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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9월 25일 (녹)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09.25|조회수90 목록 댓글 0

제1독서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 잠언의 말씀입니다. 30,5-9
5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신다.
6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마라.
그랬다가는 그분께서 너를 꾸짖으시고 너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7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8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9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3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잠언의 저자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시라고 주님께 간청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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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르가 전하는 잠언에서 아름다운 기도를 듣는다. 기도하는 사람은 두 가지를 간절하게 청한다. 허위와 거짓말을 멀리할 수 있기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기를 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낫게 하라고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신다. 또한 길을 떠날 때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 것이며,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을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무르라고 이르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일상적인 생활 태도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특별히 복음을 선포하러 떠날 때의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러 떠날 때, 인간적인 준비와 계획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빈손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니고 가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힘과 권한”(루카 9,1)입니다. 
그 힘과 권한이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합니다. 다른 어떤 준비는 없습니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면, 그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안전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순간에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복음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 머물라는 말씀도, 더 좋은 곳을 찾아 옮겨 다니지 말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라는 뜻입니다. 음식도 준비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러 떠날 때 그를 맞아 주는 이가 있다면 그렇게 주어지는 상황을 감사하며 받아들이고 더 좋은 집, 더 나은 대접을 찾아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오늘 복음의 말씀을 꼭 글자 그대로 따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만 하더라도 필리피 신자들 말고는 다른 이들에게서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았고 자기가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하며 복음 선포의 일이 자기가 계획한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주님께서 주신 “힘과 권한”이나 그분께 받은 파견의 자리는 없습니다. 파견은 내 계획과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힘과 권한”을 지니고 어떤 상황 속에 내가 던져지는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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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쌍을 이루고 함께 나아갑니다. 말하자면 복음 선포는 인문학적 소양이나 객관적 지식의 함양과는 결을 달리하고, 동시에 우리 삶 곳곳에서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기쁨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걱정입니다. 대다수의 종교가 현실 도피적 위로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기우이기를 바라나 많은 신앙인이 성당이나 교회에 와서는 세상사 잊고 그저 하느님 안에 조용히 위로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이 팍팍하고 때로는 내려놓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파견되어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긴박히 돌아가는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홀로 베드로 광장에서 강복하시는 장면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력함과, 그럼에도 세상을 향하여 무엇이든 해 주시려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고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직접적인 기쁨, 가시적인 치유를 말하기 전에 오늘 복음 한 구절을 다시 묵상하려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은 언뜻 보기에 무소유의 편안함을 의미하는 듯싶지만 실은 ‘현실주의’에 대한 과감한 저항입니다.

돈이 있어야 성공이든 행복이든 말할 수 있다는 현실에서 돈 한 푼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현실을 우리는 내려놓고 비워 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치유됩니다. 더 쥐려고 경쟁하는 세상을 아무리 치유하고 위로한들 더 큰 질병이, 더 큰 바이러스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은 가난한 이들에게 차곡차곡 쌓이고, 그로 말미암은 부는 사회 상층부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질병을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고쳐 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가진 이들이 나눌 때 가능합니다. 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 남았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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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곧 복음을 선포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길을 떠나도록 당부하시지 않습니까? 여행하는 데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지팡이나 여행 보따리, 빵이나 돈마저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의도는 선교 활동 자체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는 능력이 부족한데, 나는 시간이 없는데…….” 이렇게 핑계를 대지 말고, 그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열정을 가지고 행하라는 당부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아울러 오늘 생각하고 싶은 점은 복음 자체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과거 선교 활동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선교하려는 지역의 문화나 전통을 무시하고, 그저 그리스도교만 강요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 결과 박해의 빌미를 주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뿌리내리려면, 그 전에 그 지역의 문화나 관습, 종교심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복음처럼 선교사는 자신의 문화나 풍습, 언어 등 모든 것을 놓아두고 빈손으로 가야만 합니다. 선교 지역에서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새롭게 배우며, 그들의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친교를 나누어야 하지요. 그 뒤 예수님 말씀을 그들의 문화와 전통에 맞게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과거 선교사들이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점을 오늘날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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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안고 있는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구약 성경의 지혜 문학 속에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을 담고 있는 교훈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래서 「잠언」은 많은 사람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동시에 친근감을 줍니다. 

우리가 며칠 동안 제1독서에서 듣고 있는 「잠언」은 대표적인 지혜 문학에 속합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잠언」은 인간사에 관한 예지를 담고 있는 구전의 ‘민중 잠언’을 바탕으로 삼아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한 매우 깊은 식견들이 넘쳐납니다. 인생살이에는 보편성이 있는 법이기에 이스라엘 밖에서 전해진 삶의 지혜도 넉넉히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이러한 다양한 인간사에 대한 삶의 지혜를 단순히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선과 악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새롭게 조명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혜 문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혜와 하느님 지혜 사이의 긴장이 드러나 있고, 자신이 추구한 삶의 지혜를 하느님에 대한 지식에 통합시키려는 진지한 노력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보는 기도는 참으로 쉬운 언어로 인간사의 원숙한 경륜이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경외로 잘 여물어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이러한 기도로써 잘 산다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고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가운데 그분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라는 자신의 인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잘 살아가는 지혜에 눈을 뜨고자 한다면, 이처럼 주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길을 찾고자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할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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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어려운 일입니다. 사막을 맨발로 걷는 일과도 같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하십니다. 도움에 목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지원보다는 하느님의 이끄심에 기대를 걸라는 말씀입니다.

물질을 믿으면 실망이 돌아옵니다. 잡음이 생깁니다. 주님께 매달려야 안정과 평화가 함께합니다. 

선교는 사람이 하지만 그 에너지는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힘’을 지녀야 올바른 선교가 됩니다. 사람들의 지원이 많아지면 그분의 지원은 줄어듭니다. 사람들의 격려를 찾다 보면 그분의 힘을 외면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하고 이르셨습니다.

사람들은 봄과 가을에만 꽃이 많이 피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여건이 갖추어지면 언제라도 피어나는 것이 꽃입니다. 다만 봄가을에 피는 꽃이 유난히 아름다운 것은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혹서를 견디어 냈기 때문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함 속에서 오히려 단단한 결실이 맺어집니다. 

결과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기에 업적을 남기려 합니다. 발자취를 남기려 애를 씁니다. 곁에서 보기에 안타까운 선교의 모습입니다. 선교의 본질은 하느님을 전하는 것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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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임금은 하느님께 장수나 부귀가 아니라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지혜와 장수와 부귀를 모두 주셨습니다. 잠언의 저자는 가난도 부도 구하지 않고 진실한 사람이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하느님과 닮아 가기를 청하여 그분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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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짧은 복음 말씀에는 ‘떠날 때’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첫 번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 식량 자루, 빵, 돈, 여벌 옷 등 이 모두가 필요한 물건들인데, 하나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곧 주님께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으로 ‘떠남’의 첫 번째 규범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떠날 때에는 주님께 의지하여라.’

두 번째의 말씀은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입니다. 한 집이 아니라 여러 집을 돌아다니면 그만큼 더 많은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떠날 때까지 한 집에만 머물면서 민폐를 끼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로써 두 번째 규범이 나옵니다. ‘떠날 때에는 사사로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마라.’

세 번째로는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입니다. 이는 상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도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 번째 규범이 나옵니다. ‘떠날 때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집착을 버려라.’

사 실 우리는 날마다 떠납니다. 과거와 떠나고 있고, 자기 자신의 현재 모습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떠나는 것은 잘만 하면 성장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잘하지 못하면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던져 주신 떠남의 세 가지 규범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에게서 떠나는 연습을 하도록 합시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이라는 글자와 ‘사랑’이라는 글자가 너무 닮았는데, ‘사람’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ㅁ’이 ‘ㅇ’으로 바뀌면 된다. ‘ㅁ’이 ‘ㅇ’이 되려면, 즉 모난 네모가 둥근 동그라미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부딪혀 깎여 나가고 닳아서 둥글둥글 해져야 한다.”

 

사람이 서로 부딪혀야 사랑이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고, 또 공감도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부딪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얼굴도 쳐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며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꾸 만나 소통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을 깎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며 관계를 이어갈 때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성당에서는 돈 나오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왜 이런 고민을 안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냐면서 하소연 하십니다. 신자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어렵다면 잠시 미사만이라도 나오라고 말씀드리는데, 얼마 못 가 성당에서 뵙기가 힘들어집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끊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거부감을 가지면 가질수록, 사람과 함께 사랑도 멀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는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시는데,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할 것 같은데 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세상의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 주님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만이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것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만나 소통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세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필요한 것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사랑’을 완성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립다는 것은 당신의 삶에 특별한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니까(니키 쉬펠바인).

 

 

 

쉽게 털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법칙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언젠가 한 여자 청년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친구가 너무 착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연락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도 다 이해해주고 자기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주는 것이 못마땅해서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 청년은 남자가 착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내 허락 없이 어떤 남자도 만나지 마라, 응? 오빠가 전화하면 재깍재깍 받고!” “오늘은 오빠가 먹자는 거 먹고, 오빠가 보고 싶은 영화 보자.” “내일 시간 좀 내라, 바다나 보러 가자.” 이런 남자를 소위 나쁜 남자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살아보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상하게도 이런 나쁜 남자에게 끌리게 됩니다. 항상 저자세로 다 이해만 해 주고 상대의 편의만 봐주려고 하는 남자는 왠지 매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거미는 이미 자기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들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거미줄을 쳐서 더 큰 먹이를 잡을지가 관심사입니다. 착한 남자는 이미 걸려든 하루살이와 같고 나쁜 남자는 걸려들지 않는 잠자리와 같습니다. 이미 잡힌 하루살이에게는 관심이 줄어들고 잡히지 않은 것에 더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지팡이도 보따리도 돈도 여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자신을 받아들이는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지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집은 제자들에게 옷과 음식과 돈을 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그 고을을 떠나면서 경고의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먼지’는 가장 보잘것없는 것 중의 보잘것없는 것의 표징입니다.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먼지와 같은 당신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누어 주려고 하였지만 받으려 하지 않았기에 나는 당신들로부터 더럽혀진 나 자신을 씻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먼지로 남아있게 되는 것에는 더 이상 내 책임이 없습니다.”

선교하다가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툭툭 털고 나와 버리십시오. 그들은 저자세로 계속 자신을 대해주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비굴해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만큼하고 아니면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들도 이런 자세에서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시도하는 데에서 집착이 사라지려면 알아야 하는 것이 ‘평균 성공의 법칙’입니다. 앨런 피즈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원칙』에 ‘평균 성공의 법칙’이 나옵니다.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활동에는 평균 성공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생명보험 영업하던 시절 그는 1:56이라는 평균 성공이율이 적용됨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거리를 지나는 사람에게 “보험에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56명당 1명은 “네”라고 대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을 하루에 168번 하면 보험 계약을 하루에 3건씩 체결하게 되고, 그러면 보험 영업의 세계에서 상위 5퍼센트에 들게 됩니다.

앨런 피즈는 이를 아버지로부터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11세 때 집집이 다니며 고무 스펀지를 개당 20센트에 팔았습니다. 그때 평균 성공 비율은 10:7:4:2였습니다. 그는 학교가 끝나고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방문판매를 하였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10곳마다 7곳이 문을 열었고, 그중 4곳이 나의 준비된 상품 소개를 들어주었으며, 그중 2곳이 고무 스펀지를 샀습니다.

다시 말해 10곳당 평균 판매액이 40센트였습니다. 그는 1시간에 평균 30곳을 돌았고, 2시간 동안 평균 12개를 팔아 평균 2달러 40센트의 판매실적을 올렸습니다. 1962년 당시 11세의 호주 소년에게 2달러 40센트는 큰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문을 두드리는 10집당 40센트씩 번다는 것을 알고는 문을 열지 않는 3곳과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관심 없다며 문을 닫는 3명과 구매를 거절하는 2명에 대한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10곳을 두드리면 40센트를 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평균의 법칙을 모르면 다음에 일어날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게 됩니다. 10대 시절 앨런은 방과 후에 무작위 전화 영업으로 냄비와 팬, 리넨과 담요를 팔았습니다. 이때도 당연히 평균의 법칙을 활용했는데, 활동 30여 일 만에 발견한 평균 성공 비율은 5:3:2:1이었습니다. 전화를 받는 5명 중 3명이 그를 만나는 데 동의했고 3개의 약속 가운데 제품 소개까지 성공하는 경우는 2번이었으며 2명 가운데 1명꼴로 물건을 구매해주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법칙을 쓰는 이유는 성공에 집중하여 실패가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도 자체를 하지 못합니다. 앨런은 나중에 보험 영업사원이 되는데 이를 이용하여 가장 빠른 기간에 호주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보험회사 직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할 만큼 하시고 유다에게 “이제는 네 할 일을 하여라.”라고 하시며 그를 놓아버리십니다. 그를 영원한 지옥으로 넘겨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마지막으로 베푸는 하나의 경고요 초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는 그리스도께 후회하고 돌아왔다면 그리스도는 기쁜 마음으로 유다를 맞아들이셨을 것입니다. 은총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을 받고 세상에 전해주기 위해서 파견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는 사람에 합당한 자세를 지닐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주일학교에서 ‘필드트립(Field Trip)’을 준비하였습니다. 학생들은 4시에 모여서 필드트립에 대한 주의사항을 들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차량봉사를 해 줄 형제님들도 함께 했습니다. 저도 학생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필드트립에 참가했습니다. 이번 필드트립의 장소는 텍사스 레인저스 구장이었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메츠와 양키즈 구장에 가곤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야구장으로 향했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몇 년 전에 ‘돔’구장을 신축했습니다. 야구장은 덥지 않고 쾌적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응원했고, 텍사스 레인저스는 9회 말에 점수를 내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1점차로 이겼습니다. 이런 필드트립이 좀 더 발전하면 필드필그림이(Field Pilgrim) 될 수 도 있습니다. 야구장, 농구장에 가서 학생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주교좌성당이나, 성지에 가서 학생들이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3년간 ‘필드트립’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필드트립 장소는 ‘갈릴래아’ 호숫가 주변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2000년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 언덕에서 ‘행복선언’을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축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셨고,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필드트립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많은 ‘필드트립’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제가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저를 보내 주셨습니다. 5년 전에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로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에파타와 탈리타쿰’을 이야기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이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기 바랬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을 통해서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은 희망으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으로, 근심 중에 있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일어나길 바랐습니다. 팬데믹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제 발의 등불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함께 필드트립을 할 수 있는 동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난 2월 13일, 저를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필드트립의 장소는 다르지만 제가 해야 할 소명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주셨던 소명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제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허위와 거짓말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너무 부유하게도, 너무 가난하게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부유하면 교만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난하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이곳에서도 제 발의 등불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필드트립’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함께 멋진 필드트립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우리 님 그러하시듯
끊어진 것을 잇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잇습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흩어진 것을 모으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모읍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씻어냅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굽은 것을 바루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바룹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메마른 것을 적시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적십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엉킨 것을 푸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풉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모난 것을 다듬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다듬습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쓰러진 것을 일으키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일으킵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무른 것을 돋우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돋웁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부족한 것을 채우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채웁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멈춘 것을 움직이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움직입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죽은 것을 살리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살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대개 사람들은 여행을 계획하면서 갖가지 준비를 합니다. 먼저 어디로 갈 것인지 장소를 정하고 예약을 합니다. 그리고 여행하면서 쓰일 필요한 짐을 챙깁니다. 곧 충분한 여비와 더불어 여행에 필요한 장비들, 그리고 옷가지를 챙기고 또 여행 중에 먹을 먹거리를 장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행을 떠날 때에 충분한 준비를 하는 것과는 다르게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준비를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 곧 제자들이 언제나 성령과 함께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리 인간적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복음 여행을 떠난다고 해도 성령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사도로서의 기본 여정을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곧 성령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기름이 부족한 차를 운전한다거나 무면허 운전을 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인간적인 준비보다도 언제나 성령과 함께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성령과 함께일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며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실 것을 믿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시지요!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을 향해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의 의미는 진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로서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지하면 많은 은총을 주실 것이기에 이러한 것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발에서 먼지를 털라고 하셨는데 이는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이방인 취급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권한을 받았습니다. 먼저 고쳐주는 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권한을 받았는데 이는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것을 하라는 것인데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쳐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가르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이지요.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처음으로 알리신 것입니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권한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잘 전파하고 계십니까? 전파하고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하시고 계십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전파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이 신뢰는 바로 이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가 이 좁은 문을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되는지 오늘 하루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9,3)


1964. 9. 14일 미국 성 십자가 관구(=미국 시카고) 소속 고난회 수도자 2명이 이 땅에 도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복음’의 씨앗을 척박한 토양에 뿌렸습니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로 저희 관구는 지난 2000년 5월, 중국의 공산화로 말미암아 1950년 초반 추방된 중국에 선교사 2명을 다시 파견함으로 중국 선교를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현재는 중국 형제들이 서안에 수도원과 아울러 여러 본당에서 선교활동을 활발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된다, 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임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즉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며, 예수님과 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고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산다, 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9,3)하고 권하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자 곧 선교사가 선교지로 파견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 선포자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즉 선교는 아무것도(=세상적인 재물) 지니지 않는 것, 곧 무소유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며, 또한 복음 선포자들에게 필요한 삶의 방식이며 태도입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유하게 되었습니다.”(2코8,9) 복음 선포자가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난다는 것은 오로지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에 그리고 성령의 힘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서 시작하라는 의미이겠죠. 더 나아가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부유하게 해 주기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가 가난(=영적으로 비워있다면)하면 가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교는 쉽지 않으며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막을 맨발로 걷는 일과도 같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9,3)하고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도움에 목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지원보다는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믿고 재물을 의지하다 보면 실망이 돌아옵니다. 헛소리가 들리며 잡음이 생깁니다. 주님께 매달려야 안정과 평화가 함께 합니다. 다만 솔로몬 임금과 같은 마음으로 선교사도 선교에 필요한 것을 매일 주님께 간청하여야 합니다. 즉 선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명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비록 짧지만, 베트남에서 선교사로 살아 본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선교사가 너무 물질적으로 궁핍하면 많은 분심과 걱정으로, 하지만 너무 부유하다 보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모든 일을 다 자신이 한 것인 양 교만과 자만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하시며, 심지어 지팡이마저도 지니지 말라 하십니다. (9,3참조) 지팡이는 지친 여행자에겐 몸의 의지가 되는 것이며 길을 걸을 때 위험(=동물이나 뱀)을 물리쳐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팡이마저도 지니지 말라 하심은 철저히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파견된 제자들에게는 당신이 주신 그 능력과 권한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9,1) 그 엄청난 일은 지팡이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만이 그 유일한 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지팡이 대신 모든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는 능력과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과거 선교사로 파견되셨던 분들이나 내일 선교지로 떠날 분 그리고 자기 삶의 자리에서 선교할 우리 모두 다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하느님의 힘과 권한만으로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선교사가 되도록 합시다. 오직 하느님 말씀의 지팡이에 의지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머니를 채우고,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사고방식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으로 갖춘 새 옷 한 벌만을 입고서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데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총만을 믿고 신뢰하면서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9,3) <주님, 당신의 복음 선포자들이 빈손으로, 빈 가방으로 떠날지라도 당신께서 언제나 어디서든지 채워주실 것을 믿고 또 체험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하느님의 나라 - “복음선포와 회개, 믿음과 치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 오이다.”(시편119,105)

 

빛이자 길이요 꿈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잊어 표류하고 방황하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우선적으로 찾아야 할 바 빛이자 길이요 추구할 바 희망이자 꿈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희망이, 평생 화두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시공을 초월하여 역시 우리에게도 영원한 궁극의 꿈이자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제가 자주 되뇌이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께 파견받은 열두 제자들처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제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내야 할 하느님의 나라의 선물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든 마귀를 쫓아 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신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목적은 단 하나 열두 제자들과 똑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요 병자들의 치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목표가 뚜렷하니 삶은 아주 단순합니다. 소유의 삶이 아니라 전적 포기의 존재의 삶, 참 자유로운 삶입니다. 

 

역시 안주의 삶이 아니라 도상(途上)의 삶, 순례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믿는 이는 모두가 ‘길가는 사람’, 도인(道人)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흘러야, 떠나야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삶도 행복도 자유도 선택입니다. 말그대로의 무소유는 아닐지라도 이런 무소유의 정신으로 무집착의 초연한 이탈의 가난한 삶을,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함이 없이 활동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을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셨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함께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치유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복음 선포의 양상은 다 다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자리 잡고 있는 내 삶의 제자리가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언젠가의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 잠언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려는 우리에게 참 적절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는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이런 하느님께 두 가지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참으로 공감이 가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순수와 자족의 겸손과 무욕의 삶을 간청하는 내용이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참 적절하고 이어 계속되는 내용도 더욱 공감이 갑니다. 간청하는 자는 변질, 부패될지도 모를 마음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있든 없든 부패와 타락이 없는 시종여일 한결같은 감사와 겸손, 절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와 치유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 감사와 겸손의 삶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아멘.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혼인놀이와 장례놀이를 들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당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사두가이들, 원로들은 요한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기적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다니지도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하셨다. 이들을 두고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31절) 하신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33-34절). 이런 사람들의 욕구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35절) 지혜의 자녀들이란 의인들을 말한다(집회 4,11 참조). 우리는 참으로 지혜의 자녀들인가? 혹시나 우리 자신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사고판단, 고집스러운 비판의 자세는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진정한 뜻은 모른 채 자기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일에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마르 8,29-33 참조). 그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거부하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 내가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고집스럽게 서 있는 아이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 즉시 따르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이 진정 풍요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 자유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는 한에서 자유롭고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그것은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원의대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고 싶어 하므로,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회개는 이러한 이기적인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하느님의 뜻으로 향하는 데 있다. 회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드러나야 한다.

 

 

 

파견 받은이의 삶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 세상에 파견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기쁜 이들의 발걸음
이들이 떠나는 길에는 다른 것들이 필요치 않습니다.
기쁜 소식의 선포와 생명을 주는 회복의 발걸음들이
사람들의 생명을 회복시키고 기쁨의 삶에 동참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결국은 그 기쁨을 향한 발걸음이겠지요.
새로운 생명을 입은 사람들의 삶, 새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삶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며 특권임을 새겨 봅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특별한 은총에 초대받은 이들
그 기쁨을 노래하며 기도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Take nothing for the journey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 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가지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이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먼저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부여하시어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루카 9,1)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그렇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그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몸 걱정도, 치장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칠 힘도 권한도, 말씀도, 예수님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 권능이 우리에게서는 드러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이는 우리의 초라함, 우리의 무력함, 우리의 허약함이 당신의 권능을 더욱 더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에, 결국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 파견 받은 자들이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고, 그 증거로 병든 자들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루카 9,6)

오늘 우리도 분명 예수님께 파견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내 형제들에게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질병이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내가 무능하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능력을 부리려다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지 살펴보아야 할 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루카 9,3)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함승수 신부님

가까운 곳으로 잠깐 여행을 갈 때도 많은 짐을 챙겨가는 우리들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이고 화장품이나 휴대폰 충전기에 이르기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가지요. 그런데 ‘혹시나’ 하는 걱정으로 무겁게 가져간 물건을 ‘역시나’ 한 번 꺼내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우리 모습을 ‘준비성’이 투철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행지에 가서도 더 편하게 있고 싶고 더 많은 걸 누리고 싶은 욕심 때문에 자기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어리석은 모습은 아닐까요?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고 하시는 것도 아마 그런 점을 염려하시기 때문일 겁니다. 제자들은 세상을 여행하러 가는게 아니라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누리는 ‘여행’을 할 때도 기존에 소유한 것들을 싸들고 가기보다 여행의 목적을 생각하며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하고 여행지에 있는 것들을 상황에 맞게 잘 이용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하느님의 일’을 할 때에는 그런 점이 더 두드러지지요. 그 일을 위해서는 세상 것들에 의지하고 기대려는 마음을 어느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철저하게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그분의 은총과 사랑만을 바라며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무언가를 많이 지니고 있으려는 사람은 삶을 자기 뜻과 계획대로 하려는 욕심과 고집이 클 때가 많습니다. ‘내 뜻대로 안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삶의 여러 변수에 대비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것들을 가지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감당치 못할 정도로 뭔가를 잔뜩 짊어진 상태로는 인생길을 똑바로 걸을 수 조차 없지요. 그러나 소유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은 상황에 맞게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맞춰가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다보니 굳이 많이 가질 필요가 없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인생길을 여유있게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아름다운 주변 풍경도 천천히 둘러보고 여행의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면서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삶의 길, 신앙의 길을 그런 자세로 걷기를 바라십니다. 삶이 내 뜻대로 되야한다는 욕심과 고집을 버리고,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 섭리에 순명하며 그분 눈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미와 보람을 찾고 기쁨을 누리며 한 번 뿐인 삶을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들로 만족하려고 들면 끝도 없는 욕망에 휩쓸려 불행해지지만, 하느님으로 만족하려고 들면 내 삶을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소유한 것 가운데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게 방해하는게 있다면 그건 나에게 필요없는 ‘짐’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1독서인 잠언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두 가지만 바라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위선과 거짓을 멀리하는 진실함,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나에게 필요한 만큼의 재물만 바라는 마음. 우리가 행복하기엔 그 두 가지면 충분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제가 어릴 때 어머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남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뭐라고 하든 간에, 너는 그저 네 할 바만 다 하거라.”

오늘 선교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의 사항을 알려주십니다. 그 훈시 중에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4-5)

선교를 할 때,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리스도교 샤랑을 실현할 때, 가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대가 좋아할지 싫어할지, 혹시나 부작용은 나지나 않을지 걱정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사람들이 받아들이면 함께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저 조용히 물러나 다른 사람이나 다른 기회를 찾으면 그만이지, 걱정이나 불편한 감정을 사전이나 사후에 가질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다음 기회에 다른 상황에서 받아들이리라고 믿고 주님께 맡겨 드리면서, 나는 오늘 이 상황에서 내 할 바를 다 하고 나머지는 주님께서 몸소 채워주시고 이끌어주시기를 청하며 살아갑시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는 다른 나라다. <루카 9, 1-6> 9월 25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한 나라가 만들어지려면 권력, 재력, 단결력이 필요하지만, 주님이 선포하시고 만들어지는 나라는 힘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단결된 사람의 힘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유로운 나라, 평화로운 나라, 서로 사랑으로 일치한 나라입니다. 한마디로 권력으로 다스리고, 돈으로 다스리고, 지식이나 능력이나 돈이나 제물이나 인기나 명예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섬김과 나눔, 친교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믿음, 희망, 사랑으로 다스리고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왕이 힘으로 다스리는 것도 아니요, 돈으로 움직이는 나라도 아니요, 뛰어난 사람의 생각으로 즉, 독재적 다스림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제자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려고 파견하시며 지팡이도 돈도 갖고 가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능력만 갖추고 가라고 하신 것은 지팡이는 권력의 상징이고, 돈은 재력의 상징이며 병을 고치거나 마귀를 쫓아내는 힘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은 힘이나 권력이 아니고, 재력도 아니고, 명성도 아닙니다. 전하는 사람은 어부요, 세리요,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아니면 살아있을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 아니면 한순간의 생명도 누리지 못합니다. 산소 없이는 숨을 쉬지 못하고 저 태양의 힘이 아니면, 땅에서 솟아나는 물이나 먹거리가 아니면 즉, 일용할 양식을 주시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주님 자신입니다. 미사 끝에 복음을 전하도록 이르는 파견의 말은 미사를 통해 주님의 자비, 일치, 사랑을 받고 주님이 복음의 중심이 되어 주님이 전하는 것입니다. 이는 미사를 통해 은총으로 변화되어 손에 진주, 보물, 누룩처럼 성장의 원리에 따라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살려는 사람은 거룩한 주님을 따라 진실과 선을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살려는 사람은 거짓, 악행, 미움으로 진, 선, 미를 거스르면 마태복음 13, 47-49 말씀과 같이 “하늘나라는 그물과 같다.” “건져 올린 고기 중에 좋은 것과 나쁜 것 골라내서 좋은 것은 거두고, 나쁜 것은 버리는 것과 같다.” 하시며 하늘나라는 수에 있지 않고 질에 있다고 하십니다. 서 말의 밀가루를 한 줌의 누룩으로 변화시키듯이 알찬 믿음, 희망, 사랑을 사는 사람에 의해 하느님 나라의 존재가치가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인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나를 알고 계시는 주님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열두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떨어져 둘씩 짝을 지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치는 길을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환대받지 못할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환대받지 못한 경험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이야기하시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세례자 요한은 빵을 먹지도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자 이번에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떠들어댔습니다(루카 7, 24-30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앞으로 만나게 될 이들도 이러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교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대응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잘 알고 계셨던 듯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셨을까요? 예수님과 같은 사명을 수행하고 같은 대접을 받는 여정 안에서 제자들이 하느님과 일치하기를 바라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신앙생활을 통해 바로 그 일치의 여정에 초대받았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 9,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도를 하며
사람의 길을
다시 배웁니다.

잎을 떨구어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옵니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있는 것 마저
내려놓는
사랑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려놓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이 물질이
사람의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만들어냅니다.

많이 지닐수록
미련과 욕심의
소금기둥은
길을 떠날 수
없게 만듭니다.

모두 지나가는
시간 속에
있습니다.

모두가
빈손으로
떠나 갑니다.

공짜로 받은
숨결이며
공짜로 받은
하늘의
날씨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물질에 빼앗기는
것을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마음을 제멋대로
다루며 살았습니다.

움켜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사람이 보이고
마음이 보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내려놓는
빈손의 길입니다.

욕심으로
가득찬 이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깨어있는 길입니다.

깨어있기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선물입니다.

깊은 호흡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깨어있는 오늘
되십시오.

비행기 사고가 자주 있지는 않지만 한 번 사고가 나면 큰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비행기 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탈 가장 안전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언제일까요? 그 시점은 비행기 사고가 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라고 합니다. 모든 항공사가 정비 점검을 더욱더 철저하게 하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위협이 있을 때, 큰 고통과 시련이 있을 때가 오히려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때를 통해서 오히려 더 큰 성장을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려움을 힘겹게 극복한 다음에야 지금 모습이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공하길 바란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길 원한다면 오히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고통과 시련을 제게 맘껏 주세요.”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 제발 좀 치워달라는 것에 맞춰져 있습니다.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어렵고 힘든 일은 제발 없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지금 모습입니다.

진정으로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 부분은 심각하게 묵상할 때, 나의 기도 내용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기쁨을 간직하며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셔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따라서 이 파견은 그들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실 때 자기 육신을 위해 아무런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맨몸으로 보내시면서 오직 수확할 밭의 주인님만 의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충실히 따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교 여행은 어떠했나요? 실패였을까요? 아니면 성공이었을까요?

큰 성공을 거둡니다.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고, 힘든 것투성이였지만, 이 없음이 커다란 성공을 이끌어서 그들을 더욱더 영예롭게 한 것입니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습니다.

이를 잠언서의 저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간청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잠언 30,7-8)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건 힘들다. 그래도 길 위에 선 이상 계속 가는 수밖에 없다(박용희).

 

새로운 나.

저는 일찍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육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기에, 큰형의 큰아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서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손주를 보니, 조카 때와는 다른 느낌입니다. 더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자주 만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코로나로 서로 주의를 해야 하는 시기이기에 더욱더 만남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조카가 종종 아들 사진을 올려 줍니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는 나날이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기였는데, 어느 순간 어린이가 되어있습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늘 새로운 오늘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도 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맨날 똑같은 삶이라고 말하며 불평합니다. 지금의 새로운 오늘을 생각하지도 또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새 물건을 가지게 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새로운 나를 갖게 된다는 것은 분명히 기분이 좋아지는 일입니다.

 

 

 

오상(五傷)으로 인한 기적도 큰 기적이었지만, 교회와 장상을 향한 철저한 순명과 지극한 겸손의 삶은 더 큰 기적이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탈리아 남부 지방 출신 오상의 비오 신부님(1887~1968)은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크게 사랑받는 성인입니다. 정식 이름은 피에트릴치나의 성 비오 사제입니다. 피에트릴치나는 ‘작은 돌맹이’라는 뜻인데, 그에 걸맞게 피에트릴치나는 남부 이탈리아 지방, 돌밭 투성이뿐인 가난하고 척박한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1903년 카푸친 회에 입회하여, 1907년 종신 서원, 1910년에 사제로 서품됩니다. 그의 성소 여정은 험난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눈에 띄게 병약했는데, 특히 고열에 자주 시달렸습니다.

신학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병세는 더 위중해졌는데, 장상은 그를 고향인 피에트릴치나로 요양을 보내고, 그곳에서 특별 신학 교육을 받게 합니다. 종신 서원 이후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된 그는 다시 신학원으로 들어갔지만, 또 다시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 당시 주치의는 청천벽력같은 선고를 내렸습니다. “길어봐야 두 달입니다!”

1909년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부제품을 받았지만, 건강 상태는 늘 아슬아슬했습니다. 그의 가장 큰 걱정은 사제품을 받지 못하고 죽는 것일 정도로 건강 상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밤잠을 못 이루던 그는 소속 관구장께 편지를 써서 사제품을 앞당겨주길 청했고, 그 청원을 즉각적으로 수락되었습니다.

1910년 8월 10일 드디어 그는 베네벤토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카푸친회 소속 수도자였지만, 건강 때문에 고향 피에트릴치나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고향 본당의 보좌 신부로 사목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제가 된지 1년이 지난 1911년 9월 7일부터 비오 신부님의 몸에 예수님의 오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유럽 전역으로부터 구름처럼 비오 신부님에게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비오 신부님은 매일 새벽 5시에 미사를 드렸는데, 사람들은 새벽 1시부터 몰려와서 큰 소리로 기도하며 성당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교회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에게 발생한 특별한 현상에 대해 보고를 받은 관구는 1919년부터 의사의 진단을 받게 했습니다.

정말 괴로웠던 일 한 가지는, 안그래도 오상으로 아프고 쓰려 죽겠는데, 의사들은 상처 위 아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상처 내부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럴 때 마다 비오 신부님은 천상의 비밀이 모독당하는 심한 죄책감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1923년부터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일체의 편지에 대해서도 답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비오 신부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3천여명의 신자들이 격렬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오 신부님은 다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고, 고백성사도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당국이 비오 신부님에게 허락한 것은 오직 미사와 고백성사 뿐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미사와 고백성사를 온갖 정성을 다해 집전했습니다. 1시간 넘게 지속되는 미사는 늘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보통 사제들은 1분도 채 안걸리는 거룩한 변화의 기도는 5분 이상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흥건해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기도를 드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집전하신 미사에 참석했던 한 사제는 ‘머리 털나고 이렇게 감동적인 미사는 처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본당으로 돌아간 그 사제는 자신이 봉헌했던 성의없던 미사에 대해 크게 반성하면서, 지극정성을 다해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답니다.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서 비오 신부님께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오상을 똑같이 받았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그의 생애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카푸친 수도자로서 보여준 무조건적인 순종과 한없는 겸손의 삶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으로 인해 숱한 오해와 중상모략을 받으면서 깊은 수도원 안에 유폐되곤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교회에 대한 신뢰, 장상에 대한 순명의 강도는 점점 더 커져만 간 것입니다.

 

 

 

이별도 사랑할 때처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다음엔 가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걱정은 성령의 힘을 약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만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해보겠다고 했다가 이도 저도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교도 사랑이라면 넓게 하는 것보다 좁고 깊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돌 들고 싸우는 사람 수십 명을 만드는 것보다 총 든 군인 한 명 훈련하는 게 낫습니다. 성인 한 사람은 많은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도를 거부한다면 보이는 증거로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사실 당신은 발의 먼지와도 같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먼지 털어버리듯이 매몰차게 떠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떠날 수 없다면 사랑을 했던 것도 아닙니다.

만약 두 연인이 헤어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한 사람이 술만 먹으면 계속 기억이 난다고 전화를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좀처럼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둘이 사랑할 때 누가 더 사랑했었다고 생각이 되나요? 당연히 매몰차게 끊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했기에 그만큼 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왜 인간이 지옥에 가게 내버려 두시는지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거부한다면 하느님은 더는 그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제 생각이지만, 만약 누군가와 헤어졌는데 그 누군가를 아직도 기억하며 잊지 못하고 있다면 그때 그 사람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의 자세와 헤어질 때의 태도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골든 에이지’(2007)는 무적함대를 지닌 당대 최고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영국으로 망명해 있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려 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위험을 잘 알고 있던 대신들은 여왕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말렸지만 여왕은 국민들과의 소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왕이 지나가던 때 한 남자가 웅덩이가 있다며 그 위에 자기 옷을 던집니다. 강하게 인상에 남는 남자였습니다. 여왕은 그 남자에게서 호감을 느낍니다. 그는 스페인 해적이라 불리는 라일리 경이었습니다. 그가 여왕의 침실에 드나든다는 소문까지 퍼집니다. 하지만 여왕은 그 사람만은 곁에 두려 합니다.

이 와중에 메리 스튜어트가 여왕을 암살하려 한 것을 알고 그녀를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제 스페인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앞두고 엘리자베스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랑을 라일리 경과 나눕니다. 영국 여왕으로서 자신 나라를 침공하려는 나라의 한 선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또 다른 궁실 여인과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 여인은 엘리자베스의 친구이자 하녀였습니다.

배신당한 사실을 알지만, 전쟁이 코앞이라 슬퍼할 여유도 없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죄수들까지 동원하여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친구와 라일리 경을 용서합니다. 둘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그 이후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 사람들 앞에 나섭니다. 흰 분을 발랐다는 것은 자신은 이제 세상에서 죽은 사람과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며 유일하게 자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을 한 번도 보지 않습니다.

엘리자베스 때가 영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때입니다. 무려 40년 동안 영국은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강대국이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죽기 직전 숨을 거두며 자신이 평생을 사랑했던 한 남자, 자신의 친구에게 빼앗기 한 남자, 라일리의 이름을 부르며 생을 마감합니다. 여왕으로서 그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더 큰 책임을 어깨에 지고 있습니다. 그것과 반대되는 애정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 남자와의 애정에 휩쓸렸다면 나라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이도 애정에 휩쓸리기보다는 발에 먼지를 털어내듯 복음을 거부하는 이를 떠나야 합니다.

어떤 때는 모질게 끊는 것이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개중에 몇 명은 그 사람이 자신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좋은 것을 주려고 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아픔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잃어봐야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발에 먼지를 털어내는 것은 헤어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만약 그렇게 단호하게 끊지 못하면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랑을 할 때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하고 헤어질 때도 그래야 합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람들이 문화 인류학자에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그러자 인류학자는 15,000년 된 사람의 치유된 허벅지 뼈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자연의 세계에서 골절된 동물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움직이기 어렵기에 다른 동물에게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움직이기 어렵기에 동료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동물은 골절당한 동료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뼈는 치유된 허벅지입니다.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골절된 동료를 도왔다는 증거입니다. 골절되어 움직일 수 없는 동료와 함께 했다는 증거입니다. 인류의 문명은 이렇게 서로를 도와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동물은 태어나서 곧 걷고, 날고, 뛸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10년은 보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사랑받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걷고 뛰지 못하는 시간 동안 말을 배우고, 글을 배우며, 공동체의 삶을 배우게 됩니다. 오랜 시간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형성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인류의 문명과 문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서 사람들은 겁을 먹고 두려워합니다.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한 사람이라도 침착하게 방법을 찾는다면 배는 풍랑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두려움과 걱정은 풍랑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지 않느냐!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들은 풍랑을 이겨낼 수 있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걱정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배들이 방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북극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캄캄한 밤바다에서 배들이 육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멀리서 빛을 비추는 등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에 북극성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등대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라는 현자가 있었습니다. 공자, 맹자, 장자, 노자와 같은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성서에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어떤 예언자도 따를 수 없는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마치 내가 너희를 이리 때 속으로 보내는 것 같구나!’ 제자들이 가는 길이 결코 쉬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현실의 삶에서 꼭 필요한 것들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냈고,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제자들이 파견되어서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소유와 욕심을 버릴 때, 우리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은 무엇인지, 나의 성인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먼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이미 충분히 가난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이천 여 년 전의 가르침은 지금 이 시대의 상황과는 잘 안 맞는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 라고 생각하면서 ‘몸의 가난’을 실천하는 일을 외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언제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가르침들이고, 영적인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실생활에도 적용되는 가르침들이고, 마음과 몸으로 함께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들입니다.

“나는 이미 충분히 가난하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에 교회 안팎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우리는 ‘나의 가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난’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잘 사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잘 사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바꿔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 자체는 극복해야 할 고난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자주 강조하신 것은,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가 ‘죄’와 ‘악’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짐으로써 극복됩니다.

‘가난’도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천 여 년 전의 낡은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몸의 가난’을 실천하는 일을 외면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이것은 ‘깨끗함’에 관한 가르침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겉만(몸만) 깨끗하면 깨끗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마음이 깨끗하면 몸은 더러워도 된다고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똑같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가난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를 보면, 권한과 임무를 주시면서 특별히 지시하신 말씀은 바로 ‘가난’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바라신다면 제자들에게 더 많은 활동비를 주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활동비를 전혀 주시지 않았고, 또 ‘빈 손’으로 가라는 지시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신 ‘예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뜻을 깨닫는다면 능동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어떻게든 그 지시의 실천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님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1-6).”

 

제자들이 받은 임무는 ‘복음 선포’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은 복음 선포에 속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말’로도 복음을 선포했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통해서도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빈 손’으로 떠난 일은 ‘삶’으로 복음을 선포한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하느님 나라의 부’를 선포하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느님 나라의 부’는 ‘하느님 뜻에 합당한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빈 손’은 세속 재물을 버리고 ‘하느님 뜻 실천’으로 가득 채운 손입니다.

 

‘빈 손’으로 떠나라는 지시는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루카 12,22-32) 연결됩니다.

만일에 활동비와 생활비 걱정을 하면서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빈 손’으로 떠나라는 지시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떠나라는 지시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 없이 활동비와 생활비를 많이 가지고 간다면, 그 돈에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진 돈이 많다면 돈을 도둑맞지 않으려는, 또는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이나 걱정이 생길 것이고, 그 마음과 걱정은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4).”>

예수님께서 나중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라고 물으신 일이 있는데, 그때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모든 것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비어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은 “누군가가 너희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든”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시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도와주실 때, 직접 도와주시거나 천사들을 보내서 도와주실 수도 있고, 마음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 착한 사람들’이 천사입니다. 그들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욕심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라는 지시입니다. 사실 ‘복음 선포’는 ‘심판 선포’를 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내린 이 모든 지시는, 제자들만 실천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뿔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 깊숙이

우리를 보내시는 분의

당부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다부지게 다짐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아야지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말아야지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야지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우리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려야지

 

다짐은 다부지게

하지만 그냥

지금 이 자리에 머뭅니다

 

편하니까요

아쉬울 게 없으니까요

이미 여기서 충분히 누리니까요

친한 우리끼리 너무 좋으니까요

 

굳이 거친 세상에

들어갈 까닭이 있을까요

굳이 다른 이들에게

눈 돌릴 까닭이 있을까요

 

아뿔싸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시고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 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요즘 시대에 우리가 길을 떠나면서 정말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자면 당장 요즘같은 경우 스마트폰만 없다고 해도 우리는 아주 불편해 할 것입니다. 

스마트 폰은 그만큼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 된 듯 합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스마트폰의 존재감을 뛰어넘는 더 중요한 성령을 함께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 주님의 영께서 함께하실 때 사도들의 모든 삶이 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도 그와 같이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 모든 활동들이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영을 통해 얻게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늘자연특명인 복음전파와 병약자 돌보기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하느님 나라 선포에 필요한 것은 지팡이도 돈 옷도 빵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느님나라 복음 전하고 병자 고쳐 주기였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신앙인들에게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오늘은 사제생활 중 50년 간 오상 지니고 사신 비오사제의 축일입니다.

주님의 양손 양발과 가슴의 5상처 아픔과 함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세상과 육신위해 몸과 마음 다 쓰면 하느님나라 선포할 여력 없습니다.

 

권위나 부유나 뭐든 잘하는 줄 알면 하느님나라 선포할 자격 없습니다.

복음전하고 나약한자 돌봄이 하늘의 자연특명인 걸로 아시면 멋지시죠.

 

 

 

영원한 집을 세우는 돌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의 서한에서 (Edit. 1994: Ⅱ, 87-90, n. 8)

장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집을 세우시려고 돌들을 마련하시어 구원의 정으로 끊임없이 깎고 부지런히 다듬고 계십니다. 지극히 온유하신 우리 어머니이신 거룩한 가톨릭 교회가 성당 봉헌 성무일도 찬미가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영원한 영광을 향하는 영혼은 누구나 스스로 영원한 집을 짓는 데 쓰일 가장 좋은 돌이 되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는 장인은 먼저 그 집에 쓰일 돌들을 다듬어야 합니다. 그는 망치와 정으로 돌을 두드려 댑니다. 천상 아버지께서는 선택된 영혼들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그 영혼들을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의 지고한 지혜와 섭리로 영원한 집을 짓는 데 쓰이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영원한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도록 세워진 영혼은 망치와 정으로 깎이고 다듬어져야 합니다. 장인이신 하느님께서는 돌들을, 곧 선택된 영혼들을 그렇게 다듬어 쓰십니다. 이 망치와 정은 무엇을 다듬는 것이겠습니까? 나의 누이여, 그것은 암흑, 공포, 유혹, 영혼의 슬픔, 어떤 고통으로 드러나는 영적인 두려움, 그리고 육신의 괴로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영원하신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에 감사하십시오.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이 구원되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모든 아버지를 합하여 놓은 지극히 선하신 아버지의 호의에서 나온 이 은혜를 어찌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이 영혼의 의사에게 마음을 열고, 충만한 신뢰로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팔에 여러분을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분께서는 선택된 여러분이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마음의 내밀한 움직임으로 어느 모로든 여러분 안에서 기쁨과 은총이 작용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일어날 모든 것을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때문에 모욕이나 불행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온 삶이 주님께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고 주님께서 더욱더 영광을 받으셨음을 여러분이 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지극한 호의를 베푸시는 이 신랑께서 숨어 계시더라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대로, 그것은 여러분의 불신을 벌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신뢰와 항구함을 여러모로 시험하시고, 나아가 여러분의 어떤 나약함을 고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약함은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의인도 그 나약함 곧 죄의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도 일곱 번 쓰러진다”(잠언 24,16).

 

저를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그토록 고통을 당하는지 몰랐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석을 주셨다는 것을 몰랐다면, 저는 슬펐을 것입니다. 유혹과 함께 나쁜 의심도 던져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삶 속에 스며드는 의심, 곧 여러분이 거룩한 부르심을 못 들은 것은 아닌가, 또는 신랑의 감미로운 초대를 거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의심을 내 버리십시오. 그 모든 것은 좋은 영만이 아니라 나쁜 영에게서도 나옵니다. 마귀의 장난으로, 여러분이 완덕에서 멀어지거나 적어도 완덕을 향한 여정이 지체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결코 낙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여 주실 때마다, 여러분은 감사하십시오. 그분께서 당신을 감추시더라도, 그래도 여러분은 감사하십시오. 모든 것은 감미로운 사랑에서 나옵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영혼을 바치며, 예수님과 함께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하고 외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행을 떠나 보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여행용 캐리어만 들고 나가면 사람들은 먼 여행을 떠나는가 보다 하며 부러움을 살 때가 있었다.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출타시 캐리어를 들고 나선다. 

첫 해외 여행, 캐리어가 터질 정도로 옷가지, 먹을거리, 일용품 등을 넣었었다. 이동시 마다 지니고 다니느라 불편함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여행할 기회가 늘어나고 짐을 꾸릴 때 생각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

 

여행의 횟수가 늘어나고 목적을 지닌 밖으로의 행군일수록 나에 딸린 부수적인 짐이 모두가 무용하다는 생각이다. 짐이 커갈 때가 수단이 목적이 될 때였다. 목적이 되버린 수단을 내 안에서 하나씩 버리고 비워갈 때,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목자는 짐이 많으나 선교사는 짐이 없다. 영화 ‘미션’에서 선교사의 손에 들려진 재산이라고는 피리 하나가 전부였다. 예수님의 제자 파견, ‘당신의 권한이 위임되고 제자들은 복음을 전한다.’ 이는 선교사의 미션이 되고 하느님께 모든 것 의탁하고 목표를 향해 걸었던 일상이 된다. 목적을 위해 비젼은 더욱 확고하게 그 사람에게서 확장되어 갔다. 내가 부족한 것은 그곳의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았고 나애게 목적은 일취월장이 되었고 비젼은 더욱 순수해졌다. ‘암자의 고승은 목적에 충실해 가난하나, 본당의 승려는 본질적 재산이 줄어들고 물질적 풍요가 넘쳐나 있음을 본다.’ 순례자는 여행 보따리의 무게를 줄일 것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을 통해 "아무것도"와 "어디에서나"의 연관성을 묵상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 9,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구마와 치유의 힘, 복음 선포의 권한을 받은 터입니다.

대개 여행을 떠날 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지요. 식량과 옷, 돈과 보호장구, 약 등 각자의 필요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를 모르시지 않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분의 것은 다 내려 놓고 가라고 명하십니다. 당장 숨 쉬고 걷고 선포할 수 있을 만큼의 기본만 지니라고요. '혹시나 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모든 잉여분에 대해서 홀가분해지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주님께 대한 신뢰이고 그분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물질이나 도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보증으로 여기고 기대는 온전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

파견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을 훌륭히 수행합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고통스런 질병을 치유해 주지요. 사람들은 말로만 전해 듣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을 그분 제자들을 통해 만나고 누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직접 체험하는 은총이지요.

 

"어디에서나"

제자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 발길이 닿는 곳이 바로 주님께서 이끄신 곳, 그분께서 가시려는 곳, 이미 주님 마음이 가 계신 곳입니다. 그들이 어디에나 갈 수 있고, 어디에서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큼 인간적인 힘에는 자유롭고 홀가분하고, 신적인 힘에는 든든했을 것이니까요.

자기 소유와 그에 따른 집착에 자유로운 이는 삶에 있어서 "반드시"라는 요구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내 안위, 내 명예, 내 취향, 내 이익, 내 사람 등 움켜쥔 것이 많을수록 그것들을 뒷받침할 요구가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이는 어디에서나 기꺼이 머물고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지요.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주어진 모든 것은 주님의 은총이니까요.

 

제1독서의 잠언 대목에는 하느님 말씀을 대하는 이의 진실된 바람이 나옵니다.

"그분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마라."(잠언 30,6)

짧지만 엄청난 무게가 담긴 권고입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만합니다. 온갖 지혜를 쌓은 이가 말씀을 해석한다고 해도, 말씀 자체의 의미와 힘을 넘어설 수 없지요. 그분 말씀에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입니다.

말씀에 다가갈 때, 오늘 파견되는 복음 속 제자들처럼 여분의 것을 모두 내려놓고, "아무것도"만을 지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즉,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섣부른 감성과 현학적 지식, 얕은 성찰은 말씀의 본류에 가닿기 어렵습니다. 말씀 자체가 순수하고 진실되기에 모든 곁가지나 치장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 쉽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잠언 30,8)

잠언 저자의 기도에서 지혜를 배웁니다. 주체할 수 없을 만치의 과도한 부나 생존을 위해 죄악에 기대야 할 정도의 극심한 가난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려는 이에게 장애가 될 수 있으니, 제 삶의 모든 것을 주님을 섬기기에 알맞도록 섭리해 달라는 겸손한 청입니다. 이기주의와 탐욕을 제거한 순수한 바람이 담백하고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이 지향은 자기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이에게 필요한 듯합니다. 영으로든 물질로든 가진 것이 많으면 하느님 말씀에 자꾸 보태고 싶을 테고,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으면 다가오시는 말씀과 제가 하고싶은 말 사이에서 분별을 잃고 헤매다 길을 잃을 우려가 크니까요. 스스로 넉넉하다는 오만 못지 않게 계속 모자란다는 불안도 말씀과의 만남을 방해합니다. 말씀 앞에 선 이가 모든 잉여분을 내려놓고 "아무것도"만 지닌 채 맑고 순수하게 머무를 때, 비로소 말씀께서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자본주의 사회, 자유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무것도"의 요구는 커다란 부담과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를 물질적 기준으로만 보면 더욱 그렇겠지요. 하지만 "아무것도"를 소유 기준이 아니라, 기꺼이 "어디에서나" 주님을 전할 수 있는 비움과 헌신의 자유로 생각한다면 접근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를 치장하던 온갖 군더더기를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말씀 앞에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복음 선포의 힘은 이 머무름과 만남에서 나옵니다. 외출을 자제하고 머물러야 하는 집이든, 소박하게 나누는 안부 안에서든, 또 온라인 활동 안에서든 "어디에서나" 주님 사랑의 기운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은 말씀께서 친히 하실 것입니다. 아멘.

 

오상의 성 비오 사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나는 더 가난한 자로 살아야 한다. <루카 9, 1-6> 9월 23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가난은 사람이 서로를 만나고 이어주는 통로이며 사랑의 시작입니다. 가난함을 해결하려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며 결실을 보게 됩니다. 외로워서 외로움을 해결하려고 상대를 찾아 나누고 사랑을 시작합니다. 필요가 사람을 움직이고 필요하니 서로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간난 아기의 웃음은 전체가 웃음으로 가득 차고 많은 이를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 빈손으로 복음을 전하러 나가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그 힘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물질적 가난은 영적 풍요로움을 줍니다. 

수도 사제로 시작한 저의 복음 선포는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첫 본당 보좌 시절 내 주머니에는 동전 한 푼 없었습니다. 1,000원 받아 공소에 가면 돌아와 일원까지 다시 바치고 돈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복음 전파가 가능한 것은 주님이 옆에 계신 힘이었습니다. “사제는 주님의 대리자다.”라는 의식이 나를 견디게 했습니다. 지금은 보좌에게 약간의 돈을 주지만 그 당시는 무일푼이었습니다. 먹는 것도 본당 신부의 취향에 따라 먹어야 하고 본당 신부님이 병이 있어 음식에 소금기 없는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소금을 달라고 하면 본당 신부도 먹고 싶으니 참으라고 하여 먹지 못하고 영양실조에 걸릴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주일 한번 수녀원 미사 가면 진수성찬이어서 잘 먹고 일주일 견뎠습니다.

2년 후 함창 보좌 겸, 퇴강 본당 준 본당 신부로 임명받고 일주일 3일 토, 일, 월 지내는데 떠나신 신부님이 주방 도구를 숟가락 하나 남기지 않았습니다. 본당도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그때 수도원에 가서 청하니 10,000원 받아 아쉬운 대로 밥그릇, 반찬 그릇, 숟가락, 젓가락 구해서 밥을 겨우 끓여 먹을 정도였습니다. 그곳 신자들도 가난하여 함께 견뎌 나갔습니다. 다른 본당 신부들은 가난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면서 사목했지만, 보좌는 무일푼이었습니다. 함창 본당 공소에 가서 미사 드리고 나니 신자들이 줄을 서서 저를 기다리며 마귀를 쫓아달라고 하여 나가보니 얼굴이 노란데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래서 본당 신부님께 청해서 밀가루 한 차 싣고 가서 나누어주고 다음 주일 가니 얼굴이 환하게 폈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사제 생활 3년 지나고 나서 가난한 이를 도우려면 내가 무엇을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아끼고 절약하여 약간의 남을 도울 수 있는 돈을 갖게 되어 내가 가난하여 당한 서러움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수도원에서 어제 신부 된 사람, 소임 지 없는 사람,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에게 약간의 간식을 사주면서 나눔과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주위에 몇 사람의 부자가 있어 주시는 돈으로 충당합니다. 없으면 달라고 청해도 봅니다. 이렇게 저는 상담자에게도 도움이 필요하면 나누어주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니 ‘가난한 선교자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가난한 가운데 서로 돕고, 가난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해결하며 주님께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아멘.”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함승수 신부님

예전 TV 프로그램 중에 <꽃보다 청춘>이라는 여행 프로가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출연자들이 아무런 사전 정보나 여행 준비 없이 갑자기 ‘맨 몸으로’ 여행을 떠나게 만듭니다. 그러면 출연자들은 제작진이 준비해 준 최소한의 여행 경비만 가지고 정해진 목적지로 떠나 자기들만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애초에 ‘계획’같은 것이 없었기에 모든 여행 일정은 즉흥적입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정해진 날짜까지 버텨야 하기에 씀씀이가 조심스러워지고, 작은 물건 하나를 사는데에도 ‘그 물건이 여행에 정말 필요한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 고생스러운 여행이 대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지만, 여행을 마친 출연자들은 하나같이 오래도록 추억에 남을만한 뜻깊은 시간이었노라고 고백합니다. 늘 여행을 떠나고 싶었음에도 이것저것 챙길 것들도 많고 묶여있는 관계들도 많아서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는데, 빈몸으로 갑자기 훌쩍 떠나면서 “희망사항”에만 머물렀던 여행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늘 ‘미래’만 바라보며 이것저것 준비하고 챙기느라삶을 제대로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했는데, 좋은 사람들과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르는 체험을 해봄으로써 나중으로 미루기만 했던 행복을 ‘지금’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모든 것을 다 비운 상태에서,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과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며 그분과 함께 하는 지금 이 시간에 온전히 머무름으로써 참된 행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과 행복의 깨달음’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복음선포”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 바쁘다는 이유로, 여러가지로 챙길 것이 많아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신앙생활을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남으면, 나중에 여건이 허락되면 그 때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집착하는 것들을 지금 당장 비워내고 끊어내지 않으면, 하느님께로 나아가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나중’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항상 다이어트를 ‘내일’로 미루는 사람에게 체중감량이 언제까지나 이룰 수 없는 목표로 남듯, 늘 기도와 신앙을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목적지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매이지 않는 삶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가진 것 없이 무일푼으로 떠나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이렇게 여행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요즘은 돈 없이 어디를 다닐 수 없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대부분 도보로 여행을 하였기에 여비의 부담이 덜했습니다. 또 여행 중에 제자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유다인은 여행객을 마치 ‘하느님의 천사’를 대하듯이 대접했습니다. 그들은 나그네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여겼으며, 이를 통해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유다 백성을 찾아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전도 여행의 조건이 담고 있는 의미는, 복음 외에 어느 것에도 매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겠지요. 인간에게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거기에만 집착하게 되면 복음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십상입니다. 무일푼으로 여행하며 복음을 전해야 했던 제자들과 비교하면, 한국에서 사제 생활을 하는 저는 너무도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혹시 나에게 복음 말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봅니다. 또한 편리한 시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편리함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지팡이도 여행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주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할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상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그지가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제는 명확합니다. 바로 아무 것도 없고, 오직 하느님 한 분만 믿고 가라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이지요.

우리가 일상 생활을 살다보면 과연 하느님이 나의 모든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어느 정도 그렇겠지만, 내가 필요하고 힘들면 하느님을 찾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안정되고 문제없을 때는 하느님보다 다른 것들을 먼저 추구합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가치기준에서 1등이 되었다가도 2등, 3등, 심지어 더 뒤로 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내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믿을 대상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경고합니다.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교우여러분들, 지금 하느님은 우리에게 몇 번째 입니까? 하느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믿음이 약간 건 아닌지요.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을 받았습니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습니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루카 9,1)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2절) 시면서 선교하러 나가면서 유의사항을 알려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4-5절) 그래서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6절) 라고 전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우리 스스로 선교에 나서는 나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교할 때 우리가 믿는 주 예수님께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참 구원의 길을 열어주고 참 기쁨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선교하는가?

  내가 선교할 때 나의 사적인 이해관계나 다른 아무런 사심 없이 오직 주 예수님께서 구원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순수한 확신 속에서 선교하는가?

 

  내가 선교할 때 내가 전하는 주 예수님을 지금 바로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사랑하는가?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 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디에서나

복음은

복음으로

아름답다.

 

복음은 뜨겁고

사랑은 아프다.

 

사랑의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상처에서

복음이

선포된다.

 

아픔은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된다.

 

아픔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상처로 삶을

치유하는

이들이 있다.

 

상처를

받아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성 비오 사제의

오상은 상처를

품는 사랑이었다.

 

상처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주님과 함께

아파하고

주님과 함께

피 흘리며

상처를 품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상처가 있고

치유가 있다.

 

복음은

주님께 우리의

상처를 보여

드리는 것이다.

 

복음은

상처에

감사하는

것이다.

 

상처로 복음을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를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또한 상처였다.

 

살아있기에

상처와 치유가

있다.

 

상처가

있는 곳에

복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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