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11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6-50
그때에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라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그가 되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며, 죄인인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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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증언한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셨으며,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마침내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는 사실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자리하신 식탁에 죄인인 한 여자가 다가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어 발랐다. 이를 속으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사이에게 예수님께서는 빚을 탕감받은 이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시며, 많은 죄를 용서받는 곳에 큰 사랑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여인을 용서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어제 독서에서 보았던 것을 오늘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소란한 꽹과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기도와 단식과 자선도 실천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무엇을 받았다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하느님께 드리는 것, 자신의 공로를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리거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실천한 율법과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반면 그의 집으로 예수님을 찾아와 발을 닦아 드린 여자는 선행도 공로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알았기에 많이 사랑하였고, 그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남아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의 죄가 사라지고 나면, 예수님께 보여 드린 그 사랑은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7)라는 말씀이 눈에 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큰 사랑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지 않고,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큰 사랑을 드러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순전히 인간 자신에게서 시작된다면 그 사랑이라는 것도 또 하나의 업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출발점은 하느님이십니다. 먼저 사랑하여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으로 지금의 자신이 되었고 복음을 선포하였으며 신자들이 자신을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았기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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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리사이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죄인이 얼씬거리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집, 죄인을 극도로 꺼리는 바리사이의 식탁에 예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향유를 들고 예수님의 발을 닦는 여인의 눈물은 바리사이와 죄인을 갈라놓는 단단한 벽을 허물어뜨립니다.
루카 복음의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을 비롯한 다른 복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루카 복음의 다른 점은 예수님의 장례가 아닌 죄의 용서에 대한 응답으로서 여인의 모습을 그려 나가는 데 있습니다. 극도로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께 다가서는 여인은 겸손이나 자기 비하 또는 속죄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과 기쁨에 휩싸여 있습니다.
죄는 불안을 가져옵니다. 죄는 고유한 삶을 망가뜨리고 주위의 눈치를 보게 하며, 끝내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짓밟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 삶의 경험이자 고백입니다. 여러분의 죄는 어떠한지요? 어찌하면 용서받고 살아갈까요? 여인의 모습을 다시 한번 묵상합니다. 복음은 여인이 어떤 행동으로 용서받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미 용서받은 모습으로 여인을 등장시킵니다.
오늘 복음은 죄를 짊어지고 사느라 반성과 참회로 주눅 든 수동적 자세를 질타합니다. 반성과 참회가 이미 용서받은 것일 수 있음을, 그 반성과 참회가 감사와 찬미가 될 수 있음을 고백하라고 다그치는 듯합니다. 반성은 주눅 든 자기 비하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설계하려는 희망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죄를 극복하기보다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일에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다만 그분의 자비하심만을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는 일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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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와, 죄를 지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였지만 예의를 갖추지 않았지요. 당시에는 먼 길을 걸어오느라 발이 매우 더러워진 손님의 발에 물을 부어 주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바리사이 시몬은 이런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호기심에 초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반면 예수님의 발을 닦아 준 여인은 행실이 매우 나쁘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군중 틈에서 예수님을 보고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였기에 아끼던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 발에 발라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두 사람의 태도가 대조됩니다.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께 아무런 요구도 없었습니다. 자신은 하느님 앞에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지은 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런 만큼 자신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죄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자신이 지은 죄를 느끼고 참회한다면, 그 어떤 죄도 다 용서받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더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을 낳습니다. 많이 용서받을수록 더 많은 사랑을 베푼다는 점을 다시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과연 무엇인지를 성찰하며, 나의 부족함과 약점을 보완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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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에는 그 어떤 설명이나 해설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그 안에 깊이 머무르며 우리 스스로를 똑똑히 비추어 보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여인처럼 용서받은 이로서 눈물을 흘릴 만큼 깊이 감사하며 주님 가까이에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집주인인 바리사이처럼 속으로 여인과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판단하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바리사이에게서 자신과의 더 큰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잖은’ 바리사이는 예수님에 대한 호감으로 자신의 집에 초대했겠지만, 그의 속내는 아직 그분께 가까이 가려는 갈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깊이 감사할 것도, 가장 낮은 자세에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리고 입을 맞추는 순종의 모습을 보일 의향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렇게 남아 있기 쉬울 것입니다. 큰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는 자신이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애써 예수님께 매달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을 ‘교만’이라고 부른다면 너무 야박할까요? 교만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와 ‘은총’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멀쩡하고 경건해 보이는 삶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은 교만에 물들었다면, 가장 중요한 것, 곧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순간’들을 붙잡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현대의 출중한 그리스도교 작가 가운데 하나인 영국의 루이스는 왜 교만이 신앙의 가장 큰 장애인지를 그의 『순전한 그리스도교』에서 이렇게 명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항상 눈 아래로 사물과 사람을 보며, 그러는 한 그는 자기보다 높이 있는 존재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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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평면적 인물과 입체적 인물의 유형이 있습니다. 평면적 인물이란 이를테면 고대 소설 『흥부전』에서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선한 존재로 묘사되는 흥부나 한결같이 악인으로 묘사되는 놀부 같은 인물을 가리킵니다.
그 반면, 입체적 인물이라고 하면 악한 사람이었다가 선한 사람으로, 아니면 선한 사람이었다가 악한 사람으로 바뀌는 식으로 변화되는 인물입니다. 이를테면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쓴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크루지 영감은 지독한 구두쇠로 사는 이였지만, 죽은 동료들의 영혼의 도움으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보며 너그러운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때 스크루지라는 인물은 평면적 인물이 아니라 입체적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세 사람이 나옵니다. 바리사이, 예수님, 그리고 죄인인 여자입니다. 바리사이는 죄인인 여자를 행실이 나쁜 여자로 완전히 고정시켜 버립니다. 그의 눈에는 죄인인 그 여자가 평면적 인물입니다. 변화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 반면 예수님께 그 여자는 입체적 인물입니다. 행실이 나쁘다는 사실에 고정되지 않으시고 그 여자의 변화에 주목하십니다. 그 여자에 대하여 단선적으로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면을 바라보시는 것이지요.
우 리는 이웃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저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고, 이 사람은 저러저러한 사람이야.’ 하고 고정시켜 버리지는 않습니까? 어느 한 사람을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나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러할 때 하느님 은총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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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주님 뒤쪽 발치에 서서 웁니다. 처음엔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르기까지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를 알기에 주님의 동태를 살핍니다. 여차하면 반격할 태세입니다.
그 여자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기댈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기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죽어 버릴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주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창녀와 세리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갔을 것입니다. 따라가서 먼발치에서라도 그분을 뵙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발치에 엎드려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한을 풀어 주십니다.
그 여인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여인처럼 모든 것을 주님께 걸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음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사랑을 받았음에도 사랑을 실천할 줄 모르고 있지는 않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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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용서의 원인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여인이 ‘죄를 씻는 절차를 밟았기에’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드러내는 행동’을 보였기에 용서받았습니다. 사랑도 속죄 행위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주님께서는 죄 용서의 ‘화두’를 던지셨습니다. 사랑하면 용서받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용서를 베풀면 속죄의 길이 열린다는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보복은 어떤 경우라도 ‘밝은 생각’이 아닙니다. ‘악의 세력’이 마음에 심는 ‘어두운 생각’입니다.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가능한 좋은 생각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선한 생각이 많아지면 악한 생각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용서의 길이 됩니다. 좋은 생각이 많으면 행동은 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운 사람에 대해서는 억지로라도 좋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가 쉬워집니다. 악한 생각을 자꾸 하기에 용서가 어렵습니다. 싫은 사람을 사랑으로 받아 주면, 삶의 ‘업 하나’가 떨어져 나갑니다. 인생을 누르고 있던 ‘짐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사랑과 용서는 신비스러운 속죄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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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예수님과 자리를 함께합니다. 한 사람은 모범적인 바리사이 시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죄인인 여인입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 여인을 만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빚진 사람 두 명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빚을 많이 진 사람과 적게 진 사람이 둘 다 탕감받았다면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시몬은 대답합니다.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그러한 상식은 잘 알면서 어찌하여 영적으로 빚진 여인이 그만큼 감사하는데 못 알아보느냐고 지적하십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엄청난 자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행복을 깨닫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어찌 나에게 그럴 수 있는가? 어찌 나에게 아픔을 주는가? 내게 이렇게 해도 되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준 아픔은 잊어버린 채 상대방이 자신에게 준 고통만을 기억하려 합니다.
시몬은 지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여인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인을 구원한 것은 그의 믿음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서울 신학교에 다닐 때, 사무처장 신부님께서 학교 운동장을 잔디 구장으로 만들 것이니 신학생들 모두 나와서 잔디를 심으라고 하셨습니다. 기뻤습니다. 지금까지 흙으로 된 운동장이라 미끄러져서 많이 다쳤고, 무엇보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잔디 운동장에서 축구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기뻤습니다. 며칠 동안 매일 저녁 식사 후 모든 신학생이 운동장에 나와 잔디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 심고 나서는 잔디 보호를 위해 한동안 운동장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생이 제일 많이 하는 그리고 인기 있는 운동은 축구입니다. 그런데 공을 찰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불만이 많았겠습니까? 결국 그냥 축구하라는 허락과 함께, 꿈에 그리던 잔디 구장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학생들은 다시 활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신학생을 위한 잔디 구장이지, 잔디 구장을 위한 신학생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도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미래에 잘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학업 스트레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정치인의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깨끗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제발 뽑아달라고 했는데, 나중에 각종 비리로 매스컴에 오르내립니다. 성당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갖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누구 때문에 성당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뜻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분명히 사랑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있는 곳에만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바른 죄인인 여자를 보고서는 사랑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잃고 나니,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어 바른 여자는 끝까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놓지 않습니다. 주님께 큰 사랑을 드러낸 여자는 예수님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고 말씀하시지요.
주님을 향한 사랑은 믿음을 통해서 커질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의 명언: 매일 아침 일과를 계획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사람은, 극도로 바쁜 미로 같은 삶 속에서 그를 안내할 한 올의 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획이 서 있지 않고 단순히 우발적으로 시간을 사용하게 된다면, 곧 무질서가 삶을 지배할 것이다(빅터 위고).
이 깊은 상처가 때로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세상에 상처나 흠결, 과오나 흑역사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때로 그 흠결이나 과오가 너무 깊고 커서 걱정합니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내가 과연 주님 나라에 합당하기나 할까?
그런데 요즘 와서 드는 생각,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난 우리 삶 안에서 너무나 깊이 아로새겨져 문신처럼 사라지지 않은 상처가 때로 약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상처는 나의 결핍과 약점을 상기시키기에 나를 거만하지 않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만들고 결국 나를 하느님과의 만남에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랜 세월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온 한 가련한 여인, 상처로 인해 늘 아파하고 갈등하고 한평생 주눅 들어 살아온 한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 너무도 당당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실이 나빴던 여인으로 지칭되는 그 여인은 오랜 방황과 악순환의 세월을 접어보겠다고 그토록 노력했지만 항상 그때뿐이었습니다. 마음뿐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은 어느새 과거의 비참함에로 떨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해왔습니다.
여인의 머릿속에 늘 잠재되어 있던 큰 걱정거리는 이것이었습니다. ‘과연 죽기 전에 내가 변화될 수 있으려나? 죽을 때 까지 계속 이렇게 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토록 불가능해 보이던 여인의 회개는 결국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오랜 고통의 세월을 견뎌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그녀의 쓰라린 상처를 당신 자비로 아물게 하십니다. 결국 여인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인해 지난 세월의 모든 상처를 완전히 치유 받습니다.
자신을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예수님이 너무도 고마웠던 여인은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예수님께 드릴 가장 좋은 선물이 어떤 것인지 찾아봅니다. 향유가 든 옥합이었습니다. 당시 꽤 값나가던 물건이었습니다. 아마도 여인에게 있어 전 재산과 다름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그 향유를 가져온 여인은 회개의 표시로 예수님 발치에 서서 울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회개가 얼마나 절실했으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다 적셨습니다. 그 눈물을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냅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마음은 지상 최고의 봉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봉사는 더이상 극진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사랑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었으며 용감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이렇게 행동 양식이 달라집니다.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위주로, 이타적으로 변화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됩니다.
오늘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된 여인을 바라보면서 저 역시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봅니다. 우리 역시 누구나 여인 못지않은 ‘변화와 새 출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참해 보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토록 비참한 국면을 결정적으로 반전시킬 전환기가 찾아오리라고 확신하면서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매일 망가지고 깨져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다시 새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기뻐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많이 용서받아서 많이 사랑한다면, 많이 사랑받으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사이는 한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뿌리고 머리로 닦는 등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덜 탕감받은 사람보다 탕감해준 사람을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법칙대로라면 죄를 많이 지어서 더 많은 죄를 탕감받아야만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면에서 특별한 죄를 짓지 않은 바리사이인 시몬은 억울합니다. 사실 모태 신앙인이어서 큰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기가 그리 어려운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사랑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많이 사랑받으려면 많이 용서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이 용서받지 못하면 많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사회복지법인 들꽃마을 창설자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는데 헌신했던 최영배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들꽃마을 후원회 전담)가 2024년 5월 20일 병환으로 선종하셨습니다. 최 신부는 생전 ‘부랑인의 대부’, ‘장애인의 벗’으로 불렸고 40년 가까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리스도의 사명을 몸소 실천했던 ‘천사 같은 사제’였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청소년들과 장애인들과 범죄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마음이 커야 합니다.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을 참아낼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신부님께 어떤 자매님이 찾아왔습니다. 천사처럼 사는 분이라 성당에서도 천사란 별명을 지닌 분이신데, 요즘에 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10년 전 자기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적이 있는데 그것을 떼어먹고 미국으로 도망쳤던 사람을 10년 만에 길가에서 보고는 온몸이 마비되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죽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자신은 천사라 다 용서하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치니 그런 나쁜 마음이 생겨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신자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사람 모든 마음에 악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에 가라앉아 있는 오물과 같아서 그 물병이 쓰러지기만 하면 병 안의 모든 물을 더럽힙니다. 자매님이 천사로 불렸던 것은 지금까지 그 오물이 가라앉아 있기만 했을 뿐입니다.”
또 어느 날 한 남자분이 외도하다가 들켜서 간통죄로 6개월을 복역하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용서해주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밭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데 천사처럼 아름답게 꾸민 자매가 잠깐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고 내려오다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을 보고는 얼굴이 마귀처럼 변하여 욕을 마구 퍼부었습니다. 자기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서 손에 물 한 번 묻혀보지 않았는데 이런 창피한 고통을 준다고 빨리 이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교사였는데 어떻게 교사 입에서 그런 말과 표정이 나오는지 모르겠고, 남편은 기가 죽어서 계속 무릎을 꿇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눈에는 그 자매가 마귀처럼 보였고 형제가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받아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내가 용서받지 못했다면 용서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부님이 신학생 때 직접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당신도 신학교에 늦게 들어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도 도와주는 천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기도 중 가슴 속에서 수많은 구더기가 돌아다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들이 당신 안에 잠재되어있던 죄들이었음을 알고는 5년 동안 밤마다 방에서 울었습니다. 5년이 지난 뒤에야 그것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몸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서품을 받고 첫 미사 때 바로 교도소로 달려가셨습니다. 남자 4백 명, 여자 2백 명이 넘는 복역자들에게 자신도 똑같은 죄인인데 자신은 들키지만 않았을 뿐, 그래서 천사처럼 제의를 입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들켜서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차이밖에는 없는데, 이렇게 고생하고 계신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사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미사는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고 모든 분이 신부님과 함께 울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교만, 성욕, 욕심이라는 세 가지 죄를 누구나 다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는 그것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고 누구는 터뜨릴 뿐이지, 같은 죄를 지닌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기 위해 용서받읍시다. 나의 죄를 볼 수 있는 눈을 주님께 청합시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저도 제가 바리사이였지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한 마디로 무너졌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한순간이라도 감사하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죄입니다.
자녀를 부모만큼 용서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부모처럼 사랑받기 위해 모든 이를 자녀처럼 용서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8월 24일에 성가대에서 ‘한 여름 밤의 작은 음악회’를 준비했습니다. 합창곡으로 ‘바람의 노래와 다시 살아나신 주’를 준비하였고, 9명의 단원이 독창을 준비하였습니다. 합창이 멋진 화음과 넘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면, 독창은 내면의 깊이와 영혼의 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악을 전공한 지휘자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잘 따르는 단원들이 만들어낸 ‘한 여름 밤의 작은 음악회’였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9개의 행성이 빛을 내듯이, 지휘자를 중심으로 9명의 단원이 위로와 용기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감사와 찬양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그날에 ‘임마누엘 어린이 합창단’이 문을 열었습니다. 19명의 어린이가 고운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아모르 성가대가 현재의 빛이라면, 임마누엘 어린이 합창단은 미래의 빛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가대가 아름다운 노래로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면 그것 또한 복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복음의 뜻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가져오는 ‘군인’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승리한 전쟁으로 평화가 지켜지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우리들 개인의 삶에도 복음이 있습니다. 냉랭하던 여인이 마침내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마음 졸이던 남자에게 복음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아이의 울음도 엄마에게는 복음입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다가온 제대의 날은 복음입니다. 서류 미비자에게 마침내 주어지는 그린카드는 복음입니다.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마침내 눈을 뜨고 깨어난 환자의 미소는 가족들에게 복음입니다. 제게도 복음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벽보에 쓰여 있던 저의 이름이 복음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합격했음을 알리는 이름이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언제나 감사하고, 늘 기뻐하는 사람에게는 매일매일이 복음일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3가지 의미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때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바오로 사도가 선포한 복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우리를 행복에로 이끄는 것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것, 힘들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것, 세상을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참된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초대하시는 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여자를 보아라.”(루카 7,44)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초대한 이와
초대받은 이들과
한 식탁에
초대받으신 분이
계십니다
초대한 이와
초대받은 이들의
눈길을 피해
초대받으신 분의 뒤쪽에
초대받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초대한 이의
매서운 눈초리와
초대받은 이들의
서늘하고 무덤덤한 눈길에
아랑곳없이
아무에게도
초대받을 수 없는
스스로를 탓하지 않고
초대한 이와
초대받은 이들과
한데 어울리시는 듯
홀로 계시는
초대받으신 분과
오롯이 함께하려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는
초대받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초대한 이는
초대받으신 분에 가린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초대하지 않은 이가
거슬립니다
초대한 이는
초대하지 않은 이 앞의
따뜻하고 든든한 울타리 같은
초대받으신 분이
못마땅합니다
초대받으신 분은
당신 앞에서
당신을 보면서도
결코 당신을 보지 못하는
초대한 이에게
안타까운 눈길을 보네십니다
초대받으신 분은
당신 뒤에서
당신을 보지 못하면서도
참으로 당신을 보고 있는
초대받지 못한 이에게
오롯한 마음을 건네십니다
초대받으신 분은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
초대받지 못한 이를
당신의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당신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초대받으신 분은
당신이 그러하시듯
초대받지 못한 이를
품으라고
당신을 초대한 이를
초대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십시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고, 그곳에서 식사를 하실 때 죄 많은 여자가 다가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는 이 모습을 보고 아주 못 마땅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이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그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 받았기 때문에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죄 많은 여인과 바리사이의 모습이 아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은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다가왔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입을 맞추며 향유를 발라드렸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여인의 모습을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러나 반면에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긴 하였지만 예수님을 대하면서 겸손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교만하게 예수님을 판단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모습 중의 하나는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주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회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도 주님을 만났고, 죄 많은 여인도 주님을 만났지만 결국 구원으로 나아간 사람은 죄 많은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같은 교만한 모습으로 구원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죄 많은 여인의 회개의 모습처럼 주님 앞에 겸손되이 회개하며 믿음 안에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고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죄인인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형유를 바랐습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는 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높은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을 시험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죄인인 여인이 들어와 한 행위를 예수님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여인은 죄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인은 창녀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어떤 연유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이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알게 되었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격멸했던 죄인임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서 자신의 죄를 하느님 앞에서 용서받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바리사이의 집으로 갔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보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먼저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그녀의 믿음이 용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 앞에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죄인이기에 단죄하는 분이 아닙니다. 죄인이지만 용기를 갖고 자신에게 오는 이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짓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여러분!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은 모두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여기에서 말씀하신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용서받았고 구원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구원의 길로 들어셨습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또 죄를 짓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를 지었다 해서 멈출 것이 아니라 속죄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치에 다시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죄를 이었다 해서 자신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을 예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인 신앙인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누구든지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며, 많게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합니다.” (7,47)
손님을 초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손님을 초대할 때는 그 나름대로 초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초대한 손님에 대한 예의와 환대의 마음과 함께 정성이 담긴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초대받은 손님도 그 집에 머물면서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지 준비한 음식이 풍성하고 화려하지 않더라도 초대한 분의 마음이 담긴 정갈한 음식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의 무대는 바로 바리사이 시몬의 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엔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의 초대 이유가 드러나 있지 않았으며, 초대한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관습, 예의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즉, 주인은 손님을 마중하여 어깨에 손을 얹고 평화를 기원하는 입맞춤을 하고, 길을 걸어오면서 먼지로 더러워진 발에 물을 부어 씻겨주어야 하며, 약간의 향료를 분향하든가 향유 한 방울을 손님의 머리 위에 부어 발라주어야 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몬이 예수님을 손님으로 초대한 의도란, 단지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함으로써 타인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돌연히 나타난 죄인인 여자, 행실이 나쁜 죄 많은 여자가 시몬의 집에 들어와서 시몬이 미쳐 행하지 않은 역할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것을 본 시몬은 당황스럽고 황당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불편한 심기가 표출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이미 간파한 것처럼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도 그런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은, 겉으론 예수님께 대한 호의를 가진 듯 보였지만, 내심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가졌던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의 숨은 의도가 드러난 것은 많은 사람, 남정네들만이 모인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사람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죄 많은 여인의 등장과 그녀의 행위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부끄러움 내지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아니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오직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7,38)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 있는 어떤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은 행동을 그녀는 애정과 감사와 존경의 표시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녀가 이전에 예수님에게서 어떤 은혜를 입었고, 어떤 치유를 받았는지, 또 어떤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아니면 그녀가 이런 행위를 통해서 어떤 죄를 용서받고자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닦아드리고 향유를 부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 여자는 참으로 대단히 위험스럽고 파격적인 행동을 감행한 것입니다. 참으로 이 여인의 돌발적인 행동을 보면서 가장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던 사람은 아마도 집주인인 시몬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집 주인인 시몬의 마음은 결코 편할 리가 없었을 것이며 불편한 심사로 좌불안석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그때 시몬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하고 속으로 말하였다.”(7,39) 얼마나 미묘한 표현입니까? 시몬의 내심을 꿰뚫어 보듯이 그가 자신에게 향한 심정을 넋두리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죄 많은 여인이 눈물로 통회하고, 오직 주님의 자비로운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기며 다만 낮아지고 비워버린 마음만을 보고서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만이 아니라 투정하는 큰아들을 용서하시고 마음을 달래주신 것처럼, 시몬의 불편한 마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시몬을 꾸짖거나 야단을 치시기보다 에둘러 채무자와 채권자의 비유(7,41~42)를 들려주시고 세세하게 그와 그녀의 당신에 대한 상반된 행위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인에 대한 예우이며 배려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여전히 예수님과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그 자신 스스로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지 않은 선한 사람이다, 라고 자부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입으로는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지만, 마음은 전혀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가 아쉽지 않았습니다.
그에 반해 그 여인이 예수님께 한 행위는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알아보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저는 믿기에, 그 여자의 사랑어린 행위를 예수님도 아무 망설임 없이 기꺼이 사랑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응답으로 예수님은 그녀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7,48)라고 위로하십니다. 사실 이 지상에서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분명 하느님께 속함을 바리사이들도 알기에, 그 여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7,49)라고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내심으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7,50)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누구든지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며, 많게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합니다.”(7,47)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입증되었으며, 우리 역시 그 여인처럼 주님으로부터 많은 죄를 용서받았으니 큰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음에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며, 많게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합니다.” (7,47)
<아직도 향유를 나를 치장하기 위해 쓰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 때 있었던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 하나가 있었는데, ~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루카 7,37-38)
이 자리에서 ‘죄 많은 여인’이 영광을 입습니다.
죄 많은 그녀는 감히 예수님의 앞쪽에 나서지도 못하고 뒤쪽 발치에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셨습니다.
자신의 머리 위에 간직한 가장 고귀한 머리카락으로 땅에 붙이고 있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 발에 당신 입을 맞추고 그 발에 자신의 전부를 쪼개어 부수고 깨뜨려 그 발에 붓고 발라드렸습니다.
하여, 그 옥함의 사랑의 향기는 온 집안 온 고을로 퍼져나갔습니다.
교부들은 이 ‘죄 많은 여인’을 교회에 비유합니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교회 말고는 누구도 그런 향유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죄인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교회가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루가복음 해설)
이러한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의 아름다움은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선언으로 그 향기를 뿜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안에는 ‘죄 많은 여인’(교회)이 부은 사랑의 향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나는 왜 공동체에 파고든 그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내게 사랑이 없어 사랑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까닭이 아닐까요?
사실 오늘도 내 형제들은 예수님을 섬기며 발을 닦아드리느라 여념이 없는데도, 그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 것은 결코 닦아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그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향유를 나를 치장하기 위해 쓰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요?
값비싼 것을 낭비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물질에 애착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사실 오늘도 ‘죄 많은 여인’인 교회는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사랑이 쏟는데, 아직 내가 그 사랑을 보지 못함은 아직도 구린내를 담고 있는 나를 깨부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감추어 둔 채, 다 부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결국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온 집안 온 공동체를 사랑의 향유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온 집안에 가득 퍼진 이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종일토록 취할 일입니다.
내내토록 찬미할 일입니다.
그 향기 온 몸에 묻혀, 바다소라처럼 그 향 되어 날릴 일입니다.
오늘 하루 이 그리스도의 향기에 흠뻑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향기가 되어 세상에 뿜으시길 바랍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의 불순한 입이 당신의 발에 입 맞추고 거룩해지게 하소서!
저 자신을 깨뜨려 형제들의 발에 입 맞추는 사랑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주님!
제 영혼의 막힌 코를 뚫으소서!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듯 제 온몸에 쏟아지는 숨 가쁜 당신 사랑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저를 부수어 진한 향기의 피가 흐르게 하고 부서질수록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온 집안에 베인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를 내내토록 찬미하게 하소서.
많이 용서 받았기에, 많이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우스갯소리라고 할까 아니면 현실적인 이야기라 할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미국 투자이민은 선착순이 아니라 투자 액수 순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되려면 어느 정도의 노력으로 가능할까? 우리가 공부할 때는 사당오락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네 시간 자면 대학에 합격하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죄를 용서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이 말씀을 거꾸로 적용하면, 적게 사랑하는 이는 적게 용서받는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과 양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감나무 아래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몇 시간 어느 정도뿐만 아니라, 우리 각각의 사정도 헤아리시겠죠. 장애자인지, 몇 명을 부양하는지, 어느 정도의 형편인지... 등등. 스스로 헤아려 봅시다. 나는 지금 주님과 교회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얼마나 스스로를 봉헌하고 투신하며 희생하고 희사하고 있는지? 나는 지금 어느 정도 어느 단계 어느 수준의 구원 과정에 있는지?
죄를 짖은 것 보다 죄를 뉘우치지 앓는 것 문제다.<루카 7/36-50>9/19.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죄는 인류의 시작부터 따라오는 일이며 “잘못은 인간의 일이다.” 하는 말처럼 성이도 하루에 일급 번 죄를 짓은 다 란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가 되를 짖고 벌벋는 것을 보면서 나는 죄없다 하면서 사는 사람은 죄짖고도 뉘우침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늠하다 사람들 앞에서 돌로 주기이여야 한다는 사람들이 “죄없는 사람 이 여인을 돌로 처라 하니 나이 많은 사람부터 그 자리를 도망갔다고 합니다.
거룩하시고 진선미의 근원이신 하느님 거스르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는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오늘 죄인의 참회의 행위는 체면불구하고 물질적 손해도 마다하지 않고 주님 발 치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모습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주님을 시험하려 하는 바리사이들 처럼 우리도 죄인이면서 자기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다고 생각하고 죄인과 함께 하는 주님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오늘 한 마디 하시며 빛을 더 많이 진 사람이 당감 받은 말씀으로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 말씀 거스리고 용서 받고 주님의 사랑을 약속받은 성은 온 인류가 주님 세상 오심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저는 되인이 라서 병자가 병원 의사가 필요 하듯이 교회와 주님이 팔요한 사람입니다.
보통 살이 죄인도 법정에서 자기 죄를 부인하다가 양심의 주인이신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게 되면 자기 죄를 고백하고 죄를 시인합니다. 전에 대구의 배자못 살인 사건이 죄인이 잡혀서 2년동안 죄를 부인하다가 신앙를 가지고 고백함으로 자기 사형 당하였지만 사형장에서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 알고 죽은 것 행복하다고 하며 형장의 이슬로 살아졌습니다.
우리는 죄하면 죄를 범한 사람이지만 죄를 범하지 않아도 큰죄인 될 수 있습니다. 행하지 않아도 즉 자기의무를 다하지 않아서 범란 죄는 배가고파서 훔치는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나누지 않아서 범한 죄가 더 큽니다. 나눔이 없어 가난한 사람이 죄를 짓고 벌 받게 한 죄입니다.
주님은 잃은 양을 찾으려 오셨다고 하시며 찾아서 어개에 메고 기뻐하시는 목자이십니다. 병자가 병원을 찾듯이 죄인은 주님 찾아 뉘우치고 용서를 창하는 겸손과 은유함을 가져야 평화를 얻고 기쁘게 살게 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편안히 가거라.“ 하는 소리를 듣고 비록 죄인이지만 편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용서의 양’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공정하고 자비로운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푸심에 있어 차별을 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 모두에게 차고 넘칠 정도로 풍성한 은총과 사랑이 주어지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떤 사람은 그 용서를 뼈저리게 체험한 후 자기 부족함과 잘못을 깨닫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는데 비해, 다른 사람은 ‘난 잘못한 거 없어’라고 완강하게 버티며 자기에게 티끌만큼이라도 잘못한 이들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일에 혈안이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느낀 후 자기도 이웃에게 기꺼이 기쁘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랑의 기쁨을 두 배로 누리는 사람이 되는데 비해, 또 다른 사람은 자기는 늘 사랑받지 못한다고 여기며 다른 이로부터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으려 하고, 사랑을 눈에 보이는 모습을 확인하려고 들지요. 바다 한가운데에서 탈수증세로 죽어가는 조난자처럼, 하느님 사랑 한가운데에서 애정결핍으로 죽어가는 겁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왜 하느님으로부터 똑같이 차고 넘칠 정도로 풍성한 용서와 사랑을 받는데도 그것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과 전혀 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회개의 차이’로 설명하십니다. 빗물이 온 세상에 똑같이 내려도 각자가 들고 있는 물통의 크기에 따라 그 빗물을 담을 수 있는 양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느님 사랑과 은총이 모두에게 풍성히 내려도 각자가 준비한 마음그릇의 크기에 따라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양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 마음그릇의 크기를 결정하는 요인이 바로 ‘회개’, 즉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완전히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의 방향이 하느님을 향해 완전히 돌아섰음을 눈에 보이는 표징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녀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그동안 살면서 저질러 온 수많은 죄들을 구구절절 나열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진정한 참회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리며, 자기가 준비한 값비싼 향유를 그분 발에 발라드렸을 뿐이지요. 당시 여인이 외간남자들 앞에서 자기 머리칼을 풀어 헤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숨김 없이 드러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분 앞에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 겁니다. 또한 값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발라드린 것은 그녀가 죄의 용서에 따르는 보속을 실천했다는 뜻입니다.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여인 신분에, 자기의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수백 만원 짜리 향유를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사용한다는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해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루려고만 했던 다른 이들과 달리, 먼길에 지치신 예수님이,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의 홀대에 발조차 제대로 씻지 못하신 그분이 무엇을 바라실지를 곰곰이 생각하며, 그분께서 원하실 일, 그분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적극적으로 찾고 실행했습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두고 예수님은 더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그토록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라며 칭찬하시지요.
그런데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의 실천이라는 보속을 먼저 실행해야만, 그 대가로 용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을 실천한 만큼만 제한적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분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내 마음 속에 있던 욕심과 집착, 고집과 편견이 말끔하게 비워져 내 마음 그릇이 하느님 은총과 사랑을 풍성히 담을 준비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은총과 사랑을 충만히 누려본 사람은 다음 번에 더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어 그의 마음그릇에 그만큼 더 넉넉한 공간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가진 자가 더 받아 넉넉해지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한가위
연휴의
귀한 시간을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마음을 나누는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결코
볼 수 없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무례한
우리들의
섣부른 판단은
언제나
비생산적인
헐뜯음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함부로
구겨넣을 수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겉모습만 보지
예수님의 마음은
보지 못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까지 사람대접을
하십니다.
사람대접이
복음이며
위로이며
그리움입니다.
엎드려 절망하는
이들의 참된
희망이
되십니다.
삶을 가르쳐주어도
들을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부끄러운
우리들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친구가 되시어
평화를 나누어도
평화를 거부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주어도
우리는
불가능을 믿지
가능을 결코
믿지 않습니다.
가능이 복음이며
열림이 복음이며
고마움이
복음입니다.
소중하신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기쁜 오늘
되십시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한 뒤, 77세에 은퇴하여 조용한 삶을 보내고 있었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은퇴 후의 삶은 무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술을 10주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81세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샤갈이라 불리는 ‘해리 리버만’입니다. 그는 101세에 22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10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80세가 넘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지요.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않고 있다가, 2~30년을 지나고 나서는 어떨까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음에 너무 억울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지 못할 장애를 찾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사람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주어졌을 때가 아닌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성공을 위해 끝까지 시도하는 용감한 사람의 몫입니다.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죄 많은 여인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사람들 앞에 나서기 힘들었던 여인이었습니다. 특히 자신을 경멸하는 바리사이의 집까지도 찾아갔습니다. 주님만이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용서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발에 향유를 부어 바를 수 있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께서 예언자이심을 알아보지만 바리사이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여인은 믿는 사람이지만 바리사이는 믿는 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서 확실하게 죄를 용서받지만, 바리사이 시몬은 여인으로 말미암아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것은 바리사이 시몬이 아니라 여인입니다. 시몬은 그분을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발에 기름을 부어 바른 여인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당신께서 마지막 예언자, 곧 종말론적 예언자임을 시몬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메시아임을 알지 못한 시몬이나 다른 바리사이들과 달리, 큰 빚을 탕감받은 여인은 큰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더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갔기에 가능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으니 이왕이면 사랑하는 일에 도전하는 게 낫다(짐 캐리).
1965/1-∞
1965년부터 2011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무엇인가를 했던 화가가 있습니다. 로만 오팔카라는 폴란드 화가로 ‘1965/1-∞’라는 그의 대표작이자 유일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1965년부터 검은 바탕의 캔버스에 흰색 물감으로 1부터 차례대로 숫자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에 1,000,000을 찍었고, 그 후부터는 캔버스 하나를 다 채우고 나면 그다음 캔버스에는 바탕색에 흰색을 1%씩 첨가해 칠한 뒤 그 위에 또 끊임없이 숫자를 이어 써나갔습니다. 흰색이 1%씩 더해진 검은 바탕의 캔버스가 언젠가 흰 바탕이 되고 그 위에 흰 물감으로 보이지 않는 숫자를 그리려던 것이 오팔카의 계획이었습니다. 그가 젊은 날 세웠던 목표 숫자는 7,777,777이었고, 마지막으로 쓴 숫자는 5,607,249였습니다.
수십 년간 같은 작업을 해나간 그의 작품을 통해 영원하지 않은 인간이 영원한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하게 해줍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며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과 가장 가까운 단어는 무엇일까요? 이 단어를 넘지 못하면 사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감사’라 생각합니다. 더 많이 감사할수록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 중 누가 더 탕감해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더 많이 탕감받아 더 감사하니까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가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 지금까지 저를 극도의 교만에서 구해주고 있으니 분명 주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단 한 순간도 주님께 감사하지 못하면 그것 자체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죄구나!’였습니다.
부모에게 무언가 잘못을 해서 죄가 아니라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면 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주님께 무엇을 잘못해서 죄가 아니라 받은 은혜를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죄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끊임없이 묵상하여 매 순간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 자신이 더 해주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실이 바르지 않은 여자가 향유를 깨뜨려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는 것을 눈꼴사나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를 깨우치십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께 무언가 더 해주고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고 감사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 시몬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자신의 초대에 응답해 준 것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바로 일어나기는 힘이 듭니다.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사하려고 노력해야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주는 여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바리사이가 세리와 창녀, 죄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바로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찾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감사를 찾을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상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큰 반감을 갖습니다.
영화 ‘똥파리’(2008)는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잔인한 한 깡패와 한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가족이 되어야 했고 그 가족이 원수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둘은 서로 아는 것이 없지만 그저 눈물만 흘립니다. 자신은 바람피우면서도 여동생과 어머니를 죽게 만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병원으로 업고 뛰어야 하는 남자 주인공, 죽은 어머니 대신 아버지에게 잘해주려 하는데 오히려 어머니를 죽인 사람으로 오해받고 박해받는 여주인공. 그러나 잔인하고 안 됐지만, 이들은 ‘아버지’라는 이름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하느님이 싫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먼저 사랑하지 못하면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하는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좋아하지 않으면 선물을 주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선물이 싫으면 주는 사람도 싫은 것입니다. 이들이 먼저 부모에 대한 용서와 감사를 찾아내지 못하면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해집니다.
따라서 바리사이 시몬은 먼저 자신의 집에서 이 용서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용기 있게 찾아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준 여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찾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사랑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찾아내고, 더 나아가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서 감사를 찾아내야 합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에게 고문하는 이들에게도 감사를 찾아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는 도구로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인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먼저 감사를 찾아내려 노력할 때, 그런 선물을 주신 주님께 더 감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감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감사로 가는 유일한 다리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을 이야기하였고,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17년 전에 저는 교구 사목국에 있었고 사목국의 사제들은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어 제목은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이지만 원 제목은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입니다. 성공이라는 말은 없고 삶을 효과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 사회는 ‘성공’이라는 말을 좋아하고,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 같습니다. 사목국에는 ‘교육, 전례, 선교, 가정, 복음화, 직장사목, 기획’을 담당한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각자의 업무에서 주어진 일을 하지만, 사목국 차원에서 함께 협력하고 연대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구는 ‘시노드(교구사목회의)’를 통해서 교구가 나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교구장님은 ‘2020’을 말씀하였습니다. 2020년에는 가톨릭 신자가 20%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는 열심히 했는데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이어달리기에서 다음 사람에게 배턴을 넘겨주듯이 저희는 후배 사제들에게 사목국의 일을 넘겨 드렸고, 지금의 사제들은 코로나19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영상으로 자료를 만들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 습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제자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물과 배는 제자들에게 소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소중한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높은 자리와 권력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따르면서 더 높은 자리와 권력을 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도들은 소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소중한 것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잡는 일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잡는 일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율법의 가치를 무너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이제 소중한 것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박해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지금 죽는 것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에서 미사를 부탁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 몇 달간 자리를 비우셨다고 합니다. 사제에게 미사는 소중한 직무입니다. 신문을 만들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소중한 직무이지만, 공동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본당신부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매 주일 공동체를 위한 미사에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본당을 떠나서 교구에서 지냈습니다. 모처럼 공동체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니 제게도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소중한 일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거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발라드린 여인은 소중한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오늘 하루 소중한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소중한 일을 찾았다면 행동으로 옮기면 좋겠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과
함께 하고파
그분이
계신 곳이라면
나를
사람으로조차 보지 않는
이들 한가운데라도
두려움 없이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
내 죽음준비로 삶의 방향 잡읍시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마리아 막달레나가 등장하는 시작기록인 이 성구는 감탄 절로 납니다.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데 그걸 까맣게 모르고들 삽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생각이 자기 안의 판관이며 자기 지휘자입니다.
오늘성구 읽고 하늘 향해 마음 열어 나 비우고 예수님 심정 들읍시다.
바리사이네 옛날 초대 때 마리아 막달레나 만나신 예수님의 심정을요.
내 마음대로 고집대로 고정관념에 갇혀 굳어버린 내 마음 느끼시면서.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믿기로 정했고 자신과 주님의 죽음을 준비했어요.
이대로 그냥 살겠다 고집피지 말고 내 삶의 방향 죽음준비로 잡으시죠
<감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목요일>(2020. 9. 17. 목)(루카 7,36-50)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이 말에 대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지만,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기뻐할 일이 생겨야 기뻐할 것이고,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하지 않겠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인의 ‘기쁨’과 ‘감사’는 자기가 원하는, 또는 좋아하는 어떤 일을 만났을 때에 저절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써 실천해야 하는 신앙 행위입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언제나 기뻐하게 됩니다. (믿음에서 감사로, 감사에서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은 은총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기쁨, 기도, 감사의 출발점이 됩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말에 대해서, “나쁜 일도 은총인가?”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살다보면 내가 원하지 않은 일, 내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보면, 그 일들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 나에게 좋은 일이었음을 깨달을 때도 많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바오로 사도가 한 이 말은, ‘하느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지금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러나 언젠가는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일”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또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이었고 섭리였음을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은 인생의 끝부분일 수도 있고, 저쪽 세상에 간 다음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사람에 따라서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말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고, 그것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떻든 모든 사람의 모든 일에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4-47).”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떤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그 여자의 죄가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언제 그 여자의 죄를 용서하셨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죄를 이미 용서 하셨다면 여자의 눈물은 기쁨과 감사의 눈물일 것이고, 여자가 예수님에게 온 다음에 용서하셨다면 여자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사이에게 하신 말씀은, 시몬을 꾸짖거나 비난하시는 말씀은 아니고, 여자의 마음과 행동을 부각시키기 위한 말씀입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르는 여자의 행동은 매우 이례적인 행동인데 감사와 존경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반적인 손님 접대는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뜻으로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 사랑을 드러낸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입니다. (“크게 회개한 사람은 주님께 큰 사랑을 드린다. 그러나 회개가 부족한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고, “많은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께 큰 사랑을 드린다. 그러나 은총을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 자비, 용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베풀어집니다. 그러나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드리는 사랑에 차이가 생깁니다. (온 세상에 똑같이 비가 내려도 큰 그릇을 준비한 사람은 빗물을 많이 받게 되고, 작은 그릇을 준비한 사람은 적게 받게 되고, 그릇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받지 못합니다. 햇빛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해를 정면으로 마주보는 사람은 온 몸에 햇빛을 받고, 뒤돌아 서 있는 사람은 자기 그림자만 보게 됩니다. 암실 속에 숨어있는 사람은 빛을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은총은 받으려고 노력하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제대로 받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에 인용했던 바오로 사도의 말을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1) 힘든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7).”
2)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3) 믿고 기도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항상 기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1-12).”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서(7,36-50)에 나오는 여인이 어떤 죄를 저지른 줄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과거에 중죄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예수님으로부터 중죄를 용서받은 여인은 예수님을 언제나 잊지 않았다. 여인은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뵙가를 바랐고 응분의 고마음을 표할 때를 기다렸다.
마침 자기의 죄를 용서해 준 예수님이 자기 마을의 한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은혜 갚을 기다림의 때가 온 것이다. 여인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여인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들어가서는 안 될 바리사이의 집을 찾았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열정 때문이다. 여인은 바리사이가 만나고 있는 예수님 앞에 무릎꿇었다. 여인은 예수남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칼로 발을 닦아드리고 발에 입맞추었다. 여인에게는 이런 행동이 지극히 일부분의 보답일 뿐이라 여겼다.
이를 지켜 본 바리사이는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칼로 발에 먼지를 닦아 주고 발에 친구한 여인에 대하여 과거의 여인만을 기억할 뿐이다. 바리사이는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루카7,39)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7,47) 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7,50) 한 바리사이의 예수님 초대는 그 의미를 차지 못했지만 한계를 넘어 예수님께 드린 한 여인의 은혜갚음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인 구원으로 완성되고 있다.
우리는 한 여인처럼 구세주,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고마움을 표해 드리며 당신 곁을 찾아가고 새로 태어난 한 여인처럼 떠날 때 더 큰 사랑을 받고 더 큰 마음이 되어 편안히 돌아갔으면 한다. 이것이 신앙에서 받은 선물의 결정체인 구원이 된다. 내가 배고품의 굶주림에서 죽게 되었을 때, 생명의 구원을 가져다 준 은인을 어찌 잊겠는가? 그런데 거꾸로 그 사랑하는 은인이 어느 날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되었다. 그 은인의 죽음을 어찌 내가 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 살면서도 그 크신 은혜를 잊고 있지 않은가? 더 나아가 예수님을 배은망덕하며 낭떠러지로 몰고가 떨어트려 죽게 만들지 않는가?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시고 그 집으로 가셨다. 그 바리사이의 집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회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37절),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 즉 회당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 여인은 아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땀에 젖은 채 식사 중인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린다.
여기서 바리사이 시몬은 속으로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39절)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시몬에게 두 채무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바리사이는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43절) 채권자를 더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다.
주님께서는 밖에서도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셔서는 더 큰 기적을 행하셨다. 밖에서는 병든 육신을 고쳐주셨지만, 안에서는 병든 영혼을 고쳐주셨다. 밖에서는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셨고, 안에서는 죄 많은 여자를 죽음에서 살려 내셨다. 그러나 눈먼 바리사이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들을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입맞춤이란 사랑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춘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며,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는다. 마리아께서 주님의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셨듯이, 교회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한다. 교회만이 신부처럼 신랑에게 입을 맞춘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분의 신부, 신랑을 사랑하는 신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는 깊숙이 감추었던 눈물을 자신의 사랑을 통해 밖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용기와 믿음을 보시고, 여인을 옭아매고 있는 많은 조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48절) 이 말씀은 참으로 하느님다운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여자를 자유롭게 해주신 동시에 함께 앉아있던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셨다.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49절) 말한다.
이제 용서는 넘치는 사랑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47절) 라고 하신다. 베드로 사도도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1베드 4,8)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꾸미며 살아감으로써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고, 그곳에서 식사를 하실 때 죄 많은 여자가 다가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는 이 모습을 보고 아주 못 마땅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이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그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 받았기 때문에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죄 많은 여인과 바리사이의 모습이 아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은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다가왔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입을 맞추며 향유를 발라드렸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여인의 모습을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러나 반면에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긴 하였지만 예수님을 대하면서 겸손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교만하게 예수님을 판단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모습 중의 하나는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주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회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도 주님을 만났고, 죄 많은 여인도 주님을 만났지만 결국 구원으로 나아간 사람은 죄 많은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같은 교만한 모습으로 구원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죄 많은 여인의 회개의 모습처럼 주님 앞에 겸손되이 회개하며 믿음 안에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랑과 용서의 상관 관계를 알려 주십니다.
"그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 한 여인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의 대접을 받고 계시지요.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되풀이해 읽어 봅니다. 그녀가 하는 대로 발을 내어맡기신 예수님 마음에도 귀를 기울여 봅니다.
남녀를 떠나서, 의인과 죄인을 떠나서, 어느 집 누구인지를 떠나서, 사랑을 행하는 여인과 사랑을 받으시는 예수님 모두에게서 온 정성과 온 마음을 다 쏟아내는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참, 아름답지요?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
바리사이 시몬은 고을의 죄인인 여자가 제 집에 들어온 것도 못마땅한데, 거기에 더해 제 손님에게 손을 대니 마음이 불편했을 겁니다. 부정한 이와 닿으면 부정해지니까요. 그런데 예언자라는 사람이 죄녀의 손길에 순순히 자신을 내맡기고 있으니 어이가 없습니다. 이 사랑의 현장을 목도하면서 그의 속은 더 복잡해지고 까칠해집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7)
이미 그 속을 다 읽고 계신 예수님께서 그녀 대신 그녀의 행동을 설명해 주십니다. 용서와 사랑의 관계가 명쾌히 정리되는 말씀입니다.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는 그녀라고 왜 보란듯이 그 생활을 청산하고 떳떳이 새 삶을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한 인간을 옭아매는 가난이나 소외나 그밖의 여러 한계 상황들은 그리 쉽게 물러나줄 만큼 만만하지 않습니다. 복음 환호송에서 미리 우리에게 힌트를 주듯, 그녀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복음 환호송) 우리 모두의 표상입니다.
남의 집에 들어가 그 집 손님 앞에서 눈물 흘리며 마음을 쏟아놓는 것은 죄인이건 보통 사람이건 쉽게 할 수 있는 예사 행동이 아닙니다. 고을을 찾은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려고 향유가 든 옥합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이미 용서의 은총이 시작되었지요. 비록 그녀는 이 마음의 끌림을 신학적인 전문 용어로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그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사랑은 이처럼 설명이 불가능한 비이성적 비논리적 불합리성으로 다가오기도 하지요.
오늘 복음 속에서 여인은 마음이 끌리는 사랑을 표현했고, 바리사이 시몬과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은 율법에 묶여 "속으로"(루카 7,39.49) 끊임없이 구시렁거리지요. 사랑한다면 알 수 있는 신비에 접근할 권한이 아직 그들에겐 없어 보입니다. 참 안타깝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자격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1코린 15,10)
열렬한 바리사이로서 자청해 "새로운 길"을 박해하던 사울은 은총으로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가감없이 드러내면서 용서받은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 나는 ...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
바오로가 은총에 순응해 예수님을 향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그의 사랑은 오늘 복음 속 여인처럼 진실되고 뜨겁습니다. 그가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기에 그렇고, 그 사랑에 감사할수록 증거할 수밖에 없으니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니 우리를 용서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받고 용서받은 우리는 자연스레 사랑을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용서받았음을 경축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형제와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우리는 용서받은 은총의 주인공임을 온몸으로 증언합니다. 용서받은 이의 자유는 사랑하면서 누리는 기쁨과 보람을 배가시킵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랑할 일이 우리 주변에 온 천지 가득 널려 있습니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우리 인생입니다. 요즘 같이 어려운 때는 더더욱 그렇지요. 복음 속 여인처럼 용기를 내어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받은 용서의 증거니까요.
오늘 저희 프란치스칸 가족들은 성 프란치스코가 받은 거룩한 상흔(오상)을 기억하는 축일을 지냅니다. 프란치스코는 당신의 독생성자를 우리 하잘것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내어 놓으신 하느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그 고통이 어떠하였는지 체험하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피정에 들어갔고 오상의 선물을 받았답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거룩한 수난 상처가 벗님 여러분 모두에게 맘속 깊이 체험되는 은혜로운 선물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신자들의 모범이 되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9: CCL 41,535-536)
주님은 이런 목자들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후 그들이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양들의 허물은 거의 보편적입니다. 튼실하고 살진 양들 즉 진리의 양식으로 튼튼해지고 하느님 은총의 풀을 잘 먹는 양들은 드뭅니다. 악한 목자들은 이런 양들마저 아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병들고 허약한 양들이나 길 잃고 헤매는 양들을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한 튼실하고 살진 이런 양들을 죽이려 듭니다. 그래도 이 양들은 살아 있지 않습니까? 네, 하느님의 자비로써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악한 목자들은 이 양들을 죽일 마음뿐입니다. “어떻게 하여 이 양들을 죽이게 되는 것인가?” 하고 여러분은 물어 볼 것입니다. 악하게 살고 나쁜 표양을 줌으로써입니다. 최고 목자이신 분의 제자 중에 뛰어난 하느님의 종인 디도에게 바오로가 한 다음 말은 조리 없는 말이 아닙니다. “그대는 스스로 모든 일에 있어서 좋은 행동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신자들의 모범이 되십시오.”
아무리 건실한 양이라 해도 자기 목자가 보통 악하게 사는 것을 볼 때 그는 하느님의 법에서 눈을 돌려 사람만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내 지도자가 그렇게 산다면 나인들 그가 하는 것처럼 할 수 없단 말이냐?” 그 목자는 자기 스스로 그 양을 튼튼히 키우지 않았으면서도 튼실하거나 살진 것을 보면 자신의 악한 생활로 그것을 죽여 버리는데 다른 양들을 가지고 무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거듭 말씀 드립니다. 양들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 굳건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도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하는 주님의 말씀에 굳게 매달려 살아 있다 해도, 신자들 앞에서 악하게 사는 목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자기의 행실을 보는 사람을 죽여 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양이 아직 살아 남아 있다 해도 목자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양이 살아 남아 있다 해도 그 목자는 여전히 살인자입니다. 흡사 색을 탐하는 자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을 때 여자는 비록 정결하지만 그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간음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에 대해 하신 말씀은 아주 명백합니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그는 그 여자의 침실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의 내부 침실에서 이미 욕정으로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지도하는 사람들 앞에서 악하게 사는 목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튼튼한 이들까지 죽이는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죽고 그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살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목자는 둘 다 죽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부활 은총의 삶 -사랑, 만남, 회개, 용서, 구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상에서 떨어져 불암산 기슭 수도원에서 33년째 머물러 정주하고 있지만 세상 중심 한복판에 살고 있는 듯 생각됩니다. 혼자 유리된, 고립단절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편해야 저도 편하고 세상이 행복해야 저도 행복합니다. 바로 수도자의 마음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게 되고 최선을 다해 매일 강론을 나누게 됩니다. 어제 받은 세 통의 카톡 메시지가 새삼 이런 진리를 확인하게 합니다.
“며칠전 수도원에 다녀온 이후로 참말로 매사 매순간 감사를 느끼며 지냅니다. 우리 가정 식구 모두가 무탈하게 세끼 식사하며 가정 기도를 매일 같이 할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한거예요. 신부님 기도 덕분이라고 느껴지네요. 세상적으로 보면 최하위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편안함을 잠시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주신 휴식인 것 같아요. 자존심의 꽃이 다 떨어져야 인격의 꽃이 편다고 하더니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신부님, 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요? 자연 이치대로 순행하며 사니까 아픔도 고통도 슬픔도 덜한 것 같아요. 신부님 만나고 나서 제게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 기도 덕분에 이경자씨가 기적처럼 깨어 나셔서 중환자실에서 하루만에 일반병실로 내려 왔답니다. 감사합니다. 이분 위해 15일 미사봉헌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주님을 만난 분들의 고백입니다. 구원은 언젠가 밖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가까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만나 구원의 삶,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먼저 사랑의 손길을 뻗으십니다. 어제 저녁 식사전 수도형제들을 줄 복숭아를 오토바이에 싣고 싱글벙글 웃으며 오는 한 수사님의 모습이 아름다워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대로 구원과 부활의 기쁜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주님과 만날 때 회개요 용서요 구원이요, 늘 우리를 찾아 오시는 사랑의 주님을 환대함이 그렇게도 중요합니다. 바로 이의 생생한 증거가 주님 부활의 증인이요, 부활의 구원의 기쁨을 사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사도의 겸손한 고백이 참 아름답고 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맨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바오로의 겸손한 고백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마치 후반부는 그대로 저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사랑의 은총을 만날 때 회개요 겸손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은총이 우리를 회개시켜 겸손하고 아름다운, 매력적인 구원과 부활의 참 삶으로 이끕니다.
바오로와 쌍벽을 이루는 은총의 여인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인공 죄녀입니다.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너무나 매력적인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감동과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미 죄녀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며 하여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사랑의 주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향유의 사랑! 그대로 죄녀의 회개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표현된 죄녀의 회개입니다. 죄녀의 회개를 촉발시킨 예수님의 사랑이 이미 선행했음을 느낍니다. 회개해서 사랑이 아니라 사랑해서 회개입니다. 그러니 누가 회개하지 않는다 꾸짖을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기다리십시오. 때가 되면 회개할 것입니다. 죄녀와 예수님의 만남이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오늘 복음중 절정의 장면입니다. 말그대로 회개와 사랑, 감사와 찬미의 눈물이자 행위입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로 미사전례에 참석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은 한 순간에 죄녀의 전부를 알아 챘습니다. 죄녀의 예상치 못한 행위에 놀란 바리사이 시몬과는 너무 판이한 주님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은연중 죄녀와 바리사이 시몬을 빗댄, 빚을 많이 탕감받은 자와 적게 탕감받은 자에 대한 적절한 예를 들면서 시몬을 직격直擊합니다. 바로 우리를 깨우쳐 회개에로 이끄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인간이 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라면 하느님 하시는 일은 죄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수록 즉시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아파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순수가 아니라 회개하고 사랑할 때 순수요, 죄가 없어 구원이 아니라 회개할 때 하느님 사랑의 은총으로 구원입니다.
사랑과 죄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사람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사랑의 빛 앞에 사라지는 죄의 어둠처럼 말입니다. 죄녀가 그 순간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그녀는 죄인일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몬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의 죄의 개념이 순전히 율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 죄의 개념은 관계적입니다.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와 더불어 사라지는 죄의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보다 ‘어떻게 사랑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백배 유익하고 낫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복음의 죄녀는 물론 마치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랑의 회개로 표현된 죄녀의 아름답고도 슬픈, 깊디 깊은 믿음에 감동, 감격하신 주님의 구원 선언입니다. 아, 이제부터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과 함께 구원의 삶, 부활의 삶을 살게 된 죄녀입니다. 이제부터 주님과 본격적 우정의 여정에 오른 죄녀요 주님과 사랑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과거는 불문에 붙이고 다시 묻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어제나 내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나를 보십니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고 가까이 있는 이웃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처벌이 아니라 우리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려 노력하십니다. 처벌은 파괴합니다. 하느님의 소망은 우리 모두가 온전해 지는 것이며 내적 평화와 조화를 체험하며 구원과 부활의 기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18,1). 아멘.
하느님의 자비는 차별이 없다. <루카 7, 36-50> 9월 17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죄에 대하여 차별을 두고 판단합니다. 내 가족, 내 편, 나와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너그러우나 다른 쪽에 있으면 티끌만 한 것도 트집을 잡아 큰 죄인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나 태양이 차별 없이 땅을 비추듯이 하느님의 자비는 차별 없이 용서해주십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모든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여 생각하고 판단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당신의 발을 향유로 씻으며 눈물을 흘리는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고 하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십니다.
우리는 죄인을 앞에 놓고 이러니저러니 하며 말을 앞세우지만, 주님은 모든 죄인을 믿음을 중심으로 용서하시며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죄를 용서받으려면 자존심을 버리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 앞에 나서야 하는데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으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모범을 보여준 성서 안의 죄지은 여인을 우리가 본받아야 용서가 가능합니다.
용서받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부끄럼도 없고 거리낌 없이 주님 앞에 나가고, 죄를 용서하는 사제 앞에 나가고, 울면서 뉘우치며 희생을 감내하고 하느님 앞에 죄를 고백하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십니다.
저는 어느 날 용서할 수 없는 형제가 있어 이 공동체를 떠나려고 하다가 피정 중에 하느님이 “네가 가진 바를 다 버려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담배까지 끊고 나니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셔서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나에게 참 평화가 없구나.’ 생각하고 그 형제를 피정 중 불러 무릎을 꿇고 용서 청하고 사함을 받고 나니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마음의 참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 후 누구든지 나를 해치려 하든지 해를 주는 사람을 용서하는데 자유스러워졌습니다. 80이 되어 원장을 하라고 하시기에 원장을 하고 있으니 사방에서 그만두라고 하고, 별 비난의 소리를 듣는 중 “당신은 원장을 하면 교만한 사람이 되고, 끝나면 형제들에게 외면당하니 지금 그만두시오.” 하는 소리를 듣고 저는 교만하다는 말을 이렇게 들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약 4년간 원장직을 수행하고 지금은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도 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일생 많은 빚을 하느님께 갚기에 시간이 없습니다. 열심히 죄를 뉘우치고, 용서받고 마지막을 행복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고 싶습니다. 우리 이 세상에서 은혜로운 삶을 살고 주님 앞에 평화로이 나가시지 않으렵니까? 믿음을 갖고 주님 앞에 나가서 자비로운 용서를 받고 “평안히 가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서로 어울려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가난한 이 부자 되고, 굶주리는 이 배부르고, 우는 이 웃으며 억눌려 사는 사람이 해방되고 미련한 이는 지혜로운 이 될 것입니다.
차별 없이 서로 사랑합시다.
용서의 향기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 뒤에 섰을 때 바리사이는 “죄인인데” 하며 예수님이 어떻게 나오실지 지켜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여인이 당신 뒤에 서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여인이 당신 뒤에서 철철 눈물을 흘릴 때 혹여 당황하시지는 않았을까요? ‘아니, 이 여자가 왜 내 뒤에 서서 우는 거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텐데. 빨리 다른 데로 갔으면 좋겠는데.’하며 말이지요. 하지만 죄 많은 여인은 한술 더 떠 이젠 눈물로 예수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그리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르지요. 예수님이 정말 당황하지 않으셨을까요? ‘발에 입까지 맞추다니 혹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왜 이러는 거지?’ 하고 생각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조금 다르셨을 듯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그녀에게 ‘힘들지? 괜찮아. 나는 그걸 문제 삼지 않을 게. 아프면 그냥 내 뒤에 서 있어. 외로우면 마음껏 울어. 두려워도 사랑하고 싶으면 그 사랑을 표현해. 내가 받아줄게. 그리고 너도 사랑받기에 충분해. 자, 이제 평안한 마음으로 이 향유처럼 세상에 기쁨과 평화의 향기가 되거라.’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 오늘도 그 고마운 이름을 기억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장에 가서는 콩나물 하나 사기 위해 십 원 이십 원을 깎으면서, 뷰티나 패션 물품은 값이 비싸도 깎지 않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좀도둑은 잡아서 벌을 주지만, 큰 도둑은 잡지도 못하고 잡아서도 이렇다 하게 처벌하지 못하고 놓쳐버리기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한 여인이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며“(루카 7,39) 그 여인을 죄인으로 낙인을 찌고 죄인을 받아 주는 예수님을 탓합니다. 아마도 바리사이는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채권자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 채무자와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채무자에게 빚을 탕감해 주면 누가 더 그 채권자를 사랑하겠느냐고 묻자, 바리사이는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43절) 이라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에게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44-47절) 라고 하시며 그 여인의 정성을 일깨우십니다. 그러시고는 그 여인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48절) 라고 하시며,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주는가?’(49절) 하며 비아냥거리는 생각들을 헤아리시면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50절) 라고 이르십니다.
이스라엘의 한 학자는 정치가는 용서를 받지만, 경제가는 용서받기 어렵다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내리는 이들은 그 결정으로 인하여 어느 누가 피해를 보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참으로 조심하고 유념해야 합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서 무엇을 직접 훔치거나 손해를 끼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결정 때문에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남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타인에게는 관대한 처우를 베풀고, 자신에게는 더욱더 엄격한 잣대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살피고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형제들에게 용서를 청하며 바른 잣대와 규범으로 되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고해성사의 단계 중 죄의 ‘용서’가 시작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자기가 지은 죄를 입으로 고백할 때?, 아니면 사제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사죄경’을 들을 때? 사죄경은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교회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마무리’ 절차이지 그것이 ‘용서’의 시작은 아닙니다. 용서는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되돌리는 ‘회개’의 순간 이미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제의 사죄경을 통해 ‘공식적’인 용서의 절차는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하고 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내적인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후속조치’가 중요한데, 우리는 그것을 ‘보속’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분들이 ‘보속’이라고 하면 죄를 지은데 대한 벌로써 받는 ‘숙제’라고 생각하시지요. 그래서 지은 죄가 클수록 보속 또한 무겁고 힘들어지는거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보속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처벌’이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가 하느님께 용서받은 사람, 그분의 사랑 속에 사는 사람임을 다른 이들 앞에 드러내고, 자기 자신 또한 그 사실을 되새기기 위해 하는 ‘확인절차’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도, 여인도 모두 ‘이미’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후의 행동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바리사이는 다시 죄를 짓지 않는데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계명을 어기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소극적인 모습으로 살았던 반면(그래서 죄로부터, 온갖 부정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데에만 몰두했던 것), 여인은 죄를 용서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사랑과 자선을 실천하며 자유롭게, 위축되거나 주눅들지 않은 모습으로 삶을 온전히 누립니다.
그랬기에 ‘죄인’인 자신을 ‘벌레’처럼 여기며 무시하는 바리사이의 집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녀로 하여금 죄의 용서를 넘어 ‘구원’에 이르게 한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그녀가 믿은 것은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잘못을 저지르게 되더라도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시리라고 믿은 것입니다. 값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린 그녀의 ‘봉헌’, 눈물과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그녀의 ‘봉사’는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레 우러난 행동이었던 것이지요.
반면, 바리사이가 믿었던 것은 하느님의 ‘심판과 단죄’였습니다. 그에 대한 믿음이 컸던 만큼,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하느님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그의 삶은 온통 ‘죄’라는 올가미에 묶여버렸습니다. 삶의 모든 기준이 ‘죄를 지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였기에 삶의 참된 기쁨도, 행복도 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이웃을 괴롭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바리사이처럼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삶의 초점을 ‘죄’가 아닌 ‘사랑’에 맞춰야 합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단죄를 두려워하며 주눅든 채 살지말고,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며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 당당함은 내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내 마음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 4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눈물로
용서와 사랑을
배우게 된다.
먼저
나자신을
들여다본다.
용서의 열매는
쓰라린 사랑의
열매이다.
아픈 용서가
참된 사랑이다.
아프지 않는
사랑과 용서는
없다.
죽지 않고서는
부활이 없듯이
죽을만큼 아파야
용서하시는
주님을 보게된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용서의 삶이다.
예수님의
용서로
죄많은 우리가
아름다워진다.
용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가장 가치있는
사랑이다.
주님께
내어드리는
사랑이 용서이다.
향유같이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고
깨뜨려져야
가장 향기로운
사랑이 된다.
용서의 향유는
아프기에
모두를
향기롭게 한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의 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
용서는
죄의 치유이며
관계의 치유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용서와 사랑이다.
용서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용서에 빚진
죄인임을
깨닫는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드러낸다.
사랑의 열매는
용서의 여정을
거친 가장 향기로운
눈물의 열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