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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10월 4일 (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10.04|조회수38 목록 댓글 0

제1독서

<아침에게 명령해 보고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았느냐?>
▥ 욥기의 말씀입니다. 38,1.12-21; 40,3-5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12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
13 그래서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어
악인들이 거기에서 털려 떨어지게 말이다.
14 땅은 도장 찍힌 찰흙처럼 형상을 드러내고 옷과 같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15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빛이 거부되고 들어 올린 팔은 꺾인다.
16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
17 죽음의 대문이 네게 드러난 적이 있으며
암흑의 대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18 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19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20 네가 그것들을 제 영토로 데려갈 수 있느냐?
그것들의 집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느냐?
21 그때 이미 네가 태어나 이제 오래 살았으니 너는 알지 않느냐?”
40,3 그러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5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갈라 6,14-18)와 복음(마태 11,25-30)을 봉독할 수 있다.> 

 

 

말씀의 초대

바빌론에 유배된 이들은,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다고 고백하며 참회 기도를 드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는 고을들에게, 당신을 물리치는 자는 당신을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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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룩 예언자는,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다고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고을을 향해 불행하다고 선포하시며, 카파르나움도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욥기 38,18). 이것이 문제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의인입니다. 그가 고통을 당한 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께서 의인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들을 벌하신다고 주장하지만, 욥이 보는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니, 욥 자신에게서 이미 그러한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께 질문하고 탄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오히려 물으십니다. 아침에게 명령하여 본 적이 있는지, 새벽에게 자리를 지시하여 본 적이 있는지, 많은 물음을 던지십니다. 욥은 이 물음들에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많고,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이 물음들로, 욥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십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그것이 나의 고통이거나, 적어도 나에게는 무엇보다 중대할 수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계절이 바뀌고 해가 뜨고 지듯이, 동물들이 살아가듯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할 따름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욥은 입을 막고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지만, 내 삶 안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다 아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고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 그것이 욥기가 말하는 지혜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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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은 무겁고도 매섭습니다. 예수님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불행을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선언을 이해하려면 이 세 도시가 예수님의 주된 활동 무대였고,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셨던 곳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시는 동네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바빌론 임금의 생각을 적은 것에서 가져온 말씀인데, 이사야는 바빌론 임금이 하늘까지 올라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질 것을 꿈꾸다가 저승으로 떨어질 것을 예언합니다.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장소였고, 당신 구원 사업의 중심 장소로서 들어 높여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은 교만하고 완고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척했기에 불행을 선고받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전해진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배척하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넘치는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깨닫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생활의 중심으로 삼도록 이끄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에 승복하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회개의 여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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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합리화할 수 있지만, 내 양심의 거울을 비추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고, 온전히 자신의 부족한 면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자신의 허물을 그대로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것이 하느님 백성이 가진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아무리 큰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새로운 회개의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늘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앞에 금방 보이는 죄와 허물보다 더 큰 잘못은, 자신의 죄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고서도 그것을 덮어 버리고 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기만하고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도 바로 이러한 교만, 곧 하느님에 대한 교만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 심한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 반대로 예루살렘이 칼데아인들에게 점령당하여 불탄 지 5년이 지난 뒤 쓰인 바룩의 참회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고 있지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고백하는 신앙인의 참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보여 주는 성공과 화려함은 세상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진실함과 하늘 나라의 영광은, 비록 죄가 크고 허물이 많지만, 자신의 영혼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소박한 영혼에게 돌아갑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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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빼어난 외모의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를 하나 얻습니다. 그러고서는 ‘나의 미모는 영원하고, 그 대신 그림 속의 내가 늙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특히 그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초상화의 자신의 모습이 흉측하게 변해 간 것입니다. 자신의 미모만 믿고 살아온 도리언 그레이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한탄합니다.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대가를 치렀다면 이렇게까지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복음서 곳곳에서는 예수님께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부으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무섭고 엄하신 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준엄하게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것은 돌처럼 굳어진 그들의 마음을 깨고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세 고을을 향해 불행하다고 한탄하시며 견디기 어려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저주의 경고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진리를 깨닫기를 바라시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복음에서 ‘위로’만을 얻고자 합니다. 물론 때로는 진통제 같은 위로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통제만 바라며 산다면, 도리언 그레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영적 건강을 위해서 더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치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하신 것이 바로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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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시대의 신흥 도시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시리아와 인접한 국경 도시로 사통팔달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카파르나움에는 가나안 지역을 통괄하는 로마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에 더욱 번창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상주하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이교 문화와 장사꾼들로 넘쳐 납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들떠 있었고, 조용했던 시골엔 돈이 풍족해졌습니다. 미래는 온통 희망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기적도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여겨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맒苛求?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과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베푼 기적을 티로와 시돈에서 베풀었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다.’ 기적 앞에서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 완고함을 ‘불행’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언제까지나 햇볕만 내리쪼이는 땅은 없습니다. 햇볕만 받으면 땅은 서서히 갈라지고 맙니다. 언제까지나 비바람만 맞는 땅도 없습니다. 바람의 땅도 언젠가는 숲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이 진리를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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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을 하는 듯 보이는 오토바이 몇 대가 곡예를 하듯 자동차 사이를 내달립니다. 교통이 복잡한 도시에서 오토바이 배달은 신속하게 물품을 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토바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토바이 배달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는 이들은 목숨을 담보로 그날의 할당 물품을 다 배달해야 합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폐지가 잔뜩 실린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지만 아직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빵빵거리다가 그 리어카가 앞을 지나가자 신경질이 난 듯 가속 페달을 밟고 쌩하니 달려갑니다. 서울 제가 사는 지역의 풍경입니다.

경제 성장을 말하며 국민 소득 2만 달러를 이야기하지만 사회의 절대 빈곤층은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빈곤에서 탈출하려고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며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인정은 사라지고 소외감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날마다 뉴스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부정부패, 사기, 공갈, 협박, 도박, 자살, …….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 이렇다면 우리 사회의 내부는 어떻겠습니까? 거기에다가 경쟁 사회에서 사회적 패자들의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까지 합하면 우리 사회는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혼돈과 어둠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어느 20대 청년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자신은 성장하면서 오로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으며, 한 번도 삶의 진정한 행복과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을 두고 ‘영혼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불행한 세대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도시를 바라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바라보며 탄식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도시를 향해서도 똑같은 탄식을 하실 것 같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될지 정말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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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참으로 뜻밖의 말씀입니다. 일찍이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실 때 그 고을에 의인 다섯 명만 있어도 진노를 거두겠다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그분의 자비를 청했던 것입니다. 자비의 주님께서 왜 불행을 언급하셨을까요? 

벳사이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사도의 고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도시에서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간택하기도 하셨습니다(요한 1,43 이하 참조). 사도들의 절반이 이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또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드러내시면서 소경을 고쳐 주기도 하셨습니다(마르 8,22 이하 참조).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곳도 바로 벳사이다였습니다(마르 6,30 이하 참조). 그만큼 이 도시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무척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저주라기보다 예수님의 탄식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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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을 하는 듯 보이는 오토바이 몇 대가 곡예를 하듯 자동차 사이를 내달립니다. 교통이 복잡한 도시에서 오토바이 배달은 신속하게 물품을 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토바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토바이 배달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는 이들은 목숨을 담보로 그날의 할당 물품을 다 배달해야 합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폐지가 잔뜩 실린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지만 아직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빵빵거리다가 그 리어카가 앞을 지나가자 신경질이 난 듯 가속 페달을 밟고 쌩하니 달려갑니다. 서울 제가 사는 지역의 풍경입니다.

 경제 성장을 말하며 국민 소득 2만 달러를 이야기하지만 사회의 절대 빈곤층은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빈곤에서 탈출하려고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며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인정은 사라지고 소외감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날마다 뉴스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부정부패, 사기, 공갈, 협박, 도박, 자살, …….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 이렇다면 우리 사회의 내부는 어떻겠습니까? 거기에다가 경쟁 사회에서 사회적 패자들의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까지 합하면 우리 사회는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혼돈과 어둠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어느 20대 청년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자신은 성장하면서 오로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으며, 한 번도 삶의 진정한 행복과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을 두고 ‘영혼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불행한 세대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도시를 바라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바라보며 탄식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도시를 향해서도 똑같은 탄식을 하실 것 같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될지 정말 두렵습니다.

기도가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요? 미국의 심장병 전문의 벤슨 박사는 노인 73명을 선발해서 절반은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갖도록 하고, 나머지는 평소대로 살게 했습니다. 3년간의 관찰 결과, 아침저녁으로 기도한 이들은 혈압이 낮아지고 병에 대한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통해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이 장수하는 이유가 규칙적인 기도, 식사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원리를 이용해서 ‘정숙 치료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울증이나 불안이 심한 사람을 열흘간 명상하게 하여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정 후 정신적 건강을 얻었다고 느끼는 등 의학적 효과를 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하는 곳에는 영적인 기운이 있어서 그 곁에만 있어도 치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곳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도가 가득해서, 그냥 그 곁에만 있어도 건강해질 수 있다면 정말로 멋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건강을 통해 이 사회에서 더 힘차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회에도 건강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교회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만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개의 도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에 위치하고 있는 당시의 상업 도시로 많은 이가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를 향해 단호하고 무거운 경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영적, 육적 건강으로 이끌어 주는 공동체가 아닌, 오히려 하느님께 멀어지면서 공동체의 구성원들까지 망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부터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나’가 늘어날수록 우리 공동체는 더욱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에 건강을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가정 안에, 교회 공동체 안에, 마지막으로 세상 안에서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과연 주님께서 함께하고 있나요? 그래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가 되고 있나요? 오히려 힘을 빼는 그래서 함께하고 싶지 않은 공동체의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모든 시작은 ‘나’부터 이루어집니다. 지금 당장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인 사랑의 삶에 적극적인 ‘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바꿀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또 그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루 하루 살게 하시고 순간순간 누리게 하시며 고통을 평화에 이르는 길로 받아들이게 하시옵소서(라인롤드 니버, ‘평온을 비는 기도’ 중에서).

 

 

 

무소유의 삶 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대자유의 삶을 찾은 프란치스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톨릭 성인(聖人)이면서도 타 종교 신자들뿐 아니라, 무신론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성인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개척한 성화의 길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는 복음서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여러 면모 가운데, 머리 두실 곳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예수님, 그래서 그 어느 곳에도 묶이지 않으셨던 대자유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흠모하고 추구했습니다.

인간적 나약함과 유한성을 딛고, 그 위에 펼쳐진 자기 극복과 자기 해방과 자기 이탈을 위한 프란치스코의 하루 하루 여행길은 참으로 위대하고 빛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의 성화(聖化) 여정을 바라볼 때 마다 큰 감탄과 함께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발밑을 내려다보며 큰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 자신으로부터 한번 이탈해보겠노라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보겠노라고, 갖은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보겠노라고, 발버둥쳐 왔지만 아직도 제자리 걸음입니다.

초심자 시절 지니고 있었던 악습을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 일상적으로 짓던 죄를 아직도 같은 방식으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탈, 자유, 해방...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프란치스코의 삶이 대단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한올 한올 얽히고 꼬인 실타래 풀듯이 인내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자신의 문제나 약점들을 극복해나갔습니다.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을 머릿속이나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행해나갔습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대 성인 프란치스코에게도 젊은 시절의 흑역사(黑歷史)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지 아십니까? 사실 그의 본래 이름은 죠반니 베르나도네(Giovanni Bernadone)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자수성가한 포목상이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부자 아버지 덕분에 호화판이었습니다.

당시 아시시 남자 청년들의 로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옆 나라 프랑스로부터 건너온 청년 문화 중에 하나였습니다. 멋진 기사(騎士)가 되고, 잘생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아름다운 여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리던 여인을 찾게 되면, 미리 준비해둔 낭만 가득한 음유시를 한편 멋드러지게 읊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프란치스코 역시 프랑스 음유 시인들의 서정시를 열심히 읽고 외웠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프랑스 패션으로 온몸을 치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바로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어린 프랑스인’이라는 뜻입니다.

한때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 이웃 사랑의 실천이나 청빈의 덕과는 철저하게도 담을 쌓고 살아왔던 프란치스코, 잔뜩 겉멋만 들어 유행의 최첨단을 걷고 있던 그가, 적당한 회개가 아니라 180도 완전 회개해서, 몇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 만인들로부터 존경과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의 신앙 여정, 회개 여정, 하느님을 찾아갔던 순례 여정은, 한없이 부족한 우리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이 우리의 가난과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가난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는 더없이 환하고 행복한 얼굴로 가난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은 반면, 그는 무소유의 삶 속에 진정한 행복, 대자유의 삶을 찾았습니다.

 

 

 

회개: 병신 여우 짓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는 것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삶의 궁핍함과 어려움에 지쳐 무작정 숲속을 거닐던 사나이가 다리 잃은 여우를 보았습니다. ‘저래서 어떻게 살아있을까?’ 이렇게 궁금해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사냥한 먹이를 물고 들어와서는 실컷 먹고도 여우가 먹을 고기를 남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도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은 여우를 먹이셨습니다. 사나이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크신 선의에 깊이 탄복하며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하느님은 저런 여우도 살리시는 분이시구나. 하물며 당신을 믿는 나야 얼마나 잘 먹이시겠나. 지금까지 먹고 살 걱정만 하며 살아온 내가 부끄럽구나.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사나이는 여러 날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며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며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문득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 거짓의 길에 들어선 자야. 참을 향해 눈을 떠라! 병신 여우 흉내랑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아라.”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시어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그분의 기적들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은총만 바라고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회개란 받기만 하는 존재라는 처지에서 나도 예수님처럼 내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성공적인 학자이자 신학자였지만 자신의 감정적, 영적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불안감과 내면의 혼란을 고려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지원에 압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그에게 보여준 사랑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고, 이에 따라 영적인 불균형이 생겼습니다.

나우웬의 심오한 마음의 변화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그림을 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형에게서 자기 모습을 봅니다. 동생처럼 회개하고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양심은 받은 것에 보답할 때 자유로워집니다. 사실 지금까지 받기만 하였지, 보답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결코 완전히 갚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끼며)에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바뀔 때만 자신의 영혼이 진정한 치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수용에 대한 나우웬의 이해의 변화는 그가 자신의 권위 있는 학문적, 신학적 경력을 뒤로하고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인 라르쉬(L'Arche)에서 살고 일하기로 결정한 데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나우웬은 어떤 세상적인 방법으로도 자신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며 평안을 찾았습니다. 장애인을 섬기면서 그는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 사랑받을 가치가 있거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사랑을 주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여덟 살 이후로 손과 발이 없는 것에 좌절하여 자살을 세 번씩이나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망 전도사로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강사로 살아가면서 이미 받은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부족하게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에서 갚아나는 삶을 사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은총을 받으면서도 끝내 이런 회개가 이뤄지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오늘 멸망을 예고한 도시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인 아시시에 가면 성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성인은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은 새와도 대화 할 수 있었고, 장미와도 대화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이 기도하던 성당에는 비둘기 한 쌍이 있습니다. 이 비둘기는 몇 백 년을 이어가며 성인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인이 유혹을 견디기 위해서 장미 밭에서 굴렀을 때, 장미는 가시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인이 기도하던 곳에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하면 좋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영성’을 나누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작은 존재로 여겼고, 가난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세속적인 재화를 멸시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마음에서 진정한 부유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처럼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프란치스코는 참된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모든 죄악 된 일을 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실 수 있다면, 그분은 누구를 통해서라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 겸손함 덕분에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인 나병환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안아주었는데, 그것은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자만과 자기 과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은 우리에게 겸손의 덕을 되찾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생명’ 존중입니다. 이는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을 "형님 태양," 달을 "누님 달"이라 부르며 모든 피조물들을 하느님의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자연은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반영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창조물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시적 표현에 그치지 않았고, 매우 깊은 영성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창조물을 돌보는 것이 창조주를 존경하는 방법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환경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를 돌보는 것이 단순한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나무, 강, 생명체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손길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지구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후손들이 그 열매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그리스도께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이웃을 향한 그의 급진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로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크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단순한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이들들, 병자들, 소외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그들을 조건 없이,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겸손, 단순함, 창조물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헌신의 메시지로 세상에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우리에게 거룩함으로 가는 길이 부나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신실함 안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난한 자들을 안아주고, 창조물을 돌보고, 모든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묵상하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고을을 향해 불행하다고 선포하시며, 카파르나움도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주된 거점으로 삼으셨던 사목의 중심지였습니다. 첫 번째로 부르신 제자인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이 곳 출신이었고,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세리 마태오가 바로 이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면서 너무나도 많은 은총을 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모습으로 인해 결국 예수님께 저주와도 같은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주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으로 존재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증거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그렇게 주님께서 주시는 수많은 은총으로 살아가면서도 참된 회개의 삶을 이루어가지 못하곤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카파르나움의 사람들처럼 주님과 늘 가까이 살아가면서도 그 주님의 자비를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인간적인 욕심의 날들을 이루어 가곤 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나는 얼마나 주님의 은총과 자비에 화답하며 참된 회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하겠습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코라진, 벳사이다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기적을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다면 그들은 회개하였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카파르나움을 향해서는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고 심지어 저승에 떨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시고는 이어서 파견될 제자들을 향해서는 다음과 같은 힘을 주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이후 일흔두 명의 제자들은 파견이 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몇몇 지역의 이름을 대면서 불행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실 저는 예수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것을 알고 올바른 길로 가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두고 한 불행 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표증을 보고 믿지 않는 이들을 놓칠 수가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오늘 나온 고을들이 회개하여 하느님의 표증을 믿고 다시 진리의 길로 오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눈물나는 마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슬픈 마음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용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을 단 한 명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와 똑같은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약한 존재들입니다. 걸어가다 넘어집니다.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서 실망하고 자책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더 용기를 내라고 외치십니다. 그리고 혼자 하지 말고 자신과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미십니다. 인간이기에 또 그래서 약한 존재이기에 넘어지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이것은 죄가 아닙니다. 진정한 죄는 넘어졌음에도 일어나지 않고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넘어졌어도 당당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하느님을 불러 봅시다. 아멘!

 

 

 

세상을 구원할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 “회개, 가난, 겸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인도하소서.”(시편139;1.24ㄴ)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흡사 10월을 대표하는 가난과 겸손의 성인처럼 느껴집니다. 성인 축일 때 마다 확인하는 생몰연대와 산 햇수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만 44세를 살았지만 영향력은 영원합니다. 기후위기를 겪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종파를 초월하여 개신교는 물론 불자들에게도 가장 사랑받는 프란치스코 성인이요, 오늘 축일을 지내는 교황님도 프란치스코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시는 가장 현대적인 성인 프란치스코입니다. 성인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산과 강”이라는, 성 베네딕도회 영성을 상징하는 제 좌우명 자작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정주의 산, 흐르는 강이 기막힌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이래야 정주는 안주가 되지 않고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산”이 상징하는 바 성 베네딕도라면, “강”이 상징하는 바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두 분은 경쟁 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의 성인이요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를,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를 산다면 정말 “Ever old, Ever new”(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 최고의 영성이겠습니다. 

 

성인의 감동적인 일화는 한둘이 아닙니다. 삶전체가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한권의 살아 있는 복음서 같습니다. 오늘 본기도가 참 아름답게 성인의 삶을 잘 요약합니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가 성당의 정문 앞에서 바치던 기도입니다.

“그리스도님, 저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경배하며 흠숭하나이다.”

예수님과 산상수훈의 “참행복”을 사랑했던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의 고백입니다.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성프란치스코는 시편 141장을 읊은후 선종했고 마지막 유언은 “내 형제 죽음이여, 어서 오라.”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지향과 동일하다 여겨지는 널리 회자되는 “평화의 기도”와 더불어,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요약하는 “오, 감미로워라” 시작되는 성가 “태양의 찬가” 역시 너무나 유명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고백의 기도이자 시요 노래입니다. 이에다 몸과 맘이 하나된 춤까지 곁들이면 정말 멋지다 싶습니다.

 

시간되면 “평화의 기도”도 읽어보시고 “태양의 찬가” 노래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장례미사때 입당성가는 “태양의 찬가”를, 퇴장성가는 “평화의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성인은 1226년 선종하신 2년후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된후, 1939년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성인은 모든 동물들과 새들, 그리고 자연환경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과 제1독서 욥기에서도 성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 요소를 발견합니다. 바로 회개와 가난, 겸손입니다. 저는 감히 오늘 강론 제목대로 “세상을 구원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회개-가난-겸손” 이라 주장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숱한 기적에도 회개하지 않은 악한 세 도시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너 벳사이다야! 너 카파르나움아!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기적의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회개요,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이자 성인들의 삶은 더욱 그러합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아갔던 성인들이요 성 프란치스코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인은 결정적 회개에로 이끈 성서는 마태복음 10장9절 말씀이었고 성인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회개 은총의 열매가 바로 자발적 가난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고백할 정도로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정말 가난을 사랑한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가난한 부자일 것입니다. 엊그제 주교들의 시노드 피정 개막 연설시 교황님의 한 대목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로서 여기 있습니다.”

  (We are here as beggars of God’s mercy)

 

우리가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이라면 예수님은 거지 대장쯤 되지 않겠나 불경한(?) 생각도 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의 회개가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됩니다. 하느님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물음에 말문이 막힌 욥은 회개와 더불어 침묵중에 진짜 가난과 겸손을 깊이 체험했음을 다음 고백이 입증합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몰라서 의심에 무수한 의문들을 남발하지 정말 하느님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침묵할 것입니다. 정말 주님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주님 자비의 거지들로 행복할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만날 때 참된 가난과 겸손이요 이런 자기를 아는 가난과 겸손이 참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미사전례중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위해 서있는 빈손의 대열은 얼마나 거룩한 아름다움의 복음적 장면인지요! 가톨릭 교회의 영성체가 아니곤 도대체 어느 종교에서 이런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회개한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로서 가난과 순수, 겸손과 지혜의 절정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감동적 장면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또 하나의 거룩한 하느님의 거지가, 성 프란치스코가 되어 살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3-16).”

 

1)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이미 지은 죄에 대한 ‘선고’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이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목자이신 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경고’이고,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타이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특정 도시들만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전체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는 “불행하게 될 것이다.”, 즉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2)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 또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몰라서 안 믿었더라도, 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안 믿었더라도, 죄는 죄이고,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안 믿은 사람들과 믿는다고 자처하면서도 믿는 사람답게 살지 않은 사람들과는 좀 다른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또는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느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살았지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고,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들을 기회가 없어서 전혀 몰랐던 경우와 듣고서도 거부한 경우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에 성탄절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고, 그날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믿지 못했다는 변명은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북한 지역 사람들이나 이슬람 지역 사람들이라면 그런 변명이 통할 수도 있겠지만...

 

3) 13절의 예수님 말씀의 뜻은, “너희가 얼마나 큰 은총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깨닫고,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은 “너희가 받은 은총들”입니다.>

“나는 받은 은총이 없다. 그러니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큰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짚어보면서 “이것도 은총이었고, 저것도 은총이었다.” 라고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그게 무슨 은총이냐?” 라고 부정해 버리면 도와줄 방법이 없고,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뉘우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카파르나움’은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교만한 위선자들을 가리킵니다. “나는 정말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틀림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스스로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따로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교만과 위선부터가 죄입니다.

16절의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려고 떠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곧 ‘예수님의 말씀’이고,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보증해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신앙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며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복음을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합니다.

 

4) 우리는 ‘회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를 단순하게 죄를 뉘우치는 일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죄를 뉘우치는 것은 회개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회개는 인생과 삶 전체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전부 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변화시킨 다음에는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보면, 그는 자기 죄를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았고, 그냥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3-5). 배반자 유다가 자살한 것은 죄책감 때문일 텐데, 용서받기를 거부한 일이기도 하고, 용서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린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멸망으로 갔습니다(마태 26,24).

 

 

 

김준수 신부님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10,13)
 
우리는 삶을 살아오면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싶은 이들이, 많은 경우 가장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사람들과 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 때문이든지 그 관계가 잘못될 때 가슴에 상처로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전 보았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가슴에 와닿았던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지금도 마음에 남아 흐르고 있습니다. 『 ‘동생의 죽음에 대해 정말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다 나에게 다 말했니?’ 아버지가 물으셨다. ‘다 말했어요.’, ‘별로 할 애기가 많지 않지, 그렇지?’, ‘네’라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어요.’, ‘나도 그것을 알고 그렇게 설교해 왔단다.’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저와 저의 두 형들의 부족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대목입니다. 아직도 저의 큰 형과 작은 형은 I.M.F 이후 맺힌 매듭을 풀지 못한 채 형제가 아니고 원수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 형들을 화해하도록 노력하고 기도하지만 아무런 화해의 몸짓을 엿볼 수 없습니다. 삶이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고 말하지만, 저의 두 형들은 아직도 이 말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계속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늘 복음의 코라진,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꼭 들어야 할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에서 주로 활동하시면서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였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기적을 이방인 지역인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들쓰고 회개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0,13참조) 이런 배경에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이들 도시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시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부모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자식에게 안타까운 심정에서 ‘애야, 이제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너 그렇게 살다가 불행해진다!’라고 야단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야단이 아니라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의 불행은 곧 부모의 불행인 것처럼 코라진,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의 불행은 곧 예수님의 불행이며 고통이기 때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움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에선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스스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랑이란 이름의 자유인 것입니다. 그가 이해하지 않으면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랑의 무력함에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닫힌 인간의 영혼을 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닫힌 문을 열고 나오시도록 다만 문을 두드리실 뿐입니다. 변화되기를 바라시고 변화할 수 있도록 은총과 사랑을 베푸실 뿐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리시고 참아주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10,16)하고 말씀하신 것도 사실 제자들에게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코라진,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의 경우처럼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쏟아부었지만, 배척과 거부를 받았음을 환기시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디서든지 어떤 일(=배척과 거부 등)을 겪게 되던지 결코 실망하거나 의기소침하지 말고 꿋꿋이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치유하는데’ 모든 힘과 열정을 집중하도록 격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좋은 결실맺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자책하거나 낙담하지 말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라고 느껴집니다. 이는 단지 일흔두 제자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모든 이에게 대한 지지와 격려입니다. 아버지와 당신 그리고 우리를 한 운명공동체로 묶어 주시고 우리의 사명 의식을 고취하시려는 당신의 깊은 배려와 지지를 표명하신 것으로 알아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지만, 때론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자책하거나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그들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전한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었다면,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히 사랑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진정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귀하게 여기고 체험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사랑하려는 그 모습이 진정 예수님께 큰 기쁨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은총을 받았지만, 그 사랑에 상응한 삶을 살지 못한 채 남남 아닌 남으로, 원수처럼 살아가는 저와 제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맺히고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오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축일을 맞는 모든 분에게 축하와 함께 기도드립니다. 성인처럼 평화의 사도가 되길 바랍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 안에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곧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에 대한 불행 선언’(13-15절) 부분과 ‘파견 받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파견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16절)는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 코라진, 벳사이다, 가파르나움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서는 회개하지 않은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도 회개하지 안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은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도 여전히 회개하는 일에는 더딘 저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애태우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얼마나 존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고,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를 깨우쳐줍니다. 

동시에 파견 받은 이는 파견 받은 분에게 메여 있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파견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는 너희를 보낸 분께 매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매달리지 말고 보내신 분께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말씀’을 품고 있어야 하고, ‘말씀의 영’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파견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그렇습니다. 

파견 받은 우리는 ‘아버지의 영’을 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루카 10,16)

 

주님!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명심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하여도, 언제나 저를 보내신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말씀을 품고, 당신의 영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들은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제한된 인식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회의 공감대와 공론화를 거쳤다고는 하나 마치 실험실에서 모든 변수를 제외한 상태에서 얻은 원리와 원칙, 규범과 규정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변수가 다 활개를 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원리와 규정들이 다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욥은 지엄하시고 무한하신 주 하느님 앞에서 고합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욥 40,4-5)

오늘 독서를 들으며 고백합니다. 주 하느님의 무한하심과 지엄하심 앞에 우리의 앎과 원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그리고 오히려 그 지엄하심과 무한하신 주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항변과 원망을 가벼이 뜷고 우리를 감싸안으시려고 구원해 주시려고 오고 계심을 접하며 주 하느님께 감사의 정을 감히 올려드립니다.

 

 

 

하느님을 전하는 복음은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루카 10, 13-16> 10월 4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복음이란? 복된 음성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하느님 자체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말씀의 주인을 알고 말씀의 주인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느님처럼 살면서 전해야지 말씀과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지 못합니다. 선교사는 가정과 고향, 나라를 떠나 하느님 말씀만 의식하고 목숨을 내놓고 전하며 전하는 사람은 주님이 되어야 바로 전합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고 아무것도 세상의 것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미사 끝에 파견받으며 무엇을 갖고 파견되는 것이 아니지만, 세 가지 은혜를 갖고 파견됩니다. 미사의 은혜는 자비와 일치와 생명입니다. 자비로 자신을 비우고 주님과 하나 되고 주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파견되는 사람은 죄가 없고 깨끗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죄를 짓고 약점을 갖고 남 앞에 나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미사 시작에 자비 송을 통해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일치의 은총을 말씀의 전례를 통해 받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미사드리는 사람은 주님과 하나 됩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모르던 사람과 의사가 통하고 생각이 같아지고 말도 같아지게 되어 모든 일을 하나 된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준비 중의 하나는 마음속에 아무런 장애가 없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들으려면 말씀을 알아들을 준비가 필요합니다. 들을 마음이 먼저이고 들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알아듣는 사람에게 알려줘야 하지, 알지 못하면 소귀에 경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미사 후에 복음을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하고 하루를 산다는 것 미사를 드려도 헛 미사입니다.

미사의 은혜 중 첫째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면서 빵이 몸이 되고 포도주가 피가 되어 내 안에 생명을 받았으면서 기적의 음식을 먹고 마신 것이 각자의 몸에서 생명에 이르지 못함은 헛 미사입니다. 자연히 주님 복음 전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너 코라진아, 너 벳사이다야 불행하다.” 하신 것같이 은혜 충만한 미사를 드리고 아무 소용이 없는 미사가 되는 것은 최후 만찬 시 세상 끝 날까지 행하라고 하신 기적의 현실을 받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다음부터 미사에서 기적을 보고 기적을 현실화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하며 모두가 미사드리며 미사의 기적이 생활화하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함승수 신부님

사막 한가운데서 목 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오아시스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분명 ‘기쁜 소식’입니다. 자기 목숨을 건질 소중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진짜 기쁜 소식으로 완성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들은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들은 말을 곰곰이 되새기며 오아시스를 찾아간다면 물을 마시고 살게 될 것입니다. 반면, ‘사막 한 가운데에 오아시스가 어딨어?’라는 생각으로 자기가 들은 말을 허튼 소리로 여기며 무시한다면 탈수 증세로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누가 그를 죽인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불신과 완고함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세 고을의 주민들에게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셔서 망하라고 ‘저주’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 세 고을은 예수님의 주 활동무대로써,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시고 놀라운 기적들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을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좋은 말씀을 들었으면 들은 것을 실천에 옮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겁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세속적인 재물과 성공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어느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 잘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원래 걷던 잘못된 길을 계속 걸어갑니다. 그 길의 끝에 멸망이 있음을 알면서도 간 것이니 파멸에 대한 책임은 그들 스스로에게 있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불행하여라’라는 말씀은 ‘그러다가 정말 큰일나니 얼른 발길을 당신께로 돌리라’는 애처롭고 간절한 ‘탄식’이었던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은 그분에 대해 아는 것으로, 그분 말씀이 진실임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그 말씀을 ‘주님의 말씀’으로, 자기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 실천을 통해 잘못된 방향으로 걷고 있는 자기 발걸음을 주님께로, 그분께서 이끄시는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에 언급되는 세 고을 사람들이 멸망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회개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천주교 신자분들 중에 회개를 꺼리고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들으면 자기 삶을 성찰하는게 아니라, 자기는 특별히 큰 죄를 지은게 없다고 항변하시기도 하지요. 물론 그분들이 주장하시는대로 십계명을 대놓고 거스르는 대죄는 안지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죄 없다’는 완고한 태도로 나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욕망이 이끄는대로 계속 걷다보면 그 길의 끝에서 ‘지옥’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어서 회개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방향 돌리기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장소들, 즉 코라진, 카파르나움, 벳사이다 이 마을들은 예수님이 공생활 중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역인데 거기서 제자들도 불렀고, 여러 기적들도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그 고을들을 크게 꾸짖죠. 불행해지고 저승에까지 떨어지고 심판 날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은총이 불행으로 바뀌고 기적이 심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생명이 죽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을 가까이 체험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었던 고을들인데, 무엇이 그들에게 죽음의 그늘을 가져오게 했을까요? 기적은 일어났지만 정작 자신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았기에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기적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기적을 체험하면 잠깐 기분이 좋을 수는 있고 순간 뜨거워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회개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나를 더 깊은 어둠으로 끌고 갑니다.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다시 방향을 돌리는 게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성찰을 요구합니다. 지금 내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요. 나의 삶을 다시 하느님께로 돌리기 위해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루카 10,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참된 인생의
가치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에
있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청빈의 힘으로
피조물을
더 피조물이게
했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이렇듯
청빈의 가치가
식어가면
교회를 향한
우리의 열정도
식어갑니다.

청빈의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청빈하셨기에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움을
사셨던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가난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난과 함께
사셨던
성 프란치스코의
삶입니다.

가난의 변화는
자유의 변화입니다.

하느님의 가난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
조건 없는
믿음이듯
조건 없는
청빈으로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빛의 길은
가난의
길입니다.

가난의 길로
묶여있던
모든 것들이
자신을 낮추고
낮추며 풀리기
시작하며
한 몸이 됩니다.

새로운
가난의 정신이
새로운
탄생입니다.

하느님의 가난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관념의 껍질을
벗어버리는
가난의 실천이
바로 복음이
말씀하시는
참된 사랑이며
참된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참된 회개의
시간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평소에 존경하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본당 사목을 아주 열정적으로 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의 사랑도 많이 받으시지요. 그런데 어느 본당으로 이동을 하셨는데 부정적인 평가의 말들이 들리는 것입니다. 본당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린다, 신부님께서 개인적인 욕심을 부린다, 기도하기보다는 행사 위주의 일을 한다 등의 말들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는 지금의 본당 신부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이 본당으로 이동하신 뒤에 사람이 바뀐 것일까요? 어느 부분에서 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자들과 신부님의 대치로 인해서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누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해서 주님만 보고서 성당 나가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하시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나쁜 생각을 버리고 대신 좋은 생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의 굴레에 빠져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을 만들어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병원에서 식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형제님은 치료도 받지 않으면서 암으로 인한 죽음만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집에서 쓰러졌고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아쉽게도 그만 주님 곁으로 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병리학 조사 결과 암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조금 부풀어 오른 림프종 몇 개만 발견된 것으로 죽음까지는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부정적인 마음이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많이 보여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향해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많은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정적인 마음을 간직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사람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면 절대로 들을 수가 없겠지요. 듣지 못하는 이유만 계속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말 안에서 함께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대화의 기술보다 더 값진 것은 경청의 기술이다(말콤 포브스).

 

괜찮다. 사랑한다.

어떤 형제님께서 나이가 많아지면서 자식들을 향해 “괜찮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자녀들을 폭언과 폭언으로 길들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남을 고치려는 것이 아닌 자신을 고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타인을 향해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서로가 함께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괜찮다. 사랑한다.”라는 말이 아닐까요?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외투를 본래의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산책을 나갔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강아지를 만났습니다. 보아하니 족보와는 거리가 먼 강아지, 잡종 중에 잡종 강아지였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예뻤는지 모릅니다.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짖지도 않았습니다. 손만 내밀면 그저 좋아서 꼬리를 흔들며 손을 핥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주인 몰래 들고 오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녀석이 그렇게 예뻤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녀석이 송아지나 코끼리 만해도 예뻐서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까요? 녀석이 그리도 예뻤던 이유는 작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분명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부담스러워하실 것입니다.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당신 품에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작은 사람, 겸손한 인간을 총애하신다는 진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의 한없는 겸손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칭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본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랫사람’, ‘작고 가난한 사람’, ‘천한 사람’, ‘모든 사람의 종’, ‘다른 형제들의 발아래 있는 사람’, ‘죄인 중의 죄인’, ‘주 하느님의 부당한 종’등으로 자신을 칭했습니다.

 

그의 겸손은 예수님의 겸손을 판박이처럼 빼닮았습니다. 그는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하려고 집도, 수도원도, 아무런 재산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의 덕을 유지하려고 사제직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수도회 총장이 되었지만 갓 입회한 지원자에게도 순명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수도원 들어와서 참으로 멋진 선배 사제를 봤습니다. 당신께 들어오는 좋은 선물들은 모두 저처럼 ‘없어 보이는’ 후배들이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십니다. 당신은 늘 노숙인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 선배가 인사발령이 나서 다른 소임지로 떠나실 때였습니다.

 

다들 수도원 마당에 모여서 인사를 드리는데, 깜짝 놀란 것이 이삿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짐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달랑 손가방 두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걸 손수 양손에 들고 대중교통으로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홀연히 떠나가는 뒷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프란치스코가 살아가셨던 중세기 가톨릭교회의 모습은 부끄러운 구석이 많았습니다. 귀감이 되어야 할 고위 성직자들은 제 몫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지도자들이 갖은 이권에 개입하여 막대한 부를 축척했습니다.

 

위풍당당한 대성전들과 수준 높은 예술작품 등으로 외관상 교회는 활짝 꽃피어났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회칠한 무덤 같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암울한 시절,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모습, 가장 가난한 모습, 가장 겸손한 모습,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로 대중들 앞에 등장합니다. 지닌 것이라고는 지독한 고행과 극기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 하나뿐인 그가 부패일로를 걷고 있던 제도교회와의 정면대결을 펼쳤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정신이나 이상, 영성으로만 추종한 것이 아니라, 100% 있는 그대로, 실제로,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심이후 한 평생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했습니다. 완벽한 가난의 실천을 가로막는 무수한 장벽들과의 피나는 투쟁이 그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서슴없이 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외투를 본래의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 외투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 까지만 우리가 잠시 빌린 것입니다. 나는 결코 도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 것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둑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를 보는 눈이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죄인이었을 때는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졌지만, 회개하고 나서는 참 많은 이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 우선 아버지가 그를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그가 갑자기 이상해져서 가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는 더 이상 집에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취했던 사람이 너무나 이상해져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 많은 친구들이 나중에 그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그는 교황님께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당시 부유하기 그지없었던 교회분위기에서 거지로 살아가는 수도회를 세우겠다는 프란치스코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교황의 꿈을 통하여 프란치스코를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프란치스코는 구걸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많은 외면과 무시와 박해를 받아야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그의 제자들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썼던 회칙은 너무나 엄격하여 그 제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왜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 모두에게 외면당해야 했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너무나 그리스도와 닮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도 받았습니다. 손과 발, 가슴의 다섯 상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다닌다는 표징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완전히 그리스도처럼 되어버리면 많은 이들에게 외면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집안의 재산을 다 뿌려버리고 극도의 극기생활을 하며 부자 교회를 비웃는 듯한 그의 삶은 지금 신앙인들에게도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 태어나셔도 그렇게 외면당하실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신앙인이었어도 잘못된 신앙을 가졌음이 프란치스코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와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파견된 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파견하신 분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됩니다. 파견된 자는 파견하신 분을 품 안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원한 벌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품지 않으면 지옥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명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당신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가파르나움, 벳사이다, 코라진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도시들이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는 무엇일까요? 그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눈이 곧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입니다. 그 눈을 가져야 예수님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는 가톨릭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이래로 계속 복음을 전하고 그 받은 은총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베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교회를 파견 받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사제들을 통하여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게 하셨을 리가 없다며 교회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 같은 은총들을 거부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은총을 감소시킨 다른 종파들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어느 종파를 선택하느냐가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판결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당신 살과 피를 주시고 죄의 용서까지도 주실 수 있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믿는다면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곧 교회를 보는 눈입니다. 아니, 교회를 보는 눈이 그리스도를 보는 눈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올 때 여행 가방을 가지고 왔습니다. 책, 옷, 필기구, 제의, 신발을 가져왔습니다. 잘 챙겨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있습니다. 꼭 가져와야 할 건 놓고 왔고, 굳이 가져오지 않아도 되는 걸 가져왔습니다. 몇 년 지낼 동안의 물건이고, 정 아쉬우면 부탁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문득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난다면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옆 본당의 신부님이 강론 때 닭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전에 닭을 키울 때입니다. 닭 중에는 유난히 약하고, 병든 닭이 있습니다. 다른 닭은 활기차게 먹이를 찾고 움직이는데 병든 닭은 머리를 숙이고 졸고 있습니다. 그러면 힘이 강한 닭이 졸고 있는 닭의 머리를 쪼아댑니다. 그러면 약한 닭은 죽습니다. 병이 더 퍼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 없는 닭은 그렇게 죽습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닭의 선택입니다.” 닭만 그럴까요? 사람들의 공동체에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 ‘왕따’가 있습니다. 왕따 당하는 학생은 악 하거나, 못된 게 아닙니다. 학생들 사이에 약하고, 지적으로 모자란 친구가 왕따를 당합니다.

 

학생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익빈 부익부의 생존게임이 자연스럽습니다. 승자독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돈도 실력이라는 말도 있었고, 땅콩이 비행기를 멈추기도 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장관의 능력과 자질을 묻는 청문회에서 딸의 성적, 학력이 쟁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기보다는 타인의 잘못을 비판하는 데 익숙합니다. 인류는 최근까지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건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권력과 재물과 능력에 따른 새로운 계층이 생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또 다른 삶의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병들고 약한 닭을 공동체에서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고 약한 닭을 위해서 병원을 만들고, 공동체가 힘을 다해서 도와주는 겁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밤을 새워서라도 찾는 착한 목자가 되라고 합니다.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큰아들이 되지 말고,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가 되라고 합니다. 오히려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자고 합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면 무엇을 가지고 싶으신지요? 나를 외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게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업적입니다. 그러나 그건 이 세상에서 유익할지 모르지만, 언제가 우리가 모두 가야 할 곳에는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무얼 가져가야 할까요? 프란치스코 성인은 우리가 가져가야 할 건 외적인 게 아닌 내적인 거라 합니다. 

 

어둠에 빛을 주는 마음, 의혹이 있을 때 믿음을 주는 마음, 절망이 있을 때 희망을 주는 마음,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마음,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는 마음,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하는 마음,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몸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곽승룡 비오 신부님

갈릴레아의 베사이다는 겐네사렛 호수의 북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빵 기적이 있던 곳(루카9,10)이고, 베드로, 안드레아, 필립보의 고향이다.(요한1,44;12,21) 코라진도 겐네사렛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곳이다. 이 동네는 예수님을 자주 만나고 잘 알고 있는 곳이다.

 

한편 띠로와 시돈은 하느님의 심판에 걸려든 이방인 도시들이다.(아모1,9;예레25,22;이사23,1-11;에제26,2)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던 구약의 이 도시들도 메시아 기적의 증거가 있었다면 그들은 니느웨 사람들처럼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파르나움은 그러지 않았다.

 

예수님뿐 아니라 베드로, 안드레아, 필립보 등을 잘 알고 있던 고향 사람들은 구약의 이방 도시 사람들보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대해 훨씬 무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일흔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의 말은 나의 말이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안다는 사람들이 덜 감동적일까? 알기 때문에 마음이 무딜까? 오히려 반대이면 더 좋을 텐데... 우리도 예수님을 알기에 많이 무딘 듯싶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말씀을 행동으로 믿었다. 그러면 생각이 경직되고 마음이 무딜 순간이 사라지게 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귀족 부호의 아들, 군인, 모험가, 세상을 즐기며 살아간 방랑자. 군인으로 출전, 중상, 장기치료 중, 아마도 그는 그렇게 젊음을 지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은 허전함, 무력감이 컷을 것이다. 이는 부자의 젊은이들이 갖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는 전쟁 중 입은 중상 때문에 병상생활을 길게 했다. 투병 내내 무력감에 시달리며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병상 밖 지봉 위를 날고 있는 새들을 보며,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하루의 삶이 일용할 양식으로 족하고, 죄에서 벗어나면 자기도 하늘 창공을 훨훨 날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유혹에서 탈피하고, 악과 싸워서 승리를 하겠다고 다짐했으리라. 프란치스코는 이때부터 진정한 자유가 하느님께로부터 옴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서서히 물질에서 벗어났다. 그를 대표하는 모습들, 맨발의 사람,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 참다운 자유인,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갔다. 변신한 프란치스코는 그의 삶이 교회를 쇄신하고 개혁하기에 충분했다. 중세교회가 부에 결탁하고 교권이 속권까지 장악하고 부패했던 시절, 그리스도와 같아진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 가난한 젊은이는 복음을 살려고 모여든 젊은이들과 수도회를 세웠다.

 

그가 부를 살며 방종과 방탕으로 즐기기를 좋아하고, 기쁨과 행복의 부족함을 알아차렸을 때, 비로소 그는 삶의 방향전환을 시도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회귀하기 시작했고,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행복한 삶을 시작했다. 그가 자신을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채워졌을 때, 이미 세기의 큰 성인이 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삶에 감동했다. 나도 신학생 시절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살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고 기도한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인을 오늘 또 다시 본받고 싶다.

 

혹자는 마르틴 루터가 교회 쇄신과 개혁을 주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교회분열을 가져왔다. 나는 중세교회의 쇄신과 개혁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주도하며 이루어 냈다고 말하고 싶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의 프란치스코 시성은 닫힌 교회를 열었으며 성령의 바람이 크게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세 고을,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바라보시고 탄식하시며, 당신을 물리치는 자는 당신을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3대 고을이라고 할 수 있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많이 실망하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바라본 위의 세 고을의 경우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도 살지 않는 거의 폐허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많은 사랑과 은총을 주시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좀처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곤 합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힘만으로 살고 있는 듯 생각하며 감사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언제나 받아들이고 늘 감사드리는 것이 곧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생명을 얻고 존재하는 사람들이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안에 영원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참 신앙인들은 눈뜬 하늘복덩이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기적을 보고 싶고 기적 받고 싶어 하는 사람 만날 때마다 전 겁납니다.

기적을 보거나 받으면 하늘생각만 해야지 세상생각 했다간 벌 받습니다.

기적 받은 것은 영원행복 미리받는 건데 그 값은 세상생활로 갚아야죠.

 

첨단 기발한 로봇보다 더 귀한 인생을 받은 게 기적인데 뭘 더 바라요.

하느님께 받은 신기한 기적적 몸으로 하느님을 무시하다니 어이없지요.

이 몸의 신비한 모든 부위를 언제 내가 설계해서 만들었다 생각합니까.

 

이미 이 몸은 하늘 최초의 힘님의 소산인데 그걸 믿어야 정상이잖아요.

참 신앙인들은 눈뜬 하늘복덩이고 비신자들은 하늘 불구자들 같습니다.

 

 

 

      이철구 요셉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루카10장 13-16)

여러분 돈 좋아하십니까?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돈이 좋다 하면 왠지 속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돈 없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호소합니다. 돈만 많으면 한국이 제일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엔 효도의 기준마저 돈이 되어 가는 듯하여 씁쓸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다 여기며, 자식에게도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해지라고 무심코 내뱉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에는 나눔도 희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를 향해 던지셨던 “불행하여라”는 독설을 지금 우리에게도 던지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존경받는 부자를 찾기 어려운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얼마나 가치 있게 돈을 써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돈은 누군가를 위해 선하게 쓸 때 진정 내 것이 되는 것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은 배척이 아니라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돈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충실히 살아갑시다.

* 배척하는 삶이 아니라 함께하는 삶 속에서 행복을! ​

 

 

 

'변화될 용기'(루카 10장 13~16)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벌써 ᆢ 회개하였을것이다.'

고마움을 모르고 ~

기적을 입은 특혜도 모르고 버릇없이 행동하는 사람들, 예수님이 몹시 화나십니다.

괜히 해줬다 ~ 다른 사람 줄껄 후회하게 만드는 사람은 더 이상 어떤 혜택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기회를 줄때, 배려할때 배은망덕한 행동 말고 바른 마음 바른 모습으로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회개하며 사는 모습이 예뻐서 더 많은 은총이주어집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모의 든든한 빽도 버리고 부유와 화려함을 버리고 가난을 부인삼아 부패한 세상에 맨발의 수사로 도전하여 주님 보시기에 흐뭇한 삶이었죠.

'회개는 변화될 용기를 발휘해야합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 16)

(And whoever despises me, despises him who sent me.)

     김웅태 신부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1182~1226) 성인은 중세의 교회가 영적으로 세속화되고 타락했을 때,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청빈의 정신으로 교회를 쇄신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프란시스코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 출신이어서 처음에는 세속적으로 출세하려는 마음을 가졌지만, 아시시의 맞은편에 있는 페루지아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많은 보상금을 치루고 풀려나와 계속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가 중병에 걸렸는데, 이때 크게 깨달아 하느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부유한 가정의 상속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살려는 마음으로 부모님의 가정을 떠나서 하느님만을 믿고 살게 됩니다. 그의 거룩한 뜻에 동조한 형제들이 모이면서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를 세우고, 복음적 가난을 모토로 하는 수도회로 자리를 잡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러한 청빈의 영성은 그 당시 중세의 타락한 교회 정신에 큰 영향을 주었고,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중세 교회를 다시 일으킨 역할을 했다고 보겠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주님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할 때, 어느 무너져가는 교회, 즉 다미아노 성당을 보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무너져가고 있는 내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환시로서, 당시 중세 교회가 권력과 세속적인 욕망으로 그 본래의 정신을 잃고 영적으로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복음적 가난의 정신으로 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상징이 되었다고 보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복음적 가난의 삶을 산 그 정신은 오늘날도 계속적으로 교회를 쇄신시키는 영적인 힘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념일을 맞아 우리도 복음적 가난의 영성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지향하고 하느님 안에서만 참 행복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가난의 정신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나의 삶은 어떠하다고 생각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회개의 일상화, -끊임없는 말씀공부와 기도, 회개의 수행-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종파를 초월하여 만인의 사랑을 받는 '만인의 연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성인의 생몰연대를 확인해 보니 만44세, 역시 치열히 살았던 성인이었습니다. 얼마나 성덕이 출중했던지 선종후 2년만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셨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성인들의 공통점은 산 햇수와 상관없이 죽는 순간까지 참 치열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성인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라 일컫는 평화의 기도와 태양의 찬가는 얼마나 아름다운 지요.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도록 나를 도와주소서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여/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평화의 기도의 가사와 곡은 언제 들어도 감동이요 새롭고 공감이 갑니다. 참으로 복음적 기도입니다. 더구나 오늘과 같은 극도의 분열의 시대, 내전內戰을 연상케 하는 양극단으로 나뉘어진 우리의 비정상적 현실에는 더욱 절실한 평화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미칠 ‘광狂’의 시대같습니다. 이러다 보면 다 미칠 것 같습니다. 광란, 발광, 광분, 광기, 광신 등 참으로 미쳐가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역시 평화의 기도를 통해 모두가 평상심을 회복하고 분열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절박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불어 날로 위태해가는 하나뿐인 공동의 집 지구입니다. 이에 대해 성인의 태양의 찬가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생태적 회개를 촉구하며 자연 피조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는 태양의 찬가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제 장례미사때 퇴장성가로 불러 달라 부탁드리고 싶은 성가입니다. 전문의 아름다움과 깊이는 참으로 탁월하지만 그 일부 요약과 같은 성가 역시 참 흡겹고 아름답습니다.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참으로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저명 인사들의 프란치스코에 대한 찬사들입니다.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인도의 성자 간디의 말입니다. ‘희랍인 조르바’의 작가이자 성자 프란치스코 전기 소설을 쓴 그리스인 니코스 카잔스키스의 작품 서문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나에게 있어 성 프란치스코는 사람의 본분을 다한 인간의 표본이며, 시련 또한 평화로운 투쟁으로 이겨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의무를 실천한 인물이다. 그것은 윤리나 진리 또는 아름다움보다도 더 지고한 차원의 것, 곧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이 맡기신 물질을 갈고 닦아 영혼으로 승화시키라는 본질의 의무일 것이다.”-

 

참으로 가장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은 성인으로, ‘살아있는 복음서’ 같은 성인으로 칭송받는 프란치스코입니다.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의 체험으로 인한 성인의 오상이 아닙니까? 오늘 본기도 역시 성인의 생애와 영성을 요약하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소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바로 성인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전삶의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하고 관상할 뿐 아니라 성인이 되라고 있는 성인 축일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들인 성인들은 그대로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오늘은 제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1988년 요셉 수도원에 부임해 축일을 지냈으니 올해 32번째 맞는 감사한 마음 가득한 축일이기도 합니다. 성 베네딕도 회 요셉수도원 소속의 프란치스코 수사이니 흡사 세 성인들, 요셉, 베네딕도, 프란치스코 세 분이 제 수호천사들이자 롤 모델 성인들이 된 셈이나 얼마나 부자인지요! 어제는 한 형제의 “큰 산이십니다!”라는 말에 아 정말 불암산 큰 산 같은 수도승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성 베네딕도와 성 프란치스코는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루는 성인들입니다. 어제 인용했던 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두 분들입니다.

 

-“밖으로는 베네딕도 산/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성 베네딕도

안으로는 프란치스코 강/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성 프란치스코”-

 

정말 산같은 정주의 베네딕도 성인이라면 유연히 흐르는 강같은 신비가이자 시인이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가을철 같이 경쾌하고 아름다운 성 프란치스코라면 겨울철같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침묵의 산같은 성 베네딕도,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루는 성인들입니다.

 

요즘 형제자매들을 만날 때 참 많이 사용하는 말마디가 성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제도 30년 이상 친분을 맺고 있는 한 부부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자기 전에 묵주기도 10단을 함께 바치고, 일어나면 부부가 사랑의 포옹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기에 성인성녀부부라 격찬했습니다. 정말 평생 부부인연에 충실하며 신의를 다했다면 두말할 것 없이 성인부부입니다. 사실 참으로 항구히 사랑하면 모두가 아름답게, 또 성인처럼 보일 것이고 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답은 세가지 실천입니다. 1.끊임없는 말씀공부, 2.끊임없는 기도, 3.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이 세가지 수행에 충실하면 우리가 소원하는 바 성인이 됩니다. 우리 인간의 평생 적인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한, 즉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이 세가지 말씀, 기도, 회개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당대의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 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불행하여라!’ 역시 저주가 아닌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충격요법의 표현입니다. 기적이 의도하는 바도 회개인데 반응이 없는 무디어진 당대 사람들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성 프란치스코는 물론 성 바오로, 성 아오스팅, 성 이냐시오 등 모든 성인의 공통적 특징이 결정적 회심의 성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화답송 후렴은 말씀에 늘 깨어 있을 것을 촉구합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언제나 오늘입니다. 바로 오늘 주님 말씀에 마음 활짝 열고 경청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발생하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말씀 공부와 실천에 깨어 항구하라는 깨우침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평생, 매일 렉시도 디비나의 수행이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를,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함을 봅니다.

 

이어 기도입니다. 바로 회개의 일상화를 이뤄주는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 바룩서는 바로 온통 ‘참회기도’입니다. 기도가 참 진솔하고 아름다워 일부를 인용합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사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대로 우리의 참회기도로 바쳐도 손색이 없는 공감이 가는 기도입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 본질은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인간 무지와 광기에 대한 유일한 치유제도, 또 성인이 될 수 있는 길도 끊임없는 말씀공부와 기도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회개의 일상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끊임없는 말씀공부와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절실한 평생과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함승수 신부님

깊은 정글 속을 탐험하던 한 남자가 우연히 다리를 다친 여우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통 어딘가를 다친 동물들은 제대로 사냥을 하지 못해 삐쩍 마르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그 여우는 비록 다리는 절뚝거렸지만 털에 윤기가 흐르고 살도 통통하게 올라 있었지요. 강한 자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그런 약점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비결이 궁금해진 남자는 숨어서 그 여우를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호랑이가 커다란 사슴을 한 마리 입에 물고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한참을 정신없이 고기를 뜯어먹던 호랑이는 실컷 먹고 배가 불렀는지 남은 고기를 그 자리에 내버려둔채 다른 곳으로 가 버렸지요. 그러자 다리를 다친 그 여우는 호랑이가 남긴 고기를 열심히 뜯어먹었습니다. 호랑이를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런 일이 매우 자주 일어나는 듯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작은 여우 한 마리도 먹여주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크신 사랑에 깊이 탄복했지요.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런 작고 약한 짐승도 먹이시는 분인데 하물며 당신을 믿는 나같은 사람이야 얼마나 잘 먹이시겠나. 지금까지 먹고 살 걱정을 하며 하느님께 소홀했던 내가 부끄럽구나. 남은 삶은 주님의 섭리에 맡기며 살아야겠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는 하던 일도 그만두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일 같은 것은 굳이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먹여 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도 자신에게 먹으라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야위어가며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져가던 중 문득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거짓의 길에 들어선 자야. 진리를 향해 눈을 떠라! 병신 여우 흉내일랑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아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 고을에 사는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등 많은 표징들을 보여주셨음에도 그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재물과 세속적인 즐거움들에만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런 잘못된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드리려고 하지 않고, 그분께 받으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음 속에서 ‘감사’는 사라지고 ‘욕심’만 남아 그 욕심을 채우고자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스레 ‘주님의 길’로부터는 멀어지게 된 것이지요.

받기만을 바라는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이타적’인 사람만이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복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뿐인 소중한 삶, 기왕이면 ‘여우’보다는 ‘호랑이’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제병영 신부님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질타하신다. 왜 이들은 변화를 꺼려하는가?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모습에서 변화라는 것은 일어날 수 없지 않을까? 나 역시 이런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변화하려고 하면 두려움이 나를 엄습한다. 그 두려움은 한꺼번에 변화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오는지도 모르겠다. 기도 말미에 이런 생각이 들어온다. 지난 2년간의 나의 삶 속에서 분명히 변화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의 존재를 존중하며 함께 그 변화에 동참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나에게 많은 위안을 준다. 그래 묵묵히 걸어가자 한꺼번에 존재자체가 변화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천천히 시간에 맞추어 걸어가자! 그것이 나의 시간이요 하느님의 시간일께다.

가을의 문턱에서 나뭇잎이 변하듯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듯 하느님의 시간에 순응하며 오늘을 살아보자!

 

 

 

<기적 같은 삶>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땅 공기 물 벗으로

나 있게 하심에 감사를

모두 있게 함으로써 감사를

 

한 들숨 한 날숨으로

살리심에 감사를

살림으로써 감사를

 

햇빛 달빛 별빛으로

어둠 밝히심에 감사를

어둠 밝힘으로써 감사를

 

선선한 바람 한 자락으로

품으심에 감사를

품음으로써 감사를

 

벗님들 환한 웃음으로

기쁨주심에 감사를

기쁨 줌으로써 감사를

 

아픔과 시련으로

정의롭게 하심에 감사를

정의로움으로써 감사를

 

일과 쉼으로

살맛나게 하심에 감사를

살맛 냄으로 감사를

 

섬김과 나눔으로

더불어 삶 주심에 감사를

더불어 삶으로써 감사를

 

육화와 성체와 십자가로

내어주심에 감사를

내어줌으로써 감사를

 

죽음과 부활과 영원한 삶으로

참으로 살게 하심에 감사를

참으로 삶으로써 감사를

 

 

 

장소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루카,10/13-1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성지에 살고 있다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거륵한 사람이 살고있어 장소가 빛나게 됩니다. 말이 거룩하다고 거룩해지지 않고 거룩한 실천이 있어야 거룩해집니다. 수도원이 있어 거룩한 땅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사는 수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기적이 일어나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이없으면 거룩한 곳이라 말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까운 대마도가 풍성하고 해외 영해지로 각광을 받았으나 찾는 사람이 없어 황패해지고 모든 식당 호텔 상점이 황폐해 저기고 있어

3만명의 거주자들이 원성이 높이지고 있다고 합니다.

 

나라가 나라다우려면 아무리 물자가 풍요롭고 가진 것이 많아도 그 나라에 사는 사람 관리자 다스리는 사람이 정의롭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기적을 행하고 좋은 것이 머물고 있어도 하느미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물침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집을 화려하게 짖고 잘 꾸며도 그 안에 사는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협력하지 않으면 상막하고 행복하지 못한 가정이됩니다.

 

수도원이 거룩한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 거룩하게 살아야 거룩한 곳이지 건물 때문에도 아니고 역사적 의미가 있어도 안입니다.

사람이 외모로 잘생기고 호감이가고 가진 것이 많아도 깨끗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면 인간 쓰레기취급을 받습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성인축일 인데 그분이 있어 쓰러져 가는 중세교회가 바로서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하느님에게로 인도되였습니다.

그분은 매사를 하느님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빛나게 하신 분이였습니다, 저는 믿는 사람이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 각 사람이 있는 곳이 거룩히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 보이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축일을 맞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주 하느님의 축복와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 예수님만을 선택하여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느님으로서의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조건을 선택하신 것처럼 가난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를 선택한 가난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궁핍한 이들과 마음과 힘을 모아 나누어 가난의 상황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가난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굶어죽지 않게는 할 수 있어도 잘 살 수 있게 할 수는 없다는 말처럼도 들립니다. 나누어 주어야 하는 양도 양이겠지만, 받는 사람의 자세도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그리고 오늘 복음 환호송의 싯구가 우리를 부릅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94], 7.8)

 

주 하느님은 지금 당장 우리 모두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팔아버리고 다 같이 가난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책임지라고 하시지도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늘 가난한 이와 가난한 상황은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순간에 다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벌써 주님의 권능으로 한 번에 다 해결하셨겠지요.

우리의 힘으로 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 이 가난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 계시고, 또 그런 상황에 우리를 계속 살게 하시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가난의 문제를 하루 아침에 제도적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하시는 것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소시민적인 생각으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 개인인 우리에게 다가온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모른 체하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나눌 수 있는 만큼 나누면서 오늘을 살아가도록 허용하시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누다 보면, 주 하느님께서 나머지는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성 프란치스코의 소품집, 분도출판사, pp.107-113)

하늘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 지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동정마리아의 태중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성과 약점을 지닌 참다운 육체를 취하여 오시리라는 것을 거룩한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부유하셨지마는 지극히 복되신 당신 어머니와 같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시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가까워지자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를 거행하셨습니다. 그 다음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맞추려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다른 게 아니라 축복받은 아드님, 영광을 받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위해 탄생케 하시고 십자가의 제단 위에 그분의 고귀한 피의 희생 제물을 그분이 직접 바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난 바로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되고 우리 모두가 깨끗한 마음과 정결한 육신으로 아드님을 받아 모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복음에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며 축복받은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결한 마음과 정신으로 예배 드립시다.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 드리라.”고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또 무엇보다도 이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 드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그분에게 예배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겠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면서 밤낮으로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 기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을 지니도록 합시다. 죄인들의 더러운 때에서 직접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는 애긍 시사를 하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남겨 둔 모든 것을 결국 잃고 맙니다. 그 대신 자기가 실천한 사랑의 열매를 가지고 가서, 그 행실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을 것이며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면에서 지혜롭거나” 현명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히려 더욱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결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보다는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 때문에, 피조물이 모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 끝까지 항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영이 임하실 것이며” 그것을 당신의 거처와 집으로 정하실 것이고, 그들은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아들이 될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 형제, 모친이 될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말씀 내용은 다소 어둡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빌론 유배에 대한 바룩 예언서 저자의 참회 기도가 들려 오고,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애끓는 탄식이 들려옵니다.

 

"불행하여라"(루카 10,13).

오늘의 대목은 일흔두 제자의 파견 기사에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런저런 지침들을 당부하시면서 혹여 받아들여지지 않을 상황을 염두에 두어 대응책까지 일러주신 바 있지요(루카 10,,10-12). 이 말씀에 긴장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도 어느 고을들에서 배척당하셨다는 걸 솔직히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거부한 고을의 이름들이 불리웁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안타깝게도 이 고을들은 예수님과 더 가깝고 친숙한 곳들입니다. 저주가 아니라 한탄과 탄식에 가까운 이 불행 선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무기력, 나아가 하느님의 무기력을 만납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루카 10,16).

복음 내용 앞부분의 2인칭 "너희"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가리켰다면 뒷부분의 "너희"는 제자들을 향합니다. 용기를 주시려는 겁니다. 너희가 받는 환대는 내가 받는 것과 마찬가지고, 혹 너희가 배척을 받아도,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배척하는 것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움츠러들지도 말라고 격려하시지요.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의 이름과 존재를 새기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바룩 1,15).

하느님의 의로움과 그 앞에 선 우리의 부끄러움. 이는 벗어버릴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모습일 겁니다. 아무리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을 옴팍 쏟아부은 선택된 백성이라도 스스로 거부하고 배척하고 외면하면 도리가 없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거해서라도 당신 말씀을 듣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이 존중 역시 그분의 의로움이니까요.

 

바룩 예언서 저자는 유다의 패망과 바빌론 유배의 원인을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라고 겸허히 고백합니다.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거역하고, 말씀을 듣지 않은 죄입니다. 심지어 이집트 탈출 때 이집트에 내리신 재앙과 저주가 이번에는 고스란히 이스라엘에 내린 것이라고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성찰합니다.

 

핑게 없는 무덤이 없다는 옛말처럼 모든 흥망성쇠에는 원인이 존재하지요.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닥쳐온 행, 불행의 실마리를 아프지만 정확히 성찰해낼 수 있다면 아무리 비참한 흑역사라도 디딤돌로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각자의 삶을 "하느님의 의로움과 인간의 부끄러움"이라는 말씀에 비추어 돌이켜 봅시다. 예수님과 가까웠던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처럼 각자 삶에 알알이 박힌 사랑의 기적들을 망각한 채 무심하고 미온적인 마음으로 회개를 마냥 미루고만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을 알아갈수록 결국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제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당신께서 주신 것이고 당신이 이루신 일입니다. 반면 제 삶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실패는 제 탓입니다. 그러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 초기 하느님께서 자신의 길을 밝혀 주시기를 청하며 밤새 "하느님 의로우신 당신은 누구시며, 죄많은 저는 또 누구입니까?"를 되내며 기도하였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회개의 삶이었다고 유언에서 고백하지요. 또 자신이 시작한 수도회의 첫번째 명칭을 "아시시의 회개자들"이라고 불렀답니다. 큰 회심은 큰 사랑을 낳습니다.

 

오늘 큰 회심과 큰 사랑으로 교회를 쇄신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하느님의 의로움과 우리의 부끄러움을 겸손되이 고백하는 큰 회심의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께 자비를 청해주십사 성인께 전구합시다.

 

"성 프란치스코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우상인가, 이상인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게 프란치스코는 우상이었다.

이상이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돌아보면 우상이었다.

 

이것이 사부 프란치스코 축일을 맞은 저의 소감입니다.

인간적으로 얘기하면 운명적인 만남이지만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그것이 성소였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수도원에 들어와 책도 아니고 선배들로부터 처음 얘기로 들은 프란치스코는 그야말로 저를 뿅 가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니!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저였지만 하느님은 너무 멀고 예수님은 너무 무거운데 비해 프란치스코는 인간미를 풀풀 풍기면서도 초월을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뒤로 밀리고 프란치스코가 저의 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저의 이상이 아니고 우상인 이유입니다.

우상이나 이상이나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존재라는 면에서는 같은데 추구하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집착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매이게 하며, 주님을 가리키고 따르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하느님과 주님을 대신하고 가리는 것이 차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저를 집착케 하고 매이게 하고 주님을 가리는 존재가 프란치스코였기에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데 있어서 당연히 사달이 났지요.

하느님을 잃고 길을 잃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가야할 곳이고 예수님은 그 길인데 갈 곳도 일고 갈 길도 잃은 겁니다.

프란치스코처럼 되는 것이 돈 버는 것처럼 저의 성취, 욕심, 집착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제가 가야할 종착역이 아닙니다.

종착역은 하느님이고 프란치스코는 그리로 가는 길의 한 역일뿐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차가 종착역을 향해 가면서 프란치스코라는 역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태우는데 저도 이 역에서 예수 기차에 올라탈 사람 중의 하나지요.

 

기차에 올라타고 기차가 떠나면 역도 떠나게 마련입니다.

불교 우화가 얘기하듯 강을 건너고 나면 배를 버려야 합니다.

그냥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였으니 너무도 고맙지만 아무리 고마워도 그 배를 계속 메고 다녀서는 안 되겠지요.

 

사실 프란치스코도 프란치스코라는 역을 우리에게 남겨줬지만 그도 기차를 타고 떠나버려 이제 그 역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집착하고 매였던 저와 달리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사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떠나고 난 뒤 프란치스코와 같이 쳐다보던 하늘을 보니 하늘로 오르는 계단 꼭대기에 프란치스코가 이미 올라있었습니다.

 

그래서 클라라도 프란치스코가 먼저 올라간 그 하늘계단을 쏜살같이 올라가 프란치스코의 젖에서 젖을 먹었더니 그 젖이 달콤할 뿐 아니라 황금빛이 났습니다.

 

클라라가 본 이 환시에서 계단은 천국의 계단이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계단이며 완덕의 계단입니다.

겸손이라는 맨 및 계단에서 시작하여 사랑이라는 맨 위 계단까지 오르면 사랑이신 하느님께 도달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계단입니다.

 

우리가 프란치스코를 사랑하고 따르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갔기 때문입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참으로 사랑한다면 뭘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해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을 같이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수의 힘

     이종훈 신부님

숲 속은 밤은 정말 캄캄하다. 어두워서이기도 하고 고요해서도 그렇다. 한 마디로 무(無)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무엇인가 있으면 그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크다. 반딧불이와 별똥별은 선명하고 전등불빛에 달려드는 나방 날갯짓에도 깜짝 놀란다. 세상에서 사셨던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그러지 않았을까? 지극히 순수해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을 것 같다. 

 

선입견도 유전적으로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도 없는 하느님이 처음에 사람에게 불어넣어주셨던 그분의 인격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근거는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이 사물과 사태의 본질을 볼 수 있고, 그것이 지혜의 시작이었을 것 같다. 명의는 증상만 없애려고 하지 않고 그 병의 근원을 찾아내기 때문에 병을 제대로 치료한다. 예수님도 그런 마음과 인격을 지니셨으니 사람과 세상을 꿰뚫어보셨을 것이다. 그분의 치유와 구마 등의 신적인 능력도 그 티 없이 맑은 마음과 순수함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반딧불이의 작은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보이고 나방의 날갯짓이 비행기소리처럼 들리는 숲 속의 밤처럼 예수님의 마음도 그렇게 순수했기 때문에 세상의 죄악으로 받으신 고통도 컸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지혜로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신적인 능력으로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행하셨다.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당신의 추종자들을 끌어 모으려고 그러신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고 죄를 뉘우쳐 하느님께로 그리고 하느님이 사람을 지어 만드실 때 불어 넣어주신 그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당신의 예상과 달라도 참 많이 달랐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많이, 아주 많이 실망하셨던 것 같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3-15).” 이 말씀은 위협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고 그분의 순수한 마음이 지닌 지혜는 당연한 미래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데도 자꾸 똑같은 것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렇게 불같이 화내셨지만 그보다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훨씬 커서 그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불사르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아버지 사랑, 인간 사랑이었습니다. 죄인인 저는 그 사랑으로 삽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실망과 괴로움으로 자신을 위로하거나 감추지 말고 주님의 큰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고 주님의 계명을 더욱 충실히 지켜나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띠로와 시돈에게 기적을 보였더라면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큰 기적과 놀라운 일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해주었는데도 믿지 않는 마을들을 엄하게 꾸짖으신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13절)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백성이다. 

 

‘기적을 베풀었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하느님의 은총을 베풀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받아들이지도,응답도, 보답도, 회개도 하지 않았음을 한탄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의 오늘의 말씀은 이 마을을 저주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들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기를 바라시며 걱정하시는 말씀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다. 

 

‘너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겠느냐?’라고 나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은혜, 집, 가족들, 재산, 재능, 건강 등,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조건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다면 그들은 하느님과 교회에 그리고 이웃에게 얼마나 더 많은 선행과 봉사를 나보다 더 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16절)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큰 권한과 최고의 영예를 주셨다. 비록 인간들이지만 하느님 같은 영광을 입혀 주셨다.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그분을 물리치는 것이며,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물리치는 죄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도들이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전해주는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시는 말씀이다.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주님께서 그들 안에서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니, 어떻게 잘못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요,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물리치는 것이며 그분과 아버지 하느님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3-16).”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로 제목이 붙어 있고, 또 예수님께서 고을들을 꾸짖으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말씀이지만, 사실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성경에 어떤 국가나 도시의 멸망을 예고하는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국가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 그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의 사람들이 무조건 멸망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한 국가나 도시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구원과 멸망은 개인의 문제입니다.

최후의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전체가 심판 대상이지만, 구원을 받거나 멸망을 당하는 것은 각 개인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과 심판의 날에 일어날 일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가족이라도 구원과 멸망으로 갈라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자신의 구원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멸망은 개인의 문제” 라는 말은 심판결과가 그렇다는 뜻이지, 남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관심 갖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남의 구원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 실천이고, 사랑 실천은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관심 갖지 않고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하고, 혼자서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태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볼 때,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도 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은 다른 사람의 죄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 도시나 한 국가가 이상한 풍조에 휩싸여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것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또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죄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일도, 세상을 복음화 하려고 노력하는 일도 사랑 실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 말씀이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안 믿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물론 예수님 말씀에 있는 ‘회개’ 라는 말은 ‘당신에 대한 믿음’도 포함하는 말이긴 합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회개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티로와 시돈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고,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을 언급하신 것은, 그 두 도시 사람들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하느님 뜻’에 합당한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참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믿는 사람들이 첫 번째로 할 일은 ‘회개’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고,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받을 심판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받을 심판이 더 엄할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렇다면 처음부터 세례를 안 받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세례를 받았고, 은총 속에서 살고 있는 신앙인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그동안 받은 주님의 은총을 부정하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은총 속에서 살았던 시간들은 결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은총이 취소되는 일도 없습니다.)

 

‘회개’는 은총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이미 받은 은총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회개’ 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 ‘하느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물론 지은 죄에 대한 회개도 포함되는데, 그 경우에도,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심판이 두려워서 하는 수동적인 회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응답하는 능동적인 회개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지옥 가는 것만 피하면 그만이라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죄를 안 짓기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상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즉 믿음과 사랑 실천을 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죄는 안 짓겠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열성적으로 복음 전하는 일을 하고, 이웃 사랑 실천을 하고, 항상 기도하면서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살아 있는 삶’입니다.

 

 

 

생명의 빛이 세상에 빛나고 있다.

     최민석 신부님

저 어둔 밤에 고요히 빛나는 손톱같이 야위었던 달도 시간이 흐르면 쟁반 같은 보름달로 나타난다. 기울었다가도 꽉 차는 달은 고단한 인생살이에서 위로와 희망이다. 지금 나의 생이 가난하고 쓸쓸해 보여도 실상은 본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다.

 

어제 밤 아는 수녀님의 초대로 수녀원을 방문하였다. 10월 4일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축일 만찬 초대이다. 축하 전례와 만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둠 밤 예쁘게 빛나는 초승달을 보았다. 가을밤에 빛나는 초승달은 제법 낭만적이다. 초승달과 빛나는 별빛은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어둠에 길들면 세상을 다시 보는 깊은 눈도 생긴다. 어둠은 하루치 빛을 키우는 시간이다. 어둠 속을 거니는 자와 빛 속을 거니는 자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어둠 속을 거니는 자는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자꾸 넘어질 것이다. 빛 속을 거니는 자는 앞이 잘 보여서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뒤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생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 14-16)

 

어둠 속에 있는 자는 어둠 속을 헤매다가 자기가 무엇에 걸려 넘어졌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바로 어둠 속에 있는 백성에게 빛이 되시어 어둠에 빛을 보게 하신 분이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강하다. 어둠에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어둠의 장벽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영성적으로 매우 깊이 들어가신 분이시다. 성인은 종교 사이의 장벽은 말할 것도 없고 짐승과 인간 사이의 경계, 나아가 해, 달, 바람하고도 장벽이 사라져 그것들 모두가 당신의 언니 누이로 되었다. 성인은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면서는 “나의 누이 죽음이여, 어서 오십시오. 그대는 생명의 문이 될 것입니다.”라 하신다.

 

그분이야말로 천지가 나와 같은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라는 옛 성현의 말씀을 몸소 이루신 분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중심’이 바로 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고백한 것이다. 우리가 저마다 자기 속의 ‘중심’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 ‘그것’과 ‘너’는 사라지고 존재하는 모두가 ‘나’임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거죽을 보는 눈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지만 속을 보는 눈에는 모든 것이 같게 보일 것이다. 깊이의 세계로 들어갈수록 경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빛과 어두움을 같이 본다고 한다. 빛 속에 어둠을 보고 어둠 속에 살아있는 빛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어둡고 저것은 밝은데 그 둘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둘이 본디 같은 것임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지향하여 나아갈 곳은 저 끝없이 펼쳐진 ‘지평’이 아니라 들어가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중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갈라져 있는 둘을 하나로 본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본디 하나임을 알아본다는 뜻이다. ‘깊이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말은 매 순간 주님의 현존 안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을 떠나고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숨 쉬고 말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주님의 현존임을 안다. 나의 유일한 수업은 자신 안에 들어가 있는 그대로 그분의 현존 안에 잠기는 것이다.

 

 

“나의 누이 죽음이여, 어서 오십시오, 당신은 생명의 문이십니다.”라고 말한 아시시 프란치스코의 신앙은 어두운 죽음에서 생명의 빛을 노래하신 것이다. 그렇다. 순간마다 ‘나’를 떠나지 않고서는 내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 안에 잠길 수 없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의 삶을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가난으로 시작하여

가난으로 돌아갈

가난한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가난의 여정입니다.

 

가난은 모든 여정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삶은

순종의 삶이며

회개의 삶이며

믿음의 삶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통하여

다시 태어났습니다.

 

가난을 통하여

풍요로우신

하느님을 기쁘게

만났습니다.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려야 할

가난의 여정입니다.

 

가난한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랑의

삶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삶이 우리의

관계를 치유합니다.

 

가난한 삶은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끕니다.

 

하느님께로

이르는

가난의 길을

우리도 걸어갑시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게 하는

겸손한 가난입니다.

 

가난은 사랑의

회복이며 가난은

끝까지 충실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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