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충성스러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5,5-12.17-18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5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7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8 아브람이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9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잘라,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11 맹금들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아냈다.
12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18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3,17―4,1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8ㄴ-36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땅을 후손에게 준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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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신다. 아브람에게는 가능하게 보이지 않는 약속이었지만 그는 하느님을 믿었다. 하느님께서는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심으로써 그와 장엄하게 계약을 맺으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현세적인 탐욕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며, 우리의 비천한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제2독서).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신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당신께서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속에서도 제자들은 그분의 영광을 기억해야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을 말합니다. 이 떠나심은 ‘영광’을 위한 ‘넘어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고난을 겪고, 예루살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9,22 참조). 영광 가운데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는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영광 가운데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만 자신이 본 그 영광이 계속되기만을 바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사명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함께 있었던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수난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두고 떠났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포기하시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사명의 신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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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서는 거룩한 변모 사건에 앞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9,18-21 참조), 수난과 부활에 관한 첫 번째 예고(9,22 참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방법(9,23-27 참조)을 전해 줍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순서는 마르코 복음과 마태오 복음의 전개 구조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질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고를 통하여 당신의 정체를 알려 주시려고 하였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고난을 겪는 메시아의 정체가 제자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변모 사건을 통하여 또다시 제자들에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는 동안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입고 있던 옷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9,29 참조). 예수님께서는 변모 사건으로 당신의 영광, 곧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드러날 순간을 미리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변모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만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질 고통스러운 죽음까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9,31)은 예수님의 죽음과 승천을 통하여 아버지께 가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변모로 드러난 예수님의 신분을 입증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영광이 우리가 이미 누리거나 앞으로 누리게 될 영광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영광의 빛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자 하십니다(필리 3,21 참조).(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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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동에서는 임금들이 서로 계약을 맺을 때 희생 제물을 가져와 반으로 자른 뒤 계약 조건을 말하며 잘라진 제물 사이로 지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둘 가운데 누구라도 계약을 어기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른 짐승 사이를 지나가시며,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점이 발견됩니다. 계약 당사자인 아브라함은 잘라진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잘린 짐승 사이를 지나가시면서 계약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보니 창세기 15장은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일방적인 약속, 곧 하느님의 언약에 관한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시는 것도 아브라함이 청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 선택하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계약에 당신 스스로를 옭아매시는 하느님. 여기서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마지막까지 책임지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주님께서 변모하시면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실 때, 바로 당신의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당신이 바로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제물이며, 당신의 피로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지리라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 그분의 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이루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충실하심 덕분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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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세 제자가 보았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이 기다림을 더욱 간절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가리켜 예수님의 ‘엑소도스’라고 말합니다. 탈출기의 그리스어 제목이 ‘엑소도스’이지요. 우리말 번역에서 전에는 출애굽기라고 했었지만, 이집트를 떠난 한 번의 사건만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그리고 인간의 삶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탈출을 포함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 『성경』에서는 탈출기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바로 예수님의 이 ‘엑소도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분의 떠나심, 이 세상에서 벗어나심을 가리키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듯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 탈출을 통하여 억압에서 벗어나고 해방되어 하느님 백성으로서 본모습을 온전히 누리며 살게 되었듯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실 예수님께서는 그 ‘엑소도스’를 통하여 당신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감추어져 있던 당신의 본모습을, 당신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통하여 제자들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시려고 미래의 영광을 잠시 미리 보여 주신 것이지요. 우리가 하늘의 시민이 되어 그 모습을 뵙게 될 때까지, 우리는 제자들이 산에서 보았던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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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충격 요법입니다. 놀란 베드로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산을 내려오던 다른 제자들 역시 말이 없습니다. 잠시 혼이 나갔던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예감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방황과 옛 직업으로 돌아갈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그대로 두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핵심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잊지 못할 충격’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늘을 기억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배려이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체험은 있습니다. 인생에서 낙담하지 말라고 그분께서 개입하신 ‘사건들’입니다. 그것을 찾아내어 묵상하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았는지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사건은 분명 있습니다. 우연히 마무리된 것이 아닙니다. 은총의 개입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드러내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은총은 예고 없이 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시기에, 필요하다 여기시면 언제든 주시기 때문입니다. 올해 사순 시기에도 우리가 겪는 사건마다 은총의 개입은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그분의 뜻을 먼저 헤아려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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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따로 데리고 산으로 오르시어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 이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때 구름 속에서 예수님이 바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을 해 주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해 주십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제자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이유는 제자들을 두렵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부활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제 얼마 뒤에 제자들은 스승을 잃고서 스승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자신들도 걸어야 할 운명에 놓일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나약한 제자들은 그러한 십자가의 길에서 좌절감을 느끼고 중도에 포기하려는 유혹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때 당신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이 기억할 수 있게 배려하심으로써, 제자들이 믿음과 희망으로 자신들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실로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신지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신부님! 이런 책도 읽으세요?”
가톨릭 신부이니 종교 서적만 읽는 줄 아셨나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다양한 책을 읽습니다. 시, 소설, 에세이, 철학, 정치사회, 종교, 예술, 과학, 역사 등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면 책을 사서 읽습니다. 요즘에는 아이들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어린이, 청소년 책도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만큼 저의 시야를 넓혀준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이 세상이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전에는 저와 맞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읽으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있었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는 지인이 중병에 걸려 오랜 시간 병상에 있었습니다. 사실 이분은 열려 있는 분이었습니다. 비난보다는 새로운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변하셨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셨고, 사람들에게 화를 낼 때가 많아졌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면서 마음이 닫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 대해 궁금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열린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다양한 활동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활동에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넘쳐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모습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을 테니 여기에서 지내자고 말합니다. 워낙 힘든 전교 여행 중이었으니 이런 제안을 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닫힌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이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가질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 안에 갇혀 사는 닫힌 마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내 뒤틀리고 초라한 손은 축복이었다(모데카이 브라운).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단 가운데 핵심급이라고 할수 있는 제자 세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정상에 도달한 제자들은 잠시후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스승님의 얼굴과 분위기가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 거룩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움의 시작일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전설로만 여겨왔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장차 이루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핵심 제자들에게 살짝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만 살짝 천국 문을 열어 보여준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황홀경에 도취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과 더불어, 이 좋은 곳에서 저 위대하신 인물들과 함께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아귀다툼의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베드로의 제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해서 복음사가들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놀라서 반쯤 얼이 빠진 제자들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서들 일어나거라.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황홀한 산 위 풍경을 뒤로한 채, 다시금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수난을 향한 여행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리석은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어찌 그리도 우리들의 생각과 흡사한지 놀랄 지경입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부족한 존재입니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너무나 게으르고, 잠시 편안하기만 하면 그냥 그곳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직 멀고도 멉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 십자가와 원수로 살게 될 것 입니다.(김승훈 신부,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참조)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 “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는 없는데, 한국에 있는 주거 방식이 있습니다. ‘전세(傳貰)’ 제도입니다. 임대인은 일정 금액을 지급하고 임차인의 주택을 계약기간 동안 사용하는 제도입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임대인은 임차인의 결정에 따라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계약기간이 끝났을 때 임차인이 전세 금액을 올리면 임대인은 올린 금액을 더 지급하고 재계약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내 집 마련’은 서민들에게는 ‘꿈’과 같았습니다. 제 기억에 어린 날 이사를 자주 가야 했습니다. ‘쌀가게, 미진이네, 담배 가게, 재웅이네, 쌍둥이네, 할머니 집’까지 6번을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6학년이 될 무렵 비로소 더 이상 이사 가지 않아도 되는 집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주인집 아이들의 눈치를 보았던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릴 때, 매주 ‘주택복권 추첨’이 있었습니다. 1등에 당첨되면 주택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당첨금이 지급되었습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2년 후면 설립 50주년이 됩니다. 지금 성당이 3번째 성당입니다. 첫 번째 성당은 ‘다운타운’에 있었다고 해서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독일인 이민 공동체가 세운 성당인데 독일인 이민이 줄면서 한인 공동체가 다운타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고 합니다. 다운타운 성당이 좁고, 주차장이 협소하여서 교우들은 더 넓고 큰 성당을 원했습니다. 다운타운 성당에서 지내면서 교우들은 지금의 자리에 성전 대지를 마련했습니다. 새로운 성전을 세우기 전에 임시로 옮겨간 성당이 있었습니다. 창고 건물이었기에 교우들은 그 성전을 ‘창고 성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새로 마련한 땅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고, 지금의 성전 위치가 달라스 중심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이민 오는 분들이 북쪽에 세워지는 새로운 도시로 오기에, 북쪽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번의 진통 끝에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교우들의 땀과 눈물로 세워진 성전입니다. 2017년 3월에 새 성전이 완공되었고, 축성식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8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하느님께 2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땅의 축복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식의 축복입니다. 어렵게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것도 큰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40년 만에 아름다운 성전을 세우고 축성하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사는 가족들의 삶입니다. 넓고 큰 집에 살면서도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집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없습니다. 6번이나 옮겨 다니면서 이사를 할지라도 그 집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 신축된 아름다운 성당에 있으면서도 공동체에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성당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수 없습니다. 다운타운에서 힘들게 미사를 봉헌했어도, 창고에서 공동체를 이루었어도 그 성당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 3개를 만들어서 함께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해석을 잘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한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종교는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삶의 길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삶을 해석하고, 삶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전과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성전과 공동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당신과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살리시는 당신을 따라
살고파 나선 길 위에서
살리시기 위해서
반드시 죽으셔야 한다는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당신의 말씀에
코앞에 닥친
당신의 죽음보다
당신과 함께 한다면
반드시 맞닥뜨려야하는
아직은 뿌연 나의 죽음이
오히려 더욱 쓰라리게
가슴을 파고들어
살려면 떠나야 하고
따르면 죽어야 하는
참담한 갈림길에서
느닷없이 곁에 계신
빛나는 당신을
살아있는 당신을
영광스러운 당신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악착같이 움켜쥐어
당신과 더불어
빛나는 나를
살아있는 나를
영광스러운 나를
그려보는 꿈은 이내
온데간데없이 부서지고
끝내 길을 가시려는 당신과
갈지 말지 두려움에 머뭇거리는 내가
날것 그대로 마주한 순간에
생생하게 듣습니다
무른 믿음을 다지는 하느님의 소리를
바랜 희망을 돋우는 하느님의 소리를
식은 사랑을 지피는 하느님의 소리를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당신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듣고 싶지 않아도
당신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따를 수 없어도
따르고 싶지 않아도
당신을 오롯이 따르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처럼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가
당신과 함께 사흘 만에 되살아나게 하소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럽게 빛나는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지난 사순 제1주일 복음이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면 오늘 사순 제2주일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를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참된 변화를 함께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곧 다가오게 될 예수님 부활의 예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감당하셔야 할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영광을 가져다줄 것인가에 대해서 당신께서 미리 우리에게 보여주신 표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소니 멜로라는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는 세계를 변화시키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중년이 되어서는 내 이웃을 변화시키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70세가 된 후 저는 오직 하나 '하느님,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이 바뀌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곧 국가와 사회. 정치 경제 등등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그 모든 것이 정말 제대로 변화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그 기도를 들으시고 분명히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정작 우리는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 예수님과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자기 방식과 자기 스타일, 자기 성격, 등등 그 모든 자신의 것을 고집하면서 참된 변화를 거부하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오늘 주님의 변모처럼 바로 우리 자신의 변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가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시기를 통해서 주님 안에서 참된 변화의 시간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모든 인간적인 욕심의 언어들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되면서 주님과 함께 참된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제가 처음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동료 중의 한 분이 저를 데리고 신학교 뒷산인 낙산을 돌며 이 나무가 느티나무고 저 나무가 무슨 나무고…… 나무 이름에서부터 자연의 섭리까지 도시에서 자라난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비단 저에게만 친절하게 해준 것이 아니라, 그 신부님은 청소에서부터 모든 동기 신학생의 각종 행사와 일의 뒤처리를 도맡아 해주었습니다. 똑같이 주어진 빠듯한 신학원 생활 속에서도 그 신부님은 남몰래 그리고 남들이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타나는 데 반해, 그분은 미리 나가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 준비해 주었고, 맨 마지막까지 남아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동기들끼리 무슨 회합을 해도 그 신부님이 한 마디를 하면 그것이 그 모임과 그 주제의 결론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신부님이 책임지고 마무리 하기 때문입니다.
그 신부님은 남보다 잘난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더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물론 훤칠한 키에 잘 생기고 노래도 잘하지만, 그보다는 변하지 않고 확실하게 끝마무리를 해주는 것이 동료들의 신임을 얻은 탓이었습니다. 가끔 살펴보면, 너도나도 좋은 안을 내세울 수는 있지만, 꼭 그 안대로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요, 그 안들이 모두 다 실현 가능한 것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그 안을 제시한 사람조차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기면 자기가 제안한 안 대로 실현하지 않는 경우조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신부님은 말없이 꾸준히 끝까지 마무리 지어주었기에, 동료 중에 그 누구도 더 이상의 말을 할 필요도 없었고, 딴소리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분을 먼저 데려가신다고, 그분은 참으로 아쉽게도 일찍이 주님께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는 하늘에서 선택한 아들임과 동시에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31절)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하실 것이고, 또 스스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더욱 환하게 빛나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28-29절)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나서 한 생을 살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여러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가고, 어떤 이는 여러 사람의 미움을 받고 돌아갑니다. 여러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가려면 여러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함께 해줄 때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생애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변한 모습을 본 제자 베드로는 엉겹결에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33절)
이렇게 자신의 이득과 편함을 위해 자기 일생과 일생에서 자기에게 닥쳐온 기회를 사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존경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시샘과 원망마저 받게 됩니다. 사람들을 눌러 이기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잘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쥐어짜며 자기 것을 늘리는 사람은 도망자가 되고, 스스로도 추하게 인생을 마감합니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한탄하면서, 심지어는 남들을 원망하면서까지 불만족스럽게 떠나게 됩니다.
보다 낫고 좋은 미래를 위해 너도나도 노력합니다. 그런데 서로가 그 좋은 미래에 자신이 얻을 혜택만 생각하고, 그 좋은 미래를 이루기 위해 오늘 함께 참여하여 양보하고 희생하지 않는 한, 좋은 미래는 다가오기 힘들어 보입니다. 혹자는 모두 다 귀한 인생인데, 어느 누구 하나의 희생을 요구하지 말고, 다 같이 상생의 길을 걷자고도 합니다. 좋은 말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같이 어느 한 사람의 희생이 요구되는 시대와 처지가 다시 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한 부류나 어느 한 세대에게만 좋은 열매가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열매, 곧 공동선을 얻을 수 있는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관련자들의 이해관계 속의 야합이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의 공감대를 가져올 수 있는 좋은 안과 기획이 마련되고, 다 함께 자신들이 추구하는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실현 의지와 헌신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좋은 미래가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힘을 가지고 있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자기를 따르라고 하거나 자신의 생각만이 좋은 결정이라고 여기지 말고, 동시대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공감대와 동의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위한 미래를 함께 건설해 나갈 수 있도록 참여케 하며, 우리 스스로 그 일을 위하여 개인적인 친분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인류 사회의 공동선인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닮아 변화되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려는 예수님의 주윗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
사도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립 3,21)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우리 인생길을 밝혀주고 인도해 주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의 생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기로 합시다. 그래서 마지막 날 웃으면서 주님께 돌아가기로 합시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느님 참 모습을 보여주신 이야기<루카9/28-36>3/16. .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그럴 뜻한 이야기를 하면서 믿음을 가지게 하지만 모두가 하느님의 현존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신앙교육를 하다보면 하느님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믿으며 어떤 이치를 듣고 믿음을 지니고 막연하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몇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신 주님의 현손형의 이야기는 지나가는 현성으로만 알고 자나갑니다. 주님만 당신의 보습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아 까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시며 죽은 다음 사람의 참 모습 까지 보여주셨습니다.
저도 어떤 시기 하느님 참 모습을 모고야 믿고 희망을 가지고 사랑하겠다고 원하고 피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피정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려야 볼수있다고 해서 하루에 세값씩 피우던 담배를 끊고 이틀후 아침에 일어나 겨울을 보다 하느님 모습같은 형상을 보면서 내가 하느님 이다 하시기에 자세이 보니 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저것은 나 자신이지 하느님 아니 잔야요. 하니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보라 하시어 창세기를 보다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 내가 너를 만들어 낼 때 내 모습으로 만들었다.” 하는 구절을 보고 깨우치며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습니다.
그후 저는 참 회심을 하며 죄를 뉘우치며 늘 주님 보고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 아니시면 나는 한시도 살아있지 못함을 알고 여기 내안에 하느님 거처를 마련하고 살고 있습니다. 산소를 호흡하며 감사 찬미 들이고 태양의 힘을 받으며 살아있고 밥상에 오라온 음식은 땅에서 나오고 한모금의 물도 땅이 없으면 마시지 못함을 깨우치며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저는 주님과 함께 살고 있으며 오늘 형성용을 묵상 하며 주님 모세 엘리야 같은 모양으로 변모하신 현상은 보면서 저도 죽은 자음 같은 모양으로 빛나고 찰라한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겨울을 보면서 내 모습을 하느님 모습으로 보게 됨을 진 선 미를 따라 사는 시간이며 저는 상담 할 때 찌프린 얼글을 하고 들어온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대가 얼굴이 빛나는 현상을 보면서 제 말과 응답안에 하느님 보고 느끼는 현상을 보면서 더 열정적으로 이야기 나누다 보면 문제를 풀고 마음이 평화로워 졌습니다하고 안수받고 떠나는 사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아주싑게 알듣고 깨우치는 사람도 있고 두시간 후에야 알듣는 사람도 있지만 하느님 현존 안에 대부분은 참으로 잘 왔다고 하며 평화를 안고 돌아가는 뒷모습은 하느님 모습을 저는 보고 감사합니다. 묵상 글을 힘들어도 놓치 못하는 이유는 지속적으로 제가 사는 믿음을 전해주기 위함입니다.
제글을 보시는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자기 안에 하느님 살아 움직이고 계심을 잊지 말고 주님 보고 느끼며 설기를 기도합니다. 창조된 모든 것 안에 주님 계시고 사랑 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행복하세요.
김준수 신부님
“예수님과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9,29)
신학생 시절 감명 깊게 읽은 어른 동화책이 있습니다. ‘트리나 포올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동화입니다. 그 내용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모하는 과정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책의 제목에서 느끼는 것처럼 한 애벌레의 변모로 이 세상의 많은 꽃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 존재의 변모가 다른 모든 존재에게 희망이 된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애벌레가 나비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자기의 겉모습이 죽어 없어질 때만이 자기의 참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전 베트남에 살 때 시청한 드라마 「내 딸 서영이」란 드라마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때부터 ‘이보영’이란 배우를 좋아했습니다. 서영이는 물론 서영이 아버지 그리고 서영이 남편 ‘우재’, 시아버지인 ‘강기범’ 등 여러 사람의 변화에 초점이 있습니다.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 없는 자기 자신 하지만 변화를 사랑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결국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때 변화는 일어난다는 메시지를 표현한 드라마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브라함도 하느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모든 신앙인의 선조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15,5),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들에게 준다.”(15,18) 그런데 많은 후손을 얻기 위해선 자기의 외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했고, 약속한 땅을 얻기 위해서는 고향 칼데아의 우르를 떠나 나그네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의 생전에는 많은 후손도 없었고, 많은 땅도 없었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눈에 보이는 축복이 없어도 끝까지 믿은 신앙이 모두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거룩한 변모를 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그분은 영광에 싸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35) 하지만 하느님께서 선택한 아들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목숨마저 바쳤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이 본 영광된 모습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게 더 놀랍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거쳐야 부활의 희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변화하려고 할 때는 아픔이 따릅니다.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해야 하는 아픔, 자기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바치고 고향 땅을 떠나야 하는 아픔, 자기의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 바쳐야 하는 아픔이 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픔을 싫어하고 베드로처럼 주어진 현실에 안주해 버리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9,33) 이 말은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그냥 머물러 살자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에 머물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영광에 싸여 살자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그만 겁이 났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진정한 의미는 수난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변화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자기를 포기하는 아픔을 받아들이십시오. 자신의 상처를 놓아버리십시오.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면 그 끝이 멸망이지만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하면 그 끝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하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3,20.21)
불가능함이 없으면서도 늘 자기의 능력과 힘을 발휘하지 않으셨던 주님께서 왜 이렇게 느닷없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내다보셨습니다. 제자들의 절망과 방황도 내다보셨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당신의 천상 모습을 미리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후에 당신이 수난당하고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체험을 떠올리며 의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처럼 생명의 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변모 사건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고자 했던 위안과 격려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변모의 순간은 한순간이었지만, 제자들은 영원을 목격하고 체험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스승에 대한 믿음이 더 굳건해졌고,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체험이 없었을까요. 우리에게는 그분의 변모 사건이 없었을까요. 신앙 안에서 낙심하지 말라고 그분께서 개입해 오신 사건은 없었을까요. 이것을 찾아내어 묵상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고통과 역경 속에 놓이게 되면 좋았던 순간, 행복했던 것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수난의 순간이 오자 스승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버렸습니다. 변모 사건의 기억도 소용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주님께서 다시 찾아가셨기에 제자들은 사도로 바뀔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영세 후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신자가 되기 전에도 그분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진정한 신자는 이러한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잊어버리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잊지 않기에 감사할 수 있고 그래야 신앙은 힘이 됩니다. 누구에게나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은 있기 마련입니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십시오.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많았던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사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마무리되었습니까. 우연인 듯 느껴져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역경을 만나 기도했는데 역경이 끝난 뒤에는 우연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입니까. 너무 쉽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현실적인 유혹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반드시 은혜로운 기억이 있습니다. 고통으로 힘들었지만, 지난 다음 은혜와 감사로 충만하고 마감된 사건들 말입니다. 주님의 개입 없이 가능했었을까요. 신앙 안에서 힘을 내라고, 희망으로 견디어 내라고 주님은 변모하셨고, 이 놀라운 체험으로 그분께서 가신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오도록 베푸신 은총이 예수님의 변모 사건입니다. 은총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옵니다. 평소의 작은 기도가, 작은 선행이 결정적 순간에 은총이 다가오게 하는 겁니다. 그분께서 눈길 한 번만 주셔도 우리의 삶은 놀랍게도 은총으로 넘쳐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 보여 준 사랑의 계시이며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가끔씩 부활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작정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부분이 부활해야 할지 생각하며 사순절을 보내도록 합시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바꿔주시어 현재에 만족하여 안주하지 않,고 당신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있도록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처럼 저희 또한 기꺼이 변화의 고통을 받아들여 당신 모습 닮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의 ‘차이’
김희경 성심 수녀님
베드로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하고 말을 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구름이 일더니 곧 그들을 덮어버립니다. 구름에 덮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베드로는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구름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분명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모는 절에 다니시다 늘그막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파킨슨병을 오래 앓으셨는데 더 늦기 전에 세례를 받고 싶다고 하시면서요. 그런데 언젠가 잔치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척 오라버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다니던 절도 그만두고 성당에 다녔는데 아직까지 낫지 못하고 그렇게 아프냐?” 이모는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옆에 있던 저는 너무 당황했었는데 이모는 오히려 담담하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오라버니,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하느님을 믿었는데도 아직도 아프다’와 ‘하느님 덕분에 아직까지 살아있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구름에 덮인 베드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하느님을 목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상황은 변한 것이 없다 해도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선택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기도의 힘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행하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사순 시기는 절제하고 극기하느라 괜히 배고프고 지칠 수도 있지만, 더 가볍고 더 단순하게 ‘하느님만’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조금 덜 먹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선을 베풀고, 즐기는 것들을 참는 시간에 조금 더 기도할 수 있습니다.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의 ‘차이’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은혜로운 사순 시기, 이 차이를 깨닫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회와 회개의 계절
키엣 대주교님
사순절은 참회와 회개의 계절입니다.
회개는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영혼을 새롭게 하려면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반적인 사건에 대해서 종종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빌라도가 신전에서 유대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해 군중들은 그것을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그를 정치적으로 벌을 주기를 바랬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비록 당신이 부당한 정치적인 죄명으로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비난하지 않으셨고 빌라도 총독을 판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치적인 관점이 아닌 종교적인 관점으로 해결할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사건을 여론화하기 전에 먼저 참회와 회개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성공은 도덕적인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이고, 재난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는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재난의 피해자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가 있기 때문에 참변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그 참변을 면한 사람들은 죄가 없다는 증거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 또한 죄인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보다 더 참혹하게 멸망할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을 심판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심판해야 한다. 판결을 내려야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기 전에 자신에게 먼저 판결을 내려야 한다.”
이처럼 먼저 회개하며 자신을 판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행동이, 나의 말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상이 아닌 현실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합니다. 하늘과 바다를 막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우선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개조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집에 꽃을 가꾼다면 세계는 아름다운 정원이 될 것입니다” 자신을 바꾸는 것이 바로 세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타인이나 사건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판단하여 자신의 실체를 알고 부족한 자신부터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시작입니다.
주님, 저희 영혼을 새롭게 하도록 도와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와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2. 나의 삶에서 행운과 불행 어떤 것이 더 많았습니까? 왜 나에게 불행이 닥쳤다고 생각합니까?
3. 사회와 가정을 바꾸기 전에 나 자신부터 바꿔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에 내가 바꿔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타볼산에 오르는 법
전삼요 요셉 신부님
우리는 모두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뵈옵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딱 맡기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표징’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 얼굴을 뵈옵자고 하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하십니다.
저도 사제가 되라고 불러주실 때, “그럼 먼저 당신 얼굴을 보여주세요~!”라고 청했습니다. 그게 정말 성모님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성모상에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셔도 저는 “내가 술을 마셔서 헛것을 봤지!”라고 생각해버렸습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마음은 순종하고 싶지 않은데 그 핑계를 하느님께 대는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하느님 탓만 하는 것입니다. 복권은 사지 않고 복권에 당첨되면 믿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나를 타볼산 꼭대기까지 데려다줄 이를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시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김흥순 자매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장이 유착된 상태여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다 게워내며 걷지도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명한 병원엔 다 다녀봤지만 수술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진단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2~3년, 길면 5년은 더 살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수술이 두려워서인지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설득하자 자매는 자신들을 위해 고생하는 수녀들 인생이 참 딱하다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은 딱한 수녀 말 한 번만 들어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대세를 받고 수술도 받아보겠다고 했습니다.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는 “나는 무조건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설 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인자한 모습으로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의사가 자신을 분명히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그렇게 수술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수술받을 때 자기 발 쪽에 서 계셨던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수술실에는 모두 청색 가운을 입게 되어 있어서 흰색 가운 입은 의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매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였습니다. 두 달 후 교리를 받고 정식 세례를 받았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을 때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짐을 느꼈고 걷지도 못했던 그 자매는 기쁨에 취해 병실을 두 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에 들어선 자매는 감실 쪽을 보더니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저를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기적적으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으며 퇴원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수녀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잘 사신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이영숙 베드로 수녀는 예수님과 같이 말을 듣기만 하면 타볼산에 오를 수 있게 하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였습니다. 파견된 자의 특징은 사랑을 위해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파견된 자는 마치 아이에게 엄마와 같습니다. 엄마를 믿지 못하면 아빠는 자동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엄마를 파견한 아빠의 사랑은 더더욱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하느님 신성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고생은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명과 힘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는 이들은 반드시 주님의 얼굴을 뵐 수밖에 없습니다. 별을 따라오다 보면 구유의 메시아를 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읽게 된 것이, 그 책을 쓴 ‘마리아 발토르타’란 분을 보면서였습니다. ‘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는 분이 살아생전에 영광도 보지 못했는데 수만 페이지에 해당하는 광대한 예수님의 생애를 썼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사도들의 삶에 저도 순종하였고 그렇게 “다 주시는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예수님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고생하는 새로운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말을 듣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분명 타볼산에 있게 될 것이고 그 가운데서 모세의 말씀도 듣고 엘리야의 은총도 받으며 밝게 빛나는 하느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별을 존중하고 공경하지 않는다면 구유의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변모의 여정 - “파스카의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시편27,9ㄱㄴ)
사순시기 제1주일은 언제나 주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일화가 나오고, 제2주일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사건이 소개됩니다. 수평의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이어 수직의 산상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체험입니다. 산은 언제나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변모 사건에 앞서 바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더불어 당신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시고,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최측근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토록 하시니 참 놀랍고 고마운 선물입니다.
주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 나야 한다.”
이어 당신을 어떻게 따를 것인지 확실한 지침을 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을 따르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타당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나를 따라야 한다.”
바로 이런 어둡고 무거운 경직된 상황에 이어 주님은 다소 긴장되었을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체험토록 하십니다. 이 말씀이 있은 후 여드레쯤 되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순시기는 물론 삶의 여정에 참 좋은 세가지 가르침을 배웁니다.
첫째, “기도하라!”
기도가 답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주님의 변모사건을 가능하게 한 것도 기도였습니다. 사순시기 어느때 보다도 기도와 회개의 시기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바오로가 개탄하는 세인들의 타락한 삶이 더욱 우리의 기도를 부추깁니다.
“내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이런 세속적 육적 삶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복음 첫 대목부터 ‘기도’란 말마디가 나오고 기도의 결과 주님의 변모 신비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바로 기도와 더불어 발생한 주님의 변모 사건이요 여기서 등장한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입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해줍니다. 깊은 기도중에 시공을 초월하여 두분의 자문을 받으며 친교를 나누니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깊은 지 깨닫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람 역시 주님을 만나 축복말씀을 들었으니 이 또한 깊은 기도중에 일어난 신비한 사건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기도중 이런 신비축복체험은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에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초연하라!”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중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베드로의 호의였을 수도 있지만 이는 분명 성급한 이기적 집착이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은연중 본색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신비체험은 독점하여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잠정적 삶의 여정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또 여기는 궁극의 머물 안식처나 정주처도 아니고 삶의 제자리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정말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흥분했음이 분명합니다. 십자가의 도상중에 있는 순례자의 삶임을 잊은 것입니다.
셋째, “순종하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의 집착을 교정하는 하느님의 기민한 개입이 뒤따릅니다. 집착하지 말고 떠나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중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을 때,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그만 제자리로 내려 가 다시 십자가의 길을, 파스카의 삶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나를 비추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현존이요 빛이자 생명이요 영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인도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사순시기 광야여정 우리가 믿고 순종하며 따를 것은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주님의 세 제자들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체험은 물론 주님의 이 말씀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며 파스카의 여정중에 지칠줄 모르는 삶의 원동력이 됐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복된 제자들이요 이제 예전의 세 제자들이 아닙니다. 다음 시편 화답송은 그대로 세 제자는 물론 우리의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의 거룩한 신비스러운 변모를 체험한 이 세 제자들은 바오로의 다음 고백에 이심전심 공감했을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신선한 감동과 더불어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용기백배하여,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하늘의 시민으로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흡사 오늘 주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매일이 주님의 변모축일입니다. 주님의 변모는 우리의 변모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주님의 변모를 체험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시면서, 주님의 몸으로 변모되어가는 ‘변모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을 제 말씀으로 삼아 여러분 모두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제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4,1). 아멘.
조윤호 윤호요셉 신부님(봉담 본당 주임)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그의 후손이 셀 수 없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여겨 그와 계약을 맺고 후손들에게 땅을 주실 것을 보증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믿음 안에서 본보기가 되라고 권고하며, 하늘의 시민권을 얻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합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를 닮아 변화될 것이며, 주님을 기다리며 굳건히 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중에 변모하시어 얼굴이 빛나고 옷이 눈부시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실 일에 관해 이야기하자 바로 그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본문들은 하느님의 약속과 변모, 그리고 신앙인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바오로는 신앙이 하느님의 영광을 향한 길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예고하며, 우리도 믿음으로 변화될 것을 가리킵니다.
“회개”
윤대건 대건 안드레아님(신갈 본당 보좌)
오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변모를 통해 그분의 영광을 목격합니다. 또한,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함께 목격하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룩하실 일을 듣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룩하실 일은 ‘구원을 위해 세상을 떠나심’이었습니다. 영광에 싸여 모습을 드러내신 그리스도께서는 고통과 수난을 동반한 새 파스카를 언급하십니다. ‘세상을 떠나실’에서 ‘떠나다’는 탈출을 의미하는 희랍어 'εξοδον'이 사용되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탈출시키시어 자유를 선사하신 하느님은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고통과 고난에 참여하시어 새 파스카를 세우셨고 인류와 새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는 사순 시기에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을 듣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격했고 새롭게 맺어질 새 계약과 새 파스카를 듣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인간과 유대하시고, 그로인해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심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겪으실 고통 뒤에 찾아올 영광을 미리 목격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훗날 그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영광은 목격에 그쳤지만 신약에서는 참여로 확장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하지만 누가 선뜻 고통이 있는 길을 선택하고 그 고통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할 수 있을까요? “성장통이다.”라는 생각으로 고통을 참기만 하고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그저 미련하게 고통을 참고 견디어내는 것을 바라실까요?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참고 견디어내라, 고통을 받으라', 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을 받고 견뎌라.'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라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죄와 고통이 시작된 이유는 첫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그 죄를 씻어내고자 고통을 짊어지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부활하시어 다시 나타나셨고 영광을 모든 이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하얗게 번쩍였다."고 합니다. 흰옷은 더러워지기 쉬워 자주 입기 꺼려집니다. 혹시라도 때가 타지 않을까 조마조마합니다. 하지만 더러워진 옷은 다시 세탁해서 입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란 없습니다. 고통을 마주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비와 사랑의 주님을 찾을 수 있는 회개의 용기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심재관 사무엘 신부님(수원가톨릭대학교)
지금이야 OTT(Over-the-top) 서비스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지만 제가 학교 다니던 그 시절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TV에서 방영해 주지 않는 최신 영화나 만화를 보기 위해서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야 했었죠. 그래서 당시엔 동네마다 꽤 많은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영화는 늘 ‘대여 중’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죠. 오색찬란한 옷을 입고 외계에서 온 악당들을 무찌르는 영웅들의 이야기였는데, 제 또래 사이에선 굉장히 인기가 많았거든요. 영웅들이 우여곡절 끝에 서로 힘을 모아 무지개 광선으로 괴물들을 물리치는 그 통쾌한 장면을 볼 때마다 저의 심장은 늘 두근거렸었죠. 소년들에게 그것은 ‘정의(正義)’,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착한’ 영웅들이 ‘나쁜’ 괴물들을 무찌르는 것. 바로 그것이 정의였죠.
그런데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알게 되더군요. 착하게만 산다고 세상이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니구나. 물론 착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하지만 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와 정의로운 사회가 동의어는 아니더군요. 20세기 초, 독일에는 과연 ‘나쁜’ 사람들만 득실거려서 그렇게 유대인들을 괴롭혔을까요? 그보다 앞선 18세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과연 ‘착한’ 평민들이 ‘나쁜’ 귀족들을 물리친 ‘정의로운’ 사건이었을까요? 착한 사람이 많은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개개인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복잡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정의로운 사회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정의는 윤리적인 덕으로서,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07항).
우리 교회가 바라보는 정의로운 사회란 과연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는 것이 ‘당연한’ 사회입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이 바보 취급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을 받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는 사회, 바로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이러한 당연한 것들을 위해 사람들이 싸우지 않아도 되는 사회, 바로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올해 희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희년의 중심에는 ‘해방’이 있죠. 이 해방은 바로 악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잘못된 사회 구조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리고 이는 바로 ‘정의’로의 귀환을 의미합니다. 희년을 살아가는 오늘,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받아야 할 몫을 당연히 받는 그러한 정의로운 사회를 꿈꿔봅니다.
조선 천주교의 주춧돌,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축일 9월 20일)
백형찬 라이문도(전 서울예술대 교수
유진길(1791~1839)은 대대로 벼슬을 지내온 중인(양반과 상민 계급의 중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진길은 조선 최고의 통역관인 당상역관(堂上譯官/正三品)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뜻이 깊어 많은 책을 읽고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만 권의 책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는 불교와 도교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진길은 우연히 장롱을 열었다가 그 안을 바른 종이에서 ‘각혼(覺魂), 생혼(生魂), 영혼(靈魂)’이란 글자를 보았습니다. 탐구심이 강했던 유진길은 그 의미가 궁금했습니다. 알아보니 그 글자는 ‘천주실의’라는 책에 들어 있는데 ‘생혼’은 식물의 혼, ‘각혼’은 동물의 혼, ‘영혼’은 인간의 혼을 뜻했습니다. ‘천주실의’는 이탈리아의 마테오리치 신부가 중국 선교를 위해 가톨릭 교리를 알기 쉽게 풀이한 책입니다. 유진길에게 홍 암브로시오라는 교인이 천주교 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유진길은 천주교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유진길에게 조선 교회를 위해 일할 ‘거룩한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유진길은 역관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습니다. 유진길은 동지사(冬至使, 매해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 사절단의 수석 역관으로 간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북경 교회와의 연락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총 여덟 번이나 북경을 오갔습니다. 그리고 정하상과 함께 교황청으로 신부 파견 요청 글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희생과 노력으로 조선교구가 설립되었고,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비롯해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그리고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기해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미 유진길이 천주교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으나 당시 섭정하고 있던 대왕대비의 오라버니와 친한 사이라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오라버니가 죽자 유진길은 즉시 체포되었고, 온 가족이 달려나와 “배교하라.”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에 유진길은 “나 때문에 가족이 고초를 당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소. 하지만 나는 결코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 나는 내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고 있소. 나를 본받아 천주교인이 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유진길은 포도청에 여섯 번 출두해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곤장을 맞아 살이 헤어지고 주리로 뼈가 뒤틀렸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흔들림 없는 의연한 자세로 모든 고문을 이겨냈습니다. 결국, 유진길은 ‘국법을 어기고 매국노와 공모한 사학(邪學)의 무리’라는 죄목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함승수 신부님
‘약속의 증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결혼반지’입니다. 결혼반지를 부부가 나누어 낀다는 것은 혼인서약 때 발설했던 사랑의 약속, 즉 상대방을 자신의 배우자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사랑하고 존경하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다짐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상대방이 한 그 다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남편과 아내 상호간에 혼인 계약이 맺어집니다. 그리고 누군가와 혼인 계약을 맺게 되면 그 계약을 맺은 상대방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일치된 부부 공동체로 살면 여러가지 유익과 혜택들을 누리게 되니,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함은 당연한 일인 겁니다. 만약 부득이한 사유가 없는데도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상대편 배우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손해를 끼친다면 그건 혼인 때 했던 중대한 약속을 깨는 잘못이기에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전례 독서에서도 그와 비슷한 약속을 맺는 모습이 보입니다. 먼저 제1독서인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인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은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즉시 순명하여, 평생 터전을 잡고 살아온 우르 땅을 기꺼이 떠났지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고,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2)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느님은 당신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즉시 실행에 옮긴 그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야말로 당신 백성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올바른 태도라 보신 겁니다. 또한 아브람에게 했던 약속을 ‘계약’으로 발전시키십니다. 계약(契約)이란 ‘서로의 관계가 묶여지는 약속’을 의미하는데, 고대 근동지방에서 계약은 동물을 이용한 희생제사가 동반되는 일종의 ‘예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정해진 제물을 반으로 잘라 서로 마주보게 둔 후 그 사이를 계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며 계약의 세부 내용을 선언했는데, 이는 계약을 어길 시 두 동강난 제물처럼 파멸에 이르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굳은 맹세를 드러내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맺으신 계약에서 특이한 점은 아브람은 제물 사이를 지나가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이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의 모습으로 제물 사이를 지나가시며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큰 땅을 주겠다’고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부족하고 약한 인간에게 그 어떤 저주나 손해를 끼치지 않고 무상으로 당신 사랑과 은총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겁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놀라운 표징을 통해 당신께서 하신 약속이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증해 주십니다. 그 일이 일어나는 장소는 ‘타볼산’입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장소, 인간이 하느님 가까이로 나아가 그분과 친교를 맺는 특별한 장소를 가리키지요. 예수님께서 핵심 제자 세 명을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시는 것은 그들에게 하느님의 현존과 영광을 직접 느끼는 강렬한 신앙체험을 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이 그저 놀라운 사건이나 일회성 이벤트로 여겨지는 건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 중에 당신을 간절히 찾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부족하고 약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함으로써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산에 오르시는 내내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러자 ‘그분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번쩍였다’고 오늘 복음은 기록하고 있지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그분과 깊은 일치를 이룬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40일 동안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가 그랬지요. 그의 얼굴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 제자들이 기도 중에 거룩하게 변화된 당신 얼굴을 보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한편 옷이 하얗게 빛났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신적 권능을 지니고 계시며 그 권능과 은총으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깨끗하고 거룩한 존재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 두가지 표징을 통해 당신께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많은 고난을 겪고,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겠지만, 사흘만에 반드시 되살아 나리라고 하셨던 그 예언적 약속(루카 9,22)이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걸 제자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겁니다.
그 예언적 약속은 외아드님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맞닿아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시려면 반드시 수난 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하는 겁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그런 점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는 거룩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온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상징하는 엘리야가 예수님과 만났다는 건, 예수님께서 경직되고 문자화된 율법의 부족함을 당신 사랑으로 채우시고,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당신 죽음으로 완성하시리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예언에 해당합니다. 우리를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구원의 그 심오한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던 겁니다.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27,4). 라고 노래했던 시편 저자의 마음이 바로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산 아래’의 세상에서는 하루 종일 예수님께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시달리느라 매일매일이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예수님은 자꾸만 당신이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거라는 절망적인 말씀을 하셔서 여러가지로 걱정되고 불안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자기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그런 그분 곁에 유다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까지 함께 있으니, 베드로에게는 그 영광된 자리가 본인이 그토록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계속 그 산 위에 머무르자고 청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자기들이 지금 당장 세 분이 머무르실 초막을 지어드리겠다는 허황된 약속을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머무르실 거처는 때가 되면 재가 되어 사라질 세속의 것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들은 대로 실행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 단단하게 지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에 참된 거처를 마련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쉽고 편한 것을 찾는 나태함과 안일함을 내려놓고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 3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잃어버린
하느님의
얼굴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주일입니다.
짐승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로
살아야 하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빚으신
얼굴을
우리의
교만과 욕심으로
우리는
못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삶이 빛나야
우리의
얼굴 또한
빛날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사랑으로
느껴집니다.
얼굴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며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순시기는
우리가
사람의 얼굴을
다시 찾고
사람의 얼굴로
살아야 할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선택하심을
믿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달라져야
얼굴도 달라집니다.
기도 없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버려야 할
교만이며
거짓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할 때
더욱 빛납니다.
우리의 얼굴이
달라져야
우리의 길도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변모의 주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예쁜 강아지, 고양이를 키우는 애견인, 애묘인이 참 많습니다. 동물을 예뻐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모든 사랑을 동물에게 쏟아붓습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동물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씀까지 하시더군요. 그래서일까요? 한때 ‘강아지 번역기’라고 해서, 강아지의 짖는 소리를 통해 어떤 말을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성능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지금은 시판되지 않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많이 구매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대화하고 싶고, 사랑하는 자기 마음을 보여 주고 싶어서 이런 상품을 구매했겠지요. 그렇다고 자신이 개나 고양이가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아닌 그 동물이 되어야 동물의 언어를 할 것이고, 동물의 마음을 알고 자기 마음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사람임을 포기하고 그 동물이 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과 전혀 다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언어를 함께 나누고, 사랑의 마음을 나누기 위해 연약한 인간이 스스로 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감히 인간의 사랑을 하느님 사랑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광채가 빛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담소를 나누십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고, 엘리야는 예언서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를 죽음으로 완성하면서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실 분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 구약시대의 유산이 신약시대에 인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루카 9,33)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머물면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속 머물겠지만, 예수님께서 하실 구원의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편한 대로 지금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듯(창세 15,18 참조), 우리와도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계약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시기”(필리 3,21) 위함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데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계약을 통해 얻은 은총을 온전하게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배워 그런 사람이 되어라(핀다로스).
제게 와줘서 고맙습니다. 죽어가던 저를 살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잡목과 칡넝쿨, 가시덤불에 둘러싸여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소나무 한 그루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이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가련한 아이 같았습니다.
잘 드는 톱으로 잡목을 잘라내고, 굵은 칡넝쿨과 가시덤불을 과감히 쳐주었습니다. 이미 오래전 말라 죽어버린 가지들도 깨끗이 잘라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본래 지니고 있었던 어여쁜 자태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그루를 끝내고 다른 나무로 옮겨가려는데, 말끔하게 단장한 그 나무가 제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제게 와줘서 고맙습니다. 관심 가져줘서 고맙습니다. 죽어가던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쁘게 단장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나무가 제게 한 말은 저 역시 날이면 날마다 주님께 말씀드려야 할 말씀 같습니다.
얼마 전 건장하고 기품있는 청년 한 명을 만났습니다. 어떤 부모님이신지 모르지만, 교육 참 잘 시키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그 청년은 20년 전 저희가 운영하던 청소년 복지시설에서 동고동락했던 유명한 개구쟁이였습니다. 이제는 멋진 신사가 되어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에피소드들을 끝도 없이 나누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그런 청년들을 만난다는 것은 살레시오 회원으로 가장 큰 보람이요 기쁨입니다. 그 청년을 보는 순간, 지난 세월 별로 한 것도 없이 죄만 산더미처럼 짓고 부끄럽게 살아왔다는 울적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나도 가뭄에 콩 나듯이 좋은 일도 했구나, 하는 마음에 기분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그 만남, 그 존재는 순식간에 제 삶을 화사한 봄날로 바꾸어주었습니다.
변화되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 일이라는 것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참 안 바뀐다는 것 또한 피부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봐도 그렇고 동료들을 바라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삶을 바꾸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언제나 작심삼일입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그렇게 큰 변화 없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타볼산 위에서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 앞에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동시에 큰 위로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간 스승님을 탁월한 랍비 정도로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영도자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저 한 인간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신 스승님의 모습을 제자들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심을 밝혀주신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도 거룩하게 변모되기를 청해야겠습니다. 인간적, 육체적인 성장과 변화도 추구해야겠지만, 영적인 성장, 거룩함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참사랑은 변화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로 얻는 믿음: “괜찮다, 사랑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 올라보면 이 세상이 작아 보이고 별것도 아닌 일에 아웅다웅하며 살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인데 하느님은 에덴동산에 사십니다. 우리가 잠시나마 에덴동산에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걱정과 근심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아의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짐을 느낍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오르는 방법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율법, 곧 하느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엘리야는 성령, 곧 하느님의 사랑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충분한 사랑을 주면 자녀는 생존 걱정을 내려놓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부터 에덴동산에 살게 됩니다. 그러면 집착이 작아지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께 은총과 진리를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도 괜찮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때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면 주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괜찮다!”
기도하면 또 엘리야도 보내주십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사랑한다.”
지금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추측에 따르면 200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분당보다 넓은 크기의 1조 5천억 원짜리 궁전을 짓고 있고 자동차와 비행기 등은 수천억 원씩 개발비를 투자한 특수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100세까지 대통령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법을 개정하며 계속 대통령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대통령이 되고 국방력과 경제가 나아졌다고는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경제가 좋아진 기업들의 많은 주식을 엄청나게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기와 같이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푸틴이 어렸을 때 ‘생존의 문제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 환경’에서 자랐을까요, 아니면 그런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랐을까요? 지금 생존의 문제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을 보면 분명 어렸을 때 부모님이 그의 생존의 문제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고 빈민 공용주택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존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여기며 유도와 같은 운동을 하고 소위 불량배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힘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였는지 당시 강한 권력을 지녔던 소련 정보부 KGB에 들어갑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 곁에서 정치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뇌물수수 등 비리에 말려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옐친 대통령의 오른팔이 되어 결국엔 대통령에 오릅니다. 그러고 나서 법을 개정하며 2036년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지금 인지도가 점차 하락하자 아마도 전쟁을 통해 이미지 전환을 꾀한 것 같습니다.
푸틴은 히틀러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히틀러도 아버지의 엄청난 기대와 그에 미치지 못할 때 행한 무자비한 폭력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위치에 오릅니다. 푸틴도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힘과 재산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살아남아야 하는 마음은 대통령을 그리 오래 해도,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푸틴이나 히틀러에게 부족했던 것은 자랄 때 먹어야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양식은 은총과 진리가 결합한 것입니다. 양식은 “괜찮다, 사랑한다!”라고 말해줍니다. 이 양식을 먹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아버지에게 이 양식을 먹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다 책임질 테니 죽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그래야 남을 해치는 사람이 되지 않고 남을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먹고 사는 거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 때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알려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타볼산에 데리고 올라가셔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일론 머스크의 1달러 프로젝트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창업한 페이팔을 큰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이 돈이면 평생 놀고먹어도 될 양이었습니다. ‘창업했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하루 1달러, 한 달 30달러로 생활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냉동 햄버거를 사서 30일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컴퓨터와 조금 먹을 것만 있으니 행복했습니다. ‘하루 적어도 1달러는 벌겠지!’라는 생각으로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푸틴도 최고 부자고 일런 머스크도 최고의 부자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생존이 두려워 모으는 사람과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자해서 부자가 된 사람과는 확실히 달라 보입니다. 일런 머스크는 이번 우크라이나의 전쟁 승리를 위해 인터넷망 시스템을 공급하였습니다. 신기하게 푸틴과 싸우는 편이 된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누구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아이를 많이 낳으면 나라가 가난해질 것이라 해서 산아제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엄청난 낙태가 이뤄졌습니다. 어쩌면 그 이후로 생존에 대한 불안함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제가 어머니께 들었던 것 같은 말이 ‘각자의 밥그릇은 각자 가지고 태어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요즘에 하면 무슨 조선 시대냐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 지금만큼 풍요로울 때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조선 시대에 지금보다 나라의 믿음이 더 강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 없이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니 잘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각자의 밥그릇은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에는 “괜찮다.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라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이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코헬렛의 지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와 재화를 베푸시어 그것으로 먹고 자기 몫을 거두며 제 노고로 즐거움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모든 인간. 이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정녕 하느님께서 그를 제 마음의 즐거움에만 몰두하게 하시니 그는 제 인생의 날수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코헬 5,9.14.16.18-19)
하느님께서 이미 모든 사람이 제 마음의 즐거움에만 몰두하도록 일만 하면 먹고 살 수 있는 몫을 마련해 두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괜찮다, 사랑한다!”라고 하시며 모든 것을 마련해주시니, 나는 죽음도 걱정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주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면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묘사한 것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성령의 감동으로 복음을 기술한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보면 기도 중에 만난 인물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서를 상징한다는 말씀은 여러 신부님의 강론 내지는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코너를 통해서 여러 번 언급돼서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래서 마치 이 내용이 소설의 복선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구름 속으로 사라지신 후에 하느님의 소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가 울린 것입니다. 그때 보인 것은 예수님의 모습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대해 여러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납니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내용은 베드로 사도가 한 표현처럼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영광만 봤습니다. 그랬기에 초막 셋을 지어 각각 드리고 그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곧 있을 일이신 세상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친 후에 일어나는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인데 베드로는 결과만 본 것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에도 한번 언급한 내용이지만 구두 장사하는 사람은 구두가 눈에 잘 들어올 것입니다. 가발 장사하는 사람은 사람의 머리를 잘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치 세상은 이와 같습니다.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게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관도 결정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우리가 어디에 초점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도 결정될 수 있습니다. 사라지고 말 세상에 마음을 두느냐 아니면 영원한 세상인 천국에 마음을 두느냐 이게 관건입니다. 여기에 따라 결과가 완전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입니다. 이건 바로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끝은 바로 멸망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세상 것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2000년 전 사고로 보면 당연한 내용이지만 이 내용을 현대인 지금 시점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분은 신학을 하는 이유와 성서를 연구하는 목적이 이런 원인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시대가 변하면 성경의 근본적인 뜻을 유지하면서 시대에 맞게 해석하기 위해서 신학자와 성경학자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점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시민은 이런 기대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처럼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와 아울러 당부하신 게 있습니다. 이런 것을 고대하며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 있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으로 어려운 내용이지만 해답이 오늘 복음에 있는 듯합니다. 복음 35절에 나오는 말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입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지금은 하늘의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하지만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에 합당한 조건이 되어야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듯이 말입니다.
2독서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원수로 알것이 아니라 그걸 사랑으로 포용해야만이 우리가 멸망의 길을 가지 않을 것입니다. 독서에서 말하는 멸망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뒤에 나오는 말씀을 문맥적으로 해석해본다면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닮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가 되지 않으면 그게 멸망과도 같은 의미라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독서에 나오는 말씀 속에 드러나는 행간의 의미를 잘 보면 그렇습니다. 이와 함께 또 하나 중요하게 볼 게 있습니다. 세상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는 그게 영광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그게 영광이 아니고 수치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 것은 그 어떤 영광도 영광이 아닐 수 있다는 말씀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논리로는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오로지 하늘나라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하늘나라의 시민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이 주는 달콤함 속에 묻혀 이 세상 것만 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바로 멸망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길임을 오늘 복음이 저희에게 주는 교훈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은 제자들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다. 세 제자는 산에 올라 잠에서 깨어났고 기도 중에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나누고 계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경지를 보게 된다. 그 경지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부활의 경지일 것이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고 황홀경에 빠진다.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순간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님께 제안한다. 초막 셋을 지읍시다.' 침묵으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그들은 마음에 간직한다'(루카9,28-36참조)
산에 오르는 과정은 쉽지 않다. 어쩌면 고도의 상황이 아니라면 힘든 산행은 히말라야 보다 우리의 산이 더 가파르고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히말라야에서 산을 오르는데 '힐'은 3천고지, '피크'는 5천고지, '마운틴'은 7천고지로 분류한다. 내가 오른 가장 높은 산은 학생들과 지인 동료와 함께 '힐'과 '피크' 사이 4,130(ABC)를 올랐었다.
2019, 8천고지 봉우리 두곳을 오른 전문 산악대장에게 사투하며 올랐던 소감을 물어 보았다. "마운틴이라는 7천고지부터 어떤 마음이었는지요?" "그때부터 감성도 이성도 사용이 불가능해집니다. 붕 뜬 느낌으로 순간 멍해집니다. 아무 생각없이 목표점만을 향해 움직입니다. 사실 제가 실족해서 사투 상황일 때, 혹시나 "죽어서 돌아가면' 아버지한테 혼날텐데"'하는 생각이었어요."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인가요?" "세상을 떠나신 생부일 수도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산이 있어 산에 오르는 자들은 기도하며 사투 속에서 거룩함과 신의 음성을 만난다. 7천고지 이상의 상황은 그렇다고 했다. 히말라야 롯지 2천8백 고지를 통과할 때, 표지판에 이렇게 써있다. '여기부터는 신성한 곳이니 잡은 고기 먹지말라' 경고문이 붙어있다. 경거망동 삼가고 기도하며 목표만을 떠올리며 산행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란다. 최종으로 신을 만난 기쁨의 경지를 맞이하라는 말씀이리라.
수난과 죽으심, 부활의 경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이다. 찬란한 예수님의 얼굴 변모를 제자들애게 보여주신 것은 수난과 죽음을 넘어 부활이란 목표점에 이르라는 삶의 동력이다. 예수님의 변모 모습을 본 제자들은 초막 셋을 지어 편안히 살 생각을 버리고 부활의 영광을 향해 힘차게 걸아갈 것이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이다. 내가 학생들과 다섯번, 본당에서 세번 올랐던 히말라야 '힐'높이의 4,130미터 안나프르나 베이스캠프(ABC)는 학생들에게 삶의 동력이 되고 어려움에도 목표를 살아내라는 값진 가르침을 담아준다. 인생 종착점은 부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히말라야 산행을 권유한다. 그리고 학생들을 대리고 함께 거룩함을 담아 주는 산을 오르고 있다. 이것이 '놀체인양업'에서 행하고 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다볼산에 오르셨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럽게 빛나는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지난 사순 제1주일의 주제가 유혹에서 벗어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살아갈 것을 이야기 했다면, 사순 제2주일의 주제는 하느님 안에서의 참된 변화입니다.
예전에 어느 성당에 어느 신부님께서 부임하셨는데 정말 강론을 기가 막히게 잘하셨고 사람들은 그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매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신자들은 점점 불만이 싸여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신부님의 강론 내용이 매번 똑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본당의 사목회장님이 주교님을 찾아가서 본당 상황을 해서 말씀드리면서 본당신부님이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일렀습니다. 사목회장님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으신 주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회장님,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신부님이 그렇게 같은 주제로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서 혹시 신자 분들은 그 신부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 주교님의 그 질문을 들은 회장님은 그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시고 집으로 돌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변화입니다. 우리는 대개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변화되길 바라며 살아갑니다. 곧 자신은 변화되지 않으면서 변화되지 않는 세상만을 비판하며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변화입니다.
시편 35장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빛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빛을 통해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셨던 이유도 그 아버지 하느님의 빛을 만나기 위해서였고, 그 빛을 받으며 눈부시게 빛이 나는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주님의 사랑의 빛이 우리에게 그야말로 전폭적으로 다가오는 시기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사랑의 빛을 통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가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의 빛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면 우리도 역시 주님의 모습처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그 빛을 받으며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갈 때 우리도 역시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 그리고 딸로서 그 영광을 함께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벗이여, 기도하러 산에 오르시게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이여,
몸서리치게
힘겨운 날에는
모든 사람
모든 일
잠시 내려놓고
지금
오를 수 있는
그 어디든
마을 언덕이든
동네 뒷산이든
멀리 높은 산이든
오롯한 마음으로
묵주 하나 들고
기도하러 오르시게나
한걸음 또 한걸음
묵주알 하나 또 하나
가쁜 한 숨에 기도 하나
탄식과 분노
무기력과 절망
스멀스멀 오르더라도
오르고 또 오르며
숨 쉬듯 기도하고
기도하듯 숨 쉬다가
불현듯
그대를 품는
새하얀 해방의 순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곱게 품게 되거든
오를 까닭 없으니
훌훌 털고
내려오시게나
모든 사람
모든 일
다시 곱게 보듬어
기쁨과 희망으로
거침없이
나아가야 할 테니까
그러다가
또 다시
그대를 덮친
몸서리치게
힘겨운 날에는
기도하러 산에 오르시게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을 데리고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입고 계신 옷이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과 세상을 떠나실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정착하려고 합니다. 순간 하느님으로써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분위기에 휩싸여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도중에 갑자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덮습니다. 그리고 그 구름 안에서 성부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리고 후에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계심”을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내용입니다. 즉, 모세도 엘리야도 중요하지만 오늘복음의 정점은 바로 구름을 통해서 오신 성부 하느님의 말씀과 그 이후 혼자 계신 예수님이라는 것이지요. 먼저 구름을 통해서 성부 하느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구약 안에서 많이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지요. 모세의 시기동안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아들이며 그의 말을 들어라. 라고 말씀하시며 힘을 실어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나의 뜻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면서 베드로의 초막 셋을 만들자는 말이 잘못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혼자 남으셨다는 것은 구약의 핵심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짐으로써 구약의 메시아에 대해 예언이 신약의 예수님으로 완성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복음은 변화 된 예수님의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들이 묵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변화가 아닌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단순이 때가 돼서 태어나신분이 아니라 구약으로부터 예언되어진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구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증명해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오늘 제자들 세 명과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길을 함께 가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이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에 맡겨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깨어있지 않는 이들은 베드로가 한 말처럼 초막을 지어 정착하려 할 것이고 깨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의 말씀대로 살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겠지요. 지금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아멘!
사순 제2주일: 다해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조용히 참회와 보속을 하는 시기에 영광스러운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의 루카 복음은 사순시기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파악하도록 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계약이 먼 훗날에 이루어지리라는 그 말씀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 자신을 변모시켰던 믿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후손들까지 변모시키는 믿음이었다. 아브라함도 그렇지만 우리도 사순절의 기다림과 앞당겨진 파스카의 빛으로 신비스럽게 변모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매 순간 이 변모의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 9,28-36: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였다.
오늘 복음은 사순절의 분위기로 이끄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기도’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28-29절). 여기에 예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그 기도가 그 영광스러운 변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다. 루카 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기도의 주제가 바로 이 사순시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사순절의 의미가 기도의 표지 아래서 더 잘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리가 참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열렬히 타오르는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복음에서는 단순하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30절)는 사실만 전해주고 있는데 반해, 루카 복음은 두 인물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도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31절). 여기서 ‘세상을 떠나실 일’이라고 한 말은 원문으로 ‘exodos: 출애굽, 대탈출이다. 즉 결정적인 해방과 약속의 땅을 향한 출애굽의 모든 주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은 출애굽 사건과 같이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는 고달픈 여정이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여정을 반복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는 사순절의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 사도의 졸린 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내용이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32절). 그리고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34절)고 한다. 이 구름은 특별한 신적 현존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 즉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은 수난과 수모를 당하시겠지만, 한결같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선택한 아들’(35절)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 위에 죽임을 당하시지만, 그분은 산에서 보여주신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아 그 고통과 괴로움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변모’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예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의 빛을 위한 것으로써, 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택하신 아들’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예수께 일어났던 그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우리 자신이 신앙을 통해 아브라함이 변화되고 그의 자손들이 은총을 입었듯이 그처럼 변모되어갈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딸로,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는 말씀을 잘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약속된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이미 그 영광을 미리 내다보고 있고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속이거나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35절) 즉 그분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그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광야와 같은 이 사순절은 어떤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목적지에 미리 도착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부활의 신비를, 영광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될 때, 진정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리피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들의 생활에서 고달픈 십자가를 회피함으로써 사순절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다(필립 3,18-19). 갈바리오를 향한 여정이 없다면 파스카의 기쁨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늘의 시민으로서(필립 3,20)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변모의 기다림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매일매일 변화시켜 가는 삶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춤으로써 신앙 안에서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 자신의 변모를 이룰 수 있는, 그래서 합당하게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가 되어야 한다. 우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그 변모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필립 3,20-21). 나 자신의 참된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기도하는 이, 묵상 중에 있는 이의 빛나는 얼굴을 기억해 보십시오.
기도의 시간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만나게 하고 당신께 맛들이게 합니다.
당신의 빛을 우리에게 전해주며 그 빛으로 우리 자신을 채울 수 있게 합니다.
침묵의 기도, 묵상의 기도는 우리를 그 빛에 머물게 하며
그 빛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사순의 두번째 주간
축복과 은총의 기도 안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머무르게 하소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This is my chosen Son
이근상 시몬 신부님
변모사건은 영광, 곧 십자가와 연결된 사건이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현존을 뜻하는 영광과는 정반대의 하느님 부재 사건인데, 복음은 이 둘을 하나의 영광으로 연결한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하느님의 부재는 하느님의 현존과 붙어서 하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건데... 더 쉽게 말하자면 죽어야 산다(死卽必生)란 말이다. 다만 사즉필생이 병법서의 말씀이어서 죽도록 싸워서 결국 산다는 말이라면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은 말 그대로 정말 죽어야 산다는 말이니 이건 병법과 어울릴 수는 없는 말이긴 하다. 병법이야 어떻게든 살자는 이야기이니.
하지만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십자가를 정말 병법서로 이해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십자가를 부활로 가기위한 통과의례, 혹은 댓가로 여기는 것. 그러니 십자가를 부정적인 사건 사고로 곧잘 연결한다. 어떤 병환이나 우환이 닥치면 갑자기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십자가는 견디고 이겨내 승리를 만나야 하는 댓가
하지만 변모사건으로 십자가의 영광을 준비하듯, 십자가란 귀하고 소중한 '길'의 정점이다. 그건 준비하고 마련한 투신이지 느닷없는 벼락이 아닌 것. 생의 곤란에 십자가란 명찰을 붙이는건 신성모독이다. 내 것으로, 주님께, 또 세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길로 그것을 받아들일 때, 곧 걸머질 때 벼락같은, 돌부리 같은 곤란은 십자가가 되고, 영광이 된다.
영광스러운 계기가 아니라면 그건 십자가가 아니다. 그냥 곤란일 뿐.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를 하하호호 맞이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십자가는 내 온 몸이 일그러진 고통은 어찌할 수 없으나 외면할 수도, 외면하고 싶지도, 외면하지 않는 길. 영광의 길이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사순 제2주일(다해) 루카 9,28ㄴ-36; ‘22/03/13
우리 나라 말로 '7가지 유혹'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현혹됨'(Bedazzled)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악마가 인간에게 7가지의 소원을 들어줄 테니 대신 자기에게 영혼을 팔라는 계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악마와 계약한 인간은 햄버거와 빅맥에서부터 시작하여 돈과 권력, 명예, 아름다운 여인, 감상적인 인간 등 여섯 번째까지 소원을 빕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소원이 즉시 이루어지고 또 그 상태를 누려보긴 하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도 없었고 또 그 상황을 오래 유지하지도 못합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원하는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남은 한가지 소원을 마저 대고 영혼을 내 놓으라는 악마의 재촉에, 자기가 그렇게도 가지고 싶었던 여인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그러자 악마와의 계약은 깨지고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남을 위해 소원을 비는 순간부터 악마와의 계약은 끝난다는 것이 계약파기의 비밀조항이었습니다.
그 영화를 통해 작가는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것과 원하는 상황은 누릴 수 있지만, 그 상태와 상황이 행복이라든지 등의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갈증과 원의를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소원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향해 빌 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소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늘 부족함을 느끼고 삽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자기 식구 그리고 우리 사회와 민족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꿈과 욕망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더 얻고 싶어하고, 하나를 이루면 하나를 더 이루고 싶어할 뿐 만족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하고 늘 불평불만과 아쉬움 속에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자포 자기 할 때도 있고, 자기 자신과 사회를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현재 상황이 다 좋다고 만족하면서 살 수는 없다하더라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그저 고통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리 얻고 성취하고 채워도 부족하고 모자라고 결핍을 느끼지만, 이웃을 위해 일한다거나 조금 나누기라도 한다면 나눈다는 그 자체로 자기가 얻은 것보다도 더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니 말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처럼 사랑은 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줌으로써 받는 것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영광에 쌓여 계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면서 엉겁결에 모시고자 한다. 베드로가 성인들을 뵈면서 잘 모셔야겠다는 지극한 마음이 들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자신들을 위한 존재로 모셔두기를 바랬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십니다. 마치 '나는 죽으러 왔지 접대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듯 합니다. 이 모습은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 28)하신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하신 이유와 상황은 바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대화 즉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루가 9, 31)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 중에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빌지만,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마태 6, 10)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 39) 그리고 다시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 42)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 인간이 그리는 영화처럼 너도 이기도 나도 이기며, 너도 잘되고 나도 잘되는 해피엔딩으로 마쳐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너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실제로 고통스럽게 생애를 마감합니다. 그것도 기적을 베풀고 병자를 치유하고 사람들을 먹이고 살리신 분에 걸맞지 않게 수치스럽고 처참하게 돌아가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애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그냥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즉 주님은 죽으셨지만, 아니 인간으로서의 한계인 죽음을 겪으시고 받아들이셨지만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또 믿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죽음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위한 삶이었고 죽음이었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활시켜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또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살아 주님과 함께 부활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며 우리의 믿음입니다.
현실에서는 손해보고 억울하게 죽지만,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된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리며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루가 9, 35) 이 사순시기에 우리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하여,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될 마지막 그날에 주님과 함께 부활하기로 합시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세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립 3, 20-21) 아멘.
사다리 좀 타봤니?
이규현 가롤로 보로메오 신부님
지난 여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예전에 제가 있던 성당에 난리가 났었습니다. 성당 지붕을 살펴보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사다리가 흔들릴 때마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무서웠습니다. 그때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서 다시는 올라갈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신가요? 혹시 두려움을 즐기시나요? 인간은 참 특별합니다. 무서워하면서도 오히려 출렁다리, 번지점프, 그리고 각종 놀이기구를 만들어 즐기고 있으니까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몸과 눈은 고소 공포를 느끼는데, 권력과 명예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은 왜 고소 공포를 느끼지 못할까?’ ‘분명 높은 곳에 올라가면 떨어질 위험이 있고, 그래서 더 두렵고, 조심해야 하거늘. 왜 인간은 높은 지위에 올라서고, 권력의 높은 곳에 올라서면 두려움을 잊어버릴까?’ ‘왜 다른 이들을 깔보고 함부로 대하며 갑질을 하는 것일까?’
지위, 권력의 높은 곳이라고 특별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크게 추락합니다. 성추행 사건으로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배우와 감독, 그리고 예술가들이 급격히 추락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권력과 명예, 그리고 인기가 어쩌면 사다리 위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높은 지위, 높은 권력, 높은 인기일수록 더 많이 흔들리니까요. 높이 있을수록 더 떨어지기 쉽고, 그래서 더 조심하고, 더 노력해야 하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와야 하니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 지내기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다시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셨고,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높아지기보다 오히려 우리와 같아지는 것을 선택하신 것이지요. 그리고는 제자들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높은 자리보다 낮은 자리를 좋아하셨던 예수님,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르치려고 하셨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높은 지위, 높은 권력, 높은 인기를 얻을수록 더 조심하고, 책임감을 느끼며, 섬기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사다리 위를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높아질수록 그 사다리는 더 많이 흔들리고 있지요. 그러니 높아질수록 밑에서 사다리를 잡아주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더 나아가 낮은 자리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사랑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 읽기
이승환 루카 신부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좀 더 주님과의 친밀함을 더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은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그리스도교 생활을 완성하고 완덕에 이를 수 있도록 성경을 자주 읽고 묵상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은 “하느님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묵상과 기도가 동반되지 않는 성경 읽기는 자칫 인간적 만족감만을 남기거나, 인간적 해석으로 하느님 말씀을 잘못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53항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서를 읽을 때에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가 따라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려면, 우리는 영적으로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늘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성경 말씀을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줍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자신이 묵상한 성경 구절이나 본문의 내용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조금씩 깨달아가게 됩니다. 이미 여러 번 읽고 들었던 성경 구절이 어느 날 나에게 말을 건네고,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환하게 비출 때가 있는 것을 체험하곤 합니다. 바로 그때 말씀과 만나는 그 자리에 머물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되고, 주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자기 인생에 깃든 육화된 하느님의 뜻을 가슴 깊이 되새겨봅니다. 그러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서 바라는 삶인지를 식별하여 결심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해주고, 그분이 바라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비록 인간적인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이 초대에 응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1코린 2,16)이 형성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필리 4,6)
정말 꾸밈없는 현장 느낌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세 제자들만 타볼 산에서 보았던 사건입니다.
놀라 반사적으로 한 베드로의 초막 셋이라는 기발한 생각 멋졌습니다.
정말 꾸밈없는 현장 느낌에 사실이었다는 것을 더 확실히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현세와 초월계가 한 공간에 있었다고 믿어집니다.
저도 사도들처럼 이 현장을 현세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있겠나 싶어요.
해서 제자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침묵 이해갑니다.
예수님의 참모습 보신 제자들처럼 제 본명 사도 요한처럼 믿겠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참모습 보았다는데 왜 이리들 무관심 하는지 나참!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9, 28-36(사순 2 주일)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이처럼, 아브람의 믿음 위에 계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에게 줄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시편을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으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시 27,7-8.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멸망이 오고, 믿는 이들에게는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필리 3,21)이라고 하면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 4,1)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면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합니다.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려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고 전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을 때나 겟세마니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듯 때처럼, 중대한 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곧 죽임을 당하시기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시간이 임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시던 중에 변모를 이루시는데,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루카 9,30).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루카 24,4;“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귿르에게 나타났다.”)에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표하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애굽을 통해 약속된 땅으로 인도했듯이, 엘리야가 불붙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듯이, 그들이 예표한 바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될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며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요, 예언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 다음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날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루카 9,31). 이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과 그를 위한 수난과 죽음을 알려주심과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부활 무덤 안에 나타난 “두 남자”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들은 당황하는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나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6-7)
결국,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1코린 15,3.4)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습니다.”(루카 9,34). 그리고 그 속에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우리는 이와 유사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세례닫으시는 장면에서도 들었습니다. 곧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마르 1,12;마태3,17)라는 말씀입니다. 이 둘은 예수님의 신원을 아버지께서 직접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그 신원을 예수님께 밝혀주시는 장면이고, 후자는 제자들에게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2사무엘>(7,14)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이어받은 <시편>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2,4)이라는 표현과 <이사야>에 나오는 “내 마음에 드는 이”(42,1)라는 표현이 합쳐진 것으로, 메시아인 “왕”과 “주님의 종”이라는 두 예언적 인물을 합쳐줍니다. 그리고 후자는 <이사야서>의 “내가 선택한 아들”(42,1)이라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53장)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뒤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 대한 유혹의 말, 곧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라는 말로 다시 반복됩니다. 그러니 이는 예수님을 인류구속을 위해 죽게 될 “종”임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주시며,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가르쳐주십니다. 곧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시며, 그들이 아드님처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흔히 말하기를 ‘은혜로운 회개의 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지금, 나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라면,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혹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을 듣지 못해서 일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선물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우리는 진정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들은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 까닭에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나는 말씀 아래 머물러 있는가? 들은 말씀에 응답하고 있는가?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이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
말씀 아래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말씀이 제게서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에 응답하는 일, 바로 그 일을 제가 하게 하소서!
말씀으로 변모되게 하소서! 아멘.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20년을 넘게 신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어떤 질문을 받으면 딱히 드릴 답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부족하신 것이 없는 하느님께서 왜 굳이 인간을 만드시어 사랑해주시고, 심지어 인간을 위해 하느님의 아드님이 고생하고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나요?"
이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인격적 대상과 나누신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부족함이 없으신 분을 두고 그분께 사랑을 나눌 대상이 "필요했다"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아브람(아브라함이 개명하기 전의 이름)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고대 사회나 오늘날에나 완전히 평등한 계약이란 거의 없습니다. 언제나 우세한 쪽이 유리한 계약을 맺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해주시자, 아브람은 그것을 어떻게 알겠냐고 여쭙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송아지, 염소, 양, 비둘기를 가져오라고 분부하시고, 아브람은 당시 사람들이 계약을 맺기 전에 하던대로 그 동물들을 반으로 잘라서 잘린 반쪽을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습니다.
그리고 새들이 쪼아먹지 못하게 지키면서 기다리다가 아브람은 밤을 맞습니다. 이 때 아브람의 심정을 창세기는 이렇게 전합니다.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당시 풍습에 따르면, 계약을 맺는 당사자 가운데 약자는 반으로 잘린 동물들 사체 사이를 지나가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만약 계약을 어길시, 쪼개진 동물 신세가 되는 것까지 감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계약을 앞두고 있던 아브람이 공포를 느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계약을 어겼을 때 사람에게서 도망칠 수는 있어도 하느님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동물 사체 사이를 지나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께서 쪼개진 동물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똑같이 하라고 시키지 않으십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던 아브람마저도 때로 비겁하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일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호의와 사랑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신약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계약의 제물은 더 이상 쪼개진 동물들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귀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라는 제단 위에서 당신 자신을 영원한 계약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맺으신 계약은 당신께서 아브람과 맺으신 계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귀한 것입니다.
이 계약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걸고 맺은 계약이고, 세상의 눈으로보면 하느님께 일방적으로 불리해보이는 계약입니다. 왜 하느님이 이렇게 불평등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계약을 맺어주시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신비로 남습니다.
이 한없는 사랑에 응답하여, 무질서한 욕망의 길에서 벗어나 의로움의 길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 사랑 앞에 승복하는 은총의 사순 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변화의 종착지를 향하여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님
삶은 변화의 연속입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태양도 오늘 하루치 에너지를 써서 소모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를 품고도 남음이 있는 단단한 성전도 오늘 하루치 분량만큼 시간 속에 마모되었습니다. 우리 몸속 세포 또한 잠시도 멈춰 있는 법이 없어서 낡은 세포는 새 세포로 끊임없이 교체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처럼 변화의 강물에 실려 흘러가는 우리가 삶의 마지막 목적지에서 만나게 될 풍경을 미리 보여줍니다. 세 제자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좋고 행복해서 베드로는 아예 거기서 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잠깐으로 그쳤지만, 매 순간 변화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 삶 전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삶은 결코 의미 없는 변화의 연속이 아닙니다. 바이러스가 생존 자체를 위해 무의미한 변이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알고 있고,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애쓰는 존재입니다. 가엾지만 숭고합니다. 지치지만 보람찹니다. 변화로 가득 찬 삶 속에서 운전대를 잡은 영혼이 올바른 길을 따라 달리면, 마지막 순간에는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위안이 되어줄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기도>
2022.03.13. 사순 제2주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느님 당신과 내가 맺는 계약은
동일한 의무와 책임을 수반하는
쌍방간의 계약이 아니라
무조건 퍼주시는 당신과
기꺼이 받기만 하면 되는
저 사이의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계약임을 알려주시니
그저 황송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나의 주님!
당신이 저에게 복을 안 내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 복을 기꺼이 예 하며 받지 않고
굴러들어 온 복을 걷어 차 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게 하소서.
나의 하느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거룩한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천국의 아름다움을 체험케 해주시어
미구에 그들에게 닥칠 현세의 삶이
비록 연옥과 지옥이 어른거린다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한 그 천국 체험 때문에
꿋꿋이 견디어내어
부활의 기쁨과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하셨으니,
저도 당신과 함께한
멋지고 아름다운 추억들을 되새기며
오늘의 고통과 십자가를
잘 견딜 수 있게 하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창세 15,5-12.17-18)는 아브람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네 발 달린 짐승을 잡아 반으로 갈라서, 잘린 반쪽들이 마주 보게 하고, 가운데에 길이 되게 떼어놓고, 짐승을 잡을 때 받은 피를 가운데에 뿌리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이 깊은 잠에 빠지고,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을 때,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로 나타나신 하느님께서는 그곳을 지나가시면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계약의 조건은 아브람의 후손이 하늘의 별 수만큼 많아지게 하는 것은 물론 넓은 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떠돌이 유목민인 이스라엘이 차지할 넓은 땅에는 이집트(노예생활)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바빌론 유배)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의 후손들이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계약의 조건을 위반할 때 겪게 될 아픔을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네 발 달린 짐승을 잡아 반으로 갈라서, 갈라진 쪽이 마주하도록 땅에 깔아놓고 피를 뿌린 다음 계약의 당사자들이 지나가는 것은 고대 근동지방에서 쓰이던(기원전 1800년경부터) 계약서였습니다. 계약을 어기면, 그 짐승처럼 계약 위반자를 죽일지라도 아무런 책임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송아지를 두 토막으로 가르고 그 사이로 지나가면서 (나와) 맺은 계약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그 송아지처럼 만들어버리겠다.”(예레 34,18)고 하십니다. 함부로 약속을 해서도 안 되겠지만, 매번 계약을 어기는 것은 인간입니다.
복음(루카 9,28ㄴ-36)은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화되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9,22)고 하신 뒤, 여드레쯤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서 옷이 하얗게 번쩍이고 얼굴이 달라지면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다니 10,5-6; 묵시 1,12-15). 거룩한 변화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도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관계로 바뀌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24,27; 사도 26,22)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나실 일(ἔξοδος=exodus)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미리 말해주는 구약성경이 모세오경과 예언서로 나뉘어 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시고(9,22), 어떻게 당신을 따라야 하는지(9,23-24) 가르치신 뒤에 제자들을 위로하려고 보여주신 거룩한 모습은 새 계약의 표징이고(2,49),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주는 부활(24,49)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잠에 빠져있었다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직전에,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고 했지만, 아브람처럼(창세 15,12),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감겨 자고 있었다,”(마르 14,40)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게는 초막이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세 분을 모시겠다고 했지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습니다. 어쩌면 자기들의 영원한 거처로 생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더 많이 즐기고 싶었고, 자기들끼리만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초막절 축제(여덟째 날)를 지내고 싶었나봅니다. 그런데 초막 셋을 짓고 머무르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산에서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루셔야 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한 죽음의 길을 더 이상 가시지 못하게 예수님의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휩싸인 베드로는, 부르심을 들을 때처럼(5,5), 예수님을 “두목”(ἐπιστάτα)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아직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음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을 도운 구름(탈출 13,21-22)을 생각하라는 것인지, 루카는 “구름”이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제자들을 잠에서 깨우려는(마르 14,41-42) 듯합니다. 이어서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마르코와 마태오는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는데, 이 소리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참된 말씀이다.”(묵시 19,9)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사명을 완수해야 할 예수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목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사 42,1)이시므로 예수님의 발목을 잡지 말고, 그분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제2독서(필리 3,17-4,1)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맺으신 새로운 계약의 결과를 말합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필리피인들을(1,1) “하늘의 시민”, “나의 기쁨이며 화관”, 그리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라고 부르면서 자기가 전해준 복음의 가르침은 물론 자신의 삶을 본받아 잘 살고 있다고 칭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라는 새 계약의 계약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은총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그리스도의 원수처럼 표징이나 요구하고 인간적 지혜에 의존하려고 하며(1코린 1,22-23),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의 배를 채우는 것(물질)을 섬기고, 달콤하고 비위에 맞는 말로 순박한 이들의 마음을 속이면서(로마 16,18) 살아간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합니다. 코린토인들처럼 많은 이들이 하느님으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라 강요하고, 자기네 수치(할례)를 오히려 영광으로 삼으면서 세상 것만 생각하는데도 아주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한다고 질책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이들은 누구든지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에 모인(히브 12,22-23) 하늘의 시민이며,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사람입니다. 계약을 수도 없이 어겨온 인간을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겪으시면서 새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오로지 그분만 섬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율법주의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이라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야 합니다.”(2코린 3,18)
아브람과 하느님께서 짐승을 잡아서 반으로 갈라, 갈라진 부분이 마주하도록 떼어서 땅에 놓고, 짐승을 잡을 때 흘린 피가 뿌려진 곳을 지나가면서 맺으신 옛 계약을 이스라엘은 계속 어겼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번 맺은 계약은 성취되든 파기되든 반드시 완성됩니다. 하느님을 배반하면서 계약을 위반했기에 죽어야 할 인간을 대신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옛 계약을 어긴 책임을 우리에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 책임을 지시고 당신께서 선택하신 아드님을 인간이 되게 하시어, 계약을 어긴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넘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신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엄청난 자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탐욕과 자기중심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산다면 또 다시 새 계약을 어기는 것이며,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변화의 마지막 현상은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구름 너머에 홀로 남아계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보호자로 보내주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때까지(루카 24,49; 요한 16,8) 하느님 아버지의 긴 침묵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성실하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아무도 그분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계약을 어겼기에 죽어야 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맺으신 계약은 우리를 하늘의 시민으로 변화시켜주신 것이고, 머지않아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입으로 제 아무리 찬미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분께 순종하면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을 때에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맺어진 새 계약이 우리에게 유효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하는 것이며, 깊은 잠에 빠지든지, 아니면 십자가의 원수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배웁시다. - 위로와 격려, 치유의 봄비같은 하느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벽 잠깨어 수도원 ‘자비의 집’ 숙소 문을 열고 나오니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가 참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메마른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가 마치 위로와 치유의 봄비같은 하느님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래 전 써놨던 시가 반갑게 떠올랐습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4.
참으로 충고와 조언보다는 위로와 격려가, 치유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모두가 고단하고 지쳐있으며 마음이 갈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하느님입니다. 다음 마태복음처럼 어느 한편의 일방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모두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바로 메마른 온누리를 차별없이 적시는 봄비같은 참으로 보고 배워야 할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면모는 오늘 주님의 변모 체험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또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도 봄비같은 하느님 체험입니다. 어제 오늘 복음에 기반한 사순 제1저녁기도 세 후렴들도 봄비처럼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셨습니다.
1.“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도다.”
2.“주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눈과 같이 부셨도다.”
3.“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도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주요 내용에 대한 소개입니다. 흔히 영성생활을 수덕신비생활로 정의합니다. 금욕과 절제, 극기의 수덕修德생활(ascetic life)의 기반위에 자리한 신비神祕생활(mystic life)이라는 것입니다. 신비생활에 앞선 철저한 수덕생활입니다. 불교의 삼학三學인 계정혜戒定慧 순서와도 일치합니다. 뿌리없이는 꽃이 없는 이치와, 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사순 제1주일 복음은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이겨내시는 예수님의 수덕생활 측면이 강조되었다면, 오늘 사순 제2주일 복음은 수덕생활에 잠시 지친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 변모 신비체험입니다. 부활의 영광이라는 신비 관상 체험을 앞당겨 체험케 하심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용기백배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체험은 제1독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체험과 흡사합니다. 하느님은 이런저런 일로 지쳐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계약을 맺으심으로 아브라함의 영육을 새롭게 하십니다. 다음과 같은 일련의 하느님 신비 관상 체험은 광야 여정중의 아브라함에게는 신선한 활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참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진짜 힘은 이런 하느님 신비 관상 체험입니다.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같은 위로와 격려, 치유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래서 깨어 있는 절제와 금욕의 수덕생활에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주님과 계약을 맺으면서 나눈 대화를 통해 평소 얼마나 주님과 깊은 친교 관계의 기도생활에 충실했던 아브라함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변모체험 역시 기도중에 선물처럼 주어진 신비 관상 체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최측근인 세 애제자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의 은총으로 예수님의 변모를,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하면서 내적으로 새로워졌을 것이며 앞으로의 광야 여정에도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 미사를 통한 이런 주님의 봄비 같은 신비 관상 체험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다음 결론 같은 말마디가 우리에게는 좋은 깨달음이 됩니다. 다음 하느님 말씀은 산상 신비 변모 체험에 집착하는 베드로에게는 천둥같은 경각심을 주는 가르침이였을 것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평범한 광여 여정의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며 우보천리 한결같은 자세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물론 베네딕도 규칙의 맨 앞에 나오는 말마디도 “들어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경청의 들음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겸손한 경청에 이은 순종입니다. 참으로 평생 주님의 학인답게 말씀을 경청하고 실행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 제2독서 바오로의 말씀이 현대인의 타락한 실상을 보여주며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합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어제 읽었던 주님의 충실했던 제자 두분, 50년전 7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들의 영적 스승이었던 장공 김재준 목사와 함석헌 선생에 관한 김경재 목사의 인터뷰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김재준은 북간도에서 은진중학교 교사를 할 때도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이면서 월급 70환중 최소한의 금액인 22환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 데 썼다고 한다.”
“선생님은 80이 넘은 고령에도 10가지 생활 좌우명을 책상앞에 놓고 자기를 성찰하는 자세로 살았다.
1.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대인 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4.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5.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느님께 맡긴다.
6.평생 학도로서 지낸다.
7.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8.사건 처리에는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9.산하山河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10.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함석헌과 김재준은 정치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고, 지성이 맑고, 역사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투철했기에 장준하, 안병무, 문익환이 이들 스승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이들은 두 스승을 아버지처럼 모셨다. 그들이 스승을 모신 것에 비하면 우리는 개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 두 스승뿐 아니라 세 제자들 역시 70년대 시대의 스승이자 사표師表였고, 지금은 세상을 다 떠났지만 저 또한 20대 청년시절 이분들로부터 유익한 가르침과 감화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참으로 평범한 일상의 한결같은 수덕생활이 얼마나 소중한지 배웁니다. 이런 수덕생활의 실천에 꽃처럼 피어나는 선물같은 신비관상체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신비 관상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시켜주십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다음 주옥같은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3,20-4,1). 아멘.
유혹을 이긴 변화
이기우 신부님
1.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주님 세례 축일에 우리가 기억한 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라고 세상에 보내신 그 아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요한 14,6). 그 과정은 하느님을 적대하며 욕망으로 유혹하는 악마와의 대결이었고 이 또한 그분이 보여주신 길을 걸어가려는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지난 사순 제1주일의 전례에서 기념한 내용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오늘 사순 제2주일의 전례는 이 과정은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임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이 거룩한 변화의 여정은 그 변화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2. 이러한 거룩한 변화는 이미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으신 아브라함 이래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청되어 오던 바였습니다. 그 계약의 내용이란,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주님이 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바친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펴겠다는 의지의 봉헌이었고, 그에 따른 하느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늘어나리라는 축복과 늘어난 그 후손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주시겠다는 축복이었습니다.
3. 하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러한 하느님과의 계약을 실현하고 그 축복을 실현하시고자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계약의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 대신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이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요 참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늘의 시민’(필리 3,20)으로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양성하신 열두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땅을 떠나 당시 지중해를 둘러싼 로마 제국의 강역과 그 주변 지역에로 이 복음을 전하여 복음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4. 그리하여 온 세상에 퍼져 나간 교회는 시대별로는 물론 지역별로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보여주신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유다인들은 그 길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하느님께서 모세가 전해준 율법과 엘리야를 위시한 예언자들이 전해준 예언으로 인류에게 보여주신 진리의 계시는 여전히 유효하였기에 각 시대의 교회와 각 지역의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모세의 율법과 엘리야의 예언을 귀담아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 왔습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시행착오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을 본받는 거룩한 변화를 지향하면서 세상도 죄악에서 벗어나 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복음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5. 이 복음화의 여정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옛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고,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사실은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보여준 언행에서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타볼 산에 오르시되, 따로 동행하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만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기도하시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고, 당시로서는 오래 전 서로 다른 시대에 활약했던 모세와 엘리야가 시대 간격을 뛰어 넘어 소환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후대의 교회들에 의해 계승되는 복음선포 활동 역시 일찍이 모세와 엘리야 시대에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6.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세 제자는 잠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서 모세와 엘리야가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이 광경을 보고는 아주 놀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오래도록 이 상황에 머물고 싶었지만, 예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변화를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의 산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고, 그들이 체험한 하느님의 변화를 산에서 내려가 세상에서 증거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명심해야 할 바가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6).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자 받으신 세례 때에 들려온 같은 메시지였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예수님만 들으셨는데, 이제는 세 제자가 함께 들을 수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7.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변화가 그분이 기도하시던 중에 일어났음을 감안하면, 세 제자처럼 교회가 말씀에 대해서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으면 안 됩니다. 말씀 전례에 있어서는 물론 복음선포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 안에 늘 현존하여 계십니다. 모세의 시대가 다르고, 엘리야의 시대가 다르며, 또 우리의 시대가 다를지라도, 시간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적 범주일 뿐 하느님의 말씀은 이 범주를 초월하여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8. 또한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은 우리를 재촉하여 산에서 내려가게 합니다. 전례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은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서 우리의 삶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초막을 지어서 산에서 언제까지나 머무르고자 하던 베드로의 선택은 틀렸습니다. 이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전례를 거행하되 전례를 통한 복음선포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9. 전례에는 말씀 전례만이 아니라 성찬 전례도 있습니다. 말씀 전례는 성찬 전례를 살아있게 하며 전례 이후의 행동을 방향 지어줍니다. 그래서 타볼산에서도 초막을 지어 산에 머무르겠다던 베드로와 두 동료에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 전례는 예수님의 행동적인 말씀입니다. 당신이 행한 모든 가르침을 기억하고, 당신이 행한 모든 사랑을 계승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전례에서 기운을 받아서 세상에 그 기운을 나누어주라는 뜻입니다.
10.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가르침과 사랑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 가지로 간추려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일과,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일 그리고 서로가 공동으로 합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가 말씀과 성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복음선포를 하도록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재촉하시며 세상 안에서 현존하시는 양식입니다. 이 현존양식에 충실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분의 빛을 비출 수 있게 됩니다.
11. 돌이켜 생각하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세 가지 징표를 알아보지 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 율법을 모르며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소외시켰습니다.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기는커녕 율법을 좀 안다는 자들은 열 가지 계명으로 시작된 율법을 6백 가지도 넘게 방대하게 만들어 놓아서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어서 율법 지식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공동합의성 역시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대사제와 최고의회는 증인도 확보하지 못한 한밤중에 졸속으로 신성모독과 성전모독의 혐의를 뒤집어 씌워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고도 로마 총독의 권세를 빌려 죽임으로써 후환을 아예 없애고자 혁명당원들과 야합한 바리사이들의 꾀를 빌려서 종교적인 혐의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독립을 원하던 유다인들에게 민중봉기를 일으며 로마 황제에게 반역을 꾀했다는 정치적 반란죄를 뒤집어씌우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12. 그런데 교회는 2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시행착오로부터 얻었어야 할 역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나서야 지난 세월에 일어난 교회의 시행착오마저도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서, 위에 언급한 다섯 가지 징표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양식으로 확정하고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거룩한 변화의 요청입니다. 이 요청은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는 초대입니다. 교회의 상층부인 성직자들의 변화 없이 평신도들에게만 변화를 기대했던 노력은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전례 안에서만 거룩한 변화를 맛보려는 유혹이 우리 교회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했듯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유혹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하고, 그래서 교회는 위와 아래, 모두가 함께 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신도들이 거룩하게 변화되려는 자발적 동기가 필요합니다. 거룩한 변화를 전례 안에서만 맛보려 하거나 성직주의라는 종교의 산에 머무르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 거룩한 변화를 이루는 일, 이것이 이번 사순시기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귀에 대고 말씀하신다. <루카 9, 28ㄴ-36> 3월 13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비밀과 중요한 말은 큰소리나 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귓속말이나 조용한 곳에서 들려줍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변모를 알리는 복음에서 주님의 변모 후 제자들을 구름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는 신약의 복음 안의 주님 말씀을 제자들을 통해 듣고 깨달아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듣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을 기록한 성경이 남아 읽고 따르게 하신 것은 참으로 행복입니다.
주님이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된 현상은 잠깐뿐이지만, 주님의 말씀은 인류 역사 안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지가 변해도 내 말은 변하지 않는다.”
주님을 만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야말로 하느님과 통합하고 화합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생명이요, 힘의 원천이요, 삶의 목표이며, 길이며, 진리입니다.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전례기도 중 미사가 제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도 중의 기도입니다. 미사 때 자비를 구하면서 깨끗한 마음을 준비하고 생명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데 오늘 복음이 뭔지 모르고, 어떤 말씀이 내려지는지 모르고 참례하거나 미사 끝에 무엇을 들었는지 알지 못하면 말씀이 내 마음속에 없으며 그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신 말을 천둥소리 같다고 했지만, 제자들은 듣고 전해주셨습니다. 미사 때 그저 천둥소리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거나 말씀의 뜻이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으면 주님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변모가 이루어진 것은 하느님 말씀의 증거자요, 전달자요,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전파자이며 주님을 알리는 전달자입니다. 말씀 없이 전달자가 되지 못합니다. 밤낮으로 주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안에 사는 사람의 기도는 주님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 살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택배 기사처럼 포장된 물건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음식을 장만하여 접대하는 사람처럼 재료, 만드는 법, 맛까지 알고 음식상을 차리는 요리사여야 합니다. “음식은 손맛이다.” 하듯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내 마음, 정성, 사랑이 깃들어 있어야 음식을 먹어서 영양이 되고 몸에 힘이 생깁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잘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먹을 것을 먹지 않고 힘있게 살려는 사람처럼 주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먹고 내 안에 맛있고 멋지게 만들어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야 열심히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하시듯 말씀을 듣고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믿음 없는 삶을 살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함승수 신부님
이형기의 시 <낙화(落花)>중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시의 화자는 온갖 세속적인 욕심과 집착을 떨쳐버리고 '떠나야 할 때'에는 떠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떠남 때문에 나의 '청춘'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그 순간은 사라지겠지만, 그 사라짐을 통해 소중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될 것을 알기에 기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행복은 샘터에 물이 고이듯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충만히 채워진다는 것이지요.
오늘의 말씀은 그 '떠남'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인 창세기는 아브람의 떠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신이 평생 살아온 터전을 떠나왔던 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아브람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주변의 비옥하고 넓은 땅을 그에게 주시고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들처럼 많이 번성하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굳은 믿음으로,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가득한 미지의 땅으로 기꺼이 떠났던 그의 순명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고 그에 합당한 선물을 베풀어 주신 것이지요. 여기서 '믿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원래 ‘그렇게 생각하다’, ‘확신하다’, ‘전적으로 의지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기꺼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리라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그분께 전적으로 의지했기에 가능했던 일임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떠남'이 모세와 엘리야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떠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엑소더스'(Exodus)입니다. 구약성경 탈출기의 영어식 표현이기도 한 이 단어는 '탈출', '해방'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의 세상을 떠나시는 일이 멸망이나 끝이 아니라,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 억압으로부터 탈출하여 참된 생명의 세상으로 건너가는 파스카 여정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남으로써 억압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본모습을 되찾고 자유와 기쁨을 온전히 누리며 살게 되었듯이,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떠나심으로써 당신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는 감추어져 있던 본모습을 되찾고 당신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시리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것은 그 영광을 맛보기로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잠시 맛보았던 예수님의 참된 영광과 거룩함에서 힘을 얻어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게 될 고통과 시련, 두려움과 절망, 부당한 대우와 박해가 아무리 크더라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이겨낼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도 이 지상의 순례여정 동안 주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겠지요.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분처럼 변화할 것이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그 변화의 과정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필리 3,21)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변화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제 욕망과 뜻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잘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가 중에 <임 쓰신 가시관>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후렴구의 가사가 참 인상적입니다.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종말의 순간 주님 앞에 섰을 때, "얘야, 너는 참 날 닮았구나, 날 닮은 모습으로 정말 열심히 잘 살았구나"하는 칭찬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자 영광일 것입니다.
“수녀님은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요?”
조경자 마리 가르멜 수녀(장상연합회 JPIC분과 위원장)
코로나19 이전에 저는 강화에서 살면서 여름철마다 아이들을 위한 생태신앙캠프를 진행했었습니다. 캠프를 시작할 때면 아이들은 핸드폰도 없이 자연 안에서 놀아야 하는 익숙하지 않음을 불평하는 표정이 됩니다.
어느 해 여름, 캠프 중에 아이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데 문득 한 아이가 손을 들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유난히 딴청부리던 아이였습니다. 아이의 질문은 이랬습니다. “수녀님, 수녀님은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습니다. 아픈 지구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소개하는 중이었고, 또 농사에, 교육에 땀범벅이 된 저의 모습이 아이의 눈에 안쓰러워보였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도 모르게 대답 대신 아이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나요?” 그러자 아이는 자기가 직접 본 것처럼 대답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요.” 아이의 즉각적인 대답에 저도 서슴없이 말하였습니다. “맞아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셔서 낫게 하셨어요.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셨다면 어디에서 그분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수녀님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시대에 가장 가난한 이들이 바로 이 생명들이라고 생각해요. 인간만이 아니라 많은 생명들이 기후 위기로 상처받고 있어요. 바로 이렇게 다른 생명을 돌보는 장소로 예수님께서 수녀님을 초대하셨어요. 예수님은 저 가난한 생명들과 함께하고 계시거든요.” 저의 이 대답을 들은 장난꾸러기 아이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캠프 내내 그룹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아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자연 안에서 그동안 몰랐던 생태적, 창조적, 사회관계적 충격이 아이들 안에서 아주 깊은 상처를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상처는 마치 조개의 몸에 모래가 들어가 상처를 내는 것과 같이 다가옵니다. 모래가 들어갔을 때 어떤 조개는 뱉어내려다 제 몸이 썩어 죽을 수 있지만, 어떤 조개는 그 모래를 품어 진주가 되게 합니다. 이 상처, 이 모래는 곧 희망의 씨앗입니다.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어른들 중 거의 대부분은 이 모래를 뱉어내려하고, 이미 절망스러운 미래를 전제하고 희망 품기를 그쳐버렸습니다. 미래에 대하여 아이들만큼 절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품은 한 사람 때문에 오늘 이 세상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린 시절 언니 오빠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 나면 혼자 집에 있고 싶지 않아서 어머니를 따라 밭으로 가곤 했다.
두 고개를 넘어가야 우리 밭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큰 고무 대야에 점심때 먹을 밥과 몇 가지 반찬을 담은 뒤, 머리에 똬리를 얹고 그 위에 큰 고무 대야를 이고는 한 손으로 중심을 잡으신 후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밭으로 향하셨다.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그냥 좋았다. 그래서 혼자 밭고랑에서 조개껍데기 몇 개로 소꿉놀이해도 재미나게 놀 수 있었다.
점심때 즈음이면 논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께서 밭으로 오셨다.
어머니는 고무 대야에 싸오신 밥과 반찬들을 펼쳐놓으셨다.
나는 일한 것도 아닌데 밥맛이 꿀맛이었다.
밭에서 나의 간식은 싱아와 찔레순, 삘기였다.
내가 목마르다고 하니 아버지께서는 산자락으로부터 밭으로 이어진 개울로 나를 데려가셨다.
“아가, 이 물이 약수여”라고 가르쳐 주셨다.
나는 물가로 얼굴을 가져가 삐죽 입술을 내밀어 물을 먹었다.
내 입에도 달았다.
물소리, 바람 소리, 어머니의 호미 소리, 딱따구리와 비둘기와 풀벌레 소리 말고는 없는 밭에서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것은 해가 질 즈음 부엉이가 ‘부우엉’하고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아가, 가자!”라고 어머니께서 다시 고무 대야를 머리에 이고 왼손으로 내 손을 잡으신다.
작은 돌부리에도 잘 넘어졌던 내가 항시 걱정되셔서 그 손을 놓지 못하셨던 것이다.
사실 어머니의 이 염려는 쉰 살이나 먹은 나에게 아직도 “아가,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조심혀”라는 안부 인사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니 나는 항상 내 오른손으로 어머니의 왼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정에 있다.
촌뜨기가 도심에서 봄을 맞이하려니 엔간히 땅 냄새가 그리운가 보다.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려니 가장 먼저 땅과 어머니를 새기고 있다.
발 없는 마음 어머니와 밭으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리운 마음이라도 그 길을 따라 걷도록 잠시 잠깐 내버려 두었더니 제 고향인 땅과 어머니를 금세도 찾았네.
믿는 내 마음이 찾는 고향이 하나 더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머문 기도의 자리이다.
아파트 방 한편에 장궤틀 고여 앉아 눈 감은 채로 주님을 따라가는 기도의 자리이다.
주님께서 초대하셨고, 주님께서는 이곳에서 당신의 생각을 보여주신다.
당신이 가실 길을 생각하시는데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게 되는 시간이다. 그러니 그분이 기도하시는 그곳에 함께 머무는 그 기억이 단지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함께한 기억의 자리가 되도록 예수님께서는 나를 그 작은 장궤틀을 도구 삼아 당신이 머무시는 산을 오르도록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시는지 알아차릴 수 있도록 다 보여주신다.
당신이 가실 길에서 겪게 될 어려움을 아시지만, 예언된 하느님의 아들이 바로 당신이심을 아시는 그분께서는 자신이 끝까지 가기를 바라신다.
기도하는 많은 이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지만 다른 사람들 때문에 고난을 즐겨 받을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그 길을 받아들이신다. 사명을 받아들인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세상을 떠나시게 될 일을 알게 된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과 달라졌다.
무엇에 대한 반영인가?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반영하는 변모이다.
그것이 어떤 환한 빛인지 그려낼 수는 없어도 다만 그분 가슴에 이미 가시관을 끌어안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나도 담대해진다.
나에게는 또 다른 그리운 자리가 있다.
택배 노동자들과 함께 촛불을 드는 자리,
기후위기 피켓을 드는 자리, 삼척화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자리,
탈핵을 외치는 자리,
서울역과 남대문 노숙인들과 함께하는 자리이며,
전쟁을 반대하는 군중 속의 자리이다. 세상이다.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의 자리이다.
함께하면 ‘평화’의 빛깔로 변화되어 번지게 되는 자리이다.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은 오늘 당신 그리움의 대상인 ‘나’, ‘우리’를 기다리신다.
“보소서,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적혀있나이다.”
20대 대선을 떠나보내며
이지혜 체칠리아(CPBC 가톨릭평화방송 작가)
드디어! 20대 대통령선거가 끝났습니다. 내가 한 표를 던진 후보이건 아니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이 땅의 국민들이 선택한 차기 리더 최종 1인이 탄생한 겁니다. 그리고 새롭게 탄생한 대통령과 함께 우리는 앞으로 5년이라는 시간을 살아가야 하지요.
사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재보궐선거까지, 이른바 선거철은 시사프로그램의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대선도 지난 해 하반기부터 각 당의 대선주자가 속속 결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요. 선거 100일을 남겨놓을 즈음부턴 거의 매일 타 방송 시사프로그램들과 비교되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들이었습니다. 각 당의 대선 후보들을 비롯해 선거캠프와 선대위, 선대본 주요 관계자들과 거의 매일 접촉하다시피하며 방송 인터뷰를 요청하고 또 일정을 조정하는 일이 하루일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매일 출석체크 하다시피 공을 들인 인터뷰이가 다른 방송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날은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작가의 능력 부족인 것 같아 하루 종일 심적으로 위축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는 호된 비판 속에 치러진 이번 20대 대선은 또 다른 면에서 깨달음을 주기도 했습니다.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후보 당사자는 물론 배우자와 가족들까지 들추어지는 걸 보면서 ‘아! 정치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구나. 함부로 정치판에 뛰어드는 게 아니구나’, 이런 깨달음이요. 특히 대선기간 내내 제기되는 의혹들은 이게 정말 사실일까 싶을 정도로 상식 수준을 벗어나는 것들이 많아서 혹시 선거 때마다 새로운 의혹을 만들어내는 전문공장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생각될 만큼 상상초월의 사건들이 매일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시사프로그램 작가로서 이런 대선 현안들을 다루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종교방송의 시사프로그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선과정에서 불거진 의혹이나 정책들을 다루기 위해 여당 의원이 출연하면 ‘가톨릭교회가 언제부터 좌파방송이 됐느냐’는 청취자들의 항의성 문자가, 반대로 야당 의원이 출연하면 ‘평화방송이 언제부터 수구보수가 됐느냐’는 항의성 문자가 쏟아졌습니다. 심지어 종교방송이 현실정치에 개입해도 되냐며 후원금을 끊겠다는 협박성(?) 문자까지 간혹 날아왔지요.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교방송은 세상 일이 아닌 종교의 범주 안에만 한정돼 있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은 가끔 답답함을 느끼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넋두리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대 대선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고 나니 이제야 한 짐 내려놓은 듯 어깨가 가벼워집니다. 물론 누군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대선 결과를 놓고 도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새로운 걱정을 안고 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혼란의 시간은 끝이 났고 국민들의 뜻이 모인 새로운 리더는 이미 탄생했습니다.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이젠 마음 모아 함께 나아가야 할 때인 거지요.
그렇다면 앞으로 5년 동안 이 나라를 잘 이끌라고 국민들이 채용한 대통령에게 우리는 어떤 리더십을 바라고 또 원해야 할까요?
물론 사람마다 생각도 다르고 원하는 대통령의 리더십도 다르겠습니다만, 저는 리더십을 말할 때 꼭 전제되었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나는 누구다’라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정확한 인지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그 다음 단계로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문득 2천여 년을 관통해온 예수님의 리더십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누구길래,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없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뜻밖에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 곳곳에 예수님의 리더십을 말해주는 존재론적 해답이 나와 있었기 때문이죠.
“내가 생명의 빵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문이다.”(10,9), “나는 착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포도나무요.”(15,1) 등등 요한 복음 곳곳에 나는 누구라고,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친절하게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직접 소개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존재론적 자기소개 멘트에서 찾을 수 있는 리더십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건 바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빵의 리더십’, 어두운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잘 이끌어줄 ‘빛의 리더십’, 어느 때고 간절히 청하고 두드리기만 하면 활짝 열어 반겨주는 ‘문의 리더십’, 양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착한 목자 리더십’,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내 능력 이상의 열매를 맺게 해 주는 ‘참포도나무 리더십’ 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리더십들을 아우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리더십, 그건 바로 ‘섬김의 리더십’이었지요. 국민들이 대통령 당선인에게 권력을 쥐어준 진짜 이유, 그건 앞으로 5년 동안 ‘국민을 잘 섬기라’는 엄중한 명령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4-1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루카 22,42)
서주현 에드부르가 (전 명지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
저는 응급의학과 전문의입니다. 응급실에서 15년 이상 근무하였고, 진료 경력은 약 20년 정도 됩니다. 특히 마지막 10년 정도는 소아응급실에서 근무하면서, 야간과 휴일에 갈 곳을 찾기 힘들거나 다쳐서 응급처치가 필요한 어린이 환자를 진료하였고, 코로나19 감염증이 발생한 이후 2020년부터는 병원 입구에 임시로 만들어진 선별진료소에서 근무하면서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 하에 열이 나거나 호흡기 증상이 있는 환자, 또는 코로나19 확진자와 밀접접촉을 하여 자가격리된 환자들을 진료하였습니다.
제가 슈바이처라던가 마더 데레사, 이태석 신부님처럼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지역에서 나를 희생하며 살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름 ‘무의촌’에 가서 일할 수 없으면 ‘무의 시간’에라도 일을 하자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힘들 때도 있었지만 잘 버티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한 때 나름 독실한 신자였지만, 주일을 지키기가 어려워지고, 점점 냉담의 길로 빠져들게 되는 부작용도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라고 바리사이파들에게 분명 말씀하셨다는 것을 핑계로 염치없이 냉담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도 받아주실 거야’ 하면서 말이죠.
코로나19 이후 선별진료소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열이 나거나, 호흡기 증상이 있거나, 코로나19 감염이 의심돼서 자가격리 중인 환자들은 다른 환자들과 동선이 섞이면 안 된다는 이유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병원 출입이 제한되거나 진료를 거부당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응급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제 때 진료를 받기 어려운 상황도 많았습니다. 코로나19 방역 규칙은 지켜져야 하지만, 상황이 계속 바뀌면서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의 율법처럼 법에 갇히게 되는 순간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법이든, 인간의 법이든 존재의 이유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교만함으로 인해 앞으로 어떠한 재난상황이 닥쳐올 지 모르지만, 재난상황에 대한 규정을 만들고, 실천한다 하더라도 법에 갇혀있던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꾸짖음을 모두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강만연
오늘 주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면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묘사한 것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성령의 감동으로 복음을 기술한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보면 기도 중에 만난 인물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서를 상징한다는 말씀은 여러 신부님의 강론 내지는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코너를 통해서 여러 번 언급돼서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래서 마치 이 내용이 소설의 복선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구름 속으로 사라지신 후에 하느님의 소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가 울린 것입니다. 그때 보인 것은 예수님의 모습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대해 여러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납니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내용은 베드로 사도가 한 표현처럼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영광만 봤습니다. 그랬기에 초막 셋을 지어 각각 드리고 그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곧 있을 일이신 세상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친 후에 일어나는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인데 베드로는 결과만 본 것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에도 한번 언급한 내용이지만 구두 장사하는 사람은 구두가 눈에 잘 들어올 것입니다. 가발 장사하는 사람은 사람의 머리를 잘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치 세상은 이와 같습니다.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게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관도 결정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우리가 어디에 초점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도 결정될 수 있습니다. 사라지고 말 세상에 마음을 두느냐 아니면 영원한 세상인 천국에 마음을 두느냐 이게 관건입니다. 여기에 따라 결과가 완전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입니다. 이건 바로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끝은 바로 멸망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세상 것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2000년 전 사고로 보면 당연한 내용이지만 이 내용을 현대인 지금 시점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분은 신학을 하는 이유와 성서를 연구하는 목적이 이런 원인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시대가 변하면 성경의 근본적인 뜻을 유지하면서 시대에 맞게 해석하기 위해서 신학자와 성경학자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점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시민은 이런 기대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처럼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와 아울러 당부하신 게 있습니다. 이런 것을 고대하며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 있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으로 어려운 내용이지만 해답이 오늘 복음에 있는 듯합니다. 복음 35절에 나오는 말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입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지금은 하늘의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하지만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에 합당한 조건이 되어야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듯이 말입니다.
2독서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원수로 알것이 아니라 그걸 사랑으로 포용해야만이 우리가 멸망의 길을 가지 않을 것입니다. 독서에서 말하는 멸망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뒤에 나오는 말씀을 문맥적으로 해석해본다면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닮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가 되지 않으면 그게 멸망과도 같은 의미라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독서에 나오는 말씀 속에 드러나는 행간의 의미를 잘 보면 그렇습니다. 이와 함께 또 하나 중요하게 볼 게 있습니다. 세상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는 그게 영광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그게 영광이 아니고 수치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 것은 그 어떤 영광도 영광이 아닐 수 있다는 말씀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논리로는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오로지 하늘나라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하늘나라의 시민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이 주는 달콤함 속에 묻혀 이 세상 것만 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바로 멸망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길임을 오늘 복음이 저희에게 주는 교훈인 것 같습니다.
사순 제2주일 다해 (2022.3.13.)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
사순 둘째 주일이 되면,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 관하여 복음에서 듣습니다. 이를 통해서 교회는,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높은 산에 올라가 주님의 영광을 듣고 보고 맛보고 느끼고 관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성찬례를 통해 부활의 기쁨을 가슴에 안고, 지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용기와 희망을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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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높은 산으로 오르셨습니다(루카 9,28-36). 우리는 이 산을 ‘타볼 산’으로 알고 있지만, ‘높은 산’이라는 표현에서 이 산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하느님의 산, 곧 ‘시나이산’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산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장차 있을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 영광에 빛나는 모습,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참된 당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머지않아 당신이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을 때 제자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0여 년 전 생각이 납니다. 제가 서울 장충동 분원에 있을 때, 분원 가을 소풍으로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북한산 둘레길’을 수도 형제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우이동에서 출발해서 평탄한 길을 걷다가, 마지막 구간에 왔는데 계속 오르막 길이었습니다(저는 등산을 싫어합니다. 내려갈 건데 왜 올라가?). 그 구간 이름은 ‘명상의 길’이었는데, 명상은 커녕 정말 고난의 길, 악몽의 길이었습니다. 낑낑 올라가면서 “도대체 누가 이런 길 이름을 붙였는가” 하고 투덜거렸습니다. 올라가다 올라가다 하도 힘들어서 우리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계속 갈 것인가 아니면 되돌아갈 것인가 심각하게 논의를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분들은 우리가 이렇게 논의하는 것을 보고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린 ‘계속 전진’이라고 말하고 걸었습니다. 그런데 5미터도 채 안가서 내려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탄성을 올렸습니다. 만일 거기서 포기했다면 왔던 길을 터벅터벅 실망을 안은 채 내려가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목표로 한 이 마지막 구간 내리막 길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이 길 이름이 참으로 ‘명상의 길’이 맞다고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인생 길에도, 끝이 없을 정도로 험한 오르막이 있고, 게다가 거센 비바람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운 길도 있습니다.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을 만큼 고통과 슬픔이 엄습할 때, 희망이 사라질 때,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을 만큼 외로울 때, 우리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저 주저 앉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창세 15,5-12.17-18)에서 아브라함 역시 우리와 똑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많은 후손과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땅을 약속하셨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아브라함은 살아 있을 동안 이 약속의 실현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눈앞에는 외아들 이사악 하나밖에는 없고, 또 땅은 커녕 거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 처지였습니다. 게다가 하느님은 외아들마저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모진 삶의 질곡을 지나갔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신뢰했습니다,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가야할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무서울 정도로 깊은 신앙의 인간이었습니다. 진정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의 후손(신앙의 자손)은 전세계를 걸쳐 퍼져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루살렘은 머지않아 당신이 사형선고를 받아 죽어야 할 도성이었습니다. 당신 수난과 죽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지금은 아프고 힘들고 쓰리지만, 이것이 미래의 기쁨을 위한 밑거름임을 인식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위신한 제자들은 미래를 내다볼 영적인 눈을 잃어버렸습니다. 의심했습니다, 투덜거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끝내 절망했습니다. 현실의 위기 앞에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홀로 매달리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나약한 그들을 당신 품에 꺼안으셨습니다.
우리 눈 앞에는 일상을 살아가며 걸어야 하는 구체적인 현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환상이나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갈등, 싸움, 혼란, 분열, 걱정 등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국민의 절반 정도가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또 이것 때문에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을 탓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해외로 우리 눈을 돌려보면,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매일 매일 고통과 공포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피할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 현실 자체가 오늘 우리가 당면해야 할 고통과 죽음과 같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현재에만 매달린다면 찰라의 인생밖에는 살 수 없고 현재의 어려움 앞에 멈춰 서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인생길의 동반자, 인생길의 위로자를 주셨습니다. 바로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화답송(시편 27)에서 노래한 대로,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주님이 우리 편이신데 그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는데, 어떤 일이, 어떤 사람이 우리를 주저앉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을 살면서 찬란한 미래의 완성을 내다보는 영적인 시각으로 인생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깊이 살 수 있고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살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희망에 가득 찬 격려를 해줍니다.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 4,1).
아멘.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간절히
기다리던
봄비가
기도처럼
내린다.
기도는
새로운 변모의
시작이며
모색이다.
기도는
우리 삶의
제일의 가치가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게 한다.
기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거룩한 변모의
핵심이다.
하느님 말씀을
들으려는
기도는
삶의 태도와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환하게 열릴
기도가 있기에
우리는
이 시간을
견디어 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부터
변화를
시작하신다.
너가 아니고
내가 먼저
변모의
시작인 것이다.
이와같이
변화는
적극적인
현실의
실천이다.
실천에 의해
우리또한
변화되고
빛나게 되는
것이다.
욕망의 노예에서
혼탁한 사회를
정화하는
희망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도는 쌍방향
의사소통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변모는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변모한다.
거룩한 변모는
기도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기도는
뜨거운 심장의
소리를 다시
듣게하며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다시 만나게
한다.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들이다.
사람은
사랑의
인격으로
기도와 함께
변모를 지향한다.
변모의
사순 제2주일이다.
예전에는 등산을 좋아해서 산을 많이 다녔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등산을 다녀온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등산을 하겠다고 늘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언젠가 충청도 지역에 강의가 있어서 하루 전에 가서 강의를 할 본당 근처에 있는 어느 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높지 않아서 산책하듯이 정상까지 갈 수 있다는 말에 힘차게 발을 내딛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등산을 하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 순간 정상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정상을 오르는 두 갈래의 길에서 이런 이정표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리 아픈 길. 그러나 빠른 길.’, ‘다리 편한 길. 그러나 느린 길.’
저는 너무 힘들어서 ‘다리 편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편안하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내려올 때에는 ‘다리 아픈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짧은 거리였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금세 내려올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식으로 두 갈래 길이 펼쳐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힘들지만 짧은 길, 편하지만 먼 길처럼 말이지요. 두 길 모두 무조건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장단점이 늘 있습니다. 문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힘들다고 불평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편해서 좋고, 또 시간이 짧다면서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내게 가장 좋은 순간들이 찾아옴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순간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라는 위대한 현현은 우리에게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삶의 신비를 흘끗 보여 줍니다. 흘끗 본 것만을 통해서도 베드로는 큰 감동을 얻었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이 너무나 좋으니 그냥 이곳에 눌러 살자는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구름 속에서의 소리로 명령하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순간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주님의 말씀이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어도,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 분명히 나의 길이 가장 좋은 길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소리로써 사랑의 언어 못지않게, 침묵으로써 사랑의 언어 또한 필요하고 소중하다(이해인).
이웃을 인정하고 있는가?
50년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계신 팔순이 넘으신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면 잘 하는 것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대충 포기하면서 살면 돼.”
이 말을 들은 옆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엄청나게 화를 내십니다.
“당신이 포기한 것이 뭐가 있다고 그렇게 말해요?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는지 알기나 해요?”
그리고 이 둘은 자신의 입장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면서 한바탕 싸우셨습니다.
결혼 생활을 잘 하려면 대충 포기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사실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주변에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허탈한 마음을 갖게 하는 자기 포기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갖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 했습니다.
헨리포드의 말이 생각납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든 당신은 옳다.”
기도의 효과를 알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유튜브 채널 ‘마인드풀 tv’의 운영자가 말하는 명상이 주는 효과입니다. 그녀는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까지 삶이 무너졌지만 신경안정제 하나도 복용하지 않고 명상으로만 자신의 모든 정신적 문제를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명상을 전파하고 있고 구독자수가 상당히 많은 인기 유튜버가 되었습니다. 물론 삶도 매우 생기 넘칩니다.
그녀가 주장하는 명상의 효과는 1. 현실개선, 2. 정신건강을 상승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여줌, 3. 두뇌가 변함, 4. 건강이 개선됨 등입니다. 명상을 주장하는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이 세상을 창조한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 마음 때문에 불안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환경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정마인드’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호흡을 가져와 의식적으로 호흡을 함으로써 자아와의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것이 명상입니다. 모든 불안과 우울, 스트레스는 무의식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호흡을 의식적으로 하면 무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현대 과학자들이 명상을 많이 하는 티베트 스님들의 뇌를 조사한 결과 전두엽이 다른 사람들보다 발달해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물론 게임만 하고 인터넷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뇌는 퇴화한다는 것도 밝혀냈습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노력하여 발전시키고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분이 좋아지니 스트레스에서 오는 병들을 이길 수 있게 되어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도 맞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이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전 세계의 8세 이하의 아이들이 명상을 교육받는다면 우리는 단 한 세대 만에 전 세계의 모든 폭력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이라고 하는 것 안에 주님의 현존을 넣으면 기도가 됩니다. 명상은 자아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놓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바다는 우리의 잠재의식, 혹은 자아라고 하는데 그 자아에 빠져들지 않게 만드는 것이 명상, 혹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부정적인 본성을 기도를 통해 ‘감사’로 이끌라고 하는 것이 명상과 기도의 공통점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한 일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내 마음을 부정적이 되지 않게 만들면 삶이 훨씬 수월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있건 없건 간에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긍정적 마인드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기도나 명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실은 우리가 창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맞닥뜨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 현실 앞에서 어떻게 긍정적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세상에 내려왔지만 인간은 그분을 무시하고 침 뱉고 십자가를 지우고 조롱했습니다. 이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으셨을까요? ‘기도’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타볼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가 어떻게 부정적 현실 앞에서 긍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 주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님은 기도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 계약과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이 꼭 필요함을 되새기십니다. 기도하면 이렇듯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있는 사람이 닿을 수 없는 높은 진리를 깨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왜 어려운 현실이 닥치는지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래서 현실이 부정적이더라도 그 부정적인 현실 뒤에 있는 부활의 영광과 그 열매들을 봅니다. 그래서 힘든 현실도 잘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깨닫는 이런 진리들은 우리 자신을 주님의 뜻에 봉헌하게 만듭니다. 마치 빵과 포도주가 봉헌되면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되돌아오듯 봉헌은 아픈 것이지만 더 좋은 것으로 되돌려주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봉헌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 자기봉헌이 자신과 주의의 현실을 재창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모습이 환하게 빛나셨듯이 나의 본성이 변화됨을 자신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생각과 하나인 줄 알았지만 생각은 뱀과의 대화였음을 깨닫게 되고 그 어둠에서 멀어지며 빛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선택이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사람보다 생각 없이 즐거운 아이들의 얼굴이 훨씬 환하게 빛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빛났던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은 빛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환하게 변하시는 것을 보고는 그 제자들이 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전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40일 동안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빛나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그들은 모세를 보고 하느님의 현존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기도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리더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신 다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더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그 책임자의 말을 잘 따르도록 마음을 이끌어주십니다. 기도는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나와 이웃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인 것입니다.
제가 성지순례 갔을 때 함께 한 인솔자가 사제가 되려다가 나와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결혼하여 아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태중의 아기가 불구로 태어나거나 사망할 것이라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가톨릭신자는 낙태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오는데 병원 문 밖에 나오니 다리에 힘이 풀려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혼자 기도할 수 있는 수도원 성당에 들어가 한없이 울었습니다. 신발을 십자가에 집어던지며 심한 욕까지 했다고 합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리 고통을 주시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시지 왜 죄 없는 아이에게 그러시냐고 밤새 소리소리 지르며 울었다고 합니다. 새벽 동이 터 올 때쯤에는 제정신이 들어 이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비뚤어진 십자고상을 바로 세우고 자세도 바로잡고 한 번만 더 도와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아이는 정상으로 태어났습니다.
리더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체 앞에서 일정 시간만 머물러 있으면 먼저 내가 변화되고 그 다음엔 나에 딸린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가족이나 단체를 이끌려는 사람은 리더의 자격이 없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기도로 채울 줄 아는 사람이라야 참 리더의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작가는 정성과 혼을 다해서 작품을 만듭니다. 그래서 작품에는 작가의 뜻과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도 자기의 작품을 봐주고 인정해 주는 관객이 없다면 서운 할 것입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안목과 지식이 없는 사람이 없다면 그 작품들은 마치 길 잃은 아이와 같을 것입니다. 드라마, 영화, 노래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그것을 감상하고, 웃고, 울어주는 관객이 없다면 아쉬움이 많을 것입니다. 화장품과 옷이 새로운 유행에 따라서 등장하는 것은 화장품을 바르는 본인과 옷을 입는 본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화장품을 바르는 사람도, 옷을 입는 사람도 누군가 봐주길 원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늘의 별과 달을 창조하시고, 구름과 태양을 창조하시고, 꽃과 나비를 창조하시고, 새와 양을 창조하시고, 바다의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창조를 찬양하고, 감사할 줄 아는 존재가 없다면 하느님께서도 아쉬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 같습니다. 인간은 왜 이 세상에 왔는지를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왔으면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어디로 갈지를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까닭 없이 남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먹고 살 만큼 이상의 것을 채우려 합니다. 같은 인간을 죽이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심 분야에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 좋은 음악을 떠올릴 것입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 한 폭의 그림을 생각할 것입니다. 금융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 경제적인 이익과 손실을 따질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봄이 오면 무엇을 심을까를 생각할 것입니다. 원망과 분노가 가득한 사람에게 세상은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세상은 아름답지도 않고, 세상은 악취가 풍기는 더러운 곳으로 보일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사람에게 세상은 불안하고, 허무하게 보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 욕심이 가득한 사람에게 세상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약육강식의 전쟁터처럼 보일 것입니다.
보는 것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입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놀릴 생각으로 무학대사의 드러난 겉모습을 꼬집어서 ‘그대는 돼지처럼 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바라보면서 ‘왕께서는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성계는 ‘나는 그대를 놀리려고 돼지라고 하였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부처님이라고 합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뼈있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돼지의 눈에는 세상이 돼지처럼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세상이 부처님처럼 보이는 법입니다.’ 이 말에 태조 이성계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슬픔과 고통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둠이 깊으면 밝은 빛이 드러나는 새벽이 가까이 옴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면 사랑할 일들이 생기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기며, 세상 모든 것들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오늘의 제1 독서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희 후손들에게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순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예언자들의 대표인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율법과 예언은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외롭고 힘든 여정이지만 예수님을 충실하게 따르면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참된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유명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영광입니다.
히말라야 산행길에서(사순 제2주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히말라야를 오르며 새벽이면 찬물로 세수하고 손을 호호불며 ‘성무일도’를 하고 ‘미사’를 봉헌했다. 엊그제 함께 히말라야를 동행했던 원로 신부님이 동료 사제들과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우리는 히말라야 산행 내내 성무일도와 미사를 드리며 하루를 시작했다네” 하고 말했었다.
식사를 하며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원로 신부가 말을 받았다. “신부님, 히말라야에서 성무일도가, 미사사 왜 필요해요? 그 자체가 기도 아닌가요? 하느님을 마음껏 찬양할텐요!”
철학은 인간 자체를 논하지만 신앙은 인간이 처한 인생을 논한다. 하느님께서 받혀 주어야 하느님께 찬미도 드릴 수 있음을 신앙은 우리게 가르쳐 준다. 아무리 처한 곳이 아름다워 활홀경에 빠지게 한다해도 하느님을 찬양할 신앙의 밑바탕이 없으면 그 찬양도 무의미함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오늘 사순제2주일을 맞이한다. 루카복음 9장 28ㄴ-36절의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 을 제자들이 보게 되고 하느님의 음성까지 듣게 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변모모습을 보게 된 것은 그들 신앙의 바탕이 된다. 이는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신앙성숙의 중간을 알린다.
아름다운 자연 앞에 하느님을 마음껏 찬양함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생각없이 ‘장관이다, 장관이야’라고 한마디 하는 것이 고작 차관(?)일 뿐이다. 그러나 우주만물을 조성하신 하느님을 찬양함과 동시에 그분을 따름은 신앙의 결과이다. “나는 하느님을 뵈었소’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 신앙인은 해야할 본분을 다하며 하느님께 충실해야 한다.
우리 일행은 히말라야 등반을 마치고 돌아올 때, 신자분들이 말했다. 새벽 아침 별밤의 퇴장을 알리는 시간에 함께 드렸던 미사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은혜로운 미사였어요. “거룩한 주님의 얼굴을 보았지요. 이제 우리는 각자 아름다운 그림 한장을 마음에 새기고 내려갑니다”
이틀에 걸쳐 내려올 하산 길을 우리 일행은 힘이 솟아 하루만에 내려와 모두들 기뻐했다. 신앙은 이렇게 우리 안에 커가고 찬미와 찬양이 높아진다.
거룩한 변모
곽승룡 비오 신부님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9,28-29)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다. 변모는 무엇인가 바뀐 것이 아니다. 곧 주님께서는 돌을 빵으로 바꾸는 것을 원하시지 않은 것과 같이 어떤 종류의 마술도 피하신다. 만일 주님께서 본질, 본심이 바꿔서 마술을 부리셨다면 그것은 바로 악마들이나 하는 속임수를 부린 것이다. 변모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면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알아들어야 할까? 주님께서는 변한 게 아니고 바로 주님 당신의 본질이 드러나신 것이다. 변모는 종전 공생활에서 보여주셨던 기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건국이야기에 나오는 신화는 더욱 아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하신 말씀으로 당신의 본질을 보여주셨으나 그들은 잘 알아듣고 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라고 대답을 하였지만, 지금 타보르 산에서는 그 대답을 얼떨결에 했음을 확연히 알게 된다.
이제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질을 말씀뿐 아니라 빛을 통해서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9, 29)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17,2)
빛은 무엇일까?
빛은 풍경을 변화시킨다. 빛은 풍경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다. 물론 빛이 거짓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본질을 바꾸는 것도 아니다. 빛은 본디 그 모습이 잘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다.
필자도 십오륙 년 전 안식년을 어느 수도원에서 보내며 거의 매일 오후 1-2시간 산책을 하였다. 뒷산에 올라 수도원이 어디 있나 바라보고 “아! 저기 있다.”하고 잠시 자세히 보면 수도원이 아니라 비슷한 사회복지 시설이다. 장소가 변하고 바뀐 것이 아니라 나의 눈이 잘 못 본 것이고 시야가 바뀐 것이다.
이같이 세상이 변화는 것이 아니라 내 시각이 변한다는 것이다. 해가 환할 때는 산 아래 경치는 아주 선명하게 잘 보이고 풍경도 매우 아름답다. 그런데 날씨가 흐려서 햇빛이 약할 때는 아름다운 풍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본래의 그 풍경이 변한 것이 아니다. 빛은 풍경을 더 아름답게 잘 보이고 내 살던 곳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결국 세상은 본디 아름다운데 나의 시야가 좁던지 흐리게 되어서 그 본질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빛은 영성가들이 두 가지로 말한다. 외적인 빛의 감각들과 내적인 빛으로서 마음과 정신이다. 외적인 빛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관들 눈, 코, 입, 귀, 손, 몸으로 느끼지만 내적인 빛은 마음과 정신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일까 빛이 마음과 정신에 온다. 그순간 그 정신이 뭔가를 본다.
그 빛은 마음과 정신 안에 비추어 오고, 그 빛을 통해서 우리는 그 대상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다. 베드로는 평소에 마음과 정신으로 내적인 빛을 통해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강렬한 주님의 빛이 비추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주님 본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세상을 변모하게 할까?
그것은 빛과 사랑이다. 바로 빛과 사랑이 세상을 변모하게 한다. 사랑의 실천과 환한 빛이 세상을 아름답게 그 본질이 잘 드러나도록 한다. 사랑으로 출발한 원의가 일하고 우리 환경을 변화하게 한다. 사랑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참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면 세상이 변하게 된다. 그 빛과 사랑은 바로 주님과 성령으로부터 기인되는 세상 변모의 원천이자 뿌리이다. 사랑이 세상을 변모케 한다.
타보르 산위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신앙의 본질을 또한 제시한다.
죽음이란 믿는 이들에게 거룩한 변모 곧 부활신앙으로 가는 시작이라면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끝이요 마침이기에 변모도 없는 것이다.
부활은 세상에서 태어난 우리가 서로 사랑과 빛으로서 변화되어 가는 그리스도신앙의 본질이며, 세상은 우리의 삶이 성령의 내적 빛과 사랑으로 살아갈 때 변화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문한림 주교님(아르헨티나)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나옵니다!
우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타인의 관심을 끌려고 합니다. 옷차림,장신구, 문신, 유행에 앞서거나 혹은 타고난 재능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 고유의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예수님의 변모와 그 아름다움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빛을 발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분은 총애하는 세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 후 그곳에서 기도하던 중, 그분의 얼굴과 입으신 옷이 눈부시게 하얗게 변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그분의 얼굴이 마치“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과 같이 하얗다고 표현했습니다. (마태오 복음 17장 2절 참조)
지난주일예수님께서는 유혹당하심을 통해 진정한 인성을 지니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그분은 눈부신 아름다움을 통해 진정한 신성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는 내 아들이니…”라고 확고하게 증거하십니다. (v 35) 그분의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 하느님과 온전한 통교를 이루시는 데에서 기인합니다.(히브리서 1장 3절, 요한 복음 14장 9절 참조) 즉, 그분의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정체성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과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들로 재창조되었습니다.(에페소서1장 4-5절 참조) 그러므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보물을 우리 마음에 간직합니다. 그리고 바오로 성인은 ‘그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표현하였으며 우리는 그 보물의 형상입니다.(고린토서4장7절참조)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운 보물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하지못할까요? 그것을 방해하는 두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번째, 우리는 내면에 간직한 보물의 형상을 죄와 악습과 상처로 덮어버리거나 손상시키고 더럽힙니다. 이는 우리가 거울을 더럽히거나 손상시키고 깨뜨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의 형상을 복구하고 치유하며 깨끗이 정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고백성사 입니다.
우리가 눈부시게 아름답지 못한 두번째 이유는, 내면의 형상이 깨끗하게 치유되고 복구되었다 할지라도 우리 내면의 아름다움이 밖으로 우러나올 수 있는 소통의 통로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먼저, 하느님을 향해 귀가 열려 있어야 하며,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 사랑을 받기 위해 열려 있어야하며 또,우리 형제들과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입은, 하느님을 찬양해야 하며 미소를 머금고 형제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사랑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하느님을 향해 관상적이어야 하며 형제들의 부족함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손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펼쳐져 있어야 하며,또 이웃형제들을 돕기 위해 열려 있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발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모든 이들에게 전달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소통의 모든 통로를 통해, 우리 내면에 지니고 있는 그 보물이 빛을 내며 비로서 우리의 아름다움은 예수님이 발하신 빛처럼 성스럽고 눈부시게 빛이 납니다.
이 사순 시기에 우리들 내면의 형상에 관한 위의 두 가지 면을 잘 보완한다면, 이번 부활절은 신성한 보물로 우리 내면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화장술이나 옷차림, 인간적인 겉치레도 신이 주신 이 아름다움을 능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버지 하느님을 닮아가는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한 걸음 더 내딛으라”고 초대하십니다.그리고 우리의 아름다움은 노화되어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오히려 점점 더 찬란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총애하시어 “눈부시고 아름답게 빛나는 이”가 되도록 선택하십니다! 아멘.
교황의 사도적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 1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교황은 사도적 권고 사랑의 기쁨 서문에서 “가정 안에서 체험하는 사랑의 기쁨은 또한 교회의 기쁨”이라고 밝힙니다.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라고 상기하면서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때에(요한 16,13 참조) 일치하게 될 것이며, 특별히 개별 국가나 지역이 자기 문화에 더 적합하고 그 전통과 지역의 요구를 잘 반영하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사도적 권고는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혼인과 가정이라는 선물을 소중하게 여기고, 관대, 헌신, 선의, 인내의 미덕으로 충만한 강한 사랑을 지킬 것을 제안하며, “가정은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회”라고 선언하십니다.
제1장 말씀에 비추어 보기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의 가정(창세 4장)에서부터 신부와 어린양의 혼인잔치 이야기(묵시 21,2.9)까지, 가정과 출산, 사랑 이야기와 가정의 위기에 관한 내용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고 하시며,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는 명에 따라, 서로 사랑하며 생명을 낳는 부부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참되고 살아 있는 조각품입니다. 인간 부부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으로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는 길을 마련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시며, 이는 가정을 통하여 현실에서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하느님 가정 안에서 바로 그 사랑이 성령이십니다.”라고 보았고, 사도 성 바오로는 이러한 부부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와도 연관된다고 보았습니다(에페 5,21-33 참조).
한 남자가 동물과 세상이 해소해주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외로움을 덜어 줄 수 있는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창세 2,18.20)를 애타게 찾아, 눈과 눈이 마주치는 관계와 만남은 새로운 탄생과 가정을 이룩해 냅니다. 혼인 결합은 성적 육체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을 스스로 내어 주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한 몸이 되고, 두 사람의 몸을 물려받아 자녀는 부모와 유전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결합됩니다.
올리브 나무 햇순과 같은 자녀
부모가 가정의 토대라면, 자녀는 가정의 ‘살아 있는 돌’과 같습니다(1베드 2,5 참조).
신약 성경은 ‘집에 모이는 교회’(1코린 16,19; 로마 16,5; 콜로 4ㅡ15; 필레 1,2 참조)를 언급하며 가정의 생활공간이 가정교회로 바뀔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보라, 내가 문을 두드린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라고 하심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 함께 드리는 기도, 주님의 축복이 가득한 가정을 그려보게 됩니다.
성경은 가정을 교리교육의 자리로 제시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신앙의 전수 방법을 가정에서 배웁니다. 성경의 현자들은 부모에게 교리교육의 중대한 책임이 있다(잠언 3,11-12; 6,20-22; 13,1; 22,15; 23,13-14; 29,17 참조)고 이르며,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탈출 20,12)고 명합니다. 복음은 자녀가 가정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들만의 삶의 길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정 안에도 다른 차원의 더 깊은 유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고통과 피의 길
성경은 현실 안에서 가정을 깨뜨리고 또 그 삶과 사랑의 내밀한 친교를 깨뜨리는 고통과 악과 폭력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시자마자 곧바로 다른 나라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시몬의 장모를 방문하시고, 야이로의 딸과 나자로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시며, 그들의 애절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간질병 걸린 아이와 마태오와 자캐오와 죄많은 여인에게도 말씀을 건네시며 가정이 겪는 걱정과 갈등을 아시고 이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추상적인 나열이 아니라 어려움이나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가정의 위로가 되고 그 여정에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가정에 여정의 목적지를 알려주며,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때에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묵시 21,4)
네 손이 하는 일
가장은 가정의 물질적 안정과 평온을 위하여 직접 손으로 일하는 노동자로 나옵니다.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을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시편 128[127],2) 또한 노동을 통하여 사회가 발전하게 되고 가정은 생계를 유지하며 안정과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잠언은 어머니의 가사노동도 보여줍니다(잠언 10,10-31). 룻기와 장터에서 할 일 없이 서 있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에서 시업과 고용 불안으로 야기되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몸소 만나 경험하신 이야기를 통해 고용 기회의 부족과 가정생활의 안정에 피해를 주는 사례들을 알려주십니다.
인간이 마치 폭군과 같은 자세로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며 이기적이고 심지어 잔인한 방법으로 자연을 착취한 죄로 야기된 사회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는 지구의 사막화(창세 3,17-19)와 사회적 경제적 불균형을 야기합니다. 이를 엘리야 예언자(1열왕 21장)를 비롯하여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지적(루카 12,13; 16,1-13)하고 계십니다.
온유한 포용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계명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내주는 것을 당신 제자의 분명한 표징으로 제시하십니다(마태 22,39; 요한 13,34).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더 가치 있는 삶을 살라고 타이르시며, 사랑은 또한 자비와 용서라는 열매를 맺어주십니다(요한 8,1-11).
그리스도인 혼인과 가정생활의 핵심인 사랑은 온유함이라는 덕목을 제시합니다. 시편 131편에서 어머니와 아기 사이의 섬세하고 따스한 친밀함을 엿봅니다. 아기는 젖을 먹고 나서 어머니 품에 안겨 잠이 듭니다. 이는 단순한 생물학적인 것을 넘어 의식적인 친밀함입니다.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시편 131)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호세 11,1.3-4)
믿음과 사랑, 은총과 약속, 인간 가정과 삼위일체 하느님을 포괄하는 이러한 시각으로 우리는 가정을 바라봅니다. 가정의 일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를 따르는 것이며, 아이를 낳아 기르며 교육하는 활동은 하느님의 창조 활동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날마다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읽으며 성찬의 친교에 함께 참여하여 사랑을 키워나가며 성령께서 머무시는 좀더 완전한 성전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가정들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가정이 직면한 도전에 마리아처럼 용감하고 침착하게 맞서며 하느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루카 2,19.51). 가정생활을 몸소 하신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를 충분히 전해주십니다.
참 인간의 거룩한 변모
서동신 신부님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참 인간의 거룩한 변모를 통하여 당신의 신적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어떤 이 세상의 마전장이도 만들지 못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고 예수님의 인간적인 얼굴은 신의 얼굴로 거룩한 변모를 하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예수님, 참 인간의 거룩한 변모로 당신 수난 죽음 예비하시니 인간 세상 모든 조물, 천상 복락 구원 위한 복된 그리스도 수난이라네.” 노래가 흘러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피 3,21)라고 확신에 차서 믿음으로 외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모두 본래의 천상 영광 하느님 자녀임을 회복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 강생해 오셨고 당신의 사명, 소임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서 참 인간의 거룩한 변모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우리들에게 얼마나 슬픈 일이 되겠습니까?
만약 참 인간의 거룩한 변모가 없다면 희망이나 목표가 희미해져 버린다면 그래서 열정이 식어 버렸다면 참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어리석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니 우리 모두 거룩히 변모하는 참 인간-참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갑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들, 딸입니다. 그 어떤 어둠의 세력도 끊지 못할 것입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찬란한 천상 영광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믿으면서 천국가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 합시다. 아멘.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왔고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습니다.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Sermo 51,3-4. 8: PL 54,310-311. 313)
주님은 당신의 뽑으신 증인들 앞에서 영광을 드러내시어 당신이 지니신 우리와 똑같은 그 육신의 형상이 광채로 빛나 그분의 얼굴은 태양처럼 밝고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어졌습니다. 주님이 당신의 모습을 변모시키신 것은 제자들의 마음에서 십자가 상의 죽음으로 초래될 실망감을 없애 주고, 주님께 숨겨진 위엄의 탁월성을 드러냄으로써 자원하신 수난의 치욕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신앙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주께서는 또 당신의 모습을 변모시키심으로 성교회에 희망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즉, 이 변모로 인해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는 자신에게 일어날 변모의 형태를 깨닫게 되고, 지체들은 이미 그 머리에 비추인 영광의 한몫을 미래에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위엄 중에 다시 오실 것을 예고하실 때 이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사도 바오로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서간에서 또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기적으로써 사도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시고 그들에게 더 완전한 지식을 주시고자 그 안에서 또 다른 교훈을 주십니다. 그때 주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 즉 율법과 예언자들이 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다섯 명 앞에서 일어났으므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증하라.”는 성서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신구약이 선포하는 말씀을 다 포함하고 복음의 교훈을 구약의 가르침과 일치시키는 이 말씀보다 더 확실한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신약과 구약이 서로를 보충해 줍니다. 과거의 징표들을 통하여 신비 속에 약속된 분이 현재의 영광의 광채를 통하여 환하고 확실하게 제시됩니다. 복음사가 요한이 말했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왔고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예수님은 당신의 현존으로써 예언자들의 진리를 확인하시고 당신 은총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심으로써, 당신 안에서 예언자들의 상징적 약속과 율법 규정의 목적들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들음으로써 모든 이들은 신앙이 굳세어져 누구도 세상을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누구도 의를 위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누구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신다는 데에 의심을 갖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수고를 통해 안식을 얻고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성의 연약함을 친히 걸머지셨으므로 우리가 그분에 대한 신앙과 사랑에 항구하다면, 우리는 그분이 얻으신 승리를 얻을 것이고 그분이 약속하신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 하거나 시련을 인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선포하신 그 말씀이 우리 귀에 쟁쟁히 울려야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생명 아닌게 없다.
최민석 신부님
올해는 유난히 꽃이 아름답다. 날이 많이 따뜻해져 꽃이 예전에 비해 훨씬 먼저 피는 것 같다. 개나리는 더 노랗게 피어오르고 있고 진달래는 연분홍 색깔이 곱기도 하다.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벚나무 끝이 붉은 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백목련 꽃망울이 앙증스레 올라온다.
세상 전체가 생명 세상, 생명 잔치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축제 직전의 분위기다. 밖에는 온갖 생명이 살아 깨어 출렁거리니 내 마음에도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툇마루 있는 쪽의 문과 방문을 함께 열어 놓으니 바람이 방안을 자유로이 건너다닌다. 봄날 밝은 햇살과 바람을 빼놓을 수 없다. 바람과 햇살이 봄기운을 더욱 북돋는다.
아침에 맑은 바람 오가고 밝은 햇살 비추는 창 앞에 고요히 않아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충만하다. 몸과 마음이 온화한 상태로 돌아오고 정신이 맑아지며 몸에 있는 나쁜 기운들이 소리 없이 빠져 나가는 걸 느낀다.
어제 하루 허물없이 살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좋은 사람을 만난 시간에 대해 기뻐하며, 큰일을 하지니 않았지만 큰일 아닌 게 없고 좋지 않은 일 없다. 모두가 좋아 보인다. 살아있다는 것이 참 좋다. 원망을 듣지 않고 보낸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동안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번져 나간다. 모두가 살아있는 덕분이다.
인생사 일장춘몽이라는 말이야말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이 모두 꿈이니 언제고 꿈에서 깨어날 수밖에 다른 무슨 뾰쪽한 수가 없지 않는가. 태어났으니 언제고 죽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말이다. 꿈은 꿈을 꾸는 동안에만 길하고 흉할 뿐이다.
깨어나면 모든 꿈이 ‘좋은 꿈’이다. 깨어나기만 하면 있는 그대로 좋은 것이다.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이든 그 어떤 감정이든 그 어떤 상황이든 다 이유가 있다. 그 모든 것에는 하느님의 어떤 선한 의지가 있는 것이다. 나쁜 일(것)은 무엇 하나도 없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그저 내 생각일 뿐이다.
어째서 하느님이 선이요 사랑인지도 알게 된다. 깨어나는 그 순간, 꿈꾸는 세상이 재미있고 흥미진지하다.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꿈이다. 꿈을 꾸는 것을 알아차리며 꿈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깨어난 상태로 꿈을 꾸면, 받아들이지 못할 경험이 없고 용납 못할 상황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들을 참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멋지게 잘사는 것은 하늘 아래서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다. 인생은 비록 짧아도 하느님께 허락받은 것이니, 그렇게 살 일이다. 이것이 인생이 누릴 일이다.”(코헬렛 5,17)
솔로몬으로 하여금 이런 말을 하게 한 것은 다음에 한 마디로 요약된 ‘깨달음’이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코헬렛 1,2) 이 말을 풀어서 이해하자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알고 보니 꿈이로다. 내가 사는 삶이 사실은 한 바탕 꿈인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보는 세상도 그렇지만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감정이 다 꿈인 줄 알면 내게 일게 일어나는 생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지켜 볼 수 있다.
이 세상 한 바탕 꿈이다.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아는 것이 전부다.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배고파도 배고픈 줄 모르는 것 병이다. 이는 마비증상이거나 중독에 빠진 상태이거나 아니면 이미 죽어있거나 하는 상태이다.
찬물을 먹으면 찬 줄 알고 더운 물을 먹으면 더운 줄을 알고 그 찬물과 더운 물에 사로잡혀 휘둘리지 않으면 된다. 찬물은 멀리하고 더운 물만 좋아하거나 더운물을 멀리하고 찬물만 좋아하는 것이 병이다. 병인 줄 알면 병이 아니다. 지 않으면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좋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5-48)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알되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싫은 것을 싫은 것으로 알되 그것을 뿌리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지금 이대로의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본래 마음 하느님 마음자리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깨어 있는 신앙인의 삶의 모습이다.
봄이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온 우주가 생명으로 충만하다. 생명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완전하다 사실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다. 이미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 이루시는 일이기에 봄에 드러나는 모든 생명들에서 그 충일하고 충만한 힘과 기쁨을 발견한다. 놀랍고 신기한 봄이다. 이 봄을 즐기고 누릴 수 있어서 좋다.
'그분 빛으로 그분 덕에'(루카 9장 28ㄴ~ 36)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얼굴 모습이 변하셨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들렸다ㆍ
성형 외과를 찾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연예인의 사진을 의사에게 내밀며 이 사람처럼 해달라고 ‥
얼굴은 변화할 수 있어도 속까지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처럼 얼굴이 변하고 가장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마음이 변하고 그 마음이 얼굴로 드러나는 묘약같은 힘이 있습니다.
당신은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빛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이 보여 뒤로 주춤하거나 때로는 도망치는 사람이 있는데 ~ 그러지 마십시오.
그분 빛으로 그분 덕에 당신이 빛나게 될테니 머무르십시오!
내가 빛나는 은총이 주어집니다ㆍ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 3, 21)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십시오.
오늘은 사순 제 2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9, 28~36)에서는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시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제2독서(필리 3, 17 ~ 4, 1)에서는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하신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의 몸을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이라고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 3, 20~21)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큰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 육신과 영혼으로 된 몸으로써 살고 있지만, 그러나 이 몸은 죽음을 겪고 땅에 묻혀서 썪는 육신이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부활하여 부활한 육신과 영혼이 다시 결합해서 영광을 입을 사람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을 따르며 주님께로부터 인정받은 사람들은 하늘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으로서 온전한 기쁨과 평화의 안식을 주님과 함께 영원히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빛나는 모습으로 영광을 입기 위해서는 바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되겠지요. 주님을 따른 사람들은 참으로 모범적인 사람이며, 사도 바오로는 바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다 함께 나를 본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 보십시오." (필리 3, 17)
그리스도와 친구가 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친구이며 또 예수님을 주님으로 맞아 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 바오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필리 3, 18~19)
우리는 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죽음의 세계를 겪은 이후 종말에 가서는 땅에 묻혀 있던 육신도 하느님의 전능으로 다시 부활하여 흩어졌던 영혼과 다시 결합하여 부활한 몸으로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한 번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대단한 영광과 은혜를 입을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광의 대열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님 편에 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이 영광을 입는 척도는 우리가 이 지상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을 살 때, 그런 영광의 몸으로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합시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필리 4, 1)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주님께서 분부하신 삶의 규칙을 따라,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세상을 고대하며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그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죽음을 거쳐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며, 하늘나라의 시민들 모두가 예수님의 은혜로 빛나는 영광의 몸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의 목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의 몸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 것이며,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으로 가꾸어 나가는 그리스도인의 지혜를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비록 죽음을 겪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영광스럽게 변화할 비천한 몸
한민택 신부님
오늘 복음은 몇몇 제자와 산에 오르시어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이 신비로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그분께서 겪으실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수난과 부활을 통해 당신의 지상 여정을 마무리할 결심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 사이에 자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 ‘당신을 따르는 길’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산에 오르시어 영광스럽게 변모하십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신 다음 두 번째로 예고하시고,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옮기십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구름 속에서 들린 아버지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세례 때 들은 말씀과 유사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인간 구원을 위해 죄 많은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시어 인간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일치한 것이라면, 예루살렘을 향해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걷고자 하심 역시 고난의 길 한가운데서 인간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려는 아버지의 뜻과 일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신앙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 그분처럼 변화할 것이며, 우리는 이미 그 과정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
바오로 사도의 이 희망의 말씀처럼 우리의 몸이 영광스럽게 변화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닥치는 고난을 피할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신 주님과 함께 참고 견디어 이겨내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을 피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 본성은, 구원을 위해 없애거나 부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이 실현될 구체적인 장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몸은 비천합니다. 질병과 죽음의 공포뿐 아니라, 갖은 시련과 고난이 도사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말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러한 비천한 몸 한가운데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시련을 통해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참고 견디면, 주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으로 고대하면서 계속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변화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순간은 우리가 성장하고 변화하기 위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한 계기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영적 용기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도록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특별했던 아름다움의 기억
김혜윤 수녀님
무수한 의심과 의혹, 망설임과 절망은 두려움 때문에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사랑하기 때문에,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그 사랑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그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온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그들의 사랑을 더 완전한 것으로 하기 위한 또 다른 시간과 공간에 초대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수난과 죽음에 앞서 그분의 가장 본래적인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그것을 기억하며 간직하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인데 이 경이로움의 순간에 오히려 그들은 두려움을 느낍니다.(루카 9,34 참조) 모든 영광과 수난, 아름다움과 두려움은 한 가지 사건에 대한 다른 측면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사실 그분의 수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고, 이는 수난이야말로 진정한 영광에로 들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임을 암시합니다. 언뜻, 스치듯, 보거나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가짜가 되는게 아니듯, 제자들은 잠시 보았던 예수님의 영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힘’으로 삼아 수난과 죽음의 어둠을 견뎌냅니다. 아무리 혼란과 절망, 부당함과 부조리한 비극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선을 기억하는 것, 환멸과 고통이 우리의 믿음을 훼손시키지 않게 단단한 마음을 가지는 것, 우리가 그분처럼 영광스럽게 변모되기 위한 길입니다.
■ 복음의 맥락
교회력은 가·나·다해로 진행되며 해당 시기마다 각기 다른 본문들을 읽게 되지만, 사순 제2주일에는 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읽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안에 숨겨져 있던 그분의 신적 초월성과 거룩함을 장엄히 선포하는 내용으로서,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 모두가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다’해 사순 2주일에는 루카 9,28-36이 봉독되는데, 루카복음서에서 이 부분은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9,22 이하)와 예수님을 따르려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내용(9,23-27) 다음에 등장하고, 이는 이제 곧 시작될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이 하느님의 거룩한 계획 속에 있는 사건임을 인식하고 준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 영광에 싸여
루카복음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다른 복음서들과 차별화된 점이 있다면,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이 함께 나눈 대화의 내용에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9,31)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문장에서 “세상을 떠나실 일”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표현은 “그분의 엑서더스”(Exodus, 텐 엑소돈 아우투)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완성하실 일은 ‘예수님의 엑서더스’(출애굽 혹은 탈출, 해방)인 것이고, 이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여정 전체를 가리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대표하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들은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완성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32절) 이 초월적 계시를 보게 되는데, 갑자기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34-35절) 들려옵니다. 이 특별한 현현(顯現)의 목적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의 말을 듣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 연기 뿜는 화덕과 횃불
수난과 영광의 밀접한 연관성은 제1독서에 등장하는 아브람(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에게도 해당됩니다. 독서의 본문은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창세 15,5)시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데리고 나감’이 곧 엑서더스이고, 칼데아의 우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하느님은 아브람을 자신의 거처에서, 곧 자신에게 안락한 익숙함에서 밖으로 나오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그분께로 가기 위해서는 늘 나오고 떠나는 여정이 필요함을 알려주는 것이며, ‘밖으로 나온’ 아브람에게 이제 하느님의 선물과 약속이 주어집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5절) 마치 아브람에게 최상의 미래가 약속된 것처럼 들리지만 여기에도 냉혹한 시험이 숨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내 사라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임을 잘 알고 있던 아브람에게 거대한 후손에 대한 약속은 지금까지의 모든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를 믿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6절) “믿으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만’(‘아멘’과 동일한 어근을 가짐)이며 이 말이 동사(히필형)로 사용될 때 ‘그렇게 생각하다’, ‘그렇게 확신하다’, ‘전적으로 의지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을 아브람은 진지하게 믿고 받아들이고 의지했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시는데,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체다카’ 역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모순과 불가능성에 휘둘리지 않고 그 관계를 항구히 유지하는 자세를 말하며 하느님은 아브람의 이러한 관계적 모범을 올바름으로 인정해주십니다.
아브람이 불가능과 의심에 훼손되지 않고 당신을 굳게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은 이제 ‘약속’을 ‘계약’으로까지 발전시키십니다.(18절) ‘계약’(契約: 맺을 계, 묶을 약)은 서로의 관계가 묶여지는 약속을 말하며, 고대 근동의 계약은 제사가 동반되는 일종의 ‘예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제물을 잘라 놓고(그래서 유다인들은 ‘계약을 맺는다’고 하지 않고 ‘계약을 자른다’[히브리어 카라트 베리트]고 함) 그 사이를 계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며 계약 내용을 선언했는데, 이는 계약을 어길 시 두 동강난 제물처럼 될 것임을 맹세하는 행위였습니다.(예레 34,18-20 참조) 하느님은 당시의 관습대로 제물을 가져오게 하시어 반으로 잘라두고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17절)로 등장하십니다. 특이한 점은 계약 당사자들이 제물 사이를 지나가지 않고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로 나타나신 하느님만이 제물 사이를 지나가신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계약 준수의 의무에 귀속되고, 아브람은 계약을 지키지 못할 경우 감당해야 할 비극에서 제외시키시는 듯한데, 이는 인간에게 그 어떤 저주나 손해, 피해도 주지 않으시고 오직 무상으로 당신의 사랑을 전해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의도를, 되돌릴 수 없는 계약을 통해 선포하시는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살면서 우리를 진심으로 감동케 하고 매료시킨 아름다움은, 인간이 감수해야 할 모든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인내하게 하는 가장 힘센 기억이며 능력이 됩니다. 그 아름다움이 경이롭고 충격적인 것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제자들과 아브람이 목격한 하느님 현존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불가능과 고통을 견디게 하는 강력한 촉매제이며, 지켜내야 할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혼란과 절망, 환멸과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내게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던 일을 지켜내는 것,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의 자세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목격한 후 조용하고 담담하게 수난을 기다리는 시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을 때 우리의 몸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제2독서, 필리 3,21) 조금씩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변모
김상열 신부님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희생과 극기를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여 주님의 부활 축제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러 므로 교회는 사순 시기의 각 주간마다 고유한 주제를 가지고 독서와 복음을 배 치함으로써 신자들이 보다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사순 제2주의 고유한 주제는 ‘거룩한 변모’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특 별히 중요한 때마다 대동하시는 세 제자(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사도)와 함께 산(다볼산으로 추측) 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 중에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함께 나타나서 주님의 수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고 루가 복음사가는 전 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앞으로 받으실 당 신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 곁에 함께하시며 주님과 말씀을 나누셨다는 것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구약의 율법과 엘리야로 대변되는 모든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나타난 것과 같이 주님의 구원은 오로지 수난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 함이며, 그 끝은 주님께서 다볼산에서 미리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제2독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통받고 있는 필립비인들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 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 의 미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0-21) 이 말씀은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희생과 극기를 통하여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당신이 본격적인 수난의 길로 나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우리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라 확고하게 보답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현장체험을 해보면 어떨까?
윤현식 신부님
본당에 나오는 초중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 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해맑고 귀엽다고 생각한다. 어찌 이 런 생각을 나만 하겠는가? 물론 그들 나름대로의 고민과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학생들이 갖는 꿈과 이상은 충분히 그것들 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본당에서는 학생들의 꿈을 미리 맛보기 위해 현장체험을 많이들 한다. 유명 음악회 감상, 월 드 클래스 스포츠 관람, 드라마 촬영장 방문, 신학교 방문, 테마 여행, 순례 등등……. 이럴 때 아이들은 힘과 용기를 갖고 신명나 게 빛을 낸다. 아이들이 꿈을 이룬 거룩한 변모라 할까!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체험들이고 결국엔 꿈을 이룬 현실이 된다.
사순 제2주일이면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한층 깊어져야 하는데, 복음의 내용은 의외로 부활을 예표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이다. 십자가상 죽음 이후 부활 때에 있을 이 사건 을 앞당겨서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 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주님의 수난을 목격하게 될 측근 제자들에게 그때를 대비하여 미리 용기를 북돋아 주자는 것이다. 복음의 말씀처럼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러 산에 오를 때”(루카 9,28)에만 매년 반복 되는 고리타분한 일상의 사순시기를 넘을 수 있다. 산은 하느님을 더 깊이 가깝게 체험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다. 제자들은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와 그것을 완성하 실 예수님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초막 세 개를 짓고 영원히 살고플 정 도로 매혹적이며 신비로운 체험이었고 은혜였다. 천상의 체험이 주는 행복이 제자들에게 지속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이 그들의 십자가를 요구한다. 그러나 은혜와 체험에서 받은 용기와 힘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게 한다.
“사순은 부활의 관문이며 부활은 십자가 끝에 달려 있다”고 한다. 부활을 향한 이번 사 순시기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현장체험을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떨까?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권능으로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그 체험을 주실 것이다.”(필리 3,21) 아멘!
“괜찮다”
김동영 신부님
기도하시며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 뒤로, 졸음을 참지 못하는 제자들이 보입니다.
밤낮없이 스승님을 따른 탓인지, 제자들은 고단했나 봅니다.
땀 흘리며 오른 산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제자들의 하루하루 같습니다.
스승님을 제대로 따르기에는 아직 미숙하고 제 십자가가 버거운 제자들입니다.
쉬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 속에 오히려 연민과 자비가 차오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당신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설 수 있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어쩌면 제자들에게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꼭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 영광을 위해서 스승님처럼 십자가 죽음을 거쳐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이 제자들에게 위로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다시 일어서서, 스승님을 따르는 삶을 새롭게 시작(회개)하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천상 희망을 선물하십니다.
고난의 삶을 받아들여 영광 속에 머물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에게 야훼 하느님께서 주셨던 그 위로가 제자들에게도 주어집니다.(탈출 33,7-11; 1열왕 19,9-18)
베드로가 했던 서약처럼, 굳이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순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도 구름 속에서 빛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 곁에 쓰러져 쉬고 있는 제자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많은 시련과 유혹에 맞서야 하기에 늘 적지 않은 수고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더군다나 우리 각자의 십자가도 그리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때문에 주님처럼 나름 기도 안에 머물러 보지만, 여전히 부족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럼에도 청해봅니다.
가끔은 지쳐 쉬고 있는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당신 자비의 눈길을 보이시고, 당신 영광의 짧은 순간이라도 허락하시기를 말입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처럼- 당신 말씀에 따라 누군가를 섬기고, 그를 위해 용서와 희생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모든 이들의 얼굴로 우리와 마주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사랑으로 빛나는 그들이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던 변모된 주님이 아니실는지요.
괜찮다고, 다시 일어서서 당신을 따르라 하시는 주님께, 당신 영광의 빛으로 사순 여정의 힘을 북돋우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십자가를 꼭 끌어안고 그분을 따라 걸읍시다!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 세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대화합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발견하게 된 과정(過程)을 알립니다. 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말은「구약성서」에 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본, 그분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특별한 교감(交感)을 하며 사셨던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이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킨 것은 초기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을 알아듣는 데에 그분들의 역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깨달음으로 발족(發足)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데, 그 함께 계시는 양식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셔서 세상에 생명이 태어나고 자랍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인류역사 안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善)한 실천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계약을 맺었다고「구약성서」는 말합니다. 모세의 가르침이 있어서 이스라엘사람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 안에 모셔들이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계약(契約)은 두 당사자가 앞으로 할 행동 양식을 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은 앞으로 계속해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겠고,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충실히 실천하지 못했을 때, 예언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말하면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사람입니다. 왕(王)이나 사제(司祭)들이 그들의 기득권으로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할 때, 예언자들은 그들을 비판하면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시대 기득권자들로부터 박해 당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살아 계실 때, 당신 자신에 대해 가르치거나 당신의 권위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간질 환자나 정신 분열환자들을 마귀 들렸다고 말하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연장한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한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일부 사람들은 그분을 예언자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군중이 그분을 “나자렛 출신 예언자”(마태 21,11)라고 환호하였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하느남의 나라는 모세로부터 시작된 믿음, 곧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삶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실천되는 삶의 공간이 하느님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다가 생명을 잃었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의 일에 충실하다가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산에서 그분과 교감(交感)하는 예수님은 평소와 다른 모습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그들과 뜻이 통하는 분이십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발생한 구약신앙의 전승(傳承)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곳에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엉뚱한 제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에 혼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아듣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서 들렸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알려면,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 깨달은 바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었습니다. 하늘나라의 호적을 보았거나, 유전자(遺傳子) 감식(鑑識)으로 친자(親子) 확인을 하였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병을 고친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며 사람들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면서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종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나는 여러분을 친구라 불렀습니다.”(요한,15,15).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인에게 순종하는 종이 되어 미성숙하게 살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는 친구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친구는 친구로부터 정보를 받아 자유롭게 그것을 활용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정보를 당신으로부터 받은 우리도 자유롭게 실천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믿음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있어,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분의 죽음이 그분을 결정적으로 알아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삽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빌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웃을 형제자매로 생각하고, 그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일을 합니다. 아버지를 소중히 생각하는 자녀는 아버지의 다른 자녀들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늘의 선언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변해야 본 가치를 찾는다.<루카,9/26ㄴ-3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주님의 변모는 당신이 누구시지 알리고 보여 줄 뿐아니라 우리도 모두 변화의 과정을 거처 사람의 본질을 알려 변화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시는 날입니다. 주님의 모든 행위는 나를 위한 것이며 온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은 더 확고이 증명해줍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본질은 하느님으로 하느님을 살도록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삶을 따라 사는 사람 끝에 머리에 후광이 씨워 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심 같이 우리도 주님을 따라 바르게 살고 선하게 살고 참되게 살고 생명인 사랑을 실천하며 살면 어굴이 변하여 깨끗하고 아름답고 신선하게 보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선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셨으나 인간의 불 순정으로 하느님을 떠나고 모양이 지그러지고 보기 흉하게 되었습니다. 어려분 오늘 한 번 거울을 버시고 내 얼굴이 빛나는 삶을 살았는지 반성하고 자신이 아니다 하셨으면 빛나는 얼굴을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만들까요? 우선 변해야 산다란 말에 의식을 가지고 접근하시고 우리가 사는 이유는 잘 먹고 살지고 살기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살기위해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변하여 참 사람의 본질을 찾아 누리기 위함입니다.
변하여 자기 본질을 찾으려는 사람은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본질을 찾는데 장애가 됩니다.
자기를 비우려면 하느님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하여 자기 안에 있는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을 버려야 앞이 보이고 바른 길로 나가고 거짓을 벗어버리고 진실로 나아가고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자신을 비우는 길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가능함을 보이려고 미리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고 우리를 그길로 이끌고 계십니다. 변화 과정은 불을 거치지 않고는 올바른 쇠를 만들 수 없고 일차 산업에서 4차 산업으로 가 제대로 된 사업을 고통을 통하여 별로 간다는 말처럼 시련 고난을 거처 목적에 이르게 됩니다. 사순절 은총을 충만이 받고 자기의 본모습을 찾아 하느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듯 서로 사랑으로 일치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를 이루도록 기도합니다. 그래야 성호경을 놓고 믿음을 사는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허규 베네딕도 신부님
거룩한 변모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산에 오른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합니다. 루카복음은 그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변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단지 ‘다른’ 모습으로, 이전에 예수님에게서 볼 수 없었던 모습으로 변하셨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변모에 함께 등장하는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성경에서 전하는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힙니다.
모세는 탈출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체험을 이끈 예언자이며 유일하게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던 인물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미래에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기 위해 보낼 예언자로 소개됩니다.
엘리야는 우상이었던 바알의 사제들에 맞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낸 예언자이면서 바람에 실려 하늘로 들어 올려진 인물입니다.
이 사건의 마지막에 전해지는 것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와 비슷한 표현을 예수님의 세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복음서 안에서 중요한 축(軸)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표현하는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복음서의 시작과 중간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또한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앞으로 받으실 영광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모든 이들이 알게 될 그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세례와 영광스러운 변모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서의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사건이면서 복음서 안에서 명시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표현합니다.
변모 사건을 체험한 제자들은 그 영광스러운 모습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나 거룩함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것을 묘사하려고 해도 쉽지 않습니다. 다만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변모가 얼마나 황홀하고 찬란한 것이었는지 엿보게 됩니다.
그저 그렇게 머물고 싶고 다른 모든 것들을 잊게 만듭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원하는 사회에서는 종교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나 영광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시편의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시편34,9)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머물러 있기를, 머리보다 먼저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맛볼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항상 감사하라.
백윤형 알베르토(한국항공소년단 사무총장)
일선 부대의 성당에는 성가대가 거의 없고 반주자도 없는 처지라 그저 큰 목소리로 성가를 부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가끔은 제가 연주할 수 있는 악기로 성가를 같이 연주할 때도 있었습니다.
생도 시절부터 작은 성가대를 지휘했지만, 그 당시는 그저 같이 모여 연습하고 성가를 부르는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제대로 모습을 갖춘 성가대의 지휘를 맡게 된 것은 2002년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갑자기 성가대 지휘자의 인사이동으로 공석이 된 자리를 아무런 준비 없이 받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 첫 지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종성당 중에서 제일 큰 성당이고 제대의 오른쪽에 모든 신자가 다 볼 수 있는 곳에 성가대 자리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시종일관 땀이 비 오듯 했습니다.
미사 중반쯤 되었을 때 무엇인가 들려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것이 그저 한 사람으로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례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정말로 순식간에 땀이 멈추고 걱정과 불안이 사라지며 저도 모르는 사이 전례의 한 부분으로 성가대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날의 경험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성가 지휘와 성 음악에 관한 공부를 계속해 왔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가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준비했고, 그로 말미암아 가는 곳마다 주님께 찬미를 드리는 성가대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성가를 부를 몇 명의 신자들만 있어도 성가대를 만들고 같이 연습을 했습니다.
이런 성가대의 화음과 찬양을 듣고 성가대 활동에 참석하는 신자들이 늘어났습니다.
한 성당에서는 전체 신자의 3분의 1이 넘는 신자가 성가대에 들어와 오래된 어린이집을 수리해 미사를 봉헌하던 성당 뒤쪽이 성가대로 가득 찼던 기억도 납니다.
주님께서 제게 과분할 정도로 주신 은총과 능력을 남들과도 나누라는 가르침을 떠올립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신 것처럼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무엇을 가르치려는 지휘자가 아닌 성가대원과 같이하는 단원의 한 명이 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지휘자도 봉사자이며 성가대원도 봉사자입니다.
한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할 때 더욱 큰 은혜와 은총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이런 달란트를 주신 하느님께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리며 영원한 주님의 종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또한 감사드립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걸으며>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9. 03. 17 사순 제2주일
기억조차 희미한 어느 날
당신을 따라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감미로운 말씀을 달게 삼켰고
당신의 따스한 품에 포근히 안겼습니다.
당신과 함께 걷기에
세상은 밝고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따뜻하고 정겨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끝까지 함께 하기를 바라는
슬픈 희망 머금고 말씀하셨습니다.
벗들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죽어야 한다고.
벗들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밥이 되어야 한다고.
벗들을 더 높게 올리기 위해서
우리가 발 디딤대가 되어야 한다고.
당신이 앞서 가시고
내가 따라야 할 길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한 길이라고.
당신과 내가 함께 걷는 길은
십자가를 넘어야만 이를 수 있는
찬란한 부활을 향한 길이라고.
당신과 함께 하는 길이
나를 버려야만 하는 길이라면
굳이 당신과 함께 할 까닭은 무엇인가.
당신과 함께 하는 길이
나를 죽이는 고통의 길이라면
더 이상 함께 할 수 있을까.
몸은 당신과 함께 하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길을 찾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런 제게 때때로
벗들과 함께 하는 기쁨으로
홀로 머무는 평화로
영원한 것을 품는 열정으로
당신은 다가오셨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당신의 십자가도
당신과 함께 걷기에
제게 주어질 십자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다른 이야 무어라 하든
다른 이야 어떻게 살든
당신과 제가 그저 함께 있으면 좋고
당신과 함께 저만 행복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빛나는 영광에 싸인 당신은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 받고 버림받은
벗들을 보듬기 위한.
인간의 탐욕으로 물든
악한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기 위한
참혹한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는데.
애써 십자가 뒤로 밀쳐내고
당장의 기쁨과 행복에
저를 담그고 싶었습니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제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의 목소리 안에서
당신의 간절한 부르심을 듣습니다.
나와 함께 해 주렴
비록 멀고 험난할지라도
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걸어 주렴
그리하여 마침내
오직 십자가의 길을 건넘으로써 주어질
나의 영광스런 마지막에 함께 하렴.
비록 내일 또다시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고픈 유혹에 휩싸일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해야지요.
당신을 떠나 누구와 함께 길을 걷겠습니까.
저로 말미암아 당신의 십자가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시금 저를 추슬러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 여정에 함께 하렵니다.
당신께서 불러주신 이 길
끝까지 당신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굳센 용기와 강인한 힘을 주소서.
아멘.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럽게 빛나는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지난 사순 제1주일의 주제가 유혹에서 벗어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살아갈 것을 이야기 했다면, 사순 제2주일의 주제는 하느님 안에서의 참된 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곧 다가오게 될 예수님 부활의 예시입니다.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감당하셔야 할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신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성당에 정말 인간적으로 강론을 기가 막히게 잘하시는 신부님이 부임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분의 강론이 모든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신자들은 점점 불만이 싸여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신부님의 강론 내용이 매번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본당의 사목회장님이 주교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본당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본당신부님이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일렀습니다. 사목회장님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으신 주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회장님,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신부님이 그렇게 같은 주제로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서 신자 분들은 그 신부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 주교님의 그 질문을 들은 회장님은 그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시고 집으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변화입니다. 우리는 대개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변화되길 바라며 살아갑니다. 곧 자신은 변화되지 않으면서 변화되지 않는 세상만을 비판하며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변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당신의 변모보다 세상의 개벽을 바랄 수 있었지만 당신의 변모를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수난의 여정을 받아들이고 그 길을 걸어가셨고 결국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그야말로 전폭적으로 다가오는 시기이며, 그러한 주님의 사랑을 통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성장과 변화를 이루어가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면서 우리도 역시 주님의 모습처럼 변화의 모습을 지나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미 성취된 약속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사순 둘째 주일이 되면 늘 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우리에게 둘려줍니다. 세 명의 제자와 함께 주 예수님의 영광을 관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높은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의 모습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루카 9,29). 예수님이 하늘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구약의 중요한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과 당신의 ‘탈출’ (Exodus)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탈출이란 예루살렘에서 이룰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그래서 탈출이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을 의미합니다.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들은 첫째 독서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창세 15,18). 그때 아브라함은 땅도 자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과 자손은 알 수 없는 하나의 꿈일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른 채 아브라함은 모르는 땅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친구와도 같은,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사람’이며 ‘하느님 안에서 변모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신뢰를 두었습니다. 하느님 입에서 나온 약속을 믿었습니다. 신앙의 사람은 하느님의 약속을 향하여 걸어나갔습니다. 그의 길은 매우 거칠고 어려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은 큰 인내였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죽을 때까지 하느님의 약속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매우 늦게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이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변모는 미래에 있을 우리의 모습이고, 그래서 우리를 위한 초대이며 약속입니다. 주님의 모습으로 우리는 변모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사람을 말합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 안에서 변화된 존재로 초대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이미 우리는 변화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는 우리가 살아야 하고 걸어야 하는 매일의 삶이라는 현실이 있습니다. 우리 삶은 하나의 환상이나 이상이 아니라 실제이며 구체적인 것입니다. 일상 안에는 수 많은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갈등, 다툼, 혼란, 분열과 걱정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것들은 모두 고통이며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또한 하늘의 사람으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 그리고 지금 하늘이 우리 안에 현존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영적으로 우리는 변모된 사람입니다. 일상 생활의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피하지 맙시다. 이것이 파스카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기뻐합시다. 우리는 영광의 주님 안에서 이미 변모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땅의 날씨와
이 땅의 시간을
받아들이며
봄꽃이 피어납니다.
받아들이는
변모는 기도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도의 이 순간이
온통 아름다운 변모의
순간들입니다.
죽음까지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만을
바랄뿐입니다.
우리를 향한 소중한
하느님의 고백과
약속은 사랑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또한 아름답게
변모될 것입니다.
기도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기도의 여정을
걸어갔던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의 여정을
걸으며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으로하여
과거와 현재는
아름다운 선물이 됩니다.
이 사순 주일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거룩한 주일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임이
뜨거운 변모의
힘찬 신앙고백이 됩니다.
받아들임이
깊어지는
신앙입니다.
깊어지는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