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 19,21-27
욥이 말하였다.
21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22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내 살덩이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단 말인가?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2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욥은 그의 구원자가 살아 계심을 알고 있다며, 기어이 뵙고자 하는 그분을 보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게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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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비록 하느님께서 그를 짓누르시고 자신이 모든 불행을 겪고 있을지라도 그분께서는 여전히 그에게 변호인이시며 구원자시라는 사실을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를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제자들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상황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곳이 아직 많고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도 많은 상황입니다. 파견할 제자가 일흔두 명이나 있어도 부족합니다. 어림잡아 비교한다면 비신자들이 많은 지역에 선교를 시작하는 상황과 비슷할까요?
그러나 신자들이 많아도 일꾼은 많이 필요합니다. 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복음 선포가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교회가 없는 지역에 처음 교회를 세우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 상황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결국 언제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확할 것은 많고 일꾼은 적을 때, 일꾼은 할 일이 많다고 하여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그 밭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까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많다면, 그들을 염려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써 그 밭을 돌볼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아 밭에 할 일이 많다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이고자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일이 많은 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에서 지금의 처지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우리 밭에는 일꾼이 부족하고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 밭 주인의 마음으로 그 밭을 바라봅시다. ‘밭 주인’은 일꾼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밭 주인’에게서 파견되었음을 생각하며,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 주인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충실한 종이 됩시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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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는 유산을 버리고 집을 떠나 보잘것없고 가난하게 되었지만, 주님이 그를 들어 올리셨네.” 성인은 임종할 때에도 잿더미로 돌아갈 인간의 삶을 기억하였습니다.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가난과 고난을 본받으려 하였습니다. 성인은 그리스도께서 배척받고 모욕받으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강조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많은 제자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세상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배려를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배척받는 일이 될 것인지 미리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상에서 살아야 할 기준과 방향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평생 실천하며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한 분이 바로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성인은 탁발 생활을 하면서 어떤 집에 들어가거나 만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빌어 주었습니다. 진정한 평화와 선행은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을 따르는 행위에서 옵니다. 오늘 우리는 성인에게 전구를 청하면서 그 길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도록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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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아슬아슬한 심정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 한복판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보다 앞서 이미 세상 속에 계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어둠의 세상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파견될 세상 또한 역시 그들을 잡아먹으려고 노리는 이리 떼와 같습니다. 이리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양처럼 순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그들에게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빈손으로 세상에 내보내십니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빈손의 위력을 잘 압니다. 다윗은 막대기와 돌멩이만 가지고 골리앗과 싸워 이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프란치스코 성인도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으로 교회를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갑옷은 우리가 걸친 모든 것을 벗어 버릴 때 입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는 주님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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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두 제자’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고 있기에 열두 제자는 아니라도 예수님을 추종했던 분들로 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루카 역시 처음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선교를 명하고 계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이렇듯 선교의 첫 작업은 평화를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를 알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평화를 비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선교에 앞서 그런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선교를 지향하는 사람이 평화는커녕 투쟁과 싸움에 휩싸여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지요?
선교를 방해하는 세력은 언제나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비난하고 헐뜯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갈라져 나가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본다면 어찌 주님을 믿으려 할는지요? 그들이 외치는 소리에 누가 귀를 기울일 것인지요?
신앙인은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모습으로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평화로운 사람이다.’, ‘평화로운 분위기를 지녔다.’고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자세로 살아가기만 해도 훌륭한 선교가 됩니다. 악을 쓰며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외친다고 선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독일의 어느 공장에서 작업 효율을 높이려고 기술 고문을 초대했습니다. 이 기술 고문은 공장 전체를 돌아본 후에 한 가지 지시 사항을 내렸습니다.
“매일 공구를 정리 정돈하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이 지시 사항에 불만이 커졌습니다. 기술 고문이라고 특별히 초청했는데, 뻔해 보이는 지시 사항을 내렸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기술자들은 귀찮다고 짜증을 냅니다. 공구 정리 정돈으로 무슨 효율이 높아지겠냐며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일 효율이 20%나 상승했습니다. 일하다 공구를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일상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짜증이 많은 사람, 우울과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은 대체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역시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죄인으로만 만드는 것 같다며 짜증 나서 성당을 멀리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본인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기도하며 주님과 가까운 사람은 신앙의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저것 챙겨줘도 잘될까 말까 한데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이 전교 여행의 기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은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였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평화였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장 기본을 열심히 선포하고 행동하는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고을이 있는 반면,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도 있었습니다. 이 기본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라고 말하면서, 소돔보다 더 심한 벌을 받을 것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땅을 떠날 때 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자기네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바로 이교도들을 저주하는 표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은 저주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받아들이고 있나요? 신앙생활의 기본인 기도를 멀리하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만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주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관계는 단지 마주쳐 나눈 이야기로 맺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드는 과정이 필요하다(정영민).
욥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땅히 이유도 모르겠는 극심한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는지요? 내가 잘못한게 무엇인지 아무리 따지고 따져봐도 모르겠는데, 난데없이 다가온 불행 앞에 망연자실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한없이 나약한 결핍투성이의 존재로서, 한계를 지니고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에 두발을 딛고 있는 이상, 욥처럼 극도로 비참한 상황 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 이 한 세상 살아가며 이런저런 다양한 고통과 시련에 노출됩니다.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고통이 아니라 욥처럼 뼛속 깊이 사무치는 고통일 경우, 우리는 하느님도 원망하고, 이웃도 원망하고, 나 자신도 원망하며 크게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욥의 절규 같은 경우 우리와 살짝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극한의 고통 앞에 울부짖지만, 그 울부짖음이 결국 주님 안의 울부짖음이요, 주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의 울부짖음입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 26-27)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욥은 극심한 피부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마지막 희망을 둡니다.
이런 욥이었기에 결국 하느님께서 그의 절규, 그의 몸부림, 그의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십니다. 그를 지옥같은 병고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새로운 피부, 새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때로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가혹한 나머지,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이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냐며 따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그분께서 이 혹독한 고통 너머에서 주시려고 마련하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말 안에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곧 ‘심판’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을 찾는 행위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믿는 이들에게는 마치 아기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으니 부모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이 들립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 자체가 하느님이 계심을 증명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가지론자들이 사용하는 예는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원래 영국 철학자 John Wisdom이 제시하고 나중에 Antony Flew가 대중화한 이 사고 실험에서는 두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는지 아닌지를 토론합니다.
아름답고 잘 관리된 정원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정원사가 정원을 관리한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론을 테스트하는 데 동의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정원사가 잘 관리된 정원 상태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두 번째 사람은 회의적이며 정원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정원사가 존재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그들은 정원사의 존재를 감지하는 카메라, 센서, 심지어 경비견까지 다양한 도구를 설정합니다. 그러나 정원사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발자국도 남지 않고, 방해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정원은 눈에 띄는 어떠한 간섭도 없이 계속해서 번창하고 있습니다.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정원사가 분명히 있다고 계속 주장하지만 이제는 정원사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어떤 알려진 수단으로도 탐지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다음 회의론자는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정원사가 있는 것과 정원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즉, 정원사의 존재를 어떤 관찰 가능한 방식으로도 확인할 수 없다면 어떻게 정원사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까?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지구와 화성 사이 어딘가에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찻주전자를 상상하는 유명한 비유를 제안했습니다. 이 찻주전자는 너무 작아서 어떤 망원경이나 과학 장비로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는 누구도 찻주전자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존재 입증의 책임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지 않는 정당화를 하는 것이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약 부모가 나의 부모임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 부모를 보여주어야만 할까요? 또 누군가 DNA 검사를 해서 그 부모가 확실함을 입증한다면? 그런데 그 DNA 검사도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중간에 속임수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떤 증거를 대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인다고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믿지 않으려면 태양 주위를 도는 주전자를 보더라도 홀로그램이라 주장할 것이고, 정원사를 보더라도 그 정도 실력으로 저 좋은 정원을 다 가꿨을 리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증거들은 이렇게 외적이고 외적인 것은 속임수가 가능하므로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어떤 믿음도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이 나에게 키스해 주었다면 그것을 사랑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런 외적인 것은 속임수일 수도 있어서 쉽게 믿지 못합니다. 사랑은 그런 증거들이 쌓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간 이성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믿음은 마음 차원의 문제인데 부모의 사랑이 그 사람 마음 안에 들어가 ‘평화’를 줄 때 생깁니다. 제가 어머니를 의심했을 때 어머니께서 저에게 해 주시는 사랑에 결국은 믿기로 결단을 내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 ‘평화’를 하느님 나라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나의 창조자를 만났을 때 누구나 그 평화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평화까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그 사람이 아이라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온전한 인간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이 평화를 주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것을 거부할 때 더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이 곧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르쇠르와 펠릭스 르쇠르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저명한 프랑스 의사이자 지식인인 무신론자 펠릭스와 결혼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펠릭스는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아내의 신앙에 적극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종종 아내의 종교적 신념을 조롱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결혼 생활 내내 사랑과 인내, 충실함을 유지하면서 펠릭스의 개종을 위해 고통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펠릭스는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도와 희생을 기록한 영적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녀의 사랑과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은 펠릭스는 깊은 회개를 경험하고 도미니키회 가톨릭 신부가 되었습니다.
펠릭스는 후기 저작물과 공개 강연에서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께로 인도한 것이 그녀의 사랑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결혼 생활 내내 보여준 사랑은 궁극적으로 그가 한때 거부했던 바로 그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이끌었습니다.
교회는 엘리자베스와 같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엘리자베스가 쓴 영적 일기입니다. 이것마저 거부한다면 다른 증거는 펠릭스에게 믿음을 가져다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흘린 피만이 상대의 심장까지 흘러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도록 파견되었고 그래서 교회의 사랑과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변을 보면 제복을 입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사는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사에게 신뢰와 존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경찰도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경찰의 안내와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질서를 유지하고,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군인은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우는 사람입니다. 군인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대원도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방대원의 차가 지나갈 때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합니다. 소방대원들이 위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제복을 입고 있는 동안, 그 제복이 가지는 권위와 가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사회의 질서와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더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의사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사기를 친다면, 경찰이 모여서 도박을 한다면, 군인이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더 큰 비난과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한 아이가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왜 사제복을 입으세요?’ 아이는 사제복에 있는 하얀 칼라가 궁금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별 뜻 없이 ‘그것이 법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신부님이 아이에게 영어로 사제복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클러지 칼라(clerical collar)라고 불리는 하얀 색 칼라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헌신과 순결: 하얀 색은 사제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 순결하게 살아가겠다는 서약을 상징합니다. 사제는 이 칼라를 통해 자신이 세속적인 생활과 구별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사제의 정체성: 사제복의 하얀 칼라는 사제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직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이로 구별됩니다. 하느님의 빛: 하얀 색은 성서적으로 하느님의 빛과 진리를 상징합니다. 사제는 이 칼라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저도 신부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제복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7 -28)"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모두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보다 더 큰 비난과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는다.” 간디의 눈에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고, 세례 받는 신앙인이 줄어드는 이유는 박해가 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빛을 잃어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하는 신앙인들이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요청하셨습니다. 첫째는 열정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불가능한 것 같지만 열정에 시간이 더해지면 이루어집니다. 돈도, 지팡이도, 조직도 열정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도착한 프랑스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돈도, 지팡이도, 조직도 없이 머나먼 길을 떠나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박해와 순교가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둘째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눈이 먼 소경을 치유하실 때도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믿음이 약하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조건을 따지는 믿음은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아무런 조건이 없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진 건 풍랑이 거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주님께서는 제게도 열정과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다면, 무기력하고 의욕이 사라진다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께 열정과 믿음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가리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는 …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루카 10,1)
나는 가리라
주님이 가라시니
주저하지 않고 나는 가리라
주님 뜻 새기고
주님 향기 머금고
주님 한발 뒤 제자로서
주님 옆의 벗으로서
주님 한발 앞서 사도로서
몸소 오실 주님
희미하게나마 드러내고픈
주님이 가라시기에
가야만 할 가고픈 길에
짝지어주신 고운 벗
누구든지 어디에서든지
섬김과 나눔으로 하나 되어
우리 품은 하느님나라
벗들에게 아낌없이 나누고자
기쁘게 나는 가리라
주님을 만나고픈
가난하고 작은 벗들
혹여 나로 말미암아
오히려 주님께로부터 멀어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 정갈하게 가다듬어
오직 주님만을 품고
겸손하게 나는 가리라
아픈 벗들 보듬어주고
갈라진 벗들 이어주고
빗나간 벗들 제자리 찾아주고
만나는 모든 벗들에게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건네며
머물 때에 모든 것이 되어주되
떠날 때는 아쉬움 없이
자유로이 나는 가리라
한걸음 한걸음에
나는 작아지고 없어져
마침내 주님만이 남으시고
그렇게 주님만이 계심으로써
나 영원히 살게 되는 그 날을 향해
기쁨과 고통 보람과 허무
순간순간 연연하지 않으며
더디더라도 쉼 없이 나는 가리라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선포의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제자들이 이루어 가야할 사명이 복음선포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사명이 선교의 직책을 가진 사람들에게 국한되어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선교는 사제나 수도자들, 선교사들이나, 교회의 봉사자들의 몫이라고 여기면서 정작 자신은 그 사명을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아주 소극적으로 임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복음선포의 사명은 우리의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명령이자 사명입니다.
복음선포는 거창하게 어디 먼 곳으로 가서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바로 그 곳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그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기쁨의 여정이 되길 함께 기도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을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저는 오늘 이 대목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집에 들어가면 다음과 같이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평화를 받을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독서를 보니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복음을 보면서 평화를 비는 일흔두 명의 제자가 아니라 그 평화를 받는 이들에 대해 묵상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평화를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욥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게 되었지요. 욥은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 욥처럼 이렇게 많은 고통을 받았던 이는 지금까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욥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하느님을 볼 것임을 또 세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다른 이가 아닌 오직 하느님만을 볼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평화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 이들에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순수한지 설령 자신이 안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해도 욥처럼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바로 우리는 이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저는 쉽다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어렵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가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우리는 그분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멘!
『복음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1-8)”
1) ‘다른 제자’는, 열두 제자가 아닌 다른 제자들입니다. ‘일흔두 명’은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민족들의 수를 ‘일흔둘’로 생각했습니다.>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은, ‘모든 곳’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가 다가오는데, 믿고 회개하면서 준비하는 사람이 적다.” 라는 뜻입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제자들(신앙인들)은 그 일을 도와드리는 협력자일 뿐입니다. 그러니 복음 선포 활동을 할 때, 즉 선교활동을 할 때, 기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여기서 ‘일꾼’은 ‘모든 신앙인’을 뜻합니다. 일꾼인 신앙인과 일꾼이 아닌 신앙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전부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하는 일은 모든 신앙인이 일꾼으로 참여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구경만 하다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자녀의 집이기 때문에 ‘남의 집’이 아니라 ‘나의 집’이고 ‘우리 집’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이고 ‘우리 모두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건설과 완성을 위한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고 ‘우리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일꾼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하느님의 일꾼들을 모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성소주일 같은 때에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가리켜서 일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착한 목자는 착한 양들 속에서 나오는 법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3)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어린 양’ 같은 제자들이 이리 떼 같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염려를 나타낸 말씀이기도 하고, 이리 떼 같은 사람들을 양들 같은 사람들로 변화시켜야 하는 제자들의 임무를 뜻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라는 말씀은, 목자만 의지하는 양들의 모습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목자의 보호 안에 있는 양들은, 모든 것을 목자가 알아서 다 챙겨 주기 때문에, 따로 무엇인가를 챙기거나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그런 생활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세속의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런 관계에 의존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일인데, ‘주님의 평화’를 남에게 전해 주려면 자기 자신이 먼저 그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돈 걱정’ 같은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걱정과 참 평화는 반대쪽에 있습니다. 평화를 빌어 주었는데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런 경우에는 평화가 되돌아올 것이라는 말씀은, 복음을 거부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전해 준 사람 쪽이 아니라 거부한 쪽에 있다는 뜻입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일꾼들을) 당연히 먹이신다.”이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라는 말씀과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말씀은, “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4)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라는 말씀은(9절), 복음 선포는 ‘말’로도 이루어지고, ‘자비의 실천’으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병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치유의 은총’이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경고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에도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은,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지만,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에 관한 무서운 소식’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전사 -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오늘 10월3일은 사대 국경일중의 하나인 제4356주년 개천절로 1949년 국경일로 제정됩니다. 예전 저 어린시절 달력에는 단기와 서기가 나란히 쓰여져 있었습니다. 참 뿌리깊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입니다. 날마다 기상하면 만세칠창중 빼놓지 않고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를 부릅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 그대로 될 것입니다.
4대 국경일의 노래 작사가는 일제강점기의 한학자, 역사학자, 교육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였던 정인보 선생으로 고고(孤高)하고 독야청청(獨也靑靑)했던 고전적 선비였습니다. 개천절 노래 가사가 좋아 3절까지 다 나눕니다. 시간되면 개천절 노래 3절까지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새벽 강론 쓰며 어린이들 노래 들어보니 너무 경쾌하고 좋습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 아버님은 단군이시니
백두산 높은 터에 부자요 부부
성인의 자취 따라 하늘이 텃다.
이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목 잎에 삼천리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새삼 확인하는 우리 민족의 깊고 깊은 뿌리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뿌리 깊은 우리 전통을 새로이 하는 개천절이요, 이렇게 미중일소(美中日蘇)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기적적으로 번영을 성취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맞이합니다. 남북의 분단도 언젠가는 평화로이 하나로 통일되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42년동안 한결같이 강조하고 살아 온 “주님의 전사”라는 수도자의 신원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너나할 것 없이 영적전쟁중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성서의 인물들이, 교회의 성인들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는 신원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이와 더불어 강조하는 교회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공통적 삼중신원입니다. 주님의 전사이자,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라는 삼중신원입니다. 주님 안에서 평생 싸워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형제로 살아가기에 전우애, 학우애, 형제애가 창조적 긴장과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오늘은 주로 주님의 전사로서 측면을 나눕니다.
역시 선택-훈련-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 평화를 선택했으면 끊임없는 훈련으로 습관화할 때, 주님과 깊은 관계와 더불어 내적힘의 증대입니다. 이래야 하루하루 날마다 영적전쟁을 훌륭히 수행해 낼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욥의 믿음과 희망이 참 대단합니다. 초인적 인내의 힘이 바로 하느님 향한 절대적 믿음과 희망에서 옴을 봅니다.
얼마나 뿌리 깊은 믿음이요 희망인지요! 희망에 거슬러 희망하는 모습은 그대로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하느님 전사, 욥입니다. 깊은 침묵중에 ‘위로와 함께하기’ 보다는 욥의 부족을 추궁하는 경박한한 친구들에게 하소연과 더불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바위에다 기록해 주었으면!...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극한의 고통중에도 온힘을 다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간절히 기도하는 하느님의 전사, 욥입니다. 평소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부단히 훈련하여 내공이 깊었기에 이런 기도이겠습니다. 이런 하느님 믿음이 희망이 사랑이 없이 이런 시련의 고통을 어찌 감당해낼 수 있을런지요! 이미 절망으로 무너져 내렸을 것이요 자살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참으로 험하고 거친 광야 인생, 셋중 하나라는 것이 제 지론입입니다. 성인이 되느냐, 괴물이 되느냐, 폐인이 되느냐? 셋중 하나요, 자살로 끝내기도 할 것입니다. 불광불급,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합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하느님의 전사들인 욥은 물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하느님께 제대로 미친 성인들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총사령관인 예수님께서 72명 당신의 제자들이자 전사들을 세상 영적 전쟁터로 파견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주님의 제자들이자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간청과 더불어 먼저 나부터 솔선수범, 수확할 밭의 주님의 일꾼으로, 주님의 전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파견되는 세상은 꽃밭같은 세상이 아니라, 생존경쟁, 약육강식, 각자도생생 치열한 영전전쟁터입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면서도 뱀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소유로 무장하지 말고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평화로, 지혜로, 한마디로 주님의 성령으로 무장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평상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영성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무소유의 삶이 상징하는 바, 소유의 힘이 아닌 존재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민폐를 최소화하면서 주어지는 모든 것에 만족하면서, 요구하지도 피하지도 말고, 주님의 평화를 선사하면서,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병자들의 치유와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라는 본질적 사명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스스로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당신의 전사”로,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 되어 살게 합니다.
“주님께 바라라.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4). 아멘.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둘씩 보내시며 방법적으로 걱정하신 예수님!
그 때부터 하늘나라 부속물인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리떼 속에 양을 들여보내는 것 같은 예수님 심정이죠.
병약자들 위해 기도하며 평화의 중요성과 하느님 나라를 알렸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임무라 봅니다.
하늘나라의 큰 인물로 세상 이리들을 변화케 하라는 하늘사명입니다.
돈벌이 먹을거리 대인관계 등등의 세상일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죠.
참 가톨릭 신자들은 오늘의 일흔 두 제자들로 뽑힌 큰 인물들입니다.
가톨릭알림 말: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알려주는 큰 인물들 됩시다.
파견받은 이의 자세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님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마라.’ 뭔가 이상하죠.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준비하라고 했을 텐데, 그분의 마음은 전혀 다릅니다. 머리로 이해가 가지 않아 볼리비아에서 선교하고 있는 친한 선배 신부님에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처음 볼리비아에 정착해 살면서는 필요한 것들만 생각이 났어. 이게 있으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지금은 이게 없으니 할 수 없는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게 되더라.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한테 없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어. 무엇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나 자신의 문제였단다.” 그 신부님의 말은 처음에는 외적으로 무언가 준비하는 것에 마음을 썼는데, 그런 부수적인 것들을 구할 수 없게 되니 비로소 나 자신이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주님을 찾게 되었다는 고백이지요. 그렇습니다. 복음 전파란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나 신발에 달린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본인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파견받은 사람이 사나운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위험한 장소에 맞닥뜨렸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 복음화되어 있다면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준수 신부님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10,5)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10,5)라는 현판은 신자 가정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뜨입니다. 그리고 교회 입교하려는 예비자와 오랜 신앙생활을 하신 신자 분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바로 신앙생활 곧 교회를 다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분은 참으로 평화로우며, 삭막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평화를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라는 의문이 듭니다. 여러분 가정의 현관에 붙어있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집에 나갈 때와 들어올 때마다 성찰해 보십시오. 절의 일주문一柱門의 의미가 본래 청정한 도량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집에 들어올 때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는 현판을 보면서 나와 내 집에 주님의 평화가 깃들이지 못하도록 저해하고 방해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면서 주님의 평화가 머물도록 마음을 되잡는 순간을 갖길 바랍니다. 이는 곧 우리가 참 평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체험하며 살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세상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를 말하고 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평화를 체험하고 평화를 살려는 마음을 간직하는 게 파견된 제자들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이는 곧 그만큼 선교지역이 넓어졌고, “수확할 것이 많아졌기”(10,2)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을 파견한 1차 선교 여정과 거의 동일한 여장 규칙 곧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10,4)는 당부와 함께 파견 임무를 주십니다. 물론 파견될 선교지의 여건은 마치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험악한 곳이며 이런 곳에 파견될 제자들은 어린 양에 비유하신 것은 같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맡겨진 파견 임무는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10,8)고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는 곧 거룩한 활동과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대 제자들의 역할이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의 파견 소명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는 것”(10,5참조)입니다. 그 어떤 집이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가난한 처지와 상관없이 먼저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인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평화의 인사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과 그 사람 위에 머물 것이다.”(10,6)하고 예수님은 당부하십니다. 제자들의 평화는 바로 자신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의 평화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일꾼은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의 사절이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자신에 집으로 환영하고 환대한다는 것이기에 이는 곧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와 같습니다. 평화란 속마음에 갖고 있던 보이지 않은 무장을 해제한다, 는 표현임을 저는 파푸아 뉴기니와 인도네시아의 정글에서 만난 원주민을 통해서 체험했습니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친구로 받아들이며 친구 사이에는 분쟁과 불목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견된 제자들에 대한 거부 행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하느님과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견된 제자들은 단지 거부하는 집이나 고을을 향해 폭력 행위가 아닌 “자신들의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림”(10,11)으로 끝나지만, 그들에 대한 거부는 하느님에 대한 거부이기에 마치 심판으로 멸망한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0,12)라고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집과 고을에 대해 제자들처럼 평화의 사절로 파견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복음 거부에 대한 경고로 고작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는 일일지 모르지만, 훗날에 그로 인한 엄청난 심판은 하느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파견된 그리스도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끝까지 평화를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평화의 사도였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초기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바 있으십니다(루카 9,1-6).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다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일흔’ 혹은 ‘일흔 둘’이라는 숫자는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수였고(탈출 1,5), 모세와 함께 시나이 산에 올라갔던 이스라엘의 원로들의 숫자로 이스라엘을 대표하기도 합니다(탈출 24,1; 민수 11,25).
또한 <창세기> 10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의 수로 표기되는 바, 열두 제자의 파견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파견이라면, 일흔 두 제자의 파견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상대로 파견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이로,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이루는 이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이곳, 이 세상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실 때, ‘돈지갑이나 여행 가방이나 신발을 가져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존하라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돈지갑도 여행가방도 신발도 없이 가서,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이 ‘아쉬운 것이 없었다.’(루카 22,35)고 대답했을 때에는 ‘돈주머니와 여행가방과 칼을 장만하라’(루카 22, 36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박해받을 각오를 하고, 말씀의 칼로 무장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돈주머니’와 ‘희망의 여행가방’과 ‘말씀과 성령의 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먼저 다름 아닌 기도로 무장하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서둘러서 사명을 이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라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먼저 기도하는 일이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파견 받은 자로서의 삶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먼저 주님이신 그분께 기도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요, 세상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이루고 증거하는 일이요, 무엇을 하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앞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시고,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시고,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참 일꾼 거짓 일꾼 참 믿음 거짓 믿음이 있다.<루카10/1-12>10/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든 일은 정성과 열정이 있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져야하고 어떤 공동체도 서로 참 믿음 안에 이루어져야 참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권력의 힘이나 재력의 힘 명예만을 위한 모임이나 일들은 이루어지거나 존재해도 지속성이 없고 보람차지도 않고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할 일은 많으나 바로 할 사람이 없으면 올바른 성과를 기대하지 못하고 풍요로운 결실을 갇지 못합니다.
나라에 감사원이나 일의결과를 점건하는 사람이 있어 되어가는 일이나 된 일을 꼼꼼이 정검하고 객관적 관찰이 필요합니다.
오늘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하심은 일의 선공을 바른 성취가 막일꾼 같은 사람들 의하여 풍요로운 결실을 갇어 들이기 위하여 정성과 열정을 다하는 일꾼이 없다고 하십니다.
교회안에 사제 수나 제정이나 조직이 가추여 있어도 바른 마음을 가진 믿음이 없으면 일의 성과는 기대하지 못하고 전에 순교시대의 열악한 조간에도 생명을 내어놓고 믿음을 믿는 사람보다 지금은 믿음이 못하고 교회의 삶이 점점 약해지는 현상 속에 살고 있음을 현제 믿음을 사는 저희는 깊은 반성과 주님이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오늘의 믿음을 도우는 일은 전에는 성경도 없고 오늘처럼 신문 라되오 콤푸터 데레비 인동지능 까지 그 외 거리도 줄었고 소식도 지구 뒤에 일어난 일이 순시간에 전에지고 이름있는 ㅏ람의 가르침을 통신망의 발달로 쉽게 접촉하는 시대이지만 어둡고 빛을 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에 살고 있습니다. 알고자 하는 것만 알고 알고 있는 것에 집착하여 새로운 것을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안으려고 하여 아둠속에 살고 있으며 믿음도 발전 없이 살고 있습니다. 할 일을은 많은데 일 할 사람이 없다. 성당에 노인들은 많으나 활발하게 일할 젊은 이가 없어 교회는 침체되고 서로 이기적 삶으로 희생 봉사적삶이 없어지니 하느님 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 수명이 길어져 노인은 먾으나 일할 사람 없어 세상은 점점 피폐하게 되고 인간관계도 피폐해져 활기를 잃어 살아지는 것들이 많아지고 믿음도 전 같이 않아 진 선 미의 삶이 살아지고 사는 것이 더 힘들게 보입니다. 기쁨 즐거움 없고 참 행복한 삶이 없집니다. 자유보다 부자유 평화보다 전쟁 기쁨 보다 슬픔이 많아집니다. 진심 어린 정성과 열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세상이 되도록 기도하며 참 일꾼들이 많이지도록 기도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지닌 서울대교구 인사이동 때, 어느 신자분이 “안 간다고 하시면 안 됩니까?”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사라는 것이 필요한 자리에, 필요한 일이 있어서, 그 자리에서 필요한 일을 할만한 적당한 인물을 뽑아 보내는 것입니디. 그 자리에 타인들의 추천과 인정으로 뽑힌 당사자가 가지 않게 된다면, 그 일을 할 수 없는 것이거나 적절하게 흘러가지 않게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인사 명령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 장상에게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사정이나 상황 설명을 드릴 수 있어도, 결정이 내려져서 가도록 명을 받았다면, 가는 것이 주님과 교회에 순명서약을 우리 제자요 사도의 본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사도로 선발하시어 파견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2-5) 그러시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여건과 상황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6절)
알미니 잘 히고 좋은 실적을 내느냐가 아니라, 주 하느님에게서 세상에 파견되어 그 자리에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 맞춰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실현하며,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를 통해서라도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기꺼이 헌거롭게 봉헌합시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함승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을 둘 씩 짝지어 당신이 가시려는 고을로 먼저 보내십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그러했듯 사람들로 하여금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며 회개하도록 이끄는 선구자이자 예언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신앙적으로 성숙해있지 않은 이들에게, 아직 주님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그분 뜻을 마음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해받고 배척당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무시당하고 핍박받는 일이 잦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 것은 물론 때로 자기 신변에 심지어 목숨에 큰 위험이 따르기도 하겠지요.
그런 상황을 미리 내다보신 예수님께서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에, 자기 생각만 맞다고 여기는 고집과 편견에 찌들어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이들에게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이, 이리 떼 한 가운데로 양들을 보내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임을 다 아시면서, 왜 제자들에게 그 길을 가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너무나 위험하지 않을까요? 당신 가르침에 따라 용서와 사랑, 평화 밖에 모르는 바보들이 사악한 음모과 계략, 거짓 술수로 단단히 무장한 세상 사람들을 이길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과 싸워 이기라고 그들을 보내시는 게 아닙니다. 용서와 이해로 져주라고, 사랑과 자비로 섬기라고 보내시는 것이지요. 물론 처음엔 상처입고 피해당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저렇게 무지하고 고집 센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 이리 떼의 먹이가 되라고, 보람도 의미도 없이 개죽음 당하라고 보내신 게 아닙니다. 제자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주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생활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은총’이 될 것입니다. 제자들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으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제자들은 두 가지를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세상 것들에 욕심내고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주시는 분이니, 그들의 믿음과 의탁은 스스로에게는 기쁨과 희망이 되고,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전해 받은 이들이 보이는 반응에 연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베푼 호의를, 내가 먼저 빌어준 평화를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 호의나 평화가 무의미하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베풀고 나누었다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언젠가는 의미가 되고 기쁨이 될 겁니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호의나 선행이 거부당했다고 해서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듯 훌훌 털어버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실 기쁨과 영광을 희망하며 내가 가야할 길을 계속 가면 됩니다. 그것이 주님 말씀을 ‘복음’으로, 내 구원을 예고하는 기쁜 소식으로 만드는 삶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갑자기
쌀쌀한 날씨가
되었습니다.
머무르지 않고
흐르며
걸리지 않고
지나가는
자연의
순리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자아를
벗어나는
여정이
곧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떠나면서 알게되고
따르면서 보게되는
참된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는
물질을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수확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에
그 어디에서도
배움이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수확할 양(量)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확할 일꾼들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너무 많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사는 것을
경계해야합니다.
기도는 욕심을
줄이는 것이며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기에
나의 뜻을 비우는
나라입니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듯
수 많은
집착의 먼지를
털어 버립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일꾼과 주인의
관계처럼
수확할 밭도
수확의 때도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수확할
밭으로 보내신
사랑안에는
기쁨도 실패도
좌절도 행복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체험이
다 필요하기에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는
먼지를 털고
다시 시작합니다.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온
가장 좋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가장 좋은
하느님 나라의
오늘되십시오.
저는 올 7월부터 시작했던 국내성지 111군데 순례를 지난 9월 말에 모두 마쳤습니다. 남들은 몇 년에 걸쳐서 마친다고 하지만, 제게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새벽 4시부터 저녁 7시까지 식사도 하지 않고 강행군으로 순례를 하다 보니 이렇게 빠른 기간에 성지순례를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지순례를 완주했다고 하자, 사람들이 제게 이런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신부님! 어떤 성지가 제일 좋아요? 물론 갑곶성지가 제일 좋다고 말씀하실 테니 갑곶성지 빼고서 말씀해주세요.”
어떤 곳이었을까? 성지로서 의미가 큰 곳일까요? 아니면 감동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곳일까요? 그런 곳도 좋지만, 사실 가장 좋았던 곳은 순례자들을 위해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전담사제가 있어서 열심히 성지에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순교자 신심을 전해주고 있는 곳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성지는 대부분이 순교성지이기 때문에 다 비슷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과거 역사 안에서 보여주었던 순교자의 정신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드러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통해서 분명해집니다. 어느 순교성지에서 “박해받고 잊혀지다.”라는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구절이었습니다. 순교성지의 가치는 과거의 역사 자체에서가 아니라, 과거의 순교자를 기억하게 하면서 현재 어떻게 순교자의 의미를 드러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과거에 주님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분들을 기억하면서 지금 역시 주님의 말씀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단순히 과거 주님께서 하신 일회성의 말씀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 자기 아닌 남들을 향한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일회성이 아닌 영원한 말씀입니다. 또한 남을 향한 말씀이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더불어 또 다른 일꾼들이 나올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일꾼이 되어서 사는 삶, 그 삶의 자리가 바로 지금 시대의 또 다른 거룩한 주님의 성지를 만드는 시작입니다.
오늘의 명언: 생명력은 살아남는 능력뿐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능력에서도 드러난다(F.S.피츠제럴드).
67 양근성지
양근 성지는 이승훈 베드로 순교자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한강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에게, 또 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대감마을 또는 한감개에 살고 있던 권설신에게 세례를 베푼 뒤 천주교 신앙생활을 실천한 곳입니다.
또한 양근 성지로부터 충청도와 전라도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으며, 지도자급 평신도들이 가성직 제도로 성직자 역할을 하면서 미사와 견진성사를 2년간 집전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근 성지를 천주교회의 요람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이곳 양근 성지는 복자 이순이 루갈다와 복자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복자 조숙 베드로, 복자 권천례 데레사 동정 부부와 20여명의 순교자들이 태어나거나, 신앙을 증언하다 체포되어 순교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방 신부님과 샤스탕 신부님이 입국 한 후 양근에 머물며 조선말을 공부하고 신자들을 돌보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미사는 평일 오후 11시(월요일은 미사 없음)에 봉헌되고, 주일은 오후 2시에 봉헌됩니다. 주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 전화는 031-775-3357입니다.
위대하고 빛나는 자기 극복과 해방의 여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톨릭 성인(聖人)이면서도 타종교 신자들뿐 아니라, 무신론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이야 말로 성인 중의 성인, 참 성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그렇고, 또 한 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가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개척한 성화의 길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는 복음서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여러 면모 가운데, 머리 두실 곳 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예수님, 그래서 그 어느 곳에도 묶이지 않으셨던 대자유 그 자체, 예수님을 흠모하고 추구했습니다.
인간적 나약함과 유한성을 딛고, 그 위에 펼쳐진 자기 극복과 자기 해방과 자기 이탈을 위한 프란치스코의 하루 하루 여행길은 참으로 위대하고 빛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의 성화(聖化) 여정을 바라볼 때 마다 큰 감탄과 함께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발밑을 내려다보며 큰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 자신으로부터 한번 이탈해보겠노라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보겠노라고, 갖은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보겠노라고, 발버둥쳐왔지만 아직도 제 자리 걸음입니다. 초심자 시절 지니고 있었던 악습을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 때 당시 일상적으로 짓던 죄를 아직도 같은 방식으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탈, 자유, 해방...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프란치스코의 삶이 대단해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한올 한올 얽히고 꼬인 실타래 풀듯이 인내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자신의 문제나 약점들을 극복해나갔습니다.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을 머릿 속이나 마음 속에만 간직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행해나갔습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대 성인 프란치스코에게도 젊은 시절의 흑역사(黑歷史)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지 아십니까? 사실 그의 본래 이름은 죠반니 베르나도네(Giovanni Bernadone)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자수성가한 포목상이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부자 아버지 덕분에 호화판이었습니다.
당시 아시시 남자 청년들의 로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옆나라 프랑스로부터 건너온 청년 문화 중에 하나였습니다. 멋진 기사(騎士)가 되고, 잘 생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아름다운 여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리던 여인을 찾게 되면, 미리 준비해둔 낭만 가득한 음유시를 한편 멋드러지게 읊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프란치스코 역시 프랑스 음유 시인들의 서정시를 열심히 읽고 외웠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프랑스 패션으로 온몸을 치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바로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어린 프랑스인’이라는 뜻입니다.
한때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 이웃 사랑의 실천이나 청빈의 덕과는 철저하게도 담을 쌓고 살아왔던 프란치스코, 잔뜩 겉멋만 들어 유행의 최첨단을 걷고 있던 그가, 적당한 회개가 아니라 180도 완전 회개해서, 몇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 만인들로부터 존경과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의 신앙 여정, 회개 여정, 하느님을 찾아갔던 순례 여정은,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으며 ‘이 나이에 회개는 무슨 회개?’라고 외치는 우리, ‘나 좀 그냥 내버려둬!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라고 자포자기하는 우리를 향해 프란치스코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도 가능합니다!’라고 온 몸으로 외치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가 극단적 청빈을 모토로 내세우면서 당신 스스로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처절하리만치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는 우울한 금욕주의자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이 우리의 가난과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가난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는 더없이 환하고 행복한 얼굴로 가난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은 반면 그는 무소유의 삶 속에 진정한 행복, 대자유의 삶을 찾았습니다.
<하느님 특사의 품격>
전삼용 요셉 신부님
헨리 나우엔 신부는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1985년 초에 불란서에 있었던 정신지체아들을 돌보는 라르쉬라는 공동체에 한 지도자가 예일대학으로 헨리 나우엔을 방문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그 공동체의 지도자로부터 처음으로 정신지체아들의 세계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또 정신지체아들을 섬기면서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날은 그들이 사는 얘길 감동적으로 듣고 그냥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 공동체의 지도자로 있었던 장 바니에 신부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자기의 공동체에서 정신지체아들의 피정이 열리는데 거기에 왔으면 좋겠다.”는 글이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처음에 자신을 강사로 초청한 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가보았더니 “우리 피정은 침묵 피정입니다. 이 피정은 사흘 동안 열리는데 기도만 하고 행동으로만 사람들을 돌봐주고 섬기는 피정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특이한 피정을 참석하면서 헨리 나우엔 신부는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 소리 안 하고 정신지체아들을 돌봐주고 발도 씻어주고 밥도 해주고 같이 식사하고, 그들을 쳐다보면서 그는 처음으로 정신지체아들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침묵피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또 한 장의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신부님이 함께 있어서 축복이었습니다. 신부님이 우리 같은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주신다면 얼마나 커다란 하느님의 선물일까요.”
그 당시 헨리 나우엔 신부는 예일대학에서 하버드대학 교수로 이제 막 옮겨 한참 할 일이 많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얼마든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는데, 그 편지 한 장이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하버드대학을 떠나서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지도자로 부르신다.’
그의 마음에 자꾸 그런 부르심이 느껴져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그는 매우 갈등했지만 주님의 강렬한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1985년 가을에 캐나다의 토론토 근처에 ‘데이브레이크 커뮤니티’(Day Break Community)라는 정신지체아를 위해 새로 생긴 공동체의 지도자로 떠납니다. 그 곳에는 단 6명의 정신지체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 6명과 함께 살기 위해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상하다. 이것은 희생이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뒤엎는 나의 새로운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웬일인가! 이상한 마음의 평안이… 이 놀라운 평안이여, 자유여, 자유여.’
[‘주님의 강렬한 부르심: 소명편’, 한태완 목사 예화 모음]
예수님은 오늘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세상 속으로 가는 제자들을 향해 당부하고 싶으셨던 것은 “조심하라!”는 것일 겁니다. 절대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일 것이라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이 제자들에게 호의적이라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며 이리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예수님께서 먼저 당부하시는 것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유해지면 아무래도 세상 유혹에 빠지기 쉬워집니다. 또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세상 애정이나 애착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치 그들의 호의를 얻으려고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항상 ‘갑’의 위치를 유지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교만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나누어주려 하는지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약 임금이 주려는 보물들을 나누어주러 가는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굽실거리고 세상 것이나 사람에게 애착을 느껴 휘둘린다면 임금이 준 특권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됩니다. 하물며 임금 중의 임금이신 하느님께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받아 세상에 파견된 자라면 그것에 합당한 품격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시며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그 집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 집은 그것으로 이미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발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버리고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것은 말하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말씀을 정리해보자면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재물이나 먹고 마시는 것이나 애정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되면 결국 그들에게 잡아먹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특사는 특사로서의 품위를 지켜야합니다. 맹수는 약해 보이는 것부터 잡아먹습니다. 헨리 나우엔 신부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세상 명예를 쓰레기처럼 버렸습니다. 이것이 파견된 자의 품격입니다. 이 품격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가치를 증명해줍니다. 세상 가치들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처럼 휘둘려서는 복음전파자의 품격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리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하신 하느님 은총의 분배자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부들의 영성을 배우고 있습니다. 교부들은 4가지 요건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삶의 거룩함이요, 둘째는 교회의 인정이요, 셋째는 가르침이 정통성이 있어야 하며, 넷째는 600년 이전의 고대성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 우리가 교부들을 알아야 하고, 왜 우리가 교부들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부들은 생각과 삶이 같았다고 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은 생각과 삶이 달랐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교부들은 사도들이 전해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해 받았고, 그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해 주었습니다. 교부들은 기도 중에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교부들은 산 속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고, 삶의 현장에서 신자들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교부들의 생각, 삶, 기도, 사목자로서의 실천을 배워야 합니다.
세라피온이라는 교부는 떨고 있는 거지를 보았습니다. 저 그리스도가 얼어 죽는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수도복을 건네주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 그리스도가 노예가 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 가지고 있던 성경을 주었습니다. 당시에 성경은 빚을 갚을 정도로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습니다. 세라피온 교부의 제자들은 귀한 성경도 없이 알몸으로 돌아온 스승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교부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했으니 이제 구원의 날을 기다리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 받은 것이고,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육화된 것입니다. 전통은 관습이나 체계를 전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넘겨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통입니다.
교부들은 사제직의 본질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목자가 어떤 영성을 가져야 하는가를 주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사제는 주님의 제자여야 합니다. 사제는 사목자여야 합니다. 사목자는 신자들에게 다가가야 하며,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사목자는 관리자가 아니라,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는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는 주교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 제자라는 차원이 없으면 사목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사제, 주교, 교황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늘 성찰해야 합니다.
조직으로서의 교회라면 한국 교회가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성으로서의 교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합니다. 사목자들에게도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영성에 대한 갈증을 풀어가기 위해서 교부들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교부들은 기도와 삶 그리고 실천이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집단의 보장과 확장만을 생각한다면 복음 선포와 하느님 나라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고민을 하게 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영성은 시스템이 아닙니다. 영성은 향기와 같아서 전해지는 것입니다. 고민을 먼저 하는 개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개신교 신학자였던 본회퍼는 어쩌면 이 시대의 교부였다고 생각합니다. 본회퍼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값싼 은총은 싸구려 상품 같은 은총이며, 싸구려 죄의 용서, 싸구려 위로, 싸구려 성만찬입니다. 교회의 무진장한 창고에서 생각도 없이, 끝도 없이 경박한 손으로 털어내는 은총입니다. 가격도, 경비도 없는 은총입니다. 값싼 은총은 교리, 원리, 체계로서의 은총입니다. 값싼 은총은 회개 없이도 죄를 용서하는 설교요, 공동체 훈련도 없이 베푸는 세례요, 죄의 고백도 없이 참여하는 성찬례요, 인격적인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총, 십자가 없는 은총, 살아계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총 이것이 값싼 은총입니다.
값비싼 은총은 끊임없이 찾아야 할 복음이며, 기도해야 할 은사이며, 두드려야 할 문입니다. 은총이 값비싼 까닭은 은총은 우리를 제자의 길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총인 까닭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비싼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총인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비싼 까닭은 죄를 저주하기 때문이요, 그것이 은총인 까닭은 죄인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은총이 값비싼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하나님에게도 값비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꼬 성인의 축일입니다. 생각과 삶이 하나였고, 기도와 실천이 하나였던 프란치스꼬 성인의 아름다운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10월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사랑으로 여물고, 다듬고, 익어 가면 좋겠습니다.
내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집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적인 모습을 보아주십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는 그가 세리이고 죄인이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세리의 마음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이 있음을 보아주십니다.
또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에 올라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그를 내려오라고 하신 다음 그의 집에 가셔서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군...’ 하고 투덜거리지만, 예수님은 자캐오의 마음 안에 회개하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를 보아주십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욥도 사람들이 볼 때는 불행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욥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살갗이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이 말씀을 읽고 이지선 씨의 모습이 떠올랐는데요.
이지선 씨는 음주 운전자가 낸 사고로 3도 화상을 입고 예전의 모습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몇년 전에 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등이 아파서 벽에 기대야 했기 때문에 모두 앞으로 나와 기도를 하는 데도 저는 맨 뒷자리에 있었어요.
그러나 내 마음은 주님 제일 가까이, 십자가 바로 밑에 엎드리고 있었답니다.
다들 찬양하는데 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잇몸이 다 내려앉을 것같이 당기는 턱 때문에 도저히 입을 벌려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 누구보다 큰 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너무나 못난 얼굴을 갖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예쁘게 화장도 못 하지만, 이 마음은 그 누구보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스물네 살 여자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쯧쯧쯧...” 불쌍하다 하지 말아주세요.
누가 봐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불행할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행복한 천국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외모가 아닌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주님, 나는 그래서 하느님이 더 좋아요.
내 부족한 외모가 아닌 마음을 보시는 주님, 나는 그래서 하느님이 좋아요."
이지선 씨가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힘을 낼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적인 모습을 보아주시고, 내적인 변화에 기뻐하시는 하느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가 힘들 때마다 힘이 되었던 구절도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실제로 이지선 씨는 사고 후에 외적인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말씀대로 내적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졌던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되었고, 가족과 주변 신앙인들의 기도와 관심을 받으며 따뜻한 사랑을 체험합니다.
또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라며 더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되었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희망을 전하고 그 일에서 하느님의 도구로 쓰였다는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적인 모습에 상관없이 한결 같이 자신을 사랑해 주시고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합니다.
이러한 체험 때문에 그녀는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내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져 봅시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일상의 삶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려보고, 내게 주어진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체험해 봅시다.
하느님은 우리의 내적인 변화를 보시고 기뻐하실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추석 때 집 근처에서 친구를 만났다.
어렸을 때부터 성당도 같이 다니고 계속 연락하는 친구인데, 그 친구 옆에 두 살 된 아들이 있었다.
아이는 뭐가 좋은지 근처를 뱅뱅 돌며 뛰고 있었는데 친구가 아들을 멈춰 세우더니 나를 가리키면서 “누구야~ 누구야~” 하고 물었다.
아이가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친구가 이렇게 가르쳐줬다.
‘촌놈 신부님.. 촌놈 신부님...’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 외에 일흔두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당신이 가시려는 모든 곳으로 보내셨다. 그러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3절)고 하신다. 이 양들은 이리 떼의 먹이가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그것은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이사 65,25)라는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보내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째서 양들과 같은 사도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까? 너무나 위험하지 않겠는가? 평화밖에 모르는 양들이 어떻게 잔인한 맹수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목자가 되어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도와주시고 모든 악에서 구해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만 의탁하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돈주머니와 여행보따리,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바삐 다녀야 한다. 그들이 생필품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신발을 신었느냐 벗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살아가는 일을 모두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23)고 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이는 길에서 누구와 이야기 하느라고 자시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늦어지지 않도록 복음 선포의 직무를 서둘러 수행하라는 말씀이다. 인정에 끌린 행위가 거룩한 임무를 방해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신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5절) 우리는 방문을 하면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한다. 좋은 습관이다.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평화를 빌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빌어준 평화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유익한 것이다. 평화가 전달되면 그 사람과 우리에게 다 유익한 일이다.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1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응징하시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응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즉 복음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2절)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할 것인가? 깊이 묵상하자.
<나는 가리라>
상지종 신부님
나는 가리라
주님이 가라시니
주저하지 않고 나는 가리라
주님 뜻 새기고
주님 향기 머금고
주님 한발 뒤 제자로서
주님 옆의 벗으로서
주님 한발 앞서 사도로서
몸소 오실 주님
희미하게나마 드러내고픈
희망으로 나는 가리라
주님이 가라시기에
가야만 할 가고픈 길에
짝지어주신 고운 벗
누구든지 어디에서든지
섬김과 나눔으로 하나 되어
우리 품은 하느님나라
벗들에게 아낌없이 나누고자
기쁘게 나는 가리라
주님을 만나고픈
가난하고 작은 벗들
혹여 나로 말미암아
오히려 주님께로부터 멀어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 정갈하게 가다듬어
오직 주님만을 품고
겸손하게 나는 가리라
아픈 벗들 보듬어주고
갈라진 벗들 이어주고
빗나간 벗들 제자리 찾아주고
만나는 모든 벗들에게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건네며
머물 때에 모든 것이 되어주되
떠날 때는 아쉬움 없이
자유로이 나는 가리라
한걸음 한걸음에
나는 작아지고 없어져
마침내 주님만이 남으시고
그렇게 주님만이 계심으로써
나 영원히 살게 되는 그 날을 향해
기쁨과 고통 보람과 허무
순간순간 연연하지 않으며
더디더라도 쉼 없이 나는 가리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소품집, 분도출판사, pp.107-113)
우리는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 지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동정마리아의 태중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성과 약점을 지닌 참다운 육체를 취하여 오시리라는 것을 거룩한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부유하셨지마는 지극히 복되신 당신 어머니와 같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시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가까워지자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를 거행하셨습니다. 그 다음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맞추려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다른 게 아니라 축복받은 아드님, 영광을 받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위해 탄생케 하시고 십자가의 제단 위에 그분의 고귀한 피의 희생 제물을 그분이 직접 바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난 바로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되고 우리 모두가 깨끗한 마음과 정결한 육신으로 아드님을 받아 모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복음에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며 축복받은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결한 마음과 정신으로 예배 드립시다.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 드리라.”고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또 무엇보다도 이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 드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그분에게 예배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겠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면서 밤낮으로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 기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을 지니도록 합시다. 죄인들의 더러운 때에서 직접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는 애긍 시사를 하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남겨 둔 모든 것을 결국 잃고 맙니다. 그 대신 자기가 실천한 사랑의 열매를 가지고 가서, 그 행실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을 것이며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면에서 지혜롭거나” 현명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히려 더욱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결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보다는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 때문에, 피조물이 모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 끝까지 항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영이 임하실 것이며” 그것을 당신의 거처와 집으로 정하실 것이고, 그들은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아들이 될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 형제, 모친이 될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예전에 제가 아는 수녀님이 계신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과수원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수확 철이 돼서 수확을 해야 하는 데 너무나도 일손이 딸려서 함께 일하시는 몇 분 안 되는 수녀님들이 몇날 며칠을 쉴 새 없이 고생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녀님들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기쁘게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하느님의 일꾼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수확할 것’의 의미는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대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세상엔 그렇게 사랑을 전해주어야 할 대상이 많이 있지만 주님과 함께하는 일꾼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이 일꾼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보다는 자신의 것을 챙기기에 바쁘고,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드리기 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인해 사랑을 전하는 데에 소홀하고 자신만의 안위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꾼은 많은데 정말 일할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시간 세례를 받고 견진을 받으면서 주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과연 얼마나 주님의 충실한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가 참된 일꾼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비움과 실천의 여정 -성인이 되는 길-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아름다운 수확의 계절이자 기도의 계절, 10월 묵주기도 성월에 걸맞는 축일입니다.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교회의 살아있는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우리에게 살 희망과 의욕을 주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확인시켜 주는 영원한 희망의 표지이자 회개의 표지, 그리고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촉구하는 성인들의 존재입니다.
제가 성인 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어김없이 확인하는 사실은 성인의 생몰生沒연대입니다. 저보다 적게 사셨나 많이 사셨나 비교해 보며 삶의 자세를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만 45세를 사셨고 저는 성인보다 거의 25년을 더 살았음을 생각할 때 더욱 분발하게 됩니다.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의 ‘삶의 질’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부쩍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여정’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궁극의 목적지인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하여 여정을 수식하는 단어도 참 많습니다. 순례의 여정, 믿음의 여정, 사랑의 여정, 회개의 여정, 순종의 여정, 겸손의 여정, 비움의 여정, 자유의 여정 등 끝없이 이어집니다.
삶의 여정이 깊어가면서 점차 주님께 가까이 이르게 되고 주님을 닮아 성인의 되어가는 여정,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 목표입니다. 이런 각자 삶의 여정을 한 마디로 정의 하면 ‘삶의 성경책’이요, 저는 신구약 성경뿐 아니라 때때로 각자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삶의 여정을 점검해 보라고 자주 피정자들에게 권하곤 합니다.
예수님이후 가장 예수님을 닮은 분이라 불려지는 성인은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 등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인이기도 합니다. 제가 천주교로 개종하기전 유일하게 알았던 성인이 프란치스코 였고 유일하게 소개받고 알아 입회한 것이 베네딕도 수도회였습니다. 그러니 제 삶의 여정에 운명적 만남의 성인이 바로 약 5세기 간격으로 쌍벽을 이뤘던 성 베네딕도요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참으로 대조적이면서 서로 보완하는 두 성인을 저는 ‘산과 강’이라 칭하곤 합니다.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과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비교하면 더욱 분명히 이해됩니다. 산같은 정주의 표상, 성 베네딕도요 맑게 흐르는 강같은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산과 강’이란 짧은 자작 애송시도 생각납니다.
“밖으로는 산/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되뇌며 밖으로는 산같은 성 베네딕도처럼 살고 안으로는 강같은 성 프란치스코처럼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참으로 비움과 실천의 여정에 항구했던 무소유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파견되는 제자들처럼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도 그러했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실천했던 비움의 성인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존재냐 소유냐?’중 존재를 택해 주님과 일치로 참으로 투명한 삶을 사셨던, 가난한 듯 하나 실은 내적 부유와 자유의 성인 프란치스코였습니다. 말그대로 텅빈 충만의 성인 프란치스코입니다.
텅빈 충만의 기쁨에서 터져 나온 하느님 나라의 선포요, 치유의 기적이자 평화의 선물이요 찬미의 노래입니다. 모든 역경을 비움의 계기로 삼았던 가난과 겸손, 평화와 찬미의 성인 프란치스코입니다. 성인의 유명한 ‘태양의 찬가’를 인용합니다. 가사와 곡은 얼마나 아름답고 마음 설레게 하는 지, 저 죽으면 장례미사때 퇴장성가로 불러 달라 부탁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맘에/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부른다."
성 프란치스코가 눈멀어 보이지 않는 역경중에 제자를 불러 구술하여 적게 한 태양의 찬가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카의 신비를 사셨던 불굴의 찬미의 성인, 온갖 시련중에 단련된 보석같은 영혼의 성인 프란치스코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말했다 합니다. ‘희랍인 조르바’의 저자인 니코스 카잔스키스의 ‘성자 프란치스코’ 저서의 머리말 일부도 생각납니다.
“나에게 성 프란치스코는 사람의 본분을 다한 인간의 표본이며, 시련 또한 평화로운 투쟁으로 이겨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의무를 실천한 인물이다. 그것은 윤리나 진리 또는 아름다움보다도 더 지고한 차원의 것, 곧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이 맡기신 물질을 갈고 닦아 영혼으로 승화시키라는 본질의 의무일 것이다.”
저에겐 제1독서의 욥, 복음의 예수님, 오늘 기념하는 프란치스코가 시공을 초월한 영적 형제들처럼 생각됩니다. 마치 욥은 예수님의 예표같은 분,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분신같은 분처럼 말입니다. 욥의 하느님께 대한 불굴의 희망과 신뢰는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극한 상황의 시련중에도 하느님 생명의 끈, 희망의 끈, 신뢰의 끈을 꽉잡고 있는 욥입니다.
“아,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 구나.”(욥19,25-27).
참 처절한 믿음의 승리요,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욥의 불굴의 믿음, 희망의 고백입니다. 값싼 은총도, 평화도 없듯이 값싼 성덕도 없습니다. 이런 시련을 통해 비움의 여정에 항구할 때 성덕에 성인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모두 예외 없이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비움과 실천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가 10, 1-12(연중 26주 목)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과 “당부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 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이어서,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 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이로,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이루는 이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곳이요, 이 세상이 바로 그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각오를 불러일으키신 다음, ‘하지 말 것’ 세 가지와 ‘해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는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 함은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직 목자이신 당신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라” 함은 머뭇거리거나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열중하라는 말씀이요,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함은 좀 더 좋은 집과 대우를 위해 찾아 나서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 세 가지는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되, 인사를 받으려하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나눌 것이요,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빌어주라 하심입니다,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함은 음식물에 대한 유다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방해 받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요, 동시에 일꾼으로서 삯을 받음이 정당하다 하심입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을 전파하고 증거 하는 것이 소명임을 알라 하심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무엇이 해야 할 일인지’, 그리고 ‘무엇이 하지 말아야 될 일인지’ 말입니다. 주님의 밭에서 당신께서 맡기신 일에 충실한 일꾼이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평화의 본질은 자기 보호이다.< 루카,10/1-12.>
이석진 신부님
자기 보호가 보증 되지 않은 평화는 가짜 평화입니다. 자신은 온갖 위험에 노출되고 보호받지 못하면 참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은 평화를 원하지 않은 사람 안에 머물지 말고 발의 먼지까지 털어벌리고 떠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요사이 참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이 보여 집니다. 거나 정당한 절차없이 참 평화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혹시 깡패 소굴에 들어가 사이좋게 살자고 하지만 힘으로 사는 그들은 정의나 교만한 정신을 버리지 않는한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한 전쟁에는 승자와 폐자가 있어 한쪽이 무릅을 끊을고 항복하여야 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무기 핵은 어느 나라나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 협정만이 평화의 길을 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협정은 협정으로 끝날 수 있으며 더 도전 적이며 무서운 핵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유리합니다. 우리나라는 핵이 없이도 70년을 이북보다 40-50배 잘살게 도였으나 이 행복을 함께 하자는데 함께 아니라 핵의 위력에 항복하라고 합니다. 이때 우리는 구원의 차원을 넘어 그곳을 따나라 하신 이유는 찾은 평화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전교가 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은 하느님 보다 더 강한 신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일본은 선교시작하진지 400년이 넘어도 신자 백만이 안디고 50.60만정도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나라가 어디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왜 주님의 평화가 전착 되지 않은 이유는 가지 생활 방식에 고정 되여 더 높은 이상을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않아서입니다.
우리는 화해를 청하는 사람을 매장하게 물리치고 평화를 깨버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 억지로 닥아 가는 것이 아니라 매물 차게 발의 먼지까지 털어 버리라 하신 말씀에 위로를 느낍니다. 그러나 회두하여 주님의 평화를 찾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찾아 주님의 평황의 상에 초대하여야 합니다. 단 자신을 믿지 않고 쉽게 없질 세상에 가지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우리는 참 평화를 위하여 희생하고 자기를 내어놓은 것은 주님의 십자가길이에서 배워 각자의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참 회해하여 자기희생과 양보심으로 평화의 공동 상속자로 살며 마음에 참 평화가 이 상막한 세상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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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사 중, 성체를 모시기 전에 하는 전례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라는 기도문을 사제가 말하기 전에 하는 행위가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예. 평화의 인사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 …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미사 전례는 왜 성체를 모시기 바로 직전에,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기 전에,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친교와 화해를 체험하고,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모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지닌 상태로 성체를 모셔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순결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라는 뜻입니다.
어느 본당이든지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 공동체의 분위기가 쉽게 파악이 됩니다.
고개만 끄덕이면서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은 상대를 위해 평화를 비는 모습이 아닙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의 눈을 피하면서 주고받는 것 역시 평화의 자녀로서 보여 할 태도는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 적극적으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2.
평화의 의미를 각 개인의 마음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봅니다.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다양한 이유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이든지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반응은 하나입니다.
예, 그것은 불안감입니다.
불안하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의해 마음이 시끄러워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원인조차 찾아내기 힘든 불안감,
그 불안감 속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이 보다 고급화되어 갈수록, 우리는 평화를 깨뜨리는 이유들을 더욱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풍요속의 빈곤이겠지요.
보통 불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신뢰가 깨질 때,
혹은 다가올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겨납니다.
기도하십시오.
고요속에 머물러 기도하십시오.
마음의 평화를 그분께서 허락하시기를 청하십시오.
그 어떤 집중할 것을 만들어 불안을 잊고자 하는 것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불안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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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달자
인영균 신부님
오늘 우리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사도로 파견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예수님의 선택에 따라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씨시의 성인은 작음과 단순함으로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그 겸손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살며 선포하는데 합당한 토양으로 성인을 만들었습니다. 성인에게 유일한 힘은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미사 본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성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셨으니…”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제2의 그리스도다.’
성인의 전구를 통해, 우리가 복음에 따라 살고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우리의 시대정신인 평화
김찬선 신부님
매년 성 프란치스코 축일을 지내며 주제를 잡아 강론을 하였고, 가능하면 그 시대정신과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연결하여 하였지요.
그렇기에 매년 그해의 시대정신이 뭐가 될지 생각하였는데 당연히 올해도 무엇이 시대정신일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는 평화, 남북의 화해와 일치, 이런 것이 시대정신일 거라 생각했는데 여러분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재작년에도 프란치스코와 평화를 주제로 강론을 올린 바 있고 올해 또 같은 주제로 강론을 하는 것인데 재작년에는 전쟁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평화를 얘기하였다면 올해는 평화를 이루어가는 상황에서 평화를 얘기하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에서 평화를 어떻게 실현할까를 논하게 된 것은 실로 기적과 같이 놀라운 것입니다.
작년만 해도 북한과 미국이 말폭탄을 주고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던 것이 남북 정상회담이 세 차례, 북미 회담이 한 차례 열렸으며 말폭탄을 주고받던 북한과 미국의 지도자들이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우리의 대통령이 평양시민을 상대로 연설을 하였는데 이 때 우리 대통령은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았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는데 이제 함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는 취지의 감동적인 연설을 했으며 백두산을 남북의 정상이 함께 올라 천지에 물을 담그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국내외의 모든 전문가들과 언론이 평하고 심지어 김정은 위원장도 문대통령의 끈질긴 노력에 찬사를 표했듯 우리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런 끈질긴 노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모두가 전쟁으로 치달을 때도 우리가 잃지 않은 평화에 대한 희망과 모두가 전쟁을 얘기해도 평화를 얘기할 수 있는 용기가 밑바탕이 되었지요.
저는 이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제가 북한 일을 할 때 북한의 복음화니 인도적인 지원을 얘기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으며 그 이전에 만연한 북한에 대한 비관론 가운데서도 희망과 열망을 제 안에 간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습니다.
이것을 저는 프란치스코에게 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 당시 교회는 전교회가 전쟁에 몰두하고 왕들을 총동원하여 십자군을 독려하였는데 이때 프란치스코는 전쟁이 한참인 곳으로 이슬람의 지도자 술탄을 찾아갔습니다.
이때 프란치스코가 술탄을 찾아간 용기도 대단하였지만 온 교회가 전쟁을 얘기할 때 평화를 얘기한 것이 더 대단하지요.
참으로 이상한 것은 누구나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원하고, 또 전쟁은 사라지고 평화로운 세상이 와야 한다고 말은 하는데 실제로는 싸우자고만 하고 평화를 얘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적이 나타났기 때문이고 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적이 나타나면 싸워야 하는 것이고 적이라고 하는 순간 싸워 이겨야 하지요.
국가 간의 거대한 관계가 아니라 우리 개인의 관계를 봐도 우리는 선을 악으로 만들고, 형제를 적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형제가 악이고 적인 이상 우리는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합니다.
그러니까 악과 적 이전에 우리는 상대를 형제로 봐야 합니다.
나에게 잘못했으면 잘못한 형제이지 적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내게 잘못한 사람이 적이 아니라 형제이기 위해서는 적 또는 원수를 형제로 용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고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태양의 찬가에서 ‘당신 사랑 까닭에 용서하는’ 형제는 복되다고 하고 이들을 통해서 찬미 받으시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만 해도 형제를 악으로 만들어놓고는 용서하려고 갖은 애를 쓰는데 왜 선인 형제를 악으로 만듭니까?
내 마음에 안 드니까 나쁘다고 하고, 나는 선인데 나와 다르니 악이라고 하며, 듣기 싫은 소리 했다고 악이라고 하고 원수로 만드는 것이지요.
하느님 안에서 형제임을 발견하고, 하느님 사랑 까닭에 내게 잘못한 것을 용서하는 우리가 될 때 일본과 우리나라 국간 간에, 남북 간에도 평화가 올 것입니다.
하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제가 지은 주의 기도를 소개하며 오늘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아버지인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
오늘 북녘의 형제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 서로 잘못한 이를 서로 용서하오니
그 용서를 보시고 저를 용서하시고,
형제를 악으로 보는 악에서 구하소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 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손길은
허물어진 우리 마음을
평화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비워야 채워지는
평화의 길입니다.
평화의 길은
집착의 굴레를 벗어나는
영혼의 자유로운 길입니다.
자유로우신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보여주십니다.
가장 약한 것이
실은 가장 강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평화로 하나가 됩니다.
평화는 믿음으로
채워집니다.
믿음은
풍요롭습니다.
풍요로운 믿음은
복음적 가난을
축복합니다.
복음적 가난으로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평화를
만납니다.
우리가 찾는
진정한 보화는
감사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살리는
가난입니다.
가난은
하느님을 향한
진심어린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하느님의
기쁨이 평화로 가득
채워지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것을 살게하는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