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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4년 12월 8일 (자)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작성자peater|작성시간24.12.08|조회수71 목록 댓글 0

제1독서

<하느님께서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실 것이다.>

▥ 바룩서의 말씀입니다. 5,1-9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2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3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어디서나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고
4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5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보아라.
네 자녀들이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해 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을 보아라.
6 그들은 원수들에게 끌려 너에게서 맨발로 떠나갔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왕좌처럼 영광스럽게 들어 올려 너에게 데려오신다.
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8 하느님의 명령으로 숲들도 온갖 향기로운 나무도
이스라엘에게 그늘을 드리우리라.
9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은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1,4-6.8-11
형제 여러분, 나는
4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8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9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10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룩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를 빈다고 한다(제2독서). 하느님의 말씀이 내리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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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룩서의 앞부분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참회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기억하고, 마지막 부분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선포하며 예루살렘을 위로한다. 흩어졌던 이스라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게 될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어 그 열매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이 그분의 오심을 준비한다. 그는 바룩서의 말씀대로 산과 언덕이 낮아지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임을 선포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 사람들이 많은 ‘도시’가 더 효과적일 텐데 하느님께서는 왜 광야를 고르셨을까요? 더욱이 그 말씀을 선포할 사람으로도 사람들에게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본시오 빌라도, 헤로데나 필리포스, 대사제 한나스와 카야파가 아닌, 광야에서 살고 있던 세례자 요한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3,6)라는 구약의 예언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원을 준비하시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고 아주 비효율적인 방법, 비합리적이고 너무나 미약해 보이는 방법으로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믿음 없이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방법들을 하느님께서는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3,3)야말로 우리 마음 안에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지며,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가장 탁월한 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3,4-5 참조). 고해성사는 우리가 이러한 은총의 길로 들어가게 해 줍니다. 많은 교우가 ‘회개하는 마음’ 없이 그저 ‘판공성사 표’가 나왔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과 함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영혼의 길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대림 시기를 지내며 하느님의 구원을 보는 은총의 주인공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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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기이면서, 종말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길을 닦는 시기입니다. 특별히 대림 시기 초반부에는 종말론적 성격을 부각시켜,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려야 함을 강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실 종말이 임박했으니 생활 태도를 바꾸라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구원의 역사가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알리고자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을 언급합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제십오년은 기원후 28년경이며, 본시오 빌라도는 26-36년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의 영주였고, 그의 이복 동생인 필리포스는 갈릴래아 호수 북동쪽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였습니다. 

한나스와 그의 사위 카야파는 당시 대사제로 복무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죄는 하느님을 등지는 행위이며, 죄 지은 인간이 하느님께 되돌아서는 방향 전환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처럼 회개한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등진 이웃을 향하여 방향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입니다. 내 삶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마음의 움직임이 큰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나의 삶을 하느님과 나누다 보면,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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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표상을 하느님의 구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주는 표징으로 제시합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 성소의 특징이 세례자 요한 안에서 드러납니다. 성소는 하느님의 심오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의 위대한 예언자들의 전통을 보면 하느님 말씀은 광야에 있는 세례자를 향하여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한을 태중에서부터 선택하셨는데,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에 힘입어 거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이고 그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은 예언자가 되고 메시아의 선구자가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례와 교회에 속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그분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가장 큰 관심을 받는 대상이며 그분께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을 받으셔야 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 성소는 하느님의 소중한 도구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광야에서 요한은 하느님께서 그를 당신의 도구로 삼으실 수 있도록 증명해 보였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맡겨 드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끝으로 성소는 강한 선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은 하느님께만 매여 있지 않았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에게도 심오하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자신의 백성이 회개할 필요성을 온전하게 느끼는 감수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 다가오는 새 시대에 교회 선교의 선구자라는 의식을 갖고 새 복음화를 위하여 계약의 하느님과 협력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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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 대조되는 인물로 소개합니다만, 사실 세례자 요한만큼 예수님과 공감할 수 있는 분도 드물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마지막 예언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과 자신을 구분하려고 요한은 자기를 ‘광야의 소리’로 겸손하게 밝혔고, 설령 자기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도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회개도 겸손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하여, 이스라엘에게 요한이 촉구했던 회개가 무의미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고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준비한 그 길로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해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는 우리가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면서 주님의 오심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치우는 때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적인 희망을 두지 못하여 우리가 깊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면, 또는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믿으면서 하느님 앞에서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마치 그분의 도우심이 전혀 필요 없는 것처럼 거만을 떨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스스로 가로막고 있는 셈이 되겠지요. 

세례자 요한의 권고대로, 오늘 주님께서 오시는 길목에서 걸림돌 하나쯤은 치우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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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시기 두 번째 주일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회개를 뉘우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본질에 가깝습니다. 뉘우침은 새 출발을 위한 행동일 뿐입니다. 다시 시작하고자 아파하는 것이지, 자신을 괴롭히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뉘우침만을 붙들고 온통 그쪽에만 신경 쓰는 것은 올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새 출발을 위한 ‘성찰’입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한 ‘반성’입니다. 이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소홀히 하였기에, 열심히 회개했지만 새 출발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이 불안하면 사람들은 돈과 물질에 집착합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역시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주님의 힘’이 물질의 힘보다 강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사랑의 힘’이 돈의 위력보다 세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실천입니다. 

믿음과 신뢰는 언제나 ‘내 쪽’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이 먼저 믿고 베풀면, 결국은 사람 사이의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호해 주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이 속이고’ 거짓말하더라도 신뢰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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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말로 ‘회개’란 단어의 본디 의미는 ‘뒤를 돌아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앞을 내다보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쁘고 열심히 살아가는지에 대한 물음엔 선뜻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열심히 산다고 하는 사람부터 마지못해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까지,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과 목표는 나름대로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느 하나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채워 줄 만한 대답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이내 허무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왜 살아가며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려면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 달린다. 그러나 길이 아니다.”라는 라틴 말 속담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은 위험천만할 수 있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 스스로 왜 달리는지 그리고 어디로 달리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잘 달려 보아야 무의미한 달리기가 될 것입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져다주며, 그동안 간과했던 삶의 모습들을 찾아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제 나이는 오십 대 중반입니다. 문득 마흔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처음으로 본당신부로 나가서 재미있고 기쁘게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또 빠다킹 신부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제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마흔에 아이를 여섯이나 둔 아빠였다면 어떠했을까요?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또 사회생활 역시 그렇게 재미있게 살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자녀들을 부족함 없이 키우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교육비가 얼마나 비싸고, 들어가는 생활비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로서는 아이 여섯과 함께 잘 살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를 성공적으로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부모님이십니다. 전혀 쉽지 않은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이런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할 텐데, 이제는 기도로만 못다 한 효도를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분 모두 하느님 나라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제일 후회가 되는 것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면서 제 할 말만 했던 기억이 제일 큰 후회가 됩니다. 어쩌면 잘 듣는 것이 가장 큰 효도가 아닐까요?

 

하느님께 충실한 자녀의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임을 깨닫습니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효도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하느님 말씀에 곧바로 “그렇게 어떻게 살아요? 나는 싫어요!!”라면서 화를 낸다면 어떨까요? 효심 가득한 자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림 제2주일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을 등져야만 했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산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고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 꿀 뿐이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셨다’라는 뜻인데, 그 모습을 보고서 과연 은총을 받은 사람처럼 보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던 세례자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의 목표는 풍요롭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법정스님).

 

 

 

보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 사막 체험은 필수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벌써 대림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서두에는 당대 세상을 주름잡고 있던 사람들의 이름이 쭉 나열되고 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로마 황제를 대신해 유다에 파견나와 있던 본시오 빌라도 총독,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그의 동생 필리포스, 대사제 한나스와 가야파...

엄청 대단한 사람들로 여겨지지만, 한 명 한 명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시 세상과 종교의 주류 세력으로서 높은 자리에 앉아 세상과 교회를 쥐락펴락하던 권세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주름잡던 명망가들이나 세력가들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생각할수록 하느님은 참 묘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지니고 계신 본질적인 성향이랄까 속성 중에 두드러진 것 하나가 하향성입니다. 끝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당시 가장 낮은 곳에 낮은 모습으로 살아가던 세례자 요한에게 내렸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광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늘 깨어있기 위해,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촉각을 하느님께로 맞추기 위해 광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광야는 사실 무지막지한 곳입니다. 극한 체험을 하기에 딱 맞는 곳입니다. 먹을거리, 마실거리, 즐길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세찬 모래바람, 끝도 없는 메마름과 무미건조함, 세상과의 철저한 단절과 외로움만이 존재하는...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그런 사막에서 끝도 없이 자신을 단련시키며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사막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상태에서 매일 호의호식하며 부른 배를 두드리다보면, 주님 말씀과는 무관한 삶을 살게 되기 마련입니다.

보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 사막 체험은 필수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보다 명확히 듣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결핍이 필요합니다.

남아있는 대림 시기, 보다 더 명료하게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도 기쁘게 사막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그 사막이 어디인지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자발적 광야의 삶을 사는 이가 존경스럽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만나게 해 주는 길과 같은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먼저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뇌엔 ‘망상활성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가 있습니다. 망상활성계는 뇌와 외부 자극 간의 필터 역할을 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뇌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를 다 처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까요? 바로 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면세점에서 무언가를 사려 집중할 때는 공항 방송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시계를 보고 출발시간이 지난 것을 알았을 때는 벌써 몇 분째 자기 이름이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신을 보이셨는데, 어떤 이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였고 어떤 이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는 마치 망상활성계가 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분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들만 보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무엇에 집중하고 있어야 할까요? ‘뜻’입니다. 

 

‘착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사랑입니다. 나에게 이웃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다면 예수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만약 잘 생기고 예쁘고 돈 많고 인기 많은 아이돌을 죽자 살자 쫓아다니는 아이에게 구유에 뉘어진 예수님이 매력이 있을까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광야를 산 세례자 요한을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의 세례자 요한을 주윤발이나 워런 버핏, 일론 머스크, 척 피니와 같은 인물들을 들고 싶습니다. 이들은 인기 있는 세계의 거부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광야에 살았던 세례자 요한과 비교하느냐고요? 먼저 돈에 대해 말해볼까요? 이런 사람들은 모두 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실제로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고 기부할 약속을 한 이들입니다. 그래도 잘 먹지 않았겠느냐고요? 워런 버핏은 오래된 집에서 오래된 자동차로 맥도날드에서 4달러도 안 되는 햄버거로 식사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자기 집도 없이 6천 만 원짜리 조립식 주택에 거주합니다. 그래도 명예를 추구했다고요? 워런 버핏은 나이가 들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성공한 것이라 말합니다. 척 피니는 자기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도 나라에서 조사받기 전까지 그가 기부하는 사람인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존경스럽게 보인다면 착한 뜻이 들어온 것입니다. 착한 뜻은 이웃을 사랑하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기에 그런 이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착한 뜻을 가지면 자발적으로 광야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많고 쾌락을 찾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어디서 만났느냐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에서 만났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이휘재나 욘사마 배용준과 같은 같은 나이 또래의 사람들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가난하고 절제되고 멸시받는 삶이 부러워졌던 것입니다. 이는 그 책이 저의 시선을 바꿔놓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이젠 내가 아니라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임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성체에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주일학교 교사 중에 어떤 자매가 수박을 먹는데 빨간 부위가 하나도 없이 갉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왜 저래? 맛있으라고 먹는 건데 저 흰 부분까지 먹다니. 누가 알아준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 책을 읽는 동안 시선이 바뀌었는데, ‘지금 나는 저렇게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저렇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 신앙이 우리를 광야로 나가게 하여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하게 하는 문입니다. 착한 뜻을 가져야 인간이 되신 착한 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발적 광야를 사는 이들을 존경하게 만들어줄 환경에 자신을 먼저 살게 하십시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입니다. 미술 시간에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져갔습니다. 크레파스는 12색, 24색이 있었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이 있습니다. 검은색, 흰색, 연두색, 갈색, 분홍색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두 색을 중심으로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피부의 색으로 이름을 부르던 크레파스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살색’ 크레파스입니다. 그 살색은 백인의 피부를 뜻하는 하얀색이 아니었습니다. 그 살색은 흑인의 피부를 뜻하는 검은색이 아니었습니다. 그 살색은 황인의 피부를 뜻하는 누런색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크레파스는 살색 크레파스가 아니라, 누런색 크레파스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크레파스의 색을 통해서도 어쩌면 인종을 차별하는 교육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17년 전입니다. 저는 이탈리아 로마 공항에서 캐나다 토론토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했습니다. 체크인하는 중에 착오가 있었는지 보안요원이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5시간 넘게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저의 외모가 범죄 용의자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지만 이미 시간은 늦었습니다. 저를 조사하는 요원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외모와 피부색 때문에 인종차별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인권 주일입니다. 인권 주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은 성별, 나이별, 피부의 색으로 차별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 모두는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슬프게도 인류의 역사는 인권 차별의 역사입니다. 인권 차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슴 벅차게도 인류의 역사는 인권 차별을 극복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쉰들러 리스트’를 제작했습니다. 폴란드에서 사업하던 독일인 쉰들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로 끌려가야 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쉰들러는 자기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죽음의 수용소로 가야 했던 유대인들을 구했습니다. 쉰들러의 선행으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후손이 매년 쉰들러의 무덤을 찾아 경의를 표한다고 합니다. 뉴저지의 뉴튼 수도원에는 마리너스 수사님의 무덤이 있습니다. 마리너스 수사님은 한국전쟁 당시 화물을 운송하는 선장이었습니다. 흥남 부두에서 화물 선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남쪽으로 피난하려는 피난민을 보았습니다. 선장님은 배에 있던 화물을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태웠습니다. 그렇게 배에 오른 14,000명의 피난민은 성탄절인 12월 25일에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4명의 아이가 출생했습니다. 마리너스 선장은 하느님의 섭리를 알았고, 수사가 되어서 평생 뉴튼 수도원에서 지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도 그 배에 있었습니다. 미국을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마리너스 수사님의 무덤을 참배하였고, 기념식수를 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높은 산은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운다.’입니다. 이는 인종, 혈통, 세대, 이념, 사상, 신념, 신분, 종교 때문에 차별과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품성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모습은 끝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나눔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닮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험한 산과 거친 들판을 건너고서야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듯이 우리 안에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내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도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우리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출 때 그래서 우리가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아름다운 기도로 남겨 주었습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님의 길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우리는
님의 길입니다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모든 것 집어삼키는
게걸들린 골짜기를
비움과 베풂으로
메우는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사람들을 가르는
날선 산과 언덕을
너그러움과 품음으로
낮추는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불의한 미친 짓들에
뒤틀려진 굽은 데를
흐트러짐 없는 의로움으로
곧게 하는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미움과 거짓으로
죽임 가득한 거친 길을
사랑과 진리의 살림으로
평탄하게 하는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우리는
님의 길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한국 교회가 정한 인권 주일이고 사회 교리 주간의 시작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내용이 전해졌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광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끝도 보이지 않게 광활한 사막과도 같이 희망이 없어 보이고, 타는 듯한 목마름과 굶주림과 같은 고통의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광야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라 이리저리 방황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예언자로서 구세주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우리에게 참된 희망의 길을 제시하여 줍니다.

그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예전에 강원도 어느 지역에 홍수로 수해가 났을 때 산사태로 도로가 흙더미에 싸여 아주 긴 시간 동안 복구를 하면서 길이 통제되서 한동안 다른 길로 돌아가야 갈 수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통행하는 길에 커다란 장애물이나 장벽이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주님께서 오시는 길에 놓인 우리 마음의 장애물, 그리고 장벽을 미리 없애고 그분께서 어서 빨리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골짜기가 메워지듯이 깊은 구렁과도 같은 마음의 골을 없애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산과 언덕들이 낮아지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산과 언덕과도 같은 교만함을 없애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굽은 데가 곧아지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굽어 있고 꼬여 있는 마음의 불신과 편협함을 없애고 믿음을 곧게 한 후에 그분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친 길이 평탄해지듯이 여러 가지 죄의 상처로 거칠어진 우리의 마음이 평탄하게 되어 그분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세례자 요한은 우리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을 때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예언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구세주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우리에게 예언하였던 대로 우리의 모습이 그동안 깊은 골짜기, 높은 산과 언덕, 굽은 길, 거친 길이었다면 메워지고, 낮아지고, 곧아지고, 평탄해져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대림절 제2주일입니다. 복음에서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면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회개해야 하는지 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용서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하겠지만 하느님을 알고도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무엇이고 언제 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근본적인 죄일 것입니다. 즉 죄란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았음에도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자녀다운 행동을 하지 않고 하느님과 멀어진 자신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세상을 향했던 나 자신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고 이를 실천했으나 이것으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이 회개는 매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매일 죄를 용서받고 이를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그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림 2주일을 보내면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나와의 거리는 멀어지고 급기야는 자신이 신앙인임을 잊어버리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용서와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림을 통해서 죄인임에도 용서를 받았고 많은 은총을 받았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아직도 죄의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 2주일을 시작하면서 두 개의 촛불이 켜졌습니다. 두 개의 촛불을 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것은 타인을 위한 기도 그리고 용서해 달라는 기도, 더불어 타인의 잘못을 보면서 잘못은 보지 않으려는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청합시다. 왜냐하면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2025년 주임사제의 교구장 사목목표 세부시행 계획

설립 30주년에, 선교와 복음화하고, 친교를 다지며, 봉사하는 공동체

사랑하는 등촌3동 103위 한국순교성인 성당 공동체 형제자매 여러분!

사목협의회원들과 소속 단체장님들 그리고 구역반장님들과 함께, 2024년 한 해 복음화 사업에 매진하신 여러분의 환대와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사랑과 은총 안에서 함께 땀 흘리며, 주님의 위로 안에서 마음을 모아 수고 수난했던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며 주님께 더욱더 깊이 감사드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우리를 통해 등촌3동 지역에 구체화하고 구현되고 있습니다. 교회력으로 이달부터 시작되는 2025년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는 우리 교회의 선교 사명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교구장님의 사목목표인 ‘희망하는 교회, 순례하는 교회, 선포하는 교회!’를 이루고자 합니다. 아울러 2025년에는 희년을 맞아 우리 본당 설립 30주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명실공히 우리의 마음과 몸이 일치된 신앙생활로 주님 말씀을 우리 일상에 구현하는 복음화를 이뤄냅시다.

교구장님께서는 2025년 사목교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교회가 되어, 서울 순례길 도보 성지순례나 성체조배를 통한 내적순례를 하며, 희년을 맞이하여 순례하는 교회를 이루고, 애덕 실천과 사회적 약자와 동행함으로써 선포하는 교회가 되자고 하십니다.

2025년 교구장 사목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시행계획

우리 본당 신자들은 본당 신자들끼리 주님을 찬미하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친교를 이루는 데는 세상 어느 본당에 못지않게 활기차고 깊고 그윽한 정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얼마나 활발하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제 이러한 신앙 공동체에서 우리가 나누고 있는 사랑과 친교를 우리 본당 신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이 시대 이 지역에 함께 살고 있는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도 흘러넘쳐 우리의 사명인 선교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사랑하셔서 한 분 하느님이 되셨고, 그분들의 사랑이 흘러넘쳐 우리가 창조되었고, 지금 그 사랑은 우리 생애에 은총과 축복으로 계속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축복과 은총으로 진정 기쁘고 행복하게 살면서, 형제자매들을 우리 사랑의 영역 안으로 초대하고 실제로 나누도록 합시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섭리 안에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고 우여곡절 속에 살게 하시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안배해 오셨는지 하나하나 기억하고 계십니까?

주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그동안 어떤 축복과 은총을 내리시어 우리를 지켜주시고 살려 주시는지 알아차리고 계십니까?

주 성령께서 우리에게 언제 어떻게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알게 해주시고, 오늘 이 순간 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고 계시는지 느끼십니까?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만남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은 그 사랑과 기쁨을 이웃과 나누고 싶어집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라고 외친 바 있습니다.

지난여름 무척 더웠습니다. 그런데도 예비자 환영식에 한 분도 오시지 않아서 그 무더위를 무릅쓰고 가두선교에 나섰습니다. 덕분에 열다섯 분의 예비신자가 오셨지만, 추운 1월과 무더운 7월 발등에 불이 떨어진 후에서야 가두선교에 나서는 우를 범하지 말고, 평소에 조직적이고 구체적으로 선교 활동을 해야 하겠습니다. 2025년에는 2월 23일과 6월 8일, 10월 19일에 예비신자 환영식이 있습니다.

내년부터는 구역반별로 가능하면 단체들과 함께, 누구를 예비신자 대상자로 모셔올 것인지 선정하고, 누가 가서 예비신자가 되도록 권면할 것인지, 누가 그 예비신자가 우리 구역반원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도록 기도할 것인지, 누가 가서 예비신자로 모셔올 것인지, 누가 가서 예비신자가 된 대상자를 세례 때까지 돌볼 것인지 정해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활동하시면 좋겠습니다.

교구장님의 올해 사목방침에 따라, 각자가 처한 각기 다른 형편에서 나눌 수 있는 만큼 기도와 방문과 희생과 봉사의 사랑 나눔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열매 맺도록 합시다. 우리는 올해 본당 설립 30주년을 맞습니다. 교구와 지역사회 안에서 30주년을 맞는 주님의 교회로서 우리가 기여할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개인과 가정, 구역반과 단체 및 사회에서 묵묵히 실천함으로써 우리 등촌3동 103위 한국순교성인 성당 선배 신앙인들이 전수해 주신 신앙을 계승 발전해 나가도록 합시다. 아울러 나날이 힘겨워지는 청소년·청년 사목에도 적극적으로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희년에 열리는 우리 본당 설립 30주년을 맞이하여 2025년에는 ‘선교와 복음화’와 ‘친교’ 그리고 ‘봉사’ 면에서 아래와 같이 우리의 신앙을 불태우도록 합시다.

올 한 해 주님 사랑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여 기쁘고 행복하시길 빌며, 혹시 어려움이 닥쳐도 주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주님 사랑의 힘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2024년 대림절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등촌3동 103위 한국순교성인 성당

주임사제 심흥보 베드로 신부

설립 30주년에, 선교와 복음화하고, 친교를 다지며, 봉사하는 공동체

사목목표 세부 시행계획

선교와 복음화(가정과 교회 및 지역사회 복음화를 통한 민족의 화해와 세계평화 지향)

1. 30주년 기념 묵주기도 30만 단 바치기(선교, 구역분과)

- 실현가능한 목표량 수립과 성과 도출과정 방안 모색(게시판)

2. 30주년 기념 성체조배 3만 시간 봉헌하기(성소신심분과 - 게시판)

3. 예비신자 모셔오기(2월 23일, 6월 08일, 10월 19일 – 선교, 구역분과)

- 신자배가운동의 일환으로 시행 : 1인 1예비신자 모셔오기가 모토

- 구역반과 쁘레시디움, 단체별 최소 연간 예비신자 3명(상하반기 각 1명) 이상 모셔오기

- 자연보호와 가두선교

4. 미사 참례율 향상(선교, 구역분과)

- 현재 17.5% 수준인 미사 참례율 30%로 향상

- 냉담 교우 회두 활동 병행

- 주일 이외의 날에 구역별 공휴일, 토요일 성지순례 및 야유회 시행

5. 30주년 기념 혼인갱신 및 성가정 축복장 수여

- ’24년 12월 29일[성가정축일] 11시 – 전례, 구역, 재정

6. 30주년 기념 감사미사와 견진성사(3월 2일 11시 미사 – 전례, 선교, 교육, 구역분과)

- 견진교리: 1월 모집, 2월 4회 수(5, 12, 19, 26일) 저녁 20시

- 견진면담과 총고백 및 예절연습(2월 22일[토] 20시)

친교(주님과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성화)

7. 30주년 기념 전례 힐링 콘서트

- 매월 셋째 토요일 저녁 8시~9시 40분(’24년 12월 21일[대림특강], ’25년 1월 18일,

2월 15일, 3월 15일[사순특강], 4월 19일, 5월 17일, 6월 21일, 9월 20일, 10월 18일,

11월 15일, 12월 20일[대림특강])

8. 5월 성모성월 묵주의 고리기도(5월 1일[목]~31일[토] - 구역, 선교, 전례분과)

9. 구역별, 단체별 서울의 길 도보 성지순례

10. 성모의 밤(5월 24일[토] 19시 미사 – 구역, 선교, 전례분과)

- 고통의 신비: 선교체험사례 5개 팀 발표(성공 & 실패)

11. 초중고 30주년 기념 공동체 미사(5월 중 – 미사중 학년별 성가경연대회)

- 공동체 의식 함양과 친목과 일치 지향

12. 청년회 30주년 기념 공동체 미사(5월 중 – 미사중 전례단&성가대 성가 공연)

청소년분과 30주년 기념 떼제(?) 미사(7~8월 중 – 초중고생, 복사단, 교사, 자모회, 청년)

13. 생명존중과 환경보호의 날(6월 21일[토]~22일[주일] 미사 전후 – 가정생명, 전례분과)

- 생명수호를 위한 주일미사 전후 태명 짓기, 태아 사진전, 태아 생성 체험 등 전시

- 임신부 태아 축복 미사(5월 3일과 9월 6일 토요일 10시 미사)

14. 순교자 현앙의 밤(9월 6일[토] 19시 미사 - 선교, 구역, 전례분과)

- 강론 후 103위 성인 호칭기도 전과 후 그리고 124위 복자 호칭기도 후 쉬는 교우 회두의

성공과 실패 활동사례 A4용지 3장을 넘지 않는 분량으로 3개 팀 발표

15.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101위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감사미사

16. 30주년 기념 한국순교성인 음악회

17. 10월 묵주기도 성월 묵주의 고리기도(10월 1일[수]~31일[금] - 선교, 구역, 전례분과)

18. 성경과 교회상식 퀴즈 대회(11월 23일 성서주간 - 교육분과)

봉사(이웃사랑)

19. 아가페 사랑나눔 본당 설립 30주년 기념타올 나눔

- 3월 2일(주일) 1, 4, 7, 9단지 5천여 가구 – 선교, 사회, 구역분과

20. 사순과 대림시기 17지구내 사회복지시설 봉사활동과 사랑나눔(선교, 사회, 구역분과)

21.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101위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감사미사

- 9월 20(토)~21일(주일) – 선교, 사회, 구역분과 - 떡나눔(성당 인근 상가)

 

 

 

세례성사 와 사람다운 모습으로 사는 것.<루카3/1-6>12/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은 인권 주일이며 사람답게 사도록 이끌어 주는 날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가추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실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추여야 할 자격을 지녀야 합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이 하느님 다웁게 살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사는 길입니다.

제가 어느 날 성탄을 준비 하는 시기에 병원을 방문하여 병자들에게 성칸 선물을 전해주는 기회가 있어 병원을 방문했다가 세레성작가 얼마나 큰 은총인지 사람다웁게 하는 일인지를 알고 큰 감동을 받아은 적이 있습니다. 방문을 끝내고 나오려는데 간호사가 여기도 한 사람의 환자가 있다고 해서 골방에 찾아가니 얼마전 연탄불을 갈다가 나이롱 치마에 불이 붙어 온몸에 화상을 입고 경리된 환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얼굴만 불이 가지 않고 온몸이 화상으로 거이 죽음 직전에 있어 대세를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사정을 알아보니 혼자서 사는 노인이며 외롭게 살다가 파티마 병원 앞에서 떡 바두니 들고 장사하던 할머니였습니다.

약간의 교리를 설명하고 세례를 권하니 받고싶다고 하여 세례주고 마리아씨 이제부터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으시라 하니 얼굴에 기쁨이 넘치는 소리를 지르며 지나가는 간호사에게 “보아라! 나는 이제 아버지가 있다”고 하며 혼자가 아니라 기뻐하며 즐거워 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부족한 것 없나 하니 목이 춥다고 하여 집에 와서 담뇨를 가져다 주겠다고 약속하고 집에 오니 병원에서 제가 떠나고 그날 저녁에 임종하셨다고 하는 소리를 듣었습니다. 그 마리아는 죽기 전 사람으로 숨쉬고 있다가 하느님 아버지 곁으로 가셨습니다.

이 같이 세례성사는 죄에서 해방되고 성부성자 성령이신 하나이신 하느님과 관계을 맺고 진 선 미를 따라 사람답게 사는 길입니다. 세례성시는 그리스도의 왕직 사제직 에언직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세례성사로 완성되는 서약과 약속을 이행하는 성사입니다.

저는 어느날 기도 중에 어머니의 큰 업적은 하느님 모르는 큰집 닥은집 사람들이 사춘동생 마마병에 걸려 죽게되어 세례받으며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성당을 찾은 것이 기회가 되어 하느님을 알고 믿음이 사작되어 2년을 수녀원의 유치원원에 다니며 믿음이 저에게 강하게 입력되어 쉼없이 여가까지 믿음을 사는 것을 감사합니다. 죄짖고 뉘우치고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비와 일치와 생명 안에 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받고 하느님처럼 사는 믿음을 감사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하느님 영광을 충만이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배제하지 않는 사랑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외국에서 이방인 사제로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전교생이 기다리는 학생 미사를 집전하러 서둘러 가다가 교통 체증 탓에 사고가 날 뻔한 위험한 순간을 맞았습니다. 운전자가 외국인인 것을 확인한 상대편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진로까지 막고 도로 한복판에서 생트집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수차례 용서를 청하고 없는 죄까지 사죄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우여곡절 끝에 제대에 섰는데, 그만 구석 자리에서 그 얼굴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방금 전 제 면전에 삿대질을 하던 상대편 운전자였습니다. 억지로 평온함을 유지하려다가 얼굴 근육에 경련까지 일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니셨더라면 분노의 번제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사명은 인간적인 면모로는 기구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지혜를 물으면서도 행동은 꺼리던 이들과 바른 경로를 제시하면 못마땅하게 여기며 다른 길을 찾던 인물들의 완고함에 둘러싸여 맞이한 허망한 죽음까지…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기대할 수는 없었겠지만, 소명을 입은 예언자가 현세에서 감당할 난관은 쉴 틈 없이 불어닥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리로 외치라 파견된 존재였기에 군중을 향해 끊임없이 회개하라는 목소리를 높였고 다가오실 주님을 위해 곧은 길을 가는 것이 그의 생활 양식이 되었습니다. 유독 사람이 미워지는 날이더라도, 어느 예언자의 사명 수행으로 나도 언젠가 은혜를 입었음을 떠올려야겠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회개의 세례를 외친 즈카르야 아들 세례자요한은 예수님을 예고했죠.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소리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요한의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광야에서의 요한 외침은 버거운 일이었겠죠.
메시아의 길을 위해 언덕 골짜기 거칠고 굽은 길 평탄케 하라셨지요.
지금도 우리마음에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편히 오시도록 해야 되겠죠.

이미 오셨던 구원의 메시아예수님을 모시려면 죄의 회개부터 해야죠.
우리 죄의 회개로 겸손해져야 하늘의 진리가 편히 내 안에 들어오죠.

가톨릭알림 말: 죄를 회개하여 겸손해져야 하늘진리가 마음에 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함승수 신부님

대림 제2주일의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그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사실들을 꽤나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카 복음사가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지요. 그 당시는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하여 통치를 시작한 지 15년째 되는 해였고, 본시오 빌라도라는 인물이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다지역을 관리 감독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주요 고을을 다스리던 영주가 누구였으며, 예루살렘 대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를 관장하던 대사제는 누구였는지 구체적인 이름들을 밝히고 있지요. 그렇게 하는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신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신기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분명한 ‘현실’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겁니다. 한 가지 의외인 점은 이 세상의 구원과 직결되는 중요한 ‘하느님 말씀’이 예루살렘에 있는 대사제나 율법학자가 아니라 먼 광야에서 은수생활을 하던 요한에게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은 다 제쳐두고 요한에게만 말씀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동안 여러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가지 방식으로 수 없이 당신의 구원계획을 말씀하셨지만,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망에 휘둘려 세상 것들에만 귀를 기울인 이들에게는 그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에 비해 요한은 세상과 떨어진 ‘외딴 곳’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깊이 머무르며 그분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에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을 받은 요한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소명을 시작합니다. 그에게 맡겨진 소명은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일이었지요.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여러 형태의 ‘세례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율법만 지나치게 강조하며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성전에서 행해지는 속죄예식을 사유화, 물질화하여 돈이 없어 그 예식을 치르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발하여, 물로 몸을 씻는 예식 만으로 자기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의식운동이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요한이 전개한 세례 운동에는 그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 있습니다. 즉 요한은 물로 죄를 씻는 세례는 일생에 한 번만 받을 수 있으며, 그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지요. 요한이 강조한 ‘회개’란 욕심에 눈 멀고 나태함에 안일해져 잘못된 길을 걷던 것을 중단하고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완전히 돌리는 일입니다. 그전까지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그분과 상관 없는 사람처럼 살았지만, 이제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전적으로 그분 뜻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다시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꾸준히 노력하는 일입니다.

요한이 그처럼 회개를 강조한 것은 그것이 우리 구원에 직결되는, 가장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님과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구원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일단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 ‘큰 길’은 하느님께서 친히 준비해두셨습니다. 이 점에 대해 오늘 제1독서인 바룩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즉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품으로 돌아가는 그 길의 중간에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당신 손으로 고통의 산과 시련의 언덕을 낮추시고 슬픔의 골짜기를 메워 평평하게만들어 주셨다는 겁니다. 모두에게 당신 나라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신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도 주님께서 나에게 오실 ‘작은 길’을 닦아야 합니다. 그 작은 길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문 밖에 서서 내가 그 문을 열어드릴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빨리 나를 구원으로, 참된 행복으로 이끌고 싶지만 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에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분께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에 대해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첫째, 골짜기를 메우라고 합니다. 나와 이웃 사이에 생각이 달라서, 입장이 달라서, 제대로 모르고 오해해서 감정의 골이 생겼다면 그것을 이해와 용서로 메우라는 겁니다. 누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입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게 있는만큼 부족한 부분도 있지요. 그러니 남의 부족함과 허물, 실수와 잘못을 비난하고 단죄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가주는 넓은 아량이 필요합니다. 또한 나와 ‘다른’ 이를 ‘틀리다’고 배척하지 말고 서로의 다름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며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산과 언덕들을 깎아 낮추라고 합니다.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군림하고 싶은 욕망을, 나 자신을 멋져보이게, 있어보이게 꾸며 주목과 인정을 받고 싶은 교만을 경계하며, 늘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라는 뜻입니다. 참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이 되시어 자신을 낮추시고, 제자들 앞에서 종처럼 자신을 더 낮추시어 발까지 씻겨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여 사랑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종말의 날에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굽은 데는 곧게 만들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 먹은대로 세상을 보는 법입니다. 내 마음이 고집과 편견, 시기와 질투로 굽어져 있으면 내 눈에 비친 모든 사람과 세상도 다 굽어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를 보고 ‘넌 왜 마음이 굽어있느냐’며 지적하기 전에,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굽어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모습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의 부족함과 약함, 실수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들이 다른 이에게 피해나 상처를 입혔다면 ‘내가 잘못했다’며 먼저 손 내밀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넷째, 거친 길은 평탄하게 만들라고 합니다. 너와 나의 마음이 통할 길을 만드는 것은 ‘말’입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내 마음 내키는대로, 분노라는 감정에 휘둘려 거친 말들을 함부로 쏟아내지 말고,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질 지를 그의 입장 상황 마음을 충분히 헤아린 다음 조심하고 배려해가며 부드럽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을 일이 없습니다. 상대방을 내 안에 받아들여 사랑으로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성탄과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해야 할 마음의 준비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마르 11,30-33ㄱ)

비겁과 무책임의 역사는 어쩜 이리도 계속 반복되는지… 국민이 무서워 탄핵 반대한다고 대놓고 말할 용기도 없으면서 책임은 지지 않기 위해 도망치기에 급급한 사람들. 지금 당장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 한 사람씩 외쳐지는 당신들 이름은 대한민국 역사에 큰 수치이자 슬픔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김동우 바오로 신부님(교구 사무처 차장)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의 본기도 안에 기다림의 조건이 담겨있습니다. “하느님, 저희가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기꺼이 성자를 맞이하여, 천상의 지혜로 성자와 하나 되게 하소서.”

얽매여있는 것을 풀고,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청해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 바룩서는 희망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실 것이다.”

이어 복음은 떨리는 기다림을 약속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제2독서 필리피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얽매여있는 마음을 풀고 하느님의 지혜를 청하는 이들의 모습을 알려줍니다. “여러분은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십시오.”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아기와 같은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천상의 지혜가 내려앉는 기다림의 두 번째 주일 되시길 빕니다.

 

 

 

기쁨의 회개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님(분당성요한 본당 제1보좌)

“일단 인간의 이성이 균형을 잃게 되면, 인간은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푸블리우스 타키투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은 균형을 잃었었습니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율법을 따랐고,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과 이웃을 단죄하느라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영혼은 ‘굽은 곳과 거친 곳’으로 가득했습니다. 균형 잃은 그들의 신앙은 눈먼 이들의 인도를 맹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 요한 세례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 영혼의 굽은 곳과 거친 길을 바라볼 수 있도록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이 외침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나의 영혼은 얼마나 굽어 있고 거칠어졌는가?’ ‘나는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제2독서를 살펴봅시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필리 1,9).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단순히 내가 했던 행위들을 나열하고 심사하는 순간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이기적인 사랑이 만든 굽이지고 거친 나의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의 사랑이 만든 곧은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균형 잃은 이성으로 나를 돌아본다면 우리 마음은 더 거칠어지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를 돌아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벌써 12월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난 시간을 인간의 힘으로만 돌아본다면 막막함이 앞설 것입니다. 하지만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본다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연말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번잡스럽고 바쁜 시기지만, 나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 사랑 안에서 평온함과 침묵을 추구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곳에서 찾는 기쁨은 분명 우리를 새롭게 해 줄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제1독서. 바룩 5,1)

 

 

 

이혼하면 성체를 모시지 못하나요?

     신정윤 라파엘 신부님(교구 제1심 법원 변호인)

매주 금요일 평일미사에 참례하는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미사 내내 울고만 계셨고, 성체도 모시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사연이 있으신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몇 주 후 자매님과 면담 했더니, 이혼했기 때문에 죄인이라 생각되어 성체를 모실 수 없고, 또 주일마다 출근하느라 미사도 봉헌하지 못해 슬퍼서 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 자매님은 성체를 모실 수 없는 것일까요? 주일을 지키지 못하면 매번 고해성사를 해야 할까요?

사실, 이혼만 하고 아직 재혼하지 않았다면 신앙생활(성사생활)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교회가 볼 때 자매님은 이혼한 것이 아니라, 별거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매님께서 추후 재혼을 하려고 한다면, 교회법적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는 주임신부님과 반드시 면담을 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법적 절차를 지키지 않고 혼인을 한다면, 혼인장애 즉, 성사생활을 할 수 없는 ‘조당’(阻當) 상태가 됩니다. 조당은 신자가 혼인을 할 때, 교회에서 정한 법(교회법)과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볼 때, 혼인장애 상태에서 맺은 불법적인 혼인으로 인한 동거 상태인 것입니다. 이럴 경우 고해성사, 성체성사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자매님처럼 직업적인 이유로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할 때에는 ‘대송(代誦)’을 봉헌하시면 됩니다.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74조, 3-4항)에 따르면, “주일이나 의무 축일에 미사참례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는 신자는 공소예절로 그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 미사나 공소예절에도 참례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대신에 묵주기도, 성서봉독, 선행 등으로 그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 ”라고 전합니다.

여기서 ‘부득이한’ 경우란 신앙적, 신체적, 직업적, 환경적 이유로 미사에 참례할 수 없을 때를 말합니다. 특별히 직업적, 환경적 이유의 경우, 대송을 봉헌하기에 앞서 신부님께 문의하시면 좋겠습니다.

부득이한 경우에 대송을 봉헌했다면 고해성사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게으름으로 대송을 바치는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게으름 또는 기타 사유로 주일에 미사 참례를 하지 못했다면, 대송을 봉헌했더라도 고해성사를 하시는 것이 신앙적으로 유익합니다.

교회(아버지의 집)는 늘 열려 있고 여러분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혼인장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신앙적 어려움이 생긴다면 고민하지 마시고 신부님께 문의하시면 좋겠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여러분들의 신앙 여정을 위해 늘 함께하고자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오시는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용기 내어 오늘부터 애쓰십시오.’(2베드 3,14 참조)

 

 

 

가톨릭 교회의 찬란한 빛, 성녀 루치아(축일 12월 13일)

      백형찬 라이문도(전 서울예술대 교수)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내 배는 살 같이/ 바다를 지난다.” 나폴리 민요 ‘산타루치아’입니다. 루치아(283~304)는 나폴리의 수호성인입니다. ‘루치아’는 빛이라는 뜻을 가진 ‘룩스’에서 나왔습니다. 빛은 휘어지지 않고 직선으로 날아갑니다. 루치아의 삶도 하느님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간 삶이었습니다.

루치아는 이탈리아 시라쿠사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살던 어린 소녀는 스스로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루치아를 귀족 청년과 약혼시키려 했습니다. 어머니는 혈루증(하혈하면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오는 무서운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루치아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가타 성녀의 무덤이 있는 성당으로 갔습니다. 루치아는 어머니가 성녀의 무덤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무덤에서 기도하는 중에 루치아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아가타 성녀가 꿈속에서 말했습니다. “하느님께 축복받은 동정녀 루치아여, 루치아의 믿음으로 어머니 병은 나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루치아가 어머니에게 “어머니 병은 다 나았어요. 병을 낫게 해주신 하느님 이름으로 간청드려요. 저를 약혼시키려 하지 마세요. 그리고 제 결혼 준비금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한 어머니는 루치아의 말대로 했습니다.

루치아와 약혼하려던 귀족 청년이 이를 알고 ‘그리스도인이고 로마법을 지키지 않았다.’며 루치아를 로마 집정관에게 고발했습니다. 집정관은 루치아를 법정에 출두시켰습니다. 집정관은 루치아에게 로마의 신을 믿으라고 강요하며 “우리는 로마의 법을 따른다. 너도 그 법을 따라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루치아는 “나는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이므로 로마의 신은 믿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의 법에 따라 행동한다. 당신은 로마 황제를 두려워하지만 나는 하느님만 두려워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가 난 집정관은 루치아에게 “너를 매음굴로 끌고 갈 것이다. 그곳에서 너의 몸은 더럽혀질 것이다.”라고 하자 루치아는 “성령께서 보호해주실 것이므로 나의 몸은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어서 고문을 시작하라.”고 말했습니다. 루치아를 끌고가려 했지만, 그녀는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황소 여러 마리가 와서 끌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집정관은 루치아를 불에 태워 죽이라고 했습니다. 루치아는 불에도 타지 않았습니다. 집정관의 부하가 루치아의 목에 칼을 꽂았습니다. 루치아는 목에 칼이 꽂힌 채 성체를 모시고는 하느님 곁으로 갔습니다.

 

“모든 사람의 끝은 같다. 다만 그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는지 그 디테일이 그를 구분할 뿐이다”(헤밍웨이)

 

 

 

“주님, 저를 자녀로 받아주세요.”

      정남희 데레사(망포동 본당)

남편 직장 때문에 살게 된 수원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낳고 키우다 보니 시간은 어떻게든 흘러갔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어느 날, 아파트 앞에 있는 작은 ‘망포동 성당’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주말에 아이들과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많은 사람이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들어가는 저곳은 어떤 곳일까? 왜 사람들은 활짝 웃고 다닐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어느날 용기를 내 성당에 갔습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그곳에 발을 디뎠고, 그 이후 소중한 말씀과 이웃이 저의 여정에 함께 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낯선 사람과의 관계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교리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성경 말씀을 풀어주시면서, 제가 조금 더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낯설기만 한 성당에서 함께 공부한 이웃들은 어느덧 가족처럼 일상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는 감사하게도 무사히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함께 하고 싶어 남편, 두 딸, 친정엄마까지 주님의 자녀가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제 기뻐도, 슬퍼도, 맛있는 음식 앞에서도 늘 기도드립니다.

주님, 저를 당신 자녀로 받아 주시고, 좋은 이웃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외로운 저의 마음을 채워주시고, 인생을 감사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루카 3, 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시린 손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추운
시간입니다.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
가톨릭의
인권이며
사회 교리의
분명한
실천입니다.

구체적인
현실의
골짜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복음의
길입니다.

복음의 길은
뼈저리게
회개해야 할
우리의
길입니다.

회개의 길은
인권의 길이며
인권의 길은
사람다운
사람의
소중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권을
소생시키시는
인권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웃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곧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입니다.

하느님의
살아있는
목소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는
우리를
꾸짖습니다.

이 대림시기가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불
실천의 불이
필요합니다.

모순과 거짓의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권력자의 교만은
낮아지고
비겁한 데는
곧아지고
마음을 돌이켜
실천으로
평탄하여 지길
기도드립니다.

실천의
길은 갈고
닦아야
빛납니다.

복음의 길은
하느님의 길이며
인권을 훼손하지
않는
구원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묻고 답하는
대림 제2주일의
시린
아침입니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기에 결혼한 조카도 많고 또 자녀를 낳아 저로서는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조카들이 모두 열심히 살고 있기에 다들 자기 자리에서 나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카 중 한 명이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법정 분쟁까지 가게 되어 큰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척 속상했습니다. 조카에게 큰 손해를 안겨 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괜히 미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사제인 제가 조카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기도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려졌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조카의 일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기도이기에 열심히 기도로만 함께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되지만, 굳이 걱정에 휘말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세속적으로는 솔로몬 왕 이후로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가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고, 유다 땅은 로마인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 밑에서 로마에 아부하는 헤로데 일가의 3형제가 유다 땅을 나누어 영주로 있었습니다. 또한 종교적 지도자 구실을 하던 이스라엘의 대제관직도 카야파의 손에 들어가 하느님의 백성은 세속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는 구원의 소리가 광야에서 들려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요르단강 주위의 지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것,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도록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가 정치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더 큰 가치 안에서 참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자크 데리다).

 

갈등의 해소를 위해….

어떤 부부가 커다란 갈등에 빠졌습니다. 남편이 아내 몰래 투자했는데 큰 손실을 본 것입니다. 물론 미리 아내와 상의할 수도 있었지만, 평상시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에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 주제에 무슨 투자야?”라는 식의 무시하는 말을 할 것이 뻔해서 한번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대와 달리 역시 큰 손해를 본 것이었지요.
아내에게 투자 실패를 말했습니다. 아내는 더 남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가장으로 여겼고, 아이들에게도 남편의 무능을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런 아내에 대한 미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한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말합니다.
“좋아요. 주님 때문에 당신을 용서하겠어요.”
이 말에 남편이 기뻐했을까요? 아내가 용서하겠다는 말은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문제의 책임이 남편에게만 있다는 행동에 더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갈등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의에 둘 때 진정한 용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같은 위치에서부터 용서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용서하려면 먼저 자기 잘못부터 찾아서 고백해야 합니다. 서로 자기 잘못을 고백해야 용서도 가능하고 갈등도 해결됩니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 주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주일입니다. 인간은 첫째가는 하느님 피조물이기에 그 어떤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신분, 국적, 빈부 여부를 떠나 생명을 지닌 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특별히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등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깊은 수렁 속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너무도 막막해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분들, 희망을 상실한 분들을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주일입니다.
직원을 소중히 여기는 경영 마인드로 유명한 한 경영자의 외침은 어려운 이 시대 모든 경영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 감축! 우선 인건비를 대폭 줄여보자는 마인드인데,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피해야 할 유혹입니다. 그로 인해 예견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가적 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희 회사는 인원 감축이라는 뼈아픈 해결책이 아니라 3교대를 4교대로 늘리는 고용 증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잉여시간을 직원교육과 재충전에 투자한 결과 생산성 향상, 안전사고 감축, 노사화합이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 회사 경영자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근로자들과 고통을 분담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사직서를 쓰면 최고 책임자와 면담을 거쳐야 한답니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로부터 "도대체 왜 사직서를 썼느냐? 좀 더 함께 일할 수는 없겠냐?"는 듣기 행복한 만류의 말을 들어야 한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 무리한 방법보다는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이 난관을 함께 견디고 함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대림 시기도 어느덧 두 번째 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자비로운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앞에 망연자실하게 넋을 잃고 앉아있는 이웃들 삶을 개선시키는 구체적 "구원의 손길"이 됩시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억압받는 이웃들을 향한 적극적 투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표시입니다. 우리 삶이 그저 단순한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들을 향한 끝없는 개선의 길, 나날이 성장하고 쇄신되는 참된 회개 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성탄 구유 앞에서 침묵 중에 묵상합시다!
성탄이 다가오면 본당이나 수도원, 그리고 많은 가정에서 연례행사처럼 시행하는 작업이 있습니다. 바로 성탄 구유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성탄 구유를 만드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성탄 구유 만들기는 어린이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종교교육의 장이 됩니다. 성탄 구유는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억하기 위해 만듭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감사와 찬미, 경축이 성탄 구유가 주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우리도 진실로 태어납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마구간 탄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출생도 비로소 의미를 지니고, 빛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게 꾸며진 성탄 구유를 바라보며 그저 ‘멋있다!’ ‘아름답다!’ 외치며 사진만 찍을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대림 시기에는 우리 모두 성탄 구유 앞에서 해야 할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이 지니는 단순함의 가치, 본질적인 것의 가치, 침묵의 가치, 평화의 가치, 기쁨의 가치, 사랑스러움의 가치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 공개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신 인류 역사상 가장 은혜로운 대사건입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하느님의 배려로 인해 인류 모두는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이토록 헤아릴 길 없는 큰 은총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기뻐하면서, 감사하면서, 행복해하면서, 아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일입니다. 침묵 가운데 우리 가운데 오신 하느님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분이 우리 내면에 다시금 탄생하시도록 우리 영혼의 문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탄 구유 앞에서 침묵 중에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의 장면을 관상하면서 아이가 될 수 있으며, 하느님께서 육화강생에 대한 경이로움이 우리 안에서 다시 샘솟게 할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 각자 안에서도 아기 예수의 잉태와 탄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를 낳지 못한다면 마리아가 그때 거기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늘 새롭게 태어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마이스터 에카르트).

 

 

 

길들여지는 사람은 길을 내지 못한다. 지금의 행복에 길들지 않기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직무가 소개됩니다. 요한의 직무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길을 미리 닦아놓는 역할입니다. 이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라고 합니다.

‘회개’란 무엇이 행복인지 아는 것입니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회개했다고 하면 이제 술을 덜 마시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집을 나온 아이가 회개했다고 하면 그래도 집에서 부모님과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안성에서 있을 때 길거리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살 때 입었던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다시 줍니다. 그리고 입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코를 막고 억지로 입고는 자기들 손으로 내다 버리고 샤워를 두 시간씩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길거리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 없이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간신히 주일미사에 나오기는 하겠지만 일상을 살아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심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기보다는 뱀의 뜻에 따라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더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먹고 마실 것도 없고 명예도 없는 광야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삼구를 포기할 때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광야로 나오지 않으면, 곧 삼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신데 삼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과 물처럼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이 세상의 즐거움을 다 포기하는 것보다 행복함을 믿지 못한다면 누가 광야로 나오겠습니까?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일단 믿고 광야로 나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무엇이 행복인지 증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삶이 그랬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이분들의 삶을 보며 많은 사람은 ‘저런 삶이 진짜 행복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그 광야의 삶으로 나아올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분들이 먼저 세상의 행복에 길들지 않은 누군가를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회개의 세례는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가지 못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것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히말라야’(2015)는 엄홍길 대장과 박무택과의 우정을 그립니다. 엄홍길 대장으로부터 산을 배우고 싶었던 박무택은 지옥훈련을 거쳐 엄홍길 대장과 극한의 어려움을 견뎌내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엄홍길 대장은 세계 최초 16좌 등정을 코앞에 두고 더는 산을 타서는 안 된다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박무택이 대장이 되어 에베레스트를 등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박무택 대장은 동료들을 구하려다 조난합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악천후로 베이스캠프에 있었던 어떤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오르지 않았습니다.

책도 쓰며 가족과 삶을 즐기고 있었던 엄홍길 대장은 소식을 듣고 이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산을 오르기로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쓸데없는 도전이라며 말립니다. 명예가 따르지 않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찾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후배를 추운 그곳에 홀로 둘 수 없었던 엄홍길 대장은 아픈 다리에도 그들의 시신을 찾아 내려옵니다. 어떤 명예도 없는 도전. 다만 우정을 지키기 위한 두 달이 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 대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6좌 등반을 완주합니다.

 

살다 보면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낼 것인가의 선택이 참으로 많이 찾아옵니다. 이때 현실에 안주하는 삶은 아무런 길도 내지 못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은 새길을 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이 세상으로 내려오시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길을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 여기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인가?”

이 질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길을 개척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메이즈 러너’(2018)는 실험용으로 기억이 삭제되어 한 공간에 갇혀 살아야 하는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토마스만이 길을 알 수 없는 미로와 무서운 괴물을 무릅쓰고 그곳을 탈출하려 합니다. 그런 그를 보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 자신들의 세상에서 계급을 정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둘의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희생이 따르더라도 나가는 길을 찾게 된 토마스는 다른 이들도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길을 만들어줍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세상의 틀에 갇혀 사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이 위에 섰을까? 이 위에선 세상이 무척 다르기 보이지. 잘 알고 있는 거라도 다른 시각에서 봐라. 틀리거나 바보 같아도 반드시 시도해라.”

키팅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나자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의 위협에도 책상 위로 올라섭니다. 

 

누군가 길을 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쫓고 있는 돈이 행복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이해할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여기십시오. 그래서 행복에 대해 다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결국엔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다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사람이 다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과 반대되는 광야의 삶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지금의 행복이 최선인지를 끊임없이 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을 위해 찾아간 그 길로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행복을 만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너무도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교육이 있어서 연수원으로 갔습니다. 연수원에서는 숙소를 배정하게 됩니다. 저의 방은 317호 였습니다. 지나가며 보니 다른 방들은 독방이거나, 두 명이 지내는 방이었습니다. 제방은 317호인데 2층에 있었고, 어렵게 찾아가보니 그곳은 20명이 한 방에 있었습니다. 그나마 저의 침대는 아직 자리에 없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20명이 함께 지내는 것도 자신이 없었고, 아직 침대도 없었기에 자리를 배정한 담당자를 찾아갔습니다. 담당자는 제가 잘 아는 선배였습니다. 선배는 곧 침대를 갖다 놓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불편하지만 며칠만 참으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다같이 20명이 사용하는 방이었다면 저는 그렇게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독 저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불만이 컸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니 사제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지순례 중 버스에 탑승할 때면 내리기 쉬운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두 명 씩 침실을 배정받지만 저는 독방을 사용했습니다. 식사를 할 때도 맨 먼저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봉성체를 갈 때도, 환자 방문을 할 때도 봉사자들이 차량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꿈’은 그동안 제가 특별한 대접을 받고 살았음을 돌아보게 한 것 같았습니다.

 

며칠 전 카톡으로 가슴이 뭉클한 이야기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큰 아들의 집으로 갔는데 아들의 집 비밀번호가 어머니의 집 비밀번호와 같았습니다. 큰 아들은 어머니가 비밀번호를 쉽게 기억하도록 어머니의 집과 같은 비밀번호를 만들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집도 같은 비밀번호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집으로 갈 때는 적어도 비밀번호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었습니다. 물론 아들의 결단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기꺼이 받아준 며느리들의 배려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라면 언제든 오실 수 있도록 비밀번호를 공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 같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아파트의 이름이 대부분 어려운 외국 말인 것은 시골에서 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미국도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려고 하였습니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에 긴 장벽을 설치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가족들과 친지들이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교황이 된 후에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람페두사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넘어오는 난민들이 도착하는 항구였습니다. 교황님의 방문 후에 유럽은 난민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국경을 열어 주었습니다. 교황님은 북한이 초청을 하기만 하면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방북으로 북한의 신앙의 문도 활짝 열리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높은 산은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운다.’입니다. 이는 인종, 혈통, 세대, 이념, 사상, 신념, 신분, 종교 때문에 차별과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난 2년간 코로나19의 팬데믹을 겪으면서 장벽과 차별로는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연대와 협력 그리고 나눔과 사랑으로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백신과 치료제는 공유제로 국가와 빈부의 차별 없이 나누어야 합니다. 인류가 함께 노력하여 코로나19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나가야만 우리는 비로소 마스크를 벗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품성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모습은 끝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나눔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닮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험한 산과 거친 들판을 건너고서야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듯이 우리 안에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내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도 쉬운 일만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우리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출 때 그래서 우리가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아름다운 기도로 남겨 주었습니다.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님맞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께서
길이 없어
못 오실까마는


오시는 님
맞는 설렘으로
님의 길 내렵니다


다른 이 삼키던
나의 골짜기
메우고


다른 이 거부하던
나의 산과 언덕
허물고


다른 이 트집 잡던
나의 굽은 데
곧게 하고


다른 이 아프게 하던
나의 거친 길
평탄케 하여


오시는 님
한걸음에 편히 오시게
님의 길 되렵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평생 충실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당신은 누군가에게 평생 충실한 자가 되길 원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복음에서 왜 세례자 요한을 아무도 없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할까요 ? 인적 없는 곳에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요?


광야의 의미
그렇다면 성경에서의 ‘광야”는 무슨 의미일까요? 광야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황폐한 곳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생 역경을 체험한 곳으로서 아주 중요한 의미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랑의 계약을 맺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삶의 의미를 더하는 다른 어떤 곳보다 중요한 특별한 장소가 하나쯤은 있을 것입니다.
이 계약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은 결속으로 상호 간 서로에게 충실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약속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그들에게 시험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광야에서의 회개 선포”는 다름 아닌 이러한 불성실에 대한 회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의 충실함
그러면 이제, 우리 모두는 각자 개인의 경험 또는 우리 주변인을 통해 일생 신의를 지켜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와 새롭고 영원한 사랑의 계약을 맺기 위해 구세주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예레미아 31장 31-34절 참조)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새로운 계약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 모두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불어 넣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에제키엘 36장 26절 참조)
바로 그런 이유로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가 오심을 선포합니다. 이번에는 직접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약속을 지키시려고 오십니다. 우리가 마음 깊이 그분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새롭게 변화되어 하느님과 완전한 사랑의 통교를 이루며 확실하고 온전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 곧, 인간의 몸으로 육화되신 그분, 예수님 만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내적 준비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몇 가지 마음의 준비를 요구합니다.
1.“골짜기를 메우십시오”
우리의 낮아진 존재감과 낙담을 구세주에 대한 희망으로 메꾸라는 말씀입니다.
2.“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고르십시오”
우리의 우월감과 독선을 평평하게 고르고, 하느님으로부터의 지나친 독립적 자만을 깎아내리라는 말씀입니다.
3.“굽은 데를 곧게 하십시오”.
구세주 오심을 맞이하는 데 있어 “저는 너무 바쁩니다”와 같은 변명을 질책하시는 말씀입니다.
4.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십시오”.
죄로 인한 돌덩이 같은 장애물들을 말끔히 치우라는 말씀입니다.
위에 언급된 대부분의 요청은 고백성사를 통해 해결됩니다!!!
“고백 성사가 요즘 유행이 아닌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유행이나 시대 변천과 상관없이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세주는 사실상 2000년 전부터 우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어쩌면, 아직 당신의 생애 속에 강렬한 현존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당신에게 준비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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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세례자 요한, 그리고 바오로 성인과 함께 당신에게 간곡히 청합니다.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로마 13장 11-12절 참조)
부탁입니다! 소비주의, 습관적 향락, 분주함, 사소한 일들에 대한 근심 걱정 그리고 생각과 희망과 기도를 방해하는 모든 사상의 최면에서 깨어나십시오!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전 생애를 구원할 구세주를 보내 주시고 계십니다. 그분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아멘!


성찰의 질문
-광야의 삶을 살아본 적 있는가? 하느님께 불충실하지는 않았는가?
-우상숭배는 하지 않았는가?
-나의 구세주의 강림을 어떻게 준비하는가? 이 대림 시기에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변화해야 하는가? 골짜기를 메우는 것,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는 것, 굽은 길은 곧게 하는 것, 혹은 고르지 못한 길을 평탄하게 하는 것인가?
-고해성사 한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내 고해성사의 의도는 구원의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동기가 아닌가?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대림절 제2주일입니다. 복음에서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면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여기에서의 회개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돌아선다면 누구에게 돌아서는지 알아야 합니다. 또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복음대로 회개는 왜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회개를 해야 하는지 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용서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죠. 이 회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하겠지만 하느님을 알고도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무엇일까요. 저는 죄에 대해서 특정화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죄란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았음에도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자녀다운 행동을 하지 않았던 모든 것입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제가 언젠가 언급했던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용서, 받아들임입니다. 바로 이 두 가지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제일 실천하기 힘든 것이라 말하고 싶고 동시에 신앙인으로써 제일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자신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이유도 필요가 없이 우리들을 용서해주셨고 받아들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희생재물을 통해서 말이지요.


우리들은 하느님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얼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드러나는 말과 행동은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인지 의심이들 정도로 과격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상의 이분법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종교인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를 세운다고 외치기는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말과 행동과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2000년전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희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대림2주일을 보내면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앞서 저는 회개는 돌아섬을 의미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나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급기야는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용서와 받아들임을 실천하지 않아서 하느님과 멀어졌다면 다시금 하느님께도 돌아와야 하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셨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로마군인들과 자신을 팔아넘긴 모든 이들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해주시기를 청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청했던 기도가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기도인 것입니다. 타인을 바꾸기 위해서 행동하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께 그들을 받아달라는 기도 그리고 용서해달라는 기도, 더불어 하느님의 정의를 세운다는 말로 자신의 말은 진실이다. 라고 말해온 우리 자신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왜냐하면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자신이 빛이 아니라 빛이 오는 길을 준비하는 이
내 자신이 빛이 되고 싶고
주인공이 되고 싶은 유혹 앞에서
겸허히, 그리고 겸손히 주님의 길을 마련한
세례자 요한의 삶을 새겨 봅니다.
어느때 보다
겸허히, 겸손한 마음의 삶이 증거가 필요한 시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All flesh shall see the salvation of God.

 

 

마음의 길

      키엣 대주교님

로마제국 황제 티베리우스와 황제의 대리인 유다 총독 빌라도, 헤로데와 그의 동생 필리포스, 사제인 한나스와 그의 사위 카야파,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입니다. 그들과 대조되는 억압받는 노예신분의 유다인들, 그들은 권력자들보다 더 권위 있는 모습으로 구세주께서 왕림하시어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조용히 우리 마음 속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열어놓아야합니다. 주님이 인도하는 그 길을 가는 사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권력자가 아니라 왜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을까요? 거대한 구원의 사업을 왜 한 나라의 수도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시작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업을 말씀하셨지만 권력과 욕망에 미혹된 그들에게는 주님의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적하고 조용한 광야에서 오직 기도만 하던 세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간절히 열망하였기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겸손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권력자들은 화려한 궁전에서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향락에 빠져 오만하였지만 세례 요한은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황폐한 광야에서 마음의 덕을 쌓고 기도만 하는 겸손함을 지녔고 메뚜기와 꿀과 자연이 주는 음식과 검소한 옷만 입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황량한 광야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찾는 겸손한 사람이었기에 주님께 선택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나를 선택해주시기 전에 내가 먼저 그 길을 가야만이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심의 길은 “자신과의 투쟁의 길”입니다.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을 듣고 그 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헛된 권세와 오만한 삶을 버리고 자신과의 격렬한 투쟁을 하며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길은 마음입니다. 물질적인 길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길을 바꾸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자만과 오만의 산 위에 올려놓았던 마음을 보잘것없는 가치로 여겼던 산 아래로 내려놓으려면 처절한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만과 오만을 잘라낸다면 그 고통도 견딜 수 있습니다.
삶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폭주의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멀리가면 갈수록 마음은 점점 비어만 가고 돌아오는 길은 그만큼 멀어집니다. 대림주간을 맞이하여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회개와 참회의 마음으로 주님 곁에 다가가야합니다. 영혼의 죄를 씻고 참회하고 마음의 길로 들어가야만이 새로운 영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속삭임을 듣는 침묵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주님을 따라 겸손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미 그 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과 멀어지고 굽은 길에 있기에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없을 뿐입니다. 굽은 길이 곧아지고, 거친 길이 평탄하게 되는 그 날이 오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의 길, 마음의 길로 가기위해 어떤 투쟁이 필요합니까?
2. 나의 마음의 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꽉 막힌 도로위에 경적소리가 가득한 도로 위에 갇혀 있습니까? 아니면 작은 바람소리조차 들을 수 있는 한적한 시골길에 있습니까?
3. 나의 마음의 길은 어디를 고쳐야 주님이 계신 그 곳을 볼 수 있습니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전례의 주제는 우리에게 오시는 구세주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회개’이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주시는 구원은 어떤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마음 자세를 온전히 새롭게 바꾸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자신의 순수성을 되찾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모두 필요로 하는 구원이다. 구원에 이르는 첫 단추는 바로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변화하는 것으로 하느님 앞에 회개라고 할 수 있다.

 

바룩 예언자는 참된 회개는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바룩 5,7) 되게 하는 데 있다. 즉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맞아들이고 모시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없애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5,7) 나아갈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우리가 머무르는 삶이 될 때, 참된 해방을 알게 되고 또한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카 3,1-6: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 복음은 좀 지나칠 정도로 개개 인물들을 역사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의 신학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께서 이러한 보편적인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이제 그분이 역사의 중심이며, 역사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보편적인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6절)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주님의 오심에 대비하여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적 쇄신을 의미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내적 쇄신을 실현하는 성사적 행위를 수행하였다. “그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3절). 이 세례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회개’를 불러일으켰고, 그 마음의 회개는 ‘물’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되었다. 여기서 물은 인간을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해주며 하느님으로부터의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어서 “주의 길을 마련하여라.”(4절)는 것은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윤리적 차원에서의 큰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낮아져야 할 산들은 바로 복음 첫머리에 말한 티베리우스, 헤로데 그리고 다른 정치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이기주의, 특권의식, 권력의 남용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메워져야 할 ‘골짜기’들과 ‘언덕’들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불신과 실망과 낙담과 운명론과 체념에 빠져있는 태도를 말한다. 즉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께서 임하실 수 있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비우고 내적으로 모든 면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윤리적인 면에서 항상 새롭고도 신선함을 갖추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영원한 과제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에 장애를 가질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가운데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당신이 시작하신 ‘훌륭한 일’을 완성하실 수 있다. 이러한 완성은 이렇게 순화된 영적 감각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신앙인은 이 순화된 영적 감각을 통하여 ‘선’을 알고 행할 뿐 아니라,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사랑과 정의 안에 계속해서 성장해 갈 수 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립 1,10-11)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날’을 두 번(필립 1,6.10)이나 반복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날에 우리는 우리의 성덕과 정의의 결실을 내어놓아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림은 항상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미 구원에 다가서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는 높은 언덕들인 이기주의나 특권의식 또한 권력의 남용 등, 골짜기들인 실망과 좌절 그리고 우리 사이의 불신 같은 것을 없애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준비와 사랑의 실천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더욱 우리의 삶을 하느님 안에 살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시간 속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바룩 5,1-9)는 바빌론 유배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합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시온”(이사 60,14)인 예루살렘을 아내로, 하느님을 남편으로 상징합니다(1-4절: 이사 54,4-8). 또한 바빌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을 자녀로, 예루살렘을 어머니로(5절: 이사 54,11-13), 하느님을 자녀를 단련시키고 보호하시는 아버지로(6-9절: 신명 8,5) 묘사합니다. 남편을 저버린 아내인 예루살렘과 아버지를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끌려가 슬픔과 재앙 때문에 탄식하고 있는 상황에서도(이사 50,1-3)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극진한 사랑에 대한 배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시지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공경을 요구하는 것(말라 1,6)과 같고, 어머니가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없듯이(이사 49,15)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유배생활은 아버지(하느님)와 어머니(예루살렘)가 자녀(이스라엘)를 팔아넘겼기 때문이 아니라 불러도 대답이 없었고(이사 50,1-2), 비틀거리게 만드는 술잔을 바닥까지 마셨기 때문에 인도해주거나 손을 붙잡아 주는 자가 하나도 없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이사 51,18).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비둘기처럼 돌아올 때에(호세 11,11)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입고 간 고통의 옷을 영광의 옷으로 바꿔 입히실 것입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은 온갖 향기를 뿜어낼 것이며,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 불릴 것입니다. 바룩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해방과 기쁨의 약속을 전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경건함에서 비롯되는 예배를 먼저 요구합니다.

복음(루카 3,1-6)은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실 분이 오심을 알립니다.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15년째 다스릴 때(서기 28-29년),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있을 때(서기 26-36년) 활동했습니다. 또한 헤로데와 빌라도의 동생 필리포스와 리사니아스가 갈릴래아 주변의 영주로 있을 때라면서 로마제국의 정치적 배경을 소개합니다. 갈릴래아와 페레아를 통치했던(기원전 4년-서기 39년) 헤로데 안티파스는 백성에게 해마다 200데나리온(200일 품삯)을 세금으로 바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래아와 페레아 사람들은 혹독한 가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필리포스는 시리아의 국경과 인접한 북쪽지방(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의 영주로 있다가 후계자도 없이 죽었고(기원전 4년-서기 34년), 리사니아스는(36년 사망) 이투래아의 동쪽과 다마스쿠스 북서쪽(아빌레네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많은 특권을 가지고 유다교를 관장했던 대사제 한나스와 그의 사위인 대사제 가야파를 들먹이면서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적 배경을 말하고자 합니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성령)으로 충만해진 세례자 요한(1,80: 28-29년경)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면서 자신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도록”(1,76)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로부터 편안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장애물을 없애려고 미리 온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외치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그분이 이루실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자기 사명을 다 마칠 무렵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사도 13,25)고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서(40,3-5)를 인용하면서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광야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의 속삭임(부르심)을 듣는 장소이고(호세 2,16), 하느님의 말씀에 젖어들기 위해 단련하고 정화하는 곳이며(신명 8,2-5), 새 계약을 맺는(구원이 베풀어지는) 곳입니다(이사 43,19). “소리”는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만백성이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내고, 골짜기는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낮추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이사 40,3-5). 토목사업이 아니라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이사 49,8-11; 57,14-21).

제2독서(필리 1,4-6.8-11)는 필리피 공동체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칭찬입니다.
바오로가 필리피 공동체에 대해 지니고 있는 애정과 관심, 칭찬과 감사, 그리고 바람을 말하는데, 공동체가 물질적으로는 물론 영적으로도 늘 바오로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가 복음을 전한 공동체들 가운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이사 43,4; 예레 31,20) 할 정도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기억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 사도에게 엄청난 기쁨을 주는(1,18.25; 2,2.17-18; 3,1; 4,1.10) 필리피 공동체를 바오로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실 정도의 사랑과 같은 애정으로 그리워한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 가지를 깨달았던 필리피 공동체의 열심과 희생, 그리고 복음 선포를 위한 적극적인 후원을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공동체가 자기를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인간적 친분 때문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업적(하느님중심적)이라고 합니다. 필리피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역동성에다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고 산다면 바오로가 헛되이 달음질했거나 헛일을 한 것이 아닐 것이며, 감옥에 있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뵙게 되는 날에 필리피 공동체를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2,16) 합니다. 필리피 공동체가 말씀에 대한 지식과 넓은 아량으로 더욱더 풍부해지고, 분별력까지 갖춘다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신앙인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예루살렘 공동체(바룩)와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들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된 필리피 공동체(바오로)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극진한 사랑으로 보살펴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배반한 예루살렘 공동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려면 바오로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된 필리피 공동체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젖어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려면 복음에 대한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다가오는 하느님의 구원(예수님의 탄생)을 보려면 자신의 말과 행동 사이에, 자신과 이웃 사이에 남아 있는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의로움으로 자기 마음을 채우고 미움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길을 곧게 하고 평지로 만들라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보기 위해 그리스도중심적인 신앙생활의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이사 42,16).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뿐이고(요한 14,6), 그리스도께 대한 앎이 깊어져야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요한 17,3). 새롭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나, 그리고 이웃과 나를 서먹서먹하게 만드는 깊은 응어리를 풀어내고, 잘못 알고 함부로 판단했던 것에서 벗어나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일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실현해야 할 사명입니다. 먼저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깊은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폭력과 권력과 금력으로 험악해진 상황에서도 잘 살펴보고, 좋은 길이 어디냐고 물어 그 길을 걷고, 우리 영혼이 쉴 곳을 찾아야 합니다(예레 6,16). 자기 편리만 앞세워 내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공평과 사랑에 바탕을 둔 정의를 앞세워야 합니다. 힘이나 돈이면 다 된다는 그릇된 생각은 물론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막아버리는 높은 장벽을 허물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모든 이가 밝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험한 길을 고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쁜 마음으로,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오늘은 울면서 뿌릴 씨를 들고 갔다 할지라도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올 수 있도록(시편 126,6) 공평과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대림2주일에 교회는 특별히 인권을 위해 노력할 것을 권고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인권”이라는 말은 16세기 스페인 살라망카대학 교회법 교수였던 도미니꼬회 수사 비토리아의 프란치스코 신부에 의해 쓰이기 시작합니다. 남미 원주민들에 대한 스페인 정복자들의 만행을 비난하면서 인권은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인간이 마음대로 박탈하거나 짓밟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엔 본부에 비토리아의 프란치스코 신부의 흉상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 희망, 기쁨, 회개, 사랑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새날 밤마다 잠깨면 일어나 우선 바라보는 하늘의 별입니다. 초겨울 하늘의 별은 유난히 총총히 빛납니다. 대림2주일 역시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바라봤을 때 떠오른 24년전 별이란 시였습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노래한 기도시입니다.

 

우리만 주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그 이상으로 우리를 그리워하고 사랑하십니다. 우리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로, 수호천사 별로 떠올라 언제나 우리 광야 인생 여정을 비춰 주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결정적 역사의 시점에 광야의 요한에게 떠오른 주님의 별이었습니다. 흡사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 둘이 "깨어 살라!" 촉구하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별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 시작을 보면 티베리우스 황제를 비롯하여 5명의 역사적 실제 인물이 나오는데 바로 요한의 출현이 우연이 아닌 하느님 섭리의 필연적 역사적 사실임을 알립니다. 때가 되자 말씀의 빛나는 별이, 광야의 요한에게 떠오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렸다’

결정적 순간의 장면이 아름답고 신선한 충격입니다. 그대로 대림의 광야 여정중인 우리의 체험처럼 생각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요한의 출현은 대림 광야 여정중의 우리에게 참 깊은 깨우침과 가르침을 줍니다.

 

광야 여정하니 문득 2014년 안식년중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 생각납니다. 대림의 광야 여정 역시 우리 인생 여정을 요약합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중 목적지 산티아고에 가까워질수록 기쁨이 더해지듯 우리의 인생 광야 여정 역시 주님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날로 기쁨이 더해짐을 은연중 느낍니다. 아, 대림의 광야 여정은 귀가 여정으로 바로 죽음 준비를 위한 주님의 자비로운 배려임을 깨닫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교회 전례의 아름다움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전례 은총이 광야 여정중인 우리 삶을 날로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합니다. 지난 주에 이어 아침 성무일도 세 후렴의 아름다운 가사와 곡도 잔잔한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시온산은 우리 힘과 피난처이니, 구세주는 그의 성과 보루가 되리라. 성문을 열라.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도다. 알렐루야.”

“목마른 자는 물있는 데로 가거라.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를 찾으라. 알렐루야.”

“보라, 우리 주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알렐루야.”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 대림 제2주일 하루도 끊임없는 기도노래로 바치려 합니다. 이런 교회의 전례 은총이 광야 여정중인 우리를 ‘알렐루야’로 시작해 ‘알렐루야’로 끝맺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별처럼 아름다운 주님 찬미로 시작하여 주님 찬미로 끝나는 알렐루야 광야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광야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대림시기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주님을 기다렸다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림의 날입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주님 명령에 응답하여 아름다운 대림 광야 여정이 되기 위한 네 구체적 처방을 제시합니다.

 

첫째, 희망입니다.

대림의 희망입니다. 대림의 광야라지만 희망의 빛이 환히 길을 비춥니다. 우리가 가는 대림의 여정은 바로 영원한 도반,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자 희망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여정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바룩 예언자는 우리 모두 희망의 옷으로 갈아입을 것을 권합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교회요,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 하나하나입니다.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예루살렘아, 하느님에게서 오늘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예루살렘아,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어디서나,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고,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보아라.”

 

얼마나 고무적인 희망찬 말씀인지요! 한마디로 희망으로 빛나는 옷을 입고, 관을 쓰고 동쪽으로 눈을 돌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형제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빛나는 희망의 옷을 입혀 주시고, 희망의 관을 씌워 주십니다.

 

둘째, 기쁨입니다.

대림의 기쁨입니다. 대림의 희망에 저절로 따라오는 대림의 기쁨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 맞이하는 기쁨입니다. 바룩 예언자의 말씀이 우리의 기쁨을 배가합니다. 기쁨의 예언자 바룩입니다. 외적 환경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샘솟는 기쁨입니다. “주님이 큰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도 이를 입증합니다. 우울이나 심각함은 결코 영성의 표지도 아니고 하느님께 모독이 됩니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숲들도 온갖 향기로운 나무도,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드리우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바, 미사은총을 가득 받는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대림 광야 여정을 축복해 주시는 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기쁨의 예언자 바룩에 이어 기쁨의 사도 바오로가 옥중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필리비 교회 신자들은 물론 대림시기를 지내는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의 축복의 기도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 만날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성탄을 앞둔 대림만이 아니라 죽음도 이렇게 기쁨으로 맞이했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셋째, 회개입니다.

특히 대림은 회개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요한입니다. 우리의 세례를 늘 새롭게 하는 회개와 용서입니다. 바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이며 그분의 길을 곧게 하는 회개의 구체적 실천입니다. 이사야의 주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전하는 요한의 주님 말씀이 그 구체적 상징적 처방입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바로 이것이 회개의 혁명, 피흘리지 않는 사랑의 혁명입니다. 우리 사이의 불평등으로 깊어진 골을 메우는 것이며, 교만의 산과 언덕을 겸손으로 깎아 낮추는 것이며, 거짓과 위선, 허영과 왜곡으로 굽은 길은 곧게 하고, 불화와 불평불만으로 거친 길은 평화와 안정의 평탄한 길로 바꾸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모든 피조물, 모든 중생,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봅니다.

 

그대로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절망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당신께 마음을 연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진정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일에 참여하는 우리의 회개의 실천입니다. 바로 회개의 구체적 실천은 대림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새삼 대림시기 역시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실천해나가야 할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넷째,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회개의 열매가 사랑과 겸손입니다. 무엇보다 오실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주님 기다리는 그리움의 설렘에 잠깨어 쓰는 날마다의 강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랑이 감동스럽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이처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남녀의 성적 사랑을 초월한 보편적 형제사랑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형제들을 사랑하는 바오로인지요! 바로 다음 말씀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필리비 신자들을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순수한 아가페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사랑의 결정체’같은 말씀입니다.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 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때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런 사랑 충만한 대림 광야 시기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바오로의 말씀에 그대로 공감하니 강론을 쓰는 제가 흡사 바오로가 된 기분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회개한 영혼들에게 선사되는 겸손, 지식, 이해, 분별의 지혜등 풍부한 축복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광야의 대림시기, 우리의 영원한 도반 이신 희망의 주님을, 기쁨의 주님을, 회개하게 하는 주님을,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여 열렬히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행복한 대림 광야 여정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평화,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새날,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아멘.

 

 

 

메우고 고르며 새로움을 찾아가는 회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절은 삶의 진정한 목적지인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시기이며, 예수님의 온유와 연민을 나누는 때입니다. 이 시기를 어떻게 잘 보낼 수 있는지 요한 세례자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3,3).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며 회개하지 않고서 희망이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세상의 흐름이나 사회 체제와는 상관없이 오시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려고 아무것도 의지할 데 없는 광야로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힘에 의존하여 오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도 의지할 데 없는 광야로 나아가 내 마음과 세상 한복판에 그리스도께서 자리잡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모습입니다.

광야는 언제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사랑의 정원입니다. 이 광야는 내가 넘어야 할 산이고 올라야 할 언덕이지만 내가 사랑해야 할 나의 자아이기도 하며, 불공평과 불의, 고통과 시련, 차별과 갈등이 있는 사회 현실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어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게 하며, 굽은 데는 곧게 하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라고 외칩니다(3,4-5).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의 오심으로 모든 게 뒤집히고 새로워짐으로써 모든 이가 하느님의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3,6). 겉모습, 익숙한 환경과 습관, 현세적 성공과 물질, 편의에 젖은 우리에게 광야는 외면하고 싶은 낯설고 불편한 현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익숙한 삶의 자리를 떠나 광야로 가야 합니다.

대림시기에는 의식과 행동방식, 언어습관을 대수술해야 하는 때입니다. 대충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뒤집어 바꿔야 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자비에 목숨을 걸고’ 믿어주며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서로를 가르는 불신의 골짜기는 메워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교만, 불평불만, 근심 걱정, 미움과 같은 산과 언덕들을 품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온유한 마음을 지닐 때 이런 언덕들이 낮아질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모든 이를 섬겨야 하고, 부유한 이들은 탐욕을 버리고 가난한 형제자매들의 한숨 소리를 마음으로부터 들으며 나눔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계층 간의 위화감은 더욱 깊어지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상대적 빈곤감과 고통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말뿐인 형제애는 씁쓸함만 안겨줍니다.

또한 깨끗하고 순수한 눈길, 긍정의 눈길, 그 어떤 경우에도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 등을 통하여 우리 안의 ‘거칠고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기 위해 지식과 이해로 사랑을 풍부하게 해야겠습니다(필리 1,9-10).

이제 주님께 되돌아가기 위해 침묵 가운데 내 안의 골짜기, 높은 언덕, 굽은 곳, 거친 길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여 새롭게 뒤집어 바꿔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되돌아갈 때 인간이 얼마나 존귀하고 자유롭고 평등한지 알아차리게 되고, 순수하고 사랑 지극한 마음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하여 이웃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여 서로를 존중하고 섬김으로서 모두가 살맛나는 새 세상을 이루어가야 할 때입니다.

 

 

 

오늘같이 행복한 날은 없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놀체인양업’축제의 날이자, 후원의 날이었다. 봉사자분들로 넘쳐난 행복한 날이었다. 행사가 끝나는 시간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안과 밖에서 서로 협력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의 시간이었다. 
특별히 봉사자분 중에 낯모르는 분이 한 분이 있었다. 처음 보는 분이었다. 그분은 행사 처음 시간부터 손님이 다 떠난 뒤 뒷정리까지 봉사하고 있었는데 친구 따라 나섰다고 했다. 모두가 그의 봉사를 보고 감동했는지 나에게 찾아와 넌지시  이런 분이 있다고 귀띔해 주고 있었다. 확인차 찾아냈는데 주방 마무리 정리를 혼자 하고 있었다. 봉사는 이렇게 하는 거야 하고 그분은 우리들에게 조용히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모든 신자분들이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알고보니 신자도 아닌 익명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우리의 오늘 축제는 어린이 스스로가 준비했었다. 아이들은 축제의 주제로 ‘못해도 괜찮아’로 정했다고 했다. 내용은 우리는 놀이를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고, 존중과 배려로 상생과 협력을 배웠다며 놀이로 행복하게 1년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담아 놓았다. 대단한 가능성의 어린이들이다. “내년에도 꼭 찾아 올게요” 기다림이 담긴 어린이들 마음 속에 행복이 있었다. 부모님이 힘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가정에서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고 여기지만 상대를 한 번도 바라보지 않고 내려다 보며 어린이들을 강제하고, 간섭하며 지시하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 명령자를 올려다 보는 어린이들은 힘이 부쳐 만신창이가 된다. 처다 보지도 않고 간섭하는 교육 풍토는 무성한 욕을 만들고 부모님까지 무시하게 만들고 있다. 경쟁교육문화가 서로를 불신하고 깔보고, 그러는 과정에서 어린이가 상처를 받고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려 미치도록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의 교육철학을 사는 아이들이 오늘 축제에서 무지한 어른들을 일깨우고 교육문화를 바꾸고 있다. 어린이들은 이를 축제에서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놀체인양업이 있어 한 해동안 행복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축제의 메시지는 확고하고 분명했다.
2022년 ‘놀체인 양업’의 전망이 밝다고 학부모와 선생님들이 입을 모았다. 어린이들의 입을 통해 외치는 우리의 교육철학이 사회적 공감대를 지닐 때 사회적 자본인 후원금은 놀체인양업에 자연스럽게 유입되리라는 기대를 한다. 오늘 1년을 산 또다른 보람과 희망의 즐거움을 잉태한 하루였다. 
봉사자 분들이 준비한 떡국이 맛있고, 떡복기가 맛있고, 어묵이 맛있다. 건물 밖 잔디밭에서 구워낸 힌떡구이, 쫀득이가 맛있다. 오늘 행사에 함께한 모든 분들, 특히 봉사자 여러분에게 감사하다. 모두 기쁘게 행복을 담고 헤어졌다. 성탄 축제를 앞당겨 한 느낌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축제 내내, 후원의 날 행사에서 하루종일 뵈올 수 있어 행복했다. 
예수님을 기다리며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소리를 듣는다. 교육의 길을 새로 냅시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4-6)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고,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전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광야에서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외친다고 해도 그야말로 광야는 아무것도 없이 척박한 땅이어서 어쩌면 아무도 듣는 이가 없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듯이 그 소리는 세상 속에 희망의 울림이 되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요 사도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광야 한 가운데에 나아가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복음선포가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허공에 떠도는 메아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울림은 하느님의 영께 전해지게 될 것이고 그 영과 함께 세상에 울려 퍼지게 되면서 다른 이들을 구원으로 이끌어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또 주님의 사도로서 봉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을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을 뿐더러 순교한 세례자 요한처럼 시련과 박해의 시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주님의 영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늘 그래왔던 것처럼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아직도 그 어려움은 끝이 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의 많은 봉사자들은 그 여려움의 시간 속에서도 진정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보이지 않는 곳,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주님의 사도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이루어 주셨음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광야와도 같은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입니다. 그렇게 사도로서의 여정에 임하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늘 함께하시길 기도하고 또한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함께 이루어지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기우 신부님

⒈ 대림 제2주일인 오늘은 인권주일입니다. 이 취지에 맞추어 대림 제2주간에 사회교리에 대해 알아보는 한 주간을 보냅니다. 대림 시기에 들려오는 성경과 전례의 언어들을 해석하는 코드는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우리가 그분을 맞이하는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점이 형식상으로는 메시아이시지만 내용상으로는 메시아 백성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메시아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⒉ 대북 안보와 경제 성장을 앞세워서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던 유신 독재 시절을 겪으면서 주교단에서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나타내는 현실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징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거룩하고 의롭게 변화시켜야 할 바를 그 징표로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인권이 유린되는 현실은 개선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권 보장은 인간 존엄성 실현을 위한 최소한도의 요구임을 사회에 대해서 주장하고 밝혔던 것입니다. 옛날 조상들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하늘의 뜻을 살폈다지만, 오늘날에는 세상의 현상을 복음 진리의 기준으로 관찰하고 판단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살핍니다. 그래도 점성술에 들어가던 정성과 천문관측에 요구되는 엄밀함은 시대의 징표를 세상의 현실에서 식별하는 일에도 그대로 필요합니다. 

 

⒊ 인권 유린을 처벌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일이 인권 주일을 제정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는 종교는 정치가 인권 유린을 방지하고 인권 보장을 하기 위하여 공동선에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공동선을 증진하는 것이야말로 인권이 보장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고, 이웃 사랑의 본령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랑이야말로 자선이나 사회봉사보다 더 차원 높은 애덕 실천입니다. 

 

⒋ 공동선에 대한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황금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말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정치에서는 정치 권력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부정한 방법으로 차지하려는 부정부패가 판을 칩니다. 그로 인해서 정치판이 더러워지고 정치 혐오가 퍼지며 급기야 정치 무관심이 일반화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는 더 이상 정화되지 못하고 더 부패하고 더 부정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세상살이에서 공동선이 필수이며 이 공동선을 위해서 정치 질서 또한 필수적이라는 이치를 깨닫고, 정치를 깨끗하고 정의롭게 하기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정치인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선출하거나 임명하는 심부름꾼, 즉 공복이며 정치의 주체와 주역은 국민임을 우리나라 헌법 제1조가 천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민이요 주권자인 우리는 이 나라 정치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지니고 정치 현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정치는 국민이 하는 것이고 그 수단은 선거와 투표, 그리고 여론 형성입니다. 

 

⒌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는 인권 주일을 맞이하여 주권자요 국민이기도 한 신자들에게 깨끗하고 올바른 정치를 세우기 위한 세 가지 사항을 당부하였습니다. 첫째,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한 정치를 해야 합니다. 모든 부정부패는 소수를 위한 정치로 타락된 결과입니다. 그보다는 공정함과 정의로움의 가치를 정치가 구현하도록 정치적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과정이 공정하고 결과가 정의로울 수 있도록 정치가 노력해야 다수가 공동선의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⒍ 둘째, 갈라져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하고 모으는 정치를 해야 합니다. 하도 정치 세력들이 진영으로 갈라져서 정쟁을 하는 역사를 보아온 지 오래입니다만, 각 세력의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한 정쟁을 멈추게 하고 국민의 공동선을 위한 토론과 경쟁을 하는 정치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여전히 구태에 물들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 정쟁을 일삼고 부정부패한 정치 세력이 이런 개혁을 거부한다면 선거에서 투표로 심판해 주어서 정치 수준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이 책임이 정치의 주체인 유권자에게 있습니다. 

 

⒎ 소수 부유한 이들의 기득권을 옹호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정치를 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중산층이 정치의 우선적 관심사가 되어야 공동선의 질서가 안정될 수 있고 나라가 튼튼해집니다. 사회적 조건에 상관없이 국민 누구나 인간다운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고, 각자가 능력을 발휘하고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하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세상에 봉사할 수 있도록 정치가 그 조건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⒏ 이상 공동선을 위한 정치의 조건 세 가지를 전국 신자들에게 주교단에서 당부해 온 데 이어서, 전국의 사제 및 수도자 1천 명이 더욱 구체적인 조건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들은 첫째로 검찰 개혁을 촉구하였습니다. 검찰은 사회적 범죄를 처벌하고 인권을 보호함으로써 정의를 수호하라는 준사법기관입니다. 그런데 역대 정부에서 검찰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소홀히 하고 권한을 남용해 왔습니다. 사건을 조작해서 무고한 국민을 간첩으로 내몰고 멀쩡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인생을 망치게 만들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욕망을 위해 약자들을 괴롭혔던 강자들의 죄를 가려주고 치워주는 범죄의 세탁부 또는 청소부가 되었던 흑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있습니다. 

 

⒐ 둘째로 언론이 국민에 대한 책임을 자성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국민이 주권자로서 나라의 정치에 주인으로서 참여하려면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이 여론에 따라서 선출되거나 임명된 공직자들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여론 형성의 임무는 언론의 몫입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도하고 그 가운데에서 진실을 가려내어 국민의 여론 형성에 일조해야 할 언론이 가짜 뉴스를 보도하거나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해서 보도하는 바람에 우리나라 언론의 신뢰 지수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선출되지도 않고 임기도 없는 권력처럼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언론의 자세가 뜻있는 국민들의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⒑ 셋째로 사법부의 책임 또한 엄중함을 비판하였습니다. 재판의 공정성을 믿지 않는 국민이 많고, 판사의 선택적 양심으로 피해를 입는 국민이 늘고 있습니다. 국민의 법감정에도 미치지 못하는 판결에는 국민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법은 상식의 최소한일 뿐입니다.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도록 사법부가 거듭 나야 합니다. 

 

⒒ 이렇듯 인권 주일에 들려온 정의평화위원회와 사제 및 수도자들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입니다. 예언자의 직무는 올바른 정치를 지키는 종교 파수꾼의 역할입니다. 공동선의 중심은 인간의 존엄성이며, 이를 위한 세부적이고 실무적인 정책은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가 해야 할 일이지만,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규정하는 최고선의 가치를 수호하는 일은 종교 본연의 역할입니다. 일찍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는 회칙 ‘지상의 평화’를 통하여 모든 인간 사회에서 구현되어야 할 최고선의 가치를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로 정리했습니다. 건물로 치면 네 기둥이라 할 만한 이 가치들이 사랑으로 행해져야 하며, 이것이 교회가 선포해야 할 사회적 복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⒓ 끝으로, 대림 제2주일인 이 인권 주일에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을 상기합니다. 제1독서에서 바룩 예언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루살렘아,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전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그리고 이런 지향을 바탕으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⒔ 사회적 사랑의 네 기둥인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이끌어주는 진리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권고하듯이, 우리 모두가 가톨릭 사회교리가 가르치는 최고선의 가치들인 이 네 가지 사회적 사랑과 공동선의 중심 가치인 인간 존엄성에 대하여 더 잘 아실 수 있도록 사회교리 주간인 이 대림 제2주간 동안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준비는 ‘모든 이’를 향한 구원의 ‘차별 없는 포용’을 깨달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루카 3,8).
그 시절, 이방인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로 각인된 이스라엘 선민의식의 기원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는 그들이 한때 ‘차별받고 억압받는 이방인들’ 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큰 민족’의 시조가 된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고(창세 12,1-2), 하느님의 분부대로 집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갔으며, 야곱은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이집트로 내려가 이방인으로 살다가, 거기에서 큰 세력의 민족이 되었습니다(탈출 1,1-7).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오랫동안 종살이를 한 뒤에 40년 동안 떠돌다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영광스러운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한편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또한 이집트에서 난민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형제로 대하며 차별 없이 포용해야 할 이유는 이처럼 ‘이민과 유배라는 힘든 시련이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역사의 근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교황청 이주사목평의회 훈령 [이민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14항] 참조).
이스라엘처럼 이민과 유배라는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우리 민족에게도 이주민들을 대하는 배타적인 정서는 여전히 극복해야할 문제로 보입니다. 국제결혼 이주자와 같이 법적으로 국민의 일부로 받아들여진 이주민들에게는 다소 호의적인 정서를 갖지만, 법적 체류기간을 넘기고 체류하고 있는 ‘미등록 외국인’들과, 난민 지위를 신청하였으나 인정을 받지 못해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임시 체류하고 있는 ‘인도적 체류자’들에 대한 정서는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자국민이 우선이다.”라는 일부의 주장이 이주민들을 향한 적대적인 구호로 바뀌는 경향은 우려스럽습니다.
인권주일을 맞아 우리 사회에 이방인으로 소외된 이들은 없는지 되돌아봅시다. 이 세상에서 차별과 불평등을 없애고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는 이사야서의 외침,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외침입니다.

 

 

 

사울의 상승과 하강 : 우리에게 성공과 실패는 무엇일까
      이나미 리드비나(서울대학교 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
도덕적 혼란과 외침(外侵)의 와중에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은 원래는 제사장들뿐 아니라 부모님께 순종하고 성실하며 겸손한 멋진 청년이었습니다. 용기, 애국심, 관대함까지 다 갖추었지요. 하지만 왕이 된 다음부터는 전쟁과 내분을 거치면서 성품이 조급해집니다. 제사장만 드리는 제사를 함부로 지내는가 하면, 자기를 내세우고자 기념비를 세우기도 합니다. 당연히 상황은 악화되어, 스스로에 대한 회의와 낮은 자존감으로 새 지도자 다윗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우울증 환자가 됩니다. 상대를 깎아내리는 질투는 오히려 자기를 파괴하는 내면의 악령이기 때문입니다.
선하고 멋진 리더가 승승가도를 걷다가 교만해지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충고에 눈과 귀를 닫고 추해지다가 고꾸라지는 모습은 자주 접하는 인생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심을 잃지 마라.”는 조언도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하지 못한다.”라는 속담도 있겠지요. ‘나는 달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리는 사람을 무섭게 변화시킵니다. 돈과 명예가 많고 높을수록, 진실함보다는 무언가 이용할 거리가 있을 거라는 계산만 앞세우는 소인들이 더 많이 꼬입니다. 어떡하든 이익을 챙기려는 아첨과 거짓된 이야기만 계속 듣다 보면 참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리더가 바보일수록 주변인들은 나쁜 짓을 더 쉽게 하고, 리더가 고립될수록 더 훌륭하고 정직한 인재들이 배제되니, 제 살길만 챙기는 것이지요. 시간이 그리 흐르다 보면 지도자들은 결국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거듭하다 세속적인 힘은 물론 영혼과 육신의 생명까지 잃게 되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사울, 다윗, 삼손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의 일생이지요.
심리학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외면적 조건들이 워낙 좋다 보면 자아가 풍선처럼 팽창되어(ego inflation), 자신에 대한 비현실적인 과대평가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바람이 빠지거나 빵 터져 버리는 결과에 대해서는 상상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자기 그릇에 비해 감투가 너무 크다 보면 퇴행하고 있는 내면을 부정하기 위해 스스로를 왕, 지도자, 현자, 심지어는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합니다. 한 번 명예로운 직역에 종사하게 되면 사람들이 영원히 자신을 그 직역으로 대우해 주길 바라기도 합니다.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persona)에 매달리는 것이지요. 어딜 가든 그 껍질을 쓰고 대접을 받겠다는 태도는 사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이라는 뜻과도 같고, 가면 뒤의 얼굴을 숨기고 싶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젊을 때 부자도 되고 싶고, 명예도 얻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생의 목표가 성공 그 자체에서 멈춘다면 성공 이후에 사울과 같이 외롭고 힘든 삶을 보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어떤 자리도 영원하지는 않으니까요. 무슨 일을 하건, “나”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 사울을 반면교사로 삼아 돈과 명예가 품고 있는 독과 병증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저물어 땅거미가 질 때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고층 건물로 막혀 있는 도시에서 매일 1분이라도 저녁노을을 관조하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일레인 세인트 제임스의 책 《Simplify Your Life》은 ‘인생을 복잡하게 살지 않는 100가지 방법’ 중 83번째 방법으로 저무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잠깐만이라도 저녁노을을 보노라면 지금 고민하는 문제가 별로 심각하지 않아 보인다.” 
요즘과 같은 코로나19 시기에 저는 저녁노을이 질 무렵 사람을 피해서 한강 둔치를 걷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쪽 하늘을 향해 걷다 보면 삐쭉삐쭉 가지를 치고 줄지어서 있는 미루나무 너머로 하늘은 진한 땅거미로 바뀌어 갑니다. 땅거미가 지는 황혼(黃昏)은 ‘누를 황’에서 ‘어둘 혼’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시간이며, 인생의 길이도 깨닫는 시간입니다. 
루카 복음 마지막 장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는 두 제자가 겪은 사건을 말합니다. 한 스타디온이 185m이니까 이 마을은 11km 떨어져 있었겠지요. 걸어서 3시간 거리입니다. 이때 낙담한 채 걷던 제자에게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걷고 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저물어 황혼으로 넘어가려는 때 그분에게 함께 묵자고 청했습니다. 그 시기에 예루살렘은 해가 7시쯤에 지니까 그들은 4시쯤 예루살렘에서 출발했고, 도중에 그분이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은 5시 조금 지났을 때였을 겁니다. 이 세 사람은 어떤 이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서서히 어두워지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어둠이 깔린 집에서 두 제자는 그분과 함께 묵게 되었고, 함께 빵을 뗀 그때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들과 함께 걸었고 말을 나누었고 함께 식사한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그 집에서 묵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어둠의 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자정쯤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그 감동의 사건을 다른 제자들에게 증언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 마음이 몹시 무거워진 지금, 오늘도 서쪽 저녁노을 바라보며 땅거미가 질 때까지 계속 걸어야겠습니다. 그러면 황혼을 지나 어두움이 깊어지는 그 길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함께 걸으시며 나를 크게 위로해 주실지 모르니까요. 어둠은 어둠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셔서 함께 해주실 시간입니다. 그러니 잘 참고 기다려야지요.

 

 

 

판교 신혼부부, 당신 멋져! 
      이원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LAB2050 대표)
“당신 멋져!” 입에서 이런 말이 절로 튀어나왔습니다. ‘판교 신혼부부’라는 유행어에 대한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였습니다. 네, 집값·땅값이 많이 올랐다는 경기도 성남의 판교입니다. 돈 잘 번다는 기업들이 즐비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에 사는 신혼부부는 우리 사회에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모두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아마 이 부부는 둘 다 멋진 벤처기업에 다니는 것 같습니다. 어쩐지 주식이나 스톡옵션도 두둑이 받아 부자 대열에 들어섰을 것 같습니다. 비싼 아파트도 소유하고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신혼부부가 사기는 어려운 가격입니다. 그러니 양가 부모님도 부유한, 유복한 가정인 것 같아 보입니다. 그 집에는 세련된 유럽풍 가구가 가득할 것 같고요. 그 부부는 음식도 유기농이나 친환경만을 고집할 것 같고, 요가나 헬스를 즐기며 건강도 잘 챙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설명을 좀 더 듣다 보니, 이제는 아파트에 사는 신혼부부들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네요. 타운하우스에 살아야 한다고요.
그렇지요. 취직해 월급을 타면 집 가진 사람들이 제 앞줄에 서 있습니다. 허덕이며 빚내어 집을 사고 나면, 주식과 스톡옵션 가진 이들을 쫓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들마저 따라가고 나서도 건물주가 되어야 할 것 같아 초조합니다. 판교로, 대치동으로, 압구정동으로 뛰어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 멋져!”라고 외치려다가, 조금 씁쓸해졌습니다. 요즘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느껴져서입니다. 좀 더 많은 돈을 벌고, 좀 더 많은 재산을 갖고, 좀 더 좋은 물건을 사서 쓰는 데에 너무 매달려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오늘은 인권 주일이고, 사회교리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사회교리의 핵심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 제2주일이기도 하네요.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면, 판교나 대치동보다는 서울역 뒤편 동자동 쪽방촌이나 반지하 방이나 고시원이나 소멸되어가는 농어촌에 먼저 오시지 않을까요?
참, 생각해 보니 “당신 멋져”에는 다른 뜻도 있습니다. ‘당당하고, 신나고, 멋지게, 져주자’입니다. 한동안 건배사로 유행했던 이야기이지요. 올해 연말에는 이 건배사를 외치면서, 가난한 사람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쪼개, 쪽방촌과 고시원에 사는 분들을 위해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마음을 비우며 기다리는 것
      왕승수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은 ‘인권 주일’이며 ‘사회교리 주간’이 시작되는 날이다.
모든 신자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총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제3편에 해당되는 사회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교회 정신에 따라 살아가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지만 현실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기에 실망을 하게 되고 참된 행복과 기쁨을 놓치며  살아가기도 한다. 이런 우리에게 ‘사회교리’는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해준다.
26년 전쯤, 어느 본당에서 사목하던 시기에 제가 가끔 두통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할머니께서 ‘바셀린’ 한 통을 신문지에 곱게 싸서 가져 오신 적이 있다.
할머니께서는 저에게 바셀린을 주시면서 본인은 머리가 아플 때마다 바셀린을 머리에 바르고 성수 한 컵을 마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나아진다고 하며 저에게도 한 번 발라보라고 하셨다. 저는 이해가 안 되어 그 문제로 할머니와 티격태격한 기억이 난다.
평생 두통을 바셀린과 성수로 견뎌 오신 분에게 병원을 권유하는 내가 고집을 부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와 생각이 다르지만 상대가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면 설령 그것이 상식에 맞지 않더라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도 행복해지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
상식에 맞지 않더라도, 상대가 나의 뜻과 다르더라도 마음을 비우고 기다릴 줄 아는 것, 세례자 요한이 이런 마음으로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지 않으셨을까?

마음을 비우고 기다린다는 것, 이것은 쉽지만은 않다. 비우지 못하는 삶은 분수대로 살지 못할 때 교만으로 채워진다.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은 마음을 비우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겸손 자체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대림시기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 인권 존중이며, 이런 깨달음을 통해 행복과 기쁨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 사회교리 주간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 자세라고 생각한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대림 제2주일 2022년 주임사제의 교구장 사목목표 세부시행 계획(다해) 루카 3,1-6; ’21/12/05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 ‘복음화되어 복음화하는 친교 교회 공동체’
  우리 등촌3동 103위 한국순교성인 성당 공동체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초대 이철호 암브로시오 신부님을 비롯한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사목협의회원들과 소속 단체장님들 그리고 구역반장님들과 함께, 지난 26년간 복음화 사업에 매진하신 여러분의 환대와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사랑과 은총 안에서 함께 땀 흘리며, 주님의 위로 안에서 마음을 모아 수고 수난했던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며 주님께 더욱더 깊이 감사드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오늘 우리를 통해 우리가 사는 등촌3동 지역에 구체화되고 구현되고 있습니다. 2022년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 교회의 사명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교구장님의 사목목표에 따라 ’복음화되어 복음화하는 친교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자 합니다.
  새로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하시는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께서는 2022년 사목교서에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로 ‘복음화되어, 복음화하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자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올 한 해의 사목 주제어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라는, 교회의 선교사명을 일깨우는 말씀으로 선정하셨습니다. 
  우리 천주교회의 본질이자 사명은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선교사명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명에 따라 무엇보다 먼저 ‘선교와 복음화’를 이루고자 합니다. 선교는 내(우리)가 주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아 왔고, 또 지금 받고 있는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내(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고 있는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내(우리)가 주 예수님의 사랑을 이러 이렇게 받았다는 강렬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체험은 그냥 교리와 신앙감각으로 머릿속에서 막연히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 직접 피부로 느낄 정도로 선명하고 강렬하여 누군가에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진한 체험입니다. 그 체험을 언제 어떻게 느끼게 되었는지를 교리와 성경 말씀 공부와 교회의 전승을 통해 그 체험을 일깨우고 되새기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나 개인의 생애와 우리 공동체 차원에서 간직해왔던 주님과의 친교와 일치를 오늘에 되살리고자 합니다.
  세 번째, 주님 사랑에 대한 표현은 단순히 말로 그치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은 그 사랑을 형제자매들, 특별히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데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나눌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계속 나눌 수 있도록 몇 곱절로 채워주십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주님 말씀을 살아낼 수 있을지 모색해 왔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유혹이 뒤따릅니다. 그 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고 성실히 복음을 따라 신앙생활을 해 온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 노고를 주님께서 잊지 않고 하나하나 다 기억해 주시고 갚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마지막 날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보상에 걸맞지는 않지만, 현세에서도 뭔가 조그마한 보답을 해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 각박하고 무한경쟁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사회, 특별히 최근 코로나19 감염상황의 악화로 인하여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우리 신자분들에게 어떤 희망과 기쁨을 드릴 수 있을까 고안을 하다가 다음과 같은 기획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평월에 주일학교 미사와 교리와 주일학교 행사에 80% 이상 신실하게 출석하고, 겨울방학 때 (2박 3일로) 루카 복음 피정을 하고, 여름방학 때는 (2박 3일로) 루카 복음 연수를 하면서, 4년간의 신앙교육을 성실하고 신실하게 이수하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2026년 겨울이나 적절한 시기에 신앙교육 차원에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대상은 내년도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어린이부터 중3과 고3은 물론 교사들과 청년들까지입니다. 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매월 네 번째 주일미사의 2차헌금을 ‘청소년 사목 기금’으로 모금하겠습니다. 비단 4년 후의 이스라엘 성지순례뿐만 아니라, 지금부터 주일학교 수업의 질을 높이고, 방학 때 특강과 집중교육을 하면서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의 신앙을 고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신앙교육을 담당하는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지난 학기 평점이 B+이상이 되는 대학생 교사들에게는 봉사 장학금을 주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실손 가정의 증가와 그에 따른 악영향으로, '학대당하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사회상황을 신문방송에서 유난히 자주 접하며, '편부모와 (세 명 이상의 자녀를 둔) 다자녀 가정'에 매 학기 장학금을 주겠습니다. 
  요즘처럼 교회에서 일꾼을 구하기 어려운 시기에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목협의회원, 구역반장, 단체장도 4년 동안 주일과 대축일 미사에 80% 참례하고, 신자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2월 복음피정, 3, 4월 사순부활 특강[피정]과 판공성사, 5월 성모의 밤, 8월 성모승천대축일 고해성사, 9월 103위 한국순교성인 지도자 복음연수, 11월 구역별 잔치[연도대회, 성가대회, 복음구현대회], 대림성탄 특강[피정]과 판공성사)를 전부 다 수행하시면, (제주도나 해외) 성지순례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일반 신자분은 위의 자격기준에 추가로 한 해에 '예비신자 한 분씩' 모셔오면 됩니다. 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매월 두 번째 주일미사의 2차헌금을 ‘지도자 사목 기금’으로 모금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코로나19 감염상황이 안정되고 우리 모두 건강해야 하므로, 개인위생과 방역수칙을 잘 지켜 스스로 성숙한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성당에 회합하러 오거나 일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기도하러 오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면서 그 사랑에 취하고 감격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하면서 스스로 복음화되고, 형제자매들에게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지를 알리고, 이웃 특별히 어려운 이웃에게 그 사랑을 나누면서 주님께서 이루신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성당이 일과 봉사에 지쳐서 부담되고 꺼려지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 사랑 때문에 기도하고 싶고, 또 교우들끼리 서로 보고 싶고, 가고 싶고, 함께 주님의 말씀을 기쁘고 행복하게 실현하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하고 일하자!’라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본당의 모든 모임과 단체회합에서 일하기 전에 반드시 복음을 읽고, 복음해설을 훈화로 들으며, 주님과의 친교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과의 친교를 통해 지치지 않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신앙과 형제자매들과의 공동체 신앙생활을 영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해 제게 주신 권한으로,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강복해주시고 화목하고 평안하게 해주시기를 1년 내내 매 순간 기도합니다.

 

 

 

하느님 뜻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의 길을 마련한다는 건 곧은 길 즉 바른 삶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죄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 참 많던데 신법 말고 국법 교통법만 압니다.
국법 교통법규 어기면 죄인이 아니고 범법 위법자라고 해야지 않나요?

죄는 사람들이 판단할 일 아니고 하늘이 도덕적으로 할 판단이잖아요?
양심을 고쳐 바르게 산다는 건 하늘 뜻 그대로 산다는 말이 아닌가요?
하늘뜻이 하느님 뜻이고 하느님 뜻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인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믿는 다는 의미란 걸 잊지 맙시다.
요한에게 세례를 청한 모범인간 예수님의 행동에 깊은 감동 받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주교의 ‘이사야서 주해’에서 (Cap. 40: PG 24,366-367)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예언자는 이 예언이 말해 주는 일이 즉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이가 하느님의 구원을 알게 되는 것이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광야에서 일어나리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께서 나타난 바로 그 요르단 광야에서 구세주 하느님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때 역사적으로 또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어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그분 위에 내려오시고 당신 아들을 증언해 주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성부의 음성이 들려 왔을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모든 이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광야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옛적부터 험하고 가팔라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광야에 내려오시려 하셨습니다. 
실상 모든 민족들은 하느님의 의인들과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막아 하느님께 대한 지식이 광야처럼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 소리는 하느님의 말씀께서 오실 길을 닦고 주님이 오실 때 곧장 나아가실 수 있도록 그 길을 고르게 하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길을 닦아라.” 
곧 복음을 전파하고 새 위로를 전하라. 이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알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야, 높은 산에 올라가라. 예루살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야, 힘껏 소리질러라.” 
앞에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제 예언자는 이 말씀을 통해서 복음사가들을 예시해 주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내려오시리라는 것을 전해 줍니다. 이렇게 예언자는 세례자 요한을 예시한 다음 이어서 복음사가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시온이란 일찍이 예루살렘이라 불리운 도성이 아니겠습니까? 
“시온산을 당신의 자리로 정하셨나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에 따르면 시온 역시 산이었습니다. 
사도는 또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시온산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 말씀으로 할례 받은 백성들 가운데 뽑히운 사도들의 무리를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이 시온과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은 이들이고 하느님의 산 즉 아버지의 말씀이신 외아드님 위에 세워진 이들입니다. 
예언자는 이들더러 높은 산에 올라가 구원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가 사도들의 무리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또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 특히 유다 성읍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회개>

      송영진 모세 신부님

“......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2-6)”

 

요한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6-8).”

또 요한복음에는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라는 세례자 요한 자신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1,31).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맡기신 임무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일, 또 사람들을 메시아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일, 메시아 예수님을 잘 맞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그 ‘준비’는 ‘회개’입니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주님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는 “탐욕과 이기심을 버려라.”이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는 “교만과 위선을 버려라.”이고,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는 “죄 때문에 비뚤어지고 거칠어진 생활을 바로잡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여라.”입니다.

 

1)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꼭 필요했을까?

그냥 예수님께서 곧바로 활동을 시작하셨어도 되지 않을까?”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먼저 세례자 요한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 쪽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배려’ 라고 생각됩니다.

만일에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등장하셔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 소개하셨다면?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언자가 먼저 와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준비시키는 것이 사람들을 위해서 훨씬 더 유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이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다는 점이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요한 1,35-39).

(그렇다고 해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자 요한을 먼저 보내셨지만,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믿으려고 노력하고 회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만 받아들였습니다.)

 

2) “그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언자가 미리 와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이 필요했겠지만,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신 뒤에는 세례자 요한 없이도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까지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그의 회개 선포를 듣고 있는가?”

예수님 승천 후에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 널리 퍼졌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처음부터 인류 구원을 계획하셨던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는 점에서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오늘날에도 중요하고, 또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려면 회개부터 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의 회개 선포는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회개 선포를 듣고 있습니다. 특히, 인류의 회개는 아직도 미완성인 상태라는 점에서, 그의 회개 선포는 더욱더 필요합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그 자신의 선포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포입니다.

 

3)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에게도 회개 선포가 필요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신앙인들이(신앙인들부터) 더 많이, 더 모범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일만 회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의 삶을 일치시키는 일이 회개입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고, 세례를 받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더욱더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는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4) “구체적으로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뉘우치고 고해성사 보는 것으로 회개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삶 전체’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한다고 생각만 하는 것과 말만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고, 실제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고 말했는데(루카 3,8),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라는 뜻입니다(루카 3,10-14).>

삶 전체가 변화되는 것이 회개이기 때문에, 회개는 한 번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도 회개이고, 벗어난 다음에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면, 그 길에서 벗어나서 올바른 길을 찾아서 걷는 것이 회개이고,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면,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5) 회개는 대림 시기나 사순 시기에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인생 여정 자체가 회개의 여정입니다.(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회개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때가 회개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히말라야 3
찬미 예수님 
1.히말라야를 다녀 온뒤 마침 개봉된  황정민 주연의 히말라야 영화를 보았습니다.. 제가 직접 그 휘말라야의 한자락을 밟아보았기에 은근 내심으로 무척 기다리던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는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뜨거운 감동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산사나이들의 뜨거운 삶과 우정, 의리를 느낄 수 있었고, 위대한 자연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성과 연약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엄홍길이라는 뜨거운 산사나이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엄홍길은 히말라야의 8,000미터가 넘는 16개의 봉우리중 14개를 등반하였습니다.. 동생처럼 아끼던 한 젊은이,즉 박무택 산악인이 그 험한 여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뒤 그때 그 후배가 산행대장이 되어 휘말라야에 갖다가 조난을 당하게 되고, 그 눈보라가 치는 칠흑과 같은 어두운 밤에 구조되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되죠. 그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슬픔과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동료들과 함께 그대로 휘말라야의 그 차가운 눈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랜기간 너무 혹독한 등반에 시달린 엄홍길은 의사로부터 이제 다시는 산에 오르지 말라는 산악인에게는 사형선고와 같은 처방을 받게 됩니다.그러나 엄홍길은 결심합니다.. 그를 데려 오겠다고 여러 가지 악조건속에서도 그 결심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와 뜻을 함께 하던 예전의 동료들도 그의 결심에 함께 따라 나서죠. 데드 존이라고 불리는 8700고지에 그 시신이 있었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혹한과 눈보라, 바람, 부족한 산소가 그들 일행의 앞길을 번번히 막곤 하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산행에 나섭니다.. 모두가 말리는 위험한 시도였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습니다. 모두 그의 고집에 혀를 차면서도 그의 결심을 존중하고, 목숨을 걸고 따라 나섭니다.. 악전고투가운데 드디어 그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시신을 산아래로 운구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원들 전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히말라야까지 따라온 죽은 이의 부인이 남편은 아직 발견되지 못한 동료들과 함께 그대로 히말라야에 남기를 원하는 것 같다고 하면서 그냥 내려올 것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엄홍길대장은 대원전체의 안전을 고려하면서 그의 시신을 해가 뜨는 양지쪽에 안장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죽은이의 목에는 밤마다 부인에게 쓴 편지가 목걸이속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부인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는 말과 함께 그 구구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부인에게 전달합니다.
그후 엄홍길은 살아생전에 그 고인과 했던 약속을 지킵니다.. 그 불가능한 몸을 끌고 히말라야 8000미터이상 봉우리중에서 아직 가보지 못한 2개의 봉우리를 다녀오는데 성공합니다.. 최초로 16개봉 등정에 성공합니다.
그는 절대로 산을 정복했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어쩌다 후배들이 그 정복이라는 말을 썻다가는 혼쭐이 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야.. 그저 산이 허락해주었기에, 운이 좋아서 그 정상에 서는 것뿐이야. 산은 결코 점령당하는 곳이 아니지.”
정상에 올라서서는 무엇을 느끼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글쎄요.. 기쁨, 쾌감보다는 그저 힘들다는 생각뿐이네요. 산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 산위에서는 너무 힘드니까 자신의 가면을 벗는 것 같아요.. 그래서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2.정말 깊이 그 영화에, 그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일반인으로서 제가 높이 올라 갈 수 있는 최고의 높이를 경험해보았습니다.. 정말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그러나 저 자신의 내면을 아주 또렷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대자연앞에서 감동과 찬탄을 하기는 커녕 조그만 불평불만에 온갖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차는 어리석은 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3.안나푸르나봉 베이스 캠프에서 하룻밤을 고통가운데 지샌 저는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후배신부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머리는 무겁고, 숨이 여전히 가쁘고, 여기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정말 앞뒤로 기가막힌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저 이 불편한 곳을 얼른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후배 한사람의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얼굴에는 병색이 가득했습니다.. 비상헬기를 불러야 하나,, 또다시 긴길을 내려갈 걱정에 가득찬 저는 헬기가 오면 저도 그 헬기를 타고 내려갈까 등의 번민에 가득찼습니다.. 가이더는 태평한 얼굴로 내려가면 괜찮을텐데 라는 말만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아픈 후배가 그냥 내려가겠다고 합니다.. 모두 아무말 없이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아래쪽에 있는 마차쿠레라 캠프에 도착했을 때 그 후배는 그냥 누워 버립니다.. 좀 누웠다 따라 오겠다고 합니다.. 모두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그 후배가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희한하게도 아래쪽으로 내려오니 맥이 다 빠졌던 근육들에 다시 힘이 생기고, 머리 아픈 것도 서서히 가시기 시작합니다... 몸에 정상적으로 산소가 공급되니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기 시작하고, 땀도 나고, 몸도 가뿐해지기 시작합니다.


4.정말 이길을 올라 온거 맞아? 할 정도로 내려가는 길은 아주 수월했습니다.. 힘도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그 아름다운 경관들이 이제는 눈을 통해 마음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마음속에 감동과 찬탄이 연이어 터져 나옵니다. 뒤를 돌아보니 산위를 휘감던 구름들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듯 연신 춤을 추어 댑니다.. 계곡을 흐르는 빙하녹은 물이 내는 소리가 어쩜 그리도 아름답게 들리던지요!  내려올수록 나뭇잎들은 더 더욱 반짝입니다.. 아 정말 걸어내려오기 잘했다. 마음속에 이 아름다운 자연의 이야기를 새길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축복인가! 오로지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산위에서의 좁디 좁았던 마음들이 부끄러워집니다.. 힘들더라도 좀더 여유를 가질걸,, 밤에 별들을 볼걸, 좀더 감동하고 감사할 걸. 등등 후회가 마음속에 쏟구칩니다.
내려오는 길에 아름다운 계곡을 만납니다. 그 계곡은 히말라야 벌들이 벌집을 만들어내는 깊은 계곡이었습니다.. 그 계곡에 들어서자 이른바 석청이라고 하는 꿀냄새가 진하게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하게 나는 것이었습니다. 맑은 날씨, 저멀리 보이는 설산들, 열대지방의 풍부한 산림들, 맑디 맑은 빙하수들,길가의 작은 야생꽃들이 그 석청의 냄새와 아주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었습니다.


5.일행들의 컨디션과 기분이 최고입니다.. 다시금 예전의 그 활기찬 분위기를 되찿고, 재미있는 이야기들, 서로 마음이 오고가는 따뜻한 대화들을 나눕니다. 그래 이게 사람사는 세상이지,, 그 위는 사람이 살수 있는 곳은 아니지...하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우정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6.다음날 마지막 내려오는 길에 저는 오른쪽 무릎 인대쪽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어  이게 왜 이래.. 마지막 날 왜 이러지.. 내리막 길에서 그 통증이 더 심해집니다. 올라갈때는 천천히라도 제가 제일 선두에 섰었는데 내려오는 길에는 제일 후미에 서게 됩니다. 그래도 이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데,, 아무나 못가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갔다 왔는데 하는 생각으로 통증을 즐거움으로 삼으며 내려 옵니다.


7.마침 그날은 네팔의 명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빨간색 계통의 명절옷을 입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일가친지들을 찿아 나섭니다. 차위에까지 사람들을 가득 싣고서도 그 험한 길을 달리는 모습을 보니 참 신기해 보입니다. 네팔의 사람들에게는 이 휘말라야밖에 없습니다. 그당시 인접한 인도와 분쟁이 있었는데 인도에서 원유공급을 중단하는 바람에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참으로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나라였고, 가난한 국민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해맑은 웃음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라마스테” 하고 인사합니다. “당신의 신을 존중합니다.. 당신의 신께서 당신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하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8.산을 다 내려온 후 먹는 삽겹살이 얼마나 맛있던지요?  그렇게 맛난 삽겹살을 먹어본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선후배가 함께 어울려 친구가 됩니다. 참으로 산이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산을 다니는 사람들은 의리가 남다르다 하는데 그 의미를 알 것 같았습니다.


9.산에서의 느낌, 그것은 엄홍길대장이 이야기 했듯이 가면을 벗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깨닫는 것이었고, 대자연앞에 숙연함과 겸허함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10.오늘은 대림 제 2주일입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안에 탄생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하느님앞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1.우리 모두는 그러한 삶의 여정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가식을 벗고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가운데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인 아기예수님의 탄생이 우리 마음속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입교를 하시는  분들도 바로 그런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는 커다란 산 앞에서 겸허함과 진실함을 배울 수 있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여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과 자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아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공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선포합니다. 복음사가는 요한의 회개 선포를 이사야 예언서가 전해주는 말씀의 성취로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선포한 회개란, 예수님을 올바르게 맞이하기 위해 길을 곧게 내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게 만들며, 굽은 곳은 곧게 만들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를 잇는 길을 좋은 길로 만드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의 길이 어떠한지를 알아보는 좋은 방법은 성체조배입니다. 성체조배를 하기 위해 성당에 잠시 앉아보면 우리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많은 생각들을 만나게 됩니다. 평소 하지도 않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그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면서 성체조배라는 원래의 목적은 잊은 채 조배 시간을 보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참된 회개를 위해 예수님과 나 사이에 놓인 길을 좋은 길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와 예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이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한다면 용기를 내어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 길을 좋은 길로 만들어낸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통해 육화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를 위해 길을 닦고 정비하는 시간이 바로 대림 시기입니다. 대림 둘째 주일, 나와 예수님 사이에 놓인 은총의 길을 정비하는 귀한 시간 가지시길 기도합니다.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당에 처음 오신 예비자분들을 만나서 교리반을 열면, 어떻게 시작할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신학교를 몇 년 다니고 나서 저는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감정적으로 우울하고, 쳐지는 날들이 있기는 하지만 (온전한 인격적 성장을 위해서는 그런 날들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으로 인해 영혼의 평화가 침식된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이런 나,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의 실현인 세례자 요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 강론 때에 대림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을 압축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사명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물질인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금지하신 이유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추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당신의 생명을 나누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우리 내면의 수 많은 골짜기와 산들, 굽고 거친 길들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는 우리의 여정을 방해합니다. 
골짜기와 같은 허무주의와 좌절.
높은 산과 같은 교만과 우쭐거림.
굽은 길과 같은 거짓과 허영.
거친 길과 같은 무절제한 욕망과 이기주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 "아무리 거룩한 사람도 적어도 이기주의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죄의 상처를 지니고 사는 인간은 이러한 어려움들에서 해방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신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성인전들을 읽으며 이런 결점들을 모두 떨쳐버리겠다고 다짐했었지만, 20대 전부를 신학교와 군대에서 보내면서 체험했던 것은 그런 다짐의 성공보다는 반복되는 쓴맛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굿간에서 가난한 부부의 아기로 태어난 예수님 탄생의 신비를 묵상하며 참 평화를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냄새나는 마굿간의 말구유에 눕히기 전에, 요셉 성인은 부인인 마리아와 태어날 아기에게 미안해서, 그나마 사용할 수 있었던 말구유를 닦고 또 닦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구유 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태어나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호텔이나 궁전을 만들 수 없어서 그런 곳에서 태어나지 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마굿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은 그분께서 그곳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신비는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위로를 줍니다. 이 위로는 단순히 감성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쓰시고자 하실 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든지 "예"라고 응답하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느님의 귀한 도구가 된다는 진리가 주는 위로입니다.
아무리 결연한 다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실수와 실패를 반복할지도 모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겉보기에만 좋아보이고 결국은 후회와 쓴맛을 남길 것을 선택하고 반복적으로 후회하며 삽니다. 이러한 삶이 마음에 골짜기를 만들고, 마음의 길을 굽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이 겨우 말구유 정도라도 좋습니다. 하느님께서 기꺼이 우리 영혼에 머무시길 원하십니다. 말구유 같은 우리 영혼이 주님을 마땅히 모시기에 합당치 않더라도, 요셉 성인처럼 입김을 불어가며 닦고 또 닦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다시 태어나셔도 그분은 궁궐이 아니라 마굿간에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도 감히 성체를 모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오늘 미사 때 우리는 성체를 모실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막지 않고 오히려 무척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2코린 4,7).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루카 9/1-6> 12월5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2주 무엇을 생각하고 기대하며 어떤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오시는 길을 바르게 준비 하시려 오시어 급은 길을 곧게 하시고 깊은 꼴짜기는 메우고 산과 높은 언덕은 낮아지게 하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하신다 하시려 미리 오셨다고 합니다. 그 길을 오시는 분은 누구신가?  누구를 기다리며 만나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   전례 상 기념행사뿐인가? 저는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을 기다리고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시는 그분을 통해 “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심 같이 하느님 자비를 받고 지금 있는 모든 가련하고 힘들고 어려움 속에 해방되고 어떤 죽음의 고통에서 장롭고 평화스럽고 기쁨에 넘치게 되도록 기다리며 오늘 눈 앞에 일어나는 일 안에 이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어 온 인류가 잘 살게 하시었는데 죄와 악이 숨어들어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생명의 장애를 받고 행복하여야 할 삶을 불쌍하게 만들어 나가는 세상을 재 창조의 의미로 세상에오시어 급은 길을 곧게 하고 웅덩이를 매구고 높은 언덕을 깎아 내리고 나추고, 거칠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살게 하시려 말씀이신 성자 주님이 오시었습니다.
오신 주님은 특별 계층을 위해서 아니고 교회 안에만 오시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 어디나 주님의 영원한 자비의 은총을 부여 주십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공장에서 만들어 내어도 전비공장이 없으면 조금 움직이다가 고장이 나서 멈추게 됩니다. 기계는 고장 나기 마련입니다.
운전수가 스스로 고칠 수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정비 고장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정비공장에 가 보면 자동차를 만든 사람보다 더 섬세하게 기계를 일고 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고장인지 알아 수리를 하여 차가 운행하도록 해줍니다. 
이같이 세상이 잘못된 것을 창조주이신 하느님만이 원상 복귀가능 하여 세상에 오시어 영원한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창조된 모든 것은 좋은 것이고 절대로 필요한 것이 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생명은 귀하고 좋은 것이지만 생명에 해가 닥칩니다. 병으로 인한 죽음입니다. 권력은 좋은 것이지만 권력 밑에 억눌려 약한 사람이 신음하고, 재력은 좋은 것이지만 남용 부정으로 빈부의 차별이 생기고 명예가 좋은 것이지만 독점욕으로 인간의 겸손한 품위를 잃게 됩니다.
루카 복음 15장에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주님의 비유말 씀은 “ 모든 사람이” 란 말씀처럼 바로 자비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바로 나로부터 너에게 한  사람한 사람에게 자비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저는 어느날 묵상 하다가 주님이 나 한 사람 위해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시었다는 생각에 감사와 찬미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영원한 자비는 어제도 지금도 내일도 시간의 변화 없이 언제나 내려주십니다. 성탄 날 만이 아니고 지금가장 필요한 시기입니다. 저는 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지금 주님과 함께 살며 제가 할 수 있는 능력 것 주님의 자비로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 지금 깨어 기도하고 지금 있는 것 나누어주고 지금 진실과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제 저녁 식사 때 얼마 전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한 형제를 식사 후 어리버리 하는 모습을  보고 바라보기만 하지 않고 손을 잡고 식당을 나와서 수사님 빙으로 인도 하면서, 주님의 손을 잡고 가는 마음으로 대려다 주고 나오면서 바로 이거야 가장 힘들고 필요한 사람을 도우는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 주님의 자비를 베풀기를 기도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함승수 신부님
 지난 9월 '월드컵대교'가 새로 개통했습니다. 그 전에는 교통량이 하나의 다리로 몰리다보니 차가 많이 막혔는데, 새로운 길이 뚫리면서 확실히 제가 있는 수색에서 시내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길을 닦는' 이유입니다. 목적지에 더 빨리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새로운 길을 만들고, 그 길 덕분에 서로간의 '마음의 거리'가 더 가까워져 함께 할 수 있는 이들의 숫자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지요.
 비슷한 이유로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제대로 닦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걸어갈 '구원의 길'은 '세상의 길'과는 다르기에 그 길을 닦는 역할을 맡은 요한은 세상에서 벗어나 '광야'로 나아갑니다. 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적막한 곳, 어느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어 홀로 자기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곳입니다. 또한 사방이 훤히 트여있어서 어느 한 군데 숨을 데 없는 곳, 그래서 자신의 본모습이 밝은 빛 아래 낱낱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세상이 주는 물질적 편의에, '대중'의 한 사람으로 '익명성'이라는 어둠 속에 숨어 사는데에 익숙해진 우리로써는 그런 광야가 낯설고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세상이 주는 익숙함과 편안함 속에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넓고 편리하다해서, 익숙하고 편하다고 해서 내가 가고자하는 목적지에 닿지 않는 길로 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고자 한다면 힘들고 불편해도 그곳에 가기 위한 길을 새로 닦아야 하는 것이지요.
 길을 닦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어디로 가야할지 그 목적지를 정하고, 거기까지 어떻게 갈지 그 '경로'를 정하는 일입니다. 구원의 길을 닦는 과정에서 요한이 처음 한 일도 그것이었습니다. 그 길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 즉 하느님과의 일치였습니다. 그러니 그 길의 경로는 당연히 '회개'여야 했습니다. 죄를 뉘우치고 용서받는 것은 구원의 여정에서 꼭 거쳐야 할 중요한 단계지만, 잘못된 길을 고집스럽게 계속 걸으면서 그것을 그저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삼으려 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베풀면서 그 조건으로 '회개'를, 곧 자기 삶을 하느님 뜻에 맞게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하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을 갖춘 이만이 중간에 포기하거나 딴 길로 새지 않고 구원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오늘의 제1독서인 바룩서를 인용하여 그런 회개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웃과 나 사이에 파놓은 무관심과 이기심의 골짜기를 사랑과 관심으로 메워야 합니다. 성공과 명예를 최고로 여겨 쫓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높이려고 드는 교만의 산, 무시와 차별이라는 언덕을 겸손의 곡괭이로 부수고, 존중이라는 삽으로 파서 낮추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단순하고 분명하게 따르지 못하고 자꾸만 제 입맛에 맞추어 예외를 만들려고 하는, 그래서 구원의 길이 곧은 지름길이 아니라 구비구비 돌아가는 길이 되게 만드는 거짓과 고집의 바위를 파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내 편한대로,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하여 상처를 입히는 나의 거친 마음을 배려라는 사포로 갈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과 힘을 다해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다보면, 구원의 길을 닦는 공사는 어느 새 끝나있을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배려하고 사랑하는 모습 안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따뜻함, 기쁨, 행복, 평화를 미리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완성되어 갑니다.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통해 회개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마음의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회개의 여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후회하다’, ‘보속하다’ 또는 ‘생각을 바꾸다’로 해석될 수 있는 회개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즉 회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입니다.
완전한 삶의 정상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회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잠시 지날 세상의 것을 잊어버리고 양심의 가려진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자신의 과거 및 현재의 모든 잘못, 습관, 감정 및 행동 그리고 모든 죄를 겸허히 바라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낸 잘못이 무엇이든 참된 슬픔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침묵은 회개의 마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침묵을 지키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고 자신의 결점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자신의 진보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곳, 모든 친교가 단절된 곳, 아무것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곳으로 철저히 고립되어 극심하게 외로운 곳 바로 그곳에서 회개가 시작됩니다.
성 보나벤뚜라는 양심의 가려진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자신의 과거 및 현재의 모든 잘못, 습관, 감정 및 행동 그리고 모든 죄를 주의 깊게 탐색하고 검토하고 평가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낸 잘못이 무엇이든 참된 슬픔으로 회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표현한 대로 회개의 시작은 감각의 밤의 시작이며 회개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좀더 깊이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 삶의 뜻을 더욱 깊이 추구하고 묵상과 기도와 침묵의 생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인간 감정에 사로잡힌 무질서한 상태를 초월하여 보다 더 하느님 사랑에 잠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감각적인 부분이 믿음으로써 정화되는 단계를 뜻합니다.
회개는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함이 죄임을 알게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고 자기집착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들을 해방시켜 줍니다.
이것이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이고 그분의 오심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임을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 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먼저 사람이
있고 구원이
있다.

모든 출발은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출발도
도착도
사람일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사람 앞에
소중한
사람이 있다.

너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다.

마땅히
당연히
누려야 할
사람의 존엄함을
다시 생각한다.

하느님께서
손수 빚어
만드신
사람들이다.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탄생하신다.

사람과 함께
살려고 사람이
되셨다.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이시다.

서로에게
머리를
숙여야 할
하느님의
사람들이다.

사람이
구원이다.

사람으로 사는
기쁨을 다시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신다.

소중함을
다시
배운다.

존중을
다시
깨닫는다.

사람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인권과 구원은
사람과 사랑처럼
연결되어 있다.

구원은
맞바꿀 수 없는
우리 인격을 향한
가장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보신다.

하느님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현실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우리는
사랑의 사람들이다.

반갑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전해야 할 것은
사랑과 존중이다.

무시할 수 없는
그래서
사랑해야 할
사람의 삶이다.

사람의 길에
대림이 있고
사람의
성탄이 있다.

1800년 중반, 가난한 아일랜드 청년이 미국으로 이민 가기로 결심을 하고 배 값 마련을 위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은 돈으로 간신히 삼등칸 배표를 샀습니다. 하지만 식사비를 낼 돈이 없어서 빵 몇 개만 사서 배에 탔습니다. 빵을 조금씩 아껴 먹었지만 대서양을 항해하는 내내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가 도착하기 전날, 그는 큰맘을 먹고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마지막 식사만큼은 돈을 다 털어서라도 번듯하게 먹고 싶어서였기 때문입니다. 맛나게 식사를 하고 돈을 내려고 하자 종업원이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합니다.

“식사는 무료입니다. 운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섣부른 지례짐작으로 인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고 또 얻을 수 있는 것도 얻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앞선 이야기에서 식사 가격만 미리 물어봤더라면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청년의 모습이 우리 안에 담겨 있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에 나만 만들지 않고 이웃 역시 함께 만드셨습니다. 또한 불편함 없이 살라고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늘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도도 하지 않고 ‘할 수 없다’라는 말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이유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이 역시 지례짐작으로 자신은 할 수 없는 일로, 다른 이들만 할 수 있는 일로, 그래서 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대림환의 두 번째 초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땅에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표시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세례자 요한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자는 것 모두가 불편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주님을 준비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이로써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면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을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과 행복을 분명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삶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늘 말해 왔어요(시모어 번스타인).

 

행복에 대해....

1983년 사람들은 500원으로 구입한 주택복권으로 1억 원의 당첨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열광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좋은 꿈을 꾸면 복권을 사야한다고 생각했고, 어느 자리에서 구입하면 당첨 확률이 높아진다면서 길게 줄을 서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1억 원의 당첨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 현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액수를 물어보면 1억 원이 아닙니다. 한 50억 원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지요. 그래야 집도 사고, 하고 싶은 사업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50배가 커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크기도 50배 커졌을까요?

실제로 커다란 행복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자그마한 행복이 많아야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그마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뭐가 되고 싶으십니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어머니의 강요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첫 영성체 이후로는 주일미사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집은 평택 시골이었는데 학교는 자전거를 타고 나와서 송탄에서 다시 봉고차를 갈아타서 수원으로 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3은 주일도 학교에 등교해야 했고 6시 이전에는 집에 갈 수 없었습니다. 끝나고 아무리 빨리 나와도 성당에 도착하면 미사가 끝날 때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주 정도 빠졌을 때 판공성사표가 나왔습니다. 역시 어머니의 강요로 고해성사를 보아야했습니다. 신부님은 무섭기로 소문난 분이셨습니다. 주일 두 주를 학교에서 허락하지 않아 빠졌다고 하니까 대뜸 “그래서 뭐가 되려고 하는데?”라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나올 수 없는 상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빠진 건데 너무 억울하여 “학교에서 안 보내주는데 어떡합니까?”라고 따졌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계속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자율학습을 하다가 5시쯤 가방을 창문 밖으로 던져놓고 매주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 1년 동안 한 번도 걸리지 않았고 그렇게 주일미사를 계속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뭐가 되려고?”라는 질문에 “훌륭한 사람이 돼야죠!”라고 속으로 대답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질문은 그런 뜻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질문은 한 대답을 제외하고는 뭐라 대답해도 다 틀리게 돼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한 번 대답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내 자녀는 어떤 사람이 되게 하고 싶은지. 

 

9.11 테러 때 무역센터에 차례로 여객기가 부딪혀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습니다. 쌍둥이 빌딩이었기 때문에 처음 한 건물에 비행기가 부딪혔을 때 다른 쪽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밖으로 나올 시간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테러가 일어난 건물은 다른 쪽이기 때문에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은 동요하지 말고 하던 일을 계속 하라고 건물 스피커의 안내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일을 잊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람들은 건물 안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인지, 긴급 뉴스를 봐야 할 것인지, 밖을 내다봐야 할 것인지 우왕좌왕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몇은 그 방송을 아예 무시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 방송을 무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뭐가 되고 싶어?”라고 물으면, “연예인이요.”, “과학자요.”, “소방관이요.”, “수녀님이요.”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 자체가 아이들을 이 세상 속에 갇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하든 이 세상 속에 갇혀 이 세상과 함께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결국 멸망해버릴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된다고 한들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되라고 말씀하고 싶으셨을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자녀,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입니다. 이 세상에서 되려고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람이라 믿으면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아이가 늑대라고 믿으면 늑대로밖에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라 믿어야 사람이 사는 곳에서 함께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연예인이 되고 의사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판검사가 되라고 창조하셨을까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라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만 하면 무엇으로 살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되고 싶은 것들이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구원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해 광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이가 ‘세례자 요한!’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요한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마치 이 세상에는 어떠한 욕구도 두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 세상 속에서 무언가 되려고 노력하겠지만, 광야에서는 그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 외에는 어떤 욕망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마치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이 세상에서는 그저 하느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면 그만인 삶이 광야에서 추구할 수 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부자가 돼라, 성공해라, 유명해져라 등의 세상에서 무언가 되도록 가르친다면 이는 마치 허물어질 건물에 더 오래 머무르게 만드는 꼴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무언가가 되려고 한다면 갑자기 무너져 내릴 이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결승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와의 대결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지단이 먼저 한 골을 넣었고, 그 다음 이탈리아의 마테라치가 동점 골을 넣었습니다. 연장전에 돌입하여 지단과 마테라치가 몸싸움을 벌인 후 말싸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지단이 갑자기 머리로 마테라치의 명치를 들이받았습니다. 지단은 생의 마지막 A 매치를 퇴장으로 마무리했고 승부차기 끝에 우승컵 역시 이탈리아에게 넘어갔습니다.

마테라치가 한 말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출신 이민자 2세였던 지단과 그의 누나에 대한 인종차별적 폭언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인종차별적 모욕을 한 마테라치가 잘못이지만 그래도 지단은 프랑스를 대표해 월드컵 결승전을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순간은 알제리 출신이 되어버려 경기에 큰 지장을 주게 된 것입니다. 물론 출신 성분을 잊을 수야 없겠지만 한 국가를 대표하고 있다면 이제 과거에 속해 있던 어떤 것들이 자신에게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말게 했어야합니다. 

 

우리가 광야로 나와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언가 되려고 하는 동시에 하느님 자녀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어떤 순간에 자신이 실제로는 하늘나라가 아닌 세상에 속해있는 사람임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입고 먹는 것 걱정하지 말고 오늘만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로 가려면 광야를 건너야합니다. 바라본다고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이 세상에서 되고 싶은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비로소 하늘에 속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이 길을 마련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 길을 만드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사람들을 세속에 속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구해내야 합니다. 교회는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처럼 사람들이 이 세상의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을 멈추게 하여 그들의 시선이 자신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았습니다. 전설적인 그룹 ‘퀸’의 음악과 삶을 보여준 영화입니다. 영화의 압권은 십만 명 이상의 청중이 모인 곳에서의 공연이었습니다. 공연은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해서 기획되었습니다. 세계적인 가수들이 무료로 재능을 기부한 공연이었습니다. 퀸의 음악을 듣는 것도 즐거움이었지만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한 공연이라는 것이 좋았습니다. 공연에 참여하면서 퀸의 구성원들은 갈등과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어려움에 부닥친 퀸의 구성원들이 화합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인권 주일을 지내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복음은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산과 언덕을 낮추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요한은 요르단 부근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대로이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제2 독서는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산과 언덕을 낮추는 이들이 가져야 할 덕목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사회교리를 통해서 신앙인들이 골짜기를 메우고, 언덕을 낮추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인간은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부색, 성별, 학력, 가문, 종교, 이념 때문에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먹고, 입고, 자는 최소한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아픈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강도 맞은 이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사제도 아니고, 레위도 아니었다고 하십니다. 강도 맞은 이를 치료해주고,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하십니다. 

 

둘째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은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고 있으며, 자연을 돌이킬 수 없도록 파괴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달라도, 국가가 달라도 우리가 모두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세상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생태계를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폭력, 전쟁, 테러를 없애도록 함께 연대해야 합니다. 

 

셋째는 많이 가진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많은 능력을 갖춘 조직은 그렇지 못한 조직을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려는 목자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고 기뻐하며 돌아오는 목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국가 같은 상위 단체는 지방정부 시민단체 같은 중간 및 하위 기구와 그 구성원들의 권익을 보호하면서, 개인이나 하위 단체가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도와주어야 합니다. 공동선을 침해하는 조직이나 단체에 대해서는 개입을 해서 공동선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의 동물들은 3차원의 욕망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먹고, 자고, 자손을 낳아 번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족되면 동물들은 만족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은 동물들과는 달리 5차원의 욕망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먹고, 자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과 함께 재물을 모으고,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다섯 가지 욕망을 통해서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두 가지 차원의 삶을 더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바로 7차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입니다. 우리는 모두 존귀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짧은 생으로 마감을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믿어서 우리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아름다운 기도로 남겨 주었습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 구세주 예수의 선구자

      서동신 신부님

대림 제2주일을 맞아 세례자 요한의 신원과 직무생활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합니다.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진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혹은 구세주 예수님의 선구자라고 그의 정체성을 파악하기도 합니다. 전자는 구약과 연속성을 위해서일 것이고, 후자는 신약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의 직무는 주로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고 죄의 회개를 통한 구원을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독신생활로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사는 철저한 수덕생활이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세례자 요한은 부모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아론의 후손이었습니다. 당시 즈카리야는 레위인으로 제관 곧 구약의 사제 직분을 수행했습니다. 즈카르야의 기도에 따르면 아들 요한이 탄생할 때 아들 요한은 장차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진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요한을 불러도 좋지만 구원사를 넓게 펼쳐서 보면 메시아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요한을 부각시키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세주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루카 3,4)가 되어, 죄 회개를 통한 하느님 나라로 구원을 선포합니다. 요한의 사명은 오실 그분 메시아 예수님이 길을 마련하는 선구자 역할이었습니다. 선구자 요한의 외침은 그 자신 그리고 우리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골짜기를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을 모두 낮추고, 굽은 데는 곧게 하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하여라. 그리하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암울한 골짜기 같은 어두운 마음에 본래 주어진 거룩한 우리의 광채(바룩서 5,3 참조) 곧 거룩한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불가능할 것 같지만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순수한 마음(필립비서 1,10 참조)으로 가능합니다. 그밖에도 높다란 산과 높다란 언덕 같은 우쭐하고 교만한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고, 인생살이 상처받고 찢어지고 막혀버린 마음의 굽은 데를 곧게 하고, 거칠고 각박한 마음을 곧게 펴고, 거칠 대로 경화되어 버린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평탄하게 하는 것이 대림 제2주일을 지내며 실천해야 할 숙제인 것입니다. 아멘. 

 

 

 

골짜기는 메우고 굽은 길은 곧아지게!

      김 도미니꼬 신부님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습니다. 회개로서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라는 외침을 말입니다. 회개를 통한 우리의 준비는 먼저 ‘너’라는 모든 상대를 이해하는데서 출발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만과 아집의 산과 언덕을 눕히는 일과 있는 그대로의 너에게로 왜곡됨 없이 곧게 나아가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은 이제 끝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임을 받아들인 성모님같이, 탕자를 안아 들이는 아버지같이 누구나를 다 받아들이는 예수님처럼 서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받아들임이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네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 이번 대림절의 소망이고 이 소망이 우리 안에 자리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성탄이 되는, 그래서 주님의 오심이 참으로 기쁜 그런 성탄을 체험했으면 합니다. 서로를 탓하고 비난하기보다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포근함을 체험하는 성탄, 자비의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서로 다른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는 그런 성탄, 성당에서는 반목했던 형제자매끼리, 가정에서는 갈등·대립이 있던 부인과 남편, 자식과 부모, 며느리와 시어머니 등 모두가 조건 없이 서로를 수용하는 그런 성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올 성탄은 그리스도의 성탄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셨듯이 너와 나의 성탄이 우리 공동체의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기적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하게 희망해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2018년 인권 주일 담화문 요약

 

형제자매 여러분, 한국 천주교회는 해마다 대림 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강생과 함께 도래한 ‘종말의 시간’을 살며 깨어 지내던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되새기며 인권 현실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보는 일은, 다가온 성탄을 준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지금 우리는 인권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찰하고 발언하기에 과거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자기도 상처입고 고통받는 이가 더 깊고 근원적으로 치유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처입은 치유자”란 헨리 나웬 신부님의 표현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작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겹겹의 차별을 받고 있는 농어촌 이주 노동자에게 최우선의 관심과 주의를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2. 인권 감수성의 토대는 타자의 ‘다름’이 초래하는 불편함을 감당하고 소화하는 능력, 곧 상대의 다름을 가능한 한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동성애에 관한 질문을 받고 “그가 선한 의지로 하느님을 찾는 이라면 내가 어떻게 그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시거나, 몇 년 전 방한하셨을 때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하시면서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 역시 복음적 인권 감수성의 빛나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3. 일상적으로 인권을 침해당하고 차별을 겪는 이들은 대부분 여러 부류의 소수자입니다. 이들의 고통은, 차별과 배제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이를 당연시하는 다수자와 기득권층의 무신경한 태도로 더욱 증폭됩니다. 첫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는 당대 그리스 로마 문화가 감당하고 참아주지 못하는 ‘다름’ 때문에 극심한 박해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4. 이방인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차고 넘칩니다. 유다인들은 국외자, 타국인, 이방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겪어 배워야 했고, 결코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과월절 축제에서 이집트를 탈출하던 그 밤의 상황을 재현하며 기억했던 것입니다.

 

5. “하느님의 가난한 이(아나윔)”야말로 복음을 가장 먼저, 그리고 깊이 이해하는 이였음은 고대 교부들뿐 아니라 현대 사도좌의 가르침도 거듭 강조했습니다. 

교회의 이 ‘첫 자리’의 기억을 새로이 하며, 가난한 이를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처지를 함께 나누는 ‘가난한 교회’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과 세상의 고통을 따로따로가 아니라 동시에 알아듣고 이해하는 복음적 명오(明悟)가 열립니다.

 

6. 이 모든 사실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인권 감각은 “고귀한 것이긴 하나 신앙과는 별개의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인권 감각은 신앙과 지극히 내밀하게 연동(連動)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약자와 소수자를 착취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는 사람의 인간성과 인권을 해치는 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로 신성(神性)과 신권(神權)에 대한 공격이 됩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나아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람을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7. 형제자매 여러분, 이 땅에는 이미 많은 이주민이 선주민인 우리와 공생(共生)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농어촌 지역의 노동자처럼 열악한 조건 아래 하루하루 고단한 생존을 이어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비록 인종과 언어와 문화와 신앙이 다르다 하더라도, 이들 역시 한 하느님에게서 난 우리 형제자매들임을 잊지 말아야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름’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차별과 불이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먼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이 되어 줄 수 있도록, 올해도 베들레헴의 누추한 여관 짐승 밥통같이 가장 낮은 곳을 골라 강생하시는 구세주께 은총을 청합니다.

2018년 12월 9일 대림 제2주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주님이 오십니다. 죄 짓지 말고 회개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에 대청소를 합니다.

그러다보니 월요일이 가까워질수록 방이 지저분해 집니다. 

 

책상 위에 책들은 수북이 쌓여 있고, 잠바나 코트들이 방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또 간식을 먹은 쓰레기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말에 혹시라도 내 방에 오는 사람은 ‘청소도 안하나 보다...’ 하며 깜짝 놀라고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제가 일주일에 두 번 청소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월요일과 금요일 두 번 청소를 했는데요. 왜 두 번 청소를 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토요일 날 견진 때문에 주교님이 오셨었기 때문입니다. 

주교님이 오시면서 당연히 제 방도 한번 둘러보시리라는 예상이 있었기에, 평소보다 두 배 깔끔하게 정리를 해 둔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집에 누군가를 초대했거나 누군가가 방문하리라는 예상을 하면, 당연히 방 정리를 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리라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중요한 손님이 오시는데도 불구하고 방 정리는 커녕 잠만 자고 쓰레기들을 쌓아두고 있다면, 주변 가족들이 가만히 안 있겠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어야 할 거고, 배우자가 있다면 상대 배우자의 잔소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심하면 자녀에게 ‘아빠, 제발 청소 좀 하세요..’ 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가족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이천년 전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천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짓고 뉘우치지도 않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다그치고 이끕니다. 

그 모습이 오늘 복음에 표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요한의 모습을 상상하면, 단순하고 명확하면서도 직선적이었을 거라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다음 이야기의 마지막 의사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앉기만 하면 종이를 찢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정신병원을 다녔습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그 사람의 과거를 분석해 보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정신과 의사는 그 사람이 사는 환경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의사가 물었습니다.

 

“여기 왜 오셨습니까?”

“저는 앉기만 하면 종이를 찢습니다.”

 

잠시 뒤, 의사가 말했습니다. 

“종이 찢지 마!!”

그러자 그 다음부터 종이 찢는 버릇을 고쳤다고 합니다.】

 

요한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어떤 분석보다는 정확하고 단호한 한 마디가 더 효과를 발휘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죄를 짓는 행동은 분석이 필요한 것이기 보다는 당연히 끊어버려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요한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한 마디를 정확히 했을 겁니다. 

죄의 유혹을 끊어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죄 짓지 마!’ 라고 단호히 말했을 거고, 회개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라고 필요한 한 마디를 했을 겁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단호한 한 마디가 많은 사람들을 준비시켰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앞으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가 끊지 못하는 죄들, 회개하지 못하는 상황들에 대해서, 단순하고 단호한 한 마디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기한 일을 보았다!"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간절함이 있는데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간절하지 않거나 혼자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낫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누구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상태였지요.

그를 가엾이 보던 사람들이 방법을 모색하여 예수님 계신 곳의 지붕위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병자를 평상에 묶어서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시선 집중! 

병자의 간절함과 돕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합쳐져 예수님을 감동시키고 자신의 의지로는 꼼짝도 못하던 병자가 일어나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신기한 일을 선한 열망과 

사랑을 지닌 이웃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나는 어떤 이웃입니까?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일생 동안 누군가가 당신에게 충실하기를 원하십니까?

일생 동안 누군가에게 당신은 충실하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을 왜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할까요 ? 인적 없는 곳에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요?

 

그렇다면 성경에서의 ‘광야”는 무슨 의미일까요? 

 

광야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황폐한 곳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생 역경을 체험한 장소로서 굉장히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랑의 계약을 맺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삶의 의미를 더하는 다른 어떤 곳보다 중요한 특별한 장소가 하나쯤은 있습니다.

 

이 계약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은 결속으로 상호간 충실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그들에게 시험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광야에서의 회개 선포”는 다름아닌 이 불성실에 대한 회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모두는 우리 개개인의 경험 혹은 우리 주변의 요인으로 일생 신의를 지켜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와 새롭고 영원한 사랑의 계약을 맺기 위해 구세주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예레미아 31장 31-34절 참조)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새로운 계약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 모두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넣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에제키엘 36장 26절 참조)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가 오심을 선포합니다. 이번에는 직접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약속을 지키시려고 오십니다. 우리가 마음 깊이 그분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새롭게 변화되어 하느님과 완전한 사랑의 통교를 이루며 확실하고 온전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 곧, 인간의 몸으로 육화되신 그 예수님 만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몇 가지 마음의 준비를 요구합니다.

 

1.“골짜기를 메우십시오”

우리의 낮아진 자존감과 낙담을 구세주에 대한 희망으로 메꾸라는 말씀입니다.

 

2.“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고르십시오”

우리의 우월감과 독선을 평평하게 고르고, 하느님으로부터의 지나친 독립적 자만을 깎아내리라는 말씀입니다.

 

3.“굽은 데를 곧게 하십시오”

구세주 오심을 맞이하는데 있어 “저는 너무 바쁩니다”와 같은 변명을 질책하시는 말씀입니다.

 

4.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십시오”

죄로 인한 돌덩이 같은 장애물들을 말끔히 치우라는 말씀입니다.

 

위에 언급된 대부분의 요청은 고백성사를 통해 해결됩니다!!!

“고백 성사가 요즘 유행이 아닌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유행이나 시대 변천과 상관없이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세주는 사실상 2000년 전부터 우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어쩌면, 아직 당신의 생애 속에 강렬하게 현존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당신에게 준비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세례자 요한 그리고 바오로 성인과 함께 당신을 향해 외칩니다.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로마 13장 11-12절 참조)

부탁입니다. 이제 제발 깨어나십시오! 

 

개념 없는 소비주의, 습관적 향락, 분주함, 사소한 일들에 대한 근심걱정 그리고 생각을 방해하며 희망 없이,기도도 못하게 하는 모든 관념의 최면에서 깨어나십시오!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전 생애를 구원할 구세주를 보내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분 말씀이 들리십니까? 아멘!

 

 

 

교만의 산은 낮추고 약점의 골짜기는 메우소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오늘 말씀, 주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라는 오늘 말씀을 요한복음의 말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과 연결시키면 배치되는 말씀처럼 들리고, 약간의 혼동을 주는 것처럼도 들립니다.

 

요한복음에서 당신을 길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길은 당신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길, 곧 하느님께서 우리게 오시는 길이고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는 뜻이지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길이 되어주시는데,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는 그 길을 잘 이용만 하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가 무슨 길을 따로 닦는다는 말인가요? 새로 낸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주님이 하늘길이고 이 하늘길이 주님이 오신 길이고 또 오실 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실 길을 따로나 새로이 낼 필요 없습니다.

 

내 집 길만 내면 되고, 내 집까지도 길이 이미 나있다면 그 길을 막지만 않으면 되고 오시기 편하게 닦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늘길이시고 우리 동네까지 오는 간선도로幹線道路시라면 내 집 길은 우리 동네로부터 우리 집까지 오는 지선도로支線道路거나 그 마저도 낼 필요가 없이 하늘길이 연결되어 있다면 막지나 말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어도 우리가 그 길을 막으면 하느님도 오시지 못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맞아들이지 않은 마을이 있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이 내게 오시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필요치 않아서 또는 삐지거나 서운하거나 원망스러워서도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저는 올해 전에는 놓쳤던 기도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대림 1주 화요일 아침청원기도에 “우리 교만의 산은 낮추시고, 우리 약점의 골짜기를 메워 주소서.”라는 기도가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오실 길을 막는 제일 큰 죄가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주님이 오실 필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님이시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잖아요? 이럴 때 우리는 콧대를 꺾는다고 하는데 우리 콧대가 꺾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신앙은 있지만 우리 신앙이 약하여 오실 주님을 깨어 준비하지 않거나 감히 모실 수 없다고 거절할 수는 있습니다.

 

지난 주 판공성사를 주는 중에 마음 아픈 얘기를 들었습니다. 매주 미사를 드리면서도 자주 점 보러 간다는 거였고 그래서 왜 그러냐고 여쭸더니 거기 가면 위로가 된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성당에 신부님도 계시고 수녀님도 있는데 왜 그러냐 했더니

본당 신부님이나 수녀님은 어렵다고 하여 제 전화번호를 드리며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제게 전화하시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믿음이 약할 때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하느님은 무섭거나 어려워 찾지 않거나 청하지 못하고 만만한 인간에게서 위로와 힘을 찾고 얻습니다.

 

또 시련의 때에도 믿음이 약하면 하느님을 의심할 수도 있지요. 과연 하느님은 계시는가? 계시더라도 나를 위해 계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119 소방차나 구급차를 부르면 즉시 온다는 믿음이 있는데 나를 위로하고 구원하러 오시라면 오시리라는 믿음이 있나요, 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인권 주일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오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을 보내면서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그 존엄성을 보장 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회개란 다름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골짜기와 산과 언덕과도 같이 우리 마음에 있는 여러 가지 굴곡들을 없애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움과 불신, 오해와 편견, 시기와 질투, 교만과 이기심 등등…….어쩌면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패여 있는 깊은 골짜기이며, 솟아있는 험한 산과 언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들이 산재해 있을 때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에 너무나도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호소하며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쳤던 것입니다. 

 

사실 정릉동 성당은 지도상으로 보면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예전에 이 곳 정릉을 한번 찾아오려면 정말 교통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제가 정릉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원에 예비신학생 모임을 하기 위해 한번 오려고 하면 집에서부터 정말 많은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돌고 돌아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길이 좋아지고 터널이 뚫리고 지하철이 생기면서 정말 찾아오기가 쉬운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길이 좋아진다는 것은 소통이 원활해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 그리고 우리 서로간의 인간관계도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이번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진정 ‘회개’라는 공사를 통해 우리의 모든 굽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서 빨리 오실 수 있기를 바라며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제1독서의 바룩 예언자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인생 광야 여정, -주님의 길을 마련합시다, 주님의 길이 됩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자 한국교회가 정한 제37회 인권주일이고 제8회 사회 교리 주간입니다. 참 풍요로운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대림촛불 두 개가 희망과 기쁨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대림시기가 인생 광야 여정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산티야고 순례 여정이 삶의 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줬듯이 말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목적지가 뚜렷한 여정입니다. 궁극의 목적지인 아버지의 집을 향한 여정입니다. 대림시기의 여정이 끝나면 대망의 성탄입니다. 어떻게 하면 대림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요? 인생 여정 하면 제가 즐겨 자주 인용하는 예가 있습니다. 

 

‘내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오전 혹은 오후 몇시 지점에 와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또 ‘내 인생 여정을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에 와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마냥 영원할 것 같은 삶도 언젠가는 끝날 것임을 실감할 것입니다. 

 

남은 선물 광야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가 우리에겐 참 본질적 물음입니다. 그러니 인생광야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을 늘 사랑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언제나 거기 그 자리’의 불암산을 볼 때 마다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네팔 사람들은 말합니다.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것은 하느님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다.” 저 역시 불암산 봉우리를 볼 때 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느낌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시를 나눕니다. 요셉 수도원 배경의 아름다운 불암산을 볼 때 마다 하느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넉넉하고 편안한/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사랑만으로/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산처럼!” 

 

산을 바라 보면서 광야 여정 중의 우리 삶의 위치와 자리를 생각하며 삶을 재정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인생 광야 여정을 압축적으로 살아 보라 하느님 주신 대림4주 동안의 여정입니다. 어떻게 성공적 인생 광야 여정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주님의 길을 잘 마련할 수 있을까요?

 

첫째, 인생 광야를 사랑하십시오.

인생은 광야 여정입니다. 외딴곳의 외롭고 쓸쓸한 광야만이 아니라 우리 삶도 광야입니다. 도시의 광야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 삶도 광야입니다. 흡사 겨울 배밭의 배나무들이 세상 광야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하느님은 광야의 외롭고 쓸쓸함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니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내 삶의 자리 광야를 떠나선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는 광야의 고독과 침묵을 사랑합니다. 광야의 고독과 침묵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때 날로 깊어지고 풍요로워지는 연대의 삶입니다. 바로 복음의 요한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오늘 복음은 신화가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루카 복음 사가는 서두에 구체적 이름들을 나열합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광야에서 수련중인 요한을 만나 말씀을 주십니다. 다음 복음의 묘사입니다.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단연 주목되는 말마다기 ‘광야’입니다. 옛 수도자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악마와 싸우기 위해 광야를 찾았지만 우리는 우리 삶의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악마와 싸웁니다. 광야에서 수련중인 요한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듯이 광야여정에 충실한 이들을 찾아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둘째,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사십시오.

광야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이 내리자 즉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세례를 받고 회개할 때 죄의 용서입니다. 우리의 세례를 늘 새로이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할 때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그 실천으로 입증됩니다.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주님의 길을 곧게 냄으로 비로소 회개의 완성입니다. 이사야서를 인용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요한의 선포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참된 회개의 실천을 통해 안팎의 평화가 실현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외적 현실은 어떤지요. 빈부의 격차, 불평등과 차별, 교만으로 인해 골짜기는 더욱 깊어지고 산과 언덕은 날로 높아지는 현실이 아닙니까? 사람의 심성들도 날로 굽어지고 거칠어 지고 차거워지니 참으로 내적혁명의 회개를 통해 겸손하고 온유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온화溫和, 온유溫柔, 온순溫順의 ‘따뜻할’ ‘온溫’자가 참 그리운 세상입니다. 

 

오늘은 인권주일이고 사회 교리 주간이기에 더욱 위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정의 평화 위원회가 제37회 인권주일, 제8회 사회 교리 주간 담화문의 마지막 부분을 나눕니다. 

 

-이 땅에는 이미 많은 이주민이 선주민인 우리와 공생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농어촌 지역의 노동자처럼 열악한 조건 아래 하루하루 고단한 생존을 이어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비록 인종과 언어와 문화와 신앙이 다르다 하더라도, 이들 역시 한 하느님에게서 난 우리 형제자매들임을 잊지 말아야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름’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차별과 불이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먼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이 되어 줄 수 있도록, 올해도 베들레헴의 누추한 여관 짐승 밥통같이 가장 낮은 곳을 골라 강생하시는 구세주께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착하고 따뜻한 사마리아 사람같은 이웃이 될 때 비로소 참된 회개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는 것이 하느님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셋째, 하느님의 자녀답게 품위있는 삶을 사십시오.

살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시편 말씀대로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신 인간입니다. 유명한 한류스타 방탄소년단 예를 들고 싶습니다.  

 

방탄소년단은 전 세계 어린이와 청소년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LOVE MYSELF 캠페인을 유니세프와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방탄소년단 리더 김남준 자신의 체험으로 말문을 엽니다.“LOVE YOURSELF 앨범을 발매하고, LOVE MYSELF캠페인을 시작한 후 우린 전 세계 팬들로부터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었다. 우리의 메시지가 그들에게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랑하게 되는 데 어떠한 도움이 되었는지를….우리는 거기서 ‘말의 힘’을 느꼈다.” 말합니다. 

 

방탄소년단의 캠페인처럼, 우선적으로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모상으로서 우리의 고귀한 신원을 자각하며 자신은 물론 이웃도 그렇게 사랑하며 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품위를 지니고 살 수 있습니까?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희망입니다. 희망이 살게 하는 힘입니다. 희망이 있어 끝없는 기다림의 인내도 가능합니다. 하느님 희망의 샘에서 샘솟는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예언자들이나 성인들이 한결같이 고귀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도 구원의 하느님께 대한 항구한 희망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바룩서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어디서나 너에게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고,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이요 고귀한 인간의 품위인지요. 하느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있는 삶입니다.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이 대림시기 주님의 길을 잘 마련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께 영원토록 희망을 둘 때 이런 아름다운 모습에,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란 우리의 이름입니다. 

 

넷째, 지혜롭게 분별하여 사십시오.

끊임없는 회개에서 순수한 사랑과 겸손이고 품위있는 삶의 회복입니다. 이어 하느님께 분별의 지혜도 선물로 받습니다. 바오로의 기도는 바로 필리비 교회는 물론 오늘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이래서 사랑 공부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이래야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사랑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지식과 온갖 이해로 풍부해지는 사랑입니다.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가슴의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합니다.  

 

이래야 주님의 길을 잘 마련할 수 있고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되어 주님 성탄을 잘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인생 광야 여정입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는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인생 광야 여정 중 어느 지점에 와 있습니까? 하루로 압축하면 오전, 오후 몇시쯤에 위치해 있습니까? 일년사계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느 계절 어느 시점에 와 있습니까?  

 

인생 광야 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림시기 여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길을 잘 마련하여 성공적 대림여정을 마칠 수 있겠는지요. 주님은 대림 제2주일 그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1.인생 광야를 사랑하십시오.

2.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사십시오.

3.하느님의 자녀답게 품위있는 삶을 사십시오.

4.지혜롭게 분별하여 사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성공적 대림여정은 물로 인생광야 여정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3, 1-6(대림 2 주일)

이제 우리는 대림 2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에서, <제1독서>와 <제2독서>와 <복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제1독서>는 바룩 예언자가 전하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자녀를 잃은 과부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과 아름다움을 입어라.”(바룩 5,1)고 기쁨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바룩 5,9)고 말합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인들을 위해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 1,10-11)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은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구원’을 보기 위해, 세례자 요한과 함께 ‘광야’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 ‘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에,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방이 트여 있어서, 어디 하나 숨을 데가 없으니 벌거벗고 자신의 실상을 낱낱이 확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우리 공동체가 바로 광야입니다. 제 실상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항상 고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체험하기도 합니다.

사실, 홀로 있을 때보다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가 훨씬 고독할 때가 많습니다. 홀로 있을 때는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 되고,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서로 다름과 그 차이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있을 때가 더 괴롭고 힘들고 고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이 광야로 불러내시어 사랑을 속삭여주십니다.

그러기에,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사막이요,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사막입니다. 곧 공동체가 저를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는 아름다운 저의 광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정이 광야요, 본당이 광야요, 직장이 광야요, 이 세상이 광야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요한은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이를 <마르코> 복음사가는 병행구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마르 1,4) 

 

그는 용서를 선포하였지만, 결코 자신이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죄의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명을 지니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곧 ‘사명의 차이’뿐만 아니라, ‘신원의 차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은 “용서를 위한 회개”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회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한 회개는 하늘나라가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응답인 ‘결과로서의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 “용서를 받았기에 하는 회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늘나라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삶으로서의 회개하는 것입니다. 곧 회개가 먼저가 아니라 ‘용서’가 먼저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이미 용서와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용서하고, 그 은총을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오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을 보내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알아보고, 신뢰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감사의 응답으로 진정한 회개로 성탄을 기다리고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시기 <루카 3, 1-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을 사는 나는 역사적 흐름 속에 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시간 안에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펴신 시기는 역사적 현실 안에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고, 합당한 시기였으며 충분히 준비된 다음 오셨습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세례자 요한을 앞세워 오신 역사적 현실은 참으로 오늘 이 시대에도 알아듣기 쉬운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시간 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어제도 아니요, 내일도 아니라, 지금이란 시간이라고 강조했지만, 오늘 아침 묵상 중에 지금이란 시간은 어제도 없고 내일이 없다면 오늘 있어야 할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제가 있어 내가 지금 여기 수도원에 있는 것이 중요하고, 내일이 있어 오늘 여기에 살고 있음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어제의 시간에 계셔서, 내가 오늘 여기 살고 있으니 중요하고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가짜 역사를 내세운다면, 오늘 우리가 내일의 삶을 계획할 수 없으며 내일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오신 시기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맞이하였을까? 오늘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어떤 기적도 신기하게 여기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 안에 가장 적당한 시기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성경 안의 하느님 말씀을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 현실성, 미래 지향적 의미를 알지 못하고 이러니 저리니 말하면 오류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모든 판단은 반드시 역사적 깊은 의식과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로 살기 위해 고전을 읽어라” 지금에 충실하게 살아야지 어제도 지나간 시간, 미래는 올지도 모르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오늘을 사는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느님은 시간 안에 사는 우리를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연결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뿌리 없는 나무, 잎이 없는 나무는 나무로써 존재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나는 역사적 산물이며 내일의 새로운 날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대림 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바로 알고 내일의 세상을 더 아름답게, 더 깨끗하게 준비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역사 안에 오신 주님을 깊이 생각하며 끊임없이 오신 주님의 현존 안에 살고 주님과 함께 인류 구원의 동반자, 협력자로서 함께 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의 사명은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죄와 악이 넘쳐 험한 세상에 우리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어 구원 받아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 내가 먼저 주님과 같이 살아서 자비, 일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며, 그의 길을 곧게 하고, 내가 정의롭게 진실하게 참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골짜기를 메우고, 언덕을 낮추고, 굽은 길을 곧게 하고, 주님께 가는 길을 고속도로를 만들라고 한다면 하느님께 직통으로 들어가는 길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는 삶입니다. 

“주여, 모두가 아버지를 만나려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아멘.”

 

 

 

"기도와 성사로 내적 참회를” 

      김창선 선교사

오소서, 주 예수님! 대림초를 하나 더 밝히며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대림 제2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오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루카 1,76)인 요한 세례자의 광야의 소리는 주님이 오실 길을 닦도록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이끕니다.

 

한국교회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아 행복하게 살아갈 길을 직접 계시하셨습니다. ‘유엔인권선언’(1948)이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깨닫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인간존엄성’에 대한 선언(1965)에 따라 교회는 복음의 요구인 인간 존중과 인권 신장을 위하여 힘써왔습니다.

 

또한 교회는 2011년부터 이 주간을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왔습니다. 1891년에 발표된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가 기초를 놓은 사회교리는 인권, 가정, 생명, 경제, 정치, 환경, 평화, 등 제 사회문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이 교리는 사랑의 문명을 향한 ‘새 복음화’인 동시에 우리 모두가 진리, 자유, 정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사회교리의 실천을 통해 이 사명을 수행합니다.

 

제1독서(바룩 5,1-9)에서 위대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친구요 서기인 바룩은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을 부릅니다. 예루살렘은 충실한 믿음의 수도요 도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와 의로움으로 이스라엘을 영광의 빛 속에서 걸어가도록 이끌어주신다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원수들에게 유배당한 백성들이 당신의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며, 정의와 평화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주님께서 귀양살이에서 풀어주시는 사람들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합니다.(화답송)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필리 1,4 이하)에서 복음을 전하는 필립피인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기도는 고통을 이기는 힘이 되고 사랑을 키웁니다.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이해를 증대시키고, 그리스도의 날을 위하여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품격을 갖추며, 의로움의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복음(루카 3,1-6)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인류구원의 보편성을 밝히고자 예언자 요한 세례자의 시대를 소개합니다. 티베리우스(AD14-27) 로마황제(2대)의 치세 15년, 당시 유다지역 로마총독은 본시오 빌라도(AD26-36), 갈릴래아 영주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4BC-AD39), 갈릴래아 북동쪽 영주는 그의 동생 필리포스(4BC-AD34), 전임 대사제 한나스와 그의 사위인 가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내렸습니다. 그가 선포한 말씀의 핵심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입니다. 요한의 증언은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예언자 보다 더 중요한 인물’, ‘예수님의 선구자’,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로 주님이 오실 길을 닦은 분입니다.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광야생활을 하면서 회개의 상징으로 물로 세례를 준 그는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으며, 그분은 커지셔야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할 정도로 절제와 겸손이 몸에 밴 분입니다.

 

회개는 무엇입니까? 일상에서 회개라면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유다 사회에서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은 죄인이 하느님께로 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에서는 ‘지평의 확장’, ‘체험의 변화과정’, ‘생활의 개심’을 내포하고 있기에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귀의’라고 생각됩니다.

 

요한 세례자가 전하는 ‘광야의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말씀은 더욱 커져야하고 소리는 작아져야 합니다. 소리를 잘 들으려면 귀를 기울여야 하고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선민의식을 지닌 이스라엘 백성이 방탕과 교만의 삶을 살다가 바빌론 유배라는 뼈아픈 상처를 겪은 뒤 율법의 정신을 새롭게 한 그들의 역사를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교만과 미움의 산과 언덕은 낮추고, 불신과 절망의 골짜기는 메우며, 굽고 거친 길은 곧고 평탄하게 마련할 때, 그 길로 오시는 주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3,4-5; 이사 40,3-5)

 

우리는 무엇을 회개하고 어떻게 주님의 길을 마련해야 하겠습니까?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은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고 쓴 맛을 단 맛으로 바꾸는’ 기도와 성사로 빛 속을 걸으며 기쁜 마음으로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은총의 대림 시기에 기도 속에 자신의 잘못과 의무를 소홀히 한 점을 없는지 내면을 살핍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기도와 성사생활, 성경독서, 복음화의 사명, 가난한 이웃 돌보기, 생태계의 보존, 평화를 위한 기도를 충실히 하고 있는지, 이밖에도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일은 없는 지를 돌아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마음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고, 마음의 변화 없이는 그리스도와 진실한 우정과 친교를 나눌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회개의 길로 부르십니다. 대림 시기는 회개의 원천인 성사로 죄의 용서를 받는 은총의 계절입니다.

 

 

 

분별된 사랑의 행위는 소통으로 이어집니다.

      홍성만 신부님

제가 잘 아는 성실한 회장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복 한 가정의 가장으로 직업은 의사이십니다. 이런저런 대화 중에 아내의 오빠인 처남이 처한 처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60대 중반의 비슷한 나이인 처남에게 몇 년 전부터 치매가 시작되었고, 점점 심해져서 요사이는 그렇게도 서로 아끼 던 여동생도, 매제인 자기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 니다. 그동안 매 주일 병원에 가서 휠체어에 태워 산책하면 서 이러저러한 대화를 시도했지만 더 이상 소통이 되지 않 아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궁리 끝에 회장님은 마 사지와 함께 손끝으로 50분 정도 처남의 등을 두드려 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반응을 했다고 합니다. “아이 시원해.” 이 반응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손끝에서 전해진 소통, 두 분에게 는 더없이 소중한 표징이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필리피 공동체에 보내는 바오로 사도 의 애정 어린 편지에서 다음의 말을 들려줍니다. “내가 기 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진정한 사랑의 행위로 이어지기 위해 서는 그 안에 지식과 온갖 이해가 곁들여져야 합니다. 사랑 은 나의 좋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지만 그 안에는 상대 를 향한 사려 깊은 이해가 녹아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향 한 내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의 행동을 해야 할지 분별이 됩니다. 이렇게 분별된 사랑의 행위는 소통으로 이어집니다. 다가올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교회는 이사 야 예언자를 통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세례자 요한을 대면시켜 주고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것으로서 주님께서 오실 길을 내 마음속에 곧게 내라 고 하십니다. 거만스러운 산과 언덕의 마음은 깎아내리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굽은 마음은 곧게 하고, 거친 길과 같은 성격은 온순하게 하라 하십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 느님의 구원을 보게 하라 하십니다.’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요즘, 나에게는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소원해졌던 이웃이 누가 있는가를 뒤돌아볼 때입니다. 있다면, 그는 나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소통을 해야 하는 이웃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소통을 하지 못한 이유가 그의 거친 성격 때문이었다면, 그가 왜 그런지를 이 해하는 데서 부터 소통은 시작이 되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그 누구와 소통하기 힘들어했던 이 유가 내 안에도 엄연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통 은 늘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12월을 지내면서, 특히 예 수님의 성탄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소원했던 분을 기도시 간에 초대하여 그를 향한 사려 깊은 이해로 다가갑시다. 소 통의 길이 열립니다. 이 소통을 통해 주님은 우리 안에서 또다시 탄생하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루카 3,4) 

      장원일 신부님

 “주님의 길”, 그 길은 주님께서 당신의 양떼를 찾아가시는 길입니다. 모든 양들을 데리고 아 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곧게 마련하는 것은 세례자 요한과 당신의 제자들, 그리고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 게 주시는 사명입니다. 항상 듣고 묵상하기에 그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을 잇는 길, 세상에서 참 많이 훼손되었음을 또한 알기 때문입니다. 

 

  성사와 미사에 대한 무관심과 나태함은 하느님의 참된 모습을 흐려버립니다. 어떻게든 가 진 것을 유지하려는 욕심, 지위와 권력 위에서 사람을 우습게 보는 교만, 혹은 빼앗긴 것만 바라보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사람들, 그러한 모습이 우리에게서 사람다움을 앗아가 버립니 다. 하느님의 모습, 사람의 모습이 모두 흐릿해져 버렸으니, 그 둘을 잇는 길이 어느샌가 사 라진 지금, 우리 세상의 모습입니다.

 

  너무나 거대하고 막막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 돌아섭니다. 가끔은 그 교만과 죄스러움이 내 선택이 되기도 하기에 변명을 늘어놓곤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은 정의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내 귓가에 머무르고, 모든 선택과 결정의 대가는 스스로의 몫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말씀들도 쉽게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야 할 자리는 여기 인데, 지금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을 떠올립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과 나 자신 사이에 난 길이 어디인지 보기 시작하니, 어쩌면 이 말씀의 자리가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첫 번째 자리 일지도 모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루카 3,4)       그 길이 무엇인지는 말씀의 자리를 통해 밝혀 주시고, 길을 곧게 만드는 도구는 

 

  성사의 은총과 자선의 실천으로 마련해 주십니다. 세레자 요한은, 이 자리에서 죄를 씻어내어 사람다움을 회복하고 하느님을 마주 대하라고 오늘 우리에게 명령 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 오시는 그분을 기쁘 게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대림의 두 번째 주일이 되길 바랍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한삶의 집, 예리코 클리닉

      오세호 신부님

춘천교구 관할구역 내인 경기도 포천군 일대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아 주 많이 사는 지역입니다. 그들은 보통 공장에서 일하지만 어떤 이들은 더욱 열악한 근처의 농장에서도 일합니다. 우리교구 사회사목국 내 이주민지 원 사목을 맡고 있는 ‘한삶의 집’ 소속 단체인 ‘예리코 클리닉’은 지난 2003 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 포천군 가산 일대의 외국인 이주노동자 들을 위한 무료 의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가산성당의 허름한 교육관, 마치 야전병원을 연상케 하는 의료현장에서 대다수 신자들로 구성된 의사, 약사, 간호사, 통역사, 의료행정가 등이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 자들과 함께 고통과 더위와 추위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젊은 그들의 몸과 마음은 날이 갈수록 병약해져 갑니다. 격심한 노동과 스트레스로 치아가 다 흔 들려 빠지고,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40-50세나 되야 망가지는 팔과 다리와 허리의 모든 근육과 뼈 들이 고통에 잠기고 맙니다. 외과진료를 하시는 선생님이 “이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망가지고 있습 니다.”하시는 말씀에 문득 이샤야 예언서의 ‘고난받는 주님의 종’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렇지만 그 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는 자로 여겼다.”(이사 53,4)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도 오랜 세월동안 난민 이자, 이주노동자로 지내야 했습니다. 헤로데의 칼날을 피해 어린 예수님이 성장하실 때까지 요셉 과 마리아는 외국인 노동자로서 힘들디 힘든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인권주일입 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병든 외국인 노동자들이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신음하는 현실이 눈 앞인데 달리 무슨 좋은 말로 인권을 논하겠습니까. 춘천교구는 ‘한삶의 집’을 통해 어려움을 겪는 이주민 가정들을 위해 영적·물적 지원사업을 펼치 고 있습니다. 또한 ‘예리코 클리닉’을 통해 고통 겪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의료봉사를 하고 있 습니다. 포천시 가산성당 내의 ‘이주민노동자센터’와 구 솔모루 성당에 위치한 ‘선한 다문화센터’도 같은 취지로 열심한 사목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목의 성과는 사목자들의 열성과 불가피하게 재정적인 측면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교구는 가난한 교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잘 돕는다고 합니다. 현재 안정적인 진료소 건축을 위해 교구의 역량을 모으고 있습니다. 늘어가는 환자들을 위한 각종 의료기기와 다양한 의약품들이 필요합니다. 교우 여러분들 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여러분들의 작은 정성은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것입니다. “자 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이땅에서 이주민과 난민으로 살아가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야고 2,1)

      김종원 신부님

오늘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는 최고의 방법으로서 우리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아집과 편견의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길”(바룩 5,7 참조) 바라십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은총 없이는 진정으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존재임을 느껴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바탕 위에서 회개는 결국 후회와 뉘우침 이후 죄에서 떠나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인권 주일을 시작으로 대림 제2주간을, 신자들이 시대적 상황에 따른 ‘새로운 사태’들을 복음적 시각으로 성찰하고 그리스도인 삶의 구체적 실천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사회 교리 주간’으로 제정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창조되었으므로 존귀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될 것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합니다.

인권을 존중하고 신장하는 것은 복음의 요구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은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보살피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누군가 차별당하고 있는 나를 환대해 준다면, 나는 사랑과 친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의 마음을 주님 마음에 일치시키고자 조금이라도 노력한다면, 차별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감과 내적 치유를 찾도록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작은 환대의 행동들을 지금부터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인 필리피서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할 수’(필리 1,10 참조) 있게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현을 알립니다. 「루가복음서」는 사실(事實)들이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에 일어난 일인지를 정확하게 언급합니다.  로마황제 티베리오 치세 15년이고,  본시오 빌라도가 로마 총독(總督)으로 유대아를 통치할 때입니다.  당시 팔레스티나의 영주(領主)들과 대사제(大司祭)들의 이름도 밝힙니다.  이「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때도 당시의 로마제국 황제와 로마총독의 이름을 정확히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은 하나의 신화(神話)에 그 기원(起源)이 있지 않고,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과정(過程)을 거쳐 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신앙은 그 시대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인류역사 안에 그 발생과정이 확인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여러 형태의 세례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율법과 성전 의례에 대한 유대교 당국의 요구는 엄하였습니다.  사람이 그 요구들을 온전히 수행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진 절망감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시대의 세례는 흐르는 강물에 사람의 몸을 잠기게 하여 죄를 씻는 의례였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실세(實勢)인 사제와 율사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민중 안에서 일어난 일종의 신앙(信仰)부흥(復興)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죄(罪) 의식(意識)에서 해방시키는 의례(儀禮)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사람들 중 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행한 세례운동은 다른 세례 운동가들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세례 운동가들은 단순히 죄를 씻는 의례로 세례를 행하였지만,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회개,곧 삶의 전환(轉換)을 요구하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일생에 단 한 번 받는 의례였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가르치기 전에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복음서」들이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운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족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보았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말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정확히 자리매김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요한의 제자들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베푼 요한이 세례를 받은 예수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요한이라고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서(40,3-5)를 인용하여 그 사실을 설명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예수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준 주님이고.  요한은 그분의 길을 준비한 인물이라는 해석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회개는 어려운 절차가 아닙니다.  자기 삶을 바꾸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던 사람이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그 회개의 결심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모세로부터 비롯된 신앙을 왜곡하였습니다.  율사들은 율법 준수를 강요한 나머지,  사람들이 율법준수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하였습니다.  사제들은 성전에 바칠 것만 강조한 나머지,  사람들이 제물봉헌에만 마음을 쓰게 하고,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하느님은 율법준수와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그 죄에 대한 대가로 그들에게 벌을 주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준수와 제물봉헌이 있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그 함께 계심을 사는 데에 필요한 생활지침이었습니다.  제물봉헌은 사람이 노동하여 얻은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서 하느님의 시선(視線)이 그 위에 내려오게 하여,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가 얻은 산물(産物)을 보는 상징(象徵)적 의례였습니다.  인간이 자기가 얻은 것을 자기 한 사람만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그것을 보고 처리하게 하는 상징적 의례였습니다.  얻은 것이 은혜로우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도 은혜로운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지키고 바칠 것만 강조하다가 율법과 제물봉헌의 참 뜻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벌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 안에 발생한 세례 운동은 그런 왜곡된 신앙으로 말미암은 폐해(弊害)에서 벗어나겠다는 민중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포함된 아버지는 자녀에게 은혜로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땅에서 우리가 실천하며 살겠다는 기도입니다.  은혜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고,  사랑하고,  용서하신다는 말은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도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세상에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말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느님을 빙자하여 의인과 죄인을 갈라놓고,  사람을 차별하던 높은 사람들은 낮아지고, 그 들로부터 무시당하던 죄인들,  곧 “낮은 골짜기”는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으로 메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 은혜로우심을 실천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복음서」가 선포하는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의 삶은 이웃에게 은혜로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 내세(來世)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람들에게 은혜로울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르 10,43)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웃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길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걷게 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시기와 질투, 미움과 배척으로

얼룩진 거친 인생길을

나눔과 베풂, 사랑과 품음으로

곧게 하는 아름다운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온갖 차별로 상처 입은 이의

마음에 새겨진 큰 골을,

따스한 보듬음과 평등을 위한

아름다운 투쟁으로

메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함께 하는 삶을 방해하는

온갖 갈라섬의 거친 산들을,

너그러움과 평화를 위한

당당한 온 몸의 외침으로

허물어뜨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미움을 사랑으로 녹이고,

처절한 경쟁의 사슬을

자기희생으로 끊으며,

더 가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끊임없이 베풂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세상의 어두움과 혼탁함 가운데에서

참되고 착하신 삶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이를 이끄는

더욱 뚜렷한 아름다운 길로

드러나야 할 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첫 마음 회복”

      김관우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은 대림 두 번째 주간이며, 인권 주일입니다. 

촛불 민심을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 현 정부의 핵심 키워드는 ‘사람’입니다. 

주일에 방영되는 모 방송국 코미디 프로에서 한동안 뜨거웠던 유행어가 “사람이 먼저다!”입니다. 사람이 먼저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이 당연한 것이 우리 사회에서 최우선적 가치로 여겨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권’은 ‘육화’의 신비에서 비롯됩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계명이 아니라 같은 계명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무시되고 짓밟힌다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을 거스르는 행위와 같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후 서점에 들러 처음 구입 한 책 “사람만이 희망이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 / 겨울나무로 서 있는 벗들에게 /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 맑은 빛이 숨어 있다 / 

첫 마음을 잃지 말자.” 우리 모두의 공통된 첫 마음은 무엇인가.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회개란 첫 마음의 회복입니다. 

우린 죄로 인해 상처 주고 상처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맑은 빛’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다시 말해 ‘첫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가리어지고 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 마음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곧 ‘회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되기를…”말씀하십니다.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우리의 첫 마음입니다. 

우리의 첫 마음은 ‘사랑’입니다. 사랑해야 하며, 사랑받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권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고백하는 우리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우리가 보고 듣고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더불어 우리의 첫 마음을 정확히 보여주시고 알려주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 그것이 곧 우리에게는 회개요, 동시에 첫 마음을 회복하는 길임을 마음 깊이 새기는 복된 대림시기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LOVE MYSELF

      천향길 베네딕다 수녀님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 좋아했던 가수는 ‘이동원’ 씨입니다. 

대부분의 앨범을 소장할 만큼 그 시절, 그의 노래는 저에게 ‘성사’였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비롯해 정지용 시인의 ‘향수’ 등 아름다운 노랫말이 가진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분이 부른 많은 노랫말은 시인들의 시어(詩語)였습니다. 

그 가사를 음미하며 힘을 얻었습니다. 

BTS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저는 요즘 방탄소년단(BTS)의 ‘덕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미(Army)’로 활동하진 않지만 조용하게 열렬히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이돌 가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룹명은 물론 가수 이름도 모르는 저에게 그들은 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거듭되는 행보를 접할 때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자기 관리와 멤버들 간의 공동체성, 노랫말 메시지로 ‘랩’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저에게도 귀를 열게 했습니다.

 

데뷔한지 5년 만에 그들이 어떻게 세계 정상에 설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평범한 그들이 뮤지션으로 성장한 성공신화를 보니까 그 중심에 팬들과 허물없이 소통하고 또래 집단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공감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들었고 거기에 ‘케이팝 고유 가치를 지키며 기본에 충실했던 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특히 방탄소년단 리더 김남준의 UN 연설은 훌륭했습니다.

 

인권 주일인 오늘, 그 내용을 떠올려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방탄소년단은 전 세계 어린이와 청소년을 폭력으로 부터 보호하는 LOVE MYSELF 캠페인을 유니세프와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말문을 엽니다.

“LOVE YOURSELF 앨범을 발매하고, LOVE MYSELF 캠페인을 시작한 후 우린 전 세계 팬들로부터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었다”고요. 

“우리의 메시지가 그들에게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랑하게 되는데 어떠한 도움이 되었는지를….” 거기서 그는 ‘말의 힘’을 느꼈다고 합니다.

 

평범한 소년이던 그는 어떻게 해서 꿈을 잃어버렸고, 어떻게 다시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는지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은 걸 정말 행운이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많은 결점이 있고 두려움이 있지만,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끌어안고 천천히 조금씩 사랑해보려고 한다고요. 

저는 방탄소년단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입니다. 

그들은 내 안에 열정과 가능성을 일깨워 주었고, 삶의 자리에서 내가 먼저 변화될 때,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 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대림시기가

우리 삶의 주변을

살펴보는 관심과

애정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의 존엄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자체로

소중합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소외된 이들을

먼저 끌어안으시며

인간의 권리를

되찾아주십니다.

 

우리의 현실안에서

인권의 신장이

이루어져야합니다.

 

그 누구도

이웃의 인권을 침해할

권리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회경제적 

관계안에서도

복음의 원리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합니다.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대림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소외된 이들 안으로

따뜻히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인간적인 삶이

복음적인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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