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 욥기의 말씀입니다. 1,6-22
6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
7 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사탄이 주님께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8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9 이에 사탄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0 당신께서 몸소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으로 울타리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내리셔서, 그의 재산이 땅 위에 넘쳐 나지 않습니까?
11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12 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이에 사탄은 주님 앞에서 물러갔다.
13 하루는 욥의 아들딸들이 맏형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다.
14 그런데 심부름꾼 하나가 욥에게 와서 아뢰었다.
“소들은 밭을 갈고 암나귀들은 그 부근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15 그런데 스바인들이 들이닥쳐 그것들을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6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 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7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8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나리의 아드님들과 따님들이 큰아드님 댁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19 그런데 사막 건너편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그 집 네 모서리를 치자,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20 그러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21 말하였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22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6-50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2티모 3,14-17)와 복음(마태 13,47-52)을 봉독할 수 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욥의 모든 소유를 치셨지만,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이자,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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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욥을 칭찬하시자 사탄은 욥의 소유를 쳐 보시면 주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제1독서).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논쟁이 일어나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세우시고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욥기에는 몇 가지 주제가 들어 있습니다. 무죄한 사람의 고통은 큰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욥은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시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는]”(욥 1,1)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고통을 겪게 된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죄 탓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욥기가 던지는 큰 질문입니다. 이 문제는 욥기 마지막 부분에 가서 답을 만날 것입니다.
다른 질문들 가운데 오늘 사탄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까닭 없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말에서는 ‘거저, 공짜로’를 뜻하기도 하는 낱말입니다.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탄은 하느님께, 먼저 하느님께서 욥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그를 부유하게 하셨기 때문에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확인하고자 욥이 모든 재산과 자녀, 그리고 건강을 잃게 만듭니다. 그럴 때도 인간이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요?
욥기의 사탄이 오늘 나를 이렇게 시험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을 거두어 가신다 하여도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까? 욥은 아들들과 딸들을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순수한지를 시험하는 순간들은 계속 주어집니다. 그 시험들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돌아보면서, 하느님에 대한 나의 경외심의 깊이를 헤아려 봅시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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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시자(루카 9,44-45 참조), 제자들은 그분의 최측근으로 얻어 누릴 영광을 기대한 듯 자기들끼리 서열을 매기려 합니다. 이토록 완고한 모습에 진노하실 만도 한데, 예수님의 교수법은 달랐습니다. 아직 어리석기만 한 제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가장 작은 이들을 섬기는 겸손으로 얻게 될 영광을 다시 한번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신 말씀은, 어린아이처럼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마치 당신인 듯 받아들여 달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선을 넘고 내 감정과 삶을 마구 헤집으며 나를 이기려고만 하는 이를 미워하고 앙갚음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사람, 못난 나보다 더 못나 보이는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이 계시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참아 내고 용서하는 사람. 그가 당신 눈에는 진정으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 속하지 않는 이에게도 이런 겸손과 포용의 마음으로 대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제1독서의 주인공 욥은 흠 없는 의인이었지만,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로(의인의 수난을 ‘하느님께서 다 아셨고 허락하신 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 자연재해와 약탈자들의 손에 모든 재산과 자식들마저 잃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하고 드렸던 욥의 기도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욥의 삶이 그분께 영광과 승리가 되었듯이, 일상 속 고난과 시련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직 주님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삶도 하느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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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문제의 크기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것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크게 다가오는 것이 세상의 상대적 논리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굳이 내 편, 네 편을 갈라 세우거나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나 찬성이 명확해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자리에 신앙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독일의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은 평범합니다. 악은 결코 섬뜩한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일 수도, 해맑은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악은 제 모습을 숨기고 나타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선한 것 안에서도 옳은 것 안에서도 얼마간의 부족함과 어긋남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세상은 쉬운 답을 원합니다. 사실 쉽다기보다는 편한 답을 원합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답, 모두가 그럴 것이라 추정하는 답 말입니다. 그래서 낯설고 불편한 답은 옳더라도 피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래전 어렸을 때, 동네에 서커스단이 오면 그렇게도 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문 앞에서 호객하는 서커스단 관계자의 말은 늘 이랬습니다. “애들은 가라!” 이 말을 다시 고쳐 보면, 애들은 돈이 안 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그 ‘애들’을 당신 곁에 세우십니다. 인간이 덜된 존재로 하찮게 여기던 어린이를 통하여 가장 큰 것을 보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불편해했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누가 큰 사람인지 답이 분명한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누구든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설렘이 가득한 사회는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은 사회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선악과 정의를 논하면서 흡족해하는 이들의 편협성을 오늘 복음은 질타합니다. 절대 선과 정의를 좇고 있는 신앙인은 자신의 판단과 식별 안에 아름다운 척하는 섬뜩한 악마가 함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과 식별을 과신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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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갈수록 우리의 지성은 어두워지고 우리가 초라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작아질수록 예수님을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원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시기심과 허영심, 권력욕과 교만함을 내려놓지 않으면 그분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
돈과 권력이 많은 사람은 이 세상의 친구가 많습니다. 반면에 돈과 권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기가 쉽습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라.’는 예수님 말씀의 사회적 의미는, 교회 공동체 안에 약자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미소하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리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작은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큰 사랑을 닮는 길을 알려 줍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다투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 길을 가장 잘 알아듣고 전 생애에 걸쳐 실천한 성녀이므로, 우리는 그를 ‘작은 꽃, 소화(小花)’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우리가 한 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린이의 길’은 오직 하느님께 작은 사랑의 꽃을 바치고 예수님께 칭찬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처럼 ‘우리가 한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는 소박함을 기억하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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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 중에 버릴 수 없는 것, 모든 사람이 내면에서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권력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고 다투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력 욕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어린이의 단순함이 그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가치는 지상의 가치와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권력은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곳에 있습니다. 가난과 겸손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하늘 나라의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작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의 전형은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욥 성인의 위대함은 자신의 재산과 자녀들, 곧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도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단순함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가 욥 성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되, 하느님만이 자신을 알아주고 그분이 준비하여 놓은 천상의 상급을 얻으려 살아가는 순박함과 겸손함을 간직합시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은 우리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 천상 지혜가 넘치게 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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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입니다. 일종의 권력 투쟁입니다. 제자들의 권력 투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다.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탐하고 보자는 것이 인간 사회의 모습이고, 또한 공동체 안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곁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어린이는 혼자의 힘으로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지요.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알아들으려면, 사회적 통념과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내로라’하며 행세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공동체의 가족들은 이러한 속물적인 생각들을 과감히 털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모두가 다 “예.”라고 할 때, 과감히 “아니요.” 할 수 있는 신앙적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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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제자들은 논쟁했습니다. ‘누가 높은 사람인가?’ 우리 역시 가끔은 따집니다. 모임이나 식사 때 ‘자리 배정’에 신경을 씁니다. 말은 안 해도, 제대로 되었는지 관심을 가집니다. 권력과 이권이 개입된 자리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능력 있고 ‘자격 있는’ 사람이 윗자리에 앉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그런 ‘능력과 자격’을 갖추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한 명을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이런 어린이를 제대로 받아 줄 수 있겠는가?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눈치 보지 않고 사랑으로 가까이 갈 수 있겠는가?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당시 어린이는 ‘약자’였습니다.그러므로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자격의 기준’이라는 말씀입니다.
말 없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어떤 단체든 ‘내색하지 않는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을 껴안으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인간관계를 늘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앞에서 ‘튀는 사람만’ 붙잡으면 점점 옹졸해집니다. 눈앞의 사건에만 매달리면 멀리 보지 못하게 됩니다. 깊은 강은 언제나 조용히 흐릅니다. 얕은 강이기에 소리를 내며 흐릅니다. ‘속 깊은 사람’은 깊은 강을 닮기 마련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많아져야 합니다.
예전에는 여행을 참 많이 했습니다. 여행을 통해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나의 세상을 확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여행하며 느끼는 것은 삶의 확장이 아닌 삶의 축소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하지만, 사실 집에서도 전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행 중의 경험은 힘들고 불편할 뿐입니다.
힘듦과 불편함 속에서 나의 모습은 작아집니다.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삶이 축소되었을 때,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단순히 낭만, 예술, 아름다움 등을 찾고자 한다면 집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는 자기가 주체이니 원의만 있다면 스스로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집처럼 하겠다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어떨까요? 나의 힘듦과 불편함을 없게 하겠다고 옷만 가방 25kg을 가득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비행기도 탈 수 없습니다(비행기 수화물 25kg 이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여행자입니다. 언젠가는 여행을 마치고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작은 내가 되어, 훌쩍 떠날 수 있게 됩니다.
겸손의 삶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진정한 여행자의 모습이 됩니다. 불편함과 힘듦도 여행자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을 기억하면서 작은 존재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대표로 세운 일, 타볼산에 올라갈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가신 일들이 서열 문제를 일으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의 랍비신학에서는 천상에 있는 낙원의 주민들을 일곱 등급으로 나눈 것, 꿈란 공동체에서도 확고한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볼 때, 모든 유다인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역시 세상일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즉, 세상의 서열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세우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어린이를 순진, 소박, 겸손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이처럼 순진하고 소박한 마음 또 겸손을 갖춘 사람만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의 여행자일 뿐입니다.
오늘의 명언: 누구의 인생이든 절정기가 있게 마련이고, 그 절정기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격려를 통해 찾아온다(조지 애덤스).
걱정이나 근심, 유혹이 다가올때면 즉시 성경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진심으로 성경에 매료되어 목숨 걸고 성경을 공부하던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교구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이런저런 성경 공부 과정을 빼놓지 않고 수료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2년 과정의 가톨릭교리신학원까지 졸업했습니다.
제가 그분께 여쭈었습니다. “형제님, 평생토록 산업현장의 역군으로 죽기살기로 일하셨으니, 이제는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시고, 운동도 나가시고, 좀 여유있게 지내시면 좋을텐데, 어찌 그리 성경을 파고드십니까?”
형제님 왈, “그동안 제 안에서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사방천지를 헤매다녔지만 찾지 못했는데, 성경 안에 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 유혹과 갈등을 떨치는 데는 성경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예로니모 사제 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좀 놀았습니다. 이교에 빠지기도 하고, 세상의 유혹에도 빠졌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다 보니, 삶의 균형이 무너져 중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니지 하면서, 지난 삶을 반성하며 은둔 수도 생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맛을 본 세속의 유혹은 수시로 떠올라 예로니모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로니모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 그는 유혹을 물리치는 방편으로 그 어려운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유혹은 예로니모를 흔들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본문을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번역하고 연구하고, 그것이 그의 하루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날 그는 하루 온 종일 성경 번역에 매달렸었는데, 잠깐의 휴식은 다름 아닌 성경 읽기였습니다.
탁월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예로니모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습니다. 대단했던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대적 성경 번역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장장 2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깔끔하게 번역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대학자였던 예로니모였지만 늘 겸손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도 사제직에 부당하다고 생각했던지 한동안 한사코 미사 봉헌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예로니모는 보다 정확한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신구약성경에 대한 번역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를 위해 새롭게 카르데아어를 배웠고, 또 다시 20여 년간의 세밀한 번역작업 끝에 그 유명한 불가타 성경 번역을 완성시킵니다.
예로니모의 탁월한 지적 능력, 성서에 대한 열정은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교부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조금도 의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대학자 예로니모였지만 그에게도 십자가는 있었습니다. 과거 영위했던 세속생활의 유혹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죄책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쉼 없이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던 노력, 어려울 때마다 인간적인 위로를 찾기보다 하느님의 보화가 담겨있는 성경에로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했던 그 노력으로 인해 그는 끝까지 자신의 성소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로니모는 사자 같은 용기로 교회를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강인함으로 자신을 잘 다스렸습니다. 자신을 극기했었고, 자신의 결점이나 악습 같은 가시들을 제거하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예로니모의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파고드십시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로 모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하늘 나라의 자리를 결정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누가 높으냐는 것으로 제자들이 다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겸손은 곧 포용력입니다.
사람을 품으려면 자기만 크고 옳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모든 동물과 사람들을 정말 잘 받아들입니다. 물릴지도 모르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봅니다.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이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늘에서 큰 사람이 된다고 하십니다.
요한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라고 대답하십니다. 웬만하면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틀리면 어떻게 하라고 무작정 다 내버려 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린이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의 잘못을 바로잡아줄 해답지인 부모가 있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락방에는 5천만 원이 예금 된 통장과 1억 7천만 원 가량의 주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생 헐벗고 굶주리며 모은 돈이었으며, 이를 모으기 위해 어쩌다가 현미 쌀을 사다 먹고 남이 주는 채소 부스러기나 날로 먹고 어쩌다가 끓일 것이 생기면 방안까지 들고 들어와 풍로에다가 주워온 나뭇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고 목욕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만 하였습니다.
결국 그 노인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을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고생하며 사느냐고, 자신을 위해 돈 좀 쓰면서 살라고 말하는 이들이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200살까지 살 것이기 때문에 돈을 아껴둬야 할 필요가 있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답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정답지는 부모입니다. 이것이 포용력의 차이, 곧 하늘나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의 차이를 만듭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교만해지기에 십상입니다. 특별히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이 망하게 된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과 긴 보급선이 재앙적인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고문과 장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812년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무적이라고 믿으며 완고하게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그동안의 성공으로 나폴레옹이 얼마나 교만해졌는지를 상기시킵니다. 나폴레옹의 오만함과 전략 조정 거부는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60만 명이 넘는 초기 병력 중에서 약 10만 명만이 캠페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재난으로 그의 제국은 심각하게 약화됐고 결국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
묻고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맞히는 즐거움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해답지가 있어야 합니다. 대본을 들고 연기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과 행동, 대사가 맞는지 끊임없이 대본과 자신을 맞춰갑니다. 그러면 맞추는 즐거움에 틀리는 아픔을 잊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는 이들만이 이러한 겸손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해답지가 부모인 것처럼,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해답지로 여기면 틀리는 게 두렵지 않고, 오히려 나를 성장 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이 향상됩니다.
그러니 주님을 진리로 받아들입시다. 그런 사람은 묻기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묻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내가 틀릴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나의 삶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포용력도 향상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9월에 있었던 일을 돌아봅니다. 3일에는 ‘김수환 추기경배 골프대회’가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150명이 함께 했습니다. 점수를 계산하는데 약간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순위가 바뀌는 실수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연락을 드리고, 상패를 전달했습니다. 일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입니다. 상패를 받은 분들도 이해해 주었고, 기뻐하였습니다. 10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의 기일이었습니다. 4년 전에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뉴욕에서 세상을 떠난 형제님의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형제요, 어머니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어머니이다.”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어머니의 기일을 기억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22일에는 ‘본당의 날’ 잔치가 있었습니다. 2012년에 본당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성소국에 있었고, 신문사에 있었습니다. 12년 만에 본당의 날 잔치에 함께 했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함께 모여 사는 것, 오직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본당의 날 주제는 “수고하고 짐 진 자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교우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잔치를 위해서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9일은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이었습니다. 미카엘은 사탄을 물리치는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라파엘은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천사입니다. 사탄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아픈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천사입니다. 저의 축일을 축하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순교자성월인 9월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순교자 영성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순교자 영성의 시작은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타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가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죄의 결과” 곧 죄에 대한 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으심도 이를 통한 죄의 용서도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믿기 이전의 삶에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더 이상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부활은 믿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는 것이며, 우리의 희망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저희의 마음을 북돋아 주시어 거룩한 가르침을 깨닫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
내가 바라는 사람보다
나를 바라는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내가 사랑해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내가 함께하고픈 사람보다
나와 함께하고픈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내가 받아들여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품는 사람보다
내가 품어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내게 베푸는 사람보다
내가 베풀어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살리는 사람보다
내가 살려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부모라고 생각했을 때 자식들이 여럿이 있는 데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자식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집니다. 그게 부모 마음입니다. 어쩌면 가장 적게 가진 자식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때 우리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애매한 말씀을 조금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가진 것이 많은 것처럼 자신의 교만이 가득 들어 차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느님 앞에 진정 겸손하게 자신을 비울 때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신앙인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하느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느님을 멀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누구를 받아들이고 누구를 도와준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떤 이들을 선택하실까요. 이 세상 모든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는 이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진다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믿는 이들이 선택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 앞에 자신이 작은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서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작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어떤 이가 작은 자인지 우리는 독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독서에서 욥은 자신의 것과 자신의 자녀들이 한순간에 없어지거나 죽었을 때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러한 고백은 작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믿음은 선택적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좋은 것이든 혹은 나쁜 것이든 모두 하느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작은 자가 되기를 두 손 모아 함께 기도합시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9,48)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스카 와일드의 「욕심쟁이 거인」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는 자신이 가꾼 정원에 동네 아이들이 몰래 들어와 노는 것을 싫어하여 아이들을 모두 쫓아내는데 그러자 갑자기 봄은 사라지고 겨울이 계속되며 키다리 아저씨의 마음도 꽁꽁 얼어버리지요. 어느 날 한 꼬마(=예수님의 현신)로부터 봄이 시작됨을 알았고 꼬마의 정체를 알면서 이후에는 동네 아이들이 자신의 정원에 놀러 오는 것을 막지 않자 언제나 봄이 찾아왔지요. 한참 시간이 흘러 그 키다리 아저씨가 죽자, 예전의 그 꼬마가 다시 찾아와 그 키다리 아저씨를 천국으로 데려가고 나중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니 키다리 아저씨가 꽃밭에 누워 행복한 표정으로 죽어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일까요? 이기적이고 욕심쟁이 키다리 아저씨는 꼬마(=예수님)를 만남으로써 단지 키가 큰 사람만이 아니라 마음도 커졌기에(=회개를 통해) 천국으로 들어갔잖아요. 우리 역시도 단지 키만 큰 사람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9,48)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려면 가장 작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는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거듭날 때만이 가능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 역시도 이기적이고 욕심쟁이 키다리 아저씨처럼 마음이 부드럽지도 못하고 따뜻하지 않고 오히려 차갑고 무뎌져 가는 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요즘 제게는 ‘사라짐과 살아짐의 경계선’에서 붙잡아야 하는 것과 동시에 놓아야 하는 것과 싸우고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라지는 삶이 아니라 살아짐의 삶을 살고 싶지만, 마음 한편에 나의 이기적인 자아가 아직도 준동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늘나라로 들어 갈 때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낮아지고 작아지려고 하기보다 더 크고 힘 있는 자가 되려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자신을 더 낮추고 작아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과 달리 마태오 복음에서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인가를 말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라.”(18,3)하고 가르치신 말씀에 담긴 지향처럼 지금껏 자신이 주인처럼 걸어왔던 길과 삶의 태도가 아닌 주님을 자기 삶의 참 주인으로 모시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했던 높아지려는 삶에서 벗어나 내려가는 삶, 자신을 낮추는 삶, 하느님과 이웃 앞에 겸손하고 온유한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요3,3)이며,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길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는 삶입니다.(9,48참조)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48)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은 단지 어린이만이 아니라 최후 심판의 장면에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라는 말씀에 드러난 것처럼 작은 사람은 바로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무시당하는 이들에게 베풀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갈 때,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이며, 가장 작은 사람은 바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임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마태23,12)
가장 큰 사람이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 이름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예수님과 하느님 이름으로 작은 사람을 받아들이면 큰 사람이 되죠.
제자들은 자기네끼리 누가 가장 큰 사람 즉 높으냐를 논쟁하였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 이름으로 받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이었어요.
그러니 우리는 모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받아들이려 노력해야죠.
세상 권력자나 어떤 직함으로 받아들여 혼란을 빚지 말아야 하겠죠.
예수님의 이름 외에는 모두가 허무로 돌아갈 걸 기억하며 살읍시다
가톨릭알림 말: 하느님 뜻 예수님 뜻에 맞게 살아야 큰 사람 됩니다.
<'진정한 큰 사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부는 어제 복음과 병렬구문으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전반부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이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요, 동시에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 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은 큰 사람’이란, 단지 ‘작은 이’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라기보다, ‘작은 이’를 받아들여 ‘같이 작아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크기 때문에 큰 사람인 것이 아니라, ‘크면서도 작은 이인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이’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큰 것을 비우는 바람에 ‘작은 이’가 된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비우고 낮아져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힘없는 약한 사람을 표상하며, 예수님께서는 발가벗고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는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천대받는 이’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력함과 낮아짐, 동시에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작은 이’, ‘무능하고 비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리 2,3)
사실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되, 허물과 허약함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나아가서, ‘허물을 함께 지는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높아지고 커지고 첫째가 되고자 안달인 이 시대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가 진정한 큰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의 찬미 - “경천애인(敬天愛人)”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 때에 열매를 맺으리라.”(시편1,2-3)
교황님의 제46차 해외 사목 방문중 루벵 학생들에게 한 감동적인 강론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추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공부는 권력의 도구가,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이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 된다. 앞으로 나가라. 이념들의 이분법에 들어가지 마라.”
엊그제 수도원 ‘자캐오의 집’, 피정집에서 단체 피정지도중 제의방에서 불암산을 바라볼 때 저절로 흘러나온 고백에 행복했습니다. 흡사 주님 앞에 서있는 듯 행복한 체험이었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8.>
당분간 10월은 이 시로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역시 지인에게 시화(詩畫)를 부탁해서 받았습니다. 수도원에서 가장 불암산 바라보기에 전망좋은 ‘자캐의 집’ 3층에서 탄생된 시입니다. 아마도 성인들 역시 주님 앞에서 늘 사랑의 찬미에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역시 지혜문학에 속하는 욥기의 시작입니다. 욥기 역시 앞서의 코헬렛 못지 않게 깊고 아름답습니다. 욥의 시련에 앞서 똑같은 그에 대한 묘사가 2회 나옵니다.
‘그 사람은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하느님도 인정한 욥이었고 시련에 앞서 사탄 앞에서 욥을 자랑했고, 사탄은 이의를 제기하자 하느님은 사탄의 제의를 수락합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같이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위에 다시 없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새삼 우리 생명은 하느님의 고유 권한에 속해 있음을,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1차 사탄과의 게임은 극한의 고난과 시련중에도 솟아난 욥의 다음 감동스런 찬미의 고백으로 하느님의 승리로 끝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평소 사랑의 찬미로 일관된 삶임을 입증하는 고백입니다. 더불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서 찬미받으소서.”
오늘 9월 순교자 성월 마지막날 9월30일 우리는 참으로 자랑스런 성인 예로니모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역시 순교적 삶에 한결같았던 성인으로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사대교부에 속하는 분입니다. 당대 성인의 학문의 깊이는 성 아우구스티노 외엔 아무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합니다.
성인의 가장 큰 업적은 불가타(일상적, 대중적이라는 뜻) 성서 번역이요 391년부터 406년까지 1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하니 성인의 진리를 향한 사랑의 열정과 끈기가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성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 성경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이 뜨거웠습니다. 성인의 편지에 나오는 권고가 심금을 울립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늘 성경을 읽으십시오. 아니 당신 손에서 성경이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경을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감싸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대의 혀는 그리스도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것들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신학교의 수호성인’,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인은 사제이면서도 생애 대부분을 수도자로 살다가 420년 오늘 9월30일, 72세에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임종을 맞이합니다.
욥의 경천애인의 사랑은 그대로 예수님께 전수되었음을 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은 오늘 기념하는 성 예로니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후 제자들에게 유언같은 교훈 둘을 선물하십니다. 동상이몽,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도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중인 철부지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가장 취약하고 약하고 무력한 이들입니다. 이들을 사랑의 환대로 맞이함이 예수님 당신을 환대하는 것이며 궁극에는 예수님을 보내신 분, 하느님 아버지를 환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하고 무력하고 불쌍해 보이는 이들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이며 우리의 전적인 사고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얼마전 공동체 회의 결과에 ‘신의 한수’라 감탄했고 민심은 천심임을 확인하고 기뻤습니다. 엄격한 비밀투표를 통해 이심전심 가장 약해 보이나 실상은 똑똑한 수도형제를 총회대표로 선출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주님의 가르침도 소중합니다. 스승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막았다는 기고만장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과 같은 내용의 어제 마르코 복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음을 배웁니다. 진리앞에 일체의 기득권이나 엘리트주의는 모두 배격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진리의 주님을 그들만의 소유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진리앞에 지극히 겸허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사랑과 찬미의 겸손한 이들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진리이신 주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작은 이들’을 사랑하며, 진리의 사람, 찬미의 사람, 겸손의 사람, 경천애인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찾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예레15,16)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지난 한가위 명절에,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명절에 누구를 기억하는가?
우리가 윗어른을 찾아뵙고 은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하고, 다른 민족들에게 자랑할 만한 아주 좋은 풍속입니다. 그런데 위아래를 지칭하는 용어를 사용하기가 어렵지만,
‘아랫사람들과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방문하고 돌보는 일도 그렇게 하는가?’
하고 자문해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눈에 띄게 하고, 우리 귀에 들리게 하고, 우리가 마음과 피부로 느끼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맡기신 가난한 이들과 어려운 이들에게 우선적인 관심과 애정을 표하는 배려를 생활화해야겠다는 명제가 메아리칩니다.
정치기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면 국민이 힘들다.<루카 9/46-50>8/3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엣 부터 우리 국민성은 단결이 아니라 서로 흩어져 서로 위를 찾이 하려고 서색당파 싸움과 권력 투쟁으로 국민은 아랑 것 없고 자기 권위만 세우려고 하다가 나라를 빼앗기었습니다.
어려서 들은 말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란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우리는 서로 소통이 있는 세상에 살며 나라가 움직이여야 하는데 권력을 잡은 사람을 거짓이나 사기로 끓어 내리고 그 자리를 찾이 하려 하니 고래싸움에 세우등 터진다는 말처럼 국민의 삶은 점점 피패해져 갑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서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는가를 논쟁하고 있을 때 어린이와 같이 되고 낮은 자리를 찾이 하는 사람이 윗자리를 찾이 한다고 합니다. 주님은 나는 섬김을 받으려 오시지 않고 섬기려왔다고 하십니다. 저는 높은 자리에 있어 좌지우지 하지 않고 내가 사는 공동체가 협치나 진리를 따라 일치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때 이런 소리를 듣고 웃는 적이 있습니다. 결혼하면 누가 이 집안의 권리를 잡는 냐에 따라 행복이 온다고 하여 한집안도 권력 투쟁을 한나고 하며 잡안이권력을 잡지못하면 평생고생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패권 전쟁보다 더 진실하고 선허고 아름잡게 살려고 하는가가 문제라 생각하고 진선미를 따르는 살을 살려고 합니다.
아무리 힘있게 잘 달리는 기차도 철로 없으면 한치도 앞으로 나갈 수없습니다. 모든이는 법과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또한 서로 섬기는 삶이 여야지 섬김을 받으려면 부자유스럽고 앞으로 나기지 못합니다. 아담이 하느님 밑에 사는 것 불편하게 여겨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저 땅 밑으로 떠러져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 힘들게 살게 되었지만 오늘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 사람이 되시어 가장 낮은 자리에 계시며 가장 높은 자리를 살게 하시려고 믿음 희망 사랑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수도원의 역시를 보면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 대부분 수도원 밖에 나가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자랑할 것이 없어 남 앞에 나서지 못하고 늘 섬기는 자세로 살려고 하니 그 흔한 외국에 유학도 못가고 독일어 영어 불란서 말을 못하고 남이 서 놓은 글을 우리말로만 보고 목상 하지만 그레서 더 밒으로 내려가 깊이 생각하고 반추하며 마치 먹을 것이 없으며 오래십고 입안서 영양분을 얻어 소모 되는 것 없이 몸이 섬취 하도록 하는 것처럼 주님의 가르침을 되 색이며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악을 것 없으면 거리에 노숙자도 되고 땅이 없어 농산물 없어 먹을 것이 없으면 이삭이라도 주어서 먹어야 하고 원산에서 인천에 월남 후 가난하여 김장 때 김장을 못해서 겨울나기가 힘들 것 같아 어머니와 저는 김장 밭에 버린 배추 무청을 주어다가 소금에 저려 독 가득히 넣어 겨울을 멋지게 난 때가 있었습니다. 소금에 저리기민 한 무청이 얼마나 맛있는지 김장 못해도 김장 철을 잘 지냈습니다. 혼자 부산 피난가서 먹을 것 없어 부산역 앞에 골목에 부대찌개 파는 것 맛있게 먹었는데 그 재료는 부대에서 먹다 남은 음식 찌거기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영양 가치는 높았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낮은 자리에 있다는 별 볼 일 없는 사람 아니고 소중한 사람이여서 비록 낮은 자리에 있어도 감사하며 살아야함을 깨우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함승수 신부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웠던 사람이 지위가 높아지면 어려울 때 일을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잘난 듯이 뽐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는 그러지 않지요. 부모는 자녀가 실수나 잘못을 저질러도 ‘그러려니’하고 이해합니다. 자신도 어린 아이였던 시절 그와 비슷한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었고, 자기 부모님이 그런 자신을 이해해 주셨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든 것이 부족하고 서툴렀던 ‘올챙이 시절’을 거쳐 어엿한 어른이 되었기에, 지금 그 올챙이 시절을 겪고 있는 자녀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지금 ‘개구리’가 되었다고 해서 자녀를 개구리의 기준으로 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작아짐으로써 자녀와 똑같은 올챙이의 눈높이로 그들을 바라보기에, 그들이 부족하고 약해서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입니다. 예수님께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만해도 정말 보잘 것 없던 사람들이 그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조금 성장했다고 우쭐해져서는, 서로 ‘내가 더 잘났네’하며 되지도 않는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이 곧 도래할 거 같으니, 거기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가 하느님 나라에 기여한 바가 더 큰지를 따져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진짜 열을 올리며 집중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어린이’를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가장 작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어린이는 어른이 돌보아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힘 없고 약한 이를 표상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믿고 따르는 예수님도 그런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요. 그러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건 작고 약한 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수많은 ‘아기 예수님’들을 사랑으로 끌어안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나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허물과 약함을 지닌 상태 그대로 포용하는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함을 가리키지요.
한편, ‘가장 작은 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어린이처럼 작고 약한 이들을 그저 내 안에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으로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가 어린이처럼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며 자녀들과 같은 눈높이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야 어린이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입장과 상황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부족하고 약한 우리 인간을 더 폭넓게 이해하시고 깊이 공감하시며 제대로 사랑하시기 위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부족하고 약한 인간이 되신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당신 모습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당신을 알아보고 사랑함으로써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마음속 생각
한창현 모세 신부님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9,48). 제자들이 지금 당장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가리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큰 사람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를 삼위의 강생의 신비 차원에서 본다면, 세상을 구원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스스로 내려오시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가장 크신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가장 작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심으로써,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가장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는 가장 큰 모범이 되셨습니다. 세상이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을 낮추려 할 때, 우리는 세상의 일반적인 흐름을 거슬러 고통과 시련의 길을 걷게 됩니다. 비록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보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작은 사람
큰 사람의
잣대는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고정된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주는 것이
진실한
복음입니다.
큰 사람이
되려는
거품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예수님의
작아지시는
사랑입니다.
허풍에 익숙한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할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작아지고
작아지는
곳에서
보게 되는
우리자신의
참된
모습입니다.
작아지는
진실한
성찰이
우리를
키웁니다.
작은 사람의
진실한 실천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어떠한
인간관계도
가장 작은
사람이 되면
평화가 늘
함께합니다.
완고한
나 중심을
내려놓는
가장 작은
사람의
삶입니다.
우리를
진심으로
생각하시고
간절하게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 먼저
가장 작은
사람이 되십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이듯
우리자신의
가장 작고
진실한 모습을
다시 만나는
기쁜 날
되십시오.
2018년 저의 첫 번째 손주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의 아빠인 조카는 태어나기를 기다리면서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운동하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종종 자기 자녀와 함께하는 꿈을 이야기하는 부모를 봅니다. 이 꿈대로 어렸을 때는 부모와 함께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 역시 성장하면서 부모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더군요.
죽이 척척 맞아 정치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부모와 문화 활동도 같이하고, 또 세계여행도 함께하는 상상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상에 충족하는 자녀 부모의 관계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치에서는 서로 정반대 견해를 보여서 토론할 수 없으며,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문화 활동이고 여행이냐며 화를 내는 부모와의 다름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이렇게 다릅니다. 살았던 시간이 다르고, 생활했던 공간이 다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해야 부모와 자녀의 만남이 가능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면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일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에 찾아온 약장수 무리가 기억납니다. 그들은 약을 팔기 전에 관심을 끌 수 있는 차력쇼를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의 모든 아이가 약장수 근처에 모입니다. 그때 약장수 무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약을 사지 않으니,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겠지요. 애들을 무시하는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불과 4~50년 전에도 그러했는데, 예수님 시대는 어떻겠습니까? 아직 미성숙한 존재로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역시 다름의 차이인데 말이지요.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런 다름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다면 봉사하라. 그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 불변의 법칙이며 그것이 당신을 성공으로 이끄는 왕도이다(헨리 밀러).
작음을 무시하고 푸대접하며 등 뒤로 내던져버리는 폐기의 문화와 결연히 맞서 싸워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이름으로 반포된 권고나 회칙, 강론들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틈만 나면 수시로 강조되고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작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 교회 밖으로 나가는 가난한 교회!
201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장 호세 베르골료 추기경님이 교황으로 선출되자,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 빈민가 주민들이었습니다.
빈민가 주민들은 자신들을 향한 베르골료 추기경님의 아버지 같은 모습과 따뜻한 마음에 언제나 큰 감동을 받고, 깊은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베르골료 추기경님은 럭셔리한 관용차가 아니라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수시로 빈민가 주민들을 찾아가 그들의 고충을 듣고 위로했습니다.
부활이나 성탄 때는 빈민가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려고 방 한칸짜리 자신의 서민 임대 아파트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날랐습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니 교황님의 노선은 작고 연약하며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신 예수님의 노선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어린이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그들 역시 한 인간 존재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해주셨습니다.
교황님의 큰 걱정 중에 하나가 이 시대 냉혹한 폐기 문화입니다. 모든 잣대가 생산성, 효율성 위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산성 면에서 뒤쳐지는 노인들, 장애인들, 환자들, 약자들, 어린이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폐기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작은 것도 분명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세상에 외쳐야겠습니다. 작음을 무시하고 푸대접하며 등 뒤로 내던져버리는 죽음의 문화, 폐기의 문화와 결연히 맞서 싸워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치유와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치유(Healing)는 외부에서 들어온 질병을 몸이 가지고 있는 면역력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강력한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물리 칠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치료(Treatment)는 외부에서 들어온 질병을 약을 가지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사와 약사는 병이 든 우리의 몸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몸을 의사와 약사에게 의지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예전에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광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나 약사에게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 몸의 면역력을 잘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몸의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잘못된 습관들을 먼저 개선해야 합니다. 지나친 음주와 흡연은 면역력을 약하게 합니다. 과도한 업무와 그에 따른 긴장은 면역력을 약하게 합니다. 욕심과 욕망 그리고 분노와 원망 또한 면역력 약하게 합니다. 규칙적인 식사와 적당한 운동은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나눔은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독서와 명상 또한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의 면역력을 키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치유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이 났을 때도 손을 대셨고 시몬의 장모는 열이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병환자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죽은 라자로와 소녀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낮기를 원하느냐? 치유 될 것을 믿느냐?’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갈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면역력을 키워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하혈이 멎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잃어나 걸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도 걸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도 앞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치료하시는 적이 없었습니다. 치유 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습니다. 치유 될 수 있도록 기도 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영적인 면역력이 강했던 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욥은 사탄으로부터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배도 바다에서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르던 양도 모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인들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이런 영적인 면역력을 겸손의 3단계로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일찍 죽는 것도 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영적인 면역력을 3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모든 유혹을 굳건하게 뿌리치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영적인 면역력은 어떤 상태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사람이라면
주님의 사람과 함께
주님의 사람이기에
작은 사람과 함께
주님의 사람이기에
보잘것없는 사람과 함께
주님의 사람이기에
가난한 사람과 함께
주님의 사람이기에
믿는 사람과 함께
주님의 사람이기에
희망하는 사람과 함께
주님의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주님의 사람이기에
선한 사람과 함께
주님의 사람이기에
의로운 사람과 함께
주님의 사람으로서
주님의 사람과 함께
가장 큰사람은 누구?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남자들은 서로 자리를 놓고 우위를 점하려고 줄기차게 싸운다. 소리없는 전쟁이다. 승진 시험으로 싸우고, 줄을 잘 서서 인맥을 구축하며 싸운다. 층층시하에 산을 넘을 일이 많다.
제자들도 예수님께 줄을 서서 싸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만을 대동할 때도 있다. 다른 제자들의 시새움을 자아낸다. 초심과는 다르게
배가 부르고 안정되면 남자들이 하는 일이란 그런거다.
지기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산원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제자들 간 누가 더 높으냐를 놓고 예수님께 물어 보는 것 같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그들 앞에 세우며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9,48)
묵묵히 자기 권한에 충실하며 직무를 다하는 사람, 남이 보던지 안 보던지 주님의 제자로 작은 이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제자가 가장 큰 사람이다. 가장 큰 사람 놓고 싸우려 하지 마라! 작은 사람으로 충실히 살아가길 힘쓰라. 삶의 자리를 떠난 후 그 사람이 얼마나 가난한 자들을 찾아 살았는지? 큰 사람인지, 조무래기인지 그 진가가 한 순간 극명하게 드러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예전에 미사가 끝나고 신자 분들 인사를 하는 데 한 어린 아이가 와서 저에게 인사를 하면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응 나는 예수님이 아니고 신부님이야’라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그 어린 아이는 보잘 것 없는 저의 모습 속에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어른인 제가 그 아이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그 아이가 먼저 저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도 사람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복음의 길이고 구원의 길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흔히 속이 좁고 마음 씀씀이가 얕은 사람을 두고 ‘밴댕이 소갈딱지’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밴댕이라는 생선이 속 좁은 ‘좀생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자리잡은건 그 생선의 속, 즉 내장 자체가 작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특유의 성질 때문입니다. 밴댕이는 낚시나 그물에 걸려 물 밖으로 나오면 제 성질에 못이겨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씩씩대다가 금새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런 모습이 어떤 상황이나 사람이 제 뜻과 기대대로 되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며 화를 내는 우리 모습을 닮아 있지요. 마음 그릇이 너무 작아서 나와 다른 입장, 생각, 가치관을 내 안에 담아내지 못하고 무조건 제뜻대로 해야 한다고 떼를 쓰는 옹졸한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나이 깨나 자셨다는 어르신들 중에, 재산 깨나 있다고 자랑하는 부자들 중에, 공부 좀 하셨다고 으스대는 엘리트들 중에 이런 “밴댕이”들이 참 많다는 점입니다. 마음 속에 자기 자신이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머리 속에 자기 생각만 가득 차 있어서 남의 마음이나 생각을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건 온통 내가 더 편할 방법, 내가 더 부유해질 방법, 내가 더 높아질 방법들 뿐이라 타인을 배려하고 챙길 여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삶이 온통 “나뿐인” 사람들이 제것만 챙기다가 결국 다른 이에게 상처입히고 피해를 주는 “나쁜 놈”이 된다는 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자기들끼리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의 문제를 두고 갈등을 일으키는 제자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위해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고 계시는데, 그들은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높아져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지를 생각한 겁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당신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더 많이 내어주실 수 있을지를 생각하시는데, 그들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이용해서 제가 원하는 것들을 더 많이 채울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둔 겁니다.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록 그것들을 잃으면 어쩌나 더 갖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커져 마음이 잔뜩 오그라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영적인 밴댕이가 되어 마음 속에 자기 자신이 가득 차다보니 주님의 뜻을 헤아릴 여유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를 용기도 사라진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중요한 것은 남들을 짓밟고 상처입혀 가며 높은 자리에 오르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 어린이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고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나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그 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게 되고 그분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약한 사람이 곧 악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약한 사람은 고통에 대한 저항력이, 다름을 인정하는 포용력이, 미움과 갈등을 견뎌내는 인내력이 약하기에, 사악한 세력이 사소한 오해와 갈등으로 그를 뒤흔들면 금새 미움과 원망에 걸려 넘어지고, 작은 고통과 시련으로 그를 시험해도 금새 포기와 절망의 늪에 빠져 끝없는 후회와 슬픔으로 괴로워하게 되지요. 그러니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꾸준히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어안아야 할 “어린이”는 누구입니까?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에 대한 문제로 논쟁을 합니다. 이들이 한 논쟁은 어떤 논쟁일까요. 만약에 이들이 한 논쟁이 하느님 나라에서의 누가 큰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었다면 괜찮겠지만 사실 그들이 한 논쟁은 지극히 세속적이며 또한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논쟁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은 하였지만 지상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왕으로서의 메시아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곁에 세우신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메시아 상을 바로 지적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작은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서 어린이란 힘없는 이 혹은 낮은 이, 등으로 상징됩니다. 즉 예수님께서 아이를 세우신 의미는 자기 자신을 어린이로 낮추심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약한 인간이 되심이 자신을 낮추심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이지요. 이어서 교만해진 요한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강조하고자 한 부분이 어디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일이 아닌 “저희와 함께”입니다. 요한에게 중요한 것이 마귀를 쫓아낸 것이 아니라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비록 자신과 함께 생활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 지상에서 확장시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신앙인으로 살아갈 때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사욕에 눈이 멀어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인지에 대한 것으로 논쟁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은 이를 폄하하면서 그 일을 못하게 하였으며 그것을 자랑삼아 예수님께 보고하였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세우시며 메시아가 어떤 모습으로 오는 것인지 알려주십니다. 낮은 자의 모습으로 힘이 없어 다른 이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로 이 땅에 왔음을 강조하시며 진정한 큰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다시말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아져야 하고 하느님은 커져야 함을 그래서 겸손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도 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었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욥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낮은 자 혹은 작은 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또는 욥의 모습이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낮은 자 작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심하고 그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삶이 낮은 자, 작은 자인지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아멘!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큰 사람
작은 사람의
어리석은
이 논쟁은
허무하게
스러지는
포말과도 같이
삶의 본질을
놓치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시 겸허한
자세로 주님을
따라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살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 모두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좋은 스승들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이 와도
소중함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같이
낮아지심으로
사람을 얻습니다.
사람을 얻으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자신의 삶을
보게됩니다.
진리를 찾는
모습은 언제나
작아지고
낮아지는 가운데
만나게되는
기쁨입니다.
복음은 우리들
마음의 성숙과
정화로 우리를
이끕니다.
더 낮은 곳에서
행복해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꽃을 만나면
꽃이 되시고
어린이를 만나면
어린이가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들 만남이
이렇듯 큰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작은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귀중한 만남
소중한 열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어린아이같이
순수하며
낮아지는
만남입니다.
오늘도 겸손과
사랑의 참된
날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막을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서울 대학교 병원에서 스트레스에 관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연구진은 같은 환경에서 양육된 실험용 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서 한 집단에는 2분마다 전기 충격을 주고, 또 다른 집단은 유리창 건너편에서 맞은 편 고통 받는 쥐를 관찰하도록 배치했습니다.
열여섯 시간 동안 실험을 진행하며 쥐들은 480회의 전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탈진한 쥐는 전기 충격을 받은 쥐가 아니라 이 고통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던 쥐였다고 합니다. 유리창 너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느꼈고,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큰 무력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보다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의 아픔이 더 큽니다. 그런데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랜 병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와 그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고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을 이겨낼 힘은 무엇일까요?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고통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하는 마음보다는 ‘나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과연 마음이 편안할까요? 더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육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십니다. 사실 다투게 되면 절대로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그 다툼의 이유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더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위대한 의사답게 어린아이를 그들 앞에 본보기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까지 받아들여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눈높이를 낮춰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린이의 행동과 어린이의 말을 따라 하게 되지요. 어린이 앞에서는 세상의 체면이나 명예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낮춰서 함께 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혼자’가 아닙니다. 자신을 낮춰서 누구든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지금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생텍쥐페리).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방법
강의 부탁을 받으면 아무리 멀고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해외에도 또 사람이 없는 시골 본당에 가서도 강의를 해왔습니다. 저를 불러주시는 것에 감사하면서, 지금까지 거부하지 않고 기쁘게 강의를 해왔습니다(물론 올해는 코로나19로 거의 강의를 못 했습니다). 그런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강의 청탁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은 신학교였습니다. 수준 높은 강의를 들어 온 신학생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부족한 저의 강의를 들어는 줄까? 등의 생각으로 강의를 하겠다고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불안을 멈추기가 힘들었습니다.
망설임, 두려움.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별것 아닌 것이 됩니다. 스티브 프레스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우리 내면에 있는 살지 않은 삶. 이 둘 사이에는 저항이라는 게 버티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항을 부숴야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은 하느님을 찾게 하고 하느님께 더 집중하게 만드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 그런 체험 해보신 적이 있는가요? 불행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체험 말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의외로 그런 분들 참 많습니다. 불행이라는 것은 결핍투성이인 인간 존재가, 불완전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어야만 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때로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평화롭고 만사형통하던 욥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시련을 체험케하십니다. 그가 연속적으로 겪은 불행의 강도가 얼마나 컸던지, 위로 방문 온 친구들은 할말을 잃습니다.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겨웠던 욥 역시 나중에는 자신의 태어난 날 마저 저주하게 됩니다.
평화롭던 욥의 집에 갑작스레 적군들이 들이닥칩니다. 적군들은 가축들 중에서도 가장 값나가는 소들과 암나귀들을 약탈했고, 가축들을 돌보던 목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달려와서 욥에게 사건의 개요를 보고했습니다.
유일한 생존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양치기 한명이 달려와서 외쳤습니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6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 양치기의 보고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와 외쳤습니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7절)
갈수록 점입가경입니다. 욥은 설마 설마 했는데, 또 다른 이가 와서 가장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9절)
보십시오. 욥은 순식간에 재산이며 가축이며 자식들이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과 몇분 사이에 그간 욥에게 베푸셨던 모든 선물들을 다 거두어가신 것입니다.
제가 욥같았으면,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내게 이런 가혹한 현실을 허락하시는가? 이런 상황 속에서 내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랴?’하고 울부짖으며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태도를 보십시오. 놀랄 지경입니다. 욥은 자리에서 일어나 애통과 슬픔, 참회의 표시로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기 1장 21절)
더 놀랍게도 욥은 그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따지지도 않았으며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부당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욥은 흠 없고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런 욥이었기에 하느님의 축복도 풍성했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당시 가축의 숫자는 부의 기준이었습니다. 욥에게는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었고, 가축을 돌보는 일꾼들의 숫자도 엄청났습니다.
욥과 그 가족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위에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며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동시에 선물로 주어진 부를 마음껏 향유하였습니다.
없이 살던 사람, 이미 밑바닥에서 살던 사람에게 시련은 면역이 되어 있어서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사람, 누리던 사람에게 시련은 훨씬 더 크게 다가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든 실패나 좌절이 없는 평탄한 인생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예외없이 시련을 체험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큰 시련 앞에서 처절하게 절망하기도 하고 하느님을 원망도 하지만,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동시에 한 가지 큰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자신은 크신 하느님 앞에 한갖 티끌같이 작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 좋은 것은 물론이고 나쁜 것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이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겪는 시련은 그 자체로 고통의 원인이지만, 결국 시련은 하느님을 찾게 하고 하느님께 더 집중하게 만드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시련은 우리 인간을 더 큰 믿음의 사람, 더 큰 그릇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남의 단점이 나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참으로 성공한 인생은 무엇일까요? 하느님 눈에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크게 되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세우신 다음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크기를 심판하실 때 사용하시는 유일한 기준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낮출 줄 아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사랑’이 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교만하면 사랑을 할 수 없으니 겸손의 크기가 곧 사랑의 크기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들까지도 잘 받아들이기에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가장 크시지만 가장 작은 밀떡 안에 계신 것처럼, 가장 작은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캐나다 몬트리올 어떤 초등학교에서 정신적으로 조금 모자란 랄프라는 아이는 성탄 연극 때 여관 주인 역할을 하며 오갈 데 없는 요셉과 마리아를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장 작은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태중에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은 또 하느님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늘만큼 큰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에게서도 단점을 찾아냅니다. 예수님은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내세우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단점들을 극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단점이 있으니 남의 단점도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도 기억하는 어머니께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버스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어머니와 저는 서서 있었습니다. 한 정류장에서 앉아있던 사람이 내리자 어머니는 재빨리 그 자리로 뛰어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앉을 자리에 저도 앉으라고 손짓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그 자리를 맡으려고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창피해서 어머니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상도 찌푸렸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내려서 매우 서운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종일 저 때문에 뛰어다녀서 몹시 지쳐있었는데, 어머니보다 그 앞에 있는 사람이 더 소중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특권의식을 지키려 어머니에게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했던 것입니다. 나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어머니의 단점을 나의 것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의 단점을 받아들이면 나의 단점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남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나의 단점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나이 들며 유일하게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남의 단점들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렸을 때 길을 잃어 고아로 크며 남의집살이하며 고생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물건이, 혹은 누군가가 버려지는 것을 그냥 보지 못하십니다. 저희 집에는 이미 쓴 물건들이 많이 쌓여있고 그것을 버리라고 하면 어머니에게 혼이 납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흘려보내 주는 것을 배운다면 더욱 좋겠지만 지금처럼 사시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훌륭해 보이십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 아이를 집에 들여 씻겨주고 재워주고 좋은 옷을 주시고 당분간 머물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포용력이란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익은 사람이 자신의 옛 모습을 가진 이들을 이전의 자신처럼 대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익어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남의 단점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그 단점을 극복했어야 합니다.
쭉정이는 자신도 곡식이라는 것을 뽐내기 위해 익지 못한 것들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미 익은 곡식은 새싹이든, 자라고 있든, 속이 아직 차지 않은 쭉정이든, 자신이 그런 적이 있어서 언젠가는 가득 차게 될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이미 익은 곡식은 익지 않은 다른 것들도 자신처럼 곡식으로 봅니다. 부족한 이들도 모두 자기 자신처럼 보는 것입니다.
나이 들며 더욱 포용력이 향상되는 이유는 그만큼 이전의 단점들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도 벗어나야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남의 단점이 나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단점을 내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넓은 마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평화 책꽂이’가 있습니다. 책을 소개하고 필자의 느낌과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한영국 선생님은 정채봉님의 ‘초승달과 밤배’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주로 외국 작가의 책을 소개하였는데 이번에는 한국 작가의 책을 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은 미주가톨릭신문 홈페이지 지면보기 9월 13일자를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연좌제와 신분제’의 사회를 살았습니다. 연좌제는 부모의 잘못, 특히 사상과 관련된 잘못이 있으면 자녀들 또한 영향을 받는 제도입니다.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없고, 정보원에 의해서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초승달과 밤배에서 할머니는 손자와 손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사상범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손자와 손녀 역시 사상범의 가족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이 연좌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저의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지만 면접에서 떨어지곤 했습니다. 연좌제의 벽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이 신장되면서 ‘연좌제’는 더 이상 삶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이 가끔씩 큰 홍역을 치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Black Lives Matter'입니다. 지금 미국에 있는 흑인의 선조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Roots)'를 통해서 미국 흑인 노예들의 삶과 애환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세기 전만해도 대부분의 나라는 신분제의 사회였습니다. 한국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천민(賤民)’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람이 그 신분에 따라서 등급이 매겨지는 사회였습니다.
신분이 다른 사람과는 사랑할 수도 없었고, 사랑한다고 해도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재능과 능력이 있어도 신분이 천하면 재능과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때로는 그 재능과 능력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피부색 때문에, 성별 때문에, 신분 때문에 차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엔 인권 선언문은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우리 모두는 이성과 양심을 가졌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피부색, 성별, 종교, 언어, 국적, 갖고 있는 의견이나 신념 등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연좌제와 신분제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따라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인데 인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입니다. 가난은 사상과 신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은 물질과 재물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누면 해결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가난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굶주려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치료받지 못해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이 없어서 거리에서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코로나19는 가난한 국가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라자로를 외면했던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 놓은 부자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후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워 주었던 자캐오를 축복하시면서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가난한 이들과 재물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공동체가 기쁜 마음으로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다고 전해줍니다. 가난한 사람도, 굶주린 사람도, 과부도, 어린아이도 주님의 식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우리가 이 세상에 빈 몸으로 왔음을 안다면 재물과 돈에 그리 연연해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기쁘게 나눔으로서 하늘에 보화를 쌓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쌓은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입니다. 연좌제와 신분제의 벽을 허물었다면 가난한 이들의 아픔과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소중한 생명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대하기>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다 더 깊숙하게
보다 더 넓디넓게
보다 더 높디높게
보다 더 따뜻하게
보다 더 부드럽게
보다 더 너그럽게
보다 더 겸손하게
보다 더 평등하게
보다 더 편견없이
보다 더 갈림없이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부모라고 생각했을 때 자식들이 여럿이 있는 데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자식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집니다. 그게 부모 마음입니다. 어쩌면 가장 적게 가진 자식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때 우리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애매한 말씀을 조금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가진 것이 많은 것처럼 자신의 교만이 가득 들어 차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느님 앞에 진정 겸손하게 자신을 비울 때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어린이들에게서 큰 사람을 봅니다. 아직은 미미하지만 엄청나게 주어진 시간 안에 큰 사람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어른에게서 작은 사람을 봅니다. 앞으로의 시간이 작게 남아 존재의 크기가 점차적으로 소멸 되기에 작은 사람입니다.
어린이들에게서 작은 사람을 봅니다. 얼마 살지 않아 내용이 부실합니다. 미성숙합니다. 어른에게서 큰 사람을 봅니다. 살아온 날들이 내용이 충실해졌습니다. 성숙합니다. 나는 요즘 어린이들과 지내며 많은 것을 배웁니다. 어린이의 미성숙 안에 성숙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큰 사람입니다.
나는 늙어가며 어떻게 지내야 하느님 보시기에 큰 사람일까 자주 생각해 봅니다. 살아온 날들의 내용이 남은 시간과 연결되고 힘차게 삶 속에서 당당히 살아가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신약과 연결될 때 큰 사람이 될텐데 수석사제, 백성의 원로들이 자꾸 작아지는 모습을 봅니다. 이들은 나이만 먹은 작은 사람입니다. 어른답게 어린이 같은 마음하고 신약에 다가가야 큰 사람이 될 터인데 구약의 과거에 답습하고 붙잡고 늘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예수님은 한없이 커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앞에 어린이로 자신을 맡겼습니다. 가장 큰 사람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9,46-48).
<낮춤과 섬김>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월요일>(2020. 9. 28. 월)(루카 9,46-50)
‘교만’은 그 자체로도 죄가 되지만, 더 큰 죄로 이어지는 ‘죄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업신 여김으로써 사랑을 거스르는 죄, 하느님과 같아지고 싶어 하는 신성모독죄 등이 바로 그 ‘더 큰 죄’입니다.)
사탄은 하와를 유혹할 때,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느님처럼 된다고 유혹 했습니다(창세 3,5). 인간들은 하느님처럼 높아지고 싶은 욕심으로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창세 11,4).
사도들이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거나 자리다툼을 한 일이 있는데, 그런 논쟁과 다툼은 명예욕, 교만, 우월감 등에서 생긴 잘못된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겸손’해야 한다고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겸손’은 이웃 사랑 실천에 직결되는 ‘덕’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신앙인의 기본자세’이기도 합니다.
진심으로 “나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나는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다.” 라고 겸손하게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으려면 하느님과 예수님 앞에서만 겸손하면 되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겸손하지 않다면 (교만하다면), 그것은 ‘가장 작은 이’와 당신을 동일시하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일이고,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 앞에서만 겸손한 것은 사실상 ‘거짓 겸손, 위선’ 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6-48)>
“누가 가장 큰(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제자들이 논쟁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모두 “나는 너희들보다 높다.” 라고 자기를 높이는 교만, 동시에 “너희들은 나보다 낮다.” 라고 다른 제자들을 낮추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도 잘못이고, 다른 사람을 낮추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자기들끼리만 다투고 예수님 앞에서는 겸손하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그것을 반박했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말렸다가) 혼난 일이 있는데, 그때 베드로 사도가 했던 말은 겸손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이 말은, 예수님께서 판단을 잘못하고 계신다고 나무라는 말이고, 동시에 자신의 판단이 옳으니 자신의 충고를 따르라고 강요하는, 감히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하는, 제자의 본분에서 많이 벗어난 교만한 말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긴 하지만, 아주 잘못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즉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고 꾸짖으셨습니다(마태 16,23).
이 말씀은, 베드로의 말과 행동이 사탄의 그것과 같다는 뜻이고, 또 제자의 본분을 지키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는 “내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가라.”이고, 이 말은 “제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스승의 뒤를 따라라.” 라는 뜻입니다.)
배반자 유다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때(요한 12,3), 유다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라고 비난했습니다(요한 12,5).
유다의 말은,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재물을 쓸데없이 낭비 한다는 비난인데, 이 비난은 마리아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행동을 내버려둔 예수님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유다는 감히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한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유다가 도둑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기록했는데(요한 12,6), 어떻든 유다의 태도는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요한 13,16).”
루카복음 6장에도,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는(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예수님 앞에 서서 예수님을 인도하려고 하거나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죄이고, 신성모독죄입니다.
그 죄를 짓지 않으려면 예수님 앞에서도 겸손해야 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라는 뜻입니다. (어린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보다도 더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가르침은 곧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진심으로, 또 진실하게 겸손을 실천하는 사람을 높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 때에도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카 22,24).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신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예수님께서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에 계신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이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뉘우치는 삶인 가톨릭인 됩시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어린이시절 지나 초등학교~중등학교 배우고 듣고 보는 능력 배웁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생각하고 행동하며 자기인생을 꾸미기시작합니다.
세상이 아직 물들이지 못한 어린이들은 하늘냄새를 고스란히 풍깁니다.
뇌 성장 따라 무엇을 어떻게 배우느냐로 인간 개개인 모습 달라집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부모 가족 보며 교리 배워 하늘자녀 돼야하는데.
예수님의 ‘어린이처럼’이란 말씀을 ‘하느님 닮은’이라고 바꾸어 봅시다.
어린이=하늘냄새=창조상태=>순수 겸손은 누구나 뉘우치면 터득합니다.
세상욕심의 아집에 인간관계고뇌 말고 뉘우치는 삶인 가톨릭인 됩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 줍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루카 9,46)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스승 예수님 다음으로 누가 가장 높은지 우열을 가리고 싶은가 봅니다. 세속적인 서열과 권력의 욕망이 아직 정화되지 않아서겠지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답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세속의 질서와 역행해야 한다고 알려주십니다. 모두가 크고 힘 있고 강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려고 경쟁하는 세상에서, 작고 힘 없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
사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장 작은 이가 되기를 원하셔서 실제로 가난한 목수와 한 시골 처녀의 아들로, 그것도 객지에서 태어나셨지요. 공생활 동안에도 머리 둘 곳 없는 떠돌이 가난뱅이셨습니다. 죽음도 가장 작은 자로서 맞이하셨지요. 모두가 고개를 돌리는 사형수로 생을 끝맺으셨으니까요. 가장 작은 이가 되는 것은 비우고 낮추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이 그 바람을 이어받기를 바라시지요.
"막지 마라"(루카 9,50)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요한이 무용담 하나를 들려드립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어느 사람이 자기들과 같은 제자 무리가 아니라서 못 하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를 막지 말라고 이르시지요. "우리"에게 속하건 속하지 않건 하느님의 선한 일은 널리 퍼져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화는 제자들은 이미 큰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반증 같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선한 일들을 규제하고 막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또다른 기득권 그룹을 형성해 버린 듯합니다. 이렇듯 악은 인간 욕망의 아주 미세한 빈틈을 노려 가차없이 파고듭니다.
"막지 마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어떠한 욕망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바람은 오직 하느님 뜻과 사람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명성이나 권력 따위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허용하십니다. 당신 자신의 죽음까지도 말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욥의 신앙 여정이 시작됩니다.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욥 1, 8)
주님께서 보시는 욥의 모습입니다. 그의 충실함과 신실함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부러울 지경입니다. 욥의 모습은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욥 1,9)
사탄은, 주님께서 욥에게 축복을 내리셨으니 그가 응당 그런 거라고 응수합니다. 주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처럼 사랑이 아닌 거래로 보는 것은 악에서 오는 생각임을 알 수 있지요.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지금부터 욥에게 지난한 시련의 여정이 닥치겠지만, 아직까지 욥은 주님께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습니다.그동안 누린 것이 모두 주님의 축복이었으니 거두어 가신들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원망이나 항변이 아닌 오히려 찬미입니다.
이 고백 안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위해 당신께 떨어진 영광도 치욕도 가리지 않고 달게 받으셨지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예수님은 철저히 당신 자신을 잊으셨던 것입니다.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모욕 당하고 조롱 받고 버림받고 실패하고 비천한 이로 내쳐지는 것을 받아들일 용기를 지닌 사람입니다.
제자들처럼 큰 사람, 높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어도 작은 이가 되는 것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어떤 면은 작은 이에게 무례하고 무자비하며 잔인하기까지 하니까요. 당장 제자들도 예수님을 등에 업고 "우리"가 아닌 이에게 힘을 행사할 지경이니 세상 편의 혹독한 갑질은 슬프게도 전염성이 매우 강한 듯 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그래도, 작은 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작고 작아져서 눈에 띄지도 않는 지경에 다다르면, 비로소 거기서 사랑하는 주님을 발견할 것이니까요. 작은 이 안에 예수님이, 그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계시니, 작아진다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을 품는 것입니다. 또 작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속한 곳에서 작은 이를 환대하고 또 가장 작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찾고 바라고 갈망하는 주님의 거처는 가장 작은 이들의 마음이랍니다. 그러니 우리, 거기서 만납시다.
정의의 무기로 무장합시다.
성 폴리카르포 주교의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Nn. 3,1-5,2: Funk 1,269-273)
형제들이여, 내가 정의에 대해서 쓰는 것은 내 독창적인 생각에서가 아니고 여러분이 나를 부추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나 나와 같은 사람이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바오로의 지혜를 결코 얻지는 못합니다. 바오로는 여러분 가운데 계실 때 그 동시대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확고하고도 완벽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떠나 계실 때 여러분에게 편지를 쓰신 바 있는데 그것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여러분이 전해 받은 신앙을 굳세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희망은 그를 뒤따르고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를 앞장서 갑니다. 이 삼덕에 이른 사람은 정의의 계명을 완수한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온갖 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정의의 무기로 무장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계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배우도록 합시다. 다음으로, 여러분의 아내들에게도 받은 신앙과 사랑과 정결 속에서 거닐고 자기 남편을 충실성을 다해 사랑하며 다른 모든 이들도 정숙함 가운데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자녀들을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가운데 교육시키도록 가르치십시오. 과부들 또한 주님의 신앙 안에서 분별력을 얻어 모든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온갖 중상 모략, 험담, 거짓 증거, 탐욕, 그리고 모든 악에서 멀리 떠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바로 그들 자신이 모든 것을 샅샅이 살펴보시며 마음의 생각과 감정과 비밀까지 숨길 수 없는 하느님께 바친 제단이라는 점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계명 가운데서 합당히 걸어가야 합니다. 부제들은 사람들의 봉사자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봉사자들로서 정의 앞에 허물없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중상 모략하는 자나 한 입에 두 가지를 말하는 자나 탐욕에 빠지는 자들이 되지 말고, 만사에 있어 진지하고 자비롭고 열심하며 모든 이의 종이 되신 주님의 진리에 따라 살아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승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분이 우리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실 때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미래의 복락을 얻게 될 것이며, 또 우리 믿음에 따라 하느님께 대해 합당하게 살아간다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새 신부와 판공성사
강석진 신부님
어느 날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된 ‘2020년 부활 판공’을 ‘성모승천대축일’ 전까지 실시하라는 교구 결정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부활 판공성사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신자들 간의 이동이 겹치지 않는 장소를 선정했습니다.
이어서 판공성사 일정을 잡는데, 의외로 손님 신부님을 모시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주임 신부인 나와 보좌 신부가 본당 교우분들의 고해성사를 주면 되겠다고 편하게 생각했지만, 본당 신자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손님 신부님이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본당 신부님들과 교우 분들이 일상을 잘 지내는 것과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암튼 판공성사 일정 중 마지막 날 평일 저녁에, 손님 신부님 두 분을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무더운 때에 갑작스럽게 손님 신부님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보좌 신부님의 인맥과 노력으로 두 분의 신부님 물색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분 중에 한 분 신부님께선 지난 해 12월에 사제품을 받았고, 해외 선교를 나갈 준비를 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난 해 12월 사제 서품이라…. 그러면 서품을 받은 지 만 1년도 되지 않는 새 신부님이네. 음, 판공성사를 잘 줄 수는 있을까!’
아니다 다를까, 판공성사 주러 온 날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데, 그 신부님 말로는 ‘고해성사는 준 적은 있지만, 판공성사 경험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신부님에게 겉으로는 편안하게 성사주시면 된다고는 말은 했지만, 내심 신경이 쓰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신자들 모두가 영적으로 힘든 때, 모처럼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 되게끔 신경을 쓰려고 했지만, 고해 신부님이 ‘새 신부님’이라는 생각에… 미심쩍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판공성사가 시작됐고, 손님 신부님을 안 불렀으면 어찌됐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교우 분들이 고해성사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보고 돌아가는 신자분들은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나 또한 고해성사를 보고 가시는 신자분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은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다 내 마음 속에서 어떤 울림이 밀려 왔습니다.
‘석진아, 너는 언제 고해성사를 볼 거야?’
이에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나는 그 신부님에게 고해성사 보기를 결심한 후, 판공성사를 마칠 즈음, 새 신부님이 계신 고해소에 들어가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도 고해성사를 볼게요.”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 당황한 듯 손 사레를 치자, 나는 막무가내로 성호를 그어버렸습니다.
“나의 범한 죄를 전능하신 하느님과 신부님께 고백합니다 … 이러쿵 … 저러쿵 …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해 신부님이 내게 ‘지금 어려운 시기에 신자들을 위해 힘과 용기를 주는 사제가 되기를 바란다’는 훈화 말씀을 해 주셨는데, 마음이 어찌나 따스해지던지요.
내가 그 신부님을 ‘새 신부’라는 딱지를 붙여서 그렇지, 그 신부님은 판공성사 주시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좋았다고나 할까!
살면서 나도 모르게, 서품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신부님께 ‘새 신부’, ‘젊은 신부’, ‘어린 신부’ 등의 말을 쓸 때가 있었고, 은연중에 그 신부님을 ‘어린 사람’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료 신부님을 ‘어린 사람’ 취급하면, 그 신부님은 결코 ‘형제 신부’, ‘동료 신부’로 생각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날, 그 신부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내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하느님의 종. -믿음의 대가;예수님과 욥-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부터 시작되어 토요일로 끝나는 제1독서 욥기가 반갑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예표처럼 느껴지는 욥이요, 두분의 믿음이 공통적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종, 믿음의 대가 예수님과 욥이요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모세, 다윗, 이사야처럼 두 분 다 하느님의 종이요 우리 믿는 이들 역시 하느님 가까이에서 하느님의 종으로 살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인물이 욥입니다. 무죄하고 의로운 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략된 첫머리 부분이 아름답고 참고가 되겠다 싶어 인용합니다.
“그 사람 욥은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에 딸 셋이 있었다. 그의 재산은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었고, 종들도 많았다. 그 사람은 동방인들 가운데서 가장 큰 부자였다.”
설화상 인물이지만 실화의 인물처럼 느껴집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큰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오염되거나 중독되지 않고 참으로 겸손하고 초연했던 하느님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탄과의 대화중에 확인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인정한 욥이었습니다. 사탄은 창세기 하와를 유혹하던 뱀같지만 하느님의 수중에 있음을 봅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위에 다시 없다.”
우리보다 우리를 환히 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며 세상 누가 뭐라든 요지부동일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허락이 떨어짐으로 사탄에 의한 욥의 시련과 고난이 시작됩니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본 훼퍼의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네 차례 반복되어 전해진 불행의 소식입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이어지는 욥의 반응이 감동적입니다. 일체의 불평이나 원망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즉시 일어나 통회의 자세로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고백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셔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참으로 순수하고 놀라운 믿음이자 겸손의 극치요, 이런 불행의 극한 상황에서도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의 믿음을, 찬미의 힘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평소 믿음을 반영합니다. 한결같이 ‘1.하느님을 경외하며 2.악을 멀리하고 3.올곧고 4.흠없이 살아 온 믿음 생활’의 반영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욥의 믿음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하느님의 종 욥입니다. 하여 사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하느님의 1차 시련의 시험을 통과한 욥입니다. 하느님은 눈이자 귀자체입니다. 하느님은 침묵중에 사탄을 통해 일어나는 욥의 불행과 그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눈이 되고 귀가 되어 보고 들으셨습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보고 듣고 계십니다.
말그대로 욥의 믿음의 승리요 평소 쌓아온 믿음의 내공을 반영합니다. 모두를 다 잃었어도 찬미의 믿음이 있었기에 욥은 건강은 잃지 않았습니다.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욥의 믿음임을 짐작합니다. 우리 삶은 크고 작은 이런저런 시련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루하루가 영적전쟁입니다. 살아 있는 마지막 그날까지 무너지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곧장 일어나 이런저런 시련과 고난을 통과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을 주십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믿음을 배웁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논쟁이 일어났을 때 조용히 개입하셔서 제자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십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상처입기 쉽고, 약하고, 무력한 제자들을, 아니 우리 인간 모두를 상징합니다.
아, 이게 인간의 본질입니다. 수도공동생활을 통해 저는 물론 형제들을 통해 날로 깨달아 가는 상처입기 쉽고, 약하고 무력한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여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자비를 강조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상징하는 어린이는 ‘겸손’보다 ‘파견 받은 신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작은 사람이자 가장 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한 참으로 상처입기 쉽고 약하고 무력한, 그러나 하느님께 파견 받은 인간존재의 대한 깊은 연민을 지닌 가난하고 겸손한 ‘가장 작은 이’가 정말 큰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믿음이요 예수님이 그 모범이 되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파견받은 존재들이요 연민의 대상이 됩니다. 연민의 믿음과 더불어 예수님은 관대한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은 자기 우월감에 젖어 주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막아야 한다는 유혹에 빠진 편협한 제자들의 마음을 넓혀 주십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그러합니다. 온전한 진리는 우리를 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전히 하늘 나라를, 진리를 탐구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하늘 나라 건설에 누구든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목표는 우리 교회를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계획을 촉진시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에 활짝 열린 넓고도 깊은 겸손한 자세의 관대한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마인드를 지닌, 행동하는 믿음을 지닌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고자 모두와 연대와 협력을 추구하는 교황님입니다. 193개국이 모인 UN총회에 보낸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모든 나라들이 연대와 협력을 통해 공동의 집인 지구의 더나은 미래를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수님과 욥은 정말 믿음의 대가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믿음, 악을 멀리하는 올곧고 흠없는 믿음, 연민과 관대한 믿음을 지닌 하느님의 종으로서 누구보다 하느님 가까이 사신 분들입니다. 매일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 좋은 하느님의 종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나는 누구의 말을 가장 귀여겨 듣는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이는 누구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싸우는 제자들을 바라보시고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세우시고 이르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내세우셨을까? 가끔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라고들 하며 요즘에는 자식이 상전일 때도 많지만, 실제 생활에서 어린이들의 의견이나 바램은 후순위로 밀려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어린이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뿌엘이라는 단어는 또 다른 한 개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중시 여기지 않는 사람, 사람들이 귀여겨 들어주지 않는 사람의 의견을 들어주고, 그들의 뜻을 받아주고 그 뜻을 펼치게 해주는 나라가 예수님이 시작하는 하늘 나라입니다.
보잘것없은 피조물에 불과한 나를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그런 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대신 바치신 주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주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돌려드리오니 저를 구하시고, 세상에서 대우해 주지 않고 심지어는 버림받은 듯한 이들을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묘로다< 루카 9/46-50> 9/2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누가 더 잘하나 게임을 하고 끝나면 평가가 나옵니다. 평가에 따라 잘한 사람 못한 사람이 결정되고 세상은 잘란 사람 못난 사람으로 차별받지만 아무리 잘라도 시간과 일정한 공간 안에 살고 있습니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도 결국 땅에 떨어집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랐다 해도 내일이며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어 자기는 더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황금덩어리를 귀하다고 해도 금이 나를 먹을 것 숨 쉬는 공기가 되지못하고 어두운 창고에 가쳐 있습니다. 들에 흔히 있는 약초 한 잎만 못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남 앞에 뛰어나고 높이 있으려 하지만 순간에 지나지 않고 오르면 울을 수록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있고 하늘보다 높이 오르지 못합니다. 사람은 가금 큰 착각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그래서 어떤 일을 해도 문제가 없다 하고 자기 욕망을 마구 휘 들다 정을 맞아 깨지고 맙니다.
욥기에 욥은 무난하고 보지로 착하게 살았지만 마귀의 유혹을 하락하신 주님은 인생의 제일 밑바닥 까지 끓고 가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합니다. 그에게 낮은 자리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지금의 낮은 자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땅이 아무리 오르려 해도 하늘만금 올을 수 없듯이 우리는 올으려 하지 말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어떻게 사라야 낮은 자리로 내려가며 만족할 수 있을까 ?
특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가금 우리는 천주교가 종교중에 기장 완전하고 높은 종교다 생각하지만 제일 높게 보지 말고 제일 밑자리에서 모든 종교의 기초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천주교를 비난하는 타 종교의 말을 들으면 전에는 화를 내였지만 지금은 그들의 생각을 바르게 하려 그들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고 우리의 태도를 바꾸려 합니다. 마리아교다 하면 아니다 하지 않고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이상의 것도 생각해주십시오 말합니다. 우리는 부배된 천주교를 개몽하였습니다. 하고 그당시 부패상을 이야기하면 더 낮은 자세로 안정하고 지금도 우리는 반성해야 할 일이 있다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응답합니다. 불교와도 우리가 가진 것이 있다면 불교가 가진 것을 못가진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잘랐다고 머리를 들고서 나설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것을 내가 못가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거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고 네가 가진 것은 나는 가지고 싶지 않다 하면 나는 더 높이 올를 수 없습니다. 내가 최고가 되고 싶은면 네 밑에 들어가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말씀은 나의 우월감을 들어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서로 섬기고 나누고 서로 손을 내밀어 친교를 맺으려는 것입니다. 높은 줄 위에서 두 사람이 재주를 부리는 광경을 보고 누가 더 잘랐다 할 수없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여 하나가 되어 재주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공동체가 누가 더 잘해서 아니고 모든 공동체 회원이 서로 도우며 잘하기에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모든 가정도 나라도 협치가 없으면 멀리 보지 말고 가까이 보며 서로 서로 손을 잡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갑시다. 함께 갑시다. 서로 반대하지 않으면 서로 지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일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과 안면이 없는 사람이 예수님 이름을 부르며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 일을 막아보려 했습니다. 악을 이기는 힘이, 어떤 집단의 이름에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나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제자들 마음속에 배타적 정서가 생겨날 수 있음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우리만 사용할 수 있다든가, 예수님을 우리가 소유한 것처럼 여긴다든가,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닌 자신이 구세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만이 예수님을 소유한다고 믿으면 착각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은 오류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종교 전쟁은 실제로 이런 배타적 정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과 신념에 붙잡혀 계시지 않고, 교회의 경계를 언제나 넘어서시는 분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건 예수님의 일이 아닙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어린이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어린이라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아무래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귀여움, 이쁨, 사랑스러움, 미래의 주역 등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이들 보면 얼마나 이쁩니까? 때론 장난치고, 말도 안 듣고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이고, 순수합니다. 본당이든 가정이든 아이들에게 쓰는 돈은 아깝지가 않지요. 미래를 위한 투자이니까요.
오늘 주님께서 어린이를 두고 하신 말씀을 좀 생각해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조금 노력과 기도를 봉헌한다면 충분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정말 너무나 이쁜 아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절대 그렇게 쉬운 것을 주문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말씀을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내가 하루를 살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각각 어떠한 마음으로 만날까요? 어떤 사람은 내가 좋아해서, 돈이 많고 능력이 있어서 조금 더 마음을 두고 만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내가 싫어해서, 미워서, 비천해서, 가난해서 등등의 이유로 마음을 멀리하고 만납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멀리하는 행동입니다. 도리어 그 반대로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볼 때 어린이와 같은 이들을 우리는 더 마음을 두어 만나야 합니다. 정확하게는 주님을 모시듯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 주님을 뵐 수 있고, 주님을 뵙는 것으로 하느님을 만나 뵈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작은 사람이 결국 가장 큰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들, 주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지내셨습니다. 그런 분들과 함께 다니셨고,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이자 자녀인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오늘 다시금 주님께서 주신 하루에 감사하며, 그런 마음으로 조금 더 노력하고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작아지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너무
커져버린
우리자신을
보게된다.
꼭 빠르고
큰 걸음으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작아짐의 길을
천천히
따라간다.
사랑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교만이 아닌
작아지는
겸손의 길이다.
작아지면
모든 것은
선물이다.
작아지면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잃어버린
행복의 중심또한
작아짐에 있다.
자아를 버리면
작아질 수 있다.
작아지면
말씀을 간절히
들을 수 있다.
작은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이시다.
자아에
욕망에
갇혀있는
우리를
꺼내는 방식은
작아지는
복음의 길이다.
작아짐이
알차게
익어가는
삶이다.
작아지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작아짐이
삶의 참된
이정표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