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는가?>
▥ 욥기의 말씀입니다. 3,1-3.11-17.20-23
1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2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3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3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4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 폐허를 제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5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 제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6 파묻힌 유산아처럼,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나 지금 있지 않을 터인데.
17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20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건만, 숨겨진 보물보다 더 찾아 헤매건만 오지 않는구나.
22 그들이 무덤을 얻으면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련만.
23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이사 66,10-14ㄷ)와 복음(마태 18,1-5)을 봉독할 수 있다.>
말씀의 초대
욥이 제 생일을 저주하며,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하고 탄식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신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리자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다른 마을로 가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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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큰 고통을 겪은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이 차라리 없어져 버리라고 저주한다. 또한 태어나지 않았다면 평온을 누렸으리라고 말하며,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신 채 목숨은 남겨 놓으셨다고 탄식한다(제1독서).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분노하여 하늘의 불을 내려 벌하려 하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꾸짖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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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카르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있을 메시아 시대의 행복에 대하여 전한다. 많은 민족들과 나라들이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러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고, 유다인에게도 하느님 계신 곳에 함께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할 때가 오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 일행을 거절한다. 제자들은 격분하여 벌을 내리기를 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돌아가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을 없애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으리라고 아셨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마태 23,37)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9,51)는 것 또한, 그곳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전제합니다. 예언자의 삶은 늘 그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6,22)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굳히신 것은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없애려고 하는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할 때 모든 이가 기쁘게 받아들이리라는 생각은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그들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아마도 세상 끝 날까지 어디에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심지어 그들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에 따라 살기는 어렵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이겨 낼 수 있도록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여야 합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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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 곧 당신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위한 마지막 때가 왔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여정의 첫 순간에 마주한 사람들의 외면과 배척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실 여정의 마지막까지도 이어질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것은 유다인들을 향한 오랜 반감과 더불어, 그분께서 그리짐산에 있는 자신들의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런 사마리아인들을 두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살라 버리겠다.’고 한 것은, 지난날 엘리야 예언자가 자신을 잡으러 사마리아에서 온 이들을 하늘에서 내린 불로 살라 버린 일을(2열왕 1,10.12 참조) 떠올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냉대와 무시에 분개하여 복수를 떠올린 제자들을 꾸짖으셨는데, 몇몇 수사본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목숨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왔다.”(루카 9,56, 『성경』 각주 참조)라는 말씀을 덧붙여 그분의 속마음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시기 전에 제자들도 장차 당신처럼 사람들에게 외면과 박해를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그들의 선의가 짓밟힐 때가 오면, 증오와 원망이 아닌 온유와 겸손으로 그 사명을 이어 갈 힘을 지니도록 미리 단련시키셨습니다. 제1독서에 따르면 욥과 같은 의인도 까닭 없는 고통과 지독한 시련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처량히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파견된 주님의 사도임을 기억합시다. 내 진심을 왜곡하는 이들이나 거룩함을 간직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일들을 만날 때, 흔들림 없는 내적 평화와 온유를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필요한 힘과 지혜를 주님께 청합시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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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중에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의 왕림을 거부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한 번 지나가신 하느님께서 다시 되돌아오지 않으실 것을 두려워하라!”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 중에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오는지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는 사마리아인들의 태도에 격분하여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부딪치는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구원의 진리는 때가 차면 스스로 올바름을 증명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인간의 잔꾀나 수단으로 전파되지 않습니다. 상황이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복음을 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앞길이 보이지 않아 죽음을 원할 정도로 괴로운 인간에게도 천상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열려 있습니다. 이슬람 해적들에게 잡혀 노예로 팔렸다가 극적으로 구출된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삶 속에 주어지는 은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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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자신의 고통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고통은 더해 가고 죽음은 다가오지 않아, 생명은 마치 하느님께서 내리신 끝없는 저주와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심정이 처절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욥처럼 극단적인 불행이 휘몰아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삶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짐으로 다가오는 시기를 겪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긍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합니다. 현대의 뛰어난 가톨릭 신학자 과르디니는 ‘주님의 기도’에 대한 해설 『기도와 진리』의 한 대목에서 우리가 짊어진 삶의 무게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진리를 실행해 보자. ‘주님, 제가 존재해도 됨을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삶의 무게가 짓누를 때에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존재해도 된다는 것, 숨 쉬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선물이고, 이에 대해 감사드려야 한다. 이것이 삶을 진실하게 하고 해방시켜 준다. 좀 더 순수하고 깊이 있게 감사할수록, 그리고 힘든 일, 쓰디쓴 일,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더욱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삶의 근본 감정은 더욱 깊이 자유를 느끼게 된다.”
욥이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삶은 때때로 차라리 피하고 싶은 두렵고 무거운 짐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욥이 탄식과 투쟁 속에서 마침내 하느님 섭리의 투명한 진리를 깨달았듯이, 우리 또한 일상 안에서 끊임없이 감사하며 기도 속에서 진리를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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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들이 의기양양해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수많은 기적들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임금이 되시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시대가 오리라는 기대마저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가는 길에 사마리아에서 길이 막힙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걸어서 사흘 정도 걸리는데 사마리아 지방을 가로질러 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지방은 과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렸을 때 북왕국에 속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일찍이 아시리아 침공 이후 혼혈 지역이 되었고 혼합 종교를 신봉하던 터라 유다인들은 그들과 상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는 장소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짐 산이었기 때문에,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차별이나 편견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사마리아인들이 거부하자 제자들이 격분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 옛날 주님의 사람 엘리야가 하느님께서 내리신 말씀을 거부한 아하즈야 임금의 군대들을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삼켜 버렸던 것을 기억했을 것입니다(2열왕 1,10-12 참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힘과 세력을 느낀 제자들은 이번 기회에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마리아인들이 예언자보다 더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막으니, 그들을 혼내 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길이 아니면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정의를 내세워 폭력으로 누르고 뚫고 가는 길이 아닙니다. 사랑의 길이 아니면 돌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다리고 참으며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우리 안에 잠재된 분노와 폭력성이 정의라는 탈을 쓰고 종종 그 얼굴을 드러냅니다. 이런 예수님의 큰마음을 우리는 언제나 배울 수 있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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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때가 차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려고 마음을 단단히 정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려고 나선 사람들은 주님을 닮아,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떳떳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주님께서 먼저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그 길은 잘못되어 돌아가는 역사의 진로를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주님을 맞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이신지 알았더라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즉시 달려 나와서 주님을 영접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어쩌면 사마리아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우리를 찾아 주시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번번이 주님을 외면해 버리기 일쑤였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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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희생자들입니다.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수도 사마리아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처형되었고, 주민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아시리아는 사마리아에 다른 민족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남은 유다인들은 그들과 어울려 살아야만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예루살렘 중심의 남쪽 지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민족의 순수성을 더럽힌 집단으로 여겼고, 유다인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들도 증오심으로 대했고, 독자적인 종교 예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푸대접에 분개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제자들 자신들에게 그럴 만한 능력도 없으면서 이러한 말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다른 곳으로 돌아가자고 하십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을 이해하신 겁니다. 그분의 깊은 배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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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서운한 일을 당하면 보복을 바랍니다. 한 대를 맞으면 두 대로 갚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보복하면 상대편은 다시 복수하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은 계속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그 이상으로 보복하지 않도록 동태 복수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을 것이지 당한 것 이상으로 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법으로는 악순환을 막을 수 없다고 보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만이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푸대접한 마을에 하늘의 불벼락으로 보복하고자 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처벌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신 까닭입니다. 언제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강의할 때 종종 감동적인 영상을 보여줍니다. 지난번에는 네 살짜리 꼬마 아이가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를 그리워하는 영상을 틀었습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아빠에 대한 그리움에 도화지에 아빠를 그린 뒤에 “아빠, 보고 싶어.”라면서 그림을 자기 가슴에 안습니다. 이 영상에 신자들이 여기저기 훌쩍거리면서 곧 성당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떻게~~~”하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하셨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인간 내면에 깊이 심어주신 본성입니다. 하지만 이 본성을 벗어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무례하고 불친절한 사람,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 사람을 단순히 경쟁 상대로만 보려는 사람….
우리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본성인 사랑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사랑을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다시 찾으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도보로 사흘이 걸리는 여행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국적으로 보면 같은 나라이지만, 민족적으로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 취급하며 그들의 음식을 부정하다 하여 먹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던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한 4,,40-41).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개심보다는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가는 유다인들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홀대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편협한 마음으로 유다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대우하는 유다인이나, 또 스승을 홀대한다고 벌하겠다고 하는 모습이나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본성인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본성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진심을 담아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읽을 수 있다(하윤재).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류 열풍의 기세가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음악이나 영화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지속적으로 끌고 있다는 것, 정말이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지한 성찰도 필요합니다. 전 세계 수많은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K-드라마나 영화, 가요인데, 그저 흥행만을 추구하며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으로 흘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영화나 드라마가 너무 지나치게 폭력적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풀라는 의미인지, 여차하면 주먹을 휘두르고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니, 아이들이 보고 따라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냉철한 지성을 소유한 인격자인 인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뜨거운 피가 돌고 있는 생명체이기에, 내면 깊숙한 곳에 강한 공격성이 분명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절실히 느끼는 유혹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이성과 논리와 대화로 풀어나가기보다는 그냥 확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입니다.
책상이고 컴퓨터고 다 엎어버리고 뛰쳐나가고 유혹, 평소 꽉 참고 눌러왔던 하고 싶은 말들 속 시원히 해주고 싶은 유혹, 우월한 힘을 총동원해서 눈엣가시 같은 누군가를, 천하 밉상인 이웃 나라를 확 쓸어버리고 싶은 유혹...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하면서 특별 제자교육을 받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핵심 제자들, No2, No3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 사도들도 그런 유혹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는 개와 고양이 이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안 섞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런저런 연유로 이민족들과 혼혈하게 된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유다인들, 나름 전통 신앙과 관습을 고수한다고 잔뜩 폼을 잡지만, 실상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유다인들, 뒤로 호박씨를 까는 유다인들을 또한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자기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노골적인 냉대를 받은 것에 대해 노발대발한 요한과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께 다가와, 저것들 그냥 확 한번 엎어버릴까요, 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요한 9,54)
사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받아, 사마리아 고을 하나 순식간에 날려버릴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그게 낫겠네. 감히 우리를 배척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속 시원히 한번 봐버리게!”
그러나 생애 내내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한결같이 고수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두 제자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분노는 지옥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은 자신들 편인 줄 알았으나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짖는 개와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은 왜 개와 싸우는 것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한가해서 그렇습니다.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개가 짖건 말건 급해서 병원으로 갑니다. 두 번째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 목적지로 가봐야 고통만이 있으니 여기서라도 자기를 무시하는 개를 두들겨 패는 기쁨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처음엔 이 영화가 응당한 복수를 하는 사이다 같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지나친 복수에 아내도 떠나고 딸들도 아버지 곁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버지가 범죄자의 모습처럼 처참하게 변해있습니다. 복수하면서 자신도 고통을 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는 감사한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의사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길을 가다 돌부리에 발이 긁혀 피가 난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만나러 오다가 피가 나는 그 애인을 더 사랑하여 잘 치료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부리가 감사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무서운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면 그 결말이 행복하지 않아 돌부리를 발로 차며 화풀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고 복수심이 생긴다면 내가 가는 방향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미 천국과 지옥을 정해놓고 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용서되지 않는다면 조심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유일한 행복은 그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행복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알바니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안톤 룰리 신부는 자국의 공산주의 정권 동안 극심한 박해를 겪으며 살았습니다. 1910년에 태어난 그는 종교 기관을 맹렬히 표적으로 삼은 알바니아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부가 등장하기 직전인 1942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7년 정부에 반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7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극심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환경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1989년 석방된 이후 고문자 중 한 명을 용서하고 포옹하기까지 했습니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사랑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특히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알현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 교황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그가 평생을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그가 천국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투옥 중 심한 고문을 당했던 특별한 크리스마스이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묶인 그는 겨드랑이 아래에 밧줄로 매달려 있었고 간신히 발가락으로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추위가 그의 몸에 스며들자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이 고통과 무력함으로 울부짖던 순간에 룰리 신부는 그가 묘사한 특별한 영적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느꼈습니다.
지극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은 그를 기쁨과 위로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행복이 없이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부활 앞에선 십자가는 감사의 도구가 될 뿐이지만, 지옥 앞에서는 모든 게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이 이정표를 잘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엎친 데 덮친다.’라고도 합니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고통의 수렁에 빠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캐롤턴 반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날 복음 나누기는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온지 1년 된 자매님이 ‘열려라’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낯선 곳에서 가장 힘든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힘들어 했습니다.” 한국에 어머니가 있는 자매님도 ‘열려라’를 묵상하면서 아픈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어머니에게 ‘열려라’라고 하셨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니, 다른 분들도 눈물 흘렸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복음 나누기’를 배웠습니다. 교구 사목국에 있으면서 구역장, 반장들에게 복음 나누기를 알려드렸습니다. 그 복음 나누기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복음 나누기의 영성은 말씀이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날 주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복음 나누기를 통해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도 ‘에파타’를 묵상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아람어’였습니다. 복음서는 희랍어로 기록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아람어를 그대로 기록한 곳이 있습니다. ‘에파타, 탈리타꿈,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입니다. 성서의 저자는 이 말씀들이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람어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에파타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탈리타꿈은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는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저는 닫힌 마음이 열리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신기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려있으면 온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넓어집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 닫혀있으면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으로 닫혀있는 정치인들의 마음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마음으로 열려 있으면 좋겠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은 희망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두려움 중에 있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욥은 사탄으로부터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배도 바다에서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르던 양도 모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인들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일찍 죽는 것도 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 낮에도 당신께 부르짖고, 밤에도 당신 앞에서 외치나이다.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돌아가는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5-56)
죽음으로써
살리는
가야할 길
가로막은 사람들
행여 다칠세라
차마 밟을 수 없어
돌아가는 길
길고 더디더라도
살림의 길
아무도
해치지 않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말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두 제자를 꾸짖으시고는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제자들의 경우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인들을 불살라 버리고 싶다는 말에는 무언가 정의로운 듯하지만 인간의 복수심과 잔인함과 폭력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그렇게 정의를 내세워 폭력으로 만들어가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평화로 이루어가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여나 우리가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정의라는 탈을 쓰고 분노와 폭력을 드러내는 모습은 아니었는지 성찰하면서 진정 예수님의 모습처럼 사랑과 평화를 이루어가는 모습이 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그리고 미리 심부름꾼들을 사마리아로 보내시어 모든 것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떄문이죠. 이 말을 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성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란 무엇일까요. 태초 아담의 죄로부터 시작된 모든 것을 마감하고 용서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다시 만드시는 것이지요. 새로운 세상이란 용서와 사랑이 중심이 되어 닫혔던 하느님의 나라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불을 내려 불사르려고 합니다. 이들의 잘못은 두 가지입니다. 이제 곧 만들어질 메시아 왕국의 왕이 될 예수님과 이제 곧 권력을 잡을 자신들을 맞이하지 않았다는 생각, 마지막으로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특히 메시아의 역할인 용서와 사랑이 아닌 심판하는 말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왜곡했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지상에서 이제 자신의 때가 다 되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의 역할은 죄로 더러워진 우리들을 자신이 흘릴 피로 깨끗이 하여 하느님 나라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죄 많은 우리를 용서하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심판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제 곧 자신이 만들 교회를 이끌어가야 할 제자들이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의 길로 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던 것입니다. 그래서 꾸짖으셨던 것이지요. 신앙인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가끔 잊어버리곤 합니다. 잊어버린 것도 모른 체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의 규칙대로 살아갈지 혹은 이세상에서 살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지 이제는 정합시다. 어떤 이유도 말하지 말고 딱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합시다. 성령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 것입니다. 아멘!
성화의 여정 - “시조여일(始終如一)한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을의 절정이자 묵주기도 성월에 전교의 달 10월 첫날 오늘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어제는 성 예로니모 기념일이었고 글피인 10.4일은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참 아름다운 꽃같은 성인들입니다. 꽃의 색깔, 크기, 모양, 향기가 다 다르듯 성인도 다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닌 꽃같은 분들입니다. 지금까지 여전히 저를 행복하게 하는 좌우명 같은 시(詩)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성인 축일은 기념하고 기억하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꽃같은 성인이 되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누구나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는, 날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성소자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작은 길, 작은 꽃이라 불리는 성녀 소화데레사는 비록 꽃다운 나이 스물 넷에 선종했지만, 여전히 끊임없이 감동을 선사하는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성녀입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성녀를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불렀고, 비오 11세는 사후 2년만에 시성하였으며, 성녀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고, 비오 12세 교황은 성 조안 오브 아크와 함께 프랑스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녀를 보편교회의 박사로 선언합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아빌라의 데레사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성녀의 삶은 복음의 메시지에 매우 가까웠고, 고통중에도 용기, 힘, 자기희생의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성녀의 내적 금욕주의는 단순한 외적 행위보다는 사심없고 무조건적인 순종에 기초했습니다. 작은 길로 알려진 성녀는 거룩함을 얻기위해서는 영웅적인 행동이나 위대한 행위가 필요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처럼 고백합니다.
“사랑은 행위들로 입증된다. 나는 어떻게 나의 사랑을 보여줄까? 위대한 행위들은 나에게 금지되어 있다. 내가 내 사랑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꽃을 뿌리는 것이고, 이 꽃들은 모든 작은 희생, 작은 시선과 말, 그리고 사랑을 위한 가장 작은 행동들이다.”
평범의 비범을 살았던 일상의 성녀, 소화데레사입니다. 임종 직전의 극심한 병고중에 감동적인 고백들을 소개합니다.
“나는 더 이상 고통을 겪을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 모든 고통이 나에게는 달콤하기(sweet) 때문이다.”
“나는 매우 작은 영혼이어서 주님께 작은 것만을 바칠 수 있다.”
“나는 천국에서 보낼 시간을 이땅에 좋은 일을 하는데 쓰겠다.”
“내가 죽은 뒤에는 장미꽃이 비처럼 쏟아질 것이다.”
사랑으로 ‘교회의 심장’이 된 소화데레사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예수님의 교회를 사랑했고 예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어제 참 많이 나눴던 10월 한달 행복하게 할 선물처럼 찾아 온 다음 시에 감사합니다.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떠오르는 고백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 앞에서의 삶이라면 참 아름답고 행복한 삶일 것이며 바로 성녀 소화데레사는 물론 모든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도상의 십자가의 길이 참 감동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서두의 묘사가 단호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성화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이자 하늘 향한 여정임을,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의 여정임을, 궁극의 영적승리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어디가나 반대자들은 있기 마련이요,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통과하는 것이 거부되자 불같이 화내는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불필요한 마찰을 피한후 지혜롭게 다른 마을을 통과해 예루살렘 여정에 오릅니다. 추호의 주저함이 없는 단호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처신입니다.
예수님도 아름답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소화데레사도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극도의 시련중에도 치열한 사랑으로 사명을 다했던 거룩한 분들입니다. 이 두분과 더불어 언급하고 싶은 인물이 제1독서의 욥입니다. 욥의 치열함이 참으로 감동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욥은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지만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는 않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는 사방을 에워싸 버리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고 사방이 막힌 절망적 암흑같은 극한 상황중에서 ‘어찌하여’로 계속되는 처절한 물음이 일종의 치열한 기도처럼 생각됩니다. 끝까지 하느님 끈을 놓지 않고 온갖 부정적 말마디로 기도하는 치열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참사람 욥입니다. 그동안 믿고 희망했고 사랑했던 하느님이 없었다면 아예 이런 넋두리 기도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내 목숨처럼 사랑했던 독자(獨子)를 잃은 어머니가 원망할, 울부짖을 하느님이라도 계셨기에 죽음 같은 고통을 살아낼 수 있었다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욥의 수난과 시련의 삶에서 예수님을, 또 소화데레사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사’답게 결코 좌절하여 쓰러져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다하면서 치열한 아름다움을 살았던 세분들이요 우리 삶의 좌표가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시종여일,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좋은 도움을 줍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9,51.53)
때론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길(=인생)을 걷고 있기에 그 길을 걸으면서 끊임없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고 묻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오신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때를 알고 어디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인생이란 길을 걸으면서도 늘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물어왔기에 사람-사건-사물을 통해서 들려오는 아버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당신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세상에 성취하실 구원의 때가 오신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길을 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예루살렘은 단지 지형학적인 장소이지만, 이는 우리에게는 도달해야 하는 인생과 영적 순례의 목적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순례를 영적 달음질이라고 칭하였으며, 우리의 여정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3,14)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기에 이미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뒤따라야 합니다.
본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한민족이었지만,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패망한 후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시리아의 식민지 정책에 동화되어 혼혈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혈통을 보존하지 못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처럼 취급하고 멸시했으며, 회당에서 공공연하게 저주하고 상종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 유대인들은 지름길을 두고 요르단강을 건너 사마리아를 우회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통상적인 길이 아닌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려고 먼저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 하면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잖아요. 착한 사마리아인(10,33)과 사마리아 여인(요4,1~42)입니다. 특히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예수님은 그녀에게 이제 영과 진리 안에서 참된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이후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묵상하면 좋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예상과 달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고, 이에 대해 예전 아름다운 기억을 품고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엘리야가 한 것처럼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9,54)라고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런 싸가지들이 있나 그래!’ 저 역시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반응을 했으리라 봅니다. 사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때 저도 전두환 일당에게 하느님께서 엄중한 벌을 내려 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었습니다. 물론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분노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사람같이 취급하지 않은 데 반해서 그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랑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냉대이니 스승님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도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마디로 예수님께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배은망덕이라고 제자들은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역지사지의 심정에서 바라보면 약자이며 소수였던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멸시하는 유다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니 자기들이 그렇게 믿었던 예수님께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결국 당신도 다른 유대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시고 마찬가지시군요. 물론 예수님은 이를 이미 예견하셨기에 심부름꾼을 미리 보내셨고 격한 분노를 드러내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신 것은 이 일을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앞으로 세상에서 당신의 복음을 선포할 제자들에게 세상의 반응, 곧 거부와 배척에 어떻게 신앙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려는 의도라고 미루어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마치 물 흐르듯이 모든 것을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응답하시고 수용하신 분이시기에 결코 자신의 계획을 집착하기보다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관점이나 입장에서 이해하고 공감하셨던 것이라 봅니다. 자신이 베풀었기에 당연히 환대와 환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심부름꾼들을 앞질러 보내서 당신의 행선지와 여행 목적을 알릴 이유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을 환대하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적인 느낌을 토로하시기보다 기꺼이 그들의 입장을 수용하시고, 가시려던 길을 바꾸신 그 유연함을 우리 또한 본받아야 하리라 봅니다.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 자신이 계획하고 이미 시작한 일이라도 기꺼이 바꿀 수 있고 바꾸는 유연함과 열린 마음을 제자들도 그리고 우리 또한 닮아야 하리라고 봅니다.
오늘 소화 데레사 성녀 축일입니다. 축일 맞는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18년부터 대축일에서 기념일로 변경되면서, 갑자기 평가절하된 기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많은 성인 가운데 제가 닮고 살고자 하는 삶을 사셨던 분이 바로 소화 데레사입니다. 아무튼 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작은 자의 길을 걸으시고, 하느님 자비 앞에 빈 손으로 살려고 했던 작은 꽃 데레사 성녀처럼 우리 또한 언제나 하느님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오늘 하느님의 아이답게 살아갑시다.
『신앙인은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저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1) 지금 이 이야기의 상황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상황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한 상황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고, 그 길로 가면 도보로 사흘이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부름꾼들을 당신에 앞서 보내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고, 일행이 많았기 때문에 음식과 숙소를 미리 준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가 심부름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갈등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성전이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이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그것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면서 예루살렘으로만 가는 것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는 축제 기간 중에는 그 적대감과 반감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 당시에 전반적인 실제 상황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도 야훼 하느님을 믿고 있었고, 모세오경을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와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고, 배척하고 학대하고 박해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 박해에 맞서 싸울 힘이 없어서
소극적으로 적대감과 반감을 드러내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있는 입장에 있는 사마리아인이 박해를 하는 위치에 있는 유대인을 도와주는 이야기는 ‘이웃 사랑’과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잘 보여줍니다.>
2)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을 모욕하면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신체적인 폭행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심부름꾼들이 먼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면서, 오만한 태도로 음식과 숙소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모욕당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부름꾼들이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였다면, 그들은 모욕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크게 화를 냈을 것입니다. 둘 다 불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마르 3,17).
<겉으로만 보면, 두 사도는 자기들이 당한 일은 곧 예수님이 거부당하고 모욕당하신 일이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모욕당한 것에 대해서 화가 났을 것입니다.>
몹시 화가 난 두 사도는 엘리야 예언자가 했던 일을, 사마리아인들에게 똑같이 하고 싶어 했습니다(2열왕 1장).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립시다.”, 또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려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3)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일은, 다음 가르침에 연결됩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우리도 살다보면 두 사도와 같은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악인들의 횡포를 참기가 힘들 때,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부당하게 보일 때......
그럴 때에 하느님께 ‘정의의 심판’을 간청하기도 하는데, 그 간청이 선을 넘어서, 악인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빌거나 악인들이 큰 불행을 당하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저주’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다른 사람을 저주할 권리와 권한이 없습니다.
가끔 예외적으로 하느님께서 직접 천벌을 내리시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청할 수는 없습니다. 저주 자체가 죄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죄인들이 멸망당하기를 바라지 말고,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야고 3,9-11)”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을 굳히셨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는 말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면서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열왕 17,24-41 참조).
더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신명 12,4-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고자 하시기에,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 했던 그리짐산을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치 갈릴래야에서의 활동이 배척을 받았듯이, ‘예루살렘 상경기’도 배척받음으로 시작되며, 결국 예루살렘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의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이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한 길을 가시며,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내신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신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제자들을 배척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의 경멸과 조소를 견디어야 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온갖 폭력과 고통을 받아들이셔야 할 몸이었다. 이러한 고통 앞에 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예행 연습의 도구로 삼으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위해 그들을 꾸짖으셨고, 그들을 벌주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분한 마음을 풀어주셨다. 이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도록 제자들을 단련시키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을 위하여서 하신 일이었다. 제자들은 이제 온 백성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방방곡곡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한다. 그 사명을 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무리도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분개했던 제자들을 오히려 꾸중하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였다. 복음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주님께 받은 능력을 잘못 사용하려 했던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또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나의 기준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부족한 판단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거절하는 예도 많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을 베풀려고 하였을 때, 거절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때도 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통하여 내가 보였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이웃에게 더욱 관용을 베풀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도움을 청하여야 하겠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자신도 선교사들처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싶지만, 병약하고 어려서 그저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밖에 하지 못하지만, 이 생색도 안 나는 작은 일을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실히 바쳐, "자모이신 교회의 심장인 사랑이 되겠습니다."라며 자신의 수도성소 소명을 밝혔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가려고 하시는 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맞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벌할지를 묻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그냥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6)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상대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보복할 필요 없이, 우리는 우리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녀 소화 데레사가 참으로 복음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작은 일을 어린이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열성을 다해 봉헌하는 삶이 참으로 현실적인 복음을 살았다고 하십니다. 명절을 보내면서 우리 마음 속에 드러나는 짜증과 미움과 분노 등의 여러 가지 상념들을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씻어내고 티도 나지 않는 소소한 일상들에 남모르게 충실하면서 오늘을 이겨냅시다.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루카 9, 51-56> 10월 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내 존재의 시작은 어디며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지만, 찾을 길이 없어서 우리는 신학을 연구하며 하느님에게서 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감을 알게 되어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하며 신앙 고백을 합니다. 석가모니는 철학적 사고로 인간의 윤회설을 말하며 “나는 전생에 무엇인지 모르지만, 존재하다가 다시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보리수 밑에서 깨우쳐 불교란 종교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깨우침은 위대한 인간의 현존을 느끼며 윤회설이나 우리가 다시 온 곳을 돌아간다는 말이나 내용상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는 마치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온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구원자이신 주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분명히 “나는 아버지에게서 보내지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하시며 탄생의 신비와 승천의 신비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12살 때 주님의 부모님이 성전에서 주님 잃고 다시 성전에서 찾았을 때 주님의 진심 어린 말씀 하나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모르셨습니까?” 하시며 “잃은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할 곳에서 찾으셨으면 고생하지 않았을걸”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에서부터 시작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버지 집을 떠난 작은아들같이 나그넷길이고 길잃은 어린 양이 헤매던 땅입니다. 어찌 보면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 살다가 쫓겨난 땅이고 전쟁 때 피난 간 땅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피난처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던 사마리아인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하니 냉대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같은 곳에서 와서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끼리 세상의 나그넷길에서 자리싸움, 위치 싸움, 권력 싸움, 재력 싸움, 인간적 관계 싸움을 하며 길을 가다가 주님 앞에 함께 가야 함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으면 모두가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하느님께로 돌아감을 안다면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며 살아야 할 것을 깨우쳐서 진실과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마침 소화 데레사 축일입니다. 성녀는 단순하고 소박하게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위대한 업적도 없으며, 스물네 해를 주님 안에 살며 의지하고, 겸손과 온유함으로 모범을 보여주고, 복음을 위해 기도하며 몸 바쳐 사신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내가 가져갈 것도 없으며 가져가지도 못합니다.
지나가며 하느님 만들어 놓으신 것을 보고, 듣고, 관광차 온 것처럼 욕심부리지도 말고, 자랑하지도 말고, 사용하다 놓고 가는 것뿐입니다. 오늘 사랑과 기쁨을 몸에 담고 온 길을 돌아가 주님 뵙고 자유, 평화, 기쁨 누리며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기를 기도합니다. <성가 292번 노래 부르기를 부탁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당신의 희생과 보속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행하셔야 할 그 때가 되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시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제 발로 당신이 죽으실 장소로 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뜻하는 바가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는 소명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 주지요. 히브리어로 예루살렘은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더 나아가 온 세상에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당신 목숨을 희생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가 그랬듯 강력한 힘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랬듯 계명과 율법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헤로데와 대사제가 그랬듯 세속적인 부와 명예로 평화를 이루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듯이’, 사람들이 힘들고 고통스럽다며 외면하는 십자가와 희생을 통해, 벗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는 참된 사랑을 통해 평화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비를 통해 평화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지 않고 자기들이 적대시하는 유다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고는, 힘든 길을 가시는 그분을 자기들 마을에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지요. 상대방이 내 기대와 바람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금새 실망하고 원망하며 미워하기까지 하는, 나를 사랑하고 아껴준 소중한 은인을 철천지 원수처럼 대하는 미성숙하고 자기 중심적인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을, 그리고 자기들을 냉대하는 사마리아인들의 모습에 울컥해서는, 감히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저 못된 놈들에게 ‘불의 심판’을 내려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는 겁니다. 그들이 왜 화가 났는지 그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이 실수와 잘못, 부주의로 인해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제 마음을 상하게 한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만 하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셨던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아마 그들에게 이 말씀을 상기시키셨겠지요.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가6,32-33).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게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유혹에 넘어가 길 잃은 양을 벌주러 오신게 아니라 끝까지 찾아내어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같은 소명을 맡겨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심판하고 단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과 자비로 끌어안을 중요한 소명만 있습니다.
다른 길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사마리아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났죠. 그 중에서도 성질 급했던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아룁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그동안 보여주셨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했을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꾸짖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다시 세우기 위한 것이었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지 생명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원수지간일지라도 예수님은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으셨습니다. 상대방이 당신께 아무리 예의 없이 처신하더라도 절대로 응징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수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안타까워하십니다. 침묵하고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드러나기만을 기다리십니다. 당신의 길을 묵묵히 가십니다. 폭력을 사용하는 일, 아주 가까이 있고 손쉬운 일이죠. 그러나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옵니다. 결국 나도 죽고 상대방도 죽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셨는지 늘 마음에 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마음을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굳히시는
그 마음으로
돌아가는
은총의
첫날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바치는
것이 참된
기도이며
참된
사랑입니다.
마음을 굳히시는
십자가의 길이
우리모두를
살리는 구원의
길이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며 마음을
보여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수 없이
마음을 베이고
찔려도 마음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끝내 십자가로
마음을 세우시고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십자가는
아버지
하느님께
마음과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마음을
받아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마음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을
나누는 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단단히 하는
은총과 축복의
묵주 기도
성월 되십시오.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에 타고 있던 닐 암스트롱이 처음으로 달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면서 달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달은 그저 신비로운 장소일 뿐이었지요.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는 옥토끼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나라에서 달이 가장 큰 보름에 맞춰 농경 사회에 의미 있는 행사(정월대보름, 백중, 추석)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달에 직접 갈 수는 없고, 눈에 보이기만 하니 그냥 신비로운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달 착륙 후 신비로움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의 이웃과 함께해야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혼자만 살면 그만이라면서 함께하는 자리를 피한다면 사람의 기억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에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자기의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해야지만 구체적으로 서로에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신적 존재가 아니기에 절대로 사람들과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던 예수님께서는 심부름꾼을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보내서 숙박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그 전에 이미 사마리아 지역에서 환영받아 머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영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다인들이 과월절을 지내는 곳은 시온산, 즉 예루살렘입니다. 그에 반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과월절은 그리짐산에서 지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가는 예수님 일행을 환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전례적인 이유로 거부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제자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격분해 못 참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자기 스승께 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홀대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은 누가 내릴 수 있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어떤 불도 내릴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하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폭력적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든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이웃들과 함께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비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으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물 흐르는 대로 휩쓸러 가지 않고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멈춰 서서 고민하고 사색하는 것. 의구심은 사람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에너지가 된다(야마자키 마지).
형제들이여,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짊어지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젊은 사제 시절 주로 아동 보육시설에서 담당자로 일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넘쳐날 때였습니다. 여기저기 아동 입소 문의가 들어오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니다.
각 집에는 아이들로 넘쳐나고, 더 이상 안 되지, 하다가도 아이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면 또 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하고, 사정사정하면서 아이들을 입소시켰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도 비슷한 일, 아니 몇백, 몇천 배 더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부슬비가 내리던 스산한 겨울밤, 가난한 도시의 뒷골목 쓰레기 더미 위에는 수시로 갓난아기들이 버려졌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신부님은 양심상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숱한 밤, 아이들을 챙기러 밤거리를 헤매 다니셨습니다. 아이들 보육을 담당하던 수녀님은 안 그래도 꽉 찼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수시로 아이들을 데려오는 신부님이 못마땅해 구박을 드렸습니다.
“신부님, 아무런 대책도 없이 또 주워 오시면 어떡해요?”
심한 흉년과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던 17세기 초, 신부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셨습니다. 정부 관계 부처를 수시로 찾아가서 대책을 마련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부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를 했습니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던 가난한 형제들을 살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해있던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씨앗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집 지을 자재를 구해다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빈첸시오 신부님이 하셨던 수많은 일들을 열거해보면 마치 거짓말 같습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한 인간이 어떻게 이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있었을까?
이토록 훌륭하셨던 빈첸시오 신부님이 하느님 앞에 늘 되풀이하셨던 기도는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몸을 주님 당신의 심부름꾼으로 써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한번은 빈첸시오 신부님이 노예선의 지도 신부로 사목하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발목과 팔목에 쇠사슬이 채워진 채 정신없이 노를 젓는 죄수들의 모습은 빈첸시오 신부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죄수들의 생활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쇠사슬에 닿은 피부는 벗겨져 항상 피가 흘렀습니다. 그들의 어깨와 등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채찍 자국들이 굵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마에는 죄수임을 표시하는 쇠도장이 찍혀있었습니다.
자신도 직접 몸으로 노예 생활을 체험하셨던 빈첸시오 신부님이셨기에 그런 죄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잔인무도한 간수들을 타일러 매질을 못하게 했었고, 죄수들 앞에 무릎을 꿇어 그들의 상처를 일일이 치료해주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의 내면에 자비의 목자 빈첸시오 신부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형제들이여, 이 약한 사람들에게 가십시오. 그들과 함께 약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그들의 연약함을 느끼십시오. 그들의 비참함을 서로 나누십시오.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짊어지십시오. 그러면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여러분을 짊어지고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입니다.”
분노는 칼과 같아 쓰는 법에 따라 의사도 되고 강도도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 (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아버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피해자의 고통과 그것에 비해 약한 처벌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 가서는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마가 되어가는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보복하면 딸이 살아날까요? 그리고 그 보복은 그 사람 전체에 대해 행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식의 분노는 그 사람의 마음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어 나중엔 이런 소리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죄 안 지었냐?”
부모가 화가 많으면 자녀도 화가 많은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방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금자 씨’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금자 씨에 안 좋은 감정을 품고 다가온 목사님에게 금자 씨가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지적할 때 “그러면 너는?”이라고 자동으로 질문합니다. 이것이 본성입니다. 그리고 상대에게도 단점이 있다는 것이 발견될 때는 절대 그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부모가 분노를 터뜨려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그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명확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메스를 들었다고 다 의사가 아닙니다. 마구 휘두르면 강도이며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 화를 내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 마을을 불살라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님의 분노와 다릅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정화할 때,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실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는 그들을 고치려는 의사의 분노였습니다. 성전 전체가 아닌 성전을 더럽히는 탐욕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 전체가 아니라 자기만 생각하게 만드는 그 안의 사탄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유다 지도자들도 그들의 위선과 교만에 대해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의사로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 수술을 받아들이면 고쳐지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사의 분노를 터뜨리는지 강도의 분노를 터뜨리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 5,22)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형제에게 성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사탄에게는 화를 내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화를 내도 되고 죄에 대해서도 화를 내도 됩니다. 예수님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 전체에 대해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재판에 넘겨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용서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분노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분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살인자에게 분노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그렇게까지 이끈 사탄에게 분노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트레이 알렉산더 랠포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어서요. 내가 도와주고 싶습니다. 선량한 시민으로 자라도록 아들을 도운 것처럼요. 살라후딘이 여기 있었다면, 살아 있었다면, 당신을 용서했을 겁니다. 그게 아들의 방식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아들을 해쳤다고 해서요. 나는 악마에게 화가 납니다. 악마를 탓합니다. 당신을 잘못 이끌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인도했으니까요. 당신 탓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걸 꼭 알아주세요.”
우리가 화를 터뜨릴 대상은 사람이 아닌 사람을 그렇게 이끄는 사탄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도시와 같아서 사람 전체에 분노하면 정의롭지 못한 인간이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도 하느님은 그 안에 살던 롯의 가족은 빼내셨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것이 정의입니다. 좋은 것도 분명 들어있는 사람 전체에 분노하지 맙시다. 그러면 의사가 아닌 강도로서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좋으니? 아빠가 좋으니?’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엄마가 좋다고 하면 아빠가 마음에 걸립니다. 아빠가 좋다고 하면 엄마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둘 다 좋아!’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사제 모임에서 강사 신부님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용서와 화해 중에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신부님 한 분이 손을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용서와 화해가 둘 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처지와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용서함으로써 내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처지와 상관없이 내 마음에 먹구름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용서함으로써 내가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70년이 넘게 분단된 상태도 있는 것은 용서의 차원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가 진정으로 화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입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말다툼 끝에 싸우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저의 목을 잡고 있었고,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숨이 막혀서 울었고, 친구는 기가 막혀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울던 우리는 서로 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저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고, 친구도 기가 풀려서 편하게 지냈습니다. 화해는 이렇게 서로가 잡았던 것을 놓아야 시작됩니다. 어제 욥 성인은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용서함으로써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본 것처럼 화해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욥은 시련을 주시는 하느님과 진정으로 화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사필귀정, 인과응보’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옳은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의 이치일지 모릅니다. 그래야 사회가 질서가 잡히고, 제대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와 화해입니다. 분노와 심판은 잠시 평화를 줄 수는 있겠지만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기 위하여,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시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배를 저어가는 선원입니다. 직책이 다를 수 있고, 하는 일이 다를 수 있지만,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배가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권위와 교만’은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과 분노’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배가 방향을 잃게 만듭니다. 무엇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순탄하게 노를 젓게 할까요? ‘겸손과 사랑’입니다. ‘친절과 온유’입니다. ‘용서와 화해’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주님 가신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리기 위하여
죽이려는 이에게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맞아들이기 위하여
맞아들이지 않는 이에게
그리하여 사마리아로
두루 품기 위하여
내치자는 제자들마저 품고
그리하여 다른 마을로
빈자들의 성인 성 빈첸시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인도의 콜카타(인도의 구 수도)를 방문할 때의 일이다. 나는 '사랑의 선교수녀회(성녀 마더 데레사))를 방문했었다. 마더 데레사 성녀가 사용했던 방에는 단칸방이었고 작은 침대와 침구가 전부였다. 빈자들의 성녀이다. 일상은 새벽미사, 일상기도, 그리고 내일 갈아입을 겉옷세탁과 건조, 일용할 양식의 빵을 조식으로 간단히 끝내고 빈자 어린이들의 집합소로 서둘러 향하고 기분 좋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따라가 보니 기아에 버려진 아이들로 가득찬 너른 창고 같은 건물인데, 삶의 터는 전장터를 방불케 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수녀님들은 얼굴이 빛났으며 그들을 통해 가난한 예수님을 만났고 하느님을 섬기고 찬양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기아와 사랑에 굶주린 빈자들의 참상을 보았지만 수녀님들은 날마다 기아의 어린이들을 돌보며 살랑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있었다.
오늘은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축일이다. '빈자들의 성자' '자선단체의 수호성인' 인 그분은 가난한 자들을 사랑했고 그들 속에서 숨어계신 하느님을 보았고 하느님을 섬겼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난한 자들을 찾아 교회는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갔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며 그들을 예수님께서 단죄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도직을 수행하면서도 많은 난관에 부딪히곤 합니다. 내가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진정 주님의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만약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나보다도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분노하기보다는 그렇게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비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오히려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주님의 일을 하면서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있다면 우리는 먼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진정 주님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지 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지….
우리의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는 순간까지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의 판단은 역시 평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이스라엘인들의 자랑인 예루살렘과 이방인의 마을 사마리아 문제였죠.
민족들의 반목분위기로 예수님 일행을 사마리아 인들이 거부했습니다.
제자들이 사마리아에 저주 내리자고 하지만 예수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세상의 정치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의 판단은 역시 평화주의였었습니다.
지금도 나라별로 서로 우호 비 우호 국가들이 있는 게 이해가 됩니다.
국가들의 관계 개선에서 무엇보다 평화사랑이었다는 관점이 보입니다.
심기를 건들지 말자고 하신 예수님의 처세에 대해서 존경을 표합니다.
선교도 상대를 비하하거나 싸워 이기려 말고 평화사랑 길 택해야겠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함승수 신부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만난 한 여인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이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자기들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유다인'의 한 사람인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일만큼 열린 사고를 지니고 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절대 양보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자기들이 '그리짐산'에 특별히 만든 성전에서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자기들이 '친구'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그리짐산에서 파스카 예배를 드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다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시니 그들은 큰 배신감과 실망감에 휩싸여 예수님 일행을 배척하고 냉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깊이 헤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분의 구원계획을 완성해야 하는 당신의 사명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뜻'이라고 쓰고 '제 뜻'이라고 읽는 그것을 사마리아인들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 그들에게 '불벼락'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거친 언사까지 서슴지 않지만, 예수님은 이해와 존중, 배려의 단비가 미움과 오해로 딱딱하게 굳은 마음 밭에 촉촉히 스며들어 다시 부드러워질 때까지 기꺼이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누군가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것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아무리 사마리아인들이 악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심판하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입장과 상황은 알지도 못하면서, 제 고집 제 오해 제 분노에 사로잡혀 그들을 직접 심판하려고 나서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이자, 모든 이가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입니다. 그런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안에도 있습니다. 뉴스를 통해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고 그들을 심판하고, '저런 나쁜 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아 죽어야 한다'고 그들을 저주하는 말을 내뱉는다면, 주제 넘게 나섰던 야고보와 요한처럼 주님으로부터 엄한 꾸짖음을 듣게 되겠지요.
예수님이 올라가려고 하신 도시, 그분께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완성하실 도시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처럼 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강압적인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처럼 계명과 율법을 앞세워 주눅 든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헤로데와 대사제들처럼 권위와 권력을 내세워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적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십자가와 희생으로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참 평화를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그 평화는 오직 자비와 사랑으로, 용서와 나눔으로 완성됩니다.
진, 선, 미를 거부하는 사람들 <루카 9, 51-56> 9월 27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악으로 기울여지고 진, 선, 미를 떠나거나 잃고 사람의 길로 사는 사람을 참 길로 이끄시려고 오셔서 온갖 고난을 겪으신 주님을 거부하거나 피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은 하느님의 큰 벌을 주자고 했지만, 그들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진실과 사랑은 사악한 인간의 잘못된 마음, 거짓과 미움으로 망가트립니다. 진실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게 살아야 하지만, 내 편이 아니고 이익이 없고 내 생각과 다르면 거부하고 다른 이가 만들려고 하는 것을 망치려고 듭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이기심, 시기 질투, 속된 말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하는 말처럼 거부하거나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민주주의는 서로의 좋은 의견을 모아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인데 서로 존재를 존경하거나 인정해 주지 않고 자기 이익만 찾는 사람은 투쟁, 사기, 거짓, 전쟁으로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합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 공평한 세상을 기대하는 사람은 법대로 처리하고 상주고, 벌줘야 합니다. 잘 살려고 해도 능력이 부치면 도우려 하지 않고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없애려고 합니다. 부모님들도 잘못 사는 자녀에게 “너 같은 것 없는 것이 낫다.” 하며 죽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부모는 어머니 태에 생겨난 생명을 지워 버리려고 하거나 낳아도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또 다른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즉, 악이 악을 만들어 냅니다.
많은 사람을 상담하다 보면 세상의 여러 단면을 보고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고통은 진실과 사랑의 결핍으로 일어납니다.
또한, 자기만족을 모르는 욕심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나는 왜 이 모양으로 살아야 하는가?” 자기 존재에 대한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당신이 있어 나는 이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아서 불만인 사람, ‘다른 아이는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저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만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산다면 주님께서 모든 이를 당신의 자녀로 살도록 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을 닮게 만들어졌습니다. 나의 존재는 하느님과 같은 가치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하고 사랑스럽지 않으면 십자가에 돌아가셨겠습니까?
이 사실을 미사 때마다 느끼며 감사기도 드리게 됩니다. 굳건한 믿음은 하느님의 자녀로 세상에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이든지 어떤 사람이 마음을 흔들어도 주님 십자가의 은덕으로 잠깐 머물다가 떠나는 세상 뒤에 영원한 생명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면 지나가는 세상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셨다는 말씀은 거부하는 사람 미워하시지 않고, 벌주지 않으시고 마음에 품고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저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더 잘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뜨거운 결심은
뜨거운 실천을
낳습니다.
예수님의
굳히신 마음이
십자가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흩어진
우리 마음을
모으는 일이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가장 좋은 사랑은
인생의
참된 가치와
참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가장 존귀한 일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사랑하는 봉사입니다.
봉사의 기쁨은
삶의 새로운
안목을 제공합니다.
새로운 안목이란
복음의 기쁨인
새로워진 마음과
하느님 중심의
실천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웃들을
대하고 있는 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았던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삶이었습니다.
가장 예수님다운
삶이란 반드시
해야할 일을
피하지 않고
우리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인식의 전환은
생각 속에
그치지 않는
복음의
실천입니다.
복음의 실천이란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며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의 아픔에
우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생활의 실천이
참된 봉사이며
참된 나눔입니다.
나눌 줄 알 때
만나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맑으신 사랑입니다.
생활의 실천이
십자가이며
부활의 삶임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생활의
실천이십니다.
우리의 오늘이
뜨겁고 맑은
생활이길
기도드립니다.
신앙인의 생활은
뜨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여정이
참으로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보통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일어납니다. 이런 말을 들으신 분들은 하나같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그렇게 일어나면 피곤하지 않으세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변하지요.
“원래부터 하던 거라 괜찮습니다.”
사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벌써 16년째입니다. 원래 하던 일,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별로 피곤하지도 않고 또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합니다. 하긴 저 역시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분의 직업이 높은 건물의 외벽에서 유리창을 닦는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분들의 일이 대단하다 싶어서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무섭지 않으세요?”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원래부터 하던 일이라 괜찮아요.”
그렇게 살지 않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 삶이 어렵고 힘들어 보이지만, 원래부터 하던 일은 그리 힘들지도 또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냥 자신의 일상 삶이 된다면 남들의 시선과는 다르게 편안하게 생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일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일 역시 나의 평범한 일상 삶의 일부처럼 생활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사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사랑과 희생을 하면서 사는 것이 보통의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이나 가능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살아보지도 않았고, 살려는 마음도 없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원래부터 하던 건데요. 괜찮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들어가려는 예수님 일행을 맞이하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 제자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을 강조하셨고 또 그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미움과 복수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삶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지만, 아직은 미워하고 판단하며 또 복수 등의 단죄를 하려는 마음을 더 많이 간직하며 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으로는 사랑의 삶을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주님께서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이 오직 주님께로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 어렵지 않게 주님의 일을 하면서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연연함과 구애됨을 버려야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여유 있고 충실한 생활을 할 수 있다(요제프 킬슈너).
세상을 멈춰 세워,(풀턴 쉰 대주교, ‘한 해를 풀턴 쉰과 함께’ 중에서)
자살은, 장기 두는 사람이 자기 앞에 놓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자 아예 장기판을 엎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엎어 버리는 게 장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듯, 자살은 인생 문제에 대한 해법이 아닙니다.
동물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포자기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불멸성 때문입니다. 자포자기는 자기애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다른 모든 이들에게 등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결국엔 그 자신마저도 넌더리가 나 스스로 없어지려 합니다.
생명의 영역은 바로 하느님의 영역이지요. 우리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어리석음에서 원죄가 나왔고 각종 죄들이 흘러나왔습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자기 삶의 모든 문제들이 술술 풀어지는 것 역시 보너스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아지는 연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남미에서 온 동료 관구장 신부의 나눔을 들었습니다. 한 수녀님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런 하소연을 털어놓더랍니다. “신부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는 봉헌된 수도자로서 평생토록 목숨 바쳐 하느님을 사랑했고, 동료 수녀들을 사랑했고, 나환우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담당의사는 제게 말기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착하기로 유명한 그 수녀 앞에 동료 신부님을 할 말이 없더랍니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찾을 수가 없어 한동안 침묵 속에 있다가 그는 돈 보스코가 그랬듯이 사무실에 걸려있던 십자가를 손으로 가리켰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큰 탈 없이 무병장수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폭의 풍경화처럼 평화롭게 아기자기하게 그렇게 살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평탄한 지름길만 우리 앞에 펼쳐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어떤 때 가파른 오르막길도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우산도 없이 폭우가 퍼붓는 밤길도 홀로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큰 고통과 십자가를 지고 각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일말의 위로가 되는 것은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 역시 다들 원치 않은 십자가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호의적이지 않은 삶과 매일 마주하며 비틀비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특히 욥이라는 특별한 인물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신음하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의 인생은 정말이지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탄식과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인생이었습니다.
사실 욥은 한때 아주 잘나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극찬을 들은 보기 드믄 참 신앙인이었습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욥기 1장 8절)
이토록 하느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욥이었는데, ‘재미있는 하느님’ ‘때로 이해 못할 하느님’께서 잘 나가던 욥을 크게 내리치십니다. 그를 심연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리며 시험에 빠지게 하십니다. 그것도 적당히 내리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게 만드십니다.
그 많던 재산 모두를 약탈당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많던 종들과 가축들이 모두 죽어나갔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자녀들마저 모두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뿐만 아닙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욥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재를 온 몸에 둘러쓰고 사기그릇 조각으로 가려운 부위를 긁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어이없는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욥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신 앞에 펼쳐지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억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합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히 벌거벗은 알몸으로 엎드려 외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큰 불행 앞에서도 악담이나 저주, 투덜거림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주님 앞에 완전히 알몸으로 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난다 긴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도 강렬한 밑바닥 체험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잔뜩 이렇게 저렇게 치장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하느님 앞에 드러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욥의 한결같은 신앙을 떠올려야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언제나 활짝 자신을 열어놓는 개방성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작아지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높은 곳에 있을수록 밑으로 떨어질 때 그 충격이 큽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노력을 되풀이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심연의 밑바닥 거기까지 내려가면 거기서 광대무변한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낮아지고 작아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바닥을 쳐보지 않았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밀정’은 독립 운동가들을 참 많이도 잡아들여 지금으로 말하면 5급 공무원까지 올랐던 한 조선인 일본 순사 이정출(송강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실제 독립투쟁단체였던 의열단이 폭탄을 경성으로 들여오는데 도움을 주었던 조선인 일본순사 황옥 종부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을 위해서 자국민들을 잡아들였던 한 사람이 의열단과 술 몇 잔을 나누어 마시고 그들을 돕게 된다는 것이 어쩌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이 자주 바뀌는 것 같습니다.
3·1 운동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기미독립선언문을 복사하고 있었던 ‘보성사’라고 하는 곳에 조선인 출신 순사가 들이닥쳤습니다. 모두 사색이 되어 같은 조선인으로서 한 번만 눈감아 달라고 하며 지금의 가치 1억 5천만 원 정도의 돈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사는 그 돈도 받지 않고 뒤돌아 나옵니다. 물론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게 잡혀 자결을 하게 됩니다.
저는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바로 들어주기 싫다고 하는 사람은 더 설득해보지만 미적미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더 빨리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은 잘 바뀌지 않지만 태도가 분명한 사람은 더 쉽게 바뀌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가장 웃기는 사람은 “절대로”라는 말을 쓰며 장담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절대 그러지 않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나약한 존재라 선악과 옆에 있으면 그것을 따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그 옆에서 참아내지 않고 일부러 그를 멀리합니다. 주님의 기도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 기도하지, “저희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자신했습니다. 이 “결코, 절대로”를 예수님은 깨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 번이나 당신을 배신할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아니었으면 우리는 큰일 날 뻔 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당신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욥의 입에서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라는 한탄을 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왜 나를 태어나게 했느냐며 부모님을 원망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경우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안타까워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주님께 두어야 한다고 일상적인 멘트를 날립니다. 그러나 이는 가진 자의 자만일 수도 있습니다. 욥처럼 지금 가진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잘 태어났다고 말할 자신이 있을까요? 욥은 하느님이 인정한 동방의 최고 의인입니다. 그렇지만 자녀와 재산, 명예와 건강까지 잃게 되자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삶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립니다. 이는 누구도 구원만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며 자만해 할 수 없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자신의 삶을 저주하였다가 지금은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직도 그런 상태까지 나빠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기 전의 욥처럼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들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방해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욥에게 하신 것처럼 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우리가 세상 것으로부터 떨어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가 되어버려 그런 것들을 잃으면 자살을 해버리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삶의 의미라 믿는다고 쉽게 자만하지 맙시다. 우리는 결단코 ‘절대로’라는 말을 쓸 수 있을 만큼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죄에 쉽게 떨어질 수 있는 우리 자신을 인식할 때 더 죄로부터 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과 너그러움으로 걷는 일상의 순례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십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 들어가려 했으나 거절당하십니다(9,52-53).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멸망합니다. 이후 아시리아의 이주정책으로 사마리아 지역은 혼혈 지역이 되고 혼합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중심의 남쪽 지파 사람들은 그들을 민족의 순수성을 더럽힌 집단으로 여겨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요한 4,9).
그런데 사마리아인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유다인들에 대한 미움이 생길 법도 했지요. 그들은 자기들만의 종교 예절을 가지게 되었고, 더구나 주님을 섬기는 장소도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과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피해 다니던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신 것은 그런 그들의 처지를 헤아리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집단적 이기주의와 배타심으로 예수님을 배척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그들에게 재앙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합니다(9,5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그 어떤 원망과 불평도 없이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십니다(9,54-55).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은 살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내려오심, 수난을 겪고 죽음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자기 몫을 챙기려는 장사꾼의 길이 아니라,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의 애타는 사랑의 발걸음입니다.
그 길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냉혹하게 응징하기 위한 길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고 헤아리는 길입니다. 마음을 헤아리고 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며, 그 사람의 아픔과 영혼의 어둠과 상처를 헤아리는 천국을 향한 길이지요
예루살렘을 향한 길은 모든 이를 품기 위한 길이며 모두가 행복하기를 희망하는 길입니다. 죄인도 이민족도, 나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이들도,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까지도, 내 안의 증오와 다른 이들의 분노까지도 품기 위한 길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새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회개하기를 기다려주는 ‘기다림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이 바로 그런 길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척하는 사마리아인들이 겪어온 역사적 아픔과 유다인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들이 입었던 상처와 어둠을 헤아리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품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당하자 그들 안에 사랑이 뿌리내릴 여백을 남겨두신 채 묵묵히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우리의 나날의 삶이 바로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입니다. 그 길은 안락한 길이 아니라 고난의 연속입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고, 세상의 유혹에 맞서야 하며, 밉고 싫고 피하고 싶은 자신과 이웃의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야 하고, 때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짐을 대신 지기도 하는 길이지요.
내 인생의 길목에서 예수님처럼 나도 나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 친구, 직장동료, 교회단체 구성원들의 아픔과 상처를 헤아려 본 적이 있나요?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인생길을 걷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좀 더 너그럽고, 좀 더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족과 다른 이들을 대하도록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신부님
제가 담당하고 있는 ‘복음화 학교’에서 하루 피정을 하였습니다. 주제는 ‘여러분도 그렇게 해 주십시오.’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와 ‘영적식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전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달이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으며, 우리의 태양은 은하계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도, 영적식별의 이야기도 핵심은 ‘전환’입니다. 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관점은 ‘나’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지역, 같은 학교, 같은 취미,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살고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도 그런 관점에서 사목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신자, 내가 사목하는 지역, 내가 만나는 사람을 중심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내 관심에서 멀어지는 사람과 일들은 무시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여러분이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관점은 상대방입니다.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 지금 헐벗은 사람, 지금 병든 사람이 중심입니다. 이제 그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 사제, 율법학자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그 사람들의 직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서는 ‘영적식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영적식별을 잘하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지금 나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나쁜 악습들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두렵고, 거북하겠지만 바로 보아야 합니다. 애연가는 금연을 대면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주가는 금주를 대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술을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죄’를 대면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드러내야 합니다. 악의 세력은 어둡고, 음침한 곳을 좋아합니다. 작은 빛이 어둠을 이기듯이, 우리의 나쁜 생각들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빛이 우리를 어둠에서 희망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사랑하는 이웃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들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마련입니다.
셋째는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듯이, 우리는 자주 고백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성찰하고, 뉘우치고,새롭게 살 것을 결심하면서 성사를 보는 사람은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미사참례를 자주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하느님나라를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불을 내릴 것을 이야기 합니다. 성서에서 불을 내린 다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불꽃을 내려 주십니다. 그것은 성령의 불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은 위로, 화해, 평화, 사랑을 주는 영입니다. 가난한 이, 장애인, 이방인까지도 함께 하는 일치의 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배가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권위와 교만’은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과 분노’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배가 방향을 잃게 만듭니다. 무엇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순탄하게 노를 젓게 할까요? ‘겸손과 사랑’입니다. ‘용서와 자비’입니다. ‘친절과 온유’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영원한 배경背景이시다. -자연 배경, 공동체 배경-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의 강론 제목은 ‘하느님은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시다’입니다.
배경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웬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올 가을입니다.
자연 배경의 빈약함 때문입니다.
올 여름엔 메꽃, 달맞이꽃등 야생화 풍경이 초라했고 능소화꽃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매미소리도 유난히 약했던 여름이었습니다.
예전 이 때쯤이면 한창 영롱하게 울려 퍼지던 풀벌레 소리들도 거의 들리지 않는 적막한 가을밤입니다.
하느님 배경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자연배경이 많이 빈약하게 느껴진 올해입니다.
콘테이너로된 원장집무실 공사후 잠시 들렸다 입구문벽에 붙어있는 시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올해 4월 22일 원장에게 선물한 ‘배경의 사랑은 이런 것’이란 자작 애송시였습니다.
-수도원 배경의/신록新祿/연록軟綠/초록草綠
온갖 색깔의 생명生命으로 충만充滿한
불암산
무언無言의/축복祝福/환호歡呼/격려激勵/응원應援
배경의 사랑은 이런 것-2016.4.22. 아침
원장직에서 물러난 후 제 소망을 담은 시인데, 이를 좌우명座右銘 삼아 살려는 원장수사의 마음이 느껴져 순간 감동했습니다.
진정 이상적 배경의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 배경의 사랑은, 공동체 배경의 사랑은 이러합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은 제1독서 욥기입니다. 갈수록 욥의 점증하는 고통입니다.
욥기 주석의 첫 단락의 글이 참신했습니다.
-욥기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불의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것도,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혼란에 빠진 한 인간이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 우리가 욥기를 읽는 궁극의 목적도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신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각자의 제자리를 찾기위함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하느님 배경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 욥의 환경입니다.
하느님의 철저한 침묵입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침묵에 답답해 할까요.
바로 오늘 욥기 독서 앞에 나오는 욥의 아내와 욥의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
비수같이 아픈 살인적인 말입니다.
이에 대한 욥의 답변을 통해 드러난 그의 믿음이 감동입니다.
“당신은 미련한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욥기는 이어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기술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욥기 전편을 통해서도 욥은 극한적 고통의 상황속에서도 환경만 탓할 뿐 결코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고 하느님 앞에서 끝내 제자리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아내와의 시련후에 세 친구의 방문입니다.
욥을 방문한 세 친구들은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한마디 하지 않았다 합니다.
욥의 고통이 너무도 큰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친구들 앞에서 펼쳐지는 욥의 독백의 탄식입니다.
생일을 저주하고,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는 욥이요,
왜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셨는가에 대한 항의로 이루어진 오늘의 독서입니다.
저절로 ‘하느님은 어디에게 계신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상황입니다.
답은 욥과 함께 계신 하느님입니다.
침묵의 배경이 되어 욥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순간적 깨달음은 세 친구들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세 친구의 배경이 없었다면 욥이 죽음과 같은 침묵과 고독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종일관 세친구들과의 주고 받은 문답을 통해 고통의 극한 상황을 통과한 욥입니다.
새삼 세 친구들은 하느님이 파견하신 배경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탄식의 독백으로라도 자기를 표현하지 못했더라면 욥은 참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세 친구들과의 주고 받은 문답 내용을 침묵의 배경이 되신 하느님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들었을 것입니다.
흡사 욥의 독백은 하느님께 바치는 탄식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욥의 독백을 통해서도 빛과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배경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 배경입니다.
세 친구들의 공동체가 욥의 구원의 배경이 되어 주었듯이 오늘 복음의 제자공동체도 예수님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아니 서로가 배경이 되어주는 역동적 공동체의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배경이 된 제자들, 또 제자들의 배경이 된 예수님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되자 제자들과 함께 발걸음을 서둘러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을 때 제자들과 예수님의 주고받은 문답은 역동적 상황의 절정입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야고보와 요한의 생각없는 무모無謀한 언행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향하는 지혜롭고 권위있는 배경의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열심한 제자들의 배경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운신의 폭도 퍽이나 좁았을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 크게 꾸중을 들었지만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이 중요한 순간마다 대동한 주님의 삼총사였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신 주님과의 끊임없는 생명의 소통이 바로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친히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빛의 배경이심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시편107.8-9). 아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우리마음을 굳히는
것입니다.
오늘 져야 할
십자가를 우리가
뒤로 미루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굳히는
이에겐
십자가는
분명 선물입니다.
마음을 굳히는
이에게만 열리는
새로운 길입니다.
마음을 굳힐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언지를 깨닫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를 두려워
하기보다는
십자가를 통해
변화를 시도하십니다.
마음을 굳히는
용기를 통해
우리들또한 자신을
속이지 않는 이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결심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참된 기쁨이란
아예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신앙이란
마음을 굳히는
십자가의 여정으로
사랑의 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또한
주님의 십자가를
선택하는 은총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