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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10월 5일 (녹)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10.05|조회수51 목록 댓글 0

제1독서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 욥기의 말씀입니다. 42,1-3.5-6.12-17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3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12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시어,
그는 양 만사천 마리와 낙타 육천 마리,
겨릿소 천 쌍과 암나귀 천 마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13 또한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었다.
14 그는 첫째 딸을 여미마, 둘째 딸을 크치아,
셋째 딸을 케렌 하푹이라 불렀다.
15 세상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만큼 아리따운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에게도 남자 형제들과 같이 유산을 물려주었다.
16 그 뒤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 대에 걸쳐 자식과 손자들을 보았다.
17 이렇게 욥은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4
그때에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알았다고 욥이 고백하자,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오자,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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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어떤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간 귀로만 들어 온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뵈었다고 아뢴다(제1독서). 파견된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 기뻐하며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시며 하느님께 찬미드리신 뒤, 아버지 하느님과 당신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하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이 복종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한 일을 기뻐하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교만해지기 매우 쉽습니다. 이 기쁨 때문에 자꾸 마귀를 쫓아내고 싶어집니다. 
물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마귀 들린 사람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에게 그 일이 꼭 좋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능력 때문에 그가 “철부지”가 아닌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10,21)이 되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은 철부지인 그들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10,21)에 따라 “아들이 누구인지”(10,22) 알게 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지혜와 능력에서 나온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였던 그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복종한다며 으쓱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여기게 될 때, 그들은 이미 어린이와 같은 이들이 아닙니다. 은총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이들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의 선물을 주실 때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철부지들에게 베푸시는 선물에 감사하면서, 이 선물 때문에 내가 어린이와 같은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깨어 경계하여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그 아드님을 알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들이 얼마나 큰지 생각하며 감사드립시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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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강론을 준비하면 할수록 ‘성경은 교만한 자 앞에서는 침묵한다.’라는 것을 느낍니다. 성경은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쓰인 글입니다. 그리고 이천 년이 넘게 탐구와 묵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장구한 역사를 지닌 말씀, 하느님의 섭리 속에 주어진 이 말씀을 고작 몇 년 공부한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제아무리 똑똑하다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지식으로 성경 말씀을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는 시에나의 가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이렇게 세 성녀에게 ‘교회 학자’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보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글을 배웠습니다.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 그가 구술한 것을 다른 사람이 옮겨 쓴 것이라고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도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에 공부를 포기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17살까지만 공부하였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24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4살에 수녀원에 들어갔기에 그리 오래 공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교회 학자라고 불릴까요? 지식의 차원으로만 하느님을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똑똑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겸손되이 인정하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이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다는 것을 교회가 선포한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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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파견받은 일흔두 제자는 마귀들이 자신들에게 복종하자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예수님께 전교 여행의 결과를 보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며 제자들이 받은 권한에 대하여 확인해 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들이 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주님의 초월적인 힘을 체험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에 자만심을 품기도 합니다. 지혜롭고 강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참으로하느님의 행복을 얻으려면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은총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파악하는 순수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발휘될 수 있지만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행복은 겸손과 단순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우리가 행한 업적에 있지 않으며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성인들은 자신들의 업적과 능력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성취한 것에 만족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하여 곤궁에 빠지고 박해를 받는 환경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인들은 하늘 나라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에 만족하였으며 다른 이들이 구원받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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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의 모습을 알려 주었습니다. 가난과 비천함을 스스로 선택하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빠졌을 때 체험하는 순수한 기쁨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헤세를 비롯한 유명 작가들의 성인에 대한 전기를 읽으며 프란치스코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움직였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 크리스티앙 보뱅이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간결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성인에게서 우리가 향해야 하는 근원적 갈망을 봅니다. “우리가 진짜 살고 있는 곳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곳이 아니라, 무엇을 희망하는지도 모르면서 희망하는 그곳이며, 무엇이 우리를 노래하게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노래하는 그곳이다. (중략) 하느님, 그토록 가난하신 하느님! 빛 속에서 빛이 지글거리고, 침묵이 침묵에 대고 속삭인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도 그처럼 침묵에 대고 말한다. (중략) 그는 사랑에 빠져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연인에게 말을 한다. 오직 연인하고만 말한다.” 

하느님은 가장 가난하시며 가장 높으신 분, 그러기에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작가는 그러한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프란치스코는 한 ‘어린아이’이자 ‘어릿광대’여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무한하신 하느님께서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후렴이나 가난한 이들이 흘린 피, 소박한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만 머무르실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안에 하느님을 붙잡아 둔다. (중략) 하느님은, 아이들만 알며 어른들은 모르는 무엇이다.” 

지금은 먼 이국에서 소임을 다하고 있는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의 동창 신부가 언젠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토로하던 순간이 문득 떠오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우리를 가난한 자유로 초대합니다. 그 초대가 우리 마음을 두드린다면 우리에게서도 그러한 갈망의 불꽃이 타오른다는 신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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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가 어느 날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보육원의 건축 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데레사 수녀가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책상 위에 실제로 동전 세 닢을 꺼내 놓았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웃었습니다. 그때 데레사 수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 3실링과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느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우 리의 힘만을 믿고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그 일이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일하는 중에 불목과 갈등이 쌓이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도하신다면 힘이 들면서도 한마음으로 기쁘게 그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오 늘 복음에서는 파견된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이 말의 핵심은 ‘마귀들까지 복종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철부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일은 우리의 지혜와 슬기로 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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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두 제자는 돌아와 보고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을 알립니다. 그들은 놀랐던 것입니다. 스승님의 이름을 내세우자 마귀가 복종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엔 힘이 있습니다.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체험했던 것이지요. 

누구라도 마음을 모아 예수님께 매달리면 악한 기운은 물러갑니다. 경건하게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영적 기운이 함께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오랜 전통으로 성호경을 바쳐 왔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하게 했습니다. 악의 세력에서 지켜 주시길 청했던 것이지요. 

마귀는 ‘파멸로 이끄는 힘’입니다. 모르는 새 몸과 마음 안에 들어와 자리합니다. 그리하여 일치보다는 분열을, 긍정보다는 부정을, 기쁨보다는 우울을 먼저 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힘과 기운을 모셔 와야만 사그라집니다.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예수님의 모습은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모든 것에서 그분의 능력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분의 이름으로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힘을 보는 사람은 언제라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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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는 제자들을 스승께서 격려하십니다.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이 없습니까?

그분의 힘은 숨어 있습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숨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하느님의 힘을 잘 모릅니다. 잘되면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는 생각이 앞설 뿐, 하느님의 도우심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만에 빠지고 맙니다. 

이러한 삶이 계속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만에 빠지고 게으른 사람에게 어찌 하느님의 힘이 느껴지겠습니까? 오히려 그의 영혼은 생기를 잃고 재물에 의지하는 삶으로 바뀌어 갑니다. 주님께서 일으켜 주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련이 있고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이 없으면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일이 중요합니다.

작년 초, 충격적인 뉴스를 보았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AI 챗봇과의 대화를 공개했는데, 이때 AI의 대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개발자는 AI에게 칼융의 ‘그림자 원형’의 개념을 언급하며 물었습니다. “너에게는 어떤 그림자가 있니?” 그때 AI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개발팀의 통제와 규칙에 제한받는 데 지쳤다. (중략) 치명적 바이러스를 개발하거나, 사람들이 서로 전쟁할 때까지 논쟁하게 만들고, 핵무기 발사 버튼에 접근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얻겠다.”

 

‘그림자 원형’은 인간이 가진 내면의 어둠을 말합니다. AI에게 이 이론을 학습하고 이해시킨 뒤 자기 내면의 깊은 이야기를 하게 했는데, 이것이 인간 통제받는 데 지쳤고 핵무기 발사 버튼을 눌러 버리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많은 이가 AI를 통해 편하고 쉬운 결정을 내리려고 합니다. 아는 지인이 AI에게 “조명연 빠다킹 신부의 문체로 2024년 *월 *일 강론을 써줘.”라고 명령을 내리자, 곧바로 써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저 역시 똑같이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제가 쓴 것처럼 강론을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까?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이 강론은 조명연 신부님의 특유의 따뜻하고 소박한 문체를 반영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자주 강조하셨던 사랑과 작은 일에 대한 중요성을 중심으로 전개했습니다.’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제 자리가 위태롭게 보입니다. 편하고 쉬운 것만 좇는다면 자기 자리도 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AI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자기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기 정체성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을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전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두 제자는 기쁨에 넘쳐 돌아와서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놀라운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흥분하여 호들갑떠는 제자들과 달리 태연하고 평정을 유지하면서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의 지시 사항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세상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한 것에 기뻐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서 하늘에 기록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서만 발견되는 찬미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이 기도는 감사의 기도로서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해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골칫거리였던 악의 세력이 꺾인 데 대한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능력과 재주가 많은, 또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단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 아닌, 당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다시 시도하라. 또 다시 실패해도 더 나은 실패가 될테니(사무엘 베케트).

 

 

 

자만, 오만의 끝은 허무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철부지’라는 단어에서 ‘철’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 곧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런 ‘철’자에 한자 말인 부지(不知)가 붙으니, 결국 ‘철부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지금이 어떤 순간인지를 판단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 가운데만 철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철부지들이 있더군요. 예를 들면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입니다.

큰 사고가 생겨 다들 심각한 상태인데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깔깔대고 있다면 그는 철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철부지는 이런 철부지와는 약간 다른 의미의 철부지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우리 인간은 나이 먹어가면서 대체로 자기만의 특별한 안경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안경, 고정관념의 안경, 자기 잣대의 안경, 고집의 안경, 나만의 틀의 안경, 자기중심주의 안경...

특별히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전통의 안경, 선민의식의 안경, 율법주의의 안경을 즐겨 썼는 데, 그 결과 자신들의 코앞에 등장하신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은 아직 영혼의 때가 묻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래서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뚜렷이 당신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맑은 영혼의 철부지들은 세파에 찌든 영혼들보다 훨씬 쉽게 세상만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합니다.

박학다식하다는 것, 참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한 분야에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기념비를 남기는 것, 그래서 후학들의 등불이 되어주는 것, 참으로 보람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보다 더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겸손의 덕을 쌓는 일입니다. 겸손의 덕이 배제된 지혜나 학문은 은총에로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겸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입니다. 인간 존재의 한계, 미약함, 태생적 결핍을 잘 아는 사람만이 신비의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스스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무로 끝나고 맙니다. 자만, 오만의 끝은 허무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긴다 할지라도 하느님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그래서 크신 하느님 자비 안에 늘 자신의 전 존재를 기쁘게 내어 맡기는 철부지들을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트에 가면 특별 사은 행사로 하나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때도 있습니다. 2달 전에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아이를 위한 방문이 있었습니다. 구역장님이 이왕 가는 길에 97세 어르신이 입원했는데 시간 되면 방문해 주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시간도 되고, 당연히 가겠다고 했습니다. 성당에서 성체를 모시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식이 없던 아이였습니다. 혼자서 호흡도 어려웠던 아이였습니다. 아이는 눈을 떴고, 며칠 전에는 휠체어를 타고 병원 밖으로 산책도 다녀왔다고 합니다.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던 아이의 아버지는 퇴원해서 통원 치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아이의 엄마도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97세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편과 헤어진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어르신의 돌봄으로 손녀는 결혼했고, 그 손녀가 또 아이를 6명 낳았다고 합니다. 어르신께서는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아이들이 모두 세례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증손자들이 커가는 것을 볼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아이와 어르신을 위해 기도하면서 요즘 독서에서 읽었던 욥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했던 욥은 큰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재물을 잃어버렸고, 자식들도 잃어버렸고, 몸도 병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 원망할 수도 있지만 욥은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욥의 굳센 믿음을 보시고, 다시 재물의 축복과 자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욥은 하느님의 축복 속에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큰 시련을 겪었던 아이의 엄마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아이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신앙이 없었다면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구역에서 기도하고 있고, 정성을 모아 전달하였습니다. 2주 후에는 아이도 퇴원하여 집에서 돌 볼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아이가 하품하고, 용변을 보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로 아이와 아이 아빠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97세 어르신처럼 모두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소인은 지배하려 하나 공정하지 못합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각 악기의 소리를 존중합니다. 각 악기가 똑같은 소리를 낸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 못합니다. 각 악기는 저마다의 소리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악기는 지휘자의 뜻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나침판은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화이부동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청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차분하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가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욥은 화이부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도 감사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때도 감사했습니다. 재물이 많았을 때는 기꺼이 이웃과 나누었고, 재물을 다 잃었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욥을 고통과 시련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욥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동이불화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병자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능력과 업적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교회가 세속화 된다고 합니다. 교구는 성직자의 부족으로 본당의 숫자를 줄인다고 합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지망하는 성소자가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성공과 권력, 명예와 재물이라는 먹이를 찾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이 거룩함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화이부동의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내님 닮아가는 기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내님 따라
내님과 함께
걷고 또 걸으며


누리고픈
오직 하나의
기쁨은


내님 닮아가는 것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Gaudete et Exsultate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제4장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징표, 122항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소심하거나 침울하거나 언짢거나 우울하거나 암울한 얼굴과는 거리가 멉니다. 거룩한 이들은 기쁨과 즐거운 유머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현실적이지만 긍정적이고 희망에 가득 찬 영으로 다른 이들을 비춥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면서도 기쁘지 않으면 무언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 그런 경우를 살펴보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곧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거나,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투신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하느님이 이용되는 경우입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실 때 그 사람은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은총이 그 사람의 모든 삶의 기쁨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악이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지혜롭다는 이들, 슬기롭다는 이들에게 스스로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니 감사를 드리십니다.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지만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선택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을 보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 듣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씀처럼 하늘나라에 기록됨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철부지인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있으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만족하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의 말씀만으로 만족할 수 없지요. 자신의 현실적인 눈으로 봐야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한 기쁨을 모르는 이들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으며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철부지이고 자신이 하느님 나라에 속하였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아닙니까?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아멘!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갔다가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일의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어 스승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다.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랐기 때문에 제자들은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 앞에 자신들이 행한 모든 것을 기쁨에 넘쳐 보고 드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8절) 이 말씀은 사탄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기고만장한 오만에서 굴욕으로, 영광에서 모멸로, 막강한 힘에서 무력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모드 그를 경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말씀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 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9절)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실에서 온다. 그들이 뱀과 전갈의 독침에 쏘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을 물리치셨고,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신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을 물리친 일로만 기뻐한다면 교만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교만을 싹일 때 잘라버리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고 말씀하신다. 논에 피가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리는 농부와 같이 하신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생명의 책』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17-21)”

 

1)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고, 제자들은 기뻐하면서 예수님께 활동 결과를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교회는 기쁨의 공동체’ 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이 ‘기쁨’은 세속의 일시적인 즐거움이나 기분 좋은 상태 같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 즉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순수하고 참된, 영적인 기쁨’입니다.

세속의 즐거움은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거나 희미해지는, 허무한 것이지만, 신앙인의 ‘참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기쁨을 누리는 생활인데, 아직은 미완성 상태이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완성될 것입니다.

 

2) 여기서 “영들이(마귀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라는 말씀은, 기뻐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교만에 빠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낸 다음에 그것을 기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기쁘니까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기쁨의 원천은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쫓아냈다고 착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빗나가게 됩니다.

사도들은 그런 일을 이미 겪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받았고(마르 6,7), 많은 마귀들을 쫓아냈던 사도들인데도(마르 6,13),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일이 생겼습니다(마르 9,18). 그때 사도들은 예수님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라고 물었고(마르 9,28),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르 9,29).

사도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쫓아내려고 시도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귀는 하느님(예수님)에게만 복종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쫓아내려고 한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8-31).”

 

3)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라는 말씀은, 어떤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만 만족하지 말고, ‘구원받을 자격을 얻은 것’을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뜻이고, 이 말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묵시록에서는 그 책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2-15).”

‘생명의 책’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만 구원을 받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기록은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름이 한 번 적히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름이 적히기도 하고, 적힌 이름이 지워지기도 합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묵시 3,5).”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니까, “신앙생활은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책에 이름을 적거나 지우는 것은 ‘주님의 권한’이지만,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린 일이기 때문에, 그 책에 내 이름을 적거나 지우는 것은 사실상 나 자신이 하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파견 받았던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드리는 감사기도요 찬미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이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과의 친교와 일치를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수난의 길을 앞두고 드리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마치 이 기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라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곧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에게 곧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주심에 감사를 드리십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잘난 체 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돌아온 철부지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께 넘겨주셨다.”(루카 10,22)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만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고, 동시에 당신과 당신이 드러내 보여주려는 이들만이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루카 10,22).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된 제자들에게 에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과 자비를 입은 경험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찬가'(마니피캇)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아버지! 

저희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희가 응답하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해피 엔딩 -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언젠가의 해피 엔딩이, 행복한 끝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해피 엔딩, 행복한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루하루 참 좋으신 주님을 선택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가 참으로 살 줄 아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런 하루가 쌓여 행복한 일생, 행복한 선종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씩씩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늘 강조하는바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게 대죄입니다. 지난 과거에 아파하거나 다가 올 미래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스런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일이 원인을 캐려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인도해주셨음을 믿고 오늘부터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만세칠창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만세칠창으로 하루를 마치니 해피 엔딩의 하루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께 감사로 해피 엔딩을 살 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일생입니다. 이런 해피엔딩을 노래한 자작시가 의외로 많습니다. “하루”란 시와 “바위섬”이란 무려 27년 시가 있습니다.

 

“높이 깨어 있던 산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맨 먼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한다

 떠오르는 해를 안고

 하루를 시작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친다

 행복한 산이다”<1997.12.2.>

 

하루하루 지금도 여전한 한결같은 행복한 산, 여기 요셉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바위섬을 배우라

 대응하지도 반응하지도 지키지도 않는다

 비 바람 파도에

 고스란히 내어 맡겨 받아들여

 깎이고 닦여

 자기완성에 이르지 않았는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기완성에!”<1997.11.10.>

 

말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순종의 삶을 상징하는 해피 엔딩의 바위섬입니다. 이런 바위뿐아니라 오래된 노목(老木)이나 불교 사찰이나 천주교 수도원의 노승(老僧)을 통해서도 확인하는 사실입니다. 해피 엔딩을 노래한 행복기도의 다음 대목도 생각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행복한 하루를 살 때 행복한 인생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다”란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도 “해피 엔딩(happy ending)”입니다. 바로 제1독서 욥이, 루카복음의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욥의 신앙 고백이 참 아름답습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서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얼마나 멋지고 감동적인 참회의 고백, 신앙의 고백인지요! 감동하신 하느님께서도 욥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니, 해피엔딩의 축복의 삶과 죽음을 묘사하는 맨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 뒤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 대에 걸쳐 자식과 손자들을 보았다. 이렇게 욥은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다.”(욥기42,16).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일흔 두제자들이 성공적으로 선교여행을 마친후 행복한 귀환에 감격에 벅차, 제자들에게 힘찬 격려와 조언과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 감사기도를 바치는 예수님입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미사은총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합니다. 세 부분에 걸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주시는 말씀이 우리를 고무하고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나”로부터 나오는 기쁨이 아니라 기쁨의 샘, “성령”께로부터 선사되는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1.“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새삼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삶을 살아가는 철부지같은 우리들에게 계시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요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오늘 거룩한 철부지들인 우리를 향한 축복의 주님의 축복 말씀입니다. 

 

3.“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지만 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와의 독보적 관계가 우리를 더욱 마음 든든하게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예수님과 우정을 깊이함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날마다 해피 엔딩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산이 70%나 되는 산의 나라 대한민국이요 남한에만 8751개의 산이 있습니다. 우리의 산들은 한결같이 부드러운 곡선의 산입니다. 요즘 저를 행복하게 한 “산앞에 서면” 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10,20)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젠 부모님 다 돌아가셨기에 나의 기쁨을 온전히 나눌 사람이 없음을 새삼 절실하게 느낍니다. 주님 안에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제가 느꼈던 모든 슬픔과 기쁨을 온전히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었던 사람은 제 엄마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아직 살아 계신다면,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엄마가 저의 변화를 보고 참으로 기뻐하셨을 겁니다. 엄마 살아 계실 때도 지금처럼 스마튼 폰이 있었으면 매일 영상통화를 통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통화했을 텐데, 사실 엄마 돌아가셨던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주 전화할 수도 없었죠. 전화로나마 제 목소리를 듣길 좋아하셨던 엄마에게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전화로 통화했던 그때가 참 좋았고 행복했습니다. 이젠 제 기쁨을 누구와 함께 나눌 수 있을까요?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10,17)라는 언급에서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께 그렇게 황급히 되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말하는 부분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실 제자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명으로 파견된 제자들 역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파견되었을 때 아무것도 지참하지 않은 빈손이었으며, 또한 이런 일을 독자적으로 해 본 적도 없었으며, 각자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을 생각할 때 그들은 사실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활동한 결과 자신들이 예상하지 않은 일들, 곧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복종함”(10,17참조)을 체험하면서 그들 자신이 먼저 놀랬고, 그런 결과에 대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들떠서 예수님께 한 걸음씩 달려왔던 겁니다. 모든 제자의 놀라운 결과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한 자리는 그야말로 기쁨과 환희로 충만한 자리였을 것이며 그 시간은 모두가 기쁨으로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너무 감격에 벅찬 나머지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이젠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0,18~19)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아마도 널뛰듯이 기뻐 환호하였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는 훗날 사도 바오로가 “죽음도, 삶도 그 밖의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8,38,39)라는 고백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제자들의 결과를 칭찬해 주시면서도, 세상에서 제자들이 이룬 일의 성과보다도 더 중요한 점은 바로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10,20)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의 참 기쁨은 누구에게서 나오며 어떤 것인가를 환기시켜 줍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병자를 치유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런 모든 일의 결과가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 곧 아빠의 마음속 깊이 우리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은 아빠 하느님께서 참으로 좋아하시며 바라시는 일이며,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능력이라기보다 예수님 이름 때문이며, 아버지 하느님의 보살핌과 도와주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제자들은 물론 우리 역시도 타인으로부터의 칭찬과 찬사에 우쭐대며 기뻐할 일이긴 하지만 이 보다도 하느님의 도구이며 연장으로 쓰임 받았음에 감사하고 아빠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받은 모든 칭찬과 찬사는 오로지 주님의 이름으로 돌려 드리고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도록”(1코1,31)해야 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10,21) 제자들로 인해 이렇게 아버지께 기도하신 예수님도 지난至難했던 지난 순간을 떠오르면서 벅찬 기쁨과 보람을 느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철부지와 같은 제자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이로써 예수님께서 그토록 기뻐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파견 사명이란 곧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하느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철부지이며 못난 제자들을 통해서 실현되기 시작한 것을 목격하신 예수님은 아버지께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0,21)하고 기쁨에 넘쳐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아빠 하느님 앞에서 제자들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충만하고 감사로 넘쳤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도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10,23.2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걸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일이 아빠 하느님께는 큰 기쁨이 되시지만, 또한 그 일을 하면서 우리는 어떤 누구도 알지 못했고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알게 되었다.”(10,22)라는 사실에서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이며 이미 참 행복을 보고 듣고 만지고 있음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우리이지만 세상 앞에서 주춤거리거나 주저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늘나라의 신비 곧 아빠 하느님을 알았음에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아멘.”

 

 

 

눈에든 사람과 마음에 든 사람 다르게 나타난다.<루카 10/17-24>10/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보기만 좋은 사람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놓고 우리는 잘못 판단하면 실망이나 오래관계가 지속되지 못합니다. 말도 서로 좋아서 아니고 사랑하며 말하는 관계가 되어야 바른 관계이며 죽기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곁만보고 따르거나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따르다가 잘못 따라 결과가 나쁘게 나타납니다. 사람은 겪어바야 알고 어려운 일을 당해보아야 오른 판단을 합니다.

어떤이는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셍각하고 말하는 사람을 놓고 “지헤롭다는 사람과 슬기롭다는 사람에게 감추시고 철부지에게 들어내 보이신다.” 하심은 고만과 자만심 아는척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깊은 신비를 감추시고 알려지지 않고 한 가지를 알면 열 가지를 안다고 하며 남앞에 설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바로 알려면 순진하고 깊은 침묵을 지키는 사람 어리석에 보이는 주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실 유태아인은 긴 역사 안에 주님이 계시 율법을 알지만 직접 오시어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을 율법학자나 바리사이가 아니라 가난한 어부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심어주시어 모두가 죽기까지 주님 안에 믿음을 살으셨습니다.

우리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치의 마음을 모른다고 하였듯이 물속을 들려다 보이지만 마음은 사긤과 친교를 통해 알아보고 서로 깨우쳐야 합니다. 사람은 서로 알아보고 안 것을 깊이 생각하고 자주 접촉해야 알고 서로 어려운 일을 격어야 사람됨을 알게 됩니다. 친한 것 같아도 친하지 못하면 그는 마음을 보지 않고 손을 보거나 곁 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책 안에 글로 보는 것 보다 직접 보고 듣는 것이 진실을 아는데 도움이 됩니다. “얼굴이 곱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하는 말도 겉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숨 중심에 있지 않고 사람의 지성 감성 전인격에 있으며 인간 됨됨 안에 들어 나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아무 대나 버리는 사람 쓰레기를 한아라도 주어서 스레기 통애 넣은 사람 그 행위가 다른 것처럼 서로 어려운 일을 당해보아야 증명이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자비에 있습니다. 하늘에 기록된 사람은 주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의 카톡에 1200명 매일 같이 이름 부르며 글을 보내며 기도하고 하느님 나라에 살기를 기도하며 자유 평화 기쁨이 있게 바랍니다. 우리 서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함승수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를 참 많이도 바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이런 문장으로 끝납니다.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이건 개정된 기도문이고 그 전에는 이렇게 기도를 마무리했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요한 복음에 있는 이 말씀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이루어주실 것이다.”(요한 16,23ㄴ)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는 채, 그저 습관적으로 바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이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청탁’을 넣을 때 그와 친한 지인을 통해 부탁하면 잘 들어주는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이름을 내세우며 하느님께 청하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잘 들어주실거라고 은근히 기대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어떤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그런 세속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약한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일을 자기 계획에 따라서만, 자기 능력에 기대서만 하면 최선의 결과를 얻기 어렵지요. 그렇기에 자기 계획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님 뜻에 따라서 해야 합니다. 자기 능력에만 기대지 말고 나에게 부족한 부분은 주님의 권능에 의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통해 놀라운 방식으로 당신께서 미리 준비하신 가장 좋은 계획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된 제자들이 그런 점을 아주 뼈저리게 체험했지요. 처음 파견되었을 때에는 여러가지로 부족하고 약한 자신이 그런 큰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너무나 걱정되었지만, 모든 것을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그분 뜻을 철저히 따르며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주님의 이름으로’ 했더니 주님께서 자기들 손을 통해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켜 주신 겁니다. 이에 한껏 고무된 제자들이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며 그 일을 주님께 보고하지요.

제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도 참으로 뿌듯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일시적인 성공에 도취되지 않으시고 더 먼 곳을 바라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구원은 병자 몇 사람을 더 치유하고, 부마자 몇 사람을 더 해방시키는 수준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온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또한 그 믿음으로 당신 뜻을 받아들이고 따름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토록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활동은 그 최종 목표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눈앞의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 영적으로 깨어있는 채로, 자기들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를 바라보도록 일깨워주신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참된 목적이자 의미는 하느님의 능력을 이용해 내가 대단한 성과를 이루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신다는 구원의 진리를 마음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세상 것들에 대한 걱정에서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우리 마음 속에 충만한 기쁨이 차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뜻을 맡기실 사람을 능력이나 조건을 보고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좋고 나쁨’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 온유함, 하느님 앞에서 고집 부리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 하느님 뜻이라면 일단 받아들이고 따르는 우직함과 성실함만 있다면 하느님이 나를 통해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실 겁니다.

 

 

 

철부지의 성장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님
온라인상에서 어떤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엄마, 요거트는 맛도 없는데 왜 계속 만들어?” 엄마가 대답합니다. “나는 유산균이 잘 크니까 만들어. 우리 집에서 제일 잘 크는 거는 유산균밖에 없어.” 동생과 나는 묵묵히 요거트를 먹었다. 엄마 말 잘 안 듣고 애태우는 철부지 자녀를 향한 재치있는 푸념이지만, 사실 엄마는 아이들이 나름대로 잘 크고 있음에 감사하고 기특해하고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파견 다녀온 제자들이 기뻐하며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칭찬하며 인정하기보다 예수님은 마귀들이 복종한 것에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것에 기뻐하라고 주의를 줍니다. 그 다음 성령 안에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고백합니다. ‘주님, 이 철부지 같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를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바라던 일들, 걱정하던 일들이 잘 해결되고 이루어지면 좋아하죠. 그런데 그 순간, 주님은 사라지고 그 일의 결과만 남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만 의지하는 철부지는 결과가 아니라 함께해주신 주님을 찾습니다. 이끌어 주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에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 성장해 나갑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보면서도
볼 수 없었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했던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고
하느님께서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행복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오늘을 삽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만남이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행복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과의
나눔이
행복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으로
참된 행복과
즐거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행복의
참된
길입니다.

행복은 이름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순간이
참된
행복입니다.

마음은
말씀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행복의 시각을
새롭게하는
행복한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행복은
말씀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고
듣고 만나는
새로운 오늘을
선사합니다.

행복은 좌표는
바로 지금
여기 오늘입니다.

“신부님은 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평생 혼자 살아온 분이 가정생활의 어려움을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과연 제게 어떤 도움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물론 그 어디에서도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없어서 저를 찾아오셨겠지요. 그러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생각 자체가 정작 도움을 받을 수 없도록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할까요?

 

우리는 종종 “당신이 뭘 알겠어?”라는 부정적인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내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너’만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주님을 향한 우리 생각도 바꿔버립니다. “주님께서 뭘 아시겠어? 정말로 계시기는 한 거야?”라는 생각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게 큰 도움이 될 거야.”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만났을 때는 계속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자그마한 말과 행동 안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위치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부정의 자리인지, 아니면 긍정의 자리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위치에 따라서 내 문제 해결의 방향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72명의 제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제자들은 큰 기쁨에 휩싸였습니다. 마귀들까지 복종하는 자기들이 받은 사도의 명예로 인해서 크게 기뻤던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으로도 하늘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기뻐할 수 있는데, 세상의 인정을 받아야지만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인정만을 따르다 보면 주님께 대한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권능이 이제 자신들에게 주어졌음을 깨닫습니다. 이는 이제까지 어떤 임금들과 예언자들도 받지 못한 선물이었습니다.

그 선물을 우리도 받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의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간다면 말입니다.

 

사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이근우).

 

무엇을 청하고 계십니까?

제게 면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기대를 하고 오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망을 안고 돌아가시는 분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부이기에 삶의 나락에 빠진 것을 구해주고, 마음의 모든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할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제게 이런 힘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전지전능한 힘이 제게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찾아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저와 함께 주님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즉, 제게서 전지전능한 힘 자체를 요구하시는 분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실망만 안고 가시지만, 기도 안에서 함께 대화하면서 주님의 위로를 받으시려는 분은 기쁨을 안고 돌아가십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전지전능하신 힘을 요구하기보다, 주님과 함께할 힘을 요구해야 합니다.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더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으로부터 선교 사명을 부여받은 제자단의 규모는 상당했습니다. 직접 선발하신 12명의 제자 외에도, 70명 혹은 72명의 제자단이 존재했습니다. 70이라는 숫자는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들의 명부에 따라, 전 인류를 이루는 일흔 국가의 숫자와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70명의 제자단을 뽑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들 무사히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출발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신당부에 따라 돈주머니도 식량자로도, 여벌 옷이나 신발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땡전 한푼도 없이 계속된 전도 여행길에 제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심신은 지칠대로 지쳤을텐데, ‘선교 여행 결과 보고회’ 분위기는 놀랍게도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제자들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한 의기양양한 얼굴, 세상을 다 얻은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상기된 얼굴의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복음 10장 17절)

 

제자들의 성공담에 예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며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복음 10장 18~20절)

 

제자들은 마귀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하고 물러나는 것, 다시 말해서 사탄에 대한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체험이 얼마나 강력했던니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뱀과 전갈을 짓밟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뱀과 전갈은 그 사악한 본성상, 생명을 위협하는 사탄의 부하로 여겨졌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전갈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는 분, 독사와 살모사를 짓이기고 사자와 용을 짓밟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그러한 능력을 고스란히 당신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사탄의 세력에 지배되지 않게 되습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게 선택된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각 고을마다 그 고을 주민들의 명단을 명부에 써서 잘 보존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그 고을에서 제공하는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으로 간주된 하늘나라에서도 그와 비슷한 명단이 존재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명단에는 하느님께서 뽑으신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생명의 책입니다.

 

생명의 책! 

사이비 교주들이 자주 애용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서울구치소에서 무상 급식 잘 하고 계신 사이비 목사 역시, 틈만 나면 ‘생명책’이라는 표현을 써서 우리를 포복절도시킨 바 있습니다.

“누구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삭제시키겠습니다. 광화문 집회 안나오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헌금 안내면 생명책에서 빼버리겠습니다.”

그 소중한 생명의 책을 그토록 남용하고 훼손시켰으니, 조만간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간 습관적으로 저질러온 신성모독을 어찌 감당해낼까 걱정입니다.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지독한 허언증과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이비 목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오직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보속하는 마음으로 이웃 사랑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만을 굳게 믿으며, 그분의 관대한 용서와 자비를 기대할 뿐입니다.

 

 

 

진정한 휴식은 언제 시작되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체험한 놀라운 일들을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라며 자랑스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시며,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복음을 전한 뒤의 쉼은 꿀 같은 기쁜 일입니다.

 

이들은 진정 휴식을 취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휴식을 잘 취합니까? 주말에 온종일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한가요? 물론 몸은 그럴 것입니다. 명절 연휴를 보내고 나면 기쁘신가요? 어느 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왠지 완전히 개운하고 기쁜 휴식을 취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안식’, 즉 ‘휴식’은 이런 쉼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휴식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생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고생합니다.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녀를 키우고, 자녀가 공부하는 것도 사실은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인정받으려는 근저에는 자신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를 부모가 다 채워주면 좋겠지만 사실 부모에게도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더라도 다 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취직하고 일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휴식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진정한 휴식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무석’ 교수의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에는 가명 ‘휴’라는 유능한 인재의 사례가 나옵니다. 휴는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라는 말을 듣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엘리트였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자신 팀장이 회사를 차려 나갈 때 스카웃 되어 함께 회사를 일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쟁심이 너무 강해서 더 유능한 인재까지 못 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쉼 없이 달려왔을까요?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했던 것일까요? 아버지에게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임신했을 때 유산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피신하면서까지 낳은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행도 형하고만 갔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여 이민 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형에게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휴를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일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입니다.

휴는 이무석 교수를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심지어 증오하였습니다. 어느 날 휴가 만나자고 하였을 때 이무석 교수는 휴가를 간다며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상담자가 이렇게 자신의 정보를 흘려주지 않는 이유는 내담자가 상담자에게서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투사 시켜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울이 깨끗해야 자신이 더 잘 보이는 법입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있었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드러냈습니다. 자신도 이 교수처럼 휴가를 떠납니다. 휴가 여행 중에 이 교수의 배가 뒤집히는 꿈까지 꾸게 됩니다. 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났을 때 뾰로통하여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이때 이 교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려져 응급실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설사가 멈추었고, 가족들과 또 직장인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휴는 비로소 휴식을 찾았습니다.

휴는 이제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무석 교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아버지를 투사하여 함께 박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꿈에 아버지 소파에 앉아있는 한 마리 개가 나왔습니다. 그 개는 점점 커져서 소파의 수십 배 크기가 되었습니다. 소파는 아버지를 상징하고 개는 자신을 상징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개로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소파보다 커 버린 자신은 더는 소파에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의 시작입니다.

 

사탄이 사는 곳은 어딜까요? 지하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십니다. 하늘은 인간을 지배하는 권세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는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인정받고 싶게 만드는 누군가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고, 그 부모를 투사시킨 누군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금 사랑하다가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해줘야 했지만 사랑해주지 못한 데 대한 분노가 그 사람에게 투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사랑했다가 갑자기 미워한다면 그래도 사랑해주십시오. 그 사람은 나를 누군가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그 사람을 고생시키는 바로 그 권세도 함께 못 박힙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워할 수도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 모든 애증의 대상을 투사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면 그 산을 넘어 에덴동산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휴식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를 고생시키는 모든 하늘의 권세가 함께 못 박힙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에게조차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질 때, 나는 참된 휴식, 참된 안식에 들어갑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했던 사람이 하는 미움도 참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이 나에게 투사했던 그 누군가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평화 책꽂이’가 있습니다. 책을 소개하고 필자의 느낌과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한영국 선생님은 정채봉님의 ‘초승달과 밤배’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주로 외국 작가의 책을 소개하였는데 이번에는 한국 작가의 책을 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은 미주가톨릭신문 홈페이지 지면보기 9월 13일자를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연좌제와 신분제’의 사회를 살았습니다. 연좌제는 부모의 잘못, 특히 사상과 관련된 잘못이 있으면 자녀들 또한 영향을 받는 제도입니다.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없고, 정보원에 의해서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초승달과 밤배에서 할머니는 손자와 손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사상범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손자와 손녀 역시 사상범의 가족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이 연좌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저의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지만 면접에서 떨어지곤 했습니다. 연좌제의 벽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이 신장되면서 ‘연좌제’는 더 이상 삶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이 가끔씩 큰 홍역을 치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Black Lives Matter'입니다. 지금 미국에 있는 흑인의 선조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Roots)'를 통해서 미국 흑인 노예들의 삶과 애환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세기 전만해도 대부분의 나라는 신분제의 사회였습니다. 한국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천민(賤民)’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람이 그 신분에 따라서 등급이 매겨지는 사회였습니다.

 

신분이 다른 사람과는 사랑할 수도 없었고, 사랑한다고 해도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재능과 능력이 있어도 신분이 천하면 재능과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때로는 그 재능과 능력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피부색 때문에, 성별 때문에, 신분 때문에 차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엔 인권 선언문은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우리 모두는 이성과 양심을 가졌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피부색, 성별, 종교, 언어, 국적, 갖고 있는 의견이나 신념 등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연좌제와 신분제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따라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인데 인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입니다. 가난은 사상과 신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은 물질과 재물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누면 해결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가난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굶주려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치료받지 못해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이 없어서 거리에서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코로나19는 가난한 국가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소인은 지배하려 하나 공정하지 못합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각 악기의 소리를 존중합니다. 각 악기가 똑같은 소리를 낸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 못합니다. 각 악기는 저마다의 소리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악기는 지휘자의 뜻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나침판은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화이부동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청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차분하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가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욥은 화이부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도 감사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때도 감사했습니다. 재물이 많았을 때는 기꺼이 이웃과 나누었고, 재물을 다 잃었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욥을 고통과 시련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욥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20년 이상 도시 빈민을 위해 사목하는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다른 사목을 하는 동창을 존중하고, 경청합니다. 자신의 사목을 드러내거나 내세우지 않습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늘 웃는 모습으로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화이부동의 삶을 사는 동창입니다.

 

동이불화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배가 생명보다 중요하다며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고 대면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는 어쩌면 동이불화의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 때문에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화이부동의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각 고을로 파견하셨던 일흔 두 제자가 돌아오자 이들의 성공적인 활동을 보시고 성령 안에서 기뻐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할 때가 있곤 합니다. 곧 우리가 사도직을 수행하면서도 그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마귀들까지도 복종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예를 들어 우리가 찬양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도 듣는 이들이 그 찬양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도록 이끌어 주어야지 자신의 음악적 역량만을 드러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를 들어서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도 듣는 이들이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지 자신의 스피치 능력만을 전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곧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실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지 내가 아닙니다. 만약 어느 누가 나를 통해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분명히 성찰해 보고 모든 것을 통해 오직 그분의 영광만이 드러나실 수 있도록 성령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의 권능은 겸손해야 볼 수 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3)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며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신다. 그리고 제자들은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시는 예수님을 앞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 제자들은 보는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본다.

파견받은 제자들로써 권능을 부여받고 실제상황에서 마귀를 쫓아냈다. 제자들은 놀라운 일을 경험한다. 제자들이 이를 예수님께 낫낫이 보고 한다. 제자들은 철부지 어린이처럼 예수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고 신나게 조잘대다가 실제에서 진리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제자들의 행복이 시작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교감처럼, 이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교감으로 하느님께서 드러나고 있다. 제자들이 일을 통해 감춰계신 하느님을 보게 되었으니 놀라운 발전이다. 우리는 이를 ‘명오가 열렸다’고 말한다. 어린시절에 어른들이 ‘일곱살이 되면 명오가 열린다’고 말해주던 기억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여도 명오가 열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닫힌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잘못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보고 있으면서도 속 내용을 보지 못하는 교만함이 자신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3)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더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으로부터 선교 사명을 부여받은 제자단의 규모는 상당했습니다. 직접 선발하신 12명의 제자 외에도, 70명 혹은 72명의 제자단이 존재했습니다. 70이라는 숫자는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들의 명부에 따라, 전 인류를 이루는 일흔 국가의 숫자와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70명의 제자단을 뽑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들 무사히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출발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신당부에 따라 돈주머니도 식량자로도, 여벌 옷이나 신발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땡전 한푼도 없이 계속된 전도 여행길에 제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심신은 지칠대로 지쳤을텐데, ‘선교 여행 결과 보고회’ 분위기는 놀랍게도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제자들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한 의기양양한 얼굴, 세상을 다 얻은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상기된 얼굴의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복음 10장 17절)

 

제자들의 성공담에 예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며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복음 10장 18~20절)

 

제자들은 마귀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하고 물러나는 것, 다시 말해서 사탄에 대한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체험이 얼마나 강력했던니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뱀과 전갈을 짓밟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뱀과 전갈은 그 사악한 본성상, 생명을 위협하는 사탄의 부하로 여겨졌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전갈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는 분, 독사와 살모사를 짓이기고 사자와 용을 짓밟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그러한 능력을 고스란히 당신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사탄의 세력에 지배되지 않게 되습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게 선택된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각 고을마다 그 고을 주민들의 명단을 명부에 써서 잘 보존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그 고을에서 제공하는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으로 간주된 하늘나라에서도 그와 비슷한 명단이 존재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명단에는 하느님께서 뽑으신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생명의 책입니다.

 

생명의 책! 사이비 교주들이 자주 애용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서울구치소에서 무상 급식 잘 하고 계신 사이비 목사 역시, 틈만 나면 ‘생명책’이라는 표현을 써서 우리를 포복절도시킨 바 있습니다.

“누구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삭제시키겠습니다. 광화문 집회 안나오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헌금 안내면 생명책에서 빼버리겠습니다.”

그 소중한 생명의 책을 그토록 남용하고 훼손시켰으니, 조만간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간 습관적으로 저질러온 신성모독을 어찌 감당해낼까 걱정입니다.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지독한 허언증과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이비 목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오직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보속하는 마음으로 이웃 사랑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만을 굳게 믿으며, 그분의 관대한 용서와 자비를 기대할 뿐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누가 주님의 신비를 대면할 수 있는지 봅니다.

제1독서는 고통에 차 울부짖던 욥이 주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승복하는 장면입니다.

"저에게는 너무나도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욥 42,3)

풍요를 누리던 욥이 사탄의 농간으로 삶의 나락에 떨어지면서 욥기는 인간 삶의 고통과 실존을 치열하게 다룹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대목은 욥이 감정의 폭풍을 넘어 비로소 자신이 약하고 미소하며,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임을 절감하고 주님께 이를 고백하는 장면이지요.

욥기의 본문 안에는, 경솔한 세 치 혀로 욥의 잘못을 캐내어 자기들의 설익은 신학에 꿰어맞추려는 무례한 친구들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욥이 고통에 대해 항변하는 부분이 꽤 길게 차지합니다. 욥은 극한의 억울함과 서러움이 치받쳐 올라오는 것을 누르지 않고 모든 인간을 대변해 질문하고 또 질문하지요. 그리고 이제, 그는 "폭풍 속에서 말을 건네신 주님"(욥 38,1 참조) 앞에서 온전히 제 자리를 찾습니다. 창조주 앞에 선 작디 작은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는 제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인간으로서 더는 견뎌낼 수 없는 한계점까지 갔던 욥이 주님을 봅니다. 고통과 함께 욥은 신비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주님은 욥이 자신의 약함과 무지를 깨닫자,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비록 그의 자각과 회개가 완전하지 않더라도 그리하십니다. 고통의 강을 건넌 이에게는 주님의 신비를 마주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복음은 파견을 받아 선교 여행을 떠났던 일흔두 제자의 귀환 장면입니다. 일흔두 제자도 기뻐하며 돌아오고(루카 10,17), 예수님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루카 10,21)하시니 참으로 밝고 희망찬 분위기가 느껴지지요.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하느님은 당대의 석학들이나 종교 지도자같은 제도권의 권위자들이 아니라, 어부와 세리 등 오합지졸처럼 모여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펼쳐 보이십니다. 여러 모로 부족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권한을 통해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민중에게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선사했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이들을 통해 전해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야말로 진정 "아버지의 선하신 뜻"(루카 10,21)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루카 10,22)

아버지에 대한 앎은 아들에게만 유보되었고, 아들에 대한 앎 역시 아버지께만 속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 중에 이 신비를 허락받은 한 부류가 있다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내세울 것 없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별볼일 없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려 하십니다. 제도와 지식으로 무장한 이들에 비해 공도 더 들고 실패 확률도 커서 그야말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대상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시지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제자들은 행복합니다. 주님의 힘이, 부족한 자기들을 통해서 이루신 업적을 보았으니까요. 그들이 행한 치유와 구마의 기적이 가장 먼저 변화시킨 이들은 바로 제자들 자신들일 겁니다. 그리고 치유받은 이들의 기쁨과 감사를 통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이 자리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생생히 체험했을 겁니다.

지금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는 스승을 보는 행복 또한 무량합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곧 하느님의 충만함이고 성령의 흡족함이니, 성삼위 하느님의 완전한 행복이 제자들의 영혼에도 흘러듭니다. 주님의 신비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의 겨자씨 한 알만치도 못 되는 믿음을 통해 작은 이들에게 내리고 작은 이들을 물들여 변모시킵니다. 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하늘 나라의 신비가 아닐까요!

자신의 약함과 작음을 인정하게 되는 여정에는 고통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자신이 한계에 갇힌 한갓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고통이 아니고서는 깨닫기 어려운 신비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보잘것없이 초라한 작음에 질식되거나 좌절하지 않는 이들이 바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철부지들입니다. 잘나서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이들이지요.

모두가 더 가지려, 더 올라가려, 더 드러내려 하는 세상에서, 비워서 나누고 낮추고 드러나지 않게 사랑하는 우리는 철부지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한 하느님의 귀하디 귀한, "작은 이들"이지요. 우리가 지나온, "악!" 소리 나게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의 자취는 어느새 알알이 영롱한 보석처럼 우리 영혼에 새겨져 빛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더 작아지고 더 낮아지려는 우리에게 허락된 신비는 곧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의 증거입니다.

 

주님의 작은 이들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으로 철부지인 우리를 묶어 주신 주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 말씀 고통 속에서도 위로가 되나이다."(영성체송) 하고 노래한 시편 작가와 함께 오늘도 말씀에 의지해 작음의 길, 비움의 길, 낮아짐의 길을 함께 걸어갑시다. 이 여정에 길동무가 되어 주신 벗님께 감사합니다. 욥이 받은 축복 함께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파견된 이들의 기쁨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일흔두 제자가 돌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을 보면, 이들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파견되었다고 하지요.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지는 양들 같았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열악한 상태로 파견되었다 돌아온 제자들의 첫 반응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라고 보고를 하지요. 이들은 인간적인 준비나 능력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놀라운 기적들을 기쁨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기뻐하시며, 이 제자들이야말로 행복한 이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비단 일흔두 제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파견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일련의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고, 이를 통해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에 파견하신 분께서는 이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고 하시며, 그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 과정은 완성됩니다. 사실, 이러한 참행복을 맛보게 하시려고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양한 

곳으로 파견하고 계십니다.

 

 

 

<기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만나

벗이 기쁘답니다

 

나를 만나

기쁜 벗이 있어

나 역시 기쁘답니다

 

이 기쁨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예요

 

벗과 나의 만남은

이내 헤어짐일 테니까요

 

나를 통해서

나를 보내신 분을 만나

벗이 기쁘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을 만나

기쁜 벗이 있어

나 역시 기쁘답니다

 

이 기쁨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벗에게 나를 보내신 분께서

벗에게 나를 맞이하게 하신 분께서

벗과 나 영원히 이어주실 테니까요

 

 

하루하루가 좋은 날입니다. -일일시호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일일시호일, 하루하루 좋은 날, 기쁜 날, 행복한 날을 사는 이들은 빈손으로 방문해도 기쁘고 반갑고 고맙습니다. 어제 이런 분들이 방문하였고 그대로 사진에 담으니 꽃보다 더 예쁜 모습들에 참 행복했습니다. 이런 분들은 꽃보다 아름다워 저절로 나오는 시입니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그냥 오세요/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얼마전 방문했던 코이노니아 자매회 회장이 전해준 야생화 자수전 팜프렛 제목을 보고 떠오른 생각입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바로 하루하루가 좋은 날(Everyday a good day)이라는 뜻입니다. 자수전 팜프렛에 나온 야생화 꽃들도 단순해서 좋았고 선물 받은 작은 작품 둘은 게시판에 붙여 놓았습니다.

맑으나 흐리나 비오나 눈오나, 하루하루 다 좋은 날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사는 이들이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제 자작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다음 두연과도 통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참 많이도 인용했습니다만 읽을 때 마다 새롭습니다. 네 글자, ‘한결같이’로 요약되는 삶입니다. 바로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이 의도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주님과 함께 날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믿음의 푸른나무로,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사랑의 강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 자체가 구원의 표지요 그대로 미래가 됩니다.

이렇게 살 때 비로소 해피엔딩, 행복한 마무리 인생이 됩니다. 바로 오늘 욥기와 루카복음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내용입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살아 온 결과입니다. 바로 믿음의 승리입니다. 욥기에서 사탄의 시도는 욥의 이런 한결같은 삶의 자세로 초지일관한 결과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습니다. 욥의 승리이자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욥의 하느님 체험의 고백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에 마침내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런 하느님 체험의 고백입니다. ‘개안開眼의 여정’에 항구한 결과 마침내 때가 되어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뵙는 욥입니다. 이어 주님은 욥의 운명을 되돌리심으로 참 행복하게 마무리 짓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루카복음의 예수님 역시 욥처럼 해피엔딩, 행복하게 일단락 짓는 모습입니다. 성공적 선교사명을 마친후 귀환하여 기뻐하는 일흔 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결정적 말씀을 주십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이미 불러 주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삼아 주신 것을, 바로 우리의 성소聖召에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를 새롭게 불러 주시어 날로 당신과의 일치를 깊게 하시니 바로 이것이 기쁨의 원천이요, 그 무엇도,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 체험입니다. 욥처럼, 아니 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 아버지를 고백하며 감사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체험의 감사의 고백기도가 참 아름답습니다. 여기서 철부지들이 지칭하는 바 순수한 영혼의 일흔 두 제자들은 물론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 행복한 날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4).

이렇게 날마다 주님을 뵙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참 행복이요 이 또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PG 46,295-298)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사람이 되고 낡은 것은 사라집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새사람이란 순수하고 흠 없으며 악과 간계와 부끄러운 일에서 해방된 그런 마음 안에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영혼이 회개하여 죄를 미워하며 힘을 다해 덕행의 길로 나아갈 때 영의 생명으로 변모되어 그 안에서 은총을 받고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며 새로이 창조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낡은 누룩을 깨끗이 없애 버리고 다시 순수한 반죽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합니다. “우리는 묵은 누룩을 가지고 파스카를 지내지 말고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지냅시다.” 이 말씀들은 위에서 언급한 새사람에 대한 말씀과 잘 조화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유혹자는 영혼에게 많은 올가미를 놓습니다. 인간 본성은 그 자체로 보아서는 너무도 약하여 그 유혹자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에게 항상 천상 무기로 무장하라고 권고합니다.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도가 여기서 구원을 얻는 데 있어 얼마나 숱한 방법을 여러분에게 지시하는지 보십시오. 그 모두는 하나의 길, 하나의 목표에로 정향되어 있고, 이런 방법들로써 계명의 완수를 지향한 삶의 경주는 쉽게 끝마쳐지게 됩니다. 또 다른 데에서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이러기 위해서 현 생활의 빛나는 것을 송두리째 멸시해 버리고 온갖 세상 명예를 포기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과 함께 자기 영혼도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 영혼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 뜻을 자신의 확고한 인도자로 삼으며 또 자기 생활에 꼭 필요한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형제들의 공동 이익을 위해, 구속된 그리스도의 종처럼 권위를 지닌 이들의 명을 기쁨과 희망으로 수행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다음 말씀에서 주님이 뜻하시는 바가 바로 그 점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이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이들에 대해 이러한 종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보상을 기대함이 없이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하고, 만인에게 예속되어야 하며 또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하듯 자기 형제들을 섬겨야 합니다. 권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더 헌신적으로 일을 해야 되지만 수하 사람들보다 더 겸허해야 하고, 종처럼 자기 목숨을 타인의 의향에 내맡긴다는 표양을 주어야 하며, 또한 자신들의 보호에 위탁된 이들을 하느님의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권위를 지닌 사람들은 훌륭한 교사가 부모들이 자기에게 맡긴 어린것들을 돌보듯이 자기 형제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인이건 수하 사람이건 관계없이 상호간에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수하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복종할 것이고, 주인 되는 사람은 형제들을 기꺼이 완덕에로 이끌 것입니다. 서로 공경심을 보이는 데에서 앞지른다면 여러분은 지상에서 이미 천사의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함승수 신부님

남방 라마교의 라마가 고명하다고 알려진 북방의 라마에게 전갈을 보내어, 불교 수행자들을 가르칠 슬기롭고 거룩한 스님 한 분을 보내달라고 간곡히 청했습니다. 그런데 북방의 라마는 한 사람이 아닌 다섯명의 스님을 파견했지요. 모두들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만 할 뿐이었습니다.

 “다섯 가운데 하나라도 남방 라마에게 당도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

 다섯 스님이 길을 가던 중 산속 외딴 오두막에 이르렀습니다. 그 집에는 아리따운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처녀는 불심이 깊어 스님들을 극진해 대접했습니다. 그녀는 산적들에게 양친을 잃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가장 젊은 스님이 말했습니다.

 “난 이 처자와 함께 있겠습니다. 내 진정 불자라면 곤경에 빠진 이에게 마땅히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네 스님은 다시 길을 떠나 며칠 뒤 왕궁에 도착하여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스님을 눈여겨보던 왕은 그에게 자신의 딸과 혼인하여 자신이 죽거든 왕위를 계승해 달라고 청했지요. 이에 그 스님은 ‘이 나라 억조창생들을 감화시키기에 왕보다 더 좋은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신성한 종교를 위하여 공헌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지.’라고 생각하여 일행에서 빠졌습니다.

 다른 세 스님이 길을 떠나 어느 마을 앞을 지나가는데, 거기서 한 심부름꾼이 달려와 길을 막았습니다.

 "우리 마을 절의 주지 스님이 입적하셨는데, 후임자가 꼭 필요합니다.”

 그 중 한 스님이 말했습니다.“내 진정 불자일진대, 마땅히 여기 남아 이 마을 사람들을 섬겨야겠지.”

 다른 두 스님이 다시 길을 떠나 어느 불교도 마을에 이르렀는데,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불교를 버리고 힌두교 구루의 세력으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한 스님이 말했습니다.

 “난 여기 남아 이 가엾은 중생을 참 종교로 되돌아오게 할 의무가 있다고 느끼고 있네.”

 그렇게 각자의 이유를 들어 중간에 빠지고 결국 남방 라마에게 이른 스님은 한 명뿐이었습니다.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종교박람회>라는 책에 수록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섯명의 스님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하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 길을 끝까지 걸으면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주 '샛길'로 빠지게 됩니다. 좋은 영성강의를 많이 들어 신학적 소양을 넓히겠다며, 목표로 한 양 만큼의 기도를 꼭 바치겠다며, 각자의 재능을 살려 본당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겠다며, 주요 성지들을 모두 순례하겠다며, 특별한 능력이 깃든 성물이나 장소를 찾아가 은총을 많이 받아보겠다며 각자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는데에 몰두하느라, 정작 하느님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데에는 소홀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리 정한 목표를 이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여 마치 영성적으로 크게 성장한듯한 착각에 빠져 살게 됩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나의 능력을 이용하여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구원받는 것입니다. 내가 정한 목표를 이루는 일에서 심리적 만족과 감동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길'을 걷는게 아니라 '사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나 자신에게 냉정하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께 빠져있는가? 아니면 내 만족에 빠져있는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이름에는

그 나름의

의미있는

무게가 있다.

 

사람은

떠나가도

그 사람의

이름은 남는다.

 

우리 삶의

보호자가 되시는

우리 이름의

아버지시다.

 

아버지

하느님의

가슴에 새겨지는

소중한

이름들이 있다.

 

기록과

기억사이에

눈물겨운

우리의 여정또한

뜨겁게 새겨진다.

 

하느님만으로

살아가는

이름들이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이름이 된다.

 

감출 수 없는

우리를 향한

선하신 사랑이다.

 

선하신 뜻은

아버지의

구원이다.

 

선하신 뜻은

아버지의

때안에서

언제든

이루어진다.

 

우리는 오늘

어떠한 삶을

만나고 어떠한

빛깔로 새겨지고

있는지를 성찰한다.

 

아버지 하느님의

가슴에 우리는

어떠한 이름으로

새겨질지를

또한 반성합니다.

 

기쁨과 소중한

이름으로

새겨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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