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 3,1-11
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3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5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9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10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코헬렛은,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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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헬렛은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데,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자,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라고 베드로가 답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는 코헬렛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가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코헬 3,11) 만드셨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고에 대한 갚음도 곧바로 눈에 보이지 않고, 모든 일의 “때”도 인간이 다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니한지, 지금 일어난 이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인간은 다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좋은 일이라고 쉽게 판단을 하지만, 그 일이 장차 가져올 모든 결과를 다 알고서 하는 판단은 아닙니다.
시간이 더 지난 뒤에 보면 그 일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지금 행한 일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가져올 모든 결과를 계산하지 않고서는 행동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다 보고 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다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코헬렛의 신앙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코헬렛을 의심스럽게 볼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와 코헬렛의 차이는 우리가 큰 비극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코헬렛은 훨씬 작은 일에서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코헬렛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교만을 버립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어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시는 분이심을 믿을 따름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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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복음에서 헤로데의 의문으로 제기된 예수님의 신원 문제는 오늘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드린 답변은, 안타깝게도 헤로데가 전해 들은 소문(루카 9,7-9 참조)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되살아난 옛 예언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 임금으로 삼으려고나 하였을 뿐(요한 6,15 참조), ‘수난을 겪는 메시아’ 곧 백성에게 배척을 받고 돌아가심으로써 그들 모두를 구원하실 구세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이러한 몰이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살리는 그 길을 방해 없이 끝까지 가시고자 베드로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코헬렛의 저자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치 오늘 복음의 군중처럼 가끔은 우리도 하느님의 계획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장의 변화만 바라다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군중의 몰이해와 외면을 이겨 내는 세월 끝에 성부께서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셨고, 성 비오 사제도 오십년이 넘게 오상(五傷)의 고통을 참아 내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면, 우리라고 어찌 그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건너뛸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위한 최선의 때와 방식을 마련해 두셨음을 확신하며 언제나 희망 안에서 이 구원의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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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짧게 보도하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라는 말이 덧붙여지는 것은, 루카 복음의 지속적인 서술 의도에서 비롯됩니다. 루카 복음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루카 복음의 의도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와 서로 친교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공간적 흐름이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집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다만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길에 십자가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이 복음서 안에서 늘 논쟁의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른바 승리의 그리스도이셔야 하는데,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음일 수밖에 없는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길이 성직자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혜택과 위로를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성직자들이 누리는 모든 혜택과 위로는 그들의 인간적 능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지라도, 성직자들은 꽤나 풍성한 대접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받고 또 받는 데 익숙해지면, 주고 나누고 함께하는 데 인색해질 수 있다는 것은 제 경험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아무리 영성 훈련을 한들 제 삶이 풍요로우면 이웃의 배고픔을 어찌 알겠습니까. 제 삶에 부족함이 없으면 하루 끼니가 아쉬운 이들의 형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함께하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자리에 배부른 이만 모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진 이든 그렇지 못한 이든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있는 잔치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자리를 마련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십니다. 특정 계층만을 위한 그리스도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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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분명하게 대답하지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을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른다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평화와 생명이 넘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체험하고, 평화와 생명을 얻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변하려면 먼저 내 안에 깃든 온갖 종류의 어두움과 악의 기운, 이기심들을 없애야 합니다. 반면 생명의 기운, 선한 마음, 남을 위하는 마음들을 살려야 하지요. 미래에 대한 불안을 희망으로 바꾸고, 증오와 의심을 사랑과 신뢰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놀라운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새롭게 보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바로 ‘나’부터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이 변화되면 가정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직장과 사회마저 서서히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라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내 생활에서 얼마만큼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뜻에 맞도록 변화하고자,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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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메시아 고백은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실 수도 있고, 훌륭한 ‘멘토’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출세를 보장하는 ‘현자’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참된 메시아가 어떠한 길을 걷게 되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성인은 예수님의 오상을 받으신 분입니다. 1911년 비오 신부의 오상은 시작되었고, 1918년 9월 20일 비오 신부가 고해성사를 집전하던 중에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오상에서 흘러나온 피에서 꽃향기가 났다고 합니다.
비오 성인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시관과 채찍질의 고통을 실제로 느꼈습니다. 1968년 성인은 오상을 받은 50주년 기념 미사를 장엄하게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9월 23일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선종하였습니다. 우리도 성인처럼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 안에 지니는 영광을 소망해 봅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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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더불어, 「코헬렛」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탄복하는 것이 ‘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관점에서 세상사를 하나하나 새겨 보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깁니다.
여기서 ‘때’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에트’를 종종 어떤 행위를 위하여 사람이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적절한 시점’을 뜻하는 그리스 말 ‘카이로스’와 같은 의미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때’를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시고 정하신 ‘주어진 기회’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은 우리가 행한 일들의 전적인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지금’이 하느님께서 이 일을 위해 주신 때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의식’은 지니고 있으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전체 내용을 시작과 끝의 흐름 안에서 파악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이렇게 모두 정해진 때가 있고 그 세상사의 전체적 의미를 알 수 없다면 우리가 수고를 들여 행하는 모든 일이 어떤 보람을 가질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의 질문은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반복하는 근원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애써 해낸 일들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 질문을 조금 바꾸어 던져 보고 싶습니다. ‘나는 언제 내가 한 일에서 내 역할이 미소하다는 것을 알고, 또한 내가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코헬 3,20 참조) 내게 ‘주어진 기회’에 해 놓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의미를 찾게 되는가?’ 「코헬렛」이 던져 준 ‘허무’와 ‘때’에 대한 성찰은 우리의 인간 조건 속에서도 충만한 의미의 비밀을 발견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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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나 엘리야, 또는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자신의 주변 인물 정도로밖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 곧 구세주라고 고백합니다. 군중과 달리 베드로는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 삶의 주변 인물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생각, 이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흔히, 예수님께서 ‘나’의 뜻에 따라 움직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예수님을 주변 인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우리 자신이 중심이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맞추어 움직여 주시는 존재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이며, 또한 정반대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중심이시고, 그 중심에 맞추어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주님께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청원과 함께 반드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중심이시며, 저는 그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제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하소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대로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께서는 그 고난 뒤에 반드시 우리를 되살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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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인심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거꾸로 돌아가도, 곡식들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에 맞추어 충실하게 그 열매를 맺어 갑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가까이 오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의 심중을 헤아리고 계십니다.
유가(儒家)의 전통 가운데에는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에 딱 들어맞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때 ‘시’는 곧 ‘천시’(天時)입니다. 하늘의 때이지요. 하늘이 정해 놓은 때에 딱 들어맞게 행하는 것이 곧 사람의 도리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면, 그가 곧 성인(聖人)이고, 그렇지 않으면 소인배에 해당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때가 이르자,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 또한 ‘시중’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이제 곧 때가 이르게 되니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제자들의 태도를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때에 맞춘다는 것은 신중하게 산다는 것이며,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식별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신중하거나 식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이야기하지만, 용케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시다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실지에 대하여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각인시켜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때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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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구세주라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을 지녔기에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주님께서는 침묵을 명하십니다. 당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 하게 하셨습니다. 아직은 수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참메시아가 되십니다. 구세주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역사에는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신을 살아 있는 구세주라고 당당하게 외친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 다릅니다. 그러기에 분열만 일으키다 사라졌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면 메시아가 아닙니다. 고통과 수난을 피하려 들면 영적 지도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끌어 주셨기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언제라도 은총이 답인 것이지요. 사람은 다만 도구일 뿐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스피커’일 뿐입니다. 이를 잊어버리기에 자만에 빠집니다. 메시아 대접을 받으려 합니다.
‘죽지 않으면’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훗날 제자들은 깨닫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희생하고 침묵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천상의 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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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스승의 이 질문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어떤 세상의 구원입니까? 당연히 우리 인류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내가 책임질 사람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세상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한다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따르느냐? 무엇을 바라면서 신앙煇걋?하고 있느냐?’ 하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과 재앙을 없애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면 곤란합니다. 믿음은 불행을 피해 가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역경 속에서도 잘 극복해 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더 나아가 고통마저도 자기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여기며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데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주인님’의 줄인 말입니다. 무엇의 주인이겠습니까? 내 인생의 주인이며, 내 모든 소유의 주인입니다. 그분께서 주셨기에 내 몸이 있고, 건강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이 고백에는 이렇듯 엄청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두 아빠 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아빠 곰에게는 각기 아들 곰이 있었습니다.
한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물고기를 잡아다 먹였습니다. 다른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매일 잡아다 주는 물고기를 먹었던 아들 곰은 자기 아빠 곰이 최고라고 늘 외쳤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빠를 둔 아들 곰은 힘든 사냥에 투덜거리면서 불평을 이야기했습니다. 왜 다른 아빠 곰과 달리 직접 사냥하는 방법만 가르쳐주냐고 했지요. 그래도 아빠 곰은 그때마다 인내를 가지고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시간이 흘러 두 아빠 곰은 늙었고 자기 힘으로 더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물고기를 받아만 먹던 아들 곰은 투덜거렸습니다. 이 아들 곰은 물고기를 잡을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냥을 배운 아들 곰은 아빠를 위해, 자기를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새끼를 위해 사냥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훈육법은 넘어져도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과 함께했던 사람은 일어나는 법을 압니다. 계속해서 우리 삶 안에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은 불평불만만을 이야기할 뿐,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뿌듯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군중의 반응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영광만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을 들으신 뒤에,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즉,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꽃길만 있을 줄 알았는데, 가시밭길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곧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먼저 수난과 죽음으로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지금 삶을 잘 살 수 있는지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조건 영광의 길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상징되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부활이라는 참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오래 산 사람은 가장 나이 들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잘 느끼다 죽은 사람이다(장 자크루소).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빈첸시오 드 폴처럼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신 분은 드물 것입니다. 사제품 이후 좀 더 깊이 있는 신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빈첸시오 드 폴에게 한 가지 좋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마르세이유의 한 귀부인이 학비에 보태라고 거금의 유산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한걸음에 달려간 그는 두둑한 봉투를 건네받고 품에 간직한 채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돈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모든 소지품마저 탈탈 털리고 말았습니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온 몸은 굵은 철사줄에 꽁꽁 묶여 아프리카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전도양양하던 사제에서 노예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는 선주의 손에서 의사의 손으로, 의사의 손에서 농사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기적과도 같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 빈첸시오 드 폴이 겪었던 특별한 바닥체험은 그의 성소 여정을 더욱 굳건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같았으면 그런 불운을 겪게 해주신 주님과 해적들을 원망했을 텐데, 오히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불행한 사람들만 만나면 빈첸시오 드 폴은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베풀수 있는 가장 큰 사랑과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빈첸시오 드 폴은 당시 사회 안에서 넘쳐흐르던 고아들과 과부들, 환우들과 임종자들, 노예들과 재소자들, 걸인들과 병든 나그네들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여기고 섬겼습니다.
한 가장이 잘못을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가 없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이 굶어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빈첸시오 드 폴에게 전해졌습니다. 저 같았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는 선에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 당국에 부탁해 가장을 석방시켜주도록 탄원했습니다. 남은 형기는 자신이 대신 뱃사공 역할을 하며 채워주었답니다.
참으로 위대한 자비의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사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난’ ‘자선’ 하면 즉시 떠오르는 얼굴이 바로 그의 얼굴입니다.
그의 생애와 영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온통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해 아낌없이 조각나고 나눠진 거룩한 성찬의 삶, 빛나는 자선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한 자비심, 연민의 정, 측은지심이 많이도 결핍된 우리입니다. 피눈물 흘리는 이웃들, 죽어가는 이웃들의 고통 앞에서도 무더덤한 우리를 향해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은 외치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스승이고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은 불가항력입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도 불가항력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배 골프대회를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휴스턴, 오클로하마, 포트워스, 오스틴에서도 참가해 주었습니다. 160명이 참가 신청해 주었습니다. 경품도, 티켓도 잘 마련했고, 골프장도 멋진 곳으로 예약했습니다. 아쉽게도 일주일 전부터 확인했는데 대회 당일에 비 소식이 있었습니다. 일기예보는 정확했고, 비가 내리는 중에 골프대회를 시작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150명이 참가해서 골프대회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중에도 끝까지 함께 해준 참가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행사 준비를 위해서 애써 주신 준비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겁니다. 달라스 날씨가 무더운데, 비가 내리니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골프대회를 통해서 수익금은 필요한 곳에 나누어 주고, 교우들은 친교를 나누고, 교우가 아닌 분들에게는 교회를 알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까르페디엠(Carpe Diem)'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라틴어인 이 말의 문자적 뜻은 “현재를 잡으라.(Seize the day)”는 말입니다. 즉, “현재를 신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라.” 그리고 “오늘을 견뎌라”는 속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있음을 항상 기억하는 사람은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을 낭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현재를 견뎌냅니다. 오늘은 그날을 준비하는 유일한 기회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한 이 말이 다시 소환 된 것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라고 말하면서입니다. 저는 이 말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골프대회 날, 비가 오는 걸 원망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계절을 바꿀 수 없다면 바뀌는 계절을 즐기는 것이 좋습니다. 비가 내렸지만 바람은 별로 없었고, 내리는 비도 과하지는 않았기에 골프대회를 잘 마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비가 내리니 오히려 차분해져서 좋았습니다. 불가항력이라는 말에서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에서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까르페디엠이라는 말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도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때문에 너무 가슴 아파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 때문에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고통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욥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올 때 빈 몸으로 왔으니, 이 세상을 떠날 때 빈 몸으로 가는 것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의 평가와 세상의 가치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엘리야라고 하든, 세상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든, 세상 사람들이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못한 이웃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라고 하십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악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물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께서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저에게 건네시는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께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제가 답해야 할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과
함께하고자 하는
제가 결코 피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께서
저를 알고 계시니
굳이 답을 바라시지 않는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일 수 없는
제가 결코
답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처럼
되어감으로써
제가 서서히 답할 수 있는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처럼 될 수 있으니
당신을 따르라고
저를 애틋하게 부르시는
물음 아닌 물음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사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실 때 자신들도 역시 한 자리를 차지하려니 하는 생각들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가진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정말 당황스러워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다른 복음에서 보면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그것을 극구 말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 안에 인간적인 이익과 현세적인 복락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저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그저 단순히 자신의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복락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주님과 모든 것을 이루어가며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며 하느님 안에 영원한 행복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받을 고난과 죽음 이어서 사흘 만에 되살아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의 빌라도에 의한 죽음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면서 예수님 스스로가 선택하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먼저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피조물이 아닌 자녀로서 만드셨고 자녀가 죄를 지어도 너무 사랑하시어서 죄를 묻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알 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의 중심에는 바로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시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즉 찐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십니다. 독서를 보면 우리가 살면서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서 만드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요. 참 마음이 아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군다나 요즘의 시대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 희생의 가치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것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여 잘못된 말과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께 의탁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이들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 베드로는 이에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에 대답하지 맙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예수님께 답해드립시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9,20)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이 단순한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실 복음서를 집필한 네 명의 복음사가들은 후대 사람들의 의문에 대해 많은 정보나 힌트를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 생애의 거의 95%는 복음서의 기록에서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구원과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12,8)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물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먼저 G.K. 체스타톤의 다음 글을 읽으면서 대답을 위한 힌트를 얻길 바랍니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키가 크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작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뚱뚱해서 싫다 하고, 어떤 이는 그가 너무 말라서 안됐다고 한다. 누구는 그의 피부색이 너무 검다고 말하고, 누구는 너무 창백하다고 말한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우리는 황당해한다. 이런 경우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 그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그는 제대로 된 사람일지 모른다. (...) 간단히 말해서 어쩌면 이 비범한 존재야말로 정말 평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가장 정상적이며 중심을 지키는 사람 말이다.』 이어서 윌리암 블레이크의 다음 글 또한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대가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내가 보는 형상과 전혀 반대라네. 그대의 그리스도는 그대처럼 매부리코, 나의 그리스도는 나처럼 들창코, 둘 다 밤낮으로 성경을 읽건마는 그대가 검정이라고 읽을 때 나는 흰색이라고 읽네. 』
위에 언급한 내용을 마음에 간직해 놓고 잠시 상상해 보도록 합시다. 지금 어떤 사람이 자기 방의 창문을 통해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파트가 높이 서 있어 이젠 거리를 볼 수 없지만,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입니다. 거리에 있는 어떤 사람이 손으로 햇빛을 가리키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건물에 가려서 그 사람이 무얼 가리키고 있는지 자신의 방 창문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어떤 것도 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오신 지 2000년 넘은 오늘이란 시점,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창가에 서 있는 어떤 사람과 비슷한 입장입니다. 윌리암 블레이크의 시에 잘 드러나듯이, 우리는 때론 눈앞에 보이는 예수님만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학자인 ‘바버라 터크만’이라는 분은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규칙이란 다름 아닌 『앞으로 빨리 감기를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훌륭한 역사학자는 그 역사적 사건의 분위기를 재창조해서 『독자가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과거 교회의 역사는 터크만의 주장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 ‘앞으로 빨리 감기’의 시각을 견지한 채, 복음서를 연구하고 가르쳐 왔는지 모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우리 모두 ‘앞으로 빨리 감기’ 식의 통상적인 대답이 아닌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듣고 보고 느끼고 만져 보면서’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9,18)라는 표현처럼 무엇보다 먼저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만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빨리 감기식의 영혼이 없는 주입된 대답이 아닌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만남을 통한 살아 있는 대답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9,20)하는 질문은 관계적인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 자체가 바로 우리가 누구를 믿고 있으며, 또한 내가 누구인지, 를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믿음의 핵심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이다,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12,8)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모르지만, 아빠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신 것처럼 저희도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대답 백점 맞았던 겁니다.
우리는 이제 베드로를 커닝하거나 눈치 볼 필요 없이 믿으면 됩니다.
이미 베드로가 인류를 대신해서 정답을 말씀 해 주신 것 아니겠어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하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시간은 지났죠.
그런데도 신자들은 무조건 말하지 말랬다고 아직 말을 안하나봅니다.
예수님부활 전 까지였고 이젠 지났으니 베드로처럼 뉘신지 알립시다.
본당마다 예비자 교리를 직접 하기도하고 비대면 인터넷교리도 있죠.
인터넷 검색에서 인터넷교리 라고만 하면 개인별 교리수업 가능해요.
가톨릭알림 말: 예수님과 우리생애가 깊이 연결돼 있는 내용 알립시다.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믿음과 복종의 삶>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는 궁중들과 헤로데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았습니다(루카 9,7-9).
오늘 복음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단지 ‘예언자’ 차원에서 이해했을 뿐 메시아로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습니다(루카 9,21).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언은 이미 천사들과(2,11) 예언자 시메온과(2,26) 마귀들에게서(4,41) 선언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지만, 잘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을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당혹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9,23-29).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Dei)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표현에 ‘아버지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맞게 될 일을 네 개의 동사, 곧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되살아난다' 로 표현하십니다.
‘고난을 겪는 일’이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은 고난을 여러 차례 겪는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겪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그 고난은 여타의 다른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벌어지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겪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죽기까지 믿고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믿음과 복종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는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본회퍼)는 말을 떠올려 줍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믿음의 복종은 결코 시들지 않는 생명으로 되살아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믿음과 복종의 삶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루카 9,22)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인간관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 판 베토벤(Karl van Beethoven)과의 관계는 그의 개인 생활과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에게 큰 정서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베토벤은 1815년 그의 형이 사망한 후 카를의 양육권을 얻는 데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카를의 어머니에 대해 깊이 불신하고 있었고 그녀가 아들을 키우기에 도덕적으로 부적합 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칼의 완전한 양육권을 놓고 그녀와 길고도 격렬한 법적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 양육권 싸움은 베토벤의 시간, 에너지, 재정적 자원을 많이 소비했습니다. 그것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종종 그의 음악 작업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의 우울증과 좌절감은 끊임없는 법적 논쟁으로 인해 더욱 악화하였습니다.
베토벤이 양육권을 얻은 후 칼과의 관계는 이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그의 조카에 대해 높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그를 교양 있었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칼은 까다롭고 반항적이며 베토벤이 꿈꾸던 삶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칼을 징계하고 통제하려는 베토벤의 시도는 종종 둘 사이에 긴장을 초래했습니다. 베토벤은 소유욕이 강하고 위압적이어서 그들의 관계가 긴장되었습니다. 칼에게 엄격한 양육을 제공하려는 베토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칼은 종종 삼촌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칼이 베토벤에게 끼친 가장 비극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은 1826년에 일어났습니다. 칼은 그에게 가해진 압력과 기대에 대처할 수 없어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지만, 이 사건은 베토벤을 황폐화했습니다. 그는 칼의 불행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느꼈고, 실제로 베토벤은 카를의 자살 시도 이후 건강이 악화하여 몇 달 뒤인 1827년에 사망했습니다.
베토벤의 죽음의 원인을 조카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자기 책임 하에 놓으려고 하는 것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조카는 삼촌의 음악을 본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책임은 베토벤에게 있는지 모릅니다. 끊어내야 할 사람을 끊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집착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나 형제, 자녀의 잘못 때문에 정치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만약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한다면 기회가 있을 때 비록 가족이라도 그 사람을 끊어냈어야 옳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나 다른 예언자가 살아났다고들 하지만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이 메시아란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이르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지만 왜 여기서는 당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신나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함구령이란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질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을 안다고 말할 자격도 박탈하시는 것입니다. 자칫 당신이 이용당하여 목적을 완수할 수 없게 되고 또 그 사람에게도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주교님에게 전화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저의 이름을 대면서 아주 잘 아는 사이고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주었기 때문에 머리말에 저의 이름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구에서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그 사람이 강의하고 책을 파는 것을 금하려는 때였습니다.
저는 그 신자를 압니다.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왠지 자신을 위해 저를 이용하지, 저의 생각으로는 한 발자국도 다가오려 하지 않는 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래도 인연이 중요하다고 여겨 계속 그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자칫 저도 그 일 때문에 혼이 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절연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전혀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나를 아는 것에 대해 말할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더 큰 일을 할 미래를 위해 그 사람을 끊어내야 합니다.
사랑은 무능력이나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사명이기에 그에 어긋나는 것은 가차 없이 끊어낼 줄도 아는 일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맑스의 공산당 선언에 보면 ‘종교는 아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마태 5,3) 라는 복음 말씀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하늘나라 이야기를 하면서 노동자들을 사용자들 편에서 착취하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람들을 속이는 아편이라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말을 듣고 당시 파리 대학의 프레드릭 오자남과 여섯 명의 대학생들이 직접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서 기도만 해주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 말씀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사는데 정작 필요한 것을 찾아 가난한 이들끼리 서로 나누고 채우면서 현세에서도 행복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 학생들의 노력은 하나의 단체가 되어 전 세계 교회로 퍼져나갔는데 그것이 오늘날 전 세계의 여러 본당에서 교회를 대표하여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빈첸시오 드 폴회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 회라고도 번역하여 쓰기도 합니다. 이들은 17세기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영성을 따라 가난한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도움을 주고자 오늘도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코헬렛은 말합니다.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 3,10-11)
우리는 주님께서 정하신 때가 다 되어야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고 마치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린다고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내가 한다고 해서, 또 내가 할 수 있을 때에 다 이루어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에게 맡겨진 그 때 그 순간에 해야 할 일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채워야만, 한 단계씩 하나씩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주님의 섭리와 안배 안에서 그 다음 단계가 와서 다음 사람이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일을 내가 채우기를 믿고 맡기신 것이고,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구원의 역사는 진행해 나아갈 것입니다. 주님 구원의 역사에 미소한 도구라도 되도록 부르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소문에 귀를 기우리는 사람보다 진실을 보는 사람이 되자<루카9/18-22>9/2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소문과 진실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10번 듣고 아는 사람과 한번보고 아는 사람이 진실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한국을 외보고 놀라며 듣는 말은 미개한 나라 더러운 나라라고 알고 있다가 발전한 모습과 깨끗한 거리를 보고 놀란 사람이 많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주님은 당신이 베드로 사도가 고백한대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듯이 참 하느님이시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였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 부활의 모습을 보고도 믿지 않은 사람에게 소문은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알려면 합당한 증거와 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하려면 분명한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어디사십니까? 하니 “와서 보라.” 하시었으며 오늘도 율법 학자에게 베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시흘만에 되 살아나야 한다.“ 하시며 보아야 믿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진실을 알고 따라 살아야 바르고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을 살려면 믿을 만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백마디 말보다 한번의 진실을 보여 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온 안류를 사랑함을 몸으로 보여주시어 믿음으로 이끄셨으며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믿음이 지속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늘아레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 때가 있다. 시작하여 모든일은 때를 따라 이루어지고 형성된다고 하십니다. 말할 때가 있고 행동할 때가 있으며 원한다고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어야 땅에 심어 놓은 씨앗이 곡식이되어 익어 먹이가 될 때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작이 있으며 마침이 있습니다. 아기가 어머니 벳속에 생겨난 후 10개월이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세상에 태어나면 어느 날 땅속에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시작한 때가 있으면 마치는 시간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지 끝나는 시간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무엇을 만드는 사람은 만든 것이 없어질 때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코 찔지리가 국민하교 들어가 6년이 지나서 빛나는 모습으로 졸업장을 받듯이 때를 기다리는 사람 어떤 일이 지금 안 되는 것 같아도 되는 때가 온다는 희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여려 사람으로 보여도 끝나는 시간 그런사람이였구나 하는 인물을 경험하듯이 두고 보도 기다려 보는 삶이 필요합니다. 오늘 힘들어도 참고 견디고 지금 잘된다고 교만한지 말고 겸손하고 자신을 나추며 살아 주님의 사랑 안에 진실 속에 살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함승수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는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인하려고 들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들이 당신의 신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제자들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두고 목 베여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거라고, 엘리야 예언자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돌아온 거라고, 모세가 자기 뒤에 올거라 미리 예고했던 ‘그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등장한 거라고,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군중들이 자기 스승님을 그렇게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꽤나 자랑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생각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그 손이 가리키는 달은 보고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예언자의 모습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수제자인 베드로만은 자기가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심을 제대로 알아본 겁니다. 그가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의 눈으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예수님을 바라보았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라는 부분입니다. 어떤 말 뒤에 ‘의’가 붙으면 소유격이 됩니다. 즉 예수님이 하느님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근동지방에서는 누군가의 아들을 가리킬 때 ‘아들’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기보다, 그 아버지의 이름에 소유격 접미사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들이 그 아버지께 속한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께 속한 존재이니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게 당연히 수행해야 할 ‘소명’으로 주어지지요. 예수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소유인 당신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고 따라야 함을.
그런 점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의 신원에 대한 말씀 뒤에, 당신이 겪으셔야 할 수난을 예고하시는 말씀을 덧붙이신 겁니다. 어쩔 수 없어서, 마지못해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 슬프고 괴로운 일을 떠맡으신다는게 아닙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임을 아시기에 사랑에서 우러나는 순명으로 기꺼이 따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예수님의 순명과 희생을 어여삐 보시어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임을 믿고 희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런 믿음과 희망을 지니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
한창현 모세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세 가지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지만 헤로데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알고 싶은 동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자들도 군중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에 대한 세 가지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십니다.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서 함께 지내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걸 확인하고 싶으셨던 걸까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 대답을 들으시고 그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의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고 싶으셨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으신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경험하게 될 수난과 부활의 과정을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게 될 것임을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우리 삶에서 체험하게 되는 순간을 놓치지 마십시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루카 9,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을 하늘이
최고의
선물입니다.
고난이 고난을
위로하고
가난이 가난의
마음에 와 닿는
고난의
선물입니다.
고난이 삶의
족쇄가 되지는
않습니다.
고난의 깊이가
바로 사랑의
깊이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없이는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둔한
우리들입니다.
고난은
환상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고난 앞에
내려놓는
우리들의
오만함입니다.
오만함과
결별하고
겸손을
만나는
고난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희생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 됩니다.
고난과
가난으로
완성되는
내면의
길입니다.
가난과
함께 하시며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돌보셨던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봉사의 삶입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이 여정을
함께 걸어갑시다.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삶의
고난과
가난입니다.
이것이
선물이었음을
언제나 나중에
깨닫는
우리들입니다.
한 소년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느 날, 쪽지 시험을 봤는데 망쳤습니다. 소년은 “다음 시험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맞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시험에도 망쳤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중간고사를 봤는데 망쳤습니다. “다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맞겠다.”라고 결심했지만, 기말고사도 망치고 말았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다음 시험에는 열심히 공부하자.”라고 결심했지만, 다음 시험도 망쳤습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재수할 때도, 취업 시험을 보고 나서도 “다음 시험에는 열심히 공부하겠다”라고 결심했지만 늘 망쳤습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운 좋게 조그마한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이 회사에서 하는 일은 너무 하찮은 일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걸 할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다 보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세상을 한탄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번 생은 틀렸어. 다음 생에는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뒤로 미루기만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면서 당신의 신원에 관한 질문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분이라는 대답을 합니다. 사실 제자들이 말하는 인물 모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자랑스럽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 정답을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정답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알려주시지요. 정답을 알기에 미래의 시간을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에 매여있는 분이 아닙니다. 과거의 영광만을 떠올리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희망으로 이끌어주시는 분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걱정 없이 큰 기쁨을 가지고 희망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어제로부터 배우고, 오늘을 위해서 사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사람들은 왜 나를 만만하게 보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여기 피로와 무기력감, 자살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막 40대에 접어든 미혼 여성의 삶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 여성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족스럽게 살아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녀는 소위 한국의 전형적인 장녀였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사고로 잃은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의 기둥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도 사춘기도, 질풍노도의 시기도 그녀에게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네가 빨리 자리를 잡아 어린 남동생을 경제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청춘도 연애도 뒤로하고 오직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동생이 재수, 삼수를 하는 동안 학원비는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자 남동생은 그녀가 평생 엄두도 내보지 못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를 원했고 그다음은 사업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업비용은 어머니의 대출로 이루어졌고 어머니의 대출금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갚아나갔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여러 날 앞둔 어느 날 어머니의 다음 말은 그녀를 폭발하게 하였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 있지? 그거 네 동생 신혼집으로 주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집 한 칸은 해줘야 사돈 보기에도 체면이 서지.”
기가 막힌 그녀가 “그러면 엄마는 어디로 이사할 건데?”라고 묻자 어머니는 당연한 듯 말했습니다.
“너희 집으로 가면 되지. 이제 같이 나이 먹어 가는 모녀끼리 친구처럼 한 번 살아보자!”
그녀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애 처음 반대의견을 말한 뒤 에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순식간에 일그러진 얼굴과 폭언,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빨대 꽂아 다 빨아먹은 동생의 적반하장 반응이었습니다.
“불효녀”, “욕심 많은 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누나 왜 그렇게 엄마 힘들게 해!”와 같은 비난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는 동생이 신혼집으로 쓰고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만나던 남자친구는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졌습니다.
[출처: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시다』, 권순재, 생각의 길]
위 여성의 문제는 이전 세상을 찢을 용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궁이 좋아서 자궁을 찢을 용기가 없다면 아기는 자궁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맛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성의 정체성은 ‘어머니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흔들리고 휘둘리고 이용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나의 것이 된다는 것에 희망을 걸지 마십시오. 나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인간은 분명 누구에겐가는 의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속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은근히 우리를 자기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들 맘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내가 나를 너무 믿기 때문입니다. 나로 사는 것이 강한 삶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로 산다는 말은 세상 것들이나 사람들에게 다 휘둘리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떤 피조물이건 버려진 깡통과 같습니다. 나 스스로는 다른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피조물의 본성적 의존성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생존하려면 에너지를 소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속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소멸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더욱더 누군가에게 속하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한 불안함은 나를 의존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남에게 휘둘릴 준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휘둘리지 않는 유일한 법은 내가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는 대상의 것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대상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흔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 9,20)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루카 9,2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입니다. ‘의’가 붙으면 소유격이 됩니다. 하느님의 소유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성령으로 아드님을 소유하십니다. 성령은 은총이기도 하지만 소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리지 말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 9,22)
아버지로부터 소명을 받지 않으면 아버지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뜻에 의해 움직일 때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하느님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 누구의 뜻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휘둘리며 살 것인가, 아닌가는 내가 누구의 것이 되느냐에 달렸습니다.
고집부리는 것과 줏대 있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고집부리는 사람은 분명 누군가에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입니다. 그러면 흔들립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발로 차 봅니다. 하지만 줏대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누군가의 권위에 따라 사람들은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고집부리는 사람이 가장 만만합니다. 그 사람의 주인이 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차피 휘둘리게 태어납니다. ‘나’라는 존재는 실제로 어떤 권위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휘둘린다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고 화내지 마십시오. 그건 내가 누구의 권위 있는 대상의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용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으려면 누구도 그럴 수 없는 대상의 것이 되십시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창조자의 것이 되십시오. 그분의 뜻을 따르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창조자로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당신 것이라 천명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이사 43,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사랑은 뭐길래!’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극중에서 엄격한 남편에게 순응하면서 지내는 아내가 혼자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제목은 산스크리트어 ’타타타‘ 입니다. 우리말로는 ‘그래 그런 거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엄격한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자상한 아내는 남편을 잘 알았습니다. 자녀들의 꿈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딸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었습니다. 드라마 제목처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것이 ‘때’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고 합니다. 열흘 넘게 피는 꽃이 없고, 권력이 10년 이상 가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겸손’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자매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사연은 자신이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성인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즐겁고, 재미있게 살았던 성인으로, 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성인으로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함께 기도하고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 뒤로 그 자매님이 저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이 제게 말하는 겁니다. ‘저요, 세례명 바꾸지 않을래요.’ 그러면서 그동안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좋은 일도 많았었고, 주보성인의 삶을 따르기 보다는 세상의 명예와 자리를 너무 따라갔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주보성인처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니 다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고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자신의 것보다 더 가볍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매님처럼 때로 우리의 십자가를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 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너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구원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고마운 다리가 될 것입니다.
<나에게 당신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되고 싶어도
될 수 없고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한결같이
언젠가는
되고픈 나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인가?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감이 익어간다. 감을 잃었다면 감을 잡아 보라. 감이 올 것이다. 우리의 글은 소리글로 뜻글자가 아니기에 이런 아재개그가 통한다. 정확히 위에 문장을 한자로 표기하면 이런 개그는 금방 사라질 것이다.
아마추어를 넘어 프로가 되기 위해 산을 넘어야 한다. 커리어가 생겨나면 그 분야에 전문인이 되고 장인으로 또 앞서간 스승의 길을 간다.
뭐가 되겠지, 막연하다가는 늘 변죽만 울린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6개월, 1년 교리를 받아도 전체에 대한 감이 쉽지 않다. 교리는 계속 삶에서 이해 되어야 하고 응용되어 감칠맛나는 풀롯으로 만들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스토리가 아니다. 뜨거운 감동으로 이어져 내 삶으로 완성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답이 내 안에 섰을 때, 그것은 스토리가 아니다. 풀롯이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의 변신하려면 스토리를 솥에 집어 넣고 푹 끓여야 한다. 달달 볶아 흠뻑 우려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맛일 때, 그 때 정확한 맛이 나올 것이다.
오늘 베드로가 말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놀라운 답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당부 하신다. 그 답은 훌륭하지만 스토리 다운 답이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들려 주신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9,22)
우리는 이 수난예고를 들은 베드로의 반응은 '아니 되옵니다'를 알고 있다. 스토리를 넘기에는 큰 장벽에 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이다' 운명 교향곡이 파도를 친다. 그때 배드로의 고백은 풀롯이 될 것이다.
감을 잡아보라! 감나무 밑에 가서라도 감을 잡아 보는 거다. 신앙생활은 스토리가 아니고 격앙되고 흥분되고 뜨겁고 그런 푸롯이다. 왜 영화 연극을 보며 극찬하는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배우들의 감동을 주는 풀롯이다. 주저 앉지 말고 끊임없이 투신하며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의 의문을 달고 살며 생생한 나만의 고백을 완성하라. 성령께서 상급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옛 예언자중 한 분이시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사도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물어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우리가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답을 한다는 것은 곧 내가 주님과 함께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상대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서 나의 태도와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상대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그 사랑 안에 함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신 그리스도, 주님이심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신앙인들은 주님과 함께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말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모든 유혹을 뿌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바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가신 길을 따라서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바로 나의 행복이자 나의 희망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베드로의 정답에 진정으로 공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신앙인들은 베드로의 정답에 진정으로 공감동의하며 사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지 말고 단계적으로 진행하라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겪을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셨죠.
지금은 베드로의 정답에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다 마치신 때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에 대해 어느 누구도 딴 말 할 필요가 없는 시대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에 대해 그대로 확신과 믿음으로 살면 되는 시대입니다.
인간들은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따라 살면 됩니다.
하느님과 인류와 예수님의 필연적 고리관계는 종말에라야 끝나겠지요.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메시아라고 고백하고 믿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어떤 그리스도이고 메시아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는데, 우리가 믿는 것이 올바른 믿음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에 갑자기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혹은 엘리야 그리고 예언자 중 어느 한 분”이라고 대답하지요. 예수님께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군중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그저 기적을 베푸는 이 혹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기에 그것을 정확히 알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묻지요. 어쩌면 이 질문이 핵심일 것입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자신을 올바로 믿고 받아들이는지가 제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올바른 대답을 하였지요. 하지만 그가 고백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맞는 대답이지만 제자들 역시 세상에서 원하는 것대로 로마로부터 구원을 해줄 메시아 그리고 자신들 역시 제자들로서 이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엄중하게 분부하십니다.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군중들이 자신을 로마의 억압에서 구원해줄 사람, 그리고 억지로 왕으로 만들려는 것을 알기에 베드로의 이 고백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큰 혼란이 일어나고 심지어 자신이 왜곡되어 질 것임을 알았기 떄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언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 지상의 삶이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과 동시에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묵상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들이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디 아니면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것인지 다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이들은 평탄한 삶이 아닌 고난의 삶과 다른 누군가로부터 배착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이 끝이 아니라 되살아나듯이 새 희망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예수님 앞에서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말마디는 정답이었지만 그의 마음 안에는 사익이 들어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하느님의 뜻에 맞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 개개인에게 다가오는 매일의 고난들이 괴로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는 올바른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지내면서 다시 한번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뜻 한에서 올바른 고백을 하는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두손모아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신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이었고, 예루살렘에는 십자가의 길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예수님은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를 지셔야 하며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셔야 하는 중요한 때였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올바로 보고 있는지 물으신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19절) 예수님께서는 이 소문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 그 소문은 언급할 가치도 없이 틀린 소문이기 때문이다. 그 답에 즉시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0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혼란을 겪지 않도록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대하신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그리스도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더러는 임금으로 혹은 예언자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그리스도이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20절)라고 정확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여기서 제자들은 그 기적에 놀랐고,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도록 칭송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분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당하는 길로써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길이기에 그리스도를 다른 뜻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함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영광을 입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함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선포해야할 내용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수난과 육신의 부활을 선포해야 했다. 제자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근상 시몬 신부님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렛 3,11)
문제가 되는 단어는 '시간 의식'으로 번역한 '올람'이다. 구약에서 수 백 번 사용하는 단어인데 주로 영원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영원한 계약, 영원한 소유... 뭐 이런 뜻. 그런데 바로 이 영원이 문제다. 이게 불멸의 영원성이 아니라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길고 긴 흐름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보통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 먼 옛날부터 아주 먼 미래까지의 시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감각을 주셨고,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감각을 주셨으나 그 시작도 그 끝도 우리의 몫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멈추고,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것.
우리의 신앙은 내내 하느님, 그러니까 예수님의 삶에 뛰어들려는 몸부림이다. 어떻게든 당신과 결부되고픈 바람.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당신의 것을 간직하고픈 바람. 그런데 그와의 관계를 이루는 대부분의 공간이 비어있다는 건 어렴풋하지만 그럴 것 같다. 온 우주를 채우는 가장 큰 자리가 빈공간인 것처럼.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 그 빈 자리를 한 해 두 해, 아니 백 년 이 백 년, 아니다 일 광 년 억 광 년 건너가야 하는 것.
당신은 우리에게 별같은 기쁨을 주고 그 사이에 광대한 빈공간을 허락했다. 옛날에 배운 독일어에 Weltschmerz란 말의 의미를 조금 알 것도 같다. 네이버사전으로 찾아보니 염세, 비관적 세계관이라고 딱 두 단어로 정의를 해 놓았다. 아... 말이란게 이렇게도 저렴하게 난도질 당하기도 한다. 블레이크가 많이 서운할 거 같다. 세상이 사람의 마음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에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이라 배웠다.
사실 빈공간을 빼면 별들이, 아니 우주가 어찌 텅빈 마음을 위로하는 우주가 될 것이냐.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홀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기도안에 당신의 소명을 마음에 새기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목숨을 바치는 희생의 사랑이
사람들을 향한 당신 사랑의 완성과 실현이며
구원과 해방의 길이 될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보고 듣고 머무는 길
그 깊은 사랑안에 오늘의 기도를 담아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함승수 신부님
‘황태’와 ‘북어’는 어떻게 다를까요? 둘 다 명태를 재료로 하여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말리느냐에 따라 ‘황태’가 되느냐, 아니면 ‘북어’가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명태를 바닷가에서 그냥 말리면 마른 장작처럼 딱딱한 북어가 됩니다. 그러나 바람이 많이 불고 일교차가 매우 큰 산악지방에서 겨울동안 말리면 낮에는 녹았다가 밤에는 어는 과정을 스무번 이상 거치면서 누런 빛을 띠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황태’라고 부릅니다. ‘황태’는 겨울이라는 혹독한 시기를 견뎌내는 동안 살이 연하고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육질을 갖게 되지요.
시련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 맛이 더 깊어지고 질이 더 좋아지는건 과일이나 야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뜻한 육지에서 자란 포도보다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포도가 훨씬 달지요. 또한 따뜻한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배추보다 밭에서 눈을 맞고 자란 월동배추가 더 맛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한우’도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큰 경북 안동, 영주, 예천 지방에서 자란 것들이 더 맛있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보호만 받고 자란 사람보다는, 세상의 풍랑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시련과 고통을 극복해낸 사람이 더 강한 생명력과 적응력을 지니게 될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보다 성숙하고 단단해집니다. 그러니 하루 하루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어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의 맛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시련과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에 당당히 맞서며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하고 바라는지,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이며 예수님과 맺은 관계가 그들 삶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변화시키는지를 물으신 겁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시라고 답하지요.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자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시험 문제의 답안으로 그보다 더 분명하고 정확한 말은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잘 대답하였다'고 칭찬하시지 않고 갑자기 엄숙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십니다. 대체 왜 그러셨을까요?
베드로의 신앙이 아직은 '머리로 생각하는 믿음'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머리 속에만 머무르는 관념적인 신앙, 가슴으로 내려가 그 사무치는 의미를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손을 통해 뻗어나아가 그 참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가벼운 신앙'은 약한 바람에도 금새 부러지고, 작은 파도에도 쉽게 가라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에 십자가라는 무게추가 더해져 묵직해져야만, 고통과 시련을 거치며 단단해져야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으며 평정심을 잃지 않는 '반석' 같은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당신이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며 심지어는 목숨을 잃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부활할 거라고 하십니다. 그저 잠드는 정도로는 깨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단지 아픈 정도로는 일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오직 죽어야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비워내고 내려놓아야만 나의 신앙이 내 삶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고백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저희 수도회에서는 소임을 이동할 때 인수인계서를 작성합니다. 이동하는 수도자가 그간 사도직을 하며 경험한 지혜를 바탕으로 후임 수사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기록해 전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수인계서 중에 어떤 부분은 직접 경험하는 것 말고는 표현할 방도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번은 행사와 관련해 인계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어떠한 축제의 어떤 대목에서 흥겹게 춤을 춘다’ 몸치인 저는 여간 난감하지 않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통나무처럼 뻣뻣한 춤을 추었습니다. 하지만 축제의 절정에서 제 춤은 어색하고 민망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말았습니다. 후에 저는 해당 부분을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축제 참가자의 흥을 돋운다.’로 수정해 인계했습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릅니다. 앎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그에 대한 행동 양식도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스승님의 질문에 정답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답변은 직접 고백하는 이들에게만 유효한 답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때까지 그 질문은 되풀이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주님께서는 교리 지식이 아닌 하느님을 오롯이 체험하고 그 진심을 담아 고백하는 단 하나의 지혜로운 대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빠드레 삐오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
이태리말로 ‘빠드레 삐오’(Padre Pio)라고 부르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경축합니다. 신부님은 50년 동안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몸에 지니고 사셨습니다. 그 상처에서 오는 통증도 십자가에서 주님이 받으셨던 것과 똑같이 실제로 밤낮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받으신 마음의 상처는 더 컸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과 거짓말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기 위해서 비오 신부님은 내적 아픔을 인내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칼처럼, 못처럼, 가시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 생각과 계획과 마음과는 다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우리 생각이 가는 길과는 하느님 말씀이 인도하시는 길은 어긋나기 십상입니다. 우리 몸은 핑게와 합리화와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꾸 다른 길을 가려고 합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되는 영예는 말씀을 전적으로 따를 때입니다. 예수님의 혈육들이 누리는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이 기쁨은 주님이 친히 주시는 내적 평화에서 오는 선물입니다.
성 비오 신부님에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 오는 상처를 당신처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빌어주소서.”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루카 9, 18-22> 9월 23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베드로 사도가 “주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입니다.” 하셨지만,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거부하셔서 사탄의 생각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믿으면서 믿음으로 당연히 오는 고통을 피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완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합니다.
수도자로 일생을 살고 완성하려면 수도 규칙을 지키고 서원한 바, 봉헌한 바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순명, 청빈, 정결입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신자로 불림 받아서 세례성사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왕직, 사제직, 예언직을 따르기로 결심했으며 각자 이마에 기름 바름으로 하느님과 약속했습니다. 왕직, 사제직, 예언직을 실천하는 사람은 고통이 없이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자리에 있어도 그 자리가 원하는 의무와 사명을 다하려면 고난이 따라옵니다. 의무와 사명을 저버리는 사람은 자격을 상실합니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무단으로 이탈하면 경고와 벌을 받게 됩니다.
믿음의 삶을 바라보며 살고 주님을 떠나지 않고 함께 살려는 사람은 믿음으로 인해 주님을 믿고 따르기에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실천해야 합니다. 믿음은 실천이며 실천은 많은 어려움이 따라옵니다. 세상을 살려면 권력, 재력,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따라 살려는 사람에게 믿음은 장애가 됩니다. 시간과 장소의 부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믿음의 중심 내용은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고 죽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는 주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이 없습니다.
어느 날 강론 때 “정의의 완성은 자비다.” 정의와 자비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정의는 선행은 상주고 악행은 벌주는 것이고, 자비는 악을 행한 사람도 용서하는 것인데’하고 혼자 생각하다가 강론한 분에게 질문을 던지고 알아보니 정의가 사랑을 받아들여야 자비가 된다는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하니 ‘죽음은 모든 세상의 끝인데 다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다.’ “자비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다.” 하신 것같이 하느님의 사랑이 정의를 뛰어넘어 자비로 끝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사는 믿음의 삶은 하느님이 사랑이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도록 기도합니다. 믿음은 영원한 삶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루카 9,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겪어야 할
우리들 삶의
고난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고난이 문제가
아니라 고난을
부정하는
우리들이 더
문제입니다.
쾌락을 누리는
길만 알지
욕망을 정화하고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고난은 알지
못합니다.
죽는 법을 모르면
사는 법도 알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
생명의 길
구원이
있습니다.
꿰찔리는
아픔 없이는
변화 또한
없습니다.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십니다.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당신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고난으로
다시 세워지는
주님의 뜻입니다.
당신의 고난으로
우리의 상처를
꿰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고난이 지나간
자리에서
사람의 꽃들이
피어납니다.
신앙의 길은
고난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큰 울림이
함께 아파하시는
생명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으로
회복되는
우리들
삶입니다.
이기적인
우리들만의
생존과 소유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아픔의 공감이
참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십자가는
공감의 가장
기본적인
뿌리가 됩니다.
지극한 사랑의
진리는 언제나
십자가의 수난과
함께 우리를
이끄십니다.
고난을 통하여
반쪽짜리 삶이
온전하여 지는
믿음을 만납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십자가의 고난이
있습니다.
믿음과 삶은
고난으로
성장합니다.
나이 든 세대들은 요즘 젊은이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걱정을 하지요.
“별로 고생도 하지 않고 전쟁이나 혁명 등을 겪어보지 않아서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세상에 대한 판단력도 부족하다.”
정말로 그럴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이는 인터넷을 하면서 자란 세대라서 정보 습득이 빠릅니다. 따라서 나이 든 세대보다도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 역시 젊은이보다 더 나은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가지고서 현재의 어려움을 현명하게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른은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현재를 바라보지만, 젊은이는 미래를 지향하면서 현재를 살아간다.’
서로 간의 이렇게 좋은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즉, 어른에게는 지혜를 얻고, 젊은이에게는 실행하는 추진력을 얻어서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길거리에 떠도는 소문들을 추려 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과거에만 매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지금 함께 계시는 살아있는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있었던 한 분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마침내 베드로에게 빛이 비치어, 그분께서 바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므로 어떤 예언자보다 큰 분임을 알아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육화하신 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것이므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이렇게 모든 시간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향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한순간에 머무시는 주님이 아니라, 또 미래에만 희망을 둘 수 있는 주님이 아니라, 모든 시간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독서에 나와 있듯이,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코헬 3,11 참조).
시간이 가면 모든 게 바뀐다고들 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능동적으로 바꿔가야만 한다(앤디 워홀).
새로운 변화로 나아갈 때
2020년 1월 12일(주일). 갑곶성지에서 어느 성당의 구반장님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했습니다. 새해의 기쁨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날, 올해에도 강의가 많겠구나 싶었습니다. 계속해서 강의가 끊이지 않았으며, 곧 다가올 사순시기에도 강의가 너무 많았고 심지어 연말인 12월의 대림 특강까지 잡혀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월 12일 이후 강의를 할 수 없었습니다(참, 5월 28일에 한 번 하기는 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며칠 이러다 말겠지 싶었습니다. 흔한 감기와 똑같거나 더 약하다고 방송에서는 말했고, 날이 조금 따뜻해지면 사라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코로나 확진자는 멈추지 않았고, 사람들은 마스크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비대면의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강의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사도 못할 지경이었는데 강의를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강의로 이제까지 바쁘게 살아오다가 마치 실업자가 된 기분으로 강의가 없는 한가한 생활을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과 다른 상황을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변화의 길로 나아갈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내게 어떤 때인지? 무엇을 할 때인지 수시로 하느님께 여쭈어봐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제 허무에 대한 소중한 가르침에 이어, 오늘 코헬렛 저자는 우리에게 그 유명한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말씀을 주제로 가르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어찌 그리 마음에 절절히 와 닿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코헬렛 3장 1~5절)
때와 관련된 코헬렛의 말씀을 곰곰히 묵상해보니, 정말이지 천번 만번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일천한 경험과 보잘 것 없는 지난 삶을 통해서도 때의 중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런 때가 있더군요. 때로 인간적으로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도무지 방법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였습니다. 그때는 그저 마음 크게 먹고, 인내하며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철저하게도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 같은 경우도 평생에 걸쳐서 하느님께서 침묵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순간은 바로 인간의 때입니다. 인간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입니다.
이상하게 움직일 때 마다 좌충우돌, 여기 상처 저기 상처, 상처 투성이일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행동거지를 조신하게, 입도 굳게 다물고, 조용히 침묵 속에 자숙하고 성찰할 때입니다.
순풍에 돛단듯이 만사 형통, 승승장구할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 마다 잘 되고, 탄탄대로를 달릴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더 겸손해지고, 더 예의 바르게 처신 할 때입니다.
곳간마다 추수한 곡식이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쌓일 때, 갑작스레 은행 잔고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것들을 주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눌 때입니다.
적당한 때를 파악하지 못해 패가망신하고 동네방네 창피스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해먹을만큼 해먹었기에, 이제 연세도 연세인만큼, 모든 것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물러설 때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기 남아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체 얼마나 더 추한 모습을 보이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마다 늘 스스로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겸손되이 여쭈어야겠습니다. ‘지금은 제게 어떤 때입니까? 오늘 이 순간은 제가 어떤 일을 할 때입니까?’
코헬렛이 강조하는 ‘때’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말로 ‘카이로스’, 곧 인간이 행동해야 하는 올바른 때(제 때)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아무 때나 의미나 가치가 있고, 아무 때나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올바른 때의 선택을 할 때만 의미와 가치가 있고, 성공에로 이끕니다.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내게 어떤 때인지? 무엇을 할 때인지 수시로 하느님께 여쭈어봐야겠습니다.
하느님 현존 연습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진화론에서는 모든 것들이 ‘저절로’ 진화, 발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태어나서 부모 없이도 저절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진화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화할수록 부모에게 더 의존합니다. 어떤 인간도 부모 없이는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현존 안에서 두 발로 걷고 말도 하고 사회생활도 배웁니다. 부모의 ‘부재’(不在)는 아이들을 다시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반대로 부모의 ‘현존’(現存)은 아이들을 부모의 수준이 되게 만듭니다. 앞에서 끌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혼자서는 진화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혼자 기도하시지만 실제로는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현존 연습’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의 ‘법’(法)이 함께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사람이 지닌 뜻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이 됩니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과 친구가 된다면 그 친구도 다이어트를 할 확률이 45%나 된다고 합니다. 저도 살을 빼니까 주위에 살을 빼는 분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함께 머물면 이렇듯 변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세례자 요한처럼 될 수도 있고, 엘리야처럼 될 수도 있으며, 예언자 가운데 한 분처럼 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자녀까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함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온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세상 누구보다 힘이 듭니다. 하느님을 옆에 두고 사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니 하는 일뿐만 아니라, 생각과 욕구에서도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그 마음마저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물으시고 곧바로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누구도 베드로만큼 빨리 하느님의 자녀로 변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래서 교회의 반석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의 현존 안에서 아기가 인간으로 자라나듯,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삽니까? 얼마나 기도합니까? 자주 주님의 현존을 잊고 내 뜻대로 살아서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기도하며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개신교 책 중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 있습니다. 1605년 프랑스 로렌느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에 있는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의 평수사로 살았던 로렌스(Lawrence) 수사의 영성을 담은 책입니다. 그는 전쟁에 참여했다가 상처를 입고 평생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리고 50세라는 늦은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가 주방 허드렛일이나 신발을 수선하는 일을 하면서 매우 빠른 영성의 진보를 보입니다. 장상의 명으로 이것을 기록한 것들이 지금 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하느님을 느낀 것은 나무를 보면서였습니다. 잎이 떨어지고 다시 나고 하는 이 순환 속에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시작한 수도 생활 안에서 오랜 기간 쌓여온 세속의 때는 좀처럼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세속의 삶이 그리워졌습니다. 주방 허드렛일이 의미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믿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마치 나무를 보고 주님을 느꼈듯이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느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의미 없게 느껴지던 일들이 참으로 달고 기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거창하고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할 때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하나 줍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그의 변화에 많은 형제가 감명을 받았고 그 방법을 묻자 “매 순간 호흡할 때마다 하느님의 현존을 연습하는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영성과 기도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왠지 저에게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저는 현존을 연습하기로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일하는 시간이 기도 시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성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처럼 깊은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소유합니다. 저는 세상에 하느님과 저밖에 없는 것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자상한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자녀로 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 훈련이 쉽고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훈련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 훈련을 계속해나갔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연습하는 이 훈련을 제 본업으로 생각하고, 마치 하루 전체가 정해진 기도 시간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오로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 살아오다 보니 때로는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이 몰려옵니다. 가끔 제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을 잊기라도 하면 하느님은 즉시 저의 내면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고백 드립니다. ‘하느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온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기쁘신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러면 곧 사랑의 하느님은 저의 고백에 흐뭇해하시며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편히 쉬며 거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아주 작은 고난도 주님을 위해 받을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저는 앞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할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며 나머지 것은 아무것에도 정신을 주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소명과 의무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출처: 『로렌스 형제의 생애; 하나님의 임재 연습』, 유튜브 성결출판사]
현존 자체가 법입니다. 법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진화시킵니다. 그 현존을 연습하고 체험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라고 말합니다. 현존 연습을 하며 모든 시간이 기도와 찬미와 사랑이 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누구를 두고 살아갑니까? 자아라는 뱀일 수도 있고, 사랑의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내 곁에 누구를 두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 홈페이지에 매일 오늘의 묵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홈 페이지에 접속하려는데 인터넷이 굳게 닫혀서 열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컴퓨터를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성당의 사제관에서 인터넷을 열고 오늘의 묵상을 올렸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컴퓨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날 강풍으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인터넷 선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선을 다시 복구하였고, 인터넷은 다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추적, 검사, 치료입니다. 추적하지 못하면 검사할 수 없고, 검사하지 못하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민들의 협조가 중요합니다. 코로나19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던 한국에서 다시금 확진자가 늘어난 것은 종교적인 이유로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국가의 방역체계를 믿지 못하고,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 행위는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습니다. 바이러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대립은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습니다. 바이러스는 정당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고, 정부의 방역지침을 지키는 것이 최선의 방업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잠시 내려 우리는 누구인지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안식일’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해서, 병들어서, 직업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던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지키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소중하다고 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목회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실 것 같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바이러스가 전파되고, 이웃의 생명에 위험을 준다면 그런 예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웃’입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강도당한 사람을 뒤로하고 예배하러간 제사장입니까? 율법을 이유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레위인입니까? 이방인이었지만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하고 여관으로 데려간 사마리아 사람입니까? 진료를 거부하는 의료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실 것 같습니다. ‘누가 아픈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꽃길만 걸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내가 버려야 할 것을 움켜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타인에게 짊어지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꽃길만 찾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길을 걷는 동안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걷는 동안에
길의 끝을
말하지 않는 거야
다만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쉼 없이 내딛을 뿐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고 이에 제자들이 말하길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 혹은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다고 전해드렸습니다. 이어서 다시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착각 중에 하나가 신앙생활의 본질을 지식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나 혹은 경험을 많이 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성당을 다녔다거나, 또 어떤 사람이 성경공부를 많이 했다거나, 또 어떤 사람이 본당에 어떤 중요 직책을 맡았다고 했을 때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어떤 아이가 친구들에게 자기 집에 금송아지 있다고 자랑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곧 아무리 신앙적인 지식과 경험이 많다고 하더라도 스승이신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대로의 삶을 함께 살아가지 않을 때, 그리고 그분께서 걸어가신 수난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지 않을 때 그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그리스도, 십자가>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금요일>(2020. 9. 25. 금)(루카 9,18-22)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 9,20-22).”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저희는 스승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구세주)로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엄중하게’ 분부하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그리스도는 ‘정치적 해방자’였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다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 지도자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고, 또 로마제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하려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올바르게 알고 믿게 된 것은 수난, 죽음, 부활 후의 일입니다.
“사도들과 몇몇 신자들은 수난 전부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과 부활 후에 믿은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혹시 차별이 아닌가?”
차별은 아니고, 수난 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른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 특별히 선택되고 뽑힌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믿음도 완전하지는 않았고, 그들도 예수님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완전하게 믿었습니다. 수난 전에는 머리로만 믿었고, 부활 후에 비로소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만 믿는 것은 그냥 ‘아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어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아는 것’은 지식으로만 그치고 ‘삶의 변화’가 없지만, ‘믿는 것’은 그 믿음 때문에 ‘온 삶’이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신 것은, 아직 머리로만 믿는(아는)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믿어야 남을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 없이 그저 ‘아는 것’만으로는 남을 믿게 만들지 못하고, 역효과만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에도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마태 17,9; 마르 9,9).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즉 당신이 하느님의 영광을 누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셨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본 것만으로는’(‘아는 것’만으로는) 증언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온전히 믿게 된 다음에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자들의 입장에서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았을 때에도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지는 못했고, 예수님의 신성을 ‘아는 것’으로 그쳤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 설교는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증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앞의 신앙고백이, 머리로만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또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진술이었다면, 오순절 날의 설교는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고백(증언)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은 이제 사도들이 온 세상에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하고 증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음을 확인해 주신 일이기도 하고, 그 선포와 증언을 도와주기 위해서 ‘힘’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은, 당신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 또는 과정에 관한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당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고,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죽음을 당신이 직접 짊어지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일이었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에 대해서,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냥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로 직행할 수는 없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은 개인의 십자가에 대한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 여정에서 만나는 온갖 십자가를 건너뛰고 그냥 부활과 생명으로(또는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이시니 그렇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일이 좋은 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한 번에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옮겨 놓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긴 세월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녔고, 우리는 그 방랑의 이유와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서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 생략할 수 없습니다. 그 고난들은 바로 “믿음의 순수성을 위한 단련”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7).
신앙생활은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한 생활입니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의미가 없고,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치가 없습니다.)
모든 착한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29-30: CCL 41,555-557)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올바르게 기르시고 당신의 양들을 당신의 양들이 아닌 것과 구별하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를 따라온다.”
이 말씀에서 나는 한 목자 안에 모든 착한 목자들이 있음을 봅니다. 착한 목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다 이 한 목자 안에 있습니다. 목자들이 서로 갈라져 있을 때 그들은 여러 목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서 한 목자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일치를 권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여러 목자들에 대해 말하지 않고 한 목자가 언급되는 것은 주님이 당신의 양 떼를 맡길 다른 목자를 찾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사실 주님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사람에게 맡기실 때에도 일치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많았지만 한 사람에게만 “내 양들을 치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 시대에 착한 목자들이 없지 않기를 기원하며, 또한 주님의 자비가 그들이 없는 것을 허락치 않고 그들을 많이 보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착한 양들이 있는 데에는 분명히 착한 목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착한 양들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착한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 있고 한 목자입니다. 그들이 양들을 기를 때 그리스도께서 기르시는 것입니다. 신랑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신랑의 목소리로 인해 몹시 즐거워 합니다. 그들이 양들을 기를 때 그분 친히 기르시는 것이고 그분의 목소리와 그분의 사랑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은 “내가 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실 때 그것은 한 사람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었지만 그래도 베드로가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인 교회를 표상하는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와 베드로는 신랑과 신부처럼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실 때, 그 양들을 마치 다른 남에게 맡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그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두 번째로 “베드로야,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다시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다시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세 번이나 사랑을 확인하심으로써 일치를 견고히 하십니다. 주님은 목자들 안에서 홀로 양들을 기르시고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서 양들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여러 목자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또 동시에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자들은 자랑합니다. 그러나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친히 기르시므로 목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길러야 하며 그리스도 외에 자기 자신들을 위해 길러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맡길 자가 없어서 “내 양 떼는 내가 돌보리라.”고 하면서, 예언자가 장차 다가올 악한 시대를 예언한 것처럼 장차 목자들이 없으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이 세상에 아직 살아 있을 때, 모든 목자들이 그분 안에서만 하나가 되는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 있고 그 목자의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양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자기 목자를 따르며 이 목자 저 목자가 아닌 한 목자를 따르게 됩니다. 모든 목자들은 여러 목소리로 말하지 않고 그분 안에서 한 목소리로 말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시기를 호소합니다.” 이렇게 양들은 온갖 분열과 온갖 이단에서 정화된 이 목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그 목자를 따라갑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를 따라온다.”
생명가꾸기 농사꾼에서 하느님을 본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태풍은 벼를 논바닥에 맥질을 했다. 인건비가 비싸 엎친 벼를 세울 수도 없다. 그렇게 방치할 수밖에 없기에 농부는 이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농부의 마음은 한 포기마다 정성껏 일으켜 세워 알알이 영근 알곡을 만들고 수확하고 싶을 것이다.
이런 마음은 ‘생명가꾸기’ 농부의 역할이고 책임이다. 농부는 자연재해를 극복하고 또 다시 생명을 가꾸어 간다. 산고는 생명을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이다. 이 산고의 극치는 예수님께서 본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생명되게 하시고 신앙고백을 제대로 하는 알곡으로 만들어 가신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한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종교, 계시종교는 예수님과 함께하며 신망애 삼덕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만나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고백하도록 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자연종교는 절대자를 향하지만 믿음의 대상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을 찾아 진리에 접근한다고 말하지만 알곡을 수확할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계시종교는 믿음에 대한 확실하고 구체적안 삶을 통해 힘을 갖지만, 자연종교는 나약해 힘이 없어 기대여 살려는 기복종교에 머물 수밖에 없다. 기복종교는 결코 종교의 본질을 지니지 못한다. 기복종교는 미신과 약자들을 이용해 먹고 사는 무속일 뿐이다. 이들에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이 대한 앎은 세례성사를 통해 시작되며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참뜻을 알아가며 영글어갈 때, 그 답은 정답이 접근해 간다. 베드로의 답은 그 믿음의 과정이 얕을 때는 할 수 없었으나 믿음이 깊어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답은 분명하 진다.
농부는 엎친 벼를 바라 보다가 논바닥에 맥질한 엎친 벼포기를 땀흘려 일으켜 세우고 있다. 농부는 수확과 관계없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기에 하는 일이다.농부의 마음 안에 하느님을 본다. 고난과 죽음이 생명이 된다는 삶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고 삶으로 실천하는 농부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어 예수님을 닮은 축복의 사람이다. 나는 생명을 일으켜 세우는 농부에게 존경과 사랑을 드리고 싶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9,22)
종교는 취미생활? 클럽활동? 아니고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사실을 아무에게 말하지 말고 죽은 후 사흘 만에 되살아난다는 말씀.
미래를 보듯 아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대화하기가 참 힘드셨습니다.
지나간 것 많이 안다 해도 한 치 앞 모르는 우리나 제자들 같습니다.
수석사제 율법학자들의 배척에 죽고 다시 산다는 구체적인 말씀이죠.
우리는 죽어서 다시 부활 못하고 이사하듯 하늘본향으로 옮아갑니다.
하늘본향 거부하는 사람들이 권력과 힘으로 죽이려 대들기도 합니다.
오늘도 이 사회엔 지도자 사제 학자들 많지만 영원세상 잘 모릅니다.
종교는 취미생활? 클럽활동? 아니고 인생 근본이라 알면 만점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때"에 대해 일러 줍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군중은 그분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옛 예언자가 되살아난 것으로 여기는데, 예수님은 바로 당신 곁에서 생활하고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과연 당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듣고 싶으신 듯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베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고백합니다. 루카 복음서와 달리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대답이 베드로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이라고 부연하지요.(마태 16,7 참조) 지금은 베드로가 주님의 영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고백하는 때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루카 9,21)
예수님은 당신의 신원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침묵해야 할 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스승이 명하시니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루카 9,22)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지요. 사람의 아들이 맞이해야 할 "때"입니다. 고난, 배척, 죽임, 부활까지 단 몇 단어로 표현이 되고는 있지만 그 여정을 입에 올리는 것도, 듣는 것도 사실 두렵습니다. 고통의 길임을 뻔히 알고 향하는 여정은 모르고 가는 것 이상으로 어려우니까요.
제1독서에서 코헬렛 저자는 "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하느님의 계획 아래 세상은 저마다의 "때"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코헬 3,11)는 말씀이 참 멋지게 들립니다.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의 때에 자신만의 충만함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창조 계획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피조물은 그 본성 안에 하느님의 때와 스파크를 일으키며 피어날 자기만의 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 3,11)
그토록 정교하고 섬세하게 정성을 들인 하느님의 계획이 온 세상 모든 역사의 날줄 씨줄 안에서 면면히 흐르지만, 우리 인간은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저 당장 눈 앞에 닥친 일들을 감당하면서 한발짝씩 내디딜 뿐이지요.
그런데 이 무지가 반드시 저주나 불운만은 아닐 듯합니다. 각자의 "때"를 깨닫지 못하면서 묵묵히 나아가는 우리 인간은 어쩌면 몰라서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르니 희망하고, 모르니 기대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오늘 복음 속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미처 다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스승의 때가 오면 그 영광을 어떻게 받아 누릴지, 누가 가장 높은지가 내내 그들의 관심사인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침묵을 명하시는 것은 지당합니다.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운명과 그들의 욕망이 아직 화해하지 못한 지금은 코헬렛의 단언처럼 "침묵할 때"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말할 때"(코헬 3,7)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때가 완성된 후 제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변화될 것이니까요 제자들은 자기들이 들은 바와 본 바, 체험한 바를 증언하고 선포하게 것입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때가 과연 "말할 때"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코헬 3,11)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심어 주신 "시간 의식"은 단순히 숫자로서의 시간 감각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시간 의식" 안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아버지 뜻에 대한 순응, 결국 사랑으로 이끌리는 순리에 대한 신뢰, 마침내 이루어질 주님과 우리의 영원한 일치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지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의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무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지, 나의 때는 과연 언제인지, 찬란히 아름답게 빛날 "제때"를 속절없이 흘려보내고 만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올 것인지...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우리 여정이 "반드시 고난과 배척과 죽임을 당하실" 예수님의 여정과 별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두렵지만 진실입니다. 우리의 때는 이런 주님의 때와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을 겁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기시고 평화의 존재로 우리에게 되돌아 오셨으니 우리는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이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견디게 합니다. 이 희망 앞에서는 무지조차도 축복입니다.
그러니 언제일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이루실 것이니까요. 사랑 안에서는 "때"를 알려고 날을 세울 필요가 없답니다. 주님의 "때"에 나의 "때"를 결합해 그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행하며 순례의 여정을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모르는 길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꿋꿋이 나아갑시다. 그 때를 기다리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함승수 신부님
요즘 사람들은 궁금한 것을 알고자 하거나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때 '네이버'나 '구글' 같은 검색엔진을 이용합니다. 검색창에 내가 찾고자 하는 단어를 입력하면 그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지요. 그러면 그중 가장 그럴싸한 것, 가장 내 생각과 비슷한 것을 골라 '나의 답안'으로 삼습니다. 이처럼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보니 열심히 발품을 팔아가며 관련된 정보를 조사하고 그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가며 답을 찾는데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것을 쓸데 없는 일로 여기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 내가 직접 노력하고 연구해서 찾아낸 답이 아닌 남들이 써놓은 답은 내가 찾는 것과 '비슷한' 답일 수는 있어도 내가 찾고자 하는 '정답'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써놓은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는지를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도 없습니다. 쉽고 편하게 찾은 정보를 덜컥 믿었다가 그것이 사실과 다를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온전히 다 내가 감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남들이 얘기하는 것들을 생각없이, 여과없이 다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해야 하고, 어느 한쪽의 입장에 편향되지 않도록 객관적으로 다양한 입장을 고루 살펴보아야 하며, 심사숙고의 과정을 통해 나의 입장을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군중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군중들이 생각한 예수님의 이미지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린 '세례자 요한'이나, 빵을 많게 하고 죽은 이를 살리는 기적을 일으킨 '엘리야' 예언자,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박해받고 죽은 옛 예언자 같은 사람들이었지요. 그 중에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정답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먼저 물으신 것은 제자들을 떠보시기 위함입니다. 당신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이들로서 스승이신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혹시 자기만의 확실한 '메시아상'을 지니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대로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시려는 것입니다.
다행히 베드로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그분이 생각하시던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답을 말한 베드로를 칭찬하시는 대신,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그분의 아들이자 구원자'라는 올바른 결론에는 도달했지만, 그 결론이 갖는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인 고난과 죽음을 아직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 험난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님이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시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냐?" 그 문제에 대해 각자가 찾아야 할 답은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자기만의 '정답'을 찾기 위해서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쳤던 것처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찾고 그들을 위한 봉사의 소명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은 마더 테레사는 "나는 예수님의 몽당연필입니다."라는 답을 찾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답을 찾았습니까? 자기만의 답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나로 인해서 주 예수님과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받으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송구스러움 속에서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들으신 후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베드로가 나서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20절) 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하러 보내주신 구세주이십니다라는 뜻이었겠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대답을 들으시고는 곧 바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21절)십니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선입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지 않으셨는가 봅니다. 당대 유다인들이 바라는 메시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그리스도라는 말에 담겨 있는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잘 알고 게셨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 메시아의 진실한 면모를 밝히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22절) 메시아는 정치적으로 점령군인 로마를 내쫓고 유다인들에게 해방을 안겨주고 강대한 유다 민족의 나라를 세우리라는 기대에 정반대의 모습을 제시하십니다. 메시아에 대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기대를 품고 있는 유다 사람들의 원의를 들어주지 못하고, 사랑하는 희생으로 그 원의를 채워주지 못한 미움과 원망을 한 몸에 받고 거부당하고 저주받아 죽어야만 하는 숙명 같은 처지를 알립니다. 물론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부활하리라는 사실도 함께.
오늘 날 사람들의 기대에 온전히 부응하지 못해 상처받고 미움받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한 가정의 부모와 자녀에서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기대와 요구를 서로 주고받는 관계 안에서 어쩔 수 없이 희생당하는 역할과 아픔도 기억합니다.
우리의 사랑과 기대를 온전히 받으시면서도 늘 우리들의 삶 속에서 소외되고 희생되셔야 하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로 인하여 고통받고 신음하시는 주님, 저희를 구하소서. 어머니 마리아님, 저희를 지켜주소서. 아멘.
나에게 예수님은?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다양한 의견을 전해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더 궁금해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지금까지 당신과 제자들 사이에 형성된 관계를 핵심적으로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당신이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당신이 행한 일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묻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질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신앙의 결단을 해야 할 때마다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신념을 정립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참조할 수 있지만, 결국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증언하듯,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언자들 중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구세주가 아니라, 다만 그분을 증언하려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증언의 최종 목적입니다. 내 삶에서 예수님을 수단이나 방법으로 전락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주님이라고 죽음이 달가웠겠습니까? 참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참 인간이셨던 주님은 죽음을 앞두고 괴로워하셨습니다. 그것을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기도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주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말씀 단 한 마디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인간으로 내려오셨고, 당신 직접 삶 안에서 노력하시며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하셨습니다.
가끔 주변에 교회 열심히 다니시는 분들에게 이런 말씀 들어보셨나 모르겠습니다. “구원받으셨나요?” 들어보셨지요? 대답을 어떻게 하셨나요? 성당은 열심히 다니고 있는데, 구원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구원은 나중에 받는 것 아닌가... 이럽니다. 그렇다면 교회분들은 무엇이라 대답하실까요? 아, 믿음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자신은 이미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 우리는 세례성사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결은 아닌 것입니다. 완결은 하느님 앞에 설 때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미 구원받았다고 속단하기 이릅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지만 내가 생활을 올바르게 못한다면 분명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구원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겠지요. 그리스도이셨던 주님께서도 죽기까지 노력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마치 마라톤을 했던 선수에도 비유합니다. 승리의 월계관을 받으려 열심히 뛰었다는 것이지요.
교우여러분들, 제가 항상, 자주 강조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으로 초대되었지만, 가는 중입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벌써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삶 안에서 노력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모신다는 것은, 제자로써 그분을 닮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따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도 그러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오늘 하루의 시간 안에서 은총 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 18-22> 9월 25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시는 분을 알아보고 섬기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옆에 주님이 계셔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는데 알아보지 못했지만, 베드로 사도는 알아보고 “하느님의 그리스도입니다.” 고백했습니다. 그런 일은 그 옛날 한 번 있고 지나간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삶의 중심에 주님이 현존하시는 것을 잊고 지나갑니다.
주의 기도를 하시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하는가? 아무런 느낌도 확신도 없이 입으로만 외우고 있습니까?
미사에 참례하고 외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듣고 지나가지 않습니까? 미사 끝에 주님과 함께 복음 전파를 위해 파견되었는데도 의식 없이 집으로 돌아가서 하던 일만 하시지 않습니까?
요사이 코로나로 인해 성당에 자주 가지 못하고 영성체하지 않는다고 주님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착각하고 살지 않습니까?
주님은 더 가까이 당신 안에 살고 계십니다.
어떤 이는 성모님은 역사 안에, 현실에 자주 나타나시는데 왜 주님은 나타나셔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시지 않는가? 바라지만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다음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깊이, 더 가까이 현존하십니다.
성찬의 전례 때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셨습니다. 미사 때 빵이 주님의 몸으로, 포도주가 주님의 피로 변화되어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믿음으로만 아니라, 늘 우리는 주님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형식적으로 피상적으로 깊은 의식 없이 전례와 기도에 참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기를 마음의 문 앞에 기다리고 계시며 마음의 문만 열면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진복팔단에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하심같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현재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어둠 속에 살지 않고 “빛으로 빛을 보는 사람이며” 빛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세상의 가치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권력에, 재력에, 명예에 눈이 가려지지 않으면 마음이 깨끗하여 어디서나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무거운 짐을 지고 기진맥진하지 않고 주님에게 짐을 맡기고 웃으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 중에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아니면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청하는 사람의 마음은 깨끗할 수 없습니다.
깨끗한 마음은 위와 아래를, 높고 낮음을, 크고 작음을, 잘나고 못남을 보지 않고 자기 자신에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어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이 하느님이시고 지금 여기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보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뵙고 행복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아침 제대 상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뵙고 저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며 ‘주님과 함께 사는 이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 무한에 잠입하여 생각하며 감사, 찬미 드렸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루카 9,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난이
시작된 곳에
구원이 있다.
예수는 고난을
온 삶으로
이겨내셨다.
죽이는
고난이 아니라
살리는 고난이다.
고난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고난은
아프게도
필수사항이다.
고난을 통해
배우게되는
삶의 겸손된
여정이다.
고난이 없는
삶은
그 어디에도
없다.
고난이 우리를
아름답게 머리를
숙이게한다.
고난을 통해
사람이
되어간다.
고난이
실은 은총이다.
배척과 고난이
영혼을
되찾아 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고난을 주셨다.
고난속에서도
가을하늘을
맞이한다.
하느님께서는
고난을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니라
고난을 이겨낼
은총을 주시는
분이시다.
고난이
믿음을 이룬다.
고난을 통해
빚어진
빛나는
열매이다.
고난을
비껴가시는 분이
아닌 고난을
믿음으로
통과하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