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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10월 8일 (녹)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10.08|조회수31 목록 댓글 0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1,13-24
형제 여러분,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24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자신 안에 계시해 주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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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제1독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고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가 예수님께 동생인 마리아더러 언니를 도우라고 일러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읽을 때 자신이 마리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마르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사시는 동안은 당신께 음식을 마련하여 드릴 사람들이 필요하셨습니다. 천국에는 마르타가 할 일이 없으리라고 말하지만, 현세의 삶에는 어제 복음에 나왔던 강도를 만난 사람처럼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언제나 있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을 돕기 전에 먼저 나의 일상생활을 해결하는 것부터 적지 않은 근심거리입니다.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부러워하고만 있을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면 마르타의 일도 좋은 몫입니다. 전에 어떤 곳에서 방 이름을 정하는데 제가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마르타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을 집에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매우 큰 특전이 아니었을까요? 마르타는 스스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는, 이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잊은 듯합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바쁘다 하여도, 예수님께서 드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그를 예수님과 긴밀히 결합하여 줍니다.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잊지 않는다면, 우리 집을 찾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애쓰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수고는 좋은 몫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수고로 천국에 이르게 될 때, 그때는 세상의 무수한 마르타들도 수고를 멈추고 “빼앗기지 않을”(루카 10,42) 몫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사람, 예수님께 음식을 만들어 드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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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그들의 위치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보다 ‘위’에 있습니다. 이는 ‘다가갔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말 ‘에피스테미’를 번역한 것인데, 본디 그 뜻이 ‘위에 서다.’입니다. 곧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바닥에 앉아 계실 때 마르타는 그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신보다 위에 계신 분이 아니라, 아래에 계신 분으로 여긴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다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발치에 앉았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위치에서 알 수 있는 그들의 사랑법은 무엇일까요? 마르타는 자신이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 예수님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시선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 결과 염려와 걱정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다그치기에 이릅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행동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마르타와 달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내버려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은 그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셨느냐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 마음을 헤아리며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 그분 사랑에 맞갖은 사랑법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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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자신을 선택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간파하고 있습니다. 불철주야 소아시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한 사도의 활동은 하느님께서 주신 부활의 은총에서 그 원동력을 얻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대접하느라 분주하였습니다. 그녀는 손이 모자라자 동생 마리아의 도움을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의외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좋은 몫을 존중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르타에게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지 않도록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봉사한다는 명목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를 주십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활동에 정신을 쏟다 보면 외면적인 업적에 매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분주한 일과 걱정에 마음을 빼앗겨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말씀을 모시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우리의 마음은 메말라 가고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참되게 하느님을 섬기는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자신의 봉사를 자랑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잘 모시고 섬기는 길을 알려 주는 모범이 됩니다. 그녀는 사랑의 봉사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참된 힘을 발휘하는 길을 보여 주는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하는 봉사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는 행위는 모두 귀중한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두 가지 방식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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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적 삶의 목표에는 ‘깨달음’이란 것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무명(無明)한 인간이 참된 진리에 눈을 뜨는 ‘회심’의 사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깨달음을 얻고 회심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열정적인 바리사이로서 교회를 박해하며 유다교의 전통을 지켰지만, 참된 진리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된 보편적인 하느님의 구원의 계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따로 뽑으셨다는 그의 고백은, 자신의 잘못된 과거까지도 당신 섭리의 도구로 쓰시는 하느님을 향한 찬양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도 비슷했습니다. 세속적인 부와 명예에 매달리던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순간, 헛된 욕망을 버리고 완전한 가난과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삶에로의 부르심을 깨닫고, 무너져 가던 교회를 청빈의 정신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님을 집에 모신 마르타의 분주한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푹 빠져 있던 마리아가 찾은 참된 기쁨의 몫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평가하려던 마르타의 편견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셨을 뿐입니다. 마르타나 마리아 둘 다 주님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의 본질이고, 이 회심은 ‘멈추어 듣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마리아가 먼저 깨달았을 뿐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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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은 ‘묵주 기도 성월’입니다. 가을이 무르익는 이 아름다운 계절의 저녁나절에 성모님과 함께 묵주 기도의 ‘장미 꽃다발’을 주님께 찬찬히 올리면, 마치 종이에 물이 배어들 듯 마음을 감싸는 평화와 위로를 느낄 것입니다.

묵주 기도는 교회의 삶에서 마치 공기와도 같습니다. 할머니들이 기도하며 끊임없이 돌리는 묵주의 마디마디가 교회를 지탱하고, 자식과 손자들의 삶이 엇나가는 것을 막아 주며, 사제와 수도자들이 비틀거리더라도 다시 일어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힘과 용기를 주고 있음을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실감합니다.

또한 묵주 기도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늘 간직해야 하는 삶의 지지대이자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나가사키의 성자’라 불리는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책 『로사리오의 기도』를 보면, 그가 원자 폭탄으로 죽은 부인을 뒤늦게 발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읽을 때마다 부부의 깊은 사랑과 전쟁의 비극, 인생의 무상함 등을 떠올리게 하는 숙연한 장면이지만, 또한 묵주 기도가 한 신앙인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온통 잿더미였다. 나는 금방 발견했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남아 있는 검은 덩어리를. 그것은 탈 대로 타 버리고 남은 골반과 요추였다. 곁에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의 사슬이 남아 있었다. 불에 탄 양동이에 아내를 주워 담았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그걸 가슴에 안고 묘지로 갔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 버려 저녁 해가 비치는 잿더미 위에 같은 모양의 까만 뼈가 여기저기 점점이 보였다.”

묵주 기도는 우리의 삶을 은총으로 수놓으며 지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동반할 것입니다. 묵주를 손에 쥐고 ‘성모님과 함께’ 산책하며 기도를 올리는 것만큼 이 아름다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일도 드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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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에게서 들은 얘기를 모아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들이 후회한 내용은 대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할걸.’, ‘좀 더 친절하게 대할걸.’, ‘그때 좀 참을걸.’ 등입니다. 이에 비해 ‘돈을 더 많이 벌걸.’,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학위를 딸걸.’, ‘사업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쏟을걸.’ 하며 후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일을 보고 접하며 분주하게 살다 보니 정작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마르타를 비판하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르타 역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다만 마르타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인지 구분하기를 원하십니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본당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 이 사회의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애쓰고, 자녀들에게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채근하며, 다른 이와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한 일이기는 합니다. 다만 그 일에 너무나 치중한 나머지 정작 더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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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 세상을 보는 방법이 다릅니다. 특히 자연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어떤 이는 자연을 살려야 우리도 살 수 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연을 개발해야만 인간도 살고 자연도 깨끗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게는 세상을 보는 것도 환경 보존과 자연 개발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주신 바로 그 환경을 훼손시키지 않고 잘 보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을 모시는 방법은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듣는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분께 온몸을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받아들일 수 있으며, 받아들여야 실천할 수 있지요. 실천할 수 있다면 이는 곧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언하는 일이 되니, 바로 선교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자기 집에 주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온몸으로 시중을 들고, 마리아는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중요하냐가 아니라, 서로 상대방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선적으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주님을 섬기는 것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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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바쁜 것은 그저 ‘바쁜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바빠야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원 아이들조차 바쁘다는 말을 예사로 합니다. 모두가 착각입니다. 

우리 민족은 본래 바쁜 민족이 아닙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는 노래를 만든 민족입니다. 팔자걸음을 걷지 못하면 양반 자격이 없다고 했던 민족입니다. 그만큼 ‘삶의 여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는 것에 떠밀려 ‘여유’를 잃고 말았습니다. 한 번쯤 멈춰 서서 원인을 찾아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없는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주님의 뜻을 알고 이끄심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끄심을 따라야 평화가 함께합니다. 아무리 바쁘게 살고 분주하게 움직여도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기쁨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쁩니다. 마르타처럼 ‘사는 일’에 너무 바쁩니다. 하지만 때로는 마리아처럼 그분의 말씀을 조용히 들어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는지요? 성당 안에서만은 ‘세상 걱정’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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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홍수처럼 쏟아지는 차량 속에서, 날만 새면 생겨나는 빌딩 속에서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육체가 성장하면 영혼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몸의 요구는 채우면서 영의 목마름을 외면한다면 영적 갈증은 당연합니다. 

불안과 초조가 그것입니다. 때로는 허무감이요 때로는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갈증을 채우려 본능에 탐닉하고 재물에 젖어 듭니다. 세상이 폭력과 환락으로 얼룩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갈증은 여전히 남습니다. 몸의 갈증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끔은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조용히 있을 줄만 알아도 ‘갈증의 늪’은 힘을 잃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해도 ‘영적 목마름’은 멀리 느껴집니다.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귀한 삶을 받았습니다. 조용히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때때로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 주님의 은총을 묵상해야 합니다.

인지 심리학자 힐렌 아인혼은 ‘경험의 함정’이라는 책에서 행복을 ‘행복의 사분면’으로 이야기합니다. 우선 행복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실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행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과 자기가 원치 않던 것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잘되면 행복하지만, 사업이 잘 안되면 불행합니다. 건강 검진을 해서 너무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오면 행복하지만, 암진단을 받으면 불행합니다.

 

세 개의 단면이 보입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갖게 되었을 때, 불행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 원하지 않는 것을 갖게 되었을 때입니다. 행복 하나에 불행이 두 배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빠진 한 면이 있습니다. 바로 원치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픈 가족이 없다거나, 교통사고가 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반반입니다. 원하는 것을 갖게 되는 것이 힘들지만, 원하지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됨에 “다행이다”라고 말하면서, 행복한 ‘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의 이유는 갖는 것에만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갖지 못하는 것에도 행복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건 사고의 주인공이 되지 않는 것만 해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가십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가 행복할까요? 아니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을 분주하게 시중드는 마르타가 행복할까요? 둘 다 행복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 행복을 간직하며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마르타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상태였지만, 그녀는 앞서 말씀드렸던 불행의 측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가 초대했지만 마리아처럼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억울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마르타처럼 우리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행복의 이유보다 불행의 이유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좋은 몫인 행복의 이유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자기에게 다가와도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은 나이만큼 늙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만큼 늙는 것이다(조지 번스).

 

 

 

묵상기도 잘하는 방법: 마르타는 소리기도, 마리아는 묵상기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 마르타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어떻게 봉사할까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서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이 두 자매의 상태가 바로 걱정을 하는 사람과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가끔 우리는 걱정하면서도 생각한다고 착각합니다. 생각은 내 밖에서 들어오는 좋은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이고 걱정은 자아와의 대화입니다. 생각은 곧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윌리스 캐리어(Carrier)는 미국 유명 에어컨 회사, ‘캐리어’의 설립자입니다.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백만 달러가 드는 일을 수주받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들어가야 했는데 아직 그 회사는 그 기술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캐리어는 수천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되었고 회사에서도 퇴사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몇 날 며칠 엄청나게 걱정합니다. 막연한 걱정이 그를 집어삼켜 잠도 잘 수 없었고 먹고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걱정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걱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도대체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게 뭘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분석해 보았습니다. 현실을 분석해 본 것입니다. 종이 위에 이 실패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써보았습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직업을 잃을 수도 있어. 길거리에 나 앉겠지.’ 최악의 상황을 쓰다 보니 긍정적인 생각도 올라왔습니다. ‘물론 회사는 2,000만 달러의 손해를 보았지만 좋은 실험을 한 거야.’ ‘근데…. 어떻게 하겠어…. 현실을 받아들이자.’

이때 바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걱정이 생각인 줄 알았는데, 걱정은 자신을 사로잡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하게 되니 구체적인 방안이 떠올랐고 그 결과 2,000만 달러 손해를 단지 2만 달러 손해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걱정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좋은 생각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J.K. 롤링은 1990년 맨체스터에서 런던까지 연착된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해리포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기차를 타는 동안 마법 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의 아이디어가 “완벽히 형성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혼하고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살길이 막막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착된 기차가 무엇입니까? 느리더라도 언젠가는 이 자리를 떠나 다른 곳에 저절로 다다르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기차는 자신의 인생도 그럴 수 있다는 차분한 마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지혜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욕조에 들어가자 물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알아차렸고, 왕의 왕관이 얼마나 많은 물을 대체했는지 측정함으로써 왕의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방법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는 "유레카!"를 외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시라쿠사의 거리를 달렸습니다.

왕의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 알아내지 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욕조에 들어가 한가하게 목욕하는 게 정상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내 힘으로 하려는 마음을 포기했을 때 마음에 평화가 오고 깨달음이 옵니다. 걱정은 그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담장과 같습니다.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예스터데이’(Yesterday)의 멜로디가 꿈에서 떠올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완벽히 형성된 곡조로 잠에서 깨어났고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 완벽해 보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표절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이란 무엇입니까? 세상 걱정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걱정이 많으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잠을 자고 나면 새로운 영감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좋은 생각은 내 노력에서 오지 않고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제임스 와트는 증기 엔진의 기존 설계에서 얼마나 많은 증기가 낭비되는지 알아차린 후 증기 엔진을 개선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실패에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공원을 거닐다가 별도의 콘덴서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는데, 이는 증기 기관의 효율을 획기적으로 향상하게 하였고 산업 혁명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공원을 걸으며 평화를 찾는 것도 얼마나 좋을까요?

뉴턴은 연구할 때가 아닌 사과를 바라볼 때 중력의 법칙을 깨닫게 됩니다. 나에게서 좋은 게 나온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좋은 생각은 내 힘으로 무언가 생각하려 할 때 달아납니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듣는 마음을 가집시다. 이것이 마르타로부터 마리아로의 전환이고 기도의 꼭 필요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교구는 3년 동안 교구 시노드를 준비하였습니다. 지난 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에 대의원 회의가 있었고, 저는 부제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그날 교구장님과 함께하는 미사가 있었고, 그동안의 준비 과정과 결의안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시노드는 ‘건강검진’과 비슷합니다. 건강검진은 여러 분야를 점검합니다. 질문을 통해서 생활 습관을 파악합니다. 운동은 얼마나 하는지, 음주와 흡연은 하는지, 우울증은 없는지, 잠은 충분히 자는지 질문을 통해서 확인합니다. 채혈을 통해서 몸의 영양상태를 살펴봅니다. 소변검사를 통해서 영양분의 순환이 잘 되는지 살펴봅니다. 내시경을 통해서 위와 장의 상태를 살펴봅니다. 혈압을 측정합니다. 고혈압이라면 원인을 찾아봅니다. 시력과 청력을 확인합니다.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건강검진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몸에 이상이 있다면 그것을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몸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좋은 생활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건강검진을 통해서 우리 몸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듯이, 시노드를 통해서 교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는 겁니다. 시노드는 교구의 건강 상태를 점검합니다. 첫째는 ‘경청’입니다. 교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제와 수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교우들이 영적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민과 갈망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에게 두통약을 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둘째는 ‘진단’입니다. 교회의 재정은 문제가 없는지 살펴봅니다. 교우들의 신앙생활의 지표인 성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세례, 견진, 고백, 병자, 성체, 혼인, 신품 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성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만과 위선이 문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 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먼저 찾으려는 제자들의 욕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처방’입니다. 처방에는 고통이 따르고, 인내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처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60년 전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창문’을 여는 처방을 하였습니다. 사목헌장, 계시헌장, 교회헌장, 전례헌장을 통해서 시대의 징표에 맞도록 교회의 창문을 열었습니다. 달라스 교구도 ‘결의문’을 통해서 교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처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시급한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필요한 곳에 예산을 책정하고, 집행해야 합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예수님의 처방은 여전히 강력한 효과가 있습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있다면 예수님의 처방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헌신과 희생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처방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처방입니다. 

12월 4일일 교구 시노드는 폐막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복음의 기쁨이 넘쳐나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기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교구 시노드와 동행하려고 합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좋은 몫>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2)


임을
사랑하는데


좋은 몫
나쁜 몫이
어디 있으랴마는


네 몫에
마음 빼앗기면


내 몫은
같은 몫이라도
나쁜 몫이 될 테고


내 몫에
오롯하다면


내 몫은
같은 몫이라도
좋은 몫인 거지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초대를 받고 그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 드는 일로 분주하였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동생 마리아가 자신을 도와주라고 말씀해 주시길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복음에서 드러나는 두 여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은 친자매였지만 각기 다른 개성을 드러냅니다. 곧 마르타는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 분주했고, 마리아는 주님께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분의 발치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마르타는 바쁜 중에 도와주지 않고 주님앞에 있기만 한 마리아에게 순간적으로 섭섭한 마음이 들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두 자매를 생각해 볼 때 그들이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가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 실로 엄청난 순간, 곧 구세주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집에 함께하시는 엄청난 기쁨의 순간을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중요한 몫은 바로 매 순간 주님과 함께하는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른 모든 행복을 잃는다 해도 그 주님과 함께하는 행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는 그 엄청난 행복을 누리는 하루가 되길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에 사는 마르타는 예수님과 일행들을 집으로 모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몹시 분주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그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지요. 이 상황에서 마르타는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에게 화가 났으며 또한 이를 보고만 있는 예수님에게도 화가났음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마르타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마르타와 마리아, 특히 마르타의 말을 들어보면 과거도 그리고 현재도 볼 수 있는 자매들의 모습입니다. 투정을 부리는 이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동생 혹은 언니에 대해서 말하지요. 과거 마르타는 예수님께 투정 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동생 마리아에 대해서 말하지만 보고만 있는 예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지요. 즉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마리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지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마음을 아시고 그녀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이름을 두 번 부른 것의 의미는 그녀를 위로해 주시는 것이며 나는 너를 항상 보고 있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똑같은 사랑을 주십니다. 설령 어느 누가 신앙인으로서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를 더 사랑하거나 관심을 거지거나 하지 않으십니다. 똑같은 빛을 주시며 똑같은 비를 내려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르타에 대해서 복음은 분주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쁘고 뛰어다니는 마르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어버렸고 심지어 예수님께서 차별하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기에 잘한 것이고 혹은 말씀보다는 시중을 들었던 마르타가 잘못된 것이다. 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르타 마리아 각자의 자리에서 하고 있었던 것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마르타는 너무 바쁘다 보니 정작 자신이 하던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르타의 문제입니다.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돌아보면 좋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내 일이 다른 이의 일보다 적다 하여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혹은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이보다 많음에도 은총을 받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성당의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지요. 내가 하는 일이 많은데 신부님으로부터 칭찬을 못 받았다고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각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십니다. 우리는 그것만 충실히 임하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아멘!

 

 

 

참된 영적 삶 - “경청, 회개, 환대, 관상”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참된 영적 삶을 살 수 있나? 

참으로 믿는 이들, 누구나의 관심사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참된 영적 삶에 대한 깊은 가르침과 더불어 깨달음을 줍니다. 네가지 측면에서 나눕니다.

 

첫째, 경청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귀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입니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물론 성 베네딕도 및 모든 영성가들이 우선적으로 꼽는바 경청입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맨 처음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며, 예언자들 역시 무수히 들어라 외칩니다. 

 

대화나 상담의 기본도 경청이요 기도의 기본도 경청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 역시 경청해주길 바랍니다. 경청을 잘 하기 위한 침묵이요 경청에서 겸손도 순명도 뒤따릅니다. 침묵과 경청에서 참말도, 지혜도 나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삶의 지혜가 됩니다.

 

“조급하고 허망한 말을 피해야 마음이 고요해진다. 엄정한 말과 평안한 마음이 어우러질 때 덕은 완성된다.”<다산>

“대개 겉과 속을 함께 닦아야 그 덕이 외롭지 않으니, 한쪽으로 치우친 말을 해서는 안된다.”<다산>

 

이런 말은 깊은 침묵과 경청에서 나옵니다. 바로 경청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우선 주님의 발치에 앉아 침묵중에 그분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새삼 침묵과 경청의 훈련을 통한 습관화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너무나 침묵과 경청이 실종된 경박한 세속화된 삶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개입니다.

경청과 동시에 일어나는 은총의 회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의 지혜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한두번의 경청이 아니듯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여정의 회개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오늘 예수님 발치에 앉아 경청하는 마리아는 분명 동시에 내면에서는 회개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반면 일에 몰두하면서 마리아의 모습에 불평하며 도움을 청하는 마르타에 대한 주님의 충언이 마르타는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과도한 활동을 절제하고 주님 말씀에 귀기울이는 경청의 관상을 우선하라는 회개의 가르침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 제1독서 갈라티아서는 바오로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경위를 소상히 설명합니다. 진솔하고 겸손한 고백을 통해 사도의 회개의 여정을 듣는 듯 합니다. 예전 바오로가 아니라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의 종으로, 교회의 사람으로 거듭 난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환대입니다.

손님 환대는 기본적 영성이자 예의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정주영성과 함께 가는 환대영성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환대의 집, 수도자는 환대의 사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환대의 기쁨, 환대의 사랑, 환대의 치유, 환대의 축복입니다. 서비스업의 첫째 요소도 친절한 환대입니다. 환대가 아닌 냉대(冷待)라면 그 상처는 얼마나 크고 오래가겠는지요.

 

오늘 마리아의 예수님 환대는 옳았습니다. 제 좋을 대로의 환대의 사랑이 아닌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에 따른 마리아의 경청의 사랑,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마르타 역시 제 좋을 대로 정성 가득한 음식준비를 통해 주님께 대한 환대의 사랑을 표현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바, 환대는 아니였습니다. 

 

환대에도 분별의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내 중심의 환대가 아닌 주님 중심의, 상대방 중심의 환대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의 불찰은 주님 환대의 우선 순위를 잊은 것입니다. 미사구조도 이런 주님 환대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말씀전례에 이어 성찬전례로 말씀을 경청하는 환대가 우선합니다.

 

넷째, 관상입니다.

관상과 활동은 함께갑니다. 우열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요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경청의 관상이 우선입니다. 경청의 관상에서 삶의 중심과 질서가 자리잡히고 지혜로운 눈밝은 활동생활이 가능합니다. 경청의 관상없는 활동이라면 무질서하고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경청의 관상의 부재로 맹목적 눈 먼 활동에 지친 어리석은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활동입니다. 관상이나 활동의 본질은 사랑이요,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관계로 봐야 합니다.

 

바로 오늘 마르타의 좋은 취지의 음식 손님 접대의 문제점도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경청의 환대가, 경청의 관상이 우선임을 잊고 활동에 몰두함은 지혜가 아닙니다. 밖으로는 마르타의 활동이, 안으로는 마리아의 관상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관상에서 샘솟는 활동이어야 바람직한 영적 삶입니다. 예수님만큼 섬김의 활동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밤마다 관상가가 되어 외딴곳에서 관상의 기도로 아버지와 일치의 충전시간을 가졌습니다. 낮에는 활동가, 밤에는 관상가로 사셨지만 분리된 분이 아니라 통합된 온전한 분이었습니다. 

 

잘 듣기 위해, 잘 분별하기 위해, 잘 기도하기 위해 일단 멈춤의 관상이, 침묵중 경청의 관상이 절대적입니다. 우리 삶에서 최고의 활동 형태가 하느님과 일치의 관상입니다. 참으로 이상적 영적 삶은 예수님처럼 “활동안에서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 삶을 위한 네  요소가 경청, 회개, 환대, 관상이요 이 또한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영성훈련과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바로 이 넷의 요소를 통합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참 영성가로 살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여라.”(루카11,28). 아멘.

 

 

 

김준수 신부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10,42) 


경험적으로 소박하고 단출한 식단이지만 단품 식사가 마음 편합니다. 그래서 많은 반찬으로 가득 찬 뷔페 식사가 부담스럽고 불편합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음식을 먹을 때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 기분 좋은 포만감보다 불편한 더부룩함으로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을 겁니다. 과한 것보다 약간 모자란 게 낫다는 말도 있듯이 정성이 담긴 작은 음식이 많은 음식보다 더 만족감을 줄 수 있습니다. 영적 만족감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몇 년 동안 원외 거주할 땐,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혼자 있으면서도 주어진 외부 활동 곧 병원 원목 신부로서의 제 소임에 충실하고, 운동도 열심히 할뿐더러 꾸준히 독서도 하면서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도 중요하지만 제게 꼭 필요한 영적 운동, 곧 기도 생활을 충실히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바쁜 일상에서, 분주한 활동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영혼을 고요하게 유지하느냐가 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려면, 활동의 회전 바퀴 중심에 고정된 축이 굳건하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고정된 축이 있다면, 바퀴가 아무리 빨리 돌아도 그 축은 중심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축이 바퀴를 돌려주는 것입니다. 축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바퀴가 요동치거나 아예 움직이지 않아 모든 일이 뒤 틀려 멈추고 맙니다. 고정된 축에서 안정이 나오는데, 이는 바퀴가 축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고요함은 바로 바퀴가 축에 고정됨에서 나옵니다. 우리 시대만이 아니라 성서의 시대에도 이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우리네 삶의 문제를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를 통해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집 안에 살아가고 있는 두 자매에게서 드러나고 있는데, 한 사람은 고정된 축이고, 다른 자매는 그 축에 끼여 돌아가는 바퀴와 같습니다. 마리아는 고정된 축이고, 마르타는 돌아가는 바퀴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한순간이지만, 잠시 고정된 축에서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긴 여정으로 인해 지치시고 피곤하셨기에 편히 쉬고 싶은 마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시장하셨을 겁니다. 오랜만에 자기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이 마르타에게는 오직 음식 대접을 필요하는 손님으로만 보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당하신 거부와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겪어야 할 수난은 그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잠시라도 그 짊을 내려놓고 누군가가 자기 곁에 머물면서 관심과 이해의 시간과 자리가 필요했었나 봅니다. 예수님도 누군가 당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말해 보았지만, 앞으로 겪을 수난에 대해 예고할 때마다 다들 진저리를 내고 들으려는 마음이 없음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이런 주님에게 마르타는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10,40)라고 마리아에 대한 분노를 예수님께 쏟아 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10,41)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마르타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은 해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진정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음을 예수님은 에둘러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마르타에게는 회전하는 활동의 고정축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고요함을 잃고, 식사 준비가 음식을 먹는 사람보다 중요해질 때, 바퀴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요함을 되찾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영원히 가치 있는 한 가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단 한 가지 그것은 사람이며, “주님 발아래 앉아 있는 것”(10,39)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눈을 바라보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중심 단어는 “좋은 몫”(10,42)이란 표현입니다. 여기서 좋은 몫이란 곧 주님과의 교제, 친교입니다. 그러니까 마르타가 준비 중인 음식과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양분과의 대비해서, 식사의 가장 좋은 몫은 부엌에 있지 않고 마리아가 앉은 자리에서 베풀어지고 있는 말씀의 잔치에 무게가 더 쏠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친교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수많은 식단을 두루 갖춘 뷔페 식사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뷔페는 먹고 나면 부담스럽고 불편합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우리 모두에게 삶을 단순화해야 하고, 중요한 한 가지 일에 초점을 모으고 그 일에 열정을 쏟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고있는 그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섬기고 있는 주님에게서 우리의 시선이나 관심이 분산되어, 다른 일에 정신을 팔려서는 아니 됩니다. 갈라진 마음 없이 주님 곁에 머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을 갈라지게 하는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함을 유지하고 생활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씨름해야 하는 물음과도 같습니다. 그 해답은 오늘 복음의 마리아처럼 하면 됩니다. 주님 발아래 앉는 쪽을 선택하면 됩니다. 거기가 바로 우리 모두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는 많은 일이 한 가지 일에 굴복하는 곳이며 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많은 일을 주님 발아래 내려놓고 그분의 보살피심을 받아들이면서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때엔 예수님께서 받는 존재가 아니라 베푸시는 존재가 되실 것이며,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마태20,28)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온전히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느끼면서, 우리가 참석하고 있는 성당에서 우리 모습을 성찰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 말씀을 잘 듣고 실행하는 것이 잘 섬기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1)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르타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마르타만 바라보다가, 또는 마르타가 한 일만 바라보다가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려고 오신 분, 목자이신 분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먹입니다.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ㄴ-38)”

<목자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양들이, 즉 ‘말씀’이든지 ‘성체’든지 간에,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사람들이 ‘착한 양들’이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고,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2)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 예수님께 드릴 음식을 준비하려고 애쓴 일은 훌륭한 일입니다. 마르타는 순수하게, 아무런 사심 없이, 예수님을 좀 더 잘 섬기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분명히 그랬는데, 나중에는 ‘일’만 생각하느라고 예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라는 말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분주하였다.’ 라는 말은, 마르타의 마음속에 ‘일’만 있고 예수님은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라는 말도, 마음속에 ‘일’만 있고 예수님은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마리아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 말은, 도와주지 않는 동생과 모든 것을 ‘보고만 계시는’ 주님을 함께 비난하는 말입니다.

<마르타는 자기가 모셔 들이고 잘 접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바로 그 주님을 비난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3)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라는 말씀에서, ‘많은 일’은 ‘너무 많은 음식’을 뜻할 수도 있고, ‘물질적인 일’이나 ‘다른 사람들의 일’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에서, ‘필요한 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가리키고, 이 말은 예수님, 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뜻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당신이 주시는 것을 잘 받는 것이 곧 당신을 잘 섬기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말씀은, 마리아는 주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 영원한 것, 가장 고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고 너도 여기 와서 내 말을 들어라.” 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하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도 아니고, 먼저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4) 주님께 무엇인가를 잘 바쳐야만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2사무 7,2)”

다윗은 성전을 지어서 바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가 성전을 짓는 것을 막으셨습니다(2사무 7,4-17).

하느님께서 바라신 것은 성전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충실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나중에 솔로몬이 짓게 되는데, 솔로몬은 성전 봉헌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1열왕 8,27)”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 지었다는 것이 솔로몬의 기도입니다(1열왕 8,28-30).

주님께 무엇인가를 잘 바치는 것이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들은 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주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1열왕 9,4-9).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지금 마르타는 예수님의 몸을 섬기고 있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섬기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타가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주님을 섬기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자신을 섬기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실상 주님을, 혹은 남을 섬긴다고 하면서, 막상은 자기 자기를 섬길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마르타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상 주님 앞에 앉아서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있거나 타인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그 어떤 섬김보다도 더 큰 섬김이 됩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허용해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곧 자신을 향한 주님의 섬김을 수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리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나는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해드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과 한 자리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일, 곧 섬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나의 종’이 되십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지금 자신보다 더 작아진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곧 ‘종’인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꼭 한 가지, 그것은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일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관상하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주님!

이 한 가지로 하여 가난을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당신께 속한 자만이 진정 가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로 하여 낮추어 섬기겠습니다.

속한 자만인 진정 낮아질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전부를 하는 이 신령스런 일이 바로 당신의 소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이신 당신을 주님 되게 하는 일, 바로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프랑스 북부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 예전에 야고보 사도가 선교여행경로를 따라 도보로 순례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가 출발하고 이삼일이 지나면, 지고 가는 짐을 줄이는 일이라고들 합니다. 여행 전에 꼭 필요하리라고 여겨 가져왔던 소품들이 결국은 짐으로 여겨져, 버려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거나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또 가정과 부부생활 중에,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해주는 사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 예수님께 대접할 음식을 만드느라 바빠, 정작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예수님을 대면할 시간조차 없습니다. 그런 마르타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과 그야말로 노닥거리고 있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눈엣가시처럼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하소연합니다만 예수님은 마치 마르타를 나무라기라도 하듯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너는 나를 초대해 놓고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나를 위한답시고 네 음식을 만드는 일에 빠져있는데 반해)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신앙생활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성경을 통해 말합니다. “셔마 이스라엘” 곧 신명기에 나오는 대표적인 유다교의 명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그런가 하면, 신약에 와서 꼭 필요한 계명이요 사명인 구절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15,12) 마땅히 우리로부터 흠숭을 받으셔야할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희생하셨으니, 너희도 그렇게 서로를 살리기 위해, 사랑하고 봉사하라고 하십니다. 이 계명을 우리의 가정과 사회, 직장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선택하고 실행해야 할지 정하고 노력합시다.

 

 

 

피정과 사명<루카 10/38-42>10/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셕가모늬도 보리수 밑에서 3년동안 할 일을 깨우치기 위하여 침묵 속에 수련을 했고 주님도 공생활 하시기 전 30년을 침묵 속에 사시다가 40일 광야에서 엄재하신 후 세상에 본 모습을 들어 내셨습니다. 교회는 큰 업무를 받기 전 피정을 통해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반성하며 기도 속에 좋은 결심을 굳게 하며 사제나 업무를 받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수도자와 성직자는 일년에 한 번 일주일 피정시간을 가지고 주님의 종으로 합당하게 살기위하여 준비 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깊이 생각하고 깨우치며 일을 하지 않으면 재대로 일을 할 수없습니다. 결혼하기 전 약혼기간도 충분이 서로 알아보는 기간이며 덮어놓고 좋으니 일생을 함께 산다고 하면 살면서 나몰랐어 그런 사람인줄 하면서 그귀한 일치를 깨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독서기도 아침기도를 주님 말씀을 따라서 보고 기도하며 그 내용에 따라 묵상하고 주님과 하나 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제는 시편 70을 드리며 어려서부터 저를 아시고 이끌어 이 나이되도록 보호하시고 특별히 이 나이 들어 비록 늙어 보잘 것 없어도 보호자 되시고 함께 계시니 무시당하고 냥대 당하여도 저의 편이 되시고 잘못이 있어도 자비 배푸시니 갈곳이 있고 머물를 수있어 외로움에서 당신의 사랑으로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어제는 늙음을 한탄 하지않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만나보겠다는 전화만 받고 아무일 없이 행복한 하루를 보내었습니. 오늘 내일 사람만나고 피정 지도하며 지내고 내 일 본당 성가대원과 피정 강론을 준비하며 이나에도 강론하게된 것을 감사하며 지냈습니다. 준비 하는 시간이 제일 중한 시간입니다. 오늘 주님 발치에 앉아 쥠 말씀 듣는 마리아는 제일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하심같이 저는 이 나이에 주님의 제일 좋은 자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살면서 많은 위기를 당면하지만 생각을 깊이하고 하느님 말씀에 응답하면서 살면 위기는 지나가고 더 먾은 은통 속에 살게 합니다. 잃은 것을 잃고 버릴 것을 버리고 삵 됩니다. 이 나이 들어 내것은 하나도 없고 다 주님 것이며 주님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내 것이 되고 늘 충만함이 넘치게 됩니다. 생각하며 살고 감사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늙어버린 이때 저를 기운 다한 이때 저를 버리지 마소서.” 아멘. 요사이 사방에 피정집 있어 한번은 피정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기를 권합니다.

 

 

 

좋은 몫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님
우리는 마리아처럼 기도를 하며 마음을 모으고 주님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 방어할 틈도 없이, 온갖 잡념들이 내 안에 들어옵니다. 그 잡념들은 나를 서서히 허물어뜨립니다. 우리는 때론 마르타처럼 일을 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실수 없이 하려고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합니다. 왜 나만 이런 일을 하냐며 다른 사람을 보고 불평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리아의 몫도 마르타의 몫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합니다. 마리아처럼 좋은 몫을 택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만, 마르타의 곱지 않은 눈길처럼 잡념들이 밀려와 마음이 복잡하고, 많은 염려와 걱정으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 일이 잘못되면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상황을 불평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건 한 가지뿐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하든 ‘좋은 몫’일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앞에 있는 몫에 충실하면 됩니다. 누가 이렇고 저렇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먼저 맞아들인 것은 마르타였지만, 그 첫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주님을 향한 첫 마음을 잃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몫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함승수 신부님

많은 분들이 오늘 복음을 이해할 때, ‘기도생활’을 대표하는 마리아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와 ‘봉사생활’을 대표하는 마르타를 옹호하는 이로 갈라져 누가 더 교회에 필요하고 유익한 존재인지,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더 어여삐 보시는지를 논쟁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비교해서 누가 더 잘했는지 우위를 정하기 위함도, 둘 중 누구의 입장이 옳은지 그 시비를 가리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는게 좋지요.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써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누구나 신앙생활 하는 목적은 똑같습니다. 죄에서 구원받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가 다르기에, 그 목적지까지 가는 방식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신앙생활 하는 방식을 두고 ‘감놔라 배놔라’ 해서도 안되고, 자신이 신앙생활 하는 방식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착각하여 교만해져서도 안되겠지요. 마르타에게는 마르타의 방식이 있고, 마리아에게는 마리아의 방식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해주신 특별한 길이 무엇인지 잘 식별하고 받아들여 따르면서 그 안에서 신앙생활의 의미와 보람을 찾으면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는데에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할지를 스스로 선택했다면 그것 자체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소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데를 기웃거리며 남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마음 속에 불평 불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써 자존감이 떨어지고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여 우울해질 뿐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이 가져오는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주님과의 관계에만,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데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 의지로 시작하는 것이지만,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끄시는대로 따라가는 것이기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또한 주님의 뜻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 발치에 앉아 그분 말씀을 듣기로 한 마리아의 선택만 좋은 것이고, 주님의 수발을 들기로 한 마르타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 자신이 감정적으로 느끼는 ‘좋고 싫음’과 주님께서 결정하시는 ‘좋고 나쁨’을 헷갈립니다. 주관적으로 ‘싫다’고 여겨지는건 자신에게 ‘나쁜 것’으로 여겨 회피하려 드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주신 좋은 것들을 놓치게 되지요. 그러니 내 마음에 드는 것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내 육체적인 기호에 맞는 것보다 하느님 뜻에 맞는 영적인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에게 참으로 좋은 몫을 택하여 누릴 수 있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루카 10, 4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홀로 너무
많은 염려와
걱정을 하며
우리들은
살아갑니다.

왜 그렇게만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걱정을
떼어내야
머무름이라는
믿음이 됩니다.

걱정의
분주함이
아니라
머무름의 온기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염려와 걱정
하나 없는
삶을
주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염려와 걱정을
주님께
맡기는 삶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주님을
불편한 염려의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도록 하는
사랑의 자리에
우리가
모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분주함으로
상대방과
더 이상
다투지 않습니다.

온갖 걱정으로
주님께 머무를
시간조차 없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걱정을
내려놓고
맡겨야
우리 생활에서
살아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좋은 몫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몫이란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좋은 몫을
선택하는
좋으신 오늘
되십시오.

텔레비전에서 냉면한철(冷面寒鐵)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넌센스 문제로 생각했는지 한 방송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냉면집 장사가 여름 한 철이다.”

물론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방송인들이 이 대답이 맞을 것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한글만 보면 당연히 그렇게 예측할 수도 있는 ‘냉면한철’입니다.

그러나 이는 ‘낯빛이 싸늘하기가 차가운 쇠붙이 같다’라는 뜻으로, ‘사사롭고 편벽됨이 없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이르는 말입니다. 한자를 보지 않고서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도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를 잘 알면서도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그 안에 담긴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뜻은 그냥 눈으로만 쉽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너그러운 손님 접대의 덕을 보여 줍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한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르타의 동생인 마리아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녀는 마르타처럼 손님 접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 발치에 앉아서 정의와 진리를 즐겼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자신과 달리 주님 발치에 편하게 앉아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 관한 판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청을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은 마르타가 잘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영원에 속하는 일이지만 육신을 섬기는 일은 지나가 버리는 일일 뿐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결국, 겉으로는 보이는 모습을 보고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그 안에 담긴 뜻을 볼 수 있어야 함을 마르타에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어떤 모습도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을 부족한 인간의 눈으로 부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인간의 영혼을 더욱 위대한 것으로 만든다(프리드리히 실러).

 

취미와 특기

어느 단체에 가입하기 위해 가입 신청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항목 중에 취미와 특기가 있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에는 이 항목에 쓸 것이 참 많았습니다. 우표 수집, 기타 연주, 독서, 탁구…. 너무 많아서 글씨를 쓸 칸이 부족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 취미와 특기가 뭐지?’라고 자신에게 반문할 정도로 특별한 취미도 또 나름의 특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너무 각박하게 살아왔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그래서 어제는 오랜만에 기타를 꺼내서 옛날 가요를 힘차게 불러봤습니다. 더군다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미사 때 성가도 부를 수 없지 않습니까?

힘이 불끈 솟는 것만 같습니다. 옛날 취미가 지금에도 힘을 제게 전해주는 취미였습니다.

취미 생활을 하지 않다 보면 삶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취미와 특기를 다시금 찾아보십시오. 사는데 바빠서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지금을 잘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주님의 크신 은총으로 인해, 이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유다교 열성 신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신 바오로 사도께서 겪으셨던 고초가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것은, 그가 집필한 여러 서한들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유다교 입장에서 보면 바오로 사도는 배교자요 배신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저 그런 신자 중 한 사람이었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바오로는 앞길이 창창하던 유다교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원로들과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에 대한 사랑과 유다교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인재 바오로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오로가 하루 아침에 그리스도교로 돌아선 것은 유다교 입장에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가 유다교에 끼친 손실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개종 이후 깊은 광야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 곳마다 다니면서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수많은 유다인들이 줄줄이 바오로 사도를 따라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니, 유다 지도층 입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눈엣가시같은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오로 사도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큰 환영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찾아내고 체포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니던 바오로였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가 하루 아침에 개종을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 근처를 기웃거리니, 신자들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러다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떨칠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배신자라는 낙인과 의심으로 가득찬 눈초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의 강렬한 주님 체험 이후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알아주던 말던, 누가 험담을 하던 뒷담화를 하던 상관하지 않고 묵묵하고 충실하게 복음 선포를 향한 여행길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놀라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기회 닿을 때 마다 회개 이전의 부끄러웠던 모습을 공개석상에서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세기 교회를 이끈 쌍두마차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 중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 정도 되었으면, 충분히 회개의 과정도 거쳤겠다,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에 대해서 굳이 스스로 들춰내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도 바오로 사도는 틈만 나면 지난 시절 자신이 저절렀던 과오와 어두웠던 시절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갈라티아서 1장 13절) 

 

부끄러운 지난 날을 고백할 때 마다 바오로 사도는 늘 이런 식으로 말씀을 마무리짓습니다. 

“이토록 부당하고 부족한 저를 당신의 사도로 선택해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도로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크신 은총으로 인해, 이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필요한 한 가지는 자기관리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보통 예수님을 위해 봉사와 활동을 위주로 하는 이들을 대표하고, 마리아는 기도와 관상을 위주로 사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마르타는 활동을 통한 성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사람이고,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곁에서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보고 불평하는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마르타를 따르면 예수님께 식모가 되고, 마리아를 따르면 신부가 됩니다. 예수님은 식모와 같은 여인을 원하시지 않고 순결한 신부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집에서 밥도 청소도 하지 않는 아내를 원하시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사랑하는 순결한 신부가 신랑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순결한 신부가 식모보다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모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지쳐 쓰러지지만, 신부는 신랑을 위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충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더 사랑하는 것이지, 더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식모가 될 것인지 신부가 될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순결한 신부가 되려고 하다 보면 끝까지 좋은 결과를 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일에 집중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첫째로 자기관리에 집중합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이 유일한 취미라는 유재석씨도 자기관리에 충실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끊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는 일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기관리가 잘 된 모습이 일을 통해 입증되도록 합니다.

정준하 씨는 말합니다.

“재석아, 너 너무 재미없게 산다. 몸이 재미가 없잖아.”

정형돈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 거 주위 사람들이 스트레스야.”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점점 재석이 형이 무섭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데, 슈퍼맨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운동도 진짜 열심히 하고 담배도 끊고 점점 이형,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무한도전이 끝나고 다른 멤버들은 활동이 약해져도 유재석씨는 언제나 건재합니다. 유재석씨가 집중하는 것이 일이 아닌 자기관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자기관리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유재석씨도 놀란 자기관리 장인이 있는데 바로 박진영씨입니다. 박진영씨의 자기관리 방법을 들으며 유재석씨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박진영씨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조금만 먹으면 바로 살이 찌는 박진영씨는 일주일의 반 이상 하루 20시간 공복을 유지합니다. 1일 1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엔 운동하며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런 사람이 배 두드리며 먹고 놀아도 되는데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일까요? 그는 매년 한 곡씩 노래를 발표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올해도 ‘When We Disco’라는 곡으로 복귀를 했습니다. 그의 음원 수입이 국내 1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듯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의 전형이고, 마리아는 먼저 자기관리부터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봉사와 기도 중 하나만 끊으라고 하면 어떤 것을 끊으시겠습니까? 활동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활동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여 분명 무언가 이루어내고 싶은 열망으로 들끓습니다. 그래서 일에 지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 중심인 사람은 그 일이 잘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지치고 그래서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일보다 자기관리가 우선입니다.

박찬호 선수도 첫 메이저리그 성공신화를 이루어내고 후배들에게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적합한 조언을 달라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치지 않는 것입니다.”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를 우선시하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다가는 자신도 거룩함을 잃습니다.

제가 살을 조금 빼니까 저절로 주위 사람들도 다이어트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로 나를 증명하려 하지 말고, 내가 일을 통해 증명되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한데, 신앙인 처지에서는 그것이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기도로 여기고 기도시간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마련할 줄 알 때 다른 하는 모든 일도 잘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는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정년퇴임까지 5번 정도 직장을 옮긴다고 합니다. 직책은 19번 정도 바뀐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회가 다양해지고, 직업을 구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런가하면 대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새로운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소홀해서는 안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민 사회도 다양한 직업을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증권회사에 다녔는데 이민 와서는 한의사가 되신 분도 있습니다. 언어의 소통 문제로 직업을 바꾸기도 하고, 회사의 구조조정 때문에 직업을 바꾸기도 합니다. 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신문사 직원이 되신 분도 있습니다. 여행을 다니다가 여행사를 운영하는 분도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여행사를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직업을 바꾸는 것이 당연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율법학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율법학자로서의 신념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한 체험을 했던 바오로 사도는 율법학자라는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찾아가는 선교를 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선교여행을 통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율법학자로 대접을 받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바오로 사도는 박해와 시련이 눈앞에 보이는 사도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방법은 2000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선교사들은 중국과 일본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와 남미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박해가 심했던 한국으로도 왔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박해도, 시련도, 죽음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30년째 사제로 지내면서 다양한 직책을 경험했습니다. 본당 사제로 16년 지냈습니다. 보좌신부 8년, 본당 신부 8년을 지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는 본당 사제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사제가 하는 일은 본당 사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구의 인사이동을 통해서 다양한 사목을 체험하였습니다. 사목국에서는 3년 동안 교육 담당 업무를 하였습니다. 소공동체를 위한 교육을 하였고, 구역장과 반장을 위한 월례교육을 준비하였습니다. 해외연수와 중견사제 연수를 통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연수의 기회를 주신 교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청소년국에서는 6개월 동안 청소년 수련원에서 지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과 함께한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성소국에서는 5년 동안 사제양성을 위한 업무를 하였습니다. 교황방한 준비위원회 업무를 한 것도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작년부터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신문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주님께서는 제게 참 다양한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많은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큰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마리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활동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좋은 몫입니다. 영성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좋은 몫입니다. 중요한 것은 활동과 영성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가 좋은 몫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습니다. 직업에 따른 다양한 직책이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그 일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좋은 몫을 선택한 것입니다. 비록 그 일 때문에 시련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좋은 몫을 선택한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가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기에 마르타는 예수님께 마리아가 같이 도와주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전부터 이 복음의 대목은 신학적으로도 많은 논란이 있었던 대목이었습니다. 그 주된 논란의 주제는 실천하는 영성과 관상의 영성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지에 대한 논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실천의 영성과 관상의 영성의 중요성을 따지기 이전에 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예수님께서 함께 머무셨다는 엄청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집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머무셨다고 했을 때 그 사실이 정말 영광이자 기가 막힌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보다 교황님 오셨을 때 어떤 행사를 기획했고, 어떤 음식을 제공했는가, 그리고 그분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에 머물러 버리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를 하면서도 주님께서 자신을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시고 늘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 정말 영광이자 행복인데 그것보다 자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또 하나의 교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불러주시고 늘 함께해주시는 주님께 진정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크신 주님의 자비 안에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감사와 기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감사와 기쁨이 진정 주님께서 바라시는 우리의 좋은 몫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늘진리 들으며 살아봐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 만나면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제일 잘 모시는 거 아닌가요?

가정방문 갔었는데 가구 벽지 테이블 창문 커튼 자랑만 잔뜩 하더군요.

이야기만 듣다가 시간 없어 가정축복 얼른하고 나오는데 아쉽더라고요.

 

속으로 별 사람이군! 아마 성체 모시고도 세상일 부탁만 하고 끝내겠군.

기도는 인격적대화인데 자기말만 냅다하고 예수님께는 기회 안 드려요. 

사람들은 하늘 봐도 세상말만 하고 하늘얘기엔 귀 막고 안 듣나봅니다.

 

하늘말 하늘노래 하늘계명 평생 배워도 모를 텐데 세상말만 하자니 참.

우리는 지난 얘기 과장 꾸밈 자랑 그만하고 하늘진리 들으며 살아봐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시중을 들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었다.

마르타는 시중들기에 정신이 빼앗겨 예수님께 불평하며 협박에 가깝게 회유하며 자기 뜻대로 명령해달라고 부탁했다.그 일로 초대받은 예수님께서 입장이 난처해 지셨다. 마르타의 일로 예수님의 Quality에 손상을 입혔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10,40)

초대받으신 예수님께 관계를 좋게 하는행동에서 말씀을 경청하고 이를 수용하고 존중하고 지지하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타는 관계의 경고상황을 야기했자만 마리아는 관계 중심으로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것을 선택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내가 귀한 손님을 자리 중심에 모셨다면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가를 관심있게 살펴야 한다.

추석연휴가 끝났다. 자녀들은 모처럼 부모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가족들이 함께 만났다. 마르타 역인가? 마리아 역인가? 행복한 만남으로 헤여졌나? 아니면 .....? 빨간 경고음만 남기고 떠났는가? 마르타처럼 만일 빨간 경고음만 남겼다면 그것은 부모 보다 자기를 뽀족히 드러내며 우쭐대다 생긴 일이라 여기면 틀림없다. 마리아처럼 다소곳이 부모님의 의중을 헤아려 경청하고 들어주고 지지하고 돌아갔다면 지금쯤 그 자녀는 마음 속에 행복한 추석으로 길게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좋은 몫’을 택해야 한다. 내가 하는 행동이 예수님도 좋고 나도 좋을 때 나의 Quality는 한없이 높아진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화요일>(2020. 10. 6. 화)(루카 10,38-42)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분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목자’이신 분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28).”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먹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13).”

<루카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시고,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잡수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루카 24,41-42), 그 이야기는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이야기이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셨고(마태 15,32),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마태 15,37).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잘 받아먹는 것이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지금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르타가 바라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 음식 대접을 잘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코헬렛’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지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식사는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사람들을 영적으로 배불리 먹이시는 일을 먼저 하셨고, ‘기적의 빵’을 주셔서 육적으로 배불리 먹이시는 일은 그 다음에 하셨습니다. (항상 꼭 그런 순서로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에는 그것을 잘 들어야 하고, ‘빵’을 주실 때에는 그것을 잘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타의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의 갈등이 이야기의 핵심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이 핵심입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라는 말씀에서 ‘많은 일’은 ‘다른 사람의 일’을 뜻할 수도 있고, ‘너무 많은 음식’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지금 마르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은,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마라.”(“왜 그 일을 하는지 잊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을 막지는 않으셨지만, ‘많은 일’ 때문에 ‘필요한 것 한 가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타이르셨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애를 썼고, 그 마음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을 신경 쓰다가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면서도, ‘일’만 신경 쓰다가 누구를 위한 일인지 잊어버리고, 왜 하는지도 잊어버리고, ‘일’만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을 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말씀에는 “너는 나쁜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는 자신에게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뜻인데, 그 ‘좋은 몫’은 사실은 마르타에게도 ‘좋은 몫’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시니까, 마르타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그 다음에 해야 합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음식을 먼저 준비하더라도 필요한 양만 준비하고 바로 와서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너도 여기 와서 앉아라.” 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마르타가 하는 일도 ‘좋은 일’이지만, ‘말씀을 듣는 일’이 ‘더 좋은 일’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먹인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리아가 선택한 몫을 빼앗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개인 소명의 고유성을 이야기하십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루카 10,39)

이 유명한 복음 내용을 '활동'에 대한 '관상'의 우위성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마르타 성녀가 평가절하되어 버리는 당혹스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당신이 각별히 사랑하는 두 사람을 차별하거나 경쟁 구도로 세우실 분이 아니지요. 누군가를 들어높여 다른 이를 낮추실 리도 없습니다. 이 일화를 통해 들려주고 싶으신 예수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루카 10,38)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 들인 여인입니다.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세 남매와 예수님 사이의 애틋한 우정이 바로 마르타의 환대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마르타는 적극적이고 부지런하며 헌신적이고 용기 있는 멋진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 39)

손님 대접에 분주한 마르타에 비해 마리아는 고요히 예수님 앞에서 그분을 응시합니다. 말씀하시는 분 앞에서 듣는 것. 이 또한 최대의 접대 행위입니다. 이는 주인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지요. 객들을 자기들끼리 있게 두고 주인은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것만큼 무례한 일도 없으니까요.  

세상 모든 좋은 일이 다 그렇듯이, 마르타의 입장이나 마리아의 입장이나 함정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마르타가 삐끗한 지점에 머무릅니다. 사실 손님을 접대하다보면 좀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커집니다. 손님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예의를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좋은 지향이 내면의 건강하지 못한 욕구, 이를테면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엉켜버리면 적정선을 넘기기 쉽습니다. 만족을 모르게 되어 버리지요. 그러면 시간이 더 필요하고 일손이 더 필요하며 물질도 더 필요합니다. 내 안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더, 더 원하게 됩니다. 더 잘 하려고 그러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저 깊은 곳에서 더 사랑받고 더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활활 불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도하고 방만한 열정에는 얼마간 자신의 책임이 따릅니다. 

마르타는 "당연히" 마리아의 노동력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접대를 위해서는 마리아의 손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그건 마르타의 만족을 위한 것이지 예수님의 바람은 아니었지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르타가 서운해졌을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으셨을 겁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 마리아의 경청을 콕 짚어서 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 누구나 자기의 고유한 소명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한 가지씩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러니 마르타도 본인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에 본인이 몰두하면 되는 것이지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는 말씀 역시, "너도 그렇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는 마리아의 소명이 귀한 것처럼 마르타의 소명도 귀합니다. 훗날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기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한 라자로의 소명 또한 귀하고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가 자기 소명을 빼앗기지 않는 것처럼, 마르타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에게 가장 잘 맞는 모습으로 창조된 만큼, 우리는 자기 존재의 본질, 정수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마르타가 자기 자신의 욕구에 집중하기보다 예수님께 필요한 것을 바라본다면 과도한 열기가 제 온도를 찾아 마르타 다움이 질서를 잡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솔직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6)

사도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이, 본래 창조 때부터 "새로운 길"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소명이 제 궤도를 찾기까지 그는 사도들을 찾아가거나 해서 성급히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침묵과 고독 중에 숙고와 성찰의 시간을 보냅니다. 바오로에게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했을 뿐, 당장 제자단에 합류하여 제도권의 확인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갈라 1,24)

바오로의 과거를 아는 이들이 바오로의 회심 소문을 듣고 그를 조롱하거나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섭리를 미리 준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사도로써 이만한 열매가 또 있을까 싶도록 보람찬 결실이지요.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체험 이후, 이해할 수 없이 펼쳐지는 길 위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졌습니다. 인간적인 계획이나 수를 내려놓고, 인내하며 머물렀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소명에 빛과 색과 온도를 입혀 쓰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만의 고유한 소명이 이렇게 완성되어 가게 되지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교회의 보편 소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창조 때부터 심어 주신 고유한 개인 소명을 꽃피우고 완성해가는 중입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르타만의 아름다움이, 마리아에게는 마리아만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벗님 여러분 각자에게도 마찬가지지요.

 

사랑하는 벗님! 각자 주님께서 주신 고유한 소명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우리가 선택한 좋은 몫을 주님께 올라가는 동앗줄이라 여기면, 단단히 부여잡고 절대 빼앗기지 않겠지요. 우리 모두는 주님과 하나 되는 데 "필요한 한 가지"를 저마다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좋은 몫을 택하셨으니,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처럼 미리미리 여러분에게 권고하고 싶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의 ‘트랄리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시작 (Inscriptio; nn. 1,1-3,2; 4,1-2; 6,1; 7,1-8,1: Funk 1,203-209)

테오포로스(하느님을 모신 자)라고도 하는 나 이냐시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거룩한 교회 곧 우리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신의 평화를 누리고 그분 안에서 부활할 것을 희망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택하시고 또 그 마음에 드시는 아시아의 트랄래 교회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사도적 양식으로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 가운데 이 인사를 보내면서 갖가지 축복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정신 자세는 책할 바 없고 확고 부동하며 또 그것은 일시적이 아닌 타고난 성품이라고 여러분의 주교 폴리비오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뜻으로 이곳 스미르나의 나에게 왔을 때 들려 주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슬에 묶인 나를 볼 때 같이 기뻐하고 나는 그를 통해서 여러분 전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의 편으로 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의 희사품을 받았을 때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여러분은 하느님을 참되게 닮는 자라는 사실을 알아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여러분은 흡사 예수 그리스도인 듯 여러분의 주교에게 복종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속의 생활 자세로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죽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인해 죽음을 피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처럼 여러분은 주교 없이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고, 그리스도와의 일치 가운데 남아 있도록 우리 희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듯 원로들에게도 복종해야 합니다. 부제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들의 봉사자로서 만사에 있어 만인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은 음식과 음료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기보다도 하느님 교회의 봉사자들입니다. 그래서 죄악을 불인 양 피해야 합니다.

모든 이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인 듯 부제들을 공경하고 특히 아버지의 모상이신 주교를 받들어 모시며 또한 하느님의 원로원이요 사도들의 집회인 듯 원로들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이분들 없이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고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나에게 와 아직 내게 머물러 있는 주교의 인격에서 여러분이 지닌 애정의 본보기를 보았습니다. 그의 온유함은 바로 그의 힘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영혼을 여러 가지 체험들로 채워 주셨지만 오만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는 그것들을 내게만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순간이기 때문에 나를 추켜 주는 말에다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칭송하는 이들은 나를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고난 당하고 싶지만 그런 자격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이 열망은 일반 사람들이 알아차리지는 못하지만 못 견디도록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으로 이 세상의 으뜸을 쳐 이길 수 있는 그 겸손을 지극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권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인의 양식으로만 먹이고 이단이라는 이질의 풀을 멀리하십시오.

그런데 이 일은 오만으로 부풀지 않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주교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사람은 순결한 사람이지만 그밖에 있는 자는 불결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주교와 원로들과 부제들의 권위 밖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순수한 양심으로 일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쓰는 것은 여러분 가운데 그런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처럼 미리미리 권고해 주고 싶어서입니다.

 

 

 

<내 눈길 당신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바라보다

당신 곁의 누군가

내 눈길에 들어온다면

 

당신이 아닌

당신 곁의 그에게

내 눈길 빼앗기기 전에

 

내 눈길

오롯이 당신께만

건네야 해요

 

내 눈길 좁아서

두 사람 함께

담을 수 없으니까요

 

 

 

빼앗길 수 없는 한 가지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게 “좋은 몫을 선택하였고,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루카 복음 10장 25절부터 오늘 복음까지 연속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첫 번째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25-28), 두 번째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29-37),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복음인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38-42)입니다. 아마도 루카 복음사가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먼저 강조하고, 이어서 두 사랑의 예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를 밝혀주고 북돋워줍니다. 평화운동가였던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참으로 무신론자”라고 이야기했다지요. 그러니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만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마더 데레사 성녀는 “빵의 형상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다면, 가난한 이들 안에서도 그분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한 마리아는 사람들 안에 계신 그분을 또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는 행위는 행복의 원천입니다. <루카 10, 38-42> 10월 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인간의 행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우리나라가 바라는 것은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은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어떤 위험이 일어나면 흩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위험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 발치에 앉아 다소곳이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행동을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하시며 너와 나의 관계,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에 일치는 가장 소중하고 하느님과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고, 듣고, 질문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다운 행위입니다. 어제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대구에 경북광유라는 기업주의 창립자에게 20여 년 전에 대세를 주고 기일이면 산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회사의 임원들이 매년 함께 미사를 드리지만, 신자가 3분의 1 정도이며 다른 사람은 신자가 아닌데 미사 때 만나지만 말을 주고받고 하지 않다가 어제는 식사를 함께하는 장소에서 제가 선교적 차원에서 말을 했습니다. “언제 시간 내서 회사에서 신앙 간담회 같은 것도 하고 서로 만남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긍정적 반응이 나왔습니다. 기도 부탁합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알게 하면 제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KK”라는 그룹 단계로 성장하여 사장이 5명, 그 아래 임원단이 있고, 전 직원은 200명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 말씀 전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렙니다. 

상담할 때 저는 반드시 미사 해설을 하면서 미사의 은혜 중 일치의 은혜를 받는 시간은 말씀의 전례라고 하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면 기도 때 말만 하는 것으로 부족하고 말씀을 듣고 응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많은 신자가 미사 때 일치의 은총을 받는 것도 모르기도 하지만 귀담아듣지 않고 말씀을 흘려보냅니다. 미사 때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도 못 하고, 기억을 못 하니 실천도 못 합니다. 저는 그래서 카톡으로 그날 복음을 묵상하여 매일 전해주고 있습니다.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의 하느님 말씀을 음식을 반추하듯 말씀 안에 깊은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현존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서 주님 말씀 듣고, 주님과 하나 되는 일을 선택해서 가장 필요한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 깊이 새기고 머리는 거듭 생각하며 실천의 의지를 키우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면서 빈 머리 빈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거짓이며 진실과 사랑이 없는 신자 생활입니다. “아멘. 아멘. 아멘.” 하는 것은 헛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 듣고 의미를 알고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 중, 침묵 중에 하느님 말씀 듣고 실천하는 일을 선택 시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대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마음가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주(主)가 되어 예수님 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는 마르타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객(客)이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데에 집중하는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각자의 행동 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먼저 마르타는 예수님을 최대한 편안하게 모시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드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요. 자신이 계획한 바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어렵고 동생인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한데, 동생은 자신을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만 있으니, 이에 답답해진 마리아가 예수님께 ‘다가가’ 동생에게 놀지만 말고 언니의 일을 좀 도우라고 명령해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가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에피스테미’는 원래 “위에 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실 의자에 앉아 쉬고 계셨을테니 그분 곁으로 다가간 마르타가 선 채로 예수님을 ‘내려다보는’ 상황이었겠지요. 결국 마르타는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예수님 ‘위에 서려고’ 한 셈입니다. 예수님을 잘 대접해드리는 것은 곧 예수님 당신께도 좋은 일이니 자신의 계획과 뜻을 따르라고 예수님께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맞이한 순간부터 계속하여 주님의 발 옆, 즉 바닥에 앉은채로 예수님을 올려다보며 귀 기울여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즉 그녀는 언니와는 달리,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철저하게 예수님 ‘아래’에서 그분께 순명하며 그분의 말씀과 뜻을 받아들이는데에 집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일’이라며 자신의 생각대로 계획을 세워 그 일을 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경청하고 따르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가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르타를 나무라시고 마리아를 편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움직이는 봉사보다 조용히 앉아 바치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비교우위’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참된 행복과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느라 바쁘게 살아가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정작 중요한 주님의 뜻에 소홀해지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실천에 옮기는 그 ‘한 가지’뿐입니다. 내가 계획한 것들은 이런저런 ‘변수’나 ‘시간’에 따라 변하거나 사라지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은 그분 뜻에 따라 온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절대 빼앗기지 않을’, 영원불변의 몫을 선택한 마리아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입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저는 사실 고등학교 때 이과였습니다. 지금은 안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저 때는 교차지원이 가능했습니다. 아무래도 신학교는 철학, 신학 이러한 것들을 배우니 당연히 문과이겠지요. 사실 많은 이과생들은 대학을 공대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 중 우리나라는 한양대 공대가 가장 좋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것을 생각해봅니다. 어떤 고등학생이 한양대 공대생이 멋져보인다고 그냥 입학하려 하면 될까요? 아마 성적부터 여러 가지 신경 많이 써야겠지요. 그 중에서 공대인데 가장 중요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네. 바로 수학입니다. 수학은 공대에 있어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기본바탕입니다. 이 기본바탕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수업 자체를 따라갈 수 없으니 말이지요.

오늘 주님 말씀도 사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마르타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시고, 마리아만 높이높이 비행기 태우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에 있어 중요한 한 가지를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 기본바탕은 바로 기도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수 많은 봉사를 하고, 정말 많은 재물을 봉헌하고 그 어떤 일을 한다해도, 기도없이는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기도는 우리의 신분증과 같은 것이고, 우리를 우리로써 존재하게끔 만들어주는, 그리고 지켜주는 하느님의 방패입니다.

보좌신부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성지에서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나고 성사도 드리고 했습니다. 긴 시간 교회 안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많으십니다. 또한 교회 안이 아니더라도, 좋은 일을 하시는 분들 많으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일로 다가오고, 의미가 없어지고, 내 마음의 짐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그 순간 잠시 멈추고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기도생활은 어떠한지 말이지요. 내가 점점 누군지도 모르게 존재가 옅어지는데, 어떻게 주님의 자녀라는, 제자라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기도 안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교우여러분들, 기도는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것의 기본입니다. 더 이상 설명하는 것이 불필요할 정도로 기도는 중요하고, 기본바탕입니다. 오늘 하루 봉헌하며, 지금 우리 각자의 기도를 점검해봅시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한 번 환우를 방문하여, “오랜만에 누워 계시니 기도도 많이 하시겠네요?”라고 여쭈었더니, 그분이 “너무 아파서 기도할 생각도 안 납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프면 뒹굴면서 ‘주님, 살려주십시오!’라고 외치기라도 할 법도 한 데 그분은 아닌가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라는 자매의 일상을 엿보게 해줍니다. 마르타는 여러 사람을 초대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마리아는 여러 손님에게 다가가 그와 함게 대화하며 그와 대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하고 힐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1-42절) 라고 역성을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문득 주님 앞에 다가와 주님과 대면하고자 하는 마리아를 반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어쩌면 정반대의 모습도 칭찬하실 듯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마르타보고 ‘제는 손님을 불러 놓고 손님과 이야기 할 생각은 안 하고 저렇게 손님을 위한 일을 한다고 손님 곁을 비워두고 있으니 일을 그만하고 여기 와서 손님과 함께하라고 해주십시오.’라고 마르타를 힐난하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똑같이 마르타의 몫을 중히 여겨달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평소에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연습을 하면서 기도를 습관화시켜 두지 않으면, 나중에 시간이 나도 어떻게 주님과 함께할 줄 모르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그렇게 주님께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가 봅니다. 운동도 습관화시켜야 하듯이 기도도 습관화시켜야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주님을 찾게 되는가 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마르타처럼 열심히 일을 해야 하지만, 마리아처럼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오는 생명의 양식과 기쁨을 오늘 여기서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삶의 중심은

한 가지뿐이다.

 

삶의 중심이

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염려와 걱정을

맡겨드린다.

 

하느님께

멀어질 때

염려와 걱정은

더욱 커진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시간은 많아도

 

하느님께

머무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의 몫이다.

 

믿음은

함께하는

기쁨이다.

 

믿음의 방향은

일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은 마음을

표현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보다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기꺼이

하느님께

나누는 마음이다.

 

마음 안에

일이 있고

마음 안에

기쁨이 있다.

 

필요한 것은

삶의 첫자리에

계시는 하느님께

먼저 우리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마음을

드리는 것이

말씀을 듣는

머무름의

첫시작이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두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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