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2-17
12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13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4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5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6-40
그때에 36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죄를 용서받은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기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것을 권고한다(제1독서). 한나는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온갖 정성을 쏟으며 살아온 예언자로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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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는다고 한다(제1독서). 한나라는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 예수님에 관하여 이야기하는데, 나자렛으로 돌아온 아기는 자라면서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다(복음).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사가는 한나 예언자의 출신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루카 2,36). 아세르 지파는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거나 주목받는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나는 ‘여자 예언자’였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볼 때, 출신으로나 성별로나 그리 주목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한나 예언자가 한 일에 주목합니다.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2,38). 여기서 ‘같은 때’는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2,30-32)라고 하느님을 찬미한 순간입니다.
시메온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였다면, 한나 예언자는 시메온이 선포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이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사가는 이와 같은 한나의 역할도 시메온 못지않게 비중 있게 바라봅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은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나 예언자처럼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성탄 축제를 지내는 우리는 모두 한나 예언자처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널리 알리는 매우 중요한 부르심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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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한나라는 예언자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는 늘 성전에 머무르며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기는 과부였습니다. 젊은 시절에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만 살고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고 하니, 어림짐작하여 60여 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렇게 철저히 자기 봉헌 생활로 평생을 지낼 수 있었을까요?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을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가 보낸 긴 세월이 메시아를 만나려는 준비의 시간이었고, 결국 메시아를 만나 그동안의 고된 여정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종말의 때에 예수님과 이룰 결정적인 만남을 준비하는 여정에 있습니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나’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주문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하시는데(9,23 참조), 솔직히 잘 버리지도 못하겠고, 버리고 싶은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눈에 보기 좋은 것과 우리 입에 맞는 것들을 손에 한가득 쥐고서는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욕심부릴 때가 많습니다.
오늘 독서는 그렇게 손에 꼭 쥐고 있는 것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여정에 방해가 된다고 말합니다.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싶은 것들 대부분은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들인가 봅니다.
손의 힘을 풀고 세상에 초연한 자세로 있어 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오랜 세월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 섬기는 일에 충실하였던 한나처럼,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하느님을 섬기며 그분을 사랑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쏟도록 합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히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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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로 유학 간 첫 학기에 유독 어려운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업 윤리’라는 과목이었는데, 언어도 문제였지만 토론 수업이라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번번이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쯤 되자 교수님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놀리셨습니다. “자네는 성탄 방학이 되면 시칠리아섬의 작은 본당으로 봉사하러 갈 것이네. 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성탄 밤 미사 강론을 할 텐데, 신자들 앞에서 떠듬거리며 ‘오늘 밤은 성탄입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신자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날 것일세.”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부인 나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놀리다니.’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리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영성 지도를 받는 날이었는데, 지도 신부님을 만나자마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신부님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이 일로 배운 게 있어?” “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학생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또 배울 게 있어?” 생각을 좀 하다가 “제가 이탈리아 말을 잘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그래. 또?” “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잊어버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또 흥분하여 “아니 어떻게 잊습니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며 씩씩거렸습니다.
제 얼굴을 쳐다보던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너 지금 기도할 수 있어?” “아니, 지금 기도가 중요합니까? 그 교수가 저를 놀렸다니까요?” 그러자 그 신부님은 “바오로, 하느님이 중요해? 그 교수가 중요해? 지금 네 마음을 온통 그 교수의 말에 빼앗겼잖아!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의 마음을 그 말에 빼앗겨 하느님은 안 계시잖아! 바오로,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세상 것에 빼앗기지 마!” 이 말을 듣는 순간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날마다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고 성전에 나가 하느님을 섬긴 한나처럼, 단 1초라도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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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십니다. 여기서 시메온과 함께 또 한 사람의 예언자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뵙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입니다. 그는 루카가 전하는 대로 7년 혼인 생활을 하고서는 여든넷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며,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단식하며 기도하고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예언자로서 한나는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어 낸 현명하고 거룩한 여인이었습니다.
한나의 삶은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 속 슬기로운 처녀들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올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에 깨어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의 성실함과, 성전에서 단식과 기도를 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구원자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한나의 인내가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을 본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비록 한나가 사람들에게 전한 이야기가 루카 복음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이사 40―55장 참조)을 떠올리며 이스라엘과 온 인류를 구원하실 분께서 바로 아기 예수님이시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혼인 생활의 열두 곱절을 성전에서 보낸 여든넷의 여인은 그 숫자가 의미하는 대로 완전하고 거룩한 삶과 복음을 선포하는 삶의 본보기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오늘 독서가 한나의 삶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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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세상의 유혹에 무릎 꿇지 않고 그분 사랑에 머무르기 위한 조건이라고 강조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것은 성탄을 믿음과 무관한 소비주의, 떠들썩한 소음과 소동에 치우친 시간으로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복음에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한나 예언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녀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다가 남편을 여의고 성전에 늘 머물면서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다가 자신의 소망을 이루었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항구하게 섬김으로써 보상을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데리고 왔을 때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은총도 받았습니다. 구세주를 만났고, 마리아가 하였던 것처럼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으며,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한나는 사제 계급에 속하지 않은 평범한 신자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똑똑하다는 이들과 교만한 이들과 자만에 빠진 이들에게는 강생의 신비를 감추셨지만, 목자들이나 동방 박사들처럼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이를 드러내셨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슈퍼맨도 아니시고 신화의 영웅도 아니시며, 이 세상에 태어난 다른 아이들처럼 가정 안에서 태어나 자라나셨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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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네 살의 과부 한나는 시메온과 같은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녀는 구세주의 탄생을 지켜보며 자신이 바친 단식과 기도의 응답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속량을 이룰 구세주를 직접 바라보며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이 뜻하는 대로 그녀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받았습니다.
한나의 삶은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속에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육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영원한 구원을 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에게 은총을 주신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구원의 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프누엘’은 하느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프누엘의 딸이 아기 예수님의 얼굴을 본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구원의 시기를 구체적으로 마련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때 오기에, 우리에게는 겸손과 극기로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나는 연약한 여자이지만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나가 예수님의 구원을 본 것처럼, 우리도 아기 예수님 곁에 남아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곁에 머무르는 이는 세상의 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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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서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선재하시던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의 적’들의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 것을 촉구하는데, 오늘 독서는 우리가 사람이 되신 예수님과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이미 죄를 용서받고 악마를 이겨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으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훈계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의 할례와 정결 예식을 거행하는 자리에는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던 여자 예언자 한나도 함께하고 있었는데, 이 여인은 과부였습니다. 불행과 슬픔을 깊이 체험한 여인이었지만, 이것이 그녀에게서 믿음을 빼앗지는 못했고 오히려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게 하였습니다. 한나가 겪은 고통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는데, 이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불필요한 눈물을 흘리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나는 84세의 고령이었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단식과 기도를 하며 하느님 백성과 더불어 성전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기다렸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녀에게는 희망이 있었고 그 희망은 그녀로 하여금 언제나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설령 교회에서 부정적인 면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신앙의 유대를 끊지 않고 교회 공동체와 일치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 신앙의 끈을 놓아 버릴 때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나 예언자처럼 강한 믿음과 인내심을 갖고 흔들리지 않는 희망 속에서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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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는 언제나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주인공만으로 흘러갈 수 없습니다. 주인공 말고도 조연, 그리고 수많은 단역이 필요합니다. 이는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이시기는 하지만, 예수님 밖에도 수많은 조연과 단역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루카 복음서에서는 모범적인 인물로 그려진 단역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 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자식이 없음에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시메온은 이스라엘에 주어질 구원을 기다리며 한평생을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나는 평생 과부로 어렵게 지냈지만 성전지기로 살면서 하느님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그 밖에도 겸손한 모습의 모범을 보인 카파르나움의 백인대장, 세관장으로서 죄를 지으며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자캐오, 예수님께 다가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죄 많은 여인, 예수님의 옆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된 강도, 스스로 나서서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도 있습니다.
드 라마에서 단역들이 보여 주는 여러 이야기가 엮일 때 드라마의 전체 내용이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의로움을 잃지 않은 이들 등의 이야기가 모여 복음이 완성되었습니다. 드라마의 단역들이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것처럼, 복음서의 단역들은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데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처럼 위대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들처럼 큰 인물이 되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단역들처럼 크게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주님의 눈에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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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사가는 이스라엘 여성들에게 흔했던 이름을 가진 ‘한나’를 등장시킵니다. ‘우아함’이라는 뜻인 한나는 구약 성경에서는 사무엘의 어머니로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을 임금으로 내세워 기름을 부은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지만, 절망하지 않고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기도로써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한나의 애틋한 기도를 들어주시어 그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이처럼 한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들은 세상에서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살았던 가난한 이들의 표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녀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웠을 슬픈 인생의 소유자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성전에서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로 한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그녀가 마침내 사람의 아드님으로 오신 구세주 참하느님을 만나 뵙게 됩니다. 하느님께 의탁하여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다는 진리를 그녀가 보여 준 것입니다. 구세주 아기를 만나 뵌 그녀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오심을 체험한 사람만이 세상에 주님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절망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오로지 희망만이 있을 뿐이지요. 그 희망은 곧,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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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인이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매일 하늘 나라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소원대로 해 주겠다. 그런데 몇 가지 부탁을 하겠다. 우선 그대가 죽으면 장례가 있을 것이니 사람들을 위해 집 안을 깨끗이 정리하기 바란다. 그대가 떠나면 자식들이 마음에 걸릴 것이다. 자녀들에게 마음껏 애정을 쏟아 주기 바란다. 남편에게도 최선을 다해라.좋은 아내였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무슨 말을 해도 대꾸하지 말고 정성으로 모셔라. 사흘 뒤 그대에게 가겠다.’
부인은 눈 딱 감고 삼 일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오셔서 ‘이제 갈 시간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깨끗이 정돈된 집 안을 보자 그녀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남편과 자녀들의 ‘전에 없던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좋아지니 떠나기 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마음을 바꾸면 세상도 바뀌어 보입니다. 내가 변화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도 변화가 옵니다.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변화입니다. 복음의 ‘한나 예언자’는 구약의 여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기에 긴 기다림 끝에 아기 예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기다림의 대가는 어떤 식으로든 주어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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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또 다른 새해의 시작을 생각하니 마침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순간이요, 결국 시작은 항상 다른 마침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지만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은 달은 다시 차오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시작이 있으면 마침이 있고, 마침이 있지 않고서는 또 다른 시작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 안에서 마침을 보고, 다시 마침 안에서 시작을 찾아볼 수 있는 혜안이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과 세상 것을 사랑하지 않도록 간곡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세상 속에서 유한한 세상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이러한 유한한 삶의 종말과 동시에 무한한 삶의 시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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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그 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테두리가 점점 더 넓어지는 것이다. 그동안 거부하고 수용하지 못해 내가 그어 놓았던 금을 이제는 끌어안고 받아들여 나무의 일부가 되고 점점 자라나 비바람에도 더욱 굳세어지고 더위와 추위에도 잘 견뎌낼 수 있는 튼튼한 나무가 되는 것이다.(→뒤쪽에 이어집니다.)
나무의 나이테는 마치 우리의 주름과도 같다. 내가 여기까지라고 금을 그어놓았던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삼겠다는 결심의 선, 이것이 주름이다. 나이가 들면서 늘어가는 주름은 그래서 아름답다. 내가 보았던 수많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사의 여러 광경들 안에서 겪어낸 인고의 시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했기에 눈가의 주름은 그래서 아름답다. 내가 수없이 저지른 많은 말의 실수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고 미약하나마 누군가를 위로하고 용서를 청하며 울고 웃을 수 있었기에 입가의 주름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여러 가지 축복을 생각해 보자. 건강만이 축복이 아니라 병고 또한 축복이다. 성공만이 축복이 아니라 실패도 축복이다. 만남만이 축복이 아니라 이별 또한 축복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 점점 자라나는 것이다. 이 축복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달라지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어둠이어서 피했던 그곳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빛이 드리워지는 자리임을 깨닫고 그래서 다가올 죽음까지도 하느님의 축복임을 깨달을 수 있기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길목인 것이다.
2024년 파리올림픽 여자 공기 소총 10m에서 올림픽 역사상 대한민국 100번째 금메달을 거머쥔 반효진 선수가 자기 노트북에 붙여 놓은 쪽지가 화제였습니다.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다.’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사회심리학 이론 중에도 자기 충족적 예언이 큰 효과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정 상황을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결정해 버리면 그것에 맞게 자기 행동과 생각을 변화시켜 결국 원하는 결과를 이뤄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도 기억납니다. ‘말이 씨가 된다.’
생각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데도 생각을 닫아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히려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만 하면서 자기 변화를 멈춰버립니다. ‘어차피 안 될 거야.’라면서 쉽게 포기합니다.
언젠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 중학생을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방에 나오지 않고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면서 그 부모가 한 번 만나주길 원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사람 만나는 것도 힘들고, 이 세계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가상의 세계에서의 삶만이 이 아이에게 행복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앞으로 엄청나게 많을 텐데 할 수 없다면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이렇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거 해 볼 걸….”
생각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이 힘을 키우는데 주님과의 대화는 결정적입니다. 사랑이신 주님은 생각 안에서 큰 힘을 주시며,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후회를 줄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예언자도 생각의 힘을 믿었던 분이었습니다. 주님을 뵙게 되리라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 한두 해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자기 생각이 이루어지길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즉각적인 결과만을 바라면서 쉽게 포기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포기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큰 기쁨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갖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역경 속에서도 계속 의욕을 가져라. 최선의 결과는 곤경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마틴 브라운).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아기 예수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다들 세상사나 자기 생각에 깊이 빠져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두 사람, 육화 강생하신 하느님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품에 안아보는 특전을 누린 예언자들이 있었으니, 시메온과 한나였습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세상 의롭고 독실했습니다. 언제나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 항상 그들 위에 머물러계셨으며, 성령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여 예언자 한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 36-37)
보십시오. 한나 예언자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지복직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짧은 문장 안에 정확히 들어 있습니다. 이른 나이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큰 고통을 겪었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항상 하느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에 충실했습니다.
요즘 우리 가톨릭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7-80대 자매님들처럼 단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하며, 교회 일에 협조적이었습니다. 항상 묵주를 손에 놓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는데, 신명기에 따르면 아세르 지파는 모세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은 모범적인 지파였습니다. “아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아세르. 그는 형제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가 되어 발을 기름에 담그리라. 너의 빗장은 쇠와 구리 너는 한평생 평안하리라.”(신명 33, 24-25)
한나의 좋았던 시절 7년과 현재 나이 84세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설이 흥미롭습니다. 한나가 남편과 함께 산 7년 세월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사셨던 시간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84세에 대해서는, 일곱에 열둘을 곱하면 84가 됩니다. 일곱은 또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전 과정을 나타낸답니다. 열둘은 열두 사도의 완전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한나 예언자가 84세란 표현은 그녀가 삶의 전 과정을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히 살아온 신앙인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결국 한나는 갖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84년 동안, 아니 평생토록 충만한 은총 속에 주님을 섬겨온 신앙인의 모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한나 예언자처럼 불행한 여인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결혼 7년 만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참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가장 불행한 인생의 대표 격인 ‘청상과부’로 60년 이상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삶을 보십시오. 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큰 상급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지복직관’ 하느님의 얼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품에 안겨 계신 만왕의 왕,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에 안아 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은 기다리는 일이군요. 비록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나날이라 할지라도 그저 기다리는 일입니다. 꼬이고 꼬인 인생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풀 방법이 없어 보이는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다 할지라도 기다릴 일입니다.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고통의 정도가 극심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고통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정말 너무 너무 지루하다면 기다림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다리다보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우리 앞에 좋은 날을 펼쳐놓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에 백배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한나 예언자에게 하신 그대로 말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봄에 뉴욕에서 달라스로 왔습니다. 오니까, 교우들이 ‘창고’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창고 공사에 필요한 비용을 후원하고 떠나셨습니다. 매주 토요일 형제님들이 창고 공사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기초를 놓았고, 바닥, 벽, 지붕, 창문, 문, 전기 공사를 했습니다. 창고가 완성된 다음에는 청년들이 멋진 벽화로 마무리했습니다. 2월에 시작한 창고 공사는 7월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도 매주 토요일 현장에서 형제님들과 함께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선물한 것은 ‘창고’가 아니라, 창고 공사를 통해서 형제님들과 청년들을 선물했습니다. 지난 8일에 ‘사도회와 이냐시오회’의 송년 모임이 있었습니다. 사도회는 40대 형제님 모임이고, 이냐시오회는 50대 형제님 모임입니다. 모임 자리가 하나도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미 창고 공사를 통해서 얼굴과 이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형제님들이 제게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어떻게 사람들 이름을 잘 외우세요?’ 제가 사람들 이름을 잘 외우는 이유는 가능하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자녀와 아버지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글을 쓰는 이유 3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겁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알았다는 겁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악을 이겼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 팔일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친절하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탄을 지내면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구유 경배를 하는 것도, 선물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성탄을 지내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묵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독서는 신앙인들이 삶을 살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올해도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363일을 욕심과 욕망 때문에 채우려고만 했어도, 오늘과 내일 마음을 비우고 나누는 삶을 산다면, 베푸는 삶을 산다면, 기도의 삶을 산다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상의 분주함 속에서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살았던 궁전에서는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규율에 얽매여서 살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한나는 예수님을 보았고, 축복의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리 흐르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2,38)
믿음을
믿는 이
믿음이 된다네
믿음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희망하는 이
희망이 된다네
희망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사랑을
사랑하는 이
사랑이 된다네
사랑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기쁨을
기뻐하는 이
기쁨이 된다네
기쁨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의로움을
의로워하는 이
의로움이 된다네
의로움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한나라는 나이 많은 예언자가 나옵니다. 한나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그러한 한나 역시도 오늘 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한나는 남편이 일곱 해를 살고 죽은 뒤 평생을 홀로 살아온 과부였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인생의 시련과 고통을 겪은 여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느님만을 굳게 믿으며 단식과 기도를 하며 평생을 성전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기다렸습니다. 결국 그녀는 하느님의 자비로 인생의 끝자락에 구세주를 영접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마다 각자 인생의 시련과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요즘 혼란의 시대를 지내면서 많은 이들이 위기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되고 끝까지 하느님 안에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하느님과의 관계의 끈을 놓아 버릴 때 어쩌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역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나 예언자처럼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며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도전하지 않는 희망은 합리화된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마 전에 어떤 신자분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있는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나고 싶고 힘든데 왜 나타나지 않느냐고 합니다. 저는 그저 인내를 가지고 희망하라고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빠진 것 같아 이 강론으로 설명을 대신합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사.시.를 끊임없이 읽었고 단식하였습니다. 만나주실 때까지 할 작정이었습니다.
루카 복음 2장 36-40절에서는 예언자 안나가 오랜 세월 동안 금식과 기도를 통해 메시아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기다림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기다림이었습니다. 안나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헌신하며 기도로 하루하루를 채우며 메시아를 볼 수 있는 그날을 준비했습니다. 그녀의 기다림은 희망 속에서 도전하며 신앙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다림과 희망은 반드시 실천과 도전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월터 미티의 이야기는 이러한 주제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잘 보여줍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주인공 월터 미티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월터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상상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그는 모험적인 삶을 꿈꾸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는 삶을 희망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의 삶은 단순히 희망과 상상의 반복일 뿐, 현실을 바꿀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중요한 순간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상상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월터는 회사의 중요한 사진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상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진정한 모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빙하를 건너고, 화산이 분출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자신의 상상력을 현실로 실현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두려움에서 벗어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과도 연결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상상과 희망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줍니다. 도전과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 희망은 단순히 합리화된 절망일 뿐입니다. 월터의 삶은 도전과 실천이 있을 때 희망이 어떻게 현실로 변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제, 또 다른 실화를 통해 희망과 도전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영화 ‘바람을 길들인 아이’(The Boy Who Harnessed the Wind)는 말라위의 한 소년 윌리엄 캄쾀바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윌리엄은 극심한 가뭄과 기아 속에서 절망에 빠진 마을에 희망을 가져다준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구하고자 했지만, 자신이 가진 것은 학교 도서관에서 배운 과학 지식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폐품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작은 자원을 활용해 풍차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이 풍차는 마을에 물을 끌어올려 농사를 가능하게 했고, 그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윌리엄은 단순히 기적을 기다리며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희망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질적인 노력을 통해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처음에는 그의 계획에 회의적이었지만, 아들의 열정과 결심에 감동해 마침내 협력하게 됩니다. 이렇게 바람과 아버지를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도와주었다가는 자신이 바람과 아버지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교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희망이 당신을 감동시키기를 기다리시는 이유입니다. 결국 윌리엄은 자신의 노력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을 통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가 단순히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가르칩니다. 참된 기다림은 준비된 기다림이며, 희망은 행동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무엇을 하였을까요? 약속의 땅으로의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욥은 또 어땠나요? 자기 자신과 싸웠습니다. 예수님께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은 어떤가요? 절망하지 않고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기 위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5)
희망 자체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희망은 믿음을 낳고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희망한다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된 기다림, 실천하는 기다림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비가 오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길들일 수 있는 도전과 준비를 통해 우리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응답하며 도전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참된 희망과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나이가 많은 한나라는 여인은 깊은 신앙인으로 성전과 함께 살았어요.
신심 깊게 하느님 섬기며 사신덕에 아기 예수님의 할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아기의 할례소식을 많은 이에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주님의 법에 따른 일을 마치고 나자렛으로 갔습니다.
아기 예수는 튼튼히 자라며 지혜도 충만해지고 하느님 총예를 받았죠.
우리 아기들이 자라듯 잘 자랐고 마리아와 요셉은 부모역할 잘했지요.
이 시대 우리 어린이들도 하느님총애를 받으며 신앙 속에서 살아야죠.
하느님 총애보다 사람들의 총애를 받게 하려는 부모가 참 많다봅니다.
가톨릭알림 말: 모든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총애를 받게 합시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어떤 신자들이 와서 속삭여 줍니다. “신부님, 저희가 신부님의 기도부대에요.”
오늘 복음에는 한나라는 예언자가 나옵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
성당에 들어올 때마다, 누군가가 앉아서 성체조배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푸근함을 느낍니다.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이 성당에서는 늘 주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고,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서로 부족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해 주 하느님께 기도하고, 서로의 허물을 닦아주고 채워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도록 초대하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나가기로 합시다.
주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루카 2, 36-40> 12월 3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세가 모리아 산에 올라가 기도하던 중 하느님 만나고, 야곱이 천사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주님을 만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원수가 된 형 에사오를 만나면서 하느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성전에서 주님이 봉헌되는 시간, 시메온과 안나는 주님을 뵙고 기뻐하는 모습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피정 기도나 개인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도 앞으로 하실 일을 바로 하려고 광야에서 보낸 40일은 아버지 하느님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수도원에서 밤낮으로 기도하며 주님과 함께하고, 특별히 미사 시간에 일어나는 기적을 통해 주님 만나고, 주님과 함께 어려운 삶을 극복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은 서로 다른 환경과 위치에서 각기 자기 삶을 살지만, 너와 내가 만나서 대화가 없으면 일치가 불가능하며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흩어져 길을 가게 됩니다.
대화를 거부하고 자기 길만 찾아가려는 사람은 실천해야 할 사랑을 따라 살지 못하고 상대를 죽이려 하고 자리에서 쫓아내려고만 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시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하셨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을 살려면 기도를 통해 주님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대화처럼 서로 믿음, 희망, 사랑으로 살려면 대화해야 하고 대화 속에 일치가 필요합니다.
한 나라가 민주적으로 되려면 삼권분립이 되어 있어도 대화해야 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정의롭다고 해도 자기주장만 앞세우면 성장도 결실도 얻지 못하고 자기주장대로만 무엇을 하려고 하면 혼란스러워집니다. 대화를 잃어버린 관계는 미움, 원망, 절망만 있고 다른 사람 방해만 하고 인간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참 기도를 하려면 기도의 내용을 알고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대화의 법칙은 첫째, 진실하고 현실적 내용을 가지고 대화해야 합니다. 거짓이나 비현실적 내용은 갈등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둘째, 악의가 없는 내용과 선을 위해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셋째,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생각과 말이 실천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이같이 진실과 사랑이 실천으로 옮겨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주님 만나고 함께 있게 됩니다. “너희는 항상 기도하라.” 기도의 끈을 놓지 말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함승수 신부님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자리에 한나라는 예언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한시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성실한 여인이었지요. 그녀의 팔자는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결혼생활의 행복을 누린 시간은 고작 7년이었고,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어 여든 네살이 될 때가지 거의 60년에 달하는 시간을 외로이 살고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의지할 자식조차 없었으니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그분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겨드릴 수 밖에 없었지요. 그건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하루 하루 극복해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한나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그 모든 과정을 이겨냈고 그 보답으로 구세주를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그분을 굳게 믿고 전적으로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지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부귀영화에 마음을 뺏기고, 시기와 질투에 마음을 뺏기며, 증오와 복수심에 마음을 뺏기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하느님이 내 마음 안에 안계시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1분 1초라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한나 예언자가 주님을 직접 뵙고 구원에 대한 확신 속에서 참된 기쁨을 누린 것은 단 한 순간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하느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큰 슬픔을, 세상에 혼자 남겨진 깊은 절망을 통해 하느님께 더 깊이 일치된 사람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 때문에 하느님께 실망하여 신앙에서 멀어지는 이들도 있지만, 한나는 오히려 그 고통과 시련을 하느님께 대한 자기 신앙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은 겁니다. 많은 이들이 상황과 조건과 환경을 탓하며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핑계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절망과 고독 속에서 슬픈 결말을 맞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느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면 희망과 기쁨 속에서 참된 행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니 세속적인 이익과 즐거움들을 누리지 못한다고 실망하거나 억울해 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고 그것을 욕망하는 내 마음도 언젠가 사그러들고 말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분과 깊이 일치되어 그분과 함께 ‘영원’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삶의 지혜와 하느님의 총애
진동길 마리오 신부님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투자에 대한 열망도 남다릅니다. 이들은 오래도록 변함없는 가치와 성장 가능성이 높은 것에 투자를 하는 지혜도 갖추고 있지요. 그래서 오늘은 내일을 짊어질 젊은이들에게 아주 좋은 것, 그야말로 ‘최고로 좋은 것(Summum bonum)’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썩지도 시들지도 변하지도 않습니다. 요즘 시장 상황을 살펴보면 윌리암 템풀(캔터베리 대주교)이 지적했듯이 “이 세상은 마치 어떤 장난꾼이 남의 상점에 들어가서 쇼윈도에 벌여놓은 상품들의 정가표를 모두 바꾸어 놓은 현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장난꾼은 비싼 물건에는 낮은 가격표를 붙이고 반대로 싼 물건에는 높은 가격표를 붙여놨다”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젊은이들이 더 잘 알겠지만, 가치 투자는 펀더멘털Fundamental(근본적인, 핵심적인, 기본적인)에 비해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상품에 투자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치 투자의 선구자들 중에는 벤저민 그레이엄, 워런 버핏, 세스 클라먼 등이 있다는 것도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싼 물건에 낮은 가격표가 붙어 있는 지금이 투자의 최적기가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새날, 제일 좋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뜨겁게 부추깁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픔만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를 잡아줄
참된 희망이
우리에게는
간절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된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이야기가
성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로
이어집니다.
이야기를
열고 나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아픔이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가장 친밀한
관계입니다.
지나가는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자신을
구원하는
구원의
관계입니다.
구원의 관계는
어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동의합니다.
우리의
힘들고
아픈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유명을 달리하신
소중하신 분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계속되는
아픈 이 현실을
아프게
기도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버릇없고 무례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세대 차이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나이 많으면 예의가 넘치고 무례하지 않을까요?
우연히 뉴스를 보다가 어느 국회의원이 상대 당 국회의원을 향해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라고 큰소리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더 예의 없고 무례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국회의원이 젊은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손자 둘 셋은 있을 법한 나이였습니다.
버릇없음과 무례함은 나이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보다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떤 자극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상대는 무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의 없다며 다시는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며 외면할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이 다를 뿐이라면서 받아들일 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상대의 말도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틀렸다면서 예의 없고 무례하다고 말하기보다, 그런 이견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눈물을 흘리면서 “하느님께서는 왜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요? 제가 한 달 동안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데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상황만을 보고 하느님은 제대로 보지 않는 모습입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한 달이면 정말로 열심히 기도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도 서른이 되어서야 공생활을 하셨지요. 자그마치 하느님의 일을 위해 30년 동안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 예언자는 어떠한가요? 그녀의 삶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
보통 15살쯤에 결혼했던 것을 기억하면, 60년 이상을 성전에서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 삶이 과연 쉬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기 예수님을 보고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리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던 한나 예언자를 떠올리면서, 우리 역시 섣부른 판단으로 하느님 바라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 삶 전체에 퍼져있는 하느님의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큰 기쁨 안에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좋고 나쁜 것은 없다. 단지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윌리엄 세익스피어).
가장 확실한 교회의 우군이요 기도 부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제 시메온 예언자에 이어 오늘은 한나라는 여예언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나 역시 시메온 못지않은 노인으로서, 평생토록 성령의 이끄심 안에 거룩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평균 연령이 40전후였는데 놀랍게도 한나 예언자가 아기 예수님을 목격할 당시 나이가 여든 넷이었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윈 한나는 장장 60년 세월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한나의 충실한 신앙생활에 하느님께서 크게 응답하셨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두눈으로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보게 되는 축복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한나같은 자매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교회의 보물이요 보루이십니다. 가장 확실한 교회의 우군이요 기도부대입니다.
눈만 뜨면 성당으로 나오십니다. 성당이 삶의 중심입니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떤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분명히 하느님께서 이 시대 또 다른 한나 예언자이신 그분들을 크게 축복하시고 풍성한 은총을 선물로 베푸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5년 전에 미국에 온 이유는 주교님께서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일하도록 권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라고 순명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왔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 또 다른 이유는 본당은 맡지 않겠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좌 신부님들이 본당 사제가 되기까지 20년 가까이 있어야 하는 현실이 있고, 저라도 양보하자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제 몇 년이 지나면 저를 포함해서 ‘원로사목자’들이 늘어날 것이고, 보좌 신부님들이 본당 사제가 되는 기간도 짧아 질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ME 대표 신부’를 맡았던 이유는 제가 한국에서 ME 주말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ME 대표 신부가 되었습니다. 3년 동안 팬데믹 중에도 피정, 소풍, 주말 체험, 총회에 함께 했습니다. 부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감사했고, 유익했습니다. 제가 ME 대표 신부를 마치고 꾸르실료 지도 신부가 된 이유는 전임 지도 신부가 권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꾸르실료 봉사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신심단체들이 있습니다. ‘성령 기도회, 레지오, ME, 꾸르실료’와 같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사제는 가능하면 이런 신심단체가 성장 할 수 있도록 관심과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의 주제는 생, 노, 병, 사를 넘어서는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달마 조사는 527년 남인도에서 당나라 낙양에 도착하여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 수도를 하였습니다. 인도를 중심으로 하면 달마조사는 동쪽으로 가신 것이며 중국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서쪽에서 오신 것입니다. 서쪽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행보로 인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라는 조주 스님의 문답이 있습니다. 조주 스님은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동쪽 당나라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달마 조사는 동쪽으로 온 까닭에 대해 답했습니다. “내가 본래 이 나라에 온 것은 법을 전하여 미혹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라. 한 꽃에 다섯 잎이 피어서 결과가 저절로 이루어지리라”고 답했습니다.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사제가 된 이유를 모르면 방황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지 못하고 세상의 것들에 빠져들게 됩니다. 사제가 되었다는 것은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왔던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 팔일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친절하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탄을 지내면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구유경배를 하는 것도, 선물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성탄을 지내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묵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독서는 신앙인들이 삶을 살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나를 벗들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2,38)
나 홀로 믿음은
믿음이 아니니
나의 믿음을 벗들에게
나 홀로 기쁨은
기쁨이 아니니
나의 기쁨을 벗들에게
나 홀로 희망은
희망이 아니니
나의 희망을 벗들에게
나 홀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니
나의 사랑을 벗들에게
나 홀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니
나의 정의를 벗들에게
나 홀로 삶은
삶이 아니니
나의 삶을 벗들에게
나 홀로 나는
내가 아니니
나를 벗들에게
성탄은 부활을 포함해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부활을 향한 성탄이어야 한다.
늙음은 미학이다. 늙어가며 귀감이어야 한다. 전례는 예수님의 생애를 구분져 놓았다. 그러나 늘 한 통이다.
동방박사들이 성탄의 아기 예수님께 드린 예물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한 부분의 예물이 아니다. 당신의 전 존재를 담고 있는 예물이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되었다는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간 시메온과 한나도 그랬다. 성탄의 아기 예수님만 보인 것이 아니라, 성탄을 받아 안으신 예언자들은 예수님의 전생애를 보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늙음은 완성이기에 날개를 달고 가야할 하느님 나라만을 꿈꾸며 산다. 본당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며 젊음을 지낸 늙음의 미학을 사는 분들을 바라본다.
부활을 향한 줄기찬 성탄을 살며 신앙을 고백한다. 아름답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나라는 예언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에서 밤낮으로 단식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한나도 성전에서 예수님을 바칠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화를 하나 들려드리자면 어느 개구리 두 마리가 크림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개구리 두 마리는 처음엔 달콤한 크림 통에 빠져서 너무나도 행복했지만 점점 늪처럼 빠져드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그곳을 탈출하려 갖은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나 크림이 너무나도 미끄러웠기 때문에 그들은 번번이 크림 속으로 떨어지곤 했습니다. 마침내 기운이 빠진 한 개구리가 말합니다. “우린 틀렸어 나는 포기야.” 그리고는 결국 그 개구리는 크림 속으로 빠져들어 죽고 맙니다. 그러나 다른 개구리는 끝까지 포기 하지 않고 계속해서 뒷다리를 차면서 기어오르려고 애를 씁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수차례 반복해서 뒷다리를 차며 뛰어오르던 순간 그 개구리는 갑자기 자신의 뒷다리에 딱딱한 물체가 차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수차례 반복해서 발차기를 하는 동안 어느 덧 크림은 제법 딱딱한 버터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개구리는 그 버터 덩어리를 밟고 밝은 세상으로 빠져 나오게 됩니다.
이 예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고 구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 예언자는 하느님을 늘 섬기면서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삶이 비록 절망스럽다 할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으리라는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의 응답을 반드시 내려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한나라는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이 예언자가 등장했던 때는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만났던 순간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예언자 한나의 삶을 우리는 묵상해야 합니다. 이 여인은 남편과 사별하고 결혼하지 않았고 매일 성전을 떠나지 않았으며 단식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또 예언자 시메온과 같은 점은 보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묵상하며 신전, 즉 하느님 안에 항상 머물면서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던 것이지요. 이렇게 오직 하느님을 섬겼던 두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기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를 볼 수 있도록 해주셨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주인공은 “한나”라는 나이가 든 예언자입니다. 특히 과부이지요. 그럼에도 이 예언자는 오직 평생을 하느님 안에 머물기를 바라면서 실지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보내주기로 한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지만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재림이 반드시 실행될 것이라 믿어야 하며 그때를 대비해서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한나 예언자가 그랬듯이 오직 기도와 항상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고난이 와도 슬픔이 와도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메시아의 첫 번째 강림을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녀가 되기를 오늘도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인 감각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러 가셨을 때, 그 성전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시메온과 한나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하지요. 왜 다른 이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오직 그들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이들이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을 알아볼 준비가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 따르면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이었고,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고 하지요. 이러한 준비가 두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가난한 부부의 갓난아이를 메시아로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세속적인 것에 더 많이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싶다면, 영적인 감각이 무뎌지지 않도록 시메온처럼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한나처럼 성전에 머물며 기도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성탄의 신비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김준수 신부님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2,38)
어제 복음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치러진 마리아의 정결 예식과 아기 예수님 봉헌예식의 자리에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 ”(2,37) 예언자 한나도 있었습니다. ‘우아함’이라는 뜻인 한나는 구약 성경에서는 사울과 다윗을 임금으로 내세워 기름을 부은 사무엘의 어머니로 등장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본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지만, 절망하지 않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기도로써 살았으며 주님께서는 한나의 애틋한 기도를 들어주시어 그에게 아들을 점지해 주십니다.
이처럼 한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들은 세상에서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살았던 가난한 이들의 표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녀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 자식도 없이 홀로 그 연세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그녀는 어떤 누구를 믿고 의지할 사람도 없었으며 가난한 삶을 살아왔지만,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2,38) 는 성경 본문에 의하면 그녀는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분이었으리라 추정됩니다. 과부로서의 한나의 삶은 경제적인 면에서 궁핍하고 곤궁困窮했겠지만, 그녀는 모든 그리스도교 홀로 사는 여성(=어떤 이유에서든지 상관없이 혼자 살아가는 여성)들을 대변하는 분으로써 비록 삶이 거칠고 힘겹다고 해도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우아함’을 잃지 않고 진정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삶인 어떤 삶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자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성전을 중심으로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며 지난 세월을 살아왔기에 그녀는 바로 그 거룩한 자리와 시간에 구세주를 뵈옵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야기를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이 아기에 대해서”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고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2,29~30)라는 찬미는 단지 시메온 예언자만이 아니라 한나에게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바로 이 거룩한 날을, 축복된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힘겨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왔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녀 또한 이제 시메온처럼 평안히 눈감게 되었을 것입니다. 노인 요양병원에서 원목 신부로 살면서 체험한 일 중에서,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저에게 해주었던 많은 표현 가운데서 자주 들은 표현은 ‘신부님. 이제야 편안히 눈을 감고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정말이지 세상의 모든 것을 누려봤고 겪으셨겠지만,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삶의 의미이며 행복의 주체인 자녀들이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더 이상 어떤 아쉬움이 없을 때 이렇게 표현하시더군요. 그런데 떠나야 하실 어르신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힘듦이나 어려움이 남아 있을 때, 흔히 ‘내가 어떻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어요!’라고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는 경우를 목격합니다. 특히 보고 싶은 자녀가 보이지 않을 때도 쉽게 눈을 감지 못하고,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느낌으로 강하게 전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족들에게 물어보면 정말이지 어르신이 특별히 사랑했던 사람들이나 꼭 화해가 필요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외국에 그 자녀가 사는 경우, 늦어지는 경우엔 부득이 오고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로라도 그 자녀의 목소리를 들려드리면 정말이지 편안히 눈을 감고 임종하시는 분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온 그날을 맞았고 그곳에서 기다리던 구원을 목격하고서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으니 무슨 여한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한나는 정말 주님 자비의 섭리 안에서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 눈을 감으셨으리라 믿습니다.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보낸 저 많은 날이 다 하느님의 자비였고 은총이었음에 감사하면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으니, 그녀는 참으로 행복하고 축복받은 여인이었을지 모릅니다. 한나는 오늘 독서의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2,17)라는 표현처럼 그리스도교 역사에 성경이 있는 곳에 영원히 그녀의 성덕은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한나처럼 하느님 안에서 저 임종의 순간에 평화로이 눈을 감을 수 있는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 그녀처럼 삶의 모든 날을 하느님을 중심으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도록 다짐합시다. 하느님의 축복 속에 평화로이 눈을 감고 죽을 수 있다면 그날이 바로 하늘에 곧장 태어나는 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저희 또한 한나처럼 당신을 눈으로 뵈올 수 없으나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 영혼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저희도 삶의 마지막 순간 당신으로부터 사랑받았으며 제가 더불어 살아왔던 모든 이를 제가 사랑한 것 보다 그들이 저를 더 많이 사랑했음에 감사하면서 평화로이 눈을 감고 떠나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날로 자유로워지고 경쾌(輕快)해지는 선물인생을 삽시다. -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을 통해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는
가진 것이 없어
저리도 가볍고 기쁘게
하늘을 날 수 있겠지”-1998.3.17.
요즘 수도원에는 겨울철인데도 새들이 많습니다.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졌는지 그 많은 새들중 죽은 시체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새들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 작은 새들이 무수히 하늘을 떼지어 나는 모습을 볼 때 마다 가볍게, 기쁘게, 비상하는 영적 삶을 상상하게 됩니다. 날로 무겁고 어둬지는 짐같은 삶이 아니라 날로 가볍고 밝아지는 선물같은 삶이 되기를 소망하지만, 몸도 마음도 무겁고 어둬지는 현실이 더욱 분투의 노력과 훈련을 다하게 합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자주 자문하는 질문이자 피정지도시 주제로 택했던 강의 제목인데, 참으로 날로 기쁨과 감사중에 가벼운 선물인생을 살고 싶음은 누구나의 바람일 것입니다. 어제 복음의 주인공이 시메온이었다면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한나라는 여자 예언자입니다. 한나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여 눈에 선히 그려집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며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복음의 한나처럼 노년에 이르기 까지 한결같이 치열한 선물 인생을 사시는 초대 안동교구장이었던 두봉 레나도 주교님이 생각납니다. 게시판에 붙은 주교님의 친필 성탄 답신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많은 성탄 카드중 친필의 축하 서신은 이기헌 주교님과 두봉 주교님뿐이었습니다.
“축 성탄
보내신 카드를 잘 받았습니다. 사진! 예수님 성탄 계기로 삼아 우리는 예수님 닮은 삶을 삽시다. 2023.12.20. 두봉 주교”
1929년 생이니 저보다 20년 연상의 만 94세의 노년에도 ‘가볍고 기쁘게 감사하며’,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선물인생을 사시는 모습이 참 경이(驚異)롭고 이채(異彩)롭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새삼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과연 날로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에 항구한지 성찰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와 더불어 생각나는 90세에 선종하신 제 어머니 신마리아입니다. 노환으로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기전 낙엽처럼 바짝 마른 참 가벼운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죽음을 직감하셨던지 제가 선물한 묵주, 시계를 내놓으셨고, 어느 수녀님이 선물한 묵주반지만 끼고 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서울로 유학하여 공부할 때도, 군입대후 군대시절에도 가장 많이 생각났던 어머니이며, 작금의 나이 들어 가는 노년 인생중에도 가장 많이 생각나는, 끊임없는 회오(悔悟)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전에 써놨던 “어머니를 그리며” 후반부 내용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어머니
삶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셨고 종교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1940-50년대 세상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거니 ‘그립다’거니 감정 표현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없이도 과부아닌 과부처럼 흔들림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어머니.
내 수도원 들어올 때도 극구 만류하셨다.
‘왜 이제 살만하게 됐는데 또 고생길에 접어드느냐’고
그러다가 하루 지나 내 방에 들어오셔서
‘예 수철아, 네가 좋아하면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허락해 주셨다.
사실 어머니는 은연중 막내인 나와 살고 싶어 하셨다.
지금은 극도로 쇠약해 지셔서 온 종일 방에 누워계신 어머니
정신은 여전히 맑으시고 마음도 고요하시다.
그냥 계시기만 해도 좋은 어머니
‘신마리아’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나이들어 철이 들었나 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전 얼마전에 썼던 고백시이며 제 어머니는 18년전 2005년 6월에 선종하셨습니다. 참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시다 지닌 것 없이 가볍게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역시 오늘 복음의 한나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식과 기도로 깨어 지내던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예언자 한나도 시메온처럼 마음의 눈이 열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이에 대해 알립니다.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 예식을 마치고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가는 예수님 부모 모습도 참 홀가분해 보입니다. 한나도 예수님 부모도 참 초탈(超脫)하고 경쾌(輕快)해 보입니다.
아, 나이들어갈수록 무겁고 어둬지는 삶이 아니라, 푸른 창공을 자유로이 나는 새처럼 몸도 마음도 삶도 밝고 경쾌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한나도 예수님 부모도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하니 그 부모에 그 아들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자녀 교육에 집착없는 지혜로운 사랑, 자유롭게하는 사랑보다 더 좋은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날로 따름과 닮음의 여정이 깊어갈수록 이탈과 초탈의 경쾌한, 자유로운 빛속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이런 영혼들은 제1독서 요한 사도의 말씀에 더욱 공감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이탈과 초탈의 삶을 살았던 한나가 우리에게 주는 말씀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모두가 다 지나갑니다. 사라져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우리 선물인생을 참으로 자유롭고 경쾌하게 하늘의 새처럼 살 수 있게 하는 깨우침을 주는 주님의 참 귀한 가르침입니다. 소유하되 소유되지 않는, 소유가 아닌 존재의 자유로운 본질적 삶을 살라는 말씀이며,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깨끗한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주님을 닮아 밝고 맑고 향기로운 삶을, 참으로 초탈과 이탈의 자유롭고 영원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단식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섬긴 여인 한나
당대의 사람들의 시선에 그녀는
남편을 잃은 여인,
주님의 축복에서 소외된 여인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안의 하느님의 사람인 한나에게는
사람들의 시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겠지요.
그녀는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그녀에게도 하루하루의 삶은 몹시 버거웠을 것이고
그 시련과 고통 가운데 그녀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당신의 사람이 되어가는 삶임을
당신을 닮아가는 삶임을 새겨 봅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
All who were awaiting the redemption of Jerusalem.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성탄 8일 축제 제6일)
믿음의 신비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손자를 등에 업혀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버님! 오늘 시장 갖다 늦을 것 같아요. 손자 좀 엎어 주세요.”
그리고 예정보다 더 늦게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손자가 오줌과 똥을 몇 번 싸서 펑퍼짐한 데도 그대로 엎고 있었습니다
.“아버님! 미안해요. 수고하셨어요. 힘들지 않으세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단다. 아주 즐거웠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손자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옆집에 빌려온 빈 항아리를 갖다 주어야 했습니다.
시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걱정 마라. 내가 갖다 주고 오마.”
그리고 등에 지고 가다가는 쉬고, 가다가는 쉬면서 말했습니다.
“너무 무거워서 힘들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손자 몸무게와 빈 항아리 무게는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힘들어도 힘든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무겁고 힘듭니다. 그래서 사랑의 힘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오늘 복음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여인 한 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한나입니다.
‘한나’라는 뜻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라는 이름과 달리 한나는 불행한 삶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7년 남편과 살다가 사별을 하였습니다.
그 동안 아이는 하나도 못 낳은 것 같습니다.
한나는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살면서,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오직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이렇게 한나는 긴 시간 동안 어렵고 힘든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절대로 고통과 시련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삶을 보냈으면서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한나는 즐거웠습니다.
왜냐하면...하느님을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함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온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 예수님을 만나는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사랑의 힘은 어떤 고통과 시련도 다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한나는 긴 기다림 끝에 아기 예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기다림의 대가는 어떤 식으로든 주어지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 여러분!
만일 한나가 죽을 때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남겼을까요?
저는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그런데 한나가 84세가 될 때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예루살렘의 속량을 이룰 구세주를 만나야겠다는 간절한 소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84년이라는 기다림은 결코 짧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전을 떠난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기다렸던 원천은 바로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힘은 하느님을 믿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제 내일 하루만 있으면 2017년이 지나갑니다.
2018년 새해에는 고운님 모두가 밤낮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믿음의 신비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 1서 5장 16-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사거리를 발견하십시오.
왜냐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바로 축복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매 순간 감사야말로 앞으로 주어질 놀라운 은총을 준비하고 담을 그릇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매 순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감사할 일이 생길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입니다.
이제 믿음의 신비로 저도 마지막 날에 남길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님! 다 이루어졌습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믿음의 신비로 은총을 준비하고 은총을 담는 그릇을 준비하는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 어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루카.2,38)
김종오 신부님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며 성전에서 밤낮으로 단식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섬겼던 한나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속량(贖良)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희생양이 되실 아기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나는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목적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당신을 희생시키시며, 우리 목숨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고,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시려고 당신의 고통을 감수하시는 아기 예수님의 삶의 목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나의 이야기는 철저히 우리만을 위한 존재가 되실 아기 예수에 대해서입니다. 우리는 무관심해도 당신은 사랑하시기를 멈추지 않으시리라는 아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기애에 빠져도 당신은 이웃 사랑에 빠지리라는 아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주님마저 희생시켜도, 당신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시키리라는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계약을 어기지만 당신은 사랑의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시리라는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나는 들려줍니다.
한나의 이야기는 아기 예수님께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드려야 할 감사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거저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하여 드려야 할 감사입니다.
한나의 이야기는 우리 내면의 아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감사만큼 우리는 속량(贖良)이 되신 아기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우리 내면의 아기는 아기 예수님을 닮기 위해 우리 안에 숨겨진 열정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바닷 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바닷물에 소금이 섞여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금의 양은 얼마나 될까요? 약 3%의 소금이 그 큰 바닷물을 썩지 않도록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나라는 여자 예언자가 남편과 결혼하여 일곱 해를 살고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여든네 살이 된 노인네가 어디 마땅히 오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어서 성전에 와서 지내는 것처럼 평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매일 미사를 나오고 기도를 하면서 남모르게 희생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고 묵묵히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분들이 교회를 지키고 복음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 아기를 가리켜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40절) 라고 끝을 맺습니다. 이 구절이 ‘교회는 점점 성숙해지고 굳건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공동체가 되어 나갔다.’라는 말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진실하고 성실하게 복음화의 길을 걷는 이들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원동력은 은총과 건강과 지혜입니다. <루카 2, 36-40> 12월 3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출세에 출세를 바라며 살고, 남의 밑에 억눌려 살려고 하지 않고, 억누르며 살려고 합니다. 모두가 서울대를 나와야 출세하고, 책상을 놓거나 똑똑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려 합니다. 자녀 교육을 그 방향으로만 이끌어 가려고 좋은 대학, 좋은 전공을 하게 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키우며 어려서부터 온갖 학원에 다니고 교육에 열을 냅니다. 우리나라는 대학 교육을 90% 이상 시키며 졸업 후 일자리가 없어서 50% 정도가 무위도식하고 산다고 합니다. 어느 소식지에 60이 넘은 사람이 고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생산이 없으면 산업이 망가집니다. 생산직은 선택하지 않고 안락의자에 앉으려 하고, 돈 많이 벌고 윗자리를 차지하는 직업을 선택합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은 30이 될 때까지 양아버지인 요셉 밑에서 목수 일을 도우시다가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하십니다. 건강, 지혜,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것이며 누구나 열정을 갖고 살면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건강이 따르지 않으면 지속성이 없고 아무리 똑똑하다 하더라도 지혜가 없으면 가득 찬 것들을 요리하여 먹을 수 없습니다.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을 순서로 잡으려면
1) 하느님의 은총
2) 건강
3) 지혜입니다.
자녀 교육의 첫째는 어디서 왔는지 무슨 힘으로 사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모르고 사는 것은 물이 어디에서 흘러나와서 마시게 되는지 모르는 사람이고, 산소 없이 몇 초를 살지못하는 사람은 산소가 어디서 나와서 숨을 쉬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태양이 없이는 지구의 생명이 살지 못합니다. 하느님 아니고는 세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나빠지면 정신적으로도 약해집니다.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며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듭니다. 육체의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움직일 때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은총과 건강이 있어도 지혜가 없으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판단 능력이 없어 정신 없는 행위를 하게 됩니다. 지혜중의 지혜는 죄와 악을 물리치는 능력이며 진, 선, 미를 따라 사는 사람의 몫입니다. 어제 저를 찾아온 사람이 “신부님은 매일 글을 쓰면서 정신 건강이 유지되고 치매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십니다.
그러나 건강하더라도 생각에 진실과 사랑이 없으면 바보같이 쓸모없는 행위만 하게 됩니다. 은총, 건강, 지혜를 아우르는 삶은 진실하고 사랑을 가진 사람의 삶입니다.
자리가 말하지 않고, 가진 것이 말하지 않고, 건강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르지 진실과 사랑이 말하게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님 슬하에서 은총과 튼튼한 몸과 지혜가 자라도록 기도합니다. 더불어 양심 교육이 바로 되도록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벼워지시는
아기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아기 예수님께
참된 사랑을
묻습니다.
지금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에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우리는
대가를 치르며
깨닫습니다.
모든 사랑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탄의 사랑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삶 안에
성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다려 본
사람은
사랑의 소중함을
알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본 사람은
밝은 길의
소중함을
너무나 잘 압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의 언어로
세상을
밝히십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으로
복음의
이야기는
희망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겐
간직하고픈
시들지 않는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성탄을 향하고
성탄은 사람을
향합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은 성탄과
함께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함께 삶으로
써내려가는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속량과 기다림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께 바칩니다.
성탄을 만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삽니다.
맑게 사랑하고
맑게 깊어지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은
대가를 치르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 사랑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나누고
우리들이
간직하고픈
사랑의
이야기 또한
예수님을 향하는
사랑이길
기도드립니다.
히말라야 등산을 하려면 반드시 고용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등산 안내자로 널리 알려진 셰르파입니다. 이들은 많은 짐을 운반하고 또 온갖 잡일을 하면서 등반을 돕습니다. 그래서 네팔에는 약 7만 명의 셰르파가 있다고 하네요.
등반을 돕는 셰르파가 꼭 필요한 것처럼,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셰르파 역할을 하는 도우미가 우리 주변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우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운이 없어서 어떤 도우미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 못 만났을까요?
등반을 돕는 셰르파를 만나려면 히말라야를 끼고 있는 네팔에 가야만 합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즉, 내가 직접 네팔까지는 가야 셰르파를 만나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나의 도우미는 나를 직접 찾아오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그 자리로 가면 도우미를 분명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계신 곳에 내가 가야 합니다. 주님 계신 곳은 주님의 뜻인 사랑이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있으면서 주님이 안 계신다고 외쳐서는 안 됩니다.
엉뚱한 곳에 서 있으면서 운이 없다고, 주님께서 외면하신다고 불평불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한나라는 예언자를 만납니다. 구약성경에는 남자 예언자의 역할은 막중합니다. 구원을 알리고 구세주를 예언했습니다. 그에 반해 여자 예언자는 수도 많지 않았고, 하는 일도 부녀자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주님의 봉헌식에 여자 예언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름은 한나로서 밤낮으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기던 할머니 과부였습니다. 아마도 성전에 살면서 성전 일에 봉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남편과 일곱 해 살고서는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풍습에 따라 15세 전후로 결혼했을 것이고 일곱 해 살고 과부가 되었으면 자그마치 성전에만 60년 이상 있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굳게 믿었기에 기다리고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구세주를 뵙는 영광과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나 예언자와 같이 주님 안에서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분명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건 좋은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켄 로런스).
채우려고 하지 말고 비우세요.
우연히 조병수 건축가가 지은 집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 가로세로 7m 마당 곁에 한 평짜리 방 여섯 칸을 지었습니다. 하늘을 보고 빛과 바람을 느끼도록 만든 ‘땅집’입니다.
인터넷에 있는 ‘땅집’ 사진을 보니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조병수 건축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게 지으려면 마음이 작아야 합니다. 마음이 작으려면 비워야 하고 무엇이 소중한지 알아야 하지요.”
제 방만해도 너무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더 넓은 공간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너무 많은 것을 채우고 있어서 계속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작은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모실 수 있는 작은 마음만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입니다.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제 시메온 예언자에 이어 오늘 등장한 한나 여 예언자가 한평생 겪어온 고통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열여섯의 나이에 혼인한 그녀는 남편과 혼인한 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녀의 나이는 겨우 스물셋, 그때부터 60년 동안 홀로 살아왔습니다.
당시 여자로서 가장 큰 행복은 남편 잘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편에 종속되어 한평생 별 탈 없이 백년해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건강한 아들 펑펑 잘 낳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나는 정말 빵점이었습니다. 7년 만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참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가장 불행한 인생의 대표 격인 ‘청상과부’로 60년 이상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삶을 보십시오. 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큰 상급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지복직관’ 하느님의 얼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품에 안겨 계신 만왕의 왕,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에 안아 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은 기다리는 일이군요. 비록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나날이라 할지라도 그저 기다리는 일입니다. 꼬이고 꼬인 인생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풀 방법이 없어 보이는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다 할지라도 기다릴 일입니다.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고통의 정도가 극심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고통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정말 너무너무 지루하다면 기다림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우리 앞에 좋은 날을 펼쳐놓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에 백배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한나 예언자에게 하신 그대로 말입니다.
우리 모두 너나할 것 없이 희망합니다. 나이를 먹게 되면 좀 더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꿈꿉니다. 지금은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노년기에 접어들면 좀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좀 더 많이 희생하게 되고,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이 세상을 하직할 순간이 다가오면 좀 더 이타적인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한 걸음 크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아름답고 품위 있는 노인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웬걸! 많은 경우 삶은 우리 의도대로 펼쳐지지 않습니다. 기도나 영적 생활은 습관이 중요한 것이어서 젊은 시절 기도에 맛들이지 않았던 사람이 나이 든다고 저절로 기도의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젊어서 육적으로만 살았던 사람이 연세 든다고 저절로 영적인 사람으로 탈바꿈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남은 날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안하무인으로 살아가시는 분들, 극단적 자기중심주의로 살아가시는 분들, 끝까지 놓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분들, 그래서 정말이지 불행한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들 꿈꾸실 것입니다. 영적이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노년기! 그렇다면 한나 예언자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세상에 푹 빠져 삶을 허비하다가 어느 순간 영적인 삶으로 전환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충만한 영적 생활을 추구했고 그 맛을 들였습니다. 그 결과 살아생전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평생소원을 이뤘습니다.
잡생각 끊는 방법: 내 생각은 내가 사는 집에 의해 결정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한나는 시메온과 함께 아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봅니다. 한나는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평생 성전에서 기도와 단식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여인입니다.
왜 성경은 굳이 그녀가 남편과 일곱 해를 살았던 것과 그 이후 성전에서 산 것을 밝힐까요? 그 이유는 그녀의 거처가 남편의 거처에서 하느님의 거처로 옮겨진 사실이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님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남편의 거처에 살면 그녀는 남편의 아내가 됩니다. 그러면 아내로서 생각하고 아내의 감정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 한나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자기 정체성을 주거지를 바꿈으로써 변화시킨 것입니다. 성전에 사는 예언자라는 정체성은 세속에서 굳이 신경 써야 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내 생각은 나의 정체성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학생이라면 학생이 아닌 사람이 가질 필요가 없는 생각과 감정으로 살아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거나 자신이 학교라는 공간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라고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제는 성전에서 살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집에 살 수도 있습니다.
2021년 12월 30일 「매일미사」 묵상글에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의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유학 간 첫 학기에 유독 어려운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업 윤리’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언어도 문제였지만 토론 수업이라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번번이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쯤 교수님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놀리셨습니다.
“자네는 성탄 방학이 되면 시칠리아섬의 작은 본당으로 봉사하러 갈 것이네. 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성탄 밤 미사 강론을 할 텐데, 신자들 앞에서 떠듬거리며 ‘오늘 밤은 성탄입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신자들이 손뼉을 치고 난리가 날 것일세.”
신부님은 생각했습니다.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부인 나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놀리다니.’
신부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영성 지도를 받는 날이었는데, 지도 신부님을 만나자마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부님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바오로, 이 일로 배운 게 있어?”
“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학생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또 배울 게 있어?”
신부님은 생각을 좀 하다가 “제가 이탈리아 말을 잘 못 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또?”
“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잊어버려!”
신부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흥분하여 “아니 어떻게 잊습니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며 씩씩거렸습니다.
영성 지도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너 지금 기도할 수 있어?”
“아니, 지금 기도가 중요합니까? 그 교수가 저를 놀렸다니까요?”
그러자 영성 지도 신부님은 “바오로, 하느님이 중요해, 아니면 그 교수가 중요해? 지금 네 마음을 온통 그 교수의 말에 빼앗겼잖아!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의 마음을 그 말에 빼앗겨 하느님은 안 계시잖아. 바오로,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세상 것에 빼앗기지 마!”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신부님은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며 날마다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던 한나 예언자처럼 단 1초라도 하느님 아닌 세상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겠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감정’입니다. 바오로 신부님은 교수가 한 말에 감정이 상했습니다. 그 감정은 그 사건을 자꾸 ‘생각’하므로 일어납니다. 영성 지도 신부님은 생각을 주님께 돌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정체성’에 의해 규정됩니다. 내가 판사라면 판사의 일을 생각하고 도둑이라면 도둑의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을 무조건 하느님께로 돌리려 한다고 쉽게 되지 않습니다. 정체성부터 확고하게 바꿔야 합니다. 이는 마치 잘못 걸려온 전화가 계속 온다면 자신은 누구누구라고 명확하게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다시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사제라는 정체성은 학생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사제는 어디 머무는 사람입니까? 성전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정체성이 생각을 규정하기는 하지만, 그 정체성은 또 자신이 머무는 집에 의해 규정됨을 알아야 합니다.
한나 예언자가 성전에 머물지 않으면서 예언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을 밤낮으로 했기 때문에 그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제라고 하더라도 여행자로 몇 년 동안 놀러만 다니며 신자들과 미사도 하지 않는다면 사제는 자신이 사제인지 여행자인지 구분할 수 없어지고, 그러면 사제로 생각해야 할 것보다 여행자로서 해야 하는 생각이 그 사람을 가득 메우게 됩니다. 따라서 개집에 머물면 개가 되고 그러면 개의 생각과 감정으로 행동하게 되지만, 우리가 성전에 머물면 하느님 자녀가 되고 그 정체성에 맞는 생각과 감정으로 행동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내가 초대한 대상의 집에 삽니다. 생각은 나의 정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나의 정체성은 내 안의 동굴에서 내가 누구와 대화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 누가 바로 내 집을 규정하고 그 규정된 집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집은 내가 평소에 대화하는 대상의 집입니다. 내가 주님의 집에 산다면 자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하며 바로 끊을 수 있게 됩니다. 잘못된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 집의 정체, 혹은 나의 정체성을 밝히면 됩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더는 대화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누구와 함께 삽니까? 그 안에 신이 있으면 나는 성전에 사는 것이고 그 안에 뱀이 있다면 나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이는 평소에 누구와 대화하며 사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그 정체성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다가 죽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 자녀가 되지 않으면 구원을 위한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자녀만이 부모의 뜻을 이어받기 때문입니다. 한나 예언자처럼 성전에 머뭅시다. 그래야 세상 것들과 대화를 할 사람이 아님을 내가 알고 쓸데없는 생각들은 바로바로 끊어지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하는 말 중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절망도, 근심도, 걱정도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면, 우리가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절망은 희망으로, 근심은 위로로, 걱정은 용기를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버지니아 성 정 바오로 성당으로 대림특강을 다녀왔습니다. 본당 신부님께 신문 홍보도 부탁드렸습니다. 코로나 변이 오미크론도 시작되었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제게 수호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버지니아에 고등학교 동창이 있었고, 저의 강론을 읽고 있는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홍보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쉼표를 찍어 놓으셨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이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열매를 먹은 것은 분명 인류에게 ‘원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죄가 있었기에 우리가 있을 수 있고, 그 원죄가 있었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유다는 하느님께서 찍어놓으신 쉼표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로 쉼표를 이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거두어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로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절망으로, ‘다 이루었다.’는 확신으로, ‘목마르다.’라는 갈망으로,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겨드리나이다.’라는 순명으로,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사랑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당신이 사랑하시는 교회를 맡겨 드렸습니다. 죽음의 십자가는 부활의 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2달 전에 있었던 교통사고는 제게 마침표가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혈압이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혈액검사, 소변검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검사 결과 다른 부분들은 모두 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의 건강을 돌봐 주실 의사 선생님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혈압약을 처방 받아서, 혹시 모를 위험을 예방 하게 되었습니다. 원망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미워해서는 건강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따지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한 때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지금 문화를 선도하는 서구 문명도 한 때는 그리스, 로마의 문명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사제생활 30년을 하고 있는 저도 한 때는 철부지 어린이였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생각할 수 있다면 좀 더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나비가 한 때는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였음을 기억한다면 하늘을 나는 기쁨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침표는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올해도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363일을 욕심과 욕망 때문에 채우려고만 했어도, 오늘과 내일 마음을 비우고 나누는 삶을 산다면, 베푸는 삶을 산다면, 기도의 삶을 산다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한해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상의 분주함 속에서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살았던 궁전에서는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규율에 얽매서 살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한나는 예수님을 보았고, 축복의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한결같고 초연한 정주의 삶, - 사랑, 신뢰, 지혜, 가난, 겸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겨울은 춥지만 맑고 깨끗해서 좋습니다. 잠깨어 일어나면 우선 집무실 앞 수도원 정원을 거닐며 하늘의 별들을 봅니다. 겨울 하늘의 별들도 좋고 본질로 서 있는 가난한 겨울나무들도 좋습니다. 밤마다 바라보는 늘 거기 그 자리 밤하늘의 카시오페아 별자리와 북두칠성입니다.
맑고 깨끗한 겨울 하늘도 좋지만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간 침묵과 고독의 겨울산도 겨울나무도 좋습니다. 계절마다 좋고 배우는 바 다 다르지만 겨울에는 무욕의 초연한 삶을 배웁니다. 어제는 참된 정주 영성의 한결같은 삶에 대해 나눴지만 오늘은 초연한 삶에 대해 나눕니다. 역시 참된 정주 영성의 열매가 초연한 삶입니다.
가난하나 한결같은 삶, 초연한 삶이 그대로 품위있는 아나뷤의 삶입니다. 어제 복음의 주인공이었던 시메온과 오늘 복음의 주인공 한나가 그 아나뷤의 전형적 모습니다.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둔, 하느님 사랑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아나뷤입니다.
사랑, 신뢰, 지혜, 가난, 겸손으로 요약되는 한결같고 초연한 정주 영성 삶의 모범이 한나입니다. 참으로 겨울 하늘처럼 맑고 깨끗한 한나의 영혼입니다. 새삼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깨끗한 영혼에 있음을 봅니다. 이런 순수한 마음에서 샘솟은 깨끗한 열정입니다. 깨끗한 마음, 깨어 있는 삶, 깨달음은 셋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직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정말 가난하나 아름다운, 참으로 영육으로 건강한 한나입니다. 오로지 일편단심 한결같이 초연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겨온 정주 영성의 한나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여 섬길 때 저절로 가난하고 겸손하며 지혜로운 정주의 삶이겠습니다. 오래 전에 써놓은 겨울나무에 대한 시 두편이 생각납니다. 모두가 오늘 복음의 한나를 연상케 합니다.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
나무마다
푸른 하늘
가득하고
가지마다
빛나는 별들
가득 달린 나무들인데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1998.12.
역설적으로 가난한 듯 하나 텅빈 충만의 부유한 겨울나무들 같습니다. 동안거중의 겨울 배나무 밭을 산책할 때마다 갖는 느낌도 역설적으로 텅빈 충만의 부요와 행복입니다. 이어지는 ‘겨울나무’라는 시입니다. 복음의 한나 여인 앞에서 느끼는 마음도 아마 이러할 겁니다.
“떠나자
떠나 보내자
미련없이 아름답게
나 늘 푸른 사철나무보다
잎들 다 떠나 보낸 겨울나무가 좋다
가난한 겨울나무들 앞에서 서면
왜 이리 부끄럽고 부러워질까
왜 이리 가슴이 저릴까
하늘 향해 쭉쭉 뻗은 무수한 나뭇가지들
참 간절한 그리움의, 기다림의 촉수들
볼품은 따질 게 아니다
그대로 그리움 덩어리, 침묵의 기도로 구나
흡사 봄꿈을 꾸는 나무들 같다
하느님 향해 쭉쭉 뻗은
무수한 내 깨어 있는 영혼의, 그리움의, 기다림의 촉수觸手들!
나도 한 그루 겨울나무로구나
그대로 한 그리움 덩어리 침묵의 기도로구나
나도
겨울나무가 되고 싶다!-2000.12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공감과 감동을 선물합니다. 겨울나무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시입니다. 겨울 속의 봄이듯 이런 기다림중에 맞이하는 주님입니다. 참으로 겨울나무같이 가난한 영혼들에게는 매일이 주님의 대림이요 주님의 성탄입니다. 이런 깨어 주님을 기다리던 가난한 한나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이시니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또 한결같은 초연한 정주 영성의 본보기가, 참된 아나뷤의 본보기가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예수 아기의 성장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부모의 인품이 환히 드러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요셉, 마리아 부모님의 인품을 그대로 거울처럼 보여 주는 예수님의 성장과정 모습입니다. 한없이 기다리며 무집착의 이탈의 초연한 사랑과 지혜로 예수 아기의 넓고 깊은 따뜻한 품이 되어 준 요셉, 마리아 부부임이 분명합니다. 칼리 지브란의 시집 ‘예언자’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하여’ 라는 시의 진실을 이미 꿰뚫어 살았던 부부임이 분명합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나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 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마라
큰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한나와 시메온, 요셉과 마리아, 모두가 가난하나 참으로 한결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섬겼던 겸손하고 지혜로운 아나뷤이었습니다. 바로 요한 사도가 우리 모두 육신의 세상적 욕망에 초연하여 한결같은 정주의 참 삶을 살도록 간곡히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냥 놔두면 미풍으로 끝날 지나가는 것들에 유혹되어 어리석게도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며 분별력의 지혜를 잘 발휘하여 세상을 잘 보살피고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맛’이 아니라 ‘하느님 맛’으로 살라는 것이며, 무지의 탐욕이나 질투, 분노에서 벗어나 초연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과 사랑을 둔, 겸손하고 지혜로운 아나뷤으로 한결같고 초연한 정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한나라는 과부의 기쁨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하고 있다. 먼저 시메온이 아기를 뵙고 품에 안아 본 다음에 한나가 나타났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절)고 한다. 복음에 그녀의 조상과 지파를 밝힘으로써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이다. 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한 한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여인이 과부라고 소개한다. 한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하느님께 더욱 의탁한 사람이었다. 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는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여든네 살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한나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한세상을 살아가면서 귀엽고 믿을 수 있는 자녀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한 생애를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현세의 큰 축복이겠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부부가 그렇지는 못하다. 또 부부 중에 어느 한 편이 세상을 먼저 떠났다고 해서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겠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믿고 바라고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맑고 밝고 깨끗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과 다투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벗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스스로 작아짐을 기뻐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가짐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 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홀로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죽음을 향한 삶을 즐깁니다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시메온도 한나도 구원의 빛을 보며 생의 끝자락에 왔다. 어제는 시메온을, 오늘은 한나를 복음에서 만난다.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2,38).
한나는 혼인해 일곱 해를 살고 과부로 여든 네살까지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한나는 급기야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에게서 구원의 하느님을 보았다.
우리는 성탄날 마굿간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렸다. 우리는 과연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아기 예수님께 우리의 살아계신 하느님, 구세주로 알아뵙고 고개 숙여 경배를 드렸을까? 아마도 많은 경우 시메온과 한나와 같이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께 당신 구원을 떠올리며 경배드린 사람은 그리 많지 안았을 것 같다.
한나는 인생 후반전에 아기 예수님 안에 신성을 보았음에 감격하고 자기가 입은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떠올렸다. 한나는 생의 어려움 중에도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렸다'고 밝히고 있고, 이어서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한나는 감격과 감사함으로 가득찼고 구원을 본 것에 대한 선포만이 생의 전부가 되었다.
한나는 자기의 노고로 어려움에도 '아기 예수님 안에 하느님을 보았다'고 자랑하지 않고, 자기가 입은 은혜가 너무나 크다며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성전에서의 자기 봉헌과 노력을 먼저 꺼내 자랑할 법도 한데 한나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알려 주신 크신 은혜를 먼저 떠올리며 감사드리고 있다. 즉 아기 예수님 안에 주님을 보도록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만방에 밝히고 있다.
이제 2021년도 이틀 밖에 남아있지 않다. 돌아보면 한 해도 많이 어려웠다. 그러나 모두가 감사한 일 뿐이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먼저 감사드린다. 자기 노력은 사실 미미해서 자랑할 것도 없다. 하느님의 크신 은덕으로 한 해의 끝날까지 무사히 안착했음을 감사드려야 한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 시메온처럼, 한나 예언자처럼 아기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만나 찬미 드릴 것이다. 오늘 한 해를 돌아보며 성탄날 못다 드린 구유경배를 아기 예수님께 드려야겠다.
머물러라. 기도하라. 그리고 바라보라. 하느님께서 시메온처럼, 한나처럼 가장 귀한 선물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다.' 경배드릴 것이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어제 시메온에 이어서 한나라는 나이 많은 예언자가 나옵니다. 한나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그러한 한나 역시도 오늘 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한나는 남편이 일곱 해를 살고 죽은 뒤 평생을 홀로 살아온 과부였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인생의 시련과 고통을 겪은 여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느님만을 굳게 믿으며 단식과 기도를 하며 평생을 성전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기다렸습니다. 결국 그녀는 하느님의 자비로 인생의 끝자락에 구세주를 영접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마다 각자 인생의 시련과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요즘 코로나와 경제위기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신앙적으로도 위기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되고 끝까지 하느님 안에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하느님과의 관계의 끈을 놓아 버릴 때 어쩌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역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나 예언자처럼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며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어제의 복음에서는 독실한 하느님의 자녀인 시메온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해 주셨던 메시아를 보았으며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렸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같은 날 한나라는 과부도 메시아를 보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녀는 이 기쁜 소식을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널리 알렸으며 자신에게 기쁜 소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리게 됩니다.
어제와 오늘의 복음에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기쁨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제의 복음과 오늘의 복음의 주인공인 시메온과 한나에게 무엇이 특별한 것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큰 선물을 주셨을까요. 우리들은 복음을 통해서 아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한나는 매우 불쌍한 여인입니다. 결혼을 한지 7년 만에 남편을 잃었으며 그 후 그녀는 80세까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게 됩니다. 그녀가 정상적인 나이로 결혼을 하였다면 대략 60여년을 혼자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혼자 살게 된 그녀는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복음 안에 있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메온과 한나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특별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한나는 사랑하는 남편과 7년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크게 원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분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느님과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매일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밤낮으로 기도를 받치며 매일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 뿐 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메온과 한나에게 또 하나의 공통점은 하루 하루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항상 있는 이들이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고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며 아기 예수님을 뵌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물론 한나처럼 매일 성당에 미사를 참례하고 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여건상 그러질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영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마음이 항상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어떤 일이 생겨도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향한 충실한 자녀들과 자신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정신없이 바빠서 또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등 이런 저런 이유를 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아니 용서하시지 않으십니다. 한나 그리고 시메온처럼 살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만이라도 가지고 지상생활을 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것이고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느님께서는 직접 여러분의 영혼을 향해 마중 나오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살리셨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봉헌합시다.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여인의 기도
하느님께서는 이 여인의 기도와 함께 하시며
구세주의 방문 순간에 함께 할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감격의 기도와 감사의 순간
그 축복의 순간 역시
일상의 기도와 삶의 자세가 기본이 되었음을 마음에 새깁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She gave thanks to God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 요한 2,7)
이근상 시몬 신부님
남는다(메노)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 중에 하나인데 머물다는 근본적인 의미와 더불어 기다린다는 뜻에도 쓰인다. 사랑안에, 내 안에 머물라는 초대에도 쓰이지만 사도행전 20장23절처럼 환난과 투옥이 바오로를 기다린다고 할 때도 쓰인다. 그러니까 첫독서에서 사용되는 '영원히 남는다'는 말씀의 뜻은 영원히 머문다는 뜻이지만, 그 안에는 기다림도 포함된다는 사실.
영원히 남는다는 건, 어떤 고난뒤의 얻게되는 영원무궁한 트로피라기보다 계속되는 머뭄이며 기다림이라는 것. 당신 안에 머문다는 것, 당신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 곧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건 말건 그 나라의 오심을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행함보다 늘 앎이 조금 더 큰 존재이니. 해서 하느님 나라를 목격할 뿐 참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기다리지 않는 자는 하느님나라를 보며 그저 곁을 지나듯 그 나라의 곁을 스치며 사라질지도...
세상과 세상의 욕망이 지나가는게(파라고; 곁을 가다) 아니라, 지나가버리는 모든 것, 머물지 못하고 곁을 스쳐가버리는 모든 것이 가짜다. 그걸로 세상과 세상의 욕망을 구별해 내야한다. 영원히 남는 것, 그게 무엇이든 영원히 남겨지는 게 진짜다. 참여하는 것, 성실하게 기다리는 것 만이 영원히 남겨지는 모양이다.
감사와 찬미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초고령 사회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본당에도 노인들만 있다고 걱정들 많이 합니다. 사실 주일 미사 참례자들 대부분이 70대 이상입니다. 60대만 해도 젊다고들 하고, 40-50대는 벌써부터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일을 할지 우려들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의지하고 희망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어르신들입니다. 새벽부터 기도하는 분도 어르신들이고, 평일 미사 참례하는 분도 어르신들이고, 교회 가르침을 진지하게 듣고 따르는 이도 어르신들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어르신들은 세상의 재미나 근심 걱정에서 한 발 벗어나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선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 예언자는 나이가 매우 많은 과부였습니다. 그 여인은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신세한탄으로 허송세월하지 않고, 하느님을 흠숭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 가까이 머물렀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눈이 은총으로 밝아져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이웃들에게도 주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젊고 생기 넘친, 신앙의 활력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어르신들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하도록 한나 예언자의 전구를 청합니다.
하늘지혜와 진리를 익혀 세상공생활 시작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인생 절반이상을 하느님만 섬기며 성전 지키고 산 예언자 한나 할머니.
아기예수님 봉헌 현장을 보며 하느님께 감사하고 사람들에게 알렸겠죠.
그후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삼십년을 하느님 총애 받으며 살았다합니다.
성가정 부모슬하에서 하늘지혜와 진리 익혀 세상 공생활 시작했습니다.
한국 청년들은 초중고 군대 복학 대학졸업 막 취업 했을 나이겠습니다.
예수님은 삼년간 공생활 후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삼십대에 어떤 인간형으로 형성되어서 세상에 나간다고 봅니까.
혹시 세상 재물중심이라면 이제라도 하늘중심 영생준비로 바꿔 보시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함승수 신부님
……“새로운 인생은 방향을 찾음으로써 시작된다.”
오늘 복음에는 ‘한나’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한나는 혼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된 불쌍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불행한 상태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어렵고 힘든 상황을 하느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하느님과의 참된 일치’라는 새로운 방향을 찾음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챙겨야 할 남편이 있다면 밤낮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지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것은 불행이지만, 그 불행 덕분에 온전히 하느님께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은 행복입니다. 한나가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나 형편에 휘둘리지 않고 천상의 것을 추구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한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이름인 ‘프누엘’은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녀가 속한 지파 이름 ‘아세르’는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즉, 한나는 자신의 이름대로 하느님의 빛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것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온 존재를 하느님께 걸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그분께 의탁한 채 온전히 하느님의 소유로서 살아간 것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의 소유가 됨으로써, 참으로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도 신앙도 내 존재를 내어주는만큼, 몰입하고 정성을 들이는 만큼 큰 결실을 얻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이라는 영역에서는 ‘무임승차’를 하려고 들지는 않는지요?,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으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그저 받으려고만 하지는 않는지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는 법입니다. 한나처럼 하느님을 위해 내 모든 걸 내어드릴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느님께서도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프로필의 링크를 누르시면 강론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연세가 나이가 들어 살 만큼 살고 나시면, 무엇을 기대하고 어디에 희망을 두며 살아가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에서 만난 어느 몇몇 천주교 신자들은 은퇴해서 1년 동안은 캠핑카를 사서 전국을 일주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그동안 사느라고 바빠서 충실하지 못했던 주 하느님께 대해 연구하고 집중하고 싶다고들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나라는 예언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 라고 기록합니다.
요즘 코로나19 감염상황이 심해서 어디 나다니기가 조심스러운 시기입니다. 성당에 올 때도 어떨 때는 혹시 감염되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사 시간 이외의 시간에는 성전이 텅 빕니다. 그럴 때는 감염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는다면 기도하러 오셔도 될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어쩌면 여태까지 살면서는 얼마나 가졌고, 또 무엇을 가지고 누릴까를 신경 쓰고 그 영향권에 살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주 하느님께 집중하고 영으로 일치하여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주님과 기도 중에 순간순간 누리는 기쁨과 평안에 잠기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다른 어느 것을 구하고 찾느라 수고할 필요도 없이, 내 몸과 마음과 정신을 다 바쳐 주님께 침잠하여 그분과의 일치에서 오는 희열과 평화와 안녕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 <루카 2, 36-40> 12월 3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지만 환경에 따라 서로 디른 삶을 살기도 됩니다. 서로 비교하면서 더 나은 환경에서 살기를 바라고 그런 횐경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금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 흙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 성장 과정이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느 나라에 태어날 것인가에 따라서도 운명이 달라지고 어느 시기에 태어나는지에 따라서도 성장 과정이나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에도 적응하고 따라 살며 더 좋은 환경을 갈망하고 살아갑니다. 종의 아들로 태어나면 종노릇 하며 일생을 살고 양반 집안에 태어나면 양반 행세를 하고 삽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양반도 종의 집안도 없어지고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죄에서, 악에서 구원받고 진실과 사랑의 길을 만들어주시는 주님의 길을 따라 살기 위함입니다. 믿음을 통해 믿음을 살고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찾고 사랑과 진실이 없는 세상에서 참사랑을 살기 위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시메온과 한나라는 두 예언자는 기다리던 주님을 뵙고 찬미의 노래를 부르듯이 이미 오셔서 하느님 나라가 임하게 하심을 우리의 삶을 통해 노래 부르고 춤추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은 주님 오심이 새 세상,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주심을 알리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비유와 왕위를 받고 돌아오는 주인의 비유를 통해 어떤 준비가 있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혜로운 여인과 미련한 여인의 비유는 준비된 삶과 준비 없는 삶을 비교해서 말하고 왕을 기다리는 비유는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를 다했는지 깨닫게 하십니다.
기다림 안에 진실과 사랑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가 문제입니다. 주님은 인류에게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고자 하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나를 따라라.“ 오시는 분을 기다림이 아니라 주님처럼 복음을 마음에 품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세상은 공산 독재주의와 민주 자본주로 나누어 환경을 조성하고 있으며 소위 “좌우”라고 합니다. 공산독재는 평등이란 이름 아래 자유, 평화, 기쁨이 없는 환경이고 민주자본주의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나 평화를 위해서나 기쁨을 위해서 자기희생의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경쟁에서 승리하여 윗자리에 있어도 약한 이, 가난한 이, 외로운 이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길은 봉사와 나눔, 친교입니다.
주님은 낮은 자리로 가라 하시고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시면서 무엇이든지 독점하려 하지 말고 서로 공유하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현 교황님의 “찬미 받으소서”라는 회칙은 60여 년 전에 이미 바티칸 2차 공의회를 되풀이하며 각성시키는 회칙으로서 사목 헌장의 내용을 상기하시며 이루지 못한 것을 완성하고자 하십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교회의 환경이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따르지 않으면 로마에서 시작한 “시노드스”<공동 합의성> 도 성공을 거두지 못합니다. 지난 공의회가 교회의 조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전례 헌장에서 제단이 하늘을 향한 것을 신자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으나 아직도 성직자 중심의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하는데 부족함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러 어디로 가야 하는 것도, 높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 바로 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 중에 내 안에 계신 주님을 찾아 만나고 함께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를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막을 수 없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로
가고있다.
성탄은 어제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의 살아있는
이야기로
우리 마음을
울린다.
우리를 위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잊어버릴 수
없는 하느님의
탄생이다.
성탄은
우리를 일으키는
기쁨의
이야기이다.
성탄의
이야기를 통해
복음은
살아있는
복음이 된다.
이야기가
깊어지면
우리의 삶도
깊어진다.
이야기의
바탕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이 있다.
하느님의
이야기를
다시 듣는다.
하느님의
이야기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비로소
바라보게 되고
비로소 듣게되는
성탄의 변화이다.
성탄의 이야기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되찾아주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은 새롭고
사랑은 뜨겁다.
사그라들지 않는
아기 예수님과
함께 이 하루를
시작한다.
아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사랑은
막을 수 없고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어졌다고 많은 이들이 울상을 짓습니다. 그러나 마이너스 편익과 함께 반대로 플러스 편익도 교차한다고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 이동이 줄면서 항공 산업, 자동차 산업, 운수 서비스업 등은 수입 감소로 마이너스 편익이 생기지만, 탄소 등 오염물질 배출이 줄어들면서 맑은 공기라는 플러스 편익이 생긴다.
- 원격 근무,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사무실 밀집 지역 식당가에는 수입 감소로 마이너스 편익이 생기지만, 주거지에서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서비스가 늘어나면서 플러스 편익이 생긴다.
- 영화관에 관객이 끊기면서 수입 감소로 마이너스 편익이 생기지만,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통해 좋은 영화를 값싸게 감상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플러스 편익이 생긴다.
- 유흥가 술집에 손님이 줄면서 수입 감소로 마이너스 편익이 생기지만, 가족과 보내는 저녁 시간이 늘면서 관계가 개선되어 플러스 편익이 생긴다.
그렇습니다.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도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여자 예언자를 봅니다. 그녀는 남녀 차별이 심했던 시대를 사는 여자였습니다. 또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과부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보이는 한나 예언자입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도 정말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다렸기 때문에 그 모든 부정적인 상황이 아기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완전히 뒤바뀝니다.
우리에게도 부정적인 상황은 자주 주어집니다. 내 편은 하나도 없고 이 세상 안에 나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정적인 상황에 갇히면 안 됩니다. 그냥 주저앉아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한나 예언자가 보여주었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시선에 흔들려서 포기하는 삶이 아닌, 하느님과 함께하고 하느님 품에 머물러야 합니다.
부정적인 상황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희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코로나 팬데믹을 잘 이겨냈으면 합니다.
행복이란 자신의 몸에 몇 방울 떨어뜨려 주면 다른 사람들이 기분좋게 느낄 수 있는 향수와 같다(랄프 왈도 에머슨).
누구도 닮지 않아서 예쁜 아기
아주 예쁜 꼬마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어떤 할머니께서 아이를 보면서 “우리 아기 참 귀엽고 예쁘네!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쁘니? 엄마 닮았어? 아니면 아빠 닮았어?”라고 말합니다.
이 물음에 이 꼬마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요. 아무도 닮지 않아서 이쁘대요.”
엄마도 아빠도 닮지 않아서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의 대답이 참으로 당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아이의 대답처럼 삶을 조금만 다르게 바라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감정 폭발하는 다혈질인가요? 활력이 넘치는 분입니다.
아들이 고집이 너무 세다고요? 소신이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늘 지적만 한다고요? 참으로 세심하고 섬세한 것입니다.
딸이 너무 소심하다고요? 조심성이 있는 겁니다.
세상이 롤러코스터 같다고요? 네 맞아요. 세상은 놀이터입니다.
생각을 뒤집어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보면 어떨까요? 정말로 다른 생각이 보입니다.
인생의 방향을 알려줄 예언자를 빨리 찾아주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봉헌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어제 시메온 예언자에 이어 오늘은 한나 예언자가 예수님의 미래를 말합니다. 시메온과 마찬가지로 한나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속량”을 위해 오신 분임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고 ‘속량’은 피 흘림을 통한 죄의 용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소명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언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어렸을 때부터 음악가나 축구선수의 자녀로 태어나면 그 방면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기에 남들보다 더 빠른 성장을 할 것이고 그러면 그런 분야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 필요가 없기에 또한 훌륭한 성과를 내게 됩니다.
올해 차범근 감독의 아들 차두리 씨도 감독의 길로 들어서 자신의 팀이 U18 무패 우승하여 최우수지도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상은 이을용 코치의 아들 이태석이었습니다. 이는 어려서부터 갈 길을 알았던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늦게서야 찾으려고 했던 사람과의 차이가 극명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도 아기 때부터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시작하여 그 길을 아기 때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도 하지만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주님께서 이 아이를 어떤 길로 이끄시려고 하는지 그 길을 빨리 찾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속 ‘사하라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비셀 마을 원주민들은 켄 리먼(Ken Lehman)이 이 마을을 방문하기까지 한 번도 사막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막을 벗어나려고 길을 떠나도 걷다 보면 결국은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더라는 게 마을 원주민들이 말한 이유였습니다.
1926년 이 마을을 찾은 영국인 켄 리먼은 이 사실을 알고 엑터라는 마을 청년에게 사막을 벗어날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북극성을 따라 걷는 것이었습니다.
리먼의 가르침대로 엑터는 낮에는 쉬고 밤에는 북극성을 보고 걸으며 마을 원주민 중에서는 처음으로 사막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사막의 개척자가 되어 마을 한가운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동상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새로운 인생은 방향을 찾음으로써 시작된다.’
방향만 찾으면 천천히 걸어도 방향 모르고 달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고생하면서도 훨씬 멀리 갑니다. 그러니 일찍 그 방향을 찾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청년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청년은 하고 싶은 일이 하도 많아서 90개나 적습니다. 모두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중생들입니다. 그렇게 살면 나이가 들어도 평생 해 놓은 것이 없어 인생을 허비했다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한 우물을 파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밑에 물이 있다는 확신을 줄 누군가를 만나야 합니다. 저는 다행히 늦게나마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만나 저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그 방향으로 나아온 것에 지금까지 후회가 없습니다. 힘이 들어도 좋은 열매가 계속 맺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오늘 예수님의 미래를 말해 준 한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평생 이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5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여든네 살이면 엄청나게 장수한 나이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는 그 긴 세월을 혼자 성전에서 기도와 절제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한 삶이 아니라 한 길로 평생을 나아온 삶입니다. 그 정도면 하느님의 자신에 대한 뜻을 평생 따라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누군가의 삶을 예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성공법칙』에 멘토의 조건 네 가지가 나옵니다.
1. 해당 분야에서 성과를 이뤄낸 전문가일 것.
2. 타인의 성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 것(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안 됨).
3. 평생 자신과 싸움을 하며 성장하는 사람일 것.
4. 나를 편안하게 두지 않고 한 발 내딛게 만드는 사람일 것.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신이 자신과 싸움을 통해 자신을 이긴 사람이어야 하고 이웃의 발전에 관심이 있어 그 사람도 자신을 이기는 삶을 살아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도 저처럼 책을 통해서도, 혹은 기도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하느님께서 분명 어떤 좋은 일을 하도록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분명 우리 부모 주위에, 혹은 아이들 주위에 놓아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빨리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임무일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0년이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오늘 3가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는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 똥’입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강아지 똥은 민들레 씨를 만나면서 거름이 될 수 있었고, 강아지 똥은 아름다운 꽃이 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 똥, 누구나 외면하는 강아지 똥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는 모두 귀한 존재입니다. 다른 하나는 말로 모건의 ‘무탄트 메시지’입니다. 호주의 원주민들은 자연을 파괴하고, 자원을 낭비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지금의 인류를 돌연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원주민들은 잘 씻지 않아도 냄새가 나지 않고 배설물에서도 악취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잘 씻고 향수를 뿌려도 냄새가 나고 배설물에서도 악취가 났습니다. 호주의 원주민은 이웃과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인간은 돌연변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끝으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습니다. 집 앞에 공중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지금이야 대부분의 집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지만 당시에는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는 집이 많았습니다. 신학생들과 영신수련 피정을 함께하면서 문득 ‘배설물’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에는 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을 냄새난다거나, 더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원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마찬가지로 원죄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이 병들었거나, 죄에 물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모님께 몸을 물려받듯이 교회는 신앙인들에게는 ‘원죄’가 있다고 가르쳐왔습니다. 원죄에 대한 교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유아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아이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된 악한 경향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없애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죄, 악,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그리고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글을 쓴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나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한나가 평생 성전을 떠나지 않고 하느님을 섬긴 까닭은 무엇일까요?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루 남은 2020년을 보내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아침마다 묵상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뉴욕에서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앙인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았다면 행복한 1년이 되었을 겁니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았다면 하느님 나라에 영원히 썩지 않는 보화가 쌓였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새로운 한해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모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아기의 정결례를 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시메온과 더불어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기 예수님을 만난 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고 전합니다.
한나의 경우 남편과 일곱 해를 산 후 과부가 되어 여든 네 살이 되도록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며 살았다고 전합니다. 추측컨대 그녀의 삶은 인간적으로 볼 때 외롭고 고통스러운 날들이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한나는 결국 평생을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한 끝에 성전에서 구세주를 만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는 반드시 그분 안에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는 희망을 바라보게 됩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지금의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하느님께 의지하며 그분 안에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인들은 결국 하느님 안에 참된 구원을 얻게 될 것을 믿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영광이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죽어도 원 없다는 기쁨을 느낍시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과 세상에서 오는 것은 구분해야 됩니다.
한나라는 84세 할머니 끈기 있는 성전 지킴이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예수아기를 볼수 있어 시메온과 함께 세상구원 느끼며 원 없다했지요.
시메온과 한나는 아기예수 만남에 죽어도 원 없다는 깨달음 느꼈어요.
성탄기념일을 맞아 우리도 오늘 죽어도 원 없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세속이 제공하는 온갖 것에 말려들어도 하늘것 좋다고 합시다.
영원세상 살 준비 않으면 세상과 육신 후엔 외롭고 심심해서 미치죠.
가톨릭인은 아기예수님과 얘기나누며 영생 준비하여 원 없이 삽시다.
기다림의 결실, 하느님의 만남이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늙은 나이의 시메온과 한나의 이야기, 그들이 이제는 평안히 눈감게 된 이유이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신 분”(루카2,32), ‘예루살렘을 속량하실 분,(루카2,38)을 아기 예수님 안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인생은 기다림에 대한 결실이다. 그 기다림의 연속성을 통해 하느님을 뵙는 최종적 결실이 성탄이다.
오래 살아야 100년이다. 잠자는 시간 빼고, 요양원과 치매걸린 시간 빼고 정신차려 의미를 담고 사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막연하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늙은 나이가 되도록 하느님의 현존이 되어 오신 이기 예수님을 만난 시메온과 한나처럼 우리의 인생 목표도 하느님을 향해 항구하게 기다리며 기쁜 성탄을 맞이하는 결실이어야 한다.
나도 그분들처럼 성탄하신 아기를 팔에 안아 보는 것, 속량할 아기를 만나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기쁜 성탄은 목표가 된 마음 속 생각을 기다림의 결실로 꺼집어 내는 것이라 여겨진다. “아기 예수님은 나자렛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부터 지혜가 자라나고 충만해져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우리의 목표도 연속성에서 영원성을 간파하도록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 일백년을 살아도 스쳐 지나가는 유한한 목표를 산다면 결실은 무의미하다. 한나는 혼인해 일곱해를 살고 혼자가 되어 팔십사세를 살았다. 열 두 해를 일곱번 살았다. 한나의 생이 갖는 의미는 어려움에도 주님을 향한 항구한 기다림이 지혜를 자라게 하고 오늘의 성탄이란 결실을 맺게 했음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2,40).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나타내는 한나.
-존자 베다-
신비적 의미로 풀면,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녀의 나이도 교회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지내온 세월을 가리키지요. 일곱에 열둘을 곱하면 여든넷이 됩니다. 여기서 일곱은 일곱 날로 표현되는 이 세상의 전 과정을 나타내고, 열둘은 사도들 가르침의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삶의 전 과정을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이라면, 보편 교회든 개별 신자든, 여든네 해 동안 꽉 차게 주님을 섬긴 이로 칭찬받을 만합니다.
한나가 남편과 함께 산 일곱 해는 주님께서 육으로 사신 시간을 나타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간 전체를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주님 위엄의 특별한 속성 때문에, 일곱 해라는 단순한 숫자가 완전함의 표정으로서 그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를 가르치신 때를 나타냅니다. 또한, 한나를 주님의 은총으로 풀이하는 것도 교회의 신비로운 성사들을 확증해 줍니다.
한나는 ‘주님의 얼굴’로 불리는 프누엘의 딸이며 많은 자녀로 축복받은 아세르(신명 33,24 참조) 지파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을 섬기는 삶의 정수를 보여 주십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된 날, 그 자리에 함께했던 한나라는 예언자의 삶에 대해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위안을 맛본 짧은 결혼생활이 끝난 뒤에 그녀는 온 존재와 삶을 하느님께 걸었지요. 자신의 존재를 그분 앞에 두고, 온전히 그분의 소유로 살아간 것입니다.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38)
예언자인 그녀의 역할은 하느님께서 입에 담아 주신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목소리니까요. 이제 직접 눈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본 그녀는 무엇보다 먼저 감사를 잊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삶은 대부분 감사로 채워지게 마련이니, 그녀의 반응은 놀라울 것 없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답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거기에 더하여 직접 눈으로 본 구원을 선포하게 됩니다. 예언에 증언이 보태어진 것이지요. 세상이 아무리 번잡해지고 향락이 일상화되어도 내적 삶을 소중히 가꾸며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한나의 증언은 견고한 희망의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과 같을 겁니다. 함께 듣고 공감하고, 믿고 희망하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훨씬 선명해지니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지요.
제1독서의 말씀은 세상의 욕망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라고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
물론 "세상"이 가리키는 중의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곳으로서의 세상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피조물이 각자의 평화와 충만함을 누리는 장이기에 소중하고 거룩합니다. 동시에 세상은 온갖 욕망과 불의와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장이 되기도 합니다. 요한 서간 저자가 말하는 "세상"의 의미는 어둠의 힘이 장악한 세속을 가리키지요.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쾌락, 만족은 일시적입니다. 겉꾸민 허영과 과시, 눈속임과 위선, 질시와 경쟁, 증오와 기만의 태 안에서는 슬프게도 사랑이 쉽게 유산되어 버리지요. 진실도 선함도 착상할 곳을 찾지 못해 쉬이 유실되고 맙니다. 욕망하는 무언가를 들이면 들일수록 더 공허해지는, 심연의 구렁과 다를 바 없는 곳이 바로 그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 속 한나는 영원히 남는 사랑에 전 존재를 던진 지혜로운 여인의 표상입니다. 그녀는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고, 철저히 하느님만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로 삶의 모든 공간을 채웁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녀를 사로잡았고, 그녀의 사랑에 하느님이 매료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시공 안에 현존하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영성체송)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이미 체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삶에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재산이나 인맥, 권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총에서 우러나는 것이지요. 진정한 행복은 주님의 충만함 안에 녹아들어가 그분 충만함의 일부가 된 영혼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한나처럼 말이지요.
신구약의 접점에서 복음 안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한 여인의 삶이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길 기원합니다. 아기 예수님도 그녀와의 만남을 기뻐하셨을 것이고, 마리아와 요셉도 큰 위안을 받았을 겁니다. 그리하여 각자의 삶에서 조금씩 더 깊이 주님을 섬기는 은총으로 들어가시길 축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한나처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한 벗님을 축복합니다.
<성모 마리아>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탄 팔일 축제 제6일>(2020. 12. 30. 수)(루카 2,36-40)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36-38).”
이 이야기 바로 앞에는 시메온 예언자가 아기 예수님을 보자마자 구세주를 보내주신 하느님을 찬미했고(루카 2,29-32), 예수님과 마리아의 고난을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루카 2,34-35). 한나도 시메온이 한 것과 같은 찬양과 예언을 했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한나의 말을 생략하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시메온이 한 말과 같은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두 예언자가 같은 예언을 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하느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나의 신앙생활 모습에서 바오로 사도가 과부들에 관해서 한 말이 연상됩니다.
“무의탁 과부 곧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된 여자는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대로 사는 과부는 살아 있어도 죽은 몸입니다(1티모 5,5-6).”
“과부 명단에 오를 수 있는 이는 예순 살 이상으로 한 남편의 충실한 아내였고, 선행으로 좋은 평판을 받는 여자여야 합니다. 자녀들을 잘 길러 내고 나그네를 후대하고 성도들의 발을 씻어 주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도와주고 온갖 선행에 몸을 바친 사람이어야 합니다(1티모 5,9-10).”
한나는 과부로서도, 또 신앙인으로서도 모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한나의 삶’을 비교적 자세하게 말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복음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한나의 삶’을 통해서 ‘성모 마리아의 삶’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언자 한나의 삶’ 자체가 ‘성모 마리아의 삶’의 예고편일 수도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고, ‘새로운 성전’으로 오신(요한 2,21) 예수님 곁을 떠나는 일 없이 일생 동안 충실하게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성모 마리아를 암시하는 것과 같은, 또는 성모 마리아를 연상하게 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루카복음 21장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동전 두 닢이 하루 생활비였던 가난한 과부의 모습에서 가난한 과부였던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헌금함에 넣는 모습에서 자신의 인생 전부를 봉헌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루카복음 7장에 나오는 ‘나인’이라는 고을의 과부의 모습에서도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7,12-16)."
죽은 젊은이가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은, 아마도 당신의 죽음을 지켜보시면서 큰 고통을 겪으실 성모 마리아의 심정을 미리 헤아리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라는 말은 “그를 살리심으로써 그 어머니에게 ‘큰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당신의 부활로 성모 마리아가 ‘큰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모든 이에게 큰 기쁨을 주는 사건이지만, 성모 마리아에게는 더욱 큰 기쁨이 되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암시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고서 “이것은 하느님의 기적이다.” 라는 단순한 뜻으로 이 말을 했지만,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다.” 라는 것을 말하려고 이 말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를 어머니에게 맡기셨고, 당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셨습니다. (요한 19,26).
우리 교회는 이 일을, 예수님께서 성모 마리아를 당신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하신 일로, 또 당신의 교회를 성모 마리아의 자녀로 삼으신 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 8,21)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신 분이고, ‘삶 전체’를 봉헌하신 분이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신 분이고, 주님이신 분의 어머니이신 분으로서 전체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에서 성모 마리아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곳은 예수님 승천 후의 교회의 모습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성모 마리아는 교회 공동체의 중심에 계셨고, 아마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또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삶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지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강림 때에도 그 현장에 계셨을 텐데, 일생 동안 겪어야 했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것과 같은 고통이(루카 2,35)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그 열매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성모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기억하여 행하라.
김현 프란치스코 살레사오 신부님
영명 축일을 맞이한 동료에게 “기도 안에서, 미사 안에서 기억합니다.” 하고 문자를 보내던 중 ‘내 기억이 더 오래 효과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양한 기회에 기도를 부탁받기도 하고 기도하겠다는 약속도 하게 됩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따로 메모한 종이를 들고 입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기억만’ 하고 끝내는 인사치레를 많이 했습니다. 그것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어떤 것도 담지 않은 채 그저 간단한 인사치레로, 형식적인 태도로 그친 적이 많았다는 고백입니다. 한나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단식을 했을까, 하루에 기도는 몇 시간씩 했을까 궁금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서 있는 힘껏 사랑하였다.”는 뜻이니까요. 그녀는 기억하여 힘껏 사랑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책임을 하느님께 전가하기 위해서 기도를 이용한다면 그 기도는 창피스러운 속임수에 불과하다.”(루이 에블리) 누군가에게 “기억하겠습니다!” 하며 건네는 인사에 하느님만 아시는 작은 희생을 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강만연
오늘 제1독서 마지막 말씀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즘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많은 연락이 옵니다. 기도를 요청하는 분이 갑자기 많아졌습니다. 수도자가 된다고 하니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가슴이 아픈 사연도 많이 있습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최선을 다해 할 생각입니다. 기도의 요청 중에서 조금은 허탈한 내용도 있습니다. 바로 어쩌면 욕망의 끈을 놓치 못하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나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보시면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간다고 나옵니다. 인간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육의 본성은 그 자체가 욕망에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욕망 자체가 나쁘다고는 말할 수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욕망에 따라 산 삶은 언젠가는 물거품처럼 솟아났다가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인생무상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합니다. 고작 장수한다고 해도 100년 인생입니다. 100년 인생 길다고 생각하시나요? 다윗은 70까지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 평균수명과 견주어보면 상당히 장수했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다 누려본 사람이고 또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생 말년에 자신의 생을 되돌아보니 모든 게 다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삶을 무상한 삶처럼 생각하는 그런 비관주의 생각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제가 묵상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요즘 현대인은 지금 자신이 생을 살면서 사는 존재의 이유도 모르고 또 자신이 그저 사람으로서 태어났으니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인생인 마냥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어쩌면 그들의 영혼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건 신앙의 유무를 불문하고 말입니다. 그럼 신앙이 있다고 해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앙 따로 삶 따로이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된다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이 세상의 삶은 눈에 보이는 삶이지만 우리의 영혼이 가게 되는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확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이라는 말을 한번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우리가 가야 할 영혼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그런 세계를 절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신앙인의 눈으로 그 세계를 볼 수 있을까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내용을 잘 묵상하면 답이 있을 겁니다. 육에서 나오는 욕망을 쫓지 않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신앙의 눈으로 영혼의 세계를 볼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길이 바로 오늘 제1독서 끝에 나오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세상과 세상의 욕망은 다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또 믿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오늘을 사는 진정한 신앙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세상의 욕망을 초월해야만이 그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명품名品 인생을 삽시다. - 이탈의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에 이어 똑같은 강론 제목 ‘명품인생을 삽시다-이탈의 삶-’입니다. 자발적 이탈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시작할 수 있는 명품인생이고 또 이렇게 살아야 행복합니다. 아주 오래 전 써놨던 시가 형님이 살아계실 때 방문했던 기억과 더불어 생각납니다. 형님 방의 푸른 하늘 환히 보이는 창문이 참 좋아 형님에게 말했습니다.
“형님, 창문밖 하늘 풍경이 참 좋습니다.”
“신부님, 쓴 시를 읽고 하늘이 보이도록 정리했지요.”
형님은 제가 쓴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란 시를 읽었던 것입니다. 당시 형님은 ‘사랑의 향기 마을’ 카페에 올려지는 제 강론 글에 ‘무궁화 삼천리’란 필명으로 강론마다 자주 댓글을 다시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방에 있는/TV,그림,사진---/대부분 군더더기/쓸데없는 짐
이보다 더 좋은/임 만드신/창문 밖 하늘 풍경
살아있는 그림/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방 하나만 있어도/부러울 것 없겠네/행복하겠네.”-2005년-
참 행복하고 부요한 사람은 무욕의 이탈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참 부자는 최소한의 소유로 자족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이 지녔어도 끝없는 탐욕의 사람이라면 가난뱅이요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사랑할수록 저절로 행복하고 부요한 이탈의 삶에 명품인생이 됩니다.
바로 어제 복음의 시메온에 이어 오늘 복음의 한나가 그 모범입니다.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한나는 참 부자요 복자福者요 자유인입니다. 하느님만을 섬기며 자발적 봉헌의, 이탈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아기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의 묘사가 한나의 참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하느님만으로 행복했고 만족했던 한나였음을 봅니다. 하느님만이 그의 삶 전부였기에 저절로 이탈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한나의 예를 통해 네가지 귀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1.우리의 사회적 지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무관하다.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는 분이기에 누구나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지닐 수 있다.
2.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가까이 있고자 원한다면, 기도는 우리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3.예수님은 어느 때든, 어느 장소에든 우리 삶에 오실 수 있다.
4.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알게 된다면, 그대로 머물수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 체험을 나눌 수 뿐이 없다.
참으로 한나처럼 깨어 주님만을 섬기며 이탈의 삶을 살 때, 때와 장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제1독서 요한 사도 역시 이탈의 삶을 강조합니다. 세상 것들의 무시가 아니라 세상 것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대로 복음의 한나가 이런 이탈의 삶의 모범입니다. 하느님만을 온전히 사랑하여 섬길 때 저절로 지나는 세상 것들의 집착에서 벗어난 이탈의 행복하고 부요하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바로 영원한 삶의 실현이요 명품인생의 실현입니다.
멀리 밖의 사막을 찾아가지 않아도 삶의 한복판에서 주님을 사랑하여 이런 이탈의 삶을 살아 갈 때 그대로 그 삶의 자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사막의 고독과 침묵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사막 교부들의 말씀도 있듯이 말입니다. 결국은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가 이탈의 열쇠임을 봅니다.
품위있는 명품인생을 위한 삶의 우선순위를- 1.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2.건강, 3.재산(돈)-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삶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 잡을 때 건강이나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점차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끊임없는 자발적 이탈의 삶을 통해 우리 모두 명품인생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요한1,16). 아멘.
다 지나가는 것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세상은 지나간다고 오늘 독서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세상이 우리를 지나가는가요? 독서가 그리 말하지만 실은 우리가 세상을 지나가고 세상은 계속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요? 실제로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세상은 남아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아픈데 다른 이들은 건강한 것이 괜히 야속한 것처럼 나는 죽어가는데 세상은 여전한 것이 야속하고 지어 그런 세상에 분노를 터트리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세상이 지나간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지나간다는 것은 나에게 머물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욕망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니, 지나가게 욕망을 내가 놔야 합니다. 지나가는 욕망을 내가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욕망만큼 허무한 것이 없지요. 욕망은 항상 끝이 허무 아닙니까?
욕망은 지니고 있는 동안은 근심과 걱정뿐이고, 지나고 나면 허무뿐입니다.
욕망과 근심 걱정뿐 아니지요. 이 세상의 모든 기쁨과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이 내게 계속 머물러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으니 참으로 그것 때문에 슬퍼하지만 슬픔도 마찬가지로 내게 계속 머물지 않고 떠나가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니 성녀 대 데레사의 기도 시가 맞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러니 이 시와 새옹지마의 교훈을 따라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방의 한 노인이 소중히 여기던 말을 잃고 슬퍼했는데 그 바람에 준마를 얻게 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지요. 그런데 아들이 그 말을 타다 떨어져 절름발이가 됐는데 절름발이가 된 것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 않게 되었지요. 성한 다른 집 아들들은 다 죽었지만, 아들은 살게 되었다는 얘기지요.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게 다 내버려 두고 오는 것, 잡아야 할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월이 가고, 한 해도 다 갔습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나는 무엇을 잡아야 할까요? 세월이 다 가고 한 생이 끝나는 날에 나는 무엇을 잡아야 할까요?
<기다리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한결같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늘 푸르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밝고 부드럽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뜨겁게 타오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쉼 없이 나아갑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쓰러져도 일어납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반드시 만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연세가 들어 살 만큼 살고 나시면, 무엇을 기대하고 어디에 희망을 두며 살아가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에서 만난 어느 몇몇 천주교 신자들은 은퇴해서 1년 동안은 캠핑카를 사서 전국을 일주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그동안 사느라고 바빠서 충실하지 못했던 주 하느님께 대해 연구하고 집중하고 싶다고들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나라는 예언자이야기가 나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 라고 기록합니다.
요즘 코로나19 감염상황이 심해서 어디 나다니기가 조심스러운 시기입니다. 성당에도 신자분들이 많이 모일 때, 노약자분들은 가급적 오시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미사 시간 이외의 시간에는 성전이 텅빕니다. 그럴 때는 감염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는다면 기도하러 오셔도 될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어쩌면 여태까지 살면서는 얼마나 가졌고, 또 무엇을 가지고 누릴까를 신경쓰고 그 영향권에 살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주 하느님께 집중하고 영으로 일치하여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주님과 기도 중에 순간순간 누리는 기쁨과 평안에 잠기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다른 어느 것을 구하고 찾느라 수고할 필요도 없이, 내 몸과 마음과 정신을 다 바쳐 주님께 침잠하여 그분과의 일치에서 오는 희열과 평화와 안녕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사랑과 진실이 내 안에 자라고 있는가?<루카,2/36-40> 12/3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미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이 30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시기 까지 사람의 성장의 원칙을 따르셨습니다. 건강 정신적 가치관인 지혜< 사랑과 진실> 하느님의 총애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성턴의 기쁨속에 사는 이유와 전례상 우리는 성턴 8부를 지내며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을 경축하고 그 깊은 의미를 되색임하고 우리의 믿음을 다지고 있습니다. 오늘아침 독서기도의 시편을 들으면서 내 마음에 깊이 색여진 말씀은 “사랑과 질실은 우리의 길잡이시다.” “ 진실과 사랑이 그와 함께 있으니 내 이름으로 그의 뿔이 치솟으리라.”
30년이 걸려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복음을 전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도 너이 30이 되어서 사제가 되고 57년간 사제로써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젊어서 튼튼한 몸으로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주님의 지혜를 지니고 살고 있으며 찬미 감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이 사랑이 되사어 이 땅에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데 오늘 이 시간에 제 안에 현존하시며 사랑과 진실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이끄셨습니다. 만일 내 안에 사랑과 진실이 자라고 있지 많으면 제가 전하는 모든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전파의 사명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다만 조건은 우리가 사랑과 진실를 어디서 얻고 성장하는 것인가? 저는 나이 20살 될 때까지 집안서 부모님 밑에 자라고 20에 수도원 들어와서 청원기 지내며 순심학교 다니며 21살 신학교 들어가 3년 동안 라틴어 첧학을 배우고 일년 수련기 동안 수도생활을 익히고 수련중 이름있는 선생신부님 만나 많은 가르킴 중 가장 큰 것은 미사와 생활의 일치였습니다.
덕원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면서 주신 교훈입니다.
어느날 신학생이 찾아와서 불평을 하면서 친구를 비난하는 말을하고 화를 풀지 못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하십니다.‘
“ 학생 오늘 미시에 참례하였습니까? ”
“네”
“ 성체를 모셨습니까? ‘
”네“
”그려면 성체를 모신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체를 모신 사람은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주님이 그런 경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말씀의 깊은 의미는 예수님이 하느님으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였음을 증명하시고자 성체 안에 현존하시고 성체를 모신 사람은 바로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로우시고 일치의 근원이며 사랑의 완성이신데 성체를 모시고도 그저 한 사람처럼 시기 질투 이해 탄산을 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으면 성체를 모신 의미기 있습니까? 이런 말씀하시며 우리는 서로 주님이 세상을 살아가신 것 같이 살아야 하고 그런 의미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가숨 깊이 색이고 살고 있습니다.
그후 신학교에서 신학 사목학 사회학 성서학 등을 사랑과 진실에 관한 것을 배우면서 제 안에 진실과 사랑이 성장하고 사제가 되어서 농촌 사목에 전념하고 하느님 나라의 자유 평화 기쁨의 삶을 살고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그 사목경험과 실천을 깊이 묵상하면서 글을 쓰며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서 전하고 각 교횡에 주님을 전달하듯이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몸이 힘들면 '주님, 이것만 전하고 죽더라도 할수있게 함께 계셔 주세요.' 하고 기도하며 글을 옮깁니다.
모두 진실과 사랑이 주님의 앞잡인 것을 깨닫고 날로 성장하여 하느님의 믿음의 증거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양육하는 모습에 머문다. 항상 뒷걸음치며 예수님을 양육하신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 들이며 그 모습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창이 되도록 하신다. 절대 앞장 서서 예수님을 끌고 가는 양육법은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그런 모습으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은총을 청한다.
어제 오후부터 눈이 왔다. 그렇게 많이는 아니지만 재설작업을 하여야 한다. 오늘은 처음으로 트렉트로 재설 작업을 해볼 작정이다. 동네 길 재설을 다 해 주어야 할 모양이다.
이근상 시몬 신부님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2,36-38)
한나 할머니가 생애의 단 한번 아기 안에서 하느님의 위대하신 손길을 발견하였고, 오직 한번 그걸 증언하였을까? 오히려 그 반대. 할머니는 수 없이 많은 아기들에게서 하느님의 움직임을 감지하였고, 또 그것을 증언하고 증언하였을 터. 주님의 강생이 바로 이 곳, 우리들 속으로 들어온 행위이기에, 주님은 우리를 닮고, 우리들 곁에 서신다. 한나의 손을 거쳐간 숱한 아기들처럼 주님은 거기에 깃들이시어 증언을 받으신다.
믿는 자란 한나처럼 기다리며 끊임없이 증언하는 자다. 그 분을 로또처럼 맞추는 행위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 안에서 하느님의 움직임을 증언하는 자다. 주님은 바로 그 증언 속에서 아무일 아니라는듯 깃들이실 것이니.
젊어서 육적으로만 살았던 사람이 나이든다고 저절로 영적인 사람으로 탈바꿈되지 않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인간의 능력, 오랜 세월 기를 쓰며 쌓아올렸던 허영의 탑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요즘입니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실감하며 살아갑니다.
그간 쓰고 있던 허울좋은 가면이 벗겨지고, 과대포장의 부끄러운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이 시기, 요한 1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요한 1서 2장 16~17절)
사실 세상은 좋은 곳입니다. 하느님의 정성스런 손길로 창조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축복하신 후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창조물들 가운데 으뜸인 인간과 더불어 더 조화롭고 아름답게 보존되고 지속되어야 할 세상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인간 측의 과오와 결핍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도를 넘어서는 인간측의 자만, 통제가 불가능한 인간측의 욕심, 과도한 계발과 남용, 지나친 이기주의로 인해 세상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지나치게 훼손되고 파괴된 세상에 대한 원상복구란 불가능합니다. 차선책이 있다면 인간측의 자제입니다. 그저 육적인 충족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지난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영적인 삶에도 눈길을 돌려야 할 순간입니다.
이런 면에서 한나 예언자의 삶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 표현에 따르면 그녀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복음 2장 36~37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나 예언자는 13세에 혼인해서 7년간 결혼생활을 했으니, 20살에 남편과 사별한 것입니다. 그리고 84세가 되기까지 64년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충실한 신앙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이런 한나 예언자의 깊은 신앙과 충실성에 하느님께서도 크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녀에게 당시로서는 놀랄 정도의 장수(長壽)를 허락했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 구세주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는 은총,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너나할 것 없이 희망합니다. 나이를 먹게 되면 좀 더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꿈꿉니다. 지금은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노년기에 접어들면 좀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좀 더 많이 희생하게 되고,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이 세상을 하직할 순간이 다가오면 좀 더 이타적인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한 걸음 크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아름답고 품위 있는 노인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웬걸! 많은 경우 삶은 우리 의도대로 펼쳐지지 않습니다. 기도나 영적 생활은 습관이 중요한 것이어서 젊은 시절 기도에 맛들이지 않았던 사람이 나이 든다고 저절로 기도의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젊어서 육적으로만 살았던 사람이 연세 든다고 저절로 영적인 사람으로 탈바꿈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남은 날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안하무인으로 살아가시는 분들, 극단적 자기중심주의로 살아가시는 분들, 끝까지 놓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분들, 그래서 정말이지 불행한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들 꿈꾸실 것입니다. 영적이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노년기! 그렇다면 한나 예언자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세상에 푹 빠져 삶을 허비하다가 어느 순간 영적인 삶으로 전환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충만한 영적생활을 추구했고 그 맛을 들였습니다. 그 결과 살아생전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평생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함승수 신부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푸시킨’이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삶이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슬픔이나 분노에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현재’의 삶이 슬프고 괴로울지라도 언젠가 기쁨의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살면, 결국 그 힘든 시간들이 다 나를 지나쳐 지나간 ‘과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충만한 기쁨 속에서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며 그래도 참 소중한 ‘추억’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살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의 삶도 그랬습니다. 그녀의 삶에서 남편과 함께 보낸 알콩달콩한 시간은 7년에 불과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여든 네 살 할머니가 되도록 ‘과부’로서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지요. 당시 유대인들이 15-16세 정도에 혼인했던 것을 생각하면 60년이 넘는 시간을 힘들게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깊은 슬픔과 절망에 사로잡혀 삶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자신이 삶의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 성전에 머무르면서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섬겼습니다.
그런 그녀였기에 세상의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님을 직접 보고 품에 안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충만한 기쁨 속에서 그녀는 그분과 함께 보낸 지난 60년의 시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이렇게 읊조렸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견뎌냈던 그 시간들이 그저 ‘힘들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하느님과 함께한 그 모든 순간들이 참 행복했노라고, 하느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그분의 아드님을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자신의 인생은 충분히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었다고…
한나가 그러했듯, 우리도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누구나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며 그분과 깊은 일치를 이루는 이들만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 곁에 머무르며 기도와 삶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 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요즘은 10년 볼 필요도 없지요. 1년이면 강산이 아니라 도시가 변합니다. 없던 건물이 생겨있고 그렇습니다. 과거 신학교 철학 시간에 배웠던 어느 내용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발을 넣었다 뺀 그 강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물이 흐른다는 것은 계속 변한다는 것이지요. 진리는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에 반한 주장으로 영원 불변한 진리는 분명 존재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독서에서 하느님이라는 영원 불변한 분은 고정시키고 나머지는 변화형으로, 지나가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 생각해보면 세상의 순리겠지요. 그런데 사도의 말을 잘 들어보면 하느님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도 영원히 남는다고 했습니다. 사도는 요한 복음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저 흘러지나가는, 영겁의 시간에서 볼 때 찰나의 한 순간이 아닌, 영원히 우뚝 서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을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주님과 함께 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비록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언제나 뜻을 주님께 두고 주님 뜻대로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 위에서도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잘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받아들임의 신비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
팔일 동안 우리는 성탄의 신비를 경축하고 있습니다. 이를 ‘성탄 팔일 축제’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성탄 팔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8일 동안 매일이 성탄이라는 말입니다. 성탄의 신비는 12월 25일 단 하루만으로는 경축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성탄의 빛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6-17).
요한 사도에게 세상은 세속이란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는 상관 없이 이기심과 욕심에만 눈이 멀어 그것만 쫓아가는 인간 세상을 말합니다. 사라질 세상에 매어 사라질 것에만 얽매어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말합니다.
빛으로 오신 아기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열린 눈으로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받아들임의 신비입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죽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사랑 때문에 우리 인간의 허약함과 한계를 온전히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의 허약함과 한계를 받아드립니다.
“하느님, 당신 뜻이 아기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신 것처럼,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음이
깊어갈수록
이야기도
깊어진다.
우리를 살리는
구원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이다.
성탄은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예수님께로
돌아서게 한다.
우리를 위하여
내려오신
내려옴의
이야기이다.
내려옴이
믿음이다.
믿음을
배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으로
믿음을
이야기하신다.
이야기는
말씀이 되고
믿음은
속량이 된다.
나와 너를
변화시키는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구원이 필요한
우리들이다.
나누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의
이야기이다.
성탄의
이야기는
우리를 살리는
이야기이다.
우리 마음은
성탄의 이야기를
품고 살아야 한다.
마음을 살리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