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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11월 28일 (녹)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11.28|조회수33 목록 댓글 0

제1독서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8,1-2.21-23; 19,1-3.9ㄱㄴ
나 요한은 1 큰 권한을 가진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의 광채로 땅이 환해졌습니다.
2 그가 힘찬 소리로 외쳤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21 또 큰 능력을 지닌 한 천사가 맷돌처럼 큰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며 말하였습니다.
“큰 도성 바빌론이 이처럼 세차게 던져질 터이니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22 수금 타는 이들과 노래 부르는 이들,
피리 부는 이들과 나팔 부는 이들의 소리가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고
어떠한 기술을 가진 장인도 다시는 네 안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맷돌 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23 등불의 빛도 다시는 네 안에서 비치지 않고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너의 상인들이 땅의 세력가였기 때문이며
모든 민족들이 너의 마술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19,1 그 뒤에 나는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내는 큰 목소리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2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자기 불륜으로 땅을 파멸시킨 대탕녀를 심판하시고
그 손에 묻은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
3 그들이 또 말하였습니다.
“할렐루야!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
9 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21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22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23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24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대바빌론이 무너졌다는 천사의 소리와 하느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는 소리를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적군에 포위되는 징벌의 날에,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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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천사들이 대바빌론이 무너졌다고 외치며 큰 돌을 바다에 던지는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를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짓밟히고, 표징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두려워 떨며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묵시 문학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으며 어떻게 벗어날 도리가 없는 억압의 굴레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신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거슬렀던 이들에게 이 상황은 두려움이며,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따랐던 이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입니다. 믿음 안에서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한 이들은 이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하며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날을 전혀 다른 두 가지 말로 표현하십니다. ‘징벌의 날’과 ‘속량의 날’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이들은 심판과 벌을 받을 것이고, 주님을 믿고 회개한 이들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다랐을 때, 악을 상징하는 바빌론은 파괴될 것이고, 하늘에 있는 무리들은 승리에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마지막 날은 주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삶의 완성과 구원의 날, 그러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파괴와 징벌의 날이 됩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본다면, 개인 역사의 끝은 죽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죽음이 누구에게는 조금 이르게 올 수도, 누구에게는 조금 늦게 올 수도 있지만, 모든 이가 받아들여야 할 순간입니다. 죽음으로 맞는 마지막 날이 나에게 두려움이 아닌 희망이 되도록 잘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산다면 그날은 기쁨과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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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서에서 예루살렘 멸망 예고는 세 차례 등장하는데(19,43-44; 21,20-24; 23,28-31 참조), 오늘 복음은 그 가운데 두 번째 예고입니다. 마태오 복음(24,15-21 참조)과 마르코 복음(13,14-19 참조)의 병행 구절에서는 묵시 문학적 문체를 사용하며 종말의 대환난을 집중적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 파괴를 역사적 사건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신학에 따르면, 이는 메시아 임금,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최종 심판의 예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루살렘에만 한정되어 있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시작점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뻗어 나간다는 ‘보편적 구원’의 주제를 다룹니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라는 내용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이제 유다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만백성에게 선포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집중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는 종말론적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보편적 구원’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널리 선포되고 모든 이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복음화의 탁월한 도구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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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성전은 두 번 파괴됩니다. 기원전 8세기 바빌론에 의해서, 그리고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서입니다. 성전이 파괴된 사건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기에, 이를 계기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자신들의 죄를 성찰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 두 사건을 마치 하나의 사건처럼 연결합니다. 시대적으로 요한 묵시록에서는 로마가 성전을 파괴한 사건을 나타내려고 ‘바빌론’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묵시록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마치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전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사람들에게 종말을 떠올리게 할 만큼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며 포로가 되고 삶의 터전은 무너집니다. 전쟁을 피하기 힘든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더 큰 고통을 받습니다. 성경은 이런 재난의 상황을 말하면서 백성들의 행동을 신앙 안에서 성찰합니다. 여기에는 하느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재난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 안에서 멸망의 이유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말에 관한 말씀이 우리의 잘못이나 죄를 탓하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도 큰 사건들이 생기면 사람들은 ‘왜?’라고 질문합니다. 그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종말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재난의 상황에서도 우리를 속량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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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된 민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방탕과 교만의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가장 큰 징벌은 바빌론 유배라는 뼈아픈 상처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를 계기로 율법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메시아를 갈망하는 희망의 신앙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성취하셨는데도 신약의 유다인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징벌의 표징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전쟁으로 말미암은 참혹한 결과를 맛보았습니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전쟁의 공포가 얼마나 두려운지를 압니다. 어떤 이는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하고, 마치 전쟁이 나면 자기들은 피해를 입지 않고 적군만을 무찌를 수 있다는 환상도 갖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늘날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무고한 이들의 죽음과 공포, 모든 윤리적 가치가 훼손되고 오직 생존의 욕구만 남아 인간 잔악성이 광란을 일으키는 세상을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 혼란의 시기일수록 적대감과 분열을 조장하는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고 교란시키는 일은 사탄의 세력과 담합하는 행위입니다. 대화와 합의를 통한 평화만이 우리가 함께 공존하며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표징들이 나타날 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잘못된 신념과 왜곡된 정보로 말미암아 혼란과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경고입니다. 거짓 뉴스와 악의적 보도들이 난무하는 우리 세상에서, 보편적 상식에 어긋나고 공동선을 해치는 헛된 소문이나 편협한 정보에 눈과 귀를 닫는 노력도 필요한 지혜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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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는 이때 복음은 우리에게 종말에 대해 묵상하게 합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맞이할까?’가 우리에게는 늘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적에게 쫓기고 포위되어 무서운 징벌의 날이 다가오는 것처럼, 또는 이 땅에 큰 재난이 일어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이는 것처럼 그날이 다가오지나 않을지 무시무시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날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에게 세상의 마지막 날은 당신이 우리 가운데 오시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의 속량이 가까워진”, 그래서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올 우리의 구원과 해방의 날인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날이고, 우리의 구원의 역사가 결정적으로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 주님을 얼굴을 맞대고 뵙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 그분을 마치 친구처럼 찾았다면, 우리는 그분을 기쁨과 신뢰 속에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그분을, 또는 우리의 형제들을 모른 체하고, 간과하고, 두려워하고, 무시했다면, 마지막 날 주님과의 만남도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우리에게 구원이냐 단죄냐, 파멸이냐 해방이냐, 행복이냐 절망이냐, 이 선택은 바로 오늘, 이 시기에,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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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이 늦가을 밤, 죽음과 종말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그저 무기력하게 지속되는 것만 같은 일상 속에서 생생하고 빛나는 순간들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고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차게 느껴질,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은 과연 언제 오는 것일까요?

근래에 나온 철학서들 가운데 미국의 유명한 두 철학자가 함께 쓴 『모든 것은 빛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룬 이 책은, 무기력과 탈진의 이 시대에 인생을 바꿀 거창한 계기를 헛되이 기다리거나 자괴감만 남길 자극적 쾌락에 탐닉하는 대신에, 자신의 일상을 감사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그런 눈을 가진 이들은 평범한 일상이 품은 ‘빛나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의 한 이야기가 깨우쳐 줍니다.

어느 지혜로운 스승이 자신의 두 제자를 하산시키며, ‘세상의 모든 것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들의 인생은 참으로 복될 것이라 이릅니다. 산에서 내려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제자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났습니다. 한 제자는 동료에게 세상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다 겪으며 결국은 모든 것이 빛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쓸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다른 제자는 행복한 모습의 얼굴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든 것이 빛나는 것은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이 존재할 뿐이지.”

우리는 평범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며, 또한 그러한 존재들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랑으로 완성하실 주님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기에 각자가 ‘빛나는 순간’을 담고 있는 작은 조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소리 없이 가을이 사라져 가는 이 밤에, 사랑의 눈으로 모든 것이 빛나고 있는 장관을 가만히 바라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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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행정, 문화, 경제 등 모든 활동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고 끝납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게 소중한 장소입니다. 그런 곳이 주님께 멸망의 선고를 받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70년경 로마에게 함락됩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몹시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몇 번이나 다녀가셨던 도시입니다. 그랬던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무참히 못 박히시어 돌아가셨지만, 이스라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며,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킬 것인지 아닌지 저울질해 대는 상황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전쟁의 위험에 노출된 화약고는 바로 우리 한반도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입니다. 한반도는 이념 때문에, 중동은 종교 때문에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참평화이신 주님께서 복음 말씀처럼 다시 한 번 불행을 선언하신다면, 그것은 곧 한반도와 이스라엘의 몰락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가 그분의 백성답지 못하면, 새 도성 예루살렘도 무너지게 되겠지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제외하고 새로운 당신의 예루살렘을 세우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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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독립 전쟁은 기원후 66년에 일어나 70년에 끝납니다. 무모한 전쟁이 길어진 것은 68년6월 ‘네로’ 황제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로마 제국 수뇌부에 혼란이 생겼던 것이지요. 하지만 69년 로마 장군 ‘티투스’는 전쟁을 속개합니다. 70년 초에는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4개월의 전투 끝에 성벽을 뚫고 성전에 불을 지릅니다.

곧바로 ‘돌 위에 돌이 얹혀 있지 못할’ 정도의 파괴가 뒤따랐습니다. 불타는 성전을 바라보면서 유다인들은 세상의 종말을 생각합니다. 성전 파괴와 함께 로마도 벌을 받아 망할 줄 믿습니다. 하지만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원하고 바란다고 오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종말은 삶의 결과입니다.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에게는 죽음이 곧 종말인 셈입니다. 따라서 두려워할 것도, 무서워할 것도 아닙니다. 온전히 자신이 만들어 가는 작품일 뿐입니다. 누구나 결국은 하느님께 돌아갑니다. 미리부터 불안하게 산다면 복음은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날을 위해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말에 담긴 교훈입니다. 잘못된 ‘지식’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종말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메밀을 좋아합니다. 메밀에는 다양한 영양소와 생리활성 물질이 들어 있어 건강에 이로운 음식이라고 하지요. 고혈압 예방, 성인병 예방, 혈관 건강, 혈당 조절, 변비 해소, 이뇨작용 등 장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메밀국수, 막국수, 메밀묵, 메밀전병, 메밀전 등의 음식이 유명합니다. 또 예쁜 메밀꽃도 좋아합니다.

 

구전에 따르면 메밀은 고려 말 중국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제주도에 들어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메밀은 소화도 안 되고 독성이 있는 작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실제로 살리실아민이라는 독성 물질이 있습니다. 원나라는 제주도 남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제주 전역에 메밀을 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의 지혜는 이를 오히려 약으로 바꾸었습니다. 무와 함께 먹으면 간단히 중화된다는 것을 알고, 무를 메밀밭 옆에 심었고 또 메밀을 무와 함께 먹었습니다. 독을 이 나라에 뿌렸지만, 반대로 고마운 약이 된 것입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또 독성이 있는 메밀이 산천에 심었을 때, 가장 안 좋은 상황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이때 만약에 그냥 좌절해서 포기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겨내려는 마음에서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삶 안에서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라면서 그냥 절망하면서 포기해야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또 다른 기회라고 여기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마지막 때를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될 때라고 하시면서 이때가 바로 징벌의 날이라고 하시지요.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가고, 짓밟힐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순간 예수님 말씀처럼 ‘불행하여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절망의 순간만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인 날인 것처럼 주님께서 오심을 꾸준한 기도 그리고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으로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새로운 시간 속에서 새로운 마음을 담아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의술의 발달로 인해 임사 체험자, 근사 체험자, 죽음 유사 체험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때가 되어 한 인간의 수명이 다해 맥박이 그치고 숨이 멎는 순간, 의료진들이 열심히 심폐소생술을 실시합니다. 이제 요르단강을 건너 꿈에 그리던 하느님 나라로 들어섰는데, 유능한 의료진으로 인해 심폐소생술이 성공해서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많은 임사 체험자들이 죽음 이후 공통적으로 겪은 체험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죽음과 동시에 체외 이탈을 해서 자신과 가족들을 보게 된답니다. 그리고 그토록 간절히 보고 싶었던 먼저 떠난 가족들과 친지들을 만났답니다.

세상 강렬하고 환한 빛의 통로를 본답니다. 아마도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통로겠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세상 따뜻하고 자상한 크신 분의 현존을 느낀답니다. 그분이 마중나와 계셨답니다. 그분을 뵙는 순간 그간 지니고 있었던 그 모든 상처와 두려움, 고통과 슬픔이 눈 녹듯이 사라진답니다.

그래서 임사 체험자들은 하나 같이 고백했습니다.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라고.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건너가는 사다리요 통로라고.

요즘 예수님께서는 계속 종말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간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던 공포스런 분위기에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까무러칠 것이겠지만, 평생토록 주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신앙인들을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7-28)

보십시오. 평생 주님 안에 살아왔던 우리에게 그날은 공포스러운 날이 아니라 황공스럽게도 몸소 우리를 맞이하러 나오실 주님을 대면하는 날입니다. 그날 우리는 주님과 함께 손을 잡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각자 개인의 죽음은 개인 차원에서의 또 다른 종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두고 울며 슬퍼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참여하는 순간이며, 그분 나라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언은 모호하게 쓰였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미래 세계에서 프리 크라임이라는 혁신적인 범죄 예방 시스템을 채택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이 시스템은 살인이 일어나기 전에 예측할 수 있는 프리코그(Precogs)로 알려진 세 명의 심령술사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가끔 헤로인에 찌든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예지능력을 지닌다고 합니다. 그들의 비전을 통해 경찰은 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잠재적 범죄자를 체포하여 도시에서 살인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프리 크라임 경찰 반장인 앤더튼은 이 시스템을 확고히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예언에 따르면 그가 36시간 이내에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충격을 받고 자신이 왜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앤더튼은 도망자가 되어 진실을 밝히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이 속한 프리 크라임 팀의 체포를 피하면서 앤더튼은 시스템의 무오류성에 대한 답을 찾습니다. 그는 프리 크라임의 창시자인 이리스 박사로부터 시스템이 때때로 지배적인 예측과 다른 결과를 내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생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앤더튼도 그러한 오류를 발견함으로써 모함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인권의 보호를 위해 더 많은 범죄자를 감옥에 집어넣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무고한 죄인이 벌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이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프리 크라임 팀은 이 오류를 깊이 숨기고 있었고 그 책임자인 버제스에 의해 그 사실을 알게 된 앤더튼이 제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앤더튼은 자유 의지로 예언되어 있던 살인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요나에 의해 한 달 뒤 멸망하기로 되어 있던 니네베가 멸망하지 않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마지막을 굳이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 정확한 시간은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하십니다. 만약 예언이 명확하면 그것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는 이들이 생깁니다. 버제스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디나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워 사람들의 재산 등을 가로챘던 사이비 교주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왜 예언은 모호한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을 말씀하시다가 마지막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모든 예언이 이런 식입니다. 어떤 채널에 보니 ‘구약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적이 없다’라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한 지구 멸망의 이야기는 예언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이사야 7,14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 될 것이라 합니다. 미카 예언서 5,1에서는 그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이 예언은 분명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이전 수백 년 전에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예언은 모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할 위기에 처한 남 유다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말씀 안에서 나온 예언들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이 악한 이들에게 명확한 사실로 인지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이용해 많은 이들을 미혹하게 될 것입니다. 악한 이들은 아무리 좋은 것도 악용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 예언이 온전하게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착한 뜻을 가진 이들에게는 교회나 성령 충만한 이들의 해석에 의해 도움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악인들 가운데 보내며 이렇게 예언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9-10)

악인들이 예언을 듣고 깨치면 큰일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헤로데를 방문했을 때 헤로데는 예언을 통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렇게 도움을 받았지만, 헤로데는 그 지식으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예언을 악인들에게 해석해 주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언제 세상이 멸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 명확한 표징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이방인들의 시대가 있을 것이고 그 시대가 다 찰 때가 올 것이란 예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같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로마 11,25-26)

현재 이스라엘은 재건되고 있습니다. 아랍 민족들이 다 들고일어나도 지금의 이스라엘을 어찌할 힘이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대인들이 무엇이든 거의 휩쓸다시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께 완벽히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무서운 징조도 아직은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정말 완벽한 마지막일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준비는 언제나 ‘회개’에 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여 살았습니다. 회개는 에덴동산에서처럼 십일조를 봉헌하고 선교로 하느님 백성을 탄생시키는 본래의 일로 회귀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는 이들에겐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닌 희망이 날이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정태현 신부님의 ‘성서 입문’을 읽고 있습니다. 주제는 ‘성서의 형성 과정과 각 권의 개요’입니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알려주듯이, 성서 입문을 통해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술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고, 음악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듯이, 성서의 형성에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습니다. 오늘은 예언문학, 지혜문학, 묵시문학이 전하고자 하는 사상과 교훈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언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고, 경고와 위로를 통해 신앙 공동체를 회복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언문학은 하느님의 정의, 자비, 공의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며, 특히 불의와 억압에 반대합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를 지적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공의를 외칩니다. 예언자들은 종종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예언문학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회개와 회복이며,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삶을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정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심판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교정과 회복임을 강조합니다. 장차 올 구원자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합니다. 이러한 메시아적 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궁극적인 희망을 제공하고, 나아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중요한 메시지로 작용합니다. 예언문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백성들이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지혜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인생과 신앙, 도덕적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인간이 지혜를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지혜문학의 시작과 중심은 하느님을 경외함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올바르고 정직한 삶, 즉 의롭고 도덕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지혜는 올바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겸손히 하느님 앞에 서야 함을 가르칩니다. 인간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없고, 하느님의 계획은 때로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물질적 성공과 쾌락의 무상함을 강조하고, 진정한 행복과 의미를 추구하도록 이끕니다. 인생에서 겪는 고난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이를 극복하는 지혜로서 인내와 신뢰를 가르칩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을 유지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의 한 부분임을 강조합니다. 삶의 작은 부분들 속에서도 지혜를 실천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는 가정과 사회생활, 인간관계 속에서 도덕적이고 올바른 태도를 보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지혜문학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정직과 의로움으로 삶을 살아가며, 삶의 일시적 본질을 깨닫고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을 통해 충만한 인생을 누리도록 이끕니다.

묵시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시련 속에서 희망을 전하고, 최후의 승리와 하느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박해와 고난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일시적이며, 끝까지 인내하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역사의 모든 흐름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으며, 모든 사건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느님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현재 상황이 불확실하거나 고통스러워도 궁극적인 목적이 있음을 신뢰하도록 돕습니다. 종말에 하느님께서 완전한 새 창조를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 이는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창조를 의미하며,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희망과 소망을 줍니다. 강력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 독자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촉구합니다. 비유적인 언어와 환상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신앙을 경계할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세상의 악과 싸우는 영적 전투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신앙인들이 이 싸움에서 영적 무장을 통해 승리하라고 요구합니다. 믿음을 지키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이 있어도 하느님이 함께하시며 그분의 계획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희망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탑을 쌓으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의 삶을 산다면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 사람에게 기쁨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슬픔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믿음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반역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희망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절망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증오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축복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저주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방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억압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살림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죽임이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의 패망에 대해 예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를 하며 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경청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청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자세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누가 말하고 있을 때 상대가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면 서로간의 제대로된 대화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진지하게 경청한다고 했을 때 그 대화는 제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속량과 구원의 길은 그렇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자세처럼 언제나 주님을 맞이하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데서 그 시작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먼저 적들이 오면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빠져나가며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징벌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또 다른 의미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산이라고 하면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해 오직 그분에게만 의탁하라는 것이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빠져나가라는 것의 의미는 회개하라는 뜻이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더 이상 죄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복음에 예수님 자신이 마지막 날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늘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보는 이들은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이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에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늘을 볼 수 없어 땅을 보았지요. 죄를 지으며 사는 이들은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하늘을 볼 수 있는 이들과 하늘을 볼 수 없는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 이들일까요. 서두에 적은 대로 회개하는 이들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이들입니다. 여기에서 죄는 바로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사람의 아들이 올 때 하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때는 언제 올지 우리는 모르지요. 그러므로 내일이 그날이라 생각하면서 오늘 준비해야 합니다. 항상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자녀의 삶으로 말이지요. 아멘!

 

 

 

김준수 신부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1,28)

역사의 반복처럼, 매년 연중행사처럼 분쟁 그리고 천재지변, 기상이변과 각종 질병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이런 인재人災와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 등은 이젠 지구라는 행성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에게 일상화되어 버린 듯 무감각하기도 합니다. ‘금년도 예외 없이!’ 예수님 시대 이후 세상은 세기말世紀末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은 종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종말終末을 앞둔 시간을 살아간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봅니다. 더욱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침 시기와 또한 새로운 시작,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를 앞둔 지금은 공교롭게도 계속해서 비슷한 복음의 메시지를 듣다 보면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이 시기만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때까지 우리네 삶도, 역사의 시간은 바로 ‘어제는 금요일, 그러나 부활 주일이 오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두 날을 온전히 살았던 사도들은 결코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아니 계신 것처럼(=不在) 보일 때가 예수님이 가장 강하게 現存하신 때이며,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보일 때가 다시 살아 돌아오실 때라는 것을 철저하게 배웠고 체험했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실제로 영적으로 전례력에서 별로 의미 없는 날, 바로 토요일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역사는 어떤 면에서 약속과 성취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구는 현재 토요일인데 과연 부활 주일, 곧 재림은 올 것인가? 영성적 의미에서 우리는 성금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에 살고 있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재림은 오리라는 기다림으로 살아야 하는 우주적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당신께서 몇 번이나 예루살렘을 모으려고 하였으나 마다하였다.”(루13,34)하고 한탄하시면서도, 품으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을 향한 애틋한 심정으로 눈물을(19,41) 흘리시면서까지 회개하도록 촉구하셨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역사적으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루살렘은 자신의 속량(=구원)을 스스로 잃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 결과로 닥친 환난을 피하기 위해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며, 하느님께 피신하라는 의미)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악의 구렁에서 나오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죄악의 구렁으로 들어가지 마라.)”(21,21)고 권고합니다. 이런 권고는 마치 6. 25전쟁을 겪으신 분들은 이런 어려운 상황을 온몸으로 겪으셨기에 실감하셨으리라 보며, 그러니 전쟁 중에 누가 그 전쟁의 중심 지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빠져나와 피난을 떠나다 보면 거동이 불편한 임산부나 젖먹이가 딸린 여성들이(21,23)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야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한 일이라고 봅니다. 이런 전쟁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말씀, 곧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구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1,28)라는 말씀을 통해서 종말의 시간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 시간은 속량(=구원)과 심판의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종말의 시간을 앞두고 우리는 역사와 신앙의 교훈을 통해 누구 앞에 어떻게 서 있을 것인지 지금부터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불안과 걱정으로 허리를 굽히지 말고, 머리를 들어 세상의 표징을 읽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되새기면서 힘차고 충실하게, 밝고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마지막 그 날, 그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날이며 시간이 되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존재”(묵18,9)의 행복을 만끽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 귀의하여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빛의 편에 선다면 그날은, 그 시간은 결코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날과 시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매 순간이, 그날과 그 시간이 계속될 뿐 내일은 없습니다. 내일이 있으려니 지금 주어진 시간을 헛된 것에 탕진하고 소진하고 산다면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 사람에게는 바로 그 마지막 시간이 곧 심판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내일이면 이미 늦습니다. ‘때는 늦으리라!’ 그러기에 오늘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21,28)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마지막 날은 고통과 절망으로 끝나는 날이 아닌 기쁨과 희망으로 벅찬 새로운 날이 되리라 믿습니다. 속량의 날이 가까웠으니 주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합시다. “주님,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위기의 시간에 두려워하지 않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살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벌어질 무시무시한 표징들을 듣습니다.

곧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표징들입니다.

 

이는 ‘종말’, 곧 ‘구원’은 올 것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때에 그 어떤 시련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는 ‘종말’ 그날이 우주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그날의 대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신다는 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 될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종말론적인 표징들은 우주론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주님!

새롭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하소서.

변형되게 하소서.

당신의 속량을 입게 하소서.

제 삶이 역전되고 당신 승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로마 국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이스라엘은 대 재앙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650년 지나 예루살렘은 로마로 거이 이동하게 됐네요.
오늘의 바티칸이 로마에 이룩된 것이 예수님의 예언속에 있었습니다.

이같이 전쟁 같은 것 지금 계속 곳곳에 일어나고 있으니 걱정입니다.
언젠가 대자연의 큰 변화와 함께 하늘 구름 타고 예수님 오시겠지요.
이런 종말에 예수님 믿는 신앙인들은 허리펴 머리들고 속량되겠고요.

하늘 뜻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만이 하느님나라로 가겠죠.
신앙인들은 그 때를 준비하는 나날의 생활로 세상생활을 이겨내겠죠.

가톨릭알림 말: 인간들은 예수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늘시민 됩니다.

 

 

 

『종말이 어떤 날이 될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0-28).”

 

1)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죄인들에게 멸망이 내릴 때 그 멸망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죄인들과 함께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천사들이 롯에게 한 말이 연상됩니다.

“자, 이 성읍에 벌이 내릴 때 함께 휩쓸리지 않으려거든, 그대의 아내와 여기에 있는 두 딸을 데리고 어서 가시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 19,15.17).”

‘죄인이 아니어도 죄인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멸망을 당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세 18,25)”

의인과 죄인이 함께 있다면, 그 의인 덕분에 죄인이 멸망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이 아브라함의 생각이었는데,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은 죄인들과 함께 있다면 의인이라도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이 하는 말은 사실상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간청해서, 소돔에 의인 열 명이 있다면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소돔을 파멸시키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얻어냈습니다(창세 18,32).

그런데 우리는 소돔에 ‘롯’ 외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어서 멸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 라는 도시의 이야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에 멸망이 내릴 것이라고 선포했는데도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자 화를 냈습니다(요나 3,10-4,1).

자기가 거짓 예언을 한 것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타이르셨습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

이 말씀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죄로 멸망에 휩쓸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니네베의 멸망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고, 하느님의 뜻은 니네베의 회개와 구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요나 예언자를 시켜서 멸망을 선포하게 하신 것은, 회개하도록 인도하신 일입니다.

 

3)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는 예수님 말씀도, 또 종말의 재앙들에 관한 말씀도,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휩쓸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도, 끝까지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있을 때, 죄인들을 감화시키고 회개시켜서 함께 구원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의인들이 죄인들의 죄에 오염되어서 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어떤 의인이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죄인들이 멸망을 당할 때 함께 휩쓸리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죄인이 아닌데도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아니라, 죄에 오염되어서 의인의 자격을 잃었기 때문에 당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의인들과 함께 있다가 구원받는 죄인들이 있다면, 그것은 죄인인데도 의인들 덕분에 운 좋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의인들의 인도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날이 나에게 ‘징벌의 날’이 될 것인지 ‘속량의(구원의) 날’이 될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을 더 분명히 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때를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0절) 그런 다음 다시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창조계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하고 땅의 주민들이 견디기 힘든 공포에 휩싸일 때부터 무서운 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장차 올 것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파멸에 이를 것이다. 임신한 여인들이 불행한 것은 몸이 무거워 위험을 피해 달아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24절)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마태 24,19-21)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여도 이런 환난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종말이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온다 하여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예언의 참된 결말이요 새로운 신비가 일어나는 계기이다. 세상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포로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에 의해 성령의 쌍날칼(히브 4,12) 아래 놓일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요엘 2,10; 3,3-4; 4,15).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자기 믿음에 따라 거룩한 태양(말라 3,20)이 밝아지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하늘의 해를 바라볼 때도, 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흐리게 보는 사람과 밝게 보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도 믿는 이의 경건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악덕이 거룩한 빛을 가로 막으면, 거룩한 교회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빛의 밝음을 빌려 쓸 수 없다. 박해 때는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의 빛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면 온 세상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분을 볼”(즈카 14,5; 마태 24,30)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신성에 어울리는 영광을 떨치며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만물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실 것이다.

 

창조계를 새롭게 하시고 사람의 본성을 본래 상태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8절)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당신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도록 해 주신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호사유피 인사유명’이란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죽으면,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또 실제로 나는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에 남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남기고 가시겠습니까?

배우자와 자녀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 무엇을 남기고 가시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6-28)라고 세상 마지막 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무자비한 심판과 처절한 징벌이 아니라,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시면서 오시리라는 믿음 안에서, 조심스럽게 희망을 둡니다.

예전에 어느 본당에서

“신부님 가고 나시면, 성당에 앉아서 기도하시던 모습만 생각날 거예요.”

라고 하시던 신자분의 말이 생각납니다. 무엇을 얼마나 거창하고 유명하게 했는가보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산 사람이었는가를, 인간 됨됨이를 가늠하는 인격과 영의 깊이와 거룩함의 질을 가늠하는 영성의 격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 거스르면 살 수 없고 망합니다. <21/20-28>11/2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자신의 편리한대로 살려고 진 선 미의 반대방향으로 나갈 수 있지만 생명을 잃거나 단축됩니다. 자기를 찾으며 편하게 살려하지만 죄를 지으면 더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서나 길을 잃고 죽게 됩니다. 한 나라의 흥망 성쉬도 위정자나 다스리는 사람으로 인하여 흥하고 망하게 됩니다.

사람이 거짓 편에 들거나 악의 편에 들거나 더러운 편에 들면 온전하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에루살렘의 멸망과 지구상에 살아지는 예언의 말씀이며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거이 2000년동안 나라 없는 서러움에 빠져 살았습니다. 로마도 하느님의집을 망가트려 망하고 이조 500년도 끝에 하느님 집을 망가트려 망하고 살아졌습니다. 공산당의 나라가 온전하지 못한 것도 종교박해가 원인이 됩니다.

오랜 냉담 중에 살던 가정이 어떤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보고 돌아오는 일을 종종 보게 됩니다. 주님을 거스르는 사람은 자유 평화 기쁨을 잃고 살게 됩니다. 죄를 짖고 편하게 사는 사람 없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불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 잃은 사람 알굴 보면 안정과 평화가 없으나 하느님 찾으면 얼굴에 빛이나고 맑은 눈으로 돌아가는 사람 보면서 저도 행복해 집니다.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얼굴에 표가 납니다. 저는 이런 사정 저런 사정으로 마음이 편하지 못하고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용서하고 살자니 자존심이 하락하지 않고 그대로 살자하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말안에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평화를 누리고 돌아가는 사람 있지만 대부분은 하느님을 새로운 눈으로 찾아 하느님 뜻을 따라 살려고 결심하며 안정과 평회속에 돌아갑니다. 저는 상담의 중심은 하느님 바로 찾고 그 뜻을 깨우치고 믿음 희밍 사랑 안에 살게 하는 길입니다. 하느님 누구시며 어떤 분인가 깨우치며 일상의 신앙생활의 의미를 깊이 반성하며 습관 생활 기계적 생활을 의미를 알고 사는 길을 찾아주는 일입니다.

약보다 음식이 보약입니다. 특별한 심리치료가 안이라 일상 샐활에서 먹고 마시고 숨쉬며 바로사는 것이 하느님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자세를 낮추고 섬기며 나누며 친교를 이루며 살면 언제나 웃고 행복하게 살지만 자신을 높이고 낮출 모르면 외출타는 사람처럼 불안하고 망가진 차를 모는 사람 같이 길을 가는 사람 같습니다. 주님 뜻하고 주님이 주신 것을 받아 감사하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뜻 따라 사는 사람은 강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물 안주어도 잘 자라는 나무 같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집시다.

     신주환 안셀모 신부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인간관계에서, 때로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우리 마음은 다치고 또 닫힙니다. 어둠 속으로 이끄는 삶의 어려움은 끝이 없겠지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을 계속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정말 어딘가에 숨어서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숨쉬기조차 힘든 어려움을 경험하고 그 누구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하느님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과 더없이 가까워질 수 있는 순간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예수님은 그 끝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순간이 바로 속량이 가까워진 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만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죽기를 바라던 그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그를 어루만지시며 “일어나 먹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순간이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가장 힘든 그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맙시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함승수 신부님

학생시절 성적표가 나오는 날은 설렘과 긴장, 두 가지 기분이 공존하는 날이었습니다. 시험성적이 잘 나왔을 때에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부터 가볍습니다. 어깨를 한껏 으쓱거리며, 집에 가는 내내 ’부모님을 만나면 무엇을 사달라고 할까?’, ‘어떤 맛난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할까?’ 이런 생각들을 했지요. 그리고 제 성적표를 확인하신 부모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며 필요한데 쓰라고 용돈도 주시고, 맛있는 음식도 사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험성적이 영 신통치 않을 때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참 무겁습니다. ‘성적이 떨어졌다고 부모님께 혼나지는 않을까?’, ‘맨날 놀기만 하고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나온 결과이니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실까?’ 이런 생각들로 어깨가 축 늘어집니다.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집 주위를 서성이다가 어렵게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런 두려움 속에 마주하는 부모님의 얼굴은 너무나도 무섭게 보였습니다. 물론 저희 부모님은 단순히 성적이 떨어졌다고 화를 내시거나 혼내시는 분은 아니었지만, 제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 떄문에 마음 속에 두려움이 생겼고, 그 두려움이 부모님을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내면상태가 어떤지에 따라 우리의 마음이 바뀔 수 있으며,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나 생각도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 점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세상 종말의 순간에 만나는 예수님의 모습도 내 마음상태에 따라 무섭고 준엄한 ‘심판자’가 될 수도 있고, 한 없이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시는 ‘구원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평상시에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이중계명을 충실히 지키고, 매 순간마다 그분의 뜻에 맞는 선택을 하고자 노력했다면, 그런 나의 마음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다림, 그분께서 만들어가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할 것이고, 그런 내면상태로 만난 주님은 사랑 넘치는 ‘구원자’로 보일 것입니다. 반면에 평상시에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처럼 내 뜻대로만 살며 계명을 소홀히 여기고, 매사에 욕심을 부리며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왔다면, 그런 나의 마음은 주님께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할 것이고, 그런 내면상태로 만난 주님은 무서운 ‘심판자’로 보이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참 좋은 분이십니다. 단지 그분을 맞이하는 우리의 준비가 부족하여 그분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종말’이란 내 삶의 결과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따라 받게되는 일종의 ‘성적표’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도 무서워할 것도 없습니다. 막연히 불안해한다면 우리에게는 ‘복음’도 기쁜 소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이비 종파들이 종말에 관하여 주장하는 잘못된 지식에 물들지 말고, 그저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을 위해 ‘현재’에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그분의 뜻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간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든 채"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까워진
속량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맞이합니다.

속량이 필요한
우리 존재의
참모습입니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를
풀어주는
속량에서
배웁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절이
멈추어 있지
않듯이
삶의 시간도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삶의
여정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향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삶의 존재방식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다시금
십자가에서
만납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온전히
만나는
참된
속량이며
구원입니다.

우리 존재의
실상을 알기에
기도와 회개로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절실한 실상이
거짓의 허상을
보게 합니다.

속량이
지나간 자리에
있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믿음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은총의
새날
되십시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큽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잃은 상태에서 직장에서 쫓겨나기까지 하면 어떨까요? 직장도 없어서 실업급여로 생계를 꾸려야 한다면, 더군다나 자기 몸 하나만이 아닌 홀로 아이까지 키워야 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이런 상황에서 희망을 품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동 문학에 해당하는 글을 써서 출판사에 건넸습니다. 출판사에서 자신의 글을 받아주고 책을 내줘야 숨통이 트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실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런 메시지를 보내며 퇴짜를 놓았습니다.

“이 책에는 부사가 너무 많고, 또 너무 길어서 지루하다.”

이런 식으로 12곳의 출판사에서 거절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J.K. 롤링입니다. 맞습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입니다. 그의 인생 스토리를 보면서 우리는 한 자기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서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책으로 그리고 영화로 ‘해리포터’ 시리즈를 만나게 된 것은, J.K. 롤링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가 자신의 노력을 키우기보다는 “이런 상황이라서 나는 힘들어!!”만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설명만 하다가는 어떤 상황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이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포에 휩싸여서 절망에 빠져 있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끔찍하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종말 설교의 결론으로 사람들이 하늘의 표징들을 보면 구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름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의 죽음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희망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종말이 온다고 해서 무조건 벌벌 떨며 두려워하고 자포자기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나 자신이 해야 할 사랑의 실천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노력해야 할 사랑의 실천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가족, 이웃, 그 밖의 사람들에게 어떤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배우도록 하라. 나중에는 그 어떤 것도 소용없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성 빅토르 휴).

 

나의 가치

삶에 대해 의문을 품고 해답을 찾아다니던 젊은이가 현자를 찾아가 “저의 존재 가치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현자는 보석 하나를 주고는 시장에 나가 값을 알아보고 절대 팔지는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과일가게에 들어가 보석을 내놓으니 오렌지 다섯 개를 주겠다고 합니다. 채소가게에 가서 내놓으니 감자 한 자루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보석상을 찾아가니 “이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보석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현자는 이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 자신은 이 보석과 같다. 그대는 자신을 오렌지 5개에 팔수도 있고, 감자 한 자루에 팔 수도 있다. 그리고 최고의 보석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길 수도 있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그대의 정의가 자신의 가치를 결정한다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로 진귀한 보석과 같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무시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또 세상의 기준대로 자신의 가치를 함부로 매겨서도 안 됩니다. 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스도 없는 종말은 두려움 뿐이지만, 그분과 함께 하는 종말은 설렘과 기쁨의 순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래전 이스라엘로 입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비행기 안에는 소위 ‘디아스포라’(dispora) 유다인 청년들이 가득 차리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아미도 평생 처음 방문하는 고국인 듯 했습니다. 착륙이 가까워질수록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큰 목소리로 자신들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했던 그들의 합창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성도(聖都)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聖殿)이 부여하는 의미는 엄청났습니다. 힘들때 마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자신들 삶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반이요, 심장이나 목숨같이 소중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영예요 자부심인 예루살렘의 함락과 철저한 파괴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 복음 21장 20~21절)

 

사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루살렘은 여러번 수모를 겪은 바 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BC 175~164)의 군대는 철저하게도 예루살렘과 성전을 짓밟았습니다. 그간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전례를 금지했습니다. 성전 중앙에는 파괴자의 우상인 제우스 제단을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유다 전쟁(AD 66~70) 중에 예루살렘은 또 한번 큰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유명한 유다 역사가 요셉푸스 플라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백만명 이상의 유다인들이 살해되었고, 십만여명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은 처참히 허물어져 폐허가 되었고, 성전은 불타고 말았습니다.

 

오늘 예수님 예언의 말씀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와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루카 복음 21장 23~24절)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위풍당당하고 견고했던 도시 예루살렘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때 영원한 보루요 가장 안전한 피신처로 여겼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삶의 마지막 보루로 여기는 지상의 것들 역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파괴와 징벌의 날에 어떤 사람들은 불안과 무기력, 두려움과 공포로 전율할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열렬한 기대와 희망으로 그 시간을  기다립니다. 그리스도 없는 종말은 두려움 뿐이지만, 그분과 함께 하는 종말은 설렘과 기쁨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에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21장 27~28절)

 

사람의 아들이 타고 오실 구름은 하느님의 전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인류에게 계시하실 때, 권능과 큰 영광에 쌓여 그렇게 오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주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구름은 예수님의 신적 위엄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언어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그분의 큰 영광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보여주셨던 약함과 부드러움이 아니라 위엄과 영광 중에 오심을 강조합니다. 

그간 갖은 박해와 고통 속에 교회는 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떨어트린 채 세상을 견뎌왔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표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신자들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제 곧 박해와 위협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비웃음과 조롱은 희망과 기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제 허리를 똑 바로 펴고 고개를 쳐들 순간입니다.

 

 

 

주위에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요즘 복음은 계속 무서운 종말에 관해 말합니다. 성전의 파괴에서 시작된 복음은 이제 예루살렘 파괴로 넘어와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온 세상의 멸망으로 그 이야기가 확대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 각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것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그곳을 빠져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도시는 죄가 많은 곳을 상징합니다. 코로나도 시골보다는 도시에서 발생률이 높습니다. 이상하게 재앙과 죄는 실과 바늘처럼 동반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우리가 세상을 거슬러야 함을 알면서도, 그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해야 함을 알면서도, 그 속에 머물며 그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요즘 혜민 스님의 뉴스가 많이 나오는데, 어쩌면 나오는 뉴스대로라면 그분은 세상을 구하려다가 세상에 조금은 발이 묶여버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그렇게 추락하더라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우리 구원은 하늘에 있지 추락하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항상 세상을 거슬러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허리와 머리를 숙이게 된다면 짐승의 자세가 되고 세상 사람들의 자세가 됩니다.

세상은 마치 가라앉는 배처럼 아래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래만 바라보면 위에서 오는 구조의 손길을 볼 수 없습니다. 세상이, 내 주위의 많은 사람이 아래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떤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구원이 오는 방향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절망은 지옥의 문입니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2009)는 엄청난 크기의 몸을 지닌, 그래서 빅 마이클이라 불린 흑인 고등학생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는 아주 안 좋은 가정에서 자라 지능지수(IQ)가 80에 불과합니다. 도저히 일반 고등학교에서 공부가 불가능합니다. 약물중독에 걸린 어머니 밑에서 살 수도 없어 쫓겨난 상황입니다. 그는 같은 흑인 친구의 아빠가 받아주어 그 집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과 빅 마이클을 고등학교 풋볼팀에 넣어달라고 코치에게 부탁합니다. 코치는 마이클의 엄청난 신체조건을 보고 교장 선생님을 설득하여 IQ 80짜리를 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자신의 풋볼팀에 입단시킵니다. 그러나 몸은 좋지만,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친구의 아버지 집에 머무는 마이클은 아래층에서 부부싸움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내가 더는 그 덩치 큰 아이를 책임질 수 없다고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마이클은 짐을 싸서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월세가 밀려 마이클에게 알리지도 않고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옷도 한 벌 없는 마이클은 비를 맞으며 학교 체육관에서 잠을 자려고 길을 걷습니다. 추운데 반소매 셔츠 하나만 입고 비를 맞으며 걷는 마이클을 본 ‘리 앤’이라는 여성은 자신의 자녀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마이클을 집에 데려옵니다. 그리고 침대를 주며 씻고 잠을 자라고 합니다. 마이클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침대에서 잠을 청합니다.

마이클은 학교에서 뭐든지 꼴찌입니다. 그런데 하나, ‘보호 본능’만은 엄청나게 높았습니다. 리 앤과 그 가족들은 마이클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마이클도 그들을 믿고 가족으로 여깁니다. 리 앤은 마이클에게 함께 뛰는 자기편 선수들을 가족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그래야 보호 본능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마이클은 이 말을 알아듣고 자신의 편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뜁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마무리를 지을 무렵 많은 대학에서 그를 스카우트하려 하고 결국 그는 엄청난 스타로 발돋움합니다. 그는 수백억 원의 몸값을 받는 프로미식축구 슈퍼스타 중 하나인 ‘마이클 오어’이고 이 모든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마이클 오어는 모든 것이 아래로 추락하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약물중독 어머니에게서 지적장애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집도 없었고 침대에서 자 본 적도 없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맞아주었지만, 그 집에서마저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는 추운 날 반소매 셔츠 하나 입고 추위에 떨며 학교 체육관에서 잠자기 위해 길거리를 헤맸어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맞아준 부잣집 가정의 따듯함도 어색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떨어지는 것들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허리를 펴고 위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도움의 손길이 왔을 때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세상을 사랑한다며, 사람을 사랑한다며 그들에게서 분리되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추락합니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남편이 자녀를 남겨두고 그 자리에서 자신도 뛰어내려 자살한 경우도 있습니다. 아래만 보면 현기증이 나서 자신도 떨어집니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추락하는 세상에서 현기증을 일으키지 않고 위에서 오는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추락하는 세상 속에서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듭니다. 그리고 언제쯤 도움이 올지만을 절망하지 않고 기다립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데이비드 에든버러의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를 보았습니다. 93세의 노인은 70년 지구의 곳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생명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지구와 다양한 생명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의 낭비로 파괴되었고, 사라져갔습니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별이었습니다. 어두운 우주에서 지구는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지구밖에는 생명의 다양성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에덴동산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93세 노인이 태어나던 때보다 지구의 온도는 1도 상승했다고 합니다. 

 

지구의 동물 중에 40%는 인간이 차지한다고 합니다. 나머지 55%는 인간이 양식하는 가축이라고 합니다. 그중에도 닭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5%만이 자연에 있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동물을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 얼음에 갇혀있던 메탄이 배출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온난화는 가속화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지금처럼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을 낭비하면 앞으로 60년 후에 지구의 기온은 4도 가량 상승할 거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쌓아놓은 문명이라는 바벨탑은 무너지고, 인간이 사라진 지구는 다시금 생명의 다양성을 복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지구라는 에덴동산은 5번의 멸종이 있었지만 생명의 다양성을 복원하였기 때문입니다. 

 

93세의 노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은퇴하셔서 조용히 사셔도 되지 않습니까?” 

노인은 대답합니다. 

“후회할 것 같아서 증언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돌보면 자연은 반드시 우리를 돌봅니다.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면 자연은 우리를 대신할 새로운 생명의 다양성을 만들 것입니다.” 

노인은 우리와 모든 이를 위해서 증언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지식이 아닌 지혜를 추구하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생명의 다양성이 살아 숨 쉬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에덴동산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석유와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의 사용을 점진적으로 줄이면서 재생 에너지의 사용을 늘리면 된다고 합니다. ‘태양에너지, 물, 지열, 바람’을 이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미래를 위해서 만든 연금과 자본을 석유와 석탄을 개발하는데 투자하기보다는 재생에너지를 개발하는데 투자하면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땅은 70억 명이 매일 먹는 육식을 제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식습관을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바다의 생명을 보호하는 방법을 찾고, 삼림을 다시 복원하면 자연은 다시금 생명의 다양성을 복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우리의 기술과 과학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복원하며 어두운 우주의 에덴동산이 지구에서 사랑하며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곧 대림시기를 시작합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은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를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묵시록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 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93세 노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자본과 욕망의 바벨탑을 계속 쌓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93세의 노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무분별한 개발과 생명의 다양성을 파괴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푸른 별 지구 외에는 ‘에덴동산’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탑을 쌓으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의 삶을 산다면 그래서 모든 형제들이 생명의 다양성을 보존한다면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그리스도 중심의 참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 - 기도, 가난, 겸손, 순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교황님의 강론 서두의 잠언같은 말씀이 깊은 묵상감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깊은 기도생활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겸손한 봉사의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다.”

“사랑은 신자들 삶의 신비로운 뿌리이다.” 

 

문득 예전 손희송 주교님의 강론 중 두 예화도 생각납니다.

“기도는 꽃에 물주는 것과 같다.”

너무나 자명한 진리입니다. 채소 모종했을 때 뿌리 내릴 때 까지는 매일 물을 주어야 하고 집무실에 있는 화분의 식물이나 꽃들도 자주 물을 주지 않으면 예외 없이 시들어 죽습니다. 기도와 영혼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만남과 같다.”

아무리 사랑했던 사이도 자주 만나 사랑하거나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관계도 멀어져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잊혀져 떨어진 낙엽처럼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결국 몇몇만 남아 계속 나눔을 갖게 됩니다. 바로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하여 매일 평생 끊임없이 기도를 바치며 주님과의 관계와 더불어 공동체 도반 형제들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과연 날로 영원한 도반이자 반려자인 주님과 사랑의 우정은, 함께하는 형제들과 사랑의 우정은 날로 깊어져 가는지요. 저 또한 첩첩산중의 산을 넘듯이 매일 강론을 쓰며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고자 온힘을 다합니다. 

 

만추를 지나 초겨울에 들어선 느낌의 날들로 때로는 춥게 느껴집니다. 단풍잎들 다 떠나 보낸 겨울 나무들이 믿는 이들 삶의 본질적 모습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유난히 겨울을, 겨울나무를 좋아하는 수도자들입니다. 22년전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

나무마다 푸른 하늘 가득하고

가지들마다 빛나는 별들 가득 달린 나무들인데

누가 겨울 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1998.11.21 

 

비움의 충만입니다. 말 그대로 텅빈 충만의 겨울나무들입니다. 나뭇잎들 다 떠나 보내고 비우니 푸른하늘, 빛나는 별들로 충만한 참 부요하고 행복한 겨울나무들 같습니다. 날로 깊어지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자기를 비워갈수록 투명히 드러나는 아름다운 주님의 현존입니다. 

 

요즘 수도원 연피정중의 미사시간이 참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평상시 미사때 마다 있었던 강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본질이, 주님의 현존이 투명히 드러나는 느낌입니다. 더 깊은 침묵중에 말씀에 귀기울이게 되고 미사경문에 집중하게 됩니다. 흡사 군더더기 다 떨어낸 겨울나무들처럼 주님만이 본질로 드러나는 미사가 참 단순투명하여 좋습니다. 새삼 침묵의 고마움을 깊이 느끼는 미사시간입니다. 좀 과장된 표현입니다만 언젠가 들은 강론에 대한 다음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5분의 강론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10분을 인간의 말이고, 15분은 악마의 말이다.” 

 

무수한 나뭇잎들로 하늘을 가리듯 군더더기 복잡하고 긴 강론들로 주님을 가린 적은 얼마나 많았겠나 생각해 봅니다. 주님을 투명히 드러내는 강론이 아니라 주님을 가려버리는, 아름다운 미사를 통한 주님의 현존을 가려 버리는 신변잡기身邊雜記같은 군더더기 예화들의 강론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교황님의 강론이 위대한 점은 보편적이요 본질적이라는 것입니다. 예화나 개인적 체험이 극도로 절제된 ‘절제의 미학’을 보여 주는 강론들입니다. 제대에 대한 다음 글도 겨울나무들이나 단순투명한 강론들과 맥을 같이 함을 깨닫게 됩니다. 

 

“제대는 그리스도라고 전례학에서 말합니다. 제대는 자체가 아름다운 작품이기에 그 작품을 가려서는 안됩니다. 관습적으로 꽃으로 제대를 장식하는 데, 장식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더욱 아름답게 꾸미기 위함일 것입니다. 제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노출 시키려면 제대를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제대를 꽃으로 꾸미고 싶거든 꽃꽂이를 최소화해서 제대를 가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꽃으로 제대를 장식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제대가 그리스도의 비움을 온전히 드러내고, 제대를 바라보는 이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조각되고 만들어진 제대이기 때문입니다.”(송차선 신부;가회동 성당 이야기;126-127쪽) 

 

단풍잎들 다 떠나 보내고 푸른 하늘 배경 충만한 겨울나무 같은 제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꽃꽂이의 이치도 강론의 이치가 똑같습니다. 꽃꽂이가 제대를 가리지 말아야 하듯 강론도 주님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제대를 잘 드러내는 꽃꽂이가, 주님을 잘 드러내는 강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무시무시한 성전 파괴의 모습이나 최후심판의 종말 상황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묵시록은 바빌론 제국같은 로마제국의 멸망의 모습을 예언적으로 전하지만 이들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는 우리의 회개입니다. 요즘 코로나 19팬데믹으로 혼란에 빠진 세계도 흡사 종말 상황을 연상케 합니다. 참으로 전폭적 삶의 전환을 요구하는 회개의 시대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와 가난, 겸손과 순수의 단순투명한 본질적 삶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부자는 많은 축적의 ‘풀소유의 사람’이 아니라 필요를 최소화한 ‘무소유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만족한 사람이 진정 행복하고 자유로운 부자일 것입니다. 

 

이런 무욕無慾의 사람이, 주님만으로 행복한 청정욕淸靜慾의 사람이 참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전부인 주님을 모심으로 참으로 행복하고 자유로운 내적 부자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아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루카 21,2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주님의 구원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산으로 달아나고 ...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 21,2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고하시며, 그 상황에서 제자들이 취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십니다. 과거 역사 안에서 수차례 이민족에 의해 무너졌던 예루살렘은 실제로 기원후 70년경 로마군에 의해 다시 한 번 포위되고 점령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실제로 벌어질 상황이지만,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산"이나 "예루살렘"의 영적 의미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루살렘은 인간의 재력과 기술과 제도로 쌓아올린 한낱 모래성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사람의 재간으로 지은 예루살렘은 무너지겠지만, 영원한 하느님의 도성은 건재합니다. 우리가 달아나야 할 "산"은 변치않는 하느님 현존의 장소를 의미하지요. 이 "산"이 곧 영원한 천상 예루살렘으로 이어질 것이고요.

마지막 날이 오기 전, 우리는 모든 인간적 욕망과 위선과 허세의 장소를 떠나야 합니다. 장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자세도 포함합니다. 아직 푹 잠겨 있다면 서둘러야 하고, 이미 거리를 두고 있다면 되돌아갈 생각을 아예 말아야 하지요. 우리가 달아나야 할 곳은 "산"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신,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라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21,26)

예수님은 현실 안에서 벌어질 파괴 예고와 더불어 천재지변을 동반한 종말적 표징까지 덧붙이십니다. 이로써 언젠가 닥칠 그날이 결국 인간들의 일을 넘는 하느님의 계획임이 명백해집니다. "자지러짐, 공포, 두려움, 까무라침..." 종말의 현상 앞에서 인간이 겪게 될 심상이 그저 참혹할 뿐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심판의 그날,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이 아니라 속량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날 우리가 서슬 퍼런 정의의 낫에 잘려 영원한 불로 떨어지리라 하시지 않고, 오히려 죄의 용서와 구원을 약속하시니, 대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은 어디까지인 걸까요!

 

제1독서에서는 죄악의 거대하고 강력한 표상인 바빌론의 몰락을 예언합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묵시 18,2)

바빌론은 거짓과 탐욕과 폭력을 성공으로 위장하여 우상화하고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리는 현세의 모습까지도 담고 있습니다. 바빌론은 내면의 숨은 악을 부추기고 응원하며, 수치로 감추어도 시원찮을 더러움과 부패를 당당히 주장하게 만들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니, 바빌론의 멸망이야말로 곧 하느님 정의의 실현입니다.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묵시 19,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심판의 날, 바빌론으로 대변되는 악은 심판을 받고, 그로 인해 고통 받고 무죄하게 피를 흘린 모든 이들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인내로써 고통을 견디어낸 모든 선한 영혼들, 그리스도의 제자들, 예언자들과 순교자들 모두 주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묵시 19,9)

천상 예루살렘은 이 혼인 잔치의 영광으로 찬란히 빛나며 기쁨으로 일렁일 것입니다. 방근 전까지 천체를 휩쓸었던 무시무시한 심판은 끝나고,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믿음을 지킨 충실한 이들이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 되어 영원한 신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파괴와 환란, 종말의 말씀들이 기쁨과 찬양을 노래하는 시편과 짝을 이루어 미사 안에 울려퍼지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에게 심판은 버림받고 내쳐지는 단죄의 순간이 아니라, 속량과 구원, 즉 영원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행복의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당장의 부족함과 불결함에 무너지지 말고 끝까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나아갑시다. 구원을 꿈꾸며 희망으로 삶을 엮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자,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구원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우리 뇌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종말단편을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여기 너무 관심 안 둡니다.

지금만 알고 땅만 배우면 살 수 있다니 고등동물 되기 싫은가 봅니다.

미래 알지 못하고 가려진 걸 못 보는 게 속고속이는 자유란 거겠지요.

 

우리 정신은 상상하면서 가상으로 꾸며 보기도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정신이 땅만 배우고 하늘 모른다면 신념이념 필요 없네요.

우리 정신은 땅 배우고 하늘도 배워야 정확한 행로를 갈 수 있습니다.

 

기왕 배울 수 있는 능력 지닌 우리 정신(메모리)에 양껏 입력시킵시다.

메모리 초과에 안 걸리는 특별한 우리 뇌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패망을 예언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종말의 두려움을 알려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들이 다가올 때 두려워하지 말고 어서 회개하고 하느님을 바라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뉴스를 접하면서 참 두려운 이야기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당장에 요즘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을 하면서 2단계가 선포되고, 나라 정치판도 뒤숭숭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알게 모르게 공포감을 가지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까 요즘 유행하는 가요 중에 고대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찾고 갑자기 형님으로 부르면서 세상이 왜 이러냐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이 이럴 때 일수록 찾고 불러야 할 분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십니다. 곧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절망을 바라보고 주저앉아 마냥 한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희망을 바라보고 일어나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 성전정화의 반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유다인, 지배의 강자들이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반기를 들었다. 반기를 든 자들은 당시 잘 나가는 기득권 세력들이다. 성전파괴를 예고했으나 그들은 정화를 외면했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도 생명이 되기 위한 뿌리의 작용이 그 기능을 잃었고,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우리를 속량하러 오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스스로 마음의 황폐함을 선택한다. 죽음을 자초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

나는 뭐에 의미를 두고 바라고 믿고 있는가? 목적과 수단이 서로 바뀌고, 눈 뜬 눈 먼 사람들이 되어 간다. 예루살렘의 황폐가 가속화 하듯 오늘의 시대도 하늘을 잃고 땅에 머리 처박고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들로 넘쳐난다. 예수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 하신다. 이는 속량을 위한 급박한 명령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함승수 신부님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지은 <유대고사>의 기록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서기 70년 8월에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무려 11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으며 10만여명이 전쟁포로가 되어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끌려갔습니다. 게다가 전쟁의 여파로 기근까지 심해져 각 가정의 다락방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찼고, 거리의 길이란 길에는 모두 노인들의 시체가 즐비했으며,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굶주림 때문에 몸이 퉁퉁 부어서 마치 ‘망령’과 같은 모습으로 하염없이 거리를 헤매다가 쓰러지곤 했습니다. 그런 재난이 너무나 참혹했던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할 기운도, 눈물을 흘릴 여유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모든 일은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려고 하지 않고, 본인들의 힘에만 의존하여 전쟁을 일으킨 결과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겪게 될 전쟁의 시련과 고통을, 인류 전체가 겪게 될 무시무시한 종말의 상황과 연결지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상에 닥쳐올 큰 지진과 해일, 전 우주적으로 일어날 무시무시한 표징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공포와 두려움에 짓눌려 떨고 있지 말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때에 그런 무서운 표징들을 일으키시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는 절망감을 안겨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날이, 우리가 그토록 그리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복된 삶을 누리게 될 기쁨의 날이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희망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도시가 멸망하고 땅이 무너지는 것이 종말이 아닙니다. 우리들 각자는 개인의 종말인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것이므로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과 그분의 뜻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가서는 그렇게 멀어진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영영 단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더 늦기 전에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나 자신의 삶을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그분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 즉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내일이 없는 삶’을 살다가는 욕심과 집착에 눈이 멀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죽음이 언제 어떻게 나에게 닥쳐오더라도 아쉬움과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하루 하루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 ‘그날의 회개’를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밀린 일기장은 몰아서 쓸 수 있지만, 밀린 회개는 몰아서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속량의 날’이 후회와 절망에 빠져 고개를 푹 숙인채 괴로워하는 ‘징벌의 날’이 되고 맙니다.

 

 

 

<처음과 끝>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처음이

처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끝까지

처음은 있고

 

끝을 향한 처음부터

끝이 없는 끝까지

처음은 늘

새로 처음이다

 

끝이

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은 있고

 

처음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헤아릴 수 없는

순간들에도

끝은 있다

 

끝이

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끝으로부터

처음은 태어나고

 

끝을 향한 처음부터

헤아릴 수 없는

끝은 처음을 품고

처음은 끝을 품는다

 

처음이 끝의 희망이고

끝이 처음의 희망인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처음은 끝이요

끝은 처음이다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이제 교회의 전례주년 마지막 날도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을 산다는 것은 지난 날을 다시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으로 건너갈 준비하는 의미입니다. 늘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마지막 때의 핵심은 두려움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참여할 참된 해방에 대한 희망입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죄인들이지만,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희망,우리의 미래, 우리의 힘이십니다.

 

 

 

양처럼 되면 승리하고 늑대처럼 되면 패배당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마태오 복음에 대한 강론에서 (Hom. 33,1. 2: PG 57,389-390)

우리가 양처럼 되면 승리하고 수만 마리 늑대의 무리로 둘러싸인다 해도 이겨냅니다. 그러나 늑대처럼 된다면 패배당하고 맙니다. 그때엔 목자의 도움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늑대를 기르지 않고 양들만 기르십니다. 당신은 목자께 그분의 능력을 보여 주기를 허락치 않기 때문에 목자께서는 당신을 떠나가 버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양이나 비둘기처럼 되라고 하면서 늑대의 무리 가운데에 보낸다고 해서 근심하지 말라. 내가 그 정반대의 말을 하여 너희가 양처럼 늑대의 밥이 되지 않게 하고 사자보다 더 힘세게 만들어 모든 고통을 피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의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 그렇게 될 때 너희는 더욱 영광스럽게 되고 내 권능이 더욱 훌륭히 드러나게 된다. 나는 바오로에게도 이것을 말했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내가 택한 길이 바로 이 길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양처럼 보낸다.”고 하실 때 다음의 것을 암시하십니다. 

“절망하지 말라. 원수들이 많다 해도 그들이 너희를 무너뜨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다음으로 주님은 만사가 은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또 아무 까닭도 없이 월계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당신의 제자들에게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양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숱한 위험 속에 우리의 슬기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늑대들 가운데 있는 양이 지닌 슬기가 아무리 빼어나다 해도 그것만 가지고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비둘기가 아무리 양순하다 한들 수많은 매들이 포위할 때 그 양순함이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성 없는 동물에게는 물론 아무 도움도 되지 않지만 여러분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떤 종류의 슬기를 요구하십니까? “뱀과 같은 슬기”를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이것으로 뱀이 자기 머리를 구하기 위해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몸뚱이까지 포기해 버리는 것처럼, 여러분도 신앙을 건지기 위해선 모든 것, 즉 재산, 몸, 그리고 목숨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신앙은 머리나 뿌리와 같습니다. 신앙을 보존하면 다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결국 모든 것을 더 풍성히 돌려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양순하게만 또는 슬기롭게만, 어느 한 쪽만 되라고 명하시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덕이 되도록 두 가지 다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서 뱀의 슬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모욕을 주거나 올가미를 놓는 이들에 대한 복수심에 떨어지지 않도록 양순함을 지녀야 합니다. 슬기는 양순함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는 무익합니다.

 

누구도 이 두 가지 명을 실천하기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보다 사물의 성격을 잘 아십니다. 그분은 폭력을 폭력으로써가 아니라 온유함으로 더 훌륭히 이긴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겪은 전쟁 한마당<루카 21/20-28.>11/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나는 군인으로 전쟁의 분위기를 경험하지 못하여도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인지 16살 때 전쟁의 한 가운데 있어 죽음도 보고 공포도 느꼈습니다. 6,25가 일어나든 해 나는 인천 세관의 급사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날은 30명의 직원이 세관을 지키는 당번에 들어가 세관에서 숙직을하는데 아침녁에 길가에 저차소리 와 군인들이 줄지어 큰길을 지나가는데 창밖을 보니 큰일 났다 저 군인은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이네 이북에서 본 군인 복장과 철모가 바로 인민군이였습니다. 어제 밤에 라디오에 서을에 들어온 인민군을 쫓아냈다는 가짜 뉴스가 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인천까지 올줄을 몰랐습니다. 세관 안에는 작은 통신 부대가 있었는데 인민군 행열을 구경나온 잘 아는 군인이 지나가는 인민군이 “ 너누구냐.” 이군인은 국군이줄 알고 “나 국군이다” 갑자기 총소리와 함께 세관이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지나가든 인민군이 세관을 급습하며 총을 쏘고 처들어와 저는 방 제일 구석으로 숨었지만 민간인을 죽이지 않으니 나와라 아니면 쏜다 하기에 믿고 나오는데 3명의 세관직원이 거의 다 불려 길가에 서게되였는데 나올 때 손을 들고 나왔습니다.

나와보니 좀전에 총소리와 구경하던 군인은 총을 맞고 숨을 쉴 때 마다 피가 소구처 오르며 죽어가고 있는 현장에 세관직원들 줄세워 권총을 들고 하나하나 총으로 가르키며 너는 무엇하던 사람이냐? 하고 물어 오다간 앞에와서 동무는 무엇하였소 “ 나는 급사일을 하였습니다.” 손을 보자 하기에 내미니 동무는 진짜 노동자요 하고 칭찬을 하며 열심히 일하라구여 하고 계속헤서 세관을 지키라 하고 떠나 갔습니다. 그러나 모두 집일이 걱정되어 집으로 갔는데 우리집은 시내에서 10리즘 떠어져 있고 큰집이 가까이 있어 들렸더니 내 아버지는 약아서 벌써 도망갔으니 우리하고 함께 피난가자 하고 즉시 피난길에 들어서 살짐을 지고 따라 나셨습니다. 그런데 가족걱정 이 앞서 길을 가다가 환상 조금가다 저기 아버지가 보여 쫓아가면 아니고 어머니가 보여 가보면 아니고 수인을 따라 가는데 가다가 밤이되면 아무집이나 헛간에서 잠을 자고 가면 갈수록 인민군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에로 밀려 할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을 떠나지 않고 나를 찾아 세관을 몇 번가셨는데 죽음 시체가 있으니 아들 죽었다고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전쟁 마당을 겪으며 1,4후퇴 까지 인천에 있다가 중공군이 쳐들어오니 그때는 저만 배를 타고 제주도  부산으로 피난 갔다 돌아왔습니다.

이런 경험은 오늘 복음을 들으며 전쟁은 두려움 혼란 불안 공포에 쌓인 분위기이며 도망가지도 못하고 당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전쟁중에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지만 여기까지 보호해주신 하느님의 섭리는 제가 이렇게 살도록 준비 하여 주셨습니다.

전쟁이 아니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조건이 우리를 공포와 혼란 속에 살게 하여 당황하게 합니다. 속담에 호랑이가 물어가도 정신만 차라면 산다하였듯이 자기 있는 곳에서 안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중에 또다시 이런 불행이 모두에게 닥치지 않기를 기도하며 전쟁 보다 평화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주해

     김대군 베네딕도

큰 재난

21,20-24는 루카가 마르 13,14-20을 대폭 수정.가감한 것이다. 그렇게 한 까닭인즉, 마르코는 장차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예고했으나(묵시문학전 예언), 루카는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겪고 그 사건을 기록했기 때문이다(사학적 기술). 또한 마르코는 예루살렘 멸망을 종말 직전의 전조로 여긴 데 반하여, 루카는 그 멸망을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오직 해와 달과 별들이 뒤흔들리는 우주적 파국만을 종말 직전의 전조로 여겼다(25-26절). 

 

마르 13,14에서는 종말의 전조로 “황폐의 흉물”(反 그리스도)이 성전에 등장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루카 21,20은 로마군이 70년 해방절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다가 마침내 같은 해 8월 29일에 예루살렘 시내를 완전히 점령한 사실을 상기하여 개작한 것이다. 

 

마르 13,15-16에는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내려오지도 말고 제 집 안에서 물건을 꺼내려 들어가지도 마시오. 또한 들에 있는 사람은 제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아서지 마시오”라는 충고를 덧붙이고 있다. 루카는 이 충고를 17,31에 수록한 대신 21,21ㄴ-22에는 다른 말씀을 창작.추가했다. 그 내용인즉, 전란에 휩싸인 예루살렘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신명32.35;호세 9.7:예레5.29;6,2-4;미카3.12)불충한 예루살렘이 엄한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루카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본디 구원이 이룩된 장소였으나 70년에 복수의 심판을 받은 다음부터는 구원사적 위치를 상실했다.

 

23ㄱ절은 마르13,17절을 그대로 옮겨쓴 것이나 불행한 이유가 서로 다르다. 마르코에 의하면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는 여자들은 쉽게 달아날 수 없기 때문에 불행하다. 그러나 루카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전란을 겪기 때문에 불행하다. 

 

마르코에는 불행선언 다음에 “이런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시오”(13.18)라는 충고가 있는데 루카는 예루살렘 멸망을 참작하여 그것을 삭제했다. 사실 예루살렘은 70년 4월부터 8월까지 로마군에 포위되었다가 8월 29일에 함락되었던 것이다. 

 

23ㄴ절 “땅에는 큰 곤궁이, 이 백성에게는 진노가 닥칠 것입니다”는 마르 13.19를 대폭 수정한 것이다. 

 

24절은 루카가 형성.첨가한 것으로, 요세푸스가 전하듯이(유다전쟁6.425-434,7,5,17)예루살렘의 비극을 서술한다. 로마군이 이스라엘인들을 살육하고 포로로 잡아가며 엄히 다스린다는 것이다. 루카는 “이방민족들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즉 종말이 닥칠 때까지 로마군의 지배가 계속될 것으로 보았다. 이 시대는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시대이기도 하다(사도1.8). 

 

21,25-28은 마르 13,24-27을 대폭 가감.수정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장차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다루는데. 해와 달과 별들이 뒤흔들리는 종말 전조가 나타나고(25-26절) 이어서 인자가 내림하는 종말이 닥치리라고 한다(27절). 

 

25-26절은 마르 13,24-25를 많이 고친 것이다. 마르코는 예루살렘 멸망에 곧이어서 종말이 닥친다는 뜻으로 “그 무렵, 그 재난 후에”(13-24ㄱ)라고 하는데, 루카는 예루살렘 멸망과 종말을 연속적 사건들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삭제했다. 또한 루카는 종말 전조인 우주적 이변을 예루살렘 시민들뿐 아니라 온 인류가 목격 할 것이라 한다(25절의 “민족들”,26절의 “세상”;참조 17.24.37). 

 

루카는 마르 13.27을 삭제하고 그 대신 28절을 지어넣었다. 명사 ”속량“(1.68;2.38;21.28).지불하는 몸값을 ”속전“(45절=마태20.28) 또는 “대속전”(1디모2.6)이라 한다. 속전으로 노예나 포로를 해방 또는 양민을 만드는 행위를 일컬어 “속량”. 또는 “속량하다“라 한다. 네 복음서 가운데 오직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낱말이다. 그 대신 28절을 지어넣었다. 속량은 본디 속전을 지불하고 노예나 포로를 해방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휩쓸리지 마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34주간 목요일>(2020. 11. 26. 목)(루카 21,20-28)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루카 21,20-24).”

 

이 말씀에 묘사되어 있는 ‘예루살렘 멸망 모습’은, 실제 예루살렘 멸망 때의 모습과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이천 년 전 과거의 사건은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죄인들이 멸망을 당할 때 그 멸망에 함께 휩쓸리지 마라.” 라고 강조하십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죄인들과 함께 있으면 그들의 죄에 오염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순히 죄인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멸망에 휩쓸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데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만 하느님의 징벌의 대상이 됩니다.)

 

‘오염’이라는 말에서 ‘누룩’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이르셨다(마태 16,6).”

“그들은 빵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6,12).”

여기서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은 그들의 ‘악한 영향력’을 뜻합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생활 모습, 율법주의, 현세주의적 사고방식과 가르침 등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고, 사람들을 물들였습니다. 죄인들의 그런 나쁜 영향력에 물들면 죄인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죄인들이 받는 벌을 함께 받게 됩니다. (죄에 오염되지 않으려면 단순히 ‘거리두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의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해야 합니다.)

 

잠언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악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말고, 악한들의 행로를 걷지 마라. 그런 길은 피하여 발을 들여놓지 말고, 발길을 돌려 비켜 가거라(잠언 4,14-15).”

(“의인들의 선한 영향력으로 죄인들을 회개시키면 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인데, 선한 영향력으로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과 그런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고 그냥 함께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그냥 함께 있는 것은 죄에 오염되는 지름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ㄴ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징벌’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임신과 출산은 죄가 아니고 축하와 축복을 받을 일인데, 하느님의 징벌의 날에는 축하와 축복을 받기는커녕 남들보다 더 큰 고난을 겪는 이유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안정감이 모두 사라진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자비하신 분이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적군’과 ‘모든 민족들’과 ‘다른 민족들’은 실제 역사에서는 로마제국 군대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신학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고 처벌하기 위해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편인가? 그들은 심판에서 제외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또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만으로는 “그들은 의인들이다. 그들은 하느님 편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다른 죄인들을 처벌하시기도 합니다. ‘징벌의 날’에 심판과 처벌을 집행하는 도구로 사용된 사람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처벌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5-28).”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을 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날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날이 바로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 되면 사람들은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됩니다.

하나는 자기에게 닥칠 일이 너무 무서워서 까무러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뻐하면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사람들입니다.

까무러치는 사람들은 너무 일찍 오셨다고 예수님을 원망할 것이고, 하루라도, 아니면 한 시간이라도 시간을 달라고 애원할 것입니다. 어떻든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날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또 얼마나 성실하게 회개했는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어떤 표징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날은 죄인들에게는 굉장히 무서운 날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강조하시는 것은, 그날이 되기 전에, 즉 ‘지금’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지금’은(‘오늘’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지막 시간이 되기도 하는데, 그 ‘어떤 사람’이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면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온 세상에 떨치면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지금 ‘재림 예수’ 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모두 백 퍼센트 가짜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은총의 날

     정성윤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종말의 시기에 닥쳐올 환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종말의 때란 하느님 나라가 완성을 이루는 은총의 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종말이 고통과 수난의 시기이기만 할까요?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밤새 기도하시고 길을 재촉하시며 많은 이들을 고쳐주신 것, 마귀를 쫓아내주시며 죄인들을 용서하신 이유, 수많은 이들의 배고픔을 달래주신 그 모든 이유가 바로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억울하게 고통받지 않고, 굶주림도 가난도, 아픔과 슬픔도 없는 그러한 세상, 오직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로 다스려지는 하느님 나라를 말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이들, 단지 세례받았다는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를 살아온 이들에게는 참된 정의 안에서 심판받을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외침에 담겨 있는 그 말씀,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그 말씀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회개를 통해 내 신앙이 참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 이웃에게 그분을 전하게 되기에 종말의 때에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주님을 당당히 또 기쁘게 맞이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연말이 되어가면서 세상 곳곳에서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심판의 시기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면서 돈을 뜯어내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으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7-28) 라고 말씀하시며 마지막 날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십니다.

  심판은 왜 하는 것일까? 그것은 멸망과 징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구원과 평화를 위한 것인가 생각하게 해줍니다. 물론 선한 사람은 걱정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늘 선할 수만은 없는 것이라, 선하지만 않은 상황에서 벌을 주는가 아니면 용서해 주는가 하는 것도 관건입니다. 그리고 심판이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편안하게 해주려는 것인지도 식별하게 해줍니다.

   오늘 우리를 구원하러 다시 오실 주 에수님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죄를 끊고 회개의 순간을 통해 우리의 삶을 구원의 길을 향해 나아갑시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예루살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 자체로 종말입니다. 더는 하느님을 경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던 예루살렘이70년에 완전히 멸망합니다. 성전 중심의 종교적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붕괴된 것입니다. 유대전쟁사를 기술한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5개월간 예루살렘이 고립되자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휩쓸고 다녔으며, 유대인들은 굶주림에 지쳐 급기야 자식까지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로마군에게 투항해 오던 자는 산채로 배가 갈리고, 수많은 자들이 체포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소리쳤던 그들 스스로가 매일 400-500명씩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끝내 항복을 거절한 독립당원들 때문에 성전은 불타고, 예루살렘은 송두리째 폐허가 되어버렸고, 투항한 자들은 포로가 되어 노예로 전 세계에 팔려 나갔으니, 그야말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이다.”

복음서가 쓰였던 당시는 이미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미 벌어진 사건 속에 예언의 의미를 담아내는 ‘사후예언’의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종말론적 상황을 설명할 때 주로 쓰이는 문학적 기법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새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주님의 역사가 시작됨을 선언합니다.

우리가 항상 성경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울 수 있는 부분은 명확합니다. 구약부터 줄곧 그랬으니까요. 이스라엘은 간단하게 도식으로 말하면 이러한 역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사랑받았으나, 먹고 살 만하니까 배신합니다. 즉,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세상적인 것이나 다른 신들에게 말이지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마음 아파하시면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불러모으시지요. 그런데 말을 안 듣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벌을 내리십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야 이스라엘 민족들은 죽는 소리를 하며,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 또 하느님은 사랑하는 자녀인 그들을 용서해주시고, 다시금 사랑해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철저하게 뽑힌 백성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인류 전체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문을 열어주신 새로운 시대, 그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우리도 어찌보면 이스라엘 민족처럼 같은 것을 반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잘못하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구르고, 넘어져도 좋으니 주님께만 가면 됩니다. 그것을 위한 지속적인 요청도 있고요, 고해성사도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것만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전례력으로 연말, 주님과 함께 뜻깊게 보내실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멘.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속량이

희망이다.

 

충만한 희망은

충만한 속량이다.

 

먼저 우리의

절망과

맞닥뜨리면서

 

더욱

간절해지는

주님의

속량이다.

 

다시 찾으시는

주님의

속량과 희망은

하나이다.

 

무너짐과

무력함

사이에

 

자지러지거나

까무러친 것

사이에

 

쓰러지거나

죽은 것들

안에서

 

다시

만나게되는

 

주님의

새로운

희망이다.

 

절망의 끝은

언제나 새로운

희망이다.

 

이별이 있기에

만남이 있고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흔들리거나

쓰러진 것들

사이로

 

세상의

재난과 진노

사이로

 

멈출 수 없는

주님의 권능과

주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우리 삶 전체를

바꾸어놓는

희망의 속량이다.

 

가까이 온

주님의

속량이다.

 

속량을

간절히 바라는

주님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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