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5,17-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18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19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20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21 그들은 집을 지어 그 안에서 살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43-5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43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44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45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47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4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49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52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53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5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리니,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카나에서 왕실 관리가 카파르나움에 있는 앓아누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자 고쳐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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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카나로 가셔서,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는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 주시자,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된다(복음).
오늘의 묵상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슬픔 가운데 하나는 자녀의 죽음입니다. 그러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누군가 말하여 준다면 이보다 ‘기쁜 소식’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과 독서는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약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하여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중병에 걸린 아들 때문에 상심한 어느 왕실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아들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믿음’을 강조하고자,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표징과 기적’을 믿는 우리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관리는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납니다. 아들을 고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는 모습은 참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결과로 받아들이겠다는 절대적 순명의 자세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역경의 순간을 건너게 하는 것은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말씀이 살아 있고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실재’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임을 믿는 것, 그것이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 왕실 관리는 구원을 체험하였고 “그와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존엄한 믿음이 존엄한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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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병으로 앓아누워 있는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 주시는 기적 사건을 전합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이 사건을 “두 번째 표징”(4,54)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 사건, 곧 ‘첫 번째 표징’(2,11 참조)을 상기시킵니다.
이 ‘두 번째 표징’으로 앞서 요한 복음 4장 1-42절에서 소개된 “세상의 구원자”(4,42)로서 예수님의 신원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왕실 관리는 카파르나움에서 카나로 예수님을 찾아와 병들어 누워 있는 아들을 고쳐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외적으로 드러난 기적에 의존하는 왕실 관리의 믿음을 꾸짖으시며 그의 요청을 거절하셨지만, 절박하게 매달리는 왕실 관리의 부탁을 물리치지 못하시고 그의 아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왕실 관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표징과 기적을 보고 믿었는데(4,48 참조), 그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보여 주신 아들의 치유를 체험하면서 더욱더 굳건해졌습니다. 그 결과 왕실 관리의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말씀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이 치유 사건을 생명의 주인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표징’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신기한 일이나 기적에만 의존하지 말고 ‘말씀’의 힘을 굳게 믿으라고 요청하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없을 경우 믿음이 쉽게 약해질 수 있는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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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표징과 기적을 체험해 보았습니까? 간절히 기도하였던 일과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체험, 머리로 아무리 이해하려 하여도 이해되지 않는 일을 우리는 표징과 이적이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이상한 언어로 말하기도 하고 놀라운 능력과 기운으로 병을 고치는 체험, 이 또한 우리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표징과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갈까요? 아니면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실망과 좌절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기 전에 그분의 표징과 기적을 체험해야만 믿겠다는 일종의 거래로 우리의 신앙을 전락시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왕실 관리는 아들의 치유라는 불가능한 일을 예수님께 청합니다. 자신에게도 기적을 보여 주십사고, 예수님을 찾아가서는 아들이 있는 곳으로 함께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청을 거절하셨다기보다는 왕실 관리가 청한 방법을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가지 않으시고 그저 말씀만 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그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방법을 믿고 떠나갑니다. 만약 그 이방인이 계속하여 자신의 방법만을 요구하였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시선으로 계속 예수님께 요구하였다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기적은 믿어야지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기적은 우리의 삶에서 이미 일어났지만 우리의 시선과 방법 때문에 그 기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으로 하루를 바라본다면 일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길이고 섭리며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야기하시고 놀라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잊고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더 사랑하라고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주님께서 다 마련해 주셨습니다. 야훼 이레.(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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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에서 갈릴래아 카나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표징을 일으키신 곳입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로 그곳에서 표징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고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다시 사마리아를 거쳐 카나로 돌아오십니다. 거기에 있던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왕실의 관리는 이방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왕실 관리만이 아니라 당시 예수님의 주위에 있던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지금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표징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 주신 뒤 그와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전합니다. 이렇듯 그들은 표징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표징과 이적만이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 외의 것을 통해서 믿음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만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드러내시는 하느님에 대한 계시를 통하여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사건에,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들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을 통하여 보여 주신 사건에 집중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를 위한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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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성경의 독서들은 파스카 축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사순 시기에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향합니다. 사순 시기는 우울한 시기가 아닙니다. 그분을 믿고 우리가 세례 때에 결정한 마음을 새롭게 하며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죽음에게 거둔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가 됩니다. 이 주제는 사순 시기가 끝날 때까지 점차 강조될 것입니다.
유배 후에 살았던 예언자인 제3이사야가 제1독서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새로운 세상의 이른 아침, 부활의 서광 속에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기쁨으로 채워 주실 때 예루살렘에서 우는 소리는 사라질 것입니다. 질병과 죽음을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그분 안에서 예언자의 예언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요한 복음에서 뽑은 오늘 복음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카파르나움에 있는 한 왕실 관리가 죽게 된 아들을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왕실 관리의 믿음 어린 간청은 갈릴래아 카나에서 베푸신 예수님의 능력을 통하여 거리가 먼 곳에서도 치유의 기적을 끌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으로 드러내십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어쩌면 공관 복음 전통(마태 8,5 이하와 루카 7,1 이하)이 전하는,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치유하신 이야기에 대한 요한의 해석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은 카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의 첫 표징에 이은 “두 번째 표징”이라 강조합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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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왕실 관리에게 진정한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 관리는 애타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라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지 않고 단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지체 높은 그 관리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당신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다시 요구하고 계십니다. 다행히 그 관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그 관리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우리는 자주 예수님께 ‘표징’과 ‘이적’을 청하고 그것을 보면 믿겠다고 조건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간청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먼저 준비되어야 할 것은 그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의탁입니다. 믿음이 담긴 겸손한 기도는 하느님을 움직이게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피조물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됨을 내다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선물은 미래의 약속으로 머물지 않으며 ‘지금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병든 아이를 일으키시는 주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므로 죽은 사람도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가지도록 격려하시면서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구원되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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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어느 왕실 관리가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청을 합니다. 왕실 관리는 고위층으로서 많은 권력을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떤 위치에 있었습니까? 당시 시각으로 보면 시골 마을, 평범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하였지요. 더욱이 고향 마을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 자존심을 버리고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짐짓 냉정하게 거절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더욱 끈질기게 청을 하지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허락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는 이 말씀을 믿고 떠나갔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왕실 관리는 집으로 가는 길에 아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러고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 표시로 온 가족과 함께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급할 때만 예수님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막상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면, 감사하는 마음을 잊을 때마저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조그만 일에도 감사하며, 하루하루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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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사람들에게서는 환대를 받으십니다. 그들이 축제 기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과 이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열렬한 마음과 호기심에 가득 찬 행동들이지만, 마음이 담겨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만나신 왕실 관리는 마음이 달랐습니다.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과,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실 관리는 오늘 요한 복음의 바로 앞에 나오는 니코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처럼 신앙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신앙이 표징과 이적을 본 데서 온 것이라고 그를 시험하셨음에도, 그는 끝까지 겸손과 신뢰를 잃지 않으며, 자기 아들이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그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것은 바로 요한 복음 안에서 드러나는 가장 높은 신앙의 표현입니다.
신앙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열렬함이나 호기심과 같은 표면적인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이기는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왕실 관리처럼, 간절함과 굳은 믿음,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가 주님을 움직이시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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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부활 때까지 요한 복음을 이어서 묵상하게 됩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현양되시는 그분의 ‘때’가 되기 전까지 여러 표징을 전해 줍니다.
표징은 믿음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지만,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는 표징 자체도 거부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표징을 모두 보여 주신 다음,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12,37) 하고 증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징을 보여 주신 장소는 갈릴래아 카나이지만,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카나 사람이 아닌 이방인 왕실 관리였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와 자기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했던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그의 아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죽어 가는 한 아이를 살아나게 하시는 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바로 그 시작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싹트고 있음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보라”(이사 65,17).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라는 뜻입니다. 약속은 이미 성취되고 있고 그 완성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 병든 아이를 일으키시는 그분께서는 장차 죽은 라자로를 살아나게 하실 것이고, 당신 자신도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실 것이며, 아울러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표징은 신앙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표징을 알아보고 믿는 이들은 이미 구원되어 생명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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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의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재작년인 2012년 한 해 동안 이 『매일미사』에 주옥같은 묵상 글을 써 주셨던 의정부교구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이 짧은 투병 생활 끝에 선종하셨습니다. 고인이 생시에 존경하고 높이 평가했던 프랑스의 예수회 신학자 샤르댕 신부님처럼 부활 대축일에 주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친형 같고 스승 같았던 신부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신부님의 선종 과정에서 주님께서 선사하신 은총의 표징들은 신부님의 때 이른 죽음이 얼마나 큰 하느님의 사랑으로 감싸여 있는지를 느끼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너무나 슬펐던 장례 미사이지만 한편으로는 한스러움이 아니라 감동과 감사와 평화가 충만하였습니다.
임종 바로 이틀 전인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고인을 만나 대화한 내용을 전해 주신 서울대교구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2011년 『매일미사』 묵상 글의 필자)이 쓰신 글 한 편을 읽으면서 그때의 마음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떠나신 빈자리는 메울 수 없이 크지만, 그 떠난 자리는 여전히 따뜻합니다.
사실 부족하지만 제가 이 『매일미사』에 글을 쓰기로 수락한 것도 전숭규 신부님의 격려와 권유 때문입니다. 이번 달 마지막 날의 묵상 글을 써 놓고 전체를 다시 한 번 읽어 보면서 제가 환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로 생각만 하던 것을 전숭규 신부님은 삶의 자리에서 그대로 실천한 사제였습니다. 시골 본당의 사목자로서 초대와 환대의 삶을 살 수 있던 것을, 특히 본당의 할머니들이 고생하는 병사들에게 따뜻한 국수를 대접하며 격려한 것을 참으로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긴 분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셨더군요.
"본인의 의향과 상관없이 낯설고 각박한 곳에서 분단의 통증을 겪고 있는 병사들은 분명 이 시대의 나그네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나그네들에게 후하게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 말씀을 묵묵히 실천하는 우리 할머님들이 저는 늘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며 신부님의 격려와 질책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천국에서 굽어보시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분과 함께했던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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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느님을 이길 수 있을까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이긴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이기는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 렇습니다. 믿음이 담긴 기도는 하느님을 움직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인 왕실 관리와 예수님의 만남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왕실 관리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지체 높은 사람입니다. 그 반면, 예수님께서는 볼품없는 목수의 아들이실 뿐입니다. 그럼에도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만나러 카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 수님을 만나러 내려가지 않고 올라갔으며, 예수님을 보고 올라오시라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시라고 한 것은 왕실 관리 스스로 자신이 높지 않고 예수님께서 높은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청을 다음과 같이 거절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 는 예수님의 단호한 거절에도 다음과 같이 간청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청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 곧 그의 믿음 깊은 기도가 예수님을 움직이시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하게 바치는 기도는 주님을 움직이시게 합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항구하고 겸손하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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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장 많이 쓰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를 물으면 막연해집니다. 사랑에 대한 어원에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한자어 사량(思量)에서 왔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곧 생각 ‘사’(思)에 헤아릴 ‘량’(量)을 써서 ‘상대방을 생각하고 마음을 헤아린다.’는 뜻풀이가 복음적 사랑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이런 예수님의 ‘사량’(思量)에서 나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고 헤아리는 연민의 마음에서 기적의 능력이 나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런 사랑은 우리 믿음의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받고자 하는 믿음의 크기만큼 그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들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는 왕실 관리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 왕실 관리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단 한마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는, 두말없이 ‘믿고서’ 왔던 길을 돌아갑니다. 그의 단순하고 확고한 믿음이 아들을 살렸습니다.
믿음은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이 크고 비어 있을수록 하느님의 사랑의 은총은 쉽게 작용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수록 오히려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량’(思量)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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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등장하는 왕실 관리는 아마 ‘헤로데’의 친척이었을 것입니다. 당시로는 귀한 신분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세속의 기준에 얽매일 분이 아니십니다. 지위가 ‘높든 낮든’ 누구나 소중히 맞아 주십니다. 당신을 해치려는 자들에게도 따뜻함으로 다가간 분이십니다.
왕실 관리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아들이 죽어 가니, ‘어서 가시어’ 낫게 해 주십사고 간청합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짐짓 그를 ‘시험해’ 보십니다. 그러나 관리는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변함없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입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렇듯 마음자세는 은총까지 좌우합니다. 관리는 말씀을 받아들이며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종들을 만나지요. 그러고는 아들이 나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습니다. 놀랍게도 그 시간은 주님께서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셨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은 사람입니다. 그분께 나아가면 자신의 아들이 살아날 것을 굳게 믿은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순수한 믿음이 아들을 살린 것입니다.
1913년 엘리너 H.포터가 집필한 고전 소설 ‘폴리아나’(Pollyanna)를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 명작으로 꼭 등장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화 영화로도 나왔었다고 하더군요. 이 책의 주인공은 이모 집에 얹혀삽니다. 그러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사는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 나간다는 아주 훈훈한 내용입니다.
주인공 폴리아나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불행한 삶 속에서도 매 순간 ‘다행한 일 찾기’ 때문입니다. 저택 같은 집에서 아주 좁고 퀴퀴한 다락방에 살게 되었지만, 전망이 좋아서 그림 같은 경치만 봐도 정신 수양이 되어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또 방에 거울이 없지만, 주근깨 난 얼굴을 안 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다행한 일 찾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부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모임에서 한 신부가 방귀를 시원하게 뀌었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이지요. 그러자 한 신부가 “야~ 그러다 똥 싸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그 당사자 신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똥 싸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마음에서 행복이 가까워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폴리아나처럼 ‘다행한 일 찾기’ 놀이를 해 보면 어떨까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주님을 체험하는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매 순간 느끼는 방법이 있으니 참 다행이 아닙니까?
왕실 관리의 아들이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이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찾아와 고쳐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거절의 뜻을 비치지만,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왕실 관리이니 재산이 많이 있고 또 권력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만을 전해주십니다. 만약 재산과 권력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에 화를 냈을 것입니다.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끌고 갈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고 떠나갑니다. 믿음만으로 충분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산과 권력에만 매여있었다면, 그는 다행한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다행한 일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매여있는 것이 혹시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 편이라 정말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오늘의 명언: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다(앙리 마티스).
오늘 우리 사목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덕목이 너그러움이요 관대함이요 포용력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기저기 사순 특강을 다니면서, 참으로 은혜로운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다들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가 위기 상황이다, 위험을 알리는 비상벨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있다고 걱정합니다만, 저는 마냥 비관적으로만 봐서는 안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유는? 아직도 소리소문없이 착한 목자로서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목자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눈만 뜨면 본당 활성화를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신부님들이 계십니다.
교우들이 내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고, 수시로 찾고 싶은 본당을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신부님, 교우들의 영성 생활 증진을 위해 큰 투자를 아끼지 않는 신부님들을 뵈면서, 아직 우리 교회에 희망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착한 목자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 있어 당신 고향 갈릴래아, 그리고 나자렛은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당신에 성장하신 고향이었기에 다른 그 어떤 고장보다 마음이 쓰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신경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느냐?”며 개무시했습니다.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아무리 고향이라 할지라도 당신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고향이라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수모와 배척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향을 찾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들 때문에 상심이 컸던 왕실 관리에게 큰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배신과 배척, 홀대와 거부에도 불구하고 착한 목자 예수님께서는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 불벼락을 내리지 않습니다. 큰마음으로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또다시 큰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목자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참으로 다양한 유형이 있습니다. 본당 사목에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발목을 잡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반대의 깃발을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사목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너그러움이요 관대함이요 포용력입니다. 나와 전혀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잘 맞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잘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함께 어울려 나아갈 수 있는 큰 마음,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년 전에 뉴욕에서 지낼 때에 보일러에 문제가 있어서 새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이번 댈러스에 와서도 보일러에서 가스가 누출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간단하게 해결 될 줄 알았는데 보일러의 수명이 다 되어서 새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보일러를 바꾸면서 형제님이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이동하는 곳마다 보일러를 바꾸시네요.” 제가 가는 곳마다 보일러의 수명이 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제가 가는 곳마다 새롭게 뜨거운 열기를 만들어 내라는 사명인 것 같습니다. ‘Peace Maker'가 있다면 저는 ’Heat Maker'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성령 강림 대축일에 바치던 기도가 생각합니다. “허물들은 씻어주고 메마른 땅 물주시고 병든 것을 고치소서. 굳은 마음 풀어주고 차디찬 맘 데우시고 빗나간 길 바루소서.” 새로운 곳, 댈러스에서 제가 따뜻한 마음으로 굳은 마음을 풀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시간 넘게 보일러를 교체하는 현장에 함께 했습니다. 보일러에는 물이 50갤런 넘게 들어 있기 때문에 먼저 보일러에 있는 물을 빼 주어야 했습니다.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면서 형제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전날 작업 중에 왼손 중지가 다쳐서 작업에 애로가 많았지만 형제님은 꼼꼼하게 작업을 해 주었습니다. 물이 빠진 보일러를 빼내고 새 보일러로 교체 했습니다. 다시 물을 채우고, 가스를 연결하고, 배기가스가 나갈 수 있도록 연통을 달았습니다. 물을 채우면서 공기를 빼주고, 드디어 불꽃으로 가스에 불이 붙었습니다. 뜨거운 물을 틀어 놓으니 에어가 빠지면서 드디어 따뜻한 물이 나왔습니다. 저는 형제님을 보면서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옆에서 지켜보니 문제가 쉽게 해결 된다면서 좋아하였습니다. 보일러를 교체하는데 순간순간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공간이 협소해서 보일러를 넣은 작업도 힘들었습니다. 배관을 연결했는데 고무 파킹이 낡아서 새것으로 갈아야 했습니다. 배관이 짧아서 더 긴 것으로 교체 했습니다. 3시간 넘게 작업을 지켜보면서 매일 따뜻한 물을 사용할 수 있기 까지 수고하는 분들이 있음에 새삼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새 하늘 과 새 땅은 눈에 보이는 시간과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던 마구간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믿음으로 치유되었던 실로암 연못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자캐오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강도당한 이웃을 정성껏 돌보아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어드리고, 정성껏 씻어 주었던 마리아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뉴욕이든, 댈러스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그곳이 새 하늘 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다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왕실 관리가 한 일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은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한 주간 충실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만 있다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3,50)
말씀하시는 분이 곧
말씀이요
말씀이 곧
말씀하시는 분이니
말씀을 믿음은 곧
말씀하시는 분을 믿음이요
말씀하시는 분을 믿음이 곧
말씀을 믿음이라
말씀하시는 분
비록 곁에 없어도
말씀만으로도
더 바랄 것 없나이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카나로 가셨는데 거기에서 왕실 관리 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아들이 죽어가는 절박한 사정을 예수님께 말씀드리면서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먼저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왕실 관리는 그래도 예수님께 매달렸고,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아이는 살아났고, 그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누구를 사랑할 때 자신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먼저 따지면서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느 누구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따져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없어도 믿어주고 내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믿음이 없다면 사랑도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그저 조건 없이 사랑과 믿음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께 조건 없는 사랑과 믿음을 드리며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이룰 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자비와 은총을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는데 그곳에서 왕의 관리 중 한사람이 찾아와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음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믿음이 필요한데 표징과 이적을 봐야 믿는 너희들이 왜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내가 고쳐줄 수 있다고 나에게 청하고 있는지 묻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왕의 관리는 주님이라 말하면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 믿음은 아직 완전한 믿음이 아니라 불완전한 믿음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그를 성장시켜 주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불완전함에서 시작되어 완전한 믿음으로 성장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 흔들림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왕의 관리는 종의 말을 듣고 바로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리지 않고 종에게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물었습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온 가족이 믿게 되었지요. 믿음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부족함에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은 성장해 가는 것임에도 우리는 조급해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처음에는 불완전하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을 조금씩 성장시켜 주셨지요. 불완전한 믿음이 온전한 믿음으로 되기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이 그분을 향해있어야 합니다. 아주 작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믿고 오늘 하루도 오직 주님께 의지하는 자녀가 되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아멘!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 갈릴래아의 카나에 가셨을 때, 카파르나움의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한다. 카파르나움은 카나에서 80리 정도 되는 먼 거리였다. 예수님은 애원하는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말씀하셨다. 고관은 그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 종들을 만났다. 아들이 완쾌되었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먼 길을 찾아와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이 고관의 자세를 살펴보자. 우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고관이 일개 목수에 지나지 않는 예수님께 오기 위해서 먼 거리를 고생하며 찾아왔고 예수님께 간청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8절) 하신다. 그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49절) 했다.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기 때문에 아이가 죽으면 예수님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 때문에, 당신께 귀 기울이도록 하신다. 기적은 믿는 이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과 믿음에 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는 기적을 기다리기보다는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50절) 여기서 믿었다는 것은 완전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그는 처음부터 불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리는 대신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각부터 물어보았다. 그 시각이 예수님께서 아이가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와 온 가족들이 믿게 되었다.”(53절) 한다.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두 사람이 치유를 받았다. 왕실 관리에게는 뜻밖의 믿음이 생겼고, 아이는 육체적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지난날을 통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혜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보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삶 속에서 어떤 자리에 모시고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김종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왕실 관리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4,50)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을 믿었기에 황실 관리는 떠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상식과 가치관을 떠나고, 왕실 관리로서 가졌던 확신마저 떠나게 한 것은 희망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말씀을 믿고 걸어가는 길에 황실 관리는 생명의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의심과 불평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단순함으로 재무장을 하였습니다. ‘제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단순한 믿음만 간직하였기에 황실 관리는 죽어가는 아들의 생명을 되찾았습니다.
길 떠난 우리는 잃어버린 단순한 믿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말씀을 믿었기에 떠난 우리는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단순함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어제를 떠나야 합니다. 복잡하게 쌓아 올린 내면의 바벨탑을 떠나야 합니다.
단순하게 믿어야 우리는 떠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단순하게 믿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머리로 믿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믿으면 복잡해져서 떠나기 어렵게 됩니다. 십자가의 여정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자신을 믿기에 불안하기만 합니다.
머리로 믿으면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머리로 믿는 만큼 우리는 불안합니다. 내일 일도 모르는 우리이기에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서 불안감만 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이신 그분께 믿고 맡기는 만큼 우리가 떠나는 발걸음은 가볍게 됩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따를 때, 믿음은 우리를 단순함으로 이끌어주고, 단순함은 어떠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앞에서도 용기로 직면하게 해 줍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혼돈된 세상을 걸어가는 길에서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게 됩니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믿음의 길에 체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체험에 대한 영의 식별 역시 중요합니다.
단순한 감정의 흥분이나 군중 심리를
영적 체험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꾸준한 기도와 성사는 우리가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안내서가 되며 식별의 지혜를 가져다 줍니다.
표징과 체험과 이적을 보여달라고 외치는 사람들 앞에서
이방인 왕실 관리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를 믿고 돌아갑니다.
간절한 마음의 청원은 실패 한 듯 보였고, 그는 힘 없이 돌아갈 수 있었지만
당신 말씀에 믿음과 희망을 걸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말씀의 체험이 그의 믿음을 더 굳세게 하였고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삶의 순간들의 당신의 큰 뜻 안에서 인도하시는 주님 앞에서
그 지혜와 식별, 흔들림 없는 믿음의 길을 청하여 봅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You may go; your son will live.
믿는 이의 행복
신중호 신부님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복음 4장 43-54)
제 집에 가셔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하는 왕실 관리에게 주님께서 너희는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 주님께 함께 가달라고 청합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살아날 것이다.” 오늘 복음은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고 전합니다.
왕실 관리는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보지 않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주님 말씀을 “믿고 떠나간” 그는 죽음에서 살아난 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길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믿고 떠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앞날이 불확실한 시대라고 느끼며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앞날은 불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 앞날에 놓인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길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요한 복음 20장에서 주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눈앞에 놓여 있는 절망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매일 길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믿는 이 앞에 기다리는 것은 분명한 행복입니다.
* 오늘 나는 마음에 무엇을 품고 길을 떠납니까?
살고 죽는 것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다. <요한 4, 43-54> 3월 1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침에 일어나 감사기도를 드리고 오늘 하루를 허락하신 주님을 찬미하며 일어납니다. 병이 들어 죽는 사람도 의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죽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맡기고 살아 있는 한 진실하게 살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진실은 주어진 시간을 의미를 갖고 살며 사랑은 마음에 드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주님을 끌고 가려고 하지만, 주님은 다 알고 계시며 “가거라. 네 아들이 살아날 것이다.” 하시며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어떤 분이 저는 조금만 아파도 죽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어 불안하다고 합니다. 그 불안을 없애는 방법은 저는 “살아있음을 감사하십시오.” 하며 감사기도 드리라고 권했습니다. 백부장도 병든 아들이 죽을까 걱정이 끊이지 않았지만, 주님을 믿고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삶을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죽음도 두렵지 않아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고 주제 자이시기에 모든 것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하루 사는 것 온전히 주님의 자비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죽음의 복을 주시기를 청하며 병원에서 가물가물 정신없이 죽지 않고 70년 이상 살던 집에서 형제들에게 작별 인사하며 웃으면서 길 떠나는 나그네 모양 “잘들 사시고 여러분과 함께 주님을 믿고 살던 시간, 기도와 일하던 시간을 감사합니다.” 작별 인사하며 주님 앞으로 영원히 떠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아침기도 후렴에“주여, 당신은 우리에게 아침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나이다.” 이 기도가 나를 감동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불안에 떨며 아침을 시작합니다.
백부장이 아들의 죽음 앞에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살지 말고 믿음, 희망, 사랑을 지니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함승수 신부님
헤로데의 측근으로서 큰 권력을 누리던 한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와 같이 가서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사정합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누군가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만큼 아들의 병이 위중했기에, 그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에 예수님께 매달렸던 겁니다. 하지만 그 간절함에 비해 그가 지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아직 깊어지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계심을 믿으면서도 그분이 자기 집에 가서 아들을 직접 봐야만 치유할 수 있다고, 아들이 죽고 나면 아무리 그분이라도 어쩔 수 없다고 무의식 중에 그분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었지요. 전능하신 하느님을 인간의 얕은 지식과 좁은 사고 안에 가둬두려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들의 치유 자체를 거부하신게 아니라, 그 관리가 제안한 방법을 따르기를 거부하신 겁니다. 그의 집까지 함께 가시는 대신, ‘말씀’으로 그 아들을 치유하시지요. 물론 그렇게 하신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물리적’인 이유입니다. 아들의 상태가 매우 위중한데 그 관리의 아들이 있는 집까지 걸어가려면 적어도 7-8시간은 걸릴터였습니다. 그 아들이 그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당신이 직접 가시는 대신 ‘말씀의 능력’을 활용하시는 쪽을 택하십니다. 일종의 ‘원격치료’인 셈입니다. 둘째는 ‘신앙적’인 이유입니다. 그 왕실관리가 청하는대로 그의 집까지 가서 그 아들을 고쳐주신다면, 예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은 더 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가 원래 알고 있던대로 예수님을 능력있는 ‘치유자’ 정도로 생각했겠지요. 그랬다면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받을 기회도 사라졌을 겁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왕실관리는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만약 그가 말씀에 순명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말대로 해달라고 고집을 부렸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그 아들이 죽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랬다면 아직 믿음이 얕은 그는 예수님을 원망하고 미워했겠지요. 주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는 걱정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단 예수님 말씀대로 따르는 쪽을 택합니다. ‘보고서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어도 일단 먼저 믿는 단계로 올라선 겁니다. 그랬기에 말씀대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여 자기가 예수님 말씀에 순명한 바로 그 순간 아들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 모두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게 됩니다.
기적은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려고 들면 신기한 ‘사건’으로 끝나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먼저 믿고 그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표징’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당신 섭리로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고 계시지만, 우리가 편견과 고집, 고정관념 안에 갇혀서 그것을 ‘표징’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매달리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이뤄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분께서 주시는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또한 믿어야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대리 안수
박민우 알베르토 신부님
해마다 본당에서는 수능 시험 전날, 혹은 전전날 수험생 미사를 봉헌합니다. 주로 시험을 코앞에 둔 수험생들이 불안한 마음을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꺼내놓고, 미사 중에 안수를 받으며 큰 위안을 얻곤 합니다. 어느 해인가 수험생 미사 때 안수를 하는데, 수험생 무리 중에 중년의 자매님이 끼어 있었습니다. 저는 당황하여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물었고, 자매님은 “수험생인 아이가 미사에 못 와서 제가 대신 안수를 받으러 나왔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때는 안수를 해드리면서도 내심 ‘살다 살다 대리 안수는 처음이군’ 하면서 불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조금 다른 결론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아들을 위해 길을 나선 아빠의 마음을 보시고, 아빠를 통해 한마디 말씀으로 아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주님의 은총은 그분께서 닿고자 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누굴 통해서든 전달된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 깨닫습니다. 물론 앞으로 수험생 미사 때 자녀들은 집에 두고 엄마들이 와서 대신 안수를 받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당사자가 직접 하느님 앞으로 나와 은총을 구하고 안수를 받는 것이 정석입니다. 그러나 정말 부득이한 상황이라면, 부모를 통해서도 은총이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이적과 표징의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모세가 장대에 구리뱀을 달아 올린 것처럼 당신도 십자가의 죽임을 당해야만 함을 설명하십니다. 구리뱀이 없었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죽어야만 했습니다. 다만 뱀에 물렸더라도 구리뱀을 바라본 이들은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7년 10월 13일, 포르투갈의 파티마 근처 코바 다 이리아 들판에서 일어난 태양의 기적은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도 대서특필 될 정도로 수천 명의 사람이 목격한 기적이었고 성모 마리아를 여섯 번 보았다고 주장한 세 목동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날 비가 오고 있었는데, 구름 중간이 뚫리며 그 밖으로 태양이 성체 모양으로 땅에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다시 올라갔습니다. 당시 모였던 사람들은 종말이 온 줄 알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자 땅은 말라버렸고 옷도 말라 있었고 병이 들었던 사람들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실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하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기적을 보았던 사람이 모두 구원 받았을까요? 여전히 기적에 반대하던 이들은 그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그 기적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도 분명히 많은 수가 다시 냉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지만, 표징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에서 기적이나 이적, 그리고 표징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갈릴래아 지방 사람들은 처음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 예루살렘에 다녀오고 나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으킨 많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표징은 오늘 카나의 혼인 잔치에 이어 두 번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분명 기적과 이적, 그리고 표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기적과 이적은 어느 정도 믿음은 줄 수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주지 못합니다. 반면 표징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줍니다.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 복음에서 기적은 누군가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려주는 표징이고 이적은 나도 그 누군가가 될 수 있음을 믿게 하는 표징입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표징인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의 믿음이 아니었으면 그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치 않는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일꾼들이 정결례 항아리에 물을 붓는 믿음도 요구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기적이 인간의 믿음의 순종이 개입하였기에 나도 그렇게 순종하면 나를 통해서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믿게 합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왕궁 관리는 믿고 떠나야 하는 시험을 받습니다. 하루가 지났을 때 집에서 오는 사람들을 만나 그 기적이 일어난 시간이 예수님께서 종의 병이 나을 것이란 시간과 일치함을 알고 온 가족이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궁 관리는 자신의 믿음으로도 표징이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반면 기적은 어떤 누군가가 “나는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니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고 너희는 못 하니까 나에게 순종해야 해!”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에서 이런 일들을 하며 사람을 모읍니다. 그러나 참 믿음으로 성정하지는 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표징이라 말합니다. 여기서는 제자들이 빵을 나누어주는 믿음의 행위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기적에 당신 제자들을 참여 시킴으로써 누구나 그 기적을 이루는 주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태생 소경을 고치는 장면에서도 소경이 믿음으로 흙을 실로암에서 씻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표징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라도 믿고 순종 하기만 하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의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레지오 단원이 함께한 묵주 기도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마귀가 쫓겨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징이 누군가에게 믿음을 줍니다. 기적은 ‘그분이니까 할 수 있고 나는 안 돼!’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면, 표징은 ‘저들도 할 수 있으니 나도 할 수 있겠네!’라는 믿음을 주어 본성이 상승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 5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물이 얼었다
풀리듯이
봄은 믿음처럼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빼앗길 수 없는
믿음의 몫입니다.
표징과
이적에만
집착하고
의존하는
믿음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실은
보이지 않는
은총이
믿음의
감사입니다.
믿음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반성합니다.
믿음의 삶은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삶입니다.
멈출 수 없는
믿음의 여정이며
믿음의 생활입니다.
믿음의
하느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다면
하느님을 향한
간절함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쓰러진 믿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치열한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치유이며
화해이며
회복입니다.
십자가와
사람이
한 몸이듯이
가장 소중한
믿음과
사람 또한
한 몸입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진
자리에서
믿음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뿐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고
믿음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소중한
모든 관계가
믿음으로
다시 만나는
은총과 생명의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믿음을 따라
번지는
은총과
감사입니다.
어느 형제님이 오랜만에 애인과 함께 극장에 갔습니다. 서로 회사 일이 바빠서 공동의 취미활동인 영화관람을 오랫동안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영화가 상영한다고 해서, 회사 일을 모두 마치고 밤에 극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볼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10시까지만 극장 이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는 것인데 너무 화가 났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간에는 식당이나 카페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정부의 방침을 비판하면서 불만을 이야기하는데, 여자친구가 공원에 산책하자고 제안합니다. 이 둘은 함께 산책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더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영화관람이 더 큰 기쁨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부정적 감정으로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긍정적 방향을 찾는 것이 본인들에게 더 유익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이 좋다 나쁘다 하는 문제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느냐가 진짜 중요하다.”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에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과 이적을 봐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표징과 이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튼 거절처럼 보이기도 하는 예수님 말씀이었지만,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고 조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말을 들은 왕실 관리는 어떠했을까요? 기뻤을까요? 화가 났을까요? 왕실 관리인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꿉니다. 화가 나는 부정적인 상황이 아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긍정적인 상황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도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떠나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믿지 않았다면,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생사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왕실 관리였기에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끌고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었기에 떠날 수 있었습니다.
직접 보고 체험해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자신에게 필요한 은총과 사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상을 늘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위대한 영광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일어서는 것이다(공자).
새 하늘 새 땅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루하고 답답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향해 건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습니다. 꼭 그렇게 되리라 굳게 믿으며 희망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이사야서 65장 17~18절)
참 은혜로운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새 하늘 새 땅’ 하니 즉시 떠오르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사이비 종교 집단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군요. 특히 신천지! 한번 크게 타격을 입어 더 이상 웃기는 꼴을 안 봐도 되나 싶었는데, 그들은 마치 불사조 같습니다. 거대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가 봅니다. 또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개를 치기 시작합니다.
이 사탄의 무리는 팬데믹 시대, 발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답니다. 2021년부터 모든 예배나 세미나, 교육을 비대면 온라인 방식으로 바꾸어, 작년 한 해 동안 약 2만 명에 육박하는 신도수의 성장을 기록했답니다.
눈을 부릅뜨고 경계해야 할 대상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틈만 나면 토론석상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단기전략, 중장기 전략을 수립합니다. 성공 사례담을 나누면서 격려하고 포상합니다.
그들의 세운 전략은 우리 젊은이들 입장에서 너무나 달콤하고 다양합니다. 그리고 또 집요합니다. 요즘 어깨가 축 쳐진 우리 젊은이들이 들으면 한방에 ‘훅’ 넘어갈 다양한 미끼들이 수두룩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교묘한 방법으로 접근해오는 그들이 가르치는 바는 참으로 어이없습니다. 자기네 교회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주라고 가르칩니다. 자기 교회의 교주는 곧 재림 예수 그리스도이랍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갖다 바치라고 외칩니다.
이제 지상천국 신천지가 도래했으니 부모 형제나 가족도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외칩니다. 이제 혈연을 모두 끊고 신천지에서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새 하늘 새 땅을 만끽하자고 초대합니다.
흔히 그들이 바라는 것은 순식간의 천지개벽입니다. 초스피드한 상황 전환을 기대합니다. 빠른 치유와 고통의 완화를 원합니다. 단 한 번에 인생의 대반전을 꿈꿉니다. 결국 고통과 십자가는 무시하고 만사형통과 승승장구만을 강조하는 값싼 신앙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을 어디 그렇습니까? 근본적으로 부족한 우리입니다. 다양한 결핍과 한계를 지닌 우리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죄와 결핍과 나약함은 지극히 당연하고 인간적인 일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새 하늘 새 땅, 결국 주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새 하늘 새 땅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는 모두 미완의 존재로서 완성의 땅, 새 하늘 새 땅인 주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한 고통과 시련과 십자가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희망하지만 결핍되고 모자란 존재로서 매일의 눈물과 한숨을 감내해야 마땅합니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기꺼이 견뎌내야 합니다. 때로 겪는 수모와 비참함과 굴욕감도 그러려니 마음 넓게 갖고 수용하며 살아갈 일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집 축성을 다녀왔습니다. 95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자매님의 집입니다. 95세의 연세가 무색하리만큼 어머니는 정정하였고, 순수하였습니다. 손에는 작은 십자가를 쥐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부모님은 황해도 해주에서 사셨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성당에서 종을 쳤고, 신부님을 도와 드렸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수산나, 아버지는 요한이었다고 합니다. 제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해서 ‘신문사’에서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잘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생각에 사제는 모두 성당에서 오는 것이었나 봅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퀸즈성당’에서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것보다 사제인 저를 본 것이 더 반갑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며 예수님을 만났던 ‘한나’라는 노인이 생각났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던 한나는 예수님의 탄생을 보았고, 기뻐하며 축복하였습니다. 연세가 많아서 외출은 못하지만, 매일 기도하던 95세의 어머니에게 사제는 특별한 의미였습니다. 집 축성을 마치면서 사제로서 제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야 길을 성찰하였습니다. 95세 어머니가 건강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내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왕실 관리가 한 일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왕실 관리의 병든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군가가 나의 빈자리를 채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내가 누군가에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역사가 되었고, 신앙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자신들의 삶으로 재해석하였고, 편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재해석된 예수님의 삶은 오늘 나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르꼬, 루까, 마태오 복음 사가는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삶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되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가 되셨고, 표징을 보여주시는 새로운 권위가 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셨고,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포하였습니다. 암부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안셀모, 토마스아퀴나스, 칼라너, 한스큉과 같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신학과 철학의 옷을 입혀드렸습니다. 베네딕토, 프란치스코, 대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과 같은 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영성의 옷을 입혀드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도시의 성당에 팔이 부서진 예수님상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기도하던 군인이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나는 이제 팔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나의 팔이 되어주십시오.” 군인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팔, 예수님의 발,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묵상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4, 43-54(사순 4 월)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일련의 표징과 증거들, 곧 일곱 개의 표징과 일곱 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증거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징’이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신성을 증거 하는 하느님의 계시가 구체화 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파스카에 집결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순시기’의 한 가운데 이르렀습니다.
이제, 전례주년에 따라 ‘기쁨주일’이 지나고, 십자가의 수난이 다가올수록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의 빛을 점점 더 밝게 비춥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에 대한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카나에서 행하신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두 번째 표징’입니다.
이 역시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아픈 아들 때문에 절망에 빠져있던 왕실관리가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고 찾아가 기쁨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가파르나움에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왕실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 자체가 그의 희망과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굳이 청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믿음은 불완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백인대장이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하셨을 때,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루카 7,7)라고 고백했던 것과는 달리,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말합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까지 가야만 치유하실 수 있는 정도로만, 혹은 죽기 전에 치유해야만 되는 정도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는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직 표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종들이 와서 아들이 나은 것을 알려 주었을 때,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표징과 이적을 보고서” 비로소 온전히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병든 아들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하시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두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믿음이 불완전할지라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왕실관리 아들을 살리신 이 ‘두 번째 표징’은 믿는 이들에게는 확증을 주기 위함이요,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이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당신의 신성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아멘.
주님! 보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몰아내소서.
사랑받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완고함을 몰아내소서.
제 삶이 믿음과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주님,
믿음이 부족하오니, 도와주십시오.
의혹하고 믿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치유하소서.
믿음 없이 청하기만 하고 돌아서버리고만 마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오 주님,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힘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힘에 아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믿어 코로나 우쿠라이나 우리나라 기적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힘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 참 신앙이랍니다.
사람들은 누구의 힘으로 살아가는 지 생각하면 너무나 다양할 겁니다.
비싼 옷 보물을 몸에 두르고 으스대는 멋부리는 힘으로 사는 가 하면,
군사력이나 원자력 로켓 등으로 힘세다고 자랑하는 멋에 살기도 하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죽으면 그만이고 낙엽만도 못한 바람일 뿐입니다.
그런 가랑잎에 목숨 걸고 인생 바치지 말고 하느님 힘에 인생 겁시다.
"제 아들을 살려 주세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신부님,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요, 저와 함께 죽기 전에 그 아이가 있는 곳에 가셨으면 합니다."
나는 오늘 복음(요한4,43-54)말씀인 "그 아이가 살아날 것입니다" 를 떠올리며, 즉시 그 아이의 어머니와 함께 그곳으로 달려 갔습니다. 아이는 환자용 침대 위에 죽은채 누워있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침에 소풍나간 아들의 변고를 보고 아연실색하며 눈물도 잊은채 '아이고, 어떻게요'하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 변고를 당장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정례미사가 있던날, 공동체가 함께 울고 미사를 봉헌하고 장지에 가서 함께 위로를 드렸습니다. 부모는 아들의 죽음 앞에 희망은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 아들을 살려주세요" 한없이 절규했으며, 나는 말없이 두 손을 잡아주며 "그 아이는 살아날 것입니다."하고 말하며 지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믿음의 여인입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미사하고 무덤으로 달려가 어머니의 사랑을 쏟으며 기도했습니다. 내가 찾은 무덤에는 용돈도 놓아주고 즐겨먹던 과자도 놓여있었고 생화를 언제나 마련해 꽂아주었습니다. 생화를 보며 부활신앙의 증표를 보았습니다.
그곳은 청주교구 성당묘원입니다. 나의 부모님 성묘를 갈 때면 꼭 그 아이를 찾아보고 나는 그렇게 말합니다. "어머니의 믿음 때문에 너는 우리와 함께 살아있구나." 하고 인사를 나누곤 합니다. 그의 어머니의 믿음으로 생겨난 부활신앙은 아들 또한 힘있게 살아갑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 향한 믿음은 언제나 죽음을 넘습니다. 가슴에 묻은 자식은 믿음 안에 사랑으로 함께 생명으로 자라납니다. 세월이 제법 흘렀습니다. 부모와 자녀를 위해 또 기도합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는데 그곳에서 한 왕실 관리의 아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에게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왕실 관리는 계속해서 매달렸고 결국 그 아버지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그의 아들을 치유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로 신망애의 삶, 곧 늘 주님만을 믿고, 주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왕실관리는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께 유일한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매달리며 기도하였고, 결국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주님께 대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통해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덕송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한없이 좋으시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나이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을 함께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조욱혀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 갈릴래아의 카나에 가셨을 때, 카파르나움의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한다. 카파르나움은 카나에서 80리 정도 되는 먼 거리였다. 예수님은 애원하는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하고 말씀하셨다. 그 고관은 그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 종들을 만났다. 아들이 완쾌되었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먼 길을 찾아와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이 고관의 자세를 살펴보자.
우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고관이 일개 목수에 지나지 않는 예수님께 오기 위해서 먼 거리를 고생하며 찾아왔고 예수님께 간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표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8절) 하시면서 왕실 관리를 가르치신다. 사실 그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49절) 했다.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기 때문에 아이가 죽으면 예수님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기적들은 무엇보다 영혼을 위한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들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해 주신다. 우리가 당신의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 때문에 당신께 귀 기울이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기적은 믿는 이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과 믿음에 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는 기적을 기다리기보다는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가셔야 아들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이 관리를 도와주신다. 예수님은 관리에게 “가거라.”는 말씀으로 왕실 관리의 믿음을 알아주셨고,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사랑과 권위로 그의 소망을 이루어주시고 계시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50절) 여기서 믿었다는 것은 완전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그는 처음부터 불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리는 대신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각부터 물어보았다. 그 시각이 예수님께서 아이가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와 온 가족들이 믿게 되었다.”(53절) 한다.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두 사람이 치유를 받았다. 왕실 관리에게는 뜻밖의 믿음이 생겼고, 아이는 육체적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지난날을 통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혜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보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삶 속에서 어떤 자리에 모시고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표징>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으로
보다
귀로
듣다
마음으로
느끼다
그분을
드러내니
있어서
좋다
그분은
함께하시니
없어도
괜찮다
표징이
아닌
그분을
믿으니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가나로 다시 오십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포도주의 기적을 일으킨 지역이지요. 그런데 이곳에 오시자 카파르나움에서 온 왕의 관리의 청을 듣게 됩니다. 그의 청은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는 것인데 이러한 청을 하는 관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왕의 관리는 다시 청을 하지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즉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우리들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표징과 이적이 없어도 믿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확신이 들어야 믿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왕의 관리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이 “너는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표징과 이적을 보고 예수님께서 주님이라는 것을 믿는 이들을 두고 지적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인간의 한계를 말씀하신 것 뿐 이지요. 그리고 우리들이 봐야 할 것은 예수님께 청을 했던 왕의 관리에 대한 것인데요. 그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청한 것일까요? 그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말하였지만 몇 프로 부족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카파르나움으로 돌아가는 길에 종을 만났고 아들이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 그 시간을 종에게 묻지요. 살아나는 시간이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함을 알고 온전히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로써 이 왕의 관리는 온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왕의 관리는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을 한 관리가 신분으로 볼 때 자신보다 아래인 예수님 앞에 청한다는 것이 자존심도 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 마음을 다하여 청하면 들어주신다는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카나로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카나로 가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제 4주일 복음에서 자신을 떠난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과거의 것은 따지지 않으시고 또 많은 돈을 탕진 한 것의 책임을 묻지도 않으시고 자신에게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잘못된 길을 걸었던 아들이 다시 왔을 때 받아주었듯이 오늘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청하지 않았던 왕의 관리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온전한 믿음이 아님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들어줄 수 없다. 라고 말하시지 않으시고 다음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란 나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예수님께 더 의탁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지만 때에 따라서 의심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나약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심을 잊지 맙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들은 자녀로써 아버지에게 청하듯이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을 보고 계시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다는 의심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아멘!
이근상 시몬 신부님
요한 복음은 따뜻한 복음이다. 나를 못 믿겠다면 내가 행한 이적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다독인다(요한10,38;14,11) 손으로 만져보아야겠다는 토마스에게는 손을 보여주신다(요한20,29). 자식이 죽게된 아비는 예수에게 매달린다. 표징과 이적을 원하는 마음보다 보지 않고 믿는 마음이 더 크다고 말씀하시지만 예외가 없다. 고쳐주신다.
왕실관리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의 아들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식의 숨이 넘어가는 급박한 와중에 예수를 찾아와 모셔가려 한다. 예수는 그의 믿음에 응답한다.
그러나 예수는 믿음을 키우는 농부. 왕실관리는 예수께서 치유자임을 믿었으나 받드시 현장에 있어야만 치유가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라 믿었던 모양이다. 예수는 안달하며 어쩔 줄 모르는 어린 믿음의 어깨를 다독인다. 나는 그대의 믿음을 따라 어디든 함께 하고 있노라. 멀리 떨어진 그대의 집에도, 벽으로 막힌 골방에도, 가 닿을 수 없는 바다 넘어에도, 이승저편까지도 믿는 자의 믿음을 타고, 예수께서 거기에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아이를 잃을 위험에 처한 아비의 청원과 믿음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앓고 있는 아이를 눈 앞에 두고도
예수님을 모셔 오기만 하면 그 아이가 나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믿었던 아버지의 믿음을 생각해 봅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어떤 치유행위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직 당신의 말씀 한 마디를 믿고 돌아갔던
그의 믿음을 되새겨 봅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 받지 못하고,
유다인들은 당신을 배척하였지만,
이방인 왕실 관리의 믿음이
그 어느 누구 보다도 온전한 믿음이었음을
그와 같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청해 봅니다.
가거라 You may go
우리의 대사제이시요 속죄의 제물이신 그리스도
오리게네스 사제의 레위기에 대한 강론에서 (Hom. 9,5. 10: PG 12,515. 523)
대사제는 일년에 한 번씩 백성들을 떠나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 곳에는 분향 제단이 있고 계약의 궤가 있는데 궤 위에는 케루빔 천신 상이 있습니다. 이 지성소에는 대사제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제 참된 대사제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은 육신으로 계실 때 연중 내내 당신 백성들과 함께 계셨고, 바로 그 해에 대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은총의 해와 죄 사함의 날을 전하라고 나를 보내셨다.”
주님은 그 해 속죄의 날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즉 당신의 과업을 성취하신 후 천상에 들어가시어 인류를 위한 속죄가 되시려고 아버지의 옥좌 앞에 서 계시고, 당신을 믿는 이들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간구하십니다.
사람들을 아버지와 화해시키는 이 그리스도라는 속죄의 제물에 대해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자녀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합니다. 그러나 혹시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바오로도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 이 속죄의 제물을 지적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속죄의 날은 이 세상이 마칠 때까지 우리에게 계속될 것입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주님 앞 제단에서 숯불을 향로에 피워 증거 궤 위에 있는 속죄 판을 가리워야 한다. 그래야 죽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황소의 피를 얼마쯤 가져다가 손가락에 찍어 속죄 판 동쪽 위에 뿌려야 한다.”
이 예식이 인간을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화해의 제사가 옛적에 어떻게 거행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주시고 여러분을 하느님과 화해시킨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여러분은 이제 동물의 피를 더 생각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며 주님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것은 내 피이다. 너희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이다.”
피를 뿌릴 때 동편을 향해 뿌렸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여러분의 화해는 동편에서 왔습니다. 동편에서부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이시고 동방이라는 이름을 지니신 그분께서 오셨습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 정의의 태양이 뜨고 또 빛이 언제나 밝아 오는 동쪽을 계속 바라보기를 초대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이 결코 어둠 속을 거닐지 않고 마지막 날이 여러분이 잠자코 있을 때 오지 않으며 또 밤이 여러분에게 몰래 기어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지혜의 광채 속에서 거닐고 언제나 믿음의 대낮을 지니며, 또 언제나 사랑과 평화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노동준 안토니오 신부님
이해인 수녀의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 내 마음엔 조금씩 /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 내 마음의 바위 틈에 /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 일어서는 봄과 함께 /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겨울의 차가운 눈보라를 맞으면서도 기어이 푸른 싹을 틔워내는 보리, 참 대단하고 또 대견합니다. 오늘 복음은 왕실관리의 아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실관리가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시며 왕실관리를 돌려보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왕실관리는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을까요? 아들이 여전히 아프지는 않을지 혹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닌지 아마도 조바심에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 아들의 병은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침묵과 불안의 어둠 속에서도 예수님의 빛은 이미 파란 싹을 틔워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침묵과 불안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작은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 - 꿈의 현실화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금 전쟁을 없애자, 전쟁이 역사로부터 인간성을 없애기 전에!”
“충분하다! 전쟁을 멈추라! 무기들을 침묵하게 하소서. 평화에 대해 진지하도록 하자!”
전쟁 종식의 평화를 꿈꾸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새벽 홈페이지에서 언뜻 눈에 스친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예외 없이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꿈쟁이라 불렸고 옛 예언자들은 물론 예수님 역시 평생 하늘 나라를 꿈꾸며 부단히 꿈을 현실화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꿈꾸는 분입니다. 꿈 역시 제 강론에 참 많이도 등장했던 제목입니다.
“꿈꾸는 정치인이 없었던 이상한 선거! 시끄럽고 시끄러웠던 20대 대선이 마침내 끝났다. 나는 몇 달 동안 한낮의 집필 시간을 빼서 정치인들의 소식과 그 관계자들의 말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는 좀 이상했다. 어디에도 미래를 꿈꾸는 정치인이 없었다. 현실정치, 생활정치라고 하기에도 너무 옹색했다.”
일간지의 모 소설가의 내용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늘날의 비극이자 불행은 꿈꾸는 사람들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꿈꿔야 합니다. 꿈꿔야 삽니다. 꿈꿔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꿈꾸지 죽은 사람은 꿈꾸지 못합니다.
불암산의 바위를 꿈꾸며 살아가는 저입니다. 수도형제의 재치있는 말마디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퇴임하여 팔공산에서 은수자로 살아가는 ‘팔공산의 곰’이라 불린다는 아빠스를 ‘팔공산의 아기곰’으로 지칭한 유우머에다 저를 지칭한 다음 대목입니다.
“마르틴 아빠스님이 ‘팔공산의 아기곰’이라면, 수사님은 ‘불암산의 바위’입니다.”
내심 만족했습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는 결기는 여전합니다. 청마 유치환 역시 바위의 꿈을 노래했습니다. 불암산의 바위로 살아가는 정주의 수도자 제가 애송하는 시입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노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내 죽으면 불암산의 바위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살아서 바위니 죽어서도 바위가 되겠지요. 하느님 역시 꿈꾸는 분입니다. 파릇파릇 대지에 피어나는 풀들이 하느님의 봄꿈이 현실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활짝 피어난 봄꽃들!
꼭 꿈꾸는 나무같네
꽃은 꿈인가
나무나 풀이 땅이 피어낸 꿈인가
꿈꾸는 사람이 아름답다
성인들
하느님이 피어낸 꽃이자 꿈이다
하느님의 꿈
꽃으로 피어나 성인들이다”-2001.3.21.
21년 이때쯤 써놨던 ‘꿈꾸는 사람이 아름답다’라는 자작시입니다. 하느님의 꿈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제1독서의 이사야를 통해 현실화됩니다. 날마다의 이 은혜로운 미사를 통해 하늘 나라의 꿈도 현실화됩니다. 이사야의 꿈이 얼마나 멋지고 가슴 설레는 감동인지요. 예언자이자 신비가, 시인이자 꿈쟁이인 이사야입니다.
사실 성서의 시편의 사람들은 한곁같이 하늘 나라의 꿈을 노래했고 하느님은 시편 노래를 기도로 바치는 이들에게 하늘 나라를 선물하셨으며 이는 오늘날도 여전한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 나라를 꿈꾸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강력한 권고입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얼마나 신바람 나는 현실화된 꿈인지요. 여기서 3회 나오는 창조라는 말마디는 하느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창조하는 꿈의 현실화라는 것입니다. 꿈의 예언자 이사야처럼 꿈꾸는 사람은 지옥같은 현실에서도 하늘 나라의 꿈을, 천국을 삽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매일이 새 하늘과 새땅입니다. 하느님은 한 번의 창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창조와 구원을 통해 당신 꿈을 현실화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하느님 꿈이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의 꿈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마다 하늘 나라의 실현이요 치유의 구원입니다. 문득 예전 ‘예수님 봄이다’라는 자작시가 반갑게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1999.3.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꿈은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되지 않습니까? 권능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심으로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시키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의 왕실 관리와 같은 하느님을 향한 구원의 갈망이요 하늘 나라의 꿈이 현실화된 예수님을 만나는 것뿐입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났고, 바로 그 시간에 아들을 열이 떨어져 살아 났으며 이어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습니다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당신을 믿고 꿈꾸는 희망의 사람들에게는 오늘도 표징을 일으키시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결정적 증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새 하늘과 새 땅과 더불어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시편34,6-7). 아멘.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이기우 신부님
오늘은 부활 신앙의 창조적 국면에 대해 묵상한 바를 강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카나 마을에서 헤로데 왕실의 관리를 만나셨는데, 그의 아들이 거기서 제법 떨어진 카파르나움에서 죽을 병을 앓고 있으니 가서 살려주십사 하는 청원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헤로데는 에사우의 후손인 에돔족의 후예로서 이두메아 출신이었는데,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사후에 그 권력을 여러 형제들과 함께 나누어 받아 갈릴래아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였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로마 제국의 위임 통치를 하고 있었으므로 백성을 위하는 대신 그 반발을 막아주는 방패막이에 불과했습니다. 악정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바른 소리로 비판하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것도 그 헤로데 영주였으므로, 그의 관리라면 유다인들과 예수님께는 원수와 다름없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망설임 없이 그것도 말씀 한 마디로 그의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카파르나움까지 가실 것도 없이 원격으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었습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바를 몸소 실천하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말씀 한 마디로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소생 기적이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을 살려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라든가(루카 8,55), 과부의 외아들(루카 7,14),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친구 라자로를 살려내신 일이(요한 11,43)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소생 기적 사건들을 통해서 깨우쳐야 할 것은 소생은 부활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소생은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지만 수명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은 육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거듭 태어나는 일이고 다시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소생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당신이 지닌 신적 권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소생 기적 사건 중에서 라자로의 소생 기적 사건에 대해서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별히 절친했던 벗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그의 누이들이 죽기 전에 일찌감치 전해왔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미적거리시다가 죽은 다음에야 가서 살리셨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기가 파스카 축제가 임박한 때였고, 그 장소 또한 베타니아로서 예루살렘과 매우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만일 예수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다면 그 소문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모여든 군중에게로 순식간에 퍼져나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명성은 높아질 수 있겠지만, 그럴수록 민중봉기를 염려하는 로마 군대가 계엄령을 내려서 학살을 저지를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눈치챈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러 가실 때, “우리는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비장한 각오를 표명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을 각오를 하고 일으키시는 라자로 소생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이 부활 신앙을 지니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일깨우고자 교회의 전례에서도 창조에 관한 이사야 예언을 독서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소생은 육신에 붙어 있던 생명의 기운이 다시 돌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부활은 육신과 정신과 영혼이 다 함께 생기를 되찾는 것이고 이 기운은 순식간에 다른 이들에게로 널리 퍼질 뿐만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활이야말로 새 창조에 해당됩니다. 창조의 국면을 생각해 보면 이러합니다.
첫째, 우리의 혼은 하느님의 영과 소통을 해야 살아있는 영혼이 됩니다. 종교의 본령입니다. 개인이든 겨레든 사람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야 제대로 된 종교입니다. 미신적인 종교는 악령이나 귀신과 소통하게 해서 영적 질서를 더 어지럽힙니다.
둘째, 영혼의 생기가 정신과 마음을 움직입니다. 문화의 영역입니다. 개인의 마음도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민족의 문화도 자기만 평안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특히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주어야 보편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전에 유행했던 강대국의 문화 즉 로마나 프랑스, 영국, 미국, 중국이나 일본 등의 문화와 최근의 한류 문화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셋째, 정신과 마음이 몸도 움직입니다. 경제의 자리입니다. 흔히 민생경제라 말합니다. 정치적 관심사는 사람들이 고르게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는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창조하시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소생 사건들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예비시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다 마치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지금은 이 부활을 위한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시기입니다. 머지않아 곧 예수 부활 대축일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우리 겨레에게 부활 신앙을 불어 넣어주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우진 신부의 이야기 동산
- 김형영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부모 마음은 부모가 되어봐야 안다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왕실 관리 마음은 부모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모가 아니기에 그저 공감만 해볼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왕실관리도 그렇게 자신의 아들을 걱정하는데, 그를 바라보는 주님은 어떠하실까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걱정하실까요? 노심초사. 이 말이 정말 딱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왕실관리는 믿음을 품에 안고 집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굳게 믿듯, 주님도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이자, 제자이고, 친구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주님의 마음을 우리는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요?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매일 저녁 9시에 가정의 화목과 단란, 본당의 친교와 일치,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통한 국토통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주모경을 읊으며 만과를 바치고 있습니다. 과거 한 때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 파티마의 푸른 군대원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소련 공산당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던 그 수많은 세월 동안, 아무도 그 기도가 실제로 이루어지리라고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소련 공화국은 붕괴되고 새로운 변화가 몰아쳤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 있는 아들이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살려달라고 갈릴래아를 방문한 예수님께 쫓아온 왕실 관리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 라고 미래형으로 약속해 주십니다.
기도가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마도 때가 있나 봅니다. 무엇보다 그때가 되기 위한 우리의 정성과 노력도 필요합니다. 아울러 우리를 둘러싼 관계 당사자의 이해와 용인, 그리고 그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을 정도로 주변 상황이 변화되어 정황이 될 때 비로소 이루어지나 봅니다. 더 필요하다면, 정치, 경제, 사회의 의식도 무르익어야겠죠. 우리는 언제 우리의 기도가 온전히 이루어질 줄은 정확히 모르지만, 그때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치 그 일이 이미 확실히 이루어진 것처럼 여기고 오늘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2)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믿음이 죽음을 이긴 희망을 만든다. <요한 4, 43-54> 3월 28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삶은 고통의 바다를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살기가 힘이 들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이렇게 살지 않고 가장 안전하고 편한 길을 걸어갔을 텐데 믿음은 이 험하고 힘든 고난의 길을 가도록 하고 걸어왔습니다. 어떤 이는 이런 세상을 원망하고 이런 환경을 만든 사람을 저주하지만 믿음이 삶이라 생각하고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 왕실 관리인이 자기 아들이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움으로 내려가 살려 달라고 하니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시며 믿음에 희망을 주어 돌려보내셔서 아들이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순간적 믿음이지만 영원 앞에 시간은 없는 것과 같지만, 우리는 한시라도 고통에 시달리면 힘이 들고 절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갖고 살면 어떤 고통이라도 극복하고 이겨내고 고통이 오히려 힘이 되고 은총이 됩니다.
저는 지난 3월 24일 기적 같은 현상을 보고 감탄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5년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연약한 여인이 모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삼성 병원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가? 어떤 정치적 선언을 하는가? 5년간의 옥살이를 시킨 사람을 원망하고 배신자들을 비난하고 울며 하소연할 줄 알았는데 웃으며 나오고 부모님 계신 현충원에 먼저 침묵으로 참배하고 집이 있는 달성 유가에 돌아갔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여자 대통령을 모시고 살았으니 희망을 보았습니다. 웃으며 자신을 정치에 입문하도록 도와준 달서 국민에게 감사하고 이 나라 앞날에 작은 힘이 되겠다는 약속, 모두가 마음에 드는 말이며 애국심이었습니다. 저는 5년 동안 희망을 잃지 말고 절망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박근혜 율리안나를 위해 기도합니다. 처음 베다 신부님(영세신부님)을 찾아갔을 때 고등학생들 틈에 놀고 있던 모습을 직접 본 것밖에 없지만 같은 신자로서 그 후 계속 관심 속에 살았습니다. 믿음과 신념으로 웃으면서 서 있는 모습 아름다웠습니다. 갑자기 소주병이 날라 와도 미동하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작은 고통이나 큰 고통이나 어려움 중에서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봅니다. 믿음이 없으면 당황하고, 짜증 내고, 화내고, 안절부절못하지만 믿음이 있으면 비록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처럼 “이렇게 목을 대면 편하게 내 목을 칠 수 있겠습니까?” 하셨듯이 믿음은 어떤 고통 중에도 희망을 품습니다.
믿음을 갖고 사는 모든 사람이 희망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 5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꽃들이
다시
피어나는
봄이다.
삶에서
단 하나뿐인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다시
살리는 법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다.
믿음은 얕고
말씀은 깊다.
믿음은
말씀과 함께
깊어가야 한다.
주님
말씀으로
다시 오늘이
펼쳐지는
생명의
여정이다.
우리 삶에서
빠져 있던
믿음을
되살려 주신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던
소중한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사랑이라는
표징과
믿음이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이
먼저 계시고
우리 사람이
있음을
깨닫는다.
왕실 관리의
역할을 하는
아이의
아버지를
먼저 치유하는
것이 그의 아들까지
치유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믿음이
건강해야
자식또한
건강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근원적인
것을 먼저
치유하여 주신다.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수많은 기적과
표징이 있었다.
우리의 오늘이
그냥 이루어진
오늘이 아닌
것이다.
하나의 기적이
다름아닌
나로부터
시작되는 소중한
믿음인 것이다.
부족한
우리 믿음을
치유하는
말씀이시다.
말씀으로
환하게
피어나는
오늘이라는
믿음의 시간
말씀이다.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오늘의
주님이시다.
말씀으로
다시 살아나는
믿음의 여정
치유이다.
꽃들이
말씀처럼
향기롭게
피어난다.
자전거를 오랫동안 타고 있습니다. 요즘이야 무리하지 않고 자전거를 편하게 타고 있지만, 예전에는 먼 거리를 갔다 오기도 했고 험한 산에 가기도 했습니다. 사실 산이나 도로의 오르막길을 오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위안을 받는 것은,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내리막길을 달릴 때는 얼마나 신나는지 모릅니다. 힘을 들이지 않아도 시원한 바람을 가로지르며 아래로 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힘든 오르막길에서 다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신나는 내리막길에서는 많이 다칩니다. 저 역시 자전거 타다가 다쳤을 때를 떠올리면 모두가 편한 내리막길에서였습니다.
예전에 등산할 때, 산악반 선배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올라갈 때는 아주 힘이 들어. 그런데 힘이 덜 드는 내려올 때가 훨씬 위험해.”
등산도 자전거 타는 것도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나를 힘들게 하는 가장 위험한 순간인 것 같지만, 가장 위험했을 때는 편안함을 느끼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될 때였습니다. 안일한 마음을 갖게 하고, 이로써 교만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왕실 관리는 헤로데 조정의 관리이거나 유대아에 파견된 로마 황제의 신하일 것입니다. 그를 종들이 마중 나왔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을 볼 때 그가 높은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꾸짖으시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직접 아들을 만나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볼 때, 아직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종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순간에 아들이 치유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실 관리였던 아버지 역시 치유되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불신의 마음에서 굳은 믿음을 갖춘 참 신앙인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우리가 실망할 방법으로 들어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겸손의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곧바로 응답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보다는 가장 적당한 시간에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기다림을 가져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주님을 굳게 믿게 되는 커다란 기쁨과 행복의 시간이 아닐까요?
자신의 가치는 다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이 전하는 것이다(엘리노어 루스벨트).
인생은 그런거야.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에게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인생은 그런 거야.”
실제로 “인생은 그런 거야.”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호전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인생은 그런 거야. 나는 운도 지지리 없어.”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현실과 함께 살고 이 위에 굳게 서야 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실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참 많아 보입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부정적인 나를 찾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인생은 그런 거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눈물은 웃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춤으로 바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 원거리 비대면 치료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의료진이 환자와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 거리가 떨어진 상태에서도 진료는 물론이고 치료까지 하는 시스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원거리 비대면 치료를 실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에 머무시는 동안 한 왕실 관리가 황급히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보니, 한걸음에 달려온 것입니다.
왕실 관리는 아들이 처한 위기 상황 앞에 체면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예수님께 간절히 청했습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복음 4장 49절)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아들의 상태는 위중한데,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던 카나와 환자가 누워있는 카파르나움은 33Km 떨어져 있었습니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도보로 간다면 적어도 7~8시간은 걸릴 거리였습니다. 낙타나 나귀를 타고 간다할지라도 네다섯 시간은 잡아야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즉시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치유와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원거리 비대면 치료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복음 4장 50절)
한 인간 한 인간의 개인적인 필요성에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배려가 크게 돋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달려오느라 기진맥진한 아버지를 눈여겨보십니다. 아들을 향한 각별한 사랑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그의 믿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아직 예수님 당신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물끄러미 바라보십니다.
왕실관리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는 아직 한참 낮았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의 기적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든지 다 현존하시는 멀티 플레이어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33km나 되는 장거리를 죽어라고 뛰어가지 않으셔도 원격치유가 가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였기에 예수님을 향해 집요하게 같이 가달라고 졸라대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졸라대지 않을 수 없었던 아버지였습니다. 늑장부리다간 아들과는 영영 이별하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탁이 아니라 거의 협박수준입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한 왕실 관리였지만, 그의 간절한 눈망울과 그의 찢어지는 가슴을 예수님께서는 차마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아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확인한 가족들과 종들은 얼마나 기뻤던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왕실관리에게 알리기 위해 동네어귀까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비탄으로 가득 찼던 집안은 순식간에 축제분위기로 돌아섰습니다. 한바탕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눈앞에서도 똑같이 벌어질 풍경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힘겹게 견뎌나가고 있지만,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큰 슬픔에 잠겨있지만,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큰 십자가에 허덕이고 있지만, 머지않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큰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눈물은 웃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춤으로 바뀔 것입니다.
남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게 하는 두 필수 요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서의 두 번째 표징입니다. 첫 번째 표징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있었습니다. 요한은 첫 번째 표징과 연결하라는 의미로 ‘다시’라는 말을 쓰며 이렇게 정보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또한, 이런 정보도 줍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여기서 ‘카파르나움’으로 대표되는 갈릴래아는 다른 복음에서 ‘나자렛’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혹은 실제로는 믿을 마음이 없으면서 표징만 요구하는 바리사이-율법학자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들이 첫 번째 표징을 일으키게 했던 성모 마리아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오늘 왕실 관리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으로는 믿기가 부족했으나 왕실 관리는 그 표징들로 자신 안에서 ‘용기와 끈기’를 뽑아냈습니다.
그는 왕실 관리이면서도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용기’를 보였고 예수님의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청하는 ‘끈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믿음이 없이 예수님께 청했던 것일까요? 그가 예루살렘에서 보거나 들은 예수님의 표징들은 완전한 믿음을 그에게 주지는 못했습니다. 남의 믿음으로 생겨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그 표징이 나의 것이 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종합하여 나에게서 ‘용기와 끈기’를 뽑아내야만 합니다.
미국 심리학자 에릭슨이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분야에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만 시간은 하루 3시간씩 훈련할 경우 10년이고, 하루 10시간이면 3년이 걸립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와 아마추어 연주자 간 실력 차이는 대부분 연주, 연습 시간에서 비롯되고, 우수한 집단은 연습 시간이 1만 시간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타고난 재능보다는 인내와 끈기가 그 사람을 성공으로 이끈다는 결론입니다.
‘1만 시간’을 투자할 용기와 그 시간 동안 지치지 않을 ‘끈기’는 바로 누군가의 성공을 보았기 때문에 나옵니다. 타인들이 이뤄낸 것은 그들의 표징입니다. 일단 그들의 표징을 보지 않으면 아무리 100만 시간을 투자해도 그 자리일 뿐입니다. 움직이기는 하나 목적지가 없으면 빙빙 돌 뿐입니다. 남의 성공을 보고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이제, 그 성공이 나의 성공이 되게 만들기 위해 나도 ‘용기와 끈기’를 끌어내야만 합니다.
저도 사제가 되라는 하느님의 뜻에 일반 대학을 자퇴하고 신학교에 입학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 그리고 신학교에서 끝까지 버틸 끈기를 내지 못했다면 지금 가지게 된 그 작은 저만의 믿음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를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서 본 열 가지 재앙은 그저 모세의 표징이었습니다. 그 표징을 보고 홍해를 건널 용기와 광야를 이겨낼 끈기가 없었다면 성막 위에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표징은 가질 수 없었습니다. 용기가 ‘세례’의 필수 요소라고 한다면 끈기는 ‘견진’에 필요하고, 그렇게 가지게 되는 믿음이 ‘성체성사’의 준비가 됩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표징은 나의 용기와 끈기를 끌어내면 그 역할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닮으려 해도 닮기 불가능합니다.
어느 날 몇몇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해박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일단 돌아가서 매일 팔 돌리기 300번을 해 보게. 그렇게 한 달을 채우거든 그때 다시 나를 찾아오게나.”였습니다. 젊은이들은 ‘아니 팔 돌리기와 학문이 무슨 상관이 있지?’라며 의아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 달이 지난 후, 절반의 인원만 다시 소크라테스를 찾아왔습니다.
“잘했네. 좋아. 다시 한 달을 해 보게.”
또다시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소크라테스를 찾아온 젊은이는 지난달보다 3분의 1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한 끝에 1년이 지난 후에도 소크라테스에게 자문하러 온 젊은이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바로 ‘플라톤’입니다.
진정한 표징은 남이 일으킨 표징이 아니라 내가 일으킨 표징이어야 합니다. 내가 일으킨 표징만이 진정한 믿음을 줍니다. 표징을 일으키기 위한 용기와 끈기는 타인이 일으킨 표징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그러니 믿는 것이 있으면 용기를 내고 용기를 냈다면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커넬 샌더스”는 트럭에서 자며 환갑이 넘어서 시작한 튀김 닭 사업을 위해 ‘1,008’번의 거절을 버텨낼 수 있었기에 ‘KFC 프라이드치킨’ 창업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실베스터 스탤론”은 1,500번의 거절 끝에 자신을 20여 차례나 거절했던 감독에 의해 첫 주연을 맡게 되었습니다. 영국 수상이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윈스턴 처칠이 해로우 스쿨 졸업식에서 이런 연설을 하였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대, 절대, 절대,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재의 수요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세 곳의 성당에서 재의 수요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2019년 8월 뉴욕에 도착해서 매주 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신문사 옆의 퀸즈 정하상 바오로 성당, 작년 8월부터 매주 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부르클린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당, 지난 2월 14일부터 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롱아일랜드 한인성당에서 재의 수요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부르클린 성당은 한국에서 신부님이 파견 될 것이기에 5월 까지만 도와 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롱아일랜드 성당은 신부님이 곧 귀국하시니 다음 주까지만 도와 드리면 될 것입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3번의 재의 수요일 미사를 봉헌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올해 사제 서품 30년이 되는 해라서 주님께서 특별히 재의 수요일 미사를 3번 봉헌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세 곳의 성당에서 재의 수요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받은 느낌이 있습니다. 퀸즈 한인 성당은 모든 것이 잘 조직된 백화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성당의 규모도 크고, 교우들도 많았습니다. 성당 안이 부족해서 친교실에서도 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롱아일랜드 한인 성당은 마트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잘 정비된 모습이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은 동네 편의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모두가 가족 같았고, 친근했습니다. 퀸즈 한인 성당은 한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에 있습니다. 롱아일랜드 성당은 백인이 많이 사는 동네에 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은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 곳의 한인 성당을 사랑하십니다. 세 곳의 한인 성당도 모두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재의 수요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장소와 규모는 두 번째입니다. 정성과 마음이 첫 번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새 하늘 과 새 땅은 눈에 보이는 시간과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던 마구간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믿음으로 치유되었던 실로암 연못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자캐오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강도당한 이웃을 정성껏 돌보아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어드리고, 정성껏 씻어 주었던 마리아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다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왕실 관리가 한 일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은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한 주간 충실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카나에서 왕실 관리가 카파르나움에 있는 앓아누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자 처음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그 왕실 관리가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끈질기게 청하자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하시며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마지막 호스피스 병동에 계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제가 병이 낫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팔십 평생을 주님 안에서 살아온 것이 기적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방식으로의 기적을 바랍니다. 예를 들어 죽을병이 든 병자가 기적과도 같이 병이 치유되어 살아나는 것과 같이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러나 기적이라는 것은 그렇게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충격적이고 기이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행복은 그 일상의 모든 기적들을 진정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사드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빵가게 주인님, 파이팅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빵가게를 하시는 분이다. ‘놀체인 양업’ 아이들 간식을 그곳에서 준비했었다. 사무실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또 빵도 맛있고 유명 브랜드이기도 했다. 우리의 사무실 이전 소식도 알려주고 인사를 해야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끝내 통화를 놓쳤다.
그런데, 비보가 있었다. “신부님, 그분이 고혈압 뇌출혈로 쓰러져 혼수상태입니다. 장기기증을 한답니다.” 요 며칠동안 통화를 하려 했는데 후회가 되었다. 아니 이럴수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겨나 계속 귀를 의심했다. 늘 건강했고 환한 얼굴로 그분을 만났기 때문에 더 그랬다.
중환자실에서 한가닥 희망으로 소생을 바라며 지낸다는 소식을 뒤에 들었다. 오늘 복음(요한4,43-54)에서 왕실 관리가 아들의 죽음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 달려와 살려달라 애원하는 광경을 떠올린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4,53) 아들은 죽음에서 생명에로, 한 가정은 고통에서 온통 기쁨으로 바뀐다. 이런 기적이 주님의 권능으로 그분에게, 그분 가정에 기쁨으로 이루어지길 주님께 청합니다.
가정은 다시 새롭게 ‘즐거움’과 ‘기쁨’으로, 그분에게는 ‘‘기쁨’으로 피어났으면 하고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혹여 비보가 비보가 아니길 바라본다. 한 가정의 한 가족이 갑자기 쓰러져 빈자리가 되면 그 아품은 ‘도미노’현상이 속도를 내고 고통은 커지기 때문이다. 누구나 모두 가정과 한 개인은 살아가며 ‘즐거움’과 ‘기쁨’사이에 고통이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매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지만 작은 신앙으로 견디기 어려운 십자가가 가혹할 때가 있다.
그분이 누워있는 중환자실과 우리들 사이 간격이 요즘 쉽게 갈 수도 없기에 더 멀게만 느껴진다. 찾아가 손 잡고 기도하고 싶지만 이도 생각 뿐이다. 예수님께 속삭이듯 만나서 애원한다. ‘주님, 살려주세요’ 전에 ‘갈릴레아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의 첫 기적’을 기억하고, 급박한 아들 일로 황급히 예수님을 찾아가 만나는 왕실 관리처럼, 우리 또한 황급히 예수님께 매달려 애원하며 기도한다.
늘 우리는 맹물 같은 신앙이지만 작은 믿음 하나로 주님께 또 매달린다. 이 고통이 생명이 되고 ‘거거라, 그도 살아날 것이다.’ 하는 응답을 기다려 본다. 첫 기적이 카나에서 ‘물이 맛 좋은 포도주가 되어 혼인잔치가 즐거움과 기쁨으로 가득찼듯이’ 또 두 번째로 카나에서 왕실관리에게 기적이 일어났듯이 오늘의 이 환자에게도, 그 가정에게도 ‘기쁨’으로 새롭게 창조되길 기도드린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그들은 집을 지어 그 안에서 살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이사65,17-2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도사 훈련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죽을 위험의 환자를 병원 데려가기 왕진 청하기 둘 중 하나뿐입니다.
네 믿음이 대단하니 지금 살아났다 그냥 가보라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냥 믿음과 말씀으로 해결하신 사실을 요한사도가 전해 주었습니다.
원격지원 받아보신 분이라면 예수님이 얼마나 앞서신 분이신지 알죠.
시공을 초월해 계신 예수님을 현세인간들 이해할만한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워 믿는 이들은 쉽게 말해 인생도사님들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시공초월로 훈련받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이런 영신수련 통해 점점 커가는 인생 느낄 수 있습니다.
<믿음>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순 제4주간 월요일>(2021. 3. 15. 월)(요한 4,43-54)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46-50).”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왕실 관리의 믿음을 끌어올려 주신 이야기입니다. 또는, 초보 단계의 믿음만 가지고 있었던 어떤 왕실 관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그의 아들이 예수님 덕분에 치유된 일은 부수적인 이야기입니다.)
1) 이 이야기에 나오는 왕실 관리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은 믿었던 것 같은데, 그 믿음이 곧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예수님께서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원하는 결과를 얻어야만 믿겠다는 태도를 버리고 결과를 보기 전이라도 믿는 믿음을 가져라.”
(2) “표징과 이적만을 믿는 단계에서 벗어나서 ‘말씀’을 믿는 단계로 올라가려고 노력하여라.”
마르코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이 말씀의 핵심은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가 아니라,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입니다. 결과를 보기 전이라도, 또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더라도, 믿어야 합니다. 사실 믿음이란 ‘모르는 일을 믿는 것’입니다.(누구나 아는 일이라면, 믿음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들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자기가 원했던 것과 다른 결과가 생기더라도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나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그것만을 지금 당장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2) 왕실 관리의 입장에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 ‘거절’로 들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를 ‘어떤 이교도 여자의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마르 7,27-28).”
여기서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우상숭배자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예수님 말씀은, 그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먼저 자녀가 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강아지들도 부스러기는 먹는다는 여자의 응답에는,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간청을 들어주시기 전에, 그 여자에게 ‘믿음의 은총’을 먼저 주셨는데, 사실 ‘믿음의 은총’이 더 크고, 더 중요한 은총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고 우상숭배를 계속하겠다고 고집 부렸다면, 그 여자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왕실 관리의 경우에도,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라는 그의 말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믿겠습니다.”, 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그가 “우선 먼저 제 아들을 살려주시면, 그 다음에 믿겠습니다.” 라고 고집 부렸다면, 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은총 받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3)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라는 말은,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았어도, 또 원하는 결과를 아직 얻지 못했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단계로 올라섰음을 나타냅니다.
‘말씀’만 들었을 뿐이고, 결과를 아직 모른다고 해도, 그 말씀대로 된다고 믿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뒤의 5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요한 4,53).”
여기서 ‘그의 믿음’과 ‘그의 온 집안의 믿음’은 구분됩니다. ‘그가’ 믿게 되었다는 말은, “자신의 믿음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로 해석됩니다.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는 말은, “그의 증언을 듣고서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로 해석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지 다 낫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은총이란 무엇인가?’, 또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묵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내가 원하는 그것을, 원하는 그대로 주시는 일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일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원하는 그것을, 원하는 그대로 받아내는 수단이 아니라, 모든 일은 다 주님 뜻대로 된다는 것을 믿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전적인 의탁’입니다.(‘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주님께서 주실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은 모든 신앙인의 숙제입니다.)>
<믿는 이가 길을 떠난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말씀 하나
마음에 담고
길을 떠난다
그 말씀은
바로 그분이기에
비록 그분
곁에 없는 듯
홀로 걸어도
말씀이신 그분
마음에 모시고
믿는 이는
홀로이지만 함께
발걸음 내딛는다
기적을 기다리지 마라.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 일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입니까? 기적을 기다리거나 하느님 권능의 약속을 받고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아프던 자녀나 아내가 차도를 보이면 그것을 표징으로 이해하고 신심이 한결 깊어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나 아내가 차도를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찬미를 바칩니다 주인을 사랑하고 정신이 올바로 박힌 종들은 용서받을 때만 아니라 벌 받을 때도 마땅히 주인에게 달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훈육하시고”(히브 12,6)라고 쓰여 있듯이, 응징 또한 사랑이 깃든 하느님의 보살핌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주생활의 은총이요 깨달음입니다. 안주가 아닌 늘 새로운 시작의 정주의 삶입니다.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같은 안주의 삶이 아니라 내적으로 하느님 향해 끊임없이 새롭게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정주의 삶입니다. 이를 요약한 ‘산과 강’이라는 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못 살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못 살면 언제 어디서도 못 삽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아야 죽어서도 하늘 나라를 삽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서도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 에버랜드는 용인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 진정 에버랜드입니다. 33년 동안 수도사제로 요셉 수도원에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처럼 정주하며 매일미사에 강론을 하다 보니 하늘 아래 새것이 없음을 늘 새롭게 깨닫습니다. 늘 반복의 삶입니다. 사실 세상에 반복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제 강론도 잘 들여다보면 반복입니다. 반복이지만 그냥 기계적인 타성적인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깨달음의 반복, 거룩한 반복입니다. 외관상 단조로운 반복 같지만 내적으로는 날로 깊어지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내적 여정의 삶입니다.
결코 생각없이 트랙을 도는 트랙경기같은 삶이 아닙니다. 아니 생각없이 트랙 10바퀴 도나 50바퀴 도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지요. 많이 사는 ‘삶의 양’이 아니라 하루하루 깨어 사랑하며 사는 ‘삶의 질’이 삶의 핵심임을 깨닫습니다.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경구警句입니다. 제대로 깨어 산다면 나이 70에 죽어 70에 묻혀야 할 것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중의 영원한 현역의 수도자들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결론이 정주의 수도자들 누구나 공감하는 제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30년 이상 한 곳에서 수도사제로 살며 강론하다 보니 참 자주 많이 인용했던 예들이 생각납니다.
1.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하느님 찾는 맛, 하느님 찬미하는 맛, 하느님 맛, 기도 맛, 말씀 맛으로 살아갑니다.”
2.그 긴 세월 수도원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넘어지면 일어서고 넘어지면 일어서고 하며 늘 새롭게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넘어지는 겟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3.아 여기 수도원이 천국입니다.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하느님과의 관계, 너와 나의 관계, 나와 나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관계에 따라 천국같은 환경에서 지옥을, 지옥같은 환경에서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환경을 바꿀 것이 아니라 늘 마음을 새롭게 바꿔야 합니다. 마음이 새로우면 늘 새롭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생생한 짧은 영어 말마디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 만큼 세상도 그러하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느 수도자의 물음에 ‘훌륭한 수도자가 되라’ 답했다는 마더 데레사 성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4.삶은 선물입니까 짐입니까?
“사랑하면 선물이지만 사랑이 식으면 짐입니다.”
이밖에도 무수합니다면 우선 생각나는 예를 들었습니다.
5.제목은 모르지만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흥얼흥얼 즐겨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해방후 유행했다는 노래 3절입니다.
“낙원이 어디냐고 묻지 말게나
심으면 웃는 얼굴 어화 낙원이로구나
내 가슴엔 비가 개어 하늘 푸르고
내 가슴엔 언제나 봄바람 분다
어화 어화디야 일터로 가자
이 나라의 주인이 너와 나로 구나”
6.자주 즐겨 되뇌는 행복기도 한 연도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참 장황하게 예를 많이도 들었습니다. 결국 이에 답은 기도뿐입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한결같은 기도뿐입니다. 기도가 우리를 오늘 지금 여기 깨어 하늘 나라를 살게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일하심을, 모두가 하느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섭리의 손길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나중 남는 두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입니다. 기도와 삶이 함께 가듯 기도와 믿음도 함께 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이사야 예언자나 우리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고무적인 말씀이 우리 가슴을 설렘의 기쁨으로 뛰게 합니다. 기도하는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새 하늘과 새땅입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선물에 우리의 은혜로운 이름은 ‘즐거움’이요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우리가 하느님의 즐거움이요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하느님 꿈이 정말 좋습니다. 하느님의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살아갈 때 하느님 꿈이 실현됨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 꿈의 현실화인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꿈이 예수님을 통해 현실화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새로운 창조의 구원입니다. 한 번으로 끝난 창조가 아니라 매일 평생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치유의 구원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왕실 관리는 간절한 기도와 믿음 덕분에 주님을 만나 살아난 아들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두 번 째 창조의 표징입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간에 그의 아들을 살아났고 그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합니다. 왕실 관리의 간절한 기도와 믿음, 그리고 은총의 말씀과의 만남으로 이뤄진 치유의 구원이자 새로운 창조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늘 새롭게 창조하시며 치유의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화당송 후렴, 주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고백입니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시편30,2ㄱㄴ참조).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과 기적의 관계를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 가셨을 때, 한 왕실 관리가 예수님께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시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지요.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심을 표징 유무와 효력으로 가늠하려 한 듯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9)
지금 병든 아이의 아버지는 몹시 절박하고 다급합니다. 그가 믿기 때문이지요. 그는 예수님이 자기 아들에게 가시기만 하면, 예수님을 모셔가기만 하면 아들이 치유되리라 굳게 믿기에 지금 한시가 급한 겁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
그 아버지의 간청에서 진정한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를 아들에게로 보내십니다. 그의 믿음이 이룬 바를 확인하게 해 주시려는 겁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50)
애초 그 사람의 의도는 예수님을 아들이 앓아 누워 있는 카파르나움까지 모셔가려는 것이었지요. 물론 목적은 아들의 치유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나았다니, 예수님을 모셔갈 필요가 없게 되어 버렸네요. 주님이 반드시 눈앞에 계셔야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여긴 그의 인간적 믿음이 이제 훌쩍 자랄 것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언제 들어도 행복하고 가슴 뿌듯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이 선포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이사 65,17)
황폐해진 땅, 무너진 성전, 모진 유배살이로 절망한 백성에게 주님의 약속은 새 희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모든 실패와 불행의 원인인 자기들의 죄악과 부정을 주님께서 깨끗이 잊어 주신다고 하시니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을 누리려면, 믿어야 합니다. 그저 '진짜 그럴 수 있을까? 어디, 한번 보자. 아님 말고...' 하는 식으로 물러앉아 지켜보는 관찰자나 방관자는 설령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서, 제 존재 안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감지하지 못할 것이니까요. 새 창조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이사 65,18)
기쁨과 즐거움은, 꿈이 무너져 버린 우리의 삶에도 빛이 스며들고 있으며, 그 빛이 꼭 지금은 아니어도 언젠가 반드시 우리를 일으켜 세울 것임을 믿는 이에게서 볼 수 있는 표징입니다. 이 약속은 믿지 않는 이에게는 죽은 문자로 남지만 믿는 이에게 반드시 실현되는 기적입니다.
표징과 믿음과 기쁨. 이 셋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 영적 여정을 함께 동행하는 벗들입니다. 꼭 순서를 정하지 않아도 모두 잘 있는지, 어느 것이 빠졌는지, 인간적으로 치우침은 없는지 감지하면서 그 균형 안을 걷는 것이 신앙의 순례길인 듯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고통스럽고 절박한 아픔을 주님께 겸손히 아뢰고, 그분의 처방이 꼭 우리가 바라던 바가 아니어도 굳게 믿으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믿는 이에게는 표징과 기쁨이 함께할 것이니, 믿는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믿기에 기쁘고 행복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믿음의 씨앗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과 이적 그리고 그 결과인 믿음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왕실 관리에게 단순히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를 도식처럼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 순간 왕실 관리는 믿음에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자신의 아들의 목숨에 대한 간절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지금 앞뒤 가리며 체면을 내세울 형편이 아닌데다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애원할 입장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생애에 몇 번씩 눈앞이 캄캄해져 올 만큼 급박한 일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일 외에는 그 어떤 일도 더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이 일만 잘 되면 온전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나의 계획이나 의도를 훨씬 뛰어넘는 일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가게 됩니다. 또한 우리도 왕실 관리처럼 급박한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초대하는 길은 주님께서 그 시간에 그 사람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라도 알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해주는 일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함께 머물러주는 기간에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의 행복 <요한 4, 43-54> 3월 15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믿음은 찾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오늘 왕실 관리자의 믿음은 찾아가서 듣고, 보고, 신뢰하고 “주님, 제 아이가 죽게 되었으니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주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가거라. 네 아들이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살아났다고 합니다.
저에게 카톡으로 “신부님 지금 암으로 고생하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 부탁합니다.” “네, 기도합니다.”로 끝나지만, 그다음 “많이 치유 받고 나았습니다.”하고 감사하는 말이 오면 주님이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오랜 상담자가 결혼해서 임신했는데 이제 곧 낳게 되는데 병원에 오니 제왕절개를 해야 아이가 무사히 낳는다고 기도 부탁했는데 몇 시간 되지 않아 아기 사진을 보내며 무사히 낳았다고 감사하다고 전하는 말에 저는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주님의 힘을 또 한 번 느꼈습니다.
주님은 태초에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었다.” 요한복음 말씀의 시작 말씀은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 인하여 생겨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간다고 하십니다. 인류의 역사 안에 주님이 오시고, 완성하시고, 이사야 말과 같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도록 하시려고 오신 주님을 만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지 감사 기도가 절로 납니다. 말씀이신 주 하느님은 힘이었으며 생명이었습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과 말로 이어지고, 글을 쓰지만, 그 본질은 말의 힘입니다. 말은 주님의 힘입니다. 어제 이문희 대 주교님이 선종하셔서 계산 성당에 기도실을 꾸미고 누워계시는데 코로나 시대 아니면 천리만리에서도 마지막 길을 축복하러 모여야 하는데 “집에서 기도하세요.” 합니다. 저는 우선 “주교님, 저는 주교님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가 새 하늘 새 땅에 거처하심을 믿나이다.” 기도하며 “세상에서 힘든 삶을 내려놓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세요.” 기도합니다.
우리가 서로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기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살고 있습니까? 사제의 말 한마디에 물이 술이 되듯이 빵이 주님의 몸이 되고, 포도주가 주님의 피가 되어 미사 안에서 새 하늘 새 땅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사제나 믿는 사람의 기도 한 말씀이 주님의 말씀 같이 말씀을 하신 순간 왕실 관리자의 아들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입은 복되고 부탁받고 기도하는 입술은 복됩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멀리하십니까?
저는 어머니 기도의 힘으로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되어 이 나이 되도록 살고 있습니다. 사제 품을 받고 어머니 앞에 가니 “얘야, 사제가 되도록 하루에 묵주기도 한 번씩 했는데, 인제 보니 사제의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데 하루에 세 번씩 해야 하겠다.” 하셨습니다. 20년 후 소천 하셨는데, 그 기도의 힘으로 살고 있음을 느끼며 힘 있게 살고 있으며, 옆으로 가다가도 어머니의 기도 힘을 느끼면 바로 가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우리 서로 기도해 줌으로써 주님의 무한한 힘을 받고 모두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긴가민가하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라는 뜻입니다. 보지 않아서 잘 모르고, 본다고 하여도 확실히 알 수 없으니, 불안하기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황실 관리가 예수님께 와서 앓아누워있는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그가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여러 가지 탓만 하고 시비만 걸던 왕실 사람들을 기억해 내시고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라고 반문하십니다. 그래도 자기 아들을 고치려는 마음으로 다급하기만 한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난데없이 ‘주님!’이라고까지 부르며 매달립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49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작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실 만도 한데도 그가 하자는 대로 하지 않으시고, 그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라고 일러주실 뿐입니다. 그 왕실 관리는 그야말로 긴가민가하면서도 자신이 할 바는 다 했고, 자신이 그렇게 고쳐주실 수 있으시리라고 믿고 의지했던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렇게 믿고 집으로 향합니다.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전해줍니다.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종들이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52절) 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을 들은 왕실 관리는 그 시각이 바로 예수님께서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3절) 하고 말씀하신 순간임을 확실히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긴가민가하던 그와 그의 집안이 예수님을 진정 주님으로 믿게 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그 시각에 우리가 청하는 그 방법대로 주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시각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진정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사고,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고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긴가민가하기만 한 세상을 힘차게 살아나갑시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요한4,53)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님
+찬미예수님
“일본 도호 대학교의 아리타 히데오 교수는 감동해서 흘리는 눈물, 감루(感淚)는 웃음보다 6배나 더 강력한 면역증강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한 감루를 흘리고 부교감 우위상태가 되면 면역력이 회복된다고 합니다.
감루란 무엇일까요? 감동적인 영화나 소설 혹은 이 어지러운 세상살이에서 진선미를 만날 때 우리 마음속에는 잔잔한 감동이 퍼지거나 혹은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합니다. 이때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감루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맛을 느낄 수 있고 속이 시원하고 후련해지는 느낌도 들게 됩니다. 이러한 감루의 경험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감동적인 영화를 보며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도 그러한 사람이 되고자 다짐하며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식으로 말입니다. 혹은 스포츠 선수인 박세리나 김연아의 감동적인 활약을 보며 골프의 '세리키드' 빙상의 '연아키드'로 열심히 목표에 매진하는 경우, 혹은 케이팝 K-pop의 후예가 되고자 결심한 수많은 젊은이들의 경우가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이처럼 진심의 감동이 주는 힘은 대단히 크고 또 중요합니다.“(면역혁명 이시형)
왕실 관리 한 사람의 아들이 앓아누웠습니다.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느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 아들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간청 끝에 예수님 말씀을 듣습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4,50)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혼자 내려가는 도중에 종들에게서 자신의 아이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는 감동을 했습니다. 그 결과는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요한4,53)
사람을 움직이는 감동이 있습니다. 감동은 전율을 가지고 옵니다. 눈물을 가지고 옵니다. 변화를 가져 옵니다. 치유를 가지고 옵니다.
신앙생활 역시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뭔가를 자주 바랄 때 감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마음 느끼고 감사 행위를 할 때 감동합니다. 하느님 은총에 감동할 때 하느님 사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감사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하느님의 이끄심을 느낄 수 있고, 하루를 끝마칠 때 감사함이 쌓여 하느님 사랑에 감동합니다.
감동은 내 마음을 하느님으로 향하게 합니다. 날마다 하느님 사랑에 감동스런 날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요한 4, 5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겨울의 끝은
새로운
봄의 시작이다.
생명의
새로운
봄날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되살리시는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실천하신다.
가본 적이
없는 길을
주님께서
먼저
걸어가신다.
죽음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죽음조차
주님에게서
분리될 수 없는
생명이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죽음의 관계가
아니라 생명의
관계이다.
일상을
되살려
놓으시는
주님이시다.
생명을
되살리시는
주님이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하느님의
생명을 결코
가로막을 수
없다.
구원의
여정이란
다름아닌
생명을 되찾는
여정이다.
오늘이 바로
생명을 되찾는
오늘이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다.
죽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다.
죽기에
되살리는
십자가의
봄이 있다.
우리의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
사랑의 시작은
오늘의 삶에
감사하는
것이다.
삶이
생명이다.
생명의
새날이다.
되살아나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