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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8월 15일 (백) 성모 승천 대축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08.15|조회수365 목록 댓글 0

제1독서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10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20-27ㄱ
형제 여러분, 20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24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27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의 표징을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의 맏물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다는 인사를 듣고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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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의 표징을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의 맏물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다는 인사를 듣고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른다(복음).

 

 

 

오늘의 묵상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종착점을 보여 줍니다. 그 종착점은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로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는 성모님의 승천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차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맏물”(1코린 15,23)이신 그리스도께서, 미완성의 상태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르게 될 완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다음 성모님의 승천이 구원된 이들의 미래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우리는 어떤 희망을 품고 있습니까? 삶의 많은 근심 걱정이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도, 한 달 후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들어 올려지신 성모님께서는 오늘 감사송에서 말하듯이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성장하시며, 천사를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시는 데에서 어려움을 겪으셨고, 그 계획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피난을 가시고 낯선 땅에서 사셔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삶에서도 이해할 수 없어도 그저 마음에 새겨야 하셨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나서야 하셨으며, 예수님의 죽음까지 보아야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 모든 미완성을 거쳐 가신 성모님께서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우리보다 앞서 하늘로 올라가셨기에, 우리도 우리의 삶 안에서 온갖 불완전함을 겪으면서도 하늘을 바라봅니다. 믿으셨기에 복되셨던 성모님처럼 우리도 믿음을 간직한다면 복될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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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엘리사벳의 집으로 갔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세상일 가운데 우리가 가장 서둘러야 하는 일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태 안에 모시고 그분과 함께 가십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은 그분들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구세주의 오심을 희망으로 기다려 온 이스라엘의 모든 의인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엘리사벳의 눈을 열어 주시어 성모 마리아께서 참된 계약의 궤,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알아보게 하십니다(43절 참조).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의 태 안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마음도 열어 주십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즐거워 뛰놀다’로 옮긴 말은 구약 성경에서 되찾은 계약의 궤를 보고 환호하며 다윗 임금이 뛰며 춤추는 것을 표현하고자 쓰인 말입니다(2사무 6,16 참조). 세례자 요한은 참된 계약의 궤 앞에서 다윗 임금처럼 뛰며 그분을 뵙는 기쁨을 표현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자신 안에 가두지 않으시고 그 넘치는 은총을 모든 이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전부터 교회는 성모님을 가리켜 “즐거움의 샘”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구세주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오르신 성모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벅찬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한 미래를 열어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그분께 나아가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한결같이 당신의 아드님을 따르는 모범을 보여 주시며, 분명히 우리가 참된 집, 영원한 우리의 본향으로 나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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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유람선을 탄 승객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보다 그날 식단과 놀 거리에 더 관심을 보인다고 합니다. “영원성을 삭제하면 지평선은 언제나 좁게 보인다.”라는 어느 이탈리아 주교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먼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들에게는 올여름에 어디 갈 것인지,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어떤 클럽에 갈 것인지, 오늘 저녁을 먹고 나면 무엇을 할 것인지가 더 흥미로운 관심사입니다. 이런 현상은 어른들 탓이 큽니다. 어른들의 생각과 삶 속에서 점점 ‘힘들지만 참는다’, ‘영원하다’, ‘결정적이다’ 등과 같은 말이 사라졌고, 그 영향이 젊은이들에게서 보이는 듯합니다. 
우리는 점점 ‘지속’, ‘충실’, ‘인내’와 같은 낱말을 멀리하려 합니다. 현재가 영원할까요? 현재를 영원한 것으로 믿고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한 여인을 소개합니다. 그는 한 아기를 낳은 빛나는 옷을 입은 여인입니다. 붉은 용이 이 여인을 적대시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그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하지만, 아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여인은 광야로 숨습니다. 이 여인은 명백히 교회를 상징합니다. 또한 구세주 메시아를 바라는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용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뱀을 떠오르게 합니다. 
모든 악이 폭력을 휘두르며 아기와 교회를 반대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교회는 아기를 지켜 내고 우리는 광야로 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귀의 시련과 유혹에 시달리겠지만 그가 우리를 죽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성모님께서 광야로 피신한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하늘에 올라가셨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성모님의 위대함을 알리는 진짜 이유를 알려 줍니다. 바로 그분의 믿음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믿음은 성모님의 온 생애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가 썩을 몸으로 끝날 인생이 되지 않게 하시리라는 것을 믿으셨고, 마침내 하늘로 불려 올라가시어 우리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인생입니까? 
우리가 탄 배의 종착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귀양살이하는 하와의 자손들이 슬픔의 골짜기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성모 찬송’ 참조)라는 말처럼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이 길의 끝은 성모님 생애의 끝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어머니처럼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인생이 거룩한 순례 길임을 믿으며 하늘에 오르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시다.(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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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전에는 ‘몽소 승천’(蒙召昇天)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승천(Ascensio, 상승, 올라감)은 능동적으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오르신 것이고, 성모 마리아의 승천(Assumptio, 올림을 받음)은 수동성, 곧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아 하늘로 올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1950년 11월 1일, 교황령 「지극히 인자하신 하느님」을 통하여 성모님의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치신 다음 영혼과 육신으로 천상 영광에 들어올림을 받으셨습니다”(신경 편람 3902항). “하느님의 고귀하신 어머니께서는 …… 마침내 당신 특전의 최상의 화관으로, 무덤의 부패로부터 더렵혀지지 않은 채 보존되셨으며, 또한 당신의 아들처럼 죽음을 완전히 이기시고서 육신과 영혼으로, 천상의 지고한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시고, 거기서 세세 대대 불사불멸의 왕이신 당신 아들의 오른편에서 여왕으로 빛나실 것입니다”(3903항).
성모 마리아 승천의 의미는 먼저, 하느님께서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이시며 성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하늘로 부르시어 그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심으로써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하신 것’(『가톨릭 교회 교리서』, 966항 참조)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모님의 승천이 언젠가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여 예수님의 천상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희망의 표지요 위안의 보증인 것입니다. 이 세상 순례의 여정에 있는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그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실제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이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당신의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교회 헌장 62항)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어머니께서 하늘 나라에 계시기에, 우리가 매 순간 그분께 도움을 청할 때, 그분께서 언제나 자애로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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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가 마리아에 대하여 믿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마리아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 신앙을 밝혀 준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487항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가운데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모 승천에 대해서도 966항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합니다. “마침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 거룩한 동정녀의 승천은 당신 아들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것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승천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30)라는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실현되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승천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 헌신적인 태도,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겪으신 몸과 마음의 수고와 시련의 삶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 안에 받아들여져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께 드리는 엘리사벳의 인사에 대한 응답으로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을 찬양하십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겸손함이 드러나는 이 노래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비천한 여종을 굽어살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도록 성모님께서는 맏물이신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오게 하셨고, 또한 재림하시도록 ‘가난한 이들’의 희망을 노래하셨기 때문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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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는 몸과 마음으로 하늘의 영광에 들어 높여진 마리아의 승천을 경축합니다. 제1독서는 천상 성소에 있는 계약의 궤와 용으로 표현된 악의 세력을 피하여 아기를 밴 태양을 입은 한 여인의 장엄한 표징으로 마리아를 회상합니다.마리아의 승천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의 표상 안에서 마리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왕권으로 보호를 받는 광야의 여정을 체험한 새로운 백성의 변화를 지탱하는 교회 안에서 전형과 본보기로 있습니다.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물로 되살아나신 뒤에는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 곧 그분을 믿고 생명을 얻은 이들이 뒤따릅니다. 그들 가운데 첫째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며 예수님의 삶과 수난과 죽음에 긴밀한 방식으로 결합된 마리아입니다.오늘 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승천이 아닌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리아는 동정의 몸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동정의 마음으로 그분을 낳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몸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통하여 그의 마음에 그분을 낳아 주셨기 때문입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예고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천주의 성모로 또 구세주의 참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을 받으신다”(교회 헌장 53항).하느님 백성은 아직도 지상을 순례하는 나그네입니다.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승천은 지상을 헤매는 우리에게 위로와 확실한 희망의 표지가 됩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정성을 다하여 믿으셨기에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실천적이고 정성스러워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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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벳과 태중에 있는 아기, 곧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어머니가 방문하자 기뻐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가족 관계로 서로 연결되고 탁월한 모성으로도 하느님에게서 복을 받은 여인입니다. 두 여인의 운명과 그 아들들의 운명도 서로 연결됩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을 만납니다. 엘리사벳은 옛 계약의 백성을 상징하지만, 마리아는 신약을 열어 주고 새 계약의 백성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인류 전체를 나타냅니다.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새 계약의 궤(2사무 6장 참조)인 마리아는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를 성령으로 인하여 태중에 잉태하여 모시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한 표현에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과 토마스 사도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믿음의 행복이 암시되어 있고, 이는 두 여인의 기쁜 만남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마리아는 두 가지 행복, 곧 믿음의 행복과 “행복하십니다.”라는 말에 대한 행복을 맨 처음으로 느낀 분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첫 제자이며 신자, 교회의 첫 그리스도인인 마리아. 그녀가 복된 여인인 것은, 무조건 “예.”라고 하느님의 뜻을 믿고 실천하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전적인 동의가 구원의 세계와 새로움의 세계에 얽매인 것은, 하느님께서 그녀를 통하여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완전한 전환, 곧 마리아가 마니피캇에서 노래한 하늘 나라의 변혁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때와 장소의 구분 없이 하느님을 믿은 여인, 마리아는 신앙의 본보기로서 개인과 공동체의 삶 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마리아가 신적 모성을 받아들인 것은 하느님의 손에 순수하게 맡겨진 수동적인 도구가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자유로운 행위로써 사람들의 구원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기 때문입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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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치시고 하늘에 들어 올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에 참여하시는 특전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의 승천을 통하여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은 영광스러운 성모님의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계약의 궤인 성모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육신은 죽음의 파멸을 겪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인 죽음에게 성모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성모님의 승천은 인류에게 보여 주는 희망의 표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받을 영광을 미리 보여 줍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삶을 본받는다면, 우리에게도 같은 승리와 영광이 주어짐을 알게 합니다. 굶주리고 비천하게 살지만, 하느님께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받을 영광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받을 상급을 기다리게 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성모 승천 대축일에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당한 고통과 인내를 하느님께서 승리와 영광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서 악과 싸우면서 하늘 나라를 향하고 있는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성모님처럼 우리 모두는 죄악에 대해 승리하고 주님의 승천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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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 대축일의 의미는 인간의 삶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성모님처럼 하느님과 일치되리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월적 생명을 얻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 마리아의 노래’에서 알 수 있지요. 그 내용은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세와 부귀를 과시하며 헛되이 남용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하루하루 살아가기조차 힘든 비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비천한 이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완전히 무력하기에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울러 명예가 높고 가진 것이 많다 해도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비천한 사람에 속합니다. 결국, 마리아의 노래는 주님의 자비가 세상의 모든 차별을 없애 주신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세상의 억압과 차별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서 나의 삶 안에 늘 계시다는 것을 느껴야만 합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그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순간마저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기쁠 때나 힘들고 절망에 빠졌을 때마저도 하느님의 숨결을 느껴야 하지요. 이런 과정에서 참된 행복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런 자세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가장 긴밀하게 동참하셨으며, 그 결과 하느님과 일치하는 영광을 입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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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구(熱氣球)는 풍선처럼 생긴, 하늘을 나는 비행체입니다. 이것의 무게는 보통 2.6톤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거운데도 어떻게 하늘로 떠오를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공기주머니 속의 공기를 가열하면 그 안의 공기가 바깥 공기보다 더 가볍게 되기 때문입니다.

열기구가 하늘로 올라가는 원리를 보면, 성모님께서 어떻게 하늘에 오르실 수 있었는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이라 하며 성모송을 바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은총이 가득하신’이라는 말은 곧 ‘성령이 가득하신’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가득 차 계셨기에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낳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기주머니 속의 공기가 가열되어 하늘에 오르는 열기구처럼, 성모님께서도 성령의 불로 가득 차 계셨기 때문에 하늘에 오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그렇습니다. 성령의 성전인 우리도 성령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죽음 너머의 하느님 나라로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불로 타올라 비워지고 가벼워져야 하는데, 돌처럼 굳어 있어서 무거운 영혼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이제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늘에 올라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비우고 성령의 불이 끊임없이 타오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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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부릅니다. 어머니가 없다면 인류가 존속될 수 없을 정도로 어머니는 하느님의 손길과 같은 것입니다. ‘신은 모든 곳에 계실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머니가 있기에 인류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다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모태로 나를 품어 주고 젖을 먹인 어머니를 통해 더 깊은 친밀감과 사랑받는 법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인으로서는 주름지고 볼품없는 얼굴을 한 참으로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어머니로 서 있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인생의 스승이 됩니다. 세상 누구에게도 견줄 수 없이 소중하고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어머니는 하느님의 손길이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살펴 주시고 길러 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런 육친의 어머니를 넘어 어머니 성모님께서 계십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님의 손길은 교회를 돌보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가까이, 마치 우리 육친의 어머니를 부르듯, “어머니!” 하고 부르면 금방 우리 앞에 서 계시는 어머니이십니다. 

날마다 우리는 시간을 내어 묵주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기도 시간은 우리 마음속에 따뜻한 성모님의 마음을 새기는 순간이고, 이미 지상에서 성모님을 영적으로 깊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언젠가 홀로 받아들여야 할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는 “엄마!” 하고 어머니를 부르며 그 외롭고 둔탁한 죽음의 문턱을 넘어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평소 하던 묵주 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의 품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승천하시어 당신의 아드님과 하나 되셨던 하늘의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우리도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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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께서 승천하신 날입니다. 마리아께서는 곧바로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아 하느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마리아께서 구세주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삶을 잘 모르고 그분의 승천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천사가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할 때, 처녀인 자신의 처지를 포기하고 ‘주님의 여종’임을 솔직히 고백하십니다. 이로써 마리아께서는 이제 개별적 인간 마리아가 아니라, 주님의 여종으로서 철저하게 주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십니다.

처녀인 마리아께서 주님의 거룩하신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신 것은 주님의 은총이기도 하지만, 성모님의 신앙 고백적인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곧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축복의 표지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자신의 온 생애를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하여 바치셨습니다. 그러한 성모님을 주님께서는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 올려 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성모님과 같은 삶을 산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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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승천은 성모님께서 곧바로 천국에 가셨음을 의미합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만한 삶을 사신 분이시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를 평탄한 생애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과 아기 예수님께서 함께 사셨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으셨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가장 행복한 성가정을 이루셨으니 고통도 고뇌도 없고, 마음 상하는 일이나 말썽도 없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성가정을 단순하게 아무런 문제도 없고 다툼도 없는 가정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강한 개성과 고집을 지닌 분들이 사셨기에 어쩌면 남모르는 아픔이 더 많으셨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분들은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며 사셨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가정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성모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승천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 사람에게 내려지는 축복의 예표입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살면 주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모님께서 함께 계신 초대 교회에는 하느님의 힘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곁에도 수많은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성모님을 닮아 또 다른 마리아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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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은 당신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내맡기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참여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순간부터 이 세상 삶을 마칠 때까지,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거룩하게 되셨고, 그 목표인 구원에 이르게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성모 승천은 마리아를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근원적 구원은 모든 사람의 구원이요, 그 충만함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 승천은 우리가 사도 신경을 통하여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의 신앙을 거듭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곧 우리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머리카락 색깔 측정기’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단순히 전 세계의 모든 머리카락을 인종을 구별한 것이 아닐까 했더니, 사실은 인종 차별에서 나온 측정기라고 합니다. 1927년 오이겐 피셔는 아리아인(독일인)의 인종적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종 혼합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적 순수성을 평가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이 ‘머리카락 색깔 측정기’였습니다.

 

이 인종 차별적인 이론은 곧바로 사람들에게 거부되었을 것 같지만, 반대로 뉘른베르크법에 영향을 끼쳐서 1930년대와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나치 체계를 뒷받침했습니다. 유다인, 흑인, 로마니인 등을 표적으로 삼아 박해하거나 살해하는 행동을 합법화한 것입니다.

 

당시의 아리아인들은 이런 생각과 결정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아리아인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집단주의에 빠져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수많은 박해, 지금은 분명 당시의 사람들이 잘못 판단했다고 말하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예수님이 잘못되었고 또 국가 반대하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고 단죄했습니다.

 

지금의 내 판단이 무조건 옳을까요? 아닙니다. 그 기준을 이 세상의 테두리에 맞춰서 따져 들어가면 옳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주님 기준으로 따져보면 틀릴 때가 더 많습니다. 따라서 자기 기준에 맞추는 교만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교만의 마음으로는 제대로 판단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겸손의 마음으로만이 세상의 기준을 접고 주님의 기준에 맞춰서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준을 철저하게 지켰던 분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겸손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태중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계신대도 먼저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 이에 엘리사벳은 깜짝 놀라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라고 말하지요.

 

이 밖에도 성모님의 겸손은 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을 때, 카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했을 때,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셨고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끝까지 지키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하느님께 기준을 맞춰서 사신 분,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하늘로 불러올리셨습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세상이 아닌 철저하게 하느님께 맞춰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 떼어 보면 모두 영리하고 분별이 있지만, 집단을 이루면 모두가 바보가 되고 만다(프리드리히 실러).

 

 

 

오늘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직도 결핍과 흠결투성이인 저 자신의 모습, 백번 천번 결심을 하지만 크게 변화되거나 성장하지 않은 제 모습에 실망도 큽니다. 동료 형제들의 모습도 개진도진, 거기서 거기라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가뭄에 콩나듯이 멋진 형제를 만납니다. 부족함과 미성숙을 극복하고 하루 하루 일취월장합니다. 주어진 탈란트도 잘 활용해서 자신의 능력치를 극대화시킵니다. 그런 능력치를 바탕으로 공동체와 교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니, 선배 입장에서 너무나 감사하고 뿌듯합니다.

성장은커녕 퇴보하고, 겨우겨우 현상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니 참으로 부럽습니다. 성장하지 않는 인생, 성장하는 않는 신앙, 성장하지 않는 공동체, 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인지.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예의주시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오늘 대축일을 맞이하시는 성모님이십니다. 그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이 올라간 분이십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서 가장 큰 진보를 이룬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오늘 우리에게 한 인간이 얼마나 변화될 수 있는지, 얼마나 성장을 거듭할 수 있는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 모두에게도 희망과 자극을 주는 축제입니다. 예수님의 잉태와 출산, 양육을 위한 성모님의 큰 희생과 노고도 대단한 것이지만, 우리가 좀 더 예의주시해야 할 부분은 성모님의 신앙여정입니다.

한 평생 다양한 위기와 고통, 큰 십자가와 험난한 가시밭길이 성모님 생애 내내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태도를 보십시오.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희미한 안개 속의 위험한 길을 걸어가시면서도 그 발걸음이 늘 당당했습니다. 천사를 통해 들려온 하느님의 약속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 새롭게 결코 만만치 않은 신앙의 길을 기쁜 얼굴로 걸어가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으셨습니다. 이제 성모님께 주어졌던 역할이 우리 모두에게 확대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예수님을 잉태하지 못한다면, 그 옛날 성모님의 아기 예수 잉태는 그저 오래전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아기 예수님의 잉태는 되풀이되어야 합니다.

나도 힘들지만 미혼모가 낳고 떠난 아기 한 명을 입양하면 그것은 내가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우리 가족도 힘들지만 도움이 필요한 보육시설 아동들의 구체적 결핍을 채워주는 일은 어떤 면에서 내가 직접 또 다른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필요에 응하는 일, 작지만 시간 내어주는 일은 또 다른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어디 다른 하늘 아래서 멀리 계셔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늘 새롭게 거듭 태어나셔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처럼 아쉽지만 또 다시 나를 떠나고, 안타깝지만 어제와 결별하고, 늘 새로운 여행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부단히 다시 태어나실 것입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때로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때로 작은 울타리에 갇혀 괴로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한히 성장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가 역시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있음을, 성모님처럼 큰 도약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결국 우리 안에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늘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길 바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8년 시흥5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목사님이 성당엘 찾아왔습니다. 대화 중에 목사님은 제게 몇 가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모님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가톨릭은 성모님을 믿느냐고 하였습니다. 개신교 신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 해 줄 수 있지만,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배운 목사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답답했습니다. 먼저 흠숭과 공경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흠숭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공경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성인과 성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께는 좀 더 큰 존경과 사랑을 표현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분이 이제 너의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모님에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모님을 어머니로 존경과 사랑을 드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를 위해서 전구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가톨릭은 성모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저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저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5살 때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습니다. 큰 길에 나갔다가 그만 버스에 타고 말았습니다. 내리고 보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제가 얌전하게 생겨서 누가 데리고 갔을 거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길을 잃어버리면 파출소로 가라고 했던 아버님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파출소로 갔고, 거기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버님은 실종신고를 했고, 제가 있는 파출소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머물면서 사제들과 대화를 하셨는데, 저는 파출소에 머물면서 경찰 아저씨가 사주신 순두부찌개를 먹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입니다. 인사이동으로 제가 가야할 성당이 정해지면 어머니는 저보다 먼저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사제가 건강한 모습으로 사목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외국으로 갔을 때를 빼고는 어머니는 언제나 저보다 먼저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는 1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아버지와 함께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도 있지만 성모님께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순명’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들었던 성모님은 당혹스러웠지만 하느님의 뜻임을 알았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순명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순명은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열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열정이 있었고, 가야 할 길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 굶주린 이를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는 ‘중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혼인 잔치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청을 받아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미래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은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분단된 조국은 절반의 광복입니다. 언젠가 하나 되는 조국으로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하늘로 오르는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네.”(루카 1,47)



앞에
길 하나
놓여 있으니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네


하늘로
부르시는
임의 손잡고
지금여기에서부터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네


믿음으로 한걸음
희망으로 한걸음
사랑으로 한걸음
더디더라도 쉼 없이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네


길 없다 외면하는
뭇사람들 틈바구니
행여 놓칠세라
임의 손 꼭 붙잡고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네


한걸음 한걸음에
나는 서서히 사라지고
임만이 오롯이 남아
임 품에 가벼이 안겨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성모님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신앙 교의에 따라 성모님의 승천을 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성녀 엘리사벳을 만나셨고, 마니피캇, 곧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진정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당신의 모든 생애를 바치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의 신앙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을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로 이루어진 것에 늘 감사와 찬미를 드리시고 언제나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시며 당신의 온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드리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에 대한 ‘경외심’이 없을 때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못할 때 그 자연에 대한 파괴가 시작이 됩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기후위기 역시도 인간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못하고 그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파괴와 난개발을 이루어 가면서 창조의 균형이 깨어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인간관계 안에서도 그러한 경외심이 사라지게 될 때 반목이 시작이 됩니다.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니까 결국 서로를 파괴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험담과 이간질 폭력과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게 될 때 어쩌면 모든 우주의 질서마저도 흔들리게 되면서 결국 비구원의 상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시고 그분의 말씀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셨고, 그분의 뜻이 완성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결국 성모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셨고, 하느님 곁에 올림을 받으시는 승천의 영광을 입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신앙, 그리고 성모님의 경외심과 사랑을 본받아 늘 언제나 하느님께 경배와 찬미를 드리며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 안에서 참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1950년 11월1일 교황 비오 12세는 “믿을 교리” 하나를 선포하십니다. 비오 12세는 교리와 대중적 신심과 전례를 통하여 표현된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믿음을 정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신앙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다음의 말씀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의 이 한마디 응답은 자신의 운명과 온 인류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았습니다. 성모님의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다음의 내용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마리아는 우리의 신앙적 모범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게 됨으로써 아들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길로 들어섰지만, 온 인류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성모님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앞으로 얻게 될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하느님 말씀에 충실히 순종하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받게 될 은총인데 성모님은 자신을 포기하고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었지요. 그리고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분으로써 살아있는 그대로 승천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받게 될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즉 우리도 자신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길로 들어선다면 우리 역시 마지막 순간에 성모님과 같이 승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기념하는 의미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것만으로 오늘을 보낸다면 의미 없이 보내는 것입니다. 오늘을 기념하는 진정한 의미는 성모님의 삶을 다시 바라보면서 자신을 얼마나 포기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에게 신앙인의 삶 자체가 희망이 될 것이며 그리고 먼 훗날 성모님처럼 우리도 불사불멸의 갑옷을 입고 승천하는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영원한 어머니 - “복되신 동정 마리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시편45,10ㄷㄹ)

 

오늘 화답송 후렴이 흥겹습니다. 작년 성모승천대축일 강론때는 강론중 광복절을 상기하며 애국가를 불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특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대목을 부를때는 성가처럼 일치의 숙연한 분위기였습니다. 작년 이날부터 만세칠창을 하기 만1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하듯 바쳤습니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온전한 독립국가가 될 때 까지, 아마 죽는 그날까지 집무실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기상후, 기상전 바칠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수도원 만세!”

 

성모승천대축일이자 광복절에 참 잘 어울리는 만세칠창으로 오늘 따라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올해는 ‘빛을 되찾았다’는 광복(光復)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가 지상생애를 마친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오늘 대축일은, 1950년 11월1일 교황 비오 12세의 사도헌장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교황무류성으로 선언함으로써 믿을 교리로 지정됩니다. 

 

광복 5년후 6.25사변중 1950년 제정된 성모승천대축일에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습니다. 대한민국은 물론 한반도의 수호성인이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전구로 6.25 사변중에도 적화(赤化)되지 않았고 언젠가는 온전한 광복의 나라가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영원한 수호자이자 어머니가 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오랜만에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요 납북자인 정인보 작사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43세 가난하게 살다가 죽은 ‘보리밭’과 ‘나뭇잎배’를 작곡한 윤용하 요셉 작곡의 광복절 노래를 불러 봅니다.

 

1.“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구원의 빛은 대한민국 한반도 예서 나리라 믿습니다. 성모승천 대축일 아침 성무일도 아름다운 찬미가와 시편 후렴들도 새삼스런 감동이었습니다.

 

1.“태양의 빛입으신 동정녀시여 열두별 머리위에 꾸미신이여

   저달을 발판삼아 우뚝서시니 환하게 빛나도다 당신의광휘”

5.“우리의 동정성모 성마리아께 영광의 화관씨워 드높이시고

   여왕과 어머니로 세운삼위께 영원한 찬미찬양 있어지이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과 제2독서 코린도 전서 말씀을 근거로 한 찬미가입니다. “맏물”(1코린15,23)이신 그리스도께서, 미완성의 상태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르게 될 완성을 보여주었으며, 이어 성모님의 승천이 구원된 우리의 미래를 분명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은 그대로 예수님, 성모님이 승천하신 영적승리와 희망을 상징하는 하늘길, 하늘문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다음 시편 후렴도 은혜롭습니다.

“기뻐하라, 오늘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시는도다.”

 

가사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동정녀 마리아께서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은총의 보답입니다. ‘동정마리아께서는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헌신함으로써 교회를 위해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심으로,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유일무이한 교회의 전형이 되신 것입니다’(가톨릭교리서967항).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히 보고 배울 롤모델이 된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첫째, 겸손과 섬김의 어머니입니다.

섬김을 받으로 오신 주님이 아니라 겸손히 섬기러 오신 주님입니다.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마리아 성모님은 태중의 아기 예수님과 함께 엘리사벳과 태중의 세례자 요한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까? 섬기로 오신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마리아 성모님의 겸손한 섬김의 자세에 감동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외칩니다. 동병상련, 평생도반 두 어머니의 영적우정도 참 깊어졌을 것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둘째, 감사와 찬미의 어머니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은 우리 교회가 2000년 동안 저녁성무일도시 성모님과 함께 불러온 감사찬미가입니다. 말그대로 가난한 이들인 아나뵘의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감사는 저절로 찬미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영혼의 건강과 치유에 감사와 찬미의 삶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삶과 더불어 성모 마리아의 주님 향한 믿음, 희망, 사랑도 더욱 증대되었을 것입니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찬미와 감사의 삶이요 성모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셋째, 순종과 믿음의 어머니입니다.

순종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던 순종의 어머니, 영원한 예스맨 성모마리아입니다. 앞서 예수님 탄생이 예고 됐을 때, 성모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믿음의 결정체같은 응답에 주님께서도 분명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마리아가 한없이 고맙고 사랑스러웠을 것이며 마리아에 대한 신뢰도 한없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역시 엘리사벳이 이런 마리아의 믿음을 격찬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제가 감동하는 것은 성모님은 십자가의 길, 제13처 피에타의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는 기도문입니다. 

“구세주 예수님,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품에 안으신 성모님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성모님 품 안에서 효성스러운 자녀로 살다가 마침내 그 품 안에서 죽게 하소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품에 안으셨을 때, 순종의 비움(케노시스)을 통해 드러나는 성모님의 절정의 믿음은 그대로 아드님께 전수되었음을 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감사송 고백처럼 오늘 하늘에 오르신 분, 하느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를 닮아 겸손과 섬김의 삶, 감사와 찬미의 삶, 순종과 믿음의 삶에 항구한 노력을 기울입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성모 마리아, 

 하늘에 오르시니

 천사들의 무리가 기뻐하네.” 아멘.

 

 

 

김준수 신부님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1,48~49)

 

오늘은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하늘에 오르신 날,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을 효성스러운 자녀의 마음으로 함께 축하합시다. 오늘 대축일을 성대하게 기념하고 기억하는 까닭은 우리도 언제가 어머니 마리아처럼 흠도 티도 없이 하늘, 아버지의 나라로 나갈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모 승천 감사송에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축일의 의미를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늘에 오르신 분, 하느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 제정된 것은 1950년 11월 1일입니다. 이 축일이 제정된 시기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세계 곳곳에 전쟁의 상흔傷痕이 남아 있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이 땅에선 6.25전쟁이 발발한 해이기도 합니다. ) 20세기 들어 발발한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생명이 비참하고 참혹하게 죽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특히 유럽은 대부분 그리스도 국가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땅에 떨어져 짓밟혔고, 인류의 미래는 절망의 어둠이 짙게 깔린 시기였습니다. 희망이 아닌 절망이 사람들 가슴 속에 깊이 베여 있었던 시기에 교회는 바로 성모 승천 대축일을 통해 세상에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상처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우고, 인류의 미래는 하느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느님만이 우리의 희망의 원천임을 밝히고자 제정한 것입니다. 더더욱 오늘은 우리 민족에겐 새로운 희망이 싹튼 날,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광복절은 한층 더 성모승천 대축일의 의미를 풍요롭게 해줍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참된 희망의 메시지가 이 땅, 특히 침묵의 땅인 북녘에도 희망의 빛이 가득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어머니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의 문안 인사의 말을 듣고(1,41) 엘리사벳에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향해 노래한 “마리아의 노래”(1,48-55)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어머니 마리아께서 자신에게 큰일을 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아울러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던진 희망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이 희망은 단지 주님 잉태 기별을 받은 순간에 국한하지 않고, 당신 평생의 여정 곧 못 박히신 아드님의 십자가 아래까지의 여정을 통해 당신께서 마음에 새겨둔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어둠과 절망으로 힘겨워하는 세상을 향해 선포하신 희망의 찬가입니다. 마리아께서 주님을 찬송하고 기뻐하는 까닭은 바로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시고 보잘것없는 당신 종을 통하여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1,48.49참조) 이 찬가는, 마리아의 입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과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도 당신에게 베푸신 자비와 은총이 영원히 세세 대대로 미칠 것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희망이 없고 힘없는 민중들에게 지금 보는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머지않아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리라는 것입니다. 이 찬가는, 온 존재로 겪고 체험한 사건들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신앙의 비전이며 희망의 선언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통해 겪었던 가난과 멸시, 거부와 차별, 절망과 고통을 체험한 어머니 마리아께서 세상에서 당신처럼 어렵고 힘들게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모든 민중을 향한 따뜻한 위로이며, 확신에 찬 희망의 예언이고, 사랑을 바탕으로 한 믿음의 노래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가 지금껏 비천하였기에 존귀하게 될 것이며, 겸손했기에 들어 높여질 것이며, 굶주렸기에 배부를 것이며, 가진 게 없었기에 모든 것을 다 가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얼마나 희망찬 선포이며 선언입니까? 그러기에 매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마리아의 노래를 노래하는 우리 역시 희망의 사람으로 세상에 나가서, 동일한 음조音調로 희망의 노래를 들려줍시다. 희망의 사람만이 성모 마리아의 희망에 동참하게 되며, 마침내 이 모든 것이 실현되는 하늘에서 웅장한 하늘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행복과 기쁨에 넘쳐 영원한 희망의 찬가를 함께 노래하리라 믿습니다. 그날이 꼭 오리라 믿습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질병과 재난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우리의 노래를 듣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다, 라는 희망과 꿈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올리시고, 천상 모후의 관을 씌워 주셨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또한 어머니 마리아께서 앞서가신 여정을 걷고 언젠가 성모님의 중재에 힘입어 천상 하늘로 나아갈 날을 희망으로 기다리며 살아갑시다. 이런 마음가짐이 진정한 성모 승천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라고 믿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바로 우리의 미래이며 희망의 보증이십니다. “알렐루야. 성모 마리아 하늘로 오르시니 천사들의 무리가 기뻐하네. 알렐루야.”(복음 환호성)

 

 

 

꿈을 꾸는 사람들

     김인한 알베르토 신부님
한때 만나는 사람들에게 꿈이 무언지를 물었던 시절이 있습니다. 사제들과 수도자들, 신자들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물었습니다. 대부분 쭈뼛쭈뼛하며 “뭐 그런 걸 다 물어보냐” 하는 반응이었고 꿈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들의 말도 사실 새로울 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사제들, 수도자들, 신자들이 있는 교회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한참 생각했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은 우리를 꿈꾸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시작이 그랬습니다. 성령의 불로 잔뜩 취한 그들은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를 만큼, 아니 몰라도 좋을 만큼 그분을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순교이든, 박해이든 묻지 않아도 될 만큼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시작도 그랬습니다. 사제로 수도자로 신자로 처음은 다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실패와 약함의 연속일지라도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꿈을 꿉니다. 당신이 아니 계시면 이 부질 없는 목숨은 한낱 먼지에 불과하고 하루 웃었다가 하루 울어 대는 이 내 몸의 행복도 위태로울 따름이지만 그래서 신앙인은 모든 희망과 모든 운명을 그분께 맡길 줄 압니다. 오늘 성모님의 승천을 묵상하며 성모님이 꿈꾸셨던 노래 자락에 우리의 꿈도 함께 흥얼거려봅시다.

 

 

 

<혁명의 노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기쁨인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모송에 언급되고 있듯이, '은총이 가득 하신 분', 곧 참으로 복되신 분이셨습니다.

‘은총이 가득하다는 것’은 축복의 풍요로움과 구원의 완성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리아는 구세주를 낳아 인류를 구원하는 계기를 마련하셨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구원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또한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라는 혈연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칭송하고 있듯이,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신앙의 여인이었기에 행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요, 비운의 어머니셨습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시골 처녀로 어린 아기를 안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고, 뼈를 깎는 가슴 아픈 예고를 들어야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잃고 3일 동안 애태웠고, 아들 예수에게 문전 박대를 당했고, 아들이 십자가형에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고,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던 어머니셨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묻히셨지만 부활하실 것을 믿으셨으니, 이 부활이 바로 구원의 완성이요,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분명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원죄의 물듦이 없이 출생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원죄의 결과로 갖게 되는 죽음이 없이 곧바로 승천하여 하느님께로 가심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원죄 없으신 잉태가 진정 성모님께 베풀어진 자비라면, 이제 성모님의 승천은 온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자비입니다. 
이토록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삶과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우리 모두가 성모님같이 영광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욥처럼 우리 안에서 그분께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 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욥 5, 9)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사부 베네딕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규칙서 머리말 30절)하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 안에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 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들을 찬미합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심을 찬미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자비를 입은 존재요, 우리의 삶이 당신 안에 있음을 찬미합니다. 

당신과 함께 저희에게 영광을 입혀주심에 찬미합니다. 

복되신 성모님과 함께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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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진 기쁨인 광복을 기념합니다.

이 광복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이 파티마 성모님의 전구로 종결되었듯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 역시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승천대축일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을 찬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또한 오늘은 해방의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북이 분단된 불행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형제적 화해와 평화를 이루지 못한 채, 많은 이들이 동포요 형제를 적으로 여기고 대적하며, 여전히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로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평화를 원하고, 연대와 협력과 대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할 때입니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거나 내 편으로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상대방의 고통과 어려움에 공감하고 연민으로 다가가야 할 때입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에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특별히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김동우 바오로 신부(교구 사무처 차장)

성모 승천 대축일의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이시며 성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하늘로 부르시어,

그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셨으니,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소서.”

대축일을 지내며 천상 영광을 향한 희망을 새롭게 합니다.

제1독서 요한 묵시록에서는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하늘의 처소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제2독서 코린토 1서에서는 하느님께 넘어갈 나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천상 영광의 자리는 결국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을 증언하는 성모님의 분명한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승천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이유가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며, 천상 영광을 약속하신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우리의 생명·기쁨·희망이시여!

     백형찬 라이문도(전 서울예술대 교수)

“자애로운 마리아여 천상 어머니 / 이 정성 다하여서 기도하옵니다 / 어둠 속의 등불 되어 / 나의 앞길을 살펴주소서 아 마리아여”(가톨릭성가 239번)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성모님의 은총을 듬뿍 받은 성인들의 일화를 짧은 연작으로 펼쳐봅니다.

1531년 겨울, 멕시코의 후안 디에고는 새벽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언덕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름다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곳으로 가 보니 태양처럼 빛나는 귀부인이 서 있었습니다. 귀부인은 “나는 하늘과 땅의 참된 창조주 하느님의 영원한 동정 성모 마리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주교에게 가서 “이곳에 성당을 지어라.”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교가 디에고에게 표징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성모님은 디에고에게 장미꽃을 담은 ‘틸마’(어깨 위에 걸치는 망토 모양의 천)를 주었습니다. 추운 겨울이라 장미꽃이 있을 시기가 아니었지만, 디에고가 주교 앞에서 틸마를 펼치자 장미꽃이 쏟아져 나오며 틸마에 성모님의 모습이 또렷이 나타났습니다. 주교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성모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성모님이 ‘과달루페의 성모’입니다.

1858년 겨울, 프랑스 루르드의 한 시골에 열네 살 소녀 베르나데트가 살았습니다. 소녀는 여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땔감을 구하러 강가로 갔습니다. 그런데 강 건너 마사비엘 동굴에 흰옷을 입은 여인이 찬란한 빛을 받으며 서 있었습니다. 베르나데트는 즉시 무릎을 꿇고는 묵주 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서 있는 자리에 성당을 세워라.”라고 했습니다. 베르나데트는 여인께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여인은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모님은 열여덟 번이나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모님의 발현은 ‘어린 소녀의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이 알려주신 루르드 샘물에서 수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성모님이 ‘루르드의 성모’입니다.

1917년 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타가 양 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 목동들은 묵주 기도를 드리며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 여인은 아이들에게 “매달 13일마다 이곳에 오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평화가 오도록 매일 묵주 기도를 바치라면서, 묵주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말하는 ‘성모님의 발현’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조롱당했고, 심지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성모님이 사람들 앞에 직접 나타났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습니다. “나는 묵주 기도의 모후다. 매일 묵주기도를 바쳐라. 하느님의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해드리지 마라. 그분은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으셨다.” 그 성모님이 ‘파티마의 성모’입니다.

1353년, 이탈리아 시에나에 살던 카타리나가 여섯 살 때였습니다. 카타리나는 예수님이 자신을 축복해주는 환시를 보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자신을 예수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느 날, 카타리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성모님이 예수님 손에 카타리나의 손을 쥐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카타리나에게 반지를 끼워준 것입니다. 후에 이 일을 화가 안토니오 코레지오가 ‘신비로운 약혼’이란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성모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이 카타리나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성화입니다. 성모님은 카타리나에게 많은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한 예로, 마을에 심한 기근이 들자 카타리나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빵을 만들었습니다. 밀가루가 없어 아주 적은 양만 반죽했는데 엄청나게 많은 빵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기적의 빵’을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습니다.

1571년 10월 7일,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이탈리아를 침략했습니다. 전쟁 상황이 적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러자 성 비오 5세 교황은 교황청에 있는 모든 성직자를 불러 함께 무릎을 꿇고 묵주 기도를 간절히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교 함대가 오스만 함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했습니다. 이것이 세계사에 기록된 ‘레판토 해전’입니다. 교황은 ‘승리한 것은 묵주 기도 덕’이며 ‘성모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라고 했습니다. 이후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선포했고, ‘묵주 기도 성월’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성모님은 십자가를 앞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승리로 이끌어주셨고, 영혼이 맑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축복해주셨습니다. 성모님은 발현하실 때마다 묵주 기도를 바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묵주 기도를 바치면 성모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총과 하늘나라의 신비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의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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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하느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루카 1, 38-56> 8월 15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진실과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마련하신 하느님의 눈으로 현실을 보고 판단해야지 인간의 눈과 지식, 이해타산, 현실 파악은 오류를 낳고 판단이 그릇되기 마련입니다. 즉, 진실과 사랑을 자기 성품이나 경험, 지식으로 판단하면 이루어져야 할 일이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은총을 하느님으로부터 충만히 받으신 마리아가 하늘나라에 승천하심을 믿음으로 보고, 하느님 눈으로 보면서 은총 충만한 기념일을 함께 기뻐하며 지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님의 승천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마리아는 창조로 이루어진 존재이지만, 영과 몸이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하게 보여도 하느님 능력으로 가능하며 이런 일은 세상 여기저기서 일어납니다.

우리 현실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니,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남의 말 듣고 판단하면 오류가 일어납니다. 하느님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듣고, 진실과 사랑 안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느님 뜻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인간적 편에서 판단하면 현실에 큰 오류가 발생합니다.

인간관계도 내 경험과 지식, 성품에 따라 판단하면 오류가 발생하고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면 진실과 사랑이 살아납니다.

하느님의 눈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예전에 종신서원을 못 주겠다고 생각되던 한 수사님을 퇴원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퇴원시키려고 하니 그 수사님은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고 원장실에 엎드려서 여기 수도원에 있어야 한다고 움직이지 않아서 하느님 눈으로 다시 보고 받아들였습니다. 외적으로 큰 일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수도승으로 열심히 사시다가 하느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공동 휴게 시간에 묵주 들고 기도하며 인간적 대화는 하지 않으셨지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으며 수도원에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제 하느님을 열심히 찾고 기도하는 사람이 가족 안에서 상처받고 힘들어하기에 그의 마음에 하느님 눈과 생각을 심어주면서 하느님 눈으로 보면 하느님처럼 자비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하며 그의 열심한 믿음을 찾아주었습니다. 눈물 나는 눈에 웃음을 심어주고 평화를 얻었으니 며칠 더 머물 예정이었으나 내일 집에 가겠다고 하며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느님의 눈과 귀로 보고 듣고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으로 살며 감사기도로 살아야 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사람 눈으로 보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 눈으로 보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눈, 귀, 입, 코, 몸에 십자가를 놓으며 오늘 주님의 눈, 귀, 입, 코, 몸을 움직이고 하루를 살도록 기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자기는 빠지고 하느님만 현존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기도합니다.

어느 날 카카오톡을 하다가 잘 보이지도 않고 손도 떨려서 머리는 어지러워서 그만둘까 하다가 “주님 당신의 힘으로“하고 기도하며 행하면 힘이 생기고 어느새 괜찮아집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승천을 보고 느끼며 은총 속에 살게 됨을 감사합니다. 함께 축하합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함승수 신부님

오늘은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즉 성모님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고 하늘나라에 올라가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옛날에는 성모님의 승천을 예수님의 승천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입을 ‘몽’자에 부를 ‘소’자를 써서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소명을 ‘다 이루신’ 후 당신 스스로 하늘나라로 오르신 것과는 달리,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과 축복을 받았기에 승천하실 수 있었다는 겁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오르신 하늘은 우리도 올라가야 할 하늘이고, 또한 올라가게 될 것임을 믿고 희망하며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이지요. 오늘 전례의 감사송은 그런 우리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늘 하늘에 오르신 분 하느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과 성모님의 승천 사이에 스스로냐 아니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서냐라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성모님의 승천과 우리의 승천 사이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이는 교리적으로는 물론 신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기에, 우리는 이에 대해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육신의 부패를 겪었는가 아닌가의 차이입니다. 우리 인간은 죽은 다음 육신의 부패를 겪고 난 뒤에야 종말의 순간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지만, 성모님은 육신의 부패를 겪지 않고 하늘로 불려 올라가신 겁니다. 오늘 전례의 감사송은 그런 우리의 믿음에 대해 또 이렇게 노래하지요.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의 아드님께서 동정 마리아의 몸에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에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이 무덤에서 썩지 않도록 섭리하셨나이다.”

성모님의 ‘육신이 썩지 않았다’는 내용 때문에 성모님에 대한 다른 ‘믿을 교리’들처럼 성모 승천에 관한 믿을 교리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이견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평생 동정’을 그저 순결이라는 육체적 의미로만 바라보지 않고 ‘평생동안 변치 않고 한결 같았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영적 의미로도 이해하는 것처럼, 성모님의 시신이 썩지 않았다는 말도 그저 육신의 부패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물질적 의미로만 바라볼 게 아니라, 성모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평생을 사신 다음에도 죄에 물들지 않았기에 죄로 인한 영적 부패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영적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지요. 그랬기에 지체 없이, 즉시 하늘로 올라가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알게 모르게 짓는 죄 때문에, 그리고 제대로 보속하지 않고 남아있는 죄의 흔적 때문에 바로 하늘나라로 올라가지 못하고 연옥에서 정화의 시간을 거치는데, 성모님은 그런 고통스런 정화의 시간을 거치지 않도록 특별한 은총을 입으신 겁니다.

어머니 뱃 속에서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으셨고, 심지어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연옥을 거치지 않고 즉시 천국에 오르시도록 특별한 은총을 입으셨다고 하니 그런 성모님이 너무나 부럽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영적 금수저’인 성모님과 ‘영적 흙수저’인 나 사이에 결코 따라잡을 수 없어 보이는 큰 격차 때문에 포기하거나 절망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주 큰 오해입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받는 은총은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해 받았고, 본죄에 물들지 않도록 인도받는 은총은 우리도 고해성사를 통해 받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직천당’하신 건 그분만 ‘특별대우’를 받아서가 아니라, ‘무염시태’ 때 받은 은총의 씨앗을 평생동안 잘 간직하고 가꾸신 것이 승천 때에 열매를 맺은 것이지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지니고, 그분의 뜻이 내 안에서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철저히 순명하면 됩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 5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비천함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랑의
만남입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돌아갈
우리 삶의
진정한
주소는 사랑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선물로 내려준
시간들을
살다가
우리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어머니의
매일 매일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앞서 나가시는
삶이 바로
승천의
삶입니다.

승천의 이야기는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삶을
믿음으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사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곧 믿음의
일입니다.

믿음으로
신비의 일체가
되시어
감춰진 신비를
승천으로
드러내십니다.

승천의 삶은
성모님의 삶처럼
말씀을 듣는 삶이며
곰곰이 되새기는
성숙한 마음이며
십자가 곁에
꿋꿋하게 견디는
사랑이며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승화시키는
삶입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녕 모르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신비로
보여주십니다.

삶이라 불리는
십자가의 시간을
지나면 어김없이
은총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비천함 속에서도
우리를 당신께로
초대하시는
사랑이 있기에
믿음이 되고
성장이 되고
승천이 됩니다.

성모 승천은
끝내 이루시는
하느님
사랑의 힘이며
꺾을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올려드리는
믿음의
대축일 되십시오.

신학생 때, 동아리 MT로 전라도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광주신학교 신학생들을 만나서 모임을 하고, 저녁에 술자리를 함께했지요. 이 자리에서 안주로 ‘홍어’라는 것을 처음 접했습니다. 심한 암모니아 냄새와 함께 코가 뻥 뚫리는 체험을 했지요. 이 이상한 음식을 왜 먹나 싶었습니다. 몸에 좋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고통을 느끼면서까지 먹어야 하냐고 물었지요. 하지만 그곳 신학생들은 계속 먹다 보면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 된다면서 너무 좋아했습니다.

30년 전에 시작했던 홍어와의 만남이 지금은 어떨까요?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피 음식일까요? 아닙니다. 이제 홍어가 나오면 입맛이 돋고 술맛도 더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왜 그럴까요? 홍어의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미사를 처음부터 기쁨과 행복으로 체험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군대에 있을 때, 성당 가면 맛있는 간식 준다고 꼬셔서 함께 미사에 갔던 동료가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성당의 미사는 너무 힘들어. 계속해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니, 편안히 잠잘 수 있어야 말이지. 그런 면에서 불교가 최고야.”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기쁨은 이 고통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진짜 맛을 느끼는 상태까지 와야만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쯤 오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냅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상당히 부러울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한 성모님의 승천이지요. 죽음을 건너뛰고 하늘로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총이며 영광입니까? 그러나 이 영광은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얻은 것도, 또 운이 좋아서 얻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예수님의 죽음 때까지 성모님께서는 계속된 고통을 당신의 가슴으로 안으셔야만 했습니다. 그 고통의 크기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성모님께는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낳을 장소가 없어서 허름한 마구간을 선택했던 것도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또 산후조리도 못 한 채 이집트로 피신까지도 가야 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성전에서 잃어버리기도 했고, 세상에 나간 아들이 미쳤다는 말도 듣습니다. 이것도 부족했는지 이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모습까지도 직접 봐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고통과 시련을 넘어섰기에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모든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성모승천이라는 영광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작은 고통과 시련에도 크게 넘어져서 주님으로부터 더 멀리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인생이 하나의 긴 문장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쉼표가 필요하다(백영옥).

 

 

 

우리도 언젠가 성모님처럼 불멸의 갑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950년 11월 1일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회칙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통해서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습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세의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함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

 

성모 승천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오늘 지상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에게도 가능한 일이 승천이고 구원이여, 천상 영광에의 참여입니다.”

 

성모 승천은 하느님께 대한 성모님의 신앙과 순종, 헌신적인 태도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구원과 승천이라는 풍성할 결실을 맺었음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면서, 그분의 구원 의지 실현을 위해 헌신한다면 성모님처럼 구원과 승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모 승천은 지상 순례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징표로 제시됩니다. 아울러 성모님이 도달한 목표는 성모님 당신 개인만의 목표가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목표, 교회의 목표요, 오늘 우리들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마리아 안에서 교회는 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목표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후에도 이 목표에서 빗나갈 수 없다. 마리아의 현양은 세상 종말에서 교회 현양을 위한 보증이다.”

 

성모 승천은 교회와 전 인류가 그토록 바라던 최종적인 희망이 실현됨을 보여주는 축제일입니다. 성모 승천은 인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을 때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모 승천 교리를 굳게 믿는 우리는 오늘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실망스럽더라도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좌절이 클수록, 고통이 커질수록, 우리가 나아갈 길이자, 역할모델이신 성모님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린 대사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의 복사판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비록 나약한 인간이지만 썩는 몸에 썩지 않는 것을 입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성모님의 승천, 성모님께서 직천당(直天堂)하시고 성인 중의 성인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준 대사건입니다. 우리가 비록 썩을 몸을 지닌 인간이지만, 우리도 언젠가 성모님처럼 불멸의 갑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음을 보여준 은혜로운 대사건입니다.

 

 

 

성모님은 당신께서 승천하실 것을 아셨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날을 기념합니다. 예수님이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다시 아버지께 당연히 승천하시어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덕분으로 하늘로 오르신 최초의 인간이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이유는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런데 무엇을 믿으셨을까요? 성모님은 승천하신 것을 믿으셨을까요?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도 승천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승천할 것을 믿어야 승천할 수 있을까요? 

 

요즘 디즈니 플러스에서 ‘무빙’이라는 드라마를 합니다. 초능력을 지녔던 전직 국정원 부모들이 자신들의 초능력을 물려받은 자녀들을 낳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었습니다. 

여기서 고3 김봉석은 하늘을 나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나지 않는 재생능력을 지닌 장희수를 좋아하게 됩니다. 김봉석은 기분이 좋아지면 하늘로 뜨게 되는데 엄마는 그런 능력이 발각되면 위험해질 것을 알아서 봉석이 날지 못하게 합니다. 무거운 것들을 차고 들고 넣고 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체육관에서 농구대가 빠져 희수가 다치게 되었을 때 무거운 것을 차고 있는 봉석은 날아서 그녀를 구해줄 수 없었습니다. 대신 다른 능력을 지닌 반장 이강훈이 그녀를 도와줍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반장을 좋아하게 될까 봐 겁이 난 봉석은 자신도 나는 법을 제어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러면 아빠처럼 아이가 다치게 될까 걱정하고 야단칩니다. 

 

오늘 성모님은 하늘을 나셨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누구도 그분의 믿음을 잡아 끌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바탕은 지혜입니다. 지혜는 우리를 믿음으로 초대합니다. 믿음도 하나의 선택이고 결정입니다. 믿기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생각하면 쉽겠습니다. 믿으니까 선택하고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선택을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식만 가지고는 속기 십상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자꾸 만나보면서 내가 가진 지식으로 믿어도 될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게 됩니다. 자녀에게 지식이 아닌 지혜를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모님께서 믿으신 것은 무엇일까요?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3,28)라고 말해줍니다. 은총은 아담의 죄로 끊겼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다는 믿음이 팽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3,30)라고 말해줍니다. 더 말이 안 됩니다. 다른 수많은 여인이 있는데 왜 자신만이 특별히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전해주는 말은 더 황당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31-32)

 

만약 성모님께서 겸손하셨다면 “농담이 지나치십니다!”라고 말씀하셔야 하셨을까요? 성모님은 감히 인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말에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하십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더 겸손하여지려면 더 낮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우리가 더 가졌다고 믿어야 진짜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지식이 아껴야 잘 산다고 말한다면, 지혜는 더 가졌다고 믿으면 결국엔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을 지혜로 만드는 진리입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더 해빙』의 홍주연 작가는 사업 실패로 돈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했던 아버지 밑에서 컸습니다. 아버지는 자린고비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굴비였습니다. 아버지가 췌장암에 걸렸다고 하여 홍주연 작가가 마지막에 굴비라도 실컷 드시고 가시라고 열 마리 보내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도 아껴 드시다 다섯 마리를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병원도 굳이 6인실을 선택하여 죽을 때까지 돈을 아끼셨습니다. 그러나 홍주연 작가는 ‘그렇게 돈을 아끼면서도 왜 아버지는 평생 가난하셨을까?’를 궁금해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누군가에게 행복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상처가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난 행복하면 안 돼요.”

이것을 누가 정해줬을까요?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부활도 마찬가지고 승천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주연 작가는 왜 아버지가 아끼면서 가난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비범하였고 지금은 전 세계 재벌들의 컨설팅을 해주고 있는 이서윤 선생을 만납니다. 그녀는 수십 만 명의 부자들을 연구하여 ‘해빙’(Having)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인물입니다. 그녀는 홍주연 작가에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기쁘게 쓰라고 말해줍니다. 돈을 낭비하라는 말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기쁜 마음이 들 때만 쓰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했던 것, 혹은 누군가를 도와줄 때는 돈을 쓸 때 마음이 기쁩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기쁘게 내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원천으로 향하게 됩니다. 원천으로 향할수록 더 많이 받게 됩니다. 원천은 그것이 솟아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쓰는 것이 부자가 되는 길이라는 말은 주님의 뜻대로 돈을 쓰면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믿음이 깔려있습니다. 너무 아낀다는 말은 행복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돈을 쓸 때 기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이에게 주님께서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삶 안에서 언제든 이런 부활과 승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성모님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으니 당연히 당신도 승천하실 것을 믿으셨다고 확신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니 자신도 걸을 수 있음을 믿었던 것과 같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예수님께서 다 해주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처럼 할 수 있음을 믿으라고 인간이 되셔서 모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예수님의 승천을 보시며 당신도 승천하실 것도 믿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대로 되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토마시 할리크의 ‘그리스도교의 오후’를 읽고 있습니다. 책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신앙은 믿음의 대상을 중심으로 바라보면 ‘종교, 교리, 교의, 신학, 조직’의 형태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신앙은 전승과 역사를 통하여 발전하지만 신앙의 이름으로 다른 신앙을 판단하고, 때로는 박해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삶이 불신앙인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셨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도 신앙의 이름으로 이방인을 판단하고, 죄 없는 사람을 단죄하고, 죽음으로 몰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신앙은 믿음의 대상으로뿐만 아니라 신앙은 삶과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부른다고 하느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말은 따르지만 그들의 삶은 배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위선과 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신앙인이지만 신앙인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를 칭찬하시면서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위기가 있다면 신앙을 대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삶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끌림과 떨림’은 비슷한 면도 있고, 다른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격이나 취미가 비슷하면 더 끌리기도 합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맛이 있는 음식도 있지만 입맛에 끌리는 음식도 있습니다. 술도 비싼 술이 좋지만 입맛에 끌리는 술이 있습니다. 저는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이 끌린 사람이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쳤던 소경, 깨끗해지기를 바랐던 나병환자, 부하의 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왔던 백인대장, 딸의 병을 위해 찾아왔던 여인,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던 자캐오, 예수님께 시중들던 마르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있습니다. 세상의 욕망과 권력에 끌리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끌리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하는 연인은 마음이 떨릴 것입니다. 서품식에서 바닥에 엎드려 성인호칭기도를 듣는 서품자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둥지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릴 것 같습니다. 드디어 새집을 마련해서 입주하는 아내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처음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저도 첫미사를 봉헌할 때 무척 떨렸습니다. 무서워서 떨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벅차서 떨리는 것입니다.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의 마음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들것을 들고 걸을 수 있었던 중풍병자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도 떨렸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도 떨렸다고 합니다. 익숙함으로 소중함을 잊어버리기보다는 처음 성체를 모셨던 그 설렘과 순수함으로 신앙을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모님께서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가셨다고 믿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성모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셨기 때문에 원죄의 결과인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면서 하느님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이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 대한 이 모든 찬사와 공경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천사 가브리엘과 성모님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이며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성모님께 대한 찬사와 공경은 시작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 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채워 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할 미래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꿈을 꿉니다
하늘로 오르는 꿈을


이 땅에서
하늘을 품은 이만이


마침내
하늘의 부르심으로


오를 수 있는 그곳을
향한 고운 꿈을


지금여기에서 이루렵니다
꿈을 꿀 수 있도록

 

 

 

성모승천대축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왜? 도대체? 물음을 갖고 답하는 것은 철학이고, 약속이 이루어지라라 굳세게 믿는 것은 신앙이다. 신앙은 따져 묻는 것이 아니다. 조건 없이 확실하게 믿는 것이다.

이 세대는 도대체, 왜라고 묻지도 않고 의문의 답도 없는듯 살아간다. 돈이 하느님일 뿐 아무 의미도 갖지 않고 세월따라 살아갈 뿐이다.

첫 째 물음은 나의 존재 이유이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무엇하는 사람인가?, 어느 곳으로 향해 사는 것인가?’ 이 물음을 갖고 따져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 답을 찾을 때 철학이다.

 

오늘 성모승천대축일이다. 성모승천은 믿을 교리이다. 성서에 근거해 유추되어 얻은 믿을 교리이다. 성모님은 모든 성인들의 으뜸이 되시고, 천사들 보다 우위가 되시어 승천하신분으로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하고 신앙의 모범을 따른다. ‘은총을 가득히 입은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말을 들었다. 그분의 존재 이유를 들었고 믿음으로 받아드렸다. 이는 성모님의 태어남부터 승천까지의 삶은 하느님의 축복에서 비롯된다.

성모님도 어떻게 그런 일이? 라고 물었고 곰곰이 생각했다. 아들 예수님의 잉태 소식 말이다. 천사가 답해 준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삶에서 우려낸 신앙을 통해 믿었고 응답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 지소서’ 그분의 존재 아유를 알았다. 그 믿음은 불변의 신앙이 된다.

 

믿음의 성모 마리아, 엘리사벳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분!’(루카1,45) 믿음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시어 하느님과 함께 하셨다. 성모님의 승천은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성모 찬가 중, 루카1,49-50) 확신에 찬 믿음의 노래이다.

 

성모님 승천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의 극치이다.

오늘은 우리나라 ‘광복절’이다. 김구 선생의 말이 맞았다. 하나된 광복이어야 했다. 두동강 나 갈라진 형제는 아픔을 산다. 남북이 적대의 골이 깊어져서는 안 된다. 하나된 나라, 전쟁 은 멎었지만 여전히 아픔이다. 독립군의 위대한 정신을 기억하고 그들의 정신이 녹아들어 위대한 나라가 되길 기도드린다. 평화의 모후께 봉헌된 이 나라 통일을 앞당기도록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자!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성모님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신앙 교의에 따라 성모님의 승천을 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성녀 엘리사벳을 만나셨고, 마니피캇, 곧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진정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당신의 모든 생애를 바치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의 신앙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을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로 이루어진 것에 늘 감사와 찬미를 드리시고 언제나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시며 당신의 온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드리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에 대한 ‘경외심’이 없을 때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없을 때 그 자연에 대한 파괴가 시작이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기후위기 역시도 인간이 하느님이 창초하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못하고 파괴해 나감으로 인해서 얻어진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인간관계 안에서도 그러한 경외심이 사라지게 될 때 반목이 시작이 됩니다.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니까 결국 서로를 파괴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험담과 이간질, 폭력과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게 될 때 어쩌면 모든 우주의 질서마저도 흔들리게 되면서 결국 비구원의 상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신앙, 그리고 성모님의 경외심과 사랑을 본받아 늘 언제나 하느님께 경배와 찬미를 드리며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 안에서 참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우리는 성모님을 신앙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받아들였던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포기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과 온 인류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게 됩니다. 즉 성모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던 것이며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인류에게는 새로운 빛이 되겠지만 성모님에게는 많은 고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성모님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얻게 될 하느님의 은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받게 될 은총은 성모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히 순종한다면 그분의 구원사업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자신이 함께 걸었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 초대에 함께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묵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기념하러 여기에 모였습니까. 오늘은 성모님께서 승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하느님께서 함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빛나는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의미에서 성모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묵상하고 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은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이 땅에서 실현되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 기도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함께하십니다. 성모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진정한 의미는 성모님의 삶을 다시 바라보면서 자신을 얼마나 포기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면 이 반성이 우리에게는 희망이 될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마리아의 석달과 엘리사벳의 석달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의 한 고을로 향했던 마리아와
성령으로 가득차 큰 소리로 환호하던 엘리사벳!
두 분에게 이 석달의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주님의 어머니이심을 알아보는 엘리사벳의 시선
어머니가 행복한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여인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고백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두 분의 신앙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시고,
교만한 이들을 흩으시며,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분!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고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
그 분을 알아볼 수 있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위로와 희망의 표지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청하며
당신을 향한 믿음과 신앙을 청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Blessed are you who believed
that what was spoken to you by the Lord

 

 

 

하늘을 담을 수 있습니다.

     김인한 도미니코 신부님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오묘합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인생길을 걷는 동안 그 생명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사연들이 담깁니다. 어찌 보면 사람의 시간이라는 것이 모두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모님의 시간도 그렇습니다. 작고 연약한 한 아이 안에서 인류의 구원을 믿고 맡기신 주님 사랑을 헤아려봅니다. 사람이 이뤄낸 것은 참 미약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담겨진 하느님 은총의 위대함을 만납니다. 한편으론 그 약함으로 인해, 늘 넘어지는 무력함으로 인해 하느님 섭리의 위대함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들의 약함의 위대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약함을 넘어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말입니다. 우리는 약하기에 하느님의 은총에 더 많이 기대게 됩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제 하느님 손에 달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되게 다시 희망할 것입니다. 오직 당신에게만 희망을 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만이 기어이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역사를 합당하게 바꾸어주실 것임을 우리는 성모 승천이라는 믿음 속에 담아 오늘 다시 희망을 간직하고 되새겨봅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승천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8월 15일은 광복절이며 성모승천 대축일이다. 성모승천에 대한 것이 성서에 나타난 근거는 없지만, 초대교회에서부터 이에 대한 신앙을 간직해 왔고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Muniticentissimus Deus)이라는 칙서를 통해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다. 교회는 2000년간을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했으나 정식으로 신앙 교리로 선포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교회는 오늘 하느님의 모친,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의 가장 큰 축일을 지내고 있다.

 

복음: 루카 1,39-56: 마리아의 노래

주님의 천사가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전갈을 마리아에게 전하고 난 후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복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이를 낳게 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을, 즉 남자가 없는 처녀가, 그리고 아기를 낳을 수 없던 엘리사벳, 노인 즈카르야의 아내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즉 하느님께 충실히 그 뜻을 받아들이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즉 하느님의 말씀대로(38절).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즉시 집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봉사하기 위해 서둘러 길을 떠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엘리사벳에게 인사한다.”(36절).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는 이제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35절). 그리고 엘리사벳이 당신 친척의 “인사”를 들었을 때, 먼저 당신의 태중의 아기가 성령으로 가득 차 기뻐하였다. 마리아의 방문과 인사는 엘리사벳에게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주었다(41절).

 

이렇듯 마리아는 첫 번째로 성령을 받은 분이셨으며, 엘리사벳은 두 번째 성령을 받으신 분이시다. 이 두 여인은 바로 성령을 전달해 주는 분들이다. 이 두 여인은 함께 태어날 아기들에게 있어 주님의 공동체, 구원의 공동체, 위대한 왕의 거룩한 나라의(참조: 시편 47,3; 마태 5,35), 성령으로 준비된 성전의 처음의 중심인물이 된다. 즉 성령을 모신 궁전이 되신 분들이다.

 

마리아 승천 축일의 의미

오늘 축일은 마리아의 신앙과 삶의 승리와 영광을 드러내 주는 동시에 구원역사의 완성에 희망을 준다. 성모승천은 예수님 부활의 은혜를 입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언젠가 성실한 신앙인 모두에게 주어질 부활의 영광을 마리아를 통하여 미리 앞당겨 이루신 사건이다. 즉 성모승천은 예수님 부활의 재확인이며 미래에 이루어질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다. 성모님의 승천은 꼿 이루어져야 하는 사건이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이미 영원으로부터 당신의 아들을 잉태하실 수 있도록 마련하신 분이시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땅에서 흙을 빚어 만드셨는데 그 땅은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깨끗한 “처녀지”였다. 그 땅의 흙으로 첫 아담을 지어내셨다. 마찬가지로 둘째 아담이신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으로 태어나시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순결한 죄에 물들지 않은 처녀, 동정녀가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에 물들지 않은 성모님은 죽음의 고통 없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셔야 마땅했다. 또한 마리아께서는 신앙으로서도 스스로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하느님께 당신의 육체를 내어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셨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이 완전한 인간인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원이시다. 우리도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생활하면 우리도 그 말씀을 세상에 다시 낳아주는 마리아가 된다. 마리아를 닮는 삶으로 우리가 모두 같은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마리아는 믿음의 여인

마리아를 보면 모든 것이 믿음에서 출발하여 완성에 이르는 모습이다. 즉 천사의 알림에서 십자가 사건 그리고 성령강림까지 믿음으로 가득한 분이시다. 아브라함보다 더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긴 믿음으로 아드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하신 분이시며, 하와의 불순종의 매듭을 당신의 순종으로 풀어주시고 세상에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한 새로운 하와이시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르쳐 준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역사를 인정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게 해준다.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신 그 혈연관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신앙의 여인이었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생애에 언제나 칭송과 영광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분은 어머니로서 또한 많은 고통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께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이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 신앙인의 모델인 성모님께서 인간으로서 당신이 하늘의 영광에 첫 번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마리아와 같은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준다.

 

우리의 생활이 마리아의 삶을 따를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아줄 수 있다. 마리아로서 살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 이때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드릴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함승수 신부님
가톨릭 성가 259번은 <성모 승천>이라는 성가입니다. 이 성가의 가사를 보면 성모님께서 어떻게 승천하셨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성모님의 승천을 바라보며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할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요. 한 번 같이 불러보면 좋겠습니다.


1) 성자 잉태하신 거룩한 몸 무덤 속에 안 계시게 많은 천사 두루 옹위시켜 부활 승천케 하셨네
2) 아들 예수 오른편에 앉아 면류관을 받으시니 천사 성인 찬미하는 노래 하늘 가득 퍼져가네
3) 마음 깨끗한 이들은 모두 주님 뵙게 되오리니 성모 우리 덕을 향한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후렴 : 성모 마리아 하늘나라에 들어 올림 받으시니 우리도 천국을 그리며 주 찬미하리다(2번)


“성모 승천”은 말 그대로 성모님께서 육신과 영혼을 온전히 지니신 상태로 하늘에 오르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능력으로 직접 하늘로 오르신 승천과 구분하기 위해 입을 ‘몽’자에 부를 ‘소’자를 써서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성모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고 따르신 결과 그분으로부터 큰 은총과 복을 입어 죽음의 세력에 완전히 지배 당하기 전에 하늘로 들어올려 지셔서, 하느님과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리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또한 성모님만 특별히 그런 영광을 누리시는게 아니라, 우리들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순명의 삶을 통해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믿으며 희망하는 겁니다.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그런 믿음과 희망을 다음과 같은 내용의 ‘믿을 교리’로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세의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함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


하지만 그 영광을 누리시기까지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을 찾아가기 전까지 성모님의 삶은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결혼도 안한 처녀의 몸으로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잉태하라’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했지만, 그로 인해 갖은 고초를 겪게 된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실망한 약혼자 요셉으로부터 파혼 당할 위기에 놓였고,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라 정결의 의무를 어긴 죄로 돌에 맞아 죽을 위험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동안 꿈꿔왔던 '보통 사람'으로서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을 모두 포기하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해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성모님은 ‘지지리 복도 없는’ 불쌍한 여인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성모님을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준 것은 오직 하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신이 뜻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굳건한 신뢰 안에서,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존재라고,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마침내 온 세상을 구원하는 순간이 오면 자신도 아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으로써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고 의심 없이 믿으셨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 어떤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렸을 지언정 절망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믿는다고 해서 지금 당장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 당신 앞에 놓인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시지도 않았지만 "주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커다란 "희망"이 되어 성모님이 절망 속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준 것입니다.


그런 성모님의 믿음을 칭찬하는 신앙고백이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터져나왔다는 사실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육체적인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이미 시도해 볼 수 있는 것들은 다 해보았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그녀였습니다. '아이를 주실 거였으면 진작에 좀 그러시지'라는 원망과 한탄으로 하느님의 뜻을 애써 무시하려다가 하느님으로부터 남편인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는 '징벌'을 받아 두려움에 떨었던 그녀였습니다. 그러다 정말 '하느님의 뜻'대로 잉태하여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고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산을 기다리는 그녀였습니다. 그런 그녀였기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자신도 처음부터 그렇게 믿었더라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신에게 아들을 주시려고 한 고마우신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을텐데, 인간적인 부족함과 한계 따위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능히 극복해내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고 믿었다면, 남편인 즈카르야도 벌을 받아 벙어리가 되는 고통 속에서 죄인처럼 시간을 보내는 대신, 자신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자비를 찬미하며 기쁨 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맘껏 누릴 수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임에도 그런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성모님의 모습이 대견하고 또 부러워서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는 신앙고백이 튀어나왔던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반드시, 기필코 당신 뜻을 이루시고야 맙니다. 그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 고집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그 누구보다 나의 행복과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의심을 품고 스스로를 두려움과 절망 속에 빠뜨려 불행하게 살게 만드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의미없는 고통이란 없습니다. 내가 보내는 모든 시간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극복할 수 없는 절망이나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다 하느님께서 나를 더 큰 행복으로 이끄시기 위해 하시는 일임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 다시 말해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섭리는 믿음으로 시작되어 순명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순명은 내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길’이 훤해보여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희망을 꺾지 않으십니다. 충만한 은총과 복으로, 가장 큰 기쁨과 행복으로 우리의 희망을 채워주십니다.

 

 

 

어머니 중에 어머니인  마리아여! <루카1/39-56>8/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마리아를 믿는 교회가 아니라 마리아를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세상에서 모성애 만금 모범적 사랑은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어머니가 되겠다는 마음부터 겸손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었습니다. 들어나면 돌로 맞아 죽을수도 있는 자리를 하느님뜻에 “ 아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이 뜻대로 이루어 지소서” 하시며 주님의 어머니로 선탹하시었습니다. 이로써 인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하였습니다.


여자로써 약하지만 어머니로써는 가장 강한 것은 어머니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받고 존경맏은 어머니 마리의 하늘나라로 승천하신 축일을 지내며 성모님의 삶을 집어 보며 하느님의 큰 사랑을 도리겨 보고 감사와 찬미의 시간을 가지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일생을 도리켜 보면서 그 사랑 은총에 평화와 기쁨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주님은 잉태하시고도 나이많은 엘리사뱉의 임신을 도우려 찾아 가시고 도와주신 어머니는 섬김 나눔 친교의 보범자이십니다.
때가 되어 편하게 아기를 낳을 수 없는 형편에도 아무런 불평없이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으신 용기와 낮은 자세를 찬미합니다.  지금은 조리원이니 아기와 산모를 보호하는 기관이 있어도 힘들어하며 아기를 낳아 기르는데 성모님의 고통은 말할 수없었지만 참고 견디며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느님이신 주님을 품으셨습니다.
헤로데의 폭거에 에짚트로 피난가시며 천사의 말을 따라 아기를 보호하시였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가지 성서는 자시히 전해주고 그 안타까운 사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보시고 성령의 오심을 경험하신 마리아는 주님이 죽기전 성모님은 우주의 어머니 되시어 모든의 어머니되셨습니다. 2000년 동안 교회는 만인의 어머니로써 사랑과 존경을 받게 하시면서 우리의 보호자 되게 하시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녀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지  잘알고 있습니다.


어느날 산중턱에 옷을 벗고 맨몸으로 죽은 여인의 곁에 어머니의 옷을 입고 살아있는아기를 발견한 이야기 얼마전 터키에서 지진이 나서 무너진 돌더미에서 아기를 품고 자기는 그많은 장애물인돌로 죽어도 아기를 품고 아기는 살아있는 모습은 어머니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상담자 중에 신랑은 죽었는데 젊은 어머니로써 약간의 장애아를 사랑하는 나머지 결혼하지 않고 아기를 사랑하면서 살겠다는 사람을 만나 감동을 받았으며 하느님 보신적 있는냐 하니 내 하며  장애자 아이가 저에게 보이는 하느님라 합니다. 저는 상담하다가 상담자에게 배우고 믿음을 성장시키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어머니를 알고 신뢰하며 도음을청해 받으며 사는 믿음을 하느님께 받고 산다는 것 얼마나 행복합니까? 천상에 하느님 옆에 게신 어머니를 통해 “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하는기도를 들이며 성모님을 사랑하는 은총 안에 살도록 기도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승천의 일상
승천의
여정인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새로운
이 모든 것이
시작될 때는
언제나
아픔과 두려움이
있지만

새로운 모든 것이
완성될 때는
승천처럼
진정한 기쁨과
영광으로
우리를
가득채웁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뜻이
하느님을 만나면
이와 같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가르침이 됩니다.

하느님을 낳으시고
하느님을 길러주신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오늘 하늘나라로
승천하십니다.

고맙고 존귀하며
고맙고 소중하신
우리의
어머니의
여정입니다.

우리보다
더 기뻐하시고
우리보다
더 애태우시는
우리보다
더 안타까이
슬퍼하시는
우리 어머니의
삶입니다.

화려함만
승천이 아닙니다.

비천함도
가난함도
승천의 놀라운
선물들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 끝에서
우리를
맞이하여 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랑의 결실이
있습니다.

승천은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결실입니다.

올리시는 분도
내리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끝내 우리모두는
비천함을 지나
하느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땅은
사랑의 하늘로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삶입니다.

문을 열어주시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고

이끌어주시지
않고서는
오를 수 없는
승천의 여정입니다.

사랑한 모든
시간이 신비이며
은총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승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은총 가득하신
고마우신 사랑의
마무리는
승천입니다.

끝내 만나게 되는
믿음과 사랑의
진정한 승리입니다.

믿음은
미끄러지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씩
오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향하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우리 일상의
소중한 승천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성모 승천의
발걸음을
기억하는
소중한 대축일
되십시오.

모든 이야기의
끝은 사랑이며
하느님이십니다.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네이버 뉴스 기사에 올라온 댓글로 사람들의 추천을 많이 받아 ‘베스트 댓글’이 되었다고 합니다. 과연 얼마나 잘 쓴 댓글일까요?
“빌 게이츠? 그저 운이 좋아 프로그램 하나 만들고 억만장자가 된 사람이잖아.”
“사실 아이폰을 만든 건 스티브 잡스가 아니지. 잡스는 진짜 천재인 워즈니악한테 빨대 꽂은 인간이지.”
“왜 다들 워런 버핏을 현자니, 뭐니 치켜세우는지 이해가 안 돼. 그 사람 그냥 주식으로 해서 돈 번 사람 아닌가? 개미들 피 빨아먹는 투기꾼일 뿐이야.”

어떻습니까? 진짜 공감이 가는 댓글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남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가짜 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감할 필요도 없고, 공감할수록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부족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족한 사람의 평가가 완전할 리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많음을 스스로 깨달으며 자기편을 만들어 갑니다. 이 세상에서 할 새로운 일도 더불어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어머니 성모님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아직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분명 기뻐할 일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기뻐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간음죄로 공개적으로 처형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느님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세상의 시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엘리사벳 역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했던 두 사람은 우리 구원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을 낳게 되었습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시선에 집중하고 있나요? 세상의 시선에 집중할수록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며, 자신을 저버리지 말라(크리스토퍼 리브).

 

 

 

성부께서 간택하신 신부가 하늘의 신방에서 사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은 성모승천이라고 하는데, 과거에는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 했습니다. 입을 몽자에 부를 소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부르심을 받았기에 비로소 승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의 지향점은 하느님의 총애를 입으신 성모님께서 하늘로 불러올림을 받으셨다, 즉 구원되셨다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1950년 11월 1일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회칙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통해서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세의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함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

 

성모 승천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대사건입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오늘 지상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에게도 가능한 일이 승천이고 구원이요, 천상 영광에의 참여입니다.”

 

성모 승천 교리는 하느님께 대한 성모님의 신앙과 순종, 헌신적인 태도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구원과 승천이라는 풍성할 결실을 맺었음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면서 그분의 구원 의지 실현을 위해 헌신한다면 성모님처럼 구원과 승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모 승천은 지상 순례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징표로 제시됩니다.

아울러 성모님이 도달한 목표는 개인만의 목표가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목표, 교회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마리아 안에서 교회는 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목표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후에도 이 목표에서 빗나갈 수 없다. 마리아의 현양은 세상 종말에서 교회 현양을 위한 보증이다.”

 

이토록 영예롭고 영광된 성모님이시지만, 그분의 삶이 언제나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한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의 삶은 때로 기구하고 때로 혹독했습니다. 때로 삶 전체가 슬픔 덩어리요 고통 덩어리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때 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건네신 언약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자신은 그분의 부족하고 나약한 여종일 뿐이라는 겸손한 신원의식을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은 혼란과 무지의 상태이지만, 언젠가 그분께서 내 눈과 마음을 열어주셔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때가 오리라는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 오랜 인내와 기도, 의탁과 희망의 결과가 영광스러운 승천인 것입니다.

 

성모 승천과 관련된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의 찬미가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창조주를 아기로서 품에 안았던 분이 하느님의 집에 사랑으로 가득 차서 머무는 것을 옳은 일입니다. 성부께서 간택하신 신부가 하늘의 신방에서 사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가까이서 보며, 아들을 낳으실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칼날 같은 슬픔을 느낀 이가 자기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천재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마지막 작품이고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힙니다.

그는 1600년경에 귀족들의 그림을 도맡아 그리던 가장 유명하고 실력도 완벽한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술만 취하면 욕설과 폭행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돈을 대어 그를 빼내 주고는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간 횟수가 열다섯 번이나 됩니다. 

 

자기 실력을 믿고 그렇게 자만하던 중, 1606년 5월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가 다시 후원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번엔 모두 등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탈옥에 성공하여 이태리 가장 남쪽의 섬 몰타로 도주하여 몸을 숨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지긋지긋한 나머지 유일한 사면권이 있었던 교황을 설득해보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1610년 세계 처음으로 조명을 사람에게 직접 비추는 기법을 이용해 어린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들어 올리는 그림을 완성해냅니다. 

이 그림은 교황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그림 속의 다윗은 어렸을 때의 순수하고 겸손했던 자기 모습을 의미하고 목이 잘린 흉측한 골리앗의 머리는 지금의 자신을 상징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성직자들의 말에 불순종하여 끊임없이 범죄를 저질러왔던 자기 자신을 죽였음을 의미하는 회개의 증거품이었던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그 완성품을 들고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랐으나 중간에서 경찰들이 카라바조를 연행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를 도둑으로 오인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만 그림을 배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경찰들은 카라바조가 도둑이 아닌 것을 알고 놓아줍니다. 그러나 그림을 가지지 않고서는 교황에게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배를 쫓아 걷고 또 걷습니다. 그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길거리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카라바조는 왜 그 그림에 그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그 그림이 아니면 교황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그림 안에 자기 뜻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넣기 위해 피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니 소중한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를 사랑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점점 커감에 따라 부모의 뜻이 아기 안에 더 들어갑니다. 아이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부모의 뜻을 아이를 통해 실현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주시는 부모에게 감사해서 그분들 뜻을 따라줍니다. 그렇게 두 발로 걷고 말도 하고 공부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부모는 그 아이 안에서 자기 살과 피로 넣어준 그 뜻, 그 보석을 보며 아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피 흘리고 고생한 자녀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 아니실까요? 인간이라고 해서 다 천국에서 살게 하실 수 있을까요? 그러면 가리옷 유다도 지옥으로 보내면 안 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리옷 유다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넣어주시기는 하였지만, 자신을 죽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 뜻이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불이 났을 때 내가 들고 나오는 것이 내 피가 가장 많이 섞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체를 영해도 그분 뜻을 실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께 귀하게 쓰일 수 없습니다. 

 

‘시몬과 페로’라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나이 든 시몬은 감옥에 갇혀 젊은 여인의 가슴에서 젖을 먹는 음란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젊은 여인은 시몬의 딸 페로입니다. 페로는 아사형을 받은 아버지를 위해 아기에게 주어야 하는 젖을 아버지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성모님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성모님을 육체적으로 칭송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모님께서 칭송받으셔야 할 더 큰 의미를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님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잉태하실 때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서약한 것입니다. 그렇게 페로처럼 비난받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런 분에게 영광이 주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있습니다. 수수한 옷차림에 커다란 귀걸이를 한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 영화에서는 이 소녀가 가정부로 묘사됩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젊은 나이에 남의 가정부로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것은 가난한 화가뿐입니다. 그 화가도 능력이 부족하여 아내 집에 얹혀삽니다. 아내와 딸, 장모님은 화가가 그 여자와 빠지지 않도록 빈틈없이 감시합니다. 소녀는 그들에게 지쳐갑니다.

그 소녀를 노리는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 화가에게 돈을 대는 부자입니다. 그는 그 소녀를 그리면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소녀를 그리는데 화가는 아내의 진주 귀걸이를 귀에 걸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어찌 될지 뻔합니다. 그리고 소녀를 좋아하는 연인도 그 집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그 연인은 그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임신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녀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하는 행동으로 그 화가만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인간적으로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그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기로 합니다. 화가는 그 그림으로 매우 유명해집니다. 덕분에 소녀는 쫓겨나고 연인과도 사이가 안 좋아집니다. 몇 년 뒤 화가의 하녀가 그 소녀에게 선물을 전해옵니다. 그 진주 귀걸이입니다. 화가는 자신의 영광을 그 소녀에게 돌린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이런 희생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뜻이 성모님 태중에 잉태되시고 그분의 피 흘림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진주 귀걸이의 영광을 받아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성모님께서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갑시다. 그 피 흘림이 영원한 승천과 영광의 유일한 길입니다. 

 

 

 

조재형 가즈리엘 신부님

오늘은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깊은 사랑과 공경을 드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을 각별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을 지내면서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을 선포하셨던 예수님, 많은 표징과 말씀을 전하셨던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으로 믿었습니다. 성부와 성령과 성자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 되셨으니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인 마리아는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두 번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의 몸은 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 역시 거룩한 몸이라는 믿음입니다. 성모님은 루르드에서 발현하셨을 때에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여인’이라고 벨라뎃다 성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리아의 승천입니다. 첫 번째 인간인 하와는 죄를 지었고,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거치지 않고 승천하셨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네 번째는 동정이신 마리아입니다. 교회는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가 복음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도 있지만 성모님께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순명’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들었던 성모님은 당혹스러웠지만 하느님의 뜻임을 알았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순명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순명은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열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열정이 있었고, 가야 할 길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 굶주린 이를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는 ‘중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혼인 잔치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청을 받아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미래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은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분단된 조국은 절반의 광복입니다. 언젠가 하나 되는 조국으로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하느님의 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그 안에 있건만
쉬 느끼지 못하는


하느님의 품


무뎌진 몸과 마음을
다시 곱게 감싸는


하느님의 품


모든 사슬을 끊어내고
새로이 일어나게 하는


하느님의 품


그 안에서 희망으로
그 안에서 앞으로

 

 

 

영광의 성모님 승천 감사송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오늘 하늘에 오르신 분 하느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의 아드님께서 동정 마리아의 몸에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에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이 무덤에서 썩지 않도록 섭리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천사들의 무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성모승천 감사송)

 

이 나라, 광복절에 남과 북이 화해로 하나되게 하시고,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주님께서 우리의 바람을 이루어 주시길 기도하며 오늘을 살겠습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지상 생활을 마치신 다음 하늘나라에 들어 올림을 받으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인류에게 보여 주는 희망의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받을 영광을 미리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뵙고 성령에 감동되어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구세주를 잉태하시며 하느님 구원의 통로가 되셨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때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어 들이고 그분의 성령이 함께하시길 원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마니피캇, 곧 성모찬송을 노래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드리고 그분을 모시고 아드님을 잉태하시며 그 아드님을 위해 평생을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신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19,27) 우리도 역시 그분의 사랑받는 제자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고 성모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드리고 언제나 주님과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며 하느님 안에서 승리와 영광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역시 성모님의 뒤를 따라 우리 삶의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태중 두 아기들의 교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성령 가득찬 60대여인 엘리사벳은 태중아기의 기쁨을 외쳤다 합니다.
16대 조카 마리아에게 태어날 주님이신 아기의 어머니라면서 말예요.
태중의 두 아기들의 교류로 두 여인은 하느님 품 행복을 표현했어요.

우리 같은 인간들이 현장에서 두 여인의 말을 들었다면 벙벙했겠지요.
60대 여인이 16세 여인에게 주님의 어머니라며 행복하다 인사했다니.
초월적 영의 세계가 아니고서는 인간들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죠.

예수님은 태아 때부터 성령 안에서 통할 이에게는 자기 표현하셨네요.
오늘을 성모승천 날로 정한 가톨릭교회도 성령이 통한 거라 믿습니다.

 

 

 

아, 어머니! 성모 마리아. -교회의 어머니, 신앙의 어머니-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정인보(1893-1950) 작사, 윤용하(1922-1965) 작곡-

 

성가처럼 느껴지기도 할 광복절 노래 한 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8월15일은 제77주년을 맞이하는 광복절이자,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72년전, 1950년 11월1일 교황 비오 12세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림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계시된 진리”라고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이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며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에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 받으셨다”(교회헌장59항), 성모승천교리를 교회의 정통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자 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을 주제로 발표한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 메시지도 은혜로웠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을 모범삼아, 험하고 힘든 세상에 다리를 놓아야 하며, 교회 자신이 다리가, 신앙의 다리, 사랑의 다리, 통합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교황님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가 ‘폰티펙스’(Pontifex)인데, 이는 ‘다리(pons)’와 ‘만들다’(facere)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그 어원이 ‘다리를 놓는 사람’이란 뜻이라 하니 참 의미심장합니다. 교황님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다리를 놓는 소통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세상에 신앙의 다리, 희망의 다리, 사랑의 다리, 즉 신망애의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교회의 어머니, 신앙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닮는 일입니다. 성모님이야 말로 기쁨과 희망의 어머니요, 찬미와 감사의 어머니요, 승리와 영광의 어머니로 우리 믿는 이들의 믿음의 모범이요 영원한 어머니가 되십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시 찬미가와 후렴 노래도 은혜로웠습니다.

 

“태양의 빛입으신 동정녀시여, 열두별 머리위에 꾸미신이여,

저달을 발판삼아 우뚝서시니 환하게 빛나도다 당신의 광휘”

 

바로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 근거한 찬미가요, 이어지는 후렴 및 즈카르야 노래 후렴도 한결같이 성모님께서 하늘에 올림 받으셨음이 강조되었습니다.

 

“기뻐하라, 오늘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시는도다.”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곳에 왕중의 왕께서, 별빛 찬란한 옥좌에 앉아 계시는도다.”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으니 천사들이 기뻐하며, 주를 찬미하는 도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또한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아, 이 모두는 성모님의 지상생애를 반영합니다. 참으로 치열히 일편단심 하느님과 아드님께 자신을 남김없이 헌신했기에 이런 승천의 영광으로 하느님께서 보답하신 것입니다. 이런 성모님을 하늘에 불러 올리신 하느님께, 희망의 표징인 성모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우리 또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기다리고 인내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참 좋은 이웃의 다리가 되어 살 수 있을까요?

 

첫째, 겸손과 소통의 어머니 마리아를 닮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과의 만남과 우정이 이를 입증합니다. 영적 도반 엘리사벳을 친히 찾아 나선 겸손과 소통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참 은혜로운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의 태중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참 그림같은 아름다운 영적도반들의 만남입니다. 두 어머니들과 더불어 태중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인생 광야 여정중 이런 영적 도반과의 만남은 그대로 오아시스입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더불어 영적 도반들인 형제들을 새롭게 만나 영적 우정을 새롭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 그대로 오아시스같습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참으로 깊은 영적우정관계에 있는 두 어머니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새삼 그 어머니에 그 아들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 찬미와 감사의 어머니 마리아를 닮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의 응답에 감격한 마리아의 찬미가 참 아름답습니다.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바로 오늘 마리아의 노래는 초대교회 가난한 이들, 즉 아나뵘의 노래였습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에 대한 노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유일한 자산이 바로 이런 찬미 감사가 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이어지는 마리아의 노래는 늘 불러도 새로운 힘과 감동을 줍니다. 평생 날마다 저녁성무일도 끝무렵에 성모님과 함께 아나뵘의 영적 후예들인 우리 믿는 이들이 바치는 노래기도입니다. 이런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을 통한 주님의 은총이 성모 마리아를 닮아 우리 모두 외로움과 고독의 광야 세상에서 참 좋은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신망애의 수련에, 훈련에 하느님 찬미와 감사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찬미와 감사의 맛에, 기쁨에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셋째, 승리와 영광의 어머니 마리아를 닮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사신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궁극의 승리는 하느님께 있으며 성모님처럼 주님 향한 신망애의 삶에 항구할 때 영적승리에 영광의 삶입니다. 바로 성모님의 승천은 성모님의 영적승리와 영광을, 희망과 기쁨을 상징합니다. 그대로 성모님의 평상시 삶의 성취가 바로 성모님의 승천입니다. 바로 이런 어머니의 승리와 영광의 삶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으로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그대로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살만한 세상입니다. 그리스도님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기쁨과 희망의 표징이자 승리와 영광의 표징인 성모마리아님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성모님을 닮은 살아계시거나 이미 세상을 떠나신 우리 어머니들입니다. 오늘은 이미 돌아가신 제 어머니 신마리아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내 어머니, 

신 마리아!

삶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였고 종교였다.

이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상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어머니를 그리며” 기도시중 떠오른 한 대목입니다. 알게 모르게 신망애의 삶을 사셨던 우리 어머니들도 모두 성모님과 함께 승천의 승리와 영광을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승리와 영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오늘 아름다운 감사송을 나눕니다. 오늘 하루 깊이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며 지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늘에 오르신 분, 하느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의 아드님께서

동정 마리아 몸에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에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이 무덤에서 썩지 않도록 섭리하셨나이다.”- 아멘.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묵시12,1)

     김혜선 아녜스 수녀님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잉태하여

말씀을 낳았네.

 

그리하여

그 여인인 교회는

지금도 끊임없이

목마른 영혼들을 잉태하여

세례를 주고

 

그들을 성사를 통하여

양육시킨 다음

말씀의 선포자로

세상에 내보낸다네.

 

 

 

사랑했다, 사랑한다, 사랑할 것이다.

     김효준 레오 신부님
마리아는 엘리사벳 앞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을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통치자들을 끌어내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며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해서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이미 성취된 과거의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끌어내리셨습니다.” “들어 높이셨습니다.” “배불리셨습니다.” “내치셨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이 구절들은 ‘아오리스트’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어에만 있는 이 독특한 시제는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통상적인 시간의 개념들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불변의 진리나 역사적 사실을 묘사할 때 이 시제를 사용하곤 합니다.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일은 추상적인 개념도 아니고 막연한 기대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시간의 제한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는 ‘너를 사랑했다.’와 ‘너를 사랑한다.’와 ‘너를 사랑할 것이다.’가 모두 같은 시간대에 속해 있는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니 나 또한 마리아처럼 노래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셨습니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 찬송의 기도가 일상의 찬미와 기도가 되게 하소서.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Blessed are you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1950년 11월1일 교황 비오 12세는 “믿을 교리” 하나를 선포하였습니다. 교황님은 교리와 대중적 신심과 전례를 통하여 표현된 성모님의 승천에 관한 믿음을 정리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신앙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고 있지요.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고 성모님의 이 한마디 응답은 자신의 운명과 온 인류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았던 큰 사건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이러한 고백을 통해서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모든 것을 품는 것이며 자신 또한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함께하는 것, 또한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이를 통해서 온 인류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또 자신의 운명에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온갖 고난을 감당할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앞으로 얻게 될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느님 말씀에 충실히 순종하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받게 될 은총이라는 것이지요. 성모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던 분으로써 살아있는 그대로 승천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주님의 길을 걸어간다면 받게 될 은총이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모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우선으로 살아가며 십자가의 길로 들어선다면 마지막 순간에 성모님과 같이 승천하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것만으로 오늘을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을 기념하는 진정한 의미는 성모님의 삶을 다시 바라보면서 자신을 얼마나 포기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먼 훗날 성모님처럼 우리도 불사불멸의 갑옷을 입고 승천하는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모님과 함께 자신의 것을 언제든지 포기할 준비가 되었는지요. 그리고 성모님과 주님의 길을 걸어갈 준비가 되셨는지요. 아멘!

 

 

 

세계 3대 성모 발현 성지를 순례하다.

     최하경 대건 안드레아(『세계의 성모 발현 성지를 찾아서』 저자)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교황청에서 인정한 성모 발현 성지 16곳1) 중 세계 3대 발현 성지인 ‘멕시코의 과달루페’, ‘프랑스의 루르드’, ‘포르투갈의 파티마’를 찾아가 봅니다. 이 성지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 성모님의 발현과 메시지가 그 지역이나 국가,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둘째, 등급이 높은 바실리카2)로 지정된 성당이 2~3개 이상으로 성지의 규모가 매우 큽니다. 셋째, 성모님을 목격한 시현자들이 모두 성인품에 올랐으며(3대 성지 외에는 프랑스 뤼 뒤 박만 성인반열에 오름) 넷째, 역대 교황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 교황님의 성지 순방이 다른 성지보다 많았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과달루페를 무려 4번, 루르드를 2번, 파티마를 3번이나 순방하셨으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과달루페와 파티마 성지를 순방하셨습니다.

 

멕시코의 과달루페(1531년)

1531년 멕시코시티 테페약 언덕에서 멕시코 원주민과 같은 모습을 한 갈색 피부의 성모님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57세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을 동정녀 마리아로 밝히면서 성당을 세우라고 하셨고, 이에 디에고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주교에게 전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3일 후 디에고에게 다시 발현한 성모님은 당신과 디에고가 처음으로 만났던 장소에 가면 장미가 만발해 있으니 그것을 따오라고 하셨습니다. 디에고가 자신의 망토에 장미를 담아 가져오자 성모님은 “이 장미를 주교에게 가져가 내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디에고가 주교에게 가서 망토를 펼치자 장미들이 떨어지며 망토에 발현하신 성모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주교는 겨울임에도 디에고가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장미를 가져왔다는 것과, 그 망토에 성모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주교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성모님의 전언을 믿지 않은 자신을 반성하고, 용서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후 주교는 이 망토를 성물로 지정했으며, 망토를 소장하기 위해 테페약 언덕에 성당을 세웠습니다. 디에고는 주교의 허락을 받아 성모님을 찾아오는 순례객들에게 망토를 보여 주면서 성모님의 발현에 관해 설명했고, 마침내 성모님 발현 후 7년 만에 우상숭배와 인신 제사를 지내던 멕시코인 800만 명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신앙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확산되어 정착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루르드(1858년)

1858년에는 피레네산맥과 인접한 산골 마을 루르드에서 성모님이 14세의 가난한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셨습니다. 베르나데트는 땔감을 구하기 위해 가브 강가로 갔다가 마사비엘 동굴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마치자 여인은 동굴로 사라졌으며, 성모님은 이날부터 총 18번을 발현하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아홉 번째 발현에서 성모님은 바닥을 가리키며 “샘에 가서 샘물을 마시고, 씻어라.”라고 하셨고 베르나데트가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하자 흙탕물이 솟구쳤으며 그녀는 그 물을 마시고 얼굴을 씻었습니다. 그녀가 파냈던 흙탕 구덩이에서 맑은 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소식이 오후 늦게 알려지자 인근의 환자들이 몰려와 샘물을 마시고 몸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몸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치유에 대한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루르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순례자가 급증했습니다. 성모님 발현 이후 최초 55년간 4,445건의 치유가 보고되었고, 지금까지 총 7천여 건의 치유 사례가 보고되었으며, 이 중에서 주교님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치유의 기적은 70건이나 됩니다. 루르드 성지는 지금도 몸과 마음이 아픈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입니다. 성지에는 다른 성모님 발현 성지에서는 볼 수 없는 침수장이 있어서 성모님의 샘물에 몸 전체를 담그는 은총의 시간을 체험할 수가 있는데, 실제 수많은 치유의 기적이 이 침수장을 이용한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

 

포르투갈 파티마(1917년)

1917년, 파티마에서 양을 돌보고 있던 3명의 어린이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하늘에서 왔단다. 전쟁의 종말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매일 묵주기도를 드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발현하신 성모님은 세 어린이에게 인류 운명과 직결되는 세 가지 비밀 예언을 하셨습니다. 제1예언은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곧 끝난다는 것이며, 제2예언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더 나쁜 일(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며, 러시아가 잘못된 사상을 세상에 퍼뜨리고 전쟁을 일으킬 것이나 결국 러시아는 회심하여 평화의 시대를 이루게 된다는 것, 그리고 제3예언은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베드로 광장에서 저격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마지막 발현에서 성모님은 자신의 메시지가 특별하고 중요한 것임을 알리기 위하여 7만 명의 군중에게 태양의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성모님의 기적은 가는 곳마다 화제가 되었고,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민중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가톨릭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던 제1공화정은 무너졌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날마다 묵주기도를 올리라는 것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일정 부분의 고통을 인내하라는 성모님의 메시지는 지금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끌어주는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와 같이 ‘성모님의 발현’이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들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구원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신앙생활의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게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느님께 향할 수 있도록 늘 하느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일상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신앙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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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멕시코 과달루페, 폴란드 레자이스크, 리투아니아 실루바, 프랑스 생테티엔르로, 프랑스 파리 뤼 뒤 박, 이탈리아 로마 프라테 성당, 프랑스 라 살레트, 프랑스 루르드,

체코 필리포프, 프랑스 퐁맹, 폴란드 기에트슈바우트, 아일랜드 노크, 포르투갈 파티마, 벨기에 보랭, 벨기에 바뇌, 르완다 키베호

2) 교황에 의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 특별한 성당[한국가톨릭대사전]

 

 

 

가장 다정다감한 이름 “어머니” <루카 1, 39-56> 8월 15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어머니, 엄마”로 불리는 사람은 사랑의 첫째 자리에 있는 분이며 급할 때 부르며 도움을 청하는 이름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필수적 존재이며 어머니가 없으면 아이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어제 갑자기 서울에서 예전 상담자에게서 생각지도 않은 전화를 받고 상담 중이라서 나중에 받기로 하고 저녁에 약속한 시각에 전화가 와서 들으니 95세 된 어머니가 건강하시다고 전제하고 끝말은 넘어져 응급실에 있다고 말하며 기도를 청합니다. 어머니 본명을 물으니 “마리아”입니다. 한 시간 후 문자가 와서 “돌아가셨습니다.”

어제저녁부터 성모님이 돌아가시고 승천하신 축일을 준비하면서 죽음과 영원한 생명과 연결된 묵상과 기도가 함께 나왔습니다. 마리아의 영원한 삶을 구하면서 4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제 무릎에서 임종하신 어머니는 한 성녀 같은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미사 상을 차리고 형제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어머니를 하느님 나라로 영원히 보내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된 어머니 마리아의 승천 대축일을 지내며 지극히 거룩한 성모 마리아의 공덕을 기리며 찬미 찬송하고 피조물에 주어진 최상의 상급을 기억하게 합니다. 성모님은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주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인류의 모든 생명은 모든 어머니의 고통을 통하지 않고는 생겨나지 못합니다. 10달 동안 몸에 생명을 품고 생각과 말과 행위를 조심하며 몸가짐도 더욱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지고 어린 생명에 영과 몸을 전해주십니다.

성모님은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하느님 뜻을 따라 받아들이고 주님의 종과 같이 사시며 주님의 어머니 역할을 잘하셨습니다.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당연하다. 우리도 그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결심하며 어머니를 찬미 찬송합니다. 우리도 어머니처럼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해봅니다.

오늘 축일은 나와 너의 축일 되고 모든 이의 축일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모든 어머니가 성모님처럼 자기의 의무를 다하도록 기도합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 5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을
믿으셨던
성모님의 삶이다.

하늘은
하늘의
마음이 있고

하늘의
삶이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 지를
묻게되는
은총의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여정의 끝은
새로운
하늘의 시작이다.

견디어 낸
하늘이며
하나되는
사랑이다.

하늘은 사랑을
만들고 땅은
사람을 키운다.

하늘과 땅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시는
성모님의
여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사랑의
신비이다.

성모님은
십자가를
끌어안으며
하늘로 오르신다.

십자가도
사랑으로 품으면
하늘이 된다.

이와같이
사랑이 목적이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목적이다.

하느님을 통하여
인생을
가르쳐주시는
어머니이시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

성모 승천은
성모님의 여정을
품고 있다.

성모 승천은
사람과 하늘이
하나되는
기쁨의 길을
보여주신다.

성모 승천은
참 신앙인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느님 사랑은
한계와 절망까지
뛰어넘으며
우리를 구원하신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의 힘이다.

승천은 말씀과
실천 안에
온전히 존재하는
하느님의 구원이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먼저 하느님을
진실로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

빛과 사랑 안에서
성모님이 하늘로
오르신다.

언젠가 어느 형제님 두 분이 언성을 높이며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딱 들어 보니 정치적인 이야기입니다. 진보와 보수의 다툼처럼 보였는데, 서로가 자신의 말이 맞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다 인터넷 유튜브 영상입니다. 요즘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의 알고리즘은 우리를 비슷한 사람들과 짝지어 주고 우리의 취향 및 의견과 가장 잘 맞는 매체나 뉴스를 연결해주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유튜브에 들어가 있지만, 자신이 보는 것은 상대방과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반대편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연결로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촛불혁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 두 형제님의 다툼에서 볼 수 있듯이 연결이 오히려 분열이 일어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무조건 틀렸다는 생각 자체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다른 것임을 인정하면서 더불어 더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분열이 아닌 일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일치의 하느님을 우리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바로 주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하느님에게서 받으신 영광을 찬미하는 날입니다. 이런 성모님이 부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승천하셨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갑곶성지 봉안당을 운영하면서 거의 매일 죽음을 보다 보니, 죽음을 건너뛰고 하늘로 오른다는 것은 정말로 부러워 보이는 일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영광은 단 한 번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예수님의 죽음 때까지 성모님께서는 엄청난 고통을 당신의 가슴으로 안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에 대한 답답한 마음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엘리사벳 성녀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성모의 노래’라는 찬미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죄로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던 때였습니다. 이런 어려운 순간을 주시는 하느님 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아시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이 우리 모두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영광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어떠한가요? 하느님과 철저하게 일치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찬미의 노래를 힘차게 부를 수 있습니다.

경험은 한 번도 열어 보지 못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세계는 한 칸씩 넓어진다. 새로운 문이 열리면 세게의 모양도 크기도 달라진다(박서영).

 

올해는 휴가를 가겠습니다.

신부가 되고서 사실 휴가라고 해서 쉬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분명 교구 규정집에는 1년에 20일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일반 사람들도 휴가를 잘 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차마 저만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휴가를 전부 찾아 쓰는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20% 더 만족하고, 전반적인 행복감이 56% 더 높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용한 휴가 일수는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감소해왔다.”
처음에는 열정이 넘쳐서 휴가를 가지 않았지만, 이것이 몸에 배서 쉬면 죄를 짓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쉬지 않으면 그만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올해는 진짜 휴가를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리고 행복감을 느끼고 이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겠습니다.

 

 

 

하늘나라에도 경쟁이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 육신을 지니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당신 아드님과 함께 사십니다. 이것을 기분 나쁘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모님을 너무 신격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육신을 지니고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무엇이 신격화라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성모님은 원죄가 없으셨습니다. 원죄란 아담과 하와가 지어 인류에게 미친 죄입니다. 자아, 곧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인데 자아는 그것과 반대되는 욕구로 자기 먼저 살라고 합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원죄에 물드셨다면 그 인성을 그대로 받는 예수님도 원죄에 물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죄인이 되어 인류를 구원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신 상태로 준비되셔서 예수님께 죄에 물들지 않은 인성을 물려주셔야 했습니다. 인간의 몸이 죄 때문에 죽음을 보게 되고 썩게 되었다면, 죄 없는 성모님은 그 육신으로 죄 짓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상태로 에덴동산에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모님이 이러한 상을 받지 않으셨다면 어떨까요? 우리 인간 중에 누구도 더 거룩해지기 위해 경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신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모님처럼 더 거룩하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됩니다.

경쟁은 나쁜 것일까요? 물론 이 세상에서의 경쟁은 지옥을 만듭니다. 인도의 물소 달리기경기가 마을마다 축제였던 때가 있었는데 여기에 상금을 거니 자신의 경쟁자를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경쟁은 나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경쟁은 좋습니다. 왜냐하면, 노력한 만큼 상을 받아야 정의로운 것입니다. 저도 어떤 피정에 가서 열심히 하면 1등을 할 수 있고 그러면 본당의 영광이 된다고 해서 열심히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1등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영광을 받았습니다.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보상을 받지 못하자 다음번 피정에는 대충하자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만 성격이 못되어서 그럴까요?
등수를 주지 않으면, 혹은 낙제가 없다면 인간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원죄의 힘이 그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지옥이 없다면 어떨까요? 다 대충 살 것입니다. 천국에서 서열이 없다면 어떨까요? 간신히 주일만 지키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각자가 더 많이 받기 위해 더 노력하다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아가 커지는, 그러니까 돈과 쾌락과 교만이 성장하게 하는 방향으로 경쟁을 시키기 때문에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겸손과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한 경쟁이 있습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보다 작다고 했고, 이 세상에서 작은 계명을 어기도록 가르치면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 나라에도 분명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와 같은 대접을 해 달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표정이 어떨까요? 한 만큼 받는 것이 정의입니다.

‘포크포크’라는 유튜브 채널에 ‘엄마 임신 소식 들은 5살 아들의 예상 못 한 반응’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엄마가 임신을 했다고 하자, 5살 먹은 트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엄마는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하며 엄마를 나무랍니다. 지금 있는 동생을 낳아서 자신의 사랑이 빼앗기고 있는데 또 낳으면 점점 자기 입지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경쟁자라고 여겼던 동생이 태어나자 아이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동생 둘을 아주 잘 보살핍니다. 그 이유는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부모가 사랑해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사랑받는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부모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부모가 자신의 뜻을 더 따라주는 자녀를 더 사랑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경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1등을 한 누군가를 모델로 세우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나도 그 1등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얼마 전 일주일에 하루씩 와서 5년 넘게 저에게 따듯한 밥을 해 주시던 자매님이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좋은 곳에 갔다는 표징이 아주 많았습니다.
많은 분의 꿈에 나타나고 화장한 유골을 봉안당에 모실 때가 정확히 금요일 오후 3시이기도 했으며(그분은 자비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태양이 비추고 바람이 솔솔 불어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새 한 마리와 나비 하나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례를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영성관에 와서 아마 처음으로 무지개를 본 것 같은데) 무지개가 영성관에서 시작하여 하늘을 뚫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표징들은 저에게도 힘을 주었지만 남은 두 분에게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노력한 것에 대한 보답을 이렇게 받아야지 남은 두 분도 힘이 날 것입니다.
만약 열심히 봉사해도 안 좋은 일만 생긴다고 여기게 되면 남은 분들이 힘이 나겠습니까? 분명히 노력한 만큼 주님께서 은총을 주신다고 믿을 때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도 열심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르면 그만한 보상을 받으니 게으르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성모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자극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깊은 사랑과 공경을 드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한 믿을 교리 3가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천주(天主)의 모친이 되었다는 교리입니다. 교회는 새해가 시작되는 1월 1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셨기 때문에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입니다. 12월 8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은 원죄의 결과인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갔다는 교리입니다. 오늘 8월 15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의 전구를 기원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은총에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엘리사벳은 먼 길을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였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신앙인이 가야 할 삶의 기준을 노래하였습니다. 저는 성모님에 대한 믿을 교리도 중요하지만 ‘마리아의 노래’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기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모승천대축일을 지내면서 각자의 노래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브리엘의 노래를 만들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저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보내셨습니다. 제게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가톨릭평화신문을 맡겨주셨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며 좋은 지면을 만들고, 가톨릭평화신문을 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열려라)’라고 하시면서 귀가 먼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에파타’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보물을 찾아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열리고, 우리의 귀가 열려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쿰(일어나라)’이라고 하시면서 죽은 소녀를 깨우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탈리타쿰’하겠습니다. 근심 때문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거짓된 자아는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짓에서 진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탈리타쿰’하겠습니다.” 

오늘 성모승천대축일에 가톨릭평화신문을 홍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김문수 안드레아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교우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로 1년 8개월 만에 처음 홍보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의 구독 신청은 저와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에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이미 신문을 구독하시는 분께서는 후원금을 주셔도 됩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저도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영적 승천의 여정, - 승리의 삶, 희망의 삶, 기쁨의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입추가 지난 후로는 완연한 가을입니다. 줄기차게 맹렬히 울어대던 매미들 찬미 소리도 주춤해지고 과일도 점차 익어 꼴을 갖춰 갑니다. 어제는 서늘한 오후 풍경이 흡사 어머니 자연 품처럼 푸근 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며칠전 강원도에 있는 수녀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어머니 흙같은 어머니 품에서 잘자란 듯한 참 크고 잘 생긴 감자 형제들을 보면서 언뜻 하늘 아버지에 흙 어머니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래저래 자연 어머니를 통해 우리 어머니들이 많이 생각나는 기도와 수확의 계절 가을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어머니들중의 어머니인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참 좋은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요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님이십니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11월 1일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성모님의 승천을 믿을 교리로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오늘은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35년 동안 식민통치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이기도 하니 하느님의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성모님과 우리나라의 깊은 인연에 또 감격하게 됩니다. 가톨릭 교리서의 성모님 승천에 대한 요약된 가르침이 은혜롭습니다.

 

“마침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 거룩한 동정녀의 승천은 당신 아들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것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하신 것이다.”(교리966).

 

어제 성무일도시 성모 승천 대축일 제1저녁기도시 성모님이 하늘에 올리셨음에 대한 승리의 기쁨을 한껏 노래한 가사들과 찬미가도 참 은혜로웠습니다.

 

“기뻐하라, 오늘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시는도다.”

“동정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거기에 왕중의 왕께서 별빛 찬란한 옥좌에 앉아 계시는도다.”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으니 천사들이 기뻐하며 주를 찬미하는도다.”

 

참 아름답고 기쁨 가득 선사하는 후렴들도 좋고 다음 찬미가 역시 좋습니다. 두절만 소개합니다.

 

“세상의 기쁨이여 하늘의 샛별, 창조주 어머니신 동정 마리아

손길을 펼치시어, 버려진 이와 빗근길 가는이들 도움주소서.

 

하느님 지어내신 사다리시며, 이세상 지존께서 내린 사다리

우리를 당신통해 올려주시어, 천상의 귀한선물 얻게 하소서.”

 

오는 성모 승천 대축일은 평생 헌신의 사랑을 쏟으며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 성모님과 함께 승천하신 우리 어머니들 천상 생신날이라 저는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이 되면 오늘 영명축일을 지냈던 이미 16년 전 작고하신 저의 모친이 생각납니다. ‘어머니를 그리며’ 란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썼던 자작 고백시 후반부를 나눕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내 어머니

삶자체가 기도였고 종교였고 스승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상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 거니 ‘그립다’ 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았던 우리 어머니

내 수도원 들어올 때도 극구 만류하셨다

 

‘왜 이제 살만하게 되었는데 늦은 나이 서른 넷에 또 고생길에 접어드냐'고

참 안타까우셨을 어머니

그러다 하루 지나 내 방에 들어오셔서

‘얘, 수철아, 네가 좋아하면 수도원 들어가라’고 허락해 주셨다

이불 둘러쓰고 온종일 누워있던 자식이 참 딱했을 것이다

 

사실 어머니는 은연중 막내인 나와 살고 싶어 하셨다

지금은 극도로 쇠약해 지셔서 온 종일 방에 누워 계신 내 어머니

정신은 여전히 맑으시고 마음도 깊고 고요하시다

 

그냥 계시기만 해도 마냥 좋은 어머니

‘신 마리아!’

오래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나이 들어 철이 들었나 보다”-2005.3

 

가을 문턱에 들어선 자연 어머니같은 분위기에 맞이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 참 평화와 위로를 줍니다. 영적 승천의 여정중인 우리들에게 영적 승리의 삶을 살도록, 또 희망과 기쁨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북돋웁니다.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이자 성모 승천 대축일에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이자 깨달음입니다.

 

첫째, 승리의 삶입니다.

날마다 영적 승리의 삶중에 날로 영적 승천의 여정중에 날로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자꾸 자기속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지옥의 길이요 영적 패퇴의 길입니다. 반대로 날로 하느님을 향해 자아초월의 삶을, 영적 승천의,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이요 우리 믿는 이들은 예외없이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천하무적, 백전백승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를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할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최종 죽음에 대한 승리의 열쇠는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아드님의 승천에 참여하신 성모님도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십니다. 승천하심으로 언제 어디서에나 영원히 살아 계셔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고 계신 성모 마리아님이십니다. 우리의 영적 전의를 북 돋우시는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

 

둘째, 희망의 삶입니다.

희망의 반대는 절망입니다. 희망없는 절망의 곳이 지옥입니다. 정말 대죄는 자포자기의 절망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말이 절망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성모 마리아님은 우리 궁극의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백절불굴의 인내의 믿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희망보다 더 좋은 영약도 없고 주님의 전사들에게 우선적 갖춰야 할 자질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희망이 없음에도 희망하는 것이 진짜 희망입니다.

 

돌아 갈 곳이, 본향집이 있다는 희망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요즘 몇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영성의 정상에 도달한 대가의 경지에 이른 분들인데 소스라치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아, 이들은 돌아갈 집이 없구나! 문패가 없구나!” 승천하신 성모님을 통해 하늘이 상징하는 바 우리 궁극의 희망인 본향집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주 예전에 읽은 일화가 생각납니다. 곱게 차려 입힌 수의를 입은 친구의 시신을 보며 탄식처럼 외쳤다는 어느 분의 고백입니다. “옷은 잘 차려입었는데 갈 곳이 없구나. 어디로 가나?” 아마 영원한 목표의 지향없이 살아 오다 불의의 죽음을 맞이했던 분인가 봅니다. 희망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님은 오늘 하느님의 위업을 통해 희망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묵시록도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의 희망을 고무시킵니다. 새삼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 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 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승천하신 성모님 역시 영원한 희망의 표징이 되는 바,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 바로 희망의 표징인 성모 마리아님을, 순례 여정중인 우리의 교회를 보여 줍니다. 화답송 후렴 역시 희망의 표징인 성모님을 노래합니다.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셋째, 기쁨의 삶입니다.

영적 승리의 기쁨이요 희망의 기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물론 오늘 승천하신 성모 마리아님 역시 기쁨의 샘입니다. 기쁨과 감사, 찬미는 진정 영적 삶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찬미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님 말 그대로 기쁨의 어머니, 감사의 어머니, 찬미의 어머니입니다.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성모 마리아님과 함께 오늘 복음의 찬미와 감사의 마니피캇을 저녁 성무일도때 마다 노래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참 영원한 참 기쁨은 찬미의 기쁨, 감사의 기쁨뿐입니다. 이런 기쁨은 하느님의 힘이자 우리의 힘이 됩니다. 잘 먹어서 힘나는 것이 아니라 찬미와 감사의 기쁨이 참 힘의 원천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일컬으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이런 찬미의 기쁨보다 영육의 치유에 좋은 명약도 없습니다. 성모님의 영적 도반인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역시 기쁨의 여인이었음을 봅니다.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의 기쁨, 만남의 축복임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영적 승천의 여정중에 날로 하늘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평생, 승리의 삶, 희망의 삶, 기쁨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참 좋은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성모승천대축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요아킴과 안나, 성모님의 부모님이시다. 그 부모님을 떠올려 바라본다. 얼마나 인품이 뛰어나실까? 유모차를 밀고가는 한 부부를 바라보며 아이도 참 행복해 보였다. 아이는 유모차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저 아이는 부모님을 잘 만났구나 하며 부모도 아이도 행복하길 바라며 축복을 빌어 주었다. 아이가 자라났고 건강하게 성장해 갔다.
나는 이제 청년으로 자라난 마리아를 본다. 시골 처녀, 혼인을 따라 움직였다. 요셉이란 청년과 약혼한 사이, 하느님의 부르심이 급박하다.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의 뚱딴지 같은수태고지가 있었다. 얼마나 놀랐을까? 인간 이성을 뛰어 넘는 하느님의 일에 관한 소식이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신다는 주님 때문에 인간으로 마리아는 고민이 생겼다.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상식 밖의 문제였다. 곰곰히 생각할 수밖에, 가브리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고민을 해결해 주고, 아이가 태어나고, 피난길에 오르고, 성전에 아이를 봉헌할 때, 길에서 아들 예수를 잃어버리고, 작게 크게 연속으로 고통이 커가고, 아드님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 지내시고 정치인들 눈 밖에 나호시탐탐 목숨 노리고, 종교도 아닌 것이 율법에 매여 예절만 따지고 모순 덩어리 정치철학 고정관념과 맞서다 시달리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예수님께서 그들 손에 넘겨저 겪는 형벌, 십자가 였다. 채찍에 시달리고, 조롱과 비난 뒤집어 쓰고, 초와 쓸개 물이라 입에 적셔주며, 그것도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면 되었지, 죽음 확인하며 옆구리 창으로 찌르고, 사람이 잔인하면 별 짖을  다하는구나. 세상에 이런 더럽고 긴 형벌도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고…….이 모습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 보셨던 주님의 어머니 성모님, 
십자가 상에서 선포하신 하느님이신 예수의 어머니, 우리 믿는이들의 어머니 되신 성모님, 부활하신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하늘에 불러. 올리시어 화관의 영예를 입으신 어머니 되셨다. 승천의 신비를 교회가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지만 성모님을 바라보며 신심을 키워간 우리들 마음 속에 그분의 승천이 확고하게 담겨난다.  묵주의 기도 ‘영광의 신비’ 5단 째를 기도할 때면 성모님의 승천신비의 뚜껑이 벗어짐을 체험한다.
어머니의 완성을 기리는 성모승천대축일에 오늘 우리는 더욱 행복함을 간직한다. 오늘도 성모님은 하느님 자녀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밀고 끌고 가신다. 자모이신 성교회의 어머니, 성모님이 우리의 어머니로 계심이 얼마나 편안함이고 위로이고 큰 행복인가?
오늘 광복절이다. 나는 여섯차례 학생들과 중국 길림성에 갔었다. 그곳에서 독립군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카자흐스탄에 묻혀있었다. 이번 광복절에 유해가 봉환되어 현충원에 안장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해주 고려인들이 스탈린이 의해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그곳을 경유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곳에서 그분들의 소식을 들었었다. 오늘 애국독립투사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드린다. 또한 이제 남북이 서로 화해해서 일치가 성사되어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

 

 

 

<아직과 이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은
아직에서 이미로
부르시는 분


아직 땅에서
이미 하늘로


아직 없음에서
이미 있음으로


아직 비천함에서
이미 거룩함에로


아직 버려짐에서
이미 받아들여짐으로


아직 밟힘에서
이미 솟구침으로


아직 갇힘에서
이미 풀림으로


아직 슬픔에서
이미 기쁨으로


아직 절망에서
이미 희망으로


나는
아직에서 이미로
발 딛는 사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원우재 요셉 신부님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루카 1,32)”께서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해 가장 작은 존재가 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 주님이라고 부르는 분,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분께서 한 소녀를 어머니로 받아들이십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가 된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가 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것을 마리아는 순명하고 믿었을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셨습니다, 당신의 아드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구원하기를.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이러한 계획에 자신을 필요로 하심에, 그리하여 자신을 선택하심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았습니다. 자격이 없음에도, 능력이 없음에도, 비천한 주님의 종일 뿐임에도 자신을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마리아는 기뻐 노래합니다.
우리가 마리아와 같은 ‘모양’으로 예수님을 잉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나의 삶 속에서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기를’,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기를’,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매일 죄를 지으며 살고 있음을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이 나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믿으면 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나의 삶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리아는 모범이며 희망입니다. 본받아야 하는 분이며, 우리에게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하늘로 부르시어 …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우리가 마리아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며’ 살아간다면, 때가 되었을 때 우리도 마리아가 누린 그 영광을 함께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넘어선 확신

      박민우 요셉 신부님
당뇨로 인한 각종 합병증과 치매 증상으로 고생스러운 말년을 보내신 아버지. 사람을 만나는 일도 없이 대부분 누워 계셨습니다. 유일한 외출이라면 어머니가 끌어주시는 휠체어를 타고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집에서 순한 아이 마냥 그저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거나 새소리를 들으며 좋아하는 것이 주요 일과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선종하셨습니다. 당시에 저는 슬픔과는 다른 종류의 미묘한 감정을 느꼈는데, 바로 아버지께서 곧장 천국에 가셨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십 년 넘는 투병 생활로 보속하시고, 마지막 몇 년은 대죄를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지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라며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아들인 저에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한 확신이 있습니다. 한평생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던 성모님. 자신의 뜻과 욕심도 분명히 있었지만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그것들을 포기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을 가까이서 깊이 묵상할수록 어떤 확신이 떠오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에게서 죽음의 고통을 치우시고 하늘로 불러올리셨다는 확신 말입니다. 누군가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라며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분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많은 사람들은 같은 확신을 느끼고 있습니다. 성모 승천은 믿어야 할 교리 이전에 확신으로 가득 찬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함승수 신부님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코끼리가 어렸을 때부터 뒷다리를 말뚝에 묶어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직 힘이 약한 아기 코끼리는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말뚝에 묶인 쇠사슬을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코끼리는 스스로 말뚝 주변을 자신의 한계로 정해 버립니다. 마음만 먹으면 말뚝 따위 쉽게 뽑아버릴 수 있는데도, 심지어 말뚝을 빼고 발목을 묶은 사슬을 풀어주어도 평생을 그 장소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슬을 끊을 수 없을거야’, ‘나는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거야’라는 부정적 믿음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를 심리학 용어로 ‘코끼리 사슬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모습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와 절망의 경험이 반복되면 자신에 대한 부정적 믿음으로 굳어지고, 그것이 ‘나는 절대 그것을 할 수 없어’라는 자기암시가 되어 스스로를 불가능이라는 속박에, 불행이라는 감옥에 가둡니다. 그렇기에 마음 속에 어떤 믿음을 품고 사는지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가 오늘 승천 대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은 마음 속에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인간의 부족함과 약함, 심지어 불의와 악행까지도 다 이겨내시고 반드시 당신 뜻을 이루실거라는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그랬기에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시면서도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아들이 사람들 앞에서 치욕을 겪고 죽임을 당하는 지극한 슬픔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희망 덕에 성모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평화를, 외부의 조건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행복할 수 있는 내적 힘을 얻으셨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조건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이는 재물에서, 어떤 이는 명예에서, 어떤 이는 쾌락에서, 어떤 이는 관계에서, 또 어떤 이는 성취와 깨달음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재물도, 명예도, 쾌락도,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말 것들이지요. 그렇기에 행복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다면 변하지 않는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믿음 때문에 행복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성모님이 부르신 노래 ‘마니피캇’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을 두어야 할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세 있는 자가 있는반면 비천한 이가 있고, 부유한 자가 있는반면 굶주린 이가 있지요.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그런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 자비로 우리가 만든 차별, 불평등, 불공정을 모두 없애시고, 당신의 사랑과 공정이 넘치는 나라, 모두가 참된 기쁨을 느끼는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런 믿음을 지니고 계셨기에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우리보다 먼저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것은 단순히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음을 믿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죽는 순간까지 변함없이 지니셨기에, 하느님께서 그분을 당신과 함께 누리는 참된 행복의 삶으로 불러주셨음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승천’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세례 받았음을 기억하며 죄와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쁨을 찾는 일이 그것입니다. 일상 생활 안에서 기도와 미사와 끊임없는 묵상을 통해 하느님과 함께 사는 일이 그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쾌락을 쫓기보다는 성령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우선적으로 찾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승천을 지향하는 삶을 살다보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성모님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신앙 교의에 따라 성모님의 승천을 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성녀 엘리사벳을 만나셨고, 마니피캇, 곧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진정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당신의 모든 생애를 바치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의 신앙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을 이야기 하자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로 이루어진 것에 늘 감사와 찬미를 드리시고 언제나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시며 당신의 온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드리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에 대한 ‘경외심’이 없을 때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없을 때 그 자연에 대한 파괴가 시작이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역시도 인간이 하느님이 창초하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못하고 파괴해 나감으로 인해서 얻어진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인간관계 안에서도 그러한 경외심이 사라지게 될 때 반목이 시작이 됩니다.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니까 결국 서로를 파괴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험담과 이간질 폭력과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게 될 때 어쩌면 모든 우주의 질서마저도 흔들리게 되면서 결국 비구원의 상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신앙, 그리고 성모님의 경외심과 사랑을 본받아 늘 언제나 하느님께 경배와 찬미를 드리며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 안에서 참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태중 아기들의 반기는 반응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가브리엘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려준 소식 사촌 언니의 잉태사실이었죠.
마리아는 사촌언니 엘리사벳을 만나러 산골길로 정신없이 달렸겠지요.
20전 마리아와 60대 엘리사벳 둘 다 하느님의 뜻으로 잉태 했습니다.

서로 만날 때 태중 아기들의 반기는 반응을 두 분이 대신 보였습니다.
태중아가들 표현을 두 어머니들이 대신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느꼈죠.
지금도 생물학적으로 이런 반응 곧 입덧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아기가 탄생하는 원리는 창조 이래 오늘까지 변함없다 봅니다.
이 여인의 대화에서 그 주역이 하느님이심은 오늘도 계속된다 믿고요.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모 승천 대축일 함께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주십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묵시 12,1)
묵시록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에는 영광의 광채가 가득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셔서 세상을 비추게 하신 빛 물체들과 함께, 곧 해를 입고 달을 밟고 찬란히 빛나는 별들로 머리를 꾸민 자태는 하느님 특은으로 충만한 성모님의 위상이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그 잉태부터 승천까지 하느님의 총애를 입은 분이시라고 교회는 고백하지요.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묵시 12,2)
그런데 여인에게 찬란한 영광만 머무르는 건 아닙니다. 크고 붉은 용이 상징하는 악이 그녀를 노리며 구세주의 도래를 저지하려 하지요. 출산 후 광야로 달아나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로 몸을 피하는 그 여인은 영혼이 날카로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감내하신 고통의 어머니, 성모님을 보여 줍니다.
성자를 이 세상에 오게 하신 구원의 탁월한 도구, 마리아는 성자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받아들이신 수난과 죽음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 겪으셨고, 마리아의 믿음과 인내와 순종의 온전한 봉헌을 기꺼이 받으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하늘에 올려 주셨습니다.

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와 사촌 엘리사벳과의 만남의 장면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
마리아는 당신의 처지를 겸손히 인식합니다. 마리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하느님 모상인 까닭에 어떤 피조물보다 고귀하면서도,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는 비천한 종에 불과하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비천함을 은총으로 바꾸어 주는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처한 실존적 고통과 결핍이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고 연민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아직 어린 소녀였지만 마리아는 그런 하느님의 자비를 참으로 야무지게 꿰뜷고 있던 지혜로운 여성이었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경륜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주어진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1코린 15,22-23)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역시 부활을 꿈꿉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께서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 모두를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일으키시고 변모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저 나약하고 부족하며 비천한 존재에 불과한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른 믿음 덕에 그분의 영광을 나누어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승천 역시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모든 피조물을 앞서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신 것이니까요. 우리는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믿음과 인내, 순종의 덕으로 영혼을 가꾸며 언젠가 누리게 될 부활의 은총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여기 지상 순례 여정 안에서 겪는 내외적 어려움과 고통에 무너지지 않고, 또 자신의 죄악과 부족함에 발목 잡히지 않으면서, 꿋꿋이 믿음을 견지하며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영광의 어머니이시면서 고통의 어머니신 분, 누구보다 우리 눈물과 두려움을 잘 아시는 마리아께서 천상에서 늘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며 길을 안내해 주실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성모 승천>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모 승천 대축일>(2021. 8. 15.)(루카 1,39-56)
성모님의 ‘믿음’과 ‘신앙생활’은 모든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인도해 주는 ‘빛’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승천’은 신앙생활의 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희망의 등대’와 같습니다.
‘승천’은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희망입니다.
<전에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종말론자들이 말했던 ‘휴거’는 ‘승천’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휴거’ 같은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 ‘들려 올라가’ 라는 말이 있긴 합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테살 4,16-17).”
이 말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때에 구원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을 상징적인 단어들로 표현한 말입니다. 여기서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라는 말은,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말한 ‘휴거’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의 승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1)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만났을 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라고 말하면서 성모님의 믿음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행복하십니다.’ 라는 말은 원래는 ‘복되십니다.’이고,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고 찬양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는 말에는 “믿음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성모님의 ‘믿음’은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메시아 강생’과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은(루카 1,31-33),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 본 적도 없는 일, 확인하거나 증명할 수도 없는 일에 관한 예언이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성모님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그 예언을 믿었습니다.

<원래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믿음에 대해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0,29). 성모님은 바로 그 믿음, 즉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2) 성모님의 ‘믿음’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 탄생을 예고하고, 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시게 될 일을 말하자, 성모님은 그 ‘말씀’을 믿긴 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루카 1,34).
이 말은 “저는 동정녀인데, 메시아 강생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 라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루카 1,35), 엘리사벳이 임신한 일도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알려주었고(루카 1,36),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37). 성모님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학만능주의 사상에 빠져 있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서는 바로 그런 믿음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3)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서는 ‘주님의 자비’에 대한 성모님의 믿음이 특별하게 보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말한 것은(요한 2,3), 예수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4).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거절’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곧바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거절’은 아니고,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어머니께서 부탁하시니 무엇이든 해 보겠습니다. 무엇을 할까요?”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 대해서, ‘주님의 자비’에 대한 성모님의 믿음은 예수님의 계획을 앞당기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우리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성모님께서 가지고 계신 바로 그 ‘믿음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2)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을 찾아왔을 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인사했습니다(루카 1,28). 이 인사말에는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보증해 주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과 함께 계신다는 말은, 성모님 쪽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응답도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잘 나타냅니다.(이 말씀을,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살겠습니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의 응답은 ‘말로만’ 해서 될 응답이 아니고, 인생 전부를 걸고 ‘온 삶으로’ 실행해야 할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머니께 당신의 교회를 맡기기 위해서 하신 말씀도(요한 19,26)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보증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믿으셨기 때문에 안심하고 당신의 교회를 맡기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신앙생활’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성모님을 당신의 나라로 모시고 가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모든 신앙인들을 위해서 앞장서서 가신 일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대축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이기도 하고,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뒤를 따라가는 자녀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서 무슨 길인지도 모르는 길을 걷는 어둠 속의 방랑이 아니라,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상태에서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서 걸어가는 ‘희망과 기쁨의 여행’입니다.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면,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계신 그곳에 도착할 것이고,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시면서 우리를 맞이하실 것입니다.

 

 

 

성모 승천에 생각하는 성모 찬송

      이기우 신부님

⒈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 승천은 “성모 마리아의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에 부르심을 받았다”(가톨릭교회교리서, 966항)는 뜻입니다.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에서 반포하였습니다. 마리아의 몸이 하늘의 영광에 부르심을 받았다 함은 그분의 지상적 삶이 온전히 천상적 품위로 인정을 받으셨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혼이 하늘의 영광에 부르심을 받았다함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도 마리아의 지상적 삶을 모범으로 삼아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은총을 전구해 주는 특별한 영적 지위에 오르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시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과 신자들 사이를 전구해 주시는 중재자가 되십니다. 

 

⒉ 성모 마리아의 지상적 삶은 그분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리라는 전갈을 받은 직후에 엘리사벳을 방문한 자리에서 고백한 성모 찬송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엘리사벳으로부터 축하의 인사를 받으시자 마자 기쁜 마음으로 찬송한 이 노래는 이미 아버지 요아킴과 어머니 안나로부터 어려서부터 전해 들은 익숙한 내용이었고, 그 부모 역시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깊은 신심으로 기다리며 암송하여 기도하던 바였습니다. 그들 모두가 메시아를 기다리던 아나빔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드디어 그 메시아께서 오시게 되었고, 더군다나 자신을 통해서 오시게 되었음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메시아를 기다려온 모든 아나빔들이 다 함께 기뻐할 것이고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자신을 축복받았다고 축하해 줄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오심은 아나빔들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전 인류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⒊ 머지않은 미래에 성취될 구원의 확신으로 마리아는 이제 오실 메시아께서 이룩하실 구원 사건을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찬송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셨습니다.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시어,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습니다”(루카 1,51-53). 

 

⒋ 성모 찬송의 이 본론은, 메시아께서 이룩하실 구원이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은총이지만, 그렇기 위해서 특별히 그분이 개입하셔서 이룩하실 세 가지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첫째는 종교적인 메시지입니다. 창조주이시오 심판주이신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교만한 자들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몸소 내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종교나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역할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할에 관해 알려주는 예언입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하느님께서 가장 큰 관심을 보이고 계시는 이른바 최고선의 가치들, 증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에 있어서 최고선에 맞갖은 노력을 기울이며 이 가치들을 가로막는 사회악과 맞서면서 다른 종파들이나 다른 교파들과는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직접 하느님을 믿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을 믿는 증거를 실천하려 노력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⒌ 둘째는 정치적인 메시지입니다. 자유와 정의라는 가치에 해당되는 이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역할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듯이 자유와 정의라는 진리를 위한 십자가를 우리가 짊어질 수 있도록 성모 마리아께서 전구해 주십니다. 셋째는 경제적인 메시지입니다. 평등과 평화라는 가치에 해당되는 이 일 역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역할을 말합니다.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양극화가 벌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평등의 가치는 점점 더 귀해지고 있으며, 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하면 국제 평화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평등과 평화라는 진리를 위한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성모 마리아께서 전구해 주고 계십니다. 이 십자가가 우리를 천국으로 올라가도록 이끌어주는 사다리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유와 정의, 평등과 평화를 위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천국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⒍ 우리 교회는 박해시절에도 다른 나라 교회들에서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성모 신심을 간직하며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치명의 순간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숨져갈 만큼 성모 신심이 열렬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 생활에서 예수님을 따르시며 보여주신 믿음과 순명의 덕을 본받아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평소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덕행이었습니다.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며, 굷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하느님께서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기를 성모 마리아와 함께 찬송합니다.

 

 

 

내 삶에 줌아웃(zoom out)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영화 촬영 기법 중 ‘줌인(zoom in)’과 ‘줌아웃(zoom out)’이 있습니다. ‘줌인’은 렌즈의 초점 거리를 변화시켜 촬영물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촬영하는 기법이고, ‘줌아웃’은 촬영물로부터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촬영하는 기법입니다. 팬데믹, 전세대란,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홍수와 같은 우리 일상은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처럼 힘든 상황 속에 함몰된 채 내 삶에 ‘줌인’하며 살아가는 요즘입니다. 그런데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교회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삶에 대한 ‘줌아웃’의 시선을 가져보라 초대합니다.

제1독서(묵시 11,19)는 로마 제국 통치하에서 신앙 때문에 핍박받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글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 ‘여인’으로 표상되는 마리아를 통해 ‘아들’, 즉 성자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구원을 긴 인류 역사 안에서 이미 준비하고 계셨다고 전합니다. 현재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가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드라마라는 넓은 관점에서 상대화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제1독서는 고통 받는 현재의 삶에 대한 ‘줌아웃’의 시선을 제시합니다.

한편 제2독서(1코린 15,20-27ㄱ)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이들을 향해 바오로는 부활 신앙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에 이어 부활하셨듯, 그리스도인들도 그분 안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을 전합니다. 비록 지금은 무의미해 보이는 부활 이야기가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전환점이 될 수 있도록, 바오로는 삶에 대한 ‘줌아웃’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1,39-56)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벌어졌던 상황을 묘사합니다. 구약성경 율법에 따르면, 약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와 임신할 경우 간음죄로 간주 되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 처녀가 한 남자와 약혼을 하였는데, 성읍 안에서 다른 남자가 그 여자와 만나 동침하였을 경우, 너희는 두 사람을 다 그 성읍의 성문으로 끌어내어, 그들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 22,23-24) 그러나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비천한 자신 안에 이루실 위대한 구원 업적을 찬양합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안에 완성하실 구원을 바라보며 기쁨에 넘쳐 있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모습 또한 신앙인들이 현재 삶에 대한 ‘줌아웃’의 시선을 견지하도록 이끕니다.

몇 년째 지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다시 여름이 찾아왔고, 또다시 성모 승천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반복되는 이 고단한 일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면,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한 ‘줌아웃’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성모님의 승천을 묵상하며 지금 우리가 곱씹어 볼 수 있는, 그리하여 우리를 살찌울 수 있는 의미 있는 화두일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

      키엣 대주교님
원죄 없이 잉태되신 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께서는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영혼과 육신으로 천상 영광에 들어올림을 받으셨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사촌인 엘리사벳이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라는 말을 들은 성모님은 당신의 몸에 이루어지신 은총에 감격하며 주님을 찬미하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성모님의 육신과 영혼의 승천은 바로 주님의 은총입니다.

잉태가 생물학적 은총이라면 또 다른 은총은 사랑입니다.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 마리아는 ‘주님께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이루어진 은총이 자신이 가치있거나 공이 많아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마음이 ‘성모의 노래(마니피캇, Magnificat)’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나약함과 비천함으로 너무도 쉽게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인간의 몸인 자신이 원죄로부터 벗어나 일생 동정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 구원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은총을 받는 것은 다른 누구의 힘이 아닌 바로 ‘나로부터’입니다.

지극히 겸손하신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은총으로 하늘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을 갈망하신 그분께서는 이제 영원히 갈망없는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영원히 통치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성모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어머님이 올림을 받으셨기에 주님의 자녀인 우리도 올림을 받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성모님은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로 주님의 경외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위안입니다. 비록 지금 부족한 삶을 살지라도 영원한 세상에서는 풍족함을 누릴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위안입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시는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모님과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내가 받은 사랑을 표현하고 나눈다면 세상은 좀더 따뜻해질 것입니다.


성모님, 저희가 성모님과 같이 하늘로 오를 수 있도록 성모님의 겸손을 닮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성모님의 승천이 왜 우리에게 희망입니까?
2. 건강하게 오래살고 천국에 가는 것은 모든 인간의 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꿈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로 올림을 받기 위해, 주님의 은총을 받기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묵상해보십시오.

 

 


됐어, 아이한테 더 뭘 바라
      이서원 프란치스코(한국분노관리연구소 소장)
여러 해 전 외고에서 상위권 성적이던 학생이 전교 1등을 한 직후 자기가 살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습니다. 남긴 유서에는 “이젠 됐어?”란 네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부모가 성적에 대해 화를 낸 것에 아이가 목숨을 걸고 부모에게 화를 낸, 슬프고 가슴 아픈 사건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에서는 중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성적’이란 두 글자에 아이도, 부모도 목을 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성적이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는 집안의 분위기가 좋아지느냐 나빠지느냐의 관건이 되곤 합니다. 성적이 부모 기대처럼 나오지 않을 경우 가장 흔히 생기는 감정이 ‘화’입니다. 노력하지 않아 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며 아이를 나무라고 화를 냅니다. 그럴 경우 아이가 반성하며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열심히 했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에 대해 화가 나고, 결과만 보고 자신의 노력을 평가 절하하는 부모에게도 화가 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적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세상에 화가 납니다.

이런 아이의 심정을 짧은 시로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이철수 판화가의 ‘가난한 머루송이에게’란 시입니다. 몇 알 달리지 않아 시원찮아 보이는 머루송이 그림 아래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겨우 요것 달았어?’ ‘최선이었어요.’ ‘그랬구나! 몰랐어. 미안해!’ 

이 시대 우리 아이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성적이라는 결과를 떠나, 그 과정에서 애쓰는 마음을 누군가는 헤아려주고 다독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바로 부모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 한 분이 상담실에 오셔서 IQ가 90이 채 넘지 않는 아들에게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잘 지내는데, 전교 1, 2등을 다투는 딸에게는 걸핏하면 화를 낸다고 했습니다. 이 어머니가 화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들에게는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딸에게는 너무 높은 기대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대는 화를 나게 하는 주범이었습니다. 이후 어머니의 딸에 대한 부당한 화는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됐어, 아이한테 더 뭘 바라. 우리도 그때는 힘들었잖아.”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부모 가운데 한 명은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성모승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1,39-58(성모승천 대축일)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기쁨인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1950년 11월 1일, 성모님의 승천 교리를 선포함으로써, 인간의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진 기쁨인 광복을 기념합니다.

 이 광복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이 파티마 성모님의 전구로 종결되었듯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 역시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승천대축일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을 찬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날은 해방의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북이 분단된 불행한 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올해(2021년)는 해방 77주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분단 77주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여전히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로, 아직도 형제적 화해와 평화를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는 첫 여인인 하와와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납니다.

두 분 다, 맨 먼저 먹는 일, 곧 식사에서 출발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탐욕을 부려 따먹고 자신이 높아지기를 도모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아채고 다른 이들이 마시고 즐거울 수 있도록 도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와는 탐욕을 부리는 인류의 어머니가 되고. 마리아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땅에 묻혀 한 줌 흙이 되어 사라졌지만, 마리아는 하늘에 올라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이토록, 자신을 배불리고 기쁘고자 한 자와 타인을 배불리고 기쁘게 하도록 한 분의 결과는 참으로 큽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의 승천이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고 여전히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심을 드러내주듯이, 성모님의 승천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돌보시며 함께 하고 계신다는 축복이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곧,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요 사랑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승천은 하늘에 올라감임과 동시에 우리에게로 되돌아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여전히 우리를 돌보심을 말해줍니다.

또한,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에 오르심의 영광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하늘에 오를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 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보여주려고 하셨습니다.”(에페 2,6-7).

 

그렇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바로 이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성모님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일 뿐 아니라, 그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찬미노래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님의 자애와 돌보심을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사부 베네딕도께서도 수도승들이 찬미의 생활을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하느님을 찬미하기를 원하셨고(시전례 성무일도), 특별히 <수도규칙> 머리말에서는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머리말 30절)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구원)을 이루시고 계시는 주님과 주님의 자비를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만나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더 사랑하고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빼앗겨 질 수도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아멘.

 

 

 

<우리도 은총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이 성모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을 기리는 축일이지만 그 오르심이 당신 스스로 오르심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러올리시어 오르신 것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성모님만 하늘로 오르시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오르신 하늘은 우리도 올라야 할 하늘이고 우리도 오르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희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늘 하늘에 오르신 분 하느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그런데 성모님도 오르고 우리도 오른다면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교리적으로 얘기하면 '부패 없이'와 '부패된 후'의 차이일 것입니다. 여느 인간은 죽은 다음 부패를 겪고 난 뒤에 하늘에 오르겠지만 성모님은 부패할 사이도 없이 바로 하늘로 불려 올라가시는 겁니다.

 

오늘 감사송은 그래서 또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의 아드님께서 동정 마리아의 몸에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에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이 무덤에서 썩지 않도록 섭리하셨나이다."

 

그런데 우리는 '부패 없이'를 육신의 부패가 없는 것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영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곧 죄의 부패가 없기에 곧바로 하늘로 올림을 받는 것 말입니다.

우리 여느 인간은 죄로 인해 곧바로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정화의 시간인 연옥을 거친다는 것이 우리의 교리인데 성모님은 주님의 어머니시기에 죄로 인한 죽음을 겪지 않고 연옥의 정화를 거치지 않도록 특은을 입으신 거지요.

 

아담의 죄로 인해 우리 인간에게 죽음이 왔는데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아담의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이제 어머니의 부활로 하와의 죽음을 이기게 하신 것이고 그래서 승천의 성모는 뱀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오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죄 없이 잉태되도록 특은을 입으신 성모님은 죄로 인한 죽음 없이 하늘로 오르는 특은도 입으신 것이며 이로써 성모님은 당신 생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무염시태로부터 승천에 이르기까지 특은을 입으신 것이며 무염시태로 시작된 특은이 승천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축일을 지내며 이렇게 특은 입으신 성모님께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말로는 아주 쉽습니다. 우리도 은총을 받으면 됩니다.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리아가 했던 그대로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신 어머니< 루카,1/39-56>8월 15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뒤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와 함께 사시는 것에 오늘 성모 승천은 우리 믿음에 더 큰 희망과 사랑을 주는 믿음의 기초입니다. 우리도 주님 따라 다시 산다는 희망을 오늘축일의 의미를 따라 죽으면 하늘나라로 날아가 하느님과 함께 산다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오늘 축일을 깨끗한 마음으로 어린이같은 마음으로 맞이하고 그 의미를 따라 우리 믿음을 확고이 지켜 나가야 합니다. 
사람들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묻고 어려가지 이설을 내어놓지만 어디로 가기는 바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그 길을 제시하고 나를  따르라 하셨으며 그길을 보여주고 목자가 양떼를 저녁 때 집으로 몰고 가듯이 하느님 아버지 집으로 죽은 자들을 대리고 가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하십니다. 100마리 양 중 한 마리도 잃지 않고 산과들을 해매이며 찾아 어깨에 뫼고 양의 우리로 대리고온다. 하셨습니다. 성모님 하늘의 어머니시고 구세주의 어머니 되신 마리아를 당신이 영원이 현존하는 자리에 모시고 가심으로 자녀인 우리도 어머니 따라 그곳에 가게 됩니다. 오늘을 찬미 찬송하며 기쁨으로 지내며 이런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 찬미 들입니다.
주님 앞에 니가는데 여러 가지 형태로 나가게 됩니다. 말을 잘 듣는 아브라함같이 나가는 사람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함께 하시려 이스라엘백성을 가나안으로  가는 모세 같은 사람, 엘리야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백성을 이끌어 주는 사람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가는 사람 중 가장 큰 인물은 바로 오늘 축일 지내는 성모님이십니다. 세상에서 어떤 시련도 주님의 뜻이라면 종과 같이 따르셨으며 이는 오늘 복음에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시며 주님 앞에 험 하고 굽은 길을 평탄하게 하시려 오신 세례자 요한이 태중에서 요동치며 주님의 어머니의 방문을 맞이하였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종이며 어머니 되신 마리아를 공경하고 본받고 따라 살아야 합니다. 각 사람의 어머니가 진선미의 인도자인 것처럼 어머니는 하느님 나라의 인도자 되십니다. 모두가 성모님의 은총를 찾아 기도하며 함께 하려는 것은 오묘한 하느님 아버지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목 생활 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성모님을 모시려 동상을 세우고 더 나아가 동굴을 만들어 성모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얼마전 순심 학교 저의 모교를 방문하면서 입구에 성모 동굴안에 묘서진 성모님을 보면서 마음 기쁨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의 루루두 성모님이 대구교구청에 있다는 것은 저에게 희망이 였습니다. 신학교 입학후 사제가 되게 해주시기를 간청하며 매년 약속을 하였습이다. 일년에 한번이라도 이곳 성모 동굴 앞에 로사리오기도 받치겠다고 약속하고 10년  동안 지키면서 지금 것 사제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마리아를 공격하고 기도의 전달을 간구하는 교회입니다. 마이라 교회가 아니라 천주교회입니다. 저는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며 성모심신이 모두에게 일어나 성모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살기를 기도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경축합시다.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미래에 틀림없이 닥칠 것이라던 위기가 지금 우리에게 닥치고 있습니다.
불과 지난 몇 달 동안 우리가 사는 지구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전례없는 가뭄 때문에 호수가 매말라 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독일과 중국에서는 갑자기 폭우가 내려서 많은 사람들이 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 이탈리아, 미국과 시베리아에서는 건조한 기후 때문에 꺼지지 않는 산불이 임야와 마을을 태우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미 서부 지방에 있었던 가장 큰 10건의 산불 가운데 6건이 지난 1년 사이에 발생했다고 합니다.
저도 로마에 살면서 기후 위기가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이렇게 습하고 더운 여름은 제게도 처음입니다. 퇴근을 할 때 얼굴에 바람이 불면, 습한 목욕탕에서 누가 제 얼굴에 헤어 드라이어를 켜 놓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미 다가온 암울한 현실 앞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그나마 에어컨 밑으로 숨는 식의 살 방법을 찾지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자기들이 배출하지도 않은 온실 가스가 불러온 기후 변화에 의한 재앙을 가장 앞자리에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성모님의 "마니피캇"입니다. 이 아름다운 노래에서 성모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와 세계관을 전복시키는 예언을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옛 사람들은 석탄과 석유를 태워 자신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 산업혁명을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결과로 막대한 부를 거둔 사람들은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미덕이며 행복의 길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산업혁명이 인류 멸망의 문은 아니었을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더 큰 차, 더 큰 집,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소비 등과 같은 가치를 자랑으로 삼는 세상의 가치 판단을 전복시키지 않고서는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는 땅 위에 살지만 이미 하늘 나라의 시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시민답게 살 의무들도 받습니다.
그 의무 가운데 하나는 신앙이 주는 빛 안에서, 필요한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가치를 선택하고 사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필요한 것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소비를 줄이면서 단순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선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적인 선택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삶의 질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을 제안하고, 소비에 집착하지 않고 깊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예언적이고 관상적인 생활 방식을 독려합니다 ... 소비 능력이 점차 늘어나면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져 모든 것과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게 됩니다 ... 검소함은 우리가 작은 것들의 진가를 차근차근 알아볼 수 있게 하고, 삶이 우리에게 주는 기회들에 감사하면서 내 것에 집착하지 않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하여 탄식하지도 않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찬미받으소서 222항).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모님의
승천(昇天)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대축일이다.

우리 삶에는
승천이 있다.

영혼은
하느님을
노래한다.

자아에서
빠져나와
마침내
하늘로
승천하신다.

승천은
우리모두의
소명이다.

사람이
가야 할
사람의
길이다.

오를수록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다.

사람은
하느님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삶은 신비의
영역이다.

말씀으로
시작된 삶이
사랑으로
승천하신다.

성모님은
우리 인생을
뜨겁게
일깨워주신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사랑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가장 먼 길이
가장 가까운
하늘이 된다.

우리모두는
하느님에게서
왔다.

그래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하느님 사랑이
승천이다.

말씀이
시작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승천은
하느님께
바쳐지는
삶이다.

말씀이
길이 되고
말씀의 삶이
오늘
승천하신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농장을 운영하던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농장은 점점 커졌고, 이제 더는 혼자 운영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지요. 그래서 관리인을 공개 모집했지만, 워낙 일이 많은 농장 일이기에 관리인을 해보겠다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 뒤에 드디어 한 명의 지원자가 나타났습니다. 농장 주인이 그에게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태풍이 몰아치든, 눈보라가 몰아치든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잘 잡니다.”

이게 무슨 장점인가 싶었지만, 다른 지원자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 사람은 아주 성실했고, 이 모습에 농장 주인은 만족스러웠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이 농장에 커다란 폭풍이 덮쳤습니다. 폭우와 거센 바람에 놀란 농장 주인은 서둘러 농장에 가서 관리인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관리인은 너무 편안하게 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 화가 나서 흔들어 깨웠지만, 관리인은 잠에 취해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농장 주인 혼자서 걱정되는 축사와 밭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축사 지붕은 단단하게 묶여 있었고, 밭 주변은 배수로를 넓게 파서 태풍으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면접 당시에 태풍, 눈보라에도 편안하게 잠을 잘 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걱정과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철저한 준비가 아닐까요? 준비 없이 걱정과 불안으로 지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신 성모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성모님께서 이런 영광을 얻으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하느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이것도 이유가 되기는 하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예수님을 낳았을 때도, 에집트로 피난 갔을 때도,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할 때도……. 그의 기준은 늘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만큼 이 세상을 잘 사는 길이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크고 철저한 준비였습니다.

우리 역시 바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철저히 하느님과 함께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빅터 위고).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정채봉 시인의 시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큰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사랑하는 어머니를 주님 곁으로 떠나보내고 나서 무엇을 보든 어머니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묵상 글을 쓰면서도, 묵주기도를 하면서도, 전화기를 봐도, 또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했던 장소를 가도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는 이렇게 내 일생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생전에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후회입니다. 그러나 기도 안에서 만난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 속에서…. 그 사랑을 간직합니다.

 

 

 

창조주를 아기로서 품에 안았던 분이 하느님의 집에 사랑으로 가득 차서 머무는 것을 옳은 일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입으신 성모님께서 하늘로 불러올림을 받으셨음, 즉 구원되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1950년 11월 1일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회칙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통해서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세의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함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

 

성모 승천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오늘 지상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에게도 가능한 일이 승천이고 구원이여, 천상 영광에의 참여입니다.”

 

성모 승천은 하느님께 대한 성모님의 신앙과 순종, 헌신적인 태도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구원과 승천이라는 풍성할 결실을 맺었음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면서, 그분의 구원 의지 실현을 위해 헌신한다면 성모님처럼 구원과 승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모 승천은 지상 순례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징표로 제시됩니다. 아울러 성모님이 도달한 목표는 성모님 당신 개인만의 목표가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목표, 교회의 목표요, 오늘 우리들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마리아 안에서 교회는 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목표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후에도 이 목표에서 빗나갈 수 없다. 마리아의 현양은 세상 종말에서 교회 현양을 위한 보증이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께서는 성령강림 직후 에페소로 가셨습니다. 골고타 언덕 위에서 아들 예수님께서 남기신 유언에 따라 요한 사도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평소 성모님의 성향을 고려할 때 절대 편안히 계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요한 사도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의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 하셨을 것입니다. 사도들을 뒷바라지하면서, 틈만 나면 기도하면서, 언젠가 상봉하게 될 당신 아들 예수님을 매일 그리워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성모님의 죽음과 승천에 관한 전설은 다양합니다. 한 전설에 따르면 성모님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선교를 위해 사방에 흩어져있던 사도들이 모여와 마지막 인사를 올렸답니다. 이윽고 성모님께서 임종하시자 사도들은 기도와 찬미가로 그녀의 덕을 기렸고,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멀리 선교 나가 계셨던 토마스 사도는 빨리 달려온다고 최선을 다했지만, 도착해보니 장례를 치른지 이미 사흘 뒤였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토마스 사도는 성모님 얼굴이라도 뵐려고 무덤을 열었는, 그분의 시신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수의는 잘 개어져 있었고,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무덤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답니다.

현장을 목격한 사도들은 이렇게 외쳤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님을 부활시키셔서 그 정결한 육신을 모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성모승천은 교회와 전 인류가 그토록 바라던 최종적인 희망이 실현됨을 보여주는 축제일입니다. 성모승천은 인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모승천 교리를 굳게 믿는 우리들은 오늘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실망스럽더라도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좌절이 클수록, 고통이 커질수록, 우리가 나아갈 길이자, 역할모델이신 성모님을 바라봐야할 것입니다.

 

성모 승천과 관련된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의 찬미가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창조주를 아기로서 품에 안았던 분이 하느님의 집에 사랑으로 가득 차서 머무는 것을 옳은 일입니다. 성부께서 간택하신 신부가 하늘의 신방에서 사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가까이서 보며, 아들을 낳으실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칼날 같은 슬픔을 느낀 이가 자기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린 대사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의 복사판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비록 나약한 인간이지만 썩는 몸에 썩지 않는 것을 입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성모님의 승천, 성모님께서 직천당(直天堂)하시고 성인 중의 성인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준 대사건입니다. 우리가 비록 썩을 몸을 지닌 인간이지만, 우리도 언젠가 성모님처럼 불멸의 갑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음을 보여준 은혜로운 대사건입니다.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날을 기념합니다. 예수님이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다시 아버지께 승천하시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는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십니다. 그런데도 당신 아드님처럼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 또한 성모님처럼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그 순간에만 하늘로 오르셨던 것일까요? 성모님은 살아계셨을 때부터 하늘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로 향하지 않으면 마지막에도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은 땅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하늘로 향하든, 땅으로 향하든 그 길을 열심히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죽음과 함께 그 방향의 끝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로 걷고 있는지, 땅으로 걷고 있는지 반드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려면 내가 어떠한 추진력을 사용하는지 알면 됩니다. 모든 발사체는 뒤로 뿜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내게서 뿜어나오는 추진력이 나의 속도와 방향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만약 나를 통해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가고 있다면 나는 분명히 물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노를 저으며 물줄기를 거슬러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홍주연 작가의 『더 해빙』입니다. 홍주연 작가는 사업 실패로 돈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했던 아버지 밑에서 컸습니다. 아버지는 자린고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굴비였습니다. 아버지가 췌장암에 걸렸다고 하여 홍주연 작가가 마지막에 굴비라도 실컷 드시고 가시라고 10마리 보내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도 아껴 드시다 5마리를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병원도 굳이 6인실을 선택하여 죽을 때까지 돈을 아끼셨습니다. 그러나 홍주연 작가는 ‘그렇게 돈을 아끼면서도 왜 아버지는 평생 가난하셨을까?’를 궁금해하였습니다. 물론 자신도 돈을 쓰는 것에서 항상 불안하고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어렸을 때부터 비범하였고, 지금은 전 세계 재벌들의 컨설팅을 해 주고 있는 이서윤 선생을 만납니다. 그녀는 수십만 명의 부자들을 연구하여 ‘해빙’(Having)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인물입니다. 그녀는 홍주연 작가에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기쁘게 쓰라고 말해줍니다. 돈을 낭비하라는 말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기쁜 마음이 들 때만 쓰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했던 것, 혹은 누군가를 도와줄 때는 돈을 쓸 때 마음이 기쁩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기쁘게 내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원천으로 향하게 됩니다. 원천으로 향할수록 더 많이 받게 됩니다. 원천은 그것이 솟아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돈도 물처럼 흐름이 있는데 기쁘게 흐르는 그 흐름에 자신을 맡길 때 부족함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무언가를 기쁘게 내어줄 때, 그것이 무엇이든 그 기쁘게 내어주는 것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내가 용서를 기쁘게 하고 있다면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향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진리이신 주님께 향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거나 질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미움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되돌아올 수 없는 만큼 가버리고 맙니다. 

 

구약에 하늘로 승천한 사람이 두 명 나옵니다.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에녹이 하늘로 승천한 이유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존재가 나와 함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뜻이 계속 나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함께 있다면 하느님의 뜻이 나를 괴롭힐 것이고, 그 뜻을 받아들여 실행한다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늘에서 온 가브리엘 천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 마리아는 신약의 에녹이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을 세상에 내어주셨으니 그 추진력으로 말씀의 고향으로 향하신 것입니다.

그다음에 엘리야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로 오르며 자신의 제자 엘리사에게 자신의 망토를 떨어뜨렸습니다. 엘리사가 그 망토로 강을 치니 강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이는 마치 홍해를 가를 때 모세가 들었던 지팡이와 같은 힘을 지닌 것입니다. 바로 ‘성령’이고 ‘은총’을 상징합니다. 누군가에게 은총을 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은총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눈치채십니다. 포도주는 은총입니다. 교회에 은총이 부족한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갑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내려주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교회에 은총을 중개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 가셨습니다.

하늘로 오르는 방법은 지금부터라도 하늘에게서 오는 것을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말씀과 은총의 중개자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쫓겨났던 에덴동산에 어떻게 다시 오르는지 보여주신 최초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끌림과 떨림’은 비슷한 면도 있고, 다른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격이나 취미가 비슷하면 더 끌리기도 합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맛이 있는 음식도 있지만 입맛에 끌리는 음식도 있습니다. 술도 비싼 술이 좋지만 입맛에 끌리는 술이 있습니다. 저는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이 끌린 사람이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쳤던 소경, 깨끗해지기를 바랐던 나병환자, 부하의 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왔던 백인대장, 딸의 병을 위해 찾아왔던 여인,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던 자캐오, 예수님께 시중들던 마르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있습니다. 세상의 욕망과 권력에 끌리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끌리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하는 연인은 마음이 떨릴 것입니다. 서품식에서 바닥에 엎드려 성인호칭기도를 듣는 서품자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둥지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릴 것 같습니다. 드디어 새집을 마련해서 입주하는 아내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처음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저도 첫미사를 봉헌할 때 무척 떨렸습니다. 무서워서 떨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벅차서 떨리는 것입니다.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의 마음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들것을 들고 걸을 수 있었던 중풍병자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도 떨렸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도 떨렸다고 합니다. 익숙함으로 소중함을 잊어버리기보다는 처음 성체를 모셨던 그 설렘과 순수함으로 신앙을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모님께서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가셨다고 믿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성모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셨기 때문에 원죄의 결과인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면서 하느님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이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 대한 이 모든 찬사와 공경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천사 가브리엘과 성모님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이며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성모님께 대한 찬사와 공경은 시작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 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채워 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할 미래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고 거기에서 사촌 엘리사벳을 만나셨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성모님은 마니피캇, 곧 주님의 자비하심을 찬송하는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순간순간 닥쳐오는 상황에 따라 감정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자주 변화하는 모습을 가리킨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이러한 일희일비의 모습처럼 조금 사정이 좋으면 기뻐하다가 또 사정이 나빠지면 슬퍼하는 일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심을 믿고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카 전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전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성모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니피캇 기도에서 드러나듯이 그렇게 한평생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사시면서 언제나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 안에서 일희일비의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이자 구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성모승천 대축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성모승천의 복음적 근거는 여러 장면의 종합에 의한 유추에서 비롯되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의 선택, 선택에 따른 종의 응답, 예수님의 잉태, 사촌언니 엘리사벳을 찾아감, 엘리사벳의 마리아께 들려준 인삿말, 하느님 종으로서의 찬미노래(마니피캇) 예수님의 성탄, 이집트의 피난, 예수님의 봉헌과 공생활,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초대교회 제자들과의 삶,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죄에 물듦이 없음, 성령잉태, 아드님 예수님과의 삶, 결코 죽음이 있을 수 없다는 장면들의 종합에 의한 유추는 성모님의 승천을 드러냄이다. 구지 교의로 선포하지 않아도 믿을 교리로 받아드릴만 하다. 오히려 교의로 선포하지 않고 축일을 장엄하게 지내도 된다는 말이다. 성모님의 노래(마니피캇)에 성모승천이란 영광을 끄집어 낼 수 있다. 성모님의 발현에서의 당신의 신원에 대한 드러남도 이를 받침하고 있다.

 

모든 성인들의 으뜸이 되신 성모님을 닮도록 성모님 삶의 공식에 우리를 대입하며 사는 것이 오늘 성모승천대축일을 지내는 참된 의미가 아닐까 여겨진다. 성모님의 영광이 되신 승천을 우리도 차지하도록 살 것이다.

 

 

 

<우리도 승천에 참여하기 위하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모 승천 대축일>(2020. 8. 15. 토)(루카 1,39-56)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하느님 나라로(아버지의 집으로) 모시고 가신 일이고, 신앙인들에게 하신 당신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그런데 우선 먼저 ‘승천’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승천은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일로 표현되지만, 그 하늘이 우리가 늘 보고 있는 그 하늘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천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는 일입니다. 그곳을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간 개념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가신 일, 즉 원래의 당신의 위치로 되돌아가신 일이고, 하느님이신 당신의 본 모습으로 되돌아가신 일이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존재 방식을 변화시키신 일입니다.

그래서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신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성모님의 승천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승천하신 성모님은 우리를 떠나신 분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로서 자녀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시고, 자녀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회개해서 구원을 받는 것, 즉 우리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 승천을 경축하는 것은 단순히 경축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1테살 4,13-14).”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인생의 한 과정이고, 새 생명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한 다음에 예수님, 성모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6-17).”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 ‘들려 올라가’ 라는 말 때문에 ‘휴거’ 라는 이상한 말을 만들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일이 있는데, 우리 교회는 휴거가 아니라 승천을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또는 구체적으로 재림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자격 없는 사람들’은 주님을 맞이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하고,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란다면, 합당한 자격이 있어야 하고, 그 자격은 ‘지금, 여기에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6).”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 5,9-10).”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생명을 누리려면, 항상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해야 합니다(마태 16,24).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인데, 성모님은 가장 먼저 예수님 뒤를 따라가신 분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성모님 뒤를 따라가는 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일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성모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만일에 그것으로 그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찬양만 하지 말고, 우리도 그 영광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을(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계명’을 지켜야만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성모님의 승천에 참여할 수 없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요한 15,12).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고,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이웃 사랑 실천만 잘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니고,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다 잘해야 하고, 그리고 ‘사랑 실천’으로 그 일들을 완성해야 합니다(로마 13,10).

 

만일에 다른 일들은 다 잘하면서도 사랑이 없다면 그 일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다른 일들은 하나도 안 하면서(믿음도 없고, 기도도 안 하고...) 사랑 실천만 잘한다면, 그 실천은 위선입니다.

 

 

 

<만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 있습니다

눈물겹도록 정겨운 만남이 있습니다

가슴 시리도록 진한 만남이 있습니다

 

새 세상의 시작을 준비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만남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알리는

마리아와 가브리엘 천사의 만남

 

구원 역사를 경축하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마리아 태중의 예수님과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의 만남

 

하느님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아기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만남

 

구원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

 

구원의 큰 걸음을 내딛는 갈릴레아에서

예수님과 첫 제자들과의 만남

 

참 세상을 드러내는 예수님과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의

따뜻한 희망 가득한 만남

 

십자가 아래서의

예수님과 성모님의

가슴 무너지는 만남

 

부활하신 예수님과

막달라 여자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과의 만남

 

자랑스러운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의 만남

 

그리고 오늘

성모님과 아버지 하느님의

감격스러운 만남

 

온 삶 한 길을 걸어온 성모님을

따뜻하게 품에 안으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하느님 품에서 이제야 드디어

평온한 긴 숨을 내쉬는 성모님을 봅니다

 

가슴 졸이며 살아온 시간들

아기를 가지면서부터 걸어온 가시밭길

 

사랑하는 아들이 미쳤다는 소리를

가슴 깊이 간직해야 했던 순간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아들의 처참한 죽음에

함께 해야 했던 쓰라린 아픔들

 

이제 이 모두를 뒤로하고

아니 이 모두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드디어 그토록 간절히 소망했던

아버지 하느님 품에서의 평화

 

오늘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소중한 딸 마리아를

당신의 따스한 품에 안으십니다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오늘 아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당신의 영광 안에 품으십니다

빛나는 감미로운 만남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만남의

끝자리에 함께 합니다

끝자리에 함께 함으로써

새로운 만남을 시작합니다

 

하느님과 나의 만남

거룩하신 어머니와 나의 만남

믿음 안에서 벗들과의 무수한 만남들

 

하느님과 나의

아름다운 만남의 끝자리가

이젠 누군가에게

새로운 만남의 첫자리가 될 수 있도록

부족한 나를 주님께 봉헌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육신과 영혼이 함께 영광을 받으신 동정 마리아의 승천대축일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마리아에게서 결정적으로 완성되고 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업적에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마리아의 영광은 마리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될 일의 표징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을 준다.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제2독서: 1고린 15,20-27a: 그리스도-부활하신 첫 사람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인간의 부활의 근거가 됨을 두 가지로 논증을 한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 세상을 재건하는데 ‘첫 결실’로 다른 결실의 보증이 된다는 것과, 둘째로 그리스도는 모든 구원받은 자들을 당신 안에 모아들이시는 ‘새 아담’이시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그분 안에서 죽음을 이길 것이다. 

 

오늘 독서의 내용에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도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로부터 ‘부활’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와 우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마리아는 죽음의 지배를 전혀 받은 분이 아니다. 죄가 마리아를 스쳐가기조차 하지 않았다. 마리아에게 있어 ‘마지막 원수’(26절)는 이미 원죄에 물들지 않은 잉태의 순간부터 파멸되고 말았다. 

 

제1독서: 묵시 11,19a; 12,1.3-6a.10ac: 하늘의 표징

제1독서는 마리아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메시아가 태어나야할 메시아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메시아는 용, 즉 사탄에 의해 죽음의 올가미를 쓰게 되지만, 하느님은 그를 보호하여 영광의 왕좌에 앉히실 것이고, 메시아 공동체에 신비스러운 ‘광야’의 피난처를 제공하시어 보호해주실 것이다(1-6절). 

 

여기에 여인으로 나타나는 메시아 공동체는 박해와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면한 ‘교회’이다. 이 교회의 모습은 나자렛의 마리아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요한이 마리아에게서 교회의 ‘이상적 표상’의 실현뿐만 아니라, 항상 ‘다시 태어나야’하는 메시아 공동체의 ‘모성적’ 기능도 인식하여 교회와 마리아를 친밀히 결합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교회헌장은 “은총의 계획 속의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하신 그 순간부터- 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 없이 지속되었다-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주신다. 

 

당신 모성애로써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이 지상 여정에서의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돌보시어 복된 고향으로 인도해 주신다.”(62항)고 말하고 있다. 이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야말로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과 승리의 ‘권세’의 가장 고귀한 전리품이라 할 수 있다.

 

복음: 루가 1,39-56: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신 마리아

마리아는 겸손한 분이지만 자신을 중심으로 역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실과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믿음과 신적 모성에 대해 찬양하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2-45절).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다름없는 여인이었지만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그것은 자신의 ‘위대성’을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선은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요한에게 봉사하시지만, 나중에는 인류 역사 안에서 모든 사람을 섬길 것이다.

 

오직 생명과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만이 어머니가 될 수 있다. 바로 마리아는 자신 안에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모든 것을 나누신다. 사실 마리아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신적 모성에 대한 소식을 알리는 순간에 발하신 동의의 말로 이미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어 하느님의 가장 충실한 도구가 되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사람이 되신 말씀”(요한 1,14)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종’이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승천에 이르기까지 마리아 안에서 충만히 실현되었다.

 

다음에 엘리사벳의 찬사에 대한 응답으로 ‘마리아의 노래’가 나온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하느님의 신비를 향해 열려있는 것을 보고 당신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나눌 수 있음을 느끼고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46-48절). 그것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는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마리아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인간의 생각과 가치관과는 다른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1-53절).

 

엘리사벳 방문은 마리아께서 나이 많은 엘리사벳을 도와주기 위한 방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더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은 마리아는 그저 사랑의 행위만을, 혹은 '마리아의 노래'만 부른 것은 아니었다.

 

마리아 안에 계시던 그리스도는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을 성화시키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전할 수 있을 때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성화시켜 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들의 길을 따르는 분이 아님을 마리아는 알려주고 있다. 마리아의 위대함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 맡기시고, 다른 사람을 위해 당신의 것을 나누시는 구체적 사랑의 행위이다. 거기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마리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씨시의 클라라 성녀가 죽기 전에 "주님, 나를 창조하셨음에 당신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놀라운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도 충실히 믿는다면, 우리의 죽음은 그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랑의 죽음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하늘에 올라 주님과 함께 영광 안에 계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모범이시며, 모델이시다. 작은 마리아가 되도록 하자.

 

이제 그 마리아의 모습이 모든 생의 의미를 현세에서만 찾으려는 우리가 깊이 알아들어야 할 점임을 생각하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닮을 수 있는 삶을 노력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함승수 신부님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강림이 있은 후에 성모님은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에페소 지방에서 요한 사도와 다른 몇몇 사도들과 함께 사시면서, 그곳의 신자들에게 당신 아들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하루 하루 덕행을 쌓고 믿음을 굳게하는데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와 함께 그 힘들고 괴로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다 걸으신 성모님께 남은 마지막 소원은 '하느님 나라'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 만나는 것 뿐이었습니다.

 

성모님은 15년 동안 그곳에서 사시다가 64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성모님이 임종하시던 순간에 사도들이 모여 그분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고, 돌아가신 후 무덤에 안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발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 자리에 없었지요. 성모님을 무덤에 모신지 사흘이 지난 후, 뒤늦게 도착한 토마스 사도가 '성모님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려야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성모님의 무덤을 열어 보았더니 성모님의 유해는 온데 간데 없었고 그분께 입혀드렸던 수의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사도들은 성모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처럼 돌아 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다고 믿게 되었고, 성모님께 이러한 영광을 베풀어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성모님의 승천’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사건을 기념하고 되새기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불리어 올라가신 영광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는 그런 영광을 누리신 성모님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하느님 나라로 불리어 올라갈 날을 간절히 희망해야 합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당신 나라로 초대하신 것처럼 우리를 초대하시는 날이며, 하느님의 초대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그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있는 이들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허황된 '꿈'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현재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이들에게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실현되기 시작했으며 언젠가 도달하게 될 분명한 '목표'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희망을 온 몸으로 살아내시어 마침내 '현실'로 만드신, '희망의 산 증인'이신 성모님을 만납니다.

 

성모님은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언제든 꺼질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었지요. 아들 예수님을 잉태하시던 순간부터, 출산과 양육의 시간을 거쳐,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의 삶에는 우리가 '불행'이라고, '불운'이라고 부르는 일들이 수도 없이 닥쳐왔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쉴 틈 없이 계속되는 고난과 시련에 지쳐 무너졌을 것입니다. '나한테 대체 왜 그러시느냐'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흔들릴 지언정 무너지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믿음',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어도,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거라고, 그 때가 되면 참된 행복의 길이 열릴거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으니, 주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바를 어떻게든 꼭 이루실 거라고 굳게 믿은 것입니다. 그 믿음이 힘든 '현실'을 헤쳐나갈 힘이 되었고, 그렇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간 끝에 멀게만 보이던 희망이, 막막하게만 느껴지던 희망이 어느 새 지금 내가 누리는 '현실'이 된 것이지요.

 

우리도 성모님처럼 굳은 믿음을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그 믿음의 힘으로 '희망'을 향해 한 계단씩 차근차근 올라가면 좋겠습니다.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주는 참된 행복을 맛 볼 수 없습니다. 굳건한 믿음, 강인한 의지, 부단한 노력으로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주인공이 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모님을 기립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마리아께서 천사의 방문을 받고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후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들은 인사말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의 감도를 받아 외친 이 말씀은 성모님은 물론 교회가 받은 커다란 선물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행복의 조건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이는 재물에서, 어떤 이는 명예에서, 어떤 이는 쾌락에서, 어떤 이는 관계에서, 또 어떤 이는 지적 성취와 깨달음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모님께서 그러셨듯 믿음 때문에 행복한 존재일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은 인간 사고력의 한계 안에서는 믿을 수 없는 주님의 뜻을 믿음으로써 구원에 협력한 믿음의 여인이십니다. 그분의 생애는 믿음으로 견고하고 아름답게 짜여진 지성소의 휘장과 같을 겁니다. 그 휘장을 통해 성자께서 보호를 받으셨고, 그 휘장이 열림으로 구원자께서 세상에 드러나셨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마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모든 민족을 다스릴 분"(묵시 12,5)을 낳은 뒤 악을 상징하는 용에게 쫓깁니다.

 

이는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고 뱀에게 이르신 주님의 선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아이를 삼켜버리려는 악한 힘인 용과 여인의 대치가 숨막히도록 급박하게 펼쳐집니다.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묵시 12,6)

여인은 이집트의 추격을 피해 갈대바다를 건너 광야로 달아난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백성인 우리까지도 그녀 안에 있는 셈이지요.

 

말씀이신 주님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며 살아가려 애쓰는 우리를 악은 가만히 두지 않으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방해하고 공격하는 세상의 온갖 악에서 우리를 피신시켜 활짝 열어젖힌 당신의 "처소"로 받아들이십니다. 그 처소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하고 평화롭고 거룩한 주님의 '심장'이고 '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이들을 이야기합니다.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1코린 15,23)

사도는 모든 원수들이 그리스의 발 아래 굴복될 때, "그분께 속한 이들"이 주님과 함께 영광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성모님은 그 모든 때를 초월하여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할 원수인 죽음의 부패를 겪지 않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가장 철저히 속하셨던 마리아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 것이지요.

 

주님께 속한 우리 역시 그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실패와 상실로 삶의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쳤더라도 우리의 본래 자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두신 "처소"는 모든 원수를 이기신 주님의 '곁', 승천하신 성모님의 품이라는 희망입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루카 1,52)

이토록 상상할 수 없이 놀라운 하느님의 자비를 오늘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은 들어 올리시는 분, 들어 높이시는 분입니다. 인간 실존과 죄악과 나약함으로 끝간 데 모르고 추락하는 우리를 친히 당신 곁으로 들어 올려 제 자리를 찾아주시는 분이시지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의 어머니신 마리아와 함께 이 희망을 노래합시다. 코로나19와 수해, 혐오와 분열, 가난과 소외 와중에도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주님 곁에 마련된 우리 자리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천상으로 성모님을 모셔들이는 천사들과 성인들의 기쁨을 관상합시다. 마리아를 맞이하시는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에 머무릅시다. 우리의 심장에서 희망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멈추지 말고 기도합시다.

 

 

 

인류에게 큰 기쁨을 주신 마리아 <루카 1, 39-5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이 세상에 어머니 없이 태어나지 않은 사람 없듯이 우리 교회 안에 성모 마리아는 주님을 낳고 새로운 세상을 낳으신 분으로 성모 마리아 없는 교회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날을 맞이했지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일어나 “어머님 사랑합니다.”하고 성모마리아 상 앞에 인사하고 성당으로 갑니다. 그런데 오늘은 “위대하신 어머니” 칭호를 붙이고 오늘 축일을 생각하며 아침 기도를 드리러 가면서 속으로 성모님의 노래를 읊으며 어머니가 주님을 찬양하듯이 나도 주님을 찬양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께 감사 찬미를 드립니다.

 

오늘 찬미가는 이 땅에 새로운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예고한 구약의 한나의 노래입니다. 마리아께서 당신의 태 안에 계신 주님이 누구신지 알려주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성무 일도 저녁기도에 언제나 큰소리로 노래 부르며 희망 없는 사람에게 희망 주고 내일 다시 새날을 맞이하라고 기도합니다.

이 노래 기도를 할 때마다 저의 마음은 비록 미약하나 주님의 큰 힘으로 일어나 다시 은총의 시간을 살려고 저녁 시간 새로운 다짐을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살고,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하시고, 나 하나의 행위는 전 세계의 빛으로 빛나고 머물 것이며 더 좋은 세상을 만들 것입니다. 우선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큰 희망입니다. 비천한 사람이 주님의 어머님 되시고 마침내 하늘나라에 몸으로 승천하신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도 비천하지만,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살게 하시고 특별히 미사 때마다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 시켜 모든 민족이 구원의 은총 속에 살도록 하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어머니의 태 안에 모시고 사시는 어머니의 아들처럼 저를 주님의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이 오셔서 행하신 일은 권력가가 힘없는 자를 교만한 마음으로 다스리지 않고 통치하면 자리에서 내치시듯이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교만한 마음의 통치자가 되지 말고 자유로운 협력자가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재력가는 가진 것을 가지고 자기만족 자기 위안으로 생각하고, 옆을 보지 않고, 굶주리는 사람을 돌보지 않고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면 빈손으로 내치십니다. 있는 자가 재물로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면 더 나쁜 것을 몰고 옵니다. 명예와 명성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절대적 의미로 알고 살면 명예에 상처를 입고 망치게 됩니다. 오히려 비천한 사람이 들어 높임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가끔 ‘왜 나는 외국에 유학하지 못했는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저 말고는 대부분 유학을 해서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박사도 되고, 교회 안의 지도자로 살지만 저는 외국어 하나 변변히 하지 못하고 외적으로 보면 변변치 못한 사람이지만 여기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 힘이 아니면 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밤에 자는 동안 은총을 내려 주신다는 시편의 말을 굳게 믿습니다. 밤이 지나야 아침에 글을 쓰는 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소리 제 몸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꿈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쓰라고 암시하는 소리를 듣고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양성일 시메온 신부님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것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들고 다닌다고, 묵주반지를 끼고 있다고, 십자가 목걸이를 걸었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퍼지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자녀가 되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보호자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은총을 받은 만큼 참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결혼 전 천사에게 구세주를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두려움 속에서도 그 사명을 받으시고, 예수님의 수난 때에 어머니로서 고통을 감수하셨으며,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을 다독이시며 교회의 시작 즉, 성령 강림 때에도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모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애환이 녹아있는 동대문시장의 구르마. 구르마를 해체해 특별 제작한 십자가가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봉헌됐다.

      이백만 요셉 신부님(주교황청 한국대사)

긴 세월 동대문 시장통을 누비던 낡은 ‘구르마’(손수레) 한 대가 바티칸에 왔습니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온갖 애환을 싣고 왔습니다.

하느님의 십자가로 재탄생하여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통해 성모님께 헌정되었습니다.

 

올 8월 15일은 저에게 세 가지 기쁨을 주었습니다.

첫째는 성모님 승천이고,

둘째는 조국 해방입니다.

셋째는 구르마 십자가를 성모님께 헌정한 것입니다.

몰타기사단(Order of Malta)의 한국 대표를 맡은 박용만(실바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 6월 특별한 부탁이 있다면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구르마 십자가를 성모 승천 대축일에 맞춰서 교황님께 전달해 줄 수 있겠느냐고!

네? 무슨 구르마인데요?

필시 깊은 사연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최첨단을 걷고 있는 요즘, 구르마 얘기를 하면 젊은 세대는 아예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고 나이 지긋한 세대도 구닥다리 운송수단 또는 역사의 골동품 정도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80년 전 지게로 짐을 지워 나르던 시절에는 바퀴 달린 구르마가 첨단 운송수단이었습니다. 동대문시장은 한국 현대사의 애환을 고스란히 안고 있습니다.

1905년에 개설되었다고 하니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장입니다.

 

●구르마의 숭고한 땀방울

“유행도 사조도 기술도, 첨단이 미덕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골목길엔 70~80년 전의 구르마가 여전히 현역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직 짐을 벗지 못한 구르마의 숭고한 땀방울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박용만 회장은 2년 전 동대문시장을 뒤져 30여 대의 ‘현역 구르마’를 찾았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족히 80년은 되어 보이는 구르마 한 대를 골랐습니다.

구르마를 해체하여 십자가를 제작했습니다.

이 작업은 공예가 최기 교수(강원대)가 담당했습니다.

구르마가 한국 현대사라면, 구르마 십자가는 한국 현대사가 압축적으로 저장된 USB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나라 잃은 설움,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비극, 한국전쟁의 상처,

산업화 시대 노동자와 농민의 땀, 민주화 시대 역사의 제단에 뿌려진 숭고한 피,

한국 노동 운동에 불을 댕긴 전태일 열사의 영혼!

이 모든 것이 구르마 십자가에 녹아 있습니다.

교황청 의전장 머피 몬시뇰에게 전화했습니다.

머피 몬시뇰은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제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분입니다.

“대사님, 목포 아세요?”

제가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습니다. 교황청의 고위 사제가 어떻게 한국의 작은 도시를 아는지, 그리고 ‘목포’ 발음이 한국 사람과 어찌 그렇게 똑같은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그 배경을 물어봤습니다.

할머니의 남동생이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신부였는데, 목포에서 선교 활동을 하신 관계로 어려서부터 목포 이야기를 많이 들어 그렇다고 하더군요.

머피 몬시뇰에게 구르마 십자가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의 간청 때문에 첫 기적을 앞당겨 일으켰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요한 2,1-12).

하느님께 순종하는 성모님과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예수님!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성모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무척 편해집니다. “성모님, 저의 기도를 전해 주소서. 효자 아드님에게!”

 

●일치의 십자가

십자가는 일치를 의미합니다. 구르마가 땅과 구르마 꾼을 일치시켜 주었듯이, 구르마 십자가는 한반도와 성모님을 일치시켜 주지 않을까요?

“성모님, 동대문시장의 구르마가 지상에서의 고달픈 삶을 떨치고 십자가가 되어 어머님 곁에 갔습니다. 한반도의 염원, 통일을 담고 갔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전해 주소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구르마 십자가의 사연이 담긴 8분가량의 영상물 ‘구르마로 만든 십자가’를 다음과 같은 글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경건함과 노동의 경건함이 더해져 지구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주교황청 한국대사관은 머피 의전장이 보낸 공문을 한 장 접수했습니다.

교황님께서 구르마 십자가를 받고 무척 기뻐하셨고, 십자가를 보내준 박용만 실바노와 가족에게 축복을 드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감사합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 5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머니의

이름을 다시

불러봅니다.

 

어머니의

사랑에서 진실로

아름다운

사람의 삶을

만납니다.

 

하늘을 닮은

사랑입니다.

 

하늘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낳으셨고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낮아지신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에서

 

산다는 것이

견디며 또

견디는 기도임을

배웁니다.

 

아픔이 아픔을

일으켜세우고

비천함이 비천함을

달래어줍니다.

 

간절한 사랑이

하늘과 땅을

이어줍니다.

 

애달픈 사랑이

애타는 십자가의

절절한 봉헌이

됩니다.

 

올바른

사랑만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게 합니다.

 

참된 사랑은

모든 벽을 허물고

하늘로 오릅니다.

 

하늘을 품은

사람에겐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길이

삶의 승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모든

여정 모든 삶이

하늘로 오르십니다.

 

지극한 사랑이

지극한 승천의

기쁨이며

승리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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