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1,6-12
형제 여러분,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사도 1,12-14)와 복음(루카 1,26-38)을 봉독할 수 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이웃이냐는 물음에,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응답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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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내가 전한 복음 말고 누가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고,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답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가만히 보면, 율법 교사가 질문하지만 사실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 교사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명기에 있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에 있으니 율법 학자가 이 계명들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예수님께서 그 계명들을 지키게 하신다고 하여서 그에게 새로운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다시 묻는 것은 그가 어제 우리가 묵상한 것처럼 규정이 없어도,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웃의 범위를 한정하려 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범위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만 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법을 최대한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2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이웃을 한정하려 할 때, 그는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는 계명을 실천하여 생명을 얻었을까요?
마지막에 그는 강도에게 이웃이 되어 준 이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10,37)이라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계명들을 진심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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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교사가 예수님과 이웃 사랑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당시 유다인들은 이웃의 범주를 동족으로 제한하였습니다. 다만 이방인이라도 이스라엘 땅에서 살고 있다면 이웃으로 받아들였습니다(레위 19,18.34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율법 교사의 질문에는,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과, 갈등 관계에 있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의 범주에 넣지 말아야 하지 않겠냐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동족일지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단죄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 것입니다(요한 7,49 참조). 그러므로 그가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어간 것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로 지내신 것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비유 끝에 율법 교사에게 되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여기서 율법 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질문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율법 교사의 질문이 ‘이웃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예수님의 질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묻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라도 먼저 자신이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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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복음의 핵심 계명입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누구에게나 명료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화두를 던집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에게 천대를 받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자비로운 행위를 이웃 사랑의 모범으로 제시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자비를 베푸는 구세주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구세주는 유다인들에게 배척을 받지만 자비로이 구원해 주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처지를 이방인으로 비유하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모독자로 십자가에 처형되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보도록 이끕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전할 수 있는 대상은 우리 주변의 고통받는 이웃입니다. 나와 다른 타인은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기에, 우리는 그 타인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세주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쁨은 우리가 만나는 이웃 사람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이웃 사랑의 보편적 가치를 알려 주십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은 조건 없는 사랑의 기준을 알려 줍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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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쁨, 그리고 불멸의 희망이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이유에서든 하느님을 사랑하는 기쁨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 곁의 이웃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납니다.
이웃 사랑의 대명사인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넘어 인류 문명사에 이웃 사랑의 보편적 가치를 드러내 주는 이야기로 자주 회자됩니다. 내 편이 아니면 무시하고 경멸하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강해지는 우리 시대에,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위선적 사제나 레위인과는 달리, 오로지 ‘가엾은 마음’ 하나로 아무런 편견과 조건 없이 애덕을 실천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에서 복음이 지닌 놀라운 힘을 발견합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자신에게 특별한 부담이나 피해가 오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위험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고도 구조에 나서지 않는 경우에 처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다고 합니다. 최근 거리에서 폭력을 당하거나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돌보다가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를 핑계로 보편적 도덕심을 잃는 위기의 한국 사회를 볼 때,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자못 중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요청하는 애덕의 실천에 어떤 이유에서든 합리적 이유나 제한적 조건을 거는 것은 복음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무조건적인 하느님 사랑에 뿌리를 둔 조건 없는 이웃 사랑에서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얼마나 조건부 사랑에 익숙한 사람인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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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듣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명심해야 하는 말씀이지만, 믿지 않는 선의의 많은 사람도 이 말씀에 깊이 감동하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 비유의 보편적인 호소력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에 심어 놓으신 사랑의 계명을 감지하게 됩니다. 고통에 빠진 이웃에 대한 연민의 정이나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어떤 높은 지위에 있든, 얼마나 많은 지식과 언변을 지녔든, 그는 가장 중요한 ‘인간다움’을 잃은 자입니다. ‘인간다움’이야말로 윤리와 도덕의 근원이자 행동의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로써, 왜 우리가 그리도 자주 인간다움을 잃고 사는지를 깨우쳐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나의 세계에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상관없는, 굳이 마음 쓸 필요 없는 익명의 ‘타인’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마르티니 추기경은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와 가진 서면 대담에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시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사랑하고 우리 스스로를 성화하기 위한 이 세계는 존재에 관한 가치 중립적인 이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사건들이나 자연 현상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 세계는 얼굴이라고 하는 이타성의 중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바라볼 얼굴, 존중할 얼굴, 어루만질 얼굴들이 존재하기에 우리 세계도 존재한다(마르티니·에코 공저,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서).
나와 무관한 ‘타인’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언젠가 만날 ‘이웃’으로 존재합니다. 고통 받는 이들에게서 ‘이웃의 얼굴’을 보는 것, 그것이 보편적 윤리입니다. 또한 그 윤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겨 주신 ‘사랑의 계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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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사랑이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애써서 고기를 잡아 보려고 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루카 5,1-11 참조).
누 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 그 안에 새겨진 온갖 슬픔과 고독, 분노, 죄악,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깊은 데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그를 사랑하려고 애써도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 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깊은 데로 가시어 그물을 치시는 것입니다. 눈먼 이의 깊은 곳인 두 눈을 어루만져 주시고, 귀먹은 이에게는 그의 귀에다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나병 환자를 위해서는 그의 피부를 매만지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리 모두의 깊은 곳, 곧 십자가상의 죽음에까지 들어가셨습니다.
오 늘 사마리아인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쳤습니다. 그는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의 깊은 곳을 보았습니다. 곧 강도를 만난 사람이 느꼈을 당황과 두려움, 절망, 분노, 가족에 대한 걱정, 강도에 대한 원망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한 여러 가지 그물을 칩니다. 그 반면, 사제와 레위인은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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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랍니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명성 따위를 추구하는 사람도, 결국엔 건강과 생명을 보장받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가 건강과 생명을 담보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 줌 바람에 날리는 먼지와 같은 인생살이에서 정신 차리지 못하고 세상의 것에 목숨을 내맡기려 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사마리아인이 베푼 ‘사랑의 실천’에 관한 비유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거창한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며, 자선을 베푸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게 시작한다면 결국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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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교사는 영원한 생명을 원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을 ‘시원하게’ 알려 주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답변은 평범한 율법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목이 탑니다. 그러기에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실천으로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드셨습니다. 행동 없이는 깨달음도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마음먹는다고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율법을 실천하려는 이들의 ‘목표’입니다. 도달점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멍든’ 몸과 마음을 감싸 안는 일입니다. 그래도 살아야 하고 사랑하며 부딪쳐야 함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치유하는 것이지요.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라면 어떻게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는지요? 너무 힘든 인생이 됩니다. 삶은 축복입니다. 따뜻한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인생 역시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마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언제라도 이 세상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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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아름다우려면 무엇보다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도,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아름다운 만큼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려움을 이겨 내게 합니다. 『준주성범』은 사랑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사랑은 신속하고 참다우며, 또 경건하고 쾌활하며, 온화하고 용감하며, 인내성이 있고, 성실하고 지혜로우며, 너그럽고 사내다우며 자기를 찾지 아니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찾게 되면 그는 벌써 사랑에서 멀리 떨어지는 자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두루 살피고, 겸손하고 정직하며, …… 항상 하느님만 믿고 바랍니다.”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입니다. 이런 현상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저의 경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겼던 것 같습니다. 옆집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 제 장난감보다 더 좋아 보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의 가방, 옷차림 등에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지 않는 부모님께 대한 원망도 가졌습니다.
시기심은 평등의 원칙이 깨졌다고 생각될 때 나옵니다. 그토록 갈망했지만,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삶을 누군가가 살고 있을 때 불평등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불평등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삶을 보고 자기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져도 순간의 만족일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모든 감정을 통해, 불공평의 결과는 나의 욕심일 뿐 불공평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욕심 가득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삶이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상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고, 또한 다른 이들을 향해 축하의 마음을 전달하는 여유도 갖게 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자기 안에서 치워나갈수록,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자리하시게 됩니다. 여유와 편안함을 갖게 되고,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필요한 사랑의 마음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율법에 나오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이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즉,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인 사랑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통해 하십니다.
자기는 옳고 따라서 자기는 당연히 최고의 것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말로써 정의를 잘한다 해도, 이웃으로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즉, 율법의 세부 조항을 열심히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욕심, 시기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 사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한 나라의 정승이라면 모범을 보이고 백성과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정홍순).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 매일의 사랑 고백, 묵주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여기저기 몸도 아팠지만, 이 길을 계속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업 땡땡이도 많이 치고, 제대로 신학 공부도 하지 못했습니다. 늘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지라, 30년 전부터 반성하는 마음으로 매일 영성 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영적 독서 책 한 권을 만나면 마치 횡재한 기분입니다. 탁월한 영성가들의 신앙과 삶, 지혜와 경험이 맞춤형으로 내 손안으로 딱 들어오니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최근에 영적 독서를 하던 중에 묵주 기도와 관련된 풀톤 쉰 대주교님의 말씀을 접하고 정말 가슴이 뛰고 설레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때로 우리가 매일 바치는 묵주 기도는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의 의무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인들 사이에서는 수시로 서로 사랑을 확인합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해요 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묵주 기도는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치면, 그것은 “성모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묵주 기도를 누구보다도 좋아하셨던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묵주 기도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단순하고 깊이가 있고, 훌륭한 묵상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 영혼의 눈앞에는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갑니다.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로 구성된 그 신비들은 성모님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는 친교를 나눌 수 있게 저를 이끕니다. 찬미의 기도이며 간구의 기도인 묵주 기도가 묵상 기도로 넘어가길 희망합니다. 묵상을 동반하지 않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묵주 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구원송 등 염경기도의 조합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묵상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염경기도와 묵상기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기가 막힌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문 매 신비 안에 반드시 ‘무엇무엇을 묵상합시다!’ 라는 문구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묵주 기도는 당연히 묵상 기도입니다.
묵상이나 관상에로 나아가지 못하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체에 불과합니다. 또한 묵상 없이 그저 입으로만 줄줄 바친다면 묵주 기도가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이방인들의 빈말처럼 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묵주 기도를 자주 바치면 좋은 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칠 때, 성모님께서 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성모님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더 우리 가까이 현존하십니다.
결국 묵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현존 체험, 성모님 동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주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 성모님께서 언제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신다.’는 의식을 지니게 되니,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쁘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일은 참 모를 때가 많습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도 무척 다릅니다. 저의 형제들도 모두 성격과 외모가 다릅니다. 큰 형은 예술적인 감각이 좋았습니다. 필력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리고, 음악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작은 형은 좋은 몸을 지녔습니다. 형제 중에 키가 제일 컸습니다. 달리기도 잘 했고,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렸습니다. 저는 큰 형과 달리 예술적인 감각이 부족했습니다. 작은 형과 달리 좋은 몸을 타고 나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제게는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성품을 주셨습니다. 공장에서 출고 되는 물건은 기능이나 성능이 다르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이 반품을 요구할 것이고, 회사는 곧 어려움에 처할 것입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에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어도, 같은 선생님에게서 배웠어도 성품과 기질이 다른 것입니다. 진화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성격과 체질이 좋다고 합니다. 코로나와 같은 질병이 찾아와도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실 때입니다. 같은 로마 병사지만 반응이 달랐습니다. 어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했습니다. 빨리 끝내려고 예수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사는 이방인이었음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 저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구나!” 예수님 옆에 있던 죄인들도 반응이 달랐습니다. 한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오. 그리고 나도 구해 주시오.” 그러나 또 다른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이다.” 오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의 관점은 ‘나의 이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예수님의 관점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다. 나의 삶은 과연 어떤 관점에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 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훗날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빛의 신비가 묵주기도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써 묵주기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환희의 신비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묵상입니다. 빛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묵상입니다. 고통의 신비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영광의 신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들 또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 묵상입니다.
신학교에서 지낼 때입니다. 매일 저녁 7시 15분이면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혼자 할 때도 있지만 함께 할 때도 많았습니다. 본당 신학생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교구 모임과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학교에는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는 신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 기도는 신학생들을 지켜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묵주기도는 신학생들을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를 하려고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큰 차가 제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차를 멈추지 않았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막 하려고 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를 묵주기도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저기
사람이 있어
애틋이
눈길
건네고
거기
사람이 있어
바지런히
발길
내딛으며
여기
사람이 있어
따뜻이
손길
내밀어
사람에게
사람이
기꺼이
이웃이
되어주니
참으로
사람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율법 교사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이냐고 묻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으로 취급당하는 시대적 분위기 안에서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가르쳐주셨다는 것은 어쩌면 율법교사에게는 다소 충격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곧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죽어가는 이에게 진정한 사랑을 전해준 사람이 바로 참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조건을 따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답의 차원이자 거래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단순히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답하는 사랑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나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에게 전해주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곧 나에게 보답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아낌없이 나눠 줄 수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어느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답을 주시지 않으시고 역으로 질문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율법 교사는 다음의 신명기의 내용으로 답하게 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율법 교사가 어떤 마음으로 질문을 하였는지 알아야 합니다. 질문에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질문이 잘못되었던 것이지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통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얻어지는 선물입니다.
다음으로 율법 교사가 누가 자신의 이웃인지 묻는데 이에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맞은 이를 도와준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던 이가 강도를 당하게 됩니다. 강도를 당했던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재물이 많아 보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부자이거나 혹은 사제 중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목격한 이는 사제와 레위인으로 강도를 당한 이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가버렸습니다. 특히 사제는 맡은 직무가 있었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만질 수 없었기에 길 반대편으로 갔던 것이고 레위인도 같은 이유로 돌아갔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다음으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당한 이에게 다가가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붓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신의 길로 갑니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통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생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선물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율법 교사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율법만을 지키고 또 자신들이 만든 세부 규칙만 지키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몰랐던 것이지요. 예수님께는 선행을 실천하라고 하신 것이고 그 중심에는 하느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선행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강도를 당한 이를 보고 돌아간 사제와 레위인은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만 충실하고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몰랐던 것이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나의 아버지 하느님, 오직 나를 살리시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있어야만 영원한 생명이라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하면서 또 세상에 가정을 꾸리면서도 자신에게는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행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
어렸을 때,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 는 말을 듣고 자랐기에 먹기 싫어도 먹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먹기 싫은 것은 안 먹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라, 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려고 했지만, 지금은 마음 가는 대로 싫으면 싫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이런 저에게 예수님의 오늘 복음,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저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불편하게 합니다. 솔직히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우익단체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몇몇 친일 추종파들, 특히 주ㅇㅇ과 같은 사람은 정말이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욕설과 함께 분노가 솟구칩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고 말씀하시지만 그렇지 못한 저를 향해 예수님은 “모르면 책임이 없지만,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은 사람은 매를 더 많이 맞을 것이다.”(루12,48)하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10,25)하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에게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자신이 배운 바를 바탕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0, 27)라고 응답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해답으로 제시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 28)하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엔 루카의 명확한 편집 의도가 드러납니다. 루카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앎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더욱 루카 복음사가는 율법 교사의 입으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10,29)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참된 사랑의 실천 방법을 예수님께서 가르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시고, 이를 통해서 성경의 가장 의미롭고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가 제기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이웃이란 통상적인 개념, 곧 서로 가까이 인접하여 사는 집, 이웃에 사는 사람이라는 관점을 뛰어넘은 새로운 관점에서 이웃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즉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서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발상을 전환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결국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도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가까운 곳에서 나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장소적 즉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지만 이를 넘어서서 지금 여기서라는 구체적으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이웃이며, 그에 대한 나의 응답이 참된 사랑의 실천이라고 제시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이웃사랑이란, 지금 이곳(=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서 죽게 된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은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는 그 사람을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10,31.32)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라는 표현이 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단지 사제와 레위 두 사람의 방향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내면의 상태와 행동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어떤 연유에서 그 사제는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 사제의 평소 의식과 행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제는 위급한 사람이 보이기보다는 “누구의 주검이든 그것에 몸이 닿는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민19,11)라는 율법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저처럼 가장 사제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참으로 자비하시고 사랑스러운 하느님을 믿고 사는, 하느님의 대리자로서는 적합한 사람은 아닌 듯싶습니다. 레위인은 본디 성전에서 종사하는 사람이며,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괜스레 복잡한 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 또한 가엾은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마음보다는 머리가 우선하고 몸이 따르지 않았기에 못 본 척, 길 반대쪽으로 결국 오던 길로 지나가 버림으로써 스스로 초주검을 당한 사람의 이웃 됨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필요를 외면함으로써 이웃사랑의 실천하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곧 사랑을 완성할 기회를 박차버린 것입니다. 이 비유의 반전은 바로 사제와 레위인과 달리 유대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인이 바로 초주검을 당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종교, 인종, 이념, 신분, 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바로 사마리아인처럼 지금 여기서 자신을 필요한 사람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베푼 것을 되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단 한 번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머물며 쉴 곳을 마련하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초주검을 당한 사람이 온전히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돌봄으로 그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의 순수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마리아인과 초주검을 당한 사람의 관계는 바로 예수와 상처받은 모든 인류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흔히 소극적 구원과 적극적 구원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소극적 구원이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서 살려 내줌이라면, 적극적 구원이란 물에서 살려낸 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그에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마리아인의 사랑에는 이런 복합적인 사랑을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역시 그 길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일 수 있고 또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을 만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건 우리 모두 아는 만큼 실천해야 하고, 실천하는 만큼 아름다운 세상, 사람다운 냄새가 풍기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리라 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지금 여기서 나의 이웃은 누구이며, 그 사람을 어떻게 배려하고 동반하고 있습니까?”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해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나,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것’과 ‘자신은 그분께 매여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사랑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루카 10,27)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마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마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가 되어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루카 10,37)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에서, 이제는 “주님, 저희가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보다 “서로에게 사랑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37)
그러니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실행하고,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 때가 아니라 실행할 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건만,
나는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앉아
신문쪽지를 바라보며 혀만 끌끌 차면서 슬며시 길을 피해 슬금슬금 달아나고 맙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묻기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게 하소서!
그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필요하기에 사랑하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을 간직한 사람, 무엇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사제나 레위인은 반대 길로 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돌보아주었다죠.
이 중 사마리아 사람만이 이웃을 사랑하였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죠.
이웃속여 재물착취 사람죽여 부를 쌓는 생존경쟁 전쟁도 불사합니다.
하늘계명 무시하는 고등동물 인간이 하늘 편 아니고 악귀 편이라뇨!
하느님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늘 계명 있는데도.
이 두 계명이 모든 계명들 중에 가장 으뜸이라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정상인 인간이 지녀야할 고등동물다운 기본정신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인들이라면 이 두 계명을 목숨처럼 여기는 위인들입니다.
가톨릭알림 말: 사람들이 서로를 하느님자녀로 보는 세상을 만듭시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으나, 결국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절) 여기서는 율법 학자지만 법조문만 잘 알 뿐 그 정신은 모르는 자들임을 알려준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의 첫 줄부터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꾸짖으시며 벌을 주시듯이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라고 묻는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율법도 모른다. 율법은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율법을 알겠는가?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율법을 지키고자 하여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줄 준비가 된 사람만이 예리코로 내려가던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가르치신다.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사제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율법 교사가 대답한 것처럼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절)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절)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러니 그분은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묵주기도 잘 바치는 법: 묵주기도는 어머니께 내미는 어린이의 손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은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이 기념일이 정해진 이유는 교황 비오 5세와 교회의 묵주기도를 통한 엄청난 하늘의 개입을 온 교회가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적 사건은 이렇습니다.
1571년 그리스도교 신성 동맹은 해군력이 훨씬 우월하고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엄청난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두 세력은 그리스 레판토 바다에서 결정적으로 맞붙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전투는 패배로 끝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모든 유럽이 이슬람화될 위기였습니다. 이때 교황 성 비오 5세는 그리스도교국에 대한 큰 위험을 인식하고 신자들에게 승리를 위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모든 교회와 수도원에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했으며, 자신도 큰 신심으로 묵주기도를 인도했습니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신성 동맹은 많은 역사가가 기적적인 해군 승리로 간주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스만 군대는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그들의 제국이 유럽으로 확장되는 것은 중단되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교황 비오 5세는 승리를 성모 마리아와 묵주기도의 덕분으로 돌렸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교황님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셨고, 나중에 이 축일을 10월 7일에 묵주기도의 성모 축일로 바꾸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그의 묵주기도 장려는 이 강력한 기도에 대한 신심을 가톨릭 세계 전체에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제정한 로사리오 성모 축일은 묵주기도가 단순한 개인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꿀 힘을 지닌 기도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자랑 중의 자랑은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멀게만 느껴질 때 어머니를 통한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에 꺼리셨음에도 첫 기적을 행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성모님의 청원 때문이었습니다.
묵주기도는 본래 시편 150편을 하루에 다 낭송하던 수도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편도 내 생각을 끊고 이미 있는 기도문에 정신을 집중하는 행위입니다. 묵주기도가 잘 바쳐지려면 기도하는 중에 나를 믿는 마음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생각을 끊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아이들의 가장 강력한 힘은 “엄마!”라고 반복해서 부를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소화 데레사가 꿈을 꾸었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며 불쌍하고 애절한 눈만 치켜뜨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안타까움에 다른 누구보다 소화 데레사를 들어 가장 높은 곳에 앉히십니다.
묵주기도의 힘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단순하게 반복하는 말속에 나를 파묻으면 주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내가 하는 말과 각 신비를 묵상하며 최대한 나의 생각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엄마에게 내미는 아이의 손에 다른 생각이 들어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은 나를 믿는 행위입니다.
공동으로 묵주기도의 힘의 사례에 대해 들은 것은 수없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사목하던 신부님이 자기를 비웃던 마귀 들린 사람을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며 쫓아냈던 일, 그리고 성당 레지오 단원들이 밤새워 기도하여 익사한 청년을 되살린 일 등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는 성모님께 청할 때 예수님께 청하여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묵주기도는 개인적으로도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르완다 대량 학살의 생존자인 임마꿀레 일리바기자의 책 『로사리오: 내 생명을 구한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녀는 당시 숨어있던 91일 동안 묵주기도를 바치며 자신이 체험한 묵주기도의 능력을 크게 네 가지로 말합니다.
1. 하느님의 손에 숨겨져 보호받는다는 믿음: 임마꿀레는 그녀가 숨어 있는 동안 묵주가 그녀의 방패가 되어 외부의 압도적인 두려움과 위험으로부터 그녀에게 깊은 보호감을 제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밖에서는 폭력이 만연하고 살인범들이 집을 수색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묵주를 꼭 붙잡고 자신과 벽 너머의 혼돈 사이에 거의 물리적인 장벽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그녀를 둘러싼 공포로부터 그녀를 보호하시고, 겉옷으로 그녀를 덮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형태가 아니라, 성벽 밖의 악의 손길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손에 숨겨졌다.”라는 심오한 느낌이었습니다.
2. 하느님 용서의 능력을 받게 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서 경험하신 가장 중요하고 신비로운 순간 중 하나는 마음의 심오한 변화였습니다. 은신 초기에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살인자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동족을 살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묵주기도를 계속 바쳤고, 특히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이 그녀의 영혼에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용서가 그녀와 그녀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고, 원수들을 위한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에 자신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3. 천사들의 존재를 느낌: 임마꿀레는 숨어있는 동안 천사들이 거의 눈에 띄게 나타났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녀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동안 그 방에 천사들이 있어 그녀와 다른 여성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살인범들이 위험할 정도로 그들을 발견할 뻔했지만, 항상 뭔가가 그들이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보였던 여러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기도하는 순간 하늘의 존재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개입하고 있다는 깊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성모 마리아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다고 믿으며 끊임없는 묵주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겼습니다.
4. 혼돈 속에서도 신비로운 평화의 힘을 느낌: 상황의 극도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어떻게 그녀에게 신비로운 것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평화에 대한 심오한 감각을 가져다주었는지 설명합니다. 대량 학살이 밖에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동안, 화장실 안에서 그녀는 공포를 뛰어넘는 평온함을 경험했습니다. 특별히 환희의 신비를 바치면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탄생을 연결했으며,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예수님의 세상에 오신 것이 희망을 가져왔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했습니다. 이는 그녀를 둘러싼 악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희망과 평화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이 평화를 묵주기도를 사용하여 그녀에게 은총을 부어주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비로운 선물로 여겼습니다.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자기 생명을 구했다고 말합니다. 기도를 하기 전에는 그 두려움과 고통에 차리라 발각되어 죽기만을 바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5단짜리 묵주는 그녀가 용서하고, 평화를 찾고,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심오한 내적 치유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손만 내밀면 잡아주실 어머니가 계심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가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겹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라고 되물으십니다.
그러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27절)라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라고 칭찬해 주십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는 으스대며,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면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라고 물으시며 답을 유도하십니다.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37절)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대답을 들으시고 그에게 이르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비단 저 멀리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도울 기회만을 찾으며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지금 당장 내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거절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응하며, 자비를 다 할 때, 우리는 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갈게 합니다<루카10/25-37>10/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랑이 숨쉬는 곳에 믿음 희망 사랑이 충만하고 사랑이 없으면 불신 절망 단절만이 있어 슬픔 괴로움 온갖 병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잘 살아 보고 싶어도 사랑이 없는 곳에 고통의 골짜기를 갇게 됩니다. 자유도 없고 평화도 없고 기쁨도 없이 살게 됩니다.
겉모양을 잘 꾸미고 손에든 것이 많아도 자기 입만을 위한 것이면 행복하지 못하고 자기 일을 잘한다고 헤도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편한 것 같아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나만 사랑하고 너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정의보다 자비를 따라 살아야 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사람을 어둠에서 구하고 밝은 세상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은 리 이름다움도 거룩함도 없어지고 외로움속에 살며 먹어도 마셔도 몸에 살이 붙지 못 합니다 풍만함이 충만함이 없어집니다. 지금 새도시에 집을 짖고 화려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도 사람들이 가지 않으면 폐가가 되고 잡초만 자라고 사용 못하는 집이됩니다. 경주 보물 단지에 가보면 그많은 상점 식당이 하나도 문을 열지 못하고 닫아있는 모습은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교회가 문을 닫고 사람이 모이지 않은 것은 현대적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입니다. 교회가 엣 것만 내세우고 현대에 적응하는 방법을 찾이 못하면 빈집 빈 교회기 됩니다.
자기 할 일만 하면 자기 의무만 체유면 돠는 것이 아니라 의무이상의것을 찾아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저는 고백성사만 주고 사제의 의무만 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듯이 상담을 하면서 서로 통교하고 하느님 은총에 잡근 합니다. 주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든일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떠난 뒤에 사랑의 성령을 보내시어 구언의 마무리를 세상 끝날 까지 행하고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전에 종신 서원준비 할 때 큰 고민에 빠져 선배신부님 찾아가니 기도할 시간이 핑계대면서 면담을 거절당하고 결국 장상과 담찬지으면서 퇴원하려 하니 제말을 다 들으시고 그래도 이 생활에 애착 가는 일이 없느냐에 하나 있습니다. 기도시간만은 마음이 편합니다. 좋아 합니다. 하니 성소가 있으며 그를통해 일생 행복 할것이라 하시며 서원을 하리고 권하여 고민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기도 시간을 지키며 60년 이상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누구와 면담을 약속하면 미리 할 일을 앞당겨 하면서 면담 시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충족해 살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다가도 면담시간은 힘이 솟아 납니다. 모든 생명은 사랑을 요구합니다. 집안에 기르는 개도 먹을 것 다주고도 사랑받지 못하면 마르고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며 힘있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웃은 되어주는 것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떠보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다시 묻습니다. “그래, 네가 평생 달달 외우고 공부했던 율법에는 뭐라고 쓰여 있느냐.” 율법 학자는 정답을 말하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평생 율법을 공부했던 율법 학자가 정답을 모를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질문합니다. 우리도 이미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랑인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죠.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두렵고, 아는 것을 실천할 용기가 없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렇게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때 예수님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길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이 있는데, 사제와 레위인은 이를 보고서도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버렸고, 사마리아인만 그 사람에게 다가가 보살피고 끝까지 책임을 다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냐고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처럼 이웃은 원래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이웃은 ‘되어주는’ 것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함승수 신부님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는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나, 이 안에는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해드려야 그 대가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즉 구원을 본인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가치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자신의 ‘행위’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임을, 또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내가 구원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느냐 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라는 ‘존재’에 달려 있는 일임을 깨달아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율법교사는 그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계명’의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는 한편, 자신이 그 계명을 그저 머리로만 아는게 아니라 행동으로까지 옮기는 충실한 사람임을, 다시 말해 자기가 구원받기에 합당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싶어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는 자신이 하느님 사랑이라는 계명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또한 누가 자기 ‘이웃’인지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답하시는 ‘이웃’의 범주가 자신이 예상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러면 저는 이미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답할 태세였지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예수님께 그런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그가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맙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는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나처럼 당신 손으로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이자 나의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가 내 이웃인지 구분하는 일 따위는 집어치우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형제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면 될 일이지요. 하지만 그러지 않는 건 내 안에 ‘자아’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사람을 대할 때에도 그가 나에게 이익이 될지 아닌지만 따져가며 차별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등장하는 사제나 레위인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강도를 당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이익과 손해의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혹시라도 이미 그가 죽은 사람이라면 그를 손으로 만진 자신이 율법적으로 부정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종교인으로써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니, 아예 모르는 척 그냥 지나쳐버리는 길을 택하지요.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이익이 아니라 연민의 마음으로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는 유다인들에게 이방인들과 어울리는 ‘우상숭배자’라고 손가락질 받지만, 어려움에 처한 이를 ‘가엾이 여기는’ 그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는 타인의 아픔을 자기와 상관없는 ‘남의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길에 쓰러진 사람이 감내하고 있을 고통과 수치를 생각하니 도저히 그를 그냥 두고 지나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 정성껏 간호해줍니다.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일을 한 것인데 그를 두고 떠나면서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 자기가 꼬박 이틀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꽤 큰 돈을 맡기며 그를 잘 돌보아달라고 부탁하지요. 예수님은 당신께 질문한 율법학자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이익과 손해를 따지고 적당히 눈치를 보며 대충 하려고 드는 우리에게, 그 사마리아인처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라고, 그래서 어려움에 처한 이에게 참된 이웃이자 형제가 되어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참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래야만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되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의 실체가
간절한
기도라는 것을
묵주 기도를
드리면서
절실히
깨닫습니다.
마르지 않는
기도의
마음을
끊임없이
흐르게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 손에는
한결같은
묵주가
들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묵주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웃의
모습 또한
묵주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도가
바로
묵주 기도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기도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묵주 기도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며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줍니다.
한없이
기도하시는
성모님을
부르며
오롯이
우리의 삶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묵주 기도로
우리의 생활이
바로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신비로운
기도가
묵주기도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로
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환희, 고통
영광, 빛의 길을
성모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묵주 기도에
동참하는
은총 가득한
묵주 기도
성월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지난 7월, 몸에서 약간의 이상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아랫배에 계속 통증이 있고, 아침저녁으로 다리가 붓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에게 제 상태를 말하니, “나도 피곤하면 그럴 때가 있더라.”라면서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또 다른 신부는 자신은 어디가 아프다면서 저의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합니다. 이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병원에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꾹 참았습니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근무하는 신부에게 제 증세를 이야기하면서 물었더니, 곧바로 응급실로 오라는 것입니다. 제가 꾀병 부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서 빨리 검사하자는 것이었지요.
이 말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신부들의 말에는 서운함과 거리감을 얻게 되었는데, 이 신부는 저를 믿어준다는 것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가장 큰 위로는 믿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말해주는 것도, 저를 진단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나의 어려움, 아픔을 믿어주면서 이를 해소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로이며 힘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두 날개, 곧 이 두 계명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아는 것은 거룩한 육화의 신비를 아는 것이며, 이는 곧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바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 상태가 된 이를 보고서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지나갑니다. 이들은 자기 입장을 내세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 성전에서 정화예식을 마치고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피 흘리는 초주검 상태의 모습은 분명히 부정한 상태라서 자기도 부정하게 될까 봐 피했던 것입니다. 또 당시에 강도가 많았기에 낯선 사람의 모습에 의심하고 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믿지 못하는 사제와 레위인과 달리,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상처를 싸매 주고 여관에 가서 돌봐줍니다. 그를 믿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사랑으로 표현된 것이지요.
주님께서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바로 믿음을 가지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고, 인간적으로 교류한다는 것은 나와 그 사람의 모서리가 점점 닮아가는 일이다(권미선).
뒷담화
누군가 제게 화를 내면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어쩌면 그 사람이 제게 그럴 수가 있죠? 불만이 있으면 저에게 직접 말하지, 왜 뒷담화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뒷담화를 했다는 것, 그것도 부정적인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다는 불만이고 이에 따른 ‘화’였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말이 ‘뒷담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뒷담화를 신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 뒷담화입니다. 그러나 이 뒷담화가 돌고 돌아 듣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듣게 되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또 몇 번에 걸쳐서 전달된 말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어졌을 때에는 더 기분이 안 좋습니다.
예전에 어느 스님이 ‘뒷담화도 하나의 매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의를 차리는 매너 때문에 당사자 앞에서 얘기하지 못하고 뒤에서 하는 것이랍니다. 이렇게라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뒷담화가 좋지는 않지만, 이를 막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100%의 지지란 있을 수 없다고 하지요. 그렇기에 뒷담화 생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따라서 그러려니 하면서, 자신은 이 뒷담화를 하지 않는 데 집중해 보면 어떨까요?
진짜 사랑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계명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제와 레위인은 종교적 행위에는 충실했지만, 계명은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계명을 안다고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명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계명이 때 되면 식사하거나 잠을 자야 하는 것처럼 완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는 도와주고 누구는 도와주지 않고 결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 당연히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명이 나를 그렇게 완전히 지배하게 만들려면 그 계명을 주신 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왠지 나를 희생시키고 고생시키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은 그러한 계명이 나를 지배하지 않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튜브 동영상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에서는 삶에 힘겨워하는 젊은이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꿈을 잃은 사회 초년생, 매번 면접에서 떨어지는 취업 준비생, 승무원 포기한 배우 지망생, 고3 수험생 등이었습니다. 질문은 이런 것들입니다.
“하루 수면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일주일에 몇 번 사람들과 어울리나요?”, “모든 일이 힘들게 느껴지나요?”, “꿈이 있나요?”, “하루에 몇 번 소리 내 웃나요?”
그리고 뒷장에는 같은 질문 앞에 ‘어린 시절에’란 단어를 붙였습니다. 어린 시절 수면시간은 얼마였나요? 어린 시절 몇 번 소리 내어 웃어보았나요? 등입니다. 당연히 어린 시절이 앞길이 막막한 청년들보다 훨씬 행복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 행복한 이유는 다른 것은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공부가 쉽습니까? 저는 공부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 좀 그만하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가 되었는데 또 공부하라고 유학 가라고 했을 때는 정말 순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린이가 행복한 이유는 공부만 하면 되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불안한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막막한 것입니다. 재빠르게 버스를 잡아타긴 했는데 이것이 집으로 가는 것인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인지 모를 때의 불안한 마음과 비슷할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명확히 있을 때 그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합니다.
‘비벡 H 머시’의 『우리는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라는 책은 ‘외로움’과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복권 당첨자가 머시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복권 당첨된 것은 저에게 저주가 되었어요.”
“아니, 왜요?”
“복권 당첨되기 전에는 직장 동료, 친구와 이웃들이 많았습니다. 복권에 당첨되고 부자 동네로 이사 오고 나니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집에 갇혀있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다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습니다.”
사람은 돈보다 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어딘가에 속해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술자리에 있으면 술을 마시면 되고 직장에 있으면 일을 하면 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며 불안에 떨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못하면 마치 방전된 스마트폰처럼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같은 책에 이런 예도 나옵니다. 어떤 전직 조직폭력배가 말했습니다.
“저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단체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모두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처음 느껴보는 평안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었습니다. 물론 세상에 악한 일이기는 하였지만요.”
나의 행동들이 나의 자유의지로 행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인간에게 자라지 않으면 인간다운 행동이 전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늑대에게 자라면 늑대의 행동을 하고 인간에게 자라면 인간의 행동을 합니다. 아무도 만나지 못하면 기생충이나 모기처럼 생존을 위해 먹기만 합니다. 이 또한 자아라는 것에 속해있기에 그의 뜻을 따라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세상에 악한 일을 하면서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외로움과 불안함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우리가 명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 계명은 내가 그 계명을 주시는 분에게 감사할 때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자녀가 감사하지 못하면 아무리 부모라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해야 할 유일한 것은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직폭력배도 그 조직에 고마워서 그 일을 하는 것처럼 주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계명이 그 사람을 평안하게 해 줄 수 없습니다. 물론 조직폭력배는 나중에 그 조직에 감사를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주는 모든 계명은 다 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이웃을 사랑해야만 하는 계명을 주는 어떠한 공동체에 속해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배하는 계명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의 상징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쓰러져가는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실 수 없으셔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속해있었고 아버지의 계명이 그분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으로 쓰여야 행복하지 망치로 쓰이면 결국 또 내가 하는 일이 맞는지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은 하느님 모습대로 사랑해야만 행복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따를 수 있는 계명을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이 나를 지배하게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랑의 계명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오늘 복음의 사제와 레위인처럼 그 사람들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을 주시는 분에게 속하는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계명만 안다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할 수 있어야 지킬 수 있기에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당신 몸을 양식으로 내어주심으로써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면 이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나를 지배하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을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분의 계명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북미주 엠이에서 100일간 10/10(십분 쓰고, 십분 대화하기)을 시작했습니다. 8월 1일에 시작했으니 벌써 66일이 지났습니다. 매일 대화의 주제를 카톡으로 받았습니다. 코로나19로 엠이 주말을 하기 어려웠고, 봉사자 모임도 하기 힘들어졌지만 매일의 대화는 부부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저도 매일 주제를 받으면서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대화 주제도 있었습니다. “화재와 같은 긴급한 상황이 발생한 집에서 단 3가지만 꺼내올 수 있다면(가족, 친지, 애완동물 제외하고) 무엇인가? 내 대답에 대한 나의 느낌은?” 저는 이 질문을 읽으면서 무엇을 가지고 나올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권, 거주자 등록증, 운전면허증’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미국에서는 이방인이기에 저의 신분을 보장할 수 있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미국은 한국에서와는 달리 서류를 받는 절차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핸드폰, 노트북도 가지고 나올 것 같습니다. 외부와의 소통에 필요하고, 강론 준비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가지고 나오실는지요?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합니다. 헛된 것을 퍼트리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리스인이 말하는 지식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유대인이 말하는 율법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자들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동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아닙니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면서 신자들을 감염병의 위험으로 내모는 예배는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검사를 거부하고, 방역당국의 조사에 협조하지 않는 것도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참된 복음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과 가르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집짓는 자들이 버렸던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돌이 반석이며, 그 반석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오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강도당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계명을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계명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교리와 신학이라는 ‘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종교의 존재이유는 교리와 신학의 틀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악기는 연습을 해야 연주할 수 있듯이, 기도는 기도해야 기도의 맛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종교, 실천하지 않는 종교는 지친 이에게 위로를 줄 수 없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에게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와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에게서
애써 고개를 돌리는 것은
빼앗고 짓밟는 이와
말없이 함께하는 것이요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에게
애써 한걸음 다가가는 것은
빼앗고 짓밟는 이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니
아무리 제 갈 길이 바쁘다 해도
아무리 제 일이 소중하다 해도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늘
곁을 세심하게 정성껏 살펴
언제나 곁에 있는 누군가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살피고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돌보고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일으키는 것이
언제나 곁에 있는 무엇인가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살피고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돌보고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를 일으키는 것이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도 없고
빼앗고 짓밟는 이도 없이
모두가 서로를 자신처럼 사랑함으로써
모두를 있게 하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명 정의 평화 흘러넘치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바로 그 세상 만드는 길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의 이웃이냐는 어떤 율법 교사의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웬만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생각에만 머물러 있지 그것을 실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곤 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만 늘어놓고서는 정작 도와주지는 않고 이렇쿵 저렇쿵 뒷말만 많이 하는 경우도 있고, 설사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자기 생색을 내는 데에 바쁜 경우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경우는 이방인이었지만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모든 정성을 다해 돌봐주었습니다. 하지만 레위인이나 사제의 경우는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스펙이나 타이틀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랑의 실천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죄를 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앎 과 삶이 등식이 될 때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나는 매일 아침 지인으로부터 6:00시가 되면 카톡으로 짧은 글을 받고 있다. 그는 양돈업을 하면서 돼지들과 하루를 사시는 분이라서 돼지냄새 몸에 밴 분이시다. 자녀들이 셋있는데 두 명을 더 입양해서 바르게 교육시키고 있다. 늘 생명과 더불어 살기에 그에게서 사람의 향기가 난다. 술 향기나 꽃 향기와 달라 사람 향기는 만리를 간다 들었다. 만리 먼거리에서 그에게 사람향기가 났다.
오늘 복음말씀(루카10,25-37)에서 사람향기 나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만난다.
율법에 무엇이라 써 있는지, 율법을 어떻게 읽었는지는 공부 많이한 배운 식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율법은 사제나 레위인들에 해당되어 머리 싸움할 때 쓰고 읽는 것이 되어버렸다. 앎과 삶은 언제나 등식이어야 하는데 앎이 있는 식자들은 삶이 없었다. 지식을 뽑내는 사람들은 자기의 앎을 통해 정당함을 드러내려는 사람일 뿐이다. 정형의 틀, 공식에 대입해 이론적 답만을 꺼내서 갑론을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그런 사람 이야기 하는 것은 밖의 일이다.
오늘 복음 이야가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이다. 그들은 당시 인간의 범주에도 들지 못한 무식자들이다. 그들에게 앎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언제나 중요한 분들이다. 그들에게서 양냄새 나고, 똥 냄새 나고, 인간 냄새 나고, 하느님의 향기, 예수님을 삶으로 사는 분들이다. 그 삶은 예수님을 닮아 생명의 빵이 되어주는 분들이다. 아침에 글을 주는 지인, 어린 아이 둘을 입양해서 키워내는 지인, 돼지 냄새가 배어 사람 냄새를 키워내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내는 지인이 영원한 생명을 살고, 이웃이 되어주는 삶을 산다. 오늘은 이분들의 이야기이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10,25-28)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루카19,29) 예수님은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났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초주검이 되어 버려져 있었다. 그 장면을 사제, 레위인은 못본척 지나쳐 버렸고 사마리아인은 초인간적인 사랑을 베풀어 죽음에서 건져 내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에 물으신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10,36) 율법학자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이르신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은 생명의 빵을 살 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삶으로 보여 주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월요일>(2020. 10. 5. 월)(루카 10,25-37)
바오로 사도는 ‘사랑’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코린 13,2-3).”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말은 뜻으로는 “사랑 실천을 하지 않으면”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사랑 실천을 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그래서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라는 말은 “산을 옮길 정도로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도” 라는 뜻인데,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능력이 아니라면, 사탄에게서 온 능력입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는 일과 자기 몸까지 넘겨주는 일도, 사랑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실천’에 관해서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이 말에서 ‘믿음’이라는 말은 ‘사랑’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되는 말입니다. 실천 없는 사랑은, 즉 말로만 하는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사랑학’에 관해서 논문을 여러 편 쓰고, 학위를 여러 개 받아도, 실제 사랑 실천이 없다면, 그 논문과 학위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0-32).”
그냥 지나가 버린 사제와 레위인도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 나오는 것처럼 “빨리 집에 가서 치료를 받으시오.” 라는 말만 하고 가버렸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잔인한 일이 될 것입니다.
또 혹시라도 사제와 레위인이 하느님께 “이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한다면,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적절한 치료와 보호입니다. 아무 실속 없는 위로의 말도 아니고, 빈말 같은 기도도 아닙니다. (강도들을 쫓아가서 붙잡는 일도 부상자를 먼저 구한 다음에 할 일입니다.)
사랑은 가장 급하고, 가장 필요한 일을 ‘실제로’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
어떤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일을 해 주었습니다. 가엾게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말로만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두 데나리온’은 별로 큰돈이 아닙니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라는 말과 ‘두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사마리아인의 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시간 여유도 많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했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 것은 강도당한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은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것이 되는데, 이것은 ‘원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사마리아인 앞에 사제와 레위인을 등장시킨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또는 성직자들의 ‘위선’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6-37)”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은, “나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지 말고, 네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든 사람’입니다. 사랑에는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생각만 하지 말고, 또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라고 말씀하셨으니, 강도당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각자 한 사람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서, 예수님께 드리는 사랑과 똑같은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사랑하기와 이웃사랑하기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율법교사의 질문은 하느님사랑은 알겠고 자신처럼 이웃사랑하기였죠.
누가 이웃인지 물었고 예수님은 강도들에게 당한 사람돌본 얘기했죠.
거북해서 피하는 각층 사람들과 도움 준 사람 경우 지금도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주일학교에서 처음 들으며 감탄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의 예화가 너무 생생해 지금도 그 심정이 늘 살아나곤 합니다.
그래서 꽤 손해 본 것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보면 가슴이 찡 해요.
사람이라면 하느님 사랑하기와 이웃사랑하기 이게 참 기본이라 봐요.
그런데 재물 권력 명예 등을 사랑하는 사람 보면 불쌍하고 속상해요.
우리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온몸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카인과 아벨’에서 (Lib. 1,9,34. 38-39: CSEL 32,369. 371-372)
“찬미의 제사를 하느님께 바치라. 지존께 네 서원을 채워드려라.”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서원하고 그 서원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주님의 명령으로 다른 아홉 명의 동료들과 함께 나병을 치유 받은 사마리아의 나병 환자는 자기 홀로 그리스도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감사 드렸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 앞서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하시면서,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좋은 것을 베풀 줄 아시는 아버지의 선하심을 놀라운 방법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선하신 그분께 선한 것을 청하는 일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열렬히 또 자주 기도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이 말은 기도를 싫증나도록 끝없이 하라는 말이 아니고 꾸준히 또 자주 하라는 뜻입니다. 사실 너무 긴 기도는 의미 없는 수식어가 될 수도 있지만 한편 기도를 전적으로 포기하면 사람은 전적인 무관심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 당신이 용서를 청할 때 당신 자신도 다른 이에게 용서를 베풀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고 권고하십니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의 행동으로 그 기도를 보강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기도가 불완전하고 거짓된 것이 되지 않게끔 분노와 반감 없이 그것을 바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기도는 또 어느 곳에서나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구세주께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 바로 그것을 뜻하십니다. 주님이 여기서 뜻하시는 골방은 당신의 몸을 감추어 넣는 네 벽으로 된 방이 아니고, 당신의 생각이 갇혀 있고 감정이 자리잡고 있는 당신 안에 있는 그 방을 말합니다. 당신이 기도를 바치는 이 방은 어디에서든지 당신과 함께 있고, 어디에 가든지 은밀한 처소가 되며, 그 안에는 하느님만이 판관으로 계십니다.
또한 당신은 백성들, 즉 온몸과 우리 어머니이신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이것은 형제적 사랑의 특징적인 표시입니다. 당신이 당신을 위해서만 기도한다면 당신의 이익만 생각하여 기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한다면 죄인은 다른 이를 위해 기도 바치는 이보다 은혜를 더 적게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각자는 모든 이를 위해, 모든 이는 각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당신이 당신을 위해서만 기도한다면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당신만이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모든 이가 당신을 위해서도 기도할 것입니다. 그 모든 이 가운데 당신도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각 개인의 기도는 모든 이의 기도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그 상급은 큽니다. 이런 기도에는 아무런 교만이 없고 더욱 큰 겸손이 있으며 더욱 풍부한 열매를 맺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 무엇으로 결정되는지 제시하십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어떤 율법 학자가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 영원한 생명을 갈망해서라기보다 예수님 수준을 떠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율법 학자라면 나름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니 그의 머리에는 이미 답이 들어 있겠지요. 율법이 무엇이라 하더냐는 예수님의 반문에 역시 그는 막힘 없이 정답을 읊습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답한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이처럼 세 문장을 건네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그가 배워온 지식이 틀림 없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율법에는 오류가 없으니, 그가 기억하는 율법 내용 역시 옳고 바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은 그에게 머릿속에 든 것을 실천하라고 독려하십니다. 머릿속에 갇혀 있는 문자들이 구원과 연결되려면 꿰어져야 합니다. 그 지식들을 잇는 고리가 바로 실천입니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실천이 생명으로 연결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율법 학자가 처음 물었던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현세의 삶도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니, 예수님의 답에서는 지상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 하나입니다.
누가 이웃이냐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길 반대쪽으로"(루카 10,32)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보고 사제와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레위인은 종교사회인 이스라엘에서 힘과 권한과 거룩함까지 소유한 이들입니다. 그들이 피신한 길 반대쪽은 위험이 제거된 안전지대일지 모르나, 안타깝게도 사랑 역시 진공 상태입니다.
"그에게 다가가"(루카 10,34)
반대로 여행 중이던 사마리아인이 그에게 다가갑니다. 이스라엘이 경멸하는 이방 지역의 부정한 사람이지요. 여기서는 두 부류의 신분적 격차 못지않게, 고통을 겪고 있는 이를 사이에 두고 갈리는 두 방향성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더군다나 그 사마리아인은 제 일을 마치고 다시 이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겠다고 여관 주인에게 약속합니다. 고통 받는 이를 향한 무아적 방향성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됩니다. 진정으로 고통 당하는 이가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고통 겪는 이를 앞에 두고 피하느냐 다가가느냐의 차이는, 인간 안에 보편적으로 내재된 사랑이라는 하느님 모상성을 "실천"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럴 때는 머릿속 지식이나 외적 신분보다 내면에 충만히 차 있는 "사랑"이 동력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을 현혹시키는 "다른 복음"을 우려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갈라 1,2)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구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율법의 내용을 당신 죽음과 부활로 몸소 완성하셨지요.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님에게서 "실천"되어 완성된 율법입니다. 돌판에 새겨지고 일부 소수 계층의 머릿속에 박제되었던 율법이 예수님의 실천으로 피와 살을 얻어 세상에 구현된 것이지요. 말뿐인 교설은 믿음이 약한 이들을 교란시키고 복음을 왜곡할 뿐입니다.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예수님과 율법 학자 사이에서 간결한 질문과 답이 오고갑니다. 예수님 입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자비"라는 단어가 놀랍게도 율법 학자의 입에서 흘러 나옵니다. 이 대화를 통해 처음에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그의 내면에 변화가 시작된 듯 느껴진다면 착각일까요?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방향성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것입니다. 이 방향성은 우리 머릿속 지식과 익혀온 관습, 사랑과 두려움 등등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의 종합적이고 실천적인 표현입니다. 더군다나 이 방향성은 고통 받는 인류를 향해 내려오신 주님의 방향성과 일치하지요. 그리고 이 방향의 끝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 끝에서 구원을 만날 것이니, 그때에는 자비를 입은 그 사람에게 우리가 오히려 고마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마음에 떠오르는 "초주검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실직과 질병, 사고와 이별, 소외와 고독으로 쓰러져 있는 사람이 떠오른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에게 다가가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따뜻한 안부와 염려, 위로와 격려, 작은 나눔과 사랑이 그를 살릴 것입니다. 우리도 살릴 것입니다. 아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사제와 레위인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발견하고는 다른 길로 갑니다. 부정한 존재, 나와는 관계 없는 존재로 규정 짓고, 그와의 거리를 좁히려 하지 않지요. 반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진 사람을 동등하게 대합니다.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돌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초주검이 된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나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게 심하게 맞은 것을 보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사람인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이방인, 그러니까 이민자나 난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굳이 따지지 않고, 그를 동등하게 대해줍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오셨고, 죄인으로 여겨지던 병자들에게 기꺼이 손을 대 고쳐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라는 초대임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이웃임을 알려주는 말씀으로 묵상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의 거리를 없애시고, 우리가 선인인지 악인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등하게 눈 맞춰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우리 이웃이 되어 주셨으니, 우리가 무엇이라고 서로를 이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라고 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살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 루카,10/25-37>10/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은 사람을 살라고 창조하신 후 나를 닮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하라 하시며 사람이 어떤 저지에 있던지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부조리 와 부정적 사고로 망하게 하고 죽기기도 합니다. 진실과 사랑이 없는 곳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실이란? 있는 그대로 서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시고 우리는 이래서 사랑 못한다. 저래서 사랑 못한다. 하면 사랑이 없는 곳에 죽음 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란 바로 생명입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심 같이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 나머지 나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시였습니다.
어떤 이는 살기위하여 죽도록 싸워야 한다고 하지만 서로 살기 위하여 서로 사랑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어제 코로나 치료제가 어디서 축출 하는지 또 완성 단계라 하는 말을 듣고 과연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구나 생각하였습니다. 한번 코로나에 감염되어 완치된 사람의 혈청을 축출해서 코로나 치료제를 만든다는 이야기와 자기 피를 내어주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는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저는 어제 추석이 다 지나는 시간 연풍에서 얼마 전 만나서 상담한 사람이 이산 저산을 해매여 채취한 능이버섯을 전해주고 가시는 뒷모습을 보고 사랑은 이렇게 자라나는 구나 생각하면서 뒤에 따라오는 그분의 일을 쉽게 해결해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언제든지 시간 나는 대로 다시 오시라 하였습니다.
사랑은 서로 주고받으며 성장하지만 참 사람은 녀를 죽음에서 어두움에서 억압에서 온갖 죄에서 구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착한 사마리아 인의 사랑 이야기는 온갓 정성을 다해 돌보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또 다시 와서 해결하고자 하는 사랑은 우리는 실천해야 합니다.
작은 것 하나로 감동을 주는 사랑 우리는 인색하거나 무관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를 안쓰럽게 합니다.
일년 이상 자기의 비참한 처지를 글로 하소연하고 있는데 아무도 돌보지 않고 일년 가까이 글을 올리는데 그분 가까이 있는 사람도 도움을 주지 않은 다고 하여 가서 사실을 확인하고자 차를 빌려서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어제 뉴우스에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일용직 노동자 아침에 천명 이상 나왔다가 돌아가는 사람 입에서 오늘도 하루 굶을 밖에 없다는 소리가 나를 마음 아프게 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를 하며 잠자리에 들었지만 해결되리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을 도우는 사람이 생기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그 무거운 짐을 다 지고 가지 못 하지만 주위에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다고 다시 다짐합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은혜를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추석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로 여러분들에게 죄인이 되는 기분입니다. 찾아뵙지도 못하고, 이렇다 할 대면 활동을 못 하게 되니 정말 깝깝하고 안타깝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37) 라고 시험하자, 예수님께서는 거꾸로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라고 되물으십니다. 그러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27절) 라고 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한술 더 떠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라며 묻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율법학자에게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라고 이르십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지금 나를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누구신지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불편하고 어려운 시기에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주 친히 몸소 활동하시며 채워주시기를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감히 청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구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하나로 연결된 관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혼자라는 생각은 착각이요 환상입니다. 외관상 아무리 혼자 살아가는 은수자같아도 잘 들여다보면 기도를 통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고독중에 살아도 언제나 기도를 통해 연대連帶를 지향합니다. 관계의 힘, 연결의 힘, 연대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을 상징합니다.
불암산 아래 고립되어 있는 것 같아도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세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요셉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이든 믿는 이든 결코 섬이 아닙니다. 올해의 어제 제 영명축일은 제 생애중 가장 은혜로운 날이기도 했습니다. 완전히 부활한 느낌이었습니다. 두 수녀님들의 친필 편지도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결코 혼자가 아님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이 또한 좋은 이웃들을 통한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영명축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루중 가장 캄캄한 새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밝히며 새 날을 준비하는 신부님의 부지런함은 저의 모델이자 이상입니다. 30년 가까이 뵈어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변함없이 하느님께 충실한 그 모습에 감사드리며, 신부님이 밝혀주시는 그 빛속에서 저 또한 앞으로의 수도여정이 밝게 빛나길 바랍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영명축일 축하드립니다. 며칠전 교통사고로 위기의 상황에서 신부님의 안전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날 이집트를 탈출, 홍해를 무사히 건너 구출해 주신 빠스카의 놀라운 체험을 잊지 못하시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늘 건강하시고 은총의 여정 계속하시길 빕니다.”
진정성 가득 담긴 위로와 격려가 되는 아름다운 편지입니다. 더욱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 또한 평범한 일상에서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참 행복의 구원의 길은, 영원한 생명의 길을 멀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늘 함께 계신 주님을 사랑하며 가까이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 복음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에 그대로 공감합니다. 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내용을 강론합니다. 유별난 복음이 아니라 가장 큰 계명의 복음인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의 의도가 불순합니다만 예나 지금이나 구도자의 궁극의 질문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직접 답하는 대신에 에둘러 질문함으로 율법교사로부터 답을 받아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의 답을 스스로 새롭게 확인시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라는 율법학자에게 주님은 지체없이 답을 주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가장 큰 계명은 주님의 복음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구원의 길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갈림없는 온 마음, 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별될 수는 있어도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위가 검증되는 것도 이웃사랑에서입니다.
‘관상의 샘’에서 흘러내리는 ‘사랑의 강’처럼, 사실 하느님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무사하고 깨끗한 아가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누가 내 이웃인가 묻지 않고 곤궁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랑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어떤 사제나 레위인은 경건한 신자로 하느님을 사랑했을지 몰라도 구체적 상황에서 그 부족함이 적나라게 드러납니다. 거룩한 전례 시간에 맞춰 몸을 정결히 보존하여 참여해야 하겠기에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무조건 곤궁중에 있는 초주검이 된 이웃을 살리는 조처를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뜻밖에도 초주검이 된 이웃을 살린 자는 무명의 이교도,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교 유무를 떠나 이런 익명의 의인들을 통해 놀랍게도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초주검이 된 이웃을 온갖 정성을 다해 성심성의껏 돌보고 살리는 사마리아인의 감동적 사랑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하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징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쪽에 해당되겠는지요. 참으로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참된 이웃임을 깨닫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물을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묻는 발상의 전환이 바로 분별의 사랑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영원한 생명의 구원은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살리는 자비행의 실천으로 입증됩니다. 그대로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느님 사랑의 현존이 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어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게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아멘.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 비유내용을 토대로 나온 법이 있습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지요. 우리나라는 없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프랑스가 있습니다. 한국은 비슷한 의미를 조금 가지고 있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만 있다고 하네요. 사실 이것은 법적으로 필요없어 보입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덕, 윤리적 문제이며 도의적으로 당연히 도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상당히 각박하다고 하지요. 정확하게는 개인주의도 아닌, 이기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겠지만, 가끔 들려오는 뉴스가 참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생각을 많게 합니다. 길에 쓰러진 여성을 도와주었는데 성추행으로 신고당하고, 심폐소생술을 했는데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상해죄로 고발당하는 세상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착한 사마리아인도 어려운 시대인 듯 합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다음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런 시대에서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일까요?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까요? 단순하게 사마리아인의 비유라면 이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 안에서의 문제는 도저히 답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솔직하게 성추행이나 상해죄로 고발당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렇기에 답은 각자 내는 것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다만 문제에 대한 실마리라고나 해야 할까요? 그러한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만탈렌트를 빚질 정도로 애초에 하느님 앞에 죄인이었던 우리를 다시 일으켜세워 주시고, 친히 목숨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은 누구인가? 우리에게 먼저 이웃이 되어주신 분은 누구인가? 여기서 다시 한번 십계명이 생각납니다. 이웃사랑 전에는 바로 하느님 사랑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누가 먼저 저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지금 누구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아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
잘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
착한 이웃은
착한 사랑을
실천한다.
착한 사랑은
쓰러진 이웃을
지혜롭게
돌보아준다.
고통에
외면하지
않는 마음과
실천이다.
오고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좋은 이웃으로
사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우리자신이
먼저
좋은 이웃이
될 때 좋은
이웃을
만나게된다.
좋은 이웃은
자비가 만든다.
자비는
길을 밝혀주는
이웃에게 있다.
착한 이웃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복음의 이웃은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자비의 이야기는
이웃이 되는
이웃의 이야기다.
어제가 아니라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다.
신앙은
기도서에
있지 않고
따뜻한
이웃이 되는
실천에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분리될 수 없기에
가까이 있다.
우리는
어떤 이웃이며
어떤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