨 버릴 수 없습니다.
세상에선 진리와 불의의 싸움이 계속해 이어지며 오늘까지 이어옵니다.
서로 양 극에 서서 반대되는 근본을 갖고 있는 부딪힘이라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악마주장을 양보용서 없이 무시하고 사람을 구하셨던 겁니다.
공산주의나 독재자들이 사람들을 속이고 괴롭히듯 꼭 마귀짓 같습니다.
민주주의는 하늘방식이고 공산 및 독재주의는 물질세상 땅의 방식이죠.
진리와 부정은 하늘과 땅이 반대되듯 하늘 편에 들어와야 구원 됩니다.
마귀들린 사람 구하듯 독재공산주의자들을 하늘 길로 구하자는 가톨릭.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1,24). 이는 더러운 영이 걸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외친 말이다.
살면서 더러운 영이 마음을 파고들어 굳게 자리를 잡는다. 이를 마음에서 끌어 낼 방법을 찾아 헤메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오늘 복음(마르1,21ㄴ-28)에서 나에게
더러운 영을 쫓아 낼 큰 변화를 가져다 주는 사람을 만난다.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이시다.
더러운 영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권위있는 가르침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의 힘으로의 설득과는 분명 다르다. 그분의 가르침이 마음을 깊이 파고들어 이런 잘문을 이끌어 낸다. 율법학자들의 죽어있는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 왔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어 제대로의 사람을 만들어 주시는지요?"
더러운 영은 그에게서 나가게 하고 온전히 바른 인생길을 펴게 한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1,27)
이 소문이 파급력을 싣고 널리 확장되어 간다. 소문은 삽시간에
사람이 하나 둘 모여 어느새 군중을 이루며 예수님께로 모여든다. '저 사람에게서 무슨 힘이 작용하는 걸까?' 권위주의적 율법학자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거룩하신 예수님의 권위가 서로 대비되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이 큰 놀라움을 동반한다. 그들의 마음은 예리한 칼로 삼장을 후벼파듯 움직인다. 그들 내면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예수님의 오심과 가르침은 파멸이 아니라 생생한 구원과 해방을 위한
하느님의 거룩함이 있다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회심한 입을 통해 선포되고 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함승수 신부님
고지혈증과 지방간 관리를 위해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해주시는 말씀은 항상 한결같습니다. 운동 열심히 하고, 과식하지 않도록 식사량 조절 잘 하고, 기름진 것이나 단 음식은 되도록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권고 말씀을 잘 따랐을 때에는 다음 번 진료가 기다려집니다. 제 몸상태가 얼마나 나아졌을지, 각종 건강관련 수치들이 얼마나 좋아졌을지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스스로가 보기에도 이번엔 좀 너무했다 싶을 때, 의사 선생님의 권고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왠지 진료를 나중으로 미루고 싶고 병원 가기가 망설여집니다. 의사 선생님께 좋은 얘기를 듣지 못할 것을 예감으로 벌써 알기 때문입니다. 제 몸상태가 그 전보다 나빠졌음을 부정도 부인도 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로 확인하는게 영 마음이 불편하고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와 비슷한 이유로 건강 상태가 안좋아보이는 사람에게 병원에 한 번 가보라고 하면 그 말을 잘 안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사로부터 '선고'만 받지 않으면, 자기 상태를 직접 '사실'로 확인하지만 않으면, 그래서 문제를 모르고 있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려니 하는 미련한 생각으로 그러는 것이지요. 그러나 모른다고 병이 없어지는게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머리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머리로 아는 자가 지켜야 할 것들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따르지도 않았고,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욕망이 이끄는대로 이리저리 휘둘렸을 뿐이지요. 그랬기에 주님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건강해지는지 아는 사람이 스스로 그대로 살고 있지 못함을 알 때 의사를 멀리하듯, 자신이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함을 알 때, 또한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로 그렇게 살려는 의지조차 생기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보이는 반응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으로 하여금 슬프고 괴로운 현실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를 멀리하는 겁니다. 더러운 영이 거짓으로 주님을 모함하고 '당신이 나와 무슨상관이냐고', '나는 당신이 필요없다'고, '나는 나 살고 싶은대로 살테니 그냥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주님을 밀어내며 배척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두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선언한 것은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그 말이 신앙고백이 되려면 예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 존재를 그분께 내어드리고 그분을 내 삶 안에 모셔들임으로써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또한 내 삶이 그분의 뜻을 따르도록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더러운 영은 그 모든 과정을 거부했기에 입으로 주님의 신원을 고백했음에도 그분으로부터 엄한 꾸지람을 받고 쫓겨나는 처지가 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더러운 영이 '회당' 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회당이란 천주교로 치면 성당에 해당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찬미를 드리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그런 곳에 더러운 영이 있었다는 것은 성당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도 언제든 그 더러운 영처럼 변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뜻과 나의 이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주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며 주님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욕망을 따르는 선택을 하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성당 안에서만 신자이고 세상에서는 하느님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살아서는 종말의 순간 하느님 나라에서 당장 나가라는 호된 꾸지람을 받게 될지 모릅니다.
하느님 일의 방해꾼에 대처하는 방법 <마르코 1, 21-28> 1월 1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 속담에 “호사다마”는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남지 않고 악이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악마나 방해꾼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사람 안에 숨어 있다가 나옵니다. 요사이는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조금 다른 나라를 만들려고 하니 서로 물어뜯고 들어보면 한 사람도 나라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 없으며 자기와 반대되는 사람은 인간말짜로 만들어 평하고 방해 공작을 펼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또 더 나라를 망치는 세상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 주님의 일을 사람에게 붙어 방해하는 악마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시며 꾸짖고 내쫓으셨다고 합니다. 우선 방해꾼은 멀리해야 합니다. 방해자를 멀리하는 방법도 능력입니다.
상대하지 않는 방법은 “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해간다.”라는 말처럼 말이 말 같지 않으면 듣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일을 위해 상책입니다. 주님이 구원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어짐을 말씀하실 때 반대하는 베드로 사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고 사십일 간의 광야에서 엄제 기간을 망치려는 유혹자 악마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하는 일에 진실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은 부족한 것이 있고 모자라는 것이 있고 도움을 받아 보충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이와는 다릅니다. 오늘 주님을 대하는 사람들이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오신 주님은 창조주이시고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끄시는 분으로 진실과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 거짓이 아니라 진실하시고, 속이는 자가 아니라 바른 진리를 가르치시고, 말씀 하나하나에 진실이 담겨 있어 믿고 따를 수 있고, 행하시는 행위는 자비 그 자체이시고 사랑이라 그 권위는 하늘을 찌릅니다.
우리는 따라 살고 그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을 믿게 된 것을 얼마나 큰 행복이라 생각하여야 합니까?
세상은 내가 아니고 내 편이 아니면 참이 아니고 진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 고집을 부리는 사람, 세상의 이익을 탐하여 공짜 인생을 살려고 하고 나라 걱정보다 자기 걱정, 자기 위치를 생각하고 말하고 선동하는 사람들 안에서 쓸모없는 이야기는 피하고 듣지 말고 진실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진실하고 사랑을 따라 살려면 부분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진실에는 공정과 정의롭고 사랑에는 자비와 너그러움이 있고 말만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악마는 자기 모습이 없고 시기, 질투, 이기심, 욕심, 교만이란 탈을 쓰고 사람에 붙어 다닙니다.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의 요소를 쫓아내야 더 좋은 일이 성사됩니다. 쫓아낸 빈자리에 긍정, 겸손, 이타심, 감사, 찬미, 감동을 주는 마음으로 채워야 놀라운 권위와 존경의 행위가 나타납니다.
모두 사랑과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며 악의 세력이 움트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 말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반성은커녕 도리어 성을 낸다는 뜻으로 활용되며,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사자성어와 연관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이 다른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르 1,22) 라고 말합니다.
그 자리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24절) 라고 절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자신의 신원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야 할 이유도 없으시거니와, 그렇게 여러 사람 앞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떠벌리며, 마치 예수님은 악령도 용서해주고 묵인해 주어야만 한다는 듯이 주장하며 자신의 존재 양식을 유지하고자 하는 더러운 영에게 꾸짖으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25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가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고 과시하듯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시기 위해 치유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악령은 예수님을 치유의 기적자로 치부하고, 마치 예수님이 유명세나 타려고 하는 허황된 의식이라도 가지신 분으로 부각시키며 또 그렇게 예수님의 소명을 축소하면서 순간의 위험을 모면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지요? 우리의 처지와 입장에서 예수님은 기쁜소식을 전하는 이요, 우리 구원자로 오시는 분이시라고 여기는지요? 아니면, 부담스럽고 켕기게 하는 분이신가요? 아니면, 그저 내 삶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필요하면 모시고, 안 필요하면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중심적인 세계관 속에서 방관자처럼 바라보고만 계신지요?
구세주 예수님 안에서 죄와 악으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자유롭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소리쳐도 괜찮습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님
위로의 마을이란 뜻을 지닌 카파르나움. 안식일, 그곳 회당에서 예수님의 첫 사목이 펼쳐집니다. 가장 거룩한 날, 거룩한 공간에서 뜻밖에도 더러운 영이 난동을 피우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죠. 더러운 영, 마귀, 악의 세력은 인간 사회 그리고 우리 각자의 내면 어디에도 있을 수 있으니 영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거룩한 날, 더러운 영이 회당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느껴질 때 오히려 우리는 더 경계해야 하겠지요. 주님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입 다물어!!’ 정도가 아닐까요. 주님은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분은 풍랑을 향해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틈만 나면 세상의 풍조를 묵과하지 않고 소리치셨죠. 우리도 그렇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 변명하면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악과 죄와 부패와 위선을 향해 조용히 하라고 외치지 않고 오히려 교회와 신앙인이 조용히 입을 닫는다면 과연 맞는 것일까요? 침묵해야 할 때는 소란스럽고, 소리쳐야 할 때는 뒤로 물러섰던 비겁했던 지난 일들이 마구 떠오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명을
살리시는
생명의
권위이시다.
건강한 권위는
참된
가르침으로
드러나고
가르침은
권위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향(向)한다.
권위 있는
가르침을
잃어버린
우리들
세대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권위가 되신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서
새롭게
가르쳐 주신다.
일깨움의
놀라움은
언제나
하느님께
있다.
꾸미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삶에서
권위를 만난다.
하느님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건강한 삶을
가르쳐 주신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능력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건강한 삶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한다.
건강하지 못한
삶을
치유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께
건강한 삶을
묻는다.
소중한 삶으로
되돌려 놓으시는
주님이시다.


어렸을 때 제일 싫었던 것은 성당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어린이 미사는 주일 아침 9시였는데,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를 방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화를 보고 가면 성당 미사에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본 적이 없고 항상 1부가 끝나는 30분에 성당으로 뛰어가야만 했습니다. 지금처럼 지난 방송 보기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성당으로 가야 했던 것이지요. 이러니 어떻게 성당 가는 것이 좋았겠습니까?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볼 수 없으니 말이지요.
그래도 성당에 가고 나서는 너무 좋았습니다. 미사 하는 것이 좋았고, 미사 후에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도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만화영화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당으로 가야 할 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싫었습니다. 이렇게 싫었음에도 열심히 성당에 다니다 보니 믿음이 생겼고, 신학교에 들어가 지금 신부로 살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하십니다. 성당에 가면 정말로 좋다고 하십니다. 문제는 성당에 가기까지의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성당 가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왜 이렇게 바쁜 일들이 생기는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사랑하는 다른 것들을 뒤로할 때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이 더 먼저가 되면서 주님이 항상 뒤에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틀린 말입니까? 아니지요.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꾸짖으십니다.
이 꾸짖음의 이유는 그리스도를 고백했지만, 그 안에 사랑이 없었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사랑이 없으므로 주님의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아닌 세상의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서 말하고 있다면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역시 주님의 꾸짖음에서 제외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만 년 동안이나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그대가 살 수 있는 시간은 그대가 어찌할 수 있는게 아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3개월만 참아보십시오.
저는 수영을 신부가 된 후에야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30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수영을 배운 것입니다. 사실, 이 나이에 수영을 새롭게 배운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수영을 배우고자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배우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근처 수영장에 등록했습니다.
첫날, 너무 어색했습니다. 특히 제 또래의 남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킥보드에 몸을 맡겨서 ‘음파’를 반복하며 발장구치는 것도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릅니다. 첫날의 수업을 모두 마치고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겨우 하루를 마치고서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3개월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영장을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실력이 향상하지 않아서 걱정되었지만, 어느 시간이 지나자 실력은 향상되었고, 자유형, 평형, 배영, 접영까지 배우면서 그 재미가 점점 커졌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딱 3개월만 참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재미가 있고, 만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도 그렇다고 봅니다. 처음 성당에 나오신 분들은 상당히 낯설어하십니다. 왜 이렇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키는지, 미사는 왜 이렇게 지루한지, 교리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그러나 딱 3개월만 참아보십시오. 분명히 그 안에서 기쁨을 얻고 큰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뭐든지 시켜 먹어! 나는 짜장면 보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린 수사님들을 동반하고 교육하는 선생 수도자로 생활할 때였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새싹같은 수사님들의 선생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끔씩 수도생활에 대한 수업 시간 때 교실 안에서의 제 가르침과 구체적인 제 삶의 모습이 괴리감이 느껴질 때, 다시 말해서 ‘말 따로 행동 따로’ 일때, 어린 수사님의 매서운 눈초리가 채찍처럼 다가왔습니다.
수도자로서의 청빈의 삶에 대해 가르칠 때는 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혹시라도 부티나는 옷이나 고가의 브랜드 옷은 절대로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피치못할 상황으로 수사님들과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선택은 늘 값싼 메뉴였습니다.
중국집에 들어가면 제가 농담삼아 늘 그랬습니다. “자네들 먹고 싶은 요리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뭐든지 시켜먹어!” 그러면서 꼭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나는 짜장면 보통!” ㅎㅎㅎ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내려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신선하고 명쾌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수 없었던, 장황하고 고리타분해던 종래 종교 지도자들과는 가르침의 내용이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길고 장황하지 않았습니다. 짧고 단순명료했습니다. 애써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려고 애쓰지 않으셨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뒤가 구리지 않았기에, 촌철살인의 말씀을 가감없이 외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루하고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가방끈 짧은 백성들의 귀에도 쏙쏙 들어올 쉬우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말씀이 지닌 또 한가지 특징이 있었으니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가 있었다 함은 말씀에 힘과 생명력이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삶 속에서 즉시 구체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허언이나 헛된 공약을 남발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르침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에 힘과 위로를 얻고 있습니까?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우리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이 없는 나는?
전삼용 요셉 신부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나 되는 양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EBS 화해 프로젝트에서 방영되었던 ‘해병 망치부대 동기, 잊지 못할 구타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해병 망치부대란 80년대 초 북한의 간첩침투사건이후 보복을 하기 위해 북파공작원을 기르던 부대라고 합니다.
훈련은 쓰러질 때까지 지속됐고 사람을 인간병기로 만들기 위해 구타와 가혹행위가 반복됐다고 합니다.
망치부대에서 같이 근무한 두 해병대 동기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동기로 들어갔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강대중씨가 하사관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잘 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반대로 동기였던 노영길씨를 많이도 구타했습니다.
노영길씨가 그것 때문에 상처가 많았는데, 그 이후 상황은 역전됩니다.
두 사람은 같이 망치부대로 차출되어 이번엔 노영길씨가 훈련조교가 되었고 강대중씨를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노영길씨는 그 미움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강대중씨에게 더욱 지독하게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사관이었던 강대중씨는 무릎이 안 좋아져서 강제 제대를 하게 됩니다.
강대중씨는 무엇을 하든 1등이었고 직업군인을 하려 했던 터라 자신이 평생 살 곳이라고 여겼던 군대를 떠나고서는 자살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산 속에서 2년을 숨어 살다가 그래도 살아보려고 배를 탔는데 그만 무릎이 안 좋아서 그물에 다리가 걸려 한쪽 다리를 잃게 됩니다.
그렇게 군대 동기에 대한 원망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노영길씨도 트라우마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밤에 아내가 툭 치기만 해도 강대중씨에게 맞았던 기억 때문인지 아내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둘은 함께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면서 친구 때문에 한 다리를 못 쓰게 되었지만 그래도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만나고, 함께 등산을 하며 이전에 비해서는 너무나 약해진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노영길씨가 인도네시아의 다른 무술을 하는 사람과 대련할 때 같은 해병대로써 강대중씨가 응원을 해 줌으로써 서로 진심으로 30년간의 증오를 털어내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그렇게 털어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강대중씨는 30년간을 미움 속에서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대중씨가 원했던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용서를 구하는 노영길씨의 마음이었습니다.
노영길씨도 사실 강대중씨가 그렇게 된 것이 전부 자신의 책임은 아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가니 서로에게 미안한 감정이 더 많이 일어나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용서를 청하게 됩니다.
우리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안 좋은 일들이 아니라 바로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은 내 자신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보다 높이는 마음입니다.
내가 더 해 주었고, 내가 더 많이 피해를 당했고, 내가 더 참아내야 했기 때문에 상대에게 절대 무릎을 꿇을 수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자존심은 나를 어떤 큰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천사보다 높은 지위에 앉게 해 주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아드님을 천사보다 높인 이유는 당신 말씀에 순종하여 당신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에게서 자존심이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까지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줍니다.
자존심이 마음에 지옥을 만든다면 겸손함은 마음에 천국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 이런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우리 또한 천사들보다도 높아져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되었습니다.
천사들이 영원히 질투할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겸손함을 보시고 친히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덕인데 어떻게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수조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독서에서처럼 “제가 무엇이기에 저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라고 하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만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밖에 나가서 자신에게 수백만 원 꾼 사람의 멱살을 잡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남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내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겼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처지를 먼저 알아야합니다.
무상으로 천사들보다 높아져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와 그 은혜가 없었다면 지옥으로 가야했을 우리 존재의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는 지옥에 갈 운명이었습니다.
이 우리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었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주님 덕인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지렁이보다도 못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묵상합니다.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은 손으로 만져서 판단하게 됩니다. 코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길쭉한 줄 같다고 하였습니다.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기둥 같다고 하였습니다. 엉덩이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둥근 바구니 같다고 하였습니다. 옆구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벽처럼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함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장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지만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선입견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이념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행위를 보고 현재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진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좋겠습니다. 안개가 걷히면 아름다운 산을 볼 수 있습니다. 편견, 선입견, 이념, 외모, 과거라는 안개를 걷어내면 좋겠습니다.
스웨덴의 정치를 취재한 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스웨덴의 정치는 투명하다고 합니다. 정치인들은 수당을 받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으면 급여를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기차를 타도 이등석 이상은 타지 못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표를 구한다고 합니다. 식사나 금품을 받으면 반드시 신고하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재정상태를 볼 수 있기에 부정과 불의는 끼어들 틈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였을 때, 늘 같은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정치는 봉사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인도 이런 대답을 하고,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저분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저분의 말과 행동은 권위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사는 회당이 되어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회당은 교회당이다. 교회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사랑의 친교를 이루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있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1,27) 율법학자들은 두 사람 사이를 갈라 놓는다. 자기 사람과 자기 밖의 사람의 구분이다. 분열을 재촉했고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지 못했다. 그들은 이분법적으로 서로를 둘로 갈라 놓았다. 거룩함의 영이 아니라 더러운 영의 작용으로 사람 사이를 이간질 시켜 물질적 부를 누리고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죄인과 의인 사이의 구별, 건너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는 단절의 다리를 만들 뿐이었다. 율사들은 살아 있는 롤모델처럼 행동하나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고 이기적 바람의 충족을 목적으로 서로를 이간질 시켜 결정적으로 상관이 없는 존재로 고정시켰다.
예수님은 회당을 차지한 점령군이 된 율법학자들의 이 더러운 영을 회당에서 빼내야 한다. 더러운 영이 회당에서 내 쫒을 때 진정한 회당의 의미를 갖는다. 율법학자들이 그냥 빠져 나가겠는가? 자기들이 불리해지자 은근 슬쩍 권위를 지닌 예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인정하지만 척만을 하고 마음에 거품을 물고 발악을 하며 나간다.
예수님과 회당은 불가분의 상관이 있다. 그 상관을 거룩함의 관계로 하나가 되도록 해야한다. 이런 상관관계는 지금까지 회당에서 볼 수 없었던 관계이다. 모처럼 회당의 사람들은 놀랐다. 율법학자들과 다르게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을 공동체에서 내 쫒는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몫이 되었다. 그 몫을 내 안에서도 살아야 한다. 거룩함을 담고 사는 만큼 나도 거룩함을 회당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도 존경받고 살 것이고 회당은 그런 사람의 촉매로 아름답게 변화될 것이다.
스승예수
곽승룡 비오 신부님
“그분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1,22)
말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아름다운 소통수단이다. 사람은 말씀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우리의 영혼을 전달할 수 있다.
부모들, 스승들, 설교가들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사람이 특히 후회한다면 우리는 말씀의 불충분함에 대해 애석해 한다. 때때로 현실에서 느끼는 사람이 그것을 못 듣고 또는 이해는 하지만 그것을 진실로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말씀들이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라는 비관주의자같이 말한다. 정말로 말씀들이 나타내는 효과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말씀들은 모두 좋은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것과 다르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은 사실이 됐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신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사람, 신인이다. 그의 인간적인 말씀들은 신적인 능력을 가진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으로 병자들을 치유하고, 나쁜 영들을 추방하며, 가르치고 위로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환대하며 맞아들이는 사람은 인식에 있어서도 성장할 뿐만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신적인 능력을 경험하고,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첫 창조의 역동성을 그분 안에서 지속된다고 믿도록 초대된 것이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이 다른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몹시 놀랐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그 더러운 영을 쫒아내셨고, 그러자 사람들은 더욱 놀라 소문이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이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지니셨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성령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권위는 바로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그 성령의 권위를 마주하게 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말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어느 누구의 아낌없는 사랑의 나눔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순간 성령의 권위를 느끼게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정의가 필요한 곳에 어느 누구의 용기 있는 투신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순간 성령의 권위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의 평화가 필요한 곳에 어느 누구의 헌신적인 희생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순간 성령의 권위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성령의 권위를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과 연결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시면서 늘 성령과 함께 모든 일을 행하심으로써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성령과 함께 온 삶을 이루어가며 우리의 각 삶의 현장 속에서 성령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모두 평등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더러운 영들이 복종하고 도망칠 정도의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입니다.
그 소문이 갈릴래아로부터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널리 퍼져온 겁니다.
그런데 그냥 옛날 예수라는 인물이 신기한 일 했다는 정도로 봅니까?
그건 나와 아무 상관없다는 건 나는 그냥 세상사는 동물이란 뜻이죠.
이 이야기 핵심은 나는 영물이냐 동물이냐 즉 혼의 유무 확정입니다.
사람은 목숨과 자유와 존엄을 지닌 만물영장이란 점 확신해야합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하늘이 인정하고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가족 조건을 갖춘 존엄한 인간이려면 가톨릭 신앙인 되어야죠.
<사람과 더러운 영 사이에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 있어요
더러운 영이 있어요
더러운 영이
자신으로 물들이려고
사람을 찾아 다녀요
더러운 영이 있어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어요
더러운 영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지배해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더러운 영에게 지배당해요
더러운 영이
자신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나인 것처럼 행세애요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자신과 더러운 영이
하나인 것처럼 세뇌당해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거짓 하나 됨을 깨뜨려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더러운 영은 쫓겨나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어요
사람이 있어요
더러운 영이 있어요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있어요
쫓겨난 더러운 영이 있어요
더러운 영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어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시고
더러운 영을 더러운 영으로 보시는
사람을 물들인 더러운 영과
더러운 영에 물든 사람을
결코 하나로 보시지 않는
예수님이 계세요
<신앙생활>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성경의 예수님 말씀은, 이천여 년 전 어느 날 하신 ‘옛날의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곳에서, 나에게’ 하시는 ‘지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옛날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지금’ 새겨듣고 실천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살아 계시는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이고, ‘지금’ 나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때가 차서”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종말에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를 뜻합니다.
<온 세상은 전부 다, 처음부터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렇지만 ‘종말에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는 선택된 사람들만, 또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만’(루카 20,35)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 근처 어디쯤에 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루카 17,21).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마지막 날이 되면 완성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종말 후의 삶’을 미리 준비하는 생활이기도 하고, 그 삶을 미리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의 삶’을 보고, 또 교회 공동체의 삶을 보고, “하느님 나라의 삶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지...>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는 죄를 뉘우치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도 포함해서, ‘온 삶’을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회개입니다.
(‘종말 후의 삶’은 주님과 내가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즉 주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삶입니다. 그 일치를 이루는 일은 그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부터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주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천해야 합니다(마태 7,21).
<일부 종파에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 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 정말로 진실하게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실천’에는 당연히 ‘회개’도 포함됩니다. 회개하지 않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 정말로 진실하게 주님을 믿는 사람은 날마다 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6-18).”
이 이야기를 앞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어부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들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한 상태에서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시 응답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이천여 년 전 어느 날 어부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곳에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인데, 사도들만을 부르시는 말씀은 아니고,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라는 말이 ‘신자들’을 뜻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벗’이기도 하고, ‘형제’이기도 하고, ‘제자’이기도 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신앙인은 당연히 ‘제자로서’ 예수님 뒤를 따라갑니다.
신앙생활은 스승이신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 하나뿐입니다. 다른른 길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신자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뽑은 사람들을 사도로 삼으시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 신앙인 전체에 적용해서 생각하면, 너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라는 명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끄집어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일”을 뜻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생활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나와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남들은 구원을 받든지 말든지(멸망을 당하든지 말든지)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 라는 ‘사랑 없는’ 태도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사랑 없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생활이지만, ‘나 혼자 하는’ 생활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저쪽 세상에 들어가서 보니 나 혼자만 와 있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곳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지옥입니다. 이승에서 사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만 배불리 먹고, 혼자서만 즐거움을 누리고, 혼자서만.... 기타 등등...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은, 그 삶 자체가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 없는 곳은 모두 지옥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대비되는 두 개의 간청을 만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그 안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이렇게 외칩니다. 세상은 하느님 안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계성 안에 존재합니다. 한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우리 모두는 가시적으로든 비가시적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지요. 이러한 관계를 끊어버리고 고립시키는 힘은 악에서 나옵니다. 악은 끊임없이 너와 내가 아무 관계가 없으니 상관 말라고 부추기며 소외와 절망을 퍼트립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더러운 영이 제법 옳은 소리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원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런데 존중과 경외심이 들어 있지 않은 앎은 공허하고 자칫 폭력도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분께 대한 더러운 영의 외침은 그가 어떤 말을 했든 두려움과 공포가 수선스럽게 표출된 호들갑에 불과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와 확연히 대비되는 간청이 흐릅니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1사무 1,11)...
한나의 기도입니다. 그녀는 하느님께 자기와의 관계를 기억해 주시라고, 자기 삶에 들어와 주시라고, 더 강력하게 개입해 달라고 청합니다. 더러운 영이 주님을 관계에서 밀쳐내려 했다면, 한나는 그 관계성에 기대어 호소합니다. 더 깊은 관계를 맺어달라고 청하고 있는 겁니다.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1사무 1,17).
사제 엘리는 잠시 그녀를 오해하긴 했지만 이내 그녀를 축복합니다. 그녀의 길고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술주정이 아니었다면 하느님과 진정한 관계 안의 간청일 것이 틀림없으니까요.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1사무 1,18).
눈물의 기도는 종종 슬픔과 절망을 희석해 줍니다. 거기에 엘리의 격려까지 받았으니 한나는 위로와 확신으로 어둠에서 걸어나옵니다.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1사무 1,20).
주님께서는 한나가 바란 대로 그녀를 "기억해"(1사무 1,19) 아들을 주십니다. 엘리의 입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보답으로 한나는 아이의 이름에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성을 새겨 넣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엘리의 입을 빌어 기도에 응답을 주셨지만, 지금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굳이 다른 목소리를 빌릴 필요가 없으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예수님 친히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외침은 그 내용이 아무리 명예롭고 영광스러워도 언급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침묵" 뿐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예수님의 구마 행위에 모두 놀랍니다. 놀람과 경탄은 하느님의 일에 열린 마음에서 나옵니다. 더 이상 경이로울 것이 없다면 그의 영혼은 이미 박제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군중의 입에서 나온 "새로움"과 "권위"는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과 맺으실 새 계약을 가리킵니다.
더러운 영은 멀리 있지도 않고 한눈에 알아볼 만큼 흉측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도 않습니다. 더러운 영은 주님에 대한 해박하고 화려한 지식을 자랑하면서도, 주님께 가까이 오지 말아 달라고 요구합니다. 적당히 선을 긋고 내 삶에 너무 깊이 끼어들지 말기를 청하지요.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삶의 가치관과 지향은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안전지대를 확보한 채 적당히 신자이고 적당히 의인인 듯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궁금하다면, 한나의 기도에서 답을 찾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내게 꼭 필요하다"는 절절한 하소연은 그분과 내가 서로의 가슴을 가르고 들어갈 만큼 친밀하고 간절한 기도이고, 그 자체가 곧 사랑이고 관계입니다.
오늘 내가 하느님과 또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고 이 관계의 불편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털어버리는 기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제는 한나 얘기를 하며 하느님을 열매 맺는 돌계집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도 한나 얘기를 통해 하느님을 열매 맺는 기도 얘기를 해보렵니다.
한나는 기도의 열매를 맺은 데 비해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도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청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꼭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청한 것과 다른 것일지라도 열매 맺을 수 있고, 아무것도 청하지 않아도 기도가 참 기도라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열매 없는 기도란 기도를 했는데도 마음의 평화가 없고 사랑이 생겨나지 않으며, 지혜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알로 치면 무정란입니다.
알을 품고 있는데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지 않는다면 무정란이지요.
옛날에 저희 수도원에 카나리아를 키울 때 지금은 돌아가신 신부님이 키우면 1년에 4번 이상 새끼를 까던 새들이 제가 키우면 알도 낳고 품기도 하는데 한 번도 새끼를 까지 않는 거였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먹이를 잘못 주거나 적게 주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무정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의무로 합니다.
이 경우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의무를 한 것이기에 의무를 다했다는 안도감이나 고작 죄 짓지 않았다는 마음뿐 기도를 매일같이 꼬박꼬박해도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명상을 한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래도 의무 기도와는 달리 마음의 평화 같은 열매가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을 만나는 열매는 없습니다.
대화의 경우 혼자 말하는 독백처럼 명상도 혼자 하는 자기 수행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거나 대면이지요.
반드시 하느님을 상대하고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한나는 제대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 그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며 기도했지만 입술만 움직이며 속으로 기도했기에 사제 엘리는 술취한 줄 알고 나무라는데 이때 한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당신 여종을 좋지 않은 여자로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서>입니다.
주님 앞에 있기만 해도 기도가 되고 열매를 맺게 되는데 마음까지 털어놓으면 그 기도는 어떤 기도보다 훌륭한 기도가 됩니다.
오늘 한나의 경우 기도로 마음을 털어놓는데 마음을 털어놓기 전에는 분노로 차 있었지만 기도를 함으로써 마음을 털어버립니다.
이렇듯 기도는 분노의 마음을 하느님께 털어버리는 것이고, 이때의 기도는 분노의 기도이고 불풀이 또는 화풀이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로 분노의 마음을 털어버리고 풀어버리면 이제 분노로 가득 차 있어서 하느님 계실 자리가 없던 마음에 하느님이 계시게 되지요.
오늘 우리도 한나처럼 무거운 마음을 하느님께 털어놓도록 하십시다.
온전한 삶, -삶의 중심을 잡읍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제서품후 초창기부터 아마 강론중 가장 많이 사용한 주제가 ‘삶의 중심’일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삶의 의미요, 삶의 질서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복잡하고 혼란한 삶이요 방황과 표류에 온갖 영육의 질환입니다.
삶의 중심이 확고할 때 안정과 평화요 삶의 중심이 불확실할 때 점증하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이 확고할 때 단순하고 투명한 삶에 한결같이 충실한 삶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우선적으로 정립해야 할 것이 삶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들의 정주의 첫 서원 역시 삶의 중심과 직결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의 한결같고 확고한 삶이 우리의 정주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이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이제 작은 나무가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정주의 나무가 상징하는 바, 그대로 우리 정주의 분도회 수도공동체요 분도회 수도승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만을 찾는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을 지향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다음 시편 고백과 자작 고백시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의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바로 주님만이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임을 고백하는 고백시입니다. 이런 ‘삶의 중심’이란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의 시작과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삼은 후 즉시 이어지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일화입니다. 바로 더러운 영이 상징하는 바,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야기되는 온갖 정신질환을 상징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있어야 할 삶의 중심 자리에 더러운 영이나 우상들이 자리잡고 있을 때 파생되는 온갖 심신의 질환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더러운 영에 들렸던 이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자 치유의 구원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더러운 영은 주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그 사람의 중심 자리에서 퇴출되었고 그 중심 자리에 살아 계신 주님이 자리 잡으니 비로소 치유의 구원입니다. 이어지는 반응이 바로 주님이 우리 삶의 중심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 구나.”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이신 새롭고 권위있는 말씀 자체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하여 우리 삶의 중심을 확고히 하기 위해 온맘으로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엘카나의 아내, 한나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감동적입니다. 한나가 온갖 시련과 역경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음도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가능했음을 봅니다. 엘리와의 대화를 통해 한나가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기도의 사람이었음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 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고 감격에 넘쳐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고백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화답송은 바로 한나의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사무엘 아기뿐 아니라 태어난 모든 생명들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번 피정하고 갔던 5남매의 자녀들을 둔 40대 중반의 신심 깊었던 젊은 부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5남매의 아버지가 보내 준 메시지에 놀랐습니다.
“또 하나 하느님께서 저희 가정에 축복을 주셨습니다. 올 7월에 저의 가정에 여섯째가 태어납니다. 태명은 ‘축복이’라고 지었습니다. 축복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도록 신부님의 기도를 청합니다. 시몬 드림”
저희 수도원 수도자들의 반려견伴侶犬들중 ‘복돌이’ 이름이 연상되어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한결같이 충실히 살아가는 젊은 부부의 삶이 감동스러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안에 내재한 온갖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시고 심신의 질환을 치유해 주시며 당신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시편36,10). 아멘,
입으로만 외치는 신앙고백
한재호 루카 신부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1,24) 복음서에서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제대로 고백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놀랍게도 더러운 영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신앙고백에 가까운 말을 하였다고 해서 그를 두고 신앙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고백한 바를 드러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이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현종 때에 간신 이임보를 두고 사람들이 일컬은 말인데,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면서 배 속에 칼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이임보는 임금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면서 충신인 척하였지만, 절개가 곧은 신하의 충언은 절대 임금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 자기 비위에 맞지 않거나 자신보다 뛰어난 신하들은 권모술수로 제거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영은 바로 구밀복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권위'(마르코 1장 21ㄴ~2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느님의 영은 조용하며 지혜롭고 부드러운 바람과 같이 불기도 하고 순간 강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악한 영은 시끄럽고 마음을 산란케하며 불안을 몰고와 평화를 깨뜨립니다.
힘겨움에 빠진 영혼을 예수님은 권위로 잠재우시고 평화를 되찾게 하십니다.
복잡하고 시끄러울때 그속에 파묻혀 있으면 내 영혼이 지칩니다.
큰 숨 쉬고 예수님 앞에 다가가 청하십시오.
하루중에 조용히 머무는 시간이 어떤 수많은 말보다 더 강한 팩트가 됩니다.
'참된 권위는 조용합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 내시려고 하자 더러운 영이 한 말이다. 왜 더러운 영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가? 나 자신 안에 보이기 싫어 하는 어두운 부분이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도 않고 보여지기를 두려워 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이 항상 나를 사로잡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느님에게로 나아가고자 할 때마다 이 부분이 나를 자신 없게 만든다. 하느님 앞에 서면 바로 이 부분이 드러난다. 그분께서 그것을 없애 주시고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기 있게 그것을 드러내기가 두렵다. 이 부분이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지만 두려워 하는 마음이 항상 있다. 이 부분이 나를 멸망시키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마음을 그분께 용기 있게 드러낼 수 있기를 청하며 길을 걸어 본다!
주님이 오신 시기의 사회 현상 <마르코 1, 21ㄴ-2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역사적으로 주님이 오신 때는 가장 악마가 설레발치는 시기였으며 가난한 사람이 인간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시기였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오심을 경련을 일으키고 날뛰며 “나자렛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하며 선과 악의 반대 입장과 주님의 능력에 두려워하면서 설레발치는 모습을 봅니다. 악은 최후가 온 줄 알면 마지막 힘을 내서 선과 싸우려고 합니다. 어떤 경우는 세상에서 이기는 것 같지만 단호한 명령은 “나가라” “떠나라”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며 내쫓으셨습니다.
악의 세력은 지구상에서 내쫓아야 합니다. 그러나 악은 선의 세상을 괴롭히는 것을 취미로 생각합니다.
악의 세력은 지금껏 권력에 붙어서 활동하고 재력가의 손에 놀아나고, 성욕에 붙어 많은 사람을 악으로 유인하고, 악의 세력에 선한 사람들이 힘들어합니다.
나는 어느 편에 있는가? 모두가 악을 멀리하지만, 악은 유혹의 도구로 우리를 유혹하여 악마의 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악마와 악의 세력을 없이 하러 오신 주님을 광야에서 교묘하게 유혹한 악마는 돌과 빵의 유혹, 높은 성전 위에서 유혹, 산 위에서 유혹으로 선을 이기려고 했지만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며 유혹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마지막 유혹인 산 위에서 악마는 주님께 자기에게 절하고 자기를 섬기면 세상을 주겠다고 하지만, 마귀를 섬기며 세상을 얻고 다스리지 않으시고 주님 스스로 정의와 공정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오로지 사랑으로 악의 세력을 쫓아내시고, 자유 평화 기쁨이 있는 세상을 만드시려고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악의 세력을 하나하나 제거하시며 가난, 병, 죄를 짓고 허덕이는 사람, 거짓과 사기로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쫓아내십니다.
마침내 죽음의 악도 쫓아내어 참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과 함께 생명을 다하는 한 악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가 조용히 묵상을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의 죄입니다. 그리고 해결해야만 하는 급한 일 등이 떠오릅니다. 이런 것들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기도 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금방 해결될 일을 걱정 고민하게 된다면 분심으로서 장애가 되겠지만, 오랜 시간을 걸쳐서 해결될 것이라면 주 하느님께 더욱더 빌며 내 꿈과 의지가 교정 정화되거나 주님께서 허락히시고 주위의 여건이 준비가 다 될 때까지 주님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회당에 더러운 영이 걸린 사람이 왔다가 예수님을 뵙자마자 마치 도둑이 제 발이 저리기라도 하듯이 자신을 밝히며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더러운 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자마자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임을 그리고 곧 쫓겨나갈 존재임을 알고서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25-26절)가 버립니다. 그러자 이 상황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27절) 하면서 신기해합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28절)라고 합니다.
주 하느님 대전 앞에서 우리 죄를 회개하고 보속하며 주님께 나아갑시다. 우리 가슴 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악을 반기려고 하는 유혹과 악에게 기울어지는 경향을 더욱더 깊이 잠재우고, 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일깨우기로 합시다. 잔 심지같은 사랑의 불꽃을 되살려 주님 사랑 안으로 들어갑시다. 희생과 봉사의 보속으로 속죄합시다. 그리고 성체조배와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를 봉헌합시다. 그리고 주님 복음 말씀을 하나씩 천천히 실현하면서 우리 인생의 열매를 맺고 우리의 소명인 선교를 이루어냅시다.
죽었던 폰이 되살아났다.
최민석 신부님
내 손에는 늘 폰이 들려 있다. 나와 한 몸이 되어 내 손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는 게 폰이다.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이 놈의 물건이 내 손에 들려 있다. 폰 케이스에 신용카드와 신분증 그리고 약간의 현금까지 들어 있으니 이 놈 하나가 나의 필수품이자 내 행위를 항상 보조해 주는 아주 중요한 비서다.
어제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던 폰이 갑자기 작동에 이상이 생겼다. 다행히 아는 길이라서 특별한 문제없이 목적지를 찾아 가기는 했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이 놈이 길을 안내하는 도중 오작동이 계속 되더니 결국 스스로 작동을 정지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나도 모르게 짜증이 올라오고 호흡이 빨라지더니 가슴에 답답한 느낌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차를 갓길에 세우고 커버를 벗기보고 폰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알 수 없는 물건의 알 수 없는 고장을 살펴보지만 특별히 알 길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일단 포기하고 약속 장소를 찾아 가서 시간을 보내다 오후에 왔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고장 난 폰이 마음에 걸렸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일찍 일어나 습관적으로 폰을 손에 잡고 상태를 보니 다시 정상작동 한다. “아! 참, 요것 신기하다.”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듯 기쁘다.
내 몸의 일부인 폰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다. 묘한 기분이다. 죽음과 부활은 동떨어진 두 사건이 아니라 한 사건의 두 얼굴이다. 순서는 엄연히 죽음 뒤에 부활이다. 인간의 죄와 죽음과 부활도 역시 그렇다. 우리 옛사람(낡은 인간)이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다.
인간의 죄가 없었다면 하느님의 은혜도 없었을 것이다. 어둠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빛을 알 수 없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찾듯이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신이 빛 속에 있는 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더 많은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더 많은 죄를 지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은총이 많아지도록 우기가 계속 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서 죽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1-4)
탁상공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은혜를 더 받기 위하여 더 많은 죄를 저질러야 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궤변일 뿐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어둠과 씨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냥 가만히 불을 밝히면 된다. 그뿐이다. ‘진리의 말씀’은 언제나 명료하다. 장황하게 떠벌이지 않는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죄가 그를 더럽힐 수 없으며 다스릴 수도 없다. 송장을 백성으로 거느리는 임금은 없는 법이다. 죄는 죄에 대하여 살아있는 자에게만 ‘죽음’이라는 선고를 내릴 수 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다. 미움에 대하여 죽은 자는 미워하지 못하고 사랑에 대하여 죽은 자는 사랑을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살아 있는 사람이다.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시체가 어떻게 ‘더 많은 죄’에 거하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와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하셨듯이, 죄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새 생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부활 없는 죽음은 허무요 죽음 없는 부활은 허위다.
만 3년 째 된 물건이기에 자연스레 이 말썽을 받아들이기고 하고 다음 날 서비스를 받아 상담하고 고쳐 쓰던지 새로 사든지 하기로 한 것인데 거짓말처럼 부활하여 다시 정상 작동되니 참 신기하다. 폰의 터치가 전혀 먹히지 않던 이 놈이 다시 교감이 되어 반응하고 있다. 폰이 부활 한 것이다. 참으로 반갑다.
우리는 본래 사랑할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 주교의 ‘대 규칙서’에서(Resp. 2,1: PG 31,908-910)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법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을 즐거워하고 생명을 갈망하며 부모나 교육자들을 사랑하는 것도 다른 이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교육을 통하여 새겨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 사람의 본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그 본성 안에 뿌려져 있는 씨앗인 것입니다. 사람은 그 안에 사랑할 능력과 필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배울 때 마음속에 있는 이 사랑의 능력을 알게 되어 그 능력을 열심히 가꾸고 지식으로 영양분을 주며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완성에로 이끌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사랑을 이루는 데 있어 여러분들이 학습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여러분들의 기도의 도움을 받아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성령께서 부어 주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불씨를 점화시키고자 합니다.
우선 이것을 말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에 관해 볼 때, 우리는 그것들을 지킬 능력과 힘을 그분으로부터 이미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계명들이 우리에게 마치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인 양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감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또 우리가 받은 능력 이상으로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내부의 이 능력들을 올바르고 합당하게 사용한다면 온갖 덕행으로 단장한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고, 그 능력을 부당하게 사용한다면 죄악에 빠지고 맙니다.
악행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습니다. 악행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행의 능력을 주님의 계명을 거슬러 사용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우리로부터 기대하시는 덕행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덕행이란 하느님의 계명과 선한 양심에 따라 그 선행의 능력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악행과 선행을 위와 같이 정의할 수 있다면 사랑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받았지만 우리의 근본적인 본성에는 사랑할 능력과 힘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외적인 것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안에서 솟아 나오는 것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의견을 달리하지만 자연적인 본능으로 좋고 아름다운 것을 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혈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자연적으로 사랑을 품게 되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들에게 우리도 자연적으로 호의를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엄위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감미롭고 더 즐거운 일이 있겠습니까? 온갖 죄에서 정화되고 진실한 사랑으로 넘쳐 “이 몸은 사랑의 상처를 입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부어 주신 그 갈망보다 더 열렬하고 더 힘찬 갈망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광채는 참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르침이 필요한
우리들 내면입니다.
우리들 삶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시는 우리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구원에 이르게하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
우리들 삶속에
함께 하십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우리 삶을
망가뜨리는
더러운 영들을
예수님께서는
추방하여 주십니다.
더러운 영이 먼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극과 극은
이와같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사람이
되게하십니다.
간절한 사랑이
우리를 살립니다.
교묘하고 교활한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 내면을 귀하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임을
믿습니다.
그 만남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믿고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