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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9월 20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09.20|조회수68 목록 댓글 0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는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냐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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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의 저자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며,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냐며, 어떠한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하며,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지혜서에서는 의인들의 영혼이 불멸하며 하느님의 손안에서 평화를 누리리라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늦게 작성된 지혜서는 내세에 대한 희망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혜서보다는 좀 더 이른 시기, 이스라엘에서 유다교가 외세의 박해를 받던 시대에 다니엘서와 마카베오기 같은 책들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나타납니다. 
여러 해 전 어느 날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내세와 부활에 대한 믿음이 뚜렷해지면서 순교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하자 누군가 “순교자들은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더라도 순교를 하였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다니엘서 3장 17-18절에서 다니엘의 친구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불가마에서 구하여 내시지 않더라도 다른 신들을 섬기지는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것은 장차 받을 영광과 상급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 그 사랑마저도 시작은 하느님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로마 8,32)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 주셨기에,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었기에]”(8,37) 박해와 칼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주신 분, 그 사랑에 우리도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나서게 됩니다.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오늘, 순교자들이 지녔던 큰 사랑과 용기를 본받으려 한다면 먼저 순교자들이 만났던 하느님을 우리도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의 사랑이 없다면, 다만 상급을 바랄 뿐이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도 무의미할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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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에서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일상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날마다’라는 말마디가 추가되는 까닭입니다. 특정한 순간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어려움들은, 실제로는 십자가와 무관한 경우가 많지요. 삶의 처세를 위한 고난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엮는 것은, 꽤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위하고, 예수님께서 위하신 이웃을 향하는 삶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과 다르지 않다고 수없이 듣고 들어 온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는 낯선 이들과의 연대, 불편한 사람과의 동행,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겸한 공동체적 삶의 지렛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에 앞서서, 뜻이 달라도, 부족하고 어눌하더라도 제 이웃을 사랑하겠노라는 다짐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 점검해 보아야 할 삶의 기본입니다.

일상이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은 세상 처음부터 그러하였을 것입니다.원시 시대든, 인공 지능(AI)이 인간을 지배할 것 같은 미래의 어느 시간이든 사는 것이 왜 안 힘들겠습니까. 다만, 시대의 순간순간 함께하는 삶의 이질성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함께 답할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와, 제 삶에만 천착하여 다른 삶에 대한 질문은커녕 제 삶의 의미마저 속세의 천박한 유혹에 저당 잡힌 이들의 간극은 천국과 지옥보다 더 큰 것이겠지요. 십자가의 삶은 타인의 삶 안에서 제 삶의 가치를 깨닫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은 큰 선물을 미리 받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대단하다. 그들의 순교를 감히 누가 따를 수 있겠는가?’ 하는 정도로만 오늘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질 마음이 우리에게 없다는 방증입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부러워해야겠습니다. 부러워서 나도 얼른 그 선물을 움켜쥐고 싶어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설레는 기쁨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얼른 이웃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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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는 역사가 짧지만 수많은 순교자와 함께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무엇을 얻었습니까? 오히려 명예와 재산, 가족마저 잃지 않았습니까?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잃고 말지요.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까? 

당시 사회는 상당히 혼란스러웠지요. 오랫동안 사회를 지탱해 주던 가치관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정신적 지주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참된 삶은 무엇인가?’ ‘진정한 인간의 길이란 어떤 것인가?’ 이런 문제에 직면해 있던 그들은 그리스도교에서 해답을 찾은 것입니다.

그 옛날, 우리 신앙 선조들이 복음을 접하면서 가장 깊이 매료되었던 점은 인간 존중 사상과 인간 평등사상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복음이 빠른 시간 안에 널리 퍼질 수 있었지요.

그러나 복음이 전해진 지 몇 백 년이 지났음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복음의 가치와 대립하는 살인, 자살, 낙태 등 생명 경시 풍조, 인간 복제, 유전자 조작, 환경 파괴, 물질주의 등이 널리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신앙 선조들은 잘못된 가치관을 버리고, 참된 삶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신앙의 후손인 우리가 인간 존중의 정신을 회복시키고, 이를 확산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 속에서 세상이 지니고 있는 많은 문제는 하나하나 풀려 나갈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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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희망’, 죽음도 꺾지 못하는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그 희망에 목숨을 걸 수 있을까요? 그런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생각이나 기대일 수는 없습니다. 확고한 신념이 생기려면 바오로 사도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뵙고, 수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께서 지켜 주고 계신다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뒤를 따라 불사의 희망,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누구나 저마다 짊어져야 할 삶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책임져야 할 가족, 살기 위해 다녀야 하는 직장, 보기 싫지만 만나야 하는 사람들, 힘겨운 학업, 떨쳐 버리지 못하는 지병, 경제적인 빈곤, 희망 없는 인생, 맞이해야 할 두려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가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배교를 강요하는 이들의 칼 앞에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한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이라고 이런 인생의 십자가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순교자들이 배교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자신들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행 속에서도 ‘불사의 희망’,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피를 흘리는 순교는 없지만,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할 땀과 희생의 순교는 요청됩니다. 한두 번 순교하는 마음으로 참고 살 수는 있지만,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은 수행의 연속이고, 그 수행의 끝 날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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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루카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과 재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입으로 하느님을 선택한다고 말하겠지만, 마음속에서는 많은 유혹과 핑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경축하는 103위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징표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신 분들입니다. 그중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만 25세의 나이로 사목 생활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자신의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셨습니다. 성인은 죽기 전에 이렇게 설파하셨습니다. “내가 외국 사람들과 통한 것은 오직 천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 그 천주님을 위해 죽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인 성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의 재건을 위해 투신한 평신도입니다. 성인은 북경 왕래를 아홉 차례, 의주 변문까지는 열한 차례를 왕복하며 유방제 신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였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은 임금보다 더 큰 임금을 선택하여 충성을 바치고, 부모보다 더 큰 부모를 섬겨 효도를 다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여 영원한 생명의 표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죽음도 그들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이 보여 준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지닙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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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의 대축일입니다. 이 땅의 103위 순교 성인은 오늘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하신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의 우리에게는 선조들의 영웅적인 순교 이야기가 가슴 깊이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목숨’이라는 말은 영어로 ‘라이프’(life)입니다. 이 ‘라이프’는 ‘생명’ 또는 ‘목숨’으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인생’이나 ‘생활’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되새겨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정녕 나 때문에 자기 인생을 바친 사람은 그 인생을 살리게 되는 것이다.’라고 새겨봅니다. 이는 수도자의 삶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 주님을 증언하는 이가 바로 수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정녕 나 때문에 자기 생활을 바친 사람은 그 생활을 살리게 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경우에는 우리 교우들, 곧 평신도들의 삶을 새겨볼 수 있습니다. 여가 활동이나 취미 생활 등 삶의 여러 부분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주님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공인된 말은 아니지만, 이 땅의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킨 것을 ‘적색 순교’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일생을 바쳐 신앙을 증언한 삶을 ‘백색 순교’, 일상생활을 주님께 봉헌하며 희생하는 삶을 ‘녹색 순교’라고도 합니다.

종교 박해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순교의 또 다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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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신 적이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인도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 구경을 갔습니다. 지옥에 들어가니 마침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지옥은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식탁을 보니 놀랍게도 음식이 풍족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삐쩍 말라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보았더니 그들의 팔은 곧아서 그 음식을 집어 자기 입에 넣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는 천국에 가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곳 사람들의 팔도 구부러지지 않았습니다. 식탁의 음식을 보았더니 지옥의 것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얼굴은 살이 찌고 모두 평화롭고 행복에 차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찾으려고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그들은 음식을 집어서 자기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앞에 있는 사람의 입에 넣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상대에게 음식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함께 먹여 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만 살려고 하면 결국 나도 죽고 너도 죽습니다. 너를 위해 나를 죽인다고 할 때에 비로소 모두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어머니에게서 보게 됩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자신을 버립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자식을 살립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며 이미 인류도 이 지구상에서 없어졌을 것입니다. 사랑은 뺏는 것이 아니라 줌으로써 남을 살리고 자기 자신도 살리는 구원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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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는데, 너는 왜 아까운 생명을 포기하려고 하는 거니?” 높은 산벼랑 위에 서 있는 나무가, 삶의 의미를 잃고 생을 마감하려고 산에 올라갔던 ‘우종영’ 씨에게 건넨 말입니다. 농사일마저 실패하고 서른 살이 되도록 제대로 한 것이 없다며 삶을 놓아 버리려고 하던 찰나, 나무가 그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숙명처럼 평생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나무,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한결같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나무, 겨울의 추위를 앙상한 알몸으로 견디는 초연함을 가진 나무. 나중에 ‘나무 의사’가 된 우종영 씨는 늘 우리 가까이 있는 한 그루 나무에게서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의 가치를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모든 피조물에게는 이렇게 숙명처럼 살아 내야 할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나무들이 비록 척박한 땅일지라도 처음 뿌리를 내린 자리에서 살아 내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예외는 아니어서, 때로는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그러하듯,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안고 살아야 할 운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제 십자가를 지고 ‘제 갈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명처럼 지고 사는 삶의 어려움들을 예수님 안에서 바라보며 그 의미와 가치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벗어 버리고 싶은 삶의 십자가가 그분 안에서는 우리 삶의 의미가 되고, 우리 구원의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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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에 우리는 부활을 준비합니다. 죽어야 부활할 수 있음을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순 시기는 ‘내 몫의 십자가’를 찾는 기간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는 연습’을 하는 시기입니다. 내 생각보다 다른 이의 생각을 우선해 보는 훈련입니다.

죽어야 부활합니다. 부활은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반전’입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인간적 계산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신비입니다. 체험이 없었다면 올해 사순 시기에는 겪게 해 주십사고 기도해 보십시오.

부활에 대한 빠른 접근은 잡은 것을 ‘놓아 보는’ 연습입니다. 물질이든 사람이든, 사상이든 취미든 한 발자국 물러나 보는 시도입니다. ‘정말 놓아서는 안 되는지?’ ‘정말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자꾸만 돌아보는 것이지요.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재를 받았습니다. 그 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흔들었던 ‘나뭇가지’를 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의 수요일’ 예식은 다짐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 한 줌 재가 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언약입니다. 이 마음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첫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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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로, 본래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한이 쌓인 저주의 나무였습니다. 일반 사형수는 간단히 죽였지만 십자가형은 달랐습니다. 사형수는 먼저 채찍으로 반쯤 죽도록 맞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회복되면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했습니다. 형장에 도착하면 군인들이 산 채로 손발에 굵은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고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달아 놓았습니다. 일주일 가까이 숨이 붙어 있는 모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수치의 나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형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도 그렇게 죽음을 체험해야 된다고 하십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부활의 희망이 없다면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인지요?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반전’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하늘의 이끄심’입니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온다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비참한 상황’을 극복해야 부활의 현실을 만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지고 가는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의 희망으로 지는 십자가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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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저는 열등감도 많이 느끼고요, 살면서 무력감과 초라함도 많이 느낍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조금의 열등감 없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약간의 열등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고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존감이 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부정적인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마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공감이 갑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없는 상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런 부정적인 마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채워 져야 부정적인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생긴다고 해서 부정적인 마음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주님과 함께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괜히 미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 ‘나’를 함부로 한다는 생각 등으로 미워집니다. 다시 생각하면 제게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도 그냥 밉습니다. 이 경우, 대부분 그 사람을 멀리합니다. 그러나 멀리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좋지는 않지만, 멀리하지 않는 노력으로 인해 조금씩 원망과 미움이 애정으로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미움이란 감정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아마 모든 사람이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억지로라도 가까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편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 봉사자들의 고충을 종종 듣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냐며 하소연하시고 그래서 더 이상 봉사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심리적 안녕감, 만족감, 행복감 하물며 엔도르핀이 세 배 이상 증가하고 스트레스가 감소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타인을 돕는 행위라고 합니다. 봉사 과정에서 미움 등의 부정적 감정도 생길 수 있지만, 봉사에 집중한다면 그런 부정적 감정을 넘어서는 큰 선물을 주님께 받게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곧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반대로 남을 돕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삶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나를 위해서 말이지요.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는 1791년의 신해 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의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일 만여 명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박해자로부터 죽임을 당할 때, 미움의 감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모든 이를 용서할 수 있었고, 구원의 선물까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십자가의 사랑에 우리 역시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고, 원수를 만들어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사랑인 것처럼, 우리의 십자가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과거 순교자들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큰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포기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다(알렉스 퍼거슨).

 

 

 

이제 우리 교회는 백색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젊은 시절, 유학 생활이 끝나갈 무렵이 기억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과정을 마무리 짓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깊은 감사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내게 수도회에서 좋은 배움의 기회를 주셨으니, 어서 빨리 돌아가서 이 좋으신 주님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이 특별하고 대단한 성인 돈보스코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열정으로 마구 솟구쳤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 마카오에서의 길고 긴 유학 생활을 끝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러나 저와는 달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던 고국 땅 조선의 상황은 암담하고 살벌했습니다. 박해가 한창이었기에, 입국 과정은 철저하게도 은밀했습니다. 입국 과정은 소설 몇 권을 써도 남을 정도로 처절하고 위험했습니다.

육로가 꽉 막혀있으니 바닷길을 선택하고, 조각배에 몸을 싣고 건너오다 폭풍우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조선 땅을 밟았지만, 언제나 사람 눈을 피해 산길로, 밤길을 쉼 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숙박을 청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노숙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끼니를 자주 건너뛰니 건강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 어떤 건강한 장정도 견뎌내지 못할 여행길에 온몸은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피 흘리는 순교 이전에 이미 땀과 일의 순교자, 백색 순교자로서의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활활 한 세미나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적색 순교자들로 흘러 넘치고 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백색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증언하는 백색 순교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박해 시대가 지나가면서 순교에 대한 재해석 작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순교의 의미, 순교의 개념이 점점 확장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피흘림 없는 순교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피흘림 없는 순교를 영적 순교, 백색 순교라고 불렀습니다.

박해가 사라진 시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자 하는 의지만큼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깊은 사막 속으로 들어간 수도자들, 고행자들,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증거•증언하는 사람들까지 백색 순교자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종교 자유 이후 많은 신자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거나. 순교자들의 무덤을 순례하기 시작했는데, 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백색 순교로 여겼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 역시 순교입니다.”

백색 순교에 대해서 한 마디로 요약해보면 각자 삶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증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비록 피를 흘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희생하고, 적극적으로 헌신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증언하는 사람이 되며, 백색 순교자로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다는 말은 사랑 앞에서는 언제나 핑계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간이 하느님을 도울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분명 인간이 당신을 도울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키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게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성경에서 다윗은 작은 목동에 불과했으며,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골리앗 같은 거인을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은 다윗은 자신의 작은 물매와 돌로 거대한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이 이야기는 외형적인 강함이나 능력보다 하느님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 주며, 작고 연약해 보이는 존재가 큰일을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잔 다르크는 농촌 출신의 평범한 소녀로, 군사적 훈련이나 정치적 권력이 전혀 없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프랑스를 구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도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사랑은 마중물과 같습니다. 마중물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나머지는 우리 안에서 알아서 다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샘이 있습니다. 그 샘에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하려면 그에 맞는 사랑만 조금 집어넣으면 됩니다. 인간은 무한한 하느님을 닮아서 사랑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나머지는 우리 안에서 알아서 다 해 줍니다.

사랑의 의지가 우리를 작동하는 방식은 우리 안에 ‘망상활동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 가 있기 때문입니다. 망상활동계는 뇌간에 있는 신경 네트워크로, 뇌와 신체 사이의 경계를 조절하고 의식, 주의력,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과학적으로, RAS는 뇌와 외부 자극 간의 필터 역할을 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비행장에서 쇼핑에 정신이 팔려 시계를 보니 이미 비행기 이륙시간이 지났습니다. 좌석을 배정받고 짐을 부쳤기 때문에 자기 없이는 어느 정도까지는 떠나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때부터 모든 주위는 자기 이름이 호명되는지에 집중됩니다. 자기 이름이 불리고 있고 이미 20분 전부터 방송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왜 그전에는 듣지 못했을까요? 망상활동계에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오스카 쉰들러가 어떻게 1,100명이나 되는 유태인을 구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지입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이 발동하자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중엔 자동차와 나치 금배지를 팔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그것을 팔 정도까지의 의지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이게 됩니다. 줄 것이 없었다면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당신 안에 무엇이 있는가 보다는 ‘오늘은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지?’라는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정해지기만 하면 능력은 주님께서 주십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의지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하와이엘 잠시 다녀왔습니다. 하루 전에 확인 했을 때는 터미널이 A였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터미널 A에서 신부님을 기다렸습니다. 신부님이 전화했습니다. 저는 게이트 34에 있다고 했습니다. 신부님도 34에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 봐도 없었습니다. 밤사이에 터미널이 A에서 D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터미널 D로 가야 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미국 공항은 게이트는 물론 터미널까지 종종 바뀐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래도 저는 다행입니다. 어떤 신부님은 게이트 바뀐 걸 몰라서 비행기를 놓치고, 다음날 출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고난의 잔을 받아 들였습니다. 신앙의 본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내가 바뀌는 것이지, 나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혼란에 빠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것도 비슷합니다. 국가의 지도자가 여론을 무시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에 빠져서 국정을 운영하면 혼란이 발생합니다. 원칙과 공정에 따라서 법이 집행되어야 하는데,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국정에 개입하면 국가의 질서가 엉망이 됩니다. 국방부 장관도 잘 했다고 했고, 절차대로 마무리했으면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건이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특검’의 논란이 되는 것은 외압이 있었다는 정황 때문입니다. 경찰청장도 잘 했다고 했고, 절차대로 마무리했으면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건이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청문’의 대상이 되는 것도 외압이 있었다는 정황 때문입니다. 권력과 권한은 권력과 권한을 준 국민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 권력과 권한을 사적인 욕망과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살로메의 청을 받아들여 의로운 사람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과 권한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관리가 지녀야 할 덕목을 이야기했습니다. 관리는 청렴해야 하고, 법을 엄정하게 집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특별한 체험을 했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다른 사도들처럼 예수님과 같이 생활한 적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가 신약성서의 집필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였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도 인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에게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해서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 그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지금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헌신과 죽음도 헛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시중을 들고, 자신들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을 따르는 것 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험을 들은 사람들은 보험회사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우리들의 신앙, 우리들의 교회가 더욱 발전하고 성장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함께 길을 떠나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과 함께”(루카 8,1)“그들과 함께”(루카 8,2)


기쁨을 만나
기뻐하는 사람들
기쁘게 하고파
기쁨과 함께
길을 떠나네


희망을 만나
희망하는 사람들
희망을 나누고파
희망과 함께
길을 떠나네


사랑을 만나
사랑받는 사람들
사랑하고파
사랑과 함께
길을 떠나네


베풂을 만나
거저 받은 사람들
베풀고파
베풂과 함께
길을 떠나네


살림을 만나
살아난 사람들
살리고파
살림과 함께
길을 떠나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는데 열두 제자와 더불어 막달레나,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전합니다.

 

사실 당시 유대 문화 안에서 여인들이 활동을 한다는 자체가 쉽지 않은 분위기였지만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고, 자신들의 재산과 재능을 구원 사업을 위해 봉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시고 그들의 헌신을 물리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이 어떻게 자기 재산을 그렇게 아낌없이 봉헌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재산 역시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신앙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루카 복음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 말씀 중에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했던 이야기가 참 마음에 와 닿으면서 그 말씀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말씀은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이제껏 하느님 안에 모든 삶을 이루어왔으며 앞으로 언젠가는 그 하느님께로 되돌아 갈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안에 죽고 하느님 안에 살게 될 존재들이며 나는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신앙적 명제를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모든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내용은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도 함께했지요. 이는 앞으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하느님의 나라는 말씀을 통해 악이 없고 아픔이 없는 곳이지요. 이렇듯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중에는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여인들과 마귀에 힘들었다가 예수님을 통해 벗어난 막달레나 마리아도 있었지요. 이 모습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축소판이라고 보시면 맞습니다. 그리고 독서에서 나왔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죄 안에 있던 우리가 씻김을 받고 하느님 나라에 올라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짧지만,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중심으로 열두 제자들이 함께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들의 대표로 예수님을 시중드는 이들이 있지요. 바로 이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름으로 악령과 마귀들로부터 해방되고 또 고침을 받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교회를 통해 받을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하느님의 나라가 현세에만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가야 할 길이 현세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종말론적인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부활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듯이 우리도 부활하여 고향인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앞으로 만들어질 교회 안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진리가 교회 안에 있고 진정한 기쁨도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우리는 현세만을 위해 살아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무엇이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희생을 통해서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과 함께 한 자매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현실에서 살지만 정신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면 하느님의 뜻을 향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까지 현실이 주는 달콤함을 향한다면 우리는 길잃은 양이 될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는 자녀가 됩시다. 아멘!

 

 

 

회개의 여정, 믿음의 여정 - “참회, 용서,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당신의 은총을 어서 입게 하옵소서,

 당신께 의지하는 이 몸이오다.”(시편143,8ㄱ)

 

모두에 선행하는 은총이요 모두가 은총입니다. 회개의 은총입니다. 참된 회개의 표지가 참된 겸손,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회개의 표지가 참된 지혜, 참된 감사, 참된 믿음입니다. 참된 회개 자체가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잠시 교황님 인터넷 홈페이지 소식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일반알현후 삼종기도후에는 최근의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사목여정중 소감을 밝혔습니다. 얼마나 교황님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물한 여정인지 깨닫습니다.

 

“나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서 살아 있는, 기쁨 가득한 믿음을 보았다!”

“이들 교회는 ‘개종(by proselytizing)’이 아니라, ‘매력(by attraction)에 의해 성장하고 있다.”

“믿음, 형제애, 연민은 인도네시아 방문의 모토였다”

“무엇보다, 나는 동티모르 사람들의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았다. 시련중에도 기쁨이 넘쳤고, 고통중에도 지혜로웠다. 많은 아이를 낳은 사람들일뿐 아니라, 이들에게 웃음(smile)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나는 결코 아이들의 미소를 잊을 수 없다.”

이어 제39차 세계 젊은이들의 날을 맞이한 메시지도 고무적이었습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라, 그러면 지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오늘 강론 주제는 ‘회개의 여정, 믿음의 여정’입니다. 윗 말마디들은 우리 삶의 여정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여정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이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죄많은 여자의 참회 과정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죄녀의 참회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감사와 사랑을 매우 겸손하게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과의 대화가 사건의 본질을 명확히 깨닫게 합니다. 시몬과 대조하여 죄녀의 ‘회개의 표지’인 환대를 예로 듭니다. 둘의 예수님 환대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 주었다.”

 

그대로 죄많은 여자의 온맘을 다한 참회의 구체적 표현에 감동하신 예수님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죄녀가 회개하기에 앞서 회개 은총이 선행했음을 봅니다. 참회와 용서의 결과 이런 감동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이 많아서 용서가 아니라 참회와 용서에 대한 감사에서 샘솟는 주님 향한 사랑입니다. 회개와 용서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회개의 여정과 더불어 끊임없이 용서받음으로 겸손과 사랑은 날로 증대됩니다.

 

정말 날로 겸손해지고 사랑이 많아지는 사람들은 바로 끊임없는 회개로 주님께 끊임없는 용서를 받은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회개의 여정’입니다. 참된 회개와 더불어 용서의 은총이요, 주님과 사랑의 우정도 날로 깊어집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죄책감에 아파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죄녀처럼 즉각적인 참회로 주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요, 이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주님의 용서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대로 오늘 복음은 미사장면의 압축같습니다. 복음의 죄녀처럼 참회의 표지로 큰 사랑을 드러낸 우리에게 미사후 파견시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들어도 무방합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입증되는 믿음입니다. 회개를 통한 용서와 겸손한 믿음이요 살아나는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복음의 죄녀와 참 좋은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 코린토 서간에 나오는 죄인 바오로입니다. 바오로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말그대로 은총에 감격하는 은총의 사도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은총이 한 것입니다.”

 

모두가 은총입니다. 참된 회개를 통한 은총이 ‘참된 겸손, 참된 지혜, 참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아마도 동병상련(同病相憐), 누구보다 복음의 죄녀를 깊이 이해했을 바오로이며, 누구보다 바오로를 깊이 이해했을 복음의 죄녀입니다. 은총의 열매가, 은총의 자녀가 바오로이며 복음의 죄녀이고 회개로 용서받은 죄인들인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중 주님과 사랑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시며 ‘사랑의 제자’, ‘사랑의 사도’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신학생 시절 읽었던 ‘엔또 슈사꾸의 침묵’은 제게 큰 감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은총이라는 어느 시골 신부의 마지막 표현처럼 “모든 것은 다 은총입니다.”라는 점을. 생명도 죽음도, 배교도 순교도, 다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소설이었습니다. 「침묵」은 이렇게 그 내용을 전합니다. 『일본에서 선교하던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이 본국에 전해집니다. 제자였던 ‘로드리고’ 신부는 사실 확인을 위해 일본 선교를 지원합니다. 잠입에 성공하지만, 그 역시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성화’를 밟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가 거절하면 할수록, 그의 신자들은 더욱더 참혹한 고문을 받습니다. 자기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교우들을 보면서 신부는 고뇌에 빠집니다. 배교해서 죽어가는 그들을 살려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신앙을 위해 그들의 처절한 죽음을 묵인해야 하는가? 어느 것이 참된 사랑인가? 고뇌의 늪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한다. 밟는 네 발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다.’ 로드리고의 말이 이어집니다. ‘주님, 당신의 침묵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다.’ 마침내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순교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103위 시성식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조금은 길지만 읽어 보렵니다. 『그리스도 신앙에 더 깊이 들어가기를 갈망하던 여러분의 선조들은 1784년에 자기들 중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냈고, 그는 거기서 영세하였습니다. 이 좋은 씨앗으로부터 한국에 첫 그리스도 공동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도들 자신에 의해서만 세워졌다는 점에서 교회 역사상 유일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신생 교회는 아직 어리면서도 믿음에는 그토록 굳세어, 몹시 사나운 군란을 거듭 견디어 냈습니다. 그리하여 한 세기도 채 못되어 1만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를 자랑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는 1791년 신해, 1801년 신유, 1827년 정해, 1839년 기해, 1846년 병오, 1866년 병인 년에 순교하신 순교자들의 피로써 영구히 새겨져 있습니다. 그분들은 혈통으로나 언어로나 문화로나 여러분의 조상입니다. 아울러 그분들은 피로써 증거한 신앙에 있어서도 여러분들의 부모들이십니다. 열세 살 난 소년 유대철 베드로로부터 일흔 둘의 노인 정의배 마르코에 이르기까지 남자, 여자, 사제, 신도, 부자, 빈자, 상인, 양반 할 것 없이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어 가셨습니다.』

한마디로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 없이 자생으로 태어난 세계 유일무이한 교회라는 점과 갓 태어난 신생 교회는 곧바로 수없이 끔찍한 박해를 굳건히 이겨냈고, 짧은 세월 안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장한 순교자들을 배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순교자들의 후손이며, 그분들이 피로써 지킨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끊임없는 고통 중에도 늘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 내셨고, 그 사랑으로 희망을 사셨던 분들이셨습니다. 이는 오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8,35.37) 그러기에 한국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려고 순교하였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유혹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절대 가치로 여기고, 그 가치를 위해 온 삶을 투신한 분들이 오늘 우리가 기리는 순교 성인들입니다. 그분들의 위대한 삶을 뒤따르는 것이 후손인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조들이 사셨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가치가 마치 절대 가치인 양 여겨지는 세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싸워나가야 할 적은 선조들이 겪었던 박해라는 물리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밋빛으로 위장된 갖가지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유혹들입니다. 이런 유혹이 더 심해지고 있는 오늘이라는 현실은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신앙인에게 근본적인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선택을 위한 우리 모두의 내면적인 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치열한 싸움의 순간이 우리에게는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대 가치를 살아가기 위해 내려야 할 선택의 순간은 어떤 이유에서든 미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복음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9,23)하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는 본래 사람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던 잔인한 사형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십자가가 생명과 부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온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3, 8)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온전히 자신을 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의 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차지한 자리를 예수님께 내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것은 자기의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이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욕심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없으면 삶의 의욕도 없고 성취 욕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결국 자신을 힘들게 마침내 멸망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것은 곧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포기하고, 이기심과 명예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내적 문제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외적 문제입니다. 고통도 죽음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고통과 고생이 의미 있는 고통인가, 무의미한 고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당신 몸소 친히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당신의 제자라면 신앙으로, 사랑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길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도록 초대하고 격려하십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누구도 십자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과 자기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9,24)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곧 순교자의 삶을 사는 길이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거룩한 산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피 흘림의 적색 순교란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가능하지만, 피 흘림 없는 백색 순교는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죽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살아가는 삶이기에 이보다 더 거룩한 순교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쉽게 지칠 수도 있고 중간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가신 예수님은 물론 오늘 우리가 현양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을 바라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기꺼이 사랑으로 바친 순교자들을 뒤따르도록 은혜를 청합시다. 『순교로 빛을 밝힌 백삼위 성인 오롯이 바친 넋에 새순이 돋아 순례의 교회안에 큰 나무되니 님따름 그 생애가 거룩하여라 영원히 받으소서 희망의 찬미 찬송을 이름모를 순교자여 새빛되소서』(성가, 103위 순교성인)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순교한 이들 중에 11명의 성직자와 92명의 평신도, 모두 103 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고, 그 외에도 약 1만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성인품에 오르지 않은 모든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으며, 진정한 사회 개혁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오늘 제1독서는 의인들이 비록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며, 제2독서는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랑의 대헌장'을 들려줍니다. 


이는 순교의 본질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교부 테리툴리아누스가 말한대로,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하느님 사랑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선조들이 걸은 이 '순교'의 길은 비록 그 모습은 다르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오늘 복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순교와 희생의 삶이 일회적이 아닌 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교는 매일의 삶 속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사건이요, 또한 '참된 삶은 긴 순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순교와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의 녹색순교로 죽음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는 것은 죽음에로 부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 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을 갑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을 믿는 일,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께 신뢰를 두는 일,

이토록 제 자신을 바치는 일,

그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아멘

 

 

 

『사람들은 나를 몰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잘 아십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1) 복음서 저자가 여자들의 명단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열두 사도만큼이나 중요한 증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행적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고, 그것을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었던 여자들의 명단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마태 27,55-56).”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마르 15,40-41).”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모든 명단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고,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린 ‘부활의 첫 증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지만(마르 14,50), 여자들은 달아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고, 시신을 무덤에 모시는 것을 지켜보았고, 사도들이 숨어 있는 동안에도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고, 천사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마태 28,1-8).

그 여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복음서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여자들의 이름을 따로 특별히 기록해 놓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증언’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신앙을 증언하는 ‘증인들’도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명단이 똑같지 않고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보통 ‘전승의 차이’ 라고 말하는데, ‘전승의 차이’는 사실 ‘기억의 차이’입니다. 예수님 승천 뒤에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사람마다 기억에 차이가 생겼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 다른 자료 없이 사람들의 기억에만 의존해서 명단을 작성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고 ‘다른 여자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를 기록하던 당시의 신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시중을 들던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이 어쩔 수 없이 ‘다른 여자들’이라고 기록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은 아닙니다. 유명하지 않아서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한 일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인간들은 기억하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모두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데리고 가는 것은, 양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수가 몇 십억 명이라고 해도, 주님께서는 그 신앙인들을 모두 다 알고 계시고, 신앙인들이 한 일을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알고 계시고, ‘내가 한 일’을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3) 우리 교회에는 ‘무명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름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순교자들인데, 우리가 그분들의 이름을 모르고, 그분들의 삶을 모른다고 해도,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서 순교한 일의 가치와 의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이 전해지든지 전해지지 않든지 간에 모든 순교자는 다 위대합니다. 사실 인간 세상에서나 ‘무명 순교자’일 뿐이지,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고,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니, 그곳에서는 결코 무명 순교자가 아닙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슨 특별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고, 이름을 남기지도 않은 대부분의 평범한 신앙인들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인간 세상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적기 위한 생활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몰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잘 알고 계신다는 믿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을까? 서품식 때 불렀던 시편 성가가 생각납니다. “참새도 집이 있고, 제비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사와도 내게는 당신의 제단이 있나이다, 만군의 주시여, 내 임금, 내 하느님이여, 주여 당신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시편 84,4-5; 최민순 신부 역)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개인적인 꿈의 실현이나 자신의 사적인 입신양명에 주력하기보다 현실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또 개인적으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주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교회와 형제들의 구원인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복음을 구현하며 희생 봉사한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 안에서 참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 126[125],5; 화답송)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사랑의 완성은 벗을 위해 목숨을 내여 주는 것이다.<루카 9/23-26>9/2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율법의 완성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 하셨으며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하시며 주님 스스로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순교한 믿음 희망 사랑을 겸소하고 온유하게 받아드려 이 땅에 강한 믿음을 전해주신 그 많은 순교자들의 날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확신을 순교자의 정신 안에 진실과 사랑을 배우고 느끼며 오늘을 지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전세계가 한국이란 나라에 집중하고 칼보던 사람들이 와서보고 놀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국민성 성실성 진실성 시대적 자랑 거리가 많이 있으며 살기 좋은 나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믿음에도 삼철리 방방 곳곳에 순교지의 자랑거리도 넘쳐 흐름니다. 어느해 저는 휴가를 성지가 많은 충청도에 자리잡고 그 근방을 순례하면서 일주일 휴가를 보낸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40년 본당 사목을 하면서 안 가본 성지가 없지만 은퇴후 다시 찾아 그들의 믿음에 감사하고 이렇게 믿음을 지켜주신 선조들의 거룩하고 굳센 믿음을 보고 느끼며 이 나라의 미지근한 믿음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수도원은 복쪽 원산 덕원 중심으로 함경도 만주연길 까지 사목하던 선배들이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38명의 신부수사 수녀들의 순교자 사진을 성당입구에 걸어놓고 로마로부터 가경자에서 성인이 되도록 기도하며 있어 그 앞을 지나는 때 마다 기도하며 사랑과 진실한 삶을 살도록 다잡 해봅니다. 저는 원산에서 6,25 전쟁전 1948년도에 본당 과 수년원에 들려 남쪽으로 내려간다고 하려 들어가니 본당신부님 우리는 이곳에 신자 양들이 있는 한 떠날 수없다 하시더니 검옥 본당에서 옥사도에서 고생하다가 믿음을 위하여 사랑의 완성자로 순교하신 분들입니다. 역사가 증명하고 많은 따라오는 신자들이 공경과 사랑을 받겠지만 오늘 사는 우리도 그 믿음에 함께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순교의 기회가 있을 까? 아마도 공산주의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면 순교의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없어도 우리는 순교 정신을 가지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순교는 겸손과 온유 없이는 불가능 하듯이 우리는 참기힘들고 어려운일을 겸손과 온유로 극복 하고 주님 십자가상에서 지기를 죽이는 사람을 보고 아버지께 저들의 하는 바를 저들이 모르니 용서 하소서 하심 같이 용서하며 사랑을 완성 시키도록 기도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함승수 신부님

요즘은 자신이 흥미를 갖고 있는 분야에 대한 지식을 얻는게 예전처럼 어렵지 않습니다. 유튜브에서 연관된 단어 몇 개로 검색만 잠깐 하면 해당분야에서 나름 전문가라는 사람이 지식을 쉽고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잘 조직하여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밥을 다 해서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듯이 지식을 전해주니 그저 열심히 강의 영상을 보기만 하면 되지요. 이처럼 쉽고 편하니 지식을 늘리기가 참 좋겠다 싶은데 막상 유튜브 강의를 통해서는 지식의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답니다. 보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지루하면 구간을 건너뛰어 버리거나 영상을 몇 배속으로 빨리 돌려가며 ‘수박 겉핡기’식으로 보기에 머릿 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나중에 그 영상을 다시 보면 어디서 본 기억은 나는데 정작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질 않으니 봤어도 본 게 아닙니다. 그런건 지식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비단 어떤 것을 머리로 배울 때에만 그럴까요? 삶에서 중요한 참된 가치를 이해하고 수용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노력과 수고가 더해져야 그 가치가 지닌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 진정으로 ‘나의 것’이 되는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주님에 대해 잘 알기 위해, 그분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만 신앙생활이 주는 참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지요. 그런 노력을 하는걸 귀찮고 억울하게 여기면서, 마치 감나무 아래에 가만히 누워 입을 벌리고 그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게으른 아이처럼, 주님께서 내 마음 안에 신앙의 기쁨과 보람을 떠 먹여주시기만을 기다리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 자세로 임하면 세상에서 신앙생활만큼 지루하고 무의미하며 무가치한 일도 없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시기를 바라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자기들이 주님을 위해,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떤 것들을 해 드릴 수 있는지를 열심히 찾고 실행했지요. 그 결과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며 기쁘게 그분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이름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후배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녀들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도 기록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맘껏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부럽다면, 그녀들처럼 되고 싶다면, ‘최소한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위해 봉헌하고 희생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말고 기꺼이 기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인만큼 신앙생활의 진면목이 보이고, 그것을 통해 누리는 보람과 기쁨이 커지는 법입니다. 비단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

      최용감 안젤로 신부님
신학생 시절 매월 마지막 토요일은 학급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담임 신부님이 강론 중에 갑자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왜 열두 명일까?” 교의신학을 가르치던 신부님의 질문이라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며 답을 찾던 순간, 신부님이 눈을 깜박거리시며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열두 명쯤 되어야 폼 나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미사 중에 숨도 못 쉴 정도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광야에서 40일간을 홀로 보내신 다음 맨 처음 하셨던 일이 복음 선포,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신 일이었습니다(마르 1,12-20 참조). 복음 선포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진영을 갖추는 느낌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예수님 주변이 열두 제자뿐 아니라 몇몇 여인들도 따라다닙니다. 참으로 폼 나는 순간입니다. 전능하신 분, 즉 모든 일을 홀로 하실 수 있는 분께서 왜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니셨을까요? 아마도 공동체가 주는 힘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은 예수님께 때론 공동체의 존재가 위로가 되지는 않았을까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묻습니다.

그것은 내면의
참된 자유입니다.

신앙은
참된 자유로
이끄는
진리이며
구원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세속을
포기하듯
비폭력의 순교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기쁘게
선택합니다.

신앙은
호기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씻기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엄청난
일입니다.

일상생활의
전체가
하느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순교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다른 길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한 길에서
만나는
하나의
삶입니다.

우리 시대에
적합한
올바른
순교의 첫걸음은
우리의
욕망을 줄이는데
있습니다.

욕망을 줄일 때
우리의 삶은
믿을 수 있는 것을
진실로 믿는
믿음의 삶이
펼쳐집니다.

순교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순교자들의
삶이 있기에
이 땅의 신앙의
불꽃은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하느님을 선택한
이 땅의
순교자들처럼
진실한 뜻과
진실한 실천으로
이 하루하루를
봉헌합시다.

순교의 마음으로
삶을 사랑하는
은총 가득한 날
되십시오.

이 땅의
순교자들께
진심으로
신앙을 배우는
신앙의
값진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많은 순교자 덕분에 지금 우리가 편안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순교자의 삶은 끔찍해 보이기도 합니다.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닌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얻게 되는 기쁨에 집중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어야만 행복하리라 생각하지 않고, 박해 시대임에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지요.

순교자들은 자신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 역시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따르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의 지혜서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순교자 대축일인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에는 오래 머물지 않으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긍정적인 마음에는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기적을 누릴 자격이 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살을 뺄 능력이 있다. 우리는 돈을 벌 능력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헤아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찬란한 삶을 살 능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의식적 선택을 해야 한다. 새롭게 보기 위해서 말이다(가브리엘 번스타인).

 

사랑과 희망의 선택

스포츠 방송 진행자인 메간 버나드(Megan Barnard)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한 가지 남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쪽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부어 있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소녀 시절이었던 15세에 나타난 증상으로 병원에서는 ‘림프부종’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반 친구들은 그녀를 놀렸고, 한참 민감했던 나이이기에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단절의 시간을 9년 동안 보냈을 때, 그녀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하기로 합니다. 다리를 감추는 것에서 드러내는 삶을 선택합니다. 감추고 싶었던 다리를 당당히 드러내는 모델이 되어 사진 촬영을 하고, 더 나아가 스포츠 방송 진행의 영역까지 그의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용기 있는 선택이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미움의 선택, 절망과 좌절의 선택이 아닌, 사랑과 희망의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연습의 종교인가, 실전의 종교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가끔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것은 교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은 아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라고 따집니다. 저는 이때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교리서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데도, 교회 내에서 오히려 그 교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밀떡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로 불릴 수 있다면, 그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도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또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빌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795)라고 말합니다. 또,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 믿음을 신자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과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이 큰 차이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에 불과하다’는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을 넘어서서 하느님 본성에 참여한다’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만 가지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은 의미를 잃습니다. 정체성이 바뀌어야 본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라서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아이가 그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으로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수많은 다중 인격 속에서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자신이 개인지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옵니다. 22세의 의대생이었던 스티븐 D.는 약물중독으로 거의 완벽한 개의 경지까지 갔었습니다. 개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꿈을 깨고 나니 개의 모든 감각, 특별히 후각이 인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 모든 향수의 냄새를 다 구별하게 되었고, 환자들을 눈을 감고 냄새로 다 구별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간 길을 다시 냄새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주 동안 이 일을 겪고 나서 약물을 끊고 신경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자녀에게 개 짖는 소리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정말 자신이 믿는 정체성대로 되어 갑니다. 사람 흉내를 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라 믿어야 사람인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만약 이 믿음을 주지 못하면 교회는 그저 껍데기만 남습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훈련만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믿게 만들면 훈련이 아니라 실전을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어떤 종교가 진짜 종교일까요?

 

한국 가톨릭교회는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선교사들이 주체가 되어 소극적인 선교지역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학자들이 먼저 천주교를 연구하여 받아들이는 쪽이 더 적극적으로 교회를 불러들였습니다.

처음 천주교를 접하고 연구했던 이들은 대부분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이었습니다. 실학자들은 당시 조선 시대 성리학의 공리공론에 지쳐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에 진저리가 나서 더 실용적인 학문을 찾다가 서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성리학보다 천주교가 더 실용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천주교를 통해 어떤 이익을 보려고 했던 것일까요? 성리학이 그들에게 해 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성리학은 사물의 생성과 소멸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고 말합니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 ‘이’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 법칙이 되기도 합니다.

좀 복잡하게 들리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理)는 ‘진리’를 나타내고, 기(氣)는 ‘힘’을 나타냅니다. 진리는 말씀이고, 힘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성리학에서도 이와 기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 학문이 실용적인 면을 잃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실용적인 면을 잃게 되는 이유는 ‘실전’을 게을리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무술의 창시자들은 당대 엄청난 무술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창시한 무술들은 시간이 지나며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실제 대련은 소홀히 하고 그 형식에만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연습만 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가보면 여기저기에서 마을 사람들이 태극권을 수련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최고 부자인 마윈도 태극권을 신봉하고 뛰어난 무술로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태극권 무술 고수와 격투기 선수와 시합을 하였는데 몇 초도 안 돼서 쓰러져 정신 못 차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상들이 유튜브에 엄청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무술의 창시자들은 분명 뛰어난 무공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끊임없는 실전을 통해 발전하지 않으면 그저 실전에는 쓸모없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성리학도 그렇게 처음에는 모든 이들에게 실용적으로 삶에 적용될 수 있는 학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양반과 상놈을 나누는 데 이용되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데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성리학이 탁상공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리학이 창조와 운동, 소멸의 원리였다면 그것이 그것을 공부하는 이들 각자 안에서 실용적으로 적용이 되게 해야 했습니다. 연습만 하고 실전에 쓰이지 못하면 시간과 함께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에 한국의 실학자들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는 천주교가 더 실천적이요, 실용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받아들여 보니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이기고 더 높은 경지로 오를 수 있게 해 줌을 삶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천진암에서 천주교를 연구했던 이벽과 정도전과 같은 분들은 철저한 자기를 이기는 삶을 수련하였고 천주교가 실전에서 매우 실용적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천주교는 사제가 없는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도구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그렇게 순교자가 많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종교가 하나의 연습의 도구가 아니라 실전의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약간은 당시 성리학과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살게 만들려고 연습만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진짜 싸움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들은 아직도 연습만 하고 자신을 죽이거나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진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명확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은 평소에 자신과 싸우지 않고 순교 때에 한 번의 결정으로 순교하였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더 큰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작은 전투에서 끊임없이 실력을 다져왔을 것입니다. 나와 싸우지 않는 종교는 이제 실전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껍데기로 남게 됩니다. 나와 진정으로 싸우려면 내가 곧 그리스도임을 완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전이 시작되고 내가 믿는 종교는 실전의 종교가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있는 뉴욕의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은 1973년에 시작하였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로부터 정식으로 본당으로 인정된 것은 1974년입니다. 곧 50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본당 사무실로 들어가는 벽에는 역대 신부님들의 사진이 액자로 걸려있습니다. 초대 사제이신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의 사진이 제일 앞에 걸려있습니다. 퀸즈의 교우들은 지금도 초대 사제이신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가장 큰 한인 공동체로 성장한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은 초대 사제와 교우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시작하였고 벽에 걸려있는 후임 사제들과 공동체의 노력으로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미국과 한국은 교회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지만 유럽의 교회는 1,000년이 넘는 교회가 많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의 초상화가 벽에 한 가득인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성인품에 오르신 분도 있고, 주교님이 되신 분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성 바오로 성당에는 입구에 바오로 사도의 동상이 있습니다. 성당 안에는 역대 교황님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지금 교황님은 266대 교황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 266명의 교황님이 있었으니 평균 8년 정도 교황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박해의 시기에 순교한 교황님도 많았습니다. 신앙의 모범으로 성인품에 오른 교황님도 많았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구교’라고 하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세대를 30년 잡으면 150년가량 됩니다. 대략 1810년가량 됩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1784년에 시작되었으니 교회가 시작되고 30년가량 지나서 저의 조상들이 신앙을 시작하였습니다. 구교 집안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도망 다녔기 때문에 재산의 기본이 되는 땅이 없었습니다. 지역과 혈연으로 이루어지던 사회였기 때문에 낯선 곳에서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교우들이 모여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마땅한 교육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겨우 자리를 잡아도 박해가 시작되면 다시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구교 집안은 늘 가난하였습니다. 

 

둘째는 신앙교육이었습니다. 재산도 버리고, 벼슬도 버리고, 이웃과도 헤어져서 선택한 신앙이었습니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철저했습니다. 기도문을 외워야 했고, 매일 기도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주일에는 성당엘 가야 했습니다. 신자가 아닌 집안과는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자가 아닌 배우자는 먼저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앙이 먼저였습니다. 기일(忌日)에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 연도를 바쳤습니다. 친척들이 모여도 먼저 조상을 위한 연도를 바쳤습니다. 성당에 연미사를 신청하였고, 가족들이 함께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어르신들은 자녀들 중에 한명은 사제나 수도자가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저의 집도 저는 사제가 되었고, 동생은 수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형수도 먼저 세례를 받고 결혼하였습니다. 

 

코로나19를 지내면서 서울대교구에서는 신앙생활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무엇인지 질문하였고, 교우들은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미사를 봉헌하지 못하고,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심단체 및 소공동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 생기는 고립감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좋았던 점은 영상을 통해서 미사를 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교구는 영상을 이용한 다양한 신앙 프로그램을 제작하겠다고 합니다. 신자들과 사목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제작하겠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가진 신앙의 가치가 무엇인지, 신앙이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가치를 안다면, 신앙의 기쁨을 안다면 코로나19는 결코 우리를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발자취를 닮기에도 멀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고 있을까요? ‘다음에 하지 머’라는 게으름. ‘남들도 다 그러는데’라는 자기 합리화.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열등감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을 우리 삶의 액세서리로 생각한다면, 신앙은 일주일에 한 번 주일날 미사에 참여하는 것으로만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조들의 순교자적인 삶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생활은 조그마한 신앙의 시련에도 견디지 못하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본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이 땅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선택하시어 오묘한 방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신앙 고백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자라게 하셨으니 저희도 죽기까지 복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매일의 일상이 순교였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어린시절, 공소 신자들이 먼 길을 걸어 와 주일을 거룩히 지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60년 전의 일이다. 강을 넘고 들판을 가로질러 오는데 겨울 바람이 살을 에어 낼듯이 칼바람이었다. 공소회장님이 대축일이면 두루마기 차림으로 본당으로 향하는데 겨울 혹한 앞에 옷을 벗고 강을 건넜다.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선교사들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자들이 있는 곳이면 높은 산이 문제되지 않았다. 산을 넘고 또 산이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었다. 여전히 산 속에 있다. 허기진 배를 참으며 헛간에서 잠을 잤다. 밤새껏 쥐들과의 전쟁이고 이는 왜그리 온몸을 괴롭히는지 밤새껏 긁어댔다.’ 프랑스 외방전교회 신부님의 기록이다. 

순교의 장면들이 매일의 연속이다. 그 안에 수많은 외국인 선교 신부와 방인 최초의 신부와 한국 순교성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분들의 일상이 순교였다. 갑자기 잡혀서 이루어진 1회적 순교가 아니었다. 내 어린시절 어른들이 삶에서 보여주신 신앙에서도 매일의 순교가 묻어났다. 나도 그렇게 어른 신자들의 모습 보고 자라났다. 내 본당설정 60 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하며 오늘의 우리를 들여다 본다. 지금은 누구한테 신앙의 귀감을 볼 수 있을까? 나의 어린시절 보고 자랐던 생생하게 기억된 귀감 말이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다. 복음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일상을 살아보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9, 23-26).

 

 

 

<그분과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있게 하신

그분이 아니 계시면

나조차 없는 것이니

 

나 삶으로써

나를 있게 하신

그분을 없앤다면

나는 살아도

없는 것이고

 

나 죽음으로써

나를 있게 하신

그분을 드러낸다면

나는 죽어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유희석 신부님

 저는 수원교구 신자들에게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이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우리의 삶과 신앙을 한꺼번에 뒤돌아보게 하는 굉장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비단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하여 강력히 추천합니다. 세상엔 책들이 많이 있지만, 이만한 울림이 있는 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박하지만 철저하고, 신심을 내세우지 않지만 아주 신앙적인 책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있을 때부터 신학생들에게 일독을 자주 권하곤 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권정생은 개신교 신자이기에 좀 생소한 분이지만, 문학계를 비롯한 사회 저변에는 이미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고인이 되신 지금도 여전히 그 뜻을 기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개신교인이라고 해서 개신교를 두둔한다거나 편향적인 자세를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개신교인의 잘못된 생활을 나무라고 질책을 퍼부을 때가 더 많습니다. 글을 읽다보면 세상엔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할 정도로 그의 꾸밈없고 숨김없는 순박한 영혼 앞에 옷매무새를 고칠 때가 있을 정도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탐욕에 물든 세상이다 보니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위로를 받거나 위안거리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생의 나침반과도 같은 촌철살인의 정신으로 삶을 사는 이들을 만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는 이 책과 이 책의 저자를 통하여 제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한 모금의 위로를 얻거나 사제적 삶의 지속적인 샘터를 찾아내곤 합니다. 어느 종교인에게서도 그만한 삶을 산 이들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 봅니다. 더구나 이 책은 최근의 이슈를 점하고 있는 코로나 19사태와 환경과 생태문제에 있어서도 하나의 좋은 안내서 내지 참고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감히 말하지만, 이 책은 종교를 넘어 한 인간의 대서사시로 여겨도 무방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믿고 사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면서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즈음에 우리의 신앙도 무엇인가 변화되고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속 좁은 신앙에서 폭을 더 넓히라고, 알맹이로 꽉 찬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제하는 듯합니다. 지금까지의 대중친화적인 신앙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예수가 바라는 삶은 현실의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원한다.” 

 

 

 

“이름 모를 순교자여. 새 빛 되소서.”

     전현수 마티아 신부님

“순교로 빛을 밝힌 103위 성인. 오롯이 바친 넋에 새순이 돋아. 순례의 교회 안에 큰 나무되니, 님 따른 그 생애가 거룩하여라. 영원히 받으소서. 희망의 찬미찬송을. 이름 모를 순교자여, 새 빛 되소서.”

(가톨릭 성가 285번 <103위 순교 성인> 1절) 

이 성가의 가사 중에 다시 한번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름 모를 순교자여, 새 빛 되소서.”라는 1절의 마지막 가사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인 오늘, 우리는 마땅히 103위 순교성인들을 기리며 기념해야 하겠지만, 이들과 더불어 아직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성인으로 불리지 못하는 분들과 이름 모를 수많은 순교자들 역시 잊어선 안 됩니다. 그리고 비록 피 흘려 목숨을 바치지는 않았지만, 신앙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평생 박해를 피해 타향을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하다 일생을 마친 분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 역시 자신의 삶을 다 바쳐 신앙을 위해 헌신하신, 넓은 의미로서의 순교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이 순교자로서의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거나 그 한순간의 결단 때문만이 결코 아닙니다. 백 년 가까이 되는 긴 세월 동안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또 최후의 순간에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굳은 믿음과 그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복음적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라고 살고 싶은 욕망이나 출세하고 싶은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결국 하느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처럼,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지혜 3,5)이며,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지혜 3,7)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이러한 굳건한 믿음과 그에 따른 삶이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어떤 역경과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사랑을 지킬 수 있게 한 순교의 바탕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들은 무엇이 정말 소중한 것인지, 무엇이 정말 값진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오늘 기념하는 103위 순교성인들과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전수한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이어받아 이 시대의 빛이 되는 자랑스러운 ‘순교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자답게 사는 일

     이종희 사도요한 신부님

1784. 4. 만 명. 1984. 103, 124.

교형자매님들, 이 숫자들이 무슨 의미를 지닌 지 잘 아시지요?

1784년 첫 세례자 이후 4번의 대박해로 약 만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셨고, 200주년이 되던 해 1984년 103위 순교자가 시성되었고, 지금은 124위 복자들의 시성을 위한 기도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순교한다는 의미는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참되고 틀림이 없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4대 박해로 순교한 만여 명의 신자 분들은 자신들이 믿고 고백하는 믿음이 ‘절대 참된’을 목숨을 걸고 증거한 분들입니다. 

돈이나 명예를 걸고 증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뿐인 생명을 내걸고 증거한 분들입니다. 

 

그 박해가 끝난 지 겨우 147년, 요즘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에 의해 신앙생활이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미사와 각종 신심모임이 중단되는 상황.

처음에는 미사와 영성체에 대한 갈증이 컸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덤덤해져가고….

주일 성당에 못 가던 시간이 아쉽고 뭔가 부족하고 텅 빈 것 같은 느낌들도 시간이 흐르자 미사 안가는 주일시간을 은근히 즐기게 되었습니다. 

미사가 재개되니 주일미사 참석 비율이 작년에 비해 평균 60% 정도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증거할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안일함에 빠지고 게을러진 우리 생활을 돌아보고 일상에서 신앙을 증거해야 할 우리의 순교자적 생활은 생략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지혜 3,5)

오늘 제1독서의 말씀입니다.

물리적으로 신앙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일은 없습니다.

외부의 압박보다는 오히려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세상에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싸움이 자기와의 싸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마음먹고 안하면 된다.’ 가장 잘 아는 ‘나’이지만 이런 저런 변명과 핑계로 유혹에 기꺼이 빠지곤 합니다. 

 

순교자는 증거자입니다. 

순교자대축일을 경축하면서 코로나로 힘든 시간들이지만 우리도 지금 내 믿음을 증거하는 날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큰 은혜가 기다립니다. 

 

나는 내 마음을 증거하며 사는가? 예! 그러면 나는 순교자입니다.

 

 

 

다름의 축복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저희 부부는 사이가 좋은 편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 했던 헬레나는 저에게 꼭 필요한 책이나 영화를 종종 추천 해 줍니다. 코로나로 저녁 모임이 없어져 일찍 퇴근할 수 있었던 지난 3월부터 한동안 헬레나가 추천해 준 드라마를 보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의 아저씨>와 <동백꽃 필 무렵>은 도시와 마을공동체를 연구하는 저에게 꼭 맞는 드라마였습니다. 

가족처럼 지내는 이웃들이 서로 돕고 상처를 치유해 주는 따뜻한 공동체에 찐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보는 내내 마음이 짠했던 <눈이 부시게>는 장인어른 돌아가신 뒤 저희 집에 모신 장모님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드라마였습니다. 

 

사서 출신답게 그때그때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아내가 있어 든든합니다. 

29년, 꽤 긴 시간을 부부로 살았는데도 여전히 연애시절의 설렘이 남아있습니다. 

술이 과해 코를 심하게 고는 날을 빼면 늘 함께 잡니다. 

새벽에 잠을 깨면 곁에서 곤히 자는 헬레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사랑스러워 볼을 살짝 쓸어주고 어깨와 등도 다독여줍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잠결에도 포근히 안아주며 내 등을 두드려 줄 땐 단단히 묶인 매듭을 보듯 우리가 서로에게 소속된 부부라는 걸 느낍니다. 

 

우리 부부 사이가 늘 이렇게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신혼 초에는 많이 싸웠습니다. 더없이 사랑스럽던 연인과 혼인해서 함께 살아보니 어쩌면 이렇게 나와 다른지 황당했습니다. 

생김치를 좋아하는 제게 풀냄새 나는 생김치 말고 신 김치를 먹으라고 합니다.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어야 맘이 편하고, 할 일을 끝낸 뒤에야 놀든 쉬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와 달리 헬레나는 설거지 그릇을 수북이 쌓아놓은 채 드라마를 보곤 했지요. 

화를 내고 또 부탁도 해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싸워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 접고 포기하기로 마음먹어도 순간순간 화가 치밀면 또 싸워야 했습니다. 

 

서로 다른 것 때문에 싸워야 했던 악순환을 깨끗이 끝내준 게 ME 주말이었습니다. 

중2 큰아들부터 여섯 살 막내딸까지 네 아이를 성당 이웃들께 맡기고 다녀온 2박 3일 동안 둘이 참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 게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고, 상대방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나와 다른 걸 인정하고 존중해야 함을 깨닫고 나니, 내게 없는 배우자의 장점이 보였습니다. 단점을 꼬집어 탓하는 대신 장점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니 사랑 듬뿍 받고 자라는 꽃나무처럼 함께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 존중받으니 자존감도 당연히 커졌고요. 

부부관계가 좋아지니 자녀와의 관계도 덩달아 좋아졌습니다. 

“엄마랑 아빠랑 사이좋은 게 참 고마워요.” 

언젠가 막내딸에게 들은 이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름’ 때문에 싸웁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닌 그저 다름일 뿐입니다. 

나와 아주 많이 다른 배우자를 만난 덕에 까칠하고 경직되고 지나치게 예민했던 제가 이만큼 이나마 부드러워졌습니다. 

그저 인정했을 뿐인데, 다름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다름은 축복입니다.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기회는 아직 있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하느님은 지금 모습 그대로인 당신을 부르십니다!

크신 사랑 가득 담아 당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만일, 당신에게 자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그분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요구하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는 포도밭 일꾼들을 모으는 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은 하루에도 여러 번 다른 시간에 일꾼을 모으기 위해 나갔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마지막 시간까지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그러자 그들은 “아무도 우리를 고용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밭 주인은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돈, 권력, 향락, 안락함 등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을 우선 순위에 두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마음, 이웃과 자연 그리고 하느님과의 조화를 이루며 그분께서 원하시는 가치관에 따라 삶을 향유하는 것입니다.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매 순간 우리 모두를 불러 모으십니다. 더구나 소외된 이웃들과 노년층처럼 “낙오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여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비난의 의미가 아니라 격려해 주시며 분명한 부르심의 의미로 “어찌 나의 왕국을 위해 일하지 않고 일생을 허비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인간의 품위를 높여 줍니다. 왜냐하면 가족의 부양을 위해 유익하기 때문이며, 이웃에 기여하고 자신을 완성해감으로써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닮아 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하심을 받아들여 혼연일체로 협력해가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과 더욱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어느 시점에 있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은 “큰 보상”으로 “하늘나라”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그분을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 일하며,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바로 강생하신 하늘나라이므로 그분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분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고 그 일꾼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요? 학식 높고 돈이 많으며 권력 있는 사람이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들과 선한 의지를 지닌 이들 특히, 가난하므로 어느 누구도 눈여겨 찾지 않는 이들까지도 일꾼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부름을 듣고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일할 것을 받아들이고 이를 일상 속에서 증거와 말씀의 삶을 통해 그분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기쁜 소식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저를 통해, 당신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일하도록 지금 이 순간 선명한 음성으로 당신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그분에게 부적합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느 때나 환영하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에게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도 나의 포도밭으로 가시오" (마태 20,7) 이 말씀에 응답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늘나라’가 인격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일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이런 군난 때에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의 편지에서 (제25신의 발췌, 김대건의 서한, 이원순, 허인 편저, 1975년, 정음사)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主恩)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 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

씨를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염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지로 천국을 누릴 것이오.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지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형제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에 성교 들어온 지 5,60년에 여러 번 군난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 중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 아니면 주상 주벌(主賞主罰) 아니랴.

주의 성의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한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다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또 무슨 일이 있을 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 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은 자 20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들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를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은을 빌어, 삼구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事主救靈事)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하노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오늘 순교성인들의 신앙을 기리며 우리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위한 선택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실학자들 몇몇의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들 가운데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는 저희 집안에 7대조 할아버지가 되십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선교사를 통해서 교회가 시작된 것과는 다르게 자생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은 세계에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유교적인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조상 제사에 관한 문화적인 충돌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에 당파 싸움이 겹쳐지면서 박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명이 순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우리나라를 방문하시면서 순교자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위 성인 시성을 하셨고,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문하시면서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124위 복자 시복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믿지 않는 이들에게 순교는 이해할 수 없는 죽음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순교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봉헌하는 거룩한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신 가장 위대한 분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전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우리가 순교를 생각하면 피의 순교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순교는 그렇게 피의 순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로 일상의 삶 안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바로 순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나를 희생할 수 있는 모습이 바로 순교입니다.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이권을 쟁취하기 위해서 버티는 것이 순교가 아니라 내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순교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코로나 19시대를 살아가면서 사실 박해시대와도 같은 신앙적 위협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어떤 모습이 진정한 신앙의 모습인가 그 가치의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혹자는 바이러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대면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마치 순교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대면 활동을 통해서 많은 이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면 그것 역시도 하느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다시금 요구되는 신앙의 모습은 첫째는 ‘회개’입니다. 곧 우리에게 닥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그동안 하느님의 마련해 주신 공동의 지구 안에서 우리 인간이 그 균형을 깨고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반성하면서 앞으로의 시간 동안 공동의 집인 지구를 함께 살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연대’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가 하느님의 뜻 안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더욱 창조적인 연대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혼자일 때 힘이 없지만 함께할 때 그 힘은 커집니다. 그래서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복음’입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기쁨이 되어 줄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는 삶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위기가 축복이 됩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위기 중에도 더욱 더 사랑을 전하고, 기쁨과 평화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어려운 시대에 회개와 연대와 복음은 우리가 이루어 갈 참된 순교의 모습이라는 것을 함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고 하였다. 즉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동이다. 현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지금의 참된 순교의 정신이란 내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없이할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라는 것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영세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 중에 많은 분들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은 것이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 당하고 죽으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받아들임”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그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만일 나에게 필요 없는 헌신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냥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를 한 것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지만, 독신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이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즉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들을 시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조선 가톨릭신자들은 일만여 명이 순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나라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과 세상나라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면,

비슷한 말 같지만 정의 진리 때문에, 세상 욕망 때문일 때 크게 다르죠.

1791년부터 70여 년간 조선 가톨릭신자들은 일만여 명이 순교했습니다.

 

혹독한 형벌에서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 아드님 승리를 함께 누리면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당했지만 지금은 하느님가족으로 구원됐죠.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희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속욕망 살기에 목숨 걸 건지 하늘나라 행복에 목숨 걸 건지 정합시다.

십자가 진다는 것이 기쁨이 될 거라고 설레는 마음이면 참 멋진 분이죠.

 

 

 

조용국 프란치스코 신부님

찬미 예수님 

1.김수현 작가의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라는 책에 일상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학시절 친구 자취방에 놀러 갔다가, 화장실의 물때를 보고 ‘어떻게 집 화장실에 물때가 있지? 하며 놀란 적이 있다. 

그때 놀란 이유는 내가 화장실 청소를 너무 잘해서가 아니라 해본 적이 없어서였는데, 언제가 물때가 생기기전, 엄마가 청소를 해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항상 깨끗하게 청소된 집에서, 말씀히 세탁된 옷을 입었으며, 밥솥엔 항상 밥이 있었다. 

내게는 늘 당연했던 그 일상에는 엄마의 수고가 있었다는 것을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늘 이런식이라, 

시간을 들여야 하는 지루하고도 고된 일이지만, 

겉으로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기에 쉽게 간과된다. 

하지만 그 노력을 중단하는 순간, 물때가 생기고, 더러운 옷이 쌓이고, 바닥엔 발을 디딜곳이 사라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삶의 공간은 금새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2.일상이 있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도 제주에 있을 때 제주 중산간의 작은 집을 빌려 1년동안 자취를 해 보았습니다.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수고롭고, 힘든 것인지를 그때 체험해보게 되었습니다. 식사준비, 뒤처리, 청소, 빨래, 정리정돈등 모든 것을 혼자힘으로 해 내어야만 했습니다. 전에는 항상 해 주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다보니 혼자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설거지 그릇도 될 수 있으면 적게 만들고, 방에 뭔가 떨어뜨리려 하지 않고, 정리정돈도 그때 그때 해야만 했습니다. 조금만 게으르면 설것이 그룻이 쌓이고, 쓰레기가 쌓이고, 먼지와 때가 쉽게 쉽게 쌓이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신경쓰지 않으면 집안은 금새 엉망이 되고, 더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치워야 될 것이 있으면 바로 치워야 했고, 버려야 될 것이 있으면 바로 바로 버려야 했습니다. 

3.저는 그때 나의 일상이 있기까지 많은 분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제 일상을 준비하다보니 제 일상을 준비해주는 분들의 노고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감사한 것인지를 새롭게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일상이 있기 위해서 누군가의 노고와 희생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4.요즘 우리는 일상이 무너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처럼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수다도 하지 못하고, 술도 홀가분하게 마시지 못합니다. 여행을 가기도 어렵고, 영화를 보기도 어렵고, 음악회나 운동시합 관람도 어렵습니다. 하여튼 사람과의 만남이 차단되다 보니 관계로 그동안 살아왔던 우리의 삶이 우울해지고, 막막하고, 답답해집니다. 스트레스를 풀어낼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습니다. 

5.성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공식적인 모임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다보니 모든 관계도 다 소원해지고, 신앙도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에는 미사참례 안하는 것이 대죄처럼 느껴졌는데 요즘에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는 신앙적인 나태함과 무관심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6.이 코로나는 우리가 그동안 누려왔던 우리의 일상들을 깨부수고 있습니다. 일상의 많은 부분들이 제한받고, 통제받고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이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무너지다보니 여태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력감과 좌절감이 우리 마음안에 쌓여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서로가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답답함과 응어리들을 갖고 살아갑니다. 

7.아마도 이처럼 일상이 무너진 삶은 내년에도 계속되지 않을까 합니다. 앞날이 잘 보이지 않는 요즘, 그래서 더 더욱 마음속의 우울감은 늘어만 갑니다. 

8.우리는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삶을 요구받고 있으며, 도전받고 있습니다. 이제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전에 살던 방식의 삶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9.우리는 먼저 그동안 우리가 누려왔던 일상에 대한 소중함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또 노력하지 않아도 내 심장은 뛰고 있고, 내 허파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으며, 내 장기들은 알아서 자신들이 해야할 역할을 하고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몸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명을 위한 생명체의 움직임에 의식적으로 감동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주변의 꽃과 나무들은 이 기후가 파괴되는 상황속에서도 여전히 잎과 꽃을 피워내고, 결실을 거두는 아주 당연한 자연의 법칙에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거대한 우주가, 인간이 미처 다 깨닫지 못하는 방대한 우주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연의 법칙대로 움직이고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달과 별들이 제자리를 잡아감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10.나를 위한 이 모든 것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숨결이 숨어있음에 대해서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묘하게도 나의 인생을 허락하시고, 나안에 나도 모르는 수많은 선물들을 숨겨 두시고, 나의 인생을 통해서 사랑과 선의를 배우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묘하신 섭리에 무엇보다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없으면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나를 포함해서 살아있는 것들은 단 한순간도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11.하느님께서는 그동안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나의 일상들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랑을 해오셨던 것입니다.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으시고, 부셔지시고, 연약해지시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위해 모든 것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했던 우리의 일상들은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그 일상들은 참으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사랑의 결과였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상들 자체가 귀중한 하느님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12.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역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교회의 수많은 값진 전통들을 통하여, 그안에 수많은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통하여 우리의 일상을 보존해주시고, 지켜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귀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당신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인 것입니다. 

13.이 코로나 시대는 역설적으로 숨겨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시기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깨달음이 있어야만 우리는 이 코로나시기의 우울함을 이겨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랑에 대해서 희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절대로 전처럼 인간의 오만함속에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14.저도 제주생활의 낮아짐과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는 삶속에서 제 삶에 말로만의 감사가 아니라 진정한 감사의 꽃이 피어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멀고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좀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깨닫고 겸허해 질 수 있어야 하고, 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15.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정하상 바오와 한국 순교자들의 대축일이기도 합니다. 그분들의 하느님께 향한 진정한 삶이 있었기에 그분들의 공로로 그동안 우리가 나름대로 안정된 신앙생활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분들의 그 삶의 모습들은 우리 신앙안에서 깊이 뿌리박고 있는 우리 신앙생활의 원천이고, 힘인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깨달아야, 인식해야 마음속으로부터의 깊은 감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16.어렵고 힘든 시기이지만 이 위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감사할 줄 아는 진정한 신앙인, 성숙한 신앙인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코로나는 인간생존의 위기이지만 동시에 새롭게 태어나라는 하느님 사랑의 권고이자 충고인 것입니다.

내게는 너무나 당연했던 그 일상의 이면에는 엄청난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음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주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아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2020. 9. 20.)(루카 9,23-26)

박해자들은 순교자들이 왜 그렇게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증명할 수도 없고,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순교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에는 미친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예수님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마르 3,21).> 

반면에 순교자들은 허무하게 지나가버릴 현세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배교자들과 박해자들의 무지를 안타까워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길의 중간 어디쯤에서 살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믿음을 헛된 망상으로만 생각했던 박해자들의 생각과 그 생각을 어리석은 무지몽매로 생각했던 순교자들의 생각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두고 보자는 사람의 말은 무섭지 않다.”고 세속 사람들은 말하는데, 무엇이 지혜인지를 지금 깨닫지 못하고, 그 지혜의 길을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순교자들의 믿음이 옳았구나.” 라고 깨닫겠지만, 그것은 너무 늦은 깨달음이 될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해도 자기 삶을 바로잡을 시간도 없고, 자신에게 닥친 심판을 피할 방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신앙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걷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입니다. 박해자들과 믿음 없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 자체를 의심하면서 그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인들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이 증명할 수도 없고, 경험해 본 사람도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원’을 유한한 인간에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증명되지 않은 일도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논리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면, 죽을 때까지 하느님,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힘이고, 증명할 수 없다고 해도 진리를 진리로 바로 아는 힘이고, 살아보지 않았어도 믿는 대로 자기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와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태양계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는 인간들이, 은하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영적인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버리고”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욕심과 욕망 같은 것들입니다.

버린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신앙인들과 믿음 없는 자들은 완전히 정반대 위치에 있습니다. 믿음 없는 자들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신앙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신앙인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믿음 없는 자들은 중요한 것이라고 움켜쥐고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가운데에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해서 갈등과 고통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바로 자기 자신이 박해자가 되는 셈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신앙생활에 따르는 온갖 고난을 감수하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집니다. 이것도 역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 없는 자들은 “편하고 쉬운 길을 놓아두고 왜 굳이 어렵고 힘든 길로 가는가?” 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을 신앙인 스스로 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길이 바로 이 길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 길로 가는 것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신앙생활은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걷다 보면 높은 산도 만나고 험한 고개도 만나는데, 돌아가는 길이 없으니 그냥 정면 돌파를 하는 것뿐입니다.

(신앙 여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의 가시밭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다 보면 분명히 편안하고 쉬운 구간도 만납니다. 그럴 때에는 누구나 어려움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렵고 힘든 구간을 만날 때, 목적지만을 생각하면서 참고 걸어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4-25).”

우리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내 인생은 어떻게 끝나게 될까? 내가 하고 있는 일, 또는 내가 얻기를 바라는 그것이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일까? 나는 혹시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된 신앙인은 임종 때에 홀가분한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지만, 세속에 속한 것들에 대한 미련과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임종 때에 후회하고 두려워하면서 생을 마칩니다.

(한 번이라도 임종을 지켜 본 사람이라면 그것을 압니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그냥 살다가 또 그렇게 마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리고 열매맺을 수 있도록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리는 대축일입니다. 미사의 말씀은 피와 땀과 눈물로 비옥한 신앙의 터전을 일군 의인들의 신앙의 기본기를 우리에게 전수하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하다."(루카 9,24)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의 필수 요소로 십자가를 제시하십니다. 십자가는 유다인들에게는 치욕스런 형틀입니다. 이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각자 피하고픈 최악의 고통을 비유하는 동시에 예수님께는 몸소 실제로 껴안게 될 죽음의 방식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

사실 우리는 크건 작건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삽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가장 부족하고 약하고 못난 점일 수도 있고, 의도치 않게 닥친 사고나 시련일 수도 있지요. 벗어나고 싶지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환경적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인간은 꼭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인생의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의 부침(浮沈)을 겪으며 자기 십자가를 어느 정도 순응하고 받아안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어떤 지향이냐에 따라 적응이거나 포기, 아니면 성장이라 부를 수 있는 여정인 것이지요.

 

"날마다"

십자가의 특성은 "날마다" 져야한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성장을 위해 허락하신 십자가는 며칠 지다가 내팽개칠 수 있는 취미나 오락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매일 십자가의 고통과 어려움을 견딘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 아무리 하찮고 작은 십자가라도 나름 비장한 각오와 결심이 매일 동반되어야 하지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향한 '결심'은 날마다 새로이 '갱신'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만 견뎌보리라"는 다짐이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지요. 이 결심의 갱신을, 무겁고 성가시고 불편하고 고통스런 십자가가 은총으로 완전히 '습(습관, 익힘, 물듦)'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날마다 날마다, 은총으로 십자가와 완전히 한 몸이 되기까지 날마다 날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십자가(고통, 고난, 단련, 시험)를 통해 영원한 행복을 쟁취한 의인들의 영혼을 칭송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 3,9)

주님께 대한 신뢰와 신앙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것은 어느 결에, 어쩌다가, 우연히, 단발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고통 중에 그들이 쌓은 "신뢰"와 "믿음", "거룩함"이 그들 존재에 "습(習)"으로 스며들어 "덕(德)"의 실체로 정착되었기에 가능한 응답이지요.

 

그런 의인들이 세상의 얄팍하고 얕은 눈에는 "파멸"과 "징벌", 즉 불행이나 불운으로 비치지만, 실제로 그들은 엄청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며, 은총과 자비를 받고, 주님의 돌봄을 받는 축복이지요. 이것이야말로 그보다 더한 축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내세를 믿는 모든 이의 바람이고 희망이니까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를 확신에 찬 어조로 격려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

그렇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어떤 십자가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물론 만만하지는 않겠지만요. 나 혼자만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께 대한 사랑 때문에 최선을 다해 주어진 십자가를 지려는 우리를 결코 혼자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그 본성상 이미 주님과 한몸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주어지는) 모든 십자가에는 나의 구원을 애달파 하시는 예수님께서 못박혀 계십니다. 십자가와 함께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받아안음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동시에 부둥켜 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시지요. 십자가와 주님과 나, 이 셋이 하나가 되면 넘어서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순교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한없이 미련해 보이고 바보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믿는 우리는 의인들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매일 결심하고 각오를 다지며, 응답하고 실천한 여정을 공경하고 경외합니다. 순교는 주님의 의인들이 "날마다" 쌓아올린 부단한 인내와 헌신의 열매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날마다" 지는 십자가는,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벗님을 온통 주님으로 물들이게 해 줄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진리 안에 거닐며 주님과 함께 사랑 속에 살게 해 주고, 은총과 자비를 누리며 주님의 돌봄 안에 머물게 합니다. 날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를 격려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맞이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이 멋진 순교자들의 자랑스런 후손이니까요.

 

 

 

나를 여기까지 이끈 힘은 무엇인가? <루카 9, 23-26> 9월 2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기진맥진하여 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사건이 87년 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힘의 원천은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이었고 끝내 하느님의 힘으로 참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내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서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을 각자가 가진 생명이 소중하니 세상의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 바로 내 생명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순교 정신은 우주보다 각자의 생명보다 소중한 하느님과 만나서 누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중하지 않다고 하시며 귀한 목숨과 하느님을 바꾸어 영원한 승리의 월계관을 받으심을 경축하며 우리도 따라 사는 삶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먹는 힘으로 산다고 합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잠을 자도 죽음을 막을 수 없으나 하느님의 힘이 있으면 불 속에도 들어가고, 휘광이 칼 아래도 목을 내주고, 행복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고난이 닥쳐도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에 승리하신 것같이 죽어도 살리라 믿고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로 얻은 것은 우주보다 가치 있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에게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죽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중심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매일같이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힘은 권력을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정의가 없는 권력에 의지하여 살고자 하지만 10년 권세가 없다고 하듯이 권력의 끈이 떨어지면 법대로 처리되어 힘을 잃게 됩니다.

어떤 이는 “돈이 힘이다.” 하며 재산을 아무리 열심히 모아도 돈은 흐름을 따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어서 그를 잡고 살려면 폭풍에 나무가 날려가듯, 지붕이 날려가듯 날아가 버립니다. 

명예도 힘의 원천이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명예는 퇴색되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됩니다. 잠시는 명예의 힘이 있는 것 같지만, 영원할 수 없어서 또 다른 것이 나의 명예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같이 힘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참 힘이 아닙니다. 영원하고 변함없는 퇴색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힘은 영원한 자비와 완전한 일치와 우리를 위해 먼저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랑의 하느님만큼 큰 힘은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관리들이 “이것 줄게, 저것 줄게, 생명을 살려 줄게” 했지만, 자기 자신을 살게 하는 것은 하느님 외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이 신비의 힘이 어디서 나오고, 어떻게 간직하고 함께 갈 수 있는지 알고,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단단하고, 아름답게 살려고 해도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환경의 변화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권력자, 재력가, 명예로운 자가 크고 아름다운 집에서 산다고 해도 하느님 없으면 헛것입니다. 저는 이 골방 하나에서 하느님이 힘이 되어 주셔서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내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 순교자들처럼 하느님을 힘으로 알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함승수 신부님

 지금은 보석이 취소되어 다시 구속수감 되었지만, 전광훈씨가 한창 막말들을 쏟아내던 시기에 문재인 대통령에게 '언제까지 본인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순교할 각오로 제 몸을 던지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극적인 언사로 사람들을 선동하려고 한 말일텐데, 그날 그가 비장하게 내뱉은 말 중 '순교'라는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순교'라는 말의 의미가 이렇게 부정적인 뜻으로 변질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이 든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순교'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띄게 된데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나 극우주의 테러단체들의 영향이 클 것입니다. 그들이 '자살폭탄 테러' 같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무고한 생명들을 희생시키면서, 그런 자신들의 행동에 '순교'라는 이름을 붙여 정당화하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순교'라는 말의 의미가 '스스로의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는 폭력행위'라는 뜻으로 변질되게 된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진짜 순교가 아닙니다. 참된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은 당신의 개인적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자비를, '희생'이라는 사랑의 행위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순교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행위여야 하며, 아무리 옳은 지향을 가졌다고 해도 결코 인간 생명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런 순교의 모습이 '힘'의 원리로 지배되는 세상에서는 연약하고 쓸모없어 보이겠지만, 순교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이야말로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인 지혜서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아가는 '의인'들이 어떤 상급을 받게될 것인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지혜 3,9)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는 순교자들이야말로 그런 '의인'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이 시련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두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전적인 '신뢰',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참된 행복에 대한 열망.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수많은 한국 순교성인들 중 백정(白丁) 출신인 '황일광'(黃日光)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나에게는 천당이 둘 있다. 하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고 또 하나는 양반과 쌍것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똑같이 존중하는 이 세상의 천당이다.”

 천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백정' 신분이라는 이유로 온갖 멸시를 당하며 짐승처럼 살던 그였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되어 그 공동체 안에서 계급에 따른 차별없이 동등한 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사랑받는 체험을 통해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완전하게 실현된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게 되었고 그런 강력한 희망 덕분에 모진 박해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순교자들은 하느님과 함께함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참된 행복의 세상에서, 그분의 사랑을 기반으로한 새로운 질서 안에서 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절대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절대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열망(熱望)으로 온갖 박해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인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런 순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그런데 이런 '순교'의 마음가짐은 한순간 갑자기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지요. 그 과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그리고 그 과정은 구체적으로 두단계로 나뉘어집니다. 첫번째 단계는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버리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원래 '거부하다', '거절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함부로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고집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또한 '버린다'는 것은 곧 '비운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기존에 차 있는 것들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나의 취향, 주관, 계획 등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온 마음자세를 비워내고, 그 안에 예수님의 뜻을 채움으로써 그분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두번째 단계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고통과 시련을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참아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로 적극적으로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원래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듯, 소중하게 끌어안는다는 뜻이지요. 곧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분 뜻에 대한 자발적 순명으로 십자가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거기에 담긴 의미와 뜻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쉽고 편한 것을 찾는 본성을 지닌 우리 인간이 십자가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왜 끌어안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겠지요.

 배 밑바닥에는 '바닥짐'(Ballast)이라는 것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물에 뜨기 위해서는 최대한 무게를 가볍게 해야할텐데, 일부러 짐을 싣는 것이 쓸 데 없는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배의 바닥 한가운데에 돌이나 모래, 물 등을 실어 무겁게 함으로써 배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며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런 바닥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배에게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수 있는 바닥짐이 배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끌어안은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이지요.

 이처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과정이 일회성으로 그쳐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이 매일 꾸준히 반복되어 습관이 되고 그렇게 내 삶의 일부가 됨으로써, 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담대하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순교자'의 모습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하는만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도 그만큼 가까워질 것입니다.

 

 

 

하느님을 꿈꾸다.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얼마 전 수도회 형제들과 함께 청양 다락골 성지에 갔습니다. 무명 순교자들 무덤가에서 형제들과 함께 기도를 바치고, 각자 흩어져 침묵 속에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참 뒤 다시 무명 순교자 묘를 찾았을 때 한 형제가 그 순교자 묘 옆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렇게 누워 있는 그 형제를 저도 한참 동안 멀리서 바라봤습니다. 순교자 묘 옆에 누운 그 마음이 순교자들 모습과 겹쳐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일었습니다. 무엇보다 순교자 묘 옆에 누워 순교자들 마음과 함께 하고자 하는 그 형제의 마음이 좋아보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랑의 기운과 위안의 따뜻함이 번져갈 때,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렇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행복한 선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소중하고, 사람이 있음에 세상이 아름다워야 함에도 그 안에는 여전히 많은 아픔과 슬픔 그리고 죽음이 그늘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또 다른 선물로 이 땅에 하느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을 준비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죽음마저도 품에 안고 가면서, 그것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사람들을 우리 앞에 세워주신 것이죠. 청양 다락골을 찾은 형제가 무명 순교자의 무덤 옆에 누워 하느님이 주신 선물인 그분과 마음으로 손잡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며 행복했고, 그 모습을 보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순교자와 우리가 같은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꿈은 우리가 자신의 세상에서 걸어 나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로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순교자들이 보았던 큰 희망을 우리도 함께 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나라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한국순교성인과 아울러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122위 순교복자 이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계십니다. 전년도에 우리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시복을 추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순교자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근·현대 신앙의 증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분들은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와 주로 덕원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돌아가신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와 동료 37위 순교자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은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한국전쟁 중에 순교하셨습니다. 특별히 올 해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 해에 이분들을 기억한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지난 2013년 10월에 서울교구 신부님들과 함께 독일 수도원으로 사제 피정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독일 성 베네딕토회 오틸리엔 연합 수도회는 1884년 독일 보이른 지역 15개 수도원 소속 1,806분의 수도자들이 설립하였습니다. 성 베네딕도회의 영성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라는 이상을 표방하며, 자신들이 파견된 해당 교구에 가서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 및 예술 활동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도왔습니다.

그 수도원은 아프리카 우간다에 선교사를 파견하다가, 1909년 2월 당시 서울대교구장 뮈텔 대주교님의 간곡한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사우어 신부등 2분의 선교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분들은 지금 서울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즉 서울 대신학교가 들어서 있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백동)에 처음 자리를 잡고 1911년 수도원을 세우고, 1913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10년에는 ‘숭공기술학교’를 세워 목공, 칠공, 원예 등 7개 작업분야를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숭신사범대학’을 세웠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1921년 사우어 신부를 원산교구의 주교로 성성하고, 1927년 원산교구 자치를 위임하자, 우리나라 베네딕도 수도회는 함경도 덕원으로 수도원을 옮기고 신학교도 세웠습니다. 1925년부터는 투칭의 포교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의 협조를 받아 활발한 사목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28년에는 원산교구로부터 독립 설립된 연길지목구에 1922년부터 수도원을 세워 활동하기 시작한 연길 베네딕도 수도원은 1931년 11월부터는 스위스 캄의 올리베타노 수녀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아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1934년 8월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고, 같은 해 9월 5일 브레허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성성되고, 1937년 4월 연길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주교로 성성되었습니다.

1940년 교황청으로부터 덕원 수도원 자치구는 덕원 면속구로 승격되고,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명하여 12개의 본당과 89개의 공소 신자 11,000명, 신부 34명, 수녀 33명의 교세를 갖추게 되었고, 1946년 연길 대목구는 교구로 승격되어 중국교회로 소속을 달리하게 되었으나 공산당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1945년 해방 후 덕원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원은 소련군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1950년 10월에는 독일 신부 6명과 우리나라 신부 5명이 처형되었고, 사우어 아빠스 주교를 비롯한 신부, 수도자 18명이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하고, 많은 수의 수사 신부님들이 외국으로 추방당합니다.

1951년 7월 피난길에 나섰던 한국인 수도자들은 대구 주교관으로 이사해서 공동생활을 시작하였고, 1951년 9월 베넥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는 교황청의 재가를 받아 미국 뉴튼 수도원에 체류하던 이성도 디모테오 신부를 덕원 면속수도원과 함흥교구장 서리로 임명하여 1952년 6월 경북 왜관읍 왜관 성당과 낙산 성당에서 왜관감목대리구장으로 착좌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954년에는 한국에서 추방되었던 비테롤리 신부와 21명의 수도자들을 왜관 수도원으로 다시 파견하여, 2007년 현재 사제 48명을 비롯한 종신 서원자 108명등 139명의 수도자들이 본당과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 사회사업과 문화 예술 및 피정의 집 등에서 활동하고 있고, 2009년 9월 25일에는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아울러 1949년부터 1952년 공산치하에서 덕원과 연길, 보이른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 및 함흥 교구 소속으로 순교하신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6위’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수사들을 파견했던 독일의 오틸리엔 수도원 소속의 뮌스터 슈바르작 수도원 대성당의 입구 왼쪽에는 덕원 수도원에서 순교하신 독일과 우리나라 신부, 남녀 수도자, 신학생 38위를 모신 소제대가 있습니다. 저는 신부님들과 함께 피정을 가서 독일 수도원 성당에 모셔져 있는 그 소제대를 바라보면서 부끄럽고 감사하고 창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까지 와서 헌신적으로 봉사했지만 정작 저를 비롯한 한국 교회에서 제대로 기억해주지도 못하고 있는데 반해, 그곳에선 먼 나라에까지 가서 순교한 이들을 위해 소제대를 마련하고, 그분들 한 분 한 분의 영정을 마련하여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나라 신앙의 순교 선조들에 이어 피와 땀을 흘려 한국 교회의 자양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본당에 사목하시던 신부님들 중에서도 6.25 한국전쟁 중에 납치되고 실종되어 돌아가신 두 분의 주임신부님들이 계십니다. 1923년 7월부터 1926년 6월까지 봉직하셨던 제4대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님과 1932년 9월부터 1935년 1월까지 봉직하시며, 1866년 병인박해 전후 충청도 박해사를 기록한 실화소설 ‘은화’를 집필하셨던 제6대 윤의병 바오로 신부님은 민족상잔의 비극인 1950년 6월 25일 남북전쟁 때 각각 황해도 정봉과 은률에서 북한 공산당 정치보위부에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어 현재 ‘한국천주교 근현대 신앙의 증인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로 선정되어 시복절차 중입니다. 우리가 정성 어린 마음으로 기도를 올려 드려야할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시복을 기리며,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기로 합시다.

아무도 특별히 봐주지 않아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기억해 주지 않아도, 오직 한 분 주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불태우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평신도들 그리고 선교사분들께 감사와 존경 그리고 희망을 보탭니다.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은커녕 버림받고 배척받으며, 이상한 사람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제거당한 분들이 오늘 우리에게 성인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가끔 복음 선교와 인류 사회 형제자매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는 희생에는 소극적이면서도, 인류 공동체에서 인정받고 부각되는 영광은 부러워합니다. 오늘 형제들에게 기억되기 위해 이리저리 애써도 내일이면 잊혀지고 말지만, 오늘 부각되지 못해도 복음에 대한 열정과 형제들의 구원을 위한 희생으로, 어머니처럼 두고두고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 먼 훗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납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목숨과

마주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십자가와

죽는 밀알을 통해

 

목숨의

가야할 길을

보게된다.

 

되돌려

드려야할

우리의

목숨이다.

 

순교의

발자국은

복음의

발자국이다.

 

순교의 발자국은

생활의 봉헌이다.

 

생활의 봉헌은

버려야 할 것과

나누어야 할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순교는

신앙과 사랑을

위한 믿음의

간절한

결단이다.

 

신앙과 순교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순교의 피는

여전히 뜨겁다.

 

순교는

비뚤어진

우리시대의 믿음을

바로잡아준다.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간 이들의

숭고한 목숨의

승리이다.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신비로운 일치의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랑의 뜨거운

결정체이다.

 

순교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뜨거운

고백이다.

 

생명의 빛을

향해 걸어간

이들의 전적인

삶의 투신을

배워야 할 때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아는 것을

우리 생활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생활은 순교로

깊어지고

순교는 생활을

참으로

가치있게 만든다.

 

하느님을 위한

순교이며

목숨이다.

 

목숨을 위한

봉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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