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9,4ㄴ-10
4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5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6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7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유다 사람, 예루살렘 주민들, 그리고 가까이 살든 멀리 살든,
당신께 저지른 배신 때문에 당신께서 내쫓으신
그 모든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8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9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10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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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다고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며,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움을 실천하려면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알아차리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는 데 바오로 사도가 회심하는 과정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회심하기 전까지 십자가 죽음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바오로를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바오로는 죄인인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으로 배반자 이스라엘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던 하느님의 자비(예레 3,12-13 참조)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로마 11,32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려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먼저 체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상대에게 잘못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만 보려는 우리의 한계를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자 노력합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겸손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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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 관계 안에서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상처를 주지 않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상대방은 나에게 무시당하였다고 느끼고, 수치감과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을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압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졌을 때, 그것이 내가 먼저 준 상처의 대답은 아닌지,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그 사람처럼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면, 그리 쉽게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또한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인식은 그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결코 기워 갚을 수 없는 많은 잘못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한다면,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언제나 기다려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너무나 쉽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끝까지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무거움을 잘 아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며, 체험한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때문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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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하느님을 따라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 생활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그들은 속된 것과 부정한 것을 피하면서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하였고, 하느님 말씀 곧 계명과 율법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에게 거룩함은 하느님의 가장 큰 특성이었기에, 하느님의 백성도 그러해야 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이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로, 그리고 그분의 거룩함은 완전함으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같은 형식의 표현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으로 듣습니다. 구약 성경의 거룩함과 마태오 복음의 완전함은 이제 ‘자비’로 드러납니다.
자비는 하느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입니다. 이제 구약의 백성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를 닮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심판받지 않으려고 심판하지 않거나, 단죄받지 않으려고 단죄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용서받으려고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경험으로 이미 심판받지 않았고 단죄받지 않았으며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행동보다 앞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그분의 자비를 본받아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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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평지 설교’(루카 6,20-49 참조)의 한 부분입니다. 행복 선언(6,20-23 참조)과 불행 선언(6,24-26 참조), 원수 사랑의 가르침(6,27-35 참조)은 심판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에 앞서 소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어 평지에서,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증언할 증인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십니다.
루카 복음 6장 36절은 원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마무리’하면서, 심판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6장 37-38절은 사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명령과 그 결과가 같은 형식으로 네 차례 반복되는데, 처음 두 번은 부정 명령이고 다음 두 번은 긍정 명령입니다. 루카 복음서의 저자는 이러한 대조적 구조를 통하여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며 베풀어야 한다는 행위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권고와 명령에 따른 실천은 긍정적 결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이는 하느님께 심판도 단죄도 받지 않으며 그분의 용서와 선물을 체험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그분을 증언해야 하는 이들을 위한 행동 기준이자 그들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과 용서에 관한 가르침으로 제자들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속성을 배우고 닮도록 촉구하십니다.(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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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자식들보다 다른 이들에게 한없이 자비롭다면 그 자녀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자식들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너그럽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어려움보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잘못은 그대로 넘어간 일이 없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은 어떤 일이든 용서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식인 내가 가져야 할 몫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에 나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칭송을 받지만, 나에게만은 정말 매정한 아버지입니다. 자식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부모가 되고, 자녀를 낳아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 간다면 조금이나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충분히 너그러웠고 누구보다도 자식들을 많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넘치도록 많은 것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아쉬워하였습니다. 그 자녀들도 아버지처럼 살아가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이 때로는 우리를 실망스럽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와 청은 잘 들어주시는 것 같은데 내 기도와 청에는 묵묵부답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은총과 복을 넉넉히 주시지만, 나에게만은 고통과 아픔만을 주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은 일들을, 하느님께 넘치도록 받은 것들을, 그리고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옹졸한 사람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비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받은 사랑과 용서를 되새기고, 그분께 감사해야 합니다. 먼저 감사함을 찾으십시오.(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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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자비의 희년의 주제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또한 자비를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장에서도 “자비로이 부르시니”라는 말씀을 찾을 수 있습니다.
흔히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정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가장 큰 특징은 ‘자비’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행동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자비로운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비에서 비롯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미 그분의 자비를 듣고, 보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자비를 이미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되와 그릇을 만듭니다. 또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과 소통합니다. 그것으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고 자비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지라는,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을 닮아 가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하느님께서도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는 대신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는 것보다 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 가야 하겠습니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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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계명에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덧붙이며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고 가르치셨습니다. 원수마저 사랑할 때 비로소 아버지를 닮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제1독서의 다니엘 예언자가 이야기하듯이 당신을 거부하고, 적대시하며, 당신의 뜻을 어기는 원수를 용서하시고 그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의 다른 식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동포들의 죄를 고백하며, 하느님 앞에서 자비와 용서를 청합니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이 얼굴에 가득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의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이들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권고하십니다.
물론, 이 일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에는 하느님 도움을 청하는 기도가 늘 필요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용서를 시작하는 용기 있는 첫 걸음이라 하겠습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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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우리 사회에는 자비로운 마음이 절실합니다. 자비의 반대는 무자비이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점점 무자비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거칠고 폭력적으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무자비해진 것입니까? 성스러운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앞날에 대한 희망을 잃어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고, 무자비함이 확산하는 데는 언어의 문제도 큽니다. 점점 우리말이 거칠고 척박해지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대중 매체에 이르기까지 말이 너무 거칠고, 비속어가 난무합니다. 오늘날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무엇보다 파괴된 언어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해 주는 대로,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상대방에게 더한층 관대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나의 상처부터 치유해야만 합니다. 내 안에 박힌 가시를 먼저 뽑아내야 하지요. 내가 입은 상처가 가시가 되어 다른 이들을 찌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내 안의 가시로 말미암아 다른 이에게 악한 기운이 많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선한 기운을 상대방에게 보내면 상대방도 나에게 따스한 기운을 보내 줄 것이 아닙니까? 이럴 때 하느님의 은총이 더욱더 작용할 것입니다.(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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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는 다니엘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먼저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찬미합니다. 이어 자신들의 부족함과 지은 죄를 회개하지요. 특히 다니엘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자세가 기도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남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에 대해 비판마저 합니다. 하지만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모를 때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도 모르고 군중 심리에 휩싸여 함께 비난할 때도 잦지요. 또한, 상대방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도 종종 범하곤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주관적으로 심하게 비판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비판받을 때는 객관적인 잣대를 요구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남을 비판하는 데도 황금률의 정신을 적용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황금률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라는 계명이지요.
남을 비판하는 데도 황금률을 적용한다면 상대방에 대한 비판은 현격히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참된 사실을 알기 전에는 비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 우리는 주님 앞에 더욱 겸손한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동시에 다른 이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지기 때문이지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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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니엘서의 내용과 같은 기도를 이스라엘이 올리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다윗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한참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했습니다.
완 전한 파멸을 겪기 전에는 아무리 잘못을 일러 주어도 이스라엘은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율법도 있었고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옳고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나의 권리를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믿고 주장하는 한, 어느 누구의 말도 소용없었습니다. 멸망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알고 그분의 자비를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 바로 나의 덕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내 손을 놓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은총임을 터득하게 됩니다.
이 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파멸만은 피해 가려고 버티면서 버둥거리는 우리를 가차 없이 꺾어 놓습니다. 아무에게서도 단죄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책잡힐 데 없이 살고 싶기도 하고 하느님께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교만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한 태도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나 뵙거나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인간은 결코 그렇게 흠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우리의 자존심이 끊임없이 우리 눈앞에 거짓된 우리 모습을 세워 놓기에, 우리는 무수히 넘어지고 부서진 뒤에서야 비로소 자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이 사순 시기가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가난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은총의 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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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는 자기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려놓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는 우리 각자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도 삶의 방식과 판단 기준을 그 뿌리에서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 중에 갑자기 지난해의 끝자락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판단 기준들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계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잣대로 행한 말과 일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심각한 논란거리가 되면서 독설 어린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목소리가 교회 구성원들 가운데에서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불편한 진실'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비난 또는 걱정의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회가 과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는 복잡한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행태로, 혼란을 조장하며 국익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의 다니엘을 통하여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의 방식을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먼저 동포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기도가 간절했던 것은 분명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깊은 운명적 결속과 아낌없는 애정을 느끼고 실천하는 삶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다니엘이 동포들을 사랑하며 바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니엘이 무엇보다도 뼈아프게 통찰한 것은 이스라엘에 만연한,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부끄러운 죄를 저지른 삶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 이 시대와 민족에 뜨거운 애정과 깊은 책임감을 가진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해 봅니다. 죄의 근원은 주님의 자비와 정의(공정)를 거스르는 것이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그들에게 오만하고 냉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동포들과 나라를 깊이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이 그저 세상 논리의 모방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랑의 길잡이라는 사실을 믿고 경청하는 자세는 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피해서는 안 될 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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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 죄대로 저희를 다루지 마소서”(시편 103〔102〕,10 참조). 오늘 화답송의 후렴 구절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은 죄대로 다루신다 하여도 주님께서 틀리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다루실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희 죄대로 저희를 다루지 마소서.” 하는 우리의 염치없는 청마저도 들어주시는 넓은 분이십니다.
예로부터 하느님을 ‘데우스 셈페르 마요르’(Deus semper major)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크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우주에 비유한다면 우주보다 더 넓으시고, 바다에 비유한다면 바다보다 더 깊습니다.
그렇게 언제나 더 크신 그분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을 비교한다면 우리 자신은 얼마나 미약하기만 합니까? 누가 그분의 그 크신 마음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미소한 종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 크신 사랑으로 모든 죄와 잘못을 있는 그대로 단죄하시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비와 햇살을 내려 주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참아버지로 모신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하게 보이나 속은 곧고 굳세다.’는 뜻의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떠올리며 다른 이에게는 넓고 온유한 마음을, 자기 자신에게는 엄하고 깨어 있는 자세를 갖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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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곳은 휴전선 접경 지역이라서 가까이에 군부대가 많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병사들이 100명가량 미사에 참석하는데 저희 성당 신자 수와 거의 비슷합니다. 미사가 끝나고 병사들이 부대에 복귀하는 시간이 부대에서 점심 먹기가 애매한 시간이라, 저희 신자들은 병사들이 성당에서 점심을 먹고 복귀할 수 있도록 주일마다 점심을 마련해 줍니다. 성당 신자들 대부분이 연로하신 분들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손자 같은 병사들을 위해서 애쓰시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는 병사들은 마음속 깊이 느끼는 것이 있나 봅니다. 스스로 찾아와서 세례를 받고 싶으니 교리를 가르쳐 달라는 병사들도 있습니다. 성당에 일손이 부족하면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손을 걷어붙이고 도와줍니다. 전역자들은 제대하기 전에 주방에 들러 할머니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납니다. 할머니들은 그 인사 한마디로 그동안의 수고로움이 싹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희 소식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많은 분이 저희 성당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금을 보내 주시고, 어떤 분들은 정기적으로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식재료를 사 가지고 와서 점심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군인들 때문에 몰랐던 신앙의 형제들을 많이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희가 군인들에게 해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하신 예수님 말씀은 저희를 두고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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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포(楊布)가 외출할 때는 흰옷을 입고 나갔다가, 비를 맞아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는데, 양포의 개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짖어 대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개를 때리려 했더니, 형 양주(楊朱)가 “네 개가 나갈 때는 흰옷을 입고 나갔다가 검은 옷을 입고 돌아온다면 너 역시 괴상하게 여기지 않겠느냐?” 하고 나무랐습니다.
『한비자』에 나오는 양포지구(楊布之狗)의 뜻풀이입니다. 곧, 겉모습을 보고 속까지 판단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주로 쓰는 고사성어입니다. 사람이 흰옷을 입었다고 그의 마음도 하얀 것이 아니고, 검은 옷을 입었다고 속까지 검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했듯이, 사람이란 그 자체로 이렇게 신비로워서 그 마음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마저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감히 누구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약한 사람은 있어도, 악한 사람은 없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편해질 것입니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 심지어 범죄자들까지도 그 사람이 악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약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악의 세력이 인간의 나약함을 타고 들어와 일을 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범죄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 사람 안에 선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악은 힘을 잃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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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주고 베풀어도 모두 ‘돌아올’ 것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실천은 희박합니다. 쉽게 베풀려 하지 않습니다. 많이 따지고, 틈이 생기면 그 일에서 빠지려 듭니다. 복음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받으려고 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주고 되받는 체험을 ‘실천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좋은 말을 하면 ‘좋은 말’이 돌아옵니다. 웃으면 분위기도 밝아집니다. 하지만 거친 말은 ‘거친 분위기’를 만들고, 분노는 분노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아는 데’ 그치지 말고 삶의 자세를 바꾸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말씀이지만, 실천이 어려운 것은 예사롭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무관한’ 사람에게도 쉽게 비판의 화살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별생각 없이 말하더라도, 듣는 이의 영혼에는 화살이 꽂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에 ‘예스맨’이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지요. 심판과 단죄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되돌아옵니다. 올바르지 않으면 자신의 운명에 상처를 남깁니다. ‘부메랑’은 목표물에 명중해야만 되돌아오지 않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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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말썽 없이 나누려면 쪼갠 뒤에 먼저 골라잡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게 보이는 쪽을 가져가게 하는 것이지요. 어찌 빵뿐이겠습니까? 많은 부분에서 선택권을 양보하면 불만이 적어집니다. 불만이 생기더라도 쉽게 해소됩니다. 그러므로 약자에게 선택권을 배려하는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도 양보하라는 말씀입니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심판을 서둘러 하는지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내가 먼저 ‘감정을 섞고’ 언행을 높입니다. 별일도 아닌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여 분위기를 흐립니다. 때로는 침소봉대하며 떠벌립니다. 모두가 내 삶에 ‘어두운 기운’을 불어넣는 행위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업’을 만드는 것이지요. 먼저 양보했더라면 피해 갈 수 있었던 ‘업’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잠든 영혼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실천에 옮긴다면 매일매일 기적을 일으키게 하는 말씀입니다. 늘 부딪치는 관계를 새삼스레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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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어느 빵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인은 신선한 빵을 구우려고 버터를 매일 아침마다 직접 농부에게서 배달받았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버터가 정량에 모자라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버터를 저울에 달아 보니 역시 버터의 양이 부족하였습니다.
주인은 매우 화가 나서 자신을 속인 농부를 고소했고, 농부는 결국 피의자 신분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뒤집어쓰고 망신을 당한 쪽은 농부가 아닌 빵집 주인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농부에게는 젖소 몇 마리는 있었지만 너무 가난하여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는 배달할 버터의 양을 정하는 데 매일 자신이 납품하는 빵집에서 갖다 먹는 빵의 무게를 기준으로 버터를 잘랐던 것입니다. 결국 빵집 주인의 얄팍한 상술과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을 판단한 마음이 오히려 자신을 판단받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거나 단죄하고 싶을 때 먼저 우리 자신의 비판받고 단죄받을 행동들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고 그것을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 비로소 이웃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감정은 관용으로 바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계속된 가뭄에 마을 사람들은 성당에 가서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째 계속 성당에서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성당 한가운데에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너희의 기도가 닿았다. 참된 믿음을 가진 이가 제단에 초를 봉헌하면 곧바로 비를 내려주겠다.”
사람들은 서로 주저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를 봉헌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신부도 수녀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자들도 차마 신부, 수녀에게 초를 켜라고 하기 힘들어서, 신자들의 대표이며 믿음이 크다고 알려진 사목회장님이 등 떠밀려서 제대 초를 켜서 봉헌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누가 제대 초를 켜서 봉헌해야 하는지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밖에 없다는 의견이 모이고 있을 때, 성당 한가운데로 한 꼬마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를 켜서 제단에 봉헌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의 복장에서 참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비가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또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비가 내리길 기도하면서도 비 올 것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를 하느님께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시면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또 남을 단죄하지 말고, 무엇보다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제일 못하는 부분이 아닐까요? 너무 쉽게 심판하고 단죄하고 있으며, 용서를 가장 힘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온전한 신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온전한 신뢰는 지키기 힘들어도 그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이 말씀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보이는 굳은 믿음의 소유자만이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박경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 연구소에서 교우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질문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당에 다니는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성당을 떠난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성당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성당에 다니는 이유입니다. 이유는 다섯 가지 정도 되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필요한 위로입니다. 둘째는 ‘삶의 의미와 목적 발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는 사명입니다.
셋째는 ‘공동체와의 유대감 형성’입니다. 여행을 가도 혼자 가는 것도 좋지만 함께 가는 것이 좋습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고, 찬양하였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가톨릭은 세계 어디에 가도 같은 전례를 하기에 유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넷째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지침’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거든 꼴찌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겸손, 희생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다섯째는 ‘전례와 의식 참여로 영적인 충만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정점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합당하게 모실 준비를 합니다.
성당을 떠나는 이유도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삶이 바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넷째는 성당 내에서의 소속감, 교제, 혹은 따뜻한 공동체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교회 조직의 경직된 구조나 변화에 대한 저항, 혹은 내부 정책과 결정 과정에 대한 불만 때문입니다. 교우들이 성당에 바라는 것도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신앙 교육 강화입니다. 둘째는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입니다. 셋째는 신자들의 재교육입니다. 넷째는 성당의 시설개선입니다. 다섯째는 청년 사목의 확대입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은 성당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찬례(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축복과 감사의 예배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둘째는 ‘하느님과 깊은 만남’입니다. 모세는 거룩한 곳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성당은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셋째는 ‘죄의 용서와 영혼의 회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넷째는 ‘공동체로서의 신앙’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교회가 모진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몸으로 의지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시편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사는 것” 다섯째는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것은 현세에서 축복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현세에서 비록 고난과 역경을 당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진정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신앙은 진실한 회개였습니다. 하느님의 법과 계명의 준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의 신앙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늘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한 믿음은
늘 더욱 깊숙이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희망한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한 희망은
늘 더욱 새롭게
피어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늘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것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판단’과 ‘분별’의 개념을 혼동하면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념을 정리해보자면 판단은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재판적인 용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판관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 다른 이들을 판단을 하고 단죄를 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의 권한을 뛰어 넘어서서 하느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위선과 교만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도 역시 하느님 앞에 모두가 다 죄인들이기 때문에 죄인이 죄인을 심판과 단죄한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과는 다르게 분별이란, 하느님 안에서 올바른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분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별을 통해서 하느님 앞에 자신 또한 죄인임을 인식하고 더 이상 남을 판단하는 죄를 범하지 않으며 그분 보시기에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 해야 할 분별과 용서가 아닌 판단과 심판의 죄만을 지으면서 살고 있지 않은지 각자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완전한 용서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많이 들어본, “뿌린 대로 거둔다.” 법칙입니다. ‘부메랑’ 법칙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법칙은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됩니까? 잘 안 됩니다.
영화 ‘밀양’에서는 신앙으로 용서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불편한 상황을 잘 그려냈습니다. 회개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남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그 책임을 물을 때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이렇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심판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심판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을 심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부터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두려워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입니다.
자기를 심판하지 않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솔직함입니다. 타인의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부끄러운 것을 쉽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이웃도 아니요 하느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할 때 저절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용서를 위해 반드시 여기까지 이르러야 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심판하는 내 안의 심판자,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자아는 ‘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절대 완전히 죽지 않고 계속 나를 심판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에 나오는 아라곤은 왕국 곤도르의 정통 후계자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조상이었던 이실두르가 사우론에게서 ‘절대반지’를 빼앗고도 끝내 파괴하지 못한 과오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실두르의 그 선택은 훗날 사우론이 다시 힘을 키우는 빌미가 되었고, 후손인 아라곤은 “나도 언젠가 조상처럼 약해져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와 자격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그는 은둔자처럼 숨어 지내며 방랑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는 스스로 “내가 왕의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힘을 발휘하면, 혹시 조상 이실두르처럼 반지와 악의 유혹에 휘말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끊임없는 자기 의심이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자기 정죄가 쌓여서, 아라곤은 왕좌를 이어받을 수 있는 용기도 없었고, 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조차 뿌리 깊이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지 원정대에 함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두려움과 조상의 죄책감을 이겨 내기 시작합니다.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길을 떠난 이들과 동행하는 동안, 아라곤은 단지 무력이나 권위가 아닌, 진정한 용기와 헌신으로 동료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조상과는 달리 “절대 반지의 악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없애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동료들을 돕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스스로는 반지를 소유하지 않았지만, 반지를 지닌 프로도와 그 곁의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숱한 전투와 유혹 속에서도 ‘반지의 힘을 탐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 냅니다.
결국 그는 “이실두르가 실패했던 과제를 후손인 내가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내고, 인간과 엘프, 호빗과 드워프가 하나 되는 연대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기까지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사우론의 군대를 상대로 과감히 전쟁을 걸고, 자신의 힘을 다해 동료들을 지켜 내는 장면에서, 그는 더 이상 “조상의 잘못된 길을 밟을까 두려워 숨어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반지가 결국 파괴되고 사우론의 권세가 무너져 내렸을 때, 아라곤은 마침내 스스로 “나는 조상과 다르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책임 있게 완수했다”는 내적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 결말로 아라곤은 ‘엘레사르’라는 이름을 받아 곤도르의 왕으로 즉위하고, 왕이 된 이후에도 과거의 경험과 겸손을 잊지 않으면서 백성과 중간계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훌륭한 통치자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를 가리려는 노력을 멈췄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마련하신 용서의 가죽옷을 입었어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또 과거의 망상이 자기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매진했어야 합니다. 그 뜻에 자기 뜻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던 것처럼.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자아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 다른 이들을 심판하게 만들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사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민족에게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직무를 맡기심으로써 과거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결국 나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는 가장 완전한 길은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믿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자격이 없다’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타인을 판단하면서 합리화하려고만 합니다. 죄책감이 없었다면 분명 사명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사명을 받아들여 수행함으로써 이전의 나를 판단하던 자아는 죽습니다. 자아를 죽이는 가장 완전한 길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발밑에서 계속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뱀의 소리는 그저 쐐야 쐐야 하는 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렇게 뱀이 무력하게 될 때 나는 의로움으로 타인을 심판할 존재가 아닌 용서할 존재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완전한 용서의 길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이죠.
남을 심판 하거나 단죄하는 만큼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주고 용서하는 그만큼 용서와 사랑받을 거라는 예수님이시죠.
우리의 이 세상 생활이 하느님 나라의 생활 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 마음 생각이 하느님아버지의 자녀다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삶이 하느님 뜻과 달리 마치 짐승들 같아지고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세월 따라 하늘 향해 발전 변화 되어야 하는데도 말예요.
지금부터라도 선교에 힘 써 하느님의 자녀들로 거듭나게 해야됩니다.
가톨릭알림 말: 하느님의 자녀다워야 인간 존엄이 힘을 얻게 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시집살이를 심하게 한 사람일수록 더 며느리에게 심하게 시집살이를 시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생각 같아서는 힘겹게 살아왔다면 다른 이들에게 더 너그럽고 양해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로는 안 그런가 봅니다. 마치 보상을 받듯이, 복수를 하듯이, 더 혹독하게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이도 있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해해주고 믿어주고 지지해주며, 이끌어주고 함께하며 밀어주면, 상대에 따라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배반을 당한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가운데에서는 자비로운 주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닮는 것 같아서 기쁘고 평안합니다.
사랑 받으려면 사랑하여야 합니다.<루카6/36-38>3/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자격증 받으려면 자격증에 관계되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저는 사제직을 받으려고 수도자로 8년이란 시간 지나서 사제가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받으려면 사랑을 하지 않으면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하는 사람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전해주며 사랑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이 있으면 기도로써 주님의 도음을 받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의 도움이란 믿음 희망을 통해 사랑으로 가는 길입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도 주님을 기도로 접근하고 함께 하면 사랑을 알게되고 실천하게 됩니다. 주님은 사랑 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뱃 사람이였던 제자들이 3년주님을 따라 살다가 보니 사랑을 알고 받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인은 사랑 노래에 푹빠져 사랑을 알고 사랑하게 됩니다. 서경을 보고 필사하고 들으며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의식하고 주님의기도 후반부에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나에게 아니고 저희는 모두를 지칭하는 말로 나마 먹고 머시는 것 아니고 우리모두가 먹고 마시는 것이며 하느님의 자비는 나에게 만 아니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입니다. 용서는 자비로운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유혹도 악에서 구함도 주의기도 전반부에 진선미로 거룩한 사람 하느님 나라인 자유평화기쁨 중에 살고 믿음 희망 사랑으로 하느님 뜻따라 사는 사람에게 가능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받치는 사람은 전반부를 의식하고 깨우치고 드리는 사람 만이 후반부에 주님이 주시는 것을 얻고 살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같이 모든 악에서 구해지고 유호을 이겨내고 필요한 것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자비로우시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아치기도 독서에서 모세의 홍해의 기적으로 바다가 갈지고 맨 땅이 되어 홍해를 건너갔지만 주님 모르고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는 사람은 퐁해 바다에서 북음을 당하였다는 이야기는 죽이려는 사람은 작기 먼져 죽에 되는 현상을 보게 합니다.사랑 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매랑이 되어 사랑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고 사랑 속에 진실과 사랑안에 살게 됩니다.
손을 들어 아려운 사람 감싸고 나누고 찬교를 맺으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함승수 신부님
지난 주 평일의 복음은 ‘대당 명제’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최소한’의 규정을 그마저도 겨우, 마지못해 실천하는 모습을, ‘남들도 다 그러는데뭐’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따라하지 말고,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이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특별한 존재로서 계명의 근본정신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은 그 가르침을 마무리하시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엄중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 말씀은 그저 자비를 베풀라고 명령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그리고 하느님께 받아 누린 그 자비를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깨우쳐 주시려는 겁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조건 없이 한 없는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도 이웃 형제 자매에게 ‘거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비를 어떻게 베풀어야 할까요? 그 구체적 방법에 대해 예수님은 네 가지 동사로 설명하십니다.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앞의 두 가지는 자비의 소극적인 실천으로써 적극적인 측면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입니다.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을 비판하거나 단죄하려는 마음부터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팔짱을 낀 채 째려보아서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긍정적 지향과 호의를 가지고 보아야 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건 ‘법’이 할 일입니다. 그 사람의 속마음과 의도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건 ‘하느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게 아니라, 그를 본보기 삼아 나 자신을 깊이 성찰하여 잘못을 식별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일입니다.
뒤의 두 가지는 자비의 적극적인 실천으로써 하느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먼저 한 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도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내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기꺼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내 안에 ‘담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하느님을 ‘닮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내려 주시지요.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되질하는 그 되로 돌려받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가 먼저 자비를 베풀어야만, 베푼만큼만 은총과 복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조건부로 사랑하시는 까다로운 분도 아니고, 받은 만큼만 돌려주시는 속 좁은 분도 아니지요. 우리가 이웃에게 기꺼이 베풀고 나누어서 생긴 ‘빈 자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눈치보거나 아까워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베풀고 나누어야겠습니다.
눈 지키기
김희경 성심 수녀님
저희 수녀원에는 ‘눈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 시간엔 기도에만 집중하여 누가 오르간을 연주하는지, 누가 늦게 오는지 관심 두지 말라는 겁니다. 이는 기도에 집중하라는 뜻도 있지만 지나친 호기심으로 두리번거리지 않는지, 누군가의 실수에 눈길을 보내 그 실수가 두드러지게 하지 않는지 등 나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를 말합니다. 타인의 잘잘못에 무조건 모른 척하라는 뜻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남을 바라볼 때는 나 자신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는 권고이기도 하고요. 더불어 우리는 눈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조차도 눈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쉽게 하는 심판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 단죄도, 죄인에 대한 용서까지도 모두 우리가 하는 되질입니다. 내가 타인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는 잣대와 언어, 평가를 내리고 단정 짓는 기준 등을 통해 나도 어느새 반대편 저울에 나란히 오릅니다. 교회와 신앙인은 자기 자신을 언제나 무게의 추로 삼아야 함을 잊지 말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바르고 정당한 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늘 그분 앞에서 자신을 헤아려야 합니다. 내가 되질한 그 되로 되받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먼저 그런 되질은 하지 않는 관대하고 온당하며 자비로운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닮의 여정 - “대자대비大慈大悲,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당신의 종 위에,
당신의 얼굴을 빛내어 주소서.”(시편31,17ㄱ)
하느님의 마음이, 하느님의 얼굴이 자비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여전히 병원에 계시지만 점차 병세는 호전되고 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소식입니다. 새벽에 읽은 어제 발표한 삼종기도후 메시지도 교황님 믿음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몸은 약할지라도,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기도로부터, 줌으로부터, 믿음 안에서 서로 희망의 빛나는 표징이 되는 것으로부터 막을 수 없습니다. 부단히 하느님 사랑의 광선을 반사하십시오.”
그 어떤 환경 안에서도 자비하신 하느님의 빛나는 표징으로, 영원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입니다. 오늘날 모든 불행과 재앙은 하느님을 떠남에서, 하느님을 잊음에서,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발광체發光體 자비하신 하느님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 인생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광신도狂信徒가 되어 발광發狂하지 말고, 광신도光信徒가 되어 하느님을 발광發光하는 삶은 살라는 것입니다.
어느때보다, 하느님을 찾아야할 위기의 시대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사순시기, 날로 나라 안팎으로 위험이 증폭되어가는 위기의 시대에 올해 맞이하는 사순시기는 더욱 고맙고 반갑습니다. 어느때 보다 절실한 4월20일 부활대축일까지 기도와 회개, 절제와 극기의 사순시기입니다.
제 집무실 벽에 늘 걸려 있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작은 아들을 품에 안고 기뻐하는 자비하신 아버지야 말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신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귀가를 간절히 한없이 기다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자비하신 하느님이 답임을 보여줍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은 ‘밖’을 두려워하게 된다. 안에서 밖으로 나와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다산>
나로부터 벗어나 밖의 하느님을 향할 때, 부단히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 오를 때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하느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들끼리 모이고, 만물은 무리를 지어서 나뉘어 산다. 길흉吉凶이 그로 말미암아 생긴다.”<논어>
부단히 한계를 넘어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자비하신 하느님을 향해 닮아감으로 평화 공존의 삶을 살 때 길흉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입니다. 다음 행복기도의 다음 대목을 마음에 새깁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오늘 복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 믿는 이들을 향해, 아니 전인류를 향해 당신의 평생 소원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기대 수준은 이처럼 높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루카복음 평지설교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의 제시하는 바 유일한 평생과제이자 우리 모두를 향한 평생소원이자 우리의 평생목표이기도 합니다. 이래서 우리 삶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날로 자비의 삶은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하느님을 닮고 싶은 마음에 써놨던 ‘하늘’이란 고백 글도 생각납니다.
“하늘이
하늘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높고 푸른 하늘이예요”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이 아닙니다. 애매한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행동사입니다. 하느님의 깊이는 인간의 깊이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비가 바로 답입니다. 예수님의 구체적 처방이 모두 실행동사입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2.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3.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4.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되로 되받을 것이다.
바로 이런 구체적 자비행이요 이런 행위 또한 부단한 의도적, 의식적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화의 노력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은 결정적 수행은 기도와 회개임을 제1독서 다니엘서가 제시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하늘을 우러러 두려워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 철면피, 적반하장의 뻔뻔한 미치광이, 특히 오늘날 대한민국의 일부 극소수 양심과 상식을 잃어버린 무지한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법에 따라 걷지 않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다니엘의 회개의 기도가 가슴을 칩니다. 마음에 새기듯 절실한 내용들이라 대부분 다 써봤습니다.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순시기 집중적 수행이 기도와 회개입니다. 진정성 넘치는 회개의 기도가 하느님 자비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궁극의 답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사순시기,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간절하고 항구한 회개의 기도와 더불어 하닮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좋은 힘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께 바라는 너희가 모두,
굳세게 마음들을 가져라.”(시편31,25). 아멘.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매일매일
심판에
발목이 잡혀
우리 영혼을
잃어버립니다.
심판에 빠져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딘지를 묻는
은총과 용서의
사순입니다.
용서는
빛 속을
걷게 하지만
심판은 사람을
끊임없이
어둠으로
중독시킵니다.
심판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심판의
돌을 던지면
그 심판의
돌은
또 다른
심판의
돌이 되어서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심판을
끊는 것이
복음입니다.
심판은
우리 모두를
가두지만
복음은
우리 모두를
자유로이
풀어줍니다.
복음을 벗어나는
심판을 멈추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용서로
걸어가야 할
때입니다.
심판에 빠져있는
우리를
건져올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나누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자비이고
멈추어야 할 것은
심판입니다.
되받아야 할
자비의
기쁜 날
되십시오.
바람둥이 남자가 있습니다. 워낙 여자 문제를 많이 일으킨, 어느 날 동생이 형에게 “제발 정신 차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은 어릴 때, 동생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긴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엄마가 동생만 챙기는 바람에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고, 결국 지금의 인간관계까지 망치고 있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이 남자의 바람기가 과연 어머니 때문일까요?
어떤 형제님은 어린 자녀에게 폭력을 자주 씁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주변에서 말리자, 어렸을 때 자기 부모님께 맞았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많이 맞은 경험이 자기 역시도 그렇게 폭력을 쓰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의 폭력성이 과연 부모 때문일까요?
이 두 사례 말고도 ‘~탓’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를 탓하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로써 자기의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절대 바꿀 수가 없으니, 자신의 문제도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나의 모든 문제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자기는 늘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지금 모습을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탓’만 하면서 지금 모습을 계속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문제 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도 문제를 넘기게 되어서 모두 힘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선포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는 삶, 단죄하지 않는 삶, 용서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앞선 예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탓’을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면 자기도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랑의 삶을 그대로 되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그저 따를 뿐인데도, 그런 삶을 살 때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탓’을 하는 삶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에 집중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보고 또 이를 따르는데 철저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문제 되는 것들을 과거의 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지금, 그리고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에 매이지 않고 올바르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의 목적은 우리의 자유를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을 찾는 데 있다(휘시스).
남을 되질할 되를 깨버린 이의 행복.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남을 심판하지 않으면 나도 심판 받지 않는다는 주제입니다. 내가 자비로울 때 자비로운 기준으로 심판 받습니다. 주는 대로 받습니다. 반면 남을 단죄 하면 그것으로 나도 단죄 받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와 엘레우시스 사이의 성스러운 길에 살았던 불량 대장장이이자 산적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손님에게도 완벽하게 맞을 것이라고 주장한 침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잔인했습니다. 여행자가 침대에 비해 키가 너무 작으면 선반에 눕혀 잡아 늘여 펴곤 했습니다. 여행자의 키가 너무 크면 다리를 잘라서 몸에 맞도록 만들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처음으로 아테네를 여행하던 중 프로크루스테스를 만났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에게 가했던 것과 똑같은 잔인한 대우를 테세우스에게도 가할 생각으로 테세우스를 침대에 누워 쉬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제압하고 그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런 다음 프로크루스테스를 같은 방식으로 대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손님을 괴롭히던 바로 그 방법으로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나는 얼마나 부자유스럽습니까? 자기도 그렇게 못하면서 남에게 하도록 강요하면 다른 사람들 눈치가 있으므로 말도 실수할까 봐 제대로 못 하고 행동도 경직됩니다. 자기 판단의 감옥에 자신이 갇히는 것입니다. 자유로워하고 싶으면 자비를 원하면 남을 판단하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우리 속담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진리를 압니다. 내가 외로우면 다른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고 있고 내가 짜증 나면 분명 다른 사람들을 짜증 나게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영화 ‘셰임’(Shame)에서 주인공 브랜든은 평범한 직장인지만 성에 대한 강박적인 중독으로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당연히 그는 항상 고독하고 공허하고 외롭습니다. 여자를 자기 욕구의 충족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세상도 그를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브랜든의 여동생 시씨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브랜든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브랜든은 시씨의 삶을 응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상사 데이비드와 술집에 들렀을 때 시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데이비드는 그녀를 원하게 됩니다. 데이비드는 유부남임에도 브랜든의 집에서 그의 동생과 잠자리를 가집니다. 데이비드는 구토가 날 정도로 직장 상사가 밉지만, 그 화풀이를 동생에게 합니다. 오빠에게 쫓겨난 동생은 오빠에게 계속 전화하다가 자살 시도를 합니다. 동생을 품어줄 수 없었던 이유는 유부녀를 막론하고 흑심을 품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직장 상사와 동생에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유는 자기를 먼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이 갈등의 굴레 안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거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영화 극한 직업에서는 형사들이 잠복근무하기 위해 치킨집을 차렸는데 의외로 장사가 잘된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왜 장사가 잘됐을까요? 사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 벌려고 한 게 아니니 아무 생각 없이 퍼주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주방장이 주인이 미워서 양념을 팍팍 썼더니 장사가 더 잘되더라는 것입니다. 더 주려 하니까 더 받습니다. 이 진리를 알면 세상에서 인정받지 않을 수 없고 가난할 수도 없습니다.
남을 건강하게 하는 트레이너가 몸이 안 좋아지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돈을 떼먹으려 하고 남의 명예를 도둑질하며 남을 아프게 합니다.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몇 배로 돌아올 줄 모르면서 말입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우리 안에 사랑을 방해하는 남을 심판하는 되를 깨버립시다. 저절로 심판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죄와 싸웁시다. 이웃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 지만 생각합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 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나무를 옮겨 심으면 몇 달은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적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댈러스로 오면서 저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지리를 파악해야 합니다. 성당까지는 걸어서 40분이면 가기에 걸어 다니려고 합니다. 꼭 가야할 곳을 알아야 합니다. 마트, 은행, 주유소, 식당, 미장원, 병원, 차량 정비소, 산책로 등을 알아 두면 좋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입니다. 본당의 봉사자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으니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직원들을 알아야 합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플 때 함께 마음 아파해 줄 사람을 아는 것은 복입니다. 셋째는 업무를 숙지해야 합니다. 12년 만에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기에 미국 교회와도 소통을 해야 합니다. 33년을 사제로 지내고 있지만 본당 사목은 늘 새롭고, 긴장이 됩니다. 본당 사목은 장기계획과 단기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댈러스 성당은 3년 후면 설립 50주년이 되기에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워야 하고, 매년 본당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내년쯤에는 저도 이곳 댈러스에 뿌리를 내리고,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국에서 오지 않고, 뉴욕에서 왔기에 좀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민등록과 비슷한 쇼셜넘버를 이미 받았기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운전면허증도 뉴욕에서 이미 받았기에 텍사스 면허로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은행 계좌도 이미 개설했기에 이용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린카드를 받았기에 비자 때문에 한국에 다녀오지 않아도 됩니다. 5년 전에 동창 신부님의 초대로 2달을 지냈습니다. 그때 만났던 분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니 마치 집에 온 것처럼 낯설지 않았습니다. 뉴욕에서 자동차로 여행을 하면서 왔기 때문에 시차도 느끼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바로 옆 본당에 서울 교구에서 파견된 신부님이 있어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순특강을 서로 바꾸어서 하기로 했습니다. 작년부터 서울 교구에서 보좌신부님을 파견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영어도 잘 하시고, 겸손하십니다. 부모님이 미국에서 살기 때문에 부모님을 만나기도 좋다고 합니다. 뉴욕에서 함께 온 신부님들이 사제관의 불편함을 모두 해결해 주었습니다. 인터넷을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문도 열쇠 키에서 번호 키로 바꾸었습니다. 컴퓨터의 선도 모두 정리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둘째는 ‘청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셋째는 ‘선행’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세상은 선한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간다면 어떤 악의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하느님 그대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
하느님 안에
나 있듯이
내 안에
하느님 계시고
하느님 안에
그대 있듯이
그대 안에
하느님 계시어
내 안에
그대 있고
그대 안에
나 있으니
나는 그대요
그대는 나일지니
나 볼 때에
그대 보듯이
그대 볼 때에
나 보듯이
그리하여
나와 그대는
그리하여
그대와 나는
서로 믿음이요
서로 희망이요
서로 사랑이요
서로 용서요
서로 자비요
서로 살림입니다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 내용이 중요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자비하셔서 선인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비와 해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 말인즉 악인들이 회개한다면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심판과 단죄는 우리가 아닌 오직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들보는 보지 않으면서 남의 눈이 티를 지적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두 회개가 필요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용서는 하느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라고 하십니다.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라는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용서할 줄 아는 이는 다른 이의 아픔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눌 줄 아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속한 이들은 심판하고 단죄합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만 생각하고 자신의 말이 옳다고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둠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시기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특히 우리는 예수님께서 처음에 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아버지가 자비하신 분이니 그분의 자녀인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언젠가 말했듯이 우리 안에는 그분의 DNA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상해도, 괴로워도, 우리가 자비를 베푼다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넘치게 주실 것임을 잊지 맙시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6,36.38)
2016년 교회는 자비의 성년을 통해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를 깊이 묵상하고 자비를 베푸는 교회로 거듭날 수 있는 한 해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1980년 선포하신 「자비의 회칙」 이후에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자비로운 교회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다시금 재조명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용서)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비참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봅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의 예수님의 만남에서 드러난 것처럼, 또한 다니엘 예언서에도 언급된 것처럼, 그것은 인간의 부끄러움과 하느님의 의로우심, 비참함과 자비하심의 극명한 간극間隙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비참함과 부끄러움은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할 때 하느님의 전지전능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볼 때 우리의 얼굴에는 부끄러움만 가득하지 않고 그 자비로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희망에서 솟아나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각성할 수 있게 됩니다.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에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5,48) 라는 말씀을 들었고, 오늘 루카 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6,36) 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누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완전함을 당신께서 친히 보여 주신 사랑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조금 더 아버지의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 (로13,10) 고 했고, 교회 역시 「교회헌장 40항」에서 인간이 실현해야 하는 완전함은 바로 주님께서 실제로 모든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마르12,30참조), 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함에(요13,34;15,12참조)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마태오와 루카의 관점이 상이하다고 보기보다 유사한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 루카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을 새로운 어휘로써,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비전과 통찰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기 이전, 이스라엘의 주된 관심사는 성과 속(=거룩함과 불경함), 정과 부정(=깨끗함과 불결함)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였지만, 이는 동전의 한 면에 지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 곧 자비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거룩함은 비판적이며 회의적으로, 거룩하지 않은(=죄인) 혹 깨끗하지 않은(=불결/부정) 사람들과 분리, 분열, 차별 그리고 적대 관계가 팽배하지만 이에 반해 자비함은 긍정적이며 낙관적으로 비록 그 존재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 내지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과의 관계에서 일치, 친교, 존경과 환대가 있으며 그들을 지지와 나눔이 우선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어떤 이미지를 갖고 사느냐는 단순히 의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행동과 생활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거룩함을 우선시할 때 교회 안에서 의인과 죄인 그리고 깨끗한 사람과 불결한 사람으로 구분되고, 심판과 단죄가 빈번하게 벌어지며 바리사이들처럼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종교인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이미지를 사는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지금껏 의롭게 그리고 올바르게 살지 않은 흔히 죄인이라고 해서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아버지시며 어머니시고, 거룩하시면서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흔히 말해서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다, 고 하는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닮아갈 때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며, 비록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그들과 우리 사이에 분열과 불목이 아닌 일치와 친교가, 단죄와 심판이 아닌 용서와 자비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리라 봅니다.
이렇게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 또한 자비로운 마음과 자비를 베풀 때 하느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저희 품에 담아 주실 것”(6,38)을 저는 믿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우리 아버지 하느님 자비를 체험하지 못해서 자비를 살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하느님의 자비를 받고 하느님의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단죄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은 사람이며 오히려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전 메쥬고리아 성지 순례할 때, 미사 중에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하자 그런 표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양반 왈, 왜 불교 용어를 미사 중에 사용합니까?, 라는 항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의 화신이며 육화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같아지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존재 상황과 관계를 함께 나누시기 위한 사랑을 사셨는데 그 사랑을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同體大悲, 同其塵(=티끌과도 하나됨)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사랑하사 사람인 우리와 모든 점에 있어서 같아지신 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이 사순시기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깨닫고 실천해야 할 우리 존재의 새로운 비전과 통찰은 다름 아닌 자비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그렇지만 특별히 자모이신 성교회가 되살려야 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자비이며, 이 자비가 교회 안에 넘쳐날 때 세상의 수많은 고통당하고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가난한 이웃들의 피신처가 쉼터 그리고 품이 되리라 봅니다.
어느 분은 이런 표현을 하더군요. 빵을 말썽 없이 나누려면 쪼갠 뒤에 먼저 골라잡게 하라, 고 말입니다. 어찌 빵뿐이겠습니까? 많은 부분에서 약자나 소수자에게 선택권을 양보하면 그 시점에서부터 관계와 소통이 그리고 화해와 친교가 일어날 것이며 이것이 오늘 복음의 자비라고 봅니다. 타인을 나와 다르다, 거룩함의 시선에서 의인과 죄인의 구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심판하는 사고 의식과 행동 양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부단히 은총을 청해야 하리라 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그 자비를 바탕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 저희 죄대로 저희를 다루지 마소서.” (시103,10)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다니 9,7) 라고 말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되돌아보면, 내가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돌아보면, 잘 한 일은 별로 생각이 안 나고 잘못한 일들이 꼬리를 지어 생각이 나서 나 자신이 부끄럽고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지금까지 내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회와 형제자매들이 나를 용서해주시고 너그러이 받아주셔서 오늘까지 이렇게 살아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자비로워지기를 논하기 전에 나를 자비롭게 용서해주시는 주 하느님과 형제자매님들께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사드리며, 이 사순절에 새롭게 조금씩 갚으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부끄럽게나마 가져봅니다.
주는 사람이 없으면 받아야 할 사람은 죽는다. <루카 6, 36-38> 2월2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의 정상적 행동은 펴고 오므리게 되어있어서 주고받는 행동을 통해 사랑이 가능합니다. 주기 위해 손을 펴야 하고 받기 위해 손을 오므림으로써 사랑을 주고받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주기 위하여 준비하고 상담 시 가방을 들고 나갑니다. 상담 후 적지만 음료수나 초콜릿으로 상담자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용서하여라,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받을 것이다.” 하십니다. 특별히 용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누구나 잘못하고 살면서 용서받아야 하는데 서로 용서가 없으면 죽음밖에 없으며 서로 이익만 생각하고 나누어주지 않으면 풍요로운 삶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오늘 세상은 어제의 세상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암에 걸린 사람은 암을 죽이는 레이저를 밖에서 쏘며 죽였지만, 요즘은 3년 전부터 레이저를 몸 안에 심어 안에서 밖으로 보내며 암을 없앤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잘못된 것은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주고받은 것도 밖에서 조건을 맞추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만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면 이는 마음이 바로 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겸손과 온유함이며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을 감사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온유한 사람은 어떤 것도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하지만, 정의에 자비가 따라다녀야 합니다. 이런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고 사형을 기다리던 사람이 교도소에서 수감 중 감기가 들면 감기약을 주는데 이분은 자기가 받은 약을 자기는 먹지 않고 보관해 두었다가 다른 환자가 생기면 자기 약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었기에 결국 많은 사람이 사형을 당해도 이분은 감형받고 꽃동네를 거쳐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어딘가 살아 있습니다, 그 모범을 보고 “일선 회”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하느님 자비로우니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태양을 독점할 수 없으며 산소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태양은 모든 이의 것이고 산소도 모든 이의 것입니다. 정의를 따라 사는 사람은 자비가 없으면 정의도 빛을 잃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주님 말씀은 모든 이의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말하면 “너희가 세상에 풀어준 것은 하늘에서도 풀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이용하지만, 이는 성사권 있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원수의 관계를 풀지 않으면 하늘에서 풀지 않으니, 자비는 너도 살고 나도 살라는 것입니다.
손을 펴고 주고받는 것처럼 모든 것을 주고받으며 살면서 각자가 마음속에 암과 같은 병을 품고 살지 말고 죄와 악을 제거하는 하느님의 자비를 품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함승수 신부님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여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만약 내가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가수 윤복희씨가 부른 <여러분>이라는 노래입니다. 받은 만큼만 주려하고, 먼저 받은 다음에야 주려고 하고, 그마저도 ‘실리’를 따져가며 최소한으로만 주려고 하는 요즘 세상에서, 내가 먼저 누군가가 괴로워할 때 위로해주고, 슬퍼할 때 같이 울어주겠다는 마음, 누군가가 어둡고 험한 길을 걸어갈 때 기꺼이 같이 걸어주며 앞길을 밝혀주고, 누군가가 쓸쓸해 할 때 묵묵히 옆 자리를 지켜주는 참된 벗이자 영원한 형제가 되어주겠다는 마음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처럼 조건을 따지지 않고 제한을 두지 않는 참된 사랑을 자기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실천하는 사람만이, 자신이 비슷한 처지에 빠졌을 때 당당하게 '여러분'도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제대로 받으려면 먼저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받기 위한 목적으로, 계산적으로 따져가며 주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넉넉하고 깊은 마음그릇을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그 마음 그릇에 담아 내어준 그만큼, 아니 거기에 덤까지 후하게 얹어서 돌려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어줄 때는 나와 같은 인간에게 내어주지만, 돌려받을 때는 하느님께로부터 받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애가 넘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신 뜻을 충실히 실천하면 그 모습을 어여삐 보시고 사랑과 은총을 차고 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총과 사랑을 내 안에 제대로 담으려면 내 마음 그릇을 제대로 준비해야 합니다. 옹졸하고 인색한 마음 씀씀이로 그 크기를 줄여놓으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 그릇을 뒤집어 놓으면 주님께서 아무리 많은 것들을 베풀어 주셔도 내 안에 담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먼저, 조건없이, 한 없이 베풀어주신 그 자비를 우리도 베풀어 주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비를 베푸는 구체적인 방법을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첫째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판은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둘째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단죄는 자기 생각대로 다른 사람이 멸망하리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일입니다. 이 두가지는 철저하게 하느님의 고유권한에 속하는 일이기에, 감히 내가 그 권한을 손에 쥐고 휘두른다면 그건 ‘신성모독’이라는 대죄에 해당하지요. 그러니 둘 다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대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인간이 해야 할 일 두가지에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첫째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둘째 가진 것을 필요한 이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특별한 조건이나 기준이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용서하고 나누면 되는 것이지요. 부족함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 충만한 기쁨과 혜택은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많이 듣고 늦게 판단하기
이승복 라파엘 신부님
우리가 누군가에게 너그럽지 못하다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내 시각에서 보는 것만을 가지고 나의 잣대로 상대를 판단하면 우리는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당연히 너그러울 수 없는 것이죠. 내 신념과 판단만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면 똑같은 상황에서 섣불리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그를 조금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시각이 아니라 그의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해보려 하고 그럼 그 이전과는 다른 것들이 보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판단은 유보되고 우리의 지평은 넓어집니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그의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 말이 우리의 신앙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해야 합니다. 아니, 사실은 아예 판단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도 좋습니다. 판단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의 몫은 잘 듣고 타인을 더 이해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말씀입니다.
심판을
멈추어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결코
심판으로는
가까워질 수
없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입니다.
자비의 실천이
없기에
용서의 체험도
없습니다.
심판의 끝은
죽음이지만
용서의 끝은
우리모두의
자유입니다.
하느님으로 인해
우리는
자비와 용서를
얻습니다.
먼저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마음입니다.
자비도
용서도
평화도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를 살리는
마음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심판과 단죄가
없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자기의 소중함을
올바로 아는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에게
필요한 것은
심판이 아닌
자비이며
용서입니다.
자신의 아픔에만
골몰하면
타인의 십자가를
볼 수도 없고
동정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구원을 체험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미움이 아닌
용서를 통해
용서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실천이
예수님의 참된
정신입니다.
부끄러워할 것을
부끄러워하며
뉘우칠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랑이 심판을
이기며
자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사람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를
묻는 사순의
오늘입니다.
어린 예수님을 사흘 동안 못 찾았을 때가 있었지요.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께서 행방불명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뒤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원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이 사건에 대해 복음에서는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화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이해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 이해의 순간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언젠가는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그 순간에는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도저히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깨닫습니다. “맞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구나.”라면서 그 순간이 은총이었고 감사할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신학생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능력도 없고 자신감도 부족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하자, 하나같이 우리가 같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바쁜 신학교 생활에 자기 일하기도 벅찼으니까요. 그때 말만 하고 도와주지 않는 친구들을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얼마나 저 자신이 성장했었는지를 말입니다. 은총이고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용서하고 주라고 하시지요. 솔직히 예수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판과 단죄를 반복하고, 용서할 수 없다고 또 절대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나의 손해가 너무 큰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서두르게 판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해하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서두름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은 어떠했을까요? 너무 급한 서두름으로 하느님의 손길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걱정은 출처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를 약화시키는 것이요, 용기를 앗아가는 것이요, 인생을 단축시키는 것이다(존 란카스터 스팔딩).
이웃들과 내가 만나는 지점은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장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도자로서 수십 년 세월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해왔는데, 이 정도 연륜이라면, 이제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탁월한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데...아직도 손톱만한 일에 걸려 넘어지고, 분노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때로 공동체 구성원들과 사사건건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원인분석을 해나가면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과오로 인해 내게 다가온 상처, 대화 부족과 상호이해 부족으로 인한 고통, 최근 내 불편한 심기로 인한 부딪힘, 난데없이 다가온 십자가...
그럴 때마다 생각하셔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웃들과의 의견충돌이나 마찰, 그로 인한 상처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발버둥치다보면 결국 남는 것은 또 다른 상처요 또 다른 고통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지고,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열 일 제쳐 놓고 이제 하느님께로, 영적 생활로 돌아가라는 표시로 보는 것입니다. 판단이나 단죄, 그로 인한 영적 고통의 길을 그만 접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라는 표지로 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서고 나서 계속되어야 할 영적 작업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보다는 침묵, 판단보다는 묵상, 단죄보다는 용서의 길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려운 작업이 남아있습니다.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영적으로 재무장한 다음, 내적 평화를 되찾은 다음, 다시 한번 이웃들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공동체 생활의 리듬, 사이클을 요약해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들과의 관계 안에서 입은 상처와 고통☞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표시로 인식☞침묵 가운데 영적 생활☞내적 평화의 획득☞다시 그 형제들에게로 돌아감.
이웃들과 내가 만나는 장소는 참으로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주님을 알아보는 장소입니다.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장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장소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이웃들의 요구와 상황에 무관심하고 공동체에 대한 내 사랑이 결핍되고 있다면 결코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고 노래를 불렀던 가수 윤복희 씨의 삶을 간단히 살펴봅니다. 윤복희 씨는 극단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으로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무대의 내용 때문인지 아버지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아이들의 생계를 위해 극단을 쫓아 떠돌게 되며 윤복희 씨 형제들은 고아처럼 길거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잠을 잘 곳과 먹을 것을 걱정하며 살던 중에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말을 듣습니다.
윤복희 씨는 어린 나이에 삶의 이유를 잃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출소하였으나 생을 마감하여 그야말로 혼자 삶을 극복해 나가야 했습니다. 이제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는 말의 가사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워낙 천재적인 무대 기질이 있었던 터라 열여덟 살부터 미8군 무대에 섰고 때마침 세계적 톱스타 왓 어 원더풀 월드를 부른 루이암스트롱이 방한하였습니다. 루이암스트롱은 한국에 자신보다 왓 어 원더풀 월드를 잘 부르는 가수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윤복희 씨를 찾았고 윤복희 씨의 노래를 듣고는 깜짝 놀라 함께 공연하러 다니기로 합니다. 이렇게 윤복희 씨는 소속사에서 집을 세 채씩이나 사 줄 정도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때 사랑도 찾아옵니다. 서울대 출신이자 독일계 혼혈 가수인 유주용 씨와 결혼합니다. 유주용 씨는 자신보다 윤복희 씨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일을 그만두고 매니저를 자처합니다. 이때부터 그들의 사이는 벌어집니다. 유주용 씨가 윤복희 씨와 당대 최고 가수 남진 씨의 사이를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싸움을 벌이던 끝에 윤복희 씨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 그 소문이 맞는다고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혼 후 정말로 남진 씨와 결혼합니다. 나중에 윤복희 씨는 그 결혼이 유주용 씨에게 질투를 유발하기 위함이었기에 남진 씨에게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어쨌거나 윤복희 씨는 자기 남편이자 부모의 역할까지 해 주기를 바랐던 유주용 씨도 자기를 부모처럼 책임지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윤복희 씨는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무대에서 혼절하는 때도 있지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나가고 있고 치매만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혼자이기에 치매가 걸리면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여전히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고 누군가를 찾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소망은 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라는 게 틀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받으려면 먼저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윤복희 씨는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부모와 같은 사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무언가 해 줄 사람을.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부모처럼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일입니다. 독립시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할 때 받지 못하니 그 빈 곳만 바라보며 계속 누군가 나를 위로해줄 사람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명확해야 그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게 됩니다.
저는 행복을 바랐습니다. 행복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나 돈, 명예 등이 행복의 조건이라 생각했습니다. 나중에는 ‘사랑 받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니 사랑 받으려면 사랑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저는 사랑 받기 위해 사제가 되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꿈은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외롭지 않고 싶다”로 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외롭지 않게 해 줄 것인지 찾는 것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원하는 것은 “~ 하고 싶다”가 되어야 합니다. “~ 하고 싶다”라고 원해야 그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누가?”나 “무엇?”을 찾는다면 하느님이 배제되고 그러면 줄 것이 없어져서 얻을 것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순수하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수하게 원하는 것이 결정되었다면 이제 그것을 남에게 해 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해 주려면 부족한 게 없어야 합니다. 먼저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 해 주시는 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니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흑기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대신 해 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술자리에서 간혹 흑기사를 볼 때가 있습니다. 술이 좀 과했거나,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부득이 하게 술을 마셔야 할 때에 대신 술을 마셔주는 우정(?)을 보여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술 상무’라는 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래처와 회식이 있을 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술도 곧잘 마시면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직원이 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는 않지만 친구를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LA에 신문 홍보를 오면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저를 맞이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보내 주시는 흑기사입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와 주시고, 제가 있는 동안 차량 봉사를 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편안한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아침에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니다. 가족처럼 지내는 부부들도 기꺼이 시간을 내 주곤 합니다. 제게도 흑기사가 되어 주시지만 LA에 오시는 다른 신부님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LA로 가는 발걸음은 늘 가볍고 편합니다.
주변을 보면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기꺼이 시간을 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퀸즈 성당의 본당 신부님은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나그네 사제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남미에서 선교하는 신부님들, 유럽에서 공부하는 신부님들은 옹달샘에서 목을 축이는 다람쥐처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사제관에서 머물다가 소임지로 돌아가곤 합니다. 때로 귀찮을 수도 있지만 신부님은 기꺼이 사제들을 위한 사랑방을 마련해 주십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작년에 손님 신부님들이 왔었습니다. 시카고에서 공부하는 신부님, 메릴랜드에서 공부하는 신부님, 한국에서 은퇴하신 신부님이 머물다 가셨습니다. 기꺼이 흑기사를 하지는 못하지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머물다 가라고 했던 것처럼 저도 신부님들이 머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젊으신 신부님들은 알아서 뉴욕을 다니기에 차량 봉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흑기사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지상 최대의 흑기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5000명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흑기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어야 했던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고 율법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흑기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나 그대 하느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보며
내 앞에 선
그대를 봅니다
그대를 보며
그대 앞에 선
나를 봅니다
나를 보며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느낍니다
그대를 보며
그대 안에 계신
하느님을 느낍니다
나를 보며
나와 그대 사이에
하느님을 느낍니다
그대를 보며
그대와 나 사이에
하느님을 느낍니다
하느님을 느끼며
그대 앞에 선
나를 봅니다
하느님을 느끼며
내 앞에 선
그대를 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는 참으로 나요
그대는 참으로 그대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는 비로소 그대요
그대는 비로소 나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하느님처럼
우리는 서로 자비요
우리는 서로 용서요
우리는 서로 사랑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분명한 것은 나게게 심판과 단죄가 고스란히 되돌아 온다는 점이다.
운전을 하다보면 앞차가 맘에 안 들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단죄하면 꼭 뒷차가 앞차인 내차를 추돌했다. ‘꽝’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시며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용서했을 때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참 내가 어느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간 본성상 늘 동태 복수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첫째,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가 용서했을 때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길은 바로 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심판과 단죄는 바로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해를 가한 사람은 내가 심판하고 단죄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죄의 어둠에 빠져 있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상대의 회개를 위해서도 또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세상사는 방법은 주님의 기도대로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자비로우신 아버지처럼 우리도 심판 단죄 말고 용서와 베풀라는 말씀.
당연히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 사는 모습 그래야하죠.
인간 편 생각에 욕심 야망 등 위해 만능의 하느님을 써먹으려 합니다.
옹졸하고 이기주의 자기 욕심 채워줄 그런 아버지 하느님 아니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 우리를 가족으로 대하시는 한 그리되지 않지요.
신앙인들은 모두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한 가족 이랍니다.
정말 멋진 인생 가꾸기 알려주신 예수님 가르침 감탄해 마지않습니다.
주님의 기도 내용은 하늘 뜻으로 새세상 만들자는 구원의 혁명입니다.
가톨릭알림 말: 세상사는 방법은 주님의 기도대로 사는 간단한 겁니다.
툿찡 포교 베네딕토 수녀회 대구 수녀원
자비, 라틴어로 Misericordia 는 '비참하다.' 라는 Miser 와 '심장, 마음' 이라는 Cor 가 합쳐진 것으로 인간의 비참한 마음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심이라는 말을 한 수녀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의 자비심을 경험한 사람만이 자비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분께 받은 자비를 다른이에게 돌려줄 수 있습니다.
그럴려면 나의 비참함을 먼저 보아야합니다.
온갖 합리적인 이유로 포장해 그럴듯해 보이는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알몸인 나를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그래도 변함없이 나를 상대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한 인격적인 체험이 있었을 때 아버지와 같이 나의 상식과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자비심을 베풀 수 있습니다.
은혜로운 사순시기, 나의 가장 밑바닥에서 사랑으로 나를 받쳐주시고 함께하고 계신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 되길 희망해봅니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세상을 살아가려면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남을 단죄해야만 할 순간들이 심판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자비와 용서도 좋지만 정의 역시 필요하지 않습니까?
무조건 용서하며 내어 주기만 한다면
그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고 그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와 자비의 선을 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당신의 자비가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
오장 육부가 위장이 꼬임에도 함께 아파하시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과
시선이었음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 자비의 마음을 청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Just as your Father is merciful.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인 ‘자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은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지시만 하시는게 아닙니다. 왜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우쳐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자비를 실천하도록 이끄시려는 겁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이라는 구절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아무 조건없이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임금이 아무 조건 없이 ‘일만 탈렌트’의 가치에 달하는 큰 자비를 베푼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자비를 베푸셨으니, 먼저 입은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 또한 다른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 자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베풀어야 할지를 네 가지 동사를 통해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사람의 ‘겉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온 국민이 합의하여 정한 기준인 ‘법’에 따라 할 일이고, ‘속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남의 잘못을 판단하거나 단죄할 명분도 권리도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이해하고 용서하고 품어안아야 할 소명과 책임이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할 그 기준으로 먼저 자기 허물을 들여다보라고, 타인의 잘못을 단죄할 그 정성으로 먼저 제 눈에 박힌 들보를 살피고 빼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나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베풀어주신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 또한 다른 이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격려하시기 위해 한 가지 약속을 해주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는 약속입니다. ‘됫박’은 시장에서 곡물을 계량할 때 쓰는 네모 모양의 나무 바가지를 가리키지요. 자기 가게에 처음 오는 손님에게는 딱 그 됫박의 높이만큼만 물건을 담아줍니다. 그러나 자기 물건을 자주 사주는 ‘단골’들에게는 그 됫박 높이보다 훨씬 더 높게, 흘러 넘쳐서 더 이상 담지 못할 한계까지 ‘덤’으로 더 담아줍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사랑과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평소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랑과 자비를 기회될 때 마다 열심히 실천하여 ‘구원의 단골’이 된 우리에게, 내놓은 것보다 훨씬 더 귀하고 좋은 것들을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아까워말고 미루지 말고 자비를 베푸는 우리가 되야겠습니다.
아버지를 닮기 위해
여한준 롯젤로 신부님
“‘나, 요즘 성경통독 하고 있다. 나, 성경 학교 졸업했다.’라고 스스로 말하며 자랑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변화된 내 삶을 보고 ‘너, 요즘 성경 읽고 있니? 너, 혹시 성경 학교 다녔어?’라는 질문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 통독을 하시는 분들에게, 아니면 성경 공부를 마치신 분들에게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신앙인이라면 모름지기 다른 사람들로부터 “너, 하느님을 닮았구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바로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며, 이를 신앙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자비’라고 이르시며,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라는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용서하여라. 주어라.”라는 ‘해야 할 것’이 그것입니다. 내가 심판하고 단죄할 대상이라면 나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거나 그만한 죄를 저지른 사람일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심판과 단죄도 주어져서는 안 되며 오직 용서와 내어줌이 있어야 우리는 아버지처럼 될 수 있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언제쯤 가능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해야 합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신 사람이 되자 <루카 6, 36-38> 3월 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어떻게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과 같아야 하는가? 완전하심을 본받고, 자비하심을 본받고, 사랑이심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한편으로는 ‘짐승만도 못한 행동을 하고 악으로 유혹하는 악마보다 더 악한 행위를 하는 인간을 놓고도 따를 수 없는 이상을 명하시는 것인가?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한 사람이 아니, 내가 여기 생존해서 살도록 우주 만물이 창조하셨고 아침에 숨 쉬며 일어나 이 큰 은총을 느끼며 주님을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내 몸에 우주적인 십자가 기도를 하며 일어나 다음 행동, 또 다음 행동을 하면서 묵상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아침 기상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성당으로 향합니다.
아침 첫 기도의 내용이 “오늘 주님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입니다.
복음의 소리는 “너희는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우신 사람이 되어라.” 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빛나도록 빛나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시편 8편을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생각해주십니까?” 하는 구절에 하느님의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고 당신 손의 작품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어느 피조물이 사람과 같습니까? 아무리 영특한 짐승도 눈앞에 놓인 감각적 관계를 인지하지 못하며 산 너머, 바다 건너 일을 알 수 없으며 전 우주의 운행을 짐작도 못 합니다. 사람만이 지구 밖을 보고 앞날을 예측하며 관리하고 준비합니다. 사람만이 나라밖에 나라를 걱정하고, 사람만이 용서와 자비의 능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아침 기도 집회서 36, 1-7 “자비의 빛을 보여주시면 우리가 따라 살겠다.”는 기도입니다.
주의 기도문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는 말은 내가 아버지의 자녀로 자비의 빛을 받고 자비로이 살아야 함을 늘 기도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같이 자비로워야 합니다.
자비의 시작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며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이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사람이 되시려고 이 낮은 곳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남을 심판하는 자리는 높은 자리, 단죄하는 자리도 높은 자리, 용서하는 자리도 높은 자리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리보다 높은 자리가 없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이 오른다고 하셨지만, 권력은 봉사하기 위한 힘이고 재력은 나누기 위한 것이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남 주나?” 하지만 지식은 내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는 때에 따라 장소 따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고 몸 밖에 있는 자비가 아니라 몸 안에 있는 자비를 지니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우리는 우리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핑계를 댑니다. ‘나는 안 그러려고 했는데,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나오니 내가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어?’ 등등 내 행동의 자유가 있고 내 행동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내게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거꾸로 내 행동의 자유가 마치 남에게 달려있기라도 한 것 마냥 내 행동의 원인과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돌리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라고 하시며,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37-38절)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남이 너에게 어떻게 해주느냐와 관계없이, 너는 사랑으로 네가 할 바를 다하여라.’ 라고 말하시는 듯합니다. 그리고는 그에 대한 대가로 주 하느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내 마음속에서 매일 솟구쳐 오르는 저주와 벌과 보복을 넘어 자비로우신 주님의 사랑을 품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루카 6,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서로가
서로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를 향한
심판입니다.
되돌아갈 수 없는
심판의 길입니다.
심판은 심판끼리
모이고 자비는
자비를
불러들입니다.
심판의 속을
들춰보면
거기에는
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를
잘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남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오고 가는 것이
심판이 아니라
용서이길
기도드립니다.
더 아파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사순입니다.
언젠가 우리도
가야할 용서의
길을 먼저
걸어가십니다.
되돌려드릴 수 없는
끝없는 용서의
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용서를 구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심판은
환불이 되지만
용서는
환불이 되지
않습니다.
용서는
하느님께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심판과 단죄의
되질이 아닌
용서와 자비로
되질하는
사순의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자신은 뒤끝이 없는 쿨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마주 보고 다퉜습니다.
한참을 언쟁하다가, 상대방은 말이 안 통한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뒤 이 형제님의 마음은 너무 불편했습니다. 평소에 자신이 뒤끝 없다고 했는데, 자기를 비판하고 또 다퉜던 그 사람을 쿨하게 다시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속 화가 나고 얼굴도 보기 싫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자신이 얼마나 뒤끝 많은 사람인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좋은 성격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성격이 진짜로 좋은 성격이 아닐까요? 이는 무엇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상대의 잘못을 보고서 나도 그런 잘못을 할 수 있는 부족한 인간임을 인정할 때, 진정으로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살지 않고 남과 함께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참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하나가 자기 눈에 너무 잘 보이는 남의 잘못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의 잘한 일을 인정할 때는 주의 깊은 관찰과 분석을 통해서 가능하면서도, 남의 잘못은 왜 이렇게 빨리 자기 눈에 비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상대방에게는 남이 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나의 잘못이 너무 쉽게 보일 것입니다.
정말로 고치기 힘든 우리의 악습입니다. 그래서 동서양에 걸쳐서 이 악습을 버리라는 말들이 많습니다. 중국 고전 전한서는 ‘남의 공은 기억하고 과실은 잊어라.’라고 했으며, 서양의 격언은 ‘남을 고쳐 준다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열 번 더 낫다’라고 전해줍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느님 나라에 온전하게 들어갈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도 치료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남을 탓하고 교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대신 남의 잘못을 보고, 그 잘못이 내 잘못도 되지 않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사람의 겉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법’이 할 일이고, 속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입니다. 따라서 남의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 먼저 자기 잘못을 고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용서하고, 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께 더 커다란 사랑과 은총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배워 그런 사람이 되어라(핀다로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다시 또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첫 번째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 말씀은 깊은 절망감과 우울감으로 가득한 요즘 제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주님께서 사랑이요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시면서, 어찌 이리 큰 참담함과 혹독함을 체험하게 하시는지...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주님이십니다. 그분 마음속을 헤아리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다니엘 예언서 9장 8절)
지난 우리의 삶을 더 깊이 성찰할 순간인 듯합니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더 유심히 내 발밑을 내려다봐야 할 때입니다. 더 부끄럽게 되지 않기 위해 더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때입니다.
부디 너무 우울해하지 말길 바랍니다. 초기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같아서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로 극복이 가능합니다. 규칙적인 운동, 산책이나 등산, 마음 비우기 작업 등이 도움이 됩니다. 스스로 극복하기 힘겨울 때는 의사나 전문가의 진단에 따른 처방과 치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의(名醫)이자 주치의가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다가갈 때 그분께서 우리를 우울증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다시 또 없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 보니 실망이란 단어가 자리 잡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실망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나 자신과 이웃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결국 실망을 불러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이기에 실망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망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라면 언제든지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망했을 때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우울증으로 진전되도록 방관하지 말고 넘어진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하느님 자비의 강물에 흘려 보내는 일이야말로 우울증 치료에 최선책임을 강조합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한다.”(이사야 43장 18~19절)
한편 다윗 임금은 자신에게 다가온 우울증이 하느님 은총과 자비 안에서 완치되었음을 크게 외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어찌하여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시편 43장 5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조차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할 태도입니다. 암담하고 울적할수록 주님께 매달려봐야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향후 5년간을 대 피정 기간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뉴스도 끊기로 했습니다. 대신 더 깊이 복음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더 깊이 책 속으로 빠져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더 인간다운 세상, 더 의로운 세상, 더 복음적인 세상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연대할 바가 무엇인가, 고민해보기로 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는 한국 교회가 교황님의 요청으로 시노드를 준비하면서 제시한 용어입니다. 한국말로 번역할 수 있지만 원어인 시노달리타스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시노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라면, 시노달리타스는 회의를 통해서 마련하는 ‘공동합의’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월 20일 기사에 시노달리타스를 얻기 위해서는 ‘신약성경’에 주목하자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시노달리타스와 신약성경의 관계에 대해서 신문에 나온 기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시노달리타스를 얻기 위한 밭은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교회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초대교회의 성찰과 실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성찰과 실천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목적지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서, 사도행전, 서간, 묵시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유대인에게 전해졌지만 온 세상에 전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서간은 신앙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규범과 실천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묵시록은 우리는 현실이라는 땅에 서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였습니다. 태어나신 구유에서도, 죽음의 십자가에서도 늘 가난하였습니다. 시노달리타스의 첫 번째 합의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선교에 대한 기록입니다. 선교는 3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첫째,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더 온전하게 응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화입니다. 둘째,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의 요구대로 살지 않는 이들에게 신앙의 기쁨을 되찾는 회개, 복음대로 살려는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 복음화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사도행전은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에 있는 교회에 먼저 구성원부터 복음화 할 것을 권고합니다. 아울러 모든 이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열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서간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로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은 주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입니다. 서간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사랑’ 곧 윤리 덕목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새로운 삶이고,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약성경의 서간들은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표현되는 ‘자비와 용서의 삶’ 그리고 ‘일치의 삶’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시노달리타스는 진실한 회개였습니다. 하느님의 법과 계명의 준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유배지에서 돌아 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의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판단’과 ‘분별’의 개념을 혼동하면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념을 정리해보자면 판단은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재판적인 용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판관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 다른 이들을 판단을 하고 단죄를 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의 권한을 뛰어 넘어서서 하느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위선과 교만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도 역시 하느님 앞에 모두가 다 죄인들이기 때문에 죄인이 죄인을 심판과 단죄한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과는 다르게 분별이란, 하느님 안에서 올바른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분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별을 통해서 하느님 앞에 자신 또한 죄인임을 인식하고 더 이상 남을 판단하는 죄를 범하지 않으며 그분 보시기에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 해야 할 분별과 용서가 아닌 판단과 심판의 죄만을 지으면서 살고 있지 않은지 각자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생명 부활을 산다는 것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풍성히 되에 담아라."(루카6,36-38참조) 주님의 말씀이시다.
언젠가 정신이 살아 있었다. 남을 심판 하지 않았고, 단죄 하지도 않았고, 부족해서 달라고 청할 때, 후하게 누루고 흔들어서 넉넉하게 되질 해주었다. 하느님의 자비가 넘쳐났다.
언제부턴가 정신이 빈약해졌다. 상대를 심판하고 단죄하고, 잘못하는 자기에게 관대해져 갔다. 부작용이 생겨났다. 간린과 탐도를 시작했고 눈금자와 모말을 속여 이익을 챙겼다. 하느님의 자비가 시들해졌다.
언젠가부터 자비가 사라졌다. 하루종일 나도 모르게 상대를 심판하고 단죄하고 용서에 인색해졌다. 담는 되질을 손이 아닌 기계가 하고부터 일시에 덤이 넘쳐나는 자비는 사라졌고 거기다 되를 속이기까지 한다. 대형매장은 정액표로 속이고 전통시장은 가늠자로 장난질 한다.
사순절에 자비를 살아야겠다. 입단속, 마음 단속, 손단속하며 주님의 대자 대비를 살아야겠다. 용서하는 마음을 살찌우고 물질을 나누며 되질할 때 누르고 흔들되 모말은 풍성히 담아 하느님의 자비를 작동시켜야겠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의 내용을 길지 않습니다. 길지 않지만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자비로운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심판하지 말라고, 또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옳고 그름의 판단이 심판을 위한 또 단죄하기 위한 판단이라면 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사실 이 심판과 단죄는 우리들이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들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하느님의 정의를 세운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이 범한 모든 죄를 정당화 시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주어라.” 우리들은 이 말씀대로 살면 되는데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용서를 하면 손해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사회가 하는 용서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할 때 용서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서는 하느님과 관계가 없는 용서입니다. 우리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과 구별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별 되는 삶을 사는 이들이 하느님의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기쁨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려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과 단죄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상대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아멘!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더불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 있어
나 있기에
나 있도록
너 있게 하려네
네가 너라서
내가 나이기에
내가 나이도록
네가 너이게 하려네
너와 나 있어
우리 있기에
우리 있도록
너와 나 있게 하려네
남을 용서하여라.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자비는 훌륭한 덕으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덕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거룩한 이에게나 악인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다(마태 5,45 참조). 이 자비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37절)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건만,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다.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격도 없으면서 이웃을 단죄하면, 단죄받는 것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허물을 찾거나 들추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3)라고 고백한 시편 저자는 그래서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내세우며 다시 용서의 탄원을 드린다.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소서.”(시편 103,14) 그러니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하는 그대로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7,2 참조).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 주고 정의와 용서와 은총으로 심판해야 한다.
이것은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일단 올바로 심판한 사람은 은총에 따라 용서해야 한다. 그러면 정의에 따라 심판받을 때, 은총으로 용서받을 자격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정의에 따르지 않고 자기를 위해 보복하려고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는 심판은 안 된다는 것이다. 심판하기보다는 훈계하거나 충고하라는 뜻이다. “용서하여라.”(37절) “주어라.”(38절)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것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한다. 그러므로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고,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며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선을 받고 용서받으며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곳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아낌없이 후하게 갚아주신다고 하신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라고 하셨다. 용서는 단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안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바로 나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좀 더 자비롭게 용서를 베풀며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근상 시몬 신부님
자비롭다(오이크티르몬)의 뜻을 찾아보니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이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한다. 문제는 '되어라(기노마이)'인데 이게 상태의 변화를 뜻한다. 그러니까 자비롭지 않은 자가 자비롭게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게 본래 심성이 고와서 장착이 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주 아주 불쌍한 상황이 있어서 '생기는' 심적현상일텐데... 불쌍한 마음을 무슨 수로 자가발전할 것인지 막막하다. 같은 맥락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 상황, 죄와 선을 구분해야 하는 상황, 용서할 수 없는 상황, 줄 수 없는 상황, 나의 결핍으로 누군가에게 넘치도록 베풀 수 없는 상황에서 무슨 수로 '나의 상황'을 넘어 나를 바꿀 것인지 막막하다.
아버지가 그러하시다는게 우리 변화의 유일한 가능성. 아버지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판단치 않으시고, 죄를 묻지 않으시며, 주시되, 넘치게 주셨다는 체험이 없다면, 곧 이 믿음의 체험이 없다면 닮을 수 없는 일.
언제 그러하신적이 있느냐 물을 수도 있고, 잠잠히 눈을 감으며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어야 할 수도 있는 복음.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회개- 주님께로 돌아감은
나 자신의 죄와 약함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며
넘치도록 후하신 당신의 자비하심을 믿고 알아서
새롭게 태어남을 체험하며 당신안에 머무는 것임을 생각해 봅니다.
당신의 넓은 품 안의 회개와 삶의 실천을 청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Just as your Father is merciful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6, 36-38(사순 2주 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부정의 지침이요, 소극적인 지침입니다. 뒤의 둘은 ‘용서하고 베풀어 주어라’는 긍정의 지침이요, 적극적인 지침입니다. 곧 <첫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여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0,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모세와 그리스도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 (Cat. 3,24-27: SCh 50,165-167)
유다인들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유다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보았던 기적들보다 더 크고 더 영광스러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파라오와 그의 군대들이 익사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악마와 그 군대들이 물에 삼켜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다인들은 바다를 통과했고 여러분은 죽음을 통과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지배에서 해방되었고 여러분은 악마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외국의 멍에를 벗어 던졌고 여러분은 훨씬 더 비참한 죄악의 노예 상태를 벗어 던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영광스럽게도 그들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유다인들은 동료 노예였고 한 민족이었던 모세의 변모된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바라볼 수 없었지만, 여러분은 영광에 싸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오로는 “우리가 주님 얼굴의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은 모세의 은혜를 통하여 주님과 함께 걸었지만 이제 여러분은 모세의 은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걷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이집트 다음에 사막이 있었지만 여러분에게는 여정이 끝나면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그들의 안내자와 위대한 지도자는 모세였고 이제 우리의 안내자와 위대한 지도자는 다른 모세 곧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옛적에 모세의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성서가 말하는 것과 같이 “모세는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세에 대해서도 같은 특징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그분과 같은 본성을 지니신 감미로운 성령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때 모세는 하늘로 향해 손을 쳐들어 천사들의 빵인 만나를 내리게 했습니다. 우리의 모세께서는 당신 손을 하늘로 쳐드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을 가져다 주십니다.
옛 모세는 바위를 쳐서 물을 흐르게 하였고 이분은 영적인 식탁을 쳐서 성령의 물을 흐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식탁은 한가운데 있는 어떤 샘과 같습니다. 흩어져 있는 양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 샘에서 구원의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은총으로 넘쳐흐르는 이와 같은 풍성한 생명의 샘을 가지고 있으며 또 갖가지 은총으로 넘치는 식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알맞은 때에 우리를 도와줄 은총과 자비를 받기 위해 진실한 마음과 순수한 양심을 가지고 그리로 나아갑시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시고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를 통하여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함께 성부께 영광과 영예와 권세가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사람 되는 인간기본 알아봅시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자비롭고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는 사람 되라는 말씀!
세상에 필요하고 참으로 훌륭한 사람의 표본을 말씀 하셨다고 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서로 원수지고 심판하고 단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전쟁 야심 욕심 질투 왕따 등등이 엄청 발생하는 세상 됐네요.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우리는 이웃과 싸워 이기려 하니까.
이런 무서운 일들이 발생하는 건 우리가 훌륭하지 못하단 뜻이겠지요.
자비 베풀고 단합시키고 서로 돕는 사람 되려는 인간기본 찾아봅시다.
아무리 봐도 하느님계명과 예수님의 가르침 외엔 찾기 어렵다 봅니다.
자비로운 사람. -우리 인생의 궁극목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생의 궁극목표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도 당신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도 날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최후심판도 우리가 얼마나 자비로운 삶을 살았느냐일 것입니다.
사실 살다보면 점점 똑같아집니다. 죽을 때는 완전히 똑같아 집니다. 단 하나 차이는 좋은 사람인가 자비로운 사람인가 믿음의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의 사람이었는가 하나만 남을 것입니다.
“봄비
젖은
촉촉한 대지
언제나
거기
그 자리
위로와
치유의
산같은 하느님이시다”-2022.3.13.
어제 봄비 내린 아침에 썼던 글입니다. 메마른 온누리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같은 차별없이 누구나에게 자비하신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산같이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대자대비하신 연민의 하느님이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사랑, 측은히 여기는 사랑, 가엾이 여기는 사랑이 바로 연민의 사랑,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평생과제를 부여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복잡하지 않습니다. 구체적 실천의 수행입니다. 주님은 바로 구체적 실천의 처방을 제시하십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2.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3.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4.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모두가 실천해야할 동사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애매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실천의 사람이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알면 이대로 합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이기에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용서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의 한계와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결코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용서할 것이며 줄 것입니다.
이래서 진정성 가득한 회개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회개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겸손과 자비를 닮아갑니다. 다니엘 예언자가 이런 기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진솔하고 겸손한 회개의 기도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일부만 인용했습니다만, 이스라엘인들을 대표한 다니엘의 기도가 진정성이 넘칩니다.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회개의 기도가 무지에서 벗어나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자비하신 하느님뿐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기도를 통해 겸손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비로소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자비의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산상설교를 통해 예수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하느님 마음에 정통해 있는지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회개한 우리 모두가 날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기도>
2022.03.14.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요즘 좀 부끄럽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악습이나 죄 때문만이 아닙니다.
왠 오지랖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번 대선과정과 결과를 놓고서도
부끄럼이 앞서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도
부끄러운 맘이 먼저 듭니다.
4-50대 후배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좀더 공정하고 사람답게 사는
나라를 지지해 주기보다는
여전히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한
6-70대에 속하기에 부끄럽습니다.
여가부를 폐지하고
남여간의 성 갈등을 부추기는
세태 앞에서
2-30대 여성들에게 부끄럽습니다.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정의 평화와 생태적 위기에
말로만 가르치고
삶으로 감동을 주지 못하였기에
부끄럽습니다.
오,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저도 더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못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당신께서 주신 것인데
내 것인 양 지키기에만 급급하고
더 어려운 이들과 나누고 베풀지 못하여서
부끄럽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가르치면서도
참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를 촉진하지도 못하고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기만 하여
평화의 사도가 되지 못하고 있음에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오, 나의 하느님!
이 부끄러움이 당신을 더 닮아
자비와 용서와 화해의 삶으로 나아가는
회개의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주소서.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사악한 욕심에서 사람들을 빼내어 주소서.
가난하고 없이 살아도
서로 나눔으로써 소소한 행복을 좇는 이들의
애원을 물리치지 말아주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라는 말을 가끔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받을 생각과 얻을 생각은 실망과 비례하지만, 세상이 아닌 예수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공로와 노고에 몇 배에 해당하는 자비를 선물로 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6-37)
그러시면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갚아주시고 채워주실 것이니, 아낌없이 나눠 주라고 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에게도 필요한 것임을 잘 압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당장 나눠주면 남는 것이 없을까 봐, 그리고 다음에 내가 모자랄 때 어디서 어느 누가 채워주겠는가 싶어서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거론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또 채워주시리라는 것, 우리가 오늘 작게 베푼 것을 크게 보시고 갚아 주시리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오늘까지 살 수 있었던 그리고 오늘도 이렇게 살아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으로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며 내일을 하느님 나라로 일구어 나갑시다.
사랑의 부르심을 따라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당신 혼자만 그렇게 부르지 않으시고 우리더러 같이 아버지로 부르자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의 아들딸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칭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에만 머무른다면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반영할 수는 있지만 그분의 성품까지 품지는 못합니다. 작품을 보고 작가의 의도와 사상을 유추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또 우리가 하느님의 ‘종’에만 머무른다면 우리는 그분의 명령을 수행할 수는 있어도 그분을 마음으로 따르지는 못합니다. 아랫사람은 틈만 나면 윗사람의 눈을 피해 요령을 피우려고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습니다. 작품이 작가를 닮은 것과는 다르게, 종이 주인을 닮은 것과는 다르게 아들딸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자녀에게 천성을 물려주고 삶의 올바른 길을 알려주어 성품과 태도의 기본 바탕을 만들어줍니다. 그런 아버지를 자녀들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라면 그분의 아들딸인 우리도 자비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지키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이기우 신부님
진리이신 하느님께서는 진실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하지만 악마는 그 진실을 거짓으로 가리거나 덮어서 방해를 합니다. 역사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진실과 거짓이 치열하게 다투는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일러주시는 빛으로 거짓을 들추어내어 진실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전체를 보되 본질을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을 발휘한 것이지요.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태양신의 아들이라거나 스핑크스 같은 상상 속의 동물을 거대한 신상으로 만들어 섬기던 이집트의 우상숭배를 보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와서도 뱀이나 물고기 같은 짐승의 상을 거대한 나무나 돌로 만들어서 숭배하는 또 다른 우상숭배에 직면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서 비롯된 이들 주변 민족들의 문화는 이런 우상숭배 종교를 위해 화려하고 눈부시게 발달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느님의 종교는 역사상 징표를 드러내실 뿐 우상숭배 종교들의 화려한 문화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화려한 우상숭배 종교와 그 문화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이사야는 동족을 향해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두 도시의 이름을 소환하여 비판하였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고모라의 백성들아!”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앙에 따른 윤리를 가르쳤는데, 그 윤리는 무미건조한 듯하지만 올바르고 깨끗한 길이었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6).
이러한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 위에서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에 지배층과 민중을 다 함께 지배하고 있던 정신 풍조인 바리사이즘을 정면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마태 23,2)는 말이 그 서론입니다. 모세가 받들었던 하느님 신앙도 없이, 그 신앙 덕분에 백성으로부터 받았던 권위만 취하고, 신앙 없는 윤리만 공허하게 가르치고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내세운 형식논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시면서 그 핵심을 찔러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의 형식논리는 율법 규정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그 자구(字句)대로 지키라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내놓으신 핵심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을 섬기듯이 사람들을 섬기라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말씀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도 6백 가지도 넘은 규정들을 다 알지도 못해서 규정과 규정이 충돌할 경우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놓고 허구헌 날 입씨름을 하기 바빴으며, 그러한 공리공론의 와중에 “어느 율법이 가장 중요한가?”를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이었습니다. 설사 그들이 가장 중요한 율법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도 자신들은 손해를 볼까 두려워 제대로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사소한 규정을 지키느라고 사람들 앞에서 생색내기 일쑤였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 먹으면서 형식적인 십일조를 헌금한다고 자랑했고, 기도를 해도 성전이나 저자 거리에서 보란 듯이 길게 빈 말을 늘어놓으며 기도 바쳤으며, 기도 중에도 겸손하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거나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신을 자랑삼아 늘어놓으며 축복을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청중들에게도,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입으로 가르치는 말을 따라서 지키도록 힘쓰되, 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고 인간관계에 필요한 지혜를 나누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고 진정성입니다. 말이 진실해야 하고, 행동에 진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윤리에서도 사랑의 최대한과 최소한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먼저 그에게 내가 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연이나, 우리가 자유로이 선택해서 맺은 인간관계에서라면 우리가 하는 말은 더 없이 진실해야 하고 행동에 진정성이 담겨야 할 것이며, 이 진실한 말로 한 약속이라면 행동으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나도 그에게 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의 진실과 진정성이 목표가 아니라 최소한의 진실과 진정성이 흠나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거짓말은 그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될 것이며, 가능한 한 얼마든지 선하고 의로운 이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므로 예의를 갖추어 대함으로써 그 관계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겪다 보면 분명하게 하느님의 편에 서지 않는 사람임이 드러날 경우가 있습니다. 하는 말이 진실하지 않고 행동에 진정성이 없는 속물형 인간임이 드러날 때입니다. 그럴 때에는 발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버리는 심정으로 분명한 선을 그어 처신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연히 엮여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기 십상입니다.
자비는 자비를 청하는 사람에게 주신다. <루카 8, 36-38> 3월 14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잘못하고도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거나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병이 든 사람이 자기 병을 치유받기를 거부하면 결국 그 병으로 죽고 맙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오히려 큰소리치고 더 강한 힘으로 누르고 감추려고 하면 자비를 받지 못합니다. 자비와 지혜는 병행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자비를 베풀 줄 모르고 원수 관계를 풀지 못합니다.
하느님 자비로우심은 창세기 아담의 죄를 대하는 참모습입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것을 알고 부끄러워하며 숨고 자기 몸을 나뭇잎으로 가렸다고 합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벌 대신 엄한 상을 주십니다. 내가 세상에 가서 모순된 것을 바로잡아주겠다고 하시며 구세주를 약속하시며 자비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작은아들의 비유에서 충분하게 증명해 보여 주셨습니다. 부정한 관리인의 비유에서도 지혜로운 처신에 감탄하여 용서해주었듯이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어느 날 새로운 법관으로 임명받은 젊은이를 축하하러 가는 길에 ‘무엇을 선물할까?’하고 찾던 중 호텔에 들어가니 시계와 온도계가 붙어있는 것이 눈에 띄어 즉시 ‘저거다.’하고 구매하여 전해주면서 판결은 시계처럼 정확하게, 온도계처럼 올랐다 내렸다 하듯이 지혜롭게, 겸손과 온유로 죄인을 자비롭게 대하라 부탁하고 선물을 건네주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신 것같이 자비로우려면 내가 먼저 죄인인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주의 기도 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원하면서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죄인 것을 자각하고 뉘우치며 사는 사람은 남을 대할 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영적 독서, 불교학자가 쓴 자비의 명상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달라이라마가 쓴 서문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자비는 마치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물을 주어 자비가 자라면 잘 익은 과일을 맛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나는 자비에 가장 큰 감탄과 존경을 표합니다.”라는 시입니다.
자비는 우리 안에 자라는 것입니다. 서로 어울려 사는 세상에 자비가 없으면 씨앗이 자라서 과일을 맺지 못하듯 어렵게 삽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저를 많이 도와주는 형제가 “오늘 어머니 생일이라 집에 다녀옵니다.” 하기에 얼마 전 어머니 틀니와 임플란트 때문에 돈 걱정하는 소리 듣고 마침 준비된 돈 50만 원, 다는 아니라도 조금이라도 보태라고 주면서 저에게 잘해준 것을 갚아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효도가 또 다른 효도를 만들어 가정이 행복하게 됩니다. 자비는 자비를 낳고 행복을 낳게 됩니다.
자비를 받으려면 자비의 씨앗에 물을 주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이우진 신부의 이야기 동산
찬미예수님. 지난주 우리나라에는 큰 행사가 하나 끝났습니다. 바로 20대 대통령 선거였지요. 우리 교우분들은 투표 잘 하셨지요? 결과 상관없이 좀 더 나은, 특별히 주님께서 아끼고 사랑하시는 소외받고 어려운 이들이 더 살기 나아지는 세상이 되길 기도해봅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는 과정에서 참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언론에서도 많이들 이야기하더군요. 최악의 네거티브 선거였다. 이렇게 말이지요. 정말 공약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서로 상대방을 깎아 내리기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하나같이 다 싫더군요.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을 쳐다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참 주님 말씀이 정말 어려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은 쉬운데 삶 안에서 살아내기가 이리도 어려운지요. 남을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고 산다면 내가 그렇게 심판받고 단죄받으니, 열심히 나도 그렇게 하며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상황입니다. 사실 대선후보들이 그랬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모습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교우여러분들, 신앙인이 왜 신앙인일까요? 성당다닌다고 무조건 착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선행을 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왜 가지고 살까요? 바로 신앙인은 알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보는 사람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비록 참으로 어렵지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일어나 우리의 십자가를 받아지고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심판하지 않도록. 서로 단죄하지 않도록. 그리고 용서하고 줄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신앙인이라 불릴 수 있을 겁니다.
아멘.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해지는
첫 걸음은
용서하는
마음이다.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
곧 나를
용서하는 것이다.
창조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용서의
삶이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삶으로
다시 피어나게
하는 것 또한
다름아닌
용서이다.
용서의 마음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나라의
마음이다.
평화는
용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용서의 관계는
자기반성이라는
내적 의미를
만나는 시간이다.
지나친
욕망의 충족이
미움과 증오로
위선과 거짓으로
서로를 내몰았다.
진정한 의미의
관계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실천하는
용서의
사순이다.
삶이 있기에
십자가가 있고
고통이 있기에
용서가 있다.
용서는 회개를
바탕으로
서로를 일으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진심어린
기도이다.
기도가 쌓여
용서가 되고
용서가 쌓여
새로운
삶이 된다.
새로운 삶이란
고통을 덜어주는
용서의 삶이다.
주고 받아야
함께 살 수 있는
용서이다.
수도 공동체도
용서를
주고 받아야
존재할 수 있는
용서의
공동체이다.
마음을
살리는 것이
용서이다.
용서의
현주소지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서의
새 날이다.
용서는
상황을 탓 하지
않는다.
오히려 척박한
십자가에서
새롭게
움을 틔우는
용서의 힘이다.
사람이
발전하는 것은
용서로 나아가려
노력하는 기도에
있기 때문이다.
용서가 삶의
부활이며
참된 사랑이다.
그 사랑을
실천할
용기를 청하는
용서의
새 날이다.
책을 읽다가 어떤 생각이 나서 뭔가를 찾으러 거실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기억이 되살아날까 싶어서 다시 사재로 되돌아갔지만 역시 생각나지 않습니다. ‘내 뇌가 퇴화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거실로 나가 두리번거립니다. 내 뇌의 퇴화를 인정할 수 없다며 이것저것을 보며 기억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저만 그럴까요?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한두 번은 이런 일을 겪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2~30대도 겪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주의가 산만해서 그렇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5~60대로 넘어가면 뇌가 쇠퇴하는 징후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뇌과학자들은 기억력 쇠퇴가 암울한 징조가 아니라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젊었을 때는 뇌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뇌는 외부환경에서 비롯되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드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자기 자신의 생각을 심사숙고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뇌과학자들이 말하듯이, 뇌의 퇴화가 아닌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당연한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스스로 갇혀 있는 생각 때문입니다.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 조건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니, 하느님의 사랑까지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하게 지금을 인정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심판의 주체는 늘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남을 심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율법이 허락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했기에 하느님께서는 그 모습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점을 주님께서는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지 않는 행동의 결과인 용서와 자선을 이야기하십니다. 즉, 베풀고 용서해야, 자비하신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임에도 끊임없이 심판하고 단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따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에서 드러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은 목에서 발목에 이르는 품이 넓은 옷이었습니다. 담을 그릇이 없을 때, 이 옷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주신다는 것이지요.
이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역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모습이 됩니다.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찻잔을 천천히 손에 쥐어 보라. 귀가 후 천천히 옷을 벗어 보라. 일상을 음미하면 옷을 벗는 것이 힘든 하루의 일과를 벗어내는 것과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축제를 즐기려면 지금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여야 한다(안셀름 그륀).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마세요
등교길과 등굣길, 차값과 찻값, 최대값과 최댓값.
어떤 단어가 맞을까요?
이런 단어들을 만나면 우리말이 참 어렵다 싶습니다. 우선 정답은 ‘우리말’과 ‘한자어’로 구성된 단어는 중간에 사이시옷을 넣게 되어 있으므로 등굣길, 찻값, 최댓값이 맞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한국말을 쓰며 살았지만, 아직도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하긴 아는 청년 중에 우리나라 국어사전을 만드는 청년이 있는데, 그 친구도 종종 헷갈려서 힘들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랫동안 써 온 우리말도 이렇게 정확하게 쓰기 어렵습니다. 이것만 봐도 다른 사람의 말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판단과 단죄로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전하고 있었을까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먼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삶이 아닌, 용서하고 베푸는 자선의 삶을 통해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이 훨씬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단죄와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할 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절을 지내며 십자가상 예수님의 모습을 자주 묵상하게 됩니다. 활기찬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의 모습도 감동적이지만, 십자가 상 예수님의 모습역시 그에 못지 않게 감동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의 그 끔찍하고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명언 몇가지를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이른바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도 합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오 복음 27장 46절)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복음 22장 3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복음 23장 43절)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복음 23장 46절)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복음 19장 26~27절)
“목마르다.”(요한 복음 19장 28절)
“다 이루어졌다.”(요한 복음 19장 30절)
여러 말씀 가운데 오늘은 용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제 마음에 큰 반향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복음 22장 34절)
그토록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저런 말씀이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 참으로 놀랍니다. 그 순간 저 말씀이 예수님 입에서 나온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 아니시라면 도저히 저런 표현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만일 십자가상 예수님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묵상해봅니다. 욱하기 잘하고, 한 성깔 하는 제가 도저히 그냥 넘길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하느님 아버지께 따졌을 것입니다.
“아버지, 아무리 인류 구원 사업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저 인간들 하는 행동 한번 보십시오. 어떻게 저럴수가 있습니까? 인간으로서 저게 할짓입니까? 저는 저들의 치유와 구원, 행복과 영생을 위해 이 한 목숨 불살랐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습니까? 무죄한 저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것도 모지라 저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무리 바쁘시다 할지라도 제게 딱 3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 녀석들 제대로 손좀 보고 다시 십자가 위로 올라오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함구하십니다. 철저히 침묵하십니다. 인간들의 무자비한 악행 앞에서도 보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 적대자들의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참으로 크고도 놀라운 예수님의 인내요 사랑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단죄와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미움은 고통의 바다에서 스티로폼이지만 행복의 바다에서는 납덩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가장 자주 나오는 주제이지만 일상에서 가장 되지 않는 것이 또 용서일 것입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해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득문득 떠오르는 순간은 내가 행복하지 못할 때일 것입니다.
보통은 누구를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탓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미움입니다. 하지만 순서상 그 사람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청년이 애인과 헤어져 고통스럽다며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벌써 한 달째 술로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술자리에서 친구와 싸움도 일어나고 부모에게 상처도 주고 돈도 떼이고 직장생활도 잘 안 되는 등의 사건이 더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이 그 애인을 만나기 전에는 행복했을까요?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그 애인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애인은 상대를 행복하게 해줘야만 하는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애인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으면 그 기회를 이용해 떠나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부부가 서로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그 미움 전에 각자의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나기 전에 외로웠고 만나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행복하지 못하니 그 탓을 상대에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행복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용서에 대한 이러저러한 방법을 제시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가 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해도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고통스러워서 미워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의 근본 원인을 알아야 참다운 용서가 생깁니다. 미움이 고통에서 시작된다면 행복하면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용서하기 위해 그 사람을 계속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이란 물 밑으로 가라앉히면 됩니다.
천국에 미운 사람과 함께 있는 편이 나을까요, 아니면 미운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천국 행복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까요? 모두 미운 사람과 있어도 천국에 머물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천국에 있다면 미움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행복할 수 있는 천국만 이 세상에서 발견한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더라도, 혹은 살해당했더라도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용서는 행복으로 미움의 고통을 수장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마치 암초처럼 우리 배를 긁습니다. 방법은 물 수위를 높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들 가운 데 있다면 그 행복의 수준이 고통을 넘어서기 때문에 미워할 이유도 사라지게 됩니다.
2015년 6월 17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흑인교회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던 신자 9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총을 난사한 범인은 21세 백인 청년 딜런 로프는 백인우월주의자였습니다.
19일 법원 대형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보석 여부를 결정하는 약식재판정에는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가해자에게 직접 얘기할 기회를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관행에 따라 유족들은 한 명씩 범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네이딘 콜리어, 어머니를 잃은 딸]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갔습니다. 엄마와 다시는 얘기를 나눌 수도, 엄마를 다시 안을 수도 없지만,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 영혼에 자비가 깃들기를 빕니다. 당신은 나를 아프게 했어요. 다른 많은 사람을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펠리샤 샌더스, 아들을 잃은 어머니]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죽게 했어요. 내 살점 하나하나가 다 아픕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예전처럼 살아가지 못하겠죠. 하지만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 영혼에 신의 자비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이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용서의 말을 하자 범인도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부모와 자녀를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 교회가 나눔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용서해도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손을 부여잡고 죽은 이들을 애도하며 서로를 위로했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자비의 공동체에서는 용서할 수 있는 에너지가 흘러넘칩니다.
용서가 안 될 때 그 사람과 직접 맞대결하지 마십시오. 그건 잘못된 해결방법입니다.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은 납덩이처럼 가라앉습니다.
행복하려면 행복한 공동체에 머무르려고 하십시오. 그런데 직장과 같은 데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눔의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족 공동체는 좋기는 하지만 너무 작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어떠한 고통이 와도 그 고통을 이겨낼 공동체에 속해있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사랑이 쏟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그 행복의 수위가 모든 고통을 넘어설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독특하게 ‘용서하는 마음’과 ‘주는 마음’이 결합하여 있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도 하십니다.
용서와 주는 것은 서로 다는 것 같지만 실제로 같은 ‘자비’에서 나옵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서로 나눌 줄 아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용서도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용서도 자비고, 주는 것도 자비입니다. 주는 마음이 사라지면 용서하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용서의 힘도 커집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바이러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불필요한 활동의 자제입니다. 이런 수칙을 잘 지키면 바이러스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지킨 나라는 바이러스의 감염을 줄 일 수 있었습니다. 의료체계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사망자의 수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백신의 개발입니다. 백신을 맞으면 우리의 몸에는 바이러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항체가 형성됩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했음에도 바이러스는 우리의 몸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고, 약간의 틈새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신을 맞으면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70% 이상의 사람이 백신을 맞으면 집단면역이 생기고, 바이러스는 더 이상 전파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셋째는 치료제입니다. 바이러스는 증식하는 과정에서 우리 몸의 장기를 다치게 합니다. 특히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은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치료제가 있으면 우리 몸의 장기를 보호 할 수 있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백신은 개발되어서 접종이 시작되었습니다. 2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백신을 접종 받았습니다. 이제 곧 치료제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코로나19의 위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일상의 소중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나뭇잎은 흔들리고 싶지 않아도 바람이 불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죄와 유혹의 바람에 흔들리곤 합니다. 하느님과 멀어지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몸이 바이러스로 인해 피해를 입듯이, 우리의 영혼도 악의 세력에 의해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슷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둘째는 ‘청원’입니다. 청원은 백신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셋째는 ‘선행’입니다. 선행은 치료제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세상은 선한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간다면 어떤 악의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나와 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나
너는 너
나는
나 안의 나
너는
나 앞의 나
너는
너 안의 너
나는
너 앞의 너
나는 너
너는 나
삼일절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고구려 광개토태왕 이후 나라 잃고 동북삼성을 누비던 독립운동가들 안중근, 김좌진, 홍범도, 신채호, 그리고 유관순으로 이어진 1919. 03.01. 전국 독립운동 ‘대한독립만세’로 이어졌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훌륭한 초기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만주벌판과 연해주를 누볐고 상해를 누볐다. 구국의 일념 하나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에서의 거사,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스케일이 큰 애국지사들, 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독립운동가들은 구국을 위해 기개를 펼쳤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배우려 나는 매년 10월이면 학생들을 데리고 만주벌판으로 날아갔었다. 그리고 하얼빈과 발해 연해주를 찾았다. 해란강이 내려다 보이는 용정의 일송정이 있던 곳에서 역사에 잠겼다. 백두산에 올라 북녁 하늘을 바라 보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건물이 있는 상해로 다시 날아갔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 학생들의 스케일도 커져갔고 목표가 생겨났었다.
반도는 두동강나고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정신도 이념에 가리어 자유당 독재정치, 군부구테타 독재정부, 일본과 밀착된 친일파 세력에 의해 퇴색되어 갔다. 반도의 남쪽은 좁아터진 정치꾼들의 싸움터가 되어 헐뜯고 속이고 속는다. 삼일절에 적폐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 나라사랑 한다고 외치고 있다. 4,19혁명, 6,29선언, 5,18광주 민주화 항쟁, 뜨거웠던 촛불혁명이 애국정신을 이어간다.
오늘 산책을 나갔다. 쉼터에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노인들이 변하고 있다. 생각없는 우익이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려는 움직임이다. 이 정부가 의를 위해 지구전을 펼치며 정치를 잘하고 있다며 노인들의 목소리가 비전있는 우익이 되어 대화내용도 수준이 제법 높았다. 대통령의 래임덕이 올법도 한데 여전히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며 말이다. 노인들의 나라 사랑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삼일절에 나라의 평화통일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자비를 이야기하십니다.
제1독서는 바빌론에 유배를 갔다가 왕궁에 들어간 다니엘이 동포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의 대목입니다.
"저희는 ...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다니 9,5-6)
다니엘은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리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몰락과 유배의 원인을 자신들에게서 찾습니다. 이스라엘은 거듭 다가오시는 주님을 외면하고, 거듭 보내시는 예언자들을 거부한 대가로 이방 민족들 사이에 흩어져 하느님의 율법과 예식, 성전을 그리워하는 신세가 되었지요.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다니 9,7)
다니엘 예언자는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의로우심을 고백합니다. 자신들의 죄에 비추어 지금 겪는 벌은 합당하다는 뜻이지요.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다니 9,9)
하지만 뼈아픈 통회는 자책과 자포자기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희망의 상기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또 그에 대해 벌을 받은 일도 다반사였지만, 그때마다 다시 당신 백성에게 얼굴을 돌이켜 기회를 주신 분은 하느님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계속 죄 속에 주저앉아 멋대로 살자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간과했던 일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말씀 경청, 계명 준수를 다시 기억하자는 겁니다. 당신 백성의 고통을 가장 아파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니 그분께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것이지요.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 사람에서 그 자비를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나약한 죄인인 우리에게 아버지처럼 자비로우라는 권고는 꽤나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사 이해관계에 얽혀 돌아가다 보니, 마냥 자비롭다가는 이용만 당하고 바보 취급 받기 십상이니까요. 사실 자비는 우리가 자기 힘만으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로 자비를 베풉니다. 우리가 나누는 사랑이 나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인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모든 자비도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흘러 나옵니다.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 흘러온 자비는 우리 안에 고여있지 않고, 그 자비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또 흘러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소유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흐름으로써 진정 "자비"가 되는 신비입니다.
"심판하지 마라. ... 단죄하지 마라. ... 용서하여라. ... 주어라."(루카 6,37-38)
예수님은 아버지의 자비가 우리에게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가 아버지의 자비와 다른 건, 보상이 약속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너희가 타인을 이러이러하게 자비로 대하면, 나도 너희를 그렇게 대하겠다."는 약속이 따릅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는 또 다시 아버지의 자비를 부릅니다. 자비를 베푼 만큼 또 다시 자비를 얻는다니, 힘껏 자비의 사람이 되려 노력해도 좋을 듯하지요. 자비는 이렇게 순환되고 확장됩니다.
그렇다면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는 무슨 보상을 받으실까요? 아버지께서 자비로 얻을 보상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분은 그것으로 흡족하시고 행복하십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의 보상도 결국 그 사람의 구원일 겁니다. 그러니 다른 보상은 기대할 필요가 없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 때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때 받은 자비가 누군가에게 이어져 열매를 맺었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지요. 여전히 그 자비가 내 안에 고여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힘 내어 자비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자비는 또 다른 자비를 부를 것입니다. 그러면 자비를 입은 사람은 물론, 벗님도 행복하고, 아버지는 더더욱 흡족하시겠지요.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벗님을 응원합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월요일>(2021. 3. 1. 월)(루카 6,36-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1)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는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35).” 라는 계명에 이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말씀을 합하면,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곧 ‘자비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완전함에 다가가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처럼 된다는 말은, 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간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는다는 뜻입니다.)
“너희도 하느님처럼 되어라.” 라는 말씀에서 레위기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19,2).”
이 말씀을 인용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베드 1,14-16).”
사실 하느님의 자비, 완전성, 거룩함은 하나입니다. 완전함과 거룩함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같은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자비’로 드러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요한 1서에 있는 다음 말로 합해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완성하는 일이고,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일이고,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 완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반대로, 원수 같은 사람은 제외하고서,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을 하는 것이고, 즉 죄를 짓는 일이고(루카 6,32),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일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생활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다른 일을(다른 신심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아도 사랑만 하면 되는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만 내세우면서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기본 신심 행위들을 일부러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등 신앙인으로서 하게 되는 일들을 기쁨으로 하는 법입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감히 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가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탄의 첫 번째 유혹에 연결됩니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뱀이(사탄이) 한 말을(유혹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말이다.
2.너희가 그 열매를 따 먹으면 선과 악을 알게 되어서 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
3.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가면 하느님도 너희를 죽이지 못한다. 오늘날에도 사탄의 유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유혹은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서 하느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선과 악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되라는 유혹입니다.(남을 심판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느님 행세를 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하는 것은 신성모독죄이고, 당연히 심판받을 죄입니다.
3) “남을 단죄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앙갚음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루카 6,27-31).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21).”
4) “...을 하지 않으면, 너희도 ...을 받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를 잘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 분”입니다(루카 6,35).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남을 심판하고, 남을 단죄하고, 또 남을 용서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죄와 욕망과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비를 안 받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거부함으로써 용서를 못 받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는데도 우리가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려고 하시면서, 어떻게든 나를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하시는데, 내가 고집을 부리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내 발로 심판대로 간다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지옥으로, 또는 멸망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그쪽으로 쫓아내신 사람이 아니라, 자기 발로 그쪽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세상에서도 이뤄지도록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세상은 이와 정 반대로 생각하라며 절대 손해 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남의 잘못을 심판단죄하고 원수갚고 손해 보지 말고 배상받으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 단죄 말고 용서하고 후히 베풀며 살라 하십니다.
예수님 안 믿으면 이익이고 믿으면 손해란 말 이래서하는 거라 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 뒤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시고 세상엔 없습니다.
세상 말은 죽기 전까진 그럴싸해도 살기 험한 경쟁 투쟁 살인뿐입니다.
영이며 생명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세상에서도 이뤄지도록 노력합시다.
가톨릭 알림 말: 예수님말씀은 영생 가는 길이라고 가톨릭은 믿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사제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정말 많은 장례미사를 집전했었지만 저희 아버지 장례식 때를 기억하면 그 때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아마도 저희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 정말 많은 봉사를 하시면서 남들에게 자비로운 일들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 지인들의 경우를 보아도 평상시에 많은 봉사를 하면서 많이 베풀고 나눈 분들의 경우를 보면 그 분 역시도 다른 분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으시곤 합니다. 어쩌면 내가 사랑을 베풀고 나눈다는 것은 결국엔 다른 이들 뿐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번 장례미사 때 봉독하는 말씀 중 마태오 복음25장 40절에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훗날 우리가 당신 대전에 나아갔을 때 그렇게 얼마나 베풀었는가를 물어보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의 업적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어제 주일 강론을 통해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최양업 신부님의 탄신일을 맞아, 그 업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최양업 신부님의 업적에 대한 내용을 그분이 쓰신 편지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최양업 신부님은 당시의 조선 풍습에 맞춰 선교 활동을 하셨습니다. 1851년에 쓴 여덟 번째를 보면, 최 신부님은 죽은 이를 기리는 유가족의 상복을 입고 온몸을 가리는 풍습을 이용하여, 서양 선교사들과 함게 상복을 입고 온몸을 가리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두 번째, 최양업 신부님은 찾아가는 선교 사목 활동을 펼치셨습니다. 서양 신부님들이 드러내놓고 신자들을 방문할 수 없었던 박해시기에, 최양업 신부님은 찾아오는 신자들을 맞이하는데 그치지 않고, 최 신부님이 담당한 5도, 충청도, 경상 좌우도, 전라 좌우도의 교우촌을 일일이 걸어서 방문하여 3815명의 교우분들을 맞으십니다. 이는 당시 전국 신자수 11,000명의 약 35 퍼센트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박해를 피해 밤 늦게 교우촌에 도착하여 고해성사를 주고 새벽미사를 봉헌한 후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새로운 곳으로 떠나시는 방법으로 사목활동을 하셨습니다.
세 번째, 최 신부님은 조선인 방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애쓰셨습니다. 1854년 3월 이만돌 바울리노, 김 요한, 임 빈첸시오 세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말레이 반도 페낭의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로 보내어 사제양성과정을 밟게 합니다.
네 번째, 최 신부님은 한글을 통한 복음 선교에 힘쓰셨습니다. 최 신부님은 당시 천주교 서적인, ‘성교 요리 문답’과 ‘천주 성교 공과’를 번역하며, 신자들이 쉽게 천주교리를 배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섯 번째, 최 신부님은 한글 언문체로 ‘천주가사’를 저술하여, 신자들이 쉽게 교리를 이해하고 암송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말, 즉 죽음, 심판, 천당, 지옥을 그린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을 가사 형식으로 써서, 신자들이 천주교 주요 교리를 익히고, 묵상과 심신 함양 미치 교리 실천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여섯 번째, 최 신부님은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전하였습니다. 현석문 가를로와 이재의 토마스가 수집하고 페레올 주교가 보완 정리한 프랑스어본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교황청에 보고하였고, 1857년 기해박해 73위와 병오박해 9위 등 한국 순교자 82위를 가경자로 선포토록 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일곱 번째, 최 신부님은 복음을 선교하시며 동시에 어렵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셨습니다. 최 신부님은 죽음을 앞둔 박해의 선교 현장 속에서도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풀어주고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려는 노력을 교회 사목의 일차적인 선교 목표요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박해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당시의 풍습과 이용 가능한 방법을 최대한 동원하여 선교 사목 활동을 평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기억하고 시복시성을 위해 기도하며,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실현 가능한 선교 방법은 무엇인지 모색하고 실현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헌신하여야 하겠습니다.
자비로운 판관이 되자<루카, 6/36-38>3/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자비는 선의 최고봉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아도 적어도 양심의 도를 깨달은 사람은 자비를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더구나 주님을 알고 믿는 사람은 자비를 생명으로 알고 따라 사라야 합니다. 나는 자비를 바지 않고는 여기 존재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나를 존재하게 하려고 모든 것이 있습니다. 가까이는 태양의 빛이 없으면 힘을 쓰지 못하고 공기가 없으면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아침에 맑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감사와 감단이 나옵니다. 단순이 물병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방에 물이 오기까지의 행로를 생각하면 하느님의 자비로운 창조로부터 물을 이방에 있게한 사람들의 은혜를 생각하면 자비의 은총입니다. 20년전 눈이 불편헤서 병원에 안과 병원을 찾았는데 즉시 수술을 하라고 하여 수슬을 받고 이야기를 들으니 한쪽 눈이 실명할 뻔 했다고 하며 사진을 보여주는데 시신경이 굽어 있는데 끊어지는 것 수술로 막아주어 보게되었다고 합니다. 의사가 없었으면 저는 징님으로 살아야 하였는데 의사의 자비로 지금것 눈을 뜨고 살아갑니다. 이같이 나 외의 사람에게 자바로 살아갑니다.
오늘 “하느님 아버지는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하느님은 우리를 자비로 완전하게 꾸미시고 이름답고 깨끗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니 하느님을 닮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작은 아들의 비유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는 영원무진하다고 들었고 만단롄트 빚진 사람이 백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서 감옥에 가치게 되는 말씀을 통해서 나는 모든 이에게 자비로운 판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느날 고시함격하고 핀괸으로 임영되는 축하식에 초대되어 가는길에 선물도 없이 가다가 호텔에 들려 상품 파는 곳에 들려눈에 띠는 것은 시꼐가 달린 온도계 였습니다. 그때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면서 주었습니다. 판관은 무든 판결은 시계처럼 완전하고 정확하게 해야 하지만 날씨의 차이로 온도계가 오르 내리는 것같이 따뜻한 마음으로 만사를 판결해야 합니다. 모든 판결은 법보다 주먹이 앞슨다고 하였듯이 강하게 이끄는 쪽으로 판결 내려야 합니다.
한번 벌받고 죽어바라. 너같은 것 법이 무서운 줄 알아라. 아니라 선으로 이끌고 쉽게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할 말이 있으면 정정당당히 나서 말하되 뉘우치는 사람은 용서하고 자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비는 손을 짤라 버리거나 머리 숙여 사좌하는 사람을 묵을짜르거나 자비를 구하는 입을 막거나 전후 사정도 모르고 판단하는 판관은 자기 말에 자기도 걸리게 됩니다. 사형수의 목을 짜르려고 준비한 계로징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결국자기도 자기가 만든 게로징에 목이 잘렸습니다.
“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가 되받을 것아디”
자비는 자비를 낳고 자비는 생명을 보존합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자비를 받고 내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같이 다른 이의 생명도 유지 발전시켜야 합니다. 사형제도가 있어 형무소에서 사형이 진행 도리 때 배가 고파 구멍가게에 들려 먹을 것을 찾다가 노인을 살해한 사형수가 한 천사 같은 수녀님과 변호사와 판관으로 살아난 이야기가 방송을 타고 흘려 나오고 실질로 지금도 살아서 꽃동내에서 봉사하고 사는 사람은 주위에 모든 사람이 자비를 베푸는 판관이 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형무소에 있을 때 몇 번 방문하였지만 죽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저는 판단하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사람들을 죄인 만들고 파련치 범으로 만들고 뒷담아를 통해 사건이상으로 부불러 죄인으로 만들지 말고 자기편애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갑시다.
김성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에 이어, ‘자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자비’라는 것은, 자비를 베푸는 입장 과 자비를 입는 입장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늘 자비를 베푸시는 입장이고, 반면에,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야 하는 입장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심판과 단죄 그리고, 용서 를 언급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완전하신 분, 거룩하신 분, 위대하신 분 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완전하심, 하느님의 거룩하심,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하심, 거룩하심, 위대하심을, 우리를 한없이 용서하시는 모습으로 드러내십니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참 모습이 있고,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자비롭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는 하느님께 바로 그러한 점을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함 자체이시고, 기준 자체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완전함 대로, 기준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한없는 용서로 대하신다는 사실에 마음으로부터 한없는 감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러한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기준에 맞추어 옆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나 역시, 조금씩,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3,36)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님
+찬미예수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온도가 있습니다. 말에 차가운 말과 따뜻한 말이 있습니다. 사랑, 배려, 이해, 인정, 격려, 위안, 용서 등의 말을 생각해보면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비난, 험담, 욕설, 상처, 지적 등의 말을 생각해보면 차가움이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따뜻한 말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은 따뜻함을 좋아합니다. 상대방에서 온기가 느껴질 때 긴장을 풀고 마음을 놓고 편안함을 느낍니다.
“엄마 가슴은 절대차면 안 돼. 엄마는 똑똑한 필요가 없어. 엄마 가슴이 뜨거우면 아이는 그 열로 살아갈 힘을 얻는 거야. 요즘 엄마들은 가슴은 차고 머리는 똑똑해서 아이들이 탈이 많이 나거든.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아이를 닦달하는 엄마들을 보면 아이들이 불쌍해.”(어른 연습. 양순자)
자녀들이 엄마를 좋아하고 엄마 가슴이 고향 같은 것은 따뜻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자녀를 판단하고 심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엄마는 따뜻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엄마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따뜻한 가슴이 필요합니다. 서로 따뜻함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에게 힘이 됩니다. 따뜻함이 온기 있는 가정과 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3,36)
자비로운 사람이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입니다. 따뜻한 가슴이 따뜻한 말을 합니다. 냉철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비의 온도를 측정한다면 36.5도 일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사랑의 온도입니다. 신앙인 역시 따뜻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은 정상 온도를 가진 따뜻한 사람이 될 때 정상적으로 살아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정상 온도를 가질 때 서로 잘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판단과 심판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통해 따뜻함을 지닌 자비로운 사람이 됩시다.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를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아멘
무지한 사람에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 -기도, 회개, 실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3월 첫날 ‘삼일절’이자 4월4일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둔 본격적 복된 영적훈련의 ‘파스카의 달’이자 ‘성 요셉 성월’입니다. 본기도중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 육신의 극기를 명하셨으니’라는 대목도 참 적절합니다. 육신의 극기와 직결된 영혼의 건강임을 깨닫습니다. 1년 영적 농사의 성패가 이 한달에 달려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 부활을 앞당겨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야 할 마음 설레게 하는 3월의 봄날들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우울하고 어둡게가 아닌 기쁘고 밝게 지내야 할 사순절임을 이미 규칙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으로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성규49,6-7).
규칙서에서 기쁨이란 말마디가 오직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장에만 단 두 번 나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야 할 3월 봄철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맨 먼저 영춘화迎春花, 하느님의 봄꽃 선물이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영춘迎春花, 봄꽃 어감도 말 뜻도 곱고 깊습니다. 겨울에서 봄맞이 영춘화 봄꽃 그대로 ‘파스카의 꽃’이라 명명해도 좋겠습니다. 두분과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영춘화 봄사랑 선물입니다.”
“영춘화가 피었으니 봄이 왔군요. 아, 세월은 어김없이 지나가고 있으니 오늘 그동안 잡고 있던 2월을 또 놓치고 있네요!”
“영춘화! 정말 봄사랑입니다. 노란 영춘화가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설레임이랄까, 봄날같은 삶으로, 희망으로---”-
은총의 사순시기, 하루하루 놓치지 말고 하루의 선물을 보람있고 기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좋으면 축복은 저절로 따릅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사람이 참 보물입니다. 사람이 참 선물입니다. 아무리 환경 좋고 건물 좋고 전통 좋아도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특히 수도형제는 더 그러합니다. 아무리 거금을 주고도 수도자는 스카웃 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새 지원자 정보영 사도 요한 형제를 공동체에 선물로 보내 주셨으니 참 감사하고 기쁩니다. 전번 예결산 회의를 하면서 수도자 하나하나가 얼마나 수도공동체의 기초와 기반을 튼튼히 하는 보물인지 절감했습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회개도 겸손도 불가능합니다. 참으로 사람이 하느님을 따르면 사람도 돈도 온갖 축복도 저절로 뒤따릅니다. 결코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참 사람입니다. 무지한 사람에게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참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병인 무지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자비뿐임을 깨닫습니다. 자비롭고 너그럽고 지혜로운 하느님을 닮아가는 길뿐입니다. 사순시기 3월 첫날의 복음이 흡사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3월의 말씀’처럼 생각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바다같이 넓고 깊은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 마태복음의 아버지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무지한 사람에서 완전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너그러운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 강론중 일부가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거룩함holiness이자 온전함wholeness이요 영어 발음도 같습니다. 바로 아버지를 닮은 ‘완전함perfection’은 그대로 ‘거룩함’과 ‘온전함’과 ‘자비로움’은 하나로 통함을 봅니다. 지난 밤 정월 보름달처럼 원숙, 원만圓滿한 둥근 모습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닮을수록 둥근 마음, 둥근 삶이 됨을 깨닫습니다. 둥근 해, 둥근 달, 가을철 둥글게 익은 원숙圓熟한 열매들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참으로 이렇게 무지에서 벗어나 너그럽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노년의 둥근 인생이라면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울런지요!”
우리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궁극의 꿈이자 목표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을런지요? 이의 결정적 롤모델이 가엾이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자비로운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기도와 회개, 그리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삶이자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입니다. 기도없는 인간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습니다. 기도할수록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아 참 사람의 내가 됩니다. 제1독서 다니엘서는 매년 사순시기 1000년동안 계속된 말씀입니다. 매해 들을 때 마다 감동입니다.
그대로 기도와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회개가 우리의 공동전례 기도를 닮았습니다. 우리의 평생 끊임없이 하루하루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 기도가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함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회개의 시스템’같은 일과표가 고맙습니다. 다니엘의 감동적 기도 일부를 그대로 소개합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모두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런 진정성 가득한 겸손과 경배, 고백과 탄원의 회개의 기도가 무지의 병을 치유하여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자비롭고 너그럽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기도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전환과 개혁, 변화의 회개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하나의 결정적 요소가 자비의 실천이요 오늘 복음이 가르쳐줍니다. 아주 간단한 처방이나 늘 걸려 넘어지는 자비의 수행입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2.남을 단죄하지 마라. 3.용서하여라. 4.주어라.”
넷입니다. 최종적 심판이나 단죄는 일단 무조건 보류하고, 결론내리지 말고 활짝 열어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경솔한 심판이나 단죄의 죄로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비상한 자비행이 아니라 심판이나 단죄를 하지 않는, 용서하는, 소소한 일상의 평범한 자비행이요 이들이 완덕에 도달한 성인입니다.
마지막 ‘주어라’는 대목도 너무 중요합니다. 인색하지 말고 돈과 물질의 재물을 나누는 자선이 자비행의 결정적 요소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살 때 저절로 축복입니다. 우리는 심판받지 않고, 단죄받지 않고, 용서받고, 하느님은 또 넘치도록 후하게 우리 품에 담아 주십니다.
무지에서 벗어나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기도와 회개, 자비의 실천뿐이요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입니다. 말그대로 기도의 여정, 회개의 여정, 자비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성공적 인생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아멘.
자비 실천
-아우구스티누스-
자비 실천은 복수심을 없애는 것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 둘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 둘을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
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훈련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한계가 많은 이승에서도, 순결한 미음으로 하느님의 불변하는 실재를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일을 못하도록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뿌리치고 곧장 빛을 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여섯 번째인 다음 단계는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할수록 닮아가는 사랑의 마음
이승화 시몬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은 그분의 발자취만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동행하는 길입니다. 만약 발자취의 흔적만 찾는다면, 그 흔적에만 빠져 예수님이 보여주시려는 여정의 목적지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타인을 심판하기보다 용서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살아가는 이가 되는 것, 바로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가 맺어지길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닮아갑니다. 상대의 사랑을 내 안에 담고, 그 사랑으로 관계를 맺어가며 어느새 사랑의 향기가 내 안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할수록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은 이웃에게 전해집니다. 내가 사랑받은 만큼, 내가 자비를 입은 만큼, 내가 용서를 받은 만큼 나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비롭게 대하며 용서해줄 수 있습니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사랑을 전하려하면 자칫 분열과 갈등이 생겨납니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서로에게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닮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소중히 간직한 하느님 사랑의 체험은 무엇인가요?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다니엘은 바빌론 유배시기에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 활동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유배의 생활로 이어졌다고 한탄하며 고백합니다.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다니 9,5-6)
그것은 이미 다른 예언자들도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며 왕과 지도자들의 잘못된 이런 죄를 지적했는데 다니엘은 하느님께 그들의 잘못을 용서 청하며 자비를 구합니다.
또한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유배지의 동포를 포함한 이들의 죄까지도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1) 그리고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대로 심판받고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요.
어질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은 남을 비판하기보다 먼저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것 또한 사랑에서 나오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착하고 어질며, 남의 단점을 인내할 수 있는 여백이 있습니다.
이어서 주님의 기도에서도 용서를 청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듯이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하라고 하십니다.2) 사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의도를 갖거나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이웃의 무례나 한 마디 말에도 쉽게 상처도 받고 또 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용과 겸손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웃을 용서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주님의 오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사는 비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베풀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읽고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참 신앙인이라 하겠습니다. 넉넉한 삶의 모습은 어떤 처지에서든 이웃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가까운 예로 행복한 부부는 서로 받기보다는 서로 베풀려고 노력하는 관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부부에게서 진정한 행복은 혼자의 노력 보다는 함께 실천할 때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좁은 집에 살 수는 있어도 속이 좁아터진 사람과 사는 것은 어렵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아무래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과는 충돌하고 함께 오랜 관계를 지속하기는 힘들지요.
신앙에서 그래도 중요한 것은 속이 넓고 자비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게 큰 그릇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 사람이 참다운 신앙인이냐?’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 하나가 ‘편한 사람’. 아니면 ‘따뜻한 사람’이 아닐까요?
물론 여기다가 ‘진실한 사람’도 포함하면 더 좋겠지만, ‘베푸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불편하거나 차가운 사람’은 아무래도 베푸는 것은 없고 자기 가치관에 묶여 인색하거나 부자유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사 전례에서 세 번이나 가슴을 칠 정도로 우리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대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의 티는 보며 따지고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 겸손을 청하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잘못도 살피고 우리의 죄에 대한 회개를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접고 대신 그 손으로 우리 자신의 가슴을 세 번 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을 읽다가3)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좋은 말은 진실한 말, 따뜻한 말, 필요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쓴 저자도 이 말의 출처가 생각나지는 않는데 20여년을 간직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이 말이 하느님의 사랑이 바탕이 될 때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말로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도 베풀지 않고 받는 것만을 바라는 사람도 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라는 말을 남깁니다.4)
그리스도교가 ‘은총’이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선행’도 신앙인의 삶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역사에서 베푸는 ‘선행’에도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부족한 가운데 하느님 사랑을 바탕으로 베풀고 나누는 삶을 또한 가르치십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사랑의 삶을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고 이웃에게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과 함께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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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오잌티르몬 에스틴(οἰκτίρμων ἐστίν)’처럼.”에서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자비와 측은한 마음이 나오신다. 유학(儒學) 사단(四端)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롭지 못함과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수오지심(羞惡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다. 이것은 인간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중에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양보할 줄 아는 마음은 어진 마음(仁)과 연결되는데, 복음은 ‘사랑’을 가리키고 동양의 가르침은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2) 주님께서 ‘심판하지 마라(크리네테 κρίνετε)’. ‘단죄하지 마라(카타디카제테 καταδικάζετε)’. ‘용서하라(아포뤼케헤스테 ἀπολύετε)’라는 말씀을 이어서 하신다. 그래야 그 결과로 ‘심판받지 않고.’ ‘단죄 받지 않으며’.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하신다. 부족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범할 빠져들 들 수 있는 잘못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의 참다운 단계에 우리가 이르러야 가능할 것이다.
3) ‘좋은 생각’1월호(2015,48-49): 1992년 8월에 창간된 에세이 전문 월간지.
4) 사도 바오로가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전에(사도 20,22) 에페소 원로들과 작별하기 전에 했던 말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에페 20,35)
"용서하여라."(루카 6,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용서의
봄비가
내린다.
용서의
여정안에
나와 너가
있다.
용서는
어렵고
용서는
힘들다.
사람이
누군지를
묻는 은총의
사순시기이다.
불안하고
부족한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의
자비가 더더욱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
관계이다.
너의 용서가
나를 살게한다.
나의 용서가
너를 찾는
은총이 된다.
단죄와 심판은
오늘을 죽인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자신을
보게하신다.
과거에 묶여있는
우리를 십자가로
자유롭게 하신다.
사람의 여정은
용서의 여정을
걸어간다.
용서의 실천이
서로를 살리고
닫혀있는 역사를
가능성의 역사로
바꾸어놓는다.
서로의 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는
십자가의 사순이다.
새로운 삶이란
용서의 삶이다.
용서는
사람을
살린다.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린다.
누간가의
피해자가
누군가의
가해자가 된다.
유한한 삶속에
용서의 여정이
있다.
용서는
어떤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모든 일상의
시간이다.
하느님의
자비의 순간이며
하느님 용서의
순간이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용서의 오늘이
있다.
용서는
살아있음의
가장 큰
은총이다.
나와 너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
사람과 용서
생명과 자비는
언제나 우리를
살게한다.
용서가
아름다운 것은
실천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로
바로 우리자신이
용서의 가장 큰
수혜자로
살고 있다.
용서와
용서사이에
하느님과 우리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