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보셔요, 내 연인이 산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 아가의 말씀입니다. 2,8-14
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9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10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1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13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4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이스라엘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18ㄱ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여인은 연인이 다가오는 소리에 설레며, 지난날 자신에게 와서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을 떠올린다(제1독서).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자 친척 엘리사벳을 서둘러 찾아간다. 성령으로 가득 찬 두 여인은 서로 축복하며 주님을 찬미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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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의 저자는, 연인이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온다고 노래한다(제1독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보고,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하고 외친다(복음).
오늘의 묵상
성모님께서는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던 엘리사벳에게 ‘서둘러’ 찾아가십니다. 그러자 놀라운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태중에 계시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에 ‘성령’께서도 함께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의 입을 통하여 성모님께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과 만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성부 하느님께서는 성모님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에 성령을 가득히 부어 주시며, 우리도 엘리사벳이 체험하였던 것처럼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며,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1,43)라는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느님께 올라가기 위해서는 세 계단이 있다. 그 첫 계단은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우리의 능력에 알맞은 마리아이시다.
둘째 계단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셋째 계단은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기도의 중개자이신 마리아를 거쳐야 하고 영원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구원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86항).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고, 성모님을 삶 가운데로 초대하십시오. 여러분도 엘리사벳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을 통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반드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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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나이에 아들을 잉태한 엘리사벳, 그리고 처녀의 몸으로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한 두 여인의 아름다운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서둘러’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그도 하느님의 권능으로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는 친척이 있다는 것이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을까요?
한시라도 빨리 엘리사벳을 만나 서로 체험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유다 산악 지방까지 가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마리아는 주저하지 않고 잉태한 몸으로 여행길에 오릅니다.
그렇게 먼 길을 달려와 준 마리아를 본 엘리사벳은 또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는 임신하고 무려 다섯 달이나 숨어 지냈습니다.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적인 사건을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 상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두 여인의 만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이 잉태한 아기들, 곧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첫 대면이기도 한 것입니다. 메시아와 그의 선구자, 그들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만났고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주님의 어머니를 마주한 사실에 기뻐하고, 태중의 아기 요한도 태중의 아기 예수님의 방문에 기뻐 뛰놉니다. 엘리사벳과 요한처럼, 이제 곧 예수님을 만나게 될 우리도 기뻐합시다. 아가서에서 자기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처럼 말입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우리를 보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뛰어오시는 그 ‘연인’을 기쁘게 맞이할 채비를 서두릅시다.(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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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앞선 두 이야기, 곧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관한 보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엘리사벳(루카 1,41.44 참조)과 마리아의 잉태 사실(1,42 참조)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두 이야기들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의 방문에 대한 엘리사벳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1장 42절과 45절의 ‘복 선언’은 마리아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구절입니다. 먼저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그의 아기에게 복을 빌어 줍니다. 마리아께서 복된 여인으로 칭송받으시는 까닭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1,28.30 참조).
마리아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그 아기를 낳으실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님의 어머니”로 인정하고 있으며, 복 선언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 대한 순종을 드러냅니다. 엘리사벳의 두 번째 복 선언은 마리아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음을 전제합니다(1,38; 8,21 참조).
마리아께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에 복된 여인이라고 칭송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와 매우 대조됩니다. 1장 45절의 두 번째 복 선언은 2인칭(‘당신’)으로 사용된 첫 번째 복 선언과는 달리 3인칭(‘믿으신 분’) 주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복음서 저자는 축복의 대상이 마리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모두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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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납니다. 동정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유다 산악 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을 서둘러 찾아갑니다. 당시 제관들은 흔히 예루살렘 주변 마을에 살았습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7-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인카렘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나자렛에서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걸어서 삼사일 정도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은 이유는 그녀가 친척이었을 뿐 아니라(루카 1,36),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 불리던 그녀가 많은 나이에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힘으로 아들을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엘리사벳도 자신과 같이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았음을 알았기에, 자기가 받은 은총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었나 봅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 잉태의 비밀을 서로 알아보고 기쁨을 나누고자 한 것이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말씀은 이제 기쁨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 빛이 또 다른 빛을 찾아갑니다. 아무도 모르는 잉태의 비밀을 눈빛으로 알아본 두 여인이 기쁨 속에 서로 마주 봅니다. 그 기쁨은 엘리사벳의 배 속에 있는 아기 요한까지도 기뻐 뛰놀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인,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이 만났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기쁨이 됩니다. 그 기쁨은 온 세상에 퍼져 나갑니다. 이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에게 소중한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품고 있기에 혼자가 아닙니다. 그 말씀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또 다른 말씀을 찾아갑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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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와 복음은 기다림과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아가 1,1)인 아가는 일종의 ‘사랑 노래 모음집’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독서는 구혼 시절을 회상하는 여인의 노래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두 연인은 만남을 기대하며 서로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남자를 모르는 처녀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와, 그에 앞서 아이를 낳을 수 없었지만 같은 분의 힘으로 세례자 요한을 가진 엘리사벳이 인사를 나눕니다. 그 만남의 기쁨은 엘리사벳의 태 안의 아기가 뛰노는 즐거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만남이 이루어져 얻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라면 그 기쁨은 더욱 크다는 것을 화답송의 시편이 잘 보여 줍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
주님 성탄을 앞둔 대림 시기의 막바지에서 구세주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아가의 표현처럼 구세주께서는 노루나 사슴처럼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십니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것을 이루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아기의 잉태와 두 어머니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구세주께서 오시는 것을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은 행동을 촉진하는 힘입니다. 주님 성탄을 앞둔 우리 또한 어떤 역경 속에서도 오시는 분을 기쁘게 맞이하려면 힘차게 뛰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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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에서는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보는 연인을 생각하는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 연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밖으로 나가 봄의 아름다움을 함께 즐기자고 청합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마치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라는 권고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계획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에 달려가십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 지금 태어나시려는 당신을 맞이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의 요청입니다.복음에서 엘리사벳과 태중에 있는 아기 요한은 메시아의 어머니께서 방문하셨을 때 기뻐합니다. 두 여인과 태중에 있는 두 아이의 기쁜 만남!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기쁜 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외친 큰 소리, 곧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를 반복합니다. 이 소리는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나자렛 예수님께 보낸 찬사에서 그 울림을 찾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마리아는 믿음과 말씀의 행복을 받아들인 첫 여인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나중에 파스카 발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토마스 사도에게 전하실 믿음의 행복이 이 말씀 안에 들어 있고, 두 여인의 기쁜 마음에서 그 정점에 도달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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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기쁨에 넘쳐 다가올 주님의 탄생을 소개합니다. 제1독서는 눈앞에 다가온 연인을 마주하고 당신 백성 가운데 오시는 이스라엘의 임금, 주님을 마주하게 될 기쁨으로 넘쳐흐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아담의 딸이신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동의하시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교회 헌장 56항). 무엇보다도 이런 믿음을 통하여 마리아는 행복한 여인이며, 그리스도의 첫 제자이며 신앙인, 교회의 첫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 것은 순전히 피동적으로 하느님께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신앙과 순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해서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리아의 믿음과 하느님의 어머니 관계를 주목하면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몸보다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였다고 강조합니다. 곧 그녀의 큰 공로이자 큰 행복은 예수님의 육적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설교 25와 29).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태중에 잉태하기 전에 순결하고 흠 없는 마음으로 그분을 낳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중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믿음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싹을 틔우셨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예고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천주의 성모로 또 구세주의 참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을 받으신다.”(교회 헌장 53항)라고 말합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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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남편에게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에 자주 비유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아가의 구절들은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의 심정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이러한 구절들은 사랑으로 일치되는 한 영혼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이 구절은 한 영혼을 구원하시러 찾아오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감성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이 구절은 구세주의 탄생을 앞둔 교회의 기쁨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벳 성녀는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성녀의 태 안에 있는 아기, 세례자 요한이 성령으로 가득 차(루카 1,15),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구세주를 알아보고 뛰놀았기 때문입니다. 둘의 만남은 구세주를 알아보고 맞이하는 영혼들의 기쁨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성탄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마음은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주는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주님을 연인으로 맞이하는 설렘이 우리 안에 커진다면, 아기 예수님께 하느님 사랑의 노래를 불러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시고 낮은 곳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담는다면, 우리 마음은 이웃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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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늦둥이를 잉태한 엘리사벳과 달리 마리아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기를 잉태한 처지입니다. 그러니 기쁨은커녕 불안과 초조함으로 숨도 크게 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를 엘리사벳은 따뜻하게 위로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얼마나 따스한 위로입니까?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가득 찬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 내 곁에 있어 주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이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면 나는 더 큰 힘을 받을 것입니다.
더욱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공통된 아픔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는 몰라도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일은 엄청난 고난의 길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어머니가 자식에게 이런 길을 걷도록 하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하느님 뜻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 하나로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 여인들이 하나 되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이기에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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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는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는 성경입니다. 아가는 결혼식 때 또는 연인들 사이에서 사랑을 고백할 때 주로 사용하던 노래였으나, 이 노래에 메시아적 성격을 부여하여 이해함으로써 성경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오늘 독서로 아가의 한 단락을 선택한 것은 어떤 특정한 해석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와 중세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아가의 연인(남자)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그 애인(여자)은 교회로 또는 신자 개인으로 주로 해석하는데, 특히 여기서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는 연인의 모습을 말씀의 육화로 이해합니다. 연인은 그렇게 다가와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제 꽃피는 봄이 되었으니 사랑의 때라고 말하면서, 사랑을 속삭이며 여인을 부릅니다.
“유다 산악 지방”으로 엘리사벳을 찾아가시는 성모님,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언덕을 넘어오는 이 아가의 연인과 중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다가가시고, 그에게 이제 때가 가까이 왔다고 일러 주십니다. 태중의 아기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선포해야 할 그분이 바로 눈앞에 계심을 알게 하시고, 그가 태중에서 뛰놀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가까이 오시어, 이미 “우리 집 담장 앞에서” 우리의 창문에서 사랑을 속삭이십니다. 우리를 “나의 애인, 나의 아름다운 여인, 나의 비둘기”라 부르시며 우리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분을 알아 뵙고 태중에서 뛰놀았듯, 연인의 목소리에 가슴이 떨리는 여인의 마음으로 화답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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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유다 산골 동네에 살고 있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태중에 잉태된 메시아와 그 선구자와의 첫 번째 만남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과 그의 태중의 선구자 요한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반면, 마리아와 그분 태중에 잉태된 아기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대표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복되고 위대하심을 찬양하였고, 태중의 요한은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엘리사벳의 감사에 넘친 감탄은, 주님의 탄생이 인류가 오랫동안 고대하던 기다림의 결실이며 그 탄생으로 평화와 구원의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고백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는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께서 장차 겪으실 것이 무엇인지, 사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탄이 즐거운 분위기라면 파스카 성삼일은 장엄하고 진지하지요. 부활의 기쁨도 성탄의 기쁨과는 종류가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예수님께서 몸을 지니고 태어나신 것이 제물로 바쳐지시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의 몸은 우리를 위해 제물로 마련된 몸이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시려고 이 세상에 탄생하시기에 육화의 목적과 결과는 여기까지 이릅니다. 성탄은 아이들 생일을 축하하듯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하루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 모든 결과를 감수하시며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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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벳은 즈카르야 사제의 아내입니다. 젊은 나이였을 때는 아이를 주시길 수도 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지 않으셨습니다. 여인들의 임신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며 살았을 것입니다. 후배 사제의 아내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는 열등의식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포기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은 벙어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아들을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토록 달라고 했을 때는 침묵하시더니, 이제야 주시려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있었기에, 복잡한 마음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가능성이 끝난 뒤에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기적’임을 철저하게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젊은 시절에 아이를 주셨더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기적의 아이라 해도 지금처럼 감동으로 다가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엉뚱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랬더라면 세례자 요한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의 길을 가는 이들도 때로는 사람의 능력을 ‘과신’합니다. 기적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작은 가능성만 있어도 주님의 힘으로 보지 않으려 합니다.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를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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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온몸으로 환영합니다. 참으로 기뻤을 것입니다. 두 분의 공통점은 기적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분명히 다릅니다. 자신의 운명이 바뀐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생명을 잉태했으니, 그 삶은 더욱 신비스러웠을 겁니다.
사실 모든 어머니는 기적을 체험한 여인입니다. 아기를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임신을 하면 몸의 모든 병이 낫는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정성으로 대해 주시는 겁니다. 이러한 주님을 모르고 있었다면 이제는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은 생명을 가볍게 보려 합니다. 물질에 너무 큰 기대를 걸기 때문입니다. 모든 질병도 결국은 과학이 극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돈과 재물만 있다면 행복한 노후가 보장될 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착각입니다. 건강한 미래는 주님께서 주셔야 가능한 것이지, 인간이 저장했다가 꺼내는 물건이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구세주의 어머니를 한눈에 알아봅니다. 그녀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능력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을 밝게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행복한 노년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어느 작가의 체험이 담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작가는 매일 가는 카페에서 작업하는데, 그날따라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창의력이 부족한 자기 자신을 꾸짖으며 ‘망했다’를 외치고 있는데, 그 카페 구석에 덩치 큰 어떤 남자가 울상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남자는 다시 노트북 자판을 원수 두들기듯 치고 또 잠시 뒤에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어뜯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그 유명한 ‘봉준호 감독’이었습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이라는 새 역사를 쓴 천재 감독이라 할 수 있는 봉준호 감독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기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는데, 이름도 없는 자기가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다른 성공한 사람 역시 ‘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어떤 고통과 시련도 없이 편안히 모든 것을 누리고 있다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봉준호 감독도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제주도로 지구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제주도의 돌담을 보다가 언젠가 읽은 책의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이 돌담에는 빈틈이 참 많은데, 그 이유는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야 바람에 돌담이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빈틈도 넘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서있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는 아닐까요?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 이 둘에게는 커다란 걱정과 불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사실이고, 엘리사벳은 산모로 너무 나이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세상 안에서 힘들 수밖에 없는 조건 안에 계신 두 분이 만나신 것입니다.
이 만남은 두 분은 커다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요? ‘나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비천한 당신 종을 통해 이루시는구나.’라면서 다시금 큰 힘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 성녀는 성모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우리 모두 빈틈이 많습니다. 이 빈틈 때문에 모두가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빈틈 때문에 못 살겠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이 빈틈 때문에 살 수 있음을 주님 안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면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을 수중에 넣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일이다(존 스튜어트 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7년, 교구청에서 성소 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신학생들의 연수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과테말라에 있는 사제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신학생일 때, 30일 피정을 함께 했습니다. 30일 동안 피정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 신부님은 과테말라의 원주민을 위한 사목을 신청했고, 10년 가까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생들이 어학을 배우고, 선교 체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습니다. 신부님은 과테말라 교구에 협조를 구하였고, 신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매년 선교 체험을 하였고, 사제가 된 후에는 선교 사제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만남이 인연이 되어 과테말라 교구의 사무처장 신부님이 서울의 신학교를 방문해서 신학생들을 위해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과테말라에서 사목을 잘 마치고, 지금은 콜롬비아에서 사목 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해외 선교를 지원하는 사제들이 언어를 배우고, 현지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작년에 저는 뉴욕에 있었습니다. 달라스에 있는 신부님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뉴욕에 오면 방문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 타임스퀘어, 센트럴 파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브루클린 브리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 등이 있습니다. 손님이 오면 주로 가는 곳들이라, 신부님들을 위해서도 그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방문하고 싶은 곳은 제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제가 주일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브루클린 한인 성당엘 가고 싶어 했습니다. 뉴저지에 있는 뉴튼 수도원엘 가고 싶어 했습니다. 뉴욕 맨해튼 관광보다는 제가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고, 한국의 베네딕토 수사님들이 운영하는 수도원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브루클린 성당을 도와주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뉴튼 수도원과 한국의 인연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인연이 되었는지, 저는 뉴욕 생활을 마치고 지난 2월 달라스 한인 성당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보았습니다. 두 여인의 만남은 구약과 신약,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마리아의 즉각적인 응답은 신앙의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그녀의 행동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의 첫 만남이자, 구세주의 도래를 세상에 알리는 순간입니다. 마리아의 여정은 하느님 뜻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순종을 상징하며, 신앙인이 하느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제시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하느님 구원 계획을 드러내심을 의미합니다. 엘리사벳의 모태에 있던, 요한 세례자의 기쁨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신분을 첫 번째로 증언하는 행위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연대와 나눔의 본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는 오늘날 신앙 공동체가 서로를 지지하고 함께 기뻐할 것을 요청합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몇몇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고, 제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런 친구가 있기에 저는 힘을 내서 사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나의 모습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나의 길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 무렵... 서둘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루카 1,39-40)
하느님께서
내게 오시는
그 무렵
서둘러
하느님이
간절한 벗에게
하느님사람으로 가네
사랑이
내게 스미는
그 무렵
서둘러
사랑에
마른 벗에게
사랑으로 스미네
기쁨이
내게 깃드는
그 무렵
서둘러
기쁨에
주린 벗에게
기쁨으로 안기네
희망이
내게 피어나는
그 무렵
서둘러
희망에
무딘 벗에게
희망으로 돋우네
하느님께서
내게 오시는
그 무렵
서둘러
하느님이
간절한 벗에게
하느님사람으로 가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인사를 받고 태중의 아기가 뛰놀았으며 성령으로 가득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경우도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갖지 못했던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로 세례자 요한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섭리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보면서 너무나도 기쁜 마음으로 축복의 말을 건넸던 것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신앙생활은 그렇게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신비를 함께 발견하고 기뻐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길 바라기 보다는 내 말과 내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기도하곤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내 욕심의 기도를 충분히 들어주실 충분히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원의 길은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완성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곧 내 말대로,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바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원하시는 대로의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의 완성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누구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께서는 서둘러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의 어느 한 고을로 갔습니다. 이곳은 즈카르야의 집이며 엘리사벳을 만나러 갔던 것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왜 가브리엘의 기쁜 소식을 듣고 서둘러 길을 떠났을까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 자기에게만 온 것이 아니라 엘리사벳에게도 내려왔기에 기쁨을 서로 나누고 싶어서 서둘러 길을 떠난 것입니다. 마리아에게서 세상의 눈은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중요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뛰놀다, 외쳤다. 즐거워하다, 뛰놀다, 행복,”등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기쁘고 행복하며 즐거이 뛰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바라시기에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쁘고 여러분도 기쁨의 삶을 보내고 계십니다. 이제 다음 주에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뵙기 전에 우리 마음속으로 간직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직하고 예수님을 뵌다면 기쁨은 배가 될 것임을 믿습니다. 아멘!
『성탄절은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1)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다녀간 뒤에, 가장 먼저 요셉에게 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렸을 것이고, 그리고 곧바로 엘리사벳에게 갔습니다.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고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 주었기 때문인데, 아기를 낳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려 주기 위해서 갔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기쁨’입니다.
여기서 ‘서둘러’ 라는 말은, 마리아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간 이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선교사’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둘러’ 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4-15)”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은 ‘믿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 믿음에서 ‘기쁨’이 생기고, ‘기쁨’에서 ‘나눔’이 이루어지고, 그 ‘나눔’이 곧 ‘ 복음 선포’입니다. 만일에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응답과 순종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억지로 복종할 수는 있겠지만, 믿음과 기쁨이 없는 복종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믿음’과 ‘기쁨’은 ‘하나’입니다.
만일에 기쁨이 없다면, 즉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믿는다는 말만 하면서 다른 것을 더 찾고 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2) 마리아의 기쁨은, 마리아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기쁨입니다.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은 마리아에게만 기쁨을 주는 소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에 관한 소식이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3-17)”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서는 ‘모든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많은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메시아 강생’은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이 되는 소식인데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 구원이 아닌 다른 것만 찾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으시는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주님의 구원 사업에서 소외시키는 자들입니다.
3) 성탄절은 ‘모든 사람’을 위한 축제날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고, 성탄절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스도교의 성탄절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교회 문을 닫아놓고서 신자들끼리만 축하하고 즐거워한다면, 그러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을 거스르는 죄가 되고, 성탄절을 모독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성탄을 기뻐한다면 그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우리끼리만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날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날이고, 함께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 기쁨과 나눔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주님께서 이루시는 신앙의 신비가 오늘 이 시대 이 자리에서 재현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의 동정을 세세히 기록해 줍니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루카 1,39-40) 마리아의 마음은 천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때 이상으로 떨리고 복잡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마리아는 회임한 엘리사벳을 바라보며, 드디어 천사의 말이 허언이 아니고 실제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확인합니다.
엘리사벳 역시 마리아를 맞으며, 마치 세상에서 비단 인간의 육적인 관계인 일가친척들과는 또 다른, 주님의 복음 사업 속에서 만난 둘도 없는 친구와 동료를 반기듯,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더 깊은 신심으로 맞이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41절) 그래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2-45절)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서 엘리사벳에게 이루신 주님의 위대한 업적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들려준 천사의 말이 단순한 예언이나 상징적인 선언이 아니라 사실이로구나!’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마리아는 얼마나 행복할까!
자신에게 들려준 말이 허언이 아니고, 엘리사벳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큰 기쁨!
그리고 곧 자신에게도 주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실한 믿음!
그 믿음 안에서 마리아는 얼마나 기쁘고 행복할까!
주님, 마리아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주님,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
주님, 믿는 이들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주님,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
주님의 말씀은 그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루카 1, 39-45> 12월 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못해도 주님은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실과 사랑이 있기에 말씀에 믿음, 희망,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특별히 기도 중에 일어나고, 전해지고,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절망 중에서 희망을 보고 죽음의 고통 중에서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수도원에 1954년에 들어오면서 지금까지 살았는데, 입회 때 살아 계시던 선배 신부님, 수사님들 한 분도 살아 계시지 않고 그들의 죽음 앞에 있었지만, 절망보다 희망을 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 말씀 따라 저 멀리 독일에서 오시고 손과 발이 부르트도록 일하고 기도하며 사시다가 마지막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면서 감사 찬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저는 마지막 사람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의무는 하나도 없고 은퇴자로 편하게 살면 되지만, 쉬고 놀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도 “11시에 성사 주세요.” 하고 “9시에 만나주세요.“ 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묵상하며 글을 쓰고, 오후에는 2시간 이상 보내는 일을 하고, 답글을 보고 응답하고, 상담자 만나면서 살아갑니다. 어제는 분원에서 병 때문에 병원에 오셨다가 돌아가는 뒷모습이 쓸쓸해 보여서 지갑을 열고 가시다가 맛있는 점심 들고 가시라고 식사비를 드렸습니다. 돌아가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국밥 먹지 말고 소고기나 회 한 접시 드시라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성모님이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돕는 모습은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시는 참모습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 중 “서로 사랑하라.” 이 말보다 더 소중한 말은 없습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 불가능한 가운데 아기를 갖게 되었으나, 서로 사랑의 힘으로 쉽게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갑니다. 주님 말씀 따라 사는 것이 쉽지 않으며 따라가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수도자의 삶도 아름다운 마무리는 제대 앞에 관 뚜껑 닫고 누워있을 때 완성됩니다.
죽기까지 주님 뜻 따라 살았다는 것은 죽기까지 살아낸 사람이라야 인정됩니다.
수도 생활은 혼자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자기중심적 삶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적이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정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오늘 저도 마지막 남은 삶을 이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사랑하며 하나인 것같이 일치의 법을 지키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함스우 신부님
물이 담긴 컵에 빨간색 잉크를 몇 방울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컵 속에 담긴 물이 붉은 빛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같은 양의 잉크를 한강물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잉크를 받아들이는 물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가 그런 차이를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 점은 우리 마음도 비슷할 겁니다.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좁은 사람은 작은 불편, 작은 아픔, 작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겉으로 표출합니다. 그것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 견딜 수가 없어서 때로는 짜증으로 때로는 원망으로 때로는 눈물로 그 힘듦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반면 마음이 바다처럼 넓고 깊은 사람은 왠만한 불편, 아픔이나 슬픔이 있어도 겉으로 잘 티가 나지 않습니다. 바닷물처럼 넓은 마음이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고 정화하여 자연스레 사그라지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싶으십니까? 밴댕이처럼 좁은 마음으로 사사건건 화내고 짜증내며 스스로를 더 큰 불행에 빠뜨리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살면서 마주하는 시련과 고통을 잘 극복하며 참된 평화를 누리고 싶으십니까? 당연히 후자쪽이겠지요. 그렇기에 왜 신앙생활 하시느냐고 이유를 물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실테구요. 그렇다면 그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십니까? 아무도 없는 고요한 성전에 앉아 차분하게 기도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까요? 그 평화는 성전 문을 나서서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바로 깨집니다. 작은 낙엽 하나만으로도 잔잔했던 연못에 큰 파문이 일듯, ‘조용한 평화’는 쉽게 깨지고 마는 겁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 삶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 속 성모님의 모습에 그 힌트가 숨어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 말씀에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씩씩하게 답하시긴 했지만, 성모님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약혼자 요셉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사실대로 말하면 그가 곧이곧대로 믿어줄 지, 배가 점차 불러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아채고 뒤에서 쑤군댈텐데 부모님이 걱정하시고 속상해하시지는 않을지, 정결법을 거스른 음탕한 여인이라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거나 벌을 받게 되지는 않을지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으로 속이 시끄러웠겠지요.
그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성모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하느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임신 초기의 힘든 몸을 이끌고 백 킬로미터가 넘는 산길을 걸어 이모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그녀가 늙은 나이에 잉태한지 여섯 달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 늙어서 주책이라’는 생각에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힘든 티도 못내고 제대로 못챙겨 먹으며 젊은 임산부들보다 몇 배는 더 고생하는 그녀 곁에 머무르며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뜻이라고 생각했기에 기꺼이 그렇게 한 것이지요. 그 선행의 결과 엘리사벳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하느님께 특별한 은총과 보살핌을 받는 자신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으며 따른 자신이 앞으로 얼마나 큰 행복을 누리게 될지를 깨닫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겠지요. 그러니 우리도 마음의 참된 평화를 누리고 싶다면 성모님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찾아가 손과 발로 실천하는 사랑을 해야겠습니다.
행복한 사람들
진동길 마리오 신부님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의 외침이었습니다. 복음은 큰 소리로 외쳤다고 전합니다. 얼마나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던 이였는지 짧은 문맥으로나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몸이 만나기 전에 마음이 먼저 만납니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 늘 서로를 가까이했던 사람들. 그 마음들이 만나 서로를 다독이고 부비며 사랑합니다. 그리운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들이 만나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눈이 부십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사람과 하느님이 만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만남은 눈이 부신 역사적 사건이자 기적이었습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충만한 마음들. 그 가난한 마음들 안에서 일어난 만남이 기적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분이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탈리타쿰) 달려오십니다. 우리도 사랑이신 그분을 맞이하러 갑시다. 그분의 눈빛과 그 숨결과 다정한 말씀이 벌써부터 들려오는 듯합니다. 배와 그물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그분과 더욱 가까워집니다.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 2)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날씨 같은
삶이며
삶 같은
날씨입니다.
주님의 어머니를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삶의
놀라움은
믿음과 함께
우리를
찾아옵니다.
복음을
가득 안고
찾아가는
방문과
만남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믿음을
더 큰
믿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믿음도
기뻐야 합니다.
기쁨도 믿음이
바탕입니다.
더 좋은
믿음은
언제나
가장 복된
선택이며
가장 좋은
부르심이며
가장 기쁜
화답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가득 찬
놀라운 여정입니다.
길을 묻는
사람에겐
길을
알려주시고
선택이 필요한
이에겐
가장 좋은
선택을 주십니다.
마리아의 여정
안에서는
엘리사벳도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여정 안에는
마리아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오래도록
서로의 삶을
잡아주는
소중한
만남이 있습니다.
만남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성탄은
하느님의
기쁨을
온 마음으로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먼 길을
기쁘게 떠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이끄심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쁨의 여정으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놓치고
빠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쁨입니다.
기쁨으로
기도드리는
오늘의 특별한
믿음이며
마음입니다.
마음 안에
있어야 할
기쁨을 다시
만나는 오늘
되십시오.
기쁨이신
만남의
하느님이십니다.
몇 년 전, 갑곶성지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미사 후에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혹시 제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미사 때 계속 저만 보고 계셔서요.”
이 자매님이 누군지 알 수 없었습니다. 처음 뵌 분이었고 또 미사 중에 특별한 행동을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이 자매님을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이 자매님은 제가 미사 중에 자기만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예전에 교수법 강의를 들을 때, 연극 배우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은 객석에 누가 앉아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조명이 배우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맨 뒷자리를 바라보면서 연기하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자기와 눈을 마주치며 연기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시선은 배운 대로 늘 맨 뒷자리였습니다(사람들은 제 시선을 피하려고 맨 뒤에 앉지만, 사실 제일 잘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착각 속에 삽니다. 운전할 때 내가 가는 차선만 느리게 가는 것 같고, 줄을 서면 나의 줄만 짧아지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삶에서 하는 커다란 착각도 있습니다. 나만 불리한 조건 속에 사는 것 같고, 고통과 시련은 나만을 찾아서 오는 것 같다는 착각입니다. 나만 불리한 조건 속에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런 생각의 착각 속에 있을 뿐입니다. 착각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께서 만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이신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찬양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셨고, 그 믿음을 통해 가장 복된 분이 되셨다는 찬양이었습니다. 사실 엘리사벳 성녀는 나이 많은 상태에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울 수 있으며, 그래서 세상의 이목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라면서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계셨기에, 더 큰 믿음 안에 있는 성모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 있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삶을 원망하는 착각의 삶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도 엘리사벳 성녀나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던 믿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 안에서 자기 삶이 새롭게 보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도 잘살고 있구나. 나의 삶이 그렇게 팍팍한 것은 아니구나….”
오늘의 명언: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친절과 환대와 공감의 효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특강을 하러 꽤 먼 장거리 여행을 했습니다. 요즘 대목이라 피곤이 많이 누적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도착하고 자상하신 신부님과 교우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니...쌓였던 피로가 눈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친절과 환대와 공감! 얼마나 사람을 기분좋게 하고 기를 살리며 살맛나게 하는 원동력인지!
힘겨운 여행 끝에 아인카림에 도착한 마리아께서도 엘리사벳의 극진한 환대와 배려에 순식간에 여독이 풀렸습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 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이제 겨우 열 서너 살 먹은 소녀입니다. 더구나 정식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혼모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의 여인은 더 황당했습니다. 너무나 쑥스럽고 머쓱해서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산모인 엘리사벳의 나이는 가임연령을 넘어도 훨씬 넘어 이제 인생을 마무리지어야 할 그런 나이였는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두 분의 만남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정녕 황당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며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찬미의 송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예전에 있었던 추억을 떠올립니다. 2006년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7년 전의 기억입니다. 성탄 무렵에는 커피를 마시면 컵에 경품이 있었습니다. 아는 자매님과 커피를 마시면서 평소처럼 제 것이 당첨이 되면 가지시라고 말을 했습니다. 될 리도 없고 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분이 제가 마신 컵을 가지고 열어보면서 말을 하였습니다. ‘자동차 나와도 저 주는 거예요?’ 저는 ‘그럼요!’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컵 말린 부분을 여는데 그분 표정이 변하는 겁니다. 보통은 ‘Please try again.'이라고 나오는데 처음 글자가 ’W'인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더 이상해지더라고요. 정말 자동차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신부가 되가지고 반씩 나누자고 할 수도 없고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결국 ‘Win coffe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커피의 경품은 나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는데, 주님의 성탄은 정말 나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 정도로 흔들어 놓는지 생각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 오랜 기억도 있습니다. 1980년 성탄 예술제를 준비했을 때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성당 친구들과 ‘넷째 왕의 전설’이라는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휴! 43년 전의 기억입니다. 의욕이 넘쳤던 저희는 밤을 새워 연습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우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보좌 신부님과 주일학교 교감 선생님이 우리가 연습하는 강당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밤을 새워 연습하라고 했나! 당장 돌아가!” 우리는 집에 허락을 맡았다고 했지만 신부님은 완강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분함 마음을 삭이며 모두 돌아갔습니다. 빨리 어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밤을 새워 연습할 정도로 열정이 있었던 것은 성탄 예술제를 준비하는 과정이 좋아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후배 여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성탄 예술제 연습은 하나의 구실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었던 혈기 넘치는 학생 때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43년 전의 성탄은 뜨겁고, 화끈했습니다. 2023년의 성탄은 아무래도 그때의 열정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만남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고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의 상인들에게 팔았던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면서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평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만남을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동네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입니다. 몇 번 가보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마리아는 며칠을 걸어 아인카렘을 찾아갔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이 잉태했음을 알려 주었고, 마리아는 축하해 주기 위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도 아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몇 달 동안 아인카렘에 머물렀고, 엘리사벳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을 전하였을 겁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인도로 아이를 가지게 된 놀라움을 전하였을 겁니다. 오늘의 복음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는 열정과 설렘이 있었습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길 떠나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루카 1,39-40)
하늘에서
땅으로
먼 길을
떠나오시는
기쁨이신
아가님
고이고이 품은
여린 엄마
뱃속 아가처럼
몸소 기쁨 되러
숨어 지내던
외로운 벗 찾아
서둘러
험한 산길
한 걸음에
달려가시네
기쁨 모시니
기쁨이어야 할
우리도 함께
하자시면서
하느님의 향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어머니의 향기가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찾아 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제가 나비가 되어 향기를 찾아 보았어야지요!‘
향기는 아무나 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럴만한 내용을 충실히담고 있을 때입니다. 주님의 어머니가 되실 마리아의 향기가 엘리사벳을 감쌉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드님도 복되십니다.‘라고 인사에 답을 드린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살아계신 볼 수 있는 하느님을 낳아 주시려 향기로 오십니다. 주님의 어머니의 향기는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잉태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보고 벌, 나비들이 향기를 따라 모두가 베들레헴으로 모여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곳에 참 향기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언제나 주님의 어머니께서 향기를 발하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가서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성모님의 인사를 받은 후 엘리사벳 성녀의 반응이 참 놀랍게 느껴집니다. 먼저 그녀는 성모님께서 가장 복되신 분이시며 그 태중의 아기도 복되시다고 증언하고 나서 성모님을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모님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행복한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곧 엘리사벳 성녀는 성모님에게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신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참 필요한 것이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과 성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서로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바라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고 축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만남 속에서 때로는 인간적인 부족함만을 바라보면서 갈등을 겪고 그것에 머물며 실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은 그렇게 서로의 부족함을 하느님의 영으로 채우며 함께 기도하며 모든 시련과 갈등을 이겨나가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 속에 언제나 성령께서 함께하시면서 하느님 구원을 위한 참된 행복의 만남이 되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께서는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은 후 바로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인사를 받으면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요.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어 태내의 아들이 뛰어놀았다고 하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먼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만나러 갔을까요. 천사의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갔을까요.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 실현되었음에 기쁜 마음으로 갔던 것이고 또 노령의 친척인 엘리사벳을 도우러 갔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 내용처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것이 신앙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며 바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이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마리아께서는 항상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아니면 혼자라고 생각할 때 항상 우리 곁을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마리아께서는 항상 우리 곁을 찾아오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오늘 하루도 행복한 하루가 될 것입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1,42~43)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 살던 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행복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다만 어떤 행복을 추구하며, 그 행복을 어디서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철학자 칸트는 행복의 3가지 조건을 이렇게 제시하였는데, ‘첫째 할 일이 있고,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셋째 희망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그리스도교적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디에 그 행복이 있는지,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전하는 인사말을 통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면, 그 기쁨이 바로 축복이라고 봅니다. 비록 그 기쁨을 나눌 사람이 가까이 있지 않아도 찾아갈 사람이 있고, 서로가 기쁨을 나눔으로 더 행복해진다면야 어찌 달려가는 것을 주저하겠습니까? 마치 연인을 찾아가듯 사슴처럼 언덕을 뛰어넘어 힘차게 내달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예전과 달리 성모님의 엘리사벳의 방문 의미가 절절하게 다가옴은 제가 생활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과 현실 때문입니다. 노인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신 어르신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자신이 사랑했던 자녀들의 방문입니다. 그런 그분들의 하루하루 삶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기다림의 삶’입니다. 그 기다림이 길어질 때, 그분들의 깊고 무거운 느낌은 한 마디로 버려졌다, 는 느낌입니다. 잊혀진 존재가 되어간다는 그 자체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더 힘든 마음 아픔입니다. 그러기에 요양병원에서 저의 역할과 존재 이유는 그분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의 필요성을 채워주는 데 있습니다. 말로써가 아닌 단지 그분들 곁에 머물면서 ‘함께 있음’으로 그분들의 차갑고 텅 빈 마음을 따뜻한 온기로 채워주는 일입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가장 자주 하는 표현은 그러기에, ‘고마워, 감사합니다.’라는 단순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모님처럼 제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모셔가는 일이 제가 매일 하는 일입니다. 산을 넘어가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마리아처럼 우리가 받은 축복을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 달려갔으며, 우리를 찾아온 사람을 어떻게 환영하고 어떤 말로 축복해 주었나 반성해 봅니다. 힘겹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방문하는 여러분을 가장 기쁘게 반길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엘리사벳은 자신의 임신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와 인사를 하는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가득 찬 가운데, 마리아의 행복을 외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세상에 마리아 행복의 원천은 바로 말씀 안에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행복은 바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루어진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말씀을 믿음으로 응답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믿는 마리아 당신은 참으로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1,42) 고 선포한 것입니다. 행복은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 있으며, 이 믿음의 응답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아기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실 수 있었으며, 이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응답이 나오기까지 “모든 우주 만물은 조마조마 숨 죽였다.” 고 표현한 성 아우구스띠노의 표현이 그래서 더욱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사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 엘리사벳 보다 그녀의 태중의 아기가 먼저 이를 감지하고 용약踊躍 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이 마리아와 마리아의 태중에 든 아기가 복되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 순간을 두고 성 암브로시오는 “엘리사벳은 잉태한 후 성령으로 충만했고, 마리아는 잉태하기 전에 충만했습니다.”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 외침을 통해 엘리사벳은 우리 모두에게 마리아께서 누리셨던 행복이 무엇이며, 그 행복으로 우리 모두를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참된 행복은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어떤 그 무엇을 쟁취하고 성취하는 데만 있지 않고, 성모님처럼 나의 존재와 삶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서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이를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들으며 살고 있는 지, 성모님처럼 자신에게 들려오는 말씀을 믿음으로 응답하려고 마음과 영혼에 영접하고 잉태하며 살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사벳을 통해 어머니 마리아의 행복에 우리 모두 참여하도록 초대받고 있으며 행복에 이르는 길은 바로 믿음이며, 그 믿음을 삶으로 응답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며, 그 행복이 또한 우리 믿음의 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이를 재확인하는 성경의 장면이 바로, 군중 속에 한 여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11,27~28) 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며, 세상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역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연인(戀人)이시다 - 주님과 사랑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오, 정의의 태양이시오,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비추소서.”
대림2부 다섯째 날, 12월21일 ‘O후렴’도 마음 설레게 합니다. 당신의 애인인 우리가 보고 싶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이자 이런 주님이 속히 오십사 애절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연인인 우리를 일편단심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 사랑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 사랑의 여정인지요? 요즘 간간히 내리는 흰눈을 보며 오래전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불현듯 우리에게 전해지는 주님의 연서(戀書)같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쓴 시입니다.
“계속 쏟아지는
흰 눈발들
임 보내시는
천상 편지
하얀 그리움
가득 담겨 있는
임의 편지
잔잔히 물결치는 마음
글씨 보이지 않아도
다 알아 보겠네”-2001.1.28.
더불어 떠오른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낳았구나’라는 시입니다.
“푸르른 밤하늘
휘영청
밝은 달 하나
온 누리 환히 밝힌다
푸르른 고독이
푸르른 사랑이
휘영청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낳았구나!
오,
푸르른 고독이!
푸르는 사랑이!”-2001.2.11
22년전 2001년도 유난히도 참 많은 시를 썼던 해입니다. 주님의 푸르른 하늘 사랑에서 태어난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같은 존재가 주님의 영원한 연인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아가서의 배치도 이채롭고 적절합니다. 교회전통에서 한결같이 신비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중의 노래(the Song of Songs)”, 최고의 노래가 아가(雅歌)입니다.
“그대, 내 사랑,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눈동자”(아가1,5)
연인들끼리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신비가들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신부인 교회에 대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또 우리 영혼에 대한 주님 사랑의 고백으로 읽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의 연인인 우리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아가서의 감미로운 고백을 들어 보세요.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 넘어 오잖아요.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같답니다...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하는 계절이 다가 왔다오.’...‘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벌써 대림시기를 지나 꽃피는 부활시기가 온 느낌도 드는 오늘의 아가입니다. 그대로 연인이신 주님의 사랑의 방문에 황홀해 하는 우리 영혼을 상징합니다. 다음 아가서(아가, 안소근 번역, 가톨릭 출판가, 2014, 11-12쪽) 설명에 공감합니다.
“아가는 성경 전체를 위한 열쇠다. 랍비 아키바의 말이 옳았다. 실상 구약성경은 여성 앞에서 외치는 남성의 기쁨에 넘친 탄성에서 시작되고(창세2,23), 신약성경은 신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부의 사랑의 외침으로 끝난다(묵시22,17). 그리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한 가운데에는 아가가, 사랑의 책이, 성경의 심장이 있다.”
얼마나 멋지고 사랑스러운 아가인지요! 아가가 없었다면 성경은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했을까요. 말그대로 성경의 심장같은 아가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은 우리가 그리워, 보고 싶어 찾아오십니다. 대림시기는 물론 날마다의 미사전례를 통해 한결같이 끊임없이 찾아 오십니다. 오늘 복음도 이런 관점에서 보며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당신의 연인을 찾아 오듯 엘리사벳을 찾아 오신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요, 마리아의 방문에 기뻐 환호하는 엘리사벳과 태중의 아기 세례자 요한입니다. 성령에 가득차 환호하는 엘리사벳의 고백은 늘 들어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이런 엘리사벳 같은 활짝 열린 마음으로 이 거룩한 대림시기 미사중 오시는 주님을 환대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말한마디 천량빚 갚는다 했습니다. 도반간의 덕담은 이러해야 하니 그대로 성령의 은총입니다. 두분간의 주님을 중심으로 한 더불어의 영적우정이 참 깊고 순수하고 아름다워 감동적입니다. 엘리사벳의 진심 가득한 지지와 격려와 환대가 마리아에게는 큰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 됐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반갑고 놀라운 것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간의 우정의 여정이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태중이 주님 앞에 즐거워 뛰노는 엘리사벳 태중의 세례자 요한은 흡사 마리아 감실 안의 주님앞에서 춤추는 모습이요, 이는 주님의 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췄던 다윗(2사무6,5)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께 대해 혼신의 힘을 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의 표현인 시이자 기도이자 노래인 시편은 춤까지 이르러야 비로서 사랑의 완성이란 생각도 듭니다. 예전 써놨던 글도 생각납니다.
-“그리움
색깔로 표현하면
그림(畵)이 되고
그리움
글자로 써내면
시가(詩)가 되고
그리움
소리로 부르면
기도(祈禱)가
노래(歌)가 되고
그리움
몸으로 풀으면
춤(舞)이 됩니다.”-1998.5.5
그리움을 긴 글로 써내니 강론(講論)이 되네요. 그러니 우리의 모든 수행은 주님 향한 그리움의 표현이자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랑의 표현인 한곁같은 수행이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과 사랑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자기를 긍정하려면 성당 다녀도 소용없는 이유
전삼용요셉 신부님
저에게 지금 교황님이 거의 이단이라는 식의 카톡을 보내오는 분이 계십니다. 세례명도 있고 신자인데 어떻게 사제에게 계속 교황님을 거의 악마처럼 여기는 이들의 글을 보낼까요? 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하늘 나라 열쇠를 지닌 베드로가 계시고 사도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교황이시고 사도들은 주교들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들 안에 은총이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며 성체나 고해성사한다면 효과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은총은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만의 것입니다.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아프다며 돈 요구하는 집 나간 엄마, 도와드리는 게 맞을까요?’ 라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사연자는 초4 때 엄마가 집을 나가셨는데, 최근에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운을 뗍니다. 엄마는 이혼했을 때 한 달 정도 아빠가 큰 사고를 당해 자신들을 한 달 동안 돌봐줘야 했는데, 병원에 있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아빠에게 애 돌봐주는 값으로 100만 원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또 고3 때 약 3개월을 함께 생활했는데 같이 살던 집 보증금을 다 까먹었다며 천만 원을 달라고 요구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천만 원, 언니는 300만 원 주고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지막 말처럼 딸의 양심을 건들며 돈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도와주지 못해 엄마가 죽으면 장례식에서 친척들에게 날아올 따가운 시선이 두렵다고 합니다. 서장훈은 “평생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으면서 고작 스무 살짜리 딸한테 겨우 석 달 생활했다고 천만 원을 내놓으라는 엄마가 사람이냐?”라며 크게 격분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일한 부모인 엄마를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는 사연자에게 서장훈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너도 네 삶을 찾아.”라고 충고합니다. 사연자는 잘 받아들이고 기분이 좋아져서 떠났습니다.
은총을 받으려면 자신이 찾아온 사람 안에 은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부정하고 그 말을 따릅니다. 만약 자기가 옳다는 마음으로 은총을 받겠다면 어떨까요? 절대 그 은총이 은총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이런 사연도 나왔습니다. 사연자는 14년 동안 서울 올라와서 한 달에 약 천만 원씩 열심히 일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 결혼도 못 하고 나이가 마흔이 다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속초 고향에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돈을 서울에서 더 벌어야 할지가 고민입니다.
보살들은 묻습니다. 지금 돈을 얼마나 저축해 두었느냐고. 의외로 적습니다. 14년 동안 모은 돈이 고작 1억 5천입니다. 사기당하고 투자를 잘못해서 다 날려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집이 세 채나 있고 가게를 차릴 땅도 있습니다.
보살들은 어머니의 그 땅이 탐나서 그러는 것 같아 의심스럽습니다. 1억 5천으로는 건물을 짓고 식당을 차리기에도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한 달에 천만 원씩 버니까 조금 더 자주 어머니를 찾아뵈라고 조언합니다.
그러자 상담하러 온 사람은 어머니가 자주 오는 것도 귀찮아하신다고 말합니다. 아프신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는 제주도와 일본 여행이 계획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온 것일까요? 자기가 이런 처지라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것밖에 안 됩니다. 또는 귀찮아하는 어머니가 땅을 자신에게 주고 좀 도와주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보살들을 찾아왔다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형이 둘이 있는데 한 명은 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삽니다.
아무리 조언해주어도 다 튕겨내는 이 다 튕겨내는 이 사람에게 서장훈과 이수근은 말투부터 고치라며 “그렇게 답을 잘 알면서 여길 왜 왔어. 네가 알아서 해!”라고 소리 지릅니다.
위 여자 청년은 “엄마 걱정하지 말고, 네 행복을 찾아!”라고 하는 말에 위안받고 웃으며 갔습니다. 그러나 아래 남자는 욕만 먹고 갔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래 사람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왔고 위 청년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은 알 수 없어서 해답을 들으려고 온 사람입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상담하다 보면 많은 경우 자신의 옳음만 어필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해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싶어 합니다. 은총을 주려는 이 앞에서 자기를 긍정하면 은총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말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순종과 함께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버리라는 말과 단어가 다릅니다. 나를 부정해야 주님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나를 긍정하는 이에게는 성령께서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못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총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님 안에 하느님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자기를 부정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주인만 섬길 수 있고 그래서 하나의 ‘나’만 긍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긍정하려는 이들은 성당에 나와도 은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긍정을 위해 이용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함승수 신부님
어제도 말씀드렸듯, 이번 주간의 복음 말씀에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부터는 그 양상이 좀 달라집니다. 어제까지의 복음이 하느님 뜻을 수용하고 순명하는 ‘수동적’인 면을 드러냈다면, 오늘 복음부터는 그 뜻을 받아들인 이들이 그 뜻을 자기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는지, 그리고 그 실천을 통해 그들의 모습과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그 능동적 측면이 드러나는 겁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하느님의 뜻을 전달받은 마리아가 길을 떠나 서둘러 자기 사촌 엘리사벳이 사는 ‘아인카림’이라는 고을을 향해 갑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지체 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입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루카1,36) 가브리엘 대천사는 마리아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걱정과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인데, 마리아는 그 말씀을 듣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지닌 의미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나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래도 해보려고 노력할 수는 있는 부분입니다.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신다는 분들이라면 그 정도까지는 하실 수 있지요. 그러나 가슴으로 받아들인 하느님의 뜻을 손과 발을 움직여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마리아는 아직 앳된 모습을 간직한 소녀의 몸으로 그 어려운 일을 하신 겁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라는 태도로 팔짱끼고 관망하는 수동적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게 하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일’에 미약하나마 작은 도움이라도 보태기 위해 노력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믿음이지요. 참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래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그분의 뜻에 부합된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천 안에서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되지요.
마리아는 이제 막 아기를 잉태한 임신 초기였습니다. 아직 불안정하고 위험하기에 특별히 조심해야 할 초기 임신부가 이제 임신 6개월차가 되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다른 임신부를 돌봐야겠다는 마음을 품은 것은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굳건한만큼, 그 믿음대로 행하는 과정에 따르는 고통과 시련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의지 또한 굳건했기에, 자기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가 먼저 받아야 받은 만큼만 사랑을 베풀겠다는 수동적이고 계산적인 마음을 갖지 않고, 자기가 먼저 사랑을 실천하여 다른 이들에게 부족하고 필요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잉태하면 그 말씀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품고 있는 나를 은총으로 양육할 것입니다. 나를 믿음으로 성장시키고 사랑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런 말씀의 효과에 대해 엘리사벳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마리아가 복되시기에 그 태중에 계신 예수님도 덩달아 복되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믿음과 순명으로 당신 태중에 모신 예수님이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복된 분이시기에, 그분과 몸과 마음으로 함께 있는 마리아도 그 복된 영광과 기쁨을 함께 누린다는 뜻이지요. 신앙은 행복의 기준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믿음으로 그분의 뜻을 기꺼이 실천하는 마음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옛날 조선왕조의 한 분이 “스님! 내가 보기에 스님은 마치 돼지처럼 보입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스님이 “제가 보기에, 상감은 마치 부처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조선왕조의 한 분이 다시 “아니, 스님! 내가 스님을 '돼지'라고 놀리면 스님도 나를 무어라 흉 보셔야 재미가 있지, 나를 '부처'라고 하니 재미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자, 그 스님이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에게서 하느님의 움직이심을 알아차립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놀라운 일을 발견하고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성모송의 두 번째 소절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여인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도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예수 아기를 수태시켰음을 발견합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이들은 사람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차리는가 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들과 접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발견하고 그 일을 받아들이고 지지하고 이루도록 노력합시다.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기쁨이 넘칩니다. <루카 1, 26-45> 12월 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은 온 인류의 바람이며 오심을 아는 것은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을 알아차린 태중의 요한과 엘리사벳은 큰소리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시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이라고 하며 기뻐하셨습니다.
좋은 것은 기다리든지 찾아가야 만나고 얻을 수 있습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과 아침의 빛을 만나러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태양이 어둠을 없애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태양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으로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세상에 악과 죄가 만연하여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하지 못해서 구원자 하느님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악은 어디에서 생겨났을까요? 악은 선의 결핍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둠이 있듯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 악을 제거하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바른 정의는 너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벗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듯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사랑을 완성하신 주님은 죽음 뒤에 영원한 삶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모든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신, 망, 애의 향주삼덕을 통해 믿음은 희망을 낳고 희망은 사람으로 완성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에 사랑을 자기 안에 성장시켜야 합니다. 사랑은 이기심을 지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떠나야 가능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을 떠나 사람의 입장이 되신 것같이 우리도 너의 입장으로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지구상에서 어떤 과학적 행위를 해도 태양의 빛과 열을 당하지 못합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깨우치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주님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어디나 계신 하느님을 내가 찾지 않으면 어디나 계시지 않습니다.
눈을 뜨면서 주님 찾고 찬미 찬송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준비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으로 맞이하도록 열정과 정성을 다해 준비합시다.
하느님의 계획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이 아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지 상상해보곤 합니다.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는 좋은 정치인이, 다른 이에게 영감을 주는 훌륭한 예술가가, 또 인류 발전에 공헌하는 과학자도 될 수 있겠지요. 그런가 하면, 사랑을 실천하며 주변에 따뜻함을 전하는 평범한 시민으로 성장할 아이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아이들 안에는 씨앗처럼 심겨진 하느님의 계획이 있고, 이를 통해 세상이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리라 믿습니다. 비단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을 잉태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 계획이 자라나 열매를 맺을 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면서 그분의 나라가 완성되어갑니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과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마다 예수님의 성탄 사건은 바로 지금 여기서 신비롭게 재현됩니다. 그렇게 성탄은 2천여 년 전 일어난 일임과 동시에,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상의 신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잉태된 하느님의 계획을 깨닫고 잘 돌보아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많은 눈(雪)이
하얗게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하느님 안에
만남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더 깊어지는
만남이 있습니다.
만남을
깨어나게 하시는
만남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변명과
우리의 책임을
뛰어넘는
은총의 만남이
있습니다.
길을 내는 것도
만남이며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도
만남입니다.
사람의 기쁨은
만남의
기쁨으로
확연히
드러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러 가듯
하느님께서
우리자신을
만나러
기쁘게
오십니다.
사람들 속에서
참된 기쁨을
구하시며
참된 기쁨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만남은
함께하기에
기쁜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행복이며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행복입니다.
기다림의
본질 또한
만남입니다.
우리의
만남 또한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하느님의 기쁨을
나누는 행복한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물이 담긴 컵에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컵에 담긴 물이 빨간색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바다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바닷물이 빨간색이 변할까요? 아니었습니다.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양의 잉크를 섞어도 공간이나 부피에 따라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바다는 부피가 너무 커서 잉크를 섞었을 때의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마음의 크기가 적은 사람은 어떤 말과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크기가 큰 사람은 말과 행동에 어떤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마음의 크기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커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가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우리 마음의 크기가 커져서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기준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바다와 같은 큰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다가 모두를 포용하듯 사람들을 인정하고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바다와 같은 큰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셨던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분이 뱃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찾아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교통이나 치안이 좋은 시절이 아니었는데, 당신 아들의 날을 준비할 엘리사벳 뱃속의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가십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찾아가는 것, 그만큼 큰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엘리사벳도 놀라 말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이 넓은 마음은 엘리사벳의 말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라고 믿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마음의 크기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내 마음의 크기를 넓혀야 합니다.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바다와 같은 마음을 주님 안에서 키워야 합니다.
대체 어디를 걷고 있는가? 그곳이 다른 누군가의 길은 아닌가? 그렇기에 걷기 힘들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제 자신만의 길을 걸어라. 그러면 멀리까지 갈 수 있다(헤르만 헤세).
성령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 옛날 아인카림 엘리사벳 집의 마당에서 벌어진 일은 참으로 기구하고 혹독한 사건이었습니다.
고작 13~14살의 앳된 나자렛 산골소녀,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사촌 마리아가 친척이라고 자신을 찾아왔는데, 아이를 가져 슬슬 배가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를 바라보는 엘리사벳의 상황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도 마리아보다 6개월 앞서 아기를 가졌는데,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 그리고 수군거림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엘리사벳 소식 들었는가? 노인네들이 참 대단하네 그려. 세상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저 연세에 임신을 하다니! 저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별 생각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기구한 만남, 난감한 만남, 정말 이해하지 못할 만남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슬픔과 서러움에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사람 사이에는 성령께서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기구한 만남이 즉시 기쁨과 축복의 만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순응한 두 사람이었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기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성령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종종 체험하는 결코 원치 않는 만남, 부담 백배인 만남, 호의적이지 않은 만남도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동반하시면 기쁨과 축복의 만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직면하는 기막히고 참담한 현실도 성령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견딜만한 현실, 이겨내고 극복할만한 현실로 변화되리라 확신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의 장례미사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을 생전에 뵙지는 못했지만 뉴욕 맨허턴의 신자들과 따뜻한 사랑으로 함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부님의 장례미사에는 신부님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많은 교우들이 신부님께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배웅하였습니다. 천상에서 신부님의 가족들이 기뻐하며 환영할 것 같습니다. 한국 가톨릭 미술의 선구자였던 아버지 장발 루도비코, 한국의 정치인이었던 큰 아버지 장면 요한 총리, 춘천교구 교구장이었던 사촌 장익 십자가 요한 주교님이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을 기쁘게 맞이할 것 같습니다. 저도 언젠가 하느님 품으로 가면 어릴 때 사탕을 주셨던 할아버지, 휜 수염이 멋있으셨던 외할아버지, 용돈을 주셨던 외할머니, 그리운 부모님,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갔던 큰 누님, 작은 형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위안을 받는 것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지상교회, 정화교회, 천상교회가 있습니다.
장례미사에서 반가운 분들을 보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 성가대 단장을 만났습니다. 오랜 시간 평화신문에 글을 주셨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뉴욕에 처음 왔을 때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던 부부도 만났습니다.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께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 같았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치고 함께 식사하면서 신부님과의 인연을 들었습니다. 부부는 신부님께 혼배성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교리를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악은 피하고 선을 베풀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만남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고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의 상인들에게 팔았던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면서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평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만남을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동네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입니다. 몇 번 가보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마리아는 며칠을 걸어 아인카렘을 찾아갔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이 잉태했음을 알려 주었고, 마리아는 축하해 주기 위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도 아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몇 달 동안 아인카렘에 머물렀고, 엘리사벳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을 전하였을 겁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인도로 아이를 가지게 된 놀라움을 전하였을 겁니다. 오늘의 복음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응답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만대가 나를 복되다 할 겁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제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몇몇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고, 제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런 친구가 있기에 저는 더욱더 힘을 내서 사제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나의 모습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나의 길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엄마와 뱃속 아기>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엄마와 뱃속 아기가
함께 서둘러
험한 산길을 나섭니다
엄마가 나섰으니
뱃속 아기는
따를 수밖에 없었겠죠
아니랍니다
뱃속 아기 때문에
엄마가 길을 나섰으니까요
엄마와 뱃속 아기가
함께 서둘러
낯선 거친 길을 나섭니다
엄마도 뱃속 아기도
얼마나 얼마나
힘들고 두려웠을까요
아니랍니다
뱃속 아기와 함께 엄마는
기쁨 나누러 나섰으니까요
마리아,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좋은 일도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감격스런 일이 있다. 그럴 때라도 가쁨을 나누며 함께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엘리사벳이 그랬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처지를 헤아리고 멀리서 뜻하지 않게 기쁨을 나누고자 찾아 왔을 때, 그 방문은 기쁨이 배가 되어 값진 선물이 된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1-45).
엘리사벳은 터질 것 같은 기쁨의 감격도 마리아의 방문으로 평심을 되찾고 마리아와 기쁨이 하나가 된다. 산모가 서로 기뻐 뛰놀고, 태중의 요한도 태중의 예수님 보고 함께 기뻐 뛰논다.
성탄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이다. 내가 성탄으로 하늘을 품고 있다면, 그 하늘로 힘 없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이럴 때만이 기쁜 성탄이 된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 보심을 묵상합시다.” 우리가 마리아가 되어 엘리사벳을 찾아 기쁨을 나누듯 우리도 마리아가 되어 가난한 자를 찾아 기쁨의 인사를 나눌 때 성탄은 이루어 진다. 기쁜성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유족들에게 찾아가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 인사가 필요할 때다. 왜 지도자라는 자들이 성탄절에 백성을 위해 하늘을 품지 못하는가? 진정어린 사과 한 마디, 그분들에게도 기쁜 성탄이 될 것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성녀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고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님과 성녀 엘리사벳의 만남은 단지 두분의 만남을 넘어서서 태중에 있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이었습니다. 엘리사벳 성녀가 참 위대한 것은 성모님과 인사를 나누면서 그 성모님이 주님의 어머니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엘리사벳 성녀가 말씀드렸던 인사의 내용은 우리가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 중의 하나인 성모송 기도의 전반부에 그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우리 신앙인들 또한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을 모시면서 엄청난 은총의 삶을 이루어가는 축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함께하시는 주님 안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모습처럼 주님의 말씀이 늘 우리 삶 안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엘리사벳 사촌언니 잉태소식에 마리아가 서둘러 아인카림으로 갔죠.
산길이라 험하고 하루는 더 걸릴 길을 혼자 가신 걸 상상해 봅니다.
사촌언니의 임신소식과 자신의 임신에 마리아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놀랄 일은 엘리사벳의 인사에 마리아의 마니피캇이었습니다
두 여인이 하느님의 딸들로서 모든 걸 수락했다는 점에 감탄합니다.
위 성경구절을 믿으며 그때 그 현장이 지금이라면 전율을 느끼야죠.
저는 마냥 하느님께 놀랍니다 감사합니다 믿습니다 만 외칠 뿐이죠.
그 상황 그대로를 지금이라 생각하며 믿으니 큰 복 내릴 꺼 같아요.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성령에 가득 찬 엘리사벳의 환희에 찬 인사말이
성모 마리아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까요?
하느님의 놀라운 움직임을 체험한 두 여인의 만남은
나 홀로만 겪어야 하는 엄청난 삶의 무게의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견딜 수 있는 힘과
당신의 사람을 보내주심을 묵상해 보게 합니다.
그녀에게도 구세주의 어머니로서의 시간과 과정이 필요했고
엘리사벳과의 만남은 이 준비의 시간이 되었겠지요.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와 희망의 도구가 되기를 청해봅니다.
그 행복의 여정을 청해 봅니다.
행복하십니다. Blessed are you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함승수 신부님
우리는 어떻게 해야, 무엇을 가져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하는 일이 성공하여 많은 재물을 얻는다고 해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집에 살면서 보통 사람들은 구경도 못할 비싼 외제차를 몬다고 해도 재물이 주는 만족과 기쁨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그런 조건들 하나 하나에 감사하고 기뻐하겠지만, 어느 순간 그것들을 누리는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심지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 좋은 조건들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큰 부담이자 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재물은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봐야 합니다. '목표 달성'의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이 원하던 좋은 학교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기쁨은 본격적인 학교생활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무한경쟁을 뚫고 좋은 성적을 얻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묻혀 버립니다. 취준생이 원하던 좋은 직장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기쁨은 본격적인 사회생활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남들보다 좋은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버립니다. 그러니 '목표 달성' 역시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봐야겠지요.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은 비중을 두는 이 두 가지가 그러하다면, 대체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할지 참으로 막막하게만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행복의 근원이자 기반을 불완전한 인간 세상에서 찾지 말고,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고 사라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서 찾지 말고, 완전하고 영원하신 분 안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마리아에게 전한 이 인사말 안에 그런 메시지가 들어있지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이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 보다 자세하게는 뜻하시는 바를 반드시 '현실'로 이루시는 그분의 '말씀' 안에 우리가 참된 행복을 누리게 만드는 근원이자 힘이 깃들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하느님의 의지가, 그분의 지향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목표는 당신 사랑으로 창조하신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 즉 세상 종말의 때에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섭리하시면서 품고 계시는 지향은 우리가 당신 나라에서, 당신의 넓고 따스한 품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과 행복을 가져다주기에 그 놀라운 사실을 믿는 사람은 그 말씀이 실현되기 전에는 희망으로, 실현되는 과정 중에는 기쁨으로, 실현되고 난 뒤에는 감사로 행복해지게 되는 겁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라 믿으신 분!" 엘리사벳이었기에 확신에 차서 그렇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비웃었지만, 하느님은 의심과 불신이라는 부정적 감정 한가운데에서도, 고령과 불임이라는 육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녀 안에서 당신의 놀라운 뜻을 기어코 이루셨지요. 그 절절한 체험을 통해 엘리사벳은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읍소하는 작고 약한 이들의 간구를 결코 흘려버리지 않으시는 사랑 넘치시는 분임을, 그들을 위해 해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으신 일을 반드시 해내시고야 마는 전능하신 분임을. 그러니 그런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의심하여 스스로 두려움과 걱정 속에 갇혀 불행하게 살지 말고,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며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해야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겁니다. 그리고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과 같은 깨달음 속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투신한 마리아의 용기와 결단을 칭찬하며 그 마음 변치 말고 끝까지 쭉 나아가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도 이 두 여인처럼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여 참된 행복 속에 살아가는 복된 존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연말연시 각종 모임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의무적으로 가야 하는 경우도 있고, 만나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서 가는 모임이 있습니다. 집안과 사회적인 직책과 역할 때문에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있고, 그야말로 다소 사적이면서도 친분이 깊은 이들과의 만남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되새기다 보면, ‘나는 누구를 왜 만나고 싶어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가서 사제 즈카르야의 집에 사는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성지순례를 가 보면 오늘날에도 마리아가 살고 있는 나자렛에서 차로 한 삼사십분 가는 거리입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자신에게 하느님의 위대한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며 예언한 천사의 말을 확인도 하고, 그 천사의 말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받은 석녀 엘리사벳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로 인하여 엘리사벳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등의 여부를 알고 안부를 나누기 위해 찾아갑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 안에 들어가 인사말을 전할 때, 엘리사벳은 자신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노는 반응을 느낍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엘리사벳은 성령의 감도로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주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로 성령께서 임하시어 예수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아기인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뱃속에서 즐겨 반기느라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 중의 하나로 마리아와 거기 있는 이들에게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마리아를 행복한 여인으로 칭합니다. 그 행복의 이유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받아들인 믿음’입니다. 자신의 남편 즈카르야는 주님의 말씀을 기꺼이 믿고 받아들이지 못해 임시적으로 벙어리가 되었건만, 마리아는 그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를 여시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가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주 하느님은 또 다른 여인을 찾아 헤매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미 그러한 마리아의 성성을 보시고 마리아를 태어나기 전부터 원죄없이 태어나도록 점지하셨는가 봅니다.
오늘 엘리사벳의 인사말을 되새겨 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리는 거의 모두가 주님의 생애와 말씀과 행적이 낱낱이 적혀 있는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성경 말씀을 우리 가슴 속에 차곡차곡 새겨 놓았다가, 내가 예기치 않은 일을 겪을 때마다 오늘 주 하느님께서 그 성경 말씀 중에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되새기면서 주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내가 겪는 이 상황과 이 사건 속에서, 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지 헤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에게 임하셨던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나를 통해서 주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이루어나가시도록 나를 봉헌합니다. 주 하느님께 나를 주님 구원의 도구로 봉헌하면서 참 기쁘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어서 오세요!
이승현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시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코로나로 배달 주문이 많아졌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고 번뜩 집집마다 어린이 주보를 배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본당 수녀님들과 함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걷고 또 걸어 아이들 집으로 주보를 배달했습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보 배달을 하며 기쁜 일도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하루는 신자 집에 아무도 계시지 않아 아파트 현관 앞에서 문이 열리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린 적도 있습니다. 그때 문득 ‘예수님도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기 참 힘드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닫힌 문을 열기도 이렇듯 힘든데 닫힌 마음의 문을 열기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어떤 집 우편함에는 어린이 주보만이 쌓여 있기도 했습니다. 전단지는 챙겨가고 주보는 그대로 놔두었던 모양입니다. 전단지가 하느님 말씀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는구나 싶어 잠시 슬퍼지기도 했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환대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어린이 주보를 받아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며 기쁘게 주님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만남 안에 기쁨과 행복이 있다. <루카 1, 39-45> 12월 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스쳐 가는 인생길에 기쁜 만남도 있고 슬픈 만남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남은 어느 쪽이든 필요한 것입니다. 기쁨을 배로 하고 슬픔을 삭이고 평상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어머니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기쁨과 행복의 만남입니다. 최초로 주님과 함께 계신 주님의 어머니를 만난 엘리사벳의 기쁨의 찬미는 태안에 있는 요한에게까지 전달되어 뛰놀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만난 분은 누구십니까?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오신 하느님이며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성모님은 마리아의 노래라고 하시면서 구약 안나의 노래를 부르며 엘리사벳에게 답사를 보내면서 오늘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를 깨우쳐주십니다.
거룩하고, 자비롭고, 권능을 가지신 분이 세상에 오셔서 하고자 하시는 일은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권좌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올리시고, 굶주리는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떠나보내셨도다.” 하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살게 하시려는 전능한 분의 계획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유, 평화, 기쁨이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도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 기다리는 분은 오늘 독서 아가에 오시는 분은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이미 오셔서 “내 창문을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보십니다.” 주님이 언제나 제 곁에 와 계심을 알고부터는 주님만 생각해도 가슴이 뛰고 기쁨이 넘칩니다.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바로 당신 옆에, 앞에, 뒤에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함께 있는 사람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저는 수도원을 찾아오는 사람을 그리스도처럼 대하라고 하는 규칙서를 보고 ‘별사람 다 오는데’ 했지만, 사기꾼으로 온 사람도 주님이셨습니다. 어떤 때는 굶주리는 사람, 도움을 청하는 사람, 저의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은 기쁨을 가지고 오거나, 슬픔을 가지고 오거나, 오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오상 프란치스코 성인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나환자를 만나 냄새를 피해서 지나가다 ‘아니, 저분이 주님이시라면’ 하며 끌어안고 도움을 주었는데 바로 주님이셨다는 이야기는 감동입니다.
어느 수도원에 수도자들이 서로 인간적 갈등으로 분란이 일어나다가 산 너머 잘되어가는 수도원의 원장님이 “당신 수도원에 누군지 말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한 분 계십니다.” 하여 그 말을 전해 들은 시간부터 서로 갈등을 느끼다가 ‘저분이 주님이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니 모두가 주님이 되어 하느님 나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공동체인 나라, 가정, 단체,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지금 당신 앞뒤에, 옆에, 주님 오셔서 현존하니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여 기쁨과 행복 중에 살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복을 여시는
주님이십니다.
말씀으로
행복을 깨우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다른 행복에게
하느님을 전합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펼쳐지는
행복입니다.
행복을 키우는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말씀으로
믿음의 시간이
펼쳐집니다.
마리아도
엘리사벳도
믿음의
여인들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묻고
하느님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삶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믿음의 여정과
행복의 여정은
똑같습니다.
아무 것도
믿지 않았던
우리가
하느님을
믿게 되는
행복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말씀과 믿음으로
우리의 일상을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하느님을
믿습니다.
예전에 근무했었던 교구청 앞에는 시장이 있었는데, 이 시장 안에는 아주 유명한 ‘닭강정’ 집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이 닭강정을 먹기 위해 길게 줄이 섭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근방에 닭강정 집이 정말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잘되는 집은 딱 한 집으로, 이 집만 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처음으로 이곳에서 닭강정 장사를 했던 소위 원조집입니다.
사실 저는 줄 서는 것이 싫어서 줄이 거의 없는 앞집에서 주문해 먹었습니다. 닭강정 맛을 전에 비교했던 적이 있는데,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줄이 없는 가게가 더 친절하고 양과 맛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아마도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는 ‘더 맛있으니까 이렇게 기다려서 닭강정을 사 먹겠지’라는 마음에 줄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자신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남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선택 장애가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그냥 외면해서는 안 되는 불의한 상황에서도 모른 척 지나가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 필요합니다. 사랑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할 때, 세상은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좋지 않아 보이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에 사랑으로 선택하신 분이 계십니다. 이 사랑의 선택이 우리 모두의 구원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만약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죄로 공개 처형되는 당시의 상황을 기억해서 천사의 메시지를 거부하셨다면 어떠했을까요?
편한 삶은 남들처럼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남들처럼 사는 삶이 아닌, 우리 각자의 삶을 살 것을 명하십니다. 그 모든 삶 안에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겸손하십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하느님의 어머니시지만, 엘리사벳을 직접 찾아가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겸손을 간직하고 육화하신 예수님의 마음처럼 성모님도 마음으로 하나를 이룹니다. 성모님도 겸손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만 진정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놓치지 말고 작은 것 하나라도 배워라. 그리하면 틀림없이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이다(탈무드).
누구 탓?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를 묵상하다가, 신랑이 왜 그토록 늦었을까 싶었습니다. 늦게 와서 기름이 부족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혼인 풍습은, 신랑이 신부 부모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자기 부모의 집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신부의 집에서 혼인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신랑의 행렬은 신부의 집에 당도하기까지 일반적으로 지체되었습니다. 신부의 집안사람이 막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부가 아름답고 귀할수록 신랑은 신부 집안사람에게 더 많은 선물을 줘야 빨리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랑이 늦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신랑이 늦게 오는 것은 신부 집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부는 이를 염두하고 기다렸어야 합니다. 신랑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지체하게 만든 신부 집안 탓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기름이 없어서 잔치에 들어가지 못함을 신랑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은총은 그 본성상 자신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른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는 내용입니다. 어제는 은총을 받는 첫 번째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에 대해 생각해볼까 합니다.일단 작은 은총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큰 은총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당신이 받은 은총을 당신만 지니지 않고 나누려고 하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도 자녀가 있으면 형제와 나눌 줄 아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습니다. 단순하지만 이 두 가지만 알면 우리는 은총의 충만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나중에 돌 맞아 죽더라도 당신이 가진 것을 당신만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미국 아이오와주의 작은 농촌 시골마을 웨스트 브로우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형제가 교회에 가던 중에 주먹질하며 싸우는 소년 네 명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킨 후에 음식을 먹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학습지진아, 문제아, 저능아, 무의미한 인간 등의 별명을 갖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버림받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목사님께 부탁해 주일학교에 이 아이들을 위한 반을 만들어주면 자신이 교사가 되어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주일마다 그 선생님은 네 소년에게 하느님 말씀을 가르쳤고 소년들은 자라서 도시로 나갔습니다.
1932년 이 나이 든 주일학교 교사의 은퇴 겸 생일 축하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편지 네 통이 낭독되었습니다. 하나는 중국 선교사로부터, 두 번째 편지는 연방 은행 총재로부터, 그리고 세 번째 편지는 후버 대통령의 비서실장에게서 온 것이고, 네 번째는 후버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후버는 미국 제31대 대통령으로 가장 어려웠던 대공황 시기(1929-1933)에 미국을 이끌었고 “하느님의 말씀은 역경을 이기는 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제 은총을 담을 그릇이 감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은총을 빨아들이는 힘은 나누려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제는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시기 위해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사셨음을 말했다면, 오늘은 성모님께서 당신이 받은 은총을 엘리사벳에게 흘려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감사와 사랑이 은총을 충만히 받는 길입니다.
미국의 경영대학원 와튼 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남에게 주려고만 하는 이타적인 사람인 ‘기버’(Giver), 남에게 받으려고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인 ‘테이커’(Taker), 그리고 남이 나에게 무언가 해주면 그제야 나도 주는 ‘매처’(Matcher)입니다.
이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실패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안타깝게도 무조건 주는 기버들입니다. 이들은 경쟁에서 뒤처집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큰 성공을 하는 사람들도 기버들입니다.
캘리포니아주의 기술자 16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남을 도와주느라 정작 자신은 가장 낮은 생산성을 보이는 기버 부류를 조사했습니다. 단기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기버들은 경쟁에서 뒤처졌습니다. 하지만 기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공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지속한 시간 속에서 쌓이는 사회의 ‘인정’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은 일 잘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을 선호합니다. 자신보다는 타인과 조직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버들이 그래서 장기적으로 승승장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주는 이기적인 테이커와 매처보다는 믿음과 신뢰,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기버들이 세상에서 성공합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라야 했던 배정철 대표가 있습니다. 그는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도 포기한 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많이 벌어 자기처럼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견뎠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사회에 내놓은 돈은 무려 50억 원입니다. 한국 초밥왕으로 군림한 그는 자기의 성공의 원인을 자신의 끝없는 나눔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아주 크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작은 일에서부터 나누다 보면 나중에 자신도 많은 것을 얻게 되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 저도 나눔이라는 것을 시작할 때 작은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학생들 장학금을 댄다든지 병원에 기부금을 내면서 나눔에 관련된 소문이 나다 보니까 이왕이면 우리 가게에서 먹자 하는 분들이 많으시고 그렇게 되다 보니까 더 많은 것을 제가 얻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우선 가진 것에 감사합시다.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저녁 감사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저는 자려고 침대에 누워 주모송을 바치고 오늘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다음 날 일어나서 할 일들을 자세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계약의 궤 위로 내린 하느님의 현존이 움직인다면 바로 그 구름을 따라 움직이겠다는 준비된 자세를 말합니다. 계약의 궤는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본성은 흐름입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르십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유학 가라는 주교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은 그만큼 큰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항상 전날 밤에 다음 날 일어나서 뭐 해야 할지 주님의 뜻을 물어보면 다음 날 아침부터 당황하지 않고 하루를 알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는 일들이란 사제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아주 충실히 살지는 못해도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만큼 많이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고 또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감사합니다’와 ‘사랑합니다’. 이것이 은총을 받는 유일하고 완벽한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낯선 곳에 갔을 때입니다. 모든 것이 두렵고, 걱정이 앞설 때입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면 위로가 되고, 힘이 납니다. 1986년 군대에 갔을 때입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아서 내무반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기 때문에 대학 4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한 저보다는 한참 고참이었습니다. 저는 친구의 도움으로 비행기가 하늘을 향해 이륙하듯이, 군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20년 후인 2005년 겨울입니다. 처음으로 해외연수를 시작했습니다. 늦은 저녁 토론토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입국장에는 선배와 후배 사제들이 마중 나왔습니다. 한 달에 한번 모여서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신부님들은 낯선 도시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토론토 교구에서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서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이 함께 했기에 3년을 무난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 사목국 기획연구팀에서 대림시기를 보내는 교우들을 위해서 영상물을 제작하였습니다. 짧은 영상이지만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묵상하기에는 충분한 영상입니다. “"나는 나자렛의 작은 여인, 마리아입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 요셉입니다, 나는 양들을 돌보는 목동입니다, 나는 메시아를 기다려온 베들레헴입니다."라는 영상입니다. 유튜브에서 제목을 검색하면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성탄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해당 영상을 보시면 어떨까요? 좋아요와 구독을 눌러주시면 영상을 만든 기획연구팀에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제1편에는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가 늙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아인카렘으로 떠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늙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축하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어긋난다는 것은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일입니다. 엘리사벳은 그런 마리아를 만나면서 이렇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이제 기뻐하며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나이다.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영혼 기뻐 뛰나이다.”
사제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몇몇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고, 제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런 친구가 있기에 저는 힘을 내서 사제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나의 모습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나의 길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진리의 연인戀人,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여정旅程-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제1독서와 루카 복음 말씀 묵상중 떠오른 강론 제목은 “진리의 연인-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여정-”으로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해당됩니다. 더불어 떠오른 여러 예들을 나눕니다.
-1.“한 밤중 또는 새벽녘
내 영혼
목마름에 눈떴고 눈뜨면 목말랐다
아픔에 눈떴고 눈뜨면 아팠다
목말라 주님을 찾았고
아파서 주님을 찾았다
예전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러할 거다”-2015.6.11
내 영혼의 성소요 숙명입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도 여전할 것입니다.
-2.“나무는
평생
하늘만을 향해 살아왔기에
하늘사랑만으로 행복했기에
낮에는 햇빛사랑
밤에는 달빛은총
하늘위로속에 살고 있기에
꽃, 열매, 잎들의 떠남에도 초연할 수 있는 거다
외로움을 견뎌낼수 있는 거다”-1997.10.29.
어제는 휴대폰 갤러리 안에 1년동안 축적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모두 지웠습니다. 나무들은 물론 수도원 경내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일년사계의 모습이 참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변화무쌍, 변화찬란했습니다. 부수적인 모든 것들을 다 떠나 보내고 사랑의 추억들 가득 담고 사랑의 본질로 남아있는 겨울나무들! 결코 가난한 나무들이 아니라 100% 순도純度 사랑의 부요한 노년 인생을 상징한다 싶었습니다.
-3.“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63,2)
주님을 목말라 찾는 영혼의 갈망을 노래한 시편입니다.
-4.“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오, 정의의 태양이시오,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 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비추어 주소서”
12월21일 “오”후렴입니다. 진리의 연인인 우리가 진리의 샛별! 주님의 내림來臨을 간청懇請하는 기도입니다.
-5.“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얼마전 하느님께 드린 헌시獻詩 첫연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되기(becoming love)’는 ‘하느님 되기(becoming God)’의 존재론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과연 몇 퍼센트(%) 사랑 되기, 하느님 되기의 여정중에 있겠는지요? 주님과 사랑의 일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물음입니다.
오늘 아가서와 루가복음의 내용이 참 깊고 신비롭습니다. 순전한 영적사랑은 환상입니다. 몸, 마음, 영혼, 정신 모두가 하나된 건강하고 건전한 전인적 통합적 주님 사랑입니다. 아가서 시작부터 연인간의 감미로운 사랑을 느낍니다. 이런 사랑을 노래한 십자가의 요한, 아빌라의 대 데레사, 이냐시오 로욜라등 사랑의 신비가들입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 오잖아요.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두 연인이 상징하는바 참 심오하고 다양합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관계를,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 관계를, 진리이신 주님과 진리의 연인인 우리 영혼과의 관계를, 말씀과 영혼과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연인인 우리 영혼을 찾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과연 우리 영혼도 우리의 참 연인이신 주님을 이렇듯 찾고 갈망하는지, 참으로 우리 영혼이 진리의 말씀과 일치를 이렇듯 갈망하는지 묻게 됩니다.
우리를 섬기러 오신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중에 계실 때도 엘리사벳 태중에 있는 요한을 섬기러 찾아 오십니다. 연인을 찾듯이 사촌 엘리사벳을 찾는 마리아의 영혼입니다. 과연 여러분도 반가운 일이든 힘든 일이든 겪게 될 때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듯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영혼의 도반같은, 연인같은 이들은 있는지요? 이런 영적 도반과의 만남은, 연인과의 만남은 그대로 주님과의 만남이요 구원을 의미합니다.
엘리사벳도 주님의 연인, 진리의 연인이요, 마리아도 주님의 연인, 진리의 연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성령 안에서 연인들간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에 가득 차 큰 소리로 고백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정말 두 여인이야 말로 진리의 연인, 주님의 연인이라 할 만합니다. 말그대로 진리의 연인들 간의 만남이요 치유와 구원의 만남입니다.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던 연인들간의, 영적도반들간의 만남입니다.
마리아 성모님 태중에 있는 예수님을 만나 기뻐하는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마리아 성모님은 주님을 모신 감실같은 존재가 되고 이 감실앞에서 기뻐 뛰는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의 모습은 흡사 주님을 모신 궤약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다윗을 연상케 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을 만나 기뻐하는 우리 영혼과 흡사합니다. 과연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는 이런 기쁨으로 춤추는 영혼이 되어 우리 영혼의 영원한 주님이자 연인이자 도반이신 주님을 맞이하는지 묻게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는 물론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몸, 마음, 정신, 영혼, 모두가 하나되어 갈림없는 전존재로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자 진리이자 도반이신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도록 합시다. 진리이신 주님의 연인으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여정중 날로 주님을 닮아 순도純度 높아지는 진선미眞善美의 삶이 되도록 은총을 청하며 노력을 다합시다. 아멘.
<보고픈 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외로운 날에는
보고픈 이가
더욱 보고프다
보고파서
가고픈데
갈 수 없으니
더욱 외롭다
혹시나
보고픈 이
내게 올세라
바라고 바랄수록
마음만 아릴뿐이다
허나
내 마음
전해졌을까
외로운 날에
내게 온 보고픈 이가
눈물겹게 고맙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인사를 받고 태중의 아기가 뛰놀았으며 성령으로 가득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경우도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갖지 못했던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로 세례자 요한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섭리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보면서 너무나도 기쁜 마음으로 축복의 말을 건넸던 것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신앙생활은 그렇게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신비를 함께 발견하고 기뻐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길 바라기 보다는 내 말과 내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기도하곤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내 욕심의 기도를 충분히 들어주실 충분히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원의 길은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완성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곧 내 말대로,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바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원하시는 대로의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의 완성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누구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은 지난 대림 4주일의 복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대해서 묵상하고 싶습니다. 세례자요한의 잉태와 마리아의 잉태는 모두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성취와 더불어 시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한 예언의 성취이고 마리아의 잉태는 메시아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오시는 메시아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구원사업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오늘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는데 이 두 분의 공통점에 대해서 말을 한다면 모두 하느님의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메시아에 대한 잉태는 복음에서 나왔지만 엘리사벳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를 향한 엘리사벳의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태 안에 계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엘리사벳이 가브리엘 대천사의 방문을 받으면서 알았을 것이고 자신이 앞으로 나을 아이가 하느님 구원사업의 메신저가 될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겠지요.
이렇게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공통점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굳이 마리아께서 무거운 몸으로 먼 길을 마다않고 가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리고 나누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엘리사벳은 고령자이면서 더군다나 단 한 번도 아이를 출산한 경험이 없었기에 인간적인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기에 마리아께서는 걱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찾아가 함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기쁨을 나누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기뻐하였으며 태 안에 계시는 아기도 즐거워 뛰놀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이렇게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구원 즉 하느님께서 직접 찾아와 주시는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신앙인이지만 기쁨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단 하나 하느님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지요.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알고 있다면 불행이 찾아와도 아픔이 찾아와도 믿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에서 마리아께서는 “서둘러”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리기 위함에서요.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이제 곧 성탄절의 큰 별이 우리들을 비출 것입니다. 그 빛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은 기쁨의 삶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근상 시몬 신부님
"...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아가 2,13-14)
주님의 말씀입니다. 컷 앤 페이스트를 하는데 위 성경 구절에 이어서 주님의 말씀입니다가 붙어 있다. 아가서에 주님의 말씀입니다는 생뚱맞다. 날 것의 감정에 주님의 말씀이라니...
언젠가는 아가서를 읽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아직이다. 한구절 한구절을 읽어야 소용이 없고, 이건 전체를 다 읽어야 한다고 진즉에 직감했다. 그러나 그건 교만한 판단이었고, 비겁한 게으름인데... 그조차 나란 인간의 한 구석이니 어쩔 수 없다. 난 아가서의 이 시선과 마음이 버겁다.
그런데 오늘 감히 조금 읽는다. 소리내어. 아무 것도 아닌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복되신 두 여인의 만남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성화의 중심에 있는 두 여인에게서
길을 따라 올라가보면 살짝 열린 대문 앞에
강아지와 함께 있는 즈카리야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 놀라운 축복의 소식을 믿을 수 없었기에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침묵의 사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의 봉사속에
성모님과 엘리사벳,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이
순탄히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바라봅니다.
나의 삶의 많은 부분들은
침묵속에서도 선한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 덕분에 이뤄질 수 있었음을
성탄의 기다림을 감사의 기도로 담아 봅니다.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Traveled to the hill country in haste
하늘보물로 무장한 기분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태아는 어머니와 탯줄 통해 직결됐다는 걸 느끼며 새삼스레 놀랍니다.
어머니의 생각마음 오감이 태아와 직결된 한 몸이라는 것이 놀랍니다.
이런 사실이 이천년 전에 성경에도 표현되었다는 것도 참 놀랍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 계회이고 천사들이 이를 전했던 거죠.
이런 내용들이 너무 순차적이고 논리 정연해 성경의 생동을 느낍니다.
이 모든 내용을 믿기로 정했으니 하늘보물로 무장한 기분이 솟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뜻에 공감한 믿음이 하늘 보물이란 것도 느껴집니다.
현대에도 여자들이 잉태하면 하늘보물이라 믿는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엘리사벳이 맞이한 성탄 그리고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은퇴 후 인간관계의 큰 변화가 있다. 갑자기 사라진 신분, 영원히 지속되리라던 자신의 전공에 딸린 박사라는 정체성은 하루 아침에 날아갔다. 뚝 끊긴 발걸음, 갈 곳이 없어진 아파트의 작은 공간, 다시 아버지가 되고 싶고 남편이 되고 싶은 본래의 신원으로의 복귀, 금의환향인줄 알았는데 집에서까지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다. 아버지, 남편이라는 본래의 신원도 충실했어야 했는데 그 신원을 되 찾기에는 쪽박을 찼다. 그분은 평소에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깨닫는 순간이다.
그렇게 은퇴 후 일년을 살았다. 돌아온 건 짜증과 분통, 스트레스, 또 다른 강박이 생겨나 우울증이 걸렸다. 정부고위직공무원, 잘 나가던 강사의 자리, 화려한 경력이 담겨진 명함 한 장을 나에게 건냈다. 내가 그분에게 “대단하셨군요. 훌륭하십니다” 그렇게 자기를 우러러 볼 줄 알았나 보다.
내가 들려준 말은 “이제 이런 화려함 다 내려 놓으시지요. 마음을 비우시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 재능기부하며 행복하게 삽시다”
“인생이 은퇴 후에도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도록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위해 봉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네 그 일을 하러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제가 지녔던 재능을 이곳에 기부하며 묵묵히 살려고 합니다”
우물 안에 개구리, 은퇴 후 세상에 섰다. 세상이 넓고 할 일이 많음도 조금씩 익혀간다. 공부 잘한 학창시절 뽑냈고, 승승장구하던 고공행진 관료 승진도 뽐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은퇴 후 아무에게도 칭찬이 없다. 그는 처음으로 행복하지 않았다. 또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지 새롭게 나에게 물어 본다. “신부님, 제가 어린이 청소년들과 함께 살겠습니다. 허락해 주시는 거죠?”
그는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주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귓가에 울렸다. 주님의 어머니의 엘리사벳 방문을 기억하며 엘리사벳이 맞이하는 성탄을 떠올려 본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4-45)
오늘 복음 속 엘리사벳이 맞이하는 성탄이 그랬다. 그리고 나를 찾아온 은퇴자의 성탄 또한 그랬다. 말씀이 귓가를 울리고 자기 안에서 새롭게 구세주를 맞이하는 기쁜 성탄말이다. 2021의 성탄은 그 어느 해 보다 더 친밀하게 다가오는 기쁜 성탄이다.
마음으로 부자 된 행복, 2021 성탄을 맞이하고 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음 걸음을 서둘러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갔다(39절). 그러나 그것은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거나 의심을 하였거나, 천사가 알려준 증거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약속의 기쁨으로 넘쳐, 그 기쁨에 이끌려 경건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친 마리아가 발길을 서두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성령의 은총은 지체함과 게으름을 허락지 않는다. 항상 즉시 기쁘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마리아의 겸손은 그녀를 이끌어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가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잉태를 축하하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살피게 한다. 마리아는 말씀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4절) 요한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기쁘게 뛰노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요한은 영으로 세상의 주님을 알아보고 있다. 성경에 이르기를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예레 1,5) 이 일은 큰 표징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요한이 아직 목소리로 기쁨을 드러내고 주님을 증거할 수 없었기에 그 어머니가 말한 것이다. 주님께서 죽은 태 안에 당신 전령을 준비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아담 뒤에 오심을 말한다. 그분은 먼저 엘리사벳의 태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다음에는 당신의 몸으로 아담의 토양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했는데, 아들 덕분에 성령을 받은 것이다. 어머니가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아들이 성화된 다음에,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진 것이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잉태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함께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신 것이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43절)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그분이 자기 주님의 어머니임을 알아본다.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다.”(이사 66,2) 이는 엘리사벳에게 옳은 말씀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그러나 귀로 듣고 믿는 우리도 복된 사람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했고, 말씀을 실천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살아, 말씀을 낳는 삶을 살아야 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1, 39-45(대림 4주 화)
오늘 <말씀전례>는 오시는 분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 간절함으로 마음 설레어 있고, 오신 분에 대한 기쁨과 반가움으로 벅차올라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가는 노래합니다.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또 <복음 환호송>에서는 “어서 오소서. 주 하느님”하고 환호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하고, ‘이미 오신 그분’을 맞이하여 뱃속에서 즐거워 뛰는 아기와 함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마리아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는 “말씀”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안에 행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말씀이 왜 행복이 되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이루기에 행복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또 하나의 복을 노래합니다.
“당신의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그러니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녀의 태중의 아기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 아기가 구세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두를 믿으셨으니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이미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이를 두고 성 암브오시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사벳은 잉태한 후에 성령으로 충만했고, 마리아는 잉태하기 전에 충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믿고 품으면, 진정 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얼마나 벅찬 일인지요!
그렇습니다. 말씀이 잉태되면, 뱃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오히려 품고 있는 우리를 양육할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산골을 찾아가는 노고가 되고, 섬김이 되고, 사랑이 되어 피어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노래가 되고, 기도가 되고, 삶이 되어 탄생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 요한이 동생인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닦겠지만, 분명 예수님이 먼저 요한을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곧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나무 뒤에 숨은 아담을 하느님이 먼저 찾아와 부르시고, 미디안으로 도망가 있는 모세를 먼저 찾아와 부르시듯이,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방문하시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1)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태중의 만남, 요한과 예수
이기우 신부님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가 만나실 때, 두 여인은 모두 태중에 아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루카는 엘리사벳의 입으로 그녀의 태중에 있던 아기도 마리아의 태중에 있던 아기를 만나면서 기뻐 뛰놀았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모태에서부터 만난 사이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이끌림으로만 가능했을 이 만남은 과연 두 아기가 장성해서도 서로가 영혼으로 교감하는 범상치 않은 관계로 이끌어갔습니다.
육 개월 차이로 동갑내기인 두 사람이 장성하여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자라는 동안 만날 일이 없었으나 세례 운동을 벌인다는 요한에 대한 소문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서로 상의할 것도 없이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를 주고 있던 요한을 찾아가셨습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로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사제들의 사두가이파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되 율법적으로 수구적이었던 평신도 부자들의 바리사이파, 정치적으로 급진적이면서 무장투쟁을 불사하던 혁명당원 젤로데 그리고 유다 광야에 은둔하며 철저하게 율법을 살던 근본주의자 독신 사제들의 에세네파, 그 어느 세력에도 동의하지 않고 세례자 요한의 노선에 동의하는 선택을 한 것이었습니다. 서로 만난 적이 없으면서도 태중에서부터 영적 교감을 하고 있던 덕분에 세상의 보는 눈에 있어서 두 사람은 교감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요한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근본적으로 썪었으므로 파국적 심판이 닥치리라고 선언하며 철저한 회개를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의 이러한 파국적 시국관에 동의하시느라 그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이고, 이는 당시 유다인들에게 모범이 되어 주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물의 세례로 씻을 죄를 짓지 않으셨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죄에는 물들지 말아야 하고 죄를 지었으면 회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신 셈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뛰어난 예언자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요한을 따라 다니지는 않으셨고, 그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나라의 백성을 모으러 다니셨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지 그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까지 말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점을 흔쾌히 인정하면서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천거했으며, 전반적인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드러나시도록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준비시켜서 길을 닦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신심 깊은 아나빔이었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를 선택하시고, 탄생부터 시작하여 세례 운동과 제자들을 천거하는 일까지 요한을 준비시키신 일은 모두가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준비이면서, 이 가치들을 가로막고 있는 사탄의 가치들과 맞서서 제압하는 공격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닿았다”고,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당신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고 날카로운 심판 언어들을 쏟아내면서 낡은 체제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동의하신 이 파국적 시국관은 현대의 물질문명의 우상숭배 풍조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적용의 행동을 앞장서서 하고 계신 분이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최고선의 가치들이고, 현대인들의 용어로 번역하면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입니다. 이 가치들을 가로막고 있는 우상숭배적 가치들은 억압과 불평등, 불의와 패권입니다. 종교와 교회는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을 실현하기에 앞서서, 요한의 역할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신앙인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회개만이 아니라 시대적인 회개, 시대의 뜻, 시대 정신을 일깨우도록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가치와 역할에 의해서 영적으로 교감하신 요한과 예수님처럼,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영적으로 교감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 낮은 곳에서 기다리시는 주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교회는 연인과 같은 열렬한 사랑으로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오는 노루나 젊은 사슴 같은(아가 2,8-9) 사랑하는 이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통해 구원계획을 계속하십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구세주의 수태 통보를 받고, 얼떨결에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하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신비를 이해할 수 없어 두려웠고(1,30 참조), 처녀 잉태 사실이 알려지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을 알았기에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12-15세의 어린 나이에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마리아는 두려운 마음으로 천사의 말을 확인하려고 서둘러 그 멀고 험한 길을 걸어 유다 산악 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1,39). "더 높으신 여인이 더 낮은 여인을 돕기 위해 오시고,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에게,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오십니다."(성 암브로시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자 엘리사벳 태 안의 요한이 성모님 태 안의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을 알아보며 즐거워 뛰놉니다(1,44). 요한은 태 안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1,15). 이미 시작된 구원의 기쁨은 그렇게 마리아의 수고로운 발걸음과 엘리사벳과의 소박한 만남에서 피어납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스스로 내려오시고 찾아가시는 구세주의 사랑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찾아가는 길은 그렇게 저 낮은 곳으로 향합니다. 길거리로 나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과 함께할 때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태 안의 두 생명의 만남으로 인류의 미래에 희망의 빛이 비치게 되었듯이 모든 만남을 소중히 여기며 그 안에 뿌려진 구원의 씨앗을 잘 키워가야겠습니다. 사소한 만남, 보잘것없어보이고 내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아보이는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도 가난하게 오시는 주님을 볼 수 있어야겠지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근본적인 자세는 사랑과 더불어 굳건한 믿음입니다. 인생이 제아무리 고달프고 절망스러우며, 두렵고 불안해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을 믿고, 보지 않고도 믿는 확고한 신앙으로 주님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내가 고통을 당하며 힘들어하고, 오해받고 시련을 당할 때, 절망하고 좌절할 때일수록 더 간절하게 우리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각박하고 힘든 시기이지만 다 함께 손을 맞잡고 서로에게 작은 사랑의 난로가 되어주며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구유 앞으로 나아갑시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말씀과 행복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마리아는 길을 떠납니다. 저 멀리 유다 산악 지방을 향해 엘리사벳을 만나러 갑니다. 아기를 가져 몸이 무거웠을 텐데도 “서둘러” 갑니다. 마리아는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떠나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외쳤습니다. 마리아는 기쁨에 가득 차 복음을 전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분입니다. 그 옛날 다윗은 하느님의 궤를 옮기며 유다 산악 지방에서 석 달을 머물렀습니다(2사무 6장 참조). 이제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참된 계약의 궤는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진면목을 어머니 배 속의
세례자 요한이 먼저 알아봅니다. 그는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찬” 이였기에, 마리아 안에 머무르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벳 역시 “성령으로 가득 차”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 아드님을 전하시는 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계신 곳에 성령께서 함께 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 아드님을 알아보게 하시고 받아들이게 하시고 찬미와 찬송을 드리게 하십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믿고 전한 참으로 행복한 분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함승수 신부님
[아무것도 너를 혼란하게 하지 말며, /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 하느님은 불변하신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게 하고,
하느님을 소유한 자는 아무 부족함이 없나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네 생각을 드높이, / 천국에 올라,
아무 것도 너를 번민하게 하지 말고, / 아무 것도 너를 혼란하게 하지 말라.
넓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말라.
세상의 영광을 보고 있는가? / 헛되고 헛되다.
아무 것도 한결같지 않으니, /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영원한 천상의 것을 추구할지니,
성실하신 분, 약속의 하느님께서는 불변하신다.
사랑 받으셔야 마땅하신 분, / 한없는 선이신 분을 사랑하여라.
허나 인내함 없는 참 사랑이란 없네.
신뢰와 살아있는 믿음이, / 네 영혼을 지탱하게 하라.
믿고 희망하는 사람은, / 모든 것을 얻게 되리라.
지옥에게 괴롭힘을 받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 오히려 지옥의 분노를 비웃으리라.
버려짐, 십자가와 불행이 들이 닥칠지라도,
하느님께서 그의 보물이시니, / 아무 모자람이 없도다.
그런즉, / 물러가라, 세상 것들아, / 물러가라, 헛된 것들아.
모든 것을 잃는다 하더라도, /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너를>이라는 성가로 더 익숙한 '아빌라의 데레사성녀가 바치는 기도'의 전문입니다. 데레사 성녀가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분의 뜻을, 그분의 사랑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를 이끌어주시고, 지탱해주시며, 보호해주심을 굳게 믿은 것입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자기 삶을 온전히 내어맡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이 곧 내 뜻이고 내 뜻이 곧 하느님의 뜻인 상태, 내 것이 곧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의 것이 곧 내 것인 상태 그래서 그분과 참된 일치를 이룬 상태가 바로 '하느님을 소유'한 상태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통해 무엇이든 희망할 수 있고 희망하는 바를 다 이룰 수 있으니 당연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되지요.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이렇게 외치는 것도 하느님을 소유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에,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뜻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기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것은 반드시 일어날 일을 희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청하고 바라는게 다 이루어지는데 삶이 불행할 틈이 없지요. 매 순간이 주님께서 이루시는 섭리와 신비에 대한 놀라움과 감동,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이미 그런 마음상태에 이르렀음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동시에, 그 말을 듣는 우리도 그런 상태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독려하기 위해 굳이 둘만 있는 자리에서 큰 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그런 엘리사벳의 외침을 마음 깊이 새기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 우리도 성모님처럼 주님의 사랑 안에서 큰 행복을 누리는 복된 사람이 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가면, 학교에서 신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영신지도 신부님과 생활지도 신부님을 정해줍니다. 영신지도 신부님은 신앙의 지도를 해주고, 생활지도 신부님은 학업과 생활을 지도해 주십니다. 영신지도 신부님은 신학생들에게 고해성사도 주시기에 상담 사실을 비밀로 감싸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유다 산악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 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드릴 때, 세례자 요한은 기쁜 마음으로 맞아들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루카 1,41)
그리고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으며,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2-45절)
오늘 복음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사건에서, 나는 과연 나의 믿음을 확인하고 상의하기 위하여 누구를 찾아가는가?
마리아의 방문을 반기며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노는 사건에서, 나는 어떤 경우에 마음이 동하고 더군다나 거룩한 설렘으로 가득 차는가?
마리아의 방문을 바라보며 성령으로 가득 차 환영하는 엘리사벳 사건에서, 나는 어떤 경우에 성령의 감도로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주님의 현동을 느끼는가?
그리고 진정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실현하려고 애쓰며, 주님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은총을 나눌수록 커지고 빛난다. <루카 1, 39-45> 12월 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의 은총은 독차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누며 모든 이가 즐기고 행복해지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나누어야 더 크게 되고 광채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은총을 충만히 받으신 마리아는 그 은총을 나누기 위한 엘리사벳 방문은 감동이었습니다.
개신교에서 잘하는 것 중 하나는 신도들 앞에서 믿음의 간증입니다. 우리 천주교에서는 성인 성녀들의 은총을 전하고 알려주는 것으로 믿음의 은총이 얼마나 크고 빛나는 것인지 알게 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참 기쁨을 위해 나눔의 시간 나눔의 정신이 진실하게 실천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고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 사랑의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이지 서로 알리고 증명하면서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성당에 힘자랑, 돈 자랑, 얼굴 자랑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받은 은총을 나누며 기도해주고 받기 위함입니다.
수도원을 찾아오는 사람이 건물 보러 오는 것이 아니고, 은총을 충만히 받고 믿음을 사는 수도자들의 집 공동체에서 참 평화를 얻고 기쁨을 얻고자 하며 실제로 모두 여기 오면 알 수 없는 은총의 힘이 평화를 준다고 합니다. 수도원뿐 아닙니다. 어느 가정을 방문해보면 차려놓은 십자가의 형상 속에서 은총이 줄줄 흐르는 집도 있고 찬 기운이 도는 집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과 기도가 없는 집은 즉시 느껴집니다.
수도원에서 수도자 방을 방문해보면 기도하면서 사는 방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수련장으로 임명된 젊은 수련장 방에 들어서면 기도의 냄새가 나며 주님과 깊은 교류를 하고 사는지를 알게 됩니다. 은총은 은총을 부르며 은총 안에 살도록 합니다.
은총이 충만한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는 사람은 마리아의 은총 안에 성장합니다. 우리 수도원에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신부님은 그 영성을 잘 나누면서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이끄는 모습을 보면서 은총을 나누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제가 어려서 성인 전을 처음 본 것은 성녀 젬마 갈가니 전입니다. 많은 대목에 감동했지만,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는 식탁에서 어린 동생은 마음껏 먹도록 하고 자기는 숟가락을 들고 먹는 시늉만 했다는 대목에서 나는 죽고 너는 살리는 사랑의 행위에 감동하여 양보심이 얼마나 형제를 사랑하는 기초인가를 깨닫고 살고 있습니다.
좋은 것 선물 받으며 내가 아니라, 우리들이 먼저이고 나누는 기쁨은 나를 말 없이 행복하게 합니다. 상담할 때 저의 원칙은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며 그리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며 은총의 말씀에 감동하는 사람은 울면서 모든 병이 회복됩니다. 하느님 은총의 말에 감동하지 않으면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은총의 힘은 얼마나 큰 것인지 제가 어느 날 절망과 희망 없는 삶을 살며 이제 더 이 사제 생활 더 못하겠다고 포기 선언을 할 때 한 은총이 충만한 수녀님이 찾아와 “그러시지 말고 피정하세요. 제가 함께할게요.” 하여 수녀님의 지도를 받으며 피정하고 난 후 저는 180도 변화되어 하느님의 종으로 지금껏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녀님의 그 은총이 저를 살리고 풍요로운 믿음의 삶을 살도록 했습니다. 늘 감사하고 3년 동안 수녀님에게 “꼬마 공주”란 이름으로 글을 매일 써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은 잘 정리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글을 한씩 보면 아직도 감동입니다,
서로 받은 은총을 가두어 두시지 말고 나누어주어 서로 믿음을 빛내고 굳게 하도록 기도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라아 님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루카 1, 4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침내
행복이다.
절망이
행복으로
뒤바뀐다.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의
행복이다.
말씀을
떠난 적이 없는
행복이다.
말씀으로
우리의
행복을
깨우시는
말씀의
하느님이시다.
함께
나누어야 할
말씀의 행복이다.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된다.
말씀을
믿는 것이
말씀의 참된
행복이다.
하느님을
잉태한
말씀의
행복이
시작되었다.
행복이
믿음이
될 수 있음을
다시 배운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알게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은 우리의
행복을
되찾아준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이다.
모든 행복의
시작은
하느님으로 부터
시작되는 행복이다.
하느님께서
행복이시다.
사람의 행복은
하느님의 간절한
뜻이시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또한
말씀이 되는
행복이다.
무엇을 나누며
살고 있는 지를
보게되는
대림이다.
말씀과 사람
믿음과 행복이
마침내 길을
찾게되는
놀라운
순간이다.
말씀이 오시고
말씀이 즐거워
뛰노는 놀라운
순간에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마침내
불행이 아닌
행복한
사람이 된다.
행복은
길을 떠나듯
머물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