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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9월 18일 (녹)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09.18|조회수32 목록 댓글 0

제1독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1─13,13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라고 한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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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가 사랑의 찬가를 들려준다. 어떠한 은사를 받았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바라며 견디어 낸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배척한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을 장터에 앉아 노는 아이들에 비유하신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당신을 배척하려 든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다면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시기하고 교만하며 이기적일까요? 꼭 그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까지 넘겨준다 하여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어렵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을 잘 짚어 보면,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지만,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을 수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요란한 소리만 낼 뿐입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 갔을 때는 무의미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고 그분을 환히 알게 될 때에는 믿음이 더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전하게 다 이루어진 다음에는 더 이상 희망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믿음과 희망은 천국 문 앞까지 가고, 천국 안에서 온전한 것이 왔을 때까지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언과 신령한 언어도 온전한 것이 오기 전의 기간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선행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한 것이 와서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지는 않을까요? 신령한 언어도 선행도 필요 없는 때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까지 내준 일들은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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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들에게 신뢰를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에 대한 판단과 식별도 그때그때 달라지고 뒤틀립니다. 고백하건대, 대개의 판단과 식별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이기심으로 그 순수성과 진정성이 퇴색해 가고는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한결같았습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하셨다. 그 구원은 모든 이가 화해와 용서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늘 함께 계실 것이다.’라고 요약되는 복음의 가르침은 이제껏 달라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문제는 수많은 인간들의 다양한 해석에서 비롯합니다. 몇몇 해석들은 타락하여 이단이 되었고, 몇몇 해석들은 감히 근접하기 힘든 고도의 수련으로 뻗어 갔습니다. 모든 해석은 어느 정도 제 삶의 가치관과 이해관계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신앙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좋습니다. 어떤 해석이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고유하게 다듬어 온 것이니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 대한 단단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에 앞서 자신이 가꾸어 온 삶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세상의 흐름에 물결치듯 흔들리며 기회주의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는 단순함이 필요한 것이지요.

힘의 논리와 경제 논리 앞에 자기 삶의 가치관마저 포기하는 비굴함이 세상살이의 당연한 이치로 변질되고 신앙을 지키는 것이 교조주의적 계명 몇 가지를 실천하는 것으로 축소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부터 회복해야 할 슬픈 시간을 살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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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무관심한 태도를 통탄하십니다. 기쁜 일을 맞아 피리를 불어도 함께 춤추지 않고, 반대로 슬픔에 겨워 곡을 하여도 동참하지 않는 무관심은 상대방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으로 연결됩니다.

복음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이 단식하니 마귀가 들렸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리시자,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이런 태도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요.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많이 하면 채신머리가 없다 하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너무 권위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지요. 옷도 모처럼 격식에 맞춰 입으면 형식적이라 비난하고, 간소하게 입으면 예의가 없다고 비난합니다. 이처럼 남이 하는 행동은 무엇이건 비난만 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이의 비위를 맞출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이에 호응하는 이도, 비난하는 이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의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오로지 주 하느님의 평가에만 관심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확신입니다. 확신하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확신이 때로 흔들리거나 잘못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우리의 판단이 흐려지지 않도록, 또 어려운 때마다 가장 좋은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느님의 지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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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의 너무나도 유명한 ‘사랑의 찬가’입니다. 이 대목에 대한 뛰어난 해석과 설명을 우리는 자주 들었습니다. 오늘은 사랑에 관한 이 헤아릴 수 없이 심오하고 아름다운 찬가가 본문의 어떤 맥락 속에 나오는지 관심을 가져 보면 좋겠습니다. 

이 단락이 자리한 전체 본문의 주제는 은사의 식별과 사용에서 생기는 어려움과 갈등입니다. 이는 공동체의 일치를 위협하는 매우 현실적이고 위중한 문제입니다. ‘사랑의 찬가’를 통해 바오로 사도가 호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찬가의 바로 앞뒤 구절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더 큰 은사를 구하라고 격려한 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코린 12,31)라고 말하며 사랑에 대해 알려 줍니다. ‘찬가’를 들려준 뒤에는 “사랑을 추구하십시오.”(1코린 14,1) 하며 단호하게 촉구합니다. 이어서 다시 성령의 은사를 구하라고 권유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사랑과 은사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들의 의미가 드러나는 ‘길’이 바로 사랑이며, 은사를 청하기에 앞서 먼저 사랑의 ‘길’을 따르고 걸어가야 합니다. 은사는 인간의 지식을 능가하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러기에 마땅히 청해야 하는 선물이며, 은사를 받는 것은 더없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지식은 이기적인 방식으로 사용되기 마련이며, 하느님에 ‘관한’ 지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는 결국 하느님의 은사와 선물을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합니다. 그 참담한 결과가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코린토 교회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간절한 호소는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그 많은 선물을 과연 얼마나 세상과 교회와 이웃을 위하여 사심 없이 선용하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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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이 대목은 예수님 시대의 동요였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변덕을 아이들의 노래에 빗대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시대 사람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좋으면 관심을 갖고, 싫으면 외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사람 중심이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중심인 듯 행동합니다. 군중이 자기들만 따라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요한에게는 먹지 않는다고 시비를 걸고, 예수님께는 많이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어디에나 있는 위험한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동하십니다. 정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남들이 믿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서 믿는 것입니다. 남이 ‘하라고 해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신앙생활입니다. ‘어쩔 수 없는 신앙’이 아니라 ‘자발적인 믿음’입니다. 떠밀려 가는 운명이 아니라 끌고 가는 운명이지요.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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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수많은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정의만큼 명확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란 참아 주는 것, 기다리는 것, 성내지 않는 것,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는 것……. 내가 과연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알려고 하면 바오로 사도가 내린 이 정의에 자신을 대입하면 쉽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참아 주었고, 기다렸고, 친절하였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었습니다. 그 정도에 따라 우리의 사랑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송두리째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놓으신 주님의 사랑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사랑만이 사랑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정도만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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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하시며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보 좌 신부 때 이 말씀을 묵상하며 주일 학교 중고등부 학생들의 모습과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놀이를 마련해 주어도 그들은 그다지 신이 나는 것 같지 않았고,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주어도 그들은 그다지 진지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를 않네?’

그런데 가만히 복음 안에 머무르면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대변하는 대리자이고, 청소년들은 그러한 저를 따라야 할 우매한 군중이라는 식의 발상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동안 저는 아이들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고, 오히려 그들의 기쁨은 별것 아니며 철없는 수준으로 생각하고 무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무엇에 눈물을 흘리고 심각하게 여기는지, 그들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채, 그저 저의 계획에 잘 따라오라고 강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신부님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신부님은 가슴을 치지 않네요.’

우리는 어떠합니까? 형제들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때 함께 기뻐해 주고, 눈물을 흘리실 때 함께 울어 주고 있는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안 들어주실까요? 많은 이가 들어주신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제 기도는 하나도 안 들어주세요.”

 

부모님의 건강을 기도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안 좋아지신다고 하고, 자녀의 진학을 위해 기도해도 현재 삼수째라고 하십니다. 남편의 승진을 기도했는데 갑작스럽게 퇴직할지 모른다는 말도 들었다고 하십니다. 그 밖에도 기도하면 더 나쁜 상황이 되는 것 같아서 기도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이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정답을 말씀드리면,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100%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우리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게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절대 아닙니다. 자기 뜻이 하느님 뜻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끝까지 매달리며 기도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십니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 ‘하나도 자라지 않았어.’라고 불평합니다. 다음날 나와도, 또 그다음 날 나와도…. 결국 포기하려고 할 즈음 땅 위로 무엇인가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쑥쑥 자라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기도도 이렇습니다. 그래서 멈춰서는 안 되고, 또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계속 밭에 나가야 씨가 자라나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뜻보다는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희망이며 기쁨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 때는 함께 춤춰야 하고, 장터에서 곡을 할 때는 함께 슬퍼해야 놀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 뜻에 맞춰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취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외쳤던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며 반대했고, 구원의 기쁨을 전하는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면서 반대합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보다는 자기 뜻만을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뜻만을 주장한다면,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사랑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 안에서 기쁨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입니다.

 

오늘의 명언: 잡초는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다(랠프 월도 에머슨).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풉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다들 고향을 찾아 떠난 여유로운 시간, 근처 방파제로 고도리 낚시를 갔습니다. 시장표 판매용이 아닌 사이즈가 좀 작은 고등어를 고도리라고 하는데, 나름 손맛이 쏠쏠합니다.

만조 전후로 잘 잡히는데, 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쑥 물고 들어가는데, 도착한 시간이 딱 타이밍이라 정신없이 잡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어린이들을 포함한 대가족이 낚시를 왔는데, 전혀 조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낚시꾼들은 다들 열심히 낚아 올리는데, 꽝 치고 있으니,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슬쩍 바라보니 바늘이며, 미끼며 전혀 아닌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입질 타이밍에도 불구하고 잠깐 낚시를 멈추었습니다. 찌도 달아주고, 바늘도 바꿔주고, 미끼도 잘게 잘라 끼워주었습니다.

즉시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싱싱한 고도리가 번쩍이며 올라오자 아이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드디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아무래도 인간이 지닌 이타적 성향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풀 줄 아는 그런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인간은 자기라는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돈 한 푼 나오지 않는 일이지만 이웃이 당하고 있는 부당한 현실 앞에 기꺼이 발 벗고 나섭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긴박한 상황에 처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 상황에 뛰어듭니다. 이웃이 겪고 있는 깊은 슬픔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가 하면 이웃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동참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 하나는 소통의 단절입니다. 인간 각자가 마치도 고립된 섬과도 같습니다. 같이 살아도 진정으로 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진정한 대화가 아닙니다. 공감(共感)할 줄 안다는 것, 이 시대가 요청하는 참으로 큰 미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능력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2)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냉담함입니다. 무표정입니다.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보려고 생쇼를 다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그저 심드렁한 얼굴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저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똑같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릇된 신앙, 왜곡된 논리에 젖어 허우적거리며 죽음의 길로 빠져들던 율법학자들, 두렵고 경직된 얼굴로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바리사이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당신에 앞서 파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새 출발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자는 마귀 들렸다’며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참수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님이 도래하셨습니다. 이분까지도 ‘먹보요 술꾼’이라며 거부합니다. 십자가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결정적 실수 그 배경에는 경직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뻣뻣한 목덜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편안함, 친절함, 편안함, 넉넉함, 통틀어서 호감이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호감이 지닌 매력은 생명력입니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호감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 매일 이웃들에게 큼직한 선물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며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인기가 떨어진 유명 가수와 가수를 도와주는 매니저의 진한 우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래만 잘하는 가수는 늘 사고를 치고, 매니저는 가수의 뒷수습을 합니다. 강원도 영월의 방송국 진행자가 된 가수는 솔직한 입담으로 지역에서 인기를 얻습니다. 전국 방송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이 승격되었고, 가수에게 새로운 기획사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단 매니저 없이 가수만 영입하겠다고 합니다. 매니저는 20년 넘게 동고동락했지만, 가수의 미래를 위해서 말없이 떠납니다. 가수는 기획사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면서 울먹이며 매니저에게 돌아와 달라고 방송합니다. 방송을 듣던 매니저는 다시 가수에게 돌아오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지지만, 추운 겨울에는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진정한 사랑은 고난과 역경의 순간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본당에 어린이 합창단이 문을 열었습니다. ‘임마누엘 합창단’이 있었는데 팬데믹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주보에 어린이 합창단 모집 공고를 하였고, 19명이 합창단에 가입했습니다. 19명의 맑은 눈망울을 보니, 저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스페인 몬세랏에는 수도원이 있고, 수도원 성당에서 수사님들이 매일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소년 합창단이 성가를 부릅니다. 지난 4월에 수도원을 방문했고, 그때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롭게 문을 연 어린이 합창단은 예전에 사용했던 이름을 다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본당의 날에, 성탄에, 부활에 공연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고운 노래와 깨끗한 마음이 공동체를 따뜻하게 해 줄 것입니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별 대부분은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의 빛을 받아서 빛난다고 합니다. 태양계도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의 빛을 받아서 빛나는 별들이 있습니다. 라디오 스타에서 가수가 빛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매니저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합창단의 고운 노래가 본당 공동체를 환하게 비출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기는 큰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재산을 나누어주고, 목숨까지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사랑이라는 추상명사에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사랑은 비로소 빛을 낸다고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어둠에 빛을 주고, 이런 사랑의 행위가 절망 속에 희망을 드러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지친 이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볼 것은 단식과 옷차림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그의 설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했던 그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에게 볼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겉모습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그분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빌어주시는 자비입니다. 담대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도 깨끗하게 하셨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게 하셨고,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은 어찌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의심이 자꾸만 다른 곳을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의지하는 건 오해와 거짓이라는 손가락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대와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나와
함께하려고


내가
되어주지 않아도
되어요



그대와
함께하려고


그대가
되어드리면
되니까요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어떤 동영상으로 본 것인데 한 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데 계속해서 수십장이 넘게 흰 도화지에 까만색 크레파스를 칠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부모는 걱정이 돼서 정신병원에 아이를 맡기게 되었고, 그 병원에서도 처음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의사가 그 아이가 그린 그림을 다 모아서 맞추어 보았더니 커다란 고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아이가 그린 그림은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큰 그림, ‘빅픽쳐’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한 부분만을 바라보면서 그것에 일희일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보아도 그랬고, 예수님을 보아도 그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보고 인간적인 트집을 잡기에 바빴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 예화 속의 아이처럼 커다란 그림을 그려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봉사를 하면서 인간적인 부족함과 아쉬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느님 안에서 그 모든 것의 의미를 찾으며 함께 해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할 큰 그림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민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동시대를 다음과 같이 비교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피리 불면 춤을 춰야 합니다. 그리고 장례식에서는 울어야 하지요. 하지만 당시 시대의 사람들은 말씀을 들어도 무시하고 그대로 살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금욕적인 생활 했지만, 그것에 대해 마귀가 들렸다고 조롱하였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밥 먹고 술 먹는다고 마귀 들렸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과 정신이 없이 사는 이들입니다. 비판 일색이었고 하느님의 뜻인 사람을 살리는 것에 관심도 없었지요. 정상적인 것에 그들은 동조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정하기전에 우리는 누구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까요. 이 삶은 세상이 주는 것에 맞추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이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지혜의 자녀임을 의심하거나 내가 자녀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당당히 고백해야 합니다.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드러남으로써 하느님께서 영광 받는 것이지요. 지혜는 옳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옳습니다. 하느님의 정신으로 살아가길 바라면서 오늘도 두 손모아 기도합니다.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혼자서 나 자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진정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에 얼마나 도달했을까?’

‘나는 내가 꿈꾸는 그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오늘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전서 13장 4절부터 8절까지의 서간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읽으며 나 자신을 점검해 봅니다.

나는 참고 기다리는지?

나는 친절한지?

나는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은지?

나는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는지?

나는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하는지?

나는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지?

나는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지?

사도 바오로는 마치 우리가 부족하고 나약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인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2절) 네, 우리는 우리가 한 평생 꿈과 이상으로 여기는 그리스도교 덕들을 다 이루지 못했지만, 주 하느님을 뵙는 그 날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채워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꿈을 좇아 거룩한 사람을 향하여, 사도 바오로께서 13장 사랑의 노래를 마무리 하면서 부른 노래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3절)를 되내이며, 우리 사랑을 불태웁시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함승수 신부님

“메시지를 반박할 수 없을 때에는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는 유명한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38가지 기술을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제시한 방법에서 유래된 것인데, 논쟁하는 상대방이 탁월한 언변과 논리정연함을 지닌 사람이라 도저히 이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 인신공격이나 모욕 그리고 무례한 행동으로 공격하라고 한 겁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논쟁에서 ‘진실’을 밝히는데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논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이겼는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을, 그리고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공격하는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드러나지요.

먼저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공격합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광야라는 척박한 땅에서 철저한 극기와 고행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가르친 요한을, 종교 지도자들은 마귀들린 사람, 즉 ‘미친 놈’ 취급한 겁니다. 욕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안위를 생각하지 않는 그의 담대하고 정의로운 모습이 소박한 백성들에게는 따르고 싶은 ‘귀감’이 되었지만,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스스로가 요구하는 수준에 한참 못미쳤던 기득권자들에게는 눈꼴시고 거북하며 자기들 이익에 방해가 되는 ‘눈엣가시’로 여겨졌던 겁니다. 그래서 ‘미친놈’이라는 부정적 프레임을 씌운 것이지요.

한편 예수님은 이렇게 공격합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엄격함을 요구하는 세례자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보다 편안하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백성들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가십니다. ‘먹고 마시는’ 인간 본연의 활동에 함께 하시면서 경쟁에서 도태되어 사회 변두리로 밀려난 작고 약한 이들을 사랑으로 당신 가슴에 품으시지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무시당한 이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함께 밥을 먹고 서로 어울리는 모습 안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게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지내는 이들을 우리가 ‘식구’라고 부르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들을 당신 ‘가족’으로 여기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그분의 소탈하고 자비로운 모습이 기득권자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도전이자 무절제로 여겨집니다. 그들이 율법과 계명의 핵심내용인 ‘사랑’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문자 그 자체에만 천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에 빗대어 비판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자신은 상대방이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듣고 따라주려고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는 자기 말을 따라줄 것을 요구하고, 그러지 않으면 그를 비난하고 원망하며 자기가 잘못된 탓을 모두 그에게 돌리는 미성숙한 모습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맺는 모든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변화되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만 그 관계 안에서 함께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지요. 그건 주님과의 관계, 교회 공동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부분이 생기면, ‘저 신부는 너무 권위적이다’, ‘저 수도자가 하는 말은 너무 어려워서 무슨 뜻인지 못알아듣겠다’, ’저 신자는 고집이 너무 세고 사고방식이 구식이다’… 그런 식으로 ‘메신저’에게서 온갖 트집을 잡고 헐뜯으며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만들려고 들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를 ‘메신저’로 선택하셔서 나를 향한 당신 ‘메시지’를 전하시는거라면 그런 식으로 ‘물타기’해서는 안됩니다. 그 메시지를 제대로 듣지 않고 따르지 않은 무거운 책임은 나 자신이 온전히 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행동의 의미를 모르면 갈팡질팡하며 살게 됩니다. <루카 7, 31-35> 9월 18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살면서 불통의 극치는 치매 걸린 사람과 정신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이런 것은 병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치매도 아니고 정신병에 들지 않은 사람과 불통은 교만과 고집입니다. 흔히 우리는 고집불통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관계 개선이 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살게 됩니다.

오늘 주님은 요한의 절제 생활도, 주님의 열린 생활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말씀 중에 어떤 행위가 참 지혜로운 행동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지혜로운 행위가 옳다는 것은 지혜의 자녀” 하십니다. 어떤 행위가 진, 선, 미인 것은 진, 선, 미를 알고 의식하고 따라 사는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을 모르는 사람이 법관이 되거나 법관이 되어도 법보다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를 우선으로 하는 사람은 올바로 법을 다스리지 못하고 부정부패에 빠져 기차가 철로 위로 달리지 않고 철로 없이 달리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가끔 기도하는 사람에게 그 기도의 의미를 알고 하는지 물어보면 외운 기도문을 의미도 모르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성자 예수님의 구원 역사를 묵상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인데 정해진 기도문을 외우며 생각 없이 입으로만 하고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인 줄 모르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화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우선 만남을 감사하고 내 말만 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알아듣고 말이 이어져야 하는데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자기 뜻만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바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다른 나라에 선교하러 가서 그 나라의 아름다운 관습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미신이다. 잡신을 믿고 섬기는 것이다.” 하며 금하다가 그래도 오늘날 알아듣고 제사를 드리도록 허용한 것은 다행입니다.

제사의 참 의미는 돌아가신 분의 기일이나 새해 시작이나 가을의 오곡, 백곡이 생산되며 추수감사절에 가족이 모여 제사를 드림은 보이지 않아도 살아서 함께 있다고 생각하며 내 존재의 의미와 물려준 땅에서 거두어들인 온갖 먹거리를 먹도록 땅을 가꾸고 준비해 주신 조상에게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에 “산 이와 죽은 이의 통공을 믿으며”처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명절 미사 때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이를 기억하며 주님 안에 일치를 기도합니다.

어제는 조금 늦게 제의 방에 들어가니 미사 지향에 신부님들이 모두 사인해서 더 절실하게 생각나는 모두를 생각하며 명절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모르고 의식이 없으면 어떤 장단에도 움직임이 없지만, 알고 의식하면 모든 것에 모든 이 되어 일치와 통교가 이루어집니다.

주님과 함께 서로 통교가 이루어지도록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내 친구 예수님

     최용감 안젤로 신부님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사람을 먹보라 합니다. 날마다 술에 취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술꾼이라 합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의 앞잡이로 같은 민족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착취하던 사람들이 세리였습니다. 죄인은 말 그대로 죄인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친구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 옛날 구약 시대부터 사람들의 죄악은 많고 많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로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야만 했고, 하느님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바벨탑을 만들어냈습니다. 이후로도 이어지는 수많은 우상숭배….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짓밟는 인간들은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친구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간들 가운데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외아들은 인간이 되셔서(육화, Incarnatio) 친구가 없는, 친구가 없어야 마땅한 이들의 벗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친구가 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변화되어 외로운 이들의 벗이 되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외로운 우리들의 벗이 되어주시기에 ‘외’아들이 아니실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 “무지에 대한 답은 평생 사랑 공부와 실천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금도 생각하며 잘 했다 싶은 평생 좌우명입니다. 여전히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다음 평생 좌우명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詩같은 하루

 詩같이 살자

 비움은 지극히

 고요히 함은 두터이”

 

하느님의 꽃이, 하느님의 시가 하느님의 사랑이자 지혜인 예수님입니다. 꽃이, 시가 상징하는바 아름다움이요 사랑입니다. 꽃같이, 시같이 살아간다 함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비움은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할 때 비옥한 마음의 토양에서 보기 좋게 자라나는 꽃같은 삶, 시같은 삶입니다. 

 

시(詩)같은 인생은 말씀(言)의 사원(寺)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의 인생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사랑이자 지혜가 됩니다. 평생 사랑을 공부하고 실천함이 지혜요 무지에 대한 참 좋은 답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지혜로운 삶에 좋은 지침이 됩니다.

 

“남을 들여다보기는 쉬워도 나를 깨닫기는 어렵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허물을 지적받을 때 기뻐하였다.”<다산>

이런 이들이 사랑과 지혜의 관대한 어른이자 참 선비입니다.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은 ‘슬기로움(智)’이지만, 자신을 아는 것은 ‘현명함(明)’이다.”<도덕경>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얼마전 강론 제목이었지만 오늘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사랑도 평생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지혜로워지고 무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탄식이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왜곡된 사랑, 변질된 사랑, 병든 사랑의 무지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당대의 세대에 대한 깊은 탄식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공감과 배려, 섬세함과 존중이 사라진 무감각하고 무뎌진 무지의 영혼들을 상징합니다. 그대로 왜곡된 사랑, 병든 사랑, 변질된 사랑의 무지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랑과 지혜의 눈이 아니라, 편견으로 고착된 왜곡된 시선의 눈먼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사람이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도 여전히 현존하는 세대들이요 회개가 시급한 이들이요, 우리도 또한 그러합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냅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지혜의 자녀들이요, 두분의 삶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자들 역시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참으로 순수한 사랑을 지닌 우리들이라면 우리 역시 지혜의 자녀들이 됩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참으로 지혜의 자녀들이 되게하는 평생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사랑은 무엇입니까? 바오로 사도가 왜곡된 사랑, 변질된 사랑, 병든 사랑을, 한마디로 무지의 사랑을 치유할 절호의 기회를 줍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사랑은 연인간의 육체적 성적 에로스적 사랑도 아니요, 친구간의 우정같은 필로스적 사랑도 아닌, 하느님을 닮은 일방적 이타적 사랑이요, 인간 모두에 대한 차별이 없는 연민과 존중, 배려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 정의할 때 그런 사랑입니다. 밑빠진 독에 물붓듯  끊임없이 주어지는 일방적 사랑입니다. 

 

끊임없는 아가페 사랑의 동력은 어디서 기인합니까? 필로스 사랑입니다. 예수님 친구와 끊임없이 주고 받는 우정의 사랑이 아가페 사랑의 샘이 됩니다. 제 아무리 많은 능력에 온갖 뛰어난 덕행을 지녔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 생생한 행위로 표현되니 각자 사랑의 현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2.사랑은 친절합니다.

3.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4.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5.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6.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7.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이래서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랑의 여정이요, 우리는 영원한 초보자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날로 사랑이 성장, 성숙하여 주님을 닮아갈 때, 지금은 거울에 비친 어렴풋한 모습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며.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니,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끝까지 계속되지만 으뜸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무한한 창조주 하느님과 마주할 때, 믿음은, 희망은 필요없을 것이니, 우리 존재의 모든 가능한 욕망이 영원히 충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남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마주할 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우리를 창조된 행복으로 채워주는 그 아가페 사랑에 영원히 젖을 것입니다. 

 

이미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맛보는 천상에서의 아가페 사랑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불순한 사랑을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하여, 우리 모두 꽃같은, 시같은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그들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7,32)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장을 보러 갔던 기억이 새삼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어린 날의 장터는 우리 모두에게 아름답고 추억으로,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찬 곳으로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시장에서 펼쳐지는 놀이판은 장터에 구경 나오는 사람들을 신명나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저의 집은 시내 한복판에, 상설시장에서 가까운 곳이라 그런 광경을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랫 장날이 서는 날이며 온갖 새로운 물건들과 몰려든 사람들로 넘쳐났기에 사람 냄새와 삶의 끈적끈적한 질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고 기억됩니다. 세상의 변화만큼 장터 또한 놀랍게 변신했지만, 예전의 향수가 그리울 때는 한 번씩 들러보는 것이 장터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비웃더니,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험담해서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장터에 노는 아이들에 빗대어 질타하고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7,32) 결국 그들의 눈에는 어떤 존재이든 어떤 삶을 살든 상관없이 자기 위주의 관점과 시선에서 판단하고 비난하는 이중적인 편견과 아집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인용한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는 가사는 당대 시대 어린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마치 예전에 그리고 지금도 아이들이 골목에서 고무줄넘기 하면서 불렀던 노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한 장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로 북적대는 공공장소이며, 이 장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상품을 사고파는 데 있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이고, 물건을 사도록 흥미와 시선을 끌기 위해서 큰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곳이라 기도하기 어려운 시끄러운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장터는 상인과 손님 사이에 흥정을 위해 소리에 더 큰 소리로 주고받음을 통해서 각자의 이익, 상인과 고객 사이에 서로 다른 입장에서 요구를 설득시켜야 하는 소란한 자리입니다. 자기의 이익과 주장만을 외쳐대는 장터와 같은 곳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 이기적인 자기중심이 아닌 타인 중심적이고 남을 배려하고 남을 위해 섬기도록 바라시는 하느님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디 손해 보고서 장사하는 분 보셨나요. 사실 안면이 있다고 늘 장사꾼이 하는 표현, 손해 보고 주는 것입니다, 라는 말에 속지 마세요. 장사꾼은 본질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이지 자선 사업가는 아닙니다. 베트남에서 제가 경험한 것은 단골 가게이고 분명 얼굴도 알고 신부라는 사실도 알면서도 외국 사람이라고 가격을 속일 때는 참 마음이 불편하더군요. 제게 별로 큰 액수는 아니기에 말없이 속아줄 수도 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속고 나면 다시는 가지 않는 게 사람이 마음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시장보다 가격표가 붙은 곳을 선호하는 까닭은 흥정하는 게 너무 싫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사지 않을 때, 구경할 때는 시장이 적합한 장소이지만요. 사람 냄새도 맡고...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에서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았다.”(6,32)라는 표현에서 피리와 춤은 잔치 놀이를, 곡과 울음은 장례 놀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이라는 것은 본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잔치에는 술과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수반하지만, 장례에도 술과 음식이 필요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슬픔과 애도 분위기가 우선하기에 절제와 참회의 마음이 필요하겠지요. 이렇게 놀이의 특성과 분위기에 맞게 장례 놀이는 회개와 참회의 세례를 선포했던 금욕주의자 요한에 비유되고 있으며, 잔치 놀이는 혼인 잔치에서 신랑의 역의 맡아 잔치에 초대받은 모든 사람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셨던 예수님을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당대의 어린아이들이 즐겨 부른 동요(?)에 빗대어, 요한의 세례를 거부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외면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을 간접적으로 그들의 태도를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요즘 자주 표현되는 제3의 길을 걸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입지와 권위를 지키기 위한 보신책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한 발상에서 나온 해결책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편리대로!

우리는 매일 수많은 희비가 교차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잔치가 또 다른 편에서는 장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네 인생입니다.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할 때가 있고, 함께할 때가 있으면 떠날 때도 있기 마련인 것이 인생살이잖아요. 이렇게 잔치와 장례가 뒤섞이고 교차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중요한 것은 잔치 놀이든 장례 놀이든 놀이가 벌어질 때마다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그 놀이에 함께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뒹굴면서 매 순간을 만끽하면서 참여하고 호응하며 교류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선뜻 그 놀이에 몰입하지 못하는가를 침묵 가운데서 가끔은 내면의 소리를 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바람직한 장터는 바로 우리 내면의 공간입니다. 이 영적인 장터인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인생살이를 살아가게 되고 그런 만큼 삶은 점진적으로 활기와 활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리라 여겨집니다. 이는 곧 사도 바오로가 사랑의 찬가에서 말하고자 했던 ‘더욱 뛰어난 길’(1코13,31)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능력을, 지식을 가졌다 한들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함께 어울림 속에서 나누는 삶의 신비 곧 사랑의 지혜는 결코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7,35)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혼인놀이와 장례놀이를 들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당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사두가이들, 원로들은 요한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기적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다니지도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하셨다. 이들을 두고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31절) 하신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33-34절). 이런 사람들의 욕구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35절) 지혜의 자녀들이란 의인들을 말한다(집회 4,11 참조). 우리는 참으로 지혜의 자녀들인가? 혹시나 우리 자신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사고판단, 고집스러운 비판의 자세는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진정한 뜻은 모른 채 자기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일에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마르 8,29-33 참조). 그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거부하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 내가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고집스럽게 서 있는 아이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 즉시 따르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이 진정 풍요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 자유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는 한에서 자유롭고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그것은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원의대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고 싶어 하므로,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회개는 이러한 이기적인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하느님의 뜻으로 향하는 데 있다. 회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드러나야 한다.

 

 

 

<‘완고함’>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

주님의 심장을 할퀴어 터져 나오는듯한 이 탄성에는 안타까움을 너머 비탄과 자조감마저 듭니다.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곧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마치 회개에 대한 요한의 외침에도 가슴을 치지 않고,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도 춤추지 않는 ‘완고함’을 드러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 무지’를 넘어,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도 없고 바닥도 없다고 투덜거리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르게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그 뿌리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완고함’입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는 원인은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고 있는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인 것입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이미 아픔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거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흘러내리는 피눈물이 됩니다. 

어쩌면 바로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피눈물을 흘렀을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렸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비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반겨 받아들이는 영접의 마음이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 피리에 춤추게 하소서!

세상 죄악의 곡소리에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픈 이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부활하신 당신과 함께 기쁨을 선포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임과 더불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 32)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디어 진 까닭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해버린 까닭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목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이 헐리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진리와 평화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한가위
연휴의
귀한 시간을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마음을 나누는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결코
볼 수 없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무례한
우리들의
섣부른 판단은
언제나
비생산적인
헐뜯음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함부로
구겨넣을 수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겉모습만 보지
예수님의 마음은
보지 못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까지 사람대접을
하십니다.

사람대접이
복음이며
위로이며
그리움입니다.

엎드려 절망하는
이들의 참된
희망이
되십니다.

삶을 가르쳐주어도
들을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부끄러운
우리들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친구가 되시어
평화를 나누어도
평화를 거부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주어도

우리는
불가능을 믿지
가능을 결코
믿지 않습니다.

가능이 복음이며
열림이 복음이며
고마움이
복음입니다.

소중하신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기쁜 오늘
되십시오.

 자기 삶의 마지막 시간을 알고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계획을 세워 지켜나가며 그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열심히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유골함에 담겨 갑곶성지 봉안당에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안치 전, 그분의 배우자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고인이 생전에 얼마나 열심히 사셨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망하게 암에 굴복해서 주님 곁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기억하시는 배우자인 자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펑펑 우십니다.

“좀 놀다가 가지. 그렇게 힘들게 고생만 하다가 가셨어요.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죽음 앞에서 사람들 모두 후회합니다.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 특히 사랑하지 않았음을 후회합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특히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이라 불리는 이 시간,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아직 살아있을 때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더욱더 중요하게 보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 사랑의 중요성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엄청난 금욕 생활을 하는 세례자 요한을 보고서는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고 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철저하게 거절하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에 맞춰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계획을 제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사랑보다는 미움을, 용서보다는 다툼을, 함께 하기보다는 욕심으로 인해 혼자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의 계획 자체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알 수 있도록, 더욱더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받고 싶은 것을 세상에 주어라. 그것이 결국 당신이 받게 될 것이니까(게리 주커브).

 

이런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 캅(John Cobb), 그리핀(David Griffin)과 같은 신학자들은 신이 다음과 같은 존재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 신이 도덕군자로서의 엄한 심판자이기만 하다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신이 세상의 고통과 비극에 무감각한 절대자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신이 인간을 인형처럼 조종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통제자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4) 신이 부조리한 현실을 옹호하고 묵인하는 존재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5) 신이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성을 가졌다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이런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류 역사상 사랑을 주제로 한 수많은 문학 작품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바오로의 ‘사랑의 찬가’는, 묵상할 때 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천번 만번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마치 천상에 계신 바오로 사도께서 직접 들려주시는 은혜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오랜 인류 역사 안에서 한 문장 한다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사랑을 주제로 노래했습니다. 시나 소설, 연극이나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주된 단골 주제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주제로 한 그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수작이 곧 바오로 사도가 지은 사랑의 찬가입니다.

 

사랑의 찬가는 예수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랑의 계명 ‘서로 사랑하라.’를 구체화시킨 불멸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눈만 뜨면 사랑을 외치지만, 그 정확한 실체, 구체적인 의미도 잘 모르면서 외치고 있는 우리를 위해, 바오로 사도는 아주 친절하고 정확하게 의미를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불멸의 선물, 사랑의 찬가를 선물로 건네십니다. 진실된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는데, 때로 그 정확한 의미도 모르는 우리, 때로 인간적 한계에 부딪쳐 포기하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찬가를 통해‘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라고 격려하십니다.

사랑의 찬가의 핵심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토 12장 4~7절)

 

바오로 사도는 지극히 짧은 문장의 나열을 통해 사랑의 속성을 소개하고 있는데, 유심히 읽다보면 문장들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됩니다. 긍정문(~합니다)과 부정문(~하지 않습니다)으로 분류됩니다. 헤아려보니 긍정문도 있지만, 부정문의 수효가 8개로 더 많습니다.

 

거센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려면 강력한 힘이 필요합니다. 막 태동된 코린토 교회를 바라보며 바오로 사도는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코린토 교우들의 개과천선과 새로운 삶을 위해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연유로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목청 높여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 문화권에 소속되어 있던 코린토는 우상 숭배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하나의 악은 또 다른 악을 불러옵니다. 코린토 사람들의 우상숭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시 전체가 집단적으로 타락했고, 코린토는 문란하고 퇴폐적인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배경 속에 태동된 코린토 교회 교우들을 향해 사랑의 찬가를 집필하셨고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철저히 구별됩니다. 그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고갈되지 않습니다. 영원 불멸의 사랑입니다.

 

코린토 교회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간절한 호소는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진실된 사랑을 얻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다스리고 자제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영원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지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어리석음의 자녀와 지혜의 자녀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는 제가 사제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을 때 읽기 시작해 마칠 때쯤엔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 준 책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들어갔더니 이 책은 거의 금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전에 이불 속에서 랜턴을 비추며 몰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유학을 가보니 로마에서 바티칸 방송국에서 어떤 사제가 이 책을 해설해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금서였지만 지금은 바티칸 방송국에서도 해설해주는 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때 금서였다는 이유로 많은 분이 책 이름만 듣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을 안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좀 지나친 듯 보이나 그런 분들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우리는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좋은 가르침과 나쁜 가르침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열매가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시려는 것과 같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지혜와 좋은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분별력이 없었고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제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행복의 기준이 ‘돈과 여자와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제가 될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났더니 그런 것들은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열매가 지혜의 기준이라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은 것은 구약의 ‘광야’의 삶을 의미합니다. 광야의 삶이란 ‘돈과 여자와 성공’을 떠나는 삶입니다. ‘파라오’를 떠나는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먹고 마신 빵과 포도주는 바로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 마신 천상의 ‘양식과 음료’입니다.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이 없다면 파라오가 제시하는 세속-육신-마귀를 벗어나는 삶은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파라오라는 자아를 떠나 삼구를 죽이는 광야의 삶을 당신이 주시는 살과 피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음이 곧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파라오가 나를 괴롭히는 뱀과 같은 자아임을 깨닫고 그를 떠나 광야로 나오게 하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은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이끄는 모든 것은 지혜를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주님은 그런 여러 도구를 통해 지혜의 자녀를 탄생시키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귀와 눈을 막고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만 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부분적인 기억력을 상실한 두 대비되는 환자가 나옵니다. 이 환자들은 어느 시간 이후의 기억이 모조리 삭제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기억도 1분만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과거의 짧은 기억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은 매우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40대 중반이지만 딱 군대 있을 때까지만 기억합니다. 그러니 쾌활하고 젊었을 때의 삶을 계속 즐기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그때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미사에 참례합니다. 기억이 20대 초반에 머물러있지만, 자기중심이 명확히 잡혀 있습니다. 올리버 색스는 그 사람 안에는 영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은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것을 사람들이 알아채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아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식료품 주인으로 여기며 “어떤 치즈를 드릴까요?”라고 말하고 끊임없는 말을 해 댑니다. 아니면 가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냅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는 잠잠해집니다. 올리버 색스는 이 사람 안에는 영혼이 없는 듯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 다 기억력이 소멸하였지만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삼으니 정체성이 명확하고 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자아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지혜의 자녀이고 한 사람은 어리석음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카라바지오는 천재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지배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싸우기 일쑤였습니다. 이때마다 추기경은 그를 감옥에서 빼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추기경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재능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여자 때문에 싸우다가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추기경은 더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머지 인생을 나폴리와 말타섬에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후회하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골리앗의 머리를 손으로 들고 있는 유명한 그림을 그립니다. 자신 안의 자아인 골리앗을 이제 죽였다는 뜻으로 추기경에게 용서를 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칼에는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는 글을 새겨넣었습니다. 참 행복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아인 골리앗의 머리를 자르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그림을 추기경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죽습니다.

어쨌든 그는 어리석음의 자녀에서 지혜의 자녀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참 지혜는 교만한 자아를 죽이고 겸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행복임을 아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파라오로부터 탈출시켜 광야로 이끌려고 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려 하십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는 모든 것들은 지혜의 자녀가 탄생하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하지만 자아를 키우는 것들은 모두 악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음의 자녀가 아니라 지혜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가 오기 전 1월입니다. 서울에서 오신 신부님과 함께 보스턴에 있는 ‘월든’ 호수엘 갔습니다. 19세기 사상가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2년 동안 세상과 등지며 홀로 살았던 호수입니다. 재능이 있었고, 재산이 있었고, 명성이 있었지만 소로우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살았습니다. 작은 오두막을 지었고, 농사를 지었으며,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2년 동안 호수에서 살면서 기록한 글이 ‘월든’입니다. 자아를 잃어버리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책이었습니다. 도시, 문명, 명예, 권력, 관심이라는 외투를 벗어버리고 순수, 영성, 성찰, 고독, 침묵이라는 옷을 갈아입고 싶은 사람에게 필요한 책이었습니다. 호수에는 소로우의 무덤이 있습니다. 소로우는 호수에서 2년 동안 살았던 이유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인생의 본질적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장례식장으로 연도를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영정 사진과 꽃 장식을 하는데 미국은 고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연도를 마치고 유족들은 고인 옆에서 조문객들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고인은 말이 없지만 언제가 이 자리가 여러분의 자리가 될 거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성수를 드리고 고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라틴어 격언에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의미의 문구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죽음으로써 타인에게 기억이라는 것을 물려주는 존재입니다. 신학생 때였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순교자 찬가’를 불렀습니다.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키고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들도 뜨거운 신앙으로 살아가려는 다짐을 했습니다. 가톨릭성가 28번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도 불렀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을 추구하면서 거짓과 위선 속에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주님만을 믿고서 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본인들의 책임은 다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사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해도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본당의 일은 신자들이 잘 하지 못해서, 교회의 일은 주교님들께서 잘 하지 못해서 안 된다고 합니다. 나중에 보면 본인들은 별로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지혜를 외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불속으로 날아가는 나방처럼, 유혹의 불속으로 들어가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참된 지혜를 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름다운 ‘사랑의 송가’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무엇이 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에게

남을 맞추려하면

남을 변화시켜야 되지요

남에게

나를 맞추려하면

나를 변화시키면 되어요

무엇이 더 부드러운가요

무엇이 더 나은가요

무엇이 더 쉬운가요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쉽게 판단을 내리면서 범하게 되는 실수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대하면서 쉽게 판단을 내리고 때로는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꺼리를 만들곤 합니다. 인간인 우리가 판단을 내릴 때 많은 경우 범하게 되는 실수가 첫째는 결과를 보고 동기까지 추정하는 것입니다. 분명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고 했을 때 어떤 동기로 그랬는지 알지 못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동기를 악하게 추정하며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 기준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모든 판단의 기준은 하느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의견이 절대적 기준이라 생각하고 타인을 판단한다면,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선입니다. 자신도 매번 실수하고 죄를 짓고 용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을 쉽게 판단하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면 사람들이 세례자요한은 마귀가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쉽게 판단을 내리면서 자신들에게 다가온 구원의 기회마저도 날려버렸던 것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적폐들이 하는 짓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과거에 안주한다

사사건건 시비를 한다

현실에 관심이 없다

위선적이다

인정에 매마르다

헐뜯고 비방한다

큰 것을 놓치고 작은 것에 집착한다.

현재와 미래가 없다

제 잘난 멋에 도취되어 있다

흑색선전 가짜뉴스를 양산한다.

남을 골탕먹이고 비하한다

남을 죽여놓고 남 탓한다

죄짓고 반성이 없다

의에 관심이 없다

춤출 때 춤주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1-32)

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말한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루카7,33)

사람의 아들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루카7,3)

그러나 적폐들이 그렇게 호도한다 하여도 걱정할 것 없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7,35)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생활 방식>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수요일>(2020. 9. 16. 수)(루카 7,31-35),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일하시는 방식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예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또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면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어울려서 식사를 하신 일들이 좋은 예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일들에 대해서,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루카 5,30).

그런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어울려서 하신 식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초대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예수님께 이렇게 충고한 형제들(친척들)도 있었습니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요한 7,3-4).”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요한 7,5).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바보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충고가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세속의 방식으로 일하라고 충고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방식으로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바로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루카 7,33-34).”

 

세례자 요한의 ‘삶의 방식’은 그의 ‘회개 선포’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는 말로만 회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도 회개를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는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은 삶으로 회개를 선포한 일인데, 회개하기를 싫어한(거부한) 사람들은 그의 그런 ‘삶의 방식’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라는 말은, “저자는 미쳤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외면하고, 또 그가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과는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을 싫어했고,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고 비난했고, 미쳤다고 비웃었습니다. (“미친 사람의 말이니 들을 필요가 없다.”가 그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상적인 생활 모습’은 세례자 요한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식사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극기고행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예언자가 아니다.”,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죄인이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이 하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극기고행을 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하신 것은 ‘구원의 복음’을 나타내는 생활 방식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기쁜 소식’은 전하는 사람에게도 전해 듣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생활 방식은 바로 그 기쁨을 나타냅니다.)

회개도 싫고 복음도 싫다는 것은 구원받기 싫다는 것이고,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2)”

이 말씀은 회개하는 것도 싫어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하니, 제3의 방법은 없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사람들의 비위에 맞추려고 제3의 방법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입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이 극기고행을 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사람들과 어울렸다면, 그러면서도 회개를 선포했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사람들은 바로 그런 생활 모습을 문제 삼으면서 그의 회개 선포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극기고행을 하면서 찾아오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했다면? 그러면 사람들은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자주 ‘혼인잔치’로 표현하셨는데, 혼인잔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기쁨의 잔치’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선포가 아니라, 사람들의 구원에 필요한 선포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의 생활 방식도, 예수님의 생활 방식도, 사람들의 비위에 맞춘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생활 방식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의 삶을 회개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생활을 자기 입맛대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항상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35).”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또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살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의 편지에서(Epist. 60,1-2. 5: CSEL 3,691-692. 694-695)

나 치프리아노는 고르넬리오 형제께 문안 드립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우리는 귀하께서 신앙을 용맹히 또 영광스럽게 증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귀하께서 보여준 영예로운 신앙 고백의 소식을 큰 기쁨으로 접수하고서 우리 자신마저도 그 공로와 그 영예의 동참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또 한마음 한뜻을 이룬다면, 동료 사제가 칭송받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가 칭송받는 듯 즐거워하지 않을 사제가 있겠습니까? 또는 형제의 기쁨을 보고 함께 기뻐하지 않을 형제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보여 준 용기의 증거 소식을 듣고 또 형제들이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귀하께서 그들의 지도자로 거기 계셨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큰 기쁨과 마음의 용약을 느꼈는지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지도자로서의 귀하의 신앙 고백은 모든 형제들의 신앙 고백으로써 한층 더 찬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귀하께서는 다른 이들을 영광의 길에 앞세움으로써 많은 형제들을 같은 영광에로 인도해 주었으며 또 귀하께서 다른 이들에 앞서 가장 먼저 신앙 고백을 함으로써 온 백성에게도 같은 신앙을 고백할 것을 설득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의 열렬하고도 확고한 신앙과 형제들의 갈림 없는 사랑 가운데 무엇을 칭송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서 온 백성의 지도자인 주교의 용맹이 환히 나타나고 그들 따라가는 신자들의 연대성도 잘 드러났습니다. 한마음 한 목소리가 된 여러분 안에서 로마의 온 교회가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바오로 사도가 극구 칭찬하셨던 여러분의 신앙은 이렇게도 찬란히 빛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용기와 불굴의 기백을 미리 내다보셨고, 여러분이 장차 거둘 공로를 전하셨으며, 부모들을 칭찬하시면서 자녀들을 독려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완전한 화목과 용맹으로 다른 모든 형제들에게도 용기와 일치의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주님은 당신의 섭리로써 시련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우리에게 훈계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배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시련에 대해 필요한 권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상호 사랑의 일이므로 서로 도와주며 모든 백성과 함께 단식과 밤샘과 기도 안에 항구하도록 합시다. 이것들은 우리를 용감히 서 있게 하고 인내하도록 도와주는 천상의 무기들입니다. 이것들은 영신적 방어체이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거룩한 활들입니다.

화목과 영적 사랑 안에서 서로 기억해 주고 서로서로를 위해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며 서로의 사랑으로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하도록 합시다.

 

 

 

인류전체가 따를 판단기준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사람들 생각으로 내리는 평가보다 하늘과 통하는 지혜를 따라야합니다.

사람들 생각이야말로 천양지차라 할까 십인십색 평가 기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늘과 통하고 하느님 자녀들이 따라가는 지혜입니다.

 

세상이 늘 불안한 이유는 이런 예수님 사랑의 지혜가 결핍된 탓입니다.

정당정치 공산주의만 아니라 단체들은 나름 세속적 인간원칙을 씁니다.

인간들의 평가기준은 이득 조작 강압 유행 습관 광고 참 정신없습니다.

 

시대국가 넘어 인류가 따를 판단기준은 예수님의 지혜로운 사랑입니다.

세상의 판단 기준엔 허점 많아 원천적 기준 찾으려는 분들 환영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본질을 보라고 촉구하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루카 7,31)

예수님께서 탄식하듯 물으십니다. 계속 엇박자만 고집하는 장터 아이들의 시끄러운 놀이를 언급하십니다.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나는 음성이지요. 그런데 이천 년 전 세대나 지금 세대나 이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빵을 먹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자"(루카 7,33)

세례자 요한은 광야의 철저한 금욕자로, 또 앞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예언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만의 독특한 양식이라기보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 무수히 족적이 찍힌 수많은 예언자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을 바라보는 종교 기득권층의 눈초리는 곱지 않습니다. 자신들 계보나 교설과 맥을 같이하지 않는다고 보여서일까요? 일부는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와서 세례를 청하기도 했지만, "독사의 자식들"라는 비판 어린 독설까지 들어야 했지요(마태 3,7-12 참조). 어쩌면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요한의 외침이, 자신들이 소유한 공고한 종교 카르텔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34)

이번에는 예수님을 향한 비난입니다. 요한의 금욕을 조롱하던 이들이 이번에는 일반인들과 함께하는 모습에 제동을 겁니다. 군중과 똑같이 먹고 마시며 가난한 이들, 곧 율법과 권력과 자본이 소외시킨 이들 곁에 스스럼없이 머무르시는 예수님이 불편한 겁니다.

아무래도 당시 종교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 수석사제와 원로, 최고의회 의원들은 하느님의 때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은 모양입니다. 진리와 공동선을 위해 지혜를 모으기보다, 사사건건 반대를 위한 반대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내지요. 그래서 장터에서 악다구니를 쓰는 철부지, 고집쟁이 아이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가장 중요한 본질을 밝힙니다.

"사랑이 없으면 ...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사랑은 우리가 구해야 할 "더 큰 은사"이고 우리가 들어서야 할 "더욱 뛰어난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뛰어든 이 신앙생활의 정수라고 할 수 있지요. 각자 하느님에게서 받은 능력과 재물과 지혜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만, 그 중심에 "사랑"이 없으면 그저 자기 영광을 위한 세속 활동일 뿐,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유명한 코린토1서의 '사랑의 찬가'는 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반복해 읽고 듣고 새기는 것만으로 성찰과 감사와 깨달음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말씀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지닌 각자의 부족함 때문에 우리는 사랑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지곤 합니다. 그래도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 그때에는 ...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이는 부족한 사랑을 품은 채, 휘청대고 넘어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사랑의 길을 걷는 이에게 주시는 엄청난 선물입니다. 그리움에 가득차 관상하던 주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지복직관,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아시듯 나도 그분을 알게 되고,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영원한 행복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 본질을 붙잡은 이는 굶거나 먹고 마시거나, 임금의 벗이거나 죄인의 벗이거나,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그닥 중요하지 않습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던 세례자 요한도 사랑이고, 먹보요 술꾼에 세리,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모든 사고와 지향과 의지를 지배하는 사랑이 중요할 뿐이지요.

굳은 마음들은 그 사랑을 못 알아봅니다. 그리고 사랑에 무모히 저항할 것이고요. 안타깝게도 사랑은 애써 외면하는 이에게 가려져 있어,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을 중심에 품은 이가 바로 하느님을 모신 이, 하느님과 하나된 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도 부족하나마 애써, 힘껏 사랑의 길을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마주 뵙고, 그분을 온전히 알게 되어 전율할 그날, 우리는 하느님 얼굴에서 서로를 발견하며 또다시 전율할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 속에서 말씀의 길벗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물이냐 짐이냐? - 하느님이, 기도와 사랑이 답이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물이냐 짐이냐? -하느님이, 기도와 사랑이 답이다-”, 어제 오늘 말씀을 대충 읽어 보고 정했던 강론 제목 입니다. 사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늘 화두로 삼는 물음이며 피정자들과 자주 나누는 내용입니다. 물으면 다들 웃음으로 대답합니다. 사람을 포함하여 세상 모두가 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 입니다. 누구나 간절히 원하는 바는 선물로, 이웃에게 짐이 아닌 선물로 살다 가는 것이겠습니다. 얼마전 읽은 아름다운 글을 나눕니다. 

 

“몇 억 겁 년 동안 몇 생을 거쳐 업인을 쌓고 쌓아야만 이 단 한 번의 생을 향유한다는 것이 아닌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망망한 창해에 눈먼 거북이가 구멍 뚫린 통나무를 얻어 걸리는 것보다 희한한 인연 이라고 한다. 아! 인생은 그 얼마나 아름답기에 이처럼 희한하고 단명한가?”(청송의 <선의 세계> 서론에서).

 

참 짧기에 아름답고도 슬픈 인생입니다. 그러니 한 번뿐의 선물 인생, 아름답게 살아야 함은 우리의 의무이며 만나는 모든 이마다 반갑고 기쁘게 사랑으로 환대해야 할 것입니다. 절대적 환대야 말로 시적詩的인 행위입니다. 

얼마전 방문했던 도반 사제가 다음 주 친구사제와 방문하겠다기에 어떤 친구인가 물었더니 바오로 신부인데 바오로 사도처럼 열정이 넘치는 자기와 ‘결’이 같은 친구라 했습니다. ‘결’이라는 말마디가 참 신비롭고 아름답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물결, 숨결, 머릿결, 나무결 한 번 결이 들어가는 아름다운 말마디를 찾아 보세요. 마침 새벽 인텃넷에서 아름다운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마다 결이 다르고 향기가 있다. 서로의 결과 향기가 뒤섞여 또 다른 결을 만들고 다른 향기를 피어 올리는 게 만남이다. 사람이 걸어 온 길도 그렇다. 비슷한 건 있어도 똑같은 길은 없다. 끊임없는 자기 선택의 반복으로 빚어낸 세상에 하나뿐인 시공간이다. 시시각각 길이 겹치면서 또 다른 길을 내고 누군가는 그 길을 간다.” 

 

역시 결과 향기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축복의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선물로 살다가 선물로 인생마칠 수 있을까요.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기도와 사랑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하느님은 선물자체라는 말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기도할 때, 사랑의 눈이 열릴 때 사람은 물론 세상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알렐루야’ 찬미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선물인생 마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축일은 지내는 3세기 비슷한 시기에 순교한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두 순교성인들 선물 인생을 사신 참 아름다운 우정의 순교성인들이었습니다. 평생 그리스도와 교회를 섬기다가 순교한 분들입니다. 치프리아노 주교가 고르넬리오 친구 교황에게 쓴 편지 한 구절도 감동입니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 중 하나에게 곧 죽을 은총을 주신다면, 우리의 우정은 주님 앞에서도 계속될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닙니다.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짐을 나누며 선물로 살아야 합니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의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의 방역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코로나19 사태로 침체된 현실에 대한 조언도 참 고마웠습니다.

 

선물이냐 짐이냐? 상대적입니다. 선물같은 사람이 짐이 될 수도 있고 짐같은 사람이 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답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게하는 사랑의 기도 하나뿐입니다. 사랑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닮아감이 바로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사랑할 때 늘 선물의 삶이요,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질책을 받는 이들은 바로 선물 인생을 망각한 자들입니다. 누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반응할 줄 모르는 무감각한 사람들입니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서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면 편향적 시각을 드러냅니다. 선물 인생임을 모르는 참으로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냅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참으로 선물인생임을 깨달은 지혜의 자녀들은 관상과 연민의 사랑으로 깨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 모범입니다. 사도의 사랑의 찬가가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풍요로운 선물인생을 만들어 줍니다. 

더 큰 은사가 사랑의 은사요 더욱 뛰어난 길이 사랑의 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오늘 사랑의 찬가는 사랑의 우월성(1-3), 사랑의 행동(4-7), 사랑의 불멸성(8-13)등 세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주목할 바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동사라는 것입니다. 한 번 자신의 사랑을 다음 4절에서 7절까지 구체적 아가페 사랑의 15개 항목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1.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2.사랑은 친절합니다.

3.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4.뽐내지 않습니다.

5.교만하지 않습니다.

6.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7.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8.성을 내지 않고

9.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10.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11.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12.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13.모든 것을 믿으며

14.모든 것을 바라고

15.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과연 15점 만점에 내 사랑 점수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선물이냐 짐이냐?의 잣대는 이런 사랑의 수행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평생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사랑공부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공부해도 사랑에는 초보자라는 자각이 우리를 한없이 겸손하게 하며 더욱 한결같이 하느님께 기도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노력에 매진하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의 선물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알렐루야’ 찬미인생과 ‘아멘’ 감사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아멘.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함승수 신부님

 요즘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주의를 집중하며 잘 들어주는, 즉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젊은 세대에서부터 나이 많은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입맛과 취향에 맞는 것만 골라서 보고 들으려는 태도, 그렇지 않은 것들은 무시하거나 배척해버리는 태도가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은 TV에서 진행하는 토론 프로그램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토론'이란 자신과 생각이나 주장이 다른 패널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들으면서 본인의 생각이 틀렸다면 그 부분은 솔직히 인정하고, 서로의 의견을 잘 조율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최소한의 에티켓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본인이 듣기 거북하면 상대방이 하는 말을 중간에 싹둑 잘라버립니다. 상대방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의도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말 한 마디, 단어 하나를 붙들고 꼬투리를 잡거나, 아예 상대방이 하는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무턱대고 비난만 하기 일쑤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져서 요즘은 토론 프로그램 자체를 잘 안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당신을 대하는 모습을 두고 장터에 앉아 서로를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그 비유의 핵심은 아이들이 자신의 '편'이 아닌 상대방의 진영에 속한 아이들에게 하는 비난의 말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상대방이 아무리 피리를 신명나게 분다한들, 내가 신나지 않는데 어떻게 춤을 출 수 있겠습니까? 또한 상대방이 아무리 구슬프게 곡을 한다한들 내가 그 슬픔에 공감할 수 없는데 어찌 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런 말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과 상황을 배려하지 않고 무조건 내가 원하는대로 따라오기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런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오해와 갈등, 다툼과 폭력이 계속되어 서로에게 큰 상처들을 남기겠지요.  

 

 모두가 행복하게 '함께'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인 '공감'이 꼭 필요합니다. 내가 피리를 부는데 상대방이 춤을 추지 않는다면, 왜 춤을 추지 않느냐고 나무랄 것이 아니라 무슨 안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어봐주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곡을 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울지 않는다면 왜 울어주지 않느냐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우는지 그 이유를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며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다면, 굳이 억지로 강요하지 않아도 그는 나의 기쁨에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며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나의 슬픔에 진심으로 함께 슬퍼하며 울어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원칙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내가 바라는대로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강요하려 하지 말고,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에 공감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분께서 나로 하여금 왜 그런 일들을 겪게 하시는지 그분의 뜻을 충분히 헤아리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만 그분께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반쪽짜리 신앙인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일치'를 이루어 그분과 함께 기뻐하고, 그분과 함께 행복을 느끼는 그분의 진짜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서로 얼마나 신뢰하며 사는가? <루카 7, 31-35> 9월 1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처럼 믿음이 없는 시대는 없을 만큼 서로 신뢰하지 않고 “저 말은 가짜다.” 신문이나 TV의 소식을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고 대학교수가 나와서 시대적 증언을 해도 믿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해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속고만 살았나?” 하고 핀잔을 주며 믿지 못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말을 흔히 합니다. 대통령의 말을 액면 그대로 듣지 않고 해설하면서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라는 말이 있듯이 지혜로운 사람, 진실과 사랑이 있는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주님의 말씀은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가 울지 않는다.” 하시며 무감각, 무감정, 무관심을 한탄하셨습니다. 주님의 진실과 사랑의 말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만 상호 간에 지혜가 인정되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을 갖도록 말하고 지시하는 관리들, 각 사회의 단체 책임자들이 진실과 사랑을 가지고 지혜롭게 지시하고 알려주어야 밑에 사람이 신뢰심 가지고 따르게 됩니다. 일 점이라도 거짓과 자기 욕심에 젖어 지시하면 듣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요사이 사회 지도층의 말에 신뢰심 갖고 듣지 않는 이유는 사회적 분위기에도 있고, 제대로 된 올바른 지식이 없어도 그렇고,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이 불신의 사회 분위기를 정화해서 서로 믿고 진실하게 더 나은 세상을 이 땅에 세우고, 후손에게 살기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후손이 행복하게 살게 하도록 기도하며 지혜로운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아는 유튜브 운영자를 참 진실하다고 느끼고 경청했는데, 그분은 천주교 신자였지만 지금은 성당에 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도 신뢰를 한 이유는 말의 신빙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의 말에 신뢰심이 없어졌습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와 편리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하나가 없는 사람이었네.’ 하루는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지만”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믿음을 가졌다가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이지만” 했으면 그의 솔직한 말에 신뢰심 가지고 계속 들으며 그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고 경청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 “믿음, 희망, 사랑이 있지만, 마지막 남은 것은 사랑입니다.” 하듯이 서로 신뢰하고 말하는 사람은 마음속 깊이 사랑이 있어야 진실이 담긴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며칠 전 청도 양봉하는 집, 제가 영세 준 가정을 찾아갔다가 나는 무심코 그냥 왔는데, 아침 미사 때 “이 석진 영육 간에 건강을 위하여” 그분이 넣은 미사 청원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여간 감사 전화를 하고 이렇게 진실로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감사하며 오늘 하루 행복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깃든 행위가 우리가 서로 신뢰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네 사람의 사제가 꿀 10만 원짜리 하나씩 선물 받고 왔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서로 믿고 바라며 살 수 있습니다.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신뢰심 있는 행복한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고르넬리오 교황은 251년에 교황으로 뽑혀, 로마 박해 시대에 2년 동안의 짧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배교를 선언하였던 신자들을 용서하며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단을 거슬러 교회를 지키다가 유배되어 253년에 순교하셨습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고르넬리오 교황과 같은 시대의 목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그는 늦은 나이에 개종하여 사제품을 받고 훗날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박해 속에서도 고르넬리오 교황을 도와 교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258년에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루카 7,33-34) 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십니다.

사람들은 드러나는 겉모습을 보면서 다른 평가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식 구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속에 드러난 것이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마음 속에 품은 여러 가지 중에 하나이기에 비단 하나만 봐도 열 개를 다 알기란 어려운 형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뻔히 보이면서도 보고 싶어 하지 않고, 자신의 눈에 보이면서도 자신이 보는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은 인식의 과정을 넘어서, 보는 주체의 거부하는 마음이 앞서는가 봅니다.

거부하는 마음, 거절하는 마음, 부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겪었던 무수한 아픔들과 처지가 안쓰럽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부정하고 싶고 모든 사람들이 원망스럽기만 한 마음을 간직하고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 모두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위로받고 치유받아 평안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온전해진 어느 날, 자신들이 거절하고 거부했던 주 예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지혜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누구나 무엇인가 갈망하고, 말하고 싶고, 지향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미 내 안에 있으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과 갈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춤추지 않느냐?’고 ‘왜 울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자신의 내적 갈망도 알지 못하고,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도 가치도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수많은 변화에 적응하느라 피곤한 사람들, 앞만 보고 달리라는 세상의 요청에 충실하지만 가슴이 꽉 막혀 미칠 듯한 이 세대 사람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왜 너는 춤추고 싶은지, 왜 너는 지금 울고 싶은지를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 갈망을 말한다는 건 나를 아는 것이고 나를 표현하는 것이며 나를 안팎으로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나의 갈망과 내가 사는 의미가 분명해질 때,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가 만드는 다름의 의미도 더 선명해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갈망을 마주하고 함께 피리를 불며 함께 곡을 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누는 삶의 지혜를 얻게 되겠죠. 그 지혜로 나아가기 위해 먼저 우리는 ‘나의 갈망을, 나의 마음을 말해야 합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 3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혜는

뜨거운 심장에서

시작된다.

 

올바른 지혜는

친구가 되는

사랑의 실행이다.

 

지혜는 판단의

반대편에 서있다.

 

지혜는 햇살처럼

어우러진다.

 

지혜는 외로움을

기쁨으로

바꾸어준다.

 

지혜는

죄인들의

친구가 된다.

친구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

 

지혜는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과

친구가 된다.

 

목마른

사람이기에

친구가 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참된 지혜는

이 순간을

내 앞에 있는

사람을 가장

빛나게 합니다.

 

지혜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더욱 살맛나게 하며

기쁨으로 변화시킨다.

 

지혜는

사랑이다.

 

지혜는 사랑으로

용서를 이룬다.

 

갚아야 할

사랑이

많음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지혜는

순교처럼

둘이가 아닌

하나가 되는

사랑의 신비이다.

 

하느님 사랑을

결코 잊지않는

지혜의 순간순간이

일상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의 사랑과

기쁨을 지혜가

다시 일으켜

세운다.

 

지혜가

옳았다.

 

지혜가 사람이

되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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