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3,10-17
사랑하는 그대여,
10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처신, 목표와 믿음, 끈기와 사랑과 인내를 따랐으며,
11 내가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과 리스트라에서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내가 어떠한 박해를 견디어 냈던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12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13 그런데 악한 사람들과 협잡꾼들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면서,
점점 더 사악해질 것입니다.
14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5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17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37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사도 26,19-23)와 복음(요한 10,11-16)을 봉독할 수 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일꾼의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다윗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주님 앞에서 늘 겸손했고, 죄를 지었을 때에도 즉시 회개하였다. 다윗 역시 장차 오실 메시아의 출현을 열망한 하느님 앞의 신앙인이었다(복음).
오늘의 묵상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성전은 딱딱한 돌과 제도의 공간이지만, 아울러 군중의 숨결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출렁이는 광장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신학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메시아, 곧 다윗의 자손’이라는 통념을 출발점으로 삼으시면서도, 그것을 해체하시고자 물으십니다.
‘메시아’는 단순히 ‘기름부음받은 이’라는 종교적 표지가 아니라, 다윗의 약속에(2사무 7장 참조) 뿌리를 둔 정치적 종말론적 희망이 응축된 이름이었습니다. 유다 전통은 그가 왕조를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이 전통을 부정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시편 110(109)편 1절을 인용하시며 물으십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다윗이 메시아를 “내 주님”(마르 12,36)이라 부른다면, 어떻게 메시아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상식을 바탕으로 다시 묻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을 넘어, 다윗보다 위에 놓여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 물음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새로이 보게 하며, 유다 전통에만 머물러 메시아를 기다리고 희망하는 무뎌진 믿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우리에게도 물음을 남깁니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예수님의 이미지 또한 너무 작지는 않은지요. 인간의 생각과 습관과 상식 안에서 그저 우리의 기대와 욕구를 채워 주시는 존재로만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넘어 ‘주님’으로 다가오십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은 성전의 돌기둥 사이에서, 한 칭호가 무너지고 더 큰 이름이 열리고 있음에 기뻐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 또한 날마다 낡고 굳어진 것을 비워 내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더 깊고 넓은 신앙의 고백은 우리의 좁고 편협한 언어를 허무는 데서 시작합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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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이었던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분열됩니다. 그러고서 줄곧 여러 강대국의 식민지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에서 위대한 임금이 탄생하여 예전의 영화를 다시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임금을 두고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마르코 복음 10장을 보면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10,47)이라고 부릅니다. 또 1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11,10) 하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처럼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고, 그분을 통하여 다윗의 나라가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메시아를 예언하며 불렀던 시편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십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 말씀에서 “내 주님”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시편을 노래하는 다윗이 메시아를 두고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다윗은 다가오는 메시아를 자신의 후손으로 하대하지 않고, 자기보다 위대하신 분으로 여기며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메시아께서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존재가 아니시고 천상적이고 신적인 분이심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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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후손이시며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메시아의 기원과 계획을 가리킵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당시의 지식인들은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을 강하게 비판하시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고백을 거론하십니다.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고,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하고 고백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다윗 위에, 다윗보다 앞서 계시는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군주제’, 곧 백성 위에 군림하면서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종으로 부리는 그러한 나라가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고 섬기는 나라임을 분명히 천명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께서 사랑과 섬김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의 시민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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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임금은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통치 때에는 이민족이 감히 넘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만큼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다윗 치세의 이스라엘만이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늘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던 이스라엘에게 다윗은 정신적 구심점이며 희망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자연히 후손들에게 화려하게 전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율법 학자들은 장차 올 메시아까지도 다윗 가문임을 내세워 다윗 숭배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편을 근거로 다윗도 평범한 이스라엘의 한 사람임을 지적하십니다. 다윗을 깎아내리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 지식에 매달려 있던 유다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주님 앞에서는 위대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는 위대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리나 업적’ 때문에 위대하다고 판단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주님 앞에서 인간의 ‘지위나 행적’은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지적 교만’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진정 위대한 사람은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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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박해와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입니다.
당신은 세상의 박해와 미움을 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과 한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8-19).
아기를 보면 어른들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도리도리 까꿍’이라고 말합니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활짝 웃으며 그 소리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습니까? ‘도리도리 까꿍’이 무슨 뜻일까요? 별 뜻 없는 단순한 의성어, 의태어일까요? 찾아보니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 육아법인 ‘단동십훈’에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잘 알려진 것 몇 가지만 보겠습니다.
도리도리는 길 도(道)와 다스릴 치(治)를 쓰고, 까꿍은 ‘각궁’에서 나왔는데 깨달을 각(覺)과 몸 궁(躬)을 씁니다. 즉, 천지 만물이 하늘의 도리로 생겼으니, 너도 하늘의 도리에 따라 생겼음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또 손바닥에 손가락을 찍으며 ‘곤지곤지’합니다. 하늘 건(乾)과 땅 곤(坤)을 쓰는데,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달으면 천지간 무궁무진한 조화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죔죔’하지요. 이는 ‘지암지암(持闇持闇)’에서 나왔는데, 쥘 줄 알았으면 놓을 줄도 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 세우는 ‘섬마섬마(西摩西摩)’는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나 굳건히 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기가 위험한 데로 가려거나 손을 대려고 하면 ‘어비어비’하면서 못 가게 하지요. 이는 한자 ‘업비업비(業非業非)’에서 왔는데, 일함에 도리와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랍니다.
의성어, 의태어가 아닌 이렇게 깊은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뜻을 알고서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안다면 어떨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에게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라고 하십니다. 당시 유다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는 것은 절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정치적, 민족적 영웅으로서의 메시아일 뿐이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다윗이 장차 올 메시아를 ‘나의 주님’이라 불렀다는 것은 단순히 다윗의 인간적인 혈통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윗조차도 경배해야 할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신적인 권위를 지닌 주님이라는 사실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자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 혹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조력자 정도로 한정 짓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 전체를 다스리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진정한 나의 주님이십니다. 제대로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바르게 살아간다면 우리 시대는 좋아질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우리 자신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나도 사랑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그도 사랑하시는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공동체 아침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데, 살짝 늦게 일어난 한 청소년이 성전 문 앞에서 쭈볏쭈볏,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저는 활짝 웃으면서 어서 들어오라고 크게 손짓했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된 청소년은 뒷좌석에 앉아 열심히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야행성인지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을 텐데, 늦게라도 미사에 나와준 것이 감사해서 강론 시간에 크게 칭찬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자주 묵상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신 분, 너그럽고 관대한 분이십니다. 미사 좀 늦었다고 대노하고 격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전 6시, 9시에 포도밭에 일하러 온 부지런한 일꾼들에게도 잘 왔다고 칭찬하시며, 넉넉한 하루 품삯을 건네시지만, 게을러터져서 정오, 오후 3시, 5시에 와서 딱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도 어여삐 보시며 똑같은 품삯을 건네시는 편안하고 따뜻한 분이십니다.
오늘 에수님께서는 하느님, 인류를 구원하러 이 땅에 내려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율법 학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사실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극진히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셨지만, 태어나신 메시아 예수님은 혈육을 취하신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 그분 자체이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도 하느님을 너무 편협된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온 세상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신데, 내 가정, 내 공동체, 나 자신의 사라사욕만을 끝도 없이 채워주시는 자판기같은 하느님으로 오해합니다.
전 세계, 모든 만민, 모든 생명체를 두루 보살피셔야 하는 크신 하느님이신데, 내 고장, 내 혈육, 내 가문, 내 나라만 애지중지하시고, 만사형통하게 하시고, 지속적으로 복을 베푸시는 편애하시는 하느님으로 착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처럼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우리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좀 더 폭이 넓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분을 나만의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느님으로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나도 사랑하시지만, 나와 철저하게 맞지 않는 그도 사랑하는 크신 하느님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나에겐 왜 하.사.시.가 기쁜 소식이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마르 12,37)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9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아주 신비로운 대목이 하나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율법 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스스로 성령의 바탕에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마르 12,35-37 참조).
예수님의 이 날카로운 성서 해석이 끝나자, 성경은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실존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군중은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기뻤을까요? 예수님이 성경 퀴즈 대회에서 율법 학자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었기 때문에 그저 통쾌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군중이 환호하며 기뻐했던 진짜 이유는, 예수님의 그 한마디가 밑바닥을 기어 다니던 그들의 '자존감'을 단숨에 우주 끝까지 끌어올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던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다"라는 교리는 철저히 혈통과 행위, 그리고 세상적 권력을 중심에 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잣대 안에서 가난하고 못 배운 군중은 영원히 구원의 변두리에 머무는 쓸모없는 존재들에 불과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백성들에게 613가지나 되는 복잡한 규정을 들이밀며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라고 끊임없이 '행위'만을 강요했습니다. 이처럼 행위의 굴레에 얽매인 율법은 인간에게 어떤 희망도, 기쁨도 주지 못하는 무거운 감옥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는 단순한 다윗의 핏줄이 아니라, 다윗조차 우러러보는 창조주 하느님 본인이시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치하러만 오신 것이 아니라, 친히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오시어 우리를 당신의 생명 안으로 끌어올리러 오셨다는 위대한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먼저 "너 왜 그것도 못 하니?"라고 행위를 따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장 먼저 "너는 하느님께서 친히 목숨을 걸고 찾아오실 만큼 우주에서 가장 귀한 존재다"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 줍니다. 사람은 딱 자신이 가진 자존감만큼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먼저 주지 않고 행위부터 요구하면, 복음은 짐이 되고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얽매임이 됩니다.
오늘 군중이 느꼈던 이 '복음의 기쁨'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던 강렬한 체험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원래 활자 매체, 즉 책을 읽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유튜브 쇼츠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지만, 저는 빠르고 자극적인 쾌감을 즐기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무려 10권짜리나 되는 방대한 책을 장장 5년에 걸쳐 끝까지, 그것도 너무나 기쁘고 가슴 벅차게 읽어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신비가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원제: 내게 계시된 대로의 복음)라는 책이었습니다. 책 읽기를 그토록 싫어하던 제가 왜 이 방대한 책에 푹 빠져들었을까요? 그 책 속에서 저는, 제가 그동안 머리로만 알고 있던 '무섭고 명령만 하시는 심판관' 예수님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님은 너무나 자주 눈물을 흘리셨고,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보잘것없는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심장을 다 쏟아내시는 지극한 사랑의 결정체였습니다.
제가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할 분이 그토록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제게는 숨이 멎을 듯한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며 그 따뜻한 예수님과 함께 흙먼지를 마시며 걸어 다니는 제자들이 미치도록 부러워졌습니다.
"나도 저분과 더 가까이 머물고 싶다. 저분의 곁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싶다." 이 간절한 갈망과 기쁨이, 세속의 쾌락을 좇던 저를 신학교로 이끌었고 결국 사제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기뻐야 합니다. 나를 심판하는 규칙서가 아니라,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분의 정체성을 깨달아 그분 곁에 찰싹 달라붙어 머물고 싶게 만드는 거룩한 자석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미사에 빠지면 대죄다", "십일조를 내야 한다", "봉사를 해야 축복받는다"라는 행동 강령에만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전하여 신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기보다는, 율법의 채찍으로 영혼을 닦달하며 "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만 지워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성모님의 진짜 정체성을 온전히 마주할 때, 우리 영혼이 얼마나 압도적인 경외감과 마주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체험이 있습니다.
제가 사제 성소에 대해 깊이 갈등하며 고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송탄성당에 홀로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당 마당에 세워진 성모님 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성모님 상이 마치 살아 숨 쉬는 진짜 사람처럼 변하더니, 온몸에서 푸르고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압도적이고 거룩한 빛 앞에서, 저는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밀려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성모님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성모님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분들의 진짜 위대하고 거룩한 정체성을 티끌만큼도 모르고 있었구나.'
복음이 우리에게 하는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막연히 알던 주님과 성모님의 정체성을 거룩한 빛으로 뚜렷하게 보여주어, 우리 존재가 그분들 발치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영원히 머물 수 있도록 우리의 낡은 자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진행했던 '요한복음 8주 강좌'를 들으신 어느 형제자매님의 후기 글은, 이 '머무름의 신비'가 우리 영혼을 어떻게 부활시키는지 완벽하게 증명해 줍니다. 그분은 이렇게 적어주셨습니다.
"오랜 냉담과 방황의 고독 속에서 고아처럼 헤매던 나를 따뜻한 말씀의 빛으로 이끌어 주신 신학적 통찰과 다정한 강의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번 강좌가 내게 준 것은 새로운 지식도, 신앙의 무지를 단숨에 깨부순 것도 아니라, '그 문이 어디 있는지를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 된 것'이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내가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분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조금씩 살아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8주의 여정 동안 말씀의 표징들을 따르는 사이, 나는 언제부턴가 다시 걷고 있었다.
거창한 결심이나 극적인 순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강의를 열고 말씀을 듣고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아주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 걸음이 어느새 내가 광야를 벗어나 그분 옆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이분은 아주 정확하게 복음의 핵심을 꿰뚫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는 대단한 업적이나 거창한 결심을 이루어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분처럼 그저 주님의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오직 하나뿐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성체 조배를 하며 뜨거운 눈물로 주님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주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다 내어주시니, 이제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까요?" 그때 제 영혼 깊은 곳에서 아주 부드럽고도 단호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 네가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나는 네게 내 살과 피, 나의 모든 것을 다 주었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니, 너는 그저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
이 얼마나 벅차오르는 사랑의 선언입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성령을 드시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머무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찰싹 달라붙어 머무르기만 하면 됩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헉헉대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나무에 붙어있으면, 나무의 수액인 성령께서 가지인 우리에게 흘러들어와 저절로 기쁨과 사랑의 열매를 밀어내 주십니다.
세상의 거짓된 율법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네 힘으로 짐을 지고 가라"며 윽박지르지만, 우리를 진짜 사랑하시는 분은 "짐은 내가 질 테니 너는 내 품에 안겨 쉬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복음 선포는, 주님이 나무이심을 알게 하고 우리가 가지임을 깨달아 그분께 기쁘게 붙어있게 만드는 생명의 초대장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그분의 정체성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품 안에 찰싹 달라붙어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가장 벅찬 기쁨을 누리는 복된 가지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번에 본당 교우들과 함께한 성지순례를 은혜롭게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순례에는 특별히 본당 성경반 교우들이 함께하였습니다. 우리 본당에는 수녀님, 부제님, 평신도가 함께 이끄는 성경 공부 모임이 있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한국 교회에도 ‘청년 성서 모임’, ‘성서 40주간’, ‘성서 100주간’과 같은 프로그램이 있어 많은 신앙인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 주었고, 특히 젊은이들이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우리는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도 성경을 묵상하며 살아온 분들의 눈빛과 태도 속에서 깊은 믿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순례를 하면서 또 하나 깊이 느낀 점이 있습니다. 공항을 이용할 때 프리체크(PreCheck), 라운지, 글로벌 엔트리(Global Entry)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긴 줄을 서지 않고 빠르게 통과할 수 있는 프리체크, 기다림 속에서도 편안히 쉴 수 있는 라운지, 입국 절차를 간편하게 해 주는 글로벌 엔트리. 같은 공항, 같은 비행기,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준비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여정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우리 신앙생활과 참 많이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 삶의 ‘영적 프리체크’와 같습니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무엇이 옳은 길인지 분별하게 해 줍니다. 성경은 또한 ‘영적 라운지’와 같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 머물며 위로와 평화를 얻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영적 글로벌 엔트리’와 같습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의 삶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다윗이 성령 안에서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라고 고백했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시면서 동시에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단순한 문자로만 보지 않으시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밝혀 주셨습니다. 성 보니파시오 성인 역시 이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였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신앙이라는 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여정은 달라집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삶의 길이 분명해지고, 어려움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본당의 성경반과 교회 안의 다양한 성경 프로그램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은총의 길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지순례에서 받은 은총을 마음에 간직하며, 말씀과 함께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저희가 말씀 안에서 길을 찾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말씀 안에서 쉼을 얻고 힘을 얻게 하소서. 주님, 저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당신께 드리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ㄴ)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품으려고
오시는 당신을
품는
품으려고
오시는 당신처럼
품음의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께 드리렵니다
받들려고
오시는 당신을
받드는
받들려고
오시는 당신처럼
받듦의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께 드리렵니다
베풀려고
오시는 당신께
베푸는
베풀려고
오시는 당신처럼
베풂의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께 드리렵니다
섬기려고
오시는 당신을
섬기는
섬기려고
오시는 당신처럼
섬김의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께 드리렵니다
살리려고
오시는 분을
살리는
살리려고
오시는 분처럼
살림의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께 드리렵니다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다윗의 후손으로서 그 적통을 이어가는 세속적인 권력의 왕권을 기다려왔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예언되었던 다윗의 자손이셨지만 그 이유만으로 메시아가 되시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메시아적인 신성은 당신께서 일생을 통해 행하신 일들로 증명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성령 안에 일치된 모습으로 살아가시면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셨고, 결정적으로 부활을 통하여 구원의 메시아이심이 세상에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적인 혈통의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세상을 구원하심으로써 당신이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예수님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꾸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저 역사속의 한 위인이나 성인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순히 역사 속의 성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메시아,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메시아시요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구원의 문은 열려 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자기의 고유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다른 것을 잘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만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문을 열어 놓아야 더 풍요로워집니다. 특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갇혀 있는 사람은 그 유식한 무지를 속히 버려야 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으며 하느님과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서 일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다윗 가문의 출신으로만 국한하여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사명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놓을 때까지”(마르12,36). 하고 말하였는데 첫 번의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내 주님께’의 ‘내’는 다윗을 말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주님’은 예수님시대의 율법학자뿐 아니라 유다교의 각 종파에서는 모두 메시아, 곧 왕으로 오실 다윗의 후손으로 이해하였습니다(2사무7,12-16. 22,51; 호세3,5; 예레30,9)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다윗의 메시아인 예수님께 당신의 오른쪽에 앉게 하여 모든 권능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한을 지닌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게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하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는 메시아는 ‘위대한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자손’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핏줄과 족보에 따른 메시아, 다윗의 왕정 이념에 따른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그를 뛰어넘어선 권위 있는 메시아이십니다. 참된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대하고 갈망하던 잘 먹고 잘사는 평화로운 세상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는 마침내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추종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학자들이 망신당해서? 아니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시고 새로운 눈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끌려서? 아니면 미래에 대한 새 비전을 갖게 되어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바람뿐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원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 내가 만든 하느님 상을 살펴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나보다 먼저 태어났느냐 나중에 태어났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깨달음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참된 깨달음 안에는 나이의 앞뒤가 없습니다. 인생은 살아온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느냐로 기억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의 정체를 가르치시는 장면이다.
율법 학자들은 다윗이 시편 110에서 장차 나타날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른 것을 근거로, 이렇게 질문한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를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가진 시대적 의미다. 당시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 기대했다.
그들은 점령당한 나라에서 해방자를 바라며,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메시아상을 꿈꾸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속적 기대를 넘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모습과 사랑을 드러내며, 천상의 아버지께 인도하는 메시아임을 알려주신다.
즉,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다. 마리아를 통하여 오신 예수님은 인간 역사 안에서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신성으로서 다윗의 주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다.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으로는 모든 피조물 위에 계시는 주님이시다.”라고 설명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복음을 해설하면서, “육체적 계보와 신적 권위가 결합하여 예수님께서 참된 메시아이자 참된 하느님으로 드러나신다.”라고 강조한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아 역사 안에 인간으로 오셨으며, 다윗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혈통의 계보만을 보고 메시아를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관념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참 의미와 구원의 본질을 드러내셨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이 던져진다.
나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내 생활의 편안함이나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내 신앙의 중심은 현세적 안락에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과 구원의 길에 있는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주권 아래 살아가는 것임을 내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교부들은 우리의 믿음을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참여하는 자유로운 동의”라고 표현했다.
즉,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참된 믿음이 된다. 이러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1)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왕실의 후손 중에서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할 왕이(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그 믿음은 다음 예언들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미카 5,1).”
36절의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에서 앞의 ‘주님’은 ‘야훼 하느님’이고, 뒤의 ‘주님’은 ‘구세주(메시아)’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는, “메시아는 적대자들을 굴복시키고 세상의 통치권을 장악할 것이며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메시아를 지상적인 왕으로만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메시아는 지상적인 왕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왕’이라는 예언입니다.
37절의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는, “다윗 자신이 메시아를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했는데”입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른 분이기 때문에, 다윗보다 더 높은(초월적인)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으로는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2) 예수님의 말씀에는 “메시아는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는 메시아”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께서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라는 말은, “메시아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군중이 바로 알아들었음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다윗 왕실을 재건하는 일만 하는 것으로 그치는 메시아라면, 메시아 덕분에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정치적인 독립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일반 서민들에게는 별로 좋을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다윗 왕실의 지배를 받는 것이나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지배 계층도, 기득권층도, 계급도, 신분도 없는 나라입니다.
만일에 이쪽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그 나라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이쪽 세상에서 낮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그 나라에서도 낮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면, 그런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이렇게 찬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물론 기득권층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빈손이 된다면...... 그런데 그것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
이 말씀에서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다.’ 라는 말은,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온 삶으로’ 어린이가 되라는 뜻이고, ‘버림’과 ‘비움’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학식이나 명예나 지위나 재산이나 권력 같은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주님 사람 안에 역사를 두고 사람처럼 사시었다.<마르코12/35-37>6월5일.
이석진 그렉리오 신부님
마태 첫 말에 주님의 족보가 길게 기록되어 있어 신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완전한 사람으로 오시어 사람의 역사 안에 사람과 똑같이 사시었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해성처럼 나타나시지 않고 우리와 똑같이 다윗의 자손으로 역사적 인물로 현존하시었습니다. 세상에 오신 것을 신비스럽게 아니고 한조상 안에 사람으로 오시고 사람 안에 살아 움직이셨습니다.
주님 믿음은 신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 따라 사람안에 사람의 필요성 가지고 사시며 사람으로 살로 믿음도 사람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시었습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삶은 우리가 양심을 따라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함같이 진 선 미를 따라 살도록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었습니다. 세상의 우리의 믿음통해 사는 것은 세상의 필요성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숨을 쉬며 살지만 먹고 마시고 옷입고 잠을자며 살아야 합니다. 먹을 것 먹지도 않고 밀도 없이 침묵속에 사는 것 아니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합니다. 앞으면 병원에 가고 배곺은면 식상에 앉고 먹고 마셔야 합니다.
한미디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 안에 살려면 필요한 것이 많이 있으며 이를 따라 살려면 힘도 있고 재력도 있고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약한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고 외로운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청빈의 참뜻은 빈손으로 사는 것 아니고 나눌 수 있는 것 가져야 하고 나눌것이 있어야 합니다. 땀흘려 일하는 사람 자기만 살려고 아니고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주는이 없으면 받을 것이 없으며 꿂어 죽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것 사람다운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첫 단계는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줄 것이 있으며 인색하거나 자기 주머니만 챙기면 사람이 하는 짓 아닙니다.
주님 사람으로 오신 이유는 자신을 위한 것 아니고 너@를 위한 것입니다. 저는 살면서 나만 위해 살기위해서 아니고 모두를 위하여 살기 위한 것임을 알고 받으며 나눔 먼져 생각하고 살고 있으며 늘 줄 것을 준비하고 살고 있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가 되시려 오신 주님 같이 교회는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 사람으로 사신 것같이 사람으로 살며 사랑을 통해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오늘도 섬기고 나누고 친교를 가지고 살아 주님이 사람으로 사시던 것 같이 주님 따라 믿음을 실천합시다.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래된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으십니다. ‘메시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통해서 말이지요. 물론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맞습니다. 다윗 집안의 후손인 요셉이 그분의 ‘양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그분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 걸 그대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 의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유다인들이 사용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무슨 뜻이며 그 안에 어떤 바람이 담겨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에 근거하여, 다윗 가문에서 태어나는 자손 중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가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메시아가 강력한 카리스마와 능력으로 자기들을 이끌어서 과거 다윗 왕국 시절에 누리던 그 영광과 번영을 다시 누리게 되리라고 기대했지요. 그런 점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 안에는 메시아가 다윗 왕처럼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어야 한다는 ‘바람’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건 ‘당신이 메시아라면 우리의 그런 기대와 바람을 이뤄주어야 해’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그 나라의 주인이신 분께 자기들 뜻을 강요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헤아리고 따라야 하지요. 그런 점을 상기시키시기 위해 예수님은 시편 110편 1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 구절에서 앞에 나온 ‘주님’은 야훼 하느님을 가리키고, 뒤에 나온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구세주를 가리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단한 존재로 여겨 칭송하는 다윗 임금이 메시아를 언급하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그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자기들 뜻과 바람을 그분께 강요할 게 아니라,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며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군중이 그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고 그들의 마음 속에 참된 희망을 심어주었기에, 그들이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자세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내 뜻과 바람을 이뤄줄 ‘도구’로 삼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순명하고 따라야 할 ‘주님’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나에게 참된 기쁨과 희망이 되고 있습니까?
있는 그대로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님
사제로 살아가며 참으로 다양한 이들을 만나고 그들 삶의 애환을 듣습니다. 각양각색의 삶이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지만, 그 안에는 공통된 고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입니다. 그 고민들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갈등을 풀어낼 실마리가 보입니다. 갈등의 뿌리에는 대개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서운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거나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 기대가 어긋날 때 우리는 상처를 입고 관계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나의 관점을 내려놓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동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문득 우리 또한 예수님을 그런 방식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봅니다. 참된 구원보다는 정치적·사회적 변혁을 꿈꾸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죄인들과 어울리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로마의 식민 지배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왕국을 재건할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발자취를 있는 그대로 따랐던 이들은 참된 행복에 이르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성령과 함께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했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도 ‘있는 그대로’ 형제들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익숙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십니다.
고정된 생각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정된 틀을
깨뜨리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방식은
우리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역사 안으로
오신 분이시며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우리의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새롭게 하는 여정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만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시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만남의 대상이십니다.
아는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각을 내려놓고
그 생각마저
붙잡으려 하지 않을 때,
이미 우리 삶의 자리에
와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듯 참된 만남은
있는 그대로를 깨닫고
함께 머무는
하나의 순간입니다.
이미 이루어져 있는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은총의 신비입니다.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한 아이와 짝을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매우 지저분했고 공부도 못했습니다. 여기에 얼굴에는 거부감이 들 정도의 큰 흉터가 있었지요.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억지로 짝을 지어주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울면서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선생님은 “이 친구와 짝이 될 사람?”이라며 지원자를 찾으셨습니다. 모두가 싫었는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지요. 그때 제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짝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놓인 이 친구가 안타까웠고, 내가 구해준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좋은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지저분하고 냄새도 많이 났으며, 공부도 못하는 이 친구와 함께하기가 점점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면 다른 자리의 친구와 놀았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괴롭힌 것은 아니었지만, 무시했던 것입니다.
철이 들면서 이때의 생각을 하면 제 마음이 아픕니다. 당시 이 친구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겉모습만 보고서 나의 행동을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철없을 때의 일이 이렇게 40년이 넘었음에도 후회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과 반대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들은 소위 성경에 대해서는 ‘박사’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어떻게 태어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즉,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앎은 인간의 앎일 뿐이었습니다.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하지만,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앎을 주님께서는 지적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지만, 다윗 스스로가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곧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주님을 육에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만 여길 뿐 다윗의 주님이신 하느님이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보지 못하고, 인성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일조를 하게 되지요.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다른 이에 대한 섣부른 판단과 단죄는 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블레즈 파스칼).
나의 영웅.
미국의 영화 배우 매튜 맥커너히는 오스카상 수상 당시 10대 때부터 변하지 않은 자신의 영웅에 대해 말했습니다.
“매월, 매주, 매월 그리고 매년 제 영웅은 항상 저로부터 십 년이나 멀어져 있습니다. 아마 전 절대로 그 영웅이 되지 못할 겁니다. 갖지도 못하겠죠.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니까요.”
그가 말하는 자신의 영웅은 10년 뒤의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미래의 다른 삶을 지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영웅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특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영웅을 생각하면서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 거리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희망을 간직하는 삶, 어렵고 힘들다고만 외치는 삶이 아니라 희망이 있기에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늘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오십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서도 한 줄기 빛으로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 주님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런 메시아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유다인들은 메시아와 관련해 한 가지 큰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윗가문에서 출생한 메시아, 힘과 능력을 갖춘 정치인으로서의 메시아, 결국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들을 해방시켜줄 해결사로서의 메시아, 그래서 이스라엘을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하는 정복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 메시아는 꼬질꼬질한 이 세상의 현실을 한 단계 뛰어넘는 메시아, 보통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초인(超人) 메시아, 이 부조리한 세상을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의 메시아, 오랜 인간의 소원을 넘치도록 충족시켜줄 기적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허무맹랑한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트리셨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에 정면으로 반박하셨습니다. 당신은 철저하게도 비폭력주의자로 처신하셨습니다. 완벽한 평화주의자로 살아가셨습니다.
유다인들 입장에서 막상 눈앞에 드러난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기대 밖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초라했습니다. 범인들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밥 같은 것 안 먹어도 되는 메시아, 화장실도 안가는 고상한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인들은 동네잔치 상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예수님,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포도주잔을 기울이는 예수님의 모습에 엄청 실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메시아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인간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 메시아,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져 죄인인 인간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메시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메시아...
참된 메시아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이 세상을 초월하는 왕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실 왕 중의 왕이십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지나갈 이 현세에 기반을 둔 왕이 아니라 영원한 도성,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기반을 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왕,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그런 왕이 절대 아니셨습니다. 거듭되는 폭력과 압제, 비인간화 앞에서도 끝까지 견뎌내며, 끝까지 용서하며, 박해자마저 사랑으로 감싸 안은 사랑의 왕이셨습니다.
유다인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사적인 욕구를 상시적으로 채워주는 개인 비서, 해결사,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키고 만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 마술사로 격하시키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메시아 상은 어떠한지 진지하게 돌아봐야겠습니다.
<기득권과 민중이 대립한다면 진리는 어느 편일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일반 대학교 입학하여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데모’였습니다. 저는 그런 정치적인 것에 끼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멋모르고 들어갔던 가톨릭학생회 동아리가 알고 보니 데모 주도 모임이었습니다. 데모를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아리에 머물기 위해서는 화염병 정도는 날라주어야 했습니다. 백골단에 끌려갔던 선배가 눈이 함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며 다른 이들은 분노했지만, 저는 저 때문에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뒤로 숨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시청 앞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어떤 모르는 여학생이 손바닥에 무언가 써 주었습니다.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는데 저는 예쁜 여학생이 손을 잡고 써 주니까 그냥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뭐라고 쓰는 거냐고 물으니 그 여학생은 짜증을 내며 “집회가 명동성당으로 바뀌었다고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군데군데 사복경찰들이 섞여 있어서 시청 앞에서 데모한다고 했다가 그곳으로 병력이 집중하니까 급하게 명동성당으로 장소를 바꾼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각자 명동성당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저는 그 혼란을 틈타 집에 와 버렸습니다. 물론 동아리 선배들은 명동성당에 갇혀버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TV로 보는데 그 많은 병력이 명동성당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그때 무슨 이유로 데모를 한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강경대라고 하는 한 학생이 경찰이 휘두른 봉에 맞아 죽은 이유로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로 여러 명의 학생이 죽었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렇지만 명동성당이 공권력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민주화의 성지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것은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단호함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987년 6월 명동성당 공권력 행사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들 위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라고 하시며 공권력에 맞서 학생들을 옹호하였습니다. 이후로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때도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철옹성이었습니다.
만약 기득권과 민중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이야기를 잘 들어보고 누가 옳은지 분별해서 선택해야 할까요?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은 누가 옳고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무조건 약자이자 권력을 갖지 못한 민중들 편에 서셨습니다.
김 추기경이 동성학교에 다닐 때, 시험에 황국 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학생 김수환은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라고 써서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를 맞았었다고 합니다. 장면 박사가 아니었으면 퇴학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법을 지키라며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한 전태일의 영화가 나오자 가장 먼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일까,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가장 오랜 시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계셨습니다.
왜 항상 기득권들보다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는 것이 옳을까요? 그 이유는 기득권들은 이미 생각이 세속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진리까지 왜곡합니다. ‘진리’를 왜곡시켜서라도 세속적으로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지키기에 급급합니다. 이는 지금이나 예수님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요 며칠 동안 예수님은 당시 기득권인 사제들, 부자들인 바리사이들, 지식층인 율법학자들, 정치인들인 사두가이들에게 공격을 당하셨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싸잡아서 공격하십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여겼습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면 누가 좋을까요? 기득권이 좋습니다. 로마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신들이 지닌 것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기 힘든 사람들이라면 메시아는 자신들의 배고픔만을 충족시켜주고 천국을 약속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기득권은 그런 메시아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다윗도 메시아를 두고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겠냐고 했을 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라고 말합니다. 분명 기득권들은 싫어할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만들어 독립운동을 일으켜 자신들의 이익을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왕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기득권과 민중이 다투고 있다면 민중 편에 서는 것이 맞습니다. 기득권은 세속적인 것은 원하지만 가난한 민중은 구원을 원합니다. ‘민중의 소리는 하느님의 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말이 있듯이, 진리는 가난한 군중 속에 머뭅니다. 가정에서도, 본당에서도, 나라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음을 잊지 말고 항상 가진 것이 없는 다수의 편에 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진리를 잘 분별하며 살아왔다고 하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좋은 점이 있습니다. 바둑판처럼 길이 나있어서 길 찾기가 수월합니다. 주소만 알면 쉽게 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산보하다가 길을 잃어도 곧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길의 번호를 따라가면 됩니다. 설명할 때도 편합니다. 길의 번호만 알려 주면 됩니다. 주변에 공원이 많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도 공원이 여럿 있습니다. 요즘 자주 가는 공원은 ‘Little Bay Park'입니다. 공원은 바닷가 근처에 있고, 멋진 다리(Throgs Neck Bridge)가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뉴저지입니다. 바닷가에서 거위 가족이 나들이 가는 것도 봅니다. 같은 다리인데 날씨에 따라서 다리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비가 내리는 날의 다리는 왠지 슬퍼 보입니다. 화창한 날의 다리는 씩씩해 보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인생의 길에서 방황할 때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고독에서 위안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다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고 합니다.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모든 사제는 서품성구를 정합니다. 저는 시편 126장 5절의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는 말씀을 서품성구로 정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알아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원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력했음에도 결과가 없다면 기다리면 됩니다. 노력하지 않고 결실을 원했다면 뉘우치면 됩니다. 힘들고 어려웠을 때 제게 큰 위로를 준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욥기 1장 21절의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는 말씀입니다. 서운했던 일도, 속상했던 일도, 가슴 아팠던 일도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면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등대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메시아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중에 주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마음을 열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꽃이 피어나서 좋은 것은 보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전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태어나서 좋은 것은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다윗도, 구약의 권위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시기 때문입니다.
<빛과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 안에
있으니
밝다
빛에게
빛이 되겠다고
빛 밖으로
나오니
어둡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메시아는 다윗이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이라고 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보면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아가 나올 것이며, 그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에서 보면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다윗의 자손이라고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혈연을 통해서 탄생하신 분이 아니시라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로 들어오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하느님을 우리 전통과 사고의 틀 안에 계신 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이 바이러스를 없애주셨으면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바람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고통을 받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분명히 이 고통을 없애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우선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진정 아버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메시아, 메시아의 나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9주간 금요일>(2020. 6. 5. 금)(마르 12,35-37)(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5-37)”
여기서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는 “하느님께서 메시아께 말씀하셨다.” 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라는 말씀은, “메시아께서는 적대자들을 굴복시키고 세상의 통치권을 장악할 것이며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라는 뜻의 예언입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는 인간적인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에는, 다윗이 예언한 메시아는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지상적인 왕이 아니라 초월적인 왕이며, 그 왕국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진정한 신원을 말씀하신 것은, 메시아로서 당신이 하시는 일은 다윗 왕실의 복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다윗 왕실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고, 그래서 기뻐했습니다(마르 12,37).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왕실을 복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율법학자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 백성 입장에서는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다윗 왕실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해도, 기득권층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득권을 누리고 소외계층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외된 채로 살아간다면,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메시아 나라는) 기득권층도 없고 소외계층도 없는 나라, 그 어떤 차별도, 억압도 없는 나라, 모든 사람이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이 행복한 나라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한 군중도 바로 그런 나라를 희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메시아의 신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백성들에게는 또 하나의 복음(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목자이신 분입니다(루카 15,4).
아흔아홉을 잘 지키기 위해서 하나는 그냥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은 세속의 사고방식입니다. 단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아흔아홉과 하나의 가치를 비교하지 않고 백 마리 양 전부를 하나하나 모두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라는 말은,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하나를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를 반대합니다.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복음 정신을 거스르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소중하게 여기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함께 행복해지는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전체주의 사상과 공동체 정신은 분명히 다릅니다. ‘희생’이란 남에게 시키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자기는 할 생각도 없으면서 남에게만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는 자본주의도,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잘난 사람들의 개인주의도 복음 정신과 공동체 정신을 거스르는 사고방식입니다.
공동체 정신은 남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앞서 가지 않고, 남보다 조금 능력이 모자라서 뒤처지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가려고 기다려 주는 정신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최후의 심판’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이 말씀들을 간단하게 줄이면,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이 바로 나다.”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겨야 한다.”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겨야 한다.”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베들레헴 마을 밖 외양간에서 태어나서 구유에 누워 계셨던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 예수님의 모습도,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어떤 백인대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 말은,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다.” 라는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힘없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마도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메시아의 사랑’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은 ‘가장 낮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나라는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프로폐셔널(professional)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프로’라고 약칭한다.이는 어떤 일을 전문으로 하거나 그런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멘탈이 강한 사람, 비범한 사람, 두려움이 없는 당당한 사람, 죽음을 뛰어넘는 사람, 자기가 하는 일에 자긍심이 높고 성취가 강해 내면이 행복한 사람을 말한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비굴하지 않고 의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람, 자신의 일을 끝내고 자기에게 불리할 때라도 불평하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할 줄 아는 사람, 하느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 고통과 박해를 견디어내며 끝까지 승리자로 남아 있는 사람, 프로이다.
복음의 사람들이 그랬다. 모진 박해와 시련에도 끝까지 견디어 승리자가 된 사람이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산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하느님의 힘에 기대서 겸손되이 산 사람들이다. 프로가 그랬다.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확신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3,1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다윗은 시편 110에서 장차 자신의 후손으로 나타나실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했는데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했는가?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으며 당신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시라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시대적 의미이다. 이 호칭 속에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가득히 들어있다. 왜냐하면 정복당해 고통을 겪고 있던 그들은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지상 왕국의 건설자, 정복자로서의 메시아의 개념을 빼버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전해주며 사람들을 천상 아버지께 인도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랬던 것이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다윗의 주님이시다. 하느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분이 어머니이신 여인을 통하여 오셨다. 세상의 주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니 마리아의 주님이시다.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니 마리아의 창조자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마리아의 주님이시며 마리아의 아들이시며, 마리아의 창조자이시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이셨기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린 것이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며,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다.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 여길 뿐, 다윗의 주님이신 하느님이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올바로 고쳐주고 계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메시아를 찾는 우리의 믿음의 자세는 어떤가? 당시의 유대인들이 정복자들에 의해 시달리고 고통당하는 속에서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해방해 주고 지상 천국을 건설해 줄 구원자, 그리스도를 기다리듯이 나는 내 생활 속에서 나의 현세적인 편안함과 바라는 일의 성취 또는 자기 생활의 안락만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진정 자신에게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가져다주시는 그리스도를 더 잘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는지? 나는 내 생활에서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 것,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생활하는지? 우리 각자 자신의 신앙의 자세에 대해서 살펴보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자.
하느님가족처럼 살면 참 멋있겠죠!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보니파시오 주교순교자는 선교활동하다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셨습니다.
입으로 가르치고 피로 지킨 신앙을 저희도 굳게 보존하며 선교합시다.
신앙인들이 믿음으로 신앙을 충실히 전파하는 순교정신 갖게 하소서.
다윗 왕과 예수님, 조상들과 우리 사이의 시간 빼면 현재가족 입니다.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현재(지금)가 우리 신앙인들을 위대하게 합니다.
다윗이 예수님을 주님이라 했듯 예수님과 우리 지금 여기 살고계시죠.
사람들이 세상조건 시간과 장소만 빼면 모두가 지금 하느님가족입니다.
인류 모두가 늘 하늘개념 하느님가족처럼 산다면 참 멋있겠죠! 그렇죠?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 복음선포를 위한 성령의 은사 ⓹ : 효경
이기우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선교활동의 스승으로서 자기고백을 곁들인 권고를 하는 가운데,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줄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을 잘 배우고 가르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에서는 율법 학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정작 다윗은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부딪치는 가운데, 군중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의 전후 맥락을 따져보기 전에는, 율법 학자들의 주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 이 주장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왜 반박하셔야 했는지 그리고 이 말씀에 군중은 왜 기쁘게 들었다는 것인지 하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인성적 차원에서 법적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가문에서 출생하였으므로 다윗의 자손이 되시지만 이는 유다인들에게 약속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였을 뿐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역사적이고 형식적 요건을 채우기 위하여 다윗 가문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를 간택하셔서 메시아를 성령으로 잉태시키셨다는 신성적 차원에 있습니다. 신성으로 볼 때는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주님으로서 세상에 오신 것이고,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약속된 메시아로서 오신 분이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미카 예언서의 기록에 따라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것이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성경에 대한 지식에 불과했을 뿐이고 당시 율법 학자들은 요셉이 다윗 가문의 자손임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예수님을 갈릴래아 출신이라며 무시하거나 사생아라고 따돌리거나 무식한 목수 출신이라며 소외시키기도 했던 겁니다. 이것이 마르코 후에 마태오가 예수님의 족보를 자신이 쓴 복음서 맨 앞에 내세워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지요. 따라서 율법 학자들이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주장은 ‘군중이 메시아로 알고 있는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므로 메시아일 리가 없다.’는 또 다른 주장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시라고 반박하셨던 것이고 이 말씀이 군중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 사건들을 목격한데다가, 권위 있는 가르침까지 듣고 감동과 경탄을 느꼈던 군중으로서는, 성경을 근거로 예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나서는 율법 학자들의 주장이 불편했던 터에, 예수님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주님이시라고 대놓고 말씀하시자 차라리 반가웠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자구에 밝았으되 성경의 진실에는 눈이 멀었던 당시 지식인들의 민낯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대단하게 여겼던 다윗 왕실의 혈통이라든지, 하느님께서 몸소 축복하신 유다 왕조의 권위 등이 그들에게는 더 없이 중요한 가치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러한 면모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려는 마당에서는 진리의 부스러기이거나 구약성서의 예언을 성취하기 역사적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백성들 가운데 드러나지 않게 사시면서 신성에서 나오는 가르침과 기적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펼쳐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 현실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현실을 예수님께서는 진복팔단의 말씀으로 구체화시키셨지요.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데 필요로 하는 성령의 은사 가운데 효경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 은사도 두 차원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즉 신성적 차원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므로 우리가 그분께 대하여 자녀다운 효성으로 섬겨야 한다는 뜻이 첫 번째입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효경의 은사인 것이지요. 한편 인성적 차원에서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에는 형제자매의 관계가 이룩되는 것이어서 인종이나 피부색, 신분이나 성별, 재산이나 학력 등의 차이를 초월한 인도주의가 보편적이고도 전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 두 번째입니다.
보편적 인도주의란 권력이나 재산이나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힘도 없고 돈도 없으며 많이 배우지도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보편적으로 인류 형제애가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전인적 인도주의란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도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에 경제적인 배려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문화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배려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용어로 바뀐 이 보편적이고 전인적인 인도주의가 내용상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선포하는 진복팔단의 현실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박해시대 백 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던 교우촌의 교우들은 실질적으로 진복팔단이 관철되는 새로운 인본주의 세상을 구현했던 장본인들입니다. 그들은 신분제도와 남존여비의 질곡을 초월하여 만인이 평등하고 남녀가 동등한 세상을 가꾸었으며, 현세적 질서를 넘어 내세의 천국을 흠모하여 가능한 대로 교우촌을 그들이 믿는 바의 천국으로 가꾸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박해가 닥치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치명할 수도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신앙생활이 바라볼 수 있는 최대의 명예요 희망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들이 박해를 피해서 심산유곡으로 숨어 들어가서 한데 모여 살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기도하며 옹기를 굽든 담배농사를 짓든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며 살았습니다. 천주교 교리를 생활화했던 이 교우들이 보여준 교우촌의 생활은 효경의 은사가 여지없이 발휘된, 보편적이고 전인적인 인도주의가 구현되었던 새로운 문명의 원형질이여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의 맥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경의 권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과 역사에 근거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서 나오리라 믿었습니다.
일찌기 성조 야곱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고 축복하며 통치권이 유다 가문에서 나오리라 예언하였지요.
이어 주님께서 유다의 자손인 다윗 임금에게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되리라"(2사무 7,16)고 하신 바 있습니다.
또 미카 예언자는 다윗의 고을인 베들레헴을 두고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고 예언하면서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 5,1-4)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서 나실 메시아는 유다 가문, 다윗의 자손이 맞습니다. 인간적 계보가 그렇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신적인 계보는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기름부음받은이, 메시아를 정치적 현세적 인물로 국한해 생각하는 이스라엘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겁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마르 12,37)...
예수님은 다윗의 노래라 불리는 시편의 고백을 들어 메시아의 신적, 초월적 신원을 밝히십니다. 이 역시 성경의 권위를 통해서입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마르 12,36).
"성령의 도움"은 곧 성령의 영감으로 씌여진 성경을 가리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2티모 3,16)라 말하며 이를 뒷받침하지요.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실 구원자, 메시아가 완전한 하느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기도 한,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존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의식의 대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 없는 신비니까요.
하지만 그 실마리가 성경 안에 없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고 하셨으니까요. 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성경을 알되 선택적으로 알게 되면 하느님의 진심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율법 학자들처럼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계보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고, 신적 계보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니 과연 구약 성경의 예언이 그분을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이 놀라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없으니 안타깝지요.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2티모 3,15).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으며 신약을 준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이 그토록 확신하는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을 완성하는 분이시지요. 그런데 성경에 대한 거시적이면서 심오한 통찰은 말씀을 사유화하거나, 제 이익을 위해 도구화하거나, 또 말씀을 인간의 편협한 사고 안에 정형화하는 이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은총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나 종교 지배층처럼 하나는 알되 둘은 모르는 우매한 현학자가 되지 않으려면, 말씀 앞에 겸손과 사랑으로 서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 앞에서 무지하고 무감할 따름이니까요.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 넘치고 그들 앞에 무엇 하나 거칠 것이 없나이다"(화답송).
우리가 말씀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또 훈장처럼 과시할 이수 과정 레벨이나 통독 횟수도 아니지요.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좀 더 갖추게 해 주신다면(2티모 3,17) 그땐 우리 자신이 복음이 되고 말씀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깊이 만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분은 우리 얕은 지식과 사고를 초월하는 분이시니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겸손과 사랑으로 그분 앞에 머물러 기다립시다. 그러면 은총으로 말씀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아멘.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 -풍요로운 영적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주님은 나의 힘, 내 기쁨이시로다.”
"주님,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가 넘치나이다."
아침성무일도 독서후 응송의 고백이, 미사중 화답송 후렴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해마다 반복하여 거기 그 자리 때되면 피고 지는 다양한 꽃들입니다. 단조롭고 따분한 반복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찾을 때 늘 거룩한 반복, 새로운 반복입니다. 아침이 늘 새롭듯 우리 역시 늘 새로워야 합니다. 바로 영적전투의 요체입니다.
제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40여년 수도생활을 통해 한결같이 강조해온 주제가 영적전쟁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들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기와 싸워야 하는, 늘 새롭게 영적전투에 임해야 하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객사, 사고사, 병사가 아닌 영적전투중에 전사戰死해야 비로소 전사戰士라는 제 지론이며 소망입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8세기 치열하게 독일 지역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성 보니파시오 주교님 또한 빛나는 주님의 전사였습니다. 사실 성서의 인물들은 물론 교회의 인물들 모두가 한결같이 치열한 영적전투에 영적 승리를 성취했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였습니다. 얼마전 치열하게 배밭 농장에서 적과摘果하고 있는 젊은 수도형제를 보면서 새롭게 부각된 영적전투입니다.
“치열한 영적전투의 현장!”
사진과 더불어 형제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담쟁이’ 시가 생각납니다. 영적전투를 상징하는 시입니다. 지금도 거기 그 자리 수도원 담벽엔 여전히 초록빛 열정으로 빛나는 담쟁이가 한창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꼭 22년전 이때쯤 썼던 시인데 그동안 한결같이 담쟁이처럼 하루하루, ‘하루살이’ 주님의 전사로 살아 온 영적 삶임을 깨닫습니다.
영적 전쟁에 필수 무기가 성경공부입니다.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풍요로운 영적 삶은 물론 영적전쟁의 승리를 보장합니다. ‘독서-묵상-기도-관상-실행’에 이르는 렉시오 디비나의 수행은 비단 신구약 성경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성경, 삶의 성경에도 해당됩니다. 제 지론은 자연도, 우리 믿는 각자의 삶도 성경책이라는 것입니다. 윗 담쟁이 시는 자연성경을 렉시오 디비나한 결과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렉시오 디비나의 우선적 대상은 신구약 성경입니다. 오늘 제1독서 ‘티모테오 2서’에 주인공들인 바오로와 티모테오 역시 빛나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내가 어떠한 박해를 견디어 냈는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해주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주님의 전사 바오로 사도는 이어 티모테오에게 성경공부에 충실할 것을 신신당부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영적 삶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물론 성모 마리아와 모든 교부들과 성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성경 렉시오 디비나를 생활화하여 늘 성경을 읽었고 성경은 이들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복음에서 예로들은 다윗이나 또 이 성서를 편집했던 초대교회 신자들, 모두 제가 보기엔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들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지만 예수님이 ‘다윗의 주님’이심은 참으로 깊은 렉시오 디비나의 묵상의 열매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도움으로 시편110장 1절을 렉시오 디비나 한 결과 이미 먼 후대 메시아 예수님의 도래까지 예견하여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 또한 다윗과 함께 이 시편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자신의 신원을, 즉 다윗의 자손이자. 다윗의 주님이심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으니 바로 예수님이 다윗은 물론 자신들의 주님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주님일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시편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시편뿐 아니라 신구약 성경이든, 자연성경이든, 내 삶의 성경이든 렉시오 디비나 궁극의 목표는 파스카의 예수 그리스도님을 내 주님으로 깨달아 내 삶의 중심에 모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이시며 인도자이십니다. 참으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인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신 당신과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제 행복기도중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배우는 자의 행복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서간은 바오로와 디모테오의 관계를 얘기하고 있는데 인도하고 따르는 관계와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라고 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먼저 디모테오가 어떻게 자신을 따랐는지 얘기합니다.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처신, 목표와 믿음, 끈기와 사랑과 인내를 따랐으며, 내가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과 처신을 그대로 잘 따랐다면 스승의 가르침과 처신이 참으로 본받을 만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자가 스승 못지않게 훌륭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우선 스승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아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그 가르침과 처신을 따를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이어지는 얘기를 보면 스승이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어야만 하고,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끈기와 사랑과 인내로 따라야 하는 그런 삶인데 그런 가르침과 삶을 그대로 함께 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웬만한 사람은 그런 삶을 따를 마음이 아예 없지요.
그런데 말들 안에서 제자의 훌륭함이 드러나는 또 다른 단서를 볼 수 있는데 스승의 목표와 믿음도 따랐다는 대목입니다. 같은 목표와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사실 이런 정도라면 스승의 뒤를 따르는 제자 이상의 동반자이고 동지지요.
그러니 나의 목표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나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겠다는 이런 제자를 하나라도 만난 스승은 참으로 성공한 스승이고 행복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의 삶을 통해 생각해보면 훌륭한 제자를 가진 스승이 되는 것보다 훌륭한 스승을 둔 제자로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인 것 같습니다. 훌륭한 제자를 만나기 어렵고 그래서 스승으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르치고 모범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저처럼 오랫동안 가르치는 삶을 산 사람은 훈장 기질이 몸에 배어 잘 살지도 못하면서 노상 가르치려고만 들고, 무엇보다도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사람은 모름지기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고, 세 살 어린애한테도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은 마치 육체의 성장판이 닫힌 것처럼 성장이 멈춰버린 것이고 하늘을 향한 문이 닫혀 버린 거지요.
이런 저이기에 배우려는 자세를 갖춘 디모테오는 오늘의 저에게는 부럽고 모범이 되는데 서간은 디모테오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디모테오가 누구한테 배웠는지 잘 인식하고 있고,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배워서 확실히 믿는 바를 잘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배운 대로 제자가 살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치라고 은근히 부추기는 스승의 고마운 권고와 격려이지요.
아무튼 저도 먼저 배우고 그런 다음 배운 대로 살뿐 아니라 나누려는 자세로 성경을 가르쳐주는 삶을 살면 좋겠다고 꿈꾸는 오늘입니다.
여기 서 계신 주님은 참으로 주님이시다.< 마르코,12/35-3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이 사람으로 오신다는 이야기는 창조 때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며 하느님은 당신의 작품을 더 자세이 보실피려 오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은 기다리고 밎이 하여야 하는데 아직도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지않고 주님의 탄생이야기중에 있듯이 동방의 박사들은 찾아보고경배하였지만 그들은 주님을 찾아 죽이려 하고 마침내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한국의 어떤 신학셍이 예루살렘까지 가서 성서학을 공부하다 랍비가 되면서 주님인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다 하는 소리를 전해듣고 저는 부족한 신학이지만 성서와 그에 관계되는 책을 보면서 “주님은 참 주님이시다.“ 굳게 믿고 믿으면 믿을수록 주님은 참 하느님이시네 하고 주님의 믿음을 굳게 하며 주님이 아니시면 우리의 구원은 없다 굳개 믿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로부터 성서와 관계 지은 사람들 구세주의 오심을 예고하고 기다리고 갈망하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시대에 많은 곳에 주님이 주님이심을 증명합니다. 주님이 어려운 말을 할 때 유대아 인들은 주님을 떠났지만 제자들은 주님은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계신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였으며 주님이 십자가에 죽음을 보고 떠났지만 성령의 인도로 다시 목숨을 내놓고 증명하시였습니다. 그런 주님을 성서를 통해 알고 깨우치면서 주님을 찾아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그자체가 행복입니다. 엣날 성탄 때 이런 노래가 있었는데 요사이는 살아졌습니다. “사천년 고대하던 우리주님 오셨네.“ 사천년은 창조부터 아부라함 까지 2000년 아부함부터 주님의 탄생까지 2000년 사람들은 그후 2000년경 세상 종말이 올 것이다. 생각하였지만 우주의 생선 과정과 지혜를 사용하던 시절을 10,000년 그전에 50억년 이란 긴 세월을 생각하여 없어졌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은 동방의 박사들의 탄생 설화에서 성겨외 다른 기록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주님 십자가의 죽음과 보활 하신 다음 따라오는 2000년 역사를 보드리도 우리는 오신 주님이 참 하느님이신 것을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 받쳐 증명한 진리 사도들부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순교한 사실을 우리는 묵과 할 수없습니다. 저는 87년 이 생명을 다해 주님을 따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 확실히 순간순간 증명되어가고 지금은 주님민이 나의 믿음 희망 사랑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교리의 약간의 잘못 전달 된것도 있고 잘못 살던 신앙의 선배도 있고 현제도 믿는 사람이 어둠을 내어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알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는 먼 빛으로 사물을 보는 것보다 가까이 찾으며 구하며 얻으며 느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멀리 보고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이 주님 안에 주님과 함께 주님을 통하여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를 오신 주님은 찬 우리의 하느님이신 것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며 행복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여기 서 계신 주님은 참으로 주님이시다.< 마르코,12/35-37.>
하느님이 사람으로 오신다는 이야기는 창조 때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며 하느님은 당신의 작품을 더 자세이 보실피려 오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은 기다리고 밎이 하여야 하는데 아직도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지않고 주님의 탄생이야기중에 있듯이 동방의 박사들은 찾아보고경배하였지만 그들은 주님을 찾아 죽이려 하고 마침내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한국의 어떤 신학셍이 예루살렘까지 가서 성서학을 공부하다 랍비가 되면서 주님인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다 하는 소리를 전해듣고 저는 부족한 신학이지만 성서와 그에 관계되는 책을 보면서 “주님은 참 주님이시다.“ 굳게 믿고 믿으면 믿을수록 주님은 참 하느님이시네 하고 주님의 믿음을 굳게 하며 주님이 아니시면 우리의 구원은 없다 굳개 믿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로부터 성서와 관계 지은 사람들 구세주의 오심을 예고하고 기다리고 갈망하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시대에 많은 곳에 주님이 주님이심을 증명합니다. 주님이 어려운 말을 할 때 유대아 인들은 주님을 떠났지만 제자들은 주님은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계신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였으며 주님이 십자가에 죽음을 보고 떠났지만 성령의 인도로 다시 목숨을 내놓고 증명하시였습니다. 그런 주님을 성서를 통해 알고 깨우치면서 주님을 찾아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그자체가 행복입니다. 엣날 성탄 때 이런 노래가 있었는데 요사이는 살아졌습니다. “사천년 고대하던 우리주님 오셨네.“ 사천년은 창조부터 아부라함 까지 2000년 아부함부터 주님의 탄생까지 2000년 사람들은 그후 2000년경 세상 종말이 올 것이다. 생각하였지만 우주의 생선 과정과 지혜를 사용하던 시절을 10,000년 그전에 50억년 이란 긴 세월을 생각하여 없어졌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은 동방의 박사들의 탄생 설화에서 성겨외 다른 기록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주님 십자가의 죽음과 보활 하신 다음 따라오는 2000년 역사를 보드리도 우리는 오신 주님이 참 하느님이신 것을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 받쳐 증명한 진리 사도들부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순교한 사실을 우리는 묵과 할 수없습니다. 저는 87년 이 생명을 다해 주님을 따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 확실히 순간순간 증명되어가고 지금은 주님민이 나의 믿음 희망 사랑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교리의 약간의 잘못 전달 된것도 있고 잘못 살던 신앙의 선배도 있고 현제도 믿는 사람이 어둠을 내어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알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는 먼 빛으로 사물을 보는 것보다 가까이 찾으며 구하며 얻으며 느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멀리 보고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이 주님 안에 주님과 함께 주님을 통하여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를 오신 주님은 찬 우리의 하느님이신 것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며 행복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어디에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온 세상의 신학생과 수도회 수련자들을 위한 축제 때 해주신 기쁨에 관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최신형 스마트폰을 가졌을 때, 멋진 옷을 입고 근사한 식당에서 즐길 때, 예쁜 이성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 안에 어떤 열망이 충족되지만, 피상적인 기쁨일 뿐 진정한 기쁨은 아니라고 하셨죠. 교황님은 진정한 기쁨은 어떤 사물이나 소유가 아니라 참된 만남에서 오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요. “너는 내게 소중하단다. 너를 사랑하고 너를 믿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께서 받아들여주시고, 감싸 안아주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쁨은 태어나고 자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에 대해 설명해주십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왕, 즉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성경에 밝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맞춰 메시아는 이런저런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집이 오히려 그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깨우쳐주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와 같아지신 우리들의 왕을 말입니다.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함승수 신부님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하여도 곧이듣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너무나 명백하고 분명한 사실을 이야기 함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이 그것을 믿지 않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는,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방법이기에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객관적 사실을 이야기 함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은 말하는 사실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해서이지요. '저 사람은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니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진실일 리 없어'라는 마음으로 듣기에 명백한 진실도 거짓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8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군중들이 그런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들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편함과 불만을 느끼고 있던 군중들이 그분으로부터 핀잔까지 듣게 되자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부정적으로 바뀝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시니 분노가 폭발합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당연하고 명백한 진실을 알려주시는 것이지만, 가뜩이나 여러가지로 맘에 안드는 사람이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선조 '아브라함'보다 먼저 태어났다고 주장하니 도저히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고 하는게 맞겠지요.
그런가하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처음에 들려드린 속담에 반대되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보통 죽을 끓일 때, 혹은 떡이나 빵에 넣는 앙금을 만들때나 쓰이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것은 누가봐도 말도 안되는 황당한 소리지만, 내가 아끼고 신뢰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기에 믿는 것입니다. 이성, 논리, 비판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온전히 그 사람을 향해 나아가려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군중이 '메시아가 다윗보다 높다'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기본적으로 예수님께 호감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성적, 논리적으로 따져가며 분석하지 않고,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어도 배척하지 않고,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섰기에 이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정작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노력은 잘 하지 않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들을 자꾸만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하고,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지요.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주님께서 내 마음에 부어주시는 '신앙의 신비'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여 먼저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야만, 그분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들과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좋고 싫음을 따지기 전에 일단 먼저 받아들여야만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의 진가가 보이는 법입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나없이
우리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강생의 뜻을
모르기에 다윗의
자손으로만
예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느님을 묶어도
결코 하느님을
묶을 수는
없습니다.
다윗도 하느님
안에서 태어나고
하느님 안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다윗을
기다려주시고
지켜주셨던
하느님을
기억합시다.
우리모두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갈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신앙의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그 길을
묵묵히 다시
걸어가십니다.
모든 힘
모든 가능성의
중심에는
이 모든 것을
가능케하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언젠가
어떻게든
하느님께로
가게 될 우리의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역사
하느님의 손길을
믿습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일꾼의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다윗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주님 앞에서 늘 겸손했고, 죄를 지었을 때에도 즉시 회개하였다. 다윗 역시 장차 오실 메시아의 출현을 열망한 하느님 앞의 신앙인이었다(복음).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이었던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분열됩니다. 그러고서 줄곧 여러 강대국의 식민지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에서 위대한 임금이 탄생하여 예전의 영화를 다시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임금을 두고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마르코 복음 10장을 보면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10,47)이라고 부릅니다. 또 1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11,10) 하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처럼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고, 그분을 통하여 다윗의 나라가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메시아를 예언하며 불렀던 시편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십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 말씀에서 “내 주님”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시편을 노래하는 다윗이 메시아를 두고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다윗은 다가오는 메시아를 자신의 후손으로 하대하지 않고, 자기보다 위대하신 분으로 여기며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메시아께서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존재가 아니시고 천상적이고 신적인 분이심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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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후손이시며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메시아의 기원과 계획을 가리킵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당시의 지식인들은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을 강하게 비판하시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고백을 거론하십니다.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고,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하고 고백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다윗 위에, 다윗보다 앞서 계시는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군주제’, 곧 백성 위에 군림하면서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종으로 부리는 그러한 나라가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고 섬기는 나라임을 분명히 천명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께서 사랑과 섬김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의 시민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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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임금은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통치 때에는 이민족이 감히 넘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만큼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다윗 치세의 이스라엘만이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늘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던 이스라엘에게 다윗은 정신적 구심점이며 희망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자연히 후손들에게 화려하게 전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율법 학자들은 장차 올 메시아까지도 다윗 가문임을 내세워 다윗 숭배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편을 근거로 다윗도 평범한 이스라엘의 한 사람임을 지적하십니다. 다윗을 깎아내리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 지식에 매달려 있던 유다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주님 앞에서는 위대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는 위대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리나 업적’ 때문에 위대하다고 판단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주님 앞에서 인간의 ‘지위나 행적’은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지적 교만’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진정 위대한 사람은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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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박해와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입니다.
당신은 세상의 박해와 미움을 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과 한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8-19).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한 아이와 짝을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매우 지저분했고 공부도 못했습니다. 여기에 얼굴에는 거부감이 들 정도의 큰 흉터가 있었지요.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억지로 짝을 지어주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울면서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선생님은 “이 친구와 짝이 될 사람?”이라며 지원자를 찾으셨습니다. 모두가 싫었는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지요. 그때 제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짝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놓인 이 친구가 안타까웠고, 내가 구해준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좋은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지저분하고 냄새도 많이 났으며, 공부도 못하는 이 친구와 함께하기가 점점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면 다른 자리의 친구와 놀았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괴롭힌 것은 아니었지만, 무시했던 것입니다.
철이 들면서 이때의 생각을 하면 제 마음이 아픕니다. 당시 이 친구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겉모습만 보고서 나의 행동을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철없을 때의 일이 이렇게 40년이 넘었음에도 후회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과 반대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들은 소위 성경에 대해서는 ‘박사’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어떻게 태어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즉,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앎은 인간의 앎일 뿐이었습니다.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하지만,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앎을 주님께서는 지적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지만, 다윗 스스로가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곧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주님을 육에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만 여길 뿐 다윗의 주님이신 하느님이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보지 못하고, 인성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일조를 하게 되지요.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다른 이에 대한 섣부른 판단과 단죄는 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블레즈 파스칼).
나의 영웅.
미국의 영화 배우 매튜 맥커너히는 오스카상 수상 당시 10대 때부터 변하지 않은 자신의 영웅에 대해 말했습니다.
“매월, 매주, 매월 그리고 매년 제 영웅은 항상 저로부터 십 년이나 멀어져 있습니다. 아마 전 절대로 그 영웅이 되지 못할 겁니다. 갖지도 못하겠죠.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니까요.”
그가 말하는 자신의 영웅은 10년 뒤의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미래의 다른 삶을 지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영웅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특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영웅을 생각하면서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 거리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희망을 간직하는 삶, 어렵고 힘들다고만 외치는 삶이 아니라 희망이 있기에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늘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오십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서도 한 줄기 빛으로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 주님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런 메시아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유다인들은 메시아와 관련해 한 가지 큰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윗가문에서 출생한 메시아, 힘과 능력을 갖춘 정치인으로서의 메시아, 결국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들을 해방시켜줄 해결사로서의 메시아, 그래서 이스라엘을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하는 정복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 메시아는 꼬질꼬질한 이 세상의 현실을 한 단계 뛰어넘는 메시아, 보통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초인(超人) 메시아, 이 부조리한 세상을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의 메시아, 오랜 인간의 소원을 넘치도록 충족시켜줄 기적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허무맹랑한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트리셨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에 정면으로 반박하셨습니다. 당신은 철저하게도 비폭력주의자로 처신하셨습니다. 완벽한 평화주의자로 살아가셨습니다.
유다인들 입장에서 막상 눈앞에 드러난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기대 밖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초라했습니다. 범인들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밥 같은 것 안 먹어도 되는 메시아, 화장실도 안가는 고상한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인들은 동네잔치 상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예수님,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포도주잔을 기울이는 예수님의 모습에 엄청 실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메시아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인간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 메시아,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져 죄인인 인간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메시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메시아...
참된 메시아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이 세상을 초월하는 왕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실 왕 중의 왕이십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지나갈 이 현세에 기반을 둔 왕이 아니라 영원한 도성,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기반을 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왕,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그런 왕이 절대 아니셨습니다. 거듭되는 폭력과 압제, 비인간화 앞에서도 끝까지 견뎌내며, 끝까지 용서하며, 박해자마저 사랑으로 감싸 안은 사랑의 왕이셨습니다.
유다인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사적인 욕구를 상시적으로 채워주는 개인 비서, 해결사,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키고 만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 마술사로 격하시키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메시아 상은 어떠한지 진지하게 돌아봐야겠습니다.
<기득권과 민중이 대립한다면 진리는 어느 편일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일반 대학교 입학하여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데모’였습니다. 저는 그런 정치적인 것에 끼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멋모르고 들어갔던 가톨릭학생회 동아리가 알고 보니 데모 주도 모임이었습니다. 데모를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아리에 머물기 위해서는 화염병 정도는 날라주어야 했습니다. 백골단에 끌려갔던 선배가 눈이 함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며 다른 이들은 분노했지만, 저는 저 때문에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뒤로 숨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시청 앞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어떤 모르는 여학생이 손바닥에 무언가 써 주었습니다.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는데 저는 예쁜 여학생이 손을 잡고 써 주니까 그냥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뭐라고 쓰는 거냐고 물으니 그 여학생은 짜증을 내며 “집회가 명동성당으로 바뀌었다고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군데군데 사복경찰들이 섞여 있어서 시청 앞에서 데모한다고 했다가 그곳으로 병력이 집중하니까 급하게 명동성당으로 장소를 바꾼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각자 명동성당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저는 그 혼란을 틈타 집에 와 버렸습니다. 물론 동아리 선배들은 명동성당에 갇혀버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TV로 보는데 그 많은 병력이 명동성당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그때 무슨 이유로 데모를 한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강경대라고 하는 한 학생이 경찰이 휘두른 봉에 맞아 죽은 이유로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로 여러 명의 학생이 죽었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렇지만 명동성당이 공권력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민주화의 성지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것은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단호함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987년 6월 명동성당 공권력 행사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들 위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라고 하시며 공권력에 맞서 학생들을 옹호하였습니다. 이후로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때도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철옹성이었습니다.
만약 기득권과 민중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이야기를 잘 들어보고 누가 옳은지 분별해서 선택해야 할까요?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은 누가 옳고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무조건 약자이자 권력을 갖지 못한 민중들 편에 서셨습니다.
김 추기경이 동성학교에 다닐 때, 시험에 황국 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학생 김수환은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라고 써서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를 맞았었다고 합니다. 장면 박사가 아니었으면 퇴학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법을 지키라며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한 전태일의 영화가 나오자 가장 먼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일까,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가장 오랜 시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계셨습니다.
왜 항상 기득권들보다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는 것이 옳을까요? 그 이유는 기득권들은 이미 생각이 세속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진리까지 왜곡합니다. ‘진리’를 왜곡시켜서라도 세속적으로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지키기에 급급합니다. 이는 지금이나 예수님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요 며칠 동안 예수님은 당시 기득권인 사제들, 부자들인 바리사이들, 지식층인 율법학자들, 정치인들인 사두가이들에게 공격을 당하셨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싸잡아서 공격하십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여겼습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면 누가 좋을까요? 기득권이 좋습니다. 로마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신들이 지닌 것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기 힘든 사람들이라면 메시아는 자신들의 배고픔만을 충족시켜주고 천국을 약속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기득권은 그런 메시아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다윗도 메시아를 두고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겠냐고 했을 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라고 말합니다. 분명 기득권들은 싫어할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만들어 독립운동을 일으켜 자신들의 이익을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왕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기득권과 민중이 다투고 있다면 민중 편에 서는 것이 맞습니다. 기득권은 세속적인 것은 원하지만 가난한 민중은 구원을 원합니다. ‘민중의 소리는 하느님의 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말이 있듯이, 진리는 가난한 군중 속에 머뭅니다. 가정에서도, 본당에서도, 나라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음을 잊지 말고 항상 가진 것이 없는 다수의 편에 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진리를 잘 분별하며 살아왔다고 하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좋은 점이 있습니다. 바둑판처럼 길이 나있어서 길 찾기가 수월합니다. 주소만 알면 쉽게 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산보하다가 길을 잃어도 곧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길의 번호를 따라가면 됩니다. 설명할 때도 편합니다. 길의 번호만 알려 주면 됩니다. 주변에 공원이 많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도 공원이 여럿 있습니다. 요즘 자주 가는 공원은 ‘Little Bay Park'입니다. 공원은 바닷가 근처에 있고, 멋진 다리(Throgs Neck Bridge)가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뉴저지입니다. 바닷가에서 거위 가족이 나들이 가는 것도 봅니다. 같은 다리인데 날씨에 따라서 다리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비가 내리는 날의 다리는 왠지 슬퍼 보입니다. 화창한 날의 다리는 씩씩해 보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인생의 길에서 방황할 때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고독에서 위안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다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고 합니다.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모든 사제는 서품성구를 정합니다. 저는 시편 126장 5절의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는 말씀을 서품성구로 정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알아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원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력했음에도 결과가 없다면 기다리면 됩니다. 노력하지 않고 결실을 원했다면 뉘우치면 됩니다. 힘들고 어려웠을 때 제게 큰 위로를 준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욥기 1장 21절의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는 말씀입니다. 서운했던 일도, 속상했던 일도, 가슴 아팠던 일도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면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등대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메시아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중에 주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마음을 열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꽃이 피어나서 좋은 것은 보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전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태어나서 좋은 것은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다윗도, 구약의 권위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시기 때문입니다.
<빛과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 안에
있으니
밝다
빛에게
빛이 되겠다고
빛 밖으로
나오니
어둡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메시아는 다윗이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이라고 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보면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아가 나올 것이며, 그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에서 보면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다윗의 자손이라고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혈연을 통해서 탄생하신 분이 아니시라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로 들어오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하느님을 우리 전통과 사고의 틀 안에 계신 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이 바이러스를 없애주셨으면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바람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고통을 받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분명히 이 고통을 없애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우선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진정 아버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메시아, 메시아의 나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9주간 금요일>(2020. 6. 5. 금)(마르 12,35-37)(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5-37)”
여기서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는 “하느님께서 메시아께 말씀하셨다.” 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라는 말씀은, “메시아께서는 적대자들을 굴복시키고 세상의 통치권을 장악할 것이며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라는 뜻의 예언입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는 인간적인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에는, 다윗이 예언한 메시아는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지상적인 왕이 아니라 초월적인 왕이며, 그 왕국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진정한 신원을 말씀하신 것은, 메시아로서 당신이 하시는 일은 다윗 왕실의 복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다윗 왕실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고, 그래서 기뻐했습니다(마르 12,37).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왕실을 복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율법학자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 백성 입장에서는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다윗 왕실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해도, 기득권층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득권을 누리고 소외계층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외된 채로 살아간다면,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메시아 나라는) 기득권층도 없고 소외계층도 없는 나라, 그 어떤 차별도, 억압도 없는 나라, 모든 사람이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이 행복한 나라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한 군중도 바로 그런 나라를 희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메시아의 신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백성들에게는 또 하나의 복음(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목자이신 분입니다(루카 15,4).
아흔아홉을 잘 지키기 위해서 하나는 그냥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은 세속의 사고방식입니다. 단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아흔아홉과 하나의 가치를 비교하지 않고 백 마리 양 전부를 하나하나 모두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라는 말은,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하나를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를 반대합니다.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복음 정신을 거스르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소중하게 여기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함께 행복해지는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전체주의 사상과 공동체 정신은 분명히 다릅니다. ‘희생’이란 남에게 시키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자기는 할 생각도 없으면서 남에게만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는 자본주의도,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잘난 사람들의 개인주의도 복음 정신과 공동체 정신을 거스르는 사고방식입니다.
공동체 정신은 남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앞서 가지 않고, 남보다 조금 능력이 모자라서 뒤처지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가려고 기다려 주는 정신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최후의 심판’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이 말씀들을 간단하게 줄이면,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이 바로 나다.”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겨야 한다.”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겨야 한다.”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베들레헴 마을 밖 외양간에서 태어나서 구유에 누워 계셨던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 예수님의 모습도,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어떤 백인대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 말은,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다.” 라는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힘없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마도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메시아의 사랑’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은 ‘가장 낮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나라는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프로폐셔널(professional)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프로’라고 약칭한다.이는 어떤 일을 전문으로 하거나 그런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멘탈이 강한 사람, 비범한 사람, 두려움이 없는 당당한 사람, 죽음을 뛰어넘는 사람, 자기가 하는 일에 자긍심이 높고 성취가 강해 내면이 행복한 사람을 말한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비굴하지 않고 의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람, 자신의 일을 끝내고 자기에게 불리할 때라도 불평하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할 줄 아는 사람, 하느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 고통과 박해를 견디어내며 끝까지 승리자로 남아 있는 사람, 프로이다.
복음의 사람들이 그랬다. 모진 박해와 시련에도 끝까지 견디어 승리자가 된 사람이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산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하느님의 힘에 기대서 겸손되이 산 사람들이다. 프로가 그랬다.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확신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3,1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다윗은 시편 110에서 장차 자신의 후손으로 나타나실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했는데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했는가?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으며 당신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시라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시대적 의미이다. 이 호칭 속에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가득히 들어있다. 왜냐하면 정복당해 고통을 겪고 있던 그들은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지상 왕국의 건설자, 정복자로서의 메시아의 개념을 빼버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전해주며 사람들을 천상 아버지께 인도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랬던 것이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다윗의 주님이시다. 하느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분이 어머니이신 여인을 통하여 오셨다. 세상의 주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니 마리아의 주님이시다.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니 마리아의 창조자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마리아의 주님이시며 마리아의 아들이시며, 마리아의 창조자이시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이셨기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린 것이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며,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다.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 여길 뿐, 다윗의 주님이신 하느님이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올바로 고쳐주고 계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메시아를 찾는 우리의 믿음의 자세는 어떤가? 당시의 유대인들이 정복자들에 의해 시달리고 고통당하는 속에서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해방해 주고 지상 천국을 건설해 줄 구원자, 그리스도를 기다리듯이 나는 내 생활 속에서 나의 현세적인 편안함과 바라는 일의 성취 또는 자기 생활의 안락만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진정 자신에게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가져다주시는 그리스도를 더 잘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는지? 나는 내 생활에서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 것,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생활하는지? 우리 각자 자신의 신앙의 자세에 대해서 살펴보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자.
하느님가족처럼 살면 참 멋있겠죠!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보니파시오 주교순교자는 선교활동하다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셨습니다.
입으로 가르치고 피로 지킨 신앙을 저희도 굳게 보존하며 선교합시다.
신앙인들이 믿음으로 신앙을 충실히 전파하는 순교정신 갖게 하소서.
다윗 왕과 예수님, 조상들과 우리 사이의 시간 빼면 현재가족 입니다.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현재(지금)가 우리 신앙인들을 위대하게 합니다.
다윗이 예수님을 주님이라 했듯 예수님과 우리 지금 여기 살고계시죠.
사람들이 세상조건 시간과 장소만 빼면 모두가 지금 하느님가족입니다.
인류 모두가 늘 하늘개념 하느님가족처럼 산다면 참 멋있겠죠! 그렇죠?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 복음선포를 위한 성령의 은사 ⓹ : 효경
이기우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선교활동의 스승으로서 자기고백을 곁들인 권고를 하는 가운데,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줄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을 잘 배우고 가르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에서는 율법 학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정작 다윗은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부딪치는 가운데, 군중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의 전후 맥락을 따져보기 전에는, 율법 학자들의 주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 이 주장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왜 반박하셔야 했는지 그리고 이 말씀에 군중은 왜 기쁘게 들었다는 것인지 하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인성적 차원에서 법적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가문에서 출생하였으므로 다윗의 자손이 되시지만 이는 유다인들에게 약속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였을 뿐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역사적이고 형식적 요건을 채우기 위하여 다윗 가문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를 간택하셔서 메시아를 성령으로 잉태시키셨다는 신성적 차원에 있습니다. 신성으로 볼 때는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주님으로서 세상에 오신 것이고,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약속된 메시아로서 오신 분이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미카 예언서의 기록에 따라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것이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성경에 대한 지식에 불과했을 뿐이고 당시 율법 학자들은 요셉이 다윗 가문의 자손임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예수님을 갈릴래아 출신이라며 무시하거나 사생아라고 따돌리거나 무식한 목수 출신이라며 소외시키기도 했던 겁니다. 이것이 마르코 후에 마태오가 예수님의 족보를 자신이 쓴 복음서 맨 앞에 내세워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지요. 따라서 율법 학자들이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주장은 ‘군중이 메시아로 알고 있는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므로 메시아일 리가 없다.’는 또 다른 주장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시라고 반박하셨던 것이고 이 말씀이 군중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 사건들을 목격한데다가, 권위 있는 가르침까지 듣고 감동과 경탄을 느꼈던 군중으로서는, 성경을 근거로 예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나서는 율법 학자들의 주장이 불편했던 터에, 예수님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주님이시라고 대놓고 말씀하시자 차라리 반가웠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자구에 밝았으되 성경의 진실에는 눈이 멀었던 당시 지식인들의 민낯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대단하게 여겼던 다윗 왕실의 혈통이라든지, 하느님께서 몸소 축복하신 유다 왕조의 권위 등이 그들에게는 더 없이 중요한 가치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러한 면모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려는 마당에서는 진리의 부스러기이거나 구약성서의 예언을 성취하기 역사적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백성들 가운데 드러나지 않게 사시면서 신성에서 나오는 가르침과 기적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펼쳐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 현실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현실을 예수님께서는 진복팔단의 말씀으로 구체화시키셨지요.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데 필요로 하는 성령의 은사 가운데 효경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 은사도 두 차원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즉 신성적 차원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므로 우리가 그분께 대하여 자녀다운 효성으로 섬겨야 한다는 뜻이 첫 번째입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효경의 은사인 것이지요. 한편 인성적 차원에서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에는 형제자매의 관계가 이룩되는 것이어서 인종이나 피부색, 신분이나 성별, 재산이나 학력 등의 차이를 초월한 인도주의가 보편적이고도 전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 두 번째입니다.
보편적 인도주의란 권력이나 재산이나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힘도 없고 돈도 없으며 많이 배우지도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보편적으로 인류 형제애가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전인적 인도주의란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도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에 경제적인 배려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문화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배려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용어로 바뀐 이 보편적이고 전인적인 인도주의가 내용상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선포하는 진복팔단의 현실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박해시대 백 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던 교우촌의 교우들은 실질적으로 진복팔단이 관철되는 새로운 인본주의 세상을 구현했던 장본인들입니다. 그들은 신분제도와 남존여비의 질곡을 초월하여 만인이 평등하고 남녀가 동등한 세상을 가꾸었으며, 현세적 질서를 넘어 내세의 천국을 흠모하여 가능한 대로 교우촌을 그들이 믿는 바의 천국으로 가꾸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박해가 닥치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치명할 수도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신앙생활이 바라볼 수 있는 최대의 명예요 희망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들이 박해를 피해서 심산유곡으로 숨어 들어가서 한데 모여 살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기도하며 옹기를 굽든 담배농사를 짓든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며 살았습니다. 천주교 교리를 생활화했던 이 교우들이 보여준 교우촌의 생활은 효경의 은사가 여지없이 발휘된, 보편적이고 전인적인 인도주의가 구현되었던 새로운 문명의 원형질이여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의 맥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경의 권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과 역사에 근거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서 나오리라 믿었습니다.
일찌기 성조 야곱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고 축복하며 통치권이 유다 가문에서 나오리라 예언하였지요.
이어 주님께서 유다의 자손인 다윗 임금에게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되리라"(2사무 7,16)고 하신 바 있습니다.
또 미카 예언자는 다윗의 고을인 베들레헴을 두고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고 예언하면서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 5,1-4)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서 나실 메시아는 유다 가문, 다윗의 자손이 맞습니다. 인간적 계보가 그렇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신적인 계보는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기름부음받은이, 메시아를 정치적 현세적 인물로 국한해 생각하는 이스라엘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겁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마르 12,37)...
예수님은 다윗의 노래라 불리는 시편의 고백을 들어 메시아의 신적, 초월적 신원을 밝히십니다. 이 역시 성경의 권위를 통해서입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마르 12,36).
"성령의 도움"은 곧 성령의 영감으로 씌여진 성경을 가리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2티모 3,16)라 말하며 이를 뒷받침하지요.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실 구원자, 메시아가 완전한 하느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기도 한,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존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의식의 대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 없는 신비니까요.
하지만 그 실마리가 성경 안에 없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고 하셨으니까요. 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성경을 알되 선택적으로 알게 되면 하느님의 진심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율법 학자들처럼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계보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고, 신적 계보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니 과연 구약 성경의 예언이 그분을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이 놀라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없으니 안타깝지요.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2티모 3,15).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으며 신약을 준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이 그토록 확신하는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을 완성하는 분이시지요. 그런데 성경에 대한 거시적이면서 심오한 통찰은 말씀을 사유화하거나, 제 이익을 위해 도구화하거나, 또 말씀을 인간의 편협한 사고 안에 정형화하는 이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은총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나 종교 지배층처럼 하나는 알되 둘은 모르는 우매한 현학자가 되지 않으려면, 말씀 앞에 겸손과 사랑으로 서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 앞에서 무지하고 무감할 따름이니까요.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 넘치고 그들 앞에 무엇 하나 거칠 것이 없나이다"(화답송).
우리가 말씀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또 훈장처럼 과시할 이수 과정 레벨이나 통독 횟수도 아니지요.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좀 더 갖추게 해 주신다면(2티모 3,17) 그땐 우리 자신이 복음이 되고 말씀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깊이 만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분은 우리 얕은 지식과 사고를 초월하는 분이시니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겸손과 사랑으로 그분 앞에 머물러 기다립시다. 그러면 은총으로 말씀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아멘.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 -풍요로운 영적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주님은 나의 힘, 내 기쁨이시로다.”
"주님,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가 넘치나이다."
아침성무일도 독서후 응송의 고백이, 미사중 화답송 후렴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해마다 반복하여 거기 그 자리 때되면 피고 지는 다양한 꽃들입니다. 단조롭고 따분한 반복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찾을 때 늘 거룩한 반복, 새로운 반복입니다. 아침이 늘 새롭듯 우리 역시 늘 새로워야 합니다. 바로 영적전투의 요체입니다.
제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40여년 수도생활을 통해 한결같이 강조해온 주제가 영적전쟁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들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기와 싸워야 하는, 늘 새롭게 영적전투에 임해야 하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객사, 사고사, 병사가 아닌 영적전투중에 전사戰死해야 비로소 전사戰士라는 제 지론이며 소망입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8세기 치열하게 독일 지역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성 보니파시오 주교님 또한 빛나는 주님의 전사였습니다. 사실 성서의 인물들은 물론 교회의 인물들 모두가 한결같이 치열한 영적전투에 영적 승리를 성취했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였습니다. 얼마전 치열하게 배밭 농장에서 적과摘果하고 있는 젊은 수도형제를 보면서 새롭게 부각된 영적전투입니다.
“치열한 영적전투의 현장!”
사진과 더불어 형제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담쟁이’ 시가 생각납니다. 영적전투를 상징하는 시입니다. 지금도 거기 그 자리 수도원 담벽엔 여전히 초록빛 열정으로 빛나는 담쟁이가 한창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꼭 22년전 이때쯤 썼던 시인데 그동안 한결같이 담쟁이처럼 하루하루, ‘하루살이’ 주님의 전사로 살아 온 영적 삶임을 깨닫습니다.
영적 전쟁에 필수 무기가 성경공부입니다.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풍요로운 영적 삶은 물론 영적전쟁의 승리를 보장합니다. ‘독서-묵상-기도-관상-실행’에 이르는 렉시오 디비나의 수행은 비단 신구약 성경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성경, 삶의 성경에도 해당됩니다. 제 지론은 자연도, 우리 믿는 각자의 삶도 성경책이라는 것입니다. 윗 담쟁이 시는 자연성경을 렉시오 디비나한 결과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렉시오 디비나의 우선적 대상은 신구약 성경입니다. 오늘 제1독서 ‘티모테오 2서’에 주인공들인 바오로와 티모테오 역시 빛나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내가 어떠한 박해를 견디어 냈는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해주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주님의 전사 바오로 사도는 이어 티모테오에게 성경공부에 충실할 것을 신신당부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영적 삶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물론 성모 마리아와 모든 교부들과 성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성경 렉시오 디비나를 생활화하여 늘 성경을 읽었고 성경은 이들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복음에서 예로들은 다윗이나 또 이 성서를 편집했던 초대교회 신자들, 모두 제가 보기엔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들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지만 예수님이 ‘다윗의 주님’이심은 참으로 깊은 렉시오 디비나의 묵상의 열매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도움으로 시편110장 1절을 렉시오 디비나 한 결과 이미 먼 후대 메시아 예수님의 도래까지 예견하여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 또한 다윗과 함께 이 시편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자신의 신원을, 즉 다윗의 자손이자. 다윗의 주님이심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으니 바로 예수님이 다윗은 물론 자신들의 주님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주님일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시편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시편뿐 아니라 신구약 성경이든, 자연성경이든, 내 삶의 성경이든 렉시오 디비나 궁극의 목표는 파스카의 예수 그리스도님을 내 주님으로 깨달아 내 삶의 중심에 모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이시며 인도자이십니다. 참으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인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신 당신과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제 행복기도중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배우는 자의 행복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서간은 바오로와 디모테오의 관계를 얘기하고 있는데 인도하고 따르는 관계와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라고 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먼저 디모테오가 어떻게 자신을 따랐는지 얘기합니다.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처신, 목표와 믿음, 끈기와 사랑과 인내를 따랐으며, 내가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과 처신을 그대로 잘 따랐다면 스승의 가르침과 처신이 참으로 본받을 만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자가 스승 못지않게 훌륭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우선 스승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아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그 가르침과 처신을 따를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이어지는 얘기를 보면 스승이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어야만 하고,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끈기와 사랑과 인내로 따라야 하는 그런 삶인데 그런 가르침과 삶을 그대로 함께 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웬만한 사람은 그런 삶을 따를 마음이 아예 없지요.
그런데 말들 안에서 제자의 훌륭함이 드러나는 또 다른 단서를 볼 수 있는데 스승의 목표와 믿음도 따랐다는 대목입니다. 같은 목표와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사실 이런 정도라면 스승의 뒤를 따르는 제자 이상의 동반자이고 동지지요.
그러니 나의 목표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나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겠다는 이런 제자를 하나라도 만난 스승은 참으로 성공한 스승이고 행복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의 삶을 통해 생각해보면 훌륭한 제자를 가진 스승이 되는 것보다 훌륭한 스승을 둔 제자로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인 것 같습니다. 훌륭한 제자를 만나기 어렵고 그래서 스승으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르치고 모범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저처럼 오랫동안 가르치는 삶을 산 사람은 훈장 기질이 몸에 배어 잘 살지도 못하면서 노상 가르치려고만 들고, 무엇보다도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사람은 모름지기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고, 세 살 어린애한테도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은 마치 육체의 성장판이 닫힌 것처럼 성장이 멈춰버린 것이고 하늘을 향한 문이 닫혀 버린 거지요.
이런 저이기에 배우려는 자세를 갖춘 디모테오는 오늘의 저에게는 부럽고 모범이 되는데 서간은 디모테오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디모테오가 누구한테 배웠는지 잘 인식하고 있고,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배워서 확실히 믿는 바를 잘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배운 대로 제자가 살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치라고 은근히 부추기는 스승의 고마운 권고와 격려이지요.
아무튼 저도 먼저 배우고 그런 다음 배운 대로 살뿐 아니라 나누려는 자세로 성경을 가르쳐주는 삶을 살면 좋겠다고 꿈꾸는 오늘입니다.
여기 서 계신 주님은 참으로 주님이시다.< 마르코,12/35-3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이 사람으로 오신다는 이야기는 창조 때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며 하느님은 당신의 작품을 더 자세이 보실피려 오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은 기다리고 밎이 하여야 하는데 아직도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지않고 주님의 탄생이야기중에 있듯이 동방의 박사들은 찾아보고경배하였지만 그들은 주님을 찾아 죽이려 하고 마침내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한국의 어떤 신학셍이 예루살렘까지 가서 성서학을 공부하다 랍비가 되면서 주님인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다 하는 소리를 전해듣고 저는 부족한 신학이지만 성서와 그에 관계되는 책을 보면서 “주님은 참 주님이시다.“ 굳게 믿고 믿으면 믿을수록 주님은 참 하느님이시네 하고 주님의 믿음을 굳게 하며 주님이 아니시면 우리의 구원은 없다 굳개 믿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로부터 성서와 관계 지은 사람들 구세주의 오심을 예고하고 기다리고 갈망하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시대에 많은 곳에 주님이 주님이심을 증명합니다. 주님이 어려운 말을 할 때 유대아 인들은 주님을 떠났지만 제자들은 주님은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계신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였으며 주님이 십자가에 죽음을 보고 떠났지만 성령의 인도로 다시 목숨을 내놓고 증명하시였습니다. 그런 주님을 성서를 통해 알고 깨우치면서 주님을 찾아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그자체가 행복입니다. 엣날 성탄 때 이런 노래가 있었는데 요사이는 살아졌습니다. “사천년 고대하던 우리주님 오셨네.“ 사천년은 창조부터 아부라함 까지 2000년 아부함부터 주님의 탄생까지 2000년 사람들은 그후 2000년경 세상 종말이 올 것이다. 생각하였지만 우주의 생선 과정과 지혜를 사용하던 시절을 10,000년 그전에 50억년 이란 긴 세월을 생각하여 없어졌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은 동방의 박사들의 탄생 설화에서 성겨외 다른 기록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주님 십자가의 죽음과 보활 하신 다음 따라오는 2000년 역사를 보드리도 우리는 오신 주님이 참 하느님이신 것을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 받쳐 증명한 진리 사도들부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순교한 사실을 우리는 묵과 할 수없습니다. 저는 87년 이 생명을 다해 주님을 따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 확실히 순간순간 증명되어가고 지금은 주님민이 나의 믿음 희망 사랑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교리의 약간의 잘못 전달 된것도 있고 잘못 살던 신앙의 선배도 있고 현제도 믿는 사람이 어둠을 내어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알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는 먼 빛으로 사물을 보는 것보다 가까이 찾으며 구하며 얻으며 느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멀리 보고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이 주님 안에 주님과 함께 주님을 통하여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를 오신 주님은 찬 우리의 하느님이신 것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며 행복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여기 서 계신 주님은 참으로 주님이시다.< 마르코,12/35-37.>
하느님이 사람으로 오신다는 이야기는 창조 때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며 하느님은 당신의 작품을 더 자세이 보실피려 오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은 기다리고 밎이 하여야 하는데 아직도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지않고 주님의 탄생이야기중에 있듯이 동방의 박사들은 찾아보고경배하였지만 그들은 주님을 찾아 죽이려 하고 마침내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한국의 어떤 신학셍이 예루살렘까지 가서 성서학을 공부하다 랍비가 되면서 주님인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다 하는 소리를 전해듣고 저는 부족한 신학이지만 성서와 그에 관계되는 책을 보면서 “주님은 참 주님이시다.“ 굳게 믿고 믿으면 믿을수록 주님은 참 하느님이시네 하고 주님의 믿음을 굳게 하며 주님이 아니시면 우리의 구원은 없다 굳개 믿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로부터 성서와 관계 지은 사람들 구세주의 오심을 예고하고 기다리고 갈망하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시대에 많은 곳에 주님이 주님이심을 증명합니다. 주님이 어려운 말을 할 때 유대아 인들은 주님을 떠났지만 제자들은 주님은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계신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였으며 주님이 십자가에 죽음을 보고 떠났지만 성령의 인도로 다시 목숨을 내놓고 증명하시였습니다. 그런 주님을 성서를 통해 알고 깨우치면서 주님을 찾아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그자체가 행복입니다. 엣날 성탄 때 이런 노래가 있었는데 요사이는 살아졌습니다. “사천년 고대하던 우리주님 오셨네.“ 사천년은 창조부터 아부라함 까지 2000년 아부함부터 주님의 탄생까지 2000년 사람들은 그후 2000년경 세상 종말이 올 것이다. 생각하였지만 우주의 생선 과정과 지혜를 사용하던 시절을 10,000년 그전에 50억년 이란 긴 세월을 생각하여 없어졌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은 동방의 박사들의 탄생 설화에서 성겨외 다른 기록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주님 십자가의 죽음과 보활 하신 다음 따라오는 2000년 역사를 보드리도 우리는 오신 주님이 참 하느님이신 것을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 받쳐 증명한 진리 사도들부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순교한 사실을 우리는 묵과 할 수없습니다. 저는 87년 이 생명을 다해 주님을 따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 확실히 순간순간 증명되어가고 지금은 주님민이 나의 믿음 희망 사랑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교리의 약간의 잘못 전달 된것도 있고 잘못 살던 신앙의 선배도 있고 현제도 믿는 사람이 어둠을 내어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알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는 먼 빛으로 사물을 보는 것보다 가까이 찾으며 구하며 얻으며 느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멀리 보고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이 주님 안에 주님과 함께 주님을 통하여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를 오신 주님은 찬 우리의 하느님이신 것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며 행복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어디에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온 세상의 신학생과 수도회 수련자들을 위한 축제 때 해주신 기쁨에 관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최신형 스마트폰을 가졌을 때, 멋진 옷을 입고 근사한 식당에서 즐길 때, 예쁜 이성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 안에 어떤 열망이 충족되지만, 피상적인 기쁨일 뿐 진정한 기쁨은 아니라고 하셨죠. 교황님은 진정한 기쁨은 어떤 사물이나 소유가 아니라 참된 만남에서 오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요. “너는 내게 소중하단다. 너를 사랑하고 너를 믿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께서 받아들여주시고, 감싸 안아주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쁨은 태어나고 자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에 대해 설명해주십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왕, 즉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성경에 밝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맞춰 메시아는 이런저런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집이 오히려 그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깨우쳐주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와 같아지신 우리들의 왕을 말입니다.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함승수 신부님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하여도 곧이듣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너무나 명백하고 분명한 사실을 이야기 함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이 그것을 믿지 않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는,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방법이기에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객관적 사실을 이야기 함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은 말하는 사실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해서이지요. '저 사람은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니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진실일 리 없어'라는 마음으로 듣기에 명백한 진실도 거짓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8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군중들이 그런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들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편함과 불만을 느끼고 있던 군중들이 그분으로부터 핀잔까지 듣게 되자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부정적으로 바뀝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시니 분노가 폭발합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당연하고 명백한 진실을 알려주시는 것이지만, 가뜩이나 여러가지로 맘에 안드는 사람이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선조 '아브라함'보다 먼저 태어났다고 주장하니 도저히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고 하는게 맞겠지요.
그런가하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처음에 들려드린 속담에 반대되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보통 죽을 끓일 때, 혹은 떡이나 빵에 넣는 앙금을 만들때나 쓰이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것은 누가봐도 말도 안되는 황당한 소리지만, 내가 아끼고 신뢰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기에 믿는 것입니다. 이성, 논리, 비판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온전히 그 사람을 향해 나아가려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군중이 '메시아가 다윗보다 높다'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기본적으로 예수님께 호감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성적, 논리적으로 따져가며 분석하지 않고,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어도 배척하지 않고,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섰기에 이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정작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노력은 잘 하지 않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들을 자꾸만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하고,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지요.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주님께서 내 마음에 부어주시는 '신앙의 신비'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여 먼저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야만, 그분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들과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좋고 싫음을 따지기 전에 일단 먼저 받아들여야만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의 진가가 보이는 법입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나없이
우리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강생의 뜻을
모르기에 다윗의
자손으로만
예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느님을 묶어도
결코 하느님을
묶을 수는
없습니다.
다윗도 하느님
안에서 태어나고
하느님 안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다윗을
기다려주시고
지켜주셨던
하느님을
기억합시다.
우리모두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갈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신앙의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그 길을
묵묵히 다시
걸어가십니다.
모든 힘
모든 가능성의
중심에는
이 모든 것을
가능케하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언젠가
어떻게든
하느님께로
가게 될 우리의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역사
하느님의 손길을
믿습니다.