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신다.>
▥ 잠언의 말씀입니다. 3,27-34
내 아들아, 27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28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 테니.” 하지 마라.
29 이웃이 네 곁에서 안심하고 사는데 그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마라.
30 너에게 악을 끼치지 않았으면 어떤 사람하고도 공연히 다투지 마라.
31 포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길은 어떤 것이든 선택하지 마라.
32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하신다.
33 주님께서는 악인의 집에 저주를 내리시고 의인이 사는 곳에는 복을 내리신다.
34 그분께서는 빈정대는 자들에게 빈정대시지만
가련한 이들에게는 호의를 베푸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갈라 2,19-20)와 복음(마태 16,24-27)을 봉독할 수 있다.>
말씀의 초대
잠언의 저자는, 선행을 거절하지 말고 악을 지어내지 말라며, 주님께서는 의인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가르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며,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가르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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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은 이웃 사랑에 대하여 말한다. 그 사랑은 선행을 행하는 것으로, 또한 이웃과 다투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드시어 주님의 말씀을 드러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등불을 덮거나 가려서는 안 되듯이 우리는 말씀이 세상을 환히 비추도록 해야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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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을 점령한 뒤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칙서를 반포한다. 유배 생활 5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 사건을 에즈라기는 하느님의 섭리로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통하여 당신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다. 등불을 켜서 감추지 않듯이, 당신 말씀을 듣는 이도 그 말씀의 빛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잠언에서는 오늘 독서와 같이 인과응보에 관하여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고 강조하며,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갚음을 힘주어 말합니다. 잠언의 저자라도 현세에서 늘 정확하게 인과응보가 이루어진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뜻밖의 일들이 벌어지고, 결과는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잠언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지닙니다.
이스라엘의 성경 안에서도 이러한 가르침은 의문에 부쳐지고 이후에 욥기와 코헬렛 같은 책들에서 다른 측면들이 지적되지만, 그렇다고 잠언이 쓸모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고, 선과 악의 갚음이 현세에서 완성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인간이 행하는 선과 악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온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삶 안에서, 특히 현세의 삶 안에서 때로 의심스럽게 보이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할까요? 정말로 현세에서 곧바로 선과 악에 대한 갚음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에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할 때는 대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악을 행하는 것이 더 유익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합니다. 명백하여 보이지 않는 가르침,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너무 단순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잠언의 가르침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어쩌면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마음 안에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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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사가는 ‘로고스 찬가’(1,1-18)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1,9)으로 고백합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에게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신 참빛이셨습니다.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내면의 어둠이 드러났을 때, 그분을 회피하거나 해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이가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구원의 빛 안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인 ‘등불의 비유’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카 8,4-8 참조)에 이어 들려주십니다. 마음속에 심긴 하느님 말씀을 싹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으로 살아가라는 당부와 더불어, 그러한 삶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둔 등불마냥 감추지 말고 가족과 이웃들에게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착한 표양과 모범까지도 감추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선(善)은 있는 그대로 드러날 때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선을 행하기를 잊어버린 누군가에게 깊은 깨달음과 변화의 계기가 됩니다. 제1독서의 말씀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선행을 베풀기를 지체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이웃에게 해가 되는 그 어떤 악행도 늘 경계하는 삶을 이어 가야겠습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주위에 빛이 되어 주는 삶을 더 실천하면 할수록 더 깊은 확신과 기쁨을 얻어, 언제나 주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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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켜는 이유는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그릇으로 덮어 두지 않고 등경 위에 얹어 둡니다. 될 수 있는 한 빛이 더 멀리 비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등불과 같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실천하면 빛이 사람들을 비추게 되고,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요한 1,9 참조).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등불을 자신과 이웃에게 비추게 됩니다(요한 8,12 참조).
어부는 먼 바다에서 그물질을 끝내고 항구로 돌아오다가 등대의 빛을 보면 평화로워진다고 합니다. 어부에게 빛은 편안한 안식입니다. 우리에게도 빛은 희망의 상징입니다. 새해에 많은 사람들은 해맞이를 하러 갑니다. 순례자들은 시나이 산 위에서 맞이하는 일출을 보고 모세 성인이 보았던 하느님의 빛을 연상합니다.
신앙의 빛은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비추고 기쁨을 발산시킵니다. 그 빛은 은총을 몰고 오고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그 빛은 사라지고 불안과 괴로움이 따릅니다. 우리는 어두움이 신앙의 빛을 끄지 않도록, 그 빛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우리 신앙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이 세상의 풍파와 고뇌 가운데에서도 은총의 빛을 계속 비추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 빛을 따라가고 어두움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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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등불의 빛에 비유하신 뒤 그 등불에 대한 사람들의 두 가지 유형의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서도 그 말씀이 부담스럽고 내 숨은 속내를 드러낼지 두려워 은근히 치워 두거나, 짐짓 듣지 못한 듯이 처신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말씀에 자신을 개방하고 그 말씀이 다른 사람들을 비추도록 애쓸 수도 있습니다. 말씀의 등경을 들고 다른 사람을 비추러 나서는 일은 어렵고 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 첫 발자국을 내디딘 사람은 어둠에서 자유로워지며 빛으로 충만해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진 자가 더 받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말씀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는 모습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제1독서의 잠언 말씀이 잘 알려 줍니다. 하느님 말씀의 빛은 이웃 사랑의 결실인 선한 행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나며, 이로써 종교적 체험은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위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봅니다. 하느님 말씀의 빛을 등경 위에 밝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 우리는 사랑의 윤리에 기초한 올바른 행위의 두 가지 차원을 봅니다. 소극적 차원의 애덕으로 우리는 이웃과의 필요 없는 다툼을 피하며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섬세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적극적 차원에서는 어려움에 빠진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잠언의 이 말씀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위란 단순히 인간적 차원의 처신을 넘어, 말씀의 빛을 간직한 사람이 자신의 선한 행위로 그 빛을 세상에 드러내는 종교적 차원을 그 안에 담고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작은 선행과 호의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깊은 차원을 드러낼 수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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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는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死海)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요르단 강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생명의 호수입니다. 이곳에는 물고기가 많고, 그 물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식수를 제공하는 젖줄입니다. 그래서 그 호수 주위로는 마을도 많습니다. 그 반면,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염분이 무척 높은 짠물이기 때문에 물고기가 전혀 살 수 없을뿐더러 식수로도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해 주위에는 황폐한 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갈릴래아 호수는 생명의 호수가 되었고, 사해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을까요?
갈 릴래아 호수는 물을 받은 만큼 그것을 요르단 강을 통하여 사해로 보내 줍니다. 받은 만큼 나누어 주는 호수이기 때문에 물이 썩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반면, 사해는 물을 받기만 하지 나가는 곳이 없습니다. 곧, 그 어떤 곳에도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분 농도가 높아 물고기를 포함한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우 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빛을 우리 마음속에 가두어 놓기만 한 채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아무 쓸모없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참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등불은 밝혀 두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비추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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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끔 듣는 말에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사회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는 구호일 뿐, 사회 환경은 철저하게 기득권자들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왠지 오늘 복음은 예수님마저도 가진 자를 두둔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깨닫도록 하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요?
이 세상에서 가진 자와 하느님 나라에서 가진 자는 서로 반대의 뜻을 지닙니다. 세상에서는 채우면 채울수록 창고에 곡식이 쌓여 부자가 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세상 것을 버려야 부유한 사람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가진 자는 자신을 온전히 비운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께서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세상 것을 비운 자리만큼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것을 움켜잡고 그것을 자기가 가진 줄로 알고 사는 사람은, 사실은 가진 것이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온통 세상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진 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세상 것에 마음을 두고 있는 만큼 영적으로는 빈곤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 것에 초연하고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없어 보여도 아무것도 부럽지 않는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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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등불을 켜서 침상 밑에 두는 이는 없습니다. 등불은 어둠을 몰아내고, 모든 것을 환하게 볼 수 있게 하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등불은 주님이십니다. 등불에서 퍼져 나오는 빛 또한 주님이십니다. 등불과 빛은 하나입니다. 등불이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뚜렷이 비추어 주시고, 당신 스스로 그 길이 되십니다. 빛은 조금만 있어도 어둠을 이깁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등불이라도 어둠을 몰아내고, 올바른 길을 비추어 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빛이신 주님을 닮아, 주님께서 앞장서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만일 신앙인들이 등불이신 주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어두운 길을 헤맬 수밖에 없으며, 자칫 타인의 등불마저도 꺼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등불이시라면, 우리는 그 빛을 가져다가 어두운 곳을 비추어 주는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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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켜서 침상 밑에 두는 이는 없습니다. 방을 밝히려 불을 켜는 것이지, 모양내려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밝은 것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애쓰지 않아도 결국은 알려집니다. 빛은 조금만 있어도 어둠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등불을 켜는 행동일는지요? 선행입니다. 착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입니다.
누구나 밝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그저 허허거리며 웃는 이가 밝은 사람은 아닙니다. 밝은 사람은 ‘몸에서 밝은 기운이 나오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선행을 베풀며 착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3개월 이상 깁스를 풀지 않으면 근육은 급속히 둔화된다고 합니다. 몸을 움직여 주지 않기에, 뼛속의 무기물이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하고 빠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약골이 되는 것이지요.
같은 이치입니다. 기도와 선행이 없으면 냉담하게 되어 있습니다. 점차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망각하게 됩니다. 성당 다니는 일이 귀찮아집니다. 영적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등불을 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등불마저도 꺼 버리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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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거짓말은 탄로가 나고 맙니다. 우리 삶에서 자주 겪는 일입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밤에도 대낮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비추시는 빛 속에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계를 아이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면서 수만 명의 어린이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안전띠와 유아용 의자를 의무화했습니다. 담배로 그렇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담배를 어린아이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성년자의 흡연이 늘어나면서 가게 점원에게 나이를 확인받으면서 직접 담배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보호하는 방법을 계속 만듭니다. 그러나 그 보호를 잘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스마트폰입니다. 그 중독성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전자기기는 사탕이 아니라 마약이다’라고 IT 전문 매체 편집장인 크리스 앤더슨은 말합니다. 생각을 멈추게 하고, 많은 자극으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계속 보다가 습관성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통, 수면장애, 기억력 상실 등의 증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기에 우울증까지 심해진다고 하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스마트폰을 사용합니다. 그 편리성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부작용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남들도 다 쓰고 있다는 생각, 편리하다는 점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름 캠프 전에 한 아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 캠프 안 갈꺼에요.”
아이뿐이 아닙니다. 현대인 모두가 중독된 것이 참 많습니다. 술, 마약, 쇼핑, 드라마, 게임….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이러한 중독으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풍요와 편리보다 더 높은 가치를 쫓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 많이 바라보고, 주님을 높이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깨끗하고 맑은 정신으로 이 세상을 밝게 살 수 있습니다.
등불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감추어질 수 없고, 밝게 빛나는 빛처럼 멀리 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이 계속 감추어집니다. 자기를 중독에 빠지게 하는 풍요함과 편리함만이 오히려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면서, 주님 말씀은 고리타분한 옛이야기처럼 취급하며 감추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갖고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갖지도 않고 오히려 피하면서 세상의 것만 가지려는 사람은 어떨까요? 주님의 말씀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지만, 세상의 것은 죽음 이후 완전히 내게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갖고, 무엇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까요?
오늘의 명언: 지혜로운 이가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자가 하는 일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원효 스님).
기적이나 환시, 특별한 체험, 그거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열심한 교우들 가운데, 기적이나 환시,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 뵐 때마다 꼭 말씀드립니다.
“그거 결코 좋은 것 아닙니다.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아주 예외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그런 현상을 허락하십니다만, 그로 인한 기쁨과 황홀함은 한순간 뿐입니다. 그 뒤로 남게 되는 것은 혹독한 고초와 오해, 편견과 십자가 길입니다. 그걸 묵묵히 감수해야만 하는 긴 여정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 딱 그러셨습니다. 그분은 사제가 된 지 1년이 지난 1911년 9월 7일부터 몸에 예수님의 오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유럽 전역으로부터 구름처럼 비오 신부님에게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비오 신부님은 매일 새벽 5시에 미사를 드렸는데, 사람들은 새벽 1시부터 몰려와서 큰 소리로 기도하며 성당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교회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에게 발생한 특별한 현상에 대해 보고를 받은 관구는 1919년부터 의사의 진단을 받게 했습니다.
정말 괴로웠던 일 한 가지는, 안 그래도 오상으로 아프고 쓰려 죽겠는데, 의사들은 상처 위아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상처 내부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럴 때마다 비오 신부님은 천상의 비밀이 모독당하는 심한 죄책감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1923년부터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일체의 편지에 대해서도 답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비오 신부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3천여 명의 신자들이 격렬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오 신부님은 다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고, 고백성사도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당국이 비오 신부님에게 허락한 것은 오직 미사와 고백성사뿐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미사와 고백성사를 온갖 정성을 다해 집전했습니다.
1시간 넘게 지속되는 미사는 늘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보통 사제들은 1분도 채 안 걸리는 거룩한 변화의 기도는 5분 이상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흥건해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기도를 드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집전하신 미사에 참석했던 한 사제는 ‘머리털 나고 이렇게 감동적인 미사는 처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본당으로 돌아간 그 사제는 자신이 봉헌했던 성의 없던 미사에 대해 크게 반성하면서, 지극정성을 다해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답니다.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서 비오 신부님께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오상을 똑같이 받았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그의 생애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카푸친 수도자로서 보여준 무조건적인 순종과 한없는 겸손의 삶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으로 인해 숱한 오해와 중상모략을 받으면서 깊은 수도원 안에 유폐되곤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교회에 대한 신뢰, 장상에 대한 순명의 강도는 점점 더 커져만 간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더 깊게 이해하고 깨닫는 유일한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고 하시며, 반드시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인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게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며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만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시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성경의 앞뒤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앞에는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말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뒤의 내용은 진정한 당신의 참 가족은 당신의 핏줄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말씀의 씨가 우리 안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내용 안에서 이 부분이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때문에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더 많은 은총을 받으려면 열매를 맺으려 해야 합니다. 그 열매는 길과 같지도 않고 돌밭과 같지도 않고 가시밭과 같지도 않아야 맺힐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세속-육신-마귀, 곧 탐욕과 성욕, 교만을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 읽어야만 그 깨달음이 있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는 5세기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약 17년 동안 깊은 죄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12세부터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매춘부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회심은 여전히 죄 많은 삶을 살면서 군중을 따르려는 호기심과 열망으로 예루살렘 순례에 합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 현양 축일에 성 십자가를 공경하기 위해 무덤 성당에 들어가려 했으나 초자연적인 힘이 그녀의 길을 막았습니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 끝에 마리아는 자신의 죄악된 삶이 자신을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깊은 통회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성당 밖에 서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이콘을 바라보며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리아는 십자가를 존경하게 된다면 회개하고 자기 삶을 바꾸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기도 후에 그녀는 저항 없이 교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심오한 회심의 시작이었습니다.
전례 중에 루카 복음에서 이 말씀을 듣고 그녀는 깊은 회개를 경험했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그녀는 앞서 자신이 기도했던 이콘 앞에 돌아가서 감사기도를 올리고 이제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요르단을 가로질러 세례자 요한이 살았던 광야, 즉 예수가 세례 받은 곳으로 가서 영원한 안식을 찾아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는 그 즉시 광야로 들어가 이후 47년을 세례자 요한처럼, 야생의 열매를 먹으며 속죄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기간에 그녀는 극심한 유혹과 육체적 어려움을 견뎌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전생에 대한 기억과 음식과 위안의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꾸준한 기도와 말씀 묵상, 금욕으로 이러한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생애 말년에 요르단 근처 수도원에 살고 있던 성 조시마(Zosimas)라는 수사를 만났을 때 알려졌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막에서 거룩한 은수자를 찾던 조시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그녀의 무식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신성함과 성경 지식에 놀랐습니다. 그녀는 성경에 대한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통해 성경의 많은 부분을 암기했습니다.
마리아는 조시마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성체를 가져오라고 요청했습니다. 1년 후 조시마가 성체를 모시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자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고, 조시마가 그녀를 묻어 그녀의 거룩함을 확인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세.육.마.에서 자신을 이기려는 이들에게 깨달음과 빛을 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정원에 앉아 있을 때 근처 집에서 라틴어로 "Tolle, Lege", 곧 "집어서 읽어라."라는 문구를 부르는 어린이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근처에 있는 성경으로 달려가서 무작위로 펼쳤고, 그의 눈은 로마서 13,13-14의 한 구절에 머물렀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3-14)
이 말은 번개처럼 아우구스티노의 마음을 강타했습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이 순간을 즉각적인 명확성과 확신의 순간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그 순간 이전의 삶을 버리고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른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해박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성 안토니오 아빠스도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라는 말로 완전히 바뀌었고, 성 프란치스코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로 완전히 변화되었으며,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미지근한 삶에서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0)라는 말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말씀이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게 만드는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들로 자기를 변화시키려 할 때 더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을 읽는 방식이고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방식입니다. 자신을 더 겸손하게 하고 더 사랑이 많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지향으로 읽어야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 수준에 따라 항상 새로운 깨달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번 여행에서 ‘몰로카이’ 섬을 다녀왔습니다. 신부님 중 한명의 세례명이 ‘다미안’이었습니다. 몰로카이 신부님은 2002년 ‘성인품’에 오른 다미안 신부님이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사목하던 곳이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자신의 주보성인이 사목하던 몰로카이 섬을 가고 싶어 했고, 우리는 기꺼이 함께 하였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1840년 벨기에에서 태어났고, 1863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1889년 몰로카이 섬에서 선종할 때까지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사목했습니다. 신부님은 자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신부님도 나병환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신부님은 원하던 대로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던 것처럼 신부님도 나병환자들과 더욱 가까이 있고 싶어서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부님께서 세웠던 성 요셉 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성지순례와 함께 했던 여행이 되었습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처럼 함께 한 신부님들에게 배울 점이 참 많았습니다. 이번 여행을 기획했던 신부님은 여행사처럼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항공권을 예약해 주었습니다. 숙소도 예약해 주었습니다. 공유차량 렌터카를 이용해서 저렴하게 자동차를 빌렸습니다. 여행 중에 운전도 해 주었습니다. 가야할 곳도 모두 미리 예약해 놓았습니다. 여행지의 맛있는 식당도 미리 찾아 놓았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계획한 여행 순서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신부님은 ‘스키, 스킨 스쿠버, 철인 삼종경기’를 하였고, 인명구조 자격증도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을 보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신부님은 관심이 있으면 찾아보고, 찾아보면서 알게 되고, 알게 되니 기꺼이 남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 덕분에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았지만 몇 번 주일미사에 참례하다가 그만 포기합니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의지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기 위해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세례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려면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면 포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결실을 맺기도 합니다. 사람을 믿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믿습니다. 본당의 피정과 교육은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어떤 단체든지 가입하면 단체를 발전시킵니다. 교리신학원에 등록해서 교리교사 자격증도 얻습니다. 같은 날 세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생활의 모습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은 빛을 드러내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는 세상이라는 강물에 떠밀려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노아가 홍수의 때를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었듯이 우리는 변화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꾸준히 기도하고, 영적인 독서를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기쁨을 넘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행의 등불을, 도움의 등불을, 봉사의 등불을, 사랑의 등불을 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지혜의 등불, 이성의 등불, 영성의 등불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또한 나를 진리에로 이끌어 주고, 다른 이들에게도 위로와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대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그대
주님의 불빛이여
비추고 비춰
어두운 세상을 밝혀라
그러지 아니하면
그대마저 사그라지리니
그대
주님의 샘물이여
흐르고 흘러
메마른 세상을 적셔라
그러지 아니하면
그대마저 마르리니
그대
주님의 횃불이여
타오르고 타올라
차가운 세상을 녹여라
그러지 아니하면
그대마저 식으리니
그대
주님의 바람이여
불고 불어
막힌 세상을 뚫어라
그러지 아니하면
그대마저 멈추리니
그대
주님의 손길이여
내밀고 내밀어
숨죽인 세상을 어르라
그러지 아니하면
그대마저 움츠러들리니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는 밤길을 비춰주는 가로등이 있습니다. 요즘의 가로등은 빛에 민감한 광전지를 이용하여 어둑해 질 무렵 자동으로 점등되고 날이 밝게 되면 자동으로 소등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 가로등과도 같은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치 요즘 가로등이 태양에너지를 받아 점등이 되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빛을 받음으로서 그 빛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가로등이 어둠 속에 빛을 전하듯이 어둠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웃들에게 밝은 빛과 같은 사랑과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어느 누구도 그 고마움을 알아주지 않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에 기뻐하시고 마치 가로등의 광전지가 충전이 되듯이 우리는 또다시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가로등과도 같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전되어 세상에 빛을 전하는 고귀한 시간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생명이고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등경 위에 놓아 모든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빛을 알고 있지만 그 빛을 많은 이들이 볼 수 없게 하는 이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들은 빛을 드러내지 않고 또 빛을 전파하지 않으며 심지어 빛을 스스로 감추려는 이들이 등불을 그릇으로 덥는 이들이요. 침상 밑에 놓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빛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빛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전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빛 자체 이신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야 하지요.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이들을 이상한 눈으로 볼 때도 있습니다. 즉 신앙인으로의 삶의 방식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방식은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빛은 등경 위에 놓아야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또 하나의 빛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지요.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기에 우리도 빛이지요. 즉 우리의 삶이 빛이어야 합니다. 빛을 모르는 이들에게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알려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빛을 모르는 이들과 같다면 빛이지만 빛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빛이 되는지 독서에서 알려줍니다.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 악을 지어내지 마라, 다투지 마라.” 바로 이 내용을 실천하는 이가 빛의 자녀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드러나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에 따라서 손해라고 생각되는 것이 나중에는 하늘나라에서 보화가 되는 것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가진 자는 더 받게 될 것이며 하느님을 가지지 못한 자는 자신이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아멘!
삶의 지혜 -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작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지식이 많아서 스승이 아니라 삶의 지혜가 뛰어나 스승입니다. 지식의 선생은 많아도 지혜의 어른이나 스승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추세라 웬만한 답은 스마트폰이 다 해주기에 이젠 지식의 선생도 쓸모없어졌습니다. 이럴수록 삶의 스승이, 지혜의 스승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 사막의 수도자들은 “참으로, 진짜로 살기”를 원했고, 많은 구도자들은 이들의 지혜를 찾아 사막에 갔습니다. 사실 우리 옛 어머니들은 지식은 짧았어도 겸손했고 삶의 지혜는 탁월했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감동하고 감탄하는 바 제 어머니입니다. 살아갈수록 자주 생각나는 어머니요 어머니의 지혜입니다. 예전에 이런 어머니를 그리며 쓴 자작 고백시 일부를 나눕니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은 분이셨다
애교나 아양은 거의 없었지만
강인한 의지에 아주 지혜로운 분이셨다
심한 밭일에 몸 많이 피곤하여
밤에 끙끙 앓으셔도
아프다는 내색 하나 않으셨다
아버지 원망하는 말 하나 들은 적 없고
큰 소리 내셔서 다투거나
화내신 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돼지 키워 자식들 학비도 대셨고
장마다 계란 모아 팔아 꼭 찐빵도 사다 주셨다
사실 오십 년대 육십 년대는 모두가 가난했지
그러나 마음은 참 부자였고 행복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어머니
삶자체가 기도였고 종교였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거니 ‘그립다’ 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내 어머니”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리운 어머니는 제 삶의 교사, 지혜의 교사가 되고 계십니다. 지혜 역시 보고 배웁니다. 지식들은 다 잊혀져도 보고 배운 사랑과 지혜는 영원히 살아 있어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오늘부터 이번 주간 제1독서는 지혜서에 해당되는 잠언과 코헬렛을 맛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비의적 지식이 아니라, 개인이나 공동체가 합리적으로, 책임감있게 살도록 부추기는 상식입니다. 새삼 영성생활도 비상하기 보다는 이런 평범한 상식의 지혜가 기초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런 지혜는 책에서보다는 삶의 체험에서 깨달음을 통해 배웁니다. ‘삶의 책’이 지혜의 보고(寶庫)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성인들에게 배우는 바 역시 지혜입니다. 교회학자 축일 때 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부르는 초대송 후렴도 생각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느님 주시는 참 좋은 선물이 지혜입니다.
오늘은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입니다. 흔히 오상의 비오 신부님으로 유명한 성인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1968년 9월23일 81세로 선종하기 까지 카푸친회 수도사제로 반세기 동안 어떤 의학적 치료나 과학적 설명을 찾지 못한 오상을 지니고 사셨고 오상에서는 피가 배어나왔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수십만명이 비오 신부님을 찾은 것도 대부분 고백성사를 보고 영적지도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성인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인들에게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에 살아계심을 놀랍게 증언하였습니다.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성인을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고, 교황 비오 12세는 “비오 신부님은 돌아가시기 전부터 성인이셨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라 하셨고,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우리 주님의 오상을 뚜렷이 잘 나타내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세기 동안 비오 신부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고, 선종하기 직전이 1967년에는 만오천명의 여자와 만명의 남자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고 합니다. 성인의 삶이 응축된 지혜로운 말씀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이란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외의 것이 아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부러워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아픔과 불편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완전하고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사랑할수록 그대는 희생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평생 영적전쟁중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살아가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잠언의 지혜는 이웃사랑에 관한 지극히 상식적인 가르침입니다.
“이웃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이웃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마라.”
“공연히 이웃과 다투지 마라.”
“포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라.”
새삼 이웃사랑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사랑은 ‘지혜의 샘’입니다. 이와 더불어 잠언의 현자는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 하시며 복을 내리시고 호의를 베풀어 준다 하시며 우리 모두 지혜로운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올곧은 삶을 살며 ‘하느님의 벗’이 된다고 지혜서는 말합니다. 지혜중의 지혜가 ‘하느님의 지혜’라 일컬어지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지혜가 빛납니다.
“등불은 켜서 등경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지혜로운 신자들은 등경위에 등불처럼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니 하늘 두려운 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삶,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촉구이며, 이래서 즉각적인, 끊임없는 회개와 고백성사가 중요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는 경청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져 빼앗길 것이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진리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수행자로서 한결같이 깨어 수행에 전념하는 영적부자로 사는 이가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언자(豫言者)와 더불어 현자(賢者)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평생교육을 이뤄주는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날로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8,16)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신영복’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라는 책의 한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신영복은 주역의 기초 개념을 강의하는 과정에서 ‘위位와 응應’에 대한 설명을 한 부분이 있는데, 그 내용이 예수님, 등불의 비유 말씀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기에 그의 주장에 기반으로 오늘 복음을 생각해 봅니다. 신용복에 의하면 ‘위位’는 자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등불이 등경 위에 있으면 득위得位, 곧 제자리를 차지하여 방 안을 환히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아래 있으면 실위失位, 곧 제자리를 잃게 되어 아무리 밝게 빛난다 해도 방안을 밝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 만물은 고유한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등불의 자리가 등경 위인 것처럼, 사람도 그 사람에 맞는 자리가 있습니다. 흔히 교구장이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을 일컬어 주교좌성당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좌座는 곧 주교가 앉는 의자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앉아야 할 사람이 그 자리에 앉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득위得位라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밝게 빛나는 것을 응應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결국 그 자리에 걸맞은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 꺼져 있다면 방안을 밝힐 수 없습니다.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전제하면서, 오늘 복음에서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8,16)라는 말씀에서 등불은 자명하게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이 세상에 왔다.” (요1,4.9)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8,12) 세상의 빛이요 등불인 예수님은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여 있으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두운 세상에 당신 존재와 당신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로써 등불이 예수님이라면 등불을 올려놓는 등경은 십자가 위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등불인 주님을 환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밝히 알려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을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8,17)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바탕으로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비밀은 드러나고야 만다, 는 격언이 생겨났고 우리 일상에서 정치인들이나 재벌 그리고 공무원의 은폐 공작과 정보 조작 등의 사례에서 자주 들어왔습니다. 물론 교회의 비리와 잘못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떻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나요. 언젠가는 그 진실은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지금 숨은 행적도 장차 하느님의 심판 때에는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물론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다 알려지기에는 시기상조이고 적절치 않아서 많은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지만 결국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드러나고야 만다는 뜻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때, 조급하지 말고 오히려 꿋꿋이 복음을 힘차게 선포하도록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10,26-27;루12,2-3)
세상의 빛이요 등불인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은 감추거나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있어야 할 가장 적합한 자리에서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의 등불인 주님의 빛은 훤히 더 발광發光하리라 봅니다. 결국 세상의 등불인 주님은 바로 우리 자신이 가장 적합한 삶의 자리에 앉아 그에 걸맞은 충실한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진리는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
아울러 예전 ‘이어령’ 교수는 당신의 한 에세이에서 영어 단어 niche(=적합한 지위, 장소. 꼭 맞은 자리나 역할)를 예를 들면서, 바다의 물고기들도 하물며 자신에 가장 적합한 수심, 자리에서 생활한다고 말하면서 무릇 참된 인간이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가장 적합한 niche를 알고 찾을 때 인생의 충만한 삶을 꽃피울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등불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제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자리가 가장 적합한 자리, 곧 得位하고, niche한 자리인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봅니다. “주님, 지금 제가 지금 여기 머물러 있는 이 자리가 저의 꽃자리임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씨 부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말씀을 들은 자에 대한 지시사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항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16)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그릇’은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그러니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사실 '말씀'은 숨겨 덮어지지도 감추어 가려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마태 5,14)처럼 감추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집안을 가장 잘 비출 수 있는 곳에 거룩한 교회인 '등경'을 올려놓고, 말씀인 '등불'을 켜서 밝혀두어야 할 일입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온 집 안과 집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비추어 밝혀줄 것입니다.
그 빛은 우리의 뼈와 살을 가르고, 우리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7)
그렇습니다.
이토록 ‘말씀’은 빛이 되어 세상과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그렇습니다.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듣는지’가 중요합니다.
율법학자가 “스승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라고 되물었던 것처럼, ‘무엇을 들었는가?’ 못지않게 ‘그것을 어떻게 들었는가?’, ‘무엇을 보았는지’ 못지않게 본 ‘그것을 어떻게 보았는가?’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곧 ‘믿음과 사랑으로 희망하여 들었는지’가 ‘문자적 의미’를 넘어 ‘영성적 의미’에 따라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들은 바를 믿고, 믿는 바를 실천함으로써 실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루카 8,18)이라는 말씀을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아무도 등불을 켜서 ~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루카 8,16)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가두어 두거나 제 발 아래에 두지 않게 하소서.
제 한량한 능력으로 당신 말씀의 권능을 덮지 않게 하소서.
아무 것도 당신 말씀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시고, 말씀의 빛으로 살고, 빛에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진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사셨습니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았습니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16)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하나하나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시지만, 어느 날, 어느 환경, 어느 민족에서, 그 시대 그 상황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 때, 어느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해 활동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요 손길이 됩니다. 등불이 세상을 비추기 위해 밝혀지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봉헌하여, 우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빛이며 바르게 살아가자.<루카8/16-18>9/2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늘에 높이든 태양은 온천지를 밝혀 어둠이 살아지게 한다. 빛으로 살려는 사람은 높이 오르고 빛을 보고 빛으로 살게 하여야 합니다. 온 천지가 어두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살다가 태양이 높이 오를수록 온 처지를 보며 분별력 이해력으로 세상을 바로 살게 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강단에 서야 되지 강단 밑에서 멀하지 않습니다. 다른이 앞에 서려먼 단정하고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듯이 빛이 빛의 역할을 하려는 사람은 진실하고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거짖과 가면과 악의를 가지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은 등불은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은 정의와 진실과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남 앞에 서야 합니다.
세상에 머리를 들고 빛으로 사는 사람이나 빛으로 살려는 사람은 자기자신을 언제나 돌보고 내가 서있는 곳이 땅 밑인가 땅위인가를 인식하고 빛이 빛으로 빛이는 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부터 우리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부산에 피정을 가게 되어 자신이 참 빛으로 살고 있는 지 스스로를 살피려 갑니다.
피정을 바로 하여 빛이 되려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 만나서 영광의 빛을 발하였듯이 참 주님을 피정 시간 만나야 합니다.
아무리 좋릉 말을 들어도 주님을 만나서 깊은 깨우침 없으면
들어갈 때같은 모양이면 피정의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오래전에 피정하면서 주님 얼굴 보여주시라고 청하며 피정에 들어가 주님 저에게 모든 것 버려야 한나고 하여 피정 중에 담배 끊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피정으로 감사의 눈물을 흐리며 수도원 떠나려 하다가 머물러 살게되었습니다.
빛의 근원이신 주님 뵈옵고 주님과 함께 빛으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피정의 효과입니다. 주님은 현성용 때 당신 자신뿐 아니라 모세 엘리야 함께 모습을 변화시킨 이유는 우리도 빛이 되어 등경위에 올려놓고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도록 빛이 되라는 말씀이며 빛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밤에 빛이지만 장애물인 지구가 가로막으면 빛을 반사하지 못하듯 주님과 함게 있어도 장애물인 권력욕 물욕 명예욕에 가려 빛이 빛이지 못하게 됩니다,
아무리 등경위에 빛이 있어도 세상일에 마음 빼앗기면 어둠 비치는 빛이 되지 못합니다. 가리게 제거하고 장애물 없이 주님과 함께 빛의 역활을 하도록 기도합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천주교 신자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부담스러워 하시는 게 바로 ‘전교’입니다. 그냥 내가 원할 때 미사참례만 하고 오고 싶은데, 마음이 힘들 때 성당 나가서 조용히 기도만 하고 싶은데, 왜 내가 굳이 어색함과 민망함을 무릅쓰고, 수고와 희생까지 감수해가며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가는 겁니다. 게다가 ‘열 처녀의 비유’에 따르면 신앙의 등불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사랑’이라는 기름은 각자가 노력하여 마련하는 것이고 남한테 빌려줄 수도 없다는데, 다른 사람을 믿음으로 이끌어도 그가 그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를 위해 애쓴 나의 노력이 ‘말짱 도루묵’이 되는게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복음적 삶으로 또한 사랑과 선행의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표현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그런 ‘척’하는 위선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된 것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구원받든 말든 상관 없이 혼자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남들이 평화를 누리든 말든 상관 없이 내 마음만 평온하면 그만인 사람은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열매인 기쁨과 행복은 우리의 손과 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며 간직한 것을 실행함으로써 비로소 그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그저 ‘듣기 좋은 말씀’으로 마음 속에만 간직하고 있으면 그 말씀은 물을 주지 않은 화초처럼 말라서 시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고 깨닫게 하시어 우리 마음에 붙여주신 신앙의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 다른 이들이 그 빛을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로, 손해보기 싫다는 이유로 신앙의 등불을 감춰두려고 하면, 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삶과 행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그 신앙의 등불은 컵 속의 성냥처럼 금새 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등불에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기쁨과 보람이라는 산소를 공급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나태함과 게으름, 허무함과 무미건조함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밝은 빛으로 타오를 수 있고, 그 빛으로 우리는 근심과 걱정, 혼란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구원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만저 빼앗기는’ 삶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신앙의 기쁨을 제대로 누려본 사람은 그 좋은 기억으로 사랑을 더 많이 더 자주 실천할 수 있게 되고 그만큼 그가 신앙생활을 통해 누리는 기쁨 또한 커집니다. 반면 상처받기 싫어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 사랑의 실천을 주저하는 사람은 신앙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에 사랑의 실천에 점점 더 소극적이게 되고 그의 신앙생활엔 허무함과 부담감만 남지요. 그러니 더 이상 나의 신앙을 이기심과 게으름의 그릇으로 덮으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려워도 행동과 삶으로 하느님께 대한 나의 믿음과 사랑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헤아려 듣기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가진 것이 없는 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지어 자신의 창고를 가득 채웠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은 자신의 창고가 가득 찼기에 든든하고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농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겨울을 맞이하였습니다. 막상 겨울을 나고 보니 창고의 수확물로는 한 해 겨울을 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충분히 소유하고 있다는 환상으로부터 깨어났을 때는 다음 농사를 시작할 기회마저 사라져버린 상태였습니다. 이 일화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봅니다. 우리는 미사에 빠지지 않거나, 고해성사를 볼 만큼의 죄를 짓지 않은 경우에 자신이 이미 충분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확신하곤 합니다. 하지만 농부가 겨울을 나듯이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거치게 되면, 자신의 신앙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 자체를 잃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내면에 영적 창고를 제대로 채우는 것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간직하고 인내로써 열매를 맺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루카 8,11-15 참조). 이러한 과정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과의 친교로 우리의 영적 창고를 풍성히 채워가면 좋겠습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으로
얻은
십자가이며
하느님
사랑에 빚진
사랑의
등불입니다.
십자가가
멈추면
기적의 빛도
자연스레
멈추게 됩니다.
십자가가
만들어내는
삶의 신비입니다.
십자가의 시간을
어루만져
주는 것은
십자가의
상처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저마다의
십자가가
단단한
축복이라는
것을 압니다.
십자가를 지고
우리는 어디까지
왔습니까.
십자가의 시간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는
구원의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를 감추지
않으십니다.
이렇듯
십자가의 상처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마음을 보여주는
고해실에서
많은 이들을
하느님께로 이끈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입니다.
함께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상처받은 이들을
보살피고
도와주었습니다.
버릴 수 없는
십자가의
상처입니다.
십자가에서
등불이 되고
은총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치유의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십자가가 있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기에
치유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후회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당연히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책을 많이 읽고, 많이 배우면 될까요?
많이 배워서 학벌도 좋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책도 열심히 읽으면서 자신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지혜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을 피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사건건 간섭하는 그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두릅니다. 그 누구도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국 속담에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말하는 순간에 밀려드는 후회를 경험한 적이 없습니까? 그러나 들어주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존경을 표시하며, 그를 향한 굳은 믿음을 갖습니다. 그만큼 들어주는 것이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더 많이 듣는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는 데에 집중하면 할수록 나의 지혜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에 맞춰 살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나요? 혹시 자기 말만 열심히 하면서, 자기 말이 마치 하느님의 말인 것과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도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열심히 실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라고 하시지요. 등불은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두면 제 기능을 다할 수 없습니다. 꺼져버리거나, 밝은 빛을 세상에 드러낼 수 없겠지요. 만약 이런 사람은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등불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는 것처럼 감춰지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에 환하게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할은 주님께서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떠했나요? 율법을 잘 아는 그들이었기에 주님을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 말씀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을 환히 드러내기 위한 노력은 무엇인가요?
우리를 우리가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성취다(랠프 윌스 에머슨).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비춰져야 할 큰 빛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상습 피로와 열두 서너 가지 고민꺼리들, 누적된 스트레스로 가득 했던 어느 날 새벽,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적합한 형용사를 떠올려보니 여러 가지였습니다. ‘게슴츠레’ ‘우중충’ ‘누리끼리’ ‘꼬질꼬질’ ‘흐리멍텅’...
부랴부랴 세면을 하고 한 수녀원 새벽 미사를 드리다가 한 A급 애기 수녀님의 얼굴을 봤는데, 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초롱초롱’, ‘샤방샤방’, ‘생기발랄’ ‘총기 충만’한 얼굴로 미사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하는지 잘 가르치고 계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복음 8장 16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등경 위에 놓인 등불 같은 삶이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짙은 암흑 속에 빛이 되어주는 사람, 심연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 끝도 없는 고통 속에서도 환하게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 병고 속에서도 빛이 나는 사람...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 밝고 화사해야 마땅한데, 참으로 어둠이 짙습니다. 암담하고 팍팍합니다.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는 점점 줄어듭니다. 표정들은 마치 좀비들처럼 퀭하고 음산합니다. 순간순간 셀 수도 없이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사고들은 우리를 더욱 울적하게 만듭니다.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우리 봉헌생활자들이 빛나는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야겠습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렬한 생명의 광채를 반사하는 거울이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 영혼의 등불에 성령의 심지로 불을 밝혀야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분의 가르침으로 인해 어떤 소중한 깨달음이나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만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꽁꽁 숨겨 둬서도 안됩니다. 그 소중한 은총을 동료 인간들, 그리고 세상과 나누고 공유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서 선물로 주신 복음,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자신 안에 붙들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 만민 모두가 아무런 차별없이 골고루 혜택을 받도록 그분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파해야 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비밀리에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에서, 광장에서, 공개석상에서, 공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분 가르침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종래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판이하게 신선했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 가운데서도 최측근 제자들과 아주 소수의 특정인들만 그분의 말씀을 이해했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복음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비춰져야 할 큰 빛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는 ‘공번되다.’ ‘보편적이다.’ ‘두루두루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는 열린 교회입니다. 너그럽고 관대한 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끼리, 마음에 드는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비밀리에 운영되는 공동체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거나 파벌을 형성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 현존의 구체적인 표지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증거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불림을 받은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 자신들에게 큰 영예고 은총이지만, 그것을 자신들 안에 가둬두고 자신들의 영광으로만 돌린다면, 큰 죄악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값진 보물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은 인류를 위해 사용하라고 맡겨놓은 보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은 공동체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등불 같은 존재여야 마땅합니다. 활활 타올라야 하고, 동료 인간들의 어두운 삶을 환히 비춰줘야 합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꽃동네 수녀회에서 주관하는 피정에 다녀왔습니다. 동창모임을 다녀온 날이었습니다. 여행의 피로가 있었지만 고백성사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피정에 참석한 분들은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깊은 성찰이 있었고, 하느님 앞에 참회의 눈물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그분들의 이야기만 들어드렸습니다. 샘이 깊은 물은 쉽게 마르지 않듯이, 고백성사의 은총도 더 깊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사를 보고 돌아가는 뒷모습이 모두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저는 피정에 참석한 분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밀림이 울창한 것은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입니다. 사막이 메마른 것은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울창한 밀림은 충분한 물을 담고 있고, 그늘이 있기에 햇빛에도 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메마른 사막은 물이 고일 수 없고, 그늘이 없기에 뜨거운 햇빛에 이슬마저 말라버립니다.
피정에 참석한 분들은 다음 피정에도 참석하기 마련입니다. 피정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약속이 있었어도 피정이 있으면 약속을 포기하고라도 피정에 참석합니다. 그러나 피정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피정이 있어도 참석하지 않기 마련입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피곤하고, 다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물이 없는 사막에 비가 내리지 않듯이 영적인 갈망이 없는 사람은 더욱더 메말라 가기 마련입니다.
20년 넘게 매일 새벽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참모임에서도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기도 했지만 새벽에 일어나는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새벽은 고요하기 마련입니다. 새벽에는 연락이 오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온전히 저만의 시간과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기쁨입니다. 목사님들이 새벽 예배를 하는 것을 보면서 힘들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스님들의 새벽 예불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힘들 수 있겠지만 새벽 예배와 새벽 예불은 지혜의 길이요, 깨달음의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신문에 늘 후원금을 보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누십니다. 그분들은 나눔의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다고 합니다. 내 몸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낸다면, 내 몸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늘 하느님의 은총 속에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 따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
일어나라 하셨으니
일어나는 이는
더욱 힘차게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 이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비추라 하셨으니
비추는 이는
더욱 밝게 비추고
비추지 않는 이는
끝내 비추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외치라 하셨으니
외치는 이는
더욱 크게 외치고
외치지 않는 이는
끝내 외치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하는 이는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 이는
끝내 사랑하지 못하리라
하느님 다 아시잖아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빛을 받아 빛을 반사하니 밫이 방 안 가득하다. 구실을 제대로 하고 살 때 그러하다. 등불을 밝히니 드디어 죽었던 물건의 입체감이 살아난다. 만일 빛 반사도구가 제 구실을 못하면 쓸모가 없어 내다 버린다.
누가 보던지 안 보던지 언제나 묵묵히 그 자리에서 제 구실을 하다가 떠나면 된다. 그때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 들려줄 말이 한 마디 있다. '하느님, 다 아시잖아요' 우리의 속까지 들여다 보시는 하느님께서 '잘 했다' 하시며 더 큰 상급을 마련해 주실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8,18)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아주 시골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부분의 도시에는 밤길을 비춰주는 가로등(街路燈, street light)이 있습니다. 요즘의 가로등은 빛에 민감한 광전지를 이용하여 어둑해 질 무렵 자동으로 점등되고 날이 밝게 되면 자동으로 소등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이 가로등의 고마움에 대해서는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아마도 깜깜한 시골의 밤길을 걸어갈 때야 비로소 그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 가로등과도 같은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치 요즘 가로등이 태양에너지를 받아 점등이 되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빛을 받음으로서 그 빛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가로등이 어둠 속에 빛을 전하듯이 어둠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웃들에게 밝은 빛과 같은 사랑과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어느 누구도 그 고마움을 알아주지 않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에 기뻐하시고 마치 가로등의 광전지가 충전이 되듯이 우리는 또다시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가로등과도 같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전되어 세상에 빛을 전하는 고귀한 시간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인생비법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등불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밑에 놓는다면 치매라고 생각합니다.
하늘보물 가진 자는 더 받고 세상보물 가진 자는 빼앗긴다는 말씀이,
정말 의미 있는 설명이라서 예수님의 멋진 표현에 감탄 절로 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인생비법의 길인 주님의 기도가 돋보여 집니다.
주님의기도 배경인 구약의 십계명도 확실한 조명 받았다고 느낍니다.
우리의 인생 길 확실하게 제시하신 점에 굳은 신념 갖고 믿겠습니다.
하늘앞에 숨기지 못하고 죽어 가진 것 처리 못하는 신세 되지맙시다.
등불 같은 하늘의 작은 진리나 하늘이 내려준 작은 재산 살려봅시다.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말씀은 등블에 대한 비유입니다. 등불은 빛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빛은 말씀으로 볼 수 있지요, 말씀을 통해서 숨겨진 것이 드러나고 말씀을 통해서 감추어진 것이 알려지는 것입니다. 시편에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오직 말씀이 빛이고 그 빛을 통해서만 우리의 길이 보인다는 것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빛은 어둠을 무너뜨리고 많은 곳을 비춥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빛을 통해서 빛이 되어야 하지요. 그럼으로 해서 말씀의 빛이 더 넓은 곳까지 비추어질 것입니다. 빛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은 없습니다. 드러내지 않는 이들은 어둠을 좋아하는 이들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복음 내용은 아주 짧은 내용입니다. 하지만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그 말씀을 통해서 내 안에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기쁨의 삶을 살 것임을 우리는 믿어야 하지요. 이렇게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큰 축복을 주셔서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사실 상식적으로 등불을 감추는 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감추는 이들도 있으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등불을 감추는 이들은 누구겠습니까. 믿음을 드러내지 않고 전하지 않는 이들,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는 자들이 바로 등불을 가리는 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다. 바로 이들이 가진 것 마저 빼앗길 이들임을 우리는 잊지 말고 자신은 등불을 드러내는 이인지 아니면 감추는 이인지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아멘!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16절). 어두움을 밝히고 다치거나 헤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거기에서 제 역할을 하여야 한다. 등불의 존재 이유는 방에 들어오는 사람을 비추어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데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두움을 밝혀주는 그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구원의 빛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삶의 빛을 비춰주는 등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 앞에 나의 믿음의 등불을 가리거나 덮어두어서는 안 되고 다른 이들의 삶의 길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또한 거룩한 교회를 “등경”이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비추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운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그러나 이 삶이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없는 집안에 어느 누가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삶을 보여주자면, 시련과 고통이 따르게 되고 인간적인 정마저 금이 갈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을 수용하기 힘든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전도시켜야 하는, 그리고 새로이 모든 것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방어적인 본능이 인간에게는 일반적인 것 같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이 진정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느끼며,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삶이 자유와 구원을 체험하게 해주는 삶임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올려놓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작은 등불이 되는 것이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8절)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들은 계속 더 큰 하느님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지 않으면 그 말씀의 중요성도 모르고 그러한 말씀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말씀을 잃어버려도 잃어버린 줄도 모른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 되어야 한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어둠이 가장 깊은 성 토요일
빛의 예식 때 신자들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
주인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종들처럼(루카 12,35)
손에 등불을 밝히며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빛을 전하며 담고 있는 등불은
빛 자체이신 그분을 마음에 새기며
일상 안에 기억하고 바라보게 하였지요.
세례자 요한도 빛 자체이신 분을 증언하며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요한 5,33)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
그 등불이 바로 빛을 전하는 도구이자
일상 안에서 당신을 따르는 좋은 도구였음을 생각해 봅니다.
기억과 새김
등불과 같이 살아갈 수 있는 한주간을 청해 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For there is nothing hidden that will not become visible
사랑의 등불
차동욱 시몬 신부님
빛은 밝히는 데 쓰여야 합니다. 새어 나올까 급급하며 숨기는 것이 아니지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세상에 밝힌 하느님 사랑의 등불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삶을 주셨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된 순간 우리 가슴에 등불이 켜졌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속성이 우리의 결심과 실천에 따라 세상 밖으로 등불이 되어 나가도록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니라고들 합니다. 내 본성은 늘 이기적이고 유혹에 쉽게 넘어가며 예수님을 따르기에 부족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본성은 잘 떨어져 나가지도 않는 끈질긴 것이라 내가 나아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 심으신 당신의 본성이 강할까요? 우리 인간의 본성이 강할까요? 우리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우리의 본성은 결코 하느님의 속성인 사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숨겨진 것 같지만 감추어진 것 같지만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본성과 사랑은 실재합니다. 그러니 그 사랑이 나의 본성을 지배하도록 놓아 두십시오. 그래서 사랑의 등불이 밝게 그리고 뜨겁게 퍼져 나가도록 하십시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이를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분에 넘치도록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나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 단언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실제로 얼마만큼 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받은 것이 많다고 여기는 이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되고, 감사드리는 만큼 더 많이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것을 받아도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헤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받은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감사할 줄도 모르게 됩니다. 실제로 무엇을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주어져도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많이 받아서 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받은 만큼 형제자매들과 나눔으로써, 넘치도록 많은 은총을 중단없이 받도록 합시다.
빛이 비치는 곳에 길이 있다. <루카 8, 16-18> 9월 19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어두운 밤길을 가는 나그네는 멀리 빛을 보고 빛을 향해 길을 찾아서 안식처를 찾아갑니다.
오늘 등불을 등경 위에 올려놓아 빛을 보고 들어오게 한다고 하십니다. 빛은 불빛만이 아닙니다. 거룩함, 아름다움, 진실과 사랑, 선하심, 희망입니다.
벌이 꽃을 보고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꽃 속의 달콤한 꿀 냄새를 맡고 모여듭니다. 관광지를 찾아가는 사람은 보기 좋고 볼거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갑니다.
성지순례를 떠나 길을 찾아 먼 길을 한 달 이상 힘들게 가는 사람은 거룩함이 있어 거룩하게 되려고 길을 찾아 힘든 성지순례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찾아가는 것도 명성과 만나 볼 일이 있어 찾아갑니다. 이 모든 것을 빛을 등경 위에 올려놓는 것과 같습니다. 요사이 빛을 잃고 성당에 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빛이 있어야 합니다.
서양의 어느 성당 주임 신부님이 신자들을 아무리 기다려도 개미 한 마리도 오지 않아 기도하면서 기다렸지만, 오지 않아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니 음악이 있는 놀이터 카바레에 모이는 것을 보고 성당에 돌아와 스피커를 하나 성당 밖에 달고 노래를 틀고 들려주니 지나가는 사람이 “이게 웬일인가? 성당에서 노래가 나오는가?” 하며 호기심에 성당에 왔다가 그때부터 성당에 사람이 모여들어 성당에 꽉 찼다고 합니다.
얼마 전 평화 방송에 트로트 곡에 성가 가사를 부쳐 미사곡을 하면서 어깨춤을 추는 모습을 봤습니다. 음악을 전공하고 성가 지도를 하시는 음악가에게 고상한 곡에 맞추어 미사곡만 부르지 말고 트로트에 맞추어 성가를 부르면 어떤지 한번 젊은이들을 위해 해볼 만하다고 권해보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현대적 의미의 빛을 비추지 못하여 모두가 길을 잃고 성당에 오지 못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에 의해 비치는 빛 중에 가장 필요한 빛은 성령의 빛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빛이 되어 말씀과 업적을 남기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 승천하셔도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서야 주님을 믿고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성령의 빛을 강하게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의 빛을 충만히 받고 충만한 믿음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빛을 받아 빛으로 살아갑시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연의 변화는
삶의 변화를
성찰하게 한다.
핑계와
실행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말씀의 힘은
실행의 힘으로
드러난다.
실행하지 않는
이의 말은
힘이 없다.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하고
믿는 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의 실행이
곧 복음을
지켜가는
올바른
삶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절이 아닌
더 넓고 깊은
관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일상적인 삶에서
만나게되는
관계의 선물이다.
가장 귀한 것은
마음에 품은
복음을 우리가
제대로
실행하는 기쁨이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지 않으면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다.
일상의 신앙이
바로 복음의
참된 실행이다.
실행은
거창하지
않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실행이다.
말씀과 함께하는
곳에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
늘 함께 한다.
인간 관계의
모든 문제는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서는
실행 없이는
해결점을
찾을 수 없다.
하느님 중심의
살이란 말씀을
일으키는 믿음의
삶이다.
마음과
실행 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말씀의 관계이다.
오늘도
아는 것을
실행하고
믿는 것을
기쁘게
실천한다.
건강한 관계는
곧 건강한
믿음이다.
제가 자주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인천 시내를 나갈 일이 있을 때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지요. 그런데 지난 한가위 연휴 때였습니다. 신부님들 모임이 저녁 6시에 있었기 때문에, 작업을 하다가 오후 4시가 안 되어서 성지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큰 일 났다 싶었습니다. 평소에는 1시간이면 충분히 갈 거리가 명절 연휴로 인한 정체가 너무나 심했던 것이지요. 왜 이렇게 차가 많은지, 또한 계속해서 자기 앞으로 다른 차가 끼어들기를 할 수 있도록 양보하는 앞 차에 대한 불만도 커졌습니다. 명절이기 때문에 막힐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저의 정신없음 역시 불만의 대상이었습니다.
차를 운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정적인 생각들이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신부님들과의 약속 자체도 깨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제까지 이 길을 그렇게 많이 다니면서 이렇게 길이 막혔던 적은 이번 딱 한 번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딱 한 번 길이 막혀서 운전을 오래하고 있을 뿐인데 뭐 이렇게 불평불만이 많은가 라는 마음을 먹으니 그런 생각을 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뿐입니다.
하긴 어떤 분이 자기가 지나가려고 할 때면 매번 신호가 바뀌어서 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신호체계를 잘못 만든 것이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실제로는 절반 이상을 파란 불을 만나서 그냥 통과하게 된다고 합니다. 많이 신호에 걸려서 차를 세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냥 통과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지요. 바로 부정적인 마음이 잘못된 판단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마음을 바꾸며 살아가는 삶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부정적인 마음,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모두 걷어내었을 때, 분명히 기쁨과 행복이 나와 함께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연하지요. 등불은 주위를 밝게 비추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는다면 가장 어리석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이 등불의 역할을 합니다. 세상을 밝게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우리 모두가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 각자가 갖는 부정적인 마음들, 그리고 욕심과 이기심 등이 주님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퍼지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님께 더 큰 관심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세상 곳곳에 퍼져나갈 것이고, 그로인해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신은 우리에게 다양한 마음을 선물했지만 공존해야 할 단 하나의 세상을 주었다. 서로의 공통점을 축복하고 서로의 차이점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조나단 삭스).
감사합니다.
내일 있을 순교자 현양 대회 준비로 며칠을 계속해서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미사 중에 순례를 오신 순례자들에게 이러한 말씀으로 부탁을 드렸지요.
“요즘에 순교자 현양 대회 준비 때문에 정말로 정신이 없습니다. 이 현양 대회가 잘 진행되고 참석한 모든 이들이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어제는 특히 바빴습니다. 제단 설치와 미사 때 뜨거운 태양을 막을 그늘막을 설치하느라 미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행사장에 있었지요. 그리고 오후 미사 시간 전에 사무실을 들어갔는데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글쎄 어떤 형제님께서 전날 미사 때 기도해달라는 저의 말을 듣고는 아침 일찍 성지에 오셔서 구석구석을 청소, 정리정돈, 그리고 수리까지 하신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점심도 드시지 않고 하루 종일 성지에서 혼자서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직원이 이름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라고 하시면서 말없이 일하시다가 저녁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너무나 큰 감동이었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교회가 더욱 더 발전하고 주님의 뜻이 세상 끝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내 자신을 알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알아주는 것보다 주님께서 알아주시는 삶을 사는 것이 더 멋진 모습이 아닐까요?
하루 종일 봉사해주신 형제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인의 얼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상습 피로와 열두 서너 가지 고민꺼리들, 누적된 스트레스로 가득 했던 어느 날 새벽,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적합한 형용사를 떠올려보니 여러 가지였습니다. ‘게슴츠레’ ‘우중충’ ‘누리끼리’ ‘꼬질꼬질’ ‘흐리멍텅’...
부랴부랴 세면을 하고 한 수녀원 새벽 미사를 드리다가 한 A급 애기 수녀님의 얼굴을 봤는데, 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초롱초롱’, ‘샤방샤방’, ‘생기발랄’ ‘총기 충만’한 얼굴로 미사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하는지 잘 가르치고 계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복음 8장 16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등경 위에 놓인 등불 같은 삶이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짙은 암흑 속에 빛이 되어주는 사람, 심연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 끝도 없는 고통 속에서도 환하게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 병고 속에서도 빛이 나는 사람...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 밝고 화사해야 마땅한데, 참으로 어둠이 짙습니다. 암담하고 팍팍합니다.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는 점점 줄어듭니다. 표정들은 마치 좀비들처럼 퀭하고 음산합니다. 순간순간 셀 수도 없이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사고들은 우리를 더욱 울적하게 만듭니다.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우리 봉헌생활자들이 빛나는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야겠습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렬한 생명의 광채를 반사하는 거울이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 영혼의 등불에 성령의 심지로 불을 밝혀야겠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동적 공격의 명수들입니다. 차라리 힘들면 힘들다고, 괴로우면 괴롭다고 표현하면 좋겠습니다만 용기 부족으로 그러지를 못합니다. 대신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알아?”라는 내면의 메시지를 자신의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닙니다. “내가 지금 지고 있는 십자가 무게가 얼마나 큰 지 알기나 해?”라고 말하지 않고 엉뚱한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최근 가톨릭교회 종사자들의 딱딱함과 불친절에 크게 진노하신 적이 있습니다. 울적하고 어두운 얼굴로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 복음이 제대로 전달이나 되겠습니까? 심각하고 울적한 얼굴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누가 그 사랑과 자비를 믿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표정 관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가장 괴롭고 울적한 표정 짓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나보다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하는 얼굴로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신 더 자주 미소를 지어야겠습니다. 더 자주 화사하게 웃어야겠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지하 골방에서 웅크려있지 말고 밝은 세상 밖으로 나와 외쳐야겠습니다.
“저를 한번 보십시오. 제가 곧 제2의 그리스도,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제 얼굴을 들여다보십시오. 제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 삶을 한번 보십시오. 제 삶이 곧 살아있는 복음입니다.”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신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차피 난 혼자였지, 아무도 없어, 다 의미 없어, 사탕 발린 위로 따윈 집어 쳐, 오늘 밤은 삐딱하게.
내 심심풀이 화풀이 상대는 다른 연인들, 괜히 시비 걸어 동네 양아치처럼, 가끔 난 삐딱하게 다리를 일부러 절어, ... 너 하나 믿고 마냥 행복했었던 내가 결국엔,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이유도 없어, 진심이 없어, 사랑 같은 소리 따윈 집어 쳐, 오늘 밤은 삐딱하게, 내버려 둬,
어차피 난 혼자였지, 아무도 없어, 다 의미 없어, 사탕 발린 위로 따윈 집어 쳐, 오늘 밤은 삐딱하게.
지드레곤이란 유명한 대중가수의 ‘삐딱하게’란 노래 제목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하신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다 비뚤어진다는 의미를 잘 담고 있는 가사 같아서 적어 보았습니다. 우리도 하던 일이 잘 안 되고 누군가로부터 배신당했을 때 망가져버리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그런 심정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런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신다니 큰일입니다. 비뚤어진 자는 그렇게 살면 나에게 더 손해이고 더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굳이 선택해서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일상에서 이런 경험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창옥 강사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손목을 다쳤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가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약을 져 주고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그런 불친절한 의사가 준 처방대로 지은 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달 넘게 고통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운동을 하지 못하니 식욕도 없고 살이 빠지며 짜증도 많이 났다고 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그 병원을 찾았는데 여전히 같은 의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불친절하게 약을 지어 주었습니다. 물리치료 한 시간을 받는데 물리치료사는 자신에게 매우 친절하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약 한 번 먹었더니 80%의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물리치료 한 시간, 약 한 번 먹었으면 되는 것을 나는 왜 그것을 하지 않고 몇 달 동안 고생만 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마음이 삐딱했기 때문입니다. 병원은 의사의 성격을 판단하는 곳이 아니라 나의 병을 낫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것만 해결되면 되는데 사람까지 판단하다보니 고통을 알고도 참아야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누가 화살을 쏘았으면 그 화살을 뽑을 생각은 안 하고 누가 쐈는지 먼저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줄 알면서도 굳이 용서를 하지 않고 고통 받으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눈에 흙이 들어가는 고통도 겪어 낼 테니 미워하게만 해 달라는 듯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삐딱한 삶입니다.
따라서 오늘 독서 잠언 말씀에서는 마음이 삐딱한 이들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행복한데 그것을 알면서도 고통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아,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 이웃이 네 곁에서 안심하고 사는데, 그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마라. 너에게 악을 끼치지 않았으면, 어떤 사람하고도 공연히 다투지 마라.”
이 말씀 바로 뒤에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하신다.”라고 하시고 또 “주님께서는 악인의 집에 저주를 내리시고, 의인이 사는 곳에는 복을 내리신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비뚤어진 악인은 이웃 사랑이 행복임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빈정대는 자들”이지만 주님께서도 그들에게 “빈정대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알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비뚤어진 사람이 아니라 올곧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역설을 사는 행복한 사람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하느님 나라의 영적 원리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역설적인 삶의 자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가진 자’는 누구이며, ‘가진 것이 없는 자’는 누구일까요?
‘가진 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하늘 나라의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의 지식이란 이성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체험적 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앎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진 자’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지닌 자요, 말씀의 진리를 삶의 실천으로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더욱 온전한 지식을 얻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가진 자’는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느님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전부가 되는 사람이기에 정녕 ‘하느님 외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현세의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애착으로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진정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는 ‘가진 것이 없는 가련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적 이치를 따르는 ‘가진 자’는 듣는 자세도 다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되새기며 실천하는 '가진 자'는 더욱 더 깊은 영적인 통찰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진 자’는 빛(요한 1,9; 8,12)이요 등불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고(8,16),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에게 굴하지 않고 드러나게 활약하시겠다는 결의를 나타내셨던 예수님처럼 행동과 말로 선포합니다.
누구든 말씀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춤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잠언은 그 길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곧, 선행을 거절하지 말고,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며, 이웃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말며, 이웃과 다투지 않으며 포악한 사람의 길을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3,27-31)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닌 믿음과 사랑과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세 등이 자신의 힘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실한 청지기의 비유(루카 19,11-27)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런 축복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은총과 은사의 선물들을 충실히 관리하고 주님의 뜻대로 활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세의 것들은 지니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현세의 모든 것들은 모든 선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의 의식과 지향입니다. 현세의 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 되돌리고 이웃과 나누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소유는 영원하지 않아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으니 즉시 나누고 선을 위해 활용해야 하는 것이지요.
잠시 멈춰, 세상의 것들을 많이 소유하지만 주님의 사랑과 영의 가난, 믿음과 말씀을 경청하고 선을 실행하지 못한 채, 가진 것마저 빼앗기며 살아가는 가련한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맑게 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추석 연휴가 끝났습니다. 조카가 삼촌 신부에게 용돈을 주었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태어났으니 조카도 나이가 제법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즐거워하는 조카를 보았습니다. 어릴 때는 용돈을 받았습니다. 한참 일을 하면서부터 어르신들에게 용돈을 드렸습니다. 이제 저도 용돈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시간이 흐른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추석날 아침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밥이 되지 않았습니다. 밥통의 전원을 눌러야 하는데, 깜빡했던 것 같습니다. 가는 길이 멀어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밥을 하려면 40분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 ‘햇반’을 먹곤 했습니다. 햇반을 먹자고 제안을 했고, 조카는 곧 햇반을 사왔습니다. 자칫 우울할 뻔 했던 추석아침이 ‘햇반’으로 밝아졌습니다. 하긴 추석은 햇곡식을 먹는 날이니 ‘햇반’을 먹는 것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핀란드의 끝없는 도전’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북유럽의 작은 국가인 핀란드가 국가경쟁력을 갖는 이유는 ‘교육제도’라고 합니다. 핀란드 교육의 핵심은 선택과 경쟁이 아니라 평등과 협력이라고 합니다. 교사들의 자율과 전문성을 키워주고, 학생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정부는 일관된 정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으며,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꿈을 대신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자녀들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응원을 한다고 합니다. 핀란드에서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직업은 ‘교사’라고 합니다. 그만큼 교사들의 자부심이 크고,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핀란드에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등불과 같습니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나침판과 같습니다.
내비게이션과 스마트 폰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생활을 편하게 해 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내비게이션을 작동하면 과속 방지턱도 알려주고, 과속 단속구간도 알려주고, 막히지 않는 길로 가도록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스마트 폰은 많은 보물이 있는 창고와 같습니다. 많은 애플리케이션들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줍니다. 저도 일기예보, 지하철 노선, 버스 노선, 신문과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자주 이용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등경 위의 등불과 같은 신앙인으로 이끌어 줄까요?
어릴 때 읽었던 ‘햇님과 바람’의 이야기가 하나의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 햇님은 따뜻함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 있었습니다. 바람은 거센 힘이 있었지만 결국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남에게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대해주고, 진리의 빛을 환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오늘 만나는 이웃들에게 희망의 등불, 사랑의 빛, 믿음의 씨앗을 함께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
지혜로운 현자賢者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부터 제1독서는 구약으로 돌아가 소위 지혜서의 말씀을, 특히 이번 주는 잠언과 집회서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책들은 지혜의 말씀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 말씀은 바빌론 유배이후 유대 지식층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이 책들은 예언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개인들의 행동, 친밀한 관계, 올바른 사고에 대해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최근 읽었던 예언자들의 주요 관심사인 불의에 대한 비난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는 예언자豫言者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자賢者도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밖으로는 예언자, 안으로는 현자의 삶이면 이상적이겠고 이 둘은 경쟁이 아닌 보완관계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잠언의 책은 학식이 많은 교사들에 의해 젊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윤리적, 종교적 가르침의 모음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격언들은 거의 구약 지혜서의 전형적 본보기입니다. 그것은 종교에 기반한 윤리적 금지를 강조하고 이런 삶에 따라오는 상과 벌의 가르침이 주가 됩니다. 그것은 ‘계시revelation’보다는 ‘체험experience’에 호소합니다. 그 가르침은 짧으나 하느님과 관계된 지혜에 대한 중요한 탐구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지혜는 ‘비의적 지식’이 아니라 개인이나 공동체가 이성적으로 책임감있게 받아들여 따라야 할 ‘상식’입니다. 이런 지혜는 책에서 습득된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어렵지 않게 공감하고 동의하게 됩니다. 하여 격언은 명쾌하여 기억하여 전달하기 쉽습니다.
오늘의 잠언 독서는 좋은 이웃에 대한 다섯가지 가르침입니다. 이웃이 참으로 곤궁중에 있다면 언제든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네가 할 수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테니.’하고 말하지 마라. 이웃이 네 곁에서 안심하고 사는데, 그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마라. 포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길은 어떤 것이든 선택하지 마라.”
이렇게 시작되는 모든 구절들이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아주 기본적이고 상식적입니다. 새삼 우리의 영성생활도 이런 건전하고 상식적인 지혜에 기반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여 먼저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이런 상식의 지혜에 기초하지 않은 영성생활은 사상누각, 모래위의 집되기 십중팔구입니다.
무엇보다 폭력의 사람들을 닮지 말아야 합니다. 폭력적 사람들이나 하느님 백성의 적들의 분명해 보이는 번영은 언제나 믿는 사람들의 하느님 신뢰에 위협이 됩니다. 예레미야도 욥도 계속 하느님께 “왜?”하고 물었고 이런 경우는 오늘도 계속됩니다. 그러나 다음 격언이 분명한 교훈입니다.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 하신다. 주님께서는 악인의 집에 저주를 내리시고, 의인이 사는 곳에는 복을 내리신다.”
악인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도덕적 행위는 하느님이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비도덕적 행위를 싫어하십니다. 반면 주님은 위의 올곧은 사람들을 당신 친구로 삼으십니다. 객관적으로 또는 주관적으로 봐도 악한 삶이 부와 물질적 성공, 권력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아도, 실은 하느님과 이웃간의 내적평화나 조화의 소중한 선물은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사실 밖으로 행복해 보이는 성공적 삶을 사는 것 같아도 내적으로 불행한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악인의 성공이나 번영을 결코 부러워하지 말라는 지혜서의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부와 명예, 권력을 지녔어도 그 내면에 평화와 기쁨, 희망이 없다면, 진정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런 소유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지요.
한편 참으로 착한 사람들이 표면상 시련의 연속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느 적대자도 빼앗아갈 수 없는 평화와 힘을 체험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서 올바르게 참되게 살아갈 때의 이런 깊은 내적평화와 힘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도 등불의 비유에서 세가지 이런 잠언의 지혜에 호소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전혀 감춰져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소수의 엘리트에게 맡겨진 신비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붕 위로부터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는 메시지입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된다.”
오늘날의 인터넷이 바로 등경의 등불같은 역할로 세상 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산티아고 순례시, 불암산 산 속 수도원에서 제가 인터넷에 올리는 강론도 세상 수많은 사람이 읽으니 완전히 현대판 기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인 우리 역시 세상 모든 이들이 보도록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작은 등불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자invisible Christian’란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를 지키고 이웃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강한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가능하다 할지라도 이웃에게 믿음을 강요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와서 보고come and see’, 복음을 듣고 개인적 체험을 갖게 함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듣고 동화된 진리는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계속 퍼내야 맑은 샘이 되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하여 나도 살고 너도 ‘살기위하여’ 매일 쓰는 제 강론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의 잠언같은 지혜의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바로 부익부富益富, 빈익비貧益貧의 원리가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는 지점에 도달하여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내적성장과 발전을 뜻합니다. 정지하거나 침체되는 것은 쇠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살아있는 삶이냐 죽어있는 삶이냐 둘중 하나입니다. 하느님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맑은 강물이냐, 혹은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냐 둘 중 하나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믿음은 말씀대로 사는데서 드러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의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가슴에 담고 가슴에 담은 것을 실행함으로써 비로소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생활화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요, 죽은 믿음(야고 2,17)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추구합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사는 것입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합니다”(루카8,16). 당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빛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춰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빛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으로 봉사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만큼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약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 합니다.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영적성장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주님의 은총을 희망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복음의 지식을 생활화 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오히려 지식과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고 또 살지 않으면 이미 받은 믿음의 은총도 시들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8,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수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간수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은총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가지 않습니다”(로마11,29). 다만 내가 잃어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남을 위해 봉사하시기 바랍니다”(1베드4,10).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당신의 보화를 담아 주셨고”(2고린4,7) 당신의 빛을 나를 통해서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부디 우리의 관심사와 모든 행동이 주님을 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려 행동하면 할수록 더 견고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등경 위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행동하는 믿음 안에서 기뻐하는 날들 이루시길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윤성희
숨겨졌다는 것, 감추어졌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감추어진 게 주위를 환히 밝혀줄 ‘등불’이라면 더욱 그렇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등불’이 결코 감추어져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신다. 이런 말씀은 미래가 불투명했던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대단한 힘과 용기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속임수와 거짓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과연 선한 세력이 제 빛을 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적지 않다. 그럴 때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큰 위로가 된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면, 왠지 부담스럽다. 예수께서 등불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말고 등경 위에 올려놓으라 하셨는데, 내 안에 있는 신앙의 등불이 너무나 작고 힘없어 보여 감히 그렇게 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작은 등불을 등경 위에 올려놓으면, 너무 보잘것없다며 남들이 흉이나 보지 않을까, 아니면 너무 약한 나머지 잠시 불어온 바람에 그나마 꺼져버리는 건 아닐까? 이런 걱정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등경 위에 올려놓아야 할 게 반드시 크고 대단한 등불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눈이 시리도록 아픈 자기 어머니의 고귀한 사랑과, 그 사랑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매정함을 「눈길」이라는 소설에 담아 표현했다. 그러고는 어느 수필에서 “부끄러움을 글로 씻으면서 세상살이를 지탱해 왔으며, 「눈길」은 ‘그런 씻김의 한 과정’이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부끄러운 제 등불을 등경에 올려놓음으로써, 나름대로 정화의 체험을 했다는 말이다.
등경 위에 올려둘 것이 영광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부활 사화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신 것은 당신의 권능이나 빛이 아니라, 상처받은 손바닥과 옆구리 아니었던가? 보잘것없어 보이는 우리 마음의 등불을 등경 위에 올려놓으면, 하느님께서 기름을 부으시어 그 빛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숨겨두기만 한다면 그나마 남은 등불도 완전히 잊히고 사라질지 모른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등불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16)."
이 말씀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지 말고, 침상 밑에 놓지도 말고, 등경 위에 놓아서 모든 사람들이 빛을 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의 임무는 등불이 되어서 세상을 밝히고, 다른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감춘다면, 그것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감추는 일이 됩니다.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일을 간단하게 줄여서 표현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인데,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단순히 신자수를 늘리는 일이 아닙니다.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앞장서서 인도하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기 '삶'으로 모범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 말하는 '등불'은 어두운 밤바다의 등대 역할을 하는 등불이고, 복잡한 거리에서 신호등 역할을 하는 등불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7)."
이 말씀은 "숨기지 말고, 감추지도 말고, 드러내고 훤히 나타내라."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하신 등불의 역할을 다시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라는 말씀은, '잘 듣고 잘 실천하여라.'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고' 라는 말은, '등불의 역할을 잘하는 신앙인은 더 많은 은총을 받아서 더 밝은 등불이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는 '등불의 역할을 하지 않는 신앙인은 결국 등불의 임무를 박탈당할 것이다.'인데, 이미 받은 은총도 잃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은총은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열매를 맺어야 그것이 온전히 자기가 받은 은총이 됩니다.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신자답게 살면서 신자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해야 신자라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등불의 비유'에서 '열 처녀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은 모두 똑같이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충분히 여유 있게 기름을 더 많이 준비했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불이 꺼져 가는 것을 발견했고, 기름을 사러 가야만 했고, 그래서 결국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등불의 비유'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처음에 등불을 켜 놓고 있을 때의 기름은 박해나 시련이나 고난이 없을 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신앙생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름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더 준비해야 하는 기름은 박해나 시련이나 고난을 겪을 때의 신앙생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힘든 일이 하나도 없는 평온한 시절에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 자기 자신도 잘 모릅니다.
정말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는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 드러납니다.
그래서 '등불의 비유'에서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는 일은 신앙생활을 하기가 힘들어서 자기가 신자라는 것을 감추거나 신앙인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신자 자격을 박탈하지 않아도 그 자신이 스스로 신자 자격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은총도 잃게 됩니다.
반대로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서 사람들을 비추는 것은 시련과 고난을 겪을수록 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신앙의 위대한 힘을 배우게 됩니다.
조선시대 박해 때에 신자들은 선교활동을 할 겨를이 없어도 자신들의 '삶'으로 믿음을 증언했고, 조선의 백성들은 그 '삶'을 보고 감화되어서 스스로 입교하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등불은 자기를 따라오는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한 등불이면서 동시에 자기 발 앞을 비추는 등불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뒤따라오게 하려면 우선 먼저 자기 자신부터 제대로 길을 찾아서 가야 합니다.
그래서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않아서 등불이 꺼지게 만들거나, 등불의 빛을 감추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되는 일입니다.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 테니.” 하지 마라.> (잠언 3,27-2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추석연휴 잘 보내셨나요?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요.
추석 동안 우리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정을 나누는 시간을 잠시나마 가졌지요.
사실 매일 그렇게 어른들도 찾아뵙고
작은 선물도 나누고
함께 먹고 마시고 놀며
가족의 정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데ㅆ
사는 게 뭔지...?
"뭐가 중한디?"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온 오늘
잠언의 말씀이 마음을 울리네요.
"가능하면 나누고 살고
도우며 살아라.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네요.
맞지요. 그리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게지요.
내 욕심만 챙기며 산다고
때부자가 된 것도 아닌데
나누고 사는 삶이
참부자로 사는 길이겠지요.
오늘 내가 도와야 할 일이 보이거나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보거나 알게되면
망설이지 말고
기꺼운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봅시다.
그리 하실꺼죠?
<불빛>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희미한 불빛 하나
가녀린 숨결
스스로 끊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완전한 어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보일 듯 말 듯
실낱같은 불빛 하나
어둠을 사를지언정
모든 것 무(無)로 만들
칠흑 같은 어둠조차
여린 빛 삼킬 수 없기에
사람이 그렇다
삶이 그렇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다
위로부터 오는 빛<루카,8/16-1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등경위에 올려놓은 빛은 방안을 비추며 빛 속에 살게 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저 높은 하늘의 태양은 아침을 열며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가야할 길을 가도록 하고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합니다. 빛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잠을 자거나 움직일 수 없습니다. 등경위에 등불은 바로 하느님 자신임을 알려주십니다. “ 숨겨진 것은 들어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난다.” 태양의 빛이 빛이면 빛 속에 숨은 것은 하나도 없고 감출 것도 없이 들어나듯이 위로부터 비치는 하느님의 빛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 까지 들여다 보십니다.
빛이 하늘을 향하여 비치지 않고 땅을 비춥니다. 태양은 빛을 비출때 때 땅이 없으면 빛의 효과가 나지 않듯이 빈 공간이 아니라 무엇으로 꽉 찬 공간을 비추고 있습니다. 높은 이상은 이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현실에 적응이 되어야 실현가능합니다.
사람은 가야할 길을 발이 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발에게 명령하여 가게 합니다. 손이 무엇을 잡는 것도 머리에서 명령을 내려 잡을 것을 잡고 눈이 무엇을 보아도 머리가 본 것을 식별하고 본 것을 올바로 판단해 주어야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에게 빛이어야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듣고 빛속에 살게 됩니다. 하느님은 태양이 높은데서 비추듯이 우리를 성령을 통하여 빛을 비추고 가질 것을 가지고 행할 것을 행하게 하시며 양심 따라 향동하고 계시를 통해 사람의 갈길을 가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빛이 없이는 들어도 바로 듣지 못하고 머리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어둠속에 있는 현실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으로 이루어 졌으니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는 알아듣고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영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비추어 가진 바를 바르게 분별하며 살도록 기도합니다. 빛으로 어둠 속에 분별력을 주소서 아멘.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면의 등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됩니다.
우리의 내면을
충만함으로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오직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빛은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는 것과
감추어져 있는 것들을
훤히 드러나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우리 어둠까지도
맡겨드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등불이 있습니다.
그 등불이
타오르며 빛을
자아낼 수 있도록
먼저 헛된 욕망을
정화시키고 내려놓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보다 앞서 나갈
우리의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먼저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의
내면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여러가지
인간적인 상황을
먼저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
빛안에 머무르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빛을 보게되는 이는
기쁨으로 가득찬
삶을 살게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가진 자는
더 받아
그 빛으로 더욱
충만해질 것입니다.
어두운 우리 마음에
더욱 간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