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드시며,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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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시어 세리와 죄인과 한 식탁에 앉으시고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부르시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을 따라갑니다. 절 하나로 부르심과 응답이 끝납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르심의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짧지 않나 싶습니다. 이 한 장면 안에는 세리를 부르시는 예수님께서 한 편에, 그런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세리 마태오가 다른 한 편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가 하는 일을 보시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십니다.
그는 남들에게 공공연히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이었고,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에게 베풀어지는 자비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내세우며 자비 따위는 필요 없다고 여기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것으로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세리인 자신에게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가 어떤 결심을 하였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회개는 하였는지 물으시지도 않고 곧바로 당신과 함께 있도록 불러 주시는 분이 마태오에게는 분명한 구원자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신다는 것은 그에게 걸림돌이기보다, 오히려 자신이 따라가야 할 분을 알려 주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도 다른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자기가 부당하다는 것을 말씀드리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당함을 다 아시면서도 따라오라고 하신다는 것이 명백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마태 9,9)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시라면 따라갈 만합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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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 마태오는 다른 공관 복음서들에서 ‘레위’로 소개됩니다(마르 2,14; 루카 5,27 참조). 주님께서 마치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듯이, 레위에게 마태오라는 새 이름을 주신 듯합니다. 마태오(그리스어로 마태오스)라는 이름은 히브리 말 이름 ‘마티트야’에서 온 것으로 ‘주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세리였던 그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일은 정녕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소명과 응답이라는 이 단순한 장면은 그 자체로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카파르나움(마태 9,1; 마르 2,1 참조)의 세리였던 마태오는 예수님에 관하여 이미 많은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평소에 세리라는 수입이 보장된 직업과 매국노라는 비난 사이에서 깊이 고뇌하며 떳떳하고 기쁜 삶을 살고 싶은 열망을 품지 않았다면, 어찌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들어 알고 있던 분께서 죄인인 자신에게 “나를 따라라.” 하셨을 때, 지독히도 원망스러운 그 모든 과거를 온전히 용서받고 새 삶으로 초대받은 그 순간에, 마태오가 느꼈을 전율과 환희가 생생히 느껴집니다. 죄와 부덕함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열었을 때, 탐욕과 억압의 장소인 세관이, 그리고 죄인들과 세리들의 식탁이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주님과 죄인들을 탓하며 구원의 기쁨에서 스스로 멀어졌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부르심받은 사람답게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와 사랑을 실천하면서’(제1독서 참조)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살아갑시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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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마태오 복음의 저자를 세리 마태오로 여겼지만 학자들의 의견은 다릅니다. 여기서는 주석학 논쟁을 언급하기보다 교회가 왜 세리 마태오를 마태오 복음의 저자로 여겼는지에 주목하여 묵상했으면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민족의 배신자이자 하느님을 등진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복음서 저자로 여긴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념은 상당히 파격적이었습니다. 초세기 신앙인이라고 우리와 다를 것이 있었겠습니까. 초세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의심하고 주저한 흔적은 복음서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이치와 논리에 따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이들 또한 교회 공동체와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신 모습이 복음서에 숱하게 등장하지요. 쉽게 생각하고 지나칠 장면이 아님에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그 장면들을 읽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난받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술 한잔 나누는 이가 있다면, 그가 재림하신 예수님이시라면, 우리는 아마도 예수님을 비난하고 경고하고 훈계하며 급기야 쫓아내고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이에게 의사로 오셨습니다. 제 잘못으로 아프든 타인의 차별과 억압으로 아프든, 아픈 이가 있으면 일단 고쳐 놓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그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내뱉는 비난의 말들이 아픈 상처를 더 후벼 파는 죄인들의 무지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알면 얼마나 알고 정의로우면 얼마나 정의롭겠습니까. 참된 지혜이시고 참된 공정을 펼쳐 보이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죄인 마태오와 함께 식사하십니다. 바리사이만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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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는 세계 최고의 갑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만 아는 수전노였습니다. 그런데 55세에 중병에 걸려 1년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던 중 벽 액자에 쓰여 있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깨닫습니다. 그리고 치료비가 부족한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대 줍니다.여자아이는 록펠러에게 긴 감사 편지를 씁니다. 록펠러는 그 편지를 읽으며 난생처음 행복을 느낍니다. 그 이후로 그는 나누는 삶을 살기 시작하였고 병도 치유되어 98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주님께 먼저 내어 드리는 것을 ‘봉헌’이라 합니다. 봉헌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알기에 하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봉헌할 줄 아는 사람은 주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알기 때문에 이웃에게 자비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향한 봉헌과 이웃을 향한 자비의 정신은 하나입니다.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바칠 줄은 알아도 자비롭지 못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세리 마태오의 회개를 못마땅해하고 그를 부르시는 예수님도 못마땅해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희생 제물이 이웃에 대한 자비로 이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희생 제물은 즐겨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 받은 것에 감사해서 나의 것을 내어놓는 행위가 봉헌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웃에게 무자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과 이웃을 향한 자비는 하나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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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는 세리였기에 일반 민중으로부터 미움은 받았지만, 그렇다고 살아가는 데 어떤 지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권력과 재산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마태오에게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영적 갈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태오는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럼으로써 마태오는 안정된 직업을 잃었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않았습니까? 영적인 생명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는 바리사이들이 비난합니다. 부정한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비난에 예수님께서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씀은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그런 만큼 하느님을 더 절실히 찾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의미지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으려면 자신을 영적인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육신이 아프면 곧바로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이 병든 것을 느끼기는 쉽지 않지요. 의외로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늘 남의 티끌만 바라보며 다른 이들 탓만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여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거나 오히려 불편함과 불만마저 품게 되지요. 따라서 자기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나의 삶이 확연히 달라질 것입니다.(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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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우리와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의 출신 배경과 경력, 인맥과 학벌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시고, 그가 하느님 나라에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십니다. 자기 민족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치는 세리의 직업은 유다인들에게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필연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태오가 세리가 된 것은 숙명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먹고살 길을 찾는 방식들 가운데 우연한 순간 내 평생직장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신념에 따른 일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충실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조직과 이념 때문에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세리인 마태오의 직업은 이방 민족의 지배 속에서 하느님 백성의 지위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와 모순을 알려 주는 상징적인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삶의 모순으로 닥친 죄의 현실을 치유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각자의 능력이 비교되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임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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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태 9,9 참조). ‘그곳’은 마태오 복음 9장 1절에 따라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마을’이며 ‘예수님께서 사시는 마을’ 카파르나움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 사도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전합니다(마르 2,14).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하느님의 선물’인 마태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인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고, 부정한 사람인 죄인들과 어울려서 레위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품위 없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지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그들의 비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영적 의사’이며 ‘죄인을 구원하는 구세주’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부정한 로마의 돈을 만진 마태오의 손은 정화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스승의 가르침’을 뚜렷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산상 설교, 선교사들에 대한 가르침, 하늘 나라의 비유들,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위한 권고들이 메시아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그 가르침들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였고, 후일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에티오피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마태오 사도의 열정은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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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사도에 대하여 복음이 전하는 내용은, 그가 세리였다는 사실과 세관에 앉아 있던 그를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그가 일어나 세리직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은덕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그리고 마태오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든, 그 당시 세리는 공공연하게 독사와 같은 매국노로 지탄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일하던 그런 부류의 세리 마태오를 사도로 부르신 것은 뜻밖의 선택이었습니다. 부르심을 먼저 받은 다른 사도들에게도 이 일은 언짢았을 것입니다. ‘저런 인간을 우리와 한 무리가 되게 하시다니.’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아마도 어부는 세리와, 세리는 어부와 어울리고 싶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 한 분이신 그리스도, 한 분이신 성령 안에서 어부도 세리도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이들 가운데에는 죄인도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자비를,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선포해야 하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사도로 부르셨나 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일할 사람을 이런저런 조건으로 골라 뽑는 우리의 모습이 주님 앞에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인간적 조건과 자격이 잘 갖추어져 있을수록 하느님의 자비와 능력을 체험하기가 더 힘들지 않을까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마태오는 본인이 저술한 마태오 복음에서 자신이 ‘세리’였음을 고백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하다고 확신하며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자만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책을 느끼면서 절실하게 도움을 간청하는 사람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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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죄인이란 ‘치유’의 대상이지 ‘단죄’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죄를 지었다고 해서 공동체에서 무조건 격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일반적으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떠올리며,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진료의 첫 단계는 진단입니다. 의사는 먼저 병이나 증세의 정도를 살펴본 뒤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어떤 고통의 결과를 낳았는지, 그리고 그 죄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성찰하도록 이끄십니다.
의사는 환자에 대한 진단이 끝나면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립니다. 약물 복용이나 수술 등의 방법입니다. 시간이 걸리는 경우에는 통원 치료나 입원 치료까지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말씀의 영약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정화시키십니다. 때로는 그 죄를 단호하게 끊도록 수술과도 같은 일로 이끄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단번에 하지 않으시고, 시간을 두고 고쳐 나가기도 하십니다.
의사는 처방이나 수술 뒤에 환자에게 적절한 조언을 덧붙입니다. 음식에서 조심해야 할 점, 생활 습관에서 개선해 나가야 할 점 등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그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삼가야 할 점들을 일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중증 환자를 건강한 군인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도 그렇게 바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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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마태오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치욕적인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때 세리는 자기 민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치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은 남의 나라에 세금을 거두어 바치는 앞잡이 노릇을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려고 과다하게 세금을 부과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유다인들은 돈을 위해 영혼과 민족을 파는 세리를 몸을 파는 창녀보다 더 멸시하고 죄인 다루 듯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런 자신의 과거가 못마땅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그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예수님마저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시지 않고 그를 제자로 삼아 공생활 내내 함께하십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보듯, 마태오는 자신이 과거에 세리였음을 떳떳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 삶에서 불만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과거의 상처나 죄가 치유되지 않은 채 열등감으로 작용할 경우, 자신을 혐오하거나 무기력한 생활을 하거나 절망에 사로잡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열등의식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결과는 매우 달라집니다.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행동을 나쁜 쪽으로 자극하여 ‘파괴적’으로 나아가게 하며, 반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자신감을 얻고자 노력하게 하여 ‘창조적’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는 자신의 모든 과거의 상처를 품어 주시는 주님을 통해 치유되었습니다. 그에게 수치스러운 과거는 죄인을 받아들이고 치유하시는 주님 사랑을 드러내는 ‘창조적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있는 그대로의 마태오를 사랑하시듯, 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비록 못나고 상처투성이인 우리이지만, 우리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내 인생의 과거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것을 당신의 창조적 도구로 쓰십니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역사, 어느 것 하나 주님 안에서는 버릴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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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세관장인 마태오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고 하십니다. 당시 세관장(세리)은 돈이 많고 권력까지 지녔지만,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기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쳤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로마에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어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기까지 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이 이의를 제기해 보지만,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사람을 보시고 대하시는 시각이 세상의 잣대와 확연히 다른 주님이십니다.
마태오는 행운아입니다. 난생 처음 그를 인간으로 대해 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이후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또한 행운아입니다. 문제는 마태오처럼 우리도 철저하게 주님을 따라나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마태오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따라나서는 삶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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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는 세리였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는 곤란하다는 것이 당시 많은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만큼 세리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반대 세력을 세금으로 묶었습니다. 그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 탈세를 유도하고, 반항의 기미가 보이면 세무 사찰로 협박하였던 것입니다. 그 하수인이 바로 세리였습니다. 그러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마태오는 다른 세리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응답한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나를 따라라.”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 마태오는 즉각 따릅니다. 그가 세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직업을 열망하고 있었을까요? 아무튼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러나 마태오에게 어찌 고뇌가 없었겠습니까? 두렵고 불안한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과감히 털고 일어납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부르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망설이지 말고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마태오가 그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전에 유명했던 건배가 있었습니다. 이 건배사를 술집만 가면 쉽게 들을 수 있었지요. 그것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건배사였습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는 남이 아닐까요? 아무리 같은 직장, 같은 성당, 같은 단체에 있다고 해도 남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나 외에는 모두 ‘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이 아니니, 뜻을 같이하고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라는 생각은 독선적인 이기주의가 아닐까요?
나와 네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 안에는 ‘다름’이라는 것을 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름을 도저히 함께하지 못할 사람으로, 나의 적 또는 원수로 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종종 이상한 항의를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냐?’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람이 오히려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다름을 왜 인정할 수 없는지, 여기에 자기 말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면서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서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모습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반성합니다.
‘나도 이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구나.’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보다 ‘우리는~ 남이다!’라는 구호를 외쳐보면 어떨까요?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 그리고 나의 목소리나 뜻을 조금 낮추어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모범을 보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로 당시의 모든 유다인은 세리를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이제 마태오는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자기 집에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그 역시 어떤 판단 없이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리사이들은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부터 하는 그들의 모습에 우리의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죄인 곁에 예수님도 함께 계실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간주한 죄인에게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삶의 끝에 남는 질문은 두 개다. 누구를 도왔나? 얼마나 배웠나?(찰스 핸디)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0년, 40년 전에 지었던 죄, 이제는 그만 떨치고 작별하면 좋으련만, 아직도 똑같은 죄를 고백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제게 생각만 해도 큰 위로로 다가오는 인물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태오 복음 사가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하나의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직업이 세리라는 것은 곧 죄인을 의미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였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가오면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어서 멀리 돌아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오늘 하루 재수 옴 붙었다며, 불편해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요주의 인물, 진상, 속물, 인간 말종으로 각인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세리로 일하던 시절 마태도 역시 뜨거운 피가 도는 인간인지라,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 인간도 아닌 삶,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가던 세리 마태오에게 어느 날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어느 순간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비스럽고 세상 따스한 누군가의 눈길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없이 자상한 얼굴에, 측은지심 가득한 눈동자의 예수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은 세리 마태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분의 눈길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네 심정 다 안다. 네 잘못 하나도 아니란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아무 걱정 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해 보는거야.”
이윽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향해 결정적인 초대의 말씀 한 마디를 던집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이어서 던지는 말씀,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욧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죄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서는 안될 일입니다. 죄를 지어야 하느님 자비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밥먹듯이 죄를 짓고 또 지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비의 배경에는 진실과 정의가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정의가 없으면 자비도 없습니다. 자비와 무책임이나 불의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는데도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방임주의 보다는 엄중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주님 자비와 가깝지 않을까요? 자녀가 무슨 짓을 하든 허락하는 부모는 무책임한 것이지 자비로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자비에는 어느 정도 엄격함이 포함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릇된 자비의 형태를 비판하는 올바른 목소리에도 마땅히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여행을 가면 꼭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지갑, 면허증, 노트북입니다. 노트북은 매일 강론을 준비하기에 가지고 다닙니다. 노트북을 10년 가까이 쓰다 보니 가끔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노트북은 작은 문제를 보여주었습니다. 인터넷을 무선으로 연결해야 하는데 비행기 모드에서 바뀌지를 않았습니다. 저의 실력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다행히 사목회 총무님이 친절하게 문제 해결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총무님이 알려주는 대로 노트북을 작동하니 비행기 모드가 풀리고,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은사가 다양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어떤 이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주변을 보면 하느님께로부터 다양한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총무님처럼 컴퓨터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치 있는 말과 따뜻한 말로 모임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철저한 준비로 모임을 이끌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는 친절한 이웃을 보내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헤밍웨이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점심을 먹지 못할 때도 있었고, 공원의 벤치에서 밤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헤밍웨이는 글을 쓰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헤밍웨이에게 글을 쓰는 것은 삶의 목적이었고,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헤밍웨이는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글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 봐.” 헤밍웨이가 위대한 작가가 된 건 그의 천재성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진실한 한 문장을 쓰려는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마태오 사도는 ‘마태오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은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 생각날까요? 예수님의 족보, 동방박사의 방문, 이집트로의 피난이 있습니다. 그 장면 장면들이 아름다운 문학의 소재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깊은 위로를 얻습니다. 더 높이 날려는 ‘갈매기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삶의 변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부족한 저에게 위로의 말씀이 되었고, 제 삶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몸소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우리들의 고통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의 의미를 체험하셨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위대한 작가인 헤밍웨이처럼 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성 마태오 사도는 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도로, 예언자로, 복음 선포자로,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실 겁니다.”
<살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아무도
보지 않는 이
그분
보시니
그 사람
참으로 있지요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
그분
부르시니
그 사람
기꺼이 따르지요
아무도
함께하지 않는 이
그분
함께하시니
그 사람
끝까지 함께하지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 하고 부르셨고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시었는데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하고 말하자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당시 세리 마태오는 로마의 앞잡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돈을 걷어 바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야말로 죄 많은 사람을 크신 사랑으로 당신 곁에 초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바치는 제물보다도 당신께서 자비를 베푸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가기를 더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 사람을 단죄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사람이 지은 죄값을 받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것은 법치주의를 살아가는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저 범죄자로서 단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정한 회개를 통해 구원으로 나아갈 있도록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단죄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단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그를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셨습니다. 어쩌면 세리 마태오는 그렇게 자신을 받아들여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탄복하며 그동안의 자신의 모든 잘못을 청산하고 새로운 구원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습처럼 사랑과 자비를 통해 다른 이들과 함께 참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부릅니다. 그리고 마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여 따랐지요.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축일입니다. 마태오 사도 축일이기에 사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마태오는 세리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를 대신해서 세금을 걷는 일을 하였지요. 마태오는 자신의 좋은 삶을 위해서 세리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세리들은 정확한 세금을 걷지 않고 부풀려서 세금을 걷었고 로마에 바칠 때는 정확한 금액만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취했던 것입니다. 마태오 역시 많은 세금을 받아서 이익을 취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삶을 살았던 세리들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마태오는 경제적으로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은 허전함과 외로움과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되었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읽었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는 진작에 들었던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설령 재물이 많아도 여러분의 마음을 채울 수 없을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는 문제는 없겠지요. 또는 세상의 친구가 많아도 그 친구들이 여러분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아픔을 먼저 아십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주십니다. 손을 뻗는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는 일본에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항상 혼자입니다. 외로움의 하루이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일 사랑하는 페북의 여러분들이 계시지요. 여러분도 외로울 때 예수님께서 항상 뒤에서 보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전부가 되기를 두손 모아 기도합니다. 아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한창협 모세 신부님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있는지 말이지요. 이유를 몰라서라기보다 자신들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서, 아니면 예수님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필시 옆 자리에 계셨던 예수님에게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변을 하시기보다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배우라 하십니다. 호세아서 6장 6절은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여기서 ‘신의’와 ‘예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도 각각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바리사이들은 그저 희생 제물을 잘 바치는 수준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확신했기에,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례하게 질문하며 시비를 걸어오는 바리사이들에게도 스스로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딘지 약하고 뭔가 아쉬우니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 자기 혼자 힘으로 자신을 지키고 자기 스스로 살아 나갈 수 있으면 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우리는 우리 한 몸도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할 죄도 지은 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당시 유대 종교인들에게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세리 마태오와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을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우리가 겸손되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우리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고 어떤 면이 약한지 안다면, 우리는 겸허히 주님께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를 고쳐주시고 변화시켜 주시어 세상 구원을 향한 구원업적을 이루시는 주님의 도구로 써주소서. 아멘.’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 인간적 소망 버려야 한다. <마태 9, 9-13> 9월 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어려서 부자가 되고 싶어 배의 선장이 되려고 상선 고등학교에 갔지만, 선생님이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라고 해서 포기하다가 마음 깊은 데서 원산에서 보던 신부님들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왜관에 와서 순심고등학교 전학하고 1954년부터 주민등록을 왜관읍에 두고 70년을 여기 수도원에 살고 있습니다. 들어올 때 계시던 분 중에 살아 계신 분은 한 분도 없이 저만 남아 주님의 종으로 살며 모든 것을 떠나 외롭지만, 주님만 믿고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은 모든 것을 떠난 것 같지만, 모든 것 안에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창조한 모든 것 안에 살며 계절의 변화 속에 온갖 것을 누리며 숨 쉬고 물 마시며 태양의 힘과 빛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라 죽기까지 주님의 일을 하며 살게 하셔서 기도 속에 묵상 글 쓰게 하시고 옛 체험을 기억하게 하시며 주님의 뜻을 되새겨 주시고 아침부터 성당에서 찬미 찬송 감사기도 드리는 힘을 주시어 걸어서 나가고 앉아서라도 공동 기도드리게 이끌어 주십니다.
곁눈질하며 살려고 하니 그것마저 못 하게 하시며 주님만 믿고 주님만 바라고 사랑하며 살게 하시면서 제가 살고 행하는 일에 곁눈질 못 하게 하십니다. 주님 일을 하면서 자랑도 못 하고 보여주기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도록 더 낮은 자세로 살게 하시고 하는 일에 절망감도 주시며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저는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살고 이름 알아주길 바라며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져도 내 것이 아니고 있어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주님 것입니다. 하루는 내 신세가 너무나 보잘것없다고 느끼면서 아쉬워하며 살다가 이런 글도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 것입니다.” 고백하면서 하느님 자비로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모든 이에게 자비의 은총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의 삶과 신앙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장면을 들여다보게 되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부르신 것은 커다란 ‘스캔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민족을 등쳐먹는 배신자이자,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아로 오셨다는 분이 그런 사람을 당신과 함께 일할 사도로 뽑으셨으니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결정을 두고 ‘저 사람이 정말 그리스도가 맞나?’하는 의구심을 품었을 겁니다. 또한 예수님을 거스르는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마태오를 제자로 삼은 예수님의 선택이 그분을 비난하고 배척할 좋은 구실이자 명분이 되었을테구요.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할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마태오를 부르시는 장면, 오해와 비난의 소지가 다분한 그 장면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포함시킨 것은, 더 나아가 마태오라는 사람을 그 복음서를 집필한 저자로까지 인정한 것은 커다란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의 신앙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처럼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모든 것이 명확하게 정리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기는 하지만 아직 신앙에 대한 그리고 주님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죄인’이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의 ‘리더’ 역할까지 할 수 있음을 받아들인 것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소명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자신은 죄인들과 ‘다르다’고 자부하며 그들과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죄인들을 심판하며 단죄하는 일에 열을 올렸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당신이 직접 죄인들의 편에 서겠다고 천명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께는 죄인이든 의인이든 그들이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에 있어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이들의 마음에는 ‘나는 너와 다르다’는 배타적 차별의식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마음가짐이 우리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고 타인과의 일치를 방해하며 공동체 내부에 분열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바라시는 건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으로 사람들을 구분짓고 차별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또한 사람이 죄를 짓는 건 그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정면으로 거스르려는 사악한 의도가 명확하게 자리잡고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부족함과 약함 때문임을, 그로 인해 죄를 지어 마음과 영혼이 병드는 딱한 처지가 되는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고 단죄하며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배척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인내와 사랑으로 품어줌으로써 그가 죄로 인해 받은 상처를 잘 치유하고 다시금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그렇게 함이 마땅하겠지요. 그러니 비난보다는 이해를, 단죄보다는 용서를, 배척보다는 포용과 자비를 지향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나보다 부족하고 약한 이들을 ‘희생제물’ 삼아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큰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 안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나를 따라라” - 중심, 방향, 일치의 공동체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저는 언제나 기상하면 만세칠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집무실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가장 좋은 기도, 만세칠창을 작년 8월15일 광복절이후 시작했으니 1년이 훨씬 넘었고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만세칠창후 인터넷 뉴스를 읽으며 세상을 들여다 본후 교황님 홈페이지를 통해 가르침을 배웁니다. 국제 가톨릭 학생 모임의 회원들을 만나 주신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여정중에 있는 순례자들로서 주 예수님과의 더욱 깊은 일치에로 불림받고 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도 성 마태오가 주님께 불림받고 있는 장면이 잘 드러납니다. 당대 세리라 하면 죄인처럼 사람 취급 못받는 아주 무시당하던 신분이었습니다. 바로 세관에 앉아 있더 세리 마태오가 그런 신원의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후 길을 가시던 길이신 주님께서 세관에 앉아있는 갈망의 사람, 마태오를 첫눈에 알아보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바, 그의 과거나 신분이 아닌 그의 내면의 당신을 찾는 순수와 열정, 갈망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마태오의 운명적, 축복의 만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정관념이 없고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는,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셨고 실상의 본질을 직시하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을 찾는 갈망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주님의 부르심에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을 따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은총의 섭리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세리 마태오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런지요?
한두번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여정중에 있는 당대 제자들이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버림의 여정’이자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비로소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았고, 삶의 중심과 의미를 찾은 마태오이듯이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또 주님께 부름 받은 세리 마태오는 “혼자”의 삶에서 “더불어”의 제자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듯이 우리 또한 주님께 불림 받아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오를 포함한 당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자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와 주고 받은 대화가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당신네 제자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참으로 바리사이의 무지를 반영합니다. 사람 눈에 세리와 죄인이지 주님 눈에는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일뿐임을 까맣게 모른 무지한 바리사이였습니다. 주님의 대답이 복음중의 복음이요 참 명쾌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며 제자들의 공동체의 성격이 환히 드러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의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건강하고 의인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라 불림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병없고 죄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치유받은 병자들의 공동체이자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공동체요, 자비로운 목자이자 의사이신 주님은 우리를 부단히 용서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신한 바오로의 말씀이 그대로 교회공동체에 불림받은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길다 싶지만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내용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말그대로 주님을 닮은 사랑의 일치입니다.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한분이신 주님을 중심으로 한 다양성의 일치요 상호보완의 조화의 일치입니다. 바오로가 강조하는 중심의 “하나”가 일치의 원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분이시고,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서로 좋아서 일치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중심 방향이 같아서 일치입니다. 그러니 서로 맞추려 하기 보다는 중심의 주님께 부단히 맞춰가며 각자의 책무에 충실할 때 저절로 다양성과 조화의 일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아름답고 성숙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궁극의 희망이자 목표이며,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9,13)
저와 함께 미사를 드렸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참회 양식 ‘다 양식’을 할 땐,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부분을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9,13참조)라고 덧붙여서 기도합니다. 그 까닭이란 어느 때부턴가 잘 모르지만 제가 하느님 앞에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실존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한 저의 확신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어떤 누구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고, 이 자비 안에서 과거와 똑같은 길이 아닌 참된 생명이 충만한 상태의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식 이름은 '레위'(마르2,14참조)이며, 직업은 세리(루5,27)였습니다. 세리는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또한 세리는 본의 아니게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했으므로, 반종교적이고 이교도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런 마태오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고 그를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십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당연한 삶의 자리가 아닌 조금은 비정상적인 자리에서 삶을 살아 온 그에게 예수님의 초대는 참으로 뜻밖에 찾아온 은총의 기회였고 선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또한 마태오를 부르심으로 당신이 세상에 오신 그 근본적인 뜻을 가르치고 일깨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회를 맞이한 것이라 봅니다.
이 놀라운 은총의 사건, 하느님 무상의 선물 앞에서 마태오는 이 기쁨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자,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점에서 그는 복된 사람이라고 보여지며,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9,11)라고 추궁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들이라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서슴없이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마태11,19;루7.34)하는 비방을 들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 경건자가 그렇게 처신한 이유는, 율법이 아닌 다른 길들은 참된 길이 아니기 때문이며, 바른길을 벗어난 죄인들은 하느님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서지 않는 한 하느님은 죄인에게서 멀리 계시다, 하고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죄인이요 병자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먼저 솔선해서 죄인들을 향해 나아갔고 함께 어울렸던 것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들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9,1213) 는 말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행업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 경건한 이들의 잘못은 율법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스며들 공간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버린 그들의 폐쇄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고와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은 죄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서 대자대비하시며,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또한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세상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아멘.”
<‘용서받은 죄인’이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그러자 마태오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태 9,9)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우리의 잘난 모습이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이나 봉사 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 등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신명 7,7-8)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호의와 자비'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르심 받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애를 입은 이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받은 죄인’이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2)
사실 예수님께서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타협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두둔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크신 자비요, 신의요, 호의였습니다.
용서요, 사랑이요, 곧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바로 이토록 너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사랑과 호의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죄인이라면,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기에 앞서,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시고,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날씨처럼
변화무쌍한
우리들
마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
따르는 것입니다.
따르는 것이
곧 살리는
길입니다.
따르는 삶은
기도하는
기도의
삶입니다.
삶에 대한
이해와
시각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듯이
따른다는 것은
삶의 자세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따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올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첫마음을
잃지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르는
매 순간이
가장 소중한
순간들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임을
절실히 깨닫는
오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행복의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언젠가 이메일을 통해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조금 난감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분을 알지도 못하고, 또 그 상황도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 분은 몇 년째 저의 묵상 글을 보고 있다면서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또 갑곶 성지 초창기에 자주 왔었다고 말합니다. 역시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를 잘 알고 있으니, 도움을 당연히 줘야 하는 것처럼 메일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냥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분을 모르니까요.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친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친구의 연락에 대해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그 친구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다고 하더군요.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을 때도 깊은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서 필요한 것을 얻기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과 이기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도 이런 모습을 취했던 우리는 아닐까요? 필요할 때만 기도합니다. 과연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관심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보여주신 표징과 힘이 되는 말씀은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가능성을 갖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줄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요. 그래서 계속해서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표징을 보여주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필요한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리들과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많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실천만을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실천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기 필요한 것만을 계속 청하고만 있는 우리가 아닐까요?
주님께서 부르는 사람은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을 지금 부르십니다.
정확한 목표 없이 성공의 여행을 떠나는 자는 실패한다. 목표 없이 일을 진행하는 사람은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모르고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실행할 수 없다(노먼 빈센트 빌).
우리는 지금 내세에 가게 될 똑같은 세상을 만들며 산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넷플릭스 ‘수리남’은 마약왕 조봉행의 실화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국정원은 애초에 조봉행을 잡고 싶었지만, 수리남 대통령과 깊은 유착관계가 있는 그를 건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7년간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국정원은 뜻밖의 조력자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강인구라는 이름을 가집니다. 그는 수리남에서 마구 버려지는 홍어를 한국에 수입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로 사는 조봉행이 그를 마약 밀입국자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돈도 없고 약한 이들을 이용해 한국으로 마약을 밀반입하여 많은 가난한 이들이 죄도 없이 감옥에 갔다고 합니다.
전요한(조봉행) 목사는 신도들과 함께 천국을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란 자신이 왕이 되는 세상입니다. 배신하거나 명령에 불복종하면 바로 총살입니다. 자기만 천국이지 실제로 주위는 지옥입니다.
우리에게도 힘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 힘으로 천국을 만들기도 하고 지옥을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는 천국을 만듭니다. 하지만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면 주위는 무자비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마태오 사도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힘으로 그를 사도로 맞아들였습니다. 자비의 세상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잘 사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이 만드는 세상은 자신들만 천국이고 주위는 지옥인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마태 9,13)
그들이 바치는 희생은 뇌물이었습니다. 마치 전요한 목사가 힘을 얻기 위해 수리남 대통령에게 주는 뇌물과 같습니다. 그 뇌물은 마약을 팔아서 마련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주위를 지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권력층이 주는 돈과 신뢰로 하느님까지도 팔아먹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가 천국에서 은총을 받으면 천국도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면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는 자신들에게 들어오는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주위를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지금 어디 계실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힘을 가지게 될 때 내세에 어디로 가게 될지 알게 됩니다.
내가 가정에 들어갔을 때 가족들이 나에게 몰려와서 인사하고 함께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각자 방으로 다 들어갑니까? 내가 천국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가족들이 나에게 몰려올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 자녀들을 이용해서 나를 높이려 했다면 그 가정은 지옥이 됩니다.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강의를 많이 다니다 보니 성당마다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바로 본당 신부가 만들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당 신부들은 각자 자신들이 천국이라고 여기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주의하려고 합니다. 내가 만드는 세상이 내가 가게 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자비가 흘러넘쳐서 천국이 실현된 것이 우리 각자의 성당이 되게 해야 합니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한 노부부가 한화로 약 125억 원에 달하는 거액을 복권 당첨금으로 받았지만, 이를 전액 기부해 훈훈한 감동과 함께 잔잔한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78세인 비올렛 라지(Violet Large)씨와 알렌(Allen)씨는 결혼한 지 35년이 넘은 아름다운 커플입니다.
남편인 알렌은 용접공으로서 일했고, 비올렛은 소매업을 통해서 차곡차곡 돈을 모으며 살아 온 캐나다의 성실한 부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복권 우승상금으로 1,130만 캐나다달러가 노부부에게 돌아갔을 때, 그녀는 암에 걸려 화학 치료요법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비올렛 부부는 먼저 1,100억 캐나다 달러(한화 약 121억 원)를 남을 돕는데 기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단 1%도 우리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베풂을 실천한 곳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암으로 고생하고 있던 비올렛은 자신이 암 치료를 해오던 투루로(캐나다의 항구도시)와 할리팩스에 있는 병원에 기부합니다. 또한 지역 소방서, 교회, 묘지, 적십자, 구세군, 암과 알츠하이머, 당뇨병을 치료하는 기관 등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무려 두 페이지에 달하는 기부자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았다고 하니, 그 과정이 이 부부에게 어느 정도 고된 노동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주에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돈은 우리의 건강이나 행복을 살 수 없습니다.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 돈에 대해서는 일말의 후회도 없습니다. 우리는 둘이 함께라는 것에 충분히 만족합니다.”
이분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요? 천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힘이 들어왔을 때 주위를 천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는 천국인지, 지옥인지 살펴야 합니다. 나는 잘 모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내 앞에서 천국처럼 편안해하는지 아니면 눈치를 보며 두려워하는지 보면 됩니다. 내가 만드는 세상이 내가 내세에도 살 세상과 같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키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앞 번호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1979년에 입학했으니 벌써 43년이 지났습니다. 같은 교복을 입었고, 방과 후에는 학교에 남아 농구도 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는 격랑의 시대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신군부가 등장하였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격랑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신학교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43년이 지난 친구들의 모습을 봅니다. 형준이는 일찍 미국으로 이민 와서 우편배달부 일을 하였습니다. 찬행이는 조경에 관심이 있어서 아직도 조경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식이는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자동차 중개업을 하고 있습니다. 달순이는 반도체와 친구가 되어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였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어서 지금 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같은 과목을 배웠지만 친구들이 하는 일은 모두 달랐습니다. 이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는 익어가고 있습니다.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교가는 이렇습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의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Veritas!" 친구들은 10년간 신학을 배우고 1991년 사제가 되었습니다. 31년 동창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때는 교회에 큰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1984년에는 103위 성인의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한하셨고, 시성식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44차 세계성체 대회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어나는 성장의 시대였습니다. 같은 신학교를 나왔지만 동창 신부님들의 직책은 많이 달랐습니다. 본당 사제로 지내는 친구, 교구청에서 지내는 친구, 신학교에서 지내는 친구,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지내는 친구, 교포 사목을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책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사제로 지내고 있으며 흐르는 시간 속에 익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하는 직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참아 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어둠 속에 있던 마태오는, 절망 중에 있던 마태오는, 조롱과 멸시를 받던 마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주님, 용서와 온유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제 또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나를 따라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따라라
너만의 길 멈추고
나를 따라라
가던 길 돌아서서
나를 따라라
몸과 맘 정성껏
나를 따라라
힘찬 발걸음으로
나를 따라라
기쁨과 희망으로
나를 따라라
늘 한결같이
나를 따라라
앞길이 희미해도
나를 따라라
뒤돌아보지 말고
나를 따라라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나를 따라라
채우기보다 비우러
나를 따라라
가지기보다 나누러
나를 따라라
살기보다 살리러
나를 따라라
나를 따라라
돈. 돈. 돈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세상은 온통 돈이다. 돈에 살고 돈에 죽는다. 돈 때문에 어린시절 부모 품에 함께 자라났던 형제도 없으며, 암에 걸려 홀로 방에 남겨진 어머니의 신음만 들려 온다. 사랑했던 친자도 옆에 없다. 어머니를 위해 그 흔한 휴가를 내지 못한다. 돈만을 위해 어머니를 홀로 남긴채 골프장으로 달아나 나타나지 않는다.
ㅐ혼인 한지 꽤 지났는데도 아기가 없다. 안 낳기로 합의하고 혼인했단다. 그들의 이야기는 하루종일 돈 이야기 뿐이다. 지금까지 20억을 벌었다 했다. '그렇게 살지마라' 어머니가 힘들여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알고 지내라고 이야기 하면 고루하다 여기고 귀를 막아 버린다
맑은 가을 하늘을 닮고 싶고 바람따라 자유롭게 흔들리는 꽃들을 보며 영혼이 아름답고 싶다. 사람의 본래의 마음이다.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는 하늘의 새들을 보다가 잊혀진 나의 자유로운 영혼을 본다. 태풍이 지나야 모두가 새로워진다. 쓰레기 오수 흑탕물 이루며 흘러간 후 맑게 흐르는 강물을 보며 자연의 섭리를 본다. 그래도 돈에 미친 사람은 관심이 없다.
모처럼 TV와 함께 했다. 기억에 남을 좋은그림한 장 건지지 못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유명인이지만 내면의 상처투성이로 곪아 보였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은 돈으로 모여들고 거짓, 사기, 살인, 인면수심을 본다. 스토킹 뉴스를 보았다. 인면수심은 고개 숙이고 겨드는 목소리 한마디 한다. '죄송합니다' 그것이 돈이 목표되어 만든 결과이며 내 모습이고 수준의 결과였다. 고상한척, 잘난척 뽑내지만 자기와 정면으로 만나야 하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밤이 되면 불면증에 시달린다. 불로소득 같은 엄청난 돈은 결코 그들에게 행복이 아니었다.
빌딩은 드높어 가지만 인간의 수준은 바닥을 친다. 물질적이고 쾌락적이어 광란을 한다. 이를 멈춰 세우기는 한계를 넘은 것 같다. 아름다운 단어 '사랑'은 미화되어 자그 욕심만을 채우고 수단이 되어 쓰레기 되어 처박혀 버린다.
돈의 사람, 세리 마태오, 그는 모처럼 하늘을 보았다. 왜 이렇게 살지? 그는 신을 만났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보았다. 따라나섰다. '신은 곧 행복이다.' 등식을 새롭게 정립한 성 마태오 사도, 그가 신의 사람이 되었다. 행복이 삶의 목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주님께서 초대해 주신 이런 찬상잔치가 또 있는가? 광란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식사자리에 함께 초대되어 앉는다. 예수님과 먹고 마시고 즐긴다. 이는 축복이고 은총이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의미이다. 교회는 함께하는 모든이에게 축제와 기쁨이 된다.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 행복한 축일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하고 부르셨고 마태오는 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같이 자리를 함께하자 바리사이는 그 모습을 보고 비판의 말을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보실 때 특별한 마음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그대로 보기보다는 그의 출신과 배경, 인맥과 스펙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시고, 그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사실 마태오의 경우는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둬서 로마 제국에 바치면서 이득을 챙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마치 역적 죄인처럼 여겨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오의 진심을 알아보셨고, 그를 당신께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사람의 진실한 모습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의 출신과 배경, 인맥과 스펙만을 바라보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면서 예수님의 모습처럼 참된 사랑과 자비로 대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숙의 계절
가을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있었기에
마태오 복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살아있는 말씀이고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보고 듣고
다듬고 골라서
마태오 복음이
탄생합니다.
기쁨으로
살게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기쁨을 나누는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십자가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는
마태오 복음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진리에 눈뜨는
시간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마태오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참된 사명과
간곡한
가르침을
다시 만납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공동체 정신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밖으로만 향하던
우리의 시선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으로
옮기게 됩니다.
주님의 현존으로
우리 삶의 참모습을
보게됩니다.
교회 공동체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기쁨입니다.
마태오
복음과의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가르침을
주시는
만남은 참된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의 삶에서
성숙한 부르심의
응답이 말씀으로
깊어지는 삶임을
배웁니다.
말씀의 내면화는
말씀의 실천입니다.
우리 또한
남겨야 할 것은
감사와 기쁨이라는
말씀의 나눔입니다.
성숙한 삶은
말씀으로
탄생되는
기도와 실천의
삶임을
다시 배우는
성 마태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제가 운영하는 카페에 어떤 분이 건의의 글을 올리셨습니다. 저의 묵상 글을 많이 보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치는 효과가 클 것이라면서 글을 바로 써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겠다 싶어 댓글에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더욱 신경을 써서 글을 쓰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사실 이 글을 보고서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괜히 트집을 잡는 것처럼 비치기도 했고, ‘내가 전문적으로 글 쓰는 사람도 아닌데 이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나?’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글을 많은 분이 보신다는 사실은 분명히 맞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문법에 관련된 책들을 사서 공부하다 보니 그동안 얼마나 무식하게 글을 써왔는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국어학자도 또 전문작가도 아니어서 많은 실수를 하는 저입니다. 따라서 늘 배우는 자세로 다른 분의 말을 잘 듣고 스스로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과 부정적인 마음으로 인해 비판하려고만 하지 정작 나 자신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발전은 없고 그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마태오 축일이기에 오늘 복음에서는 그의 부르심 장면이 나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는 한순간에 사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사도가 되기 위한 어떤 계획도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했을 뿐이었지요.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세상일에 파묻혀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겸손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를 주저 없이 선택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께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겸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들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과연 우리를 부르실까요? 부르지 않으실까요?
마태오 복음 사가는, 세리와 죄인으로 살다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으로 올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잔치를 그려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사처럼,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때마다, 영혼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아픈 이들과 관계를 늘 맺으십니다. 그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의지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려는 겸손이라는 마음입니다. 이 겸손함 없이는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슬픔은 한 번 더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추긴다(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
어떤 말에 집중할 것인가?
코로나 19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그래서일까요? 방송을 보면 경제 전문가들이 나와서 미래의 시간을 예측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문득 ‘이렇게 미래의 경제를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경제 전문가들이 가장 큰 부자가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로 잘 예측한다면 1년 안에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고, 수년이면 전 세계의 재산을 거머쥐어야 하지 않을까요?
경제 전문가 중에서 엄청난 부자가 없다고 합니다. 이들이 돈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제대로 된 예측을 못 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전문가의 예측은 기껏해야 40% 정도라고 합니다. 동전 앞뒤를 맞추는 확률보다도 적은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전망은 참고 사항일뿐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른 이들의 말에 흔들릴까요? 전문가도 아닌 사람의 말에 흔들리고 주저앉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확률 낮은 세상의 말이 아닌, 확률 높은 주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어제의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딛고 다시 한번 기꺼이 일어서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옛날 국경지대 왁자지껄한 세관에 넋잃고 앉아있던 세리 마태오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는 딸린 부양 가족들 생계를 도맡은 가장으로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덕분에 돈도 좀 벌었습니다. 가족들 앞에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의식주 걱정없이 그럭저럭 살아갈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깊은 회의감과 절망감이 수시로 밀려왔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세리라는 직업을 계속 해나가야 할 것인가?
하루 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세관에 앉아 환전해주는 일, 암암리에 급전을 빌려 주고 막대한 이자를 챙기는 고리대금업, 동족을 등쳐먹는 일, 윗선에 상납하는 일, 이중 장부 쓰는 일인데...
그런 마태오 앞에 누군가가 나타납니다. 선량하지만 강렬한 눈매를 지니신 분입니다. 지금 네 마음 깊숙한 곳을 꿰뚫고 있다는 표정의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마태오야! 너 지금 여기서 무엇하고 있느냐? 이 일이 인간로서 가당키나 한 일이냐? 지금 즉시 하던 일 다 때려치우고 당장 일어서서 나를 따라라!”
천둥같은 주님의 음성을 마태오는 거스를수 없었습니다. 애지중지해온 장부도 금고도, 세리라는 안정된 수입원도 즉시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끝닿는데 없이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것이 꽉 막힌 이 시대, 뭘 하기도 그렇고 안하기도 그렇습니다. 대체 탈출구는 있는걸까? 하는 큰 불안감과 더불어 우울감이 슬금슬금 찾아옵니다. 별의 별 생각을 다 해보고, 이런 계획 저런 아이디어를 고민해보지만, 너무나도 큰 막막함과 무기력함 앞에 아무것도 하지못한채 그저 주저앉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영혼없는 얼굴, 생기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얼굴, 숨만 쉴뿐이지 죽은 얼굴로 하릴없이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가 들어있습니다.
은혜롭게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듯,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합니다.
어둡고 음습하고 비정한 세관에만 앉아있지말고, 밝고 화사하며 햇살좋은 곳으로 걸어 나와야겠습니다. 모든 것이 제한되고 답답한 조건 속에서도, 하루 매순간을 보다 의미있고 역동적인 순간으로 꾸며가야겠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마태오 복음 9장 12~13절)
역대급 대죄인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신 예수님의 활짝 열린 개방성을 묵상하며, 똑같은 죄인인 저 역시 주님께 감지덕지하며, 그저 감사의 찬가를 반복할 뿐입니다.
“저 같이 부당한 죄인을 당신 가까이 불러주신 자비하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홍빛보다 붉은 감당하기 힘든 죄들, 머릿칼보다 많은 숱한 죄들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롭게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시니, 온몸과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죄인들의 주님은 세세대대로 찬미받으소서! 저는 그저 매일 좋으신 주님 자비와 은총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어제의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딛고 다시 한번 기꺼이 일어서겠습니다.”
희생 제물이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부자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마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것 같습니다. 그곳에는 역시 많은 세리와 죄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사람 같았으면, “나를 뭐로 알고 매국노들과 창녀들과 함께 식사하라고 하느냐?”라며 따졌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행복하셨습니다.
이때 역시 바리사이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해 합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가까이하는 사람도 죄인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죄에 물들지 않는 분이심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의사는 병든 이들과 함께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병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사가 병자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 말씀을 하시는데 “희생 제물”이 등장할까요? 바리사이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바치고 계셨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무였습니다. 이 희생 제물의 가장 초기 모델은 역시 ‘선악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특별해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로 자신의 죄를 이웃에게 떠넘기고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았기에 이웃을 향한 자비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면서도 자비심이 전혀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특별해지기 위해 바쳤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바치라는 이유는 하느님이 아니시면 누구라도 특별할 수 없음을 배우고 되새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과를 바치며 더 특별해지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이 마치 카인처럼 제물을 바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카인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서 더 특별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제물 봉헌의 목적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이 그것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세상에서도 가장 비천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갓 오브 이집트’(2016)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이집트의 신들과 인간들이 공존합니다. 이집트를 다스리는 왕들인 신들이고 백성들은 인간들입니다. 신들은 인간들보다 몇 배나 몸집이 더 크고 보통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싸울 때 변신하면 무시무시한 모습이 됩니다.
이집트 임금의 아들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자리에서 그의 삼촌이 와 현 임금인 자신의 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조카의 두 눈을 빼어버립니다. 그런데 한 좀도둑이 보물이 있는 곳에 잠입하여 눈 하나를 훔칩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여자 친구가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그 좀도둑은 그 눈의 주인인 신에게 가서 자신이 눈을 하나 돌려줄 테니 소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두 눈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신은 어디 파리 같은 게 와서 자신을 놀리냐며 그 좀도둑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좀도둑은 워낙 민첩한 데다 자신은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결국에는 그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여자 친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며 그도 감동합니다.
나중에 자신 대신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삼촌과 대결 중에 그는 나머지 눈 하나와 자신에게 눈을 찾아 준 한 인간의 생명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 대신 한 인간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삼촌은 신이 인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눈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며 비웃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신은 두 눈을 잃어보았기에 자신도 눈을 잃으면 한 인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겸손한 모습 때문에 결국 삼촌을 몰아내고 다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봉헌은 왜 하는 것일까요? 가진 것을 주님 것으로 인정하며 바쳐보고 불편해 보아야 자신이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희생 제물을 진정한 의도로 한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특별한 존재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와도 잘 섞이게 되고 이 능력이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희생 제물이 이웃을 향한 자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안 바치는 것이 낫습니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현재 ‘마블’과 ‘DC’의 대결을 흥미 있게 지켜보실 것입니다. 마블에는 아이언 맨이 있고 토르나 캡틴이 있습니다. DC엔 오히려 우리가 잘 아는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이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마블이 흥행하고 DC는 만드는 것마다 거의 망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마블은 자신들의 능력을 잃었을 때의 고뇌와 비참함, 그리고 그것을 통한 깨달음에 비중을 두는가 하면, DC는 무조건 더 강력해져서 이기는 게 좋다는 힘의 논리만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관객은 그런 초인적인 인간을 보면서도 슈트가 벗겨진 아이언 맨, 망치를 잃은 토르, 방패를 빼앗긴 캡틴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봅니다. 그러니 공감을 할 수밖에 없고 흥행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귀중한 것을 잃어 봐야 나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고 그렇게 내가 가진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며 모두 가진 모습을 하면서도 가난하고 비천한 이웃과 잘 섞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가 되려 하지 맙시다. 다른 포도나무처럼 주님께 자신의 포도를 봉헌하는 포도나무가 됩시다. 언젠가 그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잘려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희생 제물이 이웃을 향한 자비로 이어지려면 특별해지려는 마음을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끊어버리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평화신문에서 사제서품 60주년을 맞이한 노 사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분은 사제생활 58년을 한국에서 지냈고, 한분은 사제생활 60년을 한국에서 지냈습니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진 토마스 신부님과 메리놀회의 함 제도 신부님입니다. 한분은 독일에서 태어나셨고, 한분은 미국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한분은 수도원에 머물면서 피정지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한분은 북한을 60여 차례 방문하시면서 의료지원을 많이 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제가 태어나기 전에 한국으로 오셨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한국에 오셔서 선교사로 지내셨습니다. 두 분 모두 한국 땅에 묻히겠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그분들을 가난하고 낯선 한국 땅으로 오게 했을까요? 무엇이 그분들이 한국에서 사제생활의 대부분을 보내게 했을까요? 진 토마스 신부님은 고린토 후서 2장 9절의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 두셨다.”는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함 제도 신부님은 “선교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 때문에,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얻기 위해서 사제생활의 전부를 한국에서 보내신 두 분 신부님께서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작년 8월 뉴욕에 있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로 왔습니다. 중학생 때 신문을 돌려본 적은 있지만 신문과는 상관없이 지냈습니다.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홍보를 다니려고 했는데 코로나19가 지구촌을 덮었고 미국에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6개월째 홍보를 다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년 상반기까지도 홍보는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 종이신문을 보기보다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시대이기에 구독자는 줄어드는 상황입니다. 한국에서 평생을 보내시는 진 토마스 신부님과 함 제도 신부님을 생각하면서 제게 주어진 시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욱 단단해 진다고 하듯이, 기회가 주어지면 홍보를 다니려고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직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능력에 맞는 직무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일하는 사람에게도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어진 직무에 사람을 보냅니다.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입니다.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능력과 재능 이전에 헌신과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헌신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에게 구상 시인의 ‘꽃자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오늘은 마태오 사도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던 마태오입니다. 그날은 몸도 좋지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면서 따랐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쁨 마음을 가졌고, 행동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알 수 있는 ‘마태오 복음서’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를 통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오셨는지,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서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졌던 제자들은 모두 ‘과거와 미래’를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와 미래 모두를 버렸던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한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직책도, 능력도 모두 한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께 마태오 사도처럼 우리도 ‘예’라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하고 부르셨고 마태오는 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같이 자리를 함께하자 바리사이는 그 모습을 보고 비판의 말을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보실 때 특별한 마음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그대로 보기보다는 그의 출신과 배경, 인맥과 스펙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시고, 그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사실 마태오의 경우는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둬서 로마 제국에 바치면서 이득을 챙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마치 역적 죄인처럼 여겨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오의 진심을 알아보셨고, 그를 당신께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사람의 진실한 모습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의 출신과 배경, 인맥과 스펙만을 바라보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면서 예수님의 모습처럼 참된 사랑과 자비로 대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마태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2020. 9. 21. 월)(마태 9,9-13)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모든 사람의 구세주’입니다. ‘모든 사람’이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관점에서는 ‘나’와 ‘그들’을, 또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구원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어떤 차이도, 차별도 없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신 일은 ‘구원의 부르심’과는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열두 사도는 제자들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선택해서 뽑으신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6,12-13).
그들이 사도로 뽑힌 것은 그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의 명단을 보면, 직업이나, 출신이나, 학력 같은 것은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믿음, 열성, 충성심 등만 보고서 뽑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신 일이 ‘구원의 부르심’이라면, ‘구원받아야 할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로서 부르신 일이고, 나중에 사도로 뽑으실 것을 염두에 두시고 부르신 일이라면, 그가 사도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에 부르신 일입니다.
마태오가 세리였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죄인이라고(죄인이었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도 아니고, 죄인이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마태오를 부르신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죄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죄인을 더 많이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관심과 사랑이라는 말이 “좀 더 세심한 치료가 필요한 ‘아픈 사람’에게 쏟는 관심과 사랑”이라는 뜻이라면 타당하지만, 단순히 죄인을 향한 것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면 옳지 않은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마태오의 ‘응답’입니다. 마태오는 부르심을 받자마자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응답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말한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루카 9,61).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카 9,62).
마태오가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이야기 뒤에 잔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 잔치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마태오가 마련한 잔치라면, 마태오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먼저 하고, 작별 인사는 나중에 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0-13)”
예수님께서는 세리들의 초대만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의 초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하는 것은 죄인들과 어울리면 부정하게 되어서 죄인이 된다는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들하고만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구원 활동’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의 말은 “구원받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을 왜 만나는가?” 라는 뜻이 됩니다.
어떻든 바리사이들의 말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죄와 다른 사람의 구원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죄를 짓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1) “하느님은 인간들 위에 군림하면서 섬김을 받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이 당신 뜻에 합당하게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이다.”
하느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면,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하니까,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야 합니다.)
2) “물질적인 제물을 바치면서 형식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야 합니다.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낙인찍고 그 사람들과 접촉도 안 하려고 하는 것은 ‘사랑 없는’ 태도이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죄인만’ 부르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부르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너희는 정말로 의인이냐?” 라는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은 “나는 의인이다.” 라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던 자들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세리들보다는 바리사이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어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공공연하게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바리사이들은 대체로 위선자들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도소 재소자들이 재소자 아닌 사람들보다 더 진실하게 고해성사를 보고 회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는 여러분을 선택했고. 여러분은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자유에 따른 부름과 자유에 따른 선택이 마주할 때 놀라운 변화를 예고한다. 선택의 결정권은 서로에게 있다. 그러나 일단 선택이 이루어지면 선택에 따른 책임은 공동의 책임으로 서로에게 있다. 결코 잘 못을 할 때라도 남 탓만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기에 서로가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현실 문제를 풀어갈 것인가에 촛점을 맞추었다.
‘세리 마태오’를 눈여겨 보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불러주길 바라는 세리 마태오의 마음을 보셨다. 변하기를 바라는 죄인의 의지 말이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오를 부르신다. “나를 따라라!” 예수님의 부르심에 마태오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다. 예수님은 죄인의 집에 서슴없이 들어가신다. 이 순간이 선택의 종착점이 된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축제, 잔치가 벌어진다. 이 보다 더 큰 축제, 잔치는 없다. 구원을 향한 잔치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을 하고도 선택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이 되면 자기 힘으로, 자기가 잘나서 선택되었다고 여길 뿐이다. 부르시고 뽑아주고 선택해주신 분을 자만심은 선택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거나 가억에서 지워버린다. 단지 제 잘 난 멋에서 만들어진 흥행의 축제, 순간의 잔치라고 여길 뿐이다. 머지않아 그들 잔치는 시들해진다. 그리고 또 다른 흥행을 꿈꿀 뿐이다.
‘세리 마태오’ 죄인의 대명사 격인 세관장이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한다. 예수님과의 삭사가 1회적인 식사가 아니다. 마태오는 십자가와 죽음을 각오한 식사였고 부활의 기쁨을 이끌어 낼 영원한 구원을 향한 식사였다. 마태오는 마태오가 아닌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식사였다고 믿었다. 식사 규모가 놀랍게 확대된다. 식사 자리에 동업의 세리들이 많이 초대되어 온 것도 예수님께서 마련한 식사였기 때문이다. 이 선택의 식사자리를 세리 마태오는 그날 이후 생애 동안 한시도 잊지 않았다.
세속의 사람들, 바리사이들은 이 모습을 의아하게 지켜 본다. 왠 식사인가? 왠 축제인가? 왠 잔치인가? 그들은 늘 식사자리가 그냥 밥먹고 하히덕 거리고 남 흉보는 식사를 해 온 그들이다. 그들은 잔치라는 축제의 식사 의미를 모른다. 결론을 맺자. 나와 함께 했던 학생들은 모두 학교를 선택한 학생들이다. 변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변화되고 싶은 학생의 마음을 읽었고 나는 학생들을 선택했었다. 그때 서로를 선택했던 우리가 지금은 세상 속에서 진정한 축제의 잔치, 축제를 펼치며 힘차게 살아간다. 세리 마태오가 사도가 되어 복음서로 말씀의 식탁에서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노래한다. 성인 마태오 사도시여! 축일 축하드려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9-13).
하늘의 참 뜻 제대로 알려면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사람을 직업 학력 생김 등 세상 스타일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합니다.
예수님 당시 세관은 돈 걷어 로마에 바치고 대가 받는 일이었습니다.
해서 세리들을 매국노로 취급했고 죄인과 동등시 했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의 접근이유는 외모보다 정신마음의 건강상태라는 점이었어요.
환자에겐 의사 필요하듯 잘못한 이에겐 자비가 필요하다 하셨잖아요.
예수님은 세상의 의인 찾아오지 않으시고 죄인 찾아오신 것이었지요.
세상에 매인 자칭 의인이라는 자들은 하느님나라 참 뜻엔 둔해졌지요.
하늘의 참 뜻 제대로 알려면 예수님을 배워야한다는 분들 만점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죄인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와 함께 계신지, 그들과 어떤 행동을 하시는지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누구와 함께하며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따라 사람을 구분 짓고 가르는 것이 그의 내면을 살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니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하느님의 사람이고 예언자라면 의인과 죄인을 구별할 줄은 알아야 한다고 여겼겠지요. 어쩌면 예수님도 민족에게 반역하는 직업군에 속한 세리 마태오로 인해 제자단의 수준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많아지리라는 것을 모르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주저하시지 않고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사람을 구분하고 단죄하고 줄 세우는 건 세속의 방식일 뿐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니까요.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죄인들과 자신을 구분하여 그들과 다른 편임을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달리, 예수님은 자칭 의인들보다 죄인들 편에 서시겠다고 천명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는 죄인도 자칭 의인과 다를 바 없이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녀일 뿐입니다.
스스로 의인임을 자부하는 이들 안에는 '나는 너 같은 자와 다르다.'는 배타적 차별 의식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배타성이 쉽게 구분과 차별로 이어져 영혼을 천박하게 만들고 일치를 저해하며 분열을 야기한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의 내면 안에는 오히려 '하느님이고 사람인 나와 피조물인 그대가 사랑 안의 한 형제'라는 의식이 변함없이 흐릅니다. 이 마음이 곧 하느님의 창조 의도이고 사랑의 계획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에페 4,7)
모든 사람이 각자 다 다른 것처럼, 우리가 받은 소명도 다 다릅니다. 물론 사도나 예언자, 목자 등 큰 카테고리는 존재하지만, 그 소명을 수행하는 각 개인의 특성만큼 개인 소명은 그 곱절로 다양해지고 풍요로워집니다. 각 개인에게 내리시는 은혜가 다르기 때문인데, 저마다 받은 은총의 다양성이 상호보완적으로 서로 작용해 교회는 더욱 온전한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에페 4,13)
사도는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인 우리에게 무척 놀라운 비전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일치하고 성숙할 뿐 아니라,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전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이 지닌 한계 속으로 밀어넣은 채 당신과 동떨어진 존재로 봉인해 버리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피조물에게도 당신의 신비를 누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신 것이지요. 사람은 구분하고 차별할지 몰라도 하느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심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당신의 충만함까지도 활짝 열어 개방하고, 아낌없이 나눠주고 싶어하십니다.
주님은 자칭 의인들이 "왜 저자들과 함께하느냐?"고 비난하는 바로 그들(우리) 곁으로 가셔서(오셔서) 그들과(우리와)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우리) 마음에 "용기를 내어라. 너도 나처럼 될 수 있다."고 속삭이십니다.
오늘의 말씀은 내치고, 갈라내고, 밀쳐내는 사람과, 끌어안고,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주님과의 대비를 통해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대하여 묻습니다. 어느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았건 주님에게서 온 소명은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에페 4,3)를 씁니다. 이 부단한 일치와 하나됨의 열망이 부족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까지 끌어올려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뭇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을 마태오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오 사도는 자기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단에게 씌워진 오명이 송구하고 죄송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죄인도 놓치지 않으시려는 주님의 구원 의지는 그의 죄스러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강력합니다.
어떤 처지에서 부르심을 받아 어떤 소명을 살아가건, 사랑과 평화,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이의 소명은 결국 그리스도의 충만함에까지 다다를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 두려워말고 저마다 받은 은총을 활짝 꽃피우며, 각자 받은 소명을 당당히 살아가십시오. 그런 벗님으로 인해 주님께서 흐뭇해하며 기뻐하십니다. 아멘.
성 마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밥상공동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밥상 둘레에
옹기종지 모여 앉으면
먹지 않아도 배부르지요
차린 것이 없어도
맛난 것이 없어도
삶을 나눌 벗들 있다면
배고픔도 나누고
배부름도 나누고
모두가 똑같이
쫒아내는 이도 없고
쫓겨나는 이도 없고
모두가 더불어 함께
서로의 눈길을 먹고
서로의 마음을 먹고
서로의 이야기를 먹고
모나지 않은
둥근 밥상 둘레에서
하느님나라 이루니까요
고정관념의 무서움
김효석 요셉 신부님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 정말 힘들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행실과 언행을 모두 알고 있어서, 도저히 그를 받아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면 더욱 그렇습니다. 세리 마태오는 그가 속한 사회에서 용서받기 힘든, 보기만 해도 분노가 일어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를 위해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돈을 받으려 피도 눈물도 없이 사람들을 겁박했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은 모두 그의 무자비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금 징수원이라는 그의 신분과 그에 따른 의무 자체로 그는 그냥 지탄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스스로 의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죄인과 어울리는 예수님마저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분위기를 그대로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마태오의 직업이나 사회적 신분에 갇혀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마태오를 보시고, 그와 어울리십니다. 예수님도 마태오가 저지른 잘못을 알고 계셨지만, 그의 사회적 신분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사람을 향한 치우친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이야말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마태오가 아니라 바리사이였습니다.
부르심의 여정 -부르심, 들음, 따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배치된 말씀이 참 풍부하고 은혜롭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줍니다. ‘부르심의 여정-부르심, 들음, 따름-’,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마침 어제 교황님의 삼종기도후 메세지도 이와 일치하며 기뻤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everyone를 부르신다. 언제나always 부르신다’라는 제목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 마태오, 제1독서 에페소서의 성 바오로,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듣고 따름으로 응답한 분들입니다. 주님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분들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이 이들의 사랑이자 운명이 된 분들입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이분들의 인생은, 또 우리의 인생은 어땠을까요? 마침 어제 방문했던 어느 형제분도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도저히 살아 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혐오와 차별의 시대에 식자들은 연대와 협력을 주장합니다. 오늘 복음의 세리 마태오는 말 그대로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었고, 반면 마태오를 부르신 예수님은 연대와 협력의 사람이셨습니다. 일체의 편견없이 현재 있는 그대로의 마태오와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부르십니다. 참으로 과거에 자유로웠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부르심은 순전히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불러야 따라 나서지 않습니까? 부르심에 듣고 즉시 따라 나섰던 세리 마태오, 내면은 주님을 깨어 찾았기에 부르심을 들었고 즉시 따라 나섰습니다. 참으로 깨어 잘 듣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숱한 부르심을 듣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늘 귀기울여 주님의 부르심을 듣는 경청이, 또 들음과 즉시 주님을 따라 나서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한 두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매일 끊임없이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따라 나서는 삶이 우리 믿는 이들의 일상입니다.
모두가 예외없이 주님께 부르심의 대상입니다. 참으로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따름으로 주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참 나의 실현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롤모델은 예수님이며 바로 이 예수님과의 신뢰와 사랑관계가 결정적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르심의 대상임을 예수님은 분명히 밝히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얼마나 은혜로운 주님의 초대의 부르심인지요. 자비하신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참으로 부르심이 필요없는 건강한 사람, 의인은 몇이나 될런지요. 잘 들여다 보면 병자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참으로 모두가 주님으로부터의 치유와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매일 평생 끊임없이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듣고 따라야 합니다. 이래야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부르심은 애매하거나 추상적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요 현실적입니다.
첫째, 회개에로 부르십니다.
회개는 우리의 기본적 삶의 자세입니다. 부르심에 내포된 회개입니다.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늘 회개에로 부르시는 주님이요, 바로 오늘 복음의 세리 마태오가 회개하여 즉시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늘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이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저절로 회개에의 응답이요 회개와 더불어 겸손도 뒤따릅니다.
둘째, 예수님께로 부르십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분별하여 따르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듣고 따라야 할 분은 참 스승이신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거짓 길로 부르는 우상들의 유혹도 많습니다. 이런면에서 세리 마태오의 들음은 정확했고 지체없이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참으로 복음의 세리 마태오처럼 깨어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 나서는 일이 얼마나 우리 영성생활에 본질적이요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셋째, 성덕聖德에로 부르십니다.
성덕에로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바오로의 권고대로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온유溫柔란 말과 더불어 저절로 떠오르는 온후溫厚, 온화穩和, 온건穩健이란 말마디들입니다. 참으로 따뜻하고 다정한 인품의 성덕에로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넷째, ‘하나’의 일치에로 부르십니다.
참으로 회개하여 주님을 따라 성덕의 길로 따라 나설 때 하나에로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마련입니다. 이래야 갈림없는 온전한 통합적, 융합적 인간입니다. 어느 유명 정치인과의 인터뷰 한 대목입니다.
-“20년 집권을 책임져야 할 후배 정치가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습니까?”
“제일 중요하게 보는 건 ‘퍼블릭 마인드public mind’입니다. 생각, 정책, 생활 모든 게 총체적으로 공적인 사고방식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모든 걸 구조적으로 볼 줄 알고, 통시적으로도 공시적으로도 다보고, 균형을 잡을 줄 알고, 생각도 중요하며 자세도 중요해요. 제가 공무원 교육을 하며 늘 하는 이야기가 삼실입니다. 진실, 성실, 절실, 이 자세가 퍼블릭 마인드의 기본입니다.”
퍼블릭 마인드의 사람, 바로 통합적 인간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예수님이요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이십니다.
하나의 귀착점은 한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안에 계십니다. 하느님 한분으로 충만한 세상 안에서 바로 주님 안에서 숨쉬며 움직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살아 계신 하느님 증명인 겁니다. 요즘 산책중 시냇가 깊고 맑은 일급수 여울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무수한 물고기들이 노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깊고 고요한 현존 안에 자유로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다섯째, 교회 공동체에로 부르십니다.
최종의 결정적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세리 마태오을 부르시어 제자들의 공동체 식탁에 참여시킵니다. 다양성의 일치에 기초를 제공하는 연대와 협력의 가시적 빛나는 표지가 공동기도요 공동식사입니다. 차별과 혐오가 말끔히 배제된 참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은 공동기도와 공동식사에서 잘 드러납니다.
공동체의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성의 일치, 바로 조화와 균형입니다. 바로 역할 분담에서, 즉 우열이나 호오, 경쟁과 비교가 아닌 연대와 협력의 상호보완과 섬김의 직무와 소임에서 잘 드러납니다. 공동체 성원들의 직무는 참 다양합니다. 바오로의 설명이 적절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려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층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자랑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은총입니다. 이를 깨달아야 비로소 겸손입니다. 또 혼자서의 성장과 성숙은 일치는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 공동체의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할 때 공동체와의 일치와 더불어 성장과 성숙의 삶이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도달합니다. 공동체를 떠난 성장과 성숙, 충만한 삶은 환상이요 착각일 뿐입니다.
주님의 이 모든 부르심을 총괄 종합하는 것이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부르심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하느님은 애초부터 완전한 사람을 부르지 않으십니다. 가득차지 않고, 아주 조금 차 있는 그릇을 선택하십니다. 나름 가득 찼다고 생각하는 그릇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주 조금밖에 없는 그릇을 선택하셔서 주님은 그 안을 당신 자신으로 채워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보통 어느 본당이나, 교구나 이러저러한 봉사를 좀 해달라는 말을 들으면, ‘제가 부족해서요.’ 라는 멘트를 단골로 날립니다. 하지만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정답입니다. 내가 부족하기에 부르시는 것입니다. 애초에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낌에도 불구하고, 주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은, 제가 그랬던 것처럼, 바로 하느님을 굳게 믿지 못하거나, 나 자신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튼튼한 이들이 아닙니다. 병든 이들입니다. 몸이 병든 것이 아니라, 악의 유혹과 세상에 지쳐 영적으로 힘듭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없으면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하느님의 부르심 받은 사람 복되도다. <9, 9-13> 9월 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높은 사람이 부르면 지체 없이 달려가는 사람 복된 사람입니다. 에페소 1, 18-19에 하느님의 부르심은 희망에 차고, 영광스럽고, 부유한 상속을 받고, 강력한 힘의 작용에 의해 하느님의 권능이 얼마 큰지 깨닫게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강력한 힘으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하고 누리게 합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시는가? 바리사이들이 말한 것처럼 주님의 잔칫상에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고 함께하십니다. 주님은 권력자, 재력가, 명예로운 사람은 부르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부르셨고 그들을 모두 풍요롭게 하시며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시키십니다.
가난한 이는 부르심에 우선권이 있습니다. 아니, 가난한 이와 함께 일하려고 하십니다.
초등학교 졸업 때 친구 셋이 천주교 신자였는데 함께 놀다가 소신학교를 가자고 하여 준비했는데,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부잣집 아들이고, 한 아이는 밥은 먹고 살았고, 저는 6학년 공납금을 내지 못하여 졸업식에 참석 못 할 정도여서 졸업장도 못 받은 가난뱅이였습니다. 한 사람은 부모님의 반대로 못 가고, 한 사람은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들어가고, 저는 준비 못 하면 옷이라도 한 벌 해 입고 오라고 했는데 그것마저 할 수 없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8년 후에 왜관 수도원 입회했습니다. 8년 동안 온갖 고통을 다 겪고 세상에서 피난, 노동, 장사, 쓰레기 조합 일꾼, 조수, 17세에 운전하다 경찰에 결려 유치장까지 경험하고 1956년 대신학교 입학했습니다. 1963년 12월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돌아보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시련이며 희망이었습니다.
성경의 부자 청년에게 “가진 바를 다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지만, 그는 부자여서 근심 찬 얼굴로 부르심에 응하지 못하고 세상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이상하리만큼 성당에는 가난한 사람으로 가득하고 힘이 없는 노인들만 넘치는 이유는 가난하기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겸손하게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저의 첫 본당이 지금은 공업단지가 되었지만, 시골 가난한 동네여서 가난한 사람들과 사는 것이 운명이었지만 할 일은 많이 있어 34세 농촌운동 외, 가난한 집 아이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록금 대주어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청년들 일자리 만들어 주고 농한기 없이 일하도록 추운 겨울에도 토마토, 오이, 상추 재배했습니다. 교회가 없는 곳에 공소 짓고 한곳에는 150명 합동 세례식도 하고 환등기를 들어 메고 시골 공소에까지 가서 일하니 그 당시 김 추기경 가톨릭 신문사 사장님이었을 때 잘한다고 칭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소신학교부터 시작했으면 조금 고급 사제가 되었을 것인데.... 그 당시 부잣집 학생은 유학하러 가고 이름 있는 사제로 살았습니다. 수도원 들어와서도 제 밑으로는 거의 유학을 갔다 왔지만 저는 나이 60이 돼서야 로마를 거쳐 이스라엘까지 성지순례 하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여기 있습니다.” 응답의 결실이라 생각하고 감사 기도드리며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영명축일을 맞으신 분들 축하드립니다. 성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 참조)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다른 사람의 좋은 점과 가능성보다는 안 좋은 점과 현실의 모습으로 평가하고, 그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하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평가절하면서 바라보고 기억하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태오에게 “나를 따라라.”(마태 9,9) 하고 부르시고는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러자 마태오의 동료인 세리들과 죄인으로 낙인찍힌 친지들이 같이 와서 식사릏 함께하게 됩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비난 섞인 말을 내뱉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11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지적을 들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어르신들이 가끔 하시는 말이 귀에 쟁쟁하게 울려퍼집니다. “사는게 죄지요.” 살면서 문득 문득 우리 모두 죄인임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주님께 기꺼이 다다르며 주님과 형제들 앞에 겸손되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며 새로워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실한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다.
사랑을
품고사는
죄인들이다.
용서와 사랑의
복음이 간절한
우리들이다.
죄가 아니라
복음이다.
죄인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의 의미인
함께하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어울리는
진정한 사랑을
아픈 우리들에게
보여주신다.
삶의 기쁨을
잃어버린
우리들이다.
예수님 친히
복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셨다.
목마른
우리 역사안으로
들어 오셨다.
복음은
생생한 체험이며
다시 시작하는
이들의 간절한
만남이다.
복음은 오늘을
흔들어 깨운다.
참된 열매는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따름의
열매이다.
열매의 길은
부르심의 길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복음의 힘은
세리였던
한 사람을
복음의 사도로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 놀라운 힘을
그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마태오 사도는
체험한 주님을
기쁘게 기록하여
생생히 우리에게
전하여 준다.
우리는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
주님의 현존인
복음을 나누는
것이다.
자격이 있어
나누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에
따르는 것이다.
따르기에
복음이고
열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