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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7월 18일 (녹)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07.18|조회수157 목록 댓글 0

제1독서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6,7-9.12.16-19
7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8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9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당신의 판결들이 이 땅에 미치면 누리의 주민들이 정의를 배우겠기 때문입니다.
12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한 모든 일도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16 주님, 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
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
17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18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19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베푸신다고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안식을 주겠다고 하시고, 당신 멍에는 편하고 당신 짐은 가볍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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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며,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니 먼지 속 주민들은 깨어나 환호하라고 노래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라며,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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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길은 올바르다는 신앙 고백의 시를 읊는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주 하느님을 갈망한다고 노래하며 이제 그분을 통하여 다시 빛을 보리라고 희망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은 모두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시며 안식을 약속하신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가벼우니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 말씀에서 두 가지 표현이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옵니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예수님께 ‘와서(가서)’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삶’, 이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는 방법입니다. ‘안식’을 뜻하는 그리스 말은 일차적으로 ‘쉬다’의 뜻도 있지만, ‘되살아나게 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단순히 ‘쉼’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삶이 무겁고 힘들수록, 여러 이유로 신앙을 지키기 어려울수록, 예수님께 다가가는 신앙인이 됩시다.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하여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우며, 우리가 다시 살아나도록 주님께서 마련하신 안식을 얻읍시다. 힘들고 어려워도 이러한 선택을 하지 않는 신앙인이 많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믿음을 지키는 길이 매우 무겁게 느껴져도 예수님께 다가가지 않습니다. 일상을 멈추고, 평소에 하지 못하였던 것들을 실컷 하며, 그동안 ‘억눌린 욕구들을 채우는 시간’을 ‘안식’으로 착각하는 신앙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참된 안식을 얻는 길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신앙인이 참으로 위로받고 힘을 얻어야 할 곳은 바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성체 앞입니다. 어디에서 또 누구에게 위로받습니까? 성체 앞에 머물며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는 오늘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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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을 향하여,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 따르면 “무거운 짐”은 율법과 관련됩니다(마태 23,4 참조). 당시 율법 학자들은 율법의 세부 규정들을 만드는 일에는 열중하면서도 정작 그 규정을 마주한 이들의 어려움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세부 규정들 앞에서 느끼는 부담과 죄책감을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신심 있는 태도로 여겼나 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세부 규정들을 마주하는 이들의 힘겨움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께 초대하시며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성당 입구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 말씀이 좋아 보였는지 이단과 사이비 종교 교주들도 세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걱정 없이 쉬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직장이나 가족, 인간관계에서 오는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그런 것과 다른 세상을 경험하라고 합니다. 내려놓아야 할 ‘무거운 짐’은 힘든 의무들이고, ‘안식’은 단절을 통한 일시적 편안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라는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단순히 짐을 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에 밀착시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배우는 사랑은 율법으로는 해낼 수 없었던 일, 나와 우리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향한 진정한 안식, 곧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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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존재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편하고 가볍게 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큼 위안과 위로가 됩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비슷한 내용의 반복입니다. ‘멍에’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유다교와 신약 성경에서 멍에는 율법을 나타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당시 율법을 따르며 살았던, 율법을 힘겹게 지켜나가던 사람들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내 멍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안식을,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율법은 점점 사람들을 힘겹게 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부정한 일을 피하도록,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세세하게 모든 것을 규정하고 그 부정적인 것들에서 멀어지기를 요구합니다. 율법은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것을 더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실천하고 행동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르침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으로, 피하고 멀어지는 것에서 다가서고 실행하는 것으로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기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그 가르침은 우리에게 안식을, 영원한 생명을 선사할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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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의 기도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주님께 희망을 걸고, 비록 지금은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는 일이 ‘밤’이라는 어두움과 고통 속이지만, 하느님을 향한 인간 영혼의 열망과 갈망이 얼마나 간절하며 희망적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하고, “해산하였지만, ……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하는 슬픈 현실의 외침은, 무릇 이사야 예언자의 시대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저출산의 세상에서도 겪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자가 갈망해 온 하느님 나라의 도래, 곧 하느님께서 창조 질서를 회복시켜 주시고,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의와 불공평, 폭력과 거짓을 거슬러 참된 평화와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의 이 짧고 명료한 예수님 말씀이 주는 위로는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짐, 내가 버리고, 포기하고 싶은 멍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십자가가 부활의 희망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함께 걷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언제나 가시밭길만은 아닙니다. 살면서 하느님께서는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통해 겸손을 가르치시고, 내 아픈 멍에를 통해 숙명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십니다. 인생은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듯,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여정임을 잊지 맙시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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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 안에는 끊임없이 근심과 걱정거리들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러한 근심 걱정이 없이 좀 편안한 날이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평안한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영원한 안식을 얻기 위해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하고 권고하십니다. 멍에까지 다 벗겨 주시면 좋으련만 그것은 그냥 씌워 놓으실 모양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내 삶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삶의 멍에를 기꺼운 마음으로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만 멍에를 씌우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그 짐을 지는 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 멍에는 소나 말을 쟁기에 연결시켜 주고 그 방향을 잡아 주듯이, 우리 자신을 세상과 결합시켜 주고, 또한 그 쟁기를 잡고 계시는 예수님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끈입니다. 이 끈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은 더욱 심오해지고 풍성해집니다.

우리의 삶이 편안함과 안락함만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 인생은 오히려 무료하고 무의미할 것입니다. 시시 때때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의 순간들을 슬기롭게 이겨 내고 극복할 때, 우리는 참기쁨을 맛보게 되고, 또한 우리 자신도 신앙 안에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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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품을 받고 출신 본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새 사제는 신자들에게 기념 상본을 나누어 줍니다. 거기에 적힌 성구는 사제가 평생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제가 고른 성구가 바로 오늘의 복음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미사 독서와 성무일도 등에서 자주 대할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첫 마음처럼 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그래도 이 말씀을 되새기며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 구절을 선택한 것은 예수님을 닮아 다른 이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사제직을 수행하겠다는 순수한 열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미사에서 강론을 맡아 주셨던 원로 신부님이 제게 해 주신 당부 말씀을 들으며 깨닫고 지금까지도 깊이 새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제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운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원로 신부님은 강론에서 새 사제가 대단한 각오로 살아가려 하겠지만 자신의 잘못과 한계, 그리고 사람들의 몰이해로 말미암아 시련을 겪고 좌절할 때가 자주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때에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말씀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에 대한 말씀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자존심과 책임감을 생각하기 이전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원기를 되찾으라고 간곡히 이르셨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당부를 떠올립니다.

주님과 교회의 일을 수행하며 겪는 어려움과 한계가 참으로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초대하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치유하신다는 것을 믿고 기억한다면 그 짐은 가볍고 편한 멍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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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험한 밭이나 논을 깊이 갈아엎을 때 겨릿소를 부렸습니다. 겨릿소는 같은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끄는 소 두 마리를 말합니다. 겨릿소를 부릴 때에는 일을 잘하고 경험이 많은 소를 농부 쪽에서 볼 때 왼쪽에, 일을 잘 못하고 경험이 적은 소는 오른쪽에 세웁니다. 왼쪽에 서는 소를 ‘안소’라고 하고, 오른쪽에 서는 소를 ‘마라소’라고 부릅니다. 마라소는 안소를 따라 자연스럽게 일을 배웁니다. 마라소는 시간이 흘러 일을 배우고 경험을 쌓으면 안소가 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멍에를 메자고 초대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겨릿소가 되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멍에를 메는 것은 비록 힘이 들겠지만, 예수님께서 몸소 안소가 되시어 우리가 진 짐을 가볍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무거운 짐도 가벼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에 그 곁에 조용히 다가가 안소가 되어 준다면 그가 진 짐도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믿음이 약한 형제와 함께 멍에를 메고 동행하며 배려해 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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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내가 짊어지고 있는 짐들이 다 없어지게 된다.’는 식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이어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고, 당신에게서 짐을 지는 법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짐을 없애 주시겠다는 말씀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짐을 지고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대신 그 짐을 어떻게 지고 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분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분께서는 당신의 짐을 기꺼이 지셨고, 그 안에서 기쁘게 사셨습니다. 이것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짐이 더 가볍게 느껴지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의 짐을 기쁘게 지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비결은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때 겪는 고통은 고통이기에 앞서 기쁨입니다. 몸으로 느끼는 아픔보다도 막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고통을 이기게 합니다.

예 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아버지의 뜻에 ‘자발적인 순종’을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께 배워야 할 점은 진심 어린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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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참으로 살려면 제대로 쉬어야 합니다. 숨을 쉰다고 할 때의 ‘쉼’은 숨(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숨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도, 모든 생물도, 땅도, 장기(臟器)도 쉬어야 합니다. 돼지도 건강 상태가 나쁠 때는 스스로 단식한다는 것을 농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병은 영양 부족, 일 기피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과로와 과식이 병의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쉬지 못하게 하는 짓은 생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쉼은 틈, 여유, 여백, 비움입니다. 쇠붙이도 늘었다 줄었다 하기에, 철길을 만들 때 빈틈을 냅니다. 빈틈이 없는 사람은 친구도 없습니다. 숨을 쉬는 것도 빈 구멍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비울 때,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있고, 이웃이 내 안에서 편히 쉴 수 있습니다. 비운다는 것은 욕심에서 해방한다는 것이며, 이웃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쉼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쉬시는 분,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 참으로 쉬는 것이며, 하느님 안에서 쉬는 사람이 성인(聖人)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호경 신부, 『해방하시는 하느님』, “쉼은 무엇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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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은 늘 은총입니다. 그렇지만 시련이 은총임을 깨달으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 이러한 시련이 주어지는지, 어찌하여 이러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러려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애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여쭈어 보면, 어느 날 내 몫으로 주어진 시련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고통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시련은 아픔이 아닙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물을 주실 때 늘 고통이라는 보자기에 싸서 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보자기를 풀다가 그만둔다고 합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보자기 속의 선물을 만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미리 실망하고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께서는 선물을 거두어 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다리십니다. 사람들이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니 시련은 진정 은총입니다. 주님의 선물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시련의 의미를 축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은총이라기보다는 꾸중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던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주시는 분이지 징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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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짐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끔 신앙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려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에누마 엘리쉬’라는 서사시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신들이 그들의 귀찮은 잔심부름을 시킬 수 있도록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작가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이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에덴 동산에서 동물들을 다스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인간의 참된 행복입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해 본 사람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신앙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 신앙인 모두가 깨달았으면 좋습니다.

운전하는데, 앞차 승용차 뒷유리에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기가 타고 있으니 가까이 오지 말고 안전 운전을 해달라는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속도를 줄여서 앞차와의 간격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차가 안전 운전을 하지 않았습니다. 속도를 내서 차선을 계속 급하게 옮기면서 운전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안전 운전을 요구하면서도 본인은 정작 하지 않는 모습에, “저럴 거면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글은 떼어내야지.”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래. 지금 무척 바쁜 상황이라서 그럴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해봅니다.

 

사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생각을 품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자기를 꼼꼼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겸손은 한없는 낮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굳이 낮출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하느님이면서도 인간보다 더 낮은 자리를 선택하십니다. 자기를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실제로 보여주신 모습인 것입니다. 하느님인지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구세주임을 몰랐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지 않는 행동을 하실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셨기에 진짜 겸손을, 진짜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품이야말로 가장 편안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갓난아기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곳은 어딜까요? 어머니의 품속입니다. 저는 아이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갓난아기가 힘차게 울어 젖히는 상황에서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안는다고 하면 어떨까요? 아마 더 힘껏 울 것입니다. 이때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어머니 품 안에 들어가야 울음을 멈추고 방긋방긋 웃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안겨야 할 곳은 바로 예수님 품입니다. 진정한 겸손과 따뜻한 사랑이 있는 그 품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주님 품 안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우리 역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품 안에 나의 이웃들이 안길 수 있는 겸손과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는 근심거리와 걱정거리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품과 같은 겸손과 사랑으로 무장한다면 어떨까요? 무조건 힘들고 어려운 곳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장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에게 평안을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랠프 월도 에머슨)

 

 

 

갖은 시련 속에서도 하루 하루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쌩고생을 반복하고 무거운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한번 뿐인 소중한 인생이기에 매일 매순간을 축제 즐기듯, 수행여행 가듯 가슴 설레며 살아야 마땅한데, 어렵고 지루한 숙제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명쾌한 정답이 오늘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을 가볍다.”(마태 11, 28-30)

우리가 이 좋은 세상, 이 좋은 시절을 힘겹게 살아가는 이유는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시시각각 주님의 현존 안에 살면서도 그분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시고,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않고 산다면, 그 어떤 수고나 고생, 시련과 상처에도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를 맞이하며 치매로 고생하는 어르신을 봉양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늘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기도만 하는 순한 치매도 있다지만, 그런 치매 환자는 백 만 명 중의 한명 꼴입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수시로 의심하고, 공격하고, 다투고, 힘들게 합니다. 끊임없이 이리 저리 배회를 하고 가출을 시도합니다. 폭력과 욕설을 거듭하는 치매 환자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케어하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노고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습니다. 대체 하느님 뭐하시나, 상태가 저 모양인데, 사람 노릇도 못하시는데, 빨리 데려가시지 않고,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특별한 형제를 봤습니다. 어르신을 마치 사랑하는 아기 다루듯이 대하십니다. 동화책도 읽어드리고, 식사를 거부하시는 어르신을 살살 달래가며 법을 떠먹여 드립니다. 수시로 게임도 하고 퀴즈도 내며, 어르신과 함께 하는 하루를 놀이하듯 재미있고 기쁘게 지냅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 가족들, 또래 환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납니다. 두분 주변은 언제나 웃음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것, 분명 무거운 짐이 확실합니다. 그들을 하루 온종이 케어한다는 것, 쌩고생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주님께서 굳건히 현존하고 계시고, 그 어르신 안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그 일을 기쁨이요 축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굳은 일, 힘든 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에도 큰 의미가 있음을 확신하고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임한다면, 그 일이 곧 복음화요 주님의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런 고생 저런 시련 속에서도 하루 하루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매일 주님 앞으로 나아가며, 그분 현존 안에서 살아가며,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겨드리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트에 가면 음식 시식코너가 있습니다. 과일을 주기도 하고, 떡갈비를 주기도 하고, 나물 비빔밥을 주기도 합니다. 물건을 사고 나오려는데 과일 시식 코너의 자매님이 제게 인사했습니다. 뉴저지에서 왔는데 아직까지 성당엘 못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사제복을 입었기에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저도 뉴욕에서 왔기에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자매님은 일이 정리되면 성당에 오겠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마트에서 일하는 교우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모두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성당에서 교우들을 만나는 것도 감사할 일이지만,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교우들을 만나는 것도 기쁨입니다. 댈러스 중앙일보 창간식에도 다녀왔습니다. 대표가 신자이기도 했고, 댈러스 오기 전에 저도 신문사에서 있었기 때문에 다녀왔습니다. 창간식에 온 분들 중에서 신자 분들은 제가 있는 테이블로 와서 인사했습니다. 타 지역에서 왔기에 저를 처음 보았지만,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마트와 신문사 창간식을 다녀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신자들이, 좋은 사제를 만들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좋은 사제들이 좋은 신자를 만들지 않을까?” 교우들이 최고경영자로서 사제를 맞이하려고 하면 사제는 성공과 긍정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우들이 선포자로서 사제를 맞이하려고 하면 사제는 십자가와 겸손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밀알 하나로 남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는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성공과 부흥의 말씀은 파장이 되어 잠시 머물겠지만, 십자가와 겸손의 말씀은 가슴에 남아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토요일마다 청년 교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1명이나 2명이 함께 했는데 요즘은 15명이 넘게 온다고 합니다. 미사 후에 친교를 나누는 모임도 시작했는데 그 모임도 청년들이 함께 한다고 합니다. 말씀과 친교를 함께 하니 청년들이 말씀에서 힘을 얻고, 친교를 통해서 우정을 나눈다고 합니다. 지치지 않고, 꾸준히 말씀을 나누니, 청년들이 그에 호응하였습니다. 친교는 빠질지라도, 교리는 빠지지 않는 청년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사제 곁에는 좋은 신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 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를 떠났을 때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강대한 나라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유배를 떠나는 유대인들은 절망과 허탈감이 가득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하느님께서 징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고, 흩어졌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행복하게 살날이 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물 붇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고, 가족들과 대화를 하고, 책을 읽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피정을 하면서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본인만을 위해서, 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누군가를 시기하고 험담하면서, 음주와 도박을 하면서 시간을 사용합니다. 처음은 별로 표시가 나지 않겠지만 한쪽은 안전한 곳간에 재물을 쌓은 사람과 같고 다른 한 쪽은 깨진 독에 물을 부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안전한 곳간을 말해 주고 계십니다.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고난과 고통이 찾아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곳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재물은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빈소에 와서 울어 주기는 할 것입니다. 가족들은 장지에 와서 우리를 묻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끝까지 함께 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뿐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사람이라는 멍에와 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믿고
나를 바라고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님께서
내게 메어주신
멍에입니다


작으니
편합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믿고
나를 바라고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님께서
내게 지워주신
짐입니다


보잘것없으니
가볍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는 사람들이 강을 건너면서 강가에 있는 묵직한 돌을 짊어지고 건너가는 곳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강의 물살이 너무 세서 그냥 건너면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역시도 때로는 우리 앞에 펼쳐진 물살이 험한 강과도 같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그 거친 물살에 몸이 떠내려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멍에와 짐을 짊어짐으로서 그 험한 삶의 물살 속에서도 떠내려가지 않고 중심을 잡으며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내 삶의 거친 물살과도 같은 강을 피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멍에를 짊어지며 주님과 함께 이겨나가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순히 무거운 멍에만을 씌우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멍에를 짊어진 우리는 험한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통을 주님과 함께 이겨나가고, 주님과 함께 일을 하며, 주님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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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자신에게 오면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라고 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하느님과 거리가 먼 이들입니다. 스스로 하려고 하는 이들, 하느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 하지만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만 못하는 이들, 그래서 고생만 하는 이들, 자신들이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고 있음을 모르는 이들이 무거움과 고생함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멍에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멍에는 가르침 혹은 이끄심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멍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 고생을 하고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는 이들이 자신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지요. 예수님께 배우면 편하고 가벼워집니다. 믿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께 배우면 안식을 얻게 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없다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11,28)


인생이 고달프지 않거나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을까요? 가난은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듯이, 삶의 무게도 상대적이라고 봅니다. 편함에 길든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것마저 힘들고 무겁게 느껴지겠지요. 아무튼 예수님께서 사시던 당대의 유다 서민들의 삶은 참으로 고달프고 힘겨운 삶을 살았습니다. 삶이 힘든 것은 물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힘겨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삶의 여건에서, 율법마저 그들에게는 감내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자비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율법은 분명 서민들에게는 힘겹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11,28)하며, 지치고 힘든 자들을 당신에게 오너라, 고 초대한 것입니다. 이와 반면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향해서는,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23,4)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물론 613조항에 달한 모세의 율법이 그들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고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평범한 서민들에게는 너무 벅차고 무거운 짐이 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30)하고 말씀하신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율을 단 두 가지 곧 황금율(7,12)과 사랑의 이중계명(22,34~40)으로 환원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삶에는 어쩔 수 없이 고생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유다 서민들에게는 힘든 삶에다 율법으로 인한 무거운 짐까지 짊어져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다 내게로 오너라!”는 말씀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멍에를 풀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어주는 멍에가 편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멍에라는 단어를 십자가라는 말로 바꾸더라도 의미는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삶의 멍에나 십자가를 거부하고 부정할 때 삶의 멍에나 십자가의 무게는 더 큰 부담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멍에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나아갈 때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게 아니라 모든 삶의 순간에 주님께서 함께 짊어지고 가시기에 편해질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삶의 멍에나 십자가를 혼자 짊어지고 가는 게 아니라 주님과 함께 나누어지기에 편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멍에, 내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시고 가시는 예수님의 보조에 순응해 가고 적응해 가면서 더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고 내 멍에와 내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그 안에 편안하게 머무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온몸과 마음으로 안식을 느끼게 되고 그런 만큼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되리라 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 품고 있는 역설입니다.

    『한 남자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하느님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때 그의 지나간 삶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해변의 모래밭에는 두 개의 발자국이 나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하나의 발자국만 모래밭에 남아 있었다. 그의 삶에서 가장 힘들고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오직 그의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외롭게 남아 있는 한 개의 발자국이 그를 실망시켰다. 그는 항의조로 하느님에게 물었다. ‘하느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정작 제가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할 때는 저를 떠나셨다는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다. ‘저 해변에 나 있는 발자국은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다. 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들어 했을 때, 내가 너를 업고 걸었기 때문이다.』 ( 메리 스티븐슨의 두 개의 발자국)

 

 

 

『성당은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이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희년선포 말씀’에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기쁨’과 ‘해방’과 ‘자유’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구원에서 배제되는 사람도 없고, 그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따라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과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 생명, 평화, 행복, 기쁨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이 나에게는 필요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논쟁을 벌였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ㄴ-32).”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요한 8,3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ㄴ-3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 즉 당신을 믿고 회개하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면 참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들은 자유를 잃은 적이 없다고, 자기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감방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열쇠를 주어도, 이곳은 감방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 예수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39-41).”

<보아야 할 것을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평화와 안식을 얻어 누리려면, 지금 자기가 무거운 짐과 멍에의 억압 속에 있다는 것부터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무거운 짐도 없고 멍에도 없다. 나는 자유롭게 잘 살고 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다가 심판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가 온갖 죄와 죽음이라는 짐과 멍에의 억압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평화와 안식을 외면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임종 순간에 그것을 깨닫고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그 순간에라도 회개하고 신앙을 받아들이고 임종을 맞이한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냥 후회만 하면서 생을 마치는 경우가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인생의 모든 고통에서, 또 죄와 죽음이라는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희망하고, 그 해방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예수님만이 참 안식과 해방과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 말씀에서 ‘내 멍에’는 반어법적 표현입니다.

멍에 자체가 하나도 없는 것이 진짜 해방이고 안식입니다. 따라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계명과 가르침대로 살면 온갖 멍에와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너희의 멍에를 벗겨서 편안함과 가벼움을 주는(참된 안식을 주는) 열쇠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결코 멍에가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무거운 멍에를 당신의 가벼운 멍에로 바꿔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무겁든지 가볍든지 멍에는 멍에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멍에와 짐을 완전히 없애 주시는 분입니다.

<성당은 주님과 함께 안식을 누리는 곳, 즉 안식처입니다. 만일에 신자들이 성당에 와서 안식을 누리기는커녕 여러 가지 부담만 잔뜩 얻는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목자들의 잘못입니다.>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을 예수님은 모두 오라고 부르십니다
세상과 하늘의 짐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삶의 모든 게 버겁다고 생각하면서 다 고생 또는 짐이라 하지 않나요?

자동차 아이나비가 있듯 세상 인생길 안내로는 주님기도 십계명 이죠.
주님의 기도문이나 십계명은 인생 길 안내로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죠.
이대로만 살면 세상이 편해지고 삶이 즐거워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늘이 내려주신 인생길 안내 프로그램을 모르다니 문제죠.
내가 세상 살려면 서로 사랑하면 되는데 서로 죽이겠다고 으르렁대죠.

가톨릭알림 말: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안내 따라 행복하게 삽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의 짐’과 ‘율법의 짐’을 지고서 잠자리에 누워서까지도 신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안식'으로의 초대는 이러한 인간의 비참을 보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다함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안식'으로 초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자 오늘 우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마태 11,29)

‘멍에’란 자신의 몸 위에 걸쳐지지만, 짐을 편하게 지거나 끌게 합니다. 

그것은 짐을 함께 지거나 함께 끌며, 짐 아래에 눌리지만 짐을 가볍게 합니다. 

자신의 몸 위에 놓이지만 온유하고, 짐 아래에 놓여 겸손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가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듯이,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서 배워라.”는 말씀은 단지 ‘당신을 모방하라’ 혹은 ‘당신의 경험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진리를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바로 '길'이십니다. 

그리고 '길'이신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을 제자들 안에 건네주십니다.

 

이 마음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겪어서 타인의 아픔을 아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안식'으로 초대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이는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입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찾고 발견되는 것이며, 그분이 이를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쉼', 이를 두고 그레고리우스는 ‘관상’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가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품으십시오.”(필립 2,5)라고 했던, 바로 그 '마음'을 선물로 건네주십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라고 고백했던 바로 그 '마음'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 마음'에서 사랑을 퍼 올리는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그 사랑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마음'이 이미 안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편안하게 숨 쉬고 계십니까?

     김상태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안식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에서 기쁘고 즐거운 일이야 말 그대로 즐겁게 받아들이면 됩니다만 문제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만났을 때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각종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인간관계의 힘겨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 거기에서 피해 가도록 해주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무겁고 힘겨운 인생의 짐을 지고 있는 우리에게 안식安息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은 한자로 풀이하면 편안하게 숨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안식은 단순히 육체적인 휴식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온과 안정감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안식은 우리가 삶의 힘겨움에 직면했을 때 예수님에게 희망을 두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어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겨움 속에서도 예수님의 품 안에서 잠시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안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숨을 고르고 나서 우리는 나의 현실에 좌절하고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다시 당면한 문제와 맞서 싸워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분의 품 안에서 잠시 숨 고르기를 해봅시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느님 따르면 행복합니다.<마태11/26-30>7/1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왜 사느냐 하고 물으면 정답은 행복하려고 살고 있습니다. 오늘 사랑이신 하느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나에게 배워라.” 하십니다. 우리는 권려이나 재력이나 명예가 있어야 하지만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면 가지 것들이 짐스럽고 금심 거리로 변화됩니다. 이것을 지키려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 강한 힘을 보여주고 지키려고 총칼을 든 파수꾼을 두고 지키려하고 가지지 못함 사람에게 상처주며 교만과 강요로 인정받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아담의 첫 번째 죄는 바로 하느님 같은 힘과 능력과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수도원에서 가장 존경스럽고 행복한 사람은 빗자루 수사님으로 성당청소 복도 청소 하면서 침묵 속에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는 수사님이십니다.

구약을 보면 하느님 전쟁의 선두에 서계시지 않고 전쟁의 뜃자리에 계십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는 시간에 명망합니다.

우리는 시시비비를 타지면서 자기 상처를 들어내고 카츸의 상처를 받은 사람은 주님 따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지도 않고 알도 떠르지 않고 윗 자리 충분한 자리 더 받쳐 주는 자리에 살고자 합니다.

저는 80이 지나며 자리는 하나도 없으며 기도하고 일하는 자리만 있으며 그 자리는 권력도 재력도 명예도 없이 사는 것입니다. 저는 병실 빙을 지나며 임종 방이 문 열려 있는데 처더보며 저자리가 나의 마지막 저리라 의식하며 지나갑니다.

제자리는 기도하고 하느님 계신 곳에 함께 사는 것입니다. 어제 세상의 시간을 상담자에게 말하며 지금 저는 감기가 잔득 들었지만 여기자오면서 상담하다가 죽는 것 내 자리입니다.

저는 문명이 알고 믿는 것은 이렇게 살지만 겸손과 온유를 잊지않으려 살고 있습니다. 수도원의 내자리는 아직 큰 병이 없어 삼층방에 하루종일 거처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하루에 한번 글쓰는 장소 잠자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어제 이 방에서 대구 대주교에게 전화하고 멀리 떨어진 상담자에게 잘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연락하면서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며 감사기도하고 몸이 블편해도 가시관 쓰신 주님 앞에 기도하며 오늘하루 주시고 살게함 감사드리도 병에서 일어나게 해 주시기를 청하며 감기 중에도 글쓰고 상담하도록 힘 주시기를 온유하고 겸손하게 청하며 힘들게 일어나 상답실로 나가기도 합니다. 온유와 겸손이 아니면 누어있어야 할 것을 일어나 주어진 일을 하게 됩니다.

모두가 온유함과 겸손함을 주님에게 베우며 행복한 하루를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잘 하던 일도 다른 사람이 본격적으로 제대로 해보라며 판을 깔아주며 도와주면 하기 싫어진다는 뜻입니다. 순수하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면 ‘나의 일’이지만, 남이 해보라고 시키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 인간이 지닌 특징인가봅니다. 무엇이든 본인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면 즐겁고 힘도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들고 능률도 훨씬 떨어집니다. 그러니 기왕 어떤 일을 하려면 스스로 찾아서, 자기 의지로 해야 합니다. 그 일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으니 신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중요하며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신 멍에와 짐이 바로 그런 마음으로 지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순명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향한 크고 깊은 사랑으로 기꺼이 짊어지신 겁니다. 그저 시키니까 마지못해 하는 ‘노동’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원하고 받아들이는 ‘순명’이었기에 그분과 깊은 일치를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억지로 참아 받는 ‘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기꺼이 끌어안는 ‘희생’이었기에 그 안에서 의미와 기쁨을 찾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받던 이들이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휴식’이란 하던 일을 멈추고 아무 것도 안한 채 쉬면서 충전하는 것인데, 어깨에 삶의 무게를 그대로 짊어진 채 쉬라고 하시니 그게 무슨 뜻인지 머리로는 도대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우리보다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이니 일단 받아들이고 따라봐야겠지요.

하지만 누군가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렇게 따질 것입니다.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느냐고, 왜 무거운 짐을 져야만 하느냐고, 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크고 무거운 짐을 지느냐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불평 불만이 심해질수록, 내 마음이 더 부정적이 될수록 어깨에 짊어진 멍에는 더 아프고 짐은 더 무겁게 느껴지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보여주신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온유함은 좋고 나쁨을 내 기준으로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은 하느님께서 나 자신보다도 더 나를 잘 알고 계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신뢰로부터 나오지요. 겸손함은 내 뜻과 고집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으며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은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주님’이시며 나의 삶과 세상이 그분 섭리에 따라 흘러간다는 믿음으로부터 나오지요. 그런 마음으로 주님께서 건네시는 멍에를 기꺼이 어깨에 들쳐 멘다면, 지금 당장은 힘겨운 신앙의 길을 신나게 달려갈 순 없겠지만 묵묵히 그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이래서 신앙생활을 하는구나’하는 깨달음에 빙그레 미소짓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여러분은 혹시, 지금 어떤 고생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혹시, 어떤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십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람을 기억하며, 그 사랑 안에 여러분의 고생스러운 짐을 풀어 놓으시고, 그분의 안식을 청하십시오.

또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짊어지고 따르기를 바라시며 청하시는 편하고 가볍다는 멍에가, 혹시 내가 주님께 다가서는 데 장애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고 따르는데 있어, 무엇이 두렵고 망설여집니까?

주 예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지 않는,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길로 접어들어, 가능하면 많이, 될 수 있으면 많이, 지상에서 평안하고 천상에서 영원한 즐거움과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길을
젖게 만드는
비가 너무
많이 내립니다.

겸손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우리를 따뜻이
위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자
다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가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를
알게 하십니다.

십자가로
알게 되는
삶의
무게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십자가를 진
이들만이
깨닫는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음을
뜨겁게 깨닫습니다.

십자가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마음도
안식이
필요합니다.

이렇듯
자연스러운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휴식은 쉬는 법을
배우는 구원의
시간이며

주님의 마음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자신이
배워야 할
삶의 지혜입니다.

십자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의 안식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앞에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위로의
값진 시간입니다.

우리 마음의
풍경과
다르지 않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래서
구원이
필요합니다.

1960~70년대 스포츠화 시장의 독보적인 회사는 ‘아디다스’였습니다. 워낙 독보적이어서 다른 브랜드는 감히 경쟁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아디다스가 독점하고 있는 시장에서 몇몇 젊은이가 운동화 회사를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자본도 부족하고 경험도 없기에, 주위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가득했습니다. 창업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폐업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모여서 판도를 바꿀 전략을 모색했습니다. 여러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판도를 바꾸기에는 부족한 방안이었습니다. 한참을 회의하다가 이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떠들든 간에 상관하지 말자고. 그냥 하자!”
“그냥 하자!”는 말에 젊은이들은 힘을 얻었고, 이를 회사의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Just Do It.”

맞습니다. ‘나이키’ 회사입니다. 나이키는 창업 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아디다스를 앞질러 전 세계 최대 스포츠용품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찾는 것보다, 그냥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보다, 그냥 해야 희망도 보입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지루해서…. 등의 이유를 찾다 보면 주님의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이 너무나 커다랗고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는 주님의 큰 은총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그냥 해야 합니다. “Just Do It.”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 ‘멍에’라는 표현을 ‘하느님의 법’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은 하느님의 법이 무겁다거나 사람을 짓누른다고 여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 위한 세부 조항이 613개나 있었음에도 이를 무겁고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고, 일상 안에서 지키기 어려워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절대로 무거운 짐이 아닌, 진정으로 편하고 가벼운 짐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을 간직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인생의 짐을 흔쾌히 지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를 매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 세상 안에서 어려워 보일 수도 있지만,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가져오며 더 나아가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그냥 해야 합니다. “Just Do It.”

사람의 가치를 직접 드러내는 것은 재산도 지위도 아니고 그의 인격이다(드니 아미엘)

 

 

 

시원한 물 한 잔 하고 가세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자주 드는 생각 하나가 있습니다. 인간 존재 하나하나가 마치 어여쁜 꽃 한 송이 같다는 생각입니다. 각자의 인생이 한 송이 꽃처럼 예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열흘 붉은 꽃 없다고, 활짝 피어오르는가 하면, 순식간에 시들고 말라버리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네 인생, 긴 것 같지만 찰나같이 짧습니다. 솜털 같은 유소년기, 어여쁜 청소년기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장년기로 넘어갑니다. 눈 깜짝할 사이 어느새 희끗희끗한 노년기에 접어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순풍에 돛단 듯이 인생이 술술 풀려나갈 때도 있습니다. 만개한 한 송이 꽃처럼 절정에 도달할 때도 있습니다.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잠시입니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 이런저런 다양한 병고 앞에 노출되고, 결코 원치 않는 심연의 바닥체험도 하게 됩니다. 깊은 상처에 홀로 돌아서서 눈물짓곤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안쓰럽고, 가련하고, 측은한 존재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큰 위로와 격려의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1장 28~29절)

 

고생 많이 하기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특별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생들을 가만히 분석해보니 하지 않아도 될 고생들, 결국 ‘사서 고생’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게 그 지옥 같은 ‘쌩고생’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죽을 고생들입니다. 어디 가서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 시대 우리 교회에 주어지는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어야겠습니다.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말 못할 고초에 마음 깊이 공감하며 맞장구쳐줘야겠습니다.

 

그들이 소리 없이 흘리고 있는 서러운 눈물을 조용히 닦아줘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턱을 완전히 낮춰야겠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다양한 모습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은 세상을 향해 활짝 두 팔 벌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모든 인간이 다 존귀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생명 붙어있는 모든 인간이 다 하느님의 모상이자 거룩한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앞에는 그 어떤 차별도 없었습니다.

 

혹독한 더위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물 한 잔 하고 가세요, 요기라도 하고 가세요,'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포근하게 그들을 감싸 안고 격려의 말이라도 한마디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물이자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장하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또 다른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심장으로 산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금쪽같은 내새끼’ 104회에서 아빠 눈치를 너무나도 많이 보는 초2 금쪽이가 나왔습니다. 금쪽이는 사고뭉치입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맨날 따끔한 훈육을 받습니다. 아이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 모릅니다. 길을 가다 쓰레기통을 짓밟고 화단의 꽃들을 뽑아 엉망으로 만들어놓습니다. 그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 그게 다 문제 행동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는 게 너무 버겁습니다.

 

문제는 아빠에게 있었습니다. 아빠는 13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그전에도 아빠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책을 보고 자신은 좋은 아빠가 되려고 합니다. 훈육에 너무 철저합니다. 하지만 아빠는 아이에게 줄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 마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빠가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닌 잔소리가 됩니다. 

 

아이는 아빠의 훈육 때문에 아빠가 무섭습니다. 무서운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를 사회에 적응시키려면 따듯한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타인의 아픔을 읽고 대인관계를 잘해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금쪽이는 인형 외에는 친구가 없습니다. 이웃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아빠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만 줄 수 있습니다. 가지려면 받아야 합니다. 

아이는 아빠의 따듯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빠가 먼저 따듯한 마음을 가진 이를 사랑해야 하고 자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들이 아빠 심장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한 마을에 이웃한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넓은 초원에 많은 염소를 키우고 있었고 그 옆집에는 사냥꾼이 살았는데 아주 사나운 개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 사냥개는 종종 집 울타리를 넘어 염소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본 염소 주인은 사냥꾼에게 개들을 우리에 가둬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지만, 사냥꾼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오히려 속으로 화를 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우리 집 마당에서 개를 키우는데 무슨 상관이야?’

며칠 후 사냥꾼의 개는 또 농장의 울타리를 뛰었고, 염소 몇 마리를 물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염소 주인은 더는 참지 못하고 마을의 치안 판사에게 달려갔습니다. 염소 주인의 사연을 들은 판사는 “사냥꾼을 처벌할 수도 있고, 또 사냥꾼에게 개를 가두도록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판사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친구를 잃고 적을 한 명 얻게 될 겁니다. 적과 이웃이 되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친구와 이웃이 되고 싶으신가요?”

염소 주인은 “당연히 친구와 이웃이 되고 싶죠”라고 답했습니다.

판사는 “잘됐군요. 한 가지 방법을 알려드릴 테니 그렇게 해보시죠. 그럼 당신의 염소도 안전하고 좋은 이웃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제안했습니다.

판사에게 방법을 전해 들은 염소 주인은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웃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장 사랑스러운 새끼 염소 세 마리를 골라 이웃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웃의 어린 세 아들에게 염소를 선물했습니다. 사냥꾼의 세 아들은 염소를 보자마자 푹 빠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매일 염소들과 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들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사냥꾼의 마음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마당의 개가 염소를 물어서 해치지 않을까 걱정이 된 사냥꾼은 개를 큰 우리에 가뒀습니다. 염소 주인도 그제야 안심했습니다. 사냥꾼은 염소 주인의 친절함에 보답하려고 사냥한 것들을 그와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염소 주인은 사냥꾼에게 염소 우유와 치즈를 보답으로 주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이웃이자 친구로 지냈습니다.

 

상대가 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닮게 하고 싶거든 나를 사랑하게 만드십시오. 나를 사랑하게 되면 나의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사랑은 서로의 심장을 교환하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 마음으로 당신과 세상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그분께 드리고 그분 마음을 받읍시다. 그러려면 오늘도 조금 더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당신 심장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내어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인류 앞에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단일행성종으로 남아 언제가 다가올 멸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중행성종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탐험과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시야를 지구라는 좁은 땅에서 우주라는 넓은 공간으로 넓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땅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자손들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질서와 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낯설고 거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습니다.” 어부는 그물을 손질하여 고기를 잡은 것이 직업입니다.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 됩니다. 조상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후손들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어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입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길입니다. 단일행성종에서 다중행성종으로 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에 묶여서 살아가는 운명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멋진 세상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우주선을 타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능력과 업적으로 가는 곳도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가는 곳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 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를 떠났을 때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강대한 나라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유배를 떠나는 유대인들은 절망과 허탈감이 가득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하느님께서 징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고, 흩어졌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행복하게 살날이 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물 붇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고, 가족들과 대화를 하고, 책을 읽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피정을 하면서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본인만을 위해서, 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누군가를 시기하고 험담하면서, 음주와 도박을 하면서 시간을 사용합니다. 처음은 별로 표시가 나지 않겠지만 한쪽은 안전한 곳간에 재물을 쌓은 사람과 같고 다른 한 쪽은 깨진 독에 물을 부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안전한 곳간을 말해 주고 계십니다.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고난과 고통이 찾아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곳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재물은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빈소에 와서 울어 주기는 할 것입니다. 가족들은 장지에 와서 우리를 묻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끝까지 함께 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뿐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당신처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짐을 진
당신처럼
짐을 지고


멍에를 멘
당신처럼
멍에를 멥니다

 

 

 

특수학교 이야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내가 첫 파견지로 충주 교현동본당이었다. 1983년 1월부터 1984년7월까지 1년 반을 보좌신부로 살았다. 그리고 이곳의 본당주임신부로 다시 부임한 것은 1991년 2월 의 일이다. 1997년 7월까지 6년 반을 지냈다. 그러니 이 본당에서 모두 8년을 살았다.

 

본당 내, 학교가 있는데 '충주성심학교'로 가톨릭청각장애특수학교이다. 메리놀외방전교회 옥보을 요셉 신부님은 절대적빈곤 시대에 정규교육도 어려운데 2개의 특수학교를 1955년 전쟁 직후 설립했다.

 

또 하나는 가톨릭시각장애특수학교인 '충주성모학교'인데 충주 지현동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은 충주 호암동에 자리잡고 있다.

 

설립정신은 사랑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성경 모토가 인상적이었다.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복음 말씀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청각장애아동을 수화로 보고 말하게 하고, 시각장애아동을 듣고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교육을 담당했으니 그 교육의 동력은 죽은이를 살려내는 오늘의 성경말씀을 실천하며 살았던 교육자 신앙인들의 결실인 것이다. 청각장애아동의 수화와 시각장애 아동의 점자교육은 말하게 하고 보게하는 숭고함이 담겨있다. 6,25 한국전쟁으로 페허가된 상황에 장애아동교육은 심오한 하느님의 사랑인 예수님의 성심과 성모님의 성심이 바탕을 이루었으니 우리는 감사할 뿐이다.

 

첫 파견지 본당에서 마음에 새기고 산 오늘의 성경말씀 모토가 나의 성품성사를 풍요롭게 살도록 이끌어 주었다. 이곳 성당을 떠날 때에 나는 대안학교인 '양업고'의 설립을 마음에 담았던 것도 이 말씀 때문이라 여겨진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멍에는 예전에 우리가 소를 데리고 밭을 갈 때 소가 제대로 밭을 갈 수 있도록 주인이 잡고 함께 나아가는 운전대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소와 주인을 이어주면서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늘 그렇게 잡아주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커다란 배가 항해를 할 때 제일 밑바닥에는 ‘바닥짐’이라고 해서 무거운 화물짐들을 놓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닥짐이 있어야 행여나 풍랑을 만난다 하더라도 균형을 잘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바닥짐과도 같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짐은 내 인생의 균형을 잡아주는 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구원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통해 행복한 구원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율법을 지키려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악의 세력에 짓눌려 사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를 못해 절망해 버린 사람들, 또한 자신의 약함과 죄의 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세상을 건설하는 법,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법,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이것은 겸손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높이 올라가려 한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겸손이다. 건물이 높아지면 높이 질수록 그 기초는 그만큼 깊다. 기초가 튼튼한 만큼 건물도 튼튼하게 지을 수 있으며 높이 올라간다.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은 먼저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29절) 주님 안에서만이 이러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다면 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이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열성적인 이들에게 주님의 계명은 가볍다. 멍에는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것 때문에 파생되는 갈등이다. 이 멍에를 기꺼이 받아들이면 이 멍에는 이미 멍에가 아니라,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이 된다.

 

생명을 원한다면 누구나 부정과 악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그 멍에를 벗어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들게 보이는 것은, 세상의 욕망에 물든 마음은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그것을 충분히 이겨나갈 힘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우리의 능력 밖에서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 무게는 우리가 지지 못할 만큼 무거운 것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짐은 우리의 힘을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즉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천국의 멍에를 지도록 해야 하겠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멍에가 바로 나에게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다.

 

 

 

초월세계 입을 준비하며 삽시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도 세상사는 모습을 보시면서 참 피곤하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요새 보면 전쟁판 정치판 경제난리 폭우 지진 농사 등등 어렵습니다.
결혼 이혼 재혼 산아제한 아파트 값 음주와 흡연 성격차이 야단이죠.

사는 게 다 무거운 짐이라 안 질수도 없는 세상인생 쉴 곳 힘듭니다.
예수님께 가봤자 십자가 져라 용서하라 나누라 줘라 등 어렵다 네요.
하느님나라 아빠이신 하느님 형님이신 예수님 믿기도 어렵다는 거죠.

죽어 세상은 벗어도 영생이라는 초월세계는 입을 준비 했었어야지요.
목숨의 한계 벗어나면 지금껏 내 주체였던 내 혼은 어디로 가야하죠?

 

 

 

이근상 시몬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가벼운 멍에. 주님께서 생을 건 약속이다.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내 멍에(주고스)'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주고스는 둘로 이루어진 쌍을 뜻한다. 해서 천칭저울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멍에의 뜻으로도 쓰인데 이 때 멍에는 두 마리의 소를 연결하는 멍에이다. 소 한마리에 단독으로 걸어서 쓰는 멍에는 복음에서 쓰이는 주고스란 단어를 쓸 수가 없다. 내 멍에로의 초대는 멍에의 한쪽은 당신이 걸터어니, 나머지 한 쪽을 감당하라는 초대다. 복음은 그 때 그 멍에가 가벼우리라는 약속이다.

 

멍에의 한쪽을 당신께서 매고 계시나 나머지 한 쪽이 비어있는 상태. 믿는 이들의 '죄'란 바로 있어야 할 자리, 그의 멍에 한쪽을 비워두는 것. 인간은 참으로 신비하여 어깨가 무거워서 죽지 않는다. 우리를 죽이는 칼, 우리의 지옥은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은 가벼움. 가벼움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사랑하지 않을 때 거기가 지옥이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각자에게 그 정도와 무게의 때가 다를 뿐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지요.
분노와 질투, 고난과 불안
두려움과 격노와 분쟁에 휩싸이는 우리에게(집회 40,4)
당신은 마음의 안식을 말씀하십니다.
믿음 안의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내적 평화로 초대해 줍니다
당신의 말씀의 지혜를 배우고
기도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해 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light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함승수 신부님

어렸을 때 북한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올라가는 내내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되었고, 봉우리에 이르러서는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채 미끄러운 바위를 기어오르고, 때로는 바위 사이의 작은 틈을 낑낑거리며 통과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하며 정말 ‘죽기살기’로 올라갔지요.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의 경치는 참 인상적이었지만 올라가는 길이 너무 고생스러워서 ‘앞으로 이 산은 다시 안오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북한산의 해발 높이가 ‘겨우’ 727미터라고 합니다. 천 미터도 안되는 작은 산이 그렇게 오르기 힘들다면 그보다 더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은 당연히 그보다 더 힘들겠지요?

 

그런데 북한산보다 여섯 배 더 높은 산인데 오르기 전혀 힘들지 않은 산이 있답니다. 스위스에 있는 ‘융프라우’라는 산입니다. 그 산의 높이는 4158미터나 되지만 정상까지 열차를 타고 편하게 갈 수 있기에 올라가기가 전혀 힘들지 않은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산의 높이가 아니라 산에 오르는 방법임을, 마찬가지로 우리 삶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고통과 시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고 극복하는 방법임을 말입니다. 그러니 고통과 시련 자체만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지 말고 그것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며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하겠지요.

 

주님은 그 방법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멍에란 소가 쟁기를 좀 더 안정적이고 수월하게 끌 수 있도록 어깨 위에 메주는 보조도구입니다. 멍에의 존재 이유 자체가 무거운 짐을 지게 하기 위함이니 소의 입장에서는 그런 멍에가 좋게 보일 리 없습니다. 멍에만 보아도 곧 짊어지게 될 무거운 짐이 떠올라 몸서리를 칠 것입니다. 그러나 ‘소’라는 존재로 태어난 이상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쟁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영화 <워낭소리>에 나오는 소처럼 주인을 위해 죽는 날까지 쟁기를 끄는 자기 소명을 다하는게 소라는 존재에게 부여된 숙명이기 때문입니다. 어깨에 멍에 메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그 숙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맨 어깨로 무거운 쟁기를 끌고가면 그만큼 고통이 더 커지고 더 힘들어질 뿐이지요. 그러니 좋든 싫든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멍에를 메야만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습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인간’이라는 존재로 태어난 이상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인간으로써”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들이 힘들고 싫다고 거부한다면 그 일들에 묶여있는 나의 존재까지 부정하게 되지요. 그렇기에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서의 소명을 안할 수 있을까?’하고 불가능에 기대기보다, 어떻게 하면 그 소명을 좀 더 수월하게, 편하게, 기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게 훨씬 더 지혜로운 선택일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라고 하시는 ‘멍에’의 정체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마지못해서, 불평 불만을 늘어놓으며, 누군가를 원망하고 탓하면서 짊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기에 기꺼이,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의 마음으로, 그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쁘게 짊어지셨습니다. 그랬기에 그 십자가를 그저 무겁고 고통스럽다고 느끼지 않으시고, 좀 더 편하고 가볍게 지실 수 있었지요.

 

예수님은 당신 멍에의 특징을 ‘겸손’과 ‘온유’ 두 단어로 설명하십니다. 나의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한계, 죄스럽고 못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소명’은 결코 아프고 싫은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고통과 시련 중에도 나를 배려하시고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하는 사랑의 표징으로서 나에게 위로와 힘을 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 위에 짊어진 삶의 무게는 가볍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다들 너무나 바쁘게 살아갑니다. 초등학생들은 학교, 학원 다니느라 바쁘고 중고등학생들은 입시 전쟁, 청년들은 취업 전쟁에서 몸과 마음을 쥐어짜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쉴 새 없이 일하고 어르신들은 자식들 걱정, 또 병환 때문에 힘겹게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예수님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한” 분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 가까이 오시고, 하느님의 사랑을 내어 주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분께서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안식이 필요합니다. 세상 걱정에 찌들어 지내라고 태어난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나에게 오너라.”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한 걸음 나아가면 우리는 평화를 얻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면 우리는 행복을 얻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북돋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분 말씀의 힘으로 살아갑시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어릴 때 학교에서 돌아와서 집 초인종을 누르면, 안에서 “누구세요?”라고 물을 때, “나야!”라고 대답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면 집안 식구 누구나 제 목소리를 알아듣고 문을 열어줍니다. 내가 ‘나’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나의 가족들이고 나의 친지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목자와 양, 가족과 친지들과 나, 그리고 주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사랑과 믿음, 친교 안에서의 일치로 설명하십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을 구하러 가라고 소명을 내려주시자, 모세가 백성들에게 가서 주 하느님의 이름을 대야 할 터인데, 무엇이라고 알려주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탈출기 3,13절 참조). 주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14절) 그러시고는 그 이름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설명하라고 하시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14절) 라고 이르십니다. 그러니까 주 하느님의 이름은 ‘나는 있는 나라고 말씀하시는 나’라고 풀어볼 수 있습니다. 마치 아비가 어미에게, 아비가 자식에게, 내가 가족에게 ‘나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믿음과 신뢰 그리고 그에 따른 친교 안에서의 일치와 확실한 앎을 전해 줍니다.

 

그리고 그 나라고 하는 하느님의 본질에 대해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15절) 라고 설명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어려움에 처해서 주 하느님께 애원하며 기도할 때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해 주시며 힘이 되어 주시고 그들의 염원을 다 들어주셨던 주 하느님! 그 하느님이 오늘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헤아려주시러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가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모아 놓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16-17절) 이집트에서 고통스러운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참으로 커다란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우리가 나기 전에 십개월 동안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이 어머니 태안에 있을 때, 우리가 하루를 보내고 지치고 돌아와 어머니 품 안에 안길 때의 그 포근하고 푸근한 순간을 기억합니다. 우리에게 그 이상의 무엇을 더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도 아니요, 우리의 고통을 모두 다 없애주시겠다고 하시는 것도 아니요,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과 고통을 대신 앓아주시겠다고 하시는 것도 아니건만, 어머니 품 안에 안겨 있을 때의 그 온전한 위로와 평안함의 순간을 우리는 주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느낍니다.

 

 

 

영원한 안식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쉼터가, 안식처가, 피신처가, 정주처가 없는 현대인들입니다. 딱히 머물 아늑하고 그윽한 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방황이요 혼란이며 불안하고 피곤한 삶입니다. 현대인의 궁극의 비극이자 불행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광야인생여정중 심신이 피곤하면 언제나 찾아 머물곳이 있는지요. 제 애송愛誦 좌우명座右銘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넷째 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이,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여기서 고백하는 자는 저일수도 있고, 수도원일수도 있고, 주님일수도 있습니다. 여러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영혼의 쉼터가 상징하는 바, 영원한 안식처, 영원한 피신처, 영원한 정주처인 주님입니다. 하느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 바로 우리가 궁극으로 머물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닮아감으로 내 존재 자체가 주님의 안식처가 되고 싶은 열망을 반영하는 시詩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시편90,1)

 

참 고마운 시편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이 영원한 안식처임을 제1독서 이사야서중 다음 아름다운 신앙고백시가 입증합니다.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오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주님,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했습니다.

 

아,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죽음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의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바로 이런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쉼터이자 안식처가 됩니다. 지상에 살면서도 이런 주님이 안식처가 될 때 비로소 내적 평화요 안정입니다. 부단한 파스카의 꽃같은 삶이 가능합니다. 참 아름답고 깊은, 영혼에 깊은 위로와 평화를 주는 신앙 고백시이자 기도입니다. 

 

이런 영혼의 고백 기도시가 사라져 영적으로 참 궁핍한 현대인들입니다. 이런 주님을 떠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헛된 노고가 됩니다. 주님 아닌 어느 누구도 영혼의 허기虛氣를 채워줄 수 없거니와,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주님 안에 머물 때 다음 고백대로 의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주님이 영원한 안식처가 된 의인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요! 바로 성인들이 그러했습니다. 휴식없는 평생 고통이 따르는 와중에도 깊은 평화와 기쁨, 감사가 넘쳤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안식처로의 주님의 초대가 참 고맙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영원한 안식처에로의 초대요 환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 성구는 제가 고백성사때 보속으로 참 많이 드리는 말씀 처방전중 하나입니다. 새삼 안식은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 안에 머물 때 선사되는 주님의 안식입니다. 안식만이 아니라 기쁨도, 평화도, 희망도, 행복도 주님의 선물입니다.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 안에 머물 때 하사되는 참 좋은 주님의 선물들입니다. 

 

결코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부단한 분투의 노력이, 필히 은총에 더해져야 합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지만 평생 항구한 분투의 노력을 요하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저절로 써지는 날마다의 강론이 아니라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비로소 은총의 선물처럼 탄생되는 강론에 저절로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바로 예수성심의 사랑이 온유와 겸손입니다. 참 영성의 잣대가 되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저절로가 아닌 주님의 학교에서 주님의 학인이자 전사로서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해 훈련해야 주님을 닮아 온유와 겸손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온유와 겸손은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평생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을 날로 닮아갈 때 불편한 내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내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점차 바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웃에게 참 좋은 주님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안식처가 쉼터가 없다 탄식할 것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어디나 영원한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막교부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고통은 은총의 문이며 시작이다.< 마태11/28-30.>7/1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배 고품은 음식을 찾아가는 길이며 아픔은 의사를 찾아 병을 고치는 문이며 시작입니다. 아담이 금한 과일을 먹고 죽음 의 고통을 놓고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 하거나 그런 하느님 계시지 않은다 하는 사람 있지만 죽음 노동의 고통 출산의 고통은 하느님 자바를 체험하는 문이며 시작입니다. 부활 전야 부활 찬미가를 부르는 노래말 속에 성 아오스딩게서 아담의 죄를 “ 오 복된 탓이요 그로써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구나.” 하며 하느님 사람이 되셨음을 찬미 찬양 하였습니다. 이같이 죄로 인한 고통이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는 큰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은 행복의 원천이시니 나에게 배워라 하십니다. 인생은 고난의 바다입니다. 만일 고난을 체험하지않으면 더 좋은세상을 준비하신 주님의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좁은 문인 죽음은 분명이 영원한 생명의 문이며 시작입니다. 죽음의고통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늙어 걷지도 못하고 세상 어는 구석에 딩굴며 다리를 끓고 힘 없이 팔을 흔들며 얼굴은 주름이 가득한 체로 허덕이며 살 것이데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을 준비하신 주님은 죽음의 고통을 통해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찾아 만나는 사람의 역사를 보면 모두가 고통을 통해 아버지의 집을 찾고 자비로운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 가정이 하느님을 만나 믿음의 삶을 살게 된 기회는 사춘여동생이 천연두에 갈려 죽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어디서 들었는지 성다에가면 사릴 수있다고 해서 성당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되어 데세를 받고 죽었지만 성당에 발을 들려 놓으며 하느님을 찾아 온가족이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6살 때 유아 세례를 받았지만 기초 교리를 배워야 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하늘의 문을 열고 믿음을 시작하였습니다. 2년동안 지금 사수동 분도수녀원에서 경영하는 해성 유치원에 다니며 신앙이 성장하기 시작하어 여기 까지 왔습니다. 바로 고통이 우리 집안을 주님에게 인도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도 아무런 고통이 없으면 자기 죄를 뉘우치며 잡로운신 하느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찾와서 저는 전에 시형수를 신자가 되게 하여 죽었는데 10명의 이름을 알려주고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전에 동생 수녀를 통해 대구 베자못 살인 사건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는데 그분은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 부인하다가 하느님을 알고 세례 받은 후 법정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여 열심히 신앙생할 하다가 사형 당하였는데 사형장에서 죽으면서 마지막에 할 말이 없느냐? 하니 “ 전에 하느님을 모르고 살 때 보다 지금 하느님을 알고 믿고 죽게 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 하며 “여러분도 하느님을 믿으세요“ 말하면서 사형장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음의 고통 앞에 하늘의문을 열고 들어가는 은총은 알고 믿기를 기도합니다. 미사 전에 소리 높어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기도소리인 자비 송이 온 세상에 울려 펴지도록 기도합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직
주님뿐이시다.

고집센 우리를
끌고갈 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주님의 멍에뿐이다.

우리를 살리는
멍에이다.

주님의 멍에는
우리 삶의
방향이
주님께 있음을
너무도 잘
가르쳐 주신다.

주님을 찾지
못한 수 많은
감정들이
멍에를 통해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

멍에를 메어야
회개를 배우고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멍에를 주신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한
참된 사랑이었다.

삶의 방향을
멍에를 통해
잡을 시간이다.

주님의 멍에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닌
우리를 매순간
품어주고 있음을
배운다.

멍에를 메어야
순종을 배우고
사랑의 질서를
배울 수 있다.

멍에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잊고 산
마음이 더
무겁다.

멍에의
출발점에서
다시 우리의
본성을 만나고
사랑의 참된
의미가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는
것임을 깨닫는다.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멍에이다.

주님께로
가는 아름다운
사람은
주님의 멍에를
지고가는
사람이다.

어떤 학생이 수능이 끝난 후에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자신의 자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상담사가 왜 자살을 시도했느냐 물으니, 자신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인생을 살아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아서 죽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이 수능 잘 보는 것으로 단정을 짓는 것이었지요. 수능을 망쳤으니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고 그래서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괴로운 상태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수능을 잘 보지 못했어도 우리 각자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역할은 단지 수능을 잘 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수능이라는 것은 소중한 ‘나’를 만들기 위한 수많은 과정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얼마 전에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문구류가 있었습니다. 좋은 문구류인데 서랍을 열어서 사용하지 않다 보니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서랍 구석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도 이렇게 서랍 속에 갇혀 있던 문구류와 마찬가지는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믿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도 잘 알고 계십니다.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쉽게 포기하고 좌절한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다시금 힘이 될 수 있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정말로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향해서 내게 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개선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향해 내가 도와주겠다고 오라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초대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충분히 배울 수 있으며, 충분히 고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충분한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랍 속에 두고서 사용하지 않은 좋은 문구류처럼, 단지 아직 그 힘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게 아니다. 보다 자기다워지는 것이다(린 홀).

 

자존감 높은 사람의 특징

1)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2)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미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원치 않는다면 고쳐 나간다.

3)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어도 여유가 있다. 불안한 사람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큰 분노를 느낀다.

4)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는다. 관계를 맺고 싶다면 맺고, 맺기 싫다면 맺지 않는다. 누가 어떻게 바라볼까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을 중심으로 행동한다.

 

어떻습니까? 나는 과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특징들입니다.

자존감이 밥 먹여주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존감이 나를 살게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것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해보면 밥 먹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라는 멍청한 자기운영 체계에서 벗어나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운영체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기러기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먼 곳을 여행하고 꿀벌은 꿀을 찾으며 개미는 여왕을 위해 일합니다. 각자의 운영체계에서 벗어나면 모든 생물은 생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인간도 처음에는 이 생존체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생존체계가 강하게 나를 지배할수록 인간관계가 힘들어집니다. 인간관계가 힘들어지면 행복이 깨집니다. 모든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우선은 인간의 이전 자기운영 체계를 벗어던져야 함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식 폴더폰만을 고집한다면 스마트폰의 체계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유식만 먹으려 한다면 맛있는 음식은 맛볼 수 없습니다. 이전 체계의 불편함을 알아야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아니면 동메달을 딴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미국 코넬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팀은 1992년 하계 올림픽 중계권을 가졌던 NBC의 중계자료를 분석했습니다. 메달리스트들이 게임 종료 직전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감정을 분석하는 연구였습니다. 분석이 가능했던 23명의 은메달리스트와 18명의 동메달리스트 표정을 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의 얼굴이 비통에 가까운지, 환희에 가까운지 10점 만점으로 평점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시상식에서 선수들이 겪는 감정을 분석했습니다. 분석결과 동메달리스트의 행복점수는 10점 만점의 7.1로 나타났습니다. 은메달리스트의 행복점수는 4.8이었습니다.

연구팀은 한발 더 나아가 은메달리스트와 동메달리스트의 인터뷰 내용도 분석하였습니다. 분석결과를 보면 동메달리스트의 인터뷰에서는 만족감이 더 많이 표출되었고, 은메달리스트의 인터뷰에서는 ‘아쉽다’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왜 은메달리스트가 동메달리스트보다 덜 만족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요? 바로 나를 지배하는 시스템 때문입니다. 이 자아라는 시스템은 ‘비교’를 좋아합니다. 남과 비교하게 만들어야 인간을 더 자신의 노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메달리스트는 금메달리스트와 자신을 비교하고, 동메달리스트는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시스템에 지배받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인 것처럼 당연히 지배당하며 살아갑니다.

‘나’ 중심적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온전한 인간관계를 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잘 되려면 상대를 이해해주고 배려해주어야 하는데 ‘나’라는 시스템은 자기 우선으로 생각하게 만들기에 이기적 인간이 되게 합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에서는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대학생 두 명을 한 조로 짝지어서 한 명에게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려서 어떤 노래를 연주하게 하고 다른 학생은 그 연주가 끝나면 그 노래 제목을 맞추게 한 것입니다.

노래를 손가락만을 두드려서 연주한 학생에게 연주가 끝난 후 상대가 자신이 연주한 노래의 제목을 알아맞힐 확률을 적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평균 50% 이상은 알아맞힐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들은 사람이 제목을 알아맞힌 결과는 2.5%였습니다. 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조: ‘프레임’, 최인철,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나를 지배하는 자기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생존만을 위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나를 모기로 만듭니다. 나를 살게 하도록 이웃의 피를 빠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스템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아주 단순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선 이전의 시스템이 고생스럽고 무거운 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아를 나로 믿어버렸기 때문에 그 시스템에 지배를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다른 시스템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소가 주인이 없다면 잡아먹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 사시고 곧 나의 나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는 시스템을 장착하게 됩니다.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갖기 위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나 자신이라고 믿었듯이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드립시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 

 

어떤 나라들의 장기기증 비율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평균 60%나 높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나라의 시스템은 장기기증을 하는 시스템이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지 않겠다고 신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른 나라들은 하지 않는 시스템이고 하고 싶다면 신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기기증 신청을 받는 나라들은 20%가 장기기증을 한다면, 하기 싫은 사람이 신청하는 나라는 80%가 되는 것입니다.

각 나라에 사는 사람은 그 나라의 시스템 때문에 특별한 노력도 없이 이웃에게 자신의 장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내가 어느 나라 시민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라고 믿는 사람과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멍에로 메었다고 믿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가 납니다. 그분은 이제부터 뱀인 자아가 나가 아니고 당신이 나임을 믿게 하시기 위해 살과 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나’라는 멍청한 자아의 운영체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나는 나다’라며 오시는 그분이 진정한 나요, 나의 운영체계임을 믿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미 바뀌었습니다. 믿고 사용하기만 하면 안식을 얻으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차장 마당에 풀이 많이 자랐습니다. 풀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서 전지가위를 들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무릎이 아팠습니다. 모기는 기세 좋게 날아왔습니다.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겨서 인가 봅니다. 2달 전에 청소를 해 주시는 형제님이 마당의 풀을 뽑았습니다. 형제님은 커피를 마시면서 쉽게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꽃의 이름을 몰라도 향기는 있습니다. 새의 이름을 몰라도 아름다운 노래를 듣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름에 집착하여 꽃의 향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새의 노래를 제대도 듣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산보를 하면서 이름을 모르지만 열심히 일하는 분들을 봅니다. 도시가스를 교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가정에서 편하게 요리할 수 있습니다. 잔디를 깎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마당을 볼 수 있습니다. 쓰레기를 치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깨끗한 마을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직업이나 직책이라는 옷을 벗으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피부색이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직업이라는 편견도 버려야 합니다. 종교라는 ‘틀’에 갇혀서도 안 됩니다. 꽃밭의 꽃은 저마다 향기를 내듯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향기를 내는 겁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눈, 귀, 코는 정보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행동으로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눈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고, 귀로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코로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입, 손, 발입니다. 우리가 입, 손, 발을 잘 다스리면 권력을 가지지 못했어도, 큰 재물이 없어도, 명예를 지니지 못했어도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고, 존경을 받으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들의 곁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셨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진 많은 사람들은 그릇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길, 재물의 길, 명예의 길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사랑의 길, 희생의 길, 나눔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안내 해 줄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누군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고 싶다는 뜻으로 ‘사명’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가톨릭 신앙인이다.’ 이 말에는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서로 메어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면서 메야 할

수많은 짐들 중에

가장 무겁고 힘겨운 짐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지우는 사람 따로 있고

메는 사람 따로 있다면

 

그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일까요

 

미우니 고우니 해도

무거우니 가벼우니 해도

 

나는 너를 메고

너는 나를 메고

그렇게 서로 멘다면

 

그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지요

 

그러니 말이지요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고

미안해하지 말아요

부담스러워 말아요

 

다만

누군가를 기꺼이 메어요

그 사람 미안해하지 않게

그 사람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어차피

나는 누군가의 짐이요

누군가는 나의 짐인 걸요

 

그러니

온유하고 겸손하게

그렇게 서로 메어요

 

그리하여

서로를 편하게

서로를 가볍게 만들어요

 

그리하여

사람이 되어요

사람 사는 세상을 이루어요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2020. 7. 16. 목)(마태 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은 전부 다 사람들이 메고 있는 멍에와 지고 있는 짐을 없애서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일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16-17).”

마귀들과 온갖 질병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억압하는 멍에들과 짐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과 마주칠 때마다 그것들을 모두 쫓아내셨고, 병자들이 당신께 오면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오늘날에도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병원에 가서 치료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되지만, 기도하는 일은 더욱더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의 생살여탈권은 의사가 아니라 주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멍에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멍에인 줄 모르거나, 멍에라는 생각을 못하는 멍에가 있고, 그래서 그 멍에를 벗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19장에 나오는 어떤 부자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는데(마태 19,16), 그가 말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영원하고 참된 안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그에게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태 19,17-19).

하느님의 십계명은 인간들을 억압하는 족쇄나 멍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와 안식을 주는 열쇠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 부자는 자기가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말하면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마태 19,20). (부족한 것은 십계명 자체가 아니라, 그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이 말씀은,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 멍에를 벗어버리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은 “영원하고 참된 안식을 얻기를 바란다면” 으로,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는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로,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라.”로,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는 “영원하고 참된 안식을 얻을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일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이 바로 그가 메고 있는 멍에라는 것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 멍에를 벗어버리는 방법은 그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애착심을 버렸다면 재물은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재물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애착심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위선입니다.

그 부자는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그리고 영원하고 참된 안식에 대한 희망도 버리지 못해서 ‘슬퍼하면서’ 떠났습니다(마태 19,22). 둘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또는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멍에를 벗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고, 멍에를 벗기 위한 열쇠를 주시는 분입니다. 직접 멍에를 벗는 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감옥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시는 분이고, 그 열쇠를 받아서 감옥 문을 열고 걸어 나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이 멍에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도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재산이 많으면 그것으로 선행을 많이 실천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많은 재산을 꼭 멍에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재물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로 겉으로만 실천하는 사랑은 위선일 뿐입니다. 선행 실천(사랑 실천)은 재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가 슬퍼하면서 떠나간 뒤에,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19,23-24).

이 말씀은, “부자는 부자인 채로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입니다. (멍에를 멘 채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그 나라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멍에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에서 ‘내 멍에’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새로 주시는 어떤 멍에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온갖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한 ‘자유의 열쇠’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말은, 그 ‘자유의 열쇠’를 받아들여서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멍에들을 벗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그 ‘자유의 열쇠’가(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이) 경우에 따라서 조금 무겁게 느껴져도, 무겁다고 불평할 수 있을까?

무겁든지 가볍든지 간에 열쇠는 열쇠이지 멍에가 아닙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2월 세계 병자의 날에 오늘 복음의 이 말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를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하시면서 이렇게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쇠약하고 고통 받고 힘없는 상황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예전에 가끔 평택 안중 시골 삼촌댁에 들리게 되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큰 어머니께서 꼭 맛있는 식사를 손수 준비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큰 어머니는 비록 많이 배우시지는 못하셨지만 참 신앙이 깊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외모가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닮아서 세례명도 데레사이셨습니다. 큰 어머니는 행여라도 제가 그냥 댁에 들렸다가 인사만 드리고 가려고 하면 ‘밥 먹구 가셔’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밥을 차려서 주시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큰 어머니가 저에게 전해주셨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렇게 조카 신부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 주고 싶은 진솔한 사랑이었습니다. 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다시는 그분이 차려주시는 정성스러운 시골 밥상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참 서글프게 느껴졌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 무엇을 나누어주고 받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행여나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잣대만을 들이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진정 서로에게 전해주어야 할 것은 바로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어린시절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워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먹는 것은 초근목피요, 거기다 무거운 짐을 져보라! 힘쓰겠는가? 그 이야기도 먼 옛 이야기가 되어있다. 보리밥을 꽁보리밥이라 해서 그것도 춘궁기는 요기 정도, 쌀밥에다 고기국 한번 마음껏 먹어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보리밥이 별미라며 찾아가 먹으니 격세지감이다.

 

고생을 설명할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 고생이다 싶었다. 모두 짐을 운반할 때, 지게로 했던 시절, 양 어깨에 멘 짐이 무거웠으니 무거운게 어떤 것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것을 몸으로 떼웠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 절정은 이집트왕 파라오의 폭정 시절이었다. 얼마나 이스라엘이 노예생활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생이고 무거운 짐이었을까?

 

경제가 살아나고 먹고 살만해지니 지금이 고생이고 무거운 짐을 졌다며 자기 수준으로 호들갑 떨며 말하고는 몹시 힘들어 한다. 사실 먹고 사는 문제가 상대적이니 고생과 무거운 짐은 여전하다. 캥거루 족이 생겨나며 ‘취른’(취업 안 된 어른)도 부모도 고생이며 무거운 짐으로 작용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린’(취업 된 어린 젊은 이)이 쉽게 될 줄 알았다. 그것이 완전 빗나갔다. ‘취른’의 3,40대 젊은 이들로 고민이 깊어지고 그로 인해 가정이 행복하지 않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참 그랬으면 좋겠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직장도 인맥도 생겨날 것으로 생각했다. 성당가면 돈주냐? 밥주냐? 뻣대며 신앙생활의 기초도 없이 젊은 시절을 지냈다. 대학 졸업하고 세상 속에 뚝 떨어져 보니 기댈 친구도, 기댈 하느님도 없다. 격랑의 세파와 고도만이 나를 찾아와 괴롭히니 자기만이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했으면 했는데 열등의식이 그것도 자신이 없다. 지게질도 없이 편하게 지내며 공부가 어렵다고 했으니 멍에가 무엇인지 배우지도 못했다. 배우고 컷으면 자발성을 길러 목표를 세우고 목적인 행복을 향해 살았을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9-30).

 

어린시절, 성당마당에서 예수님과 함께 놀았다. 신부님도 숱하게 만났고, 믿음 안에 친구들도 많았다. 이 학교, 저 학교 친구들도 만났다. 온유와 겸손을 배웠고 인성이 커가고 자발성과 자기 주도성도 커갔다. 풍요함으로 채워주셨고, 고생과 무거운 짐은 예수님께서 나 대신 메 주셨음을 알게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안식을 산다.

 

똑똑함과 지혜롭다는 사람들에게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시절을 살았던 나에는 하느님을 보여주신 것이다. 너무 약삭빠르게 살지 말았으면 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안식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예수님은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스럽게 이 지상의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걸 아십니다. 당신 친히 세상에 오셔서 몸소 보고 겪으신 까닭에 그야말로 생생하게 아시는 겁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예수님께서 그 해결책으로, 세상 짐을 내려놓고 당신 멍에를 메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렇다고 먹고 사는 일, 개인 차원에서 관계적 의무를 다하는 일, 사회적 차원에서 세상에 기여하는 일을 다 내팽개치고 나몰라라 하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인간으로서 기본 도리와 권리는 챙기되, 영혼을 좀먹고 마음마저 끌어내리는 세상 짐에 매몰되어 허덕이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세상의 짐보다 주님의 짐이 더 가볍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믿어야지요. 하지만 과연 진짜 그런지 헷갈리는 이도 있을 겁니다. 말씀하시는 분만 보고 그저 철썩같이 믿거나, 용기를 내어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수긍할 수 있는 진리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신앙 고백의 시가 흐릅니다. 예언서의 추상같은 심판에 익숙했던 우리의 귀와 마음을 부드럽고 평화롭게 어루만져 주는 듯하지요.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이사 26,9).

한 영혼의 감미로운 사랑 고백입니다. 이 속삭임은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뿐 아니라 주님의 마음도 부드럽게 어루만져드릴 것 같지요. 당신 피조물에게 모든 걸 다 쏟으시고도 번번이 외면받고 배신 당하는 주님께서 당신 신부인 인간들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생명을 부여받아 이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우리의 바람과 소원이 이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 가지려, 이기려, 딛고 올라서려, 무너뜨리고 차별하고 내치려 온갖 근심 걱정 불안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가 주님의 평화를 얻고 안식을 누리는 길이란 실상 이것밖에 없습니다.

늘 주님을 기억하고 사랑으로 그분 이름을 부르는 것, 밤낮없이 주님을 열망하는 것, 존재 안팎으로 주님을 간절히 바라는 것, 그분을 목말라하는 것, 그분 음성과 어루만짐을 그리워하는 것, 그분 향한 사랑으로 사위어 가는 것, 주님 향한 사랑 때문에 고독도 위안도 가림 없이 받는 것,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메워주시는 멍에요 주님의 짐입니다. 이 멍에와 짐은 세상 짐과는 달리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을 소유한 이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라 하지요... 주님만 바라면 나머지는 그분이 해 주신다고 하지요... 편하고 가벼운 주님의 짐을 짊어지면 평화와 안식을 얻는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 모든 축복은 오직 그렇게 믿는 이의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몸을 던진 이들이 누리는 행복이지요.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한 모든 일도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입니다"(이사 26,12).

우리가 이룬 모든 것이 실상 우리를 위해 하신 주님의 업적이라고 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 혼자 힘인 줄 알고, 무겁고 고생스런 세상 짐을 거머쥐고 죽을 힘 다해 주위를 다 밀쳐내면서 도끼눈에 싸움닭처럼 살아왔다면 참 허무한 노릇이지요. 가볍고 편한 주님 멍에와 짐을 지고 왔어도 여기였을 것을 말입니다.

 

"저희가 한 모든 일도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제 예언자의 겸허한 기도에 우리의 마음도 함께 얹어 주님께 올려드립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당신의 사랑이니 우리는 그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따르면 그만입니다. 세상 근심에 주님께 향해야 할 영혼을 빼앗기지 않기를, 세상 욕망에 주님만 바라봐야 할 시선을 빼앗기지 않기를, 세상 평가에 주님께 내맡겨야 할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존엄한 인간 나의 고향은 천국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세상 속세 재물권력 외 물질영역 안에서 뒹굴며 살아온 내 인생입니다.

개발욕심에 자연오염 돼 코로나균이 인류를 덮쳤나보다 말하게 되네요.

악성 균 득실한 세속에 말려들지 말고 하늘 뜻 청정 삶에 젖어 삽시다.

 

물품배송 비대면 인 지금 예비자교리 신앙재교육 비대면도 아주좋아요.

아는 사람하고만 통하는 좁은 환경 말고 공감하는 넓은 사이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면위주로만 말고 인터넷 세상 비대면도 좋습니다.

 

사이버에서 예수님 냄새나는 분위기에 머물며 하느님가족 기분 느껴요.

십자가 앞에 예수님과만 조용히 마주 앉아 그간 못했던 이야기가 많죠.

정치 경제 문화 등 세상의 많은 소재들을 들춰가며 솔직하게 얘기해요.

 

이 세상 어떤 조건에서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느끼면서요.

초자연 영혼이 주체인 존엄한 인간인 내 고향천국 이란 걸 되새기면서.

 

 

 

삶은 짐이 아닌 선물.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수도원 배밭 곳곳에서 끊임없이 하늘 향해 타고 오르며 폈다 지는 야생화 메꽃들입니다. 그대로 수도자들의 하느님 찾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상징합니다. 아주 예전에 애송했던 자작시 메꽃이 생각납니다.

-“이가지 저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 피어내며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들!”-1997.8.21

삶은 짐인가 선물인가?

화두같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소재로 하여 참 많이 강론을 했습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그러나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선물같은데 잘 들여다 보면 짐인게 또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부분 많은 이들이 삶의 짐으로 힘겨워합니다. 하여 인생고해人生苦海라는 말도 있습니다.

결론하여 믿는 이들에게 삶은 짐이 아닌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단 주님의 초대에, 환대에 응답하여 주님과 함께 살 때입니다. 바로 이때 삶의 짐은 선물로 변합니다. 바로 이에 앞서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초대에 응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신앙고백의 시가 참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찾는 갈망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절실하여 많은 부분 그대로 인용합니다. 글이든 말이든 삶이든 기도든 참으로 절실하면 진실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여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참 아름답고 깊은 신앙고백의 시이자 기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들 누구나가 공감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영혼의 갈망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야 살아나는 영혼입니다. 영혼의 무한한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영혼의 한없는 갈망은, 허기虛氣는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 영혼은 결코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런 갈망의 목마른 사람들을 당신의 배움터에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할 때 무거운 고해인생苦海人生은 축제인생祝祭人生으로 바뀌며 안식의 선물입니다. 짐은 변하여 선물이 됩니다. 그러나 저절로의 안식이 아니라 주님의 배움터에서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이래서 하느님께 대한 갈망에 이어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글입니다. 주님의 배움터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평생 예수 성심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웁니다. 순리에 따를 때 경지에 도달합니다. 바로 평생 온유와 겸손의 순리에 따라 살 때 경지에 이릅니다.

점차 우리의 불편한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바뀌고, 우리의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바뀝니다. 온유와 겸손의 수행으로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 때의 은총입니다. 하여 우리의 짐은 점차 주님의 선물로 변합니다. 아,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두입니다.

말 그대로 예닮여정의 축복 은총입니다. 그러니 예언자 이사야처럼, 시편의 사람들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배움터에서 온유와 겸손을 배울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평생 주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이 이래야 합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삶의 영적 전쟁터에서 평생 싸워야 하는 평생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듯,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의 배움터에서 평생 온유와 겸손을,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배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죽어야 제대이고 죽어야 졸업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새롭게 배움의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멀리 밖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가 삶의 영적 전쟁터이자 주님께 배우는 삶의 배움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온유와 겸손을 닮게 하시고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시며 당신 찾는 배움의 여정에 항구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마리아는 아드님을 육신에 잉태하시기 전 마음에 이미 잉태하셨습니다.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 (Sermo 1 in Nativitate Domini, 2. 3: PL 54,191-192)

하느님께서는 다윗 왕가에 속하는 한 동정녀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간택하셨습니다. 그 동정녀께서는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신 아드님을 육신에 잉태하시기 전 마음에 이미 잉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을 잘 몰라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놀라운 일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한 천사가 동정녀께 그 계획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설명을 듣고 천주의 모친이 되신 그분께서는 이 일이 동정을 잃지 않고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셨습니다.

 

지존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 일이 일어나리라는 약속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새롭고 신기한 잉태에 실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동정녀의 믿음을 더 굳게 하고자 천사는 전에 있었던 기적을 상기시키면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엘리사벳의 잉태로써 그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인이 아기를 가질 수 있게 하신 하느님께서는 동정녀께도 아기를 갖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게 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를 통하여 만물이 생겨났으며 그 없이 생겨난 것이 하나도 없는 하느님이시요 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말씀께서는 사람을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시키고자 당신 자신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비천함을 취하시고자 당신 자신을 낮추셨을 때 원래 지니신 엄위를 감소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지닌 것을 그대로 간직하시고 아직 지니지 않은 것을 취하심으로써 아버지 하느님의 본성과 동일한 본성의 모습을 참된 종의 모습과 일치시키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유대로써 두 본성을 일치시키실 때 당신께서 받으신 그 영광은 이보다 낮은 인성을 흡수해 버리지 않았고 또 취하신 인성은 이 보다 높은 신성을 낮추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각 본성은 자신의 고유성을 모두 간직하면서 한 위격 안에 일치하여 엄위가 비천을, 권능이 나약을, 영원성이 사멸을 취했습니다. 인간이 진 빚을 갚아 주기 위해 모든 고통을 초월하는 본성이 우리 고통받는 본성과 일치하여 참된 하느님과 참된 사람이 한 주님 안에 일치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분께서 한 본성으로 인해 죽으실 수 있었고 다른 본성으로 인해 다시 일어나실 수 있게 되는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구원이 되신 분의 탄생은 성모의 동정성에 아무런 흠도 내지 않고, 오히려 진리이신 분의 탄생은 그 동정을 더 완전히 보호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그러한 탄생은 “하느님의 권능이시요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께 알맞는 탄생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인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같은 처지에 계시면서 또 한편 당신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보다 훨씬 위에 계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참된 하느님이 아니셨다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었고 또 참된 사람이 아니셨다면 우리에게 모범이 되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주님의 탄생을 보고 기뻐하며 노래합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천사들은 천상 예루살렘이 세상의 모든 백성들로부터 세워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도 위대한 피조물인 천사들이 하느님 자비의 이 놀라운 업적을 보고 기뻐 용약했다면 지극히 비천한 피조물인 사람들은 더욱더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성전에서 중앙복도를 걸으며 묵주기도 20단을 바칩니다. 분심잡념 속에 바치면 1시간이 모자라지만, 분심잡념 없이 집중하여 바치면 40여 분 만에 그치고 말아 시간이 남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충분히 돌보지 못한 분들을 기억하며 성모송을 바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참으로 이 말씀은 언제 어디서 접하든 우리의 마음을 평안케 해주고 모든 근심 걱정을 다 씻어 주시는 듯한 느낌 속에 잠기게 해줍니다.

 

어제, 묵주기도를 마치고 우리에게 주님 사랑을 아낌없이 퍼주고 하염없이 안아주고 계신 주 예수님께 이런 감사기도를 올려 드렸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깨우쳐 주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돌봐주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채워주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섭리로 이끄시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은총으로 안배해 주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편한 삶은 없다. <마태 11, 28-3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유명한 사람이든지, 십자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런 사람 행복하겠지.’ 하지만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는 말과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고 하는 말은 일생 굽이굽이 위험, 두려움,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하고 부르십니다.

 

“하느님 자비롭고 완전하신 분이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도록 버려두십니까?” 묻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려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려고 당신 곁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를 찾아 만나는 사람은 안식을 주겠다.” 하십니다.

 

온갖 정신적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주님의 십자가 의미를 깊이 알고 깨닫게 되면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심 같이 편하게 지고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힘이 각자의 마음을 통해 내려지고, 가난한 마음을 지니고 살면 견디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와 자애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사랑하시어 모든 짐을 가볍게 해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무거운 짐도 가볍고 부드럽고 순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지난날 본당 신부 하다가 3년 동안 수도원 안에서 살면서 순심 학교 종교 선생을 할 때 하루에 수업 시간이 오전, 오후 있어서 종일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본당 신부 하면 일하고 쉬는 시간 마음대로 조종하며 사는데 시간에 매여 사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사순절 금요일 6시간 수업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본당 신부 때 생각하면서 장상에게 청하여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본당 발령을 내주지 않으면 교구신부가 되겠다.” 청하는 편지를 써서 장상의 편지함에 넣고 성당에 가서 주님께 기도하려고 들어가 마침 금요일이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다가 9처에 와서 주님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하다가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생각하고 “주님! 가시던 길 끝까지 가세요. 아니면 우리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하고 말하니 주님께서 “너는 어떻게 하려고 하는데” 이 말씀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즉시 기도를 중단하고 장상 방으로 가니 아직도 거기에 편지가 있어 편지를 자리에서 찢고, 기도를 마치고 45년을 행복하게 어떤 일이든지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겸손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자기 전 존재가 하느님 손에 있고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믿고, 바라고, 사랑하고 있어 모든 짐은 가볍고 편해집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고통을 주님처럼 사랑하며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늘 십자가를 사랑하도록 기도합니다.

 

 

 

참된 쉼의 의미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요즘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피곤하다’는 말을 합니다. 능률과 성과를 내고자 쉴 틈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쉰다는 것이 경쟁에서 뒤쳐지거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끼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리고 참된 안식을 얻으려면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고’. 그런데 그분의 생이 편안하고 순탄한 삶이 아닌데 어떻게 그분에게 안식을 배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 삶에 중요한 두 가지를 일깨워주십니다. 먼저 우리 삶은 하느님을 떠나 평화를 누릴 수 없고, 인생에서 겪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식과 육신의 병, 불의의 사고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죽음의 공포 같은 고통을 껴안고 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넘어 영원하신 하느님에 대한 희망 속에 사는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순명을 통해 누리신 참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지만, 부활의 희망 속에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기에 참된 안식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사제로서의 삶을 살다보면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여서 제 자신이 다 쓴 배터리처럼 '방전'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보통 3-4개월 정도에 한번씩 그런 때가 찾아오는데, 그럴 땐 휴가를 내서 조용한 장소를 찾아 머무릅니다. 그곳에서 내가 짊어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편안히 쉬면 방전되었던 체력과 정신이 조금씩 회복됨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런 '휴식'시간이 저 자신을 온전히 다 채워주지는 못하나봅니다. 휴가 마지막 날 본당으로 다시 돌아와 밤이 되면, '그동안 열심히 쉬었으니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일하자'라는 의욕보다는, '내일부터 다시 힘든 일상이 시작되는구나'라는 막막함과 '내가 잘 해 나갈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더 큰 것입니다.

 

힘들게 일을 하시는 분들은 아마 저와 비슷한 마음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군인들이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날이 '휴가 마지막날 밤'입니다. 직장인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때는 '주일 저녁 시간'입니다. 내가 하던 일을 내려놓고 보고픈 사람들을 만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힘들까요?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나를 온전히 채우는 '참된 안식'이라는게 정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런 것이 정말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얻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 우리를 이런 말씀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안식'을 주시겠다는 말에 귀가 쫑긋 세워집니다. 대체 어떤 '안식'을 주실지, 어떤 안식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실지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안식'은 '쉼'에서 온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는 말씀입니다. 안식을 주신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왔는데, 당신 멍에를 메라고 하시니, 그 멍에를 어떻게 메야할지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하시니 김이 빠집니다. 그러나 '참된 안식'을 얻는 길은 하기 싫은 일,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무작정 내려놓고 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은 내 마음대로 잠시 중단할 수 있어도, 우리의 '삶'이라는 여정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괴롭다고 아무때나 내 어깨 위에 놓인 멍에를 내려놓고 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멍에만, 내가 원하는 만큼만 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아도 우리 삶에서 '쉬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지요.

 

그렇기에 멍에를 내려놓는데서 안식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멍에를 메는 것 자체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이 멍에를 메시는 마음가짐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마음가짐은 그냥 '멍에'와 '내 멍에'를 구분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나와 상관없는 '남의 것'을 억지로 끌고가는 자세에서 벗어나, 그것을 '내 멍에'로, 내 삶의 일부로, 하느님께서 특별히 나에게 주신 선물로 기꺼이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러면 멍에를 지고 가는 일이 더 이상 나에게 고통스럽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이유'를 찾게 되고 '의미'를 찾게 되면서 하느님께서 '내 멍에' 안에 어떤 선물을 담아 주셨을지 기대하며 찾게 됩니다. 멍에를 메고 가는 일 자체가 나에게 '안식'이 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얻을 것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원래 "찾다", "발견하다"라는 뜻입니다. '참된 안식'은 누가 주는게 아니라, 이렇듯 내가 노력해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라고 말씀하심과 동시에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삶을 살아가며 “짐”이라는 굴레에서 면제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짐을 져야 하고 자신의 멍에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앞선 예수님의 말씀은 이에 더해 우리가 주님의 멍에까지 메고 끌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다소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멍에는 나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주는데, 또한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는 그토록 무겁고 괴로운 것이었음을 알고 있는데 그 멍에가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시니 우리의 어려움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사제서품을 앞두고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잠시 내려 광야체험을 하는데 쏟아지는 햇살과 건조한 공기가 저를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광경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어미 나귀가 어린 나귀와 함께 멍에를 메고 천천히 수레를 끄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함께하던 가이드 분이 그 모습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수레를 끄는 것은 전적으로 어미의 몫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미의 멍에가 어린 나귀의 목에 연결되어 있는 이유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나귀가 수레를 끄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사실상 수레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것은 어미 나귀였습니다. 어린 나귀는 그저 줄에 묶여만 있어 어미 나귀를 따라가기만 하는 구조였습니다. 새끼 나귀는 멍에를 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수레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그저 어미 나귀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생각해보면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이해가 됩니다.

결국,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여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멍에가 가볍거나 쉽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고 그것을 먼저 짊어지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짐은 때로는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광야에서 봤던 어린 나귀의 멍에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수레의 무게를 느끼진 못할지라도 가냘픈 몸에 걸치고 있는 멍에는 그에게 충분히 버거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변함없는 사실은 곁에서 실제로 대부분의 무게를 감당하며 함께 걸어가는 어미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힘든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의 짐을 짊어지시며 위로와 힘을 주시는 분은 바로 우리가 따르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 각자의 멍에는 고통이 아닌 사랑으로 치환 됩니다. 비록 이 멍에가 우리의 삶을 구속하고 힘들게 만들지만 그것을 알고 돌봐주시는 분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대표됩니다.

주님은 인간 죄악과 죽음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위로를 얻으며 구원의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무거운 짐은 나 홀로 메고 있지 않고 하느님께서 함께 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힘듦과 버거움의 기로에 있다면 주님께서 분명 우리의 짐을 함께 지고 가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힘든 우리에게 참다운 위로를 보내주시는 분, 함께 아파하며 괴로워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러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짐을 짊어 지셨고 다른 사람이 떠미는 ‘죄악’이라는 짐을 손수 지고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힘겨워 하시며 천천히 앞장 서 걸어가십니다. 우리가 느끼는 멍에의 무게도 충분히 버겁지만 만약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 무게는 더더욱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아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병들고 죽어가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살리십니다.

 

주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주님안에

진정한 위로와

참된 쉼이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하는

참된 기쁨입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주님께 의탁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시간입니다.

 

의탁을 통해

온유와 겸손을

다시 만납니다.

 

생명은 이와같이

안식을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

맡겨드리는

믿음의

안식입니다.

 

믿음의 방식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먼저 마음을

깨우시고 마음을

살리시는 주님을

믿고 이 모든 것을

의탁합니다.

 

십자가가

무거울수록

더욱 깊어지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십자가조차

주님께

맡겨드리는

의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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