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26
그 무렵 치유받은 불구자가 11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온 백성이 크게 경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12 베드로는 백성을 보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13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놓아주기로 결정한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16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17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20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정하신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21 물론 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
22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야 한다.
23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
24 그리고 사무엘을 비롯하여 그 뒤를 이어 말씀을 전한 모든 예언자도
지금의 이때를 예고하였습니다.
25 여러분은 그 예언자들의 자손이고, 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희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어 주신 계약의 자손입니다.
2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 배척당하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바꾸셨다고 깨우쳐 준다(제1독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평화를 기원하시며 당신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보여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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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백성에게, 그들이 배척한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불구자가 완전히 낫게 되었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구운 물고기를 드시며,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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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온 백성에게, 불구자가 낫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며,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그들의 죄가 지워지게 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며,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엠마오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십니다. 제자들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놀라고, 의혹을 가집니다. 당연합니다. 예고를 하고 들어오셨어도 놀랐을 터인데, 대화 가운데 조용히 나타나시니 누구라도 놀랐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 당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다양한 감각(시각, 청각, 촉각, 미각)을 동원하시어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 만져 보아라. …… 말씀하시고 …… 보여 주셨다. …… 잡수셨다.” 무엇보다 손과 발을 보고 만져 보게 하심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분이 바로 이렇게 살아 계심을 확인시켜 주시는데, 이러한 확인을 통하여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연장선에 있는 사건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부활하신 모습이야말로 이 연계성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연계성은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케리그마(복음 선포)가 되어, 사도들이 선포하여야 할 내용의 핵심으로 정립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일의 증인이 된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제1독서)에서 준엄하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부활은 정신이나 영혼의 영역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이 보여 주듯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의 육신성을 우리에게 물리적으로 확인시켜 주십니다. 부활하셨어도 상처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계신 것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상처는 가리거나 없애 버릴 필요가 없는 소중한 생명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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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도 어제에 이어서 루카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부활 발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24,35 참조)로 오늘 복음을 시작하면서 어제와 오늘 복음의 연속성은 강조됩니다.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열한 제자와 동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겪었던 두 제자의 부활 체험도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열한 제자와 동료들 안에는 아직 여러 의혹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의혹”으로 옮긴 그리스 말 ‘디아로기스모이’는 부활을 거부하는 비판적이거나 반대적인 생각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배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구약 성경과 연결지어 설명하십니다. 이에 따르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구약 성경에서 예고되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하여 완성되었습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특별히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을 위한 필연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으로 완성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의 증언과 선포로 지속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열한 제자와 동료들은 우리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우리 또한 부활 증언을 전해 듣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거부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시 제자들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의 현존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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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돌아와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전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십니다. 슬픔과 절망, 좌절과 두려움의 심연 속에 빠져 있던 제자들은 여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손과 발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자국들을 만져 보게 하십니다. 이어서 구운 물고기를 잡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령도, 영혼의 환영도 아니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부활하신 당신의 몸은 누구나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그분께서는 몸소 음식까지 잡수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걸으시며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던 것처럼, 이제 다른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이로써 제자들은 스승님께서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습니다.
덧붙여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 생각과 말과 행위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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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무서워 떨며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함께하면서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고 배웠지만,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죄책감과 비참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오는 좌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이 만난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도 헛소리라 여기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뵌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의심합니다.
이런 제자들 한가운데에 예수님께서 서시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 한가운데 서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잘못이나 실패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하고 말씀하시어 당신과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하는 제자들에게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라는 말씀은,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풍랑을 만나 힘들어 할 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인 줄 알고 기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다. 너희와 함께 했고,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나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증거인 손과 발을 보라고, 그 못 자국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라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한 식탁에 함께 앉아 드시고 마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제자들과 함께 드시면서 그들을 일깨워 주십니다. 아픈 이들을 사랑하는 십자가의 길,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더 울고 웃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아픈 이들을 더 사랑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온 생애가 사랑이었기에,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당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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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를 잃어버린 사람이 도끼를 찾다가 보이지 않자 이웃집 아이를 수상하게 여깁니다.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터인데 머뭇거리고 아이의 행동만 살핍니다. 그 아이가 훔쳤다는 심증이 들자 날이 밝으면 따지겠다고 벼르며 나무를 하러 산에 갔는데 잃어버린 도끼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아이를 다시 보니 수상쩍은 데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의심암귀’(疑心暗鬼) 곧 의심이 깊어지면 귀신이 보인다는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과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나머지 예수님을 보고 유령 곧 귀신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사실 부활 이전에도 제자들은 스승을 유령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심한 풍랑으로 배가 파도에 뒤덮이려 할 때였습니다. 그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의심을 지적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의심을 없애시고자 최후의 만찬 때처럼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며,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의심 많던 제자들의 변화는 오늘 독서에서 나오듯 그들의 굳은 믿음으로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사랑의 성찬례인 미사에 더욱 열정적으로 참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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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첫째 부분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한 저녁 식사 장면을 상기합니다. 그다음 루카는 각각의 주제를 통일시키는 두 단계 위에 이야기의 메시지를 배열합니다.
첫째 단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증거를 바탕으로 하여 제자들이 알고 있던 나자렛 예수님과 당신의 신원을 일치시키는 ‘변론’ 부분입니다. 둘째 단계는 주님께서 성경을 깨닫도록 제자들을 가르쳐 주신 부분입니다.
놀라운 것은, 다른 제자들이 엠마오의 두 제자의 말을 듣고 또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고 이야기하는 반면(루카 24,34-35 참조), 그들 가운데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그들이 본 대로 믿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점까지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셨으며, 불과 몇 시간 내에 묻히신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자명한 좌절 앞에서 이 몇 시간은 온갖 메시아 환상과 희망을 깨트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님을 유령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안에서 의심이 생기고 이런 의심에서 그들이 믿는 것을 가로막는 두려움의 망령이 생깁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살과 뼈를 가진 인간임을 분명히 해 주는 육체적 증거를 모두 제시하십니다. “나를 만져 보아라.”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그분의 몸은 영광을 입으셨고, 이는 제자들이 처음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체험과 개인적인 만남을 통하여 그들을 찾아오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게 됩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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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한결같은 태도는, 놀람과 두려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제자들은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할 정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란 제자들을 안심시키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였습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라는 오명으로 자신들마저 붙잡혀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을 따른 결과에 대한 자책,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던 그들의 의심까지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기에, 먼저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도록 당신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심지어 먹을 것을 직접 잡수시기까지 해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믿도록 설득하시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섬세한 배려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증인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목격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의 말씀이 성취되는 하느님 계시의 완성이며,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선포였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교회인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로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우리가 하는 증언은, 역경을 이기고 기쁘게 살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삶의 표양으로 더 확실해질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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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몹시 놀라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살과 뼈가 있는 당신의 몸이 부활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심지어 그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살아 있는 현실의 몸과 같은 것일까?”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몸이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난다.”(1코린 15,44)고 설명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던 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심을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부패를 겪지 않으셨기에 특별한 모양으로 당신 부활의 육신을 제자들에게 보여 줄 수 있으셨습니다.
유다 역사학자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다인들의 부활 사상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 영혼을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환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은 그 몸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바리사이였던 바오로 사도는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난다.”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부활한 몸은 생전의 죽을 몸과 동일성을 갖되 죽지 않을 몸으로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일성 때문에 부활의 삶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썩어 없어질 몸에서 이루어지지만 불멸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현세의 우리 몸은 이미 ‘초월적 본성’을 지니기 시작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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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공동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확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은 같은 분이면서 동시에 다른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만남을 통해서 당신이 진정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그분을 뵙고, 만지며, 그분과 함께 음식을 먹습니다. 환상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살아 계시는 것이고 함께 소통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자유로운 분이셔서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오시고, 원하시는 곳에 나타나시며, 당신의 가르침을 되새겨 주시고, 성경 말씀도 해석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누리시는 자유는 또한 그분이 완전히 다른 분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그 영혼뿐 아니라 존재 전체가 살아 계시므로 같은 분이시지만,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조건에 묶여 계시지 않기에 다른 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십니다. 평화를 위한 주님의 인사는 또한 두려움과 죄책감에 빠진 제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십니다. 주님의 부활은 저 멀리 동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충만히 체험해야 하는 기쁨과 희망의 선물입니다. 우리 삶의 깊은 곳에 부활이 있고, 충만한 부활의 세계는 우리 신앙의 삶으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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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이제 드디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형제들의 증언을 통하여 벅찬 기대가 싹텄을 그들이 막상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뵙자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반응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 유령이라고 소리 지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마태 14,26 참조). 그 장면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주님의 현현(顯現)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두 가지 행동을 눈여겨보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제자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그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시는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무엇보다도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대신 평화를 체험하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잔잔한 마음의 평온에서부터 담대하게 주님의 일을 하는 용기까지 줍니다. 이는 요즈음 독서에서 우리가 듣는, 부활 신앙으로 살아간 사도들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모습입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의심과 불안을 잠재우시고 부활의 참뜻을 깨우치실 뿐 아니라 주님의 살아 있는 몸을 대면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그저 육신에서 분리된 영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저 물질적 육신의 재생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주님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깊이 뿌리박고 살면서도 이 세상 것들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의 길이 열렸음을 뜻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으며 그 부활 신앙을 실천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자 사명입니다. 이 부활 시기가 그 큰 발을 내딛는 은총의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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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지식이 아닙니다. 부활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애정입니다. 사랑과 애정을 어떻게 이론으로 증명할 수 있을는지요? 한계에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스승님께서는 자꾸만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한계를 깨뜨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놀라느냐? ……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안타까움이 담긴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의 의구심은 여전합니다. 마침내 스승님께서는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잡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과 인내’로 다가가시는 모습입니다.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화려하게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초라했습니다. 그런데도 스승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을 해석해 주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인데도 부활 사건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니 후대의 신앙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분의 개입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는 이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반드시 개입하십니다. 그리하여 ‘평범한 사건’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주십니다. ‘보통의 만남’을 통해서도 가르침을 남기십니다.
사건과 만남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부활은 전혀 예기치 못한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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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부모의 고통을 알게 되면 금방 성숙해집니다. 부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녀는 하늘이 보호합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부모의 정성과 사랑에 보답해 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통과 연결된 인생만이 성숙한 삶을 가능케 합니다.
복음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렇게 자신들 곁에 계시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승님을 떠나보냈던 이별이 그들을 왜소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어린이를 대하듯 하시는 스승님의 말씀에는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읽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따듯함입니다.
제자들은 감동합니다. 그리하여 ‘수난과 죽음의 아픔’을 극복합니다. 스승님의 열정이 그들의 왜소함을 몰아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지식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차가운 이론으로는 설명에 한계를 느끼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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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제자들은 부활하신 스승을 보자 유령으로 착각합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건 좀 심한 일입니다.
어쩌다 주님의 제자들이 이렇게 되었는지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스승이 떠나자 희망도 자신감도 함께 떠나 버렸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던 그들 앞에 스승이 나타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십니다. 그들의 굳은 마음을 누그러뜨리시려는 배려였습니다.
생선을 잡수시는 예수님과 그분을 지켜보는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놀람과 환희와 부끄러움이 교차되는 얼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생선 한 토막만을 달랑 드신 것이 아닙니다.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평소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부활하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던 겁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의도를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스승은 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선포하십니다.
부활 사건의 깨달음은 지식으로 습득되는 이론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려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지, 지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리 해석만으로 이 위대한 진리에 접근하려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아름답고 멋진 장소에 가시면 무엇부터 하십니까? 아마 감탄사가 먼저 나올 것이고, 그리고 이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기 위해서 사진도 찍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장소라도 자기 몸 상태에 따라 하지 않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10년 전, 남미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비행기 탄 시간만 하루가 될 정도로 먼 곳에 있는 곳이고, 이제 다시 이곳에 오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많은 체험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일정을 마치고 관광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페루 쿠스코에 도착했을 때, 울고 싶었습니다. 안데스산맥 사이의 해발 3,399m에 위치한 15세기에 세워진 고도시입니다. 볼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지만 사진 한 장 찍기도 힘들었습니다. 두통과 어지러움, 계속해서 붕 뜬 느낌과 소화 불량이 계속 제 몸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산병 때문입니다.
고산 증세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과연 아름답고 멋진 경치가 눈에 들어왔을까요? 사람들이 감탄사를 외치는 곳에서 저는 한숨만 내쉬면서 빨리 낮은 곳에 가고만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산 증세는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하룻밤을 묵고 나서는 다시 생생해졌고, 그제야 아름답고 멋진 장소가 눈에 보였습니다. 이제는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의 이해에 따라 달라지는 주변 환경에 대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 환경에 적응하고 바라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보인 것처럼, 주님께도 완전히 적응해야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방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자기들 역시 죽지 않겠냐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예수님께서 직접 3번이나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몰랐던 사건이 아닙니다. 3번이나 예고하셨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잊어버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이해가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는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을 환호하는 많은 군중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 역시 세상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한 군중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소리,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는 모욕적인 군중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하셨던 모든 말씀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오늘의 명언: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고사성어).
아무것도아닌우리인간들과끝까지접촉하시고소통하시는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초세기교회부활하신예수님에대한믿음여부는참으로큰관건이고,그에대한합당한교리적설명은너무나도큰과제였습니다.
인류역사상전무후무했던특별하고기이한예수님부활사건이었기에일반대중은물론예수님을추종했던사도들조차도믿음을지니기가어려웠던것입니다.
이런우리를향한부활예수님의태도는참으로자상하고친절합니다.배신과불신,완고한제자들의마음에도예수님께서는결코분노하지않으십니다.
제자들앞에발현하실때마다먼저평화의인사를건네십니다.“평화가너희와함께!”
뿐만아닙니다.치욕과수모,혹독한고통의흔적인당신의오상,저같았으면절대누구가에게보여주고싶지않을손과발의깊은상처를제자들에게보여주십니다.더나아가서만져보라고손과발을내어주십니다.
“내손과내발을보아라.바로나다.나를만져보아라.”
어디그뿐인가요?예수님께서는제자들에게먹을것이있느냐고물으십니다.“여기에먹을것이좀있느냐?”제자들은우선급한대로자신들이먹고남은구운물고기한토막을드립니다.예수님께서는그들이보는앞에서물고기한토막을드셨습니다.
부활하신예수님은이제또다른존재방식을사시는분이십니다.시공을초월하시는분,어디에나등장하시는분입니다.그까짓물고기한토막드셔도되고안드셔도되는분이십니다.그러나예수님께서는당신의부활이참된것임을제자들에게증명해보이기위해보잘것없는물고기한토막을그들앞에서야무지게잡수신것입니다.
참으로자상하고친절하신하느님이십니다.전혀그럴필요가없는하느님,그렇게까지하지않으셔도되실부활예수님께서,한인간이건네시는구운물고기한토막을드셨습니다.
아직도의심과불신으로가득찬제자들에게부활의기쁨과영광을전하기위해,한인간과마주앉아인간의음식을드신것입니다.참으로놀라운겸손이요크나큰자기낮춤이아닐수없습니다.
부활하신예수님은이제부활이전의예수님과는본질적으로다른분이십니다.시공을초월하시고,육의세계를넘어서신분이십니다.
그러나예수님께서는아직도갈길이먼제자들,신앙의깊이가얕은제자들을영적동반하시기위해또다시자신을낮추십니다.인간들사이로육화하십니다.아무것도아닌존재인인간들과친히접촉하시고소통하십니다.그들이건네는하찮은물고기한토막을맛있게받아드십니다.
부활하신예수님께서는배반자요불신자이며,먼지요티끌인우리인간존재를끝까지존중하십니다.함부로대하지않으시고지극정성으로사랑하십니다.또다시우리를당신구원사업의파트너로선택하십니다.
그런그분의뜨거운사랑은불신과의혹투성이인제자들의눈을뜨게하십니다.그들의나약함을강건함으로바꾸십니다.마침내그들을주님부활의당당한증인으로서게하십니다.
부활의 기쁨을 위해 반드시 준비할 것: 진리(하늘의 뜻)는 은총(부활의 기쁨)을 담는 그릇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 ‘나이야드’(2023)는 다이애나 나이야드(Nyad)의 2015년 회고록 『길을 찾아라』를 원작으로 합니다. 이 영화는 2013년 상어 우리의 보호 없이 쿠바에서 플로리다까지 수영한 최초의 사람이 된 미국인 장거리 수영 선수 다이애나 냐드(Diana Nyad)의 전기 드라마입니다.
나이야드는 책에서 본 한 문장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말해봐. 단 한 번밖에 없는 이 삶을 걸어서 네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약속을 취소하고 침대에 드러눕는 게 일상이 된 다이애나는 어느새 60세에 이르렀습니다. 그녀가 이루고 싶은 것은 이제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어렸을 때의 꿈을 보게 되자 생각이 바뀝니다. 30년 전에 쿠바와 플로리다 해협까지 110마일을 수영으로 완주하겠다는 평생의 꿈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이애나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코치의 지원을 받아 30년 전에 실패한 쿠바에서 플로리다 해협까지 110마일 바다 수영을 완주하겠다는 평생의 꿈을 다시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여기에서 그녀의 이름 ‘나이야드’가 중요합니다.
그녀의 이름 나이야드는 ‘그리스의 물의 요정’을 뜻합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지어준 그 이름을 굳게 믿고 도전에 도전을 이어가다 5번째에 성공하여 미국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나이야드가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동료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못할 도전을 꿈꿨고 그것을 위해 많은 전문가가 함께했습니다. 코치와 배와 바다 전문가가 필요했고 상어 퇴치 전문가와 독 해파리 전문가, 그리고 의료팀 등도 필요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꿈을 돕는 자에게 하늘도 돕는 자들을 보내주십니다.
도움은 은총입니다. 그 은총을 위해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방향입니다. 꿈이고 하늘의 뜻입니다. 하늘의 뜻을 들어주는 자라야 하늘이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운전도 못 하는 아이에게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주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은총을 주시는 분의 뜻을 따를 결심을 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사명을 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제가 ‘돈쭐’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던 때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 월세도 못 내고 있던 차에, 돈이 5천 원밖에 없는 형제에게 무료로 치킨은 내어줬던 치킨집 사장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형이 프랜차이즈 본사에 보낸 편지가 알려지면서 이른바 돈쭐의 주인공이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선행이 알려진 뒤 따뜻한 마음을 악용해 협박하거나 손찌검하는 사람들로 마음고생했습니다. 사장은 그 와중에도 조용한 선행을 계속 이어왔다고 합니다. 돈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사장이 가지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하면서 오히려 내어주는 기쁨에 중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돈을 주는 이유는 단지 그 형제에게 선행을 베푼 것만 보고서는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돈을 주어도 앞으로 계속 그런 선행을 할 뜻을 보고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이에게 나타나시고 은총을 주십니다. 내가 살아갈 방향, 곧 이웃 사랑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은총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자녀 앞에 그릇을 먼저 준비시키지 않고 음식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일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증인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이런 증인은 법정에서 볼 수 있고, 증인의 증언은 법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이런 증인의 증언을 공적인 장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5공 청문회’였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군사정권’의 무도함과 부당함을 증언하였습니다. 송곳 같은 질문으로 국민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밝혀낸 ‘청문회 스타’ 국회의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거짓 증언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수산나’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욕망에 사로 잡혔던 노인들은 수산나가 부정한 행위를 했다는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수산나는 억울하게 죽을 위험에 직면했지만 다니엘은 두 노인의 거짓 증언을 밝혀냈습니다. 수산나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악의 그물에서 벗어났습니다. 거짓 증언을 했던 노인들은 벌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에서 여덟 번째 계명은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념과 신앙’을 지키기 위한 증인입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투쟁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세대를 ‘386 운동권’이라고 했습니다. 3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한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대부분 586 세대가 되었습니다. 5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에 출생한 사람을 지칭합니다. 이들의 저항과 이들의 투쟁은 많은 희생을 초래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가 있습니다. 그밖에도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던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의 민주화는 그런 증인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도 많은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증인은 스테파노입니다. 부제였던 스테파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300년 박해의 시간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런 순교자들을 특별히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의 복음 전파 없이 자생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던 한국 교회도 복음 때문에, 신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로서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는 것은 우리들 또한 순교자들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이제 세상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회개 했던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교황이 되었습니다. 회개한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두 번째는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부당한 폭력 때문에 생길 수도 있지만 교회의 위기는 회개한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 주소서.’라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 부활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이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일의 증인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주님의 증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알려주시니
알고
아니
알려줍니다
아는 만큼
알려주고
알려주는 만큼
압니다
알려주심
앎
알려줌
갈림 없이
하나입니다
보여주시니
보고
보니
보여줍니다
보는 만큼
보여주고
보여주는 만큼
봅니다
보여주심
봄
보여줌
갈림 없이
하나입니다
들려주시니
듣고
들으니
들려줍니다
듣는 만큼
들려주고
들려주는 만큼
듣습니다
들려주심
들음
들려줌
갈림 없이
하나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시며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고, 구운 물고기 하나를 받아 드시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긴 겨울의 시간 동안 마치 죽은 것만 같았던 식물들의 새싹이 다시 나오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시기도 부활시기에 맞게 그것들도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새삼 또 다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그분의 자비하심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통해 우리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없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도 없는 피조물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언제나 그분의 자비하심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그 자비하심을 잊고 살아가면서 그분의 뜻이 아닌 인간적인 욕심의 나날들을 이루어 왔었습니다. 그분의 자비를 저버릴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절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회개하며 하느님의 자비 안에 머무르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바로 파스카이며 부활입니다. 그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하지요. 우리나라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귀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돌아가셨는데 자기들 눈앞에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말하면서 예수님이 나타나니 유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더 이상한 것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정말 부활했는데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배고프지도 않으면서 먹을 것이 있는지 묻고 그들이 주니 받아 잡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더 이야기하자면 얼마나 배려심이 많은지 알 수 있지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화가 났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제자들을 위해 몸을 보여주시고 심지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자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물고기도 드셨던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부활하심을 믿지 않음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노크도 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가운데 나타났으니 놀랄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나타났으니,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제자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제자들의 믿지 않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확실히 부활하셨다는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은 신앙적인 것 보다 세상에서의 삶에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제자들을 영적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가르쳤던 것이지요. 그리고 신앙인으로 제일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오직 회개 뿐임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부족한 이들에게 화내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가르치십니다.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품어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죄 있다고 좌절하지 말고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이걸 회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불안하고 힘들고 괴로워하는 우리를 보고 계시며 또 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의 곁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며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주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선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 기쁜 하루를 시작합시다. 아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의 맛
남창현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신학교 시절 수업을 시작하면서 교수신부님이 대뜸 창밖의 하늘을 다 같이 보자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늘이 참 멋지죠?” 매일 보는 하늘 풍경에 대수롭지 않게 “네 멋있습니다” 하고 신학생들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교수신부님이 한마디 덧붙이십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저 하늘은 천지창조 이래 단 한 번도 반복된 적 없는 하늘이라는 걸 기억하세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십니다. 무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대단하신 분께서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처럼 음식으로 허기를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뒤집어 이야기한다면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도 부활한 삶을 체험할 수 있다는 초대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매일 반복하며 살아가는 일상들, 먹고 마시고, 자고 말하고, 웃고 슬퍼하는 모든 순간들 안에서 부활의 삶, 참된 삶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은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었던 하루라는 것, 내가 지금 숨쉬고 하느님을 의식하고 이웃들과 함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김준수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24,36)
언젠가 영원한 딴따라가 되고 싶은 박진영은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에게, “가수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고 노래를 들려주는 사람이다.”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설교자 역시 동일한 마음과 태도로 사람들에게 설교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체험한 사람의 말이 비록 어설플지 몰라도 체험한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고 진정성이 솟아 나오기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 듣게 되고 감명을 받습니다. 어쩌면 부활을 선포했던 사도들의 말씀도, 단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바를 들려주었기에 듣는 청중들이 감명받고, 사람들이 하느님께 회개하였다고 봅니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체험보다 더 좋은 설교는 없습니다.
자기 인식을 깨트린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24,35)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 있을 때입니다. 사실 동료들의 말을 전해 듣고도 다른 제자들은 쉽게 생각을 바꾸기가 어려웠고,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24,36) 하며, 부활한 당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신 것은,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24,37) 는 표현에 암시하고 있듯이,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부족한 믿음을 탓하기보다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24,38) 하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부활하신 당신을 체험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어쩌면 이런 일련의 과정은 보지 않고도 믿을 우리를 위한 체험학습이자 영적 교육의 기회로 삼으셨는지 모릅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이전의 예수님의 몸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정녕 같은 몸인가?’라는 의문이 일어나겠지요.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체험과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코15,42.44)라고 명백히 우리의 의문을 불식시켜 줍니다. 부활하신 몸은 분명 어제와 같지만, 어제와 전혀 다른 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으며” (24,40) 이를 보다 더 명백하게 하시려고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24,41) 하고 물으신 다음, 제자들이 건네준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24, 42.43) 이렇게 하신 다음,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 관한 성경 말씀을 들려주심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던” (24,45)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몸의 현현顯現과 성경의 확증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방점은 바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24,47.48) 하고 선포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결국 사도들이 선포할 내용이란 다름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이며, 이는 예수님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사람을 살리시는 분으로, 하느님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고 보살피며 충만하길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한 베드로는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이후 베드로 사도는 놀라운 변화와 함께 전인격적으로 성숙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체험은 베드로 사도의 존재와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선포 내용의 진정성의 보증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이 예수님을 3번이나 배신했다가 다시 용서받고, 자기중심적인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하느님의 어부로 다시 호출받고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예수님의 사명을 받들어 선포하는 베드로 사도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3,15) 그렇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존재와 활동은 바로 참된 증거이며 증언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 사도는 참된 부활의 선포자입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화답송 후렴/시8,2)
“어떻게 살 것인가?” -주님의 참사람이 되어-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주님의 참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섬기는 자세로, 배우는 자세로 깨어 겸손히 사는 것입니다. 눈만 열리면 주변 모두가 스승이요 배울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가르침과 깨우침이 되는 여러 예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이런 가르침에 유의하여 사는 이들이 주님의 참사람들이겠습니다.
1.역시 오늘 소개되는 옛 어른이 말씀입니다.
“사람과의 신의(信義)를 지키는 일은 먼 이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해야할 덕목이다.”-다산
“이익을 보면 의로운가를 생각하고(견리사의;見利思義), 위기를 보면 목숨을 바치며, 희미해진 약속이라도 잊지 않는다면, 완성된 인간이라 할 수 있다.”-논어
2.계속되는 파스카의 축제와 더불어 만개하기 시작한 봄꽃들에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순간 떠오른 가르침이 정직입니다. 일년 꼬박 기다렸다가 때되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자연은 참 정직하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옥에서 수인중 가장 무시받는, 사람 취급 못받는 죄인들이 사기꾼이라 합니다.
정직, 효도, 우애를 조카들에게 가훈(家訓)으로 남기고 떠난 셋째 형님 생각도 납니다. 가훈 그대로 참 정직하게 살아가는 세 형제 조카들입니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 “정직이 가장 오래간다”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역시 ‘신의’와 더불어 마음에 새겨야 할 ‘정직’이란 덕목입니다.
3.낮은 자리 곳곳에 피어나는 제비꽃을 보니 23년전 써놨던 “절망은 없다”란자작 고백시가 떠오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제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고 사랑스럽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하느님 사전에 없는 낱말이 절망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탄력좋은 삶, 희망의 삶이 바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4.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전임 베네딕도 교황님과 세상 떠나기전 10년간 얼마나 깊은 우정을 나눈 삶인지, 또 얼마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겸손하고 지혜로운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베네딕도 교황님을 존경하고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깨닫게 되는 최근 인터뷰 내용도 감동적입니다.
“그분은 나에게 아버지와 같았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옹호했고 결코 간섭하지 않았다, 베네딕도 그분은 참으로 젊잖은 분이였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제한된 그분의 움직임에서도 유익을 얻었다. 그분은 참 섬세한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은 약하지 않았고 강인했다. 그분은 참으로 겸허했고, 어떤 부담을 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분은 참 많이도 고통을 겪었다.”
두분 교황들에서 위대한 성인의 면모를 봅니다.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한결같은 상호존경과 신뢰, 겸손의 모습들이 우리 마음에 깊은 안정(安靜)과 평화를 줍니다.
5.한밤중 기상하여 휴게실에 가는 도중 게시판에 붙은 부고에 순간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독일 오틸리엔 베네딕도 연합회의 전설이 된 노트켈 아빠스의 부고 내용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께, 2024년 4월3일 로마에서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선종하신 사랑하는 노트커 볼프 아빠스님의 갑작스러운 선종 소식을 매우 슬프게 접했습니다. 노트커 아빠스는 1940년 6월 21일 그뢰넨바흐에서 태어나 1962년 9월17일 서품을 받았습니다. 1977년부터 2000년까지 성 오틸리엔 총아빠스, 2000년부터 2016년까지 세계 베네딕도회 수석아빠스를 역임했습니다. 기도중에 노트커 아빠스를 기억해 주세요. 아빠스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전무후무의 약력을 지닌 불가사의의 탁월한 지도자 아빠스였습니다. 저보다 9세 연상이니 우리나이로 85세입니다.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경구가 떠오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Mortem cotidie ante oculos suspectam habere)
누구에게나 언젠가 맞이할 공평한 죽음이요,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참 귀한 선물같은 오늘 하루, 본질적 깊이의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무엇보다 주님 평화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은 유령이 아니라 영과 육을 지닌 참된 분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평화와 더불어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용서를 위한 회개의 사도로 중책을 위임받은 제자들의 활약상이 바로 오늘 사도행전에서 펼쳐집니다. 앞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이은 솔로몬 주랑에서의 설교로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중 핵심 부분을 나눴습니다. 무지의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회개뿐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회개입니다. 온전히 자나깨나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린 회개의 삶이요, 회개와 더불어 선사되는 성령의 은총이, 믿음과 평화가 주님의 참사람이 되어, 주님의 증인이 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종교적 진리는 보고 듣는 것으로 부족하다.<루카24/35-48>4/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무리 언변이 좋아서 말을 잘한다고 믿고 따르지 못하고 아무리 힘과 능력과 사랑을 보여 준다고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신을 어떻게 믿게 되었나 하고 종교학을 배울 때 공포심과 두려움이 보고 듣는것을 넘어 존재하는 것을 의지하려는 심리적 움직이다. 그래서 탸영을 승배하고 걷한 나무밑에 신단지를 달고 기도하고 평화와 안정을 기원합니다.
우리 삶의 가장 두려움은 죽음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누구나 바라지만 마음대로 되지않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있어 들었지만 부활을 쉽게 믿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사람들의 소망이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듣는것만 따라 가려고 하지만 보지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계시와 지혜의 영은 보이지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믿음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양심이 내안에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지않고 양심이 있느냐 없느냐?하고 묻고 다그침니다.
양심은 선을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명령이며 따라 살아야 할 밥입니다.
아담이 하느님 명한 것을 어기고 나무로 몸을 가리고 숨은 것은 주어진 양심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거룩하고 아름답고 살기좋게 만드는 사람은 양심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는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영적 능력입니다. 지적 판단보다 양심의 판단이 인간적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으로 지헤와 계시는 판다하면 오류가 나오지만 사람 안에 내재한 영으로 판단하면 오류가 없이 하느님의 영과 통하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정하였지만 닭의 울음소리에 깨우처 눈물을 흘리며 뉘우침은 주님의 소리를 듣응 이유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주님따라 살려면 계시된 주님 소리 들어야 합니다.
저는 하루 차를 타고 대구로 나가는데 자라가없어 서서기고 앉은 사람 옆에 있는데 저에게 기대어 잠을 자는 사람보고 몸을 피하려다 이삶이 예수님이면 하다가 아니야 나를 힘들게 하느데 하다가 주님이주신 주님의 눈으로 보니 주님으로 보여 대구까지 자에게 기대여 자고 가게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때부터 제눈 귀 입 코 몸이 내곳이 어니라 주님의 것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숨쉬며 행동하는 삶을 살게되었습니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원이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곧 현실이며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학은 현실의 의미를 찾아 설명하고 철학은 신학의 의미를 역사와 현실을 파학하며 지혜롭게 설명하여 믿음을 분명하게 해주고 감추어지고 숨어있으며 잘알려지지 않은 것을 바로알게 합니다.
학문적 지식을 지혜로 바꾸고 원인과 결과를 분명이 알고 알려주면서 믿음의 합리성 바라는 것에 합리성을 알며 진실과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따라 주 참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함승수 신부님
사실을 보이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 있고, 그 안에서 진실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안에서 그렇게 하는 의도와 본뜻을 헤아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존경과 사랑을 받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실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온갖 추측과 추정을 통해 진실을 다 아는 척 하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면서도 자기 입장과 이익 때문에 그것을 일부러 왜곡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게 되지요. 그래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 더 나아가 그 안에서 진실을 알아보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멀쩡히 살아계신 상태로 나타나셨는데도 그분을 ‘유령’으로 본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돌무덤에 묻히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거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그분을 유령 취급합니다.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데 일조했던 그들이, 이제는 자기들의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다시 한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셈입니다.
주님을 알아보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에 대한 얄팍한 지식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 속만 채우게 되면 그 아는 것이 오히려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지식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게 믿음이 부족하냐며 비난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들이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있도록,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아직도 못자국이 선명한 당신의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유령이라면 손과 발이 제대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흐릿하게만 보일텐데, 상처 자국이 분명한 손과 발을 가지고 계시니 당신은 유령이 아님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 의혹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그분이 유령이 아니시라는건 알겠는데, 이번엔 정말 다시 살아나신게 맞는지, 부활하신게 맞는지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손수 발라 드십니다. 배가 고프신게 아닌데도, 굳이 드실 필요가 없는데도, 제자들의 마음 속에 남은 불신과 의혹을 떨쳐주시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비로소 마음 속 의혹을 완전히 떨쳐내고 주님께서 진실로 부활하셨음을 믿게 됩니다.
회개는 지난 날의 잘못을 성찰하고 뉘우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개를 통해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전환이 필요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런 전환을 체험했기에 행동이 변하게 됩니다.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한 제자에서, 희망과 열정 그리고 용기가 가득한 사도로 변화된 것이지요. 우리도 그래야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참으로 믿는다면, 마음과 생각을 그분께서 바라시는 쪽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는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됩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24, 3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사는 곳에
십자가가 있고
부활이 있습니다.
생생한 아침에
생생한 부활의
말씀을 듣습니다.
함부로
말 할 수 없는
생명입니다.
살아있다는
사실에서
부활은
믿음이 됩니다.
기쁨도 슬픔도
살아있기에
생생한
소식이 됩니다.
생명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박힌
못 자국을
다시 만나는
시간입니다.
돌아보면
너무나 소중한
생명의
시간이었습니다.
정체불명의
유령이
산 시간이
아닙니다.
부활은 살아있는
평범한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생명의 시간인지를
일깨워줍니다.
부활은 이와같이
생명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밥을 짖고
빨래를 하는
손과 발의
정성이 바로
부활입니다.
생명을
흔들어 깨우는
부활입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의 생명을
만납니다.
우리에게
맡기셨던
십자가의 생명이
실은 가장 아름다운
부활의 생명입니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한
순간입니다.
뜨겁게
사랑하고
감사해야 할
부활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손과
발 또한
살리고
살아있음에 대한
응답이길
기도드립니다.
오늘을 기쁘게
어루만지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사람은 두 쌍의 특수 안경을 갖고 있어서 늘 슬픔에 잠겨 있다. 하나는 자신의 허물이나 약점을 엄청나게 확대하는 돋보기 안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성공을 마치 망원경을 거꾸로 쥐고 볼 때처럼 무척이나 작아 보이게 만드는 안경이다.”
여러분도 이런 안경을 쓰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이런 안경을 쓰고서는 자기 삶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허물과 약점은 크게 보이고, 성공은 너무나 작아 보이니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된 안경을 써야 자기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어렸을 때, 제 위로 형, 누나들이 모두 안경을 썼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안경을 쓰고 있으면 공부 잘하는 것처럼 보였고, 유행을 따르는 멋쟁이로 생각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형제 중에 저만 안경을 쓰고 있지 않으니 소외감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형, 누나 몰래 안경을 훔쳐 썼습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 정도로 어지러웠습니다. 제 눈에 맞지 않는 안경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종종 책상 위에 있는 스탠드 등 밑으로 얼굴을 넣어 불빛을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불과 한 달 만에 양쪽 1.5의 시력이 0.5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뒤 기쁜 마음으로 안경을 맞춰서 쓸 수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제 눈의 소중함을 몰랐던 것입니다. 지금은 당시의 행동을 크게 후회합니다. 그때 조금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했다면 지금처럼 안경 쓰는 불편함을 겪지 않았을 텐데 싶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눈에 맞지 않는 안경을 쓰고 허물이나 약점을 크게 보고, 성공은 작게 보는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잘못을 많이 하고, 때로는 주님 뜻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도 사랑해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라고 말씀하시며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또 당신 손과 발에 있는 수난의 표지를 보여주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도 잡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도들이 놀라지 않도록 또 유령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살과 뼈를 가지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보고 믿도록 해주십니다.
그토록 사랑을 주었지만, 당신을 배신하고 당신의 뜻을 실천하기는커녕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들보다도 더 많은 죄를 짓고, 또 주님의 뜻을 배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를 사랑한다고 계속 기회를 주시는 주님입니다.
헌신이야말로 사랑의 연습이다. 헌신으로 사랑은 자란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주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의 부활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에 비해 열두 사도들의 부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더디기만 합니다. 엠마오 길의 두 제자에 이어 예수님은 다시 한번 사도단 앞에 발현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주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은 바 있지만, 아직도 스승님의 부활에 대한 큰 의구심과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후 그들의 불신과 의구심에 대해 벼락같이 화를 내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자네들 보자 보자 하니 참으로 한심하고 너무하네. 내가 공생활 기간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내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자네들은 하나같이 불신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가? 제발 정신들 좀 차리게!”
그러나 예수님께서든 절대 호통을 치시거나 윽박지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따뜻한 목소리로 제자들의 안부를 물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복음 24장 36절)
이어서 부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을 향해, 정 그렇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라며 못 자국이 아직도 선연한 당신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승님의 손과 발에 남은 뚜렷한 못 자국을 확인한 제자들은 크게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확고한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손수 발라 드셨습니다.
아직 식사 시간도 아니고,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아있는 불신과 의혹을 떨치도록 도와주기 위해 생선 한 토막을 맛있게 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강조하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진실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시처럼, 유령처럼 발현하신 것이 아니라, 온전히,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이 없다면 수난도, 죽음도 빛을 바랩니다. 주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의 부활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누가 성경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드디어 당신 사도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사도들은 많은 이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믿기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또 음식도 먹어 보이십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대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몸소 증명하시기 위해 사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 말씀엔 무엇이 쓰여있을까요? 하느님께 순종 하면 부활의 영광을 누린다는 말씀이 써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쓰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당신 스스로 이루셨습니다. 아버지께 순종 하시어 돌아가셨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비로소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경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하면 됩니다. 곧, 하느님께 순종 하면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고 영원히 살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스스로 증명해내면 그 사람의 말은 성경이 됩니다. 말에 권위가 입혀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말에 권위가 없는 이유는 그 말 속에 담긴 죽음과 부활을 몸소 증명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튜브에서 동기부여 강사 중에 가장 감명 깊게 들었던 연설이 있습니다. 바로 레스 브라운(Les Brown)입니다. 그는 사업가에다 백만장자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동기부여 강사로 이름이 높습니다. 그가 자기 생애를 바탕으로 한 강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레스 브라운은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5학년 때 지적 장애 판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4학년으로 유급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랬습니다. 그는 대학에 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자신의 삶을 바꿔줄 선생님을 만납니다. 그는 레스 브라운에게 칠판에 자신이 말하는 것을 쓰라고 합니다. 레스는 자신이 선생님의 학생도 아니고 자신은 정신 지체자이기 때문에 교육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그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말은 다시 하지 말게. 누군가의 의견이 자네의 현실이 될 필요는 없는 거라네.”
레스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말합니다.
“레스 브라운, 삶에서 가치 있는 어떤 것을 하고 싶으면 굶주려야 해!”
레스는 그 말 뜻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워싱턴 선생님, 저는 DJ가 되고 싶어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면 DJ가 되는 걸 매일 연습해라!”
지금은 가진 것이 없고 직업도 없지만, 기회가 왔을 때 능력이 없는 것보다 기회가 오기 전에 능력을 키우는 게 낫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자신을 패배자로 여겼고 교육 불가로 여겼던 레스 브라운의 삶은 이 순간부터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계발하면서 마이애미 해변의 WNB에 DJ로 지원하였습니다. 밀튼 버터볼이란 간부를 찾아갔지만 당연히 그를 거절하였습니다. 방송 일도 해본 적이 없고 대본을 써 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워싱턴의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대부분 사람은 부정적이어서 승낙하기 전에 일곱 번은 거절할 거야. 다시 돌아가게.”
그는 그다음 날도 찾아갔습니다. 정직 당하거나 해고 당한 직원이 있을까 봐 찾아왔다고 말하였습니다. 버터볼 씨는 브라운을 미친 사람 취급하였습니다. 물론 그다음 날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버터볼은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됐네. 저기 있는 커피나 가져오게!”
그렇게 취직이 되었고 조금씩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굶주리세요. 자기 내면의 위대함을 알기 시작하면, 여러분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이 축복 받고 있다고 여기고, 목표에 도달하는 걸 좋아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여러분 중 한 명이라도 ‘당신은 위대하고 그 위대함을 드러낼 책임이 있다’라는 말의 본질을 파악했다면, 당신은 부모님과 학교를 자랑스럽게 만들 수 있으며 수백만 명의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세상은 예전 같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새로운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죠. 멈추지 마세요. 멈추지 마세요!”
그의 강연은 마치 성경 말씀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말씀대로 굶주렸고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조리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그 말씀을 하셨고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에 능력과 권능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의 말이 어떻게 십자가와 부활의 내용이 담긴 성경을 깨닫게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이 우리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도 권위가 있으려면 말씀을 믿고 굶주리고 결국엔 배부른 부활의 삶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말도 성경 가르침이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넷플렉스에서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를 방영하였습니다. 내용이 다소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시간을 내서 보았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운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사람이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4가지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창시자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유교는 공자, 이슬람교는 마호메트, 기독교는 예수님입니다. 창시자는 인간이 가지는 고통의 문제를 깊이 성찰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창시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고 종교가 됩니다. 둘째는 경전입니다. 불교는 불경, 유교는 사서삼경, 이슬람교는 쿠란, 기독교는 성경입니다. 경전은 대부분 창시자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경전은 내비게이션과 같아서 삶의 길에 이정표가 됩니다. 셋째는 사회성입니다. 단군신화는 ‘홍익인간’을 이야기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합니다. 불교는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극락왕생을 이야기합니다. 유교는 인의예지를 이야기합니다. 충과 효를 이야기합니다. 이슬람교는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넷째는 죽음이후의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불교는 윤회를 이야기합니다. 해탈을 이야기합니다. 유교는 현재의 삶에 충실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슬람교는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는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사이비 종교는 기존 종교의 ‘틀’을 가져와서 나름의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을 풀어주고, 갈증을 채워주었습니다. 초대교회처럼 사람들은 가진 것을 가져와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예배와 행사는 화려했습니다. 이적을 체험하기도 하였고, 기쁨을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선민의식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율법과 계명에 충실했던 것처럼 교리에 충실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체험을 기꺼이 나누었고, 사람들은 모였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이비 종교에는 기존의 종교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자리에 교주가 있었습니다. 그런 교주에게는 겸손과 헌신이 없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 갈증을 성과 재물로 채우려 했습니다. 둘째는 자비와 사랑이 아닌 엄격한 규율과 폭력이 있었습니다. 이탈한 신자들에게 대한 폭력이 있었습니다. 교주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신자들에 대한 폭력이 있었습니다. 노동력의 착취도 있었습니다. 방송국에 난입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셋째는 익명성에 숨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략선교라는 말을 하면서 거짓을 일삼기도 합니다. 교주의 말이라면 사회의 공동선에 위배되는 일도 하는 맹목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하려고 한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려고 하면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라고 해도 사탄의 세력에 지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서품을 받은 사목자라고 해도 사탄의 세력에 지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을 합리화 하고, 뉘우침이 없다면 서원을 한 수도자라고 해도 사탄의 세력에 지는 것입니다. 타산지석이라고 했습니다. 이단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모습에 허물이 없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이적과 표징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는 다릅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는 평화입니다. 욕망을 채우면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비우면서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24,36)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인사입니다.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하면서도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제자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 인사를 들은 제자들이지만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그리고 무덤이 전부였던 어두움의 제자들은 공포에 휩쌓여 쳐박혀 있습니다. 어제는 스승님 차례, 오늘은 자기들 차례라며 경비병들의 발자국 소리가 거센 격랑에 질리듯 무서움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 인사말마져도 제자들에게 공포로 다가옵니다.그들 마음 안에 무서움과 두려움이 점점 더 커가고 공포가 됩니다. 예수님께 대한 희망의 믿음이 그들 안에 조금도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열 한 제자에게서, 엠마오로 걸어가던 두 제자에게서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제자들 마음 안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커져 갑니다. 어느새 제자들 마음에도 무서움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 예수님께서 하신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신 인사로 하여금 제자들이 무서움과 두려움 없는 자유인이 되어 갑니다. 평화는 제자들 안에 커져가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자유인이 되어 하느님과 함께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행한 전교여행 때가 생각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센 풍랑 위에 있었고 파도와 싸웠습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 뱃고물을 벼개삼고 잠이 드셨다. ’주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거센 풍랑에 꾸짓으셨다. ‘잠잠해져라’ ‘왜, 두려워 하느냐?’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루카8,25) 바다는 평안해졌고 제자들은 무사히 목적지에 닿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24,36-39)
제자들이 스승님 따라 먼 길을 걸으며 산전수전 다 겪었다. 그런 제자들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의 인사를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평화의 인사를 꼭 듣도록 믿음에 의탁하고 힘차게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가
나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진리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믿음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희망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사랑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섬김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나눔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돌봄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살림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의로움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십자가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증인의 길을 걷는
너희와 함께!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고 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하시고 말씀을 들려주시며 음식을 나누셨던 것처럼 주님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의 현장으로 직접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그렇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그분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느냐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첫째, 마음을 열고 그분의 영의 다가오심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곧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모든 신앙적 삶의 시동이 그분의 영에 의해서 걸리게 됩니다.
주님의 영을 받아들였을 때 그 때 비로소 주님의 영에 의해 귀가 열려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눈이 열려 그분의 사랑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부활시기, 부활하신 주님께서 또다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평화를 전해주시기 위해서 다가오시는 시기입니다. 마음을 열어 그분의 사랑의 영을 받아들이며 우리의 삶도 그분과 더불어 다시 일어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부활8-목)
쓰리고 삶을 살자...
옛날에 배고픈 시절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흉년이 되면 어미는 굶어죽고 자식은 배 터져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흉년이면 어머니는 밥을 드시지 아니하시고, 자녀들과 남편과 집안의 어른들을 드렸던 것입니다.
흉년의 보릿고개를 지나게 되는 생명줄은 어머니의 희생이었습니다.
밥을 푸는 주걱을 쥔 자는 자기 밥을 먼저 챙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절망하는 이유는? 주걱 잡은 자가 먼저 퍼 가는 밥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어, 하느님이 당신의 생명을 내 주었던 것은? 죄인인 나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마음은 “하늘이 죽고, 땅이 사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죽는 이유는? 땅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이 죽고 땅이 사는 이 세상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 사랑의 부활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리고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의심을 버리고, 부활하신 당신을 믿고 부활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제1독서에서..베드로와 요한이 나자렛 사람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라고 말하자...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였던 사람이 치유를 받게 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갑니다.
그래서 오늘 제 1독서에도 베드로가 치유 받은 불구자를 옆에 두고 말합니다.
16절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부활은 옛날에 일어났었던 추억이 아니라, 현재에 일어나는 생생한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셔야합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을 위하여...”
“우리 자녀들이 하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마음”은 “하늘이 죽고, 땅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주일이 부활절이고, 매일 매일 부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두레박신부는 고운님들에게 매일 부활의 생명을 보기 위하도록 이 성경 말씀을 드립니다...읽고 묵상해보시기를.
♡♡신약에 사도 베드로가 보낸 첫째 편지(베드로1서) 3장 1-17절 말씀♡♡
"....생명을 사랑하고 행복한 날을 보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혀를 다스려 악한 말을 못하게 하고 입술을 다물고..."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쓰리고(드리고, 나누고, 섬기고)...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이 땅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쓰리고 삶을 살면서...천국에서 누릴 영생을 잘 준비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아멘.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루카.24,35-36)
김종오 신부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에 대해서 공동체에서 서로 나누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여행길에서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어떤 마을에서 함께 머물면서 빵을 쪼갤 때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차리게 되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체험을 나누고 성찰하는 동안 제자들은 그냥 흘려보냈던 자신들 내면의 흐름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 느꼈던 그 뜨거움’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그 뜨거움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영적 선물이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당겨진 뜨거운 영적인 불을 제자들도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것은 빵을 쪼개셨던 주님의 눈으로 자신들이 걸어 왔던 길을 다시 성찰하였을 때 발견할 수 있었던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은 큰 감동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느끼는 감동은 세상이 주는 요란한 기쁨과 다릅니다. 그 감동은 조용하지만 우리의 전 존재를 흔듭니다. 우리 삶의 방향을 전적으로 바꾸어 줍니다. 감동을 받기 전에 우리가 가졌던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기기도 합니다.
한 번이라도 뜨겁게 느꼈던 우리의 감동을 새롭게 찾아낸다면, 세상의 거친 바람이 삶의 가지를 흔들지라도, 우리 존재의 나무는 결코 휘둘리지 않고 굳건하게 서서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게 됩니다.
엠마오를 향해 걷고 있거나, 해가 저물어 어떤 마을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묵으며 빵을 쪼개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심'을 전하는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을 선포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들로부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황되기도 하지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직자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 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보아라,” “만져 보아라.” 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서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눈을 열어 주셔야 그분을 알아볼 수가 있는 법입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저 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학생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증인, 순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김성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아리송해 시리즈 아시나요?
1. 갓 나온 송아지가 엄마소의 젖을 먹는다. 모유일까 우유일까? 아리송해!!!
2. 강도들은 멍청하다. "꼼짝 말고 손들라"니 어떻게 꼼짝을 안하고 손을 들지? 아리송해!!!
3. 세월이 약이다. 그렇다면 양력은 양약이고 음력은 한약일까? 아리송해!!!
4. 장남에게 시집 안 간다는 요즘 여자들은 결혼하면 차남부터 낳을 자신이 있다는 걸까? 아리송해!!!
5. '나 원 참'이 맞는 말일까, '원 참 나'가 맞는 말일까? 도대체 어떤 게 맞는 거야? '참 나 원' 아리송해!!!
6. 뽀뽀할 때 '쪽'소리는 남자 입에서 나는 소리일까, 여자 입에서 나는 소리일까?...... 아리송해!!!
7. 단풍 구경 가서 선글라스는 왜 쓰고 있는 걸까?......아리송해!!!
8. 닭장 속에는 닭이, 토끼장 속에는 토끼가, 그런데 모기장 속엔 왜 사람이 있는 걸까?......아리송해!!!
9. 깡패들이 길을 막고 꼽냐고 물을 때 꼽다고 해야 될까, 아니꼽다고 해야 될까?...... 아리송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어제 “마리아 막달레나 – 부활의 증인”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좀 무겁기는 하였지만 사도 중의 사도라고 2016년 교황청이 발표한대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서 깊게 묵상해 볼만한 영화였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표현해 낸 것. 특히 그분의 인간적인 면모와 성부께 일치하고 순종하는 모습이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그분이 선포한 복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부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분이 가르친 복음을 영화에서는 사랑과 자비를 어느 정도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삶의 모든 것. 그리고 내 존재 자체가 사랑과 자비로 변화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가르침이고 그러한 평화의 사도가 되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분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고, 그 하느님 나라는 밭에 뿌려진 겨자씨와 같이 자라나는 것이라고 마리아 막달레나의 입을 빌려서 다시 설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만났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다른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란 인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은 유령이 아니라고 자신을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였는데, 예수님은 음식까지 잡수시면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죽음을 이긴 예수님. 참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묻힌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제자들에게 옵니다. 실패와 비참함의 상징이 된 십자가가 믿음와 희망이 되는 순간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이익이 뒤집히는 사건입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될 기적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았던 메시아상을 다 깨게 되고, 자신들이 추구하던 목적과 아집을 다 던져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살아가는 방식이 그리스도와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분이 추구하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면. 우리는 다시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의 예수님이 아니라. 매달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의 이익 논리와 효용 추구 방식을 넘어서는 그분의 신비와 기적을 만나야만 우리는 변합니다.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은총에 기대어 조금의 아주 약간의 협조만 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처럼 우리는 그 일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백경진 라우렌시오 신부님
걷지 못하던 불구자를 베드로가 고쳐주자, 백성이 몰려왔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 이 사람이 튼튼하게 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모세는 일찌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야 한다.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나갈 것이다.'"( 사도행전 3,16.22)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 평화가 너희와 함께! "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무섭고 두려워 하자,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45~48)
「 우러러 당신께서 지으신 하늘과 달과 별들을 바라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시편 8,4.5).」
우리 구원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 던지신 주님의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을 묵상하는 하루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 47~48)
김웅태 신부님
+찬미예수님!
예수님의 부활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루카 24, 35~48)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길에서 겪었던 일과 또 빵을 떼실 때 그 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얘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 36) 하고 인사를 하셨고,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서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루카 34, 37)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고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커질 때 제자들은 힘차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지만, 초창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신 다음 그들에게 또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파스카 과정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된 것이라는 것을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의 기록된 것들을 가지고 설명해주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루카 24, 47)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바로 이 일을 분부하기 위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주는 일이 없이, 그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물론 의미 있는 일이긴 하지만, 예수 부활의 참 목적은 바로 제자들에게 이런 사명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되고이 사도들은 바로 이 일에 증인이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구원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선포 핵심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사도 3, 11~26)에서 베드로 사도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사도 3, 14~15)
그러자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그랬을 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시고 하느님께 돌아오셔야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동참했던 유대인들, 그들이 그런 일을 했다고해서 그들을 내치고,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동참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회개시켜서 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하느님 백성으로 만들어서 구원의 길로 가고자 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교회의 길이라고 보겠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위하여 사도들은이 일을 위해서 증인이 되어야 하고, 교회는 바로 그런 일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를 반대하던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 예수님은 나의 원수에게도 옳은 일을 가르쳐서 옳은 길을 가도록 당부 하십니다.
'그리고 부르고 느껴봅니다'(루카 24장 35~4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전보다 우리 삶의 자리에 더 가까이 와 계십니다.
갑자기 나타나 평화를 빌어주며 놀래게도 하시고 의혹을 품는이들에게 손과 발에 뚫린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라며 짖궂게도 하십니다.
고난을 예상했고 도망치지 않고 겪어내셨기에 승리자의 여유랄까?
더 멋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피하고 도망치면 불안과 조급함이 친구가 되지만 받아들이면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더 멋지게 살게 되겠지요.
오늘~ 저의 고백을 노래로 봉헌합니다.
우리 함께 그분을 그리고 부르고 느껴봅시다.
1절. 당신의 얼굴 그리나이다
너무나도 보고파서 어루만지듯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2절. 당신의 이름 부르나이다
이른아침 종달새가 노래를 하듯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3절. 당신의 숨결 느끼나이다
말할때나 걸을때나 무엇을 하든
제 영혼이 당신을 느끼나이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엠마오의 제자들의 증언을 제자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들의 마음은
오히려 두려움, 무서움, 의혹과 의심의 마음이었습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엽니다
예수님의 현존이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함께 식탁의 공동체를 이룸이 체험이 됩니다.
부활을 삶으로 살아간 제자들에게
예수님과의 만남과 머뭄은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삶의 핵심이었음을 새겨 봅니다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머물러 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Peace be with you
<바로 나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36-43).”
이 이야기는,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은 유령을 본 일도 아니고, 어떤 환시 체험도 아니고, 착각도 환각도 아니고, 분명히 살아 계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 일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를 사도들 자신들의 말로 바꿔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분은 유령이 아니라, 분명히 살과 뼈가 있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신, 살아 계신 분이었다.”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당시에 “혹시 사도들이 예수님의 유령을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의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유령을 본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다.”라고, 또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부활하셨다.” 라고 계속 증언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습 그대로 부활하신 일은, 우리의 부활도 그렇게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도신경을 바칠 때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라고 고백합니다.(부활할 때에는 영혼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과 영혼을 모두 갖춘 한 인간으로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체를 주십니다. 씨앗 하나하나에 고유한 몸체를 주시는 것입니다(1코린 15,35-38).”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코린 15,42-44).”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
<바오로 사도의 설명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부활하셨지만, 물질적인 몸이 아니라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는 수난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요한 20,27),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4-36).”
부활한 사람들은 천사들과 같아져서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말씀은, 몸 없이 영혼만 부활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몸을 가지고 있는 채로 부활해도 인간 세상에서의 감정, 욕망, 또 여러 가지 인간관계 등을 초월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부활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게 될 ‘하느님 나라’의 모습에 대한 믿음에도 연결됩니다.
그 나라는 영혼들만 사는 영적인 나라가 아니라, 영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나라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그 나라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묵시 22,1-2).”
여기서 ‘생명나무의 열매’는 그 나라 시민들의 식량입니다. 그 나라 사람들도 식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나뭇잎은 치료제로 쓰인다는 말은, 그 나라 시민들의 ‘몸에’ 병이 생기거나 ‘몸이’ 다쳤을 때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된다는 뜻입니다.
“약이 있다는 것은 그 나라에도 병이 있다는 뜻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묵시록이 말하는 것은, 병이 있어서 약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만병통치약이 있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아픈 사람이 없다.”입니다.(그 나라에는 아픈 사람도 없고, 약한 사람도 없고, 장애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도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해 주시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는 외모에 따른 차별도 차이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아름답고, 모두가 다 행복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일들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될까?
너무 행복해서 전부 다 잊어버릴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전부 다 잊어버리면 행복이 행복인 줄도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옥이나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기억’ 때문에 큰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들과 실수들이 전부 다 생생하게 기억나서, 너무나도 부끄럽고, 후회스럽고... 그래서 끊임없이 자책하고, 괴로워할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발현하신 예수님
곽승룡 비오 신부님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카 24, 37)
왜 사람들은 유령들을 두려워할까? 사도들도 예수님을 그렇게 보았다.
아는 자, 사랑하던 자인데 그들은 왜 무서워할까?
유령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대답은 어렵지 않다.
유령으로 불리는 존재들은 이세상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살던 누군가 죽어서 지금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는데...
우리 삶에 나타났다. 당연히 깜짝 놀랄 일이다.
유령에 대해 서양과 한국의 생각은 매우 다르다.
서양에서 유령은 죽음과 악을 옮기는 전염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유령인 귀신은 오히려 불쌍하고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존재들이다.
그러면 왜 한국의 귀신이 사람을 죽이는가?
그것은 귀신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 놀래서 죽는 것이다.
실은 귀신도 하루 속히 자기 자리로 가고 싶어 떠돌고 있는 속사정이 있다.
하여간 오늘 유령을 서양의 자리로 볼 때 사람들의 이미지 안에서 유령들은 숲들, 늪지, 마법의 성들 안에서 숨어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간인 죽음의 나라로 살아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악의를 모두에게 전염시킨다.
그런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바는 사도들이 부활하신 영광의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고 그것으로 양육된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차츰 차츰 제자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설명해주시고, 마치 그들에게 신뢰를 안겨주기 위해 어안이 벙벙하게도 영광된 부활한 몸이 배고픔을 표시도 하신다.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여기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시며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제자들 앞에서 잡수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확신을 주시는 드라마 주인공과 같다.
분명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도들이 죽음과 함께 중단된 모든 상태 곧 삶, 구체적 현실, 관계들이 즉시 회복되는 것이다. 본래 삶의 형태로 돌이켜 회복된다.
예수님은 이제 사도들에게 당신이 죽음의 나라를 물리친 그 능력을 넘기신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 48)
사도들은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신앙을 증거하고 그 것을 처음으로 선포하는데 중심에 서 있는 자들이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 32)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분의 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니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 49)
예수님께서는 그저 사도들에게 증인이 될 것을 주장하지 않으신다.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신다.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된다.
영은 어원적으로 ‘숨 쉬다. 호흡하다’와 친밀한 관계를 지닌다.
숨을 쉬는 자는 살아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이다.
사도가 되어 사랑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사랑을 움직이신다.
유령은 죽은 나라에로 살아있는 자를 끌어드리는데 하느님의 영은 반대로 누구도 우리를 단절시킬 수 없는 삶, 영생 안으로 인도하신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함승수 신부님
사람들은 너무나 기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맞는지를 실감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놀라운 나머지 ‘이게 꿈이냐 생시냐?’라고 물으면서,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걸 확인하기 위해 자기 볼을 세게 꼬집어 보고 아픔이 느껴지는지를 체크해 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컴컴한 방에 모여 귀신이 등장하는 무서운 이야기를 하다가 누가 갑자기 놀래키면 정말 귀신이 나타난줄 알고 깜짝 놀라는 아이들처럼, 동료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는걸 한창 듣고 있던 와중에 예수님께서 갑자기 나타나셔서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하시니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질만도 하지요.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놀란 것은 단지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셨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두 가지 ‘의혹’이 있었던 것입니다. 첫째 의혹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에 대한 의혹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분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홀연히 자기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마음 속에 두려움을 품습니다. ‘혹시 예수님이 당신을 버리고 도망친 우리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하기 위해 유령이 되어 나타나신게 아닐까?’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의혹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의혹입니다. 자기들은 예수님께서 큰 곤란을 당하실 때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분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그분께서 극심한 고통과 모욕을 당하실 때 박해와 죽음이 두려워 그분 곁에 있어드리지 못했는데, 그런 자신들이 예수님께 용서받을 수 있을까, 주님께서 자신들을 원망하시지는 않을까, 당신을 배신한 자신들을 단죄하고 벌 주시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감히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쭈뼛거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애초에 그들을 원망하거나 단죄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스승의 죽음이라는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제자들이 큰 혼란을 겪고 방황하지는 않을까 염려하셨지요. 그래서 제자들을 만나시자 마자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신 겁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자신의 부활에 대해, 주님의 큰 사랑과 자비에 대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에 대해 굳은 믿음을 지니게 되기를, 그리고 그 믿음의 힘으로 그 어떤 고통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평정심’의 상태에 도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자상한 배려와 큰 사랑 덕분에 부족했던 과거의 자신과 화해합니다. 두려움과 공포 앞에서 한 없이 작아졌던 자신의 비참함, 스승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배신했다는 죄책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동료들의 증언을 의심하고 무시했던 완고함을 주님께서 용서와 사랑으로 다 품어안아 주신 덕분에 그런 부정적인 부분들마저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된 겁니다. 그러자 마음 속에서 주님께 대한 감사함과 사랑이 우러나왔고 그렇게 주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잔뜩 주눅들어 주님께 ‘죄송하다’는 표현조차 제대로 못했던 그들이, 자신과 그리고 주님과 화해한 후 그분께 ‘수고(受苦)하셨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인사드리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수고’라는 말은 타인을 위한 고생과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수고’하셨으니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주님을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랬듯 다른 이들도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통해 그분과 화해하도록, 그렇게 주님과 같은 곳, 즉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함께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은총을 입은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입니다.
부활의 증인
송영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죽으셨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지만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못자국이 선명한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그들이 직접 만져보게 하시고, 그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십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며 당신의 부활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실 자신을 버려두고 도망간 제자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 수도 있는데, 그분은 과거를 다시 묻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물러선 만큼 더 다가가시고, 그들이 의심하는 만큼 더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변함 없는 사랑을 드러내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그 사랑 안에서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네, 그렇습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은 나를 위해서만 머물지 않고 다른 이에게도 드러나고 알려져야 합니다. 먼저 평화를 빌어주고 한 걸음 더 다가서려는 모습을 통해, 탓하지 않고 품어주는 모습을 통해, 서두르지 않고 기다려주는 모습을 통해, 그렇게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사랑을 통해 부활은 세상에 전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부활을 증언하시겠습니까?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신문방송에서 벌어지는 세상의 사건·사고를 바라보면서 화살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이들이 그 사고의 재발 방지를 위해 애쓰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근절되지도 안전을 확보하기도 어려운 사건 사고의 상황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 운영 및 관리 시스템의 현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이러한 불편함과 불안감이 없어지는 날은 언제일까?’ ‘실제로 없어지기는 할까?’ 하는 의구심마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
역사상 많은 사람이 성경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많은 유토피아 체제를 건설했습니다. 비록 완전치 않았지만, 그 노력들은 참으로 고귀했습니다. 그 노력의 첫걸음이자 성공률은 바로 나 외의 다른 누군가가 시작하고 이루는 나라가 아니라, 내가 이루는 나라여야 할 것임은 변함없는 사실이며 성공과 실패의 열쇠입니다. 성경 말씀을 찾고 따르는 우리 수난과 희생의 사흘이 우리의 부활을 앞당겨주기를 기대합니다.
두려움을 지닌 사람은 평화가 약입니다. <루카 24, 35-48> 4월 13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렇게 힘 있고 불가능이 없어 보이던 주님이 힘없이 돌아가시는 모습에서 용기를 잃었고 살아나심으로써 더 많은 박해를 받으리라 생각하면 절망과 숨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모이지 않고 흩어지고 자기 갈 길을 찾아가려고 마음먹고 있을 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 말씀은 힘을 얻으라는 말이지만, 그래도 성령 강림까지 그들은 숨어있었습니다.
며칠 전 주님이 부활하시고 8일 동안 다시 생각하며 기도와 미사를 지내고 있지만, 많은 신자는 부활의 기쁨을 잊고 일상생활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성령강림 축일까지는 부활의 의미를 새기며 살고 일상생활 속에서 죽음의 고통과 부활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야 바른 믿음의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두려움 속에 살고 낮이 밤이 되듯이 빛이 없어 어둠을 만나듯이 의지할 사람을 잃어서 외로움 속에 살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 분은 주님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엠마누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같이 함께 있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다는 의미 이상의 것입니다. 세상을 초월하여 어디나 내가 찾고 부르는 곳에서 응답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왜 부활하신 주님을 전례 시간 안에서만 찾고 다음 부활 축일을 기다립니까? 주님은 죽음과 부활의 삶을 계속하시며 현실 안에 현존하십니다.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죄로 신음하는 사람에게 자비로 용서하시고, 두려움에 싸여있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없이하시고, 죽음의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참삶을 살게 하십니다.
어느 날 모자를 깊이 쓰고 수도원을 찾아 “여기 저를 만나줄 수사님 안 계십니까?” 하기에 마침 제가 문간에 있어 고통 중에 있는 사람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죽어야 하겠습니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합니다. 긴급한 이야기는 “며칠 전 아들이 자살했는데 어미가 되어 잘못 가르쳐 생긴 일이라 죽음도 슬프지만, 아들이 지옥에 간 것이 분명한데 어미가 되어 잘못 가르쳤으니 살 수가 없어 저 멀리 서울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저는 이야기를 듣고 “당신 아들은 지금 하느님과 함께 있습니다.” 하니 “어떻게요?” 하기에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로 죽을 만큼 고통에 시달린 사람을 대하시고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없고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하니 마음의 평화를 얻고 지금껏 더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 태어나고 찬송찬미가를 부르며 순교 현장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 뒤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하는 절망, 고통, 죽음 중에서도 참 평화를 누리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 3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부활의
또 다른 이름은
진정한
평화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발로
일구어 내신
살아있는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폭력이라는
욕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십니다.
사람의 평화는
십자가로 부터
시작됩니다.
평화의 문고리는
십자가입니다.
막연한 믿음은
평화가 아닙니다.
부활의 삶을
가리키는
평화입니다.
평화는
십자가를 닮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부활의 삶을
요약합니다.
참된 사랑은
참된 평화가 되고
참된 평화는
참된 사랑이 됩니다.
막혀있던
우리 마음을
흐르게 하는
사랑의 참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은
또 다른 부활의
일상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행복한 식사는
누군가의
사랑과 정성의
선물임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 또한
평화를
일구어 내는
부활의 도구
부활의 사랑이길
기도드립니다.
부활은
십자가로
이루신
일상의
평화입니다.
8~90년대, 동네에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1,000원 또는 2,000원의 대여료를 내고서 테이프를 빌려 집에서 편하게 영화를 봤습니다. 그러나 2,000년 초반에 들어서면서,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하나둘씩 사라졌습니다. 대신 화질이 좋은 DVD로 넘어가고 있었지요.
친한 선배가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비디오 대여점을 열었습니다. 공무원 생활로는 돈 벌기 힘들다면서 90년대 말에 대여점을 연 것입니다. 초반에는 잘 되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결국 이 사업을 접게 되었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들처럼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변화를 추구해야 하지만, 남따라 하는 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넷플릭스를 알 것입니다. 미국 콘텐츠 플랫폼 및 제작사로 스트리밍 엔터테인먼트 기업입니다. 이 기업의 시작은 DVD 대여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업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계속 변화와 혁신을 시도했기에, 현재 전 세계 2억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기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남 따라 하는 변화보다, 자기 본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도 우리 고유의 변화를 원하시지, 남 따라 하는 변화를 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다르게 만드신 것이겠지요.
예수님 부활 소식이 계속 들려왔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증언, 이제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과 함께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무섭고 두려워 유령 보는 줄로 생각했다는 증언으로 볼 때, 제자들이 얼마나 불안정한 심리상태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배반한 전력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고 따르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십자가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졌고 지금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잘못했다는 부끄러움에,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겠지요.
이런 제자에게 당신의 오상을 보여주십니다. 육신상의 부활임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라고 물으시지요. 이 역시 육신의 부활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영혼은 세상의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부활의 표징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당신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믿음으로 세상에 구원을 위한 주님의 일을 계속하는 변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이 변화를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주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릇은 비어 있어야만 무엇을 담을 수 있다(노자).
주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인들, 그리고 엠마오 길의 제자들에 이어,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도단에 직접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 가운데 서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통상적인 관습에 따른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발현 등 일련의 사건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비는 인사는 가장 필요한 인사였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반가워하고 기뻐하기보다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끔찍한 기억으로 인해 보고 싶지 않은 당신 손과 발의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난 아직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는 그분께서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확증해주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영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육신과 더불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못 자국 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신 다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제자들 앞에서 잡수시는 광경을 통해 당신의 완전한 부활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한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이 어쩌면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간절한 인간적 동경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초세기 교회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를 착시 차원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식사를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더 강력히 부활의 실재성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께서 나서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복음 24장 4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건넨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손에 드시고 그 자리에서 맛있게 발라 드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특유한 존재 양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으로 된 육체를 그대로 간직한 채 발현하셨습니다. 목소리도 예전의 그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전과는 다른 존재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특별한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더 이상 육신의 욕구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드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진실로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을 보여 주시고자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당신께서 그들과 똑같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으로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는 네 단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증언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만져보라고 하시고 심지어 생선토막까지 먹어 보이시자 그들이 믿게 됩니다.
믿으면 일어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성경에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라고 하듯 기쁨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사실 완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경의 이해’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낼 수 있으신가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에 긴가민가하면서도 기뻐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4-45)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사실 모든 성경 내용이 그리스도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아담’은 누구의 모습일까요? 아담은 옆구리가 뚫려 하와를 창조하기 위해 갈비뼈를 봉헌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납니다. 당연히 당신 옆구리에서 물과 피로 교회를 창조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새 아담은 이제 새 하와인 교회를 당신 신부로 삼으십니다.
‘에사우’는 어떨까요? 야곱에게 당신의 의로움의 가죽옷을 입혀주고 자신은 죽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병사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맞으러 나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에사우가 메시아의 모습으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십계명 판’은 어떨까요? 우리 자아인 황금송아지를 없애기 위해 한 번은 깨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십계명 판은 우리가 지켜야 할 법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당신이 사랑의 모범이요 법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이어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어쨌건 우리에게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그 시각으로 구약을 보기 때문에 비로소 구약이 그리스도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믿는 프레임 안에서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으면 성경해석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다음 변화는 ‘소명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소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
우리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나요? 예수 부활을 믿으면 우리가 선포하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어떻게 하는지 모를 수 없습니다.
만약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는 우리로서는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을 그는 선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전능한 힘 중에 하나만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할 때, 책을 빨리 읽는 능력을 청하겠다고 했습니다.
혹은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사람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같은 옷, 같은 신발만 신고 다닙니다. 생각의 에너지를 옷 고르는 데 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내 생각을 사로잡는 세상 것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세상 집착을 끊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면 누구처럼 될까요? 그리스도처럼 됩니다. 그리스도는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는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목숨을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회개란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죽으려고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으로 죽으면 영원히 부활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아직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확신은 ‘그분으로부터 힘을 받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 것을 제자들에게 권고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 곧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마지막으로 부활을 믿는 사람은 하늘에서 오는 힘을 어디서 받는지 압니다. 만약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어머니가 주시는 밥을 먹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양식을 어디서 먹을 수 있을까요? 자녀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로서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 성령께서 오십니다.
유튜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 엄마의 밥’에서는 엄마들이 직접 호주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을 위해 몰래 집밥을 해 주는 내용의 동영상입니다. 자녀들은 엄마의 밥을 먹고 눈물을 흘리며 힘겨운 유학 생활의 힘을 얻습니다.
엄마는 자녀가 있는 곳에 갑니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 위에 세우신 하나인 교회는 가톨릭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에 머물 줄 알면 어쩌면 그것 자체로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성령께서 어디로 오시는지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JTBC Voyage, ‘엄마의 손맛 재현에 감동한 스타들 모음’이란 유튜브 동영상이 있습니다. 쯔이와 바다, 그리고 박철민 씨가 셰프들이 재현한 어머니의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내용입니다. 그냥 음식이지만 지금은 함께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음식만으로 큰 힘을 얻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해 힘을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 살아계십니다. 그러면 그분은 자녀들이 모인 곳에 당신 음식을 내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성사로 내려오시는 가톨릭교회에 머물 줄 아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살아갈 성령의 에너지를 얻을 줄 안다면 그 성령은 분명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시는 것이기에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산 사람만이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외출할 때면 꼭 지니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지갑, 손수건입니다. 스마트폰은 외부와의 연락을 위해서 가지고 다닙니다. 지갑은 계산을 할 때 열게 됩니다. 깨끗하게 빨아서 접어놓은 손수건은 제 몸에서 나오는 이물질을 받아주는 고마운 친구입니다. 일교차가 심한 날에 산보를 하면 콧물이 자주 나오기 때문에 손수건은 꼭 필요합니다. 손수건을 다 쓰고 빨래바구니에 넣으면서 한 번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운동하면서 구겨지고, 지저분해진 손수건을 보니 문득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땀과 눈물 그리고 콧물까지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주는 손수건이었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드렸습니다. 베로니카의 따뜻한 마음이 있어서 예수님 고난의 길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교회의 전승은 베로니카의 용기와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였고, 십자가의 길 6처에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 난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령은 육체가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면서 유령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아 죽겠지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증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놀라운 표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던 나약한 베드로였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당당하게 선포하는 용기 있는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회개’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성찰하는 것이지만, 진정한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행동이 변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에서 희망과 열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할 일 가운데 ‘상처를 치유하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교회는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심각하게 다친 사람에게 콜레스테롤이 높은가 혈당치가 어떤가 물어보는 일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가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나서 나머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깨끗하게 빨아 곱게 접혀진 손수건은 내 몸의 오물을 받아준 증인은 될 수 없습니다. 비록 구겨지고, 지저분할지라도 내 몸의 오물을 받아준 손수건이 자신의 역할을 다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옷에 진흙이 묻을지라도,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묻을지라도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정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활의 삶은 죽은 후에 얻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은 현실의 삶에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여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48)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속속 모여 자기들이 겪은 부활체험에 대해 나누기를 하기 시작했다. 길을 갈 때, 빵을 땔때 그분을 알아 뵈었다. '참으로 그분께서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사흘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제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비통했고 희망이 절벽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런데, 그날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분께서 인사하셨다. 바라보니 예수님이셨지만 사후의 이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두려움과 공포, 유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루카24,38) '손과 발을 보아라! 뭐 먹을 것이 없느냐! 구운 물고기 한토막을 받아 잡수셨다.' 이런 표현은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드러낸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대로 이루심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의 성화를 위해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구원의 기쁜소식의 선포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고 있음이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 47-48)
내 안에 '예수님의 부활체험'은 신앙의 동력이며 복음선포가 따른다. 첫째 기도가 따라야 한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기 보다는 유령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을 바라보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죽었던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시며, 친절하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며 유령이 아니라 부활하신 당신임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일상의 행복을 나누시면서 구운 물고기를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며 도와주시는 주님과 함께 우리도 역시 세상 속에서 참된 평화를 전하며 복음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의 내용에서 중요한 내용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살아가면서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시기에 오늘의 복음의 내용을 보면서 새롭게 마음을 고쳐 잡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선 복음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두 명의 제자들이 자신들이 격었던 일들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고 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부활에 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았음에도 무서워하였으며 심지어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며 그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은 유령이 아니라 말씀하시며 자신의 손과 발 그리고 살과 뼈가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럼에도 놀라워하는 이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찾으며 물고기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믿지 않고 심지어 유령이라고 생각한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그리고 동시에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보면서 또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한 나머지 그리고 안심시키기 위해서 배고프지도 않으면서 제자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찾습니다. 이 물고기를 잡수신 것도 오직 제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일까요. 예수님의 삶은 오직 자신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를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직접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법이십니다. 우리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하느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로 뜻으로 이 땅에 있는 것이며 먹을 것 입는 것 지내는 곳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능력 혹은 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우리들이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마음을 열어달라고 그래서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으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에 제자들의 마음을 여신 것임을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에 지금도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늘 자신의 권능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여신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여시어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심을 우리들은 믿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그저 그분만이 모든 것의 주관자이심을 믿으면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필요함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며 우리들 스스로도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매일의 삶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내 마음에 미움이 없는지 나의 생각과 혹은 가치관과 다르기에 함부로 판단하고 심판하지는 않았는지 말이지요.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 앞 여러 의혹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당신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제자들의 마음이 열리자 성경을 깨달을 수 있었고
구약의 예언이 성취 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들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와, 선포의 증인들이 되었음을 마음에 새깁니다.
삶의 여러 흔들림속에서 당신께 마음을 열 수 있는
지혜와 은총을 청합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You are witnesses of these things.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도 스승을 잃은 실의와 좌절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나누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 주신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서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9절) 하셨다. 제자들은 즉시 그분을 만져보았고, 잡아 보고 그분 숨결을 느끼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잡수시고 마시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말해 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b) 하였다. 부활은 상상조차 못 하고 실의와 의문에 차 있던, 부활하셨다는 소식도 믿지 않고 두려움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실제의 모습으로 다가오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안에서 죽음을 이기셨고 육체의 부패를 떨쳐 버렸음을 증명하셨다. 부활하신 몸은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몸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하신다. 그분은 문 닫힌 방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당신 안에 신성과 인성이 나뉘지 않고 결합하신 분임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수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44절)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6절) 말씀하셨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한 제자들의 사명을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47절) 하는 사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8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바로 사도로 선택된 이들이 하여야 하며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신비를 알고 체험하는 우리가 증인으로서 전해야 한다고 하신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같이 체험하고 전하여 왔는가? 매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그 체험을 이웃에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 부활 증인의 삶. - 회개, 평화, 기쁨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에 맞춰 봄철에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에 연초록 아름다운 초목들입니다. 일년중 가장 많은 꽃들이 연이어 피어나고 새들도 참 많습니다.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 가득한 평화로운 분위기의 요즘 봄날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입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참으로 부활시기 전례에 맞는 참으로 역동적인 생명과 빛으로 가득한 계절입니다. 유난히 샛노란 색깔의 봄꽃들이 많습니다. 여지없이 때되니 수도원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샛노란 애기똥풀꽃들, 예전 써놨던 검정 고무신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볼품없는
검정 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 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1998.5.7.
살아 계신 주님 부활을 체험할 때, 볼품없는 검정고무신같은 존재도 꽃신이, 하늘이 되어,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24년전부터 해마다 폈다지는 샛노란 애기똥풀꽃들은 그대로 인데, 그동안 세상 떠난 사랑하는 형제들이나 친지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선물로 주어진 귀한 인생, 하루하루 새롭게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파스카의 평화,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현재에서 영원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파스카 축제의 주님 부활 시기의 매일 미사 말씀이 참으로 역동적이고 신바람 가득합니다. 어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들 무리와 합류하여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화를 나누는 중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입니다. 유령이나 귀신이 아닌 생전 그대로의 부활하신 예수님의 출현이요 제자들의 마음 역시 놀라움과 더불어 기쁨 가득한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과 동시에 이뤄지는 저절로의 회개요, 더불어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예전 수차례 인용했던 일화가 생각납니다. 한 수도형제가 어느 수도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다 갖췄는데 하나 빠진 것이 있더라는 것이며 뭔가 물었을 때, “기쁨!”이란 답변이었습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모든 것 다 갖췄어도 ‘기쁨’이, ‘평화’가, ‘희망’이 빠졌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최고의 명약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평화와 기쁨, 희망입니다.
이어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신 다음 당신 부활의 증인들로,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서 신바람 가득한, 역동적인 평화의 사람, 기쁨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 되어, 선물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놀라운 기적들입니다.
“벽이 변하여 문이 됩니다!”
“폭풍이 변하여 미풍이 됩니다!”
“짐이 변하여 선물이 됩니다!”
바로 주님 부활의 증인인 우리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이의 전형적 모범이 제1독서 사도행전의 솔로몬 주랑에서 성령 충만하여 열화와 같은 설교를 하는 베드로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된 주님 부활의 증인, 베드로 사도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박진감 넘치게 와닿는 설교입니다. 예전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베드로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살렸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라 합니다. 새삼 믿음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불구자를 살린 최고의 명약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어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베드로입니다. 복음의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선포하는 베드로입니다. 설교의 중요 구절을 정리합니다.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도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어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참 은혜로운 말씀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설교의 핵심 주제는 회개입니다. 예나 이제나 무지의 인간은 변함없는 현실입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무지의 양상은 얼마나 다양한지요! 탐욕, 분노, 질투, 어리석음, 이념이나 종교에 중독된 광신등 끝이 없습니다. 극우, 극좌 모두 무지에 눈먼 광신적 모습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으로서 참된 회개가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정주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역할을 다하며 제대로 온전한 삶을 사는 이들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 마음의 순수, 겸손, 지혜, 자비입니다. 어제 써놓은 지혜의 눈이란 글을 나눕니다.
“눈 있어도, 눈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지혜의 눈’
거의가 제정신이 아닌 맹목의, 광신의 사람들이다
세상 공부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래서 악도 죄도 병도 많은 세상이다
그러니 끊임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공부가 말씀공부와 회개가 참으로 절실하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찾고 사랑하여라
주님은 ’지혜의 눈’이시다”
인간 존재의 고질적 현실인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회개를 통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하나뿐이요,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무지의 병을 치유하시어 당신 부활의 증인으로, 평화의 사람, 기쁨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부활이 온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십자가 안에
부활이 온다
십자가 품은
부활이 온다
십자가 기린
부활이 온다
십자가 이룬
부활이 온다
십자가 너머
부활이 온다
두려움을 압도하는 평화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님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통교하시는 데에 우리의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영적 체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이 체험은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영적 유산 중 하나인 『영신수련』의 토대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안심시켜주십니다. 대체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섭리 앞에서 두려움을 먼저 느낍니다. 그건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쳤던 제자들 중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은 요한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없었기에 두려움을 느껴 도망갔던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결국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후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은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하느님의 초대에 주저하도록 만듭니다. 그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기를 내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할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그 두려움을 압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상징인 세례
예루살렘 ‘교리서’에서 (Cat. 20, Mystagogica 2,4-6: PG 33,1079-1082)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덤으로 옮겨지셨듯이, 여러분은 거룩한 성세대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는 “당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여러분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신앙 고백을 하고 물 속에 세 번 잠기고 거기서 세 번 나왔습니다.
이 상징적인 행위로 여러분은 무덤 속에 3일간 계셨던 그리스도의 묻히심을 은밀히 재현한 것입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무덤 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맨 처음 물에서 나오는 것은 무덤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첫날을 나타내는 것이며, 물 속에 잠기는 것은 그분의 첫 밤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밤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낮에는 빛이 있기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여러분은 물에 잠길 때에 밤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나 물에서 나올 때는 낮과 같이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같은 순간에 죽었고 또 태어났습니다. 그 구원의 물은 여러분에게 무덤도 되고 어머니도 되었습니다.
다른 상황에서 솔로몬이 말한 것은 여러분에게 맞는 말입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도다.” 여러분에게는 그 반대입니다. 죽을 때가 있고 태어날 때가 있었습니다.
한 순간이 두 목적을 성취하며, 여러분의 출생은 여러분의 죽음과 동시적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이하고 놀라운 상황입니까? 우리는 실제로 죽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묻히지도 않았고 실제로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다시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다면 상징적으로 모방하였지만 구원은 실제로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참으로 묻히셨으며 참으로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총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것을 상징적으로 모방하여 구원을 실제로 얻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무한한 사랑입니까! 그리스도의 순결한 손과 발은 못으로 찔리어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나는 고통도 고뇌도 맛보지 않지만 그분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베푼 세례가 죄를 용서해 주는 세례인 것처럼 우리가 받은 이 세례도 죄의 용서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만 가져다 주는 세례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우리의 세례는 죄를 씻어 주고 성령의 은혜를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세례는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의 상징과 표지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우리 모두는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함승수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의 사랑이 참 성숙되고 크다는 점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자기만 살겠다고 스승님을 버리고 도망친 야속한 제자들을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동료 제자들의 증언을 믿으려 들지 않는, 마음이 완고한 그들을 혼내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평화’를 빌어주실 뿐입니다. 한 번 사랑하신 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영원한 사랑, 어떤 잘못이라도 몇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깊은 사랑, 죄 지은 이들을 냉정하게 내치지 않고 당신 품에 안아주시는 넓은 사랑,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사랑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섬세하고 사려깊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하여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그분은 당신 몸에 난 상처를 그들이 직접 보고 만져보며 유령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도록 손과 발을 내어 주십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이시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음식을 드신 그 행위는 비단 당신이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당신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과 함께 밥을 먹는 식사공동체, 즉 ‘한 식구’였듯이, 부활하신 지금도 제자들과 맺으신 그 친교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시려 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 사랑 덕분에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과 거기서부터 오는 깊은 믿음이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눈에 보이는 놀라운 기적으로부터 오는게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여시어 성경 말씀에 담긴 뜻을 깨닫게 만드신 겁니다.
주님 말씀에 담긴 뜻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논리도 증거도 아닌 ‘열린 마음’입니다. 성경을 들여다보면 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기쁜 나머지 믿지 못하고, 두려워서 믿지 못하고, 출신 때문에 믿지 못하고, 율법에 어긋난다고 믿지 못합니다. 믿음은 단순하고 명확한 ‘결단’이라 믿기 위한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붙일 필요가 없는데, 믿을 마음이 없기에, 마음이 주님을 향해 열려있지 못하기에 믿지 못할 이유들을 자꾸만 찾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신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시고, 만지게 하시고, 먹고 마시며 함께 살아가십니다. 그러니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어 내 곁에 계신 주님을 찾읍시다.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고, 성화나 조각상 안에 갇혀 계시지도 않습니다. 우리 곁에서 웃고 우는 이들, 나를 비난하거나 격려하는 이들, 나를 여러가지로 자극하여 성장시키는 모든 이들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을 만나 사랑의 친교를 이루는 것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유이자 의미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비자 교리 시켜서 간신히 세례주었다고 생각하면 이제 내 할 바 다했다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다음 예비신자 모집일이 다가오니, 그것도 한 번도 아닌 매번 예비신자를 모셔와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아침 먹고 또 점심을 먹어야 하듯이, 선교가 행사나 이벤트나 단기 성사 프로그램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된다면, 인원을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보다는 선교의 기쁨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돌아오셨다고 하니, 이해는 잘 안가지만 그래도 기뻤습니다. 그리고 내심 이렇게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오셨으니, 내가 더 이상 먹고사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이제 한 자리 할 수 있겠구나!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치 제자들의 이러한 느슨한 마음을 알기라도 하시듯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제 너희는 전 세계로 나아가 선교를 해야한다.’라고 이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
우리가 자신의 삶이 따로 있고 성당에 오는 것이 취미생활이나 사회활동처럼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또 성당에 와서 기도하면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더 하나 얻어 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의 선교 사명이 참으로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제자들에게 주님 부활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못에 찔린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일깨워 주시고, 증명해 주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심을 바라봅니다. 우리에게 선교사명을 심어주시며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은총과 사랑으로 채워 주시는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선교사명을 이루어 나갑시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참 평화입니다. <루카 24, 35-48> 4월 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입니다. 전쟁은 죽음, 파멸, 폐허 등 생명뿐 아니라 공들여 만들어놓은 것을 없애고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마음의 평화는 불목에서 일치로, 죄에서 용서로, 불안에서 안정으로, 거짓에서 진실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환경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무서움과 두려움 속에 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은 주님을 죽인 사람들이 빈 무덤을 놓고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훔쳐 갔다는 소문을 내어 무서움과 두려움에 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주님의 부활을 즐기지 못하고 나타난 주님을 유령으로 생각하고 헛것을 본 것처럼 현실 감각을 잃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의심하고 놀라워하고 있을 때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인사말 하시며 십자가 죽음의 흔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미사 시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말을 듣고 하지만 각자 마음에 평화가 일어나지 않고 덤덤하면 믿음이 없는 참 평화를 찾지도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어디서나, 어느 때나 만나고 함께해야 하지만, 미사 때는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같이 나타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미사에 참례한다면 보물을 찾고 버리는 어리석은 믿음입니다.
저는 청년 때부터 매일 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례하면서 지금 같은 믿음을 갖지 못했지만, 주님과 함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참으로 주님의 현존을 믿고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비와 일치와 생명의 성사인 미사 드리다가 죽는 것이 바람입니다. 선배 신부님 아침 미사 드리고 오후에 임종하신 열정을 본받고 싶습니다.
며칠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 순례하는 분이 카카톡에 성체 성혈 기적이 일어난 성당에서 미사 참례했다고 해서 ‘이탈리아 말고 그런 기적이 일어난 성당이 또 있었구나.’ 생각하다가 ‘아니다. 지금 여기 오늘 미사에도 같은 기적이 분명히 일어나지. 방금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 평화의 인사를 받고 전하고자 여기 파견되어있는데’ 하며 부러움보다 더 확실한 믿음으로 저를 초대합니다. 저는 참 주님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미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우리 수도원은 부활 후 주일부터 다음 주일까지 장엄 미사를 봉헌합니다. 주례 사제가 바뀌며 정성껏 미사를 봉헌하는 주례 사제를 따라 믿음과 열정이 일어납니다. 오늘 박 안셀모 원장 신부님 축일이라 원장님이 미사를 드리는데 예수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미사를 드리듯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이같이 드리는 사제가 일치되어 주님의 참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보통 본당에서는 부활 주일 지내고 나면 성당이 큰일을 치른 뒤처럼 한적하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미사에서 만나서 받은 주님의 평화가 우리 삶 안에 오래 머물고 변함없이 각자의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도록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는 참 평화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은총입니다. 이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참 평화의 삶이 됩니다. 모든 두려움 분열을 어둠 속에서 평화, 일치, 사랑을 느끼며 살도록 기도합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루카 24, 3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찬란하고
눈부신
새 날의
시작이다.
눈부실수록
더 잘보이는
십자가이다.
당신의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상처를 나누는
살아있는
부활의 기쁨이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
상처를 품은
십자가를
지나야
부활이 있다.
상처가
상처를
치유하듯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십자가의
손과 발이
우리 마음을
울린다.
상처가 깊을수록
사랑도 깊다.
살아있는
사랑과 평화의
길에는
살아있는
상처와 함께
길이 된다.
십자가가
사라지면
부활도
사라진다.
십자가의 상처가
새 세상을
만들었다.
부활하신
십자가의
상처에서
삶을 배운다.
보다듬고
어루만지는
참사랑이다.
십자가가
사랑을 이루는
살과 뼈이다.
갇혀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시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다.
십자가의 상처가
부활의 징표이다.
십자가 없이
만들지 못하는
용서와 사랑의
복음이다.
상처가
상처를
품어주는
예수님의
부활이다.
살과 뼈를
이어주는
십자가의
핏줄이
선명하다.
상처가 열리면
부활이 된다.
우리는
이 기쁨의
증인이며
목격자들이다.
손과 발의
상처에서
되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
그 부활을
진실로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늘 사랑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말 다 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는 어느 자매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분명히 상대방이 자신에게 잘못했는데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니 자기가 먼저 상대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진짜로 사과해야 하는지에 대해 주님께 계속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었답니다.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성숙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이 늘 사과를 먼저 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볼 수가 없어서 세상의 기준에 맞춘 잘잘못만 따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사과를 먼저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는 사과는 누가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주님의 사랑을 따르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주님의 사랑에 거리를 두는 사람인가요?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봤을 때, 제자들이 보여줬던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화를 내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자신들도 십자가 죽임을 당할까 봐 도망치고 숨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잘못한 것을 책망하기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시면서, 사랑의 하느님을 다시금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계속 의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자, 자신의 손과 발을 보고 만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것으로도 믿지 못하자, 구운 물고기를 그들 앞에서 잡수시기도 합니다.
굳이 당신이 증명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고 의심하기만 하는 제자들에게 큰 벌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너무나 큰 사랑이고 성숙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기준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닌, 오히려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어떤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고, 어떤 잘잘못에서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이고, 죄에 대해 내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품으로 안아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증인이 우리의 삶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으로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헌신이야말로 사랑의 연습이다. 헌신으로 사랑은 자란다(루이스 스티븐슨).
하느님께 맡기면 돼!!
오랫동안 자녀가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을 했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부부는 오랜 시간을 힘들어했지만, 결혼 10년 만에 드디어 아들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귀하게 얻은 아들이었기에 정말로 잘 키우겠다고 부부는 함께 두 손을 꼭 잡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사춘기를 지내면서부터 부모 속을 계속 썩이는 것입니다. 혼내기도 하고 두 손을 빌며 사정하기도 했지만, 아들은 부모 곁을 떠나려고만 했습니다. 결국 군대에 다녀온 뒤, 혼자서 멀리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이 부부는 모든 사랑을 쏟아 부었다고 생각했는데, 부모 싫다고 떠난 아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서운한 마음을 친한 성당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냥 둬. 하느님께 맡기면 돼.”
그리고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해줍니다.
“자식을 내 마음대로 하면 내 수준으로 키울 수밖에 없어. 그러나 하느님께 하시면 하느님 수준이 되는 거야. 그러니 하느님께 맡겨!”
성인이 되었으면 이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내 수준이 아닌 하느님 수준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나도 낮은 수준인 내 수준에 맞춰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은 공상이 아니었습니다. 발현하신 분은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후 제자 공동체에 발현하신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취하셨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장난끼가 발동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야 이 겁쟁이들아!”로 시작해서, 그 자리에서 참교육을 실시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들 인생 그렇게 살지들 말어라. 결정적인 순간에 다들 36계 줄행랑을 놓고 말이야! 도망가고 숨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그게 인간으로 할짓이냐?”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아래 서 있었던 애제자 요한에 대한 공개적인 칭찬도 이어졌을 것입니다. “다들 요한 좀 본받아라! 특히 베드로 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 수치심에 괴로워하는 제자들을 몰아부치지 않았습니다. 질책하거나 공개적인 챙피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산란한 제자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시는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복음 24장 36절)
자신들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우스꽝스럽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유령이나 정령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필사본에 따르면 부활 예수님을 공상의 선물, 악마의 환영으로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은 공상이 아니었습니다. 내적인 환시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목격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발현하신 분은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틀림없이 나다.” 그분의 손과 발이 그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분의 손과 발에는 못자국이 선명하게 나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짜 육체의 모습을 지니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과 공포는 즉시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이 어쩌면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간절한 인간적 동경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더 강력히 부활의 실재성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께서 나서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복음 24장 4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건넨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손에 드시고 그 자리에서 맛있게 발라드셨습니다.
초세기 교회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를 순전한 환영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식사를 강조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특유한 존재 양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볼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으로 된 육체를 지니고 발현하셨습니다. 물론 그분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살과 뼈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육체적 실재에 관한 모든 의구심들을 없애버리기 위해 더 이상 음식이 필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신 것입니다.
성경은 목적이 아닌 믿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경을 통해 당신 부활을 믿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여인들의 증언이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유령을 보는 것처럼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믿게 하시기 위해 당신 손발을 만져보게 하신 다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십니다. 유령이 아닌 육체의 부활을 증명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여인들이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참 육체가 아닌 유령을 보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경의 주요 내용은 이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만드는 가장 좋은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찾아내어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준다면 사람들은 그 신비로운 섭리에 놀라고 믿게 됩니다. 교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성경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연결하여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저도 그리스도께서 새 아담이라는 사실을 배우고 깜짝 놀랐던 적이 기억납니다. 교회는 바오로 전통에 따라 하느님께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낸 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만들어졌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피와 물은 좁은 의미로는 세례와 견진, 그리고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이 세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당연히 죽으셔야 하고 부활하셔야 함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학자들처럼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 말씀 안에서 무언가 찾아내려 했다면 이런 믿음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성경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가르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 말하면 어떤 성서학자들은 분노합니다. 성경은 선입관 없이 문자에서부터 연구하여 어떤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께서 새 아담이라는 사실을 연구해서 알아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미 아시는 교수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 믿게 된 이유는 그 성경을 설명해 주신 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을 연구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 다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마치 악기와 같아서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를 냅니다. 악기 가격에 매료되지 말고 악기 자체에 몰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 본래의 악기 연주법이 아닌데도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믿어버리게 됩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2020)의 주인공, 조 가드너는 재즈 음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중학생 아이들을 가르치는 음악 선생님입니다. 어느 날 운 좋게 자신이 연주하고 싶어 하던 유명 연주자인 도로시 밴드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너무 기쁜 나머지 길을 걷다 맨홀에 빠져 죽고 맙니다.
죽어서도 그는 평생소원이었던 연주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다시 살아나서 그날 저녁에 있는 연주회를 멋지게 장식합니다.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도로시는 조를 자신의 밴드의 정식 단원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뭔가 텅 빈 느낌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무언가 더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똑같이 연주해야 하는 삶이 이어집니다. 연주가 잘 되는 경우는 100번 가운데 1번. 목적지만 바라보고 달려오느라 놓친 행복들이 너무 컸습니다. 그는 바다에 살고 있으면서도 평생 바다를 보고 싶다던 물고기와 같았습니다.
성경이 이 재즈 연주와 같습니다. 성경을 다 암기하고 훌륭한 성경 학자가 된다고 해도 결국엔 자신이 속한 팀의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재즈 연주를 바라면서도 자신의 우상과도 같았던 도로시의 일상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녀의 밴드에 들어가면 그녀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성경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그들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으로 들어갑니다. 성경은 오직 그것을 쓰신 분만 그 의미를 알고 최고의 해석자가 됩니다.
“오늘은 여러분 마음속에 떠오르는 걸 그려보세요.”
반 아이들은 가족, 동물, 자연 등 각자가 원하는 것을 도화지에 그렸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아이는 도화지를 온통 검게 칠했습니다. 선생님들도 부모들도 아이가 무엇을 그리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수십 장의 도화지를 그저 빈틈없이 검게 칠했던 것입니다. 아이는 의사들에게도 무엇을 그리는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릴 뿐이었습니다. 아이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계속 도화지에 검게 칠했습니다. 이제 수백 장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아이의 책상에서 커다란 고래의 그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그린 그림을 다 맞춰보니 커다란 고래의 모양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그저 고래를 고래의 크기에 맞춰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내가 높은 위치에서 그것이 고래의 그림임을 알고 내려다보지 않으면 성경 말씀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화지 한 장 한 장 연구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의 탄생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미리 알고 설명하지 못하면 성경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은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경을 권위 있게 가르치실 수 있으십니다.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할 때 예수님께서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한 교회만이 그래서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요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해석이 곧 교리입니다. 누구든 성경을 통해 그 가르치는 이가 가진 교리로 수렴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을 만나게 만드는 다리입니다. 도구를 보지 말고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이가 누구인지 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교회가 가르치는 성경을 배워야만 구원의 교회 일원이 됩니다. 성경보다 항상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교리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정호승 시인은 ‘새들은 바람이 강한 날에만 집을 짓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높은 나무 가지 위에 위태롭게 보이는 둥지는 바람이 불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새들은 바람이 강한 날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배우지 않았어도, 새들은 바람이 없는 날에 편하게 집을 지으면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에는 둥지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고치에 있는 나비가 쉽게 나올 수 있도록 밖에서 고치를 열어주면 나비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합니다. 스스로 고치를 열고 나와야만 날개에 힘이 생겨서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타면 엉덩이가 아프기 마련입니다. 다리의 근육도, 팔의 근육도 아프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려면 그 과정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 해 줄 수도 없습니다. 처음 자전거를 탈 때는 엉덩이가 아팠는데 어느덧 아픈 줄 모르고 타게 되었습니다. 다리와 팔이 아파서 경치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예쁜 꽃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새들이 바람이 강한 날에 집을 짓듯이, 삶은 폭풍우 속에서도 항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잔잔한 파도는 결코 강한 항해사를 만들 수 없습니다.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들도 모두 지난겨울 눈보라를 맞으면서 봄을 맞이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고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삼보일배, 오체투지, 108배’와 같은 고행이 있습니다. 이는 깨달음을 얻어 구원받으려는 염원입니다. 묵주기도에 ‘고통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가신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지는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고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수고(受苦)하셨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인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이 세상의 것들에 머물러 있다면 주님의 부활을 애써 외면하고 감추려했던 율법학자와 대사제의 삶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다면 진리를 외면한 빌라도와 같은 삶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베드로 사도처럼 변화된 삶이 아니라면 타인을 위한 수고의 삶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기쁨의 삶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찾으려는 열망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제자처럼 가슴 벅찬 감동의 삶이 아니라면 주님과 함께 머물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 부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부활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이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일의 증인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주님의 전사, 회개의 전사 - 무지의 탐욕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가 강론쓰기에 앞서 말씀 묵상중 우선 생각하는 것은 강론 제목입니다. 제목은 강론의 ‘눈眼’같고 ‘창문窓門’과 같습니다. 몸에 눈이 없다고, 방에 창문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참 답답할 것입니다. 몸의 눈같고 방의 창문같은 강론 제목을 통해 내용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주님의 전사, 회개의 전사’에 부제는 ‘무지의 탐욕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입니다. 수도사제생활 32년 동안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참 많이 애용했던 제목이 ‘주님의 전사’입니다. 아마 죽는 그날까지 제 애용하는 제목이 될 것입니다.
수도생활은 예로부터 영적전쟁이라 칭하며 수도자는 주님의 전사라 칭합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영적전쟁의 현실이요, 늘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파스카의 삶, 주님의 전사의 삶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구체적으로 회개의 전사입니다. 평생 회개의 여정중인 회개의 전사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뜨거웠던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여당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이 또한 여당이나 국민들에게는 강렬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여당 패배자 박후보자 회개의 성찰도 마음 짠하게 했습니다.
-박 후보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아픔을 담은 박용주 시인이 15살에 쓴 ‘목련이 진들’의 한 구절,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를 읊으며 선거 패배애 대한 회한을 드러내며 담담히 고백합니다. “이른 새벽 하얀 목련이 피는 것을 보며 집을 나섰다. 목련의 단아하고 눈부신 흰빛에 맺힌 간절함이 봄을 말하고 있었다. 새로 피어나는 연초록 잎을 보며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
요즘 초목들의 연초록빛이 참 신비롭고 아름답고 눈부십니다. 새로 피어나는 연초록 잎이 상징하는 바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 회개의 삶입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바치는 성무일도의 시편이 우리에게 위로와 구원이듯이 큰 아픔을 겪는 분들에게 적절한 좋은 시 역시 위로이자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강론중에 환대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습니다. 환대의 사랑 역시 강렬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요즘 피정중 정성 가득한 식탁을 대할 때 환대의 사랑을 실감합니다. 이 또한 참으로 내 환대를 돌아보게 하는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주님의 환대의 사랑을 환히 드러내는 이 거룩한 미사 역시 우리에겐 참 좋은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우리를 환대하는 주님과 주님을 환대하는 우리의 사랑이 만나 회개의 완성입니다. 미사 시작 인사에 이어 참으로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 참회 고백 기도는 평범한 듯 하지만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늘 할 때 마다 새로운 감동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회개는 신자생활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을 눈멀게 하는, 마음의 고질병인 무지와 탐욕에 대한 처방도 끊임없고 한결같은 회개뿐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자기를 알아갈 때 비로소 무지로 부터의 해방에 겸손과 지혜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의 공생애 첫 일성이 회개의 촉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를 선물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님의 증인, 회개의 증인이 될 것을 당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요, 새삼 죄의 용서에 전제되는 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향한 부단한 방향의 재정립이, 삶의 방식의 철저한 전환이 회개입니다. 주님을 향해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 바로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회개의 삶입니다.
오늘 솔로몬 주랑에서 설교하는 베드로 사도야 말로 참으로 모범적인 주님의 전사요 주님의 증인이자, 회개의 전사요 회개의 증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베드로의 설교가 참으로 힘이 있습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무지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의 축복의 응답입니다. 평생 회개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 빛의 자녀, 참 나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 회개의 전사가 되어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파스카의 삶을 요약한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게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반전(反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이 한 상태로부터 그 반대 상태로 급격히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부활의 의미는 그러한 ‘반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하느님 안에서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고 여겼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지극하신 사랑으로 부활이라는 ‘반전’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안에 이루어지는 선한 ‘반전’입니다.
2021년 부활시기, 우리의 주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우리 곁에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하느님 안에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선한 반전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고차원세계 조금씩 접근 훈련받는 큰 인물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자기들도 잡혀가 죽을 까봐 무서워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던 거였지요.
그런데 문이 닫힌 채로 통과해 들어와 나타나신 예수님 보고 놀랐겠죠.
의심 버리고 내 손 발 못 자국 보고 확인 강조하시며 믿으라는 예수님.
그제야 놀라기 시작 기뻐하며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을 상상해 봅시다.
자기를 귀신인줄 아는 제자들을 야단 안 치시고 이해시키시려했습니다.
용서하시며 이해심 갖고 편하게 해 주시는 예수님차원 고차원이었지요.
당시 제자들이나 지금 우리 삼차원만 알고 고차원 앞에는 바보들이죠.
우리는 신앙이라는 고차원세계 조금씩 접근 훈련받는 큰 인물들입니다.
부활 이야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고 부활절을 산다. 예수님 부활하셨다고 모두들 기뻐한다. 정말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기뻐하는 걸까? 많은 이들이 부활을 기뻐한다는 의미조차 모른채 입으로 ‘예수님 참으로 부활했네’ 하며 알렐루야를 외치고 한 잔 나누고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봐야 그분의 진가를 알게 되는 것 같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한 사람의 죽음 뒤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그 죽어간 사람에 대한 부활 이야기가 된다. 있을 때는 있는가 보다, 그곳에 가면 있을 것이다 무덤덤 생각했는데 그가 죽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라도 내가 평소에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시공을 초월해 떠난 사람과 사랑으로 함께 한다. 그리고 죽음 후에도 부활 이야기를 계속한다.
요즘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 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을 자주 듣고 지낸다.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도 이 말씀을 깨닫기는 여전히 힘들어 한다. 부활 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엠마오로 낙향하던 두 제자. 열 한 제자, 이 모두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특별히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 그런대 무덤에 시신이 없었다. 이럴 수가? ‘누군가 예수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다 모셨는지 알려 주세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애타게 찾아 만나 보려고 무덤을 찾았다. ‘마리아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르신다. 생명은 시공 안에 있지만 진짜 생명은 시공을 초월해 있음을 깨달아 알게 한다.
우리의 문화는 죽음은 될 수 있는한 멀리 있어야 한다. 죽으면 하루 빨리 그의 유품을 정리하며 뇌리에서 잊어버려야 한다. 무슨 원수자간도 아닌데 실제로 죽음을 지워버리려 한다. 그러나 유럽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는 죽음을 대하는 문화가 전혀 다르다.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은 마을 한 가운데 친근하게 있다. 매일 아침 무덤에 들러 조화가 아닌 생화를 꽂아 드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시공을 초월해 그와 우리와 함께 만난다. 전자와 후자가 누가 더 기쁘고 행복할까? 북망산에 시신을 모셔두고 잊어버린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라면 오래 함께 살았어도 죽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늘 당신을 사랑했노라고 또 이렇게 당신을 찾아 왔노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 사랑을 살았던 사람 일 것이다. 이로써 부활 이야기는 계속 이어갈 것이다.믿는 사람들은 부활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간다.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라도 똑 같이 현실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이어간다.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죽음을 두고 말한다. ‘나에게 죽음을 이제는 잊으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나에게 위로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더 이상 믿음의 사람도 아닙니다. 말한다면 떠난 후에도 살아 있을 때와 꼭 같이 사랑하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울고 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나는 네가 사랑했던 ‘나다’. 시공을 초월해 너와 함께 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평안하냐?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슬퍼하는 마리아에게 묻고 있다.
사순절, 그리고 성삼일의 예수님 수난과 죽음, 그 하느님의 사랑을 죽음 속에 기억해 내며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부활은 큰 기쁨으로 피어날 것이다. 부활은 지긋지긋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는 볼 수 없다. 사랑했던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 속에만 부활이 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명을 부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오늘 복음의 대목은 어제 우리가 들었던 엠마오 제자들의 일화 뒤에 바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모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체험을 서로 나누고 있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오시어 평화를 베푸십니다.
지난 며칠간 롤러코스터를 탄 것보다 더 두렵고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라고 예수님은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영육으로 평화를 되찾아 새 시대에 걸맞는 새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평화를 말씀하시지요. 평화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심어주신 자기다움을 가장 충만히 누릴 때 존재적으로 느끼는 행복일 테니까요.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24,39)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당신 몸을 만져보라고까지 하십니다. 이 접촉은 지금 그들 눈앞에 나타난 예수님이 실제 현존하심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그분과 제자들의 거리를 좁혀 줍니다. 스승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제자들 내면의 심정적 죄의식도 녹여 주는 배려가 될 터이지요.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24,41)예수님께서 정말로 배가 고프고 허기가 지셔서 먹을 것을 요청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 스승과 제자가 동고동락한 세월 동안 그들이 가장 빈번히, 허물없이, 동질감을 공유하며 나누었던 행위가 바로 먹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경계심과 의혹, 두려움과 죄책감을 덜어주시려 여러 모로 애쓰시는 듯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예수님은 생전에 누차 말씀하셨어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던 메시아의 소명을 깨닫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은 인간적 지식과 욕망만으로는 열리지 않는 신비니까요. 스승의 부활까지 체험한 제자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이제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비로소 제자들은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그분 존재와 가르침, 행적과 부활의 영광까지 맛보고 누리고 체험한 진짜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증인"은 세상 사건의 증인과 사뭇 다른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증인은 어떤 사건에 대해 체험한 바를 객관적 입장에서 진술하고 증거하는 역할일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전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라 사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사명까지 부여받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달하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만납니다.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 3,15)굳이 반복할 필요없이 베드로의 설교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치유 능력이나 언변이 아니라, 모든 일이 성경에 근거해 이루어이진 것이며 자신들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증인은 그저 증인일 뿐이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증인입니다. 곧 그분의 판박이, 따라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증인은 말과 행동, 선포와 능력 등 자기 존재를 총동원해 주님의 영광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무수한 증인들, 증거자들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삶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상승과 추락과 충돌의 충격으로 온 존재가 들썩이면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우리 모두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주님 사랑의 증인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빕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2021. 4. 8. 목)(루카 24,35-48)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36-43).”
1) 이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우리는 처음에는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다.” 라는 사도들의 고백이기도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살아 계시는 분이셨다.” 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사도들이 유령의 존재를 믿었느냐, 아니냐? 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유령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다는 것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그들이 절대로 헛것을 본 것도 아니고, 단체로 어떤 환시를 본 것도 아니고, 실제로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만큼 놀라운 일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도들의 믿음이 부족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2)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는 말씀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라는 말씀은 ‘평화의 인사’와 함께 묶어서 생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불신과 의심으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믿는 사람만이 ‘참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만져 보라고 하시고, 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을 겉으로만 보면, ‘안 믿으려고 하는 제자들’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을 간절하게 희망하면서 믿고 싶어 하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제자들의 그 노력에 응답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만져 보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져 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토마스 사도는 당시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요한 20,24).나중에 제자들이 토마스 사도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증언했을 때(요한 20,25),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손과 발을 보았다는 말도, 또는 직접 만져 보았다는 말도 했을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상처 자국을 직접 보고 싶다고 말한 것은(요한 20,25), 사도들이 그에게 한 말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4-48)”
1) 예수님 말씀에서, “다 이루어져야 한다.” 라는 표현과 “다시 살아나야 한다.” 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수난을 당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성경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와 이유를 알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됨으로써 성경의 예언들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부활 신앙 안에서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특히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을 모두 체험한 뒤에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더욱더 부활 신앙 안에서 읽어야 할 책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읽는다면, 그것은 옛날이야기 책을 읽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성경 지식은 나중입니다.>
2)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죄에서 구원된다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3)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과 모든 일들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선포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일들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말씀들이고 일들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는 말씀은,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증언하려면, 그 일을 자기가 먼저 믿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려면, 자기가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자기는 믿지 않으면서도 증언한다면, 그것은 거짓 증언입니다. 거짓 증언은 십계명을 거스르는 대죄입니다.
4)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말’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말’로도 해야 하지만, 우선 먼저 ‘삶’으로 해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 자체가 증언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또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그 일들을 받아들이고, 인내하고, 신앙을 지킵니다. 바로 그 모습이 증언이 됩니다.
만일에,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마다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거나, 인내하지 않고 포기한다면, 믿는다는 그 말은 거짓 증언이 되어버립니다.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베드로 사도는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가 치유한 불구자가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고 있고 군중은 불구였던 사람이 걷는 것을 보며 감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는 곳으로 몰려옵니다.
사도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문을 엽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3,12)
그리고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의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3,14-15)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유를 사람들의 무지의 탓도 있지만 이미 예언자들을 통하여 알려진 ‘수난 받는 메시아’의 뜻을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사도는 이제라도 그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인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당부하며 이런 말을 이어서 이런 말로 마무리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3,2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드디어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8-39) 그들은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손과 발의 상처를 보고서야 주님이신 것을 믿고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1) 잡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시며 식사하시던
모습으로 돌아가시고 그제야 하나 둘 스승의 부활을 실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며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 시편에 이르기까지 수난 받는 메시아와 부활에 대한 대목을 설명해 주십니다.
세상에서 죽었던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반가움보다 먼저 두려움이 앞섭니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대로만 산 사람이 귀신을 만난다고 할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소문으로만 스승의 소식을 들었지만 그래도 죽었던 분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낯설기도 하고 두려운 일이도 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러한 제자들 앞에 스승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상처들을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기 식사를 청해서 생선을
잡수기도 하신 것입니다. 서서히 제자들은 스승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당신에 관한 성경의 대목들을 열한명의 제자들에게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절망으로 끝날 것 같았던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제 부활이라는 새로운 출발로 제자들에게 등장합니다.
슬픔에 싸였던 제자들은 기쁨과 희망을 갖게 되었고 또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쁨소식으로 전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당신 부활을 못 받아들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잡수시는 사랑은 우리 마음도 따뜻하게 만드십니다.
스승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흩어지고 도망치던 그 마음도 한 켠에서는 부끄러움이 남아 있을 법도 한데 주님께서는 지난 일들은 침묵하시고 일상생활에서 부활 전이나 후에도 그 사랑에는 변함없으심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에게 스승을 만나 뵙는다는 것만큼 기쁘고 위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듯이 묵은 우리가 아니라 이제는 새로움으로 향할 때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던 우리의 삶의 모습에서 이제 우리도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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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자들이 그분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익튀오스 옵투 메로스 ἰχθύος ὀπτοῦ μέρος)’를 드리자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그것을 잡수신다.(루카 24,42-43) 생선은 당시 일상생활의 양식으로 이해된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셨다.(마태, 14,9-11; 루카 14,17-19; 마르 6,35-41; 요한 6,16-21).
주님께서 부활 후에 갈릴리 호숫가 뭍에서 제자들을 기다리시며 숯불에 물고기를 얹어놓으시고 빵과 함께 아침식사를 준비하신다.(요한 21,9) 부활 후에도 전처럼 변함 없으심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자책도 자랑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가 지난 3월부터 청담동 성당 영성학교에서 10주간 특강을 하고 있는데 지지난 주일 특강은 그야말로 횡설수설이었습니다.
그렇게 준비를 많이 하고 했는데도 강의를 망치고 나니 무척 속상하고, 더 나아가서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자책까지 드는데 자책하는 내가 또 자책이 되는 거였습니다.
아직도 자신의 부족함과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책하니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고 수도생활도 할만큼 한 사람으로서 어찌 아직도 그 모양이냐고 저를 또 자책한 것이지요.
자책하는 것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거나 적어도 자책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도 자책이 문제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반성은 해야 하고 그것이 회개로 이어지게는 해야겠지요. 이런 반성은 그래서 겸손에 가깝지만 그러나 자책은 교만에 가깝습니다.
자신을 책망하는 자책은 자신의 성공을 바라는 자의 행위이기 때문이고, 성공했을 경우엔 틀림 없이 자기가 잘한 것에 대해 자만하고 자랑도 하고 의기양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는 이런 것을 넘어선 차원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불구자를 고쳐주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경탄할 때 그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그는 프란치스코처럼 인간의 것이란 죄와 악습뿐이고 온갖 좋은 것은 다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출세를 위해 갈릴래아 시골구석에서 주님을 따라나섰고, 예루살렘에 입성만 하면 그 바라던 출세가 이루어지리라 믿었는데 주님께서 허무하게 돌아가시게 되자 배반을 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지은 자기를, 이런 믿음의 소유자인 자기를 부활의 증인으로 만드시고 죄가 아니라 주님처럼 치유의 행위를 할 수 있게 하신 것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베드로는 이제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그러므로 자책이나 자랑이나 다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자기 앞에 있는 자의 행위이고, 베드로처럼 꿈꾸던 성공과 출세가 좌절되고, 그 좌절에서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실패도 자책 않고 성공도 자기 것으로 생각하여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묵상하고 다시 하느님 앞에 겸손히 서는 오늘 우리입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예수님
-존자 베다-
우리는 구원자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곧바로 평화의 기쁨을 안겨 주셨다는 사실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도 구원의 특별한 언약으로 불멸의 영광을 인사말에 넣으셨지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7). 그분께서 태어나셨을 때 나타난 천사들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며 목자들에게 이 은총을 선포하였지요. 우리의 구원자께서 몸을 입고 오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그 계획 자체가 세상의 화해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이루시고자 그분께서 몸을 입고 오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죄를 지어 하느님의 진노를 산 우리가 당신의 화해 행위에 힘입어 다시 하느님의 평화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언자가 그분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 (이사 9,5)이라는 이름을 드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도 또한 여러 민족의 믿는 이들에게 그분에 관한 글을 써서 보냈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7-18).
<부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핏빛 머금은
고운 꽃
부활
내가 나다운 일
김준한 빈첸시오 신부님
성인은 팔방미인이 아닙니다. 기도도 잘 하고 봉사활동도 열심이며 인간성도 뛰어난데다 다재다능해서 자신의 능력을 필요한 이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아 완전한 사람이 되라 하셨지 완벽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마태 5,48 참조). 어쩌면 깊은 땅속 대수층에서 맑고 깨끗한 지하수를 길어올리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우물보다 한 우물을 꾸준히 제대로 파야 하는 것처럼, 믿음의 완성도 가장 자기다운 한 가지로 충분할지 모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그저 증인이 되라고 이르십니다. 당신이 하신 수많은 말씀을 주석하여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완벽한 교리 지식을 증언하라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드러나는 그분의 놀라운 신비를 삶으로 보여주는 증인이 되라고 말입니다. 이 증인이 갖춰야 할 유일한 덕목이 있다면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말씀을 새겨 그 말씀이 그를 통해 살아 숨 쉬게 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이 목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 아니라 말씀이 아리고 쓰려도 인내하며 그 말씀이 생각 없이 걷던 나를 멈춰 세워 내 삶을 변화시켰음을 나의 언어로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함승수 신부님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마주친, 이웃집에 사는 아이의 태도가 아무래도 수상쩍었습니다. 그는 분명 그 아이가 도끼를 훔쳐갔을 거라고 단정짓고는, 그 아이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도끼를 훔쳐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안색을 꼼꼼히 살펴보아도 그 아이가 도끼를 훔쳐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실직고를 하지 않고 뻔뻔하게 구는 모습이 너무 괘씸했지만 증거가 없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잃어버린 도끼를 찾았습니다. 그 전에 갔을 때 나무 밑둥에 꽂아두고는 깜빡 잊고 그냥 내려갔던 거였습니다. 도끼를 찾아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다시 그 이웃집 아이와 마주쳤습니다. 그 아이의 행동은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 행동을 보아도 안색을 보아도 도끼를 훔친 사람처럼 수상쩍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열자(列子)] <설부(說符)>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의심암귀’(疑心暗鬼)라고 합니다. ‘의심을 지니고 있으면 망상에 빠져 있지도 않은 대상에 두려움을 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의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돌아가셨는데 그런 예수님이 다시 생명을 지닌 존재로 부활하실 리가 없다고, 동료 제자들의 증언을 의심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들 눈 앞에 나타나셨으니, 자기들이 귀신을 본게 틀림없다고 오해하며 두려워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의심을 해소해주시기 위해 당신 몸에 난 상처를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먹을 것을 잡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당신께서 참으로 살아나셨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아주 중요한 구원의 진리를 선포해야 할 중대한 사명을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이 욕심과 오해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으니, 즉 하느님께서 놀라운 능력과 무한한 자비로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를 없애주셨으니, 그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으며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금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되돌리는 ‘회개’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릴 기회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이유는 그런 구원의 진리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여자는 머리 스타일만 바꿔도 남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나 할까. 생소하고, 뭔지 모르게 전에 알고 있던 그 모습이나 그 느낌이 아니라는 표현이겠지요. 그런가 하면, 오랜만에 보는 어린아이들이 훌쩍 커진 모습. 어릴 때 보던 그 모습이 아닌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면서, 내가 알던, 그 아이 그 사람인가 하는 의아스러움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공통적인 느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생전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생전에 자신들이 알고 있던 그 예수님이 아니라고 인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자신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자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37절) 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못이 박힌 자국이 남아 있는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설득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8-39절) 그러시고는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41절) 라고 물으시고는 그들이 주는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씹어 잡수시며 그들에게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경과 예언서에 드러난 주님에 대한 기록들을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6-48절)
우리도 주님 부활의 신비를 이해하고 믿도록 합시다. 성경과 예언서를 비롯하여 역사를 통해 주님께서 이루신 업적들을 통해 드러난 부활하신 예수님을 연구하고 알아보아 체험하기로 합시다. 그래서 그분 부활의 증인이 되기로 합시다. 손처럼 실제로 느끼도록 보여주고,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맛있고 영양가 있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여 증거합시다.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주님 부활의 증인들 <루카, 24/25-48> 4/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든 일은 있어도 증명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빛이 난다. 아무리 자기 것을 주장해도 믿고 증명해 주지 않으면 말이나 소문가지고는 사람들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맛있는 음식점이 있다고 해도 가서 먹어보고야 참으로 맛있는 음식이구나 합니다. 그러나 찾아 가기위하여 먼저 가본사람의 증언이있야 합니다.
주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것을 말한 것을 믿으려면 보아야 하고 본사람이 증언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진실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시실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듣고 보고 하였지만 성령을 받기전에는 주님의 사정으로 두려움과 숨어서 주님의 발현을 보고 유령인줄 알고 드려워 하여 오늘은 만저보고 함게 식사도 하시면서 증언하려 하여도 승천 때도 믿지않은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 일까? 지금도 전해주는 말을 듣고 증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나는 부활의 믿음을 증언하지못하는 것은 체험 없는 믿음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참으로 부활 하셨네 알렐루야하고 노래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부활을 맏습니까? 하면 성당에서 믿으라고 해서 믿습니다 하면 부화르이 참 증인이 돨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와 내가 서로 믿음을 가지고 사는가? 하고 생각하면 아니 못믿겠습니다. 합니다. 믿음은 증명된 것이 여야지 그저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명하는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어야 합니다.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사시는 주님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잊고 자기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사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일어나는 일에 괸심을 가지고 믿음만 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따라가는 사람 끌려가는 사람 아니라 획신을 가지고 함께 가는 삶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증명하는 사람은 인간의 기본 제세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진실이 정직 깨끗함 순결함 아름다운과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눈에 보이고 마음에 색여 집니다. 손에 집어 주어도 내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하고 사랑하면 사랑의 능력으로 보이고 증명됩니다. 성령의 역할은 우리의 좋은 바탕 위에 작용하십니다. 아무리 빛이 강하게 빛어도 벽을 쌓아 빛을 막으면 빛이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가짓으로 나를 감싸고 있으면 참을 참으로 보지 못하고 거짓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을 비우는 삶을 살아아야 빛이 빛이고 빛 가운데 살며 진실을 보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마음의 문을 열고 깨끗한 마음에 말씀을 주시어 알아듣게 하시였다고 하십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증명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24,45)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님
+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에 관한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24,44-45)
성경에 관한 내용이 당신에 관한 내용임을 알려주십니다. 성경이 곧 당신 자신입니다. 말씀이 곧 예수님임을 뜻합니다.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말씀 안에 사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플로이드 헤밀톤이라는 학자는 "그리스교신앙의 기초"라는 책을 통하여 구약성서 안에는 예수님의 성취에 대한 예언이 332개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수난과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콩트가 영국 시인 칼라일을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교를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종교를 창설하기 위해 구상 중입니다. 이 새로운 종교는 완벽하고 분명한 종교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칼라일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새로운 종교를 만드신다니 좋은 일입니다만, 그전에 당신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겁니다.”
그리스도교가 단지 머리 좋은 천재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위에 세워졌음을 증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 부활에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하느님의 말씀도 헛됩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만든 하나의 좋은 가르침에 불과합니다.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47-48)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신앙인이기에 그분을 부활을 선포합니다. 아멘.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이용현 베드로 신부님
주님은 한 분이시며 영원하시고, 나에게 은총과 기쁨과 영광을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은 변함이 없고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이 다가오면 그것은 악이라고 생각을 하며 왜 주님은 나에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냐며 따지곤 한다.
이번에 아버지의 병환의 과정을 살펴보며 내 마음 또한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10년 전에는 뇌 부정맥으로 머리를 여는 수술을 하시고, 좋아지시는 듯하니, 결핵이 생기고, 또 좋아지시는 듯 하니 대장암이 발병하셨다. 누구보다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기도하시는 아버지이신데, 그런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주님을 원망했다.
“기도도 열심히 하시고, 이웃사랑을 통해 자선도 많이 하시며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짓, 안 하고 늘 당하고만 사시는 아버지를 주님 왜 자꾸 괴롭히십니까?”하고 따지기도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당에 앉아 가만히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하느님은 좋은 모습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는 분이지만 안 좋은 일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 주님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좋은 것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불행하게 하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둘이 다 같은 주님이라 여겨졌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도 우리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예수님이 앞에 나타나자 그들은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이들의 모습을 일깨워 주시고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일들 속에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주님의 영광이 숨겨져 있다. 좋은 것만을 보려 하는 이는 나쁜 일이 왔을 때 두려워할 것이며 힘들어하고, 주님을 멀리 떠날 것이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나쁜 일 안에서 만나는 주님이 참 주님이시다는 것 그런 주님을 알고 깨달아 전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하루를 살아야겠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24,39)
이근상 시몬 신부님
어제 이 십 여 년만에 만난 친구가 죽은 뒤의 세계를 물었다. 신부는 그 세계를 어찌 믿고 있는가였다. 나는 육신의 몸이야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우리의 영은 살아있기에 죽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몸마저 온전하게 다시 살아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가톨릭 신자인 친구는 그런 이야기 처음 듣는다고 해서... 다들 웃었다.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가톨릭 신자인 친구가 얘는 정말 가톨릭이 맞다고 했다.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그런데 육신의 죽음과 부활이란 대목은 아직 명료하지 않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21,19)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신 적이 없다. 홀연히 등장하시는데, 사람들은 잘 알아보지 못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러했고, 엠마오의 제자들이 그러했다. 그러니 그 육신이란 우리가 아는 육신과는 거리가 좀 있는 듯하다.
다만 오늘 복음처럼 육신의 생생함도 보도되는데, 이를테면 손과 발-상처가 있는, 그리고 식사하시는 몸, 말씀하시는 목소리 등...
그러니 지금 주님의 몸은 우리가 아는 몸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용서가 있되 상처의 아픔은 고스란히 있는 몸. 밥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몸. 평화의 인사를 나눌 수 있는 목소리가 있는 것만은 분명할 듯. 그리고 우리 역시 따라야 할 죽고 부활하신 바로 그 몸이란 멀고 먼 마지막 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있을 가능성이 아주 많다. 그들은 지옥과 천당을 우리 곁에서 살아내고 있는지도.
주님 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우리의 벗들이 켜켜이 우리 곁에...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느님이라 하셨으니. 하느님 앞에서 죽은 자가 없다는 선언이다.
이 생을 영원처럼 귀하고 중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이 생에 안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24, 3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을 만나고
오늘을 만져보는
감사의 오늘이다.
부활 축제는
서로를 빛나게
하는 오늘의
살아있는
축제이다.
오늘이
참으로
소중한
생명이다.
오늘로부터
시작되는
생며의
일상성이다.
보고 싶었던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오늘의
살아계신
부활이다.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부활을 다시
체험한다.
그 모습
그대로가
소중한
오늘이다.
일상의
살아 있는
삶이 부활의
진짜 삶이다.
삶의 중심에
생명의
부활이 있다.
생명이 주는
진정한
기쁨이다.
생명이
중심이 되는
삶의
관심이다.
관심은
생명은
나눔으로
활짝 꽃핀다.
나눔 속에
참된
행복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오늘이다.
우리의
오늘로
존재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우리의 노동속에
화사한 봄꽃속에
따뜻한 밥으로
따뜻한 관심으로
만나게되는
부활의 오늘
사랑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