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2,10ㄴ-16
형제 여러분,
10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11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2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16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시어 마귀를 몰아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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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치유하시자 모두가 놀란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마귀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어떤 주장이 교리에 맞는지 그 여부를 따집니다. 물론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교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들이 있고, 이를 식별하지 못한다면 이름뿐인 신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를 정확히 안다고 모두 좋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까요?
오늘 복음에서 마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여기며 벼랑에서 떨어뜨리려 하였던 나자렛 사람들보다 나아 보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던 것을 마귀는 인정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4,34). 아직 제자들도 그렇게 말할 수 없던 때입니다. 마귀는 그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선포합니다. 적절한 말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예수님보다 힘이 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 순종해서 떠나가기까지 합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길, 진리, 생명이시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자신을 멸망시키신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방해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신 예수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그 사실은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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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마르코, 루카, 세 복음서는 공통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첫 번째 기적이 마귀의 추방이라고 말합니다(마태 4,24; 마르 1,23-26; 루카 4,33-35 참조).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어 그를 해방하십니다. 마귀가 떨어져 나간 사람은 다시 의식을 회복하고 자유를 얻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마귀의 영”이라는 말이 자칫 고리타분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다양한 것들에 사로잡혀 살아갈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를 현혹하는 광고와 황당한 뉴스에 눈과 귀를 빼앗겨 소비주의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소중한 자유를 잃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많은 나쁜 것에 중독될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매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신봉하고 그것에 매여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루카 복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미리 유산을 받아 멀리 떠난 작은 아들이 세상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한 이야기를 전합니다(15,11-19 참조). 마귀들은 똑똑하고 교활합니다.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창세 3,1). 마귀들은 신학에도 밝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들은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선을 거슬러 거세게 저항합니다. 우리 안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조용히 차분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귀와 대적할 힘을 주님께 청합시다.(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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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더러운 영을 내쫓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그분의 권위를 언급합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연거푸 두 번 나타나는 예수님의 권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만 예수님과는 거리를 두지요. ‘무슨 상관’이냐며 예수님을 멀리합니다. 더러운 영은 제 이익과 제 삶의 안위를 행여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러운 영은 자신의 삶이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제 삶의 자리라고 우기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타인의 자리를 맴돌다 그것이 제 것인 양 여기며 기생하는 삶이 더러운 영의 삶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하여도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방해꾼일 뿐이며 낯설고 불편한, 그야말로 ‘타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구별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픈 이를 아픈 이로 보고, 슬픈 이를 슬픈 이로 보며 순수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데 예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제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에 질서와 고유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사유하고 존중하며 기념하는 오늘,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움켜쥐기보다, 우리 각자의 눈에 틀어박힌 들보를 빼내고 제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우리의 눈이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모습을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 할 것은 ‘예.’라고만 할 수 있는 순수함과 순박함이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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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더러운 영이란 악한 세력을 말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하느님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마음이 더러운 영이 들린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오늘날에도 악한 세력은 많습니다. 그중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세력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누구와 가장 대립하셨는지를 보면 알게 됩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와 같은 기득권층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빈틈없이 지키며 스스로 거룩하고 권위 있는 것처럼 처신하였지요.
반면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든 사람들은 많은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하기에 자신들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까지 여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을 독점하고는 율법과 계명을 잣대로 하여 거룩한 사람과 거룩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더 가까이하셨습니까? 하느님을 절실하게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더러운 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땀 흘려 일하는 직장에 있었습니까, 회당에 있었습니까? 오늘날 거룩한 성전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와 같은 형태의 신앙심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동하지만, 실상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당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며 우리의 신앙심을 정화해 주십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의 참된 본질을 깨닫고, 그 뜻을 실천함으로써 언제나 거룩한 영으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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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분야에는 제각기 전문가가 있습니다. 과학, 철학, 음악, 경제, 문화 등 분야별로 전문가가 있지요. 그 전문가들이 자기 본연의 일에 정통하고 충실할 때 권위가 있게 마련입니다.
참된 권위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와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권위 있는 자세란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적인 힘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는 나 자신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도구가 될 때에야 가능하지요. 나의 입을 빌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나의 손을 빌려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도록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권위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마귀마저 굴복시키십니다.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위는 메시아로서의 권위이지요. 이 세상 모든 생명과 질서를 주관하시는 분으로서의 권위입니다. 그러기에 마귀 들린 사람까지도 다 치유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도 참된 권위를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좋은 방법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지요. 적은 분량이라도 날마다 꾸준히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면 어느새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참된 권위로 무장되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럴 때 그 어떠한 악의 세력도 우리 안에 침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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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지금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더러운 영이 무엇인지 성찰해 봅니다. 우리는 각자의 상처와 욕망에서 자라난 병든 영들에 사로잡혀 있을뿐더러 시대 전체를 휘감으며 수많은 사람의 영적 생명을 앗아 가는 악한 기운에도 짓눌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개인의 내적 회심으로 이끄는 기도와 성찰만이 아니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뿌리 깊은 시대의 병든 부분을 식별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 또한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오로 사도가 오늘 독서에서 호소하는, 현세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물을 제대로 알아보는 영적 삶을 위한 터 잡기입니다. 특히 사회 병리적 현상과 왜곡된 시각들에서 한 개인이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어제오늘이 아니라 근대적 삶의 기나긴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때때로 예술가들의 예언자적 직관에서 발견하는데, 그 좋은 보기가 19세기 미국의 작가 멜빌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입니다. 이 소설은 ‘근대적 삶의 허무함을 보여 주는 슬프면서도 참으로 순수한 작품’이라 할 만합니다. 작가는 뉴욕 월가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경사로 일하는 주인공의 ‘하고 싶지 않다’라는 ‘부정’의 대답으로 ‘근대적 삶’의 요구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부정’의 원인과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조금은 수수께끼 같은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큰 여운을 남깁니다. “바틀비는 워싱턴에서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다가 갑자기 해고되었다. (중략) 사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절망에 빠져 죽었고, 희망적인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죽었으며, 희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구제받지 못한 불행에 짓눌려 죽었다. 생명의 임무를 받아 나섰건만 편지들은 죽음으로 질주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더러운 영’은, 눈에 보이는 업적에 도취되고 풍요의 그늘에서 ‘배달되지 않는 편지’에 희망을 상실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서려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주시는 살아 있는 영을 찾을 때 비로소 ‘더러운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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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외친 말입니다. 자기들이 하는 일에 왜 훼방을 놓는지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들이 훼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칠 흑 같은 밤에 배 한 척이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방에 불빛이 하나 보였습니다. 앞쪽의 배가 지금 당장 방향을 틀지 않으면 충돌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쪽의 선장이 확성기로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지금 당장 방향을 남쪽으로 15도 바꾸시오!” 그러자 그쪽에서도 반응이 빨랐습니다. “당신 배를 북쪽으로 15도 바꾸시오!” 선장은 당황하며 다시 한 번 소리 질렀습니다. “나는 이 배의 선장이오. 지금 당장 방향을 바꾸란 말이오.” 그러자 그쪽에서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3등 항해사요. 그 배의 방향을 바꾸시오.”
불 쾌해진 선장이 더 크게 외쳤습니다. “이 배는 거대한 화물선이란 말이오. 그러니 당신네가 남쪽으로 15도 트시오!” 역시 그쪽에서도 곧바로 반응했습니다. “여기는 섬에 있는 등대요. 얼른 북쪽으로 15도 돌리시오.” 이 소리를 들은 선장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렸습니다. 선장이 방향을 바꿀 수 없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으면 그 배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 리와 주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뜻이 주님의 뜻과 다르면 누가 그 뜻을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바꾸셔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배가 섬을 옮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도 더러운 영처럼 예수님께 훼방하지 마시라고, 걸림돌이 되지 마시라고 항변하고 있다면 섬을 옮기려는 어리석은 선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말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주의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말실수를 해서 상대에게 아픔을 줄 때가 많습니다. 나쁜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말실수는 너무나 자주 이루어집니다.
마트에서 우연히 아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정말로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성당에 오랫동안 나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청년이었는데 결혼했다고 신앙생활을 멈춘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당 나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이 청년도 알겠다면서 이제 열심히 다니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얼마 뒤, 이 청년의 친한 친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의 아이가 아파서 너무 힘들어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시로 병원 응급실을 갈 정도로 아프고 약해서 그렇게 좋아하는 성당도 제대로 못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성당에 나오라는 말만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싶었습니다. 이 청년을 위한 말이었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저의 말실수였습니다. 곧바로 전화 걸어서 사과했지만 저를 만난 이후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은 과연 어떤 말이 되어야 할까요? ‘말실수’에 해당하는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랑의 말이 되어야 할까요?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은 사람을 살리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픔과 상처를 남기는 죽이는 말이 아닙니다. 대신 구원으로 이끄는 살리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가장 유익한 말이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데 이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악을 없애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어떤 타협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말씀은 악을 멸망시키고, 사람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악을 따르면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죽이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연은 항상 강력하다. 항상 낚싯바늘을 던져두라.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 물고기가 있을 것이다(오비디우스).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사하던 사랑스러운 교황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얼마나 탁월하고 출중한 인물이었던지 이름 앞에 대(大)자를 붙입니다. 성인 중의 대 성인, 교황님 중에 대 교황님으로 불릴 만큼 교회사 안에 그분이 남긴 족적이 정말 탁월합니다. 그는 얼마나 명석했던지 서방교회 4대 교부 가운데 한분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540년경 로마에서 출생합니다. 그의 가문은 정말 대단한 귀족가문인 동시에 부유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혈통만 훌륭한 귀족가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측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훌륭한 가문이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었던지 교황님을 두 명(펠리체 3세 교황, 아가피토 교황)이나 배출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일찌감치 법학공부를 시작한 그레고리오는 572년 공부를 끝내고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로마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당시 시국은 어수선하기가 극에 달했고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로마 총독 시절 그레고리오가 직면했던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해나가기 위해 흘렸던 땀은 그가 나중에 교황직을 수행하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로마 총독이라는 직책은 그레고리오를 결코 만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첼리오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레고리오가 체험했던 짧은 수도생활은 그의 인생 여정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깊은 묵상 중에 선물로 받았던 소중한 하느님 체험,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던 가운데 얻었던 충만한 기쁨과 희열, 열정적인 기도 분위기는 그가 나중에 수많은 사목적 걱정거리들을 껴안고 살아야 했던 교황 시절 영원한 향수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꿈결같이 행복했던 순간은 잠시였습니다. 펠라지오 교황님은 그를 부제로 서품하면서 콘스탄티노플 교황대사로 파견합니다. 그곳에서 로마와는 사뭇 다른 비잔틴 문화를 이해해가면서 열정적 사목체험을 해나가던 그레고리오였는데, 그를 끔찍이도 아꼈던 교황님은 그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다시 로마로 불러들여 당신의 비서로 임명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모셨던 펠라지오 교황님이 당시 창궐했던 페스트에 걸려 돌아가시고 맙니다. 그러자 즉시 그레고리오를 후임 교황으로 임명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그레고리오는 이리저리 도망까지 다니며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백성들의 요구를 마냥 물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교황직을 수락하고 590년 교황좌에 오릅니다.
착좌하자마자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즉시 사목에 뛰어듭니다. 사회 일이건 교회 일이건 상관하지 않고 탁월한 능력을 선보이며 수많은 일들을 척척 해나가셨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쇄신을 위해 800여 통이나 되는 사목서한을 썼습니다.
각 교구 주교들이나 사제들, 아빠스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수시로 전문가적 자문을 구하기 위해 그레고리오 교황님께 편지를 썼고 교황님은 매일 수많은 질문들과 산적한 고민거리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지혜로운 평화의 전도사였습니다. 당시 비잔틴 제국과 롬바르디아, 이탈리아 사이 미묘한 신경전, 실제적 국지전이 벌어지곤 했는데,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그들을 착한 목자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 사이에 형제적 친교, 평온한 동거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의 회개, 여러 유럽 국가들, 하느님을 믿지 않은 수많은 이교도 백성들은 교황님에게 있어 끊임없는 기도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사목적, 신앙적, 영적 측면에서의 아버지이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사회 변화, 사회 개혁의 주인공이셨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까 하는 걱정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지나친 일과 일상적 과로로 인해 교황님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갔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이지 하느님 안에 푹 잠긴 인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언제나 그의 영혼과 내면 안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힘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던 절망의 시대 그는 평화를 건설하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백성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사하던 사랑스러운 교황님이셨습니다.
누가 가장 마귀 같은 사람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보자 마귀가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오늘은 마귀의 정체를 알아보려 합니다. 마귀는 일단 예수님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능력에 휘둘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들이 느끼는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이기는 쾌감’입니다. 이는 모든 죄에 다 들어있고 모든 죄의 밑바탕입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은 자연을 보고 일어나는 사건을 보고 양심을 보고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핑계로 믿지 않습니다. 벌써 여기에는 하느님을 이기는 즐거움이 스며있습니다.
그런데 더 마귀와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이기려는 존재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팔아넘겨 죽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쾌감은 얼마나 클까요? 물론 그 쾌감이 자기를 마귀로 만든다는 것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진짜 마귀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믿으면서 교회를 이기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정통 가르침인 지옥과 연옥 등을 부정합니다. 하느님이 자녀를 만들고 불지옥에 보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2,000년 동안 믿어오던 것보다 자기 혼자의 생각이 더 옳다고 여깁니다. 여기서 느끼는 승리의 쾌감은 매우 클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처럼 결국엔 교회 전체를 분열시키는 악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계심을 알면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이 변하기를 원하기보다는 자신이 하느님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마치 내 뜻이 하느님의 뜻보다 더 나를 위해 옳다고 믿는 것처럼.
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 집 원장이신 김학배 안젤로 신부가 PBC 강의에서 이런 일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제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임신한 자매가 기도해 달라고 오셨다고 합니다. 무슨 기도를 해 드려야 하느냐고 묻자 자기가 딸이 여섯인데 꼭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청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이 안 믿는 사람들인데 이번에도 딸이면 자신까지 아예 성당에 못 나오게 될 판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성별을 결정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어쨌건 신부님은 기도해 주었는데 다행히 아들을 출산해서, 온 시댁 식구들도 아기의 세례식 때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 20년이 지나 신부님이 피정의 집에 있을 때, 그 자매님이 순례자들과 함께 오셔서 너무 반가웠는데, 그 자매님은 슬픈 표정으로 면담을 요청하였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신부님이 기도해서 낳은 아들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큰 사고들을 많이 쳐서 이제는 그 아이가 온 집안의 걱정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무것도 청하지 말라는 말인가요? 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결정은 부모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악마가 아니라 천사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마 전 한 자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얼마 전부터 매일 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났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면 뚜껑이 열렸을텐데 참아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심하게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도 담담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내가 주님께서 뜻을 바꾸기를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힘에 내가 변화되기 위해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악마의 성향에서 천사의 성향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궁에서는 그분 뜻에 의해 내가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이지 부모가 내 뜻대로 변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일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로 간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너희에게 ‘협조자’이신 진리의 영이 함께 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께는 새로운 계획이 있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육체’의 옷을 입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영인 ‘협조자’이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 더욱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강림의 생생한 현장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굳셈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지혜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말씀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저도 성령의 은사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1992년입니다. 새벽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교우분이 아프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준비해서 병원으로 갔습니다. 자매님은 하혈을 많이 하셨고, 의사 선생님은 힘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드리면서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뜨거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자매님은 사랑하는 딸의 첫 영성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32년이 지났지만, 저는 그날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1994년입니다. 패혈증으로 입원한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기 전에 저는 형제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형제님의 가슴에는 패혈증 보다 더 심각한 원망과 분노가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원망과 분노도 사라졌습니다. 용서와 사랑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드리면서 뜨거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형제님은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주일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부족한 제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도, 허물 많은 제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도 모두 성령께서 저를 이끌어 주시고, 보살펴 주셨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주변을 보면 성령과 함께 지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생각이 바른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봉성체를 하려고 나서는데 자매님 두 분이 제게 부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장 투석하는 어르신이 있는데 함께 가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이 생일이라, 간단한 음식을 준비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봉성체 가는 어르신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마음이 통하니, 뜻도 통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르신에게 같이 갔습니다. 저는 성체를 모셔 드렸고, 자매님들은 어르신의 생일잔치를 해 드렸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교우들이 따뜻한 마음을 모았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간병하는 자매님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서 드리는 분이 있습니다. 병원비를 돕고 싶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작은 정성을 모아서 전달해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을 뛰어넘는 협조자이신 성령은 따듯한 사람들의 마음에 함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면, 내가 양심의 부끄러움을 알고 뉘우치고 있다면, 욕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살고 있다면, 사람의 일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성령께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알기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루카 4,34)
당신이 누구신지 알기에
나를 위해 홀로 있지 않으며
벗을 위해 함께하게 하시기를
늘 그리하시는
당신께 청합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알기에
오르기 위해 누르지 않으며
올리기 위해 낮춰주시기를
늘 그리하시는
당신께 청합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알기에
가지기 위해 움켜쥐지 않으며
나누기 위해 열어주시기를
늘 그리하시는
당신께 청합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알기에
살기 위해 죽이지 않으며
살리기 위해 죽게 하시기를
늘 그리하시는
당신께 청합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알기에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예수님을 보고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셨고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참 놀라운 것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말을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실로 엄청난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미 마귀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귀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의 손길을 피하려고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귀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이 하느님과 연결되는 것을 방해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여나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은지 우리는 끊임없이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마귀의 도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나의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함께할 때 마귀는 그 힘을 잃어버리고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민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의 회당에 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회당 안에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안에 있던 마귀가 예수님을 향하여 말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특히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오늘은 회당 안에 마귀 들린 사람이 있습니다. 회당이라고 하면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며 또한 신전의 역할도 하지요. 이러한 신성한 곳에 마귀가 들어왔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의 모습 그리고 종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예수님께 했던 말 중에 멸망이라고 말했지요. 이는 어둠의 세계와 하느님의 나라가 싸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성한 회당에 마귀가 들어왔습니다. 이는 아주 큰 문제입니다. 신전의 역할을 한 회당에 마귀가 들어왔다면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도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당에 마귀가 들어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성당은 그 자리에 있는데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가지 않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을 먼저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도 이에 맞게 변화해야겠지요. 그렇다고 이러한 변화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전통까지 잊어버린다면 더러운 마귀의 영에 들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람 뿐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을 저버리고 세상이 주는 것에 만족했던 예수님 시대의 종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제대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지금 누리는 삶의 조건과 처지를 보다 더 발전시키고 싶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자칫 자신이 성공하고 보다 더 발전하면, 더 나은 가족의 화목과 행복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만 그나마 누리고 있는 자신의 건강이나 가족과의 관계나 행복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과 진급만을 바라보고 회사에 전념하다가 명퇴되고, 가족에게는 이방인과도 같게 되어버린 가장이나, 자식의 성공을 위해 외국에 보내고 혼자 그 뒤를 받쳐 주다가, 쓰러지는 기러기 아빠 등등 우리 근처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미래의 희망과 발전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부족해 보이는 현재의 관계와 그 관계에서 나오는 우정과 신의, 화목, 안정, 평화 같은 소박한 가정의 행복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2,12.14.16)
세상 사람들이 찾는 물질적이고도 현세적인 발전과 행복과는 또 다른,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우리 생의 인간관계 안에 감춰져 있는, 영적이고 영원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고, 그 영원한 행복을 잘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ἅγιος(하기오스)
김성현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의 등장인물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문제는 이 고백의 주인공이 마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을 가장 먼저 알아본 존재가 그 거룩함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마귀라는 사실은 우리를 ‘거룩함’에 대해 더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는 ‘거룩하신 분’이라는 표현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다양한 함의는 거룩함을 뜻하는 ἅ‘ιος(하기오스)’의 또 다른 뜻 ‘순수하다’ ‘완전하다’ ‘하느님께 합당하다’에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하신 분’이란 아무런 흠도 티도 없이 하느님께 바쳐진 봉헌 제물(레위 22,21)이 되는 것이며,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되어(마태 5,48),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2테살 1,11) 되는 분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받고,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하신 분’을 알아보고 멀어지려는 마귀와 그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채(1코린 2,16) 그분을 따르려 노력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거룩함이라는 선물을 누구처럼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착한 목자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 “종과 섬김의 영성”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각별한 인연의 중요성 때문에 ‘기념일’이 아닌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축일’로 지냅니다. 베네딕도 성인을 만난적은 없지만 동시대 분으로 성인을 참으로 흠모하여 ‘베네딕도 전기’도 썼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 하느님과 이웃을 섬김’에 있어 이분들을 능가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갈망의 사람, 배움의 사람, 섬김의 사람으로 한마디로 정의하면 하느님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걸작품에 속하는 분들입니다. 두분이 바로 중세초 혼란기에 있던 유럽을 구했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는 누구보다도 수도생활을 사랑하여 자기 집을 수도원으로 만들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평생 수도원에서 하느님만 섬기며 살려했던 분인데 교회에 순종하여 섬김의 교황직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느님 솜씨에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마음입니다. 아름다운 두 분 축일 미사시 입당송도 흡사한 느낌입니다.
“복된 그레고리오는 베드로 좌에 올라, 언제나 주님의 얼굴을 찾고, 주님 사랑의 신비를 기리며 살았네.”<오늘 입당송>
“베네딕도는 그 이름대로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과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생활을 추구하였네”<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 입당송>
교황님이 참으로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천재인지 그 업적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황직만해도 벅찼을텐데 영국에 선교사들 파견, 야만족들의 침입으로부터 로마 수호, 그리고 방대한 저술활동을 보면 도대체 어느 시간에 저렇게 많은 일을 하셨는지 정말 불가사의의 신비입니다.
전례개혁도 독보적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물론 미사중 빵 나눔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교황님의 창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정말 질그릇 속에 엄청난 하느님의 보물을 지니신 분입니다. 이 성인 교황뿐 아니라 우리 역시 질그릇들 속에 엄청난 보물을 지니고 있음을 한시도 잊어선 안됩니다.
성 예로니모,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큰 대(大)자가 붙는 교황은 대 레오 교황과 더불어 둘뿐입니다. 교황 재위 14년 동안이지만, 교회 발전과 중세 교황직의 발전에 영향은 멀리멀리 미치기에 대 교황이라 불립니다.
그 옛날 분이 흡사 현대인처럼 느껴지는, 시공을 초월하여 늘 현존하는 분처럼 느껴지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교황님입니다. 성녀 모니카의 아들이 성 아우구스티노 였듯이, 성녀 실비아의 아들이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요, 또 생각나는 성녀 헬레나의 아들, 위대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입니다.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얼마나 하느님을 잘 섬기며 돌봐드렸는지, 선종하자 얼마 안되어 신자들의 쇄도하는 요구에 시성되었고, 묘비명도 “하느님의 집정관(Consul Dei)”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대로 일치되는 참으로 ‘종과 섬김의 영성’의 표본이 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흡사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문서에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분입니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으로 이해한 참 멋진 교황이며, 후임 교황들 역시 이 칭호를 즐겨 사용하게 됩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같은 어원입니다. 오늘 복음은 섬김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결코 군림하는 자나 권세를 부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공동체의 중심에는 바로 섬김의 원조인 주님께서 계심을 깨닫습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려고 오신 분이요, 이런 주님을 섬길 목적으로 생긴 것이 베네딕도 수도공동체이기에,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합니다.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들뿐 아니라 종과 섬김의 영성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복음적 영성이요, 직무가, 권위가, 여정이 있다면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여정이 있을 뿐이겠습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섬김을 배워가며 살아가는, 종과 섬김의 영성을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의 삶입니다.
순교자 성월이 시작되자마자 9.2-9.13일까지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제45차 해외 사목 순방길에 오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섬김의 직무에 열정을 다하시는 충실하신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저보다 무려 13세 연상의 88세 고령이나 영성은 “영원한 청춘”이요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분발하게 합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그의 생애 대부분 수도생활 초기 지나친 고행 생활로 통풍과 소화장애로 고통을 겪었지만 지적으로는 끝까지 활력넘치는 삶이었으나, 선종 몇 년 동안은 침대에 누워 극도의 병고중에 지냈습니다. 604년 선종전 교황님의 일기에 나와 있는 기록의 상황도 눈에 선합니다.
599년 일기에는
“열 한달 동안 나는 거의 침대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통풍과 고통과 근심들로 너무 괴로운 나머지 매일 죽음의 안식을 기다린다.” 라 썼고,
600년에 일기에는
“나는 근 2년 동안 침상 위에 매여 있었다. 통증이 너무 괴로워서 축일에서 조차 세시간 동안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기가 버겁다. 나는 매일 죽음의 문턱에 서고, 매일 그 앞에서 내쳐진다.”고 적었으며,
601년 일기에는
“오랫동안 침상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애타게 죽음을 기다린다.” 썼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한 교황님의 마지막 고통의 생애가 순교자 성월 9월에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전구가 우리 모두 9월 순교자 성월,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4,35)
<자리로 돌아가 가만히 있어라!> 그렇게 세월호 희생자들은 구조를 기다리다가 죽어갔습니다. 이는 단지 세월호만이 아니라 미국의 9.11 테러 때도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중 한 건물에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했을 때도 이런 안내방송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이 건물은 안전하니 계속 근무하셔도 됩니다.> 이런 알림 방송에 연연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이 건물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뛰쳐나온 1,400명은 살아남았지만, 안내방송을 믿고 계속 근무하던 600 여명 가운데 대부분은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독일의 유대인 대량 학살인 홀로코스트 비극을 알리는 증후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정부 발표를 그냥 믿었기에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해서 벌어지는 것일까요? 왜 인간이란 존재는 악한 권위에 도전하기보다 순종하는 쪽을 택하는 걸까요? 진정 참된 권위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참된 권위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는데, 그분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몹시 놀랐는데 그 까닭은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4,31~32)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內的活力인 디나미스의 충만한 결실인 外的活動 엑수시아를 말하며, 이는 곧 힘과 능력 power를 뜻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다는 표현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하느님의 영의 내적활력의 외적활동으로 표출입니다. 이는 바로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가르침, 복음 선포의 자리였던 나자렛 회당에서 선언에 이미 드러난 능력이며 힘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능력인 성령을 바탕으로 하는 창조의 능력, 치료와 치유의 능력, 구마 능력 등이 담겨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힘이 전달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군중들이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들의 ‘놀람’은 당연한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힘이 있다는 사실은 단지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 역시도 강하게 느꼈기에 스스로 당황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정상적인 사람들도 놀랐는데 하물며 영의 기운을 알아차린 그 더러운 마귀의 영이야말로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러기에 자신도 모르기에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도 마귀 역시도 무서움에서 놀라 크게 소리를 지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4,35)는 말씀으로 더러운 마귀를 쫓아내시고, 마귀의 영으로 고생하던 그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말씀 한마디로 더러운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더욱 놀라 수군거렸습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4,36) 이로써 당신의 첫 사도직 활동이 거룩하게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 물론 군중들의 반응에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와 힘은 다른 어떤 지도자들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권위와 힘이었기에 더욱 놀랐던 것일지 모릅니다. 지금껏 권위를 가지고 자신들을 가르쳤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전혀 다른 아우라Aura와 힘을 느꼈기에 더욱 놀라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미 지난 주 복음 묵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지도자들에게 향한 질책의 이면에는 바로 그들의 언행불일치에 따른 위선적이고 권위적인 면을 질타하신 것이잖아요.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치고, 말만 할 뿐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권위가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시27.1)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자렛에서 설교하신 다음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새로운 창조는 옛 창조가 끝나는 때인 안식일에 시작되는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 주심으로 당신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셨다. 마귀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34절)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신다. 그것은 마귀가 진실을 말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마귀가 들린 사람을 완쾌시켜 주신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즉시 알아본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견디지를 못한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능력은 인간뿐 아니라 마귀의 힘을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멀리하려는 그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권능을 견디어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 앞에 마귀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꼼짝 못하고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그것을 새로운 가르침,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놀란 것은 조용하고 간단한 말 한 마디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지도자들 즉 그들의 스승들과 다른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보았고 놀랐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권위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전파되었다.
예수님은 여기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신 당신의 아들임을 이러한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마귀들이 그분을 알아보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야 하겠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눈이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즉 깨어있는 삶이 될 때에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때에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인 우리의 이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보면서 또한 우리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는 우리 되도록 기도하면서 주님께 은총을 구하자.
『믿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1-37).”
1)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뜻합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란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힘’에 자신들이 압도당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율법학자들과 달리’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마르 1,22).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고, 자기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로 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고, 당신 자신의 말씀으로만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복종하고 떠나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그래서 자신들이 느낀 그 힘이 실제로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또는 자신들이 느낀 것이 그냥 느낌이 아니라 실제 힘을 체험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놀라게 됩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한 일은, 예수님 말씀의 힘은 곧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몹시 놀랐다는 말만 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놀라기는 했는데, 아직은 예수님을 믿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어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안 믿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믿게 됩니다.>
3) 여기서 마귀가 하는 말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그것들은 원래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마귀가 사용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호칭을 흉내 낸 것인데, “당신은 나자렛 출신인 ‘사람’일 뿐이다.” 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우리가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마라.” 라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은 상관할 권한이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것’에 상관할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고, 특히 마귀들을 인간 세상에서 쫓아내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는 “당신은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다.”이고, 이 말도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데, 당신은 나를 쫓아낼 수 없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이고, 이 말도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이 아니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게 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 존재입니다. 그 점에서도 예수님을 안다는 마귀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이 말도 역시 “당신은 사람일 뿐이다.” 라는 의도로 한 말이고, 그래서 거짓말입니다.
4) “조용히 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귀의 입을 아예 막아버리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선포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고, 섬기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또는 마귀에게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만일에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그러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원래 마귀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이고, 마귀들은 그곳으로 떨어지는 것을 몹시 두려워합니다(루카 8,31). 마귀들도 두려워할 정도로 무서운 곳이니, 인간들에게는......>
<권위 있는 말씀>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희년 선포'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이 전하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어촌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 일컬어지는 시작 부분입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었는데, 루카복음에 나오는 21개의 이적 중 첫 번째의 이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르침’과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은 이미 앞에서 ‘예수님 탄생 예고 장면’(1,32.35)과 ‘세례 방면’(3,22)에서 선포되었는데, 여기서는 마귀들의 입을 통해 선포됩니다(4,34.41).
그런데 목격자들이 놀란 것은 구마치유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곧 그분의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권위 있는 한 마디 말씀, 곧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라는 말씀에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 내동댕이쳤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습니다(루카 4,35).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고,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인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곧 희년 선포와 마찬가지로 원죄 이전의 에덴으로의 복귀를 보여줍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은 해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단지 악마를 쫓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몹시 놀랐던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이 나가지 않는가?”(루카 4,36)
'권위(exusia)'란 ‘힘’이란 뜻으로, 발설된 말씀이 말씀한대로 이루어지는 힘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니 말씀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 곧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구마자들과는 달리,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의 '말씀'으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힘으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루카 4,34)
주님!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으로 새로 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소서.
하여,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 거룩하시듯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루카 4, 31-37> 9월 3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세례 때 새 이름을 받아 본명을 정하고 신자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며칠 전 상담 온 사람이 저는 “베리타스”입니다. 하시고 “본명 정해준 대모님이 제게 베리타스는 진리라고 했습니다.” 하고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저도 오늘 “그레고리오”란 이름으로 수도 생활을 하는데 영광이 빛나는 의미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명은 그 성인의 보호 속에 살고 성인을 따라 살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주님의 보호와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부르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며 주님의 기도를 시작합니다. 주님이 거룩하시다는 내용은 주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신 것같이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고 우리를 거룩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이란 바로 “진, 선, 미의 근원이다.”란 뜻입니다.
제 이름도 석<주석 석> 진은 <떨진 진 > “주석이 떨릴 만큼 울리는 사람이 되어라.” 그래서인지 젊어서 가르멜 수녀원에서 첫 번째 피정 후 거의 모든 수녀원을 다니며 피정 다니고, 1980년도 부산에서 수녀원 지도신부 하면서 한 본당 빼놓고 전 본당에 피정 다녔습니다. 지금 나이가 90이지만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처럼 영광과 빛나는 생활을 하는 것도 이름 덕분이며 이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이름이 거룩하심은 진실하고 선하신 아름다움으로 거룩하시며 빛나는 본성을 따라 빛나는 일을 하셨습니다. 인간 안에 잠재한 거짓, 악, 추함을 물리치시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시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구하시고, 죄악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넘어진 사람 일으키시고, 잠자는 사람 깨우시고, 믿음이 없는 사람 믿음으로 이끄시고, 희망 없는 사람에게 희망 전해주고, 배척받고 외로운 사람을 위로하며 용기와 힘을 내게 하십니다.
저는 나머지 삶을 주님의 거룩하심이 빛나도록 기도하고 일하는 사람으로 다하도록 살기 위해 아침 기도 시간부터 미사 끝나는 시간까지 기도합니다. 미사에 들어가면서 환자 수사님이 저에게 축일 축하하면서 “신부님 죽어라.” 하기에 웃으며 자리에 앉아서 “별소리” 하는데 미시 시작하는 노래가 “죽어야 산다.”라는 의미를 깨우쳐주셨습니다. “착하신 목자 우리 주님, 양들을 위해 목숨 바치시니” 하는 시작 성가가 바로 “신부님 죽어라.”하는 의미를 알게 하셨습니다. 진실과 선행으로 아름다워지려면 죽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미사 동안 내내 죽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기도하며 오늘도 참 행복을 위해 죽음을 맛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기도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 35)
함상우 바오로 신부님
더러운 마귀의
영에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예수님의
구원이며
정화입니다.
더러움을
하나 하나
벗겨가는
정화의
여정입니다.
맑아질수록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빠짐없이 아시며
은총의 길을
내시며
치유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험하고
어려운 곳
어둡고
더러운 곳
괄시받고
버림받은 이를
찾아나섭니다.
은총을 입은
우리들
삶입니다.
더러운 영은
우리를
시끄러움으로
몰아넣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조용히
끌어안으시며
빛으로 조용히
이끄십니다.
아는 길도
매일의
생활 안에서
주님께
물어 가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마귀 추방은
간절한 심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깨끗한
정화입니다.
우리를 향해
외치시는
간절한
기도이십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정화에 동참하는
맑은 날 되십시오.
“성사 본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 고백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죄 고백할 것도 없는데 왜 고해소에 들어오셨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사 보신 지 얼마나 되셨는데요?”라고 물으니, 석 달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자기 마음의 불편한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석 달 되었다는 말에, ‘얼마 안 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황님도 보름에 한 번 성사를 보신다고 하는데, 석 달이면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닐까요? 사실 많은 이가(저 역시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갔으면서도 안 넘어간 척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1)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
2)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3) 아직 젊으니까
4) 이번 한 번뿐이니까
사실 마귀의 유혹은 우리가 방심하는 잠시의 틈을 타서도 불쑥불쑥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주님의 말씀 따라 항상 깨어 있지 않는다면 죄의 침범을 절대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점령되었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도 마귀는 힘을 잃고 도망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정답입니까? 거짓입니까? 당연히 정답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도 이 고백을 해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마귀가 이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이 걸렸다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면 사람들이 과연 믿을까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도 마귀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하면서 거리를 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시대에도 마귀를 쫓아내는 예식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예식은 주로 랍비들이 담당했는데, 그 시간이 아주 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 한마디 말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귀의 유혹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마귀와 타협하지 않고, 주님 말씀만을 따라야 합니다.
소통의 답은 존중하는 마음에 있다(템플 그랜딘).
이렇게 했더니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유튜브 채널 ‘책그림’에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한 오래된 동영상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다른 방향으로 뜁니다. 어떤 차를 보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이것만 보면 이 사람은 분명 도망자입니다. 옷도 그렇게 입었습니다. 그러다 어떤 신사의 멱살을 잡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을 벽으로 밀어붙입니다. 이때 하늘에서 건축 자재들이 쏟아집니다. 이 사람은 사실 지나가다가 건축 자재가 쏟아지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 신사를 구해주려 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현실은 하나지만 그것 때문에 생기는 판단은 여럿이고 그것 때문에 생기는 감정도 시시각각으로 달라집니다. 처음엔 안 좋은 감정을 가졌던 사람에게 나중엔 감동하게 됩니다.
우리 감정은 어떻게 생길까요? 바로 ‘믿음’에 의해 생깁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감정이 다릅니다. 얼굴에 모반을 가지고 태어났고 또 한쪽 얼굴에 암까지 들었던 김희아 씨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반면 내 안의 자아를 믿으면 그 자아가 하는 말을 믿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에 불만을 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루카 4,34)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어떤 감정으로 소리 지르는 게 옳은 일일까요?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 21,9)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왜 어떤 이들은 같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 뛰지만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싫어할까요? 분명히 어떤 이들은 좋은 이득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어떤 이들은 자기가 가진 무언가를 잃게 만드는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죽이고 당신이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나’를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거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를 버리고 싶은 이들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어려움 속에서 당신께 잘못하는 이들을 죽이고 싶은 심정까지 들 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 곁으로 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
이 말씀으로 어머니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한 분으로 모든 서러움이 날아가고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음은 좋은 감정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감정은 ‘믿음’의 산물입니다. 연인을 태우고 배를 타고 물놀이하는데 다른 배가 내 배를 들이받아서 심하게 흔들렸다고 가정해봅시다. 멍청하게 배를 젓는 상대 때문에 화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그 배는 빈 배였습니다. 그냥 떠내려온 배였습니다. 그러면 ‘아, 내가 부주의해서 저 배를 보지 못했구나!’로 감정이 바뀝니다. 앞에서 화가 날 때의 감정은 ‘분명히 저 배에는 멍청한 놈이 타고 있어!’라는 자기 말을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을 믿으면 나쁜 감정이 솟아납니다. 하지만 자신을 믿지 않으면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어 모든 일에 감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어린이가 사람을 톱으로 자르거나 통에 넣고 칼로 찌르는 마술을 본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매우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그 모든 것이 눈속임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저 ‘저걸 어떻게 했지?’라며 신기하기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감정은 믿음에 의해 생겨납니다. 나는 내 목소리를 믿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믿을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내 목소리를 믿으면 나쁜 감정에 사로잡혀 결국 남도 죽이고 나도 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것이 은총이 됨을 믿어 나도 살고 이웃도 삽니다.
기쁘지 않은 성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않고 기쁜 감정으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악령은 ‘나를 믿게 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으로 믿게 했습니다. 그래서 악령에 들린 사람은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나를 주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악령이 되어갑니다.
더 늦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사랑합시다. 그러면 그분이 주인이 되시고 그분의 말씀을 믿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감사한 감정이 생겨나고 그러면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나에게 사로잡힌 이들은 나쁜 감정으로 살면서도 좋은 감정으로 구원해주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감정에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나를 믿던지, 그리스도를 믿던지. 불만족과 불평으로 살든지, 기쁨과 감사로 살든지. 악령에 사로잡히든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든지 말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 교회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전직 목회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종의 자기고백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의 문제는 대부분 ‘담임목사’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복음 선포와는 거리가 먼 설교라고 하였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설교, 번영의 설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시대의 표징을 잘 읽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교회운영이 투명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재정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식에게 교회와 교회의 재산을 물려주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언행이 상식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생활이 너무 사치스러운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동차, 집, 옷이 호화스러운 경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동체가 분열되고, 가나안 신자가 늘어나고(가나안은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된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대부분 담임목사의 책임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목사님이 수준이하인가?’라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전도사 시절 열심히 전도하였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목사님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목사님의 생활이, 삶이 변하게 된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특별한 존재라고 존경하는 것은 좋지만, 목사님은 예수님은 아닙니다. 마치 목사님을 예수님처럼 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결정은 목사님이 내릴 수 있는 교회의 구조에도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기구에 덕망 있는 신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교회에는 정관이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정관에 따라서 목사님의 임기를 정하고, 교회에서 ‘재신임’ 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목사님은 처음 가졌던 순수한 마음으로 목회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목사님은 대부분 ‘재신임’을 받고 목회를 계속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제도, 견제 받지 않는 제도는 부패하기 마련이라는 말은 가톨릭 사제인 저에게도 ‘타산지석’이 되었습니다. 한국 가톨릭에 문제가 있다면 대부분 영적으로 눈이 먼 사제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에 소홀한 사제, 세상의 것들에 관심이 많은 사제, 재정에 투명하지 않는 사제, 성사를 성실하게 집전하지 않는 사제, 말과 행동이 상식적이지 않은 사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악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맞습니다. 사제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기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교회는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제안이 있다면 사목에 대한 키워드를 뽑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기간 동안 ‘겸손, 희생, 인내, 열정, 화합’이라는 키워드가 많이 있었다면 그렇게 평가하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기간 동안 ‘독단, 독선, 상주의무 위반, 지나친 음주, 불성실’이 많이 있었다면 이 또한 평가 되면 좋겠습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사목자들은 그에 합당한 곳에서 사목을 하면 좋겠습니다.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사목자들은 재충전의 시간을 주면 좋겠습니다. 치유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면 좋겠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평가를 하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비판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차안에서 피안으로의 하루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산자락 양지바른 전원주택에서 하루를 지냈다. 9백고지에서 부는 골바람이 시원했다. 사람들은 공기의 오염, 소음공해를 피해 청정지역에 집을 짓는다.
모처럼 덕분에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들었다. 하루종일 나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산길을 따라 산책을 하려 폼 잡았지만 왼종일 빗방울이 발길에 훼방을 놓았다. 대신 지인들과 하루종일 살아간 이야기를 했다. 간의 피로가 싹 날아가 버렸다.
속세인 차안에서 천상의 피안으로 몸과 마음이 옮겨 와 예수님을 이야기하다 숨어계신 하느님을 뵈었다. 은총과 축복의 날이다. 오늘 하늘을 향하는 마음의 미학을 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더러운 마귀가 들린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셨고, 마귀는 그에게서 나갔습니다.
얼마 전 신종 용어로 ‘법꾸라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법과 미꾸라지를 합성한 용어로서 법의 굴레를 요리조리 잘 빠져나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이 법의 굴레를 잘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법을 잘 알아야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마귀의 경우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하면서 예수님을 안다고 하였지만 정말 신앙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술책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경험적으로 교회를 잘 알고, 교리를 많이 알고 표면적으로 신앙인임을 과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진실한 신앙을 살아가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마귀는 우리를 자기 과시나 현학적인 지식이나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을 살아가도록 유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참된 신앙의 모습을 살아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황상 영원히 아멘.
<함께 라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라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요
누구는
나누려고
함께하고
누구는
앗으려고
함께하니
함께 라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요
누구는
일으키려고
함께하고
누구는
쓰러뜨리려고
함께하니
함께 라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요
누구는
풀어주려고
함께하고
누구는
얽매려고
함께하니
함께 라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요
누구는
섬기려고
함께하고
누구는
지배하려고
함께하니
함께 라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요
누구는
살리려고
함께하고
누구는
죽이려고
함께하니
함께 라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요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가파르나옴으로 내려가십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공적 생활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이며 이 중에서 가파르나움이라는 고을이 주 활동무대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가시든 많은 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군중들은 가르침에 권위가 있음에 몹시 놀라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나오는 말씀의 권위는 어떤 권위일까요. 이것을 알려면 필요한 것이 비교 대상입니다. 당시에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인데 그들의 권위는 스스로 드러내는 권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다른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를 원하는 권위, 선생이라고 불리기를 바라는 권위, 기도와 단식을 눈에 보이는 장소에서 함으로써 온전히 자신들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것들이 그들의 권위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권위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사회의 정치 지도자들과는 차이가 있엇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한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권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복음에서는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등장하지요. 그리고 그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항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회당은 작은 조건만 갖추면 각지역 마다 회당을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당은 작은 신전의 역할도 했었지요. 이러한 회당 안에 마귀의 영이 들어왔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마귀의 말입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이 말 중에 멸망이라는 것을 잘 보면 예수님의 권위 및 힘,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 그리고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분이며 더욱이 사탄과 그 졸개들인 마귀의 더러운 영들을 멸망시킬 수 있눈 분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보다 더 먼저 악, 그리고 죽음, 사탄 및 마귀들이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기에 사실임을 알 수 있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마귀로부터 우리들을 지키시는 참 하느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마귀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는데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특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마귀가 회당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것을 알기 전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하늘은 악, 어둠의 세력들과 전쟁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물질적인 만족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현재 일하시는 중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권위는 예수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동시에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떤 권위인지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아멘!
권위의 체험
전형천 미카엘 신부님
사람들은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며 그분의 권위를 체험합니다. 그렇다면 더러운 영이 들렸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교회는 마귀가 엄연히 존재한다고 단언합니다. 교회는 정신질환이나 질병은 마귀 들린 것과는 전혀 다르며, 그런 질병은 의학이 치료하는 것이므로, 구마를 행하기 전에는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요(가톨릭교회교리서, 1637항). 그런데 이 가르침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는 말이 지금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가 의학이나 과학, 합리적인 사회의식으로 접근하고 해결하는 많은 문제들을 더러운 영의 탓으로 돌렸겠지요. 더러운 영이 들렸다는 말은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혹은 문자 그대로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힘을 그를 위해 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힘을, 당신이 누구이신지 알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돕고 돌보는 데 쓰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에 권위를 체험한 것은 그저 말씀의 힘 때문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함승수 신부님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폭력을 쓰는 이유는 '말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논리, 대화와 소통으로 상대방을 설득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 자기 생각만이 옳으며 상대방은 자기 생각에 따라야 한다는 교만한 독선과 고집으로 똘똘 뭉쳐 있기에, 상대방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이끌어가려고 하는데, 그가 자기 말을 따라주지 않으니 폭력을 이용해서라도 자기 주장을 억지로 관철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 모습은 비단 남남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녀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억지로 강요하는게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나이를 먹어가며 머리가 커갈수록 그런 '강압식 교육'은 통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자녀들이 부모의 잘못된 교육방식에 반감을 가져 엇나가게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폭력이나 강압적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말 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올바른 쪽으로 돌려놓는 '힘', 즉 참된 권위를 지닐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언행일치(言行一致)"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말과 삶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그런 척 하는 '위선'으로 여겨져서 '너나 잘 하세요'하는 반감이 들지만, 말과 삶이 일치되어 함께 가는 사람이 하는 말은 정말로 그렇게 사는 '모범'으로 여겨져서 나도 그 모범을 본받고 싶어지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 있다'고 느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당신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강조하시며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조건 없고 제한 없는 용서의 실천과 원수에 대한 사랑을, 당신 자신을 완전히 비워내고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따르시는 순명을 몸소 실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런 분이 하시는 말씀이라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것일테니 꼭 따라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에 비해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던,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놀라운 능력을 지닌 거룩하신 분이라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더러운 영은 그분의 말씀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한편, 그분이 자신들을 괴롭히고 멸망시키러 오셨다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미지를 갖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조용히 하라'고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시고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불어넣지 못하도록 내쫓아버리시지요.
그 더러운 영은 '회당 안'에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율법을 공부하며 종교적인 예식을 치르던, 그들이 가장 '거룩하다'고 여기던 장소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과 같이 안식일 율법을 지키고 예식에 참여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불편한 진실'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거룩한 성전에서 열심히 미사에 참여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몸을 받아모신다고해도, 제 이익과 제 삶의 안위를 지키는데에 방해가 되면 주님마저도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밀어내는 교만과 집착, 욕심과 고집에 빠져 있으면, 그런 나 자신이 '교회 안에 사는 마귀'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고싶지 않다면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분 마음을 헤아리며 철저하게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 사랑의 권위가 내 삶에 작용하여 나를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시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 3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있기 마련이다.
가장 소중하신 분을
알게되는 시간이다.
가장 소중한 기쁨을
만나는 시간이다.
소란스러움이
멈추어야
말씀을 통해
치유가 일어난다.
주님 말씀으로
내면의 소란이
사라지는 은총의
순간이다.
말씀을 건네시는
예수님이시다.
잘못된 삶을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예수님이시다.
말씀으로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아 주신다.
관계를
어지럽히고
인격을 훼손하는
모든 어두움을
바로잡아 주신다.
일상의 삶이
건강하길
바라신다.
건강성의 회복은
참됨을 되찾는
일이다.
참됨은
일상과 말씀이
분리되어 있지않다.
고귀한 가치를
실천하는 일이다.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내세우는
실천이다.
참된 사랑은
말씀에
권위가 있다.
예수님의 권위는
착한 마음
말씀의
올바른 이해
거룩한 실천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시끄럽고
어수선한 삶이
사랑의 질서
고요함을
회복하게 된다.
언제나 삶의
마지막 버팀목이
되시는 주님께
우리의 어두움을
봉헌한다.
마음과 마음이
새로 열리는
시간이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
본래 마음으로
돌아갈 오늘이다.
사랑의 유효 기간은 어떻게 될까요? 사랑이니까 영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싶겠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사랑도 유효 기간이 있을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사랑한다면서 뜨거운 만남을 가졌던 연인이 어느 순간에 헤어졌다면서 어색한 미소를 짓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미국의 코넬 대학교 인간행동연구소에서는 2년간 5,000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사랑의 유효 기간을 조사했습니다. 연구 결과 18개월에서 30개월이면 뜨겁던 사랑이 식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랑에 빠진 후 1년이 지나면 사랑의 감정은 50%가 사라지게 되고, 이후 계속해서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권태’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영세 후에 곧바로 ‘권태’를 맞이하면서 점점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권태를 변화를 위한 서곡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강사들은 매번 재미있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루할 만한 시간을 알고 그 시간에 변화를 주면서 계속해서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그리고 이웃과 맺는 사랑의 관계가 식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새로운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사랑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회당에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겠다고 선언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자진 신고를 하면서 예수님께 항의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셨고,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자기를 쫓아낼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런 말도 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는 거짓말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진실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한 의심을 하게끔 하였고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을 위해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될 때가 주님께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할 때입니다.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그 색깔을 지니고 있다(E.리스).
어떤 선택?
얼마 전에 특수 청소를 직업으로 하는 분이 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특수 청소라는 것은 대부분 ‘죽은 자’의 집 청소였습니다. 이 책 안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어느 날, 모르는 사람의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은 “인터넷에 착화탄 자살을 하면 괴롭다고 쓰셨던데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착화탄 자살자의 집을 청소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게 되었다는 글을 보고 전화했다는 것입니다.
착화탄 세 개를 샀다는 말을 듣고는, 저자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경찰을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보내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문자일까요? 물론 좋은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나쁜 시키’
이 문자를 받고서 저자는 너무나 기뻤다고 적습니다. 좋은 내용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욕 섞인 문자가 오히려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생명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욕을 먹더라도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포하는 말씀에 행동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받으셨던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셨습니다. ‘내려가셨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습니다. 나자렛은 해발 380미터 정도되는 꽤 높은 구릉지대에 위치한 고을인 반면,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숫가 북서쪽 해안 평지에 위치한 포구였습니다.
끝까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나자렛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고향이자 복음 선포의 베이스 캠프로 카파르나움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나자렛을 떠나 낮은 곳에 자리한 카파르나움으로 본거지를 옮기신 예수님의 선택이 의미심장합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높은 곳에만 앉아 계시지 않고, 언제나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안락하고 편안한 자리를 마다하시고 진흙탕 같은 인간 세상 속으로 깊숙히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카파르나움은 지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꽤나 융성했던 고을이었습니다. 교통의 요지였고, 로마 군대가 주둔했으며, 세관도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 위치했던 관계로 주거 환경도 탁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첫 제자단을 선발하셨습니다. 공생활 초기부터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많은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집도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주 이 고을에 들르셨습니다.
그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카파르나움을 ‘예수님이 사시는 고을’, ‘예수님의 집이 있는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자렛이 예수님의 고향이라면,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활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도 나자렛에서 하셨던 방식 그대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회당 안으로 들어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종래의 사제나 율법학자들과는 차별화되는 신선하면서도 살아있는 가르침 앞에 백성들을 크게 환호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기존의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모습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포하는 말씀에 행동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당신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예수님의 말씀에는 힘과 생명력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분 말씀을 듣는 청중들은 앉아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회당 안에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 마귀들린 사람조차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파악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마귀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복음 4장 34절)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영의 신앙 고백을 경멸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복음 4장 35절)
믿음에 행동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부정한 영이 예수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했지만, 결실이 없는 헛고백이었습니다. 신앙 고백에는 언제나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생활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 세상에 다양한 마귀들의 횡포와 그로 인한 악이 창궐하지만,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권위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하고 초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보이셨습니다. 곧 거룩하신 분, 전지전능하신 분, 완전히 다르신 분, 지극히 힘있는 분임을 입증하셨습니다.
땀이 섞이지 않은 망치로는 달걀도 깰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좋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말을 해 준 부모가 있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말을 해 준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나쁜 말을 해 줄 수 있을까요? 말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권위’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분명 하느님의 계명을 가르쳤기 때문에 좋은 내용의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엔 권위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좋은 길로 나가게 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에 권위가 있어야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우리는 그 권위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심리학자로 꼽히는 ‘아른힐 레우뱅’은 10대 시절, 심리학자를 꿈꾸던 우등생이었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환각과 환청을 겪기 시작했고, 그녀의 세상은 온통 회색빛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귀가 이상해졌습니다. 친구가 말하는 소리보다 자신의 신발 끄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다음엔 눈이 이상해졌습니다. 보도블록에서 떨어져 다칠까 봐 건널목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다음엔 자신 안에서 선장을 만납니다. 처음엔 친절한 것 같았지만 갈수록 잔혹하게 아른힐을 몰아쳤습니다. 그러나 친구라고는 내면의 선장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자아에 묶이게 된 것입니다.
정신병원 독방 침대에 묶여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공허함만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장은 밥을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밥 대신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정신병원을 몇 번을 들락거리며 수없이 자해하기도 하고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자해와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어서 10여 년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그 원하던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책에서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치유해 준 것은 당시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조현병은 고질병이니 나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거나 TV를 보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라고 충고했습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런 말들은 그녀를 변화시킬 어떤 힘도 주지 못했습니다.
어떤 치료사가 그녀의 두꺼운 기록철을 보더니 “이런 상태라면, 시간이 꽤 걸리겠네요”라고 한 말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치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건널목을 건너지 못하고 웅크리고 앉아있을 때 어떤 사람이 차에서 내려 “괜찮아, 좋아질 거야!”라고 하며 그녀를 차로 태워주었습니다. 다른 때는 소리를 질렀겠지만, 그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람들의 작은 친절함이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말들은 강요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따듯함이라고.
[참조: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아른힐 레우뱅, 책읽는 다락방 J, 유튜브]
오늘 복음에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고 나옵니다. 말의 권위는 말의 힘입니다. 그러며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이 나오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말의 권위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 한 명의 마음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말보다 권위가 있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희망과 믿음을 주는 말씀이었다는 뜻입니다. 당신 말씀 안에 ‘따듯함’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따듯함은 무엇일까요? 바로 당신의 ‘피’입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말은 어떠한 힘도 없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도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베테랑 군인들이 희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도 라이언 일병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라이언, 값지게 살아. 값지게 ... ”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 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
라이언 부인이 대답합니다.
“그럼요!”
밀러 대위의 한 마디는 라이언의 평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에 피가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다면 그 이유는 그 말씀에 피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피를 마귀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피가 섞인 말만이 내 안 마귀의 본성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힘이 든 말씀은 권위가 있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땀을 흘리게 만들지 않는 망치는 달걀도 깰 수 없습니다. 땀과 함께 휘둘러지는 망치만이 권위를 가집니다. 말에도 온도가 있다고 합니다. 말이 따듯해지려면 그 말에 나의 따듯한 피가 섞여야 합니다. 각자의 피는 십자가에서 흘려집니다. 따라서 자기를 살리려고 이웃을 죽이는 사람의 말엔 권위가 없고, 자신을 죽이며 이웃을 살리려는 말엔 권위가 있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2년 부라질의 리우에서 리우환경회의가 있었습니다. 정식 명칭은 환경 및 개발에 관한 유엔 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입니다. 28년 전의 일입니다. 전 세계의 정상들이 모였고, 단체들의 대표가 모였습니다. 주제는 지구의 환경을 보존하고, 생명을 보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무분별한 개발과 에너지의 급격한 소비로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함께 살던 많은 생명이 멸종하였고, 멸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지구를 보호하던 오존층에 구멍이 났고,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북극곰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기상이변이 되어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바다와 공기가 오염되고 있으며, 지구의 허파인 밀림은 점점 파괴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도 환경파괴가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피조물을 보호하고 함께 살도록 하셨는데 인간은 피조물을 파괴하고 있으며 우주에서 하나뿐인 푸른 별 지구를 어둠의 별로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12살 때는 동네에 우물이 있었고 언제든지 두레박으로 마실 수 있었습니다. 논에는 미꾸라지가 있었고, 메뚜기도 있었습니다. 동네 하천에서 수영도 하였고, 어머니가 부를 때까지 동네 마당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수돗물도 믿지 못해서 물을 사먹고 있습니다. 저는 28년 전에 환경회의가 있었는지 잘 몰랐습니다. 며칠 전 우연히 당시 회의에서 발표하였던 어린이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어린이의 연설은 다른 학술 논문보다 호소력이 있었고, 회의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어린이도 40살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정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어린이의 발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8000킬로를 달려 여기에 왔습니다. 저는 어린이 환경단체의 대표로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낚시를 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낚시에 잡힌 물고기가 암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밀림이 파괴되고, 오존층이 파괴되고, 공기와 바다가 오염되고 있습니다. 저의 아이들에게 지금의 지구를 보여 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저는 해결책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어른들도 해결책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오존층에 난 구멍을 수리하는 방법, 죽은 강으로 연어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 사라져 버린 동물을 되살려 놓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미 사막이 된 곳을 푸른 숲으로 되살려 놓을 능력도 없습니다.
저는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전쟁을 위해서,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돈을 환경을 보존하고, 가난한 이를 돕고, 아픈 사람을 돕는데 사용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리우의 빈민촌에서 태어났다면, 제가 중동의 마을에서 태어났다면, 제가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면 저는 굶주리고, 병들고, 전쟁을 경험했을 겁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약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환경을 보존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왜 어른들은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지 않나요? 아버지가 제게 말하였습니다. 너의 말이 아니라, 너희 행동이 너를 만든단다. 여러분도 행동으로 지구를 보호해 주십시오.”
12살 어린 소녀의 말이지만 놀라운 성찰이 있었고,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악의 세력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악의 세력도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하느님의 능력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과 악의 세력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신앙인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 갑니다. 하지만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능력을 알면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반대 방향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신앙인과 악의 세력이 하느님을 알지만 서로 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어떠한가요? 참된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지요? 아니면 하느님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알면서도 악의 세력처럼 정 반대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세속의 유혹 앞에, 돈과 명예 앞에, 자존심과 욕심 앞에 눈이 멀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참된 식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악령아, 사람에게서 나가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옆에서 죽든 말든
제 살길만을 찾으라는
무관심의 악령이 따집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라는
탐욕의 악령이 따집니다
하느님의 이름 걸고
제멋대로 날뛰라는
불경의 악령이 따집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를 따르는 그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저함 없이 단호하게 거침없이
꾸짖어야 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이 더러운 악령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고인현 도마나코 신부님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오랫동안 묵상합니까?
묵상의 첫 단계는 성당이나 여러분의 방에서 아주 편안한 몸의 자세를 취하는 데 있다. 먼저 허리를 곧곧하게 펴고 손을 모으고 편안하게 앉아라. 묵상을 위해 적당하게 몸의 자세를 유지하고 난 뒤에 호흡에 여러분의 의식을 집중하기 바란다. 호흡은 몸과 정신을 연결해 주는 중재자이다. 여러분의 호흡이 거칠면 여러분의 생각도 거칠어 질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게 된다면 그 호흡은 금방 고요해지고 늘여지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여러분의 생각도 고요해지고 여러분은 몸과 마음에 안정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 비로서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모든 관심을 한 점에 집중시킬 수 있다.
서서히 호흡에 대한 의식에서 내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소리에로 여러분의 의식을 열어 놓아라. 여러분의 의식을 열어 주위에 들리는 모든 소리에 민감하게 있어라. 그 우주의 소리와 하나가 되어라. 어떠한 생각도 일으키지 마라. 이제 여러분의 의식을 서서히 여러분이 현존하고 있음으로 돌려라. 내가 살아 존재하고 있음을 느껴라.
그냥 나 있음에 머물러라. 나 있음의 현존 체험은 바로 하느님의 현존체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감각 안에 있을 수 있다면 그러한 시간을 계속 늘여가기 바란다. 그러나 이런 감각을 발견할 수 없다면 차선의 방법을 선택해야만 한다. 너무 욕심을 내지 말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라. 하느님은 내가 알아채지 못해도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세 가지 선택적 대안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하느님의 이름을 단순하게 간절하게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다. 호흡에 맞추어 하느님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르는 것은 굉장히 도움이 된다.
둘째로, 가장 자기가 좋아하는 하느님의 상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마음에 다가오는 예수님의 상을 갖고 있다면 마음속에(가슴부위) 예수님의 상을 그리도록 하라. 그리고 그 상에 나의 모든 관심을 쏟아 붙는 것이다. 그 상을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 상이 없어지지 않도록 집중하라. 상이 없어지면 즉시 깨닫고 다시 그 상을 떠 올려라. 여러분이 그 상에 여러분의 정신을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그 상은 더욱 선명하게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를 것이다. 한 번 상을 선택했으면 다른 상으로 바꾸지 말라. 우리의 정신(mind)은 원숭이처럼 늘 움직이고 그 대상을 바꾸려고 한다. 묵상 혹은 명상이란 여러분의 정신을 길고 깊게 한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묵상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관상의 상태로 들어가는 데 관상이란 더 길고 깊은 집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상의 상태에서 더 나아간다면 깊은 하느님의 체험이 일어난다.
세 번째의 방법은 성서 혹은 복음을 묵상하는 것이다. 성서 혹은 복음 묵상은 아침에 하는 것이 좋다. 먼저 편안하게 앉고, 호흡을 주시하고, 외부소리와 하나가 되고, 자신의 현존의 느낌 속에 2~3분 머물고 나서 1~2분 자신의 호흡을 의식하고 자신이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음을 느끼면서 천천히 눈을 뜬다. 그러고 아주 천천히 주의 깊게 그날의 성서(복음)의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나서 다시 호흡에 의식을 주고 외부의 소리와 하나 됨을 느끼면서 복음의 말씀의 세계로 들어간다. 마음에 와 닿은 복음 말씀 한 단어 혹은 아주 짧은 문장을 마음속에 떠올린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 말씀에 대하여 주석을 달 생각을 피하라는 것이다.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하고 그 이유를 찾거나 생각하거나 하지 말라. 그냥 계속해서 그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말씀 그 자체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아마 어느 순간 우리의 생각은 다시 나타나 자신을 괴롭힐 수 있다. 그러나 그 생각들과 싸우지 말아야 한다. 그냥 ‘아! 생각이 나타났구나! 하고 알아채면 즉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되돌아 오면 된다. 묵상 속에 있다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자신의 호흡을 1~2분 의식하라.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면 된다. 그리고 미사에 참여하고 하루를 사는 동안 틈틈이 그날 묵상 속에서 마음에 새긴 하느님의 말씀을 떠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자기 전에 그 말씀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나 체험 등을 짧게라도 일기처럼 써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의 삶을 여러분이 반복하여 훈련한다면 여러분은 아주 엄청난 하느님 말씀의 은총을 체험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다른 교우들에게 그 묵상한 바를 나눈다면, 그 나눔은 그 어떤 설교보다도 힘 있는 설교가 될 것이다. 또한 여러분은 여러분의 나눔을 통해 하느님께서 그 나눔 안에 함께 한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고통이 하늘 길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마귀가 하느님의 비밀을 누설한답시고 외쳐댔으니 제대로 선포한거죠.
예수님이 마귀를 야단치며 꾸짖으니 암말 못하고 쫓겨 난 꼴이었어요.
장소는 갈릴레아 가파르나움 회당이며 때는 1990년 전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쓴 시대는 신문 방송 기자들도 없었지만 서술이 실재적입니다.
세상의 악들이 오늘도 하늘 있음을 이처럼 역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산이 싸움으로 평화를 알리고 권력의 도도함이 겸손을 알려 줍니다.
실패는 성공의 길이란 것처럼 세상의 고통이 하늘길이라는 걸 압시다.
이처럼 세상의 십자가 고통이 행복영생길이라 알려주신 예수님이셨죠.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예수님께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말 중에 ‘오지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대개의 경우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는 사람에게 주로 쓰는 약간은 부정적인 의미의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나도 그러한 오지랖이 그립기도 합니다. 사실 요즘은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가 아니라 반대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로 바뀌었습니다. 곧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서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 서로가 서로를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누가 죽어가도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우리라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는 의미입니다. 어쩌면 그것 자체가 바로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어쩌면 우리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너무나도 오지랖이 넓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에 관여하시고, 상관하시고, 돌보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는 지금보다도 더 넓은 오지랖이 요청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화요일>(2020. 9. 1. 화)(루카 4,31-37)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입니다(요한 1,1).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 ‘힘’은 모든 피조물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입니다.
특히 마귀들은 그 힘의 위력을 잘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시면 그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것들이 저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루카 4,41). 만일에 마귀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것들은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시지만,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명령을 하시기도 했는데, 그러나 제자들이 자유의지 없이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바라지 않으셨고, 제자들이(신자들이) 스스로 원해서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들을(말씀들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고, 거부하면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1-32).”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권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을 안 믿었고, 또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기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끼자 몹시 놀랍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었다면, 그 힘을 느꼈을 때 당연한 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에는 ‘힘’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힘이(생명력이) 들어 있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마귀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붙잡고 있는 마귀는 자기가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예수님께 반항하려고 시도합니다. 그 마귀가 선택한 방법은 예수님의 신원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 라는 마귀의 말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을 표현한 말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한 말입니다.
<마귀는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악한 의도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은 진실이 되지 않습니다. 또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마귀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원래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마귀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그것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5-37).”
마귀에게는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냥 나가지는 않고 그 사람을 내동댕이칩니다. (예수님께 직접 달려들 수는 없으니 힘없는 그 사람에게 분풀이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로 옆에 계셨기 때문에 마귀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마귀의 억압에서 구출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귀의 괴롭힘에서 지켜 주셨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또다시 몹시 놀라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기 때문에 놀랐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복종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꼼짝도 못하고 복종한 것은, 그 명령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의 명령은 곧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놀란 것입니다.)
마귀들은 하느님의 명령에만 복종하고 사람의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마귀를 쫓아내려면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냅니다.
마귀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명령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명령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같은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셨습니다(루카 9,1).
그 권한은 사도들의 후계자들, 즉 주교들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마귀를 쫓아내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귀는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면서 그들에게 달려들었고, 결국 그들은 마귀를 쫓아내기는 커녕 그들 자신들이 쫓겨 달아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19,13-16).>
더러운 영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더러운 영은 어떤 영일까? 사람이 마귀가 들렸다. 마귀는 세상을 떠돌다가 존귀한 사람 속에 자리 잡는다. 인간 이성을 마비시키고 한 인간을 철저히 망가트린다. 낫기를 바라는 사람과 사람 속에 자리를 잡고 살기를 바라는 마귀가 한 사람 속에 작용하며 한 인간을 철저히 둘로 갈라 놓는다.
나는 사목을 하며 이런 경우를 여러번 보았다. 기도의 힘이 막강하자 마귀가 사람에게서 떠나는데 여기서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작용한다. 마귀가 사람에 빌미 붙어 나가지 않으려고 붙잡고 늘어진 힘과 마귀를 떨쳐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의 힘이 서로 팽팽이 작용한다. 이때 마귀는 예수님의 권위에 승복하나 사람을 떠나면서 해코지하며 내동댕이 치는데 사람이 박살나는 것 같다.
세상은 더러운 영들이 득실거린다. 건강한 사람 속에 자리잡고 사람을 철저히 파괴하는 세력들이다. 하나를 둘로 갈라 놓는다. 적폐 정치가, 대형 종교가, 적폐의 특정 공무원이, 기레기 언론이,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일부의 병원 전공의가 응급실 환자도 버리고 무더기로 더러운 영에 걸렸다. 코로나 전염병처럼 연일 또 다른 더러운 영이 세상을 온통 시끄럽게 파열음을 내고 있다. 그러나 걱정 없다. 언제나 하느님의 영이 승리를 가져오니 말이다. 지금까지 마치 극적인 드라마를 연일 보고 있지 않는가.
마귀가 영리하여 잔재주를 부린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기 위해 발악을 했다. 예수님의 권위에 승복하며 아양까지 떤다. 간교한 속셈을 드러낸다. 살고 싶어 술수를 부린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4,34).
또 새 달을 맞이하며
2020, 9월의 시작입니다.
또 나에게는 함께할 분들과 이루어 가야할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은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갈 계획입니다. 매일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살다보니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그 행복을 위해 오늘도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세상을 사노라면 계획한 것을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은 ~~때문에 라고 말하며 아무 것도 못하게 만들고 나 또한 내 자신을 ~~때문이라고 말하며 묶어 둡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나는 비오는 날 우산도 없지만 비를 피할 방도를 찿습니다. 가장 날렵한 사람이 있습니다. ‘비 사이로 막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를 맞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그렇게 열려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렵다고들 말하며 불평합니다. 불평을 늘어 놓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함께 일하는 분들과 대화를 하고 시스템의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가동합니다.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 않아 늘 한계상황이지만 이를 극복할 생생한 일, 바로 시스템과 함께 합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 걱정하는 시간에 기도합니다. 구성원을 떠올리며 오늘도 당당히 살아있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일은 사람이 합니다. 축복은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결코 한계상황이라 여기며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언제나 하루를 맞이함이 설레이고 행복합니다. 그렇게 살기에 오늘을 마감하며 나는 말합니다.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내일을 위해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코로나 상황에 잘 대처해야 합니다. 몸은 거리두기, 자가격리로 고정될 때라도 마음은 하느님과 함께하며 자유롭게 날아 다닙시다. 9월의 하늘이 쾌청하듯 우리의 마음도 쾌청하게 되어있을 것입니다. 9월 페친님들 행복하세요.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과 마귀의 영 사이의 긴장을 보여 주십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 카파르나움 고을의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그 안에 있던 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큰 소리를 지릅니다. 유다인 안식일 관습대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회당 안에까지 들어왔으나,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성정이나 분위기와는 계속 마찰을 일으켰을 테니까요.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2)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에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동안 들어온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와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분 말씀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으며 희망을 엿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복음 환호송)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넘어지는 누구라도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세우시는"(화답송) 분이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권위가 어디서 오는지 단초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1코린 2,12)
하느님의 영, 곧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생각을 통찰하십니다. 세속의 영, 더러운 마귀의 영과는 섞일 수 없는 거룩하고 순수한 영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일치의 유대이십니다. 성 삼위 하느님에게서 흘러 나오는 말씀은 그래서 사랑의 권위를 지니지요.
"자비, 어짊, 용서, 자애, 너그러움, 모두에게 좋으심, 참됨, 진실, 선하심"
오늘 미사의 입당송과 화답송, 영성체송 때 불리우는 시편들에서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위를 노래합니다. 주님 말씀의 힘은 세속적 힘 자랑이나 더러운 마귀의 영이 과시하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힘과는 다릅니다. 위로하고 존중하며, 격려하고 믿어 주는 권위, 용서하고 희생하고 속량해 주는 권위입니다.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루카 4,35)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인격과 존엄성을 짓밟는 더러운 마귀의 영을 단호히 꾸짖으시니 마귀는 쫓겨 나갑니다. 그 사람 안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거칠고 폭력적으로 요동치며 떠나지만, 다행히 그는 아무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사실 더러운 영은 거룩한 주님의 영 앞에서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영성 생활의 여정 안에서, 우리의 영혼에 어둡고 음습하고 파괴적인 힘이 밀려들 때도 있고, 헤어날 수 없을 듯한 두려움의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합니다. 하느님 현존의 기억을 까마득히 잊고 슬픔과 절망에 무너져 버릴 때도 있지요. 악한 영은 한 영혼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을 원치 않기에 호시탐탐 그 사랑의 유대를 약화시키거나 끊어낼 기회를 엿보다가 작은 틈새라도 생길라치면 당장 치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세상의 악을 퇴치할 수는 없어도, 우리에게서 악을 떼어내시는 예수님 곁에 머무른다면, 그분 말씀이 지니신 사랑의 권위가 그 악을 물리치고 우리를 다시 온전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설령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지더라도 아무 해조차 입지 않고 다시 일으켜 세워져, 처음처럼 그분의 온전한 소유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은 이들입니다. 현세의 눈에는 "어리석음"으로 비치겠지만 "권위와 힘을 가지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이끄시는 대로 내어맡깁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1코린 2,16)으니 두려워 말고 주님께 의지해 남은 사랑의 길을 완성해 나갑시다.
주님의 진리는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준주성범’에서 (Lib. 3,14)
주여, 내게 당신 판결의 언도를 우레와 같이 내리시니, 무섭고 두려워 내 모든 뼈가 울리고 내 영혼이 몹시 놀라나이다. 주 대전에는 하늘도 깨끗치 못함을 생각하오니, 놀라서 있나이다. 당신은 천사 가운데도 죄악을 찾아내어 용서 없이 벌하셨거든, 내게 대하여서는 어떻게 되리이까? 하늘의 별도 떨어졌거든, 먼지 같은 나로서 주제넘게 생각할 수 있겠나이까? 훌륭한 일을 하는 것같이 뵈던 자들이 깊은 구렁으로 떨어졌고, 천사의 면병을 먹던 자들이 돼지가 먹은 깍지를 즐겨 먹는 것을 내가 보았나이다.
그러하오니 주여, 당신이 도우시는 손을 거두시면, 성덕이라 할 것이 도무지 없겠나이다. 당신이 지배하여 주시기를 그치시면, 지혜라 할 것이 없겠나이다. 당신이 보존하여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 용기도 남아 있지 않겠나이다. 당신의 보호가 없으면, 전혀 정덕을 위험 없이 닦아 나갈 수도 없겠나이다. 당신이 거룩히 보살펴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리 우리가 지킨다 하여도 무익하리이다. 당신이 우리를 버리시면 빠져 망할 것이며, 당신이 우리를 찾아 주시면 일어나 살겠나이다. 이는 우리가 항구히 서 있지 못하지만 당신의 힘을 빌면 견고하여지며, 우리가 게을러지지만 당신이 도우시면 열렬하여지나이다.
내 위에 내리시는 당신 깊은 심판 속에 내 모든 헛된 영광은 사라졌나이다.
당신 대전에 사람이란 그 무엇이옵니까?
“진흙이 어찌 저를 만든 자를 거슬러 스스로 영광을 취하겠나이까?”
참으로 천주께 복종할 마음이 있는 자라면 어찌 헛된 말로써 교오를 발할 수 있겠나이까? 진리의 명을 일심으로 듣는 그는 온 세상이 떠들어도 교오치 아니할 것이요, 모든 희망을 천주께만 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찬미한다 해도 움직이지 않으리이다. 말을 하는 그 사람들 역시 누구나 다 같은 허무이고, 그 말의 음파와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나 주의 진리는 영원히 머물러 있으리이다.”
악마는 어디에 있는가? <루카 4, 31-3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악마의 존재는 성서 여러 곳에서 보이고 전해오는데, 악마는 어디에 살고 존재의 형상은 무엇일까? 창세기에 뱀의 모양으로 선조들을 유혹했다고 하지만 주님이 40일 엄재 하신 후 악마가 어떤 모양이란 말은 없고 주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말만 있습니다. ‘악마는 참으로 있는가? 없는가?’ 생각하게 되지만 ‘지옥에 있을까? 지옥에 있다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일까?’ 악마는 여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사람과 함께 살고 있으며 그가 있는 곳은 악이 현존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악의 현존을 이렇게 무의식으로 말합니다. “병마가 들었다. 주색잡기에 빠졌다.” 하고 말을 하면서 사람과 함께 있는 악마의 존재를 들어 말합니다.
악마가 있는 곳은 어둠이 있는 곳, 시련과 고통이 있는 곳, 절망과 죽음이 있는 곳, 게으르고 나태한 곳, 움직이지 않는 곳입니다. 주님도 악마의 유혹을 받으신 때도 40일 엄재 하셔서 시장하시고, 기진맥진하시고, 외로움과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한 압박감이 있을 때 마귀가 나타났지만, 주님은 사탄을 물리치시고 마귀와 관계를 끊으셨습니다. 유혹의 내용은 권력, 재력, 명예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 들린 사람이라 하고 마귀를 쫓아 달리고 하지만 자신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쫓아도 다시 찾아옵니다. 아니, 쫓아낼 수 없습니다.
똥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더러운 곳에 있는 것같이 자신이 깨끗하면 마귀는 붙지 못합니다. 영적 삶의 시작은 정화부터 시작합니다.
답답한 일이 있으면 “죽고 싶다.” 합니다. 이는 악마의 장난입니다. 우리는 악마가 똥파리 모양 끌지 않게 하려면 우리 자신이 깨끗해야 합니다. 어둡고, 더럽고, 정돈되지 않은 삶에 악마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근심 걱정으로 싸여 있으면 그 짐 속에 악마는 자리 잡고 있으며, 할 일 없이 서 있는 한가한 사람에게는 동무하자고 알짱거립니다.
마귀를 쫓아 달라고 하면 저는 긴 상담을 통해 자신부터 청소하라고 이릅니다. 우선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디가 더러운지 쓰레기가 있는지, 마귀가 달려드는 기회를 주고 있는지를 살피고 자기 탓으로 마귀가 옆에 있거나 자신 속에 있으면 청소부터 해야 합니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우울증을 일으킨 원인을 찾아 없애지 않으면 우울증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런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주님이 “사탄아 물러가라.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신 것같이 마귀를 자신에게서 떨어버리고 비워놓으면 더 많은 마귀 떼를 데리고 온다고 했듯이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어둠을 쫓아내고 빛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악마를 쫓아내고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미사 때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인사를 나누면서 자연히 주님을 모시고 마사 전례를 시작하며 기도하기 전에도 같은 방법으로 주님과 함께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살아 움직이는 한 악마는 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악마를 쫓아내고 믿음의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리고자 하려면 다시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악마의 질투, 시기는 우리가 주님의 친구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붙어서 살 환경을 만들지 말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순수하고, 안정된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함승수 신부님
요즘 의사 파업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공공 의대"를 설립하여 의사 정원을 늘리겠다는 정부 정책에 대해 반대의견을 피력하던 의사들이 '파업'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환자들과 간호사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한 지인분께서 SNS에 이 문제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남겨 주셨는데 그 내용이 참 마음 아팠습니다. 일부를 옮겨봅니다.
["지방 공공의대설립"이라고 말하면 안되고 "전라도에 2개 공공의대설립 계획" 이라고 정확하게 말을 해야지.......전라도 시골농촌에만 의사가 부족할까? 경상도 산골은 안 부족하고? 전라도에 공공의대 만들면 경상도에서 학생들 오기가 쉽겠어? 완전히 전라도 학생들만 많이 오겠지.]
이 글을 쓰신 분이 불만을 가지신 부분은 공공의대를 설립하는 장소가 '전라도'라는 점입니다. 글의 내용이나 뉘앙스를 통해 본인 혹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중 누군가의 고향이 '경상도'일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안그래도 "5.18 민주화 운동" 유공자 선정과 관련하여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을 느끼고 계시던 차에, 공공의대를 설립하는 장소가 전라도에 있는 대학이라고 하니 또 정부가 그 쪽 지역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는게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의견은 크게 두 가지 점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첫째, 정부가 전북 남원에 있는 서남대학교에 공공의대를 설립하고자 한 것은 그 학교에 2018년까지 운용되다가 폐교한 의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49명의 의대생을 수용하여 교육할 수 있는 시설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점이 선정 이유인 것입니다. 의대가 없는 곳에 갑자기 의대를 만들거나, 이미 의대 정원이 다 찬 곳에 억지로 추가인원을 배정하여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보다 이미 있는 시설을 활용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시간과 비용이 덜 들기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이겠지요.
둘째, '서울대'에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만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 대해 그 누구도 '왜 서울대는 굳이 서울에 있어서 서울 사는 사람들만 통학하기 쉽게 특혜를 주느냐'고 불만을 가지지 않습니다. 또한 서울대를 졸업했다고 해서 무조건 직장을 서울에서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인의 전공과 능력과 관심분야에 따라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할지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공의대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공의대가 전라도에 있다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곳을 졸업한 사람들은 정부 정책에 따라 다양한 지역으로 파견되어 지방 소도시가 직면한 의료공백 문제를 해소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공공의대가 어느 '지역'에 있는지를 두고 '차별' 문제를 제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시골마을 나자렛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자렛 사람'인 당신이 왜 이민족들의 땅인 '갈릴래아'까지 와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왜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 와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느냐고 따지는 식이지요. 자신과 같은 지역 사람들만 편들고 챙기는 '지역주의', 우리편 말고는 다 배척하고 외면하는 '배타주의'를 활용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희석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귀를 엄하게 꾸짖으며 쫓아내십니다.
기본적으로 '정'에 약한 인간은 '팔이 안으로 굽는'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공정한 태도를 갖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내 편'이 아닌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는 하느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 '공정함'이 이 땅위에 실현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 실현되게 만드는 그분의 모습을 보고 '권위'를 느낀 것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참 권위의 삶.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홀로와 더불어’라는 시인 구상 추모 문집의 단아하고 품위있는 글들을 읽으며 참 권위의 힘을 실감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사랑의 권위가 사람들을 감화感化하고 덕화德化하고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고 위로慰勞하고 격려激勵하고 치유治癒하며 기쁨과 평화를 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하는 참 권위가 이웃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 수도원의 반려견 다섯을 돌보는 일명 ‘문보물’이라 부르는 수사의 예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문보물 수사를 반려견들의 ‘수련장’이자 ‘수호성인’이라 부릅니다. 반려견들이 수사님을 따르는 모습에서 사랑의 권위를 느끼기 때문이며 엊저녁은 반려견들의 집에 모기향을 켜놓으며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모습도 사진에 담았습니다.
참 권위가, 진정한 권위가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회복이 참 힘들 듯 권위도 무너지면 회복이 참 힘듭니다. 권위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참으로 살기 위해 참 권위는 필수입니다. 교회 역시 생생한 전통과 참 권위를 지닐 때 소금과 빛의 사명에 충실한 참 권위의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라지만 대면예배 고집, ‘공공의 적’이 된 개신교, 목숨과 바꿀수 없는 종교의 자유?”란 기사를 보며, 이래서는 교회의 권위도 보장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권위도 지녀야 하겠지만 서로의 권위를 존중하고 지켜주는 일도 기본에 속합니다. 참 권위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닮아 책임을 다하며 ‘답게’ 살 때 옵니다. ‘스승답게’ ‘부모답게’ ‘책임자 답게’ 궁극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품위 있게 살 때 옵니다. 비상한 권위가 아니라 평범하면서 꼭 지녀야 할 하느님의 선물같은 권위입니다. 죽이는 권위가 아니라, 살리는 권위 사랑의 권위입니다.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첫날이자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면서 해마다 9월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했습니다. 특히 교회는 오늘부터 성 프란치스코 축일인 10월4일 까지 ‘피조물의 계절’, ‘지구를 위한 희년’으로 정해 피조물 보호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강우일 주교님의 ‘2020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도 참으로 시의적절한 주옥같은 말씀으로 가득했습니다. 근본적이 전환이 필요하다는 진정성 가득 담긴 절박한 호소였습니다. 한 마디로 피조물 보호에 생태적 회개를 통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참 권위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간되면 시대의 표징같은 예언적 담화를 꼭 정독하시길 권합니다.
수십년전 희랍어 시간, 희랍어 ‘권위(ex-ousia)’에 대한 어원을 통한 명쾌한 설명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권위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란 해설입니다. 외적인 지위에서, 옷에서, 외모에서, 권력에서, 재물에서 오는 참 권위가 아니라 사람됨됨이의 안의 존재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존재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참으로 권위있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생생한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참 권위는 알아 채는 법이며 그 권위 앞에는 저절로 승복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참 권위를 한 눈에 알아 본 더러운 마귀의 영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워는 거룩하신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함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을 때 반영되는 거룩한 권위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명령하시자 더러운 영은 혼비백산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갑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사람들의 즉각적인 경탄의 반응입니다. 모 정당의 이름이 ‘국민의 힘’으로 정해졌다는 뉴스가 생각납니다. 참 권위의 힘은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면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하느님의 힘은 사랑의 힘, 겸손의 힘, 섬김의 힘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입니다. 참으로 ‘국민의 힘’이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는 겸손한 삶이라면 저절로 참 권위를 지닌 정당이 될 것입니다.
참 권위를 지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 어느 자매님께 “자매님은 자매님 고유의 매력을, 아름다움과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드린 격려말이 생각납니다.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제모습, 제색깔, 제향기를 지니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바로 참 권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하느님의 영을 통한 깨달음에 대한 말씀도 참 권위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을,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영적 인간인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와 교만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례 받아 하느님의 영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영적 인간인 우리는 참 권위를 지닌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1독서의 결론같은 말씀이 참 권위의 소재를 밝힙니다.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그리스도와 일치가 깊어질 때 비로소 참 권위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닮의 여정과 함께 가는 참 권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쿄 교황님의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애덕은 박애가 아니라, 매사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것이며 각자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일치되어갈 때 참 권위를 지닌 애덕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페인트칠같은 얼마 못가 들통나는 외적 가짜 권위가 아니라 저절로 안의 하느님으로부터 배어나와 빛을 발하는 참 권위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를 권하는 것입니다. 화장하지 않아도, 곱게 꾸미지 않아도, 성형수술 안해도 내면의 아름다움이 저절로 빛을 발하면서 참 권위를 지니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부터 출판계에서는 얼짱이 아닌 몸짱에 대한, 예쁜 얼굴이나 몸이 아닌 강한 몸을 지향하며 운동하는 여성에 대한 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합니다. 아주 바람직한 좋은 현상입니다. 여기에다 몸뿐 아니라 영적 삶에도 힘을 쏟는 다면 금상첨화의 참 권위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 참 권위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시편145,8-9). 아멘.
내로남불?
남창현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차를 탔습니다. 새 차를 뽑았다며 으쓱하던 친구는 조금씩 조금씩 속도를 올리더니 꽤나 위험하게 난폭운전을 시작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한쪽에 있는 손잡이를 꽉 잡았습니다. ‘좀 천천히 가도 될 것 같은데?’ 하니 ‘빨리 가서 조금이라도 더 쉬는 게 낫지!’ 합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옆 차선의 차가 깜빡이도 없이 갑자기 끼어 들어옵니다. 순간 휘청한 친구는 온갖 욕설을 쏟아부으며 끼어든 차를 향해 들리지도 않을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가 옆에서 보기에 친구의 운전이 그 전까지 몇 배나 더 거칠었습니다. 하지만 운전자인 친구의 마음속에는 한번 끼어든 차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합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나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 맥락과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니 말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지금 매우 급하므로’ 좀 난폭하게 운전해도 돼!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 맥락과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보여진 결과만을 놓고 판단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마귀의 영과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구분하십니다. 당신에게 악을 쓰는 한 인물의 행동과 그가 놓인 상황과 맥락을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놓인 상황, 맥락을, 내가 나를 바라볼 때처럼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들의 이해의 폭은 훨씬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
안타깝게도 여름이 지나 새 학기가 밝았습니다. 여름 행사들이 없었기에 여느 여름보다 한가롭게 지냈을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여전히 바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 평가를 마치고 좋아한 게 엊그제 같은데 바로 오늘, 2학기 수업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지난 학기보다도 2학기를 준비하는 제 마음은 더욱 무겁고 부담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가톨릭 사회교리>라는 수업을 한 과목 더 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르쳐야 할 과목이 더 늘었다는 양적 부담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사회교리>라는 과목명이 제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이들이 있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비참한 이들도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사회적 병폐가 있기도 하고 새로운 시대 안에서 생겨나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사회교리>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예수님의 시선에서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문제는 고학년들의 수업인 만큼 저의 시선과 생각이 사제가 되기 직전의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수업은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업 중 하나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가르치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응당 사회 안에서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제로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연대성의 원리 등 당연한 논리들만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보다 더 사회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양심에 따라서 투신할 수 있는 뜨거운 마음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과도한 욕심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최선은 다 하고 싶으니 커다란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다행히도 오늘의 복음은 제가 앞으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면 될지 그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유다인들의 ‘회당’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와는 다른 장소입니다. 회당은 주로 교육적인 시설물이었고 종교를 첫째가는 교육으로 여겼던 유다인들은 이곳에서 하느님 말씀의 낭독과 그에 대한 해설을 행했습니다. 성전이 예배를 드리고 희생제물을 바쳤던 장소였다면 회당은 그야말로 훈육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다름 아닌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전해주신 이 율법을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를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규율로 여겼고 조금도 어기지 않기 위해 수만 가지 법규를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은 도덕적인 율법에서 시작해서 무한한 규율과 규칙으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말씀에서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마귀를 쫒아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라며 경탄합니다. 이들이 놀라는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이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와 힘”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의 답은 마귀의 영이 하는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고 도망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간단한 말에서 두 가지 예수님의 권위의 원천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기반으로 행동하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을 죄와 약점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당시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던 학자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율법의 글자 자체만을 객관적으로 세분화시켜 가르치던 이들입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도 자비도 결여되어 있으니 당연히 거룩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율법에 얽매이다 보니 인간을 해방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구속하곤 했습니다. 진정으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은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구속하고 있으니 그 말에 권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내버려 둔다고 원망하며 쉽게 등을 돌려버리곤 합니다. 우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돌보아 주시며 당신만의 방법으로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분, 우리의 삶을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임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율법주의에 쉽게 빠져들곤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내 관점에서 해석하고 저것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미워합니다. 또한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다는 이유로 타인을 마음 속으로 단죄하고 알게 모르게 무언의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믿는 생명의 하느님, 구원의 하느님은 종종 잊혀집니다.
오늘 성체를 받아 모시며 우리의 신앙이 참으로 선행과 사랑, 하느님께 나아가는 소신있는 기쁨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써 복음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예수님을 굳건히 믿고 따름으로써 세상 안에 우리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다보니 저 역시 이번 학기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마음을 다 잡게 됩니다. 글자와 교재의 내용에 집착하기 보다는 크나 큰 하느님의 거룩함을 기반으로 모든 인류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열정을 담아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물론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있겠지만 제가 최선을 다 한다면 하느님이 알아서 채워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아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루카 4,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계절은
어김없이
오고갑니다.
가을에는
더 좋아지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이 어둠속에서
더욱 빛나는
주님의 빛을
믿습니다.
어둡고 뒤틀린
우리의
현실 안으로
주님께서
오십니다.
알고 있지만
돌아가지 않고
알고 있지만
믿지 않는
우리들 안으로
직접
들어오십니다.
의심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피조물을
아프게
찌르는 것은
언제나
피조물이듯
피조물을
더럽히는 것 또한
피조물이었습니다.
죄로 얼룩진
우리 삶을
깨끗이 하시는
피조물의
주님이십니다.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근원적인
사랑입니다.
일방적인 사랑
일방적인 믿음은
나가야 할
피조물의 길을
혼돈에 빠뜨립니다.
보호하고
보호받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 시대의
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아는 것이 아닌
아는 것을 올바로
믿고 올바로
실천하는 것이
피조물 보호를
위한 참된
기도일 것입니다.
피조물의
보호자이신
주님께
이 어려움을
기도로
의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