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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9월 24일 (녹)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09.24|조회수32 목록 댓글 0

제1독서

<여러 가지 교훈>

▥ 잠언의 말씀입니다. 21,1-6.10-13
1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2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3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4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
5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6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10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11 빈정꾼이 벌받으면 어수룩한 자가 지혜로워지고
지혜로운 이가 지도를 받으면 지식을 얻는다.
12 의인은 악인의 집을 살피고 악인을 불행에 빠지게 한다.
13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잠언의 저자는,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니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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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의 저자는,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며 여러 가지 교훈을 들려준다(제1독서). 군중을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하자,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서 8장 19-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군중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밖에 서 계실 때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고, 11장 27-28절에서는 군중 가운데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말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오늘의 화답송인 시편 119(118)편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176절에 걸쳐 율법에 대하여 말하는 이 시편은 “행복하여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은 복음의 여러 곳에서 말하듯이 자신을 버려야 하는 길이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이지만, 그것은 또한 행복의 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어리석어 보이는 길인데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 외에는 다른 무엇도 나를 지배하지 못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처럼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같은 표현들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주님과 뗄 수 없이 결합된 삶의 방식으로 이해될 때, 그 길은 기꺼이 달려갈 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일컬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이 예수님의 식구들보다 더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을 내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결합되어 새로운 가족을 이룹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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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족들이 그분을 찾아왔던 일은 공관 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습니다. 다만 루카 복음사가는, 그들이 사람을 보내어 군중을 가르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밖으로 불러내려 하였다는 내용이나(마르 3,31 참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마르 3,33)라고 하신 조금은 냉정해 보이는 예수님의 반문은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의 가족들은 군중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께 그저 방해가 되는 존재, 또는 그분에게서 외면당한 이들로 여겨지는 오해를 벗고, 독자의 관심은 오롯이 예수님과 그분께 귀 기울이는 군중에게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서민들은 하루 품삯으로 온 식구가 끼니를 해결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빠듯하였습니다. 작고 가난한 이 사람들이 당신 곁에 모여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듣고 새 삶을 결심하는 그 자리가 매우 소중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미루어 둔 채 이들에게만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과 ‘등불’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삶 안에서 열매로 맺어 내라는 가르침(루카 8,4-15.16-18 참조)을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은, 겉치레뿐인 예배가 아니라 정의와 공정을 실현하고, 악인의 행실을 멀리하며,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삶입니다(제1독서 참조). 막연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주 읽으며 삶의 방향을 잡고, 깨달은 바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주님의 어머니요 형제’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합시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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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예수님의 새 가족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그 형제들을 외면하시는 예수님의 차가운 태도로 오늘 복음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마치 거사를 앞두고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떠나는 영웅으로 여기지는 말아야지요. 요컨대 예수님의 새 가족은, 혈연이라는 굳건한 장벽을 뛰어넘어 세상 모든 이를 형제요 자매라 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루카 복음에서 성모님 또한 말씀을 듣고 간직하실 줄 아는 이로 제시되십니다(루카 1,45; 11,28 참조).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집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의 삶이 곧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중요한 것은 들은 말씀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잠 못 이룬 적도 있고, 스치듯 지나간 누군가의 말에 감동받아 평생을 두고 곱씹으면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말 자체의 무게감만이 아니라 말하는 이와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은 서로의 관계를 위한 도구입니다. 말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를 향하고 있는지, 나 자신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서로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은 상대를 참 피곤하게 합니다. 실컷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아 예수님과 갈라서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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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께서 친척 형제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반가워하기는커녕 서운하게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물론 이 말씀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를 부인하는 말씀은 아니지요. 다만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더 중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회 에서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많은 사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때로는 윤활유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따른 폐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인위적인 관계에 얽매이다 보면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하지 못할 때가 있고, 반대로 혈연이나 지연, 학연에 얽힌 굴레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마저 거절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이 지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일치시켜야만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어 갈 것입니다. 아울러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형제자매들, 곧 새로운 가족들도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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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마음속에는 사악한 마음이 가득하여 이웃을 돌보려는 사랑의 마음은 없습니다.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그 행위 안에 약자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허영과 위선으로 바치는 제물보다 의로움의 실천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그저 생존을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커다란 신비는 사랑입니다. 그 모든 행위와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단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짧은 단락은 예수님 말씀의 의도를 알아듣기 어렵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이 와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이럴 때 보통 우리라면 뛰어나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엇인가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려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 구성원이 되고 천상 시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1,22 참조). 성모 마리아를 영적인 어머니로, 사도들을 영적인 형제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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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근래에 성인 반열에 오른 분 가운데 참으로 열렬히 공경을 받고 또한 그의 시성식이 큰 화제가 된 성인으로 꼽을 수 있는 분이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출신의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사제입니다. 성인의 인기가 고국인 이탈리아에서 얼마나 높은지는 도시의 식당이나 카페들에서조차 쉽게 눈에 띄는 그의 사진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지닌 성덕의 위대함은, 세속화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심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을 철저하게 증언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몰려들고 인간적으로 추앙받던 상황에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대중의 환심을 사기보다 때로는 거친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통하여 회개하고 참된 신앙을 다시 찾도록 인도했습니다. 또한 성체성사가 예수님과 나누는 참된 친교이며 신비적 실재임을 자신이 혼신을 다해 봉헌하는 미사를 통하여 느끼게 했습니다.

그가 직접 병원을 세워 환자들을 치료하게 하였듯이, 비오 성인은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깊이 염려하면서 그리스도의 고통에 자신을 일치시켰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라고 부르듯이, 그의 다섯 군데의 상처는 예수님의 고통과 일치하며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자신을 봉헌한 사람이라는 점을 상징합니다. 그 유명한 ‘오상’과 또한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주어진 환시들과 수많은 치유의 기적 때문에 그의 존재는 현대에 시성된 어느 성인들보다도 우리가 ‘기적’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 숙고하게 합니다.

‘기적’은 현대 신학이 애써 외면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오 성인에게 일어난 기적들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피안의 세계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신비로운 ‘초월적 실재’와 마주하며 살아간다는 표징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초월’에 대한 의식과 경외심 없이는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믿음과 희망을 두는 순례의 여정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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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제주교구장을 거쳐 지금은 원로 사목자로 지내는 김창렬 주교님은 예수님을 ‘형님’이라고 자주 부릅니다. 어느 잡지의 인터뷰에서 그 까닭을 밝힌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조금 다듬어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철이 나고 배울 걸 거의 다 배우고 섭렵했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늘 어린애라는 생각이지요. 저는 그냥 발가벗은 어린애처럼 거리낌 없이 예수님하고 함께 지내려고 해요. 그분께서는 마음이 아주 넓으시고 저를 위해 모든 걸 다 하시는 형님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까지 드네요. ‘예수님께서는 저를 당신의 동생으로 삼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지.’ 제가 죽은 뒤에도 하느님 아버지께 저를 데리고 가시어 ‘아버님, 이놈이 제 동생인데 아버님 아들로 좀 삼아 주십시오.’ 하실 것 같아요.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가 ‘그래, 너 이놈아! 내가 아빠다. 그래, 아빠야. 넌 내 아들이라니까.’ 하시며 반기실 것 같고요.

성부 하느님과 저는 부자지간, 또 성자 예수님과 저는 형제지간, 이렇게 한 가족이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요. 제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생각이 늘 떠나지를 않아요. 이 세상에서는 그림자이지만 죽은 다음에는 완전한 가족이 되지요. 죽음을 잘 맞이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교님의 이러한 말씀은 오늘 복음을 근거로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를 둘러싼 군중을 보시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형님이시고 오라버니이십니다. 동생이 불 속에서 헤매고 있다면 곧장 그 안에 뛰어드시어 꺼내 주시는, 그러한 분이십니다.

2016년,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즉,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를 금지하는 법입니다. 이 법은 사회를 더욱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제정된 것임을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된 후, ‘어떻게 하면 법에 걸리지 않는지, 법망을 피할 수 있는지’ 등의 문의가 쇄도했다고 합니다. 또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이루어지고 피할 수 있도록 하는 책도 출판되었습니다.

 

법의 기본 정신과 취지는 보려고 하지 않고, 걸리냐 걸리지 않느냐를 따지는 상황이 너무 우스워 보입니다. 그리고 작년(2023.2)에 물가 상승률 감안 및 내수 진작 차원에서, 이 법을 손질하는 방안(음식값 3만 원을 5만 원으로 인상)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습니다. 청탁 금지를 위한 것인데, ‘5만 원 정도는 괜찮다’라는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라며 죄짓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힘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타협해서는 주님께 절대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에 가까워질 것이고, 이로써 주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알려줍니다. 이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기대했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당연히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얼른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혈연, 민족, 인종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 관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고 타협한다면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새로운 가족 관계가 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과 타협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우리가 되어, 하느님과의 참 가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에게는 인생의 목표가 있지요(토마스 칼라일).

 

 

 

언제나 깊이 새기고 곱씹고 묵상해야 할 예수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때로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정확한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랜 시대적 간극, 문화나 언어 습관의 차이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의 시선이 지극히 인간적이거나 편협되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자렛 출신으로 마리아에 의해 잉태되시고 출산되신 한 인간 존재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신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지극히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인 존재이십니다. 작은 고을 나자렛에 머물러, 혈육이나 지연에 묶여 평생을 지내셔야 할 분 절대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혈육이나 인연, 지연이나 학연을 초월하는 크신 분, 세상 만물, 인류 전체를 주관하고 구원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서 다음의 예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위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사촌들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아직 예수님의 애매모호한 말씀의 진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시점에서 들으면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을 향한 극찬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세상 무수한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주님 말씀을 충실히 듣고 묵상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실행한 사람은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족의 결속력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핏줄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칫 핏줄이나 지연, 학연 등이 우리 공동체의 결속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사상과 체제 속에서 산다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결속력이 있는 공동체에 머무느냐에 따라 우리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고 그 사랑의 말씀이 결속력의 근원이 되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주인공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 (이전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루크는 평화 수호자들 편에서 일하고 다스 베이더는 악의 원흉인 다스 시디어스의 부하입니다. 결국 루크와 다스 베이더가 맞붙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다스 베이더가 루크의 아버지라는 설정입니다.

다스 베이더는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제다이 기사였지만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쌍둥이를 임신한 아미달라까지 잃게 될까 봐 평화만 유지하는 일에 점점 신물을 느낍니다. 자신의 힘을 점점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데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잘 아는 시스가 그에게 힘을 주었는데, 그 힘을 이용하려면 더 분노하고 더 악해져야만 했습니다. 결국 점점 변하게 되는 아나킨을 떠난 아미달라는 혼자 남녀 쌍둥이를 낳고 죽습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다스 베이더는 더 극악무도해집니다.

다스 베이더의 두 자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몰래 키워집니다. 둘 안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포스가 작용하고 있었고 결국 루크도 제다이가 되어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전투에서 손목이 잘리고 자신이 다스 베어더의 아들임을 알게 된 루크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과 함께 싸우던 레아 공주도 자기 동생임을 알고는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다시 나섭니다.

시스는 스스로 찾아온 루크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스 베이더와 대결을 시킵니다. 다스 베이더가 이번에는 루크에게 쓰러집니다. 그러나 루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에 서라는 시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스가 루크를 죽이려 합니다. 이때 부상을 당한 다스 베이더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악의 중심인 시스를 죽입니다. 이렇게 예언대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악과 선의 균형을 다시 찾는 인물이 되어 죽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할까요? 이 이야기 안에는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하는 하늘에서 오는 ‘말씀’과 ‘혈육의 관계’가 대결합니다. 결국 혈육이 하나로 뭉치려면 어쩔 수 없이 둘 다 악인이 되던가 둘 다 선인이 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자녀가 눈이 빠지면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녀를 만들 줄 모릅니다. 만약 자동차가 자신을 만들지도, 고치지도 못하는 원숭이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고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운명은 뻔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목소리를 따라야 온전한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피조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게 창조자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그 뜻은 사제가 되건, 결혼하건 모두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핏줄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깁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가족은 핏줄이 같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결속력이 줄어듭니다. 악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핏줄이라도 선을 따르는 사람과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발합니다. 아들은 가진 옷을 다 아버지에게 주고 자신의 아버지는 이제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며 수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허락하시고 충실한 신앙인이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안에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핏줄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서는 1권의 책이지만, 73권의 책이기도 합니다. 구약이 46권 신약이 27권입니다. 이 성서의 제목 중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사무엘, 다니엘, 이사야와 같이 구원의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전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대부분이 남자의 이름이지만 여자의 이름으로 된 책도 2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스테르와 룻입니다. 에스테르는 페르시아 왕국의 왕비였습니다. 에스테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는 하만의 음모를 알았고, 하느님께 의탁한 에스테르는 용감하게 왕 앞으로 나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였습니다. 룻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룻은 남편이 죽어서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겼습니다. 룻은 보아즈를 만나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이고,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나라의 왕비였던 에스테르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이방인 여인이었던 룻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느님 앞에 지위의 높고 낮음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업적의 크고 작음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혈연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저의 사제 생활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갔던 곳은 경기도 적성 성당입니다. 그곳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미사 예물과 사무장 급여를 교구에서 지원받았습니다. 주방을 도와줄 식복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3년간 저와 함께 지내면서 청소, 세탁, 식사를 도와주었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5명 정도 나왔고, 주일미사에도 50명 정도 나왔습니다. 군인이 오거나,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태권도를 시작했고, 농산물 직거래도 했고, 비디오 대여도 했고, 차량 봉사 팀도 만들었습니다. 3년이 제게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부족한 능력이지만 교우들과 알콩달콩 사목의 기쁨을 알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사목 체험을 발표했고, 그 소식이 교구에 전해져서 다음 임지는 교구청이 있는 명동이 되었습니다. 저는 교구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사목국에서의 업무는 적성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구역장 교육에 지구마다 700명이 넘게 왔습니다. 남성 구역 봉사자 교육에는 2,000명이 넘었습니다. 예산 규모도 달랐고, 만나는 사람도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적성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명동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참가족>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믿음의 참가족은 믿음입니다
희망의 참가족은 희망입니다
사랑의 참가족은 사랑입니다
진리의 참가족은 진리입니다
정의의 참가족은 정의입니다
자유의 참가족은 자유입니다
기쁨의 참가족은 기쁨입니다
온유의 참가족은 온유입니다
자비의 참가족은 자비입니다
함께의 참가족은 함께입니다
품음의 참가족은 품음입니다
돌봄의 참가족은 돌봄입니다
섬김의 참가족은 섬김입니다
베풂의 참가족은 베풂입니다
살림의 참가족은 살림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군중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밖에 서 계실 때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들은 먼저 주님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제일 우선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가 있다면 늘 주님 곁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가에 있어야 온기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 곁에 있을 때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늘 언제나 말씀을 통해 주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주님과 함께 모든 일들을 실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우리의 성모님은 늘 언제나 주님 곁에 계셨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며 사셨고, 늘 주님과 함께 모든 이들을 이루어가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오늘 복음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배척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의 어머니께서 늘 함께하시며 말씀대로의 삶을 이루어가신 분이심을 말씀하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요!“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만드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이들 즉 교회공동체가 새로운 가족인데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입니다.


우리가 형제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형제라고 하는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독서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새로운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정의가 아닌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실천해야 하고 하느님의 일에 부지런한 이의 계획에는 반드시 이익이 남긴다는 것을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아주 옛날에는 이웃의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정도로 가까웠지요. 하지만 현재는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르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이러한 삶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 우리 신앙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지요. 상대가 거짓이든 진실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도리만 하면 되고 우리의 행동은 하느님께서 아시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족함을 잊지 맙시다. 아멘!

 

 

 

“누가 예수님의 참가족인가?”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새롭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걸었던 길을 아까워하지 말고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다산>

회개에 신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므로 뉘우침에 이르지 않으니 길하다.”<주역>

늘 깨어 살 때 큰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제목 “예수님의 참가족”이 맘에 들어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혈연 가족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참가족의 이상이 참 원대합니다. 예수님의 품은 그대로 온 인류를 품에 안는 하느님의 품임을 봅니다. 인류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마음을 넓고 깊게 멀리 개방해야 함을 봅니다. 교회가 날로 예수님의 큰 품을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자 누군가 예수님께 전달합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즉각적인 답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화두입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말씀인지요!

 

그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시공간에 관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파를 초월하여 진리를 실천하며 참으로 반듯하고 의롭게 사는 이들도 넓은 의미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혈연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품, 하느님의 품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교회요 우리 마음이면 참 좋겠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참가족의 생생한 증거가 교회공동체요 이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감하는 사실입니다. 미사한번만 함께 하면 국적, 인종과 상관없이 한가족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디에서나 미사에 참여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 한가족임을 체험하지 않는지요! 도대체 미사전례가 아닌 그 무엇이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을 실감나게 보여줄 수 있을런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사가 아니더라도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를 듣고 실행하여 사는 이들은 그가 어디에 있던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를 사랑하여 듣고 공부하며 실행에 옮기는 삶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요! 참 사람이 되는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은 단 하나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에 속하는 것뿐이요, 부단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평생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전 삶을 요약하는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시종여일(始終如一), 한결같이 평생 하느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실행한 “예스맨(yes-man)”이 바로 마리아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 잠언의 현자가 말하는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손(in God’s hands)’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의 지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려는 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임금의 마음은 주님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이끄신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그러니 말씀에 맛들여 잘 듣고 실행하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세상맛이, 돈맛이 아닌 하느님맛에 살게 하는 말씀맛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으란,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라는 시편 말씀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제가 피정지도시 자주 드는 예에 웃습니다만 대부분 공감합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하느님 믿음을 북돋우는 ‘말씀맛’만이 ‘돈맛’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119장은 “주님의 법”이라는 제하에 무려 176절에 이르는 제일 방대한 시편입니다. 흡사 ‘말씀 찬가’같은 시편입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이 더욱 말씀 사랑과 실행을 고무합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가르침을, 길이길이 지키오리다.”

 

말씀이 사람이 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고 온전하고 충만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자 영이요 주님의 현존입니다. 다음 히브리서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우리의 주님 향한 갈망은 시종일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고 주님을 닮아 참내가 될 때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43년 전 일본 나가사키 우라카미 주교좌 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이내 저는 광주 화정동 피정센타의 피정 지도자의 소임을 받고 활동하면서 ‘성직자, 수도자 부모님 피정’을 지도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성직자·수도자 어머님들의 모임(=현 광주대교구 농심회)이 결성되었는데, 제 어머니도 다른 교구 사제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모임에 참여하셨죠. 그런 계기로 다른 신부님들의 어머님들로부터 아들 신부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때론 함께 만나시던 사제의 어머니께서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아들 신부의 환속 때문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제 어머니에겐 걱정 아닌 걱정이 생기셨고 그래서 늘 저를 위해서 사제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셨습니다. 저로 인해 부모님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시고 세례를 받으셨지만, 참으로 열심한 신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사시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는 바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이를 더 심화시키면 성직자·수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분은 하느님이시겠지요. 수도자이며 사제인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수도자·성직자들은 부모와 가족들을 떠났다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부모와 가족을 되찾은 것이라 봅니다. 흔한 표현으로 신부나 수도자보다 더 효자가 없다, 하는 표현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수도자나 사제에게는 영원히 부모와의 관계 이외의 어떤 가족이 없습니다. 형제도 자매도 결혼하면 다 자기 가족이 생기지만, 수도자에게는 참으로 남는 것은 부모님뿐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부모님에게서 멀어졌지만, 하느님 때문에 부모님께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었으며, 혈연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 새롭게 부모님과의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젊은 날의 저에게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복음의 내면을 깊이 숙고하지 않은 저의 체험 부족과 연륜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첫 장면, 곧 어머니와 형제들이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고”(8.19), 또 “밖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이 제겐 너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구도로 보자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어머니와 형제들은 가장 먼 밖에, 멀리 서 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이전의 내용들 곧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를 통해서 볼 때,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고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과 주님의 말씀을 등불처럼 실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게 될 것입니다.”(8,15.18)라는 말씀을 전제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비추어 볼 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참된 가족 관계는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루카 사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 범주에 포함하려고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혈연적 관계이면서도 예수님에게서 가장 먼 자리에 위치해 놓고 상대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의 중요함과 그 실행 여부가 바로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조건임을 이런 영적 원근법을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다시 오늘 복음을 유심히 살펴보면, 예수님과 형제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고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아들인 예수님께 다가설 수 없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런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린 한 사람, ‘그 어떤 이’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8,20)하고 환기喚起시켜 드립니다. 어쩌면 그 ‘어떤 이’의 의도는 만나야 하는 가족을 만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예수님께 귀띔해 주었으리라 봅니다. 아마 우리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그 사람’처럼 했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런 생각 자체가 지나치게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인간적인 관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영적 관계를 여는 새로운 지평이며 이를 위한 포석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답변은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 불편한 느낌으로 다가오겠지만, 신앙적이고 영적인 면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사실 성서학의 발전으로 성서의 중요한 영성의 본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이 따름의 요소는 떠남과 버림인데 이러한 추종 영성의 모범인 분은 다름 아닌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이미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선택과 주님을 잉태한 순간부터 ‘주님의 여종’으로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듣고 실천해 오신 분이셨으며, 그 순간뿐만 아니라 아드님 예수의 마지막 삶의 순간, 십자가 밑까지 동행하시면서 인간적이며 모성적인 측면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모질고 힘든 순간도 신앙으로 이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수용하고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표현은 역설적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비하하는 말씀이 아니라 칭송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이후에 이 말씀을 전해 듣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 어머니와 같이 인간적인 관계와 인습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강한 의향을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단지 말씀을 들음으로만 듣지 않고 들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실천할 수 있는 신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신자信者란, 곧 말씀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고, 말씀이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주님, 저에게도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계셨고, 그분들과 저는 혈연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순례자였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하느님의 백성이며 가족이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멘.>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여전히 어제 복음의 맥락에 이어(렉시오 디비나의 맥락에서 보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선포와 경청, 등불의 비유-묵상과 기도, 영적 가족-관상), '말씀을 실행하는 이'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다는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 루카 9,48; 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해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신앙인이라면 말씀을 잘 듣고 들은 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1)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하느님 나라의 참 가족’이 되는 길을, 즉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말은 ‘실행’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하느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은, 빈껍데기 신앙인으로 사는 죄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죄가 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자기는 충실한 신앙인으로 잘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2) ‘말씀’을 아예 듣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처음에 집을 떠날 때의 작은아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아마도 분명히 아버지가 그를 타일렀을 것이고, 식구들도 말렸을 텐데, 그는 마음껏 살고 싶다는 욕망에만 사로잡혀서 아버지의 말도, 식구들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배반자의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은 채로 제자들 가운데에 배반자가 있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유다 자신이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았고, 끝내 멸망을 향해서 가버렸습니다.

<복음을 아무리 열심히 전해도, 아예 안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처럼 스스로 크게 깨닫고 뉘우치는 것 말고는......>

 

3) ‘말씀’을 듣고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사제와 레위인이 그 경우입니다. 그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계명과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계명과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계명과 율법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기가 싫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버린 것은 ‘큰 죄’입니다.

또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도, 성경의 가르침을 잘 알면서도 ‘아무것도 안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라자로가 누워 있는 것을 못 본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외면했습니다. 그는 오며가며 빵 부스러기를 던져주는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습니다.

 

4) ‘말씀’을 듣고, 또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긴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인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런 자들인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이 말씀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질문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좋은 일도 하지 않고, 목숨을 구하는 일도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하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성경 해석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5) 어떤 경우든지 간에,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믿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이거나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우리가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원하는 하느님 나라는 관광지가 아니라, 인생 전부를 걸고, 목숨을 다 바쳐서 간절하게 찾아가야 하는 생명의 집입니다.

아무리 성경과 교리를 잘 알아도 바로 그 간절함과 절실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바위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루카 8,13).”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예수님의 대인관련관심 중심문제 맞아요!
예수님의 일 거수 일 투족 속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중심인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재물 권력 친분 등등이며 그 안에 우리가 갇혀살죠.
우리의 관심사는 자기중심이기에 하늘 뜻 하느님 사랑을 무시합니다.
예수님도 우리 대화에서 인간들이 너무 자기중심이라 언짢으실 걸요?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 중심 사고라는 걸 늘 잊어서는 안 되겠어요.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 예수님의 주 관심이듯 우리도  그래야겠죠.

가톨릭알림 말: 인류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이웃과 일치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지난 한가위 명절에 저희 삼남매가 모였는데, 막내가 저녁을 먹고 가라니까, “얼굴 봤으면 됐지 새삼 무슨 할 말이 또 있다고 오래 있냐?”라고 하면서, 그냥 갔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가족이란 존재로서 함께하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토대로 우리 신자들의 관계를 되돌아봅시다. 천주교 신자로서 함께 취미활동을 하고 같이 운동을 하는 관계인지? 같이 사업을 하고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관계인지? 아니면,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활동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새로운 가족 관계인지? 그리스도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함께 형제 자매로 모여 교회를 이루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보다 깊은 관계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고 구원의 나라로 함께 걸어 나가도록 합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잘려 나갑니다. <루카 8, 19-21> 9월 24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무리 좋은 계획이나 목표라도 실천 없이는 하나의 공상이 됩니다. 아무리 진수성찬이 차려져도 소화를 시키지 못하면 몸에 힘이 되지 못합니다. 강당에서 아무리 도리에 맞는 말을 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뜬구름같이 되고 맙니다.

오늘 형제자매라 하더라도 정의의 실현과 사랑이 없으면 일치가 불가능합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지 않으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따로 놀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의 강론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눈앞에 굶주리는 사람에게 빵 하나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말할 자격을 잃게 됩니다.

사랑의 시작은 주고받고 싶은 마음에서 주고받으며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고받은 것이 서로 균형이 맞지 않으면 불만이 나오고 사랑을 중단합니다. 그래서 더 높은 단계는 받지 않고 주기만 해도 좋은 사람은 사랑을 지속합니다. 주는 것도 지속하기 어려우면 중단하고 사랑이 중단됩니다. 셋째 단계는 있기만 해도 좋아하는 단계인데 잘났거나 못났거나 살아있기만 하면 사랑하는 단계이지만, 어느 날 죽음으로 단절되기도 합니다. 마지막 사랑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주는 것만큼 더 큰 사랑이 없다.”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너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주는 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내주는 것으로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랑을 통해 우리 안에 현존하시며 끝없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참사랑의 실천은 죽음도 막을 수 없는 것이며 너를 위해 목숨까지 내주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믿음을 통한 하느님 사랑은 순교로 증명되었으며 순교자 정신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완성입니다.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삶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저는 성호경 놓으면서 의식하고 체험하기 때문에 여기 70년을 한결같이 살고 있습니다. 수도원 떠나며 “여기 사랑이 없다.” 하는 사람에게 “아니요, 여기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혼은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구체적 실천은 코린토 전서 13장 4절~13절 꼭 보세요. 13절 “믿음, 희망, 사랑. 그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 하는 것같이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며 서로 한 형제자매 아버지며 어머니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함승수 신부님

우리는 성당에서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호칭을 참 자주 사용합니다. 그와 내가 피가 섞인 가족은 아니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영적인 가족이 되었음을, 주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로 묶여 영적인 친교를 이루고 있음을 그런 호칭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그 사람들과 정말 영적인 형제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기가 조심스러워집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용서와 사랑에 힘 입어, 세례성사의 은총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내가 나와 같은 교회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정말 ‘가족’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그러지 못할 때가 너무 많아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오늘 복음 말씀이 참으로 아프게 다가오지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21)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자주 오해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가족들과 거리를 두시며 차갑게 외면하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과 거리를 두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혈연 관계 바깥에 있는 우리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을 계기를 만드시려고 하신 말씀인 겁니다. 사실 우리는 출생 신분으로 따지면 주님의 가족이 되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이들입니다. 가족이란 같은 본성을 지니고 서로 닮은 이들인데, 부족하고 약한 인간인 우리를 전능하신 하느님과 한 가족으로 묶는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게다가 예수님과 우리는 시대와 민족, 출신이나 환경 등 물리적인 부분에서 서로 통하는 ‘공통분모’라는걸 찾아볼 수가 없으니,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참으로 멀어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우리에게는 한 가지 크고 중요한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가족이라고 말이지요. 이 말씀을 통해 ‘가족’이라는 말이 지닌 의미가 새롭게 정립됩니다. 예수님은 ‘핏줄’이라는, 본인의 의지와 선택으로 정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조건을 기준으로 당신 가족과 타인을 구분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참으로 믿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믿음을 실행에 옮기는 삶을 통해 ‘하느님의 가족’이 되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요. 누군가와 가족이 된다는 건 그와 내가 특별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인데, 그런 관계를 하느님과 맺으면 그분께서 누리시는 생명과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되니 그 자체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저 하느님 말씀을 귀로 듣기만 하면서, 스스로가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있다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야고 1,22 참고)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마음에 간직해야 하고 마음에 간직한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단순히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순명과 실천 덕분이었음을 기억합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태도는 종종 오해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왔으나 군중에 둘러싸여 예수님 가까이 올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딱히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모두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은 성모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루카 복음 8장 전체 맥락에서 본다면, 오늘 복음은 가족 관계에 대한 부정이나 배척의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실행 측면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 말씀의 실행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처럼 말씀을 간직하고 인내로써 열매 맺는 과정입니다. 하느님 백성 전체는 이러한 하느님 말씀 실행에 불림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께서는 가족들을 특별하게 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하시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계기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셨을 겁니다(루카 1,29 참조). 많은 인내가 요구되는 하느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성모님의 모범에 따라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를 수 있는 겸손의 덕을 청합시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전보다
더 나은
우리 자신이길
기도합니다.

누구
없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자연의
단호한
질서를 만나며
하느님께서 주신
마음을
되잡습니다.

하나의
말씀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의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자신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빠진
세상적인
인정만으로는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올바른
형제의 관계란
기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인정할 때
더 아름다운
관계가 됩니다.

참으로 신비롭고
소중한 관계는
그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보는
관계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길에서 만나는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참으로 소중한
어머니요
형제들을
귀하게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관계도
머무를 수 없는
관계들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떠나고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기에

그 어떤 것도
부여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느님께
기쁘게
맡기고 기쁘게
성장하는
우리 자신의 삶이
있을뿐입니다.

말씀은
성장이며
말씀은
존중이며
질서입니다.

혈육의 정에
연연하기 보다는
하느님께로
더 다가서는
맑은 가을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좋은
말씀 안에서
가장
좋은 날
되십시오.

어느 신부가 본당의 어느 어르신 때문에 힘들다고 말합니다. 사사건건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누구 만났는지를 물어보기도 하고, 어제는 왜 늦게 사제관에 들어왔냐고 물으신답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려는 이 어르신께 대한 불편함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르신은 왜 스토커처럼 본당 신부에게 집착하실까요? 이 신부가 자기 아들 같아서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에 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너무 서운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남이란 어느 정도의 이기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즉, 자기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입으로는 상대를 배려한다고 말하지만, 이 역시도 자기 관점에서 나오는 ‘배려’라는 이름일 뿐입니다.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책에서,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알아서 해주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 됩니다. 때로는 답답해도 가만히 놔두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이런 진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알아서 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답답하고 간섭하고 싶지만, 우리를 위해 꾹 참으며 말없이 함께하실 뿐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 진짜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 역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봉헌합니다. 과거의 순교자들은 박해의 고통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도 불의의 폭력을 저지르는 박해자들을 벌하지 않는 주님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단순히 주님을 믿고 있다는 이유로 망나니의 칼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갈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주님을 믿을 수 없다며 배교했습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은 이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진짜 사랑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찬미를 외치면서 기쁘게 순교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같은 고통과 시련의 삶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진짜 사랑을 찾고 있습니까? 혹시 불평불만과 원망으로 주님을 떠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과거의 순교자 모습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다. 절망하는 인간만 있을 뿐이다(하인츠 구데리안).

 

 

 

그분으로 인해 아무것도 바랄 것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맞아 봉독되는 성경 말씀들은 우리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명확히 대변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지혜서 3장 1절, 4절, 8절)

 

그렇습니다. 형장으로 끌려가던 우리 순교자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더없이 가련하게 비춰졌겠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눈은 이 세상 너머의 또 다른 세상, 영원불멸의 세상,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순교자들을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땅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저 삼시 세끼 잘 먹고 잘 지내는 삶만 추구했으니, 그 삶이 참으로 안타까운 삶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상에서의 복락은 찰나이지만 천상에서의 복락은 영원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이 지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을 제대로 만나고 나니 그토록 좋아 보이던 세상 것들이 모두 빛을 잃었습니다. 그 깊고 달콤한 사랑을 맛보고 난 다음부터는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초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더 이상 환난이 환난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역경이든 박해이든 기쁘게 견뎌낼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굶주리든 헐벗든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칼이나 갖은 위험 앞에서도 초연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그분 때문이었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복음 9장 24절)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분, 생사마저 주관하시는 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심을 알게 된 우리 순교자들은 더 이상 이 지상의 것들, 돈과 명예, 그리고 목숨까지도 연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국 순교자 대축일에 우리도 순교자들처럼 주님을 제대로 한번 만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얼마나 감미로운 분인지,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아무것도 바랄 것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는, 그래서 그분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도 아깝지 않은 그런 인생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자녀를 집착의 속박에서 해방하는 유일한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 주일 경축이동 관계로 주일 묵상을 9월 20일로 이동했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01회에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아이들과 이모, 그리고 엄마 돈은 물론이요 화장품까지 내다 파는 금쪽이가 나옵니다. 

금쪽이는 자신도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고 자신도 착해지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고 합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사느냐며 다그치기만 할 뿐입니다.

 

아이가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 돈으로 친구를 사귀기 위함입니다. 친구들에게 돈 자랑을 하고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사줍니다. 그 이유는 친구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없는 것입니다. 금쪽이도 자신은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약삭빠른 청지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실 이 복음은 더 깊은 내용이 있지만, 오늘은 왜 약삭빠른 청지기가 주인의 돈을 축낼 수밖에 없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돈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인이 그를 떠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인의 돈을 훔쳐서라도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물론 그 친구들이 이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청지기를 맞아줄 것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모든 죄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탐욕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탐욕을 끊어야 합니다.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의 청지기와 위 사례의 금쪽이로부터 그 원인을 찾아내면 됩니다. 

금쪽이는 박스로 만든 진실의 방에서 엄마, 아빠에게 털어놓습니다. 지금 집으로 이사 오기 이전에 엄마 아빠가 심하게 싸웠을 때 자신은 큰 상처를 받았고 경찰까지 부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싸운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자녀의 생존이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의 청지기가 직장을 잃고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과 같습니다. 

 

이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돈을 많이 모으고 친구를 많이 사귀어서 세속적인 보험을 들어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돈에 대해 집착이 커지고 그렇게 죄를 더 많이 짓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집착은 생존에 대한 보장이 이뤄지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집착하게 되었을 때는 하느님을 생명보험으로 믿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러니 자기들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탐욕을 부리게 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금쪽이가 부모를 믿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금쪽이 부모는 금쪽이에게 믿음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엄마는 돈을 원하면 가져다 쓰도록 보이는 곳에 놓습니다. 다만 쓴 액수를 써 놓도록 합니다. 그리고 아빠는 금쪽이를 데리고 일을 나갑니다.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까지 금쪽이를 책임지겠다는 믿음을 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화목입니다. 부모는 앞으로 금쪽이 앞에서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금쪽이가 계속 돈을 훔치고 거짓말을 할까요?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부모님을 믿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참 자유입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면 이제 부모가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더는 부모를 자신의 창조자로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창조자만이 자녀에 대한 생명보험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의 생명보험은 오로지 부모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다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스페인에서 예술 작품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대형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스페인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의 작품인 ‘성모잉태’를 무자격 복원업자가 작업하면서 흉측한 ‘추상화’로 바꿔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위대한 화가의 작품을 자격이 부족한 사람에게 맡겼을까요? 

현지 언론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80대 여성 세실리아 히메네스의 원작 훼손’과 비견된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2012년 스페인 북동부 보르자 교외의 한 교회 벽에 걸린 예수의 그림을 선의로 복원했는데, 가시 면류관을 쓰고 박해받는 예수의 얼굴을 원본과는 전혀 딴판인 원숭이 같은 모습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같은 존재를 낳을 수 있는 분은 부모밖에 없습니다. 나는 온 우주의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리 봐도 나와 같은 존재를 다시 복원시키고 창조할 수 있는 생명보험을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창조자라고 하시는 분이 당신이 우리 생명보험이시라고 우리에게 아드님의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이제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위 청지기처럼 돈에 집착하고 관계에 집착하며 자기 생존을 책임지려 할 것인지, 아니면 신앙인들처럼 자기 생존을 하느님께 맡기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인지. 어차피 에덴동산에서도 아담과 하와는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믿을 것이고 집착하려는 사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자녀의 모든 집착에서 해방하는 유일한 법은 자녀의 생명보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모든 집착은 결국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모를 자기 생존을 위한 생명보험으로 믿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자녀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에게 정확히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느님을 생명보험으로 믿지 않아서 좋을 것은 잠깐의 집착과 쾌락입니다. 그리고 긴 양심의 가책과 고통 속에서 지옥을 간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약삭빠른 청지기처럼 되지 말고 절대 우리를 내쫓으실 수 없는 우리 아버지를 참 생명보험으로 믿기를 결심합시다. 그러면 탐욕에서 벗어나고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며 그러면 착한 사람이 되고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자유와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 보기에는 힘들고 어려운 것도 지나가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곤 합니다. 지금 보기에는 즐겁고 행복한 것도 지나가면 한 여름 밤의 꿈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진인사대천명’하라고 하였습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2019년 8월 21일에 한국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신문을 만들고, 홍보하는 일입니다. 의욕을 가지고 신문을 홍보하려고 하였습니다. ‘버지니아, 워싱턴, LA, 밴쿠버’로 신문 홍보를 하기로 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겪었던 것처럼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했습니다. 미사가 중단되었고, 가게도 문을 닫았고, 신문홍보도 모두 중단되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들이 모여서 함께하는 순교자 대축일 미사도 중단되었습니다. 생각하면 힘들고 암울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쉼표를 찍은 것이지 그것이 마침표는 아니었습니다. 퀸즈 정하상 성당은 사제들의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우드사이드, 롱아일랜드, 베이사이드 그리고 평화신문의 사제들은 자주 모여서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자전거를 함께 타기도 했고, 캠핑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지난 3년을 함께 보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사제에게는 사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김상균 다니엘 신부님은 건강이 좋지 못해서 부득이 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부르클린 성당에서 제게 주일 미사를 부탁했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주일미사를 도와드렸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다닐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3달만 도와드리기로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도 길어졌고, 부르클린 교구의 요청도 있어서 2년이 넘는 지금까지 주일미사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제게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사제들과의 친교와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의 만남은 제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시련과 고통이라는 쉼표를 찍으셨다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시련과 고통 앞에 좌절하거나, 낙담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도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축복과 은총이라는 쉼표를 찍으셨다면 겸손과 감사들 드리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과 은총을 나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라며 교만하게 지내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웃의 시련과 고통을 외면하는 것도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은 언제가 기뻐하고, 항상 감사드리며, 늘 기도해야 합니다. 3년 만에 한국순교자 대축일을 함께 봉헌하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한국 순교자 대축일 미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정하상 바오로 그리고 동료 순교자들에게 시련과 고통 그리고 순교라는 쉼표를 찍으셨습니다. 100년이 넘는 ‘박해’라는 쉼표를 찍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침표는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들판에 새싹이 피어나듯이 순교자들이 흘린 피에서 신앙의 꽃이 피었습니다. 순교자들이 묻힌 곳은 성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1984년 성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03위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그때 교회를 박해했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들은 풀잎 끝에 맺혀있던 이슬방울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미주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한인 성당들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퀸즈 성당은 정 하상 바오로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부르클린 성당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비록 고난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살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한국순교자들은 고난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순교자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한국순교자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분들을 성인품에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순교자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오늘 나에게 시련과 고통이라는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지고가면 좋겠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 은총과 축복이라는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 또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시련과 고통 그리고 은총과 축복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에 쉼표를 찍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그리스도 예수와 맺어진 사랑을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도, 박해도, 위험도, 칼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맺어진 하느님과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말씀과 실행 사이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가난을 선포하고 가난을 사신 예수님,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셨다. 실행에 옮기신다. 오늘도 자신을 찾으려 모여든 군중 속에 계시다. 말씀은 선포 되어야 한다. 선포는 실행으로 살아야 하느님 나라가 선다.

 

밖에 서성이던 마리아와 형제들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 이를 예수님께 건내주는 한 사람이 있다. "밖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들인가?" 내가 할 일은 하느님 뜻 따라 군중 속에서 내 어머니를 만나고 형제들을 만나게 하는 일이다.

 

말씀과 실행 사이는 항상 하나이어야 한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다. 머리에서 머물다가 실천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속적 셈법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저 앉고만다. 냉엄한 현실 속에 예수님께선 더욱 냉엄해 지신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도 또한 예수님이 계션던 그곳에 함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로부터 어머님과 형제들이 당신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시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개신교 신학자들은 예수님도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을 배척했는데 가톨릭에서는 왜 성모님을 공경하느냐하고 반박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대목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어머니이실 뿐 아니라, 그 어머니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 분이심을 더욱 강조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하신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모든 이들을 당신의 가족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인간적인 혈육의 관계를 뛰어 넘어 하느님 안의 참된 구원을 이루어가는 새로운 가족, 곧 혈연을 초월한 하느님 안의 신연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며 그분의 뜻을 함께 이루어 간다면 우리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 안의 참된 자녀들이며 가족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성모님의 모습처럼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며 주님과 한 가족인 그 영광을 영원히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했으면 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나와 관련된 주변상황의 질서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어머니 형제입니다.
내 존재유무 즉 내 존재의 근원인 에너지를 확실히 파악해야 합니다.
그 힘이 같으면 내 존재의 뿌리가 같으니 가족이상의 공감 형성되죠.

내존재 유무 문제인 하느님이 필연이고 다음이 혈연인 가족들입니다.
무엇을 어머니와 형제 혈연처럼 느끼고 사는 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혈연 말고도 세상에 사는 내 에너지 원천이 되는 것들은 다양합니다.

친구 기술 실력 사상 직업 재물 권력 욕구 등 찾으면 얼마든 있어요.
그러나 필연 외 혈연이나 나머지 우유적인 것에 빠진 사람들 많아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그분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영적인 관계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시고 계시다. 즉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강생 하시는, 그래서 나에게 있어 그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을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만든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밖에서 친척들이 찾는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21절)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으셨다거나, 당신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성경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고 잘 될 것이다.”(신명 5,16)고 하셨다. 그분께서 당신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형제들 뿐 아니라,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실 수 있었겠는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고 하셨다. 우리 모두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최우선으로 사랑할 의무가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더욱 들어 높이시는 말씀이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신앙이 구세주를 낳아주실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한다면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해주는 마리아와 같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의 형제도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말씀은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씀도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가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성모님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왜 신앙인들이 마리아를 공경하는지, 또 마리아를 닮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살 때에 우리는 올바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닮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올바로 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당신의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알았다. 오늘과 같이 각박하고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반성하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신앙을 점검하도록 하자. 즉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면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주님께 구하자.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군중들로 인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다른 이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이 새로운 가르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기존의 자신의 가족들을 부정하는 내용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에 대한 말을 듣고 이를 통해서 새로운 진리, 즉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의 새로운 가정을 알리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가정은 당연히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실행하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현재 우리는 이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형제 혹은 자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나의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실질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그분을 믿었기에 아버지가 아닌 진짜 우리들의 아버지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대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아버지고 교회공동체를 떠나서 자연히 우리는 형제, 자매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돌보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뜻을 따라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분은 선하시기에 우리도 선해야 하며 그분 자체가 사랑이시기에 우리도 사랑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기에 우리도 그분의 자녀라고 한다면 희생을 실천해야 함을 잊지 말고 오늘도 그분의 자녀답게 그분과 함께 하루를 시작합시다. 그분이 항상 지켜보고 계십니다. 아멘!

 

 

 

'분별' 루카 8장 19~21

       김연희마리아 수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
피를 나눈 가족이 사랑으로 느껴질때는
기쁨이든 고통이든 함께 할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족애를 지녔지만
공인이 어떠해야 하는지
냉철함을 보이십니다
어느 부인이 남편 회사를 자꾸 오든지
일하고 있는데 특별한 일없이 전화를
자주 하면 훼방꾼으로 여겨집니다
의사가 급한 환자 수술을 앞두고
딸이 다쳤다는 소식 듣고 달려간다면
그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닌것입니다
공과 사를 혼돈하거나
공과 사를 뒤섞어 살면 혼탁해집니다
공적인 모습이 발휘될때와
사적인 모습이 발휘될때와 시기를
분별할 줄 알면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근상 시몬 신부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예수는 그 때 가족만이 유일한 사회안전망인 세상을 살았다. 서로 기대고 지지하며 생존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바로 그 가족을 거슬러 낯선 이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예수의 무대책은 오늘 우리에게 실감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은 가족에게조차 잔인하고 부박한 시절 아닌가. 이 말씀을 읽으며 이것 보라구! 가족보다 더 중요한게 있잖아라며 내심 지가 하는 일의 정당함과 거룩함을 맨 윗자리에 두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독이 되는 말씀.

이걸 가족이야기로 읽는건 오독이다. 자기에게 힘이 되어주는 이들 대신 자기 자신이 힘이 되어주어야 하는 '가난한 이들'을 선택한 이야기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루카6장)처럼 짜드락하게 뭘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 기대어 그처럼 가난하고, 굶고 있고, 울고 있는 이들의 편이 되어 그들과 함께 하는 이들을 말한다.

다시말해서 병들고 힘도 없는 부모가 가진 재산도 없다면 그렇게 예수의 가난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다면 바로 그가 내 참부모라는 말씀이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 쌓여 있는 예수님을 찾아 찾아온
어머니와 친척들을 매정하게 외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낯설게 느껴집니다.
군중들의 환호에 도취되신 예수님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실행하고 계셨지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보다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어머니가 어머니로 공경받는 참 이유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충실히 실행했던 신앙의 모범이었던 것 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새기며
하루의 삶 안에 실행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 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act on it.

 

 

 

끝까지 십자가를 지는 삶

     차동욱 시몬 신부님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삶을 직접 실천하였습니다. 가족과의 인연이나 평온한 삶에 연연해 하기보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며 죽음도 각오하였지요. 우리가 사는 지금은 그 옛날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 해서 당장 죽음을 맞는 그런 위험한 시대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십자가 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부활을 믿고 기대하는 안일한 믿음입니다. 그것은 희생 없이 영광만 누리겠다는 가짜 신앙이지요. 최인호 작가는 살아생전 삶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통곡하며 살고 싶다. 나는 대충대충, 생활도 대충대충, 만남도 대충대충, 일도 대충대충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일에 통곡하는 그런 열정을 지니고 살고 싶다. 어찌 사랑뿐이겠는가. 나는 친구도 통곡하고 사귀고 싶고, 꽃 한 송이도 통곡하며 보고 싶다.” 꽃 한 송이를 바라보는 것도 열정을 다해 느끼기를,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작가는 ‘통곡하며 살고 싶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통곡하듯 열정 가득한 신앙이 지금 우리가 지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입니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간다면, 우리의 생이 다할 때 순교자들에게 내렸던 영광이 우리에게도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익어가고
영글어가는
가을소리를
가을 풍경과
함께 듣습니다.

먼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먼저 듣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말씀에 마음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먼저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말씀에
집중할수록
삶은 달라집니다.

말씀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과 함께
하는 여정이
신앙의 참된
여정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생활 신앙이
참으로
중요한
신앙입니다.

생활 신앙은
먼저 말씀을
듣기에
새로워질 수
있는 이들입니다.

새로운 변화는
우리가 제대로
듣는 변화입니다.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시작은
이와 같이
경청입니다.

사람의 성장은
경청의 성장입니다.

먼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변화는 말씀이며
실행은 경청입니다.

기도도
소통도
관계맺음도
모두가 제대로
듣는 경청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오늘을 말씀을
듣는 마음과 함께
시작합니다.

익어간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
마음이 익어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들어야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자아에
갇혀 있기에
우리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이기적인 자아를
치유하는
그 시작은
먼저 말씀을 듣는
실행임을 기억하는
기쁜 오늘 되십시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는 것만 같습니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켜 놓고 열심히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책을 읽으면 편한 마음이 생길까요? 아무도 없는 우리 집보다 더 편한 곳이 있습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 편합니다. 왜 그럴까요? 모두 책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오히려 스마트폰을 보고 있으면 어색해지고 불안해질 것입니다.

함께 같은 것을 할 때 편안해지고 기쁨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도 한 편에서만의 짝사랑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랑이 더욱더 기쁜 것입니다. 혼자 하는 사랑은 어색하고 여기에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함께 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하는 사랑이 많아질 때, 마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이 편한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편해지고 더 많은 사랑을 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누가 예수님께 성모님과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알려 줍니다. 이때 어떤 행동을 하셨어야 할까요? 맨발로 어머니와 형제를 만나러 가야 할 것만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과 형제를 반가워하지 않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정말로 반갑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 안에서 피로 맺은 가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가족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혈통과 가족 관계에 따라 이스라엘의 구성원임을 인정하는 구약성경의 친족법을 의식적으로 뒤엎으시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가족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라면서 그 공동체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집니다. 하느님 가족의 숫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 자신부터 사랑을 실천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부터 시작하는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사랑의 실천은 편안해지고 더불어 큰 기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하느님 가족이 대가족이 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사랑하도록 합시다.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게 늘어나면 변화가 일어난다(마이클 버나드 벡위스).

 

너무 빨리 늙어가는 우리.

‘사람은 왜 이렇게 빨리 늙을까?’라고 말하는 어느 작가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작가는 100세 인생이니까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한 60살까지는 20대 초반의 체력, 외모를 유지하며 신나게 놀다가, 80살까지는 지금 모습 그대로 열심히 일하면서 세계 각지로 여행도 다니고, 그 후 80대 즈음에야 슬슬 늙어가며 여생을 보내면 좋을 텐데……. 100세 인생인데 젊은 날이 너무 짧다.”

공감이 갑니다. 젊었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했지만, 금세 어른이 되고 늙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안이 오고, 뜀박질도 못 하겠고, 어디 가는 것이 귀찮다는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이제 젊은이라고는 못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이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남아 있는 날의 가장 젊은 순간을 사는 지금을 더 충실하게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가 제게 각별히 좋아하는 구약 성경을 꼽으라 하신다면 코헬렛과 잠언이라고 말합니다. 코헬렛과 잠언은 구약 성경 속 지혜 문학의 쌍두마차입니다.

코헬렛은 인생의 산전수전과 허망함을 경험한 현인의 지혜로 가득합니다. 모든 것이 헛된 인생사안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최고의 선택임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잠언은 각자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지혜를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잠언이 다루는 주제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직면하는 문제들입니다.

 

가끔씩 세상과 인간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할 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앞에 섰을 때, 제가 즉시 펴드는 책이 코헬렛이요 잠언입니다. 쿵쾅거리는 마음을 일단 진정시킨 후, 심호흡을 좀 하다, 천천히 코헬렛과 잠언을 펴서 읽기 시작하면, 오래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잠언 속 지혜의 스승들이 외치는 권고들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촌철살인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을 자극하고 일깨웁니다. 지혜의 스승들은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우리에게 잠깐 브레이크를 잡으라고 외칩니다. 급히 가던 길을 멈추게 하고,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라고 권고합니다.

잠언 속 현인들은 분노하고 힘겨워하는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시킵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사건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문제를 한템포 늦춰서 바라보도록, 객관적 입장,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보도록 요청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도록 안내합니다.

대표 저자인 솔로몬은 잠언을 통해 거룩하고 고상한 일들 뿐만 아니라, 의식주를 포함한 매일의 평범한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역사하시기에, 주님 마음에 들게, 지혜롭게 처신할 것을 당부합니다.

솔로몬은 참으로 박학다식했고, 지적 탐구심이 강했습니다. 그는 한 인간의 구체적이고 세부족인 삶의 요소 하나 하나를 주님 지혜의 눈으로 바라고자 노력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끝도 없었습니다. 개인의 행실, 남녀관계, 사업, 부, 자선, 야망, 훈육, 빚, 육아, 성품, 술, 정치, 복수, 경건...그 숱한 주제들에 대해서 잠언은 소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잠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지혜를 구하고, 얻고, 깨달으라고 권고합니다. 잠언은 또한 반복하여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강조합니다.

잠언은 금언, 비유, 속담, 격언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한자어 '잠언'(箴言)을 풀이하면 ‘바늘로 찌르는 말씀’입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잠언 내용의 대부분은 금언, 속담, 격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이 어렵지도 않고, 짤막하고 간결합니다,

읽어 내려가다보면 요즘 시대와 부합하지 않은 부분도 있으니 잘 새겨서 읽으셔야 합니다.

 

“아이를 훈육하는 데에 주저하지 마라. 때로 때려도 죽지는 않는다. 아이를 매로 때리는 것은 그의 목숨을 저승에서 구해 해는 일이다.”(잠언 23장 13~14절)

 

자녀 교육에 있어 체벌을 정당화하는 뉘앙스인데, 요즘 그랬다가는 큰 일 나니 절대로 그러시면 안됩니다.

반면에 오늘 날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유용한 구절이 있으니 바로 술꾼들에 대한 충고 말씀입니다.

 

“빛깔이 좋다고 술을 들여다보지 마라. 그것이 잔 속에서 광채를 낸다고 해도, 목구멍에 매끄럽게 넘어간다 해도 그러지 마라. 결국은 뱀처럼 물고 살무사처럼 독을 쏜다. 네 눈은 이상한 것들을 보게 되고 네 마음은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게 된다. 너는 바다 한 가운데에 누운 자와 같고 돛대 꼭대기에 누운 자와 같아진다. <사람들이 날 때려도 난 아프지 않아. 사람들이 날 쳐도 난 아무렇지 않아. 언제면 술이 깨지? 그러면 다시 술을 찾아 나서야지!> 하고 말한다.”(잠언 23장 31~35절)

 

술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진작 읽었으면 참 좋았을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로 봉독하는 말씀들도 귀담아 들을만 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 21장 3절)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잠언 21장 12절)

 

 

 

가족과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께서 매정하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모질게 대하실까요?

가족은 정말 지긋지긋하지만 버릴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관계일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가장 많이 사랑을 받기도 합니다. 이상하게 가족인데도 만나면 서먹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더 외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정말 가족을 만나면 외롭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의 성모 마리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서먹하고 외로우셨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기쁘셨을까요?

먼저 사람이 왜 외로워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해답은 안데르센 동화 ‘미운 오리 새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안데르센은 어머니가 창녀였습니다. 그나마 안데르센을 잉태하고 결혼했지만, 그마저도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살하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다면 자녀는 올바로 클 수 없습니다. 마를린 먼로를 보면 압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버림받고 고아원을 전전하며 자랐습니다. 사랑을 그토록 원했지만, 사랑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때, 그것이 자신이 찾던 것이 아니었음을 느끼고는 약물중독으로 사망합니다.

반면 안데르센은 어떻게 저런 환경에서 자라나 그 많은 명저를 남길 수 있었을까요? 미운 오리 새끼가 외로웠을 때는 자신이 오리인 줄 알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백조임을 알고 백조 무리에 있을 때는 행복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백조가 오리 무리에서 자라면 왠지 오리 부모가 시키는 것이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서먹해지는 것입니다. 가족과 있어도 외롭습니다.

 

사춘기 이전 아이들이 외로워 보이나요? 일반 가정이라면 외로움은 사춘기 때 시작됩니다. 사춘기 이후 부모가 더는 아이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몰입하지 못할 때 느낍니다.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 외롭나요? 외롭지 않습니다. 몰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몰입하고 있으면 내가 외롭다고 말해 줄 자아가 그 말을 할 기회를 잃습니다.

사춘기 이전 자녀들은 부모의 뜻에 무조건 따르면 되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부모가 더는 그 역할을 해 주지 못합니다. 그럼 누가 해 줘야 할까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그 사람에게 순종하면 외롭지 않나요? 이제 머리가 커서 웬만한 사람에게는 순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순종하여 그 사람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일에 몰두할 때 외로움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이 되시어 당신 뜻에 순종하여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가족은 피를 나눈 공동체입니다. ‘피’ 안에는 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뜻’도 들어있습니다. 부모의 뜻은 자녀들이 어릴 때까지만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피입니다. 하느님의 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인간의 피는 유한하지만, 하느님의 피는 무한한 결속력을 지닙니다. 그 피가 성령이시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족 안에 들어오시면 그 가족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영원한 결속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족이 그래서 끝까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 그 가정에 성령께서 오시면 그 가족은 영원히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하느님 뜻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골고타까지 아무 말 없이 따라가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니 외롭지도 않고 그래서 서먹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핏줄이라는 끊어지기 쉬운 줄을 놓고 하느님의 핏줄이라는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우리 가족을 묶읍시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는 사람은 외로움을 모르고, 그러한 가정은 끊어질 수 없는 결속력으로 행복한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외국은 처음에 코로나19에 대해서 경각심을 크게 갖지 않았습니다. 마스크 착용을 거의 하지 않았고, 거리두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감염 된 후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습니다. 뒤늦게 봉쇄와 단절을 시작했지만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으며, 거리두기를 잘 지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외국의 경우에 코로나19 확산의 주된 원인은 경각심 부족이며 그로인한 방역의 실패입니다. 

 

메르스 사태를 경험한 한국은 코로나19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졌고, 방역에 집중했습니다. 시민들도 정부의 정책에 협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코로나19가 확산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신천지’에 있었습니다. 신천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모략전도라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천지는 밀착예배라는 독특한 예배방법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확진자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밀착예배는 바이러스 전파에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처음 한국에서의 확진자의 대부분은 신천지와 관련되었을 정도입니다. 의료진의 헌신과 정부의 노력 그리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한국은 신천지로 인한 코로나 확산을 막을 수 있었고, 코로나19의 방역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최근에 또다시 대규모 확진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긴 대규모 집회와 교회를 통해서 확진자가 늘어났습니다. 일부 교회의 목회자와 신도들은 정치와 방역을 혼동하였습니다.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반대할 수 있고, 집회를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기에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엄중한 시기에 집회를 하더라도 방역지침을 준수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더라도 방역지침을 준수해야 합니다. 자가 격리 대상이 되면 지켜야 됩니다. 그래야 본인은 물론 이웃을 보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방역을 혼동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검사를 거부하고, 확진으로 입원했지만 도망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코로나19는 신앙이 없습니다. 코로나19는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저 생존을 위해 사람을 숙주삼아 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코로나19는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방역의 차원에서 막아내야 합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모략전도로 사람들을 자신들의 모임으로 끌어들이는 행위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정치와 방역을 혼동하며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는 행위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목적이 좋다고 해서 나쁜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인의 태도는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참된 신앙인은 혈연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은 종교의 이름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하느님의 말씀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귀로 듣는다

귀로 전한다

 

눈으로 본다

눈으로 건넨다

 

입으로 먹는다

입으로 외친다

 

마음으로 느낀다

마음으로 보낸다

 

손으로 만진다

손으로 나눈다

 

발로 딛는다

발로 옮긴다

 

삶으로 듣는다

삶으로 행한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혹자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마치 혈연은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 안의 영적 인연만이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 우리가 아는 십계명에서 4계명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혈연만을 중시하는 삶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영적인 인연 곧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요 가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을 강조하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요 가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말씀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에 SNS상의 어느 동영상을 보니까 어떤 아이가 노래를 하는 데 랩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노래하는 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며 악의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것에는 감탄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아이가 그렇게 어릴 적부터 공격적인 가사를 되뇌면서 성장했을 때 과연 그 아이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그 삶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생각대로의 삶을 함께 이루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주님의 말씀 속에 참된 진리와 정의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대로의 삶을 이루어가는 이에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또 다른 시선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인간의 시선은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 다시 혈연에 집중된다. 직계는 더욱 그러하다. 언제나 관심은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으로 작용한다. 혈연에 집중되는 것을 그 어떤 것으로 누구도 방해되서는 안 된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상황은 군중에 쌓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게된다. 군중에 쌓여 있는 예수님을 떼 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 것이다. 이 시선은 인간이 갖는 소극적 시선이며 혈연이 갖는 시선이다. 이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시선이다. 밖에서 우리의 본질을 정확히 들여다 보는 시선이다. 그 시선은 인간의 한계를 파격하는 적극적 시선이다. 예수님께서 군중에 쌓여 있는 것은 혈연의 관계를 넘어 모두에게 열려진 시선이다. 인간의 시선이 필요하나 믿음의 사람은 또 다른 시선으로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군중을 향하는 시선을 지녀야함을 깨닫게 한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19-21)

 

 

 

<예수님의 참가족>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화요일>(2020. 9. 22. 화)(루카 8,19-21)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9-22).”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가족과 육적인 가족을 대립 관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큰 가정’이고, 각 가정은 ‘작은 교회’ 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은 신앙생활의 동료이면서 동시에 가족이고, 가정의 식구들은 가족이면서 동시에 신앙생활의 동료입니다.

신앙생활과 가정생활은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생활이 아니라,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하는 하나의 생활입니다. ‘가족’이라는 말은 아직 신앙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입니다. (교회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그들 자신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들 가운데에는 가족을 멀리하라는, 또는 버리라는 가르침으로 오해할 수 있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

 

이 말씀들은 실제로 가족을 멀리하거나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먼저 자기 가정에 헌신하고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1티모 5,3-4).”

“어떤 사람이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믿음을 저버린 자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1티모 5,8).”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그들은 나의 가족이 아니다.” 라고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가족들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영적인 참가족’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이라는 말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따라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는 말씀은, ‘영적인 참가족’의 정의를 내려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참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나의 참가족이 되기를 바란다면, 즉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는 것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뜻을) 실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는 방법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모든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의 계명들을 (명령들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합니다. (그것은 그 계명들을 실천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계명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는 믿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는데, 머리로만 믿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과 생활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과 종교생활을 구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사 참례 잘하고, 공동체의 전례나 행사나 활동에 참여하는 일도 잘하는 것은 종교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생활을 잘하는 것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도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생활은 잘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주님께서 바라시는(명령하시는) 일들을 제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잘 안 보일 때가 많지만, 주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간에 충실하게,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바위’와 비슷합니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루카 8,13).”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또는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않은 사람은, 신앙에 뿌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뿌리가 없는 신앙은 얼마 가지 않아서 말라 버리게 됩니다(루카 8,6).

 

 

 

인간의 고귀한 정신이 하늘소속이기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영적 형제관계 발표는 인류 진화의 혁명적 차원이라 봅니다.

예수님은 생물학적 혈연장벽 넘어 인류가족이란 단계로 높여주십니다.

하늘 아버지를 모름에서 알게 하는 것은 인류 진화의 혁신교육입니다.

 

의형제도 가짜서류작성 혈서로 약속된 형제가 아니라 원천사실입니다.

이성적 동물로 자라며 급성숙하는 뇌기능의 마찰문제를 해결하셨지요.

육체는 물질 세상에서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왔음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인간의 고귀성은 그 정신(혼)이 하늘나라 소속이기 때문임 깨달읍시다.

인간고귀성의 근원이 있어야 정상진화 가능하다고 느끼시면 남다르죠.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와 더 가까워지고자 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21)

우리는 언감생심 주님의 가족이 될 꿈을 꿀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은 혈연, 즉 핏줄에 기인해서 이어지는 관계성인데, 예수님과 우리는 시대와 인종, 민족, 출신 등등 거의 모든 면에서 공통분모가 없으니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족의 의미를 재정립하십니다. 핏줄에 기인하지 않는 예수님의 가족은 무한히 확장될 가능성을 안고 있지요. 하느님의 말씀이 온 세상 어디에나 선포되듯이, 그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 역시 온 세상 어디서나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마리아와의 가족적 연관성을 부인하시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오늘은 비록 군중 때문에 밖에 서서 예수님 가까이 갈 수 없으셨지만, 말씀을 듣고 실행한 가장 탁월한 모범이요 증인이십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계시니, 성모님만큼 말씀을 듣고 실행해 열매를 맺은 이는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오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듣고 머무르고 되새기고 품고 실행하는 말씀이 우리를 엮어 한 가족을 이루게 해 주었지요. 그런데 말씀은 지적 유희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식과 식견을 쌓는 것과 주님의 가족이 되는 일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은 듣는 이의 실행을 통해 진정으로 완성됩니다.

 

제1독서에서 나오는 여러 잠언 중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 21,3)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의례를 행하고 제물을 바칩니다. 말하자면 절대자에 대한 경외와 찬양의 표현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제물보다 자비와 사랑을 바란다고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를 위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일은 하느님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목소리조차 낼 줄 모르는 이들의 외침이 되어 주고, 친구가 되어 주는 일은 육화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이제 우리가 그분 대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분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꿈을 실현하라고 하십니다. 이쯤 되면 주님과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읽고 실행하는 경지이니 최상의 가족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바람은 우리 모두가 더 친밀히 연결된 당신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눈빛만 봐도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독이고 일치하는 진짜 가족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도 주님의 가족입니다. 각자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을 각자가 처한 환경과 실존 안에서 실천하려 애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지요.

오늘 우리를 당신 곁으로 끌어당겨 가족의 연으로 품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가족으로 불러주신 주님께 더 달아드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교회는 포도나무처럼 자라나 온 세상에 퍼져 나갔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8-19: CCL 41,544-546)

“내 양들은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온 세상에 흩어졌다.” “온 세상에 흩어졌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온갖 지상적인 것을 따라가고 지상의 표면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고 사랑함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지게 하는 그 죽음으로 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지상적인 것을 사랑하고 길 잃고 헤매고 있기 때문에 온 세상에 흩어진 것입니다. 이런 양들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한 어머니이신 가톨릭 교회가 낳은 것처럼, 그들도 모두 한 어머니인 교만이 낳은 것입니다.

 

따라서 교만이 분열을 낳게 하는 것처럼 사랑이 일치를 낳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한 어머니이신 가톨릭 교회와 그 교회 안의 한 목자께서는 어디에서나 헤매는 이들을 찾으시고 허약자를 굳세게 하시며 앓는 이를 돌보시고 상처 입은 이를 싸매 주십니다. 교회가 어떤 이들은 이런 곳에서 찾고 또 다른 이들은 저런 곳에서 찾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네들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교회는 모든 이와 합치되어 있으므로 그들 모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라나 온 세상에 퍼져 나간 포도나무와 같고 그들은 열매 맺지 못하여 농부의 낫으로 교회라는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쓸모 없는 가지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포도나무를 모조리 잘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잘려진 가지는 잘려진 바로 그 곳에 남아 있지만 그 포도나무는 모든 곳으로 자라나 붙어 있는 가지도 알고 있고 잘려져 떨어져 있는 가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아직 헤매는 이들을 되부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진 이 가지들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여 주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 때를 떠나 헤매는 양들이건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이건 최고의 목자이시고 참된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양들을 되부르시고 또 가지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 양 떼는 온 세상에 흩어졌지만” 그 악한 목자들 중에 “그들을 찾아 다니는 목자는 하나도 없었도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나는 내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증거로 삼아 맹세하십니다. 목자들은 죽었지만 주님은 살아계시므로 양들은 안전합니다. “나는 내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런데 죽은 목자들은 어떤 목자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익을 찾지 않고 자기 이익만 찾는 목자들입니다. 자기 이익을 찾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익을 찾는 목자들이 앞으로 있겠고 또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있을 것이고 또 분명히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멋지고, 맛있고, 아름다운 삶 -말씀 예찬-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제 취미는 단연 사진찍기와 독서입니다. 자연사진도 좋지만 인물사진도 좋습니다. 까닭을 어제 분명히 알았습니다.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 모습들입니다. 정말 마음이 예쁘니 얼굴도, 모습도 예쁨을 실감합니다. 나이 70넘어 이런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깨달으니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어느 수녀님이 수녀원 정원 사진을 보내 줬기에 수녀님의 마음이 고마워 다음 같은 메시지를 나눴습니다.

-“아침 선물 감사합니다. 거기 수녀원 정원도 깊고 아름다운 숲같습니다! 그러나 나에겐 수녀님 마음의 숲이 훨씬 깊고 아름답지요!”

“신부님! 말씀에 힘이 나네요.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 ‘마음의 숲’처럼 아름답고 깊습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사랑의 눈에는 모두가 아름답게 보입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누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는 아름답다(Each one is beautiful to God who loves us).’

그렇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의 눈으로 보면 고유의 '결'과 색깔과 향기를 지닌 아름다운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체험도 생각납니다. 주문한 두권의 책을 받아 열어 봤을 때 책 표지의 디자인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책 내용도 깊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책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부른 느낌입니다.

예전 미국 생존 수도원에서 잠시 머물 때, 아름다운 환경에 신선하고 향기로운 공기를 숨쉬며 먹지 않아도 배불렀던 느낌과 흡사했습니다. 아름다움에 취하면 그 행복에 침식寢食도 잊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라는 책 제목입니다. 아름다움은 발견이자 또 지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책 소개글도 좋았습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아름다움이 거기 있었던 것 같다. 읽는 내내 그 질문 겸 감탄사를 들었고 또 따라했다. 아름답지요?”

제가 요즘 자주 쓰는 말마디 역시 ‘아름답네요!’, ‘멋지네요!, ’예쁘네요!‘라는 표현입니다. 어제도 몇분의 사진을 찍어 전송하며 나눈 덕담입니다.

“시처럼 늘 멋지고 예뻐요! 늘 이렇게 사세요!”

“너무 멋지고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고 활기찬 청춘같아요! 늘 이렇게 사세요”

며칠전 읽은, 내용이 깊고 아름다워 메모한 글도 나눕니다. 귀농하여 18년동안 농사짓고 있는 50대 중반의 어느 자매입니다.

“귀농은 디자인이예요. 단순히 지역만 옮겨가는 게 아니예요. 일상생활을 새로 디자인해야 해요. 작게 쓰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 놓을 줄 알아야 맘 편하게 살 수 있어요. 본인에게만 맞춰 디자인을 해서는 안되요. 가족 구성원 모두가 그런 생각을 공유해야 하고, 모두가 어지간히 활동할 수 있는 그런 곳을 얻어야 해요.”

귀농만 아니라 우리 삶도 디자인입니다. ‘삶의 디자인’ 참 멋지고 아름다운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디자이너입니다. 하루하루 생각없이 되는 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아름답게 삶을 디자인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 자체입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 하고 정화하며 치유하고 구원합니다. 어떻게 삶을 아름답게 디자인하며 살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말씀에 맛들이는 것입니다. 세상에 말씀보다 아름다운 것은, 맛있는 것은 없습니다. 누가 저에게 무슨 맛으로 사느냐 묻는 다면 저는 지체없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말씀 맛으로, 기도 맛으로, 찬미 맛으로, 바로 하느님 맛으로 삽니다. 말씀 맛이 바로 하느님 맛입니다.”

맛과 멋이 통합니다. 맛있는 삶이 멋진 삶 아름다운 삶입니다. 참으로 말씀 맛, 하느님 맛으로 살 때 비로소 영육의 건강에 아름다움이요 세상 맛, 육신의 맛을 넘어설 수 있입니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먹는 재미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느냐?’ 종종 듣는 말입니다.

식욕食慾, 성욕性慾, 물욕物慾, 근본적인 욕망입니다. 지나칠 때 중독입니다. 식食중독, 성性중독, 돈중독될 때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제가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다’ 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말씀의 맛에, 말씀의 아름다움에, 하느님 맛에,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미칠 때 참 아름다운 사람, 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에워싸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은 아주 짧지만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바로 당신을 에워싸고 말씀 맛에 심취하여 듣고 있는 자들을 지칭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시간과 장소는 문제가 안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계시며, 바로 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참가족이란 말입니다.

말씀의 맛, 말씀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하느님 맛,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말씀 맛, 말씀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말씀을 실행할 때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다음 제1독서 잠언의 하느님 말씀도 우리를 각성覺醒케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삶의 디자인에 하느님 말씀의 실행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말씀 맛을, 말씀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 맛이 날로 깊어갈 때 멋진 삶,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입니다. 바로 복음 환호송이 이를 요약합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루카11,28)

오늘 화답송 시편 119장은 그대로 말씀 예찬입니다. 시편집에서 가장 긴 시편으로 무려 176절까지 계속되며 오늘 시편은 그 일부에 속합니다. 말씀이 얼마나 우리 영적 삶에 결정적인지 구구절절 공감에 감동입니다. 몇절만 인용합니다.

1.“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이들!”

81.“제 영혼이 당신 구원을 기다리다 지칩니다.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97.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103.당신 말씀이 제 혀에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도 답니다.

105.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127.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

130.당신의 말씀이 열리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이들을 깨우쳐 줍니다.

131.당신의 계명을 열망하기에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147.새벽부터 일어나 도움을 청하며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12,7."주님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 흙 도가니에 일곱 번이나 정제된 순은이어라.

말씀이 얼마나 좋습니까! 결국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은, 목마름은 말씀에 대한, 하느님께 대한 배고픔이자 목마름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이런 말씀의 실행과 더불어 깊어지는 주님과의 일치요, 성령 충만, 생명 충만, 빛 충만한 삶이 될 것입니다. 비로소 예수님의, 하느님의 참가족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 의를 따라 걷게 하시고, 겸손한 자 당신 도를 배우게 하시나이다." 아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함승수 신부님

 '가족'을 소재로 다양한 영화를 연출해온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 중에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유사가족', 즉 혈연이라는 법적 관계로 묶이지는 않았으나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요. 이 가족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빠인 '오사무'와 엄마인 '노부요'인데, 이들이 갈 곳 없고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이들을 한 사람씩 데리고 오다보니 총 여섯명에 달하는 '대가족'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끈끈한 유대감으로 묶여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이나 윤리관념도 없고, 자본주의 시대에 남들과 경쟁하여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하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며 또한 넉넉합니다. 항상 천진난만하던 아빠 '오사무'는 아들 '쇼타'가 친부모를 찾게 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자 헤어짐의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쇼타가 탄 버스를 쫓아 전력질주합니다. 딸인 '유리'는 '진짜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음에도 '가짜 엄마' 노부요를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고레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습니다. '혈연'으로 뭉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살면서 관계가 삐걱거릴 때마다 그렇게 만든 이유를 찾아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가족이니까 참아야 한다'며 '의무감'이라는 반창고를 붙이고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정말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단지 '피가 섞여서' 같이 살게 됐을 뿐인 가족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함께 살려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진짜 가족'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과의 관계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진짜 가족'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혈연처럼 수동적으로 부여된 관계도, '가족이니까 무조건 참아야한다'는 식의 의무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에  그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사랑'이 더해져야만 '진짜 가족'이라는 끈끈한 유대로 묶여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아도, 주일미사에 참여하여 봉헌금을 내도,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신앙생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데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한다면 하느님의 '진짜 자녀'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진짜 가족'이 되기 위한 노력, 그분과 진정으로 일치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이들만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족 사랑 

     김효석 요셉 신부님

성모님과 친척들은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가족은 늘 함께 지내고, 언제든 원할 때마다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은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갔으나, 군중에 막혀 그분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과 가족을 갈라놓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가족보다 군중을 더 가까이 하신 걸까요? 군중 때문에 예수님은 가족을 버린 걸까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군중 속에 있던 사람이 예수님께 당신 가족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족들이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가족이 된다고 알려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진정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혈육의 관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지향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 가족을 통해, 군중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군중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군중은 예수님의 가족을 통해 주님의 가족이 될 길을 발견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사람을 갈라놓지 않고,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가 되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가족애도 깊어집니다.

 

 

 

하느님의 불으심은 받은 사람 복되도다.<9/9-13.>9/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높은 사람이 불으면 지체 없이 다려 가는 사람 복된 사람입니다. 에페서 1/18-19 에 하느님의 부르심은 희망에 차고 영광스럽고 부요한 상속을 받고 강력한 힘의 작용에 의해 하느님의 권능이 얼마 큰지를 깨닫게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불으심은 우리에게 강력한 힘으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하고 누리게 합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불으시는가? 바리사이들이 마란 것처럼 주님의 찬지 상에는 세리와 죄인들 어울리고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권력자 재력가 명예로운 사람은 부르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부르셨고 그 들은 모든 풍요롭게 하시며 하느님의 권능에 참례시키십니다.

가난한자는 불으심에 우선권이 있습니다. 아니 가난한자와 함께 일하시려 하십니다.

저는 불으심에 꿈은 초등하교 촐업 때 친구 세이 천주교 신자였는데 함께 놀다가 소신하교를 가자하여 준비하다가 차별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부자 집 아들이고 한 아이는 밥은 먹고 사는 사람이 였고 저는 6학년 공납금을 내지 못하여 졸업식에 참례 못할 정도여서 졸업장도 못 받은 가난뱅이 였는 데 한사람은 부모님의 반대로 못 기고 한사람은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들어가고 저는 준비 못하면 옷이라도 한 벌 해 입고 오라고 하여도 그것마저 할 수 없어 못 들어가고 8년 후에 왜관 수도원 입회를 하였습니다. 8년 동안 온갖 고통을 다 격고 세상에서 피난 노동 장사 쓰레기 조합 일꾼 조수 17에 운전하다 경찰에 결려 유치장 까지 경험하고 1956년 대신하교 입학 사제로 불리워 1963년 12월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모든 과정을 돌아보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시련이며 희망이었습니다.

성경의 부자 청년은 가진 바를 다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하였지만 그는 부지여서 응하지 않아서 근심찬 얼굴로 불으심에 응하지 못하고 세상에 머물려 살게 되었습니다.

이상 하리 만금 성당에는 가난한 사람으로 가득하고 힘이 없는 노인들만 넘치는 이유는 가난하기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겸손하게 응답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첫 본당이 지금은 공업단지가 되었지만 시골 가난한 동래여서 가난한 사람들과 사는 것이 운명이었지만 할일은 많이 있어 34세 농촌운동 외 가난한 집 아이들 중하교 고등하교 대학교 등록금 대주고 공부하도록 하고 청년들 일짜리 만들어 주고 농한기를 없이 일하도록 농산물을 추운겨울에도 도마도 오이 상추 제배를 하면서 교회가 없는 곳에 공소 짖고 한곳에는 150명 합동 세레식도 하고 환등기를 들어 매고 시골 공소에 까지 일하니 그당 시 김 추기경 가톨릭 신문사 사장님이 었을 때

잘한다고 친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소신하교부터 시작하였으면 조금 고급 사제가 되었을 것인데 제일 밑에 그당시 부자 집 학생은 유학을 가고 이름 있는 사제로 살았지만 수도원 들어와서도 제 밑으로 거이 유학을 갔다 왔지만 저는 나이 60이 돼서야 로마를 거처 이스라엘 까지 성지순례를 하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여기 있습니다.” 응답의 결실이라 생각하고 감사기도들이며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세리인 마태오를 부르시고 따르라고 하신다. 우리를 부르시는 자리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자리가 아니라 부족하고 죄스러운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인간의 본성은 그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예수님이 부르시고 계신다.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나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서 그분이 나를 부르시고 계심을 다시 알아 듣는 하루가 되고자 한다.

가을의 정취가 한 몸으로 다가 온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영명축일을 맞으신 분들 축하드립니다. 성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 참조)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다른 사람의 좋은 점과 가능성보다는 안 좋은 점과 현실의 모습으로 평가하고, 그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하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평가절하면서 바라보고 기억하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태오에게 “나를 따라라.”(마태 9,9) 하고 부르시고는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러자 마태오의 동료인 세리들과 죄인으로 낙인찍힌 친지들이 같이 와서 식사릏 함께하게 됩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비난 섞인 말을 내뱉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11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지적을 들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어르신들이 가끔 하시는 말이 귀에 쟁쟁하게 울려퍼집니다. “사는게 죄지요.” 살면서 문득 문득 우리 모두 죄인임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주님께 기꺼이 다다르며 주님과 형제들 앞에 겸손되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며 새로워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하는

말씀이다.

 

말씀

한 마디가

우리를 살린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점점 더 말씀을

믿게되고

사랑하게 된다.

 

말씀과 실행은

분리될 수 없다.

 

말씀으로

정화되고

 

말씀의

실천으로

깊어진다.

 

말씀과 함께

말씀 안에서

바라보아야할

우리의

관계이다.

 

관계의 방향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하느님 말씀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귀 기울여 듣는

경청의 가족이

되게한다.

 

가족은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간다.

 

가족의 인연은

말씀의 인연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가족의 힘은

말씀의 힘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거기가 가족이다.

 

실행하는

가족의 얼굴은

말씀의 얼굴이다.

 

말씀이 엮어주는

복음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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