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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9월 22일 (녹) 연중 제25주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09.22|조회수34 목록 댓글 0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2,12.17-20
악인들이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3,16─4,3
사랑하는 여러분, 16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4,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악인들은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인지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고 말한다고 한다(제1독서). 야고보 사도는, 위에서 오는 지혜는 순수하고,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은 자주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모이면 이런 다툼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함께 읽으면,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두고 다툰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들의 행동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평화롭고 관대한 자비와도 거리가 멀고, 평화 속에 심어진 의로움의 열매도 아닙니다(3,17-18 참조). 싸움과 다툼, 분쟁은 욕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시기는 살인까지 불러올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바라는 바를 얻지도 못합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논쟁하였을 때, 그들은 위에서 오는 지혜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는 욕정에 굴복한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어린이들이 함께 있는 그림들에서 어린이들이 매우 예쁘게 그려져 있지만, 사실 복음에서 말하는 어린이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고 아무 능력도 없는 이들입니다. 나이가 어린 어린이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무능력한 이들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 물을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혜서에서 말하는 온유함은 박해자들 앞에서 모욕과 고통을 견디는 인내입니다. 박해자들을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죽임까지 당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것, 여기에서 그가 예수님의 제자임이 확인될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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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의 체험과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마태 16,24 참조)에 대한 성찰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체성대로 살고 있는지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 끝없이 계속되는 듯한 십자가 체험은 우리를 한숨짓게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러한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우리는 인내로 이 시간을 잘 견뎌 내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 인내의 열매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알려 줍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십자가의 체험’에 대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 뒤 사흘 만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현세적 명예가 중요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며 서로 논쟁을 벌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하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말씀 안에서, 성체 안에서, 그리고 어린이와 같은 약한 이들 안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세상 것만을 추구하지 말고,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인내하여 구원의 길로 들어선다면, 하느님 나라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지난여름은 정말로 더웠습니다. 수도권에만 38일간의 열대야가 있었고, 열대야가 끝났어도 낮 더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9월의 중순도 넘어가면서 좀 살 만합니다. 이렇게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겨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겨울 하면 겨울나무가 떠올려집니다. 봄의 화사한 꽃도, 여름의 싱싱하게 푸르던 잎도, 가을의 풍성한 열매도 다 떨어뜨리고 마치 죽은 것처럼 딱딱한 가지만 남아있습니다. 사실 아주 현명한 모습입니다. 푸르른 나뭇잎을 겨울까지도 가지고 있으면 혹독한 추위에 가지고 있는 많은 물기가 얼어서 터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나무 전체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나무는 가을이 되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잎사귀로 들어가는 수로를 막아 버립니다. 물이 공급되지 않아서 나뭇잎은 마르고 땅에 떨어집니다.

 

버리는 길이 바로 자기 살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돈, 명예, 지위…. 그 밖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기란 새로운 것을 얻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바로 집착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서 무엇을 첫 번째 자리에 두어야 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과연 무엇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제까지 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무엇을 가져가시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수난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세상의 칼날에 쓰러질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고 있어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까지 합니다. 그들은 모두 첫째가 중요했고, 가장 높은 자리가 중요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만 보는 집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어린이 하나를 세우시고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집착을 내려놓고 겸손하고 낮은 이,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지고 큰 것을 차지하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까지 짊어지는 용기와 자기 비움, 그리고 작아짐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진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이별의 커다란 슬픔 그 너머 영원의 문을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내게 있음에 감사한다(고영배).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 줍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초단기간에 세상의 물을 쫙 빼고 멋진 수도자로 탈바꿈시키려는 욕심에 도에 지나친 요구도 참 많이 했습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저도 제대로 실천 못하면서 형제들을 몰아붙이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래도 제 마음 안에는 어떻게든 형제들의 초보 수도 생활을 일취월장시키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구도 많았고 기대치도 높았습니다. 그 결과 갈등도 많았고 실망도 컸습니다.

12사도를 당신의 최측근 협력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한명 한명을 두고 따져보니 한 마디로 오합지졸, 당나라 군사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가방끈도 짧았고, 뭔가 내세울 것도 마땅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을뿐 아니라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었지만 아직도 세속적인 야심으로 가득했고, 예수님을 통해 뭔가 얻어내고, 한 자리 차지하고픈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단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길에서 한바탕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일종의 서열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분노에 앞서 큰 서글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높아지지 말고 낮아져라, 커지지 말고 작아져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겨라, 그렇게 목청껏 외쳤건만, 아직도 서열 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아무리 말로 교육을 시키려 해도 안되니, 특별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살암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 옛날 극도로 미성숙했던 제자들, 틈만 나면 내가 높으니, 네가 높으니, 서열 싸움을 하는 제자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주면 좋으련만, 수시로 나와 그를 비교하고, 어떻게든 상대의 위에 서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은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순교는 과연 행복한 선택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으려는 마음을 갖는 날입니다. 그런데 요즘 순교는 조금 남의 이야기이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시지만, 사실 사람은 어떤 것이 ‘행복’으로 보여야 선택합니다. 자살까지도 이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워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의 길로 가려면 순교가 참으로 행복으로 보여야 합니다. 

 

만약 죽을 때도 후회가 없다면 그 삶은 행복일 것입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을 쓴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죽기 직전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중에 공통된 다섯 가지를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둘째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입니다. 대부분 남성 환자들이 이러한 후회를 했습니다. 이들은 직장 생활 때문에 아내, 자녀들과 따뜻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셋째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타인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긴 것이 어쩌면 지금의 `병`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넷째는 `옛 친구들의 소중함`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오랜 친구들이 보고파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연락처조차 알 수 없어 절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많은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살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순교자의 삶을 이 다섯 가지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최초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한 광암 이벽 성조를 봅시다. 그는 정약용이 친구로서 인정할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 연구를 통해 천주교가 진리임을 깨달았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일하는 것보다 진리에 더 심취했습니다. 진정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다. 이승훈을 중국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고 자신은 스승인 권일신, 권철신까지 설득하여 박해받는 상황에도 천주교 신자를 늘렸습니다. 

아버지가 문중의 꾸중을 받고 오자 아버지는 이벽을 집에 가둡니다. 그리고 배교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벽은 솔직히 자기감정을 털어놓고 집에 갇혀 죽습니다. 아버지에게 독살을 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같은 유배나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지만,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외에도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등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목숨을 함께 할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누구의 행복도 아닌 자기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길을 갔기 때문에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75년간 하버드에서 연구한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관계’였습니다. 주위에 생명의 은인이 많이 모이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자신이 사는 언덕으로 올라오게 하려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면 그 사람은 집을 잃었어도 사람을 얻었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 의원 선우경식 원장은 수십만 명의 환자를 거저 치료해주었지만, 가난한 그 환자들이 자신에게는 행복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맞아준 철거민들과 학생들은 그분을 생명의 은인처럼 좋아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나 마더 데레사 주위의 많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모읍니다.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하는 수많은 사람을. 그래서 십자가의 삶은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본당의 날’입니다. 본당의 날을 지내면서 4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본당의 날에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당연히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본당의 날에 잔치를 벌였습니다. 맛있는 점심이 준비되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습니다. ‘족구, 피클 볼, 포인트 게임, 길거리 노래방, 찬양 팀 공연, 경품추첨’이 있습니다. 모두들 잔치에 참여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은 열정과 땀으로 한국의 초대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분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함으로써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신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서울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를 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이분들이 한국교회의 영웅들입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내님과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뒤서려고


날마다
낮춥니다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따르려고


날마다
걷습니다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닮으려고


날마다
비웁니다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살리려고


날마다
죽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로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천주교 신앙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는 전통을 중시하던 유교 사상과 충돌하였고, 당시 당파 싸움의 희생양으로 천주교는 박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명이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에 오셔서 순교자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셨고, 지난 2014년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문하셔서 124명의 복자 시복을 하심으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손꼽을 만큼 많은 성인과 복자를 보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가 많은 순교성인을 모시고 있는 나라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순교성인들의 후손으로서 그 피로 증거된 신앙의 모습을 현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세속 안에서 끊임없이 타협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 속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대로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순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하느님으로부터 생명과 구원을 얻었고, 앞으로도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갈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시련과 고통이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승리할 것이고, 하느님 안에 영원한 행복을 이루어 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받게 될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앞으로 만들어질 메시아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일까에 대해서 논쟁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극히 세속적인 입장에서 서로 토론 하였던 것이지요. 그들은 세속적인 생각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지요.


이렇게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은 이 지상에서의 삶과는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첫째만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자신의 삶을 본받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존경과 흠숭을 받아야 할 분이 도리어 섬기면서 심지어 자신의 생명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 만족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어린이는 약함을 의미합니다.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무시하지 말고 그들을 도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껴안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특히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주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이 사랑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지는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목적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알려주려는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요즘의 한국의 사회는 문을 잠그며 살고 있습니다. 좀처럼 문을 열고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나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문을 열고 나갑시다. 나온다면 예수님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이들을 안아주면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한가위, 추석 잘 세셨습니까? 명절 치르시느라 수고 많으셨죠? 예전에 혼자 살 때 먹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번에 많이 먹고 다시 배가 안 고프면 좋을 텐데, 한 번에 하루치를 다 먹으면 과식으로 배가 탈이 나서, 매번 일정양의 음식물을 취해야 한다는 인간 조건이 좋기도 했지만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또 그에 따라 매번 남은 음식물을 치우고, 냄새가 나지 않도록 뒷정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지만 귀찮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크게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주님의 복음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지난 2014년 8월 16일 한국을 방문하셔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신앙선조들을 복자품에 올려주시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향한 회개와 새로운 삶으로 이끄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을 통해 오늘 우리의 신앙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미사를 봉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성 바오로는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영광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신앙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환희와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함께 참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음을, 순교자들은 성 바오로와 함께 증언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교황님은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미사’에서 교황님께서는 한국 천주교회를 평신도들이 자립적으로 세웠다는 사실을 칭찬하십니다.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 ……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진리의 탐구를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평신도 소명의 중요성, 그 존엄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시면서 순교자들이 받아들인 복음의 열망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복음과 처음으로 만난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무언가의 깨달음은 곧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첫 세례들과 더불어 충만한 성사 생활과 교회적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교 활동의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의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한국 천주교가 시작했던 조선 시대에는 양반과 중인 및 상인으로 반상의 신분차이가 엄격히 존재하고 남존여비가 남녀평등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던 시절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상황 안에서, 조선시대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선택했다는 사실을 교황님은 지적하십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교황님은 오늘 우리가 처한 사회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민을 대비하며, 현실 안에서 우리 천주교인들이 선택해야 할 복음 정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교황님은 순교자들을 뒤를 이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분하지 말고,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라고 하십니다.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게 주님을 믿는 신앙과 그에 따른 사랑의 실천에 이르는 기쁨을 이야기 해주십니다.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본당의 주보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교황님의 강론을 되새기며, 우리가 매일 접하고 대면해야 하는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잘 실현하여,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데 충실하기로 합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함승수 신부님

박해가 한창이던 때에 천주교를 믿는다고 여인이 끌려오니 관장이 “너는 왜 왔느냐?”하고 모욕적으로 묻습니다. 여인은 조용히 대답합니다. “저 또한 천주님을 믿는 사람이니 국법대로 다스림을 받으러 왔습니다.” 관장이 언짢은 목소리로 묻습니다. “네가 믿는 천주가 도대체 어느 책에 적혀 있느냐?” 여인은 대답합니다. “저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관장은 글도 모르는 게 와서 국법 운운하니까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는 “글도 모르는 게 뭘 안다고 천주를 믿느냐, 너는 천주를 본 적이 있느냐?”하며 다그칩니다. 그러자 여인은 “저는 본 적이 없습 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봐라! 글로 아는 게 있느냐, 본 적이 있느냐, 너는 뭘 가지고 믿는다고 큰 소리를 치느냐?”하고 관장이 무시하자 여인이 답합니다. “나리, 제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말아야 할 것으로 말한다면 저는 이 나라의 임금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나리님을 보내셔서 오셨기에 저는 임금님이 계신 줄 믿나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있는 걸 보고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을 어찌 믿지 않겠나이까!”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온갖 거짓 정보들이 가득하여 무엇이 진실인지를 제대로 구별해내기 어렵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유혹거리들이 넘쳐나 하느님 뜻에 맞는 올바른 길을 걷기가 어려워진 요즘 세상에서, 순교 성인들의 모범적인 신앙을 되새기는 것은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식별하는데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하느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와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신앙의 길을 계속 걸어나갈 용기와 힘을 얻지요. 순교 성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박해를 각오해야 했고 재산과 땅, 명예와 성공, 그밖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 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얻고자’ 했으며 주님과 고난을 함께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랬기에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굳게 믿었기에, 그들에게는 그 신앙이 전부였기에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처럼 신앙을 내 삶을 멋져보이게 꾸며주는 ‘악세서리’정도로 생각했다면, 시간이 남고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여가활동 정도로 여겼다면, 순교는 엄두도 못냈겠지요. 자연스럽게 ‘구원’도 나와는 먼 ‘남의 일’이 되었을테구요.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생활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그치십니다. 당신을 제대로 믿고 따르려면, 그래서 세상 종말의 날에 당신 뒤를 따라 천국에 들어가려면 대충대충, 눈치보며 적당히 할 생각말고 최선을 다해 구원의 길을 걸으라는 겁니다. 그 과정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데, 먼저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쓸모 없는 것을 버리는게 아니라, 주님과 그분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존에 내가 중요하게 여기며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비워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는 중요할 지 모르지만 구원에는 별 도움이 안되는 그것들이 내 마음 안에 가득 차 있어 주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만 하려고 드는 나의 취향, 바람, 계획 등 자기 중심적인 요소들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주님과 그분 뜻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채워가라는 뜻입니다. 이는 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입니다. 여름에 감나무가 덜 익은 열매들을 털어내듯이, 가을에 활엽수들이 그 많던 나뭇잎들을 떨구듯이…. 셋째,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들을 하느님께,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바치라는 뜻입니다. 물론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그러하듯 하느님께 딱히 내어드릴 것은 없고 받기만 하는게 어쩔 수 없는 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이지만, 그래도 사랑과 정성 그리고 희생을 바치려는 마음을 갖는게 중요한 겁니다.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가 신부님께 드릴 것이 없어 감자라도 쪄 드리는 그 마음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한 두 번하고 마는게 아니라 꾸준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꾸준함을 ‘날마다’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나의 작은 노력이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는 큰 변화로 나타나지 않아 실망스러워도, 매일매일 ‘제 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아 답답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내가 어제보다 더 나은 나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나선형 계단’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제 자리를 도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날마다 조금씩 주님께 가까워지는 신앙의 여정을 이렇게도 표현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 예수님의 일부라도 닮으려고 애써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 뒤에 설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의 겸손을 닮으려고 애써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 나의 욕심과 집착들을 비워 나가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날마다 조금씩 신앙을 실천해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양보하고 희생하는 연습을 해야지요.]

매일 이루어지는 그 노력은 십자가를 지는 행동으로 구체화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생활에 동반되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쉽고 편한 길을 놔두고 왜 굳이 어렵고 힘든 길로 가려고 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길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쓸 데 없는 고생을 사서하는 비효율적, 비합리적인 생활양식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걷다보면 중간에 높은 산도 만나고 깊은 강도 만나게 되는데, 그걸 넘고 건너는게 힘들다고 천국으로 가는 걸 포기할 수는 없으니 힘을 내어 ‘정면돌파’를 선택하는 겁니다. 이런 ‘어쩔 수 없는’ 점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 어깨에 짊어진 크고 무거운 짐을 힘겹게 질질 끌고 가는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듯,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어안고 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때로는 나를 아프게 찌를지라도, 때로는 그것 때문에 손해를 입고 희생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사랑과 순명으로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 성인들이 그렇게 하셨기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과 행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말씀이 주시는 생명력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진 채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선뜻 내키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처럼 나도 참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서는 스스로 십자가를 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이 이러한 차원에 머물고 있다면 한번쯤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 목숨을 구하는 길이라고도 말씀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 참된 생명을 얻는 길임을 깨닫는다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참아 견디는 인내의 여정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뿐 아니라, 순교 성인들은 그 신비를 깨닫고 삶으로 받아들이신 분들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참된 생명을 얻는 길임을 깨달은 사람의 표지標識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일을 어려운 관계나 상황을 무조건 참고 인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주저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나를 변화시켜 준다는 체험들이 쌓여 나에게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다 보면 우리의 신앙은 나날이 성장하여 십자가를 통한 참된 구원의 길을 기꺼이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나의 행동

     키엣 대주교님

평등한 세상이 과연 이루어질까요?

고대인들은 식량과 땅을 빼앗기 위해 서로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존이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형성되면서 계급과 권한이 주어졌고 불평등한 사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권한과 부를 갖기 위해 전력 질주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도전해야 할 대상, 때로는 넘어가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두머리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고, 제일 끝 가장 겸손한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회의 통상적인 지위가 역전되는 혁명, 즉 나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이 가장 존중받는 세상, 사랑의 혁명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가 변화되려면 권한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특권을 포기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진정한 평등의 사회가 될 것입니다. 서로가 경쟁 상대, 제거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따뜻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권력은 권한을 가진 사람,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지위란 단지 업무와 책임을 분배할 때만이 합리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각자 주어진 일은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분의 겸손을 따르는 새로운 사회로 변화된다면 더 이상 해결될 수 없는 갈등과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로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지만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다른 사람보다 높이 올라가고 싶은 욕망을 키우고 있습니다. 아직도 더 좋은 자리, 더 중요한 자리에 올라가고 싶습니다. 아직도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다시 또 주님의 길로 돌아 가기 위해 스스로 작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위를 조금만 놓아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가지십시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따뜻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한번만 더 그들을 돌아보십시오. 

나의 작은 행동과 따뜻한 마음이 어느 한 누군가에게 평화와 작은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작은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주님, 주님과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는 저희가 다시 아버지 주님의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닮게 하여 주소서.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오늘날 아동과 여성, 장애자들은 그 옛날보다 훨씬 많은 관심과 돌봄을 받고 있지만 또 다른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면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또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 예수님께서 가장 나약하고 가난한 사람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의 삶 - “모든 이의 꼴찌, 모든 이의 종”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오늘 미사중 방금 부른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주님께서 늘 우리 생명을 떠받쳐주시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을 기억하고 신망애(信望愛) 삶을, 진선미(眞善美) 삶을 두터이 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가, 은총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너무 잊고 지낸 생명의 주님입니다.

 

어제 위에서 오는 지혜를 갈망하여 피정자들과 파견미사후 퇴장성가 부르기전 일어나 함께 부른 만세칠창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자 강론에 이어 실제 일어나 하늘을 향해 눈길을 두고 양손을 활짝 펴들고 만세칠창을 바쳤습니다. 피정자들도 이런 체험은 처음일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우리 가정 만세!”

 

함께 부르는 만세칠창 기도 얼마나 좋은지요! 두발로 서서 눈들어 하늘 보고 기도하라고 직립인간(直立人間)입니다. 순교자성월 9월, 묵주기도성월 10월, 위령성월 11월, 가을철은 정말 기도의 계절입니다. 우리 생명을 떠받쳐 주는 주님께 기도할 때 활력넘치는 충만한 삶이요, 위에서부터 지혜도 선물로 받습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 심어집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때는 수제자 베드로가 격렬하게 반응했고, 오늘 복음에서 두 번째 예고 때는 철부지 제자들은 동상이몽, 동문서답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스승이자 주님께 공감하는 분위기가 전무합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길이신, 생명과 진리의 길이신 주님께서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길은 걸을 때 마다 상기해야 할 사실은 길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모두 도인(道人)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현자 무위당 장일순과 목사 이현주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목사인 자기에게 왜 도인이라 써주었는지 묻자 장일순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합니다.

 

“허, 자네는 길 가는 사람이 아니신가? 길 도(道)에 사람 인(人), 그러면 그게 길 가는 사람이지, 사람이 길을 간다는 건 길을 닦는 거라.”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길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길 가는 사람’ 도인(道人)이자 길을 닦는 수도자(修道者)들임을 깨닫습니다. 자나깨나 잊지 말아야 할 말마디가 도(道)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요한복음 중국한자 성경은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침 지인이 보내준 삶의 지혜도 길 가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 싶어 나눕니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을 위해, 소식(小食)에 고기를 먹기, 뭘하든 계속하기, 햇빛 쬐기, 눕지 말고 움직이기, 일부러 외출하기, SNS를 즐기기, 지인과 대화하기, 느슨한 운동을 습관화하기”

 

이보다 더 권하고 싶은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기, 적절한 걷기 운동”입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에 필시 이런 삶의 지혜도 적절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차마 부끄러워 대답을 못합니다. 주님은 이들의 속내를 환히 아시고 위에서 오는 지혜의 절정을 가르쳐 주십니다. 길이신 예수님이야 말로 이런 지혜를 체현(體現)하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역설적 영적 진리의, 겸손의 최고봉이자 천상 지혜의 결정체같은 말씀입니다. 이런 첫째의 삶은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런 첫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는 공동체의 첫째 원리입니다. 모두가 “커지기 경쟁”이 아니라 모든 이의 “꼴찌 되기, 작아지기의 경쟁, 모든 이의 종이 되기 경쟁”이라면 상상만해도 너무 흐뭇한 '복음적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지체없이 택한 오늘 강론 제목, “첫째의 삶-모든 이의 꼴지, 모든 이의 종”입니다. 영어 말마디 역시 은혜롭게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부터 또 하나의 평생 좌우명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Last of all, Servant of all(모두의 꼴찌, 모두의 종)”

 

얼마나 멋집니까! 이러면 다투거나 싸울 일이 없습니다. 이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삼 우리의 파스카 영성은 어원도 같은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어 어린이를 껴안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참 감동적입니다. 제가 간혹 면담성사시 감동하여 형제자매를 안아들일 때도 이런 심정입니다. 예수님 제자 공동체는 물론 교회 공동체의 두 번째 원리로 이 또한 ‘위에서의 지혜’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건강하고 건전하고 온전한 신비주의입니다. 어린이 환대가 예수님 환대요 하느님 환대라는 놀라운 신비를 보여줍니다. 어린이가 누구입니까?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무엇입니까? 

 

어린이는 물론 모든 가난한 자, 무력한 자, 약자, 병자, 죄인, 난민, 노인들, 변두리 소외된 사람들...끝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이들을 환대함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일이요, 이런 이들을 받아들여 모든 이의 꼴지로, 모든 이의 종으로 사는 자가 참 영성가이자 신비가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가한 박해와 시련중에도 이런 위에서의 지혜와 하나된 이들의 내공은 놀랍고 주님 친히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인지,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녕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 과정을 통해 입증된 영적승리자, 하늘 지혜의 화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영적전쟁의 상황은 흡사 온유와 겸손, 인내력, 분별력의 시험장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한 “지혜의 도(道)”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내적 일치가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김동우 바오로 신부(교구 사무처 차장)

자랑스러운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기억하며 지내는 대축일입니다.

입당송으로 축일을 기뻐하며 시작합니다. “거룩한 순교자들을 공경하여 축제를 지내며 다 함께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자.”

주님 안에서 하나될 수 있다는 것은 순교자들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의 믿음을 제1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순교자들은 복음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때, 우리도 순교자들의 그 믿음을 본받아 제2독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지지 마십시오. 그 힘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부터 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고 기도하면, 우리 믿음의 신앙 선조들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을 것입니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하노라.

       강유빈 도미니코 신부(태평동 본당 주임)

많은 분이 읽어보셨을 수 있는, 故 박경리(테레사)님의 시 <세상을 만드신 당신께>를 나눠봅니다.

당신께서는 언제나

바늘구멍만큼 열어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이제는 안 되겠다

싶었을 때도

당신이 열어주실

틈새를 믿었습니다

달콤하게 어리광부리는 마음으로

어쩌면 나는

늘 행복했는지

행복했을 것입니다

목마르지 않게

천수(天水)를 주시던 당신

삶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을 믿고 순교를 통해 성인품에 오른 신앙 선조들을 기억합니다. 올해, 김대건 신부님이 남긴 21편의 서한을 다시 읽으면서, 저에게 조금 더 와닿았던 한 대목도 함께 소개합니다.

“마지막 박해(1839년 기해박해)가 4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 신자들은 예전보다도 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집이라는 것이 알려지기만 하면 포졸들이 즉시 그 집을 점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당하고 난 후라 맥이 빠지고 열성이 식어 대다수가 냉담자들이 되었는데 예전과 같은 열성적 상태로 돌아올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전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점차 열성이 오르고 그 수도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배교자들이 참회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열한 번째 서한. 1845년 4월 6일).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라는 로마서의 한 구절처럼,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 신앙 선조들이 ‘희망을 거슬러 희망하며’(직역)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돌아오고, 하느님과 함께 살았음을 목격하고,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바늘구멍’, ‘틈새’처럼 보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희망하고, 작은 틈을 통해서도 전해지는 하느님의 은총(천수 天水)에 감사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셨을 것입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찾고 살아가려는 우리를 위해, 신앙선조들은 김대건 신부님이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함께 전하며 오늘도 하늘에서 기도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하노라.”

 

 

 

증거재판주의와 증거신앙주의

      성진욱 베드로(법무법인 해성 변호사)

법으로 먹고사는 법조인들을 제외하고, 일반 사람들은 살면서 소송을 경험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민사소송이든 형사소송이든 소송을 경험해 본 의뢰인들 대부분은 소송 과정이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전쟁터 같은 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판사를 잘 만나는 것?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 중간에 꺾이지 않는 마음? 물론 이런 것도 중요할 수 있겠습니다만, 같은 질문을 법조인들에게 해 보면 백이면 백 모두 “증거”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소송은 결국 ‘증거싸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현대 사법제도의 근간인 ‘증거재판주의’는 ‘증거에 의해서만 재판의 전제가 되는 사실을 인정하는 원칙’을 말합니다(형사소송법 제307조). 이는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식의 원님 재판을 방지하고,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이 극명하게 위반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신앙 선조들에 대한 재판’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당시, 수많은 순교 선조들은 단순히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범죄의 증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들의 믿음 자체가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순교자들의 죽음은 믿음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순교’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증언, 증거(martyrium)’를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순교는 증거가 필요 없는 죽음이었지만, 그 죽음은 신앙의 가장 강력한 형태의 증거가 되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많은 영감과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극단적인 형태의 순교를 요구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신앙을 증거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는 법정에서의 증거재판주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과정입니다. 법정에서 증거 없는 주장은 힘을 잃습니다. 마찬가지로,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신앙은 공허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순교 선조들은 하느님을 위한 삶과 죽음이라는 행동으로 신앙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통해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대하며, 사회적 약자를 돕는 등의 행동은 우리 신앙의 ‘증거’가 됩니다. 신앙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순교’의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신앙인다운 삶을 가로막는 각종 유혹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하는 모든 것은 현대 사회의 박해와도 같습니다. 그러한 박해와 불의에 맞서 진실을 말하고 진리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 편견과 차별에 맞서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사는 이 모든 것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순교자의 길’일 것입니다.

‘순교자 성월’의 끝자락에 우리 모두 신앙 선조들의 용기와 믿음을 본받아 각자의 삶에서 신앙의 증인이 되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있는 증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한국교회를 특별히 사랑한 성 바오로 6세 교황(축일 5월 29일)

      백형찬 라이문도(전 서울예술대 교수)

바오로 6세 교황(1897~1978)의 원래 이름은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입니다. 이탈리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몬티니는 어려서 몸이 많이 약해 교구 신학교를 집에서 통학했습니다. 몬티니는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중학교 때 그를 지도한 선생님은 ‘몬티니는 글솜씨가 매우 뛰어나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훌륭한 기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가 된 몬티니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수료 후에는 교황청 국무원에서 무려 30년 가까이 일했습니다.

몬티니는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밀라노대교구가 시작되는 곳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췄습니다. 밀라노대교구에 대한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요한 23세 교황은 몬티니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해에 요한 23세 교황이 갑자기 선종했고, 후임 교황으로 몬티니 추기경이 선출되었습니다. 추기경은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이름을 ‘바오로 6세’라 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전임 교황이 시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속개, 현실에 맞지 않는 교회법 개정, 그리스도교의 일치 운동’ 등을 착실히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교황 최초로 오대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을 모두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순례자 교황’이라고도 부릅니다. 교황이 특별히 이룬 업적은 세계 주교 시노드 개최와 ‘추기경의 국제화’였습니다. 이제까지 추기경은 유럽 출신이 대다수였는데 바오로 6세 교황은 제3세계 출신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대주교가 한국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되었습니다. 교황의 한국교회와의 인연은 오래되었습니다. 교황은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을 허락했고,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식을 주례했습니다. 시복된 순교자 24위는 후에 103위 순교성인에 포함되었습니다. 시복식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당시 대주교)이 교황을 알현했을 때, 교황은 “한국교회를 특별히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교황은 겸손하고 검소했습니다. 밀라노대교구 신자들이 교황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삼층관(교황관)’을 선물했습니다. 교황은 그 삼층관을 공의회까지만 쓰고 미국에 있는 한 성당에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이 선종했을 때도 장례미사는 검소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광장 바닥에 관을 놓았고, 관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습니다. 관 위에는 오직 성경만 놓여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바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 때문에 오셨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

 

 

 

발안 성당에서의 첫영성체

      김현숙 아가다(발안 본당)

사진을 정리하던 중, 10살 무렵 첫영성체를 받은 딸과 아들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어린아이들이 자라 지금은 성인이 되어, 이제는 첫영성체를 한 기억이 나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연년생인 딸과 아들이 2007년과 2008년 2년 동안 박경민 신부님께로부터 첫영성체를 했다는 사실을 저도 잊어버리고 있었답니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첫영성체 준비를 잘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이름과 세례명을 불러가며 격려를 하였습니다. 또, 지하식당에서 간식을 만들어 먹었던 추억이 함께 떠오르며, 사진 한 장으로 인해 행복한 시간이 고스란히 상기되었습니다.

교리와 미사에 함께 해주신 선생님, 첫영성체를 준비하며 힘들어하던 아이들에게 늘 힘이 되어 주신 신부님과 수녀님. 그때는 미처 하지 못했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신부님, 수녀님, 선생님! 늘 애써주시고 격려와 사랑으로 아이들에게 웃음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내년 3월이면 결혼하는 딸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며, ‘너에게 이런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라고 자랑해 보려합니다.

 

 

 

<하느님께 '첫째'가 되는 길>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길을 제시해줍니다.

곧 '첫째가 되는 길로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길'(마르 9,35)을 제시합니다.

제1독서인 <지혜서>의 의인은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는 악인들의 위협은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 43)라고 비아냥거리는 유다 지도자들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이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는 것과는 달리 제자들은 자신들의 키 재기와 힘겨루기를 하며, 자신들의 야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스승의 죽음을 목전에 둔 제자들이 벌리는 철없고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논쟁을 하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 볼 일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큰 사람, 높은 사람 되어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야고 3, 16)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야고 4,1)

반면에, '위에서 오는 지혜'와 '의로움의 열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야고 3,17-18)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 말씀은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고 높은 사람인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심은 단지 자신을 비우고 ‘꼴찌’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높여 받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를 존중하고 앞세우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타인 아래 두고, 타인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껴안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그렇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께 ‘속한 이’로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란 당시의 가정이나 사회에서 군림하지 못하고 지배받고 군림당하는 이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에서 천대받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군림 받는 무력한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린이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죽으러 가는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곧 당신처럼 그렇게 당하면서 이루는 길을 '첫째'가 되는 길로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무력하여 사람에게는 '꼴찌'가 되고, 무력하기에 하느님께는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바로 이 길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하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마르 9, 3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가을 열매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우리의 삶이란
어느 위치에
우리가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모두가 첫째가
되려는
천태만상의
우리들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림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모시는
섬김의 가치를
당신의 삶으로
실현하십니다.

꼴찌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을
찾지 않는
우리들 교만을
간파하십니다.

꼴찌의 생명력은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는
남춤에 있습니다.

우리를 낮출 때
우리가 삶에서
살아내고
치러야만 하는
고통은 은총이
됩니다.

은총은 낮춤에
있습니다.

더 기쁘고
더 귀한
겸손입니다.

우리자신이
첫째가 되는
우선이 아니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우선이십니다.

건강한 신앙은
꼴찌와 첫째의
건강한
교환이며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꼴찌를 통해
새로운 삶을
보여주십니다.

겸손한 삶
모시는 삶
섬기는 삶이
모든 이의
종이 되는
봉사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기쁨은
봉사의 참된
기쁨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어느 위치에
있느냐가 아닌
어떻게 섬기고
나누며 살아
가느냐에 있음을
마음에 되새기는
은총 가득한 주일
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으로 뽑힌 인물이 있습니다. 1929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프란 세락’이라는 인물인데, 그의 좋은 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열차가 탈선해서 한겨울 차가운 강에 빠져서 17명이 사망했지만, 그는 팔이 부러지는 상처만 입었습니다.
2) 처음 타 본 비행기가 추락해서 19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건초더미 위에 떨어져 목숨을 구했습니다.
3) 그 후에도 버스가 강에서 떨어지거나, 운전하던 승용차가 폭발하는 등 다섯 번의 사고가 있었어도 매번 죽음에서 벗어났습니다.
4) 자신의 다섯 번째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복권을 샀는데 1등에 당첨되었습니다.

진짜로 운 좋은 사람일까요? 교통사고를 아예 당하지 않는 것이 더 운 좋은 것이 아닐까요? 또 다섯 번의 결혼을 했다는 것은 네 번의 이별을 했다는 것인데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거액 복권 당첨자의 불행이 자주 소개되는 것을 보면, 복권 당첨도 행복하다고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무 일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가장 운 좋은 사람이 아닐까요? 왜 특별한 행복을 찾을까요?

세상의 관점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은 세상의 관점과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평범함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관점을 뒤집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직접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외 아드님인데도 불구하고 그 고통스러운 수난을 당하시고, 또 발가벗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는 권력자가 어디 있습니까?
사랑이 담긴 주님의 관점을 따를 때, 하늘나라에서 첫째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았습니다. 세상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늘나라에서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

세상의 첫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각종 조건이 많습니다. 능력도 좋고, 돈도 많고, 또 운을 비롯한 그 밖의 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세상의 첫째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의 첫째 자리는 딱 하나,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기도란 내가 하느님께 바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순간이기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지 묻는 순간이다(성녀 마더 데레사).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지 마세요.
올해는 아직 못하고 있지만, 매년 국내외 성지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이 순례 중에서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성지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성지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맞은 편에 순례객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지 문이 자물쇠로 닫혀 있어요.”
몇 차례 방문했었던 곳인데, 이곳을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늘 문이 열려 있었던 곳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런데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순례객들과 함께 내려갈까 했는데, 그래도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문 앞까지라도 가야겠다 싶어서 혼자 올라갔습니다.
정보를 알려 준 순례객의 말처럼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는 생각으로 자세히 보니, 자물쇠가 걸려는 있지만 문이 움직이지 못하게만 했을 뿐 열려 있는 것입니다. 앞선 순례객은 문에 자물쇠가 끼워져 있는 것만 보고서 그냥 포기했었던 것이지요.
시도도 하지 않고 ‘안 돼’라는 생각으로 포기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먼저 떠납니다. 천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천주교 박해시대 당시 조선이란 땅은 동방 선교사들에게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일단 들어가면 100% 죽음이 확실한 사자굴과도 같은 선교지가 조선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 선교를 지원했던 서방 선교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조선으로 입국했지요.
조선으로 떠나기 직전 선교사들은 죽음 준비 작업을 하였습니다. 아쉽고 송구스런 마음을 겨우 달래며 부모님과 지인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작별 편지를 말입니다. 편지지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이윽고 떠나기 직전입니다. 동료사제들,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올립니다. 아무런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승에서는 마지막이 될 깊고 힘찬 형제적 포옹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고개만을 끄덕이며 마지막 눈인사를 주고받습니다.


“먼저 떠납니다. 천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래요. 먼저 가세요. 저도 준비되는 대로 뒤따르겠습니다. 꼭 뜻을(순교) 이루길 바랍니다.”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형극의 길이자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선교사들의 조선행(朝鮮行)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무죄한 어린 양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았던 모든 선교사들의 길은 오직 처절한 십자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길과 같습니다.


이런 선교사들에게서 사제수업을 받으셨던 김대건 신부님 역시 동방 선교사들의 전통과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 입국 역시 목숨을 건 길, 일단 들어오면 100%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꿈결에서 조차 그리웠던 고국산천, 입국을 위해 그 숱한 나날들을 기다려왔던 조국인데, 이제 그 고향 땅에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이라니…. 참으로 비극적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박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국할 수도 있었습니다. 박해의 세월이 지나가기를 기대하면서 다른 학문을 공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입국을 뒤로 좀 미루고 중국에서 사목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 뇌리에는 오직 목자 없이 길 잃고 방황하는 동포들의 고통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목자가 없어 서러운 민중들 한가운데로 한시라도 빨리 투신할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 김대건 신부님과 동료 순교자들처럼 죽기 살기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평소보다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자신을 죽이는 '작은 순교'를 실천하는 날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 시대, 피를 요구하는 절박한 순교상황은 맞이하기 어렵습니다. 순교 기회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순교자 후예로서 어떤 방식으로 순교 영성을 살아야 할까요? 일상(日常)에서 순교입니다. 매일 고통과 십자가를 기꺼이 견뎌내는 일입니다. 매일 좌절과 방황을 훌훌 털고 일어서는 일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병인박해나 기해박해와 같은 대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매일의 삶 가운데서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나 시련을 기쁘게 참아냄으로써 가능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유일한 인생의 방향: 십자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제자들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당신 수난과 부활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따라야 할 구원의 표지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습관상 하늘을 보기보다는 땅을 보며 걷습니다.
하늘엔 죽어야 산다는 표지판이 있고, 땅엔 그저 이전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이 있습니다. 표지판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인생의 길에 방향이 분명 있음을 믿는 사람이고, 땅을 보는 사람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길을 만든 사람이라면 표지판을 공중에 달아놓는 법입니다.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길을 만들지 않아 방향을 모릅니다. 그래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는 그 끝이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표지판보다는 이전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을 따르려 합니다. 바닥만 보는 사람은 당장 넘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저 지금의 생존을 위해 소유하고 강해지는 것만을 원합니다. 그러며 서로 누가 더 높은지를 두고 다툽니다. 그러다보니 그 생존경쟁 안에서 이웃에 대한 포용력과 이해력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나의 생존에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신경만 쓰입니다. 당시 어린이는 과부처럼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 어린이 때문에 나를 희생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십자가로 자기를 죽이는 삶이 아니면 그런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받아들여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희생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사람이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발걸음을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그런데 걸을 때 땅을 보도록 가르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하늘을 보고 걸으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있습니다.
‘히틀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렇다면 히틀러의 아버지는 히틀러에게 어디를 보며 걸으라고 알려주었을까요? 땅일까요, 하늘일까요?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을 좋아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난폭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출세 지향적 성향’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13살 때부터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생존만을 위해 산 사람이고 그것을 자녀들에게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도 자신처럼 실제적이고 분별 있고 현실적이며, 비종교적이고 비정치적이며 안정적이고 근면한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서 마찰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아버지에게 심한 폭력을 당하며 컸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망하자 미술의 꿈을 꿉니다. 그러나 미술에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엔 아버지의 발걸음을 쫓아갑니다.
그 후 아버지의 소원대로 군인이 되어 고위 공무원 자리에 오르고 결국 독일 총통이 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그렇게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까요? 히틀러가 군대에서 마치 아버지처럼 인정받기 전까지는 무엇을 해도 사람들과의 충돌 때문에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총통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큰일을 벌이게 됩니다.

방향이 없는 길은 없습니다. 인생도 동물처럼 그저 생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어진 길이 있다고 믿는다면 하늘을 보게 해야 합니다. 하늘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달려있습니다. 죽어야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생존만을 위한 삶은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만든 사람이 표지판도 만듭니다. 그리고 표지판은 항상 공중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방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달에도 있고 별에도 있고 표지판도 그렇고 등대도 그렇습니다. 생존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자녀에게 삶의 표지판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사람입니다.

히틀러와는 반대로 이 시대에 가장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마더 데레사’의 부모님은 어땠을까요?
마더 데레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지역 유지였고 교회에 많은 후원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10살 때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어머니에게 키워졌는데 그 어머니는 십자가를 지워주는 분이셨겠습니까, 아니면 치워주는 분이셨겠습니까? 대답은 정해져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이렇습니다.

“어머니를 떠오를 때마다 ‘거룩’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말씀과 행위가 거룩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힘든 생활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을 곤경에 처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때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고, 말이 아니라 실제로 알코올 중독 여성, 버림받은 노파를 돌봐줌으로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가난한 사람들이 문간에서 음식을 청할 때 자신이 먹을 것이 모자라도 반을  떼서 주시며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얘들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때는 말 없이 하여라. 바닷물 속에 돌을 던지듯 말이다.”
선행하고 알리지 말라는 말은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18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께 하느님께 온전히 속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하루 동안 홀로 기도한 후에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얘야, 예수님의 손을 꼭 잡아라. 죽을 때까지 그분과 함께해라.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려무나. 성모님은 네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거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표지판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부모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인간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합니까? 길을 만든 사람은 길 위가 아니라 하늘에 방향을 표시합니다.

인도의 ‘디팩 쵸프라’는 자신의 아들 둘에게 어렸을 때부터, “너희는 어떻게 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지만을 생각해라. 나머지는 아버지가 다 책임지겠다.”라고 가르쳤습니다.
큰아들은 학교도 안 가고 마을 어른들을 도와주다가 큰 사업가가 되었고, 둘째아들은 학교에서 꼴찌들에게 공부 가르쳐 주다가 하버드 교수가 되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창조의 법칙을 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창조자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창조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녀들에게 바로 그것을 바라보도록 교육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무엇을 바라보도록 교육합니까? 이웃의 행복입니까, 당장 나의 행복입니까? 많은 자녀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법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땅만 보고 교육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를 지게 할 수 있을 때 정말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이웃과도 행복하게 지내며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자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게 되면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만든 부모 자신의 책임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상관이 두릅이 많다며 따러 들어가자고 해서 쫓아 들어갔다가 지뢰를 밟아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지뢰밭이라는 표지판을 못 보고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면 눈을 들어 표지판을 보지 못하는 눈먼 자녀로 만듭니다. 땅은 생존을 위한 집착의 상징입니다. 하늘은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입니다. 죽어야만 살 수 있다는 유일한 진리와 생명의 길을 알려주는 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이라는 내용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개의 분단국가가 생겼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범국가로서 분단이 되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대한민국과 베트남이 분단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을 선언하면서 1955년 통일하였습니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1976년 통일하였습니다. 독일은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1950년 시작되었던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정전상태입니다. 우리는 1945년 이후 76년 째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통일이 된다면 군사분계선은 생태계가 잘 보존된 평화공원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평양으로, 백두산으로 소풍 갈 수 있습니다. 북한의 아이들도 서울로, 설악산으로 소풍 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수출품은 멀리 배로 돌아가지 않고, 기차로 빠르게 유럽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북한의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이 남한의 기술과 조직이 만나면 더욱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잠시 생각해 봅니다. 어째서 다른 나라들은 분단의 장애를 이겨내고 통일을 이루었는데 대한민국은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요? 물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답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시에 분단되었던 나라들은 모두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종전협정을 맺지 못하고, 분단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민족의 통일보다는 이념의 통합을 이루려했던 내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세력과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해방된 조국이 또다시 강대국들에 의해서 일정기간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념의 벽을 넘지 못한 대한민국은 결국 남과 북이 각자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대한민국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 강대국들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념의 벽을 넘어, 분담의 담장을 허물려는 의지가 있다면 언젠가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공동체가 분열되는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통일을 이루려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북한에는 조만식, 남한에는 김구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김구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그러나 통일된 조국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덫에 걸려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기억하듯이,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던 분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제2독서는 공동체 분열의 원인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이기심 그리고 부당한 욕정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정당한 재판도 없이 수용소에 가두고 강제노동을 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검사는 사건을 조작하였고, 판사는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하였습니다. 노동운동, 통일운동, 인권운동은 불온한 사상으로 매도되었고, 언론은 정권의 뜻에 따라서 보도하였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야만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통일된 나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내 마음에 갈등과 분열의 바람이 분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속한 공동체가 대립과 분열을 겪고 있다면 이 또한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통일된 대한민국이 되면 좋겠습니다.

 

 

 

내 이웃은 어떻습니까?

      키엣 대주교님

멈출 수 없는 욕망과 돈과 명성으로 하느님과 세상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하느님을 거역한 인간은 점점 오만해졌는데 하느님은 언제나 겸손으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셨고 진정한 겸손과 순종을 알려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나약한 사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섬김이 진정한 사랑의 사회로 변화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특권을 포기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사회는 변화합니다. 특권층이란 꼭 권력층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상대적인 것입니다. 나보다 약한 사람에겐 나도 특권층일 것입니다. 강한 사람은 나약한 사람을 이끌고 큰 사람은 작은 사람을 위해 무릎을 굽혀야 합니다. 권력은 권한을 가진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지위란 단지 업무와 책임을 분배할 때만이 합리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각자 주어진 일은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서로가 경쟁 상대가 아닌 사랑하고 도움을 주는 너와 나의 관계가 될 때 따뜻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겸손을 따르는 새로운 사회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나약한 사람은 돌봄을 받아야 하는 관심의 대상이고, 가난한 사람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로 많은 깨달음을 주지만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가르치심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더 높은 곳을 보느라 옆과 아래를 돌아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자녀이지만 아버지의 길과 다른 권력의 사회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멀어져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돌아오라고 하시지만 그 말조차도 귀 담아 듣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멀리가면 돌아오는 길은 지금보다 훨씬 힘든 길이 될 것입니다. 작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위를 놓아버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가져야합니다.

어렵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금 내 이웃은 어떤 모습입니까? 힘들고 외롭게 살아가는 이웃에게 잠시나마 따뜻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한번만 더 눈길을 주십시오.

나의 작은 행동과 관심, 따뜻한 마음이 사람들에게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주님, 아버지이신 주님과 멀리 떨어져 가고 있는 저희가 아버지 주님의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겸손과 사랑을 닮게 하여주소서.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명절과 성탄절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찾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2. 주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묵상해보십시오.

 

 

 

현대의 순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1요한4,10-12).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는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고 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그분들의 신앙을 본받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순교의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순교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이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케 하였습니다.

 

1독서의 말씀 그대로 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3,9).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고 사랑 안에 살고 은총과 자비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 받습니다’라는 성경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고 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몸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마음입니다.

 

천주교는 초기에 사교, 곧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단정 되었고 이 사교를 뿌리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옛 말에도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풍요로운 수확을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지혜3,1-5).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며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굣ㄴ자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자수가 늘어갔습니다. 그것은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하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며 평화롭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타협도 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구별이 없습니다.‘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바보소리 듣는데’하면서 합리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주님의 모습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비쳐지지 않으니 어떻게 신자가 늘어나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가9,23-24)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타협하고 싶은 마음들이 십자가 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하느님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은총과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지혜3,9).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들이 물려주신 신앙을 땀의 순교로 지켜야 할 때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분명히 ‘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하면서 주님을 과감히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자, 제가 한마디 하면 ‘그래도 사랑하여라’ 하고 답하십시오.

그가 원수 같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나를 욕하고 다닌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기만 하면 상처 받는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말을 함부로 한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너무 이기적이고 안보면 편하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보면 정말 밥맛이 떨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하십시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날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인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사랑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일상의 삶의 온전한 봉헌을 통해 땀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사랑합니다.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라고 하였다. 즉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동이다. 현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지금의 참된 순교 정신이란 나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포기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라는 것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세례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랫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중에 많은 분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은 것이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고 계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당하고 돌아가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받아들임”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그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만일 나에게 필요 없는 헌신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냥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한 것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지만, 독신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이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즉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를 성인품에 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 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 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김대건(金大建, 1821년 8월 21일-1846년 9월 16일)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6년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로 사제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참수 전에 남긴 마지막 신부님의 말씀입니다. 

“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또한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1795년-1839년 9월 22일) 성인께서는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9월 22일에 순교합니다.

 

정하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자 더 이상 사제가 없자 역관의 종으로 위장해서 북경에 가서 천주교 사제를 청하기도 했는데, 그동안 무려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고 합니다. 정하상은 1825년 조선의 독립 교구 설치를 교황청에 청원합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께서 1931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산하에 천주교 조선교구를 설치,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합니다.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고 하였습니다.

 

1836년 1월 모방 신부가 조선 천주교인들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하여 정하상의 집을 숙소로 삼았고 순교하기까지 성인께서는 중국으로부터 성직자 영입을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습니다.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썼습니다. 이것은 당시 우의정(右議政) 이지연(李止淵)에게 보낸 한국 최초의 천주교 호교론서(護敎論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척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는 정하상의 가족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샤를 달레의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여러 사람이 아직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정씨 일가는 천주교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그런 교를 계속 믿으려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척들은 정하상과 그 집안 식구들이 천주교를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통렬한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되었다.”(<한국천주교회사> 달레, 86~87쪽)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루카는 자기 자신을 거절하는 의미로 '아르네사스토 에 헤아우톤 ἀρνησάσθω ἑαυτὸν'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 '미워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 병행으로 뒤 따라 오는 말은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아라또 똔 스따우론 아우또 ἀράτω τὸν σταυρὸν αὐτοῦ)'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우리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 다르게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은 이제까지 자기가 중심이었는데, 그 자체를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중심이라면 자기의 가치, 자신의 이익이 주축을 이루겠지요.

 

그런데 이제는 주님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이 자기 자신의 자리 대신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자기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없는 실존에서 오는 고통이겠지요.

 

내적인 고통은 고통인데 이제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버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버리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순교 성인성녀들께서 인간의 약함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져야하겠습니다. 때로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의 큰 박해를 겪은 초대교회는 피와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천주학쟁이로 끌려가는 모습은 대 죄인이요, 버림받은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4,14)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요?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함께’해주시는 주님의 사랑 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사랑은 놀라운 힘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8-39) 

 

도살장에 끌려가며 순교자들이 겪었던 환난, 역경, 굶주림, 헐벗음, 칼이 아닙니다. 이제는 세상의 자유로움이 하느님과 우리를 갈라 놓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을 흩으러 놓는 것은 금전만능의 주인인 세상의 재물과 자유로움입니다. 여기에 대처하는 것은 세상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적당한 신심이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도 좋고 주님도 좋은 양다리 신앙에서 벗어나야합니다. 그들도 배교할 수도 있고 주님을 부인하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따른 신앙 때문에 생명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도 순교자들의 정신을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지고 편하고 좋은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 십자가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로 매일 성실하게 노력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파스카의 삶, 의인의 삶, - 지혜, 섬김, 환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첩첩산중疊疊山中이란 표현이 어울립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루하루가 넘어야 할 산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의 삶은 나름대로 길게 뻗어있는 살아있는 산맥처럼 보입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평전을 쓴 분 고백이 생각납니다.

 

“밖에서는 큰 산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수 차례 만나 인터뷰 하니 하나의 산山이 아닌 살아있는 거대한 산맥山脈같은 대통령의 생애였습니다.”

 

끝나지 않은 살아있는 산맥같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들입니다.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라는 자작시도 이런 점을 고백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며 살았습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 내적으로는 장대長大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산맥山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첩첩산중 하루하루 넘어야 할,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할 파스카의 삶, 의인의 삶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다시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영적전쟁의 현실입니다. 바로 오늘 지혜서가 그 현실을 보여줍니다.

 

‘악인들이 말한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현실이자 우리가 겪는 영적전쟁의 현실입니다. 흡사 삶의 여정은 모욕과 고통의 ‘장애물 경기’와도 같고 온유와 인내력의 시험장試驗場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같은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는 예수님의 2차 수난과 부활의 예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만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당시 제자들은 주님 부활을 체험하기 전이라 당황했고 두려워했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주님 파스카의 삶이 무엇인지 배워 익히 압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고 부활의 희망으로 열린 하늘 나라가 궁극의 답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 영원한 생명의 삶, 하늘나라의 삶,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위에서 오는 주님의 지혜 은총이 이런 파스카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평화롭고 관대하며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속에서 얻어집니다.”

 

바로 이런 위로부터의 지혜 은총이 하루하루 파스카의 삶을, 내적 평화와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첩첩산중의 산을 넘게 합니다. 참된 자기비움의 겸손과 섬김도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도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다투던 동상이몽의 오합지졸의 제자들 공동체에 대한 주님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파스카의 영성은 자발적 꼴찌의 겸손의 영성이자, 종과 섬김의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이 모두가 주님의 파스카 은총입니다. 종들의 종이라 정의되는 교황님의 신원이 또한 우리에게는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섬김의 영성에 이어 환대의 영성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내적으로 한계를 지닌 약한 어린이들입니다. 그러니 환대의 정신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듯 만나는 모든 이들을 환대의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파스카 영성의 진위는 환대의 영성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 역시 이를 분명히 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깊고 건강한, 온전한 신비주의입니다.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듯 만나는 모든 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대할 때,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사람환대를 통해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우리들입니다.

 

평생 배워 살아야 할 파스카의 삶, 의인의 삶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위로부터 하사되는 주님 지혜의 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지혜와 섬김과 환대의 삶을, 늘 새롭게 시작하는 영적 승리의 파스카 삶을 살게 합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아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이기우 신부님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반기에는 주로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후반기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주로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시는 일에 주력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예고와 함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오늘 복음도 그 중의 대표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구체적인 내용을 일러주신 가르침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 진리는 영적인 의미에서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어주는 커다란 전환이었습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서로 첫째가 되려고 다투게 되어 세상에는 혼란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이 진리를 반대하는 악인들은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려는 의인을 시기하여 덫을 놓는 악행까지 저지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핵심으로 삼아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고자 하였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의회의 쇄신 의지를 담아서 2014년에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이라는 문서를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포하였습니다. 여기서 교황은 서로 섬겨야 한다는 말씀을 하느님의 진리로 믿는 신앙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직자들은 가르치고 능동적으로 행한다거나, 평신도들은 배워야 하고 수동적으로 행한다는, 기존의 잘못된 교회관을 배격하였으며, 모든 세례 받은 이가 예언자직, 사제직, 왕직이라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에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참여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좋은 예로서, 평신도들의 신앙 감각을 높이 샀던 비오 9세와 비오 12세 교황 시절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이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망설이는 교황청 관료들과 반대하는 신학자들을 무릅쓰고 각각 1854년과 1950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와 몽소승천 교리가 확정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들었는데, 이 두 교리는 초대교회 시절 이래로 근 2천 년 동안이나 평신도들 사이에서 신앙 감각으로 확신되어 오던 신심이었습니다. 동정녀의 처지에서 오로지 믿음만으로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올곧게 예수님의 길을 가신 성모 마리아이시라면, 하느님께서 잉태와 죽음의 순간에 특별히 보호하셨을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평신도들의 소박하지만 확신에 찬 신앙 감각의 발로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로가 꼴찌가 되어 섬겨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확신하는 평신도들의 신앙 감각은 어려운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능동적인 능력이자 감수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의회는 교회헌장에 이런 내용을 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섬김으로 이룩하는 당신의 직무를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수행하시며, 가정과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복음의 힘이 빛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신도들은 성사 생활로 그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여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귀중한 활동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35항). 또한 계시헌장에서도 사도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 예수님의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이 활성화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첫째, 마음 깊이 진리를 새겨 간직하는 명상과 공부, 둘째 영적인 식별로 실천하며 겪는 체험, 셋째 확고한 진리의 은사를 받은 주교들의 설교”라는 것입니다(8항). 

 

  이 같은 섬김의 진리를 실제 사목에서 구현한 인물은 올해로 탄생 백 주년을 맞아 그 생애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초대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입니다. 그는 신생 교구로서 교세가 빈약한 상황에서도 신자들을 늘리려고 하기보다도 교구가 관할해야 하는 지역 내에 가난한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을 직시하고 가난한 이들의 눈으로 사목하고자 오늘날 사회사목이라 일컬어지는 통합적 인간발전을 위한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와 상황을 깨닫게 하는 의식화 교육을 실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주민 자조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지 주교가 보여준 섬김의 사목은 첫째,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인간 발전을 위한 노력, 둘째 협동조합 운동을 통한 참여적 대안 경제 설립과 독점과 독재에 저항하려는 정치개혁 요구, 셋째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리는 산업 문명을 좇아가지 않고 모든 생태계가 협동적으로 공존할 수 있도록 모색하려는 노력 등 선구적인 모범이었습니다. 

 

  원주 교구와 그 모태가 된 춘천 교구는 지금도 이 강원 지역 복음화의 산실이 된 풍수원에서 성체 현양 대회를 1920년부터 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뿌리이자 신앙생활의 맥이 된 교우촌이 한국에서 최초로 형성된 풍수원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섬김의 진리를 성체성사의 영성으로 생활화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가 첫째가 되려고 다투는 세상과는 정반대로 서로 꼴찌가 되어 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섬김의 진리에 대한 신앙 감각으로 살아갑시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지혜 2,12.17-20)는 악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의인들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면서(창세 1,26-27)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지혜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의로움을 실천할 때 누리게 되는 행복이라고 합니다(3,1-9). 그런데 악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의인들과 자기들의 삶이 비교되기 때문에 의인들을 시기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죽이려고 덫을 놓으면서 끈질기게 괴롭힙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을 괴롭히면서 인내력을 시험하고, 의인들이 겪어내는 아픔을 보면서 즐기는 가운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보호해주실 것이며,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주변 강대국의 침략으로 극도의 고통과 수모를 겪으면서도 침략자들에게 부화뇌동하는 악인들은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의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죽음에 이르게 될 때 최후가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의인들은 하느님 앞에 환하게 드러날 것이며, “의인을 무시하고 주님을 거역한 악인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것에 따라 벌을 받을 것입니다.”(3,10) 그래서 제1독서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언으로도 이해됩니다.

복음(마르 9,30-37)은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의 필리피 근처 마을에 가셨다가(8,27)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면서 군중들로부터 떨어져서 제자들에게만 “은밀하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머지않아, 제1독서가 말하는 의인처럼, 고통을 겪으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두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셨기 때문인지 제자들은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태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도 귀를 막고 눈도 감아버렸는지, 아무 생각 없이 따라다니기만 했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말씀을 그토록 많이 들었고,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기적들을 많이 보았을 텐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는 듯한 제자들의 어리석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갈릴래아로 돌아오는 긴 여정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행동에서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한심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복음 선포의 근거지인 카파르나움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논쟁을 했느냐고 물으셨지만 제자들은 마치 죽은 이들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고, 제자들의 논쟁의 주제가 정말 한심스러웠지만, 그 때에는 제자들이 좋은 결론을 얻어낼 것을 기다리시면서 그 논쟁에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길에서” 왜 그랬는지, 그리고 논쟁의 결과가 무엇인지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가르침에서 제자들은 사탄으로 돌변했지만, 두 번째 가르침에서는 자기들 가운데 누가 첫째고 누가 꼴찌인지 서열다툼을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9,19)라고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이 서열다툼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뒤에도 계속됩니다(10,35-41).
아무런 지혜가 없다는 듯이, 자기들 욕심만 채우려고 서열다툼을 하면서 본질적인 것은 외면하고 비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첫째가 되려면 먼저 섬길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 하기(마태 23,11-12) 때문에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겸손(꼴찌)과 섬김(종)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굉장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나약한 어린아이를 껴안으시면서(사랑으로 보살피면서) 당신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작고 낮은 자와 소외된 이들을 당신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꼴찌가 되고 종이 될 줄 모른다면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또한 어린아이를 올바르게 교육하듯이, 제자들끼리 서로 가르쳐주고 고쳐주는데 주저하지 말고(집회 30,1-13), 어린이처럼 어리석고 유치한 행동 때문에 공동체가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잠언 23,13-14). 결국 제자들끼리 서로 헐뜯고 모욕하거나, 시기질투로 모함하면서 상처를 주지 말고 순수해지고 겸손해지면서 서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이 있기”(야고 3,16) 때문입니다.

제2독서(야고 3,16-4,3)는 시기와 이기심으로 악행을 일삼지 말고 지혜를 청하라고 합니다.
야고보의 공동체가 시기와 이기심 때문에 서로 다투면서 살인까지 저지른 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처음부터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결코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느님께 청하고,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나무라지 않고 주신다고 했습니다(1,5-6). 그런데 “순수하고,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는” 지혜는 청하지 않고 시기와 이기심과 욕정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면서 혼란과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런 상태에서는 제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지혜를 청한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욕정과 욕망과 욕심을 따라 살아간다면 편견과 위선 때문에 온갖 혼란과 악행으로 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롭고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이라서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합니다(1베드 2,11).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외면하는 이들은 악하게 될 것이며,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호세 1,2). 시기와 이기심으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 해도 지혜를 얻지 못할 것인데, 그 청원 자체가 정의와 평화가 아니라 자기 욕정을 채우는 데 쓰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겸손하게 섬기면서 살아가는 의인이 겪는 고통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마태 6,19-20). 시기질투와 이기심, 그리고 욕심 때문에 이웃을 혼란과 악행으로 몰고 가는 사람은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분쟁을 일으킬 뿐이지 진정한 의로움과 평화는 얻어내지 못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를 찾는 이들은 비록 삶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스승의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뜻을 깨달으라고 가르쳐주시는 예수님 앞에서 누가 첫째인지 서열다툼에만 열중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함께 지내게 하셨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으며, 악을 물리치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면서(3,14-15) 겸손해지고 섬기라고 하셨는데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기회만 되면 서열다툼을 일삼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성의 법이 아니라 다른 법을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어서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자주 체험합니다(로마 7,22-23).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른다고 하지만 욕심과 시기질투 때문에 쉽게 악에 물들게 됩니다. 양심은 하느님의 법을 따르라고 심장을 두드리는데 머리는 그 소리를 외면하라고 재촉하는 때가 가끔 있습니다. 우리가 이기심에 젖어들고,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욕심이 많아질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이성의 법을 두고 기뻐하기 때문에 악법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은 많이 가지고, 큰 것을 차지하라는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버림과 작아짐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낮고 좁아서 겸손하게 어깨를 낮추는 사람은 들어갈 수 있지만(루카 12,32) 교만하게 어깨에 힘을 주면서 으스대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도 가끔 하느님보다는 사람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지키도록 이웃에게도 가르쳐주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입니다(마태 5,19). 하느님의 법이 새겨진 심장을 두드리는 양심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사는지,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한 주간 동안 돌아봅시다.

추석 잘 지내세요~~~

 

 

 

<한걸음만 당신 뒤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걸음만
당신 뒤에
서게 하소서


한걸음 앞서
당신 없는 길을
걷지 아니하고


너무 뒤쳐져
당신 가신 길을
잃지 않도록


한걸음만
당신 뒤에
걷게 하소서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한국 교회에 신앙의 초석을 놓은 순교 성인들을 기리며 경축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의인이 받을 몫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사람이 가장 직면하길 어려워하는 주제가 죽음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항상 이 죽음이 끼어듭니다. 당신의 신원과 소명을 말씀하실 때에도 수난과 죽음이 늘 언급되고, 당신을 따르려면 십자가와 그 죽음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이르시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음이란 존재는 어쩌면 참 당연합니다. 죽음이 없다면 지상의 유한한 생명에서 무한의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관문이나 경계가 부재하는 것이니까요.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로서는 하나의 생명을 포기해야만 더 나은 완전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건너야만 부활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보통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의인들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4)
물질과 현세적 안위를 행복의 척도로 보는 사람들 눈에 의인들은 꽤나 기구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의인들이 신앙과 신념 때문에 포기한 것들이 사실 세상에서 많은 편의를 보장해주니까요. 세상은 의인의 삶을 "죽음, 고난, 파멸"이라 여겨 조롱하거나 업신여깁니다. 육적인 세상의 가치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은 화합하기 어렵습니다.

세속적 자기 영광과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 이 둘을 다 움켜쥘 수 없음은 명백하지요. 육적인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해 "죽음"이라는 관문을 거치듯이, 자기 영광이 죽어야 주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의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이를 감행한 사람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영광 때문에 지금 누리는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당장은 보이지 않는 까닭이며, 익숙해진 풍요와 안락과 우월감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죽음이 두려워 아직도 선택의 언저리에서 미적대고 서성이는 이들을 일깨웁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죽음처럼 보이는 어떠한 것들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아니,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등등, 이 모든 것은 오히려 그분과 우리를 더 가까이 밀착시켜 주지요. 박해와 순교의 시대에 뜨겁게 타오르던 신앙과 열정이 안정이나 풍요와 더불어 오히려 무뎌지고 온도를 잃어 간 역사가 이를 반증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영성체송)
주님은 세상에서도 실컷 누리다가 죽음 너머의 영원한 행복까지도 얻고 싶은 탐욕스런 속내를 모르시지 않으면서도, 영적 삶에 발을 들여놓은 이에게는 "증언"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보상까지 마련해 놓으셨지요.

그분께 "제가 당신을 압니다." 한 이는, "나도 너를 안단다." 하는 사랑의 응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한 이는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는 성자의 증언을 들을 것입니다. 변호하고 보증하시는 영이 곧 성령이시니, 이 "앎"의 증언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의 유입이며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때 우리가 듣게 될 "내가 그대를 압니다."라는 주님의 증언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찬사에 비할 수 없는 영광이 될 겁니다. 이 증언이 바로 잠시 지나는 세상의 쾌락, 안위, 명예와 흔연히 맞바꾸어 얻게 될 몫입니다.

신앙의 초창기에 신앙적 돌봄과 양성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음에도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거한 순교자들께,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십사 청합시다. 우리도 그들처럼 지금 여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순교의 정신과 결단을 꽃피워 주님을 잘 안다고 증언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누가 첫째냐 만 따지는 어려운 세상.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은 못 깨닫고 돌아가신다는 것만 알았나 봅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첫째가 되느냐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했든 겁니다.

예수님은 들으셨지만 넓은 마음으로 대응 하시는 것이 참 멋지셨어요.
첫째가 되려면 꼴찌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주님 이름으로 어린이를 하느님으로 주님을 모실 줄 알라는 것이었죠.

꼬이고 캐고 따져도 행복 없는 세상 하느님을 전제하라는 거였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 뜻만을 받드는 길이 참 영원행복의 길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유동철 리노 부주임 신부님 강론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는 대축일 경축 이동을 통하여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미 다들 잘 아시다시피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을 중시하는 유교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국 사회 안에서 많은 어려움과 박해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고, 목숨을 바쳐 그 믿음을 굳건히 지켜 나가셨습니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순교의 피로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열어 주셨고, 지금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피를 흘리는 순교는 없지만,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할 땀과 희생의 순교는 요청됩니다. 한두 번 순교하는 마음으로 참고 살 수는 있지만,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리고 우리 신앙 선조들의 믿음과 피의 순교를 묵상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제로서 주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의 길을 따르기 위해 선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년간의 시간이었지만, 아주 보람되고, 주님의 은총 안에서 소중한 시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제가 경험했던 이 시간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간략하게 사진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잠시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사실 사진을 제가 찍어야 해서 제가 나온 사진도 많지 않고, 제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아서 사진이 많지도 않지만, 그래서 이 짧은 영상으로 저의 6년간의 삶을 다 보여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영상을 만들면서 저 역시 지난 선교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생김새의 다름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괜히 그들이 저에게 해꼬지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어 공부를 하고, 1년 동안 현지인 신자 집에서 하숙생활을 하면서 과테말라 사람들이 참 착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생김새의 다름에서 오는 어려움은 제 편견이었던 것이죠.
또한 언어 공부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저는 언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롭게 스페인어 배우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1년간 어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6개월 간 과테말라 신부님과 살면서 사목 실습을 했습니다.
사목 실습 이 후 과테말라 대교구로부터 정식 발령을 받아 약 4년 반 동안, 자난6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San Lorenzo el Cubo 라는 성당에서 지냈습니다. 네, 사진에서 보신 교우들이 모두 그 성당 교우들입니다. 사실 이 성당은 본당은 아닙니다. 청주교구 신부님이 주임신부님으로 계신 성당의 공소입니다. 하지만, 제가 모든 책임, 재정적인 부분, 성사적인 부분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제가 다 책임을 갖고 신자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과테말라는 1820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군부독재 시대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85년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시설을 운영하던 단 한 명의 신부님만 빼고, 모든 신부님들을 내쫓았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스페인계 신부님이 많이 계셨는데, 독재를 하기에 있어서 그들이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사제는 부족했고, 그래서 성사 생활을 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과테말라 신자들은 성사가 아닌, 준성사적인 부분에서 신앙을 간직해 나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보신 것처럼, 그들은 스페인 지배 시대 때부터 해왔던, 행렬이라는 독특한 신앙 문화를 만들어냈고, 십자가의 길 또한 실제 예수님이 진짜 걸으셨던 것처럼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도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공동체는 특별히 공소였기에, 사제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짧았습니다. 그래서 미사나 다른 성사보다는 이 행렬이나, 성체 현시 등을 사제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준성사를 더 중요시하기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돈 문제도 걸려있었기 때문에, 몇몇 이들은 이 행사를 결코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성주간에, 성목요일에 주님 만찬 미사가 그리고 부활 성야 미사가 성 토요일 저녁 7시에 있었는데, 이 두 날에 5시부터 11시까지 행렬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해왔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성삼일 전례가, 성삼일 미사가 매우 중요하다고, 설득도 해보고, 싸워도 보았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5년 동안 마을, 성당 밖에서는 수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5시부터 밤 12시까지는 행렬을 했고, 그 행렬과는 따로 저녁 7시에 성당에서는 100명도 안 되는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 만의 전통을 바꾸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어려움도 있었지만, 사실 좋은 부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사람들은 나눔을 실천할 줄 알았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은 약 1950-60년대의 한국처럼 개나 고양이, 닭이나 오리, 심지어 돼지까지 마당에 놓아 길렀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키우는 닭이 알을 낳으면, 저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잔치를 할 때면, 초대해서 같이 춤도 추고, 기쁨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아까 사진에서 잠깐 보신 음식 사진이 잔치 음식입니다. 매우 소박하죠, 밥, 고기 조금, 그리고 야채 샐러드 정도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시간을 공유하고 음식을 나누며 그들과 기쁨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지난 2018년,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직선 거리로 약 15키로미터 떨어져 있는 화산이 크게 폭발했습니다. 저는 그 때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성대히 봉헌하고, 성체 행렬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행렬 중에 화산재가 비처럼 내렸고, 제의는 검은 물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행사 후에 성체분배자들과 식사를 하는 도중, 화산에 가까운 본당의 본당 신부님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과테말라에서 제가 있던 지역에는 한국의 농촌 ‘네 이장이 말씀드립니다.‘라며 마을 방송을 하듯이 성당에서 마을 전체에 방송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송으로 이렇게 화산이 폭발해서 ‘도움이 필요하다, 먹을 것이나, 약품들, 물 등의 도움을 받습니다.’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성당으로 물건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 마을은 가난한 지역에 속했지만, 그래도 단 2-3 시간 만에, 트럭 8대 분량의 많은 물건들을 봉헌해 주셨고, 그 도움으로 화산 폭발로 고통받는 지역에 잘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을 겪은 6년 간의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개인적으로 저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 삶 안에 역사하시는 하느님, 나의 주님, 그리고 부족하지만, 사제로서의 삶, 선교사로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그분의 섭리, 사랑과 자비를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주님께서는 제가 과테말라에서 과테말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셨고, 그 안에서 행복함을, 평화를, 그리고 사랑을 느끼고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제 영적으로,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이 선교사제로서의 시간은, 과테말라에서 보낸 시간은 저에게 아주 소중한 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들은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어 모든 것을 이겨내며,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하느님에게 딱 붙어서, 그 사랑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목숨을 바쳐서, 또 최양업 신부님이 온 삶을 바쳐서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듯이, 그리고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이 자신을 버리고 용기를 갖고 목숨을 바쳐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셨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사랑 안에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땅끝까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살아가고 계신 모든 평신도 선교사들, 선교 수도자들, 그리고 선교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네가 천주교 교인인가?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성장하며 내 자신에게 묻기 시작한다.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목표가 목적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물어가며 살고 있다. 도대체, 왜 라는 질문에 답을 종합적으로 찾음이 철학이다. 우리는 철학하며 살아간다. 질문에 따른 답이 종합적으로 분명해질 때까지 우리는 철학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은 질문에 답을 지녀야 하고, 자신이 살 삶의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신학에서 비롯된다. 신학은 궁극적 목적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다. 신학은 철학처럼 따지는 학문이 아니다. 믿음을 갖고 그 믿음에 목적을 확신으로 따르는 것이 신학이다. 신앙생활을 하며 신학에서 비롯된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쿵 저러쿵 따진다. 그것은 신학은 아니다. 신학은 성서와 성전에 근거하여 생겨난 확고한 목적을 향한 믿음이다. 신학은 인간 역사속에 면면히 살아온 하느님을 향한 확고한 목적을 지닌 믿음의 학문이다.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지낸다. 도보 성지순례를 하며 그분들의 걸으신 길을 걸으며 내 신앙을 돌아본다.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을 기리고 있다. 그분들의 담고 산 믿음, 그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올곧은 믿음이다. 우리도 걸으며 향하고 닮고 행복을 차지하려고 노력한다. 몸으로 걷고 또 걷고 예수님의 삶을 쫒아 걷는다. 성인들의 믿음, 한계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그들에게 매번 물었다. ‘당신은 천주교 교인이요?’ ‘그렇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그분들은 언제나 불변의 진리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성 김대건 신부님과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사람의 손에 넘겨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우리들 가운데 영원히 살아있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철학하자! 그리고 목표와 목적이 뚜렷해질 때까지 묻고 또 묻자.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가?’ 계속 묻자. 그리고 나에게 불변의 확고한 답이 된 신학을 만나면 의심없이 믿자.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삐딱하면 이단이 되는데 믿어도 사이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분을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한다. ‘너, 천주교 교인 맞니?’ ‘네, 맞습니다.’ 누가 말해도 우리는 그렇게 답해야 한다.


사도 성 바오로는 로마인들은 향해 외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8-39).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지만 그들은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 와중에 그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보면 어린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다른 어른들과 같은 존중을 하기 보다는 단지 교육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면서 그냥 어른들 뜻대로 밀어붙이면 되는 식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와의 대화 안에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어린이가 한 인격체로서 마땅한 존중을 받음과 동시에, 충분한 대화를 통해서 무엇이 진정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어린이와 함께 추구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인터넷 동영상에서 한 어린이가 정신과 상담을 받는 내용의 영상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어린이의 경우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 보니 계속해서 도화지에 검은색 크레파스를 칠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가 그것을 보고 어린이를 데리고 정신과 상담을 받았는데 그 이후에도 그 어린이는 진전이 없이 계속해서 도화지에 검은 색 크레파스를 칠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그 어린이는 그 색칠한 도화지를 다 모아서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나열을 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그 도화지들이 다 모인 그림을 보니 그것은 바로 커다란 고래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그러한 커다란 퍼즐을 보내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바로 진정 순수하고 열린 마음으로 그 퍼즐을 맞추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퍼즐을 맞추고 하느님의 비전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찬미예수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순교하신 성인들의 그 신앙을 이어받아 현시대 속에서 다가오는 여러 가지 형태의 박해 중에도 끝까지 하느님과 교회를 증거하는 삶을 이루어 가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힘들고 어려운 시련을 대할 때 우리는 그것을 ‘삶의 십자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십자가를 내려놓기를 바라고 또한 자신에게서 사라지길 바라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무거운 짐을 지는 차원이 아니라 주님을 끌어안고 동행하는 것이며 주님과 함께 모든 일을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짋어지고 주님과의 동행을 이루어갈 때, 십자가의 주님께서는 내 모든 삶의 시련을 이겨나갈 힘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질 때 십자가의 주님께서는 내게 다가오는 모든 악의 공격들을 막아주시는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질 때 십자가의 주님께서는 내가 나아갈 길의 모든 장애물을 건너가게 할 다리가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 주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질 때 마지막 순간 십자가의 주님께서는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피의 박해와는 다르지만 끊임없이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대는 박해의 순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코로나와도 같은 바이러스의 공격일 수 있고, 경제적 어려움 같은 시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순간 속에서도 십자가를 지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삶의 힘이 되고, 악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가 되고,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고, 마지막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어떠한 순간 속에서도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참 신앙의 모습이자 순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선택
      배상희 마르첼리노 신부님
오늘 강론의 주제는 ‘선택’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아니 평생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줄곧 선택을 합니다. 무엇을 먹을지, 입을지, 어디를 갈지, 누구와 함께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등등 …
눈뜨고 감을 때까지 모든 것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좀 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우리는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주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배반할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나의 선택이 잘못되면 헛되이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쳐 진리이신 주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선조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을 선택하는 것만이 영원한 행복과 평화, 기쁨을 얻게 되는 길임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이러한 확신을 갖게 만들었을까요? 
신앙의 선조들이 가진 확신은 신앙생활을 통해 얻은 체험에서 나왔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하면서 영적인 평화와 위로를 체험했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행복과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이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미리 체험하면서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매일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걸고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선택의 순간, 갈등하게 될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의 계명 실천을 통한 신앙의 확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결코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에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큰 사랑을 이뤄 한몸같이 주를 섬기라”
      이상훈 바오로 신부(은이·골배마실 성지 전담)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국천주교회는 2021년 한 해를 희년으로 선포하여 많은 신자들이 성 김대건 신부님이 보여주신 믿음의 모범을 따라 살도록 초대하며, 특별히 한국의 모든 사제들이 성 김대건 신부님을 닮아 신자들을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불타오르기를 권고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종식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그 기세를 떨치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신앙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많은 것에 불안한 것이 우리들의 현 상태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마음에 성 김대건 신부님이 쓰신 편지글이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신부님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상황에서 신자들을 향해 편지를 쓰시는데, 그 편지 가운데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님들께! … 부디 환난에 짓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받들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서 뒷걸음치지 말고, 오히려 지난날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를 아주 많이 살펴 이를 본받고 실행하여 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하느님의 착실한 군사이며 자녀가 되었음을 증거하십시오”(21번째 서한, 마지막 회유문 중에서).


코로나19로 미사 참례와 기본적인 성사 생활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많은 신자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체를 모시고 미사성제에 참례하는 것이 우리 신앙 생활의 기초이자 뿌리임을, 역설적이게도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뿌리가 점점 약해지고 흔들리며 우리의 신앙이 위기에 처하게 됨을 절감하지만, 나약하기만한 우리는 이 같은 위기와 환난의 상황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뿐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성 김대건 신부님은 분명한 답을 제시해 주십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의 말씀 그대로 코로나19라는 환난에 짓눌려 하느님을 받드는 일과 영혼을 구하는 일에서 뒷걸음질치지 않도록, 지난날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성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한국천주교회의 순교 성인들의 삶을 묵상하며 본받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한국 모든 사제들의 수호자이자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께서 우리의 작은 노력에 함께하여 우리의 삶을 축복해 주시고 하느님의 곁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부디 서러워하지 말고 큰 사랑을 이루어 한몸으로 주님을 섬기다가, 죽은 후에 함께 영원히 하느님 앞에서 만나 길이 영복을 누리기를 천 번 만 번 바랍니다.”

 

 

 

사랑이 지속될 때 기도도 지속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무들을 손질하면서 과감한 가지치기와 적절한 거리두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과감하게 솎아내고 웃자란 가지들을 쳐내고 굵은 칡넝쿨을 걷어주니, 나무들이 활짝 웃으며 매우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듯합니다.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선택과 집중, 과감한 ‘전지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베트남의 가경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1928~2002)의 기도생활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한때 사이공대교구(현, 호찌민대교구) 부교구장 대주교로서 활발한 사목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베트남 공산화와 더불어 하루아침에 독방에 수감됩니다.
그의 내면은 끝도 없는 의혹과 불안, 수시로 찾아오는 분노와 외로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과감한 영적 가지치기에 돌입했습니다. 자신의 시선을 의욕, 불안, 분노, 외로움으로부터 차단하고, 오로지 하느님께로만 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먼지 앉은 독방 바닥에 손가락으로 성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길고 지루한 수감 시간을 묵상 기도로 채워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는 독방을 교구민들을 위한 지속적인 기도가 그치지 않는 거룩한 제대요, 주교관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는 노년기를 바티칸에서 보냈는데, 힘겨운 투병생활 중에도 언제나 환하게 웃는 얼굴로 활짝 두 팔을 벌려 방문객들을 맞이했습니다. 방문객들이 하나같이 남긴 증언은 ‘추기경님과 함께 있으면 마치 내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어떤 사람이든 즉시 무장해제를 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방문객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메시지, 영혼 저 깊숙한 곳에서 길어올린 따뜻한 메시지를 방문객들에게 건넸습니다. 방문객들은 그와 비록 한 순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돌아서면 마치도 충만한 기도 피정을 한 느낌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렇게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은 자신의 삶의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했습니다. 세심하고 깊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영혼, 그들 내면의 성장을 위한 관심과 노력은 한평생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자신을 배신하고 박해하고 고문한 사람까지도 포함되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기도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기도의 참된 여정은 삶입니다. 지속적인 기도는 하느님을 섬기는 데 온전히 바친 삶입니다. 이것이 항상 기도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랑이 지속될 때 기도도 지속됩니다”(구엔 반 투안 추기경).

 

 

 

화나면 무슨 말을 못하냐고
      이서원 프란치스코(한국분노관리연구소 소장)
같은 대학 출신인 약사 부부가 상담하러 왔습니다. 
그들은 학력고사 세대로 대학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남편의 학력고사 점수가 아내보다 3점 낮았습니다. 어느 날 크게 말다툼을 하다가 너무 화가 난 아내는 자신도 모르게 남편에게 “공부도 못하는 게!”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순간 남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화분을 던지며 거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여러 날 아내에게 눈빛도 안 주고 말도 걸지 않았습니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이고, 설령 잘못된 말이라 해도 화나면 그 정도 말을 할 수 있지 않느냐하는 생각에, 아내는 속 좁은 남편이 더 쪼잔해보였습니다.
아내는 말했습니다. “화나면 누구나 그 정도 말쯤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러자 남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았습니다. “화가 나니까 더욱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 말에 이번에는 아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학력고사 점수가 3점이 낮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두 사람이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아 온 자존심의 핵심이었습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한 남편은 아킬레스건처럼 그것만은 아내가 건드리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떨어뜨리고 열등감을 폭발시키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내가 건드렸으니 매우 불쾌해진 것이었습니다.
캐나다 의료진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화날 때 사람의 지능은 평균 30이 떨어집니다. 아이큐가 120인 사람이 화날 때는 90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평소 하던 말보다 훨씬 비이성적인 말이 나오게 됩니다. 어른이면서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철없는 막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날 때 한 말은 대개 나중에 후회할 말입니다. 또 지능은 떨어지고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기에, 원시적 공격 본능이 올라와 상대의 가장 아픈 부분을 자극하고 공격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가장 흔하게 부부 사이에 화가 날 때 하는 말이 상대 집안에 대한 인신공격입니다. “당신 집안 아버지가 그 모양으로 살았는데, 당신이 뭘 배웠겠어!” 하는 식입니다. 이 말은 바로 배우자의 반격을 불러옵니다. “당신 집구석은 얼마나 대단해서!” 싸움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화가 날 때는 말을 가려서 하거나, 그럴 자신이 없다면 잠시 침묵하는 것이 답입니다. 철부지 아이는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울 때가 훨씬 많으니까요.

 

 

 

순교자 성월, 그리고 하느님의 집…
      임미정 살루스 수녀님(장상연합회 JPIC분과 위원회, SOLPH)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2005년 2월 12일, 아마존 유역 파라주에서는 6발의 총성이 울리고, 70대 고령의 도로시 스탱 수녀가 마태오 복음 5장 9절이 펼쳐진 성경과 함께 낙화(落花)하셨습니다. 도로시 스탱 수녀는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 지킴이’로, 반평생을 아마존의 환경과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농민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삼림개발업자들에 맞서 비폭력으로 저항하다 순교하셨습니다.
바야흐로 보편 교회는 이웃 교회들과 함께 9월 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부터 시작된 창조 시기(Season of Creation)를 보내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컬(교회 일치 운동) 연대인 창조 시기, 올해 주제는 ‘우리 모두의 집, 하느님의 집을 새롭게 하기’입니다. 이 주제에 담긴 의미는 ‘환대’의 역사적 상징인 ‘아브라함의 천막’을 치라는 권고입니다. 이는 ‘창세기’의 아브라함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집, 하느님의 집(οἶκος, 오이코스)을 보호하고, 기후난민과 같이 자신의 안식처를 잃은 모든 사회적 약자들을 조건 없이 환대하라는 부르심의 초대입니다.
아울러 한국 교회는 9월을 순교자 성월로 보내고 있습니다. 현대의 순교는 피를 흘리지 않기에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사는 것’이라는 의미로 ‘녹색 순교’라고도 표현합니다. ‘녹색 순교’가 한국 초대교회 신자들의 신앙적 치열함에 비해 약한 의미가 아니기에, 현재 절박한 생태적 위기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도로시 스탱 수녀처럼 지구와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보다 급진적인 신앙적 결단이 따라야겠습니다. 이러한 응답에는 일상 안에서 탄소배출을 줄이는 단순하고 검소한 생활을 포함하여, 하느님의 집, 거대한 우주 그물망의 작은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각, 즉 온전한 생태적 회개를 통한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전세계적으로 범람하는 성장주의와 산업자본주의의 물신적 우상숭배의 구조적 악에 저항하는 정책적 전환에도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녹색 순교 한 가지, 앞으로 진행될 중요한 국제회의 ‘제26차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COP26)’와 ‘제15차 생물다양성 협약에 관한 당사국 총회(COP15)에 참여하는 세계 지도자들이 기후 및 생태정의를 위해 대담하게 행동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건강한 지구, 건강한 사람들’ 청원 서명에 동참해 주십시오. 덧붙여, 우리나라에서도 “2030년 탈석탄, 2050 탄소중립”에 대한 확고한 실행안이 담긴 ‘기후정의법의 입법’과 기후정책 수립을 위해 9월에 진행될 기후 관련 대중집회(9.24~25, 코로나 방역단계에 따라 온라인 집회로 대체)에 순교의 열정으로 동참해 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슬기로운 나눔 생활
      김창해 요한 세례자 신부님
코로나19와 관련한 여러 부정적인 지표 속에서 백신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이에 백신 확보를 위한 국가적인 노력의 중요성이 날로 증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도 백신 수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데, 백신 나눔을 꼭 해야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모드는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한겨례 2021. 7. 22)에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를 비롯해 85개 개발도상국이 2022년 말까지 국민 다수에게 백신을 접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현재 가난한 국가의 접종률이 1% 미만인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라는 질문에, ‘윤리적이거나 정의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한국인을 위해서, 가난한 국가의 사람들을 비롯해 전 세계의 사람들이 백신을 맞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안전하지 않은데 한국이나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안전하길 바라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외부와 단절하고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이 시대에, 나만 홀로 행복하거나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창궐 초기에 세계의 몇몇 부유한 사람들이 섬으로 피신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단절은 단기간의 대책일 뿐입니다. 타인을 살리지 않으면 우리가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백신의 접종률이 낮은 곳에서 ‘델타, 델타 플러스, 람다, 뮤’ 등의 코로나19 바이러스 변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루어진 진화의 법칙은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바이러스조차도 생존을 위해 진화의 법칙에 충실합니다.
백신이 충분한 나라에서도 확진률이 높아지는 것은, 백신의 후유증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비록 후유증의 발생률이 낮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과 백신 접종의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냐고도 합니다. 물론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갖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백신을 맞는 선택에는 나의 생명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노력이 포함된 것입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맞이하여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의 모습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현재 바로 지금 우리가 그분이 하셨던 선택을 하기 위함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생존을 위해서 진화하고 여러 변이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 신앙은 인간으로 태어나 성인으로 진화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도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님
김대건 신부님은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845년 1월 세 번째 입국에 성공하여 그해 4월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지도를 한 장 그립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6년 앞서 그린 이 ‘조선전도朝鮮全圖’에는 독도가 조선 땅으로 표기되어 있어, 오늘날 독도 영유권과 동해 표기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 지명을 알파벳으로 표기해 조선을 해외에 알리는 첫 번째 지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의 조선전도는 순수 지리학적 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박해받는 조선 교회의 힘을 북돋우고 조국의 복음화를 위한 사목적 열정의 결실입니다. 조선의 땅과 마을을 그리며 신부님은 마음으로나마 전국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누비고 이 땅 구석구석에 복음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김대건 신부님은 1년 반 뒤에 피 흘려 순교하셨지만 지도에 새겨진 꿈은 최양업 신부님이 이어받아 땀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뿐입니까. 전국 각지에서 교우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꽃으로 피어나 지도를 가득히 수놓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지도에 나오는 모든 길이 십자가의 길이 되었습니다. 그 길 위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오갔습니다. 그 길을 따라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신자들이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세속 삶의 무게는 그들을 힘들게 하였지만, 스스로 짊어진 십자가는 그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앞서간 이들의 모범이 뒤따르는 이들에게 눈에 보이는 확실한 보증이 되어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그렇게 이 땅에 위대한 신앙의 지도를 남겼습니다.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였습니다.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순교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순교자’라는 말은 역사적, 법률적 그리고 종교적 관점 무엇이든간에 어원적으로 ‘증거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순교자’라는 명칭은 피로써 증거하는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적용되어 왔습니다. 순교자는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 처럼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온전한 맘으로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입니다(사도 7,55-60).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느님을 위한 순교자의 으뜸이며 순교자의 표본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기꺼이 당신 전부를 바치시어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참되고 온전하게 증거해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미리 아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죽음을 아버지께 바쳐진 온전한 존경의 표시와 순명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요한 10,18).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형선고 받으신 순간에 당신의 신원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 18,37)
루가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서 참된 순교자 상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다시말해 그분께서 보여주신 참된 순교자의 모습은 심적으로 고통스런 순간에 그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하느님 은총을 통한 위로와 힘(루가 22,43), 고발과 모욕앞에서의 침묵과 인내(루가 23,9), 자신의 고통보다 다른이의 고통을 먼저 생각함(루가 23,28), 죄가 아무리 크다고해도 참회하는 죄인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임(23,43), 당신을 해치려는 박해자들에 대한 용서(루가 22,51; 23,34) 등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전체는 예수님 안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고통받은 종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주님의 수난은 당신의 사명에 대한 본질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죽음을 당해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수난당해야 하는 이유였습다. 다시말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 집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수난과 죽음을 통한 영광스러운 순교로써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제 교회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피와 증거를 하느님께 비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미 유다인 공동체는 특히 마카베오 시대에 순교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마카 6-7장).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순교는 주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아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바친 우리 선조들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 우리 또한 일상안에서 매순간 순교의 정신으로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함승수 신부님
지난 5월부터 지금까지 계단 오르기 운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폭염과 열대야로 숨이 턱턱 막혀도, 장대비가 내려 밖에 나가기 귀찮아도 ‘날마다’ 하루 한 시간씩 꾸준히 계단을 올랐는데, 그 노력이 결실을 맺었지요. 지난 몇 년간 늘 ‘다이어트’를 목표로 삼고 이것저것 해봤음에도 꿈쩍않던 체중이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빠지기 시작해 총 11킬로그램 정도 살이 빠진 것입니다. 이 체험을 통해 어느 한 가지를 꾸준하게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겨우 체중 몇 킬로 줄어든 정도로 이렇게나 큰 기쁨과 성취를 느끼는데, 만약 내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하고 행복한 삶을 선물로 받게 된다면 얼마나 더 기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려면 어떤 노력들을 꾸준히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먼저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필요없는 것을 버리는게 아니라, 새로운 것, 더 좋은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존에 내가 중요하게 여기며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비워내라는, 구원에 별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을 덜어내라는 뜻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만 하려고 드는 나의 취향, 성격, 계획 등 자기 중심적인 것들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이는 절망이나 포기와는 다릅니다. 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여름에 감나무가 덜 익은 열매들을 털어내듯이, 가을에 활엽수들이 그 많던 나뭇잎들을 떨구듯이…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한 두 번하고 마는게 아니라 꾸준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꾸준함을 ‘날마다’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을 청하듯이,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그날 분량의 만나 만을 거두어들였듯이, 하루 하루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고 봉헌하는 과정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만으로 살려는 이들은 늘 걱정과 불안 속에서 매일을 초조하게 살아가지만,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봉헌하는 이들은 그분의 은총과 축복 안에서 매일을 충만하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항상 느끼며, 매일 그분 사랑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 삶은 십자가를 지는 행동으로 구체화 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생활에 동반되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편하고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어렵고 힘든 길로 가려고 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길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고생을 사서하는 비효율적, 비합리적인 생활양식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걷다보면 중간에 높은 산도 만나고 깊은 강도 만나게 되는데, 그렇다고 ‘천국’을 내버려두고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 그냥 ‘정면돌파’를 선택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어쩔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진 채 힘겹게 끌고 가는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원래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듯,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어안고 가는 모습을 지칭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나를 아프게 찌를지라도, 때로는 그것 때문에 손해와 희생을 안게 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에 사랑과 순명으로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는 그저 성물일 뿐이지만, 내 품에 끌어안은 십자가는 구원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한국 교회의 순교 성인들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신 분들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분들이 고난을 당하고 벌을 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분들의 마음은 주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고통이 그저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고 주님의 은혜를 가득히 받기 위한 ‘단련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을 본받고 싶다면 우리도 마음 속에 구원에 대한 희망을 지녀야 합니다. 그 희망은 신앙인다운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하는 이들은 그 마음가짐을 굳건히 가지기 어렵겠지요. 가정생활도, 사회생활도 ‘그리스도인답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서 해야 우리 마음 속 희망이 굳건해집니다.



아닌 건 아닌 겨!
      한상갑 바오로(전주교구 순교자현양회)
“이건 아니라고 봐!”, 주말연속극의 이 대사 한마디가 제법 맛깔스럽게 느껴집니다.
곧 죽어도 뼈대 있는 양반집 자손이라고 자랑하는, 자칭 종갓집 종손이 하는 한마디라서 그런지 제법 젊잖게 여겨지기도 하며 웃음을 불러내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서 한마디 더 보태는“아닌 건 아닌 겨!” 하는 대목에서는 살짝 무게를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네거티브 말싸움으로 우리 선거판의 격이 떨어져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목소리 큰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정치인들의 날선 목소리와 삿대질을 해대는 꼴을 늘상 공중파로 보고 삽니다. 그럴 적에는 마치 핏발선 쌈닭을 보는 듯싶어서 기분이 언짢습니다. 그래선지 “아니라고 봐!”라고 말한 다음에 “아닌 건 아닌 겨!”라고 마무리하는 연속극의 대사가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이건 아니라고 봐!” 하는 첫마디로 자기 생각의 일단을 가볍게 표현하고, 그런 담에 “아닌 건 아닌 겨!” 하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마무리하는 느낌이 들어보여서 그렇습니다. 나름 격조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잘’ 말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하나의 ‘道’입니다.
나와 말을 나누는 상대방이 있기에 ‘예의’를 챙겨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앞에 있는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고 제 생각만 말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집안에서도 그렇고 일터에서도 그렇습니다. 동네에서나 교회에서나 이것저것 따져보지 않고 제 말만 해댑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느 상황이건, 말할 적에는 상대방을 꼭 배려하면 좋겠습니다. 배우자와 자녀 등 가까운 사람과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가장 가까운 아내와 어머니에게 생각 없이 불쑥불쑥 말한 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서는 “가슴을 후벼댄다”는 타박도 들었습니다. 타박 들어서 싸죠.

언젠가 한 제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무개 선생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했더니, 수업시간에 자기더러 “바보”라고 말해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 선생님, 악의 없이 그랬을 텐데, 그 한마디가 비수였었구나 생각하니, 되레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까닭 없이 성을 내지 말라고, 또 ‘바보!’나 ‘멍청이!’라고 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마태 5,22 참조). 누구에게도 그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은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을 ‘敎友’라고 불러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부릅니다. ‘신앙(敎)의 벗(友)’이란 뜻이겠습니다. 신앙함에 있어서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道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그런 동반자끼리도 생각이 달라서 큰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이럴 때에 “아닌 건 아녀!”라며 칼로 무 자르듯 하지 말고, “이건 아니라고 봐!” 하는 한 박자 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대 우리 교회의 화두(話頭), ‘공동합의성’의 단초가 바로 이것 아닐까요?

 

 

 

떼제,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그 곳
      유혜진 마리아(오카리나 연주자)
프랑스 중부지방의 ‘떼제’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남자수도회 ‘떼제공동체’에는 매주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듭니다. 저도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장기봉사자로 지냈고, 그 후로도 몇 차례 방문하였습니다. 떼제에서는 저처럼 불면증으로 쉽게 깊이 잠들지 못하는 사람도, 자주 졸리고 배고파집니다. 소박한 식사가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기분 좋은 피로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매일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함께 일을 하고 부대끼며 생활합니다. 또 하루 3번 공동 식사, 공동 기도 시간이 있습니다. 기도 중에는 주로 찬양을 합니다.
제가 떼제에 다녀왔다고 하면 많은 이들이 ‘왜 그 시골 마을에 그리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가는 것이냐’라고 묻곤 합니다. 그리고 제게 개인적으로도 묻습니다. 왜 그곳까지 갔으며, 왜 그리 오래 머물렀느냐고. 반대로 떼제에서는 여러 수사님들과, 함께 살던 청년들이 ‘왜 한국인들은 그 멀리서 이곳을 찾아오며, 어떻게 한국인이 오지 않는 주간이 없느냐’라고 제게 묻습니다. 물론 유독 한국인들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한국인이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서 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와 환경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고요함과 평화로움, 기도 안에서 느껴지는 평안함과 따뜻함, 또 그와는 상반되는 생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에너지, 이 모든 것들의 어우러짐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젊은이들끼리 서로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끼고 배우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함께 찬양하면서 함께 기도하는 즐거움을 새롭게 느끼고, 성경 나눔을 하면서 같은 구절을 다르게 보는 여러 시각을 통해 새롭게 느끼기도 하고 공감합니다. 단순한 일정과 식사로 우리 기본적인 욕구에 집중하게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엇을 해야만 한다.’라는 식의 강요나 설교 없이, 자유로이 함께 기도할 수 있음이 젊은이들을 자유롭고 평안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며 제일 먼저 걱정된 곳이 ‘떼제’였고, 마음이 산란해지고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종종 생각나는 곳도 ‘떼제’입니다. 그곳에서 마음껏 졸려하고 배고파하고 싶습니다. 물론 어디에나 계시는 그분이지만, 바쁜 일상에서 그분의 존재를 깊게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혹은 그곳에서 느꼈었던 그때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추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머지않아 다시 찾아갈 그곳을 그리며, 내 삶의 이 자리에서도 그 분의 현존과 보살핌을 느낄 수 있기를 청해봅니다.

 

 

 

윤영민 신부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어린이’는 주석가에 따라 두 가지 모습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이’를 사회의 모든 약자를 대표하는 존재로 바라보기도 하고, ‘어린이’라는 말 그대로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하느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관점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복음)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으로 바라보든 간에,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이’로 생각하든 ‘약자’로 생각하든 복음에 등장하는 ‘어린이’는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복음)


제자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논쟁한 이유가 올바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잘못이나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 하느님 앞에 서기 두려워합니다. 아담 역시 그랬지요. 아담이 태초에 하느님 앞에서 거리낌 없이 지내던 모습이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따르기로 했던 그때의 모습, 즉 아이와 같은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복음)


강력한 왕이요 예언자로 자신들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대로가 아니라, ‘고난 받는 종’(1독서)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경악할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자신들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 즉 이 세상의 부귀도 명예도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보통 가지는 바람과는 다른 것들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2독서)


2독서 야고보서에 따라서 ‘어린이’의 개념을 생각해보자면, ‘시기와 이기심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라고 그런 것이 아예 없을 리야 없겠지만, 우리 어른이 가지는 시기와 이기심과는 차원이 다른 소소한 것들이겠지요.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독서)


적어도 어린이들에게 ‘여러 가지 욕정’이라고 표현할만한 것이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어린이와 같은 이’는 야고보서(2독서)에 따르면, ‘시기와 이기심을 가지지 않고 욕정에 의해서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나의 모습은 어디쯤 있습니까?’
오늘 강론의 마무리는 시기와 이기심 속에 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1독서의 구절로 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복음) 아멘.




최고가 되려거든 밑에서부터 시작 하라<마르코9/30-37.>9월19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창조란 말은 있는 데서아니라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것입니다. 하느님이 새로운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한 연인의 태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죽으심으로 하느님 나라를 높이 세우셨습니다. 기초가 없는 건물은 아무리 화려하게 지어도 그짐은 무어지고 쓸모없는 집이 됩니다. 오늘 주님은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면 그들의 손에 넘겨져 죽을 것라 하여도 못알아 듣고 그 나라가 이말 때 누가 높은 자가 될 것인가 논쟁을 하였다고 하니 “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시였습니다. 나무도 뿌리가 없으면 살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세상의 주인으로 주인의 모습을 가지시려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 것같이 우리도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시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하심 같이 우리의 자세도 낮은 자리에서 시작하고 그 의미를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나라의 제일 높은 자리를 찾이 하려는 사람은 모든 국민의 낮은 자리인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신 주님은 하느님이 셨지만 아버지의 종으로 행동하시였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배워도 높은 자리 탐하고 조금만 가져도 높은 자리를 탐하고 그리 큰 공작을 쌓지 않아도 큰 상을 받고 이름을 높이려고 하고 조그만 권력이 있으며 자기 마음대로 부정을 통해 높은 자리를 탐하여 오른 자리는 더 큰 오류속에 살게 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는 순진하고< 어린이와 같이 되라> 진실 되고 < 있는 거대로 속이지 말고 거짓을 행하지 말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 무엇을 필요로 하지 말고 자기가 필요가 되어 주는 사람> 믿음과 희망과 사랑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되려고 하지 말고 다른 이의 필요가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깊이 이 진리를 깨우친 사람은 자기가 죽은 다음 몸을 의학의 실험용으로 몸을 내어주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순교 성월 순교자는 지기 몸을 받치며 믿음을 키우고 믿음이 참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무서운 십자가의 형벌을 통해 가장 영광스러움을 알려주고 각기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죽음 뒤에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믿음을 통해 영원히 살기위해 십지가의 사랑을 깨우치고 따라 살 때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집안을 깨끗하게 하려면 걸레가 필요합니다. 가장  보질 것 없이 보이는 걸레가 바로 집안을 빛내는 것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빛냅니다.
저의 세맨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수세미입니다. 겊을 씻으려 할 때 손으로만 안 되고 수세미를 사용하여 더러워진 겊을 씻을 때 수세미에게 감사합니다. 네가 있어 내가 겊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다.라고 합니다. 저는 나이 들면서 누구에게 대우를 받고 자리를 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교회의 수세미 걸레로 있는 것 감사하게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왜 당신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합니까?  내 이상을 실현하려고,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하여가 아니라 종중의 종으로 살기위하여 라고 해야 합니다. 모두가 낮은 자리로 내려가며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빛내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모든 이안에 모든 이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작은 들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짜가 되는
첫째보다는
꼴찌가 되는
진짜가
더 아름답다.

복음의 기본은
언제나
진실함과
겸손에 있다.

낮아지는
섬김과
우리자신을
제대로 아는
겸손이

예수님을
만나는 참된
기쁨이다.

삶이란
우리자신을
알아가는
겸손의
여정이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왼편과
오른편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이 자리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
더 중요하다.

건강한 믿음은
낮아지는
겸손에 있다.

낮아질수록
깊어지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낮아지면
모든 것은
은총이다.

십자가의
겸손이다.

낮아질수록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다.

하느님을
가리는
장본인이
우리자신임을
알게된다.

낮아지신
예수님의
삶에서

참된 사랑이
겸손임을
다시 만난다.

실패와
아픔을 통해
다시 일어나는
꼴찌들과 함께
꼴찌가 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낮아지는
기쁨에 있다.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다시금 깨닫는
은총가득한
가을 주일이다.

낮아져야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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